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과 올해 초 인천 신항만 건설현장에서 벌어진 베트남 이주노동자의 파업소식이 최근 널리 알려졌다. 이 사건은 고용허가제 노동자가 처한 열악한 현실, 이로 인한 노동자들의 공동 투쟁 그리고 그 투쟁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잘 보여준다. 인천 신항만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180명 노동자는 주야맞교대로 하루에 12시간 씩 노동을 하면서 최저임금을 받았다. 회사가 제공하는 식사 질은 형편없었으며, 친구들의 숙소출입과 숙소에 음식물 및 주류반입을 금지하는 등 노동자를 면밀히 통제했다. 2010년 6월에는 사측이 세끼 제공하던 식사를 한끼로 줄여(월급에서 24만원씩 공제) 노동자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노동자들은 식사 질 개선, 휴일 보장, 강압적 야간근로 중단 등을 요구하며 7월 22일부터 25일까지 4일 동안 작업거부 투쟁을 벌였고 2011년 1월 9일부터 10일까지 다시 파업에 나섰다. 사측은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에 응하기는커녕 “노동부에 신고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했다. 2차 파업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난 후 경기지방경찰청은 파업 참여 베트남 노동자 10명을 체포해서 구속시키고 다른 17명에 대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편 5월 이후 베트남 노동자들의 투쟁과 이후 탄압 상황이 널리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민중운동의 대응 역시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고용허가제 하에서 최초로 벌어진 대규모 사업장 투쟁으로 관심을 끌었고, 특히 경찰청의 무리한 수사와 검찰의 엄격한 구형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내국인 노동자였으면 벌금 정도 받을 사안에 대해 검찰은 “불법파업, 업무방해”라고 규정했으며, 노동자 개인 간의 발생한 사소한 다툼을 “비참가자에 대한 조직적 폭력행사”로 과장하여 징역 1년~3년을 구형했다(2명에 징역 3년, 1명에 징역 1년 6개월, 6명에 징역 1년, 1명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이 사건은 분명 인종주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 사건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이주노동자의 삶에서 인종주의는 노동탄압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 내에서 인종주의의 본질과 신자유주의·자본주의와의 연계성에 대한 토론은 아직 풍부하지 않다. 토론을 통해 공동의 이해를 마련할 때, 앞으로 사안에 대한 대응은 물론이고 이를 넘어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체계적인 반인종주의 운동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인종, 인종주의 그리고 그것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와의 관계를 규정짓고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인종주의의 모습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반인종주의 투쟁을 위한 몇 가지 중장기적 과제를 제안하고자 한다. 이 글의 목표는 확고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라기보다 앞으로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인종주의란 무엇인가? 인종과 인종주의를 이론적이고 역사적으로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자. 이를 위해서 인종주의의 본원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사회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인종의 정의 미국의 인종 이론가 마이클 오미(Michael Omi)와 하워드 위넌트(Howard Winant)는 다음과 같이 인종을 정의한다. “각기 다른 형태의 인간 신체를 언급함으로써 사회적 갈등과 이해를 나타내고 상징하는 개념”(Omi & Winant 1994, 55). 이 정의는 인종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인종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종적 명명이 본질적인 특성이나 물리적 성격을 언급할 때 사실 각기 다른 인종적 집단을 나누는 생물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인종적 범주는 시간과 장소를 넘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아시안’이라는 예를 들어 보자. 한국에서 ‘아시안’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네팔, 방글라데시와 같이 1980년대 후반 이후에 집단적으로 한국으로 이주한 나라 사람들을 언급하기 위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아시안’이라는 명명은 이러한 사람들을 토박이 한국인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으로 표시하고 비난과 동정, 자선과 교육의 대상으로 만든다. (예컨대 부모 한 쪽이 한국인이고 다른 한 쪽이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 출신인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부르기 위해 사용되는 코시안이라는 용어를 생각해보라. 혹은 영화 ‘방가방가’에 나오는 다국적 이주노동자들이 만든 노래그룹 ‘아시안 브라더스’와 같은 이름을 생각해보라.) 반면에 미국 2000년 인구센서스에서 ‘아시안’은 “예컨대 캄보디아, 중국, 인도,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필리핀군도, 태국, 베트남 등을 포함하는 극동, 동남아시아 또는 인도대륙의 원주민들에 출신을 갖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한국과 미국의 각기 다른 ‘아시안’ 만들기는 두 나라의 상이한 경제, 사회, 정책적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인종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인종이 단지 환상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종은 사회와 정치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고 제도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역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해하려면, 인종을 상식의 요소로서 이해하는 것이 유용하다. 상식은 어렸을 때부터 거의 무의식적으로 배우고 거의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일상적 관행, 사람 간의 상호작용, 국가정책의 개발 등 사회적인 관행을 주조하며 같은 사회적 행동에 의해 재생산된다. 다양한 사회적 행동에 내재된 상식으로서 인종은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회 구조의 요소’가 되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미와 위넌트의 정의는 또한 인종의 개념이 처음부터 갈등으로 뒤엉켜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인종적 범주의 개발과 위계화는 근본적으로 특정 세력이 경제, 문화, 정치적 지배를 세우고 특정한 축적체제가 유지되는 헤게모니 진행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종적 차이에 대한 개념에는 항상 열등성과 우월성이 내포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인종이 불평등을 위해 종종 의식적으로 날조된 정당화가 아니라 그에 대한 반(半)의식적 혹은 잠재의식적 자연화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인종의 역사 많은 사람들은 인종적 범주와 이에 기반한 편견과 불평등이 우리 천성의 일부로 인간 역사의 시작부터 존재해 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인종 개념은 겨우 400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 식민화’, 즉 아프리카 노예무역과 세계 자본주의체계의 설립이라는 맥락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이는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와 아프리카인의 노예화가 상식인 것처럼 느껴지게끔 설명함에 따라 발전했다. 17세기 말 아프리카 식민지의 상황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백인 계약 하인에 비해 아프리카 노예를 더욱 저렴하게 활용하여 농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 피부색의 구별에 따라 아프리카인은 ‘평생 노예’로 백인은 ‘자유민’으로 명명하여 두 그룹 사이에 사회적 장벽을 세우는 법률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법률을 개발하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마치 그 법률이 자연적인 질서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백인우월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체화시켰다. 즉, 흑인과 백인을 확실히 구별하고 후자를 전자 위에 위치 짓는 이데올로기 및 사회적 체제(다르게 말하면 인종주의)의 발전 그리고 노예 노동력에 기반한 축적체제의 구조화는 거의 같은 시기에 상호적으로 발생했다. 동시에 남부의 노예노동과 대서양의 노예무역은, 마르크스가 분명히 인식하였듯이, 아메리카 북동부와 유럽에서 섬유, 조선, 기타 새로운 자본주의 기업에 투자되는 부를 창출했다. 따라서 인종과 인종적 지배의 출현이 근본적으로 지구적 자본주의의 출현과 뒤얽혀 있다는 것은 과언이 아니다. 노예제도 철폐 이후 인종과 인종주의는 자본주의의 각 국면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재생산되어 왔다. 그것은 19세기에서 1960년대까지 미국에서 법적으로 백인과 흑인 노동자를 분리시켰던 ‘짐 크로우(Jim Crow)’ 법의 형태를 띠었다. 이는 남부에서 백인 지주의 흑인 농업노동자에 대한 지배를 가능케 했다. 또한 인종과 인종주의는 19~20세기의 전환기에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 식민지들 사이의 지배와 복속 관계, 식민지 내에서 서구인들과 식민지 주민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 확립을 통해 서구 제국주의의 맥락에서 재생산되고 정교화 되었다. 이 당시 식민화와 인종적 사회구조는 유럽 과학자들에 의한 각기 다른 인종 그룹의 범주화와 위계적 질서화에 의해 소위 객관적인 지원을 받았다. 유럽 자본주의가 여러 지역을 불균등하게 지구적 생산체계에 편입시키고 전 세계로 확대되면서, 인종주의도 국가들 내부와 국가들 사이에서 관계를 주조하면서 확대되었다. 발리바르가 지적했듯이 “인종 따라서 인종주의는 노동분업 축과 연관된 지리적 집중의 촉진자이자 결과의 표현이다.”(Balibar, 1991, 80) 중국계 미국인 학자인 리사 로우(Lisa Lowe)는 인종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그 지구적 확장의 전체 역사는 [인종적, 성적 등] 차이의 구조화를 통해 조직되었다... 자본 축적은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법적 차별화를 통해 지속된다.”(Lowe, 1999, 159)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오늘날 인종주의는 이민과 외국인 노동력을 규율하는 법률들을 통해 작동한다. 3) 인종주의의 정의 위에서 필자는 사람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또는 상식적으로 구별하는 것을 지칭하기 위해 ‘인종’을 사용했다. 필자가 채택하는 인종주의 개념은 인종을 단순한 이데올로기나 개인적 편견을 넘어선다. 오히려 인종주의는 개인적 편견, 이데올로기, 법률과 정책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되고 유지되고 변화되는, 인종적 범주에 기반한 지배와 억압체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가부장제와 성 억압처럼 체계적 인종주의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근본적으로 지구적 자본주의와 연관되어 있다. 개인적 인종차별 행위나 정보, 기술과 자원에 대한 인종화된 집단의 불평등한 접근을 유지하는 행위, 인종화된(인종으로 여겨지는) 집단의 권리를 제한하는 정부 정책, 인종적 표상들은 모두 체계적 인종주의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러한 요소들의 오랜 상호작용은 자본주의 축적체제와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집단의 헤게모니를 동시에 지원하고 자연화하는 인종주의적 사회구조를 형성하면서 자원, 기회와 권력에 있어 불평등을 형성한다. 지구적 자본주의, 이주, 신자유주의...그리고 인종주의 1) 이주와 국제 노동분업 지구적 자본주의는 국가와 지역들을 불평등한 관계로 편성하고, 그들 사이에서의 무역, 투자, 노동의 흐름으로 연계된 세계 체계를 통해 기능하고 유지된다. 이 체계는 국제 이주를 몇 가지 수준에서 가능하게 했다. 첫째, 생산의 세계화는 주변부 지역에서 농산물 수출과 제조업 수출을 발전시켰다. 이는 자급 노동자를 임금 노동자로 전환시킴으로써 인구의 일부를 삶터에서 쫓아내는 경향이 있다. 쫓겨난 노동자들은 처음에 자기 나라 안의 중심 도시로 이주하고 그 다음에 그 중심도시에 일자리가 충분치 않으면 더 발전된 다른 나라로 이주한다. 또한 국가 간 무역과 투자는 전혀 다른 장소 사이에 사스키아 사센(Saskia Sassen)이 ‘문화적 연계’라고 부른 것을 창출한다. 선진국으로 수출될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종종 선진국 자본가들이 소유한 기업에서 일하는데 이들은 이러한 접촉으로부터 그 나라들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획득한다. 이는 이러한 나라들로의 이주를 상상가능하고 매력 있는 것으로 만든다.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자면, 저발전 나라들에서 수출 경제와 외국인 투자는 이전에 정착 노동자들을 이동하게 만들고 이주 본국(송출국)과 목적국(유입국) 사이에 물질적 문화적 연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주민은 이러한 연계를 따라 자본의 역방향으로 움직인다.(Sassen, 1988, 20; 1993, 74)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농촌 지역 안팎과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에 불평등을 증가시켰다. 이러한 불평등이 일반적으로 인종적 구분선과 일치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인종적 범주와 인종주의적 사회구조와 함께 발생한 세계 각 지역의 자본주의로의 불균등한 편입에서부터 일어난다. 인종은 다양한 사람들의 본질적 특징으로부터 발생하는 불평등한 관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듦으로써 이러한 역사적 불균등성을 제거하는 작용을 한다. 즉, 남반구 노동자의 빈곤은 그들의 선천적인 특징인 교육 부족, 무기력함, 기술 부족, 열등한 문화, 성차별주의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소득과 기회의 불평등은 인종화된 피지배자들을 더 발전된 나라로 들여오는 이주 물결의 방향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고, 이주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더욱 증가하였다. 국제이주기구(IOM)의 통계에 따르면 1965년에서 2002년 사이에 7천5백만 명에서 1억5천만 명으로 이주민 숫자가 두 배가 되었다고 한다. 이주민은 2002년까지 세계 인구의 2%인 1억8천5백만 명이었다. 현재는 그 숫자는 세계 인구의 3%인 2억 명으로 증가한 것으로 여겨진다(Castle & Miller), 2003, 4). 물론 이주는 경제적 조건, 전쟁, 정치적 불안정성, 나라 사이의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연계, 이전의 이주 전통, 개인적 선택 등의 요인들의 결합으로 인해 발생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이주를 발생시키는 유일한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은 적어도 지난 삼사십년 동안 이주를 가속화시켰고 이주의 방향과 성격을 결정하는 데에 핵심 역할을 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의 무역 자유화와 구조조정 정책은 나라와 지역 간 소득과 실업, 기회의 차이의 주요 원인이다. 이들은 또한 가난한 나라에서 노동자들을 지역 경제로부터 쫓아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이주 사이의 연관에 대한 가장 극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멕시코 농민에 미친 효과이다. 미국노총(AFL-CIO)의 연대센터(Solidarity Center)에 따르면 “북미자유무역협정의 실행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유입되는 값싼 농산물은 1백7십만 명의 멕시코 소농들을 쫓아냈고 멕시코의 농업경제를 파괴했다. 생계를 잃고 농촌에서 실업에 직면한 농업노동자들은 일자리 경쟁을 위해 멕시코의 도시 지역으로 이주했다. 이러한 이주는 중심 도시들에서 더 낮은 임금을 초래했고 노동자를 다시금 쫓아내서 이제는 미국과 같은 나라에 일자리를 찾으러 가게 만들었다.”(Misra, 2007, 2). 2) 한국으로의 이주와 한국의 자본축적 20세기 초부터 중후반까지 한국에서 노동력의 순흐름(net flow)은 군사적, 경제적인 개입으로 형성된 물질적 문화적 연계를 따라 한국을 떠나 일본, 미국 등 선진국으로 이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한국이 주변 아시아국 노동자들의 중요한 목적국으로 등장함으로써 순흐름의 방향이 역전되었다. 변화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국제 노동분업에서 한국의 역할 변화와 한국 경제의 축적구조 변화에 있다. 이주노동은 현재 한국 축적체제의 필수요소가 되었고, 따라서 정부에 의해 도입되고 규율된다. 그러나 최초의 이주노동자 유입은 정부의 노력이나 자본의 유치 결과가 아니라 해당 노동자들 스스로의 선택 때문이었다. 1980년대에 한국은 자본주의 발전의 기적처럼 여겨졌고 동시에 석유가격의 하락은 이전까지 아시아 이주노동의 중요한 목적지였던 중동에서 경기침체를 낳았다. 물론 한국의 발전은 한국을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보루이자 일본의 하위 경제파트너로 강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미국의 원조와 반공주의 독재자의 주도 하에서 진행된 극단적 수출주도의 경제성장에 의해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의 한국의 성장은 비슷한 식민 역사를 가진 문화적, 지형학적으로 비슷한 나라에 의해 달성된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의 드문 사례로서 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한국에 대한 관심은 한국에서 열린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의 효과를 선전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더욱이 한국은 베트남, 중국과 왕래를 원활히 하면서 그 같은 공산주의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설립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에 한국 자본은 선진국에 기반을 둔 초민족자본의 급속한 지구적 확장에 대응하여 이와 경쟁하기 위한 노력으로 값싼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아시아 나라들로 해외투자를 하고 생산시설을 이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투자는 이주를 가능하게 한 물질적, 문화적 연계를 형성시켰다. 해외 투자에 더해 한국 재벌들은 생산비용 삭감을 위한 수단으로 한국 내에서 외주화와 하청화를 본격화했다. 해외로 확장할 수 없는 중소기업들은 하청업체로서 이러한 생산체계에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임금과 노동조건에 대한 하향압력에 직면했다. 동시에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은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을 증가시켰고 상대적으로 더 나은 노동조건과 임금인상을 요구할 능력을 주었다. 재벌 원청으로부터의 단가절감압력과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요구 사이에서 중소기업들은 이주노동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해외로 이전하지 못하는 농업, 어업 등 일차산업과 건설 자본도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이주노동자를 채용하게 됐다. 앞서 언급한 파업 베트남 노동자들이 일하던 건설업에서는 이주노동과 유연한 노동관계가 특히 중요하다. 수주산업인 건설업에서 건설 원청회사는 각 공정을 발주해서 담당하는 전문업체와 전체 사업비용의 일부비용으로 계약을 한다. 