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 당신, 유통서비스 노동자 지난 6월 19일, 상암 월드컵경기장 옆 공터에서는 홈플러스노조 월드컵 지부의 다섯 번째 생일이 열렸다. 지난 2007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던 이랜드노조 파업 이후 5주년을 맞이한 것이다. 처음으로 외박을 하며 동지애를 느끼고 노동자로서의 해방감을 느꼈던 이랜드 여성노동자들에게 해방구를 만들어줬던 상암동 마트는 여전히 물건을 사러오는 손님들로 붐비고 있고, 여전히 많은 유통서비스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우리는 2007년 투쟁 이후 유통서비스 부문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2007년 투쟁에서는 ‘비정규직법에 의한 해고’ 문제가 가장 시급했으므로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어떤 고충을 가지고 노동하고 투쟁하고 있는지 부각되지는 않았고, 우리도 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는 지하철역 한 정거장 간격으로 대형할인마트가 있고, 터미널과 주요 철도역에는 백화점이 있으며, 길거리에서는 발에 차이는 돌맹이만큼 자주 편의점을 만나고, 집에 가서 TV만 틀면 한 채널 건너 홈쇼핑이 펼쳐진다. 이렇게 유통서비스 노동자는 우리 주변 가까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노동자로서의 그들을 잘 알지는 못한다. 우리가 투쟁을 통해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존재를 인식한지 5년이 지난 지금, 유통 여성노동자의 현실과 쟁점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후 활동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유통서비스 노동의 최근 쟁점 최근 유통서비스업의 쟁점은 ‘감정노동’의 문제와 ‘영업시간제한’의 문제이다. 유통서비스업체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백화점’과 마트라고 불리는 ‘대형(소매)할인점’이다. 백화점의 가장 큰 문제는 장시간노동이며, 대형할인점의 가장 큰 문제는 비정규직의 기간(基幹)노동력화이다. 하지만, 두 영역 모두 공통점으로 서비스노동이라는 점에서 감정노동에 시달리며, 쉴 권리 없이 일한다는 점에서 건강권의 사각지대에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감정노동자가 진짜 웃을 수 있는 일터 만들기 ① 감정노동의 문제 살펴보기 6월 19일 홈플러스노조 월드컵 지부 출범 5주년 문화제에서 가장 많이 나온 구호는 “감정노동수당 쟁취하자”였다. 감정노동수당 월 10만원 쟁취가 올해 노조 임단협에서도 주요 요구로 다뤄지고 있는데, 물론 한계도 있지만 의미도 있다. 현재 감정노동수당은 서비스업계에서 비행기 승무원부터 시작하여 백화점 화장품 판매직원에게까지 보편화되어 있다. 비슷하게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대형할인마트 직원들도 감정노동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유통서비스노동자들의 가장 큰 특징은 감정노동이라는 직무 스트레스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데 있다. 서비스직종 노동자들의 감정노동은 노동자들의 심리적 탈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유통서비스업 노동자들의 주된 업무가 상품판매와 고객 상담이기 때문에 일의 성격상 고객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노동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스트레스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유통서비스업 노동자들에게 부과되는 월별 판매 목표에 따른 실적부담 역시 감정노동을 가중시키고 스트레스를 높인다. 판매량에 대한 실적 이외에도 감정노동을 끊임없이 체크하는 ‘미스터리 쇼퍼’(mystery shopper)라 불리는 일상적 감시체계가 존재하므로 감정노동은 끝나지 않는다. 일상의 감시는 노동자들의 피를 말린다.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또 그 감정노동을 평가받는다. 소위 고객평가단이라는 감시원들이 언제 어디서 평가하고 감시할지 몰라서 항상 긴장해야 한다. 게다가 이 평가의 기준이라는 것이 애매하다. 친절이라는 다소 주관적인 감정을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고작 기준이 있는 것은 인사 여부 정도이다. 대형할인점의 경우 어느 매장이나 ‘맞이인사, 전송인사’가 기본 평가 항목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인사 여부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주관적이다. 대형할인마트의 경우 한 달에 한 번씩 전국에 있는 모든 매장의 CS평가(고객서비스 평가) 순위를 매겨놓는다. 순위가 하위권인 매장은 직원교육이 강화되거나 다소 엄격한 규율이 생긴다. 전국의 모든 매장뿐 아니라 각 파트별, 개별 직원별 고객평가 내용이 게시되고 언급되기도 한다. 이러한 평가의 내용은 모두 고객평가단이라는 사람들에 의한 주관적인 내용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감정노동을 요구하는 유통서비스업에서 여성노동자들은 사업장내 성희롱 문제에 그대로 노출되는 심각한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유통서비스업에서 성희롱은 직장 동료나 상사로부터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고객으로부터 발생한다. 대부분이 언어적 성폭력인데, 현재 유통서비스업 대부분 이에 대한 조처가 거의 전무하다. 관련 법률을 재정비하거나 사용자의 적극적인 대응지침 마련이 필요하나 친절을 강조하는 사업장 분위기상 이러한 대책을 마련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② 감정노동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감정노동의 문제는 유통서비스 노동자라면 대부분 공감한다. 그러나 그 해결책은 대부분 개별적인 방법에 머무른다. 감정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기위해 가장 많이 하는 방법은 음주와 흡연이다. 2010년 서비스여맹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서비스노동자 삶의 질’ 조사에서도 여성응답자의 흡연율은 한국 여성 평균인 7.1% 보다 5배 높은 35.2%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감정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는 어렵다. 최근 이러한 문제를 개인적인 방법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고민들이 나오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대형할인점 유통서비스 노동자들이 ‘감정노동수당 10만원’ 쟁취를 임단협 요구로 내건 것이다. 이는 감정노동의 문제를 사회화시키는데 있어 분명 의미있는 활동이지만,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사실 하루 종일 손님의 비위를 맞추고, 때로는 ‘진상고객’을 상대하느라 쌓인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이는 단지 월 10만원의 수당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의 문제가 아니다. 간 쓸개 다 내놓고 인격을 내다파는 것 같은 노동에 시달리는 유통서비스노동자의 현실을 폭로하는 출발점으로서 감정노동 수당 10만원 쟁취는 의미가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한 지속적인 개선이다. 영업시간 제한을 둘러싼 쟁점 ① ‘영업시간 제한’은 노동자의 건강권(쉴 권리) 문제 최근 일요일 의무휴업의 문제로 유통업계가 시끌벅적하다. 급기야는 일요일 의무휴업으로 매출이 줄었다며 소송을 낸 대형마트 측에 행정법원이 손을 들어준 일이 발생했다. 서울행정법원이 대형마트, SSM의 영업시간 제한을 규정한 서울 강동구와 송파구의 처분이 부당하다고 판결한 것이다. 이미 유통서비스 시장을 독식한 재벌기업들의 집착으로 아마도 이러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일요일 의무휴업이 시행된 배경에는 유통산업발전법이 있다. 유통산업 발전법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건전한 유통질서 확립과 노동자 건강권, 대규모 점포와 중소유통업의 상생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지자체장이 대규모 점포에 대해 영업시간을 제한(오전 0시~오전 8시)하거나 의무휴업일(매월 1일 이상 2일 이내)을 지정해 의무휴업을 명할 수 있다. 또한 지난해 11월 국회에서 입법발의 된 유통산업근로자보호와대규모점포등주변생활환경보호등에관한특별법에서는 대형유통매장은 공휴일과 일요일엔 휴업해야 하고 백화점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 대형마트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 사이에만 영업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업시간 제한은 대부분 중소영세상인, 골목상권을 보호한다는 취지로 전개가 되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고 짚어봐야 할 문제는 유통노동자의 건강권의 문제다. 세계 최대의 장시간노동을 자랑하는 한국에서는 모든 노동자가 엄청난 노동시간에 허덕이고 있다. 2010년 OECD국가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평균 1,749시간인데, 한국의 노동시간은 2,193시간으로 2,109시간 일하는 그리스와 함께 유일하게 2,000시간이 넘는 나라로 악명이 높았다. 유통서비스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② 유통서비스 노동자는 외계인? 남들 쉴 때 쉬고, 남들 일할 때 일하고 싶은 유통노동자 유통서비스업에서 영업시간 제한은 크게 세 축으로 나눌 수 있다. 일단 일요일 의무휴업 문제로 대두된 주말 영업시간 제한 문제와 둘째로는 연말 명절 세일 기간 등 특정일의 영업시간 제한 문제, 셋째 평일의 야간 영업시간 제한 문제이다. 노동자들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시 정리한다면 ‘휴일노동, 장시간 노동, 심야노동’ 이라 명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일요일 의무휴업의 문제를 보자. 많은 유통서비스 노동자들이 공감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인간관계의 축소다. 일요일에도 노동을 해야 하는 유통서비스 노동의 특성상 유통노동자로 일하기 전에 친구들과 함께 가던 등산도 갈 수 없고,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종교 활동을 하기 힘들며, 여러 경조사가 대부분 주말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지인이나 친인척의 결혼식조차 참석하기 힘든 것이 유통노동자의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도 축소된다. 남들 쉴 때 쉬고, 남들 놀 때 놀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힘든 상황에서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존재로 느끼기도 한다. 일례로 메이데이에 근무를 하지 않거나 선거일에 근무하지 않는 일반적인 노동자들과 달리 유통서비스 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누려야할 시간에도 일을 해야 한다. 둘째로는 연말명절세일 기간 등 특정일의 영업시간 제한 문제이다. 이 장시간 노동의 문제는 아주 고질적이다. 백화점의 경우 세일기간이 되면 이미 일상적이었던 장시간 노동이 더욱 늘어난다. 유통업체간의 과당경쟁으로 인해 백화점과 할인점의 영업시간 연장이 거의 관행화되고 있어, 입점업체 판매사원들은 장시간 근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상적으로 백화점 화장품 판매사원들은 대부분 아침 8시30분에서 9시 사이에 출근하여, 저녁 8시 정도에 퇴근하지만, 백화점 세일기간이나 주말(금, 토, 일)은 영업시간 연장으로 인해 퇴근이 1시간 이상 연장된다. 게다가 근래에는 백화점의 주 1회 정기휴무마저 거의 사라지고 매장의 인력부족과 맞물려서 백화점 판매사원들은 자신의 휴무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백화점 판매직의 75.7%가 주당 52시간 이상 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형할인마트의 경우 명절 바로 전날 늦은 밤까지 일하고 나면 녹초가 되는데, 대부분 40-50대 기혼여성이 많아, 근무하고 바로 다음날 명절 가사노동까지 겹쳐 그야말로 2중의 고통 속에 놓이기도 한다. 최근에는 명절 당일에도 휴업하지 않는 백화점과 대형할인마트가 있어 유통서비스 노동자들의 삶은 더욱 고달프다. 세 번째는 평일의 야간 영업시간 문제이다. 이제는 다소 줄어들고 있지만 한 때 24시간 영업이나 12시까지 영업하는 매장이 꽤 많았다. 