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과 사회운동 정영섭 (반전팀) 11월 3일 아침 부시를 물리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미국의 사회운동 진영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허탈해했다. 그들은 그 '악몽과도 같은 체제'가 끝나있기를 희망하면서 눈을 떴으나 현실은 4년 전보다 악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시는 4년 전보다 큰 격차의 승리를 거두었고 많은 이들에게 '4년 더(four more years)'라는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미국인들이 전쟁과 종교광신주의, 국가 테러리즘에 손을 들어주었다며 한탄하는 이들도 많았다. 물론 위안거리를 찾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전 세계적인 반전운동의 성장, 민중의 힘이 대통령의 힘을 이길 수 있다는 것, 젊은층의 행동이 커진 것, 자유무역 정책에 대한 반대활동 등을 말하면서 '캐나다로 이주해서는 안될 10가지 이유' 같은 글을 쓰기도 했다.{{) 사라 앤더슨, www.CommonDreams.org 2004. 11. 4 }} Nation誌와 같은 언론에서는 가장 시급한 과제는 반전운동의 부활이며 이라크로부터의 철수뿐만 아니라 새로운 전쟁에 대해서도 반대하여 모두가 꿋꿋이 서서 싸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전반적으로 볼 때 미국 진보진영은 크게 실망하면서도 최근 몇 년간 성장해온 운동의 동력이나 그 성과에 다시 주목하고 향후 운동의 힘을 더 키우기 위한 실천과제를 제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反부시 캠페인의 한계 미국 반전운동 진영은 대체적으로 반부시 캠페인에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부시만 아니라면 아무라도(Anybody But Bush)'가 그 캠페인의 이름이었다. 그들은 마치 주문처럼 "누가 이기든 우리는 여전히 이라크 점령을 지속시키는 대통령을 갖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공유하고 있었다. 즉, 케리 역시 마찬가지로 전쟁과 점령을 지속하려 하기 때문에 그를 지지할 수는 없으며 오로지 부시를 패배시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케리 지지로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대적인 선거캠페인이 벌어졌다. 노동운동을 비롯하여 반전운동의 활동가들은 새로운 유권자들을 등록시키거나 유인물을 배포하거나 호별 방문을 하거나 선거모니터 요원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반부시 선거운동은 전례없이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킬 수 있었고 오히려 김빠진 케리진영의 유일한 활력이었다. 그리하여 운동진영이 총력으로 조직하여 공화당 전당대회 전날인 8월 29일 뉴욕에서 개최한 부시 반대 시위에는 무려 50만 명이나 참여하여 부시행정부의 전쟁과 복지삭감, 노동 공격에 대해 반대를 표시했다. 그러나 케리의 정책은 운동진영의 열망과 활동과는 상관없었고 그에 정반대 되는 것이었다. 비판적 지지라고 표현될 만한 수준을 넘어서, 결과적으로 반전활동가들 다수는 전쟁을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노조활동가들은 자유무역에 찬성하는 이를 위해 노력했으며 권리로서의 의료보장을 평생 대변한 이들도 5000억 달러를 사적이고 이윤지향적인 민간의료보험에 부어넣으려는 사람을 선출하기 위해 헌신했던 것이다.{{) 마크 두직, 「선거 이후 : 다음은 무엇인가」, www.zmag.org, 2004. 11. 22 }} 반부시 캠페인에 적극적이었던 미국의 대표적인 반전운동 연대체인 '정의평화연합(United for Peace and Justice'은 선거 직후 '한탄하지 말고 조직하라'는 제목의 입장을 내어서 스스로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리의 오랜 희망은 이 풀뿌리운동의 발전에 있다. 그리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전망이 필요하다. 물론 부시정책을 패배시키지 못했고, 우리는 수많은 활동가들의 좌절과 분노를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를 진보적으로 변화시키는 평화와 정의를 위한 운동은 권력을 변화시킬 만큼 강력하지 못하다... 우리는 언제나 이라크 점령을 종식시키기 위한 우리의 운동이 대선 결과에 즉각적으로 영향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미래는 쉽지 않겠지만 우리의 노력이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있다."{{) 정의평화연합, 「한탄하지 말고 조직하라」, www.unitedforpeace.org, 2004. 11. 3 }} 선거에서는 패배하였지만 반전운동을 더욱 강화하자는 얘기다. 또 하나의 반전운동 연대체인 'A.N.S.W.E.R(Act Now to Stop the War and End Racism)'는 케리 비판에 보다 비중을 두면서 많은 진보단체들이 케리에 영합한 것을 비판하였다. 계급을 대표하는 것에 있어 부시나 케리는 동일하고 그들은 오히려 암묵적인 단결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라크에서 전쟁의 가속화와 국내에서의 억압에 직면하여 반전운동의 전망은 무엇인가? 우리가 너무 약했다고 선언해야 하나? 반전운동은 평화를 위한 투쟁과 국내에서 여성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전투적인 운동을 결합시켜야 한다. 노조를 지키고 의료보장과 연금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에 대항해 투쟁을 시작하는 노동자운동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반전운동은 시민적 권리와 자유를 수호하는 반인종주의 운동과도 단결해야 한다... 원칙적인 입장에 서서 집단적 행동에 참여하고 연대하는 민중들에 의해서 국제적 운동은 강화된다."고 하였다.{{) ANSWER, 「미국의 진정한 분열」, www.answercoalition.org, 2004. 11. 5 }} 운동 자체의 변화 발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미국 반전운동은 반부시 운동으로 드러났고, 이는 냉철히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미국 정치구조가 진입장벽이 높은 양당제로서 제3후보의 출현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지만, 부시정권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를 부시와 비슷한 정책을 가진 케리 지지로 동원해내려는 전술 자체는 전제부터 치명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헤게모니국가인 미국에서 신자유주의와 전쟁에 대한 대대적인 대중투쟁의 발전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할 때, 그러한 방향에서 실천을 해야 했다. 미국 노동운동의 현실 AFL-CIO(미국노동조합산업연맹)로 대표되는 미국 노동운동 역시 전례없는 민주당 지지운동에 역량을 동원했고 그야말로 사력을 다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AFL-CIO는 5,000명의 유급직원, 225,000명의 자원봉사자를 동원했고 수백 개의 전화선거운동센터에 활동가를 보냈으며 6백만 가구를 방문했고 3천2백만 장의 유인물을 돌렸다. AFL-CIO는 4천5백만 달러(약 460억 원)를 썼고 SEIU(미국서비스노조)는 6천5백만 달러, AFSCME(미국공무원노조)는 5천만 달러를 썼다. 다른 노조들도 수백만 달러 이상을 썼고 수많은 활동가들을 케리 선거운동에 내보냈다.{{) 마크 그루엔버그, 「케리 패배 이후의 존 스위니」, www.zmag.org, 2004. 11. 6 }} AFL-CIO는 1억달러 이상을 민주당에 기부했다고도 한다. 조합원과 그 가족들이 전체 투표의 1/4 정도인 2천7백만 표를 투표했고, 이 가운데 케리-부시 비율은 65%대 33%로 거의 두배 차이가 났다. 선거 이후 AFL-CIO의 존 스위니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노동조합이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면서, 민주당이 노조의 이슈를 더 중요시하도록 하고 활동가들과 조합원을 더 적극적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민주당의 우군의 위치에서 최대의 기여를 했다고는 하지만, AFL-CIO 자체적으로도 조직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그 기여를 지속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더욱이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케리가 노조를 한번도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민주당은 계속 멀어지고 있다. 노조와 민주당의 동맹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결국 노동운동은 어마어마한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실패한 케리 선거운동에 바친 것이다. 한편, 민주-공화 양당에 독립적인 노동운동을 위한 아래로부터의 유의미한 시도가 '백만노동자행진(Million Workers' March)'이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ILWU(국제항만노조) 10지부에서 제안된 이 운동은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에 대해서 노동자들에 의한 행동을 조직하자는 의미로 제기되었고 흑인과 라틴 등 유색 노동자조직과 일부 반전운동 조직에 의해 주로 지지받았다. 