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세계의 제국주의 질서와 대안 = 엄 한 진(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이 글에서 우리는 폭력적인 이행기로서의 세계화 시대가 낳은 아랍세계의 정치·경제질서와 이데올로기적 지형의 분석을 통해,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아랍정세에 대해 조망해 보고자 한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미국 지배세력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와 그에 기반한 사악한 음모에 대한 폭로와 분노를 낳았다. 그렇지만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우리가 그나마 이란혁명 이후 가장 효과적인 이슬람마케팅이었던 9.11테러 직후의 문명담론의 포로상태에선 다소 벗어났다 해도 여전히 위의 음모와 비극이 가능했던 아랍세계의 종속과 분열, 무력함의 원인, 즉 아랍문제에 대한 총체적이고 구조적 인식은 미흡하다. 전쟁에 대한 인식과 대응 역시 2차 대전 이후 전쟁과 일상화된 무력사용이 아랍세계에서의 제국주의 이해관철의 핵심적 요소로 작용해왔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 그 자체의 야만성에 대한 비판과 일시적, 인도주의적 박애를 넘어 총체적 인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베트남, 레바논, 이라크, 소말리아, 코소보, 아프가니스탄, 다시 이라크로 전쟁에 대한 그간의 세계의 관심은 일시적이었다. 예를 들어 걸프전 이후 이라크와 이라크 민중의 고통은 잊혀졌었고 1988년 종전 이후에도 지속적인 공습과 무력점령을 경험하고 있는 레바논의 현실에 대한 관심은 또 다른 전쟁을 요구한다. 조만간 또 다른 분쟁과 비극의 지점으로 우리의 관심은 옮아가겠지만 이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아랍문제가 현 세계의 본질의 특수한 발현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그리 먼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I. 아랍세계에서의 제국주의 제국주의를 경제적 착취와 국가간 정치·군사적 지배관계의 중첩, 그리고 세계체제에 대한 일국 현실의 종속의 측면에서 바라보면 아랍세계에서의 새로운 제국주의는 구 식민본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특히 미국 주도하에 형성된 경제적, 정치적 개방, 이데올로기적 종속, 종족적·종파적 차이의 정치도구화, 그리고 군사적 개입 등으로 실현되어 왔다. = 경제적 동기와 정치적 압력: 신자유주의와 형식적 민주화 = 경제개방과 정치개방은 90년대 이후 아랍의 지역질서의 변화를 이끄는 핵심적인 동력이다. 식민지 경험, 발전전략 및 근대화 방식, 천연자원 보유 등에 따라 시기와 정도 면에서 국가간 차이가 있지만 아랍세계의 경제개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이들 모두 산업간 연계성에 기반한 통합성있는, 그리고 자주적인 민족경제 건설에 실패하고 심각한 재정위기와 외채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결국 대다수 국가들이 외채문제를 계기로 국제금융기구들에 의해 강요된 개혁프로그램을 채택하게 된다. 이것은 여타 지역에서처럼 거시적 지표의 안정화와 구조조정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구조조정과 그 연장선상에서 최근 본격화하고 있는 경제개방 전략은 미국과 유럽연합 주도의 개방적인 지역경제질서 형성과정이다. 그리고 아랍국가들의 경우 이러한 전망은 부정할 수 없는 대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랍정권들은 분열과 불평등으로 인해 구조적 한계를 지니는 아랍 차원의 지역화가 아닌 서방에의 편입만이 유일한 현실적 대안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 미국과 유럽은 석유자원의 안정적 확보라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지만 역사적, 지리적 요인으로 인해 서로 다른 틀에서 이 지역에 대한 경제통합을 추진하고 있다. 먼저 지리적으로 인접해있어서 이 지역에 대한 경제적, 정치·군사적 이해관계가 큰 유럽연합은 1995년 11월 바르셀로나 회의에서 윤곽이 잡힌 유럽-지중해 차원의 틀에서의 지역화에 집중하고 있다. 경제협력, 이민문제 해결 등을 중심으로 최근 활발해진 유럽의 지중해정책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중동석유 독점 기도, 그리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아랍세계 분열정책이 유럽에 미치는 경제적, 군사적 불안정 효과를 저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의 아랍국가들이 포함된 이 전망 속에는 20세기 초에 그랬듯이 이스라엘이 유럽의 첨병으로 기능한다는 가정이 내포되어 있다. 한편 미국은 중·근동지역 아랍국가들과 터키, 이스라엘이 포함된 틀에서의 경제통합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 지역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이해관계의 차이는 예를 들어 1990년대 후반이래 두 세력 모두에게 대아랍정책의 핵심요소인 반테러정책의 경우, 미국이 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과 이스라엘이 자행하는 전쟁과 테러의 빌미로 사용하는데 반해 유럽, 특히 프랑스는 테러조직 유입 방지에 전력하는데서 알 수 있듯이 중동정세의 불안정이 유럽본토, 그리고 아랍국들과의 경제관계에 미칠 파장을 막으려는 의도가 크다. 한편 이러한 방식의 세계경제에의 통합과정은 정치적 변화를 수반했다. 1980,90년대이래 군주제 국가와 세속적인 성격의 정권 모두에서 국가주도의 제한적인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아랍국가들의 정치 지형은 대체로 권위주의 정권, 정치적 이슬람, 시민운동 삼자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구도는 매판적인 정치권력이 지역질서 재편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수용하면서 이로 인해 야기된 정당성의 위기를 절차적 제한된 정치개방과 종교적 담론의 강화로 극복하는 전략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 다당제의 도입은 발전전략의 실패로 민족주의적 권력이 약화되면서 남긴 정치적 공백을 메우는 국가 주도의 지배구조재편 과정의 주요 기제였으며 이 과정에서 이슬람세력과 과거의 반체제세력의 온건한 분파가 제도권 정치에 편입되었다. 1970년대 이집트의 정치개방이 시장개방과 대외종속을 정당화하기 위한 과정이었듯이 1990년대 초반부터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레바논, 요르단,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아라비아반도 군주제 국가들에까지 확산된 정치범 석방, 다당제와 직접선거, 언론의 자유의 도입은 제국주의와 그 매개체로서의 지역정권들 주도하에 이루어진 시장개방의 정치적, 제도적 토대구축과정이었다. 최근에 이루어진 일부 나라들에서의 정치변동과정 역시 경제개방과 정치개방이 동시대적 현상이며 상호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로코의 경우 90년대에 진행된 왕실 주도의 반체제 진영의 체제내 수용과정은 1998년 정권교체를 낳았으며 2000년 새로이 국왕이 된 젊은 모하메드 6세는 경제개방과 정치개방, 그리고 여성문제를 비롯한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같은 해에 역시 국왕이 교체된 시리아도 경제개방을 가속화하고 있으며 특히 2010년 발효될 유럽연합과의 자유무역협정은 농산물, 석유, 관광산업을 중심으로 이 나라의 경제부흥의 열쇠로 간주되고 있다. 그 과정의 주역으로서 기술관료들이 정치적으로 부상하였고 정치개혁이 경제개방의 관건으로 논의되고 있다. 군주제 국가 바레인 역시 2001년 위로부터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세계경제에의 편입을 계기로 외부로부터의 압력하에, 그리고 위로부터 진행된 정치변동은 일부 형식적인 민주적 권리의 신장과 시민사회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정치권력의 질적 변화나 신자유주의노선에 대한 어떠한 근본적 수정도 이루지 못했다. 그와 반대로 절차적 민주주의의 도입은 연고적 권위주의의 강화와 신자유주의 정책의 가속화를 초래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아랍지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세계화 시대의 주된 정치현상의 하나는 민주주의의 강요이다. 198,90년대 개발도상국들에서의 민주화 현상은 대부분 시장개방과 구조조정을 통한 세계경제에의 편입의 제도적 기반으로서 강대국과 국제금융기구로부터 권고 내지 강요된 결과였다. 이는 세계경제체제가 낳은 국지적 위기,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제시되었던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실패를 부패, 비효율적 문화와 체제의 성격 등 개별국가 내적 문제로 환원시켰음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시장의 투명성 문제로 환원된 민주주의 담론은 아랍정권들의 권위주의를 이스라엘의 '민주주의'와 대비시키면서 미국, 프랑스, 영국의 정치·군사적 개입,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사주의를 묵인하는 빌미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정치도구화와 그것의 비민주적 결과는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논리적 결과인 전지구적 차원의 민주주의의 퇴보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세계화에의 적응만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고 희망의 근거라는 분위기 속에서 선진국을 포함하여 세계 전 지역에서 민중의 실질적인 정치참여나 민주적이고 관용적인 논의문화의 퇴보를 볼 수 있다. 난해한 용어와 허구적인 수치로 치장된 주요 정책결정은 효율성을 앞세워 소위 전문가들에게 일임되고 경쟁을 빌미로 한 국익, 그리고 대안의 부재 또는 종말을 내세워 반체제적 사회운동과 민주적 논의를 억제하고 있다. = 종족적·종파적 차이를 이용한 분열 전략 = 근대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과 유럽은 아랍세계를 그들 각자의 이해에 유용한 매판적 성격을 띤 여러 지역으로 분열시켜왔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전략의 실현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종족적·종파적 차이의 정치적 이용에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에 대한 이해는 역사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레바논 출신 경제학자 꼬름(G. Corm)은 배타적인 유대인적 정체성에 기반을 둔 시온주의(zionism)와 그 정치적 화신인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가 이 지역 정치질서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주로 폴란드와 러시아에서 건너온 유대인 이주민들은 차별과 위협에 따른 유럽에서의 그들의 패쇄된 공동체 생활의 경험과 배타적인 탈무드 문화, 그리고 유대교, 유대인만의 국가의 창설이라는 이념으로 인해 다원주의 전통이 강했던 아랍사회가 그들에게 제공했던 공존의 기회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타자에 대한 거부를 본질로 하는 유대국가가 자신의 부당한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단지 타민족을 차별, 배제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주변민족들 역시 자신을 배척하고 더 나아가 그들이 자신처럼 배타적인 종교적, 민족적 정체성에 따라 서로 분열, 대립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70년대초까지만해도 이러한 이스라엘 존재의 의미와 그들의 정체성에 따른 분열의 전략은 종교적 차원이 미미했고 종교적인 면에서 관용적이었던 아랍민족주의에 의해 효과적으로 저지되었다. 그런데 이미 1967년 아랍진영의 패배는 이러한 방어벽의 붕괴를 의미했고 그 이후 이 지역 정치질서는 이스라엘의 전략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변형되었다. 즉 각 지역마다 다른 형태로 발전해 온 이슬람 내 분파간 차이를 극단적으로 부각시키는 이슬람근본주의 운동은 이스라엘의 이 지역 분열정책에 크게 기여하는 결과를 낳았다. 꼬름은 이슬람근본주의의 발전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레바논 내전(1980-1988)을 야기하며 키워낸, 기독교 종족인 마로니트족(Maronite Christians)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독교운동단체, 팔랑헤주의자(Phalangists)나, 이슬람근본주의자들에 의한 배척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긴 이집트의 기독교 집단 꼽트족(the Copt)의 종교적 정치운동도 바로 이 이스라엘의 영향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간은 아랍민족주의의 저항으로 온전히 실현되기 어려웠던 경제적 차원을 포함한 온전한 의미의 이스라엘 제국주의의 실현이 이스라엘의 대아랍전략의 핵심으로 대두되고 있다. 이미 이스라엘의 군사적 헤게모니 완성과 미국주도의 평화협상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이 이 지역의 온전한 일원으로 암묵적으로 인정되어 그 역사적 정당성 문제가 현실적으로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면서 이스라엘이 꿈꾸던 이스라엘 중심의 아랍경제질서 형성은 커다란 장애물을 벗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존재를 사실상 승인한 아랍정권들은 정치적 양보를 하더라도 지역안정을 확보하여 경제부흥의 길을 걷고자 한다. 시리아 역시 이미 75년부터 레바논에 대한 침략과 내정간섭을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수행한 레바논 분열전략의 동조자 역할을 수행해왔다. 걸프전에서의 시리아의 참전은 이 지역 반제·반시온주의 세력의 결정적 패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는데 시리아는 전쟁참여에 대한 대가로 레바논에 대한 자유로운 개입을 보장받았다. 아랍세계가 언어, 종교, 역사를 공유하면서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분열되어 있고 적대감과 경계심이 팽배한 것도 이러한 종족적·종교적 정체성의 정치도구화에 크게 기인한다. 이 전략은 국제사회가 그간 보스니아, 팔레스타인, 레바논, 이라크에 적용한 공동체 정책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여러 공동체가 공존하는 이 지역들의 비극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정체성의 도구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지배의 이데올로기적 측면: 이슬람 담론 = 이슬람근본주의의 대두과정은 바로 제국주의 논리가 관철되는 과정, 즉 70년대이래 미국과 이스라엘 주도로 새로운 지역질서가 형성되는 과정과 동시대적인 현상이었다. 영국의 인도지배에 그 연원을 두고있는 이슬람의 정치도구화는 1970년대 이후 소련과의 경쟁에서 미국이 계승하게 된다. 이 지역의 국가들에서의 재이슬람화는 바로 이러한 석유·사우디 중심의 지역경제질서 재편과 함께 강화된 것이다. 이 변동과정에서 이슬람근본주의의 대두는 새로운 지역질서 형성이 낳은 부산물인 동시에 이 과정의 필수 구성요소였다. 즉 기존 이데올로기들이 무력해진 상황에서 나타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사회통합의 위기에 대한 민중의 대응양식이자 동시에 중동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실현의 축인 사우디아라비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슬람 중심의 지역질서 형성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사우디가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하고 미국이 사우디의 아랍세계 주도권 장악을 도와주는 방식의 미-사우디 관계는 이미 5,60년대 낫세르의 범아랍주의에 대한 견제전략으로 그 모습을 보였었다. 당시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은 팔레비 치하의 이란과 사우디, 쿠웨이트 등 종교적 성격이 강한 군주국들을 통해 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저지하려 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미 CIA의 대리인 역할 수행, 이란혁명 이후 사우디 주도의 대이란전선의 형성, 석유수출국기구(OPEC),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에서 사우디에 의한 미국의 이해대변으로 둘간의 연대가 본격화되었다. 