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회담이 끝났다. 한-미의 언론들은 각 국이 대화를 통해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6자회담 과정의 계속 추진을 원했다는 점을 들어 대체로 회담을 성공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이번 회담이 ‘탁상공론에 불과’했으며 ‘북의 무장해제를 위한 마당으로 되고 말았다’는 비관적인 평가를 제출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전제로 미국의 대북적대정책과 북한의 핵계획 포기를 일괄타결 하고자 했던 의도가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6자회담에 이르기까지 부시행정부의 등장 이후 미국은 ‘반테러 전쟁’을 경과하며 사실상 페리 프로세스의 중단을 선언한 상황이었다. 부시행정부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 체결된 북미 제네바 기본 합의문이 북한의 ‘핵 공갈과 그에 따른 착취’라는 악순환만 조성했다고 간주했다. 신보수주의자들은 ‘클린턴 행정부 4년 동안 이루어진 북미 협상의 교훈은 북한의 벼랑 끝 전술이 미국에 먹혀 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결론지으면서 앞으로 북미 협상에서 절대로 보상을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미국은 북미 양자간의 직접적인 협상을 거부하고 대신 ‘다자적 압력구조’를 활용, ‘북핵문제’를 국제문제화하고 북한을 고립․굴복시킬 수 있는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대북강경론이 득세하면서 북한과는 외교 수단을 통한 핵문제 해결이 난망하기 때문에 봉쇄 정책이 필요하며, 나아가 북한 핵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북한 정권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신빙성을 얻어갔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클린턴 행정부의 ‘접촉정책’과 남한의 ‘햇볕정책’을 지지했던 소위 ‘온건파’들의 정책방향이 점차 ‘봉쇄정책’으로 수렴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북한과 성실하게 협상에 임하되 만일 실패로 돌아갈 경우, 군사적 제재를 포함한 ‘의미심장한 제재’를 취하거나 핵이나 마약 등의 수출을 막기 위해 봉쇄정책을 부과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즉 북한의 궁극적 붕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제 제재와 같은 비군사적 방법으로 체제교체를 유도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지난 4월에 열린 북중미 3자회담에서도 미국은 대북 선제 핵공격 옵션을 포기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권 교체’와 ‘북핵문제 유엔 상정’ 등을 운운하며 대화 거부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오히려 미국은 3자회담 직후 한미, 미일 정상회담 등 국제 외교무대를 적극 활용, 북한에 대한 다자간 압력틀을 강화하고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을 통해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봉쇄에 돌입했다. 그리고 주한미군 전력 증강을 시도하고 스트라이커 부대를 편성하는 등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무력시위를 전개하며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켜왔다. 또 미국은 대규모 탈북-기획망명을 유도하는 법안을 기획하고 ‘작전계획 5030’을 발표하는 등 ‘전쟁 없는 체제 교체’라는 시나리오를 수립한 상태다. 남한과 일본은 이러한 미국의 군사전략에 적극 호응하면서 각각 ‘자주국방론’과 ‘보통국가화’를 병행 추진했다. 미국의 진심이 문제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에 성실히 임하는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미국이 핵문제의 평화적인 종식을 위해 진정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주변국들이 북한에 대한 더 강력한 제재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은 한미일 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 가운데 특히 중국을 설득시켜 북한을 압박할 수 있도록 다자간 협의틀을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미국은 북한이 줄곧 주장해온 양자회담을 거부하고 다자회담의 틀로 북을 유도한 것을 외교적 승리로 평가하고 있다. 비록 북한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더라도 미국은 협상이 성사되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향후 외교 무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고, 이 경우 국제적인 대북 제재(특히 경제적 제재)를 유도하기에도 훨씬 용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미국은 광범위한 이슈와 의제들을 함께 제기하며 핵개발을 지렛대 삼아 미국으로부터 직접 체제보장을 받아내겠다는 북한의 의도를 분산시키고자 했다(럼스펠드 미 국무부 장관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확대하라”면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으로 한정되지 않는 많은 이슈를 동시에 제기할 것을 주장했다). 예컨대 마이클 오핸론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 연구원과 랜드 연구소의 마이크 모치츠키 등은 6자회담을 앞두고 북한의 핵개발을 궁극적으로 막는 방법이 경제위기를 해결하는 것이라며 관련 5개국의 지원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들이 경제위기를 거론한 것은 경제난을 매개로 하여 대북 식량․경제지원 등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서 북한과 협상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한 책략일 뿐이다(이들은 이를 일컬어 ‘(전쟁 없는) 체제 교체’와 매한가지라고 말한다). 덧붙여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 제거에 소요되는 비용(경제협력 및 지원과 인도적 차원의 식량 및 에너지 지원 등)을 주변국들에게 분담시킬 수 있다는 것도 다자회담의 부수물이었다. 따라서 6자회담은 한반도 관련 6개국이 ‘대화와 타협’으로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한다는 외피에도 미국이 ‘진심’으로 협상에 임하지 않는 한, 그리고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긴장이 객관적으로 완화되지 않는 한 사실상 ‘추가적 조치’를 단행하기 위한 단계적 수순에 불과했다. 그러나 회담을 며칠 앞둔 상황에서도 미국은 보란 듯이 을지포커스렌즈 훈련 등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긴장감을 높이는 도발을 지속했고, 심지어 제임스 울시 前 CIA 국장, 존 볼톤 국무부 차관 등 대북강경세력은 최근 북한과의 협상을 일체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며 차라리 전쟁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촉구하기까지 했다. 결국 미국은 6자회담에서 북한의 일괄타결 제안을 무시하고 북한의 선핵포기를 거듭 요구했고, 그 후 재래식무기, 테러, 인권, 납치, 마약문제 등을 협상대상에 포함시키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 미국은 6자회담 도중 “미국이 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으면”이라는 전제조건을 생략하고 북한의 핵관련 발언만을 미 언론에 흘림으로써 회담을 경색국면으로 몰아갔다. 이에 북한이 “기존의 선핵포기 주장보다 더 후퇴한 날강도적인 요구조건”이라고 크게 반발하며 ‘핵억제력’을 불가피한 조처로 제시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북한의 위협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며, 북한은 모든 회담에서 그런 위협을 해왔고 이번에도 그런 말들을 하리라고 예상했었다’라는 조엘 위트 ‘전략 및 국제 연구센터(CSIS)’ 선임연구원의 언급은 결국 이번 6자회담의 ‘결렬’이 ‘자기실현적 예언’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미국의 강경 대응과 위기의 심화 6자회담에서 미국은 핵 포기 전까지는 어떤 대북 지원도 있을 수 없다는 ‘네거티브 전략’을 통해 고지를 선점하려 했다. 미국은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실패’로 돌아간 이유를 ‘정치적 강제 없는 합의’로 보기 때문에 6자회담에서 핵포기의 대가로 대북 체제 서면보장과 경제지원 등을 약속하는 것조차 완강히 거부했다. 또 미국은 6자회담이 끝나자마자 9월 3, 4일 프랑스에서 11개국이 참가하는 PSI 3차 회의를 열고 이번 달 중순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회담 재개 자체를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핵이나 마약, 미사일 등을 수출하는 ‘악의 축’ 북한을 봉쇄하기 위해 ‘의심선박’에 대한 해상검색과 나포를 강화하겠다는 PSI는 사실상 준군사행위에 해당한다. 이는 ‘상황을 악화시키는 추가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6자회담 문항을 위반한 조처로서, 사실상 후속회담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다. 게다가 미국은 북한에 제공키로 한 한국형 경수로가 플루토늄을 ‘몰래’ 재처리하기가 어렵지만, 북한이 ‘드러내 놓고’ 재처리할 경우엔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빌미로 경수로 사업의 전면 중단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미국의 대북 강경기조는 현실적으로 군사적 수단과 경제 지원을 ‘채찍과 당근’처럼 활용할 수 있는 한미일 3각 동맹의 역할분담 전략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특히 경제적 제재를 위해서는 북한 경제의 숨통을 쥐고 있는 중국을 설득하는 한편 남한의 대북 현금지원의 불투명성을 문제삼고 일본으로부터의 대북 송금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이 북한에 뇌물을 주는 데 익숙해져 있는데 각종 경제사업이나 식량지원 등에 엄격한 조건을 붙이고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미국은 자신의 대북 선제공격을 남한 정부가 두려워한 나머지, 대북 압박 선택지가 줄어드는 것을 지극히 염려하고 있다. 이에 미국의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번 회담에서 ‘한미일 3국이 통일된 입장을 취하지 못했는데, 동맹국이라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며 재차 고삐를 다잡고 있다. 이들은 미일중러 등 주변국들이 공통적인 한반도 정책을 추진함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그 정책에 반대하면서 북한의 호의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고 은근히 협박하고 나섰다. 그런데 이미 남한은 ‘한미동맹의 현대화’를 수용함으로써, 미국의 군사전략에 더욱 깊숙이 편입되고 있다. 미국의 신군사전략에 따른 주한미군 전력 증강 및 재배치와 ‘자주국방 비전’은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영향력의 확대와 함께 확장된 동맹체계로의 철저한 편입을 의미한다. 일본 역시 미국의 MD 계획에 적극 부응하면서 재무장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만일 미국이 대북 봉쇄에 초점을 두고 사실상 북한의 핵을 ‘무시’하는 정책을 취할 경우 이는 일본의 핵무장을 촉발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설사 북미간의 교착상태가 일시적인 협상국면으로 전환된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이 그대로 관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미일 군사동맹의 공고화는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의 고조를 낳고 이로 인한 군사력의 편중은 북한 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할 것이다. 미국 대외정책의 변수들 따라서 한반도와 동북아는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근본적으로 수정되지 않는 한, 장기간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될 전망이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적절한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표류한다면 북한의 핵보유선언과 핵실험의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당초 협상 타결 가능성을 낮게 점쳤던 미 의회 산하 싱크탱크 외교관계협의회도 6자회담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한반도에서 군사적 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미국의 봉쇄정책의 성공과 한반도에서의 실제적인 군사 분쟁의 가능성을 속단하기에는 아직 많은 변수가 남아 있다. 우선 북에 대한 선제공격을 미국의 단기적 정책 목표로 선언하는 것은 한반도 주변의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중국과 일본의 협력을 잃게될 뿐 아니라 남한을 자칫 ‘반대편’으로 만들 소지가 있다. 6자회담을 주선하고 ‘주최국 요약’을 발표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온 중국의 수석대표 왕이 부부장이 ‘미국의 대북 정책이 한반도 핵위기 해결의 최대 걸림돌이며 미국이 대북 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것은 단적인 사례다. 또 경제 불황과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정보조작 의혹 등이 겹치면서 부시 행정부가 지지율 하락을 경험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걸림돌이다. 무엇보다 최근 이라크 재건 과정이 난항을 겪음에 따라 ‘대테러정책’ 등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적․군사주의적 편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강경파-온건파, 혹은 국무부-국방부 사이의 갈등이 불거지는 것도 변수다. 가령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무부 장관을 역임한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최근 한 기고문에서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이 ‘미국 편에 설 것인가, 테러리스트 편에 설 것인가’를 중심으로 세계를 분리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녀는 9․11 이후 국방부가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일방주의적 정책이 이슬람 온건파와 유럽을 소외시켰다며 범대서양 동맹을 회복하고 미국을 정점에 둔 다자주의로 복귀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테러와의 전쟁’이나 ‘부시 독트린’ 등 미국 대외정책의 근간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책실현의 경로와 방법에 국한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미 백악관이 2002년 공개한 ⌈대량살상무기 대응 국가전략(NSCWMD)⌋ 보고서는 ꋲ잠재적인 적들에게 대량살상무기의 부품이 이전되는 것을 막고, ꋲ부품이 조립되기 전에 파괴할 수 있도록 군사력과 비밀병력을 이용해 선제공격을 실시하며, ꋲ적들이 생화학무기를 사용할 경우에는 ‘우리가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복을 단행한다고 적고 있다. 9․11 이후 정확히 1년 만에 발표된 ⌈국가안보전략⌋은 미국과 그 우방에게 위험스러운 세력에 대해 ‘선제예방’과 ‘방어적 개입’을 선언하고 있는데, 이것이 탈냉전 이후 당파를 초월한 미국의 중장기적 대외전략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대통령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민주당의 네거티브 캠페인이 합세하면서 지지율 하락을 경험하고 있는 부시 행정부가 당분간 ‘맹동’을 자제할 수는 있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조정국면에 불과하다는 것도 분명하다. 미국은 당분간 한미일 3국의 군사력 증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동시에 대북 봉쇄의 수위를 단계적으로 높여 나갈 것이다. 동시에 북한이 핵개발에 필요한 ‘시간벌기용’으로 회담을 낭비할 여지를 좁히면서도 북한을 협상국면에 유도하는 양면 전략을 구사할 것이다. 무엇보다 북한에 압박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중국과의 파트너쉽을 공고히 하는데 주력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핵공갈’이 비가역적인 상황으로 치닫는다면 핵개발을 중단 혹은 포기시키는 선에서 당분간 상황을 유지하고 추후를 도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다음은 또 그 다음의 일이다. 모든 문제는 열려 있다 결국 현재 한반도의 위기는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을 제어하기 위한 현실적 힘으로서 국제적 반전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이라크 재건과정에서 드러난 미국의 ‘정치적 위험’을 국제적 반전운동이 어떻게 영유할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9월에 칸쿤에서 펼쳐질 WTO 반대 투쟁은 반세계화와 반전이 서로의 결합선을 찾아나가는 하나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국내적으로도 남한이 미국의 군사전략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쟁점들 - 주한미군 전력 증강 및 재배치, 미국산 첨단 무기 도입과 국방예산 증액 등 - 에 긴밀히 대응하면서 반전운동의 대중적 토대를 확산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군축을 일관되게 주장하며 미국의 호전성에 대한 반전평화의 정당성의 우위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 아직, 모든 문제는 열려 있다.PSSP