이 심야노동은 그 자체로 노동자의 건강을 갉아먹고, 또 야간까지 일하느라 차가 끊기게 되더라도 그 비용 역시 고스란히 노동자의 부담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심야노동은 노동자의 단결권마저 보장해주지 않는다. 퇴근 후의 회식이나 모임 등 노동자들의 단체 활동 등에도 제약이 생기기 때문이다. 현재 이러한 문제점을 알리는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는데 대형할인마트의 경우 ‘연장영업반대’, 백화점의 경우 ‘주 1회 정기휴점제’로 그 요구안이 제출되고 있다. 유통서비스업의 시장구조와 노동자 현황 유통시장에서 감정노동의 문제나 영업시간 규제의 문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유통 산업의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적으로 제조업에서 서비스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재편되면서 노동시장 역시 급속한 변화를 겪어왔다. 유통서비스 산업 역시 초민족 자본의 유입과 확장, 인수합병 등의 과정 속에서 고용 불안이 일반화되고 심화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국내 유통서비스 산업에서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전개되었으며 그 속에서 노동자들은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유통산업 구조조정과 재벌 독식 1990년대 중후반부터 확대된 한국의 유통시장은 1996년 유통시장이 전면 개방된 이후 세계 1-2위의 다국적 유통그룹인 월마트와 까르푸가 들어오면서부터 두 차례의 큰 변화를 맞는다. 첫 번째는 1998년 경제위기 전후 유통업체의 도산 등으로 인한 국내 유통업체 간 1차 재편이고, 두 번째는 2000년대 중반에 외국 업체들(월마트와 까르푸)이 철수한 이후 국내 업체들 간의 인수합병(M&A)이다. 이 과정에서 유통업은 재벌그룹이 장악한 지금의 형태로 재편된다. 국내 주요 유통업의 시장 점유율 현황을 보면, 백화점 Big 3 (롯데, 신세계, 현대백화점)의 시장 점유율은 2001년 61%, 2003년 74%, 2005년 78%, 2007년 78%, 2009년 81%로 계속 증가하고 있고, 면세점 Big 2 (롯데, 신라 면세점)의 2012년 4월 현재 시장 점유율은 85% 이상이다. 대형할인마트 Big 3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의 시장점유율은 2001년 52%, 2003년 62%, 2005년 67%, 2007년 76%, 2009년 80%로 나타났다. 결국 현재 유통업의 대부분은 몇몇 소수 재벌에 의해 독과점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최근에는 재벌 대기업에서 골목 상권을 겨냥한 기업형 수퍼마켓(SSM) 형태의 확장과 창고형 할인매장(도매 할인점)까지 등장하여 유통서비스업의 재벌 독식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유통서비스 노동자 현황 ① 왜 여성노동자의 문제인가 이미 알려져 있다시피 유통서비스업에는 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이 있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일부를 제외하면 주로 비정규직의 일자리다. 단순히 일하는 여성노동자들 수가 많다는 것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의 여성화를 이루며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고착화하고 있다. 특히 대형 할인점의 경우 ‘소수의 관리자와 기간노동력화한 다수의 비정규직’ 패턴으로 굴러가고 있는데, 이 다수의 비정규직이 여성노동자이다. 여성 노동자들이 밀집되어 있는 대형할인마트의 고용형태를 보면 계산과 판매판촉 부분에서 성별 직무분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계산, 판매, 식품, 안내 및 고객서비스 등은 여성들이 대부분 담당하고 있고, 유통업 정규직 남성은 매장관리나 구매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유통업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과 별반 차이가 없는 노동(8시간 근무)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용이 불안정하다. 1998년 경제위기 이후 기혼여성노동력의 급속한 유입으로 노동력이 남아도는 가운데, 기업은 굳이 높은 임금을 주지 않고, 정규직으로 고용하지 않아도 일하려는 의사를 지닌 이 기혼여성들을 비정규직군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형 할인점의 경우 대다수가 기혼 여성인데, 가사노동이나 육아와 병행하기 위해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이 적합한 것처럼 포장된다. 이에 점점 유통 서비스업 자체가 여성이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구성되고 있다. 또한, 유통업이라는 산업적 성격은 특정 기술을 요구하지 않으며 노동력의 대체가능성이 높은 직종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특성은 노동시장 밖에 머물도록 구조화된 기혼여성의 고용을 증가시키고 있다. ② 불안한 고용은 이제 그만! 백화점이나 할인점 등 대다수의 유통서비스 노동자들은 용역업체를 통해 채용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현재 그들이 일하고 있는 해당 유통업체(백화점, 대형할인점)의 노동자라고 생각하며, 또 이들이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도 이러한 바탕 위에서 생산되고 평가된다는 점에서 용역업체와 원청 간의 관계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백화점, 대형할인점에 가면 진열대에서 상품을 선전하고 홍보하면서 구매를 권유하는 여성노동자들을 보게 된다. 이들 대부분은 상품 제조업체에서 판매를 위해 매장에 파견한 사원들로 유통업체의 직원들은 아니다. 백화점의 경우 직영매장, 수수료 매장, 임대 매장이라는 형태로 구분되어 근무하고 있고, 대형할인점의 경우 해당 상품의 판매대에 배치되어 근무하고 있다. 이런 노동자를 판촉노동자라고 하는데 판촉노동자는 유통업체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비정규직 형태이다. 판촉노동자는 입점업체보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유통회사의 요구에 의해 생겨났다. 상품 판매업무를 입점업체에 맡겨서 판매 관련 인건비를 입점업체에게 떠넘기는 방식이다. 그러다보니 유통회사 판매직은 대부분 판촉노동자로 구성된다. 판촉노동자는 근무는 유통업체에서 하고, 임금은 상품제조업체에서 받기 때문에 소속업체와 사용업체가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파견노동자와 유사하다. 그러나 소속업체가 인력파견을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가 아니고, 상품을 제조하거나 중개하는 업체라는 점에서 근로자파견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법논리상으로 파견노동자와 다르나 판촉노동자는 파견노동자가 겪는 이중의 고통을 똑같이 겪고 있다. 노동시간, 휴일 휴가 사용, 근로감독 등에 있어 대형 할인점의 영향력이 더 크지만, 소속은 상품제조업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외 근로 산정 같은 급여 문제나 승급, 투입매장 선정 같은 인사문제는 상품제조업체에서 관리한다. 이러다 보니 고용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또한 대형 할인점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직접고용과 간접고용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유통업은 산업구조변화와 노동유연화에 의해 비정규직 고용이 증가하고 있는 업종 중 하나이다. 고용현황을 보면 정규직보다 직접고용 비정규직(계약직, 파트타임)과 간접고용 비정규직(파견 및 촉탁 형태) 노동자들이 더 많다. 1998년 경제위기 이후 기존의 정규직 업무 일부를 비정규직으로 전환했으며, 유통업 핵심 업무 중 하나인 계산, 판매판촉 업무를 기간제 및 파트타임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유통업체에서도 파견업이 허용된 직종의 경우 대부분의 직무는 간접고용으로 전환되었다. 청소, 경비, 주차안내 등의 업무는 거의 간접고용이다. 최근 건강권(감정노동), 노동시간(영업시간규제) 문제를 중심으로 유통서비스노동의 문제점을 폭로해 왔다면 고용불안(간접고용화)에 대한 쟁점 또한 이후에 이슈화시켜야 할 중대한 사안이다. 또한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다양한 비정규직 노동자를 아우르고 작업장 내에서 서로의 조건을 이해하고 연대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는 것 또한 남아 있는 문제이다. ③ 건강하게 일할 권리 ▶ ‘서서 일하는 서비스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 앞서 언급한 ‘감정노동’의 문제와 ‘영업시간제한’의 문제 말고도 유통업에는 산적한 문제들이 많다. 애초에 의자 놓기 캠페인이 나온 이유도 유통노동자의 건강권 때문이었다. 유통노동자는 제대로 쉴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내내 서서 일을 하는데, 장시간 서서 일할 경우 하지정맥류나 관절염 등 질병을 유발할 수 있어서 건강에 상당히 좋지 않다. 2008년부터 진행되어 온 의자놓기 캠페인으로 서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의자가 제공되는 비율은 30%로 늘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실제 근무하면서 의자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안 되거나 또는 보이지 않는 회사의 압력 또는 눈치로 거의 의자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답변한 경우가 많아 여전히 풀어야할 문제로 남겨져 있다. 이에 대해 2011년 ‘서비스 노동자 건강권 실현을 위한 캠페인단’은 대형 유통업체가 여성 노동자에게 앉아서 쉴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의자를 제공하는지 감시하고 고발하는 ‘의자 감시단’을 발족하여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촉구했다. 또한 서울시가 올해 세계여성의 날을 앞두고 ‘여성의 삶을 바꾸는 서울 비전’을 통해 대형마트에서 근무하는 여성 근로자들이 2시간이상 서서 일하지 않고, 앉아서 일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을 제시하기도 했다. ▶ 휴게 공간, 휴게 시간 부족 쉴 공간은 물론 쉴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보통 점심시간 외에 하루에 한 번 30분의 휴게시간이 주어지는데,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 이는 무척 짧은 시간이다. 쉬는 시간이 주어져도 쉬려고 작업하던 것 정리하고 휴게공간까지 가서 물이라도 마시고 담배라도 피려고 하면 금방 30분이 가버린다. 고작 의자에 앉아 쉬는 시간은 5분 남짓도 안 된다. 대부분의 사업장 휴게실은 왜 그리 멀리 있는지 잠깐 쉬고 다시 일하러 작업장에 돌아가려면 잠깐 쉬고 나올 수밖에 없다. 휴게 공간도 부족하여, 유통서비스 노동자가 가장 많고 가장 피로한 주말의 경우 휴게실에 자리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다보니 부족한 휴게시간과 휴게공간으로 탈의실이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계단 등에서 쉬는 경우도 많다. 유통서비스 노동자들의 건강권 쟁취를 위해 기본적으로 적정한 규모와 거리 등이 모두 보장된 제대로 된 휴게공간과 휴게시간의 확보가 필요하다. ④ 저임금 노동 유통업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비정규직의 월평균 임금총액은 2007년 8월 기준으로 93만 원(남성비정규직 120만 원, 여성정규직 145만 원, 남성정규직 216만 원)으로 소매업 전체 평균 임금 117만원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유통서비스 노동자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앞서 살펴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통서비스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은 미진하지만 노동조합으로의 조직화가 많이 진행되어야 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유통서비스 노동자를 가깝고도 먼 당신이 아닌 가까운 존재로 만들어가기 위한 방안 역시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유통서비스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고민들 ① 조직화의 계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은 일상적인 현장 투쟁을 벌이기가 쉽지 않은데, 유통서비스 부문도 마찬가지이다. 