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기획팀 1장. 국제주의의 대장정 17세기 이래로 배태되어 온 민족적 감정은 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발생한 두 번의 근대적 대혁명의 충격 하에서 출현했다. 평등의 원리 속에 정치적 시민권을 기초하기 위해 ‘조국'과 ’민족‘은 특정한 왕조의 정당성에 대립되는 것으로 제시되었다. 프랑스의 『인권선언』이나 칸트의 『영구평화론』에서 드러난 것처럼, 갓 태어난 애국주의는 스스로가 보편주의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인 것이기를 바랬다. 그것은 국경을 넘어 민족적 이상과 형제애를 화해시키고자 했다. 이에 따라 부르주아지는 인류의 보편이익을 담지한 것으로 믿어졌다. 자본이 산업적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상업적․농업적 상태로 남아있던 시기에 민족은 인민의 상상적 공동체를 표상했다. 그들은 아직 상상적 공동체를 파열시킬 계급의 새로운 적대를 경험하지 않았다. 19세기 전반기에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구성되었다. 1846년 『인민』이라는 에세이에서 미셀레(Michelet)가 인식한 사회적 분화는 그 이후 1848년 혁명에서 전면에 드러날 정도로 증폭되었다. 이제 우리는 1848년 6월 혁명의 나날들과 (『이상적 교육(l'Education sentimetale)』에서 플로베르가 상기시킨) 파리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유혈진압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건들은 생산과 재생산의 자본주의적 관계의 핵심에서 제거할 수 없는 사회적 균열을 보여주면서 유럽의 역사를 ‘둘로 쪼갰다’. 코스모폴리탄주의에서 국제주의로 쁘띠 부르주아와 노동자의 새로운 엘리트들은 그들의 투쟁을 유럽적 전망 속에 기입했다. 1850년대에 마치니(Mazzini), 코수트(Kossuth), 루이 블랑(Louis Blanc) 등은 1848년 망명자들의 수도인 런던에 모였다. 가리발디(Gribaldi)는 베네수엘라에서부터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의 독립을 위해 전투에 참여했다. 갓 태어난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는 산업적 비약과 동시에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또는 프랑스에서 박해받은 혁명가들의 추방(영국, 미국,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하도록 선고를 받은)에 의한 숙련 노동력의 이동에 의해 강화되면서 계몽주의의 코스모폴리탄주의를 대체했다. 형성 중인 노동자 운동은 민족국가를 자연적 현실로도 정치사회의 최종적 해답으로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근대성의 종별적․이행적 형태로 생각했다. 1848년에 이미 『공산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은 그것의 지양을 당면과제로 설정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제 계급의 연대는 피억압계급 내에서 신성한 (종교적) 합일과 민족적 신성동맹에 대립했다. 그러한 유년기의 국제주의는 성숙기의 민족주의에 대응했고, 국제주의에게 민족은 더 이상 세계적 시민권을 향한 진보를 표상하지 않으며, 기원, 인종, 땅, 언어 등에 대한 낭만적 추구 속에서 종말에 다다른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 이후로 혁명의 정치적 민족은 역사를 자연화하고 숙명화하는 신화적이고 (르낭의 정식으로 따라) 광물적이거나 ‘동물학적인’ 우스꽝스런 풍자화로 대체되었다. 식민지 팽창, 쇼비니즘과 인종주의 1860년대부터 지배계급들은 점점 더 광신적이게 되어 가는 민족주의를 위하여 낭만적 민족주의를 버렸다. 1853년 고비뇌(Gobineau)의 『인종불평등』과 그 이후 스펜서 사회학의 부산물들에서 드러난 것처럼, 제국적 헤게모니 형성의 과정에서 민족은 인종화되었다. 그러한 민족주의는 실증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양분을 얻으면서 혁명적 무질서라는 커다란 두려움을 가장 잘 쫓기 위해 문명을 수출하고 질서 내에서 진보를 확산하는 것처럼 뒤늦게 가장했다. 시민성은 민족성 내에서 강화되었다. 민족은 종족화되었다. 1850년대에 쇼비니즘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는 것은 민족과 보편성 사이의 분리를 보여준다. 그러한 진화는 식민 정복 전쟁의 논리와 근대적 제국주의의 출현 속에 기입되었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미래의 ‘대재앙의 씨앗’을 담고 있었다. 그 시대의 정복의 정신을 요약하면서, 세실 로드(Cecil Rhodes)는 ‘행성들을 병합하려는’ 자신의 야심을 보여주었다. 팽창은 최고의 목적이 되었다. 다시 한번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면, 그러한 목적은 결국 ‘권력의 수출’과 ‘폭력의 기능화’를 동반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적․신학적 반유대주의는 인종적 반유대주의로 변모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그러한 반유대주의가 증폭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부르주아적 파퓰리즘은 계급타협(그리고 프랑스에서는 공화주의적 협약)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대립시켰다. 이는 또한 호전적 경향과 군사주의적 확장에 의해 굴절되었다. 1912년 바젤 사회주의 총회의 평화주의적 성향의 분출(바젤의 종각에서 아라공은 서정적인 찬사를 보냈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전쟁에 맞선 전쟁’의 감정에도 불구하고, 신성 불가침의 [민족적] 통일성을 향한 사회주의 정당들의 참여는 1914년 8월에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을 낳았다. 1차 세계전쟁 이전의 [민족적] 팽창기 동안 주요 유럽 나라들에서 노동자 운동의 노조적․의회적 관료화는 사실상 그것의 ‘민족화’와 쌍을 이루었다. 민중적 문화 속에서 계급적 외양의 공동체와 민족적 공동체라는 두 개의 상상적 공동체는 일치되었다. 정당들의 인터내셔널은 근본적으로 민족적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프롤레타리아들이 서로를 살육하는 전면전의 발발에 저항하지 못했다. 혁명적 국제주의와 관료적 쇼비니즘 1919년에 제2인터내셔널의 트라우마와 러시아 혁명이 낳은 열망 속에서 제3인터내셔널이 탄생했다. 1920년 바쿠에서 개최된 동방민족대회는 식민권력에 의해 억압받는 인민들의 민족적 요구들을 보편화했다. 전간기 파시스트 체제에 의해 격화된 민족주의에 직면해서, ‘조국도 국경도 없는’ 투사들의 새로운 혁명적 국제주의(그것은 장 발텡(Jan Valtin)의 기념비적 저작, 빅토르 세르쥬(Victor Serge)의 기억들, 엘리자베스 포레츠키(Elizabeth Poretsky)의 『우리들』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영광의 시간을 누렸다. 여기서 스페인 내전은 국제적 가교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국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적 이론, 대러시아 쇼비니즘의 재등장(이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나 『이반 대제』와 같은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속에서 호화로운 이미지로 등`장한다), 크레믈린에 대한 각국 공산당들의 관료적 예속 등에 의해 내적으로 급속하게 침식되었다. 1943년 반파시즘의 제단을 향한 인터내셔널의 순수하고 단순한 해산은 그 자체는 국제주의의 종말의 에필로그에 불과했고, 이미 국제주의는 망령이자 유령이 되어 있었다. 2차 세계전쟁 이후 국제주의는 소련이나 중국의 국가이성에 의해 박탈당했고 제3세계에서 변용되었다(이는 특히 전투적인 서인도인 프란츠 파농의 생애와 저작에서 잘 드러난다). 국제주의는 식민지 세계와 중국의 지도자들이 ‘폭풍지대(zone de tempetes)’라고 부른 지역으로 축소된 채, 비동맹국가들의 운동인 반둥회의의 형성과 함께 완화된 형태의 제도적 표현을 찾았고 두 개의 핵 강국 사이에서 불안한 균형을 활용했다. 그것은 쿠바의 지도자들에 의해 주도된 3대륙 회의와 1967년 라틴아메리카연대조직(OLAS)의 형성 속에서 급진화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대륙적 투쟁이라는 전략적 전망 속에서 전통적 혁명운동과 새로운 혁명운동을 연합하려는 것이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알제 담화(Discours d'Alger, 1965)나 3대륙에 보내는 그의 유언서신(1967)에 대한 반향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국제주의는 제국주의적 메트로폴리스 내에서의 반자본주의라는 차원과 현존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의 반관료주의라는 차원으로부터 분리된 채 ‘자유세계’와 ‘사회주의 진영’ 사이의 대결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었다. 그것은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중봉기를 지지하는 영감이 넘치는 원리들에 대한 거부와(명목상 그것들은 소비에트 탱크들의 케터펠터에 의해 부과된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라고 주장되었다) 인도차이나의 해방운동 사이의 균열의 증거가 드러나면서 소진되었다. 2장. 세계화에서 또 다른 세계화로 빅토리아 시대의 세계화, 유럽과 미국에 의해 가속화된 산업화, 식민주의적 팽창 등은 1864년에 노동자국제연합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851년과 1862년의 런던 대박람회는 1864년 구성될 총회를 예비하는 노동자 대표들 사이의 접촉과 회합의 장이 되었다. 1980년대에 로날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가 주도한 자유주의적 반-개혁, 시장의 탈규제, 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순환 등이 이번에는 국제주의의 새로운 비상으로 표현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자본, 무역, 생산의 세계화는 이제 다시 다양한 형태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는 투쟁의 국제화를 낳고 있다. 시장의 전제에 맞서는 대장정의 한 걸음 한 걸음들로서 그 투쟁의 주요한 상징적 장소들은 저항의 지정학적 기묘함을 보여준다: 시애틀(1999), 밀라노(2000), 프라하(2000), 니스(2000), 포르투 알레그레(2001), 제노바(2001), 포르투 알레그레(2002), 브뤼셀(2002), 바르셀로나(2002), 몬트레이(Monterrey, 2002), 플로랑스(2002), 포르투 알레그레(2003), 하이드라바드(Hyderabad, 2003), 생-드니(2003), 나아가 퀘벡, 제네바, 워싱턴, 방콕, 멜버른, 다카, 바마코(Bamako), 교토, 부에노스 아이레스, 몬트레이. 3년 동안 이들 도시 모두는 WTO, IMF, 세계은행, G8, 다보스 포럼 등의 수뇌부 회의에 대항하거나 유럽 위원회(Conseil de Europe)의 회의에 대항하는 대규모 시위나 회합의 무대가 되었다. 빅토리아적 세계화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19세기의 빅토리아적 세계화는 운송․통신의 거대한 기술혁명에 의해 지지되었다. 몇 년 동안에 철도망은 가지를 치면서 확장되었다. 전신은 전선으로 지구 전체를 직조했다. 증기선은 80일 동안에 세계 일주를 실현할 수 있게 만들었다. 타자기와 인쇄 윤전기는 하나의 인쇄물이 엄청나게 많은 부수로 발간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만들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인터넷, 위성통신, 그리고 원격통신이었다. 1860년대는 철도, 전신, 해운 등에서 거대한 혁신이 있었다. 또 이 시대는 거대무역의 탄생, 은행신용의 비약적 발전, 부르주아적 열정과 정념의 폭발(에밀 졸라의 『돈』에서 드러난 것 같은),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사라지는 행운, 요란스런 파산과 정치-금융 스캔들 등과 같은 사건들을 목도했다. 유동성 은행(Credit mobilier)의 파산이나 무자비한 경쟁에 의해 제거된 철도회사들은 신경제의 환상이나 엔론사의 파산의 등가물이었다. 이 시기는 또한 식민원정, ‘학살산업’, 금융적 타락, 그리고 잭 런던에 의해 상상된 강력한 마피아를 예견하는 ‘암살단’의 시대였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도 마피아적 범죄, 모든 생물 종에 대한 암거래, 마약과의 전쟁, 전자 해적과 인터넷 테러리즘, 무자비한 경쟁과 제국적 전쟁 등과 같은 일련의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있다. 그것은 상품과 자본의 순환을 제한할 줄 모른다. 또한 그것은 국경 없는 폭력, 생태위기, 증권시장 패닉 등의 세계화를 의미한다. 1998년 아시아 위기나 2001년 아르헨티나 위기와 같은 국지적 위기는 카오스 물리학에서 말하는 나비 효과처럼 세계화된 체계 내에서 증식된다. 그러한 세계화의 주창자들은 특별한 수식어 없이 그것을 경제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의 숙명적 결과로 제시한다. 그것은 그 이면의 부조리가 무시하고자 하는 그 자신의 근거를 갖는다: 공간에 대한 병적 허기증과 가속에 대한 광란. 이는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에 내재된 것이다. 자본은 자신이 산출한 그 자신의 한계와 사회적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저하하는 이윤율에 대한 반 경향을 조직하기 위해, 자신의 활동영역을 끝없이 확장하고 자신의 변태와 회전을 가속화한다. 정보통신 및 바이오-테크놀로지의 혁명은 그러한 장기적 운동들을 증폭한다. 세계의 새로운 분할 제국적 세계화의 양상들은 경제적 논리와 기술혁신에 의해 기계적으로 인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 독일의 재통일, 소련과 그 영광의 해체 등에 따른 새로운 정치적 상황에 조응한다. 1943년과 1944년에 테헤란, 얄타, 그리고 포츠담에서 열린 일련의 회의들에서 협상되었던 세계적 양극 균형은 지역적 위기와 분쟁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동안 냉전을 유지시켰다. 냉전 질서의 붕괴는 1815년 비엔나 조약이나 그 이후 1848년 인민의 봄을 낳은 19세기나 2차 세계전쟁 직후 중요한 조약들을 낳은 20세기 초와 같은 새로운 세계 대분할의 시대를 낳았다. 그러한 분할은 밀실의 조심스런 분위기 속에서 세계라는 ‘거대한 체스판’을 놓고 각국 재상들이 벌이는 평화적인 놀이가 아니다. 그들의 지위는 칼과 칼의 충돌에 의해 확립되고 해체된다. 1991년 평화와 번영의 동의어로 ‘신세계질서’를 선언했던 부시 시니어의 약속과 반대로, 시장이 지배하는 최상의 세계는 지난 15년 동안 걸프 전쟁에서 중앙아시아 전쟁, 그리고 발칸 전쟁이나 아프리카 내전을 거쳐 근동지역의 분쟁에 이르는 끊이지 않는 전쟁을 목도해야 했다. 