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용 전 경북일반노조 정책교육국장 초청 경주지역 노동운동은 90년대부터 최근까지 수차례의 지역 총파업으로 지역연대 운동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모범으로 꼽혀왔었다. 작년 발레오만도 투쟁 패배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많은 활동가들은 경주 지역이 조만간 예전의 활력을 되찾고 민주노조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일으킬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어떤 문제점으로 현재의 침체를 겪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또 많은 이들이 노동운동의 끝 모를 침체 속에서도 여전히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에 대해 많은 기대를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동자운동연구소는 지난 3월 18일 경북일반노조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을 초청하여 “경주 사례로 보는 노동자운동의 지역연대”를 주제로 두 번째 월례워크숍을 열었다.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은 20년 넘는 시간 동안 경주지역에서 민주노조 운동을 일궈온 경주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다.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이 정리한 경주지역의 민주노조 운동은 크게 다섯 시기로 나뉜다. 첫 번째 시기는 암흑기로 민주노조 운동이 태동하기 이전인 1987년 이전이다. 두 번째 시기는 민주노조 운동의 시작기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부터 1996년 민주노총 경주시협의회 출범 전까지다. 세 번째 시기는 1996년부터 2005년까지로 민주노조 운동이 지역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던 시기다. 네 번째 시기는 금속노조 경주지부와 경북일반노조를 중심으로 조직확대가 크게 이뤄지고 지역 민주노조 운동이 가장 활성화되었던 2006년부터 2009년까지다. 마지막 시기는 2010년 이후 현재로 민주노조 운동의 정권과 자본의 집중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고 내부적으로도 양적 성장을 질적 전화로 발전시키지 못한 한계가 드러나는 시기다. 민주노조 운동의 시작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은 1989년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첫 출발은 자동차부품사업장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이었다. 89년 1월 경주 안강 풍산금속 공권력 투입에 따른 구속 해고자가 발생하고 같은 해 5월 전교조 결성에 따른 해직자가 대량 발생하면서 해고·해직자들을 중심으로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8월 울산 현대자동차에 민주 집행부가 출범하여 경주지역 노동자운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한 것 역시 중요한 힘이 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90년 1월 경주지역 최초의 지역노동조직인 ‘경주노동자회’가 건설된다. 경주노동자회는 한국노총과 단절한 민주노조 대표자들의 모임으로 자동차부품 6개 노조와 전교조, 2개 택시노조가 함께 했다. 경주노동자회는 이후 자동차부품사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거쳐 91년 10월에는 경주지역노조대표자회의로 발전, 10개 노조 2천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한다. 한편 이들은 90~91년 전노협에 함께 하고자 경노협 건설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정권의 거센 탄압으로 전노협에 직접 가입하지는 못했다.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은 이후 1993년 5월 문민정권 최초의 공권력 투입 사업장인 아폴로 산업 투쟁을 계기로 더욱 강한 연대투쟁을 발전시키며 1995년 1월에는 자동차부품노조 ‘지역집단교섭’을 추진하기도 했다. 산별노조가 건설되기 한참 전인 95년에 이미 경주지역에서는 집단교섭이 시도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여러 한계로 인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이러한 공동교섭-공동투쟁의 기풍은 계속 발전해 나가게 된다. 그리고 1996년 4월에는 민주노총 경주시협의회가 출범하며 그동안 자동차부품사 10개 노조 3천여 명이었던 지역 민주노조 운동 연대를 16개 노조 4천여 명으로 확대했다. 90년대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은 한 편에서 정권과 자본의 탄압이 계속됐지만 동시에 매년 4~5개 노조가 시기 집중 임단투 파업을 돌입해 큰 마찰 없이 3~4일 만에 노조별로 타결을 보던 시기이기도 했다. 민주노조 운동의 정착기 경주의 세 번째 민주노조 운동 시기는 96년 노동법개정 총파업 투쟁으로 시작했다. 노개투는 경주지역 노동운동의 단결력을 다시금 확인하던 계기였는데 12월부터 1월 수요 총파업 전환 전까지 10개 노조가 2천여 명 파업 및 지역집회로 전국적 투쟁에 함께했다. 이 밖에도 96년부터 97년까지 힐튼호텔, 동아산업, 금아교통, 한일 등이 파업 투쟁을 벌였다. 한편 경주 자동차부품 6개 노조는 1998년 5월에, 1995년 이후 중단되었던 지역집단교섭을 재추진하는데 그 해 출범한 금속산업연맹의 영향과 IMF 경제위기로 인한 정세를 함께 돌파해내기 위한 주체적 노력이었다. 11차례 교섭과 공동파업, 경고파업, 천막농성 등을 진행했으나 결국 집단교섭을 성사시키지 못한 채 개별교섭으로 전환했다. 집단교섭 실패는 경주지역에서 자동차부품사 노조 운동 이후 강고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맛본 첫 좌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좌절은 이후 1999년 현대차의 부품사 구조조정에 맞서기 위해 자동차부품 노조 통합 추진위를 구성하며 극복된다. 당시 현대차는 부품사들을 인수합병하는 한편 모듈화를 통해 부품 공급 시스템을 개편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조정에 맞선 부품사 노조 공동투쟁은 2000년 4월 경주금속노조 출범으로 이어졌다. 금속산업연맹 소속 8개 노조 1천여 명의 통합노조인 경주금속노조는 일종의 지역산별노조 형태였는데, 상근자와 재정을 통합하고 임금 요구안까지 공동으로 내거는 높은 수준의 통합을 지향했다. 전국금속노조가 추진되던 중에 당시 경주금속노조의 앞선 출발은 전국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전국금속노조의 조직 체계와 충돌하며 연맹 중앙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도 경주금속노조는 2개월에 걸친 16차례 교섭을 통해 2001년부터 집단교섭을 추진하는 것을 사측으로부터 이끌어내 금속 산별의 지부 집단 교섭의 첫 사례를 만들어 낸다. 2001년 2월에는 금속노조 건설에 따라 현재와 같은 금속노조 경주지부가 출범한다. 금속노조 경주지부에는 11개 노조 1,600여 명의 조합원이 참여했다. 그리고 바로 6월에는 다스의 위장 계열사인 세광공업 위장 폐업 사태를 계기로 금속노조 경주지부의 첫 연대파업이 진행되었다. 금속노조 경주지부는 약 10개월에 걸쳐 투쟁을 전개하는데 경주-울산을 잇는 7번 국도를 점거하는 가두 시위까지도 불사하며 금속노조의 지역연대투쟁이 무엇인지를 자본에게 보여주었다. 이 과정에서 7명의 활동가가 구속되었다. 결과적으로 위장폐업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이 투쟁을 통해 다수의 훌륭한 활동가들이 지역에 배출되었고, 경주지역 자본이 이후 금속노조에 대해 함부로 탄압을 자행하지 못하게 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광공업 투쟁 이후 2010년 이전까지 경주지역에서는 큰 투쟁이 없었는데 이는 이후 노사타협, 담합구조가 점차 노조 내에서 확산되는 역효과도 가져오게 된다. 2002년부터는 비정규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노동법률상담소가 개설되고, 미조직특위가 구성되어 경주지역 비정규사업이 본격화되었다. 