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연장 동의안을 저지하자 뻔한 수순, 파병연장동의안 12월 7일 상임위에 상정되었던 파병연장 동의안이 통과되었다. 이라크 파병규모 3위에 빛나는 한국군의 병력규모는 3600여명, 이들은 올 12월 31일부로 법적 주둔시한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 파병 때와 마찬가지로 또 한 번 소리 소문 없이 연장동의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그간 정치권과 언론은 온통 소위 4대 개혁입법을 둘러싼 여야다툼으로 도배가 되었고, 연장동의안은 주요 민생현안과 더불어 일말의 논의조차 진행되지 않았다. 자이툰 부대 파병 당시, 추가파병은 '신중하게, 충분한 고려와 국민적 합의를 통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던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영국 방문 시, '파병연장은 통과될 것'이라는 BBC와의 인터뷰 발언을 통해서도 공수표임이 확인되었다. 결국 3600여명의 젊은 목숨들은 여전히 사지에 머무르게 될 것인가? 사실 이미 뻔한 수순이었다. 작년 3월 20일, 이라크전이 발발하고 바로 그 다음날 정부는 임시국무회의서 한국군 파병동의안을 의결하였다. 당시 정부는 이라크 평화재건 사업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파병 반대 여론을 무마시키려 하였으나, 서희 · 제마 부대 파병 이후 전투병 파병은 뻔하게 예상되던 바였다. 아니나 다를까 2003년 5월 1일, 부시 대통령의 종전 선언에도 불구하고 국지전 양상 확대라는 사실상의 점령 실패가 확인되면서 미국의 추가파병 요청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지역 담당 독립부대'인 전투부대 자이툰이 이라크 북부 아르빌에 주둔한다. 이라크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아르빌의 광활한 사막 한 가운데 3중 보호막을 쳐 놓고, 쿠르드 민병대의 보호를 받으며 태권도 보급, 의료봉사, 차량 수리, 문맹퇴치라는(!) 평화재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이툰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 대선 직후, '팔루자 대 공습' 이나 모술 등지에서 미 · 영 연합군의 공격을 가능하게 하는 후비대 역할로서 전쟁의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더군다나 애초 자이툰 부대와 관련된 수송임무 약속을 파기한 미군 덕에 10월 11일, 불법 파병된 공군 제 58 항공 수송단 다이만 부대의 활동까지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쿠웨이트 알리 알-살렘 미군 공군기지에 주둔하며 아르빌을 왕래하는 다이만 부대는 "필요하면 다국적군의 수송작전에도 투입될 것"이라는 말 한마디에 채 1개월도 지나지 않아 이라크 주둔 미군의 병력과 장비 수송 지원임무에 투입되었다. 미국의 이라크 총선 전략, 잠재된 혼란 제 2의 베트남전으로 불리며 끝 갈데 모르는 이 장기전에서 여러 나라들이 속속들이 파병을 철회하거나 병력을 감축시키고 있다. 하지만 내년 1월 30일 이라크 총선을 앞두고 저항세력 일대 소탕을 벌이고 있는 미국은 신규병력 1500명을 추가파병하고 주둔기간을 연장하여 전후 최대 15만 명을 이라크에 주둔시켜 총선을 대비한 치안확보에 힘쓸 계획이다. 수만의 이라크 민중들이 다치거나 죽었고 이라크 전 이후로 11월 현재, 미군 사망자는 1천 251명에 달한다. 미국 내에서는 모병을 위해 26억 달러를 뿌려가며 고등학교 앞에서 진을 쳤으나 지원 미달사태가 빚어졌다. 이라크 전범재판에 증인으로 서기 위해 한국에온 이라크인들은 미군의 언론통제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대선 직후 이어진 팔루자 공격 3주 동안 이라크 인 4천여 명 이상이 확실히(!) 죽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더불어 이라크를 시아 · 수니 · 쿠르드를 구분하여 갈등을 조장하는 미국의 3분할 정책도 이 혼란에 불을 지피고 있다. 전쟁 이전 "친구들 사이에서도 시아인지 수니인지 모르고 관심도 없었고 … 결혼도 한다. 전쟁 이후 부각되었다. 미국의 의도적 분열정책이며 효과적인 이라크 통제 · 지배 전략이다"라고 종교/민족 갈등을 설명하는 이 증인들의 말은 제 2의 팔루자라 불리며 지난 11월 말부터 대규모 공습에 들어간 이라크 북부지역 모술의 상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미국은 쿠르드족으로 구성된 이라크 방위군 4개 대대를 모술로 이동시켜 저항세력의 주축으로 파악되는 수니파와의 종족갈등을 부추겼으며, 저항세력은 모술에 위치한 자체군대 약 7만 5천명의 페슈메르가('결사대')와 민병대 포함 13만 명으로 추산되는 병력을 가진 쿠르드계 정당인 쿠르드애국동맹(PUK) 본부 건물을 습격하였다. 더불어 대규모의 시설과 비용, 시간을 들여 훈련시킨 경찰병력 4000여명은 저항세력이 모술을 점령한 48시간만에 3200여명이 줄행랑을 쳤다. 수니 · 시아 · 기독교 · 공산당 · 이라크 투르크멘 전선 등의 다양한 단체 미군의 팔루자 공격 시 선거 보이콧을 선언했으며, 수니파는 점령군 하에서의 총선을 기본적으로 반대하고 있고, 시아파(이라크인 60%)는 총선참여를 거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미군점령을 원하지 않고 있다. 또한 총선 준비마저 엉망이어서 일반 민중들은 후보, 정당, 선거일정 등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무자헤딘의 공격으로 선거당일 투표소에 가는 것조차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은 미국과 점령군이 밀어붙이는 총선이 그 이후에도 상당한 여파를 남기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음은 아르빌이다. 하지만 이 전쟁과 점령으로 인한 혼란은 계속해서 정당화의 구실을 만들고 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가졌을 것이라는 의혹은 의혹일 뿐이었고 또 다른 명분이었던 사담 후세인은 이미 축출되었지만 "이라크 전의 타당성 여부를 논란으로 삼기보다는 향후 이라크의 사회적 안정, 자유와 민주주의 구축 등을 위한 효과적 해법에 치중해야 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대량살상무기와 테러 지원이라는 명분에서 민주주의와 사회 안정에 이르기까지 어떤 명분이든지 갖다 붙이면 다 말이 된다. 종전 선언 이후 이라크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치달았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안정과 민주주의 구축이란 저항세력 소탕을 위한 계속적인 전쟁, 친미정권의 수립을 위한 총선에 다름 아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할 수 있는 효과적 해법이란 그것을 위한 '전쟁의 지속', 즉 파병군을 계속 유지하는 것과 위기상황에서 한국군이 참전하는 것이다. 자이툰 부대가 주둔한 북부 아르빌은 쿠르드족의 집단 거주지역으로서 인근 모술 지역의 참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모술 지역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서장이 저항세력의 공격 직후, 아르빌로 도망쳤다가 미군에 의해서 잡힌 것만 보아도 두 도시간의 접근성은 한 눈에 드러나며 이는 저항세력의 이동경로를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이미 아르빌은 안전한 지역이 아니다. 주변 열강에 의해 억압받던 쿠르드족은 이라크를 연방으로 재구성하여 중앙정부로부터 광범위한 자치권을 확보하는 것을 핵심요구로 하고 있으나 미국은 시아파 지도자 알-시스타니의 요구로 총선 이후 제정될 헌법에 대한 쿠르드족의 거부권을 박탈시켰다. 더불어 과거 정권에 의한 아랍화 정책(특히 아랍인 이주정책)으로 쿠르드 자치지역 안에서의 갈등양상 까지 예상되는 바이다. 이것이 정부가 말하는 "안전한 지역"이라면 위험천만한 반어가 아닐 수 없다. 누가 노무현 대통령의 인간적 고뇌까지 받아 안으려 하는가! 파병 연장안을 "독자적 결정"이라며 되려 자랑스러운 어투로 이야기하는 대통령에게 인간적 고뇌 운운하는 것은 엄청난 사상자와 앞으로 일어날 참사에 대한 모독일 뿐이다. 반전평화운동, 파병연장동의안 저지투쟁에 나서자! 얼마 전 방한한 미국의 반전 활동가는 열화우라늄탄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참전 군인들의 조사, 통계 리포트를 발표했고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고엽제 후유증은 참전 군인들의 비극을 대변한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이 전쟁의 피해는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이라크 민중들은 물론이요, 전쟁 범죄국 정권의 강요된 선택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국민들에게까지 확대된다. 이 비참함을 중단시켜내기 위해 남한 민중들은 전 세계 민중들과 함께 전쟁종식과 파병반대 운동을 벌여왔다. 하지만 지난 8월, 자이툰 부대 본진 파병으로 반전운동은 한 번의 고비를 맞이했다. 그렇지만 반전투쟁이 끝나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비록 대규모 거리 집회는 잦아들었지만 이라크 철군, 파병반대 단식에서부터 자유로운 상상력의 평화유랑단 활동, '풀뿌리 운동'을 표방한 '부시 · 블레어 · 노무현 전범민중재판운동'까지 민중들 삶의 곳곳에서 '철군'과 '전쟁종식' 요구가 보이고 있다. 이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은 파병군을 철군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연장동의안을 통과시키려하고 있다. 민중의 삶 곳곳에서 보이는 '전쟁반대', '파병군 철군'의 요구는 더 크고, 강한 목소리와 투쟁으로 모아져야한다. 수많은 민중의 반대와 저항에도 불구하고 본회의에 상정될 파병연장 동의안을 막아내기 위해 싸우자. 이라크 민중을 고통에 몰아넣고 남한 민중을 전범으로 만들어놓고도 뻔뻔스럽게 '한-미 동맹'과 '평화재건'을 입에 담는 노무현 정권을 심판하자. 민중들이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심판의 의지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노무현 정권은 자신들이 한 짓을 언제까지나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닐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파병연장 동의안을 막아내는 것, 노무현을 전쟁범죄자로 심판하는 것, 바로 지금 우리가 전쟁을 끝장내고, 파병군을 철군시키기 위해 해야할 절박한 투쟁이다.
