뭄바이에 모인 다양한 사회운동들은 그 광범위한 운동의 범위만큼 정세에 대한 인식도 다양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한가지 명확한 공동의 인식지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현실의 모든 사회운동들은 세계적인 전쟁과 폭력의 가시화와 이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의 군사패권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을 벌여내야 한다는 인식이다. 사회포럼기간 기간동안 ‘국제반전총회(the General Assembly of the Global Anti-War Movement)가 진행되었다. 행사 마지막 날 세계 사회운동의 호소문을 통해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점령반대! 전쟁반대를 위한 국제공동행동의 날에 대한 공동의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이 글에서는 국제반전총회로 결집한 반전운동들의 국제적 연대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현 시기 우리가 다시금 상기해야 할 반전운동의 과제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4차 세계사회포럼과 국제반전총회의 배경 작년 브라질에서 개최된 3차 세계사회포럼은 2월 15일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국제공동행동의 날을 결의한바 있다. 2003년 2월 15일 수백 개의 도시에서 천 오백만 명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반전시위를 벌여낸 것을 시작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 중단과 각 국 정부의 이라크 파병반대를 위한 투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이는 반전 반세계화를 중심으로 한 각 국 사회운동에 커다란 활력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한 해 동안의 반전운동은 4회 세계사회포럼 내에서 ‘전쟁반대, 미국의 군사주의 반대’라는 하나의 명확한 공동의 인식지반을 확보하는 성과를 내었다. 전 세계의 반전운동이 ‘국제반전총회’라는 체계에서 서로의 활동을 총화하고 상호 간의 운동을 보다 상승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2003년 5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채택된 ‘자카르타 평화선언’이 있다. 이 선언은 당시 전 세계 반전운동의 시급한 대응으로서 미?영 연합군 즉각 철수와 미국의 중동지역 패권장악 반대하며 추진 중인 중동자유무역지대 설립을 막아내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G8정상회담(5월), WTO각료회의(칸쿤), 지역사회포럼, WSF 등에서의 공동행동을 계기로 4회 WSF에서 세계적 평화를 위한 네트워크(Solidarity Network for Global Peace)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4회 세계사회포럼에서의 국제반전총회는 이라크 전쟁을 통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작동되는 파괴와 폭력의 방식이 전쟁과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인식아래, 역사적으로 분리되어온 평화운동과 반세계화 운동의 접합점을 찾아야 한다는 입장을 세워갔다. 전통적인 평화운동세력들은 조직적 연결망을 확보하고, 반세계화 운동은 전쟁과 폭력의 원인에 대한 분석의 틀로 제시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세계적 정의와 평화를 위한 새로운 운동의 창출을 목표로 한다A Report of the General Assembly of the Global Anti-War Movement -Background- . 국제반전총회 워킹그룹(Working Group)Anti-War Coalition, South Africa, Asian Peace Alliance, ATTAC Japan,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UK, Coalition for Nuclear Disarmament and Peace - India, Focus on the Global South Global Exchange/United for Peace and Justice US, Hemispheric Social Alliance, International Civil Campaign for the Protection of the Palestinian People (CCIPPP), Italian Movements of the European Social Forum, Peace Boat, Japan, Red Mexicana de Acci frente al Libre Comercio (RMALC)/ Serarpaz, Miguel Alvarez Gandara, Social Movements Network, Stop the War Coaliton - Greece/UK 은 2003년 9월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사회포럼에서 국제반전총회가 시급히 필요하다는 내용의 선언을 사회포럼 조직위 100여 개의 연합 및 단체의 이름으로 서명을 받아냈다. 이들은 이라크 전쟁 전후에 플로랑스 카이로, 치아파스, 런던, 자카르타, 제노아 등에서 개최된 국제반전운동 전략회의들은 재정적 지역적 한계로 인한 조직화의 협소함, 상황의 급박함에 비해 효과가 미약했다는 평가를 제시하며 반전운동이 반세계화 운동과의 접촉면을 최대한 넓힐 수 있도록 사회포럼이라는 공간에서의 반전총회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우리의 운동은 제국에 대한 전쟁아론다티 로이, 4회 세계사회포럼 개막식 연설 중에서 ” 무엇으로 어떻게 싸우고 있는가? 전쟁과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실로 많은 운동들이 사회포럼에서 소개되고 교류되었다. 시공간적 한계로 인해 그 다양한 운동들의 중요한 정세적 맥락들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국제반전총회에서 진행된 논의의 틀거리들과 올 한 해 공동의 계획으로 제기되고 있는 몇 가지 운동의 흐름에 대해 관찰할 수 있었는데 이들 각각에 대한 어느 정도의 평가의 관점이 필요하리라 판단한다. 1월 18일 오전부터 저녁까지 진행된 반전전략회의(Strategy Session)는 ‘세계화와 전쟁’에 대한 통합적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의 배경에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주도하는 IMF, WB, WTO 그리고 UN이라는 또 다른 제국적 권력이 뒷받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라크 점령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미국의 정치적 곤란함으로 ‘제국은 위기’에 처해있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전쟁은 북한, 이란, 시리아를 겨냥하며 계속될 것이라는 점 역시 확인하였다. 연사들의 발언요지는 이 위축된 제국에 대항해 인민들의 투쟁으로 새로운 권력을 창출해야 하며, 바로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과 전통적인 반전평화운동의 결합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2004년 홍콩에서의 WTO각료회의 저지투쟁은 반전투쟁의 또 다른 이슈라는 점을 강조하며 반전 반세계화 운동의 결합의 계획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세계화와 전쟁에 대한 통합적인 인식지반을 형성하기 위한 활동가들의 노력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하게 사고해야 하는 것은 단지 반세계화 운동으로 표상되고 있는 각종 국제기구에 대한 반대운동에 대한 연대 그 자체만으로 세계화와 전쟁의 긴밀한 연관성이 해명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반전운동은 세계화에 의해 불평등하고 빈곤해진 전 세계 다수 인민의 삶의 상태가 극단적인 폭력전쟁의 연속상태와 결코 다르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편 몇 가지의 운동의 흐름이 있었는데, 미군기지반대운동, 팔레스타인의 자주권을 위한 행동들, 이라크 점령 감시 센타 설립운동, 각 국가와 지역의 반핵과 군사적 무장해제 운동, 미국의 애국법 및 각 국의 테러방지법에 맞선 시민사회의 민주적 권리침해에 맞서는 행동들, 이라크 전쟁범죄 국제법정운동, 부시낙선운동 등이 있었다. 각자의 운동들의 고유한 역사성을 존중하면서도 반전 반세계화 라는 공동의 인식을 통해 또다른 운동으로 상호 확장, 전화하는 것이 세계사회포럼 공간이 가진 유의미성이라면, 현재의 반전평화운동의 다양한 흐름들이 자신의 운동들을 그 자체의 조직적 강화 확장라는 틀거리에 가두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해온 ‘평화운동’의 주요이슈들을 어떻게 정세적으로 재구성할 것인가?이는 현시기 ‘평화’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빈곤과 불평등으로 점철된 민중의 삶이 군사적 폭력의 지속상태라는 점을 인식하며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운동이 또 다른 이름의 평화운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 “유럽과 미국 등의 시민사회의 개념과 위상은 어떻게 전화되어야 하는가?” “민족과 국경을 넘어서는 국제적인 반전평화 운동이 시급히 요구된다면 그 새로운 운동의 이념과 가치판단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그 운동의 흐름을 살펴보자 -미군기지 반대운동 국제회의(International Anti-US Bases Conference) 1월 17일과 20일에는 미군기지반대운동 국제회의가 진행되었다. 총 100개의 나라에 분포되어 있고 계속 확장 중인 미군기지의 현황을 파악하였고 각각의 반기지 운동의 사례들을 교류하였다. 두 차례 회의의 결론으로는 약 25개의 국가 주축이 되어 반 기지운동에 대한 국제네트워크를 결성한 것이었고, 이는 국제반전총회에서 중요한 투쟁의 과제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 네트워크는 첫번째 행동 계획까지 제안하는데 아프리카 모리셔스(Mauritius)의 디에고 가르시아(Diego Garcia)기지를 찾아가는 투쟁이다Lindsey Collen, LALIT, Diego Garcia . 생태환경, 미군범죄, 농토의 문제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반기지 운동이 반전운동의 주요한 과제로 확장하고자 하는 의미는 평화운동으로서의 반 기지운동의 관점을 정세적으로 재조명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냉전이후 미국의 군사전략은 지속적으로 변화하여왔고 9.11 이후 출현하고 있는 새로운 전쟁(New War)은 기존의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와 무기체계 전반에 대한 변화를 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들은 각 대륙과 국가들에 주둔해있는 미군기지의 위상의 변화와 미군재배치의 움직임 등을 통해서 각 지역에서의 특수한 미국의 군사패권전략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활발하게 교류되고 있지 못했던 이러한 정보들을 파악하고,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에 대한 인식을 확보하는 과정은 단지 반기지 운동의 활성화뿐만이 아니라 각 국의, 각 대륙의 반전운동의 과제와 역할을 보다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연대운동이 될 것이다. 일례로 오늘날 한-미, 미-일 동맹의 현대화와 함께 진행되고 있는 주한미군 재배치와 남한의 군사적 역할의 확대, 일본의 보통국가화 등의 움직임은 단순히 북한에 대한 위협의 증대이거나 일본의 군국주의화라는 문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한?미?일 동맹의 현대화를 전제로 한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군사적 신축전략이 구체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것을 의미하며, ‘새로운 전쟁’에 입각한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전략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현재 남한에서 추진중인 주한미군기지 이전의 문제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반전운동의 방향에 중요한 쟁점을 던지고 있다. 동아시아의 미군기지 문제가 단지 해당국가만의 문제가 될 수 없는 현실을 보았을 때에도 이 운동의 국제적인 시각이 요구된다. 반기지 운동은 새로운 반전운동과 결합하여 그 목표와 역할을 재구성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라크 점령감시센타(Occupation Watch Center) 미국의 이라크 점령 행위를 제어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이다. 점령과정에 대한 상시적인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medea@globalexchange.org 주도하고 있는 대표적 단체는 Bridge to Baghdad, Italian Movements of the ESF 점령 감시센타는 자카르타 평화선언의 결의사항이기도 하였다. 