빈 라덴 역시 이 양국관계의 익명의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었다. 참고로 근본주의적 이슬람을 주창하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파키스탄 역시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중동에서의 사우디아라비아와 동일한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미국은 이슬람이 있는 제3세계 모든 곳에서 이슬람을 정치도구화했던 것이다. 또한 이슬람 정치세력의 부상에 따른 정치의 불안정이 미국의 개입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9·11테러 이후 억압적인 여성현실, 비민주적인 정치체제, 아프간 무자헤딘의 지원 등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사우디 비난, 그리고 걸프전 이후에 시작되어 최근 심화된 정권과 여론의 괴리에서 미-사우디 관계의 변화의 조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이스라엘 관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미국의 군사력을 필요로 하는 사우디 왕가와 사우디 석유의 안정적 공급을 필요로 하는 미국의 공통이해는 여전히 굳건하다. 1980년대에 전 아랍세계에서 주요 정치·사회세력으로 부상했던 정치적 이슬람은 90년대에 들어 알제리 이슬람 저항세력의 비극을 신호탄으로 탈정치화 또는 온건화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여성의 의복문제나 의례의 준수문제와 같은 형식적 측면에 국한해 이슬람을 사고하는 세속화된 아랍민중과 이슬람 운동세력의 정치적 전망과의 괴리는 점차 벌어지고 있다. 이제 아랍에서의 이슬람 세력은 이슬람 NGO들의 비정치적 활동과 극소수의 테러리즘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다. 제국주의 세력들은 바로 이 후자 덕택에 또는 전자와 후자의 연관성을 부각시키면서 이슬람담론과 문명담론의 생명연장을 꾀하는 것이다. 9·11이 소위 '이슬람세계'의 희생과 이슬람의 평화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루어진 이슬람열기를 통해 유럽의 극우파와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의 강화를 가져왔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군사적 지배 = 최근 미국의 지배전략은 반테러리즘을 빌미로 한 군사주의와 더불어 민주주의제도의 무력화 시도의 양상을 띠고 있다. 1970년대부터 영국, 프랑스의 뒤를 이어 이·팔분쟁에 개입하기 시작한 미국은 걸프전을 기화로 이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개입의 시대를 열었다. 영국의 퇴각을 가져온 수에즈 전쟁부터 걸프전 이전까지만해도 다른 지역들과 달리 중동에서의 직접적인 군사적 역할은 미국과 유럽의 동맹국 이스라엘에 맡겨져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은 그 이후 추진된 이·팔 평화협상으로 국제사회의 지지를 받은, 그리고 일회적인 것에 그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걸프전 이후부터 9·11까지의 기간에도 반테러리즘은 아랍의 현 정권들과 이 지역질서의 고착화를 추구하는 미국과 유럽의 주된 이데올로기였다. 걸프전은 코소보전쟁으로 전장을 옮겼을 뿐이고, 이미 90년대 중반부터 반테러리즘 투쟁이 평화협상과 결부되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중탄압이 심화되면서 9·11이후의 반테러리즘 전쟁의 토양을 닦아놓았다. 결과적으로 9·11이후의 과정은 테러리즘을 빌미로 구 소련을 포함한 세계 전 지역에 군사기지와 결정적인 군사적 우위의 확립과정이었다. 한편 최근 미국 대외정책의 군사화는 다음과 같은 유일 강대국으로서의 헤게모니의 한계와 연관이 있다. '신경제'와 금융세계화의 환상이 깨어진 21세기의 미국은 더 이상 세계에 대안을 제시할 능력을 상실했으며 과거 동아시아 모델과 같은 모범사례도 더 이상 언급되지 않고 있다. 더불어 세계경제체제의 조절자로서의 능력도 의지도 보이고 있지 않다. 그나마 유일하게 압도적인 힘을 유지하고 있는 군사적 차원을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이끌어가고 있지만 미국의 정치·군사적 개입은 국제사회로부터의 정당성 인정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세계화의 장밋빛 미래의 제시를 통해서가 아니라 전지구화되고 일상화된 위기감을 이용하고 동시에 스스로가 창출한 위기를 해소해줄 수 있는 힘의 과시를 통해 지배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민주주의의 파괴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는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의 위기를 심화시킬 것처럼 미국의 군사주의화 경향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그 속에서의 자신의 헤게모니의 안정성을 침식할 것이다. '예방전쟁'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전략에는 그간의 세계화가 낳은 일국적, 세계적 차원의 양극화의 심화와 그로 인한 저항의 분출을 예방하려는 긴급한 요구가 담겨있다. II. 대안적인 아랍질서의 모색 아랍세계는 정치적으로 위기의 상황에 처해있다. 이는 무엇보다도 90년대 초반 이후 정치적 이슬람의 쇠퇴가 남긴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공백을 채울 대안세력이 부상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이미 걸프전 이후 설득력을 상실한 이슬람 담론이 위로부터, 즉 미국·유럽과 아랍정권들에 의해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특히 9·11테러 이후의 반테러리즘이 세계질서의 이데올로기의 주요 구성요소로 등장하고 미국의 이라크지배 이후 가시화되고 있는 종족·종파간 갈등의 정치적 이용은 이슬람 담론의 정치적 위상이 당분간 지속될 것을 예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의 위기 내지 부재는 민중운동의 역량 미흡에 크게 기인한다. 사실 미디어를 통해 우리에게 비추어지는 아랍민중의 모습은 억압적인 정치적 조건에서도 분연히 일어서는 의식있고 용기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엄혹한 현실에서도 아랍민중이 살아있음을, 그리고 아랍민족주의와 무슬림들의 연대가 실체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의 분출은 1999년 2차 인티파다 이후 무장투쟁 참여열기가 가혹한 탄압의 결과이듯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의 산물이라는 점을 주지해야한다. 정치변혁에 대한 아랍민중의 전반적인 소극적 태도는 계급구조, 대안의 부재 등 여러 요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사회해체에 대한 두려움이다. 2000년 2차 인티파다 이후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오랜 내전이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후견으로 이어진 레바논, 서방세계와의 갈등으로 아랍세계에서마저 고립된 리비아, 걸프전 이후의 이라크, 군과 이슬람 무장단체들간의 내전의 참혹한 결과를 겪은 알제리, 그리고 이슬람국가 아프가니스탄의 파괴와 이란의 고립은 아랍민중으로 하여금 이슬람을 통해서든 세속적 이념에 따르든 현 체제에 대한 어떤 거부의 시도도 사회의 붕괴 내지 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결국 이 지역질서의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세력들처럼 민중도 현실의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에도 소극적이다. 테러리즘과 세계화담론이 심어주는 경제적 환상만이 이들의 고통과 허탈함을 달래줄 수 있는 마약인 것이다. 위로부터의 정치개방의 산물인 측면이 큰 시민사회 담론은 아랍세계와 서양 및 그들의 것으로, 그들의 지배도구로 인식된 민주주의, 인권, 법치국가, 여성해방 등의 근대적 이념과 가치간의 극복할 수 없는 차이만을 각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마찬가지로 이 서구 및 서구적 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졌던 정치적 이슬람의 전망과 그것의 구체화로서의 이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환상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물론 전망을 상실한 아랍민중의 미약한 역량은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주변부의 현실적 힘의 약화,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주변부 민중의 정치적 약화 및 이데올로기적 종속이라는 전반적 현상의 한 부분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방식의 축적위기 극복형태는 결국 주변부와 민중의 대항능력 약화라는 계급관계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자주적이고 민중적인 사회변혁을 주도할 수 있는 주체는 신자유주의나 추상적인 민주주의 담론, 그리고 현 세계질서의 유지에 기여하는 일부 인도주의적 개입세력들이 상정하는 사회적 관계에서 유리된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이 주체는 공통이해에 근거한, 즉 지난 20년간의 세계화를 통해 생존의 위협에 처한 대다수의 세계민중의 일원으로서의 아랍민중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이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이데올로기투쟁과 연대의 창출이 요구되는 것이다. 다행히 2000년을 전후해 등장했고 전세계적인 반전열기 속에 강화된 대중운동의 부활에서 그 태동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세력의 형성은 다음과 같은 아랍세계의 본질적 과제들의 해결과정 속에서 가능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이 과제들의 미해결이 이러한 세력의 형성을 가로막아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첫째는 팔레스타인국가 수립문제, 동예루살렘의 지위문제, 난민문제와 같은 본질적인 사안에 대한 논의와 같이 중동질서의 핵심문제인 이-팔분쟁의 근본적 해결이다. 둘째는 종족간·종교간 공존이다. 석유를 매개로 한 세계경제에의 편입이 낳은 대외종속의 심화와 아랍국들간 경제적 격차의 심화,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는 5,60년대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 아랍민족주의의 현실적 기반을 붕괴시켰고 이란-이라크전, 사하라분쟁, 레바논내전을 비롯한 종족간, 종파간, 국가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제 종족·종교간 갈등의 해결은 자율성의 보장과 공존을 지향해야 하며 그 해결은 분리독립이 아닌 다원적인 국가의 건설이라는 원칙하에 역사적, 지역적 조건에 따라 상이한 형태를 모색하는데서 나올 수 있다. 셋째는 제국주의의 매개체로서의 아랍정권의 개혁과 아랍지역차원의 통합이다. 아랍 각국의 미래가 워싱턴이나 파리가 아닌 스스로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조건의 창출이 절실하다. 이는 사회통합 능력이 있는 정권에 의해서 가능하며 이러한 정권의 창출은 자주적이고 민중적인 정치세력의 등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미국과 유럽이 이 지역 국가들의 민주화에 무관심하고 연고에 기반한 권력과 지배를 용인 내지 부추기는 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탈을 쓴 봉건적 체제가 그들의 이해실현에 효과적이며 민주적인 정권은 미국이나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보다 자국민의 이해를 대변할 것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난 2,30년간 미국과 유럽에 의해 저지된 이러한 세력의 창출은 현재의 종속적인 지역질서 유지를 위해 행해져온 아랍세계의 분열전략을 극복하고 아랍세계에 속한 국가들간의 경제통합, 아랍차원의 산업 연계구조의 창출이 절실하다. 넷째는 석유자원에 대한 자주적 권리의 확보와 석유수입의 민주적 배분 그리고 산유국을 포함해 경제의 석유의존도의 완화와 산업화 추진을 통한 저발전의 극복이다. 이는 중심부-아랍 산유국-아랍 비산유국으로 이어지는 지배-종속관계와 석유지대의 통제를 기반으로 한 연고주의와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열쇠이다. 다섯째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주창하는 방식의 일국내 제도개혁보다 지역차원의 정치·군사적 갈등의 해결을 우선시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이슬람 중심의 지역질서와 이데올로기 지형의 극복이다. 그간 석유를 매개로 한 세계질서에의 편입이 낳은 아랍사회의 재이슬람화와 정치적 이슬람은 위에서 언급한 아랍세계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가리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 과제는 시급하다. 새로운 주체의 형성은 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능할 것이다. 이라크 민중의 고통을 댓가로 우리가 이슬람이라는 차이가 아닌 세계화라는 보편적 현상을 통해 아랍세계를 덜 낯설게 느끼게된 지금, 이 지역의 저항운동에 대한 연대 역시 세계질서와 이것의 특수한 구현형태로서의 아랍의 지역질서의 근본적 변화라는 전망을 갖고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상의 과제들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한반도 - 노무현정부의 무정견, 무대응이 한반도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임필수 | 정책국장 미국이 이라크 침략전쟁을 감행한 후 바그다드를 점령하면서, 미국의 정·관계의 신보수주의자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화제에 오르고 있다. 미국 국방차관인 폴 월포위츠, 더글라스 J. 파이스, 전 국방위원회 위원장 리차드 펄, 전 CIA 국장 제임스 울시가 그들이다(언론에서는 그들을 '네오콘'(neocon)이라 부르고 있다). 신보수주의 '스타' 중 한 명인 제임스 울시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이었던 1998년 <새로운 아메리카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를 결성하여 이라크에 관한 미국의 정책 목표는 "정권교체"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 의회에서 이라크 반체제그룹 특히 <이라크민족회의>(INC)의 활동을 보조하기 위해 1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하자는 "이라크 해방 법"(Iraq Liberation Act)을 통과시키기 위한 로비활동을 펼쳤다. 그는 최근 연설에서 이미 4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고, 양차 세계대전과 냉전은 유럽 중심으로 벌어졌지만 4차 세계대전은 중동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즉 사우디의 라덴과 같은 '와하브' 극단주의자, 시리아와 이라크의 바아쓰당 '파시스트', 이란의 '신권정치가'와의 전쟁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더글러스 파이스 국방차관과 리처드 펄 전 국방정책위원장은 이스라엘 싱크탱크인 '고급전략·정치연구소'가 후원하는 연구모임에 참여해왔다. 이 연구소는 91년 오슬로 이-팔 평화협정의 합의 사항들을 반대하는 보고서를 네타냐후 이스라엘 행정부에 제출한 바 있다. 보고서는 요르단과 터키, 미국의 도움을 얻어 후세인 대통령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시리아와 이란까지 친미정권으로 교체시키는 전략적인 환경 변화를 이뤄내지 않는 한 팔레스타인과의 어떤 협상 조건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였다. 무시 전략 또는 북한 '정권교체'? 