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비극? 불가능한 희극! 파병반대국민행동의 분열 지난 7월 3일 집회를 둘러싼 파병반대국민행동 참가단체들의 입장 차이는 확연했다. 시청집회를 강행할 것이냐 광화문으로 옮길 것이냐, 청와대와 미대사관을 향해 행진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규탄의 목소리를 드높이는 집회를 할 것이냐 아니면 추모 문화제의 기조를 지속할 것이냐 들로 논점은 좌충우돌 우왕좌왕했지만 이들 사이의 간격은 쉽게 좁혀질 것이 못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충돌만큼 이날 집회에 참여한 대중들의 반응도 극단적이었다. 어떤 이는 '성난' 만큼 노무현 퇴진의 목소리를 높였고, 어떤 이는 '실망'한 만큼 집으로 빨리 발길을 돌렸다. 분노와 무기력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지난 주 광화문의 촛불은 그렇게 끝났다. 한편, 시민단체-들(!) 역시 (우리들과는 정반대방향에서) 최근의 파병반대운동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시종일관 파병철회운동 내의 '노무현 규탄/퇴진' 주장을 문제 삼고 있다. 이들은 파병철회운동내의 '노무현 규탄/퇴진' 주장에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들 목소리를 잠재울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민중운동의 일부 인사들마저 여기에 동요하고 있는데, 김선일을 죽음으로 내몬 노무현 정권과 미국에 대한 분노의 함성을 내자고 하고서도, 시민단체들의 이런 비판이 제기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에 동조하고 나서고 있는 것이다. 탄핵무효와 파병철회의 짧은 시간, 먼 거리 김선일씨가 피살된 직후 광화문에는 촛불이 밝혀졌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은 안 된다', '왜 우리국민이 거기서 죽어야 하느냐'부터 '미국이 만악의 근원이다', '김선일을 죽음으로 내몬 노무현과 외교부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까지 다양한 의견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김선일 피랍 사실을 노무현 정권이 고의적으로 은폐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면서 후자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급기야는 노무현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촛불의 한계가 지적되기 시작했다. 추모의 분위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노무현과 싸워야 하는데, 촛불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대중들의 터져 나오는 발언이 자유발언을 가장한 활동가의 선동에 불과하다며 맘대로 험담하고 외면할 생각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들이 외치는 목소리의 진실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바로, 효순이 미선이 추모의 촛불과 탄핵무효의 '촛불', 그리고 지금 김선일을 추모하는 촛불사이에는 빗대려야 빗댈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다. 효순이 미선이 추모의 촛불과 탄핵무효의 '촛불'이 불평등한 한미관계와 수구 보수 세력의 퇴행성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그 '촛불'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진두지휘하는 사령관이자, 온갖 감언이설로 민중운동을 지속적으로 분열시켜온 '노무현' 만큼은 단 한번도 문제삼지 않았다. 탄핵무효의 '촛불'은 오히려 반대방향을 밝혔다. 이 '촛불'은 노무현의 자멸을 지연시키고, (아니, 정확히는 노무현의 올인 전략의 기반이 되어) 역사의 무대위로 복귀할 길을 안내한 '촛불'이었기 때문이다. 대중이 심각한 혼란에 빠지고 파병반대 국민행동의 지도부가 심각한 혼란에 빠진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김선일 피랍 사실이 알려진 당일은 누구든 그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촛불을 들 수 있었지만, 그의 죽음이 알려진 다음날부터는 누구든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노무현은 '테러행위를 규탄하며, 국제사회와 함께 단호히 대처할 것'이라며 이라크에 대한 정치적 보복을 선동하고 다녔고, 광화문의 촛불에게 자신을 지지하는 '촛불'인지, 자신의 파병강행 결단을 비난하는 촛불인지 양자택일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광화문 촛불은 이렇게 균열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듯, 국가의 기본적 기능은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서 이데올로기적 수준에서든 강제적인 수준에서든 대중의 명확한 인식과 정치적 단결을 저지하는 것이었고, 지금도 이에는 변함이 없다. 김선일 피살 이후 광화문의 촛불을 분열시켜야 하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노무현, 국방부, 외교부, 국회, 언론 모두 여기에 충실했던 것이다. 탄핵무효의 '촛불'을 들었던 상당수의 인사들은 탄핵무효운동의 '촛불'과 파병철회 광화문의 촛불을 구별할 수 없었고, 이 혼란을 수습할 길이 없었다. 이 상태로는 '선택'을 강요당한 광화문 추모의 촛불이 파병철회운동의 촛불로 번질 수 없을뿐더러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광화문에 모인 대중들이 '추모의 분위기를 넘어야 한다' 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를 지적한 것이다. 광화문에 모인 대중의 촛불이 파병철회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노무현 지지와 탄핵무효운동의 잔흔이 남아있는 광화문의 '촛불'을 당장 놓아야 한다. 새로운 촛불을 들어야 한다. 광화문의 촛불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 파병, 아니 더 나아가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민중의 새로운 운동이 풀뿌리 번지듯 땅바닥에서부터 새롭게 피어나야 한다. 바로 여기에 기반을 두어야 파병반대운동은 자신의 정치적 단결에 성공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다른 운동과 연대의 호흡을 다질 수 있고, 그래야만 진실로 대중 스스로 자신의 운동이자 자신의 민주주의를 기초지을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다. 파병철회운동과 노무현 퇴진운동 노무현의 강요된 선택 앞에서 시민운동 단체들은 노무현에 대한 비판을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 파병철회운동이 촛불 속에서 분열하도록 오히려 이를 부추겨 온 것이다. 민언련의 최민희 사무총장은 '백 만 시민이 결집해야 파병철회가 가능'(『시민의 신문』6월 29일자)하다며 이를 선도해왔다. 그는 노무현과 열린우리당 지지자들 중 상당수가 파병철회를 요구하고 있다며 파병철회운동이 이들을 아우를 것을 주장했다. 이어 노무현이 피랍사실을 알고 있었겠느냐며, 김선일 피살의 책임소재를 미국으로-만(!) 돌리고, 노무현과 청와대의 정치적 책임소지는 교묘히 회피했다. 파병철회운동의 주타킷이 노무현이 되고, 심지어 탄핵까지 거론되자 노무현 지지자들이 '정서적 불일치'를 느껴 여기서 이탈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는 또 '노무현 퇴진운동은 이후 정권교체 이후 진보진영의 로드맵을 그릴 수 없다'며,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범개혁진영의 실패로 비쳐지고', 따라서, '이 정부가 개혁적 로드맵을 지키도록 견인하고, 때로는 힘을 실어주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더 중요하다'는 충고를 남겨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파병반대국민행동의 주요 단체들 사이에서 '노무현에 대한 정치적 책임(노무현 규탄/퇴진)을 어떻게 물을 것'이냐, '집회기조와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 논의를 할 때마다 시민운동단체 책임자-들(!)이 내세우는 논지는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참여연대 김기식 사무처장이 '파병철회운동과 정권퇴진운동은 차원이 다른 운동'이라며, 운동의 성격과 목표가 달라지는 만큼 '유보해야한다'는 좀더 세련된 논지를 제시한 것말고는 말이다. 백 번 양보해서, 노무현 정부가 출범 초기 '미국과 대등한 관계' 운운하며, 파병만큼은 '국민에게 뜻을 묻겠다'는 말을 해댈 때는 파병철회운동이 정권퇴진운동과 좀 거리를 두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03년 방미에서 그가 '북 핵무기 프로그램의 완전하며, 검증가능한 그리고 비가역적인 제거를 위해 노력'하며, '평화와 안정에 대한 위협이 증대될 경우 추가적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약속하고, 추가파병 결정 직후의 APEC 회의에서는 '반테러를 포함한 안보 이슈 논의를 확대해야 한다. … 반테러 협력의 이행을 위해 개도국의 능력 배양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고, 피랍되어 있는 김선일이 '나는 살고 싶다. 이라크 파병을 철회하라'며 목숨이 경각에 달린 채 부탁해도 '피랍 불구, 파병원칙에는 변함 없다'며 차라리 죽을 것을 종용했는데, 아니, 어떻게 이를 보고도 파병철회운동과 정권퇴진운동이 무관하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노무현의 이라크 파병 결정이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의사에 기반을 둔 것임을 공언하고 다니고 있고, 파병결정으로 자신의 국민이 비참하게 죽었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노무현이다. 이런 그가 국민의 읍소에 깨닫는 것이 있어 스스로 파병을 철회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은 몽상일 뿐이다. 노무현은 지금 정권의 명운(!)을 걸고 파병을 강행하고 있다. 수도이전사업 반발조차 자신에 대한 퇴진운동이라 여기는 노무현에게 정권의 명운이 달려있는 파병방침이 (한나라당의 정치적 공세차원이든, 대중들의 정치적 반란 차원에서든) 철회된다면, 이는 노무현 정권의 자멸을 뜻하는 것이다. 열린 우리당의 핵심 의원들은 이런 상황을 분명히 깨달았고, 그리하여 노무현의 한국군 파병 방침을 노골적으로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상황이 이럴 진데 파병철회운동이 노무현지지 운동(노무현 지지자들)을 포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무슨 '정치적(!) 불일치'인가? 지금 상황에서 파병반대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은 열린 우리당의 핵심 의원들이 지배세력의 단결을 도모해가듯, 정반대방향에서 노무현 지지운동과 결연히 단절하고 파병반대운동에 참여하는 대중의 정치적 단결을 이루는 것이다. 지배세력이 '노무현 지지'냐 '파병철회냐'식으로 파병반대운동을 뒤흔든다면, 그와 정반대로 전 세계 민중을 죽음으로 내모는 '파병/전쟁을 강행할 것'이냐 '민중의 자기 통치의 권리를 강화할 것이냐'로 저들을 뒤흔들어야 한다. 노무현의 강요된 '선택'위에 놓여있는 파병반대운동은 스스로 분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방향을 명확히 해야 한다. 파병반대운동이 정치적으로 단결하고 대중적으로 확장하기 위해서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정서적 불일치'를 앞세우며, 파병반대운동의 최소 단결을 해치면서까지 노무현 규탄의 목소리를 낮출 것을 요구하는 시민운동, 노무현의 테러보복-파병강행방침을 문제삼기는 커녕 되려 노무현을 냉혹히 비판하는 운동을 문제삼는 시민운동은 지금만큼은 전쟁에 반대하는 '파병철회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을 지지하는 '노무현 엄호운동'을 하는 것이다. 지난 7월 3일 집회에서 분출된 대중의 요구는 난데없는 것이 아니다. "국민행동내 친 노무현 인사들은 '파병반대'와 노무현 사랑'중에서 선택하라" 전쟁참여정권! 살인정권! 노무현 정권에게 민중의 심판을! 노무현 정권은 미국의 군사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지지하는 것이 자신의 최종적 지향임을 거듭 확인하였고, 그 자신 스스로 여기에 기반을 두어야만 자신의 정치권력이 온전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반복해서 확인해 왔다. 군사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려는 대중들의 무수한 운동을 사그라지게 하기 위해 노무현은 대국민적 도박을 벌여왔고, 매번 거기서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어왔다. 오늘 파병철회운동이 스스로 단결을 도모하고, 진정으로 그 범위를 확장하려 한다면, 노무현의 얼치기 도박판부터 거두어야 한다. '노무현 지지'와 '파병철회'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하는 도박판을 물리치고, '노무현 퇴진'과 '파병철회'를 나란히 앞세워야 한다. 우리가 그의 강요에 내몰려 선택할 것이 아니라, 노무현이 우리의 주장에 쫓기어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파병반대운동의 단결과 대중적 확장은 민중운동의 일부 인사들이 주장하듯 어정쩡하게 타협하여 조정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정치적 단결과 대중적 확장을 가로막는 장애를 제거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무엇이 우리의 정치적 단결을 가로막는가? 