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식 생산 혹은 미국식 산업의 역사 : 미국 과학기술과 산업발전 역사 2> 전쟁기술과 미국과학 김 준 범 | 편집부장 이번에 다룰 내용은 1,2차 세계 대전과 미국 과학기술의 변화이다. 이전시기 미국에서 확립된 기술-생산 체계로서 대량생산 체계에 이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에 걸쳐 미국에서 일어난 과학-기술의 변화는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현대 산업의 골간을 이루는 과학과 기술의 관계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이 대학과 기업, 혹은 정부 연구소를 매개로 연결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몇몇 천재들의 손을 떠나 대규모 프로젝트로서 추진되는 현재의 일반적인 양태가 이시기에 이르러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1. 19세기 미국의 상황 19세기 이전 미국 과학은 유럽의 국가들(영국, 프랑스, 독일)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미국에도 피뢰침으로 유명한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과학자는 있었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연구가 인정되고 그의 주된 활동무대가 된 곳은 미국이 아닌 유럽이었다. 또 남북전쟁(1861-65) 이전까지 미국의 대학은 전문지식 양성보다는 도덕, 고전, 인문 등이 주를 이룬 교육중심적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미국과학이 전환점을 맞게된 것은 남북전쟁 이후였다. 전쟁이후 미국의 산업구조가 공업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전문지식중심의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고 제기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D.C Gilman이 초대 총장으로 있었던 Johns Hopkins 대학이 설립되었다. Johns Hopkins대는 독일의 연구중심대학의 영향을 받아 학부과정을 생략한 과학연구 중심의 대학원중심대학이었다. 엄격한 교수 임용기준을 적용하고 독일식의 세미나 제도와 실험실 제도 등을 도입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교육을 진행했다. Johns Hopkins대학은 1920년까지 1천여 명의 박사를 배출했고 이들은 여러 대학의 교수로 진출하게 된다. Johns Hopkins대의 성공의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유사한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 미국과학의 수준은 유럽에 비해서는 여전히 모자랐다. A.A. Michelson, J Gibbs등 유명한 과학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여전히 유럽이었다. 다만 지질학 분야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된 것은 당시 순수과학은 과학자들의 취미활동으로 여겨져 의회의 지원이 축소된 반면 연방정부내 지질 조사국등의 실용 기술을 요구하는 기구들이 생겨난 결과이다. 앞서 설립된 전문교육기관을 통해 배출된 대학생들은 이런 정부기구에 들어가게 된다. 2. 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미국과학의 변화 20세기 초반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연방정부가 강화되고 각종 전문직종들과 전문인 연합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는 연방정부의 과학활동 지원에 따른 것이었다. 공중보건국, 산림국, 표준국등에 과학교육을 받은 대학생들이 취업을 했다. 또한 국가가 운영하는 과학기구들이 성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실용학문에 대한 투자가 국가기구를 넘어선 기업체에서도 이루어지게 된다.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은 대학에서 전문기술교육을 위한 기초과학교육의 필요성으로 인해 확대되었다. 또한 G.E, Bell Lab, AT&T등이 만든 기업체 연구소에서는 순수과학연구자들도 고용하여 기술개발뿐만 아니라 순수연구도 수행했다. 이러한 지원을 통해 1910년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연구성과들이 나오게 된다. 특히 당시 첨단 분야였던 원자의 구조들을 이해하고 논의할 수 있는 젊은 과학자들이 미국의 교육시스템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미국 과학의 수준이 이전시기와는 다른 단계에 올라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에서 기초과학과 실용기술과의 관계이다. 기초과학과 실용기술이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던 유럽의 전통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전문교육기관인 대학을 매개로 긴밀한 연계를 맺게 된다. 또한 기업체연구소에서의 합동연구와 같은 기풍은 이후 미국과학의 전화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이후 미국에서 연이어 추진된 대규모 프로젝트 성공의 주된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1차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전쟁무기연구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는 당시의 전쟁이 19세기를 통해 이루어진 공업의 발달에 기반을 둔 전쟁무기의 혁신적인 발전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차 대전 이전에도 과학자문위원회(National Adversary Committee)을 통해 전쟁연구를 수행했으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민간기구인 National Research Council(이하 N.R.C)에서 본격적 연구를 수행하게 된다. N.R.C는 당시 유명한 천체학자였던 G.F Hale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합동연구를 통해 잠수함 탐지기술과 방독면 등 전쟁에 유용한 여러 가지 기술들을 개발하였다. 1차 대전 중 연구는 과학자와 기술자의 조직적 연구에 의해 수행되었고 이는 이후 과학자, 과학연구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를 변모시키게된다. 이시기 과학연구의 특징은 집단연구와 공동연구가 일반화되고 국가에 의해 연구과제가 제시되면서 과학연구가 과학자의 실험실을 벗어나 '결과'를 중심으로 효율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또한 정부에 의한 연구과제의 선정은 무한정의 예산을 과학연구에 투자하게 하였다. 이 결과 과학자는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고 Hale, Millikan, W. Noyes 등의 과학자들은 연구활동 뿐만 아니라 정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1차 대전 이후 정부는 당시 과학자문위원회의 의장이었던 Karl Compton(루즈벨트 정부 과학기술담당)이 주장한 과학연구에 대한 연방정부의 예산투자를 연방정부가 거절함으로써 과학자 집단은 연구의 든든한 후원자를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이미 미국과학은 거대 프로젝트라는 군침 도는 요리를 맛본 후였기 때문이다. 