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제국주의의 현재성 한국에서 '식민지'라는 용어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국권의 상실과 착취, 억압"이라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로 여겨졌고, 마땅히 청산되어야 할 과거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배"가 무엇이고 그것을 청산한다는 게 무엇인지는 그것의 가능성이 점점 사라져질수록 점점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식민지배 청산이 정치적 지평에서 사라지게 되는 과정은 물리적 탄압을 동반하는 철저히 인위적인 결과였다. 1947년 미군정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민족반역자에 대한 특별법> 인준을 거부했고, 1948년 설립된 반민특위는 '국회프락치 사건'을 거치며 경찰에 의해 습격, 해산 당했다. 또한 1961년 5.16 쿠데타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세력이 7월 <반공법>을 제정해 모든 사회운동 세력을 제거한 것은 쐐기를 박는 조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역사학계가 일제 강점기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조차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친일세력이 곧 반공세력으로 변신하거나 그들과 결탁한 상황에서 그 시기에 대한 연구 자체가 금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패망과 연합군의 승리, 대한민국의 건국은 식민지배 종식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고, 일본 식민지배의 실상과 그것이 한국사회에 남긴 광범위한 유산이 무엇인지 대해서 질문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물론 이러한 조건에서 몇몇 선구적인 인사들의 활동을 통해 대표적인 친일파 인사들의 행적에 관한 조사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졌다(이러한 활동이 현재 친일진상규명법의 모태가 된다). 하지만 식민지배 청산이라는 문제는 단지 식민지배에 앞장선 친일 인사에 대한 인적 청산에 한정될 수는 없다. 일제에 의해 이식된 사회구조의 모순 전반을 일소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친일파 청산에 관한 논란이 여야 정치세력 내부의 쟁점으로 이전된 상황에서, 우리는 식민지배 청산에 관한 더욱 광범위하며 본질적인 문제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 일본 제국주의, 일본 파시즘은 왜 등장했나? 식민지배/제국주의라는 팽창주의는 당대 자본주의 중심국가의 동일한 국가적 지향이었다. 멀리 볼 것 없이 동아시아의 경우도 이러한 세력들의 각축장이었다. 영국의 인도와 동남아 여러 국가들에 대한 지배,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 미국의 필리핀 지배 등등. 물론 식민통치 전략과 목표는 서로 상이했다. 이는 세계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식민모국이 처한 조건을 반영한 것이었다. 결국 동아시아에서 태평양전쟁으로 격돌하게 된 미국과 일본을 비교해 보자. 미국은 1898년 쿠바 수역에서 스페인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비밀리에 필리핀 마닐라만에 정박한 스페인 함대를 점령하고 결국 2천만 달러에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매입하여 병합하였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영향력을 뻗치고 있던 독일이나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미대륙의 양대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필리핀을 "예방점령"하는 계획을 은밀히 실행한 것이었다. 미국이 필리핀에서 팽창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실시한 정책은 미대륙의 서부팽창과 유사했다. 즉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연방정부가 외교적으로 개입하여 점령을 정당화하고, 군사총독을 임명하여 저항을 분쇄하고, 민정으로 이양한 후, 연방으로 편입하는 방식. 그런데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차이점이 있었다면 필리핀의 "자치화"를 내걸었다는 점이다. 이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강대국간에는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고, 약소국들에서 위임통치를 실시하여 그 기간 동안 자치주의를 이식하여 독립을 보장한다는 미국의 일반적인 대외전략으로 연장, 확대되었다. 그러나 물론 미국이 "시혜적인" 목적으로 실시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연방을 건설하는 과정 자체가 거대한 내부 식민지를 창출하는 과정이었고, 이것이 완료된 시점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판으로 "자치주의"의 동심원적인 확대가 미국의 안보가 가장 최상책이라는 전략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 자본주의가 영토주의적인 직접적인 지배를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즉 "자치주의"의 실현이 미국의 기업이나 투자가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과 양립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먼저 미국의 통치기간 동안 필리핀 내부의 사회경제적, 계급적 구조는 자본주의적 수탈구조로 재편되었다. 경제의 중추부가 수출용 환금작물 생산 위주로 재편되었고, 필리핀 소수의 대지주와 함께 미국의 투자가들이 농업생산이나 공장, 광산 사업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인민들은 여전히 토지에 의존해서 살아야 했지만, 가혹한 착취를 감내해야만 했다. 또한 1934년 이후 필리핀의 "자치화" 과정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만주사변 이후 필리핀의 영구중립화 추진. 2차대전 후 필리핀 군사기지 유지, 대 필리핀 투자에서 "내국인 대우" 요구 등등.) 이러한 미국의 필리핀에서의 "경험"은 2차대전 후 냉전 시기 대외 팽창주의를 실현하는 원형이 되었고, 멀게는 1945년 이후 한국에서나 가깝게는 현재 이라크에서나 공히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의 팽창주의가 겪은 길은 서로 달랐다. 일본은 1850년대 개항과 1860년대 명치유신을 겪은 후발주자였다. 일본은 "자강론"과 "진출론"이라는 지배전략 차원의 이데올로기를 적절히 배합하여 민족주의/국가주의를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북해도와 오키나와를 강점했고, 청일전쟁 후 대만과 조선의 식민화로 대외 팽창주의의 결정적인 계기를 맞이했다. 1930년대 만주사변을 거쳐 만주 지역을 점령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 전시동원체제, 천황 중심의 강력한 파시즘/전체주의 체제로 치닫게 되었다. 미국이 연방합중국이라는 거대한 내부식민지를 형성하는 과정에 비추어본다면 북해도와 오키나와 병합은 일본의 북문과 남문이라는 요충지를 획득했다는 것 외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왜소한 것이다. 따라서 "살찐 큰 제물"이 필요했고, 그것은 곧 위기에 처한 구제국 중국이었고 그 발판이 제국의 변방인 조선과 대만이었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가 된 것은 "위대한 일본국민의 해탈과 부활", "문명화를 위한 정복"이었고, 나아가 대만이나 조선에서 "민족동화"를 달성하겠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은 구상은 실현되기 매우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었다. 식민지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식민지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로 인해 "민족동화"는 먼 훗날의 일로 계속 미뤄지게 되었다. 오히려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전황이 악화되자 전쟁 동원을 위해 '민족동화'를 강제적으로 무리하게 추진하여 커다란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전쟁동원을 위해 "황국신민화" 즉 천황숭배, 애국심, 반-백인종주의 강요, 창씨개명과 함께 식민지에서는 유례가 없는 징병제 실시를 강행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동아시아는 두 개의 팽창주의가 대결했고,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그 영욕이 갈라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동일한 팽창주의 경쟁을 펼쳤으나 일본은 동아시아 각국에서 파멸적인 전쟁동원과 착취, 이에 대한 심각한 저항운동으로 인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사상누각의 붕괴로 이어지고 전시경제가 파탄나면서 패퇴한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거대한 내부식민지를 보유하고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혁신과 '고임금 체계'를 통한 노동운동의 포섭으로 무장하고, 대외적으로는 '민족자결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민족국가간 체계라는 외피로 기존 식민지의 민족해방운동을 포섭한 미국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일본의 팽창주의(식민주의/제국주의)는 다른 경쟁자들의 팽창주의에 비할 때 고유한 특징들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다른 경쟁자들과의 대결과정에서 점차 그 형상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팽창주의는 후발주자, 추격자의 팽창주의였고, 그만큼 상쟁하는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패색이 짙어질수록 팽창주의의 야수적인 면모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일본의 팽창주의에 대해 분노를 느낄수록 그러한 팽창주의를 낳은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쟁의 시스템과 그 후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국 팽창주의의 본질을 간파해야 한다. 둘째, 일본 제국주의는 청산되었나? 친일파 청산에 관한 국내에서의 논란이 가열차게 진행되는 와중에 일본에 방문한 노무현대통령은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를 포함해) "양국 간 과거사 문제에 대해선 내 임기 중엔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일본을 방문한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도 "친일진상규명법은 순수 국내문제이지 일본과 선린우호관계를 해치거나 이를 겨냥해 만든 것은 아니다"고 말하였다. 