부시/블레어/노무현 전범민중재판운동 여성총회 토론제안문 "여성의 이름으로 전쟁을 반대한다!" -부시/블레어/노무현 전범민중재판운동 여성총회 토론제안문 1. "여성의 이름으로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의 의미 - 전쟁에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폭력 그리고 그 결과 여성이 처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폭력과 불평등의 문제 전쟁은 그 자체로 잔혹하고 끔직한 파괴 행위다. 물론 전쟁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더욱 잔혹하고 끔찍한데, 이것은 여성이 힘없는 약한 존재로서 피해자가 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전쟁에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이다. 이것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전쟁에서 활용되고, 강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폭력은 20세기 후반 들어서 벌어진 전쟁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냉전이 해체된 이후, 미국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군사적 개입의 층위를 구분하고, 이에 따라 세계적인 분쟁 및 전쟁 지역에 개입해왔다. 이 층위는 북한, 이라크, 이란과 같이 미국이 "악의 축"으로 규정한 국가에 대한 개입을 위해 고안된 중강도 전쟁이 한 축이고, 다른 한 축은 제3세계 지역의 민족해방투쟁, 게릴라 투쟁을 진압하기 위한 저강도 전쟁,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부터 배제된 아프리카, 동유럽과 같은 지역의 분쟁에 대한 의도적 방기로 나눠질 수 있다. 제3세계, 그리고 특히 배제된 지역에서는 미래를 위한 전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이에 따라 "무질서"는 증대한다. (같은 나라 안에서 가난한 지역을 저버리고 독립을 원하는 분리주의 움직임, 국가가 제 기능을 못하는 곳에서 발생하는 사적 집단의 무장화, 한정된 자원을 놓고 벌어지는 약탈전쟁에서 자행되는 민중학살, 남반구에서 빈곤의 심화와 불법이민 등으로 인한 빈곤의 역수입이 야기하는 문제들 등) 이에 따라 분쟁 혹은 전쟁이 일상화되는데, 이 때 전쟁의 목적은 '동일성의 정치'와 관련된다. 이는 어떤 특정한 인종적, 종족적, 종교적, 문화적 동일성을 최우선의 원칙으로 정치공동체를 형성하려는 기획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의 동일성을 추구하려는 기획은 종종 다른 동일성에 대한 배척으로 드러나고 이는 쉽게 폭력으로 전화된다는 점이다. 이런 동일성의 정치는 종종 여성에 대한 폭력, 억압과 결부되어 나타난다. 남성적 동일성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는 남성지배적인 사회에서 여성적 동일성은 억압, 은폐되어왔고 여성은 남성, 그리고 그 민족, 종족 공동체의 소유물로 인식된다. 다른 동일성을 배척하고 제거하는데 있어서 남성과 공동체의 소유물인 여성을 파괴하는 것은 손쉽게 채택되는 전략이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위기와 이를 지연시키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진행에 따라 증대하는 "세계적 무질서"라는 상황은 여성에 대한 구조적, 체계적 폭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1> 전시강간, 강제임신, 강간, 성폭력 등과 같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폭력 전쟁에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폭력은 가장 직접적이고 보편적인 형태의 폭력이다. 이 중에서도 전시강간과 같은 형태의 폭력은 고대시대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전시강간은 남성의 소유물에 대한 침해이고, 적의 공동체를 파괴·절멸시키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더불어 남성 병사들의 응집력을 강화시키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동일성을 위한 폭력이 더욱 심화되면서 전시강간, 집단강간과 같은 폭력은 더욱 체계적으로 활용된다. 다른 인종의 절멸을 추구하는 전쟁에서 인종청소를 위한 수단으로 집단강간이 활용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 있었던 강간캠프를 들 수 있다. 당시 보스니아 정부 추산 5만여 명에 이르는 무슬림 여성들이 세르비아 군에 의해 집단강간을 당했다. 이슬람교는 혼전 성관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무슬림 여성에게 강간은 상징적인 죽음의 의미를 갖는 폭력이다. 이런 방식의 공격이 의도하는 바는 그 여성들의 동일성과 그 사회의 동일성을 조직하는 방식을 해체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는 무슬림 남성의 소유물을 탈취하는 의미도 갖는다. 인종청소를 위한 집단강간은 강제임신을 목표로 하기도 하는데, 강간에 의해 임신하게 된 여성은 낙태를 할 수 없다. 여성들로 하여금 원치 않는 '세르비아' 아이를 출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적의 동일성을 파괴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여성에 대한 물리적, 육체적 폭력은 1990년대 이후 널리 확산되고 있다. 강간은 가장 직접적이고, 상징적인 폭력으로 활용된다. 민간인에게 공포와 모욕을 안겨주는 전술로서 성적인 공격이 조직적으로 사용된다. 르완다의 인종학살, 아이티에서 저항세력에 대한 군부의 억압 등에서도 강간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1999년 코소보 내전에서도, 보스니아 내전의 경우보다 덜 체계적이긴 했지만, 세르비아군의 인종청소는 강간을 무기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모잠비크, 라이베리아, 시에라 레온, 브루나이, 우간다, 알제리, 인도네시아, 카슈미르, 미얀마 등에서도 유사한 사례들이 나타난다. 이라크 전쟁에서 벌어진 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은 아직까지 잘 알려지고 있지 않다. 여성이 당한 성적인 폭력을 외부로 알리기 꺼려하는 문화적인 특성이 많은 사례를 은폐하게 만들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가장 알려진 것은 아부 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자행된 성폭력일 것이다. AFP 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미 시사주간지인 <타임>은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 수감된 적이 있는 이라크 포로들의 말을 인용해 "이들 포로들은 상습적으로 구타와 성고문, 강간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이들 중 한 명은 "한 미군 병사는 이라크 여성 포로를 내 감방 건너편 바닥에서 주기적으로 강간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많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러한 증언은 이라크 전쟁에서도 여성에 대한 물리적, 육체적 폭력이 점령군에 의해 자행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아부 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사건이 미군 상부가 알고 있었고, 명령했던 체계적인 군사작전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미군 상부는 결국 인정하지 않았지만, 청문회를 열고, 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일련의 미국 정부의 사태 봉합을 위한 노력을 감안한다면, 군사전략으로 인정하던 그렇지 않던 이 사건이 가진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즉, 이라크 여성에 대한 강간은 미군에 대한 이라크 인들의 공포를 조장하여 점령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이라크 민중과 그들의 저항을 억압하고 무력화시키는 기제로 충분히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적에 대한 상징적 지배로서 적의 여성화 전쟁에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은 단지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폭력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적을 여성으로 상징화하는 것이다. 이는 남성지배적인 사회에서 형성되고 구조화되어 온 남성성-여성성에 대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상징과 연관되어 있다. 남성성은 승자, 우월한 자, 지배자와 연결되고, 여성성은 패자, 열등한 자, 피지배자와 연결된다. 전쟁을 진행하면서 적을 여성으로 상징화한다는 것은 이러한 고착화된 상징과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전략이다. 이러한 전략 속에서 '여성의 상징'은 한 사회를 파괴하는 목표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남성의 공격성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전장에서 군인들의 전쟁충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강간의 상징, 성적인 상징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실제 전쟁에서 드러났던 구체적인 사례로는 남성 포로들은 처형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전리품으로 갖는 젠더화된 학살, 정복한 적을 거세하는 방식(이는 현대에서 미사일이 은유하는 팔루스 상징에 대한 경쟁으로 드러난다), 항문성교와 같은 방식의 동성 강간 등이 있다. 동성 강간에서 정복자는 지배적/능동적 위치를 차지하고, 피정복자는 종속적/수동적 위치를 차지하여, 섹스에서 전통적인 남성-여성간의 구분 이데올로기를 투영한다. 최근의 전쟁을 비롯하여 이라크 전쟁에서도 이러한 사례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걸프전 당시 미군이 사용한 폭탄에는 "Bend Over, Saddam(무릎을 굽히고 엉덩이를 들어올려라, 사담)"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아부 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는 이라크 남성 포로를 나체로 고문하거나, 성적으로 고문하는 사례들이 보도되었다. LA Times에서 보도한 "미군 교도소 성적 학대에 대한 보고서 발췌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행위들이 포함되어있다. - 강제적으로 포로들에게 다양한 성행위의 자세를 취하게 하고 사진을 찍음 - 동시에 여러 포로들의 옷을 벗겨 강제로 며칠 동안 옷을 벗은 상태로 있게 함. - 옷을 벗긴 남성 포로에게 강제로 여성의 속옷을 입게 함. - 여러 명의 남성 포로들에게 사진이나 비디오를 찍으며 강제로 자위를 하도록 함. - 머리에 모래주머니를 이게 하고, 손가락과 발가락, 성기에 전선을 감은 채 상자(식량상자)에 벌거벗은 포로를 올라서게 하고, 전기고문을 하는 것처럼 위협함. - 한 포로에게 15살의 동료 포로를 강제로 강간하게 한 뒤 그 포로의 다리 위에 "나는 강간범입니다"라고 글을 씀. - 남성 포로를 강간하겠다고 위협함. - 포로의 항문에 전구와 빗자루 손잡이를 쑤셔 넣음. 이러한 행위들은 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이기도 하고 더불어 남성 포로를 여성화함으로써 적을 무력화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문제는 이러한 '적의 여성화'가 계속해서 여성에 대한 지배구조와 억압을 공고히 한다는 점이다. 3> 구조적으로 더욱 강화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 전쟁 자체는 이미 여성을 비롯한 민중을 삶의 극단으로 몰아넣는다. 