하청 건설회사보다 수익이 낮은 전문업체는 노동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직접고용 노동을 피하며 3차 도급업체를 사용한다. 시간이 갈수록 하도급체계가 복잡해지는데 이주노동자는 1990년대에 수익이 가장 적은 제3, 제4 단계에서 도입됐다. 인천 신항만 노동자 사례에서 봤듯이 도급업체는 이주노동자의 임금 삭감, 식비 공제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돈을 아끼려고 한다. 이렇게 이주노동자들은 한국 축적체제의 가장 낮은 층위에 편입되었다. 1990년대에 한국 경제에 유연생산 체계가 확고하게 정착되면서 한국은 이주노동 유출 국가가 아니라 순 유입국이 되었다. 이주노동자들의 증가와 그들이 한국 경제에 필수불가결함을 인식함과 동시에 정부는 이주노동을 규율하기 시작했다. 3) 이주노동, 비정규 노동과 인종주의 저임금을 받고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하고 사회적 반발없이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어서, 이주노동자들은 ‘비정규’ 노동 개념이 아직 광범위하게 사용되지 않았을 때에도 비정규 노동자로 일했다. 그러나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점점 더 막대한 숫자의 한국 노동자들이 비정규직화 되어서 이제 비정규 노동자는 일반적으로 귀에 익은 용어가 되었다. 유연 노동관계의 강화는 노동자 분할(비정규직/정규직, 대사업장/중소영세, 내국인노동자/외국인노동자, 동포/비동포 이주노동자 등)의 강화와 함께 도래했다. 이는 이윤 목적을 위한 자본의 ‘차이의 구조화’의 결과이다. 인종주의는 이러한 분할을 재생산하고 자연화하도록 작동할 뿐만 아니라 작업장에서 사회의 다른 영역으로 이들을 퍼뜨린다. 유연한 생산, 이주노동, 인종주의의 밀접한 관련은 한국에만 특수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목적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적 생산과 분배 체제에 편입된다. 예를 들어, 애드나 버나시츠(Edna Bonacich)와 제이크 윌슨(Jake Wilson)은 1980년대에 물류기업의 노동비용 절감 전략을 가능하게 한 운수산업 탈규제와 새로운 기술발전이 또한 운수와 물류 노동력에 이민자와 다른 유색인들의 참여 증가로 이어진 것을 설명한다. 한때 안정적이고 정규직이고 의료보험 등 후생복지 혜택을 제공했던 트럭운송, 항만, 창고 업종의 일자리들은 현재 파트타임이고 불안정하며 후생복지 혜택이 없으며 대개 라틴아메리카계 이민자와 다른 인종화된 그룹이 차지하고 있다.(Bonacich & Wilson, 2008) 식육가공도매업, 양계, 건설산업과 청소와 경비같은 값싼 서비스 업종의 일자리에 대해서도 똑같이 얘기할 수 있다. 미국에서 사우디아라비아, 홍콩에 이르기까지 여성 이주노동자들은 가사노동자로 고용되어 있고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노동법 보호로부터도 배제되어 있다. 버니시츠와 월슨이 지적하듯이, 이민자들은 이러한 비정규, 저임금, 종종 위험한 일자리를 위한 일차적인 고용대상이다. 왜냐하면 그들 본국의 비참한 상황은 그들로 하여금 내국인 노동자들이 거부하는 일자리를 받아들이게 하고 엄격한 이민정책과 외국인노동 정책은 다른 형태의 고용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민노동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종화로 인해 일반적으로 그들이 직면하는 기준 이하의 노동조건과 권리 부재에 대해 대중이 별로 분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조해야할 지점은 한국의 노조활동가들이 여전히 이주노동자들을 대체로 소수자 그룹으로, 도와주어 마땅하나 노동운동의 주요 활동에서 분리되어 있는 존재로 보지만, 사실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현재 노동자의 가장 근본적인 적들 가운데 하나로 광범위하게 인식되고 있는 하청과 유연 노동 체제의 핵심 요소이라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인종주의(혹은 반인종주의)는 아직 한국 노조활동가들이 쉽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지만, 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밀접하게 뒤얽힌 억압 구조라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 인종주의의 모습 필자는 앞서 체계적 인종주의가 개인적 인종차별 행위나 정보, 기술과 자원에 대한 인종화된 집단의 불평등한 접근을 유지하는 법률, 인종화된 집단의 권리를 제한하는 정부 정책, 인종적 표상들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유지되고 변화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나열한 요소는 체계적 인종주의의 생산과 재생산에 각기 다른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 배제적 이민정책이 일반적으로 명백한 인종주의적 범주에 기반하고 있지는 않다. 예컨대 한국에서 귀화의 권리는 공식적으로 거주기간의 길이, 자산, 한국어와 문화에 대한 지식에 기반하고 있다(국적법, 5항). 그러나 개인적 편견, 인종주의적 표상, 다단계 하청에 기반한 한국의 축적체계와 결합할 때, 그 효과는 남아시아 출신의 이주민들을 고용기회, 사회 서비스, 노동권과 정치적 권리에 대해 불평등한 접근권을 가진 부정적으로 인종화된 집단으로 재생산하는 것이다. 1) 인종주의와 속박된 노동 한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아시안 혹은 남아시안 혹은 갈색 인종을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부는 특정한 개인들을 외국인 노동자로 정의한다. 그랬을 때 토착/내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구별은 권리, 부, 기회의 불평등을 자연화하는 과정에 있어서 생물학적으로 정의된 인종적 범주를 대신하게 되는 것이다. 외국인으로서 이 개인들은 자유로운 직업 선택과 사업장 이동의 권리가 금지되어 있다. 그들은 또한 기간을 연장해서 머물지 못하며 시민의 정치적 권리도 부정 당한다. 이러한 제한들은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을 효과적으로 속박된 노동으로 만든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노예처럼 대우받는다”는 카투이라 이주노조 위원장의 잦은 발언은 단순한 비유 이상이다. 평생 노예상태가 아니지만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흑인들처럼 한국인(혹은 동포)으로 정의된 이들로부터 법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고용주들에게 수익성을 보장하는 시스템을 통해 이동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를 법적으로 부정당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이러한 장벽을 설치할 주권이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국민이 아닌 이들을 배제하거나 제한하는 국가의 권리는 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개념의 핵심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이주를 가속화하면서 국가의 국경 순찰 역할이 증가해 왔다. 그러나 출입 제한은 이주를 막거나 속도를 늦추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는 이민 통제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적하는 사실이다. 국경통제는 사람들이 입국하는 것을 실제로 막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외국인들을 규율할 권리를 강조하는 데에 복무하여 그들이 국내에 들어오면 이윤 창출을 위해 그들에 대한 정부의 규제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단속도 유사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한다. 한국에서 단속이 명백하게 미래의 미등록 이주를 막지 못했고 현재의 미등록 이주민 숫자를 줄이는 데 제한적으로만 성공했지만, 단속은 거주 허가가 있든 없든 외국인인 사람들을 통제할 국가의 권리를 선언한다. 정책 담론에 명시적인 인종적 용어가 부재한 것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예외가 존재한다. 그것은 동포라는 용어의 사용인데, 이는 생물학적이고 민족적 동일성에 근거해 해외의 한국인들을 다른 이주민과 구별하는 것이다. ‘동포’로 명명된 사람들은 한국에 들어오고 나가는 데 훨씬 큰 자유가 있고 사업장 변경의 자유도 크다. 또한 노동할 산업 선택 범위도 더 넓다. 최근에 미등록 동포들에 대한 인도적 고려에 기반하고 있다는 광범위한 합법화 프로그램이 실시됐다. 그러나 저발전 나라들에서 온 동포들은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에서 온 이들과 같은 권리를 받지 못한다. 이 사실은 동포라는 용어의 실용적 적용을 보여준다. 인종적/민족주의적 용어인 동포의 사용과 이에 기반한 정책은 한국인(그리고 미국과 일본 출신의 해외 한국인)이 최상위에 있고 저발전 국가 출신의 해외 한국인이 중간에 있고 ‘비동포’ 이주민이 바닥에 있는 권리와 사회적 지위의 위계구조를 만들어내는데 복무한다. 2) 인종주의의 두 가지 형태 외국인으로서든 혹은 아시안으로서든 이주노동자에 관한 두 개의 지배적인 인종주의적 표상이 존재한다. 현재 한국사회에 유포되어 있는데, 이는 범죄자로서의 이주민의 표상과 한국인의 동정과 도움의 대상으로서의 이주민의 표상이다. 단순한 스테레오타입과는 달리 이러한 표상들은 이주민들이 정부 정책과 공공기관에서 대우받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것들은 또한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이주노동자에 접근하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개입한다. (1) 범죄자화 지난 몇 년 동안 정부와 미디어는 ‘외국인 범죄’에 점점 많은 주의를 기울여 왔다. 외국인 범죄에 대해 취해진 조치와 발표된 입장은 종종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미등록 체류(행정적 위반)와 범죄행위 사이의 구별을 흐린다. 이는 또한 외국인인 것과 잠재적 범죄성 사이의 일반적 상관관계를 언급한다. 한국정부의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가 2008년 9월 25일에 제출한 ‘미숙련 외국인력 정책개선 방안’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이러한 경향의 사례를 보여준다. 이 문서는 “불법 외국인 체류 집중지역의 증가”와 “모든 형태의 범죄 발생”을 “[불법 체류의] 문제점: 범죄와 국가이미지 훼손” 부분에서 같이 다루고 있다. 보고서는 또한 “불법체류자에 의한 노조결성 [이주노조], 법 무시 풍조[조장]”을 문제로 적고 있다.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검찰, 경찰, 출입국·외국인 정책본부는 ‘외국인 범죄’를 단속하기 위해 몇 가지 노력을 했다. 인천 신항만 베트남 노동자가 연행된 지 얼마 안돼서 경찰청이 ‘외국인 조직폭력과 조직성 폭력배의 불법행위’를 중점 대상으로 한 외국인 범죄 집중 단속 기간을 발표했다. 이 조치는 베트남 노동자의 파업과 유사한 사건을 집단 폭력, 범죄로 표상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행정적 틀을 제공했다. 외국인 범죄 단속조치들을 설명하는 정부의 발표는 범죄성을 ‘외국인’의 특성으로 만드는데 근접해 있다. 2010년 단속 활동을 설명하는 한 보도자료는 단속조치들이 “공공질서를 위협하고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들 사이에 증가하는...조직적이고 심각한 외국인 범죄에 대한 [대응 필요성의] 공동의 인식에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G-20 정상회의 바로 직전에 실행된 또 다른 외국인 범죄 단속 기간에는 불법 체류자가 ‘불심검문의 대상이 되는 범죄자’ 가운데 명시적으로 적혀 있었다. 여기에 서술된 조치들은 아시아 이주민들을 선천적으로 잠재적 범죄자로, 수사에 걸린 이주민을 사실상의 범죄자로 표현하고 그렇게 취급한다. 이는 주류 미디어 보도에 반영된다. 이주노동자를 범죄성과 연관짓는 것은 국경통제, 단속, 등록 이주노동자에 대한 더 강한 규제를 정당화하고 이에 의해 재강화된다. 또한 파업 이주노동자나 이주활동가들에 대한 단속은 한국인과 이주민 사이의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이는 이주민 단체들의 지도부를 없애고 대부분 일반 이주노동자에게 겁을 주어 집단행동, 즉 억압받는 세력(노동자, 인종화된 소수 등)이 실질적 불평등과 대표성의 부족을 상쇄할 수 있는 기본적 수단을 갖추기 위한 이주민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평등하게 만드는 힘을 훼손함으로써 이주노동자들이 인종적 계급적 위계구조에서 그들의 위치를 유지하도록 한다. 이것이 이주노동자들이 집단적 정치세력으로서 주체화, 세력화되는 것이 반인종주의 투쟁에서 그렇게 중요한 이유이다. (2) 다문화적 은인 - 수혜자 관계 티비 광고에서 영화, 정부 다문화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는, 아시아 이주노동자에 대한 또 다른 지배적 표상은 저개발 국가에서 온 가난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 이미지는 여성화된 남성 이주노동자에게도 종종 적용되지만, 한국 남편의 이주민 아내와 가장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다. 불쌍한 여성이든 여성화된 남성이든 이런 방식으로 표상된 이주민들 역시 한국인의 자선과 도움을 받는 이들로 만들어진다. 최근 연합뉴스 기사를 예로 들어 보자. 이 기사는 부산 경찰이 기장군 경찰서에서 견학 프로그램을 개최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당연히 경찰이 설명한 내용을 가져온 것인데 기사 일부는 다음과 같다. 기장군에는 16개국 187명의 결혼이민자들이 체류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중국,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 출신이다. 이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경찰에 대한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한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경찰서에 출입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정작 필요한 때에도 도움 요청을 꺼려했다고 결혼이주여성들은 자신들을 초청한 경찰에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처음 경찰서를 방문한 결혼이주여성들은 외사계 직원들의 안내로 민원실, 교통계, 시뮬레이션 사격장, 112지령실을 견학하고, 기초생활법률과 범죄예방교육을 받았다. 베트남 이주여성 응웬 티 짱(23세)씨는 “대부분 결혼이주여성들은 경찰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움이 필요해도 쉽게 접근하거나 도움을 요청 할 수 없었다”면서 “경찰관들이 다문화가정에도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감동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2011년 4월 8일). 여기에서 한국의 남아시아 이주여성의 어려움은 그들이 겪을 수 있는 차별이나 빈곤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오히려 그들의 어려움은 제복에 대한 겁, 한국 기관에 대한 오해로부터 나오고 이는 그들의 본국에서 부패한 정부 기관에 대한 경험에 기반해 있다는 것이다. 경찰(추측컨대 남성)은 교육, 관심과 애정을 통해 이러한 오해를 누그러뜨리도록 돕는다. 이 기사에는 남아시아 이주민들이 바로 똑같은 경찰에 의해 다른 상황에서는 범죄자 취급을 당한다는 언급이 당연히 없다. 아마 이것이 이 여성들이 경찰서에 발을 들여놓기를 꺼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자비로운 한국인-불쌍한 이주민 관계는 요즘 한국 사회 전체에 걸쳐 발견된다. 한국 정부의 다문화 가정 지원, 영화 ‘방가방가’에서 영웅적/코믹한 한국인(부탄사람으로 위장한), 이주노동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센터들... 나아가 일부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사용한 수사를 생각해보라. 이러한 관계는 이주민이 진정으로 누구인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재정립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인간적이고 더 발전된 이로서의 한국과 한국 사람의 표현이자 연기(performance)이다. 은인-수혜자 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노동자를 체계적으로 구속된 이로 만드는 착취자가 아니라 불쌍한 외국인을 돌보는 사람이라고 선언한다. 결국 이주노동자를 범죄자화하는 행위와 불쌍하게 여기는 행위 모두 다른 방식에 의해서이지만 한국을 발전된 나라로 개조하는 목표에 복무한다. 전자는 이주노동자를 값싸고 착취가능하고 통제가능한 노동력으로 만들어 이윤을 보장하고 국가경쟁력을 개선하는 것을 돕는다. 후자는 이러한 착취를 대중적 시야와 개인적 의식으로부터 가린다. 이것들은 우리가 발전되고 관대하고 다문화적인 사회가 되기 위해 필요한 자원과 세련됨을 가진 국가라는 것을 우리 스스로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단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주노동자 범죄자화와 다문화적 자비는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 그렇다면 이러한 분석의 함의는 무엇인가? 즉, 신자유주의와 유연생산의 핵심요소로서 이주와 이주노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주노동자운동의 나아갈 바에 어떠한 제언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자본주의와 동일하지 않지만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자본주의에 의해 지지되는 인종주의에 대한 분석에서 우리는 어떤 실천적 함의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몇 가지 제언을 하겠다. 1) 국제적 관점과 전지구적 투쟁 1. 국경에 갇히지 않는 조직화의 형식을 찾아야 한다. 많은 노조들은 이미 이주노동자가 귀국하거나, 다른 목적국으로 이주했을 때 이들과의 연계를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로 이주해간 곳에서도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조직화방법과 노조가입방식의 필요함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는 주요 목적국의 노동조건을 설명하고 노조를 소개하기 위한 자료를 생산하고 배포하는 국제산별연맹의 노력을 들 수 있다. 국제서비스노련 여권이 대표적인 사업인데, 이 여권을 소지한 노동자는 노조와 자신의 권리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받을 뿐 아니라, 목적국의 국제서비스노련 가맹노조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지역사회와 친숙해지는 데 있어 도움을 받게 된다. 각종 정보 메일링 리스트에 가입되고 문화 및 정치 사업들에 초대를 받기도 하며, 교육훈련 기회를 가지고,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상담 및 법적 지원 등을 얻을 수 있다. 민주노총, 네팔노총을 포함해 일부 이주본국과 목적국 노조가 양해각서를 체결해서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하고, 이주 전/정착후 노동권·노조 교육을 추진하기로 한 사례도 중요하다. 또한 필리핀 노동자의 국제 조직인 ‘국제 이주민’(Migrante International)과 같은 세계 이주노동자 네트워크 역시 존재한다. 국경을 넘나드는 다양한 조직화 방식을 조사해 각 방식의 강점과 한계를 평가하고 진전시킬 방법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특히 민주노총은 네팔노총과의 양해각서 시행을 강화하고 다른 이주본국의 노조와도 양해각서를 체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2. 이주문제의 범세계적 성격을 감안하여 이주본국과 목적국에서 도입할 수 있는 기본 요구틀이 필요하다. 필자는 이 틀로서 ‘머물 권리’와 ‘이주할 권리’를 제안한다. 머물 권리는 지역사회에서 안전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고 강제이주를 피할 수 있는 기본적 사항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양질의 일자리 및 기초 사회서비스 제공,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정치적 권리)이 포함된다. 이주할 권리는 이주본국을 떠날 수 있는 자유, 목적국으로의 이주를 위한 합법적이고 안전한 경로 확보, 영주할 수 있는 기회와 목적국에서의 정치적 권리를 포함한다. 이러한 요구에 기반하여 한국의 출입국과 귀화 체계 개혁에 대한 현실적 제안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계획이 제출되어야 한다. 2) 반인종주의적 관점과 반인종주의 투쟁 1.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유연생산과 유연노동 체계의 핵심에 있음을 인식하여야 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또한 인종주의가 이러한 체계를 지탱하고 또 이러한 체계에 의해 지탱되는 것임을 인식하고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 계급의 헤게모니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나서야 하며, 반인종주의 투쟁을 자신의 사활적 과제로서 인식하여야 한다. 2. 