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수십 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킨 지 74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후 펼쳐진, 전 세계적인 핵 개발 경쟁의 신호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정치가들은 핵을 정치적 위협의 수단으로 삼아왔습니다.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공식 핵보유국 5개국)이 자국의 핵 프로그램에 지출해 온 돈을 합치면 대략 10조 달러 가량입니다. 이는 세계 다른 나라들의 수십 년 간의 예산을 합친 것에 필적합니다. 정치가들은 핵무기 개발·실험은 자국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핵무기 개발과 실험의 희생자가 된 것은 바로 그 시민들입니다! 현재 이러한 핵실험 피해자들의 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자들의 수에 육박할 만큼 늘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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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도 그러한 사례입니다. 핵무기용 플루토늄은 1940년대 중반 소련에서 최초로 생산되었습니다. 우랄 지방의 비밀 핵 도시, 첼랴빈스크-40의 마야크(Mayak) 핵 생산 시설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역주: 첼랴빈스크-40은 오늘날의 오조르스크 시다. 소련 핵무기 프로그램의 탄생지, 마야크 핵 시설을 위해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설립된 도시다. 그 존재 자체가 비밀로 붙여지고 주민의 유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폐쇄 도시였다. 현재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능가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심하게 피폭된 지역 중 하나로 추정되어 ‘지구의 무덤’으로 불린다. 그러나 여전히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마야크 시설의 핵무기용 플루토늄 생산은 1987년 중단되었으나, 여전히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공장으로 가동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주위 주민의 건강과 생활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극비리에 진행되었습니다. 방사성 액체 폐기물이 데차 강에 버려졌지만, 이 사실은 지역 주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조상들이 수 천 년 동안 해온 것처럼, 소련 주민들과 가축들은 피폭 당한 강물을 마시고, 강에서 수영하고 낚시를 했습니다. 치명적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들이 사실상 소련 핵무기의 첫 희생자였습니다. 비밀 핵 시설에서는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고 방사능 물질이 대기와 강으로 유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정보는 국가 기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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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사고는 1957년 9월 29일에 있었습니다. [역주: 키시팀 사고(Kyshtym disaster)를 가리킨다. 사고가 일어난 첼랴빈스크-40이 당시 비밀 도시였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도시인 키시팀의 이름을 빌렸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고의 뒤를 이은, 역사상 3번째 수준의 핵 관련 사고로 추정되나 소련 정부의 은폐로 냉전 종식 이후에야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마야크 플루토늄 생산 시설에서 액체 고준위 폐기물 저장 탱크가 폭발하여, 2천만 퀴리(방사성 핵종의 방사능을 나타내는 특수 단위. 기호는 Ci.)의 방사능이 대기에 퍼졌습니다. 그 결과 2만 제곱킬로미터 이상이 오염되었습니다. 군인들과 어린 학생들이 사고로 인한 오염 수습에 투입되었습니다. 안전 기준이 준수되지 않아, 그들 중 상당수가 생명에 치명적인 수준으로 피폭되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약 250개의 거주지가 이전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등록된 민간인 수만 50만 명 이상이며 이는 사고 수습에 투입된 군인들을 포함하지 않은 수입니다. 소련 시민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핵무기로 인해 우랄 지역의 소련 시민들이 수천 명 이상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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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가 처음 개발된 이래 수많은 핵 실험이 있었습니다. 소련은 비행기로 소련 영토 안에 40킬로톤(핵폭탄의 위력을 나타낼 때 쓰는 에너지의 단위. 참고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위력은 13킬로톤 정도였다.)의 핵폭탄을 투하하는 핵 실험을 1954년 9월 14일 시행했습니다. 4만 5천 여 명의 군인과 만 여 명의 지역 주민이 이 실험에 피폭 당했습니다. 피폭으로 인한 건강 문제는 이들의 자식 세대에까지 이어졌습니다.
소련에서는 핵무기의 개발과 생산을 위해 10개의 비밀 핵 도시를 비롯한 인프라 투자들이 막대하게 이뤄졌습니다. 이후, 군사적 핵 프로그램에 들어간 엄청난 비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부 당국은 10개의 ‘민간 핵 도시’를 추가로 건설하고 그곳들에 핵발전소를 배치했습니다. 이에 따라 오로지 핵 관련 산업 밖에 존재하지 않는 20개의 도시에 150만 명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는 전체 인구의 1%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국가 엘리트로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냉전이 종식된 뒤, 이들은 해외에 핵 관련 인프라를 건설하고 핵 기술을 수출하기 위한 로비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얼핏 보면 긍정적인 기술 협력으로, 군사적 대결의 대안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핀란드를 포함해 유럽·아시아·아프리카 각지에 지어졌거나 건설 계획 중인 핵발전소에 들어가는 러시아 VVER-1200 원자로는, 러시아 핵 잠수함과 핵발전소에서 사용한 핵연료를 재처리한 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이를 통해 러시아가 설계한 핵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자동으로 러시아 군사프로그램에 투자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내막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또한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는 방사성 액체 폐기물을 발생시킵니다. 이 방사성 액체 폐기물(연간 최대 2백만 세제곱미터)은 자연으로 배출되어 강과 함께 북극해와 북유럽으로 이동합니다. 그래서 북유럽의 다음 세대 주민들은 식탁에서 생선과 해산물의 형태로 방사성 물질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들에 살고 있지만, 핵무기의 잠재적인 새 희생자들입니다.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 핵 기술은 절대 ‘위험하고 군사적인 용도’와 ‘안전하고 평화적인 용도’로 나눠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저는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직후에 방사능 오염 지역을 방문한 연구팀의 일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후쿠시마에 버금가는 참극이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에는 수십만 명의 핵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이제 더는 새로운 희생자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핵무기와 핵발전소가 없는 평화로운 미래로 함께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
2015년 이후로 영국 노동당은 유럽 중도좌파와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당은 선거결과나 조직의 측면에서 쇠퇴를 경험했으나, 처음부터 낡은 화석이라고 조롱을 받았던 코빈 지도부 하에서 악전고투 속에 전진하고 있다. 같은 기간 동안 프랑스나 독일의 자매 정당은 전례가 없는 저점을 향하며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노동당은 당원이 극적으로 증가하여 서유럽에서 최대 정당으로 등극했다. 노동당 지도자 제레미 코빈은 현재 차기 브리튼 총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코빈의 프로젝트는 수많은 장애물에 직면해 있고, 어쩌면 이를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브렉시트는 모든 정치의 영역을 혼란 속으로 밀어넣었고 노동당은 다음 선거에서 의회 다수를 달성하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연립정부의 파트너로서 가능성이 있는 자유민주당이나 스코틀랜드민족당(SNP)은 코빈 프로젝트를 멸종시키고자 할 수 있다.
