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 평가와 과제” [편집자 주] 노조페미니즘팀에서는 총 세 차례에 걸쳐 여성노동자 조직화 과정에 대한 분석과 제언을 담은 글을 연재하고자 한다. 청소노동자를 시작으로 간병·요양노동자, 제조업 여성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논의를 제안할 것이다. 이를 통해 현재 추진 중인 공공노조 서경지부의 청소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 공공노조의 간병·요양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 서울남부지역 공단노동자 조직화사업에서 여성노동과 여성노동자 조직화에 주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다만 각 글의 구성, 서술 방식은 단일하지 않을 수 있다. 청소노동자의 경우는 진행한 사업을 일단락 짓고, 사업 추진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정리할 예정이다. 반면 간병·요양노동자와 제조업 여성노동자에 대한 글은 향후 본격적으로 전개될 전략조직화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작성될 것이다. 대다수 여성노동자가 처한 고용불안과 저임금 문제는 여성노동에 대한 사회적인 가치평가와 무관하지 않다. 예로부터 여성이 집안에서, 무급으로 수행해 온 일의 연장인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은 청소노동자, 가정관리사, 간병인, 요양보호사 등의 임금노동 형태로 드러나지만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형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심지어 노동자로도 인정받지 못하며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로 내몰려 있거나, 인격적 대우는커녕 언어폭력과 성폭력에 시달리는 일도 많다. 여성의 노동에 대한 분석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전체 노동자로 포괄되지 않는 여성노동자의 경험과 노동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여성노동자가 고유하게 겪는 노동 현장과 노동조합활동에서의 난점과 특수성을 발견하며, 이에 대해 무감각했던 기존의 노동자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의 연재를 통해 전체 여성노동자의 삶과 주체화 과정을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 시작점이 되었으면 한다. 또 현재 추진 중인 전략조직화 사업 속에서 보다 적극적인 논의가 만들어지길 희망해 본다. * 노조페미니즘팀은 노동자운동의 페미니즘적 혁신의 구체적 경로를 모색하기 위해 구성되었다. 전체 노동자운동에서 여성사업에 대한 문제의식과 활동 평가를 기반으로 노동조합 활동에서 여성사업 기획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기획 연재는 격월로 진행되는 <노동위원회 연속워크샵>을 기반으로 작성될 것이다. 통계로 보는 청소노동자 노동부 산하 기관 한국고용정보원의 「산업별 직업별 고용구조조사(2009」에 따르면, 청소노동자는 426개의 직업 중 403,976명을 차지하여, 직업순위 1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임금노동자 중에서는 다섯 번째로 종사자가 많기도 하다. 이는 청소노동이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노동임을 의미한다. 그 중 남성이 66,380명(17.5%)이고, 여성이 313,543명(82.5%)으로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다. 연령을 살펴보면 50세 이상이 82.1%를 차지하는데, 고령 노동자가 많은 직업임이 한 눈에 드러난다. 가구주인 경우는 남성이 91.7%, 여성이 50.6%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도 절반 정도 됨을 알 수 있다. 반면 학력은 중졸 이하가 76.6%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고용은 상용직 50.6%이고, 임시직 41.0%, 일용직 8.5%인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상용직의 의미가 통상적인 정규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의 사업장에서 1년 이상 근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해서 정년이 보장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균임금은 81.8만원이다. (남성 101.8만원, 여성이 77.6만원. 여성노동자 임금이 남성노동자의 76.3%에 불과하다.) 평균임금에는 각종 임금항목(수당)이 포함된다. 2009년 당시 최저임금이 시간당 4천원, 주 40시간 기준으로 83.6만원(주 44시간 기준 90.4만원)이었으므로, 대부분이 최저임금 위반사업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주당 근로시간은 남성이 45.7시간, 여성이 44.0시간으로 법정 근로시간보다 많이 근무하고 있었다. 청소노동자의 임금수준은 전체 426개 직업 중 낮은 순위로 일곱 번째를 차지한다. 고령의 여성, 청소노동자가 되다 “내가 60이 넘었는데 어디 할 건 없고 집에서 살림만 하던 사람이 뭐 방법이 없더라고…. 그래서 동네 아줌마한테 어디 돈 벌데 없냐고 하니깐, 여기서 해보라고 해서 와봤거든.” “환갑이 다 되도록 가정주부였다가 남편의 은퇴로 일을 시작했지. 다른 일은 다 나이 때문에 못해. 식당 아니면 청소일인데, 식당은 쉬는 날도 없잖아” “20년 넘게 경리일을 하고 오십이 다 돼 일을 찾다가 학교로 왔다.” “30년 동안 식당에서 부엌일을 하고 음식을 나르다가 4대 보험이 된다는 말에 학교 청소노동자 됐어요.” 고령여성은 경제활동에서 배제되는 위축을 경험하다 별다른 선택지 없이 청소노동을 시작한다. 보통 대부분의 청소노동자들은 청소노동을 시작하기 전 자영업, 노점, 공장노동자, 전업주부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다가 청소노동을 하게 되는데 일을 시작하는 나이는 평균 51.6세이다.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사회는 남성이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여성은 가사와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성별분업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여성의 노동은 저평가되며 저임금 역시 당연시된다. 청소노동 또한 그러한 인식의 연장에 있다. 통계수치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의 청소노동자들은 최저임금노동자이다. 노동조합이 없는 곳의 경우는 휴게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최저임금도 못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용돈벌이’나 가계에 ‘보탬’이 되는 수준을 넘어서 생계유지를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령이라는 이유만으로 생활이 불가능한 저임금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젊은 남성 관리자로부터 시달려야 하는 각종 (언어/성)폭력과 위협도 심각한 수준이다. 노동기본권은 물론 인권의 사각지대에까지 내몰려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해고위협에 시달리는 비정규직노동자라는 고용형태는 너무나 부당한 대우와 열악한 노동조건일지라도 ‘내가 이 나이 먹어서 다닐 수 있는 직장이라도 있는 것에 감사’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점을 너무나 잘 아는 (남성)관리자들은 청소노동자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고, 욕설을 내뱉고, 상납을 받기도 하면서 청소노동자들의 불만을 효율적으로 통제한다. 노동조합과 처음 만나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청소노동자는 7,853명으로 전체 청소노동자의 2.0%이다. 매우 낮은 가입률이다. 청소노동자들은 여성비정규직노조(구 여성연맹), 여성노조, 일반노조, 공공노조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공공노조 서경지부에는 약 1,000명 정도의 청소노동자들이 있는데, (고려대, 연세대, 연세재단빌딩, 이화여대, 홍익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성신여대, 프레스센터, 롯데손해보험빌딩분회 등) 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조합원이 된 청소노동자들에게 노조는 노동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지만, 대부분 이전의 노동조합에 대한 이들의 인식은 ‘폭력적이고 과격한 것’, ‘빨갱이’,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언론의 노동조합 죽이기, 레드컴플렉스 등이 조합원들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구체적으로는 ‘교육’이나 자신의 권리를 찾아 ‘투쟁’하는 과정을 거치며 노동조합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가족들의 지지 또한 대체로 부정적이지 않다고 입을 모으기도 한다. “작년 12월 노조를 결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가 비정규직이란 걸 알았죠. 그 전에는 관심도 없었고 글자(뜻)도 몰랐고 슬픔과 아픔도 몰랐어요. TV에 비정규직 얘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렸어요. 이제까지 우리가 파견근로자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거죠.”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나서 달라졌어요. 내 소리를 낼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이제는 노동조합하는 사람이 재단 이사장보다 더 위대해보여요. 20년만 젊다면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우리 큰 아들은 “신여사님 대단하셔”라면서 농담을 해요. 우리 며느리도 “몇 개월 사이에 우리 어머니가 많은 걸 배우셨다”며 놀라워하죠. 밥 한 끼 권리 외치면서 캠페인하는게 초라해 보일 수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저는 개의치 않아요.” 통계 등의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합원들과 노동조합을 만들고 난 후 달라진 점, 제일 좋은 점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 임금인상이나 고용안정, 주5일제 시행과 같은 노동환경 개선이다. 또한 비슷하게 많은 대답이 나오는 것으로 평소 눈치 보기 바빴던 관리자들의 눈치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 더 이상 숨죽여 살지 않아도 된다는 점 등이다. 노동조합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을 가장 크고 좋은 변화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혹시 눈이라도 마주칠까 피해 다니기 바빴던, 나를 무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관리자들과 큰 소리로 싸워보기도 하고 노동조합을 통해 그야말로 ‘맞짱’ 뜨는 일은 대부분의 청소노동자들에게 가슴이 방망이질 쳐지는 가장 떨리는 순간이자 가장 짜릿한 순간이다. 노동조합의 일상 활동은 대부분 임단협을 중심으로 한 임금인상투쟁이 핵심이다. 뿐만 아니라 미화사업장의 경우는(대부분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그러하듯) 1년이나 2년 단위로 재계약이 이뤄지기 때문에 해마다 고용과 관련된 크고 작은 투쟁을 해야 한다. 최저임금 투쟁 또한 집중해야 하는 중요한 투쟁이다. 조합원들은 반복되는 투쟁과 잦은 일정에 지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그만큼 ‘자연적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투쟁과 각종 일정들을 빡빡이 소화하는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나 일상 활동이 다채롭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나 노동조합을 만들고 관례적으로라도 하는 간부교육 등은 대상의 특수성 때문에 기획조차 되지 못하였다. 이는 청소노동자들이 조합원이 된 이후 각종 일정에는 열심히 ‘참가’ 혹은 ‘동원’되나 주체로서 활동하는 데에는 부족한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일례로 핵심사업인 임단협 과정만 보더라도 현장간부들이 교섭위원으로 선출은 되지만, 노동조합의 체계나 역할, 단체교섭의 의미 등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없다보니 지부임원이나 간부들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전략조직화 사업을 시작하다 - 교육을 통해 주체로 거듭나기 대학의 비정규직 노동자, 그중에서도 청소용역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공공노조의 <대학 비정규직 전략조직화사업>은 2009년부터 시작했다. 사업은 크게 미조직사업, 간부육성사업, 여론사업 등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전략조직화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미조직 청소노동자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조합원과 간부들이 미조직사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소노동자를 조직하더라도 전담활동가가 아닌 기 조직된 청소노동자가 청소노동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업단에서는 고민 끝에 미화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기획하였다. 활동하고 있는 미화사업장 핵심간부들을 대상으로 월 1회, 4시간 집합교육의 형태로 총 7개월 동안 진행하는 교육이었다. 교육을 조직적으로 제안하고 진행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지부에서 전체 간부들을 한데 모아 노동교실 같은 교육을 해 온 적은 있지만 특정 직종(미화 업종과 같은)만 따로 분리해 교육을 했던 적은 없었다. 가장 큰 우려는 50-60대 중·고령 여성간부들이, ‘아줌마’ 혹은 ‘할머니’ 조합원들이 그 긴 시간에 이르는 교육을 소화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힘들고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새로 짜는 것도 어려운 고민이었다. 