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노동계약, 위기, 그리고 조직화 평의회 운동 및 평의회 이론가들에게 제기된 가장 심각한 비난들은 노동 이데올로기다, 공장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다, 프루동주의다 라는 것들이었다. 아마도 마르크스는 끝까지 프루동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난했을 것이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다. 혁명적 과정 동안 상품으로서 노동을 폐지하려는 객관적인 가능성이 존재하고 (그러나 이것은 이행 국면을 제거할 것이다) 혹은 노동을 모든 상품에 대한 일반적 등가물로 변형시키는 것이 분명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프루동이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본의 점진적인 사회화를 사회주의와 혼동했기 때문에 비난했다.84) 노동력의 비용과 사회적 노동의 가치를 매개할 하나의 근본적 요소 속에서 화폐의 금으로, 노동화폐로의 점진적 변형은 경제학의 역사적 장에 서술된 바는 없지만, 두 상쟁하는 계급들 간의 권력관계 의 진동하는 사건들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자본의 발전 사에서 자본이 노동계급운동을 정치적으로 완전히 통제하고, 노동대중에게 이데올로기적-제도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을 때에만 취하는 자본의 필수적 경로이다. 이 때 형태 지배의 물신화된 표현으로서 화폐는 자본과 노동의 교환에서 ― 국가의 통제기능의 출현과 관련하여 ― 문제시되지 않는, 권위주의적인 중재자가 되는 경향이 있다. 오직 이때에만 화폐와 임노동의 교환은 경향적으로 총체가 된다. 다시 말해 형태의 헤게모니는 "현실의 추상"(법률적 추상과 실질적 포섭 간의 이분법 속에서 표현되는) 과정 속에서 분리를 실행한다. 한편으로 생산자들은 "시민"(이를 통해 계급의 종별성은 보편적 평등으로 용해된다)으로 변형되며,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모든 시민들을 생산자로, 수행된 사회적 노동으로 측정된 소득의 수령자로 변형시킨다.85) 노동(공장의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적 노동으로 이해되는)에 대한 통제와 명령은 화폐적 안정성의 결정적 요소이자 유일한 보증자가 된다. 뮐러와 도위믹이 바라마지 않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공동체는 오직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통제 하에 있는 이러한 아주 일반적인 도식을 예견하고 배치할 때만 구체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권위주의 국가" 형태의 제도적 수준에서 표현되는 자본의 당연한 지배 신호 하에서 뉴딜부터 오늘날까지 작동해 왔다. 독일에서 1921년과 1923년 사이의 기간에 평의회 운동은 종종 이러한 역전을 수행하는 지점에 도달했다. 마르크의 붕괴 기간 동안 화폐와 노동을 연결시킴으로써 ― 동시에 명심해야 할 것은 복합적인 사회-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제도적 상호관련이다 ― 양자를 평행하게 통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은 프루동에 친화적인 운동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케인즈86)를 예상하는 것, 즉 자본주의적인 반격에 대한 예상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 내에서 정치의 사실상의 우위를 실현하는 데 진정한 장애물로 드러났던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분리를 피함으로써 그 과정에 대한 보편적인 사회적 지도의 계기를 실천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미 지적되었듯이, 루드비히는 노조와 평의회 각각의 임무들을 반복하여 말함으로써, 평의회 이론가들이 제안한 노조의 "혁명화" 계획을 공격했다. 노조는 주어진 생산관계의 영역에서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특수한 이익들 ― 상이한 업종과 "숙련"에 따라 분할되는 ― 을 대표하며 실천을 통해 자본이 지배하는 영역의 오직 극한까지만 이끌 수 있다. 반면 평의회는 이미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방향으로 이동한 프롤레타리아의 대항권력 기관이었다.87) 그러나 도이믹과 뮐러가 제기한 문제는 독일혁명에 종별적인 실천적이고 조직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모호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본주의적 위기의 심화와 더불어 주체성이 혁명적 성장의 결정적 요인으로 출현했다고 경고했다. 적절히 해석하면 평의회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임금을 통해 자본과 노동의 권력관계 를 조절하는 노조의 특권을 문제삼기 위해 스스로를 정치적 역량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다 시 말해 그것은 신생공화국의 불확실한 권력 균형을 지탱해 온 1919년 6월 뉘른베르크 노조 대회의 신중함을 폭발시키는 문제였다. 노동계약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헤게모니와 영토에 대한 자본주의적 힘의 거의 총체적인 지배 ―전적으로 분해된 중간 계급들의 자금과 처분권 을 여전히 통제할 수 있었던 금융 메커니즘에 대해 이러한 힘들이 행사한 통제에 의해 가능 하게 된 지배 ― 간의 권력과 중재의 결정적 지점들 중 하나였다. 1923년 위기의 전야에 칼 코르쉬는 공장 통제에서 영토에 대한 헤게모니(봉기주의적 지름길 뿐만 아니라 사민주의적인 "권력으로의 도정" 역시 비현실적인 것으로 판명된 이상)로의 이론적이며 조직적인 도약을 위해 노동조직과 노동계약과 같은 근본적 개념들에서 출발했다. 공장평의회를 위한 노동입법을 다룬 1922년의 글들에서 평의회에 관한 이론은 1919-1920년의 글들에 여전히 현존하던 급진 자유주의적 전통과의 최종적 연계를 절단한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코르쉬의 평의회-노조 기획의 기초를 이루는 반(反)국가주의를 없애기는커녕 보다 강화했다. 공장 문 안에 있는 루소적 자유들은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부상한 배경이 된 계급 현실들을 배신했다. 이것의 전형적 사례는 노동의 자유였다. 정확히 이 자유의 적용(파업 파괴)은 그것이 임금을 낮추기 때문에 보편적인 계급 이익을 거스르게 되었다. 따라서 이 "자유"를 거부하는 것은 계급적 연대를 위해 필수적이었다. 헌법이 공장을 등재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계급적 이익 때문이었다. "자유로운" 노동계약은 노동자가 자신의 자유를 임금과 교환하여 상실했음을 의미했다.88) 그러므로 "산업 민주주의"의 확장은 오직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체계 자체를 기초짓는 노동계약을 자신들의 중심적 투쟁으로 배치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산업 민주주의와 노동계약은 공장 안에서 서로 대립했다. 자유로운 노동계약의 법률적이고 부르주아적인 형태가 지속되는 한, 평의회들은 착취의 결정적 형태를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노동계약은 공장 안에서 게토화된 노동자 계급과 시민사회 사이의 제방이다. 코르쉬에 따르면 위기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반적인 물질적 이익들을 대표하는 것은 그 제방을 부수는 것 ― 바이마르가 승인한 입헌적 합법성을 파괴하는 것을 함축했다.89) 이행 과정을 관리하는 새로운 임무와 관련하여 노조 조직화의 지배적 형태인 "숙련 연합"은 프롤레타리아 계급 조직의 요구에 부적합해 보였다. 노조는 "숙련 연합"에서 "산업적 연합", 즉 개별 노동자의 "숙련" 자격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오직 특정한 공장이나 산업 조직에의 소속에 근거하여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혁명화"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변형은 또한 노조와 평의회간의 관계를 심원하게 변화시킬 것이었다. "공장평의회는 이제 더 이상 현존하는 자본주의적 계급사회 안에서 '노동의 판매자'의 생활조건 방어 투쟁을 벌이는 노조의 단순하고 순수한 '보조 조직'이 아니라 아직은 계급의 적의 손아귀에 있지만 혁명적 투쟁을 통해 탈환되어 통제 및 결국에는 경제적·정치적으로 조직된 노동 계급의 배타적 관리 하에 두어야 할 기업과 산업분야들에 노조가 발판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전진적 위치'가 되어야 한다."90) 따라서 그것은 코르쉬에게 있어 노동 계약을 대체하는 새로운 "사회 계약"을 산출하는 문제였다. 이번에는 국가의 입헌적 정점에서부터가 아니라 공장의 세포조직으로부터 시작하면서 말이다. 이번에도 그는 역시 (그의 소연한 정치적·이론적 발전 속에서 종종 그랬듯이) 정치 이론에서 조직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해결책에 관한 핵심 요점을 거의 놓치지 않았다. 그의 특출한 경험주의를 통해 그가 이해한 결정적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방법론적인 핵심이 없는 채로 그는 그것의 중요성에 거의 다다랐다. 공장 차원의 전략적 속성에 대한 강조(사민주의 내에서 암묵적인 위로부터의 정치에 대한 염려를 고려할 때 역사적으로 이해할 법한)는 그로 하여금 형태 지배의 사회적으로 총체화하는 특성, 상품의 물신숭배로부터 전혀 독립적이지 않으면서 재생산의 일반 과정에 대한 국가의 실재적 연관을 표현하는 동시에 은폐하고 신비화하는 법률적 추상의 복합적 구조에 눈멀게 했다. 결과적으로 코르쉬가 루소의 "사회계약"과 마르크스주의적 "시민사회" 개념을 종합함으로써 오히려 가치 이론 및 위기의 이론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1923년의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코르쉬의 평의회 이론은 국가와 정치의 문제(이행적 국면에서 중심적 지위를 점하는 경향이 있는)를 단순한 "외양"91)으로 폄하했는데, 당시 공산당은 유사한 내적 분할92), 의도에 관한 동일한 혼동, 그리고 당이 1921년 "3월 봉기"을 수행할 때와 동일한 전술적·전략적 준비부족 상태 속에서 태풍의 눈에 진입했다. 그럼에도 1923년 5월에서 11월까지 평의회 운동은 평의회 이론가들이 위기의 와중에 기대했었던 가장 낙관적인 것보다 더 성취하는데 성공했다. 즉 그것은 대규모 파업의 조직화에서 노조 지도부를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93) 일반화된 사회적 위기의 상황은 노동운동에 즉각적인 반향을 일으켰다.94) 노조 안에서, 평의회 이론가들이 제안한 그 어떤 것보다 더 불안정하고 급진적인 혁명이 발생했다. 노조 기부금의 가치를 소멸시킨 인플레이션은 조직의 모든 보조적이고 보복적인 능력을 박탈했다. 더욱이 인플레이션은 노조의 모든 계약적 권력을 빼앗았다. 고용주들과 함께 작성한 임금 계약은 급속한 통화가치 절하로 인해 불과 며칠 사이에 효력을 상실했다. 그 결과 노조의 탈퇴와 독일사민당(SPD)의 마비가 이어졌다. 사민주의의 실패는 계급에 기반한 정치적 기획을 정교화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리고 노조 전술에의 전적인 의존을 확인시켰다. 가장 거대한 서구 노동당이었던 것이 프롤레타리아트들의 자율적인 조직적 수단들에 대한 스스로의 무관심과 적대감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기 시 작했다. 1923년에 평의회는 선거와 반란의 실패 후 다시금 그것의 생명력과 유효성을 증명했다. 쿠노(Cuno) 정권95)에 대항하여 평의회가 조직한 정치적 총파업은 그 운동의 정점을 표상했다. 정권은 퇴진해야만 했다. 위기의 시기 동안 투쟁의 발전은 노동계약의 법률적-부르주아적 형태 및 제도적 틀 내에서의 상대적 균형에 대한 평의회의 공세라는 코르쉬의 가설을 확증하는 듯 했다.96) 임금 조정과 일상적인 계약협상들의 사례들에서처럼 자본에 대한 노동의 종속이 끝나자, 화폐 체계의 위기는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 지속되지 못하는 정치적 위기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낡은 물물교환 체계가 짧은 기간 동안 상품 유통에서 화폐를 대체할 수 있었지만, 자본과 노동의 "등가 교환"에서 화폐-형태를 대체할 수 있었던 물물교환의 형태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품을 수단으로 한 상품생산"은 치명적으로 교란되었다. 마르크스가 {요강}에 썼던 것처럼 "부르주아 사회의 기본적 전제는 노동이 무매개적으로 교환가치, 즉 화폐를 생산한다는 것이다."97) 자본주의 체계의 종별적 산물은 화폐형태를 취하는 가치이다. 자본주의 체계의 전반적인 정치적-제도적 틀의 기초를 흔드는 것은 정확히 화폐형태와 위기 사이의 관계이다. 그러나 독일의 노동 계급 편에서의 진정한 "동궁(冬宮) 점령" 이 객관적으로 지척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적 질서는 재수립되었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교환메커니즘, 화폐형태의 복권, 그리고 이것들에 의한 (재)생산 과정에 대한 어떤 통제와 관련해서도 국가와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대안적인 사회 정치적 방향의 문제는 진동하는 이행 국면을 뚫고 나아가기 위해 이러한 용어들로 의제에 놓였어야 했다. 그러나, 1921년 "3월 봉기"에서처럼,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적인 정치적 대안 속에서가 아니라, 기괴하고 파멸적인 함부르크 봉기98) 속에서 동궁을 얻으려 했다. 함부르크 봉기는 국가장치의 개조의 시작과 동시에 일반적인 자본주의적 반격의 시작을 특징지었다. 다른 수준에서 볼 때, 계급 운동과 정당 양자 모두 그들이 파악하지 못한 내재적 논리를 지닌 사건 들의 폭발적인 핵심 부분이었다. 경제적, 정치적 현실로 인해 당과 대중운동은, 새로운 혁명 적 전망을 결합하고 산출하는 것처럼 보이는 매 시점마다, 각자의 "영역"으로의 고립되고 헛된 "이데올로기적인 휴식처"로 내몰렸다. 그러나, 이들 이데올로기를 후진성의 순수하고 단순한 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일 것이다. 후진성은 독일 혁명의 실패가 궁극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용어인 것이다. 종종 "노동(자) 이데올로기"로 잘못 정의된 것을 통해, 독일의 노동자들은 이미 자본의 주도권에 의해 제거된 전문적인 계층화보다는 자신들의 현실적 존재조건들과 스스로의 객관적인 정치적 가능성("정치적인" 것과 "사회적" 수준을 연결시킬 수 있는 대안적인 대중 조직의 부재 속에서)을 표현했다.99) 물론 "생산력주의"와 "자기관리"는 오늘날 납득할 수 있는 모호함과 의혹을 유발하는 용어들이다. 그러나 본질적 모순 및 이데올로기적 결점뿐만 아니라 서방 노동운동사에서 전례가 없는 권력에의 의지와 능력을 표출했던 계급적 요구와 조직적 형태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독해를 통해 현재의 위험을 몰아내려고 시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100) 1920년대 독일에서, "통제"와 "자치"는 생산과정의 실현과 계획을 관통하고 다른 사회 집단들에 대해 헤게모니 계급으로 강화되어 생산과정으로부터 출현하고자 하는 노동 계급의 의지를 표현했다. 평의회운동은 이같은 야심찬 전망 속에서 운영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정치학과 조직이론으로 변형하는 것은 불가피한 만큼이나 어려운 시도였다.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의 견지에서뿐만 아니라 ― 레닌 스스 로 지적했듯 ― 전체 국제 노동운동에 대해서 말이다. 이 기획에 대한 대안은 확실히 "최소강령으로서 공산주의"가 아니라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이었고 뉴딜이었으며 나치즘이었다.101) 이 시점에서, 독일 노동운동이 1923년의 결정적 해에 노동, 화폐, 분배와 수입에 대한 현실적인 정치적 통제력을 발휘했을 실질적인 가능성에 대한 냉정하고 엄격한 분석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는 여기에서 다뤄질 수 없는 자료들에 대한 상세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잘 알려진) 몇 가지 주된 요소만을 제안하는 데 그칠 것인데, 이것들은 본 작업의 맥락 안에서 전통적으로 그것에 부여되어 왔던 것과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1) 위기의 혹독함에 비하면, 실업자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1930년 당시 6,000,000 이상에 비해 약 600,000 정도. 그러므로 상품의 가격결정에서 결정적 요인은 주로 가변적이고 非고정적 자본인 노동자들의 노동이었다.102) (2) 마르크화를 안정화하려는 전략적 조치 속에서 중앙은행은 아래로부터 시작된 질서를 재구축했다. 그것은 더 이상 사적으로 발행된 화폐의 유통을 승인하지 않았다.103) (3) 그리하여 더 이상 중앙의 권력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산업자본가들은 점차로 상점과 공기업에서 통용되는 화폐 교환권을 발행함으로써 현장에서(in loco) 노동과 자본간의 교환을 조절해야만 했다. 