문제는 이러한 부류의 인사들이 클린턴 행정부 당시 이루어진 제네바합의(1994년)를 부도덕한 정권과 이루어진 '더러운 거래'이며 '완전한 실수'로 간주했고, 1998-99년 입안된 '페리 프로세스'에 관한 완강한 반대 캠페인을 펼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시가 정권을 잡게 되자, 클린턴 정부 말미에 이루어진 '조미 공동코뮤니케'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북한과의 어떤 공식적인 대화도 진척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에는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개발 의혹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제네바합의와 페리프로세스가 이미 끝장난 것으로 선언하였다는 것이다. '북핵 위기론'이 미국에 의해 조장, 고조되는 가운데 지난 3월 말 윤영관 외교통상부장관은 미국을 방문, 콜린 파월 국무부장관과 함께 대북 정책에 관해 협의했다. 그 시점에서 미국의 어느 상원의원은 “우리는 지금 대북정책이 없다”고 말했다. '나쁜 정책'을 구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페리보고서가 검토했던 '무시' 전략이 실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즉 부시정부가 들어선 이후 지금까지 미국은 대북 '무시' 전략을 활용해왔던 셈이다. 하지만 4월 21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부시 대통령이 북한과의 협상을 승인하기 수일 전 미국이 중국과 함께 압력을 가해 북한 지도부를 축출해야 한다는 '혁신적' 의견을 담은 메모를 정부 내 요인들에게 회람시켰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미 국무부가 지금까지 "우리는 김정일 축출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강조해온 것과는 정반대며, 국방장관이라는 최고위급 인사의 메모라는 점에서 미국 내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는 분명한 징후다. 북한은 과연 농축우라늄 핵무기를 개발했는가? 그러나 그들이 제네바합의가 '완전한 실수'라는 주장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 개발은 과연 사실인가?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국 동아시아태평양차관보가 북한을 다녀간 후, 부시 행정부는“북한이 농축우라늄에 기반한 핵무기 개발 계획을 시인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제시한 증거는“강석주 부주석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과 북한이 원심분리기 제작에 사용될 수 있는 알루미늄을 수입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이 제시한 증거는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북한 외무성 관리는 미국 쪽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들이 주장한 농축우라늄에 의한 핵무기 제조계획을 부정했다.”“(미국은) 근거라고 한 위성사진도 내놓지 않았다!” 계속해서 북한 외무성 관리는 강석주 부주석의 당시 발언이 "지금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미국이 계속 강압적으로 나온다면 자기를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의미였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알루미늄 수입은 어떤가? 이는 현재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벌이기 전에 펼쳤던 여론공작전의 사례를 살펴보는 게 유용하다. 2002년 9월 미국 <뉴욕타임즈>는 이라크가 우라늄 농축을 목적으로 가스 원심분리기를 제작하고 있으며, 그 증거로 원심분리기의 외장재인 알루미늄 배관을 구입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같은 날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과 딕 체니 부통령은 미국 방송에 출연하여“정말로 오직 핵무기 원심분리기에만 적합한 설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미국의 핵과학교육재단에서 발행하는 <핵과학자회보>는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이라크가 수입하려 한 품목은 재래식 무기나 산업용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무기에 사용될 경우 기껏해야 재래식 로켓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주장의 요지였다. 미국이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개발의 증거로 제시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품목인 코발트 파우더, 고강도 알루미늄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북한의 농축우라늄 문제는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금창리 지하시설 문제도 이와 유사한 사례였다. 1998년 10월경부터 미국은 위성사진을 근거로 평북 금창리 지역에서 비밀 핵시설을 건설하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고, 모든 언론은 연일 떠들썩하게 핵위기론을 제기했다. 온갖 소란이 벌어졌지만 1999년 5월, 미국 조사단은 의혹 시설에 대한 현장 방문 끝에 이는 핵시설과 무관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2000년 5월에도 2차 방문이 이루어졌다). 미국은 자신이 제기한 의혹이 사실무근으로 밝혀진 것이 무안했던지,‘현장방문이 이루어질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므로 북한이 사태를 은폐할 시간이 있었다’면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뉘앙스로 정리했다. 다자회담은 대안이 될 수 있나? 한편, 현재 언급되고 있는 다자간 회담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나? 다자간 회담이 제기되는 맥락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한국정부와 클린턴 정부의 '접촉정책'(햇볕정책)의 주요 정책가들이 제시하는 대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전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레이니가 최근 미국의 <외교관계협의회>에 기고한 글은 그 윤곽을 제시하고 있다. 협상의 1단계는 남한과 북한, 미국·일본·중국·러시아가 공식적으로 한반도 전체의 안보와 안정을 보장하는 포괄적 합의를 체결하는 것이다. 그리고 2단계는 여러 소단계로 이루어지는데, 북한이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IAEA를 통한 사찰을 허용하며, 앞서 6개국이 모은 재정적 보상을 대가로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의 개발·생산·실험을 포기하며, IAEA가 북한이 모든 핵무기 프로그램이 중단되었다고 판단하면 미국은 북한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포괄적 합의가 이루어진 5년 후 시점에서 동북아안보포럼을 결성하는 것이다. 각각의 과정은 서로 분리된 합의나 협정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이 과정에서 일본은 북한과 국교를 맺고 관계정상화를 이루며, KEDO는 애초의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들이 제시하는 협상 로드맵은 큰 틀에서 볼 때 페리보고서로 복귀하자는 것인데, 차이점은 일본·중국·러시아를 끌어 들여서 그 비용을 분담시키는 것이다. 페리보고서의 핵심은 미국의 유일한 관심사가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의 제거라는 것이며(북한경제의 개혁은 부차적인 관심사다), 또 동북아에서 미군의 군사력 증강을 꾸준히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자간회담의 핵심은 핵-미사일 프로그램 제거에 소모되는 비용은 주변 국가에게 분담시키고(북한 경제위기의 관리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군사력 증강 프로그램은 협상 의제에 연루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방식으로 '다자주의'를 확대하는 것은 접촉정책의 지지자들에게 충분히 선택 가능한 옵션이다. 결국 이런 식의 다자주의는 현 단계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는 대재앙을 막는 시간을 벌 수 있는 수단일 수는 있지만, 기존의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군사력을 확대재편하며 북한의 군사력은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미국의 기존의 입장의 연장선일 따름이므로, 현재의 위기를 단지 그리 멀지 않은 미래로 지연시킬 뿐이다. 즉 북한의 '정권교체'나 '붕괴'를 목적으로 하는 '시간 벌기'로도 충분히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한반도인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이 기정사실화되면서 "다음은 한반도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해 곧바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미국이 한반도에서 긴장을 고조하는 일련의 조치를 밟아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미 행정부 일각에서는 "북한은 이라크와 다르다"고 말하고 있지만, 제네바합의 이행을 고의적으로 위반한 후, 분명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북한의 농축우라늄 기술개발 의혹을 제기하고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위기를 유도하는 일련의 단계를 밟고 있다. 특히 미국은 북한 농축우라늄 파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금창리 지하시설 문제의 전례를 충분히 따를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문제가 진전되지 않았는가? 그것은 집권 이후 북한과 그 어떤 공식적인 외교접촉도 시도하지 않는 부시정부의 태도 때문이다. 미국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이라크와 이란, 북한이 서로 모종의 관련을 맺는 것처럼 묘사했다. "선제공격을 통한 방어"(preemptive defence)라는 군사 교리를 만들어 미국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방어를 위한 전쟁’을 벌일 수 있다고 선언했다. 미국은 UN의 무기사찰단이 별다른 제지 없이 사찰 활동을 벌이는 와중에, 독자적으로 이라크 침공을 결정했다. 미국은 뚜렷한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제네바합의 파기를 선언했고 중유공급을 중단했다(금창리의 경우, 제네바합의의 틀이 유지되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역시 북한이 영변지역 핵시설을 재가동할 수 있다면서, 그 시설에 폭격을 가할 수 있는 군사 옵션을 세워야 한다고 일부러 언론에 흘리고 다녔다. 따라서 이러한 미국의 시도는 북한과의 긴장을 고조시키기 위한 의도된 수순인 것이다. 또한 다자간 회담이라는 틀이 실제로 가동될 것인가도 문제다. 북한은 다자간 협상의 틀을 수용할 수도 있다는 뜻을 비치면서, 중요한 것은 "미국의 본심"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미국의 구상은 어떤 작은 빌미나 핑계를 이용해서라도 쉽게 뒤집힐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4월 중순 중국에서 이루어진 북한-미국-중국 3국 회담은 한반도에서 순차적으로 위기를 고조해온 미국이 모종의 다음 행동으로 나가기 위한 "명분 쌓기"용으로 머물 가능성 역시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1994년 클린턴 정부가 북한 영변핵시설 폭격을 검토하면서 엄습했던 한반도에서의 '전쟁 위기'처럼, 오히려 협상이 벌어질 때가 더욱 위험할 수 있다. 즉 협상에서 강압적인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해 무력시위가 병행될 수 있으며, 또한 협상의 결렬은 곧 군사적 충돌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다자간 회담의 시작은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장기간에 걸친 위협의 증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현재의 갈등의 출발점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이라기보다는 미국의 제네바합의의 고의적 위반 이후 북한에 대한 위협을 계속 높이고 있는 미국의 태도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이에 관한 한국 정부의 무정견, 무대응인 것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미국의 농축우라늄 의혹 제기나 제네바합의 파기 선언에 관해 객관적 사실을 보려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미국이 한반도 선제 핵공격 옵션을 재확인(2002년)한 것이나 이라크 전쟁 중에 한반도에 전폭기를 증파한 문제에 관해서도 무입장으로 일관했다. 특히 이라크가 무기사찰단 활동을 훼방하지 않았고 UN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지도 않았음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지지하고 한국군 파병을 자원하고야 말았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이 군사주의와 일방주의를 더욱 노골화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조금의 입도 벙긋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현재 한반도 문제의 한편에는 미국의 '맹동주의'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미국을 건드리면 문제가 더 어려워진다"는 식의 노무현정부의 애처로울 정도의 '보신주의'가 있는 것이다. '충격과 공포'에 빠진 노무현 정부를 누가 구원하랴! PSSP
반전투쟁은 결국 패배했는가? 근 5개월 동안 지구 곳곳의 거리에서 줄기차게 이어진 '반전'의 행진은 미국의 전쟁종료의 선언과 함께 끝나야 하는 것인가? 미군의 점령과 후세인 체제의 몰락으로 미군 스스로 '이라크 자유화'라고 부른 작전은 종료되었고, 반전투쟁이 미군의 침략과 점령을 저지하는 데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도 우리의 투쟁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반전투쟁은 승리하지 못했을 뿐 패배한 것이 아니다. 승패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라크에서 미군의 점령과 지배를 둘러싼 크고 작은 분쟁들은 계속될 것이다. 중동지역의 질서를 완전히 새롭게 구축하고자 하는 미국 정부의 신보수주의자들은 시리아를 새로운 표적으로 삼고 있다. 이라크에서 보여준 엄청난 군사력과 이에 대한 주변국들의 공포를 활용하여,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지역의 잠재적 위협 세력들을 노골적으로 위협하려 할 것이고 이 지역에서의 군사적 긴장을 계속해서 강화시켜 나갈 것이다. 중동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새롭게 변모하고 있는 이 제국은 동북아시아에서, 라틴아메리카에서 자국의 헤게모니와 초민족적 자본의 세계화된 네트워크를 보호하고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선제공격'도 불사하는 적극적인 개입에 나설 것이다. 지금 어쩌면 끝이 없을지도 모르는 전쟁 ― 국가 자체의 장악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서, 국가 내부에서의 게릴라전, 그리고 저항세력에 대한 탄압에 이르기까지 ― 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투쟁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생존과 민주주의, 인권이 제국의 폭력 앞에 항상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만큼 이에 맞선 저항 역시 계속될 것이다. 그러한 장기적인 국면에서 보자면 이라크 침략전쟁을 두고 벌어진 제국과 세계 반전투쟁의 격돌은 이제 겨우 1 라운드를 마쳤을 뿐이다. 국제적인 반전투쟁의 배경 : 반세계화 운동의 성과와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에 대한 대중적 반감의 결합 이라크 침략전쟁처럼 맹렬한 반대에 부딪히고 시작하기도 전에 거대한 반전운동을 일으킨 전쟁은 일찍이 없었다. 2002년 9월 28일의 런던에서의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 11월 9일 이라크 피렌체에서 유럽사회포럼 마지막 날 행사로 진행된 '이라크 침략전쟁 반대 100만인 행진'을 시작으로 수개월 동안 연인원 수천만 명이 참가한 반전투쟁이 계속되었다. 