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WTO 5차 각료회의 대응 투쟁의 준비상황 지난 2001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4차 WTO 각료회의 결과로 2005년 새로운 무역질서를 출범시키기 위한 협상인 '도하개발의제(Doha Development Agenda)'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농업협정(AoA), 서비스협정(GATs), 지적재산권협정(TRIPs)등의 의제들은 오는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열릴 예정인 5차 각료회의까지 기본 가닥을 확정하고, 투자자유화, 경쟁, 무역원활화, 정부조달투명성 등 이른바 싱가포르 이슈에 관해서는 이번 각료회의에서 정해지는 방식대로 협상을 시작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정해진 기간 내에 목표만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하면 미국과 유럽연합 등 중심부 국가 간의 갈등이 증폭되는 등 예정 데로 협상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OECD 각료회의, G8 정상회담 등을 통한 도하개발의제 성사를 위한 이들의 노력은 분주히 이루어지고 있다. 한 편, 각각의 의제에 관한 협상이 진척되고 이에 따른 개방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이에 저항하는 민중들의 투쟁도 점차 본격화되고 있다. 서비스협상에서 지난 3월 31일 개방계획서 제출 시한을 앞두고 정부가 교육분야를 개방 대상에 포함시키려 했고, 이에 대해 교사·학생을 비롯한 시민 사회단체들은 'WTO교육개방·교육시장화 4대 입법 및 양허안 저지를 위한 공동투쟁본부'를 결성하여 다양한 투쟁을 벌였다. 오는 6월 말 경 정부가 WTO 사무국에 제출할 2차 개방계획서에는 보건의료 분야도 포함될 전망이어서, 보건의료노조를 중심으로 '경제자유구역폐기! 의료시장개방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투쟁에 돌입했다. 농민들 역시 도하개발의제에 따른 농산물 개방의 폭과 수위 확대와 2004년에 개시될 쌀 시장 개방 재협상, 그리고 그에 앞선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국회비준을 막아내기 위한 투쟁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이 밖에 경기, 대구경북 등 지역 차원에서도 WTO 개방 저지를 위한 노-농 연대의 틀이 구성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는 5차 각료회의를 앞두고 이러한 흐름을 하나로 모아 WTO 도하개발의제를 통해 추진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하는 전 민중의 연대투쟁을 형성하기 위한 논의도 본격화되고 있다. 5차 각료회의에 대응하는 투쟁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계획되고 있다. 99년 시애틀 3차 각료회의를 무산시키고 WTO 내의 새로운 무역협상 라운드의 출범을 지연시켰던 지구적 차원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운동은 점차 서로간의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 투쟁의 경험을 공유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민중적인 대안을 둘러싸고 토론과 논쟁을 벌이는 공간인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을 탄생시켰다. 지난 1월 말에 열린 3회 사회포럼에 모인 사회운동 세력들은 9월 5차 각료회의를 결집의 계기로 삼자고 의견을 모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논의 역시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지난 5월 11일∼12일 멕시코시티에서는 '미주대륙 전미자유무역협정(FTAA) 반대 캠페인'과 국제적인 WTO 반대투쟁 네트워크인 '우리 세상은 상품이 아니다(Our World is not for sale)'의 발의로 전 세계의 150여 개 사회운동 조직들이 모여 "WTO 대안 형성을 위한 민중 포럼"을 개최하여 오는 WTO 5차 각료회의에 대한 대응전략을 마련했다. 또한 지난 5월 18일에서 21일 사이 자카르타에서는 이라크를 점령한 미국에 저항하는 지구적 반전운동의 향후 계획을 논의하는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자카르타평화합의문"을 채택하여 앞으로 계속될 연대 투쟁, 특히 WTO 각료회의 기간 동안 지구적 행동의 결의를 천명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앞으로 개최될 각종 회의를 통해 더욱 구체화 될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의 맥락에서 WTO 반대투쟁의 의의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다가올 5차 각료회의 대응 투쟁에 어떠한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2. 도하 개발의제의 개요- "필수 서비스의 상품화, 투자와 금융거래의 완전한 자유화 " WTO는 각 국의 무역장벽을 없애고 무역 자유화의 틀을 다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현재 미국을 비롯한 WTO 협상을 주도하는 세력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새로운 상품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관세를 낮추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2005년부터 시행될 새로운 무역질서의 틀을 짜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은 초국적 기업의 금융적 팽창을 뒷받침하는 국제적 규범을 수립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이를 위해 각각의 의제는 교육, 보건의료, 에너지, 식량, 물 등 필수 공공서비스를 완전히 시장화하여 초국적 자본의 활동 영역을 넓히는 한 편, 해외 투자와 국내 투자를 차별하는 요소를 없애고 손실의 여지가 없도록 하는 등 투자 자유화를 이루어 내기 위한 조처들을 국제적인 규범으로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시 말하면 IMF와 세계 은행이 주변·반주변 국가들이 처한 외채 혹은 외환위기를 매개로 하여 차관을 지급하고 그 대가로 무역과 자본이동의 자유화, 탈규제화, 민영화, 긴축재정 등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요했다면, WTO 도하개발의제는 이러한 정책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틀을 갖추고 '분쟁해결메커니즘'을 두어 이를 강요하는 셈이다. '개발의제'라는 이름을 달고 '무역에 있어서 개도국들의 이익을 증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들을 협상의 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허울좋은 도구일 뿐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개도국 우대조치'에 관한 이행 계획은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5차 각료회의를 앞두고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는 의제에 대한 대략적인 협상 내용을 다음과 같이 살필 수 있다. ·농업협정(AoA) 지난 10여 년 동안, IMF와 세계은행은 주변·반주변 국에 차관을 지급하며 그 조건의 일환으로 농산물에 대한 무역 장벽을 낮추고 국내 식량생산에 대한 정부보조금을 감축하고, 농업을 강화하기 위한 정부의 각종 프로그램들을 제거하도록 했다. 이와 유사하게 도하개발의제 농업협정은 ① '시장접근의 실질적 개선(관세 감축의 비율을 높이고 폭을 넓히는 것)'②‘수출보조금의 단계적 폐지를 목표로 한 감축’, ③'국내보조(추곡수매제와 같은 생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보조)의 실질적 감축’을 협상의 3대 목표로 내걸고 있다. 그러나 주요 농업 수출국인 미국은 이러한 원칙을 주장하면서도 자국 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에 대해서는 생산비용을 낮추는 보조금을 확대하는 등 식량 수출 확대를 위한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조처는 미국을 비롯한 초국적 식량생산 기업을 기반으로 하는 농산물 수출국들로 하여금, 과잉 생산된 식량을 생산비 이하의 가격으로 덤핑하여 주변·반주변 국의 농촌을 기반으로 한 소규모 식량 생산을 붕괴시키도록 하고, 전 세계 민중들의 식량 소비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서비스협정 (GATS) 서비스협정은 교육, 보건의료, 에너지공급, 상수도공급, 통신, 금융서비스, 시청각서비스, 법률서비스, 건설, 유통, 환경 등 모든 형태의 서비스를 협상 대상으로 한다. 이 협상은 교육, 의료, 물, 에너지 등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급되어야 할 공공 서비스를 상업화하는 한 편, 외국인 지분소유한도를 철폐하도록 하여 초국적 자본이 침투하여 활동할 수 있는 영역으로 탈바꿈시킨다. 이 협정이 다룰 수 있는 서비스의 종류는 제한이 없고,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는 것 역시 언제든 가능하다. 때문에 이 협정은 개별 회원국이 특정 회원국을 대상으로 개방 요청을 하고, 그 요청에 근거하여 개방의사를 밝히는 방식으로 협상을 진행한다. 또한, '자발적 자유화 조치'에 대해 특혜를 부여하는 방식을 도입하여, 협상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 ·싱가포르 이슈 96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2차 WTO 각료회의에서는 투자, 경쟁정책, 무역원활화, 정부조달투명성을 무역자유화와 어떠한 관계를 지니는지에 대해 분석작업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후 이 의제들은 '싱가포르 이슈'로 명명되어 다루어졌다. 2001년 4차 각료회의에서는 이 주제들이 '도하개발의제'의 협상의제로 포함되어 '5차 각료회의에서 정하는 방식에 따라' 구체적인 협상이 개시될 예정이다. 이는 투자행위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거래에 있어서의 신속성을 꾀하고자 하는 초국적 자본의 필요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대다수의 주변국들은 이 이슈들이 개방압력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이 이슈를 통해 미국, 일본 등은 OECD 내에서 추진하려다 실패한 "MAI(다자간 투자협정)" 수준의 투자자유화 협정을 WTO 내에서 체결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즉, '단기성 투기자본까지 포함하는 투자의 광범위한 정의', 국내 투자와 해외투자를 차별하지 않고, 해외투자간의 동등 대우를 보장하며, 투자 설립 전 단계에서부터 투자자를 보호하는 등의 조치들을 규범화하려는 것이다. 또한 자유로운 경쟁을 가로막는 독과점, 카르텔 등의 관행을 제재할 수 있도록 하며, 통관, 수출입허가 등 모든 수출입 절차와 운송형식, 대금지불 절차를 간소화하며, 정부조달 분야에 있어서의 국내자본과 해외자본의 차별 금지와 투자 정보 등에 대한 투명성을 보장하는 조치들 역시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완전히 자유화된 투자와 금융거래의 틀을 확립하는 것이 이 이슈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바이다. 3. 노무현 정부의 외자유치 정책과 도하개발의제 남한을 '자본유치형 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했던 김대중 정권에 이어, 노무현 정권은 실제로 대규모 외국인 투자를 유치함으로써 남한이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동력을 창출하는 것을 과제로 안고 있다. 이를 위해 초국적 자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인식하도록 하는 각종의 조처들이 추진되고 있는데, 외국인 투자에 대한 '최혜국대우'와 '내국민대우'를 보장하고 '이행의무부과금지'와 '수용과 보상에 관한 규정'을 두어 위험요소로부터 보호한다는 '투자자유화협정', 외국인투자에 대해 각종 규제를 면제하고 교육, 의료 등에 대한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경제자유구역법'등이 그것이다. 또한,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 역시 이러한 외국인 투자 유치 정책의 연장선에서 초국적기업의 활동 영역을 더욱 확대시켜주고, 투자의 자유화를 꾀하는 조처의 일환으로 적극 추진되고 있다. 특히, 협상에 있어서 한국 정부는 IMF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취해진 이른바 '자발적 자유화 조치'를 바탕으로 다른 회원국들로 하여금 자유화와 개방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하도록 추동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농업 협정에서는 농업포기를 유도하는 정책을 구사하며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지난 3월 31일 146개 회원국 중 오직 18개국만 제출했던 서비스분야 개방계획서에 교육분야까지 포함시켜 서둘러 제출했다. 4. 