군사주의는 제국의 (다소간) 숨겨진 얼굴이다. 지배 열강들의 군비지출은 새로운 기록을 경신했다. 미국의 군비지출은 전세계 국방비 지출의 40%를 넘으며 NATO의 열강들 중 2위를 차지하는 영국의 군비지출의 11배, 그리고 프랑스 군비지출의 12배에 이른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또한 무장한 세계화다. 다국적 기업의 숫자가 1970년대에 대략 10,000개 미만에서 21세기초에 40,000개에 육박하게 되었고, 3억 가까운 사람을 고용하며 그 사람들 중 40%가 애초의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다할지라도, 그러한 세계화는 민족국가들과의 연계를 단절하지 않는다. 비록 국제기구들의 배치구조가 점차 형성되고 있지만 그것들은 민족국가에 등을 기대고 있으며 그 내에서 어느 것도 ‘세계적 통치성’의 윤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IMF와 세계은행은 채무국의 감독 기관으로 기능하면서 그들의 긴급융자 조건으로 구조조정 계획의 적용을 제시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그것의 재앙적 결과들을 보여준다. 부채의 메커니즘은 지배받는 나라들을 훈육하고 부를 이전하며 지배하는 나라들을 위해 불평등을 증가시키는 전달벨트 역할을 한다. 세계은행은 사회보장체제를 사적 보험과 연금 기금으로 대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정치의 사용법을 고정시키는 퇴행을 향한 관계를 생산했다. 1995년 WTO의 창립과 함께 새로운 일보가 내딛어졌다. 그 기구는 협조와 조언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라케시[모로코의 도시]의 무역협정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하고 분쟁조정기능을 한다. 협정에 반하는 조치를 취한 어떤 나라가 법을 벗어났다고 선언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된 국제적 관할권의 윤곽이 잡히고 있다. 결국 국제적 권리의 대부분이 언제나 국가간 관계와 조약들의 영역에 속한다면, 헤이그 국제재판소와 국제형사재판소는 세계화된 법률질서의 출현의 초안이 된다. 1989년에 세계은행의 수석 경제학자로 승진한 존 윌리엄슨(John Williamson)은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이름으로 1990년대에 국제금융기구의 공식적 교리가 될 10가지 항목을 요약했다: 재정적자 축소, 자본과 주주들을 위한 재정개혁, 금융시장의 자유화, 수출증가, 관세권의 완화, 외국인 투자 장려, 공기업의 사유화, 경제의 다양한 부문들 내에서 경쟁의 탈규제, 모든 형태의 소유권의 보장. 그러한 권고사항은 유럽연합의 성서이자 마하스트리히트 조약의 ‘수렴 기준’의 모형이 되었다. 그런 지향의 결과는 사기와 같은 시장의 재앙적 발전 속에서 여러 나라들에 의해 오랫동안 검토되었다. WTO의 권위에 종속된 국제협약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 나라들은 첨단기술을 보유한 초민족적 기업들에게 정보산업이나 생명공학 내에서의 혁신에 대한 독점권을 보장해주었다. 농업에 대한 협정은 그 주요한 시장들을 대폭 개방시켰지만, 열강들의 일부에서는 보조금을 받는 생산을 공고화하고 과도한 덤핑에 우호적인 조건이 마련되었다. 더욱 일반적으로 WTO의 정치는 공적 이익이나 생태적 처방에 대한 다른 모든 고려 대신에 자유무역을 특권화한다. 그러한 경제적․제도적 경향들은 권력과 결정의 새로운 장소들에 조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조정하는 자유주의적 정치에 대한 저항을 낳았다.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사회주의 진영‘의 해체는 국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e d'Etat)의 종말을 표시했다. 그러한 국제주의는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라는 이름으로 헝가리(1956), 프라하(1968), 아프가니스탄(1980)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정당화했다. 그런 국제주의의 종말은 사회운동을 ’진영‘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와 동과 서 사이의 선택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었다. 그러한 운동들은 1990년대에 절대적 자본주의와 단극적 제국 지배에 맞선 동원의 과정에서 혁신된 모습으로 재등장했다. 치아파스 산악지방에서 사파티스타의 봉기에 의해 1996년에 조직된 ’다면적(intergalactique) 회합‘은 사후적이지만 그러한 새로운 국제주의의 상징적 서막으로 제시되었다: 그것은 전통적인 것―원주민 공동체의 특수한 요구들―과 새로운 것―인터넷과 근대적 통신기술의 활용―을 결합했다. 2차, 3차 인터내셔널에 대한 비판적 평가 속에서 21세기의 국제주의는 진정으로 전지구적인 차원을 꿈꾼다. 그것은 세계의 일반화된 시장화와 사유화에 대응하면서 선행자들보다 훨씬 더 지리적으로 포괄적이고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문화들을 결합하고 전통적 노동자 운동으로만 환원할 수 없는 행위자들의 다양성을 재조합해야 한다: 페미니스트 운동, 생태주의 운동, 문화적 운동, 청년운동과 노동조합의 운동 등. 20세기의 트라우마적 경험에서 회복되는 과정의 고통을 동반하면서 그러한 국제주의는 신중하게 형성되고 있다. 피억압자들의 정치는 ‘극단의 시대’ 동안 누적된 패배와 회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따라서 저항의 세계화가 기계적으로 반체계적 요구나 대안적 기획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공적 공간의 빈혈에 균형을 맞추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시민사회’라는 통념은 매우 다의적이다. 세계은행은 태국 빈민포럼의 투사들이나 브라질의 무토지농민운동이 부여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의미를 시민사회에 부여한다. 세계화된 자본이나 초민족적 기구들은 세계적 ‘시민사회’를 자신들의 계급적 전략의 본질적 요소로 간주한다. 그들은 세계적 시민사회를 ‘기업의 세계’, 사회적 재생산 역할을 자임하는 거대 기구, 그리고 체계의 결핍요소를 보충하는 것으로 호명된 조직들 사이의 협력을 제도화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것은 새로운 범-정부적(para-gouvernementales) 관료기구를 신성화하고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지원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특정조직을 포섭함으로써 배제된 집단과 취약 계급의 사회적 요구를 일정한 방향으로 호도한다. 여기서 ‘시민사회’는 제도적 합의 내에서 갈등을 탈정치화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새로운 민중운동이나 부활한 민중운동은 시민사회를 시장화에 맞선 공간으로 제시하면서 그 자신의 내용을 제공할 수 있다. 프랑소아 위타르(Francois Houtart)가 ‘아래로부터의 시민사회’라고 부른 것의 윤곽이 잡혀가고 있는데, 그 속에서 공공재와 공적 서비스에 대한 대안적 논리를 발견한 피억압 집단들의 의식이 표현되고 있다. 단어들의 의미 그 자체는 유통되는 시대의 상황에 따라 뒤섞이기 마련이다. 스탈린 시대의 공식적 단어 속에 편입되면서 위대한 국제주의적 약속은 관료적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적 명분으로 기능했다. 만약 그 단어들의 의미가 불확실한 것이 된다면, 혼돈은 지속될 것이다. 시애틀이나 제노바에서의 시위를 낙인찍기 위해 거대언론들은 그것을 ‘반세계화주의’로 규정했다. 그들은 마치 민족국가, 부족 또는 종족의 향수가 문제인 것처럼, 그리고 마치 국제주의는 이제부터 모든 흐름에 개방된 시장의 소유물이 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쇼비니스트적 경향들은 단지 흥행성이 높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국제적 시위와 회합들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한 시위와 회합은 사실상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주의적 전통과 NGO들의 ‘무국경주의(sans-frontierisme)'를 혼합하는 용광로가 되었다. 그 구성요소들은 위기와 전쟁의 효과 하에서 국가의 재등장과 인간적 가치의 군사화에 맞서면서 급진화되는 경향이 있다. 포르투 알레그레, 제노바 또는 플로랑스의 시위대들은 편협성이나 폐쇄성, 또는 ‘반세계화주의’ 등의 함의를 거부하면서 스스로를 ‘대안세계화주의’로 정의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제 대안적 세계화를 위한 투쟁이 문제인 것이다. PSSP
명동성당 들머리 오른쪽 계단에는 4동의 텐트가 세워져 있다. 약 8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정부의 대대적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집중 강제 단속추방이 시작된 11월 15일부터 ‘강제추방 저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의 요구를 내걸고 농성단(이하 농성단) 투쟁을 시작하였다. 농성 14일차를 맞는 오늘(11월 28일)은 늘 시끌시끌 분주하던 명동성당의 농성장이 유난히 조용하다.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하 고용허가제)은 지난 7월31일 국회를 통과해 내년 8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 법률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극히 부분적인 합법화에 불과하며 특히 산업연수생제도와 마찬가지로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는 등 온전히 노동권을 보장하지 못한다. 특히,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12만 여명의 4년 이상 체류자의 경우 11월 15일까지 무조건 이 나라를 떠나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제추방 하겠노라 정부는 말하고 있다. 11월 11일부터 현재까지 무려 5명의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늘은 그들을 추모하며 1일 단식을 진행하는 날이다. 남한 사회 이 땅 위에서 일하고 있는 40만 이주노동자의 바램은 노동비자를 통해 합법적으로, 노동권을 보장받으며 노동하는 것이다. 명동성당의 농성단은 매일 오전 7시 반 하루 일정을 시작한다. 농성단의 하루 일정은 다음과 같다. 아침 출정식과 식사, 약간의 휴식 후 10~12시 교육, 12~1시 명동 거리 선전전, 1~3시 식사 및 휴식, 3~4시 노래 교육, 4~6시 group activity(노래, 마임, 드라마, 그림), 6~7시 식사, 7~8시30분 저녁 집회 이후 텐트별 미팅 및 간담회를 진행하고 11시 잠자리에 든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은 민중의료연합과 약국노조(준)에서 진료를 오고 미용사 노조 조합원분들이 오셔서 일주일에 한 번 이주노동자들의 머리를 손질해 준다. 현재 농성단은 많이 안정된 상태로 투쟁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렇게 투쟁을 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농성단의 공동 대표 샤말타파와 상황실장을 만나 이 투쟁의 의의와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농성단의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그 동안의 이야기와 앞으로의 결의를 들어보았다. PSSP 농성단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산업연수생제 폐지 !!! -노동허가 쟁취 !!! -이주노동자 노동3권 쟁취 !!! -사업장이동의 자유 확보 !!! -모든 이주노동자 석방 !!! 샤말 타파(평등노조 이주지부장, 농성단 공동대표, 네팔) 인터뷰 Q. 농성단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지금까지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나요? A. 지금 이주노동자가 80명 정도, 방글라데시, 네팔, 인도네시아 필리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국인을 포함하면 90명이 좀 넘습니다. 어려운 점이라면 감기 때문에 친구들이 아프기 시작한 것입니다. 빨리 난로 같은 것이 준비돼야 하는데 좀 걱정되요(현재는 텐트마다 난로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세수나 샤워를 해야 되는데 아직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안 되는 것입니다. 샤워하고 싶다는 요구가 제일 크고 또 이주노동자 동지들에게 이전에 일하는 회사에서 돌아오라는 전화가 오고 있습니다. 내년 6월까지 단속추방이 연기됐으니 괜찮다고 자꾸 전화가 오니까 많은 친구들이 고민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내부 교육과 토론 등을 통해 극복해가고 있습니다. Q. 장기적인 투쟁인 만큼 대표로서 어깨가 무거울 것 같습니다. 특별한 결의가 있다면? A. 저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대표자, 각 텐트 대표자들이 함께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단 저는 나름대로 아프지 않고 항상 친구들 앞에 있을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어떻게 문제를 함께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저와 농성단 상황실장님이 함께 매일 아침을 먹고 텐트마다 방문해서 간단하게 회의나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Q. 이주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들머리 밖을 나가지 못하게 되어있는 만큼 하루하루 일정(프로그램)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소개 부탁드립니다. A. 프로그램 중에서 친구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되는 교육프로그램인 것 같아요. 그리고 아침과 저녁 집회는 항상 한 명씩 다 돌아가면서 발언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이 발언을 미리 준비하고 또 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원래 12~1시까지는 선전전 시간이예요. 그제는 명동 사거리까지 전체대오가 나가서 선전전을 했어요. 근데 조금 걱정되는 것은 들머리 밖으로 나가면 단속에 걸릴 수 있기 때문에 걱정이 좀 되요. 그래도 거기까지 나가니까 친구들이 다들 좋아했습니다. 친구들은 밖에 나가고 싶어해요. 집회도 가고 싶고요. 하지만 우리는 여기 농성투쟁을 끝까지 지켜내야지만 나중에라도 우리가 연대하고 싶은 거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이는 못 가고 몇 명씩 가고 있어요. Q. 