현재 정부, 여당이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만 막상 일본에게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국내 친일파 문제는 아직 청산이 안 됐지만 일본과의 문제는 이미 과거에 말끔히 해결되었다는 뜻인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한일 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될 때 당시의 문제를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5.16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가장 기뻐한 자들은 누구인가? 물론 당시 미국 CIA 부장 덜레스가 "나의 재임 중 가장 성공한 업적은 박정희 쿠데타였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미국은 "미국이 지지하는 정부는 장면 박사의 합법정부뿐"이라는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미군 사령관의 호언장담을 금새 바꾸어버리고 박정희 세력의 쿠데타를 승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수반란사건"의 주모자라는 좌익경력을 지닌 박정희 세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케네디 정부를 설득하는 데에는 일본의 공헌이 매우 컸다. 1961년 6월 19일 정상회담에서 이케다 일본수상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말했던 요지를 살펴보면 그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케다는 '일본에게 중국문제보다도 한국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일본을 겨냥하는 비수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한국이 공산화된다면 일본의 안보는 중대한 위협을 받는다'며 한국 내 정치상황에 일본의 발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쿠데타로 성립된 남한의 군사정권은 비록 민주적 정권은 아닐망정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합법정권이며, 반공체제를 견지시키기 위해서도 일본은 경제원조를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하루속히 국교정상화를 실현시켜야만 한다고 믿는다'며 박정희 세력이야말로 미국과 일본이 바라던 일본의 대한경제원조나 한일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점을 분명히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과 일본의 대한정책의 목표는 무엇이었나. 그것이 바로 이른바 '역코스' 정책이었다. 당시 미국은 냉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단지 일본이 과거 공업력을 복구하는 것을 넘어서 일본이 필요로 하는 원료와 시장을 확보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를 포함하는 동아시아 전체를 일본의 후배지로 제공해야 한다는 '역코스' 정책을 수립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연이 아닌 것은 그것을 추진하는 일본과 한국의 세력이 과거 만주 출신의 경험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이 박정희 정권의 등장에 환호성을 지른 것을 말할 때 당시 일본 정치의 핵심세력과 박정희의 만주군 인맥간의 과거 "인연"을 빼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 이케다에 앞선 전임 수상이며 정치스승 격인 기시 노부스케는 관동군 경력을 지닌 자로 만주국산업부 차장으로서 '만주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만주중공업회사'를 설립했고, 도죠 내각 때 상공대신으로 활약해 전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전후 미국이 낙점한 인물로서, 도죠는 처형됬지만 그는 무죄로 석방되어 철저한 친미파로 정치활동을 전개했고 1957년에는 수상에 취임하였다. 그는 수상 취임 후 한일 국교정상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러한 노력은 박정희의 등장으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의 당연한 귀결로서,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문제는 완전히 논외로 빠진 채 진행되었다.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말로만이라도 하는 "사과"도 전혀 없었고, "청구권" 문제만 논의되었다. 청구권이란 개념상 쌍방이 득실을 따져 서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다는 뜻이며, 일본은 자신이 지어준 공장, 철도, 교육 시설 등을 계산해서 받아내야할 자산으로 간주하였다. 다만 이러한 문제에서 일본이 "관대한" 태도를 보여 한국에 독립축하금 격으로 5억 달러 규모의 경제지원을 하는 것으로 매듭을 짓는 형식을 취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미국이 의도했던 것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미 1951년 미일 양국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 한국을 전승국에서 제외하는데 합의했고, 이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어떤 배상의 의무도 없다고 못을 박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일본의 식민주의/제국주의 청산은 일본 국내적으로나 대외관계의 측면에서나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팽창주의 경쟁에서 승리한 미국의 의도와 완전히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일본의 팽창주의를 자신의 헤게모니 아래로 복속시키면서 그들의 세계전략을 실행하는 하위 파트너로 적절하게 활용한 것이다. 노무현정부와 여당이 일본에게 할 말은 없다라고 한 것은 박정희 정권 이후로 구조화된 한미일 관계를 그대로 승인, 유지해 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식민주의/제국주의의 현재성 물론 이러한 현상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공통된 것이다.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그것을 인정하거나 나아가 배상에 임한 제국주의 국가가 있었던가? 어차피 그들의 주도로 짜여진 국제법 체계는 과거 군사적 강점과 병합을 포함하는 식민지배를 불법화할 수 있는 요소가 없고, 어떤 강제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오히려 과거 식민 지배를 경험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민중의 고통은 한없이 연장되고 있다.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과거 식민주의의 고통(인간의 노예화와 인신매매, 자연자원의 착취)과 그 연장선상에 산업적, 금융적 착취(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직접투자, 외채와 부패스캔들을 통한 이중적 착취)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제3세계에서는 외채탕감과 각 나라에서 과거 식민모국의 자본과 결택해 부정부패로 축재한 지배세력들의 재산환수, 공적개발원조 확대 등과 강제적인 구조조정과 일방적인 무역개방 압력 중단 등의 민중의 요구가 분출하고 있지만, 현재 G-7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들은 이를 완전히 묵살하고 있다. 결국 20세기를 거쳐 미국의 공식적인 세계전략인 "민족자결주의"는 실현되었지만, 식민주의/제국주의 지배의 고통은 더욱 강하게 제3세계를 속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로 연장되고 있는 식민주의/제국주의의 역사 속에서 한국은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식민주의/제국주의 문제는 박정희 이후 한국의 신흥공업국으로의 부상이라는 화려한 성과로 인해 그야말로 "과거사"로 치부되고 있다. 지배세력들은 국교수립 후 일본이 베푼 유무형의 경제원조가 한국 경제 도약의 발판이 되었고, 더 따져보면 일본이 식민지 시기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을 통해 농업을 근대화하고 근대적 공업을 이식하였으므로 이러한 경제발전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거다). 그리고 이는 박정희는 어두운 개인사를 지녔지만, 그것을 경제기적으로 승화시킨 지도자로서의 면모는 인정해야 하며, 박정희의 국가적인 경제개발계획이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이는 현재 분배 정의를 개선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친일인사 청산이나 박정희 정권과 그 이후 군사정권에서의 "공권력의 부당한 사용에 의한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으나, 박정희 정권 이후에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금과옥조로서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게 현재 정부와 주류적인 정치세력들의 견해다. 그러나 위와 같이 박정희 정권의 등장 이후의 한국사를 정당화하는 지배세력의 논리는 우리의 인식과 가장 첨예하게 갈리지는 대목이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냉전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발전주의"라는 당근을 제공했다. 특히 일본의 군국주의적인 지배구조와 재벌체제를 유지하며, 일본의 보호무역은 용인하면서 자국의 시장을 개방하고' 미국의 초국적기업이 직접적으로 진출하기보다는 일본의 억압적 국가와 재벌체제가 동거해 나가는 것을 용인했다. 일본의 배후지로 통합된 한국에서도 이러한 정책이 적용되었다. 한국은 냉전의 쇼케이스라는 다른 제3세계와 비교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발전주의의 예외적인 "수혜자"가 되었고, 발전주의의 성공을 선전하는 세계적인 모범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이 지속가능한 것인가? 1990년대 동아시아를 휩쓴 외채·금융위기는 동아시아의 고도성장 시대가 막을 내렸고,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언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른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를 통해 이용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통화와 금융전쟁을 수행하여 이 지역에서 국내 경제와 정치를 변화시키는 전략을 수행했다. 냉전 시기 정치-군사적 논리는 약화되고 초국적 법인기업의 금융적 팽창이 우선적인 목표로 전환되었다. 한국사회는 과거 발전주의의 시험무대가 되었던 것처럼, 미국 주도의 금융적 팽창을 위한 구조조정 전략의 가장 선도적인 시험무대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식민주의/제국주의라는 문제는 반공발전주의의 성공이라는 신화 속에서 굳이 다시 꺼내볼 필요가 없는 과거사로 간주하려는 지배세력의 노력에도 여전히 한국사회의 미래를 지배하는 현재적인 문제다. 그리고 그들이 그 사실을 부정할수록, 그들 자신이 제국주의 세력과 긴밀히 결탁되어있음을 반증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친일파 청산이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온 민중과 사회운동의 요구지만, 식민지배/제국주의라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이유다.
