이번 11월 미국 대선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후보 사퇴와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민주당 후보 확정을 계기로 민주당의 박빙 속 열세 양상이 완화되었지만, 여전히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이 선거의 결과는 향후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할을 할 것인데,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외전략 구상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해리스 행정부가 탄생한다면 이스라엘에 대한 온도 차 등 세부적인 차이는 있더라도, 바이든 행정부의 대외전략을 계승하여 미국이 내세워 온 가치 중심으로 동맹국과 함께 미중 간 ‘전략적 경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중동 전쟁의 가능성에 대응하려 할 것이다.
이것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부터 확립된 민주당의 기조이기도 하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공화당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내놓은 ‘부시 독트린’은 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의 가치와 자본주의를 전파한다는 전후 미국 정치의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대원칙을 ‘악의 축’(이라크, 이란, 북한)과 이슬람 근본주의에 맞서는 선과 악, 문명과 비문명의 대결로 비화했다. 무엇보다도 이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다자주의 외교나 국제기구 대신, 미국 일방 주도의 선제공격을 불사하는 군사 개입을 택하여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중동 개입은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끝없는 폭력과 불안정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미국이 여기에 국력을 소진하는 동안 중국의 경제적 부상은 가속화했고 미국의 금융시장은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진원지가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집권한 오바마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견지했지만, 그 실천 방법으로는 “우리는 얼마나 강력하든지 간에, 그 어느 나라도 혼자서 세계적 도전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하며,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 그래왔듯이 다른 국가들과의 협력을 구축하며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10년 『국가 안보 전략』 보고서). 즉, 오바마 행정부가 일방적인 군사 개입 독트린을 폐기하는 대신 강조한 ‘동맹 강화’와 ‘다자주의적 외교’는 지향하는 가치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필요였다.
2011년 천명한 ‘아시아로의 회귀’ 전략(또는 ‘재균형’ 전략) 역시 미국의 한정적인 자원을 중동이 아닌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집중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오바마 행정부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추진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의 수단으로 아시아로의 재균형을 달성하고자 한 대표적 시도였다. 오바마 행정부는 동시에 미국 국내 경기부양과 ‘오바마케어’ 등 복지정책 확충에 힘을 쏟았다.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과 해리스 캠프의 공약도 이러한 판단을 큰 틀에서 유지하고 있다. 다만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추진을 통해 중국을 미국 주도의 국제기구와 국제무역에 참여시켜 관리하려 했던 클린턴 행정부의 ‘관여 정책’을 계승했던 오바마와 달리,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도출된 중국에 대한 ‘관여 정책’ 폐기와 ‘전략적 경쟁’을 계승했다.
반면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대선 승리는 그 자체로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초당적으로 추구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서 이탈하여, 약 70년 만에 가장 근본적인 대외전략 전환을 하는 기점으로 평가받았다. 2020년 극적으로 승리한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의 귀환’을 선언하며 취임 첫날부터 트럼프가 탈퇴를 추진한 파리기후협약과 세계보건기구(WHO)에 복귀하는 등 미국의 대외전략을 트럼프 이전의 궤도에 돌려놓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이번 대선에서 미국은 다시 한 번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냐 비자유주의적 인민주의의 특징을 띠는 트럼프주의냐라는 중대 기로에 서 있다.
트럼프 2기의 주요한 정책을 드러내는 자료로는 먼저 트럼프 캠프가 직접 만든 공식 선거 공약인 ‘어젠다 47’과 이를 반영한 2024년 공화당 정강이 있다. 그러나 이것보다는 이러한 정책의 배경으로 지목되는, 트럼프 1기 당국자들과 보수 성향의 유명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이 집필한 ‘프로젝트 2025’(공화당 재집권 프로젝트) 보고서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이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세간에서도 이를 실질적인 트럼프 2기 정책 자료집으로 간주한다. 물론, 트럼프 본인의 다소 산발적이고 상충하기도 하는 발언들도 참고할 수 있다.
이 글은 만약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트럼프 2기 외교안보정책은 1기 때보다 더 ‘트럼프주의’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전망한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는 주요 보직에 전후 미국 정치의 초당적 합의였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의 전통을 따르는 인물들이 있었고, 공화당 내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주요 대외정책 결정에 있어서는 이들이 영향력을 관철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준비된 트럼프 2기 정책이나, 2기에서 요직을 맡을 것으로 예상되는 인선은 다르다. 이들은 이전까지의 미국 정치 엘리트와 달리, 지극히 좁은 의미에서의 ‘국익’을 따질 뿐 어떠한 세계 질서를 구축하겠다거나 그 속에서 미국이 어떤 역할을 해야겠다는, 나아가 이를 통해 어떠한 장기적인 ‘국익’을 성취하겠다는 생각이 없다.
이는 미국 공화당의 주류 기조 자체가 잭슨주의적 전통으로 돌아가는 현상에서 기인한다. 티파티 운동과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운동이 상징하는, 보수주의 대중운동이 공화당을 포섭한 것이다. 공화당 계열 엘리트가 여기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 결과 티파티 코커스, 프리덤 코커스가 보여주듯 공화당 정치인 중 비개입주의를 지향하는 인사가 늘어났다. 따라서 미국 보수 세력의 이러한 기조 변화는 트럼프라는 개인의 영향을 초과하여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이러한 미국의 대외정책 기조 변화는 한반도 정세라는 국가적 차원, 동아시아 정세라는 지역적 차원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넘어 헤게모니 역할을 하는 국가가 부재한 G0(G제로) 세계, 나아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이 개방된 시장, 국제안보, 보건·환경 협력 등 세계적 공공재를 제공하기는커녕 오히려 안정적인 세계 질서에 역행하는 행동을 하는 ‘G 마이너스 2’의 세계를 열 수 있다. 이는 진보 진영 일각이 미국 헤게모니의 대안으로 여기는 ‘다극화 세계’가 아니라 ‘세계적 무질서’일 것이다.
1. 트럼프 행정부(1기)의 대외정책은 어떠한 이념에 기초했나?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비일관적이고 즉흥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그 근저에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1829~1837년 재임)에서 출발한, 미국 외교의 오랜 전통 중 하나인 ‘잭슨주의’가 있다는 분석이 있다. (트럼프는 잭슨을 존경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언급해왔고, 대통령 집무실에 그의 초상화를 걸기도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마지막 국가안보보좌관이었고 트럼프 2기에서도 중책을 맡으리라 예상되는 로버트 오브라이언이 《포린 어페어스》 2024년 7/8월호 기고문에서 트럼프의 대외정책을 “최근 수십 년간 지배해온 국제주의적 정통 외교 교리보다 더 뿌리 깊은 미국의 오랜 전통적 원칙을 고수한다… (중략) 트럼프는 자신의 외교 선배라고도 할 잭슨의 외교정책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즉, 행동이 필요할 때는 집중하고 강력하게 대응하되 지나친 개입은 경계해야 한다.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에는 잭슨의 풍미가 가미된 현실주의가 돌아올 것”이라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세기 말 잭슨주의의 부상은 경제위기가 인민주의적 여론의 확대로 이어지면서 나타났는데, 이렇게 보아도 현재의 트럼프주의 현상과 공통점이 많다.
1) 잭슨주의란 무엇인가?
미국 대외정책 전통을 분류한 월터 러셀 미드는 전후 미국 외교안보정책의 주류를 차지한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에 따른 개입 노선을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서 따온 ‘윌슨주의’로 개념화했다. 전후 민주당뿐만 아니라 공화당 정권들도 윌슨주의를 채택했는데, 가령 냉전 종식을 목표로 각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제3세계 권위주의 정권과 손을 잡기도 한 레이건 행정부나, 부시 행정부 당시 네오콘의 기조 역시 개입주의라는 측면에서 변형된 윌슨주의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태평양전쟁 이전 미국 엘리트들이 추구했던 더 오래된 전통이자, 윌슨주의에 대한 가장 선명한 대안 역할을 해온 것이 바로 잭슨주의다.
