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교육개방 시장화 저지와 교육공공성 실현을 위한 1030 범국민대회! WTO·FTA 교육개방협상 중단 ! 외국교육기관특별법 입법 저지 ! 국립대민영화, 교사대 통폐합, 대학구조조정 저지! 교원구조조정 저지! 입시제도개혁으로 사교육 불평등 해소! 공공성·민주성에 입각한 사립학교법 개정 쟁취! 대학공공성 강화! 공공의 일자리 창출! 완전무상교육 실현! 교사 공무원 노동3권 쟁취! 격동의 하반기교육정세, 교육주체와 노동자 민중의 투쟁으로 돌파할 것이다. 손 지 희 범국민교육연대 정책실장 교육권의 합법적 유린 시대 정권이 세 번 바뀌는 동안에도 꾸준히 진행된 신자유주의 교육구조조정. 급기야 완성 시도 라운드로 접어들다. 시장주의세력은 담론화, 정책화를 거쳐 "개방", "분권"을 지렛대 삼아 교육시장화 악법을 쏟아내고 있다. 90%국민의 교육권을 이제 법/제도의 이름으로 유린할 태세다. 김영삼 정부 5.31교육개혁 당시 교육부장관이었던 시장주의자 안병영을 등용했을 때, 노정권의 강한 신자유주의 교육구조조정 드라이브는 예견되었다. 시장화 방책을 요리조리 끼워 넣어 엉터리 "사교육비 경감 대책"을 내놓은 그. '사교육비 경감'라는 방망이로 인권유린의 0교시 수업과 보충, 타율학습을 국가정책으로 둔갑시켜 학교를 학원처럼 만들려 들지를 않나, 국가가 나서서 EBS로 과외공부를 시키지를 않나, 고교평준화 해체와 교원평가를 사교육비 경감 대책이라고 억지를 부리지를 않나. 사교육비 경감대책으로 내놓은 2008입시안 역시 학부모들의 호주머니를 더 털 게 뻔하다. 학벌주의의 근간이자 사회적 생산성에 역행하는 만신창이 대학서열체제를 평준화로 손볼 궁리는커녕, 시장원리를 만병통치약인 양 들이댄 지 오래. 급기야 '대학경쟁력 강화'를 내세워 국공립대는 민영화, 사립대학은 영리법인화하겠다는 야무진 계획을 내놓았다. 이뿐이랴. 정부는 전면 교육개방의 도화선이 될 외국교육기관특별법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사립학교법'은 민주적 개정의 요구를 묵살하며 수구-사학자본-시장주의 총 단결로 '개악'마저 시도할 태세다. 한나라당은 KDI출신 이주호 의원 -그는 모든 사안을 '시장화, 유연화' 깔대기로 대체한다-을 앞세워 교육문제의 해법은 "평준화 해체! 민간위탁경영! 국립대 민영화! 교원노동 유연화!"의 블랙홀로 빨아들인다. 조선일보와 합작하여 평준화 해체의 꿈을 이루려고 한다. '기업하기 나쁜 나라'라는 질타를 아끼지 않는 전경련은 경제개발 패키지에 교육을 빠뜨리지 않는다. 그들이 계획하는 "기업도시"는 입시명문 귀족학교인 자립형사립고가 얼마든지 장사를 하도록 배려하고, 외국교육기관을 맘껏 들여오고, 영리법인이 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곳이다.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천부인권(天賦人權) 억압시스템 왜곡된 교육현실을 재생산하는 파행 구조 '교실 붕괴', '사교육비 고통', '0교시에서 야간보충, 자율학습',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학생인권의 부재'.'입시위주의 교육', '교육주체 간의 불신' 등 한국교육의 파행과 왜곡은 도를 넘을 상태다. 자원과 노력을 헛되이 흘려버리는 낭비 구조 현행의 교육시스템에 투여되는 돈과 시간, 노력은 실로 엄청나다. 교육비의 경우 국가의 교육재정부담은 GDP 약4%(2001년), 공공부담비율은 32%로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편이지만 민간이 부담하는 사부담공교육비와 사교육비는 세계 최고이며 이를 합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육재정을 투자하는 캐다다(GDP 8%)보다도 훨씬 많다. 0교시에서 새벽학원까지 학생들의 학습시간도 물론 세계 최장이다. 그렇지만 우리사회의 지식과 학문, 문화적 역량 정도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 주범은 대학서열체제로 인한 학벌주의와 왜곡된 대입경쟁이다. 이로 인해 창조성과 다양한 잠재력 개발, 학문발전은 점점 멀어진다. 온 국민이 이런 기형적 시스템에 매달려있는 상황인 것이다. 대다수를 패배자로 내모는 실패 구조 입시와 취업을 위해 엄청난 노력과 자원을 투여하지만 소모적 경쟁과정을 통해서 단지 소수만이 승리자가 되는 제도다. 수직적으로 위계 서열화된 학벌체제에서는 최고의 상위에 이른 자만이 만족할 수 있디. 한해 6~70만명의 초등학교 입학생 중 최후에 1% 미만 정도만 만족할 수 있는 현실에서 대부분의 이들은 패배의식을 내면화 할 수밖에 없다. 대학입학 이후에는 취업전쟁에 매달려야 하는데 자신의 전공을 살려 정규직에 채용되는 경우는 극히 미미하다(현재 대졸취업 50%미만, 비정규직 60%, 채용규모 IMF 이후 300인 이상 기업 1만 5천 전후). 결국 수십년간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다수는 목표를 이룰 수 없으며 공부한 것을 써먹을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대물림하는 불평등 구조 막대한 사교육비를 동원한 점수 따기 경쟁은 서민들의 생활의 질을 떨어뜨리고 노동자들의 초과노동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한정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에서는 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한 계층에게 유리한 결과를 안겨줄 뿐이다. 노력과 자원의 과잉투자와 실패로 인한 고통과 상실감은 민중에게는 더욱 비참하게 다가온다. 현재의 교육시스템에서 노동자가 자녀에 투자하는 사교육비 부담은 훨씬 크지만 서울대에 진학할 확률은 고급관리직의 3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현재 소득상위계층 20%와 하위계층 20%의 과외·학원교육비 지출격차는 4.6배이며 해마다 오르는 대학교육비는 이미 보통의 노동자 임금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1학기 평균 600만원)에 도달했다. 한 마디로 노동자, 민중은 온 몸을 바쳐 스스로 이 시스템의 언저리가 되고 이 차별 체제를 정당화시켜 주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노동자, 민중은 이런 잘못된 교육시스템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서 사회적 기회 박탈, 삶의 질 하락을 감수하며 힘들게 살고 있다. 빛좋은 개살구 마냥, 겉보기에 기회는 늘었을지 몰라도 불평등의 골은 깊어졌다. '더 많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 대학을 가야 한다' 강박을 부추기며 유형, 무형의 에너지를 경쟁에 쏟아붓기를 강요하지만 막상 진정한 교육적 실현은 없다. 10년 간의 신자유주의 국가 교육 정책은 '국민의 교육권 실현, 확장'은 뒷전인 채 가진 자들의 입김대로 놀아나며 '교육권 억압, 구별 짓기'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 고도성장이 벽에 부딪치고 계급구조가 굳어지면서 서민들의 똥통학교(?)와 귀족학교를 갈라치는 '불평등 교육체제'의 도입 압력이 전방위로 몰려든다. 한국에서 출구 찾기에 짜증이 난 부유층은 아예 '조기 유학' '미국시민권 획득'을 통하여 버젓이 별개의 트랙을 개설한다. 틈만나면 조중동은 해외 자본에게 공교육을 개방하고 평준화를 깨라는 협박을 일삼는다. 세계 최고의 대학 진학률을 자랑하지만 깊어가는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대학은 민중의 등골을 빼먹는 비싼 등록금으로 장사를 일삼을 뿐, 고학력 실업자들을 양산하는 '취업 대기소'로 전락한 지 오래다. 총체적인 교육위기, 민중교육권의 총체적 위기 상황이다. 더 이상 그들에게 맡겨둘 수 없다. 노동자, 민중의 힘으로 공교육의 틀을 바꾼다. 정부는 학벌주의와 대학서열구조라는 공교육의 주요모순을 외면한 채 국가 책임을 방기하고 '돈 많은' 소비자들의 천국으로 공교육을 사유화하려 한다. '혁신'을 외치면서도 낡고 낡은 수직적 관료시스템은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걸핏하면 학원과 학교를 비교하더니 사교육비 해결을 위해 정부가 내놓은 묘안은 공교육을 학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눈 뜬 장님이고, 욕심 많은 혹부리영감이며, 자신마저 길을 잃은 양치기소년이다. 더 이상 우리교육의 미래를 정부의 독단과 시장주의자들의 탐욕에 맡겨둘 수 없다. 공공성 강화 진영은 신자유주의 저지투쟁을 벌이며 내공을 키워왔다. 올해는 드디어 '공교육 새판 짜기'란 제목의 민중적 교육 대안을 제출하면서 담론지형에서 자기자리를 만들어냈다. 전교조 10만대오가 앞장서 정부와 대결하면서 교육시장화의 속도를 늦추었고 "WTO개방·시장화 저지, 공공성 강화"의 깃발아래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시장주의 세력과 대등하지 못하다. 더 많은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정책기조를 바꾸어내는 것이다. 노동자, 민중이 당당히 정책주도권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활자화시켜낸 민중의 교육 대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다. 교육문제가 교육만의, 교육주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민중의 문제이다. 노동자, 민중이 '교육정책의 방향과 기조'를 둘러싼 싸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하반기 총 투쟁은 그 분수령이다! 1030 범국민대회, 1031 공공부문 노동자 연대 투쟁 하반기 투쟁은 범국민대회로의 총화라는 사업의 상이 그려진 상황이다.