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 국가채무의 부도사례가 남유럽 국가의 재정위기에 주는 시사점 세계정세 한미 FTA 한국경제 민선5기 지방재정 건전화 5대과제 한국정세 지자체 지방재정 위기(성남시 채무지급유예) 박근혜표 복지 노동 총연맹 – 민주노총, 7월 투쟁사업 계획 수립 – 타임오프제 분쇄 및 노동탄압 분쇄 산별연맹(노조) 투쟁 계획 – 민주노총 부위원장 실업급여 부정수급 관련 여성 <여성과 금융위기>(실비아 월비)_본문 주요내용 요약과 노조페미니즘 팀 토론
이화여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 이화여대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들을 조직하겠다고 노동조합, 학생, 지역의 단체들과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즈음이었다. 학교와 용역회사는 우리 활동을 알아 차렸는지 현장의 큰 바람이었던 주 5일제를 시행하겠다며 사람들을 흔들기 시작했고, 막판 조직화 사업은 탄력을 잃은 채 휘청거렸다. 그러나 2010년 1월 재계약을 앞둔 시점에서 관리자의 말이 ‘사탕발림’이었음이 드러나자 현장은 술렁였다. 그리고 더 이상 관리자와 학교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며 8명이 첫 주체모임에 참가하기로 했다.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곳에 모임장소를 잡았지만, 그녀들은 관리자의 눈을 피해, 퇴근하는 동료들의 눈을 피해, 빙글빙글 같은 길을 맴돌다 30분 늦게 모임장소에 나타났다. 반신반의하는 그녀들을 설득한 끝에 노동조합을 결성하기로 하고, 비밀리에 가입원서를 받기로 했다. 8명은 금세 2배로 늘어났고, 그 2배는 또 금세 배로 불어났다. 하지만 그 뒤로 주체모임을 두서너 차례하고, 가입자가 30명이 되자 더 이상 조합원은 늘지 않았다. 비밀리에 조직 확대가 어렵겠다는 판단 하에 우리는 1월 27일을 디데이로 잡고 출범 준비를 했다. 학교에 가입 통보와 함께 출범식 공문을 보냈다. 보통 ‘무시’로 일관하는 다른 학교와 달리 원청인 이화여대는 이례적으로 일일이 공문에 회신하며 “학교와 상관없는 용역회사 노동자들이기에 일체의 장소사용을 금하며 행사 강행 시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출범식 당일 원래 실내 장소로 준비하고 있던 곳은 학교 측에 의해 이미 봉쇄됐고, 우리는 할 수 없이 야외 출범식을 준비했다. 학교는 교직원들을 총동원하여 음향 등의 집회 장비를 물리력으로 철수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격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용역회사 현장소장들은 퇴근 시간 이전부터 출범식 장소에 나와 매서운 눈초리로 행사에 참가하려고 하는 조합원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날씨는 비가 오는 것도 모자라 급격한 기온 저하와 함께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은 주춤거렸다. 모든 상황이, 준비하는 입장에서도 ‘행사를 진행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궂은 날씨에도 서경지부 조합원들은 눈과 비를 뚫고 연대투쟁의 모범을 보여줬다. 출범 당시 이대 조합원들은 30여 명뿐이었지만 지부와 여러 연대 대오로 학생문화관 앞 광장은 30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연대대오의 규모에 자신감을 얻은 조합원들이 가장 앞자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잠시도 앉아 있기 힘든 추위였지만, 1시간이 넘게 결연하게 그리고 절박하게 출범식을 진행했다. 출범식 이후 분회장님은 용역회사 소장의 태도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며 신이 났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많이 받았다. 조합원들은 궂은 날씨에 자신들을 야외로 내몬 학교와 용역회사에 점차 분노하기 시작했다. 교섭을 둘러싼 투쟁은 쉽지 않았다. 학교는 ‘용역회사와 협의할 문제’라며 책임을 회피했고, 용역회사는 ‘이미 학교와의 계약이 끝났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교섭은 전혀 진전이 없었다. 출범식 이후에도 학교는 계속해서 총회 장소를 불허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본관 앞 계단이나 학생문화관 로비에 앉아 총회를 진행했고, 총회는 매번 학교와 용역회사를 규탄하는 결의대회 형식으로 진행됐다. 조직률이 취약했던 한 업체의 부당노동행위는 노동조합의 강력한 항의에도 멈출 줄 몰랐다. 교섭이 7차례쯤 진행되고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던 즈음 우리는 조금 더 잘 준비된 조합원 총회를 하기로 했다. 총회를 마치고, 학교를 한 바퀴 돌며 선전전도 진행하기로 했다. 최저임금 집회 때 볼 수 있는 빨간 조끼도 입었다. 구호도 더 많이, 더 열심히 외쳤다. 총회를 마치고 본관 앞으로 행진했다. 이화여대가 책임지고 우리 문제를 해결하라고 구호를 외쳤다. 이번엔 현장소장실 앞으로 갔다. 부당노동행위를 일삼는 용역회사를 규탄한다고 소리쳤다. 원래 여기까지가 사전에 논의된 계획이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소장을 잡으러 가자고 일제히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쳐들어갈 기세였다. 잠시 당황했지만, 조합원들의 투쟁의 열기를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대오는 현장소장실로 들어갔고 이미 현장소장은 자리를 피한 뒤였다.