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이후 미국은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하에 세계질서를 새롭게 재편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이라크 침공을 통해 두드러지게 드러난 미국의 구도는 북한에 대한 압박과 이라크 인근 중동 국가들--시리아, 이란, 심지어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까지--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계속 관찰되고 있다. 미국의 이런 변화된 노선이 냉전 하의 미국의 세계질서의 기획과 다르다는 점에서 이를 ‘제국’적 기획 또는 ‘제국주의적’ 기획이라고 부르는 논의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현재 미국의 일방주의적 세계전략을 주도하는 신보수파(neo-conservatist: 약칭 neo-con)들은 세계의 위협세력들을 제거하고 세계를 미국식 자유주의의 틀에 맞추어 변경하려는 ‘사명’을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제국주의적’이라고 부르기를 꺼리지 않고 있다. 신보수파의 대표적 이데올로그인 윌리엄 크리스톨(William Kristol)은 “만일 사람들이 우리를 제국적 권력이라고 부르기를 원한다면, 좋은 일이다”라고 까지 노골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런 새로운 미국의 세계전략에 대해 ‘새로운 미국적․민주적 제국’이나 ‘제국적 거대전략’, 또는 ‘인권의 제국주의’라는 호칭이 붙기도 하는데, 그동안 금기시 되어왔던 제국 또는 제국주의라는 용어가 미국의 정책주도세력에 의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의 변화의 한 단면과 역설적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 이라크 전쟁은 새로운 변화의 첫 수순이었으며, 미국은 이 전쟁 이전부터 예견되던 수많은 정치․사회․경제적 난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 다음 수순이 무엇이 될 것이며, 그에 대해 미국인들과 세계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향후의 과정에는 아직도 변화의 여지가 남아있다. ‘제국적 길’이라고 부르는 미국의 새로운 전략은 미국에 남겨진 좁은 선택지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 길은 새로운 변화만큼이나 많은 모순을 새롭게 발생시킬 것으로 보인다. 신보수파의 쿠데타인가? 우리는 미국의 새로운 전략적 전환이 일군의 신보수파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특히 9.11은 이들이 전면에 부각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이들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 침공을 주도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들 일군의 신보수파의 핵심 인물은 국방부 부장관인 폴 월포비츠, 전 국방부 국방정책위원장 리차드 펄, 국무부 차관 존 볼튼, 신보수파의 이론적 지주가 되는 잡지 The Weekly Standard를 발간하는 윌리엄 크리스톨과 로버트 케이건, 신보수파의 대부를 자처하는 어빙 크리스톨(윌리엄 크리스톨의 아버지) 등이며, 이들의 사령부는 미국기업연구소(The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AEI)라고 할 수 있다. 헤리티지 재단 같은 공화당의 보수적 싱크탱크 또한 이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나 딕 체니 부통령같은 매파들은 직접적으로 신보수파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정책적 지향에서는 긴밀한 공조를 이루어 행정부 내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신보수파와 강경보수파가 연합한 조직이 1997년 창건된 ‘새로운 미국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 Project for New American Century)였으며, 이들이 적극적으로 부시정권 탄생을 위한 정책브레인 역할을 수행했음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점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변화를 단지 일군의 신보수파의 쿠데타로 간단히 치부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두가지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첫째는 탈냉전 시기 미국의 세계전략이 어떻게 준비되어 왔는가하는 점, 그리고 이와 관련해 부시정권 이후의 연속성과 단절점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며, 두 번째로는 신보수파 중심의 노선이 득세할 수 있도록 해 준 미국 국내정치의 기반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먼저 첫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1991년 1차 이라크 전쟁을 전개한 아버지 부시는 냉전 종식 이후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모색하였다. 냉전 하의 소련과 미국이라는 두 극을 주축으로 한 얄따협정에 기반을 둔 세력균형 체제가 무너지면서 국가간체계에는 새로운 혼란의 요소가 나타났다.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탈냉전 시기에 지역의 맹주로 떠오른 이라크의 부상이 그 상징적 예였는데, 아버지 부시의 노선은 미국이 주도적으로 세계의 분쟁에 개입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부시를 누르고 당선된 민주당의 클린턴 정권 하에서 전체적인 정책기조는 레이건의 군사케인즈주의를 버리고 초민족적 금융자본의 요구를 최우위에 놓는 달러-월스트리트체제였지만, 클린턴 하에서 군사비는 삭감되지 않았고, 세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확대되었다. 소말리아 개입과 코소보 사태, 그리고 이라크 공습이 이를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세르파티는 이런 상황을 놓고 금융세계화에 병행해 진행되는 군안복합체(military-security complex) 중심의 ‘군사적 세계화’라는 테제를 제출 한 바 있는데, 이 테제는 부시의 출현 이전의 상황에서 이미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1990년대 이후의 변화의 연속성을 중시하고 있다. 2000년 선거를 둘러싼 쟁점에서도 이런 특징은 잘 관찰된다. 당시 부시와 고어 두 후보 중 세계에 대한 군사개입의 확대를 더 중시한 측은 부시보다는 고어였고, 고어는 클린턴 하에서 나타난 세계의 개입확대의 전략을 더욱 큰 영역으로 전개하려는 의도를 보였으며, 이미 ‘예방’(preventive)전쟁이나 사전개입 정책의 틀이 제기된 바 있다. 이 문제를 좀 더 들여다보면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을 전통적인 냉전적 구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이를 단순히 전통적인 공화당 대 민주당이라는 구도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를 적극 지지한 공화당원들의 불만에서도 확인된다. 버크(Burke)적 사상전통에 뿌리를 둔 이들 전통 보수주의자들이 당시 부시를 지지한 이유는 미국이 과도하게 해외문제에 개입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관심을 국내로 돌려 좀 더 고립주의적 노선을 강화하고 세금을 삭감하고 지방정부를 지원하고 중앙정부를 축소할 것을 부시가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9.11 이후 부시는 해외개입 확대, 큰정부, 적자재정, 지방정부에 대한 소홀한 관심, 인권 침해 등 전통보수파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전통보수파는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가 새로운 전략을 끌어가는 신보수파들 때문이라고 비난하면서 이들 신보수파는 자신들과 같은 진정한 보수파가 아니라 단지 ‘우익 급진주의’일 뿐이라는 비난을 퍼붓고 있다. 이들에 비해 오히려 민주당 내에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적극 지지자를 찾을 수 있는데, 상원 외교위원회의 민주당 지도자인 조셉 바이든은 이라크 전쟁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민주당원들을 비난하면서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은 찬성하나 다만 이를 좀더 다자주의적 방식으로 수행하고 이라크의 전후 복구에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2차대전후 미국의 세계전략의 변화과정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전후 미국의 헤게모니 팽창기에 세계에 대한 전면적 개입전략이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감당하기 힘든 정치․경제적 부담을 안겨준 후 1969년의 닉슨 독트린을 계기로 미국의 전략은 주요 지역에 하위제국주의 파트너를 육성하는 간접적 방식으로 전환한 바 있다. 특히 1970년대 유가인상과 금융세계화의 개시에 따라 넘쳐나는 저리의 자본의 덕에 많은 반주변․주변부 국가들 사이에 급속한 군비확장의 붐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의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에 맞물려 세계적으로 거대한 군사력을 갖춘 국가들이 주로 중동과 남아시아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바 있다. 그러나 이란혁명에 이어 1980년대 들어 냉전체제가 붕괴함에 따라 중간규모의 군사력을 갖춘 국가들은 탈냉전 시기 미국에 대한 위협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미국은 탈냉전 시기의 각 지역의 잠재적 위협에 대처하는 새로운 세계전략의 틀을 짜지 않을 수 없었다. 탈냉전 하에서 유럽의 군사력 부상 의지를 초반에 누르는 동시에 국지적 위협세력의 급증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은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확장하였는데, 군수산업에 도입된 신기술은 미국과 여타 나라들의 군사력 격차를 더욱 벌려 놓았다. 또한 냉전 하에 소련에 맞서기 위한 다자적 동맹의 틀이 이런 구도에 적절히 작동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미국은 다자주의를 버린 것은 아니지만 일방주의를 중심에 놓으면서 상황에 따라 다자주의의 다양한 틀을 동원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 제1차 이라크 전쟁을 유엔의 틀 속에서 수행한 미국이 코소보의 경우는 UN의 틀을 벗어나 NATO를 활용한 제한적 다자주의적 길로 가고, 그 다음 단계로는 ‘의지연합’으로 나가게 된 것 또한 아들 부시정권 하에서 사전 변화 없이 처음으로 다자주의에서 일방주의로 급격한 전환이 발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부시정권이 클린턴 정권과 단절점을 보이는 측면은 적지 않다. 상대적 정도의 차이라 하더라도 분명 일방주의는 강화되고 있으며, 클린턴의 ‘인권’ 외교의 메타포가 ‘대량살상무기’나 ‘테러’로 전환된 점도 두드러진다. 여기에 ‘예방전쟁’의 성격이 분명해지면서 근대 국가간체계 하에서 형식적으로 유지되어 온 주권의 경계가 심각하게 도전 받고 있다. 과거에도 주권의 침해는 비일비재했지만, 이것이 먼로 독트린에 입각해 라틴아메리카에서 수행되어 온 것과 달리 부시 하에서 주권에 대한 미국 일방주의의 우위는 전지구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의 새로운 전략과 금융세계화의 관련성이라는 쟁점이라 할 수 있다. 클린턴 정권 하에서 양자의 관계는 정확히 후자의 이해관계를 우위에 두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현재는 양자의 관계에서 전자가 더 우위에 서있는 경향이 있으며, 이 때문에 금융자본들이 여러 가지 불만들을 표출된 바도 있다. 이 문제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모순인 자본주의의 초민족적 팽창주의적 경향과 헤게모니의 영토주의적 경향 사이의 모순의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미국헤게모니 하에서 헤게모니의 영토주의적 성격의 팽창, 또는 세계체계의 헤게모니 유지비용의 증가는 미국의 물질적 토대 자체를 침식한 바 있는데,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의 후과로 발생한 거대한 쌍둥이 적자와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가 그 첫 번째 사례이며, 1980년대 레이건이 주도한 ‘제2차 냉전’의 결과 생겨난 더욱 거대한 쌍둥이 적자가 그 두 번째 사례였다. 두 번 모두 미국의 ‘국제주의적 보수파’라 할 수 있는 세력이 주도한 전략이었는데, 지금의 세 번째 사례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관찰되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신보수파적 전환이 가능한 미국의 국내적 토대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문제의 핵심을 살펴보기 위해 이들 매파가 미국 내에서 왜 점점 지지를 얻어가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미국 내에서 이런 매파의 목소리는 늘 존재해왔고 가끔씩 대통령 선거에도 등장하였지만 소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매파들이 부시를 후보로 만드는 기간에 상호 결집하였고, 특히 9.11 이후에 본격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내에서 이들 매파의 주장은 힘을 얻어가고 있고, 심지어 한 때 좌파라 자칭하던 이들 중에도 이들을 지지하는 자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탈냉전기 세계질서의 장기적 비전과 관련되는데, 다시 말해 다른 모든 미국의 정치세력--민주당이건 공화당내 현실주의자들이건--은 현상유지에만 급급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미국의 힘이 쇠퇴하고 종이호랑이가 되어 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뿐인데 반해, 이들 매파는 비전을 가지고 ‘무엇인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가 미국을 두려워하고 미국을 거스를 수 없게 만드는 글로벌 전략이 이들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유엔안보리가 되었건, ‘불량국가’가 되었건 사방에서 미국이 모멸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다가 급기야 자본과 군사력을 상징하는 미국의 두 상징적 심장부가 테러공격을 받게되도록 “너희는 무엇을 하였는가?” “매파의 논의에 완전히 동의는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럼 지금 이들 말고 누가 미국의 쇠퇴를 진정으로 걱정하는가,” 그리고 자기도취에 빠진 미국인의 말투대로 이들 말고 “누가 세계의 혼란과 무질서를 걱정하고 새질서를 짜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신보수파의 세계인식 신보수파가 내세우는 제국적 거대전략은 새롭게 변화한 냉전 이후의 세계구도에 대한 대응으로 제출되었다. 아이켄베리는 소련과 미국의 양국체제에 기초한 세력균형과 자유주의적 무역질서에 기반을 두고 있던 2차대전 후의 국제질서가 새로운 제국적 거대전략으로 전환되는 맥락과 신보수파의 주장을 일곱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소련의 붕괴이후 미국의 군사비나 군사기술의 신속한 발전을 다른 나라가 따라 갈 수 없는 단극 상황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미국은 열강이나 중간규모 국가 어디도 미국에 위협이 될 수 없도록 이런 군사력 확장을 지속해 가려 한다는 것이다. 둘째, 전지구적 위협이 달라졌으므로, 그에 대한 공격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인데, 주요 위협은 소집단 테러분자이며, 이들은 제거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셋째, 냉전 하의 핵억지 개념은 낡았는데, 냉전은 핵억지, 주권, 세력균형이라는 세 가지 동시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탈냉전 시기에 핵억지가 불가능해지면 나머지 둘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다시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일한 대안은 공격인데, 이 공격은 선제공격일 뿐 아니라 심지어 예방적 공격이기도 하다. 넷째, 주권의 제한이 필요한데, 테러분자 뿐 아니라 테러를 억제하지 못하는 국가도 위협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비우호적, ‘전제적’ 국가가 대량살상 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위협이 되기 때문에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은 국가도 미국의 군사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다섯째, 국제규칙이나 조약, 안보파트너쉽을 경시하게되는데, 미국은 충분히 크고, 강력한 힘을 보유하고 있고, 세계 전역에 힘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위협을 제거하는 핵심과제를 위해 독자적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섯째, 위협에 대응해 미국은 직접적이고 무제한적 역할을 해야하는데, 이런 변화한 상황을 동맹이나 연합들이 주도적으로 따라오기 힘들기 때문에 임무에 따라 연합을 결정해야지, 연합에 따라 임무를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 일곱째로, 국제적 안정성 자체가 중요한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냉전적인 현실주의적 사고는 세력균형이나 안정 자체를 목적으로 했지만, 북한 문제에서 보듯이 신보수파는 안정을 위한 타협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를 세 가지 점과 관련해 좀 더 부연 설명해 보기로 하자. 먼저 유럽의 역할에 대한 신보수파의 관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보수파는 유럽에 대해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들에 따르자면 현재 서방세계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문명의 기준이고 다른 하나는 정글의 기준이다. 유럽은 문명의 기준에 따라 포스트-역사적, 포스트-민족적, 평화의 세계, 칸트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데, 그것은 외부에서 미국이 유럽을 권력, 개입, 군사력을 중심으로 하는 홉스적 세계를 통해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럽은 항상 다자적 해결과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나, 이는 본질적으로 약자의 논리, 권력이 없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으로 본다. 유럽은 따라서 일종의 ‘무임승차’를 하게되는 셈인데, 군비를 증강하기보다는 군비증강의 의도를 포기했고, 이 때문에 미국과 유럽 사이의 군사력 격차는 1990년대에 더욱 벌어졌다. 그렇다고 이들이 유럽의 통합 노력에 부정적인 것은 아닌데, 유럽통합 노력이 유럽 내부의 국가간 갈등을 최소화하는 전략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본다. 미국이 자임하는 역할은 대서양 동맹에 대한 ‘보안관’인데, 이들은 영화 ‘하이눈’의 게리쿠퍼를 자임하면서, 평화시에 주민들은 보안관에 복수하러 찾아온 건달보다 보안관의 존재 때문에 평화가 깨어진다고 불만을 토로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평화를 지키는 것은 보안관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일방주의는 약한 유럽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지로 미국이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선제공격과 예방공격에 대해서 살펴보자. 선제공격(preemptive war)을 넘어선 예방공격(preventive war)은 사실상 2차대전의 뉴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도 중죄로 간주된 것인데, 신보수파 이데올로그인 윌리엄 크리스톨은 2차 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과 독일을 먼저 공격했더라면 더 나은 결과를 낳았을 것이라면서 이 노선을 적극 주장하고 있다. 