이들은 워싱턴에서 전쟁과 복지삭감, 일자리축소, 노조공격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벌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AFL-CIO 지도부의 탄압을 받았다. AFL-CIO, 팀스터(트럭운수노조), 미국서비스노조, 국제항만노조의 위원장들이 민주당 지도부와 만나서 백만노동자행진에 반대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이다.{{) 「백만노동자행진 선언과 향후 방향」, www.millionworkersarch.org, 2004. 11. 6 }} 이것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백만노동자행진의 시위는 대규모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미국 전역에서 모인 1만명 정도가 참여하는 수준이었다. 이들은 AFL-CIO의 관성과 전략을 비판하고 이후에도 백만노동자행진 운동을 지속할 것을 밝히면서 기층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는 노동운동을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하였다. 이것이 운동적으로 유의미한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물론 AFL-CIO 지도부의 반대 지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미국 노동운동이 수십 년 간 민주당과의 동맹에 의존해 왔던 것의 결과라고 할 것이다. 조합원들만의 이해를 대변하고 서비스를 제공해온 미국의 비즈니스 노조주의가 이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공세에 직면하여 조직률 자체가 하락하여 영향력마저 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민주당과의 동맹으로는 노동자의 이해도 대변해내기 힘들다. 전체 노동자들의 보편적인 이해를 위해 운동하고 투쟁하는 노동운동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미국의 사회운동은 어디로 대선 이후 정의평화연합과 ANSWER를 비롯한 미국의 반전운동은 1월 20일 부시 취임식에 맞춘 시위와 3월 20일 이라크 침공 2주기에 맞춘 국제적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대선의 충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대대적인 시위를 통한 운동 동력의 재조직화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국 대선이 미국만의 대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라크 전쟁과 부시 2기에 대한 저항은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 반전운동 스스로도 얘기하듯이 반부시 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대중들이 처음으로 경험한 정치적인 적극성이 향후 운동의 동력이 보탬이 되어야 할 것이다. 노동운동에서도 역시 새로운 흐름이 더욱 활발히 나타나고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인 전쟁과 신자유주의 하에서 미국이라는 헤게모니 국가에서 반전 반세계화 운동은 기존의 양당체제 틀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이를 초과해야 하며 세계 각 국의 운동과 연대하여 지배체제에 파열구를 내는 투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 PSSP
지난 1월 14일 민주노동당에서 진행된 세계사회포럼 참가자 교양대회 자료입니다. 지난 전에 올린 5차 세계사회포럼 자료모음과 약간 중복되는 내용이 있긴 합니다만 세계사회포럼에서 채택된 전세계사회운동의 호소문 등의 자료들이 첨부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라크 총선 - 문제적인 미국 조직들이 이라크 선거 배후에서 작동한다 - 리사 애쉬케나즈 크로키 & 브라이언 도미닉, 뉴스탠다드, 2004. 12. 13 (Lisa Ashkenaz Croke and Brian Dominick; The New Standard; December 13, 2004) * 미국이 기금을 대는 조직들이 이라크 선거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를 파헤친 글입니다.
한일 FTA 협상 저지 투쟁으로 하나 된 한일 노동자-민중 지난 11월 초 일본 동경에서 한일 FTA 6차 협상이 열렸고, [자유무역 WTO 반대 국민행동],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등으로 꾸려진 [반세계화 공동투쟁 기획단]은 약 90여 명의 '한일 FTA 6차 협상 저지 일본원정투쟁단'을 조직했다. ['이의있음! 한일 FTA' 캠페인], [아탁 재팬],[젠토이츠노조], [평화포럼]등 일본의 사회운동은 한국 원정투쟁과 함께 공동 활동을 펼치기 위해 '11월 한일 FTA 저지 공동행동 실행위원회'를 구성했다. 2002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1차 협상 당시에는 '한일 민중 공동성명서'를 긴급하게 조직하여 양국 정부에 초국적 자본의 이해만을 대변하며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짓밟는 한일FTA 협상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정부간 협상은 2개월에 한번씩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진행되었는데, 이때마다 양국 사회운동들은 협상장 앞 시위를 조직했고, 참여 인원은 회를 거듭할수록 늘어, 지난 8월 경주에서 열린 5차 협상에는 약 500여명이 모이게 되었다. '한일 FTA 산관학 합동 연구회' 등 한일 FTA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세력들은 한일 FTA 체결로 관세가 철폐되면 현재 관세가 상대적으로 높은 한국이 더욱 큰 타격을 입게 되고, 한국의 대일무역적자 규모가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에, 전경련 등은 정부에 공산품에 대한 관세 철폐를 유보하거나 시기를 늦춰줄 것과 중소기업체들의 피해산업에 대한 대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는 등 국내자본의 피해를 최소화할 방안을 찾고 있다. 그러나 양국 민중에게 놓인 한일 FTA의 문제가 이들처럼 양국 사이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이었다면 양국 민중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양국 민중은 한일 FTA가 국경과는 상관없이 투자의 범위와 영역을 확대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초국적 자본에 최적의 환경을 선사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한일 FTA 협상에서 교육, 의료를 비롯한 공공서비스에 대한 자유화가 WTO 도하개발의제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파업을 할 수 있는 권리 등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들을 무역장벽으로 취급하고 있는 점등은 이를 잘 보여준다. 노동권, 환경권, 공공서비스에 대한 접근권 등 민중들의 제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한일 FTA를 저지하는 투쟁에 양국의 민중들은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연대의 시작, 서로에 대한 이해로 한일 민중들의 만남. 이토록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직접 얼굴을 맞대고 행동하는 일이 처음 있는 일이긴 했지만,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행동을 펼치는 것을 어려운 일이라 생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동 활동 기간은 고작 3일이었기 때문에, 원정투쟁단의 활동 목표는 한일 FTA 체결에 대한 양국 민중의 반대의 목소리를 양국 협상단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돌아온다는 정도로 소박하게 설정되었다. 그러나 원정투쟁단과 일본실행위의 조건은 너무도 달랐고, 현실은 만만하지 않았다. 한국의 원정투쟁단에게 동경은 언어도 다르고 지리도 낯설고 스스로의 행동이 어떤 효과를 낳을지 예측하기 힘든 매우 생경한 곳이었다. 일본의 실행위 역시 이런 대규모의 원정투쟁과 공동 활동을 펼치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원정투쟁단은 한정된 시간동안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행동을 하고자 했으나,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동경에서 벌어지는 어떤 상황에 대해 즉각적으로, 안정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일본의 실행위는 원정투쟁단이 가지고 있는 의지를 모조리 발휘하고, 그럼으로써 침체된 일본의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길 기대하고 있었으나, 스스로의 역량이 마음만큼 이를 지원하기에 충분하다고 자신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공동 활동이 최대한의 성과를 남기도록 하기 위해, 원정투쟁단과 일본 실행위는 서로가 처한 조건, 그리고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3일간 진행된 투쟁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이를 훌륭하게 해냈고, 서로서로를 진정한 동지로 가슴에 담았다. 