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민중운동의 내적 변화는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앞서 우리가 대선 투쟁 본부를 제안했듯이, 대통령선거는 누가 무어라 해도 지난 5년 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를 놓고 비판의 주도권을 가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롭게 청와대에 들어설 정권이 지금 대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구조조정을 하려는 지를 놓고 과학적인 분석과 이에 근거한 비판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에 앞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오늘날 계급투쟁의 양상과 대중운동의 현실이 무엇인지, 왜 전선 재구축이 민중운동의 최우선 과제인지를 규명할 것이다. 계급투쟁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방기하는 것은 민중운동의 올바른 투쟁방향 수립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대중운동의 현실은 지배계급의 집요한 반격에 따른 대중의 분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중운동의 분화는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지금 정세의 과제가 왜 전선의 재구축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02년 대선 투쟁의 목표가 왜 민중운동진영의 전국적 투쟁 거점을 확보하는데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이후 계급투쟁의 전개양상 19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지배계급의 반격은 집요했다. 경제위기로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3당 합당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할 정치적 힘을 채비하고. 무노동 무임금을 앞세워 노동조합의 전투성(파업투쟁)과 부분적인 실리(임금상승)를 사회의 공적으로 몰아붙였다. 중소기업은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의 여파에서 살아남지 못한 채 파산하거나 과거에도 그랬듯 대기업에 하청 계열화되는데, 이때 상당수 노동조합은 자연 소멸하거나, 두려움에 주저하는 조합원의 이탈을 겪는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계열화된 산업질서에 조응하여 광범위한 하청업무를 대행하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한다. 한편, 대기업의 경우 하청계열화로 구조조정의 위기를 지연시키면서, 기업문화 개선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가며 노동자들을 사내질서로 흡수하고, 팀 체계를 앞세워 개별노동자들을 새로운 노동과정으로 재조직한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기업 노동자들 대다수를 조합원으로 확보한데다 다른 노동조합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에 발언력을 잃지는 않았다. 이 같은 현상은 금융과 언론으로 대변되는 사무직 노동조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들 사이에 노동조건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 발언력에서조차 차이가 벌어진 것이다. 경기침체는 멈추지 않았고, 산업 재편은 계속되었다. 경력을 가진 사람도, 사무직 노동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력직과 사무직에서 명퇴, 조퇴가 확산되고 있었다. 남한 발전주의가 안겨준 유일한 혜택-종신고용 전통마저 사라지고 만 것이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는 이런 민중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 최초의 전국적 총파업이었지만 조직된 규모에 비해 결과는 너무도 초라했다. 정리해고 법제화는 2년 유예되었을 뿐이었고, 겨우 민주노총 합법화와 복수노조 인정이라는 결과를 얻었을 뿐이었다. 늘어나는 기업파산 앞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 보장이 설득력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로 비쳤다. 1998년, 총파업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노사정위원회에서 양 노총 지도자들은 결국 정리해고 법제화에 합의하고 만다. 2001년에는 복수노조인정마저 한국노총의 노사정 합의로 5년간 유예되고 만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노동조합이 당연히 자신의 권익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노동자, 농민, 여성: 멈추지 않는 분열과 자기파괴 혜택을 앞세운 구조조정이 아니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정치적 조건을 활용하려 들었다. IMF 외환위기와 정권교체라는 정치 조건은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기업구조조정은 사회의 공적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구조조정에 앞서 그들은 노동자는 물론 심지어 기업주까지 한몫으로 싸잡아 사회의 공적으로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구조조정에 맞선 개별기업 노동자들의 저항은 상당부분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기업과 해당사업장을 넘는 연대투쟁은 점점 더 곤란해졌다. 모든 투쟁은 IMF 이후 더욱 고립되었고, 노동자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계급으로 단결하는 노동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해고와 임시채용의 격렬한 반복은 이제 정규직 노동자, 대기업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마저 위협했다. 이젠 누구도 평생직장을 믿지 않는다. 모든 노동자들은 자신을 보호할 법적인 장치는 물론이거니와 조직적인 힘조차 없다고 믿고 있다. 유효한 방어수단이 없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 한 몫 잡아두어야 했고, 고용만 보장되면 노동조건의 후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였다. 후퇴하는 단체협약에 개별 노조는 서명하였고, 허구적인 것을 알고도 고용보장에 만족할 도리밖에 없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노동조합 결성조차 어려웠고, 설사 결성했다 치더라도 사업장내로 진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에 투쟁의 양상은 몹시 격렬하고도 별다른 성과 없이 흩어지는 것을 반복해야 했다. 심지어 정규직과 임시직 사이에 서로 배제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지경에 이른다. 투쟁이 고립되면 될수록 노동자들은 개별화되었다. 저임금 저곡가 정책에 따라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수입하고, 농가소득보존이 곤란해지면서 노동력이 도시로 유입되는 식으로 농촌사회는 이미 거의 해체되고 난 뒤였다. 격렬한 농민들의 저항으로 UR 협상에서 쌀만큼은 10년 동안 관세화를 유예한다는 협정을 맺긴 했지만, 농산물 완전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여겨졌다. 쌀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작물이 개방된 데다가, 그나마 국제경쟁력을 갖춘답시고 정부가 진행한 농업구조조정은 경쟁력이 있다고 알려진 몇 가지 농산물 제작에 저리의 농가보조금이 몰리는 바람에 농산물 가격 폭락을 거들기만 할 뿐이어서 농가부채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늘어만 났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는 늘어나기만 했고, 계속되는 농정 실패는 농업문제에 대한 국민적 회의감을 야기했으며, 농민을 달랜다는 농지규제 완화는 농민들의 농업 포기를 부채질 할 뿐이었다. 언론조차 외면하는 농촌문제는 이제 농촌만의 문제였고, 농가소득보존의 논리만이 휑하니 남아 노령화된 농촌사회의 농민을 더욱 초라하게 할 뿐이었다. 점점 불안정해지는 삶으로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조차 곤란하게 되자 무엇보다 가족단위의 생계부터 어려워졌다. 경제위기에 따른 정부재정위기와 교육과정의 변화까지 초래하고만 노동력 재생산 방식의 변화는 가계 유지비를 높였다. 아내-여성을 필두로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생계유지와 재생산 비용 증가 분을 감당하기 위해 생업에 뛰어들게 되나, 노동시장에서 성별·연령별 구조적 불평등으로 여성과 청소년은 극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각기 흩어진 작업장과 가족의 거리는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을 해체시켰고, 급기야 개별적 생존이 강요되면서 가족은 역사적 사명이 다된 듯 보였다. 그러나 인간·가족·사회의 재생산이 개별적으로는 불가능한데다, 국가가 이를 책임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여성은 가정 유지의 책임을 다시 짊어져야 했고,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열악한 노동조건과 밀려있는 가사노동·보살핌노동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성차별에 고용불안까지 겹쳐 노동조건 개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데다, 고달픈 노동으로 가사노동·보살핌 노동은 하루하루 밀리고 말았다. 각종 가전제품과 사설 보육 서비스, 금융상품만이 대안인양 기다리고 있어 이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가계 유지비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가고, 이 상황은 여성을 더더욱 극악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이제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족 단위의 생존과 개인의 생존 사이의 대립을 겪으면서, 상황을 회피하거나, 짓눌린 채 체념하고 마는 양극단의 방식을 택하게 된다. 여기에 여성 신체의 특정부위가 여성의 인격을 대신하면서,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와 직·간접적인 폭력은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보증되고 있음에도, 오히려 사적인 차원으로 제한되고, 국가권력과 남성이 저지르는 성적 비하는 개별적인 사안과 피해자의 문제로만 남았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제한된 것이고, 제한된 만큼 곧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되돌려졌을 뿐이다. 대중운동의 분열, 운동노선의 분화 1987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위로부터 해체되고, 90년대내내 노동자대중은 세계적으로 진행된 산업 구조조정의 물결에 맞서 제대로된 대응을 조직하지 못하였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노동자, 농민, 여성은 너무도 오랜 기간 분열과 자기파괴를 겪었다. 오늘날 대중 운동의 분열과 고착화는 이를 반영한다. 1990년 정권의 극심한 탄압과 산업구조조정 속에서 중고기업의 몰락으로 상당수의 노동자가이 노동조합을 이탈(전노협은 절반 가까이)하였다. 이미 법·제도적 한계로 노동조합의 조직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법 개정이 노동운동의 주 관심영역이 되었을 때다. 흔히 중간층을 대변한다고 알려진 여론은 노동운동의 격렬한 파업에 등을 돌렸고, 많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중간층의 이탈과 법·제도적 한계로 인한 노동조합 투쟁의 곤란함을 호소하던 터라 조합원 감소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로 국민의 여론을 등질지도 모르는 과격한 투쟁은 제한하려 들었고, 법·제도 개선, 대 국민 여론 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더구나 개발독재시기 저임금으로나마 고용 자체는 상대적으로 보장된 탓에 노동자들의 관심사는 기업내부로 제한되는 경향이 있었다. 비공식부문 노동자나 실업자 문제가 노동자들의 주요관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역차원에서 불거진 쟁점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로 인해 빈민 운동을 위시해서 지역운동과 벌이는 연계는 상층연대로만 머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 기대어 노동조합 지도부는 지역별 노조보다 산별노조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운동은 노동조합을 아우르는 전체 대중운동의 지도그룹을 형성하는데 끝내 실패하고 만다. 