무엇이 파병반대운동의 대중적 확장을 가로막는가? 노무현과 그의 행정수반들의 파병/전쟁 참여노력이 우리의 정치적 단결을 가로막았다. 김선일의 죽음을 두 눈으로 보고도 반테러/복수 운운하는 노무현정권의 방침이 우리의 대중적 확장을 가로막았다. 대중적인 참여를 보장하는 집회 공간마저 없애고, 청와대와 미대사관을 향해 대중의 분노가 폭발되는 것을 막으려는 경찰의 저지선이 우리의 정치적 단결을 가로막았다.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들의 저 더러운 입놀림과 언론의 기만적인 펜대가 우리의 대중적 확장을 가로막았다. 이를 제거해야 한다. 시민운동단체들처럼 노무현 정권을 향한 분명한 비판을 주저하고, 이상의 장애를 제거하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야 말로 파병반대운동을 머뭇거리게 하는 것이다. 시민운동단체들이 강변하듯 지금 파병반대운동의 머뭇거림을 '노무현에 대한 규탄/퇴진'탓이라고 보는 것이야말로 파병반대운동을 질식시키는 것이다. 파병반대 운동은 탄핵무효운동의 미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 민주주의의 의미에 대해 진심으로 숙고해 보자. 오늘날 누가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는지 진정 살펴보자. 한 인간의 생명마저 져버린 채 전쟁 참여에만 골몰하는, 여론을 호도하며 대중을 기만하면서까지 파병을 강행하는 노무현이야말로 진정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있는 주범이 아닌가? 저들을 끌어내리려는 민중의 심판이, 그같은 운동이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성장시킬 것이다. 자신을 조직하는 것을 소홀히 하는 시민운동단체들은 '정권교체 이후 진보진영의 로드맵' 따위를 거론하며 어떻게든 기댈 대상을 찾아 보겠지만, 자신을 조직하고, 자신이 운동하며, 그에 따라 우리를 조직하는 민중운동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가꿀 수 있다. 만일 민중의 힘으로 노무현이 퇴진한다면, 그를 심판할 수 있다면, 그 이후의 로드맵에서 우리는 '민중의 자기통치, 민중의 정치'라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새겨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민중운동이 파병반대운동에서 모색해야 할 결론이다.
가디언 지에 6월 23일 실린 글입니다. 이라크 치안, 연합군의 변화, 정부구성, 유엔결의안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민중사회운동회의 기간에 열린 '동아시아 반전 평화운동의 전망과 과제' 워크샵 자료입니다.
명운을 건 노무현 정권의 파병 강행 방침 고 김선일씨 피랍사건이 언론에 공개된 후 노무현 정권은 더욱 강력하게 파병강행 방침을 밀어붙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매일같이 "국제사회의 공동대처로 반인륜적 테러를 근절하겠다"고 말하였으며, 열린우리당은 "테러는 굴복대상이 아니라 응징대상"이라는 입장을 거듭 천명했다. 대통령과 여당이 나서서 복수와 응징을 선동한 것이다. 파병을 강행하는 모든 세력이 동일한 인식을 갖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 열린우리당류와 조선일보류의 입장의 거리는 발견할 수 없다. 조선일보가 6월 22일 저녁 인터넷에 올린 사설에서 "이번 사건으로 파병의 원칙과 정신이 흔들려서는 안된다. 어떤 희생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추가파병 자체를 생각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한 것과, 유시민이 '사람 한 명 잡혔다고 파병방침을 바꿔야 하나'라고 말한 것은 정확히 동일한 태도다. 어차피 파병강행의 한 배를 탄 이상, 그들이 구사하는 논리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응징/복수의 선동이 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이제는 외교부(그리고 국정원와 NSC) 등에 한정해서 책임을 전가하여 노무현 정권과 파병강행 세력들은 유야무야 위기를 모면하려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확인해야 할 점은 노무현 정권은 자신의 명운을 걸고 파병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의 파병 "올인" 전략은 기본적으로 그 이전의 반동적 정치 행태와 하나 다를 바 없다. 자신을 지지하던가 나라가 망하던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거대한 국민협박극의 재연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지지자들은 죽든 살든 파병 강행에 동참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도심 한가운데서 열차폭탄 테러를 당한 스페인에서도 정권이 바뀌고서야 철군이 되었듯이, 파병반대 투쟁을 위한 우리의 싸움 역시 정권의 명운을 걸고 진행할 수밖에 없다. 피를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23일 새벽 김선일 씨의 죽음을 알리는 공식 발표가 있은 후,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무고한 민간인을 해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 결코 테러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추가 파병을 재검토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거듭 밝혔다. 이라크 무장세력이 고 김선일 씨를 살해한 것은 반인륜적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무고한 민간인" 살해를 테러로 규정한다면 저 전장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이라크인에 대한 미군들의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과 고문은 미국이 주체가 되어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국가적 테러가 아니고 무엇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마치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무고한 미국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포하던 부시 대통령처럼 테러세력을 응징하겠다고 단호히 천명하고 있다. "국제사회와 함께 (테러에) 단호히 대처해" 나갈 것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은 이라크 무장 세력에 대한 '복수'로 화하고 있다. 고 김선일 씨를 살려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분노를 분출한 대상을 찾고 있다. 무장 세력에 대한 적의가 오히려 전쟁의 피해자인 무고한 이라크인, 이슬람 전체로 확장되어 인종적 증오를 부추기고, "이라크 복귀와 재건"을 목적한다는 파병은 오히려 '복수'를 위해 지지되면서 이라크 전쟁 참여의 명분마저 되고 있다. 이라크 파병의 근거로 '국익'의 논리가 활용된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와 동일시되며 그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은 '우리'에서 배제된다. 인종이 배제의 경계가 되어, 배제된 자들의 존재와 고통에는 무관심하게 된다. 고 김선일 씨의 죽음에 분노한다면 미국의 침략전쟁에 의해 살해되는 이라크인들의 끔찍한 상황에 대해서도 분노해야하며, 전쟁과 폭력을 가져오는 세계적 구조에 대해서도 분노해야 한다.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의 고통에 눈감고 파병을 한들 그것이 과연 누구의 이익인가. 9.11 테러라는 공포를 눈앞에서 겪은 미국인들 대다수는 부시 정권의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으나 전쟁 개시 후, 테러라는 폭력에 이라크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으로 맞대응한 결과는 무고한 이라크인들의 살해와 미군들의 죽음, 그리고 이로 인한 폭력의 증가 뿐이다. 팔루자에서 행해진 미군의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이나 이라크 포로 고문과 성폭행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듯이 미군에게 인종의 차이는 차별이 되어 인종적 증오에 기반한 폭력이 행해졌다. 폭력과 전쟁의 악순환을 낳은 미국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지금 한국이 교훈 삼아야 할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명분없는 이라크 침략 전쟁이 이라크인들과 전세계인들에게 가져오고 있는 폭력을 보라. 그러한 전쟁에 세계 3위 규모의 파병국으로 동참하려는 것이야말로 폭력의 당사자가 되는 것이며, 그들이 말하는 '테러'를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의 진정한 원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에 파병 당위성을 "거듭 강조하지만 우리의 파병은 이라크와 아랍국가에 대한 적대 행위가 아니다. 이라크 복귀와 재건을 돕기 위한 것이다. 이미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희. 제마 부대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고 말하며 국민을 기만하려 드는 작태를 서슴없이 드러냈다. 이라크 민중들은 이미 한국군 파병이 재건이나 평화유지가 아닌 침략군 미국의 대리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똑바로 보아야 한다. 이라크가 드디어 주권국가로 자리잡을 것이라 미국이 선전하는 6월 30일 주권이양을 앞두고도 이라크 상황이 안정되고 있지 못하다. 종교 무장단체들은 과도통치위원 살해를 기도하거나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대한 공격을 통해 미국에 의한 임시정부 구성을 방해하려 하고 있다. 급기야 저항세력의 대규모 공세를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주권이양은 6월 30일에서 28일로 앞당겨졌다. 이라크 국민들이 임시정부를 온전한 자신들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국민의 92%가 미국을 점령군으로 여기며 외세의 점령에 저항하고 있다. UN 결의안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이 6월 30일자로 끝날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실상, 미국의 수중에 이라크를 통제할 수 있도록 국제적인 합법성을 부여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실상 이라크는 주권이양 이후에도 계속해서 피점령국으로 남게 된다. UN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에 따르면 138,000명의 미군과 20,000명 이상의 연합군이 여전히 이라크를 점령할 것이고 미국이 이라크의 정치,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현실은 전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노무현이 설파하는 이라크 재건은 이라크 민중이 원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미국의 이라크 전후 안정화 구상을 도와주는, 전후 처리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추모'를 노무현에 대한 규탄으로! 지난 26일 파병반대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이 주최한 범국민추모대회가 있은 후, 국민행동 홈페이지에는 당일 집회에 대한 비판의 글들이 쇄도하고 있다. 고 김선일 씨 살해 사건에 대한 분노를 갖고 추모대회에 참가한 집회 참석자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 경찰이 허가하는 폴리스라인 안에서 마치 '문화공연'을 관람하듯 정렬하여 앉아 촛불을 드는 것 뿐이었다. 집회에 참가한 후 오히려 답답하고 무기력하다는 불만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추모 중심의 촛불에 머물러서는 파병을 철회시킬 수 없다. 파병을 철회시키기 위해 노무현 정권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를 주저하는 이들이 있다. 추모대회를 앞두고 열린 국민행동 운영위원회에서 당일 집회 기조와 향후 노무현에게 어떤 정치적 책임을 물을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몇몇 단체는 "집회는 대중적으로 성사되기 위해 추모의 분위기를 지속해야 한다. 청와대를 향해 무리한 행진을 시도하는 것은 민중운동의 고답적인 행태를 반복하는 것으로 결국 또다시 파병철회 집회를 고립하게 한다", "이 사태의 배후는 이라크 전쟁을 벌인 미국이고, 따라서 미국에 대한 비판을 높여야 한다. 전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는데 파병반대 운동에는 노무현 지지세력도 있어서 현 상황에서 노무현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하면 이들이 이탈하게 되고 파병반대 운동이 대중적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노무현 비판보다는 미국 비판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말하며 노무현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것을 회피하려고 하였다. 당일 집회 참가자들 사이에 노무현 정권 규탄의 목소리가 분분한데 급기야 사회자에 의해 "노무현 대통령님, 귀기울여 들어주십시오"하며 파병 철회를 간청하는 발언까지 나오고야 말았다. 