이 글은 코빈 하에서 노동당의 내부적 변형이 얼마나 이뤄졌는지 검토할 것인데, 이는 노동당이 광범위한 성공을 거두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당 내에서 얼마나 득점을 했나? 코빈 지도부는 브리튼 미디어나 브렉시트라는 도전에 어떻게 대처했나?
아웃사이더
2015년 여름, 토리당(보수당)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후, 세 가지 요인이 상황을 변화시켰다. 첫째, (이를 정량적으로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데이비드 캐머런과 조지 오스본의 긴축정책에 대한 분노가 높아졌는데 특히 경제적으로 취약한 청년층에서 그러했다. 이는 그리스와 스페인의 ‘광장운동’, 오큐파이라는 바람을 따라잡으며, 위기에 대한 더 급진적이고 평등주의적 해결책을 생각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둘째, 에드 밀리반드가 노동당 지도부를 선출하는 방식을 개혁하려고 했는데, 이는 정당 엘리트에게 극적인 자살골이 되었다.
노동조합 유나이트는 지지하는 후보의 선출을 위해 노력해왔는데, 밀리반드는 당과 노동조합의 연계에 관한 보고서를 의뢰했다. <콜린스 보고서>는 노동조합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여러 조치를 촉구했는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선거인단에서 노동조합이 1/3의 투표 지분을 철회하라는 조치도 포함되었다. 유나이트의 사무총장 렌 맥클루스키는 노동당 의회 대표의 역할 변화와 교환하여 이를 수용했다. 어떤 후보자도 원내노동당(PLP, Parliamentary Labour Party) 15%에 의해 지명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외하면, 노동당 의원들은 더 이상 지도부를 선출할 때 수문장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으로 노동당 지도부는 1인 1표로 선출되었다. 블레어주의 분파는 비당원도 3파운드의 돈을 내고 지지자로 등록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미국식 오픈 프라이머리 모델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제레미 코빈이 부상할 수 있는 조직적 전제조건이 구축되었다.
마지막으로 2015년 지도부 경선은 노동당 기득권층의 다면적인 취약성에 기인한 바 크다. 2015년 총선에서 밀리반드의 완패(캐머런 보수당의 330석 대 밀리반드 노동당 232석) 후, 당원, 지지자, 노동조합 모두 방향 변화를 요구했다. 스코틀랜드에서 노동당은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얻었는데, SNP는 독립과 긴축반대를 결합해서 완승을 거두었다.
2015년 지도부 선출방식은 코빈의 강점을 부각시켰다. 그는 열혈 웅변가는 아니었지만, 편안하게 연설을 했고, 참가자의 질문을 받았다. 그의 세련되지 않은 처신은 오히려 그의 자산이 되었다. 그의 캠페인은 비전통적 방식, 즉 대규모 공중집회, 소셜 미디어에 의존했다. 예상치 못하게도, 그는 거대 노동조합의 일부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유나이트 집행부는 코빈을 선호했다. 유니슨의 지지는 더 예상 밖이었는데, 지도부의 전술적 판단에 기인한 것이었다. 유니슨 지도부는 재선거를 앞두고 조합 내 좌파 활동가와 적대적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으려 했다.)
뜨거운 시험대에 오르다
코빈 지도부의 첫 단계는 2015년 9월부터 시작되어 2017년 선거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언론, 노동당의 상근관리, 노동당 의원 다수는 코빈을 불법적인 권력찬탈자로 간주했다. 코빈이 자신의 적수를 그림자 내각에 제안하기로 한 결정은 그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전술적 판단이었다. 2015년 코빈의 위치가 매우 취약해서 그는 시리아 공습에 대해 그의 프론트 벤치 팀[영국 하원에서 앞쪽 좌석에 앉는 내각이나 그림자 내각]에게 자유투표하라고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우스사이드(Southside)라고 불리는 빅토리아에 위치한 노동당 본부는 당 관리를 200명 이상 고용하고 있으나, 그에 비하여 지도부 사무실은 매우 소규모다. 즉 지도부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사우스사이드에 비해 매우 불균형적이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은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전 준비기간 동안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에 큰 차이로 우위를 지켰다. 국민투표 캠페인 동안, 코빈은 노동당이 ‘영국의 비판적 잔류’(critical Remain) 입장을 취하도록 이끌었고, 데이비드 캐머런이 주도하는 공식적 캠페인, ‘잔류할 때 더 강한 영국’(Stronger In)에 참여하라는 압력에 저항했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에서 노동당이 보수당과 공동으로 캠페인을 펼쳤지만,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얻었다는 점에서 볼 때, 코빈의 거부는 원칙적으로 올바랐고 합리적인 정치였다. 노동당의 ‘잔류하고 개혁하자’(Remain and Reform)는 구호는 기본적으로 모호성이 존재했다. 한편으로 ‘유럽연합에 남고 유럽연합의 성격을 변화시키기 위해 다른 국가 정부와 협력하자’는 의미일 수 있다. (코빈은 그리스에 대한 유럽연합의 잔혹한 조치를 비판했다.) 그러나 그 슬로건은 더 제한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유럽연합에 남아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을 수행함으로써 유럽연합 규칙의 한계를 시험하자는 것이다.