인종주의가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되, 양자가 동일한 것은 아님에 유의해야 한다. 가부장제와 마찬가지로 인종주의는 자본주의가 해체된다 할지라도 간단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종주의는 상호이해와 관용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단순한 편견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전선에서 인종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개인 간 상호작용에서부터, 일터, 학교, 언론과 정부 정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간이 그러한 전선이 되어야 한다. 단지 단속추방뿐 아니라 이주노동자를 ‘외국인’으로 분리하는 데 맞선 포괄적인 투쟁이 필수적이다. 동포와 비동포 이주민에 대한 인종적 위계화를 철폐하라는 요구 또한 필수적이다. 이는 재외동포법의 완전한 적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주민에게 영주의 권리를 보장할 것을 요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과업은 상기 a-2와 상당 부분 겹친다. 여기서 학교를 언급한 이유는 인종적 범주와 인종주의가 이주노동자 자신 뿐만아니라 이들의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미등록 이주민의 아이들의 경우에는 미등록 신분이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두드러지지만, 시민권을 가진 아이들이나 부모 중 한 명만 한국인인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인종주의의 영향으로 낮은 학교 성적, 높은 중퇴율과 낮은 출석율을 보이게 된다. 인종화된 청소년들은 이미 언론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 이는 잘못된 종류의 관심으로써 미디어는 이들을 피해자로, 다문화적 자비가 필요한 대상으로만 그릴 뿐이다. 이러한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주인공으로 주체화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반인종주의 조직화의 중요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개인 간 상호작용의 영역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행동이 일어나는 인종주의적 사회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권력을 행사하는 인종주의적 위계에서 이러한 권력(더 나은 정보 접근권, 더 높은 의사결정과정 참여도, 재화와 자원에 대한 더 큰 통제력 등)을 유지시키는 우리의 행위는 체계적 인종주의의 구성요소로 작동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행위, 말하기 습관, 일하는 스타일 등을 통해 인종적 위계를 영속화할 수도 교란할 수도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에게는 인종적 위계를 영속화하는 것들을 바꿔낼 책임이 있다. 3. 반인종주의 투쟁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종위계의 밑바닥에 있는 집단을 사회적/정치적 행위자로 주체화시켜내는 것이다. 이주민 권리 운동이 요구를 걸고 투쟁을 한다 할지라도, 이주민 활동가들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고 현재의 활동을 어찌되었건 진행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로는 인종적 위계를 무너뜨릴 수 없다. 그런 운동은 반인종주의 운동이 아니다. 인종위계의 밑바닥에 있는 집단을 사회적/정치적 행위자로 주체화시켜 낸다는 것은 조직화를 의미한다. 단순히 조직 구성원을 늘리는 문제가 아니라 리더를 만들어내는 조직화를 의미한다. 조직화와 주체화를 위해 효과적인 전략과 구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1) 이주노조와 같이 단체교섭권이 없는 이주노동자 조직은 언어습득과 기술 훈련을 위한 제도 도입과 더불어 달성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대한 캠페인을 통해 활동 경험을 얻을 기회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과거에 등록 이주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통역자 배치, 사업장 이동 절차 개선 등의 요구로 고용지원센터를 상대로 한 투쟁을 제안한 바가 있다. 2) 다른 민주노총 소속 노조의 경우, 훈련된 조직활동가를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배치하여야 하며, 다른 부문에서 사용된 포괄적 조직화전략을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적용해야 한다. 지금까지 제시한 아이디어들은 더욱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은 한국 노동자 운동이 반인종주의적이고 국제적인 관점을 채택해 이주노동자를 조직하려면 금속노조, 건설노조 등과 같은 민주노총 가맹 조직은 현재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배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한국노동운동이 반인종주의적이고 국제적인 관점을 도입하지 않고 필요한 자원을 배치하지 않는다면, 이주노동자 조직화는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만약 한국노동운동이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향후 점진적 약화를 감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고자료 Balibar, Etienne. 1991, “The Nation Form: History and Ideology,” Race, Nation, Class: Ambiguous Identities, Etienne Balibar and Immanuel Walle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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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사민주의체제는 무엇보다도 스웨덴식 노사관계의 산물이다. 역사적 타협에 기원을 둔 사민당정권 및 LO(스웨덴 노총)과 SAF(사용자단체) 간의 협조주의적 노사관계가 그것이다. 스웨덴은 90%가 넘는 노동조합조직률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같은 스웨덴 모델의 근간은 역사적 타협 이후 확립된 중앙집권적 산별 교섭체계다. 또한 이러한 협조주의적 노사관계는 스웨덴 사민당의 사상 이념적 전통과 결합된다. 경제정책, 사회화정책을 집대성한 비그포르스와 소련식 사회주의와 혁명주의를 배격하고 점진적인 사민주의적 개혁을 정치이념화한 칼레비가 대표적이다. 또 다른 스웨덴 체제의 주요구성요소는 거대기업 중심의 성장주의적 경제정책이다. 연대임금정책과 렌-마이드너 모델의 기본 구상 역시, 높은 고용률을 추구하는 동시에 거대 독점 대기업 중심의 경제 성장 정책에 기본 토대를 두고 있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스웨덴은 거대 법인자본의 활동이 어느 나라보다 왕성한 나라다. 스웨덴은 일찍이 독점기업을 용인하고, 차등 의결권을 부여하며, 아주 낮은 법인세를 유지해왔다.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와 거대 법인자본이 공존해온 셈이다. 실제로 1932년 집권한 스웨덴 사민당은 1970년대 초까지 시장주의적인 성장모델을 선택했다. 평등주의적 정책으로 일컬어지는 동일업종 내의 임금평준화 정책은 경쟁력 낮은 기업의 시장 퇴출을 통해 산업합리화와 자본집중을 촉진했다. 스웨덴 사민당은 집권 초기부터 재정지출에도 매우 신중했다. 스웨덴은 전후 경제 호황기에 긴축재정 기조를 바탕으로 임금인상 자제, 간접세 인상 등을 통해 인플레를 관리했다. 시장 친화적 정책은 효율성을 높여 성장에 기여했고, 이를 기반으로 고용증대,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확대, 생산적인 복지, 삶의 질 향상 등을 성취해왔다. 다만 스웨덴식 성장경제 모델이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구분되는 점은 성장과 함께 고용에 중점을 두면서도, 특수한 국내외의 역사적 조건들로 인해 시장 친화적 경제정책과 평등주의적 분배정책을 결합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스웨덴 모델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한 대안이라기보다는 냉전과 자본주의적 호황이 만들어낸 특수한 조건의 효과로 자본주의적 모순에서 빗겨나 있을 수 있었던 예외적인 사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자본주의가 금융세계화로 수렴하는 과정에서, 스웨덴은 더 이상 예외로 남지 못하고 여타의 서구유럽국가들과 엇비슷한 신자유주의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일국적인 자본주의적인 성장을 보장해주었던 특수한 국내외적 조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살쮀바덴 협약정신과 협조주의적 노사관계 스웨덴의 노사관계는 국가의 개입보다는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 간의 장기간의 협조주의적 협상을 특징으로 해왔다. 이러한 노사관계 정착의 기점이 되는 것이 1938년에 체결된 살쮀바덴 협약이다. 이 협약의 핵심내용은 첫째, SAF와 LO로부터 각기 3인씩 파견되는 대표들로 노동시장위원회를 구성하여, 기업단위나 산업단위에서 노사간 교섭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다루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노동쟁의 절차를 제도화하는 동시에, 직장폐쇄도 어렵게 하고, 노동자들의 파업도 실행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살쮀바덴 협약은 그 구체적인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가진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 이른바 살쮀바덴 정신이 바로 그것인데, 노사간 분쟁사항에 대한 LO와 SAF의 조정권한을 대폭 강화시킴으로써 분쟁사항이 국가의 직권중재나 노동법원을 통한 사법적 절차로 다루어지기 전에 노사중앙조직들이 가능한 한 자율적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한편, 파업이나 직장폐쇄와 같은 대결을 되도록 피한다는 것이다. 협조주의적 노사관계의 정착과 계급교차연합의 형성 과정 살쮀바덴 협약이 체결되기 이전에 스웨덴 노동운동은 매우 격렬한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자본가단체들 역시 매우 중앙집권적인 결속력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SAF는 LO보다 앞서서 전국적인 중앙집권적 조직형태를 완성했다. 이에 반해 초기 LO는 소속연맹들을 확고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당시 건설부문노동자들은 스웨덴의 건설 산업이 국제경쟁으로부터 보호되는데다 스웨덴 특유의 기후조건에 힘입어 강한 교섭력을 가졌다. 이 때문에 건설노동자들은 LO소속의 다른 부문 노동자들보다 높은 임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수출의존도가 높은 제조업부문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노동자 스스로 억제하는 계급 협조주의 입장을 취했다. 대표적으로 LO내에 가장 규모가 커다란 금속노련의 노선이 그러했다. 그 결과 1931년 현재 건설부문노동자들의 임금은 전체산업노동자들의 평균 시간당 임금에 비해 1.7배 높은 수준이었다. LO는 이러한 노동자들 간의 격차와 입장 차이를 조정하지 못한 채 강한 결속력을 가진 SAF의 공세를 맞이해야 했다. 결국 LO는 수출부문 노동자들이 수출부문 자본가 및 사민당정부와 연합하고, 전투적인 노동자운동을 분쇄하는 대가로 협조주의적 노사관계를 정착시키는 계급교차연합(Cross-class Coalition, 계급연합)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앙 단체교섭 틀의 형성 1980~90년대 스웨덴 노동운동에 대한 신자유주의 공세의 핵심은 중앙교섭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스웨덴에서 중앙교섭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자본가단체인 SAF가 먼저 요구한 것이다. LO는 1952년에야 SAF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당시 SAF의 입장에서 산업별 노동자들의 임금상승 경쟁을 유도하기 쉬운 산업별 단체교섭보다는 중앙단체교섭이 임금인상을 억제하는데 보다 유리했다. 반면 LO의 입장에서는 LO산하 연맹들 간의 경제적조건과 입장차이가 컸기 때문에 중앙교섭요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LO가 중앙교섭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1950년대에 극심했던 인플레이션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스웨덴은 인플레이션을 동반하는 장기호황국면에 진입했는데, 호황은 노동에 대한 수요증가와 그로 인한 임금인상을 가져왔고, 이는 다시 물가인상과 뒤이은 임금상승이라는 인플레이션 순환을 일으켰다.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아온 집권 사민당의 입장에서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악순환이었다. 이에 따라 사민당은 LO에게 인플레이션 악순환 해결을 위한 임금동결을 요청하였고, LO는 사민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1949~1950년, 2년간 산하연맹들에게 단체교섭을 갱신하지 말도록 했다. 그러나 호황국면에서 이 같은 임금동결조치는 산하연맹들의 강한 불만을 낳았고, 1951년이 되자 LO는 산하연맹별 단체교섭을 허용하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23%대의 폭발적인 임금상승이 이루어졌고, 사민당정권과 LO를 당혹스럽게 했다. 사민당은 다시금 LO에게 임금동결을 요구했고, LO는 물가상승에 따른 생계비 상승분만큼만 임금인상을 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중앙 단체교섭 → (중앙교섭 결과를 전제조건, 즉 하한선으로 하는) 산업별 단체교섭 → 기업별 교섭 → 작업장단위 교섭]으로 이루어진 중앙교섭 체계가 마련된 것이다. 결국 스웨덴의 중앙 단체교섭은 노총 중앙이 집권 사민당의 임금동결 요청을 산하 노조들에게 강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1980년대 이후 스웨덴의 자본은 거꾸로 중앙 교섭체계를 무너뜨리는 데 총력을 기울였는데, 불황기에 자본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임금을 줄이고 투쟁하는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는 목적은 일관되었다. 연대임금정책 중앙교섭이 단체교섭의 형식이라면, 연대임금정책은 중앙교섭을 통해 LO가 추진한 임금정책의 내용이다. 연대임금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실현이다. 그런데 이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이 충실하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방대한 직무조사가 반드시 요구된다. 무엇이 동일노동인가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이종 노동들 간의 난이도, 위험성 정도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체계적인 직무조사가 있어야 다양하고 수많은 이종 노동들 간의 임금격차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설령 그런 조사가 (거대한 물리적인 기술적 난관을 해결하고)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더 중요하게는 이러한 격차와 또한 차이를 노동자 스스로 납득하고 능동적으로 해소하고 축소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 비전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제아무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조사 결과가 이루어진다 해도 실제 현장에서 적용되기도 어렵고, 이것만으로는 긍정적인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평의회주의적인 이행(변혁)과정에 대한 역사적 평가 차원에서 모색되어온 노동자 민주주의와 교통(communication), 대중의 지적 차이 감축이라는 사회변혁적인 과제들과 연관된다. 하지만 스웨덴 사민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 이 문제들은 임금정책 실행을 위한 직무조사라는 실무정책집행 차원에 머무르는 한계를 가진다. 주체형성과 이행, 대중운동과 같은 차원이 아니라, 행정적인 정책집행 수준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한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부터 올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 노동자들 간의 계급적 통합과 연대는 그저 하나의 불합리한 현실의 모순, 말 그대로 실현 불가능한 난제일 뿐이었다. 행정 정책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스웨덴에서 충분히 체계적인 직무조사에 입각하여 연대임금정책이 추진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LO가 연대임금정책을 추진한 방식은 임금격차를 낳는 원인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가능한 전반적인 임금균등화를 추진하는 방식이었다. 즉 임금격차의 원인이 노동의 난이도나 위험도이든, 기업들 간 수익성의 격차든 관계없이 가능한 한도에서 임금균등화를 추구하는 방식이었다. 구체적으로 전체 노동자층의 임금상승률을 고임금 노동자층의 임금상승률보다 높게 책정하는 방식으로 연대임금정책을 추진했다. 다시 말해 평등주의적인 임금균등화 정책이 위로부터 행정적으로 집행된 것이다. 연대임금정책의 확장과 변화, 렌-마이드너 모델 결국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삶과 노동, 경제구조를 실질적으로 바꾸어내는 연대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연대임금정책은 애초에 목적했던 만큼의 효과를 얻지 못했다. 거기에 고도성장에 힘입은 임금유동의 발생이 최초의 균열점을 만들어냈다. 임금유동이란 기업수준에서 최종 확정된 임금상승률이 중앙단체교섭이나 산업별 단체교섭을 통해 합의된 임금상승률을 상회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임금유동의 성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임금유동이 중앙단체교섭이나 연대임금정책이라는 인위적인 절차와 임금정책으로 결정된 임금수준을 교정하여, 시장원리가 제약 없이 작용했을 경우에 결정되었을 임금수준으로 복귀시켜준 것으로 해석된다면, 결과적으로 중앙단체교섭이나 연대임금정책은 아무런 효과를 낳지 못한 셈으로 볼 수 있다. 그냥 시장에 맡겨두면 마찬가지 결과일 것을, 공연히 절차만 복잡하게 만든 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임금유동은 LO가 추진한 연대임금정책이 임금인상 억제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분명하게 부각시켜 버렸다. 이러한 문제점이 부각되자, LO 연구국의 연구책임자였던 마이드너는 “임금유동에도 불구하고 연대임금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주장하면서, 임금유동에도 불구하고 보존되는 임금균등화를 그 효과로 꼽았다. 마이드너는 이후 LO의 경제학자인 렌과 함께 연대임금정책을 보다 확장하고 종합한 렌-마이드너 모델을 제시한다. 임금균등화를 추구하는 연대임금정책을 경기안정화정책(인플레이션 억제정책, 긴축정책), 산업합리화정책(산업구조조정),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확장-결합시킨 것이다. 그 후 렌-마이드너 모델은 종합적인 경제발전전략으로서 1950년대 후반 이후 사민당정권 경제정책의 골간이 된다. 렌-마이드너 모델의 핵심 정책 내용과 문제점 경기안정화정책 - 긴축정책 - 간접세 도입 렌은 긴축정책수단으로 간접세를 도입한다. 하지만 간접세는 역진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노동자들의 기본이익과 상충된다. 렌의 논리는 간접세 재정수입의 일부를 가장 빈곤한 계층을 지원하는데 사용함으로써 이 간접세의 역진성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렌은 정부가 강력한 긴축정책을 실시하여 흑자예산을 유지할 것을 권유한다. 연대임금정책 - 저임금노동자지원, 산업합리화 촉진 연대임금제도는 대기업 노동자의 양보를 전제로 설계된 것이다. LO는 연대임금제도를 통해 동일업종 동일노동의 성격을 가지는 경우 기업규모나 이윤 수준과 관계없이 동일한 임금을 지불하도록 하였다. 연대임금제도는 대기업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임금을 양보하는 한편, 동일임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중소자본은 퇴출(구조조정)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스웨덴의 연대임금정책은 경쟁력 있는 거대 법인자본 중심의 구조조정 정책과 결합되는 것이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노동인력의 원활한 이동을 지원한다. 