불과 2개월 전에 같은 장소에서 촛불을 들고 탄핵 무효를 외쳤던 운동진영과 시민들이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 파병을 철회하고자 한다면 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을 우회할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한 자기 반성과 변화가 없이 촛불 들고 '노무현 대통령님'에게 간청하는 방식으로는 파병철회를 해낼 수 없다. 파병철회는 파병의 주체인 노무현 대통령의 퇴진과 함께 이뤄질 수밖에 없다. 파병 철회 투쟁의 장은 노무현 지지세력들로 하여금 촛불을 내리고 노무현 퇴진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촛불 추모집회를 통해 결집을 했다면 이제는 파병정권, 살인정권 노무현 정권에 대한 분노를 촉발하고 행동으로 조직화할 수 있도록 파병 철회, 노무현 정권 반대 투쟁에 집중해야 한다. 7월 3일, 범국민적 행동으로 파병철회 투쟁을 더욱 고양시키자 ! "파병은 미친 짓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올 만큼, 여느 때보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높다. 이럴 때일수록 파병반대, 한미동맹 폐기를 위한 노무현 정권 규탄의 실내용이 예각화되어야 한다. 이라크 전쟁반대, 파병철회 투쟁은 금융세계화가 관철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만과 저항을 관리하기 위해 미제국주의가 휘둘러온 군사패권의 총부리를 거둬내는 싸움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전략에 한미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적극 참여하고자 하는 노무현 정권을 규탄하는 것이야말로 핵심적인 투쟁과제이다. 신자유주의 질서재편과 금융세계화, 거대한 군사력을 독점한 국가의 조직적인 폭력은 더 많은 불평등과 더 많은 증오를 불러오고 있다. 이는 절대 민중의 평화로운 미래일 수 없다. 열린우리당에서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대통령 직속의 대(對) 테러회의를 설치하고, 이 회의 산하에 테러대응센터를 설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테러방지법 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한다. 테러방지법 입법을 저지시켜낸 민중운동진영의 투쟁의 성과가 물거품이 될 처지에 놓여있다. 국가의 중대사안인 파병을 결정해버린 채 국민 대다수의 반전 의사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강행하려들고, 심각한 인권 침해를 불러오는 테러방지법 마저 제정하려는 노무현 정권은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무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재차 파병을 강행하려드는 파병정권 살인정권 노무현 정권을 우리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전쟁 참여라는 한미동맹의 끈을 잘라버려 미국의 침략전쟁을 중단시킬 때까지, 노무현 정권의 파병결정을 철회시켜낼 때까지 강력히 투쟁할 것이다. 7월 3일, 투쟁의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는 '범국민 추모의 날' 집회가 시청 앞에서 개최된다. 고 김선일 씨의 죽음을 추모하고 파병에 반대하는 모두가 시청 앞으로 결집하여 범국민적 행동으로 파병철회 투쟁을 더욱 고양시키자 ! ------------------------------------------------------ <성명서>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 중단하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테러로부터의 보호가 아니라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진정한 평화이다. 테러방지법이 없어 테러가 발생하는가 정치권 일각에서 테러방지법 제정 재추진이 논의되고 있다. 지난 28일 열린우리당 의원들에 의해 입법결의되고 7월중 17대 국회에서 입법 추진될 것으로 보이는 테러방지법안은 국가정보원이 2001년 11월 입법예고했으나 이후 국가인권위원회와 테러방지법 제정반대 공동행동 등 인권/사회단체의 저항으로 무산된 바 있다. 김선일 씨 피살사건 이후 정부 각 부처와 보수 언론들은 일제히 김씨의 피랍 및 피살과정에서 정부의 정보수집과 협상력 부재 등으로 외교안보 시스템 및 국가위기관리 기능이 미약함을 지적해왔다. 이라크 내 미국 CIA요원은 3000명에 육박하는데 국정원 직원은 단 두명 뿐이었다거나, 능숙한 협상력을 위한 안보체계의 작동의 미숙함 등을 개탄하며 안보시스템 강화, 테러대책 강화를 주장해오며 이 사건을 계기로 '테러방지법' 제정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선일 씨의 죽음이 이라크 내 정부 수집력 부족과 테러에 대한 신속대응력 부재에서 기인하는가? 알자지라 방송보도 이전에 이미 가나무역의 사장과 미군, 대사관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은폐하고 침묵했던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으며, 알 자르카위가 24시간이라는 협상시한을 걸고 파병철회를 촉구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파병은 강행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일말의 가능성을 부정했던 것이 바로 대한민국 정부 아니었던가? 피랍사실을 은폐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한 그 어떠한 노력도 보이지 않은 채 한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몬 당사자가 이제와서 정보력과 대응력 부족을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테러예방을 내세운 국민 통제, 인권 말살법안 테러방지법 테러방지법 입법 추진을 준비중인 일부의원들은 국정원의 해외정보 수집기능을 강화해주는 최소한의 기능조차 법안으로 반영되지 않은 것이 이번 사건해결에 어려움을 줬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국정원의 영역 확장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테러방지법 반대투쟁의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국정원 산하의 대테러센터를 설치하여 특수부대, 군 병력 동원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국정원 강화가 그 본질이라는 점이었다. 국가정보수집이라는 미명하에 국민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이 국정원의 본래 기능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결국 정부가 머리를 짜내 내놓으려는 안은 대통령 직속의 대테러회의를 설치하고 이 회의 산하의 테러대응센터를 설치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국정원 강화 음모라는 비난을 빗겨가기 위한 제스츄어에 불과하다. 불법감청을 통한 사찰, 근거 없는 계좌추적, 국내 외국인과 외국인과 접촉한 내국인에 대한 감시 등의 인권침해적 속성과 국정운영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말살하는 감시와 통제라는 본질을 감출 수는 없다. 테러방지법 제정 재추진 중단하고 이라크 파병을 즉각 철회하라!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는 2001년 9.11테러 직후부터 시작하여, 2002년 월드컵 준비 등을 명분으로 추진이 시도되어왔다. 그리고 지금 김선일 씨 사건을 계기로 다시 제정 움직임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 파병으로 인한 국민적 공포를 안보공백, 국가시스템의 문제로 해결하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존재하는 불안과 공포는 이슬람 무장단체 등의 테러의 위협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테러 응징을 명분으로 내세워 수많은 이라크 민중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극도의 공포라는 벼랑으로 몰고 간 미국의 이라크 침략 자체가 거대한 공포이다. 그리고 미국의 말을 듣는 것이 국익이라며 넘쳐나는 피와 거대한 공포를 불러오는 이라크 전쟁에 파병으로 동참하는 노무현 정부가 공포스러운 것이다. 급기야는 파병강행을 위해 무고한 시민을 죽음으로 몰고간, 그리고 어떠한 희생이 있어도 파병을 강행하겠다는 정부의 행태가 공포스러운 것이다. 극악무도한 이라크 침략이라는 거대한 공포에 휩싸인 이라크 인민을 테러용의자로 지목해 또다른 폭력과 공포, 증오를 부추기는 노무현 정부와 열린 우리당의 테러방지법 입법 추진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김선일 씨의 마지막 말은 "테러로부터 자신을 보호해달라, 이들에게 복수해달라"가 아니라 분명히 똑똑히 "부시, 노무현! 이라크 전쟁을 중단하고 군대를 이라크에 보내지 말라! 제발 살려달라!"는 절규였다. 그 절규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맴돌고 있는 지금, 또다른 증오와 폭력을 부르는 전쟁과 파병을 강행한 채 테러의 위험에서 빗겨나기 위해 누군가를 배척하고 감시하는 국가권력을 확대하는 것을 전세계 인민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인민들의 요구는 테러로부터의 보호가 아니라 테러를 부추기는 더 큰 국가적 테러와 폭력이 종식되는 진정한 평화일 따름이다. 정부와 여야정당은 테러방지법 입법 추진을 당장 중단하고 이라크 파병을 즉각 철회하라!
[사회진보연대 성명서] 2004년 6월 23일 이라크인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폭력을 부추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야만적 행위다 - 이라크 침략전쟁에 동참한 노무현정권에게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이 있다 - 1. 침략전쟁에 동참한 노무현정권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말한다. "무고한 민간인을 해치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가증스러운주장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태의 원천이며 수많은 "무고한" 이라크인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미국은 아무런 근거도 명분도 없이 침략전쟁을 감행하여 무고한 이라크인을 대량 살육하였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꼭두각시 정권을 내세워 노골적으로 이라크를 강점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의 천인공노할 만행에 처절하게 저항하는 모든 이라크인들의 목소리를 무참히 짓밟았다. 그렇다면 미국의 침략과 점령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한국군 파병은 무슨 근거로 용납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피랍사건이 발표된 후 오히려 노무현정권이 보인 오만방자한 태도가 죽음을 재촉했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노무현정권을 마치 정의와 진리를 실현하는 사도라도 된 것인양, 파병강행의 입장을 더욱 더 세차게 몰아붙였다. 이라크인이 반대하더라도, "평화와 재건을 위해 파병하기 때문에 우리는 정당하다"는 식의 논리로 온 국민을 기만하려는 더욱 뻔뻔스러운 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어떤 논리를 대더라도 이 사태의 책임이 침략전쟁에 동참한 노무현정권에게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2. 이라크인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극단적 폭력을 부추기는 모든 주장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또한 고 김선일씨 사건을 계기로 극히 무분별하게 이라크인에 대한 증오와 "복수"를 운운하며 극단적인 폭력을 부추기는 모든 주장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예컨대 조선일보는 "네티즌 의견 중에서 '김정일한테 양해구하고 전군 다 파병해라'라는 글이 네티즌으로부터 가장 공감을 많이 받고 있다"는 둥의 기사를 대량 유포하고 있다. "네티즌"의 이름을 팔아, 극단적 증오와 폭력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류의 모든 행동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야만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의 이라크 전쟁이 이라크와 세계인에게 극단적 폭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침략전쟁과 점령, 파병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여론을 "복수와 더 큰 폭력"으로 몰고 가려는 세력이야말로,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고통이 진정 무엇인가를 아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세력이며, 야만이 도래하기를 기대하는 가장 위험천만한 세력이다. 3. 고 김선일씨와 모든 이라크인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한다. 우리는 고 김선일씨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그의 죽음에 슬퍼하는 모든 국민의 애절한 심정에 함께 한다. 또한 우리는 이라크에 대한 미국과 UN의 경제봉쇄, 침략전쟁, 저항세력에 대한 무차별적 공격 등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모든 이라크인의 고통에 대해 그 아픔에 함께 하고자 한다. 지금도 이라크 현지에서는 미국이 저항세력 색출을 명분으로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있으며, 매번 수십명 이상의 무고한 이라크인들의 죽음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더 이상의 죽음이 벌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모든 국민의 목소리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학살이 중단되어야 하며 한국군의 파병이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모이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시종일관 무시하고 국민을 기만하려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는 노무현 정권에게는 민중의 심판만이 남았을 뿐이다. 2004년 6월 23일 사회진보연대