미드에 따르면, 잭슨주의 외교전통은 첫째, 미국 외교의 주류였던 윌슨주의에 무관심함을 넘어, 미국의 정체성을 위협할 것이라는 반감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잭슨주의는 개방적인 대외경제 정책과 이민 정책에도 부정적이다. 둘째, 미국 안과 미국 밖을 명확히 나누고, 국가 간의 끝없는 갈등과 국익 추구를 강조하는 현실주의적 세계관이다. 셋째, 대체로 대외정책보다 국내문제를 우선시하지만, 이민자, 무슬림 등 국내외의 이질적 존재들에는 편집증적으로 반응한다. 넷째, 마찬가지로 미국을 위협하는 ‘미국의 적’은 강력하게 응징하려는 매우 호전적인 태도를 보인다. 잭슨주의는 미국의 국익을 미국 본토와 정체성 수호로 두고, 소프트 파워보다는 물질적 국력과 위상 과시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당시 잭슨주의는 자유주의적, 세속적, 세계주의적 특성을 띠는 동부 해안 지역과 달리 미국을 기독교를 믿는 백인들의 공동체로 상상하는 중서부 내륙 지역의 농민들을 대중적 기반으로 두었다.
2) 트럼프가 드러내는 잭슨주의적 특성
이에 비춰보면 트럼프는 잭슨주의적 특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트럼프는 길게는 2차 대전 이후, 짧게는 탈냉전기를 주도한 초당적인 대외정책 합의, 즉 자유주의적 국제주의적 정책을 “끔찍한 실패”로 규정하며, 이것을 모두 기성의 “워싱턴 지배계급 내의 내부자들” 혹은 “소위 전문가들”의 탓으로 돌려왔다. 자신을 ‘미국 민족주의자’로 지칭하며, ‘국익’을 미국 국경 안에 한정되는 것으로 좁게 규정했다. 이러한 ‘국익’ 인식은 2017년 『국가 안보 전략』 보고서에서 미국의 4가지 핵심 이익의 첫째를 “미국 국민, 본토, 그리고 삶의 방식을 보호”하는 것으로 규정하며 드러났다.
상기했듯 미국 패권의 쇠퇴라는 인식과 그에 대한 대처는 물론 오바마 행정부 시기에도 있었다. 이는 ‘아시아로의 선회’라는 재균형 전략과 핵군축·현대화, 시리아 내전 대응에서 드러났다. 이를 계승한 바이든 행정부 역시 탈레반의 재집권을 예상하면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했다. 이라크 전쟁 이래로 미국의 중동 개입이 실패했고 이것이 미국 노동자층의 몰락과 중국의 부상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는 초당적이며, 이는 공화당 내 네오콘의 몰락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민주당과 공화당 주류가 오랫동안 공유해온, 세계 평화를 위한 민주주의 증진이라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노선과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 독트린 모두를 비판하고, 미국의 개입 축소 전략을 더욱 급진적으로 추진했다. 전후 미국이 건설해온 주요한 다자주의 제도를 비판하며, 심지어 서방의 대표적인 집단안보보장 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 탈퇴를 시사하기까지 했다. 이는 임기 첫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와 같은 해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로 나타났다. 코로나19라는 인류 초유의 팬데믹 위기에 직면해서도 “미국은 세계의 경찰이 아니”라는 태도를 유지했다. 동맹국에 대해서도 엄격한 상호성과 비용분담 원칙을 적용했다.
트럼프가 세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언하고 김정은을 비롯한 비자유주의 세력과도 거래할 수 있다고 발언한 것과 달리 이슬람 세력에는 강경한 모습을 보인 것도 ‘미국의 적’에 대한 잭슨주의의 호전적 태도의 틀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선거 기간부터 트럼프는 근본주의 테러리스트에 대해 고문이나 가족 감금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유주의적 규범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취임 직후 발표한 “미국 우선의 외교정책” 설명에서, 외교정책의 핵심을 “힘을 통한 평화”로 소개하며 이슬람 테러조직을 “공격적인 합동·연합 군사작전”을 통해 패배시키겠다고 천명했다.
2. 미국 보수의 놀라운 변화
이상의 모습은 트럼프 개인만의 특성이라기보다, 미국 보수층의 변화를 반영한다. 같은 공화당 정권이라고 하더라도, 공격적 개입주의가 두드러졌던 레이건, 부시 행정부 시기와 완전히 다르다.
1) 헤리티지 재단의 변화
1980년대 레이건 정권의 정책을 견인했고 오늘날 프로젝트 2025를 지휘하는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의 변화가 상징적이다. (『리더십의 사명』이란 제목도 레이건이 취임한 1981년 1월 당시 헤리티지 재단이 출간한 정책 보고서에서 따온 것이다. 헤리티지 재단은 이 보고서의 제안 중 60%가 실제 레이건 행정부 정책에 반영되었다고 평가한다.)
레이건 집권 당시에 헤리티지 재단을 비롯한 공화당 진영의 주류 기조는 미국이 해외 이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세계에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작은 정부’와 ‘감세’를 내세워 집권했지만, 두 번에 걸친 재임 기간에 국방비 지출을 35%나 증가시켰다. 이는 ‘힘을 통한 평화’로 안보를 확충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경제성장을 포함하여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이뤄졌다. 냉전의 종식을 통해서 이러한 전략의 실효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반면 2021년부터 헤리티지 재단 회장으로 재임 중인 케빈 로버츠는 재단의 현 역할이 “트럼프주의를 제도화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기조를 정책화하고 있다. (로버츠는 인터뷰에서 “2020년 대선에서 바이든이 정말로 이겼다고 믿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아래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변형된 윌슨주의를 따른 1981년 판과 달리, 로버츠의 주도하에 발간된 2023년 판 『리더십의 사명』은 트럼프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자유주의·국제주의적 대외 개입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며 이를 자유주의 엘리트의 음모로 치부한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시각 차이를 예로 들 수 있다. 헤리티지 재단 설립자이자 1981년 판 『리더십의 사명』을 발간했고, 트럼프 1기 당시 인수위원회에서 선임 고문을 맡았던 에드윈 퓰너는 주한미군 감축에 부정적이며, 한미 방위비 분담금에 대해서도 “현 단계에서 한국과 미국의 부담은 적정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바이든 행정부가 오커스(AUKUS. 미국, 영국, 호주의 안보 동맹)를 만들고 쿼드(Quad. 미국, 일본, 호주, 인도의 안보 협의체)와 한미일 협력, 미국의 핵우산 약속을 강화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트럼프가 당선되더라도 이러한 동맹과 협의체를 계승,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2023년 판 『리더십의 사명』은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으며, 로버츠는 여러 인터뷰에서 한미동맹, 나토, 자유무역,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트럼프의 주장을 대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대응도 미국 보수 엘리트 내 갈등과 혼란을 보여주는 주요한 지점이다. 2022년 2월 당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전후로, 헤리티지 재단의 우크라이나 수석 정책 분석가였던 루크 코피는 이전까지 헤리티지 재단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취한 태도를 근거로, “우크라이나가 주권을 유지하는 것이 미국의 이익과 안전을 보장하며, 이를 위해서 미국은 제한 없는 무기 공급을 포함하여 신속하고 강력하게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는 같은 해 5월 미 하원이 우크라이나에 400억 달러 규모의 추가 지원 패키지를 제공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헤리티지 재단의 자매 조직인 헤리티지 액션은 “우리 납세자의 돈을 책임도 지지 않는 외국에 무모하게 보낸다”라며, 하원에 지원 무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 발표 후 코피는 헤리티지 재단에서 사퇴했다.
이를 계기로 2021년 케빈 로버츠의 회장 취임 뒤로 많은 헤리티지 재단 전현직 멤버가 재단이 “공화당의 의제를 설정하는 보수 지식인이라는 원래의 사명을 잊고, 정책보다 당파성(partisanship)을 우선시하는 보수주의 운동의 한 파벌에 붙고 있다”고 우려하는 사실이 알려졌다. 실제로 2022년 1~9월에 재단 직원의 1/5가량인 51명이 사퇴하고 73명이 새로 채용되었는데, 사퇴한 이들은 주로 고위직, 경력직인 데 반해 신규 채용자들은 헤리티지 액션을 경유한 일반 활동가들이었다. 재단 구성원의 ‘물갈이’라고 할 수 있다.