이 속에서 더욱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이는 여성이다. 우선 여성들은 자신의 직업, 요구, 생존보다 공동체의 생존을 책임지기 위해 언제든 사회로의 동원과 가정으로의 후퇴를 반복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궁핍한 공동체와 가정의 생계를 꾸려야하는 부담을 지게 된다. 전쟁이 파괴한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여되는 부담은 더욱 커진다. 실제 이라크 상황을 보면, 걸프전 이후 10년간의 경제 제재 조치가 이라크 여성들에게 가져다 준 억압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걸프전 이전에 석유산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성장에 따라 교육받고, 직업으로 진출했던 여성들은 경제가 어려워짐에 따라 모두 가정으로 철수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 봉쇄 상황 속에서 심화되는 빈곤은 여성의 책임을 늘렸다. 여성들은 가정에서 직접 모든 것을 만들어야 했으며, 단전·단수가 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에 그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성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면서 여성에게 억압적인 관습들이 부활했는데, 그 이전까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던 히잡(베일)이 다시 등장했다. 이는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종교'가 부활한 것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성매매가 증가했는데, 이는 빈곤을 책임져야 하는 여성들에 대한 이중의 폭력이지만, 이것은 또 다시 여성에 대한 반격의 구실이 되기도 했다. 가정폭력의 증가도 눈에 띄는 현상이라고 한다.{{) 참고자료: '경제 제재가 이라크에서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 The Impact of Economic Sanctions on Women in Iraq, Nadje Al-Ali, 2001. 출처: www.acttogether.org }}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의 상황이 이러하다면, 전쟁 발발 이후 지금까지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이 처하게 되는 현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파괴된 사회와 공동체에서 여성이 자식과 가족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짐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이런 사례는 거의 모든 전쟁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의 경험을 상기해보기만 해도 그렇다. 뿐만 아니라 지난 4월 이후부터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 여성을 흔히 볼 수 있다는 여러 목격자의 말이 보여주듯이, 생존의 끝에 몰린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또 다시 자신을 폭력으로 내모는 성매매다. 그러나 여성이 대면하게 되는 구조적 폭력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실제 전쟁에서 자행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을 공동체의 소유물로 인식하고, 그에 따라 여성에 대한 억압과 통제를 더욱 강화하는 구조를 낳는다. 단적인 예로 이라크 저항세력 중 이슬람 근본주의를 천명하는 그룹들은 이라크 여성들에게 수차례 경고했다.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 화장을 한 여성, 남성들과 함께 다니는 여성, 청바지를 입은 여성, 미용실에 가는 여성 등 이슬람 문화와 다른 문화적 행위를 하는 여성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공격과 살해를 자행할 것이라는 경고들이다. 심지어 지난 10월 20일에 팔루자에서 열린 무자헤딘의 회의에서는 무자헤딘 전사들이 열 살 정도의 소녀들을 미군이 강간하기 전에 먼저 강간하라는 율령이 발표되기도 했다. '명예 살인"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서 폭력의 희생자가 된 여성을 다시 억압하는 악습에 대한 보도도 찾아볼 수 있다. 전쟁을 통해 강화되는 여성 억압적 사회구조, 여성에 대한 폭력은 (미군의 입장에서 보면)탈취해야하고, 적을 무력화시키는데 활용해야 할 적의 소유물로서 여성이라는 인식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라크 저항세력의 입장에서도 지켜야할 아(我)의 소유물로서 여성에 대한 통제와 폭력, 억압이 정당화되어 여성은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점차 구조화되고 공고해져 사회의 구성원리가 될 것이다. 구조화되는 폭력과 억압 속에서 여성의 정치적인 권리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치권이 박탈되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2.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에서 여성이 주체가 된다는 것의 의미 "여성의 이름으로 전쟁을 반대한다."는 의미를 위와 같이 분석했을 때, 여성이 반전운동의 적극적인 주체가 되어야 함은 너무도 자명하다. 전쟁이 강화하는 여성에 대한 극단적 폭력은 단순히 전쟁 지역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여성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문화와 구조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전쟁이 자행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반대한다는 것은 폭력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전쟁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말과 연결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더욱 심화되고 있는 무질서는 미국의 세계 패권 하에서 진행되는 세계 질서 재편의 과정과 맞물린다. 배제되고 주변화된 지역에서 발생하는 분쟁과 전쟁은 점차 중심부 국가 내부로도 침투하고 있다. 이 과정이 동일성을 기반으로 한 폭력을 증대시킬 것이라는 점은 손쉽게 예상할 수 있다.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동일성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은 성적 차이에 입각한 지배/복종의 관계와 상징을 더욱 공고히 하고, 이는 여성을 끊임없는 폭력으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폭력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에 여성이 스스로 나서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전쟁을 중단시키는 과정이 여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폭력을 제거하는 과정을 동반하지 않았을 때, 그것이 과연 전쟁을 끝내는 과정일 수 있는가 혹은 전쟁이 중단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전쟁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전략적이고 조직적으로 활용된다면,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이 이 폭력을 중단시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매우 유의미하고, 유효한 것일 수 있다. 즉, 여성에 대한 폭력의 원인을 제거하는 투쟁이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한 투쟁을 더욱 활성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이를 위해 반전 운동은 여성의 목소리를 더욱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전쟁을 중단시키는 과정은 곧 전쟁 이후의 새로운 사회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진 전쟁 이후 새로운 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은 종종 여성이 당한 폭력과 상처를 억압하고, 은폐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재건 과정에서 여성은 민족의 어머니와 적에게 순결을 빼앗긴 창녀라는 이분법으로 구분되었다. 이는 전쟁이 강화한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 폭력의 구조를 오히려 새로운 사회의 구성 원리로 채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전쟁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에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이 가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를 가부장적, 남성지배적 인식 속에서 받아들인 맹목의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맹목은 여성이 반전운동에서 주체화되는 것을 가로막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계속해서 여성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구조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계속되는 악순환의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성들이 제기하는 '전쟁의 남성적 상징에 의해 강화되는 여성의 폭력과 빈곤의 증대'라는 목소리를 통해 반전운동의 인식을 전환하고, 새로운 사회 재건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시도, 여성을 하나의 당당한 주체, 시민으로 인정하려는 시도가 지속되어야 한다. PSSP 부시 · 블레어 · 노무현 전범민중재판운동 여성총회 선언문 2004년 12월 2일 부시·블레어·노무현 전범민중재판운동 여성총회에 참가했던 우리는 전쟁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이 구조적이고 체계적이며, 따라서 전쟁이 여성에 대한 억압을 강화·재생산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쟁은 여성에게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폭력을 가할 뿐만 아니라, 적을 상징적으로 여성화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사회구조를 재생산한다. 