무엇을 기치로 투쟁할 것인가? 분명히 할 것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세계적인 무역질서 각 민족국가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이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이 노리는 것은 상품의 판로를 확보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초국적 자본의 금융적 팽창을 위한 활동의 영역을 넓히고 자본 이동의 완전한 자유화를 완성하는 데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WTO 반대투쟁의 의의는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시장 개방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초국적 자본의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처들이 공격하는 민중들의 제반 권리를 옹호해 내는 것에 있다. 식량, 물, 의약품, 에너지, 교육, 보건의료 등 필수 서비스에 대한 민중들의 접근권을 박탈하고, 노동의 불안정화를 부추기며, 농촌을 붕괴시키고 빈곤을 심화시키는 WTO의 반-민중적, 반-사회적 성격을 충분하게 폭로해내고, 민중들의 완전한 삶을 보장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또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최소한이나마 보장하고, 환경 파괴를 규제하며, 민중들의 삶에 필수적인 서비스를 공급해야 하는 국가의 책임을 해체시키며 외자유치를 경제성장의 유일한 동력으로 삼으며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키는 노무현 정권의 발전전략의 한계를 분명히 비판해야 한다. 이러한 투쟁을 전개할 때 WTO에 반대하는 전 세계 민중들과 연대의 지점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5. 덧붙여 현재 경제자유구역 폐기, 한칠레자유무역협정 국회비준 저지를 목표로 한 노동자-농민 연대투쟁이 개시되고 있다. 또한, 5차 각료회의가 열리는 9월 초에는 민중의 권리를 파괴하는 5차 각료회의를 규탄하고 WTO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투쟁과, 각료회의가 열리는 멕시코 칸쿤에서 각료회의의 진행을 저지하고, 민중들의 대안을 모색하는 전세계 민중들과 함께 할 참가단 활동이 계획되고 있다. 이러한 투쟁 계획을 의미 있게 성사시키기 위한 각 단위별 교육과 조직화가 내실있게 준비되고 추진되어야 한다.PSSP
얼마 전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 제작하고 6명의 충무로 감독들이 만든 <여섯 개의 시선>이라는 옴니버스 작품을 개막작으로 선보였다. 인권위는 기획 당시 이를 국내 첫 '인권 영화'의 출현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했지만,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참된 인권영화를 발굴, 육성하기 위한 그간의 노력 또한 분주히 있어왔다. '영상을 통한 인권교육의 실현과 인간을 위한 대안 영상의 발굴'을 목적으로 시작된 인권영화제가 올해로 벌써 8년째다. 인권영화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개념조차 생소하고, 변변한 학문적인 담론조차 존재하지 않는 '인권 영화'를 국내에 소개하는 계기로 작동하면서, 척박한 국내 영상문화의 지형에 균열을 일으키고, 인권 교육의 지평을 한 뼘 넓히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해오고 있다. 인권영화제의 상영작은 크게 해외 프로그램과 국내 프로그램으로 나뉘는데 해외 프로그램은 전세계적인 인권 실태를 구체적인 영상을 통해 조망해 볼 수 있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해외 프로그램의 대다수는 거의 자국 내에서만 상영되는데, 이러한 작품들은 철저히 상업적인 메카니즘 하에서 작동하는 영화산업시장과 사회/역사적 맥락은 거세한 채 과도하게 작가주의에 매몰되는 예술 영화 진영의 관심 영역에서는 제외된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국내작품들의 경우, 몇 년 전부터 크고 작은 영화제들이 신설되고, 일부 국내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배급 확충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행하면서 이전에 비하면 접근도가 훨씬 용이해졌다. 또한 최근 영상미디어 센터 <미디액트>를 필두로 전지역에서 미디어 센터 설립이 확산되어 가는 추세이고, 공중파를 통해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이 신설되는 등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변화된 영상 문화의 지형도 안에서 인권 영화가 설자리는 아직도 좁기만 하다. 물리적으로 불안정한 제작 환경을 감내하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은 제작자들의 지속적인 작품 활동을 방해할 뿐더러, 질적 도약을 이룬 액티비즘 작품의 출현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더욱이 체계적인 배급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국내의 인권 현실을 담아낸 호소력 있는 영화들이 대부분 제한된 유통망을 통해 고정화된 사람들과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인권 영화제는 현재 한국 사회의 독립 다큐멘터리들이 대중과 만날 수 있는 소수의 현장 중 하나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말한다. <옴니버스-여정> 이번 인권영화제에서는 인권영화제 측에서 사전제작지원을 한 <옴니버스-여정>이 상영되었다. 이 영화는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동일한 주제로 삼았으되 4편의 단편 다큐멘터리가 각각 상이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여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둘러싼 쟁점들을 다층적으로 드러내주는 옴니버스 작품이다. <이주>는 제3세계 노동자들이 왜 열악하기 짝이 없는 이주노동자로서의 삶을 택할 수밖에 없는가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방글라데시아에서 한국으로 온 이주 노동자의 사례를 통해 제3세계 국가의 불안정한 정치, 경제적인 요인이 전세계적으로 팽배해 있는 이주를 추동하는 요인임을 시사하고 있다. 방글라데시아에서 직접 촬영한 이국적인 풍경을 마냥 색다른 구경거리로만 감상할 수 없게 만드는 현지의 고단한 현실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동행>은 작년 1월에 아모르 가구에서 있었던 이주 노동자들의 파업 당시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주 노동자들은 일상적으로 언어적인 폭력을 자행하고,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면서도 재정상태를 운운하며 몇 달치의 임금을 체불하는 사측의 태도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파업을 결의한다. 감독은 파업을 둘러싼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갈등 양상을 그리는 것은 물론, 이주 노동자들을 지지·연대하는 한국인 활동가들과 이주 노동자들간의 미약한 신뢰 관계가 파업투쟁 과정 속에서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그려내고 있다. <동행>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주 노동자들의 열악하기 짝이 없는 노동 환경이 노동허가제 도입을 외면하면서 고의적으로 불법체류자를 양산해 내는 정부의 정책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Stop crackdown>은 작년 3월 강제 출국을 유예시켜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이주 노동자들에게 자진신고를 하라는 정부의 기만적인 정책이 제시되자, 평등노조 이주 지부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가열찬 투쟁 현장들을 역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신변에 위협을 가하는 정부의 단속추방 정책이 이주 노동자 운동의 연대 고리를 어떻게 파괴하는지 또한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돌아가기 전에>는 추석 연휴를 맞아 모처럼 휴식 시간을 갖는 미얀마 노동자들 사이에 오가는 삶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미얀마의 노래를 부르고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로 살아가는 어려움을 토로한다. 다소 촬영이 서투르고 한정된 시공간을 배경으로 만든 단순한 다큐멘터리인 듯 싶지만, 이주 노동자가 직접 주체가 되어 카메라를 찍었기에 연출 가능한 진솔한 풍경들이 가슴깊이 울리는 작품이다. 미약한 재정적인 지원과 시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옴니버스-여정>은 이주 노동자의 인권을 둘러싸고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는 과제들을 던지면서 작품들은 묘한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얼마 전부터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이주 노동자를 등장시켜 이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고 있는 아픔을 전하고 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하면서 대중들의 높은 관심을 끌고 있다. 가시적인 영향력이 큰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이주 노동자들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걸 느끼해 준다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저열하기 짝이 없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차가운 시선의 여파를 막아내는 데에 그 프로그램이 얼마간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사실은 '우리'와 다르다는 배제의 시선을 전제로 유발하는 감정들, 여전히 그들을 시혜의 대상으로 가두어 버리는 시선에 못내 감화되다가도 결국 불편해지고 만다. 차별과 배제를 넘어선 시선, '인권 영화'의 확장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PSSP
위험전가 군사주의, 소규모 학살과 전쟁의 역사적 합법성 요약 '테러리즘과의 전쟁' 초기의 성공에 대한 인식은 서구 세계에서 지난 20년 동안 점점 가속화되어온 전쟁의 일반적 재합법화(relegitimation)를 강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먼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을 서구의 새로운 전쟁 방식의 가장 최근의 예로 간주하며, 그 전쟁의 희생자를 이전의 걸프만과 코소보 전쟁과 비교한다. 그것은 '위험-전가 전쟁(risk-transfer war)'이라는 새로운 유형으로 동정(同定)할 수 있으며, 중심적 특징은 '소규모 학살의 군사주의'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유형은, 초기의 '타락한(degenerate) 전쟁'에서 민간인을 체계적으로 표적으로 삼는 것이 초래한 전쟁의 합법성에 관한 문제에 대해 단지 부분적인 해답만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정당한(just) 전쟁'의 기준에 관한 근사치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군인과 전쟁 지역의 민간인 사이의 위험의 불평등성은 새로운 형태로 전쟁의 합법성의 문제를 되살린다. 이 글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민간인 사상자에 관한 관심사에서, 역사적으로 면제되어온 전쟁의 기준에 관해 검토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서구의 새로운 전쟁 방식의 모순은 전쟁의 합법성 문제에 관한 '역사적 평화주의자'의 입지(position)를 강화한다. 전쟁의 르네상스는 21세기 초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다. 전쟁은 국제적 범죄자의 특권이 아니라 정의의 첫 번째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2001년 911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를 광범위하게 믿고 있으며, 정말로 미국은 힘이 정의를 강요할 수 있다고 보여주었다. 영국의 저명한 자유주의 논평가인 폴리 토인비는 이를 '폭격이 작동한다(bombing works)'고 말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한 확신은, 특히 미국에서, 지난 한 세기의 대부분 기간 동안 서구 민주주의에서 대체로 우세했던 평화주의적 감성의 현저한 역전을 수반한다. 