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투쟁전략 수립의 논점 정치위기 비판의 관점 확보와 전선복구 : 대선 투쟁전략 수립의 논점 2002년 대선투쟁은 누구나 인정하듯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5년을 심판하고 경제위기를 비판하는 의의를 갖는다. 또한 IMF-DJ 체제의 성립 이래 계속된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연장이기도 하다. 이는 현재 대선투쟁을 규정하는 엄중한 제약을 사고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왜냐하면 지난 5년 간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은 곧 거듭되는 노동패배의 역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남한자본주의의 (종속적) 발전모델 자체의 파산이라는, 지배세력의 유례없이 심원한 실패와 위기가 동시에 피지배계급의 패배를 동반한다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배계급의 위기를 지나치게 크게 본 나머지 적을 가벼이 여긴 '경적(輕敵)의 우(愚)'인가? 아니면 어느 때보다 광범위하고 폭발적이었던 기층대중의 투쟁을 좀더 좌익적이고 전투적으로 조직하지 못한 투쟁 지도부의 책임인가? 문제의 원인을 경적(輕敵)의 잘못에서 찾는 이들은 자연히 좀더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명분 아래 현실적인 개량의 추구와 사민주의적 지향을 노골화하고 있으며, 그 반대편엔 반개량주의·반사민주의에 입각한 카운터 대안으로서의 좌파결집을 사고하는 이들이 서 있다. 하지만 이같은 고색창연한 좌우대립에도 불구하고(혹은 바로 그 때문에) 양자 모두 지배계급의 실패가 자동적으로 피지배계급의 기회로 이어질 것이라는 얼마간 기계론적인 낙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이다. 이 때문에 위기 자체와 대중이데올로기에 대한 구체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은 소홀하기 십상이고, 기껏해야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뿐이다. 냉정히 볼 때 사태는 우파의 사민주의적 후퇴마저 일정한 성과를 장담하기 어려울만큼 비관적이고, 좌파의 결집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복잡성을 띠고 있다. 하지만 민중운동진영의 이번 2002년 대선 투쟁전략 역시 이같은 거울놀이를 되풀이하면서, 사민주의적 정당(후보)이냐 사회주의 정당(후보)이냐 혹은 선거투쟁인가 대중투쟁인가 따위의 대립을 증식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2002년 대선을 정치위기 비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번 대선투쟁을 통해 보수정치에 대당(couple)하는 진보정치의 세력화가 아닌 전선복구와 새로운 민중의 연합과 연대를 이뤄내야 함을 주장할 것이다. 정치위기 비판의 관점을 세울 것에 대하여 자본주의는 민족국가형태와 정치/경제(국가/시민사회)의 분리라는 주요한 두 가지 계기 없이 자신의 신민(臣民)을 재생산할 수 없다. 민족국가형태가 소유없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민족(국가)의 틀로 통합시키는 계기라면, 정치와 경제의 분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와 같은 계기들과 함께 작동함으로써 민족국가(지배정치)로 통합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를 봉쇄한다. 전쟁과 경제위기는 이같은 지배정치 재생산 매커니즘에 내재된 결정적 결함이다. 특히 현재와 같은 구조적 경제위기(공황) 시기에 (지배)정치는 착취체제의 내일을 책임질 민족적 사회적 통합을 더 이상 보장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게 된다. IMF경제공황으로부터 금융세계화로 편입되기 시작한 한국정치는 이같은 근본적인 위기 국면에 처해 있는 전형적 사례라 할 것이다. 지배계급은 이제껏 남한 자본주의를 지탱해 온 종속적인 반공-발전모델과 신식민지 파시즘의 붕괴 이후 달리 새로운 발전비젼을 제시하지 못한 채, 경제적 통제권과 자율성을 침식당한 상태로 금융세계화에 따른 미봉적인 위기관리책에만 의존하고 있다. 대중은 이전까지의 정치 불신에 더하여, 금융세계화로의 통합과정에서 되려 심화된 민생파탄, 민주압살과 끊이지 않는 부정부패의 결과에 분노하면서, 정치 자체의 혐오에까지 이르게 된다. 조금이라도 진보적으로 채색된 안경을 쓰고 본다면, 너무나 명백하고 거대한 계급투쟁전선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배계급의 통치불가능성, 국제관계의 불안정성, 그 자신의 포퓰리즘(인민주의)의 모순들에 봉착하는 경향 등... 하지만, 이같은 위기는 동시에 노동자운동의 제도적 형태 즉 조직화한 계급투쟁의 해체와 탈(脫)정당화(正當化)라는 부정적 성공을 내포한다. 경제위기는 노동자계급의 재구성이나 계급투쟁전선의 복구로 저절로 이어지기는커녕, 지리적 장벽뿐 아니라 인종적, 세대적, 성적 장벽들로써 프롤레타리아화의 차별적 측면을 더욱 근원적으로 분리하는 것으로 귀착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배세력의 패배가 곧 피지배세력의 승리라는 거울쌍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는 우리나라에 앞서 군사독재정권에 의한 종속적 발전전략의 파탄과 민간화를 경험한 뒤에 급작스러운 세계경제 위기에 빠져들어 파괴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겪었던 남미의 대다수 나라들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는 바이다. 이들 나라의 구조조정을 책임졌던 집권세력들은 하나같이 반복되는 경제위기와 부패로 인해 몰락했고, 새로운 집권세력들 역시 권좌에 앉는 그날로 전임자가 걸었던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그렇지만 이같은 지배세력들의 반복된 교체와 몰락의 전과정 속에서 노동자 민중운동진영의 패배 또한 지속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은 몰락한 DJ정권의 무덤 위에서 춤추고 있는 다음 무덤의 주인공인 이회창과 함께 DJ 몰락의 과실을 다툴 때가 아니다. 우리가 맞서야 할 현실이 지배정치의 통치불가능으로부터 파생되는 사회적 해체 경향인 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역시 지배정치 위기의 반사이득을 어떻게 얼마만큼 추수할 것이냐 와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IMF 위기 이후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대중들은 국가나 사회로부터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음을 스스로 꺠닫고 다양한 직접행동에 나섰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한편으로는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화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 이상의 해체로 인해 교통과 연대의 가능성이 축소된 상황에서 더욱 심화되는 삶의 위기를 겪음으로써 심한 불안감과 공포에 휩싸인 정념적이고 수동적인 상태로 빠져들기도 한다. 이렇게 됐을 때 대중은 과학적 인식에 기반한 집단적 문제해결 방식보다는 실리적인 생존게임에 몰두하거나 무너진 과거의 어떤 이상(중산층적 삶, 혹은 발전주의적 대망)에 집착하게 된다. 대중이 당면한 문제에 대한 적합한 인식과 집단적인 문제해결방식을 찾지 못해 공통의 '집단적 미래'를 상실해 가는 상황. 이같은 위험이야말로 이번 대선투쟁을 통해 우리가 가장 시급히 타개해 나가야 할 현실이다. 정치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은 정확히 이같은 위험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가 마주치게 될 최대의 난관은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일 것이다. 대중은 더 이상 정치와 정치인을 믿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는 곧 지배정치이므로, 이는 지배정치의 위기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배정치의 위기는 그것이 왜곡된 형태로나마 포섭하려 했던 정치적 보편성의 해체를 항상 동반하고, 이는 정치 일반에 대한 냉소로 이어진다. 지배정치의 위기가 진보정치의 해방으로 (약간의 굴곡은 있더라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라는 진보주의적인 낙관은 냉소주의가 모든 정치의 무덤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과소평가한다. "나는 당신이 우리의 삶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지배정치의 무능과 부패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분노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정치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신도 '어쨌거나' 정치인이 아닌가?(따라서 당신도 환멸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듯 냉소주의에 빠진 대중은 지배정치의 헛된 약속이나 공염불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진보진영의 어떤 폭로나 선동에도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후자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기고, 자신에게 현실적인 실리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보다 타락했지만 정확히 그 이유 때문에 더 '유능한' 정치인을 선호한다. 진보정치의 가장 대중적인 버젼이라고 할 수 있는 개혁적 국민정당의 386들이 표방하는 '감동과 희망의 정치'란 이 높은 문턱에 내걸린 진정한 넌센스일 것이다. 이러한 냉소주의는 몇몇 유별한 개인들의 품성 따위가 아니라 대중들의 객관적인 삶의 조건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상대하기 곤란할 뿐만 아니라 아주 일반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운동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되고 있는 '실리주의'는 지도부의 타락으로 한정할 수 없는 대중적 냉소주의와 연관되어 있다(가장 완화된 형태의 실리주의-냉소주의는 "나는 당신의 말이 모두 옳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나와 다른 존재로 느껴지고, 따라서 나는 당신과 함께 할 수 없다."의 논리를 취한다). 즉 이것이 바로 대중의 상태이고, 우리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매우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고, 우리 역시 완전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여기에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원칙, 즉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비대칭성'만을 다룰 것이다. 애초에 프롤레타리아 정치란 지배정치와 같은 형식에 다른 내용을 지닌 무엇이 아니며, 그렇다고 그것과 전혀 별개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지배정치에 의해 억압되어 그 안에 '비정치'의 영역으로 폐쇄되어 있으나, '지배정치 비판'과 결합한 대중정치라는 형상으로 지배정치를 내·외부로부터 파열시키면서 항상 다시 회귀하는 대중의 '봉기적 보편성'이다. 이는 정치에 대한 혐오 그 자체에 편승하는 반(反)정치나 대중의 탈정치적 이탈에 영합하는 입장과 엄격히 구별되면서도, 지배정치의 형상을 전화시키지 못하고 그것에 포섭되거나 (특히 현 정세에서) 지배정치의 위기 속에서 그것과 공명·공멸하는 진보정치 류의 입장과도 무한히 멀다. 이때 관건이 되는 것은 비록 허구적으로나마 봉기적 보편성을 포섭해 냈던 지배정치가 더 이상 그것을 감당할 수 없거나 심지어 '억압할 수 없는 최저한도', 예컨대 생존이나 민주주의, 평등-자유의 원초적 부정으로까지 내몰고 있는 구체적인 타락 지점을 비판·가격함으로써, 기존의 지배정치로부터 봉기적 보편성을 해방시키고 그에 근거하여 운동을 재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을 근대적인 민족국가형태를 매개로 포섭하여 형성된 민족적 시민('국민')이라는 주체성, 그리고 그에 기반하여 조직된 국가 및 사회가 지배정치의 통치가능성을 넘어 해체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대중을 압살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판과 투쟁을 조직하여 민중의 민주주의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경험과도 부합한다. 돌이켜 보면 한국정치는 발전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종속적 발전독재정권이 장악한 억압적 국가기구의 무력통치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이로 인해 (대중)정치는 줄곳 과소결정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역으로 (정권의 비정통성과 폭압성, 국가=정치동일성으로 대표되는) 이 '정치의 과소결정요인들'은 경제위기로 인한 대중의 궁핍화 및 반독재민주화 전선이라는 보편적 상징과 결합할 때에는 노동자 민중의 '역설적인 정치'로서의 '대중정치'를 가능케 하는 '과잉결정요인들'로 작동하였다. 하지만 현재는 군사정권이 민간정권으로 바뀌고 민주노조와 진보정당이 건설되면서 반독재민주화 전선이 소멸하고, IMF 경제위기라는 충격적 사건으로 인해 삶의 문제를 얼마간 주어진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한국정치는 다시 과소결정 상태로 회귀하였다. 또한 개발독재의 경우 '국가'가 적어도 상상적으로는 모든 책임의 원인으로 간주되었던 것과 달리, 신자유주의로 이행하면서 중립적이고 익명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장'의 원리가 부각되면서 책임의 주체가 상대적으로 불분명해지고 사회의 통합력 역시 약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현 시기 우리 운동에게 진정으로 요구되는 것은 이미 허구적 신화가 되어 버린 기존 운동의 (정치적) 성과들의 이합집산으로 정치적 계획을 대체함으로써 반복되어 온 (정세에 대한) 관성적인 정치적 무기력을 걷어내는 것, 지배정치의 위기로 인해 형성된 새로운 국면에 맞게 '운동성' 자체를 새롭게 구성하고 그 조건으로 실제적인 전선 형성을 이루는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의 '나쁜 방향'과 대결하고자 하는 강인한 사고 및 전략과 이론 없는 대중운동의 미확정적인 계기들로부터의 재출발이야말로 우리의 임무인 것이다. 의회정치의 전화와 대중정치 오늘날 구조공황의 지속에 따른 재정상태 악화와 구조조정의 압력으로 인한 국가 예산구조의 방향 재편 및 국가개입의 변화는 유권자의 물질적 요구에 대한 대응능력과 함께 의회의 정당성을 약화시킴으로써 지배(의회)정치의 위기를 재생산해낸다. 국가는 단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위기관리와 갈등관리에 주력하게 되고, 정당들은 대체로 뚜렷한 이념적 지향보다는 모든 쟁점들에 대해 미봉책들에 의존하게된다. 신자유주의 집권자들은 보다 효과적이고 안정적이며 빠른 개혁을 위해서 민주주의는 걸림돌일 뿐이라고 여기며, 제국과 종속국 내외의 소수 엘리트집단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기껏해야 대중조작적 기능만을 수행할 뿐이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과정은 국가 폭력{{) 신자유주의 시대 국가폭력은 1> (주로 배제된 지역에서의) 세계도처에서 끊이지 않는 국지전(도시전)적인 전쟁폭력, 2> 정보적 통제/폭력, 3> 구조조정 과정에서 자행되는 직접적으로 사익화된 공권력의(구사대, 용역깡패화된) 폭력의 세가지 층위에서 날로 증대하고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개혁의 과정에서 점점 더 증가하는 국가의 경찰적인(혹은 군사적인) 폭력수단에의 의존은 시민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정권의 취약성, 즉 사회세력 중재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지표이다. }}의 증대와 민주주의 후퇴의 과정인 것이다. 또한 작은정부라는 슬로건에도 불구하고 행정부는 비대화되며, 구조조정의 신속하고 강력한 추진을 위한 각종의 행정권이 남용되는 가운데, 의회는 점점 정치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져간다. 의회는 더 이상 정치의 공간이기보다는 절차적인 입법공간으로서의 의미만을 가진다. '국민주권'이라는 의회정치의 보편적 가치는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더욱이 한국사회에서의 의회정치는 군사독재정권 말기와 문민정권 출범 직후에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던 과거 청산기를 거쳐 단 한번도 온전하게 실현됨 없이,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돌입함으로써 급속도의 위기와 전화과정에 돌입했다. 이는 한국 자본주의 발전의 종속적이고 반동적인 특성에 근본적으로 기인하며 양대 문민정권의 취약한 정치적 토대로 드러났다. 양김정권은 공히 민간 개혁정부를 표방하면서(개혁/수구간의 갈등 위에 존재한다고 믿어진) '상대적 진보성'에 의존한 국민적 정당성을 명분으로 하여 권력기반을 구축하였지만, 이들의 역사적 기반인 개혁/수구간의 갈등은 이미 국가권력 내적인 타협을 통하여 왜곡된 지역갈등으로만 존재할 뿐이였다. YS와 DJ라는 대중적 지도자 1인중심의 포퓰리즘적(또한 탈의회적인) 정치행태만이 근거없는 이들의 국민적 정당성과 상대적 진보성을 유지시켜주는 대안이였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양 문민개혁정권의 성립은 이들이 극복하고자했던 낡은 군사독재의 유물인 JP의 캐스팅보드를 유지시켜 주었다(현재 JP는 토사구팽 당한 처지이지만). 강한 지역적 한계와 자민련과의 불안정한 연합에 의해 출범한 김대중 정권의 출범과 어느 때보다도 신속하고 강력한 행정부의 대응을 필요로 했던 IMF외환위기 사태는 의회정치의 위기와 전화를 결정적으로 강제한 계기이다. 즉 항상적인 위기와 구조조정의 반복적 재연, 개혁이데올로기로 특징지어지는 금융세계화의 정치·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독재정권과 비민주적인 (민족)국가체제를 시장의 불투명성을 초래하는 불안요인으로 인식함으로써,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적 안정을 가져올 형식적 민주주의와 시장투명성의 확보를 위한 반부패와 경제적 자유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는 민중의 민주주의적 권리확보와 역사적 진보와는 전혀 무관한 조치들이며, 민족국가적 자율성의 제약과 금융세계화로의 편입만을 의미할 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한국과 같은 반주변부 국가들에 있어 세계적 차원에서 일반화된 케이스이며, 그같은 여파는 의미있는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대부분이 의회 외적인 투쟁방식을 취할 수 밖에 없도록 강제한다. 이는 많은 좌파 (의회)정당들이 실용주의화되는 과정에서 각각의 대중운동들내에서의 실질적인 지도력과 중요성을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에도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왔던 남미와 유럽의 (의회주의적) 좌파들은 신자유주의 재편과정에서 대부분 이미 사회민주주의에서 사회자유주의로 변질됐다. 경제위기로 인해 각종의 계급정치적 사안들은 넘쳐나지만, 이미 의회와 국가의 실패가 명확해진 상황에서 의회 민주주의의 발달을 자신의 생존조건으로 하는 사민주의는 정작 자신의 이념적 지향인 계급정치와 자신의 존재조건 사이의 매울 수 없는 간극으로 인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생존을 위한 자유주의적인 변모의 길을 택했고, 그러한 실용주의적 변신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상당한 현실적인 이득을 얻어냈다. 그러나 (좌파의 생존을 위해) '유권자'로 동원된 대중은 지극히 수동화된 상태로, 대부분의 경우 사회의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낼 에너지를 가지고 선거에 참여하기보다는 과거로부터 가져온 헌신성이나 연고관계 때문에 투표했다. 사회적 대결은 TV토론으로 대체되었으며, 중도좌파 정당은 자신의 정체성, 즉 다수 대중의 기본적 생활조건에 대한 불만의 판단기준이라는 자신의 이념적 정치적 근거를 상실하였다. 그 가운데 비정치적인 전문성과 법률적-대안적 진보주의를 내세운 관리주의{{) 여기서 관리주의란 "코포라티즘(corporatism)"이라는 용어에 기본적인 영감을 둔 개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은 이른바 법인 자본주의(corporate capitalism) 혹은 관리 자본주의(managerial capitalism)에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특히 DJ정권은 이 양자를 수렴시키면서, 노사정으로 대표되는 코포라티즘을 하나의 대안적 정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DJ의 코포라티즘적인 대안정책인 노사정은 경제위기상황을 관리하고자하는 한계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본래의 코포라티즘에 미달하는 허구성을 가지고 이것이 신자유주의 정책개혁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심한 불안정성을 가진다. 또한 관리주의는 "자유주의"의 변종의 하나이다. 관리주의는 갈등의 실존을 부정하지 않으며, 또 그것의 해결을 위해 보수적 회귀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관리주의는 갈등의 실용적 해결을 주요한 활동근거로 삼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지속적인 법률적 개정이나 전문적 지식의 대중화 등을 활용한다. 그 결과 법률주의나 전문가주의는 NGO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그것의 구조적 특성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그것이 계급투쟁의 관리와 동시에 대중의 지성, 혹은 대중의 지적 권리를 법률이나 전문성 등으로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 NGO의 국가정치 보조적 기능이 강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양 문민정권의 등장 이후 전선의 붕괴와 노동조합, 진보정당으로 수렴되어 버린 우리 운동, 역시 매 사안별로 개별화되고, 계급투쟁은 이론, 사상과 분리된 실용적인 정책대결로, 정치투쟁은 위기에 빠진 의회정치의 기반을 재확보하기 위한 '정치개혁' 투쟁으로 변형되는 경험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사태는 IMF 경제위기 이후 더욱 고착화되어갔고, 대중과 분리된 운동은 지배정치의 공간에서 대중의 실리적 경향에 영합하는 실용주의적 변질을 겪는다. 운동의 외형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운동은 밑으로부터 붕괴되고 해체되고 있으며, 이 전과정을 아우르는 정치세력화라는 전략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급진적인 대중운동의 쇠퇴라는 특수한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기인한다. 즉, 진보정당-노조의 쌍으로 결말지어진 지난 10년간의 정치세력화 프로젝트는 대중운동의 쇠퇴에 대한 대응 혹은 그것의 결과로 제기되어 왔고 또 현재도 그러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정치정당의 위기{{) 노동계급만의 이익보다는 다양한 사회세력의 이익을 골고루 대변하려는 전취정당(catch-all party)의 경향을 강화시켰고, 특정 이념의 실현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선거에서의 승리와 그에 입각한 정권획득 자체를 목표로 삼는 선거전문 수권정당으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필연적으로 정당조직에 대한 노동계급의 직접적 참여를 감소시켰고, 또 노동조합과 정당과의 관계 역시 점점 긴밀성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한편 매스미디어의 발달은 거대 정당조직에 의한 정치적지지 동원화의 필요성을 현저히 감소시킴으로써 대중정당 조직의 쇠퇴를 또한 촉진시켰다. 당원의 감소는 당 재정의 당비 의존도를 서서히 줄여 갔으며, 서구 대중정당들은 그 대안으로 정당에 대한 국고보조금을 확대시켜 왔다. 그 결과 오늘날 서구 정당들은 시민사회와의 연계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약화된 반면 국가에 대한 정당활동의 의존도는 보다 강화된 소위 담합정당(cartel party)적 특성을 보다 뚜렷이 띄게 되었다. }}는 당노선과 구체적인 조직형태를 특정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형태로부터 국민정당(catch-all party)과 수권정당을 거쳐 미디어-정책정당, 심지어는 담합정당(cartel party)으로 나가도록 강제하는데, 이같은 과정은 대중운동의 (정치적) 지도부와 대중운동의 지속적인 괴리 과정이며 대중정치에 대한 억압과 부정에 다름 아니다. '대중정치'는 (지배)정치로부터 내부적으로 배제된(그러나 결코 제거할 수 없는) '비정치'인 생산과 대중의 삶을 대중 스스로의 정치로 변형(급진화)함을 통해 비로소 가장 진지하고 진정으로 현실적인 정치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열려진 거리와 생산현장(및 재생산)의 정치적 공간들이야말로 지배정치에 대당하는 또 다른 (지배)정치가 아닌 대중의 반역이자 지배정치비판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정치의 태반(胎盤)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우리의 관점은 반(反)정치나 탈정치적 이탈을 옹호하는 입장과 구분되어야 하지만, (근원적인 위기에 빠진 지배정치의 지반을 공유함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보수정치(혹은 자본가 정치)에 대당하는 이른바 '진보정치'(혹은 사회주의정치)의 기회로 활용하자는 입장과도 전혀 다르다. 