우리는 범국민대회를 민중이 교육권 쟁취 투쟁의 주체로 나서는 분기점으로 만들 것이다. {{{{투쟁단위 }}{{핵심저지사안 }}{{공세사안 }}{{공동 의제 }}{{전교조 }}{{교원평가, 지방직화 저지 }}{{입시제도 개혁 사립학교법 개정 (교원 노동3권 쟁취) }}{{외국교육기관특별법, 사학청산법, 국립대 민영화 저지와 공공성·민주성에 입각한 사학법 개정 쟁취 입시제도개혁 (교육부안 폐기, 수능폐지·대학서열완화의 범국민적 공동입시안 마련) => 사교육 불평등 해소, 완전무상교육 실현 대학, 교원구조조정 저지하고 공공성에 입각한 대학 및 교원정책 수립의 전기 마련 }}{{공무원노조 }}{{국립대 민영화 저지 산학협동법 저지 }}{{노동3권 쟁취 }}{{교대, 사대 }}{{교사대통폐합 저지 }}{{임용고시 폐지 목적양성체제 수립 (법정정원확보) }}{{대학 (학생/교수노조/대학노조) }}{{대학구조조정 국립대민영화 저지 }}{{청년실업해소, 대학개혁 (사학법 민주적 개정) }}{{문화 }}{{문화예술교육 축소 반대 }}{{교육과정전면개편 사회적 교육과정위원회 구성 }}{{시민사회단체 }}{{교육정책독점폐기 / 권력분점요구 }}{{기타 }}{{- 비상국민회의를 통한 상층전선형성 }}{{- 민주노동당 : 민중적 교육대안 사회 의제화(민중진영의 입시개혁안 등) / 지역투쟁 조직, 지원(평준화 해체 공세, 외국교육기관 유치 등) }}{{- 노동, 농민 진영의 민중교육권 (무상교육, 교육기회 평등 실현 등) 강력한 요구 제출 조직 등 }} }} 첫째, 순회토론회와 거리선전전을 지역 거점에서 벌이고 교육 부문은 물론 '현 정세를 돌파하는 사회공공성 투쟁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지역에서 만나는 주체들은 반신자유주의 공공성 강화투쟁의 주체로 조직할 것이다. 둘째, 외국교육기관특별법 입법 저지와 사립학교법의 개악을 막고 민주적 개정을 쟁취하기 위해 대국회 사업을 전개할 것이다. 이미 민주노동당은 교육개방을 국정감사 핵심과제로 설정하고 범국민교육연대 정책단위와 함께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국회 교육상임위원들을 최대한 압박하여 외국교육기관특별법이 저들 멋대로 처리되지 못하도록 일차 저지선을 만들 것이다. 셋째, 본고사를 부활시키고 고교등급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 뻔한 교육부의 입시안을 파탄내고 이를 공세적으로 대학서열화를 완화하는 입시안을 쟁취의 계기로 전환시킬 것이다. 이미 입시안은 사회쟁점으로 부상해 있으며 교육부는 고교등급제 시행 의혹이 사실임을 실토하고 말았다.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교육부 안에 대한 반대여론이 거세다. 입시제도 개혁은 교육운동의 숙원이다. 입시제도 개혁을 이번에는 꼭 이룬다는 각오로 기왕에 만들어진 교육부 입시안에 대한 반대흐름을 수능폐지, 국공립대 평준화의 방향으로 모아낼 것이다. 10월30일 범국민대회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와 교육공공성 실현"을 향한 연대의 대오를 확인하고 이를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보여주는 장이고 선전포고를 하는 장이다. 용두사미 흐지부지 연대를 외치다가 "역시 연대는 중요하지만 어려워"라는 반성이 반복되어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우리는 모두 "공공부문의 사회공공성 쟁취 투쟁"에서 다시 만나야 한다. PSSP 지금 범국민교육연대 투쟁기획단은 힘 있는 대회 성사를 위해 1030 범국민대회 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있으며, 지역별 토론회를 조직하고 있다. 10월 12일 조직위원회 발족 기자회견 10월 12일 서울 지역 "반세계화 교육공공성 강화 토론회" 10월 13일 "노무현 정권 교육차별 정책 규탄과 올바른 입시제도 쟁취를 위한 결의대회" 10월 14일 경기 지역 "반세계화 교육공공성 강화 토론회" 10월 30일 3시 "WTO교육개방 시장화 저지와 교육공공성 실현을 위한 범국민대회" 10월 31일 공공부문 노동자 대회
동아시아 제국주의의 현재성 한국에서 '식민지'라는 용어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국권의 상실과 착취, 억압"이라는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로 여겨졌고, 마땅히 청산되어야 할 과거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배"가 무엇이고 그것을 청산한다는 게 무엇인지는 그것의 가능성이 점점 사라져질수록 점점 희미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식민지배 청산이 정치적 지평에서 사라지게 되는 과정은 물리적 탄압을 동반하는 철저히 인위적인 결과였다. 1947년 미군정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민족반역자에 대한 특별법> 인준을 거부했고, 1948년 설립된 반민특위는 '국회프락치 사건'을 거치며 경찰에 의해 습격, 해산 당했다. 또한 1961년 5.16 쿠데타를 통해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세력이 7월 <반공법>을 제정해 모든 사회운동 세력을 제거한 것은 쐐기를 박는 조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역사학계가 일제 강점기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조차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친일세력이 곧 반공세력으로 변신하거나 그들과 결탁한 상황에서 그 시기에 대한 연구 자체가 금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의 패망과 연합군의 승리, 대한민국의 건국은 식민지배 종식 자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고, 일본 식민지배의 실상과 그것이 한국사회에 남긴 광범위한 유산이 무엇인지 대해서 질문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물론 이러한 조건에서 몇몇 선구적인 인사들의 활동을 통해 대표적인 친일파 인사들의 행적에 관한 조사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졌다(이러한 활동이 현재 친일진상규명법의 모태가 된다). 하지만 식민지배 청산이라는 문제는 단지 식민지배에 앞장선 친일 인사에 대한 인적 청산에 한정될 수는 없다. 일제에 의해 이식된 사회구조의 모순 전반을 일소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친일파 청산에 관한 논란이 여야 정치세력 내부의 쟁점으로 이전된 상황에서, 우리는 식민지배 청산에 관한 더욱 광범위하며 본질적인 문제들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 일본 제국주의, 일본 파시즘은 왜 등장했나? 식민지배/제국주의라는 팽창주의는 당대 자본주의 중심국가의 동일한 국가적 지향이었다. 멀리 볼 것 없이 동아시아의 경우도 이러한 세력들의 각축장이었다. 영국의 인도와 동남아 여러 국가들에 대한 지배,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 미국의 필리핀 지배 등등. 물론 식민통치 전략과 목표는 서로 상이했다. 이는 세계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식민모국이 처한 조건을 반영한 것이었다. 결국 동아시아에서 태평양전쟁으로 격돌하게 된 미국과 일본을 비교해 보자. 미국은 1898년 쿠바 수역에서 스페인과 전쟁이 발발했을 때, 비밀리에 필리핀 마닐라만에 정박한 스페인 함대를 점령하고 결국 2천만 달러에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매입하여 병합하였다.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영향력을 뻗치고 있던 독일이나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미대륙의 양대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필리핀을 "예방점령"하는 계획을 은밀히 실행한 것이었다. 미국이 필리핀에서 팽창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실시한 정책은 미대륙의 서부팽창과 유사했다. 즉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연방정부가 외교적으로 개입하여 점령을 정당화하고, 군사총독을 임명하여 저항을 분쇄하고, 민정으로 이양한 후, 연방으로 편입하는 방식. 그런데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차이점이 있었다면 필리핀의 "자치화"를 내걸었다는 점이다. 이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강대국간에는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하고, 약소국들에서 위임통치를 실시하여 그 기간 동안 자치주의를 이식하여 독립을 보장한다는 미국의 일반적인 대외전략으로 연장, 확대되었다. 그러나 물론 미국이 "시혜적인" 목적으로 실시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 연방을 건설하는 과정 자체가 거대한 내부 식민지를 창출하는 과정이었고, 이것이 완료된 시점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판으로 "자치주의"의 동심원적인 확대가 미국의 안보가 가장 최상책이라는 전략 때문이었다. 또한 미국 자본주의가 영토주의적인 직접적인 지배를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즉 "자치주의"의 실현이 미국의 기업이나 투자가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과 양립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먼저 미국의 통치기간 동안 필리핀 내부의 사회경제적, 계급적 구조는 자본주의적 수탈구조로 재편되었다. 