그것은 실제로 전쟁의 재합법화다. 내가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20세기를 거치면서 전쟁이 포괄적으로 탈-합법화(delegitimised) 명백히 최종적으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더라도―되었기 때문이다. 1914-18년 플랑드르 참호에서의 경험은 '무감각한 살육'이라는 패러다임을 주었고, 이는 지난 세기 동안 영향력을 남긴 전쟁에 관한 '감정의 구조'의 틀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그래서 서구 민주주의에서 1939-45년의 새로운 전쟁은 더욱 침울한 것이었고, 애국주의를 덜 동반했으며, 민족주의만큼이나 반(反)파시즘에 호소했다. 그래서 사실 그 전쟁은 많은 사람에서 선한 전쟁(good war)처럼 보였고, 홀로코스트를 멈추기 위한 십자군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더 정말 예외적인 것으로 보였다. 핵 절멸의 위협은 20세기 후반 거의 대부분 기간 동안 모든 비용을 들여서라도 큰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반드시 미리 막아야 한다는 압도적인 인식을 창조했다. 베트남 전쟁은 핵무기를 사용할 수 없는 일종의 제한 전쟁조차 무감각한 살육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반전이라는 감정의 구조를 강화했다. 이러한 경험의 중요성은, 가장 강력한 서방 국가인 미국에게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이며, (아마도 영국을 논외로 한다면) 미국은 1939-45년의 공포에 의해 전쟁의 활용이 이미 탈-합법화된 것은 아니었다. 전쟁의 재합법화는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 하나의 요소는 2차 세계대전을 '선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과 비슷한 것에서 유래한다. 즉 전쟁 또는 최소한 조직적인 군대의 역할이 민간인에 대한 집단학살과 폭력을 멈추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긍정성'은 1980년대 핵무기에 대항한 투쟁인 유럽의 대규모 평화운동이 벌어졌던 바로 그 시대에 이미 출현했다. 하지만 그 당시 선한 전쟁의 사례는 (캄보디아의) 베트남, (우간다의) 탄자니아와 같은 3세계로부터 유래했다. 물론 더 최근에는 이를 '인도주의적 개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서방이 지원하는 군사행동의 공공연한 목적이 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서방의 의지 중 항상 단지 하나의 요소일 뿐이었다. 마가렛 대처는 20년 전 포클랜드에서 전쟁의 다른 양식을 개척했고, 냉전의 종식과 함께 미국 역시 다시금 성공적으로 진짜 전쟁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부시 대통령은 1991년 이라크 전쟁에서 '베트남 신드롬을 걷어찼고', 나토(NATO)는 1999년 코소보에서 벌어진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었다. 따라서 조지 W. 부시가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발표하기 위한 배경이 매우 잘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최근까지 지난 세기 평화의 교훈이 남긴 유산은 강력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성공과 함께, 그러한 경향은 매우 다른 길로 바뀌고 있다는 결론을 피하기가 힘들다.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동원한 군사력 활용은 거의 유례가 없는 일련의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전쟁에 강력한 새로운 추동력을 가할 것이다. 바로 이 때, 이러한 전개의 모순에 관해서는 누구도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으며, 나아가 그것이 앞으로의 10년 동안 세계 사회에 끼칠 결과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이 글은 먼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을 서구의 새로운 전쟁 방식의 가장 최근의 예로 간주하며, 그 전쟁의 사상자를 이전의 걸프만과 코소보의 전투와 비교한다. 나는 그것을 '위험-전가 전쟁'(risk-transfer war)이라는 새로운 유형으로 동정할 것이며, 중심적 특징은 '소규모 학살의 군사주의'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새로운 유형이, 초기의 '타락한 전쟁'에서 민간인을 체계적으로 표적으로 삼는 것이 초래하는 전쟁의 합법성 문제에 관해 단지 부분적인 해답만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정당한 전쟁'의 기준에 대한 가까운 근사치에도 불구하고, 서방의 군인과 전쟁 지역의 민간인 사이의 위험의 불평등성은 새로운 형태로 전쟁의 합법성의 문제를 되살린다. 이 글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민간인 사상자에 관한 관심사에서, 역사적으로 면제되어온 전쟁의 기준에 관해 검토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서구의 새로운 전쟁 방식의 모순은 전쟁의 합법성 문제에 관한 '역사적 평화주의'의 태도를 강화한다. Ⅰ. '테러와의 전쟁'에서 사망자 수 칼 코네타(Carl Conetta)는 2002년 1월 말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영구적 자유(Enduring Freedom)' 작전으로 인한 직접적인 민간인 사상자수를 분석했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망자 추정치가 1000-1300명의 범위 내라고 결론 내렸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폭격으로 죽거나 다친 모든 탈레반 정부와 아프간 피난민의 수를 액면 그대로 셈한다면, 5천명 이상이 죽고 1만명 이상이 다쳤을 것이다... 실제 사상자의 수는 액면 그대로 셈한 것의 1/4 이하일 것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그 차이가 매우 크지만,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9·11 공격의 사망자의 수를 공식적으로 처음 추정할 때의 수치는 현재와 비교할 때 두 배 이상이었다. 그 수치가 아래쪽으로 조정되는 데에는 한 달 이상이 걸려고, 현재의 공식 추정치에 근접해지는 데에는 두 달 이상이 걸렸다. 최종적인 사망자 수는 9·11 공격 이후 첫 달 동안 우세했던 추정치의 아마도 50% 이하일 것이다." 그렇지만, (공동 조사의 결과로) 코네타는 이러한 민간인 사망자의 수에 "폭격의 충격, 피난민에 대한 공격, 기근의 위기에 기인하는 최소한 3천명의 민간인 사망자의 수를 추가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의 보고서는 "전쟁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지속된 기아, 폭발, 연관 질병, 상해로 인해 발생한 9월 중반부터 1월 중반까지의 아프간인 사망자 수를 8000-18000명으로 추정한 수치"를 사용했다. "총계치 중의 최소한 40%의 사망자(3200명 이상)는 위기와 전쟁의 효과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범주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한 원인은 복합적이기 때문에, 코네타는 그것을 미국의 전쟁 탓으로 돌렸다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명백하게도 이러한 절차는 방법론적인 어려움이 따르지만, 우리가 미국의 폭격으로 발생하는 사망자의 수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런 방식이 필요하다. 코네타는 "전쟁 후 보복적 나포와 포로에 대한 잘못된 관리에 따른 8백명 이상의 군인 사망자"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일단 사로잡힌 탈레반-알카에다 전사는 더 이상 전투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 수치를 포함하는 것은 정당하다). 따라서 그가 신중하게 고려한 추정치를 사용하면, 그 보고서의 결론은 2001년 1월까지 미국의 군사전투의 결과로 인한 전체 비(非)전투원 사망자의 수가 5천명 또는 그 이상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수치는 뉴욕과 워싱턴에서의 민간인 사망자 수의 거의 최종적 수치인 약 3000명보다 더 높다). 물론 이러한 추정치는 탈레반과 알카에다 전사(戰士)의 사망자 수를 다루지 않았다. 미국은 민간인 사상자의 수를 최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2001년 말기부터 2002년까지 지속적으로 뚜렷이 강화된 무시무시한 폭격으로 적의 전사들을 살해할 것을 실제 의도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살해된 전투원의 숫자는 직접적인 민간인 사상자의 수를 상당히 넘어설 것으로 여겨진다(물론 모든 간접적인 민간인 사상자의 수를 덧붙인다면, 여전히 그것을 넘어설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전투원 사망자에 관해서는 그 수치를 전혀 모른다. 우리는 미국과 동맹군에 의한 민간인과 전투원 사망자 추정치에 견주어, 미국과 동맹국의 사망자 수를 고찰해야 하며, 적(탈레반-알카에다)에 의한 민간인 사망자를 고찰해야 한다. 코네타가 다루었던 기간 동안 적에 의해 살해된 미국인 무관은 단지 한 명이었고(한 명의 CIA 요원이 마자르-샤리프 감옥에서 일어난 폭동에 의해 살해되었다), 몇 명이 챠량과 헬리콥터 사고로 사망했다. 지역 동맹군 즉 북부동맹/연합전선(Nothern Alliance/United Front)은 이 시기 동안 미국인들 보다 훨씬 더 많이, 그렇지만 탈레반-알카에다 보다는 훨씬 덜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역시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다. 전쟁 시기 동안 탈레반-알카에다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의 수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들이 지배했던 시기와 내전의 초기 시기와는 반대로, 매우 적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최근 분쟁의 간접적인 민간인 사상자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 세계화 시대의 다른 두 개의 서방의 전쟁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 전쟁들을 살펴볼 때, 지금까지 검토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표-1>이 제시하는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수치는 더욱 신중하게 추산된 것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수치는 논쟁적이다. 코소보에서 세르비아인의 행동에 의한 1만 2천명의 사망자는 나토의 폭격이 시작되기 전의 2천명의 사망자 추산과 나토의 폭격이 끝난 직후의, 널리 주장되는 1만명의 사망자 추산을 포함한 것이다. 그렇지만 약 2천 5백명의 시신이 발견되었을 뿐이라는 나토의 비판은 이러한 수치가 사실 크게 과장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반면에 코소보 프리슈티나에 위치한 <인권과 자유 위원회(Council of Human Right and Freedom)>는 3천명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정밀한 수치에 도달하는 게 중요하지만, 이 글은 서로 다른 전투원들 사이에서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는 정도에 관한 상대적으로 넓은 격차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글의 주장은 여러 관점들이 제시하는 수치 조정에 심각하게 영향을 받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사망자 수에 관한 세부적인 논의를 더 파고들지는 않을 것이다. <표-1> 주1. '전투에 참여한 적에 의한 민간인 사망자'는 즉각적인 분쟁을 일으킨 침략행위 동안 발생한 사망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초기 전투(예컨대 사담 후세인의 집단 학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의 공격, 아프간 내전과 탈레반의 억압) 또는 그 다음에 벌어진 전쟁(예컨대 걸프전 이후 이라크 내전, 마쉬 아랍인[서부 이라크의 티그리스와 유프라데강의 사이 지역의 쉬아파 무슬림]의 제거 등)에 의한 장기적인 관점의 사망자를 포함하지 않는다. 주 2. '서방의 공격에 의한 간접적인 민간인 사망자'는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예컨대 이라크에서 미국의 인프라 파괴로 인한 민간인 사망, 아프가니스탄에서 최근 폭격으로 인한 유사한 결과)에 의한 민간인 사망자 추정치를 말한다. 그것은 전쟁의 영향에 따른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사망자(즉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로 인한 사망자 또는 아프간 전쟁의 결과로 인한 장기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사망자)를 포함하지 않는다. 