진보정당의 정치노선이라 할 수 있는 진보정치론의 요체는 보수-보수를 보수-진보의 구도로 바꾸자는 이른바 '제3의 세력론', 혹은 '천하삼분지계'에 입각한 정치(정책)개혁론인데, 이는 기본적으로 (지배)정치의 구성을 다양화함을 통해 현재의 '정치위기'는 극복될 수 있다는 발상에 근거한다. 그러나 만약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정치이외에 다른 정치가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배정치와 같은 형상에 다른 내용(정책)을 가진 무엇일 수는 없다. 프롤레타리아 정치와 지배정치를 종별화하는 근본적인 구분점은 지배정치의 존재근거를(민족국가형태와 정경분리) 기각하는 종별화된 정치의 형상으로서의 대중정치라는 존재형태이며, 이것은 지배정치의 위기를 대체할 보완물이 아니라 지배정치 비판이자 생산양식의 변형을 자기 존재이유로 하는 변혁의 정치로서만 실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의 위기가 양산해내는 갖가지 계급정치적인 문제를 '정책'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기획이다. (국가)정치에서 등장하는 정책이란 이미 자본축적과정에서 그 대략의 방향과 기조가 결정된 한도 내에서 조절되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와 같은 구조공황 상황에서 취해질 수 있는 '정책'적인 선택의 폭은 대단히 협소할 수 밖에 없다. 진보정당으로 결말지어진 정치세력화 운동의 문제를 '사민주의적 진보정당인가 사회주의적 진보정당인가'라는 논점에 의해 개조하려는 시도가 현시기 전선복구와 대중운동 혁신이라는 과제 안으로 인입되지 못한 채 일부 운동세력들간의 종파적인 이합집산 논쟁으로 그칠 수 밖에 없는 이유 또한 이같은 맥락 위에 놓여있다. 대중투쟁과 선거투쟁 선거시기에 제출되는 '대중투쟁과 선거투쟁의 결합'이라는 전술은 그 뜻을 헤아리면 헤아릴수록 진실이 없는 언술이다. 선거시기에 벌어지는 선거투쟁이 아닌 대중투쟁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고, 대중투쟁이 아닌 선거투쟁은 또 무엇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선거투쟁 아닌 대중투쟁은 선거시기에 벌어지는 비정치적인(!) 조합적인 이슈와 집회일정 등을 일컫는 것이고, 대중투쟁 아닌 선거투쟁은 대중운동적·정세적 의의를 찾기 어려운 선거활동을 가르키는 듯하다. 그러나 만일 그러하다면 그같은 양자는 결합과 분리를 말하기 전에 우선 척결되어야할 경제주의적 실천과 정상배 정치일 뿐이 아닌가. 오히려 이 애매한 언술 뒤에 숨은 진정한 오류는 대중운동의 경제투쟁으로의 부당한 한계짓기와 (대중투쟁과의 결합을 빙자한) 정세적 해명 및 배치 없는 선거투쟁으로의 매몰이다. 특히 2002년 대선전략을 수립함에 있어 우리는 2002년 하반기 투쟁과 2003년 이후 전선재편에 관한 해명없는 대선투쟁론을 경계해야할 것이다. 정세적 의미와 무관한, 대선을(혹은 2004년 총선) 위한 대선투쟁은 어떤 투쟁과 결합되건 선거참여자들의 집회참가 이상의 의미가 없다.(그 역인 경우의 폐해는 더욱 심각하다) 그같은 결합관계가 양자 상호간에 득이 될 성과를 남길 리 만무하다. 관건은 선거투쟁의 의미를 분명히 함을 통해 선거투쟁 자체를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조직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투쟁은 어떤 공치사로 치장되더라도 실상은 선거운동의 동원대상에 불과할 뿐이며, 선거투쟁은 스스로가 개개의 대중투쟁에 대한 정치적 조직자라는 환상만을 품은채 선거를 위한 선거투쟁으로만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이른바 '건강한 기층'으로, 진실 없는 '대중투쟁 우위론'으로 한껏 떠받들여지고 신비화된 채 정작 과학적 분석의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비운의 군주이다. 우리는 대중(이데올로기)을 다시금 정세분석의 중심으로 복귀시켜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대중에 덮어 씌워진 괜한 공치사를 걷고, 한없이 복잡하고 때로는 모순적인 성격으로 다양하게 분열되어 있으며 때때로 반동적이고 진보적이어서 그 진로를 알 길이 없는 이 역사의 주인공에게 그들의 말과 행동을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그에 입각한 대중 공동의 행동계획으로서의 전술만이 이 비운의 군주 앞에 지켜져야 할 유일한 예(禮)이다. 보론1> 정치투쟁관의 정정 지난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대한 우리운동의 대부분의 평가가 지적하고 있는 두가지 난점은 바로 생존권(경제) 투쟁의 고립분산성 극복과 경제투쟁의 정치적 조직화이다. 그리고 그같은 평가의 대부분은 첫째, 각각의 경제적 요구들에 어떤 전국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부여할 것인가 둘째, 어떤 조직적 틀(들)로 각각의 고립분산적인 경제투쟁들을 묶을 것인가라는 쟁점을 낳았다. 그러나 막상 이같은 전술논쟁의 근거가 되는 우리 운동의 현실은 전투적인 현장중심주의가 경제주의와 공명하고, 조합을 넘어선 대사회(정권)투쟁을 강조하는 입장이 개량주의와 공명하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희비극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 우리는 이 혼탁한 반신자유주의 전술논쟁의 근저에는 이른바 '정치·경제투쟁관'(이하 정경투관)으로 불리는 오랜 부르주아적 운동관의 폐해와 '당의 계획으로서의 전술'이라는 식의 위계적 운동관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정경투관의 핵심은, 첫째, 생활 경제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투쟁이 경제투쟁인 반면 대국가 혹은 대정권관련 투쟁이 정치투쟁이라는 구분법과 둘째, 경제투쟁에 대한 정치투쟁의 우위 및 그에 입각한 상호결합의 원칙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대국가투쟁의 실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 정경투간 결합의 상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관한 현격한 입장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같은 차이가 아무리 크더라도 투쟁의 소재 및 영역의 차이를 정치와 경제의 분리라는 부르주아적 구분법에 입각하여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으로 나누고, 이 둘간의 결합이라는 틀로 운동의 배치 방법을 대체해버리는 관념은 자체로 타파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이같은 사고는 역사발전의 유일한 원동력인 '계급투쟁'을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이라는 현실에서 그 근거를 찾기 매우 어려운 관념적인 두 운동으로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실의 계급투쟁은 자본과 국가라는 두 머리를 지닌 자본주의의 지배계급과 자본주의 역사발전의 반작용으로 탄생한 프롤레타리아트간의 계급투쟁이 존재할 뿐이고, 다만 하나의 계급투쟁의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이 존재하는데 이 둘간의 분리와 구분은 지배계급의 계급투쟁의 효과로 나타난 지배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은 그것이 자본과의 투쟁과 국가와의 투쟁으로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낳고 사멸해가는 자본주의의 양측면에 대한 투쟁으로서만 현실에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이같은 '정경투관'이라는 과학아닌 과학, 사상아닌 사상에 속박되어왔을까? 그 원인은 레닌의 '경제주의 비판'과 (민주주의 혁명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성장전화론'이 가지는 (레닌 자신의) 역사적 한계와 그것의 (우리의) 교조화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레닌은 [무엇을 할것인가](1905년)에서 당대의 경제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수행하면서, 경제주의자들의 정치활동을 조합주의적 정치투쟁으로 규정하였고, 그것의 본질을 경제투쟁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비판했다.(정경투관의 출발{{) 그러나 물론 이같은 레닌의 비판은 짜리즘타도와 국가권력 획득이라는 당대의 혁명적인 보편적 대의를 그르친 경제주의자들이 범한 정치활동상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함이였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분리를 창안하고자 함은 아니였다. }}) 게다가 당시까지도 레닌은 당면 혁명의 성격과 목표를 사고함에 있어 BgR에서 SR로의 성장전화라는 단계론적 혁명전략을 버리지 못한 처지였다. 그로 인해 레닌은 정치투쟁을 짜리즘의 타도/민주공화정의 수립을 위한 '민주주의 정치활동'과 Bg혁명의 SR로의 성장전화를 담보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정치활동'으로 나누어 사고하고 있었다.(1897년 [러시아사회주의자의 임무])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은 위계적인 결합 및 성장전화관계에 있는 차별적인 주제와 수위를 가지는 운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이는 '외부주입'테제로 대표되는 카우츠키류의 분열적이고 위계적인 대중(지도)관이 레닌주의의 이름으로 정형화되는 주요한 계기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당면 변혁을 위한 운동들이 정치/경제운동, 민주/사회주의 정치활동, 당(지도)/대중(피지도)라는 위계적인 결합과 분열적인 구조로 배치된 것이다. 레닌의 성장전화론은 1917년 4월테제를 계기로 하여 자기부정되기에 이르지만, 정작 혁명전략의 수정이 곧 성장전화론에 고유한 전술·정치활동관의 혁신과 일반화로 이어진 것은 아니였다. 다만 비로소 '레닌이 된 레닌'이 4월이후 내전과 NEP기에 내놓은 구체적이고 풍부한 정치방침과 당조직/소비에트 및 노조 운동론의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레닌적인 전술·정치활동관의 혁신적 면모들의 단편을 애써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사실상 레닌 '경제주의 비판'의 요체는 '정경투관의 창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주체)성장에 따른 당(주체) 과제의 성장"이라는 제2인터의 오랜 진화주의적 관념에 정면 대항함으로써, 당(주체)'과제'가 지니는 혁명적 보편주의는 자본주의 위기발전의 객관적 조건(정세)에 의해 과학적으로 분석되어 주어지는 것일뿐, 주관적 요인에 의해 선택되는 문제가 아님을 설파한 것에 있었기 때문이다. 레닌의 성장전화론은 제2인터의 대기주의적 진화론과 바로 이 지점에서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해석에도 불구하고 당형태와 대중관 및 전술관등을 통해 잔존하고 있는 이 둘간의(진화론과 부정된 성장전화론) 친화성이야말로 레닌주의의 역사적 한계인 것이다. 한편 1871년의 맑스는 [런던에서 뉴욕의 볼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레닌과는 다른 정치투쟁(운동)관의 일단을 선 보였는데, 그는 정치운동이란 "보편적인 사회적 강제력을 가진 형태로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일체의 운동"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에는 정치와 경제라는 투쟁의 소재를 중심으로 한 운동의 구분도, '경제투쟁의 정치투쟁으로의 상승발전'이라는 성장전화론적인 위계적 결합관계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정의의 핵심 개념으로 파악되는 것은 "보편적인 사회적 강제력"를 띤 "~~을 관철하기 위한 일체의 운동"이라는 규정이다. 여기서 '보편적 사회적 강제력'이란 판단컨데,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될 힘과 정당성을 갖춘 '과학적 이성'과 '집단적인 문제해결능력'과 같은 주체적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이같은 주체적 조건이 전 프롤레타리아트적인 보편적 요구(이익)을 관철시키기위한 혁명적 성격과 결합된다면 그것이 바로 혁명운동, 혹은 혁명적 정치활동일 것이다. 당대의 레닌은 "~~을 관철하기 위한"을 짜르타도/민주공화정 수립이라는 전인민적인 과제로 보았던 것이고, 이를 실현하기위한 주체를 "전위당"으로 상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대항하여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예속됨 없이, 과학적 인식과 집단적 문제해결능력에 입각하여 스스로를(사상과 저항 이데올로기=곧 조직) 지키고 발전시키는 이른바 '봉기적 주체'는 곧 역사적으로 정형화된 '전위당'이 아니라 '능동적 대중'과 그들의 자발적인 '연합'에(전위당은 이같은 주체형태의 하나일뿐) 다름 아닐 것이다. 결국 (레닌에게 주어진 운동의 조건과 역사적인 제약을 감안하여 본다면) 우리의 전술과 정치활동관의 재정립에 있어 주요한 것은, 객관적으로 변화된 정세적 요인과 이로부터 객관적으로 부여되는 전인민적인 보편적 운동의 목표와 과제, 맑스의 일반적 정의로부터 도출되는 주체적 조건 및 운동(조직)형태일 것이다. 대중의 공동 행동계획으로서의 전술 -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더 이상 '전술=(지도)당의 계획'이라는 관념은 전술수립과 실행의 난점이 아니라 현시기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의 하나일뿐이다. 전술은 해당시기에서 전략적 승리를 앞당기기 위해 당면 투쟁의 전술적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구호, 투쟁형태, 조직형태를 결정하는 '운동주체의('능동적 대중'의 '연합') 실천계획'이다. 그러므로 전술은 언제나 '대중의 공동행동 계획'으로 받아들여지고 실현되도록 노력해야하며, 그같은 실현정도야 말로 전술평가의 핵심일 것이다. 또한 전술은 구체적 정세(분석)을 통해서만 도출될 수 있을뿐, 선제하는 전략적 과제로부터 자연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건적인 문제는 정치활동이 그때그때의 사건들에 대한 협소하고 즉자적인 대응에 머물지 않토록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외곽에서 지도지침을 주입하는 위계적인 지도조직의 선험적 구축 혹은 자임!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맞는 '정치적 지도'의 의미를 조직적이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실제로 확보하는 것이다.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전과정을 통해 그것은 1> 위기비판과 전화의 관점을 명확히 할것 : 운동의 전과정을 인식한 가운데 제반의 운동들이 전략적 방향과 목적을 견지하기 위한 노력, 2> 집단적인 분석(총화)능력의 조직을 통해 피착취 근로대중의 보편적 이해를 대변하고 조직하는 것, 3> 자기부정에서 자기긍정으로 : 과학적 인식에 기반한 '자기통치-자기해방'의 출발인 인민의 자주성을 옹호하며, 다수자 혁명의 사상에 입각하여 자기소유와 통제를 실현하도록 할 것이다. 이같은 세가지 원칙을 대중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조직적 구조를 마련하고 그것의 성과를 안정적으로 축적해가는 일이야말로 '부재한 당의 계획'으로 국한되지 않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시기 우리운동에게 주어진) '전술활동'일 것이다. 정치활동관의 정립 우리는 이상과 같은 논의에 근거하여 특히 현시기 '정치투쟁'이란 "제반의 위기관리기제와 주어진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역, 즉 대중의 '봉기적 주체'화와 대중 스스로의 자주적 연합(보편적 이해의 자기이해화)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이라는 기본관점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1987년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노조건설 운동은 비록 경제적이고 조합적인 소재를 요구하는 투쟁이였지만, 87년 정세에서 이 투쟁은 스스로 당대의 반파쇼투쟁의 주력을 형성해 내었다고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단순한 경제투쟁이 아니였던 것이다. 임금인상을 매개로 단결한 대중들은 '파쇼타도 없이 노조없다'는 즉자적인 이데올로기였을지언정 그같은 반역에 입각하여, 집단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조직하는 것의 중요성을 확인한 가운데 스스로 통치하고 스스로 해방하기 위한 조직적 거점으로서 민주노조를 축으로 한 계급적 단결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1> 정세를 초월하여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주체'화 경로와 그것에 반역하는 '봉기적 주체'화가 구분되는 것이며, (신자유주의 재편과 경제위기 심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수동화와 그에 따른 실리주의적 경향, 민중운동의 실용주의적 퇴행화야말로 현시기 정치활동의 주요타격방향이다) 2>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허구적인 결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 스스로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단적인 해결방식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조직적인 결집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투쟁의 정치적인 성패를 가로 짓는 열쇠이다.
대중·대중운동의 분화, 그리고 전선재편 박 준 도 | 편집실장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한 민중운동의 내적 변화는 필연적이다. 대선 투쟁 본부 제안{{) 사회진보연대 대선기획팀, '2002년 하반기 투쟁의 과제와 대선의 의미', [사회진보연대 2002.9] }}에서도 밝혔듯이, 대통령선거는 지난 5년 동안 자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에 대해 민중운동이 비판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못하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이 지금 대선에서 어떤 구도아래 새롭게 자신의 권력을 재편할 것인지, 어떻게 대중을 또다시 장악하려 하고, 오늘날 대중을 이해하고 있는지, 그래서 마침내 어떻게 구조조정을 하려는지 세세하게 분석해야 한다. 이를 비판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에 앞서 우리의 과제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오늘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오늘날 계급투쟁의 양상과 대중운동의 현실이 어떤지, 왜 전선 재구축이 최우선 과제인지를 따져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대중운동의 현실은 지배계급의 집요한 반격과 이에 따른 대중의 분열에 바탕하고 있다. 대중운동의 분화는 그에 따른 것이다. 1991년 계급투쟁의 패배 이후, 적과 우리를 가르는 전선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수많은 정치세력은 혁명과 개량을 가르는 수사로 이를 대체해 왔다. 그리고, 그에 따라 혁명적 정치조직·지도부와 개량적 정치조직·지도부를 구별하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후자를 비난할 뿐이다. 대중의 실리적 경향과 대중운동의 우경화라는 경향을 혁명적 지도부·혁명적 정치조직으로 역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소아병적인 자세다. 그것은 대중들 스스로 과학적인 사고로 자신의 존재 조건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의 문제를 보편적인 쟁점으로 제기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이것이 능동적 대중 주체 형성이고, 대중운동의 혁신이다. }} 전선의 부재는 무엇보다도 봉기적인(!) 대중 주체의 부재를 가리킨다. 1997년 IMF 경제위기는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드러냈지만 그에 걸 맞는 전선과 주체가 우리에겐 없다. 오늘 우리의 투쟁이 계속 분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전선의 부재는 대중운동의 분화-부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대중운동의 분화-부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다. 1987년 이후 계급투쟁의 전개양상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지배계급의 반격은 집요했다. '3저 호황'이라는 예외적인 호조건이 사라지면서, 경제위기를 눈앞에 두자 지배계급은 3당 합당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할 정치적 힘을 채비하였다. 이들은 무노동 무임금을 앞세워 노동조합의 전투성(파업투쟁)과 1987년 이후 임금상승을 경제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지속되는 경기침체 속에서 대다수 중소기업은 파산하거나, 과거에도 그랬듯 대기업에 하청 계열화된다. 그리고, 일부 설비부문(특히 섬유산업)은 해외로 옮겨지는 등 산업전반이 재편된다. 감원과 해고, 사용자의 정규 고용직 회피로 용역직과 임시직이 늘어나고, 노동자 파견, 외국인 노동자들의 고용도 대폭 증가한다. 그리고 지배계급은 '공안정국'을 앞세우며 강경하면서 선별적인 노동탄압으로 노동운동의 분열을 조장한다.{{) 전노협은 결성 전부터 주요탄압대상이었으며, 대기업연대회의는 사안에 따른 선별적인 탄압을 받았고, 업종회의는 탄압대상에서 상당히 밖에 있었다(몇몇 방송·언론·출판사 제외). }} 회사의 파산과 자본투자의 해외 이주로 상당수 노동조합이 자연 소멸하게 되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고용불안과 선별적인 공안탄압에 따라 조합원 상당수가 이탈하게 된다.{{) 이를 가장 격렬하게 경험한 곳이 여성노조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성노조의 대다수는 제조업 기반이었다. 하지만, 제조업의 절대 수가 줄어든 데다, 여성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는 전기·전자 산업과 섬유산업이 재편되면서 여성노조의 설자리가 급격하게 변하게 된 것이다. 다른 사업장보다 여성노조에서 먼저 '고용안정'을 제기한 것도 이 때문이다. }} 한편, 대기업은 하청계열화로 구조조정의 위기를 지연시키면서, 기업문화 개선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가며 노동자들을 사내질서로 흡수하고, 팀 체계를 앞세워 개별노동자들을 새로운 노동과정으로 재조직한다. 이때 대기업 노동조합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기업 노동자들 대다수를 조합원으로 확보한데다 중소업체 노동조합에 비하면 상대적인 안정성도 누린 편이므로 조직력이 크게 떨어지지도 않았다. 이 같은 현상은 금융과 언론으로 대변되는 사무직 노동조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노동자들 사이에 고용, 노동조건의 차이가 생기고, 나아가 노동조합 조직력에서도 차이가 벌어진다. 경기침체는 멈추지 않았고, 산업 재편은 계속되었다. 경력을 가진 사람도, 사무직 노동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될 비정규직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력직과 사무직에서 명퇴, 조퇴도 확산되었다. 끝내 남한 발전주의가 안겨준 유일한 혜택-종신고용 전통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는 이런 민중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 최초의 전국적 총파업이었지만 조직된 규모에 비해 결과는 너무도 초라했다. 정리해고 법제화는 2년 유예되었을 뿐이었고, 겨우 민주노총 합법화와 복수노조 인정이라는 결과를 얻었을 뿐이었다. 늘어나는 기업파산 앞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 보장이 설득력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로 비쳤다. 1997년 IMF 외환위기는 급격한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는 대세로 만들었다. 더구나 같은 해 이뤄진 정권교체는 구조조정에 민주화와 개혁이라는 모양새까지 추가하였다.