시민들 반응이 좋은가요? A. 네! 왜냐면은 성당오시는 신도들도 조금씩이라도 음식이나 투쟁기금을 주고 가시고 ‘힘내세요’라고 말씀해 주세요. 여기 성당 쪽으로 지나갈 때 웃으면서 파이팅이라고 말해주시는 거 볼 때 맘이 많이 좋아요. 우리를 지지해주는 사람 많이 있구나.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잘못된 것 아니고 올바른 거구나 느껴서 친구들 많이 좋아해요 Q. 농성 투쟁 준비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A. 오래 전부터 했죠. 지난 7월 31일에 정부가 고용허가제 발표하면서 3년 미만, 3년 이상 4년 미만, 4년 이상 이런 식으로 나눠서 정책을 실시할 거라는 얘기를 했잖아요. 그 때부터 진짜 단속추방이 실시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이 많이 됐어요. 회의할 때마다 집회할 때마다 그런 얘기했고, 바로 그 고용허가제 통과 이후부터 우리 농성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렇게도 안되면 단식 등 높은 수준의 투쟁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라고 그때부터 얘기됐어요. 구체적인 준비는 약 한달 전부터 했어요 Q. 강제추방 집중 단속(11월15일)을 앞두고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해고된 것으로 압니다. 그분들의 어려운 점을 소개해 주신다면? A. 첫 번째는 월급을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회사 기숙사에 사는 많은 친구들이 갈곳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특히 남자보다 여성들이 많이 심각해요 여자들은 기숙사에서 나가라고 하면 어디 가겠어요? Q. 그런데 농성단에 여성이 3분밖에 없죠? A. 남자들도 적습니다. 지금 추방되어야 하는 이주노동자가 12만이잖아요. 그 중 여기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은 80여명, 전국적으로는 아마 1000명 정도. 이렇게 따지면 아직 이주노동자가 발전되지 못하고 우리가 노동자라서 투쟁해야 된다는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구요. 또 여성들이 더 그렇죠. 여성들의 경우 무서운 마음이 있고 또 아직은 동남아시아 쪽에서 사회적으로 여성과 남성의 차별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3명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Q. 농성단이 이주노동자 중심의 투쟁을 기획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간략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운동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작년(농성)부터 됐었다고 생각해요. 전에는 우리가 상담소나 교회에 가서 임금체불 등에 대해 ‘도와주십시오’라고 했지만, 물론 아직도 그것도 더 많이 필요하죠, 이제는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제가 농성조직하면서 그런 얘기했어요 제발 이번에는 반드시 이주노동자 중심으로 하자. 우리 목소리로 우리가 싸움 만들자. 그래야만 이주노동자도 더 좋아질 수 있다. 친구들도 그런 생각 가지고 있어요. 우리의 투쟁으로 만들자라는 거요. Q. 현재 무수히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숨어있거나 여전히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 한마디. A. 많은 친구들이 어쩔 수 없이 숨어있고,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숨어있는 친구들에게 정말 우리가 언제까지 한국에서 단속될 때마다 숨고 도망가고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죽지말고 우리의 목소리로 우리의 투쟁으로 한국 정부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 투쟁은 나를 위한 투쟁 아니고 모든 이주노동자들 위한 것이니까요. 이제는 숨지말고 당당하게 나서서 우리와 함께 투쟁했으면 합니다 김 혁(민주노총 조직부장, 농성단 상황실장) 인터뷰 Q. 농성투쟁에 돌입하기까지의 과정과 배경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지난 7월 31일 고용허가제가 통과된 이후에 단속추방이라는 상황이 예상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 문제를 민주노총 차원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많이 논의되었고, 특히 민주노총 내부에 이주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기획단 회의를 구성해서 논의를 해왔습니다. 그 논의에서 일정하게 단속추방 고용허가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어떤 틀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되었습니다. 민주노총 내에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책본부를 먼저 구성했어요. 이것이 상임집행위와 중앙집행위를 거쳐서 중앙위원회에서 결의가 되었고 대책본부의 핵심사업으로 단속추방 반대와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위한 농성투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외국인노동자협의회 공동대책위원회(이하 외노협 공대위) 등에 적극적으로 제안을 했어요. 외노협 공대위에서 이 투쟁을 받아들여서 농성단을 구성했고 지난 11월 15일 명동성당에 진입해서 농성투쟁단 발족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약간의 견해차가 발생을 해서 외노협 공대위를 중심으로 한 농성단은 성공회 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지금 여기는 이주지부 및 한국이주노동자인권센터, 네팔공동체 등이 남아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Q. 외노협 공대위분들이 분리되어 나가게 된 쟁점이 궁금합니다. A. 역사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평등노조 이주지부와 외노협 공대위의 고용허가제를 둘러싼 요구안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민주노총은 이런 갈등 자체를 조정하고 하나로 만들어가는 역할을 하려고 했으나 실제로 농성투쟁단이 발족하는 과정 속에서 서로간의 주장이 계속 있었던 것 같다. 발화점은 자격문제였는데 실행위 위원회(현재 농성단과 유비하자면 집행위원회)회의에서 실행위원 자격을 두고 문제제기가 되고 그 과정에서 사업방식 등 여러 문제가 비화되면서 외노협 공대위 쪽 분들이 성공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Q. 작년 여름에도 이주지부가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는 이주지부에서 독자적으로 진행했다고 볼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여러 단체들이 연대를 하고 명칭 자체가 민주노총 대책본부 산하 농성단입니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A. 올해 민주노총은 비정규실을 독자적으로 구성을 하고, 비정규 사업에 많은 비중을 두었습니다. 그 비정규사업 중의 하나로 이주노동자 사업도 기획이 되었고 비정규실의 주요한 핵심사업으로 이주노동자 운동을 설정을 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민주노총 자체의 싸움으로 이주노동자 싸움을 받아 안은 것이죠. 이것은 지금까지 민주노총이 조직된 노동조합 중심의 활동을 했다면 비정규․이주 등 불안전 노동자와 관련해서 실제로 조직되지 못한 그리고 가장 바닥에 있는 노동자들의 문제를 핵심사업으로 가져가겠다는 의지이며 현실적으로 자기 내용을 밝힌 것이라고 생각이 합니다. 또한 역으로 얘기해서 이주노동자 문제가 이제 이주지부나 외노협 공대위만이 소화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버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사회적 문제가 되어있고 민주노총이 그것을 받아 안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는 거죠. Q. 농성단의 체계나 운영은 어떻게 되어있나요? A. 최고 의결기구는 총회가 있구요. 만약 이후에 정부와의 협상 등 중요한 사항들이 발생할 때 총회를 통해 방향을 이주노동자 스스로가 결정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적으로 총회를 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예요. 그래서 총회에 준하는 집행위원회가 있습니다. 집행위원회는 이주노동자 10명당 1인 씩 선출하고 지원단체의 경우 상근 역량을 파견한 단체에 한해 1인씩 대표자격(불안정노동철폐연대, 사회진보연대, 한노정연, 미래연대)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1주 1회 회의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농성단 공동대표로 민주노총 홍준표 부위원장님과 이주지부 샤말동지가 선출되어 있습니다. 집행위는 의결기구 성격을 갖고 농성단 일정을 매일 집행하기 위해 상황실이 있습니다. 상황실 산하에 투쟁조직팀, 선전팀, 교육팀, 연대사업팀, 총무팀을 두고 있습니다. 그 외 여러 연대하는 단위들 연대로 배치해서 나가는 체계입니다. Q. 아무래도 투쟁이 장기화 될 것 같습니다. 전망이나 계획은? A. 민주노총이 이 투쟁을 자기 사업으로 하겠다고 했지만, 현재까지 민주노총 산하 평등노조 이주지부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영향력이 높은 것은 아닙니다. 아직 외노협 공대위 및 인권 단체들의 영향력이 높은 상태죠. 바로 이런 것들이 명동성당의 농성투쟁 자체가 전국적 집중 구심이 되지 못하고 분산되게 하는 요인일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이 투쟁을 최대한 하나의 방향으로 모아나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할 것 같아요. 이후에 거점들간의 연대를 최대한 도모해야 할 것 같고 더 나아가서 방향성을 일치시키고, 투쟁수위를 높여나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정부와의 교섭같은 경우도 적극적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차피 농성투쟁은 장기적인 국면입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이주노동자) 내부에서 거점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들을 어떻게 모아서 공동행보를 할 수 있는가가 가장 관건일 것 같고 그 과정에서 투쟁수위도 조절해 가면서 긴호흡으로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스하나(여성, 인도네시아) 인터뷰 Q. 현재 농성장에 여성노동자들은 몇 명이나요? A. 3명입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이 2명이고, 네팔에서 온 사람이 1명입니다. 그 중 2명은 결혼을 해서 부부로 농성장에 참여하고 있고, 저는 혼자입니다. 그 여성들을 보면 부러워요 Q. 외롭지 않으세요? A. 외로워요. 외롭지만 그래도 우리가 여기 오기 전에 결의 가지고 왔잖아요. 힘들고 외로워도 같이 우리 약속했잖아요. 동지들과 서로 얘기하고 서로 변혁하고 우리 끝까지 투쟁하자고 했어요. 노동자로서의 권리 받을 때까지 우리 포기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고 계속 같이 있을 거예요 Q. 한국에는 언제 왔어요? A. 96년에 왔는데요. 3년 동안 산업연수생 했어요. 99년 1월에 돌아갔다가 99년 5월에 다시 한국에 연수생으로 왔어요. 2년 비자 받았는데 3년하고 싶어서 한국말 시험 보려 공부했는데 많이 어려웠어요. 그래도 합격했어요. 그래서 비자가 1년 연장됐어요. 그때 저는 어차피 3년 있으면 돌아가야 되쟎아요. 그래서 회사 나왔어요. 그때 불법체류자 됐어요. 2002년 5월 달부터 지금까지 불법체류자 신분이예요. Q. 산업연수생 때, 무슨 일을 했어요? A. 사철 스타킹 만드는데 연수생 월급 조금 줘요. 많이 일하면 월급 조금 많아요. 어차피 기본급이 작아서 잔업을 많이 해도 70만원 정도로 줬어요. Q. 이주지부 운동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어요? A. 저는 2002년 5월 달에 연수생이었는데, 그 때 회사에서 나왔어요. 그때 통장 가지고 나왔어요. 통장에 돈 있잖아요. 그거 되찾아야 되는데 무섭고 걱정되고 불안하고 그랬어요. 어딜 갈 때 계속 뒤에 보고 누구 따라오나 보고 계속 그랬어요. 그때 고딜을 만났어요. 이주지부에서 아마 도와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렇게 했는데 거기 언니가 은행 가서 돈 찾아 주었어요. 그때는 한 두 번 집회에 갔지만, 심적으로는 같이 투쟁해야지 마음 없었어요. 2003년 1월부터 모임에 나가고, 조합원은 7월 달에 됐어요 Q. 근데, 여기 농성장에 왜 여자가 별로 없어요? A. 그 동안에도 집회에 나가도 여성이주노동자들은 별로 없었어요. 저는 집회 나가잖아요. 그러면 여자가 멀 그렇게 나가는 거야 그런 소리도 있구요. 여자들은 남자가 안 나가면 안가요. 남자가 가면 따라가고 저는 남자 친구 없어도 몰래 집회 갔다오고 해요. 남자친구는 이런 거 싫어해요 A. 힘든 점은 없어요? Q. 힘들지만 조금 재밌어요. 여자끼리 많이 있으면 말 좀 안 통해요. 여기도 남자끼리 싸우잖아요. 여자 숙소 따로 있고 이런 거는 좋아요. Q.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부탁해요? A. 우리는 똑같은 인간이잖아요. 우리는 불법체류자가 아니고 인간이예요. 그냥 한국인과 같은 노동자니까 함께 연대합시다. 우리 권리 얻을 때까지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쇼학(방글라데시) 인터뷰 Q. 자신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농성장에서 교육팀 팀장 맡고 있습니다. 능력은 없지만 동지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Q. 언제 한국에 왔고 이주지부 운동을 시작하게 됐나요? A. 95년에 왔고, 98년부터 불법체류자가 됐어요. 이주지부 운동은 2002년 8월부터 시작했어요 2002년 2월 달에 성수지역 멤버가 됐어요. 단속기간 되면서 안산지역 맡아서 조직화를 했어요. Q. 교육시간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좋잖아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A. 동지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여러 나라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교육이 뭔지 몰랐던 것도 있고, 조합활동하고 있지만 교육을 많이 받아보지 못했어요. 