주 3. 2002년 3월까지 아프간에서 죽은 전체 미군의 수는 40명이다. 그러나 이중에서 '단지 8명이 적군의 공격에 의한 희생자이며, 그 외의 대부분은 다른 추락이나 충돌, 사고에 의한 것이다'(가디언, 2002.3.30).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의 전쟁은 지지자들에게는 '적확한' 폭력(targeted violence)'으로 보였고, 반대자들에게는 '무차별적' 살육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양자가 주장하는 논점은 너무나도 단순하다. 분명하게도 폭격은 매우 성공적으로 적확하였다. 걸프전과 (덜 두르러지지만) 코소보에서 살해된 적 전투원의 수는 그와 유사한 원인에 따라 살해된 민간인의 수에 비해 훨씬 더 많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살해된 민간인의 절대 수치는, 그 이전 두 전쟁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역사적인 전쟁(즉 베트남전쟁과 한국전쟁, 그리고 세계대전)과 비교할 때 매우 적다. 이 정도라면, '무차별적인' 민간인 살해에 대한 비난은 부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직접적인 표적이 되지는 않았지만 살해된 모든 사례는 차별적인 공격의 분명한 한계를 보여준다. 강력한 장거리 무기를 사용한다면, 악명 높게도 '부차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부르는 이러한 종류의 살인이 완전히 회피될 수 없으며, 역사적 패턴에 비할 때 그 규모가 작아졌을지라도 고유하게도 불안한 것이다. 하지만, <표-1>의 자료는 매우 다른 전망을 제시한다. 코네타가 설명한 것처럼, 코소보에 비해 아프간 전쟁에서의 직접적인 민간인 사상자의 증가는 단지 아프간 전쟁의 특유한 군사적 목적과 수단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다. 세 개의 전쟁을 가로지르는 일반적인 패턴은 매우 흥미롭다. 이중에서 걸프전에서 서방 군대의 사상자가 비교적 매우 적다는 점 다음으로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서방이 가장 최근의 두 전쟁에서 사상자 발생을 실제로 제거하도록 잘 관리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방 군대의 매우 적은 수의 사상자와 비교할 때, 직·간접적인 민간인 사상자의 수는 지역 동맹군과 (그 보다는 더 많은) 적 전투원 사상자 수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Ⅱ. 위험-전가 군사주의: 서구의 새로운 전쟁 방식 민간인 사상자는 으레 사고로 묘사되지만, 이런 결과가 우연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서구의 군사력이 세 가지 층위에서 정비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선택된 결과다: 전략, 군비개발 그리고 미디어 운용(management). 이러한 세 가지 요소의 결합은 서방 국가로 하여금 자국의 인명을 거의 희생하지 않고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베트남전 이후로 TV 화면에 비친, 인명에 대한 위험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 커다란 정치적 위기가 되어왔기 때문에, 이는 또한 서방국가가 정치적 비용(cost)의 현저한 감소 하에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으로서는, 아프가니스탄이 절대로 또다른 베트남이 되어서는 안됐고, 또는 20여년 전 같은 나라에서 소련이 경험했던 것을 반복해서도 안됐다. 미국의 전략가들은 걸프와 코소보에서 그것들[베트남전과 소련의 아프간 전쟁]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쟁 방식을 연습(practice)하면서 당연히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서구의 새로운 전쟁 방식의 한 본보기였다. 이러한 '새로운' 전쟁은 물론,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1920년대이래 영(英)-미(美)의 군사적 사고와 실행에 집중되어온 공군력에 대한 믿음을 다시 창안해 낸 것이다. 그 새로운 양식은 이전보다 훨씬 더 폭격 유인폭격기와 순항미사일 에 의존한다. 그런데 그것은 2차대전 및 베트남전 당시 발생한 적국 민간인의 대규모·광범위한 대량살상을 방지하기 위해 컴퓨터 전자기기가 목표 조준에 기여한 '향상된 정밀성(소위 군사혁명(RMA)이라 불리는)'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실제적인 지상 공격을 수행하기 위한 지역적 동맹(군)을 점점 더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더 많은 수의) 간접적인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연히' 발생한 '적은' 피해 효과를 완화할 미디어 운용을 필요로 한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전쟁 방식은 무차별적인 민간인 조준과 엄청난 숫자의 비전투병 살상으로 드러났던 이전의 폭격이 근본적으로 타락할 것이라는 생각을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전쟁 방식은 특히 민간인에게 곱절의 위험을 전가함으로써, 새로운 모순을 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위에서 논증한 '죽음의 분배'로 귀결된다. 서방 군인들과 거리가 먼, 포괄적인 위험의 전가는 새로운 전쟁 방식의 주요한 목표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목적의 중요성은 새로운 전투(fighting) 방식이 미디어와 여론의 새로운 조작 방식과 얼마나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지, 그리고 서구 사회에서 전쟁의 합법성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와 얼마나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전쟁 방식을 단지 위험-전가 전쟁이 아니라 '위험-전가 군사주의'라 부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군사주의의 다섯 가지 주요 요소를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1. 적군의 사살 (군사적 행위의 직접적 결과로서) 사살된다는 것의 제1의 위험은 실제로 민간인보다는 적의 군사력에 해당된다. 이는 걸프전에서 정확히 사실이었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거의 확실히 그랬다. 역사적 의미에서 볼 때, 이는 적국의 민간인으로부터 적국의 민간인으로서 적국의 군인에게 되돌려진 위험의 전가이고, 따라서 최소한 서구의 군사행동에 있어서 이는 민간인 희생을 광범위하게 초래했던 장기 20세기의 경향을 뒤집는 것으로 보이게끔 한다. 이는 확실히 전쟁의 합법성을 주장할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 지역의 동맹군이 지상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받아들이다 지상전의 위험은, 서구와 미국 측에서 볼 때, 어디에서든 가능하기만 하다면 (분쟁 지역에 위치한) 지역 동맹군들에게 이전된다. 서구의 공군력과 지역에 존재하는 지상군(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군, 코소보해방군, 북부동맹/연합전선) 사이의 상호의존성이 점증함에 따라 서방 국가는 전투 희생자의 상당 부분을 그들에게 전가할 수 있다. (이러한 기미는 걸프전 당시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다: 쿠웨이트와 사우디 군이 이런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내 반정부 집단인 시아파와 쿠르드족은 미국에 의해, 그 전쟁에서 결정적인 실수로, 버려지고 말았다.) 3. 소규모의 '우연적인' 민간인 학살 소규모 민간인 학살의 반복적인 위험은 서방이 자신의 전쟁을 수행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암묵적인 특징이다. 소규모 학살은 그것들이 특별히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우연적'이다. 그러나 이는 전쟁에 대한 위험 분석 과정에서 동시에 계획된 것이다. 각각의 서방의 전쟁들은, 가장 일반적으로는 '한 움큼의 사람들', 하지만 많은 경우에 한번에 50-100명의 민간인이 희생자가 속출하는 가장 큰 단일 사건은 1991년 바그다드에 위치한 아미리아 수용소에 폭격이 가해진 것이었는데, 여기서 400여명이 사망했다 수많은 대량학살로 기록되어 왔다. 서구의 군사계획입안자들은 대량살상의 위험을 인지하고 깨닫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방 조종사에 제공된 무기는 대량학살이라는 결론을 완벽히 예상가능케 한다. 고공 폭격에 대한 믿음은 공군의 안전을 보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각각의 군사행동마다 수백 수천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목표조준의 실수'를 야기한다. 이런 맥락에서 직접적인 사망의 위험이 민간인에게 전가되는 것은 계획적일뿐더러 체계적이다. 4. 미디어 운용 어떤 규모든 간에 직접적인 민간인 살상은 [미디어로] 중개된 전쟁의 합법성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미디어 운용은 위험-전가 군사주의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중재와 감독은 총력전 이후 이렇게 정비된 [전쟁] 양식에서 본질적인 것이 되었으나, 그것들은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다. 서방 정부들은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TV 화면에 직접적인 피해 상황이 나오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걸프전 당시 아미리아 폭격이나 세르비아 열차 폭격 그리고 코소보에서 난민 호송함에 가해진 폭격과 같은 어마어마한 대량학살은 합법성을 위협하고 그것들의 효과를 경감시킬 정도로 강한 '혼란'에 빠트리기 쉽다. 이런 이유로, 서방 정부들은 위협적일 정도로 많은 수의 직접적 희생자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국 하원 의장 로빈 쿡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시작할 때, 민간인 사망자가 9·11 사망자 총수보다 더 적어야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코네타에 따르면, 현재 직접적인 민간인 사망자 수는, 비록 총 사망자수가 더 많을지라도, 서방 정치인들이 지지할만한 총계의 절반 이하로 추정되고 있다. 5. 간접적인 민간인 사상자 이는 당연히 간접적이고 덜 가시적인 사상자가 직접적인 희생자에 비해 더 잘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을 경감하기 위해 중대한 노력을 더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자연스레 귀결된다. 여타 가능한 사망원인 적의 정책, 내전, 기근 등 이 존재하는 지역에서는 책임을 강요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서방은 그 위험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코네타와 같은 전문가가 미국의 행위에 의해 초래된 사망자의 비율에 대해 왜곡된 가정을 함으로써 [사망자] 숫자를 간접적인 폭격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은, 서방 정치인들로서는 간접적인 사망이 야기하는 정치적 위험이 더 적을 것이라는 것을 지시한다. 물론 걸프전 이후 쿠르드 난민의 위험이 매우 높아지자, 서구의 지도자들은 간접적인 희생자조차 나쁜 결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그 결과 토니 블레어는 시작부터 '인도적' 차원이라는 말을 '테러리즘과의 전쟁'에 삽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서방 전략가들이 인간의 위험과 정치적 위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자각한다면 간접적인 피해를 감소시키기 위한 실제적 노력만큼 정치적 책임감을 많이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유엔 제재와 이라크 정권 정책의 결합을 통해, 장기간에 걸친 이라크 민중의 비참함(immiseration)에 대해 서구가 반응한 노력의 결과였다. Ⅲ. '정당한 전쟁' 이론과 위험-전가 군사주의 이러한 새로운 전쟁 방식의 합법성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우리가 유용하게 사용해 온 원칙적-도덕적 방법들은 정당한 전쟁의 전통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전통에 따르면, 주지하다시피, 목적과 수단이 모두 정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결코 내 어린 시절부터 미국이 참여해 온 어떤 총쏘는-전쟁(a shooting war)도 지지한 적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는 급진적 국제주의 학자인 리차드 포크(Richard Falk)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종말론적인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내가 이해하기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의 진정한 정당한 전쟁의 자격이 있다. 