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노동운동 일부와 개혁 성향 시민단체에서 보수 세력의 확장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박근혜 정권 당시 총리였던 황교안을 대표로 선출한데다, 5·18 망언과 같은 극우적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서다. 문재인 정부 지지율은 50% 아래로 떨어졌고, 압도적이던 민주당 지지율은 30%대까지 하락했지만, 자유한국당에 대한 지지율은 24%에 이르렀다. 고용위기·경제위기가 가시화되면서 문재인 정권의 책임을 묻는 야당·언론의 공격도 거세지고 있다. 문재인 정권을 “촛불혁명”이 세운 정권으로 규정하는 세력들에게 현재의 정세는 그야말로 “반혁명”의 기운이 솟구치는 국면이라 할만하다. 그리고 이들의 이런 분석은 다시 보수에 맞서 개혁세력이 힘을 합치자는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더 나아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촛불혁명”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문재인 정부가 우경화하고 있어 문제라는 것이다. 이들은 소득주도성장 전략으로 사회 발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고 “노동존중사회”를 실현하겠다던 초기 국정과제를 더욱 강건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눈앞에 닥친 경제 상황과 야당·언론의 공세에 휘둘리면서 초심을 지키지 못한 것이 현재의 위기와 지지율 하락을 불러온 진정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현 정세에서 노동자·사회운동은 보수 세력의 성장 때문에 위기에 처한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사회운동은 문재인 정권을 방어하기 위한 반보수전선에 뛰어들어야 할까? 반대로 문재인 정권이 초심을 지키고 소득주도성장 전략을 밀어붙이면 문제가 해결되고 노동자·민중운동이 성장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반보수전선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중요한 국면마다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던 “반보수전선” 전체를 관통하는 성격이 무엇인지, 공통된 성격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변화되어온 지점은 무엇인지, 그러한 변화를 추동한 세력은 누구인지 등을 종합적으로 확인할 때, 현 정세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사회운동이 나아갈 바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본고는 반보수전선이 폭발하면서 문재인 정권의 출발점을 형성했던 박근혜 퇴진 투쟁에 대한 검토로부터 시작해서 문재인 정권의 성격에 대한 규정을 거쳐 지난 10여 년간의 대중운동 흐름을 검토한다.
1. 이른바 “촛불혁명”은 무엇을 남겼나
2016년, 새누리당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친박(당시 대통령인 박근혜의 측근)은 집단행동으로 당 비상대책위원회·혁신위원회를 무산시키고, 청와대 정무수석에 친박 핵심 인물인 김재원을 앉혔다. 친박으로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보수 세력은 조선일보를 필두로 청와대 공격에 나섰다. 보수 세력의 내적 쇄신을 도모한 것이었다.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리, 친박 공천개입, 재벌기업의 미르재단 모금 의혹으로 시작된 폭로는 10월 24일 JTBC의 최순실 태블릿 공개로 절정에 달했다. 보수언론은 최순실 국정농단 관련 보도를 쏟아냈다. 박근혜가 90초짜리 사과문을 읊어 녹화방송으로 내보내자, TV조선은 7월에 촬영한 최순실의 얼굴을 공개했다.
대중적인 분노가 일기 시작하자, 조선일보가 제일 먼저 수습 가이드라인(대통령의 2선 후퇴 및 거국 총리 임명)을 제시했고, 중앙일보는 이를 지원했다. 때를 기다리다 국민이 분노할 정보를 쏟아내고, 수습방안까지 던진 것이다. 비박계 역시 “친박 지도부 사퇴”를 압박하고 따로 회동하며 “한 지붕 두 가족”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박근혜가 버티기로 일관하자 보수 세력은 강도를 높여 “질서 있는 퇴진”(11.14.)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는 보수세력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애초 대중의 힘을 빌려 박근혜를 질서 있게 퇴진시키고 혁신된 보수의 재집권을 도모했던 보수 세력의 프로젝트는 JTBC의 최순실 태블릿 공개를 계기로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촛불혁명”으로 전화한다. 흥미로운 것은 보수 세력이 제시한 수습 방안을 둘러싼 야당의 입장이다. 초기에 대권 주자 문재인·안철수는 각각 거국중립내각과 책임총리를 주장했고, 제1야당 대표는 영수 회담을 제안하는 촌극을 보였으며, 퇴진으로 입장을 정리해서는 스스로 조건 없는 퇴진이자 질서 있는 퇴진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두고 안철수는 본인이 먼저 제안한 것이라 강조했고, 문재인은 명예퇴진(사면)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은 2선 후퇴 및 거국내각 구성, 질서 있는 퇴진 등의 시나리오를 모두 거부하고 탄핵과 조기대선을 강하게 요구했고 관철했다. 폭발적 대중 집회를 빠르게 진정시키고 제도정치 일정으로 복귀하려는 여야의 의도를 거부하고 사태를 급진적으로 몰아간 것은 온전히 대중 투쟁이었다.
2016년 12월 9일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었다. 박근혜 퇴진을 기존 정치세력에 맡겨두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직접 결론짓겠다는 대중의 의지가 관철되는 순간이었다. “촛불혁명”이 절정에 달한 것처럼 보였고, 재벌체제 해체, 작업장 민주주의 실현 등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출발점에 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촛불집회는 탄핵소추안 가결을 계기로 빠르게 축소했고, 빈자리를 민주당 대세론이 채웠다. 어느새 민주당이 “촛불혁명”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고, 문재인 대통령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지도자로 표상되었다. 촛불집회 단상에 올라오지도 못할 정도로 대중으로부터 배제되었던 민주당의 화려한 복귀였다.
1) 박근혜 퇴진 촛불의 모순적 성격
탄핵소추안 가결 직전까지 기존 정치세력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박근혜 퇴진 촛불이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급속히 수동적인 민주당 지지로 수렴하게 된 것은 모순적으로 보인다. 박근혜 퇴진 촛불을 분석한 여러 논문은 탄핵소추안 가결 이전의 특징(기존 정치세력을 배제한 직접행동)과 이후의 특징(민주당 재집권으로의 수렴)에 주목해서 각각 “직접민주주의의 발현”과 “대의민주주의의 정상화”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짧은 시기를 두고 나타난 모순적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점은 “촛불혁명”의 성격을 분석하는 데 핵심적인 질문일 수밖에 없다.
대중의 분노를 촉발한 것은 분명 JTBC 보도였다. 물론 이전부터 세월호 참사, 국정교과서 사태, 위안부 문제, 주한미군 사드 배치, 비정규직 보호법, 테러방지법, 고(故)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리 등 여러 사안이 누적되어왔다. 또한 퇴진 촛불 전후로 제기되었던 정유라 입시 비리, 재벌의 정경유착, 정치검찰의 봐주기 수사, 한일협정 밀실추진 등의 이슈가 정세를 더욱 폭발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국 사회에 상수로 존재해왔음을 고려한다면, (이미 전 사회적으로 제기되어 온) 행정부의 막강한 권한(제왕적 대통령제)으로 인한 폐단을 박근혜와 최순실이라는 개인의 “국정농단”으로 전환한 JTBC 보도의 성격에 주목해야 한다.
