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노동뉴스 이종호 편집국장 초청, 노동자운동연구소 3차 월례 워크숍 워크숍의 취지 노동자의 도시 울산에서 벌어지는 일은 언제나 노동운동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곤 했다. 민주노조 운동이 폭발한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부터, 노동법 개악 이후 정리해고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98년 현대차 점거 파업, 그리고 작년 말 불법 파견 문제를 전국적 쟁점으로 다시 만들어낸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의 1공장 점거 파업까지 당대의 핵심 노동 의제들이 울산에서 투쟁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울산의 노동운동은 한국 민주노조 운동의 가장 곤란한 문제들이 공존하고 있기도 하다. 울산에서는 실리주의 노동운동, 비정규직과 연대하지 못하는 정규직 운동 등 98년 이후 본격화 된 민주노조 운동의 핵심 문제점들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고 있다. 노동자운동연구소에서는 경주 노동운동, 구미 노동운동에 이어 5월 27일 3번째 워크숍으로 울산 노동운동의 현황과 쟁점을 살펴보았다. 발표는 1988년부터 현재까지 울산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는 울산노동뉴스 편집국장 이종호 동지가 해주었다. 울산 노동운동 역사 이종호 동지가 울산에 내려간 것은 1988년 5월이었다고 한다. 당시 울산은 이미 전국의 수많은 활동가들이 공장과 지역사회단체에서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 교수도 노동 문제 조사를 위해 위장취업을 하던 분위기였다고 한다. 울산 민주노조 운동은 1987년 7월 5일 현대엔진에서 노동조합 설립과 이후 6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몰려나오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풍산금속 등에서는 어용노조를 급조하여 민주노조 설립을 막았지만 어용노조퇴진과 민주노조설립을 위한 투쟁으로 이를 돌파해내었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한 신규 노조가 자본의 탄압과 회유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업장에서는 1988-1989년 노민추 등의 조직을 통해 노조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1988년 6월 현대차 이상범 집행위 불신임 투표나 1988년 임투에서 위원장의 직권조인을 불인정하며 파업지도부를 중심으로 128일간 진행된 현대중 파업투쟁이 대표적이었다. 이종호 동지는 이 부분에서 현장 활동가 조직의 역할에 대해 강조했다. 당시 현장 활동가 조직은 현재와 같은 선거 조직이 아니라 현장 대중투쟁조직이었다는 것이다. 87년 투쟁 이후 선출된 노조가 민주노조 역할을 하지 못함에 따라 현장 활동가 조직들이 파업지도부를 꾸려 공식 지도부를 무력화하거나, 노민추를 꾸려 현장을 장악해나갔다. 일종의 현장의 이중 권력 상태가 88년부터 이어졌다는 것이다. “1988-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지도부, 1991년 현대자동차연합투쟁위원회(현연투), 1995년 현대차 양봉수동지 분신공동대책위원회(분신공대위) 등이 바로 대표적인 현장대중투쟁조직들이다. 1988-19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투쟁 당시 파업지도부는 어용 집행부에 맞서 부단히 현장의 이중권력을 만들어내면서 투쟁하는 대중들의 목소리와 의지를 직접 반영하고 그 지도력을 즉각적으로 검증받았던 명실상부한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기관이었다. 1991년 현연투는 노민추, 구속해고동지회(구해동), 공동소위원회(공소위), 민주연합대의원회(민대), 풍물패연합 등 당시 현대자동차 민주세력이 총결집하여 만들어졌다. 현연투는 1991년 5월 투쟁에서 노동조합을 제낀 채 연일 4,000-5,000명의 조합원들을 직접 이끌고 공장 안 대규모 집회와 시내 거리행진을 감행한 후 격렬한 반민자당·반노태우정권 거리투쟁을 벌여냈다. 1995년 현대자동차 양봉수 동지 분신투쟁 당시 현장활동가들이 사업부별로 즉각 투쟁대오를 꾸리고 전공장에 걸쳐 분신공대위를 결성함으로써 노동조합과는 무관하게 바로 파업투쟁을 벌였던 것도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대중투쟁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현장대중투쟁조직과 노동자들의 분출하는 투쟁을 바탕으로 1990년대 초 내내 울산에서는 쉬지 않고 투쟁이 펼쳐진다. 1990년 4월 25일 현대중공업에서 골리앗 투쟁이 펼쳐지고 28일에 현대차 노동자들은 정권의 미포만 작전(경찰과 군인 1만 5천 명이 미포만에서 육해공으로 골리앗을 진압하려 했던 작전)을 지연시키기 위해 수천여 명이 가두 투쟁을 진행했고, 마창노련의 동맹파업을 시작으로 전노협은 5월 총파업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노총 사업장들마저 임금 인상을 내걸고 투쟁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에서 시작된 투쟁이 정치 투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1991년 현연투는 대중투쟁을 통해 그해 9월 3대 노조 선거에서 이현구 집행부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현구 집행부는 출범과 동시에 3중고에 부딪히게 되는데, 집행경험은 없는 상태에서, 조합원들의 기대는 매우 컸고, 자본은 청와대까지 나서 집행부를 압박해왔다. 3대 집행부는 1991년 말 성과급 투쟁을 벌이며 자본과 정면으로 부딪혔다. 공장점거까지 시도했지만 다음해 1월 21일 공권력과 대치 중 퇴각하게 되고 이후 500여 명이 구속 수배 징계되며 노조 집행부가 사실상 와해되었다. 사측은 대의원회의실까지 폐쇄했다. 하지만 현장 활동가들은 부산대에 수배자들을 중심으로 장외 집행부를 꾸리며 조직을 정비했고, 1992년 8월 4대 윤성근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4대 집행부는 김영삼 정권의 긴급조정권을 돌파하지 못하고 임투를 마무리하며 집행부를 내려와야 했다. 93년 5대 임원선거에서는 최초로 민주노조 진영이 정갑득과 김강희 후보 진영으로 나뉘어졌으며, 그 결과 이영복 어용 집행부가 들어섰다. 1991년 대량 구속 수배 사태 이후 1992년부터 93년까지는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모두 지리한 노조 정상화 작업이 펼쳐지던 시기다. 노조 정상화 과정과 이후 투쟁방향을 둘러싸고 논쟁하며 현재와 비슷한 형태의 현장 정파가 탄생했다. 이영복 집행부는 현장조직에 대해 갖가지 탄압을 벌였고, 현장조직들은 ‘노동자의 길’(노길)을 창간해 상호 소통했다. 95년 이영복 집행부가 재선에 성공하며 현장탄압이 더욱 거세졌고, 그 와중에 양봉수 열사가 분신으로 이에 항의하는 투쟁이 펼쳐졌다. 침체되어 있던 현장활동가들은 6월 대책위를 조직하고 비공인 파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투쟁의 성과로 8월 ‘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 투쟁위원회’(민투위)를 결성함으로써 오랜 공백을 뚫고 현장민주조직을 재건했다. 그리고 그 해 6대 집행부 선거에서 정갑득 집행부를 출범시키게 된다. 하지만 민투위는 이후 여러 계기를 거치며 계속 분화했다. 96-97년 총파업은 한국 노동운동에서 역사적인 투쟁이었으며, 울산 노동운동에도 그러했다. 울산지역 민주노총 사업장의 파업 참가율은 거의 100%에 육박했었다. 이종호 동지는 96-97년 총파업이 보여주었던 노동자 정치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대선 정치로 수렴된 문제점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인간선언’이었다면 96-97년 총파업투쟁은 한국 노동자계급의 ‘정치선언’이었다. 민주노총은 이 투쟁으로 합법화를 뛰어넘는 지위를 얻어냈고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대표성을 인정받았다. 총파업투쟁으로 한국노총 산하 노동조합들의 한국노총 탈퇴와 민주노총 가입이 늘어났으며 이름만 있고 활동이 없던 ‘휴면노조’들이 상당수 정상화됐다. 미조직 노동자들 또한 이 투쟁으로 노동조합 결성의 필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자신감을 갖게 됐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세계 노동자들에게 자본과 정권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투쟁의 가능성과 희망을 보여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투쟁으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계급이 국민들 사이에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96-97년 총파업투쟁은 1953년 한국전쟁 종전 이후 최초의 정치총파업이었고 노동자정치, 총파업정치의 힘과 가능성을 보여준 투쟁이었다. “1990년의 정치적 총파업이 노동운동탄압분쇄, 전노협 사수를 위한 방어적 투쟁이었다면 1996-97년 정치총파업은 노동법 개악과 재개정을 둘러싼 공세적 투쟁이었다. 1991년 5월 투쟁에서 거리정치와 현장정치가 분리됐고 거리정치를 현장정치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다면, 1996-97년 총파업은 이 둘을 역동적으로 통일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노동자 정치가 아니라 1997년 대선 정치로 수렴되는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이렇게 투쟁이 끝나버린 후과는 1998년 대규모 정리해고로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1991년 이후 계속 무쟁의 상태였고, 결국 현대차에서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이 7월에 펼쳐졌다. 1997년 7대 집행부 선거 준비 과정에서 정갑득 전 집행부 측이 실노회를 결성해 나간 상태에서 선거가 치뤄졌으나 민투위가 승리하고 김광식 집행부가 출범했다. 