반전운동 단체들은 이라크 상황의 악화와 장기적인 점령의 가능성을 우려하며 긴급하게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군사적 통치과정에서 벌어지는 이라크 국민의 민주적 권리의 파괴, 군사범죄에 대한 사례의 축적작업과 함께 전쟁이후 이라크에 상주하고 있는 외국회사들이 전시에 챙긴 부당 이득에 대한 고발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점령에 반대하는 이라크 저항세력의 운동을 반전 반세계화 운동과의 연대를 모색하고자 한다. 현재 더욱 악화되고 있는 이라크 내의 종족, 인종적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으로 연대를 만들어 가야 하는가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이라크의 반전활동가 아미르 레카(Amir Reka)Condi- Iraqi National Democratic Coalition, Iraq 은 “어렵고 부단한 과정이지만 이라크 저항세력은 부당한 점령에 대항하여 통합적인 대응을 시도하고 있다”며 “이라크가 제국의 권력이 형성되는 곳이 될지, 권력을 무너뜨리는 곳이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러며 반전, 반세계화 운동의 연대를 호소하였다. -팔레스타인의 자주권을 옹호하기 위한 국제적 행동들 팔레스타인 시민사절단International Civilian Campaign for the Protection of the Palestinian People, CCIPPP 과 이라크 순례단(Caravans to Iraq) 국제반전총회 최종 선언문에는 이라크 점령반대를 위한 3.20결의와 함께 이스라엘의 인종분리 정책에 저항하기 위한 3월 30일 팔레스타인 민중의 투쟁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명시되어 있다. 비아캄페시나에서 팔레스타인에 파견된 폴 니콜슨(Paul Nicholson)은 팔레스타인 농민의 삶의 파탄의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과 함께 새로운 차원의 연대를 모색하고 있음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3월 30일 유럽인과 미국인 등으로 구성된 팔레스타인 학살의 문제를 국제적 시민운동으로 만들어 가기 위한 시민사절단에 동참할 것과 함께 인도정부가 이스라엘과 긴밀한 연계가 있는 만큼 인도 민중운동이 정부를 압박하는 운동을 활발히 만들 것을 호소하였다. 한편 이라크 순례단은 “전쟁과 학살이 없는 중동은 가능하다”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유럽의 시민사회가 주축이 되어 3월 20일 경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쿠르디스탄(Kurdistan)과 터키, 이란을 차례로 순례하는 운동을 벌일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운동은 1)각 국가 시민사회와 전쟁에 반대한 투쟁에 연대하고 해당 국민들이 민주주의와 정의의 자기결정권을 위한 투쟁을 독려한다는 점 2)우리의 운동이 국경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3)분쟁의 내부가 분쟁 밖의 운동들과 함께 반전투쟁에 결합할 수 있어야 함 Alessandra Mecozzi, FIOM, Italian Movements of the ESF 을 목표하고 있다. 내전과 분쟁의 문제는 단지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미, 서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의 상황 역시 심각하다. 이 모든 상황의 한가지 공통점은 미국의 지역패권전략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갈등의 악화는 민중의 정치에 대한 사고를 박탈하고 폭력에 대한 대항폭력은 악순환 되고 있다. 분쟁국가 인민의 평화운동과 그 외부의 반전운동이 결합할 수 있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3?20 국제반전공동행동의 의미 1999년 시애틀에서 시작된 폭발적인 반 세계화 국제공동투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전세계적인 대중운동으로 확장, 강화되었다. 그러나 9?11을 계기로 미국은 범세계적 차원의 ‘공안정국’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냈다. 9?11 직후 미국은 도하개발 아젠다 협상을 강제하였고 반세계화 운동을 테러리즘을 빌미로 억압하였다. 미국 내 애국자법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전세계 국가들에게 테러방지법을 제정할 것을 강제하는 등 시민감시체제를 만들어 저항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작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후 전 세계적으로 고조되었던 반전운동은 이러한 분위기에 돌파구를 만들어내었다. 미국의 일방적인 “부시 독트린”과 군사패권주의의 강화에 대한 반전여론을 높여가고 실제로 수천만의 반전투쟁이 전세계 곳곳에서 진행되는 가운데 반전 반세계화 운동을 중심으로 한 통합적인 사회운동의 공간이 형성될 수 있었다. 많은 반전운동 단체들은 작년 9월부터 미국의 침공이 개시되었던 3월 20일, 미국의 이라크 점령반대, 전쟁반대를 위한 강력한 국제공동행동을 조직할 것을 제안해왔다. 2003년 각 국가와 대륙에서의 다양한 사안의 반전투쟁의 흐름, 그리고 국제반전총회를 통해 제기된 세계적 차원의 반전운동의 전략에 대한 건강한 토론의 성과는 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반세계화 운동과 반전운동의 3.20 공동투쟁의 결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보다 강고해진 세계적 규모의 반전, 반세계화 투쟁대오는 2004년 전선의 강화와 함께 새로운 통합적인 사회운동을 열어갈 것이다. 우리에게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군사적 무장화’라는 현시기 미국과 지배계급의 통합적 전략에 맞서는 새로운 사회운동의 맹아를 발견하고 만들어 가야할 임무가 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반전운동과 반세계화 운동이 어느 하나로 포괄되는 방식이 아니라, 반전이라는 단일-이슈로 형성된 운동을 정세적으로 개조하여 다양한 운동들과 결합하여 상호 강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3월 20일 세계 곳곳에서 외치는 우리의 함성이 실제로 전쟁과 학살을 중단시키고, 빈곤과 폭력으로 점철된 다수 인민의 삶의 권리를 세계화하는, 실로 위력적인 목소리가 되기 위해서 지금 ‘반전평화’의 의미가 분명히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PSSP
2004년 1월, 인도 뭄바이엔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기 위해 10만 여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직 공식적인 수치는 집계되지 않았지만, 여성들도 이번 세계사회포럼에 대거 참가했다. 그만큼 여성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와 이슈의 워크샵들이 조직되었다. 4차 세계사회포럼은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운동이 커다란 두 줄기였고, 특히 전쟁과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흐름이 두드러졌다. 이는 여성들이 조직한 그리고 인도 조직위원회에서 여성 관련 문제에 할당한 패널에서도 드러나는 흐름이었다. 세계사회포럼은 형식과 규모를 기준으로 행사를 컨퍼런스, 패널, 워크샵, 세미나, 증언으로 나눈다. 여기서는 모두 '워크샵'으로 표현하기로 한다. 사회진보연대는 '세계화와 여성', '여성에 대한 전쟁, 전쟁에 저항하는 여성', '전쟁에 대한 국제여성법정', '정치적 조직들과 급진 민주주의', '세계여성행진 워크샵' 등에 참가하였다. 참가한 워크샵과 세계사회포럼이란 공간에서 드러난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이곳에 모두 담아내지는 못할 듯 하다. 여기서는 '여성에 대한 전쟁, 전쟁에 저항하는 여성'에 나온 전쟁에 관한 여성들의 증언을 전한다. 그리고 세계사회포럼이 시작되기 전, 뭄바이에서는 여성국제회의가 있었는데, 그 틀이 '페미니스트 대화'라는 네트워크이다. 이에 대한 소개와 세계여성행진이 제안한 2005년 계획을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전쟁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목소리 - '여성에 대한 전쟁, 전쟁에 저항하는 여성' 여성에게 '전쟁'은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 군사적 행위를 넘어선다. 미국이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나타난 결과들은 여성들의 삶 자체를 전장(戰場)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가 반전과 반세계화 운동의 결합을 고민한다고 했을 때, 전쟁에 저항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전쟁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가?" 아프가니스탄의 사어 사하(Saher Saba)는 묻는다. 미국은 민중, 특히 여성을 탈레반에서 해방한다는 명목으로 아프간을 침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독재와 근본주의자들의 지배는 계속되고 오히려 전쟁으로 근본주의는 강화되고 있다고 한다. "여성은 아프간 전쟁의 첫 번째 피해자이고, 첫 번째 저항자입니다. 전쟁에 참가한 남성들은 전쟁 후유증으로 알콜중독자가 되어 아내와 딸을 때립니다. 우리는 25년 동안의 탈레반을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처음부터 탈레반을 지지해 왔던 것은 잊어선 안될 것입니다." 아프간에 새로운 헌법이 생겼다. 예전 헌법엔 여성은 기입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다. 새로운 헌법엔 여성이 분명히(!) 명시되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남성들의 반이다!'라고. 인도의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는 아프리카와 인도에서는 "평화는 전쟁!(Peace is War!)"이라고 말한다. 삶 자체가 전쟁이란 의미다. 인도에서 구조조정은 농촌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인도의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성이다. 땅이 남편의 소유라도, 여성들은 최소한 자신이 재배한 농작물에 대한 통제권을 가질 수 있었다. 농촌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남편들은 땅을 팔아 돈을 벌었다. 그러나 여성들에겐 땅에서 노동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농작물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긴 채, 땅을 팔아 돈을 가지고 있는 남편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세워진 공장에 일하는 노동자는 남자들로 채워졌다. 또한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은 인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인도에선 오랫동안 힌두교와 무슬림 사이의 분쟁(힌두교가 다수다.)이 있었다. 이라크 전쟁은 '무슬림은 나쁘고, 척결되어야 할 것'이란 생각을 남겼다. 우발적으로 진행되었던 전쟁은 공격의 목표와 방법이 분명해지는 방법으로 변화했다. 이제 힌두교들은 그날 밤 어느 무슬림 집을 공격할지 정해놓고, 여성들을 집단 강간한다. 정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이러한 사건들을 은폐하고 있다.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은 근본주의를 득세하게 했고, 이러한 '근본주의'의 문제는 4차 세계사회포럼의 중요한 주제이기도 했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아이렌 칸(Irene Khan)은 그녀를 통해 말하고자 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전했다. 그녀가 전한 증언은 끔찍한 것들이었고, 강간이 전쟁의 무기가 되고 있는 끔찍한 현실을 인식하게 해준다. 2003년 10월 콩고에서 아이렌 칸이 만난 여자는 교사였고 26살이었다. 콩고는 내전으로 현재 300만 명이 죽었다. 그녀는 남편과 잠자리를 갖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집단강간을 당했는데, 그녀의 10살 짜리 딸은 엄마가 에이즈에 걸렸을까봐 그녀에게 가까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무서워서 남편과 잘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방글라데시 한 여성이 아이렌 칸을 찾아왔다. 그 여성은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고 호소하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그녀는 강간을 당했고, 아버지는 딸을 강간한 남자한테 강제로 결혼시켰다. 결혼한 집에서 남편의 친구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했다. 