실제로 교육 초기 미화간부들은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발표)해야 하거나 토론하는 교육을 낯설어했으며, 교육이 끝나자마자 제대로 된 뒤풀이도 함께 하지 못하고 가족들 저녁 챙겨주어야 한다며 쏜살같이 교육장을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교육생들의 열의는 매우 높았다. 교육이 진행될수록 발표하는 것에 익숙해지기도 하고, 전반적인 교육 분위기도 훨씬 좋아졌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8남매 중 큰 딸로 태어나서 집안 일만 한다고 공부를 못해 아쉬워요” “10년만 젊었으면 더 없이 사는 사람들의 권리에 대해 더 공부할 수 있었을 텐데….” 교육준비 과정에서 특히 중요하게 고려했던 점은 청소노동자들의 경우 살아오면서 교육기회는 물론 사회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발표할 기회가 적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다보니 강사에 의존한 강의중심교육은 무리였다. 그래서 매 교육마다 50분 안팎의 강의와 참여형 토론을 배치하였고, 같은 교육주제라 할지라도 다른 형태의 두 세 차례 토론을 거칠 수 있게 하였다([참고 1]). 강의 또한 청소노동자 현실과 정서가 반영될 수 있도록 강사를 조직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몇 차례의 기획회의를 거쳤다. 교육 주제는 노동자 의식, 외국의 청소노동자 조직화 사례, 청소노동자의 일과 건강, 역사로 보는 노동운동사 등 다양하였지만, 매 주제의 교육내용마다 미조직사업의 동기부여와 주체로서 작게나마 당장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접목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를테면 교육 말미에 노동조합 소개 및 가입안내가 적힌 포켓티슈 3개씩을 교육생들에게 나눠주고, 다음 교육 때까지 3명의 미조직노동자를 만나서 포켓티슈를 건네며 노동조합 이야기를 꺼내보는 것을 숙제로 결의하는 식이다. 간부교육은 철저히 ‘학교’ 형태로 운영되었는데, 청소노동자 대부분이 가난했던 시절, 남아선호 시대를 살며 배움의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세대들이기에 학교식 운영을 통해 배움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입학식, 교장, 출석부, 담임선생님, 숙제, 시험, 방학, 졸업여행, 교육생의 이름이 적힌 노트 선물 등은 조합원들이 즐겁게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충분한 기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올해 3년차에 접어든 간부교육은 실제로 교육을 이수한 간부들이 이전보다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으로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성과를 내고 있다. 조합원들 말마따나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교육일지라도 교육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노조 활동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렇게 간부교육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몇 가지 요인으로는 첫째, 단체협약에 조합원들의 교육시간이 확보되어 있었고, 지부에서도 이를 적극 활용하여 안정적인 교육시간을 만들어낸 점. 둘째, 전략조직화 사업 기금을 통한 충분한 예산확보. 셋째, 조합원들의 정서와 조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섬세한 교육기획 등을 꼽을 수 있다. 더불어 <따뜻한 밥 한 끼 권리 캠페인>이나 지부의 투쟁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전략조직화 사업이 탄력을 받는 속에 교육이 이루어진 것도 활기차게 교육을 진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여성 특유의 친화력으로 새로운 노동자들을 만나다 청소노동자가 조직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분류된다. 고려대, 성신여대, 연세대, 이화여대, 홍익대처럼 학생들과 연대 사업을 통한 조직화 방식, 덕성여대, 동덕여대처럼 원청 노조(대학노조)와의 연대를 통한 방식, 기 조직된 조합원들과의 연계 및 투쟁의 입소문을 통한 자연발생적 조직화 방식이 대표적으로 조직화 되는 과정이다. 전략조직화 사업단에서는 이 중 학생들과의 연대 사업을 통한 조직화 과정을 주요 조직화 방식으로 선정하고 이화여대와 홍익대분회가 출범함으로써 이를 유의미한 경로로 확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소노동자가 청소노동자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유효한 조직화 방식이라는 것도 확인하였다. 구석구석 숨어있는 휴게실의 위치부터 파악하는 것으로 조직화 사업은 시작된다. 해당 대학의 학생들과 사업담당자가 적게는 주 1회, 많게는 2-3회에 걸쳐 정기적으로 휴게실을 방문하고 기본적인 실태조사를 수행하며, 노동자들을 직접 설득하는 시간이 조직화 과정 중 가장 긴 시기이자 중요한 과정이다. 학교의 크기나 노동자 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리는 이 시간 동안 노동자들의 주요 불만지점을 파악하고, 진심으로 노동자들과 토론하여 이후 분회 간부로까지 활동할 수 있는 (핵심)주체가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간부교육을 이수한 분회 핵심간부들과 적극적인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조직화 프로그램 등을 배치하였다. ‘새벽출근선전전’은 출퇴근길 선전전으로 조직화에 성공한 미국 SEIU노조의 사례에서 착안한 것이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출근길 버스정류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언니·동생이 되는, 청소노동자들에게 딱 맞는 조직화 방식이기도 하였다. 미화조합원들은 첫 차를 타고 출근하는 미조직 청소노동자들을 만나 비슷한 처지에 대한 공감부터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이야기를 꺼내는 것까지 어떠한 활동가들보다 조직활동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후 휴게실 방문사업에서도 간부들의 역할은 컸는데, 잦은 방문은 아니었지만 연세대분회 간부들이 이화여대 조직화 단계에, 이화여대 간부들이 홍익대 조직화 단계에 함께 하면서 미조직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게 새로 조직된 조합원들을 바라보며 갖게 되는 분회 간부들의 자긍심과 애정은 남달랐다. 나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노동조합 저임금, 간접고용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폭로하고 사회적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시작한 <청소노동자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의 권리를!> 캠페인단 활동은 전략조직화 사업의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이다. 캠페인 활동을 통해 청소노동자들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언론을 통해 조명되면서 우호적인 여론형성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캠페인단에서 진행했던 여러 사업은 단순히 우호적인 여론형성을 넘어 청소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환경, 권리, 나아가 삶의 문제에 대해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발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는 교육과는 또 다른 주체화 과정이었다. 유령이 아닌 당당한 ‘노동자’임을 선언했던 <청소노동자 행진>에서 조합원들은 틈틈이 연습했던 풍물을 연주했다. 합창단을 만들어 가사를 개사한 노래공연을 직접 준비하기도 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대회의 모든 발언을 채우기도 했다. 한 발 나아가 조합원이 직접 사회까지 보았던 <청소노동자 노래자랑>은 청소노동자들의 일상을 드러내며, 그 속에서 또 다른 주체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성공적인 실험이었다. 일하면서 작게 흥얼거렸던 노래는 노래자랑이라는 무대를 만나 나의 일과 삶을 그리고의 나의 장기를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는 훌륭한 기제가 되었다. 일하면서 가장 힘든 점, '맞아맞아 꼴불견 베스트5' 등을 이야기할 때는 지나가던 시민들도 청소노동자들과 하나가 되는 분위기였다. 엄마의 무대를 위해 손수 피켓을 만든 딸의 응원은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실험들은 ‘직접고용 쟁취하자’가 아닌 ‘학교랑 우리랑 직거래 합시다’와 같은 청소노동자들의 생생한 표현으로 발현되기도 했다. “나는 정말로 노래 부르는 것 빼고는 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마침 노동조합에서 노래자랑을 한 대자나요. 그래서 얼른 신청했지요. 그런데 내가 은상을 탔다는거 아니겠어요! 나는 정말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거에요. 내가 노동조합 아니면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요. 나는 정말 노조만나서 인생 대박터졌어요. 이번 간부 교육도 정말 열심히 들을거에요.” 대학비정규직 전략조직화 사업은 2개 대학 조직화에 성공하며 미조직사업으로서의 성과를 충분히 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몇몇 대학을 조직화 거점으로 선정해 집중적인 조직화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올해 안으로 몇 개의 대학에서 노동조합 깃발이 더 휘날릴지도 모른다. 대학 뿐 아니라 빌딩, 관공서 등으로 조직화 범위를 확대해나가기 위한 실험과 노력도 진행 중이다. 전략조직화 사업이 조직화 과정에 전담활동가를 배치하는 등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여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집중적 투자는 지속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한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들을 별도의 특화된 사업이 아닌 지부의 자산으로, 일상 활동으로 녹여내는 것은 향후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사업을 평가함에 있어서 ‘조직화의 성과’ 이외에도 중요한 부분은, 처음부터 사업을 통해 미화 조합원들을 노동조합의 주체로 세워내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는 것, 그에 따른 사업의 기획과 집행을 했으며 실제로 그러한 실험을 통해 미화조합원들이 노동조합 활동의 주체로서 성장하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가 지부 활동에 큰 활력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략조직화 사업은 많은 성과를 남겼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화 조합원들의 연령 등을 고려하면 다른 젊은 조합원들에 비해 활동주기가 짧을 수밖에 없고 활동의 제약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어떤 조합원들보다 청소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난 그 순간, 자신의 인생이 달라졌다고 자신한다. 하기에 앞으로도 조합원들의 가능성을 믿고 보다 진일보한 투쟁과 사업들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진행될 전략 조직화 사업은 조합원과 분회 간부들이 조직활동가로서 자기 역할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도록 기획되어야 한다. 조합원들이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이 있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하지만 이미 청소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엄혹한 정세 속에서도 그 어떤 노동자들보다 생동감 넘치게, 활기찬 노동조합 운동을 만들어 가고 있고, 미조직된 노동자들을 만나고 있다. 우리는 전국의 40만 청소노동자가 당당한 노동자임을 선언하고 노동조합의 주체가 되는 그날까지, ‘더 많은 우리’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응원하고 지원해야 한다.