갑작스런 해고가 아니면 일상적인 어려움으로 투쟁이 조작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대부분 노동조건의 어려움을 감내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고용문제가 아닌 근무조건의 불합리나 임금체불 같은 문제에 있어서 투쟁을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존의 정규직 노조가 있는 경우 이러한 일상의 투쟁을 만들기가 다소 용이하지만, 노조가 아예 없는 경우는 쉽지 않다. 2000년 이랜드노조의 경우 단기계약직 노동자뿐만 아니라 간접고용 노동자도 조합가입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규약을 개정하여 함께 파업에 동참하고 약 20여명의 조합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냈다. 일단 노조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이러한 투쟁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고, 정규직노조는 있으나 규약에 비정규직노동자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 어떻게 공동의 투쟁을 만들어갈 것인지도 고민해야 한다. ② 지역조직화의 가능성 지역운동의 가능성도 보아야 한다. 대부분의 유통서비스노동자들이 자신이 사는 지역의 반경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일하기 때문에 지역 구성원으로서 투쟁을 만들어 가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또한 (도시의 경우) 지역별로 존재하는 대형 할인점의 경우 지역 운동 단위들이 지역의 성원으로써 결합하고 지역의 이슈로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부분이 있다. 2001년 까르푸 일산점 여성노동자들은 회사의 부당노동행위로 활동이 미진한 기존 노조를 재조직화하여 노조를 정비했고 지역의 운동 단체와 함께 활동을 펼쳤다. 2007년 비정규직법으로 파업에 들어간 홈플러스 노조(구 홈에버 상암점) 월드컵지부의 경우도 마포 서대문 등의 지역의 운동단체와 주민들의 지지와 연대로 투쟁을 만들어 갔다. 또한, 기존의 정규직 노조가 없는 경우 지역일반노조의 형태로 조직되기도 한다. 2005년 투쟁했던 이마트 수지점 계산원의 경우 경기일반노조로 조직된 사례이다. 물론 무노조를 자랑하는 삼성 계열 회사인 까닭에 사측의 노조 탄압은 심각했다. 2004년 12월 21일 계산원 22명이 경기일반노조에 가입하고 분회 창립총회를 했지만, 사측의 회유 협박 등 극심한 노조탄압으로 창립총회 3일 만에 18명이 탈퇴서를 제출했고 남은 4명이 힘겹게 싸웠다. ③ 업체별 조직화의 사례 현재 할인점 판촉노동자를 노조로 조직한 사례로는 동원F&B 노동조합이 있다. 백화점 입점 업체로는 화장품 업체가 대부분인데, 로레알코리아 노동조합, 샤넬 노동조합, 엘카코리아 노동조합, 클라란스코리아 노동조합 등이 있다. 대형할인점에 유일하게 노조가 결성된 곳은 동원F&B 노조이다. 동원F&B 노조는 상품제조업체에서 결성된 기업별 노조이다. 그래서 유통업체에 노조가 결성되어도 다수를 형성하는 판촉노동자는 다른 회사 소속이기 때문에 조직대상에서 제외된다. 동원F&B 노조처럼 소속업체 노조를 결성한 경우 가장 큰 어려움은 조합원이나 조직 대상자들이 전국 곳곳의 유통업체에 흩어져 있다는 점이다. 대형할인점에서 한 상품제조업체당 판촉노동자들은 1~3명씩 각 매장별로 흩어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 조합원을 조직하고 조합활동을 하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일단 유통업체 매장에 배치되면 상품제조업체보다는 유통업체의 지휘 감독 하에 있기 때문에 판촉 노동자의 소속감이 확실하지 않은 것도 소속업체 노조로 조직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된다. 또한 이직이 잦고, 판촉 노동자의 대다수가 40-50대 기혼여성이어서 노조 활동에 대한 관심과 의욕이 낮은 경향이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7년 백화점대형마트에서 일하는 입점업체 종사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서비스유통노조’를 만들었지만 아직 가입률이 높지는 않다고 한다. 백화점 노동자들의 경우 입점업체로 구성된 노조로 더 많이 조직되고 있다. 로레알코리아 노동조합, 샤넬 노동조합 등과 같은 백화점 화장품 입점 업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노조가 두드러지고 있다. 백화점 입점업체 중에서도 유독 화장품 업체의 노조 설립이 활발한 이유는, ‘숍마스터’라는 소사장이 매장 직원 1~2명을 고용하고 규모도 영세하며 직원들이 회사에 적극적으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의류업체와 달리, 업체의 규모가 크고 직원들도 수백에서 수천 명에 이르러 상대적으로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2004년 샤넬 노동조합 처음 생겨난 이후, 로레알클라란스시세이도 등 유명 업체들에서 해마다 1곳 정도 노조가 결성되어 현재 노조가 결성된 화장품 업체는 8곳에 이른다. 한편, 백화점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열악한 조건 속에서 대형할인점 판매직 보다는 다소 젊은 여성노동자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백화점 입점업체로 구성된 이러한 노조들은 조합원 교육과 각종 집회 참여 등의 집단활동으로 노조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손님은 왕! 그럼 노동자는? - 사회적 시선 바꾸기 소비자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비판하더라도, 유통서비스 분야에 있어서는 소비자의 역할이라는 부분 역시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최근 착한 소비, 윤리적 소비 등의 흐름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인식전환이다. 서비스산업은 제조업과 달리 노동자가 생산한 물건을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소비자와 직접 대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서비스상품을 바로 판매하는 특징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비스노동자는 사용자만이 아니라 소비자와의 제3의 관계가 생긴다는 점에서 제조업 노동과는 다른 특성이 있다. 감정노동이 생기는 것도 바로 이러한 지점 때문인데, 감정노동에 대한 법제화, 감정노동에 대한 사용자들의 각성, 개선책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건전한 소비 의식도 필요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벗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지역사회 시민의 정체성으로 유통서비스 노동자를 대해야 한다.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식이 자리 잡아야 감정노동의 쇠사슬을 끊어낼 수 있다.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식하지 않고 감정노동을 끊임없이 제공하도록 요구하는 사회의 관행, 그리고 이윤을 위해 이를 더욱 부추기는 자본의 각성이 필요하다. 이제는 ‘손님은 왕’이라는 허위의식을 벗어던져야 한다. 가령, 단협에 노사공동 캠페인을 반영하고 소비자 인식전환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용자가 유통서비스노동자에게 고객응대 매뉴얼을 통한 서비스 교육만 할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이용 매뉴얼을 만들도록 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불필요하고 삐뚤어진 욕망을 부추기는 방식의 서비스 산업이 확대되지 않도록 지역사회 운동이나 언론 등을 통한 사회 전반의 건전한 문화 형성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 또한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다른 노동조합에서도 서비스노동에 대한 인식 전환 교육을 하거나 이러한 현실을 알려내는 것이 필요하다.
에어 샤워를 하고 새하얀 방진복을 입은 노동자들의 손에는 티끌 하나 없는 반도체가 반짝인다. 뉴스에서 매연과 분진 없는 공장의 모습으로 소개되는 반도체 산업은 ‘청정 산업’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하였다. 그뿐인가. 작은 판 안에 복잡한 회로가 가득한 그 모습은 반도체 산업이 기술집약적이고 고부가가치의 산업이며, 21세기를 지배할 최첨단 산업이라는 이미지를 부가한다. 사람들은 반도체 산업이 한국 경제를 계속 선도해 나갈 것이라 믿고 있고, 국가경쟁력을 상승시킬 것이라 기대하며 반도체 산업에 자부심을 가진다. 하지만 이런 반도체 산업의 ‘깨끗한 첨단산업’이라는 이미지는 허상이다. 반도체 산업은 기업에게는 돈을 벌어다 주는 첨단기술이지만, 민중은 ‘환경’ 문제라는 대가를 치르게 되고 그 뒷수습은 국가세금으로 해결된다. 첨단 전자회사의 ‘깨끗한’ 작업장은 반도체 칩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지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다. 반도체 산업이 지나간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오염으로 가득하다. 반도체 산업은 노동자의 건강 침해와 지역 환경 파괴, 그리고 반도체 폐기물을 야기하는 더러운 산업이다. 뿐만 아니라 반도체 산업은 해당 지역에서 국경을 넘나들며 민중의 삶을 파괴하고 있다. 1970~80년대 미국, 1990년대 대만에서 발생했던 전자산업 노동자들의 직업성 암 문제는 한국에서도 발생했다. 처음 6명이었던 전자산업 직업병 제보자는 현재 160여 명으로 늘어났고, 정부와 삼성의 직업병 은폐와 회유에 맞선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해외 전자산업 문제와 그에 맞선 투쟁 미국에서 시작된 전자산업에 의한 건강문제와 환경 파괴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서 반도체 산업은 독립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부터 기업들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반도체 산업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이나 노출 양상에 대한 지식과 정보는 오랫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반도체 산업의 공정상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미리 인지되지 않았고, 인지된 위험도 감춰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노동자에게 작업 중 사고가 나거나 질병이 생겨나면서 조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반도체 산업과 관련된 노동보건, 환경보건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피해자들과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지역사회의 노동, 보건, 환경 운동가들에 의해서였다. 1970년대부터 지역사회의 노동보건운동 소그룹 전자산업안전보건위원회(ECOSH)가 화학물질 노출에 의한 건강 문제를 제기해왔다. 1980년 미국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원(NIOSH)이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전자 제조업 사업장에서 최초로 건강유해성 평가를 실시한 것도 이들의 투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또한 주 정부의 조사도 이끌어냈다. 조사 결과는 이 지역의 지하수가 1급 발암물질인 트리클로로에틸렌(TCE)등의 유해화학물질에 심각하게 오염되었고 그로 인해 지역 주민들이 생식독성에 노출되었다는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2001년 이후 10년에 걸쳐 스코틀랜드 그리녹에 있는 내셔널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암 위험에 대한 역학연구가 진행되었다. 이 역학연구에 정부가 나서게 된 계기도 미국과 유사하다. 그리녹 시에서 노동 상담소를 운영하면서 암 피해자들의 모임을 꾸리고 지원한 스코틀랜드 노총과 피해 당사자들의 끈질긴 투쟁 때문이었다. 이후 여러 연구를 통해 반도체 제조에 벤젠, 클로로포름, 디클로로메탄 등 발암물질이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와 함께 여성 노동자들의 자연유산율이 증가했다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미국 반도체 회사들도 여론의 압박에 자체적인 조사를 시작했지만 명확한 결론도 없는 기만적 구색 갖추기에 불과했다. IBM이나 반도체산업협회(Semiconductor industry association, SIA) 등이 지원한 연구는 일부 노동자만을 대상으로 제한적인 결과만을 도출했고, 지원하던 연구 기금을 통제해 추가적인 평가를 불가능하게 했다.