노동당 지도부는 이러한 메시지를 가지고 상황을 뚫고 나가기 위해 투쟁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첫째, 언론은 캐머런과 보리스 존슨이 주도하는 보수주의 분파 라이벌 간 논쟁에 집중했고, 노동당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잔류하자는 투표는 기능적으로 현상유지를 선호한다는 의미이므로, 코빈이 지난 해 노동당 선거 캠페인으로 분출된 봉기적 에너지에 다가가기를 어렵게 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어려움은 당 내부 적대자들이 지속적으로 코빈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점이다. 노동당 우파는 잔류 측이 편안히 승리를 거두리라 예상하면서, 국민투표 캠페인을 분파적 목적을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고, 코빈의 노선이 실제로는 유럽연합을 떠나자는 주장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지각변동
국민투표는 의회가 요새화되면서 은폐되었던 정치의 균열을 드러냈다. 산업이 몰락하고 경제침체를 겪고 있는 지역(미드랜즈, 웨일스, 잉글랜드 북부)은 전통적으로 노동당이 강세를 보였지만, 떠나자고 표를 던졌다. 원내정당에 존재하는 코빈의 적수들은 그가 ‘교묘하게 국민투표 캠페인을 사보타지했다’고 주장하면서, 지도부 교체를 주장했다. 자세히 검증해보면, 이민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기를 코빈이 거부했다는 것이 핵심적인 혐의였다. 즉 그들이 보기에 코빈은 너무 국제주의자였다. 그림자 내각의 10여 명이 사임했고, 노동당 의원들은 172 대 40으로 코빈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통과시켰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러한 사임은 코빈에게 축복이 되었고, 그는 자신의 그림자 내각 팀을 재조직했고, 더 젊은 의원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극도로 파괴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코빈이 사임을 거부하자 적수들은 지도부 경선이라는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노동당 전국집행위원회(NEC)의 노동조합 대표 중 다수가 코빈을 지지했다. (유나이트와 유니슨 양자 모두 코빈의 재선출 캠페인을 지지했다. GMB와 USDAW는 코빈의 상대편 오언 스미스를 지지했다.) 지도부를 교체하려는 시도는 코빈 지지자들을 격분시켰다. 62: 38이 최종 결과였다. 하지만 그의 적수들이 사용한 초토화 전술은 노동당의 공적 위상에 거대한 피해를 입혔다.
2016-7년 겨울, 노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끔직하게 하락했다. 코빈의 당내 적대자들은 지도부가 곧 내려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톰 왓슨은 자유민주당이 ‘브렉시트 거부자’라며 비난했으며, 노동당이 브리튼 인민의 민주적 의지를 결코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2017년 2월, 리스본 조약 50조를 발동시키기 위한 의회 투표 이후, 노동당의 추카 우무나, 웨스 스티어링은 유럽연합을 떠나라는 분명한 선택을 민주주의자로서 준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기간 동안 노동당 우파는 코빈이 이른바 ‘하드 브렉시트’를 포용하려 하지 않는다고 반복적으로 공격했다. [하드 브렉시트란 영국이 EU를 탈퇴함에 있어 EU와 무역, 관세, 노동 정책 등 전분야에 걸쳐 맺었던 모든 동맹관계를 모두 정리하고 탈퇴하는 방식. 일정한 분담금을 내면서 단일시장 접근권만은 유지하는 ‘노르웨이 모델’ 같은 ‘소프트 브렉시트’가 아니라 완전한 분리를 뜻하는 것이다.] 2017년 초반, 코빈은 여전히 이주자가 너무 많다고 말하기를 거부했지만, 영국이 유럽연합을 떠날 때, 소프트 랜딩을 보장하는 최선의 길이라면, (법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사실상의 현상유지를 지지하겠다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러나 이민 문제에 관한 코빈의 모호한 입장은 그의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분수령이 된 선거
2017년 4월 테레사 메이는 조기선거를 요청했다. 보수당 지지율이 평균 18.5% 더 높았다. (이는 전 영국독립당(UKIP)의 지지가 쏠린 것이었다.) 가디언의 칼럼니스트들은 코빈의 사퇴를 주장했다. 선거결과는 정치평론가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노동당 지지율은 30%에서 40%로 상승했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노동당의 상승이지, 보수당의 약화가 아니었다. 메이의 42% 득표율은 1987년 이후 보수당의 최고성적이었고, 평범한 상황이라면 편안하게 의회 다수파를 구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당이 13석을 상실했으므로, 북아일랜드의 극우 민주연합당에 의존해야 했다.
코빈의 선거전략 중 중핵은 사회민주적 정책에 대한 선언이었다. 즉 ‘다수를 위하여, 소수가 아니라’(For the Many, Not the Few). 이러한 선언은 정치적 관심사를 유럽연합과 영국의 관계라는 문제로부터 돌려놓았으며, ‘소프트 브렉시트’를 강조했다. 맨처스터 폭탄 테러에 대한 코빈의 대응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테러와의 전쟁’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고,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위한 전쟁이 실패했고, 세계를 더 위험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설은 여론에 반향을 일으켰고 비판적 토론을 위한 공간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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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화
선거에서 코빈이 이룬 성취는 2019년 초반까지 이어진 공고화를 위한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그의 그림자 내각은 더 응집력 있고 지지도가 높은 팀으로 새롭게 구성되었다. (일반적인 패턴과 달리) 노동당의 프론트 라인 의원은 뒤에 앉아 있는 의원보다 더 좌파였다. 그렇지만 그림자 내각이 통일적으로 코빈파는 아니었고, 31명 중 오직 7명만이 캠페인 그룹(Campaign Group, 오랜 역사를 지닌 노동당의 좌파 코커스)에 속했다.