이를 기점으로 선거투쟁이란 곧 합법적 정치영역의 진출을 위한 투쟁으로 기억된다. 1993년 기업별 노조의 공통과제인 노동법개정을 위해 국제적 압력을 가하려 했던 ILO 공대위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사무직과 대기업 노동조합을 각각 대표하던 업종회의와 연대회의가 전체 민주노조운동을 주도하던 때였다. 이렇게 결성된 전노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앞세운 민주노총 1기 지도부 결성의 토양이 되었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중간층에 대한 노동자의 헤게모니, 사회개혁(법-제도개선) 투쟁, 민주노총과 양립하는 진보정당 건설들을 전면에 내건다. 80년대 후반에 이미 제조업에서 보여지는 노동의 불안정화로 남성의 노동조건이 하락하게 되고, 여성 노동자들이 많이 있던 제조업 사업장 역시 경기후퇴로 아예 문을 닫게 된다. 남성 노동조건의 동반하락으로 제조업에서 여성이 재 진입할 수 있는 일자리는 사라지고, 서비스업종의 요청이 과잉되면서 제조업의 여성노동력은 서비스업종으로 이동하게 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대기업 노동조합의 역할은 과대평가되고, 여성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의 주변에 머물게 된다. 1990년대에 즈음하여 주부노동력은 급증하고 제조업 여성노동자들은 급감하는데 이런 현실에서 여성노동운동은 관심을 다변화하였다. 이때부터 사무직·서비스업의 여성노동자들의 이해가 여성노동운동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고, 주부노동자의 사회적 진출을 보장하기 위한 모성보호와 양육서비스의 확보를 주요한 쟁점으로 삼았다. 비정규직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들과 이들에 대한 차별철폐를 내걸며, 여성노동력의 활용과 그에 따른 산업조직개편의 긍정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1999년 독자적인 조합노선을 걷게 된다. 한편, 가족을 유지하는데 국가의 지원이 전무하고, 모든 것이 가족 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겨진 상황에서 여성운동은 가족법내 성불평등조항을 주된 쟁점으로 자신을 조직하는데, 이는 거의 대부분 미국식 핵가족 모델에 조응하지 못하는 낙후된 법률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급격한 민주화바람과 함께 부분적으로나마 제도개선이 달성되면서 가족법 개정 투쟁은 일단락 된다. 하지만, 이처럼 몇 가지 성불평등 조항을 중심으로 법-제도개선 투쟁을 벌이던 여성운동의 전통은 성폭력, 성 매매 등 기존 여성운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더욱 확대된다. 여성이슈와 단일 사안의 해결에만 집중하면서 더더욱 법-제도 개선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농촌사회를 기반으로 벌이는 농민들의 투쟁은 두말할 것도 없다. 농업의 다원성과 그에 따른 식량주권을 전면에 내걸고는 있지만, 내·외곽에서 몰아 치는 농가 소득보존 논리 앞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운동의 암중모색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처럼 대중운동 모두가 겪고 있는 노선분화와 불투명한 미래는 곧, 대중 투쟁의 고립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임시적인 처방책에 불과해서 어떤 정치세력도 이념과 미래를 제시하며 체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내재된 고유한 한계로 인해 긍정적인 방식보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구조개혁을 선도할 수밖에 없고, 구조조정은 대상(특히 노동자, 농민, 여성)을 고립시켜 적의에 바탕을 둔 사회적 공론을 등에 업고 강제로 구조조정을 강행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이로 인해 저항 주체는 연대의 기회마저 빼앗기고, 개별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대책위가 난립하는 것은 사실 이의 반영일 뿐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민중은 격렬한 저항을 통해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그것이 신자유주의 정책, 나아가 자본주의의 위기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가지 못하고 되려, 국제 신용평가기관에 의해 상대적으로 노사가 안정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비극이 재현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배 정치의 위기와 2002년 대통령 선거: 민중운동진영의 전국적 투쟁 거점을 확보하라 우리는 지난 몇년동안 수 차례에 걸쳐 지배계급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제휴세력으로서 386세대와 시민운동으로 불리는 자유주의자들을 파트너로 삼아왔음을 지적해 왔다.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정치개혁이 온갖 금융비리로 주요한 의제에 상정되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햇볕정책마저 미국 정치지형의 불안정성으로 좌초하게 되자 오히려 (완전고용을 보장했던) 군부독재시절을 전후한 퇴행적인 쟁점이 대중을 선도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이들은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었음(개혁세력의 붕괴)을 지적한 바 있다. 사실, 이후 정국은 어떤 정치변수(비리폭로)가 집권의 향배를 결정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안개정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정치집단도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온갖 잡다한 정치 세력의 합종연횡과 해산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대중에 대해 완전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중에 대한 지루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히 지배계급의 위기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 깊숙이 개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이 위기를 자초한 이유가 무엇인지(바로, DJ 정권이 정권교체를 빙자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전면에 내세우고는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의 열망을 배신하고 대중의 삶을 벼랑끝으로 내몰아 저들에게 예속된 삶을 선택하도록 몰아 붙이다가 여의치 못하여 궁지에 빠져버린 것), 이들이 위기에 맞서 무엇을 조직하려는지(바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할 것 없이 민중의 피와 땀을 가로채고, 기생적인 금융생활자의 영광으로 위기를 지연시켜서 자신들만의 영속적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지배세력들의 한판 굿을 벌리려는 것)을 폭로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배계급의 정치적 위기가 곧바로 인민대중의 정치적 기회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노동자, 농민, 여성 모두 개별화된 채 존재하고 있다. 대중조직의 정치노선은 분화되고 있으며, 나아가 포괄 대중에 대한 대중조직의 정치적 헤게모니조차 상실되고 있다. 물론 우리는 대중운동을 혁신하려는 기운이 곳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과도 마주하고 있다. 공동 투쟁을 통해 대중들이 직접 연대를 실현하려는 노력에서 상설적인 공동투쟁체를 건설하려는 노력까지, 당-노조 차원으로만 제한되지 않고, 직장과 가족을 넘어 지역과 부문을 아우르려는 노력까지, 이 모든 것들이 대중운동의 한 자락을 이루고 있음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중의 공동 투쟁 경험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이고, 더군다나 2002년 대통령 선거 이후 새로운 지배권력이 들어섰을 때 전체 민중운동 진영이 이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연합적인 질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노동자, 농민, 여성이 바로 이런 연합적인 질서를 만드는데 있어 정치적 조건을 바꾸고, 공동투쟁의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부도덕한 정권을 대신하여 들어설 반동적 정권에 맞설 수 있는 전국적 투쟁 거점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이 속에서 대중운동 혁신의 거점을 확보하고, 대중운동 혁신의 흐름이 서로 실천적으로 연대하도록 하는 것이다. 곧,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운동의 과제는 전선의 복구와 투쟁-저항주체의 형성과 이들의 연대를 통한 대중투쟁체 건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선 시기를 관통하는 공동의 투쟁대오를 강조하며, (진보정당으로) 제한되지 않는 대중의 정치적 투쟁체, 대중의 선거 투쟁체 건설을 제안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추를 넘어 내년도 공동투쟁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고자 진보진영 대통령 후보 경선과 민중운동진영의 단일 대응을 주장하는 것이다. 대중운동 지도부 교체가 대중운동의 혁신을 대신할 노릇이 못되듯, 민중운동 좌파진영의 우선 결집 혹은 입지변화가 민중운동의 혁신과 질서재편을 대신할 노릇이 못된다. 민중운동의 혁신은 노동자, 농민, 여성 대중투쟁주체의 형성을 뜻하는 것이며, 실천적인 연대를 꾀하면서 대중운동의 혁신을 주도하는 것이다. 대중운동을 좌익적으로 강화하고자 하는 세력들의 결집은 오로지 여기에서 비롯될 뿐이다. SO-LA
지배계층의 분열과 혼란은 이전투구의 양상을 넘어 공도동망(共倒同亡)하려는 듯이 보인다. 물론 그렇게까지 철없으랴 만서도, 통치 곤란에 대안도 없으면서, 옥체(?) 보존하고 있는 것도 신기할 노릇이다. 올해 말에 있을 대통령 선거 역시 그들의 욕된 생명줄을 연장시키려는 한판 굿이겠지만, 쉬이 볼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 선거와 하반기 투쟁을 특집으로 다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류주형은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냉정히 진단한다. 민주당의 어정쩡한 책략이 시효를 다한 상황에서 이들이 퇴행적인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는 사정을 자세히 살펴본다. 더불어 주인 없는 자리에서 퇴행적인 쟁점으로 사태를 장악하려는 한나라당의 책략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꼬집는다. 정치 일반의 위기를 비판하는 것이 민중운동의 과제라고 맺으며, 홍석만에게 자리를 비켜준다. 홍석만은 이상이야말로 신자유주의 비판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지배계급과 민중운동진영의 한판 격돌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는 하반기 대선 투쟁에서 민중운동의 투쟁방향과 과제를 제안한다. 선거투쟁을 제한하며 진보정당을 앞세우는 흐름과 좌파독자후보-선거무대응을 비판하며, 범추를 넘어서 민중진영 단일후보를 내세우고 벌이는 선거투쟁을 제안하고 있다.