2) 공화당을 변화시킨 티파티 운동과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
로버츠가 이러한 변화에 대해 “우리는 오늘날 미국의 그 어떤 우파 기관보다도, 보수적인 미국인의 일상에 대해 잘 안다”고 답한 것처럼(헤리티지 재단은 자신들이 받는 기부금의 2%만이 기업이 낸 것이며, 나머지는 50만 명에 달하는 개인기부자의 소액 기부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전환에는 대중적 기반이 있다. 대표적으로, 오바마 집권 초기 출현한 티파티 운동과 트럼프의 부상과 함께 등장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운동이다.
이러한 운동은 보수주의 판본의 정체성 정치 운동이며, 이러한 제도권 밖 ‘운동정치’가 공화당을 포획했다는 분석이 있다. 예컨대, ‘프리덤워크스’, ‘번영을 위한 미국인’ 등의 보수주의 사회운동단체는 선거에서 공화당을 재정적으로 후원하면서 공화당 지역조직의 역할을 대신했고, 오바마 행정부 초기 재정 지출 확대에 대한 반발을 전국적인 대중운동, 즉 티파티 운동으로 확대하는 데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그 결과 2009년 9월 12일(9·11 테러 기념일 다음 날)에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티파티 시위에만 30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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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온건하고 초당적 합의를 통해 일하는 인물보다 자신들의 이념에 부합하는 인물이 공화당에서 공천 받고 당선되도록 예비선거와 중간선거에 개입했고, 그 결과 티파티 운동에 동조하는 공화당 후보들이 2010년 중간선거에서 의회에 입성했다. 이 의원들은 의회 내에서 티파티 코커스, 2015년부터는 프리덤 코커스를 구성하여, 하원 내에서 공화당 지도부의 입장을 따르기보다는 재정 지출과 대외 개입에 극도로 예민한 극우 제3당과 같은 모습으로 움직였다. 2024년 현재까지도 프리덤 코커스는 트럼프주의를 따르지 않는 공화당 내 세력을 견제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대규모 재정 지출에 대한 대중적 반감의 시작은 중동에서 두 개의 전쟁을 벌이고 대규모 지출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수습하려 한 부시 행정부 말기부터이므로, 티파티 운동을 이끄는 사회운동단체들은 공화당 자체에도 마찬가지 압력을 넣었다.
티파티 운동이 주로 재정적 보수주의를 이슈화하고 ‘작은 정부’, 탈규제 등 그들이 생각하는 미국 헌법의 ‘근본’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면, 2015년 트럼프의 대통령 출마 선언을 계기로 티파티 운동과 결부되어 있으면서도 세계화와 자유무역, 이민 정책을 정조준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이 등장한다. 트럼프의 출마 선언은 멕시코 출신 불법 이민자를 “마약범, 강간범”이라고 부르는 등 주류 언론뿐만 아니라 공화당 내부에서도 지탄의 대상이 되었지만, 기독교를 믿는 백인을 중심으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메시지는 백인 민족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소외된 백인 노동자층과 이민 문제의 언급을 꺼리는 기존 공화당에 실망한 유권자를 빠르게 결집했다. 힐러리 클린턴 대 버니 샌더스로 양강구도를 형성한 민주당과 달리, 2016년 공화당 경선은 총 17명이 입후보할 정도로(이는 양당 통틀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뚜렷한 유력 인물이나 파벌 간의 조율 과정이 없었다. 2012년 대선 패배 이후 지속한 공화당의 난맥상 역시 아웃사이더 트럼프가 빠르게 두각을 나타내고, 결과적으로 대통령 후보가 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대중운동과 트럼프 열풍의 세례를 받은 공화당은 여러 측면에서 크게 변모했다. 예를 들어, 이전의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친기업 세력이다 보니, 기업의 이민 노동자 수요를 고려하여 이민에 비교적 관대했다. 트럼프 1기까지만 하더라도, 2008년 대선 후보로 오바마와 경쟁했던 공화당 중진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오바마 전 대통령이 시행한 DACA 프로그램(미성년 때 부모와 함께 미국에 불법 이민한 약 80만 명을 강제추방에서 보호)을 철회하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결정을 강력히 비난하며, DACA를 유지하는 한편 트럼프가 요구한 국경 장벽 건설 비용은 포함하지 않은 새 이민법을 민주당 의원과 공동발의했다. 공화당 1인자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을 비롯한 상당수 공화당 의원도 DACA 폐지를 반대했다. 그러나 오늘날 공화당의 최대 관심사는 명실상부 반(反)이민이다. 프로젝트 2025도 DACA와 아프가니스탄, 우크라이나 등에서 온 난민 보호 정책을 ‘불법 프로그램’으로 규정하며 이러한 프로그램 갱신 신청 검토와 처리를 사실상 금지할 것을 제안한다. 이외에도 불법 이민 단속, 추방 확대뿐만 아니라 합법 체류 비자 발급 축소를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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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국 공화당은 자유주의를 버리는가?
이러한 미국 공화당의 사례는 1990년대 이후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는 세계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반발과 반이민 정서, 종족적 민족주의 표출, 그리고 그에 따른 인민주의 대중운동의 확대 및 기성 정당의 쇠퇴와 맥락을 같이 한다. 다만 비례대표제와 다당제 기반의 유럽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인민주의 운동 정당의 출현으로 이어졌다면, 소선거구 단순다수제 선거제도와 맞물려 양당제가 매우 견고한 미국에서는 주요 정당이었던 공화당의 인민주의 정당화로 귀결되었다. ‘정치적 올바름’(PC) 논란이 상징하듯 이념적 극단화와 정당의 제도적 기반 약화(정당의 지역조직 쇠퇴, 정당 조직이 이끄는 선거운동과 정당 일체감에 따른 투표 행위에서, 후보, 홍보 중심의 새로운 선거운동으로의 변화, 예비선거 제도의 도입으로 대의원 선발에 정당 지도부의 영향력 감소 등)는 민주당 진영에서도 나타났지만, 현재 미국은 공화당의 극단화, 우경화가 훨씬 빠르게 나타나는 ‘비대칭적인 양극화’ 양상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화당의 기존 이념과 이질적인 트럼프가 2016년 공화당 대선 후보로 결정되어 당선까지 되고, 2024년 현재에는 공화당 자체가 ‘트럼프 당’이 되어버린 현실이 증거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공화당에는 잭슨주의적 전통이 있다. 공화당은 20세기 초에도 높은 관세를 통해 자국 산업을 보호할 것을 주장했으며 2차 세계대전 참전을 반대했다. 그러나 주지하듯 종전과 냉전 돌입 이후로 공화당 주류는 마셜 플랜과 나토가 상징하는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대외정책과 자유무역 확대를 지지했고, 민주당과 이러한 합의를 공유하며 미국 정치의 주요 양당 중 하나로 남았다. 상기했듯 레이건과 부시 부자 정권 시기에는 매우 공격적인 개입주의 대외정책을 실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래 공화당의 공동화(空洞化)가 진행된 결과, 트럼프라는 아웃사이더와 그의 잭슨주의적 인민주의 정치에 호응하는 대중이 공화당을 어렵지 않게 장악했다. 미 헤게모니의 위기 속에서, 미국의 주류였던 자유주의 세력이 아닌 비자유주의 세력이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제도권 정치에 영향력을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이번 대선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지목된 J. D. 밴스는 ‘탈자유주의’(post-liberal) 우파를 자칭한다. 밴스는 민주당과 공화당 기성세력의 자유주의적 컨센서스를 깨고 미국의 ‘탈자유주의적 체제 전환’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패트릭 드닌의 2023년 저서 『체제 전환: 탈자유주의적 미래를 향하여』 출판 기념회에 참가하여 의회에서 자신의 역할도 명백히 반체제적인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 기존 공화당원들도 아직 있다. 이들의 적극적인 민주당 후보 지지 움직임이 2020년 바이든의 당선에 기여했으며, 이번 대선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2020년 당시에는 대략 750명의 공화당 유력 인사가 바이든 지지를 선언했는데, 조지 H. W. 부시(아버지), 조지 W. 부시(아들) 행정부나 공화당 대선 후보였던 존 매케인과 밋 롬니 상원의원 캠프에서 일했던 이들이었다. 2012년 대선 후보였던 롬니는 2020년 트럼프 탄핵 심판에서 공화당 상원의원 중 유일하게 찬성표를 던졌고, 이번 대선에도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매케인은 2018년 사망 때까지 당내 반트럼프 진영의 구심 역할을 했고, 2020년 대선에서는 그의 부인 신디 매케인이 “바이든은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고, 모든 미국인을 하나로 모아 도전을 극복할 것이다. 그는 이번 대선일에 자랑스러운 공화당원의 표를 받을 것”이라며 공개적으로 바이든을 지지했다. 해리스를 대선 후보로 지명한 민주당 전당대회에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등 역대 민주당 대통령과 주요 인사가 총출동한 것과 달리 조지 W. 부시, 밋 롬니는 트럼프를 대선 후보로 지명한 공화당 전당대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올해 8월 26일 역대 공화당 소속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의 참모로 일했던 유력 인사 238명은 민주당 대선 후보인 해리스를 지지한다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들은 프로젝트 2025를 언급하면서 “혼란스러운 트럼프의 리더십은 평범한 국민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국가 근간을 흔들 것”이며, “트럼프와 J. D. 밴스가 푸틴과 같은 독재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미국의 동맹에 등을 돌리는 와중에 전 세계 민주주의도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트럼프와 구별되는 온건 보수의 가치와 개입주의 대외정책을 내세웠던 니키 헤일리 전 UN 주재 미국대사를 지지했던 공화당원 일부도 ‘해리스를 위한 헤일리 유권자’ 모임을 결성했다.