그녀는 도망쳤지만, 다시 잡혀왔고, 이런 일이 반복되었다. 그녀는 결국 감옥에 가게 되었다. 경찰이 이런 상황에서 그녀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여성을 세상과 격리된 감옥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녀가 더욱 놀란 것은 감옥에 그런 여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건 죽음을 선택하는 일과 마찬가지라 했다. 아버지한테 가면, 집안 망신이라 맞아 죽을 것이고, 남편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증언들이 특수한 사례는 아니고 동남아시아 지역에선 더욱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그런지 이번 세계사회포럼에서는 인신매매에 관한 수많은 워크샵들이 조직되었다. 페미니스트 대화(Feminist Dialogues) 세계사회포럼이 열리기 전인 1월 14-15일에 뭄바이에서 국제여성회의가 있었다. 이 회의를 참가한 여성운동단체 네트워크의 이름이 '페미니스트 대화'이다. 자료를 보면, 이 회의는 남미여성운동연합체인 아르티쿨라시온 페미니스타 마르코수르(Articulacion Feminista Marcosur)란 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우리가 이 단체를 알게 된 것은 이들과 '반근본주의 캠페인'이 조직한 「정치적 조직들과 급진 민주주의」란 워크샵에 토론자로 참가했기 때문이다. 남미여성운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한 사회진보연대 여성활동가들은 이 워크샵을 이들에 대한 교류의 계기로 삼았다. 좀더 조사를 해봐야하겠지만, 토론회의 제목을 근거 삼아, 이들이 여성운동 조류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이라고 단정짓긴 어려울 것 같다. 우선 우리가 참가했던 워크샵에서 이들의 발제를 살펴보면, 주요한 내용은 현재의 이성애를 중심으로 조직된 사회모델을 비판하면서, 성적 차이를 인정하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섹슈얼리티와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권리가 새로운 사회, 민주주의를 쟁취하는데 있어 통합적으로 사고해야 할 것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이들의 생각은 페미니스트 대화 소책자의 '정치적 조직들(Politica Bodies)'란 글에서 드러난다. 이 글에선 불평등과 차별이 재생산되는 사회구조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분석과 정치적 투쟁의 영역으로 육체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통제를 고민한 페미니즘의 기여가 사회변혁에 대한 좀더 급진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을 이끌어냈다고 강조한다. 생산과 부의 축적, 억압과 성적 차별, 재생산 모델은 독점적인 사회적 삶의 영역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이러한 영역사이, 영역과 정치를 분리하는 것은 자본가와 가부장적 권력체계의 요구이다.), 오히려 그들은 특정한 사회구조의 구성 요소들이라 주장한다. '급진 민주주의는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삶 자체의 민주화에 집중해야 한다.'고 서술하면서, 시민권의 재출발은 재생산과 성적 권리의 새로운 권리를 제기하고, 투쟁하는 것, 그를 위한 새로운 상징의 창조가 필요함을 밝히고 있다. '페미니스트 대화'(이하 FD)란 네트워크를 잠깐 소개해보자. 이것은 이들의 팜플렛의 선언문에 잘 나와 있다. 우선 이들은 세계사회포럼이 지금까지 성장하는데 함께 한 세계여성행진과는 다른 여성운동네트워크이다. 대부분 세계여성행진 참가 조직이 아니고, 그래서 세계여성행진도 이들을 주목하면서 다른 여성운동 네트워크와 연합을 재검토하고 세계여성행진의 계획을 함께 토론하기 위해 국제위원회의 활동가들이 이번 뭄바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세계사회포럼의 헌장에 동의하고, 매해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해왔다. 특히 선거, 정치정당, 정부기관이 아닌 혼합 조직의 여성과 페미니스트 시민 사회조직에게 민주적인 공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FD는 반근본주의 캠페인을 지원하는 라틴아메리카 그룹의 좀더 큰 네트워크와 국제네트워크가 주도한 2003년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개최된 여성전략회의(Women's Strategy Meeting, 이하 WSM)의 후속이다. 그리고 2003년 세계사회포럼의 마지막날의 WSM의 평가는 2004년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FD의 활동(initiative)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목표는 페미니스트 조직, 진보적인 그룹과 운동들의 네트워크 사이의 대화이다. 이 대화는 세계 여성운동이 직면한 도전과 이슈 , 좀더 큰 사회운동 그리고 인권(성적권리, 재생산의 권리, 사회적 평등, 인민의 발전, 환경 그리고 경제정의를 포함하는)을 위해 활동하는 다른 지지 그룹과의 연관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들 중 가장 활동적인 그룹은 Articulacion Feminista Marcosur, DAWN(international), FEMNET, inform(스리랑카), Isis International(필리핀), 경제정의를 위한 여성국제연합(WICEJ) 그리고 인도의 자율적 여성 그룹의 국내 네트워크(NNAWG)이다. FD는 상호 변하고 배우는 참여적인 공간을 만들고자 하면서, 참가하는 개인과 그룹의 목소리가 그 자체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원리로 삼고 있다. 전문가들이나 소위 명망가를 통해 여성들의 입장이 대변되는 것에 비판적이다. 또한 이러한 방식이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하는 새로운 윤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 원리를 인용하는 것으로 마무리짓자. <페미니스트 대화 참가자들은 다음과 같은 정치적 이해와 원리의 구조 안에서 대화를 동의한다.> 1. 여성들은 균질적인 그룹이 아니라 복수성과 다층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다양한 억압을 경험한다. 그 억압은 가부장적이고 불평등한 사회 안의 다양한 위치에서 유래한다. 우리는 다양한 페미니즘과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부르려 하지 않는 그룹도 포함한 다양한 페미니스트 관점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2. 우리는 인간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경제구조를 거부한다. 우리는 이러한 경제모델에 비판적이지 않는 "발전" 또는 "젠더 주류화"에 대한 우리의 도전을 계속할 것이다. 3. 우리는 "선제공격"인 침략 전쟁과 외국 권력에 의한 지배에 반대한다. 우리는 소위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에 반대한다. 4. 우리는 어떤 계급, 인종, 종족, 종교적, 문화적 또는 성적 정체성을 단정 짓고 시민권의 배제적인 규정을 만들고 국가 안팎에서 "적들"을 목표 삼아 연대를 헤치는 민족주의적 정치적 태도에 저항한다. 5. 우리는 또한 비국가 행위자들(non-state actors)이 저지르는 모든 형태의 폭력도 거부한다. 6. 가부장제는 공적 그리고 사적 영역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영속시키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종교적 근본주의, 침략 전쟁의 힘에 의한 공격과 마찬가지로 가내폭력에서부터 공동체의 폭력은 여성운동에서 주요한 고민이다. 7. 우리는 여성의 인권을 채택한다. 그것은 시민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권리를 결합한다. 우리는 '권리는 폭넓은 국제적 확언을 필요하고 또한 각각의 공동체 안에서 얻어지고 개념화된다'고 인식하는 "보편주의"와 "상대주의"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을 거부한다. 8. 우리는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가부장적 권력에 의한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공격에 놀란다. 모든 종교에서 여성의 신체를 지배하고 규정하고 모독하고자 한 노력은 보수주의의 핵심이고 현재 전망을 조절하는 경제적 계획이다. 그리고 이는 통합적인 방법으로 도전되어야 한다. 9.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악화된, 여성의 권리와 비종교적 민주주의에 대한 위험한 공격으로서 종교적 근본주의를 본다. 많은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고 종종 인권 언어를 전유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여성의 인권과 경제적 정의를 위한 우리의 투쟁의 동맹자로 보지 않는다. 10. 우리는 섹슈얼리티 그리고 젠터/트렌스 젠터 정체성의 자기 정의를 믿는다. 11. 우리는 자기 조직과 운동에 대해 자기-비판적이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권력, 실천, 관계, 전략 그리고 정치에 관한 논쟁을 주장한다. 세계여성행진의 2005년 행동계획 -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창조하기 위한 집단적인 행동 4차에 이르는 세계사회포럼의 성장에 세계여성행진은 크게 기여해왔다. 또한 세계여성행진은 세계사회포럼이 페미니스트적 분석에 대한 자각을 일으키고, 여성이 원하는 사회변혁을 위한 새로운 동맹을 만들 기회를 제공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사회포럼이 열어놓은 공간을 배타적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개인들과 세력이 있고, '페미니즘은 여성의 관심이고,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의 관심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투쟁을 위계 짓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평가한다. 세계여성행진은 세계사회포럼 기간 중 작은 워크샵을 통해 2005년 행동계획을 제안했다. 핵심은 세계여성헌장(The Women's Global Charter for Humanity)을 작성하는 것이다. 작성과정과 헌장의 전파과정이 운동이다. 논쟁과 공동의 전망을 조직하기 위해서 세계여성행진은 2005년 3월 8일(세계여성의 날)과 2005년 10월 17일(세계빈곤철폐의 날)을 기점으로 공동행동을 제안하고 있다. 그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세계여성헌장의 전세계 릴레이'다. 헌장은 2004년 2월에 초안이 배포되고 논의를 거쳐 2004년 12월 르완다(아프리카)에서 개최되는 세계여성행진의 다섯 번째 회의에서 확정된다. 이렇게 마련된 헌장이 어떻게 전세계 행동으로 전파될 것인가이다. 우선 이 헌장은 2005년 3월 8일 모든 참가국에서 대중 집회로 발표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동시에 이 헌장과 세계지도를 그린 퀼트를 가지고 릴레이 행진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 릴레이는 브라질에서 시작되어, 아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중동, 유럽 그리고 2005년 10월 17일에 아프리카에서 끝나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다. 두 번째는 '빈곤과 폭력에 저항하는 24시간 동안의 국제여성연대 행동'이다. 릴레이 행진이 끝나는 10월 17일 각 국 시간 정오에 집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오세아니아를 시작으로 24시간 내내 집회가 진행되는 계획이다. 세계여성행진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과가 '빈곤의 여성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의 증가'이고 이에 대해 전세계 운동이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이것이 여성들의 행진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운동들의 행진이 되기 위해서는 헌장 작성의 정신을 각국의 운동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들은 요구의 목록보다는 세계원리선언을 창조하고자 하며, 이것이 세계사회변혁을 위한 힘으로 운동의 필수적인 본질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세계여성의 날은 여성들이 조직하는 다양하고 분리된 '행사'들에 머물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여성운동들과 다른 운동들의 교통과 논쟁과 공동행동의 계획들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투쟁 4차 세계사회포럼에서도 분명 전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목소리들이 넘쳐났다. 또한 세계사회포럼은 참가하는 단체들이 생각하는 세계사회포럼에 대한 특정한 전망에 따라 평가되고 있다. 세계사회포럼은 그 성장만큼 그 자체로 논쟁의 화두가 되고 있다. 언어의 장벽, 계급, 인종, 성적 차이, 문화적 차이들은 현실의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구조이면서 다양한 운동들이 교통하기 위해서, 공간으로서 세계사회포럼이 해결해가야 할 숙제이다. 인도 뭄바이의 네츠코 센터 역시도 지금의 세계와 동떨어지지 않는 현실이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는 이번 세계사회포럼 내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로 드러난 바 있다. 살펴본 페미니스트 대화와 세계여성행진은 모두 세계사회포럼의 헌장에 동의하면서, 그 헌장의 의미를 자신의 운동에서 실현, 확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들이 중요하다. 세계사회포럼의 전망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는 세계사회포럼이 지금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진정한 운동의 성장은 자기 혁신을 통해 각각의 운동이 보편성을 띠고, 그것이 만날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PSSP