246명의 의원 중에서 152명은 2010년 이후에 의회에 입성한 사람들이며, 원내 노동당 중에는 이제 훨씬 더 젊고, 노동조합이나 지방정부라는 배경을 지닌 사람이 늘었다. 그렇지만 오직 19명만이 캠페인 그룹에 속하며, 이는 원내 노동당의 8%에 불과하다. 2015년, 2017년에 선출된 92명 중에서 오직 10명만이 좌파 코커스에 참가했다.
노동당 우파는 분파적 행동을 조정하는 여러 조직적 기구가 있다. 피터 만델슨이 이끄는 프로그레스(Progress)로부터, 덩치가 큰 브라운파 트리뷴(Tribune)에 이르기까지. 톰 왓슨은 퓨처 브리튼 그룹(Future Britain Group)을 결성함으로써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80명의 의원을 모았는데, 이는 원내 노동당의 1/3이다. 그렇지만, 토니 벤의 표현을 빌자면, 노동당 의원의 다수는 이정표라기보다는 풍향계다. 즉 바람에 따라 움직인다.
노동당 활동가들은 지구당이 의원 후보자를 다시 선택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요구를 부활시켰다. 이러한 요구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는데, ‘공개선택’(open selection)이다. 2018년 노동당 대회는 이 문제를 피했다. 대회에서는 이 쟁점을 두고 당원과 노동조합 대표단 간 날카로운 대립이 발생했다. (유나이트의 간부는 노동당의 목표 선거구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를 지명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활동했다.) 퇴색된 수정안은 현직 의원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더 용이하게 했지만, 지구당은 현직에 도전하는 네거티브 캠페인을 해야만 한다. (보수당의 절차는 더 단순하다. 지구당 집행부는 언제라도 현직 의원이 공식 후보로 재신청하도록 요구할 수 있으며, 이때 비밀투표가 적용된다.) 만약 당 활동가들이 투표가 발표되었을 때 발생하는 소동을 감당할 의지가 없다면, 원내 노동당의 정치적 색깔은 대체로 자기영속적일 것이다.
이에 반해, 코빈은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으며 전국집행위원회와 당 기구에서 점진적으로 힘을 얻었다. 39석으로 구성되는 전국집행위원회는 상이한 기관의 담당자로 구성되는데, 그 중 네 자리는 노동당 그림자 내각에 배당된다. 지구당에는 9명의 대표가 배당된다. 2018년 9월, 코빈에 친화적인 명부가 직접 선출되는 9개의 자리를 모두 차지했다. 그래서 39개 중 21개가 좌파의 편에 들어왔다. 노동당과 제휴하는 노동조합은 전국집행위원회에서 최대의 단일집단이며, 당대회 대표단의 50%를 차지한다. 여기서 유나이트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유나이티드 레프트(The United Left)라는 분파는 유나이트 집행부을 지배하며, 사무총장으로서 맥클루스키의 위치는 확고해 보인다. 사우스사이드에서는 유나이트의 제니 폼비가 사무총장이 되었다. 처음으로 노동당 본부가 코빈 지도부에 기본적 지원을 하게 되었다.
운동으로서의 정당?
노동당 당원은 새로운 지도부 하에서 극적으로 증가했다. 20만 명 미만에서 5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고, 정당의 재정상태가 건전했졌다. 코빈 지지자 중 가장 중요한 기구는 모멘텀(Momentum)으로, 벤 지지파였던 존 랜즈맨이 2015년 지도부 경선 당시 구성했다. 모멘텀은 현재 4만 명 이상의 회원을 지니고 있고, 이는 <노동당 민주주의를 위한 캠페인>, <노동당 대표위원회>, <붉은 노동당>과 같은 전통적인 노동당 좌파 기구를 훨씬 능가한다. 랜즈맨과 여타 지도자들은 새로운 조직이 당 내부 분파처럼 작동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운동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가를 두고 토론을 진행했다. 그 결과는 두 가지의 혼합이었다. 모멘텀은 고도로 전문적인 캠페인 기구로 등장했고, 당 내부 선거에서 좌파 명부에 대한 지지를 효과적으로 동원했다. (비록 명부가 작성되는 과정에서 거대한 논쟁이 촉발되기는 했지만.)
동시에 2016년 이후로 모멘텀은 ‘사상의 페스티벌’을 제도화했는데, 노동당 대회와 시기가 일치하는 ‘세계를 변혁하자’(The World Transformed)이다. 2-3일간 브리튼과 국제좌파의 연사를 세우고, 정치적 토론을 진행한다. 이는 노동당의 전통적 문화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요구에 답하려는 노력이다. 더비, 브리스톨, 사우스햄튼 등 도시에서 지역별 행사도 진행되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기존 좌익 네트워크, 즉 <사회주의를 향한 캠페인>, <웨일즈 노동당 풀뿌리>는 모멘텀의 지역 지부가 되기로 했다. 전반적으로 코빈 지도부는 스코틀랜드 정치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미 2015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1석을 제외하고는 모든 의석을 잃었다. 코빈 지지자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2014년 이후 스코틀랜드민족당이나 독립을 지지하는 좌파정당에 가입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스코틀랜드는 24% 차이로 유럽연합 잔류를 선택했는데, 노동당은 탈퇴 투표를 수용해야 했으며, SNP는 잔류를 지지하는 캠페인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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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브렉시트 위기에서 노동당이 채택한 전술적 방책은 계속 변화했다. 그렇지만 그 기저에는 일련의 원칙이 존재했다. 노동당의 브렉시트 전략을 정확히 이해하면 어떻게 브리튼의 정치시스템이 현재 상태로 도달했는지 알 수 있다. 노동당의 투표 기반은 잔류와 탈퇴를 두고 대략 2:1로 나뉘어 있다. 노동당이 당선된 선거구는 2:1의 비율로 탈퇴에 더 많이 투표했다. 즉 149개의 노동당 당선 지역구가 탈퇴에 투표했고, 83개 지역구가 잔류에 투표했다. 선거캠페인 동안 여론조사에서 잔류 투표자의 다수는 국민투표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를 탈퇴 유권자와 합치면, 68%가 (비록 미지근하더라도) 브리튼의 유럽연합 탈퇴를 지지하는 셈이다. 노동당 투표자의 오직 8%만이 노동당을 선택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브렉시트를 꼽았다.