예방전쟁의 정당화는 이라크 침공을 2차 대전 후 일본과 독일의 전후복구 개입과 같은 맥락에서 보는 논지로 이어진다. 세 번째로 일방주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미국은 UN을 사실상 무시하는 일방주의적 길로 나가고 있으면서도 북한문제에서 보듯 다자주의적 틀을 완전히 포기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런 다자주의적 틀은 반드시 UN을 매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이 보는 UN 안보리는 소속 국가들의 특수 이익을 반영하는 단순한 이익집단일 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다자주의와 일방주의의 관계는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수립한 세계 질서 내에서 다자주의가 갖는 특수한 성격에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전후 미국은 브레튼우즈를 통한 무역과 금융체계와 UN이라는 국가간체계의 구조 양자를 통해 전세계를 다자주의적 방식으로 통합해 냈는데, 이는 영국헤게모니의 시기에 비해 헤게모니 국가인 미국 우위 하에 전세계 국가들을 더욱 강력하게 통제할 수 있는 틀로서 작용하였다. 그런 점에서 신보수파가 말하듯이 미국 내에 UN 중심의 국제법 질서를 수립해야 한다는 유럽식의 원칙적 다자주의자란 없다. 대신 미국의 다자주의란 손익계산에 근거한 실용적 다자주의일 뿐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 미국에는 사실상 다자주의 대 일방주의라는 논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미국 다자주의자는 핵심에서 일방주의자일 뿐이고, 이들의 말을 빌자면 “다자주의 융단 장갑 속의 일방주의 철권”이다. 우리는 이를 ‘다자적 일방주의’(multilateral unilateralism)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앞서도 언급했듯이 임무가 연합을 규정한다는 신보수파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북한문제에서도 드러나듯이 다자주의적 틀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의제를 관철하는 더욱 강력한 메카니즘으로 작동할 수 있다. 미국이 생각하는 다자주의란 위협세력에 압력을 가해 미국의 일방주의를 정당화하는 틀이다. 다자주의 틀 속에서 제기되는 조건과 압력을 상대국가가 수용하지 못할 때, 미국은 다자주의적 틀을 깰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하게 된다. 다자주의는 일방주의보다 더욱 강력한 규제의 틀이기 때문에 미국이 이 틀 자체를 폐기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다자주의의 균열이 발생함에 따라 일방주의를 통해 이런 다자주의적 틀을 미국 주도적으로 이끌려는 시도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신보수파 등장의 배경 앞서 전통 보수주의 공화당원의 불만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신보수파는 전통적인 고립주의적 보수주의자들과 노선이 상이하며, 어떤 점에서는 민주당내 보수파와 의견이 일치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신보수파가 출현하게 된 배경에서 이런 특이성의 연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신보수파 개인들의 이력과 신보수파의 지지기반이 형성되는 미국 국내 정치적 변화라는 두 가지 구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신보수파 개인의 이력을 살펴보면, 월포비츠나 리차드 펄 등 적지 않은 신보수파는 1960년대의 자유주의자 또는 심지어 중도좌파에서 전향한 우파라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대체로 UN 같은 자유주의 제도나 소련의 억압정책 등에 실망하고, 민주당의 소극적 세계전략에 실망해 레이건 하에서 공화당원으로 전향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이후 적극적인 레이건의 지지자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복지국가식 서비스의 집중은 반대하지만 하이에크처럼 최소 정부의 지지자는 아니며 전통적 보수파와 달리 강한 정부의 지지자이며, 군사력의 예찬자이다. 이라크 전쟁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나타나듯이, 이들은 위협세력의 제거와 전쟁 승리 자체보다는 ‘불량국가’들을 무너뜨리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전세계에 이식해 이로부터 도미노 현상을 일으켜 중동과 분쟁지역 전체의 체제를 전환시키겠다는 꿈을 꾸고 있는데, 이 때문에 조셉 나이는 이들을 ‘우익 윌슨파’(Wilsonians of the Right)라고 부르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의 세계적 개입과 강경 군사노선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매파 세력은 ‘잭슨적 일방주의자’(Jacksonian unilateralist)라고 부르는데, 우익 윌슨파가 이라크에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때까지 미국이 주둔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이들은 이라크로부터 빨리 철수해 다른 위협세력에 대한 공격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을 보이고 있다. 신보수파의 득세는 미국 국내 정치지형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에 보수주의가 강화되는 계기는 1970년대 초 미국의 경제위기가 나타나고 1973년 낙태가 허용되고 1970년대부터 차별수정조치(Affimative Action)가 도입됨에 따라 이에 대한 저항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이에 따라 민주당의 영향이 강하던 남부의 보수적 민주당원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여 이탈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새로운 ‘선벨트’ 지역이 부상하면서 남부와 서부의 경제력이 증가하면서 이 지역의 보수화가 강화되었다. 이런 보수주의는 복지혐오와 유색인종혐오, 그리고 기독교근본주의라는 특색을 강하게 띠었으며, 대체로 중산층과 남부공화당원, 그리고 북부의 교외지역 거주자들 사이의 보수 연합이 형성되었다. 또한 금융화의 여파로 각종 규제가 약화됨에 따라 자금 또한 거대하게 보수파들에게 몰렸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20세기 미국의 역사는 노동의 포섭과 테러의 공존이 지속되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20년대와 30년대 급진적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과 결합한 생산성 임금제의 도입(이른바 ‘포드주의’)에 이어 1950년대 냉전 형성기에 동유럽 출신 이주 노동자의 반공주의를 통한 AFL-CIO의 개량주의화와 결합한 매카시즘은 미국의 노동운동의 경제주의적 전통을 수립하였다. 1960년대 말 이러한 노동의 포섭과 테러를 결합한 통제에 균열이 생기고, 이는 중도파를 중심으로 한 사회통제의 기제에도 균열을 발생시킨 바 있다. 9.11 이후 ‘애국입법’ 등을 통해 나타나는 국내테러의 강화는 사회의 인종주의적 색채를 띠는 사회의 전반적 보수화에 기반을 두고 진행되고 있다. 제국 기획의 난점 이라크 전쟁 수행을 통해서 드러나는 신보수파 중심의 ‘제국’적 기획은 그 경제적 토대와 관련해 딜레마를 낳게 됨을 지적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은 전지구적 군사적 개입에 따른 비용부담의 급증이라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이 비용을 세계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정치적 시도를 강화하고 있다. 남한이 끌려 들어가고 있는 군대파견과 파견비용의 자비부담이라는 것이 그 일환일텐데, 미국은 이라크 침공과 재건에 들어가는 비용의 2/3를 동맹국들에게 부담 지우는 한편, 미국의회는 이라크 재건비용의 절반을 원조가 아닌 차관형태로 변경함으로써 자국의 부담을 최소화하려는 뻔뻔함까지 드러내고 있다(『중앙일보』 10월 18일). 엠마뉴엘 토드는 미국의 제국적 기획의 난점을 세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첫 번째는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강하지만 세계적으로 개입을 펼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군사력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하루 15억 달러씩 늘어나는 경상수지 적자로 표현되는 미국 경제의 취약점, 세 번째는 보편주의적 가치가 급속하게 소실되어 가는 미국의 주도력의 약화이다. 지오반니 아리기는 현재의 세계체계가 붕괴한다면 “무엇보다 적응과 조정에 저항한 미국 때문일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는데, 이는 앞으로도 미국이 세계질서를 자신의 구상에 맞게 변화하려는 시도를 당분간 펼쳐나갈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그 결과는 전혀 예상되는 방향이 아닌 매우 불확정적인 형태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미국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지역인 유럽과 자신을 연결하는 범대서양의 위계적 공동지배(condominium)를 유지해갈 수 있겠고, 그것이 적어도 중심부 국가간의 전쟁 가능성은 계속해서 억제할 수 있겠지만, 제국의 변경으로부터의 이탈과 탈구의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체계 전체가 발생시키는 모순이 제국의 핵심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계속해 이전됨에 따라 제국적 기획의 각 고리에서 수많은 딜레마와 갈등이 분출될 가능성은 더욱더 높아질 것으로 보이며, 그 모순이 결집되는 고리들에서 폭력이 폭발적 형태로 집약되어 나타날 가능성 또한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중도 자유주의의 기반이 급격히 취약해지면서 나타나는 우파의 근본적 혁신의 위협 또한 더욱 커져가고 있다.PSSP
번역-이현 | 사회진보연대 회원 독일의 반나치 혁명 작가이자 시인이었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패배한 동포를 향하여, 대지에 나뒹구는 철모의 사진을 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아라 패배한 자들이 썼던 이 철모들을! 그러나 우리의 쓰라린 패배의 순간은 이 모자들이 마지막 벗겨져 내려 대지 위에 나뒹굴었던 때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모자들을 고분고분 우리의 머리 위에 썼을 때였다.” (브레히트, 『전쟁교본』중에서) 들어가며 지난 10월28일, 도쿄도(都) 지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鎭太郞)는 도쿄 도내에서 개최된 집회에서 다음과 같이 망언을 하였다. “우리는 결코 무력으로 [조선에] 침범한 적이 없다. 오히려 당시 조선반도는 분열된 정치상황으로 러시아, 시나(支那), 일본 어느 나라를 선택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은, 이미 근대화를 눈부시게 달성하고 얼굴색도 비슷한 일본의 도움을 얻고자 했던 것이며 이에 따라 합병은 전세계의 합의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한합병을 100%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조선인의 감정에서 본다면 분한 것도 있고, 굴욕적인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합병에는 그들 선조의 책임 또한 있을 뿐 아니라, 비록 이것이 식민주의라 해도 진보적이었으며 인간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비인간적, 호전적 망언은 바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구출을 위한 도쿄 모임’(회장 타시로 히로츠구(田代博嗣), 자민당 도쿄도의회 의원)이 주최한 ‘동포를 탈환하자! 도쿄도 결의대회’의 이시하라의 강연에서 나온 것이다. 이시하라는 이에 앞선 9월10일, 작년 북일정상회담을 준비한 일본지배계급의 한 분파․다나카 히토시(田中均) 외무심의관의 자택 앞에 ‘국적토벌대’라는 명의의 정체불명의 극우그룹에 의해 시한폭탄이 설치된 사건에 대해 “다나카 히토시라는 놈, 이번에 집 앞에 폭탄 설치되는 일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중략) 회담대표로 한 사람이 나가 북한과 논쟁이 될 리가 없다.”(10일, 자민당 총재선거후보, 카메이 이즈카(龜井精香)의 가두지원 연설 중)라고 말할 뿐 아니라, “(폭탄사건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를 묻는다면 당연히 나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러한 일을 맞게 된 것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던 것 아니었는가?”(11일 기자회견 중), “다나카 히토시의 매국행위는 만번 죽어 마땅할 일이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했다”(25일, 도의회 발언 중) 등의 폭언을 내뱉었다. 이러한 이시하라의 국수적 망언․폭언은 이번 사건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이른바 ‘삼국인(三國人)’으로 대표되는 그의 망언․폭언은 이미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때마다 한국이나, 북한, 중국에서도 이에 대한 정부의 항의성명이나 민중의 규탄이 전달되고 있으나, 일본 내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발언이다”라는 기존의 분위기에서 단지 “또 시작인가”라는 분위기로 서서히 변화하여, 최근에는 인터넷상에서도 ‘도쿄도 이시하라 지사의 발언을 지지하는 모임’이라는 사이트마저 생겨나는 등 현재 이러한 민족주의는 일본 민중의 정신을 침식하고 있다. 나치의 선전상 괴벨은 “거짓말도 100번 반복하면 진실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라크에 대량파괴무기가 존재한다”고 반복해서 선전하여 미국 민중을 전쟁광으로 몰아간 것은 네오콘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시하라의 망언․폭언을 수용하는 광신성의 토대가 일본민중 내에 넓고 깊숙하게 뿌리내리려 하고 있다. 전쟁․개헌에 밀접히 관련된 고이즈미 2차 내각 9월20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압승한 고이즈미 수상은 22일 자민당 당직자 인사를 단행하고 제2차 내각을 발족시켰다. 새로운 내각의 면모를 보자면 하나같이 호전적이고 위험한 인물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민당 당직자들을 살펴보면, 먼저 자민당의 새로운 간사장으로 발탁된 아베(安倍) 전 내각 관방 부장관은 작년 북일평양선언 발표를 계기로 한 북일국교 정상화의 흐름을 납치사건을 통해 돌려놓은 중심적인 인물로서 뿌리부터 개헌론자라 할 수 있다. 자민당 부총재에 취임한 야마자키(山埼) 전 자민당 간사장은 방위청 장관을 역임한 이른바 ‘국방족’의 유력한 인사로서 지금까지 자민당 간사장으로 당내 헌법 개악안 작성 과정을 주도해온 인물이다. 자민당 정조회장이 된 누카가(額賀)와 간사장 대리인 큐우마(久間) 또한 방위청 장관 경험자로 오늘날 자위대 해외파병의 기초를 닦은 인물들이다. 제2차 고이즈미 내각에 입각한 관료들은, 아소(麻生) 총무대신이 일본우익단체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일본회의(日本會議)’와 제휴한 ‘일본회의-국회의원 간담회’의 회장이며, 노자와(野澤) 법무대신이 입각 전까지 참의원에서 ‘헌법조정회’ 회장으로 활동한 헌법9조 부정론자이다. 나카가와(中川) 경제산업 대신은 [자민당 내] ‘청년 매파’의 대표격으로서 ‘납치구출행동의원연맹’(약칭 ‘납치의련’)의 회장이며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국회 내 지원세력인 ‘역사교과서 문제를 생각하는 초당파 모임’의 회장이며 코이케(小池) 환경 대신도 ‘납치의련’의 부회장을 맡고 있는 대북한 강경론자이다. 모데키(茂木) 오끼나와․홋카이도․과학기술담당 대신은 전임 외무 부대신 당시부터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주장하고 부시의 이라크 침략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이와 같이 노골적인 개헌론자들, 더구나 이데올로기적이고 행동적인 청년 매파를 대거 등용한 신내각을 발판으로 고이즈미 수상은 연말로 계획되어 있는 이라크에의 육상자위대 파병, 북한에 대한 6자회담에서 미국 입장 추종 및 한층 강화된 강경책 전개, 내년 정기국회에서 ‘유사관련법’의 남아있는 법안인 국민보호법(‘전시총동원’)의 도입, 교육기본법의 개악, 나아가 2005년 헌법개악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 중의원 선거의 계급적 의미 새로운 내각 구성을 마친 고이즈미 수상은 10월 10일 임시국회에서 한시적 입법이었던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의 기간연장을 참의원에서 통과시키고, 같은 날,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그리고 현재 일본에서는 중의원 선거운동이 진행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중의원 선거는 어떠한 계급적 의미를 갖고 있는가? 중의원 해산 전인 10월 5일 칸 나오토(管直人)가 이끄는 제1야당인 민주당이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이끄는 제4야당인 자유당을 흡수하는 형태로 통합하였다. 중의원과 참의원을 합해 소속의원 200명을 넘는 새로운 야당 민주당의 출현에 부르주아 언론들은 일제히 이번 중의원 선거를 여당 자민당 대 야당 민주당의 양대 정당 간의 대결인 것처럼 선동하고 있다. 민주당은 ‘마니페스토’(정권공약)을 발표하고 고이즈미 ‘구조개혁’에 자신들의 ‘개혁’을 대비하면서 정권교체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민주당은 이름만 ‘민주’일 뿐 일본 독점자본이 세계시장에서 생존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철저하게 옹호하고 있다. 이들은 정․관과 재계의 유착구조에 얽혀 있는 자민당 내 저항세력의 존재로 인해 고이즈미 ‘구조개혁’은 실행되기 어려우며, 이러한 관계를 갖지 않은 민주당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세력이라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마니페스토’에서 “논헌(論憲)에서 창헌(創憲)으로” 라는 슬로건 하에 헌법 전문(前文)과 제9조의 개악뿐 아니라, 인민의 생존권에 관한 규정인 제25조를 개악하고 헌법 전체를 신자유주의적으로 개악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민주당의 개헌노선은 자민당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자민․민주의 양당체제는 일본 독점자본에 있어 매우 구미에 맞는 정당체제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체제 하에서] 자본은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부르주아 언론의 이데올로기 조작을 동원하여 자본축적 달성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보다 유리한 정권으로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에는 결코 손상이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권의 지속적인 교체가 가능한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 계급과 민중에게는 임금은 물론 연금, 의료비 등의 사회보장비와 세금 등을 통한 착취가 더욱 강화되는 체제에 불과하다. 한편 헌법옹호를 주장하는 야당 사회민주당과 일본공산당은 이번 선거에서 어떻게 될 것인가? 중의원 선거에 소선거구제가 도입된지 9년이 된다. 이러한 소선거구제 도입에 의해 자민당은 일시적으로 야당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후 연립여당을 구성한 사회당은 오히려 민주, 사민, 신사회당으로 분열, 해체되어 국회는 자민당 중심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와 같은 상황이 출현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공산당은 의회주의에 순화되어 당원과 당기능을 오로지 득표를 위한 형태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그 전형적인 사례를 당 규약에 ‘경영지부’의 지역에서의 활동의무를 명시하여 ‘경영지부’의 당원을 선거활동에 동원해온 것을 통해 볼 수 있다. 