해리스 캠프도 8월 초부터 헤일리 지지자를 비롯하여 트럼프 전 대통령을 반대하는 공화당 유권자들을 겨냥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캠페인 담당자는 “트럼프의 극단주의는, 트럼프의 당이 더는 자신의 가치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수백만 명의 공화당원에게 독이 되고 있다”며, “당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공화당원들을 공략”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출신인 스테퍼니 그리셤 전 백악관 대변인, 올리비아 트루아 전 부통령 수석보좌관과 짐 에드거 전 일리노이 주지사, 빌 웰드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 크리스틴 토드 휘트먼 전 뉴저지 주지사, 그리고 전직 하원의원 16명이 해리스 캠프가 발표한 해리스 지지 공화당 인사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3. 트럼프 1기 대외정책은 어떠했나?
이와 같은 공화당 진영의 혼란은 트럼프 1기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트럼프 1기는 미국적 가치 전파나 군사 개입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았지만, 트럼프 본인이 공언한 것이나 지지자들이 기대한 만큼 국제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1) 트럼프 1기의 ‘어른들의 축’
그 까닭으로는 먼저, 당시 트럼프 캠프는 실제 정책 준비와 일손이 크게 부족한 상태에서 당선을 맞았고, 따라서 전통적인 공화당 입장의 인사들을 요직에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단적으로 트럼프 1기 외교, 국방정책을 담당한 H. R. 맥마스터 국가안보보좌관,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부 장관, 존 켈리 전 국토안보부장관(이후 백악관 비서실장) 등은 개입주의자이자 관록 있는 퇴역 장성들로, 트럼프가 즉흥적인 정책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막아 ‘어른들의 축’으로 불렸다. 이들은 트럼프가 주한미군을 철수하거나 주한미군 사드 배치 비용을 한국에 전가하는 것을 막은 것으로 유명하지만, 트럼프의 고립주의적 결정만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위험천만한 결과를 낳을 정책 전반을 막았다. 예를 들어, 맥마스터는 최근 회고록 『우리 자신과의 전쟁: 트럼프 백악관에서의 내 임무 수행』에서, 재임 시절 트럼프가 집무실 회의에서 “북한군이 열병식을 할 때 북한군 전체를 제거하면 어떨까”라고 말해 경악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결국 자신과 여러 가지로 마찰을 빚는 이들을 차례로 해임했다.
2) 공화당 내 세 갈래의 외교정책 노선
둘째로, 크게 보았을 때 트럼프주의, 즉 MAGA를 지지 또는 수용하는 공화당 인사들 간에도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여전히 상당한 이견이 존재하며, 트럼프의 정책에는 이러한 상충하는 입장이 반영되었다. 현재 공화당 진영 다수는 경제나 이민 통제와 같은 국내 정책이나 주로 중국을 대상으로 한 무역 정책에서의 이견은 크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공화당 유권자의 선택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대외정책에서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라는 수사는 공유하되 그 실제 내용은 서로 차이가 있다. 트럼프 진영은 미국 우선주의 혹은 ‘미국을 위대하게’의 시작을 레이건 행정부로 지목하며 2024년 대선 공약에서도 레이건의 ‘힘을 통한 평화’를 계승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상기했듯 레이건의 대외정책은 국제주의적이었으므로, 미국 우선주의에 대한 해석 차이가 발생할 수 있는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럽연합의 외교 싱크탱크인 유럽외교협회(ECFR)의 마이다 루게와 제레미 샤피로 연구원은 이러한 해석 차이를 자제론, 우선순위론, 우월주의론이라는 “MAGA 공화당의 3개 외교정책 부족(tribes)”으로 분류했다. 이들은 모두 트럼프주의의 주요 담론, 즉 미국이 세계화로 인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피해를 보았다는 믿음과 이민 통제 확대, 자유무역 반대, 중국에 대한 반감을 공유하지만,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이 무엇인지와 동맹국에 대한 태도, 유럽 안보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3개 부족의 입장 비교는 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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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자제론 진영은 잭슨주의자다. 미국의 해외 개입을 줄이고, 나토를 포함한 동맹들에서 벗어나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줄이는 것을 주장한다. 티파티의 주요 인사였던 랜드 폴과 마이크 리 상원의원, 백인 민족주의 확산에 기여한 것으로 악명 높은 극우 인터넷 언론 《브라이트바트 뉴스》의 전 회장이자 트럼프 캠프를 이끈 공로로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되었던 스티브 배넌이 있다. 이미 2022년 5월 당시 우크라이나 400억 달러 지원 패키지에 공화당 상원의원 11명과 하원의원 57명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같은 해 말 선거에서 현재 공화당 부통령 후보인 J. D. 밴스와 웨슬리 헌트와 같은 MAGA 정치인들이 새로 의회에 입성하며 이러한 분위기가 확대되었다. 자제론은 여전히 당내 엘리트층에서는 소수파지만, 공화당 유권자 사이에서는 이러한 정서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시카고국제문제협의회(CCGA)가 올해 8월 22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의 56%만이 미국이 세계 문제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답했는데, 이것은 1974년 이 조사가 시작된 이래로 최저점이다. 특기할 것은 2015년까지는 공화당원의 긍정 답변이 민주당원이나 무당층보다 높았지만 이후로 역전되었다는 점이다. 2024년 민주당원의 68%가 미국은 세계 문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답했고, 65%는 미국의 이러한 역할을 유지해서 얻는 이점이 비용보다 크다고 답했지만, 공화당원은 각각 54%, 49%만이 그렇게 답했다.