정계와 재계에 두루 안면이 있던 Hale등은 과학의 새로운 후원대상으로써 기업체를 찾게 된다. 1차 대전동안의 과학연구 성과에 고무된 기업체들은 이런 과학자들의 요구를 받아 안아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추진했다. 하지만 대공황을 거치면서 기업체의 후원이 줄어들자 미국 과학자 집단은 정부와 재단 그리고 기업을 세 축으로 하는 보다 안정된 후원그룹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과 학제적인 연구와 신분야에 대한 집중지원을 골간으로 하는 자구책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대공황을 통해 미국 과학자 집단이 깨달은 것은 기업의 지원은 경기에 따라 언제든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다 안정적인 후원은 만약 한시적인 기구가 아니라면 정부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1차 대전이 보여주었던 것은 전쟁기술의 경우 정부는 언제나 예산을 투자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바르가 부시(V.Bush)가 제창했던 국방연구의 필요성은 사실상 안정된 후원을 확보하기 위한 과학자 집단에게는 당연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3. 2차 대전, 과학과 정부의 새로운 관계 형성 바르가 부시는 국방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루즈벨트에게 국방연구위원회의 설립을 요구했다. 루즈벨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막대한 예산이 국방연구에 투입되었다. 이미 1차 대전부터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산업수준이 응집된 중공업 무기들의 전쟁에서의 전투력이 이러한 투자의 배경이 되었다. 2차 대전 이전 독일과 유럽에서는 기병과 보병 중심의 전략대신 장갑차와 탱크 그리고 전투기들을 동원한 대규모 화력전의 전략이 완성되어가고 있었고 미국 역시 그러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물론 미국은 독일의 집중적인 전력증강이 본토에 미칠 것을 우려하지는 않았지만 신무기 경쟁에 뒤쳐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기에 국방연구 위원회는 레이더 연구실을 설치하고 2000명의 인원과 매달 천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는 연구를 진행한다. 이 결과 레이더 방해기술과 고체연료 미사일등 괄목할 성과를 얻어냈다. 2차 대전이 본격화되면서 신무기 개발과 생산은 공황기 침체되었던 산업을 재활시키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당시 전쟁 무기들은 집중된 산업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생산이 다시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2차 대전 이후 과학자 집단은 정부라는 결코 돈이 마르지 않는 막대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4. 핵 개발과 미국과학 핵개발은 2차 대전 중 일어난 미국과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핵개발은 그 자체로서 미국과학의 이전 성과들을 총합한 것임과 동시에 군산복합체라는 특수한 형태의 미국식 생산 체계 확립의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원자폭탄의 개발은 아인슈타인의 저 유명한 상대성이론 E= m c2 에 근거했다. 즉 질량이 감소하면 그만큼의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원자폭탄은 이러한 특정 원소의 질량 변화 즉 핵분열을 이용한다. 최초의 핵분열 발견은 1938년 오토 한(Otto Hann), 마이트너(L. Meitner), 슈트라스만(F. Strasmann)으로 구성된 베를린 팀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다. 특히 우라늄 235의 분열은 연쇄반응으로 인해 핵분열시 질량 손실이 거대한 양의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에 대해 최초의 핵분열 발견자중 하나였던 마이트너는 무기화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이를 히틀러가 개발할 것을 우려했다. 헝가리 출신의 질라르(L. Szilard)를 비롯한 일단의 과학자들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학술지에 연구성과를 발표하지 않을 것을 결의하고 아인슈타인에게 미국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건의할 것을 요구했다. 아인슈타인의 제안에 따라 루즈벨트 행정부는 1939년 우라늄위원회를 건설한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우라늄위원회가 실제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핵무기 개발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0년 바르가 부시가 국방연구위원회를 만들면서 우라늄위원회는 국방연구위원회 산하로 흡수되었다. 한편 독일에서도 정부에 원자폭탄 개발을 요구하는 과학자들이 있었으나 히틀러 정부는 이미 재래무기의 효율성을 신뢰하고 있었고 과학자들도 원자폭탄의 실현가능성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에서의 원자폭탄 개발은 종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원자폭탄을 구현하는데 걸리는 문제는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우라늄235는 자연상태에서 우라늄238에 섞여 극히 미미한 양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당시 원자폭탄의 개발을 회의적으로까지 생각하게 하는 주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영국의 성과에 의해서다. 1939년에서 1940년 사이 영국은 모드(Maud)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원자탄 개발에 착수한다. 영국의 두 천재적인 과학자 프리시(O. Frisch)와 파이얼스 (R. Peierls)에 의해 당시 원자폭탄 개발의 가장 큰 장애였던 우라늄235의 추출이 가능해졌다. 게다가 지속되는 독일의 미사일 폭격에 의해 연구시설을 더 이상 확장할 수 없었던 영국은 미국에 기간의 연구성과들을 넘겨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이러한 영국의 성과에 힘입어 미국에서도 원자폭탄개발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로렌스(Lawrence)는 입자가속기(cyclotron)를 개발하여 입자가속을 통한 우라늄235와 우라늄 238의 분리를 실험하던 중 형성된 플루토늄239가 핵분열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들에 고무되어 바르가 부시는 루즈벨트를 설득하여 맨하탄 프로젝트를 실시하게 한다. 1943년 경 연구개발 책임자로 임명된 오펜하이머(R. Oppenheimer)는 로스 알라모스의 과학자들의 도시를 건설하여 원자탄 개발을 현실화시켜낸다. 1944년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어 보어(Bohr)와 질라르 등의 과학자들은 미국정부에 원자폭탄 개발 중단을 촉구하지만 이미 구르기 시작한 수레는 멈추지 않았다. 1945년 5월 18일 독일이 항복하자 원자폭탄개발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거세졌다. 하지만 이미 원자폭탄은 개발되어 있었다. 미국정부는 전쟁이후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소련에 대한 경고로 그리고 막대한 예산 지출에 대한 의회의 추궁을 의식해 결국 이미 승전이 결정된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차례로 지옥의 버섯구름을 피워냈다. 