그러나 전쟁의 원인과 제한적 목표에 대한 합법성은 부적절한 수단과 과도한 목표의 불법성으로 인해 부정될 위험이 있다. 2차 세계대전과 이전의 정당한 전쟁들과는 달리, 이번 전쟁은 오로지 전쟁을 사용하기 위한 수단들에 대한 법적, 도덕적 제약을 지키고 제한적 목적에 충실할 때만 승리할 수 있다.' '테러리즘과의 전쟁'의 목적의 정당성(justice)은 이 글의 실제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목적과 수단의 관계가 필수적인 한, 포크가 전쟁을 변호하는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 '오사마 빈 라덴이 가지고 있는 극단적 정치적 전망은 "종말론적 테러리즘"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는 몇 가지 이유에서 잠재적 화해 혹은 타협의 틀거리 외곽에서 이러한 지속적인 위협을 제기한다: 그것의 대량 학살 의도는 미국과 유대인에 반대하여 인종적으로(generically) 기울게 된다; 그것이 선언한 [정치적] 목적(goal)은 민간인과 군사적 표적(target)을 구분하지 않고, 무제한적인 문명의 전쟁(civilizational war)―서구에 대항하는 이슬람―으로 벌어진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강력하고 충격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고, 그럴 의도가 있다는 점을 과시해 왔고 자신의 지지자들의 자살도 감수하는 헌신에 의지하여 자신의 파괴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전술적 정교함과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해왔다.' 내가 보기에 이 주장은 대부분 타당하다. 그러나 전쟁이 필요하다는 포크의 결론은 덜 확정적이다. 그는 수단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9·11 공격의 가해자들은 비폭력적 혹은 외교적 수단을 통해서 확실히 무력화 될 수는 없다; 군사적 행동을 포함하는 대응이 반복되는 위협을 줄이고, 징벌을 가하며, 국내외의 안보감(a sense of security)을 회복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가해자들이 비(非)-군사적 수단에 의해서 '확실히 무력화될 수 없다'는 점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군사적 수단을 통해서 그들을 확실히 무력화할 수 있다거나 혹은 그래 왔다는 주장 역시 확실하지 않다. 군사적 행동은 '안보 감을 회복'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안전을 보장할 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징벌을 하는 것'이 군사적 행동의 정당한 이유인가는 분명치 않다; 더구나 이것은 명백히 사법(司法)적 기능이다. 실제로, 문민적인 법적·행정적 기능들을 군사화하는 것의 위험은 '죄수처리'와 같은 사안에 대한 관심의 근거로서 널리 인식되어 왔다. 포크 스스로는 '불가피한 군사적 요소를 비군사적인 차원의 대응에 종속시키지 않는다면,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이 결국 패배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전쟁 그 자체는 수단, 즉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표현대로 '다른 수단들에 의한 정치적 관계의 연장이다'. 9·11의 테러리스트를 무력화시키는 '확실한' 수단이 없었다 하더라도, 전쟁은 가능한 수단들 중에서 당연히 하나의 불확정적인 선택이었다. 뉴욕과 워싱턴의 대량학살 이후 어떤 미국 대통령이라도 전쟁을 선택하지 않으리라 상상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법을 초과하여 즉각적으로 전쟁을 선택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빈 라덴 '현상수배: 사살 혹은 생포'와 같은 그의 거친 서부시대적 수사(修辭)는 사법적으로 대응하고자 노력하는 것과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선택을 한 종류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그런 끔찍한 사건을 접했을 때, 다른 서구 정부가 같은 방식으로 행동했을 것이라 상상하기는 어렵다; 러시아, 중국, 혹은 인도가 그렇게 했을 지는 모르지만. 그러므로, 미국의 대응에 전통적이고 국제적으로 합법화될 수 있는 강력한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전쟁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마이클 하워드(Michael Howard)가 주장했듯이, 국가가 아니라 테러리스트 조직이 끔찍한 대량학살을 저지른 것이 명백하다 할지라도, 본래의 공격의 특성을 살펴보면, 정치적, 법적 대응이 타당한 대안이었다. 예를 들어, 1995년 스레브레니카(Srebrenica) 대량학살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학살 가해자들은 '前유고슬라비아를 위한 국제형사법정(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Former Yugoslavia)'에 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 경우가 전쟁의 선택을 정당화하는 것과 전쟁의 과정에서 채택된 수단들을 정당화하는 것 사이의 연계성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포크가 언급했듯이, '그러나 전쟁의 원인과 제한적 목표에 대한 정당성은 부적절한 수단과 과도한 목표의 불법성으로 인해 부정될 위험이 있다'. 우리가 전쟁의 대안이 있다고 여긴다면, 수단의 정당성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위험-전가 군사주의를 정당한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해보자. 마이클 왈저(Michael Walzer)가 지적한 대로, 적군의 괴멸이 합법화되는 것은 자명하다: '나폴레옹이 언젠가 말한 것처럼 "군인들은 언젠가 죽게 되어 있다. 이것이 전쟁이 지옥인 이유이다."' 초점을 보다 예리하게 맞춘다면 새로운 전쟁 방식 역시 적군을 죽인다는 점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론, 살상이 적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서 불필요한 것으로 보여진다면, 그것의 적법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행사되는 폭력은 단지 자기편의 목표에 비례할 뿐 아니라, 최초에 가해진 공격의 참혹함에 비례하기도 한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마도 탈레반과 알카에다 전사들에 대한 집중폭격은 이러한 계산서에 적합했을 것이다. 그리고 '데이지-커터' 폭탄과 같은 가공할만한 무기의 사용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폭격이 작동해서' 이러한 적들을 패배시켰다면, 이는 단지 그들을 학살함으로써 그렇게 했을 뿐이다. 이런 희생자들에 대해 고려하는 것은 정당하다. 참호 속에 학살자들이 숨어 있는 동안, 우리는 군인들의 생명에 보다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을 배워 왔다. 한편에서 자국 군인들의 위험을 거의 '0'으로 만들면서, 운 나쁜 군인들을 대공업적으로 살해(industrial killing)하는 것은 도덕적인가? 걸프전의 말미에 징병된 이라크인들을 사막에서 (말 그대로)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장면은 이런 주제의 표상이다. 확실히 우리가 이러한 수단의 불평등에 대해 심사숙고하려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테러리스트들이 민간항공기를 이용하여 무기력한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학살을 자행하는 것을 상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미국 자신의 살인이 거의 일방적인 것이라면, 탈레반 군사들이 총을 가지고 정치적으로 알카에다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이에 비해 좀더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 적군을 취급하는 것을 둘러싸고 위기-전가 전쟁이 정당한 전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면, 민간인에 대한 고려라는 주제가 [정당한 전쟁의] 전통에 있어서 핵심에 놓여 있다. 왈저는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한다. '우리가 [전쟁이] 지옥이라는 관점을 가진다해도, 우리는 여전히 [군인 이외에는]누구도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구별은 전쟁의 기본적인 규칙이다.' 왈저는 전투원의 범위를, 물론 그들이 실제로 무기를 만들기는 하지만 여전히 민간인인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확장하는 것을 찬성한다. 그는 또한 '타당한 구별은…매우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구별은 진보적으로 보자면 세밀하지 못하게 이루어져왔음이 분명하다.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전략입안자들은 독일과 일본의 도시를 폭격하여 무차별적으로 엄청난 숫자의 민간인을 살상할 때까지 진군했다. 이러한 진군의 종착점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자폭탄의 투하였으며, [전투원과 민간인의] 구별선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후 4반세기 동안, 핵무기와 핵전략의 발전이 모든 국가들의 '상호' 대량학살에 다다를 정도의 수준에 달했다. 이러한 가공할만한 전쟁의 타락은 지구의 모든 생명은 아닐지라도 인류 사회의 완전한 절멸을 가져 올 수도 있었다. 이런 발전에 있어서, 가장 발전되고 문명화된 국가에 의해 전쟁이 수행되고 준비되었으며, 이는 전쟁과 무차별한 학살 사이의 구별이 무효화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쟁의 타락과 의도된 집단학살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많은 측면에서 유사했다. 이러한 타락을 우연적인 지나침이라는 하나의 에피소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20세기의 모든 세 가지 주요한 분쟁(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 과정에서 모든 측면에서 행해진 것이며, 뿌리깊은 역사적 경향의 산물이었다. 기술과 사회적 조직을 동반한 현대 산업 자본주의는 전쟁을 실행함에 있어 대량학살의 동력을 불어넣었다. 국가의 군대는 경제적 힘과 사회적 동원에 의존해야 했다. 이에 따라 필연적으로, 적대 국가의 경제와 사회는 또한 '적'이 되었고, 기술은 폭탄과 미사일 등 대규모 공격 수단을 제공했다. 언제나 국가에 대한 전쟁의 연장(延長)으로서 민간인에 대한 전쟁(나는 이것을 '타락한 전쟁'이라 부른다)과 그 자체로서의 민간인에 대한 전쟁(예를 들면, 집단학살) 사이의 차이는 존재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집단학살은 보통 타락한 전쟁의 맥락으로 대체되었다. 범주상으로는 구별되었지만, 두 현상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절멸주의적'인 동력을 가지고 있는 이러한 전쟁의 구조적 변형의 맥락에서, 정당한 전쟁을 초현실적인 도덕적 조건 속에서 사고하는 것을 제외하면, '전략'의 개선을 추구하기란 어려웠다. 전쟁이 언제나, 대규모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제안되었던 도덕적·법적 경계를 뛰어 넘어 왔다는 점에서, 이러한 경계 자체가 의문시되는 것은 당연했다. 군사적 행위가 일반적으로 '전쟁이라는 것을 대량학살로 만드는' 경향이 있었고, 그렇기에 전쟁 그 자체가 문제시되었다. 몇몇은 특히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와 재래식 병력의 형태로 복귀하는 것 사이에서 선을 그으려 노력했고, 이에 따라 '핵 평화주의'를 받아 들였다. 나는 이러한 시도가 부적절하다고 주장해왔다: 타락의 경향은 무기체계의 특정한 타입만이 아니라 현대전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내가 '역사적 평화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적절한 대응이었는데, 이는 전쟁은 타락하는 역사적 경향이 있으므로 정책적으로 불법화해야 한다는 믿음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나는 주요 국가들간의 전쟁이 자멸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을 뿐 아니라, '혁명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군사력이 과잉되는 경향이 이와 평행하여 존재함을 지적했다. 