2002년 하반기 투쟁의 과제와 대선의 의미 --전국대선투쟁본부 건설을 제안하며 2002년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계급투쟁의 지형 현 정세는 김대중 정권과 민주당으로 대표되는 개혁세력의 몰락과 보수세력의 재등장으로 특징지어진다. 김대중 정권 하에서 자행된 민생파탄-민주압살-부패비리의 확산은 노동자민중의 이반을 불러일으켰고 삶의 터전을 빼앗긴 대중은 개혁세력에 대한 지지를 급격히 철회했다. 김대중 정권의 정책개혁 즉 금융팽창에 따른 경제적 실리의 획득 역시 한국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매우 제한적이었고, 따라서 '중산층'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대중이 김대중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이로써 민주-반민주(개혁-보수) 구도를 통한 개혁 세력의 결집을 도모하여 전국정당화-정권 재창출을 노렸던 민주당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갔다(호남당으로의 전락). 그리고 지방선거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정치적 전망의 제시 없이 무차별적으로 시도되는 정계 개편은 스스로의 타락과 반민중성을 다시 한번 드러냈을 뿐이다. 반면 김대중 정권에 대해 퇴행·보수·반동적 반대를 조직했던 한나라당은 개혁세력의 몰락으로 발생한 정치적 공백을 대거 잠식하고 있다. 비록 한나라당의 지지 획득 방식이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긴 하지만 김대중 정권 및 민주당이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관리하고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특별한 계기가 없다는 점에서 이는 정권 교체의 전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보수세력의 집권이 사회 저변의 위기를 전환시킬 수 없다는 점은 자명하며, 오직 다른 양상의 위기와 모순의 심화를 의미할 뿐이다. 이들은 노골적인 친자본적 기조 하에 노사정위원회 철폐, 공공근로 사업 등 신자유주의적 코포러티즘·생산적 복지에 대해 보수주의적 반격을 감행하는 한편 국공립대 사립화, 관치금융 철폐, 공기업의 완전한 민영화 등 한국사회에서 '완전한 선진자본주의'를 구현할 것을 주장한다. 아울러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외교노선을 추종하며 반공·반북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결국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실행가능성을 제고하기 위한 정치적 조건으로서 군부정권에서 민간민선 정부로의 이행은 역설적이게도 개혁주의 세력의 '반민주-반민중적인 문민정치'로 인해 보수주의 세력의 정치적 복권을 조장한 셈이며 사회전반의 위기와 모순의 심화, 확대를 불러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6대 대통령 선거는 정치-사회적 위기의 심화 속에 지배세력의 권력재편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가늠하는 공간으로 놓여 있다. 이에 따라 대선은 지배계급으로서는 반복되는 위기를 관리하고 재봉합 할 새로운 지배분파를 형성해내는 적극적인 권력 재편의 계기지만,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으로서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반민중성과 파국성을 드러내고 한국 사회를 민중적-민주적 재편의 방향으로 전화시키는 계기로서 존재한다. 즉, 대통령 선거는 김대중 정권 5년,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비판과 이후 한국사회 재편전망의 주도권을 놓고 이루어지는 계급투쟁의 공간이다. 이는 결국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이 김대중 정권 하에서의 내부 혼란을 일소하고, 코포러티즘과 신자유주의를 절충하려던 개혁세력을 대체할 반동적 신자유주의 정부의 출현에 대해 본격적인 투쟁의 태세를 갖추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능동적 투쟁과 연합을 통해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해 민주적-계급적 반대를 조직함으로써 개혁주의 세력의 몰락으로 발생한 정치적 진공을 노동자 민중이 '능동적'으로 채워나가야 하는 시점인 것이다. 노동자민중운동의 현 상황과 사민주의적 전망의 과잉 이처럼 남한 사회 저변의 사회경제적 위기, '개혁세력'의 몰락과 보수세력의 재등장, 한반도를 둘러싼 장기적인 대치상태의 첨예화는 화약고와 같은 총체적 위기를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지난 5년 간 민중운동은 김대중정권 퇴진투쟁을 비롯하여,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운동을 활성화하고, 사회 각 부문에서 자행되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막아내기 위해 쉼 없이 투쟁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IMF 경제위기 이후 노농빈학 등 계급대중조직을 포괄하며 전선 형성적 운동을 지도·집행해야할 전국민중연대(준)는 노동자민중 투쟁의 중장기적 방향설정에 있어 불분명한 입장과 태도를 보이고 있으며, 전망의 불투명함으로 인해 여전히 느슨한 형태의 공동투쟁체에 머물고 있다. 또한, 계급대중의 투쟁은 스스로의 정치적 전망을 본격화하지 못하고 고립된 투쟁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처럼 현재의 노동자민중운동은 한국 사회 저변의 사회경제적 위기의 심화, '개혁세력'의 몰락과 보수세력의 재등장과 같은 총체적 위기를 급진적으로 전화시켜 내기 위한 고유한 이데올로기와 조직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드러나고 있는 사회적 위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더욱 강고한 투쟁 속에서 전국적인 민중연대 투쟁조직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투쟁은 눈앞의 정치 탄압과 허구적인 코포라티즘적 지향 속에서 무력화될 수밖에 없으며, 대다수 대중은 위기의 파괴적 효과에 그대로 노출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의 상황은 지난 지방선거에서 10%에 달하는 진보정당의 득표로 인해 진보정당(의 집권?!)을 통한 신자유주의의 극복이라는 사민주의적 전망이 극히 과잉되어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의 지배체제를 유지한 채로는 진보정당을 비롯한 그 누가 집권한다고 하더라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진보정당운동으로는 이러한 지배체제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데 구조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이미 초민족적 금융자본, IMF/WTO 등 세계기구, 신용평가기관에 철저히 종속된 한국경제의 구조적 조건 속에서 국가와 지배세력이 할 수 있는 것은 금융화에 따른 대중의 궁핍화와 불만을 미봉적으로 관리하고, 위기를 지연하기 위한 구조조정을 지속하는 것 이외의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민주노동당이 모범으로 삼고 있는 브라질 노동자당에 대한 초민족적 자본의 공격과 그에 대한 브라질 노동자당의 대응 과정을 보더라도 진보정당의 한계는 매우 자명한 일이다. 또한,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은 구조조정반대투쟁, 정권퇴진 투쟁 등의 과정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 바, 계급적 쟁점을 제시하고 투쟁을 선도할 능력의 부재 속에 상가임대차보호법 청원투쟁과 같이 NGO의 역할을 분점하고, 이에 더해 정치개혁 중심으로 정치적 플랜을 설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당명부비례대표제도 도입 후 처음 실시된 6·13 지자체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반부패/참여예산제 등의 쟁점을 중심으로 선거에 참여함으로서 민주당, 한나라당 등 지배세력들과 별다른 차별화나 계급적 쟁점을 형성하는데 실패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정당투표에서 133만표 8%로 자민련을 제치고 제3당으로 발돋움(?)하였다고 자평을 하고 있으나, 이번 선거결과를 민주노동당에 대한 직접적 지지의 효과라고 낙관하기는 어렵다. 김대중정부의 정책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대중의 불만과, 금융화에서 (일시적으로라도) 혜택을 받은 자들이 지지를 철회하는 상황이 기묘하게 결합되어 '개혁세력'의 붕괴(및 투표율저조+득표율저조)로 나타났다. 그리고 차별과 배제를 합리화하는 보수주의 이데올로기를 동반하는 한나라당이 역포위에 성공하며, 지배계급의 주류 분파가 군부독재의 탈을 벗고 다시금 정치 다수파로 복권하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은 일종의 상황의 지대를 누렸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 코포러티즘에 부분적으로 조응해 들어갔던 노동운동의 실리주의-조합주의 지향도 큰 원인이다. 대선방침-후보전술을 둘러싼 입장의 문제점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등 10개 단체 지도부는 지난 7월16일 '2002년 대선승리와 범진보진영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범국민추진기구'(이하 '범추')를 구성하기로 하여 민주노동당의 선제권을 승인할 것을 전제한 당 중심의 선거운동 기구 결성을 제 민중운동 진영에게 촉구하였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9월 8일로 예정된 당내 대선후보 선출을 통해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고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원을 등에 업고) 10월로 예정된 범진보진영 경선에서는 이를 추인하도록 압박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전국연합은 민주노동당과의 관계, 전농의 범추 참가 입장의 유보 등 다양한 변수 속에서 범추 경선에 참여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여기에 사회당은 진보진영의 후보단일화에 대해 무가치하고 몰이념적인 운동방식이라고 비판하고 좌파 독자후보(이른바 '사회주의 후보')를 가시화시키려 하고 있다. 이처럼 대선방침과 관련된 민중운동진영의 논의지형은 당 중심의 선거운동 지지지원 부대로 노동자민중운동의 능동성을 희석화시킬 위험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노-농특위 역시 하반기에 펼쳐질 농민투쟁과 노동자투쟁을 명확한 정치적 기조 하에 배치하고 지도, 집행하기보다는 대중투쟁 일정을 조정하는 선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한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또한, 대중투쟁을 선도하고 대선을 매개로 대중투쟁 자체를 정치적으로 고양시켜 나아갈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의 조직적 계획은 제출되지 않고 있다. 이러할 때 '정치적 집중력 없는 대중투쟁의 반복'과 '대중운동적 고양 없는 선거운동'의 편향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관건적인 사항이 된다. 결국 문제는 노동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다시 형성시켜내고 대중투쟁과의 결합 속에서 무엇을 목표로 선거투쟁에 임할 것인가 이다. 여기에는 크게 3가지 입장이 있는데, 첫째, 진보정당 즉,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한 후보전술 둘째, 좌파의 결집을 통한 좌파 또는 이른바 '사회주의 독자후보' 전술 셋째, 대선 무대응이다. 진보정당의 대선전술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지방선거로 인해 확인된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진보정당의 대선 후보를 통해 민중의 정치적 전망을 수렴하고, 2004년 총선에 제도권 진입, 2012년경 대선에서 수권한다는 전망이다. 이는 앞선 평가와 같이 민주노동당 노선의 중장기적 전망(사민주의적 전망)이 무망하다는 사실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전망을 민주노동당의 제도권 진입과 집권으로 대체함으로써 민주노동당의 선거운동이 '득표전술로서 틈새전략'의 모양새를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이 신자유주의 비판을 둘러싼 정치적 쟁점을 (선거전술로든 대중투쟁에서든) 유력하게 제기하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진보정당은 수권을 목표로 득표중심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보정당이라는 이유만으로 선거시기에는 무조건(!) 자신을 지원해야 한다고 하면, 대중의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을 더욱 가속할 뿐이다. 오늘날 노동 대중의 정치적 냉소와 무관심이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신자유주의 시대, 정치적 전망의 부재에 기인하고, 나아가 부르주아 정치정당의 호소가 지금의 정치체제(정당-노조)의 유지-복원과 퇴행적 쟁점(설사 이념을 동반한다 할지라도)에 기반하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진보정당의 선거전술 역시 여기서 한발 짝도 벗어나지 못한 채 맴도는 정치전술임이 분명해진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선에서조차 민주노동당에게 표를 몰아 달라는 식으로 대선 투쟁을 제한하려고 한다면, 개혁세력의 몰락으로 상징되는 정치의 위기를 퇴행적인 방식으로 극복하려는 부르주아들의 선거전술에 들러리 역할을 하겠다고 자임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대중운동의 위기, 고립 분산적인 대중투쟁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를 지연시키거나 호도하는 방식으로 작용할 것이다. 또한, 좌파(사회주의) 독자후보론의 경우 운동진영 내부에 만연한 사민주의적 전망의 과잉 속에서 좌파진영의 세력결집을 통한 사민주의노선과의 분화를 대선투쟁의 목표로 하고 있다. 