그 결과 일본공산당은 노동현장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공산당의 영향 하에 있는 전노련(全勞連) 산하 현장에서는 노동조합이 형해화되어 결국 현장집회 한번 만들어 내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현재 헌법 옹호를 주장하는 사민당과 공산당이 이번 중의원 선거에서 일정한 성과를 낼 수 있는 주체적 조건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상황들에서 볼 때, 현재 우리는 미래를 전망하지 못하는 매우 난망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다.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10월 17일 방콕의 APEC 정상회담 참석을 위한 일정 중 일본을 방문한 부시에게 고이즈미는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과 50억 달러의 이라크 ‘재건원조금’ 지원을 약속했다. 고이즈미 정권은 아프간 전쟁 후 미제에 의한 ‘show the flag(깃발을 선명히)’ 작전에 따라 인도양에 자위대 함정을 파견했고, 이제 또다시 ‘boots on the ground(지상부대의 파견)’ 작전에 따라 육상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단순히 미제의 행동에 꼬리를 흔들며 쫓아가는 ‘바둑이 외교’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 독자적인 계급적 이해에 따른 것이라 판단해야 한다. 즉 1985년 플라자 합의 이래 다국적 기업화를 극적으로 진전시켜온 일본제국주의는, 오늘과 같은 세계화 상황에서 일본계 다국적기업의 지속적인 권익확보를 위해서는 ‘일미동맹’과 같은 군사적 담보를 필수적인 전제로서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이즈미 정권은 ‘아미티지 리포트’의 제안에 호응하여 ‘유사법제 3법’을 제정하고 헌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기 위한 수순을 밟아가고 있는 것이며. 자민당 창당 50주년이 되는 2005년을 계기로 일거에 개헌을 성사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아미티지 리포트’가 그리는 일미관계의 미래상은 아프간 전쟁에서 이라크 전쟁까지 공조를 유지한 부시-블레어의 ‘영미동맹’에 다름 아니다. 이는 곧 서쪽으로는 ‘영미동맹’ 그리고 동쪽으로는 ‘일미동맹’을 구축하여 명실상부한 ‘팍스 아메리카나’를 성취하겠다는 몽상인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도 ‘한미동맹’의 기치 하에 제2차 이라크 파병이 강행되려 하고 있다. 한국 내에서도 노무현 정권의 대미종속 자세가 초미의 현안이 되고 있으나, 단지 이러한 종속적인 태도 자체만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자본주의의 불균등발전의 과정에서, 85년의 플라자 합의와 같은 양상으로, 한국에서도 87년 루브르 합의를 계기로 사회주의가 붕괴한 동유럽의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한국기업의 다국적화가 진행되었다. 그 후 한국자본은 97년의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또다시 자본의 집중을 강행하여 현재 노무현 정권의 ‘동북아경제중심국가’ 구상의 기치 하에 한국계 다국적 자본의 사활을 걸고 동북아시아에의 진출과 확대를 꾀하고 있다. 다국적화하는 자본을 군사적으로 담보하고자 하는 이해관계를 갖는 것은 한국자본으로서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한일관계에 대한 일본정부의 동향 글의 서두에 언급한 이시하라와 아소 등의 망언이 일본민중에게 일정하게 수용되어 파시즘의 지반이 마련되고 있다는 판단, 그리고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에 이지스함을 포함한 자위대 군함이 미․영 함선의 호위와 연료 보급 등의 명목으로 인도양에 출항한 이래 일본이 이미 전시상황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인식은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인식하에서만 고이즈미 정권 - 이는 민주당으로 정권이 바뀐다 해도 마찬가지인데 -이 추진하고 있는 ‘전쟁국가화 정책’에 대항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정부․독점자본은 자본의 세계화가 요청하는 전쟁국가화 상황을 창출하기 위해 작년 9월 북일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북한의 특수기관 일부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사실을 인정했다는 점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리고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납치문제는 지속적으로 확대․증폭되고 있다. 부르주아 언론들은 연일 납치사건을 마치 ‘일본 민족 전체가 피해를 입은 비극’으로서 연출․선동하여 일종의 ‘피해의식’에 기반을 둔 국론을 형성하고, 북한과 관계된 일은 무엇을 막론하고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위험한 민족 배외주의적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다. 서두에 언급한 이시하라의 발언도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도쿄모임’의 집회에서 나온 것이며, 이러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구출을 위한 전국협의회’(약칭 구출모임),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 가족대책위원회’(약칭 가족대책위) 그리고 앞서 언급한 ‘납치의련’ 등이 일제히 북일국교 정상화 교섭에 개입하여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본 국내에서는 민족배외주의가 만연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 공격의 초점이 (총련계) 재일조선인과 그 자녀들에게 향해지고 있다. 각 지방에 있는 총련 회관이나 관련시설에 폭탄이 설치되고, 협박장이 보내질 뿐 아니라 민족학교에 통학하는 총련계 학생들의 치마저고리 교복 등을 찢고 폭언을 퍼붓는 등의 사건이 전국에서 빈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민족학교의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체육복이나 사복을 입고 등교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한사람이라도 더 일본친구들을 사귀지 않으면 무서워서 살 수가 없다”고 말하는 필자의 총련계 조선인 친구는, 80년 전 관동대지진 직후 일본인 자경단이 6000명이상의 한국인을 학살했던 역사를 오늘의 민족배외주의가 만연한 상황을 보며 떠올리는 것이 분명했다.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테제가 현재의 일본 노동자․민중에게 다시금 상기되어야 하는 상황이다. 한편 고이즈미 수상은 이러한 위험한 배외주의 상황을 해소하기 위한 여하한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북한이 공격해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라고 말하면서 배외주의를 확대․재생산하여 유사법(‘전쟁법’) 제정을 강행하고 연내 이라크 파병 준비를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내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6자회담이 개최될 예정이지만 북일관계의 교착상황이 타개되지 않는 한, 6자회담이 다른 진전된 상황을 만들어 내지는 못할 것이다. 6자 회담에서 일본정부는 철저히 미국의 정책기조 하에 따를 것이며, 논의과정에서 납치문제를 재론할 속셈이며, 일본은 회담의 진전에 장애물이 될지언정 결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향후의 북일관계는 이 6자회담의 진척 이후 논의되게 될 것이다. 전쟁의 위험과 동북아시아의 시장경제화에 대항하기 위하여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6자회담의 계급적 성격이다. 부시 독트린은 이라크 침략전쟁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독자행동주의와 선제공격을 주요한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자유무역과 안정된 국제통화시스템을 이 원칙에 동의하는 모든 국가들에 관철시켜 경제성장과 정치적 개방을 촉진하려는 의도 또한 명확히 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제국주의는 6자회담을 통해 북한포위망을 형성하고, 전쟁을 통해서일지 아닐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 최종목표로서 북한을 포함하는 동북아시아 전역의 시장경제화를 상정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최근 일본 국내에서는 “시장경제가 확대되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논조가 신자유주의자들은 물론 자유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떠들썩하게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단지 ‘평화’롭기만 하면 되는 문제인가? 그러한 ‘평화’란 어떠한 상태이며, 그 속에서 노동자․민중들은 어떠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 바라는 ‘평화’란 단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북한과 중국을 포함하여 동북아시아 전역을 석권하는 것으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부의 편재가 국제적으로도, 일국적으로도 현재보다 더욱 심화될 것이다. 현재 아시아 각국에서 추진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FTA)와 투자협정(BIT)의 체결교섭은 이를 담보하는 자본축적의 폭력장치에 불과하다. 우리는 침략전쟁과 세계화, 나아가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삼위일체로서 작동하고 있다는 인식 하에 이에 대한 저항을, 남․북아메리카와 유럽 등 세계의 민중들과 연대하는 가운데, 동아시아 수준에서 구축해가야 한다고 본다. 작년 이래 이어지고 있는 반전투쟁의 국제적 확대와 칸쿤에서 WTO 각료회의 저지의 경험은 우리에게 이러한 과제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내년 1월 인도 뭄바이에서 개최될 제4차 세계사회포럼(WSF)을 계기로 이런 과제를 실현해가고자 한다. 나아가 WTO와 현재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유무역협정과 투자협정에 대한 투쟁이 일국 내의 개별적 대응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수준의 포괄적인 대응을 위한 조직적 틀의 형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자본의 동향이 ASEAN+3 회의와 같이 국내적인 갈등에 대해 포괄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항 저항운동을 수행하는데 있어 한일간의 연대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나아가 11월 중으로 예정되어 있는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의 오키나와, 토쿄와 서울 방문은 한반도에 전쟁위기를 가중시킬 것으로 예상되는 바, 이에 대한 긴급한 대응이 요구된다. 지난 10월25일 ANSWER의 호소 하에 성사된 국제반전 동시행동에서 한국과 일본의 노동․사회․시민단체들은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요구에 반대하는 한일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향후 이러한 공동행동을 일과성의 성명발표로 국한하지 않고 ‘이라크 파병반대’, ‘미군의 동아시아 재배치 반대’, ‘주둔 미군의 철거’라는 구체적인 공통의 과제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는 한일연대운동으로 발전시켜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브레히트의 『전쟁교본』처럼, 대지 위에 나뒹구는 패잔병의 철모를 일본의 민중이 또다시 고분고분 쓰는 일이 없기 위하여!PSSP *역주 - 일본식 한자어 표현은 한국식 표현에 맞게 수정하였다. : ‘일미’, ‘일한’, ‘조미’, ‘조일‘은 미일’, ‘한일’, ‘북미’, ‘북일’ 등으로 표기하였으며 ‘조선’, ‘조선인’은 ‘북한’, ‘북한인’로 표기하였다. 단 ‘조선인’은 문맥상 ‘(총련계) 재일 조선인’ 등으로 표기하였다. 그 밖에 ‘수뇌회담’, ‘연락회’, ‘체조복’ 등은 ‘정상회담’, ‘대책위원회’, ‘체육복’ 등으로 표기하였다. - 그 밖에 필요한 부분에 대해 역주를 달았다. 2,4,6,9번
노무현 파병정권, 한미 학살동맹을 심판하자 ! 우리는 18일 노무현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 결정을 내린 것을 강력히 규탄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3일 국회 시정연설에서 파병문제를 “결코 조급하게 결정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데 이어 불과 하루 전인 17일에는 시민-종교 단체 대표들과 만남의 자리를 갖으며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으나, 같은 시각에 청와대에서 4당 대표들에게 파병확정을 통고했다고 하니 국민을 우롱하는 이런 기만적인 작태가 어디 있는가. 여론 수렴은커녕, 뻔뻔한 거짓말로 일관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태도에 우리는 다만 기가 차고 열불 터지는 분노를 감출 길 없다. 16일 유엔 안보리 이라크 결의안이 통과되기가 무섭게 단 이틀만에 파병 결정을 내린 것은 유엔 다국적군이라는 명분을 들이대며 파병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속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처사이다. 허나 유엔 결의라는 국제 기구를 통한 문제해결 방안조차도 미국에 의해 저질러진 침략 전쟁을 사후 승인하는 미국의 일방주의를 관철하는 구실 밖에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인데, 다국적군 타이틀을 건 파병이 무슨 명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말하는 허울좋은 다국적군 파병에 한국이 파병 비용뿐만 아니라 이라크 재건 비용으로만 2억 달러를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미국의 비용을 강제로 떠맡아야 하는 상황은 또 어떠한가. 미국의 부당한 파병압력에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학살동맹’으로 응한 것이다. 이라크 파병 결정 과정과 결정 근거 지난 4월 2일 1차 파병을 위한 국회결의안 의결에 앞선 연설에서 노무현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경제 불안 해소’가 파병 결정의 배경임을 주장했다. ‘더불어 명분이 아니라 현실의 힘이 국제 정치 질서를 좌우하고 있음’을 강조하여 오늘 세계 질서에서 미국의 무력이 무엇을 뜻하며 국회가 왜 파병 결의안을 통과시켜야 하는지, 세계정세를 냉정히 읽을 것을 주문했다. 또 지난 9월 9일 언론은 일제히 리처드 롤리스 미 국방부 동아시아 태평양 부차관의 파병요청을 보도하였고, 이에 대해 황영수 국방부 대변인은 ‘국제정세의 동향과 국민 의견 수렴 등 다각적이고 신중한 검토를 거쳐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추석연휴를 경과하면서 언론은 대단히 모호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UN 결의가 통과될 때 파병찬반이 바로 그것이다. UN이 무엇을 결의하는지는 따지지도 않고, UN 결의는 곧 선이라는 전제아래 여론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국민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한편, 9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은 ‘적어도 한반도 안정에 대해 예측 가능한 무엇이 필요하다’며 파병과 북핵 문제의 연계를 시사했지만, 그 날 파월 국무부 장관은 윤영관 외통부 장관과 벌인 회담에서 ‘북한의 선핵 포기가 모든 것의 전제’라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리고 9월 30일 한승주 주미대사는 일체 조건 없는 파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미국 현지의 시각이 매우 부정적임을 알려왔다. 그리고 최근에야 확인된 바에 따르면, 10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은 라종일 국가안보보좌관을 통해 미국에 친서를 보냈고, 이에 대해 라종일 보좌관은 외교관례상 친서의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정부는 북핵과 파병을 별개사안으로 대처해 나간다는 방침을 밝힌 바 있고 여러 경로를 통해 이 점을 미국 측에 통보한 일이 있다”고 밝힘으로써, 사실상 친서의 내용이 노무현 정부의 파병방침과 관련된 것임을 시사했다. 물론, 이는 그동안 정부측의 말과 달리 애초부터 파병은 북핵의 평화적 해결과 연계되어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 것이기도 하다. 라종일 보좌관이 당시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으며, 친서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10월 14일 라이스 보좌관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에 앞선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미국의) 이라크 정책을 계속 지지할 것으로 확신하며 한국과 이라크 파병 문제를 가장 먼저 논의하고 싶다’며, ‘우리에게 한국보다 더 강력한 동맹은 없다… 이것은 매우 강력한 동맹이며, 매우 강력한 관계’라고 한국정부를 치켜세웠다. 통상관례를 넘는 수식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15일 한승주 주미대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급히 귀국해 미국 현지 분위기를 전했고, APEC과 한미정상회담까지 노무현을 수행하였다. 영/불/러시아를 달래는데 성공한 미국은 10월 16일 별다른 무리 없이 UN 안보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주도의 다국적군을 허용하는 UN 안보리의 결의를 받아낸 것이다. 이튿날인 17일 노무현 대통령은 재향군인회와 가진 간담회에서 재신임 국면이지만 그와 관계없이 파병을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곧이어 이루어진 시민운동 관계자들과의 자리에서는 파병 결정의 우려점을 털어놓으면서 ‘정부 차원에서 결정된 바는 아무 것도 없다. … 내일(18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어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이라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파병 결정을 전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파병결정의 성격 : 대테러 전쟁 참여, 파병은 학살이다!! 결국 노무현의 ‘평화번영정책’에서 말하는 평화란, 전쟁위협의 제거를 뜻하는 본연의 평화라는 의미와 전혀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의 ‘평화번영정책’은 자본 투자의 불안 요인-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의 ‘예방전쟁’, 선제공격, 침략전쟁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지지하는 전쟁지지 정책이다. 노무현의 2차 파병 결정은 이 같은 그의 속내를 더욱 적나라하게 내비치는 것에 불과하다. 미국은 ‘전투병 파병’이 부담될 수 있는 만큼 ‘안정화군(stabilizing force)’이라는 말로 동맹국에 다국적군 참여를 독려하고 있는데, 이를 모방하기라도 하듯 노무현 정권도 ‘치안유지군’을 선호했다. 이라크에서 게릴라전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누구든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그가 사태를 호도하는 이유는 어찌 보면 그 자신이 약속한 대로 ‘파병군대의 성격, 규모’에 대해서만큼은 논의의 여지를 남겨놓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즉, 비전투병이냐 전투병이냐의 선택), 사실 더 중요한 문제는 파병을 보내는 국민적 동의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즉, 이번 파병의 목적이 ‘이라크의 치안유지’에 있음을 부각함으로써 어떤 군인을 보내건 파병 자체에 대해 국민적 동의를 얻겠다는 속셈이라는 뜻이다. 