테러대책 운운말고, 당장 철군하라 ! 1. 알카에다의 2인자가 미국, 영국을 비롯한 파병국가들과 함께 한국을 대상으로 하여 공격을 촉구하는 내용이 알자지라에 방송된 이후 노무현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여는 등 테러대책을 마련한다는 명분으로 호들갑을 떨고 있다. 외교통상부는 모든 재외공관에 테러에 대비한 긴급지시를 내렸으며 법무부는 입국심사 강화 방침을 밝혔다. 2.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문제의 근본원인을 외면한 채 오히려 갈등을 더 부추길 수 있는 방안이다. 왜 그들이 공격을 촉구하게 되었는가? 전 세계가 더러운 침략전쟁이라고 하는 이라크 전쟁에 세계 3위 규모의 병력을 파견했기 때문 아닌가! 이라크 점령과 민중 학살에 한국군이 동참하는 한 그러한 위협은 피할 수 없다. 나아가 미국을 비롯한 모든 점령군이 철수하지 않는 한 이라크 민중과 무장세력의 저항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3. 테러대책이 부족해서 오무전기 노동자들이 피살당하고 김선일씨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니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민중들의 의지를 짓밟으면서 가진 자들만을 위한 국익과 한미 학살동맹을 추종하여 파병을 자행했기 때문이다. 폭력과 갈등을 조장하고 위험과 불안을 세계화시키는 것은 미국의 군사주의이며 소위 ‘테러와의 전쟁’이다. 그러나 이는 완전히 위선이고 기만이다. 무엇이 테러란 말인가? 미국처럼 첨단 군사무기로 무장하여 명분없는 전쟁을 벌이고, 그것도 모자라 수천 수만의 이라크 민중을 학살하는 것이야말로 테러 아닌가. 4. 더욱 심각한 것은 테러대책이라는 미명 하에 인권탄압이 자행될 수 있는 것이다. 법무부는 ‘반한(反韓)활동을 하는 불법체류 외국인’을 단속하겠다면서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활동을 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그들이 정부의 이주노동자 탄압정책에 항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단지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이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 혹은 그에 연계될 수 있는 범죄자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인권적이고 억압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즉각 단속 방침을 철회해야 한다. 5. 극단적인 폭력의 위험을 안방으로 끌어들인 것은 바로 파병을 강행한 노무현정부요 미국이다. 위협을 초래해놓고도 오히려 그들은 감시와 경계의 눈을 부라리고 통제에 따르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일어날 지 모르는 사태를 막기란 힘들다. 만약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정부는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경찰과 군대를 더 강화시키고 인권을 더 후퇴시키면서 즉자적인 복수심, 불안과 공포를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6. 더욱이 미국과 이라크 꼭두각시 정부가 내년 1월 이라크 총선을 그들의 의도대로 실시하기 위해 저항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 대해 대대적으로 ‘10월 대공세’를 펼치면서 희생자는 늘어나고 저항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아르빌의 자이툰 부대도 공격의 예외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자이툰 부대를 즉각 철수시키고 미국이 이라크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더 큰 재앙을 막는 첫걸음이다. 지금이야말로 이를 위해 평화와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철군과 점령종식을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할 때다. 2004. 10. 4
* 베이루트 국제 반전반세계화운동 전략회의 리포트입니다. 이 글은 참세상 뉴스 기사로 작성되었고 www.jinbo.net에 기사로 실려있습 니다.
9월 17-19일에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리는 '국제 반전 반세계화 운동 전략회의'에 '한국의 반전 반세계화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간략한 글을 제출하였습니다. 덧붙여 전범 민중재판 운동도 소개하면서 지지를 제안하였습니다. - 영문자료입니다.
전쟁과 폭력 종식을 위한 세계 민중의 연대를! 9.11 이후 3년, 세계는 더 불안해졌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 공격사건 이후 미국은 미국민들의 공포에 기반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했으나, 그것은 9.11과는 별 상관이 없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었다. 또한 국제적인 반테러전선을 세운다는 명분 하에 미국의 동지가 될 것인지 아닌지를 세계에 강요하여 군사행동에 나서게 하였다. 각 국에서는 경쟁적으로 '대테러법'이 제정되었다. 미국 국내에서는 '애국법'을 제정하고 '국토안보부'를 만든 결과, 반테러와 안보를 빌미로 광범위한 인권침해 행위가 합법화되었다. 공항의 안전검색이나 출입국 심사도 대폭 강화되어 아랍·아시아계 등 외국인에 대한 감시와 차별이 심해졌고, 무장한 경찰들의 검문검색은 미국 전체를 거대한 경찰 감시국가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미국의 15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장이라는 직책과 테러 관련 정보 총괄, 대테러 정책조정을 담당할 대테러센터까지 신설하기로 하였다. 군사전략 측면에서는 '선제공격론'을 채택하여 세계 어디든 공격할 수 있다는 협박을 선포하였다. 미국의 이 모든 행위는 전례없이 세계적 무질서와 극단적 폭력을 증가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팔레스타인, 인도, 태국, 인도네시아, 스페인, 체첸, 러시아 등에서 '자살폭탄 공격', '인질극', '보복공습', '참수' 등으로 상징되는 끔찍하고 잔혹한 폭력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부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해방시켜 5천만 명을 자유롭게 했다"는 식으로 스스로의 전쟁과 폭력, 학살과 야만을 정당화하였다. 무장한 세계화가 낳은 극단적 폭력 냉전 이후 미국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경제로부터 배제된 지역에서 특히 이러한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다. 특정한 인종적, 종족적, 종교적 동일성에 집착함으로써 다른 집단을 배척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쉽게 폭력으로 전환되고, 이는 또한 세계시장으로 편입하기 위해 그 지역의 더 가난한 지역과 분리하고자 하는 흐름과도 연관된다. 그리고 사적인 무장집단이 형성되어 폭력행사의 가능성을 키운다. 그리하여 종종 집단학살, 인종청소, 거주지파괴 등과 같은 인구제거가 일어난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경제가 붕괴되어 천연자원과 같은 한정된 부를 놓고 약탈전쟁이 생겨나고 그 과정에서 민중학살이 일어난다. 중심부 국가들은 부를 착취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지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따른 실업과 빈곤은 '증오와 폭력'의 자양분이 된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확산시키고 금융, 상업, 물류, 에너지 시스템을 적절하게 작동시키는 것을 스스로의 사활적인 이익으로 규정하고 이에 걸림돌이 되는 국가와 세력에 대해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제거하고자 한다. 결국 이러한 미국 중심의 '무장한 세계화'가 만연한 극단적 폭력의 근본적 원인이 되는 것이다. 9.11은 그것이 전 세계로 향하는데 있어 극적인 계기점이었다. 이라크 전쟁과 미국의 무능 대량살상무기, 알-카에다와의 연계 등을 명분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미-영 제국주의 연합군을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그 모든 명분은 거짓이었고 이라크는 갈수록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AP통신에 따르면 9월 7일 미군의 공식적인 사망자 숫자가 1천명을 넘어섰다. 미군 사망자 숫자를 줄이기 위해 부시정부가 사설 용병을 고용해온 것을 고려한다면 실제 미국인 사망자는 이를 훨씬 초과할 것이다. 더욱이 이라크 민중 사망자 숫자는 최소 1만 명에서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은 점령 초기 모든 국유재산을 외국자본에 개방하였고 이를 임시정부가 바꾸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종족적 갈등을 악화시켰고 시민의 정치적 권리, 노동자의 권리를 억압하였다. 또한 이라크 점령행정처(CPA)에서 현재의 임시정부에 이르기까지 점령당국이나 이라크 정부의 통치범위는 계속 축소되어 왔다. 저항세력의 조직적인 반란과 봉기로 인해 현재 임시정부는 겨우 바그다드 근처에 한정되어 통치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여곡절 끝에 100명의 임시의회가 출범하였으나 2005년 1월에 예정대로 총선이 치러질 것인지 여부는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다.