노무현정권은 파병결정을 즉각 철회하라! 미국은 이라크 점령을 중단하라! 1.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서른 세 살의 한국인 김선일씨가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납치되었고, 우리는 그가 죽고 싶지 않다고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보았다. 가나무역의 노동자인 그는 회사일로 이라크인과 함께 팔루자 지역을 지나던 중 납치되었다. 한국군 파병이 결정된 후 한국인이 저항군의 주요표적이 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예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가 위험하지 않다는 거짓말로 국민들을 우롱하며 파병을 결정했고 ‘국익’을 위한 그 결정은 결국 무고한 시민을 공포스런 죽음앞에 서게 했다. 이는 결코 우연적이지 않은, 파병의 필연적 결과다. 김선일씨를 납치한 무장단체는 한국이 24시간이내에 철군하지 않을 경우 그를 참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 이러한 끔찍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정권은 “테러세력에게 굴복할 수 없다”며 파병결정을 굽히지 않고 있다. 국민의 위태로운 목숨을 앞에 두고 도대체 무엇을 저울질하려 한단 말인가? 그 어떤 말도 납득할 수 없다.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의 파병국이 될 한국에 대해 저항세력의 반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더 많은 사람의 희생이 불 보듯 보이는데도 파병을 강행하겠다는 것은, 그것이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은 노무현정권의 파병결정에 있다. 김선일씨를 살리는 길은 당장 파병결정을 철회하고, 이미 파병되었던 서희 제마부대도 철수하는 것 뿐이다. 또한 미국은 이라크 점령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은 절대 이라크 민중들에게 해방을 안겨줄 수 없으며, 점령으로 인한 분노의 총부리는 무고한 사람들을 향하게 될 것이다. 3. 한편 우리는 이 사태를 통해 끔찍한 폭력의 고리를 보고 있다. 이라크 침략에 맞선 민중들의 저항은 정당하다. 하지만 저항군들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은 매우 안타깝다. 진정한 평화는 잔혹한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낼 때에만 가능하다. 그를 위해서는 폭력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상황자체를 바꾸어 내야 하는데, 또 다시 무고한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는 것은 그 상황을 바꾸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4. 대다수의 국민들은 파병을 반대했다. 온갖 기만으로 저들이 결정한 파병이 가져온 결과는 처절하고, 치떨리고, 경악스럽다. 지금의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다. 파병결정을 철회하고, 이라크 점령을 중단하는 것 뿐이다.
알라위 총리임명에 즈음하여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입니다. 총리 임명을 미국에 의한 쿠데타라고 하고, 그 외 식민총독, 이라크재건, 군대 규모, 헌법, 군대해산, 외국전사, 유엔개입, 미군기지, 중동지역 민 주주의 등 10가지 U-turn을 말하고 있습니다. (원문은 www.zmag.org)
[편집자주] <무장한 세계화 목차> 알랭 족스, 무질서의 제국: 두 개의 좌담, {사회진보연대} 2003년 1·2월호, 3월호 끌로드 세르파티, 21세기 초, 미국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위한 군사 교리, {사회진보연대} 2003년 4월호 메리 켈도어 세계화된 전쟁 경제, {사회진보연대} 2003년 5월호 마틴 쇼, 위험전가 군사주의, 소규모 학살과 전쟁의 역사적 합법성, {사회진보연대} 2003년 6월호 알렉스 드 와알, 아프리카의 전쟁들, {사회진보연대} 2003년 7·8월호 이번이 "무장한 세계화" 기획의 마지막입니다. 시간의 간격이 너무 길어 이렇게 말하는 게 참 쑥스럽지만, 지금까지 기획을 일단 마무리하고 앞으로 이 주제를 더욱 보강할 수 있는 기획을 마련하려는 뜻으로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군사세계화"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반전-반군사주의, 평화운동의 역사적 사례들로부터 교훈을 얻으며, 현재의 긴급한 과제를 풍부히 이해하기 위한 기획을 앞으로 새로이 마련하겠습니다. 이번 글은 잔혹한 극단적 폭력이 벌어지는 서로 이질적인 장소와 형태들, 그리고 상호관련성을 "지형학"이라는 이름으로 분석한 글입니다. 필자는 극단적인 폭력은 서로 다른 이유에서 발생하지만, 분명한 누적 효과를 생산하며, 결국 세계를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로 분할하는 "초국경" (원한의 경계선) 을 생산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세계적인 시민성을 창출할 수 없는 오늘날 자본주의의 "정치적" 조건으로 인하여, 죽음의 지대의 인민은 불필요한 "잉여"로 간주되고 , 외부세계는 예방적 "반봉기"라는 관점에서 이 지대에서 벌어지는 상호제거 또는 절멸을 조장하거나 개입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초국경 주변에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에 대한 (전쟁과 결합된) 인도주의적 개입 또는 불개입은 서로 시소처럼 반복되지만, 오히려 초국경을 강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한 애초부터 사태의 해결 능력은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국경의 민주화"를 위한 집단적 실천이 긴급한 과제라고 제안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범유럽적인 차원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제도화하고 있는 유럽연합은 극히 우려해야할 경향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번역 대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tienne Balibar, "Outline of a Topography of Cruelty: Citizenship and Civility in Era of Global Violence", We, the People of Europe?: Reflection on Transnational Citizenship, trans. James Swenson (New Jersey: Prinston University Press, 2004), pp. 115-132. ________________________ 잔혹성의 지형학에 관한 개요: 세계적 폭력 시대의 시민성과 시빌리티 에티엔 발리바르 나는 이런 젠 체하는 제목으로 내가 이미 여러 번 다루었던 이론적이며 철학적인 문제들의 연계에 관한 탐구를 지속하고자 한다. '잔혹성' (cruelty) 이라는 용어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들을 지칭하기 위해 관습적으로 (그러나 학문적 관련성을 고려하여) 선택되었는데, 그것들은 의도적인 것이든 체계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도덕적인 것이든 - 하지만 이러한 구별은 우리가 극단성의 선을 넘어서는 바로 그 때 미심쩍게 된다 - '죽음보다 더 나쁜'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말해, 잔혹성의 현실적 또는 가상적 위협은 정치에게, 특히 '세계화'라는 맥락에 있는 오늘의 정치에게 정치의 가능성 그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결정적인 실험을 의미한다는 게 나의 가설이다. 나는 정치에 대한 정치 (politics of politics) 또는 2차적 정치라는 사변적 관념을 가리키기 위해 '시빌리티' (civility) [시민적 예절] 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에는 실제로 많은 다른 사용법들이 있다). 시빌리티는 공적인 일들에 대한 집단적 참여로서의 정치가 가능하거나 또는 최소한 그것이 완전히 불가능해지지 않도록 일련의 조건들을 창조하고, 재창조하며,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시빌리티'는 분명히 모호한 용어지만, 나는 그것의 함의가 다른 용어들 예컨대 문명화, 사회화, 도시행정과 질서유지 (police and policing), 공손함 (politeness) 등등 보다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시빌리티'는 사회 내의 '갈등'과 '적대'에 대한 억압이라는 관념을 반드시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갈등과 적대가 항상 폭력의 선구자이지 그 반대가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오히려]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극단적 폭력의 상당수는 ―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 사실상 '합의'와 '평화'에 대한 맹목적인 정치적 선호의 결과며, 세계적 범위에서의 법과 질서라는 정책들의 실행에 관한 맹목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른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그러한 쟁점들을 '지형학' (topography) 이라는 관점에서 토론할 것이다. 나는 그 용어를 통해서 구체적·공간적·지리적 또는 지정학적인 전망과 - 이를테면 '북반구와 남반구', '중심과 주변', '국경의 이쪽 편 또는 국경의 교차점', '세계적인 것과 지방적인 것' 등과 같은 변화하는 구획들을 고려한다 - 추상적·사변적 전망을 동시에 이해한다. 이는 극단적 폭력의 원인과 결과가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무대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장면들' 또는 '무대들'에서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장면 또는 무대는 각각 '현실적인 것'과 '가상적인 것' 또는 '허구적인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가상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보다 덜 물질적이거나 덜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이 글은 1999년 11월 제네바 대학의 인도주의적 행동(Humanitarian Action) 대학원 과정의 개강 때 요청 받은 강연에 기초한다. 이 글은 세계화된 세계질서에서의 시민권과 인종분리, 난민과 이주, 대량빈곤과 집단학살 등이 왜 이러한 논의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는가를 설명한다. 내가 보기에, 그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왜 오늘의 세계에서 민주적 시민성 (citizenship)이 시빌리티의 구체적 형태와 전략을 발명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가 위치를 부여하고 연결시켜야 할 결정적인 '코스모폴리탄적인' 쟁점들이다. 나는 두 가지 일련의 문제들에 초점을 맞춘다. 첫 번째는, 전형적으로 유럽적인 것으로, 포스트-민족적 통합과 '유럽의 시민성'의 도입의 부정적 반향에 관한 것이다. 이는 단지 '공동체주의적' (communitarian) 요구와 '동일성의 정치'의 부활뿐만 아니라, 나아가 특히 준-아파르트헤이트적인 사회적 구조와 기관들이 발전이다. 그것은 하나의 모순적 유형을 형성하는 데, 그 유형은 이제 많은 측면에서 매우 불안정해지고 있다. 두 번째는 세계적인 것이다: 그것은 지배의 구조들을 변혁하려는 집단적 해방운동을 예방하기 위해 극단적 폭력과 대중의 불안을 체계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 그리고 또한 토마스 홉즈가 {리바이어던}에서 예방적 대항폭력을 염두에 두고 묘사한 국가 형성의 유형을 참조로 해서 ― 나는 세계적인 예방적 반혁명 또는 반봉기의 정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러한 '정치'는 현실적으로 반정치적이다. 왜냐하면 허무주의적인 방식으로, 그것은 하나의 정체 (polity) 를 건설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들 그 자체에 대한 억압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다양한 종류의 전쟁과 일종의 '인도주의적' 행동 또는 개입이 결합하여 발전하는 것을 목도한다. 