둘째, 트럼프 행정부의 국방부 전 부차관보 엘브리지 콜비와 같은 우선순위론 진영은 세계에서 미국의 존재감을 유지하고자 하지만, 현재 중국이 미국에 제기하는 도전은 과거 소련과 마찬가지로 집중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유럽이나 중동에 대한 개입은 대만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을 비롯하여 중국과의 결전에 필요한 역량을 분산시킬 것이라고 본다. 미주리 상원의원 조시 홀리도 같은 근거로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과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 지속에 반대표를 던졌으며, 미국은 대만 방어 능력을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게와 샤피로의 분류를 인용한 영국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이것이 사실은 위장된 고립주의일 수 있다는 의견을 소개한다. “우크라이나를 놓고 러시아와 간접적으로라도 맞서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과연 대만을 놓고 중국과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란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월주의론은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지도력과 군사적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는 트럼프 1기의 UN 주재 미국대사 니키 헤일리,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 부통령 마이크 펜스와 같은 핵심 인사들이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우월주의론 진영을 ‘레이건의 후계자들’로 규정한다. 현재 보수주의 대중운동의 주류에서 밀려난 “트럼프는 절대 안 돼” 주의자들은 여기에 속한다. 트럼프가 쫓아낸 ‘어른들의 축’인 존 켈리, 제임스 매티스, H. R. 맥마스터,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로버트 오브라이언 국가안보보좌관은 트럼프의 임기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고 트럼프 2기에 다시 기용될 가능성이 있으며, 상원에도 마르코 루비오, 린지 그레이엄, 톰 코튼이 여전히 강경한 우월주의로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우월주의론은 트럼프의 공약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반대했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2021년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의 직접적인 결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들은 미국이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과 중동에도 계속 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미국의 동맹국, 특히 유럽과 동아시아 국가가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는 주장은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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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 갈래 노선이 섞인 트럼프 1기 대외정책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트럼프는 자제론 진영에 제일 가까워 보이며, 자제론 진영도 그렇게 여긴다. 그러나 임기 동안 우월주의론 진영이 많은 역할을 했듯, 결과적으로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정책은 꼭 자제론으로 분류할 수는 없는 것이 많았다. 예를 들어, 2017~2018년 트럼프 행정부는 민간인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한 아사드 정권을 상대로 공습을 진행했다. 헤일리 당시 UN 주재 미국대사는 이는 시리아 정부의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아주 당연한 대응이며 추가 조치를 할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는 2014년 화학무기를 사용한 민간인 학살 등 시리아 알 아사드 정권의 국제법 위반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현실적인 역량을 고려하여 아시아-태평양에 집중하기 위해 시리아에 대한 직접적 군사력 투입을 선택하지 않은 오바마와의 차이점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도, 트럼프는 대선 후보로 나서기 한참 전부터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을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트윗을 써왔지만, 취임 첫해인 2017년, 대표적인 자제론자인 배넌을 경질한 직후 새 아프가니스탄 전략으로 미군을 추가 파병하겠다고 밝혔다. 개입주의 성향의 매티스 국방장관이 마련한 추가 파병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2020년, 트럼프 행정부는 탈레반과 평화협정(‘도하 합의’)에 서명하여, 탈레반이 알카에다의 활동을 방지하는 등 약속을 이행하면 2021년 5월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을 완전히 철수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제 완전 철군은 바이든 행정부에서 이뤄졌다. 로버트 오브라이언과 같은 인사들은 바이든의 ‘혼란스러운 후퇴 방식’이 가장 문제였다고 지적하면서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이 푸틴의 우크라이나 공격과 무관한 일은 아니라고 평가한다.
나토에 대해서도, 올해 초 트럼프의 “(나토 회원국이) 돈을 내지 않았는데 러시아의 공격을 받으면 보호하지 않을 것이며, 사실은 그들이(러시아) 원하는 대로 하라고 격려할 것” 발언이 논란이 되었지만, 애초에 트럼프는 후보 시절부터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을 지속적으로 문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재임 중 실제로 미군의 나토 파견을 취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이 트럼프 재임 기간에 미국의 동맹 관계가 세간이 우려했던 것보다 심각하게 위협받지 않았던 것에는 미국 의회의 역할도 크다. 한국과 달리 미국 의회는 대외정책에 대해 막강한 권한을 가진다. 예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이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하자 2019년 미 의회는 2020회계연도 「국방수권법」에 전년도에 2만 2000명으로 규정했던 주한미군 규모를 현 수준인 2만 8500명으로 상향해 명문화했다. 동맹국들에 과도한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요구하고, 주둔 미군 감축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는 트럼프 행정부의 행보를 차단하는 의미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한 상원에서도 통과되었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 대비하기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 관련 법들이나, 대만 방어 관련 법, 홍콩·위구르 인권 관련 제재법도 초당적 합의로 통과되었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냉전 종식 이후 그 어떤 미국 대통령보다도 자제론적 성향을 띤, 즉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국이 견인했던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책임질 생각이 없는 대통령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트럼프 1기와 달리 프로젝트 2025 등을 통해 트럼프주의적 정책이 구체적으로 준비된 점, 트럼프 2기의 내각과 의회 구성에서 자제론자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점, 나아가 너른 트럼프 지지 유권자의 성향도 그렇다는 점을 상기하면, 자제론적 경향이 트럼프 2기에서 확대할 것이다.
따라서, 세계가 트럼프 1기에 목도했던 핵심적인 문제점, 즉 안보나 가치, 장기적 전략이 아닌 단기적 이익을 중심으로 동맹국과 ‘거래’하려는 태도, 인류 공동의 협력이 필요한 보건위기, 기후위기에 대한 비과학적 태도, 경제학적인 근거를 무시하는 무역갈등과 관세 부과는 트럼프 2기에 더욱 심각한 형태로 드러날 전망이다.
4. 트럼프 2기의 대외정책 방향
1) 트럼프주의자가 주도할 트럼프 2기
트럼프 2기의 대외정책을 예상하려면, 트럼프 2기에서는 ‘어른들의 축’이나 전문 관료들의 저항이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트럼프 1기는 트럼프주의를 따르는 전문 인력이 부족하여 기존 공화당 주류 성향의 인사나 관료의 입김에 휘둘려야 했고 그래서 진정으로 트럼프주의적 정책을 충분히 관철하지 못했다는 인식은, 2020년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 도전에 실패한 후 트럼프 1기 참모들이 미국우선정책연구소(AFPI)를 설립하고 트럼프 2기를 위한 정책 생산과 인력 양성의 거점을 마련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AFPI는 “차기 공화당 대통령이 집권 즉시 일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2023년 기준 트럼프 행정부의 전직 장관 8명과 20명의 임명직 공직자가 일하고 있다.
상기했듯 케빈 로버츠 체제의 헤리티지 재단도 공화당 재집권을 위한 프로젝트 2025를 이끌고 있다. 정책 자료집인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을 발간한 것 외에도 트럼프 2기 행정부를 구성할 임명직 후보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 재단은 SNS 게시물을 포함해 “트럼프 행정부에 맞서 싸운 적이 있거나 실제로 각종 이슈에서 반대편에 섰던 경우”가 결격 사유라고 밝혔다. 완전한 트럼프 친위대만 행정부에 남기겠다는 것이다.
또한 프로젝트 2025는 현재는 200만 명이 넘는 연방정부 인력 중 4천 명 정도만을 행정부가 임명하는 데 반해, 대통령의 임면 대상 관직을 대폭 확대해 기존 관료들을 물갈이하는 것까지 제안한다. 트럼프는 임기 말인 2020년 10월, 대통령의 공무원 해임 권한을 확대하는 행정 명령 ‘스케줄 F’를 발표했는데(새로 당선된 바이든 행정부는 스케줄 F가 발효하기 전에 폐기했다), 이를 부활시켜 관료제를 대통령의 의지에 굴복시키자는 것이다. 트럼프 캠프의 선거 공약인 어젠다 47에서도 “딥 스테이트(미국 정부 안에 국익이 아닌 기득권의 이익을 추구하는 비밀 집단이 있다는 음모론적 용어)를 해체하고 워싱턴의 부패로부터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10가지 계획”의 1번이 새 임기 첫날 스케줄 F를 재발표하는 것이다.