또 종이와 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나의 경험도 누구한테 가르쳐주고 이런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동지들이 어떤 생각하고 있는지, 동지들이 어떤 식으로 우리 활동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지 그런 내용을 가지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으로 하는 방식이라 좋고 재밌게 받아들이는 거 같아요 Q. 앞으로 계획은? A. 먼저 리더 교육이 있고 앞으로 여러 단체, 조합에서 활동가분 섭외해서 동지들에게 유니온(노동조합) 왜 해야하는지 강의할 거예요. Q.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A. 나의 라이프 스토리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도 다시 떠올리고 되돌아보는 거 기억에 남는 거 같아요. Q. 한국인들에게 한마디 해주세요? A. 우리는 외국사람이지만 여기 한국에 와서 많은 고통과 많은 어려움 갖고 있고 그리고 이것이 우리 같이 진행하지 못하더라도 같이 어울리지 못하더라도 우리 시민들과 모든 분들한테 이런 문제를 갖고 있다 이런 거 알리기 위해서라도 투쟁을 통해 쟁취하는 거 뿐만 아니라 우리도 사람이다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려고 나섰습니다. 사실은 누구나 내가 도와준다 이렇게 얘기하면 어떤 도움받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불쌍한 해서 여기 온 거 아니라 우리 노동 운동 하러 온 이유도 우리도 떳떳한 사람이고 노동자다 나아가기 위해서 이렇게 운동하고 있고 우리도 도와주는 거 뿐 아니라 사람이니까 아픔이 잇고 이 아픔을 같이 나누고 느낄 수 있길 라티카(네팔) 인터뷰 Q. 언제 한국에 왔어요? A. 92년에 관광비자로 와서 불법체류했어요 Q. 한국에서 어려웠던 어떤 거에요? A. 월급 못 받은 경우도 많구요. 아파서 일 못한 것도 있어요 Q. 농성단에 여성이 3명밖에 없는데 그것 때문에 힘든 것은 없나요? A. 처음엔 그런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 생각 안해요. 여기 뭐하러 왔어요 고생하러 왔는데 괜찮아요 Q. 교육팀 리더인데 힘든 것은 어떤 거에요? A. 친구들이 시간 안 맞추고, 말 안 들어서 힘들어요. 그래도 점점 맞춰서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Q. 성당에 어떻게 결합하게 되었나요? A. 저는 이주지부 멤버는 아니구요. 한달 전에 샤말 만나서 많은 얘기 듣고 관심 가지게 됐어요. 네팔 공동체가 있어서 거기서 2년 일했어요. Q. 처음에 무섭지 않았나요? A. 조금 겁이 났어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오래되니까 지금 괜찮아요. 다른 지역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힘이 나요. Q. 투쟁이 길어질 수도 있는데요? A. 어차피 투쟁하러 왔으니 아무리 길어도 끝까지 같이 할거예요 Q. 정부에게 한마디 한다면? A. 이렇게 자꾸 강제추방하면 우리 힘드니까 우리에게 자유를 줬으면 해요 Q. 한국인에게 한마디한다면? A. 우리 많이 사랑하고 좋아해 줬으면 해요
11월 19일 전국농민대회에서 만난 농심(農心)은 한마디로 말해 ‘흉흉’했다. 이날 농민대회는 작년에 이어 대규모로 이어졌는데, 충남에서 1만7천명, 경남에서 1만8천명이 모이는 등 모두 9만 여명이 참가했다고 주최측은 밝혔다. 이날 농민대회를 통해 한․칠레 FTA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고 농민들 사이에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이 번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편집실에서는 한․칠레 FTA가 농민들에게 현실적으로 어떻게 체감되는지 구체적으로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전국농민회총연맹의 전기환 정책위원장을 만나서 현재 농촌의 구체적인 상황과 향후 투쟁방향에 대해 물었다. 정부의 한․칠레 FTA 체결 이후 농민의 여론은 정부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 이후 농민들은 ‘정부가 농업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한․칠레 FTA에 대해 일관된 반대를 해왔다. 이에 정부는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한․칠레 FTA의 실상이라든가, 이로 인해 한국의 농업에 닥칠 변화가 무엇인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정부는 현재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을 독단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지난 2월 14일 양국 대통령이(칠레, 한국 대통령) 정부간 협정을 체결하면서 정부가 농업을 살릴 의지가 없음을 알았다. 개방정책에 의해 이미 농업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더 나아가 완전 개방정책을 펼치니까 ‘농업을 포기하는 정책을 펴고 있구나, 이것이 한․칠레 자유협정이구나’라고 농민들은 느끼고 있다. 이제 방법은 ‘정부불신투쟁’ 밖에 없다는 것이 농민들의 반응이다. 정부불신투쟁은 무엇인가 정부가 농업정책을 세운 후, 농가들에게 이에 따라줄 것을 요구하는데, 이를 거부하겠다는 뜻이다. 정부가 시키는 일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는 정부의 정책대로 따를 수 없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정부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농민들은 가격폭락으로 더더욱 농업재해에 시달렸고 농가소득은 계속 바닥을 쳤다. 이러면서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고 있다. 한․칠레 FTA 정부체결에 따른 구체적인 피해사례는 UR(우르과이 라운드) 이후 전망농업사업이라는 것을 정부가 주장했는데, 사과, 배, 포도와 같은 과수농업과 양계, 양돈과 같은 축산을 권장했다. 그리고 이 때, 농가들이 장목 전환을 많이 했다. 바로 한․칠레 FTA는 정부가 권장했던 사업의 직격탄이다. 특히 과수농가는 더 그렇다. 칠레는 과수농업강국이다. 과수농업분야에서 1, 2위를 다투는 칠레에서는 질 좋은 포도가 특히 많이 난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된다면 이것은 바로 정부가 권장한 정책에 따라 장목 전환을 한 농가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준다. 그 피해란 엄청날 것이다. 그리고 또 축산과 관련해서는 돼지를 키우는 농가도 문제가 된다. 정부가 장기적 관점 없이 임기응변 식으로 농업정책을 세우는데, 이로 인한 피해는 결국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떠넘겨지고 있다. 이번 농민대회는 어떻게 조직되었는가 농민연대를 통해 조직했다. 농민연대에는 지역에서 농민운동을 하는 9개의 대중조직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참여하고 있는 단체로는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전국농민회총연맹, 한국여성농업인중앙연합회,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전국농업기술자협회, 한국낙농육우협회, 한국가톨릭농민회, 한국유기농협회, 전국한우협회가 있다. 이런 조직들을 중심으로 지역에서 지역대책위를 구성하고 이를 발판으로 11월 19일 농민대회 조직위원회를 구성했다. 전농 뿐만이 아니라 많은 조직들이 함께 투쟁하고 있는 상황이고 이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농민들의 공분을 뜻한다. 농민대회 이후의 상황은 정부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을 국회비준 하면서 농가부채해결과 복지법을 연동시켜 처리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농민들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을 용인해야 농가부채해결과 복지법을 처리해주겠다는 것이다. 현재 정부는 농민들의 절박한 요구사항을 맞바꾸기 식으로 처리하려고 언론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실제로 농가부채해결은 과거에 시행되었던 농업정책이 낳은 오류를 고쳐내기 위한 해결과제이지 새로운 정책에 대한 문제제기는 아니다. 우르과이 라운드 협상 이후 발생한 농가부채 증가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지 농가부채해결이 앞으로 마련될 정책과 맞바꿀 수 있는 협상의 대상은 아니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이 모든 사항을 연동시키지 말고 각각 분리해서 처리하라고 국회를 압박하는 투쟁을 벌이려고 한다. 한․칠레 자유무역협정과 농가부채특별법과 복지법 문제는 분리해서 통과시켜야 한다. 10만의 농민대회 이후 정부측의 반응은 농민여론에 밀려 주춤하고 있다. 전체적인 농민여론 자체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고 있고 정부가 제기했던 농업분야 119조원 투자계획 자체가 현실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국회에서조차 이를 거부하고 있다. 정부측에서 전농과 한총련 외에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찬성하고 있다는 식으로 악선전을 하고 있는데 현재 농민연대는 한․칠레 FTA관련해서는 일관되게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정부가 농업에 대한 실천적인 대책을 내오지 않는 한, 이 입장은 일관될 것이다. 현재 정부가 내오는 중장기적 농업정책은 진정으로 농업을 살리는 정책이 아니라 오히려 농업을 포기하는 정책이다. 그리고 11월 19일 전에 농업분야 119조원 투자와 관련한 정책을 발표했다는 것은 이런 농민들의 분노, 외침을 희석하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농업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이고 우리 국민들의 식량 수급 목표를 어떻게 세우고, 그에 따른 토지정책이나 가족정책, 인력육성정책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이런 큰 프로그램 속에서 그에 따른 예산안이 확정되는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만이 그나마 좀 신뢰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고려도 없는데 119조원이라고 예산책정 한다고 해서 농민들이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농민연대 결성의 배경은 무엇인가 농민연대 이전에 농민단체협의회가 있었다. 농민단체협의회에는 친정부적인 단체부터 유명무실한 단체까지 각종 단체가 모두 모여있다. 이러다 보니까 농민들의 권익을 지키는 투쟁이나 농업을 살리는 투쟁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지역에 대중조직을 가진 농민단체들끼리 새롭게 농민들의 투쟁과 농민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단체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9개 단체가 모여서 농민연대를 만들게 되었다. 정부측이 개방정책을 시행함에 있어 이데올로기 공세를 가속화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농민연대의 입장과 국민들에 대한 선전은 어떻게 농민연대는 정부의 개방정책에 대해 명확한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정부는 농업개방이 세계적인 대세라고 이야기하지만, 선진농업국 어느 나라도 이를 수용하고 있지 않으며 농업을 포기하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선진농업국의 경우, 식량자급률을 높이고 농업을 지원하고 보호하지 이를 포기하는 나라는 없다. 우선, 개방농정을 철폐해야 한다. 이를 통해 식량주권을 확립하고 식량자급률을 높여내야 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농지를 확보해야 한다. 또 하나는 농가소득을 ‘어떻게 향상시킬 것인가’이다. 정부가 식량안보차원에서 농업을 육성하고 발전시켜는 계획이 없다면 국민들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국민들도 농업을 단순히 상품경제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농업은 바로 국가의 식량주권과 관련된 문제이고 자연환경을 보호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이는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이 함께 해야하는 문제다. 이런 이유로 농업을 도외시하고 포기하는 정부의 정책에 대해 국민적인 항의가 있어야 한다. 농성단을 비롯한 향후 투쟁계획이 잡혀 있는 것으로 아는데 지금 정기국회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 때 우리가 요구하는 4대 입법과제를 중심으로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한․칠레 FTA와 농가부채해결, 복지법을 맞바꾸려는 정부의 의도를 막아내기 위해 국회압박투쟁을 진행하고 있고 지역에서부터 투쟁을 조직하고 있다. 국회의원 설득작업을 비롯한 군청, 지구당 항의방문 등과 12월 6일 전국 동시다발적으로 한․칠레 FTA 국회비준저지와 농가부채해결, 쌀수입 반대, WTO반대를 외치면서 시군 단위의 투쟁을 계획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사회진보연대 회원들에게 연대의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지금 농업투쟁은 단순한 농민들의 투쟁을 뛰어넘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초국적 자본의 신자유주의 지배에 맞서는 투쟁이다. 농업개방을 통해 선진국들이 제 3세계 국가의 농업을 파괴하면서 식량자급률을 떨어뜨리고 있다. 결국 이는 식량종속을 낳게 되는데 이것은 다국적 기업의 이해를 극대화하기 위한 과정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전략을 대행하는 것인 WTO라는 기구다. 그래서 현재 농민투쟁은 식량주권을 지키고 우리 농업을 살리는 투쟁이면서 신자유주의적 흐름들을 차단하는 투쟁이다. 그리고 농민들의 생존권투쟁일 뿐만 아니라 민정농업 사수라는 큰 목표를 가지고 있는 투쟁이다. 이런 의미에서 농민투쟁에 연대하는 것이 신자유주의를 막아내고 우리의 자주성을 지키는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전농 정책위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PSSP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은 민주화와 신자유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정치적 반대파를 폭력적으로 탄압하던 군부독재 정권이 퇴조한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던 과정에서 칠레를 제외한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화 과정에서 군부독재 정권의 파행적인 경제정책 운영이 부작용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위기에 직면한 라틴아메리카는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권고에 따라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여 단기간이나마 경제를 안정시켰고, 이 과정에서 친미적 성향의 경제관료들이 “구국의 영웅”으로서 정치 전면에 등장하였다. 