많은 경우에 그러한 행동과 개입은 정확히 고통을 낳은 바로 그 권력에 봉사하는 수단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두 가지 일련의 문제들에서, 국경들이라는 전통적 제도가 ― 나는 그것이 현대 시대에서 민주주의 그 자체의 '주권적' 또는 '비민주적' 조건으로 정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주로 안전의 통제, 사회적 분리, 생존수단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의 수단으로 작동하며, 종종 생과 사의 제도적 분배 수단으로 작동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제도적 폭력의 초석이 된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국경의 민주화를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그것은 단지 국경의 개방뿐만 아니라 (이는 국경의 일반적인 철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국경의 일반적인 철폐는 많은 경우에서 경제적 세력들간의 야만적 경쟁이라는 형태로 부활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으로 귀결될 뿐이다), 무엇보다도 인민들 (물론 이주한 인민들을 포함한다) 그 자신이 국경의 기능을 다자적으로, 협상에 의해서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단순히 '영토적'이지 않고 결코 순수하게 '민족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대의기관이 세워져야 한다. 이는 내가 시민성과 시빌리티가 밀접히 결합되는 '인권의 세계정치' (cosmopolitics) 라고 부른 것의 일부다. 시민성과 시빌리티: '권리들을 가질 권리'의 문제 두 가지 일련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세부적으로 검토하기에 앞서, 나는 우리가 인권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반성이라는 더 광범위한 시각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 약간의 철학적 도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작업이 필수적 출발점을 제공한다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 그리고 나도 이러한 관점을 상당히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그녀로부터 끌어올 수 있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자. {전체주의의 기원}에 나오는 제국주의에 관한 논의에서 그녀는 모든 시민적·공민적 권리를 박탈당한 '국가 없는' 인민들의 문제를 제기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는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들에 대한 논의에서 그녀는 정치철학이라는 전망을 이중적인 방식으로 전도한다. 첫 번째, 그녀는 [인간이라는] 종의 단순한 대표물로서의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배제의 형태와 극단적 폭력의 상황을 시민성과 정치 체제에 관한 논쟁의 중심으로 재도입한다. 그녀의 목적은 정의를 행하는 것과 관련된 인간주의적 기준을 주장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는 우리가 오직 그와 같은 상황에 대한 해법을 발견함으로써만 공적 영역, 즉 인민 운동들의 관리와 사회적 갈등의 통제 (policing) 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정치적 행위 (또는 실천(praxis)) 가 이루어지는 영역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최근에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기원 바로 그 직후부터 정치적 영역 내에서 만인에 대한 평등한 자유의 척도는 '아무런 몫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몫', 즉 공공선 (commonwealth) [국가 또는 공동체] 내에서 아무런 몫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정당한 몫을 주는 것 또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인정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다. 달리 말해, 이는 차별 받는 범주들의 배제의 과정이 '도시' 또는 '정치조직'으로의 포함의 과정으로 능동적으로 변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 도시에서 이소노미아 (isonomia) [모든 시민들에게 평등권을 적용시킨 원칙] 가 의미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관점에서, 강한 의미의 '정치'는 아마도 아렌트가 로자 룩셈부르크로부터 물려받은 통념인 '영구 혁명'과 분리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시각에서, 평등한 자유의 법률적 형태는 분명하게 제거되지 않지만 완전히 재가공되어야 한다. 현대의 인간주의와 보편주의라는 원칙의 측면에서, '권리 없는 인간'이라는 통념은 용어 자체가 모순적이다. 왜냐하면 명목상 권리 없는 인간은 없으며, 심지어 아동이나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를 들어 우리가 브라질의 무소유 (propertyless) [무토지] 농민들의 권리 주장 ― 그들의 모토는 '권리 없는 사람들에게 정의를' (justice for rightless) 인데,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학살하고 위협하는 준군사집단들이 법정에서 심판 받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 또는 공식적 서류발급을 거부당한 것에 항의하며 무적자 (undocumented) 의 합법적 거주를 요구하는 프랑스 이주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을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면, 우리는 저항과 폭력에 대한 거부에 기초한 이러한 요구들은 권리들의 창조 과정, 즉 '인민주권' 또는 민주주의라고 인정되는 정치적 헌정질서 (constitution) 를 허용하는 역동적인 과정의 부분적이지만 직접적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시민성에 대한 아렌트의 반성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교훈들의 한 가지 측면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은 더욱 더 오늘날 현실에 적합하다. 나는 민주적·민족적 혁명의 시대 이후부터 국제적 갈등의 일반화와 제국주의의 발전에 이르는 민족국가의 역사가 '인권'과 '정치적 권리' (또는 인권과 시민권) 사이의 전통적 관계를 역전시켰다는 점을 보여준 [그녀의] 유명한 논증을 생각하고 있다. 인권 일반은 더 이상 주어진 민족적·주권적 국가의 경계들 내부에서 제정되고 보존되는 정치적 권리들을 위한 단순한 전제이자 추상적 기초로 간주될 수 없다. 또한 그것은 법률적인 것에 대한 정치적인 것의 지배에 대한 제한으로도 간주될 수 없다. 20세기의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비극적 경험은 그 반대가 진실이 되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평등한 시민성의 현실적 승인이자 조건인 정치적 권리는 생존, 즉 단순한 생명의 유지와 관련된 가장 초보적인 권리들부터 시작하여, 인권에 대한 정의와 승인을 위한 진정한 토대다. 정치적 동물 (zo n politikon) 그 자체에 새롭고 '비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어떤 국가의 시민이 아닌 사람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시민이 아닌 사람들'이 되고 결국 실천적으로는 더 이상 인간으로 승인되고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 시민의 능동적인 제도적 권리들이 파괴될 때 ― 예를 들어, 시민성과 민족성이 밀접히 결합되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개인들과 집단들이 그들의 민족적 소속에서 쫓겨나거나 또는 단순히 억압받는 민족적 '약소자'의 상황에 처하게 될 때 ― '자연적' 또는 '보편적으로 인간적'이라고 여겨지는 기본적 권리는 위협 당하고 파괴된다: 우리는 이른바 과소인간 (Untermenschen) 과 과잉인간 ( berrmenschen) 이라고 여기지는 '인간' 사이의 구별이 확립되는 극단적 폭력의 형태를 목도한다. 이는 결코 우연적 현상이 아니다. 이는 오늘의 정치에서 공통적인 것이 되고 있는 비가역적 과정의 결과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일신해야 한다는 긴급한 임무를 부과한다. 여기서는 정치의 본질 그 자체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정치는 생명, 교통, 문화의 사회적·자연적 토대 위에 서 있는 단순한 '상부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의 진정한 개념은 인간들간의 특정한 공동체의 가능성 자체와 이미 관련되어 있다. 즉 그것은 해후를 위한, 다양한 구성 부분들과 집단들 사이의 적대의 표출과 변증법적 해결을 위한 공간을 건설하는 것과 이미 관련된다.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 아렌트가 제안한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는 결정적 통념은 헌법에 의해 보호되어야 할 법률적·도덕적 요구들로 구성된, 정치적인 것에 대한 최소의 준거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최대에 관한 이념이다. 또는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러한 통념은 인간이 '공통의' 실존 영역 (그리고 따라서 노동, 문화, 공적·사적 발언의 영역) 에 소속되는 것을 최소한 승인하는 것이 이미 권리들의 총체를 수반하는 ― 그리고 가능하게 하는 ― 연속적 과정에 준거를 둔다. 나는 이것을 민주주의의 '봉기적' 요소라고 부른다. 그것은 민주주의적 또는 공화주의적 국가의 모든 헌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국가는 정의상 위로부터 부여된 지위와 권리로 구성될 수 없다 (또는 그것만으로 구성될 수는 없다). 그것은 데모스 (dm os) [인민, 시민권을 혈통적인 방식이 아닌 이소노미아에 따라 성취한 인민] 의 직접적 참여를 요구한다. 아렌트의 논증은 민주주의적 시민성을 구성하는 평등주의적 또는 봉기적 요소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녀는 또한 그것을 시빌리티의 정치와의 변증법적인 관계 속에서 개념화한다. 이는 극단적으로 배제된 사람들, 곧 시민성이 부정됨으로써 또한 자동적으로 생활의 물질적 조건과 인간 존엄에 대한 인정을 부정당한 사람들이 단지 이상적인 헌정 모델에 대비하여 역사적 제도들을 평가하는 이론적 기준을 제공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들이 오늘의 정치사회들 내에서의 ― 아니, 그들의 일상생활의 핵심에서의 ― 극단적 폭력의 현실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도록 강제한다. 이는 단지 외견상으로만 역설적이다: 칼 슈미트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한계 또는 '예외 상태'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진부한'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민주주의적'이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그렇게 믿고 있는 사회적·정치적 체계들의 기능에 침투해 있다. 그것은 그 체계들이 권력에 부여한 이익의 연속성을 위한 수단인 동시에 체계의 생명력에 대한 영구적 위협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시민성의 권리에 대한 접근 [이용할 수 있는 권리] 과 그것에 대한 부정 사이의 ― 더욱 일반적으로는 포함의 (inclusive) 정치적 질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의 ― 선택을 사변적 쟁점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구체적인 도전이다. (민주주의적) 정치질서는 내생적으로 깨어지기 쉽거나 불확실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시빌리티의 정치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국경들 국경 내부에서 또는 국경을 가로질러 또 다시 '전쟁 상태'로 전화할 것이다.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 국경의 폭력 우리는 아렌트의 논증이 유럽 역사의 '파국'의 경험, 즉 나치즘, 2차 세계대전, 유럽의 유대인·집시·여타 집단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절멸주의 등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는 그것의 '기원'을 민족형태의 제국주의로의 진화에서 밝혀내려고 했지만 동시에 [유럽의] 고유성을 주의 깊게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국가의 민족적 구성이 우리를 덫에 빠뜨렸던 치명적인 순환을 말함으로써 그녀의 생각을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인권과 '불가능한' 권리를 인식하기 위한 유일한 긍정적 또는 제도적 지평이었으며, 그것이 지지해온 보편적 가치들의 파괴를 낳았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여전히 동일한 조건 속에서 생활하며 행동하고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권리들을 가질 권리'가 오늘의 정치에서 무엇이 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비록 민족형태가 단순히 쇠퇴한 것은 아니더라도, 정치·경제·문화, 그리고 권력의 물질적 분배와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 등의 조건들이 점점 더 초민족적으로 되어간다는 사실을 관찰할 때, 이러한 문제는 첨예해진다. 