우리는 이라크 전쟁에서도 여성에 대한 폭력이 활용되고 강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부 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주기적으로 행해진 여성 포로에 대한 강간은 전쟁에서 볼 수 있는 여성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강간은 이라크 사회 전반에 공포를 심어주며, 이는 미군이 이라크 민중을 통제하고, 점령을 유지하는데 효과적인 방식으로 활용된다. 게다가 남성은 우월한 존재이고, 여성은 약하고 열등한 존재라는 뿌리 깊은 성차별 이데올로기와 상징에 의존하여 자행되는 적의 여성화 방식도 드러난다. 적의 남성을 여성과 동일시하고, 이들에 대한 강간 및 성적 고문의 상징을 활용하는 방식이 아부 그라이브 포로수용소뿐만 아니라, 이라크 전쟁에서 사용되는 미사일 등의 무기체계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폭력은 모두 여성을 한 사회의 구성원, 권리를 가진 주체로 인정하기보다는 남성과 민족, 공동체의 소유물로 인식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악순환을 만든다. 이라크 저항세력 중 이슬람 근본주의를 원리로 삼는 세력들은 이라크 여성들을 지켜야할 자신들의 소유물로 인식하며, 여성을 통제하고 나아가 폭력을 행사한다. 이라크 소녀들이 미군에 의해 강간당하기 전에 무자헤딘 전사들이 먼저 강간해야한다는 율령이 발표되었고, 남성들과 함께 다니거나 베일을 쓰지 않고 밖을 다니는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이 가해지고 있다. 우리는 이라크 전쟁이 미국의 군사패권 하에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유지하기 위한 민중 학살임을 알고 있다. 자신들의 통치성을 위해 민중의 삶을 무참히 빼앗는 전쟁은 당장에 중단되어야 한다. 더불어 이렇게 민중을 짓밟는 전쟁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활용되고, 강화된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하기에 우리는 이러한 전쟁범죄를 자행한 부시·블레어·노무현을 전범으로 기소한다. 더불어 이라크에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당장 중단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바이다. 미군을 비롯한 점령군에 의해서 자행되는 폭력과 저항세력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은 모두 이라크 여성의 정치적 권리와 삶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하는 행위이다. 이라크 여성 또한 전쟁을 반대하고, 그 이후 새롭게 건설될 이라크 사회에서 자신의 파괴된 권리를 회복할 수 있는 주체로 인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전쟁을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전쟁으로 인해 체계적으로 활용되고 강화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끝내는 일은 전쟁을 끝내는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전쟁을 끝낸다는 것은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이 가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전쟁을 끝내고 새로운 사회를 재건하는 출발점이다. 우리는 미군의 이라크 점령을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우리는 여성의 이름으로 전쟁을 반대할 것이다. 우리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강화하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행동할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 전쟁에서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고 있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전세계에 드러내고, 이를 통해 우리의 반전운동이 가져나가야 할 새로운 인식의 지점을 밝혀낼 것이다.
2004년 미국에 던져진 질문 미국 헤게모니의 몰락과 '제국' 기획의 불가능성 최예륜(정책부장) 부시의 재선으로 마무리된 2004년 미 대선 직후, 미군은 이라크 저항세력 소탕을 목적으로 한다는 대대적인 팔루자 공습을 자행했다. 부시는 11월 10일 연설을 통해 "일부 소수 그룹이 이라크의 민주화를 좌절시켜 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다"며 "이같은 민주주의의 적에 대처하기 위해 미군은 향후 수주간에 걸쳐 공세를 계속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9.11테러 이후 감행된 이라크 전쟁과 공세적 세계군사재편 전략이라는 미국의 일방적 대외정책이 대선을 통해 미국 국민들에게 심지어는 전세계 인민들에게 승인되었다는 식의 태도다. 그러나 무차별폭격 수준의 팔루자 학살 이후, 이라크 내 반미여론은 더욱 고조되고 미군이 창설한 이라크군 4개 대대 중 일부가 미군의 공격지원명령을 거부하는 등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대한 저항이 쏟아지는 가운데, 부시는 동맹국의 협박을 호소하는 등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2004년 미 대선은 베트남전쟁 중이던 1968년 닉슨의 재선 이래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는 점, 그리고 2000년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나 총득표수 논란과 같은 사태가 불거지지 않은 깔끔한 승리와 승복의 과정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부시의 완벽한 승리로 평가된다. 나아가 미국사회의 보수화의 지표, 부시체제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강력한 지지도가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는 미국 정치체제가 갖는 근원적 한계가 극대화되는 가운데 민주주의 상징으로서의 미국의 헤게모니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징후가 드러난다. 한계에 봉착한 미국 정치 체제의 '민주성' 미국 대선의 선거인단 제도는 미국이 연방국가이며 각 주의 의견을 하나로 모아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연방헌법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이 선거인단 제도로 인해 전체 득표율이 선거결과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선거인단 독식제로 민주당, 공화당 이외의 제3세력의 등장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보수성이 유지가능해진다. 이러한 선거제도는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제어하는 가운데 강력한 양당체제를 뒷받침해왔다. 미국적 정치원리의 내부 긴장은 자유주의와 그것을 방어하는 외피로서의 보수주의적 성향{{) 미국의 정치적 변화란 공화주의적 덕성관념과 지유주의적 사익관념의 대립을 현상으로 하면서 주기적으로 개혁의 이념을 형성하였다. 이는 자유주의자, 흑인, 북부 노동자, 소수 인종집단 등의 민주당의 지지연합이 형성되었던 과정, 기본적 자유주의적 전망 하에서 복음주의적 종교집단 등이 주도적으로 도덕적 이슈를 대중화하여 1980년 레이건의 집권으로 결실을 맺은 보수주의 혁명의 과정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정치체제는 미국 건국의 정신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아가서는 구래의 정신으로의 회귀를 지향하는 한계 내에서 지속되어왔다. }} 간의 대립으로 유지되어왔다. 1933년-1945년 민주당 루즈벨트의 4선 기간동안 확립되고 미국 사회의 '새로운 다수'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뉴딜연합은 80년대 '스태그플레이션'과 경제불황이라는 조건 속에서 지속불가능해였다. 이는 이후의 레이건의 보수주의 혁명과 네오콘의 등장을 뒷받침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내부의 보수화와 급진화 사이의 경합을 1992년 중도보수를 표방한 클린턴의 등장으로 일단락된다.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클린턴의 등장은 여성, 소수 인종집단, 북부 노동자 등 이질적인 집단들의 연합이라는 위상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한편, 자유민주주의의 선봉장으로서의 미국의 지위가 더 이상 불가능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냉전의 해소는 평화,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미국 대외정책의 외피를 벗겨내고 다자주의적 개입의 틀(UN과 국제법)을 초과하는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을 초래하였다. 2000년 플로리다 재검표 사태는 분명한 선거조작과 플로리다의 수백 표가 미국 대통령이 될 사람을 결정했다는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후보자가 패배를 승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플로리다의 상당수의 흑인남성을 범죄자로 낙인찍어 공민권의 박탈을 초래한 '범죄와의 전쟁'은 분명 레이건-부시/클린턴-고어의 합작품이었다. 투표자의 다수가 모든 선거인단을 독식하는 선거제도는 미국 자유주의의 몰락을 '도덕적 가치'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결집으로 은폐하는 미국식 정치체제의 '민주성'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공민의 지위로부터 추방되거나 이탈하는 다양한 세력에 대해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복지의 종식을 뜻하는 '일하는 복지'와 보편성을 상실한 자유주의의 앙상함은 이러한 미국정치의 '민주성'에 대한 환멸을 안고 이탈하는 세력들을 더 이상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조직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9.11 이후 군사개입의 확대로 재정적자가 심화되는 가운데 미국인 2억 9천만명 중 4천 5백만이 의료보험으로부터 소외되고 8백만 이상이 실업상태라는 조건이 대선에서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민주당이 내건 의료보호확대와 재정적자 해소 등이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미국사회의 보수화의 지표라거나 전시에는 대통령이 바뀌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는 정치적, 법적 평등을 자유의 동반자로 인식하면서도 경제적, 결과적 평등은 자유와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모순된 미국 자유주의에 대한 인민들의 회의와 환멸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비교적) 높은 투표율에도 불구하고 이미 미국 시민의 상당수는 이러한 미국 정치체제로부터 등돌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업에 대한 감세정책, 동성애자 결혼반대, 사형제도 찬성, 낙태 불법화 등이 '도덕적 가치'로 인식되는 여론조사기관들의 분류법은 더 이상 미국 정치에 민중적 의제와 쟁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유주의의 몰락이 보수주의자의 결집으로 은폐되는 상황이란 다시 말해 미국 지배계급의 대중의 정치의식에 대한 통제력 상실의 상황이다. 