2) 어젠다 47
어젠다 47은 트럼프가 공화당의 공식 대선 후보로 지명되기 전부터, 트럼프 캠프가 홈페이지에 트럼프 본인의 영상 메시지 형식으로 발표해 온 공약 목록이다. (47은 공약이 47개란 뜻이 아니라, 미국의 제47대 대통령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젠다 47은 2023년 말까지 발표되었고, 2024년에 공화당이 정강과 20개 핵심 공약을 합의한 이후로는 강조되지 않고 있다. 여러 주제를 산발적으로 거론하는 식이라, 중국이나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대통령이 되면 24시간 안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를 제외한 특정 지역이나 외교 사안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이 잘 정리되어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어젠다 47은 트럼프 캠프가 현 국제 정세와 미국의 대응을 어떻게 보는지는 명확히 드러낸다. 2023년 2월 발표한 “미국의 마지막 전쟁광들(Warmongers)과 세계주의자들(Globalists)을 멈출 계획”이라는 영상에서, 트럼프는 “딥 스테이트, 국방부, 국무부, 국가 안보 산업단지에 있는 미국의 마지막 전쟁광들과 세계주의자들을 청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임기 내에 새로운 전쟁이 없었던 것은 미국을 갈등에 빠뜨리는 법만 아는 워싱턴의 많은 장군, 관료, 외교관들의 치명적인 조언을 거부했기 때문인 반면, 그동안 빅토리아 눌런드(오바마 행정부의 국무부 유럽·유라시아 담당 차관보)와 같은 이들은 우크라이나를 나토로 몰아가고 유로마이단 봉기를 지원하여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키고, 이전에도 이라크와 세계 다른 지역에서 대립을 부추겼다고 설명했다. 부패한 세계주의 기득권들이 이런 식으로 전쟁을 일으켜 로비스트, 대형 방위업체들과 함께 경제적 이익을 취하고 있으니 이들을 공직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한 달 뒤 발표한 “3차 세계대전 예방”이라는 영상에서도, 3차 세계대전을 막으려면 “끊임없이 우리를 끝없는 전쟁으로 몰고 가고, 해외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척하지만 미국을 제3세계 국가로 만드는 세계주의자 네오콘 기득권 전체를 해체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우리의 외교정책 수립은 러시아가 우리에게 가장 큰 위협이라는 거짓말에 근거했지만, 오늘날 서구 문명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러시아가 아니다. 미국을 미워하는 사람들, 국경 폐지, 치안 실패, 핵가족과 출산율 붕괴, 마르크스주의자, 세계주의자다”라며, 나토의 목적과 사명을 근본적으로 재평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3) 2024년 공화당 정강과 20개 핵심 공약
다음으로, 어젠다 47을 수용하여 2024년 공화당 전국위원회가 확정한 공화당 정강과 대선 핵심 공약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서는 분량이 A4 16쪽으로 길지 않기도 하지만(후술할 프로젝트 2025의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은 900쪽이 넘는다), 그중에서도 엄밀한 의미의 대외정책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는다. 1장은 경제, 2장은 국경 보호와 이민 중단인 반면, 외교·안보 정책은 마지막 장인 10장에 배치되었다. 10장 <힘을 통한 평화로의 복귀>는 트럼프식 국익 관점을 반영하여, 국익(national interest)에 관해 “공화당은 미국 본토, 우리 국민, 우리 국경, 우리 위대한 미국 국기, 그리고 우리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가장 본질적인 미국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 외교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서술하며 시작한다. 이하의 내용은 △ 군대 현대화 △ 동맹 강화 △ 경제, 군사, 외교 역량 강화 △ 미국 국경 방어 △ 우리 산업 기반 복원 △ 중대 인프라와 산업 기반 보호다. 즉, 여기에서도 멕시코와의 국경 보호, 미국 내 군수 관련 산업 투자 등 국내 정책에 해당하는 내용이 다수다. 동맹 강화를 이야기했지만, “동맹국이 공동 방위에 투자할 의무를 다하고 유럽에 평화를 회복하도록”, 즉 맥락상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전시키도록 함으로써 동맹을 강화하겠다는 내용이다. 중동에 대해서는 이스라엘과 함께 평화를 구축하겠다고 천명했다. 경제, 군사, 외교 역량 강화 역시 “미국에 맞서는 나라들의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미국적 삶의 방식을 보호하겠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없다.
핵심 공약 20개 중 외교·안보에 관련된 것도 8번과 12번뿐이다. 8번은 “제3차 세계대전을 막고, 유럽과 중동에 평화를 회복하고, 미국 전역에 미국에서 생산한 거대한 아이언 돔 미사일 방어막을 구축하자”다. 12번은 “우리 군대를 강화하고 현대화하여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강력한 군대로 만들자”다. 공화당 정강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종식할 구체 방안을 제시한다기보다는, 미국의 대외개입을 줄이고 국내 군수산업을 살리겠다는 대내 메시지의 측면이 커 보인다. “친하마스 급진주의자들을 추방하고 우리 대학 캠퍼스를 다시 안전하고 애국적인 곳으로 만들자”는 18번도 그렇다.
이와 같이 소략하며 구체적이지 않은, 국내 정책에 치중한 외교·안보 공약 또한 공화당의 변화를 보여준다. 트럼프가 처음 등장했던 2016년과 비교해보면, 당시 공화당 정강은 “우리는 미국이 피난처로서, 그다음에는 수호자로서,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에 자유의 모범을 보여주는 나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예외적이라고 믿는다”라는 서문으로 시작한다. “미국의 부활”이라는 제목의 외교·안보 정책 부분에서도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이 자유세계의 지도자라는 자연스러운 위치를 되찾을 것을 요구하며,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미국보다 더 큰 동맹이 없다고 설명한다. 중동, 아시아-태평양, 유럽, 남북미, 아프리카 등 각 지역 개입 정책과 국제기구, 국제 개발 지원, 인권 증진 이슈에서 미국의 원칙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예컨대,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 동유럽에서 무력에 의한 영토 변경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국제 개발과 외교에 대한 강력한 의지는 레이건 대통령의 ‘힘을 통한 평화’ 전략의 핵심 구성 요소”라고 명시한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트럼프주의자들이 국제질서와 그 속에서 미국의 역할을 인식하기를 거부하며, 그에 따라 정책의 초점을 미국 국내에 훨씬 더 많이 맞추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4) 프로젝트 2025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
현재 미국 내에서는 전반적으로 내용이 소략한 공식 선거 공약보다 프로젝트 2025가 논란의 대상이다. 프로젝트 2025가 발표한 보고서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은 임신중지약 배포 처벌, ‘비판적 인종이론’(CRT, 미국의 인종차별이 사회제도 등 구조적 문제라고 보고 이를 개혁하려는 이론) 교육 반대, 불법 이민자 추방, 기후위기 관련 법 폐지를 주장하며 미국 사회의 대표적인 문화전쟁 이슈들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2025가 민주당의 공격 대상이 되자 트럼프는 이와 선을 그으며 “나는 그들과는 무관하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번 7월, 논란 끝에 프로젝트 2025 총책임자인 폴 댄스가 사임하자 트럼프 캠프는 “프로젝트 2025 종식에 대한 보도는 크게 환영받을 것이며,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캠페인에 대한 영향력을 왜곡하려는 이들에게 경고가 될 것”이라는 성명을 내었다.
그러나 프로젝트 2025가 사실상 트럼프 2기의 정책을 설계한다는 의혹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일례로, 8월 15일 프로젝트 2025의 핵심 저자인 러셀 바우트 전 백악관 예산관리실장이 “(트럼프가 프로젝트 2025와 무관하다고 한 것은) 대학원 수준의 정치”며 자신들이 “트럼프가 승리할 경우 신속한 행동을 위한 토대가 될 수백 개의 행정명령, 규정, 메모를 비밀리에 작성” 중이고, 트럼프는 “우리가 하는 일을 매우 지지한다”고 말하는 몰래카메라 영상이 공개되었다.
실제로 프로젝트 2025는 트럼프주의의 주요 서사를 공유한다. 프로젝트 2025가 발표한 보고서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 서문은 선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해고도 불가능해 보이는 관료들이 점점 비대해지고, 헌법에 책임을 지지 않는 정부 부서들을 장악하여 미국을 망치고 있다고 비난한다. 예를 들어, 교육부 관료는 반미 프로파간다를 미국 교실에 주입하고, 법무부 관료는 트랜스젠더 극단주의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학생들의 스포츠를 훼손하고 부모들의 권리를 침해하도록 학교에 강제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대외정책에 관해서도, 국무부의 대외 원조 프로그램이 ‘교차성’과 낙태에 대한 극단주의를 주입하는 장이 되었으며, 지배 엘리트가 미국 시민의 권력을 빼앗아 이를 초국가적 조약과 기관으로 집중시킨다고 주장한다.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에 담긴 대외정책 제언은 어떠한가? 미국 국민이 가난해졌고, 중국의 위협에 미국의 대응을 집중해야 하므로, 동아시아, 유럽, 중동 내 동맹국의 방위 부담을 강화하고 여러 국제기구와 협약에서 탈퇴하고 미국 국제개발처(USAID)를 축소하여 미국의 부담을 덜어야 한다는, 트럼프 1기 대외정책의 핵심 구상은 이 보고서 전반에도 관철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보고서는 이러한 정책들에 앞서 보았듯 더 중대한 이념적 메시지를 더한다.