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조합원들이 자리를 깔고 앉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투쟁을 정리했다. 그다음 주, 교섭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현장소장의 부당노동행위도 계속됐다. 조합원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우리는 이번에도 본관 앞을 거쳐 현장소장실로 항의방문을 갔다. 현장소장은 자리에 없었고, 조합원들 역시 이번엔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우리는 현장소장실 옆 잔디밭에 앉아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치며 현장소장을 기다렸다. 현장소장은 비조합원들과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사과를 받으려 했으나 현장소장은 목을 빳빳이 세우며 잘못한 게 없다는 식이었다. 분노에 찬 조합원들은 ‘이런 용역회사와는 계약을 해지해야 한다’며 본관으로 달려가자고 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조합원들은 앞다투어 본관 안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또 예정에 없던 본관 점거 농성이 됐다. 퇴근시간만 되면 가족들 밥해주러 가야 한다며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던 그녀들이 퇴근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 되도록 흐트러짐 없이 대오를 지키며 투쟁을 즐기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구호를 외쳤고, 그동안 ‘너무 높으신 분들이라 눈 한번 못 마주쳤다’던 교직원들에게 호통을 치기도 했다. 그녀들에게 그 순간은 너무나 절박한 순간이었다. 이러한 몇 번의 투쟁은 적당한 선에서 투쟁전술을 고민하던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용역회사 이사와 현장소장에게 재발방지 약속을 받고 투쟁을 정리하는데, 한 조합원이 다가왔다. “다음에도 이 조끼 꼭 입어요. 희한하게 이 빨간 조끼를 입으니깐 구호도 더 크게 외쳐지고, 힘이 나네. 진짜 힘이 나!!!”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 통쾌하고 신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껏 상기된 얼굴로 집에 돌아가는 조합원의 뒷모습을 보며 오히려 더 큰 반성을 하게 됐다. 얼마 전 청소노동자 행진 선포 기자회견에서 이화여대 분회장님은 이런 말을 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다 그래요. 유령이라는 말을 들으면 너무나 슬프다고. 노조 만들기 전에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을 했어요. 유령처럼 살았지만 유령인지도 몰랐던 거죠. 근데 이렇게 알고 나서 보니깐 우린 진짜 유령이었고, 투명 인간 취급받았던 거예요. … 내가 10년만 젊었으면 이런 활동 진짜 열심히 할 텐데, 아직도 권리를 찾지 못하고 유령처럼 지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지금은 그게 너무 아쉬워요…” 미화 조합원들은 언제나 조직적인 투쟁에서 모범을 보인다. 어느 집회에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참가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표현대로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며 노동조합을 만났고, 노동조합을 만나서 일하는 게 너무 즐겁다는 그녀들에게 노동조합은 삶의 활력소이다. 또한 가장 절박한 순간 노동조합을 만났기 때문에 누구보다 노동조합의 소중함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기에 구구절절한 연설과 교육 없이도 몸소 연대투쟁의 중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활동가들이 가끔 관성적인 태도로 그녀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게 아닌가 싶다. 지부에서 미화 간부교육을 준비하며 이런 집중적이고 장기간의 교육 프로그램은 ‘아줌마들이라 안 된다, 힘들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실제로 생계를 책임지기도 하고, 가사도 도맡아 해야 하는 그녀들의 조건 속에서 8개월짜리 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익숙지 않은 토론과 발표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데에도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교육은 한 회, 한 회 준비하는 사람들이 더 큰 감동을 얻어갈 만큼 생동감 있게 진행됐고, 교육을 이수한 간부들은 현장에서 훌륭히 자기 역할을 수행해내고 있다. 이제 그녀들을 동원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투쟁의 희망으로 바라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보다 능동적으로 우리의 투쟁을 기획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얼마 전 있었던 청소노동자행진에서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았다. 발언을 준비하고, 노래를 직접 개사해서 공연을 준비하고, 그 순간 누구보다 집회를 즐기고 있는 그녀들 하나하나 참으로 진정한 활동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대분회 간부들은 이번엔 어느 학교 조직하러 가냐며 우리가 할 일은 없냐며 항상 묻는다. 더 많은 청소노동자를 조직하여 제대로 된 싸움을 준비하자는 그녀들. 나에게 항상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지만, 나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배워 더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들로부터 우리 투쟁의 새로운 희망을 마음껏 상상해본다. 빨간 조끼를 입고,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투쟁을 외치는 그녀들과 함께 오늘도… 투쟁!!!