성장하는 부문과 지역은 보다 많은 노동인력을 필요로 하고 쇠퇴하는 부문과 지역은 노동인력을 방출한다. 이때 방출되는 노동인력을 성장하는 부문과 지역으로 효율적으로 이동시킬 수 있어야 실업을 막을 수 있다. 특히 연대임금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면, 저수익 기업들로부터 대량의 인력이 방출되기 때문에 이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 노동자들을 위한 직업알선, 재교육, 새로운 지역으로의 이주에 필요한 지원 등이 필요하다. (겐트제도와 같은 실험보험제도도 그중 하나이다.) 강한 성장주의적 사고방식 이처럼 렌-마이드너 모델은 강한 성장주의적 사고방식을 기본으로 한다. 완전고용과 경제성장, 물가안정이라는 거시 경제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과 관련해서도, 수요보다는 공급측 요인을 더 강조한다. 산업합리화, 경제효율화는 지상과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경제성장에 따른 부작용은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렌-마이드너 모델에서는 중소기업이나 낙후지역의 발전을 지원함으로써 경제구조의 균형을 이룬다는 식의 사고는 찾아볼 수 없다. 생산적 복지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구조조정 정책의 보조정책일 따름이다. 스웨덴 모델이 위기에 빠지면서 등장한 임노동자기금 본래 임노동자기금안은 민간 대기업들의 이윤 중 일부를 신규 발행 주식의 형태로 노동조합이 소유-관리하는 임노동자기금에 매년 의무적으로 적립케 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노동조합이 민간 대기업들의 지배주주가 되도록 한다는 웅대한 청사진이었다. 일부 논자들은 이러한 청사진이 사회주의적 이행의 다른 길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웨덴 사민주의 모델의 꽃으로 소개되는 임노동자기금은 실은 스웨덴 모델이 고유한 내적 모순으로 위기에 빠지면서 나오게 되었다. 특히 임노동자기금은 LO가 직면한 대내적 정당성위기의 산물이다. 스웨덴 모델의 모순과 LO의 정당성위기의 표출 연대임금정책은 고수익부문 노동자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연대임금정책은 점차 직업 내부 임금억제정책에서 직업 간 임금억제정책으로 전환되었고, 인플레이션과 투자축소, 노동자집단 간 분열의 원인이라고 공격받게 되었다. 중앙단체교섭은 기업 단위노조들의 역할과 권한을 위축시켜, 풀뿌리노동자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그 결과 다양한 비공인 와일드캣 파업들이 발생했고, 노총 상층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들이 표출되었다. 또 거대기업 위주의 경제성장 정책은 결과적으로 재산과 경제적 권력이 소수 사적 거대 주주들에게 집중되는데 일조함으로써, 사민주의운동의 평등주의적 이념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모순을 가진다. 이러한 문제들이 하나둘 부각되자, LO는 임노동자기금안이라는 급진적인 정책안을 제출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LO의 급작스러운 제안은 1975년부터 1983년에 걸친 혼란스럽고 지루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자본가진영이 자본주의의 근간을 지키기 위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결집한 반면, 사민당과 LO진영은 제 각각의 계급적 기반과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념적 기반에 따라 분열했다. 게다가 기금논쟁이 진행되는 중에 폭발한 1979~1980년 세계경제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임노동자기금을 찬성 추진하는 진영이 기금안을 본래의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이행의 관점보다는 경제위기 극복 방안의 하나로 강조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노동자권력과 사회경제적 힘을 형성하기보다는 임노동자기금을 시장에 동원해서 불황을 해결하자는 정책대안이 그것이다. 또 사민주의운동의 평등주의적 이념과 배치되는 기금안의 여러 한계점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문제들보다는 효율적인 사회-경제운영 모델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 더욱 부각 되었다. 그러한 변화를 거쳐, 마침내 1983년 사민당이 제출하여 의회에서 최종 통과된 실제 임노동자기금안 법안은 애초의 급진적인 성격과 취지가 무색해진 모습이었다. 당초에 계획했던 기금규모가 현격하게 축소되어 실질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만한 위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본연의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시장원리 중심적인 기금운영방식이 전면화된 형태이었던 것이다. 임노동자기금안 실패의 원인 평가 첫째, 임노동자기금안은 부르주아 진영의 강한 결집과 격렬한 저항으로 변질되었고 실질적으로 좌초되었다. 둘째, LO와 사민당 진영은 노동자계급 내외부의 계급적, 이념적, 사회경제적 차이에 따른 이해관계의 분열과 대립을 통합하는데 실패했다. 예컨대, 육체노동자와 비육체노동자, 특히 1980년대 들어 더욱 격렬해지는 공공노동자와 사적부문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경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셋째, 임노동자기금 논쟁은 위력적인 대중운동의 전개와 결합하지 못했다. 그것은 국회나 국가연구위원회와 같은 전통적인 조합주의적인 의사결정구조 내부의 정책적 논쟁으로 국한되었다. 넷째, LO는 처음에는 매우 의욕적이고 공세적인 자세로 제도도입을 추진했으나, 전반적인 경제여건이 악화되고 자본가 진영과의 대립이 격렬해지자, 줄곧 수세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결과적으로, 계급적 이념적 통합력이 부족한 가운데, 연대임금정책을 둘러싼 LO 내부의 분열을 해소하기 위한 맥락에서 제안된 경제 정책안으로서의 임노동자기금안만으로는 부르주아 진영의 격렬한 저항을 이겨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임노동자기금논쟁 종결 이후 스웨덴 사민주의 모델의 해체와 신자유주의화 변질된 임노동자기금안이 도입된 이후, 사민당 정권은 1980년대 내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민간기업의 수익성 제고와 시장규제완화, 복지국가 팽창억제를 뚜렷한 정책노선으로 삼아왔다. 이에 힘입어 스웨덴 자본은 자유화된 외환시장 등을 통해 상당량의 자본 해외이전을 단행했고, LO의 힘의 근간인 중앙 단체교섭으로부터 이탈해 갔다. 1990년 SAF는 중앙교섭단위를 해체했고, 1년 뒤에는 노사정위원회에서 대표를 철수시켰다. 스웨덴 노동운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스웨덴식) 연대임금정책 또한 1980년대 들어 그 제도적 기반인 중앙단체교섭 체계가 와해됨에 따라 더 이상 작동될 수 없었다. 그러나 LO는 중앙단체교섭이 와해된 원인인 자본주의의 위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기득권들의 방어를 넘어서는 공세적인 운동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위기의 원인을 직시한 계급 통합적 운동보다는 자본의 위기에 조응하는 계급내부 특수이익 방어에 머물렀던 것이다. 결국 신자유주의 공세에 직면한 LO의 모든 요구는 (불황기에 불가능해진) 더 많은 재정지출과 중앙단체교섭 복원을 요구하는 즉자적인 방어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고, LO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반복적인 패배를 경험하며 쇠퇴했다. 반면 사민당의 오랜 집권에도 불구하고 학계, 언론계 등의 지식인사회 영역에 뿌리내린 오랜 부르주아적 권력은 건재했다. 거대하지만 오랜 집권과정에서 운동성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혁신의 전망을 세우지 못한 노동자운동은 거센 신자유주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소련사회주의권 붕괴 이후로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화되어 이어졌고, 2000년대에 이르러 스웨덴 사민주의 모델은 이미 여타 유럽연합 소속국가들의 사회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1990년대 금융위기와 통화주의적 규범주의 정책의 전면화 1970년대 불황기에 스웨덴 사민당 정부와 우파정부는 모두 케인즈주의적인 수요부양정책을 가교로 삼아 불황을 건너뛴다는 일명 가교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가교정책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어 사민당 정부는 1980년대에 이른바 ‘제3의길’을 내세우며, 통화주의적인 규범정책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제3의길 정책의 핵심은 ‘규범정책’이라고 불리는 시장주의적 정책개혁을 도입하는 것이다. 즉 완전고용보다는 물가안정을 중시하고, 단기적 임기응변적 처방(주로 케인즈주의적이거나 사민주의적 처방들)보다는 장기적으로 일관성 있는 정책을 통해 스웨덴 경제의 기초체력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제3의길 정책 역시 1980년대 말에 높은 인플레이션과 부동산-금융거품을 야기함으로써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만다. 그 후 1990년대 초반에 스웨덴은 고평가된 크로나화에 대한 환투기 공격으로 심각한 금융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로써 스웨덴은 1992년에 제3의길 정책의 근간이었던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 이행한다. 변질된 형태로 도입된 임노동자기금 또한 이때 폐지된다. 1993년부터 스웨덴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의 기조로 인플레이션 타깃팅을 채택하였다. 또 1994년에 집권한 사민당 정권은(1994년~2006년)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예산개혁을 단행하고,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화했다. 이는 1990년대 들어 물가안정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하는 통화주의적 합의 또는 (시장)규범 정책적 합의를 사민당도 확고하게 수용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반면 LO는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해왔다. LO는 특히 정부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면서 수요부양정책을 요구했고, 무력화된 중앙집권적 단체교섭체계의 복원을 주장했다. 그러나 LO의 반대는 별다른 성과를 못 보고, 1990년대 이후 통화주의적 거시경제정책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자 LO는 점차 신자유주의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1996년 LISA프로젝트 보고서에서 LO는 “과도한 임금상승을 자제해야 하며, 노동시장정책은 인력의 이동성을 높이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웨덴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약평 세계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빠지면서 스웨덴 모델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소개하는 논의가 간혹 있다. 하지만 스웨덴은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의 외부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고, 보수주의적인 통화정책과 거대자본 중심의 성장주의적 경제정책이 결합된 자본주의 경제체제다. 스웨덴 모델이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아니라, 오히려 스웨덴 모델이 1980~90년대에 실패하면서 선택한 대안이 신자유주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신자유주의가 곤경에 빠진 상황을 놓고 스웨덴을 대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웨덴 모델은 말하자면 ‘일국 사민주의’인데, 그 골간은 일국수준의 계급타협에 기반한 국민경제적 성장모델이다. 스웨덴 모델은 자본주의적 성장과 수출지향 공업화전략을 기반으로 성립했다. 스웨덴의 경제모델은 물가상승을 억제하면서도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는 방향을 찾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그렇기 때문에 불황기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 본연의 모습대로 작동되기 어렵다. 케인즈주의적 수요관리정책은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사민당 내에서조차 신뢰를 잃었다. 게다가 일국적인 사민주의를 실현시키는 전제조건이었던 강한 고정환율 규범과 일국적인 금융통제체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초민족적인 금융세계화의 결과 사민주의적인 계급타협은 경제적인 토대를 잃어버리고 크게 변형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웨덴 모델을 가능케 했던 다른 한 축은 강력하고 거대한 노동조합과 사민당정권의 코포라티즘 체제다. 그런데 스웨덴의 강력한 노동조합-사민당 권력은 애초부터 거대 법인기업과 국가가 주도하는 국민경제적 성장모델과 생산양식을 바꾸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자본주의적 체제의 유지를 조건으로 하는 계급타협을 추구했다. 그 대신 노동조합-사민당 권력은 자본주의적 성장의 몫을 효과적으로 분배하는 복지정책-정치에 힘썼다. 문제는 이러한 복지 분배정책-정치가 계급 내 분할과 갈등에 매우 취약하다는 고유한 문제점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복지정책은 필연적으로 비용부담의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계급 간 분배개선에는 어느 정도의 구조적인 제한선이 있고, 계급 내 분배를 강화하게 된다. 복지의 수혜자와 부담자의 이해가 충돌하고, 정규직-비정규직, 남성-여성, 실업자-취업 노동자, 노동빈민-상위계층 노동자 사이에서 수혜계층과 부담계층의 이익이 갈등을 빚는다. 그 결과 복지정책-정치는 계급적 통합력을 형성하거나 계급주체 형성에 기여하기보다는 계급 내부 분할과 갈등을 양산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경제 위기 시기에 복지정책-정치는 자본주의 지배체제와 함께 위기에 빠지면서, 계급투쟁을 약화시키고 계급분할을 확대한다. 나아가 이렇게 분할된 노동자 계급대중은 자본가 내부의 갈등에 손쉽게 동원되어, 노동-자본-국가가 연합하여 다른 노동계급 집단을 공격하는 데 이르기도 한다. 예컨대 스웨덴에서 1950년대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자 수출중심의 금속산업 자본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 와중에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던 건설노동자들과 수출기업 소속의 저임금 금속노동자들이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이런 갈등국면은 나중에는 수출기업 자본가 그룹과 금속노동자들이 노동-자본 연합을 맺고, 전투적인 건설-고임금노동자들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받던 공공부문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요구가 자본과 국가로부터 강력하게 제기되는 가운데, 민간부문 남성 노동자들이 민간부분 사용자협회 SAF 및 사민당정권과 연합하여 공공부문 여성노동자들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사건의 발단은 생산성이 낮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생산성이 높은 금속노조와 동일한 수준의 임금인상을 요구하자, 스웨덴 총연맹인 LO의 금속노조가 민간부문 사용자협회인 SAF-사민당 정권과 손을 잡고 공공부문 노조를 민간부문에 기생하는 집단이라고 비판하고,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을 요구한 것이다.
“청소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 평가와 과제” [편집자 주] 노조페미니즘팀에서는 총 세 차례에 걸쳐 여성노동자 조직화 과정에 대한 분석과 제언을 담은 글을 연재하고자 한다. 청소노동자를 시작으로 간병·요양노동자, 제조업 여성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논의를 제안할 것이다. 이를 통해 현재 추진 중인 공공노조 서경지부의 청소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 공공노조의 간병·요양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 서울남부지역 공단노동자 조직화사업에서 여성노동과 여성노동자 조직화에 주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 다만 각 글의 구성, 서술 방식은 단일하지 않을 수 있다. 청소노동자의 경우는 진행한 사업을 일단락 짓고, 사업 추진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정리할 예정이다. 반면 간병·요양노동자와 제조업 여성노동자에 대한 글은 향후 본격적으로 전개될 전략조직화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작성될 것이다. 대다수 여성노동자가 처한 고용불안과 저임금 문제는 여성노동에 대한 사회적인 가치평가와 무관하지 않다. 예로부터 여성이 집안에서, 무급으로 수행해 온 일의 연장인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은 청소노동자, 가정관리사, 간병인, 요양보호사 등의 임금노동 형태로 드러나지만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형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심지어 노동자로도 인정받지 못하며 근로기준법의 사각지대로 내몰려 있거나, 인격적 대우는커녕 언어폭력과 성폭력에 시달리는 일도 많다. 여성의 노동에 대한 분석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전체 노동자로 포괄되지 않는 여성노동자의 경험과 노동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여성노동자가 고유하게 겪는 노동 현장과 노동조합활동에서의 난점과 특수성을 발견하며, 이에 대해 무감각했던 기존의 노동자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의 연재를 통해 전체 여성노동자의 삶과 주체화 과정을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 시작점이 되었으면 한다. 또 현재 추진 중인 전략조직화 사업 속에서 보다 적극적인 논의가 만들어지길 희망해 본다. * 노조페미니즘팀은 노동자운동의 페미니즘적 혁신의 구체적 경로를 모색하기 위해 구성되었다. 전체 노동자운동에서 여성사업에 대한 문제의식과 활동 평가를 기반으로 노동조합 활동에서 여성사업 기획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기획 연재는 격월로 진행되는 <노동위원회 연속워크샵>을 기반으로 작성될 것이다. 통계로 보는 청소노동자 노동부 산하 기관 한국고용정보원의 「산업별 직업별 고용구조조사(2009」에 따르면, 청소노동자는 426개의 직업 중 403,976명을 차지하여, 직업순위 1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임금노동자 중에서는 다섯 번째로 종사자가 많기도 하다. 이는 청소노동이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노동임을 의미한다. 그 중 남성이 66,380명(17.5%)이고, 여성이 313,543명(82.5%)으로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다. 연령을 살펴보면 50세 이상이 82.1%를 차지하는데, 고령 노동자가 많은 직업임이 한 눈에 드러난다. 가구주인 경우는 남성이 91.7%, 여성이 50.6%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도 절반 정도 됨을 알 수 있다. 반면 학력은 중졸 이하가 76.6%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고용은 상용직 50.6%이고, 임시직 41.0%, 일용직 8.5%인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상용직의 의미가 통상적인 정규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의 사업장에서 1년 이상 근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해서 정년이 보장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평균임금은 81.8만원이다. (남성 101.8만원, 여성이 77.6만원. 여성노동자 임금이 남성노동자의 76.3%에 불과하다.) 평균임금에는 각종 임금항목(수당)이 포함된다. 2009년 당시 최저임금이 시간당 4천원, 주 40시간 기준으로 83.6만원(주 44시간 기준 90.4만원)이었으므로, 대부분이 최저임금 위반사업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주당 근로시간은 남성이 45.7시간, 여성이 44.0시간으로 법정 근로시간보다 많이 근무하고 있었다. 