{{) DJ 행정부는 당선되자마자 자금지원을 앞당기기 위해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더 잘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추가조건을 제시한다. IMF 플러스. 여기에는 정리해고제 수용, 집단 소송제 도입, 외환관리법 전면 개정, 적대적 인수·합병(M&A) 허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 이를 틈타 지배계급은 구조조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고통분담, 재벌개혁과 함께 다가온 구조조정은 전율적이었다. 결국 1998년, 총파업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노사정위원회에서 양 노총 지도자들은 정리해고 법제화에 합의하고 만다. 2001년에는 복수노조인정마저 한국노총의 노사정 합의로 5년 동안 유예된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노동조합(대중운동)이 당연히 자신의 권익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노동자, 농민, 여성: 멈추지 않는 분열과 자기파괴 혜택을 앞세운 구조조정이 아니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정치적 조건을 활용하려 들었다. IMF 외환위기와 정권교체라는 정치 조건은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기업구조조정은 사회의 공적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구조조정에 앞서 그들은 노동자는 물론 심지어 기업주까지 한몫으로 싸잡아 사회의 공적으로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구조조정에 맞선 개별기업 노동자들의 저항은 상당부분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기업과 해당사업장을 넘는 연대투쟁은 점점 더 곤란해졌다. 모든 투쟁은 IMF 이후 더욱 고립되었고, 노동자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계급으로 단결하는 노동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해고와 임시채용의 격렬한 반복은 정규직 노동자, 대기업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마저 위협했다. 이젠 누구도 평생직장을 믿지 않는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자신을 보호할 법적인 장치는 물론이거니와 조직적인 힘도 없다고 믿고 있다. 유효한 방어수단이 없기 때문에 노동자 개개인은 기회가 있을 때 한 몫 잡아두어야 했고, 고용만 보장되면 노동조건의 후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였다. 후퇴하는 단체협약에 개별 노조는 서명하였고, 허구적인 것을 알고도 고용보장에 만족할 도리밖에 없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노동조합 결성조차 어려웠고, 설사 결성했다 치더라도 사업장내로 진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에 격렬한 투쟁을 벌이고도 별다른 성과 없이 흩어져야 했다. 심지어 정규직과 임시직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지경에 이른다. 투쟁이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노동자들은 개별화되었다. 저임금 저곡가 정책에 따라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수입하고, 농가소득보존이 곤란해지고, 그리하여 농촌의 노동력이 도시로 유입되고, 이들의 저임금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시 저곡가 정책을 고수하고, 이런 식으로 농촌사회는 이미 해체될 대로 해체되고 난 뒤였다. UR 협상에서 격렬한 농민들의 저항으로 쌀만큼은 10년 동안 관세화를 유예한다는 협정을 맺긴 했지만, 농산물 완전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여겨졌다. 쌀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작물이 개방된 데다가, 그나마 국제경쟁력을 갖춘답시고 진행한 정부의 농업구조조정은 농산물 가격 폭락을 거들기만 했다. 경쟁력이 있다고 소문난 몇 가지 농산물 제작에 농민들은 몰렸고, 저리의 농가보조금 대부분이 여기에 집중되었다. 이 바람에 농가의 생계구조는 개선되기는커녕 농가부채만 천문학적으로 늘어났을 뿐이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계속되는 농정 실패로 국민 모두가 농업문제에 대해 회의하였다. 농민을 달랜다며 쥐어진 농지규제 완화는 농민들의 농업 포기를 부채질 할 뿐이었다. 농민들이 농지 규제 완화를 계기로 수익이 좀더 좋은 생업에 나서기 때문이다. 언론조차 외면하는 농촌문제는 이제 농촌만의 문제였고, 농촌에는 휑하니 농가소득보존의 논리만 남아 농촌 사회를 둘러쌌다. 불안정한 삶으로 일상적인 생활조차 곤란해지면서 이전과 같은 방식의 가족생계는 누구에게나 불가능했다. 경제위기에 따른 정부재정위기와 교육과정의 변화(노동력 재생산 방식의 변화)로 가계 유지비는 급증했다. 아내-여성을 시작으로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생계유지 혹은 늘어난 가계유지비를 감당하기 위해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들 모두 노동시장의 성별·연령별 구조적 불평등에 따른 극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제각기 흩어진 일터, 개인과 가족의 거리는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을 해체했고, 급기야 구성원 모두에게 개별적 생존을 강요한다. 이제 남한사회의 근대적 가족은 역사적 사명을 다한 듯 했다. 하지만 인간·가족·사회의 재생산은 개별적으로는 불가능한데다, 이를 대신할 가족 모델이 출현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국가가 이를 책임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 때문에 여성은 가정 유지의 책임을 다시 짊어져야 했고,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열악한 노동조건에 밀려있는 가사노동·보살핌노동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성차별에 고용불안까지 겹쳐 노동조건 개선은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고달픈 노동으로 가사노동·보살핌 노동은 하루하루 밀리기만 했다. 각종 가전제품과 사설 보육 서비스, 금융상품만이 대안인양 기다리고 있어 이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가계 유지비는 점점 더 높아질 뿐이었고,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이런 상황은 여성을 더더욱 극악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이제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족의 생존과 개인의 생존 사이의 대립을 겪으면서, 상황을 회피하거나, 짓눌린 채 체념하고 마는 양극단의 방식을 택하게 된다. 그 뿐이 아니었다. 여성 신체, 특정한 신체가 여성의 인격을 대신하면서,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와 직·간접적인 폭력은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보증되고 있음에도, 오히려 사적인 차원으로 제한되고, 국가권력과 남성이 저지르는 성적 비하는 개별적인 사안과 피해자의 문제로만 남았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제한된 것이고, 제한된 만큼 모든 책임이 여성 개인에게 되돌려질 뿐이었다. 대중운동의 분열, 운동노선의 분화 1987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위로부터 해체되면서, 대중운동은 1991년 5월 강경대 열사 투쟁을 끝으로 급격한 우경화(탈정치)를 겪는다. 이후, 학생대중을 위시해서 대중운동의 다수를 차지하던 노동자대중은 예외적인 몇 번을 제외하고 내내 밀리기만 했다. 노동자, 농민, 여성은 너무도 오랜 기간 분열과 자기파괴를 겪었다. 오늘날 대중 운동의 분열과 고착화는 이를 반영한다. 앞서 본 것처럼 1990년 정권의 극심한 탄압과 산업재편으로 상당수의 노동조합이 몰락하고, 노동자들이 조합을 이탈(전노협은 절반 가까이)하였다. 법·제도적 한계로 노동조합의 조직 자체가 곤란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어서 노동법 개정이 노동운동의 주 관심사가 되었을 때다. 여론은 노동운동의 격렬한 파업에 등을 돌렸고, 많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중간층의 이탈과 법·제도적 한계로 인한 노동조합 투쟁의 곤란함을 호소하던 때였다. 노동조합운동은 조합원 감소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로 국민의 여론을 등질지도 모르는 과격한 투쟁은 제한하려 들었고, 법·제도 개선, 대 국민 여론 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배계급의 반격과 구조조정을 정확히 살필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이 같은 법·제도 개선과 대 국민 여론 전의 필요에 따라 노동현장의 문제와 각종 사안에 대한 '정책대안능력'이 중요하게 대두되고, 사회 개혁 투쟁이 중요해지면서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이것이 점점 집단적으로 확산되면서,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이념(자유주의·실리주의)이 노동운동 내부로 더욱 확산된다. 과거 개발독재시기 저임금이나마 완전고용이 보장된 탓에 노동자들의 관심사는 기업내부로 제한되는 경향이 있었다. 비공식부문 노동자나 실업자 문제가 노동자들의 주요관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역차원에서 불거진 쟁점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로 인해 빈민 운동을 위시해서 지역운동과 벌이는 연계는 상층연대로만 머무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노동운동이 지역별 영역별 연대투쟁에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노동대중의 연대의 경험은 부족하거나 일방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 기대어 노동운동은 지역별 노조보다 산별노조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운동은 노동조합을 아우르는 전체 대중운동의 지도그룹을 형성하는데 끝내 실패하고 만다. 이를 기점으로 선거투쟁이란 합법적 정치영역의 진출을 위한 투쟁으로 기억된다. 1993년 기업별 노조의 공통과제인 노동법개정을 위해 국제적 압력을 가하려 했던 ILO 공대위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사무직과 대기업 노동조합을 대표하던 업종회의와 연대회의가 전체 민주노조운동을 주도하던 때였다. 이렇게 결성된 전노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앞세운 민주노총 1기 지도부 결성의 토양이 되었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중간층에 대한 노동자의 헤게모니, 사회개혁(법-제도개선) 투쟁, 민주노총과 양립하는 진보정당 건설들을 전면에 내건다.{{) 이렇게 보면, 1기 지도부가 1996년 총파업 패배를 정당·정치세력의 부재(국회의원의 부재)에서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 1997년 IMF 경제위기가 벌어지자마자 노동운동은 공세적인 방어(고용안정)를 위해 노사정의 직접 협상을 제안한다. DJ 행정부는 이를 계기로 노사정위원회를 제안하고 1998년 민주노총까지 참여한 가운데 노사정위원회가 진행된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진보정당 정치방침을 확정하고, 민주노동당 건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990년을 전후해서 여성 노동자들이 많이 있던 제조업 사업장이 역시 경기후퇴로 아예 문을 닫게 되어, 상당한 여성 노동력이 노동시장으로 흘러나오지만, 노동의 불안정화로 남성 노동조건의 동반 하락하게 되는 바람에 제조업에서 여성이 재 진입할 수 있는 일자리는 급격하게 줄어든다. 산업이 고도화되고 전문화되면서 중간관리 층에 대한 수요가 확장되고 이에 따라 사무·서비스업종에 대한 일자리가 늘어난다. 이때 여성노동력에 대한 요청이 과잉되면서 여성노동력 상당수가 서비스업종으로 진출한다. 그리고, 1987년 노동자 대 투쟁 당시 대기업 노동조합의 역할이 과대 평가되면서, 여성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의 주변에 머물게 된다. 가족내의 생계부담의 증가에 따라 주부노동력이 급증하고, 제조업 여성노동자들의 급감과 함께 사무·서비스직 여성노동자들이 급증하면서 여성노동운동은 관심을 다변화하였다. 이때부터 사무직·서비스업의 여성노동자들의 이해가 여성노동운동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주부노동자의 사회적 진출을 보장하기 위한 모성보호와 양육서비스의 확보가 주요한 쟁점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비정규직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들과 이들에 대한 차별철폐를 내걸었으며, 한편에서는 주부노동력의 급증에 발맞추어 여성노동력의 활용과 그에 따른 산업조직개편의 긍정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1999년 독자적인 노동조합노선을 걷게 된다. 한편, 가족에 대한 국가의 지원 없이, 모든 것이 가족 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겨진 상황에서 여성운동은 가족법내 성불평등조항을 주된 쟁점으로 자신을 조직, 이는 거의 대부분 미국식 핵가족 모델에 조응하지 못하는 낙후된 법률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급격한 민주화바람과 함께 부분적으로나마 제도개선이 달성되면서 가족법 개정 투쟁은 일단락 된다. 하지만, 이처럼 몇 가지 성불평등 조항을 중심으로 법-제도개선 투쟁을 벌이던 여성운동의 전통은 성폭력, 성 매매 등 기존 여성운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더욱 확대된다. 여성이슈와 단일 사안의 해결에만 집중하면서 더더욱 법-제도 개선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성운동은 '여성주류화정책'에 더더욱 힘을 싣게 된다.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농촌사회를 기반으로 벌이는 농민들의 투쟁은 두말할 것도 없다. 농업의 다원성과 그에 따른 식량주권을 전면에 내걸고는 있지만, 내·외곽에서 몰아 치는 농가 소득보존 논리 앞에서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운동의 암중모색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처럼 대중운동 모두가 겪고 있는 노선분화와 미래의 불투명함은 곧, 대중 투쟁의 고립으로 이어졌다. 어떤 정치세력도 이념과 미래를 제시하며 체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내재된 고유한 한계로 인해 긍정적인 방식보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다. 구조조정은 대상(특히 노동자, 농민, 여성)을 고립시켜 적의에 바탕을 둔 사회적 공론을 등에 업고 강제로 구조조정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이로 인해 저항 주체는 연대의 기회마저 빼앗기고, 개별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대책위가 난립하는 것은 사실 이의 반영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민중은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그것이 신자유주의 정책, 나아가 자본주의의 위기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가지 못하고 되려, 국제 신용평가기관에 의해 상대적으로 노사가 안정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비극이 재현되고 만다. 지배 정치의 위기와 2002년 대통령 선거: 연대투쟁의 확장과 전국적 투쟁거점 우리는 지난 몇년동안 수 차례에 걸쳐 지배계급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제휴세력으로서 386세대와 시민운동으로 불리는 자유주의자들을 파트너로 삼아왔음을 지적해 왔다.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정치개혁이 온갖 금융비리로 주요한 의제에 상정되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햇볕정책마저 미국 정치지형의 불안정성으로 좌초하게 되자 오히려 (완전고용을 보장했던) 군부독재시절을 전후한 퇴행적인 쟁점이 대중을 선도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이들은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었음을 지적해 왔다.{{) 사회진보연대 정책국, '개혁세력붕괴 이후의 한국사회', [사회진보연대 2002.7·8] }} 사실, 이후 정국은 어떤 정치변수(비리폭로)가 집권의 향배를 결정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안개정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정치집단도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온갖 잡다한 정치 세력의 합종연횡과 해산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대중에 대해 완전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중에 대한 지루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히 지배계급의 위기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 깊숙이 개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이 위기를 자초한 이유가 무엇인지(바로, DJ 정권이 정권교체를 빙자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전면에 내세우고는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의 열망을 배신하고 대중의 삶을 벼랑끝으로 내몰아 저들에게 예속된 삶을 선택하도록 몰아 붙이다가 여의치 못하여 궁지에 빠져버린 것), 이들이 위기에 맞서 무엇을 조직하려는지(바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할 것 없이 민중의 피와 땀을 가로채고, 기생적인 금융생활자의 영광으로 위기를 지연시켜서 자신들만의 영속적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지배세력들의 한판 굿을 벌리려는 것)을 폭로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배계급의 정치적 위기가 곧바로 인민대중의 정치적 기회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노동자, 농민, 여성 모두 개별화된 채 존재하고 있다. 대중조직의 정치노선은 분화되고 있으며, 나아가 포괄 대중에 대한 대중조직의 정치적 헤게모니조차 상실되고 있다. 물론 우리는 대중운동을 혁신하려는 기운이 곳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과도 마주하고 있다. 공동 투쟁을 통해 대중들이 직접 연대를 실현하려는 노력에서 상설적인 공동 투쟁체를 건설하려는 노력까지, 당-노조 차원으로만 제한되지 않고, 직장과 가족을 넘어 지역과 부문을 아우르려는 노력까지, 이 모든 것들이 대중운동의 한 자락을 이루고 있음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중의 공동 투쟁 경험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이고, 더군다나 2002년 대통령 선거 이후 새로운 지배권력이 들어섰을 때 전체 민중운동 진영이 이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연합적인 질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노동자, 농민, 여성이 바로 이런 연합적인 질서를 만드는데 있어 자신에게 주어진 정치적 조건을 바꾸고, 자신의 문제를 보편적인 쟁점으로 제시할 수 있도록, 공동투쟁의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부도덕한 정권을 대신하여 들어설 반동적 정권에 맞설 수 있는 전국적 투쟁 거점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이 속에서 대중운동 혁신의 거점을 확보하고, 대중운동 혁신의 흐름이 서로 실천적으로 연대하도록 하는 것이다. 곧,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운동의 과제는 전선의 복구와 투쟁-저항주체의 형성과 이들의 연대를 통한 대중 투쟁체 건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선 시기를 관통하는 공동의 투쟁대오를 강조하며, (진보정당으로) 제한되지 않는 대중의 정치적 투쟁체, 대중의 선거 투쟁체 건설을 제안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추를 넘어 내년도 공동투쟁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고자 진보진영 대통령 후보 경선과 민중운동진영의 공동투쟁을 주장하는 것이다. 대중운동 지도부 교체가 대중운동의 혁신을 대신할 노릇이 못되듯, 민중운동 좌파진영의 우선 결집 혹은 입지변화가 민중운동의 혁신과 질서재편을 대신할 노릇이 못된다. 민중운동의 혁신은 노동자, 농민, 여성 대중투쟁주체의 형성을 뜻하는 것이며, 실천적인 연대를 꾀하면서 대중운동의 혁신을 주도하는 것이다. 대중운동을 좌익적으로 강화하고자 하는 세력들의 결집은 오로지 여기에서 비롯될 뿐이다. PSSP