체제의 위기상황은 전쟁과 종교의 상호방어라는 방식을 통해서만 관리될 수 있을 따름이다. 대중의 정치적 참여와 직접적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했던 연방헌법의 이념이 자유주의의 위기 상황과 맞물려 대중에 대한 통제력 상실을 초래하는 상황을 자초하였다. 이는 '도덕적 가치'로 표상되는 쟁점들을 동원하는 것 말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며, 케리의 깨끗한 승복이란 이러한 미국 지배계급이 처한 현실을 반영한다. 9.11 - 보편적 자유민주주의의 전파에서 요새 아메리카 수호로 9.11은 미국적 자유민주주의를 보편으로 인식하는 특수한 소명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다. 냉전시대에도 관리 가능했던 전세계 도처에서의 미 패권에 대한 비판과 반전, 반미의 기운은 이제 예측불허의 테러가능성으로 가시화되었다. 부시와 신보주주의자들에 의해 천명된 팍스 아메리카나는 자본주의의 영원한 승리를 보장하는 행복한 제국의 기획으로서가 아니라 그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따라서 항존하는 '테러'위협으로부터 강력한 보호망을 형성하는 요새 아메리카를 상징한다.{{) 부시는 미국은 냉전 시대의 '억지와 봉쇄' 정책은 21세기의 새로운 위헙을 대처하는 데 적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억지'는 방어할 국가나 국민이 없는 그림자 같은 테러리스트 조직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봉쇄'는 대량살상무기를 미사일에 탑재해 공격하거나 테러리스트들에게 비밀리에 제공하는 독재자들을 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일방주의를 전제로 예방전쟁 차원에서 미국의 국익을 위협하는 잠재적 적국을 선제공격한다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 기관지2002년6월호) 2002.9.17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는 '선제공격'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국경에 닿기 전에 위협을 식별하고 파괴함으로써 미국과 미국 국민, 국내외에서 이익을 지킬 것이며, 이를 위해 국제사회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지만 필요한 경우 선제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우리의 자위권을 행사하기 위해 일방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공격은 최선의 방어이다. }} 자본과 국방의 심장부에 가해진 예측불허의 테러는 '우월성과 모범성'을 가진 구원자로서의 나라, 타락한 구대륙과도 전혀 다르고 미개한 나라에 대해서는 인도자가 되어야 할 대단히 '예외적'인 나라라는 미국적 경험과 체제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에 대한 도전이었다.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의 특수성과 도덕적 우월성 뿐 아니라, 선을 보존 혹은 확장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이는 마치 오컴의 면도날{{)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 "Entia non sunt multiplicanda sine necessitate"(존재자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된다.) "Pluralitas non est ponenda sine necessitate"(불필요하게 다수가 설정되어서는 안된다) "Frustra fit per plura quod potest fieri per pauciora"(소수를 가정하여 설명될 수 있는 것을 다수로 가정하여 설명하는 것은 헛되다.) 이상의 세가지 명제로 요약되는 오컴의 이론은 합리적 이성을 표방하는 서구적 세계관의 근저를 이루며, 적과 나를 이분화하는 미국적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처럼 전세계를 정확히 이분화하거나 지구상에서 미합중국만을 오려낸 자신과 타자에 대한 이분법적 개념을 포함한다.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골자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 혹은 개발하고 있는 잠재적 적국에 대한 선제공격을 통해 적국의 전체주의적 정권을 붕괴시키고 미국적 가치를 존중하는 민주정권을 수립해, 주변국가 혹은 잠재적 적국을 민주화한다는 것이다. 신보주주의자의 관념(idea)의 힘이자 이미 공화/민주당 내 흡수된 이러한 입장은 강력한 대외정책의 근간을 이룬다. 부시의 재선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수행한 이라크 전을 비롯, 결정된 대외정책을 시행함에 있어 그 목적을 철저히 추구하는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도덕적 절대주의의 승리를 의미한다. 미국인이 선택한 '도덕적 가치'란 이러한 소명의식과 미국적 특수성에 도전하는 세력들에 대한 화답이며, 4130억 달러라는 엄청난 재정적자와 취약한 경제구조를 안고 있는 미국의 채권의 7000억 달러 이상을 사들이는 각국 중앙은행에 대한 미국적 보답인 셈이다. 한편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을 지지하고 북한, 이란, 시리아 등 불량국가에 대한 개입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케리의 패배는 자유주의의 몰락을 저지하고 미국 헤게모니를 유지, 강화하는 데 다양한 이익집단(과거의 '새로운 다수'로 표현된 소수인종, 환경, 여성, 동성애 등등의 이슈)의 이해는 포괄될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는 1980년대 선거 이래 공화당과 보수주의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신보수주의자들의 '제국'적 기획의 판정승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세계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민족국가로서의 미국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제국의 신민들에 의한 보편성의 승인은 이제 미국의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라는 한 국가의 자국적 이해를 보호하는 것, 미국이라는 민족국가의 요새를 수호해내는 것이 미국 그리고 동맹국의 목표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수호하기 위한 전 세계 국가들의 과제는 FTA 등의 도입을 통한 관세철폐로 미국 대외무역적자를 감축하고 미국 경제를 회복하는 데 동참하는 것, 미국을 핵심 타겟으로 하는 테러 위협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을 지지엄호하고 미국의 이분법에 따라 '우리편'의 수를 늘려 단결하는 것 등이 된다. 한편 이 보호해야 할 요새에는 미국 부의 40%를 소유한 상위 1% 그룹이 존재하며 더불어 전세계 지배엘리트들이 결집하고 있다. 세계경제를 지탱하는 이 요새에 대한 저항과 공격은 물론 모두 테러로 간주된다. 이 요새 수호전략은 테러가능성을 지닌 불량국가들이라는 위협요인을 제거하고 예방전쟁을 항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을 전파하는 합의적 미국정치체제가 복원되는 길은 요원하며 세계는 동맹국의 암묵적 합의(다자간 틀로 협의한 바 없다 하여도)를 기반으로 한 더욱 야만적인 미국의 폭력에 노출될 것이다. 미국의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다. 전면적인 반전반세계화 투쟁을 조직하자.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금융적 팽창이 새로운 헤게모니 출현의 전조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이 미국의 헤게모니가 쉽게 지속된다거나 미국의 '제국'으로의 전환이 무난히 이루어질 전망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미국은 절대적 군사력 우위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적인 개입을 펼치기에는 군사력과 재정적 여력이 충분치 않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자주의적 틀을 강조하는 케리의 주장은 물론 설득력이 전혀 없다. 미국은 이라크라는 미궁에서 저항군에게 깨져나가며 친미정부 수립과정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 미국에 대한 이라크와 전세계의 분노가 폭발하고 있으며 요새 아메리카를 수호하는 전쟁에 대한 부담으로 동맹국들의 불만과 이탈은 가속화되고 있다.{{) 이라크 전을 수행하기 위한 연합군 운영의 과정에서 미국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각 국의 군대를 말그대로 갖다 쓰고 있다. }} 이러한 상황은 다자주의적 틀을 유지하면서도 일방적으로 군사개입을 상시화 해왔던 이전의 미국의 역사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임의적 자위권 발동이라는 선제공격 전략을 포기하지 않는 한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루 15억 달러씩 늘어나는 경상수지 적자로 표현되는 미국 경제의 취약성은 미국이 헤게모니 국가로서 지게 되는 정치적, 사회적 비용부담의 증가를 의미한다. 이는 유동성과 규제철폐 경향 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미국으로 집중되는 금융분파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난점이다. 국방비는 점점 늘어날 것이며 반대로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사회보장비용의 지속적 삭감이 요구될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기업 감세정책과 의료보호 축소가 '도덕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 대외정책과 맞바뀌어진 점은 그러한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초국적 기업을 통한 세계시장의 장악과 이를 통한 세계적 부의 집중으로 문제를 헤게모니를 유지해왔던 미국이 이와 관련해 내놓을 수 있는 계획은 많지 않다. 더욱 더 파괴적이고 반민중적인 시장개방 압력과 각종 FTA체결을 가속화하는 한편 각종 사회보장기금의 민영화와 사회보장비용의 감소정책을 지속할 것이다. 이는 물론 미국 내에서의 노동자, 빈민들의 저항과 전 세계 개도국 정부 혹은 민중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에게는 한층 가열차고 더욱 폭넓은 연대를 구축하는 반전반세계화 투쟁이 요구된다. 지금 우리에게는 왜 부시의 재선을 막지 못했을까라는 평가보다는 2004 미 대선을 통해 드러나는 미국의 몰락과 야만의 징후를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미국 내에서 공민의 지위(선거권을 비롯하여 제반 사회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미국 시민들의 불만과 미국 내 사회운동의 반전을 비롯한 투쟁의 과제는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오늘날의 반미란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보다 냉철한 비판과 폭넓은 저항의 조직화라는 과제를 일컫는다. 오늘날의 미 대선을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지금, 반전반세계화를 중심으로 한 모든 사회운동의 쟁점들의 연대를 통해 저항의 세계화를 이루어야 할 의무가 요구되고 있다. PSSP