김광식 집행부는 36일 간 점거파업을 이어갔지만 결국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며 파업을 종료시켰다. 5천 명 이상의 조합원들이 결사 항쟁 분위기를 이어갔고, 경찰 병력도 진입을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집행부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한편 당시 무급 휴직자가 대규모로 발생했는데, 이들 중 장사하다 파산한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이들이 복직된 이후 정리해고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보수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1997년부터 1998년 정리해고 투쟁 이후까지 민투위는 계속 분화했다. 1997년 선거 준비 과정에서 정갑득 전 집행부 진영이 실노회를 꾸렸고, 1998년 점거 파업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서 김광식 집행부 진영이 미래회를 꾸렸다. 이후 박유기 등도 이탈하며 현재 형태의 현장조직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현장 조직들은 이른바 정파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현장조직 간 경쟁으로 현장 활력의 한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2001년 초에는 울산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사내하청 노조인 INP중공업 사내하청 노조 투쟁이 벌어졌다. 노조 설립 후 노조 간부에 대한 탄압 및 조합원에 대한 대규모 계약해지가 이어졌고, 현장조직대표자회의, 지역사회단체 등이 연대 투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곧이어 효성, 고합, 태광 화섬 3사 투쟁이 진행되었다. 효성에서 시작된 투쟁은 대규모 용역깡패와 공권력 투입 이후 6월 12일 지역 화섬 공동 투쟁으로 발전했다. 한편 현대차 이상욱 집행부는 7월 총파업을 약속했지만 결국 지키지 못했다. 2003년 3월에는 현대차 근골격계 투쟁이 진행되었는데, 현장조직이 집행부 선거 외에 오래간만에 대중적 사업을 전개한 투쟁이었다. 민투위 간부들이 대우조선에서 교육받은 내용을 토대로 진행한 이 투쟁은 현장 교육, 현장 선전 작업을 현장조직이 직접 진행하였으며, 부산에서 의사를 모셔와 직접 현장 검진을 하기도 했었다. 이후 집단 요양 투쟁과 3명이 구속된 근로복지공단 점거 투쟁으로 이어지며 산재 인정을 받아내었다. 같은 해에는 비투위가 구성되어 현대차 사내하청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했다. 비투위는 내부에서 1사1조직 형태로 갈 것인지 아니면 독자노조를 유지할 것인지를 두고 내부 논쟁이 있기도 했다. 당시 대의원대회에서 정규직 대의원들이 비정규직 조직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어 역설적으로 1사1조직이 통과될 수도 있었는데, 비투위 내부 결정으로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이종호 동지는 이 대목에서 몇 가지 의견을 피력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1사1조직하고, 비투위는 현장대중조직으로 남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비투위는 오히려 공동소위원회연합(공소위)을 참조해 볼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공소위는 규약상 노동조합 공식체계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노동조합의 공식 의사결정과정에서 아무런 권리와 의무를 행사할 수 없고 집행에서의 권한 또한 없다. 그래서 실제 공소위는 스스로 부서별, 사업부별, 전공장 체계를 꾸리고 출범식도 독자적으로 해왔다. 노동조합의 맨 밑바닥에 있으면서 동시에 노동조합 바깥에 있는 셈이다. 공소위는 주요 시기에 자신의 입장을 대중적으로 표명하여 현장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고 대의원회와 대립하여 소위원회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소위원회는 활동가를 발굴하고 훈련하는 풀이고,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소위원회를 통해 활동에 입문해왔다. 공소위는 노동조합 대의원체계와는 달리 현장 대중들로부터 자신들의 일부로 인식되고 그만큼 소위원과 대중의 관계는 직접적이다. 소위원이 현장 대중들 안에서 투표를 통해 선출되고 있지는 않지만 전공장 공소위는 노동조합의 다른 체계들과는 달리 현장의 직접성을 담보로 커다란 대중적 힘을 행사할 수 있다.” 울산에서는 이후 2006년 울산과학대 투쟁을 지역연대투쟁을 통해 승리로 이끌며 오래간만에 지역에서 승리 분위기를 만들었고, 2008-2009년 미포조선 용인기업 투쟁을 거치며 울산 민주노조 운동 진영의 무너진 연대를 복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후 울산 노동운동의 과제 이종호 동지는 울산노동운동 역사를 반추하며 현재 생각해봐야 할 화두 중 하나로 ‘과소비-과노동 체제’ 를 지적했다. 소비 수준을 맞추기 위해 초장시간 노동을 감내하고 살아가는 울산 노동자들의 의식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소비와 과노동의 악순환을 끊어내지 않고서는 현재 울산 노동자들이 변화할 계기를 찾기 힘들다고 진단했다. 노동자운동의 과제에 대한 이종호 동지의 말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심야노동 철폐와 주간연속2교대제 쟁취를 넘어 주35시간으로 노동시간을 더 단축시켜야 한다. 시간급제를 없애고 월급제를 정착시켜야 한다. 비정규직과의 차별을 줄이는 데서 더 나아가 비정규직 없는 공장, 비정규직 없는 사무실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운동의 사회적 확장과 재구성을 위해 지역사회운동과의 연대와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퇴직 이후의 삶을 집단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젊은 활동가들을 키워내야 한다.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의 시각에서 벗어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노동운동의 미래를 제대로 설계할 수 있다. 최저임금도 못 받고 일을 해야 하는 청소년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처지에서 미래를 바라볼 때 자기 세대와 자식 세대를 위해 노동운동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현재의 이익만을 좇아갈 때 자식 세대는 점점 더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게 된다. 내 자식만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만들지 않으려고 휴일도 없이 밤샘 노동해 번 돈을 사교육비로 쏟아붓는 ‘악순환’은 이제 그만둬야 한다. 1987년 우리는 한낱 기계의 부속품이기를 거부하고 인간임을 선언했다. 자본의 노예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주인임을 자각했고, 1996-97년 우리 노동자가 정치의 주체임을 역사에 알렸다.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은 빛바랜 깃발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자본주의를 넘어 우리 노동자의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해가고자 하는 꿈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민중의 삶을 옥죄면 옥죌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커져갈 것이다.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되고, 함께 걷는 걸음 하나하나가 뒷 사람의 길이 된다.
화물연대 심동진 조직국장 초청, 노동자운동연구소 4차 월례 워크숍 2003년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는 기치를 들고 폭풍처럼 등장한 화물연대는 스스로가 당당한 노동자임을 선언했다. 자본과 정권을 상대로 위력적인 투쟁을 벌인 결과 화물연대가 결성 된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천 삼백 명으로 출발한 조직이 2만이 넘는 규모로 확대되었다. 그 조직화의 중심에 심동진 화물연대 조직국장이 있었다. 노동자운동 연구소는 7월 23일 현장에서 대중조직화에 헌신해온 심동진 조직국장을 초청하여 조직가로서의 자세와 원칙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의 구수하고 재치 있는 말솜씨 덕분에 강연장에는 시종일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긴 이야기를 듣는 참가자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왜 조직화에 나서는지 답하라 심동진 조직국장은 뜻밖의 이야기로 워크숍을 시작했다. 조직가로서 산전수전 겪으면서 잔뼈 마디마디가 굵은 그의 첫마디는 ‘조직화란 슬픈 것’이라는 것이었다. 조직화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는 문제인데, 사상이나 이념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직한 사람을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는 얘기였다. 한 마디로 각오가 필요하다는 메시지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옛날 얘기처럼 술술 풀어냈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화물연대 활동을 열심히 하던 동지가 있었는데 집안 생계부터 아픈 동생의 병원비까지 책임지고 있었다고 한다. 