이는 미국이 ‘대량살상무기의 제거’를 위해 어떤 형태라도 군사적 제재 수단을 갖겠다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노무현도 역시 동일하게 파병의 명분을 취하겠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는 이라크에 파병된 군인들이 예측하지 못한 피해를 입더라도 약간의 희생(!)은 감내하는 범위에서 파병을 지속할 근거를 미리 마련해 놓겠다는 의미다. 여기서 문제는 부시가 선제공격옵션을 선택했듯 그가 ‘치안부재’의 상황에서 군사적 선택(비록 파병이라는 제한된 형태이긴 하지만) 즉 무장의 선택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이다. 이때 우리는 그가 지난 10월 21일 APEC 정상회담에서 미래를 위한 파트너십과 반테러를 주제로 연설한 대목을 주목해야 한다. ‘무역 자유화와 원활화를 촉진시키기 위해 투명성 증진과 정보화 촉진이 중요하다’며 역내 국가 사이 금융협력 필요성을 강조하고는 연이어, APEC내 반테러 협력의 진전을 평가하면서 “경제번영과 안보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점에서 APEC에서 반테러를 포함한 안보이슈 논의를 확대해야 한다. … 반테러 협력의 이행을 위해 개도국의 능력 배양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 말이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보면 이번 이라크 파병 결정이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의사에 기반을 둔 것임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단순 지원이 아니라, 부시 행정부와 함께 대테러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라크 민중에 대한 학살 선언은 이 땅의 노동자 민중에 대한 전쟁선포와 한 쌍 동시에 우리는 이 같은 노무현 정권의 우향우가 단지 여기에만 그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지난 9월 노동부가 ‘노사관계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여, 노동자에 대한 자유로운 해고,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벌칙 삭제, 파업에 대한 손배 가압류 청구권 보장, 파업현장에 대한 경찰력 투입 근거 확대 등 노동 기본권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안의 실현을 예고하였다. NEIS 합의 파기, 4월 철도노조와 맺은 합의 파기, 파업현장에 경찰력/사설무장력 투입, 경제자유구역 확대, 기초생활보장제도 축소, 교육/의료/문화 시장개방의 확대들까지… 모든 것들이 다 하나같이 정확히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명목은 모두 하나같이 금융가와 기업가의 투자 여건을 방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제거이다. 이라크 민중에 대한 학살선언이 이 땅 노동자 민중에 대한 전쟁선포와 한 쌍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전투병이냐 비전투병이냐의 기만적 논점에 놀아나지 말자 뿐 만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기만적이게도 파병부대 형태, 규모, 시기를 ‘미국 요청과 국민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결정하겠다는 묘한 사족을 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에 전투병 뿐만 아니라 ‘이라크 평화정착과 신속한 전후재건 지원’ 역할에 적합한 의료부대 등 이른바 민사지원부대를 추가 구성하여 다목적부대로 파견하는 것이 낫겠다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한 쪽에선 이라크 민중들을 죽이고 한 쪽에선 그들을 치료로서 달래주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종전 이후 아직도 전쟁위험이 도사리는 이라크에 전투병을 파병하는 것은 민사지원부대 구성 비율과 관계없이 ‘조금 더’ 또는 ‘조금 덜'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 이라크 민중을 학살하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파병이 학살인 한에서 파병을 철회시킬 것이냐 아니냐의 싸움이 전투병이냐 비전투병이냐의 논란은 파병방침을 밀어붙이려는 노무현이 쳐놓은 덫이다. 노무현의 이 덫을 치워내는 일로부터 우리의 투쟁은 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노무현이 그 스스로 다짐했던 ‘국민과의 합의’라는 것을 미국의 유엔 결의안 통과를 위한 시간 벌기로 이용하고,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파병방침 결정의 들러리로 세워버린 정치 기술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언제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대화와 타협을 운운하면서, 때가 되면 합의를 뒤집고 이전의 그 어느 군사독재정권에 못지 않은 탄압을 가해왔다. 그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합리적 개혁세력이 아니다. 그는 이 땅의 민주주의의 파괴자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피바람 속에서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몇 안 되는 이라크 학살동맹의 우두머리 전범이다. 그는 노동자/농민/여성의 생존권을 벼랑 끝에 몰아넣는 것도 모자라 이들의 최소 저항마저 몰살시키려는 ‘사용자의 대항권’을 키워주려는 폭력사범이다. 그의 파병 결정은 이라크 민중들에 대한 학살선언이며, 이는 이 땅의 노동자 민중에 대한 전쟁도발과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 노무현의 거짓과 만행을 더 이상 두고볼 여유가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18일 파병 결정을 내린 후 “이제까지 생각했던 여러 가지 기준에 비춰볼 때 지금이 파병을 결정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라고 말했다고 한다. 재신임을 둘러싸고 여야가 분열을 거듭하고, 파병 결정이 미뤄지면 ‘인기투표’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에서 파병 결정과 때를 같이해서 대선 자금 공동고백을 매개로 여야가 극적인 ‘대화와 타협’을 이룰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국민들의 진정한 정치 참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야 상층 지배세력들의 타협과 이합집산만을 낳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을 규탄한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 뻔뻔하게 재신임을 물을 수 있는 권한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의 실패로 인한 장기불황과 이라크 침략전쟁, 한반도 위기에 대한 기만적 대응으로 대표되는 노무현 정권의 무능과 연이은 권력형 부정부패가 얼룩진 민생파탄 민주상실의 사회현실을 노동자 민중의 이름으로 엄중히 심판할 것이다. PSSP
말레이시아의 사회운동 태국에서 일정을 마치고 방콕의 공항에서 쿠알라 룸푸르로 넘어가는 말레이시아 항공편을 기다리면서 착잡함을 누를 수가 없었다. 태국 노동운동의 취약함이야 사전 조사 과정을 통해서도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심했고, 활발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회운동도 사전 지식과는 달리 그 역동성이나 활동력에 있어서는 기대에 못 미치는 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지의 운동 지형이 처한 상황과 조건을 정확하고 현실감 있게 파악하는 것 자체가 성과이고, 그 외에도 나름의 소득은 있었지만 말이다. 별 근거 없이 말레이시아는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혹은 바램이 앞선 것도 사실이다. 사실 태국과 말레이시아는 인접한 국가이고 비행기로 2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같은 동남아 국가라는 것 외에는 유사성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두 국가 사이에는 차이가 많다. 비행기 대기실에서부터 히잡이나 부르카, 차도르를 두른 여성들이 눈에 많이 띄는 것부터가 그렇고, 남편으로 보이는 한 남성을 쫓는 여러 명의 부인들 모습도 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 룸푸르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도심으로 향하면서 보이는 주택이나 건물의 모습 또한 다르다. 고속도로 양옆으로 새롭게 지어지고 있거나 막 완성된, 수없이 많은 같은 모습의 주택이나 저층 아파트들의 모습은, 좀 심하게 말하자면 북한식 계획거주 시스템을 연상케 한다. 산업화의 정도도 딱 한 눈에 태국보다는 월등히 위다. 도심은 서울보다도 더 많은 고층 빌딩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으며 길거리의 자동차들도 말레이시아산이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전에 알았던 내용이지만, 말레이시아는 개발독재, 국가 주도의 경제 성장으로 한국의 70-80년대와 매우 비슷한 양상으로 경제 성장을 이룩한 국가였고, 정부도 한국이 따라야 할 모범(?) 사례로서 제시한다고 현지인들은 전했다. 분위기 면에서도 방콕이 전 도시가 시장바닥처럼 무질서할 정도로 부산하고 활기찼던 것에 비해서 말레이시아의 분위기는 엄숙하고 무거우며, 체계가 잡혀있었다. 한국에서 말레이시아를 논할 때 있어서 97년도 위기를 빼놓고는 얘기를 할 수가 없다. 외환위기가 동아시아를 휩쓸었을 때 한국과 태국이 IMF의 처방을 충실히 수행한 ‘모범 국가’로 칭송되고 있었던 시절, 그 이면의 고통과 절규를 아는 사람이라면, 강제된 구조조정에 맞선 사람이라면 한번쯤 말레이시아의 사례를 접하고 한국도 같은 길을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제 경제기구들과 초국적 자본에 맞서서 서방의 제국주의와 착취, 새로운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폭로하며 당시에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다른 길’을 택한 국가가 바로 말레이시아이다. 그 구체적 내용은 IMF가 강요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 거부, 자본 통제 실시, 고정 환율제 유지를 골격으로 한다. 근데 외환위기가 지나간 지 5년이 넘는 시점에서, 우리가 만나본 활동가들과 학자들에 의하면 경제위기와 그 이후 국가의 대처와 적응 방안에 대한 평가는 말레이시아의 진보 진영 내에서도 여전히 논쟁 중인 사안이었다. 조사팀이 접한 사람들에 한해서는 크게 보자면 세 가지 입장으로 갈리는데, 그 첫째가 마하티르 정부는 순전히 자신의 과오와 부정부패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IMF 위기 국면에서 반서구, 반제국주의 수사를 동원한 것이라면서, 실제로는 IMF 처방은 이후 모두 관철되었다는 주장이었다. IMF로부터 긴급 차관을 받지 않은 대신 국내의 공무원 기금, 노동자 연금, 종교 기금, 석유로 저축한 돈 등 국내에서 동원 가능한 모든 자금을 집중하여 국내적으로는 외채 위기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로 나아갔다는 주장인데, 마하티르의 비타협적 자세가 사실상은 알맹이가 없는, 대내용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다른 쪽에서는 말레이시아의 경제가 외환위기 당시와 이후 회복 국면에서 피해는 최소화하는 동시에 성장은 빠르게 회복되었던 양상을 지적하면서, 마하티르의 정치적 한계와는 별도로 IMF의 획일적인 처방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던 것에 대해서는 평가를 해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IMF의 정책 처방의 핵심이 자본자유화와 변동환율제 도입이라는 점에 있어서도 이러한 점을 거부한 것은 무시할 수 없으며, 더군다나 IMF 외부에서는 물론, 내부 평가보고서에서도 동아시아 위기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비판을 가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말레이시아의 외환위기 당시의 대응을 전혀 의미 없는 것으로 폄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핵심적인 부분에서는 그가 IMF 위기에 대응한 방향이 옳았고, 객관적인 경제 지표들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며, 그 이후의 경제 정책과 분리해서 사고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외환위기 당시 한국과 태국의 경우 10% 내외의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인 반면 말레이시아는 5% 대에서 경제의 위축을 막았고, 이후의 성장 궤도로 복귀도 완만하게 이루어졌다. 마지막으로 이 둘 사이의 중간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마하티르가 당시의 경제위기의 원인과 처방에 대해서는 IMF와 의견을 달리 하였지만 그가 철저한 시장주의자라는 것을 전제한 후에, 국내정치의 복합적인 이해관계와 대외적인 압력 사이의 긴장관계에서 말레이시아의 경제 정책 기조가 규정된다는 의견이다. 이러한 이유로 말레이시아 사회는 완전한 신자유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에 대한 거부도 아닌 혼합 형태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국내 주식시장 개방과 민영화의 진행 등 다양한 경제 정책의 변화도 정치권이 무시할 수 없는 정실자본주의의 기득권 층과 국내 다양한 이익 세력들의 이해관계 그리고 초국적 자본의 요구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 사이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종합해보자면, 이들 주장에는 배타적인 부분들이 존재하지만, 공통분모 또한 적지 않다. 외환 위기 당시의 수사나 행보가 어떻든 간에 이후 5년 동안에 대부분의 신자유주의의 프로그램이 말레이시아에서 관철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기간산업의 민영화, 이후의 자본과 투자 자유화, 노동 시장의 유연화와 산업구조조정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민중의 입장에서 보자면 어떠한 긍정적인 요소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당시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마하티르가 그런 입장을 취할 수 있었던, 혹은 취할 수밖에 없었던 국내 정치적 요인들과 구조에 대한 고려의 필요성을 모두가 인정한다는 점이다. 사실 말레이시아의 정치구도는 상당히 독특하다. 이주민들로 구성된 국가에서 인종 분포가 60% 말레이계, 30% 중국계, 10% 인도계로 나뉘어져 있는데, 정당도 이에 따라서 조직되어 있고, 경제 부문에서의 역할 분담도 인종에 따라서 상당 부분 결정된다. 말레이계는 양분되어 농업 부문과 주요 산업의 기득권 층에 골고루 포진되어 있으며, 중국계는 화교 자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하여 상업과 금융, 하급 관료 집단에 상대적으로 많다. 마지막으로 인도계는 노동자 계급 구성원들이 주류를 이룬다. 마침, 얼마 전에 개최된 이슬람 정상 회의에서 마하티르가 유대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여 또 논란을 야기했는데, 이에 대한 폴 크루그먼의 기사를 보면, 미국 학자로서는 의외로 마하티르에 대해서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해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마하티르의 행보나 발언들이 감정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서구에는 비춰지지만, 인종/민족별로 조직된 말레이시아의 정치 구조에서 그는 자신의 지지 기반과 이해관계에 따른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이고, 경제위기 때나 지금이나 그의 말과 정책은 말레이계를 대변/지원함과 동시에 타인종들에 대한 포용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그의 조건에서 나왔으므로 단순히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성격이야 어떻든 그는 인종별로 조직된 정당 구조 속에서 다수파를 관리하며 지지를 이끌어내고, 분열을 막으면서 기타 소수 정당들과는 제휴/연합하기도 하고 선을 긋기도 하면서 20년 넘게 집권을 해온 것이다. 이념에 따라 조직된 정치 구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국의 지역주의와 비교도 흥미로운 연구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후발 국가로서, 그리고 다인종 사회로서 말레이시아는 아직도 국가의 정치적 통합이라는 근대 국가 건설의 과제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투박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말레이시아에 머물고 있는 동안 국경일을 기념으로 거대한 국기를 관공서와 주요 기업 건물마다 걸고 있었고, 방송에서도 ‘공익’광고와 ‘땡전’ 뉴스 식의 보도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더욱 극명하게는 최근에 군 징병제가 실시될 계획이 정부에서 제출되었는데, 국가에서 내세우는 명분이 안보 위협이 아닌 ‘국가 통합’이라는 것이다. ‘군대’와 ‘교육’이라는 근대국가 건설의 두 필수 요소를 국가에서 보다 넓게 활용하고자 하는 계획이다. 위의 정치, 사회, 경제적 배경에 대한 서술에서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역시 국민 동원형 국가 이데올로기,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 총리의 노련한 국정 운영, 인종별로 갈라진 정치 지형, 정부 소유의 언론, 그리고 국가보안법과 보안수사대와 같은 반민주 악법과 기구들이 존재하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아니, 철저하게 체제 내에 포섭되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애초에 태국과 비교했을 때에는 단일 노총으로 조직되어 있는 말레이시아의 노동운동 상황을 보고 적어도 태국보다는 상황이 나을 것이라고 예상을 했었다. 하지만 조사팀이 방문한 말레이시아 노동총연맹(Malaysian Trade Union Congress: 이하 MTUC)은 조합원이 약 50만으로 공무원 조직을 제외하고는 단일 노총이었으나, 외형적으로 한 조직 하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 성격은 철저하게 정부에 의존적이었으며, 정치적으로 체제 내화된, 법적 테두리 안에 완벽하게 가둬진 노동조합이었다. 마하티르 정부는 그간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온갖 회유, 협박, 법적/제도적 수단들을 총동원하였는데, 그 사례들을 들어보면 선거에서 어용파 지원, 노동총연맹의 산하 조합원 대표 자격 부정, 산별 노조 가입 제한과 기업별 노조 유도, 친정부파에 대한 금전적 지원, 공공부문 노동자들과의 분리, 단체교섭 사안을 임금, 승진, 작업 환경 등 직장과의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의제로만 제한, 직권중재, 노동재판소을 통한 단체 행동 억압, 불가능하다시피 한 파업 성립 조건 규정 등,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리하여 정치적 파업이나 연대 파업이라는 개념 자체가 말레이시아 노동운동에는 없어진 것을 물론이고, 파업 자체가 없어질 위기에 처해있다. MTUC 산하 사업장에서 마지막 파업이 벌어진 지가 4년이 넘었다고 하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된 결정적 계기는 80년대 말, 90년대 초의 MTUC 외부의 제2노총 건설 운동의 실패였는데, 이후 ‘민주파’의 전술 변화가 있어서 지금은 MTUC 내부에서 개혁을 위해 노력 중이다. 지난 위원장 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2위를 하기는 했으나, 당선이 되어도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기는 힘들다. 