‘강경 잔류파’(Hard Remainers)는 브렉시트가 재앙을 낳을 것이므로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도 대향해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럽연합을 탈퇴한다는 생각 그 자체는 정치적으로 쉽게 규정할 수 없었고, 그 결과는 이행 방식에 의존했다. 2016년에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동맹은 ‘강경’ 노선과 ‘온건’ 노선으로 구성되었다. 강경 탈퇴파와 온건 탈퇴파 사이의 틈을 벌리는 것은 좋은 전략이었고, 그 최종 결과는 노르웨이가 누리는 상태와 비슷한 것이었다. 즉 유럽연합을 탈퇴한다는 유권자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일상의 혼란을 줄이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노선에서 협상은 아일랜드 국경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만약 노동당이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중화하면 국내 정치의제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할 수 있었다. 이는 반복되는 국민투표보다는 분명히 바람직했을 것이다. 국민투표가 반복되면 잔류파와 탈퇴파 간 파괴적 양극화를 연장하고 아마도 탈퇴파의 두 번째 승리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2017년 선거는 코빈의 권위를 대단히 강화했지만, 노동당은 의회의 수렁 속으로 들어갔다. 메이는 조기선거라는 모험을 감행했으며, 그녀가 원하는 조건으로 브렉시트 합의를 협상할 수 있도록 다수파를 획득하고자 했다. 노동당은 그녀의 모험을 실패로 돌아가게 했다. 이제 그것이 너무 강경하다거나 온건하다고 생각하는 보수당의 반대세력은 모든 협상안을 부결시킬 수 있었다. 메이가 민주연합당에 의존한 사실도 불확실성을 높였다. 민주연합당은 탈퇴를 지지했지만, 그들의 최우선 관심사는 북아일랜드와 브리튼의 분리를 막는 것이었다.
메이를 위해 가장 현실적인 코스는 기대를 낮추고 제1야당에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러나 메이는 ‘노딜이 나쁜 협상보다 낫다’라는 슬로건을 제시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 노동당의 브렉시트 강령에서 가장 큰 결점은 대자본이 관여해서 자신의 전통적인 정당(보수당)에 어떤 규율을 부여할 것이라는 암묵적 가정이었다. 하지만 브리튼의 자본가는 더 실용적인 접근법을 위해 어떤 술책을 부릴 능력이나 의지가 없었다. 2018년 여름, 메이는 이른바 백서 협상안(Chequer’s deal)을 중심으로 보수당의 단결을 꾀하려고 했으나, 강경파인 유럽연구그룹(ERG)은 그녀의 안을 조롱했고 보리스 존슨은 이에 항의하며 내각에서 사직했다. ERG는 최소한 100명의 의원을 동원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유럽연합 지도자들은 그녀의 청사진을 거부했다.
반면, 반(反)브렉시트 진영은 또다른 국민투표를 밀어붙이기 위해 노력했다. 피터 만델슨, 앨라스태어 캠벨과 같은 블레어 지지파들이 인민투표(People’s Vote, PV) 캠페인의 지도부를 장악했다. PV 지도부는 냉소적인 최대주의적 노선을 채택했는데, 노동당 지도부가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다. 그들은 코빈 홀로 원내 노동당에 브렉시트에 친화적인 노선을 강제했다는 잘못된 생각을 불어넣었다. 만약 코빈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두 번째 국민투표가 가능했다고 주장한 셈이다.
이러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톰 왓슨이나 추카 우무나와 같은 코빈의 내부 적대자들은 지도부를 잠식하기 위한 최선의 판단이라고 간주하면서 ‘강경 잔류파’ 노선을 채택했다. 그들은 국민투표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는 그 이전 입장을 파쇄기 속에 집어 넣었다. 2018년 여름 노동당 대회는 타협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상이한 분파들의 관점을 종합해 균형을 맞추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즉 ‘모든 옵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데, 여기에는 메이의 협상안이 부결된 후 노동당이 총선을 강제할 수 없다면 ‘대중투표(public vote)를 위한 캠페인을 전개한다’는 옵션도 포함되었다.