일시: 2010년 4월 16일 오후 3시 장소: 사회진보연대 회의실 사회: 이소형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 참석: 박윤기 장애인 활동보조인, 심선혜 공공노조 서울경인지부 보육분회 분회장, 차승희 공공노조 의료연대 서울지부 간병분회 사무장 정리: 방민희 사회진보연대 노동위원 지금까지 여성이 가정 내에서 무급으로 수행해 온 돌봄노동이 사회서비스란 이름으로 정부 정책화되고 제도화되고 있다. 노인장기요양제도는 올해로 2년째로 접어들고 있으며 장애인장기요양제도와 간병의 제도화가 시범 시행되고 있다. 서울시는 ‘서울형 어린이집’을 늘려가는 추세다. 심지어 한나라당도 무상보육이 중요하다고 열변한다. 그동안 열심히 누군가를 보살피고 돌보고 간호했지만 ‘사랑’과 ‘헌신’이라는 미명 아래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간주되어왔던 여성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다양한 제도에는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과, 그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의 권리가 삭제되어 있다. 사회서비스가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위기 대응책으로, 경제위기 상황에서 일자리 창출 정책으로 제도화되면서 신자유주의가 야기한 재생산 위기의 부담이 다시 노동자 민중에게 떠넘겨지고 있다. 일자리 창출, 사회서비스 시장 육성에 초점이 맞추어진 정부 정책은 여성노동이 하찮고 부차적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제도의 취지가 시장 육성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돌봄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지도 못하면서 저임금의 고된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 돌봄노동과 사회서비스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일방적인 전략에 맞서는 것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돌봄노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돌봄노동 문제를 제기할 투쟁 주체의 조직화에서부터 출발할 것을 제안한다. 생산과 재생산을 나누고, 재생산을 사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여 여성에게 떠맡기며 평가절하했던 역사와 단절해야 한다. 돌봄노동의 가치가 인정받고, 돌봄노동자의 노동권이 보장받고, 돌봄노동과 관련된 제도는 보편적인 권리로 인정되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마구잡이로 시장에 내맡기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국가 책임을 강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이번 <사회운동>에서는 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개최했던 ‘돌봄노동자 희망대회’의 후속사업으로 각 분야의 돌봄노동자를 초청하여 돌봄노동의 현황과 운동과제를 살펴보았다. 이번 좌담에서는 돌봄노동자의 현실을 널리 알리고 돌봄노동자들 간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하지만 향후 노동자 운동에서 돌봄노동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고, 주요한 투쟁 과제로 만드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돌봄노동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장하고, 새로운 주체들을 조직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이후 <사회운동>에 소개할 예정이다. 본문의 각주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정리자가 추가한 것이다. * * * 사회자: 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개최된 <돌봄노동자 희망대회>에서 요양보호사, 간병노동자, 활동보조인, 보육교사들은 돌봄노동의 현실을 폭로하고, 돌봄노동의 사회화를 요구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사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돌봄노동을 가족과 여성에게 떠넘겨온 사회적 인식과 정부정책을 비판하고, 돌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회적 책임이 필요함을 알리는 첫 발걸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를 위해서는 돌봄노동자들의 노동권 보장이 중요한 문제임을 알릴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첫 발걸음을 시작으로 미래를 돌보는 사람들인 돌봄노동자들의 현황을 알리고 이후 투쟁을 결의하자는 의미에서 돌봄노동자 좌담회를 기획하였습니다. 돌봄노동의 의미. 내가 하는 노동, 왜 소중한가? 