후자는 '군사화 된 혁명'이 난관에 처한 경우에 출현하는데, 중국이나 또 다른 곳에서 그랬듯이, 국가 간 전쟁만큼이나 기형적이고 집단학살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아 왔다. 서방 국가와 관련된 위협적이고 역사적인 전쟁의 과잉은 베트남 전쟁 이후에 자신감을 상실하고 미국의 세계권력의 쇠퇴가 나타나게 된 것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는 정부와 군대가 제도적 군사력을 개량하는데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전쟁을 정책적 수단으로 계속해서 여겨왔기 때문에, 도덕 철학자들은 그것의 적절한 의미를 둘러싼 논쟁을 재정의하도록 내몰렸다. 이에 따라 베트남전쟁 이후 정당한 전쟁들에 대한 왈저의 고전적인 텍스트는, 오늘날 새로운 전쟁에 대한 논쟁의 토대를 제공한다. 왈저는 '이중 효과'의 원칙이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는 것과 같은, '사악한 결과를 가져올 행동을 하는 것을 허용하는' 하나의 방식을 제공한다고 언급했다. '선한 행위는 악효과를 상쇄할 정도로 충분하게 선해야 한다; 그것은 비례법칙 아래서 합법화 될 수 있다'는 것이 핵심 조건이다. 설령 미국이 이에 사과했고 여전히 사과를 계속 한다고 해도 히로시마에 대한 원자 폭탄의 투하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코소보 그리고 이라크에서의 민간인의 '우연적'인 살상에 관해서는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 직접적인 살상자의 숫자가 매우 적어 상상 가능한 악효과를 넘어선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왈저는 이런 사례에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는 이론적 설명을 완성했다. 그는 '이중적 효과는 단지 그것이 이중적 의향의 결과물일 경우에만 옹호될 수 있다: 첫째, "선한" 행위가 있어야 하며; 둘째, 예견 가능한 악한 효과를 가능한 한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자는 정확히 서방측이 현재 자신의 모든 군사행동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인데, '보다 정밀한' 폭격 이전의 시대에 비해 훨씬 그럴 듯 하다. 그러나 왈저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문제가 있다. '단지 고의로 민간인을 살상하지 않는 것은 너무 쉽다. (…) 우리가 그런 사례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민간인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긍정적인 행위를 했냐는 어떤 징표다. 민간인은 더 많은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민간인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군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런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인정된다.' 위험-전가 전쟁에서는, 이것은 어떤 대가를 치루고서라도 반드시 회피하려고 하는 바로 그것이다. 폭격이 군사적, 혹은 비군사적 수단 등 다른 가능한 수단과 비교해서 민간인에 대한 위험을 증대시킨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폭격은 이루어진다. 고공에서의 파괴행위는 태생적으로 무차별적인 특성을 지닌다; 적어도 지상에서의 군사행동의 몇몇 형태들은, 특히 무장한 치안유지군의 전선이 그러한데, 보다 분별력이 있으며 상당한 정도로 민간인 희생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놀랍게도, 왈저는 이런 상황에서 서방 전략가들을 위한 방도를 제시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요구하는 위험에 제한은 있다. 결국 의도하지 않은 죽음과 적법한 군사행위가 있으며, 민간인을 공격하는 것을 반대하는 절대적인 법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민간인을 위험에 빠뜨린다; 이것은 [전쟁의] 지옥 같은 측면의 또 다른 측면이다. 우리는 군인들에게 단지 그들이 가하는 위험을 최소화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이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라며 그는 주장한다; '민간인은 "적절한 보살핌"을 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최선이다.' 서방 군인들 대다수가 그들 자신의 목숨이 위협을 받는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 전쟁 상황에서는 이러한 회피 조항은 매우 졸속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아프가니스탄의 예처럼 전쟁 상황에서 이러한 조항이 유지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위험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한 명의 미국군이 적에 의해 사망한 반면, 천 명이 넘는 아프가니스탄 민간인들이 (예상컨대) 미군의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 민간인은 미국 군인에 비해 훨씬 적게 배려되었을 뿐 아니라, 미군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민간인에 대한 배려는 침식되었다. 민간인이 처한 위험은 실제로 가능한 한 정도로 감소되지 않았고, 단지 세계적 미디어에 비판적으로 방송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정도의 수준에서 위험이 감소되었을 뿐이다. 민간인의 위험은, 왈저가 상상했던 것처럼, 군인의 위험이 아니라, 미디어에 비판적으로 방송되는 것으로 인한 정치적 위험에 비례했다. 이에 따라 우리가 군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위험의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아프가니스탄, 코소보, 걸프 전쟁에서 서방 군대는 이러한 한계의 근처도 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테러와의 전쟁'의 목표가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방식은 충분히 정당하지 못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내가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기 위한 근거로 왈저의 사례를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내 주장이 왈저의 정당한 전쟁 전통의 확장을 입증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것은 포크가 취한 노선인데,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정당한 전쟁"이라는 교리는 가장 유연하고 적절한 규범틀을 제공한다. 이것은 모든 위대한 세계적 종교의 윤리에 근거를 두고 있고, 군사력의 사용을 결정하는 현대 국제법에 중요한 근거를 두고 있으며, 전쟁의 원인과 수단, 종결에 대해 관심의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도 그럴듯하게 주장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전투병에 치명적인 위험이 가해지는 전쟁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으며, 그런 위험은 대개 상당수 무고한 민간인들에 가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쟁은 그들이 '이중 효과'와 '비례성'과 같은 사고를 모순적인 지점으로까지 확장하는 유연성을 필요로 한다. 이는 더 이상 전쟁의 합법성을 평가하는 가장 적절한 틀이 될 수 없을 것이다. Ⅳ. 전쟁의 타락과 역사적 평화주의의 사례 나는 포크와 같은 정당한 전쟁 전통에 대한 일관된 옹호자가 이러한 '부조리에 빠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복권하려고 애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핵심을 놓칠 우려가 있다. 서방은 민간인보다는 적의 병사를 직접 죽이는 방식으로 무력을 행사한다; 서방은 실수가 아닌 다음에야 일반적으로 민간인을 조준하지 않는다; 서방의 목표는 '부차적인 피해'와 '우연한' 대량학살을 감소시키는 것이다. 여전히 민간인들이 살해되지만, 역사적으로, 특히 20세기 중반 동안에는 사상자 수가 매우 적었다. 따라서 서구의 새로운 전쟁 방식은, 우리가 다소간의 지나침에 대해 문제삼을지라도, 언뜻 보기에 정당한 전쟁에 대한 역사적 요구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내 논증이 받아들여졌다면, 여기에는 여전히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는 셈이다. 한 명의 미국인에 비해 1000명이 넘는 무고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이 살해된 것 사이의 불균형은 그 모든 것을 말해준다. 우리가 만일 제안된 정당화(justification)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가 상이한 기준들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나는 이 논문의 다른 부분에서 이것들이 과연 무엇일까, 그것들은 어디에서 연유했는가,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나아가려 하는가 등을 탐구하고자 한다. 대안적 기준들 중에서 분명한 하나의 원천은 인권에 대한 정치적 윤리다. 전쟁은 사회 생활에서 어디서나 적용되는 규범으로부터 도출된 서구의 사고 방식 안에서 오랫동안 비호 받아왔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이전의 전쟁에게는 면제되었던 기준들을 전쟁에 적용시키려는 중이다. '너는 살인하지 말지어다'라는 경구는 조금씩 조금씩 예외가 허용되면서 일반적인 규범으로서 강화되어 왔다; 심지어 많은 서방 국가들은 사형제도를 강제하는 것으로 경도된다. 그리고 전쟁은 아직도 거대한 예외로 남아있다. 지금 그 예외가 도전받고 있다고, 살인을 규제하는 강력한 규범이 적법하고 조직된 살인 그 자체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를 시사할만한 몇 가지 증거가 확실히 존재한다. 서방 군인들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는 역사적 변화 그 자체 내에 존재한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미국 여군(GIs)의 죽음에 대한 대중들의 항의를 반영한 것이며, 군인들의 권리에 대한 개념을 받아들여 '총알받이(cannon fodder)'라는 사고를 반성한 것이다. 군사 사회학이 보여 준대로, (직업적) 병역은 현재 '직업' 이상으로 생각된다; 확실히, 한편에서는 상이한 위험을 수반하지만 한편에서는 여전히 위험을 경감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이는 영웅적 전사의 통념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일이 잘못 돌아가게 되면, 장교들과 정부는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걸프전 동안, 9명의 영국군이 미군 전투기의 오폭에 의해 전사했다: 이 전쟁 기간 동안 단일 사고로는 영국군의 가장 큰 인명 손실이었다. 그 군인의 가족들은 회피할 수도 있었던 그들 아들들의 죽음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묻기 위해 영국 국방부를 찾아가서 미국 조종사를 증인으로 출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공적인 논쟁의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그 이전의 전쟁들에서는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다만 대규모의 인명 손실이 매우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군인들의 죽음에 대해 이와 유사한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사망자 수가 작은 수치로 경감된다면, 부분적으로는 희생자의 [발생으로 야기되는] 정치적 효과에 대해 우려한 결과, 개인의 생명이 중요하게 다뤄질 수 있을 것이다. 인권의 시대에, 이러한 개인에 대한 관심은 원칙적으로는 개별 시민들에게까지 확장되며, 아마도 적의 병사들까지 적용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불법적인 살인에 대한 관심은 현대 전쟁의 합법성에까지 확대되어 왔다: 코소보에서처럼 인권유린을 중단하도록 그것들이 실제로 선포되지 않은 곳에서, 또 911 이후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살인범을 처벌하기 위해 그것들이 고안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전쟁들을 따라 법적 소송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前유고슬라비아를 위한 국제형사법정(ICTY)'의 활동은 코소보 전쟁 기간동안 단계적으로 증가하였고, 최소한 알 카에다 포로 몇몇은 범죄 소송에 회부될 것이다(그리고 관타나모 만의 죄수들을 법정에서 떨어뜨려 놓기 위한 미국의 시도는 명백한 모순과 곤란에 처하게 되었다). 