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세우며 평화를 정착시켜 이를 중동전역으로 확산시켜 중동자유무역지대를 만든다는 미국의 구상은 애초부터 벽에 부닥친 것이다. 미국은 스스로의 목적조차 달성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다. 14만 명에 이르는 미군과 다국적군조차 이를 타개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라크 전역에서 공습과 학살을 일삼음으로써 이에 대해 '참수', '자살폭탄' 등 더욱 극단적인 형태의 저항을 자극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저항은 미군이 존재하는 한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이라크에서 미국의 무능은 쇠퇴하는 미국 헤게모니를 반영한다. 좌파사회학자 월러스타인은 9.11 사태가 미국 군사력의 한계, 세계 나머지 지역의 뿌리깊은 반미감정, 흥청망청하던 1990년대의 경제가 낳은 후유증, 미국 민족주의의 모순적인 압력들, 미국의 시민적 자유전통의 취약성을 급격히 드러냈다고 하면서 미국을 '불시착한 독수리'로 묘사하였다. 전쟁과 폭력 종식을 위해 세계 민중의 연대를 강화하자! - 베이루트 국제 반전 반세계화운동 전략회의의 의미 문제는 이러한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장기적인 이행을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점증하고 있는 극단적 폭력과 전쟁을 어떻게 종식시킬 것인가이다. 그것들이 상호파괴나 공멸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감축하고 정의와 평화를 작동시킬 수 있는 길로 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임무가 우리들, 반전 반세계화 운동에게 있다. 우리는 새로운 전쟁과 폭력의 상황에 진입했다. 이것은 상황을 이전의 시기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과, 세계 민중이 끈기 있게 새로운 시대를 개척함으로써 전쟁과 폭력을 종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꾸준히 진행되어 온 세계 각 국 운동간의 연대는 2003년 2월 15일 전 세계 1500만 명의 반전시위로 드러났다. 이어 2003년 5월에는 자카르타에서 회합을 가지고 단결과 행동에 대한 선언인 자카르타 평화 컨센서스를 채택하였다. 자카르타 컨센서스는 운동들의 단결선언, 이라크에 대한 입장과 행동계획, 세계화와 군사주의에 대한 행동계획 등으로 구성되어 기본적인 입장과 계획을 정식화하였다. 그리고 2004년 1월 인도 뭄바이 세계사회포럼에서 국제 반전운동 총회가 개최되었으며 3월 20일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1년에 항의하는 국제 공동행동이 조직되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오는 9월 17일부터 19일까지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국제 반전 반세계화운동 전략회의가 열린다. 특히 팔레스타인, 이라크의 사회운동과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 이라크에서 가까운 곳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53개국 262개의 조직이 지지 서명했고, 20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가할 이 회의에서는 현 상황에 대한 분석, 전쟁과 제국주의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의 진로, 연대강화 전략, 행동 계획 등이 논의된다. 반전 반세계화 운동들은 수평적인 토론과 연대 강화를 도모해야 하고, 이것이 세계적인 차원에서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행동을 확장시키는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 모든 운동들이 스스로를 국제적인 반전 반세계화 운동의 일부로서 인식하고 전쟁과 폭력, 세계화의 폐해를 종식시키기 위해 운동해 나가야 한다. 9.11 이후 3년, 불안해진 세계에 대해 우리의 대답과 행동을 만들어야 한다.
이글은 파병반대운동에서 노무현 '퇴진'을 둘러싼 논쟁의 진실과 거짓이 글은 인터넷신문『프레시안』에서 벌어진 시민단체의 노무현 정권에 대한 태도와 파병반대 운동의 현실, 그리고 노무현 ‘퇴진’ 주장의 의미에 대한 일련의 논쟁에 개입한 과정에서 쓴 것이다. 논쟁은 김태경, 「노 정권과 시민단체들, 유착 혹은 상생? 」,『프레시안』(진보언론인, '메이저 시민단체들' 공개비판 -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40040821100501&s_menu=미디어), → 이태호, 「파병반대운동에 대한 근거 있는 실사구시적 비판을 기대한다」 ,『프레시안』(근거 있는 실사구시적 비판을 기대한다 -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40824165814&s_menu=미디어) → 박준도, 「파병반대운동에서 노무현 '퇴진'을 둘러싼 논쟁의 진실과 거짓」(, 『프레시안』('노무현 퇴진 논쟁'의 진실을 왜곡 말라 - 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20040830104132&s_menu=사회) → 이태호, 「건강하지 못한 논쟁을 더 이상 하지 말자」,『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scripts/section/article.asp?article_num=30040831094923&s_menu=정치)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 논쟁에 앞서 나는 『월간 사회진보연대』(47호, 2004.7-8) 「노무현도 '엄호'하고, 파병도 '철회'시키겠다? - 불행한 비극? 불가능한 희극!」에서 노무현 탄핵 무효운동의 자장 안에 있는 파병반대운동을 비판하며, 현 시기 파병반대운동의 정치적 방향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주장을 펼친 바 있는데, 이는 그 글의 연장이기도 하다. 참고로 이 글은 미디어 참세상(http://cast.jinbo.net/news/view.php?board=news&id=30916&page=1&category1=3)에도 같은 제목으로 게재되었음을 밝힌다. 김태경 기자의 글을 “Pressian”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난 그가 상황을 상당히 예리하게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기자로서 의문을 품을 만한 것들, 그러니까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시민단체의 이중적인 태도를 문제삼았고, 이때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글을 끝맺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글에 대한 시민단체의 반응이 어떨지 몹시 궁금했었다. 그러던 차에 “Pressian”과 “OhmyNews”에 실려 있는 참여연대 이태호 정책실장(이하 이태호 실장)의 반박 글을 보았다. 그의 글을 처음 보았을 때 난 너무도 실망했다. 그는 김태경 기자의 논지가 무엇인지, 핵심 주장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반박해놓고는 되려 김태경 기자에게 ‘근거 있는 비판’을 요구했다. 그는 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던 독자들을 상대로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주장마저 임의대로 재구성해서 자신의 논거로 삼았다. 뭐가 그의 논거인지 도무지 알 길 없는 이 글에서 유일한 근거라고는 다른 민중운동단체들도 노무현 퇴진 주장에 반대했다는 사실이고, 따라서 비판하려거든 그들도 같이 해야 한다는 주장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반론으로 쳐주기에는 한심한데, 김태경 기자는 시민단체를 비판한 것이지 파병반대 국민행동을 비판한 것도 아니고, 몇몇 ‘민중운동진영 단체’를 비판하려 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김태경 기자가 무엇을 썼는지조차 모르고 반론을 쓴 셈이다. 따라서 ‘근거 있는’ 반론 요구는 내 보기에 오히려 김태경 기자의 몫이고, 글 쓰기를 가르쳐야 할 선생 역시 김태경 기자의 몫이다. 김태경 기자에 대한 시민단체의 반박 글이 유효하려면, 적어도 다음 둘 중 하나여야 한다. 이번 파병반대운동에서 자신의 주장이 노무현 비판에 있어서 만큼은 가장 적절하고 핵심적이었다고 주장하거나, 아니면 현 시기 노무현 비판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논증하는 것, 이 둘 중 하나 말이다. 나는 이태호 실장의 글이 시민단체의 입장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노무현 퇴진’에 대한 모두의 입장을 애매하게 서술하거나 뭉뚱그려 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서로 입장차이가 무엇인지, 무엇을 가지고 논쟁을 했는지를 애매하게 만들어놓고 만 것이다.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을 훼손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이렇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논쟁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논쟁해야 하는지 서로 근거가 없어지게 된다. 나는 그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정확히 알고 있다. 노무현 ‘퇴진’을 둘러싼 논쟁은 매우 소모적이었고 쓸모 없었다는 것, 이것이다. 이태호 실장이 정확히 이 효과를 노리고 썼는지 알 길은 없지만, 나는 파병반대운동에서 노무현 ‘퇴진’을 둘러싼 논쟁의 성과가 이렇게 유실되는 것은 불가하며,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파병반대운동이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에 맞서는 유력한 운동으로, 전 세계 민중의 평화를 향한 의지를 스스로 담으려는 운동으로 성장하려거든 이 논쟁의 의미를 정확히 재확인해야 한다. 