외무성 앞 연좌농성, 경단련 항의방문, 시부야 거리집회… 원정투쟁단의 기본적인 활동계획은 협상이 진행되는 일본외무성 앞에서 연좌농성을 진행하며 협상중단을 요구하는 것과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를 한일FTA가 정하는 '비관세 무역장벽'에 포함시켜 없앨 것을 주장하는 일본경제단체연합 앞에서 항의시위를 전개하는 것, 양국 정부가 협정문안을 합의하고 나면 비준절차가 이루어질 국회 앞, 그리고 시내 곳곳에서 한일 FTA의 반민중성을 알려내는 것들로 구성되었다. 동경 시내 중심지인 시부야 공원 근처에서 거리시위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러나 가장 흔하게 생각할 수 있는 투쟁형태인 외무성앞 연좌농성도 일본에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최근 20년 동안 일본에서는 한번도 이런 형태의 투쟁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원정투쟁단이 일본에 도착하기 직전, 코우다라는 일본청년이 이라크에서 납치되어 참수 당한 사건이 있었고, 일본 정부는 바로 그 즈음을 대테러 대책기간으로 정하고 있어서 정부 건물 주변 경비가 강화된 상태였다.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기 전날 밤, 연좌농성을 성공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일본실행위가 마련한 방안들을 공유하고, 한일FTA 체결에 대한 반대 의사를 강력하게 표출하겠다는 의지들을 확인하며 다음날을 예비했다. 20년 만에 처음인 정부청사 앞 연좌농성이 어떤 양상을 그릴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협상이 개시된 11월 1일, 이른 아침부터 외무성 근처의 히비야 공원에는 원정투쟁단을 포함하여 250명 가량이 모여들었고, 간단한 결의대회를 진행한 후 외무성 앞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경시청소속 기동대(그러나 차림새는 한국의 전경과는 매우 다르다. 헬멧, 방패, 곤봉 아무것도 없었다)는 외무성 앞길을 막아섰다. '니칸 FTA 쿄쇼 야메로!(한일 FTA 협상 중단하라!)', '한일FTA 중단하라!' 한국어와 일본어 섞어가며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던 중, 한국 정부 협상단을 실은 버스가 외무성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시위 참석자들이 외무성 앞으로 다가가 항의하며 이를 가로막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원정투쟁단은 대열을 가다듬고 길 건너편 신호등의 파란 불이 들어오는 것을 신호로 하여 스크럼을 짠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경찰을 밀어내려고 하였다.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경찰들은 스크럼을 짜고 있는 원정투쟁단원들의 목을 조르며 인도로 밀어 넣으려 했다. 순식간에 일본의 참가자들이 원정투쟁단 사이를 헤치고 경찰 앞으로 다가섰다. 원정투쟁단원들은 순간 혼란에 휩싸였다. 일본 참가자들의 행동이 경찰과의 충돌을 막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원정투쟁단을 경찰들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일민중 공동기자회견부터 유라쿠쵸 마리온 이라는 번화가 선전전까지, 이날의 활동은 날이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하루 일정이 끝난 후, 다음날의 투쟁 수위를 둘러싼 일본 실행위와 원정투쟁단 상황실간의 격렬한 논쟁이 오랜 시간동안 진행되었다. 일본 실행위는 이날 아침 외무성 앞에서 벌어진 격렬한 몸싸움으로, 경찰의 대응은 더욱 강화될 것이고, 일본의 법에 의하면 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이 따를 것이라는 점을 우려했다. 따라서 다음날까지 연좌시위를 계속하는 것은 무리라며, 계획을 수정할 것을 제안했다. 원정투쟁단 상황실은 한계적인 조건임을 감안하더라도 연좌시위를 지속하는 것이 투쟁단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이라는 입장을 폈다. 장시간의 토론 끝에 서로의 조건과 의지를 충분히 고려하여 다음날 현장에서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논쟁은 마무리되었다. 상황을 공유한 원정투쟁단은 다음날의 투쟁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 조별로 모여 밤늦은 시간까지 토론했고, 이를 지켜보는 일본 실행위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토론에 합류하여 마음은 원정투쟁단의 의지만큼 함께 투쟁하겠지만 몸은 경찰 앞에서 원정투쟁단을 보호하는 방패막이가 되어있을 것이라는 뜻을 전달하는 일본 활동가도 있었다. 날이 밝자 히비야 공원은 또다시 외무성앞 시위를 전개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외무성으로 향하기 직전 일본실행위는 원정투쟁단 상황실에 긴급한 메시지를 전했다. '구속을 감수하고서라도 원정투쟁단이 정하는 수위의 투쟁을 함께 하겠다. 그러나 원정투쟁단이 경찰에 의해 다치는 일이 없도록 일본인들이 앞장서겠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외무성으로 향하는 원정투쟁단의 발걸음은 힘이 넘쳤다. 전날과 달리 방패며 곤봉으로 무장한 채 외무성을 감싸고 있는 경찰을 바라보는 일본 참가자들의 눈빛에도 힘이 넘쳤다. 서로의 손을 굳게 잡은 채 더욱 목소리를 높여 항의의 뜻을 전했다. 안타깝게도 이날 시위에서 경찰의 진압으로 두 명의 원정투쟁단원이 부상을 입고, 전일본운수노조연대 소속 노동자 한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국회 앞 시위, 경단련 항의시위, 마루노우치 경찰서 앞 항의시위, 일본외무성 항의면담까지 힘찬 투쟁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시부야 거리시위에는 전노협, 이주노동자들이 주된 조합원인 카나가와시티 유니온을 비롯 500여명이 함께했다. 참석자들은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데도 든든한 동지를 얻었다는 기쁨에 지칠 줄을 몰랐다. '원정투쟁단이 침체된 일본 운동에 활력이 되어주길…' 일본의 3개 노총 중 가장 큰 규모를 지니고 있는 렌고(聯合)는 한일 FTA의 필요성을 긍정하지만, '일본'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보호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로 규모가 큰 공산당 계열의 젠노렌(全勞聯)은 한일 FTA가 반민중적이라는 입장은 공감을 하지만, 실행위에 결합하고 있는 여타 일본 단체들과의 관계상 원정투쟁단과 직접 공동투쟁을 벌이기는 힘들다는 입장이었다. 원정투쟁단과 행동을 함께한 일본실행위를 구성하고 있는 단체들은 가장 작은 규모의 노총인 젠로쿄(全勞協),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를 포괄하고 있는 젠토이츠(全通一)노조 등과 반전-반세계화 투쟁을 강화하여 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풀뿌리 사회운동들이었다. 시위 참가자들 중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동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침체된 일본운동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국철이 민영화되는 과정에서 해고된 조합원들이, 민영화를 수용하며 사측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새롭게 구성된 노동조합의 외면 속에서 18년간 원직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하며 조합원들의 자주적인 활동을 제어하는 어용노조에 맞서,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14명의 인원으로 새로운 노조를 설립하는 모습…. '복지는 국가가 책임 질 테니 노조는 투쟁을 자제해 달라'는 정부의 요구를 노동운동이 받아들인 후의 모습이라고 했다. 일본의 운동은 원정투쟁단에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지만, 원정투쟁단은 침체된 일본 사회운동에 활력이 되어주었으면 한다는 바램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마무리하며 6차 협상이 끝난 직후, 한국 정부는 한일 FTA 협상을 내년 중으로 타결한다는 목표에는 변함이 없으나, 서두르지 않을 것이며, 한중 FTA, 한미 FTA 체결을 함께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국내자본이 입을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련한 협상안을 일본 측이 쉽게 수용하지 않은 탓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 정부 협상단은 원정투쟁단의 항의면담 요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국내자본의 요구대로 관세철폐 등 무역자유화의 일정을 조정하는 것을 시도해 볼 수는 있을지언정, 초국적 자본의 이해보다 민중의 권리가 우선해야 한다는 양국민중의 요구는 청취조차도 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번 원정투쟁을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진행했던 '한일FTA 저지 전략 워크샵'에서는 한일 양국 민중의 연대투쟁을 이번 원정투쟁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강화시켜 가자는 의견이 오고갔다. 2005년 12월 홍콩에서 열릴 WTO 6차 각료회담 저지투쟁에도 한국과 일본의 사회운동이 아시아지역 사회운동의 합력을 모아내는 데 앞장설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3일 동안 다져진 서로에 대한 신뢰와 동지애가 그 바탕이 될 것이다.PSSP