멕시코의 살리나스 고르타리 전 대통령, 아르헨티나의 카바요 경제장관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60년대 미주군사학교(SOA) 출신들이 70년대 군부독재의 주역이었다면, 70년대 미국 대학 출신들이 신자유주의의 기수가 되어 현재의 라틴아메리카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지난 10월에 사임한 볼리비아의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일명 고니) 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다. 시카고 대학 출신으로 영어식 억양의 스페인을 구사하기 때문에 ‘미국놈’(gringo)이라고 비아냥을 사기도 했던 산체스 데 로사다는 1985년 경제장관 시절부터 신자유주의 정책의 신봉자였다. 1985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파스 에스텐소로(Paz Estenssoro) 정권은 24000퍼센트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외환 고갈, 정부 소유 광산의 재정적자로 인해 건국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에 시달렸다. 이때 산체스 데 로사다는 국제통화기금과 손잡고 광산의 민영화, 물가 현실화, 초긴축 재정을 통해 단기간에 볼리비아 경제를 안정시킨 인물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대통령에 당선된 산체스 데 로사다는 민영화, 긴축재정, 경제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에 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민적인 합의를 이끌어내기보다는 위로부터 일방적으로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였으며, 이에 저항하는 노동조합과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희생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이 결과 1995년에도 수백 명의 인명이 희생되었으며, 작년에 재집권한 이후 전개된 이번 ‘가스 전쟁’에서도 86명이 목숨을 잃었다. 볼리비아 최대 광산업의 소유자인 산체스 데 로사다는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따른 장밋빛 비전이 소수 기업가를 비롯한 지배엘리트의 이익을 대변할 뿐, 이것이 하루 2달러 이하의 빈곤선에서 생활하는 대다수 볼리비아 국민들에게는 실업과 빈곤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깨닫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산체스 데 로사다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차파레(Chapare) 지역의 코카재배 농장을 강제적으로 패쇄하면서도 대체작물을 보급하는 데는 등한시하였고, 농민들의 불신과 원성을 사게 되었다. 미국 측에서 보면 볼리비아는 페루 다음 가는 코카인 원료 생산지이다. 그러나 고산지대에 거주하는 볼리비아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코카는 전통적인 생활 필수품이며, 유일한 경제 작물인 것이다. 지금도 저 유명한 포토시의 은광산에서 일하는 볼리비아의 저임금 노동자들은 생석회를 뿌린 코카잎을 씹으면서 지하 수천 미터에 달하는 막장에서의 중노동을 견뎌낸다. 더구나 커피와 화초에 대한 미국의 수입 쿼터 폐지와 더불어 이들 상품의 가격마저 폭락한 상황에서 볼리비아 농민들은 코카 재배를 통해서 생계를 영위하였는데, 원활한 외자유치를 위해서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정부가 코카 재배를 금지한다면 농민들로서는 생존의 위협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산체스 데 로사다가 도입한 신자유주의가 국민들의 목을 죈 것이다. 이러한 예는 지난 2000년 볼리비아 정부가 코차밤바 시의 상수도 사업을 민영화하였을 때도 반복되었다. 이 지역 상수도 사업을 떠맡은 미국 엔지니어링 업체인 벡텔의 자회사, 아구아스 델 투나리(Aguas del Tunari)는 상수도 요금을 대폭 인상한 것이다. 이러한 다국적 기업의 일방적인 횡포에 맞서 볼리비아 국민들은 총파업과 도로점거 시위로 항거하였다. 볼리비아 정부는 또다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으로 폭력으로 진압했으나 결국 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굴복해 상수도 사업의 민영화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볼리비아의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대안 세력이 출현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나는 에보 모랄레스(Evo Morales)가 중심이 된 ‘사회주의 운동당’(MAS, Movimiento al Socialismo)이고, 다른 하나는 게릴라 출신의 펠리페 키스페(Felipe Quispe)가 중심이 된 파차구티 원주민 운동당(MIP, Movimiento Indigenista Pachacuti)이다. 에보 모랄레스는 작년 대통령 선거에서 20.94%의 지지를 얻어 22.4%의 지지를 획득한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와 함께 의회 결선투표에까지 갔던 인물이다. 원주민들 출신의 에보 모랄레스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지하고, 분배 우선의 경제 정책, 원주민 소유의 토지 환원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농민들의 코카 재배를 옹호함으로써 볼리비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원주민들과 메스티소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이에 반해서 펠리페 키스페는 아이마라 원주민 출신으로 1992년에는 게릴라단체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룬 인물이다. 1997년 출감한 펠리페 키스페는 2001년 파차쿠티 원주민 운동당을 창당하여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하였다. 정책으로는 토지 공개념의 전면 도입과 지하자원의 국유화 그리고 백인을 축출하고 고대 잉카제국과 같은 원주민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이번 가스 전쟁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남미 대륙에서 베네수엘라 다음으로 천연가스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는 볼리비아는 지난 키로가 정권 시절 천연가스 수출을 통해서 남미 경제의 전략적 중심축으로 거듭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작년에 집권한 산체스 데 로사다 정권 또한 비록 전정권이 입안한 프로젝트라고 일지라도 과도한 외채와 정부의 재정적자를 만회할 수 있는 천연가스 수출에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국민들의 견해는 달랐다. 영국 가스회사를 비롯하여 다국적 기업의 컨소시엄으로 구성된 ‘퍼시픽 LNG’가 총 수입의 82%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볼리비아의 몫은 18%에 지나지 않는데 천연가스 수출은 결국 실속 없는 국부의 유출에 지나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은, 주석, 초석, 석유 때문에 노동력 착취와 전쟁을 치룬 볼리비아 국민들에게 천연가스 수출이란 현대적 형태의 자원 수탈인 것이다. 더구나 이 천연가스가 칠레를 통해서 미국으로 수출된다는 사실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리비아인들에게 미국은 현재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볼리비아를 철권통치했던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Hugo Banzer Suarez)를 지원한 국가라는 인식이 있고 이는 볼리비아 국민들과 반미 정치세력에게 결코 달가운 존재는 아니었다. 게다가 칠레는 1879년 초석전쟁(일명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태평양 연안의 볼리비아 영토를 점령함으로써 볼리비아를 내륙국가로 만들어버린 비우호적인 국가이다. 그 이후 볼리비아는 티티카카호 호수에 해군 기지를 창설한 한편, 태평양 연안의 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부단한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왔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고려할 때 칠레를 통한 가스 수출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였다. 이처럼 볼리비아에서의 신자유주의는 멕시코 사파티스타 해방군 마르코스의 말처럼 “미국식 사고와 생활방식을 퍼뜨리고 국민국가가 구축한 모든 문화를 파괴하고 있을 뿐이다.” 적어도 이번 가스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펠리페 키스페나 에보 모랄레스와 같은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세력과 대다수의 볼리비아 국민들은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 지난달 사임한 곤살로 데 로사다를 승계한 카를로스 메사(Carlos Mesa) 현 볼리비아 대통령은 취임 일성에서 국제통화기금의 권고를 충실하게 이행할 것이라고 천명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국제통화기금은 안정화 정책을 조금 완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밝힘으로써 신자유정책의 철폐를 요구하는 볼리비아 국민들의 투쟁은 미해결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PSSP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단면들 멕시코 칸쿤 공항 입국심사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새하얀 뙤약볕과 한국에서 몇 년만에 있을까 말까 하는 후텁지근한 더위가 우릴 맞이할 뿐이었다. WTO(세계무역기구) 회의를 무산시키러 온 시위대를 너무 홀대(?)하는 것은 아닌가? 캐나다 입국 때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우리는 칸쿤에 들어오기 전 비행기 티켓 문제로 캐나다에서 며칠을 보내야 했는데, 캐나다 밴쿠버 공항을 들어갈 때 입국 심사대를 거쳐 공항 이민국까지 가서 서너 시간의 혹독한 심문을 받았던 것이다. 당연히도 멕시코 들어가기는 ‘장난이 아닐 것’이라며 이 궁리 저 궁리 머리를 쥐어짜며 회의를 했는데 그 작전회의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버려 허망하기까지 했다. 캐나다 입국과정이 그렇게 까다로웠던 것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테러용의자나 반WTO 시위대를 색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캐나다를 통한 미국 밀입국 용의자를 걸러내기 차원이었던 것임을 현지 가이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이민국 공무원에 의하면 미국의 압력이 대단하다고 했다. ‘잘사는 미국 식민지’ 캐나다는 따를 수밖에. 잘 사는 나라들에서는 자기네끼리 잘살겠노라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입국을 기를 쓰고 막고, 못사는 나라에서는 누구든 ‘어서옵쇼’ 한다. ‘자본 이동의 자유화’를 소리 높여 외치는 선진제국들은 ‘노동력 이동의 자유화’는 기를 쓰고 막는다. 현재의 WTO 협상의제(‘도하개발 아젠다’) 중 하나인 서비스 협상에서 대부분의 개도국들은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Mode 4)을 요구하고 있는데 선진제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짐을 풀고 WTO 긱료회의가 열리는 호텔지역의 반대편(민중포럼과 시위는 주로 여기에서 진행되었다) 지역의 한 문화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사회운동조직 총회 말미에 참석하여 저번 세계사회포럼에서 안면을 튼 세계 소농조직 비아 캄페시나(농민의 길)의 몇몇 활동가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예상과는 달리 너무 규모가 작은 것으로 보아 민중포럼이 잘 조직이 안되고 있다는 것을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이후 특별한 일정이 없어 시내구경을 갔다. 시내 곳곳에서는 아메리카 전역에서 온 백인 관광객을 상대로 길거리를 배회하면서 원색 뜨개질 제품들을 팔고 있는 조그맣고 까무잡잡한 마야 원주민 여성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계적인 휴양지 칸쿤의 주인은 멕시코인들이 아니었다. 호텔과 같은 휴양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메리카 전역에서 몰려든 부자 백인들이었다. 백인 남성들은 호텔 안에서나 밖에서나 대개 웃옷을 벗고 벌겋게 태운 상체를 드러내고 다녔다.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로 멕시코 인구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메스티조들은 언제나 근무복을 입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일 뿐이었다. 나프타 반대 시위에도 참여했다는 캐나다 밴쿠버 호텔 한 노동자가 ‘칸쿤은 어글리 아메리카(추한 아메리카)’라 한 말이 생각이 났다. 부자 백인들이나 멕시코인들이나 다 길가에 축 늘어진 야자수처럼 생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자 백인들은 무료해 보였고 멕시코 서비스 노동자들은 주눅 들고 지쳐 보였다. 방콕의 관광지와 호텔시설이 태국인의 것이 아닌 것처럼 120개나 되는 세계 유수의 호텔이 밀집해 있는 칸쿤은 멕시코인들의 휴양지는 아니었다. WTO 공식 회의장은 호텔지역 안에 있었는데 우리가 도착한 날부터 2중 3중의 철제 바리케이드가 세워지고 있었다. 철제 바리케이드가 회의장 주변 사방을 둘러 쳐진 것은 ‘시애틀투쟁’ 이후 캐나다 퀘벡에서 열린 미주자유무역협정(ALCA 또는 FTAA) 정상회의 때부터였던 것 같다. 