인터뷰어: 김유진 | 조직국장 기획/정리: 전준범 | 정책위원 우지영 | 회원 『사회운동』은 [인터뷰]를 통해 노동자운동의 혁신과 민중운동의 발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동지들을 만나 운동 과제와 쟁점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순서로 금속노조 경기지부 윤욱동 수석부지부장을 만났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긴 수염. 강렬한 인상만큼 윤욱동 수석부지부장은 총궐기투쟁과 지역노동운동의 강화에 열정적이었다. 이번 인터뷰는 『사회운동』 2011년 5·6월호에 실린 「경기지역총파업, 어떻게 준비되고 있나?」(김유진)에 이어 경기지역총궐기를 제안하고 주도적으로 투쟁을 조직하고 있는 금속노조 경기지부(이하 경기지부) 활동가로부터 투쟁의 준비과정과 향후 과제에 대한 구체적 전망을 듣기 위해 기획되었다. 또한 인터뷰 과정에서 노동자 운동에 대한 전반적 평가와 혁신방향 역시 다룰 수 있었다. 사회운동: 소개를 부탁드린다.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나 금속노조운동, 지역노동자 운동에 애정을 가지게 된 삶의 여정도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윤욱동 수석부지부장(이하 윤욱동): 1986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이때 반월공단, 노동자 도시로 이사를 왔다. 87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87년 말 대통령 선거 때 구로구청으로 부정투표함을 실은 봉고차가 들어가다가 발각된 사건이 있었다. 그때 그걸 막는 싸움에 가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되었던 것 같다. 노동자투쟁보다 정치투쟁을 먼저 경험한 듯하다. 우리 또래 중 87년 투쟁이 계기가 되어 활동하는 사람이 아마 많을 텐데, 대학을 안 다녀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웃음) 87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반월공단에 취직을 했다. 제약회사에 다녔는데 7,8,9 노동자대투쟁 때 일주일간 점거투쟁이 있었다. 아쉽게도 노동조합 결성은 실패했지만 이때 노동운동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군대에 갔다 온 뒤로 91년에 반월공단에 있는 계양전동구에 입사했다.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한국노총 소속 어용노조였다. 1년 정도 일을 하다가 대의원 활동을 시작해서 93년도에는 민주집행부가 들어서게 됐다. 이때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했고 그때부터 전노협 가입 시도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위원장이 공안기관의 협박에 무너지면서 파업을 앞둔 상황에서 직권조인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전노협 가입에 실패했다. 그리고 95년에는 내가 직접 위원장을 하게 됐다. 96년 2월 회사는 민주노총 가입을 빌미로 나에게 해고통지를 했다. 회사에서 쫓겨나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몇 개월 뒤에 노조 설립 이래 최초의 파업이 전개됐다. 그때 몇 달간 파업을 했는데 복직은 안 됐다. 회사가 직장폐쇄하고 구사대를 조직해서 조합원 쫓아내는 상황이었는데, 아마 조합원에 대해서만 직장폐쇄를 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였던 것 같다. 회사 바깥에서 몇 달간 고생하고 노조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갔었는데 마지막에 극적 합의에 이르렀다. 350명 조합원 중 30명 정도가 남았었는데 깃발 들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계양전기지회는 지금까지 경기지부 소속 사업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노동자로서 투쟁하고 노동조합을 건설해나가면서 지역조직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인가 뼈저리게 고민했다 윤욱동: 이후 지역에서 활동을 하다가 다시 공장에 취직했다. 대양금속이라는 철강회사였는데, 조용히 살기에는 공장이 너무 열악했다. 회사가 워낙 열악하다 보니 젊은 사람은 별로 없고 공장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 40~50대가 많았다. 임금 수준도 너무 낮았다. 회사에 들어간 지 2년 정도 지났을 무렵 여름에 사고가 있었다. 정년퇴직이 1년 정도밖에 안 남은 노동자가 회장 온다고 지붕 천장 비 새는 부분을 수리하러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즉사했고, 내가 마침 그 옆을 지나고 있었다. 앰뷸런스가 와서 싣고 가고 그 상황에서 옆에 기계는 돌아가고... 빨리 노조를 만들어야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20~30대가 거의 없는 사업장이었지만 젊은 친구들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야간에 노동조합 가입원서를 만들어 돌렸다. 이후 노동조합 논의하는 과정에서 위원장 출마권유를 받게 되었다. 워낙 악랄한 기업이라 조금 더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만류했지만, 나중에 형님들까지 다 싸인해 와가지고 총대 메라고 해서 하게 됐다. 대중적 분노가 모아지면서 조직을 하게 된 것이다. 대양금속 투쟁은 당시 지역에서 굉장히 중요한 투쟁이었다. 깡패와 구사대가 쳐들어왔을 때 조합원 60명이 격렬하게 저항해서 물리력으로 쫓아냈었다. 그래서 점점 깡패 인원이 400명까지 늘고 전경도 들어왔고, 공장은 아예 이전하게 됐다. 이 투쟁 도중 구치소 두 달 살고 패배하면서 끝나게 됐다. 그때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역할이 뭔지 많이 생각했다. 지금 총궐기를 하는 것처럼 지역 차원에서 연대해서 싸웠으면 투쟁을 살려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다들 많이 아쉬워했다. 조합원들이 모범적으로 투쟁하고 연대투쟁도 열심히 했다. 조합원들의 생각과 자세가 조직적이고 비타협적이었는데 아쉽게 져버렸다. 당시 지역연대투쟁이 전혀 안 됐고 공동 파업 등에 대한 논의 자체가 안 됐다. 그런 경험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지역총궐기를 조직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것 같다. 노동자로서 투쟁하고 노동조합을 건설해나가면서 지역조직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인가 뼈저리게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총파업 총궐기 지역연대전선 구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회운동: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역 총파업, 지역 총궐기 투쟁은 금속 지역지부에서 제안하고 주도적으로 추진해나가고 있다. 경기지부 사업계획에는 “기업을 넘어선 연대라는 산별노조운동의 핵심원리를 실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경기지부가 주도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 지역연대운동 강화를 통해 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야 한다. 지역차원의 단결과 연대를 획기적으로 강화하기 위하여 2012년 지역총궐기를 목표로 2011년 지역총파업으로 그 기반을 구축하자”고 설명되어 있다. 개인적 의견을 포함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안 배경에 대해 설명해달라. 윤욱동: 산별노조 운동이 10년 되었는데 10년을 돌아보면 오히려 연대운동은 후퇴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산별 수직구조를 강화하면서 역으로 지역운동이 공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산별노조가 건설되면서 노동자 수, 조합비, 상근자 규모 등 여러 자원이 확보되니까 다른 곳 힘 빌릴 필요도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식의 경향이 상층부터 현장까지 작동되고 있다. 기업별 의식을 넘어보자고 만든 산별운동이 오히려 기업별 의식을 강화하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금속노조 차원의 타임오프제 대응만 보더라도 총자본의 공격에 대해 제대로 된 대응은커녕 최소한의 방어조차도 안 되고 있다. 해당 지역지부나 사업장에서 알아서 방어하는 문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핵심사업장이 깨지는데도 불구하고, 각자 현상 유지하는 선에서 대응하다 보니 금속 노조 내의 연대투쟁조차 잘 안되고 기업별 벽은 더 높아진다. 바깥에서 보기에 금속노조는 확대간부라도 모아서 한진중공업이나 유성기업 투쟁에 결합하니까 힘이 세 보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본의 공격이 그 정도 수준에서 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지침에 따라 실행되는 형식적이고 일회성의 집회참가로는 전망이 없다. 그런 방식이 금속산별 내부의 연대도 더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그러다 보니 상황이 계속 나빠진다. 금속노조 경기지부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업장에서 투쟁이 벌어지면 그 투쟁의 성격, 지역적 파급력 등에 대해서 성격규정을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다. 그냥 ‘아, 금속 사업장 어디가 구조조정해서 싸우고 있구나’ 정도로만 이해된다. 우리는 열심히 대응한다 하지만 이미 어떤 기업이 탄압을 자행한다는 것은 역관계에서 밀려 있다는 것인데, 지역사회에서 쟁점화가 같이 되지 않으면 현장에서 힘에 밀려 무너진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법적으로 유리한 판결을 받더라도 역관계에서 밀릴 경우 대부분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적 투쟁의 강고함과 더불어 지역차원의 엄호가 동시에 필요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투쟁 양상은 포기하면 안 되기 때문에 버티고 있는 모양새다. 그걸 적들이 알고 있으니 눈 하나 깜짝하겠나? 돌파구를 열지 못하는 상황에서 계속 깨져나가면 한편에는 패배감, 다른 한편에는 조직보신주의가 만연한다. 그러다 보면 지도부에 대한 비난의 화살도 늘어가고 지도력과 대중과의 관계가 파탄난다.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돌파구를 열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우리끼리 똘똘 뭉쳐도 안 되는 상황이 확인되고 있다. 자본이 이미 세계화되면서 노동자를 우습게 여긴다. 지역전선, 전국전선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의 고민이 항상 있어야지 그게 없으면 개별사업장에서 아무리 조직력이나 의식이 높다 하더라도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연대가 강화되어야 하고, 연대 강화를 위해서는 현재 무너진 무언가를 복원해야 하고, 복원을 위해서는 그를 위한 계획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당위적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는 정당성, 명분, 자신감 등을 만들어가기 위한 계획을 작년 12월부터 고민했다. 조합원 교육을 꾸준히 추진해오면서 활로를 개척해보자는 조합원들의 의지, 미친 듯이 해보겠다는 지도부의 의지를 모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고개만 끄덕끄덕하던 조합원들도 이제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조합원 교육을 시작한 4월 이후 굵직한 일정을 밟아왔다. 5월 조합원 총회를 통해 진행하게 된 ‘경기도본부 결의대회’는 대중적 힘을 한 번 보여주는 자리였고, 새로운 의미의 투쟁을 하려고 한다는 조합원 스스로의 의미부여를 위한 과정이었다. ‘경기도본부 결의대회’의 경우 사전에 ‘지역전선 구축을 위해 우리가 총대 메자. 금속노조 아니면 누가 할래’ 이런 동기부여가 되어 있었다. 경기지부가 경기도본부(이하 도본부)와 다른 산별 등에 총궐기 투쟁을 제안해온 과정도 지역운동에 대한 전망 속에서 조합원과 호흡하면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결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6.11 도민대회까지 왔다. 도민대회는 애초에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기도 했지만, 내부에서부터 준비 과정을 차근차근 만들었고 총궐기 자체가 지역 노동운동에서 주요 화두로 떠오르다 보니 도본부 산하 산별조직들이 모두 참석했다. 아마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집중 투쟁 일정을 잡더라도 일정 박기 식으로 해서는 전망이 없다. 똑같은 투쟁을 하더라도 형식적으로 의결해서 일회적으로 탄압 사업장에 찾아가 집회를 하면 별다른 감동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는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아 날 더운데 또 집회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집회에 왜 왔는지 짜증나고 ‘언제 끝나나’ 이런 지루한 느낌을 가진다. 반대로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자발성이 형성된다면 조합원들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경기지부의 판단이다.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자발성이 형성되면 다음을 준비하는 것도 수월하다. 다음에 이보다 더 잘하자는 조합원 스스로의 결의를 모아낼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정확한 조직진단에 바탕을 둔 치열한 논쟁으로 역동적인 대중운동을 만들어야 사회운동: 총궐기 논의 과정에서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경기지부에서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도본부나 다른 산별까지 포함한다면 지금까지 지역총파업 진행과정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진행과정에서 추가된 고민들은 무엇인가? 윤욱동: 고민이 무지 많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무슨 공자님 말씀처럼 그저 그런 옳은 말로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노조가 임금인상 10만 원을 요구한다고 가정해보자. 지도부가 능력이 좋고 교섭을 잘해서 해결사 식으로 9만 9천 원을 따내고, 이에 대해 형식적으로 찬반투표하는 노동조합이 있을 수 있다. 반면, 결과적으로는 1만 원 밖에 임금을 못 올렸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합원들이 내부에서 진지하게 토론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한계와 과제를 발견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논의를 한 경우가 있다고 하자. 이 두 노조 중에 어느 노조에 미래가 있을까? 1만 원 짜리 노조에게 미래가 있다고 확신한다. 5·12 선포대회를 준비할 때에도 조직 라인을 가동해서 형식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진행하게 되면 다음을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준비과정에서 우리 내부 체계를 정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본부, 경기지부, 다른 산별 사이에 어떤 입장 차이가 있고 각 조직내부 상태가 어떤지 토론하고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과정이 축적된다면 언젠가 뻥파업이 아니라 진짜 총파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디데이 잡아서 큰 일정만 잡아놓는 식으로 준비를 하면 미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준비하게 되면 연대의 기운도 나오지 않고, 서로의 의견차만 더 벌어지고, 다시는 이런 것 하지 말자는 평가까지 나오게 된다. 현재 노동운동 내 사업준비 행태가 많은 부분이 그렇다. 