사회자: 자신이 하고 있는 노동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지 평소 느끼신 바나 경험에 비추어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선혜: 그동안은 어린이집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만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돌봄노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 전에는 일을 할 때 기술적인 부분이나 일을 잘 해서 인정받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면, 돌봄노동을 알게 된 이후로는 철학이 생긴 것 같아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있듯이 요람, 즉 인생의 초기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 그 아이들에게 돌봄을 제공한다는 점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책임감도 더 커졌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보니까 나의 노동조건, 내 컨디션이 돌봄의 질을 크게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누적되는 스트레스가 아이들 때문이 아닌데 아이들을 대할 때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돌봄의 가치를 알게 된 이후에는 이것이 나 혼자의 문제거나, 아이들에게 풀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해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돌봄을 하는 행위를 노동으로 인정으로 받고, 그 가치가 인정받아야지 돌봄의 질도 높아지고, 나 혼자 죄책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낀거죠. 그래서 노동조건을 개선하라는 요구도 더욱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박윤기: 장애인활동보조 일을 시작할 때는 사실 불쌍하다, 안쓰럽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면서 비장애인인 내가 좀 더 장애인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생각이 컸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을 해보니, ‘장애인도 사람이다’, ‘장애인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 대입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분을 만나기도 했는데, 나랑 똑같구나, 단지 장애가 장애일 뿐 ‘장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활동보조의 의미도 그런 것 같습니다. 장애인이 동등한 인간으로 설 수 있는 데 보조를 하는 것이지요. 차승희: 아까 보육이 요람이라면 우리는 무덤 쪽이지요(웃음). 어딘가 아파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사람이 병원에 와서 우리의 간병을 통해 회복을 해나가는 과정을 보고, 큰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는 제3의 의료진이라는 이야기를 해요. 그만큼 간병은 꼭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거지요. 그래서 돌봄이라는 단어와 의미가 참 좋아요. 의지가 있는데 본의 아니게 혼자서 움직일 수 없거나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간병인들의 돌봄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정부의 사회서비스 정책에 대한 비판 사회자: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돌봄노동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이런 돌봄노동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책임이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특히 요즘 저출산 고령화 시대, 경제위기 시대라며 수많은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은 돌봄의 가치를 높이고 사회적인 책임을 강화하겠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현재 시범 시행되고 있는 장애인 장기요양제도, 공보육을 강화한다는 서울형 어린이 집, 간병의 제도화에 대해 각 당사자들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세요. 심선혜: 서울시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서울형 어린이집’ 포스터 아시죠? 할아버지가 여자아이를 안고 웃고 있는 사진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울시에서 정말 보육에 신경을 쓰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게 서울형 어린이집입니다. 저출산 위기와 연관되어 보육의 중요성이 많이 강조됩니다. 저도 그런 고민을 합니다. 아이를 대책 없이 막 낳으라는 것보다는 있는 아이들을 잘 돌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있는 어린이집은 대부분 민간 어린이집입니다. 서울 같은 경우에 100개 중 10개만 국공립이고 90개는 민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부모들은 질 좋은 국공립 어린이집을 선호하지만, 서울시에서는 갑자기 국공립을 만들 수 없는 노릇이니 민간어린이집을 국공립수준으로 높이겠다고 서울형 어린이집이라는 걸 만들고 재정을 투여하고 있습니다. 