화폐가 지나치게 폭락했기 때문에 관성적으로 노동자의 수중으로 떨어질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4) 자본가들은 즉시 이 같은 현상에서 잠재적인 위험을 알아차린 반면, 전반적으로 노동운동은 그들이 접수할 수도 있었던 사회적·정치적 틀을 통제할 수 있는 지렛대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정치경제학 비판은 당의 편에서 어떤 혁명적 기획으로부터도 엄격히 금지됐다.104) (5) 외국 통화에 대한 마르크의 조절에 관한 한, 중앙은행은 힐퍼딩의 오랜 공식을 따랐다: 1 달러 대 42억 마르크. 패배하고 거부당한 국가로서 독일은 이런 식으로 명백한 자본주의적 체제를 가지고 민족들의 공동체에 진입했는데, 이로써 구제받을 가치가 있음을 보였다. 독일은 두 가지 가능한 길 중 하나로 거칠고 지난한 "이행 국면"을 해결했다. 5. '마르크스로의 회귀'와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위기': 바이마르에서 뉴딜까지 1920-1930년 "위대한 민중 혁명을 위한 모든 요인들"105)이 독일에서 재등장했을 때, 계급운동과 노동조직 사이의 간극은 매우 심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동적인 최후 몇 년 사이에 노동운동의 비극은 정확히 그 과정을 밟았고 사회 경제적 이론에 유용한 지표들을 제공했다. 제국주의와 붕괴에 관련된 프리쯔 스턴베르크(Fritz Sternberg)와 헨릭 그로스만(Henryk Grossmann) 간의 논쟁을 고려해 보라. 특히 자본주의 발전에 내재한 모순에 관한 분석을 정치경제학 비판에 근거하여 범주적 구조와 재연결하려는 그로스만의 방법론적 시도를. 또한 프리드리히 폴록(Friedrich Pollock)106) 같은 경제학자들이 수행한 소련과 "계획 경제" 같은 위기의 형태학에 관한 여러 작업, 혹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와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처럼, Zeitschrift f r Sozialforschung에서 Archiv fur die Geschishte des Sozialismus und der Arbeiterbewegung의 칼 그륀버그(Carl Grunberg)와 함께 20여년 동안 중요한 작업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온 사회철학자들의 근본적 분석들 역시 고려해보라. 이들 작업의 유효한 "분리"를 단순하게 비난함으로써 이것들을 쓸모 없는 현학적 작업으로 기각하려 드는 것은 난폭할 뿐만 아니라, 진부하다.107) 이들 작업의 "분리"는 사람들이 말하듯 그들의 '학문적 습성' 때문이 아니라, SPD와 KPD 간의 점증하는 분열이 야기한 정적 도식주의에 사로잡혀 이론과 운동의 관계에 치유할 수 없는 분열을 낳은 노동운동의 일반적인 정치적 파산 때문이다. 노동운동은 뒤이어 스스로 이론적 반성으로 움츠러들었다.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방법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높은 수준의 자기반성이 초래된 것이다.108) "평의회 좌파"의 관심이 전에는 생산과정 내에서의 자기-조직화에 놓이면서, (코르쉬의 예에서 봤던 것처럼) 위기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간과했다면, 이제는 정반대다. 위기와 체계의 붕괴로 이어지는 경제 법칙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특히 당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 그로스만의 작업에서) 노동과정의 분석과 그 안에 함축되어 있는 자주-관리 테마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경향이 운동의 정체(그리고 이후의 결정적인 패배)가 초래한 수동적 태도, 즉 "경제주의적" 혹은 "파국론적" 변형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강력한 방법론적 자각에 의해 지지됐다.109) 축적의 법칙과 자본주의 체계의 붕괴에 관한 주요 작업에서 그로스만은 다음과 같이 썼다. "마르크스 작업의 위대한 의미는 정확히 그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든 현상을 가치법칙에서 출발하여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110) "붕괴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 위기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 전제고, 위기이론은 내재적으로 붕괴이론에 연관된다. 양 문제에 대한 해법은 {자본}의 핵심 사상을 구성하는 마르크스의 축적 법칙에 나타나는데, 따라서 가치 법칙에 기초한다."111) 룩셈부르크가 개시한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더욱 견고한 방법론적 기초에 근거를 두었는데, 이는 위기에 관한 일반이론이 수정에 내재하는 위험을 피하도록 했다. 그로스만의 두 가지 근본적 기여는 다음과 같다. 위기 이론을 축적 이론과 가치이론에 직접 연결하고, 범주적 추상 과정을 "분리방법"으로 정의한 것이다. 붕괴 경향에 대한 경제적("객관적") 설명은 실재적 운동의 순수하고 단순한 "반영"으로 제시되지 않고, 범주적 전개의 수준에서 체계의 자기-모순적인 성격에 대한 연속적 근사치112)의 이해라는 추상적 표상으로 제시됐다. 그로스만의 설명 방법론이 가지는 변증법적 성격은 "붕괴 이론"과 혁명적 주체성에 관한 폴 마틱(Paul Mattick)과 판네쿠크(Pannekoek) 사이의 논쟁에서 폴 마틱에 의해 열렬히 옹호되었고, "평의회 공산주의자"의 이론적 기관인 R tekorrespondenz에서 실행되었다. 요컨대 판네쿠크는 그로스만에게 본질적으로 두 가지 비판을 가했다. (그로스만의 작업이) "순수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추론하려 들면서 "인간의 개입과 상관없이"113) 붕괴를 가상한 근거없는 시도라는 것, 그리고 계급투쟁을 "경제주의적 논쟁"으로 환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틱은 분명한 반비판을 통해, 판네쿠크가 어떻게 그로스만의 절차가 갖는 변증법적 성격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는지를 지적했다. 이는 정확히 (판네쿠크가) 스스로 경제학의 제한된(부르주아적) 개념에 갇혔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적인 정치경제학 비판의 방법론에 내재한 변증법은 "대립물들의 종합"이라는 기준의 극히 단순화된 적용 안에 있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을 정의할 수 있는 근본적 계기를 추상적으로 분리하는 데 있다. 따라서 마틱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심지어 그로스만에게도 '순수히 경제적인' 문제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축적 법칙에 대한 분석에서 그는 방법론적 근거로 순수히 경제적인 전제조건 및 따라서 체계의 객관적 한계 지점을 이론적으로 이 해하는 데 이르는 정의로 스스로를 제한했다. 내적 모순으로 인해 자본주의 체계가 필연적으로 붕괴한다는 이론적 인식이, 실재적 붕괴가 자동적인 과정이며 인간과 독립적이라는 주장을 수반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114) 생산과 재생산, 경제와 정치의 상호작용에 의해 정의되는 단일한 맥락은 자본주의 변형이 진행되는 주요 과정에서 핵심이 될 뿐 아니라, 혁명을 조직하는 모든 토론 혹은 기획의 불가피한 객관적 기초로 드러났다. 바이마르 독일에서 벌어진 이론적 논쟁의 마지막 번득임은 독일 공화국이 와해된 후에야 의미가 있게 되었고, 실질적으로 이미 전-유럽의 차원으로 투영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운동의 조직적 문제를 겨냥하거나 그에 맞게 기능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 뉴딜과 전제적인 파시스트 국가의 리바이어던 같은 구조에 직면했다. 이것이 수행된 분석의 주춧돌로서, 이제는 유명해진 Institut f r Sozialforschung에 결합한 일국의 지식인들을 포함하여, 마르크스주의 잡지 International Marxist Correspondence (훗날 Living Marxism 그리고 New Essay라 불린)에서 폴 마틱의 지도 아래 (코르쉬, 륄레, 그리고 판네쿠크를 포함한) 미국과 유럽의 많은 좌익 투사들과 이론가들의 정치적 작업과 연구를 협력, 조정하였다.115) 유럽에서 혁명의 패배 이후, 분석의 "객관주의"는 ― 다소간의 의식적인 방법론적 상대화를 통해 ― 당시부터 진행된 것인데,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서는 훨씬 값지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론의 범주적·분석적 틀 안에서 동일한 동요와 양가성의 움츠림의 표현이었는데, 이는 심지어 1933년 이전까지 노동운동을 자기-파괴로 내몰았던 것이다. 운동이 공세적인 국면에 전술적·조직적 계기를 강조하는 것과 패배에 뒤이어 (자본주의의 발전과 경향들의 국지화에 대한 분석이라는) 과학적·이론적 계기를 강조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결선도 없다. 수립된 관계는 단일하고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전된 것이었다. 하지만 연관이 있긴 하며, 전제주의적 파시스트 국가의 코포러티즘적 특성에 의해 심히 왜곡되고 뒤얽혔다 해도 동일한 측면을 보존했다. 계급투쟁과 제도, "평의회",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 말이다. 독일 노동운동의 파국은 이론과 운동의 재전환 문제를 극적으로 제기했는데, 이는 후세들에게 종별적인 정치적(이고 이론적) 대답에 의해 충족된 종별적인 역사적 요구라기보다 하나의 유령 ― 10월의 비극적 역상 ― 을 남겨 두었다. 1929년 위기를 잇는 경제의 거대한 구조 변형에 직면하면서 노동운동은 오늘날이 되어서야 이 연관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정치경제학 비판과 위기 이론 그리고 (계급의식과 조직에 대한) "구성"의 이론을 결합하는 문제의 종별적인 형태를 가정하기에 이른 것은 그저 우연만은 아니다. 관련된 첫 번째 두 요소들에 관심을 집중하는 가운데, 그로스만과 마틱은 의식적으로 경제 분석의 객관적 측면을 추상적 분석으로(그러므로, 실물운동에 대한 단순한 경험적 기술이 아닌) 분리하면서, 당연한 귀결로 계급의식과 조직의 이론적 문제는 젖혀 두었다. 이것이 그들 노력의 역사적·정치적 한계로 보인다면, 이 문제(계급의식과 조직의 이론적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싸늘하고 황폐한 추상화"를 회피할 수 있는 손쉬운 지름길이 있다고 믿는 것 역시 완전한 환상이다. 만일 방법론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스스로의 "분리"를 의식하고 있는 이론이 무용하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정치의 물질성과 계급 조직의 실천으로 전환될 수 없다면, 이론에 의해 "개념화되지" 않은 실천 역시 혁명을 유발하는 것과 관련하여 완전한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론(과학적이고 분석적인, 맹목적으로 행동주의적이거나 교조주의적이지 않은)과 실천 관계가 통일성을 갖추면,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구걸을 그치고 위기의 위협적 진행에 직면했을 때 자신의 긴급한 역사적·형태학적인 종별성 속에서 출현할 것이다. 마틱이 재도입한116) "사회주의인가 야만인가" 하는 룩셈부르크적 대안은 계급투쟁의 파국적 본질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일련의 이론적·정치적 문제(와 임무)를 알려준다. 정치경제학 비판(자본주의 발전의 분석을 갱신하는)에 대한 일반적 재고(再考)로부터 경제와 정치, 계급투쟁과 제도, 그리고 대중운동의 역사적이고 주체적인 수준에서 벌어지는 실질적 상호작용의 복합성에 조응하는 조직적 형태의 차원으로 말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종합될 수 있다: 정치의 과학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 독일 혁명의 비극적 궤적은 조직의 문제에 대한 실용적 구체화가 어떻게 계급운동 안에서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 주도권과 패배에 종속되는 무기력한 파멸로 귀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 ―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극히 밀접한 ― 이다. 미주> 84) 1850년 프루동은 그의 친구 다리몽에게 "사회주의 이념 안에 부르주아지를 위한 어떤 것이 있음을 보여줄 때가 왔다.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사회주의, 이것은 현 시점에서 반드시 완수되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P. J. Proudhon, Che Cos' la Propriet ? (Bari, 1967)에 부치는 Umberto Cerroni의 서문, p. ⅹⅵ. 85) Karl Marx,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 (Berlin, 1953), p. 65. 86) 케인즈의 개념과 프루동의 그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Dudley Dillard, "Keynes and Proudhon," Journal of Economic History (May, 1942)를 보라. 87) 루드비히의 형식은 노조운동과 공장평의회에 관한 코민테른 2차대회의 결의안을 예상했다. Cf. Ⅱ Congress del l'Internazionale Communista (Rome, 1970), pp 51-63 참조. 88) 그리하여 Arbeitsrecht f r Betriebsr le (1922) (Frankfurt am Main and Vienna, 1968)의 32페이지에서 칼 코르쉬는 다음과 같이 쓴다. "{자본} 1권 4장 말미에서 마르크스는 '경제 거래'의 맥락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용어로는, '단순 유통이나 상품 교환의 영역으로부터') 우리가 상점, 공장, 혹은 그 안에서 궁극적으로 실재적 '생산'이나 상품의 창조가 발생해야만 하는 또다른 기업으로 변화할 때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의 변화를 능숙하게 묘사했다; 여기에서 참가자들 간의 관계는 더 이상 자유, 평등, 정의의 이념에 따라 전혀 조절되지 않고, 대신 전혀 다른 양상을 갖는다." 89) 같은 책, pp. 95-97: "[빌헬름 독일에서] 반동적인 기업주는 '기업 외부'로부터 노조 지도자와 교섭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는 반면, '자신의' 노동 위원회와 교섭하고 싶어했다... 그러므로, 노동 공동-참여에 대한 권리의 직접적 형태가 즉각적인 혁명 과정의 관점에 따라 가정하는 특정한 의미로부터 물러날 때까지, 우리는 '공장 평의회'를 노조 투쟁의 단순한 '보조 기관'으로 엄격히 종속시키려는 노조의 안간힘을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오로지 평의회의 특정한 의미를 자본가와 노동자계급 간의 권력 투쟁의 결정적 국면에서의 생산에 대한 통제 기관으로 생각할 때에만, 그리고 평의회를 미래의 사회화된 경제의 책임있는 중심으로 볼 때에만,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는 방식은 전복될 것이다." 90) 같은 책, p. 97. 91) 코르쉬, Arbeitsrecht..., 위의 책, p 39: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투쟁은 이제 다만 외관상으로만 국가 통제(그리고 사회적 삶의 존속하는 상부구조에 대한 통제)를 그것의 목적으로 갖는다: 실질적으로는 경제 즉 노동의 조직화에 대한 통제가 목적이다." 92) 브랜들러의 지도력은 탈만, 피셔, 마슬로로 구성된 당의 좌익 반대파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다. Cf. Hajek, 위의 책, pp. 65-73. 93) 로젠베르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근대 독일의 역사에서, 1923년 여름만큼 사회주의 혁명에 적합했던 순간은 없었다. 평가절하의 소용돌이 안에서 질서, 소유권이나 합법성 따위의 모든 전통적 통념은 사라졌고, 루르 점령 이래 전개된 끔찍한 상황에 대해 사회주의자나 공화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 데도 없었다... 전반적으로 이러한 형국이 참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전체 체계가 공포 속에서 종말을 맞을 것임을 아주 분명하게 느낀 것은 노동자계급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중간계급조차, 인플레이션 때문에 빈털터리가 된 후, 혁명적 흥분에 젖어들었고 자본가들의 폭리를 최종정산하길 바랬다. 경찰을 포함한 공무원들의 경우 그들 자신 인플레이션의 희생자로서, 현존 체계에 대항하는 결정적 중요성을 갖는 대중운동에 대해 거의 역량을 쏟으려 들지 않았다 ― 그러므로 Reichswehr의 군인들이 투기꾼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굶주린 프롤레타리아 동지들에게 발포하려 들었다는 것은 매우 의 심스럽다." Rosenburg, 위의 책, pp. 143-144. 94) 로젠베르그에 따르면, "1923년을 거치면서 SPD의 힘은 꾸준히 감소했고, 당은 1919년의 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위기를 통과했다... 1922년 말까지 새로운 USPD가 여전히 독일 노동자들의 대다수를 사로잡았음에도, 대중들은 급격하게 공산당으로 이동했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반년 동안 관계는 완전하게 뒤집어져 1923년 여름에 이르면 KPD는 의심의 여지 없이 대다수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지를 받았다." 