세계화라는 일반적 틀 내에서 '포스트-민족적' 국가 또는 준-국가 기구가 출현해왔고, 여기서 '유럽 공동체'는 특권적 사례가 되었다. 우선 이러한 과정의 모순적이고 우려되는 몇몇 측면들을 살펴보자. 사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런 측면이 훨씬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나는 공식적인 '유럽적 시민성'의 발전과 함께 현실의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가 출현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결정적 쟁점이라고 생각한다. 장기적 또는 오히려 단기적으로, 그것은 민주주의적인 유럽 공동체의 건설에 장애물 또는 차단물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전체적으로 유럽의 통일을 막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비록 세계의 경제적·정치적·군사적 초강대국에 필적할 수 있는 권력의 축적 또는 지역 권력의 창조를 위한 것이라 할 지라도, 비스마르크식의 권위주의적 방식으로 성취되는 민족-이상적 (supranational) 공동체의 진정한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민족적 헌정질서와 비교해볼 때, 민족-이상적 유럽 공동체는 오직 그것이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적 잉여 (democratic surplus) 를 창조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두 가지 대칭적 문제를 제기하여 쟁점을 더욱 명확히 해볼 수 있다: 왜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를 말하는가? 왜 유럽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말하는가? 왜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를 말하는가? 이는 단지 외국인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외국인의 일부 범부들, 주로는 합법적으로 또는 불법적으로 유럽의 부유한 '문명'을 보호하는 국경을 건너 동구나 남반부에서 온 이주 노동자와 임시수용소를 찾는 사람들, 이런 측면에서 발칸 지역은 외부성의 두 형태의 일종의 조합을 보여준다) 권리를 덜 승인 받기 때문일 수 없다. 유럽적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 있어야만 한다. 1993년 마하스트리히트 조약 이후로 유럽 건설의 새로운 전개는 실로 그러하다. 유럽의 모든 민족국가들에서, 시민성 또는 민족성에 대한 불균등한 접근권을 강요하는 차별 구조가 존재하였고, 특히 이는 식민주의의 과거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유럽경제공동체 이후 막 바로 등장한) 유럽 연합의 탄생으로 추가된 사실은 유럽 시민 (civis europeanus) 의 지위가 점차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개인적·집단적 권리는 점차 유효성을 획득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각각의 민족 정부와 법에 반하여 유럽재판소 (European Courts) 에 호소할 수 있는 가능성). 이제 결정적 문제가 시작된다: 누구를 위한 새로운 권리인가?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유럽의 인구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단지 좀더 제한된 유럽 인민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여기서 현재 독일에서 벌어지고 인민 (Volk) 과 주민 (Bev lkerung) 사이의 구별을 둘러싼 딜레마를 확장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유럽의 모든 나라들에서 이러한 딜레마가 나타나고 있으며, 독일의 논쟁은 하나의 패러다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럽 헌법을 위한 상징적·법적·물리적 기초로서 유럽 인민을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곤란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마하스트리히트 조약은 하나의 입헌 민족국가에서 이미 시민성 (즉 민족성) 을 소유한 사람들, 오직 이 사람들만이 자동적으로 유럽적 시민성을 보장받는다고 진술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 이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내에서의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 이미 하나의 방향을 결정한다. 유럽에서 영구적으로 거주하는 이민자들의 양적·질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프랑스의 정치학자 까뜨린느 위똘 드 웬뎅은 이들을 '16번째 회원국가'라고 불렀다), 그것은 포함의 기획을 배제의 프로그램으로 즉각적으로 변형한다. 이는 세 가지 변태로 요약될 수 있다. 1. 외국인 (foreigner) 에서 [이질적인] 이방인 (alien) 으로 (이는 다른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2등 계급의 거주자들을 의미한다). 2. 보호에서 차별로 (오스트리아의 사례가 보여준 것처럼, 이는 민감한 쟁점이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자면 이는 정도와 언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유럽의 일반적 문제다: 정치적 시민성이 허용되지 않은 이주 노동자의 일부가 약간의 사회적 권리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즉 그들이 '사회적 시민성'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복지와 사회보장 또는 이와 유사한 것들에서 추방하는 것은 보수주의 세력에게 결정적인 정치적 쟁점이자 강박이 된다 ― 프랑스의 민족전선 (National Front) 은 이를 '민족 우선' (national preference) 이라고 부르지만, 민족적 제도들 내에 이미 그러한 우선이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은 '유럽 우선'이 될 수 있다). 3. 문화적 차이에서 인종적 낙인으로. 이는 포스트-식민적 그리고 포스트-민족적 '새로운 인종주의'의 창조 과정의 중심에 있다. 왜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와 유사한 것을 제안하는가? 이는 단지 쓸데없는 자극이 될 수 있다... 정말 우리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아프리카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졌지만 이제 유럽에서 (그리고 아마도 다른 곳에서) 재출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 '제국의 역습' 과정에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우리는 제도화된 인종주의의 다른 역사적 사례들과의 비교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가 아는 것처럼 미국은 '짐 크로우' [흑인 일반, 또는 흑인차별주의] 체계를 완전히 망각한 적이 결코 없으며, 보수적 정책이 의제에 오를 때, 주기적으로 그것을 재창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독일 동료인 헬무트 리트리히 (Helmut Detrich) 는 유럽의 '동쪽 국경'에서의 난민과 이주자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작업을 해왔는데, 그는 유럽제국의 새로운 배후지 (Hinterland) 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나는 하나의 또는 다른 체계에 의해 창조되는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 라는 문제는 제쳐놓고 대신에 그 구조에 초점을 맞출 것이며, 아프리카, 아시아 또는 유럽의 여타 지역 출신의 이주자들이 과거에 생활하던 지역의 상황과 남아프리카적 의미에서의 자치구 (homelands) [남아공 흑인 반투족의 자치구] 사이의 비교라는 관점에서 아파르트헤이트의 역사적 사례로부터 최소한 교훈을 빌어 오기 위해 두 가지 보충적 논거를 제시한다. 하나는 국경의 한쪽 편에서 그들의 생활을 '재생산'하고 또 다른 쪽 편에서 '생산'하며, 따라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부자도 아니고 외부자도 아니거나 또는 (우리들 다수에게) 공식적으로는 외부자로 간주되는 내부자인 중요한 노동자 집단의 상태가 '안전' 통제의 규모와 그 폭력을 점차 증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전' 통제는 상당히 오래된 '인종적 프로파일링' (profiling) 을 신원확인과 기록의 현대적 기술과 결합하면서 사회의 모든 곳으로 확산되고 '유럽적' 영토 전역에서 경계선들을 세분화한다. 쉥겐 (Schengen) 협정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EU 회원국간의 국경을 철폐하고 출입국수속을 없애기 위해 1986년 룩셈부르그의 쉥겐에서 체결된 협정]. 두 번째 보충적 근거는 이주자 가족 (그리고 그들의 구성, 그들의 생활방식) 의 존재는 이주 정책과 여론의 진정한 강박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방인 가족은 분리되어야 하는가, 통합되어야 하는가 (즉 재통합되어야 하는가)? 만약 그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국경의 어느 편에서, 어떤 종류의 가족이 (전통적 또는 현대적), 어떤 종류의 친척들과 (부모 또는 자식), 어떤 종류의 권리를 갖고? 내가 다른 곳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민족적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 가족 정치, 또는 더 일반적으로 계보의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역사적 인종주의의 결정적인 구조적 생산양식이다. 물론 민족적인 것이 다민족적 공동체가 될 때에도 이는 진실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에서 우리는 인종분리를 폐지하는 유럽, 즉 민주주의적 유럽은 결코 의제에 오르지 않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사실상 상황은 훨씬 더 모순적인데, 왜냐하면 두 가지 방향의 경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마지못해 인정되는 역사적 교차점에 서 있다. 그러나 나는 또 다른 생각을 주장하고 싶은데, 이는 다음 논지로 넘어가기 위해 필수적이다. 즉 이러한 쟁점들이 전형적으로 하나의 세계적-지역적 ('세계-지역적'(glocal)) 문제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부착된 유럽적 시민성' (또는 법률-지위적·귀속적 시민성) 의 모순적·진화적 모형은 어떤 의미에서는 세계화의 현실적·가상적 효과에 대한 반작용이다.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적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효과의 단순한 투영이다. 세계적인 예방적 반봉기: '국경 없는 폭력' 나는 이제 내가 말했던 중심 주제인 '세계적 반봉기'라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제기하고자 한다: 이는 국경의 폭력이 아니라 국경 없는 또는 국경을 넘어선 폭력이다. 나는 로잔 대학의 피에르 드 세나르클랜이라는 스위스 전문가가 출판한 인도주의적 행동에 대한 최근 저작을 인용할 것이다. 그는 오늘의 폭력에 대한 공식적 정의의 중요성과 '인도주의적인 개입'의 범위와 의미를 확대하기 위한 정당화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1981년, UN 총회는 새로운 국제 인도주의적 질서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 직후, 총회는 저명한 인사들을 모아놓은, 국제적인 인도주의 문제들에 관한 독립위원회의 창립을 지지하였다... 위원회의 1986년 보고서는 환경파괴, 인구변화, 인구이동, 인권침해, 대량살상무기, 북반구-남반구의 양극화, 테러리즘, 마약 등과 같은 이 시대의 주요한 정치적·사회적 도전을 인도주의적 기획 내부에 포함시켰다.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 "우리는 인도주의를 동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을 규정하기 위해 참고해야할 틀로서 그리고, 해결을 위한 처방으로서 고려해야 한다." 이후 저자는 1989년 이후 "양대 진영"이라는 냉전 체계의 붕괴가 어떻게 초강대국들 사이의 대치로 인해 정치적 폭력에 부과되었던 한계를 무너뜨리고, '전쟁'과 '평화' 사이의 경계선을 흐리게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누구도 냉전의 빠른 종말의 서곡이었던 베를린장벽의 붕괴를 예견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국제적 구조의 변형과 그에 따르는 폭력을 예상하지 못하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 50건 이상의 새로운 군사분쟁이 있었고, 이러한 분쟁들은 본질적으로 내전이었다. 이 중 특정 분쟁들―르완다, 유고슬라비아, 체첸 또는 알제리의 분쟁들―은 폭력과 잔혹성, 파괴의 광범위함, 그리고 분쟁이 야기한 인구이동이라는 점에서 충격이었다. 