JTBC의 보도에 따르면, 최순실의 태블릿에는 44개의 대통령 연설문, 국무회의 자료, 청와대 비서진 개편 관련 정보 등이 들어있었다. 이는 박근혜 정권이 보수적인 정책 노선, 실정, 무능을 넘어서 대의민주주의를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대의민주주의 작동의 핵심 절차인 대통령 선거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는데, 대통령 업무의 상당 부분이 법적 근거에 따라 공식화되지 않은 최순실에게 위임되었다는 사실이 대중의 분노를 결정적으로 자극했다. 더불어 최순실이라는 인물의 성격도 영향을 미쳤는데, 최순실을 수식하는 주요한 키워드는 “강남 아줌마”, “사이비”, “무당”이었으며, 여기에 더해 언론이 경쟁적으로 폭로한 “세월호 7시간”과 관련된 각종 사생활(최태민·차은택과의 관계, 진료기록, “길라임” 등) 또한 영향을 미쳤다. 요컨대 박근혜 퇴진 촛불의 대중 이데올로기는 부정·부패에 대한 대중의 분노, 최순실·박근혜 개인에 대한 악마화, 무너진 대의민주주의 회복이었다.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촛불집회가 빠르게 소멸한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인데, 사면을 전제로 하는 질서 있는 퇴진이 아니라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의 이행을 선택한 것은 부정·부패의 화신으로 악마화되었던 최순실·박근혜를 제거하고 대통령제를 회복하는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2) 어쩌다 민주당 재집권으로 끝났나
당연하게도 특정한 정세에서의 대중의 저항과 운동의 전개가 항상 처음 만들어진 프레임에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퇴진 촛불도 마찬가지였는데, 비선실세 최순실의 대의민주주의 훼손이라는 문제는 점차 고(故)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으로 대표되는 사회운동 탄압에 대한 비판, 재벌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 일터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등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이처럼 박근혜 퇴진 촛불의 성격을 JTBC 보도로 대표되는 문제에만 종속시키는 것은 대중을 수동적 존재로만 바라보는 관점이다. 따라서 박근혜 퇴진 촛불의 진행과정에서 대중 이데올로기가 최종적으로 대의민주주의 회복이라는 과제를 넘어서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대중의 저항이 근본적인 사회 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민주당 재집권으로 수렴된 이유는 무엇인지를 해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 쟁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선, 민주당으로 정권을 교체하고 반새누리당 전선을 강화하는 것이 근본적인 사회 개혁이거나 최소한 이를 향한 단계적 과제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문제제기는 잘못된 전제에 입각해 있다. 따라서 현 정세에서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의 성격에 대한 규정이 필요하다. 본고는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은 허구적인 소득주도성장론, 친일청산 등 민족주의적 정서, 반새누리당 정서, 실체가 모호한 “촛불혁명”의 성과에 호소하는 포퓰리즘 정치세력이라고 판단한다.
다음으로 민주당 재집권이 부정적인 결과였다고 한다면, 그러한 결론으로 이어진 과정을 분석해 보아야한다. 왜 박근혜 퇴진 촛불은 JTBC가 제기한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의 성격을 뛰어넘지 못했나?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본고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운동세력의 주체적인 조건에 주목한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 동안 시민운동 및 민중운동 진영 대부분은 반보수전선을 구축해왔다. 중요한 정세적 국면에서 대중운동은 포퓰리즘적 성격을 띠면서 반새누리당이라는 단일한 전선으로 수렴되었고, 그 과정에서 반보수전선의 성격이 반신자유주의에서 반새누리당으로 변화했다. 신자유주의를 추종하며 위기를 심화시켜온 김대중·노무현 정권과 민주당은 복권되었으며, 정치적 성과는 민주당과 민주당의 포퓰리즘 정치에 편승하거나 이를 활용했던 시민운동 진영으로 수렴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박근혜 퇴진 촛불은 민주당 집권 프로젝트의 결말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박근혜 퇴진 촛불의 대중 이데올로기가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넘어설 수 없었던 건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지배적인 경향과 대별되는 대안적 정치세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이 어차피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정해진 결론이었으므로 사회운동의 개입이 무의미했다는 뜻은 아니다. 반대로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민주당 집권이 새누리당 세력의 재집권보다 낫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정세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대안 사회를 향한 실천을 만드는 데 실패한 역사적 과정을 반성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노동자·민중운동이 박근혜 퇴진 촛불 국면에 개입하는 것이 옳았는가, 혹은 어떠한 방식으로 유능하게 개입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핵심을 빗겨간다. 이른바 “촛불혁명”이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간의 운동의 귀결로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면, 지난 10년의 운동을 반성하며 평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이어서 두 가지 쟁점을 구체적으로 검토한다. 먼저 포퓰리즘 비판이라는 관점에서 문재인 정권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민주당을 신자유주의를 지양하는 대안세력으로 볼 수 있는지 검토한다. 다음으로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의 몇 가지 중요한 정세적 계기를 중심으로 대중운동의 흐름을 검토하며 시사점을 도출한다.
2. 문재인 정권의 성격
1) 한국 정치의 현실: 포퓰리즘 정치의 전면화
김대중 정권 이후 본격화된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광범위한 사회위기를 초래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정치세력들은 만성적인 정당성 위기에 처해 있고, 이는 “현직의 위기”로 이어진다. 나도 나쁘지만, 상대방은 더 나쁘다는 차악의 논리가 정치를 지배하며, 부정적 정당화의 과정에서 가장 간편하게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모티브인 부패 스캔들은 일상화된다. 또한 정치 내부의 제도·장치에 대한 불신이 심해지면서, 기존 정치인들과 특권집단을 무능하고 부패한 제1의 적으로 설정하며 기존 정치 외부에서 등장한 강력한 지도자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해진다. 정치에서 이념과 정책의 차별성이 상대화됨에 따라 이념적·정책적 일관성 없이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는 정책이 상황에 따라 선택되며, 정치권력 쟁투 과정에서 개인의 카리스마가 핵심적 수단으로 동원된다.
한국 정치의 현실에 대해 서술한 이상의 내용은 포퓰리즘 등장의 배경인 정치의 위기이면서 동시에 포퓰리즘 정치세력의 특징적인 행태이기도 하다. 경제위기와 정치위기에 따른 대중적 불만에 기초하여 부상하는 포퓰리즘은 정치위기의 징후이면서 동시에 위기를 심화시킨다.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는데, ①대의정치에서 배제된 인민의 존재를 부각하면서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을 환기하지만, 선거를 부정하기보다는 선거제도를 통한 대중의 조작을 추구한다. ②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가와 특권계층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매개로 정치적 응집력을 형성한다. ③보수주의·자유주의·사회주의와 같은 현대 정치 이념과 모두 대립하며, 이념·정책의 일관성을 추구하는 대신 공동체의 조화를 파괴하는 가시적인 적을 만들어냄으로써 원한의 감정을 동원한다. ④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 위기 상황에서 포퓰리즘은 민족국가의 자율성이 제약되고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심화하는 상황을 인식하고 대안적인 발전전략을 추진하는 대신 대중의 불만을 적에 대한 분노로 치환한다. ⑤포퓰리즘 세력의 미디어를 활용한 인기몰이식 정치는 인민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면서 정치위기를 심화시킨다.
2) 문재인 정권과 박근혜 정권은 닮은꼴
문재인은 박근혜를 상징으로 하는 새누리당 세력을 거악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보수 세력을 지양하고 낡은 정치를 바꿀 대안적 지도자로 표상하면서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집권 후에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와 같은 사건이 반복적으로 초래되는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하며 개혁을 공언했던 제왕적 대통령제, 국민의 의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선거제도 개혁을 상대화한다. 민주당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핵심 요소인 법률안 제출권, 예산 편성권, 과도한 인사권 등에 대한 논의 대신, 반대로 대통령 권력을 강화하는 4년 중임제 개헌을 주장했다. 선거제도 개혁 역시 2018년 지방선거의 경우, 기존 거대 정당의 영향력 유지를 위해 새누리당과 같이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각종 위원회와 같은 기구를 통해 대통령 중심 국정 운영을 강화해왔는데, 법무·검찰개혁위원회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로 이어지는 논란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객관적 분석과 이념·노선의 일관성을 무시하고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는 쟁점을 동원하여 사회 문제를 민주/반민주, 특권계층/일반 시민의 대립으로 단순화하는 민주당의 포퓰리즘적 정치 스타일은 문재인 정권 출범 이후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반민주성을 강조하는 자극적인 소재로 “댓글부대” 쟁점을 적극적으로 동원했지만, 집권 이후 민주당도 인터넷으로 여론을 조작해왔음이 드러났다. 박근혜 정권 시기에 민주당은 평화운동에 기회주의적으로 편승하면서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의 사드 배치를 비난했지만, 대선 과정에서는 절차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등 사드 배치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했고, 집권 이후에는 새누리당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방식으로 사드 문제를 처리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선 과정에서 문재인 후보는 2015년 타결된 한일 간 합의를 인정할 수 없으며 자신이 당선된다면 이를 파기하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당선 이후 입장을 바꾸고야 말았다. 즉, 합의가 존재하지만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며, 일본으로부터 받은 10억 엔을 화해치유재단에 사용하지도 않지만 반환하지도 않는다는 모순된 입장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재벌개혁론의 파산을 지적해야 한다. 문재인은 최순실과 연결된 삼성에 대한 대중적 분노에 편승하여 재벌개혁론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집권 후에는 실상 피라미드 지주회사 형태를 묵인하고, 재벌의 경영권 승계를 용인하면서 재벌개혁은 유명무실화되었다.
돌이켜보건대 화려한 수사로 가득했던 문재인의 주장과 달리,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촛불혁명”을 명분으로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을 악마화하고 민주주의를 바로 세울 해결사를 자처했지만, 제왕적 대통령제를 포함한 전반적 정치 개혁이 아니라 제왕적 대통령을 등에 업은 정치권력 유지에 몰두하고 있다.