노동조합운동 자체가 현재 너무 취약하고 이를 규정하고 있는 환경 자체가 단기간 내에 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 때문인지 노동조합들은 이주노동자나 비정규직 문제와 관련해서, 이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거나 자기 문제로 사고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회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관료화된 노조와 서유럽이나 미국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부유한 비정부기구들이 아닌, 독립적이며 변혁적인 전망을 지닌 조직들은 드물었다. 후자의 조직으로는 노동운동의 민주화를 지원하는 노동자원센터(Labor Resource Center: 이하 LRC)가 있지만, 상근 직원은 2명뿐이고 대표로 있는 티안 추아(Tian Chua)는 새롭게 형성된 민중공평당(People's Justice Party)의 부대표로 있었는데, 좌파라고 분류하기에는 좀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여성과 노동자 독립 미디어 훈련 센터(Women and Workers Independent Media and Training Center: WIMTEC)도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이었으나, 개인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조직(상근자 없음)이고 해외에서의 지원금이 떨어져 지금은 사업 구상 중이라고 하였다. 지속 가능한 세계화를 위한 감시단(Monitoring Sustainable Globalization: 이하 MSG)은 3-4 명의 활동가 겸 학자들이 결합하고 있는 세계화 관련 단체였다. 수도 민영화, 사회적 보호망, 가내 노동자 등에 관한 구체적 연구 프로젝트 진행하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세계화와 초국적 기구들이 말레이시아와 동남아 지역 내의 경제 구조와, 생산 체계, 임금과 노동 조건, 삶의 질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교육과 연구를 하고 있었다. MSG는 세계무역기구(WTO)나 현재 추진 중인 아시아 자유무역 협정의(Asian Free Trade Agreement: AFTA) 자본 자유화 움직임에 맞서서 필수공익 서비스를 보호하고 공공부문의 사유화를 막고자 하는 ‘시민들의 권리 헌장’을 다른 시민사회 단체들과 함께 제출하기도 했는데, 운동의 조건이 우리보다 열악함에도 지역 차원의 자본 자유화 흐름이 우리보다 앞선 배경에서 생겨난 조직인 만큼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 외에도 말레이시아판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 반대 투쟁과 양심수 석방 캠페인으로 인해서 해외에도 잘 알려진 몇몇 인권운동단체들도 있었다. 학생운동도 몇 해 전까지는 꽤 활발했다고 하나 지금은 경제위기와 소비문화로 인해서 많이 위축된 상태라고 노동자원센터(LRC)의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는 전했다. 좀 다른 운동의 전통과 기풍을 지닌 조직으로는 제릿(이하 Jerit: 말레이어로 소리치다라는 뜻)이 있었다. Jerit은 맑스-레닌주의 이념의 정치 조직인 사회당(Socialist Party)과 연계된 전국 네트워크로서, 학생, 공장 노동자, 플랜태이션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의 분야에서 2004년, 태국의 빈민들의 회의(Assembly of the Poor)의 90년대 운동과 비슷한 형식의 대중 투쟁을 조직하고 있었다. 관료화된 단위 노조와 보수적인 노총을 거치지 않고, 직접 플랜테이션 노동자들과 교류하면서 투쟁을 조직했던 6개의 노동운동 지원 단체들이 연합하면서 이 조직의 모태가 형성되었는데, 최근에는 공장 노동자들의 조직화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의 투쟁 사례에서도 독립적으로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캠페인을 통해서 여론 환기, 사측 압박, 노동자들의 의식 고양을 꾀하고 있었는데, 작년 메이데이의 경우, 이들은 노총이 조직한 것보다 더 큰 규모의 메이데이 집회를 조직(노총은 1000여 명, 이들은 2000명 정도)하기도 했다. 집회와 관련된 각종 악법에도 대중투쟁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운동에서는 드문 사례였다. 각 분야에서의 요구안들을 수렴하여 2004년에는 전 민중들의 투쟁을 전개하고, 이후 이를 바탕으로 ‘민중의회’를 조직하여 현존 노조와 정당들의 대안적인 조직이 된다는 목표의식 또한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현재 노동자들과 관련해서 노동법 관련 교육, 최저임금/수당 관련 요구안을 내걸고 접촉하며 조직화하고 있었다. 이 조직은 말레이시아 노총은 어용이고 다른 기타 ‘진보’ 정당들은 사회주의를 포기했다면서 일갈을 했었는데, 그들 자신은 국제적인 사회주의 조직과의 연계는 없다고 밝혔으며 말레이시아식 사회주의를 주창하고 있었다. 규모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개입하고 있는 공장의 수가 30, 농장이 50, 도시 빈민 공동체가 30, 10여 개의 농촌 마을인 것으로 보아서는 핵심 활동가는 최소 100여명, 동원력은 메이데이 집회에서 볼 수 있듯이 2000-3000 정도에 이르는 등 왕성한 활동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노동운동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 말레이시아적 맥락에서는 이들의 한계이자 장점이었다. 내년 투쟁의 전개가 주목된다. 말레이시아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하는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극소수의 세력을 제외하면, 말레이시아 진보진영의 기대와 염원은 여전히 우리의 과거에 묶여있었다. 김지하가 70년대에 박정희에 맞서 ‘타는 목마름으로’ 고대했던 것이 사회민주주의도, 인민민주주의도, 자유민주주의도 아닌 그냥 ‘민주주의’였듯이, 말레이시아의 활동가들도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그것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지, 그것의 실내용이 어떻게 구성될지 모른 채 마찬가지로 마하티르가 물러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주적 공간’의 확보를 통해서 자신들이 바라는 미래가 전개될 수 있는 시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대중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발언도 꽤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단선적이진 않겠지만, 우리의 ‘역사’가 그들의 ‘미래’와 상당부분 중첩되는 셈이다. 앞으로 전개될 미래에 우리의 오류와 우여곡절을 겪지 않기를 바라지만, 낙관할 근거는 찾기 힘들었던 것이 솔직한 인상이었다. 마지막으로 동남아에 진출한 한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에 관련된 얘기를 하고자 하는데,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현지 조사단이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태국에서는 사측의 노동자 탄압과 부정부패에 맞서 모나미 현지 공장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조사팀이 간담회를 하는 곳에 와서 한국 기업들의 부당 노동 행위 와 인권 유린과 멸시의 사례들에 대해서 하소연하며 도움을 요청했었다. 태국 다른 지역의 귀금속 공장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의 탈의실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여 지역 노동자들의 원성이 높다는 얘기를 들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심지어 한 활동가한테서 한국 사람들은 사람을 패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냐는 질문까지 받았다. 국내에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어딜 가는 것이 아니다. 돌아와서 듣자하니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사단 모두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움만으로는 그때의 감정을 표현 못하리라. 한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날, 불가피하게 항공편이 연기가 되면서 현지 조사 일정 중에 최초로 하루를 쉴 수 있게 되었는데, 근처에 있는 이슬람 박물관과 함께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크다는 외국 서점에 가게 되었다. 마하티르가 자주 서구나 1세계에 맞선 아시아인들의 연대를 주창하는 만큼, 서점에도 ‘아시아의 작가들’이라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구성이 흥미로웠다. 말레이시아의 인종 분포를 감안했을 때 말레이계 작가들과 중국, 인도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것 외에는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일본 작가들 소수만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국이나 필리핀, 인도 외의 남아시아의 국가들은 그들의 ‘아시아’ 관념에서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 이는 하나의 사례뿐이겠지만, 그 내부에 이질성이 워낙 많고 종교, 인종, 경제 수준, 역사 모두가 상이한 상황에서 단일한 아시아 개념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닌가 싶다. 아시아에는 여러 개의 아시아가 존재한다. 이를 인정하는 속에서 공동의 의제와 공통분모들을 발굴하는 것이 지역 연대의 첫 단추일 것이다.PSSP
국제주의만큼 매우 규범적이며 동시에 다의적인 정치적 통념은 거의 없다. 오늘날, 서구의 공식적 담론은 오랫동안 좌파의 등록상표였던 이 용어에 대한 호소로 가득하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간에, 국제주의의 의미는 민족주의라는 다소 앞서 존재하는 개념에 논리적으로 의존한다. 왜냐하면 국제주의는 오직 민족주의의 대립물을 가리키기 위한 배후 구조로서 통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족주의는 모든 근대의 정치 현상들 중에서 그 가치를 두고 이론(異論)이 가장 크게 존재한다는 개념이기도 하다.―민족주의의 기록에 대한 판단은 대개 찬양에서 저주까지 180°로 매우 다양하다. 그렇지만 민족주의에 함축된 의미를 둘러싼 정신분열증이 국제주의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국제주의에 내포된 의미는 거의 언제나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제주의를 승인하는 것의 의미를 확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만약 아무도 오늘날 민족주의의 현실을 의심하지 않는다면―그러나 민족주의의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새 천년의 입구에서 국제주의의 지위는 다소간 그 반대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편에서 국제주의를 가치로서 요구하고 있지만, 아무런 항의 없이 누가 국제주의를 하나의 세력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가? 이런 역설의 뒷면에는 조사되지 않은 역사가 있다. 민족주의에 대해 가장 명확하고도 간결한 정의를 제시한 사람은 위대한 민족 지도자였던 마사리크[역주-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였다. 그가 생각하기에 민족주의는 민족을 최고의 정치적 가치로 여기는 견해를 의미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그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민족주의 추종자가 어떠한 환경이나 어떠한 맥락에서도 다른 소속이나 동일성을 배제하기 위해 오로지 또는 무엇보다도 민족만을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민족주의의 의미는 항상 변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공식은 지금까지 결핍된 것 즉 국제주의의 기록을 경험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국제주의에 관해 충분히 최소한 중립적인 [민족주의와 짝이 되는] 상대물로서의 정의를 제공한다. 역사적으로 국제주의라는 용어는 더 넓은 공동체를 향해 민족을 초월하려는 모든 견해나 실천에 적용될 수 있고, 민족들은 계속해서 그 공동체의 주된 단위를 형성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실용적인 정의의 장점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에 대한 수많은 전통적 선입견을 불필요하게 하고, 또 양자의 상호관계를 더욱 체계적인 방식으로 제시한다는 점이다. 약 250년 전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근대적 형태가 처음 출현한 이래, 양자는 각각 일련의 변형을 겪어왔다. 어떻게 이런 변형을 가장 잘 인식할 수 있을까? 이 아래에서 나는 시대 구분을 제안할 것이다. 역사적 시간을 범주적 계열로 총체적으로 분할하려는 모든 시도에는 명백한 함정이 있다. 어떠한 경우든, 시대 구분은 항상 임의적인 단순화를 포함하며, 그래서 적지 않은 뛰어난 역사가들은 역사적 시간이 전체적 과정이라며 시대 구분하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말하기는 쉬우나 행하기는 어렵다. 앞으로 출판될 저작에서 프레드릭 제임슨은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거의 없다, 우리는 시대구분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 글에서 설정된 도식은 약간의 간략한 기록에만 한정되어 있다. 이 도식의 목적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사이의 상호관계들을 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국면들을 연속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국면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지배적인 것들’(dominants)간의 쌍으로 정의하였다. ‘지배적’이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한계를 의미한다. 각각의 국면에서 ‘지배적’인 것을 속속들이 규명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것은 각 시대의 가장 새롭고 두드러진 형태들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그 형태들은 항상 일련의 반(反)경향들과 하위경향들을 포함하지만, 단순화를 위해서 단지 잠정적으로 그것들을 논외로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채택한 방식은 변화하여온 국제주의의 역사적인 판본들을 역사적으로 대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민족주의의 연속적인 이념형들과 짝을 짓는 것이다. 민족주의의 이념형은 다음의 다섯 가지의 좌표로 추적할 수 있다. 1) 각각의 연속적인 민족주의의 변종들과 동시대의, 또는 가장 유력한 자본의 유형, 2) 민족주의의 지리학적 주요 구역, 3) 널리 퍼져있는 철학적 언어, 4) 민족에 대한 유효한 정의, 5) 피지배계급과 특정 민족주의의 관계. 이 글에서 제시하는 도식의 전제는 국제주의의 역사는 이러한 민족주의의 좌표들에 상응하여 가장 자세히 그려질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시대에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에는 하나 이상의 변종이 있었다. 그리고 지배적인 형태들 사이에 갈등이 존재했던 것처럼, 언제나 그러한 변종들 사이에도 중요한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엉켜있는 실타래 속에서도 지배적인 것들의 계보는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1. 애국주의와 코스모폴리타니즘 세속적인 힘으로서 근대의 민족적 정서의 기원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에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용어로서,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개념을 처음 탄생시킨 두 개의 거대한 혁명―영국에 맞선 북미 식민지의 반란과 프랑스 절대주의의 전복―이 분출했다.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은 집합적 인민으로서의 민족이라는 우리의 관념을 실제로 발명했다. 두 혁명은 그 시대의 가장 앞선 사회의 산물이었다. 두 혁명의 이데올로기는 16세기 베네룩스 삼국과 17세기 영국의 혁명처럼 초기 유럽의 혁명들에 의해 고취된 세계관과 극적으로 단절했다. 베네룩스와 영국의 혁명은 철저히 종교적인 반란이었고, 인민의 이름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미국과 프랑스의 혁명은 아직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에서 발생했다. 따라서 아직 자본이 기본적으로 상업적이거나 농업적이었다. 그러므로 상업, 농업 엘리트들은 대체로 도시와 시골에서 직접 생산자들―달리 말해 주로 장인과 경작자로 구성된 인민 대중―을 그들의 뒤에서 동원할 수 있었다. 그 때는, 나중에 기계제 대공업이 그 사이를 벌리게 할 매뉴팩처의 공장주와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인 균열이 아직 일반적인 사회 현상으로 존재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단일한 범주가 상승하는 계급과 종속적인 계급 모두를 통념적으로 포용할 수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애국주의(patriotism)였다. 미래의 미합중국과 프랑스의 투사들은 스스로를 ‘애국자들’이라고 불렀고, 그 용어는 아테네나 스파르타, 로마와 같은 고전적인 고대 공화국의 이미지와 유산에 의해 고취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애국주의 철학적 언어는 무엇이었나? 잘 알려진 것처럼, 그것은 계몽주의의 특유한 합리주의였다. 계몽주의의 최고 웅변가들―루쏘, 꽁도르세, 페인, 제퍼슨―은 공통 이성을 전통에, 집합적 의식을 육중한 관습에 대결시켰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민족에 관한 지배적인 정의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이었다 ― 말하자면, 그것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미래의 이상이었다. 민족은 자유로운 시민이 창조할 무엇이었다. 민족은 영구적 현실로서 시민들의 개입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위적’ 특권이나 제한이 아닌 ‘자연적’ 권리에 기초한 새로운 종류의 공동체로서 출현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 자유는 완전한 의미에서 공적 생활에 대한 시민의 참여로 이해되었다. 되돌아보면, 이러한 계몽주의 시대의 애국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보편주의였다. 전형적으로 그것은 문명화된 민족들의 이해들을 근본적인 조화 (문명화되지 않은 인민들은 별도의 문제였다), 전제정과 미신에 맞선 공동의 투쟁에서의 잠재적인 통일로 간주되었다. 낙관적인 합리주의의 전형은 칸트의 에세이, 『영구평화를 위하여』에서의 논증, 즉 왕자들 사이의 경쟁이 전쟁의 유일한 주된 원인이고, 공화정 체제가 확장되면서 왕위에 대한 야망이 과거의 것이 되었으므로 유럽의 인민들은 더 이상 서로 싸울 이유가 없게 될 것이라는 논증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애국주의와 코스모폴리타니즘(cosmopolitanism)의 이상은 함께 행진하였고, 그 가치의 지평에서 볼 때 둘 사이의 모순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가치의 지평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삶과 행동에서도 상당히 그러했다. 미국의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에서의 라파예트의 역할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또는 13개 식민지[역주-독립 전 미국 동부 13개 주]를 위한 팜플렛의 저자이자 국민공회에서 지롱드파의 대표부였던 페인이 필라델피아와 파리에서 보여준 삶과 행동을 생각해 보라. 그 남부 지역으로, 미국과 프랑스 격변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지대인 스페니쉬 아메리카의 독립전쟁의 해방자들―볼리바르, 수크레, 산 마르틴―은 지역적인 박애의 정신으로 멀리 있는 또는 이웃한 땅을 해방하기 위해 그들 자신의 지역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대륙을 가로질러 투쟁했다. 2.