회의장소로 록키 산맥 안이나 카타르 도하 같은 섬 등 시위대의 접근을 차단하기에 용이한 곳으로 선정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누구 말대로 세계의 모든 것을 소유한 강대국과 초국적 자본들이 2중 3중의 철제 바리케이드와 수만의 경찰력에 의지해서 민중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한 채 외딴 곳에서 회의를 하는 것이야말로 세계화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회의장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한 단면인 ‘담장 도시’를 실물로 보여주고 있었다. ‘비아 캄페시나’ 8일부터 ‘비아 캄페시나’ 주최의 농업관련 사전 토론회가 있었다. 우리는 개막식만 참여하였다. 오후에 반전을 주제로 한 사회운동총회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번 칸쿤 투쟁의 주력대오 ‘비아 캄페시나’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를 해보자. 나는 올해 초 브라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하였다. 운 좋게도 국제 소농 원주민 운동 조직인 ‘비아 캄페시나’ 초청을 받은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간부 도우미로 부문별 사전대회의 하나인 농민대회부터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포럼기간 동안 우리같이 ‘비아 캄페시나’의 공식 초청을 받은 200여명의 각 국 농민운동 대표자들은 두 수도원에서 지냈고, 브라질의 MST(땅없는 농업노동자들)를 비롯하여 중남미의 5천여 농민들은 커다란 체육관에서 숙식을 하였다. 이 ‘풍찬노숙(風餐露宿)’을 위해 어떤 칠레농민들은 3-4일간 걸려 버스를 타고 왔다고 했다. 이들 모두는 불편한 잠자리와 변변치 못한 식사에도 불구하고 수도원 체육관 등에서 각종 토론회와 문화행사를 풍성하게 개최하였고, 라틴아메리카 자유무역지대(ALCA)와 이라크전쟁 반대시위의 주력대오였다. 이들은 언제나 농업의 상징색인 녹색 모자를 쓰고 녹색 스카프를 두르고 다녔다. 최대규모의 조직화된 대오였다. 지금은 정권의 성격이 변질되어 가고 있지만 에콰도르와 브라질에서 이들 소농들에 힘입어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인 진보정권이 들어섰고, 볼리비아 선거에서는 반미 반신자유주의 기치를 내건 농민이 직접 출마해 선전했던 터라 사기도 충만해 있었다. 나는 포럼 기간 중에 토지점거에 성공해 그럴듯한 공동체를 건설해 소박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MST 정착촌에 가서 약 1,500여명이나 되는 이들과 함께 춤과 음악이 곁들여진 풍성한 야외 식사를 할 기회를 가졌다. 거기에는 이들이 건설하고자 하는 자유, 평등, 협동, 우애의 미래사회가 이미 있었다. 포럼이 끝난 뒤에는 토지점거를 준비하고 있는 열악하디 열악한 대규모 비닐 판자촌을 돌아볼 기회를 가지기도 하였는데 이들 역시 토지를 점거하여 새로운 공동체를 꾸리게 될 앞날에 대한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이번 칸쿤투쟁의 주력도 ‘비아 캄페시나’였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허름한 체육관처럼 보이는 지역 문화회관에서 사전대회를 열었고, 집단 노숙을 하고 공동으로 식사를 해결하였으며, 녹색 모자를 쓰고 녹색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이들은 세계적인 곡물 메이져와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WTO에 대항하여, 그리고 미국-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동지배에 맞서 토지에 대한 권리, 식량주권, 식품안전성, 유전자조작 반대, 생명특허에 대한 반대 등을 내걸고 싸우고 있었다. 농업협상이 주된 의제였고, 이경해 열사의 죽음이 있었긴 하였지만 농민이 주력인 한국참가단과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의 소농 원주민이 없었다면 칸쿤투쟁은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운동에서의 ‘비아 캄페시나’의 주도성은 내년 초 인도에서 열리는 세계사회포럼에서도 여전할 것으로 보인다. ‘비아 캄페시나’ 지도자 중의 하나인 온두라스 농민 대표에 의하면, 인도에는 ‘비아 캄페시나’에 가맹해 있는 한 농민조직이 있는데 그 조직규모가 천만 명에 이른다니까 말이다. 그런데 ‘비아 캄페시나’ 운동은 자본주의가 채 발전하지 않은 나라나 지역의, 아직 소멸하지 않은 소농들의 허망한 몸부림일까? 최소한 멕시코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멕시코의 한 인권변호사와의 대화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가 이르길, 소농 운동이자 원주민 운동인 사파티스타 운동을 ‘우리 멕시코 시민 사회의 90%가 지지하고 있다, 노사협력체제에 길들여진 노조는 부패해 있다, 제도혁명당에서 갈라져 나온 인사들과 구 공산당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주혁명당도 가짜 좌파다, 그러나 사파티스타 운동은 전진하고 있다’. 멕시코 운동세력의 주된 구호가 ‘사파타 비베 비베(사파타 만세)’인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세계전역을 충분히 자본주의화하지 못한 채 위기에 빠져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요하고 있는 세계자본주의의 강력한 비판자로 바야흐로 국제 소농운동 조직 ‘비아 캄페시나’가 부상하고 있다. 여기에 이경해 열사의 죽음을 부여안은 한국의 농민운동이 함께 하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겠다. 멕시칸 타임 사회운동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상황실이 조직위에서 파악한 장소인 ‘엑스 팔랑께’(‘전 유적지’)를 가는데 한참 헤맸다. 이 택시 운전사는 여기라 했는데 가보니 아니었고 저 택시 운전사는 저기라 했는데 가보니 이번에도 아니었다. 누가 제 3의 장소를 알려주었다.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헤맬 수 없다며 한 두 사람만 가서 확실히 확인한 후에 움직이자고 했다. 대표로 뽑혀서 ‘엑스 팔랑께’로 갔더니 허름한 체육관 같은 데인데 인기척이 없었다. 또 잘못 왔구나 하고 허탈해 하고 있는데 벨기에 청년 하나도 그 체육관을 기웃기웃하고 있었다. 그 친구 왈 이곳이 틀림이 없단다. 그리고 4시에 열릴 예정이던 회의가 5시에 열리는 것으로 바뀌었단다. 시계를 보니 5시 20분. 그럼 왜 사람들이 없냐고 하니, 여기 사람들 30분 늦는 것은 보통이니 조금 더 기다려 보잔다. 과연 약 10분 뒤에 주최측이 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에 유적지(엑스 빨랑께)인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란다. 부실한 조직위 같으니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시간도 늦고 통역도 없고 대중적인 토론회가 아니니 오지 않는 게 좋다고 연락을 했다. 회의가 간단히 끝나 주최측의 한사람으로 보이는 이에게 다가가 왜 이렇게 시간이 안 지켜 지냐고 넌지시 따졌더니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이다. 같은 장소에서 열린 민중포럼 전야제격인 ‘칸쿤 참가자들 인사나누기’ 프로그램까지 참가하고 숙소에 들어왔다. 멕시코에서 행사 프로그램은 기본적으로 1시간 가량은 늦어졌다. 사회운동총회가 그랬고 농민행사가 그랬다. 이 멕시코 늑장부리기 문화에 대해 네덜란드 사람하고 같이 죽이 맞아 흉까지 본 적이 있었다. 시간엄수가 사회의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한 모습이라고 결론을 짓긴 했지만 말이다. 한국에 와서 멕시코 전문가 이성형 선생을 만나서 들은 바에 의하면 멕시코에서 파티나 집 초대에 응할 때는 약 45분 정도 늦게 가야 예의란다. 주최측에 준비 시간을 주어야 한다나. 시간을 칼같이 지키는 문화는 미국 등 몇 나라뿐이란다. 그러고 보니 브라질 사회포럼도 비슷했던 것 같다. 민중포럼 9일은 ‘세계화에 대한 포럼’에 월든 벨로, 반다나 쉬바, 마드 벌로 등 한국에도 알려진 유명인사들이 나온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엘 갔다. 그런데 이번에도 장소를 찾아가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숙소에서 걸어가도 될 정도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렸는데 호텔 직원, 거리의 칸쿤 시민들이 잘못 알려주어서 반대편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포럼 장소를 알게 되어 다시 되돌아가려는데 학생 시위대가 바리케이드에서 경찰하고 대치하고 있다는 이유로 10분이면 갈 거리를 약 1시간 동안 빙 둘러서 버스를 타고 갔다. 설상가상인 것은 거의 다 갈 지점에서 교통통제를 한다고 버스를 내려 걸어가란다. 35도가 넘는 더위 속을 약 40분간을 걸었다. 캐나다 마드 벌로 등의 물 사유화에 관한 이야기 등을 듣고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는 중간에 연사 마드 벌로를 인터뷰했고, 가족농 보호운동을 하고 생태 농업을 지향하면서 브라질 MST 등 비아 캄페시나와 연대하는 미국 ‘푸드 퍼스트’(식량 제일주의)의 공동 집행위원장 미탈을 인터뷰하였다. 미탈은 이번 칸쿤회의는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미국과 EU가 보조금 삭감 등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개도국들이 격앙되어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미탈의 예상은 14일 현실로 드러났다. 11일 오전에는 민주노총이 대거 참가한 ‘남반구노조연대회의’ 주최 노동관련 토론회가 있었고, 오후에는 내가 발제자의 한 사람으로 나선 ‘전쟁과 무역’ 포럼이 있었다. 한국 참가단들은 이경해씨가 돌아가신 10일 이후로는 텐트를 치고 매일 촛불 집회를 하느라고 포럼에 거의 참가를 하지 못했다. 꼭 필요한 곳에만 갔고, 내가 발제한 ‘전쟁과 무역’ 포럼은 나 혼자만 참석하였다. 내 발제는 매우 딱딱하게 진행되었다. 사회자가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발제 전에 이경해 씨에 대한 묵념을 1분간 진행하여 회의장이 숙연해 진 데다, 영어가 신통치 않아 남들이 하듯이 즉석에서 청중과 대화하듯이 발제를 한 게 아니라 준비된 긴 발제문을 죽 읽어가니 회의장 안이 더욱 고요해졌다. ‘무장한 세계화’와 북핵위기를 이론적 역사적으로 접근한 것이어서 다른 발제자들의 발제들과는 달리 내용도 무거웠다. 애초부터 발제를 잘 하기는 힘들었지만 어떻든 좀 실망해서 회의장을 그냥 빠져나오려니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발제문을 달란다. 아휴 고마워라! 그리고 멕시코 반전단체 출신 세 사람이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 단체에 와서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했다. 자신이 없기도 하고 텐트로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메일만 교환하고 그냥 돌아왔다. 한국참가자들이 많은 포럼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일부가 포럼에서의 토론들이 원론적이라 평가를 한다. 내 의견도 동일하다. 그래서 세계사회포럼 같은 데를 가보면 토론장보다는 바깥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더 많다. 각국에서의 투쟁경험들, 투쟁에서의 쟁점들이 교류되고 논의가 되면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본다. 사람들이 토론에 진지하게 임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언어문제도 있다.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언제나 생기는 문제인 통역이 매끄럽게 처리되는 회의가 별로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언어적으로 고립된 한국 사람들에겐 통역문제는 특히 심각하다. 이경해씨 그리고 투쟁 10일은 WTO 공식회의 개막에 맞춰 농민시위가 있었다. 한국참가단 모두는 시위에 참가하였다. 농민들은 WTO해체를 상징하는 상여를 메고 갔다. 그리고 바리케이드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이경해 열사의 자결이 있었다. 농민대오를 제외한 참가자들은 이경해씨가 온 줄도 몰랐다가 좀 당황했고 설마 돌아가시기까지 하겠는가 했는데 진짜 돌아가셨다. 이경해씨가 지난 3월 제네바에서 24일간 단식하면서 뿌린 다음과 같은 글이 독립미디어센터 등을 통해 공개되면서 그는 칸쿤투쟁의 중심 인물이 되어갔다. 이제 진실을 말하라, 그리고 농업을 WTO에서 제외시켜라 나는 56세, 한국에서 온 농민이며, 젊은 시절 희망을 가지고 동료들과 농민단체를 결성하여 우리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보자 노력하였던, 그러나 결국 실패만을 거듭한 많은 농촌지도자중 하나이다. 우리는 우루과이라운드가 끝나고 곧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더 이상 우리 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우리는 나약하게도 수백년 대대로 살아왔던 우리의 고향 농촌이 큰 파도로 붕괴되는 것을 그냥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적극적으로 그 큰 파도의 근본과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고자 하였다. (․․․) 일찍이 농사짓기를 포기한 농민들은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였고 이러한 악순환을 벗어나고자 끝까지 노력했던 농민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부채로 도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개중에 운이 좋은 사람들은 더 갈 수 있지만 종래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나는 하룻밤 새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나버린 친구의 날고 오래된 빈집을 돌아보고 그저 돌아오기만 바랄 뿐 어찌할 수 없었다. 한번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부채를 비관,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집에 달려간 적이 있었지만 역시 그 부인의 울부짖음 소리만 들을 뿐 어찌할 수 없었다. 당신이라면 어떤 기분이었겠는가? (․․․) 나는 지금, 인류는 지금 극소수 강대국과 그 대리인인 세계무역기구(WTO)와 이를 돕는 국제기금 그리고 다국적 기업의 상업적 로비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반인류적이고 농민말살적인, 반환경적이고, 비민주적인 세계화의 위험에 빠져있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즉시 이를 중단시켜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이 허구적인 신자유주위가 세계 각지의 다양한 농업을 말살시킬 것이며, 이로써 모든 인류에게 재앙이 초래될 수도 있음을. 