국제사회는 단 한번도 이처럼 짧은 시간 내에 이토록 많은 희생자를 낸 이렇게 많은 전쟁을 대면한 적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결론에 다다를 수 있다. 우리는 대량폭력과 극단적 폭력의 다면적 현상이 일반적으로 국가들 사이의 내부적·외부적 세력관계를 포함하는 정치를 대체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는 우리는 정치와 폭력 ― 합리적 조직이 결여되어 있으며, 자기파괴를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는 폭력 ― 의 영역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할 수도 있다. 정치와 폭력은 점차 상호 침투해왔다.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인도주의적 행동' 또는 '개입'이라 불리는 어떤 것이 정치의 필수적 보충물이 되어버린 바로 그러한 조건 속에서 정치와 폭력의 상호 침투가 일어난다. 나는 이 같은 변이의 모든 측면을 논의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정치 그 자체의 개념에 있어서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세 가지 질문을 간략히 언급하려고 한다. 우리는 '전례 없는' 극단적 폭력 (또는 극단적인 것의 폭력) 의 확산에 직면하고 있는가? 나는 이 문제에 관해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싶다. 이 문제는 '과거의 전쟁과 새로운 전쟁'이라는 쟁점에서부터 왜 그리고 어떻게 역사 속에서 벌어진 '집단학살들을 비교해야 하는가'라는 도덕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토론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전례가 없는 것은 기본적으로 극단적 폭력의 새로운 가시성일 것이다. 특히 매체의 포괄 범위와 텔레비전 방송과 이미지 변형 등의 현대적 기술이 ― 마침내 우리가 사상 최초로 걸프전 동안 거대한 규모로 '가상 현실'이 생산되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 극단적 폭력을 하나의 쇼로 변형하고,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동시에 이 쇼를 펼쳐놓는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가시성은 전례가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기술의 효과가 (앙골라나 시에라리온에서 수백 명의 불구가 된 아이들의 모습과 같은 진정으로 끔찍한) 어떤 폭력적 과정들 또는 끔찍한 장면들은 드러내 보이고 (바그다드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처럼 똑같이 끔찍한) 다른 것들은 덮어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극단적 폭력에 대한 [매체의] 보도가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라는 법적·도덕적이지만 거의 정치적이지 않은 개념의 무차별적 사용을 통해 냉전 동안의 '공포의 균형'이 '희생자들 사이의 경쟁상태'로 정치적으로 이행했다는 매우 단순한 관념을 믿게 만들 때, 우리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작용한다는 의심을 품는다. 결국 우리는 일상적 공포의 이미지들에 대해 말하고 그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특히 인류 중에서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보호받는 지역 내에서 매우 양가적인 효과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동정심과 함께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이처럼 인류가 질적으로 다른 문화 또는 문명으로 실제로 분할되어 있으며, 이러한 문화 또는 문명은 오직 그들간의 '충돌'을 초래할 것이라는 관념을 강화한다. 나는 이러한 모든 곤란함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현실은 '전례 없는' 어떤 것이라는 통념의 이면에 놓여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아마도 수많은 절멸의 이질적 방법들 또는 과정들 (나는 이를 통해 어떤 개인들이 객관적 또는 주체적 집단들에 속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개인들로 구성된 대중을 제거하는 것을 지칭하고자 한다) 이 스스로 '세계화'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즉, 그것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동시에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점차적으로 하나의 '연쇄'를 형성하며, 20년 전 E. P. 톰슨 (E. P. Thompson) 이 '절멸주의'라는 이름으로 예상했던 것에 완전한 현실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일련의 연속된 과정들 속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은 포함해야 하는데, 정확히 왜냐하면 그것들이 이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들은 하나의 그리고 동일한 '원인'을 갖고 있지 않지만 누적된 효과를 생산한다. 1. 전쟁 ('내전'과 '외국과의 전쟁' 양자 모두,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나 체첸과 같은 많은 사례들에서 이런 구별은 쉽지 않은 일이다). 2. 인종적 또는/그리고 종교적 '정화'(cleansing)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하는 [보통 '인종청소'라고 부르는], 공동체에서의 폭동. 3. 전통적 또는 비전통적 경제의 파멸로 야기된 기근과 다른 종류의 '절대' 빈곤. 4. 외관상 '자연적인' 대재앙들. 그러나 그것들은 사회적·경제적·정치적 구조들로 과잉결정 되었으므로 실제로는 대규모의 살인이다. 여기에는 발전된 시민적 보호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의 세계적 유행병 (예를 들면, AIDS의 분포와 치료 가능성은 유럽·북아메리카와 아프리카·아시아 일부 지역에서 차이를 보인다), 가뭄, 홍수 또는 지진 등이 포함된다. 결국 나는 다양한 종류의 극단적 폭력의 '세계화'가 '세계화된' 세계를 점차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로 분할하고 있다고 제안하고자 한다. 이들 지대 (심지어 그것들은 하나의 나라 또는 도시의 경계 내에서 복잡하게 중첩되고 빈번하게 재생산된다) 사이에, 결정적이고 깨지기 쉬운 초국경 (super-border) 이 존재한다. 이는 인류의 통일과 분할에 대한 공포와 우려를 불러일으킨다 ― 현대 유럽의 세계 정복 초기에 존재했던 '친선의 경계선' (amity line)과 유사한 세계적·지역적 '증오의 경계선' (enmity line) 과 같은 것이 존재한다. 영원한 쇼의 대상이자 동시에 개입과 불개입을 위한 뜨거운 지역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초국경이며 증오의 경계선이다. 우리는 현재의 국제 정치에서 가장 우려되는 측면이 '인도주의적 개입'인지, '일반화된 불개입'인지, 아니면 후자 이후의 전자인지 토론할 수 있다. 우리는 극단적 폭력을 시장자본주의 (또는 '자유주의 경제') 관점에서 '합리적'이거나 '기능적'이라고 간주해야 하는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만 ― 사실 나는 이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 회피될 수 없다. 따라서 이는 또한 지적으로도 가장 어려운 도전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매우 명백하지만 자주 범하는 그릇된 추리를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결과와 목표 또는 목적을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체계들을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토론하는 것이 진정으로 가능한가? 다른 한편, 우리는 자본주의와 같은 어떤 구조의 내재적 목적 또는 '논리'에 대한 반성을 회피할 수 있는가?) 매우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난점은 대량폭력의 연쇄 ― 예컨대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한 전제조건들의 창조를 빈민에 대한 폭력적 억압이라는 관점에서 묘사하면서 시초 축적 (primitive accumulation) 이라고 부른 것과 비교될 수 있다 ― 의 출현에 기원을 둔 두 가지 대립적인 '세계적 효과'에 기인한 것처럼 보인다 그 효과들 중 하나는 수백만 명의 잠재적 노동자들의 물질적·도덕적 불안전 (insecurity) 을 일반화하는 것, 즉 대규모의 프롤레타리아화 또는 재프롤레타리아화를 유발하는 것이다 (불안전이 '프롤레타리아적 조건'의 핵심에 위치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는 다수의 사람들이 다소간 벗어났던 프롤레타리아 상태로의 복귀를 결정적으로 포함하는 프롤레타리아화의 새로운 국면이다). 이러한 과정은 자본과 또한 인류의 이동성이 증가된 것과 동시대적이며, 그리고 그 때문에 이는 국경을 가로질러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과정은 또한 몇 개의 정치적 변종으로 분류될 수 있다. 1. '북반구'에서 그것은 내가 '민족적 사회적 국가'라고 부르는 복지국가가 창조한 사회정책과 사회적 시민성의 기관들의 부분적 또는 심층적 해체를 포함하여, 따라서 복지에서 근로연계복지 (workfare) [노동하는 것을 조건으로 국가가 공적인 부조를 베푸는 것]로의 폭력적 이행과 사회적 국가에서 징벌 국가 (penal state) 로의 폭력적 이행을 포함한다 (루익 와깡이 최근의 에세이에서 설득력 있게 논증한 것처럼, 미국은 이런 관점에서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2. '남반구'에서 그것은 '발전주의적' 프로그램과 정책들의 파괴와 전도를 포함한다. 발전주의는 대체로 희망했던 [경제적] '도약'을 낳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지만 빈곤화에 저항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보여주었다. 3. 이매뉴엘 월러스틴의 범주를 빌려오면, '반주변부'에서 그것은 '현존 사회주의'라고 불렸던 독재 구조의 붕괴와 연관되었다.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는 결핍과 부패에 기초한 것이었지만, 다시금 특정한 한계들 내에서 부와 빈곤의 양극화를 유지하고 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안하고자 한다. 노동력의 재프롤레타리아화로 귀결되는 이 모든 과정들의 공통적인 형식적 특성은 그것들이 국가장치 바로 그 내부에서 [역사를 만드는] 기층 민중 (subaltern) 의 대표 형태와 가능성을, 또는 당신이 이 표현을 더 선호한다면, 다소 유효한 대항권력의 가능성을 억압하거나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주목함으로써 우선 주로 '경제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과정의 정치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한다. 나는 다른 장면, 즉 대량폭력이 야기한 다른 종류의 결과들을 살펴볼 때, 정치적 측면은 훨씬 더 결정적이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원인과 결과의 메커니즘은 지극히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의문의 여지가 없이 현실적이다. 나는 훨씬 더 파괴적인 경향, 즉 복지나 전통적 생활양식에 대한 파괴의 경향이 아니라, 사회적 유대 그 자체에 대한 그리고 결국 '생명 그 자체'에 대한 파괴적 경향을 염두에 두고 있다. '생을 명령하는' 정치와 '죽음을 명령하는' 정치라는 두 가지 종류의 정치를 대비시키곤 했던 미셸 푸코에 대해 생각해보자. 내가 인류의 '죽음의 지대'라고 불렀던 곳에서 펼쳐지는 극단적 폭력 또는 잔혹성의 다양한 형태들의 누적된 효과에 직면하여, 우리는 현재의 생산 및 재생산 양식이 제거를 위한 생산의 양식이자, 생산적으로 활용되거나 착취되기보다는 오히려 항상 이미 불필요한 잉여 (superfluous) 가 되는 인구의 재생산 양식이 되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인구는 '정치적' 또는 '자연적' 수단을 통해 제거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이른다―라틴 아메리카의 몇몇 사회학자들은 도발적으로 이들을 세계 도시 밖으로 '내던져진' '쓰레기 인간' (poblacion chatarra) 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또 다시 문제가 제기된다: 그러한 것의 합리성은 무엇인가? 또는 우리는 비합리성의 완벽한 승리를 대면하고 있는가?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이지만 (왜냐하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축적 규모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합리적이다 ― 또는 더 적절히 말하자면, 그것은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사실상 역사는 단순히 순환적인 방식으로 즉 축적의 연속적 국면들의 순환 유형을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19세기와 20세기에 경제적·정치적 계급투쟁이 출현했고, 그 결과로 착취의 가능성을 제한하고 세력 균형을 창조하였다. 