꼬마(Little Boy)와 뚱뚱보(Fat Man)로 각각 명명된 최초의 원자폭탄들은 미국 과학의 위력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었으며 비극의 시작이었다. 5. 결론 :: 미국과학과 전쟁기술 미국과학과 전쟁기술은 핵무기 개발이라는 매우 집중적이고 특별한 경험으로 대표된다. 독일과 영국 등의 노력에도 역사상 최초의 핵무기를 개발한 국가가 미국이었다는 것은 미국이 상당히 효율적인 연구 동원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전술했다시피 공동연구의 기풍이 강했던 미국적 체계에서 원자폭탄 개발이 제기한 숱한 문제들은 막대한 예산과 효율적인 연구를 통해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은 이후 미국과학을 막대한 예산 투입한 거대프로젝트 중심으로 변화시켰고 꿈과 같은 거대과학을 탄생시켰다. 또한 미국 과학자 집단의 독특한 성격-전문연구자이자 정계와 재계의 기획자-으로 인해 냉전시기 광적인 무기경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꾸준한 파생산업을 문어발처럼 거느리게 했다. 이는 지금 미국이 더 이상 적이 없는 상황에도 광적으로 무기개발에 열중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기관차처럼 전쟁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미국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은 1,2차 대전 그리고 냉전이 만든 총동원체계의 떡고물이다. 과학자와 정치가 기업이 얽혀있는 이 총 동원체계야 말로 지금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PSSP
한미 정상 공동 성명과 노무현 방미 결과를 비판한다 지난 5월 11일부터 17일까지 노무현의 방미를 놓고 정치권은 극도로 치닫는 정신분열양상을 보여주었는데, 또다시 여야가 자리를 바꿔 앉아 야당이 대통령을 옹호하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평소 노무현의 대미 인식에 대해 의심의 고삐를 늦추지 않던 한나라당은 이번에는 "노 대통령이 방미외교에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전략적 상호주의에 입각한 줏대 있는 대북포용정책과 전통적인 한미동맹 복원을 추구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며 상찬한 반면, 민주당은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는 하지만 씁쓸한 얼굴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재야출신 의원들은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던 대북 포용정책에 상당한 후퇴를 가져왔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지난 3월 14일, 이라크 파병결정 이후 노무현 행정부의 대미정책은 당선 직전 많은 사람들이 바랐던 상징 즉, 미래지향적인-동등한 대미관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이에 의혹의 눈초리를 던지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향해서는 동네 부랑아 가랑이 밑을 기었다는 한신을 들먹여가면서까지 '외교란 실리를 추구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노력에도 대학생들과 시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를 않았고, 대미굴욕외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노여움은 끝내 5·18 망월동 묘역 참배를 하려는 노무현 대통령을 후문으로 돌아가게끔 하였다. 한 술 더 떠 광주지방법원은 이런 대학생들의 '망발'을 응징하려는 대통령의 의지마저 법적으로 기각하였다. 정말로 대통령 못 할 짓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한 상황이다. 노무현의 극단적인 지지자들은 이를 두고 두개로 나뉘기 시작한 듯한데, 노무현이 수구보수언론의 압력에 못 이겨 굴복하기 시작한 듯하다며 우려섞인(그러나 동정어린) 시선을 던지는가 하면,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의 입지를 이해해야 한다며 이럴 때 우리가 올바로 서야 노무현 대통령이 제대로 선다는 상황론을 전개하기도 한다. 이 둘의 차이는 그리 큰 것도 아닌데다 뜻밖의 상황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노무현의 이 같은 행동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노무현 행정부의 한반도위기 인식이 대단히 불명료하고, '평화번영정책'에서 엿보이듯 이에 대한 해법이 지극히 낙관적인데다, 더 나아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보증해 줄 수 있는 명확한 정치세력까지 (아직까지는)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정치 전망이라는 딜레마에 휩싸인 노무현이 지극히 위험스러운 방향으로 나갈 것임은 이미 경고한 바 있지 않은가?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강화한 한미 정상 공동 성명 : 한미 정상 공동 성명의 모호한 수사(修辭)? 이미 출국에 앞서 '성숙하고 완전한 동맹관계의 형성,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한미 경제협력 강화가 포함될 것'이라며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었던 것인 만큼, 한미 정상 공동 성명에서 드러난 두 정상 간의 인식의 합치점을 정확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언젠가부터 '동등한' 한미관계가 '성숙하고 완전한' 한미관계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런 탈바꿈과 함께 오늘날 '성숙하고 완전한' 한미관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두 정상은 '기술력을 활용하여 양국군을 변혁하고 새로이 대두하는 위협에 대한 대처능력을 드높임으로써 한-미 동맹을 현대화'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는 곧, '동맹 현대화 맥락에서 주한미국을 핵심 축으로 통합하는 계획'을 마련하기로 하고, 이른 시일 내에 용산 기지를 재배치하기로 하였다는 말로 뒷받침된다. 즉 '성숙하고 완전한' 한미관계란 사실 주한미군을 정점으로 하는 군사동맹의 강화를 의미하고, 그 인식의 저변에는 '새로이 대두하는 위협에 맞서기 위한 대처능력의 향상'이 깔려 있다. 공동 성명의 두 번째 내용은 북한 핵개발에 대한 입장이다. 두 정상은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의 완전하며, 검증가능 한 그리고 비가역적인 제거를 위해 노력해 나간다는 강력한 의지를 다시금 천명'하였는데, 이는 최근 북한이 베이징 회담에서 제시한 대담한 해법에 대해 '비가역적인 제거(irreversible elimination)'라는 표현을 빌림으로써 우회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즉, 핵 프로그램의 중단 주체가 북한이 아니라 미국에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더구나 '평화적인 수단을 통한다'는 말과 달리 '평화와 안정에 대한 위협이 증대될 경우 추가적 조치를 검토'할 것임을 명시하였는데, 이는 오히려 군사적 수단의 사용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이 같은 이중수사는 남북협력에 대한 언급에서도 드러나는데, 한편으로는 두 정상이 '인도적 지원이 정치적 상황 전개와 무관하게 이루어 질 것'임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노무현 대통령은 향후 남북교류와 협력이 북핵문제의 전개상황에 따라 추진될 것'이라는 점을 명시함으로써 '연계정책'에 따라 남북교류협력 방향의 변화가능성을 시사하였다. 