영국의 사회적 합의주의와 노동운동 송강현주 (노동차장) 영국, 사회적 합의주의 과정을 개괄하며 영국은 서구 유럽의 사회적 합의주의의 형태 중 가장 약한 형태로 간주된다. 역사적으로 영국에서의 사회적 파트너십은 거의 부재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때때로 산업과 경제 사안을 넘어서는 다양한 합동의 형태를 기획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다. 특히 세계대전의 상황은 삼자간의 정책협의가 가능하도록 하는 촉진적인 역할을 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보수-노동 내각(Conservative and Labour administrations)은 경제번영과 사회평화를 위한다 는 명목으로 영구적인 사회적 파트너십의 구조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를 해왔다. 그러나 이것들은 실패로 끝나고 대처주의의 (노동배제, 탄압적인) 신자유주의가 성공하면서, 영국에서 사회적 파트너십은 역사적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리고 영국의 노동운동은 보수당 80년대 이후로 암흑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 글은 영국의 사회적 합의주의의 역사적 전개과정과 현재 TUC(Trade Union Congress;노동조합회의)의 전략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으로, 현재 남한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문제와 노동운동의 전략에 대한 시사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1939년까지의 사회적 파트너쉽 ; 전쟁과 국가의 계획 영국의 노사관계에서, 국가가 관계된 화해와 조정의 메커니즘이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노동조합운동이나 사용자 양측의 어느 편에 의해서도 거의 환영받지 못했다. 노동조합은 국가의 역할에 깊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법으로 보장된 자유와 자유로운 단체협상을 위한 권리를 보존하고자 했다. 반면에 노동조합에 대항할 수 있는 공격 능력을 보유하고자 했던 사용자에게 그들의 힘을 제한하거나 경영적 특권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은 불안한 것이었다. 국가가 관련된 첫번째 사례는 '전면전(total war)'에서 요구되던 사항이, 관행적인 사회적 파트너들간의 밀접한 평화 시기의 상황을 변형시킨 것이다. 이러한 변형의 촉매제는 1915년의 군수품(munition) 위기였는데 심각한 노사불안이 수반되었다. 군수품 산업의 조합과 사용자 사이에서 동의가 이루어져야 했으며, 정부의 통제가 석탄과 선박에까지 확장되어져야만 했고, 정부에서 사용자와 노동자 대표의 자리가 마련되어졌다. 1919년에는 사용자와 노동조합 대표 양자로 구성된 국가산업회의(National Industrial Conference) 안에서 사회적 합의주의식 해결책이 실행 가능한 방법으로 제시되었으나, 이러한 계획은 정책협의의 중요성에 대한 합의의 부족으로 인하여 희생되고 1921년 NIC는 해체되고 말았다. 1930년에는 전반적으로 노동조합과 사용자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든 정부가 그들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들을 시도하지 않았다. 세계대전(Great War)이 국가에 의하여 조율되고 주선된 노사간의 협의와 협력을 유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사정 3자에게 이러한 발전은 일단 평화가 복구하면 지속되지 않을 임시적인 비상조치로 사고되었을 뿐이었다. 1939 62년까지의 사회적 파트너십 ; 전쟁과 재건 제2차 세계대전의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영국에서는 사회적 파트너십의 외연적인 시스템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경제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고, 그 결과는 국가 자체의 존재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중앙의 경영과 지시가 자유시장을 대체해 버렸다. 국가는 생산적인 능력과 인력자원을 군사와 경제 목적을 위한 방향으로 조정한 상황에서 사용자와 노동조합간의 협상, 협약, 합의에 나섰다. 또한 그 시기는 산업생산에서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노동 불안을 최소화하는 데 목적을 둔 양자간, 그리고 삼자간의 기구 운영이 번영되었던 시기였다. 새로운 행정부(생산, 공급, 식료품, 연료, 그리고 전력)는 확대된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서는 노동부였고 1940년 5월 어니스트 베빈(Ernest Bevin){{) 베빈(Bevin)은 소규모이고 내적으로 응집된 공동협의위원회 (Joint Consultative Committee)를 설립했고, 매우 역동적이고 건설적인 정책을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노동조합의 대표로서 노동조합 운동의 전폭적 지지를 획득했던 사람이었다. }}이 노동부 장관이 되었다. 그는 파업 행동을 타개하기 위한 강압보다는 합의의 방법이 성공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임금억제를 호소하는 것이 법정 임금 제한을 강요하는 것보다 더욱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TUC는 1944년 사용자와 노동조합주의자들이 함께 모여 정부에 조언할 수 있도록 한 국가산업위원회를 통하여 국가의 경제생활에 대한 실제적인 통제 속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매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시기의 사회적 파트너십을 일시적인 해결책 이상으로 보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세계대전이라는 외부의 요구에 따라, 영국은 처음으로 영국의 상대적인 경제 하강을 역전시키기 위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산업 불안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초점이 맞추어진 일련의 사회적 파트너십 전략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62 79년까지의 사회적 파트너십 ; 국가발전위원회 1960년대와 1970년대 기간 동안 영국의 정부는 TUC와 사용자들의 대표 조직(Confederation of British Industry : CBI)과 함께 사회적 파트너십을 구하고자 노력하였다. 사회적 파트너십의 첫 번째 실험은 1962년 보수당 정부의 국가경제발전위원회(National Economic Development Council: NEDC)로 시작되었다. 국가경제발전위원회는 외연적으로는 사용자, 노동조합, 그리고 국가로부터의 대표를 가지고 있는 협의체(tripartite body)였다. 위원회의 임무는 생산성의 목표를 설정하고 보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이 기관은 특정 산업을 위해 만들어진 경제 발전위원회들(Economic Development Councils)의 창설을 이끌어 냈다. 결국 국가소득위원회(National Incomes Commission: NIC)는 임금 논쟁을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적 파트너십이라는 측면에서, 1970년대는 사회적 합의를 위한 시도가 반복되는 양상이었다. 1972년 경기침체가 닥쳐왔을 때, 헤스 정부는 모든 사회적 파트너들은 경제번영을 확신하기 위해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사회적 합의주의 계획의 미덕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전환시켰다. 1974년 2월 헤스 정부가 붕괴되었을 때,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경제 계획과 사회적 파트너십 모두에 등을 돌렸다. 초기 TUC는 임금억제를 받아들였지만 1977년 가을에 자유로운 단체협상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가 높아 졌다. 1978 79년의 겨울에 상호계약의 마지막 흔적은 격화된 산업분쟁으로 사라지고 쇠퇴했으며, 1979년 선거에서 '사회적 파트너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1979~1997년; 보수당 정부의 상업주의 원칙 1979 97년까지의 보수당 정부는 경제와 산업과 관련된 정책결정 과정에서 오로지 시장의 작동원리나 또는 상업주의 원칙 (commercial criteria)에 기반하여 결정되도록 하기 위해 노동조합과의 관련성을 점차로 줄여 나갔다. 대처 정부는 전후 지속되어 온 노사간의 합의를 철저히 부인하고 노조를 탐욕적이고 무책임한 독점집단으로 규정하여 노동조합의 규제에 나섰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시작이었다.