같은 책, p. 145. 95) 구노의 중도 우파 정부는 사민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슈트레스만의 정부로 대체되었다. Cf. 로젠베르그, 같은 책, pp. 148ff. 96) 이는 샤흐트 박사의 위선적 관측에 의한 계급적 관점의 이면에 의해서도 입증되는 것 같았다. "1923년 가을에 예상치 못한 화폐의 평가절하가 독일의 사회구조 전체의 붕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사정이 나았던 노동자 부인들은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다. 쇼핑을 할 때 그녀들은 마르크화의 평가절하와 보조를 맞춰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남자들이 노동을 통해 번 돈은 심지어 봉급이 그날그날 맞춰지는 상황에 이르러서조차 주부들의 손에서 사라졌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는 평가절하를 중단하고 화폐를 안정화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나는 그같은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다. 나는 유리한 직업과 안정된 지위를 포기했다." Cf. Hialmar Schacht, Account Settled (London, 1949). 97) Marx, Grundrisse, 위의 책, p. 137. 여기에서 우리는 화폐형태의 외관상의 무매개성 때문에 발생하는 유혹을 반드시 뿌리쳐야 한다, 즉 우리는 화폐-위기 관계에 관한 정치적인 혁명적 강조를 피해야 한다. 그것은 화폐-형태의 과잉팽창을 통한 전복적 극복이 가능하다는 환상으로 이끌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화폐적 형태학은 물신숭배 ― 사회적 생산관계에 대한 형태의 지배 ― 의 일반적 문제틀에 연관되어야 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매개된 방식으로, 정치적 주제를 도입한다. 반면, 같은 페이지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화폐(교환가치) 안에서 개인의 대상화는 자연적 결정 속에서 제시되었다는 의미에서 그의 것이 아니고, 사회적 결정 (관계) 속에서 제시되었다는 의미에서 그의 것이며, 이는 이미 그에게 내재적이다." 98) 함부르크 봉기에 대해서는 A. Neuberg, Armed Insurrection (London 1970) pp. 81-104 를 보라. 99) 1924년 이후에야 자본은 계급구성에서 주요한 변형을 수행할 수 있었다. Cf. Arndt, 위의 책, pp. 32-38. 100) Cf. Olaf Ihlau, Die rote K mpfer. Ein Beitrag zur Geschichte der Arbeiterbewegung in der Weimarer Republik und im Dritten Reich (Meisenheim am Glan, 1969) pp. 85ff. 101) "금 통화의 포기와 함께, 독일에서는 새로운 통화 체계가 점차로 형성되었는데 퓌러는 ― 중요한 연설에서 ― 그것의 본질이 노동 통화라고 지적했다... 노동-통화의 단순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화폐는 민족적 생산에 의해 충당된다. 나는 내가 생산할 수 있는 만큼의 화폐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노동-통화는 금-통화만큼의 안정성을 요구한다. 그것은 민족경제의 질서에 기초한다... 명백하게 신용과 생산, 화폐와 상품 사이의 균형은 노동-통화의 기초적 원칙이 아니다." J. Winschuh, Construzione della Nuova Europa (Florence, 1941) pp. 55-63 참조. 그러나 나치의 노동-통화의 원칙은 Winschuh가 지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했다. 1933년 5월 2일 ADGB에 소속된 "자유노조들"은 해산되었다. 5월 5일 노동전선의 대표 레이는 국가사회주의 운동이 라이히의 모든 노동력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행사하고 있다는 견해를 퓌러에게 표명했다. 나치 하에서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K. H. Roth, Die "andere" Arbeiterbewegung (Munich, 1974) pp. 101-156 를 보라. 102) 1922년은 전후 기간에 가장 낮은 실업을 기록했다. 1923년에 실업이 증가한 것은 주로 프랑스 점령군에 맞서 루르에서 수행한 "수동적 저항" 때문이었다. Cf. G. Albrecht, W rterbuch der Volkswissenschaft, Vol. 1 (Jena, 1931), pp. 171-181. 1924년이 지나서야 구조조정된 공장으로부터 노동자들이 점진적으로 배제되기 시작했다. 1923년이 되면, 독일 자본은 단지 테일러주의의 보다 "합리적"인 사용을 통해 노동에 대한 내포적 착취를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테일러주의는 노동자들의 숙련을 단지 감소시킬 뿐이다 ― 제거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노동자 평의회와 테일러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C. Petrid, "Il sistema Taylor e i Consigli dei produttori," in Ordine Nuovo (October 25, 1919) p. 178. 103) Schacht 위의 책, p.7 104) 도즈 플랜(1924년 4월)의 수립 이후 독일에서 미국 자본의 성공적인 투자에 대해서는 Sydney Brooks, America and Germany 1918-1925 (New York, 1925)를 보라. 105) Rosenberg. 앞의 책, p.211. 106) Cf. Giacomo Marramao가 편집한 {Teoria e Prassi dell'Economia di Piano} 선집 (Bari, 1973)에서 선택한 에세이들 참고. 107) 이들 피상적이고 조급한 자세는 N. Moszkowski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Sergio Bologna에 의해 옹호되었다. Per la Critica delle Teorie Moderne delle Crisi(Turin,1974), p.v. 108) Cf. Giacomo Marramao, "Political Economy and Critical Theory," Telos, 24 (Summer,1975), pp.56-80. 109) 그로스만의 가장 중요한 방법론적인 저작으로는 Archiv fur die Geschichle des Sozialismus und der Arbeiterbewegung, ⅩⅣ(1929), pp.305-338 에 있는 "Die Aenderung des ursprunglichen Aufbauplans des Marxschen Kapital und ihre Ursachen"과 "Die Wert-Preis-Trasformation bei Marx und des Krisenproble." Zeitschrift fur Sozialforschung,Ⅰ(1932), pp.55-84 을 보라. 110) 헨릭 그로스만, Das Akkumulation-und Zusammenbruchsgesetz des kapitalistischen Systems (Leipzig, 1929), p.608. 111) 같은 책, P. 60. 112) Cf. 그로스만, "Wert-Preis-Transformation…",앞의 책, P.57 과 "Die Aenderung…",앞의 책, P.337 참고. 113) Anton Pannekoek, "Die Zusammenbruchstheorie des Kapitalismus." in Ratekorrespondenz, 1 (1934), 지금 재출간되고 있는 Korsch, Mattick, Pannekoek, [Zusammenbruchstheorie des Kapitalismus oder revolutionares Subjekt] (Berlin,1974), pp. 28 and 20. 114) Paul Mattick, "Zur Marxschen Akkumulation- und Zusammenbruchstheorie." in Ratekorrespondenz, 4 (1934), Korsch, Mattick, Pannekoek, 앞의 책 , pp.47-48. 115) 이 주제에 대해서는 Gabriella M. Bonacchi, "Teoria Marxista e Crisi : I Communisti dei Consigli tra New Deal e Fascismo." 를 보라. Karl Korsch, Hans Langerhaus and Paul Mattick 에 대한 소개로 Gabriella M. Bonacchi 와 Claudio Pozzoli가 편집한 [Capitalismo e Fascismo verso la Guerra],(Florence, 1976) 참고. 116) Cf. Paul Mattick, Marx e Kyunes(Bari,1972), P.433, 또한 Problemi del Socialismo, ⅩⅢ:1 (January-February, 1961), pp.95-104에 있는 Michale Lowy, "Il Significato Metodologico della Parola d'Ordine 'Socialismo o Barbarie'." 참고.
광화문 촛불시위에서의 논쟁에 대해 반미열풍이 거세다. 두 여중생의 무참한 죽음이 있은지 6개월만의 일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제안과 참여로 시작된 광화문 촛불시위가 있고, 소위 '깃발논쟁'으로 불리는 약간은 낯선 논란이 진행중이다. 외형만으로 이 논란은 깃발을 든 운동조직대오와 일반 네티즌 참여자들간의 사소한 정서적 불일치일 뿐이다. 그러나 막상 시위현장에서 빚어진 이질적인 두 집단간의 어색한 만남과 사소한 정서적 불일치가 가지는 의미와 그 파장은 생각해 보면 볼수록 현장에서의 갈등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그리 간단치않은 문제다. 범국민대책위 등의 웹게시판에 이 촛불시위를 최초로 제안했던 '앙마'라는 인터넷아이디의 네티즌은 이 논란에 대해 양쪽의 자성을 촉구하고 각 시위 참여자들 사이의 차이를 존중하는 가운데, 열려진 광화문이라는 공간을 '더많은 민주주의'의 광장으로 만들어갈 것을 호소하였다. 우리는 이같은 진심어린 호소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소위 깃발대오로 분류되는 촛불시위 참가자의 일원으로서 제안자의 자성촉구에 화답하고, 더불어 현재의 광화문 촛불시위와 반미운동에 대한 우리의 바램을 피력하고자한다. 광화문과 미대사관, 깃발과 대중 광화문 촛불시위가 벌어지는 종로 교보문고 앞 광장은 현행 집시법상 집회금지장소다. 외국대사관 반경 100m이내 집회금지라는 반민주적 규정 때문이다. 지난주 12월7일 촛불시위대가 점령한 미 대사관 앞은 해방후 한번도 집회가 허락(!)된 적이 없는 성역이었다. 더구나 현행법상 모든 야간집회는 불법이다. 이런 점에서 광화문 촛불시위는 행사의 성사 자체만으로도 민주주의의 큰 진전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하물며 이 모임은 단순한 추모로 그치지 않는 반미라는 대의아래 이루어지는 집단적인 정치행동이며, '소파개정과 부시사과', '살인미군 무죄판결 무효와 한국법정 처벌'이라는 요구사안 또한 명확한 반미집회였다. 다만 논쟁의 발단이 된 발화점은 깃발로 표상되는 운동조직대오의 생경한 몸짓과 말투, 문화로부터 조직되지 않은 참가자들이 느꼈을 법한 소외감과 위화감인데, 이는 매우 갈등적인 쟁점인 동시에 그 해결책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일견 부차적일 수 있는 문제다. 단지 앞이 보이지 않아 '깃발을 내리라'는 외침은 여느 운동조직들의 집회에서나 벌어지는 풍경이다. 깃발을 내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른바 운동권 사투리로 대표되는 운동집단의 운동문화는 '깃발대오' 스스로 반성하고 시급히 고쳐야할 숙제이다. 또 선두 연단에 한정된 발언권의 분산과 집회참여자들 사이의 자유로운 소통 또한 이른바 '깃발대오'들 또한 언제나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해온 주제다. 깃발을 내리고 말고가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진정한 문제는 집단적인 정치행동 형식을 띨 수밖에 없는 이같은 모임이 가지는 집단성과 개인성의 모순과 모임의 중심 대의인 '반미'를 둘러싼 집회참가자들간의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갈등과 그로 인한 불편함이다. 깃발은 단지 이 두 주제에 관한 깊고 넓은 갈라짐의 경계가 된 상징적인 매개물에 불과한 것이다. 집단적 정치행동의 조건과 집단성과 개인성의 모순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그들 자신의 이해를 넘는 대의를 실현하려고 공동의 행동을 실천한다면, 이는 이미 하나의 정치적 집단행동이다. 그리고 그같은 집단행동에는 집단을 형성한 각 개인들 서로간에 대의를 공유할 수 있는 상호 교통의 조건이 필수적일 것이다. 물론 그 대의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식과 결론은 상이할 수 있을지언정 말이다. 우리는 이같은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의 조건으로서 '합리적인 이성'을 중시하며, 이는 곧 형식적인 합리성에 그치지 않는 일정한 역사인식과 '공통개념'에 기반한 개인의 능동성과 집단적 실천을 결합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이로써 필연적으로 집단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일 수 밖에 없는 정치적 실천이 가능한 유일한 길이 열리는 것이며, 어떤 집단적인 강제속에서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냐에 상관없이) 개인은 자신을 잃고 소외됨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광화문에 운집한 깃발대오와 네티즌들간의 오고간 '깃발을 드냐 내리냐'는 식의 협소한 교통관계는 이들 두 대오 자체와 각 대오로 나뉜 시위참가자 (개인)자신들이 어떤 집단적 강제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린 결과라고 밖에 볼 수없다. 즉 네티즌은 자발적인 참여자이고 깃발대오는 개인참여자를 소외시킨 집단이라는 평가는 잘못된 사실에 기초해 있으며, 깃발대오와 비운동권대오라는 허구적으로 조작된 집단성이 사실인 듯 주어진 구분관념 때문에 어느 한편으로 그 성격을 제한당한 광화문 시위참여자 개개인 모두가 어느 만큼 스스로를 잃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위참여자들 자신들이 자신을 잃어버린 그만큼 광화문 시위의 정치적 실천은 실패했고, 그렇지 않은 만큼 성공했던 것이다. 우선 어느 깃발에도 속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반미'(집회의 대의)는 과연 그 개인참여자만의 순수한 결정이었을리 만무하며, 어떤 깃발에 속했던 개인도 그 깃발의 집단성에 자신을 완전히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소위 [비정치적인 반미]라는 아이러니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비정치적인 반미(反美)]라는 아이러니 한국사회에서 '반미'만큼 정치적인 문제는 없다. 반미는 남한의 성립과 더불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가장 첨예한 정치적 쟁점중의 하나다. 그러니 도무지 우리로서는 [비정치적인 반미]란 이해할 길이 없는 아이러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피해갈 도리없이 노도와 같이 몰아닥친 반미열풍사태를 수습·교정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친미냉전적 정치세력과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적 개입이 엄존함을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반미와 소파개정은 별개의 문제라느니,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반미정서를 이념적으로 불순하게 이끄는 세력이 있다느니 하는 이데올로기 공세의 고삐를 한시도 늦추지 않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한계상황에 다다른 대중의 정치불신을 가장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정치는 싫어하지만, 반미는 좋아한다"는 이른바 '월드컵 반미세대'라는 조작된 반미정서를 탄생시켜냈다. 결국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첨예한 쟁점을 내포하며, 하나의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이념일 수밖에 없는 반미는, 불순하고 구시대적인 '정치적 반미'와 반정치적 정서에 한없이 영합하는 정서적이고 신세대적인 '비정치적인 반미'로서 현실적으로 분열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분열은 추모의 촛불로 하나됨에 부족함이 없던 광화문에서조차, 운동조직대오의 깃발과 폐쇄적인 운동문화 및 정치적 발언들을 매개로 대중들의 무의식적인 심리적 한계선을 자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선을 돌파하기 위해서조차 오히려 현재 반미투쟁의 과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파개정과 주한미군 철수 현재 투쟁의 요구는 네가지다. 살인미군 무죄판결 무효와 한국법정 처벌, 부시의 공개사과와 소파 전면개정이다. 이러한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이번 투쟁의 목표임은 두말할 나위 없으며 이를 위해 모두가 나서고 있다. 