케빈 로버츠가 쓴 서문은 냉전 시기 소련과 유사한 최대의 적국으로서 중국을 부각하며, 중국이 부상한 책임을 국제주의적 엘리트 세력에게 돌린다. “베이징의 전체주의, 공산주의 독재 정권은 미국의 이익과 가치, 미국인에 맞서 전략적, 문화적, 경제적 냉전을 걸고” 있으며,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지도자들은 공산주의 중국과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중국공산당을 포옹하고 그들을 부유하게 만드는 동시에, 미국의 산업 기반은 도려냈다.” 따라서 과거 미국의 선조들이 유럽의 군주제와 식민주의를 거부했듯, 사회주의, 파시즘, 공산주의와 함께 윌슨주의적 세계주의를 거부하겠다고 선언한다.
주요 국가와 세계 각 지역에 관한 정책이 담긴 6장 <국무부>는 불안한 세계정세 속에서 차기 행정부가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국가로 중국, 이란, 베네수엘라, 러시아, 북한을 꼽는다. (6장을 쓴 카이론 스키너는 트럼프 1기 당시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으로서 외교정책에 관여했다.) 이 중 비교적 내용이 짧은 베네수엘라를 제외한 나머지 네 국가에 관한 부분을 보자.
① 중국
스키너는 “무엇보다도, 중화인민공화국의 본질을 경쟁자라기보다는 위협으로 보는 아주 솔직한 관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947년 당시 외교관 조지 케넌이 발표했던 대소련 봉쇄 노선을 언급하며, 차기 대통령은 이와 같이 냉전 시대에 소련을 상대로 세웠던 것과 마찬가지의 대응책을 중국에 대해 세워야 한다고 촉구한다. 어떤 이들은 중국의 위험성을 인식하면서도 중국의 부상에 온건한 접근을 취하며 “경쟁할 것은 경쟁하고, 기후 변화와 같이 협력할 것은 협력하자”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전략은 명백히 실패했다고 규정한다. 중국의 도전은 중국공산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만이 아니라 5천 년 동안 중국을 지배한 역사, 이념, 제도의 산물이기에, 중국의 자체적 문화와 시민사회는 결코 더 규범적인 국가를 만들지 못할 것이며 중국공산당의 공격적 행동은 오로지 외부의 압력으로만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 스키너의 평가다.
② 이란 및 중동
스키너는 오바마 행정부의 이란 핵 합의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권에 금전적 생명줄을 제공하여, 이란 시민을 해치고 세계에 핵전쟁 위협을 가하는 잔인한 이슬람 신정 체제가 핵무기 프로그램과 테러리즘 지원을 확대하게 했다고 비판한다. 2022년부터 진행 중인 이란 반정부 시위가 보여주듯 이란 시민이 원하는 민주적 정부가 이란에 들어서는 것이 미국과 세계의 이익에도 부합하므로, 경제적, 외교적 수단으로 이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중동 지역에 대해서는 트럼프 1기에서 강경한 친이스라엘 정책(미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 인정 등)과 팔레스타인 압박 정책(팔레스타인해방기구 워싱턴 사무소 폐쇄, UN 팔레스타인난민기구 지원 중단 등)을 펼치고,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수교를 통해 이란을 견제한다는 아브라함 협정을 추진한 것을 이어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한 튀르키예가 러시아나 중국과 가까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쿠르드족에 대한 지원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③ 러시아
러시아 관련 서술은 “오늘날 보수주의자를 극명하게 갈라놓는 이슈 중 하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인정으로 시작한다. 미국 보수 중 일부는 러시아의 불법 침략 전쟁이 미국의 이익과 유럽의 평화, 탈냉전 질서를 위협하므로 필요시 미군의 주둔을 포함한 적극적 개입으로 푸틴을 패퇴시키고 침략 이전의 우크라이나 국경선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일부는 우크라이나 지원은 미국이 아니라 유럽 국가들이 할 일이라고 주장하며 협상을 통한 빠른 종전을 원한다고 설명한다. 스키너는 이러한 상반된 입장 사이의 갈등으로 생겨난 세 번째 접근 방식은, “고립주의와 개입주의 모두를 피하고, 먼저 ‘미국 국민에게 무엇이 이익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소개한다. 스키너는 이렇게 보았을 때 미국의 이익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공산주의 중국이므로, 미국의 우크라이나 개입은 충분한 대가를 받아야 하고, 군사적 지원으로 제한되어야 하며, 즉 경제적 지원은 유럽이 해야 하며, 미국인의 생명을 위협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④ 북한
북한에 관한 서술은 길지 않다.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은 미국의 핵심 이익이고 한국과 일본은 중요한 동맹국이며, 북한이 사실상의 핵보유국으로 남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미국 방어와 세계 핵 비확산에 중요하다는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이러한 구상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의 대중국 접근은 트럼프 1기 당시 초당적으로 도출되었고 바이든 행정부가 발전시킨 ‘미중 전략적 경쟁’과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초 ‘전략적 경쟁’은 중국에 대한 ‘관여 정책’, 중국을 WTO를 비롯한 국제기구와 국제무역에 참여시키면 중국이 개혁에 나서고 신뢰할 수 있는 국제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전략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중국과 체제 간 ‘장기 전략적 경쟁’에 돌입하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에서 로버츠와 스키너의 서술처럼 중국을 애초에 어떠한 관여도 불가능한 문명적 타자로 놓거나, 즉각 냉전 당시 소련에 취한 것과 같은 봉쇄의 대상으로 놓는 것은 아니었다. ‘전략적 경쟁’은 신냉전 개시를 선언한다기보다는, 다시 다자주의적 협력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관여 정책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란 시민이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권을 전복하도록 지원하자는 제언도, 민주주의를 앞세운 세계주의자들이 세계 곳곳에 미국의 불필요한 개입과 대립을 낳았다는 전체 기조와 상충한다. 보고서가 작성된 시기에는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이란 반정부 시위만이 아니라 중국 정부의 ‘제로 코로나’ 봉쇄와 우루무치 화재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중국 ‘백지시위’도 있었는데, 이란 시민의 민주주의 열망은 강조하는 반면 중국 시민사회는 중국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단정 짓는 근거도 제시되지 않는다. 하마스가 아브라함 협정의 연장선에서 추진되던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 국교 정상화 협상을 막기 위해 일으킨 2023년 10월 7일 공격이 2024년 9월 현재까지 진행되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이어진 상황에서, 트럼프 1기 당시의 중동 정책을 반복하는 것의 효과도 알 수 없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서는 공화당 내 3갈래 외교정책 노선 중 중국 우선순위론을 차기 대통령이 보수 진영 내 갈등을 봉합할 방법으로 제시하였는데, 트럼프는 어젠다 47뿐만 아니라 여러 발언으로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드러냈으므로 수용될지 미지수다. 한반도와 북핵 문제에 관해서는 그야말로 원칙적인 입장 외에 제시된 것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매년 지구종말시계를 발표하는 핵과학자회보(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가 “레이건 행정부 출범 이래 가장 극적인 핵무력 증강”이며 (핵무기비확산조약, 즉 NPT가 발효되기 전인) 1960년대 초반 이래로 세계가 본 적 없는, 많은 국가의 새로운 핵 프로그램을 촉발할 수 있다고 평가한 핵 정책을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이 제안한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은 다른 안보 프로그램보다 핵무기 개발 및 생산을 우선하고, 모든 핵무기 개발 및 생산 프로그램을 가속하고, 비용 면에서 더 효율적인 대안을 찾으려는 의회의 노력을 거부하고, 현존 조약들의 한도를 초과하여 핵무기 수를 늘리고, 미국이 서명한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CTBT)을 무시하고 새로운 핵실험을 행할 것, 모든 미사일 방어(MD) 프로그램을 가속할 것을 권고한다.
5. 결론
1) 트럼프주의의 더욱 위험한 함의는 무엇인가?
트럼프주의는 스스로 개입주의도 고립주의도 아닌,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대외정책을 표방한다. 그런데 이때 ‘국익’을 판별하는 기준이 더는 자유주의나 국제주의가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기준이 될 것인가 의문이 남는다.