2005년 <사회화와노동>의 기치를 밝히며 오늘의 세계화는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며 새로운 제국주의다. 극단적인 착취와 강탈, 전쟁의 폭력,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은 세계 민중에게 유례가 없는 도전이다. 이에 저항하는 세계의 사회운동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지배세력의 온정주의나 보수적■퇴행적 ‘반세계화’를 넘어서 ‘대안세계화’의 이름으로 이념과 운동을 발견하고 있다. 인민의 권리의 자율적 실현, 사회적■경제적 변혁, 사회운동과 공동체 간 교통과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지배세력의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미망과 새로운 파퓰리즘적인 정치행태 속에서 심각한 동요를 경험하고 있으며, 동시에 ‘대안세계화’ 운동의 전진적인 요소들을 실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에 사회진보연대는 한국 사회운동의 긴급한 과제와 앞으로 <사회화와 노동>이 주목하고자 하는 바를 이 지면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 미국 경제의 위기와 이와 날카롭게 대비되는 미국 군사력의 압도적인 우위는 세계 인민들에게 진정한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국은 해외직접투자와 포트폴리오투자를 통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로 엄청난 양의 소득을 빨아들였다. 미국의 부유계급은 미국 내 신자유주의 개혁의 흥청거림 속에서 풍요한 소비를 향유했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저축률의 감소, 경상수지 적자로 외채증가, 외국으로의 거대한 소득유출, 국내 자본소득의 감소라는 악순환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은 달러화 약세라는 궤도로 돌아섰고, '글로벌한 정책협조'라는 미명으로 그 부담을 타국에게 분산시키려 하고 있다. 미국 경제가 짧은 시간 내에 대파국을 맞으리라 예상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경향이 장기적으로 미국의 금융적 지배와 제국주의 권력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모순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편, 미국은 이라크를 군사력으로 강점한 후 신속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위한 발걸음을 걷고 있다. 2004년 말 19개 나라로 구성된 ‘파리클럽’(주요채권국회의)은 이라크의 1200억 달러에 이르는 외채 가운데 파리클럽에 지고 있는 400억 달러 중 80%에 대한 부채탕감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초기 30%를 탕감한 후에는 IMF 프로그램이 승인된 후 30%를 탕감하고 마지막은 20%는 IMF 조사위원회가 프로그램의 이행 여부를 판단하여 탕감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점이다. 이라크 인민의 시각에서 볼 때, 전쟁을 감행한 당사자들에게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전제 자체가 증오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아가 앞으로 진행될 IMF 프로그램은 이라크 인민의 민주적 결정 과정을 배제한 철저한 중심부 국가의 이익을 위한 개혁이 될 터이므로 심각한 저항을 야기할 수 있다. 이미 정통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이라크 임시정부가 이를 감당한 능력을 과연 조금이라도 보여줄 수 있을까? 미국이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과 점령은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한 사회를 한순간에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은 지녔지만 그것을 재건할 수 있는 정치적■경제적 능력은 결핍되어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부시의 대통령 재선은 도덕심, 애국주의 등 어떤 치장을 하더라도 미국 사회가 종교적 이데올로기나 전쟁의 폭력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야말로 미국 스스로가 주도한 금융세계화의 부메랑 효과에 대한 퇴행적, 반동적 대응의 한 측면이다. 이는 오늘의 자본주의 세계가 착취와 강탈, 이데올로기적 맹신과 전쟁의 폭력이라는 첨예한 국면으로 이미 진입하였을 보여준다.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는 세계화의 새로운 국면이자 ‘새로운 제국주의’라고 부를 만하다. 세계 민중에게는 유례가 없는 도전이자 투쟁의 대상이다. 세계화에 대한 불만들 오늘의 세계 자본주의의는 18-19세기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의 ‘원시적 축적’ 과정과 비견할 만하다. 마르크스는 ‘원시적 축적’을 광범위하게 관찰했다. 토지의 상품화와 사유화, 농민 인구의 강제적인 구축, 다양한 형태의 소유권(공공소유, 집단소유, 국가소유)의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으로 전환, 공공의 권리의 억압, 노동력의 상품화와 생산과 소비의 대안적■ 토착적 형태의 억압, 자연자원을 포함하는 자산의 식민지적■신식민지적■제국주의적 영유과정, 교환과 납세의 화폐화(특히 토지), 노예무역, 고리대금■국채■신용체계 등등. 마르크스가 언급한 이러한 특징들은 현재에도 강력하게 남아 있으며, 어떤 것은 과거보다 더 강력한 역할을 한다. 신용체계와 금융자본은 약탈, 사기, 도둑질의 중요한 수단이다. 주식부양, 인플레이션을 통한 구조적인 자산파괴, 인수합병을 통한 자산약탈, 한 나라의 모든 인민을 부채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채무부담의 증대, 신용과 주식 조작을 통한 기업의 사기와 자산 강탈(연금 기금의 유용과 주식과 기업의 붕괴를 통한 대규모 피해) 등등. 또한 강탈에 의한 축적은 완전히 새로운 메커니즘이 열고 있다. WTO 협상에서 지적소유권에 대한 협상(TRIPS 협정)의 강조는 중요한 사례다. 지적재산권은 지배세력이 주장하는 자유무역의 유용성, 즉 지식과 기술, 사상의 자유로운 교통이라는 이념이 무색한 대표적인 보호무역의 사례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유전물질의 세계저장량에 대한 약탈이 소수의 거대 초민족기업의 이득을 위해 진행 중이다. 세계의 환경 공유물(토지, 대기, 물)의 점증하는 고갈과 생물서식지의 하락은 자연의 대대적인 상품화의 결과며 자본집약적 농업생산 양식을 제외한 모든 농업을 제약한다. 문화적 형태, 역사, 지적 활동의 상품화는 대대적인 강탈을 동반한다. 이러한 강탈의 과정은 세계화에 대한 불만들을 누적시키고 있으며, 광범위한 저항을 야기하고 있다. 반세계화인가, 대안세계화인가? 그러나 세계화에 대항하는 운동은 다양한 경향들을 포함하고 있다. 1999년 미국 시애틀 WTO 각료회담 반대투쟁은 그러한 요소들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예컨대 당시 미국노총이 보여준 입장은 중요한 사례다. 그들이 시애틀투쟁에 참가한 중요한 동기의 하나는 중국의 WTO 가입 반대였다. ‘중국의 가입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제공을 통해 중국의 엘리트들이 대중을 억압하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담론은 사실상 국수주의■보호무역주의, 그리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것이었다. 금융세계화가 동반하는 생산과 고용의 파괴라는 현실의 원인을 외부의 국가 또는 인민에게 돌리는 매우 위험스러운 주장이다. 또한 외부의 국가 또는 인민을 적으로 삼는 이데올로기는 곧바로 내부의 적 - 이주자, 여성, 실업자 등등 - 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국민 중에 기생충이 있다”는 대처의 발언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미국말고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의 범죄화를 주장하는 극우세력에게도 ‘반세계화’는 중심 구호가 되고 있다. 나아가 시민권의 '민족 우선‘ 원칙을 세운 유럽연합은 배타적인 권리부여를 체계화한다. 세계화가 낳은 혼돈으로부터 또는 ’미국화‘의 물결로부터 자기 민족에게 고유한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반세계화‘의 논리는 이처럼 보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도 이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세계화에 대한 불만이 보수주의로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화 반대’의 코포라티즘 경향도 분명히 존재한다 (민족경제의 재건, 국유화나 ‘투자의 사회화’를 통한 산업의 균형발전, 노동자 전체의 고용증진과 복지개선 등등).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금융세계화의 현실에서 이미 ‘미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배세력 중 일부는 이러한 경향을 대중조작을 위한 간판으로 간혹 활용하기도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이후 먼 훗날의 신기루로 한없이 지연된다. 대안세계화: 세계 민중운동의 저항의 전진적 요소들 이처럼 ‘반세계화’이라는 명칭이 우리의 운동을 지칭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점차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세계농민운동조직인 비아캄페시나(소농의 길)는 ‘투쟁을 세계화하자, 희망을 세계화하자’는 구호를 내걸었다. 민족적■인종적 분할, 성적 억압과 배제라는 현실의 조건을 지양하는 보편적인 이념과 그에 적합한 운동을 건설하는 것만이 능동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사회운동의 흐름에서 어떤 전진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계발해야 하는가? 첫째, 인민들의 권리의 자율적인 실현이라는 원칙을 발전시켜야 한다. 세계경제기구나 글로벌 NGO가 내세우는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라는 미망이나 ‘반세계화’ 운동의 보수적, 퇴행적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서 대안세계화 운동은 모든 인민들의 권리의 목록을 재작성하려는 노력을 펼치고 있다. 