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와 제1인터내셔널 중남미에서 투쟁의 시기는 18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 무렵 유럽에서 계몽주의적인 애국주의와 코스모폴리타니즘은 나폴레옹의 군사적 팽창주의로 인해 그 이념이 타락함으로써 이미 붕괴되어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 제1제정에 맞서는 투쟁이 초래한 것은 스페인, 독일, 러시아에서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기 위한 보수적이거나 종교적인 색조를 지닌 민족적인 저항이나, 왕정복고 시기의 유럽 군주들의 국제적인 제휴와 같은 각각의 반-혁명적인 판본들이었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다루는 연속적인 국면들을 중단하는 일련의 ‘하위-지배적인 것’(subdominants)의 첫 번째 사례를 제공한다. 하지만 세계는 비엔나 회의에서 복구되었고, 신성동맹의 보호를 받으며 여전히 구래의 원리에 복종하였다. 여전히 왕조의 정통성과 종교적 신념에 기초했던 구체제에 대항하여 곧 새로운 지형이 출현했다 ― 약간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애국주의와 구별되는 ‘민족주의’라고 처음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점점 더 산업혁명이 지배하게 된 세계에서 유산계급이 자신의 국가를 형성하려는 열망의 표출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산업혁명의 진원지인 영국보다 덜 발전된 지역이나 또는 그 뒤편에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들 계급은 무엇보다도 그 당시 주도적 산업국가들을 모방하는데―즉 따라잡는데―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유형의 민족주의의 폭풍지대는 벨기에, 독일, 이탈리아, 폴란드, 헝가리였다. 그들의 수사적인 언어는 유럽 낭만주의에서 유래했고, 주요한 대변자들은 시인과 소설가들이었다―페퇴피)[역주-헝가리의 시인], 미츠키에비치[역주-폴란드의 시인], 만초니[이탈리아의 시인․소설가]는 이 시대의 인물이었다. 전형적으로 이들은 그 이전의 합리주의적 애국주의의 지적 작업을 뒤집었고, 그들 나라의 중세나 전(全)근대 과거에 대한 숭배를 들여왔다. 낭만주의적인 민족주의에게 민족의 본질적 정의는 더 이상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언어였다. 언어는 과거 세대들의 경험이 축적되어 재현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문화적인 특성에 대한 옹호의 선지자는 헤르더였다. 그러나 1830~70년대 꽃을 피웠던 낭만주의적 민족주의가 초기 애국주의의 다수의 기호들을 전도했지만, 그것은 여전히 중요한 가정을 공유하였다. 발트해 지역 출신인 헤르더는 독일 문화를 찬양하면서 이웃의 슬라브의 문화를 깎아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독일과) 구별되는 유산으로 정당하게 칭송했다.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의 정신 세계는 더 이상 코스모폴리타니즘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했고, 암묵적으로 일종의 분화된 보편주의를 옹호했다.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의 첫 번째 정치적인 성취가 왕정복고의 평화를 깬 그리스와 벨기에 혁명이라면, 가장 웅장한 표현은 1848년 ‘인민의 봄’이었다. 그 해 유럽을 뒤흔든 연속적인 혁명적 격변들에서 민족적 소요는 대륙을 가로질러 국제적으로 전염되었고, 파리에서 비엔나로, 베를린에서 로마로, 밀라노에서 부다페스트로 바리케이드가 이어졌다. 민족 통일이나 지배에서의 독립을 위한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의 투쟁에서, 물론 1848년은 실패한 자유주의 혁명의 해였지만, 『공산주의자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에서 선언된 것과 같이 사회주의를 위한 혁명적 투쟁이 시작된 해이기도 했다. 그 둘이 겹쳐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낭만주의적 민족주의에 대응한 국제주의의 형성은 1차 노동자 인터내셔널에서 그들의 상징적인 발상지를 찾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노동자 인터내셔널의―그리고 1848년의 대중적 도시봉기의 물결의―사회적 기초가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매우 명확하다. 그것은 공장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압도적으로 전(全)산업적인 장인들에게 있었다. 이들은 생산 수단―도구와 기술―을 소유한 계급이었고, 이들은 높은 수준의 지식을 누렸고, 대체로 수도의 중심부 인근에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이들은 지리적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젊은 도제들이 나라 안팎을 돌아다녔던 사실은 상징적이다. 1848년 파리에는 3만 명의 독일 장인들이 있었다―하이네는 모든 골목에서 독일 말을 들을 수 있었고 말하였다. 런던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영국에서 일하고 있는 독일 장인들을 위해 선언을 작성하였다. 베를린에는 폴란드나 스위스의 장인들이 흩어져 있었으며, 비엔나에는 체코와 이탈리아의 장인들이 흩어져 있었다. 마르크스는 제1인터내셔널 설립 회의에서 어느 목수와 제화업자 옆에 서게 되었다. 달리 말해, 이러한 형태의 특징은 (문화적인 자신감과 높은 정치 관념을 포함하는) 사회적 탈고립과 (외국 생활을 직접 경험할 가능성과 인민들 사이의 연대감을 포함하는) 영토적인 이동성의 역설적인 결합이었다. 이는 민족적인 투쟁에서 국제적인 투쟁으로, 그리고 국제적인 투쟁에서 사회적인 투쟁으로 나아가게 하는 구성원이었다. 그 전형적인 인물은 쥬세페 가리발디였다. 그는 평범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선원으로 인생을 출발했다. 그는 생시몽주의 망명자 그룹을 통해 국제주의적 이념에 귀의했고―이는 그의 첫 번째 정치 신념이었다―그가 일했던 흑해로 가는 배에서 프랑스로부터 추방당했다. 물론 가리발디는 1848년 로마 공화국의 위대한 군사적, 정치적 영웅이 되었고, 이탈리아 통일운동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운동]를 이끈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가장 관대한 측면을 체현했다. 하지만 공화국의 패배 이후, 그는 한때 선장으로 일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브라질과 우루과이에서 진보적인 대의를 위해 군인으로서 10년 동안 싸웠다. 그는 부르봉 왕가의 지배로부터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해방시킨 원정대를 이끌기 위해 돌아왔고, 이탈리아 민족 통일의 결말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경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1860년대 링컨은 그를 초청해서 미국 내전 동안 북부군의 지휘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그는 노예제에 대한 링컨의 태도를 정확히 의심했고 제안을 거절했다. 그 반면에 그는 1871년 독일 군대에 맞서 프랑스 제3공화국의 방어를 위해 사령관직을 수락했으며 프랑스 세 도시에서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파리 꼬뮌 이후 그는 공개적으로 제1인터내셔널과 마찌니(Mazzini) 스캔들을 지지했다. 가리발디라는 역사적인 인물에서 우리는 이 시대의 유럽 장인의 최고의 가치의 구현을 볼 수 있다. 그 안에는 민족주의적, 국제주의적인 충동이 긴장 없이 공존하였다. 3. 쇼비니즘과 제2인터내셔널 1860년대의 전환 이후, 유산계급은 과거에 신봉하거나―피에몬테의 경우―교묘하게 조작했던 낭만주의적 민족주의를 버렸다. 유럽의 지주들과 상인들은 군대의 편성과 엄격한 정치적 통제를 통해 부르주아 혁명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아래가 아니라 위로부터 완수하는 것으로 나아갔다―군대편성과 정치적 통제는 비스마르크가 이룩한 독일 통일의 보증서였다. 그 후로, 서구 민족주의의 지배적 형태는 갑자기 변화했다. 이제 처음으로 진정한 쇼비니즘(chauvinism)―사회적 가상 속에서 오랜 동안 배양되어온―이 주요 산업국가인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에서 널리 퍼져있는 담론과 분위기가 되었다. 이 때는 체임벌린, 페리, 뷜로, 맥킨리, 크리스피와 같은 정치인들의 시대였다. 이 나라들에서 자본은 점차 더 큰 기업에 집적되었고, 내부 시장의 독점적 통제를 추구하거나 식민지 합병을 강요했다―그 시나리오는 홉슨과 힐퍼딩이 어느 정도 보여 주었다. 새로운 팽창주의를 동반하고 보증하는 이러한 쇼비니즘은 전형적으로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에서 용어 형태를 빌려왔다. 그것의 지적인 언어는 본질적으로 실증주의였고, 민족에 대한 정의는 점차 인종에 관한 것이 되었다―즉, 문화적․물리적 요소들의 혼합물이었고, 앞서의 것들에 비해 그 사용범위에서 분명히 덜 이념적이었다. 인간들의 관계는 ‘적자생존’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이런 종류의 강대국들―또는 강대국이 될 나라들―의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체계 중심부의 외부 지역, 예를 들어 멕시코의 포르피리아토나 아르헨티나의 로카의 지배에 대해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고, 처음으로 다른 민족 또는 국민들에 대해 직접적인 적대감을 설교했다. 좋은 시절(Belle Epoque)의 쇼비니즘은 우월성에 관한 제국주의적 담론이었다. 그것의 기능은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 시대의 제국주의들간의 경쟁을 강화하고 식민지 정복의 임무를 위해 각 국가의 인민을 동원하는데 봉사했다. 다른 한편, 그것은 대중들을 자본주의 질서의 정치적 구조 내로 통합하는데 봉사했는데, 그 시기에는 선거권이 노동자계급 부문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쇼비니즘의 군림은 선거권 확대의 위험을 중화하는 효과를 내었는데, 사회적 긴장을 계급적 적대로부터 민족적 적대로 전위하였다. 이 시대 선거 개혁의 설계사가 종종 새로운 주전론(jingoism)의 선동가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영국의 디즈레일리, 독일의 비스마르크, 이탈리아의 기올리띠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이 국면에서 국제주의의 지배적 형태가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다―그것은 사회주의 정당들의 제2인터내셔널에서 발견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족주의의 지배적 형태에 직접 반대하는 국제주의의 형태를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다―그것은 과거처럼 [지배적 민족주의와] 보완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대조적이었다. 멀리서 본다면, 이 인터내셔널은 앞서의 것보다 훨씬 더 인상적인 구조를 지녔고, 더 많은 정당들과 구성원들, 더 많은 실제 산업 노동자들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그 외관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실제로, 새로운 집단의 사회적 기초의 변화는 그것을 인터내셔널로서 강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시기 새로운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집단적 특징은 대체로 19세기 중반의 유럽 장인들에 비해 국가의 공식 정책에 맞서기에는 구조적으로 덜 호의적인 대칭성을 지녔다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노동자 대다수는 어느 지방의 공장이나 광산에 고립되어 있었고, 그들 나라의 정치 수도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예컨대 영국과 프랑스의 북부, 독일의 루르. 그들은 생산수단을 전혀 소유하지 못했고, 과거의 장인들 수준의 전투적인 문화와 전통도 결여했다. 그들의 기초적인 상태는 그 선배들과 정확히 반대로 즉 지역적인 부동성과 사회적 고립의 결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 결과는 이 계급의 넓은 범위에 대한 훨씬 더 심층적이고 실제적인 제국주의의 매수였고―그것은 강대국이라는 그 민족이 형성한 가상적 공동체로의 투사(projection)를 동반했다―그 범위는 마르크스나 앞선 세대의 어떤 사회주의자가 상상했던 것보다 넓었다. 이러한 치명적 매력의 결과는 대중의 수동성과 열광의 혼합물이었고, 이는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맞이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서구 사회주의 정당들은 그들의 가장 엄숙한 약속을 배반하면서―이탈리아는 예외였다―인민의 상호 대학살로 스스로를 던져 버렸다. 이러한 학살로 돌진하게 된 역사적 뿌리는―수치스럽게도―단지 정당 지도자들의 결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젊은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구조에 있었다. 4. 파시즘과 제3인터내셔널 제국주의간 전쟁의 발발이 제2인터내셔널의 겉치레를 묻어버렸다면, 전쟁의 종료는 단번에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양자의 새롭게 떠오르는 형태를 다시 정의했다. 전례가 없는 경제적 불황과 위기의 한 복판에서 자본은 훨씬 더 발전된 집적 형태로 나아갔지만, 그것은 더 이상 국제적 자유무역과 장기 호황의 맥락이 아니라 오히려 보호무역과 경제자립정책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이런 정세에서, 민족주의의 지배적 유형을 생산한 지리적 구역은 1차 대전에서 패배하거나 좌절한 강대국이었다―즉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일본. 여기서 출현한 세력은 파시즘이었다. 파시즘은 실증주의가 아니라 근대 비합리주의―이탈리아의 소렐이나 젠틸레, 독일의 니체, 일본의 국체(國體) 선언―에서 그 언어를 빌려왔고, 결국 인종과 같은 생물학적인 공동체로서 정의하게 되었다. 동시에 민족의 이념적 내용도 무지막지하게 축소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더욱 높은 권력으로 상승한 제국주의적 쇼비니즘이었다―전례가 없을 정도로 고삐가 풀린 반동적인 열광을 동반했다. 역시 그것의 기능은 이중적이었다. 첫째, 파시즘은 1차 세계대전의 자본주의 전승국들에 맞서 제국주의간 경쟁의 두 번째 무대를 위해 종속 계급을 동원하는데 봉사했다. 두 번째 무대에서 이전에 패배하거나 좌절했던 국가들이 이번에는 승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 의미에서, 그 이데올로기의 주된 동기는 보상과 복수였다. 동시에 그것은 의회 민주주의가 비가역적인 위기에 처하고 노동자계급의 대부분이 혁명적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던 국가들에서 대중을 봉쇄하기 위한 과잉 메커니즘으로 기능했다. 이 두 가지 기능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었는데,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안정성이 침식되고 반(反)혁명적 강압에 반드시 의존해야 하며 동시에 대륙적 경쟁의 후편을 위해 두 배의 준비를 해야만 했던 것은 1차 대전에서 패배하거나 좌절한 국가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프로젝트는 거의 성공에 접근했다. 1941년 말까지 영국해협에서 발트해에 이르는 유럽 전역은 파시스트 질서로 통합되었고, 극동에서 일본은 매우 광대한 공간을 지배하였다. 파시즘의 흡인력은 이 지역들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세 개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경험―브라질의 신국가(Estado Novo), 아르헨티나에서 페론주의의 출현, 볼리비아에서 MNR의 출발―은 모두 파시즘의 자장으로 끌어당겨졌다. 한편, 자본에 의해 길러진 쇼비니즘이 파시즘으로 급진화했다면, 그것은―그 반대 방향으로―노동자 국제주의를 더욱 급진화했다. 한 나라에서는 유럽 노동자 운동의 도덕적 붕괴가 일어나지 않았다. 1917년, 볼셰비키 당이 이끈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했다. 이러한 격변에서 출현한 정체(政體)는 자신의 이름에 어떤 민족적이거나 영토적인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국가였다―그것의 이름은 단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이었고, 위치나 인민[민족]을 나타내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 창설자들의 의도는 무조건 국제주의적이었다. 곧 이어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불이 붙여져서, 세계를 가로질러 솟아 나올 새로운 공산당들의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제3인터내셔널을 결성했다. 이제 제2인터내셔널과의 대비는 극적이게 될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노동자계급 투사들의 한 세대에게 가르쳐준 끔찍한 교훈에서 태어난 유럽의 코민테른의 정당들은 지역적 민족주의의 모든 형태를 거부하는 강철과 같은 규율과 그들 국가의 지배 계급이 가하는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정작 소련에서 소련공산당은 ‘일국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약속에 기초를 두고 있었고, 소련공산당에서 스탈린의 승리는 급속히 구조화된 독재에 특유한 민족주의의 새로운 형태를 구체화했다. 제3인터내셔널의 활동가들은 스탈린이 해석한 대로 짧은 지령에 따라 소비에트 국가의 이해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그 최후의 결말은 전무후무할 정도로 국제주의가 심각히 불구가 되는 매우 인상적인 현상이었는데, 자신의 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거부하고 다른 국가에 무제적한적으로 충성심을 쏟는 것이었다. 그것의 서사시는 스페인 내전의 국제여단의 활동이었다. 국제여단은 모든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모집된 코민테른의 밀사들―코드빌라(Codovilla), 톨리아티, 게뢰(Gero), 비달리 등―의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이는 영웅주의와 냉소주의, 사심 없는 단결과 살인적인 테러의 혼합물이었고, 이것은 전례 없이 완벽하고, 또한 악용된 국제주의였다. 2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곧바로 제3인터내셔널에 중대한 시험이 찾아왔다. 그 시점에서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모두 나치 독일의 공격을 받았다―의 공산당은 그들의 정부를 지지하기를 거부했고, 2차 세계대전이 다시금 단지 제국주의들간의 싸움에 불과하며 따라서 대중의 이해가 걸린 문제가 전혀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노동자계급이 파시즘에 맞서 대의 민주주의를 방어하는데 모든 이해가 걸려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은 더 인기 없고 정치적 오류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당들의 태도는 역시 제3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었다. 2년 후 히틀러는 소련을 침공했다. 그 즉시 유럽의 공산당들은, 중국과 조선의 동료들이 일본의 팽창에 맞서 행동한 바대로, 나치즘에 맞선 전투에 온몸을 던졌고, 머지 않아 독일의 점령에 대항하는 대중운동들의 선두에서 레지스탕스 투쟁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사회주의의 모국을 지원하는 국제적 의무와 독일군(Wehrmacht)에 맞서 무기를 드는 민족적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모순이 없었다―그 둘 의무는 하나의 임무를 성립시켰고, 그들은 대개 화려하게 그 임무를 완수했다. 전투가 최고조에 올랐을 때, 스탈린은 갑자기 제3인터내셔널의 해체를 선언했는데, 공식적으로 제3인터내셔널이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다는 근거였지만, 실제로는 동맹국인 영국과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 파시즘의 패배와 2차 대전의 종료는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모두의 근본적 변형을 준비하였고,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유럽에 한정되지 않고 세계 전역으로 확산될 것이었다. 5. 