대중적 토대에 기초해 변혁운동이 노선적으로 분화하고 각 세력의 정치적 전망이 이 속에서 구체화되어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좌파독자후보론은 운동진영의 결집이 정세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또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전망에서 무엇을 도모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면서 대선투쟁의 목표를 좌파 진영의 세력결집으로 삼는 본말이 전도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선거투쟁의 목표를 대중투쟁의 정치적 상승을 중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 좌파의 세력화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대리주의적 정치운동이라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정당 또는 계급정당을 중심으로 할 것인가의 차이가 있을 뿐 정치적 전망과 목표에 있어서 진보정당의 그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현재 투쟁의 중심과제는 '사민주의 노선과 어떻게 경쟁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더욱 효과적으로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을 폭로하고 대중투쟁의 전국적, 정치적 구심을 형성해 들어갈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이 속에서 대중 스스로가 획득할 정치적 전망을 놓고 사민주의적 전망의 비현실성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가장 치명적인 입장은 '대선 무대응'이다. 이 견해는 민중운동 진영의 정치적 역학관계만을 과도하게 해석하고는 현재의 정세에서 대선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견해이다. 후보 경선 이건, 대선 투쟁이건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을 지지기반으로 삼아 (조직할 방법도 의지와 계획도 없이) 대중투쟁을 강화해야한다는 말로 정세적 실천을 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대선투쟁이 결국 진보정당 지지운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경험적 통념은 이 경향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냉정한 정세 분석없이 이 같은 통념에만 기댈 경우 92년 이후 정치세력화가 진보정당의 건설로 수렴되고 말았던 역사를 오늘날 그대로 용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비판을 둘러싼 대중투쟁을 조직하면서, 전선복구라는 역사적 임무조차 방기하는 것이다. 결국 대선 이후 노동자 민중운동의 어떠한 정치적 전망도 형성하지 못하고, 대중 사이에서 유효한 정치적 쟁점을 제시하며 토론할 수조차 없기 때문에, 향후 투쟁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똑같은 오류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가장 치명적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노동자 민중운동진영은 반동적 권력재편을 기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에 맞서 2002년 하반기 투쟁과정에서 대선을 매개로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등 계급대중의 투쟁을 정치적으로 상승시켜 내고 집중시켜 내기 위한 적극적인 계획이 필요하다. 동시에 대통령선거라는 부르주아 정치일정이 민중운동진영의 분열을 야기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것을 막고 노동자 민중투쟁을 바탕으로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의 반동적 재편을 분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범진보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위해 구성된 현재의 범추는 진보정당을 전제로 한 대선후보 선출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제한성이 존재한다. 또한 민주노동당의 당내 후보경선이 확정되면서 전농은 참가유보를 하였고 전국연합의 현실적 유보 등으로 민중진영의 경선기구로서 범추의 생명은 다했다. 현실적으로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의 운동으로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열망을 수렴할 수 없는 조건에 있으며, 노동자 민중 투쟁의 과정에서 진보정당의 한계가 확인되고 있다. 결국 현재의 상황에서 노동자 민중이 진보정당을 통해서 걸러진 몇몇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노동자 민중 스스로가 자신의 대선 후보를 추대하는 것을 통해 진보정당의 후보로 제한되지 않는 노동자 민중의 후보를 형성해 나가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민중운동진영의 대선후보 경선은 첫째,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의 반동적 재편에 맞서 민중운동진영의 단일한 대응력을 확보해야한다 둘째, 투쟁하는 노동자 민중에 의해서 노동자 민중의 후보를 추대해 나가야 한다. 셋째, 대선투쟁과정에서 지켜야 할 공동의 행동강령을 도출, 합의하고 부르주아 정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민중적 정치방침을 공유해야 한다. 무엇보다 범추로 표상되는 진보정당 중심의 경선기구는 광범위한 노동자 민중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시급히 전화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후보를 내는 세력 자신들만의 집안잔치로 끝나거나 찻잔 속 태풍과 같이 노동 대중의 전반적 무관심 속에서 지배세력의 반동적 권력재편에 들러리를 서는 역할 이상을 못하게 될 것이다. '전국대선투쟁본부' 건설을 제안한다 이처럼 2002년 대선투쟁의 목표는 대선을 매개로 지난 5년 간 노동자 민중의 반신자유주의 연대투쟁과정에서 보여준 김대중 정권하 구조조정 비판의 주도권을 확인하며, 이를 통해 어떠한 방향으로 정치적 대응력을 강화할 것인가에 있다. 여기에 노동자 민중의 조직적, 정치적 전망의 형성과 반신자유주의 연대전선의 복구, 지역적·전국적 투쟁의 구심의 형성과 선거투쟁을 매개로 대중투쟁을 고양시켜 나가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따라서 하반기 대중투쟁을 명확한 정치적 기조 하에서 고양시키고, 이 연장선상에서 선거투쟁을 보다 효과적인 정치선동의 장으로 만들려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중투쟁을 선도하거나 구체적으로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 전국민중연대(준)의 현실과 노-농연대투쟁의 정치적, 조직적 한계 그리고 불안정노동철폐투쟁의 전국적 확대를 이루어내지 못한 현실을 냉정히 인식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전국적으로 대선을 매개로 각 기층대중투쟁을 고양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상승시켜 내기 위한 계획을 가져야 한다. 나아가, 대선을 앞두고 하반기 투쟁을 단지 선거참여로 제한하려는 흐름에 맞설 계획도 제출해야 한다. 대중투쟁의 역능을 고양시키며 그 성과로서 대중투쟁을 중심에 둔 대선투쟁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지난 6·13 지방선거와 마찬가지로 선거 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하반기 대중투쟁을 선도하고, 범추의 제한을 넘어 전체 노동자 민중의 대선 투쟁과 하반기 투쟁의 정치적 집중을 도모할 수 있는 전국적 투쟁계획과 투쟁조직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반동적 권력재편 분쇄와 민중연대전선 강화를 목표로 각계 민중의 신자유주의 반대투쟁의 조직적, 정치적 성과를 총괄하여 하반기 투쟁을 선도할 전국대선투쟁본부(이하 '대선투쟁본부')의 건설로 모아져야 한다. 대선투쟁본부는 2002년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의 반동적 권력재편에 맞서 노동자 민중 투쟁의 정치적, 조직적 구심을 형성하는 일주체로서 활동해야 한다. 그를 위해 대선투쟁본부는 김대중 정권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 세력의 공동투쟁기구로서 전국민중연대와 긴밀히 결합하여 하반기 노농연대 투쟁을 선도하고, 불안정노동철폐 투쟁을 전국화하고, 전체 민중운동 차원에서 제기되는 후보선출과정-선거운동 전반에 결합할 단위로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대선투쟁본부 구성의 의의는 민중생존권에 기반해 대선을 매개로 정치투쟁과 대중투쟁을 결합한다는 의미,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의 반동적 재편을 분쇄하기 위한 향후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조직적 전망을 수렴해 나간다는 의미, 대선시기 투쟁을 진보정당으로 대리하지 않고 노동자 민중의 조직적 역량을 결집하여 대중투쟁으로 돌파해 나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대선투쟁본부는 대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첫째,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으로 인한 총체적 민생파탄-민주압살-부패비리를 전면 폭로하고 김대중과 노무현 등 개혁세력의 무능과 부패를 거듭 폭로하고 타격해야 한다. 김대중정권의 '사회적 합의'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치장하기 위한 헛된 구호에 불과했고, 그들의 무능과 부패는 노동자 대중의 희생를 대가로 뿌려진 자본의 떡고물이라는 사실을 적극 폭로해야 한다. 둘째, 동시에 보수주의적 기조를 강화하는 한나라당과 이회창은 신자유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한국사회를 반공군사정권의 시대로 되돌려 놓으려는 반동적 집단임을 적극 폭로하며 이들에 대한 타격을 통해 지배계급의 반동적 권력 재편을 분쇄하고 한국사회 위기의 진정한 대안세력으로 스스로를 정립해야 한다. 셋째, 또한 2002년 하반기, 금융 자유화와 농업 개방에 따른 민중생존의 위기에 맞서 대중적 투쟁에 적극 복무하고, 노동신축화와 민중 생존의 위기 속에서 불안정노동의 확대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넷째, 한미일 삼각동맹의 대북 압박책과 남한의 군사력 증강 시도에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투쟁의 성과를 수렴하여 대선 이후 노동자 민중운동의 중장기적인 정치적 전망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나아가며 2002년 대통령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5년 동안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 아래에서 신음하며 피흘리면서도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노동자 민중 투쟁의 성과를 무엇으로 남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몰락하고 있는 부르주아 계급지배의 위기와 사회적 위기의 심화 속에서 신자유주의 세력의 반동적 재편을 그대로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그동안의 민중투쟁의 성과를 정치적으로 수렴하고 이후 전국적 투쟁의 구심을 형성해 나갈 것인가. 짧지만 중요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계개편, 위기에 빠진 정치를 구원할 수 있는가 ―대선 정치지형 쟁점 분석과 비판 지배정치세력의 행보가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다. 장상 총리 서리 국회 인준 부결,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 정몽준 대안론의 급부상 등 숨가쁘게 진행된 정국은 정치의 위기를 단적으로 상징한다. 현재 지배계급은 이를 재봉합할 수 있는 정치적 전망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과 민주당은 지방선거 참패 이후에 자신들의 이념·노선적 지향을 전혀 밝히지 못한 채 퇴행적·반동적인 방식으로 정계개편을 추진하고 있을 따름이다. 한나라당 역시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도 불구하고 '정치 공동화' 현상에 우왕좌왕하며 동반 몰락을 경험하고 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오리무중의 정국, 과연 지배 정치의 위기는 극복될 수 있는가. 총리인준부결과 병역비리 의혹을 둘러싼 정국파탄과 교착상태의 지속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에 대한 민심이반이 광범하게 형성된 가운데 거듭된 부정부패로 인해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대패하였고 그 결과는 김대중 정권의 정치적 몰락과 개혁주의(세력)의 정당성의 해체, 붕괴로 드러났다. 