세계화의 고통 속에서 인민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요소를 제거하고 상호확장적인 권리를 발견하며, 또한 인민들의 자율적인 운동을 통해 쟁취하고자 하는 원칙이다. 둘째, 금융세계화의 현실에 공통으로 대응하기 위한 사회적■경제적 전화의 전략과 요구를 계발해야 한다. 예컨대 세계 자본주의 주변부와 신흥공업국을 휩쓴 외채위기를 겪으며, ‘국제금융■무역기구’ 반대(또는 전화), 제3세계 외채탕감, 금융거래과세를 통한 자본통제 등의 요구를 제시했다. 현재 세계사회운동의 가장 활동적인 세력의 하나인 농민운동은 식량주권(단순한 민족적 식량자급이 아닌 토지, 생명종과 유전자원, 농업지식에 대한 농민의 권리), 토지개혁과 대안적 농업모델을 두고 활발한 모색과 투쟁을 펼치고 있다. 거대한 사유화■상품화의 물결 속에서 지식에 대한 소유권과 자연 공유물에 대한 소유권에 반대하는 투쟁도 성장하고 있다. 세계화가 낳은 여성의 빈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는 여성운동의 모색과 투쟁도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기된 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세계화는 복합적인 현실의 변화를 낳고 있으며, 대안세계화 운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몇몇 제한적 요구의 제기로 단순화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금융세계화에 조응하기 위해 화폐통합을 매개로 신자유주의 경제통합을 단행하고 유럽헌법을 제정하고자 하는 유럽연합의 현실은 이 문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참조점이다. 현재 유럽연합의 건설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긴급한 과제로 떠오르게 한다. 예컨대 유럽의 입법■사법■행정기구의 민주화 (특히 유럽연합의 사법체계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율화되면서 전횡을 휘두르게 된다), 사회적 노동의 재조직화(‘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이라는 목표의 갱신), 국경의 민주화 (인민들의 순환과 거주의 보편적 권리), 교육의 일반화 (특히 획일적인 민족적 교육체계에 의해 억압되는 익명의 이주자들 사이에서) 등등. 이는 세계화가 억압하는 인권■시민권의 재건을 위해 필수적인 과제이자 사회의 변혁을 위한 출발점일 수 있다. 대안세계화 운동은 세계적■지역적 시민권(노동권, 여성권)의 재건을 위한 경로들을 발견해야 한다. 셋째, 사회운동은 (앞서의 목표를 위해서도) 역사적으로 지리적으로 분리된 민족 또는 공동체 간 교통과 연대를 추구해야 한다. 특히 ‘문명의 충돌’이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갈등과 전쟁을 불변으로 간주하거나 이를 진압■순치하는 게 ‘성스러운’ 임무라고 주장하는 세력과 대결하는 게 긴급한 과제다. 오늘 세계에서 전쟁과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발호는 세계화가 낳은 가장 극단적인 결과이자 인민운동의 진정한 무능력을 표현한다. 현재 움터나고 있는 반전운동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감행되는 ‘인도주의’ 전쟁이나 침략전쟁을 거부하며, 전쟁과 폭력의 전장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사회운동들간의 연대를 추구하고 있다. 전쟁이 벌어지는 곳은 곧 저발전 지역이며 곧 퇴행적인 사회이며, ‘인도주의’ 개입을 통한 민주주의의 이식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서구 제국주의가 제공하는 시각을 거부하고, 인민운동 차원의 교통과 연대의 틀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대안세계화와 한국의 사회운동 한국의 사회운동은 ‘반세계화’를 넘어서 ‘대안세계화’라는 이름을 찾고 있는가? 한국의 사회운동은 노무현정권의 파퓰리즘이라는 조건 위에 있다. 노무현정권은 김대중정권의 노선을 보완하며 신자유주의 개혁을 신속하게 강도 높게 추진하기 위해 새로운 파퓰리즘적인 정치행태를 창출하고 있다. 행정부 권력의 비대화, 미디어의 적극적인 활용, 대통령 개인에 대한 대중적 지지나 지역주의(실리주의)적 동원 등의 정치행태는 민중운동의 저항을 무력화하는 전형적인 방식이 되고 있다. 또한 정권과 NGO와 결탁은 위기의 순간마다 민중의 단결을 교란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게다가 노무현정권의 파퓰리즘은 기본적으로 기존 노동자운동을 배제하는 (과거 남미의 페론주의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참여와 대화’라는 수사는 계속 허구적으로 활용된다). 이 과정에서 사법부와 같은 억압적 국가기구가 자율화되면서 민중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권력을 휘두르며 사회의 위기를 한층 강화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국가의 민주화’는 우회할 수 없는 과제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이 우선 ‘국가의 민주적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세계화의 승리자(수혜자)’라는 미망을 타파하며, 전쟁의 폭력이라는 위급성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사회화와 노동>은 다음과 같이 우리 운동의 공동의 과제를 인식하고 분석과 입장을 마련해나갈 것이다. 첫째, 대안세계화운동에 적합한 노동자운동의 개조. 현재 국제노동자운동은 형성 중인 대안세계화운동에서 가장 비활동적인 부문으로 남아 있다. 이는 국제자유노련 등으로 대표되는 국제노동자운동조직의 전통적인 ‘반공주의■코포라티즘’ 지향과 그 몰락의 유산이다 (북반구 노조운동의 쇠퇴, 로비중심의 활동 행태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에는 경제협력기구(OECD)나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하는 ‘괜찮은 노동‘(decent work)이라는 슬로건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금융세계화의 현실에 대한 진정한 맹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노무현정권이 기본적으로 노동자운동을 배제하는 파퓰리즘 형태를 창출함으로써, 현존 노동조합 운동이 큰 동요를 겪고 있다. 즉 노동조합은 최소한의 코포라티즘적 지향조차 포기하며 정권의 ’위기관리‘ 파트너가 될 것인가 동요한다. 한편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면 현재 민주노총 지도부의 지향을 ’사회적 합의주의‘라고 부르기에는 부적합한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최소한 ’사회적‘ 또는 ’코포라티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합의의 결과가 노동자대중의 포괄적인 부문들에게 그 결과가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현재의 지향은 노동자의 상층 일부의 현상유지를 목적으로 할 뿐이다. 한마디로 사회적 합의주의나 코포라티즘에 미달하나, 그것을 허구적으로 주장할 뿐이다. 예컨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라는 구상이 일부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으로 현실적으로 전환된 것은 코포라티즘에 미달하는 현재의 노조운동의 지향을 증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현재 ‘비정규직 철폐투쟁’도 갈림길에 있다. 비정규직권리보장 입법과 같은 ‘법제화’ 시도는 사회 전체에 걸친 ‘사회적 노동의 재조직화’ - 일례로 ‘모두에게 일자리를’이라는 구호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정도의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이나 여성의 가사노동과 같은 광범위한 사회적 활동의 사회적 인정. 또는 이와 전혀 다른 방식의 생산관계의 전진적인 변혁 - 가 동반되지 않으면 비정규직 철폐의 현실적 경로를 발견할 수 없다. 현재의 구조에 단순히 편입되는 게 불가능하다면 현재의 구조를 변혁하는 게 유일한 경로다. 방향의 전환이 시작되지 않는다면 실업■빈곤, 이주노동자의 권리의 문제를 동시에 사고할 길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의 양립. 지난 세기 노동자운동은 가족을 매개로 재생산의 부담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구조를 온존시켰다. 신자유주의 공세는 여성이 출산, 양육과 전반적인 가사노동을 책임져야 할 뿐만 아니라 생계비용을 보충하기 위해 이중적 노동을 해야만 하는 상태를 촉진했다. 이는 여성의 출혈적인 노동력 판매를 확대하고 그 결과 여성의 빈곤과 고통의 악순환이 성립했다. 여기서 남성 가장의 임금이 가족의 재생산을 담보한다는 ‘가족임금’은 하나의 맹목점이 되었고, 현실의 고통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여성운동과 노동자운동이 양립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빈곤 문제에 관한 전진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만 한다. 물론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한편, 전쟁을 동반하는 금융세계화는 여성이 경험하는 폭력적 현실을 더욱 증폭한다. 먼저 전쟁은 대부분의 전쟁이 증언하듯이 ‘성별화된 폭력’을 확대한다. 전쟁은 여성에 대한 잔혹한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상징적 폭력을 동반한다. 또 한편으로 금융세계화가 강요하는 여성의 빈곤은 성매매의 문제를 더욱 증폭한다. 전쟁과 성매매라는 여성에 대한 폭력의 문제에 직면해 여성의 권리의 견지에서 운동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셋째, 대안세계화 운동과 반전운동의 결합. 현재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침략전쟁만이 유일한 전쟁이 아니다. 현재 미국은 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중동과 같이 미국의 이해에 ‘사활적인 지역’에서는 기존의 군사동맹과 무기체계를 강화하면서 도발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거나, 콜롬비아나 베네주엘라에서 저강도전쟁(마약과의 전쟁, 정권의 전복)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외 배제된 지역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전쟁에 대해서는 어색하게 침묵하거나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미명으로 중심부로의 분쟁확대를 저지하는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 세계화로부터 배제된 지역은 과거 식민주의■제국주의■신식민주의의 역사를 거치며 인간생명과 자연자원의 착취, 외채를 통한 수탈을 겪었고, 구 식민권력이 이식한 부정한 토착정권의 이중수탈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는 황폐화되었고, 군벌들 간 약탈전쟁마저 만연하다. 