물론, 북핵문제에 있어 중국의 역할을 환영하며 한국, 일본, 러시아 등 여러 국가들 사이의 다자간 협상의 중요성을 재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의미인데, (협상) 비용의 분담 중요성을 확인하는 것이며, 동시에 북한에 대한 국제적 압박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한편, 노무현의 '평화번영정책'의 개요에 대해, 부시행정부는 남북화해과정을 지지한다면서 '남한의 남북화해과정은 북핵 문제 해결 촉구에 사용되어야 함'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공동 성명의 세 번째 내용은 경제관계다. 양 정상은 '한국 경제 기초 여건이 견실하다는데 견해를 같이하고, 한국의 무역, 투자, 성장의 지속적인 증가 전망에 대해 강하게 확신'하고 부시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의 한국 경제에 대한 지속적인 구조조정 노력을 환영하고 지지'함으로써, 미국에 집중되어 있는 투자자본에게 한국의 투자 전망도 괜찮다는 부시의 전언을 전달하였다. 동시에 여기에는 양국간 경제협력 강화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음도 확인해두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내용은 노무현 행정부와 부시 행정부의 완전한 동반자 관계 형성에 대한 천명이다. '당선이후 빈번한 전화통화를 통해 양 정상은 상호 신뢰와 존경의 기반을 형성하였으며, 한·미간 공조가 강화될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그리하여 부시행정부가 제기한 여러 우려가 해소되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동시적이며 미묘하게 언급하고 있어 수사(修辭)로만 보면 모호할지 모르지만 정치적 의미는 명백하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에서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핵심으로 하는 한·미 동맹의 강화며, 북핵문제의 해결은 모든 수단(군사적 수단을 배제하지 않는)을 사용해서라도 이루어야 하는 완전히 '제거'가 최종 목표며, 동시에 평화번영정책 즉, 남북화해협력은 이 모든 과정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동북아 중심 국가 모델의 핵심은 바로, 현 단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핵심 목표 즉, 무역개방, 투자, 투명성 제고에 있으며 이것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무현의 지지자들은 수사의 모호함, 애매한 표현이라는 말로 가득하다고 평가하면서 이번 한미 공동 성명의 예외성을 부각시키고 한미정상 공동성명의 정치적 의미를 가리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평화주의자' 노무현의 한반도 위기에 대한 해법이, 그 정치적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좀 더 분명히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부시독트린으로 수렴중인 평화번영정책, 그 자기 모순 누차 강조해왔듯 1990년대 미국의 대북 정책 초점은 핵, 미사일로 상징하는 대량 살상 무기의 '완전한 제거'에 있다. 이를 위해 (페리보고서에서 확인되듯) 북에 대한 포괄적 접근(engagement)을 시도하는데, 바로 '협상'과 '군사력의 증강'이라는 두개의 경로에 대한 동시적 추진이다. 과거 DJ 정부의 햇볕 정책은 (노벨상으로 빛나는 그 화려한 말잔치와 달리) 이것의 축소판 혹은 하위 파트너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남북관계는 늘 북미관계에 종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문제는 또 다른 점에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데, '협상'이 '군사력 증강'과 별개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군사력 증강'을 전제하거나 그것에 종속되어 전개된다는 점이다. DJ 정부의 햇볕 정책은 물론이거니와 그 지지자들도 이점을 정확히 비판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결국 미국의 한반도 전쟁위협에 대해 대단히 무기력한 대응을 낳고 만다. 참여정부의 평화번영정책 역시 이점을 분명히 포함하고 있는데, 평화번영정책의 전제가 '북핵 해결'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는 점과 '북한을 위시한 불특정 위협 및 비군사적 위협 동시대비전력 우선 보강'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이 같은 모순과 긴장은 미국의 군사적 수단 사용에 대해 부시 앞에서 말 한마디 꺼내지도 못하는, 되레 그것을 승인하는 공동성명의 채택으로 이어진 것이다. 더구나 참여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한반도 평화체제를 바탕'으로 동북아의 물류, 관광, 무역, 산업의 중심 및 해양과 대륙을 잇는 '경제의 관문'으로 발전시켜나가겠다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어 더욱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이를 뒤집어 놓고 본다면 동북아 허브 중심 국가 구상을 방해하는 것이 평화롭지 못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 같은 상황은 한국에 대한 초국적 자본의 투자가 어려운 핵심요인으로서 '북핵' 더 나아가 '북한체제'라는 상징으로 이어지면서, 한반도 평화의 위협요인이 '북핵'으로 뒤바뀌게 되는 상황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지배세력에게 한반도 평화란 초국적 자본의 투자의 안정성 확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북을 압박해야 평화로운 상황이 가능하다는 인식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번영정책에서 평화란 전쟁위험의 항구적인 제거라기보다는, (전쟁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경제의 불안, 투자의 불안 요인의 제거에 더 가까운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방미는 노무현의 '평화번영정책'과 '부시 독트린'이 자연스레 수렴하는 계기였다. 