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지만 노동자의 질병과 작업환경 사이의 연관성이 확인되면 산업재해 대상이 되고, 기업도 안전 대책을 세워야 하는 등 많은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반도체 회사들이 적극적인 조사에 나서지 않았다. 1985년 IBM 연구소에서 일한 한 노동자가 동료 10명 가운데 8명에게 림프종이나 뇌종양이 집단적으로 발병한 것에 대해 회사에 문제 제기를 하면서부터 전자산업과 암 발생과의 관련성 문제가 제기되었다. 반도체 기업들은 제한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작업장에서 암과 같은 희귀병을 얻은 노동자들이 소송을 제기해도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IBM은 1969년부터 2001년까지 IBM 종사자 가운데 사망한 3만여 명 노동자의 인적 사항과 사망 보험금을 수령한 이들의 내용이 담긴 ‘기업 사망자료’를 축적해 왔지만 이 자료의 존재 자체를 숨겨왔다. 하지만 직업병 피해자들은 회사가 불법적으로 독성 화학물질을 노출시켰고, 유해한 작업 환경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은폐했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 ‘기업 사망자료’가 소송 중 법원의 결정으로 2004년에 공개되었고, IBM 노동자들의 암 사망률은 미국인 평균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유력한 증거였던 ‘기업 사망자료’를 판사가 배제하면서 IBM이 승소했다. 그러나 IBM의 직업병 은폐 의혹이 계속 불거졌고, 의혹을 취재한 시사고발 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했다. 소송 과정에서 줄곧 노동자들이 일하는 클린룸의 안전성을 주장했던 IBM은 이후 대부분의 작업을 자동화했고, 염화메틸렌, 글리콜 에텔 등 각종 화학물질의 사용도 금지했다. 암을 앓는 250여 명에게는 산재보험금이 지급됐고, IBM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노동자들 대부분에 대해 산재보험을 통해 보상했다. IBM 노동자들의 건강과 환경문제가 사회적으로 알려졌고, 현재 IBM에게 지역 환경오염의 책임을 묻는 집단소송이 이뤄지고 있다. 아시아로 확대되어 온 전자산업 문제 노동자들과 지역 사회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산업은 성장을 거듭하며 전 세계로 확대되었고, 시장접근성과 물류 환경 등의 특성을 살리면서 공급망을 구축했다. 아시아 전자산업은 1970~1980년대 미국과 유럽의 전자회사들이 홍콩, 싱가폴, 한국, 일본, 대만 등의 국가들에 공장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본격화 됐다. 생산설비를 아시아 지역으로 이전하고 생산라인을 하청화하면서 미국에서 제기됐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환경문제도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된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IBM에서 대량 발생되었던 백혈병 등 반도체 산업관련 직업병도 산업의 이전에 따라 한국을 거쳐 중국의 폭스콘 등에서 차례로 재현되고 있다. 홍콩, 대만, 중국 등의 국가들이 반도체 산업을 들여오기에 급급한 나머지, 자유무역구역에 공장을 세우고, 인건비를 낮추며, 세금혜택을 주며 유치 전쟁을 벌이고 있고, 태국과 필리핀 등의 국가들도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초국적 IT기업들이 미국에서는 금지된 화학 약품 사용을 아시아에서 계속 사용했지만 이 국가들은 직업병 발생과 환경오염 문제는 등한시하고 있다. 전자회사 RCA는 1960년대 미국 인디애나 공장에서 심각한 환경오염과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해외로 공장을 옮겨, 1970년대에 대만으로 진출했다. 대만에서는 산업단지 내 공장들이 ‘합법적으로’ 환경을 오염시키도록 법 제도와 환경영향평가 완화를 허용해주었다. 그 후 20년이 지나서야 지역 주민들과 환경운동가, 학자들에 의해 RCA 공장에서 독성물질을 불법으로 배출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공장 주변 지하수는 식수안정기준치의 1000배가 넘는 TCE로 오염되어 있었고, 공장 기숙사에 거주한 RCA 노동자들은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했다.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각종 암에 걸렸고, 200여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암으로 사망했다. RCA는 1996년부터 대만 환경보호국 관리 하에 공장 부지와 지하수 정화작업은 시행했지만 노동자들의 암 발생 사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환경보호국 또한 마찬가지 행태를 보였다. 결국 1998년에 RCA 공장 주변 지역이 정화 불가능한 영구오염지역으로 지정되었고, 수천 명의 직업병 피해자들이 10년 이상 진상 규명과 보상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다. 대만 RCA 노동자들은 여러 연대체를 만들고, 경제발전을 위한 희생을 노동자들에게 강요하는 대만 정부에 항의하며 환경과 산재에 관한 법률 개정을 이뤄내고 있다. 그러나 현재 RCA는 대만을 떠나 더 값싼 노동력이 있고 국가 차원에서 사업주의 안전보건조치에 대한 법적 규제나 관리 감독이 느슨한 태국과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다. 한편 대만 자본은 2000년부터 중국에 반도체 공장을 세워왔다. 1990년 대만은 저임금 노동력을 바탕으로 전세계 80%의 노트북을 제작했으나, 지금은 중국이 전세계 노트북 생산의 95%를 차지하고 있고, 이 상당 부분은 대만 기업의 투자로 이뤄진 결과이다. 현재 대만 IT기업들은 생산은 중국에서, 연구개발은 대만에서 진행하는 형태의 분업을 도입하고 있다. 중국에 있는 애플 하청업체인 폭스콘이나 윈텍 등에서는 수십만 명을 고용해 근로계약서도 없이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은 유해화학물질에 의한 중독사고, 화학물질 누출사고와 폭발사고, 공장 인근 지역 환경오염 등의 문제를 일으켰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 삼성반도체의 상황도 미국의 IBM 공장, 영국의 내셔널 반도체 공장, 대만의 RCA 공장, 중국 폭스콘 공장 등에서 발생한 문제들과 흡사하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딸(故황유미)의 진상을 밝히고자 한 아버지의 노력을 시작으로 국내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다. 2007년 ‘삼성반도체 집단백혈병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가 발족하여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10년 동안 2만 7천 명의 직원 중 6명의 백혈병 환자밖에 나오지 않았다”며, “실제 암발생률은 대한민국 평균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다”고 주장했다. 2008년 초 대책위는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으로 이름을 바꾸고 진상규명과 산재인정을 위해 여러 활동들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제보자는 늘어났고, 현재 반올림에 접수된 백혈병, 뇌종양, 재생불량성빈혈, 다발성경화증, 루게릭 등 희귀암과 중증질환 등의 반도체 전자산업 전체 직업병 제보자는 160여명이고, 64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 삼성 직업병 제보자는 140여명이고, 지난 6월 2일 故윤슬기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56번째 삼성 직업병 피해노동자가 발생했다. 미흡한 역학조사와 산재 불승인 2007년 6월 故황유미씨의 산재신청을 시작으로 반올림과 삼성반도체 피해노동자 및 유족들은 집단 산재신청 등을 진행했다. 그동안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이나 재생불량성빈혈 등의 암 질환으로 22명(삼성 노동자만 21명)의 노동자가 산재신청을 했었지만,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승인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산재 판정 기관은 고용노동부 산하 근로복지공단이며, 백혈병과 같은 직업성 암에 대해 산재 신청을 할 경우 근로복지공단은 ‘역학조사’를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의뢰하게 된다. 2007년에 삼성반도체에서 여러 건의 백혈병이 발생하고, 산재인정투쟁이 진행되면서 삼성 백혈병 논란 사건과 관련한 역학 조사는 세 차례 실시되었다. 2007년 사망자 개개인에 대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조사, 2008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실시한 지난 10년간 전체 국내 반도체 종사자 23만 명의 림프조혈계 암 발병 위험에 대한 ‘반도체 제조공정 근로자 건강실태 역학조사’, 2009년 국내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하이닉스엠코테크놀로지가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작업환경 역학 조사’가 그것이다. 첫 번째 역학조사는 업무와 백혈병 질병 연관성에 대한 판단을 보류했다. 2008년 12월에 발표된 두 번째 역학조사에서는 반도체 제조업체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의 암 발생률은 일반인보다 높게 나왔고, 비호지킨 림프종·백혈병 발병률의 경우는 일반인에 비해 1.31~5.16배까지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산업안전보건공단은 연관성이 낮다고 결론을 냈다. △백혈병은 통계학적으로 의미 있는 증가를 찾을 수 없었고, △반도체 공정 작업 현장에서 백혈병 유발 가능 물질인 벤젠·전리방사선은 검출되지 않았거나 노출 기준을 초과하지 않았으며, △높게 나온 비호지킨 림프종의 경우 원고 가운데 한 명은 남자이므로 업무연관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올림은 “역학조사를 할 당시 삼성이 작업장의 물량을 줄이고 화학물질을 치우는 등 대대적인 청소를 함으로써 조사결과에 영향을 미쳤다”고 반박했다. 또한 반올림은 노후 라인에서 발병률이 높을 가능성이 훨씬 많은데도 전체 노동자를 표본으로 설정하여 일반인의 발병률과 비교해 별 다른 특징이 없는 것처럼 결과를 나오게 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결국 2009년 5월 근로복지공단은 ‘벤젠’이라는 발암물질이 없다는 역학조사 결과를 근거로 ‘작업환경이 백혈병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객관적 증거가 미흡하다’며 전원에 대해 불승인 처분을 내렸다. 2009년 7월 근로복지공단에 이의신청 즉 심사청구를 하였지만 전원 불승인 처분을 받았다. 행정소송을 둘러싼 삼성의 회유와 은폐 2010년 1월, 피해 노동자들과 유가족들은 ‘산재 불승인’에 불복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재인정을 요구하는 내용의 소장을 서울행정법원에 접수했다. 행정소송의 형식적 피고는 근로복지공단이었지만, 실제로는 세계 초일류 기업임을 자부하는 삼성전자를 상대로 벌이는 법적 투쟁이었다. 근로복지공단이 소송 초기부터 삼성전자 측 변호사들에게 소송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실제 삼성전자가 피고 보조참가로 소송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편 세 번째 역학조사인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의 ‘작업환경 역학 조사’ 결과가 2010년 9월 발표되었는데, 이 조사에서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되었다. 조사결과에는 삼성 반도체 제조공정에서 사용되는 감광제에서 0.08ppm에서 8.91ppm의 벤젠(국내 벤젠 노출 기준은 1ppm 이하로 규제)이 검출되었고, 각종 유기화합물질의 관리가 부실하다는 내용도 담겼다. 삼성전자가 2008년 국정감사장에서 벤젠은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바로 삼성이 의뢰한 조사 결과에서 벤젠이 검출된 것이다. 