청소노동자의 임금수준은 전체 426개 직업 중 낮은 순위로 일곱 번째를 차지한다. 고령의 여성, 청소노동자가 되다 “내가 60이 넘었는데 어디 할 건 없고 집에서 살림만 하던 사람이 뭐 방법이 없더라고…. 그래서 동네 아줌마한테 어디 돈 벌데 없냐고 하니깐, 여기서 해보라고 해서 와봤거든.” “환갑이 다 되도록 가정주부였다가 남편의 은퇴로 일을 시작했지. 다른 일은 다 나이 때문에 못해. 식당 아니면 청소일인데, 식당은 쉬는 날도 없잖아” “20년 넘게 경리일을 하고 오십이 다 돼 일을 찾다가 학교로 왔다.” “30년 동안 식당에서 부엌일을 하고 음식을 나르다가 4대 보험이 된다는 말에 학교 청소노동자 됐어요.” 고령여성은 경제활동에서 배제되는 위축을 경험하다 별다른 선택지 없이 청소노동을 시작한다. 보통 대부분의 청소노동자들은 청소노동을 시작하기 전 자영업, 노점, 공장노동자, 전업주부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다가 청소노동을 하게 되는데 일을 시작하는 나이는 평균 51.6세이다.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여전히 한국사회는 남성이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고, 여성은 가사와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는 ‘성별분업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여성의 노동은 저평가되며 저임금 역시 당연시된다. 청소노동 또한 그러한 인식의 연장에 있다. 통계수치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의 청소노동자들은 최저임금노동자이다. 노동조합이 없는 곳의 경우는 휴게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최저임금도 못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용돈벌이’나 가계에 ‘보탬’이 되는 수준을 넘어서 생계유지를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령이라는 이유만으로 생활이 불가능한 저임금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젊은 남성 관리자로부터 시달려야 하는 각종 (언어/성)폭력과 위협도 심각한 수준이다. 노동기본권은 물론 인권의 사각지대에까지 내몰려 있는 것이다. 일상적인 해고위협에 시달리는 비정규직노동자라는 고용형태는 너무나 부당한 대우와 열악한 노동조건일지라도 ‘내가 이 나이 먹어서 다닐 수 있는 직장이라도 있는 것에 감사’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점을 너무나 잘 아는 (남성)관리자들은 청소노동자들을 인격적으로 무시하고, 욕설을 내뱉고, 상납을 받기도 하면서 청소노동자들의 불만을 효율적으로 통제한다. 노동조합과 처음 만나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청소노동자는 7,853명으로 전체 청소노동자의 2.0%이다. 매우 낮은 가입률이다. 청소노동자들은 여성비정규직노조(구 여성연맹), 여성노조, 일반노조, 공공노조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공공노조 서경지부에는 약 1,000명 정도의 청소노동자들이 있는데, (고려대, 연세대, 연세재단빌딩, 이화여대, 홍익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성신여대, 프레스센터, 롯데손해보험빌딩분회 등) 대학교 청소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조합원이 된 청소노동자들에게 노조는 노동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었지만, 대부분 이전의 노동조합에 대한 이들의 인식은 ‘폭력적이고 과격한 것’, ‘빨갱이’,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언론의 노동조합 죽이기, 레드컴플렉스 등이 조합원들에게도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구체적으로는 ‘교육’이나 자신의 권리를 찾아 ‘투쟁’하는 과정을 거치며 노동조합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가족들의 지지 또한 대체로 부정적이지 않다고 입을 모으기도 한다. “작년 12월 노조를 결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가 비정규직이란 걸 알았죠. 그 전에는 관심도 없었고 글자(뜻)도 몰랐고 슬픔과 아픔도 몰랐어요. TV에 비정규직 얘기가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렸어요. 이제까지 우리가 파견근로자인지도 모르고 살았던 거죠.”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나서 달라졌어요. 내 소리를 낼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이제는 노동조합하는 사람이 재단 이사장보다 더 위대해보여요. 20년만 젊다면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어요.” “우리 큰 아들은 “신여사님 대단하셔”라면서 농담을 해요. 우리 며느리도 “몇 개월 사이에 우리 어머니가 많은 걸 배우셨다”며 놀라워하죠. 밥 한 끼 권리 외치면서 캠페인하는게 초라해 보일 수도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저는 개의치 않아요.” 통계 등의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합원들과 노동조합을 만들고 난 후 달라진 점, 제일 좋은 점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대답은 예상했던 대로 임금인상이나 고용안정, 주5일제 시행과 같은 노동환경 개선이다. 또한 비슷하게 많은 대답이 나오는 것으로 평소 눈치 보기 바빴던 관리자들의 눈치를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 더 이상 숨죽여 살지 않아도 된다는 점 등이다. 노동조합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을 가장 크고 좋은 변화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혹시 눈이라도 마주칠까 피해 다니기 바빴던, 나를 무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관리자들과 큰 소리로 싸워보기도 하고 노동조합을 통해 그야말로 ‘맞짱’ 뜨는 일은 대부분의 청소노동자들에게 가슴이 방망이질 쳐지는 가장 떨리는 순간이자 가장 짜릿한 순간이다. 노동조합의 일상 활동은 대부분 임단협을 중심으로 한 임금인상투쟁이 핵심이다. 뿐만 아니라 미화사업장의 경우는(대부분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그러하듯) 1년이나 2년 단위로 재계약이 이뤄지기 때문에 해마다 고용과 관련된 크고 작은 투쟁을 해야 한다. 최저임금 투쟁 또한 집중해야 하는 중요한 투쟁이다. 조합원들은 반복되는 투쟁과 잦은 일정에 지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그만큼 ‘자연적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투쟁과 각종 일정들을 빡빡이 소화하는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나 일상 활동이 다채롭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나 노동조합을 만들고 관례적으로라도 하는 간부교육 등은 대상의 특수성 때문에 기획조차 되지 못하였다. 이는 청소노동자들이 조합원이 된 이후 각종 일정에는 열심히 ‘참가’ 혹은 ‘동원’되나 주체로서 활동하는 데에는 부족한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일례로 핵심사업인 임단협 과정만 보더라도 현장간부들이 교섭위원으로 선출은 되지만, 노동조합의 체계나 역할, 단체교섭의 의미 등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없다보니 지부임원이나 간부들에게 의존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전략조직화 사업을 시작하다 - 교육을 통해 주체로 거듭나기 대학의 비정규직 노동자, 그중에서도 청소용역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공공노조의 <대학 비정규직 전략조직화사업>은 2009년부터 시작했다. 사업은 크게 미조직사업, 간부육성사업, 여론사업 등 세 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전략조직화 사업을 진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미조직 청소노동자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조합원과 간부들이 미조직사업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청소노동자를 조직하더라도 전담활동가가 아닌 기 조직된 청소노동자가 청소노동자에게 직접 말을 건네고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업단에서는 고민 끝에 미화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기획하였다. 활동하고 있는 미화사업장 핵심간부들을 대상으로 월 1회, 4시간 집합교육의 형태로 총 7개월 동안 진행하는 교육이었다. 교육을 조직적으로 제안하고 진행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동안 지부에서 전체 간부들을 한데 모아 노동교실 같은 교육을 해 온 적은 있지만 특정 직종(미화 업종과 같은)만 따로 분리해 교육을 했던 적은 없었다. 가장 큰 우려는 50-60대 중·고령 여성간부들이, ‘아줌마’ 혹은 ‘할머니’ 조합원들이 그 긴 시간에 이르는 교육을 소화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힘들고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에 맞는 교육 프로그램을 새로 짜는 것도 어려운 고민이었다. 실제로 교육 초기 미화간부들은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발표)해야 하거나 토론하는 교육을 낯설어했으며, 교육이 끝나자마자 제대로 된 뒤풀이도 함께 하지 못하고 가족들 저녁 챙겨주어야 한다며 쏜살같이 교육장을 빠져나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교육생들의 열의는 매우 높았다. 교육이 진행될수록 발표하는 것에 익숙해지기도 하고, 전반적인 교육 분위기도 훨씬 좋아졌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8남매 중 큰 딸로 태어나서 집안 일만 한다고 공부를 못해 아쉬워요” “10년만 젊었으면 더 없이 사는 사람들의 권리에 대해 더 공부할 수 있었을 텐데….” 교육준비 과정에서 특히 중요하게 고려했던 점은 청소노동자들의 경우 살아오면서 교육기회는 물론 사회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발표할 기회가 적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다보니 강사에 의존한 강의중심교육은 무리였다. 그래서 매 교육마다 50분 안팎의 강의와 참여형 토론을 배치하였고, 같은 교육주제라 할지라도 다른 형태의 두 세 차례 토론을 거칠 수 있게 하였다([참고 1]). 강의 또한 청소노동자 현실과 정서가 반영될 수 있도록 강사를 조직하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몇 차례의 기획회의를 거쳤다. 교육 주제는 노동자 의식, 외국의 청소노동자 조직화 사례, 청소노동자의 일과 건강, 역사로 보는 노동운동사 등 다양하였지만, 매 주제의 교육내용마다 미조직사업의 동기부여와 주체로서 작게나마 당장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접목시키려 노력하였다. 이를테면 교육 말미에 노동조합 소개 및 가입안내가 적힌 포켓티슈 3개씩을 교육생들에게 나눠주고, 다음 교육 때까지 3명의 미조직노동자를 만나서 포켓티슈를 건네며 노동조합 이야기를 꺼내보는 것을 숙제로 결의하는 식이다. 간부교육은 철저히 ‘학교’ 형태로 운영되었는데, 청소노동자 대부분이 가난했던 시절, 남아선호 시대를 살며 배움의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한 세대들이기에 학교식 운영을 통해 배움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입학식, 교장, 출석부, 담임선생님, 숙제, 시험, 방학, 졸업여행, 교육생의 이름이 적힌 노트 선물 등은 조합원들이 즐겁게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충분한 기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올해 3년차에 접어든 간부교육은 실제로 교육을 이수한 간부들이 이전보다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으로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성과를 내고 있다. 조합원들 말마따나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교육일지라도 교육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노조 활동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렇게 간부교육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몇 가지 요인으로는 첫째, 단체협약에 조합원들의 교육시간이 확보되어 있었고, 지부에서도 이를 적극 활용하여 안정적인 교육시간을 만들어낸 점. 둘째, 전략조직화 사업 기금을 통한 충분한 예산확보. 셋째, 조합원들의 정서와 조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섬세한 교육기획 등을 꼽을 수 있다. 더불어 <따뜻한 밥 한 끼 권리 캠페인>이나 지부의 투쟁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전략조직화 사업이 탄력을 받는 속에 교육이 이루어진 것도 활기차게 교육을 진행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여성 특유의 친화력으로 새로운 노동자들을 만나다 청소노동자가 조직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 양상으로 분류된다. 고려대, 성신여대, 연세대, 이화여대, 홍익대처럼 학생들과 연대 사업을 통한 조직화 방식, 덕성여대, 동덕여대처럼 원청 노조(대학노조)와의 연대를 통한 방식, 기 조직된 조합원들과의 연계 및 투쟁의 입소문을 통한 자연발생적 조직화 방식이 대표적으로 조직화 되는 과정이다. 전략조직화 사업단에서는 이 중 학생들과의 연대 사업을 통한 조직화 과정을 주요 조직화 방식으로 선정하고 이화여대와 홍익대분회가 출범함으로써 이를 유의미한 경로로 확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청소노동자가 청소노동자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유효한 조직화 방식이라는 것도 확인하였다. 구석구석 숨어있는 휴게실의 위치부터 파악하는 것으로 조직화 사업은 시작된다. 해당 대학의 학생들과 사업담당자가 적게는 주 1회, 많게는 2-3회에 걸쳐 정기적으로 휴게실을 방문하고 기본적인 실태조사를 수행하며, 노동자들을 직접 설득하는 시간이 조직화 과정 중 가장 긴 시기이자 중요한 과정이다. 학교의 크기나 노동자 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리는 이 시간 동안 노동자들의 주요 불만지점을 파악하고, 진심으로 노동자들과 토론하여 이후 분회 간부로까지 활동할 수 있는 (핵심)주체가 세워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는 간부교육을 이수한 분회 핵심간부들과 적극적인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조직화 프로그램 등을 배치하였다. ‘새벽출근선전전’은 출퇴근길 선전전으로 조직화에 성공한 미국 SEIU노조의 사례에서 착안한 것이지만 특유의 친화력으로 출근길 버스정류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언니·동생이 되는, 청소노동자들에게 딱 맞는 조직화 방식이기도 하였다. 미화조합원들은 첫 차를 타고 출근하는 미조직 청소노동자들을 만나 비슷한 처지에 대한 공감부터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이야기를 꺼내는 것까지 어떠한 활동가들보다 조직활동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후 휴게실 방문사업에서도 간부들의 역할은 컸는데, 잦은 방문은 아니었지만 연세대분회 간부들이 이화여대 조직화 단계에, 이화여대 간부들이 홍익대 조직화 단계에 함께 하면서 미조직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게 새로 조직된 조합원들을 바라보며 갖게 되는 분회 간부들의 자긍심과 애정은 남달랐다. 나의 삶을 이야기할 수 있는 노동조합 저임금, 간접고용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폭로하고 사회적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시작한 <청소노동자들에게 따뜻한 밥 한끼의 권리를!> 캠페인단 활동은 전략조직화 사업의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이다. 캠페인 활동을 통해 청소노동자들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언론을 통해 조명되면서 우호적인 여론형성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캠페인단에서 진행했던 여러 사업은 단순히 우호적인 여론형성을 넘어 청소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환경, 권리, 나아가 삶의 문제에 대해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발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는 교육과는 또 다른 주체화 과정이었다. 유령이 아닌 당당한 ‘노동자’임을 선언했던 <청소노동자 행진>에서 조합원들은 틈틈이 연습했던 풍물을 연주했다. 합창단을 만들어 가사를 개사한 노래공연을 직접 준비하기도 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대회의 모든 발언을 채우기도 했다. 한 발 나아가 조합원이 직접 사회까지 보았던 <청소노동자 노래자랑>은 청소노동자들의 일상을 드러내며, 그 속에서 또 다른 주체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성공적인 실험이었다. 일하면서 작게 흥얼거렸던 노래는 노래자랑이라는 무대를 만나 나의 일과 삶을 그리고의 나의 장기를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는 훌륭한 기제가 되었다. 일하면서 가장 힘든 점, '맞아맞아 꼴불견 베스트5' 등을 이야기할 때는 지나가던 시민들도 청소노동자들과 하나가 되는 분위기였다. 엄마의 무대를 위해 손수 피켓을 만든 딸의 응원은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실험들은 ‘직접고용 쟁취하자’가 아닌 ‘학교랑 우리랑 직거래 합시다’와 같은 청소노동자들의 생생한 표현으로 발현되기도 했다. “나는 정말로 노래 부르는 것 빼고는 잘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는데, 마침 노동조합에서 노래자랑을 한 대자나요. 그래서 얼른 신청했지요. 그런데 내가 은상을 탔다는거 아니겠어요! 나는 정말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을거에요. 내가 노동조합 아니면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요. 나는 정말 노조만나서 인생 대박터졌어요. 이번 간부 교육도 정말 열심히 들을거에요.” 대학비정규직 전략조직화 사업은 2개 대학 조직화에 성공하며 미조직사업으로서의 성과를 충분히 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몇몇 대학을 조직화 거점으로 선정해 집중적인 조직화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 올해 안으로 몇 개의 대학에서 노동조합 깃발이 더 휘날릴지도 모른다. 대학 뿐 아니라 빌딩, 관공서 등으로 조직화 범위를 확대해나가기 위한 실험과 노력도 진행 중이다. 전략조직화 사업이 조직화 과정에 전담활동가를 배치하는 등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여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집중적 투자는 지속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한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들을 별도의 특화된 사업이 아닌 지부의 자산으로, 일상 활동으로 녹여내는 것은 향후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사업을 평가함에 있어서 ‘조직화의 성과’ 이외에도 중요한 부분은, 처음부터 사업을 통해 미화 조합원들을 노동조합의 주체로 세워내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는 것, 그에 따른 사업의 기획과 집행을 했으며 실제로 그러한 실험을 통해 미화조합원들이 노동조합 활동의 주체로서 성장하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가 지부 활동에 큰 활력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략조직화 사업은 많은 성과를 남겼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미화 조합원들의 연령 등을 고려하면 다른 젊은 조합원들에 비해 활동주기가 짧을 수밖에 없고 활동의 제약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어떤 조합원들보다 청소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난 그 순간, 자신의 인생이 달라졌다고 자신한다. 하기에 앞으로도 조합원들의 가능성을 믿고 보다 진일보한 투쟁과 사업들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진행될 전략 조직화 사업은 조합원과 분회 간부들이 조직활동가로서 자기 역할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도록 기획되어야 한다. 조합원들이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이 있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하지만 이미 청소노동자들은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엄혹한 정세 속에서도 그 어떤 노동자들보다 생동감 넘치게, 활기찬 노동조합 운동을 만들어 가고 있고, 미조직된 노동자들을 만나고 있다. 우리는 전국의 40만 청소노동자가 당당한 노동자임을 선언하고 노동조합의 주체가 되는 그날까지, ‘더 많은 우리’를 만들어가고 싶다는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을 응원하고 지원해야 한다.