2004년에는 자동차 부품 8개 사업장 300여 명 사내하청에 대한 불법 판정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을 노동자 투쟁으로 현실화시켜내는 것은 실패했는데 사업장 내 정규직들의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부담이 투쟁을 확대하는데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법원의 불법 판정이 있을 때만 해도 비정규직 투쟁이 크게 일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으나 현실의 정규직·비정규직 장벽은 생각보다 컸다. 2005년 6월에는 민주노총 경북본부 사무처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경북일반노조가 출범했다. 경북일반노조는 민주노총 경북본부의 비정규 조직화 사업단위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출발 초기에는 민주노총의 산별 방침과 어긋나며 인력 재정 등에 여러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다.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근 10년의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은 여러 점에서 체계화되었고 세광공업을 제외하면 큰 투쟁 없이 전국적 투쟁에 헌신적으로 복무했다. 2000년 롯데호텔 사회보험 투쟁, 대우차 투쟁, 2002년 주5일제 투쟁, 2003년 열사 투쟁에 이르기까지 전국적 투쟁 전선에 경주지역은 선두에서 함께 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투쟁 속에서 한계도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금속노조 출범 이후 지역의 중심이었던 금속노조 경주지부는 ‘지역’보다도 ‘산별’ 중심성이 강화되기 시작했고, 비정규직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성장, 활성기 하지만 이러한 한계를 점차 극복해가며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은 계속 발전했는데 2006년에서 2009년까지 4년간은 지역 민주노조 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시기였다. 금속노조 경주지부와 경북일반노조의 조직화와 투쟁은 지역연대 투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2006년 통합산별노조 출범에 따라 지역지부에 결합하지 못했던 오리엔스와 에코플라스틱이 산별체계로 전환되었고, 2007년부터 시작된 대규모 조직화 운동으로 대림플라스틱, 디에스씨를 조직하는 데 성공하고 2008년에는 외동지역에서 대동산업, 다스, 인지컨트롤스, 청우가 조직되었다. 2009년에도 대진공업, 영진기업, 고려산업 등이 추가로 조직되며 금속노조 경주지부는 2001년 1,600명에서 2009년 말 3,200명으로 두 배 이상 규모가 성장했다. 지역 민주노조 운동에서 금속 부품사 조직에 불을 댕긴 것은 2008년 다스 조직화였는데, 다스는 지역에서 가장 큰 사업장 중 하나면서도 번번이 조직화에 실패했었던 자본의 철옹성 중 하나였었다. 경주 민주노조 운동은 대규모 선전전을 통해 지역에서 민주노조 조직화 운동의 분위기를 조성했고, 다스 조직화를 위해 계엄 상황을 방불케 하는 정권의 탄압 속에서도 다스에서 노조를 건설하고자 하는 활동가들과 연대 투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몇 명의 활동가들이 구속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조직화 노력은 3년간 8개 이상의 사업장을 조직하는 성과로 남았다. 2006년 이후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다른 한 축은 경북일반노조였다. 경북일반노조는 2006년 경주CC 투쟁을 시작으로 2009년 430명의 조직으로 발전해나갔다. 경북일반노조의 조직화는 금속 경주지부와 마찬가지로 강고한 지역연대 투쟁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는데 경주CC투쟁, 동국대학교미화투쟁 등이 대표적이다. 경주CC 투쟁에서는 금속노조경주지부가 총파업 집회를 함께 진행하며 승리했고, 동국대미화노동자 투쟁은 확대간부들의 학내 3보1배투쟁, 1,500명이 참여한 연대파업 투쟁으로 승리했다. 이러한 지역연대 기풍은 2009년까지도 이어져 경주재활용선별장 민간위탁 저지 투쟁에 금속노조경주지부가 지역총파업을 통해 연대했다. 이 밖에도 세천향예술단, 경주세계문화엑스포, 경주교육문화회관, 경주드림센터, 토비스콘도, 동국대학교병원미화 등이 투쟁과 지역연대를 통해 조직화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과 자본은 촛불 정국 이후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하는데 그 포문은 보수언론들이 열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은 2009년 하반기가 되자 ‘경주는 노조 천국’, ‘민주노총 막가파식 파업’ 등의 제목으로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을 매도하기 시작했고, 경제위기가 어느 정도 회복 국면으로 진입한 2010년이 되자 집중 탄압을 시작했다.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현황과 과제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보도가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사실상 자본이 2010년 탄압을 준비하는 첫 시작이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의 우려대로 2010년 봄부터 시작된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기획 탄압은 발레오만도 투쟁부터 시작했다. 외주화 비정규직에 맞서 파업한 발레오만도에 대해 자본은 직장폐쇄, 용역깡패와 검경의 합동작전으로 노조를 몰아붙였다. 발레오만도지회는 경주지역에서 가장 큰 사업장 중 하나이자 오랜 기간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노조였다. 2001년 세광공업 이후 어느 정도 유지되었던 노사타협 구조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인데 문제는 민주노조 운동 진영이 의외로 이러한 탄압에 쉽게 패배했다는 것이었다. 2010년 3월 영진기업이 원청의 물량 협박으로 금속노조를 탈퇴하고, 한국펠저가 공장을 이전하는가 하면, 6월에는 발레오만도가, 11월에는 광진상공이, 올해 2월에는 전진산업이 금속노조를 탈퇴했다. 경북일반노조 역시 작년 10월 531일간 투쟁한 재활용선별장 투쟁이 패배하고, 11월에는 토비스콘도가 부도나며 노조가 해산했다. 이 밖에도 지역 직가입 노조였던 320명 규모의 경신공업이 희망퇴직을 수용하며 이탈했다. 발레오만도, 재활용선별장 투쟁이 패배한 후유증에 지난 몇 년간 조직한 수에 육박하는 노조들이 도미노 노조 탈퇴를 계속하며 많은 지역 활동가들이 무력감에 빠졌다. 주체적 원인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은 이러한 현실은 정권의 탄압이 드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민주노조 운동 내부적으로도 몇 가지 문제점들을 그동안 혁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진단했다. 우선 그동안의 양적 성장을 질적 전화로 발전시켜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였다. 집행부 중심의 해결사 자판기적 노조활동이 계속되었고, 지침파업, (노사)담합파업이 계속되며 탄압에 대한 내성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 속에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건강한 활동가들을 키워내는 일을 게을리하고, 지침만 수행하는 일회성, 실무적 간부들만 양성했다. 다음으로는 시나브로 진행된 민주노총의 중심성 약화와 정파운동의 폐해다. 금속노조로의 집중성이 강화되면서 지역으로의 집중성이 약화되었고, 여기에 일부 정파가 경주지역 조직화를 시도하며 곳곳에서 폐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민주노총, 금속노조, 민주노동당 등 주요 조직 지도부 선거를 중심으로 계속 문제가 발생하면서 지역연대 기풍이 약화되었다. 이 밖에 비정규 미조직 조직화 사업 정체, 노동문제에만 갇힌 활동 등도 민주노조 운동을 약화시켰다. 경주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과제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은 민주노조 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방법은 새로운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기존에 이야기되어 왔던 것들을 착실하게 실천해나가는 길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첫 번째는 당연히 공세적 조직화로 다시 나서는 것이다. 