지난 2008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에서도 벤젠은 검출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발암성과 연관성이 낮다는 근거로 작용해 산재 불승인 결정이 난 것이었다. 2011년 2월에 반올림이 노동부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에 반도체사업장 역학조사 자료 및 화학물질 정보 등 정보공개 신청을 했지만,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영업비밀 등의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삼성은 인바이런사 재조사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삼성으로부터 연구비용을 받은 인바이런은, “사업장은 잘 관리되고 있다”, “노출재구성 연구 결과에서 백혈병이나 림프종 등을 유발할 수 있는 어떠한 과학적 인과 관계도 나오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인바이런의 발표는 주장과 결론만 있을 뿐 데이터가 없는 보고서이며, 인바이런은 폐암 환자 소송에서 담배회사를 대변하고, 고엽제 관련하여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들의 건강 문제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던 컨설팅 회사이다. 삼성은 피고 보조참가로 소송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을 돈으로 매수하여 산재를 은폐하려 했다. 삼성은 故박지연씨 가족에게 산재신청을 하지 않으면 치료비를 보상해주고 집까지 고쳐주겠다고 했다가 산재신청을 하자 수차 퇴사 권고를 하였다. 故황유미씨의 아버지에게도 거액의 금품으로 회유하여 산재신청 시도를 차단하려 하였다. 산재보험은 모든 사업주들이 낸 보험료로 정부가 운용하고, 필요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주어진다. 때문에 삼성은 작업 공정 과정에서 산재가 발생한 것을 인정하고 정부 보상받는 걸 도와주면 된다. 그런데 왜 삼성이 이를 방해할까. 삼성전자는 무재해 기록 때문에 보험료율을 50% 감면 받고 있어 연간 143억 원 정도를 절감했다. 하지만 반도체 피해자들 중 한명이라도 공식 산재 인정이 되면 절감됐던 보험료를 다시 내야한다. 진짜 재해가 없어서 보험료를 감면받은 게 아니라 피해자들에게 산재 신청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몇 억 원씩 주겠다며, 산재 신청을 못하게 회유하고 은폐해왔던 것이다. 행정소송 일부 승소와 최초 산재 승인 2011년 6월 백혈병 행정소송 1심에서 故황유미, 故이숙영씨의 백혈병 사망을 산재로 인정 받게 된다. 하지만 故황민웅, 송창호, 김은경씨는 기각되었다. 재판부는 故황유미, 故이숙영에 대해서는 “반도체 공장에서 세척작업을 해서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고, “명백하게 백혈병 유발 요인을 입증하지 못하더라도 유해한 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면 백혈병이 발병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불승인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고 측 2명은 직업병으로 인정하였지만 나머지 3인에 대해서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기각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업무와 재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입증하지 않아도 정황상 추정해 판단할 수 있다면 직업병으로 인정하는 기존 판례의 취지를 볼 때, 3명의 삼성백혈병 노동자들에게 기각 판정을 한 것은 산재보험제도의 취지에 벗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납득하기 힘든 판결이었으나 부분적으로 직업병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분명한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공단은 항소심을 제기했고 계속되는 재판은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한편 2011년 8월 고용노동부는 ‘삼성반도체 노동자 보건관리 강화’를 위해 실천방안 요구 및 이행 모니터링 계획을 밝혔다. 이는 故황유미씨가 세상을 떠난지 4년 5개월, 행정법원 1심에서 산재로 인정받은 지 약 2개월 만에 발표된 노동부의 공식입장이다. 그동안 고용노동부는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에 대한 어떤 책임 있는 자세도 보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인권과 건강권을 책임질 노동부는 삼성에게 직업병 재발방지 계획 등을 떠맡기고 뒤에서 모니터링만 하겠다는 속셈을 보이고 있다. 노동부는 ‘삼성 백혈병’으로 표현되는 반도체 및 전자산업의 유해성을 ‘삼성 반도체’만의 문제로 한정시켜서는 안 되며, 전체 전자산업 직업병에 대한 재발방지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2012년 2월 정부는 삼성전자 등 반도체 공장서 1급 발암물질이 발견되었다고 처음 인정했다. 한국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간 삼성전자, 하이닉스, 페어차일드코리아 등 국내 반도체 공장을 대상으로 ‘반도체 제조 사업장 정밀 작업환경평가 연구’를 수행한 결과, 1급 발암물질인 벤젠, 포름알데히드, 전리방사선, 비소 등이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반도체 공장 설비가 현대화된 이후에도 1급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는 것은 반도체 공장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삼성 측의 주장처럼 그동안 반도체 공장의 작업 환경이 끊임없이 개선됐다면, 1990년대~2000년대 초반에 노후화 된 수동라인에서 일한 노동자들은 더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었을 것이라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번에 측정된 부산물의 양이 모두 노동부에서 지정한 노출 기준보다 현저히 낮기 때문에 인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준은 아니라는 입장이고, 고용노동부도 측정된 노출량은 극미량이어서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노출됐다고 하더라도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노동부가 제기한 기준치는 관리 기준치일 뿐, 발암물질에는 역치가 없기 때문에 노출허용 기준 미만에서도 충분히 희귀병이 발병할 수 있다. 2012년 4월에는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린 김지숙씨의 산재신청이 처음으로 승인 처분을 받았다. 지금까지 근로복지공단은 2008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를 근거로 불승인을 남발했었다. 하지만 피해자들과 반올림 활동가들은 갖은 탄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고, 연대가 확산되면서 피해자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물꼬가 트였다. 아직은 한 명에 불과하지만 이처럼 공식 기록으로 남아야 정책을 통해 산업에 대한 예방과 규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동안 공식 블로그에 매일 ‘물타기’ 정보를 올려왔던 삼성반도체는 이번 근로복지공단의 결정에 대해 ‘겸허히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산재 인정 다음 정부가 해야 할 것은 그동안 시행했던 여러 조사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이다. 정보가 공개돼야 전·현직 노동자들, 시민들이 반도체 산업의 위험성을 충분히 알고 사회적 조치에 대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산재신청을 하더라도 자신의 직업병이 어떻게, 어떤 물질에 노출되어 발생했는지 입증할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현재 제도를 개정해야 한다. 국회는 국가차원의 신뢰성 있는 진상조사를 실시할 수 있도록 강제하고, 산업재해 및 화학물질 관리에 대한 제도개선에 노력해야 한다. 삼성은 백혈병 등 직업병 피해를 인정하고, 유족들 앞에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또한 과거 작업환경과 질병 피해자들에 대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국제적 연대와 투쟁이 필요하다 이처럼 거대 반도체 자본이 이윤 극대화를 위해 저지른 환경오염과 노동자 건강문제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해 영국,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한국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기업을 감독하거나 제어하기는커녕 규제를 완화해주고, 노동자와 지역 주민들의 문제제기에는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정부의 모습 또한 유사하다. 반도체 산업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이러한 태도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반도체 등 전자산업의 성격에 기인한다. 전자산업에서 기술개발 이후 생산과정은 노동집약형 산업이기 때문에, 고도로 유연화 된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반도체산업에서 생산직 노동력의 다수는 젊은 여성들이다. 연령과 성별의 위계에서 하위에 위치한 이들은 자신의 작업환경에 대한 고민이나 불편함, 건강상의 문제점 등을 드러내거나 문제의 개선을 요구하는 데 여러 어려움이 따른다. 또한 아시아 개도국 대부분이 노동자의 건강을 보호하는 제도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화학물질 관리에 대한 법이 상대적으로 부실하고 법의 집행 역량도 취약한 실정이다. 각 정부가 새로운 성장 동력인 IT 산업을 자국에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보장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권리를 지키기가 어려운 것이다. 로버트 노이스 인텔 공동 설립자는 “노동조합이 없는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이 산업이 살아남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만약 우리가 노동조합을 허용한다면, 우리 기업들은 파산 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자산업의 경쟁력이 ‘무노조 무파업’에 있다는 외국 기업주들의 이야기는 무노조 정책을 고수하는 삼성과 닮아있다. 반도체 기업들은 규제가 없고, 값싼 노동력이 있는 곳으로 계속적으로 이동하면서 환경을 오염시키고, 무노조 정책을 고수하며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짓밟고 있지만, 기업은 물론 해당 국가에서도 이를 은폐하고 무마하기 바쁘다. 기업들은 이윤을 쫓아 규제가 약한 곳을 찾기 위해 국경을 넘나든다. 따라서 이 문제는 한 지역이나 한 국가에서 해결한다고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은 ‘세계화’하여 민중들의 삶과 건강을 파괴하고 있으며, 국경을 이동하면서 더욱 치밀하고 강도 높게 파괴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는 어느 개인, 특정 국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노동자 민중들의 공통적 이야기다. 또한 반도체 산업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 부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다. 국경 없는 자본은 국경 없는 직업병과 환경파괴를 만들었다. 이는 자본의 이윤창출 욕구와 신자유주의 구조 하에서 발생하는 공통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응 또한 국경을 넘어 국제적인 연대와 공동의 투쟁이 되어야 한다. 현재 아시아감시정보지원센터(Asia Monitor Resource Centre, AMRC),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 캠페인(International Campaign for Responsible Technology, ICRT),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Supporters for Health and Right of People in Semiconductor Industry, SHARPS), 대만 지구공민기금회(Citizen of the Earth Taiwan, CET) 등의 전자산업 관련 환경/노동보건/노동운동 단체들은 전자산업의 노동안전보건, 환경안전보건 행태를 변화시키고, 자본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네트워크를 구성 중이다. 국경 없는 직업병과 환경파괴 문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임을 폭로하고 함께 투쟁해야 한다.