놀랄만한 일도 아닌 것이, ICTY는 세르비아와 코소보에서 발생한 '우연적인' 민간인 대량학살에 대해 나토 자체가 소송에 회부되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ICTY 위원회 보고서는 그 전쟁에서 나토가 저지른 행위를 정식으로 조사할 어떠한 기초도 없다는 사례를 남겼다. 전쟁에 관한 현재의 법조항에 따르면, 그것이 올바른 결과든 아니든 여기서 내 관심사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최소한 원칙적으로는 나토가 민간인 희생에 대해 책임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의를 추구했던 것은 모든 개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는 개념과 같은 법적 규범이 아니었다: 중국 대사관에서 세 명이 죽었고, 세르비아 방송국에서 열 여섯명이 죽었고, 철도 교량이 폭파되었을 때 70명이 죽었다. 그리고 등등. 희생자 수로 말하자면 교통 사고와 같은 작은 사고들이 세계의 가장 강력한 국가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책임을 추궁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할 수도 있다. 미국이 국제형사재판소(ICC, International Crimainal Court)의 설립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전쟁에 대한 법안들은 형사 재판소에서 이런 방식으로 적용된 경우가 없었다. 일반적 경향으로부터 법적 제재를 강화하고, 개인의 권리에 대한 자각을 향상시키고, 광범한 소송으로 흐름을 몰아가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미국 사회로부터 상당한 추동력을 이끌어내는 경향을 띤다. 그러나 범죄화(criminalization)는 다른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규범으로부터 실제로도 법률상으로도 더 이상 배제되지 않는 여타의 인간 활동처럼 전쟁을 취급해야 한다. 전쟁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살인하지 말지어다'라는 경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확실히 전쟁을 실행하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전쟁 수단이 일반적으로 가는 참빗(toothcomb)에서 엄선되었다면 법정에서, 신문사에서 그리고 정말로 대학에서, 전쟁의 합법성은 일반적으로 철저히 침식될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종류의 전쟁의 탈-합법화에 문호가 전면적으로 개방되었다는 결론에 반대하기는 어렵다. 서방 정부들이 '테러와의 전쟁' 개시 국면과 같은 특수한 경우에 미디어와 공공 여론을 성공적으로 동원한 것에 개의치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서구의 '새로운 전쟁' 방식은 조만간 새롭게 전쟁을 합법화하는 것에 도전하게 될, '새로운 비판'에 취약해지기 쉽다. 위험의 전가에 실패한다면 도리어 서방이 위험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 공군력이 적군을 괴멸시키기에 불충분하다면, 지역 동맹군이 지상 작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또는 그들이 너무 많은 잔혹 행위를 저지른다면 , 또는 변덕스러운 미디어가 그들의 주인-될 이들로부터 달아난다면, 새로운 방식의 전쟁의 위험은 서구로 되돌아올 것이다. 1960년대,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에 전쟁은 대량 민간인 희생을 양산하는 대규모의 '[핵을 사용하지 않는] 재래식' 전쟁 및 핵전쟁과 동시에 베트남전과 같은 '제한된' 전쟁 경향에 의해 근본적으로 절충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90년대 이후, 서방 정부들과 군대는 이러한 문제를 극복해낸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양식을 발전시켜왔다. 내가 본 논문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이에 따라 이러한 새로운 양식이 전쟁을 비판하기 위한 새로운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타락한 전쟁의 유산은 여전히 위험의 불균형으로 정의될 수 있다: 전쟁의 합법성은 심지어 가장 작은 살인의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도전받을 수 있다. 역사적 평화주의는, 전쟁의 재창조에 의해 도전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합법적 살인에 대한 검사가 점점 더 엄격해지는 것처럼 재혁신되고 있다.PSSP
미국식 생산 혹은 미국식 산업의 역사 : 미국 과학기술과 산업발전 역사 2> 전쟁기술과 미국과학 김 준 범 | 편집부장 이번에 다룰 내용은 1,2차 세계 대전과 미국 과학기술의 변화이다. 이전시기 미국에서 확립된 기술-생산 체계로서 대량생산 체계에 이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중반에 걸쳐 미국에서 일어난 과학-기술의 변화는 매우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그것은 현대 산업의 골간을 이루는 과학과 기술의 관계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기술이 대학과 기업, 혹은 정부 연구소를 매개로 연결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몇몇 천재들의 손을 떠나 대규모 프로젝트로서 추진되는 현재의 일반적인 양태가 이시기에 이르러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1. 19세기 미국의 상황 19세기 이전 미국 과학은 유럽의 국가들(영국, 프랑스, 독일)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물론 미국에도 피뢰침으로 유명한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과학자는 있었다. 하지만 프랭클린의 연구가 인정되고 그의 주된 활동무대가 된 곳은 미국이 아닌 유럽이었다. 또 남북전쟁(1861-65) 이전까지 미국의 대학은 전문지식 양성보다는 도덕, 고전, 인문 등이 주를 이룬 교육중심적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미국과학이 전환점을 맞게된 것은 남북전쟁 이후였다. 전쟁이후 미국의 산업구조가 공업으로 옮겨지게 되면서 전문지식중심의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고 제기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D.C Gilman이 초대 총장으로 있었던 Johns Hopkins 대학이 설립되었다. Johns Hopkins대는 독일의 연구중심대학의 영향을 받아 학부과정을 생략한 과학연구 중심의 대학원중심대학이었다. 엄격한 교수 임용기준을 적용하고 독일식의 세미나 제도와 실험실 제도 등을 도입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교육을 진행했다. Johns Hopkins대학은 1920년까지 1천여 명의 박사를 배출했고 이들은 여러 대학의 교수로 진출하게 된다. Johns Hopkins대의 성공의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유사한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 미국과학의 수준은 유럽에 비해서는 여전히 모자랐다. A.A. Michelson, J Gibbs등 유명한 과학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여전히 유럽이었다. 다만 지질학 분야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된 것은 당시 순수과학은 과학자들의 취미활동으로 여겨져 의회의 지원이 축소된 반면 연방정부내 지질 조사국등의 실용 기술을 요구하는 기구들이 생겨난 결과이다. 앞서 설립된 전문교육기관을 통해 배출된 대학생들은 이런 정부기구에 들어가게 된다. 2. 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미국과학의 변화 20세기 초반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연방정부가 강화되고 각종 전문직종들과 전문인 연합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는 연방정부의 과학활동 지원에 따른 것이었다. 공중보건국, 산림국, 표준국등에 과학교육을 받은 대학생들이 취업을 했다. 또한 국가가 운영하는 과학기구들이 성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실용학문에 대한 투자가 국가기구를 넘어선 기업체에서도 이루어지게 된다.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은 대학에서 전문기술교육을 위한 기초과학교육의 필요성으로 인해 확대되었다. 또한 G.E, Bell Lab, AT&T등이 만든 기업체 연구소에서는 순수과학연구자들도 고용하여 기술개발뿐만 아니라 순수연구도 수행했다. 이러한 지원을 통해 1910년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연구성과들이 나오게 된다. 특히 당시 첨단 분야였던 원자의 구조들을 이해하고 논의할 수 있는 젊은 과학자들이 미국의 교육시스템에서 등장했다는 것은 미국 과학의 수준이 이전시기와는 다른 단계에 올라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에서 기초과학과 실용기술과의 관계이다. 기초과학과 실용기술이 독립적으로 형성되었던 유럽의 전통과는 달리 미국에서는 전문교육기관인 대학을 매개로 긴밀한 연계를 맺게 된다. 또한 기업체연구소에서의 합동연구와 같은 기풍은 이후 미국과학의 전화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이는 이후 미국에서 연이어 추진된 대규모 프로젝트 성공의 주된 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1차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전쟁무기연구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는 당시의 전쟁이 19세기를 통해 이루어진 공업의 발달에 기반을 둔 전쟁무기의 혁신적인 발전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차 대전 이전에도 과학자문위원회(National Adversary Committee)을 통해 전쟁연구를 수행했으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민간기구인 National Research Council(이하 N.R.C)에서 본격적 연구를 수행하게 된다. N.R.C는 당시 유명한 천체학자였던 G.F Hale에 의해 제안되었는데 과학자와 기술자들의 합동연구를 통해 잠수함 탐지기술과 방독면 등 전쟁에 유용한 여러 가지 기술들을 개발하였다. 1차 대전 중 연구는 과학자와 기술자의 조직적 연구에 의해 수행되었고 이는 이후 과학자, 과학연구 그리고 국가 간의 관계를 변모시키게된다. 이시기 과학연구의 특징은 집단연구와 공동연구가 일반화되고 국가에 의해 연구과제가 제시되면서 과학연구가 과학자의 실험실을 벗어나 '결과'를 중심으로 효율적으로 조직된 것이다. 또한 정부에 의한 연구과제의 선정은 무한정의 예산을 과학연구에 투자하게 하였다. 이 결과 과학자는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고 Hale, Millikan, W. Noyes 등의 과학자들은 연구활동 뿐만 아니라 정치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1차 대전 이후 정부는 당시 과학자문위원회의 의장이었던 Karl Compton(루즈벨트 정부 과학기술담당)이 주장한 과학연구에 대한 연방정부의 예산투자를 연방정부가 거절함으로써 과학자 집단은 연구의 든든한 후원자를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왜냐하면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이미 미국과학은 거대 프로젝트라는 군침 도는 요리를 맛본 후였기 때문이다. 정계와 재계에 두루 안면이 있던 Hale등은 과학의 새로운 후원대상으로써 기업체를 찾게 된다. 1차 대전동안의 과학연구 성과에 고무된 기업체들은 이런 과학자들의 요구를 받아 안아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추진했다. 하지만 대공황을 거치면서 기업체의 후원이 줄어들자 미국 과학자 집단은 정부와 재단 그리고 기업을 세 축으로 하는 보다 안정된 후원그룹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과 학제적인 연구와 신분야에 대한 집중지원을 골간으로 하는 자구책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대공황을 통해 미국 과학자 집단이 깨달은 것은 기업의 지원은 경기에 따라 언제든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보다 안정적인 후원은 만약 한시적인 기구가 아니라면 정부에 의해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1차 대전이 보여주었던 것은 전쟁기술의 경우 정부는 언제나 예산을 투자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바르가 부시(V.Bush)가 제창했던 국방연구의 필요성은 사실상 안정된 후원을 확보하기 위한 과학자 집단에게는 당연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3. 2차 대전, 과학과 정부의 새로운 관계 형성 바르가 부시는 국방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루즈벨트에게 국방연구위원회의 설립을 요구했다. 