현 시기 민주노조 운동의 주요과제라는 측면에서도, 복수노조(교섭창구단일화) 시대 대응이라는 측면에서도, 수세에 몰린 경주지역 노동운동의 돌파라는 측면에서도 공세적인 비정규·미조직노동자 조직화가 요구되고 있다. 경주지역은 금속노조경주지부와 경북일반노조를 두 축으로, 이전의 상담을 통한 개별사업장 조직화라는 한계를 넘어 집단적·집중적 조직화로 나가야 한다. 두 번째는 집단적으로 활동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단지 양적·기능주의적 조직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직된 곳에서 이후 민주노조 운동을 새롭게 이끌어나갈 주체(계급의식으로 무장한 활동가)들을 집단적으로 양성해내지 않으면 운동의 미래는 없다. 지역차원의 활동가 양성은 실리화되고 취약해지는 현장조직력을 복원시켜낼 주체로서, 사업장을 넘어서고 정파를 넘어서고 노조활동을 넘어서는 방향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다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노조 운동의 기풍을 만들어야 한다. 사업장 따로, 산별조직 따로, 민주노총 지역조직 따로가 아니라 ‘지역’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투쟁하고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복수노조 시대로 접어들며 기업별회귀와 담합(反산별의식)이 확대되는 것의 대안으로서 ‘지역 중심성’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네 번째, 이상의 과제를 정리하면 민주노조 운동 본래의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주노조 운동의 정신인 자주성/민주성/투쟁성/연대성/변혁성/(도덕성)을 회복하고 실천하는 방향이 요구되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해 정규직/대기업/남성/정주/비장애/취업/조직노동자 중심의 운동에서 비정규직/중소영세/여성/이주/장애/실업/미조직노동자 중심의 운동으로 변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역운동과의 결합으로 나가야 한다. 지역 민주노조 운동의 내용은 상급조직 지침수행, 소속사업장 관리, 투쟁사업장 지원·연대는 기본이 되면서(현재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님), 비정규·미조직노동자 조직화, 활동가 양성 교육, 불안정노동자 사업과 함께 삶과 생활의 영역인 지역운동과의 결합과 실천으로 그 중심이 이동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노동의제를 포함한 지역운동의 의제를 중심으로, 관변시민단체나 개량적 시민단체를 넘어 지역에서 대안운동을 모색하는 단체들과 함께 지역운동으로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2011년 민주노조 운동, 새 도약을 위해 다시 초심으로! 오세용 전 정책교육국장의 발표는 1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되었고 이후 발제에 대한 몇 가지 질의와 응답이 이루어졌다. 여러 질문들이 있었지만 오세용 동지가 강조한 것은 '이전에 없던 특별한 것에서 답을 찾지 말라'는 것이었다. 민주노조 운동이 원래 해왔던, 조직되어 있지 않던 노동자를 조직하고, 새로운 주체를 발굴하고, 계급적 전망을 가지고 운동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노조 운동의 발전 동력이었고 현재 민주노조 운동이 수세에 몰리며 잃어버린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노조 탄압은 올해도 계속될 것이고, 개악 노조법에 따라 자본은 현장에서부터 민주노조를 말살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쓸 것이다. 이미 작년 경주, 창원, 대구 등에서 많은 지역의 금속노조 핵심 사업장들이 무너졌고, 올해도 여러 사업장들이 곤란함을 겪고 있다. 정권의 탄압을 뚫고 다시 민주노조 운동을 되살리는 길은 오세용 동지의 말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실천하는 것이다.
구미지역 사례를 중심으로 공단조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수직적 원하청 관계는 공단 노동자를 쥐어짜고 있고, 이에 저항하려는 노동자들을 물량협박과 공장이전 위협으로 좌절시킨다. 만연한 불법파견은 일상적 고용 불안과 저임금을 강요하고 있다. 최악의 노동 조건에서도 노동조합으로 단결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조차없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노동자운동은 공단조직화를 주목하고 있다. 노동자운동 연구소는 지난 4월 13일 배태선 민주노총 구미지부 사무처장을 모시고공단 조직화의 경험과 전망을 듣는 자리를 가졌다. 85년 처음으로 구미에 발 디뎠을 때, 출근하는 수많은 통근버스를 바라보며 모두가 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서게 될 미래를 꿈꾸며 설레어 했다는 배태선 사무처장은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구미지역 민주노조 운동을 일구어왔다. 벅찬 감동과 쓰라린 패배의 시간을 함께해온 배태선 사무처장에게서 구미공단의 특징과 투쟁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회원들과 공단조직화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워크숍에 함께했다. 번져가는 민주노조의 물결, 강화되는 지역연대 구미공단은 계획된 산업단지다. 노동자 구성을 보면 구미지역에 살던 사람들보다 공단이 없는 인근 경북지역 노동자들이 몰려와 정착한 수가 더 많다. 산업별로 노동조건과 임금수준도 비슷했고, 이는 자연스레 노동자들 간의 동질성을 높였다. 80년대 다른 지역처럼 차고 올라오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공단지역 노동자들 간의 동질적인 분위기 속에서 결정적 승리가 공단 분위기를 바꾸고 다른 투쟁들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성장하면서 노동자들이 진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왔다. 구미지역에서 90년대 초 노조가 설립되기 시작하자 당시 상당한 규모였던 일본 자본들이 대거 철수하면서 노동자운동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공단에서 100명 모아서 집회하는 것이 활동가들의 소원일 정도로 구미지역 노동운동의 암흑기였는데 이것을 걷어내는 투쟁이 96년 한국합섬에서 시작되었다. 질소탱크 관리 노동자 두 명이 산재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고 유령노조를 민주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공권력이 투입되고 무자비한 폭행과 연행이 자행되자 이에 분신으로 항거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투쟁이 전국화되었다. 한국노총 구미지부와 민주노총 준비위가 공동투쟁을 위해 한국합섬에 모였다. 오리온전기 노동자들은 한국합섬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했고, 그 결과 역사적으로 어용강성이던 오리온전기에서 민주노조 지향 위원장이 당선되었다. 지역적 연대투쟁으로 사측을 굴복시키고 이후 대공장을 중심으로 노동조합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KEC 역시 연대회의에 참여하게 된다. 한국노총의 양심적 위원장들과 지역의 운동단위들이 모여서 민주노총 건설 투쟁으로 가는데 한국합섬 투쟁이 핵심적이었던 것이다. 한국합섬 투쟁은 대하투쟁으로 이어졌다. 투쟁전술은 농성돌입해서 선전 타격하는 것이었다. 250여 명의 대하합섬 노동자들을 금오공대에 모아두고 노조설립교육을 했다. 다음 날 농성 돌입을 위해 노래도 배우고, 구호도 외치고, 늦은 밤까지 교육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불안해하던 노동자들의 눈빛이 퇴근하면서 가담하는 동료들이 계속 늘어나자 자신감으로 바뀌어갔다. 자본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날이 거듭될수록 조합원들은 늘어났다. 동네 반상회에 전 조합원이 돌아다닐 정도로 시민에게 선전하고 노동조합을 인정하도록 투쟁했다. 