K2코리아 지회 조합원 인터뷰 K2는 잘 나가는 회사다. 원빈을 비롯한 연예인들이 광고도 하고, 아웃도어 찾는 사람들도 많아 이름만 들어도 알 만큼 유명한 회사다. 영업 실적도 매우 좋다. K2는 국내 아웃도어 브랜드 3위 기업으로, 작년 매출액이 4,000억 원을 넘었고 올해 매출액은 5,000억 원을 넘을 것이라고 한다. 작년 사장 일가는 100억 원의 배당금을 챙겨갔다. 하지만 잘 나가는 회사의 제품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노동조건은 형편없었다. 10년을 일해도 임금은 100만 원 남짓했다. 번듯하게 지어 올린 회사 건물에는 냉난방시설이 잘 갖춰져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지만, 생산부서가 있는 4층과 5층은 제외되었다. 에어컨도 난방시설도 없었다. 더위를 참다못한 노동자들이 집에서 선풍기를 들고 왔고, 겨울에는 내복을 두 장씩 껴입으며 일했다. 환풍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먼지가 풀풀 날리고 본드 냄새가 공장안을 가득 메워 눈이 아프고 목이 아팠다. 회사의 규모와 이미지를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울정도로 노동조건이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하게 일했는데, 노동자들에게 돌아 온 것은 정리해고였다. 쥐꼬리만한 임금 주면서 인건비 아끼겠다고 인도네시아에 생산 공장을 세워서 노동자들을 내쫓는 회사, 노동자를 헌 신발짝 취급하는 회사가 노동자를 분노하게 했다. 분노한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에 맞서 투쟁에 나선지 벌써 100일이 훌쩍 넘었다. 봄이라 따뜻해 투쟁하기 좋다던 회사 앞마당 농성장에는 어느덧 무더위가 찾아오고 있었다. 한 낮의 더위가 물러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저녁 무렵, 『사회운동』은 농성장에 모여 있는 노동자들을 만나러 갔다. 여성노동자가 절반이 넘는 사업장이라 40-50대 여성조합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 했지만,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야기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 글은 전국민주화학섬유노동조합 K2코리아 지회 최영애, 김은희, 김선자, 마은아, 방진주 조합원의 인터뷰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관리자의 횡포 “알고 보니까 나보다 늦게 들어온 동료가 나보다 월급이 13만 원이나 더 많은 거예요. 아무리 내가 미워도 그렇지 임금가지고 장난치면 안 되는 거라고.” 10년 넘게 일한 노동자의 임금이 100만 원 남짓하다는 얘기에, 터무니없이 낮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떤 방식으로 임금이 인상되는지 물어봤더니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회사에서 사장은 매년 노동자들의 임금을 5%씩 인상해서 책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장이 책정한 임금을 관리자에게 넘겨주면 알아서 분배하는 시스템이다. 문제는 관리자가 임금 지급권한을 가지고 장난질을 친 것이었다. 근속이 오래된 노동자라고 하더라도 상무에게 밉보이면 임금을 올려주지 않고 잘 보인 사람은 근속과 상관없이 더 많이 줬다. 노동자들도 관리자인 상무가 임금인상을 자의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격차가 심할 줄은 몰랐다고 한다. 투쟁이 시작되고 나서 조합비를 걷으려고 급여명세서를 모으다 알게 된 사실이었다. 상무에게 물질적인 것을 제공하는 것은 노동자들 사이에 관행처럼 굳어 있었다. 직접 선물을 하거나 물건을 경비실에 맡겨뒀으니 찾아가라고 말하는 동료들도 있었다고 한다. 상무는 이러한 사실을 감추려 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놓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예전에 공과 사를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상무에게 말한 적이 있어요. 관리자 냉장고에 양파즙을 언제나 꽉꽉 채워놓는 언니가 있었거든. 그 언니는 양파즙 값 월급에서 받아야겠다고 동료들 끼리 농담조로 얘기 하곤 했지. 그런데 한 두 번이 아니 길래 상무에게 따졌어요. 여러 동료들이 관리자들한테 선물하고 있는데 그게 임금에 반영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겠냐는 취지로 말이에요. 개인에게 고맙고 그러면 밖에 나가서 밥이라도 사주거나 하면서 감사의 표시를 하면 되지, 똑같이 일한 사람들에게 차별해서 임금을 지급하면 어떻게 하냐고 그랬어요. 입바른 소리하며 따졌더니 상무가 나한테 당신도 그렇게 하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그러는 거야. 노골적으로. 내가 이런 식으로 입바른 소릴 많이 했더니 내 월급은 너무 짜.” 상황이 이렇다보니 외출 조퇴 결근 없이 성실하게 일한 시간이 억울한 정도였다. 한 조합원은 A형 간염에 걸려서 3주 입원했더니 그해 임금이 2%만 올랐다고 한다.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몸도 제대로 못 추스르고 곧바로 일을 시작했는데도 그랬다. 반면 해외여행 간다고 며칠씩 휴가 낸 사람 중 임금이 7-8% 오른 동료도 있었다. 해외에 놀러갔다가 돌아오면서 관리자에게 선물을 사다주었기 때문이다. 아파서 병원 가는 것은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자신에게 선물이 기대되는 해외여행은 반기는 관리자의 치졸함에 노동자들의 분노가 대단했다. 다른 사례들도 쏟아져 나왔다. 상무는 뇌물을 챙기는데 있어 노골적인 것뿐만 아니라 매우 주도면밀했다. 그리고 뇌물 요구에 응하지 않는 직원들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면박주기를 서슴지 않았다. “상무가 회사 직원들 가족관계나 인적사항을 아주 꿰고 있더라고요. 내가 입사할 때 남편이 휴대폰 대리점을 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 뒀다가 1년 뒤에 나한테 와서 느닷없이 휴대폰 바꿀 때가 된 것 같다고 넌지시 말하더라고요. 나한테 새 걸로 해달라는 거지. 나는 그러든지 말든지 내버려 뒀어요. 아부 떨고 그런 거 못하거든. 그랬더니 매사에 꼬투리를 잡아 갈구는 거야. 말도 안 되는 거 가지고 트집 잡고. 보다 못한 주변 동료들이 핸드폰 그냥 해줬으면 욕도 안 먹고 급여도 올랐을 텐데 왜 버텼냐고 그러더라니까.” 이처럼 상무가 자의적으로 임금을 책정하는 행태는 노동자들끼리 충성 경쟁을 하도록 만들고, 결국 내 임금이 오르면 다른 동료의 임금이 줄어드는 상황을 초래하게 했다. 노동자들은 정확하게 사태를 인식하고 있었다. “이건 결국 다른 동료 월급 뺏기랑 같은 거예요. 에어컨 없이 땀 뚝뚝 흘리면서 다 같이 고생하는데 다른 동료 돈을 더 뺏어 먹겠다고 아부 떨고 그렇게 하냐고.” 상무는 권력을 빌미로 뇌물을 요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여성노동자들에게 찝쩍대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번에 투쟁하면서 직장 내 성희롱으로 상무를 고소하려 했는데, 피해 당사자들이 나서지 않아서 별 수 없었다고 한다. 찝쩍댄 여자가 한 두 명도 아니고, 상무가 그러고 다니는 것을 다들 뻔히 아는 사실인데 물증이 없어서 성희롱으로 성립이 안 된다는 사실에 조합원들은 분해했다. “얼굴이 반반하다 싶으면 찝쩍대는 거예요. 상무가 월급을 조절하는 권력도 있고 하니, 거기에 넘어가는 여자들도 있고. 신랑이 외국에 나가거나 출장을 장기간 간다 싶으면 찔러보고.” 직장 내 성폭력의 전형적인 사례다. 여성 노동자보다 직급이 높은 상사가 자신의 권한을 가지고 여성들에게 성적인 요구를 하고, 불이익이 돌아올 것을 염려해 거부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투쟁을 계기로 뇌물에서부터 성적인 요구까지 해온 관리자의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철회와 더불어 관리자의 행태를 바로잡는 것이 노조의 중요한 요구라고 했다. 꼼수를 부리는 회사 6월부터 인도네시아의 K2 신발 공장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회사는 5월 31일까지 명예퇴직을 받고 신발생산부를 폐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명예퇴직을 거부한 조합원들에게는 전환배치를 공고했다. 개성공단을 비롯하여 매장판매직 등으로 조합원들을 뿔뿔이 흩어놓는 배치 안이다. 그러나 노조는 사측의 전환배치 안을 거부하고 생산라인 일부 유지와 신발 A/S부서 배치를 요구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5월 말에 파업에 돌입해서 지금까지 투쟁하고 있다. 회사의 전환배치 안을 거부한 이유를 물어봤다. “일자리 제대로 마련해 놓고 전환배치 얘기 했으면 우리가 이렇게 파업도 안 해요. 회사가 꼼수 부리는 거 뻔히 알고 있으니까 파업하는 거지. 회사는 우릴 밀어내려고만 하지 어디에다 앉힐 생각이 없는 거예요. 정리해고라고 하면 언론에 이미지 나빠지니까 전환배치라고 하긴 하는데 속셈은 다른 것이거든.” 사실 3월 8일에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를 통보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노조를 설립해 저항하고 언론에서 관심을 갖자 말을 바꿨다. 정리해고가 아니라 전환배치라고 말이다. 하지만 사측이 제시안 전환배치 안은 가관이었다. 지방으로 전근 가는 것도 부담스러운 40-50대 노동자들에게 말도 통하지 않는 인도네시아로 가라는 내용이 담길 만큼 진정성이 없었다. 이에 노조는 회사가 전환배치라고 말만 바꿨을 뿐 사실상 정리해고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며 맞섰다. 투쟁이 계속되면서 회사는 조합원들을 회유하며 흔들었고 포기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명예퇴직해서 위로금을 받고 나간 사람들도 있었고, 전환배치를 수용해 대기발령을 받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대기발령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회사의 본심이 드러났다. “회사 연락을 기다리다가 언제부터 일하냐고 물어보러 찾아갔대. 그러니까 회사에서 답답하면 개성공단이라도 가서 바람 쐬고 오라고 했다는 거야. 결국 그 사람이 사표 쓰고 나왔어요.” 애당초 일을 시킬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 기다리다 지쳐서 나가줬으면 하는 회사의 태도를 보고, 결국 대기발령을 받은 노동자가 사표를 쓰고 나온 것이다. 회사의 태도는 요지부동이다. 교섭에 나와서는 진전된 안을 제시하지 않고 시간끌기로 일관하고 있다. 반면 투쟁이 길어지자 조합원들이 지쳐서 포기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조합원들이 자꾸 떠나가면 회사에서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바라는 대로 될 거라고 생각할거에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쟁취하려면 단결하는 게 제일 중요하지. 사람들이 자꾸 나가면 안타까워요.” 처음으로 만든 노동조합, 처음으로 회사와 벌이는 투쟁, 완강한 회사의 태도, 조합원들의 동요 등 쉽지 않은 조건이지만 K2 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단결이라는 구호로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노동조합 하면서 [ ]가 제일 속시원했다! 어려운 조건이지만, 투쟁을 지속하게 힘을 주는 속 시원한 기억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관리자의 횡포에 대한 분노가 컸던 만큼 상무에게 대항했을 때라고 답하는 조합원이 있었다. “교섭할 때 어떤 개새끼 하나 때문에 월급 차이가 이렇게 날 수 있냐고 말하면서 임금 명세서를 집어 던진 적이 있어요. 그리고 용역이 우리 조합원 때려가지고 병원에 입원한 날 상무가 마침 현장에 나타나서 열나게 혼쭐을 내줬지. 왜 그러냐고 하길래 그럴만한 짓을 하니까 그러지라고 했어.” 지난달 조합원들과 회사에서 고용한 용역들 간에 충돌이 있었다. 조합원들은 매일 하던 대로 선전물을 가지고 공장에 들어서려는데 용역들이 막아서며 도발을 해 발생한 일이었다. 조합원들은 실신하거나, 발등이 으스러져 수술까지 받아야 하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갖은 횡포를 휘둘렀고, 이제는 생산부 폐지에 앞장서는 상무가 등장하자 노동자들의 분노가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조합원은 노동조합이 단결하면 사측과도 싸워볼만하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했을 때 속이 시원했다고 한다. “강남역에서 행사 할 때 무대 위에 빨간 조끼 입고 올라서 항의했어요. 행사 진행이 안 되는 걸 보면서 우리도 이렇게 힘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니까 통쾌하더라고요.” K2는 4월에 강남역에서 유명 연예인을 동원해 아웃도어 상품 홍보 행사를 개최했다. 노동자들은 회사의 화려하고 세련된 이미지 아래 숨겨진 추악한 정리해고 만행을 알리기 위해 현장에 찾아간 것이다. 결국 행사가 진행되기는 했지만, 예정 시간보다 지연되었고 조합원 중 한 분은 무대 위에 조끼입고 머리띠 두르고 올라가 노래도 한 곡 시원하게 불렀다고 한다. 