설상가상으로, 613 지방선거에서의 대패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김대중 정권과 민주당은 다시 한번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다. 7월 31일 장상 총리 임명동의안이 국회 재적의원 259명 중 244명이 참석한 가운데 실시한 표결에서 찬성 100표, 반대 142표, 기권 1표, 무효 1표로, 찬성표가 출석의원 과반인 123표를 넘지 못해 부결 처리된 것이다. 장상 총리서리의 국회인준 부결로 말미암아 대선을 앞둔 정치적 역관계의 현저한 차이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같은 날, 김대업이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의 부인 한인옥 여사가 아들 정연씨의 병역면제 과정에 연루돼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정국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환란에 빠져들고 말았다. 한나라당은 즉각 김대업의 배후로 현 정권을 지목하였고 공작정치를 중단하지 않을 경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탄핵도 불사할 것임을 선언했다. 김대업 역시 자신에 대한 한나라당의 비난에 대해 명예훼손 혐의를 제기하며 검찰에 맞고소·고발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자동적으로 병역비리 은폐사건에 대한 수사과정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고 상황의 불리함을 깨달은 이회창은 급기야 '대통령후보 사퇴와 정계은퇴'라는 최후저지선을 설치한다. 이어서 김대업이 한인옥씨가 아들의 병역면제 과정에 개입한 내용이 담겼다는 녹음테이프와 녹취록을 검찰에 제출함으로써 정국은 수사 물증확보를 둘러싼 지리한 공방전에 돌입하게 된다. 민주당은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비리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을 다짐하는 특별결의문을 채택하면서 정치적 공세를 강화하였고 한나라당 역시 검찰과 법무부장관의 개입 의혹을 제기하며(청와대 개입-조작설) 장외시위로 공방을 가속화하였다. 사태는 한나라당의 법무장관 해임건의안 제출과 민주당의 1천만 서명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이번에 지면 대선에 진다"는 인식 하에 대치 양상은 장기화될 조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여론은 극단적인 정치적 불신과 환멸을 반영하고 있다. 김대중 정권과 민주당의 실정에 대해 지지의사를 철회한 대중들은 한나라당의 보수주의적 반격에 부분적으로 조응하면서도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총리 인준 부결 과정에서 지배계급의 타락상이 공개되면서 지배계급 전반에 대한 분노를 불러왔을 뿐더러 연이어 불거진 병역비리 공방 역시 결국은 정견과는 무관한 정치 공세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이는 자명하게도 이회창과 노무현에 대한 지지율의 동반하락과 정몽준의 급부상으로 표현되고 있다(이회창 : 노무현 : 정몽준 / 7월 36.8% : 24.5% : 18.7% / 8월 31.8% : 19.3% : 30.9%). 그러나 그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 않은 바, 각 정치세력이 처한 구체적인 조건을 살펴봄으로써 향후 정계개편이 불러올 파장을 예측해보도록 하자. 8.8 재보선의 참패와 민주당의 해체 30%에도 미달하는 투표율 속에 지난 8일 실시된 재보궐 선거는 11대 2라는 일방적 스코어 속에 한나라당의 원내 과반수 확보라는 결과를 낳았다. '미니 총선'이자 '대선 전초전'으로 인식되어온 8·8 재보선임에도 불구하고 전국적 규모로 치루어진 역대 선거 중 사상 최저의 투표율을 기록했다는 것은 현 정치에 대한 대중들의 극단적인 불신과 환멸을 다시 한번 반증한다. 집권 말기 국정의 안정적 운영(경제 안정+대선의 공정한 관리)이라는 기치를 내건 김대중은 월드컵 흥분의 여파를 '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선정적 슬로건으로 대체하려 했으나 그 결과는 참담할 뿐이었다. 장상 총리 국회 인준 부결과 병역 비리 공방은 대중들에게 지배계급 전반에 대한 공분만을 누적시켰고 그 결과는 투표율로 확인되었다. 지방선거 참패 이후 민주당은 내우외환의 형국에 처했다. 지방선거 패배의 책임을 둘러싸고 형성된 당내 권력 쟁투는 급기야 노무현 후보사퇴와 신당창당, 심지어 분당 논의로까지 이어졌고 원내 단독 과반수를 확보한 한나라당의 외압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위기를 타개할만한 구체적인 정책과 정치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한 행보를 거듭할 따름이었다. 그 결과 민주당은 호남지역 두 곳에서만 무소속 후보에 승리를 거뒀을 뿐 사실상 전 지역에서 완패함으로써 613 지방선거에 이어 다시 한번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고 이로써 민주당은 해체 일로를 걷게 되었다. 8·8 재보선 참패 이후 민주당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없었다. 개혁주의로서 자신의 정체성마저 져버린 반동·퇴행적인 정계개편 말고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지속시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613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 공방 속에서 어느 정도 가시화된 후보 교체론은 이제 노무현 자신도 거스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민주당은 즉각 신당창당 추진을 공식화했다. 노무현은 국민경선 형식으로 재경선을 수용할 의사를 밝혔으나 신당 창당 전에 사퇴를 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였으며, 이인제를 중심으로 한 비주류 진영은 노무현의 후보 즉각 사퇴와 민주당의 정치적 색채를 일절 배제한 (정몽준, 김종필, 박근혜, 이한동 등을 아우르는) 신당창당을 주장하였다(굳이 노선적 근거를 찾자면 "신당은 오로지 중도개혁과 국민통합신당"이라고 말한 민주당 김영배 신당추진위원장의 말에 의존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와중에 노무현과 민주당에 대한 여론의 급격한 하락과 대조적으로 수직상승세를 그리고 있는 정몽준 대안설이 확산되며 신당 논란은 오로지 당선 가능성만을 염두에 둔 채, 모든 변수는 정몽준을 중심으로 하는 신당 창당의 가능성 여부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정몽준이나 박근혜는 민주당이 제안한 신당창당에 부정적인 의사를 표시해왔고, 이들을 포섭할 것을 중심으로 구상된 신당 창당 흐름(특히 이인제 계열을 중심으로 한 노후보 先사퇴, 後창당론)은 일시적인 교착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어떠한 형식을 취하든 간에 노무현의 후보사퇴는 국민경선제의 부정(최소한의 형식-절차적 민주주의의 부정, 따라서 정당성의 상실)을 의미하며 이것이 직면하게될 정치적 부담은 민주당으로서도 쉽게 감내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 정계개편 논의의 새로운 흐름―'개혁적 국민정당' 창당? '4자 연대'를 중심으로 설정된 민주당의 신당창당 흐름이 일정정도 교착상태에 빠진 시점에서 개혁주의 진영의 재결집을 통한 하나의 중대한 전환이 시사되고 있다. 노무현은 후보 선출방법과 시한 등 신당에 관한 모든 것은 신당창당추진위원회에서 논의할 수 있도록 위임했다고 밝히며("나의 국민경선 주장은 살아있지만 신당을 잘되게 하기 위해 이런저런 조건을 들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제 기득권이 하나도 없다") 얼핏 보기에 후보 포기를 선언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정몽준의 합류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는 정황 판단 속에서 오히려 노무현을 중심으로 하는 범개혁주의 신당을 창당하겠다는 구체적 의지로 해석될 수도 있다. 민주당 대표 한화갑 역시 정몽준이 '경선을 통해 후보될 뜻이 없다'고 밝힌 데 대해 "없으면 없는 대로 대처할 것이며 '정몽준 후보'가 없다고 당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고 말함으로써 새삼 민주당의 이니셔티브를 강조하고 나섰다. 더욱이 동반몰락을 경험하고 있는 이회창이 결정적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신당 창당 흐름은 급속히 새로운 기류로 접어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전조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있던 '노사모'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국민경선-노무현 후보 지키기 운동에 돌입했다는 점이다. 현재 '노사모'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양쪽에서 재활성화되고 있으며 노무현을 중심으로 진행중인 '정치개혁'의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정치혁명과 국민통합을 위한 개혁적 국민정당'은 반부패(즉 '탈(脫) DJ')를 핵심 쟁점으로 하는 참여민주주의(CMS 당비제)·미래형(인터넷 활동) 정당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과연 개혁신당 창당은 과연 개혁주의의 붕괴 이후 가시화된 반동·퇴행적 정계개편 논의를 적극적·발전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현 시점에서 '개혁주의'가 가능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에 대해 질문해봐야 한다. 개혁주의의 몰락은 단순히 부정부패로 인한 자동붕괴 때문이기보다는 그것을 결정하는 구조적 요인들―예컨대 금융화를 통해 직접적으로 물질적인 수혜를 얻은 신중간층(공기업 사유화 과정에서 형성된 소규모주식을 소유한 방대한 중산층이나 벤쳐기업의 수익을 누린)의 실리가 더 이상 확장 불가능한 조건―로 인한 것이었다. 현재까지 이를 역전시킬만한 특별한 요인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 게다가 소위 반민중적·반민주적인 문민정치로 말미암아 정치적 냉소주의가 심화되고 '개혁의 피로도'가 누적된 탓에 노무현의 '개인인기영합주의'는 분명 물질적인 한계를 지닌다. 더욱이 이들 '개혁신당'론이 전제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완성(보수-진보라는 양당 체계)은 일정한 개량의 구축과 안정적인 전국적 응집력이라는 (대중을 정치적으로 포섭하기 위한) 두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현재 불가능하다. 자유주의적 지향의 정치세력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언제나 노동자 대중의 지지가 필수적이지만 이미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은 대다수의 노동자계급을 배제함으로써 그들의 집단적인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따라서 남한의 '자유주의' 세력은 계급적 동원보다는 뚜렷하게 '지역주의'에 기생(DJP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2000년 총선에서 총선시민연대와 386세대를 앞세운 김대중과 민주당이 시도한 '자유주의' 세력의 전국정당화 역시 좌초함으로써 안정적인 정당을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이 취약하다는 것이 이미 드러났다. 따라서 노무현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자유주의' 세력의 '개혁신당' 창당 흐름 역시 비록 '4자연대'와 같은 식의 반동적·퇴행적 정계개편에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이 불충분하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작전'일 뿐이다. 결국 개혁세력의 붕괴 이후 추진되고 있는 또 다른 '개혁주의'는 기존의 한계를 답습할 가능성이 농후하며 오히려 현재와 같은 사회적 위기와 정치의 위기를 반부패와 정치개혁이라는 허구적 쟁점으로 호도하려 한다는 점에서 되래 더 반동적이다. 정몽준의 출마 여부―그 의미와 파장 이러한 상황에서 정몽준의 대선 출마는 기정사실화되고 있으며, 단지 민주당 신당 합류냐, 제3의 신당 창당이냐, 무소속 단독출마냐라는 방법상의 선택만 남은 듯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정몽준의 행보를 쉽게 점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며 특히 정몽준을 중심으로 한 정파연합의 대선 승리 가능성을 낙관할 상황은 더더욱 아니다. 우선 정몽준이 무소속 혹은 독자신당을 창당해서 출마할 가능성은 애시당초 배제된다. 전자의 경우 대선이 요구하는 전국적 조직력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에서 정확히 10년전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돈'으로 '배제'된 자들을 규합해서 국민당과 같은 종이정당을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한 민주당에서 제안하는 신당창당에 합류하는 경우 역시 현재로선 그리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보여진다. 