루즈벨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막대한 예산이 국방연구에 투입되었다. 이미 1차 대전부터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산업수준이 응집된 중공업 무기들의 전쟁에서의 전투력이 이러한 투자의 배경이 되었다. 2차 대전 이전 독일과 유럽에서는 기병과 보병 중심의 전략대신 장갑차와 탱크 그리고 전투기들을 동원한 대규모 화력전의 전략이 완성되어가고 있었고 미국 역시 그러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당시 물론 미국은 독일의 집중적인 전력증강이 본토에 미칠 것을 우려하지는 않았지만 신무기 경쟁에 뒤쳐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하기에 국방연구 위원회는 레이더 연구실을 설치하고 2000명의 인원과 매달 천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는 연구를 진행한다. 이 결과 레이더 방해기술과 고체연료 미사일등 괄목할 성과를 얻어냈다. 2차 대전이 본격화되면서 신무기 개발과 생산은 공황기 침체되었던 산업을 재활시키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당시 전쟁 무기들은 집중된 산업을 배경으로 했기 때문에 생산이 다시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은 당연했다. 2차 대전 이후 과학자 집단은 정부라는 결코 돈이 마르지 않는 막대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4. 핵 개발과 미국과학 핵개발은 2차 대전 중 일어난 미국과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성과였다. 핵개발은 그 자체로서 미국과학의 이전 성과들을 총합한 것임과 동시에 군산복합체라는 특수한 형태의 미국식 생산 체계 확립의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원자폭탄의 개발은 아인슈타인의 저 유명한 상대성이론 E= m c2 에 근거했다. 즉 질량이 감소하면 그만큼의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원자폭탄은 이러한 특정 원소의 질량 변화 즉 핵분열을 이용한다. 최초의 핵분열 발견은 1938년 오토 한(Otto Hann), 마이트너(L. Meitner), 슈트라스만(F. Strasmann)으로 구성된 베를린 팀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다. 특히 우라늄 235의 분열은 연쇄반응으로 인해 핵분열시 질량 손실이 거대한 양의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에 대해 최초의 핵분열 발견자중 하나였던 마이트너는 무기화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이를 히틀러가 개발할 것을 우려했다. 헝가리 출신의 질라르(L. Szilard)를 비롯한 일단의 과학자들은 이에 대비하기 위해 학술지에 연구성과를 발표하지 않을 것을 결의하고 아인슈타인에게 미국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건의할 것을 요구했다. 아인슈타인의 제안에 따라 루즈벨트 행정부는 1939년 우라늄위원회를 건설한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우라늄위원회가 실제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핵무기 개발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40년 바르가 부시가 국방연구위원회를 만들면서 우라늄위원회는 국방연구위원회 산하로 흡수되었다. 한편 독일에서도 정부에 원자폭탄 개발을 요구하는 과학자들이 있었으나 히틀러 정부는 이미 재래무기의 효율성을 신뢰하고 있었고 과학자들도 원자폭탄의 실현가능성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에서의 원자폭탄 개발은 종전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원자폭탄을 구현하는데 걸리는 문제는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우라늄235는 자연상태에서 우라늄238에 섞여 극히 미미한 양만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당시 원자폭탄의 개발을 회의적으로까지 생각하게 하는 주요한 이유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영국의 성과에 의해서다. 1939년에서 1940년 사이 영국은 모드(Maud)위원회를 발족시키고 원자탄 개발에 착수한다. 영국의 두 천재적인 과학자 프리시(O. Frisch)와 파이얼스 (R. Peierls)에 의해 당시 원자폭탄 개발의 가장 큰 장애였던 우라늄235의 추출이 가능해졌다. 게다가 지속되는 독일의 미사일 폭격에 의해 연구시설을 더 이상 확장할 수 없었던 영국은 미국에 기간의 연구성과들을 넘겨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이러한 영국의 성과에 힘입어 미국에서도 원자폭탄개발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로렌스(Lawrence)는 입자가속기(cyclotron)를 개발하여 입자가속을 통한 우라늄235와 우라늄 238의 분리를 실험하던 중 형성된 플루토늄239가 핵분열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과들에 고무되어 바르가 부시는 루즈벨트를 설득하여 맨하탄 프로젝트를 실시하게 한다. 1943년 경 연구개발 책임자로 임명된 오펜하이머(R. Oppenheimer)는 로스 알라모스의 과학자들의 도시를 건설하여 원자탄 개발을 현실화시켜낸다. 1944년 독일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어 보어(Bohr)와 질라르 등의 과학자들은 미국정부에 원자폭탄 개발 중단을 촉구하지만 이미 구르기 시작한 수레는 멈추지 않았다. 1945년 5월 18일 독일이 항복하자 원자폭탄개발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거세졌다. 하지만 이미 원자폭탄은 개발되어 있었다. 미국정부는 전쟁이후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소련에 대한 경고로 그리고 막대한 예산 지출에 대한 의회의 추궁을 의식해 결국 이미 승전이 결정된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차례로 지옥의 버섯구름을 피워냈다. 꼬마(Little Boy)와 뚱뚱보(Fat Man)로 각각 명명된 최초의 원자폭탄들은 미국 과학의 위력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었으며 비극의 시작이었다. 5. 결론 :: 미국과학과 전쟁기술 미국과학과 전쟁기술은 핵무기 개발이라는 매우 집중적이고 특별한 경험으로 대표된다. 독일과 영국 등의 노력에도 역사상 최초의 핵무기를 개발한 국가가 미국이었다는 것은 미국이 상당히 효율적인 연구 동원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전술했다시피 공동연구의 기풍이 강했던 미국적 체계에서 원자폭탄 개발이 제기한 숱한 문제들은 막대한 예산과 효율적인 연구를 통해 해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은 이후 미국과학을 막대한 예산 투입한 거대프로젝트 중심으로 변화시켰고 꿈과 같은 거대과학을 탄생시켰다. 또한 미국 과학자 집단의 독특한 성격-전문연구자이자 정계와 재계의 기획자-으로 인해 냉전시기 광적인 무기경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꾸준한 파생산업을 문어발처럼 거느리게 했다. 이는 지금 미국이 더 이상 적이 없는 상황에도 광적으로 무기개발에 열중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기관차처럼 전쟁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미국 뒤에 버티고 있는 것은 1,2차 대전 그리고 냉전이 만든 총동원체계의 떡고물이다. 과학자와 정치가 기업이 얽혀있는 이 총 동원체계야 말로 지금 미국을 지탱하는 힘이기 때문이다.PSSP
위의 자료는 print friendly format을 한글 파일로 편집한 것인데, 오늘 확인해보니 PDF 파일이 있더군요. 참고하십시오.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www.cfr.org/pdf/Korea_TF.pdf
5월 19일자로 보고된 미 외교관계협의회(CFR)의 "북한의 핵도전에 직면하 여(Meeting the North Korean Nuclear Challenge)"를 등록합니다. 제임스 레이니 등이 포함된 CFR 태스크-포스팀은 본문에서 △한미 관계에 있어 조화를 회복하고 △명확한 정책과 강한 동맹관계 수립을 선언하고 △ 북한과 진지하고 조속하고 직접적인 협상을 약속하고 △북한의 의도를 검 증하기 위해 단기 정책 제안을 개발하고 △북한을 압박하기 위해 중국과 의 노력을 배가하고 △우연한 사고, 즉 협상이 실패하고 북한이 연료를 다 시 가공하고 핵무기 실험을 할 경우를 대비하여 미국은 더욱 의미심장한 제재를 가하고 핵 및 여타의 불법-치명적 무기의 수출을 차단하기 위해 봉 쇄를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본 보고서의 발문 헤드라인이 "북한의 핵프로그램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미국은 진정한 대화를 약속해야 하고, 미국-남한의 동맹관계를 회복해야 하고, 중국으로 하여금 더 많은 역할을 수행토록 해야 한다"입니다.) 이는 지난 해 말의 보고서(<<A Letter from the Independent Task Force on Korea to Administration>>, 2002.11.26. 본 게시판 96번 게재)에서 다 소간 유보했던 쟁점들에 대해 현재적 입장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오늘 게시된 자료라 저도 아직 제대로 검토하지는 못했는데요, 언론의 보 도에 따르면 대략 다음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미국 의회 소속 싱크탱크인 외교협회(CFR)는 19일 보고서를 통해 조지 W 부시 행정부에 대해 북한에 대한 직접 협상 거부자세를 포기하고 북한 과 "검증가능한" 핵문제 해결책 모색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CFR 연구원들이 작성한 이 보고서는 북한이 추가적인 핵무기 물질을 제조 할 수있거나 제조하기 위한 단계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 하면서 북한의 상황이 "진정한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우리는 그것이 그들의 목적이며 이것이 성공할 때까지 그들이 미국을 붙잡아두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상황은 미국이 더 많은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과 공존하면서 핵분열성 물질의 수출 을 저지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외에 별 다른 선택권이 없는 쪽으로 바뀌 고 있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이같은 상황이 초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이 북한과 검증가능 한 핵문제해결을 위해 양자간 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한편 미국이 지 역협력 국가들에 대해 대북 강경자세를 취하도록 요구할 경우 협상은 실패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그러나 북한이 이미 사용 후 핵무기물질을 보유하고 있어 수개월 내 추가로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이같은 선택방안도 유효하 지 못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또 대북협상이 실패해 북한이 핵무기를 계속 추구할 경우 비상대 책으로 미국은 대북 제재를 모색하고 북한 핵무기와 여타 불법적이거나 치 명적인 물품의 수출을 저지하기 위한 봉쇄조치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해 야 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북한 핵문제해결을 위한 다자간 협상틀에 지역협력국들을 참가시 키려는 부시 행정부의 현재의 대북 접근법과 관련, 미국의 지역 협력국들 은 미국이 북한의 핵 시설들을 공격할 경우 북한의 위협처럼 한반도에 전 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우려로 대북 제제를 반대하면서 미·북간 협상의 필 요성에 공감하고 있지만 부시 행정부가 선호하는 다자간 협상방식에는 별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워싱턴=AP) --------------------------------------------------------------- <<Meeting the North Korean Nuclear Challenge>>(2003.5.19) Eric Heginbotham(Senior Fellow, Asia Studies) Morton I. Abramowitz(C.V. Starr Senior Fellow for Asia Studies II,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James T. Laney(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원문링크) http://www.cfr.org/publication.php?id=5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