난파
2018년 11월, 유럽이사회(회원국 정상회의)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협상담당 마이클 배니어와 메이가 타결했던 탈퇴합의를 지지했다. 메이의 마지막 안은 ERG가 보기에는 백서 계획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끝이 언제인지 정해지지 않은 이행기간 동안 유럽사법재판소의 관장을 받아야 하며, 백스톱(안전장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탈퇴할 여지가 없었다. [백스톱이란 영국이 유럽연합(EU)를 탈퇴한 후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와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의 국경이 강화(하드보더·hard border)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한 조항이다. 양측의 자유로운 왕래와 통관을 보장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영국 전체를 EU 관세 동맹에 잔류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다.] 메이는 2019년까지 투표를 연기했다. 2019년 1월, 양 극단에 있는 토리 의원들은 민주연합당과 야당에 합류하여 전례가 없는 부결을 야기했다. (202대 432.) 코빈은 불신임안을 제기했으나, 민주연합당은 메이를 지지해서 불신임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2019년 2월 노동당 지도부는 더 구체적이며 달성 가능한 일련의 요구를 제출했다. 이는 ‘단일시장과 긴밀히 제휴’하기 위해 유럽연합과 ‘영구적이고 포괄적인 범UK 차원의 관세동맹’을 체결하며, ‘권리와 보호라는 측면에서 역동적으로 제휴함으로써 영국의 표준이 최소기준으로서의 유럽의 표준과 보조를 맞추어 변화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연합 관리는 코빈의 계획과 협력할 수 있다고 암시했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당 지도부는 브렉시트를 중단시키기 위해 싸우라는 강한 압력에 직면했다. 더 완강한 강경 잔류파의 도전은 자유민주당, 녹색당, SNP, 웨일스민족당(웨일스 독립 지지)로부터 나왔다. 코빈은 마지막 수단으로서 두 번째 국민투표라는 아이디어를 열어두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 이는 노동당이 소프트 브렉시트를 옹호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2019년 3월, 메이가 협상안을 통과시키려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도가 286 대 344로 실패를 거두었다. 의원들은 상이한 옵션을 두고 일련의 ‘의향 투표’를 진행했다. 코빈은 세 가지 안에 대해 찬성하라고 독려했다. 즉 △의회가 승인한 어떤 안이든가 ‘확정 대중투표’(confirmatory public vote)를 진행하자는 옵션, △유럽연합과의 관세동맹, △단일시장/관세동맹안(‘노르웨이 플러스’라고 불렸다). 하지만 노딜 브렉시트를 예방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50조 발동을 철회하도록 정부에 위임한다는 안에 대해서는 기권하라고 독려했다. 의회에서 어떤 안도 다수를 얻지 못했다. 의원들은 노딜에 반대하여 투표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어떤 구체적 대안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 메이는 브렉시트 과정을 연장하도록 요청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유럽이사회는 새로운 브렉시트 데드라인을 2019년 10월 31일로 연장하기로 타협했다. 이는 UK가 5월 23일 유럽의회 선거에 참가한다는 의미였다.
브렉시트 문제는 코빈 프로젝트의 중핵이었던 국내 개혁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을 소진시켰다. 노동당은 브렉시트에 대한 타협안을 제시할 때 불편한 처지였다. 노르웨이 플러스가 메이의 합의안보다 더 선호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를 강하게 옹호한다면 이 안이 현상유지를 거의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코빈의 정책에 대한 끊임없는 내부의 공격은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
이러한 압력은 유럽선거에서 노동당에 반하는 결과를 낳았다. 투표권자의 37%만이 참여했는데, 선거에 참가한 사람만이 브렉시트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표출할 수 있었다. 탈퇴 지지파는 나이젤 패라지[영국독립당 출신 정치인]이 이끄는 새로운 브렉시트 당으로 이끌려갔는데, 그들은 30.5%의 득표율을 얻었다. 잔류파는 자유민주당과(거의 20%의 지지를 얻었다), 녹색당(12%에 조금 못 미쳤다)을 지지했다. 코빈의 소프트 브렉시트 안과 국내 정치문제로 관심을 돌리려는 노력은 아무런 견인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노동당은 3등을 했으나, 13.6%의 지지를 얻었을 뿐이다. 그 다음 날 메이는 사직을 발표했다.
노동당이 두 번째 국민투표를 지지하라는 요구는 더욱 강해졌다. 왓슨은 두 번째 국민투표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도 엄격하게 잔류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빈의 동맹자, 존 맥도넬, 다이안 애보트는 전략의 변화를 선호했다. 노동당의 프론트 벤치 는 두 번째 국민투표에 강경하게 반대했으나, 맥클루스키는 강경 잔류파로 돌연 이동했고, 스테판 키녹이나 루스 스미스와 같은 코빈의 적대자들도 두번째 국민투표가 민족주의 우파에세 선물을 주는 독약과 같은 생각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소프트 브렉시트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곧 두번째 국민투표가 더 달성되기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양자 모두 주된 장애물은 보수당과 의회에서의 세력관계다. 또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고 하더라도,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다. 동지와 적 모두, 선거에서 참패를 면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바람직하지도 않고 달성하기 더 용이하지도 않은 목표를 채택하라고 촉구하는 형국이다.
2019년 7월, 코빈은 노딜이나 보수당의 협상안에 대한 다른 대안이 없다면, 노동당이 유럽연합에 남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다른 한편, 브렉시트 데드라인 이전에 노동당이 정부를 구성한다면, 노동당 자신의 패키지로 협상을 벌일 것이며, 합의안과 잔류 두 가지 안을 두고 투표에 붙이겠다고도 말했다. 이러한 새로운 노선은 작동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코빈의 내부 적수들이 이를 허용할 것이냐는 것이다.
미래들
이러한 봉쇄상태에서 의사결정이 보수당의 기층 당원에게 이전되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점점 감소하고 있으며, 심지어 반동적인 집단으로 브렉시트 문제에 외골수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이 영국의 차기 총리로 보리스 존슨을 선택했다.
새로운 지도자는 가을에 조기총선을 선택하여, 나이젤 패러지(브렉시트당)와 의석을 나누기 위한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다른 옵션은 노딜이라는 위협을 가하면서, 메이의 패키지를 약간 변경하여 브뤼셀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이다. 이럴 경우, 브렉시트 입법이 통과하려면 10월 31일을 지나 아마도 6개월은 연장되어야 하며, 이행기간은 몇 년으로 연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존슨은 2020년 봄에 브렉시트가 공식적으로 달성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다양한 요인이 이러한 아젠다를 좌초시킬 수 있다. 의회 내에서의 날카로운 대립, 아일랜드 정치 문제, 총리 자신의 무능력한 집행 등. 토리 반대파들이 불신임안 반대에 동참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 속에서 노딜 안을 의회에 제출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는 조기총선에서 강경 브렉시트 연합을 달성하는 길을 창출하는 간접적인 경로다. 4-5개의 경쟁정당에다가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민족주의자들이 존재하므로, ‘상대적 다수 대표제’[소선거구제에서 최다득표자 1인이 당선되는 방식]는 좋게 말하면 변덕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무질서하다. 만약 존슨의 도박이 분명한 다수파 연합을 형성하지 못한다면, 민족연립정부를 수립하자는 왓슨의 주장이 작동할 수도 있다. 코빈이 1936년의 램지 맥도널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는 매우 어렵다.