여론조사만 놓고 보자면 이미 독자적으로도 당선 가능성이 확인된 마당에 굳이 '민주당'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게다가 승리 가능성을 점칠 수 없는 국민경선제를 수용하면서까지 민주당의 신당창당에 합류하기란 그리 탐탁치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제3의 신당을 창당할 가능성만이 현실적이다(실제로 지난 8월 15일 정몽준 스스로 이인제·박근혜 등과의 제휴방식을 통한 제3의 신당창당의사를 분명히 하였고 현재 9월 10일경 대선출마 여부를 공식 발표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경우 고려되어야 할 것은 과연 이렇게 창당된 신당이 전국적 조직력과 최소한의 내적 통합이나마 가질 수 있느냐라는 점이다. 이인제를 중심으로 한 민주당 내 '반노'세력의 파괴력 자체도 장담할 수 없거니와 민주당 내 분파들이 제3당으로 이탈할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정치인 개인의 인기에 의존한 창당의 한계는 자명하다. 더욱이 민주당을 포함하지 않는 제3의 신당 창당 흐름에 대한 부정적 여론(8월 22일 조선일보 발표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신당창당이 우리나라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견해가 과반수(51.2%)를 넘었다)에도 불구하고 선뜻 사실상 정치적 낙오자에 불과한 이들과 연합하여 신당을 창당하기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신당 창당이 성사된다해도 '군소 지역 연합'에 불과하여 대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뿐더러 권력분점을 매개로 한 '반이회창-비노무현' 노선 자체가 지니는 한계(창당 명분의 부재)로 인해 이합집산의 운명에서 크게 벗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 정몽준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동반하락 추이를 관망하며(그의 아버지인 정주영이 너무 빨리 대선 출마를 결심한 것이 오히려 각종 검증작업에 노출되었음을 반추하며 그 시기를 최대한 늦출 것이다) 자신의 이니셔티브가 최대한 보장되는 선에서 출마 여부를 저울질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정몽준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합종연횡의 성격이다. 실제로 정몽준은 "로마시대 귀족의 아들인 시저는 민중파에 속해 정치를 했고, 미국의 유명 재벌집안 아들인 케네디도 서민을 대변하는 민주당 소속이었다"며 '부유한 정치인의 진보성'을 유난히 강조했던 바 있다. 노무현의 참신성에 기반한 개혁세력의 결집 가능성이 여전히 불투명한 가운데 정몽준 개인의 인기에 영합한 새로운 형태의 연합(노무현의 인민주의적 개혁주의와는 다른 미국적 형태의 엘리트적 개혁주의?)이 출현한다해도 이는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상징조작을 통한 퇴행적·반동적 정계개편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모순을 재생산할 뿐이다. 한나라당의 위기 봉착 가능성의 증대 한편 '병풍' 공방으로 첨예화된 정국은 장대환 새 총리 지명자에 대한 국회동의 여부로 연결되며 심각한 교착상태에 빠져들었다. 검증과정에서 실제로 밝혀졌듯이 위장전입, 재산등록 누락, 세금탈루 등 도덕성에 하자가 있는 인사가 국무총리가 돼선 안된다는 여론이 팽배해있으며 이는 장상 전 서리 당시보다 더욱 부정적인 분위기다. 이에 민주당은 이번만큼은 통과시켜야 한다는 절박감 속에 지난번 표결 때와 달리 당론투표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다. 반면 한나라당의 경우 막판까지 총리인준안이 두 번 연속 부결될 경우 자칫 역공세로 이어지지 않을까라는 정치적 부담 속에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지 못하기도 했다. 한편 대부분의 시민단체들은 "인사청문회를 통해 드러난 각종 잘못된 관행과 부정부패의 의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장 지명자는 총리 자격이 없"고 "장 지명자가 10여개의 실정법을 위반했다는 사실이 청문회를 통해 드러났다"며 국회인준 반대입장을 표명했다. 장상 총리 서리의 국회인준 부결에 대해 반발했던 여성계 역시 장대환 총리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장상 총리의 그것에 비해 더욱 높음에도 불구하고 "28일 실시될 국회 표결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남성 총리지명자에게 장상씨와 다른 검증잣대를 들이대고 엄정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 경우, 성차별로 규정해 정치권을 심판할 것"(한국여성단체연합)이라고 경고했다(이미 한나라당은 장상 총리 인준 부결 직후 즉각적으로 여성계의 반향을 우려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장대환 총리 임명동의안은 부결되었고 그 파장은 우선 같은 날 본회의에 보고된 김정길 법무장관 해임건의안 처리 문제와 겹치면서 정국을 파란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큰 것이 사실이다. 당장 인사권자인 김대중은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 자명하다. 집권 초 김종필 총리 인준 당시부터 '인사'에 관한한 가시밭길을 걸어온 김대중으로선 총리직 장기공백에 따른 부담을 고스란히 안고가야 할 처지가 된다. 원내 제2당이긴 하지만 '정책여당'을 표방하고 있는 민주당 역시 당 지도부의 지도력 부재를 확인시켜 줌으로써 내홍의 불씨를 안게 되는 동시에 '병풍의혹'으로 일정정도 만회한 정국주도권을 상당부분 상실할 수 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미 민주당 내에 팽배한 무기력증과 각 계파간 갈등이 감출 것 없이 드러난 상태인지라 인준안이 계파 갈등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지는 못할 것이며 오히려 DJ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킬 마지막 호기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현재의 정국 대치상황이 가져올 파장은 한나라당에 더 크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우선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의 입장에선 '과반수의 힘'을 유감 없이 발휘, 확고한 원내위상을 과시한다는 순기능적 측면이 있으나 결과적으로 '거대야당의 거만'이라는 눈총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대통령후보의 두 아들 병역비리 의혹수사에 대한 전략적 대처에 사활을 걸고 있는 한나라당으로선 당장 김정길 법무장관해임건의안 처리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다. 인준안 부결에 이어 해임안 처리까지 강행할 경우 '다수당의 횡포'라는 여론의 반발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준안 부결로 정국이 급격히 경색된 상태에서 정기국회가 열려 국회가 '대선 격전장'이 되고 이에 따른 정국혼란이 가중되면 한나라당이 져야 할 책임도 '원내 과반수' 만큼이나 커지게 된다. 장기적 대치 상태에서 정기국회가 열리면 민주당은 이회창 후보의 '5대 의혹'을 내세워 총공세를 펼칠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총리인준안 처리결과와 관계없이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정면충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그 정치적 파장은 당분간 쉽게 진정되기 힘들 것이다. 이에 따라 이회창을 둘러싼 각종 의혹의 객관적 사실 여부에 따라 역관계는 항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될 것이다. 결국 9월 이후 본격적인 대선 행보가 시작되면서 지배계급 내의 공방은 지리멸렬하게 계속될 것이고 이는 대선 지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지배 정치의 위기와 민중운동의 과제 전세계적인 수준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적 사회재편의 파괴적 양상은 기존의 정치와 경제운영방식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요구하는 흐름을 광범위하게 낳았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는 1997년을 전후로 유럽 각국의 우파를 권좌에서 밀어내는 이변을 낳았고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제3의 길이었다. 영국 노동당 블레어와 프랑스 사회당 조스팽의 노선으로 상징되는 제3의 길은 기존의 사민주의의 혁신과 시민운동(NGO)의 결합을 주장함으로써 전체 노동계급의 사회적 응집성이 해체된 상황에서 이들의 일부를 재포섭하고 사회적 질서를 재확립하려는 정치전략이라 할 수 있다. 거의 동일한 시기, 김대중은 신자유주의와 코포러티즘을 절충하는 한편 시민운동 동원전략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시발전이라는 전략 속에서 공공연히 제3의 길을 자신의 노선과 유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약한 자유주의적 토대는 DJP공조가 상징하듯 보수세력과의 부분적 공조와 지역주의 연합의 형태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는 항시적인 정치적 불안과 개혁주의 노선의 파탄으로 드러났다. 결국 장기-구조적 위기 속에서 위기와 개혁의 주기가 대통령선거 등과 같은 정치일정과 맞물리면서 위기의 해결과는 무관한 의사쟁점을 중심으로 정치세력 간의 이전투구가 일상화된다. 지배정치 세력의 정쟁은 사회전반의 위기와 모순의 심화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양자가 동시적 무능력에 빠진 상황에서 전개되는 정계개편이란 이념·노선을 상실한 정치세력간의 이합집산, 합종연횡에 불과하다. 그 결과 대중들은 해결되지 않는 삶의 위기 속에서 정치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과 환멸에 빠지고 정치 자체에 대한 반감(즉 反정치)으로 일관하곤 한다. 따라서 지배정치에 대한 비판이 정치 자체에 대한 혐오를 조직하거나 외면하는 전략(즉 선거를 포함한 지배정치 일체에 대한 개입을 거부하는 '전무' 전략)으로는 불가능하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관건이다. 더욱이 지배 정치의 위기가 자동적으로 다가올 대선에서 민중운동의 이니셔티브로 수렴되는 것도 아닌 바, 이러한 균열을 공략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선거 자체에 매몰된 '전부' 전략). 바로 여기에 민중운동 진영이 대통령 선거에 능동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민중운동은 대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선거 공간 내외부를 가로지르며 지배정치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정치에 대한 지배적인 표상을 역전시켜내는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대선에 이르는 과정에서 민중운동 진영은 지배정치의 위기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강고한 투쟁과 조직을 형성함으로써 지난 시기 전개되었던 민중투쟁의 성과와 한계를 전진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재편이 낳은 파괴적 효과로부터 자승자박의 형국에 처한 지배정치의 균열을 확장하는 실천은 이제 보다 적극적으로 조직될 필요가 있다.