자본/민족주의, 노동/국제주의의 전도 지금까지 분석들은 필연적으로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지역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그것은 이 지역들이 특별한 장점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대공황 그리고 2차대전에 걸친 장기간의 세계 역사에서 서구 자본주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 이는 급속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결국 인류의 다수가 중심 세력으로서 [세계 역사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그리하여 1945년에 시작해서 대략 1965년까지 유지되는 새로운 국면에서,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에 관한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갑작스럽고 극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회고해보면, 우리는 이것이 20세기의 거대한 분수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민족주의의 지배적 형태―계몽주의적 애국주의의 가장 숭고한 열망에서부터 파시즘의 가장 범죄적인 비인간성에 이르기까지―는 항상 유산계급의 어법이었고, 그 반면에 19세기 이래로 그것에 조응하는 국제주의의 형태들은―그것의 결함과 한계가 무엇이든 간에―노동자계급의 어법이었다. 1945년 이후, 이러한 이중적 관계―자본/민족적인 것, 노동/국제적인 것―는 뒤집어졌다. 민족주의는 압도적으로, 서구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해 여러 대륙에서 잇달아 발생한 반란들에서 착취당하고 빈곤한 대중들의 주의주장이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국제주의도 자신의 진영을 바꾸기 시작했다―자본의 편에서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는 숙명적인 전환이었다. 1945년 이후 세계적 규모에서 지배력을 발휘하게 된 민족주의의 새로운 형태는 반-제국주의였고, 그것의 주요 지역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였다. 그것의 구조적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인 측면에서 볼 때 유럽 민족주주의의 연쇄적 형태에 비해 훨씬 더 이질적이었다. 당시 제3세계를 휩쓴 민족해방운동은 광범한 사회 계급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지역의 부르주아가 전과정을 지배한 곳도 있었다―인도가 가장 중요한 사례다. 다른 경우, 자본축적을 충분히 이루지 못한 중간계급이 주도하여 그 운동을 이용하고 권력 싸움의 승리 후에 진정한 부르주아로 탈바꿈한 곳도 있었으며, 멕시코와 터키의 초기 상황은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패턴의 더욱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변형들이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일어났는데, 이 곳에서 민족해방운동은 식민지 국가의 관료와 공무원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밖에 인도네시아처럼 중하층 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이 최고층에 오른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거대한 격변을 이룬 잡다한 계층의 간부들 중에서 어떤 단일한 집단을 밝혀낼 수 있다면, 아마도 그들은 농촌의 학교 선생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히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공산당이 민족해방운동의 지도력을 획득하고 그것을 자본에 대항하는 철저한 혁명으로 추진한 경우도 있었다. 쿠바는 중국이나 베트남의 경험과 앞서의 변형들이 혼합되어 나타났다. 전후 반제국주의의 지적인 어법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혼합적이었다. 상이한 민족해방운동들의 지도력에 어떠한 사회적 동질성이 없었던 것과 똑같이, 그것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은 혼성적이고 얼룩덜룩하였다―극단적으로는 합리주의, 낭만주의, 실증주의, 비합리주의적 사조 모두를 동시에 이용할 수 있었다. 터키의 케말주의,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주의, 멕시코의 오브레곤, 깔레스, 까르데나스가 계승한 혼성 이데올로기는 그 전형이었다. 초기 교리들의 조합이나 반복이 넘쳐났다. 그러나 이러한 반제국주의의 가장 구별되는 특징은 고전적인 부르주아 사상의 범위 안에 기원을 두고 있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관념들(ideologemes) 뿐만 아니라, 계몽주의에 앞서거나 자본주의 뒤에 나타난 신념의 체계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즉 한편으로는 종교를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를 활용할 수 있었다. 전자의 최근 사례는 이란 혁명을 포함할 것이며, 후자의 최근 사례는 니카라과 산디니즘을 포함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제국주의의 대중적 기초는 무엇이었나? 그것의 수적으로 가장 중요한 구성 부문은 소농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시대 공산주의 혁명에서 그러하였다―중국, 베트남, 유럽의 주변부인 유고슬라비아. 이 나라에서 벌어진 격변은 그들이 회고하던 10월 혁명과 질적으로 구별되었다. 이들 나라에서는 민족의 기치로 승리를 이룩했지만, 러시아 혁명은 그 승리의 시기에서 어떠한 민족주의적인 내포도 없었다. 한편, 자본 진영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1945년 이후 창조된 새로운 상황은 거칠게나마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은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 어떠한 나라도 향유해보지 못한 지위를 점했다. 독일, 일본 그리고 이탈리아는 패배한 뒤 몰락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힘을 잃고 쇠약해졌다. 미국은 영국이 19세기에 그랬던 것보다 훨씬 더 명확히 자본의 세계를 지배했다. 둘째, 자본주의가 타도된 나라는 더 이상 하나의 국가―러시아―만이 아니게 되었다. 2차 대전의 소용돌이를 뚫고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폐지된 나라들의 광범위한 벨트가 출현했다―유럽의 절반과 아시아의 삼분의 일에서. 공산주의 블록은 이제 세계적인 규모에서 자본주의의 존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자본은 그 자신의 국제주의를 별안간 발견했다. 자본주의 국가들―두 번의 세계 전쟁을 야기한―사이의 민족적 분쟁은 완화되었다. 단일 헤게모니 권력의 존재는 그들의 이해를 두고 국제적 협력을 가능케 했고, 공산주의 블록의 존재는 그것을 필수적이게 했다. 그 결과로 상업적, 이데올로기적, 전략적 통일 과정이 시작되었다. 브레튼우즈 합의로 출발하여, 유럽과 일본의 재건을 위한 마샬플랜과 닷지플랜이 이어졌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이 창설되고, 미국의 독려로 유럽경제공동체(EEC)가 탄생하면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 이러한 국제적 통합의 성장궤도는 자유무역의 일반적 부활로 시작하여 유럽공동시장(EEC)에서 민족주권의 철저한 대체로 나아갔다. 이는 전간기(戰間期)에 우세했던 경향의 극적인 전도였으며, 자본주의 역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였다. 우리가 이를 표현할 용어를 찾는다면 상위-민족주의(supranationalism)라고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의미는 이중적인데, 여타의 모든 나라들 위에 존재하는 미국의 지위, 그리고 서구 국가들 위에 존재하는 유럽공동체의 출현을 고려할 때 그러하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 결론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의 변화인데, 그것은 민족국가에서 서구 노동자계급의 광범위한 통합의 지배적 수단이 된 자유민주주의로의 변화였다. 냉전 시기 동안 서구의 공식적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민족의 방어에 높은 지위를 주지 않았고―그것은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그 기간 동안 최고의 가치였다―오히려 자유 세계(Free World)를 찬미하는데 높은 지위를 부여했다. 이러한 변화는 역사상 처음으로 선진국의 자본주의 국가의 형식적 유형으로서 보편적 선거권에 기초한 대의 민주주의의 일반화와 실질적 강화와 동시에 일어났다―이는 본질적으로 1950년대까지의 현상이었다. 6. 초민족주의와 포스트-공산주의적 분리주의 1960년대 중반 이후, 선진자본주의 세계의 국가와 시장의 관계를 바꾸는 일련의 구조적 변화에 따라 이러한 지형은 중대한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일단 전후 재건이 완료되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경제 성장 속도가 미국을 앞질렀고,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브레튼우즈 체계가 쇠퇴하게 되었다. 동시에 특정 국가에 근거지를 두고 있지만 국경을 넘어서 활동을 확장하는 다국적기업의 비중이 더욱 강력하고 침략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고, 축적 과정에 대한 각 민족의 당국에 의한 통제의 초기 형태는 점차 불확실해졌다. 그 결과로 특히 금융시장이 거대한 초대륙적 투자와 투기의 순환과 맞물리게 되었고, 어떠한 국내적 조절의 전통적 메커니즘이 미치는 세력권을 넘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독일 또는 일본 자본주의의 재강화가 전간기의 제국주의들간의 분쟁의 복귀의 신호를 의미하지 않았다. 관세장벽과 군비경쟁과 거리가 멀게도, 주요 자본주의 국가는 이제 높은 차원의 정책 조정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유럽공동체(EC)는 단일 시장으로 나아갔고, 궁극적으로 단일 화폐, 심지어 약한 의회를 성취하였다. 미국, 일본 등 다른 강국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상승과 하강을 공동관리를 촉진하기 위해 수많은 회의와 합의를 늘려 나갔다. 1970년대 후반 G7의 시대는 충격을 받았다. 카우츠키 판본의 ‘초제국주의(ultra-imperialism)’는 지나가 버렸다. 그 대신에 우리는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에 특징적인 새로운 유형의 국제주의를 그 이전의 것과 구별하기 위해 ‘초민족주의(transnationalism)’라는 용어로 부를 수 있겠다. 여기서 ‘초민족’이란 이중의 의미이다. 첫째,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주요한 세 구역을 묶는 제도적 결합이 이루어지고, 둘째, 고전적 국경을 넘는 대륙간 기업과 금융투기의 새로운 형태가 등장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이 시기에는 민족적 가치에 대한 민주주의의 우위라는 공식적 담론이 포기되지 않았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이는 오히려 원격 지배되는 지중해 지역의 독재 체제의 민주화(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를 더욱 그럴 듯하게 하였다. 반면 선진자본주의 지역 밖에서 반제국주의는 70년대에 이르러 민족주의의 지배적 형태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추진력을 잃게 되었다. 주요한 전투는 지속되었으나, 베트남혁명과 포르투갈 제국의 해체는 그 이전 시기의 에필로그처럼 보였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광범한 지역에서 탈식민화는 성취되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는 고립으로부터 탈출하는데 실패했다.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은 남아프리카, 팔레스타인, 중앙아시아에서 지속되었으나, 과거와 동일한 세계적 의미를 더 이상 띠지 않게 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유라시아에서 파시즘에 맞선 투쟁으로부터 출현한 거대한 공산주의 블록은 매우 독특한 역사적 요소들로 구성되었다. 대부분의 동유럽―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동독―에서 스탈린은 군사적 압력을 통해 위로부터 공산주의 체제를 강요했고, 소련의 이해와 지도에 조응하는 종속국의 고리를 창조했다. 반면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중국, 베트남은 토착적인 혁명을 성공하고 완전히 독립적인 공산주의 국가를 창조했다. 그러나 혁명들을 이끈 공산당들은 스탈린화된 제3인터내셔널에 의해 그 교리와 규율이 형성되었다. ‘일국 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 구축은, 각 나라의 당들이 박해받고 금지된 조직으로서 권력에 대해 투쟁할 때, 소련에 대한 무조건 충성을 배양했다. 그러나 그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동일한 교리는―필연적이지만 역설적이게도―소련과 각각의 비-러시아 당들간의 격렬한 갈등이라는 그 대립물을 낳았다. 스탈린이 실천한 신성한 민족 이기주의(national egoism)는 일반화되었다. 그 결과로 공산주의 국가 수의 증가만큼 고전적 공산주의 운동의 국제주의의 해체는 유례없이 가속화되었다. 먼저 유고슬라비아가 소련과 갈등을 빚었고 1940년대 후반 알바니아와 유고가 갈등에 휩싸였다. 다음으로 러시아와 중국의 갈등이 1960년대 초반 폭발하여 국경에서 무장충돌로까지 발전하면서 공산주의 세계의 통일을 위한 기회는 영구적으로 파괴되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베트남과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들간의 전쟁이 나선형 꽈배기처럼 연속해서 발발했다. 1970년대 후반 세계에서 민족주의의 지배적 형태는 공산주의의 동족살해, 분열번식이라는 게 명백해 보였다. 동시대 자본주의 국가들의 진화에 두드러지게 대비되는, 레닌주의적 전통의 급작스러운 혼돈의 역사적 뿌리는 무엇인가? 두 개의 상호 결합된 힘[생산력]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먼저 되풀이된 일국사회주의라는 구조 내에서 공산주의 국가의 생산력이 선진자본주의 경제를 따라잡을 기회가 없었다는 점은 명백했다―공산주의 국가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서방보다 훨씬 후진적이었다. 선진자본주의 경제는 동구 블럭에 완전히 결여된 상업적․산업적 교차 결합을 향유하고 있었다. 기술적으로, 조직적으로 생산력이 결코 민족적 경계를 뛰어 넘지 않았고, 일례로 소련의 평균적인 노동생산성은 서독이나 프랑스의 40% 수준에 머물렀다. 달리 말해 공산주의 진영에서 관료적 민족주의가 지속된 것은 자본주의에 비해 객관적으로 덜 국제화된 생산력에 물질적으로 뿌리를 둔 것이었다. 이러한 민족주의는 그 지체를 극복할 기회를 차례로 봉쇄했다. 유럽공동시장의 활성화와 비교되는 경제상호원조위원회(COMECON)의 고사는 그 직접적인 결과였다. 이러한 제한된 경제적 기초 위에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나? 선진자본주의 나라에서 민족주의의 쇠퇴는 사회 질서의 탁월한 정당화와 대중 통합의 기제로서 자유민주주의의 부상에 조응했다. 그러나 공산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았고 정치적 생활은 지배 관료에 의해 완전히 몰수당했다. 그 대신에, 공산주의 체제는 대중들을 지배적인 정치적 틀로 통합하기 위해 민족주의에 훨씬 많이 의지했다. 마르크스가 제대로 간파했던 것처럼 민족은 실제의 자유, 평등의 결여를 보충하는 가상의 공동체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기간 동안 공산주의 세계의 분열번식은 인민 주권을 억압했던 것의 직접적 결과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생산자연합의 부재는 숙명적으로 공산주의 간 분쟁에서 독살적인 민족주의로 나아갔다. 이 기간동안, 민족주의는 토착적인 혁명을 이루고 침략자를 패퇴시킨 러시아, 중국,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베트남에서 어느 정도 기능했던 대용물이었다. 반면 동유럽의 다수에서 공산주의 체제는 그러한 정통성이 결여되었다. 그들이 민족이라는 카드를 활용하려고 너무나 열심히 노력했지만―루마니아는 그 악명 높은 사례다―, 그들은 신뢰를 얻지 못했다. 1945년 적군(Red Army)이 강제적으로 위협을 가한 이후로, 그들은 소련의 반복적인 군사적 개입을 통해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사례를 보라. 인민 민주주의의 결여에다가 민족적 정서상의 철저한 굴욕감이 덧붙여졌다―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의 역학에 근접하여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자 사이의 거리를 가장 잘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지역의 대다수도 마찬가지였다. 동유럽에서 1989년의 대지진은 오랜 기간 준비된 것이었다. 그 여진은 두 인접한 국가, 유고와 소련을 탈안정화했는데, 두 나라는 역사적으로 더 정통성이 있었으나 다민족 연방이었다. 두 나라는 비가역적 해체의 동학으로 밀쳐졌고, 경제적 정치적 위기의 심화 한가운데에서 연쇄적인 분리주의가 분기했다. 새로운 세기의 시작인 오늘날, 무엇이 민족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형태인가? 모든 가능성 중에서도 포스트-공산주의적 분리주의에 의해 그 패턴이 드러났지만 포스트-식민주의 세계로 확장된 분쟁의 유형이 유력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발칸에서 코카서스로, 혼오브아프리카[아프리카 북동부]에서 그레이트레이크[아메리카 5대호]로, 카쉬미르에서 민다니오[필리핀 남부 제도]로 확장되고 있다. 7. 국제주의의 미래 그렇다면, 무엇이 오늘날 국제주의의 지배적인 형태인가? 그 최근의 변형들 속에서, 우리는 소비에트 블록의 소멸과 함께 미국이 역사상 모든 나라의 꿈을 넘어 정점에 도달함에 따라, 처음으로 진정한 세계 헤게모니 권력이 등장한 시대에 있다. 국제주의는 관습적인 어법에 따르면―어떻게 이해되건간에―그 대립물로서 민족주의의 어떤 판본을 갖는다. 그러나 20세기 초반부터 미국에서 국제주의라는 용어는 의미심장하게도 다른 반대말을 가졌는데, 그것은 ‘고립주의(isolationism)’였다. 국제주의/고립주의라는 쌍은 명확하게 동일한 전제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 쌍에서 민족적 이익의 우선성이 결코 문제가 된 적이 없었고, 국제주의/고립주의는 민족적 이해를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방식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쌍의 역사적 기원은 미국의 공화주의가 예외적이며 동시에 보편적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창조한 특수한 조합에 있다. 즉 미국의 공화주의는 그 제도와 자질의 측면에서 행운이 고유하며, 권력의 분산과 집중의 측면에서 모범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양면적인 메시아주의(janus-faced messianism)인데, 조국에 대한 강렬한 숭배 또는 세계에 대한 선교와 구원 양자 모두를 승인한다―또는 더욱 현실적인 스타일로 양자의 외교적 혼합물을 승인한다. 국제주의는 항상 이러한 전통의 이원론적인 용어법에서 영광스런 장소를 점해왔다. 실제로 국제주의는 미국 국가가 추구한 전진 정책을 위한 자기만족적 암호에 다름 아니었다. 고립주의가 먼로 독트린, 오르니 선언 또는 플래트 수정안의 쇠퇴를 결코 의미하지 않은 것과 같이, 미국적 의미에서 국제주의는 처음부터 미국의 권력을 유라시아로 확장할 준비와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멕시코로부터 러시아에 이르는 윌슨의 간섭 정책은 그 논리를 따른 것일 뿐이다. 20세기의 대부분 동안, 이러한 국제주의의 의미는 미국 국경 외부에서 거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기이한 국내적 어법으로 남아 있었다. 