정치세력화 15년, 물줄기를 바꿔야 한다. 정 영 섭 | 노동차장 정치세력화의 역사적 지반 : 대중운동의 쇠퇴 정치세력화가 진보정당의 형태로 추진된 역사적 배경에는 노동자 민중운동의 쇠퇴가 자리잡고 있다. 1987년 노동자 민중항쟁 이후 지배계급은 민주화를 형식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노동자 민중에 대한 반격을 집요하게 감행하였다. 지배계급은 6.29와 같은 개량조치로 중간계급을 전선에서 이탈시켜 운동세력을 분할 견인하면서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해체시켜갔다. 지배계급의 공세에 따른 민중운동의 정체상태는 끝내 1991년 5월 투쟁에서 부정적인 형태로 폭발했다. 1991년 5월 투쟁에서 노동자 민중진영은 광범위한 대정부 투쟁을 격렬하게 펼쳤으나 그것은 제2의 민중항쟁이 아니라 민중운동의 패배로 끝났다. 이것은 민자당의 광역의회 선거 승리로 확인되었고 이러한 정치적 실패의 상황을 전후로 하여 진보정당 운동이 출현했던 것이다. 90년대 이후 정치세력화 노선도 마찬가지로 대중운동의 쇠퇴를 지반으로 하고 있었다. 민주노총의 건설로 인해 겉으로는 노동운동이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속으로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김영삼 정권이 추진한 신노동정책과 신경영정책과 이에 따른 노동자 포섭과 배제의 허구적 코포라티즘에 대해 총체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였다. 결국 법제도적으로 노동유연화를 보장하기 위한 96년 노동법 날치기에 대한 총파업투쟁은 국가와 자본의 공세에 맞서는 노동자 민중의 거대한 정치적 저항이었지만 대중투쟁의 역동성을 극대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한채 마무리 되었다. 당시 민주노총은 총파업투쟁 평가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끝까지 관철시키지 못한 이유를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국회의원이 없는 것에서 찾았다.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기운을 확산시키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이끌어내지 못한 것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정치세력화'가 되지 않아서 그랬다는 것이다. 이때 이미 정치세력화는 진보정당 건설과 의회진출을 의미했다. 요컨대 고양된 대중투쟁의 충분한 성과로서 건설되는 정치적 조직적 구심이 아니라 대중투쟁이 침체된 자리에서 투쟁을 우회하면서 정치세력화라는 이름으로 진보정당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지속적으로 계급투쟁과 엇갈린 정치세력화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했던 87-88년에 정권은 격렬한 노동의 저항에 움찔했고 자본은 분출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밀려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한 경제는 '3저 호황' 덕택에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줄 여력이 있었고 노동자들의 저항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많은 양보조치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호황이 잦아들어 경제도 침체하게 되고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활동을 그대로 둘 수 없는 국가와 자본으로서는 대대적인 공세를 취한다. 흔히 신경영전략 혹은 경영합리화전략으로 불렸던 정책이 그것이다. 개별 자본은 선진 각 국에서 도입한 새로운 경영기법들을 이용해 이전의 전근대적 형태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인사·노무관리, 임금·직급체계들을 적용하였다. 또한 자본은 린생산방식이나 유연적 생산체계를 도입해 현장에서의 노무관리를 크게 강화하고 노동강도 강화를 위한 작업조직 개편도 시도하였다. 그리고 자본은 생산방식의 변화와 함께 비정규직을 체계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시간제, 임시직, 계약적 등이 대폭 확대되었고 외주나 하청을 통한 계열화도 적극 도입하였다. 국가차원에서는 이것이 '산업구조조정'으로 뒷받침되었다. 산업구조조정은 사실상 과잉·중복 투자된 자본의 합리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불황이 도래하는 상황에서 지속적인 자본의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기 위해 주로 노동비용을 절약하는 방식으로 자본합리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노동정책에서는 노골적인 폭력적 방식의 노동탄압이 아닌 보다 세련된 길들이기 정책들이 추진되었다. 김영삼 정권 들어 추진된 '신노사관계'는 경쟁력강화와 세계화 담론을 내세우면서 고통분담을 강조하여 노동에 대한 배제와 분할을 가속하였다. 또한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전사회적인 경제 침체를 노사분규나 임금 탓으로 돌리는 체계적인 반노동적 캠페인이 진행되었으며 기업 내에서는 각종 기업문화 운동이 노동자들의 저항의식을 흐리고 노동통제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과 정권의 공세에 대한 노동운동의 대응은 ILO공대위와 전노대를 거쳐 민주노총에 이르렀지만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과 '사회개혁투쟁'으로 드러났다. 사회개혁투쟁은 현실 제도개선에 초점을 맞춤으로 인해 구조조정을 저지하고 노동대중의 분할을 계급적으로 통일하며 침체하는 대중투쟁을 이끌어 올릴 계획보다는 정치공간, 제도공간에 진출하여 법제도 개선을 도모하자는 것인데, 자본에 대한 노동의 대응방향으로 득세하게 된다. 이것은 이후 진보정당 노선으로 실물화됨으로써 노동자의 실리적 요구를 제도공간에서 실현하자는 '정치세력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한편 80년대 말부터 꾸준하게 전산업에 걸쳐 추진된 구조조정으로 드러난 노동에 대한 공격에 대해 노동자 민중운동이 총반격을 감행하는 전국적 전계급적 투쟁이 96-97 총파업 투쟁이었다. 준비된 투쟁은 아니었지만 총파업 투쟁은 산업의 전 부문과 지역에 걸쳐 파급되었고 연인원 30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계급정치를 표출시켰다. 그러나, 총파업 투쟁은 87년 이후 다시 한번 계급적 단결과 연대, 투쟁을 보여주었으나 결과적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마무리된 총파업 투쟁의 결론은 또다시 정치세력화였다.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인이 없어서 한계였다는 왜곡된 평가를 명분삼아 추진된 정치세력화는 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21'로 드러났다. 종이정당에 지나지 않았지만 대선 이후 잔류한 이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정당건설이 추진되었고, 결국 '민주노총 정치방침'에 의해 추동되어 2000년 1월에 민주노동당은 건설되었다. 이때 노동조합의 이해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당 건설이라는 것은 노동대중의 상태를 떠나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대중의 상태를 살펴보아야 한다. 80년대 후반의 격렬한 노동쟁의는 경제적 이익에 있어 노동자에게 커다란 수혜를 가져다 주었다. 높아진 임금, 복리후생의 확대 등은 특히 대기업 노동자들의 경제적 지위를 상승시켰고 노동자의 의식을 중간계층에 가깝게 만들었다. 특히 IMF체제 이후 급속한 고용불안이 전사회적으로 일반화되면서 노동자들은 노조를 통한 집단적인 문제제기와 투쟁의 방식보다는 최대한의 실리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대다수 노동자들의 정서는 노동조합 운동에도 반영이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노조가 전투적이나 그렇지 않으냐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결국 계급적 실리주의가 정치적으로는 진보정당으로 표현된 것이다.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할도 더욱 커졌다. 비정규직 노동력이 주된 노동력으로 자리잡음으로써 소수 정규직 중심의 조직된 대기업노동자와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로 양극화되었다. 여성노동자는 대부분이 비정규 노동력이 됨으로써 노동유연화의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다. 따라서 현실의 계급투쟁은 이러한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할과 양극화를 극복하기 위해 시대적으로 보편적인 요구를 중심으로 공동투쟁의 경험을 축적할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투쟁의 결과로 노동자계급의 통일성은 예외적으로 확보될 수 있을 따름이다. 지자체 선거에서 비정규직이 보인 진보정당지지 거부는 이를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진보정당의 두 가지 한계 경제위기와 IMF체제의 시작으로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방위적으로 관철하였다. 그것은 그야말로 노동자 민중에게 있어 고난의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정리해고와 근로자파견제로 인해 해고와 실업이 일상화되었고 파견노동자로 대표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전체 노동자의 과반수를 훨씬 넘어서는 상황에 이르렀다. 노동자 민중운동은 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에서 1차적으로 반격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지만 전국적인 공동투쟁전선으로 확장시키지 못하고 일부 수용이라는 것으로 끝맺는다. 투쟁의 요구는 높았으나 자본과 정권의 일방적 공세와 파상적 구조조정에 밀려 노동운동은 총파업 결의와 무산, 개별 기업 차원에서의 처절한 투쟁을 반복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구조조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노동자 민중의 전면적인 투쟁의 필요성과 현실적인 조직화는 가장 절박한 과제가 되었다. 그에 따라 2001년 파탄난 생존권과 박살난 민주주의 앞에서 노동자 민중진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반대하는 총체적인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을 결의하고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 '이미' 정치세력화된 민주노동당은 김대중 정권 퇴진투쟁에 대해 유의미한 실천을 조직하지 못하였고 지속적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대중운동의 상황을 면밀히 진단하여 적극적인 대중운동의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하는데 공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한계다. 자본축적의 이윤율 하락이라는 역사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전략은 새로운 생산양식을 조직하지 못하고 금융화로만 치달음으로써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더욱이 세계적인 금융 제국주의에 대한 종속성이 커져 가는 남한 사회의 현실에서는 구조조정에 저항하는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요구를 제도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만큼의 물질적 토대는 극히 취약하다. 오히려 남한 자본주의의 현실은 개방화와 자유화가 지속됨으로써 경제와 노동 자체가 국내외 초국적 자본에 의해 마음대로 휘둘리는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여기에서 구조조정 혹은 노동의 권리와 같은 '계급정치'의 첨예한 쟁점을 의회적으로 다루어서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여지는 사실상 희박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진보정당의 선택지도 협소하기 그지없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노동자 민중의 투쟁에 의해 이 위기의 전화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몇 가지 제도적 개선이나 일반 민주주의적 과제를 달성하는데 그칠 가능성만이 앞길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진보정당이 의회정치를 통해 성과를 내기 위해서조차 계급대중의 투쟁을 강화하여 전선운동에 복무하는 조직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위기에 새겨진 구조적 한계다. 정치세력화를 넘어 전선복구와 민중운동 구심 형성으로 이제 정치세력화라는 것으로 노동자 민중운동의 현실 과제를 대신하는 것에서 탈피하자. 우리는 부르주아 의회정치 혹은 지배정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이것과는 비대칭적인 노동자 민중의 봉기의 정치를 지속하는 것을 계획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치라는 것은 부르주아적 의미의 정치나 경제로 환원되지 않는, 자본주의 변혁을 위해 대중이 집단적 주체가 되어 해방의 조건을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서 정치세력화는 하나의 경로였을 뿐이며 역사적 평가를 통해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 확인되어야 한다. 따라서 문제는 현재의 노동자 민중운동의 현재적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즉각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위기가 사회적인 위기 심화로 드러나고 있지만, 이에 대응하는 각급 대중운동은 실리주의적 경향에 빠져 있거나 부문적 요구로 후퇴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급진적 요구를 정치적으로 조직하느냐는 문제이이며 민중운동의 장기적 전망 개척과 조직적 정치적 구심형성에 관한 문제다. 그것은 첫째, 분할 해체되고 있는 대중운동의 재조직이다. 지배계급의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임시적인 처방책에 불과해서 어떤 정치세력도 이념과 미래를 제시하며 체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는 한계가 내재되어 있다.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심화와 한국사회의 금융적 재편에 따라 경제의 대외종속성은 심화되는 상황에서 국가와 지배세력이 할 수 있는 것은 금융화에 따른 노동대중의 궁핍화와 불만을 미봉적으로 관리하고 위기를 지연하기 위한 구조조정을 지속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파괴적인 정책은 노동자 민중에게 구조조정으로 다가왔다. 구조조정은 대상(노동자, 농민, 여성)을 고립시켜 사회적 공론을 등에 업고 강제적으로 순차적인 구조조정을 강행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로 인해 저항 주체는 연대의 기회마저 빼앗기고, 개별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그리하여 노동자 민중은 격렬한 저항을 통해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그것이 대중운동의 급진화와 연대 확장으로 연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사안별로 분산적인 대응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위기 상황에서 대중 스스로가 자기이익에 집착하고 이것이 대중운동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고립적인 실리추구로 나타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중의 요구를 보편적인 것으로 제기하여 대중운동간에 공통성을 확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급대중운동 내에서 계급적 통일성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 대중투쟁을 통한 새로운 전선형성이다. 1991년 반파쇼 전선이 소멸된 이후 새로운 전선의 형성은 지체되고 있다. 전선이 적(敵)과 아(我)를 가르고 계급대중이 변혁을 위한 투쟁으로 집결하는 지향점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연대투쟁 질서를 잘 꾸리거나 공동의 투쟁과제를 제기하는 것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현시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노동의 불안정화의 효과인 민주주의와 민중생존권 압살에 대한 투쟁과 조직으로부터 지배계급의 위기관리를 반대하고 무력화한다는 의미이자 자본주의의 해결 불가능한 위기를 철저하게 비판함으로써 대중의 이데올로기적 반역을 도모하고 봉기적 주체를 형성하는 의미인 것이다. 셋째, 민중운동의 조직적 구심 형성이다. 이것은 대중투쟁의 활성화와 교류, 연대의 확장을 통해 전국적 차원에서 하나의 응집력 있는 질서로 민중운동을 조직해내는 것이다. 또한 지역적 차원에서 계급대중운동이 결합하여 공통의 체계를 구성하고 지역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몇몇 세력의 결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속적인 투쟁의 과정에서 공통지반을 형성하고 투쟁의 성과를 계급대중조직의 결합력 강화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대중적으로 토론되고 합의되는 결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진보정당은 정치세력화의 실현태로 자임할 것이 아니라 이상과 같은 과제에 복무하는 운동조직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이 특정한 정세 속에서 대중정치활동을 통해서 대중의 능동성을 고양하는 운동을 지향해야 함을 의미한다. 지난 15년의 정치세력화 과정은 당대 계급투쟁의 요구인 전선복구와 노동자 민중운동의 구심 형성을 계속 빗겨가는 과정이었다. 1987년 대선 투쟁은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의 성과를 이어나가기 위한 대응이었고, 1992년 대선 투쟁은 91년 계급투쟁의 좌절과 노동자 민중운동의 후퇴를 극복하기 위한 계획으로 접근되었고, 1997년 대선 투쟁 역시 96-97 총파업투쟁의 연장선에서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제기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전선복구와 노동자 민중운동 구심 형성의 과제는 대선 투쟁 이후 유실되었고 진보정당 건설로만 제기되었다. 이제 지난 15년의 정치세력화의 오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번 대선 투쟁이 이러한 투쟁의 출발점으로 자리 매김 될 수 있도록 하자. PSSP
현시기 대선투쟁 방향의 문제점과 민중운동이 나아갈 바 1/ 우리는 왜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대선을 향한 정치모리배들의 게임이 가시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1년부터였다. 4대 부문에 걸친 대대적인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권에게는 민생파탄의 책임자라는 비판이 쏟아졌고, 지지도는 10%대로 곤두박질쳤다. 정권은 개혁을 기치로 위기를 정면 돌파하려 하였으나, 대중들은 3년 간의 '개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에 대해 이미 온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추진된 언론개혁은 오히려 이회창의 지지도만 올려주고 말았다. 언론개혁을 통해 정권 창출의 동맹자들이었던 NGO들과 개혁주의 지식인들 일부를 재포섭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미 민심은 돌이킬 수 없었다. 2002년 민주당은 국민경선이라는 승부수를 다시 한 번 띄운다. 국민들의 정치개혁 열망을 흡수하고 민주당의 전국정당화를 도모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은 '노무현'이라는 개혁의 기수를 세워냈고, 그의 지지도는 경선 기간 이회창을 월등히 앞섰다. 하지만 노무현 돌풍은 김대중 아들들의 비리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다. 비리 정권의 개혁이라는 자기모순도 그러했지만, 국민들의 개혁 세력에 대한 지지 역시 매우 수동적인 것이었다. 이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의 대패, 그리고 내분은 한국 사회에서 개혁세력의 붕괴를 최종 선고하는 것이었다. "부패 정권 심판!"이라는 슬로건 앞에 민주당은 물론이고, NGO들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대중들은 파쇼세력의 적자, 한국의 정통 지배 정당이었던 한나라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월드컵 4강' 진출의 주역 중 하나라는 이유로, 재벌 2세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2001년부터 2002년까지의 개혁세력 붕괴 과정이다. 그리고 이는 대중들이 '개혁'에 대한 환멸을 어떠한 정치적 태도로 만들어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대중들의 보수화 경향과 이를 배경으로 한 반동권력의 수립 가능성 때문이다. 한국의 민중들은 지난 5년 간 고용불안, 노동조건악화, 노동시장유연화, 공기업 사유화, 교육의 시장화 등에 맞서 힘겹게 싸워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족하게나마 비정규직, 사유화 문제 등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이러한 성과들이 결국 재벌 대통령, 반공 보수 대통령에 대한 선택 속에서 쓸려나갈 형편이 된 것이다. 생각해보라. 김대중 구조조정의 최대 수혜자인 재벌 총수 중 한 명을, 구조조정의 고통으로 인해 김대중을 버렸던 국민들이 지지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이것은 결국 지금까지의 민중들의 투쟁을 완전하게 '특수한 집단'의 비정치적 요구로 폄하하는 과정이자, 반신자유주의 투쟁 진영을 국민들로부터 고립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87년, 92년, 97년에는 직선제, 문민정권, 권력 교체라는 자유 민주주의의 환상에 속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유 민주주의에도 못 미치는 반동적 권력 재편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개혁세력의 붕괴와 개혁에 대한 환멸이 대중적 보수화 과정으로 이어지는 최악의 조건에 처해있다. 지자체 선거 8%에 고무받은 민주노동당은 이 번 대선을 2004년 의회진출의 발판으로 만든다는 꿈에 부풀어 있지만, 이는 정세를 전혀 읽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개혁세력의 붕괴로 인한 반사 이익을 과대평가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특히 민주당의 공백을 대체하겠다는 발상, 다시 말하면 민주당 지지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겠다는 발상은 '눈앞의 득표율에 눈 먼' 자살 행위이다. 민주당에 배신당했지만 그래도 역사적 야당의 이데올로기(개혁 이데올로기)를 여전히 따르는 집단들의 표는 민주노동당의 득표율을 어느 정도 올려주겠지만, 이는 개혁에 배신당한 국민들의 또 다른 분노의 표적이 될 뿐이다. 민주노동당이 혼신의 힘을 다하는 100만 표 달성을 이루기 위해, 개혁의 기만성에 분노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운동 진영이 투쟁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국민들이 왜 개혁에 배신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혀냄으로서, 국민들의 분노가 변혁의 요구로 승화될 수 있도록 혹은 최소한 보수화로는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더욱 커져만가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고통을 시장의 논리에 따른 경쟁으로 이겨내려는 것이 아니라, 민중연대 투쟁으로 변화시켜나가려는 대중들의 의지를 더욱 키워나가는 것이다. 민중운동 진영의 2002년 대선투쟁은 민생파탄, 부패비리의 원인을 '참신한 정치인'의 집권에서 찾고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틀린 이야기이기도 하거니와 대중적으로도 민중운동 진영에 대한 불신만 키울 뿐이다. 민중운동 진영은 2002년 대선에서 2003년 이후의 투쟁을 준비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민생파탄 부패비리의 원인인 금융 세계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폭로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 민중운동 진영이 전취할 것은 개혁 이데올로기의 떡고물이 아니라, 개혁세력이 파탄난 그 곳에서 사회변혁의 정당함을 밝혀내는 우리 스스로의 당당함이다. 우리는 이러한 대선투쟁의 방향에 따라 '월간 사회진보연대'와 '사회화와 노동'을 통해 "민중경선의 조직과 민중후보의 추대'라는 전술을 제출한 바 있다. 대부분의 민중운동 진영이 이에 동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동감의 지반이 현재 수준에서 보자면 "단일후보가 득표에 유리하다"라는 수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민중 경선이 재조직된다해도 이러한 인식 지반이 계속된다면 민중경선은 '후보추대'라는 형식적 결과물 이외에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민중경선과 민중후보 추대"라는 전술은 '후보 단일화'의 문제를 넘어서 민중운동진영이 민주노동당 권영길후보의 선거운동 방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경선과 민중후보의 의미는 금융 세계화 폭로의 가장 적합한 형태이자, 2003년 민중연대 투쟁의 초석이라는 것일 뿐이다. 민중경선이 향후 어떻게 재조직될 수 있을 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2002년 대통령선거를 정면 돌파하려는 한국 민중운동 진영은 반드시 현재의 정세 속에서 우리가 주장하고 선동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정세는 진보정당의 선거 포맷에 어느새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관성'이 가장 큰 위험임을 말해주고 있다. 2/ 정책 대안인가? 민생파탄 부패비리의 원인에 대한 폭로인가? "경제 위기! 노동자 농민들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대가로 수습됐지, 김대중이 정치를 잘 해서 수습됐습니까? ........ 저 권영길은 재벌들, 부자들의 돈을 가져다가 서민들에게 나눠주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부유세를 신설하겠으며, 봉급생활자 영세상인들만 쥐어짜는 세금제도를 획기적으로 바꾸겠습니다.........우리 경제는 노동력에만 의존해서는 국제경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기술개발만이 우리의 살 길 입니다. ...저는 IT, BT 등 21세기 신기술을 비롯한 기술개발에만 전념할 수 있는 1만 명의 과학자들을 양성, 이들이 아무 조건과 부담 없이 평생을 연구에 몰두하도록 하겠습니다. 신기술을 여는 시대는 신자유주의와 형체도 없는 성과주의를 거부하는 민주노동당만이 할 수 있는 정책입니다." - 권영길 대표 민주노동당 16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문 중 민주노동당의 선거 시기 정치활동은 일관되게 구체성과 책임성을 강조한다. 반대만 주장하는 운동권이 아니라, 국정운영능력을 갖춘 정책 정당이라는 것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것이 한결같은 마음인 것이다. 97년 국민승리 21 시기를 보면 고용안정특별법, 퇴직금연금제도, 임금채권기금, 상가임대차보호법, 부패방지특별법, 매매춘방지법, 환경보전특별법, 진실규명국가위원회, 노동자 경영참가 등의 수 십 가지 법안과 제도를 제안하였고, 2000년 총선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법안과 제도들을 정책으로 제시하였다. 정책 방향도 정치개혁을 통한 부정부패 방지, 조세제도 개혁을 통한 복지증진과 빈부격차 해소, 고용안정을 위한 노동시간단축 등 법안으로 제정 가능한 정책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97년 "일어나라, 코리아", 2002년 "신 과학시대 창출" 등으로 경제 발전의 요구를 비중 있게 제시한다. 정치적 보편주의가 실종된 시대, 오직 약육강식의 시장 논리가 모든 이념을 대체한 시대, 민중들은 대안을 요구하고 운동진영은 이에 대해 많은 압박을 받는다. 