경제의 중추부가 수출용 환금작물 생산 위주로 재편되었고, 필리핀 소수의 대지주와 함께 미국의 투자가들이 농업생산이나 공장, 광산 사업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인민들은 여전히 토지에 의존해서 살아야 했지만, 가혹한 착취를 감내해야만 했다. 또한 1934년 이후 필리핀의 "자치화" 과정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영향력을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만주사변 이후 필리핀의 영구중립화 추진. 2차대전 후 필리핀 군사기지 유지, 대 필리핀 투자에서 "내국인 대우" 요구 등등.) 이러한 미국의 필리핀에서의 "경험"은 2차대전 후 냉전 시기 대외 팽창주의를 실현하는 원형이 되었고, 멀게는 1945년 이후 한국에서나 가깝게는 현재 이라크에서나 공히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의 팽창주의가 겪은 길은 서로 달랐다. 일본은 1850년대 개항과 1860년대 명치유신을 겪은 후발주자였다. 일본은 "자강론"과 "진출론"이라는 지배전략 차원의 이데올로기를 적절히 배합하여 민족주의/국가주의를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북해도와 오키나와를 강점했고, 청일전쟁 후 대만과 조선의 식민화로 대외 팽창주의의 결정적인 계기를 맞이했다. 1930년대 만주사변을 거쳐 만주 지역을 점령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으로 전시동원체제, 천황 중심의 강력한 파시즘/전체주의 체제로 치닫게 되었다. 미국이 연방합중국이라는 거대한 내부식민지를 형성하는 과정에 비추어본다면 북해도와 오키나와 병합은 일본의 북문과 남문이라는 요충지를 획득했다는 것 외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왜소한 것이다. 따라서 "살찐 큰 제물"이 필요했고, 그것은 곧 위기에 처한 구제국 중국이었고 그 발판이 제국의 변방인 조선과 대만이었다.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가 된 것은 "위대한 일본국민의 해탈과 부활", "문명화를 위한 정복"이었고, 나아가 대만이나 조선에서 "민족동화"를 달성하겠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포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은 구상은 실현되기 매우 어려운 조건에 처해 있었다. 식민지배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식민지인에 대한 억압과 차별로 인해 "민족동화"는 먼 훗날의 일로 계속 미뤄지게 되었다. 오히려 일본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전황이 악화되자 전쟁 동원을 위해 '민족동화'를 강제적으로 무리하게 추진하여 커다란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전쟁동원을 위해 "황국신민화" 즉 천황숭배, 애국심, 반-백인종주의 강요, 창씨개명과 함께 식민지에서는 유례가 없는 징병제 실시를 강행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동아시아는 두 개의 팽창주의가 대결했고, 2차 세계대전을 통해 그 영욕이 갈라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동일한 팽창주의 경쟁을 펼쳤으나 일본은 동아시아 각국에서 파멸적인 전쟁동원과 착취, 이에 대한 심각한 저항운동으로 인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사상누각의 붕괴로 이어지고 전시경제가 파탄나면서 패퇴한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거대한 내부식민지를 보유하고 자본주의 생산방식의 혁신과 '고임금 체계'를 통한 노동운동의 포섭으로 무장하고, 대외적으로는 '민족자결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민족국가간 체계라는 외피로 기존 식민지의 민족해방운동을 포섭한 미국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일본의 팽창주의(식민주의/제국주의)는 다른 경쟁자들의 팽창주의에 비할 때 고유한 특징들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다른 경쟁자들과의 대결과정에서 점차 그 형상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팽창주의는 후발주자, 추격자의 팽창주의였고, 그만큼 상쟁하는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패색이 짙어질수록 팽창주의의 야수적인 면모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일본의 팽창주의에 대해 분노를 느낄수록 그러한 팽창주의를 낳은 세계적인 자본주의 경쟁의 시스템과 그 후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국 팽창주의의 본질을 간파해야 한다. 둘째, 일본 제국주의는 청산되었나? 친일파 청산에 관한 국내에서의 논란이 가열차게 진행되는 와중에 일본에 방문한 노무현대통령은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를 포함해) "양국 간 과거사 문제에 대해선 내 임기 중엔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고 발언했다. 일본을 방문한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도 "친일진상규명법은 순수 국내문제이지 일본과 선린우호관계를 해치거나 이를 겨냥해 만든 것은 아니다"고 말하였다. 현재 정부, 여당이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만 막상 일본에게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국내 친일파 문제는 아직 청산이 안 됐지만 일본과의 문제는 이미 과거에 말끔히 해결되었다는 뜻인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기 위해서는 한일 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될 때 당시의 문제를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5.16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가장 기뻐한 자들은 누구인가? 물론 당시 미국 CIA 부장 덜레스가 "나의 재임 중 가장 성공한 업적은 박정희 쿠데타였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미국은 "미국이 지지하는 정부는 장면 박사의 합법정부뿐"이라는 주한 미국대사와 주한미군 사령관의 호언장담을 금새 바꾸어버리고 박정희 세력의 쿠데타를 승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여수반란사건"의 주모자라는 좌익경력을 지닌 박정희 세력에 대해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케네디 정부를 설득하는 데에는 일본의 공헌이 매우 컸다. 1961년 6월 19일 정상회담에서 이케다 일본수상이 케네디 대통령에게 말했던 요지를 살펴보면 그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케다는 '일본에게 중국문제보다도 한국문제가 더욱 중요하다. 일본을 겨냥하는 비수와 같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한국이 공산화된다면 일본의 안보는 중대한 위협을 받는다'며 한국 내 정치상황에 일본의 발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쿠데타로 성립된 남한의 군사정권은 비록 민주적 정권은 아닐망정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합법정권이며, 반공체제를 견지시키기 위해서도 일본은 경제원조를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하루속히 국교정상화를 실현시켜야만 한다고 믿는다'며 박정희 세력이야말로 미국과 일본이 바라던 일본의 대한경제원조나 한일국교정상화를 실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점을 분명히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과 일본의 대한정책의 목표는 무엇이었나. 그것이 바로 이른바 '역코스' 정책이었다. 당시 미국은 냉전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단지 일본이 과거 공업력을 복구하는 것을 넘어서 일본이 필요로 하는 원료와 시장을 확보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한반도를 포함하는 동아시아 전체를 일본의 후배지로 제공해야 한다는 '역코스' 정책을 수립했다. 그런데 여기서 우연이 아닌 것은 그것을 추진하는 일본과 한국의 세력이 과거 만주 출신의 경험을 공유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일본이 박정희 정권의 등장에 환호성을 지른 것을 말할 때 당시 일본 정치의 핵심세력과 박정희의 만주군 인맥간의 과거 "인연"을 빼놓을 수는 없을 듯하다). 이케다에 앞선 전임 수상이며 정치스승 격인 기시 노부스케는 관동군 경력을 지닌 자로 만주국산업부 차장으로서 '만주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만주중공업회사'를 설립했고, 도죠 내각 때 상공대신으로 활약해 전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된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전후 미국이 낙점한 인물로서, 도죠는 처형됬지만 그는 무죄로 석방되어 철저한 친미파로 정치활동을 전개했고 1957년에는 수상에 취임하였다. 