[{사회진보연대} 기획연재] 신자유주의 시대 중국⑤ [연재순서] 1. 흔들리는 중국 (1·2월 합본호) 2. 외부의 자극으로 내부의 구조조정을: WTO 가입과 중국의 미래 (3월호) 3. 국유기업 개혁과 중국의 노동자 (4월호) 4. 黑猫白猫: 외국인 직접투자와 대외개방 (6월호) 5. 마오쩌뚱의 유령 (본호) 마오쩌뚱의 유령 백 승 욱 (한신대교수, 편집자문위원) 최근 들어 중국에서 국유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시행되면서, 실업문제가 심각해지고, 노동자의 지위가 하락함에 따라 노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일반 대중의 불만이 커져가고 있는 것은 여러 보도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신자유주의 지향의 사회적 구조조정은 극단적인 사회적 양극화를 낳았다. 중국을 취재한 한국의 한 방송사의 기획프로그램에서 중국 내륙의 한 농민은 개혁개방의 성과에 대해 평가하면서 "있는 놈들은 배 터져 죽고, 농민과 없는 놈들은 굶어 죽고"라는 말로 현재의 중국 현실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기도 하였다. 떵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 이후 중국의 지도부는 이런 현실을 단지 과도기적인 상황으로 합리화하고, 현실의 문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사회주의론의 변용을 추진하고 있지만 현실의 문제가 이론적 합리화에 의해 쉽게 해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더구나 코포라티즘적 체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자본가계급까지 포함하는 집권당으로서 중국공산당의 성격을 전화하려는 노력은 인민공사의 해체와 노동자 특권의 해체라는 코포라티즘적 토대의 와해와 엇물리는 것이어서 현실적 효과도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위기적 현실 속에서 중국 노동자들의 대응 또한 새로운 모습을 띠고 있는데, 올 초부터 발생한 동북 지방의 자생적 파업이 한 예일 것이다. 노동자들의 변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중국 중부 지역의 한 공업도시에서 중국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이 자발적인 모임을 조직해 학습과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도시의 노동자들은 저녁 시간을 이용해 노동자 문화궁 앞의 광장에서 자발적 토론회를 구성하기도 하였고, 또 현실을 분석하기 위한 자체적 학습모임을 만들기도 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동원한 이론적 준거가 마오쩌뚱의 후기 사상, 즉 문화대혁명기 마오쩌뚱이 제기한 '계속혁명론'이었다고 한다. 계속혁명론이란 사회주의가 언제나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하에서도 계속적인 계급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으로 중국의 문화혁명의 근거가 된 이론을 말한다. 중국 정부가 현실적으로는 중국사회주의 역사의 핵심적 측면을 부정하고, 그 속에서 단지 근대화론적 함의만을 계승하고 있긴 하지만, 스스로 사회주의 국가임을 내세우고 있는 정당화의 근거인 떵샤오핑의 '4대 기본원칙' 중 하나가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마오쩌뚱 사상의 계승이라는 점에서, 이들 노동자들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역설을 이용해 현 체제를 비판하고 있는 흥미로운 시도를 보여준다. 이 도시의 노동자들은 이 지역에서 발생한 파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앙에서 고위급 간부가 파견되어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이 지나가는 눈에 잘 띄는 길목에 커다란 현수막을 내걸고, 거기에 '마오쩌뚱 사상만세!'라는 구호를 적었다고 한다. 이 구호를 중국지도부가 어떻게 해석했을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마오쩌뚱, 특히 대약진과 문화혁명기의 마오쩌뚱의 입장은 공식적으로 중국에서 오류로 거부된 입장이고, 사실 중국의 개혁개방 20여 년은 이런 마오쩌뚱의 입장에 대한 즉자적인 안티 테제로 자리 매김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마오쩌뚱의 '정치우위'가 떵샤오핑의 '경제우위'로, 마오쩌뚱의 '계속혁명론'이 경제성장을 우위에 놓는 단계적 발전론으로 대체되어 온 것이 그 일면이다. 중국 천안문 광장에 걸려있는 거대한 사진 속의 마오쩌뚱은 분열되고 서방의 모멸을 받아온 거대한 중국을 소생시킨 국부(國父)이자 중국 경제건설의 기초를 닦아 중국을 강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위인으로 수용될 수 있을 뿐이며, 1950년대 말 이후의 마오쩌뚱은 잘못된 노선선택에 의해 중국을 적어도 10년 이상 퇴행시킨 오류에 찬 인물이라는 것이 중국정부의 공식적 평가이다. 이렇게 해서 마오쩌뚱의 현재적 위험은 제거되었다고 보고있었는데, 느닷없이 '마오쩌뚱 사상 만세!'라니, 마오쩌뚱의 유령이 다시 떠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인가? 지금 중국에서 다시 마오쩌뚱을 거론한다는 것, 특히 계속혁명론의 마오를 다시 거론한다는 것은 마치 역사를 다시 과거로 돌리고, 현재의 삶의 수준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시도로, 중국을 다시 폐쇄되고 낙후된 상태로 되돌리려는 반동적 시도로 간주될런지도 모른다. 마오쩌뚱은 '죽은 개'일 뿐이다. 중국 사회주의 역사의 모든 오류는 마오의 이름으로 귀속되고, 현 체제의 발전방향에 대한 반대는 즉각적으로 마오노선으로 회귀하려는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이분법만이 존재할 뿐이다. 누구도 마오쩌뚱 시기의 중국사회주의의 역사를 공식적 견해와 다른 관점에서 제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를 어기고 죽은 혼을 무덤에서 되살리려는 자에게는 '극좌파'라는 험악한 딱지가 붙을 뿐이다. 이처럼 20여 년 동안의 노력 끝에 중국지도부는 마오쩌뚱을 역사적 인물로, 죽은 개로 매장하는데 성공했다고 치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오쩌뚱의 유령이 어두운 창 밖에서 흐릿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실내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막지는 못하고 있다. 마오 사후 1980년대까지 이따금씩 나타나던 마오의 유령은 1990년대 들어서는 더욱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유령은 죽은 자이다. 따라서 현실 속에서 논쟁의 상대로, 그리고 수미일관된 입장을 지닌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해 어떤 다른 세력과 대면하지는 않는다. 누구도 죽은 마오쩌뚱의 계승자임을, 특히 공식적으로 비판되고 부정된 그 입장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여 논쟁을 벌이고 있지 않다. 유령은 우리의 삶의 일정 속에서 예측 가능한 시간적·공간적 자리를 차지하고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정되었고, 사망하였고, 따라서 공식적으로 그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디선가 출몰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것은 느닷없이 어느 한 도시의 노동자들이 내건 '마오쩌둥 사상만세!'라는 구호 앞에서 잠시 나타난다.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중국의 근대성의 문제를 다시 사고해야 한다는 비판적 지식인들의 주장 속에서도 마오의 유령은 다시 등장한다. 마오쩌뚱의 사진을 택시에 달고 다니고 마오쩌뚱의 일상생활을 드러내는 출판물의 붐을 이룬 '마오쩌뚱 열' 속에서도 소비주의의 팽배 속에서 나타나는 불안심리와 결합된 마오의 유령은 등장한다. 더 근본적으로 마오쩌뚱을 묻었다고 생각하고, 마오쩌뚱과 전혀 다른 방향의 발전노선을 추진하고 있는 개혁개방의 지도부들 앞에도 마오는 늘 나타나고 있다. 개혁개방 노선의 변천사는 마오가 던진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과, 그에 이은 마오 유령의 재출현, 그에 대한 재부정과 재출현이 반복되는 과정이며, 중국의 지도부는 끊임없이 마오의 유령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유령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여러 사람이 같이 있을 때조차 그중 일부에게만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마오는 여전히 없는 존재이고 사망한 존재일 뿐이다. 유령은 유령을 불러낸 자 앞에만 나타날 뿐이고, 한 번 나타난 유령은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그 유령을 불러낸 자를 언제 어디서나 붙어 다닌다. 그러나 앞으로 마오의 유령을 보게될 목격자는 점점 더 늘어나지 않을런지? 유령은 그 유령이 나타나기 시작한 이유가 사라지지 않고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흔히 말하듯 '한풀이'도 하지 않았는데, 유령이 사라지겠는가? 마오의 유령이 나타나는데는 마오가 던진 어떤 문제들의 동시대적 중요성이 사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은 여러 측면이 있겠지만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성격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이런 질문들은 주로 문화혁명기에 제기된 것들인데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사회주의의 가역성 문제이다. 이는 마오의 이른바 '대과도기론'과 스탈린의 '소과도기론'의 대립으로 나타난바 있는데, 사회주의가 다시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스탈린을 중심으로 소련에서 제기한 소과도기론에 따르면 사회주의에서 가역성의 가능성은 없다. 스탈린은 이를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론'으로 정식화한 바 있는데, 하나의 독자적 생산양식으로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선진적 생산양식이므로, 자본주의가 봉건제로 복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로 복귀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기초는 생산관계 측면에서 국가소유와 생산력 측면에서 과학기술 혁명이 될 것이다. 다만 이런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론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위협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주로 '외부의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에 반해 마오는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장기간의 과도적 시기로 간주하였고, 이런 이행기의 특성상 사회주의는 늘 자본주의로 복귀할 위험성을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곧바로 연관되는데, 이런 가역성이 존재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마오는 복귀의 가능성의 근거를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적인 본질에서 찾았는데, 여기서 문제의 관건은 '소유제'가 아니다. 소유제는 단지 법적인 근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국가부르주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走資派)이 국가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인가,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전화의 실패인가, 생산력인가 등등의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마오는 분명한 대답을 내리지 않았고, 문화대혁명기의 논쟁도 여기에 다중적 답변을 주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일정한 정치적 분파의 문제인 것처럼, 때로는 '사상'(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구습에 가까운 것)의 문제로, 때로는 조직의 문제로 제기하기도 했지만, 다만 문제로 던져졌을 뿐 합의된 결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마오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생산력의 낙후를 근거로 삼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사실상 문제를 영원히 이월하는 것일 뿐, 문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고 본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두 번째 질문에 이어지는 것으로, 그렇다면 이런 이행기의 가역성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여기서 사회주의 하의 정치의 새로운 형태라는 질문이 제기되는데, 사회주의를 일련의 프로그램에 따라 선진적 엘리트들의 주도로 계획된 플랜을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대중정치와 대중참여, 그리고 대중의 자기전화에 초점을 둘 것인가라는 대립이 나타나게 된다. 마오, 그리고 마오가 중심적으로 얽혀있던 문화대혁명은 이 문제들을 다만 문제제기로서 던졌을 뿐 그 이상의 구체적 해답의 모색에서는 복잡하게 착종된 역사적 과정으로서만 남아있을 뿐이었고, 이는 때로는 마오의 모호한 정치적 결정을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어쨌건 이처럼 미해결의 형태로 제기된 마오의 질문들은 마오 사후에 개혁개방의 과정을 거치며 다시 마오의 유령과 더불어 되살아나지 않을 수 없고, 마오의 즉자적 안티테제로서 개혁개방의 이데올로기는 이에 대한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마오의 유령을 다시 무덤으로 되돌려 보낼 수 없는 취약함을 지니고 있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서 중국공산당의 정체성 전환까지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은 마오의 질문들에 대한 자기 부정의 과정이었으며, 이는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내걸고서 그 이면에서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자기부정적 변화를 추동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최초의 탈마오적 시도는 마오 사후 후계노선의 정립과정에서 등장하였다. 