활동하면서 수입이 줄고 가족들에게 돈도 못 보낼 형편이 되자, 여동생은 스스로 짐이 된다고 여겼는지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 동생을 잃은 활동가는 심동진 조직국장을 원망했고 그도 미안함에 마음이 무거웠다고 한다. 극단적인 사례이기는 하지만 수많은 활동가들이 투쟁에 나서면서 경제적인 문제나 가족과의 갈등 등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히고 있다. 심동진 조직국장은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괴로워하고 원망하는 동지를 감당하고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조직가의 자세라고 말한다. 괜한 사람 같이하자고 했다가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자책으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인데,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에 조직화가 슬프다고 하는 것이리라. 이어서 그는 고통이 반복된다고 해서 무뎌지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을 조직하면서 마음 아프고 괴로운 일이 계속 생겨나겠지만 그게 반복된다고 해서 익숙해지지만은 않더라는 것이다. 그는 어떤 선배의 경험담을 예로 들었다. 그 선배는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지만 용감해 지기보다는 겁이 더 났다고 한다. 사회과학 서적에는 용감해지자고 했지 겁이 날 거라는 얘기는 없었던 것처럼, 조직화도 책에 나오지 않는 인간사의 굴곡을 헤쳐 나가는 일이기에 슬픔에 무뎌지기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래서 심동진 조직국장은 조직화를 하는 이유에 대해 본인 스스로가 분명한 답을 가져야 흔들릴 때 중심을 잡을 수 있다며, 바쁜 와중에도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심동진 조직국장은 조직화란 고난의 길이니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 한다고 당부하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는 중국공산당도 창당 당시 13명으로 미미하게 시작했지만 결국 혁명에 성공하여 창대한 결과를 낳았다며 조직가들은 포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동진 조직국장 본인이 화물연대를 50여 명의 발기인들과 함께 시작했지만 2만이 넘는 규모로 조직을 확대해 보았기에 더욱 확신하는 것이리라. 운동이 어려운 시기에 주류화 전략을 택하며 청산주의로 흘러가지 않고 묵묵히 현장 조직가의 길을 걷는 동지들의 노력이 반드시 결실을 맺길 바란다는 격려였다. 조직화의 삼박자 심동진 조직국장은 대중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고 했다. 노동자들의 상태와 행동, 조직가의 능력, 그리고 조직가의 의지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대중들은 정체된 상태에 있다가도 행동에 나서기도 하고, 투쟁이 고조되었다가 퇴각하기도 하며, 폭발하기 직전의 상태에서 기회를 노리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하다. 그러한 가운데 조직가는 대중들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합창단을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말이다. 합창단의 상태를 보고 반 박자 빠르거나 느리게 지휘하는 것처럼 대중들의 상태를 파악해서 구체적인 방침을 실행하는 것이 조직가의 능력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예를 들어 대중들이 위축되고 내부 경쟁하는 시기에 토론이나 교육 없이 성급히 투쟁을 호소한다면 외면당할 뿐이다. 대중들의 행동이 정체된 시기에는 조직화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소모임이라도 만들어가면서 차근차근 확대해야 한다고 한다. 반대로 87년 투쟁 같은 임계상태에는 급진적이고 선명하게 입장을 제출하고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최근 희망버스에 사람들의 관심이 왜 모이고 있는지 나름의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현재 이명박 정권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짓밟으면서 협박의 수위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저항에 나서기만 하면 앞선 사례처럼 탄압할 테니 잠자코 있으라는 식이다. 하지만 대중들은 협박에 움츠러들지 않겠다, 복수하고 싶다는 심리가 점차 쌓여서 역전을 노리는 상태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진중공업 투쟁은 탄압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대중의 흐름을 변화시키는 계기인 만큼 대중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업을 제안하고 조직노동자들이 함께 나설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양하게 뒤섞여 있는 대중의 상태를 파악하고 구체적인 방침을 추진하는 것과 함께 필요한 게 바로 조직가의 의지다. 심동진 조직국장은 눈물을 세 번쯤 흘려봐야 한다고 말했다. 감동의 눈물, 배신의 눈물, 허무의 눈물이 그것이다. 그가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것은 무일푼이던 화물연대 초창기였다. 남의 사무실 창고 같은 데서 먹고 자면서 노조를 조직했는데, 정성이 갸륵했던지 매일 아침 찾아와 복지리 사주면서 해장시켜주던 사람, 겨울엔 전기담요 사주면서 챙기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배신의 눈물은 삼성에서 노조 결성시도 하면서 겪었던 일이다. 노조 만드는 일보다 교섭하는 일이 가장 두려웠다고 한다. 고생고생해서 노조 만들고 나서 교섭에 들어가면 매수가 되든지 뭐가 되든지 사측에 의해 깨지기 때문이다. 삼성조직화 사업에 닥치는 대로 뛰어들어봤지만 너무 배신당하는 일이 많아서 심지어 이건희보다 삼성노동자들이 더 미웠던 적도 있다고 했다. 세 번째 허무의 눈물은 문제가 있을 때에는 찾아와서 상담하다가 해결되면 떠나가거나, 위기에 처한 조직을 천신만고 끝에 복원하니까 외면당하는 경우다. 이럴 때에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조직화가 자기 세력 만들기는 아니니까 세상에 조직할 노동자들이 많다는 생각으로 다른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심동진 조직국장은 조직가의 강인한 의지와 능력, 그리고 대중들의 상태가 들어맞아야 조직화 사업이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조직가의 활동지침 계속해서 심동진 조직국장은 조직가로서 명심해야 할 활동지침에 대해 이야기했다. 첫 번째는 투쟁에 나설 때 자신의 몸에 맞는 무기를 지니고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는 점이다. 남을 따라 해도 좋지만 자기 처지에 맞지 않으면 독이 될 수도 있다. 1993년 현총련 투쟁의 경우 위원장이 직권조인하고 날라버린 상황이었지만 조합원들이 파업에 돌입하면서 멋지게 승리한 사례다. 정말 교과서에 나올법하게 단계별로 투쟁 수위를 높여가면서 싸워서 이겼고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조건이 다른 사업장에서 같은 전술을 쓴다고 해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600여 명 있는 사업장인데 조합원 200명이고 그중에서 적극적인 조합원이 50명이라면, 현총련처럼 부서별 파업 돌입은 불가능하다. 투쟁이 확대 상승되는 것이 아니라 앞서나간 단위만 탄압받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총련 투쟁처럼 해야 승리한다고 주장하며 우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할 때 왕이 쓰던 갑옷과 칼을 거절하고 돌팔매를 선택한 것이 거인을 쓰러뜨린 비결인 것처럼 자기 조건에 맞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둘째, 물이 흐를 때 웅덩이를 만나면 채우고 다시 흐르듯, 어디를 조직하면 조직하던 사람이 떠나도 그 단위가 굴러갈 수 있도록 전천후 활동가를 양성해야 한다. 심동진 조직국장은 활동가들이 조직화를 시작한 곳에서 떠나려면 “본인을 복제할 수 있는 확실한 세포를 구축해 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전주 버스 사업장에서 민주노조 건설 투쟁이 비교적 잘 되고 있는데, 조합원 가운데 화물연대 투쟁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지금 당장 성과가 없더라도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놓아야 나중에 기회를 만나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세 번째는 현장에 있는 다양한 모임들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씩 늘려가는 방식도 중요하지만 기존의 조직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내가 하는 얘기를 귓등으로 들어도 그 사람들을 배척해서는 안 되고, 충분히 친해지기 전에는 느슨하고 넉넉하게 대해야 한다. 좌파들의 고질적 맹점이 처음부터 원칙을 들이미는 것인데 조급하게 굴면 일을 그르친다는 지적이다. 