그는 수상 취임 후 한일 국교정상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이러한 노력은 박정희의 등장으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의 당연한 귀결로서,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문제는 완전히 논외로 빠진 채 진행되었다. 일본은 식민지배에 대한 말로만이라도 하는 "사과"도 전혀 없었고, "청구권" 문제만 논의되었다. 청구권이란 개념상 쌍방이 득실을 따져 서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다는 뜻이며, 일본은 자신이 지어준 공장, 철도, 교육 시설 등을 계산해서 받아내야할 자산으로 간주하였다. 다만 이러한 문제에서 일본이 "관대한" 태도를 보여 한국에 독립축하금 격으로 5억 달러 규모의 경제지원을 하는 것으로 매듭을 짓는 형식을 취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미국이 의도했던 것이기도 했다. 미국은 이미 1951년 미일 양국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 한국을 전승국에서 제외하는데 합의했고, 이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어떤 배상의 의무도 없다고 못을 박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일본의 식민주의/제국주의 청산은 일본 국내적으로나 대외관계의 측면에서나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팽창주의 경쟁에서 승리한 미국의 의도와 완전히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은 일본의 팽창주의를 자신의 헤게모니 아래로 복속시키면서 그들의 세계전략을 실행하는 하위 파트너로 적절하게 활용한 것이다. 노무현정부와 여당이 일본에게 할 말은 없다라고 한 것은 박정희 정권 이후로 구조화된 한미일 관계를 그대로 승인, 유지해 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식민주의/제국주의의 현재성 물론 이러한 현상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볼 때 공통된 것이다. 과거 식민지배에 대해 그것을 인정하거나 나아가 배상에 임한 제국주의 국가가 있었던가? 어차피 그들의 주도로 짜여진 국제법 체계는 과거 군사적 강점과 병합을 포함하는 식민지배를 불법화할 수 있는 요소가 없고, 어떤 강제력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오히려 과거 식민 지배를 경험한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민중의 고통은 한없이 연장되고 있다. 제3세계 국가들에서는 과거 식민주의의 고통(인간의 노예화와 인신매매, 자연자원의 착취)과 그 연장선상에 산업적, 금융적 착취(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직접투자, 외채와 부패스캔들을 통한 이중적 착취)가 이어지고 있다. 최근 제3세계에서는 외채탕감과 각 나라에서 과거 식민모국의 자본과 결택해 부정부패로 축재한 지배세력들의 재산환수, 공적개발원조 확대 등과 강제적인 구조조정과 일방적인 무역개방 압력 중단 등의 민중의 요구가 분출하고 있지만, 현재 G-7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들은 이를 완전히 묵살하고 있다. 결국 20세기를 거쳐 미국의 공식적인 세계전략인 "민족자결주의"는 실현되었지만, 식민주의/제국주의 지배의 고통은 더욱 강하게 제3세계를 속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로 연장되고 있는 식민주의/제국주의의 역사 속에서 한국은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식민주의/제국주의 문제는 박정희 이후 한국의 신흥공업국으로의 부상이라는 화려한 성과로 인해 그야말로 "과거사"로 치부되고 있다. 지배세력들은 국교수립 후 일본이 베푼 유무형의 경제원조가 한국 경제 도약의 발판이 되었고, 더 따져보면 일본이 식민지 시기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을 통해 농업을 근대화하고 근대적 공업을 이식하였으므로 이러한 경제발전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거다). 그리고 이는 박정희는 어두운 개인사를 지녔지만, 그것을 경제기적으로 승화시킨 지도자로서의 면모는 인정해야 하며, 박정희의 국가적인 경제개발계획이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지만 이는 현재 분배 정의를 개선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친일인사 청산이나 박정희 정권과 그 이후 군사정권에서의 "공권력의 부당한 사용에 의한 피해"에 대한 진상규명은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으나, 박정희 정권 이후에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된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금과옥조로서 유지해 나가야 한다는 게 현재 정부와 주류적인 정치세력들의 견해다. 그러나 위와 같이 박정희 정권의 등장 이후의 한국사를 정당화하는 지배세력의 논리는 우리의 인식과 가장 첨예하게 갈리지는 대목이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냉전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발전주의"라는 당근을 제공했다. 특히 일본의 군국주의적인 지배구조와 재벌체제를 유지하며, 일본의 보호무역은 용인하면서 자국의 시장을 개방하고' 미국의 초국적기업이 직접적으로 진출하기보다는 일본의 억압적 국가와 재벌체제가 동거해 나가는 것을 용인했다. 일본의 배후지로 통합된 한국에서도 이러한 정책이 적용되었다. 한국은 냉전의 쇼케이스라는 다른 제3세계와 비교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발전주의의 예외적인 "수혜자"가 되었고, 발전주의의 성공을 선전하는 세계적인 모범사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이 지속가능한 것인가? 1990년대 동아시아를 휩쓴 외채·금융위기는 동아시아의 고도성장 시대가 막을 내렸고,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극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언이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른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를 통해 이용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통화와 금융전쟁을 수행하여 이 지역에서 국내 경제와 정치를 변화시키는 전략을 수행했다. 냉전 시기 정치-군사적 논리는 약화되고 초국적 법인기업의 금융적 팽창이 우선적인 목표로 전환되었다. 한국사회는 과거 발전주의의 시험무대가 되었던 것처럼, 미국 주도의 금융적 팽창을 위한 구조조정 전략의 가장 선도적인 시험무대가 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식민주의/제국주의라는 문제는 반공발전주의의 성공이라는 신화 속에서 굳이 다시 꺼내볼 필요가 없는 과거사로 간주하려는 지배세력의 노력에도 여전히 한국사회의 미래를 지배하는 현재적인 문제다. 그리고 그들이 그 사실을 부정할수록, 그들 자신이 제국주의 세력과 긴밀히 결탁되어있음을 반증하는 것일 뿐이다. 이는 친일파 청산이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온 민중과 사회운동의 요구지만, 식민지배/제국주의라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이유다.
* 베이루트 국제 반전반세계화운동 전략회의 리포트입니다. 이 글은 참세상 뉴스 기사로 작성되었고 www.jinbo.net에 기사로 실려있습 니다.
9월 17-19일에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리는 '국제 반전 반세계화 운동 전략회의'에 '한국의 반전 반세계화 운동'이라는 제목으로 간략한 글을 제출하였습니다. 덧붙여 전범 민중재판 운동도 소개하면서 지지를 제안하였습니다. - 영문자료입니다.