그나마 문재인 정권이 자신을 개혁의 상징으로 주장할 수 있었던 근거는 최저임금 대폭 인상과 공공부문 일자리 창출을 핵심 수단으로 하는 소득주도성장 전략에 있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권의 소득주도성장 전략은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지만, 실패가 예견된 포퓰리즘 정책이었다. 신자유주의를 지양하고 성장을 담보하는 대안적 경제정책이 아니라 경제학적 근거가 없고 장기적 관점에서 실현 불가능한 정책이기 때문이다. 단기에서도 최저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에 뒤따랐던 최저임금산입범위 개악,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 확대와 같은 노동법 개악은 그 자체로 소득주도성장 전략의 파산을 의미한다. 게다가 최근의 고용침체·경기침체는 소득주도성장 전략이 성장을 이끌어낼 수 없음을 보여준다. 2018년 하반기부터 이미 문재인 정권은 소득주도성장 전략의 핵심 정책이었던 최저임금인상과 비정규직정규직화에서 발을 빼고 있으며, 신산업에 대한 대규모 규제 완화를 통해 재벌기업에 특혜를 주는 “혁신성장”으로 선회하고 있다.
3) 민주당 정권의 성격:
신자유주의 정치 위기를 심화시키는 포퓰리즘 정치세력
박근혜 퇴진 촛불에서부터 문재인 집권 이후까지 돌아볼 때,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은 신자유주의를 지양하는 개혁세력이 아니라 정치위기라는 현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도 그러한 위기를 심화시켜온 포퓰리즘 정치세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는 두 가지 결론을 함축한다. 첫째, 문재인 정권의 개혁의지에 대한 기대에 근거해서 문재인 정권을 진보적인 방향으로 견인하려는 전략은 성공할 수 없으며, 문재인 정권의 개혁의지에 대한 미망은 민주당에 대한 맹목적 지지를 정당화할 뿐이다. 둘째, “촛불혁명의 초심을 잃어버리고 우경화되고 있다”는 식의 문재인 정권 비판은 소득주도성장 전략의 내적 한계를 인식할 수 없게 만든다.
그렇다면 폭발적이었던 촛불의 열망은 어떻게 민주당에 대한 지지로 수렴되었나? 다음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위기의 심화로 인한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불만이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결된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자.
3. 2008년 이후 대중운동 평가:
광우병 촛불부터 박근혜 퇴진 촛불까지
1) 광우병 촛불: 포퓰리즘적 정치 운동과 “반보수전선”의 시작
우선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 동안의 대중운동을 돌아보는 출발점으로써 광우병 촛불을 살펴보자. 2008년 4월 18일 “뼈와 내장을 포함한 30개월 이상, 대부분의 특정 위험 부위를 포함한 30개월 미만”의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는 한미 간 협상이 체결되었다. 4월 29일 PD수첩 <긴급취재,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가 방영되었고, 이를 계기로 광우병 촛불이 촉발되었다. 5월 2일 “미친 소 너나 처먹어라” 촛불집회가 청계광장에서 개최되었는데, 여기에 1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다. 5월 6일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반대 국민대책회의>가 결성되었고, 이후 9차례에 걸쳐 촛불집회 및 국민행동이 개최되었다. 절정에 이르렀던 6월 10일에는 “100만 촛불대행진”이 개최되었는데, “정부가 7대 최소 안전기준을 바탕으로 한 재협상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정권 퇴진 투쟁도 불사할 것”이라는 입장이 천명되었다. 6월 19일 이명박 대통령은 특별기자회견을 통해 사과의 뜻을 밝히는 한편 추가 협상을 통해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민대책회의는 논의를 통해 요구를 확장하면서 투쟁을 이어가고자 했지만, 이명박 정권의 탄압과 맞물려 집회 동력이 점진적으로 감소하며 촛불집회는 종료되었다.
(1) 광우병 촛불 앞에 놓인 두 가지 길
사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된 순간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은 예정되어 있었다. 2007년 4월 한미FTA 협상 타결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은 국제수역사무국(OIE)으로부터 미국이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를 획득하면 미국산 쇠고기를 뼈를 포함하여 전면 수입할 것을 구두로 약속했다. 그 뒤 같은 해 5월 국제수역사무국은 미국에 “광우병 위험 통제국” 지위를 부여했다. 노무현 정권은 임기 말인 2007년 10월 1차 쇠고기 협상에 응했으나 특정위험물질(SRM) 수입을 받아들이지 않고 협상을 결렬시켰다. 이명박 정권은 이를 이어받았을 뿐이다. 노무현 정권이 한미FTA 협상을 이미 타결한 조건에서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 개방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명박 정권의 입장은 한국 경제의 장기적인 침체를 돌파하는 유일한 선택지인 한미FTA를 포기할 수 없어서 쇠고기 수입 개방을 불가피하게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명박 정권이 맺은 쇠고기 협상의 수입 조건이 과도하게 미국에 유리한 것이었는가, 한미FTA라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유능한 협상을 통해서 더 유리한 조건을 얻어낼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분명한 것은 그게 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이 한미FTA에 종속되어 있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광우병 촛불이 그저 광우병에 대한 공포, 검역주권, 반이명박전선에 종속될 것인지, 한미FTA를 매개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구조적 원인을 인식하는 운동으로 나아갈 것인지가 쟁점일 수밖에 없었다.
광우병 촛불은 초기에는 다분히 광우병이라는 질병에 대한 공포와 굴욕적인 외교 협상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명박 정권은 광우병 사태 초기에 촛불의 문제 제기를 홍보 부족으로 인한 국민의 이해 부족, 왜곡·과장보도로 인한 해프닝으로 호도하려 했다. 그러나 촛불집회의 전개 과정에서 대중의 분노는 단지 광우병 공포라는 인터넷 괴담에 그치는 대신 민주주의와 인민주권에 대한 요구로 나아갈 가능성을 보였고, 의료민영화, 공공부문 민영화, 교육문제, 한반도 대운하 등 개발정책의 문제 등으로 확장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정세를 주도했던 세력은 어떤 실천을 했고, 광우병 촛불을 통해 폭발한 대중의 저항은 어떤 결론으로 나가게 되었나?