인터뷰어: 김유진 | 조직국장 기획/정리: 전준범 | 정책위원 우지영 | 회원 『사회운동』은 [인터뷰]를 통해 노동자운동의 혁신과 민중운동의 발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동지들을 만나 운동 과제와 쟁점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순서로 금속노조 경기지부 윤욱동 수석부지부장을 만났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긴 수염. 강렬한 인상만큼 윤욱동 수석부지부장은 총궐기투쟁과 지역노동운동의 강화에 열정적이었다. 이번 인터뷰는 『사회운동』 2011년 5·6월호에 실린 「경기지역총파업, 어떻게 준비되고 있나?」(김유진)에 이어 경기지역총궐기를 제안하고 주도적으로 투쟁을 조직하고 있는 금속노조 경기지부(이하 경기지부) 활동가로부터 투쟁의 준비과정과 향후 과제에 대한 구체적 전망을 듣기 위해 기획되었다. 또한 인터뷰 과정에서 노동자 운동에 대한 전반적 평가와 혁신방향 역시 다룰 수 있었다. 사회운동: 소개를 부탁드린다.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나 금속노조운동, 지역노동자 운동에 애정을 가지게 된 삶의 여정도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다. 윤욱동 수석부지부장(이하 윤욱동): 1986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이때 반월공단, 노동자 도시로 이사를 왔다. 87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87년 말 대통령 선거 때 구로구청으로 부정투표함을 실은 봉고차가 들어가다가 발각된 사건이 있었다. 그때 그걸 막는 싸움에 가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되었던 것 같다. 노동자투쟁보다 정치투쟁을 먼저 경험한 듯하다. 우리 또래 중 87년 투쟁이 계기가 되어 활동하는 사람이 아마 많을 텐데, 대학을 안 다녀서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웃음) 87년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반월공단에 취직을 했다. 제약회사에 다녔는데 7,8,9 노동자대투쟁 때 일주일간 점거투쟁이 있었다. 아쉽게도 노동조합 결성은 실패했지만 이때 노동운동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군대에 갔다 온 뒤로 91년에 반월공단에 있는 계양전동구에 입사했다. 노동조합이 있었지만 한국노총 소속 어용노조였다. 1년 정도 일을 하다가 대의원 활동을 시작해서 93년도에는 민주집행부가 들어서게 됐다. 이때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했고 그때부터 전노협 가입 시도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위원장이 공안기관의 협박에 무너지면서 파업을 앞둔 상황에서 직권조인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전노협 가입에 실패했다. 그리고 95년에는 내가 직접 위원장을 하게 됐다. 96년 2월 회사는 민주노총 가입을 빌미로 나에게 해고통지를 했다. 회사에서 쫓겨나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몇 개월 뒤에 노조 설립 이래 최초의 파업이 전개됐다. 그때 몇 달간 파업을 했는데 복직은 안 됐다. 회사가 직장폐쇄하고 구사대를 조직해서 조합원 쫓아내는 상황이었는데, 아마 조합원에 대해서만 직장폐쇄를 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였던 것 같다. 회사 바깥에서 몇 달간 고생하고 노조가 무너지기 직전까지 갔었는데 마지막에 극적 합의에 이르렀다. 350명 조합원 중 30명 정도가 남았었는데 깃발 들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계양전기지회는 지금까지 경기지부 소속 사업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노동자로서 투쟁하고 노동조합을 건설해나가면서 지역조직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인가 뼈저리게 고민했다 윤욱동: 이후 지역에서 활동을 하다가 다시 공장에 취직했다. 대양금속이라는 철강회사였는데, 조용히 살기에는 공장이 너무 열악했다. 회사가 워낙 열악하다 보니 젊은 사람은 별로 없고 공장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 40~50대가 많았다. 임금 수준도 너무 낮았다. 회사에 들어간 지 2년 정도 지났을 무렵 여름에 사고가 있었다. 정년퇴직이 1년 정도밖에 안 남은 노동자가 회장 온다고 지붕 천장 비 새는 부분을 수리하러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즉사했고, 내가 마침 그 옆을 지나고 있었다. 앰뷸런스가 와서 싣고 가고 그 상황에서 옆에 기계는 돌아가고... 빨리 노조를 만들어야겠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20~30대가 거의 없는 사업장이었지만 젊은 친구들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야간에 노동조합 가입원서를 만들어 돌렸다. 이후 노동조합 논의하는 과정에서 위원장 출마권유를 받게 되었다. 워낙 악랄한 기업이라 조금 더 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만류했지만, 나중에 형님들까지 다 싸인해 와가지고 총대 메라고 해서 하게 됐다. 대중적 분노가 모아지면서 조직을 하게 된 것이다. 대양금속 투쟁은 당시 지역에서 굉장히 중요한 투쟁이었다. 깡패와 구사대가 쳐들어왔을 때 조합원 60명이 격렬하게 저항해서 물리력으로 쫓아냈었다. 그래서 점점 깡패 인원이 400명까지 늘고 전경도 들어왔고, 공장은 아예 이전하게 됐다. 이 투쟁 도중 구치소 두 달 살고 패배하면서 끝나게 됐다. 그때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역할이 뭔지 많이 생각했다. 지금 총궐기를 하는 것처럼 지역 차원에서 연대해서 싸웠으면 투쟁을 살려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다들 많이 아쉬워했다. 조합원들이 모범적으로 투쟁하고 연대투쟁도 열심히 했다. 조합원들의 생각과 자세가 조직적이고 비타협적이었는데 아쉽게 져버렸다. 당시 지역연대투쟁이 전혀 안 됐고 공동 파업 등에 대한 논의 자체가 안 됐다. 그런 경험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지역총궐기를 조직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것 같다. 노동자로서 투쟁하고 노동조합을 건설해나가면서 지역조직의 위상과 역할은 무엇인가 뼈저리게 고민했다. 그러다 보니 총파업 총궐기 지역연대전선 구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회운동: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역 총파업, 지역 총궐기 투쟁은 금속 지역지부에서 제안하고 주도적으로 추진해나가고 있다. 경기지부 사업계획에는 “기업을 넘어선 연대라는 산별노조운동의 핵심원리를 실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경기지부가 주도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 지역연대운동 강화를 통해 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야 한다. 지역차원의 단결과 연대를 획기적으로 강화하기 위하여 2012년 지역총궐기를 목표로 2011년 지역총파업으로 그 기반을 구축하자”고 설명되어 있다. 개인적 의견을 포함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제안 배경에 대해 설명해달라. 윤욱동: 산별노조 운동이 10년 되었는데 10년을 돌아보면 오히려 연대운동은 후퇴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산별 수직구조를 강화하면서 역으로 지역운동이 공동화되었기 때문이다. 산별노조가 건설되면서 노동자 수, 조합비, 상근자 규모 등 여러 자원이 확보되니까 다른 곳 힘 빌릴 필요도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는 식의 경향이 상층부터 현장까지 작동되고 있다. 기업별 의식을 넘어보자고 만든 산별운동이 오히려 기업별 의식을 강화하고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금속노조 차원의 타임오프제 대응만 보더라도 총자본의 공격에 대해 제대로 된 대응은커녕 최소한의 방어조차도 안 되고 있다. 해당 지역지부나 사업장에서 알아서 방어하는 문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핵심사업장이 깨지는데도 불구하고, 각자 현상 유지하는 선에서 대응하다 보니 금속 노조 내의 연대투쟁조차 잘 안되고 기업별 벽은 더 높아진다. 바깥에서 보기에 금속노조는 확대간부라도 모아서 한진중공업이나 유성기업 투쟁에 결합하니까 힘이 세 보이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본의 공격이 그 정도 수준에서 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지침에 따라 실행되는 형식적이고 일회성의 집회참가로는 전망이 없다. 그런 방식이 금속산별 내부의 연대도 더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그러다 보니 상황이 계속 나빠진다. 금속노조 경기지부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업장에서 투쟁이 벌어지면 그 투쟁의 성격, 지역적 파급력 등에 대해서 성격규정을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린다. 그냥 ‘아, 금속 사업장 어디가 구조조정해서 싸우고 있구나’ 정도로만 이해된다. 우리는 열심히 대응한다 하지만 이미 어떤 기업이 탄압을 자행한다는 것은 역관계에서 밀려 있다는 것인데, 지역사회에서 쟁점화가 같이 되지 않으면 현장에서 힘에 밀려 무너진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법적으로 유리한 판결을 받더라도 역관계에서 밀릴 경우 대부분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내부적 투쟁의 강고함과 더불어 지역차원의 엄호가 동시에 필요하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투쟁 양상은 포기하면 안 되기 때문에 버티고 있는 모양새다. 그걸 적들이 알고 있으니 눈 하나 깜짝하겠나? 돌파구를 열지 못하는 상황에서 계속 깨져나가면 한편에는 패배감, 다른 한편에는 조직보신주의가 만연한다. 그러다 보면 지도부에 대한 비난의 화살도 늘어가고 지도력과 대중과의 관계가 파탄난다.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돌파구를 열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우리끼리 똘똘 뭉쳐도 안 되는 상황이 확인되고 있다. 자본이 이미 세계화되면서 노동자를 우습게 여긴다. 지역전선, 전국전선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의 고민이 항상 있어야지 그게 없으면 개별사업장에서 아무리 조직력이나 의식이 높다 하더라도 버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연대가 강화되어야 하고, 연대 강화를 위해서는 현재 무너진 무언가를 복원해야 하고, 복원을 위해서는 그를 위한 계획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당위적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는 정당성, 명분, 자신감 등을 만들어가기 위한 계획을 작년 12월부터 고민했다. 조합원 교육을 꾸준히 추진해오면서 활로를 개척해보자는 조합원들의 의지, 미친 듯이 해보겠다는 지도부의 의지를 모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고개만 끄덕끄덕하던 조합원들도 이제는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조합원 교육을 시작한 4월 이후 굵직한 일정을 밟아왔다. 5월 조합원 총회를 통해 진행하게 된 ‘경기도본부 결의대회’는 대중적 힘을 한 번 보여주는 자리였고, 새로운 의미의 투쟁을 하려고 한다는 조합원 스스로의 의미부여를 위한 과정이었다. ‘경기도본부 결의대회’의 경우 사전에 ‘지역전선 구축을 위해 우리가 총대 메자. 금속노조 아니면 누가 할래’ 이런 동기부여가 되어 있었다. 경기지부가 경기도본부(이하 도본부)와 다른 산별 등에 총궐기 투쟁을 제안해온 과정도 지역운동에 대한 전망 속에서 조합원과 호흡하면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결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6.11 도민대회까지 왔다. 도민대회는 애초에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기도 했지만, 내부에서부터 준비 과정을 차근차근 만들었고 총궐기 자체가 지역 노동운동에서 주요 화두로 떠오르다 보니 도본부 산하 산별조직들이 모두 참석했다. 아마 몇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집중 투쟁 일정을 잡더라도 일정 박기 식으로 해서는 전망이 없다. 똑같은 투쟁을 하더라도 형식적으로 의결해서 일회적으로 탄압 사업장에 찾아가 집회를 하면 별다른 감동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해서는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아 날 더운데 또 집회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집회에 왜 왔는지 짜증나고 ‘언제 끝나나’ 이런 지루한 느낌을 가진다. 반대로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자발성이 형성된다면 조합원들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경기지부의 판단이다.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자발성이 형성되면 다음을 준비하는 것도 수월하다. 다음에 이보다 더 잘하자는 조합원 스스로의 결의를 모아낼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정확한 조직진단에 바탕을 둔 치열한 논쟁으로 역동적인 대중운동을 만들어야 사회운동: 총궐기 논의 과정에서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경기지부에서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도본부나 다른 산별까지 포함한다면 지금까지 지역총파업 진행과정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진행과정에서 추가된 고민들은 무엇인가? 윤욱동: 고민이 무지 많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다. 무슨 공자님 말씀처럼 그저 그런 옳은 말로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노조가 임금인상 10만 원을 요구한다고 가정해보자. 지도부가 능력이 좋고 교섭을 잘해서 해결사 식으로 9만 9천 원을 따내고, 이에 대해 형식적으로 찬반투표하는 노동조합이 있을 수 있다. 반면, 결과적으로는 1만 원 밖에 임금을 못 올렸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합원들이 내부에서 진지하게 토론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한계와 과제를 발견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논의를 한 경우가 있다고 하자. 이 두 노조 중에 어느 노조에 미래가 있을까? 1만 원 짜리 노조에게 미래가 있다고 확신한다. 5·12 선포대회를 준비할 때에도 조직 라인을 가동해서 형식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진행하게 되면 다음을 준비할 수 없기 때문에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준비과정에서 우리 내부 체계를 정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본부, 경기지부, 다른 산별 사이에 어떤 입장 차이가 있고 각 조직내부 상태가 어떤지 토론하고 점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과정이 축적된다면 언젠가 뻥파업이 아니라 진짜 총파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디데이 잡아서 큰 일정만 잡아놓는 식으로 준비를 하면 미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준비하게 되면 연대의 기운도 나오지 않고, 서로의 의견차만 더 벌어지고, 다시는 이런 것 하지 말자는 평가까지 나오게 된다. 현재 노동운동 내 사업준비 행태가 많은 부분이 그렇다. 알맹이 없고, 과정 없고, 과정에 치열함이 없이, 집회일정을 잡아놓고, 이제는 그것마저도 힘들어서 못하는 상황인 것이다. 우리 내부의 한계를 점검하고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면 긴장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형식적으로 할 때와 긴장 걸려서 할 때는 완전히 다르다. 조직의 실력이 대중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탁상공론하면 말 잘하는 사람이 대장하면 되는 것이지만, 대중조직의 계급투쟁은 그런 걸로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과정을 잘 밟아가는 것이 경기지부가 생각하는 총궐기다. 과정에서 진단하고 논쟁하고, 서로 입장차를 좁히고 작은 실천을 해나가고, 그런 것이 응축되어 나타나면 그게 총파업이고 이후 총궐기까지 이어질 수 있다. 운동의 역동성을 대중적으로 만드는 과정이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으로서 위상과 역할에 맞는 운동을 하는 것이 지금 가장 공격적이고 공세적인 투쟁이다. 그리고 그런 투쟁은 박수를 받으면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지금 실제로 박수 받으면서 투쟁하고 있다. 윤욱동: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민중들의 고조되는 불만을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타임오프가 터지면 대응하고, 주요 사업장 직장폐쇄되면 대응하고, 이런 방식은 한계가 있다. 또한 미조직노동자들이 그런 투쟁에 관심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그런 투쟁들이 사회적 정치적으로 들끓는, 조직되지 않은 분노와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 분노를 누가 조직할 것인가? 자발적으로 어느 날 갑자기 분노가 모아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런 정치적 사회적 문제, 예를 들어 이명박 정권, 재벌 문제 등을 전면적으로 제기하고 대중적 분노를 모을 수 있는 것은 조직된 노동자라고 봤다. 그래서 조직된 10%가 그 외 90%를 향한 메시지를 전하고, 우리가 먼저 행동한 후 함께할 것을 촉구하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치적 문제제기에 유성기업, 외국투기자본문제, 정리해고, 비정규직, 최저임금과 같은 과제가 포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방식으로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가두로 나가야 한다. 노동자계급으로서 위상과 역할에 맞는 운동을 하는 것이 지금 가장 공격적이고 공세적인 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투쟁은 박수를 받으면서 할 수 있을 거라고 봤고, 지금 실제로 박수 받으면서 투쟁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지도력 역시 이런 투쟁 과정에서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도본부와 민주노총 지역지부 활동에 아쉬운 측면이 많다. 아직도 이해도, 의견차, 온도차가 많다. 어느 산별조직은 경기본부에서 이런 일 하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는 곳도 있다. 한편 어느 지역지부는 모든 자기사업을 총파업으로 연결시켜버리기도 한다. 아쉽긴 하지만, 이런 현실은 우리의 주체적 역량을 확인하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는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처음부터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진 않았다. 어쨌든 이런 투쟁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실력부족도 드러나는 것이지 아예 안 했다면 우리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몰랐을 것이다. 사회운동: 내부적 문제점을 확인하고 긴장감을 형성하게 된 것이 구체적 성과라고 보시는 것 같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는 말은 투쟁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단결력이 강화되어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것이 핵심이라고 이해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 사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텐데, 이에 대한 고민을 말씀해달라. 윤욱동: 교육 사업은 정말 고민이 되는 부분이다. 