알맹이 없고, 과정 없고, 과정에 치열함이 없이, 집회일정을 잡아놓고, 이제는 그것마저도 힘들어서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 내부의 한계를 점검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면 긴장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형식적으로 할 때와 긴장 걸려서 할 때는 완전히 다르다. 조직의 실력이 대중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탁상공론하면 말 잘하는 사람이 대장하면 되는 것이지만, 대중조직의 계급투쟁은 그런 걸로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과정을 잘 밟아가는 것이 경기지부가 생각하는 총궐기다. 과정에서 진단하고 논쟁하고, 서로 입장차를 좁히고 작은 실천을 해나가고, 그런 것이 응축되어 나타나면 그게 총파업이고 이후 총궐기까지 이어질 수 있다. 운동의 역동성을 대중적으로 만드는 과정이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으로서 위상과 역할에 맞는 운동을 하는 것이 지금 가장 공격적이고 공세적인 투쟁이다. 그리고 그런 투쟁은 박수를 받으면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지금 실제로 박수 받으면서 투쟁하고 있다. 윤욱동: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민중들의 고조되는 불만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임오프가 터지면 대응하고, 주요 사업장 직장폐쇄되면 대응하고, 이런 방식은 한계가 있다. 또한 미조직노동자들이 그런 투쟁에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그런 투쟁들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들끓는, 조직되지 않은 분노와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 분노를 누가 조직할 것인가? 자발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분노가 모아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런 정치적 사회적 문제, 예를 들어 이명박 정권, 재벌 문제 등을 전면적으로 제기하고 대중적 분노를 모을 수 있는 것은 조직된 노동자라고 봤다. 그래서 조직된 10%가 그 외 90%를 향한 메시지를 전하고, 우리가 먼저 행동한 후 함께할 것을 촉구하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치적 문제제기에 유성기업, 외국투기자본문제, 정리해고, 비정규직, 최저임금과 같은 과제가 포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가두로 나가야 한다. 노동자계급으로서 위상과 역할에 맞는 운동을 하는 것이 지금 가장 공격적이고 공세적인 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투쟁은 박수를 받으면서 할 수 있을 거라고 봤고, 지금 실제로 박수 받으면서 투쟁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지도력 역시 이런 투쟁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도본부와 민주노총 지역지부 활동에 아쉬운 측면이 많다. 아직도 이해도, 의견차, 온도차가 많다. 어느 산별조직은 경기본부에서 이런 일 하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는 곳도 있다. 한편 어느 지역지부는 모든 자기사업을 총파업으로 연결시켜버리기도 한다. 아쉽긴 하지만, 이런 현실은 우리의 주체적 역량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처음부터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진 않았다. 어쨌든 이런 투쟁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실력부족도 드러나는 것이지 아예 안 했다면 우리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사회운동: 내부적 문제점을 확인하고 긴장감을 형성하게 된 것이 구체적 성과라고 보시는 것 같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는 말은 투쟁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단결력이 강화되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 핵심이라고 이해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 사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텐데, 이에 대한 고민을 말씀해달라. 윤욱동: 교육 사업은 정말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보통 교육을 진행할 때 내용 생산 과정 자체도 어렵고, 또 생산된 내용을 조합원 전체적으로 교육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경기지부는 그래도 시스템은 갖춰져 있어서 내용을 생산하면 조합원까지 전달될 수 있지만, 다른 산별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시스템 구축이 대단히 어려워서 도본부 기획팀에서도 교육 선전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시스템이 미비하고 조합원까지 소통이 안 되는 구조는 심각한 문제다. 지부는 현재 대중투쟁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어떤 주체적 과제와 자긍심을 갖고 활동할지에 대한 스스로의 근거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고민하고 있다. 현안이 발생하면 사업장 찾아가서 집회를 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당장 긴박한 사태가 아니라면, 열악한 사업장에서 투쟁하는 동지들과 함께 금속 조합원으로서 무언가를 하자는 구체적인 기획을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래서 실제로 성과를 만든다면 자부심이 대단해질 것이다. 사용자들 입장에서도 노동자들이 다른 사업장 문제로 투쟁하니까 현장으로 불러들이려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현장의 조직력도 높아지고 우리의 요구도 더 잘 관철될 수 있다. 발상을 그렇게 전환해야 할 것 같다. 금속노조 정도 되면 그런 방식으로 운동을 해야 고립되지 않고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산별도 마찬가지다. 개별 투쟁을 어떻게 사회 쟁점화하고 확장할까를 늘 고민해야 한다. 자기문제, 닥치는 문제만 가지고 싸우는 패턴이 고착화되어 있다. 이런 패턴 하에서는 공격받으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이런 관점을 잡아가는 구체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도본부 차원에서도 이를 확장시켜야 되는데, 우리가 먼저 실천하면서 대중적으로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힘이 들겠지만 조합원의 힘이 있기 때문에 도본부와 지역지부에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고, 이미 조합원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방향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우리 조합원들도 깊이 있게 의식화될 수 있을 것이고 타 산별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운동: 지금까지 주로 총궐기 준비과정과 현황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이후 투쟁의 성과로 남기고자 하는 구체적 과제는 무엇인가? 윤욱동: 조합원의 일상적 실천을 강화하는 것이다. 현재 총궐기 제안 이후 간부는 주 1회 실천을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 조합원까지 확대된 것은 아니다. 앞으로 투쟁 방향에 있어서 우리가 지지하고 엄호해야 할 투쟁의 내용을 조합원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기본방향으로 삼고 있다. 그 속에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를 교육과 선전 등을 통해 구체화하고 싶다. 또한 올해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자기 사업장에서 일상활동을 자발적으로 해나가자는 결의를 하고, 상급단위로부터의 지침이 아니더라도 자발적 실천을 확대하도록 하는 단위를 만드는 부분에 대한 고민이 있다. 이런 주체적 활동과 자발성이 있을 때, 노동자들의 의식화는 물론이고 선진노동자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가 끊임없이 만들어질 것이며, 그 과정에서 간부가 양성되는 것도 가능하다. 조합원의 구체적 실천, 현장 의식 강화, 사회적 문제를 실천하는 노동자로 거듭나는 구체적 연결고리를 고민하고 있다. 대중투쟁에 기반을 둔 연대운동의 성과들은 결과적으로 운동조직 간 불필요한 이권다툼이나 탁상공론식 이견이 남발되는 상황도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두고 큰 그림을 만들어야 한다. 사회운동: 미조직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과제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가지고 있나? 윤욱동: 안산시흥노동자권리찾기 사업단(준)에 경기지부가 참여하고 있지만 아직 활동은 미흡한 편이다. 앞서 말했듯 조직된 10%가 90%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 기본적 발상이기 때문에 미조직노동자 조직화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안산지부 선전전에 매주 수요일에 결합하고 있지만 아직 집행부 수준의 사업에 머물러 있는데, 이를 뛰어넘어 일상활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사업단 수준에서 현장을 추동하는 게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기존 시스템 속에서 조합원들이 미조직노동자 조직화를 자기 과제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어렵다. 실제로 이런 흐름을 만들려면 많은 고민과 에너지, 조직적 움직임이 필요하다. 또한 시민들의 호응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미조직조직화가 중요하다고 얘기한다고 곧바로 조합원들의 몸이 움직이기는 어렵다. 도본부 중심으로 지역지부를 강화하는 활동을 하고 문제의식을 모아나간다면 가능할 것이다.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를 도본부가 관장하고, 지역지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몇 군데 지역지부라도 사전에 충분히 토론하고, 해당 지부에 경기지부 사업장이 최대한 복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면 집행부 수준의 사업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지역지부가 가동되고, 거기에 산별 지역조직, 사업장들이 복무하는 것을 목적의식적으로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미조직조직화가 지역지부의 주요 사업이 되도록 만드는 것도 우리의 계획과 연결되어 있다. 민주노총의 지역조직 내부에서 연대의 기운이 복원되고 확장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저녁 시간에 꾸준히 지역활동을 전개하고 그 성과가 공유되기 시작하면 현재 도본부나 산별 차원의 활동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같이 투쟁을 기획하고 공식적으로 자주 만나게 되면 더 효율적인 회의 체계도 갖추게 되고 생산적인 토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연대운동의 성과들은 결과적으로 운동조직 간 불필요한 이권다툼이나 탁상공론식 이견이 남발되는 상황도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두고 큰 그림을 만들어야 한다. 사회운동: 말씀 중간 중간에 지역노동자 운동의 강화가 가지는 정치적 조직적 의미를 다양한 층위에서 고민하시고 있다는 점이 묻어난다. 노동운동 내에서 현장활동을 강화하자는 주장과 지역노동운동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상당히 있는 것 같다. 지역노동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윤욱동: 그런 이분법적 사고가 고착화되어 있고, 심지어 유연성을 강조하는 사람을 회색분자로 보는 분위기도 있다. 지역이 무엇인지 그 개념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 산별노조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재편에 따라 형성된 산업구조에 맞게 만들어진 수직적 구조다. 반면 지역은 그 안에 다양한 성격의 자본이 공존하고, 생활의 공간도 존재한다. 또 조직된 노동자, 미조직 노동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있다. 그 안에서 노조가 많은 훈련을 할 수 있다. 연대 운동도 지역 내에서 훈련하는 것이다. 물론 산별노조 내에서도 연대운동이 존재하고 가능하지만, 보다 일상적인 연대투쟁과 훈련은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기본이다. 퇴근 후에 잠깐이라도 다양한 노동자를 만나고 의견을 나눌 수 있고, 그 속에서 운동의 방향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이루어진다. 산별의 수직적 체계만 가동되면 지역적 훈련이 안 되니까 운동의 발전이 어려워진다. 그런 역할이 지역 안에 있다. 민주노총이 파업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아니다. 투쟁을 회피하는 지도부가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 파업을 하자고 하면 조직의 골간에서 화두가 되고 논쟁이 되고 결의가 모아져야 가능한 것인데 그게 안 되니까 뻥파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애초에 파업을 할 수 없는 상태인데, 중요하니까 파업 하자고 하고, 그러다 보니 파업을 못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제는 뻥파업도 못하는 분위기 아닌가. 결국 지역지부가 화두를 던지고 논쟁을 형성하고 결의를 모아나야 총파업도 가능해질 텐데, 현재 지역지부는 연락책 수준으로 사고되고 있다. 따라서 지역지부를 강화하자는 말은 지역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면서 실제로 운동을 형성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전제가 없다면 매해 사업계획서에 나오는 지역지부 강화하자는 말은 ‘죽은 말’에 불과하다. 