민주노동당의 수 십 가지 법안과 기구들은 이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또 다른 진실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운동 진영의 '거짓말'은 대중들에게 더 큰 낙담을 안겨준다는 것, 그리고 대중들은 현실의 냉혹함에 대해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무엇보다 '경제위기가 수습되었다'는 식의 한국 경제 안정화론에 대한 인식을 버려야 한다. 현 시기 한국 경제는 세계금융시장과 초국적자본에 종속되어있으며, 세계자본주의가 구조적 위기를 겪고 있는 만큼, 그 이상으로 불안정하다. 브라질의 상반기를 보라. 한국보다 경제 규모와 국내 시장이 더 큰 브라질도 월스트리트의 협박에 바로 무너졌다. 그것도 경제적 이유가 아닌 브라질 PT 당에 관한 정치적 이유로. 한국의 국민들도 이를 잘 안다. 이미 2000년 가을에도 미국 주식시장의 기침이 한국 경제의 열병으로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였고, 국내 주식시장의 30% 이상, 주요 재벌 주식의 40-50%를 가지고 있으며, 주요 은행의 50-60% 지분을 가지고 있는 초국적 자본의 한국 경제에 대한 지배력 역시 알고 있다. 경제 위기가 단지 지연되고 있고, 한국 경제의 종속적 축적 구조가 더욱 명확해지고 있는 지금, 경제위기가 수습되었으니 무엇 무엇을 해보자는 식의 민주노동당의 정책 기조는 처음부터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로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핵심 정책은 조세 개혁을 통한 분배정책과 국가경쟁력강화 방안으로 이어진다. 민주노동당은 2002년 대선에서 가장 비중 있는 정책 중 하나로 부유세를 전면에 내세웠다. 10억 이상의 재산소유자들에게 누진적 과세를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조세로 11조 정도가 재정 충원이 가능하니, 이 돈으로 대학무상교육 등의 복지정책을 시행하겠다는 것이다.(『부유세에 대하여』, 민주노동당 정책위) 언뜻 보면 현실 가능해 보이며, 빈부격차로 인한 국민들의 현실고통을 덜어줄 듯 보인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부유세 정책은 몇 가지 핵심적인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먼저 이러한 부유세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WTO에 대해 한국 정부가 단호하게 반대해야 하며, 국내 자산 및 자본에 대한 이동을 엄격하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WTO의 핵심 의제인 서비스 협정은 교육, 의료, 기간시설 등에 대한 완전 개방과 시장 자유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정부의 지원 및 공적 서비스에 대한 규제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차례의 외환거래법 자유화와 각종 개방화 조치 이후 자산과 자본의 해외도피, 그리고 각종 국제 금융 기법을 이용한 재산은닉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본가들의 자산은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결국 부유세는 금융 세계화 시대에 대한 인식의 결여가 낳은 소극이거나, 아니면 빈부격차로 인한 대중들의 고통을 선심공약을 통해 득표로 수렴시켜보고자 한 얄팍한 술수에 다름 아니다. 빈부격차의 문제는 금융 세계화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에 핵심이 있다. 국가경쟁력 강화 방안이라고 주장한 IT, BT 등의 신 과학 육성 프로젝트는 더욱 가관이다. 신경제로 칭송되던 미국의 IT BT 산업이 금융 사기극 임은 이미 폭로되어진 바이다. IT 산업의 가치는 2000년 이후 70% 하락하였고, 그들의 수익능력은 주식 주가의 0.05%도 되지 않았다. 생명공학기업은 지난 25년 동안 수 백억 달러의 투자에도 불구하고 63개의 신약만이 개발되었다. 미국 신경제의 동력은 생산의 동력이 아니라, 금융 투기꾼들의 미래 가치 조작 능력이었다. 한국의 벤처 역시 마찬가지이다. 벤처기업이 생존하는 기반은 정부의 매년 수 조원에 달하는 벤처 지원금과 금융 기법으로 벌어들이는 돈이다. 이미 미국은 신경제의 환상에서 벗어나 전쟁 사업으로 솔직하게 나가고 있는 지금, 신과학육성을 통한 국가경쟁력 확보는 시대에 한참 뒤떨어저도 여간 뒤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신과학산업이 붕괴하는 이유는 연구자의 조건과 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 과학의 꿈이라는 것이 금융 세계화의 신기루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이러한 금융 세계화 시대와 한국 사회에 대한 인식의 결여를 문제삼은 것은 이들의 정책 대안이 그들만의 정책 대안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민주노동당은 국민들에게 민중운동 진영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 민주노동당의 무지와 기만은 개혁세력의 배신과 개혁의 기만에 대한 분노로 보수화 되고 있는 대중들을 더욱 보수화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데 큰 문제가 있다. 그렇다면, 2002년 대선에서 민중운동 진영은 어떠한 주장과 희망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 WTO 세계화 반대! 금융 제국주의와 정치모리배들에 대한 심판!" 과 이에 대한 표현으로서 민중후보에 대한 지지를 주장해야 한다. 민중운동 진영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 민생파탄의 원인에 대한 대중적 합의이지, 금융 세계화 시대의 단절 없이는 불가능한 정책 대안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다. 현 시기 민생파탄의 주된 양상은 노동의 불안정화, 그리고 빈곤과 금융자본의 가계금융 공략으로 인한 가계파산 문제이다. 세련된 개혁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자본주의 황금기의 슬로건인 "고용. 성장. 분배"를 이야기한다. 민주노동당의 위의 정책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고용 증대로 수요를 진작하여 성장의 원동력을 만들고, 분배를 통해 시장 외적 개입을 한다는 공식은 이미 70년대 후반에 국가 재정 악화와 금융 자본의 세계화로 파탄난 정책이다. 그리고 아예 민주노동당 식으로 고용, 분배, 성장을 분리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케인즈주의에도 미달하는 정책이다. 우리의 대답은 하나밖에 없다. 금융 세계화 시대를 넘어서지 못하고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빈곤은 극복 불가능하다' 라는 것이다. 고용 없는 성장, 주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금융자본의 운동. 투기와 약탈을 일삼으며 세계를 떠도는 초국적 자본에 의한 빈곤의 극대화는 이미 자본주의 스스로가 경계할 정도로 무정부적이고 파괴적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적 위기 속에서 운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재의 자본주의이다. 금융 제국주의의 정책에 대한 반대의 의미로서 'WTO 세계화 반대', 분명한 적에 대한 표현으로서 '금융 제국주의와 정치모리배들에 대한 심판'. 민중들 모두가 이미 경험하고 있지만 구체적 인식과 저항의 표현에 이르지 못한 금융 세계화 반대를 분명히 하는 것이 바로 대안을 요구하는 민중들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자본주의 반대의 정세적 표현이다.) 3/ 지지 유권자의 확대인가? 민중연대 전선의 재구축인가? " 2001년 김대중 정권 퇴진 투쟁은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의 구속 앞에서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2002년 발전파업은 4월 2일 어이없는 합의문으로 박살났습니다. 510일 간의 한통계약직 노동자 파업은 눈물의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민주노동당은 2002년 6월 지자체 선거에서 8%라는 정당 지지율을 획득했습니다. " 민주노동당의 지난 6월 지자체 선거에서의 득표율은 상당부분 김대중 아들 비리와 민주당의 붕괴에 따른 반사이익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이러함에도 진보정당이 표방하는 신자유주의 반대의 일반적 요구들, 고용안정, 비정규직 차별 철폐, 복지증진 등이 대중들로부터 일정한 지지를 이끌어내었다는 점 또한 확인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정당 지지도가 꾸준하게 4-5%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단적인 증거이다. 그러나 문제는 2001년에서 2002년까지의 투쟁의 패배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지지가 늘어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가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반대의 내용에는 공감하는데 이를 의회 등의 국가 기관에서 합법적으로 실천할 것을 바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뜻이거나, 전국적 투쟁의 패배로 그저 민주노동당에 대해 지지가 유일한 실천방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민중운동 진영의 미래에 좋은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경향은 당내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2002년 지자체 선거에서 반공 노동운동, 합법적 노동운동을 표방하는 인물이 울산시장 선거 후보로 선출되는가 하면,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금기시 되어 왔던 사민주의라는 표현이 공공연하게 이야기되고, 민중연대 보다는 합법적 정책 활동에 주력할 것을 요구하는 당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합법주의 선거주의 경향의 심화는 민중운동 진영이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꼴이다 왜냐하면 금융 세계화에 종속되어 있는 한국 자본주의에서 대중권력의 실질적 힘의 행사 없이는 조그만 변화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유연화, 사유화 등은 신자유주의 전망만이 유일한 대안이라 생각하는 한국 사회 정리 모리배들의 절대적 신념이다. 특히 한국의 정치모리배들이 초국적 자본의 철수 위협과 독점재벌의 요구, WTO, IMF 등의 국제무역기구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도하지 못할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운동 진영이 무엇보다 주력해야 할 것은 집권의 15년 후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연대전선을 강화하여 금융세계화 정책에 실질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어차피 국회의원 몇 명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대중자치권력과 민중연대전선에 기반하지 않은 집권 역시 어떠한 힘도 보장하지 못한다. 브라질의 PT당을 보라. 40% 이상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IMF와 월스트리트에 각서를 쓰고, 그것도 모자라 자유당의 대표를 부후보로 지명해야 대통령이 될 수 있을 판이다. 물론 민주노동당도 대중자치권력과 민중연대전선의 필요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의 운동 양식이 대중자치권력과 민중연대전선을 실천적으로 부정해나간다는 것이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를 보자.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오직 하나, 민주노총의 정당 민주노동당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조합은 노동사업을, 정당은 정치사업을! 자치란 스스로 통치할 능력을 배가한다는 것인데, 노동조합 운동 속에서 부르주아 정치 비판과 자신들의 정치를 경험하지 못하고, 다양한 저항세력과 연대하며 투쟁하는 자들의 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하고 어떻게 자치권력을 강화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건설된 연대투쟁체 전국민중연대(준)에 대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태도를 보자. 민주노총은 민중연대를 노동자 투쟁의 지지부대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며, 민주노동당은 아무런 힘을 실지 않고 있다. 이들의 이러한 경향은 범민중후보 단일화를 위한 범국민추진기구구성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났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범추를 민중연대전선의 강화를 위한 조직이 아니라, 사회당과의 통합 후보 선출을 위한 도구적 조직으로 만들어내었다. 범추를 해소할 때의 근거도 사회당이 참여 의지가 없다는 것이었고, '사회진보연대'와 '노동자 힘'의 경선 제안에 대한 논의 근거도 사회당의 참여 가능성에 맞추어져 있다. 사회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이 민중연대의 중심이 아닌 마당에야, 이것이 가장 중요한 판단 조건이 될 이유가 있는가? 이들은 대선투쟁에서 투쟁하는 민중들에게 자치와 연대를 경험을 돌려주는 것의 함의를 사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여전히 민주노동당을 지지할 유권자를 확보하는 것뿐이다. 민중운동 진영은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들이 자치와 연대를 경험하게 하는 것에 중요한 방점을 찍을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투쟁의 패배와 빈곤 속에서 극도로 위축되어 있는 대중들에게, 연대로 풍요로워지는 저항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자신들의 정치를 경험하게 하는 것은 이들을 능동화하는데 그 어떤 방도보다도 좋은 약이 될 것이다. 특히 2002년 개혁세력의 붕괴와 대중의 보수화-실리화라는 조건 속에서 이는 그 어느 시기보다는 절실하다. 진보정당에 대한 관성적 지지가 이러한 것들을 충족시켜줄 수 없음은 명약관화하다. 우리가 제안한 민중경선은 바로 대중들에게 자치와 연대의 경험을 쌓게 하자는 취지이다. 또한 민중경선으로 논쟁하는 가운데 2002년 노-농 연대투쟁을 당위적 연대가 아닌, 정치적 교류 속에서 더욱 풍부해지는 연대로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반WTO 투쟁을 민중연대 항쟁으로 만들어나가고, 그 힘으로 2002년 대선투쟁을 WTO 세계화 반대! 금융제국주의와 정치모리배들에 대한 심판의 장으로 만들어나가자는 것이다. 2002년 대선에서의 득표율에 목을 맬 것인가? 아니면 다각화 된 계획 속에 2002년 대선을 새로운 투쟁의 시발점, 민중연대 전선의 재구축 계기로 만들 것인가? 민중운동 진영의 선택이 필요하다. 4/ 나아가며: 분노를 모아 행동으로, 요구를 모아 변혁으로 ! 문제는 의외로 간단하다. 2002년 대통령선거를 '계획'으로 돌파할 것인가? 아니면 한 표의 '의무'로 치를 것인가? 우리의 계획은 민중경선으로 논쟁과 정치적 교류의 장을 만들고, 이 조건 하에서 농민투쟁을 실질적 노농연대투쟁, WTO 세계화 반대 투쟁으로 만들어, 대통령 선거를 현 시기 민생파탄의 원인인 금융 제국주의와 정치모리배들에 대한 심판의 장, 위기 폭로의 상징인 민중후보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연대투쟁의 축제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민중연대 전선 재구축의 기반을 만들자는 것이다. 대중들의 분노가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정세에 숨어있다. 극한의 민생위기 속에서 위축되고, 개혁에 배신당해 정치에 환멸하고, 투쟁하는 민중들이 승리하는 희망을 만들지 못한 것. 이에 대한 해결책은 민중운동 진영이 경선을 통해 단결하며, 교류의 풍요로움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것. 그리고 노-농 연대투쟁을 WTO 세계화 반대 민중연대 항쟁으로 승화해 거리의 정치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저항이 변혁으로 나아가지 못함 역시 현재의 민중운동 진영 속에 숨겨져 있다. 기만적 정책 대안과 실리적 투쟁 속에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우리 스스로 은폐하였던 현실이 그것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2002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운동 진영이 현시기 위기의 원인이 금융 제국주의와 정치모리배들에게 있음을 가감없이 폭로해나가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문제의 해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그들이 말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정지영 | 정책부장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담(World Summit on Sustainable Development, 이하 WSSD)의 개막과 끝 지난 8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세계정상회담이 열렸다. 전 세계 189개국 정부 및 NGO 대표단 6만여 명이 참석한 이 회의는 시작 전부터 '지구촌 최대의 환경회의'라 불리며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아프리카 남단의 한 나라가 9일동안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매일같이 거리에서 NGO들의 반세계화 시위가 열렸다. 규모도 규모지만, 회담이 다루는 내용도 마치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만큼이나 광범위했다. 회담 시기 진행된 회의만 해도, 지방정부회의, 기업가회의, 남성·여성회의(Gender Summit), 청소년회의, 의사회의, 원주민회의, 노동계회의 등 본회의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의제별, 분야별 회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최대의 규모와 광범위한 내용이 무색하게 이번 회담은 시작부터 삐그덕 거렸다. 세계 최강국이자 환경오염 및 불평등의 가장 큰 책임자인 미국의 부시대통령이 불참을 선언했으며, 따라서 이번 회담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강제력을 가질 것인지가 불투명해졌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미국과 유럽연합, 개도국들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에너지와 농업보조금 등의 문제로 팽팽하게 맞서기도 했다. 다임러크라이슬러, 휴렛 패커드, 도요타 등 세계 유수의 초국적 기업들은 회의에 후원상품 제공하랴, 기업 설명회 개최하랴 회의 내내 가장 바쁜 사람들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평가가 쏟아져 나왔다. 각 국 정부 대표들은 주로 회의가 '성공적'이었으며, '옳은 방향을 지향한 진보(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라 평했다. 그러나 이번 회담에 직접 참가해 의견을 개진했던 여러 NGO들은 '최고의 실패작', '부끄러운 협상을 한 세계정상회의(the World Summit of Shameful Deals, WSSD)' 등 최악의 평가를 내렸다. 대체에너지 사용비율 목표치 설정시한이 누락된 점 등 이행계획에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과 이행 시안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회의는 미국의 책임회피와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적 협상, 초국적 기업들의 기업 홍보가 난무하는 추악한 자리였음이 공통된 평가인 듯 싶다. 그렇다면 이것이 새삼스러운 일인가? WSSD, 더욱 악화되는 지구환경의 역사 20세기 말, 지구 자연환경 훼손이 더 이상 인간 생활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가 되고 있음을 경고하는 학계의 발표에 따라 1972년 스톡홀름에서는 유엔 주최의 유엔인간환경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인간의 경제활동에 의해 발생하는 공해와 오염의 문제를 범 지구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한 스톡홀름선언을 채택했으며, 유엔기구로 '유엔환경계획(UNEP : 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스톡홀름 회의 이후 대기 및 해양오염, 기후변화, 오존층과 산림의 파괴, 생물의 다양성 파괴 등 지구환경문제는 오히려 더 나빠졌다. 1992년, 스톡홀름 회의 20주년을 기념하는 유엔환경개발회의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100여 개국의 정상을 포함, 178개국 대표단이 참석한 이 회의는 지구온난화, 대양오염, 산림보호, 동식물보호, 기술이전, 인구조절, 환경을 고려한 자연개발 등 7가지 주요 의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환경과 개발에 관한 27개의 원칙을 담은 리우 선언을 발표하고, 지구온난화 방지와 생물종 보호를 위한 기후변화협약, 생물다양성협약, 산림원칙선언 및 지속가능발전 행동프로그램으로 의제21(Agenda21)을 채택했다. 의제21은 지속가능발전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경제·환경 3가지 핵심 분야별 구체적 실천계획을 담고 있다. 유엔을 비롯한 참가국의 대표단들은 이 회의 자체만으로 커다란 성과라 평가했다. 하지만 그 후 10년, 지구의 환경문제는 점점 나빠지고 있을 뿐이다. WSSD는 리우 회의 이후 10년을 평가하고, 의제21 및 리우선언의 이행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회의라고 한다. 그렇다면 스톡홀름 회의와 리우 회의의 뒤를 잇고 있는 WSSD 이후 10년은 또 어떨까? 이전 두 회의가 모두 그랬듯, 실질적인 성과는 별로 없이 '환경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며 또 다시 WSSD 10주년 기념 국제회의나 열고있지는 않을까? 이 말이 단순한 비아냥거림은 아니다. WSSD 선언이 아무런 실천 계획도 수립하지 못한 채, 정치적 수사로만 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패는 뻔한 것이었다. 환경을 미끼로 벌이는 정치적 협상 "참가국들이 환경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앞세운 정치적 타결을 하는 바람에 국내 산업에 미치는 즉각적인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는 동아일보의 보도는 이번 WSSD가 정치선언을 발표하기 위해 벌였던 각종 협상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유엔이 2000년에 WSSD 개최를 상정한 이후, 4차례 진행했던 준비회의(Prepcom)에서 큰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발전'을 둘러싼 것이었다. 이미 지난 수세기 지구의 자연자원을 마치 제것인양 사용하며, 고도 발전을 구가했던 선진국과 이런 선진국의 약탈 속에서 발전의 기회를 박탈당했던 저발전국 사이에 대립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개도국 모임인 77그룹은 선진국들에게 폭넓은 시장접근, 농업보조금 삭감, 개도국에 대한 원조 확대를 요구하며 '환경'을 미끼삼아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에 대한 협상에 나섰다. 즉, 이미 온갖 자연자원을 착취해 성장을 이룬 선진국들이 지금에 와서 '환경보존'을 이유로 개도국들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는 다른 조치들을 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미국과 유럽연합 등 선진국들은 지난 해 WTO 협의에서 다뤄진 내용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러한 갈등은 회의 내내 여러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서 계속 되었다. 빈곤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 유럽연합 사이의 입장 차이, 대체에너지 사용을 둘러싼 산유국, 개도국, 그리고 다른 국가들 사이의 첨예한 의견 대립 등이 회의 기간 내내 언론을 장식했다. 결국 회담은 세계화와 공적개발원조 제공 문제, 대체에너지 공급 비율 확대와 빈곤 퇴치를 위한 연대기금 조성 등과 같은 주요 사항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을 수립하지 못한 채, 이해당사자들의 이해를 조정하여 최소한의 정치적인 내용만을 담을 선언문을 채택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거대 기업들의 이미지 제고를 위한 선전장 전세계 많은 언론들은 이번 WSSD가 세계적인 초국적 기업들의 '잔치'가 되었으며, 이들은 그 어느 국제회의에서보다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그동안 제3세계 국가들의 환경 및 자원 착취의 선봉이라 비난받아왔던 초국적 기업들은 '친환경적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다분히도 노력해왔다. WSSD는 어떻게 하면 환경운동단체들의 거센 비난을 피해서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만들까를 고심하는 초국적 기업들에게 아주 좋은 홍보의 장을 제공했다. 