팔레스타인의 상황에 대해 세계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인식보다는 언론이 주기적으로 환기시키는 폭력성 그 자체, 그리고 단기적인 상황변화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러한 반응은 여러 요인들로 설명될 수 있겠지만 팔레스타인 문제 자체에서 그것의 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모순해결에 관건이 되는 요소들에는 변화가 없이 주기적으로 반복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적 역량을 갖춘 사회운동과 이념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간 전지구적, 지역적 요인들에 치중해서 다소 소홀히 다루어진 팔레스타인 사회와 이스라엘 사회의 내적 요인, 특히 90년대 이후 두 사회의 변동양상을 통해 인티파다와 샤론 정부의 강경노선의 배경, 그리고 팔레스타인 문제의 정체와 폭력의 악순환 현상을 이해해보려 한다. 2차 인티파다의 양상 올해 팔레스타인의 사건일지를 보면 명확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주기적인 양상의 변화가 있었다. 2월 중순에서 3월 중순, 5월, 그리고 8월 중순 이후의 시기에는 주로 이라크의 상황과 연관되어 양측의 대결이 격렬했고 이라크침공이 전개되고 있던 4월이나 샤론이 유보적인 방식으로나마 평화이정표를 수용하고 이행의 의지를 보인 6월에는 그나마 상황이 호전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사건의 전개를 보면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져 버린 일련의 시나리오를 재확인할 수 있다. 중동평화 이정표(로드맵)가 마련된 2002년 12월에는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두 주요 세력, 즉 이슬람주의 단체인 하마스, 그리고 아라파트가 속했던 민족주의 단체인 파타에 의한 유대인 정착촌 공격이 있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서 이스라엘군의 공격, 자치지구에 대한 봉쇄조치, 테러혐의자 체포와 암살, 이 과정에서의 가옥파괴가 있었다. 4월 24일과 29일의 테러는 팔레스타인 정부의 구성 직후, 그리고 아바스의 총리임명 직후에 일어났다. 6월 29일에는 하마스, 지하드, 파타 모두 휴전을 선언하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북쪽의 군대를 철수하기 시작하였고 살라와 에딘을 잇는 도로의 소통을 재개하였고 곧이어 자치정부가 자치지구의 통제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7,8월은 양측 모두의 휴전 위반으로 사태가 악화되었다. 급기야 8월 19일에 있은 서예루살렘 자살폭탄테러에 대해 이스라엘이 자치지구 봉쇄를 강화하고 서안지구의 나플루즈, 제닌, 툴카렘 공습, 하마스 지도자 살해와 조직원 체포, 가옥파괴 등의 방식으로 대응하고 아바스 총리조차 하마스, 지하드와의 접촉을 단절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에 하마스는 자살폭탄테러로 대응하였다. 이 전형적인 사례들에서 우리는 약속 불이행과 그 근저에 깔려있는 상대에 대한 강한 불신, 그리고 폭력의 악순환을 볼 수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분노를 야기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살폭탄테러 등 극단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게끔 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부당한 대응을 세계적으로 정당화하는 효과를 낳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기구나 조약의 권고사항에 대한 팔레스타인측의 위반이나 미실행을 근거로 평화협상의 재개를 거부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또한 공습 등 군사행동으로 수시로 하마스에 가까운 주민들을 자극하는 것은 이렇게 자극받은 상태에 있는 주민들이 테러를 예방하려는 팔레스타인 경찰의 노력을 수용할 수 없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평화협상 진전의 조건이 형성되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불신은 또한 자치정부와 팔레스타인 민중, 그리고 하마스간에도 존재하여 자치정부의 비폭력에 대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폭력적 상황이 전개되곤 하였다. 1, 2차 인티파다의 비교 2000년 가을에 시작된 인티파다는 위의 전개양상에서 알 수 있듯이 표면상으로는 1980년대 말에 시작된 인티파다(1987-1993)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1차 인티파다에 비해 폭력성이 심해진 점이다. 2차 인티파다는 지금까지 3년간 3천여명 이상의 희생자를 내었다. 이것은 1차 인티파다(1987-1993)의 첫 3년간 희생자의 두배에 해당된다. 또 다른 차이는 이제 저항운동 세력, 특히 하마스에 대한 전략이 치고 빠지는 일회적 타격에서 인적, 물적 기반을 체계적으로 타격하는 보다 장기적인 작전들로 전환한 점이다. 먼저 촉발된 계기를 보면, 1차의 경우에는 이스라엘군 지프차에 의한 교통사고 사망(4명 사망)을 의도적인 것이라고 간주한 팔레스타인인들이 자발라의 한 검문소를 타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2차의 경우에도 이스라엘의 자극적인 행동이 계기가 되었는데 샤론의 알 아크사 사원 광장 방문에 대한 분노의 표시에 이스라엘군이 탄압으로 대응하면서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시대적 배경을 보면, 1차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의 변화와 팔레스타인문제에 대한 세계의 무관심이 그 배경에 있었다. 이 사건은 그 이전까지 이스라엘 점령지 외부, 즉 인접 아랍국가들에 근거지를 두고 전개되어 온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이 점령지 내부에서도, 그리고 대중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는 역으로 아랍국가들이 미․유럽과 이스라엘과의 관계 호전으로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을 줄여 팔레스타인 외부에 근거지를 두고 전개된 이스라엘 압박전략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말해준다. 또한 1차 인티파다는 당시 동구의 변화, 그리고 이란,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등 냉전과 연관된 소련 인접국들에 관심을 빼앗기고, 유가폭락 및 새 유전 발견 등으로 상대적으로 중동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었고, 70년대 중반이래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한 주변 아랍국들의 명시적, 암묵적 인정, 그리고 그에 따른 이스라엘의 정치․군사적 안정 등의 요인들로 인해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실질적 해결에 무관심했던 당시 세계에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상징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2차 인티파다는 무엇보다도 그간의 평화협상에 대한 환멸의 표시였고, 평화협상의 산물로 등장한 자치정부체제의 부패와 무능력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러한 불신은 인티파다에 대한 자치정부의 애매한 태도로 인해 더욱 확고해졌다. 자치정부는 초기에는 탄압이 가져올 대중의 이반이 두려워 적극적 대응을 자제했으나 이후 이스라엘과 국제적 압력으로 강경한 태도로 선회하게 된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해 대다수 팔레스타인인들은 더욱 실망하게 되고 아라파트를 더 이상 자신들의 대변자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즉 2차 인티파다 이후 팔 자치정부의 제한된 행동반경이 명백히 드러남에 따라 자치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지게 된 것이다. 협상을 통한 팔레스타인 문제해결에 대한 기대가 약화되고 자치정부의 정당성과 지도력이 약해지면서 결국 폭력만이 유효한 수단이라는 인식이 강화된 것이다. 주체의 구성에서 2차 인티파다는 1차 인티파다 당시의 지도자들과 청년들, 이 두 세대가 섞여 있다. 그리고 2차는 1차에 비해 전반적으로 시위참여자가 감소한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 즉 빈민층 청년들이 주로 참여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렇게 이전보다 계급적 성격이 두드러진 것은 자치가 시행된 이후 심화된 불평등, 자치지역 경제의 와해와 이로 인한 사회해체의 가속화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저항과 탄압의 양상에서 2차 인티파다는 새로운 면을 보이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1994년 자치정부체제가 형성되면서 창출된 새로운 구조적 조건에 기인한다. 즉 1차 때는 이스라엘의 지배에 반대하는, 이 지배를 대상으로 한 전사회적 투쟁(공공기관, 기업가 타격, 불매운동)이 가능했는데, 이제 이스라엘이 물러간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대상으로 하는 직접공격이 어려워지고, 더욱이 인티파다 이후 이스라엘군의 재진입으로 점령지 내부와 외부가 분리되면서 대중적인 투쟁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양측의 대결이 군사적 양상을 더 강하게 띠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또한 자치정부의 구성이 의미하는 폭력의 제도화와 독점의 상황에 따른 것이기도 한다. 즉 자치정부에 의한 폭력의 독점으로 이제 저항운동은 자생적이고 국지적인, 즉 미조직된 저항, 그리고 이 저항의 군사화라는 현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아래에서는 이상에서 살펴본 2차 인티파다의 태동과 양상을 설명해주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회의 내적 요인들을 살펴보겠다. 평화협상과 자치정부 수립이라는 정치적 계기와 저항운동의 변화 자치정부체제는 1차 인티파다에 가담했던 두 주요 세력인 파타와 하마스가 상이한 정치적 선택을 하게끔 하였다. 파타의 대다수는 자치정부를 지지하고 경찰로 고용되는 등 제도권에 편입함으로써 저항운동을 마감하게 된다. 제도권에 편입되고 예전에는 누리지 못하던 혜택을 입게된 이들에게 이제 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아닌 상황의 안정화였다. 이렇게 존재와 의식의 전환을 겪게 된 파타는 자치정부에서 배제되어 불만이 고조된 하마스와 심한 갈등관계에 놓이게 된다. 현재 진행되는 평화협상 과정과 자치체제를 비판하는 하마스 조직원들은 특히 1996년 초부터 자치정부와 이스라엘군의 적극적인, 즉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탄압에 시달려 왔다. 이들이 겪게된 또 다른 어려움은 평화협상 이후 예전과 달리 전사는 테러리스트로 여겨지고 이스라엘과의 협상을 주창하는 자들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이었다. 이 혼란은 조직 내부의 분열과 조직역량의 전반적 약화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대중의 요구를 반영하고 상황변화에 적절히 대처하는데 있어서 문제점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저항운동의 혼돈 상황은 파타의 경우에도 없지 않아 2002년 초부터 이스라엘군의 탄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파타의 하부가 상부로부터 자율화, 급진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제도권내에서의 요구투쟁과 군사화, 그리고 팔레스타인 경찰이 통제와 관용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자생적 폭동이 증가하고 자살폭탄테러가 하마스나 지하드의 지도부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과 같은 현상들은 바로 평화협상과 자치정부의 수립 이후 팔레스타인 정치의 두 주요 세력이 겪고 있는 급격한 변동에 크게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티파다는 자치정부 수립 이후 표면화된 팔레스타인 사회의 내부모순 또는 분화를 드러내주는 역할을 하였다. 즉 한편으로는 신․구세대 운동가들간의 갈등, 파타로 대변되는 민족주의자와 하마스 등의 이슬람주의자들간의 갈등,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분화와 불평등의 심화를 드러내주었다. 사회운동의 저발전과 인티파다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은 많은 소수민족의 저항운동에서처럼 가두투쟁이나 테러의 양상을 띤다. 이것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자치정부체제의 효과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보다 근본적원인에 기인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자치지구의 경제적 기반의 부재이다. 평화협상과정에서 기대된 경제원조가 지지부진하고 준내전 상황으로 경제활동은 마비되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의 고용문제에 무관심한 상황에서 최근 부쩍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었다. 바로 이 경제적 토대의 부재가 조직적인 계급운동의 미약한 발전을 설명해준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이스라엘군의 강한 탄압이 정치사회운동의 저발전을 심화시켰다. 통행금지 등 수십년간 반복되어온 이스라엘의 통제 조치들과 혹독한 탄압은 민중의 실천가능성을 제약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팔레스타인내에서의 운동진영의 단결, 그리고 정당하고 효과적인 운동방식의 개발은 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이 팔레스타인 사회운동의 저발전, 그리고 폭동과 테러의 (사회운동)문화는 이스라엘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그 연원을 두고 그 이후의 정치사회적 변화에 따른 역사적 산물이지, 이슬람 또는 이슬람사회에 고유한 어떤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회의 변동과 샤론의 강경노선 팔레스타인에 대한 샤론의 강경노선의 배경에는 미국과 유럽의 대중동관계와 이 지역 국가들간의 역학관계 등 지역적 요인이 중요하다. 이라크전쟁과 팔레스타인의 사건전개가 보여주는 연관성이 이를 잘 입증해준다. 그러나 이하에서는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지만 다소 간과된 이스라엘 사회 내적 요인을 통해 샤론 정권의 팔레스타인정책을 설명해본다. 팔레스타인분쟁이 격화되는 것을 볼 때면 우리는 이라크전쟁의 부시처럼 샤론이라는 인물에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실제로 그는 알 아크사 사원 광장의 방문으로 2차 인티파다 유발하였고, 자살폭탄테러를 이용하여 오슬로조약을 파기하고, 급기야는 자치정부를 공격하고 자치지구를 재점령하였다. 또한 그는 2001년 9.11테러에 대해 언급하면서 “누구에게나 각자의 빈 라덴이 있고 우리에게 그것은 아라파트다”라며 부시의 반테러 전쟁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연관시키려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국민의 의식분열적 성격을 이용하여 이라크전쟁을 걸프전의 충격을 되살리는 식으로, 즉 이스라엘 국민의 공포를 자극하는 식으로 이용하였다. 이와 같이 팔레스타인 문제에 있어서 샤론과 그의 동료들의 비중이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래에서는 보다 근본적인 요인, 즉 이스라엘의 사회변동의 양상, 즉 사회경제적 변화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통해 샤론 정부의 팔레스타인정책과 2000년 이후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이해해보고자 한다. 이스라엘의 사회경제적 위기와 극우파의 부상 현재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구조적인 위기에 처해있다. 그 배경에는 심각한 경제위기, 러시아 유대인의 대량이민 등에 따른 종족적 이질성 증대,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 시온주의에 대한 사회적 합의의 약화에 따른 정체성 위기 등의 급격한 사회변동이 존재한다. 먼저 2차 인티파다 이후의 사태전개는 이스라엘 자체의 경제와 사회의 위기와 연관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현재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다. 