2월 15일에는 600만-1200만 명이 참가한 국제적인 반전 집회가 개최되었고 국제적인 동시 반전행진은 3월 15일, 4월 12일로 계속 이어졌다. 영국에서는 9·11 직후 좌파단체, 평화운동가, 무슬림 공동체 등이 결성한 <전쟁중단동맹>(the Stop the War Coalition)이 중심이 되어 이라크에 대한 무기사찰이 진행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줄곧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스페인의 '학생동맹(Sindicato de Estudiantes)'은 3월과 4월 내내 시위 때마다 고등학생 및 대학생 80-100만을 조직했고 미국의 대학생들 역시 동맹휴업 등으로 항의의 뜻을 표시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철도와 항만에서 미군의 군사물자 수송을 저지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직접행동이 이어졌고, 스페인의 대표적 노동조합 연맹체인 UGT와 CGT 산하 노조들은 국제행동의 날에 맞춰 24시간 총파업을 진행하고 대거 시위에 참여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그리스에서도 학생과 노동자가 시위의 큰 축을 이루었다. 민간부문노총(GSEE)과 공공부문노총(ADEDI)은 4월 3일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진행해, 이날 아테네에서 개최된 시위에 100만이 운집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렇게 국제적인 수준에서 대규모의 반전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이 유엔결의에 근거하지 않아 최소한의 명분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것만으로 폭발적인 반전운동의 전개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실제로 유엔 창설 이후 미국은 유엔의 결의 없이 수많은 침략과 정권전복을 시도했지만 이번처럼 폭발적인 반전운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또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가 전세계적으로 보급되면서 전쟁의 참상이 거의 실시간으로 대중들에게 전달될 뿐 아니라 거대 방송사의 미국 편향적인 보도가 아니라 다양한 시각에서의 보도가 전달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 전쟁 이전부터 광범위한 반전운동이 벌어졌다는 점에서 이 역시 미흡한 설명이다. 그렇다면 국제적인 수준에서 전쟁 이전부터 완강한 반전운동이 개시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우선 대규모 국제 반전집회가 열리게 되는 맥락을 추적해 보면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2월 15일 대규모 국제반전공동행동은 유럽사회포럼 행사에서 제안이 되었으며, 카이로선언과 3차 세계사회포럼을 거치며 전지구적인 집회로 확장되었다. 특히 올해 초에 열린 제3회 세계사회포럼은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에 맞서 세계사회운동의 연대를 실현할 것'을 주된 의제로 채택하기도 했다. 즉, 지난 몇년 간 점차 확산되고 성숙되어 온 국제적인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의 과정에서 형성된 네트워크들이 빠르게 국제적인 반전행동을 조직하는 기능을 했으며 선도적으로 투쟁을 만들어갔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공세와 제국주의가 결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에 대한 인식과 공유가 반신자유주의 시위에 참여했던 활동가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반전 시위를 조직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반전투쟁은 '전쟁반대(중단)'이라는 시급한 구호 아래 광범위한 대중들이 결집하는 형태로 이루어졌고, 또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하는 원인이 다소 '석유'라는 측면에서 제한된 범위 내에 폭로되기는 했지만 몇몇 사례에서 반세계화 운동의 주체들이 반전운동을 주도적으로 제안하고 이끌어 가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활동가들의 이러한 노력이 광범위한 대중들의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국의 일방적인 행보에 대한 광범위한 대중적 불만이 있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전후 국내적인 수준에서 복지국가의 형성과 국제적인 수준에서 민족자결권의 개념에 입각한 민족국가간 체계로 노동자들의 투쟁과 민족해방투쟁의 저항을 무마하는데 성공했던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최후의 신호였다. 이론적인 분석을 통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이 전쟁에 끔찍하게 잘못된 무엇인가가 있다는, 그것과 더불어 무엇인가가 돌이킬 수 없이 변할 것이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러한 대중적 불만에 대한 또 다른 정치적 조직화는 바로 정확하게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에 대해 취했던 태도에서 드러났다. 유엔의 결의 없는 침략에 반대한 프랑스-독일의 연합은 한 달 전에 있었던 프랑스-독일 정상 회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유럽연합의 정치적-경제적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양국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미국의 일방적 독주로 인하여 자신의 지위가 하락하는 것이었다. 세계화와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적 개입전략은 이류의 전(前) 세계 열강들,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지위를 위협한다. 영국 정부가 미국의 전략에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이러한 불안을 극복하려 하고 있다면, 독일-프랑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불안정성의 시대를 '유럽 연합'이라는 지역적 블록의 형성을 통해 극복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독일-프랑스의 구상과 미국과의 갈등이 향후 어떠한 수준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계속될 것인지는 다소 불확정적이기는 하나 전쟁의 조기 종료가 가시화되면서 미국의 전쟁을 지지하는 발언을 우회적으로라도 강화하는 등의 모습에서 그 폭과 수위가 크지 않을 것이 확인되고 있다. 20세기 초 영국 헤게모니의 위기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결과를 불러 온 것과 다르게, 지금의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가 초강제국인 미국의 독주 속에 주변부에서의 크고 작은 분쟁들의 출현과 미국에 의한 군사적 개입의 강화와 독주로 귀결되고 있는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결국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한 세계적 규모의 반전운동은 폭탄과 달러를 앞세워 독주하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반감과 친숙하던 세계가 변화하는 것에 따른 불안과 공포에, 98년 시애틀 투쟁 이후 점차 성장하고 있는 세계적인 반세계화 운동의 흐름이 결합되면서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전쟁반대/부시반대"라는 단일한 구호 아래 다양한 입장을 가진 흐름들, 다양한 조건에 처한 대중들이 결집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하는 것은 유사한 대중들의 불안과 공포가 미국 내에서는 오히려 엄청난 전쟁 찬성과 부시 지지의 기반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각한 수준에 달한 미국 내 총기사고의 문제의 원인을 파헤치고자 하는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는 정부와 미디어에 의해 조장되는 미국인의 '공포'가 가장 중요한 원인임을 지적한다. 공포를 조장하여 이득을 챙기는 것은 군산복합체와 정치가들이며 공포에 사로잡힌 미국인은 점점 더 타인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 마찬가지로 미 정계를 휩쓸고 있는 신보주의의 열풍의 배경에는 몰락하는 제국에 대한 위기감이 놓여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쟁반대/부시반대"라는 구호와 직접행동의 과정에서 형성된 주체들이 이후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 전쟁에 대한 찬성과 반대라는 전선이 이후 어떻게 진전할 것인지의 문제는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전쟁반대의 구호로 다양한 대중들이 공동의 행동을 했다는 정치적 경험에 기반하여 전쟁을 통해 드러난 세계의 변화의 의미에 대한 충분한 토론과 논쟁을 조직하고 반전운동의 성과를 올바른 방향으로 갈무리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전쟁반대, 파병저지 투쟁은 어디에서 걸려 넘어 졌는가? : 감성적 반미와 도덕적 평화에 기반한 반전투쟁의 한계 남한에서의 반전투쟁을 보다 구체적으로 평가하면서 전진의 방향을 모색해보자. 유럽 등에 비해 남한에서는 이라크 문제 자체의 사회적인 쟁점화가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세계적인 수준에서는 규모 면에서 볼 때 반전운동이 최고조에 달한 2월 15일 서울에서는 불과 2,000명 정도가 시위에 참여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직후부터 조금씩 반전운동의 흐름이 고조되어 한국군 파병안이 쟁점이 되기 시작한 3월 22일 서울에서 7-8천명이 모인 집회가 있었고, 파병안 국회처리를 앞두고는 온-오프라인 상에서 전쟁과 파병을 둘러싼 열띤 논쟁이 진행되었다. 파병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자 정부와 여야 정당은 파병안 처리에 정치적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노무현 정부는 파병의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고 국민들을 설득하려 하기보다는 '국익'이니 '전략적 선택'이니 하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포장하면서 파병반대의 공세를 애써 피하려 하였고, 정부와 여야 정당은 칼자루를 서로에게 넘기느라 급급했고 2번이나 국회 통과가 연기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4월 2일 노무현 대통령의 국회 연설을 계기로 대통령이 최종적인 정치적 부담을 지는 모양새를 연출하고서야 파병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남한에서는 이 정도 규모의 반전투쟁이 벌어진 것 자체가 하나의 사건일 수 있다. 반전의 물결이 세계를 뒤흔든 베트남전쟁 당시 남한은 무풍지대로 남아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의 반전투쟁이 베트남 전쟁 당시 세계적으로 형성되었던 '반전'과 '평화'의 열풍과 정치적 경험들이 중요한 자산이 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남한에서의 반전투쟁은 이제 막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만큼의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80%에 육박하는 전쟁반대의 여론을 이라크 침략전쟁과 남한 정부의 한국군 파병을 저지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힘으로 형성해 내는 데에는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이는 단지 파병저지 투쟁이라는 반전투쟁의 일부분에서의 한계가 아니라 남한의 반전투쟁 전반의 한계인데, 실상 파병문제가 남한에서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정치적 태도를 결정하는 핵심 쟁점이었을 뿐 아니라 남한의 반전투쟁이 실질적으로 정세에 개입할 수 있는 유력한 경로였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남한 사회의 특수한 조건이 작용하였다. 작년에 불거져 나온 북한의 핵의혹 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고 이라크 침략전쟁에 대한 정치적 태도를 결정함에 있어 가장 주요한 변수가 되었다. 북한에서는 핵무기를 개발하려 하고 있다는 소식(사실 여부와는 별도로)이 전해지고 있고 미국은 여차하면 주한미군을 철수할 수도 있다고 협박을 하며 전쟁에 대한 위기감을 조장시켰다. 더구나 TV 스크린을 통해 전해지는 참혹한 전쟁의 광경은 이를 지켜보는 자신의 위치 역시 그리 안전하지 못하다는 불안과 만나며 더욱 커다란 공포로 다가온다. 압도적인 현실의 힘과 대면하여 자연스럽게 발동되는 자기보호의 감정 앞에, 막연한 평화의 주장은 '이상적인 것', '시효만료된 것'으로 비추어 질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파병에 대한 현실적 지지가 기반하고 있는 것은 미국이 내세우고 있는 허구적 명분 따위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가 생산하는 공포와 불안이다. 타인의 희생을 통해서라도 나의 안정과 평화를 보장받고 싶어하는 욕망, 그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럽 등지에서 폭발적인 반전운동을 가능하게 했던 대중적인 불안감이 전혀 반대의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또다른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북한의 핵의혹 문제와 이에 따른 한반도의 특수한 정세로 인하여, 미국에 대한 막연한 반감과 불안감, 전쟁의 참상에 대한 인도주의적 명분만으로 전쟁을 저지하기 위한 대중적 투쟁이 형성되기 어려운 조건이 객관적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전쟁반대의 주장과 논리는 이러한 조건을 넘어서는데 실패했다. '반미'의 가능성과 위험성 일각에서는 '반미'의 주장이 너무 전면에 나섰기 때문에 오히려 노무현 식 '국익' 논리에 취약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미국에 대한 반대는 민족주의적 경향의 강화, 심지어는 '국익'을 우선하는 전체주의적인 요소의 강화로 이어지고 이는 '민족의 생존을 위해 파병이 불가피하다'는 식의 논리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반미에 대응하여 반자본을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거나 반미가 아닌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식의 흐름이 대체로 이러한 평가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국제적 반전운동에 내재된 '반미' 이데올로기의 양면성을 인식할 것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현재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근거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지금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 민족적 감성과 결합되는 바로 그 속에 대중들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우선 현재의 신중세적 무질서는 아메리카 헤게모니의 위기, 즉 중심부 국가 간의 제국주의전쟁과 식민지해방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이 고안한 민족국가 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주의 프로젝트가 냉전의 해체와 더불어 종료됨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현 시기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금융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표상된 자본주의 위기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세계전쟁의 수행이라는 형태로 표상되는 민족-국가간체계의 위기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라는 계기 속에서 비판의 초점이 미국에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을 제국(Empire)이라고 규정하건 혹은 제국주의(Imperialism)라고 규정하건 말이다. 