{{) 보수당 정부는 일련의 새로운 법률 도입을 통해 노조세력의 약화를 꾀하였는데 여기에는 사용주의 노조에 대한 법률적 인정의무의 철폐, 클로즈드 숍(closed shop: 노조에 가입해야만 회사에 취업할 수 있는 제도)의 금지, 노동쟁의시 노조의 면책특권 제한, 불법파업시 노조 기금의 압수, 파업시 조합원의 사전 비밀투표 의무화, 피케팅(picketing: 노동쟁의 시 사업장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면서 파업 불참자의 사업장 출입을 방해하는 행위)에 대한 제한 강화, 노조의 업무·재정에 대한 정부 감사, 노조의 불법행위에 대한 사용자 권리의 강화, 노조에 대한 노조원 개인의 권리 보호, 조합비 체크오프제(check-off제: 임금에서 조합비를 일괄 공제하여 조합에 주는 제도) 철폐, 최저임금제 철폐, 불공정 해고 규제의 완화 등 광범한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 따라서 조직화된 노동세력이 더 이상 사회적 파트너로 보일 수 없게 되었다. 1980년대와 90년대의 영국의 사회적 파트너십의 거부에 관한 가장 명확한 상징은 1992년 국가경제발전위원회(National Economic Development Council : NEDC)의 폐지와 그 해 4월 보수당의 4회 연속된 선거에서의 승리였다. 다양한 삼자체에서 사용자, 사업가, 혹은 다른 사적 부문의 대표체들은 여전히 구성원에 들어 있는 반면 노동조합 대표는 감소하였다. 보수당 정부는 또한 장관들과 TUC 사이의 접촉의 기회를 줄여나가는 것을 주도했다. 보수당 장관들이 TUC를 만나고 있을 경우에도 예외없이 정부의 결정과 목적에 대하여 협의하기보다는 통보되어졌다. 한편 1980년대 후반 주된 야당이었던 노동당은 1983년과 1987년 선거에서의 심각한 패배 후 우파 성향으로 꾸준히 움직였다. 지난 10년 동안 노동당은 노동조합과의 연계를 느슨하게 하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는 1997년 노동당의 선거 승리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에 대한 별다른 협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블레어 정부는 노동정책에 있어서 노동시장에서의 유연성 확대를 추구하는 반면, TUC가 주장하는 최저근로기준 설정이나 노조의 권리 강화 등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공공부문의 임금억제정책을 계속하고 있으며 완전고용정책에 대한 지지도 철회하였다. }} 한편 TUC의 1997년 연례회의는 '노조, 사용자, 정부 사이의 사회적 파트너십의 원칙'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승인하였다. 결과적으로 TUC는 영국 내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보수당 아래에서 했던 것보다는 정부 장관들과 좀더 정기적인 교류를 누렸지만, 그것들은 진정한 사회적 파트너십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다. 오히려 블레어 정부 하에서 운영되고 있는 것은 사용자 주도 파트너십에서의 실험임이 주장된다. 블레어 정부는 새로운 형태의 파트너십 그리고 가장 명백히 정부와 사적 분야사이, 그리고 사업장에서의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파트너십을 강조한다. 파트너십의 이 같은 방법들 중 어느 것도 노동조합에게 국가적인 수준의 경제정책 결정에서의 역할을 제공하지 않는다. 사업장내 파트너십에 대한 옹호는 경영자의 경영권이 신성불가침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파트너십'은 경영자가 그 계획과 정책을 사업장에 더 잘 알리는 것과 관련된다. 자본과 노동이 전통적으로 국가에 대해서 품어 온 불신들은 영국 사회 내에서의 자유적인 자유방임 가치에 대한 좀더 넓은 지지의 일부분으로 보여질 수 있고, 이것은 또한 영국 안에서의 사회적 파트너십을 불리하게 만들어 왔다. 영국의 전통적 단체교섭 ; 비공식적, 분권적, 자율적 영국은 독일의 산업발전이 아직 시작하기 전에 이미 완전히 산업화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영국경제는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쇠퇴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대륙의 국가들과 달리 영국의 산업은 전쟁 이후에 재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영국의 산업은 파괴되지 않았으므로). 또 다른 이유는 기술혁신에 대한 노동조합의 부정적 태도인데, 이러한 조합 측의 태도는 영국에서 노사관계의 본질을 이룬다. 영국의 중심적인 노동조합연합회는 노동조합회의(TUC; Trade Union Congress)이다. TUC에는 유럽의 어떤 다른 노동조합연합회들보다도 더 많은 대규모 노동조합 회원들이 가담하고 있는데, 이는 직종별 노동조합(occupational unions)이 지속적으로 존재해온 데 기인한다. 영국의 노동조합주의는 오래된 조직유형인 장인노동조합(craft unions)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러한 직업별 노동조합은 유럽 대륙에서는 거의 사라졌다. 이러한 장인노동조합들은 한 직업 내에 종사하는 숙련 근로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여기에는 동일 산업에 종사하는 미숙련근로자들이 제외되었다. 이들 노동조합은 일방적으로 또는 사용자와의 계약을 통하여 임금률을 정하고, 미숙련의 신규근로자들과 도제들이 동일직종으로 유입되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노동조건을 개선시켰다. 필요할 경우 새로운 기술들의 도입과 다른 부류의 근로자들의 고용에 반대한다. 장인노동조합의 주요 우선순위는 이동성과 재교육의 수용을 의미하는 고용안전이 아니라 직업안전, 즉 자신들의 직업을 유지한다는 보장이었다. 영국모델에서 각 노동조합들은 자신들의 숙련 근로자들이나 미 숙련 근로자들을 대표하여 개별 사용자들이나 사용자 연합들과 교섭했다. 이는 다차원적인 사용자교섭(multi-employer bargaining)일 수 있지만, 그 교섭의 결과들은 산별 노동력 전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다차원적인 사용자 교섭과 기업 교섭에서 사용자들은 많은 노동조합들과 교섭해야 했는데, 각 노동조합들은 근로자들의 여러 분파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에서의 교섭패턴과 결과들의 다양성은 유럽 대륙에서보다 더 크다. 대부분의 실제적인 노동조건들은 기업내의 노동조합-사용자 계약에 맡겨졌다. 이러한 절차들은 기업교섭에서 제기되는 갈등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주요교섭차원으로서의 기업이나 작업장의 지위를 암묵적으로 남겨 놓는다. 기업내의 교섭은 다소 자율적인 유니온 샵 직장위원(stewards)과 여러 등급의 사용자들간에 거의 지속적이고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진다. TUC의 '새 출발'운동과 '새 노조'운동{{) 1993년부터 TUC의 새로운 총서기 존 몽크스(John Monks)에 의해 주도 }} 80년대 이후 영국의 노동조합 운동은 쇠퇴일로를 걸어 왔다. 1979년 집권한 대처 보수당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과 노조에 대한 공격으로 노동조합은 조직률의 감소, 전투성의 상실, 정치적 발언권의 상실을 겪었으며, 그 결과 영국 사회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노동조합의 힘은 형편없이 줄어들었다. 현장에 토대를 둔 노동운동은 약화되고, 그 대신 기업별 노사협력주의가 나타났다. 직무경계의 소멸, 다기능공화, 파트타임 노동자 및 파견노동자의 증가, 업적급 및 이윤분배제의 도입, 변형근로시간제 및 교대제의 변경 등 경영자 측에 유리한 노동관행이 잇달아 도입되었다. 하청·임시노동자의 광범한 사용에 의해 고용불안은 한층 심해졌다. 노동조합은 정부와의 일체의 대화통로가 끊긴 채 정치적 시민권을 잃어버렸다. TUC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93년 '새 출발' 운동과 '새 노조' 운동을 시작한다. 운동의 내용은 먼저 TUC가 조합원의 좁은 이해관계를 대변하기보다는 넓은 범위에 걸친 노동자 계급 전체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최근 TUC의 캠페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의 예를 들면 파트타임 노동자의 권리, 최저고용기준, 전국단일 최저임금제, 실업문제의 해결, 인종차별문제, 연금문제 등이 있다. 또 새 출발 운동의 핵심과제 중 하나는 노조 조직률의 향상을 위한 조직화 사업이다. 주요 대상은 여성, 청년층이며 특히 새로운 산업 및 불안정한 직종에 있는 노동자들에 집중하고 있다. 그 외에도 TUC는 각종 정당, 사용주, 단체와의 연대 및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언론 홍보작업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TUC는 새 출발 운동의 성과를 스스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새 출발 운동은 회원노조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하고 완전고용과 근로조건의 질적 개선, 그리고 노동자 권리의 보장을 가져오는 한편, 사용주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노사공동목표인 경쟁력 강화 및 작업장에서의 공정성을 획득하는 등 커다란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조 내 비판적 세력들은 사회적 파트너십을 강조하는 TUC의 새 출발 운동을 온건노선(moderation)으로 규정하면서 새 출발 운동이 노사간 이해관계의 갈등적 측면을 축소하고 노사공통 이해관계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온건노선은 파업 등 단체행동을 반대하고, 노사협의회 등 단체교섭기구 외의 통로를 지지하며, 파트너십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고, 노조원의 동원보다는 사용주에 의존하는 경향을 낳는다. 