지역지부가 강화되어야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파업하고, 투쟁할 수 있는 조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에게서 신뢰받는 조직이 될 수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큰 싸움을 만들어야 자본도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사회운동: 지역운동의 중요성, 민주노총의 골간이 그런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산업구조 내에서 자본의 전략에 대한 대응도 여전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금속노조에서 완성차지부는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이를 무너뜨리려는 자본의 공격방향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동희오토 투쟁은 비정규직 문제를 내걸고 진행되었지만, 여기에는 기아자동차지부를 약화시키는 외주화 등의 문제에 대한 산별노조로서의 고민도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 대한 산별노조 차원의 대응계획을 강조하는 맥락과 지역운동을 강조하는 맥락은 결이 다를 수 있다. 윤욱동: 그동안 지역연대전선 복원을 많이 이야기하고 다니다 보니, 그럼 산별은 없애자는 거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분법적인 사고이다. 지역 안에 산별이 다 있다. 그 안에 연대하고 훈련하고 느끼게 되면, 그것을 바탕으로 산별노조의 계급적 의식이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경기에 있는 조합원과 부산에 있는 조합원이 어떻게 구체적인 고민을 갖고 연대를 하겠나? 같은 산별에 있는 조합원으로서 일정에 참가할 수는 있겠지만 한 조직에 속해있는 노동자라고 해서 서로를 구체적인 연대의 주체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지역에서 직접 부대끼는 훈련을 해야 금속노조가 부산 한진중공업 투쟁에 집중하는 것도 의미 있지 않겠나? 산업에 국한된, 자본의 형태에 근거한 산별노조의 형식적 측면을 뛰어넘기 위해서도 그런 일상적 경험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당연히 산별과 지역이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면서 작동되는 것이 맞다. 어느 하나가 삐거덕거리면 서로 안 된다. 하지만 지역연대활동이 잘 되는 곳은 다른 곳보다 계급적으로 각성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역적 연대가 잘 안 되는 지역의 노조는 제기하신 부분에 대한 고민도 거의 없을 것이다. 현재의 노동운동이 문제점들은 매우 복잡해 보이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지역지부가 바로 서면 여러 고민들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노동조합이 대중적 신뢰와 조직력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실천해나가는 한 발을 내딛는다면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섭 중에 인지컨트롤스 사측은 다른 노조는 안 가는데 왜 너희들은 유성투쟁에 가느냐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인지 조합원들은 '유성기업 문제가 우리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제있냐?' 이렇게 대응했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투쟁하고 조합원이 움직이는 게 우리가 하려는 것이다. 사회운동: 자본과 정권이 금속노조 핵심사업장에 대한 준비된 파괴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유성기업 투쟁 역시 그 최근의 사례일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경기지역에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한다고 보는가? 현장의 반응이나 고민도 궁금하다. 윤욱동: 금속노조 위원장과 인터뷰가 필요한 내용인 것 같다. (웃음)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하면, 최근 몇 년을 지나면서 금속노조 조합원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고 생각한다. 발레오, 상신브레이크 등 핵심사업장들이 무너지고, 쌍용차 투쟁에서도 자본은 ‘대들면 깨진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다. 이어서 지역 핵심사업장 몇 군데를 기획해서 깨고 2011년을 맞이했는데. 그러자마자 현대차자본이 주간연속2교대를 빌미로 유성기업을 공격했고 정부가 이를 확실하게 밀어주고 있다. 이 정도 공격이 들어오면 금속노조 차원에서 다양한 방법이 고민되어야 하는데 특별한 것이 없다. 금속 지역지부, 사업장 등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잔업을 안 하거나 퇴근 후에 사업장들이 돌아가면서 순번을 정해서 계속 연대를 가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힘을 축적하는 과정이 있으면, 날짜를 잡아서 집결투쟁을 벌이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방식의 계획을 세워나가야 할 때인데, 여전히 확대간부를 조직하는 것 이상을 시도해보지 않는 것은 관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안산에서는 두 시간 정도면 아산까지 갈 수 있다. 가서 유성 동지들을 만나고, 돌아온 뒤 그 투쟁을 다시 지역에 알려나가면서 조합원들이 자기과제를 가질 수 있는 기획을 해야 한다. 자발적 흐름들을 조직하면서 우리가 유성투쟁 엄호를 위해 할 수 있는 전술을 배치해야 유성기업 문제로 파업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금속노조 확대간부 2,000명이 연대투쟁을 가는 것보다 사업장별로 조합원이 꾸준하게 계속 가는 방법이 자본이 더 두려워하는 일일 것이다. 아래에서부터 현재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결의하고 해내면 그다음에 더 높은 결의도 할 수 있다. 사회운동: 경기지역의 사례를 말씀해주실 수 있을 것 같다. 작년에 우창정기, 인지컨트롤스 직장폐쇄 사례가 있었고, 이 외에도 장투 사업장들이 있다. 집단교섭 투쟁 과정에서 연대 분위기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또 인지 조합원들의 유성 투쟁에 대한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자세히 듣고 싶다. 윤욱동: 인지는 작년에 투쟁하면서 만들어진 활력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아직 신생노조라서 그렇다고 보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조합원들이 유성사태 초기에는 휴가를 내고 연대하러 갔다. 그 사업장은 노동시간이 길기 때문에 회사에서 반차를 만들었는데, 그걸 쓰면서 초기에 20명씩 갔다. 확대간부, 조합원 이렇게 돌아가면서 다녀왔다. 그래도 휴가를 너무 많이 써서 라인이 두 개가 멈췄다. 옛날 같으면 회사가 불법이라고 고소고발 했을 텐데, 투쟁 경험 속에 노조 조직력이 확인되다 보니 회사가 조합원들의 자발적 행동에 대해 부담을 많이 느꼈는지 그냥 넘어갔다. 그다음 주 임금교섭이 있었는데, 인지는 최저임금 사업장이라 임금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얘기도 많았겠지만, 교섭 중에 유성기업 얘기만 하다가 끝났다고 한다. 회사는 다른 노조는 안 가는데 왜 너희들은 그렇게 가느냐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조합원들은 '유성기업 문제가 우리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제있냐?' 이렇게 대응했다. 회사는 상당히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고 협상력이 높아졌을 것이다. 임금 인상만 가지고 이야기했으면 그렇게 안 됐을 것이다. 그렇게 연대하면서 토요일에 특근을 안 하고 유성투쟁에 갈 사람을 모집했는데, 주야간 50명씩인데 46명이 갔으니까 야간조 빼고 다 간 것이다. 가면서 모금을 했더니 80만 원이 모였다. 플래카드는 틀만 짜가서 각자 자기가 쓴 플래카드 걸어놓고 왔단다. 이런 실천은 확대간부회의나 상집회의에서 결정된 지침이 아니다. 작년에 투쟁하면서 훈련된 것이고 자발 실천을 조직한 것이다. 그렇게 투쟁하고 조직하고 조합원이 움직이는 게 우리가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조합원이 훈련되고 의식화되고 공동체적 분위기가 생겨서 안가는 사람 가는 사람 상관없이 의지를 모을 수 있다. 그렇게 하니까 지회 교섭력도 높아지고, 조합원들 기운이 남다르니까 유성 조합원들도 연대의 기운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직장폐쇄 관련해서는 사전판단이 있었다. 지부 운영위에서 직장폐쇄 사태가 벌어지면 우리는 즉각 파업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미리 정했었다. 이에 따라 집단교섭 사업장들이 다 파업에 참가했다. 사측에서는 원칙대로 대응하는지 아닌지 지켜보았을 텐데, 실제로 즉각 파업을 해버리니까 놀랐을 것이다. 그래서 노동부도 긴장해서 회사 측을 설득했다. 인지의 경우는 사측에서 초반에 노조를 깨려고 강하게 나왔었다가, 노조가 안 깨지고 오히려 공단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이탈하는 조합원도 없다 보니 역으로 회사가 밀리는 형국이 됐다. 유리한 조건에서 직장폐쇄를 풀고 현장으로 들어가니 비조합원이나 계약직 할 것 없이 노동조합을 다시 보게 되었다. 금속노조 위상을 우창이나 인지가 많이 세웠다. 사전에 예측하고 공감대를 만들고 결의를 하다 보니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지역총파업의 구체적 그림이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투쟁에 책임있게 결합하는 것은 그런 작년의 밑거름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사회운동: 마지막으로 사회진보연대에 한 말씀 부탁드린다. 윤욱동: 사회진보연대는 젊은 활동가들이 많은 인상이다. 진취적인 자세로 사회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해나가면 좋겠다. 현장에 대한 감각과 투쟁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면서 운동해나가면 아름다울 것 같다. ※ 2시간이 넘는 인터뷰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성심성의껏 인터뷰에 응해주신 윤욱동 수석부지부장님 그리고 경기지부 동지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공공운수노조준비위 사업기조 및 방향에 대한 비판과 제언 <프로그램> 발제 ① 공공운수노조준비위 「사업기조 및 방향」 비판과 제언 - 정윤광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공동실천위원회 회원) ② 공공운수 산별노조 건설 경과에 대한 비판과 제언 - 김형균 (철도노동자회 회원) 토론 ① 이현대 (사회진보연대 공동운영위원장) ② 김석 (노동자전선 정책위원) 2011년 6월 11일, <공공운수노조준비위 사업기조 및 방향에 대한 비판과 제언> 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는 6월 24일 공공운수노조 창립대의원대회를 앞두고, 현재까지 제출된 중기사업기조와 방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공공운수노조가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 토론회를 기획하고 준비한 주체는 ‘계급적 변혁적 노동운동을 위한 공공운수 현장조직·활동가 연대회의’다(이하 연대회의). 연대회의는 지난 3월 19일 유성유스호스텔에서 초동모임을 위한 수련회를 개최하고, 이후 대표자회의를 통해 조직을 구성하고 사업계획을 만들어가고 있다. 현재 연대회의에 참여 하고 있는 조직은 화물현장노동자회, 발전노동자현장투쟁위원회, 사회보험현장노동자회, 사회보험민주노조재건투, 철도노동자회, 철도현장노동자회, KT민주노동자회 등의 현장조직을 비롯해,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전선, 사노위 등의 정치조직이다. 연대회의는 그 명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각 현장조직들과 개인들이 참여할 수 있으며 월 1회 대표자회의를 통해 사업을 기획하고 현재 공공운수부문의 노동자 운동의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이번 토론회는 두 명의 발제와 두 명의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사노위의 정윤광은 ‘공공운수노조준비위 「사업기조 및 방향」 비판과 제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고, 두 번째로 철도노동자회의 김형균은 ‘공공운수 산별노조 건설 경과에 대한 비판과 제언’을 발제했다. 이에 대해 사회진보연대 이현대와 노동자전선의 김석이 토론문을 제출하여 논의하였다. 이글에서는 토론회에서 제출된 발제문과 토론문을 살펴보고, 이 토론회를 기획한 연대회의의 역할과 과제에 대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공공운수노조 출범, 문제점과 대안에 대하여 정윤광, ‘ 공공운수노조(준) 중기사업계획은 공공운수노동운동의 패배의 결과’ 정윤광은 현재 공공운수노조 중장기 사업계획으로 제출된 사업기조와 방향을 언급하고, 그 문제점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중기 사업계획은 노동자 투쟁을 개량주의적 제도정치활동에 종속시키고 있는데, 특히 공공기관 의정포럼과 같은 시민 운동적 개혁운동은 궁극적으로는 입법 활동을 주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정치활동을 주요한 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운동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이라는 중요한 두 번의 선거를 축으로 민주당을 중심으로 해서 제도권 진보정당들과 시민운동세력이 합세해서 선거승리를 목표로 하겠다는 것이다. 정윤광은 공공운수노조(준)의 중기 사업계획이 지난 수년간 공공운수노동운동의 패배의 결과를 담고 있으며, 공공운수 통합산별노조 추진과정상의 실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진단한다. 지난 이명박 정권 3년간 공공부문 선진화에 맞서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는 공동전선을 쳐내지도 못하고 각개격파 되는 과정을 거쳤다. 