따라서 반미 일반이 문제가 아니라 '미국 비판'의 실내용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이런 정세에서 중심부에서의 민족국가의 위기는, 정치적·문화적 보편주의들로서 나타나던 중심부의 지배적 민족주의(따라서 잘 보이지 않는)가 매우 방어적이고 때로는 공격적(따라서 잘 보이게 되는)인 형태로 이행하는 것과 체계적으로 결부된다. 부시 대통령과 매파들의 발언들을 보라. 이들은 미국의 이익과 미국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하는 주장들 속에서 인종적이고 심지어 종교적인 우월의식과 배타성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더구나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계기들 속에서 그러한 민족주의의 끔찍한 폭력은 더욱 증폭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정세 속에서 미국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이를 '모방'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배타성에 대한 반성과 내재적 비판 그리고 이에 기반한 새로운 보편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예상해 볼 수 있다. 특히 지구적인 규모로 동시에 벌어지는 공동의 행동들 속에서 형성되는 '투쟁하는 동시대인'으로서의 경험과 일체감들은 이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되는 '저항의 보편주의'가 어디로 수렴될 것인가는 매우 불확정적이다. 투쟁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저항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그 자체로 지금의 민족국가(간) 체계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은 세계화의 과정에서 더욱 점증하는 갈등과 폭력에 대한 미국인들, 혹은 세계인들의 공포에 기반하고 있다. 한편 민족-국가가 붕괴된 곳에서는 국가의 무장력의 독점 역시 붕괴되며, 그 결과 '사적'인 무장집단이 이를 대체하여 인종·종교에 따른 가상적 공동체를 경계선으로 새로운 전투부대들이 형성되고 있으며, 일상적이고 극단적인 폭력과 잔혹을 양산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전쟁은 이러한 폭력으로부터 "상업과 금융 네트워크, 수송과 에너지, 환경 등 세계의 주요 체계들의 안정과 원활한 작동의 유지"를 위해 우선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초국적 기업의 이해에 따라 국가를 해체하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시장에서 경쟁의 격화와 국가의 붕괴에 대한 반응으로, 종족적·인종적 또는 종교적 노선에 따라 '새롭지만 오래된' 가상의 공동체를 창조하거나 온존하는 것이 국경 또는 문화적 차이를 넘어서 계급적 연대를 형성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지만, 舊유고슬라비아의 경험이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손쉬운 처방은 병 자체보다 훨씬 더 나쁜 치료임에 분명하다. 오히려 정치에 대한 권리,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의 자격을 의미하는 '시민성'의 범위를 민족주의의 배타적 경계를 넘어 확장시켜 나가는 방식을 고민해 볼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영국의 전쟁 저지 연합에 무슬림 공동체가 포함되어 있고, 미국의 반전운동이 인종주의에 대한 반대를 내걸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의 흐름과 반전투쟁이 결합되지 못했는가? 한편, 국제적인 수준에서 반세계화 투쟁의 과정에서 형성된 네트워크들과 주체들이 반전투쟁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에 비해, 남한에서의 반전투쟁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일차적으로는 계획의 부재와 의식적 조직화의 미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 동안 반신자유주의 투쟁에서 중요한 동력을 형성해 온 민주노총, 전농, 학생 등의 기층 대중조직과 공동투쟁의 흐름을 형성해 온 전국민중연대(준)에서 반전투쟁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계획을 제출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을 주도해 온 주체들이 반전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이른바 신자유주의 반대의 기치 하에 계속되어 온 투쟁들이 방어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데 기인한다. 구조조정 저지, WTO 개방 반대 등의 구체적인 현안을 중심으로 한 투쟁에서 형성되는 주체들 역시 이 투쟁들을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비판의 맥락에서 구성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못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공세가 동전의 양면이라고 했을 때 반전투쟁과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결합은 체제의 위기가 현실 속에서 출현하는 정세적 계기 속에서 각각의 투쟁의 정치적 수준을 상승시킬 때 가능한 것이다. 또한 민중운동 진영에 만연한 투쟁과제에 대한 형식적 분류와 실용적인 역할분담의 논리도 여기에 한몫 했다. '반전-평화'라는 독립적인 투쟁의 영역과 주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 계기에서 '반전-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농민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이 있는 것이다. 또한 민중연대는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만을 담당하는 조직이고 반전투쟁을 담당하는 공동투쟁조직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님에도 민중연대 역시 반전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주저했고, 민중연대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민중운동 단위들 역시 반전투쟁은 전쟁반대 평화실현 공동실천이나 여중생 범대위 등의 어떤 전담기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관성을 의식적으로/혹은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전쟁반대 평화실현 공동실천 등의 사안별 연대기구를 통해서 전선의 외연을 확장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공통점을 가지고 광범위한 연대를 추구하면서도 투쟁을 전진시키거나 혹은 급진화시키기 위한 독자적인 실천을 모색해야 했고 그럴 수 있는 조직적 구심이 있어야 했고 그런 역할을 전국민중연대가 수행해야 했다. 이후 반전투쟁,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충격과 공포'로 명명된 '이라크의 자유화(해방)' 작전은 이제 '점령과 지배'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 조기 승전에 고무된 부시 행정부 매파 세력들은 곧장 시리아에 대해 위협을 가하면서 중동 전역에 대한 개입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전쟁(침략과 학살) 중단의 의미를 단순한 군사행동의 중단이라는 의미를 넘어 미국의 이라크 및 중동에 대한 점령반대의 의미로 확장시켜야 한다. 이라크 근방에서 지속될 군사적 위협과 소탕작전의 실체를 폭로하는 한편, 재건, 인도주의적 지원 등의 외피를 띠고 드러날 이후 점령행위의 실체를 폭로해야 한다. 지난 미국의 아프간 침략전쟁에서도 미군이 카불을 점령함으로써 전쟁은 끝난 듯 했지만, 사실상 아직까지도 전쟁은 지속되고 있다. 현재도 미군은 아프간에서 수천명의 지상군을 동원해 남부 칸다하르와 남동부에서 '용맹한 타격'과 '사막의 사자'라는 이름의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미국이 내세운 과도정부가 종파적으로 운영되면서 보복과 인권 침해가 지속되고, 미군이 '잔당 소탕'의 명분으로 무차별적 공중폭격과 수색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민간인 사상이 계속되면서 그에 대한 저항도 다시 거세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미군은 바그다드 점령을 계기로 더욱 잔인하게 이라크 저항세력에 대한 소탕작전을 벌일 것이며, 이는 더 많은 이라크인의 희생을 낳을 것이다. 미국은 이라크 점령과 이후 재건활동이 마치 이라크인들의 해방을 위한 것인 양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라크 인들의 해방이 아니라 자신의 입맛에 맞는 친미정부를 세우고 석유자원 등 일부 거대 기업들의 이권이 걸려 있는 부문을 장악하고, 독식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이들이 인도주의적 원조 프로그램의 핵심으로 내세우고 있는 석유-식량 프로그램이란 이라크 민중의 것이 되어야 할 석유를 팔아 그 돈으로 식량을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10년 간의 경제봉쇄와 침략전쟁으로 이라크 민중의 삶을 고통에 빠뜨린 범죄자가 인도주의의 가면을 쓰고 자원을 약탈하여 남은 이윤의 일부를 되돌려 주겠다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것은 인도주의적 원조가 아니라 날강도 같은 행위다. 이런 미국의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행하는 어떠한 인도주의적 지원 사업이나 재건 사업도 결국은 이라크인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이를 위한 주요한 투쟁의 매개 고리로 한국군 파병저지 투쟁을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 4월 12일 국방부는 이라크전 파병 의료부대(제마부대, 100명)과 건설공병부대(서희부대, 573명)를 4월 17일 선발대 30명, 4월 30일 제1제대 300여명, 5월 14일 제2제대 300여명을 각각 파견하는 계획을 확정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은 15일 국무회의에서, "파병에 대해 많은 시위가 있었으나 복구사업과 인도적 지원에 대해서는 이라크전 파병이 전쟁 참여에서 복구라는 새로운 성격을 갖게 된 만큼 이견이 없을 것"이라며 재차 파병을 정당화하려 하고 있다. 파병을 정당화하려는 논리들의 허구성을 폭로함과 동시에 이라크에서 벌어지고 있는 점령과 지배의 실체에 대한 반대투쟁을 결합시켜 나가야 한다. 한편 이번 전쟁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기반으로 중동과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물론 당장에 군사적인 대응을 시작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시리아와 북한과 같은 '불량국가'들에 대한 압박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북한의 핵문제에 대한 북한과 미국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한반도의 전쟁 위협이 사라진 것이 아니며 오히려 더욱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미국의 군사패권주의는 더욱 강화될 것이고 북한 역시 이러한 미국의 요구에 쉽게 응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또한 노무현 정부의 '평화적 해결'의 주장이 결국 한-미동맹이라는 커다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다. 따라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에 있음을 폭로하고 이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는 투쟁들을 준비해야 한다. 특히 이번 전쟁을 통해 럼스펠드식 '속전속결론'이 현실화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근 미래한미동맹회의에서 거론된 주한 미2사단의 한강 이남 배치는 자국군을 북한의 장거리포와 다연장포 사정권 밖으로 빼내는 대신 전술핵을 포함한 본격적인 공격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일련의 군사적 긴장을 강화하는 행위를 폭로하고 미국의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을 중단시키기 위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 물론 지금의 국면은 다시 전쟁이 가시적으로 진행되던 국면에 비해 폭발적인 대중투쟁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레닌은 '전쟁이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의 연속'이라는 고전적인 명제를 언급하며 전쟁을 정치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여 전쟁을 '정치화'시키고자 했다. 그렇다면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선언과 종전 이후 근거없이 떠도는 낙관적 관측에 맞서 우리는 전쟁 그 자체와, 전쟁을 둘러싸고 형성된 대중의 저항과 그 주체들을 재-정치화하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잘 보이지 않는 전쟁'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반전투쟁의 주체들을 세계화된 공간 속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모든 종류의 극단적인 폭력의 문제들과 대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의 장으로 이끌어 내야 한다. PSSP
역사는 역시 좋은 방향으로 진행해 가지 않는 것인가? 이라크 침공의 승리감에 들떠 있는 미국의 지도부는 4월 14일 잇달아 시리아에 대한 경고를 쏟아 놓았다. 대통령 부시는 "우리는 시리아에 화학무기가 있다고 믿는다... 상황에 따라 다른 대응이 필요하다"라고 말했고, 파웰 국무장관은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도피처를 시리아가 제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상황이 진행됨에 따라 외교적, 경제적 또는 다른 성격의 가능한 조처들을 검토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술 더 떠서 강경 매파의 대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지난 12-15개월 동안 우리는 시리아에서 화학무기 실험이 있었음을 알고 있으며, 또 시리아인들과 다른 이들이 국경을 통과해 이라크로 들어가도록 시리아가 허용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선전문에는 미국인과 연합군을 살해하면 포상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 우리는 시리아가 몇몇 이라크인들을 받아들이거나 머물도록 하거나 통과해서 다른 나라로 가도록 허용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이라크 다음 미국의 목표는 어디일 것인가를 놓고 많은 예측이 있었는데, 이제 그 목표가 시리아로 좁혀지고 있는 것일까? 시리아에 대해 미국이 퍼붓는 비난은 이라크 전쟁을 개시할 당시 내세운 두 가지 명분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하나는 테러리스트와의 연계이고, 두 번째는 대량살상무기다. 아랍권의 대표적 반미국가인 시리아는 이라크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시리아 국경을 봉쇄하지 않고 이라크 전쟁에 참여하려는 아랍 자원병들이 이라크에 들어가도록 허용했으며 바그다드 함락시 도피한 이라크의 핵심 인물들이 국경 내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거대한 '테러조직'인 이라크와의 연계--더 이상 알카에다는 문제가 아니다--를 증명해 주는 '불량국가'이자 테러지원국의 징표 아닌가. 그리고 미국이 아직 이라크에서 찾아내지 못한 대량살상무기가 시리아에 있다는 정보가 있으니 어찌 이 위험한 불량국가를 눈앞에 두고 정의의 전쟁을 중단할 수 있겠는가. 미국의 눈엣가시인 이란도 문제겠지만, 시리아의 경우 이라크 전쟁을 쉽게 연장할 수 있는 구실을 찾을 수 있는 대상인 데다가 중동에서 영향력도 크고 군사적 역량도 이라크보다 훨씬 약하다는 계산이 선다면, 그리고 방향을 동쪽으로 돌리기보다 서쪽으로 돌리는 편이 팔레스타인,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리비아로 이어질 중동의 평정에 훨씬 유리한 전략이라고 판단한다면, 전선이 곧 시리아로 확대될 것으로 예측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현재 미국의 강경 세계질서 구상을 주도하는 핵심 브레인으로 알려진 대표적 매파 월포비츠 국방부 부장관은 이란혁명 직후인 1980년대부터 이란보다 이라크가 잠재적으로 미국에 훨씬 더 위험한 적이 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이라크의 아랍권에 대한 파급력이 더 크다는 견해일 것이며, 이 때문에 이라크로부터 시작된 연계고리를 끊어나가는 방향도 동쪽보다는 서쪽으로 진행되는 것이 그의 구상에도 맞는 일일 것이다. 지금 미국이 벌이고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미국의 세계전략과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 것인가? 이라크 전쟁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거론되는 논리 중 하나는 이라크 전쟁의 배경이 석유자원이라는 것이다. 50년 후로 예견되는 자국 내 매장 석유자원의 고갈에 대비해 미국이 중동의 석유자원을 독점하기 위해 벌이는 전쟁이 이번 사태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일견 타당한 면이 없지는 않지만, 석유자원은 사태의 시작이 아니라 오히려 사태의 결론에 따라 얻어지는 부산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라크 전쟁을 주도한 미국의 매파의 구상은 그보다 훨씬 더 심대하다.