이후 노동조합 사무실에 전화가 빗발쳤는데, 대하투쟁을 구미지역 노동자들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공세적인 노조결성 투쟁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투쟁 과정에서 지역연대의 기풍을 세워나갔다. 한국노총 사업장이었던 KEC가 파업에 돌입하자 구사대가 노동자들을 기숙사에 가둬버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대하합섬 노동자들은 구사대를 돌파하고 들어가 KEC 노동자들과 연대집회를 진행했다. 3일 만에 KEC 투쟁에서 승리하고, 대하합섬 역시 이기면서 이후 다른 파업투쟁들 역시 승기를 잡아갔다. 연대는 연대를 부르고 하나의 투쟁도 모두의 투쟁으로 만들어가는 기풍 역시 계속되었다. 보광노동조합 투쟁 역시 그러했다. 농성 돌입 직전에 삼성이 조합원을 납치하려는 긴급한 상황이 발생하자 곧바로 공장점거투쟁 돌입을 결정하고 전 간부 결집 지침을 내렸다. 다리 건너 공장에 있는 노동자, 도로 맞은편에 있는 공장 노동자들은 출퇴근하면서 연대집회 참석하는 것이 일과였다. 단위노조 간부수련회를 농성장에서 실시하고 농성장 물품도 전 노조가 분담지원해가며 싸워서 결국 자본을 항복하게 만들었다. 결정적 패배와 복구되지 못한 운동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면서 시련이 시작되었다. 새한의 워크아웃에 맞서 처절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고, 남겨진 상처와 패배감은 매우 컸다. 오웬스코닝과 두산전자에 노조를 설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이후 오리온전기, 코오롱, 금강화섬에서 대규모 구조조정과 폐업이 이어졌고, 이제 맞서는 투쟁을 벌였으나 결정적 패배 이후 운동이 복구되지 못했다. 승승장구하던 구미지역 노동운동이 위기에 직면하게 된 배경에는 산업구조적 변화가 있었다. 구미지역 제조업은 화섬산업과 전자산업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90년대 초중반 화섬산업 시장으로 진입하는 자본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구미지역에 공장이 대거 들어섰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자본과의 경쟁 격화와 과잉설비투자로 화섬산업이 위기에 직면하면서 98년 이후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새한, 코오롱, 금강화섬, 한국합성 등의 규모 있는 사업장 대부분에서 대량 정리해고가 자행되었다. 화섬산업은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영역을 탈피해 전자소재 자동차 부품으로 업종 다각화했다. 전자산업의 경우 삼성과 LG로 대표되는 대기업을 원청으로 백여 개가 넘는 중소영세사업장들이 수직적 하청화되는 구조가 고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의 주요 사업장들이 폐업 또는 정리해고로 노조가 깨지거나 활동이 위축되었다. 경영실패로 폐업하는 기업들이 생겨나자 지역 자본가들은 ‘민주노총 있는 공장 문 닫는다’는 악의적 이념공세를 펴며 고립화전략을 펴는 상황이다. 민주노총 깃발 하나 빼앗기면 두 개 올리고 두 개 빼앗기면 네 개 올린다! KEC 투쟁 구미지역은 대다수가 대공장이었고 최저임금이랑도 상관없는 분위기였는데 최근에는 달라졌다. 많은 공장이 문을 닫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버렸고, 구조조정으로 해고 한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대체했으며, 더 이상 쥐어짤 수도 없을 정도의 원하청 고리를 만들어 최저임금 인상도 반영되지 못하도록 몰아가는 열악한 상항이다. 화섬사업장은 소규모가 되고 전자산업은 삼성과 LG의 하청업체들이 주를 이루면서 구미공단의 재편이 완료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바로 KEC 투쟁의 배경이다. 천명 이상의 대공장이 줄어서 KEC는 지역에서 여섯 번째로 크고, 금속구미지부에서는 최대 규모 사업장이다. 게다가 경비아저씨만 빼고 모두 정규직인데다 근속연수도 높고 임금도 다른 공장에 비해 높은 편이라 구미지역 민주노조 운동에서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은 사업 조정에 따른 대규모 구조조정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에 저항할 노조를 제거하기 위해 맹렬하게 공격했다. KEC 투쟁은 구미지역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중요했다. 타임오프가 도입되면서 전임자 문제로 시작된 투쟁이기 때문에 전국적인 싸움으로 만들어 금속노조 투쟁의 구심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금속 총파업은 선언에 불과했음이 드러났고, 회사는 협상을 거부하고 있으며 조합원들은 생계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합원들은 공장점거 이후 많이 힘들어했지만 집단토론을 지속하면서 투쟁이 발생한 원인이 구조적인 것에서 기인한 것을 인식하고, 스스로 전망을 밝히기 위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나눴다. 예전에는 KEC 계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조차 시도하지 못했지만,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지역 노동자 조직화 사업을 자신의 과제로 삼게 되었고, 구미공단 곳곳을 다니면서 미조직 노동자를 만날 것을 결의했다. 민주노총 깃발 하나 빼앗기면 두 개 올리고, 두 개 빼앗기면 네 개를 올리겠다는 것을 자본에 보여주자고 결심한 것이다. 공단 조직화 경험 나누기 배태선 사무처장으로부터 구미지역 상황을 듣고 난 후, 참석자들이 함께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로지역에서 공단조직화 사업을 하고 있다는 한 참석자는 수직적 하청 구조 속에서 물량협박이나, 공장이전 위협이 만연하여 조직화가 쉽지 않은데 구미지역의 경험을 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배태선 사무처장은 LG하청 세 군데가 한꺼번에 찾아와서 노조설립 상담을 요청한 사례를 얘기해 주었다. 상담을 요청한 노동자들끼리 서로가 모르는 상태였지만 노동조합 건설을 함께하자고 합의를 했다고 한다. 협업단지에서 여러 하청을 묶어서 조직하면 원청에 타격도 크게 입힐 수 있고 교섭력도 커지기 때문에 해볼 만 하다고 생각했지만 마음같이 되지 않았다. 각각의 사업장이 동일한 속도로 조직되지 않았고 보안이 깨지기도 하는 어려움 속에서 결국 좌초됐기 때문이다. 사실 패배가 예상된다 하더라도 조직화를 주저해서는 안 되고 패배의 경험을 딛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구미지역에서 운동이 잘되면 노조 가입 여부를 떠나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향상되고 운동이 후퇴하면 모두가 열악해져 왔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전자산업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많고 여성노동자들이 많은 사업장은 조직화가 어렵다는 생각이 일반적인데 역시 여성이 많은 사업장인 KEC 투쟁은 어떻게 조직하고 투쟁을 만들었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이 이어졌다. 배태선 사무처장은 우선 구미지역 여성노동자 비중이 예전같이 높지 않다고 했다. KEC가 예외적으로 여성 비율이 높은 곳이었다. 그리고 젊은 노동자들이 예전 세대와 다르다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으며 성별에 따른 차이도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젊은 여성들 같은 경우 구미지역에 정착한 여성 노동자들의 2세들이라서 그런지 자신의 일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어 사측의 탄압에 분노하면서 맞서는 분위기라고 한다. 같은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이라 서로 간에 동질감이 높아서 응집력이 생기는 것 같다고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삼사십 대 여성들은 생계에 대한 책임 때문에 잘 움직이지 못하는 편이다. 젊은 남성들 같은 경우 일하는 곳에 대한 애착이 없고 언제든 다른 곳으로 옮길 거란 생각에 단결을 통해서 무엇을 쟁취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나 신뢰가 적은 것 같다고 얘기했다. 