지난 번 소파개정시에 주권을 침해하는 핵심적인 조항들은 그대로 둔 채 몇몇 지엽적인 개정과 법적 효력이 없는 선언적 문구를 집어넣는 기만적인 개정으로 그치고 말았고, 그나마 주고 받기식 개정으로 미국이 부분적으로 양보하는 듯 하면서 핵심부분에서는 오히려 개악된 내용으로 개정됨으로써 불평등성이 더 심화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민중의 힘으로 이번에는 기어이 소파를 전면 개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묘한 심리적 한계선 때문인지 주한미군 철수의 요구는 대중적으로 나오고 있지 못하다. 물론 소파가 개정되는 것은 이번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미군이 장기 주둔하는 상황이 변화하지 않는한 유사한 사건은 언제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미군의 주둔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대중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 철수가 이번 투쟁의 직접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이 충분히 드러날 수 있도록 논쟁과 토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반미를! 작금의 반미정서에 관해 우리가 가지는 또하나의 우려점은 민족적 자존심 회복에 국한되고있는 반미정서의 협소함이다. 미국처럼 힘있는 나라가 되고 싶지만, 발전의 전망을 상실한 위기의식의 탈출구로서 '반미'가 위치지어져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인 미국의 금융 제국주의와 군사 패권전략이 전세계 인민의 삶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아야 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동남아에서, 중동에서, 동구에서, 가까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자국의 이해만을 위해 수많은 인민을 전쟁과 폭력으로 몰아 넣었는지 상기한다면, 그리고 지금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이라크 침공을 일촉즉발 일으키려 하고 있고 북한에 대해 강경 일변도로 치닫는 것을 상기한다면, 반미는 반도의 '자존심'으로 그쳐서는 안될 국제주의적인 인권과 평화의 새로운 진전을 이루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12월 14일 시청 앞 1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이 개최된다. 우리는 더욱 더 많은 민주주의와 반미를 결합시켜야 한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주장을 발표하고 소통하면서, 정치의 공간을 더 크게 열어야 한다. 모두가 반미 행동의 주체가 되어 힘을 모으자. SO-LA
대한상의 노동정책 건의와 매일경제의 '한국은 노조공화국인가' 기획기사를 보며 그들의 요구 여야 정당들의 대통령 후보가 노동자의 표를 얻고자 하기에 차마 이야기 할 수 없는 정책들을, 그들을 대신하여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조직이 있다. 대한상의, 경총, 전경련 등의 자본가 단체들과 매일경제신문 등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회창, 노무현이 가슴 속 깊이 숨겨두었던 비밀을 누설함으로서, 대통령 후보들이 당선 후에 수행해야 할 '자본가들과의 약속'을 잊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다. 지난 11월 28일 대한상공회의소는 파업기간 대체근로 허용, 부당해고시 형사처벌 규정 삭제, 노동조합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적용 등의 내용이 담긴 노동정책 과제를 정부에 건의했다. 이 내용들은 이미 10월 8일 한국경영자총협회가「대선공약 경영계 정책건의서, 경쟁력 있는 국가건설을 통한 국민 삶의 질적 개선」라는 문건을 통해 공개한 것을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으로, 김대중 정부에 정책 건의를 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 후보들에게 다음 정부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었다. 정책건의서는 이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금년에 치러지는 대선에서 각 후보의 공약은 단기적 인기를 얻기 위해 정치논리에 치중된 공약이 되어서는 안되며, 시장경제원리를 철저히 준수하고 경제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추진 … 유념해야 함." 또한 이에 앞서 매일경제 신문은 한국 노동운동을 21세기 한국 사회의 비합리적 반사회적 모습으로 규정한 '한국은 노조공화국인가'라는 기획기사를 11회 분량으로 11월 26일부터 연재하였다. "한국 국가 이미지가 노사관계 후진국으로 고착될 위기에 처했다. … 주한상공회의소는 한국경제가 도약하기 위한 결정적 걸림돌로 노사관계 후진성을 매년 꼽는다" 로 시작하는 기획기사는 노조 전임자 문제, 노조의 비도덕성, 노-노 갈등, 명분없는 파업, 잘 사는 노동자만을 위한 이익단체 민주노총, 노조간부의 정책 부족-비합리성, 노조 없는 기업의 성장가능성 등등 한국 노동자운동의 문제점을 현장 인터뷰를 중심으로 (원인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결과에 대해)해석하였다. 그리고 기획기사는 결론으로 "강력한 노조와 이를 부추기는 노동관련법 … 이 한국 기업의 최대 약점이다. … 노동자가 아니라 노조 문제인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즉 강력한 노조를 부추키는 노동관련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파업기간 대체근로 허용, 노동조합에 대한 부당노동행위 적용 등 경총이 제안하고 대한상의가 강조한 그것을 즉각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일경제는 대통령선거가 시작되는 묘한 시점에 자본가 단체들의 정책을 중립적인 듯 보이는 기사 형식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 '경쟁력 있는 국가'를 만들기 위한 이들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노동유연화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무릎꿇게 하라! 김대중 정권 5년간의 노동정책, 그리고 자본가들의 다음 목표 우리는 15대 대선을 앞두고 자본가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을 통해 차기 정권에서 어떠한 노동정책을 펼칠 것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김영삼 정권은 정권 말기에 국회 날치기를 통해서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시간제를 법제화하고 노동유연화 정책의 골간을 마련하였다. 김대중 정권은 이를 경제위기라는 상황을 명분으로, 그리고 노사정위라는 사회적합의기구를 형식으로 하여 한국사회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 김대중은 노동유연화를 신자유주의 시대에 걸맞는 노동시장, 노동과정, 노동력재생산에 걸쳐 체계화 제도화하는데 성공한다. 용역 외주화 아웃소싱 등의 노동력 외부화, 구조조정을 명분으로 한 정규직 노동자의 비정규직 전환, 임시직 계약직 일용직 등을 통한 신규채용 전략을 일반화하였으며, 연봉제 성과급제 스톡옵션 등을 통해 임금을 유연화하였고 변형근로시간제를 확대 적용하여 실질적인 장시간 노동 구조를 정착시켰다. 또한 BK21, 7차 교육과정으로 대표되는 교육 서열화, 학생에 대한 핵심/주변 분할 체제를 정착시킴으로서 노동유연화 구조에 걸맞는 노동자 재생산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그리고 생산적 복지 정책을 통해 실업 빈곤을 관리하며, 이 밖에도 주식시장의 활성화, 카드 가계대출 등을 통해 노동자들을 금융 시장에 종속시킴으로서 노동 유연화 정책에 대한 2중 3중의 보호막을 구축했다. 이제 자본은 향후 노동유연화 정책을 꾸준하게 추진할 수 있는 기초를 다진 셈이다. 실재 경총의 노동유연화 요구를 보아도 정리해고 요건 완화, 근로계약기간 상한선 확대, 의무고용규제 개선 등 기존 정책의 각론을 고치는 수준이다. 그리고 지난 5년간 노동유연화의 기초가 다져졌으니, 이를 더욱 확대해나가는 핵심 걸림돌은 이제 노동운동의 저항이다. (경총의 공약제안의 첫 번째 목차는 "산업평화 달성-유지를 위한 노동법 제도의 합리적 개선"이다. 그리고 정권 초기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이념적 지표를 선동하는 데 앞장섰던 매일경제가 지금 제시하는 것은 비합리적 반사회적 노동운동에 대한 처방이다.) 차기 정부에 대한 이들의 가장 강력한 요구는 대한상의가 선언하였듯이 이제 법적 제도적으로 노동운동을 '처벌하라'는 것이다. 자본가들의 술책 아군의 취약점은 적군의 가장 좋은 공격 지점이 된다. 자본가들의 첫 번째 표적이 되는 것은 현재의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노동자들간의 괴리이다. 매일경제 기획기사는 이에 대해 '노조전임자' 문제로 시작한다. "2000년 기준 노조원 212명당 전임자 1명이 있을 정도로 일하지 않는 전임자가 판을 친다. … 현대중공업 노조는 사무국장 수뢰사건으로 총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 관료화된 노조가 비윤리적인 자본가보다 못하다" 그리고 곧이어 노동조합의 파업 현실을 폭로한다. "50%를 간신히 넘는 투표율로 찬반투표를 가지고 파업에 들어갔다가 조합원들은 모두 떠나고 노조 간부들만 남아 파업을 계속하는 우리나라의 실정" 이에 대한 경총은 '근로자의 단결하지 아니할 권리와 단결선택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유니온 샾 조항을 삭제하라'는 것이며, '파업찬반투표 용지에 파업으로 인한 임금상실 가능성 및 불법파업시 책임발생 가능성을 경고하는 문구가 삽입된 법정투표용지를 사용하도록 하며, 노조원이 공정하고 소신있게 의사표현 할 수 있도록 우편투표화가 이루어져야 함' 이라는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 표적은 노동운동이 신자유주의 반대의 정치적 목표 아래 전국적 전선을 구축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다. 매일경제 기획기사는 먼저 단결을 주장하며, 그에 배반하는 노동운동의 내적 모순을 지적한다. "하도급 노동자는 정규직 방패막이 … 울산 현대자동차 하도급 노동자로 근무했던 C씨는 회사가 어려워져 인력을 감축해야 할 때 정규직 대신 해고될 만큼 하도급 노동자 비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 …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폭행 … 캐리어 비정규직은 정규직한테 집단폭행 당한 아픔이 있다" 그리고 이어 민주노총의 전국적 투쟁 뒤에는 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이 뒤따른 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 수많은 주장과 요구는 일반국민은 물론 노동자들에게도 외면당했다. …대안없는 민영화 반대 … 결국 노조원 350명이 해고되고 복귀자는 모든 손해배상을 감수하겠다는 서약서를 쓰면서 끝났다. " 이에 대해 경총은 '단체교섭사항의 명확한 규정', '노사관계를 악화시키는 3자 개입의 합리적 제한' '폭력 사용 개연성이 큰 개인 및 단체의 집회 참가 제한, 시위방법 제한 등을 골자로 하는 집시법 개정' 등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들은 노동운동 자체를 원천적으로 무력화하려는 속내를 드러낸다. 매일경제는 인용을 통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파업문화를 장기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형사적 접근보다 손배소 가압류 등 민사적 접근이 유리하다"라고까지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조합의 개선 방향으로 LG 전자, 미국자동차연합노조, 독일금속노조 등을 예로 들며 회사와 협력하여 구조조정과 효율화에 매진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경총은 좀 더 노골적으로 '직권중재 가능한 필수공익사업장 확대', '파업 중 대체근로 허용' 등을 주장하고 있다. 전국적 민중연대 전선의 강화를, 다시 한 번 전민중적 민주화 투쟁을 지난 시기를 되돌아보면 언제나 허황된 협박 같았던 자본가들의 정책 제안이 결국 현실에서 시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한국노동연구원은 정부의 의뢰를 받아 '기업존속이 위태롭거나 또는 법원의 쟁의행위금지 가처분이 있거나 공익이 제한될 때 이를 허용하고, 대체인력 투입을 방해할 경우 업무방해죄를 적용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또한 대한상의 회장이기도 한 두산중공업 사용주는 매일경제가 '노동자들의 지지 없는 산별건설' '산별교섭을 이유로 한 명분 없는 파업'이라 하고, 경총이 제안한 "산별노조 산별교섭을 이유로 한 연대 동정파업의 금지" 정책을 현실화시켜 임단협에서 '집단교섭 삭제'를 관철시킴으로서 두산중공업 노동조합의 산별노조를 통한 투쟁을 무력화시켰다. 축적 위기에 빠져 구조조정을 반복 획책하는 자본가에게 노동유연화의 확대 강화는 사활을 건 과제이며, 이러한 절박함만큼 저들은 더욱 집요하고 철저하게 노동운동을 괴멸시키려 할 것임이 자명하다. 2002년 발전노조투쟁과 11월 총파업에서 볼 수 있었듯이 노동자들의 분노와 저항이 더욱 거세저가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이 분노를 관리하기 위해서 더욱 노동운동을 분할 탄압하며,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의 분노를 반신자유주의 운동으로 모아나가는 것을 막으려 할 것이다. 특히 이번 대한상의의 선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탄압은 정치적 대응으로서의 공권력에 의한 것만이 아닌, 법적 제도적, 그리고 노동운동을 고립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대응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다. 저들이 획책하는 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법적 제도적 대응과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통해 민주주의의 기본적 권리인 '노동권'을 말살시키는 것이다. 이제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싸움은 고용 임금 등의 생존권 요구를 넘어 노동자 민중이 민주주의의 기본적 권리를 지켜낼 수 있는가, 시민의 최소한의 존엄을 사수할 수 있는가로 나아가고 있다. 자본가들은 '노동운동', '노동조합'이라는 대상을 싸우고 있는 듯 하지만, 실상은 노동운동 노동조합운동이 가리키고 있었던 '노동에 대한 권리'에 집중적으로 싸움을 걸고 있는 것이다. 노동운동을 관리하겠다는 저들의 정책이 결국 시민의 저항 일반- 바로 정치-을 제한하는 것임은 그들의 정책이 결국 집시법 개정, 3자 개입 금지, 단체협약 제한 등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으로도 확연히 알 수 있다. 자본가들이 획책하는 노동권 말살 정책에 대한 싸움은 한국 사회 모든 시민들의 투쟁이다. 차기 정권이 노무현이 되던 이회창이 되던 정부의 정책 변화는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금융 세계화 시대 자본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며, 김대중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결국 공장 문 앞에서 멈추어 섰듯이 신자유주의를 부정하지 않는 모든 정권의 필연적 선택이다. 이제 신자유주의 시대의 국가의 역할은 보다 분명하게 모든 국민들 앞에 등장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자본가들의 태도 역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10여일 앞두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어느 후보를 찍을 것인가'에 쏠려있는 지금, 과연 어느 누가 이 민주주의의 파산을 막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차기 정권이 누가 되던지 수행해야 할 협약을 제시하고 있는 자본가들의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고민하고 준비해야 할 것은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노동권을 사수하기 위한 노동자 민중의 전국적 연대, 전민중적 저항을 어떻게 조직할 수 있을 것인가가 아닐까 한다. 이제 자본가의 대노동 전쟁은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so-la