재정 투여는 저렴한 보육료와 보육교사의 인건비 지원이 핵심인데요, 이는 환영할 만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정지원만으로 질이 향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 몇 푼 지원이 바로 질 향상으로 연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운영하는가, 즉 관리감독과 문제의 원인 해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기본적인 습관을 익히게 하는 등 교사들이 하루에 정말 많은 일을 하는데, 그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린이집이 시설장의 독단적인 운영에 좌지우지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서울형 어린이집은 회계 투명화와 CCTV를 다는 것으로 이를 해결하려 합니다. 회계 투명화야 필요합니다. 그런데 CCTV가 안심보육에 도움이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동과 교사의 인권침해는 차치하고서라도, CCTV를 달아서 감시한다고 해서 교사 1인이 수많은 아이들을 돌보느라 발생하게 되는 안전사고가 방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력확충과 같은 근본적인 해결방안보다는 손쉽고 빠르고 자극적인 방법, 그리고 오히려 교사들의 스트레스를 높여 보육의 질을 떨어뜨리게 하는 방법을 도입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결국 보육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정책이 보육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승희: 간병제도화는 간병인들의 염원이었습니다. 간병노동자는 특수고용 노동자라서 24시간이라는 초유의 장시간노동에 최저임금도 못 받는 신세입니다. 심지어 밥을 사먹는 것도 부담이 되어 집에서 밥을 얼려 싸와서 병원 복도나 배선실, 혹은 환자 곁에서 눈치 보면서 녹여먹는 정도입니다.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밥은 기본적으로 시켜주는데, 우리는 그나마도 해결이 안 됩니다. 환자를 보다가 감염이 되고 다치더라도 간병인은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니라서 산재예방은커녕 산재처리조차 안 되는 열악한 조건에 처해있습니다. 병원에서 필수적인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로 인정 못 받는 문제, 이건 병원만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간병제도의 사회화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에서는 간병을 제도화를 한다면서 MRI와 같이 비급여화하고 오히려 민간보험을 도입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환자들도 보험 얼마짜리에 들었는지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달라지고, 간병인들의 임금도 낮아지는 것이 민간보험 도입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대안으로 간병인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건강보험에 간병을 포함시켜서 급여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박윤기: 현재 장애인장기요양제도 시범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 시범사업이 그대로 시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장애인장기요양제도의 핵심이 시장화이기 때문에 활동보조인의 노동조건은 더욱 열악해 질 것이라 걱정이 큽니다. 노동자성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중에 개인 사업자로 등록하라고 할까봐 염려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입도 일정하지 않고, 4대 보험의 혜택도 그림의 떡입니다. 실업급여나 퇴직금을 실제로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현재 중개기관에서 25%의 중개수수료를 떼고 있는데 시장자율화가 되면, 센터나 중개기관은 수수료를 올리겠지요? 그러면 저임금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또 이용자 수와 이용자들의 사용시간에 비해 활동보조인들이 넘쳐나고 있는 현실인데, 정부의 시장화 속에서 취업 경쟁 때문에 우리 권리는 이야기되지도 못할 것입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하에서 일을 하는 요양보호사도 마찬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제도가 시장화되는 상황에서 장애인 요양 서비스의 질은 당연히 하락할 것입니다. 돌봄노동자들의 노동 조건 실태 사회자: 보육, 간병, 장애인과 관련한 정부 정책의 문제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정부는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이 정책 취지라 밝혔지만, 반대로 제도를 민간영역에 맡기고 시장화해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었습니다. 