이어서 구미지역의 현재 과제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배태선 사무처장은 현재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했다. 구미지역은 민주노총 조합원이었다가 공장 문 닫아서 다른 공장에 재취업한 노동자들이 많은데 그들의 열패감이 매우 크다고 한다. 다수가 우리 사업장이 민주노총이라서 문 닫았다고 생각한단다. 자본가들도 악의적으로 이러한 생각을 퍼트리고 있는데 반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한 정규직 비정규직을 갈라치기 하는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들을 함께 조직하기 위한 매뉴얼을 만드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미지역의 우선 삼성이나 LG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여기를 뚫어야 하청업체들을 조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점 사업장이 승리하면 다른 공간이 열린다는 것이 구미지역의 이전 경험을 통해서 체득한 바임을 덧붙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단에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선전전을 많이 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워낙 저임금 노동자들이 많으므로 ‘올리자 임금! 만들자 노동조합!’ 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배태선 사무처장은 공단조직화에 임하는 데 있어 노동자를 왜 조직하려는 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량적으로 사람을 늘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수년간 함께하면서 동지라고 믿어왔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돌변하여 총대를 거꾸로 메는 경우를 숱하게 봐오면서 더욱 사람을 바꾸는 조직화가 중요하다고 느꼈다고 한다. 구미지역 노동운동이 열심히는 해왔지만 양심적인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 반성하게 된다고 했다. 노조를 당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가 아니라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혁신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을 통해서 자본의 본질을 보고 자신을 자각하게 된다. 투쟁은 노동자를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힘든 난관을 함께 넘을 수 있는 동지에 대한 신뢰, 집단적으로 함께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KEC 조합원들이 집단적인 토론을 통해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투쟁의 전망을 능동적으로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 속에서 그 단초들을 찾아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배태선 사무처장은 반전의 계기도 자신감이 있을 때 가능하다며 주눅 들어 있는 민주노조 운동이 주저 없이 싸워 반격의 기회를 잡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열 번의 싸움에서 패배했다고 패배의식이 자리 잡으면,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11번 째 승리의 계기도 놓칠 수 있기 때문에 사활을 걸고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에 힘을 모을 것을 당부하면서 워크샵을 마무리했다.
2011년 경기지역 운동의 화두는 지역총파업이다.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논의는 민주노총 경기본부의 2011년 상반기 사업 계획(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으로 포함되었다. 도본부와 산하 지역지부, 몇 개의 산별 지역지부가 함께 투쟁기획단을 꾸렸고, 경기본부 운영위원회는 4월 ‘최저임금 현실화! 비정규직 철폐! 노동탄압 분쇄! 노동기본권 사수! 공공의료 쟁취! 경기지역 총파업 투쟁본부’로 전환되었다. 주요 투쟁 흐름으로 5월 12일 ‘2011년 상반기 총력투쟁 선포대회’, 6월 11일 ‘도민 결의대회’, 7월 중순 ‘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이 제안되었다. 금속노조 경기지부가 처음 지역총파업을 제안했을 때부터 그 진정성과 가능성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사업 자체는 서서히 모양새가 갖춰지고 있다. 고민도 확산되는 분위기다. 경기지역의 이러한 결의가 2011년 노동자운동의 위기와 고립 속에 어떤 가능성과 과제를 남길 것인지 주목된다.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지역총파업 제안 배경 금속노조 경기지부는 2010년 12월 열린 정기대의원대회 ‘경기지부 6기 2년 차 사업계획(안)’에서 다음과 같이 지역총파업 제안 취지를 밝혔다. “정권과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공격이 강화되고 노동자 간 분열이 확대되는 가운데 노동운동은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다. 사업장을 넘어 단결하기 위해 만든 산별노조는 오히려 지역전체의 연대운동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처해있다. 경기지부 또한 그간 산별노조 틀 안에 머물면서 지역의 다른 노동자와 연대하는 데 소홀했다는 반성을 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주도적 실천을 해야 한다. 전체 노동자에 대한 공격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개별 사업장에 대한 공격과 계속 생겨나는 장기투쟁사업장 문제에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기업을 넘어선 연대라는 산별노조운동의 핵심원리를 실현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경기지부가 주도적인 실천을 해야 한다. 지역연대운동 강화를 통해 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야 한다. 지역차원의 단결과 연대를 획기적으로 강화하기 위하여 2012년 지역총궐기를 목표로 2011년 지역총파업으로 그 기반을 구축하자.”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금속노조 경기지부는 민주노총 경기본부, 산별 지역지부 등에 지역총파업 계획을 제안했다. 경기본부는 이를 2011년 상반기 주요 사업으로 상정했고, 건설노조, 보건의료노조 등 산별노조 지역지부들도 산별 현안을 걸고 지역총파업 투쟁에 결합한다. 금속노조 경기지부 내적으로는 4,000여 조합원에게 교육을 진행했고 매주 화요일 투쟁사업장 공동 실천의 날을 통해 지역 선전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지역총파업을 경과하는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주요 목표는 1) 교육, 토론을 통해 조직된 운동 내부의 시야 확장과 인식 전환, 2) 주 1회 간부 직접 실천 등을 통해 금속 경기지부와 조합원이 지역연대 운동의 주체가 될 것, 3) 조합원의 대중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들이 지역본부 산하 지역지부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모아지는 것이 산별운동에 복무하는 방향이라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지역총파업, 필요하고 가능한가? 지역총파업 논의가 대중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4월 15일 열린 금속노조 경기지부의 반공개 토론회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역총파업, 필요하고 가능한가?’라는 제목으로 열린 토론회에는 금속노조 경기지부 주요 사업장의 현장조직, 현장 활동가들과 지역 사회운동단위들이 참가했다. 이날 토론은 금속노조의 발제, 경기노동전선, 다산인권센터, 현장실천연대 경기준비위의 의견서 발표, 토론회에 참석한 현장 활동가, 지역 사회단체 활동가들의 전체토론으로 이어졌다. 