나는 단호히 말하건대, 우루과이라운드는 몇몇 야망에 찬 정치집단들이 다국적 기업과 외눈박이 학자연하는 자들과 동조하여 자기들의 골치 아픈 농업문제를 다른 나라에 떠넘긴 한 판 사기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진실을 말하라. 그리고 원점으로 돌아가 농업을 WTO에서 제외시켜라. 10일 병원에서의 촛불추모를 시작으로 매일 촛불집회가 계속되었다. 10일 저녁 ‘비아 캄페시나’가 머물고 있는 체육관에서의 마야 원주민들 주도로 진행된 긴 미사, 11일 집회에서 사회자의 ‘평화를 갈구한다’는 발언에 ‘현재 세계에 평화는 없다’는 인도네시아 농민대표 사라기씨의 일갈, 12일 세찬 비바람 속에서 진행된 촛불 집회, ‘비아 캄페시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온두라스 농민대표 라파엘의 ‘이경해 동지는 WTO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발언, 밤새 내리는 빗 속 텐트에서 들이치는 비를 피해가면서 잔 잠 등이 기억이 남는다. 집회는 공공연맹 김건태 동지의 기타 반주와 한국 참가단의 장중한 투쟁의 노래, ‘삶이 보이는 창’의 송경동 동지의 추모시가 어우러져 작은 문화제 모습을 띠었다. 다음은 집회에서 낭송된 송경동씨의 추모시들 중 하나다. 당신은 야속한 사람 - 이경해 열사를 추모하며(9/12 칸쿤에서) 송경동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칸쿤에 나는 새를 칸쿤에 피는 꽃을 칸쿤에 부는 바람을 칸쿤에 내리는 비를 나무를 기둥 삼아 만든 집 지붕에 떨어진 씨앗이 또 나무가 되어 지붕에 나무를 키우는 자연 속의 집들을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망치와 정으로 콘크리트를 깨고 있는 멕시코의 어린 노동자를 온 몸에 혁대를 걸고 와 하나에 10 페소를 말하며 짠한 미소를 짓는 노점의 여인을 아,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죽고 일제히 빛을 터뜨리는 카메라 후레쉬 불빛을 운전기사도 길 가던 청년도 호객을 하는 사내도 모두 꼬레아를 물으며 엄지손가락을 들고 눈물짓는 것을 아, 당신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이 그 철책에서 오른 손을 들어 빼어든 칼로 당신의 왼편 가슴을 찌를 때 찌르며 툭 떨어질 때 세계의 모든 양심과 세계의 모든 생명들이 또 다시 한번 치를 떨고 이를 갈고 눈물을 떨구었다는 것을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 권력은 민중에게 사랑은 연인에게 자연은 자연에게 되․돌․려․달․라․는 당․신․의․소․망 한국투쟁단은 계속적인 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고 한국어는 집회 공식언어가 되었다. 이경해씨가 돌아가신 바리케이드 앞에는 텐트가 설치되어 각 국 활동가들의 집결지(‘캠프 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가 되었다. ‘캠프 리’에는 여기저기서 갖고 온 물과 음식이 넘쳐났다. 이경해씨가 돌아가신 현장에는 촛불과 꽃, 그리고 추모글과 플래카드로 뒤덥혔는데, 그 중에는 환경주의자라 알려진 칸쿤 시장이 보낸 꽃다발과 위로의 말도 있었다. 11일에는 ‘캠프 리’로 언론이 쇄도하였다. 오전에는 통역이 없어서 내가 언론을 상대했는데 10군데도 넘은 것으로 기억한다. 언론은 자결 이유, 한국농민의 처한 상황, 가족 사항 등을 주로 물었는데 서구언론들은 이경해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심지어는 한국참가단이 이경해씨의 계획을 사전에 알았느냐, 또 다른 자살 가능성은 없느냐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질문들도 있었다. 반면 칸쿤투쟁에 참여한 각 국 활동가들은 한국 사람만 보면 위로의 말을 전하고, 눈인사를 하거나 어깨를 쓰다듬거나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우리 모두는 상주 아닌 상주가 되었다. 13일에는 또다시 커다란 집회가 있었다. 그런데 대중적인 집회말고 또 다른 ‘택’이 있었다. 컨벤션센터 진입투쟁이었는데 나도 여기로 가게 되었다. 애초에 듣기로는 한국투쟁단, ‘비아 캄페시나’, 학생 등 약 50여명이 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검문에 걸려 못 들어왔고 ‘비아캄페시나’ 간부 2-3인을 제외하고는 전부 한국투쟁단이었다. 물론 한국투쟁단 일부도 진입에 성공하지 못했다. 전체 15명 정도. 우리는 컨벤션센타 앞에서 약 5분간 구호를 외치다가 옆 주차장으로 경찰에 의해 떠밀려 그곳에서 약 두어 시간 구호를 외치고 투쟁가를 부르면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와중에 나는 안경과 모자를 잃어버렸고 어떤 농민 간부는 신발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투쟁은 예상과는 달리 바리케이드 밖에서의 투쟁이 훨씬 역동적이고 아슬아슬했다고 한다. 철제 바리케이드를 여성참가자들이 커터기로 자르고, 전농이 밤을 세워 꼰 두꺼운 동아줄로 바리케이드를 힘을 합쳐 넘어뜨리고, 경찰과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에 들어가고... 14일 WTO 각료회의는 아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결렬되었고 그 이후 이경해씨는 칸쿤을 떠나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마치며 이번 칸쿤 WTO 협상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거대 곡물메이저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과 EU 등 선진제국들은 자신의 국내시장은 유형, 무형으로 보호하고 개도국의 무역과 투자에 대해서는 자유화를 원하는 중상주의적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거대 농업기업을 가진 일부 개도국은 농업에서의 자유화를 주장한 반면 투자 경쟁정책 등 새로운 이슈에 있어서는 제국주의적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보수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최빈개도국들은 무망하게도 ‘개발’라운드라는 허명에 기대 선진제국에게 이러저러한 개발이슈를 제기하였다. 그 결과는 WTO 협상의 결렬이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국가간 일국내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각 국 나름의 대응의 결과다. 그러나 협상 결렬이 개도국과, 소농을 비롯한 전세계 민중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보수주의적 반대를 넘어 ‘밑으로부터의 세계화’, ‘대안적 세계화’를 추구해야 할 시점이다.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전 세계에 걸쳐 세계화 프로젝트에 대한 이견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자들은 복종과 냉소주의, 어리석음, 전쟁, 파괴, 그리고 죽음 등을 세계화하려 합니다. 아래 있는 사람들은 저항과 희망, 창조성, 지성, 상상력, 삶, 추억,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세상의 건설을 세계화하려 합니다. 민주주의와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이경해씨의 죽음을 딛고 ‘저항과 희망을 세계화할’ 책임은 이번 칸쿤 투쟁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투쟁의 선봉으로 떠오른 한국의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에도 적지 않을 것이다.PSSP
99년 시애틀에서 열린 WTO 3차 각료회의는 ‘새로운 무역협상 라운드’를 출범시키는 것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내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 세기의 끝자락을 뒤흔든 이 사건은, 4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멕시코 칸쿤에서 재현되었다. 지난 9월 10~14일에 열린 WTO 5차 각료회의 역시 협상이 결렬된 채 종료된 것이다. 5차 각료회의는 2005년 새로운 무역 체제를 출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을 중간점검하고, 앞으로의 구체적인 협상 일정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구체적인 계획은 농업협상과 비농산물 관세인하에 대한 세부 협상방식의 기본 골격을 채택하고, 이른바 ‘싱가포르 이슈’의 협상 개시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각료회의에서 개도국들은 ‘G22(농산물수출개도국그룹)’, ‘ACP(아프리카․카리브해․태평양 연안국가들)’과 같은 그룹을 형성하여, 도하개발의제와 이 협상을 주도하는 미국과 유럽연합에게 불만을 강력하게 표출하였다. 2년 전 미국과 유럽연합은 도하개발의제 협상을 ‘개도국과 최빈국의 관심사항을 대폭 반영하여, 이들 국가도 자유무역의 혜택을 고루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이 협상라운드의 출범이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주장했다. 개도국을 위한 무역협상이라는 도하개발의제에 개도국들이 불만을 터뜨려 결국 협상이 결렬된 상황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드러내주었다. 정작 미국과 유럽연합은 농업협상에서도, 싱가포르 이슈에서도 개도국과 최빈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자세로 일관했다. 식량, 에너지, 의료, 교육과 같이 민중들의 삶에 필수적인 공공 서비스를 상품화하여 자본의 이윤놀음의 대상으로 탈바꿈시키는 도하개발의제는 애초부터 ‘개발’과는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초국적 자본의 소유권을 철저히 보호하고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면서 전 세계 민중들의 모든 권리를 박탈해 갈 뿐. 1. 무역 ‘자유화’는 니들만? : 농업협정과 미국․유럽연합의 보조금 1-1. 미국․유럽연합 vs 농산물수출개도국 vs 농산물수입국 무역을 완전히 자유화한다는 도하개발의제의 모순은 농업협상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 유럽연합은 남반구 대다수 국가가 관세를 인하하고 국가보조금을 감축하여 무역장벽을 허물도록 강요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자국의 농업생산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1년에 수 천억 달러에 달하는 보조금을 유지하겠다며 ‘무역 자유화’에 반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초국적 메이저 농기업들이 국가의 보조금을 바탕으로 생산비를 절감, 농산물 가격을 낮추어 덤핑이 가능하도록 하고, 제3세계에는 전폭적인 시장개방을 유도하여 결국 제3세계의 농업 기반을 파괴하는 것이 미국과 유럽연합의 목표인 것이다. 농업협상에서 유럽연합과 미국은 보조금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데, 유럽연합의 경우는 수출보조금을 유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올해 마련된 공동농업정책(CAP)을 변경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미국의 경우, GNP와 경제활동인구를 구성하는 비율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부분이 적음에도, 무역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상황, 특히 공화당 지지층과 공화당으로 흘러가는 정치자금이 대부분 농기업에서 형성되는 상황에서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 부시 정부로서는 사활적인 과제였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시애틀 각료회의와는 사뭇 다른 협상 구도가 형성되었다. 3차에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농산물 수출국 그룹(미국, 호주 등)은 전면적인 시장 개방을 이끌어왔고, 유럽연합과 일본이 주도하는 NTC그룹(비교역적 관심사항)은 수입국의 입장에서 미국에 맞서왔다. 당시 관세 감축의 폭과 기간을 두고 미국과 유럽연합의 입장이 마지막까지 조율되지 않아 결국 결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번 5차 각료회의를 앞두고, 케언즈 그룹에 속하였던 개도국들은 G22(농산물 수출 개도국)라는 그룹을 형성하여, 미국에 농업보조금을 철폐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미국과 마찬가지로 수출보조금과 관련해 미국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유럽연합은 NTC그룹을 떠나 미국과의 공조를 추구하였다. 이제 농업협상에서는 ‘미국과 유럽’, ‘G22’, ‘농산물 수입국(한국, 일본 등)’이라는 더욱 복잡한 구도가 그려진 것이다. 2-2. 농업협정의 쟁점과 협상 경과 농업협정을 둘러싼 대략의 쟁점은 이렇다. 농업협정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을 통해 이미 설정된 의제라고 하여 도하개발의제가 출범 전부터 협상이 진행되어왔다. 2003년 3월 31일까지 ‘협상세부원칙’을 확정하기로 되어 있어서, 그에 앞선 2월에 제출된 하빈슨 초안(1차안)을 가지고 3월말까지 협상을 했으나, 합의에 실패하였다. 지지부진하던 협상은 뒤이은 7월 말 몬트리올 비공식 각료회의에서 미국과 유럽이 논의를 진전하기 위해 합의안을 마련하기로 하였고, 이에 따라 8월말 카스티요 일반이사회 의장이 2차안을 제출하였다. 2차안은 개도국의 주된 무역 통제 수단인 관세는 대폭적인 인하를 유도하고, 미국과 유럽연합의 ‘가격보전 직접지불’, ‘최소허용보조’, ‘생산계획하 직접지불’과 같은 국내보조와 수출보조는 미국과 유럽의 합의를 바탕으로 그 감축 비율을 대폭 완화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번 각료회의에서는 바로 이 2차안을 가지고 협상에 들어갔으나, '농산물 수출개도국'와 수입국그룹이 미국과 유럽의 입장만을 중심으로 작성된 2차안을 수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인도, 중국, 브라질, 태국이 속해있는 농산물 수출 개도국 그룹은 생산계획하 직접지불 철폐, 수출보조금 철폐, 미국․유럽연합의 합의안에 제안된 관세인하방식은 선진국에게만 적용하고, 개도국에게는 우루과이라운드방식을 적용할 것, 특별품목 규정 부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제안서를 제출하였다. 또한, 수입국 그룹은 관세상한 철폐, 관세할당량 증량 반대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마련된 3차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특별품목 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개도국뿐만이 아니라 선진국에게도 적용되도록 확대되어, 수출개도국 그룹은 반대입장을 제출했다. 