시민들이 K2 투쟁의 정당성에 대해서 수긍하고 지지할 때에도 힘이 난다고 했다. K2조합원들은 일상적으로 서울 각지의 매장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각자 살기에 바쁜 시민들이 관심을 잘 가져주지 않을지 모른다는 우려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응원하는 시민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떤 분은 자기가 노동부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부당한 일에 힘 좀 써달라고 부탁해 보겠다면서 명함도 주고 갔어요. 홈페이지 있냐고 묻는 분들도 많았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도 회사를 욕하더라니까요.”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마지막으로 『사회운동』독자들에게 보내는 말씀을 부탁드렸다. “한일병원 노동자들은 10명이고, 용역직인데도 그렇게 싸워서 이겼잖아요. 어떤 데는 회사가 망해서 없어도 투쟁하고, 교섭 대상이 없어도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처럼 잘 나가는 회사랑 싸우는 게 뭐가 힘드냐 싶기도 해요. 포기하지 말고 똘똘 뭉쳐서 끝까지 싸울게요.” “투쟁을 시작하고 나서 많은 연대 단위들이 K2 투쟁현장을 찾아왔고, 우리도 밖으로 나가 연대투쟁을 하게됐어요. 그 전까지는 몰랐었는데, 우리처럼 싸우고 있는 노동자가 정말 많더라구. 광화문이고 서울역이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넘쳐나. 다 같이 연대투쟁해야지.” “오늘 집회에서 우리랑 연대투쟁하러 온 노동자랑 똑같이 빨간 조끼 입고 집회 하니까 전부 우리 식구처럼 보이고 많아 보이잖아. 그래서 나갔던 동료들이 다시 돌아 온 것 같아서 흐뭇했어요. 함께 연대합시다.” “투쟁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지 직접 해본 적은 없어서 몰랐는데, 정리해고 당하고 탄압받고 하니까 힘들고 속상하고 그렇더라고요. 그래도 즐기면서 투쟁해야 길게 가겠다 싶더라고. 내 마음이 힘들면 우울증도 오게 생겼어요. 교회가면 외톨이가 된 거 같아요. 교회 사람들은 사정을 모르는데 내가 일일이 얘기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니까 내 자신이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웃으면서 즐겁게 투쟁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곁에서 맞장구치던 동료 조합원이 김진숙 지도위원의 교육에서 들었다는 구호로 인터뷰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인터뷰에 열정적으로 응해주신 K2코리아 지회 최영애, 김은희, 김선자, 마은아, 방진주 조합원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을 시작하며 비정규직 백화점이 되어버린 학교 “처음으로 월급에 숫자 1이 찍혔어요. 이 월급명세서 코팅 좀 해다 주세요. 집에 붙여놓게.” 학교에서 10년간 조리사로 일한 한 조합원이 웃으며 말한다. 그녀의 환한 웃음 뒤에 맺힌 피멍과도 같은 현실이 아파 가슴이 먹먹해진다. 20년 전부터 ‘일용잡급직’으로 존재하다가, 이제는 학교회계에서 임금을 지급한다고 하여 ‘학교회계직’이라 불리는 사람들. 교사, 공무원과 달리 호봉이 인정되지 않아 1년 일한 사람이나 10년 일한 사람이나 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 학교 홈페이지에 뜬 신규채용 광고를 통해 계약해지를 받아들이게 되는 사람들. 그녀들의 이름은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다. 전국 유치원, 초중고등학교에는 15만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직종만 50여 개에 달한다. 학교급식을 책임지는 영양사조리사조리원, 과학실험실의 숨은 일꾼인 과학실험실무원, 도서관의 체계적인 운영을 담당하는 사서, 학교 주요 공문 접수 및 민원처리를 담당하는 교무행정실무원, 장애학생의 교육을 지원하는 특수교육실무원, 저소득층 및 맞벌이 가정의 학생들을 위한 돌봄강사, 방과후 강사, 학교폭력예방과 정서교육을 담당하는 전문상담사 등이 모두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고,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고 가르치는 학교. 바로 그 학교가 차별을 양산해내고 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인 2월은 이른바 “해고 시즌”으로 불린다. 계약기간 만료를 근거로 무기계약을 회피하는 사례가 다수다. 멀쩡히 일하다가 “공정한 경쟁” 운운하며, 신규채용 절차에 필요한 서류를 가져오라는 말에 어리둥절해하다가 결국 해고통보를 맞이하게 된다. 무기계약이 되었다 해도 안심하기엔 이르다. 정부에서는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으로 분류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교과부와 교육청 등에서 해당 사업예산을 삭감하면 자연스럽게 퇴사권유를 받게 된다. 임금 항목이 별도로 책정되어 있지 않고 사업예산에서 노동자의 임금을 지급하는 구조다 보니, 사용자 측에서는 예산부족을 핑계로 해고하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쉽다. 상시적 고용불안은 노동자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감마저 상실하게 한다. 교직원 간의 불화를 이유로 재계약을 거부당한 조합원과 함께 학교에 원직복직을 요구하러 간 적이 있었다. 2년 가까이 일한 노동자를 일방적이고 주관적인 평가기준으로 해고하는 것에 대해 부당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런데 오히려 학교장은 너무나 당당하게 “내가 알아서 다 잘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걸 못 믿고 노동조합을 불러오냐”고 조합원을 향해 다그치기 시작했다. 교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합원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기 시작했고, 노동조합 측에서 요구안을 제시하는 내내 그랬다. 심지어 교장과의 면담이 끝난 이후에도 멈출 줄 몰랐다.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다행히 해고는 막았지만 그것이 문제의 해결일까, 찜찜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수한 사례가 아니다. 조합 사무실로 걸려오는 상담 전화 중 99%는 익명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학교명을 알려달라고 해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나마 노동조합에 문의를 해 오는 경우는 다행이다. 끙끙대며 혼자 설움을 겪고 있을 이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8년간 초과근무수당을 단 한 번도 지급하지 않은 학교, 노동절에 일을 시키고도 돈은 줄 수 없다고 우기는 학교. 진짜 문제는 이런 일들이 밖으로 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동조합에 가입은 했지만, 차마 학교장과 싸울 엄두는 내지 못하는 상황을 어떻게 말로 설명해야 할까. 도대체 누가 그녀들을 이런 상황으로 내 몰았나. 도대체 무엇이 그녀들을 고개 숙이게 하는가. 헌법에 보장된 노동3권,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한 기본권은 왜 허용되지 않는가. 관리자의 협박 한 번에 덜컥 겁이나 단체로 노동조합 탈퇴를 ‘애원’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의 영혼까지 바싹 말라가는 기분이다. 성장하는 신규 노동조합, 성과와 극복해야 할 과제 노동조합에 가입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공동의 요구를 통해 어떤 싸움을 해야 하는지 알 때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으로 뭉친다. 2009년 교육감 선거를 기점으로 처우개선에 대한 기대는 일정하게 커져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거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조직화 성과로 이어졌다. 물론 노동조합다운 활동과 현장 대응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노동자로서 의식 향상과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노동조합에 가입 안한 사람들도 혜택은 똑같이 받는데 뭐 하러 노동조합에 가입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 “노동조합원들의 이해만 챙기겠다.”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에 돈을 내면 자동으로 처우개선이 자판기 커피 뽑듯 나오는 줄 아는 현실, 언제든 달려가는 서비스센터처럼 인식되는 현실을 극복할 방법은 현장과 일상에 노동조합 활동을 뿌리내리는 것일 테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고민은 ‘진보교육감’이 당선된 지역 노동조합에서 더욱 커지고 있다. 교육감이 직접 각종 처우개선에 앞장서면서,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매개로만 역할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생기고 있다. 투쟁 없이 조직된 노동조합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성장하지 않는다. 투쟁을 통해 하나하나 쟁취해가는 지역에서 노동조합 가입률이 급증하고 있는 것에 비해, 면담 한 번으로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지역의 노동조합의 가입률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런 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교육기관으로서, 사회에서의 자기 역할을 긍정하게 만드는 공간으로서 노동조합의 역할을 적극 확대하고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의 가치와 평등하고 자유로운 관계에 대한 열망을 실현해가는 기본 단위로서 노동조합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앞서 말한 노동자들의 침묵과 굴종을 조금씩 깨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복수의 노동조합. 그러나 민주노조답게 단결하자 지난 4월,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그녀들이 저임금과 불안정노동, 권위주의와 부당한 차별에 맞선 싸움을 선포했다. “교육감 직고용, 호봉제 도입, 정규직과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적용, 전 직종 고용안정”이라는 요구를 걸고, 16개 시도교육감을 상대로 첫 임단협 쟁취 투쟁에 나선 것이다. 학교단위로 학교장과의 개별교섭이 이루어진 몇몇 사례가 있었지만, 시도교육청을 상대로 집단적이고 전국적인 교섭요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른바 ‘진보 교육감’이 있는 강원, 경기, 전남, 광주에서 학교비정규직의 교육감 직접고용을 쟁취하는 성과를 이루면서, 교육감 사용자성을 인정받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전국적 투쟁전선은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번 교섭은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직종 및 업무의 다양성과 개별화되어 있는 현장의 조건을 넘어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단일한 요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복수로 존재하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조합들도 과도한 경쟁을 지양하고,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전체의 단결을 위해 지혜를 모아나가는 중이다. 교섭투쟁을 앞두고 공공운수노조(전회련 학교비정규직본부, 지역지부 학비지회)와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그리고 전국여성노동조합은 ‘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를 구성하여 공동투쟁 결의를 모았다. 교섭요구 공문도 연대회의 이름으로 발송하고 있으며, 공동협약서를 만들어 투쟁의 기본원칙에 대해 합의하고, 세 조직 교섭위원들의 전국 공동연수를 추진하는 등 합력을 키우기 위한 다양한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 6월 23일에는 연대회의 주최로 전국에서 약 6,000여명이 모인 학교비정규직노동자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간 조직편제를 둘러싼 갈등에도 불구하고, 큰 뜻을 모아가는 모습은 매우 소중한 성과다. 그러나 서울의 경우 연대회의 참여를 거부하고 단독 교섭을 추진하는 일반노조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서울 일반노조는 총연맹의 중재와 연대회의 차원의 여러 제안들을 계속 거부하면서, 교섭대표 노조 결정을 위해 지방노동위원회까지 가는 상황을 기어이 만들고야 말았다. 민주노조 공동투쟁의 의미를 훼손한 부끄러운 일이다. 