분명한 논점을 가지고 전개된 논쟁은 운동 자체를 정치적으로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시민단체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우리가 어떤 입장이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상세히 남겨 보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의 노무현 비판이 파병반대운동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하여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좀더 정확히 주장하고자 한다. 1. 파병반대 국민행동에서 노무현 ‘규탄’을 둘러싼 논쟁 이태호 실장은 어떻게 기억하는지 모르지만, 김태경 기자 말대로 파병반대 국민행동이 ‘대통령 책임’ 기조를 잡는 과정이 절대로 순탄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고 김선일 사망 직후 추모제를 앞두고 진행된 첫 운영위에서 민중운동의 상당수 단체들이 대중의 분노가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참여연대의 참석자는 ‘추모 기조’를 강조했고, 민언련 참석자는 노무현 지지자들을 참석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아예 ‘노무현 비판’을 자제하고 문제의 근원인 ‘미국’에만 비판의 초점을 맞추자고 주장했다. 6월 26일 대회는 ‘이라크파병철회, 피랍상황 은폐 진상규명, 미국 파병압력 규탄’ 요구를 내걸고 추모 기조로 치르기로 했다. 잘 아는 것처럼 이날 집회에 대한 평가는 서로 극단을 달렸다. 한 극단에는 “추모와 읍소로 될 일이 아니다. 노무현이 이 사태에 대해 정치적으로 책임을 져야 그제야 파병을 철회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또 다른 극단에는 “한나라당·열린우리당 국회의원에 대한 야유는 불공평한 것이며 노무현을 향한 정치적 비판이 너무 극단적이거나 노골적이면 평화적 감수성에도 어긋나고 일부 참석자들의 경우 그 말에 놀라 파병철회 집회에 동참할 수 없게 된다”는 주장이 있었다. “파병을 철회하지 않을 경우 퇴진 당할 것”이라는 경고성 발언을 한 청소년과 노무현 퇴진을 주장한 인쇄 노동자의 발언을 놓고 “민중운동진영이 사전에 조직한 것 아니냐”며 그 자리에서 의문을 제기했던 사람은 참여연대 관계자였고, 앞서 의견은 운영위 회의에서 여성단체연합의 참석자가 제기한 것이다. 공개된 비상시국회의 자리에서 노무현 퇴진론자로 알려진 한 참석자가 현 시기 파병반대 국민행동의 정치적 목표에 대해 토론하자고 할 때, “이 자리는 파병반대 국민행동의 주요 방침을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다”라며 이를 제지한 것도 참여연대 관계자였고, 노무현의 정치적 책임에 대한 언급이 교묘히 빠져있는 ‘대국민 호소문’에 격분한 참가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려 했을 때도, 참여연대 관계자는 “채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 여부만을 놓고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이태호 실장은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수정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제안하였지만, 격앙된 상황에서 아무도 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 문제없는 훌륭한 호소문”이라는 참여연대 대표의 압박이 있었음에도 끝내 이 호소문은 채택되지 않았다. 당일 열린 운영위에서 민중운동 단체들과 인권단체들은 대중의 분노가 있고, 분노의 대상이 노무현을 향하고 있는 만큼 정치적 기조는 적어도 노무현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분명히 묻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강력하게 제기하였다. 그에 따라 파병철회. 진상규명, 대통령 사죄(대통령 책임), 미국규탄, 점령반대라는 5개 기조가 확정되었다. 또, 이제까지 집회와 달리 7월 3일 집회만큼은 대중의 분노를 모으고 노무현과 미국을 규탄하는 집회로 진행하자고 결정하였다. 하지만, 한 시민단체 활동가가 제출한 기획 안은 예전과 변함 없는 추모대회 안이었다.<<각주- 이 기획 안에는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이 ‘퇴진’ 입장에 가까운 만큼 OOO 신부의 정치발언 섭외는 재론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모양은 ‘추모대회’였지만, 정치적 의도만큼은 분명히 반영된 기획안인 셈이다.>> . 급하게 기조를 바꾸어 보려했지만 시간 제약이 있었다. 이 와중에 장소조차 긴급하게 변경되고 행진 계획마저 재론되는 등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지고 만다. 비마저 내려 더더욱 초라해진 7월 3일 집회에서 집회참석자들과 진행자들 사이의 불신과 대립은 극단으로까지 치달았는데, 이에는 전사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라고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7월 14일 운영위에서 참여연대 관계자는 “집회참석자들이 ‘노무현 퇴진’ 집회에 나왔는지, ‘파병철회’ 집회에 나왔는지 혼란스러워 한다”며 “파병반대운동은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을 포함하고 있는 만큼 파병반대운동의 다수화를 위해서는 파병 철회만을 주장해야 한다”는 의견을 다시 제기했다. 또 파병반대국민행동의 투쟁 기조 자체를 문제 삼고는 “파병반대국민행동이 노무현 문제를 들고 나오면서 미국문제는 부차화되고 있으며, 민중운동의 고착화된 집회 운영이 대중의 집회 참석을 가로막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제 더 이상 광범위한 대중이 운집하는 집회는 곤란할 것이고, 결사투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라고 주장한 뒤, “김선일 피랍 은폐 의혹에 대한 국회 청문회와 국정감사가 제대로 진행되는지, 이를 소홀히 하면 국회의원 소환운동(노무현이 아니라 국회의원 소환)을 전개하자”는 의견까지 덧붙였다. 역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대중들이 폭넓게 파병반대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것은 노무현의 ‘보복’ 선동 때문이지 반대가 아니다”라는 주장과, “파병을 강행한 실질적 주체는 미국도 한나라당도 아니라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라는 주장,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공동전선”이라는 주장들이 반론으로 제기되었다. ‘노무현 퇴진’ 주장이 자꾸 나오는 것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의견을 주고받으면서부터는 논쟁은 더더욱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시민단체와 민중단체 사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민중운동 단체들 사이에서도 논쟁은 격렬했다. 일체의 ‘퇴진’ 주장은 불가하다는 의견에서 완전히 가능하다는 의견까지 이견은 좁혀질 여지가 없었다. 참여연대 회의 참석자는 “퇴진 주장을 외치고 선전 선동하는 사람들이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다”며, “집회가 계속 이렇게 진행될 경우 결국에는 파병반대국민행동 명의의 집회 개최 자체가 제한되지 않겠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비치기도 했다. 이 날 이후 관련 논쟁은 상반기 파병반대투쟁 평가 토론에서 서로의 의견을 조금씩 주고받은 것말고는 더 이상 전개되지 않았다. 나 역시 대통령 사죄와 대통령 책임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지는 않지만, 이상에서 보듯 김태경 기자의 글에 인용되어 있는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의 말대로 ‘대통령 사죄(책임)’, ‘규탄’ 기조를 확정하는 데만도, 그리고 그 기조에 따라 집행을 하는 것도 그다지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논쟁의 대상은 고 김선일씨의 죽음에 대한 모든 정치적 책임을 ‘노무현’이 져야 한다는 주장 자체였고, 이 목소리를 가장 높인 이들은 ‘퇴진’이라는 구호로 자신의 주장을 요약하려 했던 이들이었다. 또, 보는 바와 같이 여기에 이러 저런 이유로 끊임없이 이견을 제시했던 그룹은 이른바 ‘이름 있는’ 시민단체였다. 그럼 시민단체의 노무현 비판 혹은 노무현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진실로 어떠했는가? 어떤 맥락에서 진행되었는가? 이를 좀 더 살펴보자. 2. 시민단체의 노무현 비판? 노무현 비판에 머뭇거렸다는 사실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단체는 민언련이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민언련은 회의 자리에서 “(전술적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노무현 비판은 자제하고, 모든 것의 원흉인 미국을 규탄함으로써 아예 우회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고, 최민희 사무총장은 인터뷰에서 고 김선일씨 사망 이후 피랍과정에 대한 의혹이 한참 막 제기되던 시절에 당당히 노무현을 옹호하기도 했다. 