* 최근 성매매를 둘러싼 논의에는 스스로를 성 노동자(Sex Worker)라고 호명하고 조직화하는 새로운 주체들이 참가하고 있다. 성매매나 성산업에 종사하는 성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권리를 요구하며 성 노동자 비범죄화나 합법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녀들이 자신의 인권을 위해 스스로 조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흐름의 긍정성을 가늠하며 주의 깊게 이 운동을 지켜보고자 한다. 2월 5일 오후 12시쯤 대만 공항에 도착. 주최단체인 일일춘 참가단체와 참가자를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주최 단체인 일일춘 협회-일일춘은 대만에서 가장 흔하고 평범한 꽃이라고 한다. 매매춘 대신 일일춘이라는 꽃 이름으로 스스로를 호명하고자 했던 것이다-는 97년에 설립된 성 노동자들을 위한 단체로서 성 노동자 비범죄화와 성 노동자 권리 향상을 위해 활동한다. 미국, 영국 참가자의 경우, 스트립티즈이고 성 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전문적인 직업인으로서 자부심이 강했다. 미국 참가자는 캘리포니아에서 성 매매 비범죄화와 성 노동자 보호를 위해 활동한다. 태국의 경우 섹스 관광, 성 매매 등이 활발한 지역이라서 활동 사항도 성 매매시 안전한 섹스 교육, 외국어 배우기 교육 등등을 참가단체에서 수행한다고 했다. 성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 상담을 진행하고 건강과 인권에 대한 내용을 담은 소식지도 배포한다. AFLO는 홍콩 성산업에 종사하는 거리의 여성, 나이트클럽, 가라오케, 디스코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함께 활동한다. (日日春) 협회(COSWAS) 사무실에 도착해서 인사를 나눈 후, 우리는 근처에 있는 공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COSWAS(대만), AFRO(홍콩), EMPOWER(태국), ISUW(영국), SWOP(미국), ASPASIE(스위스) 활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4회 성 노동자 권리 국제 행동 포럼과 페스티벌” 개막식을 선포했다. 참가인원이 적었음에도 많은 취재진들이 몰려든 것으로 보아 대만에서 성 노동자(Sex Worker) 운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적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행기 시간 때문에 오전 일정이었던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지 않은 관계로 우리는 기자회견을 마치고서야 일일춘으로부터 대만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공창 제도의 형태로 유지되던 성매매가 97년 불법화되면서 성매매에 종사하던 여성들이 생존권적인 요구를 들고 거리집회를 열었던 것을 계기로 대만에서 ‘성 노동자 비범죄화 성매매에 대한 입법태도에 따른, 금지주의, 규제주의, 폐지주의 입장에 대해서는 ‘월간 사회진보연대’ 27호 2002년 7.8월호 특집 ‘성매매없는 세상’를 참고하시오. (decriminalization)’를 주장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만에서는 ‘Article 80’이라는 ‘Social Order Act'(사회 질서 행위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성매매 여성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산업-술집, 가라오케 등-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처벌을 받고 있다. 일일춘 협회는 현행 Article 80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성 노동자들이 성매매에 관련한 법률에 의해 처벌받지 않을 때,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이미 공창 제도라는 규제주의를 경험한 바 있어 성매매에 관한 법률이 따로 존재하여 성매매가 불법적인 것과 합법적인 것으로 나뉘는 것은 성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할 수도 없고, 성매매를 줄일 수 있는 방안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비범죄화’를 요구했다. 한국의 상황은 성매매 폐절을 위해 입법적으로 금지주의를 채택하자는 입장이 우세하다고 우리는 그들에게 설명해주었다. 성매매 고객인 남성을 더욱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성매매 방지법” 개정안에 대한 입장에 다른 나라 참가자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는 듯 했다. 2월 6일 “성 노동자와 단결할 권리”(Sex worker and The Right to Unite)라는 주제로 포럼이 진행되었다. 발제를 한 루스(Ruth)는 영국 출신으로 대학까지 졸업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스트립티즈(striptease)가 되었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성매매와 성산업이 합법이기에 루스는 현재 성산업에 종사하는 성 노동자들까지를 포괄하는 IUSW라는 노동조합에 소속되어 있다. 이 성 노동자 노조는 더 큰 GMB라는 노조에 소속되어있어, 조합원으로서 법적, 금융적 지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루스가 스트립쇼를 하는 나이트나 술집 같은 곳도 한국처럼 사소한 것들로-이를테면 춤을 추다 거울에 지문을 남긴다든지- 벌점을 가하거나 임금을 깎아 내리곤 한단다. 그러나 노조에 가입된 성 노동자가 많은 곳에서는 사업주로 하여금 노동 조건을 개선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고 했다. 노동자가 단결할 수 있을 때에야 자신의 권리를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진리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국에서 성매매 여성들이 참혹하게 인권을 유린당하는 현실에 비추어볼 때, 자신들을 조직화하고 현실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는 점은 비범죄화의 장점으로 보였다. 그러나 법적으로 가/불가를 떠나 우리나라에서 이 여성들이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을까. 법률적인 개선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인식이 같이 변해야 여성들도 자신들을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 성매매가 합법화된 곳도 많은데 한국에서만 유독 성매매를 불법화함으로써 성매매를 폐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도덕 및 윤리와 연결된 지점이 아닐까. 루스는 자부심이 매우 강해 보였다. 그러한 그녀에게 누가 “당신은 남성에게 몸을 내보이며 미소를 파는 더러운 여성이지, 노동자는 아니다”라는 질책의 눈초리를 보낼 수 있을까. 2월 7일 비가 내리는 날, “성 노동자는 인권을 원한다”는 요구를 내건 대중집회가 잡혀있다. 광장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 켠에서는 몇몇 여성들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연습하였다. 그녀들은 교사, 간호사 등으로 성 노동자 운동에 연대하기 위해 부채를 든 채 치마를 입고 마임(?)을 선보였다. 정치인 두 명은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와 위선에 비하면 성매매가 오히려 깨끗하다고(?) 말하는 퍼포먼스에 출연하여 실감나는 연기를 했다. 학생, 노동자, 교사, 간호사, 동성애자, 성 노동자들이 모여 대열을 이루고 행진을 했다. 대열은 “인명이 도덕보다 중요하다”, “성노동자를 비범죄화하라”라고 쓰여진 피켓을 들고 대만 야당인 국민당과 여당인 민진당 당사를 항의 방문하였다. 일일춘 협회는 민진당과 국민당 양당이 Article 80 조항을 삭제하겠다는 것을 대선 공약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하였다. 성 노동자 운동을 지지하는 다양한 연대단위들의 모습과 약간은 자유분방한 대만의 성에 대한 인식이 인상깊었다. 2월 9일 “세계화 아래에서의 이주 성 노동자”라는 주제로 열린 두 번째 포럼에서는 각 참가국에서의 이주 성 노동자 현황과 각 단체 입장을 공유하였다. 대만 정부는 대선을 앞두고 중국에서 독립할 것인가의 정치적 문제를 두고 중국 본토에서 이주해오는 여성들을 강력하게 단속하고 있다. 따라서 대만 내 성 노동자들과 이주 성 노동자들간의 연대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고 한다. 스위스에서는 성 노동자의 70%가 동유럽이나 동남아 이주여성일 만큼 성산업으로의 유입이 심각한 상황이다. 빈곤한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성산업에 유입될 수밖에 없다. 바야흐로 성매매의 세계화 국면이다. 그러나 자국 여성들에게는 성산업이 합법일지라도 이주 여성들에게는 동일하게 법이 적용되지 않기에 이주 여성들의 경우, 신분이 불안정해서 포주와 같은 3자에게 더욱 의존하고 착취당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에서도 ‘예술흥행비자’나 국제결혼 그 밖의 경로들로 이주해온 여성들이 성 산업에 유입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그녀들의 노동 상황이나 인권유린 현실 등에 주목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사안의 해결에는 국제연대가 절실한 매개고리가 될 것이다.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그래도 합법화는 좀 그렇다’라는 의구심을 가졌었다. 문제는 합법화냐 아니냐는 입법에 대한 입장이 아니라 성 노동자들의 현실과 그들이 말하는 방안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일춘 협회에 질문했듯이 법률 조항 삭제 그 이후의 운동이 더욱 중요할 것 같다. ‘이제 시작이다’라고 말하던 일일춘 협회 활동가의 말이 생각난다. 성 노동자가 주체가 된 운동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그러나 그러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지점들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한다. 성매매가 현실적으로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과 성매매를 통한 성욕 해소를 정당화하는 것은 다른 문제일 것이다. 여성의 성욕은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들도 차마 성매매를 하겠다고는 대답하지 못한 채 개인적으로 풀겠다고 말하거나 답을 회피하곤 하였다. 이러한 대답은 현실적으로 왜 여성만이 성매매에 동원되고 있는지 그 구조적인 성적 착취관계를 보지 못한다는 점과 여성의 성욕 존재를 간과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사랑과 성욕 충족간의 문제... 가족 내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성욕의 문제가 성매매를 통해 또는 가족 밖에서 해결되면 되는 것인가. 여성들이 성 산업으로 유입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을 팔 수 있는 곳이 있고 그곳에서는 감히(?) 여성으로서 벌 수 없는 상당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 배제되고 그 노동이 평가 절하되면서 온전히 노동할 수 없다. 여성들이 성 산업에 유입될 수밖에 없는 열악한 노동상황과 빈곤을 간과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성적 착취관계 하에서 성의 상품화, 여성의 열악한 노동 상황, 이 연결고리를 놓치면 안 될 것이다. 대만 여행길은 이렇게 깊은 고민들을 남겨둔 채 끝나가고 있었다. PSSP