그 결과 고용보장, 노조영향력 증대 등 새 출발 운동이 약속한 것들은 지켜지지 않은 채 오히려 노동자의 요구를 사용자의 이해관계에 종속시키고 노조의 영향력을 줄여 노조를 약체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이 온건노선을 버리고 전투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파트너십 전략의 한계 영국에서 사회적 합의주의에 기반한 계획들은 전쟁 기간 동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 같은 기대는 항상 평화시기가 오면 거두어져 버렸다. 전쟁 시기의 특수하고, 일시적인 조건 이외에, 1964 70년까지 윌슨 정부에 의해 대국 모의의 사회적 파트너십이 한때 시도되었다. 영국 내에서 '사회적 파트너들' 각각은 상당한 정도의 단기간주의 (short-termism)에 의해서 특성화되고, 노동조합은 항상 본래적으로 업무조건과 업무환경에 대해 사용자들과의 협상을 통해서 사업장에서의 그 구성원들의 즉각적이고 물질적인 이해관계와 관계되어 왔다. 순차적으로 이것은 기본적으로 계급의 위치와 정치적인 소속보다는 직업과 산업에 기초한 회원을 가지고 있는 노동조합 사이에서 상당한 파벌주의를 촉진시켰다. 이것은 분권화된 형태의 단체교섭을 유지시키고 다른 유럽사회에 비하여 산별협약이 발달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노동운동의 힘을 단결시키지 못하고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처를 중심으로 한 폭압적인 신자유주의 재편에 TUC로 대표되는 영국의 노동운동은 약해지고 말았다. TUC의 새 출발 운동은 신자유주의적 정책 하에서 쇠퇴를 경험한 노동조합이 채택한 노동조합 전략의 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에 의해 위축당한 영국 노동조합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분파적 이익을 넘어 전 계급의 이해를 위한 노동운동으로 거듭나려는 조직화와 캠페인 등의 새로운 움직임은 현재 IMF 위기국면 하에서 정부와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전략과 노동정책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한국의 노동조합들에게도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TUC는 단일하게 조직된 사용자 연합이 미비하고 사용자들이 노조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정부나 EU 차원의 개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더욱이 노동당 정부의 성격변화라는 상황과 사용주와의 공동이해관계를 강조하는 TUC의 새 출발 운동이 추구하는 사회적 파트너십 전략이 얼마나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 하겠다. PSSP
독일 사례를 통해 본 사회적 합의주의 이규철(노동차장) 1. 他山之石 독일은 노사간의 공동의사결정체계가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는 나라다. 이는 한국처럼 몇 년간의 투쟁과 협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독일 노동운동의 긴 역사만큼의 오랜 시간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과거를 되돌아 보라 했다. 사회적 합의주의가 노동운동을 휩쓸고 있는 지금, 독일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현재 우리의 상황을 보다 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하자. 2. 독일 노동운동의 역사 독일에서 형성된 노사 공동의사결정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독일 노동운동의 역사를 먼저 간단히 살펴봐야 한다. 독일의 노사관계라는 것이 독특하고 오랜 노동운동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 노동운동의 역사를 몇 시기로 나누어 특징적인 부분들을 검토해보자. 1시기: 독일 노동운동의 태동(1840-1918) 이 시기는 독일에서 자본주의의 맹아가 등장하면서 노동운동이 태동하던 시기였다. 1844년 슐레지엔 방적공들의 파업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이후 1860년대부터 위로부터의 자유주의 개혁이 진행되면서 독일에서는 본격적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시작하고 이념적으로도 자유주의, 라살레주의 등으로 분화된다. 그러나 1871년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합하고 군국주의적 정책을 펼치면서 '사회주의자 탄압법'으로 인해 독일 노동운동은 큰 시련을 맞게 된다{{) 비스마르크 정권이 도입한 사회주의자 처벌법은 모든 노동자조직과 노동자언론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비스마르크 정권은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노동자들을 국가적으로 통합하고자 한다. }}. 그러나 이런 탄압에도 독일 노동운동은 의회에 13명을 진출시키는 등 영향력을 점점 강화한다. 결국 1890년 사회주의자탄압법이 폐지되고 난 후 30만 명 이상의 조합원들을 기반으로 '독일 노동조합 중앙위원회'가 설립되어 이른바 '자유노조'(Freie Gewerkschaften)가 탄생했다. 자유노조는 아직 산별이라기보다는 직업별 조직의 성격이 강했으며 조합원 권익신장, 임금인상, 노동시간단축 등을 놓고 단체협약을 체결해나갔다. 그러나 1차세계대전 과정에서 독일 사민당 다수파가 전쟁참여를 지지하면서 자유노조도 민족적 이해가 우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는 체제 자체의 변화보다는 체제 내 개선을 지향했던 자유노조의 성향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의 독일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의 본격적 시작과 아울러 투쟁 속에 형성되었으나 내부 분열과 이념적 한계-체제 변혁에 대한 명확한 상의 부재-에 의해 경향적으로 체제에 통합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2시기: 11월 혁명부터 바이마르 공화국까지(1918-1933) 1918년 독일 노동운동은 11월 혁명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11월 혁명과정에서 북부독일의 키일해병들의 반란과 뮌헨 혁명, 베를린의 투쟁 등을 통해 노동자, 농민 병사를 아우르는 평의회가 독일 곳곳에 설치되었으며, 이런 투쟁을 통해 독일은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이행한다. 이를 통해 탄생한 것이 바이마르 공화국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평의회 운동을 주도했던 급진적 세력에 의해 건설된 것이 아니라 개량주의 세력의 타협과 협상의 산물이었다. 이는 1918년 11월 협정{{) 11월 협정은 독일 노사관계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turning point)을 이룬다. 그것은 이 협정이 기존의 전제적인 노사관계를 유지시켜 왔던 구조를 해체시키고 집단적 노동관계에 입각한 새로운 틀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11월 협정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노동조합'의 공식적 인정과 남여노동자의 '단결권'을 합법적으로 보장. ② 회사조합(어용노조)에 대한 원조를 중지할 것. ③ 구체적 노동조건을 '단체협약'으로 결정할 것. ④ '노사동수'로 된 분쟁조정위원회의 설치를 협약에 포함할 것. ⑤ 근로자 50명 이상의 기업에 '노동자위원회'를 설치할 것. ⑥ 직장알선을 노사공동으로 관리할 것. ⑦ 1일 '8시간 노동제'를 실시. ⑧ 이상의 협정실시 및 사후문제의 협의기관으로 '노사동수'의 중앙위원회를 설치함. 사실 11월 협정은 내용적으로만 보면 별 문제가 없을 수도 있으나 문제는 이런 협정이 임시방편적인 것이었으며 불안정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을 통해 명징하게 드러난다. 전쟁과 자본주의 자체에 저항하는 혁명적 대중들에 대해 부르주아는 개량적인 사민당 다수파와 노조지도자들을 끌어들이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건설하게 한 것이다. 이런 태생적 한계속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여전히 혁명적이었던 평의회운동{{) 1919년 2월과 4월 루르지역 탄광노동자들에 의한 총파업, 3월 베를린 노동자들의 총파업, 4월 뮌헨의 '레테공화국' 선포와 내전의 발생(노동자 약 1천 명 정도 살해됨) 등 }}을 체제내화한다. 1920년 제정된 '노동자평의회법'이 그것인데 노사 공동의사결정 등을 명문화하기는 했으나 평의회의 파업권을 부정하고 노사의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할 의무를 부과하는 등 그 한계는 명확한 것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혁명적 대중운동을 체제내화하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지지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나찌당을 음양으로 지원해 혁명적 대중과의 세력균형을 이루려 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결국 나찌당을 키워주는 결과를 나았으며 결국 나찌당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3년 붕괴된다. 이 시기 독일에서는 분업화, 단순작업의 확대 등 테일러리즘이 본격화되는 생산의 합리화가 시작된다. 이에 대해 사민당 다수파와 노조지도자들은 이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생산합리화가 사회 진보로 이루어질 거라는 생산력 주의-하고, 이 과정에서 평의회운동은 패퇴하고 만다. 