지금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다고 해서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 결국 노무현 행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그 화려한 수사와 달리 내재적인 두 가지 모순, 즉 가시적인 적의 완전한 제거를 목표로 하는 전쟁-군사력의 현대화를 전제하고 그것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또 전쟁의 내부화를 통한 자본주의 수탈체제의 재구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민중의 위기, 한반도 위기를 가속화하는 반민중적 정책일 뿐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있는'지금의 상황에 안도하기 앞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의 상황이 '평화라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축으로 전개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초민족적 자본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이름으로 노동자, 농민, 여성을 상대로 착취의 전쟁을 벌이고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반도에서 군사력의 완전한 우위를 통해, '대량살상무기'의 완전한 제거라는 이름을 빌어 북한 체제의 완전한 전복을 꾀하려 드는 항상적인 전쟁 위기상황을 비판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북아 중심국가의 구상'과 '평화번영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그리고 '미 제국주의의 한반도 전쟁위협'에 대한 비판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반세계화 투쟁과 반미반전 투쟁, 즉 제한 없는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들의 운동만이 진정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위의 자료는 print friendly format을 한글 파일로 편집한 것인데, 오늘 확인해보니 PDF 파일이 있더군요. 참고하십시오.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cfr.org/pdf/Korea_TF.pdf
5월 19일자로 보고된 미 외교관계협의회(CFR)의 "북한의 핵도전에 직면하 여(Meeting the North Korean Nuclear Challenge)"를 등록합니다. 제임스 레이니 등이 포함된 CFR 태스크-포스팀은 본문에서 △한미 관계에 있어 조화를 회복하고 △명확한 정책과 강한 동맹관계 수립을 선언하고 △ 북한과 진지하고 조속하고 직접적인 협상을 약속하고 △북한의 의도를 검 증하기 위해 단기 정책 제안을 개발하고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중국과 의 노력을 배가하고 △우연한 사고, 즉 협상이 실패하고 북한이 연료를 다 시 가공하고 핵무기 실험을 할 경우를 대비하여 미국은 더욱 의미심장한 제재를 가하고 핵 및 여타의 불법-치명적 무기의 수출을 차단하기 위해 봉 쇄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본 보고서의 발문 헤드라인이 "북한의 핵프로그램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미국은 진정한 대화를 약속해야 하고, 미국-남한의 동맹관계를 회복해야 하고, 중국으로 하여금 더 많은 역할을 수행토록 해야 한다"입니다.) 이는 지난 해 말의 보고서(<<A Letter from the Independent Task Force on Korea to Administration>>, 2002.11.26. 본 게시판 96번 게재)에서 다 소간 유보했던 쟁점들에 대해 현재적 입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오늘 게시된 자료라 저도 아직 제대로 검토하지는 못했는데요, 언론의 보 도에 따르면 대략 다음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미국 의회 소속 싱크탱크인 외교협회(CFR)는 19일 보고서를 통해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대해 북한에 대한 직접 협상 거부자세를 포기하고 북한 과 "검증가능한" 핵문제 해결책 모색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CFR 연구원들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북한이 추가적인 핵무기 물질을 제조 할 수있거나 제조하기 위한 단계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 하면서 북한의 상황이 "진정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목적이며 이것이 성공할 때까지 그들이 미국을 붙잡아두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상황은 미국이 더 많은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과 공존하면서 핵분열성 물질의 수출 을 저지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외에 별 다른 선택권이 없는 쪽으로 바뀌 고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이같은 상황이 초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북한과 검증가능 한 핵문제해결을 위해 양자간 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한편 미국이 지 역협력 국가들에 대해 대북 강경자세를 취하도록 요구할 경우 협상은 실패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그러나 북한이 이미 사용 후 핵무기물질을 보유하고 있어 수개월 내 추가로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같은 선택방안도 유효하 지 못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또 대북협상이 실패해 북한이 핵무기를 계속 추구할 경우 비상대 책으로 미국은 대북 제재를 모색하고 북한 핵무기와 여타 불법적이거나 치 명적인 물품의 수출을 저지하기 위한 봉쇄조치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해 야 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북한 핵문제해결을 위한 다자간 협상틀에 지역협력국들을 참가시 키려는 부시 행정부의 현재의 대북 접근법과 관련, 미국의 지역 협력국들 은 미국이 북한의 핵 시설들을 공격할 경우 북한의 위협처럼 한반도에 전 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우려로 대북 제제를 반대하면서 미·북간 협상의 필 요성에 공감하고 있지만 부시 행정부가 선호하는 다자간 협상방식에는 별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워싱턴=AP) --------------------------------------------------------------- <<Meeting the North Korean Nuclear Challenge>>(2003.5.19) Eric Heginbotham(Senior Fellow, Asia Studies) Morton I. Abramowitz(C.V. Starr Senior Fellow for Asia Studies II,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James T. Laney(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원문링크) http://www.cfr.org/publication.php?id=5973