[역자주] 미국의 제3세계 간섭정책은 대체로 유사한 모형의 반복이다. 목표물이 되는 정부나 개인에 대한 악의적이고 그릇된 정보를 거대 미디어기업들을 통해 유포시키고, 국제금융기관이나 다른 나라 정부가 재정 지원을 중단하거나 삭감하도록 압박하고, 그 나라의 반대파들 특히 정부를 폭력적으로 전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우파그룹을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지원하는 것. 이는 미국의 전형적인 “저강도전쟁” 모형이다. 이러한 전략은 현재의 아이티 사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부분의 영자 언론은 아리스티드가 2000년 총선 부정 때문에 합법성을 상실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2000년 당시 미국 정부조차 선거 부정을 주장하지 않았고,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는 대통령과 입법부 선거는 자유롭고 공정했다고 선언하였다. 아이티의 모든 당사자들은 아리스티드가 92%로 득표율로 당선되었다고 인정했다. 합의되지 않았던 유일한 문제는 다수를 얻었지만 과반수를 넘지 않은 아리스티드 측의 7명의 상원의원에 대한 결선투표 문제였다. 하지만 결국 7명은 사임했고, 새로운 선거를 치른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거에서의 "권력남용" 문제를 빌미로 부시정부와 유럽의 순종적인 파트너들은 수억 달러의 신용제공과 경제원조를 연기하였다. 미리 보장되어 있었던 미주개발은행의 4억 달러 대부가 봉쇄되었고, IMF, 세계은행, 유럽연합은 신용공급을 삭감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2003년 7월 중반 아이티가 3200만 달러의 외채 연체금을 상환하면서 국고를 비우고 나서야 미국은 3400만 달러가 아이티의 보건, 수도, 도로를 위해 제공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돈은 대부분 미국의 개발사업 “계약자”들의 수중으로 다시 돌아간다. 한편 아이티의 좌파운동들은 외채상환의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것을 주장했으나, 거부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미국은 지속적으로 아이티의 우파 정당, 무장조직, 기업가나 종교 조직을 공공연하게 또는 은밀하게 지원하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본 글에서 다루고 있다). 게다가 현재 미 국무부에서 카리브와 라틴 아메리카 정책을 입안하는 인물들 중 일부는 이미 레이건 시대부터 요란을 피웠던 이들인데, 특히 존 네그로폰테, 엘리어트 아브람스, 존 포인덱스터는 니카라과 산디니스타에 대한 더러운 전쟁과 이란-콘트라 스캔들에 깊게 연루된 인물이다. 최근에는 국가안보위원회의 오토 라이히나 국무부의 노리에가가 가장 눈에 띤다. 2003년 4월 노리에가는 워싱턴에서 열린 아메리카위원회 회의에서 미국의 아이티 정책과 베네주엘라와 쿠바 정책을 연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주기구가 채택한 “아메리카 민주주의 헌장”의 20조가 민주주의의 핵심적 요소를 위반한 나라들에게 취할 일련의 조치가 담겨 있는 “개입 방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차베스와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고의적으로 분열적이며 대립적인 환경을 조성했다. 쿠바의 선한 국민들은 민주주의 헌장을 배우고 있다는 점은 나의 강력한 희망”이라고 덧붙였다. 아이티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강도전쟁”은 쿠바와 베네주엘라, 나아가 라틴아메리카 모든 곳에서 적용된다는 것이다. * 앞머리와 본문의 역주는 아래의 글들을 참조했다. Tom Reeves, “Still Up Against the Death Plan in Haiti” (2003.9/10) http://www.thirdworldtraveler.com/Caribbean/UpAgainstDeathPlan_Haiti.html Michel Chossudovsky, “US Sponsored Coup d'Etat” (2004.2.29), http://www.globalresearch.ca/articles/CHO402D.html Heather Williams, "Haiti as Target Practice", (2004.3.1) http://www.counterpunch.org/williams03012004.html * * * 아이티와 미국의 더러운 속임수 - 아리스티드 제거는 거대한 중남미 탈안정화 캠페인의 일부분이다 - 그렉 구마 2004년 3월 1일 출처: http://www.zmag.org/content/showarticle.cfm?SectionID=20&ItemID=5069. 필자는 <자유를 향하여>의 편집자이며, <불안한 제국: 억압, 세계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저자다. 이메일: editor@TowardFreedom.com 1915년 미국이 아이티에 처음 군사간섭했을 때, 아무도 그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1915년 7월 미국은 아이티 내분을 구실로 군사간섭을 시작했으며, 9월에는 아이티를 보호령으로 만들고 1934년까지 군사점령을 계속하였다.] 미국의 군사간섭을 직접 취재한 저널리스트도 거의 없었고, 대부분의 신문은 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를 받아 적을 따름이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말을 따르면, 아이티에 보호령을 세우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악하고 타락한” 혁명을 중단하고, “점진적인 개혁과정”을 지원하기 위한 거대한 노력의 일부분이며, 그의 “국제주의” 정책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사실 윌슨은 이 섬나라를 1차 세계대전의 지리전략적인 볼모로 생각했다. 그는 특히 아이티에서의 정치적 혼란으로 독일이 이 지역에 군사기지를 세우는 이득을 취할 것을 걱정하였다. 또한 그에게는 매우 강력한 경제적 동기도 있었다. 미국에게 아이티는 위협받는 투자자산이었다. 내셔널시티은행은 중앙은행과 철도체계를 통제하였고, 설탕왕들은 기름진 농장을 탈취할 표적으로 생각했다. 투자자와 중개업자에게는 불행히도, 이 나라는 4년 동안 7명의 대통령이 갈렸고, 그들 대부분은 초기에 살해되거나 제거되었다. 북부 농촌지역은 카코스라고 불렸던 반란 운동의 통제를 받았다 (카코스는 이 나라의 새 울음소리를 딴 것이다). 카코스는 대개 다른 잔인한 산적 무리들처럼 묘사되었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자였으며, 이 나라 경제를 지배하는 프랑스와 미국, 소수 물라토의 통제에 저항하였다. 미국 점령의 초기 동안, 카코스는 그들의 “산디노”[니카라과의 게릴라 지도자]인 샤르멘느 페랄트의 지휘를 받으며 저항을 지속했다 (그는 군대의 장교였다가 게릴라 지도자로 변신했다). 페랄트는 1919년 미국 해병대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1980년대 후반 아이티의 민주주의 운동의 상징으로 되살아났다. 1980년대의 민주주의 운동으로 결국 해방신학자인 장 베르뜨랑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57년 9월 대통령으로 선출된 (‘파파독’) 뒤발리에는 의회를 해산했고, 1964년 종신대통령이 선포하고 공포정치를 실시했다. 1971년 그가 죽자 19세의 (‘베이비독’)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대통력직을 세습했다. 그는 민중저항으로 1986년 해외로 망명했고, 1991년 아리스티드가 당선될 때까지 뒤발리에가의 군사집행자 역할을 했던 톤톤 마쿠트가 사실상 독재체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1990년대 동안 역사는 다시 반복되었다. 1991년 선거 7개월 후 아리스티드는 군사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군사정권은 3년 동안 지속되었고, 1994년 아이티의 곤경[대량난민사태]은 커다란 뉴스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보도는 매우 선택적이었고, 쿠데타 주도 세력에 대한 CIA의 지원이나 아이티 군부의 마약거래 개입 사실은 결코 보도하지 않았다. 미국의 점령에 앞서, 미디어는 아리스티드가 “속임수 봉쇄”라고 부른 것에 대해 의심스럽게도 침묵하였다. [군사구테타와 반대파 인사들에 대한 학살이 벌어지자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은 인권회복과 민정이양을 촉구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이 이를 무시하자 미국 부시정부는 ‘아이티 경제제제’를 가하고, UN은 1993년 6월 전세계적인 석유, 무기 금수 및 해외 자산 동결조치를 취하였다.] 봉쇄조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짜내었지만, 그러나 외국자본의 각종 이윤 사업들은 면제 대상이었다. 석유 봉쇄가 이루어졌으나, 연료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통해서 쉽게 밀수입되었다. 반면에 아리스티드를 더럽히는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또 다른 미국의 점령이 시작되었다. [1994년 8월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아이티의 민정복귀를 위해 무력을 포함한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의 사용을 승인한 결의안 940호를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아이티 군사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대응하였다. 1994년 9월 18일, 미군 2만 명을 포함한 30개국에서 파견된 총 2만 2천 명의 다국적군이 아이티에 도착하여 쿠데타 세력을 축출하고 아리스티드 민선 대통령을 복귀시켰다.] 그러나 윌슨이 안정과 민주주의라는 수사로 미국의 경제적 이해와 횡포를 숨겼던 것과 같이, 클린턴은 “민주주의의 지지”를 내걸었다. 그러나 사실 1990년대 점령의 실제 목표는 아리스티드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아이티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를 유지한다는 것이었다. 미디어는 분명한 것을 가리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미국은 아리스티드와 결코 편한 관계를 유지한 적이 없으며, 미국은 다음 선거까지 아이티 군부세력과 이 나라를 공동 관리한다는 것을 합의하였던 것이다. 되돌아보면, 정책결정가와 분석가 대부분은 미국이 본래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가 목표가 아니었고] 단지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 아이티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아이티에서 일종의 혁명이 진행 중이었다고 말하는 분석가는 거의 없으며, 심지어 그들은 아이티의 상황을 항상 카오스로 묘사한다. 상투적인 지식을 따르면, 아이티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거나 민주 제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은 20세기 초반 19년 간 아이티에 머물렀던 것이다. 아이티인들은 1915년 당시 준비되어있지 않았고, 어떤 회의적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1990년대에도 여전히 그러하다는 것이다. 1994년 9월 선거에서 로스 페로는 “노우나싱”(Know-Nothin)[무지당(1853~1856년)의 당원, 미국 태생 시민이 정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스타일로 대중적 편견을 널리 퍼뜨렸다. 그는 “아이티인들은 독재자를 좋아한다”며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하였다. 페로는 미국의 개입을 강력히 반대했는데, 그 함의는 그가 아이티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에 대해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부시정부는 2003년 말 아리스티드에 반대하는 무장봉기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또한 2월 29일 그를 납치하여 아프리카로 보내었다. 이 때 부시정부는 그와 유사한 대중적 편견에 의존했다. 그 후 물러난 대통령은 그의 사임이 미국 대사관 관리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물론 그는 결코 미국이 선호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이 지원하는 탈안정화 정책이라는 환경에서 질서를 유지할 수 없었고, 그의 무능력은 “아이티 스타일”의 “정권 교체”를 위한 최고의 구실을 제공하였다. 2월 초 “반란”을 일으킨 준군사조직 군대는 국경을 넘어서 도미니카 공화국으로부터 건너왔다. 이들 잘 훈련되고 훌륭한 장비를 갖춘 부대는 <아이티 진보전선>(FRAPH)의 전 멤버들을 포함하였다. <아이티 진보전선>이라는 이름은 아리스티드의 첫 번째 정부를 전복한 1991년 군사 쿠데타 이후 대중학살과 정치암살에 연루된 “죽음의 군대”의 이름을 부드럽게 바꾼 것이었다. [군사쿠데타 기간 동안 최소한 3000명이 죽고 수천명이 추방되었다]. 스스로 <민족해방재건전선>(FLRN)이라고 선언한 조직 역시 활동적이며 기 필리프가 이끌고 있다. 그는 과거 경찰 수장이었고 아이티 군대의 멤버였다. 