건국이래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 외국자본의 유입 감소, 아랍시장의 상실, 관광산업 붕괴, 군과 정착촌 경비에 크게 기인하는 재정적자, 11%를 넘는 실업률, 이로 인한 사회적 갈등고조를 겪고 있다.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150만명이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고 있고 부패와 투기로 극소수의 부는 증대하는 등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물론 다른 곳에서처럼 경제위기의 폐해는 소수집단,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아랍지역 출신 유대인, 이스라엘 국적을 가진 아랍인, 최근의 동구이민에게 집중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회경제적 위기가 부분적으로 인티파다 이후의 정세에 기인한 바도 있지만 이 위기는 훨씬 전부터 진행되어 온 것으로, 샤론의 강경책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요인이다. 여기서 우리는 쉽게 경제위기와 극우파의 부상을 떠올릴 수 있다. 세계화로 상징되는 1980년대 이후의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위기의 피해자들을 토양으로 번성한 극우 정치세력과 극단적인 종교세력을 낳았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이다. 1996년 네타냐후의 승리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입장이나 경제노선이 아니라 배제된 집단의 연합, 이들의 동원을 통해, 이들의 박해와 박탈감을 정치화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우파와 종교세력이 의회의 2/3를 차지한 것도 평화가 아닌 전쟁, 공존이 아닌 분리라는 이들의 정치노선 그 자체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지지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최근의 선거참여 실태를 보면 이스라엘인의 절반은 민주적 정치제도에 무관심하다. 결국 원초적 요소를 토대로 하는 근본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안전(security)이데올로기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공백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 위기와 시온주의의 급진화 1960년대 말까지 이스라엘은 시온주의적인 국민적 정체성이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시민종교, 노동운동을 토대로 하는 노동당 중심의 국가주의였다. 그러다가 70년대가 되면 이스라엘-아랍분쟁의 격화에 힘입어, 그리고 이 시기부터 본격화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의 편입을 배경으로 신시온주의가 부상한다. 신시온주의는 근대적인 국민적 정체성, 시민성보다 선민사상이 강한 민족적 정체성을 주창한다. 이 이데올로기와 이를 주창하는 정치세력은 특히 당시부터 본격화된 정착촌 확대, 아시아, 아프리카 이민의 급증 등 종족간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이를 이용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즉 점령지에서의 유대인의 존재를 정당화, 확대하면서 성장하였다. 이 흐름의 부상에 이어 80년대에는 집단보다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고, 시민성을 강조하고 이스라엘의 예외성을 비판하며 다원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포스트시온주의가 대두된다. 이 흐름은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 요소가 강했던 기존의 시온주의에서 부차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위의 근대적 가치와 제도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 흐름은 이-팔 분쟁이 다소 소강상태였던 80년대에 세속적 지식인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90년대 이후 지금까지는 러시아 유대인들의 대량이주와 경제위기 등이 낳은 정체성과 사회통합의 위기 속에서 위의 두 흐름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2차 인티파다, 평화이정표와 팔레스타인 문제 그러면 2차 인티파다와 이를 둘러싼 최근의 사건 전개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아래에서는 이 문제를 중동평화 이정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2002년 12월 말, 미국, 러시아, 유럽연합, 유엔이 공동으로 채택한 평화이정표는 2003년 잠정적인 국경을 가진 팔 국가 창설, 2005년 최종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이는 현재의 폭력적 상황을 종식시킴으로써만이 실현가능한데 이를 위해 팔레스타인 당국은 정치개혁을 지속하고, 이스라엘은 2000년 9월 28일 이후 점령지로부터 군대를 철수하며 정착촌 건설을 중지한다는 것이 이정표의 핵심적 내용이다. 이정표와 샤론 정부의 저항 지금까지의 이행 상황을 보면 팔레스타인 측은 마흐무드 아바스의 수상 임명 등 개혁을 이행하고 있으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제도와 일상생활에 대한 파괴를 지속하고 있다. 2003년 5월 25일 샤론은 뒤늦게나마 이정표를 수용했다. 그러나 그것은 팔레스타인 측과 달리 14개 유보조항을 단 수용이었다. 이 유보조항을 빌미로 샤론 정부는 오히려 이정표 실현을 저지하려 하였다. 먼저 이정표 실현의 전제로 제시된 팔레스타인의 정치개혁에 대해서 샤론은 2003년 1월 20일로 예정되었던 의회선거, 대통령선거를 여러 방식의 방해를 통해 치르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주민이 원하는 자치정부의 민주화를 샤론이 저지한 것은 선거와 정치개혁이 결과적으로 아라파트의 지위를 회복시켜 분열상황에 처해있는 팔레스타인 정치세력의 힘을 강화시킬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관건인 유대인 정착촌 철수문제 역시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지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정착촌이 팔레스타인인들 속에 위치하면서 한편으로는 평화가 불가능함을 인식시켜 평화와 공존의 꿈을 버리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 땅의 연속성을 부정하는 효과를 냄으로써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을 포함하는 국가의 창설에 대한 정당성과 가능성을 약화시키려 한다. “안전벽”, “대량이주전략”: 극단으로 가는 길 샤론 정부는 2차 인티파다 이후 점령한 지역으로부터의 철수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민족간 공존의 전망과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안전벽” 건설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미 전기장벽이 1차 인티파다 기간 중 설치된 바가 있는데 안전벽이 의미하는 것은 안전을 위해 이스라엘 지역을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단절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샤론 정권이 생각하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유대인 정착촌에 포위된, 자력방어 능력이 없는, 자체의 경제기반이 없는 국가, 유대인 자신들이 근대 유럽에서 경험했던 게토, 그보다 훨씬 비인간적인 조건의 국가인 것이다. 최근 이스라엘 사회에서 지지가 확산되고 있는 대량이주 전략에서 우리는 안전벽 설치가 추진하고 있는 종족간 문제의 극단적인 해결, 즉 분리라는 전략이 일부 극단적인 세력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량이주 전략은 아랍국가들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이주시키는 전략으로 현재 당국의 수수방관 속에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아랍인들이 사라지면 테러는 사라진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나찌를 정점으로 하는 무수한 근대의 대량이주와 학살, 그리고 보다 최근의 것으로는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의 운명을 떠올리게 된다. 비관적인 평화실현 현재 팔레스타인분쟁은 이정표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그간 이정표는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정표의 이행이 지지부진한 것은 미국의 대이라크전략 수행을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 이정표의 주된 배경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더 멀리로는 70년대 이후 이스라엘-아랍간, 그리고 90년대 이-팔간의 평화협상 과정이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적 해결과 거의 무관하게 진행되어 온 것을 회고하면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이정표 실현의 열쇠를 쥐고 있는 미국은 지금 팔레스타인 당국에게 적용하는 것과 동일한 잣대를 가지고 이스라엘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지 않고 있으며 이정표의 진행상황을 점검할 기준을 마련하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과 유럽은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적 해결에는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면서 이 지역에 대한 경제적 통합에만 몰두하고 있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력해져 있는 바로 이 상황에서 샤론의 강경노선은 아무런 저항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PSSP
알렉스 드 와알 Alex de Waal | Justice Africa 번역: 김용현 (한반도팀) [해설] 이 글은 매리 칼도어가 편집한 『세계적 불안정』 제3권에 수록된 ⌈아프리카의 전쟁들⌋을 국역한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탈냉전의 시기인 1990년대 아프리카에서의 전쟁들이 어떠한 이유로 그리고 어떠한 특징을 띠고 빈발하였는지를 거시적으로 비교분석 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전쟁들의 양상과 특징에 대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한정적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 글이 실린 『세계적 불안정』 시리즈는 UN대학의 WIDER 연구소의 연구성과를 출판한 것인데, 그 시리즈의 주제가 바로 <새로운 전쟁들>이다(참고로 지난번 번역 소개한 메리 칼도어는 이 프로젝트의 연구성과에 바탕으로 『새로운 전쟁들』이라는 저서를 따로 발표한다; 부분국역 35호 ⌈세계화된 전쟁 경제⌋). 따라서 이 글의 저자인 드 와알 역시 1990년대 이후 아프리카의 전쟁들을 ‘새로운 전쟁’의 맥락에 위치짓는다. 즉, 종족/민족적 분할들에 기반을 둔 동일성의 정치를 빈발하는 전쟁의 핵심에 위치지우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정치는 자원의 배타적 통제에서 오는 이익을 획득하려는 동기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원의 통제를 둘러싼 경쟁은 세계경제의 변화라는 맥락에 위치한다(물론 드 와알이 이 점을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지는 않다; 지난 34호에 번역/소개된 끌로드 세르파티, ⌈21세기 초 미국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위한 군사교리⌋를 참고하라. 또 아프리카의 경제위기와 관련한 세계체계적 분석으로는 지오반니 아리기, ⌈아프리카의 위기: 세계체계적, 지역적 양상들⌋(30호, 32호 번역/수록)을 참고하라). 흥미로운 것은 드 와알은 전쟁의 와중에 이러한 동일성의 정치가 극단화되고 폭력적으로 변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다시 말해 동일성의 정치의 극단성과 폭력성이 전쟁의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전쟁의 원인은 냉전 기간 발생한 아프리카에서의 전쟁들이 남긴 ‘불씨’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최근 아프리카의 전쟁들이 갑자기 빈발한다거나 뭔가 엄청난 변화라고 과대평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의 한계 역시 분명하다. 저자는 아프리카의 전쟁들에 대한 대안으로서 ‘통치성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러한 통치성은 UN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국제기구들과 NGO를 통한 관리/감독 이상의 무엇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도 이것은 세계의 변화와 금융의 세계화에 대한 저자의 맹목에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냉전이 종식되고 아파르트헤이드가 청산된 때인, 1990년대 초반, 아프리카의 전쟁들의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해졌다는 원대한 희망들이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외부적 요인들은 지역을 교차하는 무장 분쟁들을 일으키고 불을 지폈다. 돌연히 나타난 단극적인 지정학적 질서는 이러한 분쟁들을 종식시킬 수 있는 화려한 기회를 가져왔다. 조심스럽지만 지난 10여 년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전쟁들은 확산될 것이고 대륙 전체가 대규모의 무정부상태에 빠져 들어갈 것이다라는 비관적인 견해가 아직 확증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전쟁들이 확연히 감소하였다는 어떠한 징후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학구적인 그리고 의사(擬似)-학구적인 아프리카-비관주의는 언제나 비주류적이었다(Rieff, 1998/9). 비판가들은 그 대륙이 전쟁이 쉽게 발발하게 만드는 아프리카의 정치구조들에 선천적인 요인들의 사정(射程)을 지적한다.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범죄화’되었고(Bayart et al, 1998), ‘탐욕의 정치(politics of belly)’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Bayart, 1993). '신중세주의‘(neo-medievalism)는 정치적 전략으로서 체계적인 폭력을 사용하고 있는 군벌들 또는 구조조정 이후의 지배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Duffield, 1998). 용병들은 결코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이상의 견해들에 따르자면, 아프리카 사회에는 고유하게도 그들로 하여금 전쟁으로 치닫게 하는 선천적인 특징들(식자들은 예컨대 ’결함‘과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들이 의미하는 것이다)이 존재한다. 게다가, 갑자기 ’장기화된 국내 분쟁들(internal conflicts)‘과 ’복합적 긴급상황들‘이라는 주제들을 제안했던 대학과 결합된 인도주의적 산업(academic-humanitarian industry)은 아프리카의 전쟁 상태의 특이성을 전제한다. 가령, 전쟁들이 정식으로 벌어졌을 때 그것들이 유럽의 역사 또는 북아메리카의 역사에서 종종 발견되는 전통적인 전쟁들과 유사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고도로 인종 정치와 약탈의 불붙기 쉬운 혼란을 포함하는 고도로 변칙적인 전쟁들이다. 이러한 진단은, 통상 희화화되듯이, 사실과 거리가 먼 걸까? 클라우제비츠가 동시대의 아프리카의 전쟁들을 연구할 것을 요구받는다면 그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라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아마도 오직 에리트레아(Eritrea: 1993년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한 홍해에 임한 공화국-역자)와 에티오피아 사이의 거대한 정규군들 간의 대량의 그리고 유혈적인 참호 전쟁과 탱크 전투들만이 ‘다른 수단들의 의한 정치의 수행’이라는 그의 전쟁 분석(Clauswitz, 1968: 109)과 비슷할 것이다. 그 외의 분쟁들, 예컨대 수단 정부의 무자헤딘(mujaheddin)과 수단인민해방군(SPLA) 사이의 대치에서부터, 시에라 리온의 ‘군인 반란들(sobels)’에 이르는 분쟁들은 클라우제비츠에겐 경악스러운 사실일 것이다. 그렇지만 전쟁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분석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의 저작에 내포된 국제관계에 대한 최초의 현실주의 이론이 그러한가? 아마 틀림없이 후자일 것이다. 아프리카의 전쟁은 확실히 다른 수단과 혼합된 정치의 수행이다. 그러나 그것은, 19세기 유럽의 상황과 반대로, 국제적 전장에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국가들에 의한 정치적 이해의 추구라고 보기 어렵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광범한 사회로부터의 자신의 자율성을 결여하고 있기로 악명 높다. 그들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이해관계의 네트워크에 깊게 배태되었다. 만약 이러한 현실들을 고려하기 위해 우리의 국가와 국가 이익에 관한 이론을 역전시킨다면 클라우제비츠적 금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많은 아프리카의 전쟁들의 변종과 불규칙은 군대가 동원되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정치적 환경과, 대륙의 다른 지역들에서의 정치적 과정과 정치적 열정의 본성을 반영한다. 