(2)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목과 노무현 정권의 복권
광범위하게 벌어진 광우병 촛불의 요구와 양상, 참여한 대중의 인식을 단일하게 규정할 수는 없으나, 시작부터 종료까지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공포”와 “반이명박전선”이 강하게 작동하면서 광우병 촛불이 한미FTA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구조적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광우병 촛불이 촉발된 계기가 광우병 쇠고기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PD수첩 방송이었다는 점, 국민대책회의가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반대”를 표방했으며 촛불집회의 일관된 요구 역시 “광우병 수입 관련 재협상”에 머물렀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광우병 촛불의 시작점을 되짚어보자. 2008년 5월 2일 “미친 소 너나 처먹어라”라는 이름의 촛불집회가 열린다. 공식적인 1차 광우병 촛불로 기억되는 이 집회는 사실 처음 열린 집회는 아니었다.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선 투표가 끝난 오후 7시경 다음 카페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가 만들어졌다. 범국민운동본부는 12월 22일부터 이명박 탄핵을 목표로 촛불집회를 주최하여 2008년 4월 26일까지 꾸준히 개최했다. 5월 2일 개최된 “미친 소 너나 처먹어라” 촛불집회 역시 이명박 탄핵을 목표로 범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한 촛불집회였는데, 광우병 촛불이 폭발하면서 사후적으로 “1차 촛불집회”로 명명되었다. 1차 촛불집회 이후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카페는 가입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토론의 장이 되었는데, “쥐새끼” 등 이명박에 대한 조롱과 악마화, 광우병에 대한 공포와 괴담, 그리고 “깃발은 경찰과 충돌하여 탄압의 명분을 얻기 위해 이명박이 심어놓은 스파이”와 같은 음모론으로 조직운동을 공격하는 담론이 유포되기도 했다. 이런 측면을 돌아본다면 범국민운동본부를 비롯한 여러 인터넷 카페들은 노무현-열린우리당의 등장 속에서 직간접적 역할을 했던 집단·개인과 상당한 관련성이 있으며, 이들의 활동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광우병 문제는 한미FTA, 즉 노무현 정권의 정치적 유산과 분리되면서도 반이명박전선을 펼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런데 한미FTA범국본 활동을 통해 한미FTA의 문제를 꾸준히 제기해왔던 여러 사회단체의 입장에서 광우병 촛불의 폭발은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노무현 정권 때부터 한미FTA 문제,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 안전 문제를 제기해왔지만, 대중적 이슈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단체는 처음부터 촛불집회를 주도하지 않았고, <광우병국민대책회의>가 구성된 이후에도 후방 지원의 역할 이상을 하지 않았다. 일부 단체들은 국민대책회의를 통해 촛불집회에 결합하면서 광우병 쇠고기 협상으로 촉발된 정세의 본질적 의미, 즉 한미FTA 문제, 김대중·노무현의 신자유주의 개혁정책과 이명박 대선공약의 연관성 문제, 신자유주의와 국제자유무역 규범 등의 문제를 제기하려 했으나 이는 불가능했다. 광우병 촛불과 국민대책회의의 지배적 흐름은 광우병 문제를 역사적·현실적 맥락이 소거된 “괴담”으로 환원하거나 이명박 개인의 통치 스타일의 문제로 제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대책회의에 결합한 대부분 시민운동단체의 입장이 그러했는데, 단적으로 말하면 촛불집회 국면에서 이명박 정권 들어 새롭게 추진되고 있다고 여겨지는 정책들, 즉 한반도 대운하, 방송개혁, 교육 자율화, 건강보험 민영화, 공공부문 민영화는 괴담이라는 형태로 회자되고 이에 대한 반대 목소리는 쉽게 수용되었지만, 노무현 정권 정책의 연장선에 있는 쟁점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보호법이나 한미FTA 문제는 쉽게 수용되지 않는 암묵적 장벽이 존재했다. 비정규직 보호법 시행 1년을 맞이하여 민주노총과 여러 사회단체가 다양한 사업을 기획했으나 촛불집회 국면과 맞물려 투쟁이 동반 고조되기보다는 오히려 이슈가 묻혔다. 특히 한미FTA 문제는 광우병 문제와 직접 연관된 것이기는 하지만, 국민대책회의에서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와 한미FTA 비준 반대 사이에 여론조사 결과의 괴리가 크다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제기되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이명박 정권의 쇠고기 재협상이 “노무현 정부 설거지”라고 강조했지만, 촛불집회에서 반민주당 주장이 쉽게 제시되지 못하는 암묵적 분위기도 존재했다. 촛불집회의 관심사가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는 제반 정책에 대한 반대로 확장되어 가고, “이명박 퇴진” 구호가 집회에 등장하는 상황에서 국민대책회의에 속한 일부 단체들은 촛불집회를 “쇠고기 재협상”으로 국한하고, 야3당 공조 흐름과 호흡을 맞추려 하기도 했다.
(3) 포퓰리즘적 정치 운동과 “반보수전선”의 시작
광범위한 대중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광우병 촛불은 뚜렷한 성과 없이 종료되었다. 이명박 정권은 한미FTA 협상과 직접적으로 연동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는 강행하는 한편 공기업 민영화, 국민건강보험 민영화처럼 정권의 국내정치적 판단이 작동할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유연성을 보였다. 그러나 곧이어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전개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다시 잡았고, 공기업 선진화 추진계획을 발표하고 영리병원 도입을 시도했으며 한반도 대운하 사업 역시 예정대로 추진했다. 여기에 더해 노동조합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탄압으로 나아가면서 노동자운동은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단기적으로 성과를 남기지 못한 것이 대중운동에 대한 평가의 유일한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한미FTA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인식,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한 비판적 평가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광우병 촛불은 이후의 노동자·민중운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극단적 위험에 대한 공포와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포퓰리즘적 성격을 넘어서지 못한 광우병 촛불은 정당, 시민사회단체, 노동조합 등 모든 정치세력이 반이명박 전선에 결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명박 정권이라는 거악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가로막혔으며 민주당은 한나라당에 맞서는 세력으로 점차 복권되었다. 특히 한미FTA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민주당이 광우병 투쟁을 재결집의 기회로 활용하며 대중을 선동한 것은 기회주의적 행태였다. 이러한 전선은 이후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지방선거에서 반이명박전선의 본격화, 세월호 투쟁, 박근혜 퇴진 촛불까지 이어지며 점차 뚜렷해졌다. 경제위기,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 노동자 단결 확대·강화와 같은 계급적 쟁점 대신 정치사회 쟁점을 중심으로 공동대응이 이루어지면서 범 민주당 세력의 주도성이 강화됐다.
이후 노동자·사회운동은 민주당과 분별되는 운동을 만들기보다, 반이명박전선 구축을 위해 대중운동에 뛰어든 민주당에 편승했다. 국민대책회의의 후신인 민생민주국민회의의 지배적 흐름은 이명박 정권의 공세에 대한 대중적 저항이 조직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방어를 위해서 주체적인 입장에서 민주당을 활용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이른바 “MB악법”을 저지하기 위한 대국회 투쟁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부상했다. 광우병 촛불집회의 열기가 사그라진 후에 이명박 정권의 독주를 막는 길은 국회에서 민주당을 활용해서 각종 MB악법의 통과를 저지하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이후 시민운동 진영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반이명박전선에 도움이 되는가를 기준으로 정세에 선택적으로 개입했는데, 금속노조 파괴 공작, 공무원노조 불법화, 공기업노조에 대한 통제와 엄격한 법 적용, 전임자 임금 지급금지와 복수노조 허용과 같이 노동자운동의 대중적 토대를 제거하기 위한 노조탄압, 그리고 쌍용차 파업 등 경제위기로 인한 구조조정에 대한 대응 등은 상대화했다.
2) 노무현의 죽음과 “민주대연합전선”의 본격화
(1) 광우병 촛불 이후 시민운동 진영의 태도
이명박 정권 출범 초기 참여연대는 시민운동이 극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고 분석하면서 각종 위원회, 주요 각료와 청와대 비서관, 열린우리당 정책 그룹 등으로 노무현 정권에 깊숙이 참여한 것을 반성했었다. 개혁성과 진보성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은 이라크 파병,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인정과 허브기지 제공, 새만금 간척사업의 강행, 기업주 편향적인 노사관계 로드맵, 연금개혁, 재벌규제 해제, 한미FTA 추진 등 실제 보수 세력과 구분되지 않는 정체성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노무현 정부 집권 5년은 민주개혁세력의 분열을 가져왔고, 보수 세력에게는 단결과 영향력 확대를 가져다주었”으며, “시민운동은 보수화되어 가는 노무현 정부와 구분되는 독자적 사회비전을 갖춘 독립적 주체임을 입증하는데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전술했듯 광우병 촛불을 계기로 이러한 반성의 평가는 사라지고 반이명박전선이 모든 쟁점을 압도한다. 게다가 2009년 5월 노무현의 죽음 이후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불가능해졌고, 이명박 정권에 대한 감정적 원한을 매개로 반이명박전선의 포퓰리즘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노무현을 매개로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대한 원한을 강화하는 과정은 노무현의 정치 스타일에 대한 회고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명박의 “불통 정치”와 노무현의 소통을 강조하는 정치 스타일을 비교한다거나,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의 무능을 태안 기름유출사고 당시 노무현과 비교하는 등이 그 사례다. 이러한 경향은 박근혜 정권 시기까지 꾸준히 이어지면서 반보수전선의 성격을 왜곡하는 데 중요한 매개가 되었다.
(2) 노무현 정권 포퓰리즘의 종착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진보정당, 시민운동 진영, 통일운동 진영의 반응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전 의장은 노무현이 “서민후보”였다고 발언했으며, 문성현 민주노동당 전 대표는 “어떻게 보면 우리는 (노무현과) 역할분담을 하는 것이 아닌가도 싶었다”고 발언했다. 참여연대는 “한국 민주주의의 수레바퀴는 ‘바보 노무현’이 흘린 피를 먹고 다시 제정신을 차리고 있으며, 노무현의 죽음은 자신의 부활과 함께 민주 진보에 새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평가하면서, “죽은 노무현은 죽어도 죽지 않게 되었고, 산 이명박은 살아도 죽음만 같지 못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노동자운동 역시 다르지 않았는데, 민주노총은 노무현 사망 후 급히 회의를 소집하고 두 가지 결정을 한다. 임성규 위원장 등 임원이 조문을 하러 가겠다는 것과 장례 기간 중 집회와 투쟁을 자제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5월 말 건설노조의 파업, 6월 서울지역 노동자 총력투쟁대회, 박종태 열사 투쟁과 화물연대 파업 등의 일정 및 투쟁 수위가 조정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노무현 추모식(촛불집회)에 참여하고 함께 거리로 나가자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졌다. 거리에 나선 대중들이 이명박 반대 구호를 외치니 노무현 추모 국면을 반이명박 전선의 확대 계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촛불집회에 모인 이들이 이명박을 반대했던 것은 (노무현 정권의 기조를 그대로 계승한) 이명박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 아니라 이명박 정권이 노무현을 죽였다는 사실에 분노하기 때문이었다.