전쟁과 폭력 종식을 위한 세계 민중의 연대를! 9.11 이후 3년, 세계는 더 불안해졌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 공격사건 이후 미국은 미국민들의 공포에 기반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했으나, 그것은 9.11과는 별 상관이 없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었다. 또한 국제적인 반테러전선을 세운다는 명분 하에 미국의 동지가 될 것인지 아닌지를 세계에 강요하여 군사행동에 나서게 하였다. 각 국에서는 경쟁적으로 '대테러법'이 제정되었다. 미국 국내에서는 '애국법'을 제정하고 '국토안보부'를 만든 결과, 반테러와 안보를 빌미로 광범위한 인권침해 행위가 합법화되었다. 공항의 안전검색이나 출입국 심사도 대폭 강화되어 아랍·아시아계 등 외국인에 대한 감시와 차별이 심해졌고, 무장한 경찰들의 검문검색은 미국 전체를 거대한 경찰 감시국가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미국의 15개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장이라는 직책과 테러 관련 정보 총괄, 대테러 정책조정을 담당할 대테러센터까지 신설하기로 하였다. 군사전략 측면에서는 '선제공격론'을 채택하여 세계 어디든 공격할 수 있다는 협박을 선포하였다. 미국의 이 모든 행위는 전례없이 세계적 무질서와 극단적 폭력을 증가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팔레스타인, 인도, 태국, 인도네시아, 스페인, 체첸, 러시아 등에서 '자살폭탄 공격', '인질극', '보복공습', '참수' 등으로 상징되는 끔찍하고 잔혹한 폭력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부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해방시켜 5천만 명을 자유롭게 했다"는 식으로 스스로의 전쟁과 폭력, 학살과 야만을 정당화하였다. 무장한 세계화가 낳은 극단적 폭력 냉전 이후 미국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경제로부터 배제된 지역에서 특히 이러한 폭력이 일상화되고 있다. 특정한 인종적, 종족적, 종교적 동일성에 집착함으로써 다른 집단을 배척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쉽게 폭력으로 전환되고, 이는 또한 세계시장으로 편입하기 위해 그 지역의 더 가난한 지역과 분리하고자 하는 흐름과도 연관된다. 그리고 사적인 무장집단이 형성되어 폭력행사의 가능성을 키운다. 그리하여 종종 집단학살, 인종청소, 거주지파괴 등과 같은 인구제거가 일어난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아예 경제가 붕괴되어 천연자원과 같은 한정된 부를 놓고 약탈전쟁이 생겨나고 그 과정에서 민중학살이 일어난다. 중심부 국가들은 부를 착취하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지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따른 실업과 빈곤은 '증오와 폭력'의 자양분이 된다. 미국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확산시키고 금융, 상업, 물류, 에너지 시스템을 적절하게 작동시키는 것을 스스로의 사활적인 이익으로 규정하고 이에 걸림돌이 되는 국가와 세력에 대해 군사적 수단을 사용하여 제거하고자 한다. 결국 이러한 미국 중심의 '무장한 세계화'가 만연한 극단적 폭력의 근본적 원인이 되는 것이다. 9.11은 그것이 전 세계로 향하는데 있어 극적인 계기점이었다. 이라크 전쟁과 미국의 무능 대량살상무기, 알-카에다와의 연계 등을 명분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은 미-영 제국주의 연합군을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그 모든 명분은 거짓이었고 이라크는 갈수록 불타고 있기 때문이다. AP통신에 따르면 9월 7일 미군의 공식적인 사망자 숫자가 1천명을 넘어섰다. 미군 사망자 숫자를 줄이기 위해 부시정부가 사설 용병을 고용해온 것을 고려한다면 실제 미국인 사망자는 이를 훨씬 초과할 것이다. 더욱이 이라크 민중 사망자 숫자는 최소 1만 명에서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은 점령 초기 모든 국유재산을 외국자본에 개방하였고 이를 임시정부가 바꾸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종족적 갈등을 악화시켰고 시민의 정치적 권리, 노동자의 권리를 억압하였다. 또한 이라크 점령행정처(CPA)에서 현재의 임시정부에 이르기까지 점령당국이나 이라크 정부의 통치범위는 계속 축소되어 왔다. 저항세력의 조직적인 반란과 봉기로 인해 현재 임시정부는 겨우 바그다드 근처에 한정되어 통치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여곡절 끝에 100명의 임시의회가 출범하였으나 2005년 1월에 예정대로 총선이 치러질 것인지 여부는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있다.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세우며 평화를 정착시켜 이를 중동전역으로 확산시켜 중동자유무역지대를 만든다는 미국의 구상은 애초부터 벽에 부닥친 것이다. 미국은 스스로의 목적조차 달성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다. 14만 명에 이르는 미군과 다국적군조차 이를 타개하지 못한다. 오히려 이라크 전역에서 공습과 학살을 일삼음으로써 이에 대해 '참수', '자살폭탄' 등 더욱 극단적인 형태의 저항을 자극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저항은 미군이 존재하는 한 장기화될 수밖에 없다. 이라크에서 미국의 무능은 쇠퇴하는 미국 헤게모니를 반영한다. 좌파사회학자 월러스타인은 9.11 사태가 미국 군사력의 한계, 세계 나머지 지역의 뿌리깊은 반미감정, 흥청망청하던 1990년대의 경제가 낳은 후유증, 미국 민족주의의 모순적인 압력들, 미국의 시민적 자유전통의 취약성을 급격히 드러냈다고 하면서 미국을 '불시착한 독수리'로 묘사하였다. 전쟁과 폭력 종식을 위해 세계 민중의 연대를 강화하자! - 베이루트 국제 반전 반세계화운동 전략회의의 의미 문제는 이러한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장기적인 이행을 예고하고 있는 가운데, 점증하고 있는 극단적 폭력과 전쟁을 어떻게 종식시킬 것인가이다. 그것들이 상호파괴나 공멸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감축하고 정의와 평화를 작동시킬 수 있는 길로 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임무가 우리들, 반전 반세계화 운동에게 있다. 우리는 새로운 전쟁과 폭력의 상황에 진입했다. 이것은 상황을 이전의 시기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과, 세계 민중이 끈기 있게 새로운 시대를 개척함으로써 전쟁과 폭력을 종식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꾸준히 진행되어 온 세계 각 국 운동간의 연대는 2003년 2월 15일 전 세계 1500만 명의 반전시위로 드러났다. 이어 2003년 5월에는 자카르타에서 회합을 가지고 단결과 행동에 대한 선언인 자카르타 평화 컨센서스를 채택하였다. 자카르타 컨센서스는 운동들의 단결선언, 이라크에 대한 입장과 행동계획, 세계화와 군사주의에 대한 행동계획 등으로 구성되어 기본적인 입장과 계획을 정식화하였다. 그리고 2004년 1월 인도 뭄바이 세계사회포럼에서 국제 반전운동 총회가 개최되었으며 3월 20일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1년에 항의하는 국제 공동행동이 조직되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오는 9월 17일부터 19일까지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국제 반전 반세계화운동 전략회의가 열린다. 특히 팔레스타인, 이라크의 사회운동과 연대를 형성하기 위해 이라크에서 가까운 곳에서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것이다. 현재까지 53개국 262개의 조직이 지지 서명했고, 200여명의 활동가들이 참가할 이 회의에서는 현 상황에 대한 분석, 전쟁과 제국주의와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의 진로, 연대강화 전략, 행동 계획 등이 논의된다. 반전 반세계화 운동들은 수평적인 토론과 연대 강화를 도모해야 하고, 이것이 세계적인 차원에서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행동을 확장시키는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 모든 운동들이 스스로를 국제적인 반전 반세계화 운동의 일부로서 인식하고 전쟁과 폭력, 세계화의 폐해를 종식시키기 위해 운동해 나가야 한다. 9.11 이후 3년, 불안해진 세계에 대해 우리의 대답과 행동을 만들어야 한다.
“국제자유노련(ICFTU) 사무총장인, 가이 라이더(Guy Ryder)는 지난 6월 23일~ 2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120차 ICFTU 집행위원회에서 국제자유노련(ICFTU)과 세계노동총연맹(WCL)의 통합에 대한 입장과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국제노동운동의 통합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대세다. 2)통합 논의가 ICFTU가 해야 할 본연의 다른 활동들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된다. 3)ICFTU의 원칙과 가치(principles and values)가 통합 후에도 유지되어야 한다. 4)통합에 따른 복잡한 문제들이 예견되지만 세계단위의 통합이 국가단위 통합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칠 것이다. 5)통합에 따른 정체성(identity) 문제가 있을 것이다. 6)ICFTU와 WCL 어디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상당수의 미가맹 노동조합들이 통합세계노동조합총연맹에 가입하게 될 것이다. 7)국제산별연맹(GUF)과 지역기구에 통합에 따른 어려움이 예상된다. 8)통합에 대한 논의는 공개적이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세계노동운동 통합 현실로’에서 인용,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 김성진- 국제노동운동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 종전 이후 반공주의 노선에 기반해 세계노동운동의 주류적 흐름을 대변해온 국제자유노련(International Confederation of Free Trade Unions: ICFTU)과 기독교계 노동조합을 바탕으로 한 세계노동총연맹(World Confederation of Labor: WCL)의 통합이 현실 일정에 올랐다. ICFTU의 조합원수는 현재 1억 5천 1백만 명이며, WCL은 수치의 진실성을 믿기 어렵긴 하지만 약 2천 6백만 명 정도이다. 