그는 쿠데타 기간 동안 다른 수십 명의 아이티 군대 장교들과 함께 에콰도르에서 미국 특수부대의 훈련을 받았다. 고나이베와 깝 아티안 공격을 이끌었던 다른 두 명의 반란 지휘자인 엠마뉴엘 “토토” 콘스탄트와 조델 샹블렝은 뒤발리에 시대의 톤톤 마쿠트 군대의 집행자였으며 <아이티진보전선>의 지도자였다. 무장 반란자들과 민간인 지지자들 모두는 명백히 최근의 음모에 연루되었다. G-184 지도자인 앙드레 아파이드는 아리스티드를 전복했던 그 주간에 미국 국무장관 콜린 파월과 접촉했다. 필리프와 콘스탄트는 CIA와 연계되어있고, 미국 관리와 접촉했다. [현재 아이티의 대표적인 민간인 “반대파” 그룹은 <민주주의 집합점>(Democratic Convergence, DC)과 <G-184>(184 시민사회조직그룹)다. DC는 15개의 반-아리스티드 정당 연합이며, 서로 적대적인 아이티 지배계급의 분파들로 구성되어있다. 이들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빈약하다 (이들은 선거에서 20%를 넘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집합한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기부>(National Endowment for Democracy, NED)와 연계된 <국제공화당기구>(International Republican Institute, IRI)가 매년 제공하는 300만 달러의 기금 때문이다. NED는 1983년 레이건 정권 당시에 창설된 것으로, CIA가 정치인을 은밀히 매수하고 거짓 민간인조직을 창설했다는 비난이 일면서, CIA를 대체하여 정당들과 NGO 부문에서 중요한 정보기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G-184를 이끄는 앙드레 아파이드는 미국 시민이며 아이티에 4000명 규모의 공장을 소유했고 1991년 군사쿠데타를 지지했다. G-184는 엘리트기업가조직과 종교조직 등의 우산조직의 성격을 띠었고, 역시 IRI나 유럽연합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다.] 시애틀타임즈에 따라면 2월 20일 미국 대사 제임스 폴리는 미군 남부사령부로부터 4명의 군사전문가로 이루어진 팀을 불렀다. 공식적으로 그들의 직무는 “미국 대사관과 인사들에 대한 위협을 평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예방 조치”로서 3척의 미 해군 군함을 아이티로 출발시킬 준비에 돌입했다. 한 척에는 수직이착륙 전투기인 해리어와 공격용 헬리콥터가 탑재되어 있었다. 또한 최소한 2000명의 해병도 배치될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아리스티드가 납치되면서, 워싱턴은 그들의 대리인인 준군사조직 부대를 무장해제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고, 이제는 “과도기” 동안 정치적 역할을 맡을 세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달리 말해, 부시정부는 아리스티드 대통령의 제거 후 아리스티드 지지자들에 대한 학살을 막기 위한 준비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위기를 다루면서 미디어 기업들은 CIA가 개입한 역사와 역할에 대해 눈감고 있다. 그 대신에 이른바 “반란 지도자”, 곧 1990년대 죽음의 군대의 지휘관들을 반대파의 합법적인 대변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부시 정부는 효과적으로 아리스티드를 속죄양으로 삼아, 그를 “사회경제적 상황을 악화시킨” 유일한 주범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이는 그레이 데이비스를 물러나게 하고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를 당선시킨 2003년 캘리포니아 소환선거와 매우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사회경제적 위기는 대부분 1980년대 이후 IMF가 강제한 경제개혁에 기인한 것이다. 아리스티드가 1994년 아이티로 돌아올 때 그에게 강요된 조건은 IMF의 경제 “요법”의 수용이었다. 그는 이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어쨌든 그는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악마로 묘사되고 있다. [아이티의 IMF 경제개혁은 뒤발리에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1991년 아리스티드는 진보적 개혁을 추진하려했지만, 군사쿠데타가 벌어진 후 이전에 세계은행의 관리였고 1983년 뒤발리에 집권시 총리를 맡았던 마흐 바쟁이 다시 총리로 복귀하였다. 1994년 아리스티드가 돌아온 후 1996년까지의 남은 임기 동안, “긴급경제복구계획”이 진행되었다. 긴축재정과 공적서비스 삭감이 강요되었고, 엄격한 외채상환이 세계은행과 미주개발은행, IMF의 새로운 융자를 위한 조건이 되었다. 한편 1996년 클린턴 정부와 체결한 협정으로 쌀, 설탕, 옥수수 등 미국 농산품 관세가 철폐되면서 농산물이 덤핑으로 수입되었고, 인구의 75%가 농업에 종사하는 아이티 현실에서 농민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한편 클린턴정부는 2003년 11월 아이티 대선을 두 주 앞두고 발전기금 제공을 중단시키고, 아이티 정부에게 IMF와 양해각서를 체결할 것을 강요했다. 당선된 아리스티드는 최저임금의 상승, 학교건립과 문맹퇴치 등을 약속했지만, 정부예산, 공공부문, 공적 투자, 사유화, 무역과 통화정책 등에 걸쳐 이미 IMF와 체결된 합의로 인해 손발이 꽁꽁 묶이게 된다.] 캐나다의 경제학자 미셀 초수도프스키가 설명한 것처럼, 부시의 목적은 “아이티를 민주주의의 외양으로 완전한 미국의 식민지로 회복”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목표는 포르토프랭스에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고 미군이 아이티에 영구 주둔하는 것이다. 결국 미국 정부가 추구하는 것은 카리브 지역을 군사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것을 원하는가? 이스파니올라(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이 있는 섬)는 카리브 지역의 관문이며, 쿠바-북서아메리카와 베네주엘라-남아메리카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다. 이 섬에 미군이 주둔하면 쿠바와 베네주엘라 모두에게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데 큰 이점이 있으며, 더 광범위한 지역 군사작전을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아이티의 야만적인 스파이들의 사례처럼, 미국은 정보기관들이 “한번에 될 일을 두 번에 하는 일”이라고 부르는 비밀작전[대리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 시민권을 주겠다는 약속으로 모집된 베네주엘라인들이 과거 <안보협력을 위한 북반구기구>(WHISC)였고 지금은 <미국 아메리카군사학교>(SOA)로 이름이 바뀐 곳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그리고 미군 남부사령부가 관할하며 페루 북부 정글에 있는 이퀴토스 훈련소로 옮겨진다. 미국 지도자는 베네주엘라의 휴고 차베스 대통령을 달갑게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다. 오히려 차베스는 부시 정부를 격노하게 하고 있다. 2002년 4월 미국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쿠데타였다. 그러나 친미적인 페드로 카르모나 에스타냐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폐기한 후 단 이틀만에 권력에서 물러났고, 차베스는 복귀하였다. 차베스는 줄곧 미국 정부와 CIA가 베네주엘라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다양한 움직임을 지원한다고 비난했다. 베네주엘라 사태의 배경은 그 나라가 세계 4위의 석유수출국이며 미국의 세 번째 석유수입처라는 점이다. 베네주엘라는 필립스 페트롤륨과 엑손모빌의 주요한 달러박스이며, 세브론 텍사코와 옥시덴탈 페트롤륨도 주요한 이해관계자다. 아이티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적당한 때를 기다리는 문제며, 이는 더욱 격렬한 폭력 사태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 아루바(네덜란드령 앤틸리스제도)의 미 공군과 해군 분견대는 병참과 물자를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미 해군 병원선은 사태가 발생했다는 신호가 처음 나타나면 북부 해안에 배치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아이티 사태는 이라크나 미국 경제 문제에 관한 미국 시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고자 하는 미국 정부에게 유용한 전환점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비밀 작전이 실제로 아이티의 불안을 자극하고 심지어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제거하였다는 책임은 간단히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PSSP
1. 이라크 임시헌법 합의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Iraqi Governing Council)는 미국의 주권이양이 이루어질 6월 30일 이후 임시정부의 법적 통치기반이 될 임시헌법 초안에 합의했다고 3월 1일 발표했다. 임시헌법은 60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는데 주요 내용은 △표현?언론?집회?종교의 자유 △군부에 대한 민간통제 △이라크 국민의 권리 보호 △임시의회 의석의 25% 여성할당 △이슬람법(샤리아)의 지위 △연방주의 △2005년 1월 31일 이전 선거실시 등이다. 이슬람법의 역할은 제한되었다. 국교로 되었지만 동시에 종교의 자유도 인정되었고, 입법의 ‘유일한’ 근간이 아니라 다른 것 가운데 ‘하나의’ 근간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관리들은 즉각적으로 이라크 점령행정처의 브레머 최고행정관이 이 이라크 임시헌법을 승인할 것이고 이는 새로운 이라크 정부의 기본틀이 될 것이라고 환영했다. 파웰 국무장관조차 TV에 출연하여 “데드라인에서 하루가 늦었을 뿐 굉장한 성과”라고 말했다. 과도통치위에 참여하고 있는 이라크독립민주운동(IIDM)의 지도자 아드난 파차치도 “이라크 역사에서 잊지 못할 위대한 날”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점은 남는다. 과도통치위는 민병대 무장해제, 임시정부의 구성, 선거 체계 등과 같은 첨예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채 이후 구성될 임시정부로 넘겼다. 쿠르드 족과 관련해서는 북부 쿠르드 지역에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사법부와 입법부를 둘 수 있게 하는 등 자치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걸프전쟁 이후 이라크 북부에 비행금지구역이 정해지고 후세인 정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면서 광범위한 자치를 누려온 쿠르드족은 석유 수익에 대해 일정 비율의 고정된 배분을 할 것과 쿠르드족이 다수인 북부 지역에서 영토를 확장할 수 있게 할 것을 요구해 왔기 때문에 향후 갈등의 소지가 크다. 또한 임시헌법은 이라크 내에 대규모로 존재하고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민병대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쿠르드 민병대인 페시 메르가(pesh merga), 시아파 민병대인 바드르 브리게이드(Badr Brigade), 메히드 아미(Mehidi Army)등 민병대의 규모는 크다. 이들을 그냥 놓아두면 서로 분쟁을 일으키거나 정부에 저항할 수 있다고 미국은 보고 있다. 그러나 쿠르드족이나 시아파는 이 충성스러운 무장병력을 해체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임시헌법은 2005년 1월 31일 이전에 선거를 실시하도록 했는데 그렇게 되면 275명의 의원이 생기고 그들이 대통령과 두명의 부통령을 뽑게 된다. 다시 이 세명이 총리를 뽑는다. 하지만 선거 이전까지는 7월 1일부터 미국이 주권이양을 하기 위해 만들게 될 임시정부가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 통치하게 된다 총선 실시 이전 임시정부 구성에 대한 미국의 계획은 전국 18개 주에서 지역위원회를 꾸리고 이 위원회가 각주를 대표하는 선거인단을 임명하여 이들이 다시 임시의회 의원을 임명하고 이 의원들이 임시정부 수반과 각료를 임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2004년 7월 1일에 주권을 임시정부에 이양하겠다는 것이다. 이 임시정부는 총선이 실시될 때까지 선출되지 않은 권력으로서 이라크를 통치하게 된다. 이에 대해 나오미 클라인은 1월 22일자 캐나다 <글로브 앤 메일>에 기고한 글에서 ‘임명된 자들에 의한 지배(Appointocracy)'라고 비판했다. 즉 미국 대법원에 의해 임명된 부시가 임명한 브레머 최고행정관이 임명에 임명을 거듭하여 임명된 임시정부에 주권을 이양하면 미국은 ’임명된 자들에 의한 지배‘라는 영광스럽고 새로운 민주주의 전통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비꼰 것이다. 