마오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화구어펑은 마오가 말한 것은 모두 옳고 마오가 내린 결정은 모두 지켜야 한다는 '범시론'(凡是論)을 들고 나와서 마오의 후광을 통해 자신의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지만, 이는 마오의 문제제기가 아닌 어록만을 글자그대로 수용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실을 근거로 한 반박에 취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립한 세력을 대표한 떵샤오핑은 이를 반박하면서 "실천만이 진리의 유일한 검증기준"임을 내세운 진리표준 논쟁을 촉발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노선을 중심으로 정치지도권을 확립하였다. 탈마오적인 개혁노선의 정립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오에 대한 평가와 마오가 주도한 중국사회주의에 대한 평가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연이은 두 단계를 통해 진행되었다. 먼저 정리된 것은 마오 개인에 대한 공식적인 역사적 평가였다. 1981년 11기 6중전회(11기 전국대표대회 제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당의 공식 입장으로 정리된 "약간 중대한 문제에 대한 역사적 결의"에서는 마오에 대해서 1950년대 중반까지는 기본적으로 올바른 입장이었지만, 그 이후는 많은 오류를 범한 것으로 정리하였다. 이를 통해 마오는 더 이상 동시대적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있는 현재적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로 선고된 것이다. 이처럼 마오에 대한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린 후 다음은 마오의 '대과도기론'에 따른 사회주의론을 부정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1980년대를 거쳐 그 이론적 결론이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으로 정리되었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은 그 내용상 스탈린과 소련의 소과도기론 및 전인민의 국가론과 상당히 유사한 이론적 내용을 담고 있는데(이는 또한 근대화론의 자유주의적 함의를 수용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인정하고 소유제 개조를 통해 계급이 철폐되었음을 주장하지만, 다만 사회주의 혁명 이후 과정을 중국처럼 생산력이 낙후된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의 초급단계와 고급단계를 나눌 수 있다고 보고, 생산력의 발전에 의해 사회주의 초급단계에서 고급단계로, 그 다음 공산주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그 이론의 요체였다. 떵샤요핑의 이론적 입장을 '유생산력론'(唯生産力論)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을 통해 마오의 사회주의론을 부정함으로써 개혁개방 하의 새로운 소유제의 도입, 외국 자본의 유치, 다양한 물질적 유인의 동원, 집단주의의 해체 등을 정당화하는 과정을 거친 후, 1990년대 들어서 탈마오 과정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관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제출된 것이 1992년 14차 당대회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론'이었다. 등소평의 남순강화와 맞물린 시기에 제기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론은 대외적으로는 초국적 기업을 필두로하는 해외자본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면서, 대내적으로는 국유기업의 비중을 낮추고, 노동자에게 제공되었던 여러 가지 혜택을 없애며, 사적자본주의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국가경제의 골간을 계획경제적 방식에서 거시경제관리적 방식으로 전환하는 등의 근본적 변화를 정당화하였다. '사회주의'에 대한 의미규정 또한 이에 따라 변화하여, 국유와 집체를 합한 공유제가 차지하는 절대적 비율의 우위를 주장하던 것에서 점차 그 상대적인 중요성의 유지 정도의 의미를 주장하는 것으로 사회주의의 의미가 축소되었고,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의 달성여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사회주의에 대한 규정 변화 속에서도 중국을 스스로 사회주의로 칭해온 중요한 근거는 두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소유제적인 규정으로 공유제의 우위였고, 두 번째는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으로서 프롤레타리아당인 공산당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양자 모두 법률적 규정 이상을 넘어설 수 없음에도, 나름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론은 이중 첫 번째 영역에서 근본적 전환을 모색한 것이었다. 이와 병행하여 국가권력의 성격과 공산당의 성격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탈마오화의 길이 추진되고 있는데, 이는 2000년 장쩌민의 '세가지 대표론'과 2001년 사영기업가 입당 허용론에서 나타나고 있다. 세가지 대표론은 중국공산당이 선진생산력, 선진문화, 광대한 인민의 이익을 대표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이런 세가지 대표론의 선진적 생산력이나 광대한 인민의 이익의 내용을 드러낸 것이 작년 7월 1일 장쩌민의 연설에서 나타났듯이 사영기업가의 공산당 입당을 추진한 것이었다. 계몽주의적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마오의 유령은 중국의 지식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화혁명에 대한 공식적인 역사적 해석은 문화혁명의 대표적 피박해자로 일컬어지는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발언의 공간을 개방하였고, 많은 지식인들은 문화혁명의 즉자적 반대물로서 개혁개방의 탈마오화에 대대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문화혁명이 1969년 이후 제도화된 정치켐페인으로 전화하는 과정에서 공격의 목표가 국가와 당, 그리고 관리자에서 지식인들로 전환되었으며, 여기서 지식인들은 조직된 공격에 노출되어 사회를 아홉 계급으로 나눌 때 '냄새나는 아홉 번째'인 가장 밑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기억을 지니고 있다. 문화혁명에 대한 공격과 마오에 대한 비판을 입지의 강화기반으로 삼은 새로운 지도부들은 이런 지식인들에게 발언의 공간을 열어주었으며, 또한 서구적 발전모델을 추종하고 엘리트주의적 교육제도가 복귀됨에 따라 지식인들의 발언권과 정책결정과 실행에서의 참여공간 또한 넓어졌다. 1980년대 중국지식인계의 논쟁을 주도한 것은 계몽주의였다. 이는 중국 사회주의 역사의 문제, 특히 문화대혁명의 문제를 계몽적 전통의 결핍으로 본 것이었는데, 이런 논의에서는 심지어 중국 사회주의를 '봉건적 사회주의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현대사는 국가를 구한다는 목표에 치우치면서 계몽이 무시됨에 따라 비극이 발생하였다는 논지가 그 대표적 입장이다. 이런 계몽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은 자유주의적 입장에 서있는데, 중국에서 필요한 것은 자유주의적 인권 관념의 수립과 이런 자유주의적 기반을 건설하기 위한 시장의 도입이라고 보았으며, 이런 시장주의적 자유주의는 중국지도부의 입장과도 공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9년 천안문 사태를 통해 자유주의의 정치적 희망이 좌절되면서 계몽주의는 새로운 분화를 겪게된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더 보수적 입장으로 바뀌면서 중국 현대사의 비극의 뿌리는 '급진주의'에 있었다고 평가하고, 1919년의 5.4운동에서 문화대혁명과 1989년의 6.4에 이르기까지 점진주의적이지 않은 급진주의가 시대적 조건을 넘어서는 반계몽주의적이고 인민주의적이며 반지성주의적인 파괴적 효과를 낳았다는 비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들은 1990년대 들어 자유주의적인 최소한의 정치적 개혁에 대해서조차 점점 더 소극적이 되었고, 광범한 시장지향적 개혁을 통한 자유주의적 토대를 마련한 후 자유주의적 정치제도를 건설할 수 있다는 단계론으로 입장을 전환하고, 결국 이는 1990년대 중국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정당화하는 바탕이 되게 된다. 자유주의자 중 일부 비판적 세력은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자본주의 건설을 희망하지만, 신자유주의화 추세 속에서 이들의 비판의 목소리는 힘을 싣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반해 1990년대 인문논쟁을 거치면서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은 '신좌파'라고 지칭되는 조류로 등장하게 된다. 이들의 주장을 네가지 정도의 논점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현시대 자본주의에 대한 인식이다. 중국의 다양한 자유주의자들이 시장에 대한 환상에 빠져있고, 도덕적인 자본주의관의 환상에 빠져있음을 비판하면서, 이들은 현시대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일 수밖에 없으며, 그 자본주의는 배제와 양극화, 종속의 심화, 부패의 만연을 내장한 자본주의일 수밖에 없고, 제 3의 길은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두 번째로 중국 사회주의 역사에 대한 평가이다. 계몽주의자들이 중국사회주의를 근대적이지 않고, 근대에 도달하지 못한 '봉건적' 특성을 본질로서 지니고 있는 것임을 주장한데 반해 이들은 중국 사회주의는 아주 전형적인 '근대적 기획'이며, 특히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반근대적 근대성'이라는 역설을 띠고 있으면서 결국 그 반근대성이 근대적 틀 속, 특히 발전주의라는 자유주의의 틀 속에 함몰되어 버렸다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중국의 역사적 경험을 20세기의 전체 세계사 속에서 관찰해야 함을 뜻하고, 또한 사회주의적 길이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문제제기 속에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 속에 매몰된 근거를 규명할 필요를 제기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개혁개방기의 빠른 성장이 마오시기의 역사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마오시기에도 가능한 것이었는지라는 문제를 던지고, 개혁개방 시기에 강하게 남아있는 마오시기 역사의 긍정성을 강조하는 논의를 제기하고 있다. 네 번째로, 마오로 대표되는 중국의 반근대성의 요소에 대한 적극적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문화대혁명의 역사적 경험을 일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등장한 다양한 적극적 반근대성의 요소들을 재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런 신좌파 세력 또한 아직 몇몇 지식인에 한정되어 있고,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 또한 제한적이지만, 마오의 유령이 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마오가 제기한 질문과 이들이 제기하고 있는 질문의 연결점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이후 이들 주위에서 마오의 유령을 통해 중국사회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임없이 제기될 것임을 시사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판적 지식인들이 보는 마오의 유령과 노동대중이 보는 마오의 유령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나타났지만 점점 더 그 목소리가 닮아갈 가능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일찍이 1959년 대약진의 공과를 평가하기 위해 개최된 루산 회의에서 대약진에 대한 평가를 놓고 펑더화이와 대립하던 마오는 대약진에 대한 반발이 심하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반대하면 자신은 다시 유격대를 조직해 정강산에 들어가 근거지를 만들어 투쟁을 전개하겠다고까지 말한 적이 있다. 중국인들은 지금 마오의 유령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일까?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