(3) “민주대연합전선”의 본격화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반보수대연합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된다. 단적으로 참여연대는 광우병 촛불에 대해 “보통 시민들의 자발적 촛불이 진보개혁세력의 결집을 이루게 했다”고 평가하고, “현안과 이슈를 좇아 반대 투쟁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상황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우며”, “진보와 개혁세력, 촛불 항쟁에 나선 세력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와 비전, 정책을 만들어내고 이를 기반으로 중심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에 함께 나서지 않고서는 사회가 더 나빠지는 것을 막아내기도, 각 분야의 작은 개혁을 이뤄내기도 어렵다”고 주장한다. “‘민주정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개혁의 성과를 쌓아올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라고까지 주장하는데, 이른바
“민주 정부 10년”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상대화하고 다시금 민주당을 중심으로 뭉쳐서 반이명박전선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당시 “민주대연합전선”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참여했던 재야 출신 인사들 및 민주당·국민참여당 인사들, 시민운동 및 민중운동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담론화하면서 민주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연합전선을 추동했다. 대체로 김대중 계보, 노무현 계보, 시민운동 진영, 민중운동 진영의 네 개 흐름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①민주통합시민행동. 2009년 9월 창립했다. 주요 인사로 이창복 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이해학 목사, 함세웅 신부, 김종철 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 조성우 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임채정 전 국회의장,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이해찬 전 총리, 한명숙 전 총리, 이병완 전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장, 장영달 전 의원, 안희정 전 의원, 이광재 전 의원 등이 참여했다. ②시민주권모임. 2009년 10월 창립했다. 대표는 이해찬 전 총리였으며, 운영위원에 문재인, 이병완, 김병준, 이강철, 유시민 등 노무현 정부 인사와 안희정 최고위원과 이광재, 김진표, 조영택, 최문순, 서갑원, 이용섭 의원 등 민주당 인사가 참여했다. ③희망과 대안. 2009년 10월 창립했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남윤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박순성 동국대 교수, 백승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회장 등 4명을 공동운영위원장으로,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 이학영 한국YMCA 사무총장, 함세웅 신부, 수경 스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 시민운동 진영과 종교계, 학계 인사 120여 명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했다. ④2010연대. 2009년 11월 창립했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 장대현 한국진보연대 정책위원장, 윤용배 한국진보연대 조직위원장, 안지중 한국진보연대 사무처장, 전성도 전국농민총연맹 사무총장 등 민중운동 인사, 유덕상 민주노총 전 수석부위원장,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남궁현 건설노조연맹 위원장, 최상재 전국언론노조 위원장, 이용식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 김태일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 등 민주노총의 전〮현직 인사들 상당수가 참여했다.
이러한 흐름은 2010년 1월 “5+4회의”(5개 정당: 민주당, 국민참여당,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4개 단체: 이형남 민주통합시민행동 공동상임운영위원장, 황인성 시민주권 소통과연대위원장, 백승헌 희망과대안 공동운영위원장, 박석운 2010연대 운영위원) 결성으로 이어졌다. 테이블은 사실상 민주당의 선거 승리, 국민참여당으로 결집한 친노 세력의 부활을 위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의 종속적 연합을 압박하는 것이었는데, 이같이 노골적으로 진보정치 운동과 민주당 세력과의 연합을 추동한 적은 2010년 이전에는 한 번도 없었다. 진보정당 역시 이런 흐름과 단절하며 정치적 독자성을 견지하는 대신 선거 정당으로서의 생존을 더 중요하게 사고했다. 시민운동 진영은 적극적인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는데, 근저에는 이전 정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으나 이명박 정권 들어 철저하게 배제되었던 시민운동 진영의 생존이라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진보신당이 잠정합의안을 거부하며 탈퇴했고 5+4회의는 최종적으로 결렬되었지만, 야권 후보 단일화 논리가 지배하는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민주노총은 사실상 5+4회의의 잠정합의안에 수렴하는 방향으로 정치방침을 결정했다. 즉 기초의원이나 비례의원의 경우 복수의 진보정당 후보에 대한 추천·지지를 열어두는 방향으로, 그리고 그 외 부문의 경우 양쪽 모두 지지하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민주당 후보인 반이명박연대 후보 지지를 열어두는 방향으로 정치방침을 수정해 나간 것이다. 이런 점을 본다면 민주대연합전선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는데 시민운동 및 통일운동 진영 다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민주노총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잠정합의안을 거부했던 진보신당의 이후 행보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는데, 노회찬 서울시장 후보는 독자 완주를 했고 심상정 경기도지사 후보는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했다. 이 과정에서 한명숙 서울시장 후보가 오세훈 후보에게 불과 2만 6천여 표, 0.6%p 차이로 패하자 사퇴 및 단일화를 하지 않은 노회찬 후보(14만여 표, 3.3% 득표)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어났으며, 일부 당원들은 탈당하기도 했다.
(4) 진보정당 운동의 형해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종말
정권 심판론을 등에 업고 야권단일화 프레임을 밀어붙인 민주당은 예상을 뒤집고 성공을 거두었다. 시민운동 진영은 선거 결과를 “6.2 시민선택”, “제2의 6월 항쟁”으로 명명하면서 평화·민주·복지를 향한 혁명적 진전으로 평가한다. 지방선거가 이명박 정권의 민주주의 역행, 한반도 평화체제 전면 부정, 부동산과 개발 위주 경제정책 대신 민주적 시민권, 한반도 평화와 통일, 보편적 복지를 향한 시민의 선택을 보여주었으며, 이명박에 반대하는 민주대연합전선의 정당성을 입증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다수파를 포함한 이른바 진보진영 역시 비슷한 평가를 하면서 2012년 민주당과의 공동 집권, 공동내각 구상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기도 했다.
되짚어보건대 2010년 지방선거의 민주대연합전선은 진보정당운동의 형해화, 그리고 민주노총 출범과 함께 시작되었던 노동자정치세력화운동의 종말에 있어 중요한 사건이었다.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를 대가로 인천 남동구와 동구 구청장을 얻었으며, 그 외에 울산 북구청과 142석의 지방의회 의석을 얻는 외형상의 선전을 기록했다. 진보신당은 노회찬과 심상정의 상반된 선택과 패배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진보정당으로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지키지도 못했고 여론의 지지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선전과 진보신당의 실패는 모두 민주대연합전선에 종속된 결과였다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불과 몇 년 전 극렬한 갈등과 함께 분당했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일부는 친노세력의 근거지였던 국민참여당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출범시킴으로써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연합으로 수렴된다. 이후 통합진보당은 이른바 “통진당 사태”를 거치며 결과적으로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으로 분리되었고, 통합진보당은 “이석기 내란 선동 사건”으로 강제 해산되었으며, 정의당과 민주당의 연합노선은 더욱 강화된다.
(5) 민주대연합전선의 본격화와 반보수전선의 성격 변화
민주대연합전선의 의미는 서술한 바와 같이 진보정당 운동의 형해화 과정을 통해 실천적으로 확인되었지만, 2010년 지방선거 당시의 쟁점과 정치지형에서도 민주대연합전선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 지방선거의 주요 이슈는 4대강 사업, 무상급식, 집회·시위의 자유(서울광장)라는 쟁점이었는데, 이는 민주당의 입장에서 볼 때 한나라당과는 평행선을 달리는 정치적 소재이지만 진보진영과는 이미 많은 부분 입장을 공유하는 쟁점이었다. 반면 한미FTA, 비정규직 문제, 파병문제, 노동법 개악 등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입장은 동일하지만 민주당과 진보진영 사이에 일말의 공유지반도 없는 이슈들은 지방선거에서 어떤 것도 쟁점화될 수 없었다. 5+4회의 과정에서 국민참여당의 유시민은 끝까지 비정규직 사용제한 사유에 합의하지 않았고, 한명숙이나 다른 야당 후보들도 지역복지를 이야기하면서도 노무현 정권 시기 제정된 노동 악법들과 한미FTA, 파병 등과 관련한 정책전환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다. 한미FTA, 비정규직 문제를 민주당이 거부하여 5+4회의가 난항에 빠질 때마다 시민운동단체들은 적극적으로 중재자를 자임했다. 그러나 중재의 내용은 번번이 민심을 명분으로 민주당을 중심으로 단결하라는 주문이었다.