집회 발언 취지를 뒷받침하는 인터뷰 <<각주-최민희, 「백만 시민 결집됐을 때 파병철회 가능」,『시민의 신문』, (6.29, 인터넷판 http://211.115.112.3/times/news.html?id=times&no=20987)>> 에서 최민희 사무총장은 “노무현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근거도 없고 몰랐었던 것 같다”며 외교부와 개혁세력의 갈등 문제를 제기하면서 “(노무현과 개혁 세력도 일부 책임이 있긴 하지만) 도리어 수구친미세력의 무능을 문제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AP통신과 미국이 사전에 인지하고도, 동양인이라고 우습게 보았거나 고 김선일씨의 반미발언 때문에 고의로 안 알려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며 AP통신과 미국 책임론을 강하게 부각했다. 최민희 총장은 또한 자신이 한나라당보다 열린우리당을 많이 비판한 것은 사실 열린우리당이 파병철회나 미국 문제, 국가적 자존심 문제에 무엇인가 노력할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라며, 열린우리당에 대한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노무현 퇴진 주장이 잘못된 것은 이 주장이 집회에서 터져 나오면 파병철회 집회에 참석하는 다수의 노무현 지지자들이 상처받게 되고, 노무현 퇴진 이후 ‘로드맵’도 안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발언들은 다 파병철회집회에 200~300만이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파병철회 여론의 다수로 추측되는 노무현 지지자들을 참석하게 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7월16일 운영위에서 여성단체연합 회의 참석자는 “오늘 노무현 정부가 보이는 모습은 노무현 정부 내 우파(특히, 국방외교통상 라인)들의 입김이 강해서 나타난 결과”고, 따라서 “노무현 정부 내 좌파가 주도하는 개혁에 힘을 실으면서 파병반대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참석자 또한 노무현 퇴진 이후 ‘로드맵’을 걱정하였는데, 1987년 당시에는 그래도 진보야당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퇴진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며 ‘퇴진’ 주장에 강한 의문을 표명했다. 그럼, 참여연대는 어땠을까? 노무현 정부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참여연대가 당당히 내놓는 근거가 있는데, 바로, “정부의 조직적 은폐의혹이 밝혀질 경우, 노무현 정권의 진퇴 문제를 거론할 것”이라는 참여연대 관계자의 한겨레신문 인터뷰가 그것이다. 이 인터뷰 하나를 갖고 참여연대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외교적 언변에 능숙한 참여연대가 이 말의 진의를 모를 리 없는데, 이 말은 하나마나 한 소리이기 때문이다. 조직적 은폐의혹이 밝혀지면 제아무리 ‘노사모’인들이라 하여도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등을 돌릴 수밖에 없다. 친 노무현 경향의 언론이라 할지라도 게이트 사건이 터졌다며 난리를 칠 것이고, 지배세력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노무현에게 스스로 하야할 것을 권고할 것이다. 이 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점에서 아무 말도 안한 것과 똑같다. 동시에 이 말은 제 국민이 피살되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파병을 강행하는 노무현 정권의 책임은 물론이거니와 김선일의 사망 자체에 대한 노무현의 책임에 면죄부마저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은폐 의혹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고, 김선일을 실제로 죽음에 이르게 한 노무현의 가장 핵심적인 과오-피랍사실을 알고도, 파병을 강행하면 그가 죽게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도 파병을 강행한 방침 자체-를 문제삼으며 진퇴를 거론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김선일 사망 직후 참여연대가 제출한 성명서는 파병반대국민행동을 제안한 단체라는 명성에 걸맞는지 의문이 들만큼 점잖게 쓰여졌다. 이 성명서는 김선일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파병을 전면 ‘재검토’하는 결단을 내려야한다고 했다. ‘파병 철회’도 아니고 ‘파병 재검토’다.<<각주-파병반대 국민행동의 공식입장은 무조건 ‘파병 철회’다. 단, 대 국회사업에 한해서 예외적으로 ‘재검토’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내의 미묘한 갈등 활용을 강조하며, 당면목표(파병철회) 달성을 위해 상당한 정치 테크닉을 강조하는 단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김선일씨 피랍 직후 상황도 아니고 주검이 되어 돌아오게 된 마당에 대국회 사업에서나 구사해야 할 세련된 언사를 구사하고 있으니 여러모로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마지막으로 자이툰 선발대가 떠난 직후 홍성태 참여연대 정책위원장은 <안국동의 창>이라는 코너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정녕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이 도착적 수구세력과 한 패가 되고 말 것이냐며 개탄을 토한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제 국민 안위 하나 못 지키면서도 파병을 강행하는 노무현 정부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역사에서 가정이라곤 있을 수 없다고 하지만 역으로 파병을 강행한 대통령이 이회창이라고 가정하자. 참여연대가 개탄의 목소리나 내며 이런 한가로운 소리를 하고 있을까? 아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있듯 아마 정면으로(!) 비판했을 것이다. 이것이 노무현에 대한 참여연대의 정치적 태도고 이중 잣대다. 이 모든 것을 놓고, 시민단체는 파병을 강행한 노무현을 비판했으며, 노무현 정부에 대해 분명한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견지했다고 강변한다면 한마디만 덧붙이겠다. 비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정면 비판이 있고, 애정 어린 비판이 있다. 자, 시민단체의 노무현 비판은 이 중 무엇인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우연의 일치겠지만, 노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데 머뭇거렸다고 알려진 곳은 ‘주류’ 또는 ‘이름 있는’ 시민단체가 많았다”는 김태경 기자의 주장은 여전히 근거 없는 주장인가? 김태경 기자가 가장 문제삼은 대목은 시민단체가 퇴진주장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속에서 드러난 시민단체의 입장이고, 바로 그것은 시민단체가 노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데 머뭇거렸다는 사실이다. 문제의 초점은 이것이다. 3. 노무현 퇴진 주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의 진실 김선일의 죽음은 이라크 파병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언제든지 전쟁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오늘날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기보다는 극단적인 폭력의 연장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 마저 일깨워주었다. 김선일이 억류된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고도 파병강행한 것을 보며, 우리는 노무현이 마지못해 파병하는 것이 아니라 정권의 사활을 걸고 파병을 강행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라 바로 노무현이 우리를 이 참혹한 전쟁터에 내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 퇴진 주장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의 배출이건, 선전 슬로에 불과하건, 전술·전략적 주장이건 간에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런 주장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구호 자체, 이런 주장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왜인가? 굉장히 다양한 정치적 입장의 단체와 개인들이 모여 있는 연대체 내에서 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이 매번 논란이 되는가?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노무현 ‘퇴진’ 주장 자체를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매번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앞서 서술한대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 대부분이 시민단체 관계자였고, 노무현 비판에 상대적으로 관대한 이들로서는 이런 주장 자체가 집회장에서 오고가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 관계자 중 몇몇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에 대한 대중의 즉석 야유를 민주노동당 관계자가 선동한 것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고, 자유발언대에서 터져 나온 퇴진주장을 보면서 지금 촛불집회 자유발언은 자유발언을 가장한 특정정치집단의 정치발언이라며 (내 보기에 촛불집회의 유일한 자랑거리인) 자유발언 자체를 도매 급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대중은 다 안다며 선동하고 가르치려 들지 말라며 강변하는 이들이 대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것부터 의문이다.??