이러한 사건은 말하자면, 체계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 체계는 (그리고 아마도 그 체계의 이론가와 정치가의 일부는) 계급투쟁이 없는 착취는 없고, 착취 받는 자들의 조직과 대표가 없는 계급투쟁은 없으며, 정치적·사회적 시민성을 향한 경향이 없는 대표와 조직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이 정확히 현재의 자본주의가 제공할 수 없는 것이다: 지난 세기 동안 세계의 일부에서 실현된 '민족적 사회적 국가'에 상응하는 '세계적 사회적 국가'가 실현될 가능성은 없다. 내 뜻은 정치적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세계적 사회적 국가'를 향한 모든 움직임에 대한 [현재 자본주의의] 정치적 저항이 존재하며, 게다가 그러한 저항은 매우 폭력적이다. 기술혁명은 현재적 또는 잠재적 노동력의 탈프로레타리아화를 위해 긍정적이지만 불충분한 조건을 제공한다. 바로 이 때, 직접적인 정치적 억압 또한 불충분할 것이다. 가능한 한 '수동적으로' 그리고 필요하다면 '능동적으로' 제거 또는 절멸이 일어나야 한다: 상호 제거가 '최상'이지만, 그것은 외부로부터 조장되어야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세계적 폭력의 경제'가 기능적이지는 않지만 (왜냐하면 그것의 내재적 목표는 실로 모순적이다) 목적론적 (teleological) 의미에서 유지되고 있다고 제안한다 (여기서 우리는 나의 세 번째 질문으로 나아가게 된다): '동일한' 인구가 광범위하게 목표물로 삼아진다 (또는 역으로 목표물로 규정되지 않은 인구는 점점 동화되며, '동일한 사람들'처럼 보이게 된다). 질 들뢰즈의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외연적 의미가 아니라 내포적 의미에서 질적으로 '탈영토화된다'. 그들은 항구적인 제거의 위협을 받으면서 도시의 변두리에서 '생활'한다: 그러나 역으로 그들이 그들의 본국 내부로 고정될 때에도 그들은 '유목민'처럼 생활하고 또 그렇게 인식된다. 즉, 그들의 실존 그 자체, 그들의 양, 그들의 운동, 권리와 시민성에 대한 그들의 잠재적 요구가 '문명'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된다. 결국, '극단적 폭력'은 '세계적 체계'를 형성하는가? 폭력은 고도로 '비정치적'일 수 있다―이는 내가 제안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폭력의 다양한 형태가 서로를 강화한다면, 그리고 그 다양한 형태들이 그 자신의 연속과 잠식을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데 기여한다면, 그리고 결국에는 그것들이 잔혹성과 절멸의 확산을 예방하거나 그 효과만을 제한하려는 행동들이 체계적으로 가로막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인간 (주의) 적 파국'의 연쇄를 확립한다면, 폭력은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거나 또는 '체계적인' 것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목적 없는 목적론은 내가 가장 객관적인 방식으로 '예방적 반혁명'으로 또는 아마 더 나은 표현으로 '예방적 반봉기'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것은 외양상으로만 '홉즈적'인데, 왜냐하면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에 대항하여 사용되는 무기는 또 다른 종류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르 몽드}는 최근에 콜럼비아를 국가와 마피아에 의해 수행된 '사회에 대한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언급했다). 이는 반정치로서의 정치이지만, 폭력의 이질적 형태들 사이에 수많은 연관으로 인해 하나의 체계로 나타난다 (국가예산에 필수적인 무기거래는 부패를 동반하며, 부패는 범죄행위를 동반하며, 마약·장기매매·현대적 노예무역은 독재를 동반하고, 독재는 내전과 테러를 동반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악'의 형상을 그리기 위해서 모든 형태의 폭력을 혼돈하게 만드는 극단적 폭력의 정치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인도주의적 개입은 종종 여기에 참여한다), 방송과 개입 양자 모두를 수익성 있는 사업의 원천으로 만드는 극단적 폭력의 경제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깨지기 쉬운 경계선을 갖는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 사이의 분할에 대해 말하였다. 그것은 세계화의 '전체주의적' 양상에 대해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세계화는 분명히 그것만이 아니다. 인류가 경제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로는 문화적으로 '통일되는' 바로 그 시점에, 인류는 폭력적 방식을 통해 '생-정치적으로' (bio-politically) 분할되었다. 시빌리티의 정치 (또는 인권의 정치) 는 파괴된 통일성에 대한 가상적 대체물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모든 곳에서 그리고 특히 국경 자체에서 평등이라는 쟁점을 정치적 행동의 지평으로 재도입하는 일련의 주도성이 될 수도 있다. 결론 '진정한' 결론은 없을 것이고, 단지 몇몇 민감한 쟁점에 관한 직접적 반성과 토론의 시도들만이 있을 뿐이다: '대항폭력'이라는 쟁점, 국제법이라는 쟁점, '시민성'에 대한 접근이라는 쟁점, 그리고 내가 '봉기'라고 부른 것 등.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시빌리티 전략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전략들의 실현 가능한 토대와 실행에 관한 논의는 또 다른 에세이에서 다룰 문제다. 나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은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극단적 폭력 또는 잔혹성의 연계 속에서 현실적 측면과 가상적 측면이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하나를 다른 것에 비해 특권화하는 태도를 벗어나기는 매우 어렵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정치적 행위에 관한 고전적 개념들이 항상 행해왔던 것이다: 고전적 개념들은 주로 공동체들과 공동체적 감정을 형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그리고 나는 모든 역사적 공동체들이 일차적으로 '상상된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주장에 확실히 동의한다), 또는 더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 즉 사회적 구조들, 특히 지배와 착취의 구조를 변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전형적인 사례다). 나는 오늘의 정치에서 극단적 폭력이라는 쟁점의 핵심적 특징은, 이러한 이중적 양상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상들의 요구와 제약을 비판적인 방식으로 결합하기 위해 실천적·구체적으로 노력함으로써, 그러한 이원성의 지양을 탐색하고 발명하는 것을 훨씬 더 긴급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때문에, 예를 들어, 나는 국제법이 세계적 규모의 민주주의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요소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시빌리티의 정치의 토대가 국제법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만족하지 않는다. 예컨대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 [국제법] 이면에 있는 교통 (communication) 의 윤리에 대한 강조를 덧붙이면서 일관되게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여왔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교통'의 관문들이 때로는 강제에 의해서, 때로는 폭력적 방식으로 열려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잠겨진 채로 남아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여기서 국제법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정반대 각도에서 보면, 우리는 어렴풋이 나타나고 있는 대량폭력의 반혁명적 또는 반봉기적 특징은 혁명이라는 관념의 갱신으로서 '반-반봉기' (counter-counterinsurrection) 를 요청한다고 제안할 수 있으며, 이를 옹호하는 충실한 사례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 이 때 아마도 진정한 '세계혁명'은 폭력과 자본주의, 제국주의, 그리고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가 최근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 등을 연계시키는 바로 그 세계적 구조에 대항하는 방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은 정치적 수단과 목표가 바로 그 [자본주의, 제국주의, '제국'과 똑같은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 대칭성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회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최초의 혁명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하려한 이래로, 정치적 수단과 목표는 극단적 폭력이 해방의 정치의 핵심에 구축되는 데 일조했고, 20세기가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 부른 것이 되는 것에 일조했다. 국가나 경제뿐만이 아니라 혁명 그 자체가 '문명화'되거나 '시민적' (civil) 이게 될 필요가 있다. 나는 오늘 많은 곳에서 그러한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 적극적으로 탐색되고 있지만 분명히 발견되거나 제시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좀 더 조심스럽고 아마도 아포리아에 가까운 방식으로 네덜란드 정치학자 헤르만 판 군스테렌의 최근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자 한다. 나는 모든 정치적 공동체들 ― 여기에는 근린에서부터 도시, 국가, 대륙, 지구 그 자체에 이르는 (가야트리 샤크라보티 스피박은 이런 맥락에서 행성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또는 '영토'에서 '네트워크'에 이르는 가상적 공동체들이 포함된다 ― ( [위대한 결말을 암시하는] '숙명' (destiny) 과는 반대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지만 비극적으로 투쟁할 수는 있는] 운명 (fate) 의 공동체라는 판 군스테렌의 제안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공동체들은 이미 차이와 갈등을 포함하며, 그 곳에서 이질적인 인간과 집단들은 역사와 경제에 의해 '함께 내던져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이익이나 문화적 이상은 자연발생적으로 수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호파괴 (또는 외부 세력에 의한 공멸) 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완전히 분기될 수도 없다. 인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비판 (그리고 또한 1796년 칸트의 에세이 '영구 평화를 향하여'의 정식, '그들은 ... 결국 서로 가까이 있는 것을 참아야 한다')에서 영감을 얻어서, 판 군스테렌은 모든 집단의 모든 개인에게는 그 또는 그녀가 '시민'으로 인정되는 적어도 하나의 '장소'가 세계 내에 존재해야만 하고, 따라서 인권을 누릴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메타정치적 (metapolitical) [정치에 대한 정치라는 차원의] 원칙을 명확히 한다. 그러나 그 원칙을 넘어 단 한 걸음만 더 나아간다면 (이 원칙은 다른 의미에서는 단지 우리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한 장소는 어디인가? 공동체가 '운명의 공동체'라면 가능한 유일한 대답은 급진적인 것이다: 개인들과 집단들이 속한 어느 곳이라도 그러한 장소가 될 수 있다. 어디든 그들이 '우연히' 살게되고, 그래서 일하며 아이를 기르고, 친척을 부양하고, 모든 종류의 '친교'를 위해 동료를 찾는 모든 곳이 그러한 장소다. 오늘날의 세계화되고 잔혹한 세계의 '지형학'에 대해 내가 제안한 것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우리가 다음과 같이 더 정확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권에 대한 승인과 제도는 실천적으로 인권의 발전을 명령하며 하나의 공동체에 대한 배타적 소속 (membership) 을 넘어 조직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국경 위에' 위치해야 하는데, 우리의 수많은 동시대인들이 실제로 그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당연히 이는 불안정한 상황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매우 정확한 요구를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판 군스테렌은, 내가 '시빌리티'의 관점이라고 부른 것에 입각해 볼 때 중요한 문제는 단지 시민성과 따라서 인간성에 대한 소속의 자격이 아니라 항구적 접근권이라는 (또는 그가 쓴 것처럼 '형성 중인' 시민성이라는) 관념을 타당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법적 지위라기보다는 적극적이고 집단적인 시민적 과정이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