보통 교육을 진행할 때 내용 생산 과정 자체도 어렵고, 또 생산된 내용을 조합원 전체적으로 교육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다. 경기지부는 그래도 시스템은 갖춰져 있어서 내용을 생산하면 조합원까지 전달될 수 있지만, 다른 산별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시스템 구축이 대단히 어려워서 도본부 기획팀에서도 교육 선전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시스템이 미비하고 조합원까지 소통이 안 되는 구조는 심각한 문제다. 지부는 현재 대중투쟁을 하고 있는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어떤 주체적 과제와 자긍심을 갖고 활동할지에 대한 스스로의 근거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고민하고 있다. 현안이 발생하면 사업장 찾아가서 집회를 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당장 긴박한 사태가 아니라면, 열악한 사업장에서 투쟁하는 동지들과 함께 금속 조합원으로서 무언가를 하자는 구체적인 기획을 고민하는 게 더 중요하다. 그래서 실제로 성과를 만든다면 자부심이 대단해질 것이다. 사용자들 입장에서도 노동자들이 다른 사업장 문제로 투쟁하니까 현장으로 불러들이려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현장의 조직력도 높아지고 우리의 요구도 더 잘 관철될 수 있다. 발상을 그렇게 전환해야 할 것 같다. 금속노조 정도 되면 그런 방식으로 운동을 해야 고립되지 않고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산별도 마찬가지다. 개별 투쟁을 어떻게 사회 쟁점화하고 확장할까를 늘 고민해야 한다. 자기문제, 닥치는 문제만 가지고 싸우는 패턴이 고착화되어 있다. 이런 패턴 하에서는 공격받으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이런 관점을 잡아가는 구체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도본부 차원에서도 이를 확장시켜야 되는데, 우리가 먼저 실천하면서 대중적으로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힘이 들겠지만 조합원의 힘이 있기 때문에 도본부와 지역지부에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고, 이미 조합원들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방향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우리 조합원들도 깊이 있게 의식화될 수 있을 것이고 타 산별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운동: 지금까지 주로 총궐기 준비과정과 현황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이후 투쟁의 성과로 남기고자 하는 구체적 과제는 무엇인가? 윤욱동: 조합원의 일상적 실천을 강화하는 것이다. 현재 총궐기 제안 이후 간부는 주 1회 실천을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 조합원까지 확대된 것은 아니다. 앞으로 투쟁 방향에 있어서 우리가 지지하고 엄호해야 할 투쟁의 내용을 조합원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기본방향으로 삼고 있다. 그 속에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를 교육과 선전 등을 통해 구체화하고 싶다. 또한 올해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자기 사업장에서 일상활동을 자발적으로 해나가자는 결의를 하고, 상급단위로부터의 지침이 아니더라도 자발적 실천을 확대하도록 하는 단위를 만드는 부분에 대한 고민이 있다. 이런 주체적 활동과 자발성이 있을 때, 노동자들의 의식화는 물론이고 선진노동자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가 끊임없이 만들어질 것이며, 그 과정에서 간부가 양성되는 것도 가능하다. 조합원의 구체적 실천, 현장 의식 강화, 사회적 문제를 실천하는 노동자로 거듭나는 구체적 연결고리를 고민하고 있다. 대중투쟁에 기반을 둔 연대운동의 성과들은 결과적으로 운동조직 간 불필요한 이권다툼이나 탁상공론식 이견이 남발되는 상황도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두고 큰 그림을 만들어야 한다. 사회운동: 미조직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과제에 대해서는 어떤 판단을 가지고 있나? 윤욱동: 안산시흥노동자권리찾기 사업단(준)에 경기지부가 참여하고 있지만 아직 활동은 미흡한 편이다. 앞서 말했듯 조직된 10%가 90%를 위해 움직인다는 것이 기본적 발상이기 때문에 미조직노동자 조직화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안산지부 선전전에 매주 수요일에 결합하고 있지만 아직 집행부 수준의 사업에 머물러 있는데, 이를 뛰어넘어 일상활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사업단 수준에서 현장을 추동하는 게 쉬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기존 시스템 속에서 조합원들이 미조직노동자 조직화를 자기 과제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어렵다. 실제로 이런 흐름을 만들려면 많은 고민과 에너지, 조직적 움직임이 필요하다. 또한 시민들의 호응 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미조직조직화가 중요하다고 얘기한다고 곧바로 조합원들의 몸이 움직이기는 어렵다. 도본부 중심으로 지역지부를 강화하는 활동을 하고 문제의식을 모아나간다면 가능할 것이다.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를 도본부가 관장하고, 지역지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몇 군데 지역지부라도 사전에 충분히 토론하고, 해당 지부에 경기지부 사업장이 최대한 복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면 집행부 수준의 사업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지역지부가 가동되고, 거기에 산별 지역조직, 사업장들이 복무하는 것을 목적의식적으로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미조직조직화가 지역지부의 주요 사업이 되도록 만드는 것도 우리의 계획과 연결되어 있다. 민주노총의 지역조직 내부에서 연대의 기운이 복원되고 확장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저녁 시간에 꾸준히 지역활동을 전개하고 그 성과가 공유되기 시작하면 현재 도본부나 산별 차원의 활동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같이 투쟁을 기획하고 공식적으로 자주 만나게 되면 더 효율적인 회의 체계도 갖추게 되고 생산적인 토론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연대운동의 성과들은 결과적으로 운동조직 간 불필요한 이권다툼이나 탁상공론식 이견이 남발되는 상황도 제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염두에 두고 큰 그림을 만들어야 한다. 사회운동: 말씀 중간 중간에 지역노동자 운동의 강화가 가지는 정치적 조직적 의미를 다양한 층위에서 고민하시고 있다는 점이 묻어난다. 노동운동 내에서 현장활동을 강화하자는 주장과 지역노동운동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상당히 있는 것 같다. 지역노동운동의 중요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윤욱동: 그런 이분법적 사고가 고착화되어 있고, 심지어 유연성을 강조하는 사람을 회색분자로 보는 분위기도 있다. 지역이 무엇인지 그 개념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다. 산별노조는 기본적으로 자본의 재편에 따라 형성된 산업구조에 맞게 만들어진 수직적 구조다. 반면 지역은 그 안에 다양한 성격의 자본이 공존하고, 생활의 공간도 존재한다. 또 조직된 노동자, 미조직 노동자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있다. 그 안에서 노조가 많은 훈련을 할 수 있다. 연대 운동도 지역 내에서 훈련하는 것이다. 물론 산별노조 내에서도 연대운동이 존재하고 가능하지만, 보다 일상적인 연대투쟁과 훈련은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기본이다. 퇴근 후에 잠깐이라도 다양한 노동자를 만나고 의견을 나눌 수 있고, 그 속에서 운동의 방향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이루어진다. 산별의 수직적 체계만 가동되면 지역적 훈련이 안 되니까 운동의 발전이 어려워진다. 그런 역할이 지역 안에 있다. 민주노총이 파업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아니다. 투쟁을 회피하는 지도부가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 파업을 하자고 하면 조직의 골간에서 화두가 되고 논쟁이 되고 결의가 모아져야 가능한 것인데 그게 안 되니까 뻥파업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애초에 파업을 할 수 없는 상태인데, 중요하니까 파업 하자고 하고, 그러다 보니 파업을 못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제는 뻥파업도 못하는 분위기 아닌가. 결국 지역지부가 화두를 던지고 논쟁을 형성하고 결의를 모아나야 총파업도 가능해질 텐데, 현재 지역지부는 연락책 수준으로 사고되고 있다. 따라서 지역지부를 강화하자는 말은 지역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면서 실제로 운동을 형성하는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전제가 없다면 매해 사업계획서에 나오는 지역지부 강화하자는 말은 ‘죽은 말’에 불과하다. 지역지부가 강화되어야 민주노총이라는 조직이 파업하고, 투쟁할 수 있는 조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에게서 신뢰받는 조직이 될 수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큰 싸움을 만들어야 자본도 두려움을 갖게 될 것이다. 사회운동: 지역운동의 중요성, 민주노총의 골간이 그런 운동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런데 산업구조 내에서 자본의 전략에 대한 대응도 여전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금속노조에서 완성차지부는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이를 무너뜨리려는 자본의 공격방향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동희오토 투쟁은 비정규직 문제를 내걸고 진행되었지만, 여기에는 기아자동차지부를 약화시키는 외주화 등의 문제에 대한 산별노조로서의 고민도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 대한 산별노조 차원의 대응계획을 강조하는 맥락과 지역운동을 강조하는 맥락은 결이 다를 수 있다. 윤욱동: 그동안 지역연대전선 복원을 많이 이야기하고 다니다 보니, 그럼 산별은 없애자는 거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것도 이분법적인 사고이다. 지역 안에 산별이 다 있다. 그 안에 연대하고 훈련하고 느끼게 되면, 그것을 바탕으로 산별노조의 계급적 의식이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경기에 있는 조합원과 부산에 있는 조합원이 어떻게 구체적인 고민을 갖고 연대를 하겠나? 같은 산별에 있는 조합원으로서 일정에 참가할 수는 있겠지만 한 조직에 속해있는 노동자라고 해서 서로를 구체적인 연대의 주체로 느끼기는 쉽지 않다. 지역에서 직접 부대끼는 훈련을 해야 금속노조가 부산 한진중공업 투쟁에 집중하는 것도 의미 있지 않겠나? 산업에 국한된, 자본의 형태에 근거한 산별노조의 형식적 측면을 뛰어넘기 위해서도 그런 일상적 경험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당연히 산별과 지역이 서로 영향력을 주고받으면서 작동되는 것이 맞다. 어느 하나가 삐거덕거리면 서로 안 된다. 하지만 지역연대활동이 잘 되는 곳은 다른 곳보다 계급적으로 각성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역적 연대가 잘 안 되는 지역의 노조는 제기하신 부분에 대한 고민도 거의 없을 것이다. 현재의 노동운동이 문제점들은 매우 복잡해 보이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지역지부가 바로 서면 여러 고민들의 실마리가 잡힐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노동조합이 대중적 신뢰와 조직력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실천해나가는 한 발을 내딛는다면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섭 중에 인지컨트롤스 사측은 다른 노조는 안 가는데 왜 너희들은 유성투쟁에 가느냐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인지 조합원들은 '유성기업 문제가 우리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제있냐?' 이렇게 대응했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투쟁하고 조합원이 움직이는 게 우리가 하려는 것이다. 사회운동: 자본과 정권이 금속노조 핵심사업장에 대한 준비된 파괴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유성기업 투쟁 역시 그 최근의 사례일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경기지역에서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한다고 보는가? 현장의 반응이나 고민도 궁금하다. 윤욱동: 금속노조 위원장과 인터뷰가 필요한 내용인 것 같다. (웃음)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하면, 최근 몇 년을 지나면서 금속노조 조합원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고 생각한다. 발레오, 상신브레이크 등 핵심사업장들이 무너지고, 쌍용차 투쟁에서도 자본은 ‘대들면 깨진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다. 이어서 지역 핵심사업장 몇 군데를 기획해서 깨고 2011년을 맞이했는데. 그러자마자 현대차자본이 주간연속2교대를 빌미로 유성기업을 공격했고 정부가 이를 확실하게 밀어주고 있다. 이 정도 공격이 들어오면 금속노조 차원에서 다양한 방법이 고민되어야 하는데 특별한 것이 없다. 금속 지역지부, 사업장 등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잔업을 안 하거나 퇴근 후에 사업장들이 돌아가면서 순번을 정해서 계속 연대를 가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힘을 축적하는 과정이 있으면, 날짜를 잡아서 집결투쟁을 벌이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방식의 계획을 세워나가야 할 때인데, 여전히 확대간부를 조직하는 것 이상을 시도해보지 않는 것은 관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안산에서는 두 시간 정도면 아산까지 갈 수 있다. 가서 유성 동지들을 만나고, 돌아온 뒤 그 투쟁을 다시 지역에 알려나가면서 조합원들이 자기과제를 가질 수 있는 기획을 해야 한다. 자발적 흐름들을 조직하면서 우리가 유성투쟁 엄호를 위해 할 수 있는 전술을 배치해야 유성기업 문제로 파업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금속노조 확대간부 2,000명이 연대투쟁을 가는 것보다 사업장별로 조합원이 꾸준하게 계속 가는 방법이 자본이 더 두려워하는 일일 것이다. 아래에서부터 현재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결의하고 해내면 그다음에 더 높은 결의도 할 수 있다. 사회운동: 경기지역의 사례를 말씀해주실 수 있을 것 같다. 작년에 우창정기, 인지컨트롤스 직장폐쇄 사례가 있었고, 이 외에도 장투 사업장들이 있다. 집단교섭 투쟁 과정에서 연대 분위기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또 인지 조합원들의 유성 투쟁에 대한 연대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자세히 듣고 싶다. 윤욱동: 인지는 작년에 투쟁하면서 만들어진 활력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아직 신생노조라서 그렇다고 보기도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조합원들이 유성사태 초기에는 휴가를 내고 연대하러 갔다. 그 사업장은 노동시간이 길기 때문에 회사에서 반차를 만들었는데, 그걸 쓰면서 초기에 20명씩 갔다. 확대간부, 조합원 이렇게 돌아가면서 다녀왔다. 그래도 휴가를 너무 많이 써서 라인이 두 개가 멈췄다. 옛날 같으면 회사가 불법이라고 고소고발 했을 텐데, 투쟁 경험 속에 노조 조직력이 확인되다 보니 회사가 조합원들의 자발적 행동에 대해 부담을 많이 느꼈는지 그냥 넘어갔다. 그다음 주 임금교섭이 있었는데, 인지는 최저임금 사업장이라 임금 관련해서 할 수 있는 얘기도 많았겠지만, 교섭 중에 유성기업 얘기만 하다가 끝났다고 한다. 회사는 다른 노조는 안 가는데 왜 너희들은 그렇게 가느냐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조합원들은 '유성기업 문제가 우리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제있냐?' 이렇게 대응했다. 회사는 상당히 공포감을 느꼈을 것이고 협상력이 높아졌을 것이다. 임금 인상만 가지고 이야기했으면 그렇게 안 됐을 것이다. 그렇게 연대하면서 토요일에 특근을 안 하고 유성투쟁에 갈 사람을 모집했는데, 주야간 50명씩인데 46명이 갔으니까 야간조 빼고 다 간 것이다. 가면서 모금을 했더니 80만 원이 모였다. 플래카드는 틀만 짜가서 각자 자기가 쓴 플래카드 걸어놓고 왔단다. 이런 실천은 확대간부회의나 상집회의에서 결정된 지침이 아니다. 작년에 투쟁하면서 훈련된 것이고 자발 실천을 조직한 것이다. 그렇게 투쟁하고 조직하고 조합원이 움직이는 게 우리가 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조합원이 훈련되고 의식화되고 공동체적 분위기가 생겨서 안가는 사람 가는 사람 상관없이 의지를 모을 수 있다. 그렇게 하니까 지회 교섭력도 높아지고, 조합원들 기운이 남다르니까 유성 조합원들도 연대의 기운을 많이 느꼈을 것이다. 직장폐쇄 관련해서는 사전판단이 있었다. 지부 운영위에서 직장폐쇄 사태가 벌어지면 우리는 즉각 파업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미리 정했었다. 이에 따라 집단교섭 사업장들이 다 파업에 참가했다. 사측에서는 원칙대로 대응하는지 아닌지 지켜보았을 텐데, 실제로 즉각 파업을 해버리니까 놀랐을 것이다. 그래서 노동부도 긴장해서 회사 측을 설득했다. 인지의 경우는 사측에서 초반에 노조를 깨려고 강하게 나왔었다가, 노조가 안 깨지고 오히려 공단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이탈하는 조합원도 없다 보니 역으로 회사가 밀리는 형국이 됐다. 유리한 조건에서 직장폐쇄를 풀고 현장으로 들어가니 비조합원이나 계약직 할 것 없이 노동조합을 다시 보게 되었다. 금속노조 위상을 우창이나 인지가 많이 세웠다. 사전에 예측하고 공감대를 만들고 결의를 하다 보니 가능했던 일인 것 같다. 지역총파업의 구체적 그림이 보이지 않아도 사람들이 투쟁에 책임있게 결합하는 것은 그런 작년의 밑거름이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사회운동: 마지막으로 사회진보연대에 한 말씀 부탁드린다. 윤욱동: 사회진보연대는 젊은 활동가들이 많은 인상이다. 진취적인 자세로 사회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해나가면 좋겠다. 현장에 대한 감각과 투쟁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면서 운동해나가면 아름다울 것 같다. ※ 2시간이 넘는 인터뷰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성심성의껏 인터뷰에 응해주신 윤욱동 수석부지부장님 그리고 경기지부 동지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공공운수노조준비위 사업기조 및 방향에 대한 비판과 제언 <프로그램> 발제 ① 공공운수노조준비위 「사업기조 및 방향」 비판과 제언 - 정윤광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공동실천위원회 회원) ② 공공운수 산별노조 건설 경과에 대한 비판과 제언 - 김형균 (철도노동자회 회원) 토론 ① 이현대 (사회진보연대 공동운영위원장) ② 김석 (노동자전선 정책위원) 2011년 6월 11일, <공공운수노조준비위 사업기조 및 방향에 대한 비판과 제언> 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는 6월 24일 공공운수노조 창립대의원대회를 앞두고, 현재까지 제출된 중기사업기조와 방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공공운수노조가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 토론회를 기획하고 준비한 주체는 ‘계급적 변혁적 노동운동을 위한 공공운수 현장조직·활동가 연대회의’다(이하 연대회의). 연대회의는 지난 3월 19일 유성유스호스텔에서 초동모임을 위한 수련회를 개최하고, 이후 대표자회의를 통해 조직을 구성하고 사업계획을 만들어가고 있다. 현재 연대회의에 참여 하고 있는 조직은 화물현장노동자회, 발전노동자현장투쟁위원회, 사회보험현장노동자회, 사회보험민주노조재건투, 철도노동자회, 철도현장노동자회, KT민주노동자회 등의 현장조직을 비롯해,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전선, 사노위 등의 정치조직이다. 