미국 민주당 기관지라 칭할만한 <<더 네이션(The Nation)>>에 2003년 4월 21일자로 게재된 데이빗 코트라이트(David Cortright)의 "지금 우리가 해 야하는 것(What We Do Now)"을 등록합니다. 5월 15일자 한겨레(!)에서 미국 내 반전평화운동에 대한 평가 글이라고 소 개하길래 찾아봤더니, 여러 가지 측면에서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특히 미국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 로 광범위하게 형성된 반전평화 운동이 이라크 종전 이후 어떤 목표를 가 지고 나아갈 것인지를 토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너무 빠른 종전이 우리 가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며 단기적으로 다음과 같은 정책 의제를 제안합니다. -국방부가 아닌 민간이 집행하는 이라크 국민에 대한 대대적인 인도적 지 원과 경제적 보조 -(국가와 국민을 위해 군사적 서비스를 제공한) 페르시아만에 파견된 미 군 장병(특히 사병들)에 대한지지, 지원 -군대의 귀환 -이란에 대한 전쟁 및 군사적 위협 반대 -석유를 위한 전쟁 반대 -중동 지역에서의 평화(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해결) -중동 지역에서 무장해제("대량살상무기로부터 자유로운 지대", 즉 이라크 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한 것은 중동 전역으로 확대되어야 함) 이어서 저자는 부시 행정부의 선제적 예방전쟁 전략을 비판하면서 대량살 상무기의 확산을 막기 위해 더 안전하고 비용이 덜 드는, 궁극적으로는 더 효과적인 대응 전략을 대안적으로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저자는 이라크와 북한 등 대량살상무기 확산 잠재국의 무장해제를 지지한 다고 밝히면서 (이들에 대한) UN 무기 사찰단의 엄정한 감시, 외교적 해 결, 군사적 수단이 아닌 정치적 수단을 통한 정책지지 유도 등을 강조합니 다. 동시에 무장해제는 궁극적으로 전세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며 NPT 에 대한 미국 및 핵보유국의 이중적 관점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 자는 이를 수행하기 위해 일정한 강제력이 필요하다면서 결국 UN의 권위 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무기력하게 후퇴합니다. 또 무장해제를 위해 경제 적 원조와 안전보장 등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무엇보다도 저자 는 UN 안보리의 승인이라는 조건만 갖춰진다면 미국은 필요한 경우 군사 적 개입을 할 수 있다는 논리로 미끄러지고 맙니다(물론 역으로 안보리의 승인이 없다면 무력개입은 불가능하지만...). 결론적으로 저자는 미국의 정치적 방향과 지도력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 하다고 하면서 2004년 미국 대선에서 부시 행정부의 재선을 저지하는 것 이 당면한 과제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반전평화운동, 그 중에서도 대중적인 시민들의 운동이 즉각 나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초 제가 기대했던 반전운동에 대한 평가글로서는 턱없이 거리가 먼 것이 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아마 미국 내에서 반전평화 운동에 동참했 던 대중들의 심리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참고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특 히 결론부분의 경우, 낙천낙선운동-햇볕정책-(반미없는) 촛불시위-노무현 당선-정계개편으로 이어지는 국내 지형과 유비되어 흥미롭습니다. 한편, <<더 네이션>>에 기고되는 다른 글 중에서도 부시의 일방주의적 정 책을 비판하면서 UN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는 '순진무구한' 글들이 많이 있던데요, 저의 경우 민주당( 및 이의 지지세력)이 다음 대선에서 이를 강 력히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섣부를지는 모르겠지만 911 이후 '선제적 예방전쟁'은 이전의 '페리 프로세스'를 대체하는 미국 의 새로운 대외전략(당파를 초월한)이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어쨌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원문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thenation.com/docprint.mhtml?i=20030421&s=cortright
미국 외교관계협의회(Council on Foreign Relations)가 작성한 (2003.5.7) "이라크 전후 계획(IRAQ Postwar Plan)"입니다. 간략한 문답 식 구성으로 되어있는데, 종전선언 이후 이라크 재건 계획에 관한 미국의 구상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 생각됩니다. 질문의 내용은 대략 다 음과 같습니다. 참고하십시오. "미국은 전후 이라크를 통치할 계획이 있는가?" "누가 전후 계획의 책임이 있는가?" "그 계획은 실제로 어떻게 실행되어 왔는가?" "미국은 전후 이라크에서 발생할 문제들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준비가 부족하다면 그것은 명확히 무엇인가?" "전후 이라크에 대한 접근법에서 국무부와 국방부의 차이는 무엇인가?" "대통령 특사로서 브레머(Bremer)가 임명된 것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본 글에 따르면 브레머는 레이건 행정부 당시 국무부관리이자 대테러리 즘 책임자라고 함) "그것들의 반대 이유는 무엇인가?" "브레머의 임명으로 인해 정책[결정]은 국무부의 접근법에 가깝게 될 것인 가?" "ORHA(재건 및 인도적 지원 부서, Office of Reconstruction and Humanitarian Assistance)의 계획은 무엇인가?" "약탈과 무법은 사라졌는가?" "가너(Jay M. Garner, 퇴역장군) 팀은 충분한 준비가 되었나?" "이라크 과도(interim) 정부에 대한 타임테이블은 무엇인가?" "다른 나라들은 권력의 진공 상태를 채우기 위해 도움을 주고 있는가?" "이는 미국의 정책 변화를 의미하는가?" "현재 얼마나 많은 미군이 이라크에 있는가?" 원문링크는 다음을 참고 하십시오. link_http://www.cfr.org/background/background_iraq_postwar.php
지난 5월 1일 노무현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이번 미국 방문의 목적이 "한미동맹의 우호관계를 확인하고 이를 통해 한반도 안보환경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이라며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공조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안보환경이 경제에 끼치는 불안요인을 해소하기 위한 것"임을 재차 확인하였다. 노무현의 방미를 총괄하는 박기문 청와대 외교보좌관에 따르면, 이번 두 정상의 회동 결과가 과거 정상회담에 잇따른 공동기자회견이 아니라 격을 높인 '공동성명'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6일 '청와대 브리핑' 인터뷰에서 그는 이번 공동성명에는 성숙하고 완전한 동맹관계의 형성,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한미 경제협력 강화가 포함될 것이며, 31명에 달하는 경제사절단이 동행하여 각종 투자설명으로 북핵문제로 인한 경제 불안 요인을 대거 일소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가 있을 것이고 주장하는데. 은근히 방미결과를 자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은근한 자랑은 물론 국빈방문도 공식방문도 아닌 실무방문에서 오는 자격지심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노무현 정부가 이번 방미를 통해 국민들에게 무언가 가시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방미가 과거 역대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요식행위였고, 그래서 역대 정권의 대통령에게는 공동기자회견이면 충분했을 일이 노무현에게는 불만족스러웠던 것이다.