유엔의 수전 마컴 대변인은 인권개선과 환경친화적 경제성장이라는 "우리의 기본가치에 기업들이 동참해주길 바란다"면서 "그들과 힘을 합치지 않으면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말했다. 유엔이 깔아준 이 좋은 자리를 기업들이 놓칠 리 없다. 그들은 WSSD의 정보통신 장비, 운송수단, 기술 부문을 제공했고, WSSD 기간 내내 회의장 근처에 전시관을 열어 놓고 기업 홍보에 열을 올렸다. 초국적 기업들은 엄격한 환경기준을 준수하고 있다는 결과를 발표하거나 하천정화, 나무심기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며, 녹색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색내기조차 제1세계에 속해있는 자국에서나 보여주는 일이다. 거세지는 자국 환경운동단체들의 압력에 못이겨 기업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진행하는 사업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자국의 엄격한 환경기준을 피해 대량의 산업 폐기물과 유독물질을 제3세계 국가들에서 처리하는 것이 이들의 실제 모습이다. 이들은 또한 제3세계 국가들에 공장을 세워 마구잡이로 벌채와 개간, 자원착취를 진행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일본의 여러 기업들은 필리핀 목재 채취량의 70%(이 대부분이 불법이다)를 차지하고 있다. 초국적 기업들이 환경문제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 WSSD는 거대 기업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한 판에 불과했던 것이다. WSSD, 예정된 실패 이미 지구인구의 절반 이상이 더 이상 유지 불가능한 환경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배제된 땅 아프리카의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 변화로 죽어가고 있다. 남미와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약간 나을 뿐이지 상황은 마찬가지다. 전력 산업 민영화, 탄광 개발, 댐 건설, 해양자원 개발 등의 이름으로 제3세계 국가들에 투자하는 초국적 자본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무책임하고, 무자비하게 환경을 파괴한다. 이들은 산림을 파괴하고, 농지를 훼손하며, 야생동식물의 서식처를 박탈한다. 이 과정에서 배출되는 각종 오염물질은 강물, 바다, 공기를 오염시킨다. 제3세계 국가들 대부분이 외채에 허덕이거나 저개발 상태이므로, 초국적 기업들이 자행하는 이 모든 파괴와 오염은 외국인 투자라는 명목으로 규제에서 제외된다. 제3세계 국가가 초국적 기업들의 환경 파괴를 두둔하고 보호해주는 역설이 일어나는 것이다(제3세계 엘리트들에게 제공되는 리베이트가 있음은 물론이다.). 이 속에서 각종 질병에 노출되고, 삶의 터전이 황폐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은 제3세계 민중들이다. 또 한 가지. 전 세계 20%도 안 되는 사람들이 지구 자원의 80%를 소비한다. 전 세계 40%에 달하는 사람들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원조차 소비하지 못하고 산다. 전자가 북반구,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 세계 20%의 사람들이 환경을 오염시키는 이산화탄소, 폐수, 각종 쓰레기의 대부분을 배출하고 있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에게나 같은 의미의 '지속가능한 발전'의 길을 제시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망상이다. 게다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의미도 참가국들마다, 참가주체마다 상이하게 해석하고 있다. 초국적 기업들과 선진국들에게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자본의 팽창과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발전 모델을 의미하며, 이번 회담은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초국적 기업들과 선진국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희망을 걸었던 수많은 민중들의 기대는 무참히 깨졌다. 결국 전 인류가 함께, 미래세대를 위해 지구를 보존하며 발전하는 길을 모색한다는 '지속가능성'의 의미 따위는 이익에 눈 먼 자본의 논리 앞에 너무나 무기력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무엇이 남아있는가? 환경과 지구를 협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많은 국가들과 초국적 기업에게서 답을 바랄 수 있겠는가? 결국 해답은 민중들 스스로 우리의 삶의 터전인 지구와 환경을 보존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연대하고 싸우는 것에 있다.
1905년과 레닌의 전환 레닌은 자신이 제출한 테제의 독창성을 정확히 깨닫고 있었다. 실제로 레닌은 인용한 편지의 서두에서 볼셰비키 독자들에게 두 차례나 경고했다. 자신의 테제가 의심할 여지 없이 놀라움을 불러일으킬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자신의 착상을 완전하게 개괄해야 했다고 말이다.58) 더욱이 지나가듯이 언급한 것이지만, 같은 곳에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이미 심대하게 변해버린 역사적 계기에 쓰여졌던 것이라고(레닌은 1907년에 이 지점으로 복귀할 것이다) 말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레닌은 소비에트가 비록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그들 중 일부는 사민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에 의해 자생적으로 창조되었지만 혁명적 기관이고 따라서 당만큼 필수적이라는 견해를 분명히 설명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의 힘으로 노동조합주의보다 훨씬 멀리 나아갔다. 사실상 그는 소비에트를 임시 혁명 정부의 맹아로 보았다. 이 기관들이 선험적으로 사회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조리할 것이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는 소비에트 안에서 반드시 허용되어야 하는 다른 혁명적 분파들과의 끊임없는 변증법을 통해 스스로의 테제를 전달하려 노력하면서 소비에트의 근본 원리를 따라야 한다. 따라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우리는 다른 혁명적 인민들로부터 스스로를 폐쇄하지 않고, 우리가 취하는 모든 행보와 결정에서 그들의 판단을 따른다. 우리는 오직 노동대중 자신들의 자유로운 주도권에 전적으로 의지한다."59) 이 테제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낡은 관점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게다가 레닌은 자신의 새로운 시각이 십중팔구 너무 조급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주로 간접 정보를 참고하였기 때문이다), 편지의 출판 여부를 편집자들에게 위임하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따라 노선을 정한 바 있고 그에 입각하여 소비에트 가담을 반대했던(소비에트가 자생적이고 비(非)-당적인 기관인 한에서) 볼셰비키 신문은 편지를 출간하지 않았고, 그 편지는 1940년이 되어서야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향은 있었는데, 왜냐하면 볼셰비키 분파가 결국 레닌주의적 지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레닌 자신의 경우, 1906년과 1907년을 경과하면서 혁명적 수준까지 자생적으로 상승한 대중들의 능력과 어우러지면서 그는 소비에트 기관의 혁명적 특성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1906년의 소비에트 경험을 평가하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것은 어떤 이론도, 누군가의 재능이나 혹자에 의해 창안된 전술에의 호소도, 당의 교리도 아니고, 비-당적 대중기관이 봉기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스스로를 봉기의 기관으로 전환하게끔 이끌었던 상황의 힘이었다."60) 그러므로 대중들은 당의 매개 없이 사건들의 힘을 이해했던 것이다: 소비에트는 전제정에 맞서 (자생적으로 발전한) 혁명적 봉기의 기관이었다. 두 달 후 레닌은 그러한 판단을 되풀이했다: "조직의 지도부들을 뛰어 넘어 대중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이 파업에서 봉기로 발전했다. 이는 1905년 12월에 러시아 혁명이 획득한 가장 거대한 역사적 성과다; 그리고 모든 선행하는 성과들처럼 막대한 희생의 대가가 지불됐다. 운동은 일반적인 정치파업에서 더 높은 단계로 상승했다." 계속 이어진다: "12월 당시 사회민주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인 우리는, 병력 배치를 어설프게 한 나머지 그 대부분이 전투에 능동적으로 가담하지 못하게 한 총사령관 같은 꼴이었다. 노동대중들은 단호한 대중행동을 위한 지도를 요구했으나 이를 받지 못했다."61)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개의 전술}에서 대중의 자생적인 혁명적 능동성으로 정의된 것과 지도의 무지 사이에 분명한 단절이 있음을 발견한다: 빠져 있던 것은 자생적인 혁명적 대중의 능동성이 아니라 지도였다. 즉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지도가 자생적으로 노동조합주의적인 대중에게 혁명의 길을 보여준 데 반하여, 여기에서는(레닌의 판단에서 뿐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자생적으로 혁명적인 대중이 노동조합주의 밖에 예견하지 못한 나머지 상황에 대처하지 못한 지도자들에게 혁명의 길을 가리켜 준 것이다. 요컨대 1905-06년에 러시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제공한 강렬한 자극으로 인해, 레닌은 발본적으로 다시 사고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입장의 기본 요소는 다음과 같다: (a) 당은 대중들의 혁명적 의식을 독점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당의 외부적 개입과는 독립적으로 스스로의 자율적 혁명 역량을 갖고 있다(사실 소비에트와 같은 몇몇 경우에는 대중이 당을 이끌었다). 대체로 당과 대중들 사이에는 의식 수준의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b) 따라서 비-당적이고 "자생적인" 기관인 소비에트는 당만큼의 중요성을 가지는 새로운 혁명적 권력의 맹아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다른 혁명적 분파들을 배제한다거나 소비에트가 사회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를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지 말고 소비에트에 단단히 결합해야 한다. (c) 소비에트에서 당은 대중들 위에 관료적으로 군림할 수 없으며, 끊임없이 대중들의 판단에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주도권에 스스로를 근거지우려는 자유로운 변증법을 받아들여야 한다.62) 동시에 경제 투쟁에 대한 레닌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최소한 혁명적 시기에는 경제 투쟁을 계급 의식 획득의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요소로 인정하는 것이다.63) 당의 조직과 내적 구성에 관해서도 변화가 있다: 이제 레닌은 당 내에서 융통성 있고 민주적인 구조를 옹호하고,64) 회색 빛의 지적 도식을 구체적 생활로 전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기층 당원으로 대거 유입하고자 노력한다.65) 결국 레닌의 희망은 당 위원회 지식인 한 명 당 적어도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66) 분명 이는 이론적, 정치적, 노동조합적, 조직적 차원, 즉 모든 차원에서의 발본적 전환이었다. 레닌의 전환의 결과: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실질적으로 철회하다 1907년에는 성공하지 못한 혁명의 퇴조가 아주 분명해졌다. 이 기간 동안 레닌은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일련의 극히 흥미로운 저술들을 출판했다. 무엇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1905년과 1906년 사이에 당 내부적으로 조직적 전환이 있었다. 목표는 명백히 당에 뚜렷한 프롤레타리아적 형상을 부여하고 당을 직업적 혁명가의 협소하고 음모적인 조직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엄격하게 통합되어 있는 조직으로 전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은 피로와 혁명의 퇴조 등과 같은 몇 가지 요소들로 인해 촉진되었는데, 레닌은 이미 1907년67)과 1908년68)의 다양한 계기 속에서 이를 감지한 바 있다. 사실 이 기간 동안 부르주아 출신의 지식인들은 당을 떠났다. 반면 진정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인 인자들은 당에 굳건히 뿌리내렸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 숫자나 비율 면에서 성장했다. 이리하여 쁘띠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신뢰할 수 없고 동요하는 면모들은 가일층 폭로되었는 바, 이는 1905-06년의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창발성과 퇴조기에도 이어지는 새로운 전투적 노동자들의 출현과 날카롭게 대비되었다. 1895-1907년 기간 저작들의 모음집 서문 격으로 1907년 중반 무렵에 출판된 레닌의 저작 {12년}은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 저작은 거의 전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헌정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레닌은 한층 명료해지고 이전 시기의 전환을 반복하는 일련의 입장을 취한다: "현재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기본적인 잘못은 팜플렛을 우리 당 발전의 명확한, 그리고 지금으로선 오래 지난 시기의 구체적인 상황과 연관시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1901년과 1902년의 {이스크라}의 전술 및 {이스크라}의 조직적 방침에 대한 요약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닌 "요약"이었다."69) 이러한 논의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나는 2차 대회에서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주어진 나 자신의 정식들을 "강령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거나 특수한 원칙들을 대체하려는 어떠한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70) 같은 페이지의 앞 부분에서 레닌은 협소하고 종파적인 써클의 시대는 끝났고, 조직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민주적-프롤레타리아적인 특징의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했다. 요컨대 자생성과 의식성의 관계에 관해 종종 "완전히 유리하고 정확한 방식으로는 정식화되지 않은 ... 표현들"을 사용했음을 인정하는 것을 비롯하여,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당과 조직의 일반 이론을 제공했다는 견해를 분명하게 거부했다. 그것은 심지어 러시아의 경험에 관해서도 일반화될 수 없고, 다만 1901년과 1905년 혁명 사이의 보다 선진적인 사회민주주의가 추구한 전술과 관련될 뿐이다. 게다가 레닌은 특히 그 저작에서, "자생적으로 투쟁에 가담하는 객관적으로 혁명적인 계급"이 있을 때 비로소 조직은 의미를 갖는다고 몇 번씩이나 강조했음을 언급했다. 이 계급은 "노동자 계급으로, 이들 중 최량 분자들이 사회민주주의를 창안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스크라} 구성원들이 수행한 유일한 적극적 역할은 사회민주주의적 써클들의 능동성을 집중시키기 위해 짜르의 탄압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해외의 중심을 구성한 것이었다.71)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레닌 자신의 해석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분명히 앞서 지적된 것처럼 이 저작에서 그는 전형적으로 러시아적인 상황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경제주의를 격퇴할 필요성이 러시아적 수준과 함께 일반적 원칙의 수준에서 정당화된다는 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은 필요성은 정통으로 여겨진 것을 방어하기 위해 수정주의에 맞서 투쟁하던 시기에 깊이 공감되었던 것으로 이에 따라 누구든 손쉽게 [일시적] 전술에서 [일반적] 전략과 원칙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이 경제주의를 수정주의와 비교하고, 카우츠키를 인용하여 (완전히 동의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수정주의에 맞선] 정통파의 공식 후견인이었던 카우츠키는 러시아의 특수한 상황이나 전술의 차원이 아니라 원칙의 차원에서 자생성과 의식성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에 접근했다. 요컨대 레닌이 카우츠키의 일반적 원칙들을 러시아 상황에 적용했던 것은 그것들이 "경제주의자들"을 폐점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1902년에 레닌은 1907년에 썼던 것과 달리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최량 분자들로 만들어진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는 카우츠키의 일반적 주장이 "근본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이론과 조직은 프롤레타리아트 외부에 있는 지식인들에 의해 가공되어 대중들에게 외부로부터 의식성을 도입한다. 레닌에게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노동자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을 다루는 사소한 부분이었는데, 하지만 이들은 항상 노동자가 아닌 지식인으로 간주되었다. 1904년과 1907년 사이에 레닌은 러시아 계급 투쟁의 심원한 역사적 변화(소비에트의 발생)로 인해,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들이 근본적으로 유지불가능하며 (따라서 그것을) 철회할 필요가 있음을 깨달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내부의 전술 때문에(멘셰비키와 "인텔리주의"라는 그들의 비난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레닌이 자신의 테제들을 공개적으로 정정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랐다. 이 때문에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해석"을 통해 한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제출된 전술(처음에는 심지어 멘셰비키도 유보 없이 지지하였던)의 유효성을 반복하면서, 다른 편으로는 그 저작에서 모든 일반적 유효성을 박탈하였다. 그것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역사에서 완전히 지나간 단계로 격하시킴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고 극히 적절하다: 1907년에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보편적으로 유효한 원칙으로 지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 이 기간 동안 그는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해 겉보기에 모순적인 몇 가지 시각을 견지했다. 사실 멘셰비키와의 논쟁에서 그는 사회민주주의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정으로 계급-의식적이라는 진술을 반복했다72)(이는 위험한 입장인데, 비록 "외부적" 의식성을 언급하지 않음으로 인해 이러한 입장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멘셰비키 쪽에서 나타나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병적인 숭배에 대항하는 논쟁의 맥락에서 보자면, 레닌에게 이런 주장은 다만 관례에 따른 논쟁적 엄호 사격에 불과하다. 사실 논쟁을 발전시키고 결론 내린 그 이후의 논문에서 그는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기관의 경험으로 이해된 소비에트 경험에 대한 포괄적 평가를 내렸다. 그것은 그의 1905년 판단을 반복하는 것인 동시에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1917년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이미 선취하는 것이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유사한 제도들은 실질적으로 봉기의 기관이다... 봉기가 전개된 이후에야 이들의 발단이 하찮은 것 따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거대한 착취였음이 밝혀진다. 투쟁이 새롭게 고조되고 그같은 단계로 이행하면, 그같은 제도들은 물론 필수적이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적 발전은 반드시 ... 혁명적 권력의 맹아적 기관들(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바로 이런 것이다)을 혁명적 권력의 중심적 기관들로, 혁명적인 임시 정부로 전환하는 데 ... 있어야 한다."73)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한 1907년부터 1917년 기간 동안 레닌의 사상에 근본적 변화는 없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더 이상 이 주제에 관한 체계적 저술을 남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 소비에트를 광범위하게 다루지도 않을 것이다. 1917년 1월 새로운 혁명적 폭풍의 전야에 레닌은 회의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1905년 혁명에서 소비에트의 중요성을 (비록 약간의 주의를 두면서도) 실질적으로 되풀이했다: "전투의 시련 속에서 독특한 대중조직이 형성되었다. 각 공장의 대표자들에 의해 구성된 저 유명한 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몇몇 도시에서는 이 노동자 대표들의 소비에트가 점차로 장차의 혁명 정부의 역할, 봉기의 기관과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74) 이렇듯 소비에트가 재출현하게 되는 시점 직전에 레닌이 그것의 혁명적 성격을 반복해 말했던 것이다. 1917년의 레닌: 소비에트와 {국가와 혁명} 위에서 언급한 회의가 있은 지 몇 주 후, 대중들의 자생적이고 예측하지 못한 행동의 결과75)인 혁명은 전제정을 전복하고 소비에트를 다시 세웠다. 이 사건의 막대한 중요성을 완벽하게 이해했던 레닌은 망명지 스위스에서 볼셰비키에게 맹렬한 편지 세례를 퍼부었다. 두 번째 편지에서 레닌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내에서 소수파에 불과했던 상황에서도 저 유명한 슬로건을 선포했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76) 분명히 레닌은 소비에트에서 당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이는 오직 소비에트 대중들을 전취하는 당의 지혜와 정치적 역량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었다. 1905년 당시처럼 그는 소비에트가 근본 원칙에 관해서 볼셰비키의 사회민주주의적 강령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당에 어떤 제도적 특권도 부여되지 않더라도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로 즉각 이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맥락에서 당은 단지 소비에트 체계의 한 요소일 뿐이며, 비중이나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자유로운 합의를 획득해야만 했다 ― 대중들을 지도하고 계몽하는 "역사적 권리"를 스스로 참칭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1917년에 레닌은 대중들의 창발성이 만들어 낸 소비에트의 근본적인 혁명적 중요성을 되풀이했다.77) 그러나 1917년의 가장 중요한 문건은 {국가와 혁명}이다. 