미국 외부에서는 미국의 국제주의적 실천이 표현하기 위한 더욱 강력한 말들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대안적 또는 대항적 권력이 부재한 가운데 미국 헤게모니는 처음으로 자신을 ‘세계적 규범’으로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 UN을 무화과 잎으로 활용하며[회화, 조각에서 국부를 가리는], 러시아에 유순한 체제를 세우고, 독일과 일본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중국 앞 바다에 보호령을 세우고, 종속국들에 기지를 배열시키며, 잠재적 라이벌들의 화력을 모두 합친 것보다 몇 배 더 많은 화력을 보유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의지는 완곡한 어법으로 공영(公營圈)이라는 재세례를 받았다. 그것의 동의어는 정확히―다름 아니―‘국제공동체’다. 유엔 사무총장의 감동적인 체하는 말투도, 나토의 거만한 성명서도, 뉴욕타임스, 르몽드, 가디언의 과장적인 사설도, 매일 밤 우리를 안심시키는 뉴스해설자의 말도 이것[국제공동체]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국제주의는 더 이상 미국의 지배 하에서 공동의 적에 대항하는 주요 자본주의 강대국들간의 조정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는 냉전 시대의 부정적 임무였다), 오히려 미국의 이미지 속에서의 세계의 재건이라는 긍정적 이상이다. 자유세계라는 깃발이 내려졌다면, 그 대신에 인권이라는 깃발이 세워졌다. 그 의미는 국제공동체를 불쾌하게 만드는 나라들, 쿠바, 유고슬라비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를 봉쇄하고 폭격하고 침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며, 국제공동체에 애원하는 나라들 즉 터키, 이스라엘, 인도네시아,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을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체첸, 팔레스타인, 투치, 사하라, 누에르에서 자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새로운 신법에 대한 저항은 아직 바람 속의 지푸라기처럼 보인다. 유럽의 동맹국은 종종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미국의 과잉 ‘일방주의’(unilateralism)로 전가하려 하며―이는 미국에 대한 유럽의 종속을 숨기기 위해 외교적 자문의 몸짓을 취할 때의 좌절스러운 실패를 본질적으로 의미할 뿐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UN 안보이사회에서 나약하게 협상하려 들고 있다. 국제적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와 카톨릭 포스트-통합주의는 소비 세계의 관념에 덜 포획된 대안적 생활형태를 위한 잔여 공간으로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다. 포르투 알레그레에 모인 운동들은 사회적 반대세력의 출현중인 디아스포라[바빌론 시대 이후 유대인의 외부 거주지]로서 깜빡거리고 있지만, 그 윤곽은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 그 곳에서 우리는 무한한 정의와 영구적인 자유의 하늘 밑으로 피난해 있다. 그러나 그리 먼 과거가 아닌 자본주의 문명이 별로 독실하지 않은 길을 걸어갔던 그 때를 후회할 수 있다면, 국제주의가 의미하는 그 길이 끝났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국제주의의 역사는 역설, 지그재그, 놀라움으로 가득 차있다. 우리가 국제주의의 최후를 본 것은 아닌 듯하다. PSSP
이번 <보건의료와 세계화> 기획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공적의료체계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기 위해서 기획되었다. 특히 초국적 자본이나 투기자본들이 각 국의 공적의료체계를 사유화하고 독점하는 과정과 여기서 세계은행이나 IMF와 같은 국제기구들의 역할을 살펴볼 것이다. 그 두 번째인 이 글은 영국에서 국영의료서비스가 민영화되는 과정을 살펴본 것이다. ======================================================= 영국 국영의료서비스(NHS; National Health Services)의 민간자본유치사업(PFI; Private Finance Initiative), 민영화의 첫 단초인가? 왜 민간자본유치사업 인가? 영국 국영의료서비스 병상공급 정책 약사(略史) : 영국의 지역거점병원(District general hospitals) 설립 경과 국영의료서비스를 도입하던 초기의 예상과 달리 병상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이에 대한 대비책 수립이 필요해지면서 국영의료서비스 병상공급의 핵심정책으로 1962년에 전국적으로 인구 100,000~150,000명당 600~800병상규모의 224개의 지역거점병원(District general hospital)을 건립할 것을 제안한 ‘병원 계획(Hospital Plan)’이 수립되었다. 그 결과 1962-1971년까지 10년 동안 £500백만 파운드에 해당하는 비용을 들여, 새로운 지역거점병원을 신축하거나, 기존의 병원을 지역거점병원의 기준에 맞게 시설개선이 이루어졌다. ‘병원계획’에 따라 영국의 지역거점병원은 동일한 장소에서 많은 수의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양질의 서비스를 저렴한 비용으로 공급하는데 보다 유리할 것이라는 기본 개념에 입각하여 추진되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까지 1/3은 계획대로 신설되었고, 1/3은 기존 병원의 시설개선을 통해 추진되었으며, 계획의 1/3은 예산부족으로 추진되지 못하였다. 1991/1992년 회계 연도 기준으로 영국 전역에 200개가 넘는 지역거점병원이 분포하고 있으며, 인구 150,000~200,000명에 이르는 인구집단에 포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러한 지역거점병원은 영국 병원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들 지역거점병원들은 500개의 임상진료 영역 중 300개 이상을 수행할 수 있는 시설, 장비 인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데,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전체 의료행위의 60%이상을 소화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지역거점병원은 1980년대까지 국영으로 운영되었으나, 1991년의 개혁조치 이후에는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라는 국영의료서비스내의 비영리조직으로 변화되었으며, 지역보건당국(district health authority)의 통제권 밖으로 벗어나게 되었다. 민간자본유치사업 등장 배경 1970년대 중반 경제위기의 심화 이후에 의료시설에 대한 정부의 투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단지 1980-1997년까지 국영의료서비스 내에 7개의 의료시설 확충계획만 추진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의료시설에 대한 투자부족은 국영의료서비스 내에 심각한 문제를 만들게 된다. 의료시설의 낙후, 대기환자의 급증, 의료시설의 신축과 개․보수의 필요성이 급증하였다. 그러나 정부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결국 영국 자본주의의 꽃으로 불리던 국영의료서비스에 대한 대중적 불신이 커지게 되었다. 결국, 1970년 중반부터 지속된 영국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하에서 의료시설에 대한 대규모 정부재정 투자를 대신하여, 대중적 불만을 관리하기 위해, 부족한 의료시설 투자에 정부 재정 대신 민간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국영의료서비스 내에 민간자본유치사업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국영체제로 운영되던 지역거점병원을 비영리병원의 조직체계로 변화시키면서 만들어진 트러스트 체제가 그 실현을 위한 사전 조치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업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공공과 민간의 협력(Public-Private Partnership)의 강화를 목표로 추진되었다.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 설립개요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는 1990년에 제정된 국가보건서비스와 지역보건법(The NHS and Community Care Act)에 의거해서 설립되었다.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는 영국 정부로부터 시설을 임차하여 지역주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영리 조직의 형태로 출발하였고, 임차비로 1년마다 총 자산가치의 6%에 해당하는 비용(Capital charge)을 재무성에 지불하여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병원 시설에 대한 자본투자의 책임이 정부당국에서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로 이전되었다.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가 재무성에 지불한 임대료는 지역보건당국에 재배정되어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가 지불할 수 있는 충분한 비용을 보상해주는 데 활용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트러스트의 설립은 자본의 흐름만 복잡하게 만든 것처럼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의 설립으로 인해서, 영국 병원에 대한 운영비와 시설투자비용은 국가 재정에서 분리되고, 시설투자는 개별 트러스트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한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개별 트러스트의 판단에 따라서 의료기관 설립과 운영에 민간자본을 유치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영국의 국가의료서비스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변화의 대목이다.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는 영국 재무성을 독점 자본 투자자(대부자)로 하여 설립된 비영리기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병원의 새로운 시설투자를 하고자 하는 경우 ① 자체 자산매각, ② 정부재정으로부터 임차(이자율 6%), ③ 민간자본의 유입, ④ 비용절감과 서비스 공급 축소 등의 방식만을 활용할 수 있었다. 결국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의 도입을 통해서, 새로운 공공시설에 대한 자본 투자를 부채의 순환체계로 바꾸어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표 1). <표1 생략> 국영의료서비스에서의 민간자본유치사업 추진 경과 민간자본유치사업의 개요 1992년 보수당 정권 하에서, 영국의 공공부분 자본투자에 민간자본을 끌어들이는 것이 처음 시도되었고,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도 이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를 표명하여 현재까지 추진되고 있다. 국영의료서비스에서 초기에는 병원 주차장, 쓰레기 소각장 건립 등에 민간자본이 유입되었지만, 1995년 제반 규정이 바뀌면서 대규모 자본투자를 원하는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에서 민간자본조달 기전 방법으로 민간자본유치사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지금은 민간자본의 투자는 병원시설 건립과 서비스 제공 영역까지 확대되고 있다. 영리회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병원시설에 자본을 투자하여 병원 건물과 장비를 구비․관리하고, 그 시설과 장비를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에 20-60년 동안 임대(Lease)하여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가 병원을 운영하면서 국영의료서비스운영 체계 안에서 지역주민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 도입되고 있다. 민간자본은 그 기간동안 임대료로 병원 건립비용의 일정비율(11-19%)을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에 청구하여 투자재원을 회수하게 되며, 결국 이렇게 새로 건립된 병원의 소유와 운영 형태는 민간소유 공공운영(public management of privately owned hospitals)이라고 할 수 있다. 민간 컨소시엄과의 계약과정에서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국영의료서비스 소유의 토지와 병원을 매각하는 것도 계약에 포함되기도 하여, 공공소유의 병원이 점차 감소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정부 재정당국이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의 시설 투자에 대한 추가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의료기관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는 자체적으로 민간자본유치사업을 통하여 시설 투자자금을 조달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까지 처하게 된 것이다. 정부의 입장에선 과거와 같이 의료기관 설립에 소요되는 초기 투자재원의 부담이 없다는 점과 시설과 장비에 민간이 투자, 관리하게 되면 보다 효율적일 것이라는 주장이 민간자본유치사업을 옹호하는 근거로 제기되고 있으나, 영국 내에서는 정부에서 지불하는 11-19%에 이르는 임대료는 터무니없이 높다는 비판이 비등한 실정이다. 비록, 관리비와 투자원금이 배제되어 있기는 하지만, 영국 재무부 대출이자가 3.5%인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임대료가 대단히 높은 것이다. 1998년 초에 15개 프로젝트에 총 12억 파운드(2조4천억 원)에 이르는 투자계획이 발표되었고, 1998년 4월에 10개 프로젝트에 총 23억 파운드(4조 6천억 원)의 계획이 발표되었으며, 향후 이러한 투자 규모는 점차 확대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민간자본유치사업의 문제점 공적 재원보다 값비싼 재원조달 방법 기본적으로 민간자본유치사업은 자본투자에 대한 임대료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초기 자본투자(capital charge)와 동일한 방식이나, 재원의 출처가 민간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현재 민간자본유치사업을 통한 재원이 오히려 과거 공적재원보다 매우 비싼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결과 과거 재정에서 지원 받아 임대료를 지불하던 돈으로 현재는 보다 적은 규모의 민간이 설립한 병원 임대료 밖에 지불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민간시설에 대한 임대료의 기준이 되는 자산가치 평가에 거품이 많기 때문이다. 그 규모가 대체자산의 2배에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둘째는 자본투자보다 더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민간시설에 대한 사용료는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① 사용료로 건축비, 이자, 시설 장비 유지비이며, 임대료의 성격을 지니는 돈과 ② 서비스 비용으로 청소, 전기, 세탁비로 구성되어 있다. 민간자본유치사업가 국가 재정에 요구하는 시설 임대료는 연 건축비의 11.2-18.5%에 이르고 있고, 자본투자가 연 6%임을 비교해봐도 대단히 높게 책정되어 있어, 투자된 민간 자본의 수익성을 철저하게 보장해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민간자본은 비싼 자산가치평가를 통해서 공적 재원보다 높은 임대료를 받아가고 있으며,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로서는 동일한 예산으로는 그 비용을 감당하기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지역사회 필요에 의한 자원배치 기능의 소실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는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① 자본투자(capital charge), ② 자산매각 대금, ③ 서비스 제공에서의 비용 절감, ④ 기타 영리활동(소매업, 민간보험 환자진료 등)을 통해서 부족한 재원을 충당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도 부족하기 때문에 현재 다음과 같은 방식을 통해서 재원을 보충해나가고 있다. - 재정부의 보조금(smoothing mechanism) - 공공 소유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에 지원할 자금의 민간자본유치사업으로 전환 - 임대료 대신 민간자본유치사업에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 자산 매각권 부여 - 인력에 지출되는 국영의료서비스 트러스트 예산을 민간자본유치사업 임대료 지출로 전환 민간자본유치는 오히려 이전 보다 많은 돈을 국가재정에서 지불하게 하고, 예전에 공공시설 확충과 서비스 제공에 지출되던 비용의 일부분이 민간자본 임대료로 전환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약에 트러스트의 예산규모가 동일한 경우라면 이러한 경향이 점차 확대될수록 비용절감을 이유로 인력구조조정에 들어가게 되면서 공공병원에서 공급되는 서비스의 절대 양이 감소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국민에게 필요한 만큼의 보건의료서비스를 무상으로 제공하고자 하였던 국영의료서비스의 설립 목적은 이뤄지기 어려워지고, 초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정부가 이전보다 많은 돈을 지출하여야 할 것이다. 결국, 민간자본유치사업의 도입은 국영의료서비스의 가장 큰 장점의 하나였던 지역사회 필요에 근거한 의료자원의 공급과 배치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영의료서비스 민영화의 핵심 기전 민간자본유치사업을 통한 자본의 높은 비용으로 인해서 국영의료서비스의 서비스 공급역량과 인력이 축소되고 있다. 특히, 장기요양서비스, 치과서비스, 안과서비스(Optical service), 비응급수술과 관련한 공적 제공이 감소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예산 부족과 서비스 공급역량의 축소를 만회하기 위해서 국영의료서비스 일차의료트러스트(primary care trust)는 국영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가입 자격을 재조정하고 있으며, 지불능력을 갖춘 민간보험환자를 적극적으로 유입하려 하고 있다. 현재, 다양한 국영의료서비스 시설과 비-국영의료서비스시설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계획은 민간자본에게 새로운 수익을 위한 시장을 만들어주는 매력적인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앞으로 제한 없이 지속된다면, 국영의료서비스의 민영화, 민간보험과 민간공급체계로의 재편은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된다.PSSP <참고문헌> 1. Declan Gaffney, Allyson M Pollock, David Price, Jean Shaoul. The private finance initiative NHS capital expenditure and the private finance initiative-expansion or contraction? BMJ 319: 48-51, 1999 2. Declan Gaffney, Allyson M Pollock, David Price, Jean Shaoul. The private finance initiative PFI in the NHS-is there an economic case? BMJ 319: 116-119, 1999 3. Declan Gaffney, Allyson M Pollock, David Price, Jean Shaoul. The private finance initiative Planning the "new" NHS: downsizing for the 21st century BMJ 319: 179-184, 1999 4. Declan Gaffney, Allyson M Pollock, David Price, Jean Shaoul. The private finance initiative The politics of the private finance initiative and the new NHS BMJ 319: 249-253,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