보다 정밀한 분석은 아프리카의 전쟁들을 일반화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전쟁들은, 여기에 수많은 변이들이 그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확실한 재래식 전쟁(에티오피아 대 에리트레아)에서부터 인종적 계열들을 통한 대중 동원(르완다의 후투족(Hutu) 극단주의)과 반란군과 정규군을 구분하기 어려운 약탈적 봉기의 형태들(시에라 리온)에 이르는 모든 스펙트럼을 포괄한다. 인종성 또는 족벌(몇몇은 인종 이데올로기들을 포함한다)에 기초하는 군대들이 존재하고, 다른 경우에는 종교적 극단주의의 추구를 통해 동원되며, 부분적으로 일반병들은 소년병들로 충원되고, 어떤 경우엔 주로 기업의 투기행위로서 조직되는 것 같다. 전쟁의 변이를 탐구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륙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한가지는 단순하게도 전쟁들이다. 이 글은 단순한 가설로부터 시작한다. 즉, 1970년대에도 1980년대에도 전쟁들이 있어왔기 때문에 1990년대에도 아프리카에는 전쟁들이 존재해왔다. 70년대, 80년대에, 전쟁을 벌이는 분명한 이유가 존재했는데, 주로 탈식민화시기에 남겨진 몇몇 별종들-에리트레아, 서부 사하라, 남부 수단, ‘대(大)소말리아’-에서와 같이, 반식민주의적 해방투쟁들과 냉전적 경합이 그것이다. 탈식민적 국가를 향한 몇몇 목가(木稼)적 집단들의 저항은 단지 식민국가와 그 과제들을 향한 저항과 연속선상에 있었다. 나의 가설은, 근본에 있어서, 1990년대의 전쟁들은 이전에 전쟁들이 발생했기 때문에 또는 이웃 국가들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분출하고 지속하였다는 것이다. 전쟁은 전쟁을 낳는다. 초기 전쟁들의 유산은 불완전한 또는 불완전하게 이행된 평화를 담보한 거래들(peace deals)에서 발생한 미완성의 사업, 군사적 수단들에 의한 정치적 목적들의 추구라는 최근의 전통, 그리고 무기를 소유한 군사 사업가들과 그 추종자들과 배후세력들의 존재를 포함한다. 또한 아프리카의 전쟁들은 국경을 넘어 이웃 국가들로 번져 또 다른 분쟁들로 휩쓸리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 다른 두 가지 요인들을 추가하자; 가속(加速)과 연장(延長)이라는 전쟁의 논리 그 자체와 쉽게 분쟁으로 치닫게 만드는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허약함. 나는 먼저 전쟁이 전쟁을 낳는다는 가설에 대해 국내 전쟁들에 초점을 맞추어 경험적으로 검증해보고자 한다. 왜 아프리카에서 전쟁들이 벌어지는가? 1990년대 동안 아프리카에서 13개의 새로운 또는 오래 끈 국내 분쟁들이 존재했다(<표 1> 참조). 종결된 전쟁들--예컨대 모잠비끄, 차드, 그리고 Mengistu정권에 대항한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투쟁들--과 쿠데타들--레소토와 기니-비사우--은 제외되었다. 소규모의 국경 충돌들 역시 제외되었다. 그러나 점차 격화되어온 국경 분쟁들은 분쟁의 해당 국가들에서의 이차적인 국내 전쟁들에 가능한 인과적 요인들로서 포함되었다. <표 2>에서 ‘과거의 전쟁’ 항목은 앞선 내전이나 10년 이내에 동일한 국가에서 내전으로 치달은 심각한 국경 분쟁을 지시한다. ‘주변 국가의 전쟁’ 항목은 전쟁이 발발할 때에 진행중인 분쟁을 가리킨다. 더불어, 민간인들의 대량으로 추방하는 것을 포함하는 광범한 반작용들을 가졌던 두 개의 국경 분쟁이 있다(<표 2> 참조). 이것은 인과적인 연관들을 추적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만들지 않는 극히 투박한 도식이다. 몇몇 상관관계들은 분명 의사(擬似)적이다. 예컨대, 수단에서의 전쟁과 에티오피아-에리테리아의 국경 분쟁 간에 분리가능한 연관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표에 제시한 상관 관계들은 인상적이다. 15개의 사례에서 7개는 최근에 ‘과거의 전쟁들’이 있었고 나아가 4개는 20여 년 동안 지속된 앞선 전쟁들로 고통받고 있다. 2개의 사례(두 개의 국경 분쟁들)에서 인과적 연관이 희박하거나 존재하지 않기는 하지만, 오직 1개의 사례만이 ‘주변 국가의 전쟁’을 갖고 있지 않다. 오직 1개의 사례, 즉 라이베리아는 명백한 예외이다. 이러한 분석은 우리에게 아프리카의 전쟁들에서 두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지적한다. 아프리카에서, 전쟁들은 일반적으로 영속적이고 한 국가에서 주변 국가로 쉽게 전염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전쟁의 계보, 전쟁이 지속되고 확산되며 쉽게 해결되지 않는 전쟁의 논리, 그리고 전쟁에 대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취약성을 조사하도록 강제한다. ‘과거의 전쟁과 주변 국가의 전쟁’ 가설은 또한 몇 가지 잘못된 부정명제들을 발생시킨다. 예컨대, 전쟁들이 발발할 것이라고 예상되었지만 실제 그렇지 않았던 사례들이 그렇다. 적절한 사례들에는 모잠비끄, 차드, 나이지리아(‘과거의 전쟁’)와 케냐, 기니(‘주변 국가의 전쟁’)이 포함된다. 아프리카에서의 전쟁들을 설명하려는 모든 일반적 시도들은 이러한 사례들 또한 조사해야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프리카에서의 전쟁들은 외부적 요인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반-식민주의적 투쟁들과 냉전적 분쟁들이 공통적일 때였던 아프리카 전쟁들의 이전 세대에 걸친 사례에서 보다 분명하고, 1990년대 후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쟁의 계보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전쟁은 1960년대 또는 1970년대의, 아니면 보다 초기(사하라 이남은 1955년 이후 간헐적으로 전쟁 상태에 처했다)의 계보를 추적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한 주요한 예외는 라이베리아와 그 전쟁의 결과인, 시에라 리온이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다른 모든 주요 분쟁들은 그것의 역사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초기 수십 년의 전쟁들은 많은 결과들을 가져왔다. 첫 번째 결과는 아프리카에서 무기의 총량과 그 무기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의 증가이다. 두 번째 결과는 아프리카의 지배자들과 그들의 반대자들이, 몇몇 지점에서, 어떤 형태로, 인종적 동원을 거점으로 삼는 경향을 반영한다. 그 결과,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종족성(ethnicity)은 군사화되고, 종족적 분할들은 첨예화된다. 몇몇 경우에 있어서 군사화된 종족성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 종별적인 사건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1988년 중반, 대부분의 북부 소말리아 주민들이 티오피아의 난민캠프--여기서 반란을 계속하기 위해 족벌적 기초에서 동원되었다--로 이주하게 만든, 소말리아민족운동에 대한 소말리아 정부의 준-인종학살적 반격은 소말리아 족벌들의 군사화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수단에서 1983-86년에 걸친 정부의 종족적 민병대들의 모집은 이후 15년의 세월을 굴절시킨 종족 분쟁의 과정을 촉발하였다. 세 번째 결과는 전쟁은 그것이 발발했던 국가들을 허약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농업과 목축 부문들은 최악의 피해를 입었고, 주로 광물 채취, 벌목, 밀수입은 피해가 제일 적었다. 간혹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전쟁들은 전사회적으로 사람과 자원을 동원하려 하는 관료 국가의 확장 또는 공고화로 보였다. 전쟁에서 자본, 소득, 사람의 소모는 전후 재건을 원조할 수 있는 광범한 사회적 동원을 통해 보조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이것은 드문 일이었다. 아프리카의 전쟁들이 매우 국내적이었던 한가지 이유는, 국가 동원이 특정한 지역들이나 종족성들로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대다수 정부들이 그 정부들의 전쟁 수행과 생존을 위한 국외의 군사지원과 경제적/인도적 원조에 상당히 의존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반정부군들도 동일한 상황에 있었다. 국내 자원의 사용은 몇몇 경우에서 다이아몬드나 석유 판매(앙골라), 벌목(라이베리아), 가축 약탈(거의 모든 지역)에 비해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디아스포라(diaspora)로부터의 원조 또한 매우 중요한데, 예를 들면 에리트리아인민해방전선(EPLF), 소말리아민족운동(SNM), 르완다애국전선(RPF)이 그러했다. 주로 국내자원의 동원에 기초하여 벌어진 전쟁들의 사례는 거의 없다―다만 에피오피아의 티그레인민해방전선과 우간다의 민족저항군(NRA)이 그 예외에 속한다. 그 결과 전쟁은 종종 [대외] 종속성을 높이고 국가들을 허약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 말 아프리카에서 지리-전략적 이해관계의 쇠퇴로 아프리카 정부들과 반정부파들이 전쟁을 강행하기엔 자기 자신의 국내 자원들이 매우 부족하였다. 광물자원이 풍부했기에, 앙골라에서만 양측 모두 충분히 전쟁을 오래 끌 수 있었다. 국가들과 반정부파들의 감소된 능력들은 전쟁 수행에 대해 광범하게 관련되었다. 그것은 자가-동원적 또는 자가-금융적 전쟁 전략들을 고무하였는데, 이는 군대들에 대한 중앙 통제의 약화를 수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전쟁]와의 단절은 과대평가 될 수 없다. 가장 주요한 이유는 아프리카에서 전쟁들의 이전 세대의 대다수는 ‘더러운 전쟁들’이었기 때문인데, 식민적, 인종적, 냉전적 권력들은 그것들을 불법적인 반란 또는 반란진압 수단들로 사용했다. 이것은 특히 남아공, 로디지아와, 포르투갈, 프랑스, 미국에 대하여 분명한 사실이며 영국에 대해선 약간 그러하다. 반면 소련과 그 동맹국들은 재래식 군대들의 창설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더러운 전쟁들의 과정에서 개발된 군사 기술들은, 모잠비끄의 Renamo에 의한 테러와 표적 파괴(conspicious destruction)의 사용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선보였는데, 중앙의 권위의 결핍과 취약함이라는 조건들에 잘 맞아떨어졌다(Minter, 1994; Vines, 1991).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저렴한 [사회에 대한] 동요 수단들이었다. 군사 동원과 규율 유지를 위한 이러한 사회적 기술들은 수년 동안 계속해서 지속되고 또 개발되었다. 로디지아 중앙정보국은 일급 Renamo 준-테러리스트들을 채용하여 공포와 불신을 퍼뜨리는 더러운 전쟁 기술들을 훈련시켰다. 그들은 약탈과 강간을 자행하고 공동체들을 종족적 경계에 따라 분할하라고 명령받았다. 나중에 이러한 기술들은 조국을 분할하고 지배하는 수단들로서 종족성을 이용하는데 열심이던 남아공 군정보부에 의해 완성되었다. 충격 부대(skock troops) 및 학살과 신체 절단의 표적 사용으로 아동들의 동원하는 것은 더욱 빈번해졌다. 한 기술은, 특히 이것은 앙골라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었던 기술인데, 공포를 확산시키고 인민 자신의 토지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단으로서 무차별적인 대인지뢰의 사용한 것이었다. 대륙의 다른 끝에 위치하고 서구의 지원을 받고 있던 어떤 국가는 저렴하게 전쟁을 수행하는 효과적인 수단들을 동시에 개발하고 있었다. Jaafar Nimeiri 대통령의 집권 하에, 수단은 동북아프리카에 대한 미국정책의 요체였다. 1980년대 남부 수단에서 점증하던 반란은 셰브론(Chevron)의 석유 채굴권에 집중되었다. 셰브론의 대응은 해외 용병들을 데려오라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Nimieri는 본질적으로 대신 수단 용병들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애초부터 수단의 반란 진압의 핵심적인 요소는 민병대였는데, 이는 종족적으로 동원되었고 약탈에 이용되었다. 민병대의 동원은 SPLA와 전투함에 있어서 극도로 저렴한 방법이었다. 남부에서 깊은 종족적 분할을 퍼뜨리고 주민들의 커다란 보호막(swathe)을 제거하여 극심한 기근에 노출되게 하는 식이었다(de Waal, 1994). 로디지아와 남아공의 지원을 받는 ‘콘트라(Contra)'[반대파]의 모잠비끄 습격과 유사하게, 이것은, 최소한 처음엔, 거부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나중에, 사회동요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술과 유사한 방식(parallel track)으로서 채택된 수단의 군사적 수단들은 아프간의 무자헤딘이라는 다국적군―이들은 미국의 CIA에 의해 훈련을 받았었다―에 의해 아랍 세계로 수입되었다. 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전쟁에서 그 계보들의 비교가능한 어떤 집합이 추적될 수 있다. 밀집한 재래식 부대들에 관한 소련의 교의들은 엄청나게 파괴적이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재래식 부대들은 고유하게 조직력, 장비, 훈련, 수당과 같이 매우 많은 것들을 필요로 한다. 마오주의적 원칙들로부터 파생된, 해방 전쟁의 전통은 매우 성공적임을 보여주었다. 그 직접적인 연관들은 프렐리모당(Frelimo)에서부터 우간다의 NRA를 거쳐 르완다의 RPF에 이르는, 그리고 자이르/콩고공화국의 내전의 요소들에 이르기까지 추적될 수 있다. 또 다른 줄기는 알제리의 해방 전쟁에서부터 에리트리아해방전선, EPLF,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에티오피아의 TPLF에 이른다. 이러한 모든 사례들에서, 경험으로부터의 많은 교훈과 동원, 조직, 전략에 대한 자생적 교의들의 발전이 있었다. NRA-RPF의 사례에서 보면, 종족 학살에 대한 어떤 반대 교의―운동들의 적들에 의해 실행되었던―가 발견될 수 있다. 라이베리아의 전쟁은 어떠한 계보도 갖지 않는 유일한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고의 군사사업가 챨스 테일러(Charles Taylor)에 의해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그는 극적 효과로 더러운 전쟁의 수단들을 채택하고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라이베리아에서 사회 동요가 전면전으로 격화되는 속도―연이어서 그 전쟁은 시에라 리온으로 수출된다―는 이러한 종류의 사회-군사적 기술들이 갖는 유효성에 대한 하나의 증거였다(Richards, 1996). 이러한 계보학적 연관들은 매우 강력하다. 아프리카의 전쟁은 군사적 수단들과 그러한 기술들을 훈련받아왔고 그것들을 발전시키고 있는 군인들의 소규모이지만 극도로 영향력 있는 집단들의 이러한 범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없이는 이론화될 수 없다. 아프리카의 군사 사업가들과 그들의 수단들은 각 전쟁들의 ‘전도(傳導)의 대리인들’ 분석(이하를 참고)의 핵심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선 전쟁의 논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쟁의 논리 클라우제비츠는 제한전쟁은 총력 전쟁 또는 절대 전쟁으로의 고유한 경향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재래식 전쟁들은 그가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전쟁들은 장기화되고 교전국들의 처음의 예상들을 훨씬 넘어서는 경향이 있었다. 사고할 수 있게 되었던 전쟁의 처음에서 사고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전쟁이 발전함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필요한 것이었다. 전쟁에 대한 제약들은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사라진다. 아프리카의 전쟁들은 동일한 경향을 보여줌에도, 그 대륙의 사회, 경제, 국가의 상이한 성격은 ‘총력전’이 양차 세계대전, 이란-이라크 전쟁, 베트남 전쟁과는 매우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귀결한다. 발전한 세계에서 총력전은 규제의 철폐, 다시 말해 민간 산업의 군수 생산으로의 조정과, 대중 동원을 위한 선전의 사용이 결합된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군사 기술의 실행을 수반한다. 이것은 아마도 에리트리아-에티오피아 분쟁에 적용될 것이지만, 대부분의 동시대적인 아프리카 전쟁들은 다양한 전쟁을 위한 사회적 기술들의 하위-기술을 적용하는 것에서의 규제의 철폐를 수반한다. 내전은 통상 국가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통상 국가의 수장이 그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삶에 대한 권력을 갖는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구조들을 가진다. 주권의 상징들을 통제하는 사람이라면 또한 냉전 당시에 이용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간소할지라도, 여전히 인상적인 외부 자원들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다. 원조 예산들, 국내 통화들, 상업 계약들, 토지 법률...등등에 대한 권위는 불균형의 권력을 제공한다. 심지어 소말리아나 라이베리아의 경우에서처럼, 국가가 붕괴했을 때, 이러한 특권들에 대한 기대는 국가를 수중에 넣기 위한 정치적, 군사적 투쟁을 첨예하게 한다. 따라서 타협은 본질적으로 매력적이지 않다. 전쟁이 시작된 근본적인 이유가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상식이다. 처음의 전쟁 목표들이 간소했을지라도, 그 목표들은 급격하게 확대되는 경향이 있다(Ikle, 1993). 이것은 아프리카에서의 내전들 그리고 국가간 전쟁들 양자 모두에 대해 사실이다. 그 전쟁들은 상대적으로 심각하지 않은 쟁점으로 시작되었겠지만, 얼마 후 양측은 완전한 항복 또는 상대방에 대한 완전한 파괴 이외의 어떤 것도 원치 않을 것이다. 국경에서의 (우연적인) 작은 충돌에서 각 도시에 대한 공중폭격을 포함한 전면적인 재래식 전투로 급격하게 확대된 에리트리아-에티오피아 분쟁은 분명한 사례이다. 