* 원문사항: Mary Kaldor, "Chapter 5: The Globalized War Economy", New and Old Wars: Organized Violence in a Global Er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01. 전쟁 경제라는 용어는 보통 20세기의 총력전의 경우에서와 같은 집중화되고, 총체적이고 전제적인 체계를 지칭한다. 행정은 전쟁의 효율성을 높이고 전쟁에 사용하기 위한 세금을 최대화하기 위해 집중화된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군인 또는 무기 및 군수물자의 생산과 같은 형태로 전쟁 수행에 참여하기 위해 동원된다. 대개, 전쟁 수행은 자기-충족적인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소련이 미국으로부터 무기대여 원조를 받은 것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수행의 주요 목표는 전투에 돌입하여 적을 패배시키기 위한 무력의 사용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전쟁 경제의 새로운 유형은 위의 서술과 완전히 반대이다. 새로운 전쟁들은 ‘세계화된’ 전쟁들이다. 그것은 국가의 파편화와 탈집중화를 포함한다. 전쟁 참여는 인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데, 왜냐하면 교전중인 분파들에게 자금과 정당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군수품의 국내적인 생산은 거의 없고, 따라서 전쟁 수행은 거의 지역적 약탈과 외부 원조에 의존한다. 전면적인 전투는 거의 없고, 대부분의 폭력은 민간인들에게 향하며, 교전중인 분파들간의 연합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전통적인 클라우제비츠적인 용어들로, 규정가능한 지정학적 목표들에 기초하여 전쟁을 인식하려는 사람들은 전쟁의 지속됨에 따른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들을 이해하는데 실패한다. 그들은 중요한 경제적 논리를 제시할 필요 없이 정치적 해결책이 발견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동시에, 전쟁의 전통적 인식과 관련없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전쟁들에서 드러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관계들의 복합성을 관찰한 사람들은 이러한 폭력의 유형이 무정부상태와 같다고 볼 수 있다고 결론내리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은 예컨대 인도주의적 원조(humanitarian assistance)를 통해 증상들을 돌보는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새로운 전쟁들의 전형적인 정치경제가 분석될 수 있고 따라서 가능한 대안적 접근법들이 도출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사실 그러한 분석은, 전쟁의 성격에 관한 전통적인 가정들에 기초한 다양한 국제적 행위자들의 선의의 노력들 대부분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판명된다는 함의를 갖는다. 위로부터의 분쟁 해결은 단지 교전중인 분파들의 정당성만을 강화할 것이고 자원을 보충할 시간적 여유를 줄 뿐이다. 인도주의적 원조는 전쟁 경제가 기능하는 데 기여한다. 평화유지군들은 끔찍한 범죄들이 자행될 때 방관하거나 그 범죄들을 자행하는 집단들의 편에 가담함으로써 정당성을 상실할 것이다. 첫 번째 절에서는 현대전에 전형적인 다양한 전투부대들 및 그것들이 국가의 형식적 안보 역량의 탈-통합으로부터 어떤 식으로 출현해 왔는지를 묘사한다. 그리고 폭력의 유형들과 군사 전략의 특성, 그리고 그것들이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발전한 분쟁들로부터 [생겨나], 근대의 재래식 전쟁 ― 게릴라전, 폭동진압 및 1980년대의 ‘저-강도’ 분쟁을 다루거나 대항하기 위한 방도로서 진화해 온 방식을 분석한다. 다음으로 전투부대들이 그것을 수단으로 새로운 전쟁을 수행하는 자원들을 어떻게 획득하는지와, 전쟁의 맥락 속에서 가동되는 폭력의 새로운 유형과 사회적 관계들 간의 상호작용을 고찰할 것이다. 마지막 절에서는 새로운 전쟁 혹은 차라리 새로운 전쟁의 사회적 조건이 어떻게 경향적으로 확대되어 가는지를 묘사한다. 군사력의 사유화 미국의 전 국무장관이었던 메들린 올브라이트는 허약하고 중앙의 권위를 상실한 국가들을 묘사하기 위해 ‘몰락한 국가들’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였다. 제프리 허브스트(Jeffrey Herbst)는 많은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결코 근대적 의미에서의 국가주권―즉, 규정된 영토에 대한 의심의 여지 없는 물리적 통제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에 대한 행정의 존재 및 국가의 이념에 대한 주민들의 충성―을 누린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몰락하는 국가들의 핵심적 특징들 중 하나는 물리적 강제의 도구들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 및 분열이다. 탈-통합적인 주기(cycle)는 근대 국가들이 확립되었던 통합의 주기와 정확히 반대다. 영토에 대한 물리적 통제 및 인민적 충성을 명령하는 것에 대한 실패는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역량을 감소시키고 국가의 재정적 기초를 크게 약화시킨다. 게다가, 부패와 독재는 국가 재정의 추가적인 낭비를 의미한다. 종종, 정부는 더 이상 세금 징수의 신뢰할 수 있는 형태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된다; 18세기 유럽에서 성행했던 것처럼, 때때로 [세금]취득의 일부를 가져가는 사적 대리인들이 고용된다. 국가 정당성의 상실과 ‘보호세’를 요구하는 새로운 세력들의 부상으로 인해 세금 기피가 확산된다. 이는 국가 지출 삭감의 외부적 압력으로 귀결되고, 더 나아가 군부대들에 대한 통제력을 감소시키고 그 분열을 조장한다. 게다가, 외부 원조는, 이러한 국가들의 대부분이 체질적으로 이행할 수 없는, 정치적 경제적 개혁들[구조조정]에 근거한다. 무질서와 군사적 분열을 증가시키는 재정과 정당성의 하락 추세는 새로운 전쟁들이 발생할 수 있는 맥락을 창출한다. 사실상, 국가의 ‘몰락’은 폭력의 증대하는 사유화를 수반한다. 대체로, 새로운 전쟁들은 공적인 동시에 사적인, 국가적인 동시에 비국가적인, 또는 얼마간 혼합적인 전투 부대들의 유형들의 다수성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논의의 간결함을 위해, 나는 다섯 가지 유형을 구별해 보고자 한다: 1) 정규군 또는 그 부속군; 2) 준군사적 집단들; 3) 자위군(自衛軍); 4) 해외용병들; 5) 일반적으로 국제적인 원조에 의지하는 정규 해외부대들. 정규군은, 특히 분쟁 지역들에서, 쇠퇴하고 있다. 군비 지출의 삭감, 몰락하는 위세, 군장비 예컨대 예비부품들, 연료, 총탄의 부족, 그리고 불충분한 훈련,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기의 엄청난 상실에 기여한다.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과 소비에트 해체 이후 국가들에서, 군인들은 어떠한 훈련이나 정기적 급여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 자원들을 자기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데, [이 자금은] 군사 위계의 무규율과 와해에 기여한다. 종종 이것은 분열로, 즉 타지키스탄(Tadjikistan)에서처럼, 지역의 군 지휘관들이 지방 군벌들처럼 행동하는 상황들로 귀결된다. 아니면 예컨대, 자이르(Zaire)에서, 무급여 상태의 군인들이 강탈이나 약탈에 고용되었던 것처럼, 군인들은 범죄 행위에 참가할 것이다. 다시 말해, 정규군들은 정당한 무기소지자로서 자신의 성격을 상실하고 점차 사적 준군사집단들과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 이것은 의도적인 정책의 결과로 이미 보안군들이 파편화된 상황들에서 복잡해진다; 각 국내 보안군들의 다양한 유형들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종종 국경수비대, 대통령 경호부대, 헌병대들은 존재한다. 결국에는, 자이르의 모부투(Mobutu) 대통령은 자신의 안전을 오직 자신의 개인 경호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공통적인 전투부대는 준군사집단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한 사람의 리더를 중심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집결한 자율적 집단들이다. 종종 이러한 집단들은 폭력의 극단적 표출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서[직접적인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는 아마도 보스니아의 아칸의 타이거스(Arkan's Tigers)의 사례에 해당하거나, 아니면 아칸 스스로 그렇게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1994년 이전의 르완다 정부는 실업 상태의 청년들을 집권당과 연관된 새로 구성되는 시민군에 모집했다. 이들은 르완다 정부군에 의해 훈련을 받았으며 약간의 봉급을 받을 수 있었다.1) 비슷한 맥락에서, 남아공 정부는 비밀리에 무기류와 훈련을 인카타자유당(Inkatha Freedom Party: IFP)에게 제공했고, 이는 민주주의로의 이행기에 줄루족(Zulu) 노동자 집단들의 폭력적 활동들을 유도해온 바 있다. 종종, 준군사집단들은 특정한 극단주의적 정당들 또는 정치 분파들과 연계를 갖고 있다. [러시아으로부터] 독립 이후, 그루지야(Georgia)에서, 녹색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은 자신의 시민군을 갖고 있다. 권력을 장악한 세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는 이러한 시민군들을 정규군으로 결합함으로써 폭력 수단에 대한 독점을 재확립하고자 하였다. 아브하즈 공화국(Abkhaz Republic)에서 아브하즈 방위군과 러시아 전투 부대들의 합동군에게 패배했던 것은 바로 이 무장한 떼거리들의 잡동사니였다. 준군사집단들은 대개 [곧 강제제대나 퇴역을 앞둔] 잉여 군인들(redundant soldiers), 혹은 잉여 부대 전체나 이탈 군인들로 구성되고 때때로 여기엔, 예전에 유고슬라비아에서는 그런 목적으로 감옥에서 의도적으로 출소시킨 바 있듯이, 일반 범죄자들도 포함되고, 여기에 생계수단을 찾는 청년들이 대의에 이끌려 또는 모험심에 투신한다. 그들은 군복을 거의 입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비-전투원들을 구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물론 이들도 구별되는 의복이나 상징들을 착용한다. 세계적인 물질 문화의 심볼들은 종종 유사-군복의 역할을 한다: 예컨대, 레이밴(Rayban) 선글라스, 아디다스(Adidas)의 운동화, 조깅복, 모자가 그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소년병들의 사용은 이제 드문 일이 아니다. ‘정부군으로 충원되는 많은 소년들은 대개 부랑아들이다. 이들은 충원되기 전에 [빵과 같은 음식을 훔치는] 사소한 도둑질 정도를 했을 뿐이다. 이제 그들의 손에는 AK47 자동소총이 주어지고 보다 큰 규모의 도둑질에 참가할 기회가 왔다.’2) 자위부대들은 자신의 터전을 방어하려는 자원자들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지역의 민간인들을 보호하려 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지역 민병대들(예컨대, 투즐라(Tuzla)에서)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르완다에서 1994년의 대량살상을 막으려 했던 후투족과 툿시족의 자위부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부대들은 유지되기가 매우 어렵다. 주로 불충분한 자원들 때문이다. 해외 용병들에는 특정 전투 부대와 계약한 개인들과 용병 집단들이 포함된다. 가장 유명한 용병 집단은 무자히딘(Mujahidiin)으로, 아프간 전쟁을 경험한 베테랑들로 구성되었고, 이슬람과 관련된 모든 분쟁들에 개입하였고, 이슬람 국가들, 특히 이란에 의해 자금이 지원되었다. 사설 보안회사들의 등장은 새로운 현상이다. 이들은 영국 또는 미국의 퇴역 군인들을 고용하며, 정부들과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일을 수주받는다. 마지막 범주로 국제 조직들의 후원하에 운영되는 정규 외국군[이른바 평화유지군]이 있다. 이 부대들은 직접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들은 다른 전투 부대들과 상이한 성격을 갖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이들은 게릴라 부대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긴 하지만, 게릴라 부대들에서 전형적인 위계, 질서, 수직적 명령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이 다양한 평화유지군들은 독립적으로 그리고 연합적으로 작전을 수행한다. 이 부대는 정규군, 지역 민병대 또는 자위부대, 범죄집단, 광신도 집단, 부대 내의 관계설정과 분업 및 공통의 목적을 협상하는 엽관(獵官)들에 이르는 다양한 집단들의 수평적 연합으로 구성된다. 마지막으로, 아프간 또는 남아프리카에서처럼 냉전의 종식과 그와 연관된 분쟁들의 엄청난 증가는 남아도는 무기들의 가용성을 증가시켰다. 결국 새로운 전쟁들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군사적 축적의 시기였던 냉전으로 인해 생겨난 불필요한 잉여 무기들을 써서 없애버리는 군사적 폐기처분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의 방식들 새로운 전투부대들의 기술들은 대개 2차 세계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 근대적 전쟁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 발전된 전쟁의 유형들에 빚지고 있다. 마오쩌뚱과 체 게바라에 의해 정교화된 혁명 전쟁은 재래식 병력들의 대규모 집중을 우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만들어진 그리고 재래식 전략 이론에 정확히 상반되는 전술들을 개발하였다. 혁명 전쟁의 중심적 대상은 적 부대로부터 영토를 쟁탈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지역 주민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을 통한 영토의 지배이다. 혁명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들은 보통 중앙 행정이 쉽게 이를 수 없는 그 나라의 변경(邊境)들이다. 주민들은 혁명군이 적 부대의 사기와 효율성을 점차 약화시키는 전술들에 사용할 수 있는 기지들을 제공한다. 혁명 전쟁은 기동전 이론과 몇 가지 유사성들을 갖는다. 그것은 기습 공격과 기동력이 매우 중요한 탈집중화되고 분산된 군사 활동을 수반한다. 그렇지만 혁명 전쟁의 핵심적 특징은 게릴라 부대들이 부대의 규모와 장비 면에서 열등하기 때문에 패배할 가능성이 큰 정면 충돌을 회피한다는 점이다. 전략적 후퇴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마오에 따르면, ‘후퇴할 수 있는 능력은 정확히 게릴라들의 특징들 중 하나이다. 