정리하면, 2010년 지방선거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사이의 사소한 정책적 차이가 극명한 차이인 것처럼 과장된 신자유주의 세력들 간의 네거티브 선거였다. 그 과정에서 시민운동 진영은 “민주대연합을 위한 중재자”를 자임하면서 민주당의 신자유주의적 본질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하거나 면죄부를 부여했고, 4대강 사업 등을 매개로 모든 문제를 이명박 정권의 탓으로 돌리는 민주당의 포퓰리즘 정치를 지지했다. 동시에 민주당과 시민운동 진영, 노동자·민중운동 진영이 합의할 수 있는 주제라고 여겨지는 보편적 복지 이슈가 부상했다. 비슷한 시기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건강보험하나로운동 등이 등장하면서 보편적 복지를 강조하고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를 명분으로 신자유주의적 의료민영화 문제를 우회했던 흐름 역시 같은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보편적 복지 운동을 주창했던 주요 인사 중 상당수는 현재 문재인 정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3) 음모론을 매개로 포퓰리즘 정치 이슈가 된 세월호 투쟁
민주대연합전선에도 불구하고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층”의 뒷받침 아래 박근혜 정권의 주도성이 안정적으로 관철되면서 민주당은 수세적인 상황에 부닥쳐있던 때, 비극적인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상당 부분 규명된 바, 무리한 증축으로 인한 복원성 훼손, 과적과 그에 따른 평형수 부족, 화물 결박 불량, 솔레노이드 밸브 고장 등으로 급격한 변침과 함께 침몰한 것이다. 이 같은 표면적 문제의 이면에는 선주의 탐욕이 존재한다. 20년 가까이 된 노후선박을 사서 무리하게 증축하고, 안전기준을 무시하고 과적을 일삼았으며, 운행을 책임질 선원들도 모두 비정규직으로 고용했다. 그리고 숨겨진 실제 선주인 전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은 이익을 내부거래를 통해 빼냈다. 유병언이 여러 계열사와 투자회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세월호를 소유하면서 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는 점에서 사고에 대한 원청의 책임 문제가 쟁점이 된다. 여기에 더해 선박의 연령 제한을 25년에서 30년으로 늘리고, 과적 및 적재 기준을 완화하고, 선박 검사·수리 기술자를 파견노동자로 쓸 수 있도록 하는 등 광범위한 규제 완화라는 제도적 문제 역시 중요한 쟁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세월호 참사는 오랜 기간 사각지대로 남아있던 연안 해역 운수업의 안전관리 문제, 비정규직·외주화와 관련된 사회 전반의 문제, 자본의 사회적 책임 회피 문제 등 광범위한 사회 구조적 문제가 공론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세월호 참사와 이어진 세월호 투쟁의 결과로 참사의 구조적 원인이 부각되고 “안전사회”를 향한 사회개혁의 단초가 마련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1) 세월호 참사의 원인과 음모론의 등장
세월호 참사 이후 초기 국면부터 각종 의혹과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음모론이 매우 극단적 내용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었고, 사고의 원인이 일정하게 규명되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되면서 진상규명 그 자체를 왜곡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점은 기존의 대형 참사 사례와 비교할 때도 특이한 지점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박근혜와 청와대의 실정이 너무나 심각했다는 것에 기인한다. 사고 이후 많은 승객을 구조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고, 컨트롤 타워가 되어야 할 청와대는 한동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으며, 대통령은 사고 8시간이 지나서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이른바 “세월호 7시간”과 관련한 각종 의혹이 제기되었고, 더불어 세월호 실소유주인 유병언이 구원파라는 교파 교주라는 점 또한 각종 음모론의 토양이 되었다.
의혹과 음모론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제기되었는데, 참사 초기 7시간 박근혜 대통령의 행적과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것이었다. 청와대는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음모론에는 대응할 수 있었지만, 박근혜의 7시간 행적에 대해서는 해명할 수 없었고, 때문에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이라는 세월호 유가족의 요구에 강경한 탄압으로 대응했다. 이것이 비극적 참사에 대한 대중의 슬픔을 분노로 전환했고, 세월호 투쟁이 폭발하게 되었다. 세월호 투쟁이 폭발한 이후에도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은 세월호 인양, <4.16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포함한 진상규명 과정 전반을 매우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따라서 세월호 투쟁이 참사의 진상이 무엇이었는가를 밝히는 데 집중했던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흐름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총체적으로 밝히면서 청해진 해운의 속성이 자본 일반의 속성과 다를 바 없다는 점, 이에 발맞추어 각종 규제를 완화하면서 자본의 이윤 추구를 도와주었던 신자유주의 국가의 작동, 구조 업무라는 공공적 영역의 외주화·사유화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을 중심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또한 박근혜 정권의 의도적 사고 유발과 구조 방기라는 음모론적 인식이 만개하면서 세월호 투쟁이 왜곡되었다. 결국 세월호 투쟁의 대중적 효과는 참사에 대한 슬픔, 무능한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분노, 박근혜·유병언·구원파·선장 등 관련 인사에 대한 악마화로 귀결되었고, 진상규명 요구가 각종 음모론과 복잡하게 뒤엉키면서 침몰의 객관적 원인은 물론 대형사고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분석은 주변화되었다.
그 결과 세월호 투쟁은 민주당 세력이 주도하는 반박근혜 전선을 강화하는 정치적 효과를 발생시켰으며, 사태의 전개가 보여주다시피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퇴진 투쟁에서 박근혜를 거악으로 규정하는 핵심 소재가 되었다. 어떤 과정을 거쳐 이렇게 되었나? 현재까지 마무리되지 않은 투쟁이라는 점에서 완결적으로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세월호 투쟁의 직간접적 주체였던 민주당과 시민사회운동 진영이 세월호 참사와 투쟁에 개입한 양상을 통해서 사태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세월호 투쟁에 대한 민주당의 기만적 태도
5월 16일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문재인은 “세월호는 또 하나의 광주”라고 발언하면서 세월호 참사를 1980년 광주학살과 동일시했다. 이러한 주장은 세월호 참사가 박근혜 정권의 의도적 학살이라는 관점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치적 규정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박근혜 정권과 전두환 정권을 유비하면서 독재정권 대 민주화운동이라는 구도를 다시금 환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형사고를 정치적 사건과 유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비약이고 세월호 참사는 물론 광주민중항쟁의 본질 양자를 모두 왜곡하는 것이다. 또한 세월호 사고의 원인은 신자유주의하에서 이루어진 무차별적 규제 완화와 자본의 탐욕이었고, 참사로 이어진 것은 박근혜 정권의 무능과 실정이었다는 점에서 독재정권과 민주화운동이라는 구도 역시 허구적이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은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대변한다는 명분으로 박근혜 정권을 공격함으로써 7월 30일 재보궐선거에서 반등을 꾀했다. 그러나 정작 선거 패배 이후에는 유가족대책위와 상의도 없이 새누리당과 손을 잡고 세월호특별법에 합의했다. 급작스러운 여야 합의안 발표 이후 유가족들의 새정치민주연합 당사 점거 농성, 각계 인사들의 성명 발표, 야당 내 반발 등이 이어졌고, 새정치연합은 며칠 만에 재협상으로 입장을 변경한다. 이후 문재인은 “세월호 유족이 목숨을 걸고 이루고자 하는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한다. 거기에 고통이 요구된다면 그 고통을 우리가 짊어져야 한다”고 발언하면서 8월 19일 37일째 단식투쟁을 벌이던 유가족과의 동조 단식에 돌입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새정치민주연합은 대외적으로는 유가족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된 특별법이 통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세 차례에 걸쳐 새누리당과 합의하면서 특별법을 축소·왜곡한다. 결국 9월 30일 여야 간 합의된 특별법은 7월 30일 합의안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수사권·기소권을 보장하지 않는 것이었다. 박근혜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쟁점이었던 박근혜의 7시간 행적에 대해 끈질기게 문제제기하고 “구조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면서도 세월호 투쟁의 향방에 있어 핵심적 쟁점이었던 특별법 제정 문제는 상대화했다. 이후에도 새정치민주연합은 특조위 강제 종료 국면에서 특별법 개정을 공식적으로 약속하고서도 이를 외면했으며, 기업주의 사고 책임 회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입법 청원 되었으나 19대 국회에서 논의하지도 않고 폐기했다.