토론에서는 많은 현장 활동가들이 지역총파업과 같은 투쟁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조직화와 성사 가능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어려움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자본과 정권의 계속되는 공격과 노동자 간 격차 심화, 노동운동의 위축과 관성화를 타개하고 새로운 계기를 만들자는 취지에 대체로 동감했다. 규모보다 내용과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경기노동전선(집행위원장 정성훈)은 구체적 투쟁 시기를 최저임금투쟁, 임단투, 국회의 노조법 재개정안 상정 시기 등을 고려해 6월로 조정하자고 제안했다. 이번 투쟁의 핵심 과제로는 침체된 현장투쟁과 실천을 복원하고 지역연대투쟁 전선을 복원하는 것, 총파업 이후를 준비할 수 있는 자신감 획득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5월 중 현장 활동가 대회’라는 구체적 일정을 제안했다. 가능한 현장 활동가 중심으로 현장에서의 일상 선전활동을 진행하고, 현장조직간 ‘지역총파업’ 의제의 논의테이블을 구축해 현장논의와 실천을 재건하자는 것이다. 다산인권센터(활동가 안병주)는 지역총파업 제안은 노동운동의 위기를 보여주는 절박한 제안이지만 정규직 중심, 정파 중심의 노동운동 속에서 ‘지역연대 복원’이라는 취지는 아직 추상적이며 구체적 방안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노동운동이 기존의 한정된 노동권에 국한되지 말고 시민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노동자의 권리를 설명하기 위해 노동인권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 사업으로 수원촛불, (가칭)수원 노동사회포럼, (가칭)노동인권교육 네트워크(교육사업)에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현장실천연대 경기준비위(집행위원장 이규선)는 지역총파업 투쟁의 본질적 의미는 지역연대전선 복원에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지역연대의 공고화를 위해서는 연대 틀 구성이 중요한데 최근 발족한 상설연대체 <민중의 힘(준)>에 지역에서도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결집하자고 제안했다. 이를 통해 노동운동의 분열에 대해 성찰하고 논의의 장을 넓혀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체 토론에서도 총파업의 성격과 준비과정이 규모보다 중요하다는 의견들이 이어졌다. 조직된 노동자, 정규직 노동자들의 인식변화, 활동가들의 실천 강화, 사업장을 뛰어넘어 지역적으로 함께 하는 자기 기풍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전국적인 투쟁전선의 소실과 조직된 운동의 고립에 대한 현장의 절박함이 묻어나는 의견들이었다. 지역총파업, 어떤 요구로 누구와 함께 성사할 것인가? 지역총파업에 관한 여러 토론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분위기는 필요성에 대한 공감과 실제 성사 가능성에 대한 의문, 그리고 의제 설정의 어려움이다. 어떤 요구가 경기지역의 조직된 노동자들을 주체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다양한 처지의 노동자들을 결집시키고, 지역사회의 공감과 참여를 이끌어낼 것인가. 어려운 문제다. 금속노조 경기지부는 핵심 요구를 중심으로 이를 쟁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민생현안을 포괄하는 장을 만들고 생존에 대한 국가(및 지자체)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저임금, 비정규직 문제가 현재 금속노조 경기지부 구성상 조합원들의 주체적 요구가 되기 어려운 조건을 반영한 주장으로 보인다. 따라서 지역총파업을 통해 이들이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해 인식을 넓히고 연대의식을 확장하는 계기를 중요시하는 입장이다. 민주노총 경기본부는 2011년 상반기 총력투쟁 계획(안)에서 최저임금과 비정규직 철폐가 지역총파업의 중심 요구가 되어야 하며, 이를 중심으로 민주노총의 전체적인 투쟁 일정과 결합하고 지역지부의 일상적 활동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역차원에서는 대지자체 투쟁을 통해 예산 및 조례제정 등의 성과를 마련하자는 제안이다. 대지자체 요구로는 최저임금 현실화, 비정규직 철폐를 지자체 관련 업무부터 적용될 수 있도록 하고, 공공의료 확대와 외국계 투기자본의 노동탄압 근절, 건설부문 체불임금 근절 등을 함께 요구하며, 각 사안에 대해 모두 조례제정 등의 구체적 성과를 만들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에 대해 경기노동전선은 대지자체 투쟁의 측면에서 조례제정과 같은 구체적 요구를 할 수는 있지만 그로 인해 현장의 투쟁이 제약되어서는 안 된다고 문제제기 했다. 현장실천연대 경기준비위는 지역민을 포괄하는 의제와 요구를 설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정치적으로 이명박 정권에 책임을 묻는 요구가 핵심이라 주장했다. 여러 토론을 통해 최저임금, 물가 대책, 비정규직 문제, 핵발전 문제 등을 제기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이 나왔다. 경기지역 총파업, 노조운동 혁신의 주체를 만드는 계기로 지역총파업투쟁 논의로부터 주로 지역의 노조운동 현황 진단과 반성이 무수히 제기되고 있다. 조직된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간 격차의 문제, 노동자운동의 계급대표성을 회복하기 위한 내부적 혁신과 연대의 확산, 현장에서의 교육과 실천을 재건하는 문제, 산별노조 운동 현황에 대한 평가, 민주노총 지역본부와 지역지부 위상 강화의 문제 등. 하나하나 많은 논쟁의 여지와 의미가 있는 제기들이다. 지역총파업 논의를 통해 노조운동이 자기 진단과 혁신을 위해 문제를 스스로 꺼내놓고 토론의 장을 확장하고 있는 점은 정말 좋은 일이다. 또한 대중투쟁에서 빗겨나 2012년 정권교체를 통해 운동의 위기를 해결하고자 정치적 대응에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부터의 조직력 강화와 투쟁전선 구축을 주장하는 흐름이 고무적이다. 여기서 나아가 이번 투쟁을 통해 자본이 만들어 놓은 분할, 즉 노동자 간 임금과 노동조건의 격차를 뛰어넘어 단결을 확대하는 전략을 고민할 주체와 논의 구조를 만들 수 있다면 모두가 우려하는 일회성 지침 파업에 그치지 않고 꾸준히 고민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본다. 자본의 분할 전략이 현장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가, 그에 맞서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는 누구를 조직할 것인가, 다양한 층위의 노동자 간에 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지역총파업은 이러한 고민이 현장에서 시작되어 현장을 뛰어넘도록 하는 계기와 구조를 남겨야 할 것이다. 그런 주체들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 어떤 의제와 요구로 지역총파업을 구성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는 충분하지 않다. 투쟁을 제안한 금속노조와 비교해 경기본부나 다른 산별 지역지부의 논의와 교육 속도도 차이가 크다. 지역본부 차원에서 금속을 제외한 다른 산별에 교육과 논의를 제안하고 관장할 준비도 아직 미흡하다. 민주노총 지역지부 또한 지역으로부터의 일상적 연대를 구축하려면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다. 지역연대운동 단위들이 다양한 고민을 토론하고 함께 준비할 수 있는 장도 통일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지역총파업 준비 과정을 통해 많은 단위에서 제기한대로 지역본부가 산별을 포함한 지역연대운동 전반을 관장하고 지역지부의 일상 활동을 강화해 나갈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4월 22일 민주노총 경기본부 대표자 수련회에는 100여 명의 지역지부, 산별 지역지부 단위 사업장 대표자와 활동가들이 모여 지역총파업의 필요성과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2011년 지역총파업 실현을 위해 결의를 모았다. 운동의 위기에 대한 공통의 절박함에서 시작된 지역총파업 논의가 지역운동의 과제를 발굴하고 차이를 넘어 연대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서경지부 집단교섭 투쟁을 마무리지으며 지난 6개월에 걸친 공공노조 서울경인지부(이하 서경지부)의 집단교섭 투쟁이 4월 26일 조인식을 끝으로 마무리될 예정이다. 