투쟁의 패배는 공공운수 통합산별노조 추진과정상의 실패에 영향을 크게 받았고, 중첩된 상층구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지도집행력의 무능력과 강력한 통일적 투쟁방침을 내오지 못한 데서 기인하였다고 정윤광은 주장했다. 그 결과로서 현재 공공운수노조(준)의 대사업장 투쟁력이 거의 무너져 있고, 이런 상황에서 총파업과 총력투쟁 전선을 구축이라는 과제를 달성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조건임을 우려하고 있다. 또한 공공운수노조 중기 사업계획이 민주노총의 투쟁 회피계획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공공운수노조(준) 투쟁계획에 따르면, 2011년 상반기는 산별노조 건설, 민주노총 투쟁 동참, 공공운수노조 투쟁 선포로 요약되며, 2011년 하반기는 공공운수노조 요구 전면화, 2012년 상반기 총력투쟁 준비로 정리된다. 결국 2011년에는 철저하고 전면적인 투쟁은 하지 않고 투쟁선포와 (2012년) 투쟁준비를 하겠다는 것이다. 정윤광은, 우리가 수많은 투쟁에서 보았듯이 내년에 싸우기 위해서 금년은 준비한다는 계획은 결국 금년은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뿐 내년의 투쟁은 다시 그때가 다가오면 그 상황에서 결정된다며,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김형균, ‘당면한 공공운수산업노조 ‘가입 및 전환’이 현실적으로 시급’ 철도노동자회 김형균은 철도노조에 속한 노동자로서, 운수노조를 둘러싼 산별 전환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운수노조는 조직전환을 가결시키기 위해 선동하던 것과 달리 확장된 단결의 구심으로 자리 잡지 못했는가? 왜 현재 추진 중인 공공운수노조는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야 하는 무엇으로 후퇴했는가? 김형균은 그 원인이 전반적인 계급관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해명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계급적 단결과 총투쟁을 확장하는 구심으로서 산별노조가 필요하다. 둘째, 당면한 공공운수노조 ‘가입 및 전환’이 현실적으로 시급하다. 셋째, 2007년 철도노조투쟁의 뼈아픈 경험으로부터의 교훈을 도출하자. 우선, 산별노조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조직형식을 뛰어넘을 수 있는 내용과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조직형식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분노와 의식적 각성에 근거한 대중적 역동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자본의 현장통제에 맞서 현장권력이 살아있다면, 조직형식을 뛰어 넘어 공동투쟁을 조직할 수도, 산별노조라는 조직형식이 실질적인 파괴력으로 전화할 수도 있다. 산별교섭이니, 대정부 교섭이니 하는 요구 역시 현장조직력 복원 없이는 의미 없는 주문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조직형식의 전환에만 집중한 산별노조 운동이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하더라도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현재 6월 24일 창립을 앞둔 공공운수노조 건설에 힘을 쏟자는 주장이다. 공공노조, 운수노조, 미전환노조라는 3분할 구조와 연맹이라는 조직적 상황은 중앙 집중도, 수평적 연대도 어려운 구조다. 전임자 배치와 재정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서도 비효율적인 현재 상태는 벗어나야 하며, 이러한 점에서 공공운수노조로의 가입 및 전환은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공공운수노조로의 전환은 산별노조 건설논의와 대중조직단위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중조직의 조직적 결정을 자조직적 이해에 근거하여 해태하는 종파주의는 극복되어야 하고, 6월 이전에 ‘가입 및 전환’을 완료하고자 했던 계획은 이미 불가능하더라도 '가입 및 전환' 약속 자체는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공공부문과 운수부문에 걸쳐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규모가 큰 철도노조의 책임 있는 태도를 강조했다. 철도 현장조직 역시 조직전환의 긍정적 의미와 과제에 대해 적극적인 자기 의제화와 구체적인 실천 방침을 내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셋째로 2007년 당시 철노노조의 집행부이기도 했던 본인의 소회를 정리하며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2007년 철도노동자회 주요 구성원들은 철도노조 집행부였다. 당시 집행부는 비정규직 투쟁(KTXㆍ새마을 비정규직 투쟁, 직접고용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과 전반적인 구조조정(인원충원, 외주화저지, ERP저지 등)을 주요 쟁점으로 투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투쟁이 가능한 노조와의 목적의식적 공동파업을 초기부터 추진했었다. 실제 공동파업이 가능한 곳은 화물연대본부 뿐이었는데 정작 결정적인 시기에 공동파업은 철도노조 내부 조직력의 문제로 무산되고 말았다. 화물연대와 철도본부의 공동투쟁 실패 이후, 당시 지도부는 참담했고 그 책임을 지고 중앙집행부(중상집)는 모두 사퇴하고 말았다. 김형균은 이 과정에서 뼈저린 교훈은 무엇이었는지 질문한다. 그것은 지도부의 목적의식만이 아니라 현장지도력을 비롯한 골간체계를 올바른 경향으로 조직해야만 위력적인 전술운용도, 공동파업도 확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완전한 현장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조의 전략적인 지역ㆍ직종ㆍ현장 지도력이 태세를 갖출 수 있어야 다양한 전술운용도, 위력적인 공동투쟁 전술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자본과 국가권력의 통제기구, 언론, 사회적 관심 등 모든 초점은 실질적인 물리력(단결력, 투쟁 파괴력)을 중심으로 집중된다. 이때에 산업별 노조나 연맹체계는 모두 여기에 종속변수가 되며 지원체계로 작동할 뿐이다. 그 물리력의 1차적 규정은 현장지도력을 구심으로 한 현장권력이라는 점을 강하게 주장했다. 실천을 위한 비판, 비판을 넘어서는 대안을 만들어가자 각각의 발제는 현재 공공운수노조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공공운수부문 노동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철도본부 현장조직 구성원의 날카로운 비판과 솔직한 고민을 담고 있었다. 이와 같은 두 발제에 대해 노동자 전선 김석과 사회진보연대 이현대는 토론문을 통해 의견을 피력했다. 김석, ‘공공운수부문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이 필요’ 김석은 우여곡절 끝에 6월 24일로 가시화되고 있는 통합 공공운수노조의 출범이 운동 노선 강화, 현장 조직력 혁신, 계급적 연대의식 강화 등 산업노조로서의 기본적 자기정체성 확립과는 동떨어진 채 형식적 완성에만 치중하여 진행되고 있다고 밝힌다. 이는 통합 산별 추진이 시작된 이래 줄기차게 이야기되어온 소위 ‘물적·인적 자원의 통합을 통한 강한 산별’과도 거리가 먼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석은 공공운수노조(준)가 지금의 상황에 대한 조직적 평가도, 이 평가에 따른 책임 추궁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조직형식적 정리에만 치우친 현재의 산별이 그 어떤 전망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평가도 없고, 책임지는 단위도 없고, 전망도 없는 3無 산별이 이 통합 산별의 주요 특징이라고 비판한다. 이를 위해 김석은 공공운수부문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혁신을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평가와 성찰이다. 먼저 지난 몇 년 동안의 통합 산별노조 건설의 좌초와 현재의 파행적 건설에 대한 엄밀한 평가와 책임을 물어야 한다. 종파적 이해에 사로잡힌 채 통합 산별노조 건설에 대한 조직적 합의를 무시하고 조직 운영을 파행으로 끌고 갔던 행태에 대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파 역시 이러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계급적, 변혁적 산별 건설에 대한 원칙은 올바르나 그러한 주장을 대중적으로 각인하고 현장을 재조직화하기 위한 기획과 실천은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도피와 책임 회피에 다름 아니었으며, 산별 추진 과정으로부터의 자기 소외는 이후의 연맹 및 준비위 운영, 나아가 현장에 대한 자기 목소리 조직화로부터 스스로를 유리시킨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상층 정치’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이 ‘현장 조직화’에 대한 올곧은 실천으로 귀결되지는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현대, ‘산별건설은 총노동 전선 구축, 민주노조 총단결을 위한 하나의 과정’ 사회진보연대 이현대는 두 발제자(정윤광, 김형균)의 발제문에 대부분 동의하면서 몇 가지 함께 고민해보아야 할 지점을 짚었다. 정윤광이 지적하듯 현재 공공운수노조는 4년 전 공공노조와 운수노조가 건설된 당시와 비교해보아도 산별노조의 조직력이 크게 취약해진 상태이며, 현재 제출된 중기 사업계획에 드러난 조직 강화 전략에는 한계가 많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사업전체를 부정하는 방식보다는, 오히려 사업계획의 긍정적인 부분을 강화하고 부정적인 부분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며 토론하는 것이 적절한 시점이라는 제안으로 서두를 열었다. 또한 김형균의 발제에 대해서는, 기업별 조직을 넘어 산별노조(공공운수노조) 건설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산별노조 운동은 기업을 넘어서 노동자계급의 보다 일반적인 요구를 걸고 투쟁할 수 있는 조직형태이다. 따라서 현재 공공운수노조 건설의 여러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제대로 된 산별노조를 건설하자는 방식의 비판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산별노조 운동의 여러 한계, 이를 주도하는 상층 정파세력의 한계를 이유로 건설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현재 공공운수부문 노동자운동은 산별노조로 단결을 확대강화해 가지 않으면 기업별 단위로 각개격파될 우려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최근 복수노조 허용 정세에서 발전노조, 도시철도노조 등에서 어용 기업별노조 세력의 발호는 이러한 우려를 심화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이현대는 초기업조직으로서 산별노조를 강조하는 것은, 총노동 전선 구축, 민주노조 총단결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산별노조 건설은 민주노조 운동의 단결(총연맹 차원의 단결 강화)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기 때문에 민주노총보다는 산별노조를 강조하는 흐름도 정파를 막론하고 확산되고 있으나, 각 산별노조(노동자)의 독자적 이해란 있을 수 없으며 총노동 투쟁전선을 중심에 두어야한다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이현대는 공공운수노조의 발전전망을 고민하는 데 있어, 지도부 구성에서부터 현장투쟁까지 유기적으로 결합·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장 투쟁을 위해 단위 사업장 지도부에 개입, 견인할 수 있는 계획도 있어야 한다. 위아래에서 손발이 잘 맞아야 투쟁도 만들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의 균열이 더 커지게 될 시기에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구상과 계획을 세우고, 상층지도부와 현장이 함께 준비하고 실행하는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토론회 이후 과제 이번 토론회는 연대회의가 공공운수노조 출범을 앞두고 제출된 중장기계획에 대한 비판과 제언을 하는 자리이며, 현재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고 ‘계급적 변혁적’ 공공운수노동운동의 단초를 마련하는 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연대회의 참가 조직들과 활동가들이 ‘계급적, 변혁적’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현장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한 우리의 주장은 공허한 수사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주장이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도록 과제를 정선하고 실천해야 할 때이다. 첫째, 현재 2012년 정권교체기를 앞두고 민주당 등 신자유주의 세력과 함께 추진하는 의정포럼 및 정치연합에 대해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이는 발제자와 토론자 모두가 지적한 바이며, 연대회의의 주요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2012년 총대선을 바라보고 추진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무원칙한 반MB 선거 연합계획이 공공운수부문 운동에서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현장을 살려내고, 투쟁조직을 위한 기획이 필요하다. 둘째, 이를 위해서는 현장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현장 투쟁의 의미를 밝히고 실천적으로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현장의 상태는 지도부에게 투쟁 회피의 알리바이가 될 수도 있고, 투쟁을 극적으로 확장시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발제와 토론이 끝난 후 플로어 토론에서 한 참자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어느 토론회에서 의정포럼을 비판했더니 의정포럼을 옹호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현장투쟁이 안 되니까 분위기를 만들고 현장투쟁이 일어 날 수 있게 의정포럼을 하는 것이다.’ 