후보단일화 논의에 부쳐 농민대회였다. 정몽준과 노무현은 각각 돌과 계란세례를 맞고 물러났다. 농민들은 더 이상 지배정치의 사탕발림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뿐이다. 분노를 모아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는 것 또한 지금의 비정한 현실이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보수화를 넘어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내는 흐름은 지체되고 있다. 30만 농민대회의 뼈아픈 진실은 여기에 있다. 후보 단일화 그리고 개혁세력의 붕괴 노무현 정몽준의 후보단일화 논의가 진통을 겪고 있다. 일단 후보 단일화에는 공감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으나 단일화 과정에 대한 잡음이 만만치 않다. 현재까지 진행된 경과로미뤄보면 정몽준에게는 단일화의 의지가 없어 보인다. 단일화 결과 노무현이 된다면 노무현이 당선된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단일화를 둘러싼 지형이 정몽준에게 그다지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일화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정몽준과 마찬가지로 노무현 역시 단일화에 대해 소극적이다. 노무현으로서는 최초의 국민경선을 통해 창출된 후보라는 점을 내세워 당내 기반을 다지려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세 아들 비리를 계기로 터져 나온 민주당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노무현의 지지도 역시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김민석을 비롯하여 개혁세력이라 자칭하는 민주당의 쇄신파들은 후보단일화가 구국의 결단인양 정몽준의 비싼 우산 밑으로 줄을 섰다. 후보단일화를 주장하던 몇몇 의원들은 심지어 아예 한나라당으로 둥지를 옮기기도 했다. 민주당과 386으로 상징되는 개혁세력이 완전히 붕괴하고 있는 것이다. 개혁세력 내부의 붕괴와 지지율 하락에 직면하여 노무현과 정몽준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반 이회창 전선의 결집을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후보단일화를 언급할 수밖에 없는 속내가 있다. 단순히 수권전략으로서 후보단일화를 넘어서는 또 다른 이유 말이다. 후보단일화 논의는 개혁세력의 목숨을 구걸하는 구차한 연명에 불과하다 지방선거 패배 이후 몰락의 임계 상황에 몰린 개혁세력은 화려한 흔적을 남긴 월드컵과 붉은 악마에 기대어 자신의 부활을 꿈꾸었지만, 축구 열풍이 사라지자마자 붉은 악마는 자취를 감췄고, 이제는 어디에서도 개혁의 상징이 출현하기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정몽준의 화려한 등장과 정치인들의 줄서기, 그리고 점점 몰락하는 지지도) 한편으로 이같은 기대의 상실은 과거 개혁세력의 정치적 표상이었던 민주당으로의 기대 반등 효과를 낳았고, 노무현은 이때를 틈타 대선 대열을 정비한다. 개혁세력들의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이제 어느 누구도 이 상황을 주도할 수 없게 되었고, 이들은 우왕좌왕하게 된다. 개혁세력들에게 어떤 선거 전략도 유효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는 뜻이다. 어떤 바람도 기대할 수 없는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 앞에서 개혁세력은 어떤 형태로든 더 이상 지지기반을 확장할 수 없었고, 이렇게까지 몰리자 결국, 정몽준과 노무현 모두 단일화라는 카드를 쥐고 서로 몸집 불리기에 몰두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는 현재 단일화 논의의 성격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후보 단일화를 매개하는 몸집 불리기의 배후에는 보수-개혁 전선을 유지하며 이들의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려는 치열한 생존전략이 숨어있다. 즉 단일화가 추진되는 배경은 내부로부터 붕괴하는 개혁세력의 자기 수습차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외치는 맹목적인 개혁세력 결집론(반창)은 신자유주의 정치개혁의 주체였던 개혁세력들이 자신의 생명을 연명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수권전략이 되었든 생존전략이 되었든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마땅한 대안도 없는 개혁세력에게는 단일화를 향한 이합 집산 만이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에 맞서는 대선 대응의 유력한(지금 상황에서 유일한!) 방도이기 때문이다. 개혁세력의 생존 근거, 개혁/보수 전선 개혁세력의 결집을 통한 반 이회창 연대의 실내용은 존재치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있어 이회창 반대의 명분은 한편에서는 민주화운동이라는 고답적 쟁점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미래의 리더쉽이라는 가상적 쟁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반 이회창 전선으로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다만 이미 실패로 판명된 개혁이라는 허구적 이데올로기뿐이다. 개혁세력이 추진한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정치개혁이 파산한 지금, 지배분파들이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한 개혁세력과 이회창-한나라당과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선명한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대북정책이지만 이는 철저히 북-미 관계에 종속된 현재 국면에서 자신의 과거 정체성을 호명하는 단순한 수사에 그칠 뿐이다. 또한 금융세계화에 종속된 남한에서 부르주아들의 전략은 IMF위기극복의 방향이 쟁점이 된 97년의 상황과 다르다. 현시기 남한 부르주아들이 바라는 것은 현재 체제의 안정화와 효율적인 관리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부르주아 정치권의 입장은 동일하다. 이상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권의 무원칙적이며 놀라울 정도인 온갖 합종연횡을 설명하는 핵심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세력의 결집(생존)은 보수/개혁이라는 허구적 전선이 전체 정치적 쟁점을 주도할 때에만 가능하다. 유령처럼 되살아나는 보수/개혁 전선이 반창-후보단일화를 매개로 부활하고 있고, 이것이 다시 개혁세력의 생존 근거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민중운동 진영의 정치적 입지를 더욱 축소시키고, 대중들의 정치전선을 오히려 이완시키며, 대중들의 정치적 수동성에 일조 한다는데 있다. 이들이 상징하는 개혁이란 사실 신자유주의를 향한 개혁에 불과하고, 이 사실을 대중들은 DJ 정권아래에서 불안하고 곤궁한 삶과 피폐한 노동으로 확인해왔다. 따라서, 개혁세력의 붕괴로 인한 보수/개혁 구도의 해체와 정치의 위기는 진보정당과 일련의 민중운동에게 공간을 열어준 듯 하지만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다. 대중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보수/개혁의 허구적 전선 속에 지역주의, 보수주의로 회귀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회창의 지지율이 영남을 중심으로 또 노무현 지지가 여전히 호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노무현과 정몽준 그리고 '개혁국민신당'(이하 개혁신당)이라는 개혁세력의 존재 자체가 가지는 치명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정치의 위기에서 민중적 대안과 전망 그리고 투쟁을 촉발시키는 것을 저해한다. 또한 대중이 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 결집하는 것을 교란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이들의 몰락 앞에 동정이란 있을 수 없다! 노무현과 정몽준이 농민대회를 찾았던 이유는 개혁세력의 표상을 재획득하는데 있다. 하지만 계란세례로 확인했던 바와 같이 개혁과 보수의 구도는 이미 아래로부터 그 시효를 상실했다. 노무현과 정몽준을 위시한 개혁세력의 결집은 현재 상황에서 어떠한 긍정적 효과도 낳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창출해야하는 전선을 교란시키고 대중의 보수화를 부채질할 뿐이다. 하기에 개혁세력의 결집과 세력화라는 것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보수/개혁의 전선의 보수세력이 집권을 하던 개혁세력이 집권을 하던 변화할 것은 없다. 문제는 현재 대중의 정치적 보수(수동)화를 추동하는 보수/개혁이라는 허구적인 전선을 끝장내는 것이다. 다시 한번 반제/ 반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들고 민중적 대안과 세력화를 이룰 수 있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반제/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 허구적인 개혁/보수의 전선을 넘어서자. 농민대회가 남겨준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SO-LA
11월 투쟁, 어떻게 임할 것인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로 조직되고 있는 11월 투쟁은 우리에게 섣부른 기대보다는 끈질긴 인내를 요구한다. 현재 진행중인 각각의 투쟁에 대해 호흡을 가다듬고 진단, 평가하는 것은 우리 운동의 일보전진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무능부패로 일관하는 지배정치에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11월 들어 전개될 대부분의 투쟁이 처한 곤란은 장기간 준비한 대중동원 투쟁의 성과와 한계를 어디로 갈무리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다. 여기에는 11월 대중투쟁의 성과를 대통령 선거에서 어떻게 수렴시켜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착종되어 있다. 즉 선거시기 민중의 이해를 대변할 정치세력이 여전히 미력하다는 것을 이유로 투쟁의 종착지가 기성 정치권(대선 후보)으로부터 확약을 받아내는 것으로 미끄러지는 것 말이다. 그러나 현재의 정치세력은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 안을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초국적자본과 국제기구의 요구에 부합하여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한 각종 법·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 그 역할이 제한된 행정부나, 정치 이념보다는 대중적인 이슈에 대해 그때그때 신속하게 대처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정당을 구별시키는 선정적 폭로만이 난무하는 국회에서 신자유주의에 반하는 민중의 요구가 진지하게 다루어지기란 애시당초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정치상황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대통령 선거를 40여일 앞둔 현 시점에서 지배 정치권의 행태는 '바닥을 향한 경쟁'에 돌입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정치권 일반은 오로지 널뛰듯 오르내리는 여론조사의 향배에만 정신이 팔린 채 이합집산·합종연횡·이전투구에 몰두하고 있다. 8·8 재보선 선거 참패 이후 사실상 야당으로 전락한 뒤 해체 일로를 겪던 민주당은 개혁세력로서 자신의 정체성마저 져버린 반동적 정계개편 말고는 자신의 욕된 목숨을 부지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와 '분당'이라는 극약처방을 통해 오로지 정몽준과의 야합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이미 이들에게 있어 모든 정치활동의 목표는 아무런 원칙도 없는, 반이회창 단일후보를 통한 재집권의 야욕에 불과하다. 원내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한나라당 역시 무능하기로는 피차 일반이다. 이들은 정확히 말해 무정견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 어떠한 적극적인 정치활동도 전개하지 않고 있다. "대선에 팔려 국회 문닫는 나라"라는 보수일간지 사설 제목이 시사하듯, 이번 정기국회가 특별한 정치적 쟁점 없이 11월 8일로 한 달 가량 서둘러 마무리될 것이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정치권은 '짜고 치는 고스톱' 마냥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전대미문의 증액경쟁을 벌인 다음, 법안심의에서도 옥탑방 양성화, 군인연금 인상 등 실효성 없는 선심성 법안만 서둘러 통과시키고, 마지막으로 정당에 대한 예산지원을 더 타내기 위한 공직선거법만 처리하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국회는, 집권 말기에 이르러 거듭된 무능부패로 사실상 가사(假死)상태에 빠져있는 김대중 정부 최후의 '개혁', 다시 말해 미완의 신자유주의 개혁 정책 입안을 서두르고자 하는 행정부의 요구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역설에 직면하기도 한다. 결국 대선을 앞둔 이번 정기국회에서, 정치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괜시리 민감한 사안을 건드려 손해날 장사하기 싫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이러한 정치의 희화화 경향 하에서 선거가 이념이나 구체적인 정책의 차별화가 아니라 전반적인 무관심 속에 인기영합주의로 대체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다. 대정치권 압박·청원식 투쟁이 마치 '떡 줄 놈은 생각도 없는데 김치국 마시는 격'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투쟁의 목표를 대정치권 압박·청원으로 설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현재 민중운동 진영의 현실은 이러한 경향에서 전반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주지하다시피 민주노총은 지난 10월부터 주5일제 근로기준법개악·공무원조합법·경제특구법 등 자칭 '3대 쓰레기 악법' 국회통과 저지를 위해 총파업을 조직해왔다. 20만에 달하는 조합원이 총파업 찬반투표에 참가하고 국회 앞에서 펼쳐진 확대간부 상경노숙투쟁에는 3박4일 동안 연인원 5천여명이 참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비로소 11월 5일, 12만을 웃도는 조합원이 총파업에 참여해 22개 도시에서 '악법철폐'를 외쳐 노동부조차 96∼97년 노동법개정투쟁 이후 최대의 투쟁동력이라고 실토할 정도였다. 4·2 발전노조 연대파업 불발 이후 근간부터 흔들린 조직을 복구하고 5개월만에 새롭게 구성된 지도부 체계에서 뒤늦게나마 하반기 투쟁계획을 확정한 뒤, 단 2주만에 총파업을 성사시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는 일견 고무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국회 앞 도로를 완전 점거한 집회대오가 총파업 결의대회 과정에서, 하루 전날 정권의 극악무도한 폭력침탈만행에 몸서리쳐야 했던 공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을 엄호, 공무원노동자대회를 성사시켜냈다는 점도 분명한 의의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빛'의 이면에는 분명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할 정치세력이 여전히 미력하다는 것을 이유로 대신 국회를 압박, 가시적인 성과를 쟁취하려는 무의식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번 총파업이 '주5일제 근로기준법 개정안' 정기국회 회기 내 통과를 저지한다는 명목 하에 조직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번 투쟁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대중투쟁의 역동성은 끊임없이 국회일정에 종속, 제한되기 일쑤고 이 과정에서 동원되는 대중들은 정치권에 대한 해바라기식 투쟁에 매몰된다. 그리고 총파업 규모는 은연중에 협상력과 동일시된다. 실제로 김대중 정권 들어 연례행사처럼 진행된 '대국회투쟁'은 그 형식 자체가 법안의 국회통과를 저지하는 것을 현실적 목표로 하는 탓에 이러한 오류를 끊임없이 노정했다. 이러한 조건부 총파업의 후과는 민주노총이 주5일 관련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파업 중단을 선언한 그 즉시 나타났다. 바로 다음날인 6일, 국회가 경제특구법을 국회 재경위에서 통과시킨 것이다. 이로써 '3대 쓰레기악법'의 폐기라는 당초 목표는 유실되고 말았다. 자기방어적-근시안적인 투쟁을 넘어 전면적인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으로 여기서 우리의 우려는 비단 특정 법안의 파괴적 속성에 국한된 것도 아니요, 이 법안 자체를 막아내지 못할 거라는 비관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경제특구법안이 통과될 것이라는 것을 뻔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주5일 관련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이번 회기 내에 처리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업을 중단하고 간부상경투쟁으로 대체한 현실에 있다. 다시 말해 현재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 추진되는 전형적인 메커니즘을 올바로 간파하지 못하고 근시안적이고 자기방어적인 투쟁으로 일관하고 있는 민중운동의 현실을 통탄하는 것이다. 