(3) 체계화된 음모론, 의도된 유포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이라는 문제를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한 과정으로 보기보다 새누리당과의 권력 쟁투 수단으로 사고했다. 음모론은 침몰 원인을 규명하고, 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진단하는데 장애가 되었지만, 음모론의 만개는 박근혜와 새누리당을 악마화하고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실제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 세력을 중심으로 각종 음모론이 유포되었다. 대표적인 친노·친문 인사이자 무책임한 음모론 신봉자인 김어준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그날, 바다>는 각종 음모론 중 가장 완성도 높은 판본으로서 상징적이다. 영화는 AIS(선박이 항해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자동적으로 발신하는 장치) 자료를 바탕으로 정부가 발표한 항적이 조작되었으며, 해저에 앵커(닻)를 내리는 방식으로 세월호가 고의 침몰당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영화가 개봉될 당시 이미 항적 조작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 앵커를 내려 침몰시켰다는 가설은 비현실적이며 상당한 반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었다. 결정적으로 인양된 세월호 선체 내부에서 앵커 내림 장치에 밧줄과 쇠줄이 모두 감겨 있었으며, 선수 좌현 앵커 출입구에서 찌그러진 흔적도 나오지 않았다.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거짓된 음모론이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4주기에 맞춰 개봉된 <그날, 바다>는 다큐멘터리영화로서 드물게 54만 명이 관람하면서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음모론이 가진 파괴력을 보여주었다.
민주당은 음모론 유포의 직접적 당사자였다. 일례로 영화 개봉 당시 민주당 이재명 경기도지사 예비후보는 시사회에 참석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짜 원인, 그 어두운 진실의 단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라며 홍보했으며, 송영길 의원은 인터뷰를 통해 “다큐멘터리에서 지적한 것처럼 AIS 항적도가 왜 이렇게 차이 나고 조작되고 이걸 숨기려 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밝혀져야 한다”, “국정원과 세월호가 어떤 관계였는지 밝혀져야 한다”며 음모론을 옹호했다. 조승래 의원, 정청래 의원, 허태정 대전광역시장 예비후보(현 대전광역시장) 등도 홍보 대열에 참여했다. 심지어 당시 민주당 세월호특별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전해철 의원까지 “세월호의 진실을 찾고, 보다 안전한 대한민국,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나가자는 그날의 다짐들을 오랫동안 함께 기억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홍보했다. 그러나 사건의 원인을 단순하고 직접적인 사건이나 인물에서 찾으려는 음모론은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참사의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과 대립한다. 따라서 음모론은 포퓰리즘 정치를 강화할 뿐 세월호의 진실을 찾고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세월호 투쟁의 전개 과정
2014년 5월 22일 618개 단체가 참여하는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가 출범했다. 이후 2015년 6월 28일 국민대책회의 참여단체, <4.16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를 포함하는 연대체인 <4.16연대 – 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가 출범하여 “세월호 참사의 비극을 끝까지 잊지 않고 진실이 밝혀지는 그 날까지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4.16연대 규약 전문)는 뜻을 밝힌다. 국민대책회의-4.16연대 활동의 성과로 2015년 8월 4일부터 2016년 9월 30일까지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1기 특조위)가 활동했다. 세월호 인양 시점을 기한 2017년 3월 28일부터 2018년 8월 6일까지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가 활동했다. 현재는 2018년 3월 출범한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2기 특조위)가 활동 중이다.
국민대책회의와 4.16연대는 세월호 투쟁 전반을 이끌었고 특별법 제정과 특조위 출범·활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특조위와 선체조사위를 규정하는 특별법의 내용, 그리고 특조위와 선체조사위의 구성 등이 세월호 투쟁의 핵심 의제였다는 점에서 특조위와 선체조사위는 세월호 투쟁의 향방을 둘러싼 정치적 공간이었다. 또한, 국민대책회의와 4.16연대가 특조위와 선체조사위를 위한 특별법 제정과 특조위·선체조사위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두 기구가 국민대책회의와 4.16연대의 활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특별법에 따른 국가기구로서 특조위와 선체조사위는 세월호 투쟁의 직접적인 주체는 아니지만, 간접적인 주체라고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는 국민대책회의-4.16연대 활동과 특조위-선체조사위 활동을 중심으로 세월호 투쟁의 흐름을 대략 검토한다.
국민대책회의는 세월호 투쟁의 대중적 확산을 위한 제반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한편, 특별법 제정, 국정조사 대응, 특조위 활동 보장 등을 매개로 진상규명에 힘썼다. 또한 존엄안전위원회를 두어 구조적 맥락에서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규명하고, 기업의 책임을 부각하며 실소유주 처벌 등을 통해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고, 박근혜 정부의 안전 대책을 비판하는 등 안전사회 이슈화를 위한 활동도 병행했다. 그런데 진상조사 방해, 유가족 비난, 특조위 저지 등 정권의 공세와 세월호 참사를 박근혜 정권에 대한 공격의 소재로 활용하는 민주당의 행태 등으로 세월호 참사가 정치화되면서 국민대책회의 활동 역시 진상규명 중심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또한 진상규명 과정에서 온갖 의혹들이 검증되지 않은 채 제기되었고, 이는 각종 음모론의 토대를 이뤘다.
물론 구조적 원인을 밝히고 대형참사를 예방하기 위한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국민대책회의 내 존엄안전위원회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안전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에 동의지반이 있었다. 그러나 존엄안전위원회의 활동은 결과적으로는 “청와대”보다는 “청해진 해운”에, “구조 방기”보다는 “침몰 원인”에, “외력설” 보다는 과적 등 “내인설”에, “정치적 책임”보다는 “제도적 대안”에 초점을 두고 있었고, 이 활동은 점차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의제에 비해 주변화되었다.
국민대책회의에서 4.16연대로 연대체가 전환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 심해졌다. 활동가들은 물론 유가족들도 존엄안전위원회(4.16연대로 전환된 후에는 안전사회위원회) 활동에 점차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각종 토론회 등에서 (자본의 탐욕, 해경의 무능이 문제가 아니라) 청와대가 “안 구한 것”이 문제라는 식의 발언이 공공연해졌다. 안전사회를 위한 과적 규제 활동, 해양안전시스템의 보완 등은 요구로만 다뤄졌을 뿐 실제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생명과 안전, 노동과 시민의 안전”이라는 화두로 노동자운동과의 연대가 시도되었지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초안 마련과 두 차례의 살인기업 선정식 공동 진행 외에는 특별한 시도도 진척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결국 2016년 살인기업 선정식을 끝으로 세월호 투쟁과 “안전사회”라는 요구는 분리되었다. 안전사회위원회는 해소되었으며 안전사회위원회 산하에 있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연대>는 독자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간다.
(5) 수렁에 빠진 “진상규명”
이러한 흐름은 특조위와 선체조사위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1기 특조위는 진상규명, 보상 및 지원 대책, 안전사회 세 가지 요구를 동시에 제기하는 것으로 구성되었지만, 세월호 투쟁이 정치화된 상황에서 특조위는 진상규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청와대는 특조위 활동을 저지하는 데 정치적 역량을 집중했고, 야권과 대책위는 “세월호 7시간” 규명과 함께 “감추려는 자, 범인”이라고 주장하며 반격했다. 특조위에서 세월호 참사의 객관적·구조적 원인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구성원 대다수는 국가폭력의 형태로 박근혜 정권의 책임을 물으려는 방식으로 진상규명에 접근했다.
결과적으로 1기 특조위는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세월호 인양 이후 선체 조사, 미수습자 수습 등을 위해 선체조사위가 출범했고, 진상규명 과제는 세월호가 인양된 이후 출범한 선체조사위가 넘겨받게 된다. 그러나 선체조사위는 침몰 원인을 밝히지 못한 채 2개의 결론을 병기하는 최종보고서를 채택한다. 인양한 세월호 선체 조사, 외부조사기관에 의뢰한 실험 등에 근거해 솔레노이드 밸브 고장 등 기존 조사를 보완한 “내인설”이 유력하게 제시되었으나, 유가족이 추천한 권영빈 상임위원의 반대로 외력에 의한 침몰을 배제할 수 없다는 이른바 “열린설”이 동시에 주장된 것이다. 그러나 내인설은 세월호의 도입부터 사고 순간까지 전 과정울 전후 인과관계를 갖는 일련의 시나리오로 정리했지만, 열린설은 수중물체가 가한 외력의 가능성만 제기할 뿐 외력을 실제 침몰의 합리적 원인으로 입증하지 못하고 외력의 실체에 대해서도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등 어떤 시나리오도 내놓지 못한다. 그뿐만 아니라 내인설의 핵심 내용은 마린과 브룩스벨 등 외부조사기관의 판단과 거의 일치하는 반면 열린설의 핵심 내용은 외부조사기관의 판단과 상당부분 배치된다.