이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현상은 맞게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노조 중앙의 사업기획과 기조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장이 어떤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조의 기층 조직력을 침식하면서 현장투쟁의 부재를 핑계로 상층대응을 통한 정치적 해결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현장 투쟁의 실질적 조직화 없이 투쟁만을 강조할 때의 한계는 자명하다. 셋째, 현장조직력을 세우는 과정에서 지역 및 지역지부 조직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전국규모 기업별조직의 경우, 각종 권한이 지부장(본부장)에게 집중되면서 이들의 동의가 없이는 산별노조 중앙 차원에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물론, 현재 한국에서 산별교섭이 이루어지지 않는 등 한계 때문에 기업별조직의 권한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지만, 이런 상태를 방치하게 된다면 장기적으로 공공운수노조는 기업별노조들의 연합체인 연맹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역 및 지역지부를 통해 산별노조가 현장조합원들과 직접 만나고 단결을 증진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할 것이다. 공공운수노조의 조직설계 상 지역본부는 매우 약화된 상태이나 이를 단계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계획 없이는 공공운수노조가 연맹 수준의 조직운영을 벗어나기 힘들다. 지난 수년간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를 통해 조직 확대를 달성한 영역은 주로 지역지부 등 초기업 지부를 통한 중소 영세 비정규직 사업장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넷째, 6월 24일 공공운수노조 창립대의원대회 이후에도 통합 산별을 강화하기 위한 기획을 꾸준하게 계속되어야 한다. 기존의 산별노조가 충분히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는 타당하나, 그것이 그동안의 성과를 무로 돌리거나 산별노조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제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산별노조의 과제는 새롭게 토론되어야 하고, 공공운수노조는 힘 있게 출범하여 올곧은 역할을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다섯째, 연대회의를 강화하기 위한 기획을 세워가야 한다. 현재까지 현장조직들은 각 사업장 또는 업종별로 고립되어 있고, 관심영역의 차이가 있어 실천적으로 단사나 업종의 이해관계에 머물러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단지 현장조직만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공기업 선진화에 실질적인 투쟁을 만들어오지 못한 우리 노동운동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장조직들은 노동운동의 위기 속에서 목적의식적으로 전투적 변혁적 노동운동을 지켜내려는 노력을 해왔다. 연대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현장조직들이 87년 이후 노조민주화투쟁을 이끌어 왔던 세대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경험으로 현재까지도 운동의 어려움을 돌파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연대회의는 이러한 현장조직들과 활동가들이 함께 토론하고 연대하면서, 공공운수부문의 노동운동을 발전시켜 내고 공공운수노동운동의 현장기반을 구축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2011년 연봉제, 유연임금제, 정보화 등 현장의 노동자 통제는 더욱 치밀해지고, 7월 1일 복수노조 시행을 앞둔 시점에서 공공기관 사측의 노골적인 탄압이 가세되고 있다. 이러한 정황들은 이명박 정권이 공공부문 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추진하는 선진화 공세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에서, 단위사업장 만의 대응이 아닌 공동대응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현재 연대회의가 준비 중인 ‘현장조직활동강화 프로젝트’는 매우 의미 있고 주목할 만한 기획이다. 각 조직들의 조건을 정확히 진단하고, 연대회의를 중심으로 활동을 모아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6월 24일 공공운수노조 출범은 다년간 논의되어 왔던 공공운수부문 산별운동 과정에 대해 많은 반성과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 공공부문 선진화라는 벽에 막혀 공동투쟁을 기획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이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자. 연대회의는 공공운수노조가 그러한 역할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올곧은 입장을 마련하고, 실질적인 기획과 실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5월의 어떤 주말, 동자동에 있는 쪽방 중에서도 가장 시설이 고약하기로 유명한 한 쪽방에서 금철(가명, 54세)아저씨를 처음 만났다. 금철아저씨는 파주에 공장을 만드는 건설일용직 노동자다. 백령도 출신인 아저씨의 첫 직장은 15살에 학비를 벌기위해 토요일마다 학교를 빠지고 가던 해안가 공사장이었다. 그 때부터 시작해 시멘트로 만드는 물건이라면 건물이고 전봇대고 안 만들어 본 것이 없다. 깡마른 아저씨의 손바닥은 유달리 두껍다. 누가 봐도 ‘일손’이라고 부를 그 손으로 오랫동안 시멘트를 만지며 살았다. “내가 바람을 폈어. 노동하던 사람이 무슨 돈 놓고 돈 먹기를 하겠다고... 나 그때 골드카드도 만든 적 있어요. 골드카드. 기가 막히게 만들어줘요. 그럴싸한 과장, 차장 명함을 만들어줘요. 그럴싸한 회사에. 그러면 은행 카드회사 직원이 그거 모르겠어요. 가란지. 은행이랑 카드회사랑 짜고 했다는 거예요. 은행직원이 그거 모르겠어요? 보면. 고등학교도 못나온 놈이 어떻게 부장, 과장이 돼.” 아저씨 나이 42세에 다단계에 빠졌던 일을 아저씨는 ‘바람을 폈다’라고 표현했다.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깜빡 속았다. 카드회사들은 직업도 없고 학력도 없는 아저씨에게 계속 대출을 해줬다. 이렇게 아저씨가 이십 년 이상 일하며 일궈왔던 삶은 단 이 년 사이에 사라졌다. 채권추심에 시달리다 부인과 이혼을 하고 거리로 나와 살기 시작해 십년이 흘렀다. 건설일용직 일을 계속 하며 돈을 갚아나갔다. 지인들에게 빌린 2천만원을 이제 겨우 갚았지만, 카드회사 빚은 도저히 못 갚을 것 같다고 하셨다. 빈곤사회연대 사무실로 걸려오는 파산상담전화, 수급상담전화의 당사자들은 이런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다. 이들이 가난해진 원인은 다양하다. 재개발로 인해 평생 일궈온 집에서 쫓겨나 더 열악한 못한 주거나 일자리로 밀려난 것, IMF때 사업에 실패해 아무리 갚아도 끝나지 않는 빚과 싸우고 있는 것, 중산층으로 살았지만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게 된 뒤 차츰 가난해 진 것.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이들은 모두가 일을 했거나 혹은 지금도 일하는 중이다. 빈곤을 생산하는 노동의 고된 사이클: 낮은 임금과 잦은 해고 빈곤사회연대는 최저임금투쟁을 고민하며 노동경험을 중심으로 빈곤층의 삶을 조사해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4,5월에 걸쳐 7명의 수급/비수급 빈곤층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21살의 청년부터 70세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지금까지의 노동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이 빈곤층으로 유입된 결정적인 계기는 모두 달랐지만 불안정하거나 임금이 낮은 노동시장에 장시간 노출되었다는 점은 같았다. Q: “인건비가 낮은 게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A: “어, 힘들지. 왜냐면 인건비가 싸니까. 생활하다보면 일하는 사람들 일주일에 한 오일정도밖에 못해 사실은. (하루 일하고 생활하면) 돈 사만 원도 안남아, 그러다보면. 그러니까 하루 이틀 (일 못 구하고) 다니다 보면 돈이 안 남는 거지, 사실. 소주 한잔 먹다 보면 밥 못 먹고. 아침엔 일 나가야하고. 피곤한 거지. 그러니까 5일도 못 하는 거야. 사실은. 다른 사람도 다 그렇지 뭐. 걔들이 많이 하는 애들이 5일이야. 근데 그 사람들이 5일 해도 힘들지. 남는 게 없잖아.” - 건설일용직으로 일하는 이진구씨(가명, 59세) 건설 일용직으로 일하는 것은 임금이 낮아 계속 일을 하겠다는 의욕마저 뺏는다. 일당으로 받는 오만원 남짓한 돈은 미래를 계획할 수 있기보단 현재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금액이기 때문이다. 이진구씨는 술을 좋아한다. 돈을 모아보려고 노력한 적도 많지만 몇 달을 힘 다해 모아봤자 몇 주만 일을 못나가도 병원비며 방값이며 금세 사라지는 것을 보니 애써 모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방에서 소주 한잔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고 일이나 늦지 않게 가면 그만이다. 어차피 모아도 모이지 않는 돈이라는 것을 이미 인생에서의 많은 실패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지하던 삶이 무너지게 되는 것은 이 정도의 임금도 벌지 못할 때와 예상치 못한 지출이 발생하는 때이다. 40여년 화물차를 운전했던 김종남(70세, 가명)할아버지는 6년 전, 허리가 매우 안 좋아졌고 일어날 수 없었다. 통장에 있던 2000만원은 움직이지 않는 25톤 트럭의 유지비와 할부금, 치료비를 내는데 다 사용했다. 그래도 모자란 생활비와 치료비를 위해 1000만원 가량을 대출 받았다. 여전히 일은 할 수 없었지만 빚쟁이들은 자꾸 집으로 찾아왔다. 그때부터 할아버지는 종로의 한 지하철역에 몸을 누이기 시작했다. 집도 돈도 차도 없이 아픈 몸과 빚만 남았다. 할아버지는 왜 가난해졌는지에 대한 자신의 진단으로 몸이 아프게 된 것을 꼽는다. 60이 넘어서도 새로 나온 차를 구입할 정도로 활발하게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갑자기 아프게 될 줄은 몰랐다. 할부금도 다 내지 못한 거대한 트럭은 한 달에 150만원을 꼬박꼬박 잡아먹었다. 의료보험 혜택도, 실업급여도 받지 못했다. 돈을 벌고 있을 때 의료보험이나 적금을 들기 위해 시도해봤다. 하지만 수입과 거처가 일정치 않으니 적금이나 보험을 들었다가도 자꾸만 해약하기 일쑤였다. 지출해야 하는 돈은 바로바로 계산하고, 남는 돈이 있으면 통장에 넣어두는 것이 아저씨가 했던 유일한 재테크였다. 박선연(가명, 62세)씨는 2005년 현재의 동거인을 만난 뒤 둘이 삼년간 600만원을 모아 매입임대주택에 입주했다. 당시에는 돈을 더 많이 모아 더 잘 살 수 있길 바랐지만 62세인 본인과 60세인 동거인이 청소노동을 통해 돈을 모으기는 적잖이 어렵다. 둘이 일을 할 땐 한 사람 봉급은 모두 저금을 하고 있지만 둘 중 하나나 둘 다 일을 쉬게 될 때 이 돈을 쓰기 시작하니 생각만큼 돈이 모이지 않는 것이다. 더 나이가 들어 일을 못하게 될 나이가 찾아올까봐 마음이 급하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내가 생각할 때 월급이 적더라도 좀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면... 생각이 들지. 일 좀 해서 돈 벌어도 또 떨어지고 나면 갖고 있던 거 또 쓰니까.” 가난하고 불안정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우발적인 사건의 충격을 완충할만한 사적인 네트워크도, 공적인 부조도 갖고 있지 않다. 불안정한 삶과 저임금에 빠져버린 사람들의 삶에 위기는 너무 쉽게 자주 찾아온다. 이혼이나 해고, 단 몇 백 만원의 지출도 치명적이다. 다음 달의 월세와 공과금을 납부하기 위해 노후를 대비한 적금을 깨는 순간부터 삶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진다. 언제나 당장 지출해야 하는 돈들은 많고 미래를 대비할 여분은 부족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 빈곤계층 실직자의 소득원천을 분석하였을 때 연금이라고 응답한 사람의 비율이 7.2%로 15개국 평균인 42.0%보다 턱없이 낮았으며, 실업급여라고 응답한 사람은 0%로 아예 없었다. 고용보험이 적용되는 직장에 다녀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볼 때 빈곤층의 과거 직업경험이 안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나라 전 계층의 실직자 소득원천 중 연금이 차지하는 비율이 6.8%인데 반해 15개국 평균은 50.0%인 것으로 나타나 연금의 울타리 자체가 튼튼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저임금 인상과 노동기본권 확보가 빈곤을 줄인다 빈곤의 문제가 사라진 듯 화려함이 가득한 도시에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현재는 일을 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도 언젠가 내가 늙으면, 병이 생기면, 갑자기 일하던 직장을 잃으면 어떡하나 염려하며 가난의 공포와 싸우고 있다. 현재 빈곤에 대한 대부분의 정책들은 매우 강력하게 근로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을 통해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라는 강력한 주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빈곤층이 일을 해왔거나 지금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가난한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설명하지 않는다. 30대 그룹의 자산이 1000조를 넘어 3년간 54.2%나 성장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난 경제위기에 우는 소리를 하며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하청업체의 목을 조르고, 최저임금을 인하하자며 핏대를 세우던 대기업들이 엄청난 성장을 일구어냈다며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 때 삶과 꿈을 잃은 사람들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여전히 갈 곳이 없고, 청년들은 빚 위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작년 최저임금은 ‘길 가다 우연히 주울 수도 있는’ 110원 인상에 그쳤다. 부모님이 집을 마련해주지 않은 신혼부부들은 집이 있는 사람들보다 돈 모으기가 훨씬 더디며, 월급만 받아 잘 살 날을 꿈꾸는 사람들은 바보취급 당한다. 우리 사회는 공정하지 않다. “나는 제일 후회하는 게 대출을 받아서라도 95년 쯤에 집 한 채 마련했으면 지금처럼은 안 살 거 같다는 거야. 아니면 아이엠에프 터질 때 남편이 보증만 잘못 안 섰어도 20년 동안 일하면서 내 차 한 대 없진 않겠지. 그래도 완전 최빈곤층, 이렇게 안 되고 사는 건 내 남편이나 나나 몸은 안 아프니까 그런 건데, 나이 더 들면 어떨지 몰라.” 이번 인터뷰를 진행하며 20여년 구로의 전기 공장에서 일을 해온 43세 여성노동자에게 들었던 이 이야기가 많이 생각났다. 오랜 기간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했던 이 분이 바라는 것은 계속 일 할 수 있게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20년 동안 ‘애 낳았을 때 빼면 쉬어본 적도 없다’는 이 분이 아직도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43세인 지금도 ‘언제나 0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고 느껴야 하나? 이러한 불합리를 끝내는 투쟁을 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노동 경험을 통해 적절하지 않은 일자리와 임금, 주거가 빈곤을 심화시키는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빈곤사회연대는 계속 조사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저임금의 노동과 빈곤의 고리를 끊을 수 있도록 함께 싸워나갈 것이다.