이들은 2006년 새로운 국제노동조직의 출범을 목표로 통합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양대 국제노동조직의 통합과 이를 통한 새로운 세계통합노총 건설은, 절차상 관료주의적·비민주주의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회원 조직들의 광범위한 의견수렴 과정, 투명하고 공개적인 논의를 거치지 않고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겠지만, 중요하게는 국제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사고와 실천을 봉쇄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우려스럽다. 현재 국제노동운동 위기의 근본적 원인은 금융 세계화와 노동 유연화에 맞선 대응 전략과 실천의 빈곤함에 있다. 즉 “자본이 무역과 생산의 영역에서 금융거래와 투기로 전환되는” 과정, 그에 따른 부와 자원의 분배에 있어서 남북 불평등의 심화, 남북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노동조건 및 삶의 질 악화에 대한 무능력한 대응이 현재 국제노동운동 위기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국제노동운동은 이러한 근본 원인에 맞선 전략과 전술의 혁신, 이를 통한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장기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국제노동운동의 주류적 흐름인 ICFTU는 그동안 북반구 노동자를 대변해왔으며 또한 그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남반구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 악화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자인 IMF/세계은행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ICFTU는 ‘노동조합 권리, 인권, 환경권’ 등을 존중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또한 ICFTU는 ‘남반구 노동기준의 향상’이 WTO 협정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진정으로 남반구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노동조건 향상을 위한 요구였다기 보다는 북반구 노동자들의 잘못된 가정에 기반한 것이었다. 즉, 북반구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노동조건 및 삶의 질 악화가 “그들보다 아래에 있는 다른 국가들-노동자들의 희생을 통하여 자국의 산업을 유지하려는-로 인해” 심화되고 있으며, 따라서 “노동기준과 환경기준의 향상을 통하여 자국 생산품을 보호하거나, 또는 적어도 개발도상국의 생산비용을 증가시킴으로써 제3세계와 대등한 조건에서 경쟁을 도모”하기 위해 “국제적 차원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남반구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노동조건 개선, 임금 향상은 ‘국제적 차원의 보호’에 의해서가 아니라, 산업 활동이 재배치된 특정 국가에서 태동한 강력하고도 전투적인 노동계급의 투쟁이 주요한 요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ICFTU의 주장은 고용과 임금에 있어서 ‘자기 방어’에 급급한 북반구 노동자들의 이해를 반영한 정책이며, 국제적인 사회운동진영의 광범위한 저항과 투쟁으로 ‘정당성 위기’에 빠진 WTO 체제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이었다. OECD에서 논의되었던 다자간투자협정(MAI) 대응 과정에서 드러난 OECD 노동조합자문위원회(OECD-TUAC)의 태도는 더욱 분명한 형태로 북반구 주도 국제노동조직의 현 주소를 보여준다. 당시 다자간투자협정은 초국적 자본의 소유권을 절대화하는 반면, 노동권, 환경권, 인권 등을 심각하게 침해하며 자본의 금융투기적 축적 경향을 촉진시키고, 경제주권을 초국적 자본의 이해에 종속시킨다는 점에서 전 세계 시민사회단체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도 OECD 노동조합자문위원회는 광범위한 투자 자유화를 동의해주고, 대신 고작해야 노동 및 환경권 존중이라는 문구를 다자간투자협정 전문에 명시할 것을 요구했을 뿐이다. 이러한 사례에서 보듯이, ICFTU를 위시한 주류적 국제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 대안적인 세계질서의 모색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존 세계질서 내에서 북반구 노동자들만의 특별한 이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활동해왔다. 즉 ICFTU는 “자국이 자본유치를 위한 상호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자국 정부를 지지”한 북반구 조직 노동자들의 이익을 반영하는 정책들을 펼쳐왔다. 이러한 ICFTU 정책들은 북반구 정부 그리고 WTO,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들과의 ‘협의와 로비’를 통해 추진되어 왔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효과는 당연하게도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할 능력이 있는 국가들과 그렇지 못한 주변부 국가들 사이에서 차별적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자유무역, 투자 자유화, 산업활동 재배치 등 다양한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슈를 다룰 때, ICFTU의 주장처럼 “핵심노동기준 존중”만을 요구하는 것은 특히 남반구 노동자들에게 대단히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과정이 남북 불평등과 분할, 남북 노동자들의 노동, 생활 조건 악화, 자본의 금융, 투기로의 전환과 고용 파괴를 동반하고 있다면, 특히 북반구 노동자들에 비해 근본적으로 부와 자원 분배에 있어서 약자인 남반구 노동자들에게 ‘신자유주의 과정’ 자체를 문제삼지 않으면서, 단결권과 단체협상권 등의 보장만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이런 측면에서, ICFTU와 북반구 노동자들은 왜 남반구 노동조합 의제에는 신자유주의 반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대안 모색, 고용과 소득 창출 등이 필연적으로 포함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비록 현재 ICFTU-WCL 통합 과정이 “세계 노동자계급의 단결”이란 이데올로기 하에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세계노동운동의 주류를 자임해왔던 ICFTU를 비롯한 북반구 주도의 국제노동조직의 역사적 실천에 대한 진지한 자기반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새롭게 탄생할 거대한 통합세계노총은 오히려 북반구 노동자들의 ‘자기 방어’적 실천을 강화하고, 남반구/북반구 노동자들간의 위계와 분할을 더욱 심화시키며, 남북 노동자들의 진정한 ‘단결’을 위한 사고와 실천을 지연시킬 것이다. 나아가 더욱 비대해진 통합세계노총의 관료주의는 더욱 심화될 것이고, 늘어난 조합원 수를 기반으로 한 ‘로비’ 전략에의 의존도는 더욱 강화될 것이다. 더욱 심각하게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ICFTU-WCL 통합 과정이 국제노동운동의 당면 과제에 대한 포괄적이며 민주적인 토론을 동반하지 않음으로서, 주류 국제노동운동에 의한 진보적·민주적·자주적 노동운동의 소외와 배제 경향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라는 점도 문제이다. 노동자계급의 ‘단결’은 항상적으로 요구되지만, 이는 명백한 비전과 목표, 구체적 실천을 동반하지 않으면 오히려 운동의 발전에 해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잇는 ICFTU-WCL 통합 논의는 1)ICFTU의 북반구 편향적 정책과 실천에 대한 평가, 2)남북 노동자들간의 분할과 위계를 극복하기 위한 공동의 인식지반 확대, 3)노동계급을 넘어 국제적인 반전/반세계화 사회운동 진영과의 포괄적인 동맹관계 형성을 위한 계획 등에 대해 포괄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제들이 논의되지 않는 통합 과정은 국제노동운동의 위기 극복을 위한 사고와 실천을 지연시킬 뿐이다. pssp