대규모 전쟁을 준비한 것을 두고 서로가 상대방을 비난했지만, 그 증거는 무력 분쟁으로 치달은 주요한 이유가 상호적인 오산(誤算)이었음을 지적한다. 전쟁이 지속됨에 따라 여기서 사용되는 수단들이 더욱 극단화된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 또한 이제 진부한 상식이다. 이것은 물질적(material) 기술을 사용한 사례에서 더욱 분명하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지휘관들은 대(對)도시 대포와 대인 지뢰를 사용할 태세를 더욱 갖추게 된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social) 기술들의 사례이기도 하다. 지속되는 경향이 있는 전쟁의 논리와 관련한 한가지 양상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전쟁의 와중에, 일방(一方)에 의한 사고들 또는 징후들의 오판들은 [전쟁의] 확대 또는 평화안에 대한 거부로 이어질 수 있다. 중앙집권화된 군대들이 존재하는 지역에서, 이러한 위험들을 최소화될 수 있게 보장하기 위해 제3자를 통해서 통신 채널을 설정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민병대의 지휘관들 또는 군인-사업가들에 대한 정치-군사적 권위의 탈중심화를 수반하는 전쟁의 사회적 기술들은 그러한 사고들을 방지하는 것을 보다 어렵게 만든다. 아프리카의 정치-군사 지도자라면 서로 판이하게 다른 군대들에 대한 중앙 통제를 확립하려 하거나 진지하게 협상할 수 있을 때 자신의 부관들과 합의를 이루려 할 것이다. 그 실례는 제1차 수단 내전이었다. 1960년대 후반 Anyanya 반군들과 협상은 난항을 겪었는데 그들이 [반군의 구성이] 매우 이질적이었기 때문이었고, 협상은 이후 Joseph Lagu가 명령체계dml 중앙집중화를 시도했을 때 평화안이 협상될 수 있었다―왜냐하면 그가 이스라엘로부터 공급되는 무기의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소말리아 민병대들의 까다로움은 그 점에서 또 다른 실례이다. 모가디슈에서 평화 협상이 진행될 때마다 [민병대 내의] 경쟁적인 분파들 중 하나가 협상을 깨기 일쑤였는데, 협상에 반대하는 지휘관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가버리는 식이었다. 정치적 혹은 종교적 극단주의는 이미 존재해왔고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기보다 전쟁의 와중에 발전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단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는 이후 내전에 불을 지피는 1983년의 폭동들에서 그다지 눈에 띄는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행중인 전쟁은 1989년 쿠데타에서 권력을 잡고 1992년 지하드(jihad, 聖戰)를 선언하기에 이르는 이슬람주의자들의 급진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반대편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의 역할은 오히려 더욱 두드러진다. SPLA는 시작부터 정교분리적(secular)이면서 강한 반-교권적 성격을 가졌지만, 기독교로의 광범한 개종과 스스로 반-무슬림 투쟁―만약 필요하다면 무기를 공급하는 것을 통하여―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지원하기 위한 기독교 극단주의자들의 준비를 포함한, 남부 수단에서 내부에서의 변화의 결합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정치적 기독교 극단주의를 성장하는 군대로 만들었다(African Rights, 1997). 모잠비끄와 우간다에서, 무장봉기에 특정한 후원자(constituency)들을 동원하는, 얼마간 유별난 혼합적 종교예배들 역시 오랜 동안의 전쟁과 그 고통의 조건들 속에서 야기되었다. 그 예배들은 확실히 이질성의 정치를 재현한다. 중앙아프리카에서 무력 분쟁들에 기름을 부은 민족주의와 종족 배타주의는 전쟁의 와중에 자신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르완다에서 후투족(Hutu)의 힘에 대한 극단주의적 철학이 1950년대이래 존재해 왔지만, 그것이 대량 학살의 힘으로 배양된 것은 바로 1990-93년의 내전 시기에 그랬다(African Rights, 1994b). 종족 쇼비니즘의 다른 형태들은 그 지역에서 전쟁의 긴 세월 동안 견고해졌고 또한 보다 폭력적이게 되었다. 챨스 테일러와 포데이 샌코(Foday Sankoh) 같은 서양의 아프리카 군사 사업가들은 전쟁을 위해 동원 전략의 일환으로 정치적 종족성을 일부러 만들어내고 심화시키는데 얼마간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종족적 역학들은 계속해서 자신만의 무자비한(grim) 논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전쟁들은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쟁점들로 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은 나중에 도입되었다. 일단 이러한 요소들이 도입되면 전쟁에 있어서 그것들은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 된다.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아마도 전술상의 방도였겠지만, 애초에 도입했던 정치-군사 지휘관이 타협할 준비가 되었을지라도, 대부분의 이데올로기적 동원들은 완전한 승리 없이는 어떠한 협정도 체결하려 하지 않는 극단주의자들을 만들어 내며, 반대파들과 그 후원자들에 대한 완벽한 물리적 박멸을 수반할 수도 있다. 경제는 또 다른 요인이다. 몇몇 전쟁들은 부분적으로 기업의 투기의 시작되었고, 대부분의 경우 군사 사업가들은 거래 상대들과 그들의 전쟁 수행에 자금을 댈 뿐만 아니라 전쟁들이 자신들의 부를 늘려줄 수 있다면서 제휴를 체결하였다. 앙골라 같은 나라에서 석유와 다이아몬드의 형태로 손에 넣을 수 있는 엄청난 부는 교전당사자들이 전쟁―거의 모든 형태의 경제 활동이 중단되는―에 자금을 투자할 수 있게 하였다. 국가 권력이 경제적 자원들, 특히 광물[석유와 다이아몬드 같은]들을 통제할 수 있는 무한한 권력을 가져온다는 사실은 대륙 전체를 가로지르는 정치-군사적 경쟁을 첨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 경제적 요인들은 전쟁을 제한하게 하였다. 경제적 기초가 주로 농업 또는 목축업이었던 지역에서, 장기화된 전쟁은 교전당사자들이 싸울 수 있는데 필요한 자원들을 파괴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한 인식은 몇몇 전쟁들, 예컨대 소말릴랜드[Somaliland, 아프리카 동부의 지방 이름]와 모잠비끄에서의 [휴전]협정들의 기반이 되었다. 모든 전쟁들이 무한정 장기화되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어떤 지역에서의 사례들처럼 아프리카에도 제한적인 전쟁들이 존재했다. 그런 전쟁들은 안정적인(내전으로의 경향이 없는) 정부들 간의 국가간 분쟁의 상황에서 대부분 그러했다. 전초전 이상으로 나아간 적이 거의 없는 사례들은 말리(Mali)와 부르키나 파소(Burkina Faso)의 충돌(1963, 1974, 1985년), 나이지리아와 카메룬(1997년), 세네갈과 기니-비사우(Guinea-Bissau)의 충돌(1988-90년)이 그러하다. 세계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국경 분쟁들은 그리 유별날 것도 없는 일이다―예컨대, 페루와 에콰도르의 경우에서부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그리고 파키스탄과 인도가 그러하다. 그러한 분쟁들은 권위주의적 정부에서 다원주의적 또는 민주주의적 정부로의 어려운 이행에 직면하고 있는 나라들에서 특히 공통적이다(Mansfield & Snyder, 1995). 그러나, 아프리카에서 국경 분쟁들은 확전으로의 위험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일방 또는 양방에게 상대방의 내부적 동요에 개입하려는 어떤 유혹이 존재한다. 그것은 비교적 용이한데 이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종족적 공통성들, 다른 나라에 이미 몇몇 폭력적 반군들이 존재할 가능성, 그리고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의 취약성 때문이다. 1977-78년의 소말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979년의 탄자니아-우간다 전쟁, 1979-80년의 장기화된 리비아-챠드의 전쟁들과 모리타니아-세네갈의 대치가 그런 경우들이다. 왜 전쟁들은 확산되는가? 지금까지 왜 아프리카의 전쟁들이 한 나라의 내부에서 장기화되고 확대되는 경향이 있는가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 절에서는 그 전쟁들이 어떻게 한 나라에서 다른 이웃 나라들로 확산되는가에 대해 분석할 것이다. 대여섯 가지 분명한 이유들이 있다. 첫째, 구멍이 많은 국경들은 무기류의 밀수입과 사람들의 밀입국을 상대적으로 용이하게 만든다. 이것은 어떤 나라에게는 이웃 나라와 충돌하게 되는 고질적인 분쟁거리이다. 국경 지대들은 종종 정치적으로 복잡하고 민감하다. 밀수업자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정치 사업가들도 국경들을 필요로 한다. 인접 국가의 국경 내에 거주하는, 어떤 나라의 반군들은 또한 매우 행실이 나빠서 인접 국가에 무질서와 전쟁을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의 출신 국가에서 호전적인 이데올로기들을 갖고 올 수도 있다. 둘째, 극단적인 경우에 반군들은 인접 국가들로 피난/망명할 것이다. 난민 캠프들은 군사적 동원에 이상적인 장소들이다. 냉전 기간에 유엔난민고등사무소(UNHCR)와 서구의 NGO들은 다수의 반공산주의 반군들―예컨대, 태국,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중앙 아메리카 출신―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보호하였다. 남아공의 해방운동들은 유사한 목적으로 난민 캠프들을 이용하려 하였지만, 덜 성공적이었는데, 특히 난민 캠프를 공격하는 남아공 군대의 경향이 UNHCR과 남아공으로 하여금 캠프의 탈군사화를 두고 협상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아공의 선례는 1990년대에 잊혀진 듯 하다. 대신, 국경을 넘어 캠프에 합류한 힘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무차별적 원조를 제공하던 전통은, 캠프들이 종종 상당히 군사화 될지라도 계속되었다. 자이르의 캠프에서 전(前)-르완다 정부에 대한 원조는 그와 관련된 사례이다. 이는 국경을 넘나드는 군사 행동의 고질적인 유인이자 출신 국가의 심각한 동요의 원천인 ‘구멍 뚫린 국경’이라는 요인에 대한 하나의 과장된 판형이다. 셋째, 국가들은 아마도 자신의 영토 내에서 무장 분파들에 대해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몇몇 경우에 한 국가의 국경까지 미치는 경찰력으론 불충분하고 인접 국가의 반군들이 캠프를 차린다고 처벌할 수 없을 것이다. 수단 정부는 19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서부 국경에서 챠드의 분파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어떤 국가 권력도 없는 소말리아는 이슬람 극단주의 집단들을 자신의 영토 내에서 통제할 수 없었고 그들은 에티오피아를 동요시켰다. 이것의 변이들은 무장 분파들이 어떤 식으로든 숙주(宿主) 국가와 관련되었을 때 발생하는데, 예컨대 RPF는 우간다의 통치세력 NRA 내부에서 성장하였다. 넷째, 군사 사업가들은 인접 국가와의 전쟁에서 이윤을 남기려 할 것이다. 이는 자원들을 통제하고, 안전한 안식처를 만들며,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부가 권력을 잡게 하거나 아니면 잠재적으로 적대적인 권력을 단지 동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라이베리아의 내전은 시에라 리온―자신만의 전쟁의 논리를 발전시켰던―으로 옮겨갔다. 르완다의 RPF의 침략은, 국경을 따라 멀리 킨샤사[Kinshasa, 자이르의 수도]에 이르는 완충지대를 넘어서 자이르에서 전쟁을 벌이기로 한 RPF의 이후 결정과 마찬가지로, 또한 하나의 군사 사업가들의 행위였다. 마지막으로, 보복과 확전의 논리는 국경을 가로질러 작동한다. 만약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영토에서 발생한 반란의 숙주 또는 후원 국가였다면, 후자의 국가는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려 할 것이고 확전의 치명적인 논리가 작동하게 될 것이다. 이 논리는 수단과 그 인접 국가들에 적용되었다. 이른바 Lord's Resistance Army와 여타 우간다의 반란들에 대한 수단의 지원은 SPLA에 대한 우간다 정부의 태도를 SPLA에 대한 단순 허용(또는 금지하지 않는)에서 실질적인 지원을 위해 자신의 영토를 사용하라는 태도로 바꾸는 도구였다. 에리트리아 정부와 싸우고 있던 지하드주의 집단들과 오로모해방전선에 대한 지원, 그리고 에티오피아 정부와 싸우고 있던 이티하드 알-이슬라미에 대한 수단의 지원은 이 두 국가들로 하여금 수단의 반대파들에게 기지들을 제공하고 지원하는 것을 통해 [수단에] 보복하도록 만들었다. 정확하게 동일한 과정이 르완다 정부로 하여금 반-모부투 군대를 지원하게 하였고 결국 1996년 자이르를 침공하게 하였다. 왜 전쟁이 다시 발생하는가? 한 나라가 과거에 전쟁 상태에 있었다면, 전쟁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어떠한 평화협정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항상 어떤 평화협정의 체결 이후에 “끝나지 않은 사업”이 존재한다. 양 협정당사자들 각각의 몇몇 불만족스러운 성원들은 다소 긴 투쟁 또는 다른 전략을 통해 보다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거나 아니면 야망에 찬 또는 부패한 지도자들에 의해 자신들이 ‘매수되었다’라고 믿을 것이다. 그러한 불만에 찬 성원들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군사 사업가들이다. 그 위험들은 서너 가지 요인들에 의해 악화되었다. 첫째, 인접 국가에서 전쟁이 발생할 수 있고, 이 나라는 어떤 무장 반군에 대한 잠재적 스폰서 또는 최소한 안정한 피난처가 된다. 둘째, 총기류는 보통 전쟁이 끝난 사회에선 언제든 구할 수 있거나,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총기류를 구할 수 있는 네트워크들을 갖고 있다. 셋째, 반란 또는 폭동 집단들의 중핵을 구성할 수 있는 훈련받은 남성들이 풍부하다. 마지막으로, 전쟁 재발의 가장 공통적인 이유는 과거 전투원들의 무장해제, 해산과 사회재통합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패들에 대한 이유들에는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사회]통합 혹은 제대, 경제적 기회들의 결여, 월급 미지급, 혹은 또 다른 실패로서 행정부에서 군장성들의 제거 등이 포함될 것이다. 잘못 관리되면, 그것은 오직 한번의 군사 반란은 전쟁의 재발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무장해제와 군대해산의 과정들은 폭동을 포함한 산발적인 폭력적인 저항을 낳는다. 이러한 규칙들에 별다른 예외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군대가 완전히 패배하고 어떤 군사 반란들도 없었던 1991년 에티오피아의 경우에서조차, 심각한 폭력 사태가 수년 동안 이어졌다. 에티오피아는 폭력 범죄의 엄청난 증가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그 대부분은 실업상태의 퇴역군인들에 의해 일어났다. 군대의 몇몇 구(舊) 성원들은 오로모해방전선(OLF)에 투신했고 일시적인 반란을 일으켰고 또 다른 몇몇은 SPLA에 의탁하여 남부 수단쪽에서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전후의 사회는 야심찬 군사 사업가에게 이상적인 환경이다. 앙골라, 소말리아, 수단과 같이 재발된 전쟁들의 여러 예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반례에는 나이지리아와 모잠비끄가 포함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사례에서 잠재적 군사 사업가들의 경제적 만족이 성공적인 평화에 사활적이었다고 보인다. 국제적 요인들 외부적 요인들은 아프리카의 전쟁의 성격을 첨예화함에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식민권력들과 강대국들의 연루는 다수의 전쟁들이 시작됨에 있어 핵심적이었는데, 예컨대 무기류를 공급해주고 군사 교리들을 다듬어주고 발전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서구가 부가한 경제 정책들, 특히 구조조정은 또한 정부와 반군들이 민병대들과 더러운 전쟁 수단들에 의존해왔던 경제적 맥락을 만드는데 있어 중요하다. 인도주의적 행위자들의 두드러진 역할은 몇 가지 전쟁 전략들을 지시하였는데, 그것은 전쟁 지대들에 대한 구호 식량의 이용도를 전제하였다. 1990년대 초반 인도주의적 개입의 방식, 그리고 소말리아에서 그 성공적인 운용은 [이후의] 아프리카 전쟁들에 영향을 준다. 몇몇 교전국들은 외국의 군사 개입을 부추겼고, 다른 나라들은 외국 부대들의 존재에도 자신들의 목적들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았다. 소말리아에서 [인도주의적] 개입은 그 나라에 자원들을 쏟아 부었고, 미래의 소말리아 국가는 국제적 후원을 누릴 것이며 그래서 투쟁할 가치가 있다는 분파 지도자들의 기대들을 드높였다. 아프리카에서 국제적 개입들의 주요 특징은, 특히 소말리아 개입의 실패 이후, 그리 진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구의 강대국들, 그리고 특히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군사 자원들과,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대원들의 생명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정책은 단지 ‘유연한’ 개입―실제 자원들이나 성실한 정치적, 외교적 업무로 뒷받침되지 않는 구두상의 그리고 상징적인 공약들이었던―으로 특징지워졌다. 미국의 정책은 단호하지 않았다. 소신과 열정도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미국 정부는 아프리카와 연관되지 않은 이유들로 지속적으로 이집트를 지원하였고 넬슨 만델라를 존중하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원조 정책은 혼란스러웠다―종종 다른 것과 모순되는 다양한 조건들에 종속되었다. 