고용허가제와 외국인 범죄자화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전체 노동자의 단결을 위해 투쟁하자! 고용 허가를 받고 인천 신항만 공사현장에서 태흥건설 소속으로 일하던 180여명의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이 2010년 7월에 4일간, 2011년 1월에 2일간 강제출국의 위험을 무릅쓰고 단체로 근로제공을 거부하며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한 일이 있었다. 일방적으로 월급에서 하루 두 끼씩 한 달 분 식대 24만원을 공제하고, 12시간으로 인정해주던 근로시간을 11시간으로 삭감했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아니고서는 건설현장에서 최저임금을 주며 12시간 주야맞교대로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회사는 별다른 충돌 없이 요구조건을 수용했다. 베트남 노동자들은 일상으로 돌아갔고 그 후 별 탈 없이 공사현장은 분주히 돌아갔다. 그런데 최초 사건 발생 8개월이 지나고 당시 파업에 참여했던 10명의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이 주동자로 지목되어 업무방해, 공동폭행·상해, 강요죄로 3월 말과 4월 말에 전격 체포·구속되었고, 검찰은 이들에게 각각 징역 1년에서 3년의 중형을 구형했다. 구속된 이주노동자들 모두 직장과 주거가 안정적이었고, 단 한 차례도 소환장을 받아보지 못한 점, 파업이 주동자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났고 회사와 원만히 해결되어 고소가 없었다는 점, 사건이 발생한지 8개월이나 지난 시점에서 대거 10명이나 구속당한 점 등을 고려했을 때 이번 사건은 매우 이례적이고 의아한 사건이다. 고용허가제 정당화와 외국인 범죄자화의 희생양 경찰과 검찰이 회사 측의 고소 없이 자체적으로 첩보를 수집해 무리하게 수사를 강행한 주요원인은 노동시장 최하층에 고착되어 있어야 할 아시아계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들이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집단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외국인 범죄자화’를 통해, 늘어가는 이주민들을 규율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정부의 인종차별적 정책이 사건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다. 2010년 7월을 시작으로 2011년 3만 4천여 명, 2012년 6만 2천여 명 이주노동자들의 비자만료가 시작되면서 고용허가제는 한 순환의 마감과 함께 실효성을 평가받는 시점에 다다랐다. 정부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 유엔(UN) 공공행정상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하여, 대상(大賞)을 유치하는 등 고용허가제 정당화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들에게 저임금과 열악한 근무조건을 강요하는 고용허가제의 폐해를 드러내는 이주노동자들의 파업은 애초에 뿌리 뽑아야 할 심각한 위협이고, 일벌백계로 다스려 다른 이주노동자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어야 하는 사례였던 것이다. 구속된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은 외국인 범죄자화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기도 하다. 정부는2009년 10월 설치한 '외국인 조직범죄 합동수사본부', 2010년 G20을 앞두고 시행한 ‘외국인 밀집지역 특별단속’ 등을 통해 범죄사실과 무관하게 아시아계 이주노동자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며 억압의 정당성을 만들어 왔다. 2011년 4월 경찰은 ‘외국인 조직폭력의 불법행위’를 중점적으로 단속하고 “외국인 범죄의 폭력화, 세력화를 적극 차단하겠다”며 ‘외국인 범죄 집중단속기간(2011.4.5-7.4)’을 발표했다. 발표 시점을 전후로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이 구속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경찰은 재판과정에서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이 인정하지도 않았고, 유죄판결이 나지 않았음에도 6월 1일 “불법파업으로 회사에 손해를 입히고,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동료들을 흉기로 집단폭행한 외국인들을 검거”했다며 왜곡된 정보를 마치 사실인 양 언론에 흘렸다. 노골적인 외국인 범죄자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또한 주거와 직장이 안정적임에도 내국인처럼 소환장을 발부하지 않고 곧바로 구속한 이유를 오로지 이들이 외국인이기 때문이라고 밝힌 경찰의 해명을 통해서도 뿌리 깊은 정부의 제도적 인종차별을 재확인할 수 있다. 경찰, 검찰의 수사와 재판과정 전반에서 확인되는 반인권, 반노동적 작태 4월 18일 시작한 재판은 총 7회에 걸쳐 진행됐고 선고만 남은 상황이다. 일반적인 사건보다 재판의 횟수가 많은 것은 통역 문제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알고 대책위가 꾸려졌을 당시 재판은 국선변호인과 법원에서 고용한 통역사를 통해 다섯 차례의 심리가 진행되었고, 검사가 구형을 마친 상태였다. 5월 30일 사건을 인계받은 대책위 변호인단은 여섯 번째 재판에서 주동자를 지목한 사측 관리자를 증인으로 신청하였고, 일곱 번째 재판에서야 제대로 된 심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마지막 재판을 방청하며 대책위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언어의 장벽이었다. 검찰 조사와 마지막 재판까지 베트남 통역사는 변호사, 검사, 판사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통역해온 것 같았다. 재판을 함께 방청했던 대책위 원옥금 활동가는 통역의 50% 이상에서 오역과 내용의 불충분함을 지적했고, 재판 내내 통역사가 막히는 부분에서 보충하는 역할을 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경찰이 피의자들에게 조서를 정확히 숙지시키지 않은 채 사인을 강요했다는 점이다. 이날 재판에서 변호인단은 A 피의자의 조서 내용을 B 피의자에게 그대로 갖다 붙여놓고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사인을 받은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동안 이런 문제제기 없이 조사와 재판이 얼렁뚱땅 진행됐으니 이주노동자들이 지난 3개월 동안 경찰서, 구치소에 갇혀 느꼈을 고충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적을 가리지 않고 노동자를 옥죄는 한국만의 악법, 업무방해의 죄 하지만 법원에서 중요한 것은 이주노동자들의 인권, 노동권이 아니라 검사가 이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한 ‘업무방해 성립여부’였다. 이주노동자들의 무죄를 위해 재판에서는 법적 절차를 지키지 않고 근로제공을 거부한 것이 자본의 소유권을 침해할 줄 알았느냐 몰랐느냐를 중심에 두고 검찰과 변호인 간 공방이 오고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 세계에서 업무방해로 파업노동자를 기소하고 처벌하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국제노동기구(ILO)와 UN사회권위원회는 수차례에 걸쳐 이 업무방해의 죄 조항에 대한 우려를 표했지만, 한국정부는 결코 업무방해 조항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이번 재판을 맡은 판사 역시 국제사회의 권고를 감안해야 한다는 변호인단의 주장을 추상적이라며 거부하고, 올해 나온 2006년 철도파업의 업무방해에 대한 대법원판례에 이번 사건이 얼마나 부합하는지만을 보겠다고 발언하며 한국정부의 반노동성을 재확인해줬다. 갈수록 고조되는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와 지지 이 사건은 4월 25일 남양주에 있는 이주노동자 인권 단체 ‘엑소더스’에 구속된 이주노동자의 여자 친구가 상담을 의뢰하면서 우연히 사회운동진영에 알려졌다. 6월 2일 건설산업연맹, 민주노총인천지역본부, 인천지역이주운동연대, 이주공동행동 등이 주축이 되어 ‘검·경의 인종차별적 수사 중단! 이주노동자 노동권 보장! 베트남 이주노동자 10인의 무죄석방을 위한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대응을 시작했고 시간이 갈수록 참가 단위가 늘어가고 있다. 사회진보연대 인천지부 역시도 초기부터 적극 결합하여 활동하고 있다. 대응이 다소 늦었지만 사안의 중요성과 대책위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활동으로 연대와 지지의 기운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대책위는 인종차별적 끼워 맞추기 기획수사를 해온 검찰과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과 집회를 현재까지 세 차례 진행했다. 특히 6월 15일 이번 사건의 원흉인 경기지방경찰청 앞에서 열린 규탄집회는 이주사안으로는 이례적(?)으로 서울인천경기충청권 활동가들 50명 이상이 모여 경찰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 외에도 2,000여 명의 탄원서 조직, 국제건설목공노련(BWI) 홈페이지에서 지지서명을 받는 국제연대사업, 대규모 집회 장소에서의 선전전, 면회, 영치금 모금 등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다. 이번 대책위 활동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건설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연대이다. 건설연맹은 대책위 결성부터 함께 하며 기자회견과 집회에 꾸준히 조합원들을 조직하고, 태흥건설과 접촉해 사건의 전말을 파악했으며 법원에 이주노동자들의 선처를 호소하는 회사측 탄원서를 받아내는 등 이번 투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재판이 열리기 전날인 6월 14일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밤을 새워가며 건설연맹 활동가 두 명과 원옥금 활동가가 태흥건설 숙소에서 지난 파업이 주도자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났음을 증명하는 사실 확인서를 파업 당시부터 현재까지 태흥건설에서 일하고 있는 인원의 대부분인 68명에게 받아 재판에 큰 도움이 되었다. 건설현장의 경우 이주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채용하면서 상황이 매우 열악해 투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지만 임금격차로 인해 내국인과 이주노동자와의 갈등도 존재한다. 건설연맹의 적극적인 활동은 현장의 갈등을 극복하고 향후 이주노동자 조직화의 가능성을 높여가는 계기로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대책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구속된 친구들의 재판을 보기 위해 휴가를 내고 매번 재판을 방청한 10여 명의 베트남 이주노동자들도 이번 투쟁의 빼놓을 수 없는 주역 중 하나이다. 구속된 이주노동자의 삶과 전체 노동자의 단결을 위한 투쟁으로 이번 투쟁의 과제는 베트남 이주노동자 10명의 삶을 지키는 것부터 자본과 정부의 분할전략을 넘어 모든 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이주노동자들의 경우 2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을 받으면 즉시 출국해야 하고, 항소를 하더라도 구치소와 다름없는 외국인 보호소에서 지내야 한다. 또한 대부분 입국과정에서 미화 1만 달러에 가까운 큰 빚을 지고 한국에 왔기 때문에 이대로 다시 돌아가면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은 삶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10명의 소중한 인생을 지키기 위해서 우선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판결과 항소 여부와 무관하게 고용허가제와 ‘외국인 범죄자화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수사권을 남용한 검찰, 경찰과 통역도 제대로 되지 않는 엉터리 재판을 진행한 사법부에 대한 규탄투쟁을 이어가야 한다. 또한 본격적인 평가의 시험대에 오르고 있는 고용허가제를 폐기하고, 노동허가제 쟁취 투쟁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투쟁을 국적과 민족을 뛰어넘는 전체 노동자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한 발판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자본과 정부는 이주노동자를 활용하여 전반적인 노동조건을 하락시키고 노동자를 분열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 조직화와 노동권 쟁취 운동으로 지배계급의 분할전략을 무력화 할 때만이 전체 노동자의 온전한 권리 신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