자본과 정권이 만든 복수노조의 함정에 스스로 빠져버리는 이런 현실로 인해 실망한 조합원들이 한 둘이 아니다. 또 다른 지역에서도 근거 없는 타 노조 비방, 조합원 빼가기 등 문제가 발생하여 연대회의가 조정에 나섰다. 과도한 조직화 경쟁과 무원칙한 관행으로 인해 공동투쟁이 와해되지 않도록 단결과 연대라는 민주노조운동의 원칙 속에 연대회의가 중심을 바로잡아야 할 때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역의 투쟁으로- 충북지역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편, 연대회의 공동운영위원회는 6월 27일부터 전국적인 쟁의행위 찬반투표 돌입을 선언했다. 쟁의행위 찬반투표 결과에 따라 하반기에는 전국적인 단체행동에 돌입할 수도 있다. 실제로 파업이 조직될 경우, 그 파장이 얼마나 클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학교급식에 차질이 올 것이고, 교무와 행정업무가 마비될 것이며, 교사들도 수업진행의 어려움을 호소하게 될 것이다. 정부와 보수단체 그리고 언론에서는 즉각적인 여론 공세에 들어갈 것이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주체 역량만으로 버티기에는 쉽지 않은 싸움이다. 각 학교별로 산개되어 있고, 직종별로 다양한 조건에 놓인 학교비정규직의 특성상 대규모 파업 시 개별 조합원에 대한 압력이나 회유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또한 급격하게 조직률이 증가한 데 비해 실제 학교 현장에서의 대응력이나 조직력이 그에 미치지 못할 경우, 현장에서의 싸움은 일정한 한계에 부딪힐 수 있다. 때문에 총연맹 지역본부와 산별노조 지역본부가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엄호하고 상승시키기 위해 나서야 한다. 지역사회의 이해와 지지를 끌어내고, 폭넓은 연대투쟁을 조직하여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싸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해야 한다. 전회련본부 충북지부는 7월 2일부터 교육청 앞에 천막투표소를 설치하고 직종별 집회를 릴레이로 이어가며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진행할 것을 결의했다. 우리의 사용자는 교육감임을 분명히 하고, 개별화 되어 있는 현장을 하나로 모아 힘 있게 투표를 성사시키기 위함이다. 이런 투쟁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역본부도 발 빠르게 나서고 있다. 지역 총파업을 조직하기 위한 현장간부 간담회를 학교비정규직 투쟁일정에 맞추어 제안하고, 7월 13일 지역 총력투쟁 계획을 학교비정규직 투쟁과 맞물리게 할 계획을 수립하는 등 천막 설치 및 이후 투쟁계획에 대해서도 긴밀하게 논의하고 공유하고 있다. 전교조, 공무원노조, 공공운수노조 학교비정규직 단위가 함께 모여 구성한 <충북교육노동조합 연석회의> 역시 큰 지원군이 되어 줄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초 합동 간부 교육을 진행하고, 이번 달에 서로의 이야기를 담은 공동 신문을 발행하는 등 이해와 연대의 수준을 높여가고 있다. 사실 이러한 소통구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개별 조직, 산별 업종본부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중요한 사업에 대해 일상적으로 지역본부와 공유하는 가운데 형성된 것이다. 지역연대의 중요성을 현장에서부터 실천해 온 충북지역 운동의 건강한 기풍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민주노총 지역본부의 지침에 따라 각 노조에서 보내온 이기용 충북도교육감의 교섭촉구 서명용지가 매일매일 책상 앞에 놓이는 것을 보며, 지역운동의 희망을 발견한다. 지역운동 안에서 현장 노동자들과 간부들의 성장이 담보될 수 있도록,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에 새로운 활기를 부여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교류의 장을 만들어야겠다. 노동조합이 희망이다 어느 선선한 저녁, 길을 걷다 “이제서야 노동조합이 뭔지 조금 알겠다. 호봉제도 좋지만, 노동조합이 더 소중한 것 같다.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우리는 편하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매번 싸워야 되는 거냐.”고 한숨 쉬면서도 누구보다 절실한 마음으로 투쟁에 임하는 “최강 충북”의 지부장 및 임원들, 뜨거운 여름, 추운 겨울을 가리지 않고 집회 현장에 나와 “투쟁!”을 외치는 조합원들. 그녀들과 함께 이제 진짜 싸움을 시작한다. 어느새 동지라는 말도 하게 되고, 원피스를 입고 아스팔트 바닥 위에 앉는 것도 자연스러워진 그녀들과 지내며, 노동조합이야말로 노동자들의 희망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있는 중이다. 당당한 노동자로서 살아간다는 것,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남들 앞에 나선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변화인가를 느끼게 된다. 올 해, 우리는 투쟁 속에서 또 한 단계 성장할 것이다. 그것이 직접적인 성과로 이어지든 아니든, 그녀들이 노동조합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기를 기대해본다.
7시가 넘어서야 퇴근하고 어린이집을 나서는 보육노동자를 부른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놀란 보육노동자에게 먼저 말을 건넨다. “보육노조입니다. 최근 국공립어린이집 보육교사 실태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2011년 7월부터 실시한 주 40시간 적용, 시간외수당, 휴게시간 등 근로기준법 상의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서 간단하게 질문을 해보지만 역시나 거의 지켜지지 않는다. 보육노동자를 위한 선전물, 설문지, 기념품을 건네주고 돌아온다. 공공운수노조 보육협의회는 2012년 보육노동자 전락조직화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부산에서는 2012년 5월부터 부산시 국공립어린이집 보육노동자를 대상으로 현장방문, 실태조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앞으로 우편물선전, 현장노동자 모임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보육노동자의 목소리가 빠져 있는 무상보육정책 2012년은 최근 어느 해보다 보육이 이슈가 되었다. 그 한 중심에는 무상보육정책이 있었다. 공공운수노조는 그동안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고, 부모들이 안심하고 맡기고, 보육노동자가 행복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직접 마주하는 보육노동자의 처우가 개선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부가 매년 발표하는 보육정책 어디에도 보육노동자를 위한 고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정부는 보육시설을 운영하는 시설장과 보육서비스를 이용하는 부모를 위한 정책만을 만들어내고 있다. 2012년 정부는 무상보육을 실시하였다. 무상보육은 총대선을 염두에 둔 정부의 명백한 퍼주기식 정책이었으며, 충분한 검토나 안정적인 예산 마련 없이 시작한 사업이었다. 예상대로 무상보육의 위기는 시작과 동시에 각 지자체의 예산확보문제로 드러났다. 2012년 3월 29일 각 지자체에서는 지자체예산이 없으므로 정부에서 지원해야한다는 공식입장을 기자회견을 통하여 발표하였고, 연이어 6월에는 지자체 예산 문제로 무상보육을 더 이상 시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6월 3일 정부는 무상보육 중단이라는 사태를 막기 위하여 국고지원을 하기로 하였다. 또한 무상보육정책은 민간시설연합회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보육시설을 운영하는 민간시설연합회는 어린이집 집단 휴원을 하겠다고 하였다. 민간시설연합회는 보육교사의 처우개선을 위해서 집단 휴원을 단행한다고 했지만 집단 휴원 사건을 통하여 민간시설연합회가 얻어낸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0세~2세 영아에게도 특별활동 허용 및 특별활동비 수납가능, 보육료 등 필요경비 수납 금액 중 자율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일반관리비 한도 증액, 기타운영비(건물 임대료, 감가상각비, 건물 융자금의 이자, 차량할부금 등) 한도 증액 등 보육시설을 운영하는 시설장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무상보육정책을 둘러싸고 정부와 지자체, 부모와 시설연합회간에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보육노동자의 노동환경은 보육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보육노동자의 실질적 처우개선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보육노동자와 노동조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보육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노조 조직률 보육노동자는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 보육시설은 대부분 부모가 출근을 하기 전에 아이를 맡기고, 퇴근을 하고나서야 아이들을 데려가기 때문에 보통의 사업장보다 운영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보육시설에서는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안전과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보육노동자는 한시도 아이들에게 눈을 뗄 수가 없으며 점심시간마저도 아이들의 식사를 지도하는 중요한 일을 해야 하기에 쉴 틈이 없다. 따라서 보육노동자는 보육시설에서 휴게시간도 없이 9~10시간 노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보육노동자의 처우는 열악하기만 하다. 시간외수당, 연차수당 등 법정수당조차도 보장받지 못한다. 자신의 정당한 요구를 주장하거나 부당하게 운영되고 있는 보육시설에 대한 언급을 하면 단 한마디의 말로도 해고를 당하기도 한다. 시설장들 사이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한국보육교사회에서 전국보육노조로, 공공운수노조 보육협의회로 이어지는 보육노동자의 노동조합은 전국 각지에서 보육노동자의 처우개선과 보육정책 생산, 선전활동 등을 꾸준히 하고 있다. 하지만 보육노동자의 처우개선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보육노동자의 노조 조직률과도 관계가 있다. 전국적으로 15만여 명의 보육노동자가 있지만 노동조합 가입률은 낮고, 단체협약이 체결된 어린이집 역시 많지 않다. 희생과 헌신과 봉사를 강요받는 보육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현재 부산지역에서 단체협약이 체결되어 있는 어린이집은 단 한곳에 불과하다. 보육노동자들에게 이 어린이집에서 지급받지 못했던 연차수당을 받아내고, 시간외수당 및 휴게시간을 보장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은 ‘시에 가서 이야기 해 달라’, ‘이야기해도 안 들어 준다.’ 등의 반응을 보인다.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단체교섭을 통해 스스로 목소리 내어 노동환경을 바꿔내는 어린이집이 한두 군데만 더 있으면, 보육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보육현장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을 더욱 믿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번 보육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보육노동자 전략조직화, 보육공공성을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물론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보육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이 선정된 2012년, 공공운수노조 보육협의회는 지역에 있는 국공립어린이집을 대상으로 소식지, 선전물, 현장방문 등을 통하여 보육노동자가 노동자로서 보장받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권리들을 알려낼 것이다. 또한 보육노동자 스스로 용기를 내어 일어설 때만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보육노동자들을 만나고 설득할 것이다. 보육현장에서 보육교사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어야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라고, 부모도 행복하게 아이들을 맡길 수 있다. 그것이 보육공공성을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