국무부와 국가안보위 내부의 상당한 논쟁 이후 1996-7년 한 정책이 부상하기 시작하였는데, 새로운 정권을 지지하고 수단에 반대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시끄러운 소음들은 현실에서 실질적으로 공허한 것으로 번역되었다. 그 정책은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으로 1998년 실패로 돌아갔다. 회고해보자면, 그 정책의 실행가능했던 부분은 몇몇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예컨대, 과거 자신들의 인접 국가들의 내정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던, 르완다나 에리트리아처럼 뒤로 물러나 있는 것이었다. 그 주요 성과는 국제적인 중재나 평화유지의 신뢰성의 위기였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국가는, 심지어 정치적 이해가 위태로운 지역, 예컨대 콩고, 수단, 혹은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와 같은 지역에서, 신뢰할만한 평화유지의 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을 투자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아프리카와 관련한 미국의 군사 교리는 1998년 8월 [수단의] 하르툼(Khartoum)의 알-쉬파(al-Shifa) 공장에 대한 크루즈 미사일 공격으로 상징화되었다. 이것은 어떠한 미국인 사상자도 생길 가능성이 없는 압도적인 군대에 기초한 미국의 군사력의 투사(投射)였다. 그것은 19세기의 식민지 보복원정과의 유사점들을 공유한다. 미국은 자신이 어디에서든 그리고 어떻게든 보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되었다. 그 폭격은 형편없는 정보에 의해 묘사된 확실히 무고한 타깃을 때렸다. 그것은 또한 국제법에 대한 [미국의] 뻔뻔한 무시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수단의 반군들에 대한 어떤 진지한 원조를 제공함에 있어서 미국의 오랜 실패(그마저도 상징적인 행동들이었지만)와 대조를 이루었다. 단적으로, 미국의 미사일 공격은 아프리카에 대한 미국의 무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무능력은 아프리카가 어떠한 희망도 없기 때문이거나 외부자들이 영향을 줄 수 없을 정도의 정치 과정에 잡혀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 정책의 자기-부가된 불능상태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미국 또는 어떤 유럽의 정부가 아프리카의 위기들에 대한 정치적 해결책들을 구하기 위해 건설적으로 참여하고자 한다면, 기회들은 널려있다. 하지만 그 위기들은 지속적이고 아마도 값비싼 약속들―앞으로가 아닌 바로 지금―을 요구할 것이다. 결론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그들이 매우 전쟁에 민감함을 보여주었다. 이것의 이유들에 관한 완전한 분석은, 포섭과 배제의 정치에 대한 분석을 포함한, 그 대륙의 정치, 경제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수반할 것이다. 두 강한 국가들(르완다, 에티오피아)와 약한 국가들(라이베리아, 자이르)은 장기의 혹은 혹독한 전쟁이 발발하기 쉽다. 권위주의적 국가들(우간다, 니메이리 치하의 수단)과 민주주의로 이행 과정의 다양한 지점에 있는 국가들(르완다, 1998년의 에티오피아, 1986년의 수단)은 전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종족적으로 동일한 국가들(소말리아)은 첨예한 종족적 분할들(대부분의 국가들)을 갖고 있는 국가들과 나란히 전쟁에 빠져들기 쉽다. 그러나 평화로운 국가들 또한 이러한 특징들을 공유한다. 그래서 그것은 분쟁을 발생하게 만드는 요인이라기보다는 분쟁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오래 끌고 첨예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1990년대 아프리카의 내전들은 일반적으로 전쟁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던 군사 사업가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일단 전쟁이 벌어지면, 아프리카 국가들의 특징들과 대부분의 아프리카 전쟁들의 성격들은 분쟁이 언제나 참혹하고, 장기화되고 확대―지리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대중 폭력의 상태로―되기 쉽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분석의 함의는 몇 가지 점에서 [전쟁의 성격에 관한] 전형적인 것 이상이다. 아프리카의 전쟁들은 반드시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붙잡고 해결되어야 한다. 첫째, 인접 국가들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둘째, 정치적 해결책들은 반드시, 극단적 이데올로기들을 억누르는 것과 함께, 협상과 타협을 통해 찾아야 한다. 셋째, 전후 이행기는 반드시 성공적으로 관리되어야만 하는데, 특히 무장해제, 소집해제, 그리고 구 전투원들의 민간 생활로의 재통합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모든 어려움들에도, 국가는 전쟁들에 대한 해결책들이 발견될 수 있는 틀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초강대국이 부여하는 안보질서의 부재,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적 프로젝트들의 실패, 그리고 (아마 극복하기 어려울 것 같은) 대륙의 세 강대국들에 기초한 하위-지역 질서들의 문제들은 미래에 아프리카의 평화와 안보의 체계가 국가들간의 공통의 합의에 기초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체계의 윤곽들은 대안들이 실패했을 때 정치 지도자들의 마음에 점차 분명해질 것이다. 본질적인 요소들은 우호적인 인접국가간 관계, 관용과 다원주의로 구성된 공통의 문화, 그리고 지역적, 하위-지역적 제도들(아프리카통일기구(OAU), 서아프리카화폐동맹(ECOWAS), 발전을 위한 아프리카정부간협의회(IGAD), 남아프리카발전공동체SADC)에 대한 존중이 그것이다.PSSP 참고문헌 Rieff,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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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03-09-01 오후 5:43:52 아프간도 위험하다 탈레반 공격 본격화ㆍ빈 라덴 건재 이라크에서 치안부재ㆍ통제불능의 늪에 빠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수렁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탈레반 세력이 활동을 강화함에 따라 아프간 곳곳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으며 오사마 빈 라덴도 건재하다는 소 식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점점 미국이 1980년대 소련처럼 ‘제2의 아프 간’에 빠져들고 있는 양상이다. 아프가니스탄 치열한 교전 지속. 지난 주에만 양측 합쳐 90여명 사망 뉴욕타임스는 1일(현지시간) “파키스탄 등지에서 새로운 자원자들의 합 류로 탈레반 세력이 자신들의 이전 활동무대인 아프가니스탄 남부와 동부 에서 공격을 강화하고 있다”며 아프간 관료와 서구 외교관 및 포로들 말 을 인용해 보도했다. 실제로 지난 8월 중순 이래로 자불주(州)를 비롯한 아프간 남동부지역에 서 치열한 교전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교전으로 지난 달 31일 미군 2명이 동부 파크티카주에서 사망한 것을 비롯, 지금까지 미군 35명 이 사망했다고 미 국방부는 밝혔다. 또한 아프간 관료에 따르면 지난 8월에도 카불 남부의 와닥주와 로가르주 에서 교전이 벌어져 9명의 경찰관이 사망했다. 이처럼 아프간 정부와 미군 에 협조하고 있는 아프간인들에 대한 공격이 계속돼 지금까지 2명의 경찰 간부와 2명의 친정부 학자 및 30명 이상의 경찰관들이 사망했다. 한편 지난주에도 탈레반 세력 및 미군과 아프간 정부군 사이에 치열한 전 투가 벌어져 양측 희생자가 90명에 이르렀다고 AP 통신 등이 30일(현지시 간) 전했다. 유엔은 이러한 결과에 대해 “남동부지역은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지역 으로 변했으며 재건움직임과 투자활동이 둔화돼 카불 정부 및 미군지지자 들과 이 지역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파슈툰족은 점차 소원해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탈레반 전술 변화 “미군뿐만 아니라 아프간 관료 등에도 공격, 심리전 사용하기도” 탈레반들이 이렇게 공세적으로 나오면서 “탈레반 세력의 전술에도 변화 가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서구 외교관들의 말에 따르면 탈레반 의 공격대상은 이제 미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프간 정치인과 관 료 및 구호활동단체직원들도 포함되고 있는데 유엔은 보고서를 통해 “구 호활동단체직원들에 대한 공격은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지적 한 것이다. 또 팻 도노후 연합군 사령관에 따르면 탈레반 세력은 지역에 따라 다른 전술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파크티카주 및 파크티아주 지 역에서는 탈레반은 과감하게 미군세력과 직접 교전을 벌이지만 다른 지역 에서는 미군차량에 대한 미사일 공격이나 폭탄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탈레반들은 이렇게 공세적인 전술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심 리전도 사용하고 있다”고 서구 외교관들은 밝혔다. 탈레반세력 지도자인 물라 무하마드 오마르 명의의 오디오테잎이 지난 6월 이래 계속 뿌려지고 있는데 이 테잎은 “점령군과의 성전을 강화하기 위해서 10명의 지도위원 회가 꾸려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탈레반 세력은 “미군과 국 제사회는 언젠가는 떠나갈 것이고 자신들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탈레반 세력은 과거와는 달리 유화전술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전과는 달리 면도를 했거나 노래를 들으며 다니는 사람들에 게 간단한 설교만 하고는 그냥 보냄으로써 “웃음과 친근함”으로 다가서 고 있다고 비영리 단체인 아프가니스탄 NGO 단체의 닉 다우니 안보담당관 이 밝혔다. 이렇게 점차 탈레반의 전술이 다양해지면서 아프간에서 위험지역이 늘어 남에 따라 남부 최대 도시인 칸다하르에서 활동하고 있는 구호단체들의 수 가 50%까지 줄어들었으며 유엔의 활동지역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12월에나 되어서야 1백20명 정도의 미군을 칸다하르에 새로 파견할 계획으로 있어 유엔 및 서구 외교관들은 앞으로 아프간에서 의 치안에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사마 빈 라덴 건재, 제 2의 9.11 테러 위한 회의 개최” 한편 “알카에다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서 대규모 테러 회의를 개최하는 등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고 뉴스위크 최신 호(9월 8일호)가 보도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동안 미군의 집중적인 추적에도 불구하고 행적이 묘연했던 “빈 라덴 은 아프간 쿠르나주 산악지대에서 세 아들과 함께 자유롭고 안전하게 머물 러 있다”고 뉴스위크는 복수의 소식통을 인용해 전했다. 이 빈 라덴이 주최한 테러 회의에는 알-카에단 행동조직 지도자들과 체 첸, 우즈베키스탄 등지의 급진 이슬람 단체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했는데 회의에서 빈 라덴은 “중대한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 해졌다. 이와 관련 탈레반 고위 소식통은 “빈라덴은 생물 무기 사용에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다”면서 “그의 계획은 믿을 수 없을 정도”라고 밝혔다. 또 이 소식통에 따르면 “생물무기를 이용한 빈 라덴의 다른 공격계획은 9.11 테러를 기획했던 알-카에다의 핵심지도자인 할리드 샤이크 모하메드 가 지난 3월 체포되는 바람에 연기된 것 뿐”이라고 전했다. 빈 라덴은 또 이 회의에서 심복인 사이프 알-아딜을 알-카에다의 이라크 조직책으로 임명했으며 종교지도자 및 기업인 등에게 가능한 한 알-아딜 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도 작성해 줬다고 뉴스위크는 보도했다. 이라크만으로도 힘겨워하는 부시 정부에 아프간은 또 다른 시련으로 다가 오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김한규/기자
*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http://www.spark946.org/ 한미군사동맹의 비판적 고찰과 대안모색을 위한 토 론 회 - 한미상호방위조약 개정안 발표 - 2003. 7. 29 < 목차 > 미국의 동북아 신냉전패권전략과 신한미군사동맹의 반평화성과 반통일성 / 강정구 한미상호방위조약 개정안 발표와 그 배경 / 정세진 한미상호방위조약 개정안에 대하여 / 최철영 주한미군철수운동과 한미상호방위조약 / 정대연 한미상호방위조약 개정안에 대한 토론문 / 박기학 자료 · 한미상호방위조약 전문과 양해사항 · 95쪽
나는 전황을 CIA로부터가 아니라, CNN으로부터 더욱 많이 배운다 -미국의 대통령 조지 부시 - 칠흑 같은 새벽, 바그다드를 강타한 미사일이 섬광처럼 퍼져나가는 모습, 이곳저곳에서 부상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 이동하는 군사들.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한 잔상들을 기억하고 있다. 전선에 있지 않았지만, 텔레비젼 영상을 통해서 인터넷을 통해서 우리는 전쟁이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간다. 우리는 바로 그들 미디어 산업을 통해 전쟁을 알아가고 경험한다. 미디어와 전쟁, 그 은밀한 동거 미디어를 사람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전달하는 도구라고 정의한다면, 전쟁에는 그것을 알리고 이를 해석하는 미디어가 언제나 존재해왔다. 스파르타와의 전쟁결과를 알리기 위해 끊임없이 뛰었던 그리스 병사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근대적인 대중매체의 시작이었던 전신 역시 전쟁과 같은 거대 사건의 속보전달과 긴밀하게 관련이 있다. 라디오, 텔레비젼, 그리고 인터넷 등의 새로운 매체의 탄생은 언제나 군사적인 목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이를 위한 자본은 정부와 기업으로부터 끊임없이 제공되었다. 전쟁 때마다 당사국들은 다른 나라를 경계하기 위해 다양한 선전을 활용하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흑인병사들과 백인병사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실시하였던 독일의 선전은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며, 냉전시기 미국은 선전을 위해 각종 위성채널들을 활용하기도 하였다. 단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전파할 수 있는 매스미디어가 정부의 전쟁을 위한 수단으로만 이용되는 것 같지는 않다. 미국 정치인들의 많은 수가 미국이 베트남 전에서 패배한 원인 중의 하나를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로 보고 있으니, 미디어 그 자체가 전쟁에 대한 여론과 국제적 분쟁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를 생각해 보면, 지금 미디어와 전쟁에 대해 유난스럽게 말하는 것이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CNN 효과(?)-정보통신기술과 국제 분쟁의 변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에 따라 전쟁과 미디어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컴퓨터와 커뮤니케이션기술의 발달은 기존의 시공간 개념을 바꾸었으며, 세계 각지의 소식들은 동시에 전달된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이제까지 수행되던 전쟁의 양상과 전쟁을 경험하는 방식을 동시에 바꾸었다. 새로운 기술 발달을 통해 지능화되고 군사화 된 공간 체계가 등장하면서 세계의 분쟁에 대한 미국의 전방위적인 지배가 가능해졌다. 새로운 기술의 발달은 전쟁의 양상을 바꾸어 놓았고, 전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미디어의 위력은 더욱더 크게 느껴졌다. 전쟁을 비롯한 국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디어의 역할과 그 힘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91년 걸프전이다. CNN이 위성통신을 이용하여 전달한 전쟁 이미지는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CNN은 보통 사람들의 전쟁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CNN 효과(CNN effect), 즉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의 텔레비젼의 보도는 정책결정론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전세계의 국가 지도자들은 미디어를 통해 국제분쟁에 대한 전세계의 여론과 분위기를 읽어가고 정책 결정을 고려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국제 분쟁 시 각 국의 정상들은 CNN 등의 글로벌 미디어, 정확히 말하면 텔레비전을 통해 분쟁 당사국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등 다양한 외교행위를 펼친다. 