이러한 사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세계의 배제된 지역에서 반전운동과 대안세계화운동이 결합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사회운동 차원의 교통과 연대가 확장되어야 한다. 세계자본주의의 주변부에서 전쟁과 빈곤은 극단적 폭력의 지대를 공고히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주목해야 한다. 또한 현재 한반도는 ‘신자유주의 경제통합’과 ‘절멸의 전쟁’의 위기에서 장기적인 미래를 내다보기 어려운 형편이다.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희망하는 한미동맹의 안정적인 분쟁관리인가 아니면 또 다른 급진화의 길인가를 두고 갈림길에 서 있는 시점이다. 역시 이 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복합적인 과제들이 존재한다. 대안세계화 운동에서 가장 활력 있는 부문으로 성장하고 있는 농민운동, 식량주권과 농업개혁에 관한 요구와 분리될 수 없는 생태운동, 현재의 실업/반실업■빈곤의 문제와 깊게 연루된 대중교육의 위기 등의 문제는 우리가 공동으로 풀어나가야 할 긴급한 과제다 <사회화와 노동>은 이와 같은 한국 사회운동의 중장기적 과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공동의 전망을 세워나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라크 총선 - 문제적인 미국 조직들이 이라크 선거 배후에서 작동한다 - 리사 애쉬케나즈 크로키 & 브라이언 도미닉, 뉴스탠다드, 2004. 12. 13 (Lisa Ashkenaz Croke and Brian Dominick; The New Standard; December 13, 2004) * 미국이 기금을 대는 조직들이 이라크 선거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를 파헤친 글입니다.
부안항쟁, 절대공동체와 사회적 주체성의 출현 고길섶 문화비평가 예고 없이 찾아 온 불청객 부안사태는 예고 없이 찾아온 불청객이었다. 2003년 2월부터 시작된 울진, 영덕, 영광, 고창(정부 후보부지 선정지역) 등지의 지역주민들의 핵폐기장 반대집회가 잠잠해지고 정부가 지자체의 자율유치 방안을 발표하자 5월 13일 부안군의 위도주민들이 군의회에 유치 청원을 함으로써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 부안읍내에서도 반대운동이 태동되었고, 7월부터 본격적으로 핵폐기장 반대 대규모 군민집회가 시작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공권력의 폭력진압에 의한 부안사태가 속출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부안 군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하였다. 대규모 궐기대회, 촛불집회, 상경투쟁, 해상시위, 서해안고속도로 점거, 등교거부 등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내소사에서의 군수 응징사태마저 발생하였다. 이후 정부와의 대화기구가 마련되면서 부안 군민들은 핵폐기장 부안 백지화 쟁취를 기대했으나 이마저 무산되어 마침내 11월 19일 민란사태로 번졌고 11월 20일에는 부안지역에 경찰계엄이 발동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부안 군민들은 오히려 좀 더 평화적인 방식으로 촛불집회를 중심으로 저항을 계속하였으며, 2월 14일에는 주민 독자적으로 주민투표를 실시하여 강력한 반대의사를 수치(72% 투표율에 92% 반대)로 정확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신규공모 절차를 준비하는 한편 부안군의 공식적인 주민투표를 통해 밀어붙이려 했으나, 정부가 2004년 9월 15일 마감으로 고시한 지자체장 예비신청이 단 한군데서도 접수되지 않아 결국 정부와 유치예비신청을 하는 지자체가 주도하는 주민투표 일정 자체가 무산되고 말았다. 한편, 부안 군민들은 2·14 주민투표 이후 투쟁동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고 더군다나 4·15 총선 때 반핵부안대책위가 정확히 대응을 하지 못함에 따라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그나마 투쟁동력이 이어진 것은 2·14 주민투표 이후 매주 갖는 촛불집회와 매일 아침마다 군청 앞에서의 군수퇴진 1인 시위, 그리고 그때그때 사안에 따라 연속된 ‘게릴라전’/‘국지전’ 등 때문이었다. 부안군민들은 정부의 주민투표 일정이 무산됨에 따라 부안의 백지화가 공식화되기를 기대하고 있으나 정부는 여전히 또 다른 전략과 일정을 꿈꾸고 있다. 11월 들어 부안에서 한국수력원자력이 철수하기 시작하고 감사원의 유치과정 감사계획이 보도되는 등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지만 모든 게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부안 군민들은 쓰라린 기억으로 11·20 경찰계엄 1년을 맞이했다. 투쟁의 역동성 부안의 핵폐기장 반대투쟁은 반핵투쟁이자 민주주의 투쟁으로 요약된다. 부안은 분명 한국수력원자력/한국전력이라는 거대독점 전력자본 및 전력권력과, 그리고 그에 동맹하는 군정독재 및 노무현 정권에 대항해왔다. 부안 주민들의 집단적 분노와 저항의 기원은 군수의 독단적 유치신청 행위에 있으며, 그 분노와 저항은 필연적으로 예고된 군수의 군정독재 및 국가권력의 국가폭력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투쟁으로 성장되었고, 투쟁의 ‘절대공동체’를 형성하면서 군정권력에 대응하는 ‘주민권력’이 생성되었다. 부안항쟁은 군대책위라는 조직화된 투쟁체를 통해 준비되었다. 하지만 부안 군민들은 이미 군대책위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화되면서 분노의 감정구조에 따른 자발적인 투쟁공동체로 연대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공권력과 맞서는 격렬한 투쟁양상들로 표현되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촛불집회를 통한 문화투쟁으로 결속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부안 주민들은 사회적 주체성으로 새롭게 출현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주체성은 주체형태로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하는 다중적 주체성이자 자본과 권력에 대항하는 민중적 주체성이라는 이중적 형태로 나타났고 그 내용으로는 ‘생명-민주효과’로 생산되는 주체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체성은 투쟁하는 절대공동체의 힘의 원천이 되었다. 절대공동체의 부안적 구성은 장기화된 과정 속에서 역동적인 주체성의 학습으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2·14 독자적 주민투표 형태로 ‘자치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는 민주주의의 새로운 창발을 실험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부안반핵민주항쟁은 매우 풍부하게, 역동적으로 이어져 왔다. 공동체의 새로운 구성 부안의 투쟁하는 절대공동체는 첫째, 부안 사람들로 하여금 행동하는 사회적 주체로 출현하도록 하였으며, 둘째, 그 사회적 주체는 생명-민주효과로 구성하는 새로운 주체성의 담지자이며, 셋째, 그 새로운 주체성은 다중이자 민중으로서의 집합적 행위주체로 표현되었다. 넷째, 그 집합적 행위주체들은 성별이나 연령이나 위치에 따르는 수직적 종속관계로서가 아니라 수평적 동지관계로 결속되었다. 그리고 다섯째, 부안 사람들은 핵마피아 집단 및 찬핵집단에 대한 적대성으로 대치해왔다. 마지막으로, 그러면서도 절대공동체 내 ‘동지’들은 형식화된 지역-행정적 공동체를 해체하고 연대하는 지역-문화적 공동체로 이끌어 왔다. 부안지역은 핵폐기장 문제 이전에는 지역-행정적으로 규정되는 형식적 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다면, 반핵투쟁 이후로는 투쟁공동체의 운명 속에서 교통하고 연대하는 문화적 공동체로 진화되었다. 사람들은 집회장에 모여들어 공론장을 형성하면서 정보와 의견의 교환, 감정구조의 교감 등을 통해 낯선 사람들에서 낯익은 동지로 소통하고 연대해왔다. 이것은 동어반복되는 듯 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워져 왔다 부안 사람들은 일반적 지역 사람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대개 개별화된 개인으로서 존재해왔으나 핵폐기장 사태를 맞이하여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사회적 주체로 급부상하면서, 적어도 행동적으로나 인지적으로 무관심했던 사회적 이슈들에게까지 폭넓은 수용성을 가지면서 세계-내-존재로서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핵폐기장 반대투쟁의 명분을 지역이기주의에서 찾지 않고 ‘핵없는 세상’에서 찾은, 투쟁의 초기화조건을 세계 보편적 문제로서의 반핵투쟁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사실 위도주민들이 유치청원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바로 인접지역인 고창에서 핵폐기장 반대투쟁을 하는 상황에서도 부안 사람들은 핵폐기장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였다. 그러나 부안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의 문제로 불어 닥치자 지역적 존재로서의 위기를 느끼면서 세계-내-존재로서 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사안 자체가 가져다준 자발적 생명-민주효과이기도 하며 대책위에서 촛불집회와 교육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공급해준 의식적 교육-학습효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도 반대할 수 있게 되었고, 찬성이 대세였던 새만금 사업 문제도 서서히 반대하는 쪽으로 기류가 형성되어 왔다. 진정한 승리를 위해 아직도 부안 주민들은 계속 투쟁 중이다. 일개 군수의 독선적 행위로 촉발된 부안주민항쟁은 핵마피아 집단이 구축하려는 핵산업-위험사회와 맞서 싸우는 전쟁기계가 되어 왔다. 작은 지역에 갇혀 고립된 싸움을 하면서도 부안 사람들은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면서 한국 사회운동사의 새로운 역사를 기록할 텍스트들을 생산해왔고, 세계적으로도 전례 없는 주민저항방식을 창출해왔다. 부안 주민들은 핵폐기장 반대투쟁을 하면서 삶의 의미와 새로운 생활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부안 주민들의 반핵민주항쟁은 다름 아니라 정치적 투쟁과 결속된 문화투쟁이다. 부안항쟁은 매우 풍부하게 투쟁의 대서사시를 기록해왔다. 그러므로 부안항쟁은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되며,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의미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부안항쟁은 정부가 백지화 선언한다고 해서 종결되는 게 아니다. 아픔과 후유증과 희생을 치유하면서 항쟁의 성과를 이어 대안사회로의 이행을 전망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들과 장치들을 강구해야 하고 지역적 연대가 모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곧 부안항쟁의 진정한 승리를 향한 발걸음이 되지 않을까 한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