트럼프가 푸틴, 김정은,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등 세계 각지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에 대해 우호적 발언을 자주 하는 것은 잘 알려졌다. 심지어 중국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는 미국의 일자리를 훔쳐간다고 맹비난하면서도, 중국 시진핑 주석에 대해서는 “내 친구”, “훌륭한 사람”, “위대한 지도자”라고 추켜세우기도 한다. 일차적으로 이는 지도자들과의 개인적 친분을 통해 더 나은 합의를 얻거나 오바마, 바이든 행정부 외교정책을 깎아내리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트럼프, 그리고 공화당원이 세계의 독재자들과 연대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것은 이들에게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저항을 무너뜨리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바이든의 당선을 인정하지 않는 많은 공화당원의 모습은 미국 민주주의 제도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공화당의 상태가 이렇고, 이들이 트럼프를 다시 대통령으로 뽑는다면, 트럼프는 이미 시리아의 쿠르드족을 버렸듯이(2019년 당시 트럼프는 시리아-튀르키예 국경에서 미군을 철수하여, 이슬람 권위주의로 분류되는 튀르키예 에르도안 정부가 이 지역의 쿠르드족을 공격하는 것을 방조했다), 우크라이나인을 버리고 러시아와 협정을 맺을 수도 있다. 프랑스의 마린 르펜, 이탈리아의 마테오 살비니 등 유럽 극우와 러시아 푸틴 정권도 친밀한 관계다.
미국의 역사가 티모시 스나이더도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에서 푸틴 정권과의 관계를 매개로, 미국과 유럽에서 신권위주의가 우파와 좌파 양자에서 ‘민주주의’의 탈을 쓰고 확산했음을 설명했다. 푸틴은 유럽 극우정당들을 후원해왔다. 장기적으로 유럽을 러시아가 주도하는 ‘유라시아’에 통합하기 위해 ‘유럽 해체’를 주장하는 푸틴과, 마찬가지로 유럽연합을 싫어하고 배타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유럽 극우는 이해관계도 일치했다. 2016년 트럼프 선거 대책 본부장이었던 폴 매너포트는 그 직전인 2015년까지 러시아 올리가르히, 우크라이나 야누코비치 정권, 우크라이나 내 친러정당을 위해 일하며 러시아식 선전기술에 통달했고, 이를 트럼프의 선거운동에 적용했다. 예컨대, 명백한 거짓말과 말 바꾸기, 정적에 대한 모함을 반복함으로써 정치에서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어차피 진실이란 없으니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사람에게 순종하자”는 권위주의적 문화를 만드는 기법은 러시아에서 오랫동안 잘 통했고 트럼프의 전략으로도 효과를 발휘했다.
근본적으로 “나만이 진정으로 국민을 대표하며, 다른 정치인들은 국익을 착취하는 엘리트들”이라는 트럼프의 수사와 의회, 언론, 독립기구에 대한 공격은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헝가리의 오르반 등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다른 인민주의 지도자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트럼프 캠프와 프로젝트 2025가 제시하는 국내 정책들, 예를 들어 연방대법관의 당파성 강화, 연방정부에 대한 대통령의 통제력 강화,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의 독립성 약화, 현재 행정부의 직접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기관 직접 통제도 민주주의 제도를 공격하는 전형적인 정책이며 다른 인민주의, 권위주의 정권들이 시도해온 것과 유사하다. 그러니 트럼프주의자들은 인민주의, 권위주의 세력과 손잡는 것이 미국과 세계의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주어 미국의 국익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 판단할 가능성이 작고, 그에 따라 ‘파격적’ 대외정책을 감행할 가능성은 크다.
2) 미국 없는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트럼프 1기 당시, 인도의 경제학자 아빈드 수브라마니안은 오늘날 세계가 ‘G 마이너스 2’ 세계라고 설명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이 개방된 시장이라는 핵심적인 세계적 공공재를 제공하는 대신, 무역전쟁으로 세계 무역을 감소시키며 개발도상국에 타격을 입히는 ‘공공악’(public bads) 제공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로나19 위기가 터지자, 유럽연합이 이탈리아를 구해내기 어렵다는 것이 판명되었고, 이는 오래도록 인민주의 정치인들이 이용할 비옥한 토양을 만들었다. 트럼프의 미국은 전염병 위기에 최악의 대처를 하여, 미국 인구는 세계 인구의 5% 미만임에도 미국인 사망자는 그때까지 확인된 코로나19 사망자의 약 24%를 차지했다. 중국은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의 진실을 은폐하여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불러일으켰고, 전염병 위기로 인한 탈세계화와 저개발국의 도산은 중국의 무역과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악영향을 끼쳤다. 트럼프의 당선은 곧 이러한 무질서한 세계로의 복귀를 뜻한다.
더군다나 현 상황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기점으로, 인민주의와 팽창주의의 세계적 위협이 가시화된 상태다. 현대적 국제질서를 이끄는 미국의 헤게모니는 약화하고 있으나 20세기 초 러시아혁명과 같은 사회주의적 대안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권위주의 국가들의 팽창주의와 인민주의가 세계질서를 2차 세계대전 이전으로 되돌릴 위험이 존재한다. 국제질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트럼프의 당선은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미국이 앞장서서 미국이 만들어 온 전후 국제질서의 붕괴를 방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모든 국가의 평화와 자결권 보장을 공동의 이익으로 여기는(UN헌장 전문) 국제질서가 붕괴한 미래가 온다면, 유럽에서 러시아의 전쟁이 확대하고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의 대만 침공과 한반도 전쟁이 일어날 위험은 더욱 커질 것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사태를 가정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세계’라는 이상에 기초한 세계 질서가 붕괴하면 돌아올 것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와 같이 강대국들이 세계를 각자의 세력권으로 분할하고, 그 안에서 인권 탄압이나 약소국 민중의 자결권 억압을 무제한으로 행하는 세계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와 중국이 주창하는 ‘다극 세계’ 구상이기도 하다. 러시아와 중국이 서구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뛰어넘은 진정한 민주주의와 ‘공동부유’를 이루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환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세계를 반길 이유가 없다.
3) 한국 사회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와 같이 올해 미국 대선 결과가 아무리 한국과 세계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해도, 우리가 미국 대선에 영향을 끼칠 방법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미국 대선은 그저 강 건너 불구경인가? 그렇지 않다. 트럼프주의의 부상이 제기하는 쟁점은 우리 사회운동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젝은 서구 좌파가 트럼프와 시진핑, 푸틴, 르펜이 쌓고 있는 권위주의 연대가 세계 민주주의를 침식하고 있음을 깨닫기는커녕,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이해 없이 “국회의사당 점거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했다”라고만 생각하거나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은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였다는 러시아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가 보았을 때 이러한 모습은 1940년 당시 나치의 유럽 폭격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자칭 ‘반제국주의 평화주의자’들과 같다. 그런데 좌파까지 이런 권력자들의 연대를 막지 않으면, 좌파가 전통적으로 옹호해 온, 통제받지 않는 권력에 억압받는 희생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지젝이 쓴 글의 제목이 “좌파의 배신”인 이유다. 스나이더는 극우 세력뿐만 아니라 저명한 종군기자 존 필저나 영국의 대표적인 진보 성향 일간지 《가디언》 부편집인 셰이머스 밀른과 같은 좌파 인사들도 러시아의 선전에 매료되어 우크라이나에 대한 가짜뉴스를 널리 전파했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직접 찾아가거나 현지 기자들의 조사를 참고하는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서구 좌파의 모습과, “중국에도 셰셰, 대만에도 셰셰, 이러면 되지, 중국과 대만 국내 문제가 어떻게 되든 우리가 뭔 상관있어요?”라는 유력 정치인의 발언(2024년 3월 22일 이재명)에 무비판적인, 심지어 적지 않게 공감하는 한국 사회운동의 모습은 과연 얼마나 다른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포함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미국의 패권만 무너지면 더 좋은 세계가 올 것이라는 공공연한 기대는 어떠한가? 트럼프의 재선을 노골적으로 바라다, 부정선거를 기정사실화하며 “국내 진보진영도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해야 하며, 한국 정부도 바이든 인정을 보류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던 통일운동 일각은 이번에도 똑같은 행태를 보일 것인가? 올해 미국 대선의 최종 결과와 무관하게, 우리가 미국 대선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세계적 무질서와 전쟁으로 향하는 길에 복무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