연대회의는 그 명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각 현장조직들과 개인들이 참여할 수 있으며 월 1회 대표자회의를 통해 사업을 기획하고 현재 공공운수부문의 노동자 운동의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이번 토론회는 두 명의 발제와 두 명의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사노위의 정윤광은 ‘공공운수노조준비위 「사업기조 및 방향」 비판과 제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고, 두 번째로 철도노동자회의 김형균은 ‘공공운수 산별노조 건설 경과에 대한 비판과 제언’을 발제했다. 이에 대해 사회진보연대 이현대와 노동자전선의 김석이 토론문을 제출하여 논의하였다. 이글에서는 토론회에서 제출된 발제문과 토론문을 살펴보고, 이 토론회를 기획한 연대회의의 역할과 과제에 대한 제언을 하고자 한다. 공공운수노조 출범, 문제점과 대안에 대하여 정윤광, ‘ 공공운수노조(준) 중기사업계획은 공공운수노동운동의 패배의 결과’ 정윤광은 현재 공공운수노조 중장기 사업계획으로 제출된 사업기조와 방향을 언급하고, 그 문제점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했다. 중기 사업계획은 노동자 투쟁을 개량주의적 제도정치활동에 종속시키고 있는데, 특히 공공기관 의정포럼과 같은 시민 운동적 개혁운동은 궁극적으로는 입법 활동을 주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정치활동을 주요한 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운동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이라는 중요한 두 번의 선거를 축으로 민주당을 중심으로 해서 제도권 진보정당들과 시민운동세력이 합세해서 선거승리를 목표로 하겠다는 것이다. 정윤광은 공공운수노조(준)의 중기 사업계획이 지난 수년간 공공운수노동운동의 패배의 결과를 담고 있으며, 공공운수 통합산별노조 추진과정상의 실패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진단한다. 지난 이명박 정권 3년간 공공부문 선진화에 맞서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는 공동전선을 쳐내지도 못하고 각개격파 되는 과정을 거쳤다. 투쟁의 패배는 공공운수 통합산별노조 추진과정상의 실패에 영향을 크게 받았고, 중첩된 상층구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지도집행력의 무능력과 강력한 통일적 투쟁방침을 내오지 못한 데서 기인하였다고 정윤광은 주장했다. 그 결과로서 현재 공공운수노조(준)의 대사업장 투쟁력이 거의 무너져 있고, 이런 상황에서 총파업과 총력투쟁 전선을 구축이라는 과제를 달성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조건임을 우려하고 있다. 또한 공공운수노조 중기 사업계획이 민주노총의 투쟁 회피계획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공공운수노조(준) 투쟁계획에 따르면, 2011년 상반기는 산별노조 건설, 민주노총 투쟁 동참, 공공운수노조 투쟁 선포로 요약되며, 2011년 하반기는 공공운수노조 요구 전면화, 2012년 상반기 총력투쟁 준비로 정리된다. 결국 2011년에는 철저하고 전면적인 투쟁은 하지 않고 투쟁선포와 (2012년) 투쟁준비를 하겠다는 것이다. 정윤광은, 우리가 수많은 투쟁에서 보았듯이 내년에 싸우기 위해서 금년은 준비한다는 계획은 결국 금년은 싸우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뿐 내년의 투쟁은 다시 그때가 다가오면 그 상황에서 결정된다며,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김형균, ‘당면한 공공운수산업노조 ‘가입 및 전환’이 현실적으로 시급’ 철도노동자회 김형균은 철도노조에 속한 노동자로서, 운수노조를 둘러싼 산별 전환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운수노조는 조직전환을 가결시키기 위해 선동하던 것과 달리 확장된 단결의 구심으로 자리 잡지 못했는가? 왜 현재 추진 중인 공공운수노조는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야 하는 무엇으로 후퇴했는가? 김형균은 그 원인이 전반적인 계급관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해명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계급적 단결과 총투쟁을 확장하는 구심으로서 산별노조가 필요하다. 둘째, 당면한 공공운수노조 ‘가입 및 전환’이 현실적으로 시급하다. 셋째, 2007년 철도노조투쟁의 뼈아픈 경험으로부터의 교훈을 도출하자. 우선, 산별노조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조직형식을 뛰어넘을 수 있는 내용과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조직형식이 어떠하다 하더라도 아래로부터의 계급적 분노와 의식적 각성에 근거한 대중적 역동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자본의 현장통제에 맞서 현장권력이 살아있다면, 조직형식을 뛰어 넘어 공동투쟁을 조직할 수도, 산별노조라는 조직형식이 실질적인 파괴력으로 전화할 수도 있다. 산별교섭이니, 대정부 교섭이니 하는 요구 역시 현장조직력 복원 없이는 의미 없는 주문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조직형식의 전환에만 집중한 산별노조 운동이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하더라도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말했다. 둘째는 현재 6월 24일 창립을 앞둔 공공운수노조 건설에 힘을 쏟자는 주장이다. 공공노조, 운수노조, 미전환노조라는 3분할 구조와 연맹이라는 조직적 상황은 중앙 집중도, 수평적 연대도 어려운 구조다. 전임자 배치와 재정의 효율적 운용을 위해서도 비효율적인 현재 상태는 벗어나야 하며, 이러한 점에서 공공운수노조로의 가입 및 전환은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공공운수노조로의 전환은 산별노조 건설논의와 대중조직단위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대중조직의 조직적 결정을 자조직적 이해에 근거하여 해태하는 종파주의는 극복되어야 하고, 6월 이전에 ‘가입 및 전환’을 완료하고자 했던 계획은 이미 불가능하더라도 '가입 및 전환' 약속 자체는 지켜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공공부문과 운수부문에 걸쳐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규모가 큰 철도노조의 책임 있는 태도를 강조했다. 철도 현장조직 역시 조직전환의 긍정적 의미와 과제에 대해 적극적인 자기 의제화와 구체적인 실천 방침을 내와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셋째로 2007년 당시 철노노조의 집행부이기도 했던 본인의 소회를 정리하며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있다. 2007년 철도노동자회 주요 구성원들은 철도노조 집행부였다. 당시 집행부는 비정규직 투쟁(KTXㆍ새마을 비정규직 투쟁, 직접고용 비정규직 정규직화 투쟁)과 전반적인 구조조정(인원충원, 외주화저지, ERP저지 등)을 주요 쟁점으로 투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투쟁이 가능한 노조와의 목적의식적 공동파업을 초기부터 추진했었다. 실제 공동파업이 가능한 곳은 화물연대본부 뿐이었는데 정작 결정적인 시기에 공동파업은 철도노조 내부 조직력의 문제로 무산되고 말았다. 화물연대와 철도본부의 공동투쟁 실패 이후, 당시 지도부는 참담했고 그 책임을 지고 중앙집행부(중상집)는 모두 사퇴하고 말았다. 김형균은 이 과정에서 뼈저린 교훈은 무엇이었는지 질문한다. 그것은 지도부의 목적의식만이 아니라 현장지도력을 비롯한 골간체계를 올바른 경향으로 조직해야만 위력적인 전술운용도, 공동파업도 확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완전한 현장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조의 전략적인 지역ㆍ직종ㆍ현장 지도력이 태세를 갖출 수 있어야 다양한 전술운용도, 위력적인 공동투쟁 전술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자본과 국가권력의 통제기구, 언론, 사회적 관심 등 모든 초점은 실질적인 물리력(단결력, 투쟁 파괴력)을 중심으로 집중된다. 이때에 산업별 노조나 연맹체계는 모두 여기에 종속변수가 되며 지원체계로 작동할 뿐이다. 그 물리력의 1차적 규정은 현장지도력을 구심으로 한 현장권력이라는 점을 강하게 주장했다. 실천을 위한 비판, 비판을 넘어서는 대안을 만들어가자 각각의 발제는 현재 공공운수노조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공공운수부문 노동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철도본부 현장조직 구성원의 날카로운 비판과 솔직한 고민을 담고 있었다. 이와 같은 두 발제에 대해 노동자 전선 김석과 사회진보연대 이현대는 토론문을 통해 의견을 피력했다. 김석, ‘공공운수부문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이 필요’ 김석은 우여곡절 끝에 6월 24일로 가시화되고 있는 통합 공공운수노조의 출범이 운동 노선 강화, 현장 조직력 혁신, 계급적 연대의식 강화 등 산업노조로서의 기본적 자기정체성 확립과는 동떨어진 채 형식적 완성에만 치중하여 진행되고 있다고 밝힌다. 이는 통합 산별 추진이 시작된 이래 줄기차게 이야기되어온 소위 ‘물적·인적 자원의 통합을 통한 강한 산별’과도 거리가 먼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석은 공공운수노조(준)가 지금의 상황에 대한 조직적 평가도, 이 평가에 따른 책임 추궁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조직형식적 정리에만 치우친 현재의 산별이 그 어떤 전망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평가도 없고, 책임지는 단위도 없고, 전망도 없는 3無 산별이 이 통합 산별의 주요 특징이라고 비판한다. 이를 위해 김석은 공공운수부문 민주노조운동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혁신을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평가와 성찰이다. 먼저 지난 몇 년 동안의 통합 산별노조 건설의 좌초와 현재의 파행적 건설에 대한 엄밀한 평가와 책임을 물어야 한다. 종파적 이해에 사로잡힌 채 통합 산별노조 건설에 대한 조직적 합의를 무시하고 조직 운영을 파행으로 끌고 갔던 행태에 대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파 역시 이러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계급적, 변혁적 산별 건설에 대한 원칙은 올바르나 그러한 주장을 대중적으로 각인하고 현장을 재조직화하기 위한 기획과 실천은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도피와 책임 회피에 다름 아니었으며, 산별 추진 과정으로부터의 자기 소외는 이후의 연맹 및 준비위 운영, 나아가 현장에 대한 자기 목소리 조직화로부터 스스로를 유리시킨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상층 정치’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이 ‘현장 조직화’에 대한 올곧은 실천으로 귀결되지는 못했다고 주장했다. 이현대, ‘산별건설은 총노동 전선 구축, 민주노조 총단결을 위한 하나의 과정’ 사회진보연대 이현대는 두 발제자(정윤광, 김형균)의 발제문에 대부분 동의하면서 몇 가지 함께 고민해보아야 할 지점을 짚었다. 정윤광이 지적하듯 현재 공공운수노조는 4년 전 공공노조와 운수노조가 건설된 당시와 비교해보아도 산별노조의 조직력이 크게 취약해진 상태이며, 현재 제출된 중기 사업계획에 드러난 조직 강화 전략에는 한계가 많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사업전체를 부정하는 방식보다는, 오히려 사업계획의 긍정적인 부분을 강화하고 부정적인 부분을 삭제할 것을 요구하며 토론하는 것이 적절한 시점이라는 제안으로 서두를 열었다. 또한 김형균의 발제에 대해서는, 기업별 조직을 넘어 산별노조(공공운수노조) 건설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산별노조 운동은 기업을 넘어서 노동자계급의 보다 일반적인 요구를 걸고 투쟁할 수 있는 조직형태이다. 따라서 현재 공공운수노조 건설의 여러 문제를 비판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제대로 된 산별노조를 건설하자는 방식의 비판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산별노조 운동의 여러 한계, 이를 주도하는 상층 정파세력의 한계를 이유로 건설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현재 공공운수부문 노동자운동은 산별노조로 단결을 확대강화해 가지 않으면 기업별 단위로 각개격파될 우려가 있음을 분명히 했다. 최근 복수노조 허용 정세에서 발전노조, 도시철도노조 등에서 어용 기업별노조 세력의 발호는 이러한 우려를 심화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편, 이현대는 초기업조직으로서 산별노조를 강조하는 것은, 총노동 전선 구축, 민주노조 총단결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사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산별노조 건설은 민주노조 운동의 단결(총연맹 차원의 단결 강화)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기 때문에 민주노총보다는 산별노조를 강조하는 흐름도 정파를 막론하고 확산되고 있으나, 각 산별노조(노동자)의 독자적 이해란 있을 수 없으며 총노동 투쟁전선을 중심에 두어야한다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도 이현대는 공공운수노조의 발전전망을 고민하는 데 있어, 지도부 구성에서부터 현장투쟁까지 유기적으로 결합·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장 투쟁을 위해 단위 사업장 지도부에 개입, 견인할 수 있는 계획도 있어야 한다. 위아래에서 손발이 잘 맞아야 투쟁도 만들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의 균열이 더 커지게 될 시기에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구상과 계획을 세우고, 상층지도부와 현장이 함께 준비하고 실행하는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토론회 이후 과제 이번 토론회는 연대회의가 공공운수노조 출범을 앞두고 제출된 중장기계획에 대한 비판과 제언을 하는 자리이며, 현재 노동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고 ‘계급적 변혁적’ 공공운수노동운동의 단초를 마련하는 시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연대회의 참가 조직들과 활동가들이 ‘계급적, 변혁적’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현장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한 우리의 주장은 공허한 수사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주장이 현실을 변혁하기 위한 밑거름이 되도록 과제를 정선하고 실천해야 할 때이다. 첫째, 현재 2012년 정권교체기를 앞두고 민주당 등 신자유주의 세력과 함께 추진하는 의정포럼 및 정치연합에 대해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 이는 발제자와 토론자 모두가 지적한 바이며, 연대회의의 주요한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2012년 총대선을 바라보고 추진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무원칙한 반MB 선거 연합계획이 공공운수부문 운동에서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현장을 살려내고, 투쟁조직을 위한 기획이 필요하다. 둘째, 이를 위해서는 현장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필요하다. 지도부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현장 투쟁의 의미를 밝히고 실천적으로 투쟁을 만들어야 한다. 현장의 상태는 지도부에게 투쟁 회피의 알리바이가 될 수도 있고, 투쟁을 극적으로 확장시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발제와 토론이 끝난 후 플로어 토론에서 한 참자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어느 토론회에서 의정포럼을 비판했더니 의정포럼을 옹호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현장투쟁이 안 되니까 분위기를 만들고 현장투쟁이 일어 날 수 있게 의정포럼을 하는 것이다.’ 이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현상은 맞게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노조 중앙의 사업기획과 기조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장이 어떤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조의 기층 조직력을 침식하면서 현장투쟁의 부재를 핑계로 상층대응을 통한 정치적 해결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현장 투쟁의 실질적 조직화 없이 투쟁만을 강조할 때의 한계는 자명하다. 셋째, 현장조직력을 세우는 과정에서 지역 및 지역지부 조직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전국규모 기업별조직의 경우, 각종 권한이 지부장(본부장)에게 집중되면서 이들의 동의가 없이는 산별노조 중앙 차원에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물론, 현재 한국에서 산별교섭이 이루어지지 않는 등 한계 때문에 기업별조직의 권한을 인정할 수밖에는 없지만, 이런 상태를 방치하게 된다면 장기적으로 공공운수노조는 기업별노조들의 연합체인 연맹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역 및 지역지부를 통해 산별노조가 현장조합원들과 직접 만나고 단결을 증진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할 것이다. 공공운수노조의 조직설계 상 지역본부는 매우 약화된 상태이나 이를 단계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계획 없이는 공공운수노조가 연맹 수준의 조직운영을 벗어나기 힘들다. 지난 수년간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를 통해 조직 확대를 달성한 영역은 주로 지역지부 등 초기업 지부를 통한 중소 영세 비정규직 사업장이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넷째, 6월 24일 공공운수노조 창립대의원대회 이후에도 통합 산별을 강화하기 위한 기획을 꾸준하게 계속되어야 한다. 기존의 산별노조가 충분히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는 타당하나, 그것이 그동안의 성과를 무로 돌리거나 산별노조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제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산별노조의 과제는 새롭게 토론되어야 하고, 공공운수노조는 힘 있게 출범하여 올곧은 역할을 위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다섯째, 연대회의를 강화하기 위한 기획을 세워가야 한다. 현재까지 현장조직들은 각 사업장 또는 업종별로 고립되어 있고, 관심영역의 차이가 있어 실천적으로 단사나 업종의 이해관계에 머물러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단지 현장조직만들의 문제가 아니라 이명박 정권의 공기업 선진화에 실질적인 투쟁을 만들어오지 못한 우리 노동운동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장조직들은 노동운동의 위기 속에서 목적의식적으로 전투적 변혁적 노동운동을 지켜내려는 노력을 해왔다. 연대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현장조직들이 87년 이후 노조민주화투쟁을 이끌어 왔던 세대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경험으로 현재까지도 운동의 어려움을 돌파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연대회의는 이러한 현장조직들과 활동가들이 함께 토론하고 연대하면서, 공공운수부문의 노동운동을 발전시켜 내고 공공운수노동운동의 현장기반을 구축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2011년 연봉제, 유연임금제, 정보화 등 현장의 노동자 통제는 더욱 치밀해지고, 7월 1일 복수노조 시행을 앞둔 시점에서 공공기관 사측의 노골적인 탄압이 가세되고 있다. 이러한 정황들은 이명박 정권이 공공부문 운동을 말살하기 위해 추진하는 선진화 공세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에서, 단위사업장 만의 대응이 아닌 공동대응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현재 연대회의가 준비 중인 ‘현장조직활동강화 프로젝트’는 매우 의미 있고 주목할 만한 기획이다. 각 조직들의 조건을 정확히 진단하고, 연대회의를 중심으로 활동을 모아나가는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6월 24일 공공운수노조 출범은 다년간 논의되어 왔던 공공운수부문 산별운동 과정에 대해 많은 반성과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 공공부문 선진화라는 벽에 막혀 공동투쟁을 기획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이제,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내자. 연대회의는 공공운수노조가 그러한 역할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올곧은 입장을 마련하고, 실질적인 기획과 실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