이번 투쟁을 통해 기본급 대비 11.92% 임금 인상이라는 적지 않은 물질적 성과를 쟁취했다. 임금총액과 각종 노동조건 개선을 따지면 더욱 높은 수준의 성과가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당한 수준의 조직적 성과를 축적했다는 점이다. 애초 공공노조 서경지부는 집단교섭을 준비하면서 다음과 같은 목표를 설정했다. 1) 지부 내 대학교청소용역 분회의 단결 확대를 통한 투쟁력을 극대화한다. 2) 각 사업장별 임금과 노동조건 편차를 최소화, 최저임금 이상을 쟁취하는 투쟁을 통해 상향평준화한다.(곧 민주노총 요구안을 현장에서 쟁취한다.) 3) 교섭에 투입되는 지부 역량을 조직 강화, 확대 사업 등에 효율적으로 재배치한다. 4) 대학교 청소용역 전체의 ‘노동기준’을 만들어 지부의 영향력 확대, ‘따뜻한 밥 한 끼의 권리’ 사업의 성과를 단체협약에 반영, 이를 통해 조직 확대를 촉진한다. 이러한 목표를 갖고 집단교섭 투쟁을 시작했지만 지도부와 현장 조합원 모두 처음 가는 길이기 때문에 여러 어려움이 존재했다. 제대로 한번 싸워 보자는 사전 결의 우선 집단교섭 투쟁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투쟁이었다. 이번 집단교섭 대상 사업장인 고려대, 고려대병원, 연세대, 이화여대는 노동조합을 처음 만든 지 수년 동안 제각각 기업별-사업장별 교섭을 하며 임단협을 진행해왔다. 그러면서 제 각각의 기준이 현장에 정착해있었고 이를 통일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에 대해 많은 현장 간부들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투쟁 사업장 연대는 항상 해오던 것이긴 하지만 공동의 요구를 갖고 함께 교섭하고 함께 싸우는 것은 처음 해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기준이 제각각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히) 임금의 기본이 되는 기본급은 최저임금으로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수월하게 공동의 요구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장의 여러 우려들이 있었지만 지난 수년 동안 만들어온 강력한 연대의 기풍이 여러 우려와 의구심들을 불식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요구안 역시 민주노총 최저임금 현실화 요구안인 시급 5,180원을 할 것인지 쟁취 가능한 수준의 4,000원대로 할 것인지 토론이 길게 진행되었다. 이 토론 과정에서 현장 간부들이 공동의 요구안으로 시급 5,180원을 선택했다. 제대로 한번 싸워보자는 결의였다. 이미 공동의 요구를 만든다는 어려운 과정을 결의했기 때문에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는 것은 오히려 쉬운 문제였다. 특히 공동의 요구라는 것이 바로 대학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장 절실한 요구인 “최저임금을 넘어선 기본 시급 쟁취! 원청 사용자성 인정!”이었기 때문에 더욱 응집력 있게 투쟁을 할 수 있었다. 공동의 요구가 마련되자 공동파업 투쟁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공동요구와 공동투쟁을 통해 현장 조합원들에게 ‘다른 사업장 지원’이라는 의미를 넘어 다른 사업장의 문제가 바로 나의 문제라는 인식을 강화했고, 이를 통해 공동파업 투쟁이 승리할 수 있었다. 특히 3월 이후 한 달 간에 걸친 강력한 투쟁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현장 조합원들의 결의가 점차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의 요구는 결국 원청 사용자가 움직이지 않으면 쟁취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미 원하청 간 최저임금으로 계약을 맺어놓은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공동파업에 돌입한 우리 조합원들의 분노와 요구에 대해 원청 사용자는 여전히 용역업체와 이야기해보라는 뻔한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우리는 원하청 사측 간 최저가격 재계약의 관행을 끊어낼 수 있었다. 공동파업 투쟁 결과 고려대 원청은 이미 최저 가격으로 계약을 완료했음에도 추가계약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연세대는 우리 조합원들의 투쟁에 지레 겁먹고 두 자리 수 이상의 계약을 체결했다. 이화여대 측 역시 우리의 요구를 수용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공동 파업의 가장 소중한 성과는 지부 전체 조합의 단결 가장 중요한 것은 2010년 지부 집단교섭 투쟁을 통해 여러 사업장의 조합원들이 사업장을 넘어 공동 파업을 진행하면서 지부 전체 조합원의 단결을 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결력의 상승은 향후 ‘따뜻한 밥 한 끼의 권리캠페인’과 ‘전략조직화 사업’ 등을 통해 더욱더 많은 미조직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커다란 자양분이 될 것이다. 내 회사, 내 사업장이라는 작은 틀을 깨고 더 큰 시야로 자신의 투쟁과 전체 투쟁을 맞추어나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개별 사업장 내에서도 노조의 조직력이 상승할 수 있었던 점을 주요 성과로 꼽을 수 있다. 원하청 사측이 제시하는 최저임금 기본급을 거부하고 생활임금을 쟁취하고자 하는 커다란 투쟁에서 현장 조합원들은 압도적인 찬성으로 파업투쟁을 결의하였다. 그 후 한 달에 가까운 파업 투쟁을 진행하면서 각 사업장의 조직력이 향상되고, 이를 통해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파업을 진행하면 혹여나 학생들, 환자들의 비난을 받지 않을까 우려하는 모습도 있었지만, 막상 압도적인 숫자의 지지서명을 받고 파업이 길어지면서도 우호적인 여론이 점차 높아지자 우리 조합원들이 더 높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연세대의 경우 사용자들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해 항의하며 파업투쟁과 점거농성을 더욱 수위 높게 진행했는데, 결국 사용자들의 공식 사과를 받으면서 조합원들은 승리감에 고취될 수 있었다. 시급 100~200원 인상보다 더 중요한 것을 현장 조합원들이 얻은 것이다. 만만치 않았던 사측의 대응과 분리 격파 전술 투쟁의 과정에서 또 한 번 어려움에 처한 것은 바로 사용자들의 단결이었다. 시설관리 업종의 사용자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최저가입찰 등을 통해 출혈적 경쟁을 벌이고 특별한 사용자단체가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사용자들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4개 사업장의 9개 용역업체는 용역 재계약을 수주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교섭장에 나오게 되었는데, 일정 시간이 지나 쟁의조정 수순에 돌입하자 사용자들의 단결을 택한 것이다. 그들의 입장은 단순명료했다. 다른 건 일부 양보해도 기본급은 최저임금인 4,320원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원청 사용자들의 입장이 반영되어 2011년 1월 투쟁을 통해 쟁취한 홍익대의 기본급 4,450원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제시되기도 했다. 어찌 되었건 사용자들의 단결을 분쇄한 것은 다름 아닌 현장 조합원들이었다. 각 사업장의 현장간부들은 사용자들의 단결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지 고심하며 대책을 거듭 논의했다. 이 결과 약한 부분을 먼저 공격하는 분리 격파 전술을 구사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전술은 공동투쟁의 의미와 분리격파 전술의 의미를 현장조합원들이 충분히 이해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자칫 오해를 낳기 쉬운 전술이었다. 만약 공동의 협의를 까맣게 잊고, 자기 사업장 이기주의에 갇히면 “우리 사업장 먼저 연대해 달라”라며 분리격파 전술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공동투쟁의 경험과 다양한 교육을 통해 집단교섭 투쟁의 커다란 흐름을 이해하고 있던 현장간부들은 '부분파업+태업' 전술로 원하청 사측을 교란하고 압박하는 가운데 순차적인 전면파업 투쟁으로 원하청 사측을 굴복시켜나갔다. 