한편, 협상과정에서 이슬람법의 영향력, 쿠르드 자치구의 권한, 여성의 지위 문제 등을 높고 이견을 조정하지 못한 바 있고 시아파 위원들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했는데, 임시헌법을 발표할 때에도 쿠르드 대표와 시아파내 두 세력의 대표가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내재된 갈등은 확인되었다. 더욱이 임시헌법이 합의된 바로 다음 날 시아파 종교기념일인 아슈라(애도의 날)에 바그다드와 카르발라에서 동시에 발생한 자살폭탄 테러로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은 임시헌법을 부정하고 종족갈등을 부추기는 세력이 있음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시한을 하루밖에 넘기지 않았지만 미국이 중심적으로 작업하고 조정하여 타협된 임시헌법은 갈등의 봉합이라고 보여지며 그 결과 미국이 주도하는 주권이양과 임시정부 구성으로 이어지는 향후 정치일정에서 갈등은 더욱 다양하고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 2. 이라크내 종족 갈등의 양상 7월 1일자로 주권이양 시점이 다가오고 임시정부 구성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하는 종족간의 이해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1월 19일 바그다드에서는 아야톨라 알리 알 시스타니를 최고지도자로 두고 있는 시아파가 직접선거를 촉구하여 “선거 찬성(Yes, yes to election), 임명반대(No, no to selection)"라고 외치며 10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인구의 60%인 약 1500만명을 차지하고 있다는 지금까지 언론 등에서는 일반적으로 2천5백만 이라크 인구 가운데 시아파가 60%정도, 수니파가 35% 정도여서 소수파인 수니파가 후세인 치하에서 권력을 행사했다고 보도해 왔는데, 최근에는 이라크의 한 잡지가 3차례 통계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라크 인구구성이 수니파가 53%, 시아파가 40-45%, 비이슬람이 2% 정도라는 보도를 한 바 있다. 시아파로서는 직접선거는 곧 집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대중들은 경제적 권리와 투표권을 요구하는 것이다. 반전운동가이자 뉴레프트리뷰 편집위원인 타리크 알리에 따르면 두명의 주요 지도자인 알리 알 시스타니와 모크타다 알 사드르가 대중의 지지를 받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알 사드르는 점령과 연방주의 양자가 이라크를 발칸화하고 서구에 석유통제권을 내주는 첫걸음이라고 보아 이에 대해 적대적이고 알 시스타니는 협조적인데 지지를 잃지 않기 위해 점령군과 대화하는 것보다는 UN과 대화하려 한다고 한다. 알 시스타니가 직접선거를 주장하고 있다. 둘 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 실시를 요구했다. 키르쿠크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투르크멘족은 지난 2월 25일 바그다드에서 수천명이 정치 경제적 권리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투르크멘족의 권리를 무시하는 헌법반대”를 외치며 스스로가 2500만 인구 가운데 약 13%인 300만에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27일에는 바그다드 미군사령부 앞에서 쇠사슬로 몸을 묶고 미군 차량의 통행을 막으며 단식투쟁을 하였고 28일에는 키르쿠크에서 ‘전국투르크멘운동’이 자신들이 운영하는 상점과 음식점 문을 파업을 벌여 이를 지원했다. 쿠르드족 역시 이날 북부 쿠르드족 지역의 주민투표 실시를 촉구하는 170만명의 탄원서를 미 행정처와 과도통치위에 제출하였다. 이들 ‘이라크 쿠르디스탄 주민투표를 위한 운동’은 이라크 북부 지역에 사는 모든 종파의 16살 이상 주민들을 상대로 쿠르드족 지역을 연방제 국가의 일부로 하느냐, 독립하게 하느냐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하자고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쿠르드민주당(KDP)'과 쿠르드애국동맹(PUK)이 석유통제권과 민병대 지휘권 유지를 전제로 연방제를 받아들이려 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라크 내 종족갈등은 한국군 파병예정지인 북부 유전지대 키르쿠크 지역에서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세계 원유매장량의 6.7%가 몰려 있다는 이곳에서는 서로가 다수라고 주장하는 아랍계, 투르크멘족, 쿠르드족의 갈등이 노골화되고 있다. 1월 26일에는 키르쿠크시 서남쪽 외곽에 자리잡은 미군 캠프에 3차례의 중화기 공격이 가해졌고 25일에도 미군 캠프에 4발의 카튜샤 로켓 공격이 가해졌다. 29일에는 경찰차가 공격받아 경찰관이 사망했고 30일에는 검문소가 로켓추진 수류탄 공격을 받아 2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2월 1일에는 쿠르드족 관할 지역인 북부 도시 아르빌에서 쿠르드계 정당 당사를 겨냥한 2건의 동시 자폭 테러로 109명이 숨지기도 했다. 23일에는 차량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해서 10명이 숨지고 45명이 다쳤다. 28일에는 시아파 2000여명이 키르쿠크 시가지에서 “키르쿠크는 어느 민족의 것이 아니라 주민 모두의 것”이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29일에는 쿠르드족이 이라크투르크멘전선(ITF) 사무실에 난입하여 집기를 부쉈다. 폭력사태가 확산되고 충돌이 커지자 경찰은 29일부터 저녁 6시 이후의 야간통행을 금지했다. 이러한 종족갈등은 미군 점령 이후 격렬해졌다. 미군 점령은 후세인 이후의 정치체제를 이라크인들이 자주적으로 구성하지 못하게 했다. 이라크 민중들에 의한 정치체제 형성은 거세되고 미 점령당국이 종족과 분파를 안배하여 인위적으로 과도통치위원회를 구성 과도통치위는 시아파 13명, 수니파 5명, 쿠르드족 5명, 투르크멘 1명, 아시리아 1명 등 25명으로 구성되었고 과도내각도 이와 동일한 인원 비율로 이루어졌다. 함으로써 갈등은 상존하게 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구도를 적절히 활용하여 점령을 관리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점령 자체로부터 초래된 것이며 이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미국은 갈등만 키워온 것이고 지금에 와서는 “이라크는 내전(內戰)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각 언론들이나 정부관계자들이 말하게 된 것이다. 3. 이라크 석유자원에 관한 점령군의 계획 작년 5월 22일 UN안보리의 ‘대 이라크 UN제재 해제결의안’에 따라 미 점령당국은 거의 모든 석유수입이 위탁되는 ‘이라크 개발기금’의 통제권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이 이라크 재건 기금 사용의 결정권을 갖는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이 이라크 재건사업을 독점하고 석유자원을 착취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작년 6월에 석유생산이 재개된 이래 이라크는 현재 하루 2백 30만배럴을 생산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이후 전쟁 이전 수준(2백 5십만배럴)을 회복하여 올해 말까지 3백만배럴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한편 미국은 애초에 이라크 국유기업 사유화 계획에 따라 석유산업도 사유화하고자 하였다. 이라크 산업을 100퍼센트 외국에 개방한다는 브레머 훈령 39조는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미국이 임명한 과도통치위원회조차 석유 사유화에 반대하고 있고, 자칫하면 국민적으로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계획을 수정하여 이라크 석유산업의 점진적인 사유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라크 경제에 대한 미국의 기본계획은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에 따른 전면적 사유화와 개방된 시장경제이다. 이미 백텔, MCI, 핼리버튼 등은 이라크의 수도, 전화, 유전에 진출해 있고 더 많은 기업들의 이라크 시장진출이 이뤄질 것이다. 이라크의 사유화와 시장경제 유도를 통해 미국은 주변 중동국들도 그러한 방향으로 이끌어내고 궁극적로 중동 자유무역지대를 건설하고자 한다. 작년 6월 요르단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회의에서 미국은 중동지역의 평화확보와 자원개발을 목적으로 2013년까지 미-중동자유무역지대(MEFTA)를 구축하기로 하고 이를 위한 로드맵'을 밝힌바 있다. 일례로 점령행정처의 석유 고문인 로버트 맥키는 “이라크가 하루아침에 사유화로 나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라크는 국가통제로부터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사유화로 나아가야 한다. 이때 팔게될 것은 정제와 수송 같은 부분이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전문 경영진을 국유 석유회사에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즉, 미국으로서는 무엇보다 안정적인 석유자원의 착취가 중요하므로 이를 위해서 관리 통제 가능한 국유기업을 장악하는 것이 그 이해를 관철시키는 방향인 것인다. 덧붙여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공급이 불안정해지는 상황에서 미국은 이를 대체할 안정적 공급처로 이라크를 선택한 것이다. 이라크 석유산업을 재건하고 더 개발하기 위한 미국의 의도는 과도통치위원회 미국의 후원아래 국제은행들로부터 14억달러를 빌리는 계획으로 드러나고 있다. 석유에서 나오는 수입금이 담보가 될 이 대출은 이라크 전후 최초의 국가채무이다. 물론 그 국제은행들은 미국 주도의 컨소시움이다. 2월에 과도통치위의 재정위원회는 미국 정부기관인 해외민간투자공사(OPIC), 씨티그룹, BNP 파리바, 크레딧스위스 등으로 이루어진 컨소시엄과 대출에 대해 협상했고 전직 금융가인 아흐메드 찰라비(이라크국민회의)가 이끄는 재정위원회는 과도통치위에 대출계획 승인을 제출했다. 미국은 석유산업을 착취해서 이득을 취하고 석유산업 재건을 위해 막대한 금액을 대출해줌으로써 금융이익을 얻는 순환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이라크의 부채는 대략 4000억 달러로 알려지고 있다. 1200억 달러를 상업은행과 정부들에 빚지고 있으며, UN의 ‘배상 위원회’(Compensation Commission) 밑에 놓인 2000억 달러의 ‘배상’ 요구가 있으며, 이란-이라크 전쟁에 관련된 1000억 달러의 배상 요구가 있다. 이 부채에 대해 이라크는 2004년까지 지불유예를 인정받은 상태이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이라크 전후 재건 과정에서 막대한 부채는 걸림돌이기 때문에 작년부터 채무국들에 대해 부채탕감을 요구해왔다. 그 결과 지난 2월 28일 국제 이라크공여국 회의에서 채무국들은 1200달러 가운데 약 60%인 720억달러를 탕감하기로 했다. 4. 이라크의 미래는? 요컨대 이라크 상황은 다음과 같다. 임시헌법은 합의되었지만 불완전하고 주권이양 계획은 비민주적이다. 미군 점령이 야기한 종족과 분파 사이의 무력 갈등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경제는 재건되지 않고 있고 실업률 50%를 상회할 만큼 기록적이다. 초국적기업은 각종 기간산업 사유화를 추진하고 있다. 석유산업과 그 수익은 미국의 통제와 관리 아래에 있다. 그러나 많은 대중들은 민주주의와 보다 나은 삶을 요구하고 있다. 이라크는 앞으로 점령과 제국주의 경제착취가 종족적 갈등, 대중의 불만과 혼합하여 내전 상황으로 갈 수도 있고, 대중의 요구가 성장하고 점령통치를 감당하지 못하는 미국이 이를 포기하여 새로운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 테러와의 전쟁 시작 이후 미국이 침략한 아프간은 3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고통 끝에 지난 1월에 부족간의 합의로 새 헌법을 만들고 국가건설의 이정표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전투는 계속되고 탈레반은 세력을 넓히고 있으며 수도 부근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방은 군벌들이 치안을 담당할 만큼 치안이 불안하다. 재건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위기는 계속되고 있어서 ‘실패한 국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이라크가 가야 하는 길은 아프간처럼 혼돈이 지속되어 끝없는 고통속으로 빠지는 길도 아니고 정치와 경제가 미국에 의해 통제되는 친미정권의 길도 아니라는 것이다. PSSP