만약 노동당이 코빈 지도부 하에서 정부를 구성하지 못한다면, 이데올로기적 퇴각을 요구하는 압력이 강해질 것이다. 코빈 배후에서 동맹을 형성했던 집단(노동조합, 당원, 의원)은 해체될 것이다. 그렇지만 코빈이 총리가 되는 데 성공한다면 여러 가능성이 존재한다. 현재 의회 내 세력관계를 예측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지만, 의회 내 노동당이 더 크게 다수파를 모을수록 사보타지에 대응하기 용이할 것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코빈 지도부가 보수당의 저항에 의해 황급히 퇴각하게 되는 시나리오다. 이는 그리스의 시리자와 유사한 경우다. 최근 수십 년간 동안 이와 같은 사례가 매우 많았다. 더 희망적인 예측은 현대의 매우 희귀한 사례로 개혁주의(개량주의) 정당이 실제로 개혁을 수행하는 것이다. 반(反)노동조합 법률들을 폐지하고, 공공소유를 확대하고, 더 진보적인 조세체계를 도입하는 등. 대처, 블레어로부터 캐머런, 메이, 존슨에 이르는 한 세대의 우파 헤게모니 이후, 사회민주주의의 부활한 판본은 (그 개혁이 아무리 협소했던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케인지안의 전성기의 개혁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1960-70년대 좌익을 움직였던 사상으로 ‘혁명적 개혁주의(개량주의)’다. 그 당시 좌익세력은 가장 성공한 노르딕 모델에서조차 사회민주주의적 규칙의 한계를 인식했고, 랄프 밀리반드, 안드레 고르, 니코스 플란차스와 같은 사상가들이 그러한 사상을 제기했다. 개혁은 전후 사민주의 정부를 넘어서는 것으로, 자본주의 권력의 뿌리에 실제적 일격을 가하고, 국가기구 내부에서 위기를 유발하며, 보수파 블록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대중동원에 의존한다. 이러한 사상은 토니 벤을 지지하는 좌파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로부터 코빈과 맥노넬이 등장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가장 낮아 보인다.
세 번째는 고사하고, 두 번째 시나리오를 실현하는 것도 노동당이 모든 장벽에 직면하게 할 것이다. (재무부, 영국은행, 내무부, 국방부, M15 등.) 몇몇 분산된 사례를 제외하면 노동조합은 한 세대 동안 주눅이 들었고, 노동당 노선의 오래된 악령이 남아 있으며, 코빈 배후에 있는 행동주의는 사회 전체로 확산되지 않았다. 만약 코빈이 다음 총선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가공할 만한 장애물을 타개하며 자신의 길을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끝>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성사되도록 애쓰신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영국 핵군축캠페인(CND;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CND는 작년에 60주년을 맞았습니다. CND는 1958년 창립한 이래로 수십 년 간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저항 행동을 다양하게 조직해 온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운동과 협력하면서, 우리는 영국과 세계의 정부들이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PTBT; Partial Test Ban Treaty), 핵확산방지조약(NPT;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과 같은 중대한 합의에 이르게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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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영국 정부는 트라이던트(Trident) 미사일 시스템(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과 핵탄두, 핵잠수함)의 현대화 계획을 통과시켰습니다. 핵무기 반대 운동가이자 CND 부의장을 역임하기도 한 제러미 코빈이 당 대표를 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1야당인 영국 노동당은 이 트라이던트 현대화에 찬성하는 당론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국 정부는 핵무기금지조약(TPNW) 채택을 위한 협상을 보이콧하면서, 이 조약에 반대하기 위해 미국이 조직한 기자회견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묵과할 수 없습니다. CND는 이 문제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높이면서, 영국 정부와 모든 정당이 핵무기에 대해 입장을 새로, 제대로 정립할 때까지, 즉 일방적 군축 정책으로 선회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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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D는 다양한 지역별 모임으로 구성된 풀뿌리 운동입니다. 그 중에는 특정 분야를 대표하는 모임도 있습니다. 한 예가 CND 기독교도 모임입니다. 이들은 최근에 개빈 윌리엄슨 전 국방장관이 기획한,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사를 규탄하는 행동을 조직했습니다. 그 행사는 영국의 핵무기 시스템 보유 50주년을 기념하는, 국가 차원의 추수감사절 행사였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 장소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렸고, 윌리엄 왕자(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손자)가 여기에 참석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만 명을 죽일 수 있는 무기의 도입을 ‘축하’했습니다. CND 기독교도 모임의 주도로, 수백 명이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고 죽은 사람처럼 길 위에 드러누웠습니다(‘die-in’ protest. 참가자들이 죽은 것처럼 시뮬레이션하는 항의 형태를 말한다).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희생자들을 기리는 행동이었습니다. 많은 언론들이 이 날의 광경을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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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9월)에 영국에서 열리는 DSEI(Defence and Security Equipment International은 영국 국방부와 국제통상부, 국방보안기구, 항공방위보안협회의 후원으로 격년 개최되는 영국 최대 규모의 무기 박람회다)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무기 박람회 중 하나입니다. DSEI에는 1600개 이상의 무기 생산업체가 참가하여 저격용 무기에서 탱크까지, 온갖 범위의 무기를 전시합니다. 이들은 심각한 인권 유린을 벌여온 나라들에 무기를 판매합니다. 이 박람회에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정권들의 대표들이 초대받았습니다. 또한 전기 충격기, 고문 장비, 집속탄(cluster bombs. 한 개의 폭탄 속에 또 다른 폭탄이 들어가 있는 폭탄을 말하며, 넓은 지형에서 다수의 인명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대표적 비인도적 무기)과 같이, 그 극악무도함 때문에 영국 국내에서 판매가 금지된 무기들이 DSEI에서 판매된 전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위법 행위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는 DSEI를 계속 후원하고 있습니다.