여기에서 레닌은 당이 특권적인 정치적 지위를 부여받지 않고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의 운영자로 지명된(그리고 즉각적으로 그것에 책임을 갖는) 이들을 직접적이고 지속적으로 임명하고 소환하며 통제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정했다.78)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이 도식을 제출할 때에 레닌은 파리 꼬뮌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비록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전위(마르크스주의적 분파)가 파리 꼬뮌의 경험에서는 부재했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파리 꼬뮌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최초의 역사적 사례로 인정했다. 물론 그들은 꼬뮌의 우유부단함과 비극적 패배의 한 원인이 된 (중앙)집중화의 부재를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의식성의 유일한 담지자인 하나의 당이라는 소수의 제도화된 지배를 문제의 해결책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쿠겔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마르크스는 엄격한 의미에서 꼬뮌을 위해 보더라도 중앙위원회가 너무 빨리 해산했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중앙위원회는 내전의 급박한 결정에 더 적합할 수 있는 보다 조직된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는 단연코 스스로를 역사적 권리에 의해 전위로 공언하는 유일당의 제도적 표현은 아니었다.79)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기대했던 것은 단지 모든 프롤레타리아 구성원들의 표현이면서 동시에 내전 와중의 과도적인 체제 아래서 요구되는 급박한 행정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을 아직 갖고 있는 기관이었을 뿐이다. 레닌은 이 접근과 단절하지 않았고, 그의 예견은 파리 꼬뮌의 도식을 완전히 되풀이한다.80) 게다가 17년 9월에 발효된 슬로건 "볼셰비키는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는 우리의 테제와 모순되지 않는다. 이 슬로건을 선포한 편지에서 레닌은 분명히, 권력 획득의 시점까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장치의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의 이해를 볼셰비키가 대변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볼 때 4월 테제와의 단절보다는 연속성이 있다. 소비에트는 여기에서(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첫 번째 국면에서도) 당의 도구로 여겨지지 않는다.81) 또한 카우츠키와의 1918년 논쟁에서 (여전히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로 여겨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맥락에서 (당이 아니라) 소비에트의 중심성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82) 1919년 초기에 레닌은 노동조합 2차 대회(1919년 1월)에서의 극히 중요한 연설에서 또다시 전술한 중추적 개념을 반복한다: "하지만 지금, 바로 지금, 정치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권력이 이양된 이후인 지금, 하나의 계급이라는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광범한 조직인 노동조합이, 아주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정치적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며, 말하자면 정치적 기관의 수장으로 나설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이 때문에 정치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이양되었을 때 노동조합은 점차적으로 노동-계급 정치의 건설자라는 임무를, 자신들의 계급적 조직을 통해 낡은 착취자 계급을 대체하는 인민적 임무를 떠맡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학자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너희가 경제적 임무를 돌본다면, 부르주아지의 당은 정치를 돌볼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잘 드러나는 구래의 과학의 낡은 전통과 편견들을 뒤집어 놓았으니 말입니다."83) 다시 반복된다: "이러한 연계 속에서 노동조합은 근대적 공산주의의 창시자들이 얘기했던 심오하고 유명한 말들을 아주 진지하게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에서 혁명이 더 넓고 더 깊게 진행될수록, 혁명을 만드는 사람들, 진정한 의미에서 혁명의 창조자인 인민들의 숫자는 필시 증가할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들 말입니다."84) 계속 이어진다: "사회주의 혁명은 수천만 인민이 능동적이고 실천적으로 국가 관리(administration)에 가담할 때에만 이뤄질 수 있습니다."85) 이 구절에 따르자면 당은 권력을 독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독점해서도 안 되며, 기층에서의 권력 증가가 즉각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주의는 실현될 수 없고, 당연한 얘기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살아남을 수도 없다. 사회주의는 오직 대중들이 "모든 의미에서의 입안자"로서 국가적 결정에 능동적이고 직접적으로 가담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어떤 제도화된 권력도 제한된 전위에 의해 대중들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 물론 같은 경우에 레닌은 이렇게도 얘기한다: "이 임무는 인민들에게 관리(administration)의 기술을 가르치되, 책이나 강의, 회의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경험을 통해 가르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명령하고 조직할 채비가 된 바로 그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 대신, 훨씬 신선한 피가 부서에 들어올 것이고, 그와 유사한 다른 부서들에 의해 새로운 부문들이 강화될 것이다."86) 그러나 분명한 것은, (외부적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표현된 이 전위(반드시 당일 필요는 없는)의 권력이 즉각 스스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기 시작해야 하는 완전히 과도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것이다(노동조합의 합리화는 정확히 이를 겨냥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는 전위의 기본적인 제도적 권력으로 파악되지 않고, 대중들의 명령으로부터 도출된다. 그러므로 전위는 오직 대중들의 동의와 확신에 기반했고, 그럴 때에만 존속할 수 있었다. 반면 이는 소비에트 권력의 첫 번째 국면에 조응했다: 대중들은 자유로운 선택 행위를 통해 몸소 선출한 자들(이들은 대부분 볼셰비키였다)에게 통치할 권력을 (자유롭게) 부여했다. 이는 높은 수준의 의식성을 전제하는 것으로, 1917-1918년의 극적인 역사적 조건들 때문에 가능했다. 게다가 특히 인용된 구절에서 레닌이 언급한 것이 반드시 지적되어야 하는데, 그는 정치적 대중 교육의 유일하게 진실한 형태는 프롤레타리아의 점증하는 권력에의 직접 경험에 기초하지, 책이나 회의, 혹은 당 관료에 의한 다소간의 계몽된 회보에 기초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조차 기꺼이 인정하는 것처럼, 1917년 이래 레닌과 볼셰비키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실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917년 초반 레닌의 연설은 이 방면에서의 마지막 위대한 노력이다. 그 노력이 실패했음을, 지금의 우리는 안다. 그러나 이 실패는 카 같은 이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헬스의 법칙(Michels' Law) 같은, 일반적으로 정치 정당과 집단적 조직 안의 관료적 경화의 불가피성 따위의 탓이 아니다.87) 소비에트가 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에서 소비에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생명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조직이었다. (하지만) 대중적 토대가 사멸하면서 소비에트는 관료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패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계급으로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의 실패인 것이다.88) 1919-1920년의 관료적 전환 1918년이 되자 소비에트 혁명이 관료적으로 타락하는 최초의 징후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구 세계, 낡은 관습, 그리고 오래된 사고방식이 새롭게 출현하는 세계를 망치려 들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이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어야 했다. 이러한 퇴행적이고 "찌꺼기 같은" 경향은 그것들을 재도입하게 만든 일련의 사건들만 없었다면 틀림없이 격퇴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의 어리석은 태도로 인해 볼셰비키는 매우 격렬한 투쟁 속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도를 홀로 떠맡아야 했다. 한편, 훨씬 더 심각한 문제는 노동조합과 소비에트가 관료화됨으로써 당과 계급간의 진정한 변증법의 가능성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료적 경직화의 이유들은 1919-1920년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작동했던 역사적 조건들, 이미 1918년 후반에 분명해진 역사적 조건들에서 찾아질 수 있다. 내전과 외세의 개입은 산업생산의 총체적 붕괴를 야기하여 1920년 산업생산은 전전(戰前)의 13% 밖에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917년의 비범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학적으로 거의 완전히 소멸하였고 내전으로 지쳐버린 수십만의 개인들로 돌아갔다. 더욱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적 분자들은 전사하거나 관료기구로 흡수되어 작업장의 대중들과 유리되었다. 나아가 생산의 발전 혹은 최소한 지속을 위해 구(舊)체제의 관료 및 전문가들에게 의존할 필요성 때문에 부르주아적 관습과 야망의 인습에 찌든 한 무리의 타락한 분자들이 국가와 경제의 필수불가결한 중심부 안으로 들어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반적으로 반(半)프롤레타리아적인 소농민 대중들에게 의지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는 그들이 사회주의를 한사코 거부했다거나 그들이 본성적으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허약하고 분열되어 있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도시와 농촌 양자를 동시에 장악할 힘을 결코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명백히 객관적인 이유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는 농민운동이 일어난 후 몇 십년 뒤에야 발전했고, 도시들에 고립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따라서 농촌은 사회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이미 스스로를 단단히 확립했던 다양한 인민주의 운동에 내맡겨졌다. 러시아의 상황에서 소농민은 사회주의에 이질적인 대중이었고, 수십년간 나로드니키와 쁘띠부르주아의 선전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 때문에 그들은 기껏해야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신뢰할 수 없고 동요하는 동맹자에 불과했으며, 장구한 시기에 걸쳐 지루하고 난해하며 모순적인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로 전취되어야 했다. 그러나 관료화의 과정은 급속하게 진행되었고, (이 시점에는 이미 탈진해 버린)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당은 오랜 기간 동안 막대한 농민 대중들로부터 유리되었으며, 허약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는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 더 이상 의존할 수도 없었다. 다시 말해, 당은 나라 전체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유사한 상황에서 그리고 경제적, 군사적 곤란함 속에서 프랑스 꼬뮌을 모델로 한 국가의 실현은 실로 불가능했다. 이상이 러시아 노동계급이 소생하고 그 사회적 비중 때문에 통제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러시아에 이미 견고하고 경화된 관료적 체제가 존재하게 된 배경이다. 이 같은 사정은 서방의 혁명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는데, 그 혁명만이 러시아를 유럽 사회주의 동맹의 일부로 통합함으로써 이 참을 수 없는 상황으로부터 러시아를 해방시킬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혁명의 승리는 가능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룰 수 없는 일련의 상황들로 인해 혁명의 승리는 일어나지 않았고, 1921년경 프롤레타리아적 노도의 일반적 쇠퇴는 유럽에서도 분명해 보였다. 1918년에 이미 분명해진 이 같은 비극적 상황은 이듬해가 되면서 점차 악화되었고, 볼셰비키의 입장과 레닌의 사상에 공히 영향을 미쳤다. "이론적" 전환의 계기는 아마도 1919년 1월의 제 2차 노동조합 대회로부터 두 달 정도 후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상황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러시아 공산당이 소비에트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우위를 점하며 모든 업무에 대한 실천적 통제권을 가져야 한다는 결의안이 1919년 3월 8차 당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이러한 전환의 이론적 정당화는 전위로서 공산당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제도적으로 지도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사실 전위의 두 개념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개념에 따르면, 전위는 대중들에게 길을 제시하고(그들과의 끊임없는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종종 중앙위원회의 견해보다 더 정확할 수 있는 그들의 요구와 지시를 고려하면서) 의견이 엇갈릴 경우 강요하기보다는 설득하려고 노력한다. 두 번째 개념에 따르면, 전위는 대중들을 지도하는 제도적이고 양도불가능한 기능을 지니며 따라서 의견이 엇갈리면 대중은 그 의지와 무관하게 전위의 지도에 복종해야 한다. Novaja Zhizn에 보내는 1905년 서신이나 {국가와 혁명}의 레닌,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1917년의 볼셰비키의 경우에는 첫 번째 전위 개념이 우세했다. 그러나 8차 대회에서 두 번째 개념에 수반되는 고유한 위험들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세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도 및 공산당에 의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배타적이고 완전한 통제에 대한 강조는 전위가 "역사적 권리에 의해" 항상 대중들보다 더 신속하고 더 잘 볼 수 있다는 가정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것이다. 1919년 당 강령의 경우 자신들이 파리 꼬뮌을 모델로 한 국가의 원칙들을 고수하고 있고 이것이 서서히 기틀을 잡아가고 있다고 되풀이해 주장했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지도된 민주주의"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수용되었을 때, 역사적 맥락에서 원칙들의 이같은 선언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19년 3월에도 여전히 레닌은 모든 계급의 기관이 되어야 했던 소비에트가 사실상 제한된 전위의 권력을 "이상하게" 나타내고 있음을 슬픔에 젖어 언급했다.89)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하지만 불가피한 사정에 대한 깨달음은 1919년과 1920년을 거치면서 상황을 "합리화"하려는 일련의 주장들로 바뀌었다. 만일 볼셰비키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그 무렵 자신들의 권력과 동일화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한편으로 사회민주주의적 비판의 유효성과 다른 한편으로 무정부주의적 비판의 유효성을 인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것의 정치적 결과는 익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이탈리아는 있을 법한 예외로 치더라도, 지도자들의 권력을 공격하고 전반적으로 룩셈부르크 사상의 영향을 받은 좌익적 경향이 공산주의 운동 내에서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것은 공산주의 운동의 우익을 형성했던 전(前)사회민주주의자들의 관료주의와 기회주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비판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에게도 타격을 가했다. 따라서 이 같은 비판적 입장들이 레닌의 지지에 근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차 대회를 전후로 레닌에게 무자비하게 거부당하고 말았다. 레닌은 이 좌익들에 대항하여(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하여 이탈리아 좌익들에 대항하여) 논쟁하면서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을 썼다. 이 저작에서 좌익 공산주의의 매우 진지한 쟁점들은 "무정부주의적 광증"으로 환원되었고, 그에 반해 대중의 지도에 있어 강력한 권력집중화의 필요성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열 명의 강인한 우두머리"를 상기시키는 어조로 되풀이되었다.90) 사실 레닌의 테제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혁명}의 레닌, 그리고 앞서 지적했듯이 2차 노동조합대회 연설에서 (당과 함께든 아니든 간에) 노동자들의 직접적이고 지속적이며 대규모의 참여를 강조했던 무정부주의적 레닌을 상기하고 어떤 전위도(아무리 능란하고 강력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사회주의 건설에서 이 같은 본질적 요소를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상상할 수 있듯이 인터내셔널의 2차 대회 기간에도 논쟁은 계속되었다. 타너(독일)와 맥레인(영국)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속성에 관해 질문했을 때 레닌은 자본주의 시대에는 오직 소수의 노동자들(당에 순응하는 이들)만이 계급의식을 획득할 수 있으므로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질적 조응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91) 몇 년 뒤 스탈린은 레닌이 이곳에서 실질적이지만 배타적이지는 않은 조응을 말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가 "본질적이고 진실로 중요한 것"을 의미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위의 지도력은 대중에 의해 통제되거나 취소될 수 없다. 소환과 통제는 의식성을 내포하며 만일 레닌이 당시 언급했던 것처럼 진정으로 의식적인 노동자들이 바로 공산주의자라면, 정치권력은 이들에게만 귀속된다. 즉, 전위는 대중들이 선택해서가 아니라 의식성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운영한다. 마찬가지로 유사한 맥락에서 소비에트, 노동조합 등은 결국 독재를 실행하는 당의 수중에 있는 수동적인 집행도구(전달 벨트)가 되고 만다. 물론 레닌은 "외부적" 전위와 "지식인"의 기능에 관련된 {무엇을 할 것인가?}의 테제를 재도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독점하는 "내부적" 전위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국에는 점차로 "외부적" 전위로 변화하게 될 틈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의 경험을 다른 당들과 공산주의적 조류들이 모방해야 할 기본적 모델로 제시하려는 관료적 경향이 2차 대회 기간 동안 발전했다. 이 대회의 참가자들은 스탈린 시대를 예비하는 명백하게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침묵을 강요받았던 것이다.92) 이 같은 내적인 관료적 타락은 제3 인터내셔널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외부적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말년에 시도된 종합: 관료제에 맞선 투쟁 그러나 관료화로의 경향이 이제 완전하고 최종적인 형태로 응고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볼셰비키는 수십년의 투쟁 동안 언제나 대중들 및 그들의 운명에 깊이 결박된 지도자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편으로는 "당독재"를 이론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관료화의 발전과정에 대해 염려했던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은 특정한 현상의 원인을 산출했지만 그에 따른 관료적 효과의 위험성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적어도 최초의 이행국면에서는 특정한 전제들이 수용되고 그것들의 "당연한" 효과를 완화하기 한 조치가 종종 취해졌다. 이는 대립하는 경향의 탁월한 조정자인 레닌이 1921년과 1923년 사이에 관료적 물결을 저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작동시키는 원리는 의문시되지 않았다. 당 독재 말이다. 요컨대 문제는 다음과 같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 독재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당이 관료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의 권력에 대한 진정한 대항세력을 찾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는 그 전제와 갈등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당 독재와 같은 것임을 부인하지 않고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내재적이면서 관료화의 과정을 제어할 수 있는 외부의 대항세력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지적했듯이 러시아의 상황에서 그리고 서방혁명의 부재 속에서 관료화 경향은 비가역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레닌과 같은 지극히 탁월한 중재자조차도 극복하기 어려운 역사적 조건에 부딪쳐야 했다. 레닌은 1922년 초에 작성한 노동조합에 관한 논문에서 문제를 대면하려고 가장 진지하게 시도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의 주도성을 반복했다.93) 그러므로 레닌은 노동조합이 당과 대중 사이에서 작동하는 전달기제라고 주장했다. 대개 스탈린의 탓으로 돌려지는 이 유명한 표현은 레닌이 최초로 사용하였고, 1919년 1월 연설과 관련하여 근본적 전환을 보여준다. 또한 레닌은 노동조합이 국가의 관료적 타락으로부터 노동자들을 보호해야만 하며, 공산주의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레닌이 1919년에 주장했던 것이 옳다면, 즉 대중들의 교육은 오직 권력의 직접적이고 능동적인 운용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제 이행국면에서는 권력이 당에 속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레닌은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94) 국가의 관료화에 맞선 투쟁의 과제는 남아 있었다. 