파병을 철회해주세요??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대중이고, 열린우리당·한나라당·민주당 국회의원에게 야유하고, ??몽둥이로 때려 청와대에서 내쫓아 버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대중이 아니라는 말뜻인가? 아니면, 대중이 열린우리당에 야유하고 노무현 퇴진과 같은 고강도(?) 정치발언을 할 리가 없다는 뜻인가? 왜 대중과 활동가들을 무 썰듯 확실히 나누려 하는가? 집회 참석자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을 앞세우지만, 실상은 대중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것 아닌가? 노무현 ‘퇴진’ 주장을 놓고 전개된 논쟁의 축은 다음과 같다. 시민단체는 ‘파병반대운동은 열린 우리당 지지자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다수화 전략을 위해서 파병철회만을 주장해야 한다’는 내용의 주장을 되풀이해서 제기해 왔고,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의힘, 다함께, 인권단체연석회의, 전국학생연대회의 등은 ‘파병강행의 모든 정치적 책임은 노무현이 져야 하며, 노무현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대중의 직접적인 행동이 파병반대운동의 숨통을 틔게 할 것’이라는 내용의 주장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이것은 파병반대운동의 정치적 방향에 대한 분명한 ‘입장 차이’이기도 하다. 이것이 ‘퇴진’을 둘러싸고 전개된 논쟁의 진실이다. 따라서, ‘퇴진’ 주장을 둘러싼 토론의 가장 기본적인 배경은 김태경 기자가 지적한 대로 ??이라크 파병의 이유, 노 정권의 성격, 시민단체와 현 정부와의 관계에 대한 시각차??였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논의가 격렬했던 것은 바로 이들간의 시각차가 얼마나 큰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잠깐 논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데,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본대로 ‘퇴진’ 주장이 제기되고 이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토론을 벌일 때마다 이 주장과 슬로에 대해 시비를 가리자며 논쟁을 제기한 이들은 거의 대부분 시민단체 관계자였다. 여기에 맞서서 ‘노무현 퇴진’ 주장과 이들 목소리를 옹호하려 했던 이들은 (김태경 기자의 표현을 따르면) 이른바 ‘좌파’ 진영이다. 한편, 이 토론이 전개될 때 온전히 퇴진 주장 자체만 토론된 적은 없었는데, ‘지도부 비판’, ‘집회 문화’, ‘연대의 기술과 원칙’, ‘발언/토론과 선전의 자유’, ‘행동의 통일’ 등등이 혼재되면서 진행되었고, 그래서 논의 자체는 쉽게 격렬해졌다. 이러다 보니, ‘구호와 행동의 통일’을 요구하는 한편으로는 ‘노무현 퇴진’ 슬로의 선전/주장 자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이때마다 ‘노무현 퇴진’ 입장을 옹호하는 단체들은 단호히 이를 비판해 왔다. 그것이 대중의 발언을 옹호하는 차원이든, 행동의 통일과 토론/선전의 자유를 옹호하는 차원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말이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제기했던 유일한 단체인 사회진보연대가 노무현 퇴진이 공통의 구호가 될 수 없는 조건과 정세에 공감했다”며 사회진보연대가 노무현 퇴진 입장을 철회하거나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에서 자신의 입장을 후퇴했다는 듯, 혹은 참여연대와 입장을 같이했다는 듯 기술한 것은 사회진보연대의 의견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사회진보연대는 물론이거니와 퇴진 입장에 동의하는 다른 단체들이 ‘퇴진’ 주장을 제지해서는 안 된다며 반복해서 강조해왔음에도 “회의장에서 동의해놓고는 집회장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면서 노무현 퇴진 주장을 하는 단체들과 개인이 신의가 없는 정치세력처럼 서술한 것이라든지, 참여연대 스스로 노무현 퇴진 주장에 관한한 늘 논쟁과 견제의 대상으로 삼아왔으면서도 “해프닝성 사건이었다. 세 차례에 걸친 토론으로 노무현 퇴진을 채택하지 않기로 했다”며 논쟁 자체를 폄하하려 한 것, 그것도 모자라 “이 논쟁은 주로 민중연대 소속단체들 간에 이루어졌다”며 참여연대는 물론이거니와 시민단체를 논쟁의 구도에서 제외해 버린 것, 거기에 더해 ‘그래서 해프닝’이라며 친절한 해설까지 덧붙인 것은 맥락을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노무현 ‘퇴진’ 주장을 둘러싸고 참여연대와 시민단체들이 취했던 입장이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퇴진’ 주장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자신과 유사한 입장이건 다른 입장이건 적당히 물타기해서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흐리게 하면 서로 오해만 증폭될 뿐이다. 논쟁을 하건 토론을 하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 서로 오해도 없이 정확히 토론을 할 수 있고, 힘을 모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이태호 실장의 전언대로 상당수 민중운동 단체들이 ‘퇴진’ 주장에 대해서 반대하긴 했다. 그에 대한 나의 의견은 내가 결론에서 주장할 ‘지금 파병반대운동에 필요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지도부 비판’, ‘집회 문화’, ‘연대의 기술과 원칙’, ‘발언·토론과 선전의 자유’, ‘행동의 통일’ 들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제기된 만큼 이에 대한 서술도 필요하겠지만, 이 문제는 이 글이 다루어야 할 범위를 넘기 때문에 다른 기회를 기약하자. 다만, ‘퇴진’ 주장에 반대한 상당수 민중운동 단체들이 이태호 실장에게는 자신의 논지와 관계없이 매번 함께 걸고 넘어갈 만큼 손쉽게 물타기 할 대상으로 밖에 안 보이는지, 이 점 몹시 못마땅했다는 점만큼은 밝혀두고자 한다. 동지에 대한 비판을 냉혹하게 수행할지 언 정, 자신에 대한 비판의 화살을 남에게 돌리며 자신도 무마하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4. 지금 파병반대운동에 필요한 것 참여연대를 위시하여 시민단체들이 기반을 두고 있는 파병반대운동의 다수화 전략 즉,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지지자까지 포괄해야 한다는 입장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상식적인 이야기부터 꺼내야 한다. 상식적인 이야기라도 필요하면 반복해야 한다. 파병을 강행하고 파병결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는데 총력을 기울인 인물과 정당은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이다. 김선일 사망 이후 ‘테러행위를 규탄하며, 국제사회와 함께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며, 파병을 철회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보복’을 선동한 사람은 노무현이었고, 파병강행을 주장하며 테러방지법을 운운하기 시작한 의원이 속한 정당도 열린우리당이었다. 당내 파병을 철회시켜야겠다는 의견을 관철시키기는커녕 당 지도부 비판에도 소극적이고, 긴급할 때는 파병강행입장으로 바뀌는 국회의원들이 속한 정당도 열린우리당이다. 노무현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김선일 피살 이후 파병결정과정에서 노무현이 감내해야 했을 ‘고충’을 이해하자는 주장들이 제기되기 시작했고, 이때, 그들은 파병철회보다는 노무현 지지를 선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이들에 기반을 두어야 200~300만의 시위대가 모일 수 있다는 주장을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수도행정 이전에 대한 반대마저 자신에 대한 퇴진요구라 강변하는 노무현대통령을 두고, 그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200~300만의 숫자를 헤아리는 거리의 군중이 되어 파병철회를 주장할 것이라고 보는가? 단언컨대 절대 불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200~300만이 모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대중에게 실망감만 안겨줄 뿐이다. 대중에게 패배감만을 안겨줄 뿐이다. 이는 거짓말이고, 불가능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200~300만의 시위대는 노무현 지지자 몇 십만과 민주노동당 지지자 몇 십만이 합해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민주노총 조합원 몇 십만과 전농 농민회원 몇 십만이 합해진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대중의 자발적인 대규모 군중 시위는 이 집단과 저 집단을 단순히 더해서 나오는 결과가 아니라 대중의 정치적 각성에 따른 결과다. 열린우리당 지지자인 너도 나오고 민주노동당 지지자인 나도 나와서 200~300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에 투표를 했건, 민주노동당에 투표를 했건, 심지어 한나라당에 투표를 했건 아예 관계없이) 너도 각성하고, 나도 각성해서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원하는 시위 군중 200~300만이 되는 것이다. 