물론 친해지고 나서도 원칙과 규율을 세우지 못하면 어용과 다를 바 없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현장에서 영향력이 큰 기존 조직을 포섭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공동투쟁은 ‘퍼펙트 스톰’처럼 해야 한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퍼펙트 스톰’은, 위력적이지 않던 소용돌이가 합쳐지면서 엄청난 규모의 파괴력을 지닌 폭풍이 된다는 뜻인데, 공동투쟁 역시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화물연대가 철도, 덤프와 공동투쟁을 기획했던 사례를 들면서 공동투쟁의 원칙을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력갱생이다. 공동투쟁에 돌입하면 적들은 우리를 분할, 각개격파하려 드는데, 공동투쟁을 제안한 조직이 나서서 ‘우리가 계속 남을 테니 제안 받은 단위는 성과를 얻어가라’라는 마음가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조합원들이 그런 마음가짐으로 투쟁에 임해야 공동투쟁의 성과를 만들 수 있다. 대부분의 공동투쟁이 수세적이고 품앗이 투쟁에 그치곤 하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공동투쟁을 위력적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세 번의 눈물 그 후 강연 뒤에는 참가자들이 질문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석자들은 세 번의 눈물을 흘린 다음에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그는 감동의 눈물을 흘릴 때에는 자만하면 안 되고, 배신과 허무의 눈물을 흘릴 때에는 다른 일을 찾아 운동을 지속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배신의 눈물을 흘린 뒤에는 자다가도 벌떡 깰 정도로 힘겨웠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활동을 망설이던 사람들 엄청 꼬드겨서 같이 활동하면서 돈 때려 박게 하고 감옥에도 보내고 했는데 내가 배신당했다고 떠날 수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다. 힘들어도 함께해온 동지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스스로를 붙들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음 질문은 구체적인 조직화 사례에 관한 것이었다. 심동진 조직국장은 2003년 화물연대 파업 당시 조합원들은 임계상태에 있었다고 회고한다. 개별 사업장별로 싸움이 수없이 벌어질 수 있었지만 하나씩 대응하다가는 진이 빠지는 수가 있기 때문에 ‘큰 놈을 쓰러뜨리고 작은 놈을 굴복시키자’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2002년부터 꼬박 1년간 준비해서 대정부 투쟁에 나선 것이 2003년 파업이었다. 그는 당장 나서자는 조합원들을 진정시켜 가면서 준비했기 때문에 위력적인 투쟁이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남의 손을 빌린 것이 아니라 자력갱생을 기본 원칙으로 세웠던 것도 중요했다. 맨바닥, 무일푼에서 시작해 사람 모으고 돈 모았으며, 투쟁에 나설 때에도 독자적으로 돌파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키웠다고 한다. 그는 화물연대가 2003년에 위력적인 힘을 발휘하며 투쟁했지만,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투쟁 목표를 근시안적으로 세울 것이 아니라 길게 봐야 한다. 화물연대 출범식을 앞두고 우리가 왜 노동자인지 모르겠다고 해서 교육을 잡아야 할 정도로 정체성이 모호했지만 지속적인 토론과 교육을 통해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을 자각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노동기본권 쟁취를 목표로 정부에게 제도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을 만들어 갔다고 한다. 그가 말한 대중운동의 원칙들이 조직화 사례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고 노련한 베테랑 활동가라면 두려움도 없고 흔들림도 없을 것이란 생각과 다르게, 고뇌하고 흔들리면서도 중심을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 심동진 조직국장. 본인의 경험이 하나하나 묻어나는 이야기라 참가자들에게 더욱 호소력 있게 와 닿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마음을 다잡아 줄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시 한수를 소개했다. 梅不賣香(매불매향) - 신흠(申欽)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로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그가 풀이하기를, 사상이념이 분명해야 오동나무처럼 천년이 지나도 후회 없이 아름다운 노래가 흐르고,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힘들다고 변절해서는 아니 되고, 달의 모습이 바뀐다고 해서 본질이 변치 않듯 계급투쟁의 본질도 바뀌지 않으며, 버드나무 가지가 꺾여도 새로 돋아나듯이 노동자는 투쟁에 패배해도 다시 투쟁에 나선다. 그는 평소 이 시를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는다고 한다. 참석자들에게는 그의 삶 자체가 마음을 다잡아 주는 시간이었다.
한 해에 두 번, 정확히 말하면 만 1년 안에 두 번 임금인상을 한 회사가 있다. 서울 구로구에 있는 세일엠텍이라는 사업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노동조합과의 임금교섭으로 2010년 6월에 한 번, 최저임금 인상 적용으로 1월에 또 한 번. 하지만 이런 임금인상을 두 번씩 하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그게 참 싫었다. 최저임금 간당간당한 저임금의 삶도 싫었다. 그래서 올해는 결의했다. 최저임금(내년)을 넘겨보자! 그리고 살짝 아쉬운 승리를 거뒀다.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받던 세일엠텍 노동자들 세일엠텍은 2009년에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조합원 약 60명, 남부지역지회 사업장치고는 조합원수가 많은 편이었다. 자동차 카시트커버를 생산하는 미싱공장이었고 조합원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현장은 당연히(!) 열악했다. 고개를 숙인 채 하루 종일 서서 미싱을 돌려야 했고 잔업, 특근은 일상이었다. 없을 땐 억지로 연차 쓰고 쉬어야 했다. 버티다 못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했고 몇 차례 교섭 끝에 임단협을 마무리했다. 교섭결과가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일단 노동조합의 안정화가 중요했다. 이듬해인 2010년 임단협 역시 큰 폭의 임금인상을 이뤄내지 못하고(임금 15,000원 인상) 마무리되었다. 조합원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다. 잔업, 특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웠고,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회사가 분노스러웠다. 2011년 임단협은 그렇게 조합원들의 분노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남부지역지회는 올해 2월 출범한 남부지역 전략조직화사업단 ‘노동자의 미래’ 사업에 조직의 사활을 걸고 뛰어들었다. 중소영세사업장의 저임금 비정규노동자들이 밀집한 구로공단에서 미조직노동자 조직화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 지역에 둥지를 틀고 있는 남부지역지회의 사명이었다. 지역에서 사업을 시작하며 올해 제일 중점에 두었던 것은 역시 최저임금문제였다. 최저임금을 받는 사업장이 많았고, 교묘한 위반사업장 역시 존재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핵심적 목표는 지역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당사자들을 최저임금 인상투쟁의 주체로 세워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지역에서는 실태조사와 선전전, 페스티발 사업 등이 연이어 진행되었다. 동시에 다른 한축에서는 이미 조직된 노동자들 중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들을 재조직하기 위한 활동이 진행되었다. 주되게는 세일엠텍, A사업장, B사업장 등이 있었다. 이 사업장의 활동가들과 집담회 등을 진행하며 임단협 시 공동의 대응을 만들어 나가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여러 사정으로 인해 임단협 공동대응은 힘들어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세일엠텍은 올해 무조건 최저임금선을 돌파하기 위한 투쟁을 진행하게 되었다. 조합원들의 관심도 여기에 쏠려 있었고, 지역에서 하나의 전형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민도 있었다. 세일엠텍 내에서 교섭이 몇 차례 진행되었고 회사측 태도는 분명했다. 임금 3만원(그것도 2010년 임금 기준, 2011년 최저임금 인상분 포함)인상. 투쟁에 돌입해야 했다. 7월 4일 4시간동안 경고 파업을 했다. 세일엠텍 분회 결성 이후 첫 파업이었다. 팔뚝질도 어색하고 구호외치기도 힘겨웠다. 아는 노래?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노동자들은 투쟁에 돌입했고 회사 앞마당에서 파업 집회를 하며 대의원들은 머리띠를 둘렀다. 7월 6일 이날은 금속노조 파업 지침이 내려온 날이었고 서울지부 확대간부들이 세일엠텍 앞으로 왔다. 지역의 여러 사업장과 단체에서도 투쟁에 함께 했다. 조합원들은 이날도 밥 먹고 나와서 4시간 파업을 진행했다. 이번엔 회사 앞 인도. 파업 두 차례 만에 현장 밖으로 나왔다. 조합원만큼 모인 연대대오에 조합원들은 놀랐고 좋아했다. 신나게 파업투쟁을 진행했다. 회사는 난리가 났고, 앰프 줄여달라, 교섭하자며 지회장, 부지회장을 붙잡았다. 일단 이날 이후 집중교섭을 하기로 했고 약 2주간 교섭이 몇 차례 진행되었다. 파업은 노동자들의 학교 7월 22일 교섭을 앞두고 지회 임원들이 모여 앉았다. 