걸프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90-91년, 사담후세인이 평화안을 제기함으로써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에 도전한 것도 CNN을 통해서였다. Baker가 후세인에게 최후통첩을 한 것도 미국 대사가 이라크를 방문해서가 아니라, CNN을 통해서였다. Fitzwater 전 백악관 대변인이 밝혔듯이 국제분쟁의 과정에서 그들의 의도를 가장 빠르게 전달하는 방법은 이제 미디어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속보들 속에서 외무부 관리들은 미디어에 끊임없이 반응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세계의 눈들은 끊임없이 기다린다. 오래 생각할 시간이 정책관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으며, 미디어 보도에 기반을 둔 직관적인 정책 결정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점차 커진다. 빠른 속도로 제공되는 미디어 이미지에 의해, 정치가들은 사건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점차 잃어 가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Gilboa 2002). 하지만 Rubin(2002)이 지적하듯이, 이와 같은 미디어의 역할은 언제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 사건에 대한 정부 전략의 확실성의 정도와 리더쉽의 범위 그리고 저널리스트들의 역할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다면 9․11 이후 이라크 침공까지 애국주의로 일관하였던 미국 미디어의 태도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여론을 관리하라-9․11이후의 미 국방부의 정부보도 관리 결론부터 말하면, 아랍권에 대한 대 테러전쟁의 분위기가 확실하였던 9․11 이후, 국제 분쟁에 대한 관리는 미디어의 몫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부 관리들이 이를 주도하고 미디어가 동조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2001년 세계무역센터 폭격 이후 국제분쟁을 다루는데 있어서 미국무성으로 대변되는 미국 정부의 언론통제와 전략은 점차 증대되고 있다. 9․11 이후 미국을 강타한 애국의의 물결 속에서 국가 안보라는 이유로 정부와 국가관련 정보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 9․11 이후 정부 또는 대통령의 기자회견의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하는 이 모든 행위는 정부와 국민이 하나가 되고 미디어가 동행하였던 극단적인 애국주의의 물결 속에서 용인되었다(Magder 2003). 국제정책에 대한 미디어 보도를 통제하는 양상은, 단순하게 정보제공을 줄이고, 정보원을 제한․관리함으로써 사건에 대한 인식을 조절하는 차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지난 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미 국방부의 대 언론정책은, 외교 분쟁이 일어날 때 정부의 정보관리와 선전 전략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첫 번째 공습 작전명이었던 ‘shock and awe'는 국방부가 제공한 말로, 저널리즘의 구미에 잘 어울려서 신문기자라면 누구나 알아서 채택할 용어였다. 전쟁 이전 부시의 최종기자회견에 대한 언론의 반응이 시큰둥 하자, 국방부 관리들은 미디어가 알아서 쉽게 써먹을 만한 용어들을 작성해서 제공하였다(Martin 2003). 이것은 이라크 침공당시 미 정부가 국내외에 대한 선전을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2003년 미 국방부는 전쟁관련 보도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이후 금기시하였던 언론정책을 구사하였다. 즉, 각 언론사의 기자들이 이라크에 파견할 군대를 따라 이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던 것이다. 지난 이라크 침공 당시 약 3주 동안 700여명의 기자들이 각 소대별로 흩어져서 전쟁에 대해 밀착취재를 할 수 있었다(Smith 2003). 전쟁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할 수 있을 것이라던 기대와는 달리 종군기자 베테랑들은 과연 기자들이 얼마만큼의 자율성을 가지고 기사를 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Nation지의 기자 Hodge가 기술하였듯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기자들은 음식과 잠자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군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적대적인 분위기로 인해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기자들은 그들을 지켜주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갔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군대와 함께 이동하였던 종군기자들이 전쟁의 일부분만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이 같이 생활하는 군대의 이익에 반하는 기사를 내보내는 행위를 이적행위로 인식하는 자기검열의 과정이 기자들에게 지속되었으니 미 정부의 대담한 정보 관리 정책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Hanley가 지적하듯이 미국 국무성이 제안한 게임에 미국 언론들은 일정정도 놀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더 빠르게, 더 강렬하게-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당시의 종군기자 시스템이 성공을 거둔 것은 미 국방부의 대외 홍보 정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상업주의적인 글로벌 미디어의 성격이, 전세계적으로 지지 받지 못한 전쟁에서 여론을 돌리고자 하였던 국방부의 의도와 훌륭하게 맞아떨어진 것도 한 몫을 하였다. 외교정책에서 미디어가 주목받고 있는 것과는 달리, 9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각 신문사와 방송사의 외신보도는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었으며, 각 언론사들은 해외지국들을 모두 철수시켰다. 그 이유는 바로 비용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외신기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수입의 문제였다. 기술 발달로 외국 뉴스를 생산하는 비용이 줄어들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뉴스에 비해 비용은 많이 들면서 독자들의 관심을 그다지 끌어당기지 못하였다. 수익을 가장 커다란 가치로 두고 있는 미국 내 각 언론사들이 정규직 외신기자나 사무실을 해외에 두는 것은 수지가 맞지를 않았다. 대신 방송사와 주요 일간지들은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현장으로 기자나 뉴스 앵커를 보내 거의 동시에 보도하는 방식(just-in-time approach)으로 외신보도를 생산했다. 이와 같은 뉴스 생산조건 속에서 삶과 문화를 알지 못하는 기자들은 그냥 사건 현장에 떨어진다. 하지만, 그 지역의 문화적․정치적․역사적 맥락을 모르는 상황에서 기자의 역할은, 보다 심도 있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그 자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Magder 2003 ). CNN을 비롯한 미국의 방송사들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리고 전쟁 직전 전쟁의 근거가 되었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IAEA 보고서의 존재여부를 알지 못했던 것도, 경제원리에 따라서 외신뉴스를 생산하는 관행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 개의 전쟁, 스펙터클과 처절함 사이 전쟁시기 미 정부의 정보관리와 상업미디어의 보도는 깔끔하고 별로 잔인하지 않은 전쟁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일반적으로 외신보도는 기자들이 소속된 맥락 속에서 생산되고 소비된다. 종군기자들은 시청자들이 이 메시지를 소비하는 상황- 즉 전쟁 발발 전날과 마찬가지로 식사하고 운동하고 일하는 - 을 고려하면서 상을 만들어내었다. 이라크 침공 당시 미국의 뉴스들은 대부분 전쟁을 위험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전쟁의 잔혹함을 나타내는 선혈도, 병사들을 괴롭혔던 사막의 모래바람도 등장하지 않았다. 또한 대량살상무기 보다 더 위협적인 미국의 최첨단 무기는, 너무나도 정밀해서 민간인에게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그려졌다. 이라크 사람들은 자신들을 해방시키려고 목숨을 걸고 파병된 미군 병사들을 환영하고 그들이 주는 원조물품을 무척 반가워하는 것으로 그려졌다. 이러한 보도를 자신의 일상 속에서 접한 미국의 텔레비젼 시청자들은, 미군의 바그다드 진격이 있던 날 대략 2000-3000여명의 이라크 군사들이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3주 동안의 이라크 침공이 비교적 깨끗한 전쟁이었다고 생각한다(Martin 2003). 결국 미국 국민들은 일상속에서 자신의 텔레비젼 화면에서 탱크와 미사일 그리고 군인들과 기자들이 등장하는 한편의 스펙터클을 감상했던 것이다. 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라크 사람들이 주연이 된 전쟁이 펼쳐졌다. 미국과 영국의 거대한 무기와 미․영연합군에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이라크인들, 폭격 당한 건물, 연기, 그리고 혼란, 폭력으로 부상당한 사람들, 절규하는 이라크 여성들과 아이들, 포로로 잡혀 공포에 떨고 있는 이라크인들.... 공포 속에 사로잡힌 전쟁의 군상들이 아랍권의 방송과 유럽의 신문 속에 등장한다. 하지만, 미․영 기자들 중에서 이와 같은 고통을 목격하고 포착한 사람들은 없었다. 고통의 전쟁은 애국주의와 상업주의로 가득 찬 미국과 영국의 기자들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Hanley 2003). Hanley(2003)의 표현처럼 미디어에 비춰진 이라크 전쟁은 두 개였다. 하나는 미국 미디어에 보도된, 잔인하지 않은 서방의 민주주의를 증진시킬 인간주의적인 전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아랍권의 방송에 나타난 전쟁 즉 공포스럽고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전쟁이었다. 이 둘은 공존하고 있었다. 전쟁이 가져다 준 선물 미국의 미디어 비평가들이 ‘더러움으로 가득 찬 전쟁보도’, ‘객관성과 공평성이 결여된 전쟁보도’, ‘이미지만 존재하고 심층취재는 부족하였던 보도’라고 악평을 퍼부었던 미국의 이라크 침공 관련 보도는, 이처럼 미국을 비롯한 그 청중들에게 전쟁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전달해주고 있었다. 이라크 침공 당시의 전쟁보도가 현란한 이미지와 사운드로 사람들에게 생생함을 전달해 주었을 지는 몰라도, 전쟁의 장기적인 결과에 대한 심도 깊은 시각은 제공해주지 못하였다. 그 원인에 대해 Martin은 ‘각 언론사들이 명목상으로는 이와 같은 보도가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와 같은 심층 보도가 언론사들이 원하는 만큼의 수익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Martin 2003). 그렇다면 상업적 미디어가 전쟁을 통해 얻은 경제적 이해득실은 무엇인가? 대차대조표상 이들 미디어들은 이라크 침공으로 인하여 오히려 손해를 입었다. Variety지 4월 둘째 주 기사에 의하면, CNN, MSNBC, Fox News등 전쟁 보도를 주도하였던 방송사들은 전쟁 첫 주 동안 100만 달러 정도의 손해를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종군기자들의 동시다발적 보도는 기자, 앵커, 심지어는 장군들까지 스타로 키웠다. 뿐만 아니라, 전쟁 보도가 있었던 3주 동안의 케이블 방송국의 시청률은 급격하게 증대하여, 즉각적인 돈으로 환산되지 않은 브랜드 가치는 급격하게 상승하였다. 바그다드 초기 공습이 시작되었을 때, CNN의 한 종군기자가 뉴욕의 앵커에게 했던 말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사건인 전쟁이 미디어에 가져다 준 선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 미디어들이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시청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아주 매력적인 사건”이 있습니다. 제가 머무르고 있는 소대의 군인들이 ‘후세인에 대한 처형’에 대해서 다른 어떠한 미디어가 아니라 CNN에서 처음 들었다고 합니다“ <The year in TV, America, pg 18> 이 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글로벌 미디어에 있어서 전쟁이란, 시청자들에게 ‘매력적인 것-CNN의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창구로, CNN이 그들의 상품성을 홍보할 수 있는 창구로 기능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이라크 지역에서 벌어진 갈등은 해결되지도 않았고, 이라크 군의 저항이 끝나지도 않았으며 미국과 영국의 연합군이 철수하지도 않았지만, 이들 미디어들은 더 이상 사막의 풍경에 집중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들 미디어가 스포츠 중계와 드라마 방송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점은 이들에게 전쟁이 무엇이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쟁 속에 사라진 가치와 비극 이라크 침공을 전후한 오보의 속출, 보도 관점의 문제와 탐사보도(investigative reporting)의 실종은 국내외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 미․영 연합군의 이라크 침공의 가장 중요한 근거였던 대량살상무기 보유와 관련된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이라크 침공이 발생하기 직전 부시가 관련 자료로 지적하였던 IAEA 보고서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전쟁 직전 미국의 언론사와 기자들은 부시의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전쟁의 근거자료로 활용했던 IAEA보고서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내 굴지의 언론사 기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외신부의 전반적인 축소에 따라 정부에 대한 적절한 비판을 할 수 없는 조건, 그리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매국적인 행동으로 간주토록 만들었던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언론사들은 사회의 공론을 형성하는 데 제대로 된 기능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언론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한다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정신은 사라졌으며 고통 받는 전쟁의 참상과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돈벌이와 자국의 이익에 눈먼 정부와 상업적 미디어의 합작품인 더러운 이미지와 글들이 오늘도 전쟁을 하나의 구경거리로 만들어간다. 또한 국가의 정보통제와 전지구적인 전쟁담론을 정당화하고 있다. PSSP <참고문헌> Gilboa, E.(2002), Global Communication and Foreign Policy, Journal of Communication Vol. 52, Issue 4, Sage Publication Rubin, P.(2003), CNN Effect:The myth of news, foreign policy and intervention, Routledge, London and New York. Magder, T.(2003), Watching what we say: Global communication in a time of fear, Tussu, D. K & Freedman,D. eds, War and Media, Sage Publication 2003. Martin, J. The year in TV, America, New York: June 9-June16 vol 188 iss 19 pg 18 Hanley, D.C.(2003), Two Wars in Iraq: One for U.S. audience, the other for the arabic speaking world. The Washington Report of Middle East Affairs, Washington: May, 2003. Vol.22, Iss.4;pg 6 Smith,T(2003), Hard Lesson, Columbia Journalism Review, New York: May/Jun 2003. vol 42, Iss 1; pg 26.