너도 정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도 정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때, 200~300만이 되는 것이다. 200~300만이 벌이는 파병철회 시위를 꿈꾸고자 한다면 그 길은 하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가 파병을 철회해줄 것이라는 미련을 떨쳐버리고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가 정치의 주인이라며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파병을 강행한 노무현에 분노하여 노무현에게 파병철회를 요구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것, 오직 그 길뿐이다. 노무현의 전쟁범죄 행위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이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민중들의 연대의식과 함께 터져 나와야 그제야 가능하단 뜻이다. 그렇다면, 왜 ‘정치적 각성’인가? 나는 다른 글 <<각주-박준도, 「노무현도 '엄호'하고, 파병도 '철회'시키겠다? - 불행한 비극? 불가능한 희극!」, 『사회진보연대』(47호,2004.7~8) 혹은 『사회화와노동』(230호,2004.7.9)>> 에서 “국가의 기본적 기능은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서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든 강제적인 수준에서든 대중의 명확한 인식과 정치적 단결을 저지하는 것이었고, 지금도 이에는 변함이 없다”고 이야기하며 “파병반대운동의 단결과 대중적 확장은 … 우리들의 정치적 단결과 대중적 확장을 가로막는 [이 같은] 장애를 제거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했다. 지금시기 파병반대운동의 정치적 단결과 대중적 확장을 가로막는 장애는 무엇인가? 노무현과 그의 행정수반들의 파병/전쟁 참여선동, 정치토론의 장으로 확장되는 것을 막고 대중의 분노가 폭발되는 것을 막는 경찰의 저지선,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의 저 더러운 입놀림과 언론의 기만적인 펜대들이 바로 그 장애다. 그밖에도 우리에게 장애는 곳곳에 있다. 정치의 주인으로 단결하고자 하는 노동자·농민·여성을 중산층이라 칭하며 상품의 소비자로서만 살아가게끔 하는 것,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으로 분할하여 성별 분업화된 삶에 안주하도록 하는 것, 국가 행정 관료들과 국회 정치인들에게 의존토록 하는 것, 개별화되어 모든 연대의 손길을 스스로 외면토록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장애다. 이 장애를 물리쳐야 정치적으로 단결하고 대중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장애를 물리쳤다면, 어제 우리의 삶과 오늘 우리의 삶이 바뀌었을 것이다. 어제는 자기 한 몸 살아남기 바쁘고, 노무현과 정부가 그리고 미국이 한 일인데 어쩌겠냐며 수동적으로 살아갔다면, 오늘은 거리에서 ‘파병철회’를 외치고, 일상에서 ‘전쟁반대’를 주장하며 토론하고 조직하며 능동적으로 사는 것, 어제와 오늘의 삶이 조금이라도 다른 것, 이것이 ‘정치적 각성’이다. 정치적 각성은 남이 대신해주는 것도 아니요, 남이 시켜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대중이 스스로 하는 것이다. 스스로 능동적인 대중이 되는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대중의 거리 시위로 이라크 파병을 중단시키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전 세계 민중의 평화 애호 노력을 스스로 대표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서로가 능동적인 대중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노무현 퇴진’ 슬로는 노무현 정권의 성격, 노무현 정권에 대한 입장과 태도의 문제를 표현한 것이다. 미제국주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정권, 신자유주의 세계화(국익)와 이를 무장한 군사력으로 엄호(한미동맹)하려는 정권-바로 이 노무현 정권에게 우리는 일체 협력할 수 없으며, 민중은 이를 거부한다는 뜻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 ‘노무현 퇴진’ 슬로다. 시민단체들이 예의 그 관행처럼 또다시 노무현정권 행정 관료들 사이의 갈등관계를 활용하는 테크닉이나 구사하며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로비하는 것에-만(!) 치중하려 든다면, 자신과 연계가 깊은 여러 행정 관료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을까 전전긍긍하며 노무현을 향한 정면(!) 비판을 꺼린다면, 파병철회-만(!)이 목적이라며 자신의 목적 달성에만 급급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고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다른 여러 운동과 연대하는 것을 외면한다면, 파병반대운동은 노무현 정권이 스스로 자멸한다 해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퇴진’ 슬로는 파병반대운동의 정치적 단결과 대중적 확대를 가로막는 장애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게 한다. 장애를 보았다면, 우리가 지금 무엇을 딛고 일어서야 하는지, 우리가 지금 무엇을 물리치고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분명히 계획하고 사고할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노무현 퇴진’ 슬로가 가지는 중요성이다. 노무현 ‘퇴진’을 둘러싼 논쟁에서 우리가 남겨야 할 교훈이 있다면, 정치적 입장에 관한 한 광범위한 대중의 토론을 보장하고 조직하는 것이 파병반대운동에 진실로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대중의 정치적 각성을 스스로 돕는 것이며, 스스로 자신의 실천을 조직하는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토론은 오늘 우리를 참혹한 전쟁터로 밀어 넣는 이가 누구인지, 오늘 우리를 비참한 빈곤으로 내모는 이가 누구인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깨닫게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토론은 오늘날 파병반대운동의 오류가 우리의 오류가 무엇인지, 민중의 자기통치, 민중의 정치가 무엇인지를 진실로 깨닫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기반이 되어야 튼튼하고 광범위한 대중행동과 거리 시위가 가능하다. 노무현 퇴진주장과 이를 둘러싼 토론을 막으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장애를 만드는 것이다. 노무현 퇴진주장과 이를 둘러싼 토론 그리고 광범위한 의견개진, 이을 충분히 보증하려는 노력은 우리 스스로 정치적으로 단결하고 대중적으로 확장하는 길을 도모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백만 시민 결집됐을 때 파병철회 가능”하다는 주장이 그냥 한번 해본 말솜씨가 아니고 진실로 그 의미가 무엇인지 헤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제까지와 다르게 파병반대운동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국가와 행정 관료에 의존하지 않는 독자적인 우리의 운동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침략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앞장서는 노무현 정권을 냉혹한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 민중이 그 죄상을 엄히 다스리는데 앞장서는 운동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짓눌려 자신의 생존권을 되찾으려는 민중들의 투쟁에 연대의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전 세계 민중들과 함께 진정으로 평화로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데 힘껏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연대운동은 합의되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정치의식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요, 서로의 힘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다. 연대운동은 너와 나의 공동의 이해관계를 찾아 너와 나만의 이익을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목소리를 높이고 나아가 민중의 보편적인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하는 것이다. 파병반대운동이 두고두고 곱씹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PSSP
* 8월 25일 열린 전범 민중재판 운동 간담회 자료입니다. 사회진보연대에서도 참여하고 있는 인권단체 연석회의 평화권모임에서 준 비한 내용입니다.
나자프 - 무크타다 알-사드르가 아니라 부시가 이 반란에 불을 붙였다 밀란 라이 (2004. 8. 13) (원문은 http://www.zmag.org/CrisesCurEvts/Iraq/IraqCrisis.cfm)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