최저임금은 날치기로 통과된 상황, 22일 교섭에서도 안이 안 나오면 교섭 결렬을 선언하고 전면적 투쟁에 돌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상상을 했다. 최저임금이 날치기로 통과된 것에 대해, 최저임금만큼 올리자는 요구 때문에 파업을 해야 하는 현실에 대해 남부지구협 의장(남부지역지회 지회장)이 노동부 관악지청 앞에서 단식농성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현장에서는 최저임금 날치기에 대한 분노가 나오고 있었다. 날치기 직후 KBS에서 진행한 최저임금 설문조사에서 70%이상이 날치기된 최저임금에 대해 불만족스럽다고 했다. 노동자의 미래에서 진행한 최저임금 만족도 조사에서도 90%이상의 지역노동자들이 불만족스럽다는 답변을 했다. 날치기로, 턱없이 낮은 수준으로 결정된 최저임금에 대한 지역 노동자들의 분노를 모아낼 수 없을까? 남부지구협 의장이 노동부 관악지청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면서 노동부의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고 최저임금도 안주려는 사업장을 고발하고, 지역의 최저임금 현실에 대해 매일 알려낸다면 뭔가 되지 않을까? 지회 임원 셋이 모여 이런 상상을 했다. 그리고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노동부 앞 단식은 무산되었다. 남부지회장은 세일엠텍 회사 안에서 단식에 돌입했다. 잠은 지회 봉고차에서 잤다. 노동부 앞에서의 투쟁이 무산됐지만 사업장에서라도 투쟁을 승리로 만들어야 했다. 조합원들은 왜 단식까지 하냐며 말렸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지회는 이미 세일엠텍만의 투쟁이 아닌 상황에서 끝까지 한번 가봐야 했다. 22일 오후 8시까지 이어진 교섭에서도 회사측 안은 나오지 않았으나 회사가 교섭을 한 번 더 하자고 했다. 결렬선언은 한차례 미루기로 하고 25일 다시 교섭이 열렸다. 지회장은 주말 내내 굶었다. 월요일 교섭에서도 회사는 안을 내지 않았고 오후 5시 교섭 결렬을 선언했다. 현장에서 조합원들 간에 토론이 벌어졌다. 이쯤 됐으면 그만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찬반투표를 했고 전면투쟁에 찬성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26일 아침, 조합원들은 출근하자마자 일손을 놓았다. 전면파업은 안 될 거라고 봤던 회사가 몸이 달았다. 아침부터 교섭하자고 졸라서 결국 12시부터 교섭에 들어갔다. 조합원들은 현장에서 신나게 파업하고 놀았다. 영화도 보고 구호도 배우고 노래도 배웠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가 맞았다. 26일 저녁 결국 회사와 합의를 만들어냈다. 임금 4만원 인상, 일시금 20만원 지급, 11년 최저임금 인상분(130원) 전 직원에게 적용, 내년 1월 임금 15,000원 인상. 한 10%정도 부족한 합의였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그 정도면 됐다 했다. 수고했다고 눈시울을 붉히는 조합원도 많았다. 교섭보고를 하는 지회장도 목이 맸다. 조합원들의 단결이 고마웠고, 부족한 안에 만족해준 것이 감사했다.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인 비참한 현실을 바꾸자, 바꿀 수 있다! 최저임금은 현실에서 최저임금이 아니다. 많은 중소사업장들에서 최저임금은 임금의 하한선이 아니고, 말그대로 최고임금이다. 노동조합이 최저임금선을 돌파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은 이를 방증한다. 최저임금을 진짜 ‘최저’임금으로 만들려면 여기저기서 최저임금선을 돌파해야 한다. 또한 최저임금으로 인해 동일한 처지-임금의 하향평준화?-에 놓이게 된 노동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조직해야 한다. 올해 남부지역지회는 노동자의 미래와 함께 지역 미조직사업, 지역 최저임금 투쟁을 하면서 애초부터 임단협때 최저임금문제를 결합시켜 투쟁을 만들어가려 했었다. 지역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중전과 조직사업장에서의 지상전의 아름다운 결합. 애초 의도했던 것만큼의 성과는 이루어내지 못했지만 최소한 사업장에서의 승리는 거두었다. 최소한의 희망을 본 것이다. 최저임금 대상자가 최저임금 투쟁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기획이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 옳았다. 최소한 올해 지역지회와 노동자의 미래의 실천은 이를 증명해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보다 적극적인 실천이다. 조직 노동자들이 나서고 미조직 노동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길을 틔워준다면 뭔가 달라져도 달라지긴 할 것이다. 가리봉역, 독산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노동자들, 최소한 그들이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서명이라도 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투쟁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면 바꿀 수 있다.
2011년 7월 30일. 부산의 길목 길목들에서는 그야말로 비상식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찰은 영도로 들어가는 모든 버스를 통제했고 이미 탑승한 승객마저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승용차는 물론 오토바이까지 검문 받았고 심지어 걸어가는 사람도 신분증 검사를 하여, 영도주민이 아니면 통과하지 못하게 하였다. 희망의 버스를 ‘절망의 버스’라고 외치며 가만둘 수 없다는 ‘어버이연합’도 이에 가담했다. 용역깡패와 어버이연합은 희망버스 참가자나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공권력은 이를 방관하다가 시민들이 항의하면 느릿느릿 나타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라고 거들 뿐이었다. 이런 난리통을 거치며 겨우겨우 희망버스가 도착한 영도 안의 상황은 더욱 가관이었다. 2차 희망버스에서 시민과 경찰이 대치하던 도로는 여전히 경찰의 차벽에 의해 막혀있고, 그토록 가고 싶던 85호 크레인이 있는 한진중공업과 3차 희망버스의 집결지인 청학성당으로 가는 모든 골목까지 경찰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심지어 한두 명이 통과할만한 골목에도 경찰을 배치하여 영도를 원천봉쇄 하고 있었다. 경찰은 7,000여명의 경찰을 배치하여 그야말로 영도의 모든 길을 꽁꽁 틀어막았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와 김진숙 지도위원의 고공농성 이 모든 사건은 2011년 1월 한진중공업이 400여 명의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한진중공업은 3년 동안 수주를 하지 못하여 경영상의 위기가 왔다는 이유로 400여 명을 정리해고 할 수밖에 없다면서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였다.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의 지도위원이자 한진중공업의 해고자인 김진숙 동지는 “나는 한진 조합원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조합원을 지키겠다”는 편지를 남기고 2011년 1월 6일 새벽 85호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하였다.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은 단순한 크레인이 아니다. 2003년 129일 농성끝에 김주익 열사를 떠나보내야만 했던 자리이다. 그리고 그 때 그 참혹했던 자리로 김진숙 지도위원이 다시 오른지 벌써 230일이 지났다.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은 지금까지 정리해고 철회 투쟁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한진중공업은 정리해고를 철회하고 김진숙 지도위원을 크레인에서 내려오게 해야 한다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사측의 구사대와 용역들로부터 공장 밖으로 끌려나온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은 정리해고철폐투쟁위원회(정투위)를 조직하여 지금도 85호 크레인이 보이는 공장 건너편에서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희망버스의 출발 희망버스에 지금처럼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희망버스를 만들었던 것은 주류언론이 통제할 수 없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트위터로 전해지는 한진중공업의 소식은 그 어느 언론사의 신문보다 더 빠르고 정확했다. 사측과 언론에서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논리를 만들어냈지만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알리는 목소리는 더욱 커져갔다. 그리고 외국에서도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 1차 희망버스가 부산에 도착하는 날. 한진중공업 조합원과 연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한진중공업 조선소 안에 있었다. 한진중공업은 희망버스가 영도조선소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몇 가지 조치를 끝낸 상황이었다. 용역을 동원하여 사수대가 지키고 있던 동, 서, 정문을 침탈했고 컨테이너 벽을 쌓아 외부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게다가 85호 크레인마저도 침탈하려는 시도가 있었기에, 조선소 안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조선소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적은 숫자로 용역과 어렵게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희망버스 참가단이 조선소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모여든 사람들은 점차 많은 숫자가 되었고 결국 전세는 역전되었다. 