이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1919년에 개요된 과제들에 비교할 바는 못 되었다. 그러나 당과 국가95)가 일치되는 경향이 있고 노동조합이 점점 더 당(차라리, 당-국가)에 장악당한 전달 벨트가 되는 만큼, 노동조합들이 이와 같은 기능을 더 이상 완수할 수 없을 것 같다. 레닌은 스스로 이 모순을 의식하고 있었던 바, 논문의 결론 부분에서 노동조합의 임무는 모순적이며 "전달 벨트"의 양상과 국가 내 관료화(특정한 자율성을 획득한 것처럼 보이는)에 맞선 투쟁의 양상 간에 조정의 계기를 찾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하는지는 암시되지 않았다. 비록 레닌이 분쟁 시 제3 인터내셔널에의 의뢰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러나 그 무렵 제3 인터내셔널 내에서조차 볼셰비키의 비중이 압도적이었으므로 이 처방은 망상이었다. 더욱이 논문의 역사적 상황과 이론적 전제를 고려할 경우, 어떤 구체적인 조치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레닌의 논문은 미해결의 문제와 물음표로 끝을 맺었다. 인생 말년에 레닌은 관료적 현상의 증가에 대해 끊임없이 몰두했다. 그러나 Lewin이 지적했듯이96) 레닌은 그것을 깊이 있게 분석하길 거부했다. 불가피한 역사적 조건을 달아 1920년과 1929년 사이97)의 러시아에 적용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브뤼메르 18일}과 같은 몇 가지 탁월한 분석 도구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로를 따름으로써 누군가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권력이 악전고투하고 있고 세계 혁명(혹은 적어도 유럽 혁명) 없이는 그것이 다시 소생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레닌은 이 모두를 알았으며 필사적으로 서방에서의 혁명(혹은 그의 최후 저작에서 출현하는 것처럼 동방에서의 혁명)에 의지했다.98) 따라서 레닌은 관료제를 제어하고 완화시키려 노력하면서 그것의 효과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소비에트 권력과 10월 혁명의 "요절"을 선언하는 결론에 다다를 정도로 충분히 분석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최후 저작은 징후적이다. 관료제 현상에 대한 책임이 스탈린에게 있는 듯 했으므로 그의 숙청을 요청했던 유언장에 부치는 유명한 방주99)도 추이를 바꿀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스탈린은 레닌보다 훨씬 막강한 역사적 힘의 행위자였던 것이다. 그의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다소 덜 "전제적"(oriental)이고 덜 잔인했을지 모르나, 사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레닌의 최후 저술 "더 적더라도, 더 낫게"는 이 문제를 재론했다. 하지만 항상 효과의 차원이었을 뿐, 원인의 차원을 건드리진 못했다. 능률의 문제를 다룰 때 특히 그랬다. 사실 레닌은 그것의 과도함과 오용을 나무람으로써 관료제를 내재적으로 비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대중들로부터 유리되고 심지어 대중들과 대치하는 관료적 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더 이상 논박하지 않았다. 게다가 레닌은 같은 글에서 기능면에서 정당화될 수만 있다면 국가 기관과 당 기관을 융합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결론적으로, 말년의 레닌은 비극적 모순 속에서 사고했다. 관료제에 맞선 투쟁이 패배한 러시아의 맥락에서 그 투쟁을 하는 것,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당 독재 사이의 동일성을 이론화하면서 동시에 이 독재의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 그 안에서 당과 국가가 대항세력을 발견해야 함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당이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권력 및 국가(혹은 더 낫게 말하자면 그것의 지도적 기관)와 동일화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면에서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레닌의 최후 진술은 극히 고통스러운 물음표로 남아 있다. 결론과 전제 확실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 안에는 즉자계급에서 대자계급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따라서 전위와 대중의 관계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다양한 지점에서 그들은 이 과정을 포착했지만, 그러나 그것의 상호연관을 명료히 하지 않고 현상적 수준의 묘사에 그쳤을 뿐이다.100) 이 점에 관한 레닌의 사상은 단일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일련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입장들 속에 존재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 좌파" 그룹들은 "레닌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레닌에게 말인가? 초기의 "경제주의자" 레닌, 1899~1903년 사이의 "인텔리적" 레닌, 1905~1919년 1월 시기의 레닌, 1919~20년의 관료적 레닌, 아니면 말년의 고뇌하는 레닌? 우리에게 있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레닌은 두 번의 혁명 사이의 레닌, 곧 Novaja Zhizn에 보내는 서신에서의 레닌, {국가와 혁명}의 레닌, 혹은 노동조합 2차 대회 연설에서의 레닌이다. 다시 말해 두 번의 위대한 혁명의 영도자로서의 레닌이다. 그의 위대함은 본질적으로 소비에트 현상의 중심성을 이해하고, 1905년 11월과 1917년 4월 당시 당에 이 노선을 "부과"했던 사실에 존재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1905년과 1907년 사이의 입장들과 함께)은 {무엇을 할 것인가?}와 그것의 인텔리주의를 극복했음을 표상한다. 그것은 레닌의 혁명적 창발성의 최고의 경지이다. 만일 소비에트의 발생, 즉 수많은 대중들이 이 거인적인 경험에 생명을 부여한 방식과 질적인 도약을 거쳐 표면 위로 마침내 분출한 더딘 분자의 은밀한 과정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레닌에게서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실망할 것이다. 심지어 레닌에게서도, 전위와 대중의 관계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불합리한 교조주의로 인해 역사에 의해 지양되고 레닌 스스로 사회민주주의 전술의 과도적 국면으로 격하한 {무엇을 할 것인가?}의 이상주의적 테제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신 좌파"는 무엇을 복원한다거나 어디로 돌아가는 문제가 아니라 자율적인 연구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 글은 다만 전위와 대중의 관계에 관한 연구를 위한 역사적 서론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레닌주의적 교조주의(통상 스탈린의 눈을 통해 레닌이 파악되는)를 바르게 평가하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구체적 방도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58) 레닌, [우리의 임무와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레닌저작집 3-3}, 전진. 59) 같은 책, p. 293. 60) 레닌, [두마의 해산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레닌저작집 4-1}, p. 398-399.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어떤 당 조직도 대중들을 '무장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대중들을 기동적인 가벼운 전투부대로 조직화하는 것은 상황이 전개되기 시 작할 때 무기를 조달하는 데 아주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것은 1906년 7월에 쓰여졌다. 61) 레닌,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 {레닌저작집 4-1}, p. 433. 62)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항하여 프롤레타리아트의 못박힌 손에 호소하는 것을 참주선동으로 간주했 다. 63) Cf. 레닌, [R. S. D. L. P. 5차 대회를 위한 결의 초안], {레닌저작집 4-2}, p. 323에서는 거대한 경제 파업에 대해 다음처럼 언급한다: "러시아 혁명의 전체 역사는 혁명운동의 모든 강력한 고양들이 오직 그런 대대적인 경제적 운동에 기초해서만 시작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새로운 혁명적 물결이 시작되던 1917년에 레닌은 다시 1907년의 판단을 반복한다: "즉각적이고 직접 적인 환경 개선 투쟁만이 피착취대중의 가장 후진적인 계층을 격앙시킬 수 있고, 그들을 진정으로 교육시키며, 혁명적 시기에 는 그들을 몇 개월 내에 정치 투사의 군대로 변혁할 수 있다." Cf. 레닌, "Lecture on the 1905 Revolution," in Collected Works, Vol. ⅩⅢ, p. 242. 64) 레닌, [논문 모음집 {12년}에 대한 서문], {레닌저작집 4-3}, 75p. 65) 레닌, [당의 재조직화], {레닌저작집 3-3}, 298p. 분명히 여기에서 노동자들은 지식인들과 다르게, 즉 말의 모든 의미에서 프롤 레타리아적으로 간주된다. 반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다만 출신계급과 분리되고 다른 지식인들과 동등해진 노동계급 출 신의 지식인에 대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66) 같은 책, p. 302, 각주 2. 혁명의 노도가 러시아에서 고조될 때 개최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당 3차 대회 당시(1905년 4월) 레 닌은 일찍이 당의 프롤레타리아화를 지지했으며, 위원회가 두 명의 지식인에 대해 여덟 명의 노동자로 구성될 것을 희망했다. 지식인들은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67) 레닌, [혁명과 반혁명], {레닌저작집 4-3}, pp. 83 ff. 68) Lenin, "Letter to Ronsthein" (1908년 1월), in Collected Works, vol. ⅩⅩⅩⅣ, pp. 375 ff. 그리고 "Letter to Gorki" (1908년 2 월), 앞의 책, pp. 379 ff. 69) 레닌, [논문 모음집 {12년}에 대한 서문], {레닌저작집 4-3}, pp. 72-73. 강조는 원문. 70) 같은 책, p. 78. 71) 같은 책, p. 76. 72) Lenin, "Intellectual Warriors against Domination by the Intelligentsia," in Collected Works, vol. ?, p. 317. 73) Lenin, "Angry Embarassment." in Collected Works, vol. ?, p. 322. 강조는 최종 판본에서 추가. 74) Lenin, "Lecture on the 1905 Revolution," 앞의 책, p. 248. 75) 이 점에 관해서는 History of the Bolshevik Revolution (Ann Arbor, 1957)에 있는 Trotsky의 탁월한 분석을 보라. 여기에서 그는 2월 혁명이 그들 자신의 것이라 일컬어지는 혁명적 조직의 저항을 이겨낸 그룹에 의해 아래에서부터 해방되었고, 주도권은 나 머지보다 더 착취받고 억압받은 프롤레타리아 분파가 자생적으로 틀어쥐었음을 보여 준다: 직물 노동자들 말이다. 2월 23일에 는 아무도, 특히 혁명적 써클들조차 폭풍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905년의 혁명적 경험과 볼셰비키의 혁명적 노동자 들이 없었다면 1917년 2월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트로츠키가 처음에는 인정했던 운동의 자생적 성격의 적 절성을 낮게 평가하려 했다는 것을 지적해 두자. 간단히 말해, 당은 투사들을 통해 대중들을 "간접적으로" 지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볼셰비키가 운동 속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였음을 증명하지 못했고, 볼셰비키 외부에서도 전제정에 맞선 대 중투쟁으로까지 발전한 혁명적 분파들(무정부주의자, 사회혁명당원, 트로츠키 자신 같은 비-볼셰비키적 사민주의자)이 있었음에 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투쟁을 지도하고 결정하고 계획하는 집중화된 조직이 있을 때 당이 혁명을 조직하고 지도한다 는 관념은, 이 경우에는 실현되지 않았다. 만일 당시 조직 같은 게 있었다면, 집중화된 조직이 아니라 (거리거리마다, 집집마다 조직된) 지역적이고 분파적인 것이었다: 비-제도적이고 유동적이어서 아무 자취를 남기지 않았고, 무엇보다 어떤 당 강령의 헤 게모니 하에 있지도 않았다. 만일 볼셰비키가 지역적으로 투쟁을 조직했던 이런 과도적 조직에 가담했다면 사적으로 한 것이 지, 당시 다른 당들처럼 사건 앞에서 무력해지고 뒤쳐져 있는 당의 일원으로서는 아니었다. 이런 유형의 역사적 상황에서 지배 적인 요소는 분명히 아래로부터의 (자생적인) 주도권이지, (맹아적이고 분파적이고 유동적인) 조직이 아닐 뿐더러, 당이 중심에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유형의 현상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이미 1848 혁명의 자생적 성격을 지적한 바 있 다(cf. {프랑스에서 계급투쟁}, 위의 책). 76) 레닌, [당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4월 테제와 그 해설)], {레닌과 사회주의 혁명}, 태백, p. 158. 77) 공식적으로는, 1917년 당시 멘셰비키들이 추진력을 가지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재건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상황이 주 어졌다면 대중들이 그들 스스로 1905년에 주저없이 만들어냈고 그 기억이 여전히 생생한 소비에트를 재건했을 것임은 분명하 다. 사실 소비에트를 재구성하자는 발상은 투쟁의 이틀째부터 노동자들 스스로에 의해 자생적으로 제기되었다(Lisa Foa, "I Soviet e l'Ottobre," in Il Manifesto, 1970, no. 1, p. 57 을 보라). 그러므로 멘셰비키들은 대중들의 자생적으로 가동된 추진력 아래서 행동했던 것이다. 소비에트 실험은 그 안에서 자신들의 혁명적 기관을 발견하고 거기에 비-멘셰비키적인 해석을 부여한 대중들의 추동력 아래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므로 1917년에 대중들의 창발성이 소비에트를 만들어냈다(그것이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의 미래가 절망적이었을 것이다)고 반복했을 때 레닌은 옳았던 것이다. 78) 레닌, {국가와 혁명}, 돌베개. 79) 이 점에 관해서는 Lissagaray, History of the Commune of 1871 (New York, 1968) 을 보라. 80) 최근 "국가와 혁명"은 Guerin 편에서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는 Anarchism: From Theory to Practice (New York, 1970), pp. 86. ff., 에서 본질적으로 연관된 세 가지 쟁점을 제기한다: (a) 전하는 바에 따르면 레닌은 꼬뮌을 "부르주아지 없는 부르주아 국가"와 동일시했다; (b) 이 국가의 사멸 과정이 느리다는 사실은 레닌의 "의도"에 제대로 부합하지 못한다; (c) 레닌주의적 개 념에 따르자면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기관인 소비에트는 제도적으로 볼셰비키 당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첫 번째 주장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국가와 자본"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주아지 없는 부르주아 국가"로 정의하지 않으며,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책에서 레닌은 카우츠키와 사납게 논쟁했는 바, 카우츠키는 프롤레타리아적 목적으로 위해 부르주아 국가를 활용하 려 했던 것이다. 대신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를 따르고 꼬뮌의 원리에 의해 고취되는 새로운 기능적 국가 장치를 창출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주장의 근거는 더욱 박약하다: 국가를 제도화하는 과정은 날카로운 계급-전쟁(국내적·국 제적으로)으로 특징지워지는 전체적인 역사적 시대로 이루어진다. 이 맥락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의 국가를 필요로 한다: 결단주의적인 지름길은 허용될 수 없다. 당과 소비에트의 관계에 관한 마지막 언급의 경우, 역사적 맥락이 완전히 다른 1919-1920년 당시의 레닌이 쓰고 행동했던 것에 입각하여 1917년의 레닌을 독해한 혐의가 짙다. "국가와 혁명"에서는 역사적 권리에 의해 재가된 제도적 전위로 볼셰비키를 격상시키는 것 따윈 없다: 소비에트라는 장막 뒤에서 대중의 이름으로 대중을 통치하는 별개의 특권화된 전위 말이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고 새로운 이론적 입장들이 출현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새로 운 사건들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었다. 81) 이와 대립되는 견해를 보려면 Lisa Foa, op. cit., p. 60을 보라. 하지만 이는 거침없는 레닌의 주장을 왜곡하는 것 같다. 사실 레닌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어 지도력을 획득했을 때 소비에트 장치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말 했다. 즉 소비에트의 "외부적" 제도화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다. 82)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소나무. 83) Lenin, "Report to the Second All-Russia Trade-Union Congress," in Collected Works, vol. ⅩⅩⅧ, p. 418-419. 조합의 기능이 소비에트 체계 안에서 펼쳐져야 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84) 같은 책, p. 419. 강조는 추가. 85) 같은 책, p. 426. 86) 같은 책. 87) Cf. Carr, 앞의 책. 88) 우리는 Basso가 Neocapitalismo e Sinistra Europea (Bari, 1969), pp. 20 ff에서 제출한 것보다 이같은 해석을 선호한다. 전자 에 따르면 관료적 타락은 러시아의 후진성과 이로 인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허약함 때문이다. 실제로는,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집중되어 있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로 나선 1905년과 1917년의 소비에트 경험을 통 해 자신들의 위력과 성숙함을 증명했다. 1917년 이후 분할되거나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비범한 능력을 상실했다는 증거 같은 건 없다. 89) 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의 레닌의 구절을 인용하는 Moshe Lewin, Lenin's Last Struggle (New York, 1968), p. 6을 보라. "강령 에 따르면 노동자들에 의한 정부 기관이었던 소비에트는 사실상 노동대중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선진적인 분파들에 의해 운영되는 노동자들을 위한 정부 기관에 불과하다." 강조는 Lewin. 90) 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 돌베개. 당은 모든 방면에서 당을 위협하는 쁘띠부르주아적 침투에 맞선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중핵"으로 간주된다. 프롤레타리아 대중들은 매우 타락하기 쉽다고 간주되고 계급의 "정직한" 부분의 신뢰를 받는 철의 전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91) Lenin, "Speech on the Role of the Communist Party," in Collected Works, vol. ⅩⅩ?, pp. 235 ff. 또한 p. 191을 보면 당과 소비에트, 그리고 대중의 관계에 대해 모호하게 언급한다. 아마도 이 같은 모호함 때문에 Tanner와 Mclaine의 질문 및 레닌의 건조한 대답이 나왔을 것이다. 92) 의회주의(그것이 아무리 혁명적이라 할지라도)에 반대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제에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이탈리아 좌 파(보르디가)와 관련해서도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 이 문제를 여기에서는 자세히 다룰 수 없다. 하지만 이 논쟁에 관한 문서들 ("O Preparazione Revolutionaria o preparazione Elettorale," in Documenti Raccolti dal Partito Comunista Internazionalista di Bordiga, Milan, 1968, 특히 pp. 36 ff 를 보라)을 재검토하는데 관심있는 사람들은 보르디가 주장의 심각성({공산주의에서 "좌 익" 소아병}에서 레닌은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과 권위주의, 스콜라주의, 그리고 레닌 및 볼셰비키의 답변의 공공연한 공허한 방식에 충격을 받는다. 93) 레닌, [신경제정책 하에서의 노동조합의 역할과 임무에 관한 테제 초안], {민중민주주의 경제론 - 레닌의 노동자통제 및 국유 화론 1}, p. 202: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적인 전위인 공산당이 그 정치적 및 경제적 활동 전체를 지도하는 정부와 친밀하고도 항상적으로 협력해야만 한다." 94) 같은 책, pp. 190-191. 여기서 레닌은 기술적 의미에서 이해된 대중 교육(즉 특정한 관념을 배우는 것)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 한다. 하지만 단지 기술적 교육을 향상시킴으로써 대중이 국가 경제 건설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비록 레닌이 반드 시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할지라도). 중앙 계획 기관에서의 노동조합 대표자들의 권력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당이 지도하 는 국가적 차원의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안에 협력하는 정도였다. 95) 만약 노동조합이 당의 전달 벨트이고 당이 국가 권력의 정점이라면, 노동조합은 불가피하게 당-국가의 필요에 복무하는 전달기 관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관료제에 맞선 투쟁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의 레 닌 비판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면에서 당과 조합의 관계에 관한 것이지 전혀 상이하게 나타나는 부르주아 지배 국면의 그것 이 아님은 지적되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노동조합에 관한 가장 진전된 입장은 레닌이 제 2차 노동조합 대회에서 제 출한 것으로, 이때 레닌은 (특정한 맥락과 기능을 갖는) 노동조합의 국가기구화를 말했지 전달 벨트를 언급하지 않았다. 제 2차 노동조합 대회에서의 레닌의 연설은 조합에 부여하려 했던 기능("전달 벨트" 의 관료적 테제가 기각된다 하더라도, 사회주의 사 회에서 노동조합의 기능과 영속성에 대해서는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때문이 아니라, 대중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 직접적 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중요하다. 96) Moshe Lewin, Lenin's Last Struggle, op. cit. 97) 이와 같은 시기 구분에는 소련에서 관료가 진정한 계급이 된 것은 이 시점 이후라는 우리의 확신이 작용했다. 98) Lenin, "Better Fewer, but Better,", Collected Works, vol. ⅩⅩⅩⅢ, pp. 487-502. 99) Cf. Lewin, 앞의 책, pp. 84-86. 100) 이 점은 Classe e Stato 잡지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Cf. Stame의 논설, "Contraddizione e Rivoluzione," Classe e Stato, no. 4, pp. 3 ff; 그리고 Salvati, "Il Capitalismo dei Monopoli," Classe e Stato, no. 5, pp. 71 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