이러한 최종보고서 결과와 관련해서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기획단 외부 집필진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철도, 항공사고 등이 발생했을 때 국가가 사고조사를 하더라도 100% 확실한 원인을 다 찾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못 밝혀내는 부분들이 생기지만,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 주어진 시간과 자원으로 최선의 설명을 내어놓아야 한다. 공식적으로 확인할 것은 확인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사회적 교훈을 얻고, 제도, 법, 교육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6) 광우병, 민주대연합전선, 세월호 투쟁, 박근혜 퇴진 촛불
세월호 7시간은 박근혜 퇴진 촛불의 핵심적인 의제가 되었다. 세월호 투쟁의 전개 과정 역시 박근혜 퇴진 촛불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하다. 세월호 투쟁은 박근혜 정부의 극단적 무능에서 촉발되긴 했으나. “세월호 7시간”을 매개로 박근혜를 악마화하는 흐름이 강화되고 각종 음모론이 만개하면서, 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진단하고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러한 세월호 운동의 지형은 범 민주당 세력이 주도하는 반박근혜전선을 강화하는 데 일조했다. 노동자·민중운동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구조적으로 규명하고 재발방지대책을 세우는 책임 있는 정치세력으로서 나서기는커녕,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운동의 지지자에 가까웠다. 노동자·민중운동의 이념적 기반이 붕괴한 상태에서 이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퇴진 촛불의 폭발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그 방식은 박근혜 정권이 안전사회를 위협하는 여러 구조적 문제를 만들었으며, 세월호 사고와 같은 비극을 초래하게끔 여러 규제를 완화했고, 구조에 무능했음을 지적하는 대신, 세월호 참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참사였다는 음모론적 인식, 구조 실패가 아니라 의도적인 구조 방기·거부로 인한 참사라는 의혹에 집중되는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광우병 촛불, 이어진 노무현의 죽음과 민주대연합전선의 등장, 세월호 투쟁, 박근혜 퇴진 촛불은 포퓰리즘 정치를 바탕으로 한 민주당 재집권이라는 일관된 맥락에 놓이게 되었다.
4. “반보수전선”의 시대, 사회운동이 나아갈 길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노사모와 시민운동 진영은 일치단결하여 <탄핵무효·민주수호·부패정치청산 범국민행동>을 결성했고, 탄핵 무효를 주장하는 촛불집회가 연일 개최되었다. 시민운동 진영은 탄핵 반대 집회를 “제2의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고 “민주주의 파괴 세력 심판”, “부패 정치 척결”을 기치로 밤낮으로 노력했다. 민중운동 진영은 범국민행동 참가 여부를 놓고 양분되었다. 민중연대 소속 단체 상당수가 범국민행동에 참가하고 민중연대 간부들도 “개인 자격으로” 참가했다. 민중연대는 어떠한 내부적 합의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민주노총은 탄핵은 무효라며 노무현 지지 입장을 담은 성명을 냈다가 이를 철회하고 보수·부패 정치 청산이라는 입장을 담은 새로운 성명을 내는 촌극을 벌였다. 민주노총은 범국민행동에 참가했다. 비정규직 확대, 노동운동 탄압, 한미FTA 추진 등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 개혁이 극에 달했던 때였고, 바로 직전 해 두산중공업 고(故) 배달호, 한진중공업 고(故) 김주익 열사가 노동 탄압에 저항하며 목숨을 끊었던 때였다. 노무현 정권은 이라크전쟁 지원·파병을 결정했고, 파병반대국민행동이 결성되어 반전평화운동을 벌이던 때였다.
문재인 집권 3년 차를 맞이하는 2019년은 15년 전과 여러모로 닮았다. 국민경선과 노사모가 흔드는 노란 손수건을 앞세운 노무현 정권의 등장은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를 여는 신호로 간주되었다. 시민운동 진영은 김대중 정권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뒤로하고 16대 대선을 “12.19 선거 혁명”으로 찬양하며 다시 한 번 노무현의 진보성·개혁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의 신자유주의적·포퓰리즘적 본질이 드러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정치세력이라는 의미에서 동일한 한나라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네거티브적 쟁점으로 극한의 대립을 이어갔고 이는 노무현 탄핵소추안 가결이라는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
지금과 유비해 볼 수 있다. 문재인 정권은 2017년 박근혜 퇴진 촛불을 통해 극적으로 등장해 “촛불혁명”의 계승자를 자임했다. 시민운동 진영은 문재인 정권의 진보성과 개혁성에 대한 기대로 가득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득주도성장 전략은 파산했고, 노동법 개악이 추진되면서 문재인 정권의 본질이 드러나고 있다. 격렬하지만 공허한 현재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대립은 과거 새정치민주연합과 한나라당의 대립을 보는 것 같다.
달라진 것은 사회운동의 상황이다. 노무현 정권 시기에는 최소한 반신자유주의전선이라는 문제의식이 존재했고, 한미FTA 반대 투쟁, 이라크 파병 반대 투쟁과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 노동법 개악과 노조탄압에 맞서는 대중적인 연대투쟁이 실질적 의미를 가지고 전개되었다. 내부의 이견이 있을지언정 민중연대라는 반신자유주의 연대체가 존재했고, 범국민행동 참가 여부를 쟁점으로 논쟁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10년을 거치는 동안 반신자유주의 연합은 민주주의 연합으로 대체되었고, 소위 “민주대연합전선”은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연합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되었다.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권 출범 초기부터 소득주도성장 전략을 추종하고 경사노위 참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정권의 하위 파트너를 자임했다. 심지어 탄력근로제부터 파업권을 제한하는 노조법 개악까지 민주노총이 결사반대하는 사안들이 정권 주도로 경사노위에서 논의되는 상황에서도 민주노총 집행부는 경사노위 참여를 밀어붙였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이러한 상황은 문재인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보수 세력에 맞선다는 기본 정세인식이 민주노총 집행부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시민운동 진영과 통일운동진영이 주도하는 반이명박·반박근혜 투쟁 10년을 거치면서 반신자유주의라는 문제의식은 사실상 소멸했고, 민주/반민주라는 구도 아래 민주당의 정치적 입장과 사실상 수렴하는 방향으로 반보수전선의 성격이 퇴행한 것이다.
왜곡된 반보수전선을 넘어 대안 사회를 향한 이념의 복원으로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남는다. 현재 노동자·민중운동에 놓인 선택지는 사실상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퇴진 촛불의 잔열이 남아있던 문재인 정권 초기의 기대감은 상당 부분 사라졌고, 최저임금인상을 핵심으로 하는 소득주도성장 전략은 자본주의 구조적 위기라는 객관적 현실 앞에서 그 허구성이 드러났다. 그러나 시민운동 진영은 문재인 정권에 대한 지지를 넘어 정부 구성에 깊숙이 개입하며 화학적으로 결합했고, 어떤 정치세력도 민주당이 아닌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적 이념이 설 자리는 사실상 소멸했다. 문재인 정권이 초심을 찾아서 소득주도성장 전략을 더 잘하는 것을 촉구하고 기대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막다른 길에 몰려 선택한 차악이 당장의 위기를 피하는 방법이 될 수는 있어도,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될 또 다른 막다른 골목을 피할 방법이 될 수는 없다.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는 것은 이제까지 잘못된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역사를 통해 배우고 자신의 실천을 반성하며 평가해야 한다. 차악을 선택하는 대신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은 어렵고 오래 걸리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위기를 넘어설 수 없다. 애초 박근혜 정권의 등장 그 자체가 새누리당-민주당 양자의 총체적 무능함에 따른 퇴행적 결과였다는 점에서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총체적 위기 상태의 한국 사회를 구원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대안 사회를 향한 이념과 운동을 재건하는 것뿐이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 국민행동 기록기념위원회>가 발간한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의 기록』은 박근혜 퇴진 촛불이 민주주의의 실험실이었고 축제의 장이었으며, 박근혜 정권을 권좌에서 끌어내림으로써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촛불 항쟁의 기억을 안고 사회 대개혁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시민혁명을 완수하자는 과제를 밝힌다. 그러나 긴 글에서 밝혔다시피 민주당 재집권이라는 정치적 결론으로 수렴된 박근혜 퇴진 촛불이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펼쳤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촛불 항쟁의 기억을 안고 사회 대개혁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는 반보수전선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의 위기를 인식하는 비판적 사회인식의 복원과 대안적 운동의 건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