상황이 크게 바뀌면서 조선소 안에 있던 용역들은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후 2차 희망버스는 경찰의 최루액, 물대포, 살수차 등 폭력진압에 가로막혀 한진중공업까지 닿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밤새 도로에서 경찰과 대치가 있었다. 3차 희망버스 때는 경찰이 아예 영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리고 8월 27일, 4차 희망의 버스가 서울에서 진행되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 1, 2, 3차 희망버스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전국적인 문제가 되면서 한진중공업의 조남호 회장이 마지못해 8월 18일 청문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간절한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전부터 밤까지 이어졌던 청문회에서 조남호 회장은 답변자세, 화법, 자세, 표정 등을 적어놓은 '청문회 대응문건'을 준비하고, 8월 초 기자회견과 마찬가지로 정리해고는 절대 철회할 수 없다는 입장만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청문회에서도 확인했듯이, 정리해고를 철회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측에 맞서서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는 김진숙 지도위원과 한진중공업 정투위의 투쟁은 더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매일 저녁 7시 30분 한진중공업 길 건너편에서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의 희망버스 4차 희망버스는 영도가 아닌 서울로 떠났다. 앞으로도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이 정리해고를 철회할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희망버스가 조금 더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개인적인 바람을 적어본다. 무엇보다도 먼저 희망버스가 한진중공업을 향하여 출발하던 그 본래의 의미를 잃지 않아야 한다. 희망버스는 주식배당금 등의 기업과 임원의 이익은 다 챙기면서도 경영위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정리해고를 고집하는 한진중공업에 대한 분노와, 정리해고를 철회시키고 조합원을 지키기 위해 35미터 상공의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 지도위원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부산 영도를 향해 시동을 걸었다. 희망버스에 어떤 사람이 참가를 하든 간에 이 목적을 잃어서는 안 된다. 희망버스는 정당에서도 많은 참가를 하고 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유명정치인의 참가가 많이 조명되고 있다. 물론 더욱 많은 사람이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 투쟁에 참가하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 정치인들에게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의 투쟁이 가려져서는 안 된다. 한진 정리해고 철회 투쟁이 내년 선거에서 또다시 무원칙한 반MB 신자유주의 선거연합에 한 소잿거리로 이용되는 것은 아닌지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이 산자와 죽은 자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로 살아가기를 바라며 크레인에 올랐다. 그리고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이 절망하지 않고, 85호 크레인 밑을 지켜왔기 때문에 지금의 투쟁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어디를 봐도 대중투쟁은 힘들고 지친 상태다. 누구도 이렇다 할 투쟁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다. 그런 와중에 희망버스로 이름 지어진 한진투쟁은 말 그대로 우리의 희망이다. 우리는 희망버스로 모아지고 있는 노동자 민중의 요구를 한진중공업을 넘어, 전국의 정리해고 철회 투쟁으로 확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리해고 문제뿐만 아니라 저임금 장시간 노동, 간접고용 철폐 등 기본적인 노동권 쟁취를 위한 목소리도 함께 녹여낼 수 있어야 한다. 그 길만이 한진 투쟁을 전국적인 연대의 힘으로 지켜내는 일이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노동자 민중에게 한진 투쟁이 희망이 되는 길일 것이다. 정리해고 철회하라! 김진숙 지도위원의 외침은 절절한 외침에 맞서는 자본 측의 역공세는 참으로 터무니없고 치졸한 양상이다.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한다느니, 해고자 한명이 ‘한진중공업을 망하게 한다’, ‘나라 망할 일이다’는 둥. 하지만 한진중공업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것은 이미 <추적 60분> 등의 언론 보도와 청문회를 통해서 만천 하에 드러났다.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다.(물론 정리해고 자체가 부당하다.) 노동자를 정리해고 하면서 임원의 임금을 인상하거나, 3년간 못 받은 수주를 정리해고 다음에 발표하는 모습들만 봐도 정리해고의 부당함을 알 수 있다. 적자가 난 부분은 조선부분이 아니라 건설부분이다. 또 수빅 조선소 등에 과도한 투자를 벌여 발생한 막대한 이자 부담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것은 명확히 영업외 비용 적자이다. 이런 이유를 들어 정리해고를 합리화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해고문제는‘경영자의 권리’와 같이 사고된다. ‘회사에서 나가라고 하면 나가는 것이지 어쩌겠냐’는 식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유를 불문하고 해고는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정당화되어야 하는 것일까? 사장님, 회장님이 짜르면 노동자들은 그냥 포기해야하는가? 해고는 신성불가침인가? 2009년, 쌍용자동차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외치며 77일 동안 옥쇄파업을 벌였다. 그 힘겨운 투쟁의 끝에 얻어낸 합의안이 461명의 무급휴직이었다. 하지만 1년의 무급휴직을 거쳐 노동자들을 순차적으로 복직시키겠다는 약속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지금까지 15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이 차례로 죽었다. 우리들은 이미 알고 있다. 해고가 개인을 넘어 가정까지 파탄 내는 사실상의 살인행위라는 것을 말이다. 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정리해고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선 안 된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은 해고가 발생하고 있다. 10대부터 60대 이상까지 수많은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으로 고용되며 해고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사측은 언제나 기업의 이익, 경영의 위기, 유연성과 효율성을 내세우며 손쉽게 해고를 자행한다. 때로는 계약만료, 업체 변경 등을 이유로 명백한 해고마저 해고가 아닌 것으로 둔갑시킨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현 사회는 ‘너무나 경직되어서, 효율적이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의 막대한 이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희생을 강요받고, 생존권과 노동권 같은 기본적인 권리조차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리해고 문제를 단지 개인의 희생으로 바라봐야 하는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은 우리에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절절하지만 단순한 외침, ‘정리해고 철회하라’. 이것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만을 위한 외침이 아니다. 그것은 정리해고를 일삼는 이 땅의 자본과 그것에 저항하고자 하는 노동자 민중을 향한 외침이다. 그래서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현대자본의 노조탄압 공세에 맞서 노동자 총단결이 필요하다 현대자동차가 직접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징계, 해고를 지시하고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25일 민주노총울산본부와 금속노조는 ‘금속노조 교섭전략, 교섭 주요일정, 단계별 대응방안’이라는 문서를 입수했는데, 현대자동차 마크가 찍혀있는 이 다섯 쪽짜리 문서에는 사내하청 업체들에 대한 지시사항이 담겨있었다. 