지난 7월 7일, 미국은 '이라크 과도통치기구'를 2주 내에 출범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연일 지속되는 이라크 내 게릴라식 무장공격과 사회기반시설의 붕괴, 전기와 수도, 식량의 부족 등 이라크 전후 재건이 직면한 곤경은 현재 미국에게 만만치 않은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부시행정부와 신보수주의자들의 강경 노선이 미국 내에서 도덕적 정당성을 잃었다는 의미를 넘어, 9․11이후 反테러전쟁 속에서 미헤게모니의 위기가 직면한 또 다른 현실을 시사한다. 특히 이라크 재건 과정에서 드러나는 미국의 '무능력'은 세계적 반전운동에게 중요한 정치적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궁지에 몰린 미국 지난 5월 1일 부시가 종전을 선언한 지 석 달이 지났다. 그러나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이하 WMD)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미국 국민의 50%이상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 근거가 거짓이라고 믿는다는 여론조사가 발표되고 있다. 7월 6일, 뉴욕타임즈에는 부시행정부의 WMD 정보조작 의혹을 제기하는 조지프 윌슨 前 가봉 미대사의 글이 실렸고, 며칠 후 백악관은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또 얼마 후,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방장관은 이라크의 WMD 보유를 입증할 새로운 결정적 단서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군사공격을 감행했다고 시인했다. 이라크가 니제르에서 우라늄을 구입하려 했다는 부시대통령의 국정연설이 거짓정보에 기인했다는 것, 그리고 이라크 침공의 유일한 근거였던 WMD의 실체가 결국 거짓이었음이 만천하에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예상대로 이 사건의 파장은 미국 내에서든 전세계 어디에서든 일파만파로 번져가고 있다. 이라크전의 조기 승전으로 재선을 확신하고 있었던 부시행정부에게 이는 종전직후에 비해 절반으로 급락한 지지율과 함께 치명적인 악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이 처한 곤란함은 정보조작 의혹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 점령군에 대한 저항을 촉구하는 후세인의 육성 테입이 발견되면서 후세인의 생존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후세인에 대한 현상금은 종전의 20만 달러(약 2억4000만원)에서 100배 이상 껑충 뛰어올라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현상금과 같은 액수가 되었지만 후세인의 종적은 게릴라 무장봉기의 종적으로만 추적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종전 후 이라크 민중의 게릴라식 무장봉기에 의해 사망한 미군의 수는 무려 70명에 육박한다(이는 공식 교전 당시 발생한 미군 측 발표 사망자 수 130여명에 비한다면 매우 놀라운 수치다). 미국의 군정통치에 저항하고 있는 이라크 내의 이 세력은 최근 거의 매일 하루에 2-3명의 미․영군 사상자를 내고 있으며 공격의 강도 역시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송유관과 변전시설 등 사회기반시설이 폭파되고 있으며, 이유 없는 정전사태의 빈도도 늘고 있다. 이라크 전후 복구를 총책임지고 있는 폴 브레머 이라크 최고 행정관은 현재 주둔해있는 15만 8천명의 미군주도 병력만으로 이러한 저항을 감당하기 어렵다며 병력 증파를 요청했고, 부시행정부는 이러한 어려움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며 70여 개 국에 이라크 평화유지군활동을 요청하고 있으나 이것으로 이라크의 현재상황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9월까지는 이라크 현지인들도 견디기 어렵다는 혹서(酷暑)가 계속되고, 식수와 전력, 통신 등 기초 생활기반이 마비된 이라크에서 군병력의 장기주둔이 힘들다는 영국의 하소연과 함께 미국의 전후 재건사업은 거듭 난관에 부딪치고 있다. 약탈과 무질서로 얼룩진 미국의 전후구상 미국의 이라크 전후 구상은 아직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는 비밀에 부쳐져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부재했던 것이다. 다만 미국이 전후 유일하게 밝히고 있는 계획은 석유산업 재가동 프로그램뿐이다. 이라크 재건을 위한 비용은 올해만 2백 30억 달러(약 27조 6천억 원)가 소모되고 이후 완전한 복구를 위해서는 매해 150억 달러가 소모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이 엄청난 비용을 석유를 팔아 충당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라크가 석유수출로 얻을 수 있는 수입은 고작 년 간 140-160억 달러정도이고 2010년까지 기존의 생산량에 도달하려면 여러 해 동안 200억 달러를 투자해야 한다. 또한 기존 시설의 운영에도 연간 30억 달러가 사용되기 때문에 지금 석유수출로 이라크 재건비용을 충당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미국은 자금조달을 위해 이라크석유 민영화를 조속히 추진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지난 4월, 이미 미국무부는 '석유․에너지 워킹그룹'을 결성하여 전후이라크 석유정책을 여러 차례 논의하였다. 이 워킹그룹의 참가자는 극비에 붙여졌지만 전(前) 이라크 석유장관인 파드힐 찰라비를 비롯, 반후세인 지도자들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이라크 석유의 민영화와 동시에 석유회사가 비용을 투자해서 이익을 배분하는 생산물 분배협정 방식으로 외국투자를 유치하는 방안을 도출, 이를 전후 이라크 과도정부에 건의하는 것을 합의했다고 한다. '생산물분배협정(PSAs) 적용'이란 유정이 국유화된 산유국에서 유정을 개발하는 비용을 석유회사가 부담한 후 이익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유정의 소유권은 그대로 산유국이 가진다. 이런 방식은 국가 통제가 심한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에 비할 때 석유회사들에는 매우 좋은 조건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구상이 순탄할 것인가는 별개의 문제다. 세계석유시장의 40%를 차지하는 OPEC과 침략 전 이라크에 유정 개발 사업권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 프랑스, 중국 등의 반발이 거세기 때문이다. 이렇듯 현재 미국은 무리한 이라크 석유산업 장악 프로젝트 이외에, 13년 동안 경제제재로 마비된 이라크의 경제재건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이라크 경제재건을 통해 2013년까지 미․중동자유무역지대(MEFTA)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다(6․23 요르단세계경제포럼). 이는 중동 내 모든 국가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를 맺고 이를 통해 중동과 북미를 연결하는 단일지역합의체를 구성한다는 계획이다. 이 장미빛 구상의 실현은 이라크의 성공적인 재건여부에 달려있는데, "복구사업 독점-과도정부 인선주도-기간산업 민영화-중동 시장 개척-자유무역지대화"의 시나리오가 예정되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는 이라크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미금융계의 이라크 진출을 본격화하는 것으로 우선 실행되고 있다. 미국은 '경제의 중심을 국영기업부문에서 민간기업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상정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금융 시스템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연일 발표하고 있다. 미 국제개발처(USAID)에서는 월가의 JP 모건, 시티그룹과 뱅크 오브 아메리카의 이라크 진출을 서두르고 있으며 무엇보다 석유수출의 정상화를 통한 재건비용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내 주요 국영기업 100여 개를 내년까지 민영화 할 계획이다. 실제로 지금 이라크는 통제 불가능한 자유무역지대로 급변하고 있다. 미군정은 수입자유화를 위해 수입관세를 6개월 동안 면제하고 이라크 중앙은행과 민간 금융기관들이 자금을 모아 '무역보증기금'을 설치, 이를 통해 외국자본유치의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이 여파로 낙후된 이라크 국영기업은 모두 붕괴하고 있으며, 국내 상권이 소멸되고 대규모 실업사태가 만성화되어 가고 있다. 결국 국민의 50%가 실업상태인 이라크 경제와 서민생활의 안정을 위한 미국의 조치는 전무하며 그 중심에는 거대 석유자본과 금융네트워크의 이익만이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4000억 달러에 육박하는 금융채무의 문제이다. 이는 채권자들의 이익이 고려되는 방향으로 사회구조조정이 진행될 것이며 이는 곧 이라크 민중의 고혈을 착취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라크의 저항 이에 따라 미군정을 반대하는 이라크 내의 반미감정이 점차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이 행동들은 너무도 다양하고 분열적이어서 아직 단일한 정치적 요구와 전망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미 점령군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과 핵심시설을 폭파시키는 게릴라식 무장봉기인데, 이는 조직적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산발적인 흐름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흐름은 처음에는 이라크 중부에서 사담 후세인의 페다인 민병대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현재는 '미국 점령군을 쫓아내기 위한 귀환'이라는 이름이 붙은 반미저항조직에 의해 전국적으로 구축되고 있다. 이 조직은 최초에는 후세인의 수니파 후원세력이었으나 미국의 침략과정에서 자금과 무기, 교통수단, 수신장치, 정보제공자를 갖춘 이라크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결성되었으며 수니파 밀집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한편 이는 후세인을 추종하는 시리아 사우디아라바아 예멘 알제리 체첸 출신의 용병들을 합류시키고 있는데, 이로써 이라크 내의 저항은 범이슬람권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장공격과 다른 흐름으로 이슬람의 다수 종파인 시아파는 정기 주중기도회를 집회형식으로 전환하여 반미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는 주로 이라크 남부의 나자프(Najaf)와 카발라(Karbala)와 같은 사원도시에서 진행되고 있다. 종전 이후 망명했던 반체제 종교지도자들이 속속 귀향, 각각 과도정부 건설 과정에서 주도권 확보를 위해 서두르고 있다. 이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생존의 나락에 몰려있는 이라크 국민의 불만은 종교적 감정과 반미의식이 혼합되어 고조되고 있다. 물론 미국은 전후 통치를 위해 장기간에 걸쳐 이라크 종교․정치세력의 포섭을 시도해왔고, 그 결과로 1992년 이라크민족회의(Iraqi National Congress, INC)가 설립되기도 했다. 또 미국은 이라크 내 중산층을 포괄하고 있는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민주당(KDP)과 쿠르드애국동맹(PUK)을 친미세력으로 규합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약 20년 동안 고착화된 이라크 민족주의의 실체와 그것의 근원인 이슬람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라크 국민의 60%가 신봉하고 있는 이슬람 시아파의 존재와 나자프와 카발라와 같은 사원도시가 가지는 상징은 이라크 내에서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기반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정부 설립을 위한 이슬람 종교지도자 회의에 이슬람 시아파 종교세력은 일제히 불참했고, 이라크이슬람혁명최고평의회(SCIRI)는 "이라크는 이라크인의 과도정부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미국의 개입 없는 이라크 민중의 자주적인 정권수립'은 이라크 내 다양한 이슬람 종파들의 최소한의 합의지점이 되고 있다. 이들은 과도정부 수립에서 미국을 배제할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으며 "미국반대! 후세인반대!"를 기치로 가두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한편 시아파는 미국 군정 주도의 이라크 새 헌법제정 계획에 크게 반발하고 있으며, 이 입장을 이라크 내 최고 종교지도자인 알 시스타니의 헌법제정에 반대하는 율법명령(fatwa)발표로 대체하였다. 미국은 조기 총선 시 이들의 집권을 염려하고 있으며, 무력으로 총선을 연기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지난 7월 7일, 갑자기 서둘러 '과도통치기구'를 2주 내에 출범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폴 브레머 최고행정관이 발표한 '실질적인 행정권'을 갖는 '과도통치위원회' 구상은 당초 미 군정당국에 대한 자문역으로 엄격히 제한하려던 기존의 위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라크 내에서 확산되는 반미감정을 의식하고, 이슬람 종교세력을 적극적으로 순치 해야만 하는 미국의 다급한 사정이 엿보이는 조치이다. 또한 미국은 이에 대한 해결책을 후세인의 계보를 잇는 바아쓰당의 복권에 의존하는 등, 역설적인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라크 민중의 저항은 쉽사리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13년 동안의 경제제재에 이은 이라크 전쟁, 그리고 뒤이은 경제재건프로그램은 더 이상 짜낼 것이 없는 이라크 민중의 고혈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이라크 점령․지배는 범아랍 민족공동체를 위협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 종교를 경유한 새로운 정치적 투쟁이 아래로부터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봉착한 새로운 정치적 위험, 반전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러한 전후 통치의 난관을 반영하듯, 미국 외교관계협의회(CFR) 이라크 특별팀은 최근 미국이 이라크 재건 사업의 어려움을 시인하고 국제사회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더불어 현재 이라크 전후 재건과정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 이는 이후 중동지역에 대한 미국의 개입의 명분과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약화시킨다는 심각한 우려를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이라크 전후 재건 프로젝트는 현재 돌이킬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해 있다. 애초에 미국의 이라크 침공 계획은 '사담 후세인'이라는 위험 요소를 미연에 제거한다는 목표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국가 건설'은 부차적인 고려 요소였다. 이라크 내의 종족․종교적 복잡성을 고려하지 못한 결과, 미국의 전후 과도 정부 구상은 실질적인 정치적 공동체 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이는 ‘이라크 민중의 해방'이라는 '정치적 목적(goal)'과 '후세인의 제거'라는 '군사적 표적(target)'이 괴리되고 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정당한 전쟁'이라는 미국의 명분이 모순이었음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또 단기 승전에도 미국을 위시로 한 세계 경제의 회복은 불투명하다. 이라크 재건 사업을 통한 부의 창출도 일부 초국적 자본에 돌아갈지언정 그 자체로 미국 재정 수입 증가로 귀결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한 악순환은 부시의 정치적 위기로 귀결되고 있다. 이미 확인한 바대로 미국의 이라크 전후 재건 프로젝트는 이라크 국가의 재건과정이 될 수 없다. 애초부터 미국의 反테러전쟁은 명분 없는 ‘나쁜 전쟁’ 그 자체였으며 새로운 전쟁을 통해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를 지연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패배가 예정된 전쟁이다. 세계적인 자본의 위기와 대안적인 헤게모니의 부재는 강력한 군사적 우위와 명분 없는 전쟁으로 복원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라크 전후 상황을 통해 바라본 미국의 무능함은 오히려 세계민중운동이 더욱 적극적으로 반세계화-반전 투쟁을 벌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결국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전후 복구과정의 무모함은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지역의 정치, 경제적 위기를 더욱 증대시키는 것으로 결과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더욱 용이해진 금융자본의 유입여부와 신자유주의 개혁 프로그램이라는 새로운 변수는 중동지역의 정치, 경제적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이라크 민중의 ‘해방’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애초부터 모순적이었던 ‘이라크 해방작전’의 기만성을 확인하기 위해, 미국의 WMD에 대한 정보 조작이나, 침공과정에서의 국제법 위반의 문제를 굳이 폭로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날로 확산되고 있는 이라크 민중의 저항을 어떤 관점으로 마주할 것인가? 그리고 침공이후 ‘이라크 해방’을 위한 진정한 해답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 최근 목도하게 되는 이라크의 상황에서 우리는 엄혹한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민중의 힘이 이라크에서도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폭력적이고 반인민적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을 뿐이다. 우리는 현 시기 제국주의의 또 다른 방식의 폭력과 배제의 양태를 인식하고, 이 지역의 저항운동에 대한 모색과 새로운 연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