기간 민중운동은 겉으로는 소리 높여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반대한다는 것에 모두가 합의하면서도 그 실내용에 따른 투쟁형태와 조직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전방위적으로 자행되는 신자유주의적 공격에 대해 민중운동 진영은 각기 개별적으로 당면한 단위사업장 구조조정(정리해고)에 치중하거나 ―이번 근로기준법 국회 통과 저지 대국회투쟁처럼 사후적으로― 현안 쟁점에 대응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전에 줄곧 자유무역협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확인하였듯이 현재의 WTO-금융세계화 체제는 설사 이러한 현안 투쟁에서 승리하더라도 그 성과를 모조리 앗아갈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는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국가정책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듯이 의회(정당·정치인)나 행정부(정책입안 전문관료)의 신념과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규준으로 제시되는 자본축적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종속되기 때문이다. 관건은 해당 사안에 국한된 선전·조직화와 정책개혁의 사후정당화에 불과한 법·제도 반대를 넘어 반신자유주의-반정권 투쟁의 전반적 기조와 방향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투쟁에 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은 투쟁은, 설령 외양은 대정권-대국회 투쟁일지언정 실상은 '법안' 저지라는 형태로 축소되는 것을 언제나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능동적 투쟁으로 공동의 행동강령을 만들어나가자 한편 공무원노조는 11월 4∼5일 이틀동안 연가상경투쟁을 통해 공무원조합법 철회 공무원노조 합법화를 위한 대정부투쟁을 전개한 바 있으며, 특히 전농을 중심으로 한 농민 대오의 경우 WTO-쌀수입 개방에 맞서 실수로만 무려 15만을 상회하는 동력이 조직되는 와중이다. 민주노총 역시 경제특구법 반대 투쟁을 중섐으로 10만 노동자대회를 약속하고 있다. 실로 엄청난 사건이다. 하지만 애시당초 빼곡한 투쟁 '일정'만으로 전선 형성이 가능할리 만무하다 했을 때, 핵심은 각계각층에서 분출하는 민중투쟁을 지지엄호, 확산시켜내는 동시에 이를 정확한 정치적 기조로 집약할 수 있는 실질적인 '계획'의 문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민중운동 전반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 따름이다. 오로지 유일한 대안이 있다면 전국민중연대(준) 차원에서 공동투쟁-공동협상-공동타결이라는 원칙 하에 추진중인 <민중대표단>일 것이다. 현재로선 향후 그 성사 가능성조차 불투명하지만 지금까지 발표된 바에 따르면 <민중대표단>은 민중연대투쟁전선의 형성 문제를 지극히 형식상의 문제로 대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대선 직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막아내기 위해 "강력한 민중연대 투쟁태세를 구축"하는 것이 주된 목표라고는 하지만 이는 공문구에 불과할 뿐이다. 상층 대표단이 꾸려지고 공동투쟁과제를 선언한다고 해서 공동투쟁의 조건이 즉각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공동투쟁-공동교섭-공동타결이 즉각 단결과 연대의 사상으로 격상되고 마치 현재 민중연대투쟁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으로 인식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오히려 대중들로 하여금 단결과 연대를 지속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에 대해 진지하게 탐색할 기회를 박탈하고 대중투쟁의 역동성을 희석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우려가 상당하다. 예컨대 농민(쌀수입개방 저지)/공무원(공무원노조 인정)/철도(사유화 저지)의 투쟁이 공히 승리하기 위해서는 개별 요구의 단순합을 넘어서는 수준에서 공통의 전선을 형성하여 해결될 문제지, '민정(民政) 교섭'이라는 형태에 몰두하여 각각의 투쟁을 기계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이다. 설령 무능부패한 정치인들에게 약속을 받아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배 정치권은 철저한 무시전략으로 가거나 애매모호한 립서비스(최근 정기국회에서 통과된 농어가 부채 탕감책이 대표적이다)로 거듭 민중을 기만할 뿐이다. 이미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김대중이 민중에게 선사한 것은 철저한 배신이었음을 지난 5년간 뼈저리게 깨닫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아도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반하는 대중들의 개별적 투쟁이 '자기실리적'-'집단방어적'이라는 혐의로 덧씌워져 왔음에 비춰보았을 때, 대통령선거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된 현 정세에서 무능부패한 정치권을 압박하고 청원하는 투쟁 방식의 한계는 더욱 자명하다. 민중운동은 투쟁의 성과를 무능부패한 정치권을 압박하여 행동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으로 치환하는 미망(迷妄)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 오로지 '민중의 해방은 민중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투쟁 속에서 스스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민중대표단>은 향후 투쟁을 위한 출발점을 구축하는 과정이지, 종착지가 아님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11월 투쟁을 전선 재편의 출발점으로 그렇다면 결국 11월 투쟁은 대중들 스스로가 자신의 요구가 결국은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화해할 수 없는 것임을 인식하고 이를 공동투쟁 과정 속에서 상승,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물론 대중투쟁의 성과를 집약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할 민중운동의 집단적 지도력은 여전히 부족하며, 공동투쟁의 경험과 지역적-대중적 기반은 일천한 것이 현실이다. 자칫 한판 대결의 후과가 돌이킬 수 없는 패배로 이어질 염려마저 존재한다. 그러나 패배를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의 투쟁을 처음부터 한계짓고 적당한 선에서 멈추려한다면 그것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초래할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당면한 현안 투쟁이 대선까지만 유효한 것이 절대 아닌 만큼 민중 공동의 행동강령으로 정식화하여, 향후 이를 중심으로 정권과 자본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내야 한다. 많은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공무원들의 피에 젖은 '노동자 선언'으로 불붙기 시작한 11월 투쟁은 10일 노동자대회, 13일 농민대회를 남겨둔 상황에서 일대격돌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무엇보다도 고무적인 것은 민중 스스로가 자신이 처한 고통의 원인에 대해 집단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현재 지역적-전국적 차원에서 실질적인 공동투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노-농 특위를 매개로 한 전국민중연대(준)의 지역적-대중적 기반이 확장되고 있으며, 전국적 차원의 민중연대투쟁조직 구축의 흐름이 차츰 조직되고 있다. 우리는 11월에 전개될 개별 투쟁이 공동의 전선 형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도를 고민해야 한다. 11월 전개될 대중투쟁의 성과를 민중연대투쟁전선의 강화로 수렴하여 향후 보다 반동적인 형태로 편재, 새로 탄생하게될 정권에 맞설 본격적인 태세를 갖추자. 이것이야말로 IMF와 김대중의 등장을 '서 있는 채로' 맞이한 채 눈물의 나날을 보내야 했던 우리 모두가 11월 투쟁현장에서 마주치게될 서로에 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당당한 요구이다.
공투본 무산{{) '공투본의 무산'이라는 표현에 대해 공투본 7차 예비모임이 진행되었고, 후속모임이 예정되어 있으므로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전국연합, 자통협 등이 참가하여 10월 26일 진행된 7차 예비모임의 결과를 보면, 이들 단체들의 공투본 논의에 임하는 태도가 얼마나 형식적이고, 기만적인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미 한 달여에 걸처 7차례의 모임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공투본의 유의미성을 확인할 뿐, 공투본의 구체적인 향후 계획을 제출하는 단체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 이를 반증한다. 또한, 그간 논의과정에서도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의힘에서 노동해방 실천단의 논의를 통해 제출했던 공동투쟁에 대해서도 형식적인 검토만 이루어졌을 뿐이고, 민중경선방안과 관련해서는 공투본 예비모임 기획소위에서 실질적인 논의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 무엇을 평가할 것인가? 지난 9월 17일 노동자의힘의 제안으로 시작된 '공투본 예비모임'은 6차 예비모임을 끝으로 사실상 무산되었다. 공투본의 무산을 두고 여러 가지 논점의 비판이 혼재된 채로 쏟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본디 좌파란 것들이 그렇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며 좌파라는 정치세력에 대한 불신에 찬 발언들을 쏟아냈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당류의 "민족주의/의회주의 세력과 연대/연합을 주장하더니 결과가 뭐냐"라며 좌파결집론 혹은 사회주의 세력화를 정당화하는 입장을 펼치기도 한다. 또한, "대중투쟁돌파론"을 주장하던 세력들은 "역시 선거투쟁하면 좌파가 분열할 수 밖에 없어. 선거대응 하지 말고 대중투쟁에 집중하는게 옳았어"라며 공투본의 실패가 자신의 정당성을 대변해 주는 양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고, 어떤 이들은 유력한 대선방침으로서 공투본의 유의미성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 이러한 비판을 펼치는 이들은 공투본의 무산을 "특정한 정치세력의 제안으로서 공투본의 파산"으로만 한정하여 이해하기 때문에, 2002년 대선에서 공투본의 의미를 사장한 채 자신의 입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만 급급해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공투본 무산이라는 사건에는 어느 특정한 정치세력의 제안의 실패로만 제한될 수 없는 남한운동의 현실적 조건이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그 제안자가 누군인가 혹은 정확하게 그 의미를 이해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상관없이2002년 대선에서, 공투본이 가지는 현실 운동지형에서 의미에 대해 각 운동진영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대선이후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 전선의 구축"이라는 민족/민중민주운동의 공동의 과제는 또다시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운동진영은 2002년 대선을 통해 새롭게 정당성을 부여받은 반동화된 지배권력의 공세에 무력하게 무너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2002년 대선을 눈앞에 둔 현 정세, 운동현실은 어떠한지, 그 속에서 공투본을 제기한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살펴보고자 한다. 그 속에서 우리운동의 일보전진을 가로막고 있는 왜곡된 논점과 운동지형을 평가하려 한다. 또한 90년대 초반 이후 무너진 반파쇼민주주의 전선을 대체할 것으로 "반제·반신자유주의" 전선이 대중운동 속에서 재구축되어야 하고 정파적, 노선적 차이를 넘어 민족/민중민주운동 전반의 과제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1. 현 정세와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조건 우리는 2002년 대선을 앞둔 현재의 정세를 "민주화운동의 적자를 자처하며 집권한 '개혁세력'의 붕괴 및 이것의 결과가 한나라당/정몽준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대중들의 보수화 경향과 이에 따른 반동적 권력재편"으로 규정했다. 현재 형성된 정세는 지난 10년여 동안의 계급투쟁 결과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독재타도/민주쟁취'의 슬로건 아래 함께 투쟁했던 반파쇼민주주의운동은 87년 6월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대선을 거치면서 자유민주주의(개혁주의)와 민족/민중민주운동으로 계급적 분화를 겪었다. 민족/민중민주운동은 90년 초반까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기반으로 노동자, 민중들의 투쟁을 조직하는데 기여했지만, 91년 민족/민중민주운동이 암묵적, 보편적으로 동의했던 사회주의의 붕괴와 정권의 탄압, 계급투쟁의 패배 속에서 급격한 분화와 쇠락을 경험했다. 이러한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쇠락을 틈타 80년 민주화운동의 적자임을 자처하며, YS/DJ 양대 문민정권이 들어섰다. 이 과정에서 민족/민중민주운동은 세계/남한자본주의 조건에 대한 분석능력을 상실했으며, 양대 문민정권 등장의 실질적 의미-민주화운동 경력이라는 정치적 명분을 배경으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실행가능성을 제고하는-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채, 통일운동 및 운동노선을 둘러싼 분화와 다수 인사들이 부르주아정당으로 투항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개혁주의) 정권에 포섭{{) 통일운동의 개량화/민화협 건설을 주도했던 상층 인사들, 특히 98년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이창복 전 상임의장의 민주당 입당, 노동운동 및 농민운동 상층 인사의 정치권 영입, 소위 NGO로 불리는 자유주의적 시민운동 인사들의 DJ 정권에의 대거 참여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겠다. }}되어 갔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개혁주의)의 헤게모니는 경실련, 참여연대로 이어지는 자유주의적 시민운동의 융성, 386과 전문가/지식인을 동원한 이데올로기 공세 속에서 공고화되었다. 그리고 노동운동/농민운동 등의 계급대중운동은 이익집단으로 폄하되었다. 그리고,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정치적 보편성은 대중 속에서 새롭게 구축되지 못한채, 해체되는 과정을 겪는다. 특히, 1997년 IMF 외환위기는 급격한 구조조정을 대세로 만들었다. 더구나 경제위기를 구실로 취임이전부터 비상대권을 거머쥔 DJ 정권의 수평적 정권교체는 민주화와 개혁의 이미지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정당화하였다. 또한, DJ정권은 민주노총으로부터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법을 골격으로하는 노사정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유력한 저항세력이었던 노동운동의 예봉을 초기에 꺾을 수 있었다. DJ 정권은 개혁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적 NGO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민족/민중민주운동을 포섭/교란하는데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DJ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정치적 조건을 활용하여 일시적{{) 대표적으로 사유화(민영화) 정책의 경우, DJ정권 초기 대중적으로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여졌고, 대부분의 NGO들은 노동자들의 사유화저지/고용안정 투쟁을 집단이기주의로 몰아붙이며, 공기업 사유화(민영화) 정책을 지지(기껏해야 민영화 방법과 시기를 둘러싼 이견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지난 발전노조 파업 과정에서 보이듯이, 발전/철도산업 사유화(민영화) 반대에 대해 대다수 NGO들이 지지를 표명했으며, 국민 다수의 여론도 사유화(민영화) 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섰다고 할 수 있다. }}으로 대중을 포섭할 수는 있었지만, 노동대중의 고용/임금/노동조건을 끊임없이 불안정화함으로서 가능한 것이기에 대중적 불만과 저항에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세계자본주의 위기심화와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금융개방, 자본시장의 완전개방, 주식시장 중심의 경제구조)은 한국경제의 대외 종속성을 심화(초민족적 금융자본, IMF/WTO 등 세계기구, 신용평가기관에 철저히 종속된)시켰으며, 그 투기적 성격과 부패성이 진승현/이용호 게이트와 DJ 세아들의 금융비리를 통해 대중적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결과로 개혁세력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급격히 철회되었고, 그 공백을 역설적이게도 한나라당과 정몽준이 잠식하는 퇴행적인 지형이 형성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개혁세력의 붕괴'는 단지 민주당의 실패가 아니라 민족/민중민주운동이 정치적 보편성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조건과 향후 세계자본주의 위기 하에서 한국사회의 전망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안없음에 대한 대중적 이데올로기가 보수/반동적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들 지배세력들이 현재 할 수 있는 일은 금융적 재편에 따른 대중의 궁핍화와 불만을 미봉적으로 관리하고, 위기를 지연하기 위한 구조조정을 지속하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세 하에서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주체적 조건은 어떠한가? 