보조금과 관련해서는 생산계획 하 직접지불이 일정정도 감축하는 내용만이 포함되어, 여전히 미국과 유럽연합의 수출보조를 인정하는 방향이 제시되었다. 수입국이 요구한 관세상한 철폐와 관세할당량 증량 반대 요구는 포함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과 유럽연합의 국내보조와 수출보조를 폐지하라는 농산물 수출개도국의 요구를 미국과 유럽연합은 수용하지 않았으며, 특히 막후 협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데 총력을 쏟아 부었다. 미국은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등 중미 국가들을 상대로 비공식 회의를 갖고, 수출개도국 그룹에서 빠져나오면 수입 관세를 인하해주겠다고 ‘회유’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그러나, 수출개도국 그룹은 역시 여전히 미국과 유럽연합의 입장을 중심으로 작성된 3차안을 반대하였다. 결국 이번 각료회의에서도 농업협상 세부원칙을 마련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진행될 협상은 최종 제출된 3차안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2-3. 미국의 면화보조금 한편, 미국의 보조금 문제는 ‘면화’ 문제에서도 불거졌다. 면화수출이 국가 소득의 대부분인 서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 베닌, 차드, 말리 4개국은 미국의 면화 생산자들이 보조금을 바탕으로 시장을 독점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신들은 소득이 1년에 10억 달러나 줄어들고 있음을 지적하며, 면화에 대한 보조금 철폐와 이로 인한 손해에 대해 보상 조치를 요구하였다. 또한 이를 5차 각료회의의 공식의제로 다룰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 4개국은 환금성 작물인 면화의 생산을 늘리는 조건으로 세계은행의 경제개발 특별 융자를 받아왔다. 그러나 미국 등 선진국이 보조금으로 면화수출을 확대하자 면화의 국제가격이 폭락해 국가 경제 붕괴 위기에 처한 것이다. 말리의 대표는 미국의 면화보조금은 말리의 GDP를 상회하는 연간 30~40억 달러에 달해, 이 금액은 미국이 아프리카에 지원하는 전체금액의 약 3배라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보조금은 2만 5천 호의 대규모 농가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서아프리카, 중앙아프리카 지역의 면화생산농가는 약 1천만 호에 이르지만, 대부분 영세하고, 그중 대부분은 1일 1달러 이하의 금액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서아프리카 4개국의 요구는 결국 9월 10일 의제로 채택되었고, 아프리카․카리브해․태평양 연안 그룹(ACP) 대표들은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미국, 유럽연합, 호주와 같은 농산물 수출국들은 4개국의 문제제기의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비판했다. 또한 조정에 나선 수파차이 WTO 사무총장도 세계은행, 국제구제금융, 세계식량기구와 연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WTO의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모색하겠다는 입장만 밝혀, 개도국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결국, 초국적 메이저 농기업의 시장지배력을 확대하기 위한 미국과 유럽연합의 입장에 대해, 농산물 수출 개도국은 보조금을 철폐하여 자국 농산물의 시장접근을 확대할 것을 요구하며, 수입국은 점진적인 시장개방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며, 최빈국은 역시 자국의 소농을 말살하는 보조금 철폐와 그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저항했고, 미국과 유럽연합은 이러한 요구에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며 결국 협상 결렬을 이끈 것이다, 3. 싱가포르 이슈 = 초국적 자본의 소유권 보장, 자본이동의 자유화 3-1 싱가포르 이슈의 개요 ‘투자’, ‘경쟁정책’, ‘무역원활화’, ‘정부조달 투명성’ 네 가지 의제를 의미하는 ‘싱가포르이슈’또한 협상 결렬을 이끄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이슈의 무역과 연계성에 대한 분석을 개시하자고 96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2차 각료회의에서 결정됨에 따라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장 문제가 되는 ‘투자’는 지난 98년 OECD내에서 추진하려다 실패한 "MAI(다자간 투자협정)"에 담긴 ‘투자자유화 조치’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단기성 투기자본까지를 투자로 정의하고, 해외자본을 국내자본과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한다. 투자 설립단계에서도 이를 위한 정보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외환위기 등 어떠한 상황에서도 소유권을 철저히 보장받아 이윤을 남기고 손실 없이 빠져나갈 수 있다. 또한 투자할 때 이행해야 하는 의무도 부과할 수 없다. ‘경쟁’은 독과점, 카르텔 등 경쟁을 가로막는 각 국의 관행을 제재할 수 있는 수단을 의미한다. ‘무역원활화’는 ‘국제무역절차의 간소화와 조화’라고 정의되며, 통관, 수출입허가와 같은 모든 수출입 절차와 운송형식, 대금 지불, 보험과 금융의 요건을 다룬다. ‘정부조달투명성’은 정부조달 분야에 있어서의 비차별, 투명성 등을 다룬다. 그런데, 이 의제들은 소유권, 생산, 소득, 수입, 외환 거래, 지불 균형에 영향을 미치는 자본의 유출․입과 관련이 있는 정책들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무역 정책, 즉 상품과 서비스의 국가간 교역에 관한 규범과 규제의 내용을 초과한다. 미국과 유럽의 의도는 ‘무역’ 자유화를 초과하는 이러한 내용을 WTO 협상 의제에 포함시켜, 제3세계가 투자를 자유화하고, 초국적자본이 자유롭게 들락날락하면서 투기활동을 벌이는 것을 가능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개도국들은 이렇듯 엄밀한 의미의 ‘무역정책’의 범위를 초과하는 이 이슈가 ‘무역’과 관련이 없으며, 선진국이 시장개방 압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뿐이라며, 협상 개시 자체를 반대해왔다. 3-2. 협상 경과 지난 4차 도하각료회의에서 유럽연합과 일본 등은 싱가포르 이슈협상을 개시할 것을 요구했으나 개도국들이 이에 반대하였고, 이에 따라 각료회의 선언문에는 협상 개시에 대해 ‘분명한 합의를 전제로 5차 각료회의에서 정해지는 방식에 따라 협상을 개시할 수 있다’라고 담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이슈에 관한 쟁점은 5차 각료회의가 시작되기 전 도하 각료 선언문의 이 문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시작되었다. 선진국들은 이 문구가 ‘5차 각료회의에서 협상을 개시하되, 그 방식이 먼저 논의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하는 반면, 개도국들은 ‘협상 개시 여부도 논의의 대상이다’라고 해석했다. 9월 10일 각료회의 시작과 함께 중국, 인도네시아, 이집트, 방글라데쉬, 필리핀, 탄자니아, 베네수엘라와 자메이카 등 70여 개의 개도국 정부들은 싱가포르이슈 4가지 중 그 어느 것도 협상이 개시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 뒤이어 9월 11일과 12일 사이 개최된 싱가포르 이슈 작업반에서는 21개국이 완강한 반대의 입장을, 14개국은 4개 이슈 중 무역원활화와 정부조달투명성만 우선적으로 협상을 개시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싱가포르이슈 워킹그룹 의장인 캐나다 무역대표 페티그루는 4개의 의제를 분리 협상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이는 13일에 제출된 3차 선언문 초안에 반영이 되었다. 이에 유럽연합은 농업협상에서 개도국들의 양보를 유도하고자, 4개의 이슈 중 반발이 심한 ‘경쟁’과 ‘투자’는 제쳐두고, ‘무역원활화’와 ‘정부조달투명성’에 대해 먼저 협상하자는, 일정정도의 양보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개도국들은 이러한 입장에 더욱 반발하며 13일 밤에 개최된 그린룸 회의(유럽연합, 미국, 멕시코, 브라질, 남아공,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케냐)와 14일 오전 30개국이 참여한 그린룸 회의에서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정부는 4개 이슈 모두의 협상이 개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여 결국 그린룸회의가 14일 오후까지 계속되었으나, 합의를 이루어내지 못하여, 데르베스 의장은 결렬을 선언하였다. 농업협상에서 농산물 수출개도국 그룹이 미국과 유럽연합에 강력하게 대항했다면, 싱가포르이슈에 대해서는 아프리카연합(AU), 아프리카․카리브․태평양 인근 국가 그룹(ACP)와 최빈개도국(총 61개국) 그룹들이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이다. 4. 5차 각료회의 이후 5차 각료회의에서 개도국과 최빈국들은 ‘G22', '아프리카․카리브․태평양 인근국가 그룹’, ‘최빈개도국그룹’ 아프리카연합(AU)등으로 의견 그룹을 형성하여 미국과 유럽연합이 주도하는 협상에 반기를 들었다. 이로써 ‘자유무역의 혜택을 개도국과 최빈국이 고루 누릴 수 있도록 한다’는 미국과 유럽연합의 주장이 허구임이 드러났다. 또한 농업협상에서 미국과 유럽연합은 자국의 생산자들에게 유리한 국제 무역 규칙을 부과하는 것을 시도함으로써, 모두가 공평하게 혜택을 누리는 ‘완전한 무역의 자유화’를 이룬다는 것 역시 허구임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제시한 ‘싱가포르 이슈’는 엄밀한 의미의 ‘무역’정책을 초과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독수리 오형제’가 알고 보니 ‘조류의 탈을 쓴 인간 오남매’라는 우스갯소리처럼, ‘개도국에게 혜택을 주는 무역 자유화 협상 라운드’는 그 어느 단어도 ‘도하개발의제’를 설명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각료회의 무산 이후, 과연 도하개발의제가 정해진 바대로 2004년 말 타결되어 2005년에 새로운 무역 체제가 출범할 수 있을지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또한, ‘합의를 기반으로 하는’ 다자 협상이 과연 효과적인가 하는 점에서 WTO 자체에 대한 유용성도 의심되고 있다. 그러나, 개도국들의 강력한 반발로 이끌어낸 5차 각료회의의 무산과, 그에 따른 WTO의 위기상황이 곧바로 세계 민중들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관세 철폐, 투자 자유화 등 WTO 도하개발의제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조치들을 지역별,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을 통해 시도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으며, 이에 따라, 지역별,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FTAA(북미자유무역협정)과 함께 ASEAN+3, 한․중․일 자유무역협정 등 지역 협정 체결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역시 이에 발맞추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국회 비준을 서두르고 있다. 얼마 전 APEC 정상회의에서는 스크린쿼터제를 축소하여 한미투자협정 체결에 박차를 가할 것이며, 한일자유무역협정 등 양자간 자유무역협정과, 중국, 아세안을 포괄하는 자유무역지대를 설립하겠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외국인교육기관특별법을 제정하고 경제자유구역 내 내국인 진료를 허용하도록 경제자유구역법을 개정하는 등, 의료․교육의 시장화와 개방을 부추기는 여러 가지 법․제도 정비를 병행하고 있다. 그러니, 전 세계 민중들의 삶과 권리가 존중되는 세계화로 나아가기 위한 투쟁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애초에 세계 사회운동 진영은 WTO 도하개발의제가 ‘식량 주권’, ‘토지와 종자에 대한 농민들의 권리’, ‘지식에 대한 민중들의 권리’, ‘의료․교육․에너지․문화 등 필수 서비스에 대해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 ‘의약품에 대한 권리’ 등을 파괴되고 있음을 비판하였고, 이러한 권리들을 민중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각료회의 무산으로 인한 협상의 지연’이 이러한 민중들의 요구가 실현되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 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각료회의의 무산을 이끌었던 다양한 개도국 그룹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도 쟁점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각료회의 무산에 크게 기여한 G22을 계속 지원해 이들이 농업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서비스나 공산품에 대해서도 단결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WTO내 ‘남반구연대’를 구축하도록 하자는 입장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농산물 수출 개도국’은 미국과 유럽연합의 보조금 정책에 대해서 강력하게 저항하긴 했지만, 이들이 주장한 핵심이 ‘농업분야에서의 완전한 자유화를 통한 시장접근의 확대’라는 점을 볼 때, 소농들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비아 캄페시나는 농업협정에 대해 소농들이 보호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보조금과 관세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토지와 종자에 대한 농민의 권리, 식량에 대한 민중들의 권리가 옹호되기 위해서는 식량을 상품화하여 시장의 논리에 내맡기는 WTO 에서 농업이 제외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WTO 협상 구도 내에서 어떤 세력을 지원할 것인가가 아닌, 전세계 민중들의 단결과 연대를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협상을 무산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불평등과 빈곤을 확산하고, 전 세계 민중들의 제반 권리를 박탈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대안적인 세계화’를 이루어내는 것임을 확인하자.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