지난 8월 1일, 제네바에서 열린 WTO 일반이사회를 통해 도하개발의제(DDA) 협상의 기본골격(Framework)이 전격 타결되었다. 새로운 무역협상 라운드의 개시 여부를 판가름하는 회의였던 99년 3차 시애틀 각료회의부터 현재까지, 우루과이라운드의 뒤를 잇는 무역협상은 여러 차례 난항을 거듭해왔다. WTO 회원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개도국, 최빈국들이 우루과이 라운드 농업개방은 초국적 농기업의 전 세계 농업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하여 남반구의 농업 생산 기반을 뿌리째 뒤흔들었다며 강력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개도국과 최빈국에 자유무역의 혜택을 고루 누리도록 하는 동시에 이들 나라의 ‘개발’을 더욱 촉진시킨다던 ‘도하개발의제’가 오히려 미국 등 선진국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더 이상의 자유화를 거부한다는 입장을 표명해왔다. 2003년 9월 칸쿤에서 열린 5차 각료회의에서 개도국들은 ‘농산물 수출 개도국 그룹(G21)', '개도국-최빈국 그룹(G90)'등 여러 의견 그룹을 형성하여 협상을 주도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에 강력하게 반발해, 결국 각료회의를 무산에 이르게 했다. ‘개도국 및 최빈국’을 위한 협상에서는 이들의 반발로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내지 못했으며, ‘무역의 완전한 자유화’를 표방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이 앞장서서 이러한 원칙을 훼손하는 상황은 ‘도하개발의제’ 협상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따라서 지난 몇 년간 협상 진척을 가로막았던 주요 쟁점이 이번 일반의사회에서 어떻게 다루어졌고 어떠한 과정을 거쳐 ‘기본골격’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는지, 합의된 ‘기본골격’이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무산된 칸쿤 각료회의, 그 이후 도하 개발의제 협상을 난항에 빠지게 했던 가장 뜨거운 쟁점은 ‘농업협정’이었다. 그 중에서도 미국과 유럽연합의 농업보조금 문제는 ‘자유무역’이 지니고 있는 모순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쟁점이다. 도하개발의제 농업협상은 우루과이라운드를 통해 매겨진 농산물 관세를 공산품 수준으로 대폭 인하하고 ‘무역왜곡적’ 농업 보조금을 감축/철폐하는 것을 목표로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의 대규모 농기업이 세계 농산물 시장을 장악하기에 적합하도록 국제무역시스템을 재편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으며 스스로 표방하고 있는 ‘자유무역’의 원칙을 어기고 있다. WTO가 출범한 이후에도 미국은 농업보조금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어, 초국적 메이저 농기업들은 생산비를 절감하여 값싼 농산물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 반면 소규모 농가를 기반으로 하는 남반구의 많은 나라들은 관세화와 지속적인 관세감축 조치로 농업시장을 개방하게 되었다. 미국의 농기업이 생산한 싼 값의 농산물은 이렇게 개방된 남반구로 덤핑되고 있다. 남반구의 소규모 농가가 생산한 농산물은 가격 경쟁력에 밀려 미국으로 수출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산기반 자체가 뒤흔들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 예로, 미국의 면화 생산자들은 1년에 30~40억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받고 있다. 이는 면화 수출이 국가 소득의 대부분인 서아프리카 말리의 GDP를 훨씬 웃도는 금액이며, 미국 농기업의 면화 시장 독점으로 말리를 비롯한 베닌, 챠드, 부르키나파소 등 면화수출국들의 소득은 1년에 10억달러씩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특히, 부시행정부는 ‘관세감축’, ‘국내보조금의 실질적인 감축’, ‘수출보조금 철폐’를 원칙으로 하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개시된 이후에도, 그 원칙을 훼손하며 농업보조금을 대폭 확대할 것을 골자로 하는 2002년 농업법(2002 Farm Bill)을 제정했다. 이에 미국의 일방주의와 무역 불평등에 대한 개도국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2003년 칸쿤 각료회의에서 브라질, 인도 등 농산물 수출 개도국들은 G21이라는 의견그룹을 형성하여, 북반구의 시장 역시 남반구가 생산한 농산물에 개방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대규모 보조금이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아프리카 4개국 역시 미국의 면화보조금이 철폐되어야 하고 보조금으로 인한 손실을 미국이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하개발의제의 핵심 이슈인 ‘싱가포르 이슈’와 ‘비농산물관세인하협정(NAMA)’역시 남반구 각국의 비판의 대상이었다. 아프리카그룹(AP),아프리카 -카리브해- 태평양 연안국 그룹(ACP), 최빈개도국그룹(LDCs)의 연합으로 구성된 G90은 투자, 정부조달, 경쟁, 무역원활화 등 이른바 ‘싱가포르 이슈’가 엄밀한 의미에서 ‘무역정책’의 범위를 초과하는 ‘자본의 유출입규제 철폐 및 소유권 보장’과 관련된 것이며, 선진국이 시장개방 압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뿐이므로 WTO 내에서 이에 관한 협상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공산품 관세 및 비관세장벽의 완전한 철폐를 목표로 하는 ‘비농산물관세인하(NAMA)' 협상은 ’개도국·최빈국의 발전을 돕는다‘는 도하개발의제의 명분과는 정 반대로, 남반구의 취약한 산업구조가 세계적인 경쟁에 직접 노출되도록 하여, 탈산업화를 초래하며 실업과 빈곤을 남반구로 이전시킨다고 비판했다. 결국 칸쿤 각료회의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의 모순을 드러내며 결렬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7월 일반이사회에서 기본골격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 진 것은 개도국 및 최빈국이 형성하고 있는 여러 의견그룹이 무력화되었음을 뜻한다. 칸쿤 각료회의 무산 이후 미국은 미국의 일방주의에 불만을 표한 개도국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협상 결렬에 결정적 역할을 한 G21을 파괴하는데 집중해왔다. 칸쿤 각료회의 직후 미국은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페루, 코스타리카, 과테말라에게 G21에서 탈퇴하면 부분적인 시장개방을 제공하겠다고 사탕발림하여 이들을 G21로부터 이탈시켰다. 뒤이어 지난 4월에는 이 그룹을 이끌고 있는 브라질과 인도가 여타의 농업수출 개도국과 분리되도록 했다. 미국, 유럽연합, 호주, 브라질, 인도를 ‘이해당사자 5개국(Five Interested Parties)’이라 명명하며 팀 그로서 WTO 농업위원회 의장이 기본골격 초안을 작성하는데 이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한 것이다. 미국은 농산물 관세감축 분야에서 ‘점진적인 감축’을 주장해왔던 인도와, 미국의 국내보조금의 실질적인 감축을 주장하는 브라질의 요구를 5개국간의 협의에 따라 수용할 수 있다며 G21의 ‘단결’을 파괴했다. G 90에 대해서도, 7월 중순에 열린 G90 회의에 미국과 유럽연합은 죌릭을 포함한 고위급 인사들을 파견해서 4개의 싱가포르 이슈 중 ‘무역원활화’에 대해서만 협상을 개시한다는 안을 제시해 G90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비농산물시장접근’과 ‘서비스협상’의 진척에 G90이 협조하여 개도국들에게 ‘혜택’을 주는 다자간 무역체계가 작동하도록 하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협박하며 압력을 넣었다. 결국 미국은 이런 식으로 해서 7월 일반이사회에서 ‘농업협상’에 대한 브라질, 인도의 동의와 ‘무역원활화’ 협상 개시에 대한 G90의 동의를 이끌어 내고, ‘기본골격’에 대한 합의를 이루는데 성공한 것이다. 7월 일반이사회 도하개발의제 기본골격의 내용 7월에 타결된 협상 기본골격은 개도국 의견그룹의 무력화를 바탕으로 합의된 만큼 미국을 비롯한 북반구의 이해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물론 협상의 최종 결과는 2005년 말 홍콩에서 열릴 6차 각료회의 전까지 진행되는 ‘세부원칙(modality)’ 협상을 통해 좌우될 것이지만, 이후 협상은 이 기본골격이 제시하는 원칙에 따라 진행된다. 핵심 쟁점이었던 농업협상 기본골격은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라고 평가될 만큼 초국적 곡물기업의 농업시장 지배력 확대를 떠받치는 미국의 입장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우선 시장접근 분야에서는 ‘구간별 감축’ 방식을 채택하여 선진국과 개도국의 차별을 두지 않고 관세율에 따라 대상품목을 구간으로 분류하여, 고관세일수록 높은 비율로 감축하도록 했다. 또한 개도국에 한해서 관세감축에 신축성을 부여할 수 있는 ‘특별품목(Special Product)'제도와는 별도로, 선진국 품목에도 해당되는 ’민간품목(Sensitive Product)'을 새롭게 도입하여, 이에 대해서는 관세를 소폭으로 감축하되 의무수입물량을 확대하도록 했다. 수입국그룹이 요구한 관세 상한 철폐는 추후로 미뤄지게 되었다. 이는 미국을 비롯한 수출국 그룹이 주되게 주장했던 ‘스위스공식’의 변형으로 한국과 같이 고관세 품목이 많은 나라일수록 대폭으로 관세를 감축하여 개방으로 인한 타격이 커지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국내 보조분야에서 미국은 결국 2002 농업법이 보장하는 국내보조를 감축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는 농업에 대한 모든 국내보조정책을 신호등 분류방식에 따라 ‘철폐대상’(red box), ‘규제대상’(amber box), ‘허용대상’(green box)으로 분류했다. 추곡수매제와 같은 정부관리가격정책, 생산 및 판매에 관련된 농가소득지원, 투자 및 수송 등에 대한 보조가 규제대상에 포함되며, 생산과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소득보장, 재해보상, 식량비축 등은 허용대상에 해당한다. 