후퇴는 포위 상태로부터 빠져나와 주도권을 다시 획득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다’.3) 모든 혁명적 저자들은, 게릴라들이 마치, 마오의 유명한 격언처럼, ‘바다의 물고기처럼’ 활동할 수 있도록, 물론 폭력적 수단들 또한 사용되지만, 혁명의 지배 하에 있는 영토뿐만 아니라 적의 영토에서도 ‘마음’을 사로잡아야 함을 엄청나게 강조하였다. 거의 모두 실패해 왔던,4) 대(對)-게릴라전술(couter-insurgency)은 이러한 유형의 전쟁에 대해 재래식 군사력을 사용하여 대처하는 것으로 구상되었다. 주요 전략은 ‘물고기가 있는 바다에 독을 뿌려서’ 혁명군이 활동하는 환경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알제리에서 프랑스가 개발했던 강제 이주와 같은 기술들, 또는 베트남에서 미국이 개발한 구역 파괴(area destruction)나 지뢰, 고엽제, 네이팜탄을 쏟아 붓는 기술들은, 예컨대, 동티모르에서 인도네시아와 쿠르드족에 대해 터키 정부에 의해 사용되었다. 새로운 전쟁술은 혁명 전쟁과 대-게릴라전술 양자를 모방한다. 그것은 혁명 전쟁으로부터 적 부대로부터 영토를 쟁탈하는 것이 아닌 정치적 지배를 통한 영토 지배 전략을 모방한다. 이것은 얼마간 혁명군들 이상으로 용이한 전술인데, 대부분의 경우 중앙의 권위가 매우 취약하고 영토를 지배하려는 주요 경쟁자들이 정부들―유사한 유형의 전투 부대라기보다는 재래식 근대 군대를 갖고 있는―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혁명 전쟁의 경우에서처럼, 다양한 분파들은 군인과 장비를 보존하기 위해 [정면]전투를 계속 회피한다. 전략적 후퇴는 전형적이며 앞으로 강력한 정파가 될 것으로 보이는 분파에게 얼마간 양보된다. 종종, 다양한 분파들은 그들 간에 영토를 분할함에 있어서 연합한다. 그런데, 혁명군과 새로운 전사들 간의 중요한 차이는 정치적 지배의 수단에 있다. 혁명군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는 매우 중요하다. 심지어 공포가 중요한 요소일지라도, 혁명적 이념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신념이 중심적 목표이다. 그래서, 혁명군은 자신의 지배 하에 있는 구역들에 모범 사회들을 건설하려고 노력한다. 이와 반대로, 새로운 전사들은 어떤 이념보다는 ['우리'와 다르다는] 표지(label)에 대한 충성을 통해 정치적 지배를 확립한다. 새로이 민주화된 세계에서, 여기서 정치적 동원은 표지들에 기초하고 선거와 국민투표는 종종 인구조사의 형태를 갖는데, 이것은 지배 하에 있는 영토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바로 그 표지에 대해 반드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누군가는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사실상, 비민주적 구역들에서조차, 반대, 의견의 차이, 폭동에 대한 두려움은 동일성에 기초한 인구의 동질화에의 이러한 요구를 강화한다. 이것은 영토적 지배의 주요 수단이 혁명 전쟁의 경우에서의 대중적 지지가 아니라 잠재적 적대자들을 제거하는 인구의 전위(轉位)인지의 이유이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전쟁술은 대-게릴라전술의 ‘바다에 독을 뿌리는’ 기술들을 차용한다. 게릴라 운동들에 의해 다듬어진 그 기술들은 1980년대의 ‘저강도’ 분쟁들에서 좌익 정부들을 붕괴시키기 위한 대-게릴라전술 운용의 경험―모잠비끄에서 RENAMO,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히딘(Mujahidiin), 또는 니카라과에서 콘트라스와 같은―을 통해 서구의 정부들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장려되었다. 사실, 이러한 경험은 베트남과 남아공에서 대-게릴라전술의 실패에 대한 반작용이자 더 이상 재래식 근대 전쟁은 실행가능한 선택지가 아님에 대한 암묵적인 깨달음이었다. 새로운 전쟁은, 게릴라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보다는, 그들이 지배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불리한 환경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새로운 전쟁의 황폐하고 무질서한 조건들에서, 제공될 수 있는 이득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기편을 지배하는 것은 실질적인 이해득실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계속되는 공포와 불안에 그리고 타인에 대한 원한과 증오의 영구화에 의존한다. 그래서 극단적이고 분명한 잔학 행위 그리고 이러한 범죄들에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는 것, 그럼으로써 증오하는 ‘타인’에 대한 폭력을 부가하는 그리고 그들과의 분할을 심화하는 행위들의 공범화를 확립하는 것에 의존한다. 인구를 전위시키는 기술들은 다음과 같다: 1) 르완다의 경우와 같은, 다른 표지의 사람들에 대한 계획적인 살인. 1994년 툿시족에 대한 살인은 정부 관료와 군에 의해 지시되었다. Human Rights Watch에 따르면, ‘르완다 남부의 냐키주(Nyakizu)의 자치구와 같은 곳에서, 지역 장교들과 여타 살인자들이 아침마다 “일하러”("work") 왔다. 툿시족을 살해하는 하루의 “일”을 마친 후, 그들은 “노래를 부르며” 퇴근 시간에 집으로 돌아갔다.... “노동자들”은 맡은 작업이 다 끝날 때, 즉 모든 툿시족을 살해할 때까지 매일 출근했다’.5) 2) 인종 청소, 다른 말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또는 트랜스코카시아에서와 같은, 강제적인 인구 추방. 또 다른 예로는, 아브하즈에서, 아브하즈 거주자들은 전체 인구 중 17%를 차지할 뿐이다.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분리주의 세력들은 남아있는 대부분의 인구를 쫓아내는데, 주로 그루지야의 경우가 해당한다. 3) 어떤 구역을 도저히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기. 이것은 대인지뢰를 살포하는 것을 통해 또는 민간인들을 표적으로 삼아―예컨대, 민가, 병원, 시장이나 급수지 같이 사람들이 많은 곳을 사격하거나 폭격하는 것을 통해서 물리적으로 실행될 수 있다. 또 이것은 기아나 난치병들을 강제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실행될 수 있다. 사람들의 생계 수단을 그들에게서 박탈함으로써, 그들은 남부 수단에서처럼 굶어 죽이거나 그곳을 떠나 이주하도록 강제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떠한 사회적 의미에서든 모독을 가하여 그들의 가정에 참을 수 없는 기억들을 심어줌으로써 심리적으로 실행될 수 있다. 사람의 특정 집단들에게 사회적 환경을 규정하는 물리적 경계들을 제거하는 것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파괴하는 것도 하나의 수단이다. 종교적 건물과 역사적 유적들을 파괴하는 것은 특정 지역에 대한 문화적 요구의 모든 흔적들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바냐 루카(Banja Luka)에서, 전쟁이 절정일 당시, 세르비아인들은 하나의 카톨릭 교회를 제외하고 17개의 모스크들 모두를 파괴하였다. 특히, 그들은 상당히 아름다운 16세기에 지어진 모스크 두 곳을 파괴해버렸다. 또 다른 수단은 몇몇 전쟁들에서 특징적이었던 계획적인 강간과 성적 학대를 통한 아니면 다른 공개적이고 매우 가시적인 야만적 행위들을 통한 여성 학대였다. 심리적 수단들은 다른 표지를 갖는 사람들을 분류하는 것에도 도움이 된다. 본질적으로, 과거의 전쟁에서 바람직하지 않고 불법적인 부작용들로 여겨지던 것이 새로운 전쟁들에서의 전투 양식에 중심적인 것이 된다. 그것을 두고 새로운 전쟁은 원시주의로의 역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원시적인 전쟁들은 고도로 의례적이었고 사회적 제약들에 의해 제한되었다. 이 새로운 전쟁들은 전쟁의 목표에 대해 합리적 사고를 적용하고 규범적인 제약들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새로운 전쟁 유형에서 폭력의 모형들은 새로운 전쟁들의 통계들에 의해 확인된다. 전투를 회피하는 경향과 민간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폭력의 부가는 사망자들 중 군인 대비 민간인 비율의 극적인 증가에서 확인된다. 20세기 초반에, 전쟁에서 사망자들 중 85-90%가 군인이었다. 2차 세계전쟁에서, 모든 전쟁 사망자들 중 대략 절반이 민간인들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 100년전의 비율은 거의 정확하게 역전되었는데, 오늘날 전쟁들에서 모든 사망자들 중 80%가 민간인들이다.6) 인구 전위의 중요성은 난민들과 전위된 개인들의 수치들에 의해 분명해진다. 유엔난민고등사무소(UNHCR)에 따르면, 세계적인 난민의 수는 1975년 2백4십만명에서 1985년 1천5십만명으로 증가하였고 1995년 1천4백4십만명(1992년 1천8백2십만명에서 본국으로 돌아간 대략 9백만명의 사람들 때문에 감소한 수치)으로 증가해왔다. 이러한 수치는 오직 국경을 넘은 난민들을 포함한 것이다. 같은 통계에 따르자면, 5백4십만명의 사람들이 국내유랑민(IDPs, intrnally displaced persons)화되었다.7) 난민문제에 대한 미국 위원회에 의해 제공된 수치들은 보다 높아서, 1980년 2천2백만명에서 1995년 3천8백만명으로 증가하였는데, 그들 중 대략 절반 가량은 국내유랑민들이다.8) 이 수치를 사용하여, 와이너(Myron Weiner)는 분쟁당 난민수가 1969년 이후 거칠게 배가되었는데, 분쟁당 28만7천명에서 1992년에 분쟁당 45만9천명으로 증가하였다고 계산하였다. 하지만 국내유랑민들의 증가는 보다 극적인 증가세를 보여주는데, 1969년 분쟁당 4만명에서 1992년 85만7천명으로 증가하였다.9) 전쟁 수행의 자금 동원 새로운 전쟁들은 세계화의 극단적 판본으로서 보여질 수 있는 맥락에서 벌어진다. 영토에 기초한 생산은 자유화와 국가 지원의 철회의 결과로서 또는 물리적 파괴(약탈, 포획, 등등)을 통해서, 또는 국가들의 분해, 전투, 또는 외부의 권력들에 의한 의도적인 봉쇄의 결과로서 시장들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아니면 지상의 전투부대들 때문이거나 재고, 천연자원, 연료를 확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얼마간 몰락한다. 몇몇 경우들에서, 약간의 값비싼 상품들이 계속 생산되고 있고―예컨대, 앙골라와 시에라 리온에서는 다이아몬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청금석(靑金石)과 에메랄드, 콜롬비아와 타지키스탄에서는 마약이 생산되고, 그들은 ‘보호’를 제공해줄 수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소득의 자원을 제공한다. 실업률은 매우 놓은 수준인데, 정부는 계속해서 지출함에 따라, 인플레이션이 만연한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통화가 몰락하여 물물교환으로 대체되고, 값비싼 상품들이 통화의 기능을 하거나 달러나 마르크 같은 외환이 사용된다. 생산이 붕괴하고 징세가 매우 어려워짐에 따라 과세 표준이 침식하자, 사유화된 군사 집단들처럼, 정부들은 자신의 폭력적 활동들을 유지하기 위한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대안적인 자원들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생산 활동이 붕괴하자, 자금 동원의 주요한 자원들은 마크 더필드가 ‘자산 이전’(‘asset transfer')10)이라고 명명한 것, 즉 예컨대 전투 부대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산을 재분배하거나, 외국의 원조와 같은 것이었다. 자산 이전의 가장 단순한 형태는 약탈, 강도, 강탈, 인질 장사였다. 이것은 모든 동시대의 전쟁들에 널리 퍼져있다. 부유한 사람들은 살해되고 그들의 금과 귀중품들은 강탈되었다. 인종 청소의 결과로서 소유가 이전된다. 가축은 민병대가 빼앗아 간다.11) 마을들이 점령되면 가게들과 공장들은 약탈된다. 인질들은 납치되고 식량이나 무기와, 아니면 다른 인질들, 포로들 또는 사체들과 교환된다. 자산 이전의 두 번째 형태는 시장 압박이다. 새로운 전쟁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식량과 생필품들의 공급을 통제하는 많은 검문소들이다. 상이한 준군사집단들 간의 영토 분할에 따른 고립과 봉쇄는 전투 부대들이 시장 가격을 통제할 수 있게 하였다. 수단, 구 유고슬라비아 및 여타 지역들에서 관찰될 수 있는, 전형적인 방식은 바로 도시 거주민들 또는 농민들이 자신의 자산들―자동차, 냉장고, 텔레비전, 아니면 젖소들―을, 살아 남기 위해서 엄청나게 비싼 가격의 생필품들을 아주 터무니 없이 낮은 가격에 교환하여 팔도록 강제될 것이라는 점이다. 보다 정교한 소득-산출 활동들에는 일차 상품 생산과 불법 무역의 다양한 형태들로부터 받는 ‘전쟁 세금’ 또는 ‘보호세’가 포함된다. 마약의 생산과 판매는 콜롬비아, 페루, 타지키스탄의 핵심적인 소득 원천이다. 마약으로부터 나오는 소득은, 콜롬비아 게릴라들의 경우 대략 연간 미화 8억 달러에 달한다고 하며, 이는 정부의 방위비 14억 달러에 비견된다.12) 마약 및 무기 거래 또는 자금 세탁은 그리고 세금을 인상시키는 다양한 군사집단들이 연루된 범죄활동들의 모든 사례들이다. 그러나, 국내 생산의 붕괴라는 조건에서, 무기, 탄약, 식량이, 메르세데스(Mercedes) 자동차나 레이밴(Rayban) 선글라스는 차치하고서라도, 수입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해외의 원조는 결정적이다. 해외 원조는 다음과 같은 형태들을 취한다; 1) 개별 가족들에 대한 해외의 송금. 예컨대, 중동의 산유국에서 수단 또는 팔레스타인 노동자들, 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나 크로아티아 노동자들이 보내는 돈이 그것이다. 이러한 송금들은 이상에서 서술했던 자산 이전의 다양한 형태들을 통해 군사 물자로 전환될 수 있다. 2) 국외의 이주민들로부터의 직접 원조. 여기엔 무기류 및 자금과 같은 물자 원조가 포함되고, 예컨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의 IRA 원조, 전세계의 아르메니아인들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원조, 캐나다의 크로아티아인들의 유력 크로아티아 정당에 대한 원조 등등이 있다. 3) 외국 정부들로부터의 원조. 냉전 기간 동안, 정규군들과 게릴라들 모두는 초강대국들의 후원들에 의존하였다. 이러한 원조는 완전히 고갈되었다. 물론 미국은 여전히 다수의 정부들에게 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인접 국가들은 종종 특정한 분파들 또는 소수민들에 대한 지원을 제공하였는데, 이는 자국에 다수의 난민들이 존재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불법적인) 무역 관계의 다양한 유형들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구 식민 권력들에게 지원을 제공한 다른 해외 정부들은 ‘안정성’에 관심이 있었는데, 예컨대 프랑스와 벨기에는 중앙 아프리카, 또는 이슬람 국가들을 지원하였다. 4) 인도주의적 원조. 정부들과 교전중인 분파들 모두가 자신의 용도로 인도주의적 지원을 전용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사실 원조 제공자들은 인구 중에서 가장 심각한 상황에 처한 부분들의 필요라는 시각에서 허용될 수 있는 인도주의적 원조 중 5%의 전용을 인식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전용의] 수단은 '관세'(‘customs duties’)이다.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인들은 이른바 헤르첵-보스나(Herceg-Bosna)라는 크로아티아 공동체―전쟁이 절정일 무렵, 중앙 보스니아의 특정 지역들에 이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를 통해 운반하는데 인도주의적 원조의 27%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또다른 방법들도 있었는데, 그것은 강도와 매복이었다. 과대평가된 공식 환율의 사용을 주장함으로써 수단과 에디오피아 정부는 인도주의적 원조로부터 이윤을 챙길 수 있었다. 본래, 전쟁의 파편화와 비공식화는 경제의 비공식화와 평행한다. 산업 생산과 국가 조절에 대한 강조하는 일국적 공식 경제 대신에, 외부 유입들, 특히 인도주의적 원조와 해외로부터의 송금들이 자산 이전과 초법적 무역에 기초한 지방적이고 지역적인 경제로 통합되면서 세계화된 비공식 경제의 새로운 유형이 확립되었다. <표 5.1>은 새로운 전쟁의 전형적인 자원 흐름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어떠한 생산이나 세금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였다는 점이다. 대신에, 보통 사람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원조와 송금의 형태를 띤 외부의 원조는 자산 이전과 암시장에서의 거래와 같은 다양한 형태를 거쳐 군사 물자로 재활용된다. 외국 정부로부터의 직접원조, 상품 생산자들로부터의 보호세, 해외 이주자들로부터의 원조는 다양한 전투 부대들이 보통의 사람들로부터 보다 많은 자원을 추출할 수 있는 역량을 향상시키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군사적 활동들을 유지시킨다. <표 5.1> 새로운 전쟁에서 자원의 흐름 요컨대, 핵심은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군사 부문과 민간 부문이라는 근대적 구분들이 분해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통제는 경제적 교환의 새로운 억압적 형태들을 배태하는 것을 필요로 하고, 다음으로 국가의 몰락과 경제적 주변화의 맥락에서 새로운 갱스터들/권력자들에게 유지가능한 금융적 기초를 제공하여야 한다. 