한두 군데의 사업장에서 원하청 사측이 손을 들어 잠정합의를 시작하자 결국 전체적인 흐름이 바뀌게 되었다. 민감한 투쟁 전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합의를 바탕으로, 현장 조합원들의 투쟁 열기가 높게 유지되는 가운데, 공동투쟁으로 묶인 대오를 흩트리지 않고, 전체 집단교섭 투쟁을 성과 있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다함께와 같은 일부조직은 이러한 전술 논의를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경지부가 전면파업을 하지 않는다는 둥, 임금요구수준을 낮추었다는 둥의 뜬금없는 비난을 하기도 했다. 많은 노동조합 활동가들과 조합원들, 연대단위 활동가들의 기운을 빼놓았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공동의 요구를 내걸고 함께 싸우면 더 힘이 세진다는 교훈 이번 지부 집단교섭을 통해 4개 사업장이 통일 단체협약을 쟁취함으로써 지부의 860명의 현장 조합원들이 동일한 단협을 적용받게 되었다. 이는 기존의 사업장별로 편차가 크던 내용들을 하나로 통일시켰다는 점 자체로 의미가 있으며, 향후 신규 사업장이 생겼을 경우 우리가 만든 노동조건을 관철하기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이에 더 나아가 대부분의 단체협약 조항들이 상향평준화 되었다. 4개 사업장의 기존 단체협약 중 좀 더 좋은 부분으로 기준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 부분 역시 ‘기본급 통일’, ‘최저임금 이상의 기본급 쟁취’를 최대 목표로 투쟁을 진행했고 결국 시급 4,600원을 동일하게 쟁취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의 요구를 내걸고 함께 싸우면 더욱 힘이 커진다는 것을 현장 조합원들이 실감하면서 향후 공동 투쟁의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차례 공동파업을 경험한 원하청 사측이 더욱 단결하면서 탄압이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2010년 지부 집단교섭 투쟁의 조직적 성과가 유실되지 않게 하면서 더 많은 사업장을 조직하고 집단교섭에 함께 하게 하는 것, 더욱 강력한 투쟁을 조직하는 것이 향후 과제다.
경제회복 과정에서 더 커진 임금격차, 노동자 단결 전략이 절실 자본에겐 최고의 한 해, 노동에겐 최악의 한 해 작년 한해는 한국 재벌들에게 최고의 해였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창사 이래 가장 많은 돈을 번 것이다. 삼성전자와 그 계열사들은 154조 매출에 17조원의 순익을 올렸고 현대차와 그 계열사들은 112조 매출에 8조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지난 몇 년간의 이익보다 더 많은 돈을 작년 한 해에 벌어들였다. 다른 대기업들 역시 다르지 않다. [%=사진1%] 이에 반해 노동자들에게 2010년은 최악의 한 해였다. 발레오만도, KEC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정권의 공권력 투입이 이어졌고, 공공부문에서는 정권의 노조 탈퇴 공작이 횡횡했다. 재벌들이 수조원의 이익을 내는 동안 정권은 경제위기 운운하며 자본의 구조조정을 독려했고, 그 결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2.5% 이상 하락했다. 다수 노동자들에게는 경제 회복 시기가 더 위험하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고 재벌들의 곳간이 가득 찼으니 노동자들의 생활은 올해 조금 나아질 것인가?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듯이 절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세계경제가 일시 회복 국면으로 들어선 지금이 노동자들에게는 더욱 위험한 한 해가 될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자본은 경제위기를 명분으로 노동자들을 더욱 가혹하게 착취할 방법들을 찾아내고 위기 이후 이를 제도화했기 때문이다. IMF 위기 때를 기억해보자. 자본은 IMF 위기를 거치며 상시적 구조조정 시스템을 정착시키고, 비정규 악법을 제도화했다. 그래서 IMF 경제 위기가 끝난 2000년 이후 자본은 크게 성장했지만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고용 불안에 고통 받아야 했다. 자본은 포섭 가능한 일부 노동자들에게는 성장의 과실을 조금 나누어 주었지만, 다수의 배제된 노동자들은 더욱 가혹하게 착취했다. 예를 들면 1993년에 100인 미만 중소 사업장의 임금은 500인 이상 사업장의 64% 수준이었다. 하지만 IMF 경제위기 이후 임금 격차는 급격하게 벌어지기 시작해 중소 사업장의 임금 수준은 2007년에 44% 수준까지 하락했다. 최근 경제위기 시기에 자본은 IMF 경제위기 때와 같이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을 더욱 유연하게 만들고, 중소 하청업체들을 더욱 가혹하게 수탈했다. 그리고 올해 이러한 시스템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갖은 수작을 부릴 것이다. 파견노동, 단시간노동 등을 제도화하려는 이명박 정부의 국가고용전략부터 상생전략으로 위장한 재벌들의 하청업체 관리 계획까지 정권과 자본의 수작은 이미 작년 말부터 시작되었다. 전노동자 실질 임금 인상! 임금 격차 축소! 실질임금 하락을 겪은 많은 단위 노동조합들은 올해 큰 폭의 임금인상을 계획하고 있다. 응당 모든 노동자들이 실질임금 회복은 물론 자신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위해 적극적인 임투에 나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경기 회복 과정에서 미조직 노동자, 비정규 노동자,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임금이 함께 인상되지 않는다면 예전과 같이 노동자들의 임금격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대기업들은 노조 조직률이 낮아 적극적 대응을 못하는 사내외 하청 기업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비용을 전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노조 운동은 전체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표하기 위해서 임금 격차를 축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노동자간 격차가 더욱 확대되어 전체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대표하지 못하는 노동자 운동에 미래는 없다. 지역 공동 투쟁, 산업 업종 집단 교섭, 최저임금투쟁으로 단결하자! 시기집중 임단투도, 연대투쟁 기풍도 사라진 한국 노동자 운동 현실에서 전노동자의 실질임금을 상승시켜내고 이 과정에서 임금 격차가 더 커지지 않도록 공동투쟁을 조직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올해 3월 대학교 청소 미화 노동자들은 공동 임투, 집단교섭을 성사시켰고,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 인상을 쟁취했다. 또한 경기, 대구 등에서는 5월 이후 임단투와 정리해고 투쟁, 지역현안 등을 묶어 지역 공동 투쟁을 시도하고 있다. 노동조합 간부와 활동가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은 큰 성과가 없을지는 몰라도 이러한 공동 투쟁 속에서 한 발 더 나아갈 기회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5월 이후, 200만이 넘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법정 최저임금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올해 최저임금 투쟁은 그동안 임금 인상이 억제된 데다 물가까지 상승했기 때문에 그 어느 해보다 사회적 주목을 받고 있다. 민주노총이 ‘국민임투’라고 이름을 붙인 것에 걸맞은 위력적 투쟁을 만들어 낸다면 임금 격차 축소에 한 걸음 더 나가는 계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올 해 임금 투쟁은 단순한 경제적 투쟁이 아니다. 경제위기 이후 노동 현실에 대한 적극적 폭로이자 경제 회복 과정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재편 전략에 대한 정치적 투쟁이다. 121주년 노동절 투쟁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2011년 투쟁을, 자본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