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했는데, 바로 파병에 따른 '국익'이 무엇인지, 국민들이 납득할 만한 결과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자신이 국민들에게 한반도에서 전쟁은 결코 안 된다고 주장해왔던 '평화주의자'라는 사실을 대내적으로 확인시켜주어야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권력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라곤 여론의 힘 말고는 없으며, 앞으로도 상당기간 여기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지지 기반이 지난해 대선 때 (반미 없는) 촛불의 후광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촛불의 후광은 그로 하여금 냉전적 보수세력과 변별점을 충분히 밝혀주었고, 이것이 자신의 대통령 당선에 톡톡한 역할을 했는데, 이걸 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일이다. 그가 틈만 나면 한 단계 진전된 한미관계 운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불필요하게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보수주의자들을 안심시켜야 하기도 했는데, 국내 정국운영을 위해서이기도 하거니와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네오콘)들과 일정한 공조관계 없이는 동북아 중심 국가는 고사하고 상대적인 경제안정조차 묘연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방미로 자신의 지지자들과 반대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성과가 가능한지 의구심이 이는 것도 당연한데, 노무현은 여기서 잠정적이나마 일정한 해법을 찾은 듯하다. 역대 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정권기반을 가지고 있는 노무현으로서는 명분보다는 실리를 쫓는, 정치적 견해보다는 실용주의적 태도로 일관하는 방법 말고는 다른 선택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동등하고 자주적인 한미관계"라는 취임 전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국익'이라는 말 한마디로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한 것은 단적인 사례다. 현재 방미를 앞둔 상황에서도 노무현은 예의 주장만을 되풀이할 뿐, 사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태도와 정견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 초민족자본의 압력에 굴복한, '잘못 끼워진 첫 단추'―파병 그리고 '국익' 당선 직후 노무현의 정견을 의심해온 일부 언론의 호들갑, 즉 '노무현을 의심하는 미국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루빨리 미국에 가야한다'는 주장을 논외로 한다면, 노무현의 방미 일정이 구체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취임 이후 북핵 위기가 해외자본의 한국 투자전망까지 위협한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히면서부터다. 취임 직전에 이미 무디스는 한국 신용등급전망을 두 단계나 낮춘 상태였고, 코스닥지수는 40선이 무너지면서 시장 존폐가 거론되는 상황이었다. 한국의 신용평가를 하향 조정하려는 움직임이 일자 반기문 외교보좌관은 이를 만류하려고 급하게 미국 월가를 방문했고, 윤영관 외교통상장관은 3월 12일 라디오방송국과 행한 인터뷰에서 4월말 5월초 방미를 추진 중임을 시사했다. 3월 10일 미국은 청와대에 이라크전 지지를 공식 요청했고, 나종일 국가안보보좌관은 성의있는 답변을 해야 할 것이라고 보고하면서 지지를 천명하고 나섰다. 윤영관을 필두로 하는 외교통상라인은 한미동맹관계를 고려해 기본적인 것은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후 노무현과 부시 두 정상은 14일 전화통화를 통해 이라크전 지지와 북핵의 평화적 해결지지 그리고 노무현의 방미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미 비전투병 파병방침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이 조금씩 언론에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이유인즉 '국익'때문이라는 것이다. 파병 국회동의안 처리가 한참 논란이 일던 3월,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를 위한 사전정지작업의 일환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있던 윤영관 외교통상장관은 3월 28일 미국에서 있었던 한·미 외무장관 회담의 성과로 '북한과 이라크는 다르다'는 파월장관의 언급을 공개하면서 '북핵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합의하였다고 전했다. 파병에 따른 국익의 증거, 즉 한반도 평화의 보증 증거를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4월 2일 파병 안이 통과된 후에야 당시 논의내용이 상세히 알려졌는데, 윤영관 장관의 요청은 한반도에서 무력 사용 배제(rule out)였지만 미국은 이를 완고한 자세로 거절하였고, 그나마 '평화적 해결'에 대한 미국의 이해도 북한에 대한 경제제제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 서로 공통의 이해 속에 순조롭게 이야기를 나눈 것은 '북한과 이라크는 다르다'는 의견뿐이었다. 2003년 벽두부터 이미 주한미군 재배치 가능성을 흘려왔던 미국은 국회파병안 통과가 지지부진하자 고위급 미국 관료들의 입을 통해 일제히 주한미군 제2사단을 한강 이남으로 재배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남한의 보수 우익들은 주한미군이 재배치되면 북의 도발을 어떻게 막느냐며, 한미 군사동맹관계의 정상화와 파병안의 신속한 통과를 주장하고 나섰고, 대규모 군중집회를 벌이기도 하였다.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이것이 마치 노무현 정부의 새로운 한·미 동맹관계 요청에 따라, 공군력과 해군력에 주안을 두는 방위체계를 위해서라지만 실상은 전혀 반대다. '예방전쟁'이라는 미명아래 자국의 선제공격을 합리화해 온 미국의 최근 작전개념에 비추어 보면, 주한미군 재배치는 주한미군의 한강이남 재배치를 통해 북한의 공격 표적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북한의 군사적 보복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미국의 선제공격 기회를 공고히 하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3월 말 한·미 연합 연습 군사훈련 차 한반도에 임시 배치된 F-117 스텔스 전폭기 6대와 F-15E 전폭기 20여대가 되돌아가지 않은 채 한반도에 배치되고, B-1, B-52 폭격기는 괌에 배치되었다. 노골적으로 무력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하므로 임기 전에는 주한미군이 재배치되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고, 윤 장관은 당시 외무회담에서 유동적인 안보상황, 투자자 동요를 이유로 주한미군 재배치 문제를 신중히 다뤄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 역시 미국은 일말의 재고 가치도 없다는 듯 냉랭한 반응을 보이며 거절했다.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의 반민중성 1994년 제네바합의 당시 외무부장관을 역임했던 한승주 주미대사는 4월 16일 워싱턴 부임에 앞서 연합신문과 벌인 인터뷰에서 '다자회담이라면 북한과 대화할 수 있다'는 미국 측 제의가 농축우라늄 핵개발 논란 당시 '핵 폐기선언(의지)을 하지 않으면 대화하지 않겠다'는 초기 미국의 입장에 비해 상당히 진전된 자세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실상은 정반대인데 제네바 협정의 고의적인 지연/파기 과정에서 한국, 일본의 역할을 강조한데서 확인할 수 있듯, 미국이 다자회담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북한의 핵/미사일에 소요되는 비용을 다자 국가들이 분담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더구나 다자간 협상의 틀은 평화적 해법을 찾기 위한 제반의 시도보다는 북에 대한 다자간의 압력으로 드러났고, 이는 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격하는데 적합한 수단이 될 뿐이다. 