민족/민중민주운동의 객관적 현실은 앞서 밝혔듯이, '개혁세력의 붕괴'라는 한국자본주의의 대안없음/대중들의 보수화 경향에 대해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민족/민중민주운동이 지속적인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을 하고 있음에도 대중적으로 정치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다. 92년 YS정권 이후 민족민주운동과 민중민주운동은 모두 내적으로 노선적 분화와 정치적 투항, 쇠퇴의 과정을 걸었으며, 공동의 투쟁전선을 형성하지 못해온 것이 객관적 현실이다. 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21을 통한 공동의 대선투쟁이 실패한 뒤{{) 돌이켜 보건데, 97년 대선에 대한 핵심적인 평가지점은 IMF 사태에 대한 제대로된 투쟁방침을 제출하지 못한 민중운동진영의 무능이다. 현실의 상황에 대한 분석능력을 상실한 민중운동진영 무능을 뼈져리게 자기비판했더라면, 적어도 현실을 설명하거나 개조하지 못하는 구래의 운동관계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폐쇄적인 운동구조를 재생산하는 지금의 상황은 상당히 개선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중운동진영의 주요한 평가가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국민승리 21의 특정 정치노선에 대한 비판으로 제한된 것은 우리 운동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런 이유에서 2002년 공투본 무산과 대선투쟁 평가의 관점은 중요할 수 밖에 없다. }}, 'IMF 범국민운동본부'(1998년), 민중대회위원회(2000) , 전국민중연대(준)(2001)으로 이어지는 공동투쟁체 건설 흐름이 있었다. 하지만 전국민중연대(준)은 건설된지 2년이 다되도록 본조직 건설을 결의하지 못할 정도로 참가단체 상호간의 정치적 신뢰{{) 2001년 3월 전국민중연대(준)의 출범을 전후한 시기는 전국민중연대(준)의 향후 진로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우자동차 투쟁, '김대중 퇴진'을 둘러싼 논쟁, 김대중정권 퇴진 투쟁본부(최종적으로 '신자유주의구조조정분쇄·민중생존권 쟁취 투쟁본부'로 합의됨) 건설논의 및 활동의 과정에서 '6·15 공동선언에 대한 정세인식의 차이'까지 더해져 상호간의 불신을 확대/재생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과잉된 논점을 형성(물론, 분명한 논점의 차이가 존재)했다는 것은 민주노총의 단병호 위원장의 자진출두 및 민주노총의 사실상의 '김대중정권 퇴진투쟁'의 철회에 대해서 김대중정권 퇴진투쟁을 주장했던 어떤 세력도 제대로된 비판과 계획을 제출하지 못했다는 것으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가 형성되지 못한 채, 공동투쟁에 있어 대중적 지도력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IMF-DJ정권에 의한 민생파탄, 민주압살로 끊임없이 투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전국민중연대(준)을 통해 이러한 투쟁들이 수렴되고, 민족/민중민주운동의 단결과 역량강화로 귀결되기 보다는 수많은 사안별 투쟁/대책기구을 통해 개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재 민족/민중민주운동의 투쟁 슬로건을 보면, 신자유주의 반대투쟁과 반미·반제투쟁으로 수렴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공동의 투쟁과제를 공동의 투쟁조직을 통해 진행하지 못하는 것이 가슴아픈 현실이다. 이러한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상호불신과 분열이라는 조건에서 역설적이게도 하나의 수렴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정치세력이 '(합법)대중정당운동'을 자신의 정치적 전망과 계획으로 제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거를 통한 집권을 주장하는 이러한 (합법)대중정당 흐름의 심각한 문제는 세계자본주의 위기와 한국사회의 금융적 재편이 초래한 구조적 종속과 국가자율성의 심각한 제약과 현재의 지배세력 조차도 정책결정권을 심각히 박탈당하는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이러한 (합법)대중정당운동이 지배계급의 포섭/분할전략에 의한 노동대중의 분화와 대중운동의 분열이라는 객관적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이들은 대중운동의 자기방어적 실리주의를 넘어서는 현실의 투쟁계획과 조직전략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반제·반신자유주의라는 공동의 투쟁과제를 진정한 자신의 과제로 설정하지 못한 채, 정당운동을 이러한 반제·반신자유주의 전선구축을 위한 계기로 사고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중정당운동이 전선구축이라는 당면한 과제에 복무하지 못하는 한,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표방하던, 혹은 사민주의, 민족민주당으로 좀더 우경화된 집권전략을 설정하던 간에, 이들이 말하는 변혁이란 지배계급 앞에 무력한 공염불이거나, 민중에 대한 기만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자본주의 위기라는 조건에서 노동대중의 내적 분화(불균등화)가 가속화되는 현실, 즉 중소/영세사업장의 경우 최저임금에도 못미치는 임금수준, 고용불안, 노동3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합법)대중정당은 노동대중의 계급적 단결을 이루고, 노동자/ 농민/여성들의 동맹을 현실화시키는 문제를 회피하고는 부르주아 정치위기를 봉합해주는 역할에 머무르거나 서구 사민주의정당들처럼 '제3의 길'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신자유주의의 집행관이 될 운명에 처할 것이다. 2. 2002년 대선투쟁에서 공투본은 민족/민중민주운동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공투본 제안을 두고 많은 비판들이 있었다. 지난 7월 16일 10개단체 지도부가 합의한 '2002년 대선승리와 범진보진영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범국민추진기구'(이하 '범추')의 재판이고, 민주노동당의 지지부대로 전락할 것임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실제 범추의 제안대상을 보면, 정부와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노골적으로 지지했거나, 보조했던 세력뿐만 아니라 반노동자적인 '노동법 개악'에 합의했던 한국노총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도 범추의 제안자인 민주노동당의 범추 추진세력이 생각하는 향후 당의 성격이나 득표에만 목매고 있는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당내 대선후보 선출 후 범진보진영 경선에 참가한다'는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실질적 연대 가능성을 저버리는 민주노동당의 자기 중심적인 방침으로 인해 범추는 실질적으로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범추의 추진목적과 과정이 분명히 문제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나, 공투본 제안을 범추의 재판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정치방침 및 전술운용을 판단함에 있어 지나치게 운동세력의 역관계만을 고려하는 편향에서 비롯된다고 판단한다. 어차피 남한사회운동에서 어떠한 투쟁기구를 꾸리던 간에 전국민중연대(준)에 참여한 단체와 조직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동일한 단체와 조직이 참가하더라도 어떠한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모였는가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다르게 결과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개혁세력의 붕괴'라는 정세적 조건, 이는 이후 대안세력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고, 이 틈을 한나라당, 정몽준 등이 보수/퇴행적 논점으로 대중 이데올로기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민중민주운동은 '반제·반신자유주의 ' 전선구축이라는 목표 하에 하나의 대안세력으로 자신을 구성해낼 절대적인 필요성이 존재한다. 이것이 공투본/민중경선 제안의 첫 번째 이유이다. 민족민주운동이나 민중민주운동이나 실상 그 투쟁요구를 보면, 비정규직철폐, 사유화 반대, 교육/의료의 공공성 강화, 미국반대/전쟁반대 등 대부분 주장의 차별성을 찾기 어렵다. 즉, 선거라는 공간에서 대중들이 보기에는 별반 차별화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중들이 사회주의가 이미 실패한 상황에서 뜬금없이 사회주의를 외친다고 환호할 리 만무할 것이며, 따라서 이번 대선투쟁에서 '반제·반신자유주의'라는 쟁점을 통해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잊혀진 시민권을 확보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사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공투본의 후보이면 되는 것이지, 그 법적 양식이 민주노동당이냐 사회당이냐는 부차적일 수 밖에 없다. 다만, 민중경선이 중요하게 강조된 이유는, 첫째로 노동자, 농민, 민중들이 자신의 투쟁요구를 제출하고, 자신의 후보를 선출했을 때 공투본의 후보로서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의미이고, 둘째로 서로 다른 정치세력과 견해가 존재하기 때문에 각 정치세력이 공히 대중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할 기회를 가져야 하고 그 속에서 대중적인 의사결정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앞서 언급했던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상호불신과 분열이라는 현실에서 공투본은 전국민중연대(준)이 현재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민족/민중민주운동의 단결을 위한 유력한 공간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공투본/민중경선을 제안한 두 번째 이유이다. 공투본이 2003년 새롭게 집권한 반동적 권력에 맞서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 전선을 구축하는데, 유력한 발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많은 동지들이 지적하듯이 공투본이 건설된다고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노총이 공투본을 실질적인 투쟁기구로 사고하리라고 판단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투본/민중경선에 동의했던 노동해방 실천단의 경우, 적극적으로 11월, 12월 투쟁을 조직하는데 기여하려했다. 공투본은 하반기 예정된 노동자, 농민 투쟁의 폭발 가능성은 열려져 있는 것이기에 이러한 투쟁의 성과를 어디로 수렴시킬 것인가, 그를 통해 2003년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전선의 상징적 구심을 어디로부터 출발시킬 것인가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도 민중경선이 중요한 이유는 민중경선이 없는 공투본은 사실상 전국민중연대(준)의 노동특위를 중심으로 하반기 투쟁계획이 잡혀있는 조건에서 충분한 명분을 확보하기 힘든 현실적 조건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민족/민중민주운동 내에 형성되어 있는 민주노동당 지지/반대, 민주노동당(사민주의)/사회당(사회주의)이라는 지극히 왜곡된 논점을 바로잡을 필요성이 존재했다. 이것이 공투본/민중경선을 제안한 세 번째 이유이다. 다수 노동자들의 열악한 임금수준, 고용불안, 노동3권마저도 박탈당한 현실, 한칠레자유무역협정이나 WTO 쌀개방 계획에서 보이듯이 농업포기로 내몰리는 농민들의 현실에서, 대다수는 정치적 불신으로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정규직 혹은 상층 노동자들, 그리고 일부 농민들의 경우는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에 투표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당장 삶의 고통으로 인해 민주노동당에 조차 관심이 없는데, 여기에다 사민주의는 개량이고 사회주의 대통령 내야한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가. 이러한 현실에서 공투본/민중경선은 자신의 후보를 선출하고, 자신의 요구를 가지고 공동투쟁하는 과정을 통해 정치적 불신을 깨고, 보수 정치로 흡수되는 것을 막는데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또한 민중경선의 과정이 대중에게 민주노동당을 찍을 건지 말건지, 민주노동당/사회당 어느 당을 찍어야할지 왜곡된 선택을 강요하는 운동지형을 바꾸는데,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민중경선의 과정이 대중을 (합법)대중정당에 대한 수동적인 지지자/유권자로만 사고하는 현실 운동경향에 맞서 노동자, 민중을 정치의 주체로 세워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것이라 판단했다. 또한 이러한 대중에게 열린 공간을 통해, 현실 민생파탄의 원인과 지배세력의 무능에 대해서 비판하고, 노동자, 민중의 세상을 열기 위한 각 정치세력들의 입장이 논쟁되는 공간을 열고자 했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 문제도, 민주노동당의 개량적인 입장도 이러한 민중경선의 과정에서 대중적으로 비판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제안 취지에도 불구하고, 9월 17일 제안되고 10월 21일 발족할 계획이었던 공투본은 사실 "공동투쟁-민중경선"이라는 원칙을 제외하고 나면 빈 껍데기와 같은 조직인 것이 사실이다. 2001년 상설공투체로 발족한 전국민중연대(준) 내에서 본조직 건설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것이 객관적인 민족/민중민주운동의 현실이 아니던가?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하반기 투쟁의 대강은 전국민중연대(준) 노동특위를 중심으로 민주노총, 전농, 전빈련에 의해 예정되어 있었다. 공투본은 몇몇 단체가 모여, 존재하지 않는 투쟁을 일구는 것이 아닌 바에야 현재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조건상 정치적 구심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전국민중연대(준)과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전선의 상징적 구심으로 자리잡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물론, 이를 위해 민중경선은 비껴갈 수 없는 핵심적 요소였다고 할 수 있다. 3/ "후보의 등록형식"이라는 쟁점은 공투본의 제안취지를 왜곡하는 쟁점이다. 이러한 공투본-민중경선의 의의에도 불구하고, 6차 예비모임에서 노동자의 힘이 '후보의 법적 등록형식'을 공투본 건설의 전제조건으로 거듭 주장하면서 공투본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우리가 극복하려고 했던 왜곡된 운동구도를 더욱 악화된 형태로 고착화-재생산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물론, 5차 모임에 이르기까지 공투본 예비모임에 참가했던 민주노동당, 민주노총을 비롯한 나머지 단체들이 실질적으로 공투본 성사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에 대해서는 모두가 원칙적인 동의와 참가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심지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초기 사회당과의 후보단일화에 모든 관심이 있었고, 사회당의 불참 이후에도 실질적인 공동투쟁과 민중경선을 추진하는 것보다 득표전략에 손해될 것 없다는 입장으로 일관했다는 점 또한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사회진보연대와 노동자의 힘이 노동해방 실천단의 논의를 거쳐 제출한 공동투쟁계획은 형식적인 검토만 이루어졌을 뿐이며, 구체적인 민중경선의 방안은 공투본 예비모임 기획소위에서 논의조차 진행하지 않은 것이 객관적 현실이다. 