CND는 무기거래반대캠페인(CAAT; Campaign Against Arms Trade. 국제 무기 거래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영국 기반의 캠페인 조직. 1974년에 여러 평화운동 단체들의 연대체로 시작했다.)을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과 함께, 올해 9월 4일에 ‘반핵의 날’(No Nuclear Day) 집회를 공동 주최할 것입니다. 이는 DSEI에 맞서 2주간 이어지는 ‘무기 박람회 저지 행동 주간’의 일환입니다.
12월에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29개 회원 국가로 구성된 집단적 군사동맹 기구. 1949년 냉전 체제 하에서 소련 및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응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회원국 수장들이 런던에 모일 예정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참석할 것입니다. NATO 정상회의는 트럼프가 추구하는 핵 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조직하고, ‘핵 동맹으로서 NATO’의 기능이 강화되는 것은 국제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CND는 영국 및 국제 평화운동과 협력하여 런던에서 NATO 정상회의에 대응하는 시위를 조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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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위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시민행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1958년 첫 CND 모임에는 무려 5000명이 참가했지만, 현재 모임에서 제 또래 청년들을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고, 냉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세대에게 핵전쟁의 위협은 요원해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핵 전쟁 준비 태세와 이란과의 관계 악화, 그리고 핵무기는 영국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신임 총리(보수당의 보리스 존슨)의 태도는 점점 더 깊은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이 역사를 공부하고 평화 운동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시위가 마치 매주 으레 열리는 행사처럼 여겨지고, CND 로고(평화 기호. Peace symbol)가 패션 브랜드에 의해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핵전쟁의 위협은 지나간 시대의 문제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우리는 할 일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의 에너지를 모아내야 하고, 베테랑 활동가들의 전략적 통찰력, 지식, 경험을 그들에게 전수하여 이를 새 세대의 역량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융통성 있는 접근 방식을 마련하고, 차이를 긍정하며,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CND 런던 지부는 청년 조직화라는 과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우리 조직의 구조를 단순화하고, 디지털 활용 기술을 가진 회원을 모집하며, 창조적인 워크숍과 대규모 캠페인을 통해 우리의 행사에 새로운 이들을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더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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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저는 잉글랜드 북부의 한 마을, 배로우-인-퍼네스를 방문했습니다. 바로 영국의 핵 미사일이 장착되는 뱅가드급(Vanguard class) 잠수함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현재 세계 4위 군수기업인 BAE 시스템스는 이 지역의 주요한 고용주이고, 사실상 이 마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을 곳곳의 공공서비스에서 BAE Systems 로고를 발견할 때마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영국 정부가 학교 시스템을 바꿔버려, 기업들은 이제 단순히 학교에 자금 ‘후원’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업 교재까지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군수기업이 후원하는 학교에서, 11세 어린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중 무기를 디자인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들의 목록 써오기’ 같은 교재로 수업 받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전쟁과 무기는 정상적인 것이고, 사회에서 용인되는 요소이며, 일자리를 창출하고, 우리는 어떠한 충돌에도 군사적으로 대응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배우게 됩니다. 현 시스템에서 이런 식의 교육은 크게 문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군사주의적 편견을 유포하는 교육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끝없는 전쟁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야 하고, 청소년들이 다양한 정보와 관점을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자주 학교 학생들, 청소년들과 함께 일하는데, 그러면서 이들과의 대화가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영향력을 느낍니다. CND의 교육 프로그램에는 해마다 영국 전역의 수 천 명의 학생들이 참여합니다. 우리의 평화교육 담당자들과 자원활동가들은 학교를 찾아가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교사들을 위한 교육을 하기도 하고, 모든 연령이 사용할 수 있는 교실 교육활동 패키지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핵무기와 평화 문제에 대한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이 이러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합니다.
교육에 들인 노력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가족 전체가 이러한 토론에 참여하고 동의지반을 공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핵무기 철폐가 일자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부모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노동조합은 이러한 상황에서 트라이던트 반대와 같이 평화를 위한 투쟁과, 군수기업의 업종 전환을 통한 일자리 유지 둘 다를 요구할 수 있는 조직입니다. 2017년, 영국노총(Trade Union Congress)은 노동당에 국가 산업 전략의 차원에서 군수사업의 업종 전환 문제를 다루는 기관을 설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트라이던트를 폐기해야 하는 근거는 분명합니다. 자녀 세대가 핵 전쟁으로 절멸할 위험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무기 현대화에 들어갈 2050억 파운드를 아껴 이 예산을 모두를 위한 교육 및 보건의료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연히 부모들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가 단결해야 하는 필요성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각자 지닌 기술을 활용하여 운동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민행동이란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는 눈에 보이는 작업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런던 거리에서는 이미 매주 시위가 벌어지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투쟁 방법의 효과에 대해 점점 회의적이 되고 있습니다. 가시적인 대규모 행동을 조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뿌리와 가지를 사회 곳곳에 널리 퍼뜨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즉 정보를 공유하고 동료, 학생, 부모, 정치인들과 함께 우리의 견해를 토론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집회를 진행하거나, 뉴스레터를 공유하거나, 전단지를 디자인하거나, 신문에 글을 쓰거나, 학교에서 연설을 하거나, 웹사이트를 만들거나, 지역 선전전을 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평화운동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집단적 힘을 조화롭게 하나로 묶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운동은 성장하고, 새로운 사람들에게 도달하며, 더 큰 대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함께 하면, 우리는 성공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