이를 극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3자 회담을 전후한 최근 북한의 핵개발 시인/보유 논란, 미국의 북 핵무기 보유 용인 논란과 폐연료봉 재처리 징후 포착 보도들이다. 최근 들어 미국은 회담 때마다 북한의 핵무장과 연관있는 크고 작은, 지극히 부분적으로만 사실인 정보를 흘리는 경향이 있다. 미국은 그것의 효과를 아주 톡톡히 보았는데, 이는 다자간 협상 테이블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국가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였고, 더 나아가 그들로 하여금 직접 북에 압력을 행사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정부는 이를 공공연히 부추기기도 하였는데, 3자회담의 윤곽이 그려지기도 전에 윤영관 장관은 이 모든 것을 미국 혼자서 감당하기는 곤란하다며, 일본, 러시아, 한국 등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며 미국입장을 거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무현의 행보는 단지 현재의 북한의 핵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을 합의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평화번영정책' 구상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지를 이끌어 낸다는 계획에서 비롯된다. 주지하다시피 '평화번영정책'은 노무현 대통령이 새로운 경제성장의 비전으로 제시한 '동북아 중심 국가 구상'과 밀접히 관련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초민족적 자본의 투자와 입지를 유치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는 남한 내에서 이들의 활동에 장애가 되는 장벽을 해체하는 한편, 동북아시아의 군사적·정치적 안정을 강화하는 것이 전제조건이 된다. 노무현 정권이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중시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노무현은 방미 과정에서 남한 자본주의가 더욱 강력히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에 편입되기 위한 활동을 벌일 것이다. 예컨대 부시 일가의 유력한 지역구인 텍사스 주에 대규모 반도체 공단을 조성한다든지(삼성), 파병으로 한국에 대한 신인도가 제고되어 투자전망이 밝다느니, 이라크 재건 건설 사업에 지분을 요청하겠다는 따위의 말들이 그것이다. 단적으로, 노무현 정부는 문화인들의 집단적인 반발로 스크린쿼터 축소가 불가능해지면서 사그라든 한·미 투자협정 논의를 데외 신인도 제고라는 명목으로 미국측에 먼저 제기하고 나섰다. 재경부 권태신 국제업무정책관 역시 "양자간 투자협정(BIT)"이 체결되면 40억달러의 투자유치 효과에 대외신인도 회복까지 얻게 될 뿐만 아니라, 한·미 관계에 대한 불안감 시비도 사그라질 것"이라며 BIT 논의 개시를 주장하고 나섰다. BIT까지 논의될지 여부는 아직도 불투명하긴 하지만,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로 도하개발아젠다(DDA) 세계무역기구(WTO) 아태경제협력체(APEC) 등을 통한 다자 및 지역 차원의 무역·투자자유화 문제까지 논의할 것임은 분명하다. 얻을 것보다 내줄 것이 많은 투자협정에서 내줄 것이 많은 나라가 먼저 나서는 것이 '국익'을 추구하는 외교라면 이쯤에서 무슨 더 할 말이 있겠는가. 미국에 대한 굴종이 불러올 진정한 비극 결국, 노무현 행정부의 대미종속적 외교는 동북아와 한반도에서 미국의 패권적 지위를 공고화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노무현 자신은 거듭 '어떤 경우에도 아프간이나 이라크전처럼 한반도에 전화의 재앙이 몰아쳐선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 부시 대통령의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내겠다'고 공언했지만, 공언과 달리 결과적으로 미국의 한반도 선제공격 위협은 위협대로 남아있으며, 한반도의 위기는 더욱 심화되고 있는 판국이다. 이는 미국이 한반도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노무현 행정부가 애써 외면한다는데 일차적 원인이 있고, 두 번째로 한반도 위기에 대한 비판 즉, 미국에 대한 비판을 삼가고 실용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오히려 위기 대응 능력을 상실하게 된 탓이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미국과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노무현 행정부는 반미감정에 대한 미국의 불편한 심기를 달래려는 노력에 앞장선 나머지, 반미감정을 제어해야 한다는 명목만을 앞세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촛불시위 자제, 반미를 동반하는 반전시위 자제, 전교조의 반전 교육 실태를 조사하라는 지시에서 엿볼 수 있듯 노무현 행정부는 대중들의 자주적 요구를 외면한 채 한미 동맹의 강화만을 주문처럼 읊조리고 있을 뿐이다. 이는 명백한 민주주의의 파괴에 다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행위는 생존권을 위한 민중들의 투쟁에까지 미치고 있는데, 투자유치를 향한 대규모 세일즈 외교에만 매달리고 있는 노무현에게는 화물연대 대규모 쟁의행위가 짜증나는 일이었고, 급기야 빠르게 대책을 강구하라는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드러나고 만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외교정책을 과거 냉전적 보수 정권의 그것과 똑같이 볼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반도 위기에 대한 노무현의 대응책 역시 현재의 한반도 위기 상황에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의 '평화번영정책' 구상과 이를 보장받기 위해 미국에 대해 취해온 종속적 태도(반미없는 평화주의)는 그 의도와 달리 전쟁에 반대하는 대중의 열망을 무디게 하는 것이었고, 이는 결국 미국의 뜻대로 전쟁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것(무기력)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노무현식 외교의 딜레마인 것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은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불행히도 지금부터 조금씩 흘러나오는 정보를 살펴보면 사태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미국은 북한에게 '선핵포기'원칙만 강조할 뿐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어떤 진지한 태도도 보이지 않고 있으며 일본 역시 23일 미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경제봉쇄 등 북핵에 대한 강도 높은 대응을 주문하고 나섰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미국의 한반도 전쟁 책동을 막을 수 있냐는 것이다. 너무나 상식적인 말이지만, 노무현과 미국이 제어하려고 하고 있는 반미와 민주주의, 평화를 향한 대중들의 투쟁, 이것만이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