따라서, 아무런 계획도 없이, 혹은 당세의 확장을 위해서 전농의 참여만을 기다리는 7차 예비모임 참가단체들 또한 공투본 무산에 대한 책임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민주노총에서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지지'라는 기존의 정치방침이 대선공투본 경선 시 조합원들의 자유투표와 선거운동의 자유를 제약해서는 안되며, 대선공투본 후보로 민중진영의 정치적 단결이 이루어질 경우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지지'라는 기존의 방침을 대선공투본(후보)에 대한 지지로 해석한다"는 입장을 제시했고, 민주노동당 또한 기존의 경선을 통해 선출된 후보가 결정한다는 패권적인 입장을 철회하고, "대선공투본 후보로 추대하며, 후보의 법적 등록 방식은 등록과 관련한 공투본 내 대중적 논의와 후보선출 후 공투본 내 민주적 의사수렴 과정을 거쳐 결정한다"는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에 동의를 표명한 상황에서 노동자의 힘의 태도는 대중적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한다. 더구나 노동자의 힘의 이러한 행보는 공투본-민중경선에 동의하는 민중민주운동이 함께 건설했던 노동해방 대선실천단 활동의 전제였던, 중요한 정치방침의 경우 각 조직의 결정에 우선하여 노동해방 실천단 총회{{) 이에 대한 평가는 10월 26일 개최된 노동해방 대선실천단 총회에 제출된 노동해방 대선실천단 이현대, 임필수, 이상훈, 박준도 4인 명의로 제출된 "공투본 무산에 대한 평가(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평가(안)에서는 평가서와 함께 '1)후보의 법적 등록형식 문제는 공투본 결성의 전제조건일 수 없었다 2)공투본 후보 및 민중경선 문제 등 변화된 조건에 따른 주요정치방침은 노동해방 대선실천단 총회에서 결정될 사안이었음을 확인하고, 6차 공투본 예비모임 과정에서 노동자의힘에 의해 이 총회의 권한이 침해되었음을 확인한다'를 평가안으로 채택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2)에 대해서는 총회 참석자들이 대체로 공감을 표시하였으나, 1)과 관련하여 이견이 존재했고, 표결처리 요구를 하였으나 표결처리 자체를 반대하는 의견이 있어 표결을 진행하지 못했다. 노동해방 대선실천단은 총회를 통해 정치적 책임을 통감하고 해산을 결정했다. 정확히는 사회자가 노동해방 실천단 해산에 대해 반대의사를 물었으나, 반대한 사람이 없었다. }}에서 결정한다는 대중적 약속을 사실상 파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후보의 법적 등록형식"이 중심적인 쟁점이 된 것은 왜 문제인가? 무엇보다도, 그것이 일순간 모든 쟁점을 민주노동당 지지/반대, 민주노총 정치방침안 지지/반대라는 틀로 폭력적으로 정리시키면서, 대선방침의 본래 취지였던 기존의 민족/민중민주운동의 분열과 배타적 대립을 극복하고, '반제·반신자유주의'라는 정치적 과제를 중심으로 한 운동지형의 재구축의 발판을 삼고자 했던 공투본의 제안 의도 자체를 왜곡했다는 데 있다. 애초 공투본을 제기한 전제가 이러한 구도를 넘어서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구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공투본을 출범할 수 없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노동자의 힘 중앙집행위(2002/10/30) 명의로 제출된 '공투본 제안 철회와 노동해방 대선실천단 해산에 대한 노동자의 힘의 입장'을 보면, 실제로 노동자의 힘이 공투본을 제안한 취지 자체를 무색하게 하고, 노동해방 대선실천단의 공투본 제안 취지를 왜곡하고 있다. 장문의 글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힘 주장의 요지는, '민주노동당의 선거주의와 민주노총 정치방침 밀월관계가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왜곡하고, 현장 노동자들을 선거주의 틀안에 가두고 있다. 따라서, 노동해방 실천단을 통해서 현장을 조직하고, 공투본의 상층협상을 통해 압박해서 민주노총 정치방침을 바꾸고, 민주노총-민주노동당의 밀월관계를 해체하려 했다. 그러나, 사회당의 불참으로 큰 장애가 발생했고, 노동해방 실천단을 통한 현장조직화도 여의치 않아 실패했다. 따라서 노동자의 힘이 애초 주요하게 판단했던 민주노동당의 탈계급적이고 계급연합적인 성격과 선거주의를 문제삼으며 퇴각하기로 하였다. 공투본을 제안하고 책임지지 못한 것은 노동자의 힘의 책임임을 통감하나, 결국 계급운동진영(좌파)의 실력이 부족한 탓이다'로 압축할 수 있겠다. 이 입장을 보면서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상층협상과 압박을 통해 이미 운동 내부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노동운동의 자기방어적 실리주의, 이를 기반으로하는 민주노동당의 선거주의를 바꿀 수 있다는 노동자의 힘의 발상이고, 이것이 공투본 제안의 핵심적인 요소임을 스스로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의 힘이 입장을 통해 밝히고 있듯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밀월관계는 선거주의를 넘어서는 노동대중의 계급적 단결과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전선의 강화 속에서만 극복될 수 있다. 불과 1개월여의 공투본 건설과정에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는 것인데, 참으로 억지가 아닐 수 없다. 또 하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민주노총의 정치방침과 관련한 노동자의 힘의 태도이다. 판단컨데,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이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 노동운동의 현실, 즉 노동계급 내부의 불균등화와 노동운동의 자기방어적 실리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실질적인 정치방침을 제출하지 못하고, 그것을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로 대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 지지방침을 정치적 자유를 제약하는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목표로 하는 노동자의 힘을 민주노동당/사회당에 대당하는 정당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잔존하기 때문이라 판단한다. 관건적인 것은 민주노총 정치방침이 아니라 노조운동-정당운동을 개입/개조할 수 있는 주체를 형성하는 운동계획의 문제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노동자의 힘은 공투본을 퇴각한 핵심적인 이유로 대부분이 노동조합 혹은 지역본부의 활동가인 조직원들이 실질적으로 공투본/노동해방 대선실천단 계획을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조직화하지 않음으로 인해, 현장이 조직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노동자의 힘이 애초에 공투본을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전선의 구축을 위한 발판이자 자기혁신의 계기로 사고하였다면, 공투본 제안의 취지자체가 우리의 힘이 미약했기에 제안된 것이고, 공투본-민중경선을 통해서 우리의 힘을 키우자는 문제의식이었던 점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더라면, 힘이 없어서 공투본을 깨야 했다는 식의 평가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초기부터 노동자의 힘 내부에 존재했던 '대중투쟁돌파론'을 내세운 현장과 지역의 동지들이 실질적인 투쟁계획도 없이,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편승할 뿐임을 직시하고 있었다면, 더디더라도 일부지역에서 지역별 공동투쟁 나아가 공동의 선거투쟁, 노동해방 실천단 구성의 의지들이 형성되고 있음을 주목했더라면 그러한 식의 결정은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따라서 현장 세력이 이번 노동해방 대선실천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우리를 '비관'적으로 만들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훨씬 더 미래를 '낙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왜냐 하면 이것은 현재 민주노동당-민주노총의 밀월관계가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부대에 의해 얼마나 강하게 '계급적'으로 부정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라는 노동자의힘의 평가는 노동해방 실천단 건설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당황스럽게 한다. 노동해방 대선실천단은 현장의 정치적 무관심을 극복하고, 구래의 '대중투쟁돌파론'이라는 대중의 탈정치를 넘어서서, 공투본-민중경선이라는 계기를 통해 노동자, 민중을 실질적인 정치적 주체로 세우고,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전선 구축의 계기를 확보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건설된 노동해방 실천단에 현장세력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을 비관할 이유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견해로 판단컨데, 애초에 노동해방 대선실천단이건 공투본이건 제대로 할 생각이 있었는지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다. 4. 2003년 '반제·반신자유주의' 전선구축은 미룰 수 없는 과제이다. 공투본-민중경선은 사실상 무산되었으나, 공투본의 제안을 통해 밝혔던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전선의 구축이라는 과제는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있다. 공투본 무산의 책임을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으로 제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진보연대 또한 6차 예비모임에서 보인 정치적 태도에 대해 냉철하게 비판받아야 한다. 이에 책임지는 우리의 모습은 노동해방 대선실천단의 해소였다. 우리가 노동해방 대선실천단의 해소를 주장했던 핵심적인 이유는, 이미 '후보의 등록형식'이 쟁점이 되어 공투본이 무산된 상황에서, 공투본을 통해 넘어서고자 했던 민주노동당 반대, 민주노총 정치방침 반대라는 정체성으로 노동해방 실천단이 상징화되는 것이 공투본-민중경선-노동해방 실천단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했던 바를 왜곡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공투본-민중경선-노동해방 실천단의 취지는 민주노동당 반대, 민주노총 정치방침 변경으로 축소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에, 민족/민중민주운동의 반목과 불신을 넘어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 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던 애초의 취지를 다시금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노동해방 실천단의 이름으로 (노동)대중들을 헌신적으로 조직하고 있는 지역, 학생 동지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고, 많은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가 노동해방 실천단 총회에서 실천단의 해산을 제안할 수 밖에 없었던 진실은 여기에 있다. 공투본의 무산으로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상호간의 불신과 분열을 넘어서고자 했던 유력한 계기가 무산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반기 전국민중연대(준)의 민중연대특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30만 농민항쟁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함께 진행하면서, 2003년 반동권력의 집권 이후를 대비해야 한다. 현재 전국민중연대(준)의 내적 한계를 넘어 민족/민중민주운동이 이번 경험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통해 자기혁신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위기와 지배계급의 무능에 의해 고통받는 노동자, 민중들의 해방된 세상을 여는 것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적 기능은 노동대중(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분파)의 계급적 통일을 저지하는 기능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현존하는 국가 및 역사적 형태에 대한 투쟁을 통해서만, 계급적 통일을 가로막는 장애들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실천을 통해서만 노동대중(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분파)의 계급적 통일을 이루고, 계급동맹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0년여의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지속적인 분화와 쇠퇴의 과정은 변화된 현실조건을 정확히 분석하지 못하는 무능의 과정이었고, 대중적 운동과 논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래의 운동관계로부터 배타적인 자신의 정체성(좌파, 사회주의...)을 선언하는 왜곡된 운동지형을 낳고 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지배계급의 무능이라는 조건에서 지배세력의 포섭/분할 전략에 맞서 노동대중의 계급적 단결을 이루고,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 전선을 구축하여 민족/민중민주운동이 새롭게 정치적 보편성을 획득할 것인가 아니면, 각 정치세력의 자폐적인 폐쇄회로 속에서 갇혀 민족/민중민주운동 공도동망(共倒同亡)의 길을 갈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정세적 과제를 보지 못한 채 운동진영 내의 세력관계가 절대시 되고, 배타적인 운동관계를 형성할 때, 미소짓는 것은 지배계급이고 노동자, 민중의 계급적 단결은 그만큼 지체될 것이다. '반제·반신자유주의'라는 현실의 공동 투쟁과제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현실인식과 운동노선을 둘러싼 대중적인 논쟁을 새롭게 형성하는 것만이 민족/민중민주운동에게 미래를 보증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존재하는 상설공투체로서 전국민중연대(준)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명확히 내려야 한다. 반제·반신자유주의 민중연대전선 구축의 조직적 거점으로 전국민중연대(준)가 기능할 수 있는지, 혹은 그러하기 위해서 어떠한 조건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모든 정치세력이 진지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전국민중연대(준)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동지들 또한 공히 적용되는 것이다. 참가해서 함께하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태도가 아니라 실제로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기존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지 않던 세력들 또한 전국민중연대(준)을 통해 공동의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제기할 필요가 있고, 전국민중연대(준)이 공동의 투쟁 거점으로 기능할 수 없다면, 그 근거와 책임있는 제안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번 대선에 대한 평가는 진보정당의 득표율에 대한 평가로 한계지어질 수 없다. 짧게는 공투본의 무산에 대한 공동의 책임있는 평가가 필요하고, 길게는 지난 10년여의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가 있어야 될 것이다. 새로운 출발은 언제나 과거의 연장이 아니라 역사적 단절의 과정이 필요하다. 공투본의 무산이라는 2002년의 경험이 민족/민중민주운동의 자기비판과 혁신, 그리고 단결과 연대의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2003년 반동권력에 맞선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대한 책임있는 평가의 시기로 2002년 하반기가 위치 지어져야 한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