이를 통해 독일 자본주의는 1929년 공황까지 상대적 안정기를 유지하고, 노동운동은 체제 자체에 대한 정치투쟁에서 분배를 위한 경제투쟁으로 경도된다. 3시기: 나찌 시대(1933-1945) 나찌가 권력을 잡았던 이 시기는 독일 노동운동의 암흑기다. 집권 후 4개월이 안되어 대부분의 노조와 운동조직이 파괴되고 그동안의 제도적 성과물도 사라지게 되었으며 모든 저항운동은 지하로 들어가게 된다. 한편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독일에서는 포디즘적 발전체계의 기초가 형성되어 1950년대 비약적 발전의 기반을 갖추게 된다. 4시기: 본격적 산별체계의 시작(1945-1968) 2차대전 후 독일 노동운동은 본격적 산별노조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광범위한 연대를 위해, 또 한편으로는 나찌즘의 재발호를 막기위한 연합국의 이해관계속에 16개 산별노조를 기반으로 하는 독일노동조합총연맹이 1949년 결성된다{{) 독일 산별노조의 3대 기본원칙; 1산업 1노조의 원칙, 1기업 1노조의 원칙, 그리고 정치적 독립의 원칙(조직적 자주성을 의미) }}. 한편 이 시기 독일의 부르주아들은 포디즘적 축적체계를 본격화하면서 노동자들의 분노를 체제내화하기 위해 강력한 사회보장정책을 실시하고 대량소비의 확대를 꾀한다. 이는 국가에 의한 노사공동의사결정의 보장과 노동자 경영참가를 통해 노사간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한다. 독일의 산별노조 역시 이 과정에 함께 하면서 경제주의적 이익 추구를 본 목적으로 삼게 된다. 이런 과정은 노동조합 상층부와 기층 노동자, 노조와 노동자평의회 사이의 분리를 낳게 되고 근본적으로 노동자, 혹은 노동자조직이 자본주의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5시기: 산별체계의 안정화에서 신자유주의로(1968-현재까지) 1966/67년 공황을 거치며 독일 부르주아들은 산업합리화를 적극 추진한다. 고용불안과 노동강도의 강화라는 상황에 대해 노동자들은 69년 가을 전국적 파업으로 대응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노조 지도부는 산업합리화과정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노조의 영향력을 합리화과정에 반영하기 위해 참여와 형성정책을 내세운다. 부르주아들도 이에 동조하며 '노동생활의 인간화'라는 일종의 유화책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이루려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후 1970년대에서 1980년대를 거치며 독일 부르주아들은 본격적인 신자유주의 기조를 받아들이며 적극적 구조조정을 진행한다. 이런 부르주아들의 공격에 대해 독일 노조는 이에 대해 적극적 저항보다는 협상과 타협을 통해 문제해결을 꾀하기 시작한다. 덧붙여: 독일 통일과정에서의 노동조합 이런 과정에서 독일 통일은 노동운동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었다. 독일의 통일과정(여기서는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인 통일협정이 조인된 이후의 과정을 말한다)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3차원의 정화사업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헤어진 이산가족이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시간이 채 가시기도 전에 3차원의 초대형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생산수단의 소유관계나 산업구조 전체를 서독 자본의 필요에 맞게 바꿔내고('시장경제'라는 경제적 차원), 둘째로, 이것과 맞물리면서 노동자의 내부구성, 세력관계, 사회적 의사결정의 구조를 완전히 새로 짜 맞추며('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차원), 셋째로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행위방식을, 즉 일상적 삶의 방식을 서독의 기준에 맞추어 내는(사회적 차원) 것이다. 이런 통일과정에서 서독 노조는 통일 이후의 사회재편에 대해서는 부르주아들에게 맡겨버린 채 조합원을 늘리는 데만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통일 이후 서독의 부르주아들이 추진한 동독의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에 대해 노동운동은 거의 방관으로 일관해버렸다. 물론 독일의 노동운동은 동독과 서독사이의 임금격차를 줄이기 위해 많은 투쟁을 전개했으나, 이 역시도 노동자계급의 주체형성을 위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동독 노동자들이 능동적으로 자본주의에 편입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현재 독일의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를 거스르는 흐름이라기보다는 소극적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3. 독일의 노사 협상과정 독일에서 노사 협상의 주체는 대부분 산별노조와 사용자단체다. 이들간의 대표협상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것이 독일의 일반적인 노사협상이다. 산별수준에서 맺어진 단체협약은 기업수준에서는 임금 및 근로조건의 '최저수준'으로 인정되며 각 기업별로 이 협약에 기반해 세부 협상을 한다. 이때 세부협상의 노동자측 주체는 공장/노동자평의회다. 이 평의회는 한국의 노사협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지니며 경영참가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경영참가의 수준은 임금 및 노동조건에 관한 공동의사결정 및 각종 이의제기와 협의를 할 수 있는 정도로 한국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노동자평의회는 파업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파업은 산별수준에서만 가능하며-단사에는 노조가 없고 평의회만 있기 때문에-평의회의 파업은 불법이며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다. 독일에서 노조가 파업을 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단체협약 체결시 합의가 안돼 쟁의행위에 돌입하면 조합원 찬반투표를 통해 75%(!)이상의 찬성이 나오고 4주간의 '평화기간'(냉각기간)을 거친후 파업에 돌입해야 합법파업이 된다. 처음 단체협상부터 파업 돌입까지 걸리는 시간은 보통 석달 정도다. 덧붙여 파업기간에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적용되어 노조에서 파업참가조합원들의 임금을 지급한다. 한마디로 파업에 돌입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며 노조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런 이유로 독일의 산별노조들은 가능한 파업을 피하려 하며 파업 돌입전에 협상을 마무리짓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쏟아붓는다{{) 지난 1995년 2월 말에 이뤄진 금속노조 바이에른 지구의 파업은 이를 잘 증명한다. 즉 금속노조는 바이에른주에서 '파업을 해도 망하지 않을 기업' 120개를 고른 뒤, 그 중 '소비자와 중소납품업체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는' 22개 공장에서만 파업을 개시했다. "노동조합은 기업을 망하게 하거나 독일 금속산업의 국제경쟁력을 해치거나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되풀이하여 강조했다. }}. 독일의 노사협상과정을 통해 우리는 독일의 노사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산별노조와 평의회의 경영참가 및 공동 의사결정은 존중하고 이를 근거로 파업투쟁에 강력한 제한을 가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독일의 노사관계가 갈등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협조적이며 덧붙여 경영참가와 공동의사결정을 통해 노조가 기업의 운명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런 구조가 실제 현장에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보자. 4. 폭스바겐 사의 노동시간 단축 협상 사례 독일 폭스바겐 사의 노동시간 단축 협상은 93년 11월 사측의 30%인원감축계획 발표에서 시작되었다. 폭스바겐 사는 애초에는 노동과정 혁신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꾀했으나 이것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잉여인력의 과감한 정리를 통해 기업의 노동유연성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인원감축 계획은 구체적으로 당시 10만 3천 2백 명인 국내 노동자를 95년까지 7만 1천 9백 명으로 30%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무려 3만 명의 노동자를 '정리'하겠다는 이 계획에 대해 폭스바겐사의 노동자평의회와 독일 금속노조는 사측에 협상을 요구한다{{) 폭스바겐 사는 독일의 사용자단체에 가입해있지 않기 때문에 금속노조와 폭스바겐사가 직접 협상을 하는 대각선 교섭구조를 가진다. }}. 이에 사측에서도 적극 협상에 나섰고 결국 세가지 주요원칙에 기반한 단체협약을 맺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 4일제'를 통한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시간 유연화: 교대제를 통해 주 4일 28.8시간 노동{{) 당시 노동시간은 주당 36시간제였는데 이를 20% 감축하면 28.8시간으로 된다. }}에 주 5일 공장 가동한다는 것이다. 