그밖에 ‘생산제한계획하 직접지불’(Blue Box)과 최소허용보조(De-minimis-총 생산액의 5% 미만의 보조금)에 대해서는 감축의무를 면제했다. 그런데, 이번 합의안이 제시하고 있는 국내보조 감축 방식은 ‘감축보조대상 총량’(AMS), ‘최소허용보조’(De-minimis), ‘생산제한계획하 직접지불’(Blue Box)을 모두 ‘무역왜곡적 보조’로 규정했다. 또한 이를 합한 총액에 따라 구간별 감축방식을 도입하되, 보조 수준이 높은 국가일수록 더 많은 비율로 감축하도록 했다. 눈여겨 볼 대목은 미국의 주장에 따라 ‘생산제한계획 없는 직접지불’이라는 새로운 블루박스가 도입된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이번 합의안이 미국의 대규모 국내보조를 대폭 감축할 것으로 보이지만, 감축대상이 되는 보조금의 총량을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양허된 수준이냐, 현행 수준이냐)에 따라, 그리고 현존하는 보조금을 어떤 종류의 보조금으로 분류할 것이냐에 따라 감축 비율은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분석된다. 미국의 2002 농업법에 따라 새롭게 도입된 보조금들은 신설된 “새로운 블루박스”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지급되고 있는 보조금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유럽연합의 경우 공동농업정책(CPA) 2003년 개정안에 따라 보조금의 상당부분을 ‘허용보조’로 전환함에 따라 현행 수준을 유지하게 될 전망이다. 수출경쟁 분야에서는 수출보조, 상환기간 180일 이상의 수출신용 및 보증보험은 철폐하도록 하고, 180일미만 신용·보증보험에 대해서는 점진적으로 감축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개도국에만 허용되었던 수출보조는 유지하되 ‘모든 형태의 수출보조가 철폐되는 시점을 지나서 합리적인 기간까지’ 인정한다는 단서가 추가되었다. 그러나 철폐 기한은 명시하지 않고 이후 진행될 세부원칙 협상 결과에 맡김에 따라 이러한 원칙이 현실화될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결국, 높은 관세를 유지하고 있는 개도국들에게는 관세를 대폭 감축하도록 하여 개방의 효과를 극대화 하는 반면, 농산물 무역에 있어서 불평등을 심화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보조금은 도하개발의제 협상의 취지와 어긋나도록 현행대로 유지할 여지를 남기게 된 것이다. 7월 일반이사회가 끝난 후 미 무역 대표 로버트 죌릭은 “현재 지급되는 보조금 총량이 191억 달러이지만, 기본골격이 제시하는 대로 계산했을 때 허용되는 보조금은 490억”이라며 “2002 농업법에 따른 보조금은 도하개발의제 협상에도 불구하고 현행대로 유지할 수 있어서 미국이 잃은 것은 없다”고 했다. 농업협상에 비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지만, ‘비농산물시장접근(NAMA)', ’서비스‘, ’무역원활화‘ 분야에서도 미국이 잃은 것이 없다는 게 대체로 동의되는 분석이다. ’비농산물시장접근‘ 분야에서는 관세가 높은 품목일수록 감축률을 높게 하는 ’비선형 공식‘이 채택되었다. ’개도국에 대한 신축성 부여‘의 문제는 이후 진행될 세부원칙 협상 구체적으로 논의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나 ’공식‘을 통해 관세 감축률을 결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한 개도국이 양허 품목과 감축률을 신축적으로 조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분석된다. 또한 신속한 관세 철폐를 위한 ’분야별 접근‘에도 개도국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취약한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관세를 유지하고 있는 개도국 및 최빈국에 큰 타격을 가져다 줄 것이어서 칸쿤 각료회의에서 채택되지 못했던 ’데르베스 초안‘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10여개 주요 기업으로 구성된 제로관세동맹(Zero Tariff Coalition)은 ’세계적인 차원의 감세와 규제완화를 이루어 내는데 한걸음 다가서게 되었다‘며 이를 환영했고, G90은 ’남반구의 탈산업화, 실업의 확대, 빈곤의 심화를 낳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서비스협상에 관해서는 2003년 6월로 양허안 제출 시한이 정해졌으나 제출국이 147개 회원국 중 20여개국에 불과한 상황에서, 그 시한을 2005년 5월로 연장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공공서비스 사유화에 따른 파괴적 효과에 대한 우려 때문에 대부분의 개도국이 선뜻 협상에 나서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표면적으로나마 서비스 협상을 신속하게 진전되도록 한다는 데에 동의를 얻은 셈이다. ’싱가포르 이슈‘에 대해서는 4개 이슈 중 하나인 ’무역원활화‘ 분야에 대해서만 협상을 개시한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나머지 분야에 대해서는 미국이 신흥 주식시장으로 삼을 나라와 양자간 협상을 통해 추진한다는 입장에 따른 것이다. 도하개발의제 기본골격 타결의 의미 도하개발의제는 ‘실질적이고 완전한 무역자유화’를 달성한다고 표방하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WTO 회원국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개도국 및 최빈국의 의무만을 지시할 뿐이다. 진짜 목표는 초국적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 질서에 적합한 무역 규범을 세우는 것이고, 이에 따른 비용은 고스란히 남반구에, 그리고 전 세계 민중에게 전가된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농산물이 자유무역의 대상이 된 후 고작 10개의 농기업이 세계 농산물 시장의 90%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종자나 생명공학 분야, 농약, 비료 등을 생산하는 농화학 분야, 식품 가공 및 유통 분야 등 농업 및 식량과 관련된 모든 분야들을 통제해 나가고 있다. 이렇게 되는 동안 남반구의 소규모 농가들은 경쟁에서 밀려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WTO 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으로 초국적 농기업은 남반구에서 재배되는 품종을 개조하여 특허를 매겨 이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종자를 채취하고 보관하는 과정에 대한 농민의 권리와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이 수 천년에 걸쳐 개발하고 보존해온 전통적인 지식에 관한 권리는 초국적 기업으로 이전되고 있다. 식량을 자급자족하던 나라들은 이제 식량을 초국적 기업들로부터 수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농민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내몰리거나, 값싼 임금에 이 기업들에 고용되어 착취당하고 있다. 한국의 농민들은 WTO가 출범한 이후 농산물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빚더미에 올라 농약을 들이키고 목숨을 끊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초국적 자본의 활동 영역을 확대하려는 서비스협정은 교육, 의료, 에너지, 물 등 삶에 필수적인 공공서비스에 대한 민중의 접근권 마저도 박탈하고 있다. 이번 일반이사회에 참여한 회원국의 수가 전체 147개국 중 고작 40여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기본골격’에 대한 합의가 ‘불충분한 동의’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미국은 각종 회유와 협박으로 ‘기본골격’을 타결하는 데에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개발’이라는 떡고물이 도하개발의제를 통해 달성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남반구의 불만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더구나 이토록 불평등한 무역 체계 아래에서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당한 채 삶의 위기 속에서 신음하는 전 세계 민중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리지는 못한다. 이번 9월, 멕시코 칸쿤에서 목숨을 바쳐 불평등과 빈곤을 심화시키는 WTO의 수레바퀴를 멈추고자 했던 농민 이경해 열사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한국의 100만 민중이 일어서고, 세계의 농민들이 동참한다. 토지와 종자에 대한 권리, 식량에 대한 권리, 지식에 대한 권리, 의료·교육·에너지·문화 등 필수 서비스에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 의약품에 대한 귄리를 되찾고자 하는 세계 민중들의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 전 세계 민중들의 삶과 권리가 존중되는 세계화를 쟁취하는 것은 이러한 민중들 스스로의 투쟁에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