이웅화 비대위원장 등 노동조합 핵심 조합원들에게 해고와 징계 등의 조치를 취할 것, 해고 협박과 부분적 정규직화 가능성을 미끼로 정규직화 집단소송을 무력화할 것, 종업원 교육을 통해 노조 탈퇴를 유도할 것 등 지시사항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깨부수기 위한 현대자본의 폭력적 탄압 지난 11월 현대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 이후 사측은 해고 104명, 정직 659명 등 1092명에게 징계를 내리고 187명에게 고소고발을 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는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가해진 부당한 탄압이었다. 이것이 하청업체들의 개별적 판단과 실행이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컸고, 원청관리자가 먼저 해고 통보를 한 후 하청업체 사장이 해고 확인해주는 등의 일이 벌어지면서 현장에서는 원청이 직접 해고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았었는데, 결국 사실임이 밝혀진 것이다. 대규모 징계해고 등 탄압의 목적은 명백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사내하청 정규직화를 위한 2차 파업을 결의하자마자 전면적인 탄압이 시작되었으며, 정규직 신규채용을 미끼로 한 회유와 무차별 대량 징계탄압, 전직 임원들의 비리사건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결합하여 노동자들의 분열을 조장했다. 이번 문건은 노동자들이 또다시 단체행동을 할 경우 강력히 징계하겠다고 언급하는 등 징계의 목적이 노동조합 활동을 무력화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노동조합 탈퇴를 회유하고 협박할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이는 불이익 취급, 부당해고, 지배개입 등 명백한 부당 노동행위에 해당한다. 그 내용 중에는 ‘소송은 멀고 해고는 가깝다’는 노골적인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사내하청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현대자본의 입장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할 수 있으며, 법적인 절차와 관계없이 노동조합 파괴를 통해서 정규직화를 막아 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이다. 현대차는 이번 사건을 통하여 스스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원청 사용자’임을 증명했다. 현대차는 이제까지 줄곧 자신은 ‘하청업체 직원’과 전혀 무관하고 따라서 현대차를 상대로 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은 불법임을 주장해왔지만, 실제로는 하청노동자들의 사용자로 행동하고 있었다. 문건을 통해서 조합원 징계, 해고, 정규직 전환,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개입, 직원 교육 등 모든 노무관리를 현대차가 직접 수행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이번 문건에 대해서 현대차는 자신들이 작성한 문건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문서에 적힌 내용은 정확히 그대로 수행되었다. 현대자본의 전략에 맞서 노동자운동의 단결을 구축해야 하는 이유 현대차는 그간 정규직화 요구를 지속적으로 거부해왔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이미 정규직이거나 또는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현대자본은 단 한명도 정규직으로 전환하지 않았다. 도리어 파견법 자체가 위헌이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이마저도 실패하자 헌법소원까지 제기하였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경우 부담해야 하는 비용 문제를 제기하며 정규직 고용의 경직성이 문제라고 주장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로 인한 추가 비용은 연 1천억 원 정도로 알려져 있는데, 순이익만 5조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는 현대차가 이 정도 비용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용 문제만 고려한다면 파업으로 인해서 입은 손실이 훨씬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현대자본은 사내하청 비정규직 문제를 단기적인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고하고 있다. 생산량에 맞추어 노동력을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생산 신축성을 더 늘리고, 저임금의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현대자본의 최종 목적이다. 이것이 대법원의 판결, 불리한 여론, 파업으로 인해 입을 경제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는 진정한 이유이다. 이는 현대자본만의 전략이 아니라 현 정세에서 총자본과 정부가 고수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현대자본은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에도 직접 개입해서 노동조합 파괴를 책동하였으며,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당국자들도 여기에 조응하여 무차별적인 탄압과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고 있다. 한진중공업, 발레오, KEC 등 단위 사업장 차원의 투쟁에도 자본과 정부는 총력 대응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운동진영이 위기감을 가지고 사업장을 넘어서는 단결을 구축해야 하는 이유다.
무능한 정권에 맞서 노동자운동의 대안을 형성하기 위한 태세를 갖추자 고조된 대중적 불만과 어두운 하반기 경제전망 올해 상반기동안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대중적 불만에 부딪혀왔다. 우선, 높은 물가와 낮은 임금으로 인해 유류세, 통신비, 등록금 등 생계 상의 요구가 분출되었다. 그러나 이를 잠재우기 위해 시도된 물가안정 대책은 MB물가 20.42% 상승에서 알 수 있듯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다음으로 납품 단가 후려치기, 부당 내부거래, 문어발식 영역확장 등 재벌 대기업의 행태에 대한 사회적 불만 역시 제기되어왔다. 지배세력은 재벌의 이타주의에 호소하는 ‘동반성장’이라는 틀 내에서 이러한 불만을 관리하려고 하고 있으나, 이마저도 재벌들에 의해 사실상 무력화되어 왔다. 6월29일 국회가 주최한 대중소기업 상생 공청회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연합회 수장은 물론 주무 부처인 지식경제부 장관도 참석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철회에 대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정권과 자본은 타임오프제(근로시간면제제도), 교섭창구단일화, 직장폐쇄, 손해배상 등 모든 방법을 통원하여 노조탄압으로 일관했을 뿐이다. 올해 상반기를 종합해보면 높은 물가, 불안한 일자리, 낮은 임금, 불평등의 심화로 인한 분노가 사회 곳곳에서 분출했지만 정부는 이러한 분노를 봉합하는데 조차 실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진1%]이어질 하반기 한국 경제의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정부는 2011년 실질GDP 성장률을 당초 5% 내외에서 4.5%로 하향조정했다. 미국 경제의 회복 둔화로 인해 여전히 더블딥 논란은 지속되고 있으며 생산 부진, 인플레 압력 증대, 고용침체(공식 실업률 5월 현재 9.1%), 주택시장 침체, 재정여건 악화 등 다층적인 요소들이 둔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여기에 유럽 반주변부 재정위기, 대지진 이후 일본 경제 장기 침체까지 고려한다면, 하반기 한국 경제의 대외여건은 매우 불안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국제 유가 및 원자재 가격 상승세, 국내 서비스요금 상승과 근원물가 상승(5월 근원물가 상승률 3.5%), 중국 수입품 가격 상승 등으로 인해 하반기에도 물가상승 압력은 계속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저임금으로 인한 가계부채 증가, 수출대기업과 중기업간 격차 확대로 인한 중소기업 상황능력 악화 등 실물경기 침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6월30일 정부는 ‘2011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과 과제’를 발표했다. 그 기본방향은 “경제회복의 온기를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으로 △물가안정 △일자리 창출 및 내수기반 강화 △사회안전망 확충과 동반성장 등을 중점 정책과제로 추진한다는 것이다. 기본방향에서 알 수 있듯이, 이명박 정부는 상반기 동안 고조된 대중적 불만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고조된 불만의 배경이 되는 소득불평등과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저임금, 비정규직 문제가 빠져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서 물가안정 대책 정부는 하반기 경제정책의 최우선 순위로 물가안정을 꼽았다. “다소 긴축적인 재정기조”를 견지하면서 “시장친화적 물가대응”과 “서민생계비 부담 경감”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물가안정을 지상과제로 내세우는 것은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다. 