노동시간이 20% 줄어든 대신 세후 소득의 12-13%를 삭감하지만, 생계비 보전을 위해 보너스나 크리스마스 보너스를 정상 월급여로 계상한다. 그리고 주당 35시간이 넘는 노동시간분에 대해서는 금전적 보상과 함께 시간외 노동에 대한 보상 휴가를 부여하는 방식(노동시간 계좌제도, Arbeitszeitkonto)을 도입했다. 둘째, '미혼자 탄력근로제': 30세 이하의 미혼자 4만 명은 1년 중 8∼9개월 근무만 할 수 있게 하고 나머지 3∼4개월은 취미생활이나 신설 공공직업훈련원에서(공공실업기금 보전) 계속교육, 직능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이를 Block-Modell, 블록시간 모델이라고 함). 셋째, '직업훈련생과 고령자 파트타임제': 수천 명의 직업훈련생이나 고령자는 주당 28.8시간 미만으로 일하게 하면서도{{) 직훈생(Azubi)의 경우 첫해는 주 18시간, 둘째 해는 주 20시간, 셋째 해는 주 24시간, 넷째 해는 주 28시간 노동. }} 타기업에 대체노동력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거나 서서히 노동시간을 줄여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정년으로 연결될 수 있게 한다.{{) 50세 이상의 고령자는 정년의 3년 전에는 주 24시간, 2년 전엔 주 20시간, 1년 전에는 주 18시간만 일하게 함. 그리하여 매끄럽게(glatt) 정년 생활로 적응이 되게 만들고자 함. }} 결국 폭스바겐사의 고용조정은 한마디로, 임금축소를 통한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시간의 완벽한 유연화로 정리된다{{) 고용조정의 결과 대부분의 폭스바겐 노동자들의 월 급여는 전과 같은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각종 상여금과 수당을 월급여에 포함시킨 결과로 연봉으로 계산했을 때는 전보다 약 11%정도 감소하게 되었다. }}. 이는 사측 입장에서 보면 임금 총액의 축소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생산성 향상, 노동시간 유연화로 인한 공장 가동시간 연장 등 여러모로 긍정적인 것이었다. 또 폭스바겐사의 '주 4일 근무제' 협약은 그 자체로서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도 중요한 초석이었다. 즉 작업교대제와 노동시간이 그로 인하여 유래 없이 유연화될 수 있었고, 그 사이에 독일 내 10개 폭스바겐 공장들에서만 약 150 가지의 노동시간 모델이 실시될 정도로 다양화되었다. 그러나 위의 협약이 노사가 모두 좋은 윈윈전략은 분명히 아니었다. 협약의 4조 1항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고용안정을 이루기 위해서 경영상의 이유로 배치전환과 전근 등이 불가피하므로, 모든 소속노동자는 회사측으로부터 부여받은 과업을 두말없이 수행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주 4일 근무제' 협약은 1995년 말, 1997년 말에 가서 효력이 끝나고 비슷한 내용의 새로운 협약이 맺어졌지만, 이 노동력의 유연한 사용에 관한 특별조항은 그에 관계없이 효력을 지속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는 노동자 개인의 '시간'에 대한 권리를 완전하게 사측에 '양도'한 것이나 다름없다{{) 노동시간의 끊임없는 변동은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박탈한다. 개인적으로는 규칙적 생활의 불가능으로 인해 건강 및 사회 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며, 작업장내에서도 집단적 유대형성이 힘들어져 단결의 저해요인이 되기도 한다. 한국 자동차 공장내에서 탄압의 방법으로 노동자를 주간조에서 야간조로 옮기는 것은 흔한 일이다. }}.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베를린 금속노조 지부의 W. Hajek에 따르면 주 28.8시간 근무는 주당 4일 근무가 아니라 1년단위의 변형근로시간제이며 그나마 각 공장별로 4주에서 4개월 정도밖에는 시행되지 않았다. 반면 인건비 30% 절감, 생산의 유연화, 노조의 협조주의적 통합 강화 등 사측의 의도는 잘 먹혀 들어간 것이 이 모델의 특징이다. 또 한국에서도 쟁점이 되었던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삭감이 노조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각종 휴가와 수당의 폐지, 초과근로수당 지급조건의 강화(주35시간 이상)등도 큰 문제점이다. 무엇보다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하를 바꾸자는 경영측의 제안에 대해 조합원들의 의사를 제대로 묻지도 않은 채 별 다른 독자적 대안의 모색이 없이 너무도 쉽게 수용적 태도를 보이고 말았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이는 노사간의 협조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철저한 부르주아적 명분아래 노조가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이후 독일노총과 금속노조는 이와 비슷한 성격의 협약을 계속적으로 사용자와 체결하면서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의 적극적 동반자로 전락하고 만다{{) 독일 사민당 집권이후 98년에 창설된 '일자리를 위한 동맹'은 독일을 철저한 신자유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구상이었으며 독일노총은 이에 적극 동참한다. 또 2004년 금속노조는 폭스바겐사와 새로운 단체협약을 맺는데 협약의 주요 내용은 향후 7년간의 고용보장을 조건으로 임금동결 및 노동자간 임금차별, 노동시간 유연성의 강화, 초과근로수당 지급조건의 강화 등이다. }}. 독일 노동운동의 슬픈 역사다. 5. 총평가 많은 이들에게 독일 노동운동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왔다. 확고하게 자리잡힌 산별노조체계와 노사공동의사결정 등이 그 주된 부러움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변혁을 소망하는 이들에게 독일 노동운동은 마냥 부러운 대상일 수만은 없다. 독일 노동운동의 역사와 현재의 모습은 우리에게 부럽다기보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독일의 평의회는 처음 봉기했을 때의 혁명적 지향을 개량주의자들에 의해 강제로 거세당한 채, '협의회'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대중의 투쟁의 성과를 나찌에게 넘겨버렸다. 나찌 몰락이후 독일 노동운동은 산별노조를 통한 사용자와의 협상과 합의를 주목적으로 한 철저히 실리주의적 지향으로 경도되고 만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6-70년대를 거치면서 강력하게 시행된 사회보장제도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및 노동조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민중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앞에 지금 독일의 노동운동은 무능하기만 하다. 사용자측과 다양한 협상을 체결하고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지켜내는 듯 하나 그 것은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에 대한 완전한 동의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임시방편일 수밖에 없다. 개량의 유혹에 홀려 신자유주의의 덫에 걸린 것이 현재 독일 노동운동의 현 주소다. 독일 노동운동을 우리의 현 상황에 대한 모범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독일 노동운동은 우리의 모범이 아니라 가지 말아야 할 길에 대한 참고자료일 뿐이다. 6. 나가며 알튀세르는 노동조합 역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그 어느 때보다 전 사회가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지금의 상황에 잘 들어맞는 말이다.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했을 때 노동조합의 동의는 조합원의 동의로 등치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 노동조합이 부르주아들과 어떤 합의를 이룰 경우 그 합의는 노동자대중과의 합의로 인식되고 신자유주의는 전체 대중의 합의로,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관철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에 반대하는 노동자대중의 역동성은 질식되어버린다. 결국 남는 것은 부르주아의 이해만이 대변된 앙상한 '합의'뿐이며 노동조합은 '부적절한'방법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한다. 노동자대중의 피 어린 투쟁으로 만들어진 민주노조와 방대한 체계, 그 체계가 지금은 대중의 역동성을 질식시키고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의 지지대가 되고 있다면, 그것은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 쌓아왔던 투쟁의 성과들이 밑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다면 작은 기득권 하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봐야 부질없는 짓일 뿐이다. 과감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의로 강한 걸음을 준비해야 할 때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