사회적 관계들의 새로운 퇴보는 경제와 폭력이 동일성의 정치의 틀 내에서 심각하게 뒤얽힌 곳에서 확립되고 있다. 폭력의 확산 전쟁술의 새로운 유형은 하나의 약탈적인 사회적 조건이다.13) 특정 집단들이나 개인들을 내부로 억누르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사회적 조건을 그렇게 하기란 매우 어렵다. 인접 국가들은 거의 동시에 영향을 받는다. 특히 제재나 교통 봉쇄가 시도되거나 국경이 봉쇄된 곳에서 무역의 중단으로 나타나는 전쟁의 피해는 계획적이든 아니든 전투 때문이다. 난민문제, 불법적인 무역 연쇄의 확산, 동일성의 정치의 범람, 이 모든 요소들은 폭력의 새로운 형태를 양성하는 조건들을 재생산한다. 비정부기구인 Saferworld는 몇몇 사례에서 인접국가들에 대한 분쟁의 피해를 계산하였다. 하나의 예로 모잠비끄의 전쟁이 있는데, 이 국가는 잠비아, 짐바브웨, 말라위, 보츠와나, 스와질랜드와 같은 내륙의 국가들의 중요한 무역로였다. 말라위는 모잠비끄와의 모든 무역이 단절되었고, 전쟁이 절정일 무렵에 소모된 추가적인 운송 비용이 연간 수출소득의 11%에 달하였다. 마찬가지로, 짐바브웨와의 무역도 극적으로 감소하였고 상품 수출 경로를 남아공으로 재조정하는데 들어간 비용이 1998년 기준으로 8억2천5백만달러에 달하였다.14) 발칸 지역에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의 잇따른 전쟁들로 인한 GDP의 급락―국경들의 봉쇄와 제재로 인한 무역의 상실과 운송 비용이 증가된 결과―은 얼마간 폭력의 진원지로부터의 거리에 반비례하였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GDP 하락은 매우 극적인데, 전쟁의 발발 이전에 미화로 일인당 2,719달러였던 것이, 전쟁이 종결되자 일인당 250달러로 폭락하였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둘러싼 내부원(inner ring) 국가들인 세르비아-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의 GDP는 1989년 의 수준에서 각각 49%, 65%, 55% 하락하였다. 1996년에 이르러,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마케도니아는 겨우 하락세를 멈출 수 있었고, 크로아티아는 매우 소소한 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 세 국가들을 둘러싼 외부원(outer ring) 국가들인 알바니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슬로베니아의 GDP는 1989년 수준에서 각각 81%, 88%, 73%, 90% 하락하였다. 가장 외곽의 원을 이루는 국가들인 헝가리, 그리스, 터키 모두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들이 보도되었다.15) 직접적인 경제적 피해들 뿐만 아니라, 난민 문제를 견뎌야 했던 것은 바로 인접국가들이었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인접국가에 주둔한다. UNHCR의 통계들에 따르면, 1995년 1천4백5십만명의 난민들 중에서, 다수는 아프리카와 아시아(각각 6백7십만명, 5백만명)에 주둔한다. 5십만명 이상의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는 국가들에는 기니, 수단, 탄자니아, 자이르, 이란, 파키스탄, 독일, 그리고 미국이 있다. 이러한 난민들의 엄청난 집중은 그 국가들에게 엄청난 경제적 부담일 뿐만 아니라, 난민들과 원주민들 사이의 긴장의 항구적인 원인으로 나타나고 있다―경제적 이유로는, 난민들 또한 자원을 얻기 위해 경쟁에 뛰어들기 때문이고, 정치적 이유로는, 그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각 정부들에게 압력을 주기 때문이고, 안보적 이유로는, 난민 캠프들이 다양한 급진 분파들에게 종종 기지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 무역은 전쟁 경제의 새로운 유형의 확산의 또 다른 원천이다. 무역 경로는 반드시 국경을 넘어야 한다. 1990년대 중반 알바니아의 불안정은 주로 지배층과 결탁한 마피아 집단들의 성장의 결과였다. 1980년대의 아프가니스탄 게릴라 집단들에 대한 미국의 거대한 무기 이전은 (그 대부분이 전용되었지만)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카슈미르, 타지키스탄을 포괄하는 무기 및 마약 거래 네트워크들로 전화되었다.16) 마크 더필드는 수단에서의 전쟁이 어떻게 불법적인 달러 거래와 연관되는지를 보여주었다: ‘금을 가진 자이르인들은 수입된 재화, 식량, 연료를 원하고, 달러를 가진 수단인들은 식량, 의복, 커피를 원하고, 수입한 상품을 가진 우간다인들은 금과 달러를 원한다’.17) 마지막으로, 동일성의 정치는, 그 자체가 확산으로의 경향을 갖는다. 언어, 종교, 또는 분화의 몇몇 다른 형태들에 의해 정의된 동일성에 기초한 모든 집단들은 국경을 범람한다. 그 결과, 배타주의의 다양한 형태들이 등장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정확히 동일성들의 이질성이다. 한 나라에서 다수자들은 다른 나라에서 소수자들이다: 부룬디, 르완다, 자이르의 툿시족, 소연방 해체로 인해 생겨난 국가들의 러시아인들, 특히 러시아의 국경지대에 사는 이른바 코사크들, 중앙 아시아의 이슬람 집단들―이들은 동일성의 정치가 통과하는 다수의 벡터들이다. 분쟁들은 더 이상 국가간 전쟁으로 표현될 수 없고 분쟁의 새로운 유형들의 특징들의 몇몇은 이미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결론 새로운 전쟁들은 정치적 목표들을 갖는다. 목표는 바로 동일성에 기초한 정치적 동원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군사적 전략은 인구의 전위(轉位) 및 동요이고 그럼으로써 동일성이 상이한 인구를 제거하고 증오와 공포를 조성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치의 분할적이고 배타적인 형태는 그것의 경제적 기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양한 정치적/군사적 분파들은 보통 사람들의 자산과 국가의 잔고를 강탈하고 희생자들에 대한 해외의 원조를 빼돌리는데, 얼마간 그것은 오직 전쟁이나 전쟁 직전의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 다시 말해, 전쟁은 사적인 부를 증대하려는 다양한 범죄 형태들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동시에 이러한 범죄들은 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재원 충당의 필수적인 원천들이다. 교전중인 정파들은 자신의 권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동시에 각종 자원들에 접근하기 위해 얼마간 항구적인 분쟁을 필요로 한다. 사회적 관계들의 이러한 약탈적 경향은 전쟁 지대들에서 두드러지고, 그리고 또한 그 주변 지대들을 특징짓는다. 전쟁에의 참여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보스니아에서, 오직 인구의 6.5%가 직접적으로 전쟁의 수행에 참여했다), 전쟁 지대들과 평화 지대들의 차이는 이전의 시기들처럼 확연치 않다.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군사 부문과 민간 부문을 구분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점차 전쟁과 평화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새로운 전쟁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대도시 중심부의 저소득층 거주 지역에서 발견될 수 있는 범죄와 인종주의의 결합으로 시작되었고 폭력의 규모가 최대화된 지역들에서 그것이 가장 격렬하게 표출되는 하나의 연속성으로 표현될 수 있다. 만약 폭력과 약탈이 평화 지대라고 여겨지는 곳에서 발견된다면, 모든 전쟁 지대들의 가까이에 시빌리티(civility)의 지대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다. 그 지대들은 전쟁 지대들에 비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보도된 것은 정상적 상황이 아니라 폭력과 범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역의 국가장치들이 여전히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지역들이 존재하고, 그 지역들에서 세금은 인상되고, [공적] 서비스들이 제공되며 생산은 유지되고 있다. 인도주의적 가치들을 방어하고 분리주의의 정치를 거부하는 집단들이 존재한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투즐라의 어떤 마을은 하나의 유명한 사례이다. 남부 르완다에서 창설된 자위부대들은 또 다른 사례이다. 고립된 상황에서, 이러한 시빌리티의 지대들은 보존하기 어려우며, 폭력의 극단화에 의해 압박되지만, 새로운 유형의 전쟁의 매우 파편적이고 탈중심화된 성격은 그러한 사례들을 가능케 하였다. 정확하게 새로운 전쟁들은 공식적인 정치경제가 쇠퇴하면서 등장하는 사회적 조건이기 때문에, 그것은 종결되기 매우 어렵다. 위로부터의 외교적 협상들은 핵심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고려하지 못한다; 그 협상들은 다양한 분파들을 단지 그들이 국가의 초기 형태인 것처럼 다룬다. 일시적인 정전 혹은 휴전은 당시에는 다양한 분파들을 만족시키는 새로운 협정들 또는 계약들을 단지 정당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평화유지군은 영토의 분할을 유지하고 피난민들이 돌아오는 것을 막는 것을 도울 뿐이다. 현존하는 '정치적 권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제적 재건은 지역의 자산이 증발함에 따른 재원의 새로운 자원들을 단지 제공하는 것일 수 있다. 권력관계가 변함없이 유지됨에 따라, 조만간 폭력은 또다시 만개할 것이다. 공포, 증오, 약탈은 장기적으로 생존가능한 정치체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사실, 전쟁 경제의 이러한 유형은 장기적으로 볼 때 고갈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대안이 될만한 것들이 존재한다. 특히, 어떻게 시빌리티의 지대들이 새로운 전쟁에 대한 반대논리를 제공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PSSP ) Human Rights Watch, Playing the Communal Card: Communal Violence and Human Rights (New York, 1995). 2) David Keen, 'When war itself is privatized', Times Literary Supplement (December 1995). 3) Simkin, Race to the Swift: Thoughts on Twenty First Century War (Brasseys, London, 1985), p. 311에서 재인용[국역: 『기동전』, 연제욱 옮김, 책세상, 1999]. 4) 널리 인용되는 엄청난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말레이 반도에서 영국의 경험이다. 주로 중국계 소수민들로 구성된 혁명 운동은 매우 제한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다른 대-게릴라전술의 관행들과는 다르게, 영국은 독립을 약속하는 것을 통해 ‘마음’을 얻고자 노력하고 게릴라들에게 그들과 유사한 군사 전술을 사용하면서 혁명군의 전술을 모방하였다는 것이다. 위의 책, 참고. 5) Human Rights Watch, Playing the Communal Card, p. 9. 6) 초기의 수치들은 Dan Smith, The State of War and Peace Atlas (Penguin Books, London, 1997)을 참고하라. 1990년대의 수치는 나의 계산에 의한 것인데, Mary Kaldor, 'Introduction', Mary Kaldor and Basker Vashee (eds), Restructuring the Global Military Sector: Volume Ⅰ: New Wars (Cassell/Pinter, London, 1997)을 참고하라. 7) UNHCR, The State of the World's Refugees: In Search of Solutions (Oxford University Press, Oxford, 1995). 8) 이러한 수치들은 난민문제에 관한 미국 위원회(Washington, DC.)가 정기적으로 발간하는 World Refugee Survey에서 찾을 수 있다. 9) Myron Weiner, 'Bad neighbours, bad neighbourhoods: and inquiry into the causes of refugee flows', International Security, 21, 1 (Summer, 1996). 10) Mark Duffield, 'The political economy of internal war: asset transfer, complex emergencies and international aid', in Joanna Macrae and Anthony Zwi (eds), War and Hunger: Rethinking International Reponses (Zed Press, London, 1994). 11) 데이빗 킨(David Keen)은 남부에서 활동하는 SPLA(수단인민해방군)의 약화를 위해 수단 정부가 지원하는 북부 출신의 Baggara 민병대에 의한 가축 약탈에 의해 발생한 남부 수단의 기아에 대해 묘사했다: ‘젊은 Baggara 민병대원에게, 특히 경제적 주변화와 가뭄을 심각하게 경험한 대원들에게, 약탈은 자신들의 빈약한 자본스톡이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을 제공하였다’. David Keen, 'A disaster for Whom? Local interests and international donors during famine. Among the Dinka of Sudan', Disasters 15, 2, 155. 12) ‘Central Asia's narcotics industry', Strategic Comments, 3, 5 (June 1997); 'Colombia's escalating violence: crime, conflict and politics', Strategic Comments, 3, 4 (May 1997). 13) 몇몇 저자들이 동시대의 전쟁 경제들의 약탈적 성격에 대해 지적하였다. Xavier Bougarel, L'Anatomie d'un conflit (Edition Decouverts, Paris, 1995)를 참고하라. 나는 이 책에서 3장을 주로 인용하였다. 또한 R. T. Naylor, 'The insurgent economy: black market operations of geurilla organizations', Crime Law and Social Change, 20 (1993)과 Peter Lewis, 'From prebendalism to predation: the political economy of decline in Nigeria', Journal of Modern African Studies, 34, 1 (March 1996)을 참고하라. 14) Michael Cranna (ed.), The True Cost of Conflict (Saferworld, Earthscan, 1994). 15) Vesna Bojicic, Mary Kaldor, Ivan Vejvoda, 'Post-war reconstruction in the Balkans', European Foreign Affairs Review, 2, 3 (Autumn 1997)을 참고하라. 16) 1986년 말에 이르러, 미국은 약 30억달러 가치의 원조를 제공하였다. 그중 일부는 CIA에 의해 니카라과와 앙골라로 전용되었고, 일부는 파키스탄 군장교들이 개인적 용도로 그리고 암시장으로 전용하였으며, 일부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판매되었고, 일부는 가격을 부풀리거나 화물을 빼돌리는 것을 통해 무기 공급상들에 의해 전용되었다. 네일러(R.T. Naylor)에 따르면, ‘그 결과, 국제구호조직들은 전용된 식량, 의복, 천막, 의약품들을 되사는 것을 통해 시장들을 일소해야만 했고, 아프간의 반군지도자들은 마약거래로부터 생긴 이윤들을 가지고 이미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 의해 제공되었었던 무기를 구입해야만 했다’. ‘The insurgent economy', p. 19. 17) Duffield, 'Political economy of internal war', p. 57.
지난 4월 18일 전국민중연대 주최로 열린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반전반미 투쟁의 향후 방향" <전국민중연대 월례토론회> 자료입니다. 사회 : 김태연(민주노총 정책기획실장) 발제 1 : 미군의 이라크점령 구상과 중동 정세, 그리고 한반도에 끼칠 영 향 (임필수, 전국민중연대 정책실장) 발제 2 : 반전반미 투쟁에 대한 평가와 민중운동의 투쟁방향 (정대연, 전 국민중연대 정책위원장) 토론 1 : 강상구 (민주노동당 연대사업위원회) 토론 2 : 최일붕 (다함께 신문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