초국적 감시망의 설계 : ECHELON 그리고 US-VISIT 조지 오웰이 묘사했던 전체주의 사회-오세아니아-는 기계의 전지전능함만이 신뢰의 척도로 인정받는다. 그 사회에서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기초한 공동체는 거부된다. 오직 Big Brother로 상징되는 전체만이 지고의 선이 되며 개인은 실종된다. 모든 기록의 날조와 재구성을 통해 인간의 사상은 통제되고 기억까지 재구성된다. 이러한 전체주의국가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조장하는 동력은 바로 정보의 독점이다. 전체 구성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남김없이 감시하고 관리함으로써 윈스턴 스미스는 Big Brother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감시와 통제는 조지 오웰의 상상력을 가뿐하게 초월한다. 조지 오웰의 상상력은 기껏해야 오세아니아의 국경선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21세기의 Big Brother 미국은 국경이라는 인위적 경계선을 무용지물로 만들면서 60억 인류의 두개골 안쪽까지 점검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전 지구를 아우르는 초국가적 감시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우주공간을 돌고 있는 인공위성과 세계 각처에 설치된 에셜론(ECHELON) 감시시스템은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터넷 통신의 90%를 도청하며, 전화와 팩스 등 각종 통신수단의 대부분을 감시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1999년 영국 BBC에 의해 공식적으로 확인되기 훨씬 이전부터 가동되고 있었으며, 누구를 대상으로 어느 정도의 정보를 수집해왔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미국은 이러한 통신정보절도행위에 더하여 이제 전 세계 인류의 개별적 신원정보를 수집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1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소위 US-VISIT라는 조치는 미국을 출입하는 모든 외국인의 생체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미국은 US-VISIT를 통해 단기적으로는 출입국자에 대한 신원정보만을 수집하고 있지만 장기적 정책으로는 2005년부터 시행하려는 세계적 차원의 생체여권사용을 통해 미국에 출입하지 않는 외국인들의 신원정보까지도 광범위하게 수집하려 하고 있다. 이미 미국정부는 한국정부에 대해 올해 8월부터 한국인이 미국에 입국하기 위해 발급받는 비자에 생체정보를 넣겠다고 하였으며, 현재 US-VISIT에 의해 생체정보수집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는 비자면제국의 국민에 대해서도 2005년까지 생체여권을 발급받지 않으면 출입국과정에서 생체정보를 수집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US-VISIT의 목적은 테러의 방지와 자국국민의 안전보장이다. US-VISIT를 통해 수집된 외국인의 생체정보는 테러범 및 국제범죄조직의 조직원을 색출하는데 사용되며,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외국인들의 상황을 임의로 확인하는데 이용된다고 한다. 또한 생체여권의 경우 기술표준의 확정을 통해 생체여권에 기재된 모든 개인정보는 데이터베이스의 공유를 통해 언제든지 확인될 수 있다. ECHELON으로 통신망을 장악한 미국은 감시의 범위를 아예 개인에게까지 확장함으로써 전 세계적인 감시망을 구축하는데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원죄, 감시를 통한 원죄의 치유? 정보의 일방향적 독점이 권력관계의 불평등을 야기하고 종속적 위계질서를 형성한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개인 대 개인의 관계는 물론 국가와 개인의 관계에서 정보의 독점을 통한 종속관계의 형성은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하다. 이러한 지배질서는 국가 간의 관계에서조차 예외가 아니다. 60억 세계 인류의 개인정보가 미국정부로 집중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US-VISIT의 구축은 국가 간 종속관계의 정점에 미국을 올려놓을 것이다. 이로 인하여 미국을 제외한 세계 각국, 그리고 미국 아닌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는 모든 인류는 자의와는 전혀 별개로 미국에 의해 구축되는 구조 안에 존재해야만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미국이 추진하고 있는 US-VISIT의 진의가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미국이 진정으로 테러를 방지하고 자국국민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자 생각했다면 먼저 왜 전 세계가 미국에 대해 적대적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부터 검토했어야 한다. 건국과정에서 저지른 원주민 학살의 역사는 차치하고라도, 미국이라는 국가가 건설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행해 온 제국주의적 만행에 대해서 스스로의 반성이 있어야 했다. 남미에서, 아시아에서,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미국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더러운 전쟁’을 저질렀으며, 테러와 폭동을 사주하고 군부독재를 옹호하고 쿠데타를 지원했다. 무력 동원으로 외국의 정권을 전복한 일도 예사로 저질렀다. 자국 자본의 이해에 따라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무고한 어린이들 머리 위로 폭탄을 퍼부었으며, 중동장악의 교두보인 이스라엘에 대한 무조건적 지원으로 팔레스타인 인민들의 삶을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세계적인 반미적대감은 바로 미국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만행에 대해 인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축적된 분노는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었고, 물리적 저항이 세계 각처에서 빈발하게 되었다. 이것을 미국은 테러라고 규정하였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전 세계를 감시하는 감시망 구축을 설계한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근본적인 문제해결의 대응책이 아니다. 폭력에 의해 발생한 대응폭력을 감시로 억제하겠다는 발상은 논리적으로도 성립 불가능하다. 감시로 억누를 수 있는 범주의 분노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정부가 이를 간과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감시로 테러를 방지할 수 있다는 단순한 발상을 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내부에서조차 US-VISIT가 테러를 방지하고 자국민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정부의 발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테러가 발생하는 양상에 의하면 US-VISIT가 설혹 예방에 일정정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할 수는 있으나 이미 발생한 테러에 대한 사후조치로는 거의 무용하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또한 감시망의 활성화를 위한 정보기관의 권력강화가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하는 이 시스템이 결과적으로 자국국민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미국이 그토록 자부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미국의 인권단체는 특히 이 조치가 아랍인들에 대한 차별 증대를 가져오고 그들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테러방지와 관련한 부분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생체정보수집 자체는 외국인의 인권침해는 물론 자국민의 인권침해까지 유발하고 있다. 당장 브라질 정부가 브라질을 출입하는 미국인에 대해 똑같은 조치를 취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국민들의 인권이 침해당하고 있다. 무분별한 생체정보의 수집이 인권침해를 가져온다는 것은 미국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다. 미국 내에서 생체정보의 수집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으며, 연방이나 주정부 차원에서 미국시민에 대한 장기적이고 추상적인 목적의 일괄적인 생체정보수집은 특별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생체정보가 인간의 신원을 파악하는 가장 유용한 수단으로서 매우 민감한 개인정보이기 때문에, 한 번 유출되어 부당한 용도로 사용될 경우 정보주체 본인에게는 치명적인 위해까지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황을 비롯하여 국내에서 비등하는 비판적 여론에도 불구하고 미국정부가 굳이 생체정보수집을 내용으로 하는 US-VISIT를 실시하는 목적은 결국 그들이 주장하는 바, “테러의 방지와 자국국민들의 안전보장”이라는 목적과는 전혀 별개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지배전략의 현실화 : 모든 인류의 복종을 위해 그들의 이해는 다른 것이 아니다. US-VISIT를 강제하는 미국정부의 근본적인 목적은 전 지구적 감시망을 구축하고 이를 통해 자국의 이해를 세계에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지구적 정착,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질서체계를 공고히 하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촘스키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미국이 이야기하는 ‘안보위협’은 바로 “미국 투자가들의 권리를 저해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더욱 적절하게 미국이 이야기하는 ‘실용주의’는 “미국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매년 세계인권백서를 발간하는 미국정부의 ‘인권’에 관한 기준은 철저하게 “실용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미국은 자국국민들의 “인권”을 “실용주의”에 입각하여 보장하면서 “안보위협”을 제거하고자 US-VISIT를 시행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실용주의”에 따라 자국이 원하는 대로 세계를 지배하고자하는 목적으로 “미국 투자가들의 권리를 저해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사전에 제거하고자 하는 것을 뜻하고 US-VISIT의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이것인 것이다. 결국 “테러의 방지와 자국국민들의 안전보장”이라는 것은 미명에 불과하고, US-VISIT의 근본적인 목적은 미국의 세계지배, 미국식 자본의 세계경영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완성하고자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미국중심의 세계질서 구축을 위해 한편으로는 어린아이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트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인류의 개인정보를 자신들의 관리체계 안에 포섭하겠다는 것이다. 9·11이 가져왔던 충격과 공포는 미국으로 하여금 소위 ‘악의 축’에 대한 징벌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악의 축’을 길러낸 ‘악의 제국’인 자신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자국민들의 고통을 이유로 본격적인 패권주의의 전개를 획책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이다. 그 과정에서 세계 인류의 인권은 실종되고 군수산업과 석유재벌을 위시한 자국 자본의 이해가 ‘인권’의 이름으로 포장된 채 인류 개개인에게 강요되고 있다. US-VISIT는 그 시작일 뿐이며, 모든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인프라의 구축일 뿐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전 세계에 강요하고 이를 통해 자본의 이해를 극대화하려는 미국의 노력은 이처럼 개인의 인권조차도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생체여권의 발급과 US-VISIT를 단순한 통관절차의 강화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렇게 수집된 개인정보는 언제 각각의 개인들에게 탄환이 되어 돌아갈지 모른다. 지난 1990년대 초반 인도네시아에서 자행되었던 반정부인사들에 대한 살인과 폭행의 배후에는 미국이 제공한 수 천 명의 명단과 신상정보가 있었다. 그들이 수집하는 생체정보가 후일 어느 광포한 정권에 제공되어 인도네시아의 악몽을 재현하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국은 얼마든지 그런 일을 재현할 수 있는 국가이고 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미국이 중심이 되어 세계적으로 구축하려는 개인생체정보수집체계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과 저항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