한국의 경우 1998년 IMF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국은행법을 개정하는데, 이 때 한국은행의 첫 번째 목표가 국민경제발전이라는 포괄적 목표에서 물가안정이라는 한 가지 목표로 바꾸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물가안정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금융자본의 이익을 위해서다. 물가인상(통화가치 하락)으로 인해 금융자산 가격이 하락할 경우 이는 금융자본의 소득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신자유주의는 임금인상을 억제한다. 임금인상이 물가인상의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긴축적인 재정기조를 유지하면서 물가를 안정시키겠다는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은 저물가, 저임금을 통해 금융자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한편, 불공정행위ㆍ유통구조 개선 등 시장질서를 효율화하고, 교육․의료 등 서민생계비에 대한 일정한 지원을 하여 물가인상의 고통을 줄이겠다는 구상도 실효성이 없어 보인다. 가격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독과점 기업에 이를 강제할 만한 아무런 수단도 강구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상반기 정부와 정유사들이 기름값 100원 인하를 두고 옥신각신했던 점은 이를 잘 보여준다. 등록금 문제와 관련해서도 “대학의 자구노력을 중심으로 해결”해나간다는 원칙을 재확인하면서 대학의 등록금을 통한 이윤추구를 제어할 어떤 방안도 내놓지 않고 있다. 이 외에도 정부는 공공요금 인상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인상 시기만 분산시킨다거나, 재활용품 시장을 활성화시켜 중고품을 저가에 구입할 수 있도록 한다는 등의 기만적이고 성의없는 방안들을 제시했을 뿐이다. 지엽적인 ‘일자리창출 및 내수기반강화’ 정책 물가 다음으로 정부는 ‘일자리 창출 및 내수기반강화’를 주요 정책 과제로 꼽았다. 일자리 창출과 관련해서는 고용창출 기업에 대한 세액지원, 청년 창업 활성화,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충, 산업수요에 부응한 맞춤형 인력 양성 등 수년간 제시해온 정책들을 반복할 뿐이다. 다만, 일자리 창출과 관련해서 ‘노동시장 인프라 개선’을 위한 최우선 과제로 “타임오프제 현장점검 강화”,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에 대한 현장 컨설팅” 등을 명시하며 유연한 일자리 창출에 방해가 되는 노조를 탄압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밝혔다. 내수기반강화와 관련해서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판로를 확대하고, 여가와 관광산업을 확대하겠다는 것을 대책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대기업의 하청 기업에 대한 비용전가가 일반화되어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정부의 대책은 지극히 안이한 것이다. 또한 정부는 대형유통업체로부터 전통시장과 중소상인을 보호하기 위한 유통법·상생법이 한EU FTA로 인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특별법 제정에 반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이기도 하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정부의 정책방향이 자본간 이윤 분배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노동자에 대한 분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일하는 빈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사회안전망 확충 정책 정부는 ‘사회안전망 확충과 동반성장’에 대해서도 역시 의미없는 정책을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사회안전망과 관련해서는 ‘일을 통한 복지’로 탈(脫)수급 유인을 강화하겠다는 기존 정책을 재확인한다. 그러나 이는 수급자 관리를 빙자하여 기존 수급자마저 축소시킬 위험성이 있을 뿐 아니라, 450만 명 이상의 최저임금 노동자 그리고 최저임금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약 196만 명 노동자 등 ‘일하는 빈곤’의 현실을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가 있다. 동반성장과 관련해서는 대기업 계열사 간 부당거래 감시와 같은 실효성없는 립서비스, 대기업이 상생협력에 응할 시 세액공제를 해주겠다는 등의 조삼모사 식 정책을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이명박 정권의 무능과 총․대선을 앞두고 심화되는 지배 양당 간 암투 결론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수출 대기업 편향적인 경제정책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하반기 경제정책방향과 과제’에서 물가, 내수, 고용, 사회안전망 등의 구호를 내세워 ‘친서민’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에 걸맞는 본질적이고 실효적인 대책은 빠져 있다. 변죽만 울리거나, 이율배반적인 조치들로 가득차 있을 뿐이다. 특히 생활고의 원인인 실질임금 문제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은 하반기 물가상승의 충격까지 고스란히 입게 될 것이며, 불만은 더욱 고조될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2012년 총대선에 대한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한나라당 내에서도 이명박 정부와의 차별화 시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난 7월10일 한나라당 최고위원․정책위 연석 워크숍에서 홍준표 대표는 “우파 포퓰리즘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으며 법인세 추가 감세 철회, 대학등록금 완화, 대기업 규제 강화 등에 대한 몇 가지 정책 합의를 이끌어냈다. 물론 아직까지 한나라당 내 일부 의원들과 정부관료들이 이명박 정권 옹호를 위한 저지선을 지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7월11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감세는 경제에, 민간부문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며 이명박 정부의 기존 정책 노선을 옹호했다. 그러나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민생고에 대한 폭넓은 대중적 분노와 민주당 주도 반MB 공세 속에 이명박 정권의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국민들이 민주당을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4.27 재보선 직후 민주당 정당지지율이 2년 만에 한나라당을 앞서긴 했으나, 이는 금새 재역전되었다(7월 둘째 주 현재 한나라당 33.9%, 민주당 31.2%). 대선후보지지율에서는 손학규, 문재인, 유시민 세 명의 지지율을 합쳐도 박근혜에 훨씬 미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야권연합은 민주당에게 사활적인 과제가 된다. 민주당은 민생파탄으로 인한 대중적 불만과 이명박에 대한 냉소에 적극적으로 호응할 것이며, 반값등록금을 필두로 한 각종 복지 재정 조달 문제부터 개악노동법에 대한 일부 수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에서 친서민 정책을 표방할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한나라당 내 차별화 시도와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더욱 증폭될 것이다. 투쟁의 재조직화와 전선복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중운동이 개별화되고 부문화되어 각 부문별 이해를 정치권에 청원하는 양상을 띠게 될 경우, 이는 민주당 주도 야권연합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 민중운동은 이념적 차이가 전혀 없는 두 지배정당 간 권력암투에 휘둘리기 보다는, 스스로의 동력을 확보하고 주체를 형성하면서 장기적인 대안과 이념을 모색해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생계 상의 요구가 분출하게 된 원인을 중심으로 투쟁을 재조직화해야 한다. 가령, 반값등록금 단일의제를 중심으로 한 대학생들의 투쟁은 단순 재정 조달 문제로 좁혀져 결국 민주당 주도 야권연합으로 수렴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등록금 문제가 촉발된 원인은 고용악화와 소득감소 그리고 가계부채와 같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민중 생존권의 파탄이다. 2006년 프랑스 최초고용계약법안(CPE) 반대 투쟁의 승리는 노동자와 청년 각자의 요구를 실용적으로 병렬했던 것이 아니라, 노동불안정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공동투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다음으로 이러한 재조직화를 바탕으로 전선을 복구해야 한다. 노동자운동은 자본이 절대 내주지 않는 부분을 그대로 둔 채 세금만으로 삶의 고통을 일부 경감시켜보려는 시도와 분명히 선을 긋고, 실질임금의 정체 및 하락, 불안정한 고용형태를 전면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여기에 있어서 저임금을 보충하기 위한 장시간 노동체제(유성기업 투쟁), 사업 조정 과정을 경영상의 문제로 속여 진행되는 정리해고(한진중공업 투쟁)를 노동운동이 어떻게 바꾸어 내는가는 관건적인 투쟁일 것이다. 또한 노동악법 전면 개정 투쟁, 하반기 국회비준이 예상되는 한미FTA 저지 투쟁을 통해서 자본의 전면적 공세에 대한 민중운동 공동투쟁 전선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