결국 아이, 노인, 환자, 장애인이 돌봄 서비스를 온전히 받지 못하고 돌봄의 질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돌봄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현재 노동조건은 어떤지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선혜: 하도 어린이집 사고로 분쟁이 심해서, CCTV를 설치하는 것까지는 보육교사들이 수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IP-TV 생중계 시스템까지 도입하고 있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동의를 하고나서 추진해야 하는 문제인데, 오히려 이거 안 해서 우리 어린이집이 서울형 어린이집 심사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내보이는 것에 신경이 쓰여서 어떻게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겠습니까. 또 시간도 문제예요. 하루 종일 교사가 하는 일을 쭉 뽑아봤더니 기본 10시간이 넘어갑니다. 우리가 8시간 노동을 기본이라고 하지만, 어린이집은 12시간 열려있기 때문에 10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기본이고, 토요일에도 일하고 밤샘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온전한 정신으로 돌볼 수 있겠습니까. 일하는 시간뿐만이 아니라 일하는 형태도 노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어린이들을 돌보느라 앉았다 일어났다, 들었다 놨다하고 아파도 쉬지 못하고 웃으면서 일해야 해서 정신도 지치고, 급하게 밥을 먹느라 속도 망가지죠. 노동건강연대와 실태조사 한 결과 우울증 지수가 자살수위를 훨씬 웃돌게 나왔습니다. 제대로 된 보육을 할 수 있는 환경은 최소한 만들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이러한 요구를 하면 자꾸 교육자로서의 사명감과 헌신만 강요합니다. 교사당 아이수도 문제입니다. 연령대별로 교사당 아이수가 만 0세 1:3, 만 1세 1:5, 만 2세 1:7 등으로 정해져있습니다. 이건 최대정원이었는데 최근에는 최소정원이 되어 여기에서 더 돌보라고 요구받고 있어요. 아이들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건지, 아이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으니까,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집에서 혼자서 세 쌍둥이 볼 수 있습니까? 본다 해도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보육교사면 다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인간으로 본다면 교사 대 아동 비율을 대폭 줄여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지 말고 제대로 보라는 것은 매우 모순된 요구입니다. 차승희: 간병인들은 시간당 2500원이라는 저임금으로 보통 하루 24시간 일합니다. 법적으로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아 최저임금과 8시간 노동을 보장 받지 못합니다.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하루 온종일 일을 하니 대부분의 간병노동자들이 근골격계질환이나, 안구건조증, 위장장애 등의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산재적용도 못 받고 있어요. 병원에서 감염환자를 돌보다가 병이 옮아도 보호받지 못합니다. 노동권 보장, 최저임금, 산재적용, 8시간 노동시간 준수가 시급한 과제입니다.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수면시간도 보장 받아야합니다. 잠을 못자는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하죠. 밤새 환자를 주무르라는 보호자들이 있는데, 그 지시에 따랐다가 병원신세를 지게 된 간병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간병인들은 노동자라기보다는 ‘돈 주고 산 사람’이라고 인식되어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여 있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환자를 돌보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1:1로 환자를 돌보는 경우가 아닌, 요양시설이나 병원에서의 공동간병의 경우 한 명의 간병인이 정말 많은 환자들을 돌봐야 합니다. 야간에는 위 아래층을 왔다 갔다하며 혼자서 20명 넘는 환자를 돌봐야 하기도 해요. 이는 간병노동자의 노동강도 문제뿐만 아니라 환자 생명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매우 위험한 노동조건이지요. 간병제도화가 된다면 제대로 된 인력기준이 세워져야 합니다. 박윤기: 우리도 장애인 대 활동보조인 비율 1:1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반대했습니다. 건장한 신체의 장애인 같은 경우 혼자서 돌보기 어렵습니다. 필요한 경우에 한 사람 더 붙이면 안 되냐 요구를 해도 법적으로 그렇게 안 된다고 합니다. 현재 활동보조인들이 늘어서 일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말이죠. 요양보호사도 혼자서 노인을 돌보니 우리 활동보조인도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활동보조인은 이렇게 늘어났는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감당이 안 되는 장애인을 혼자서 돌봐야 하는 거죠. 활동보조인의 경우 장애인 이동시 활동보조인과 함께 오지 않은 다른 장애인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장애인들이 정부에게 받은 시간이 적기 때문에 활동보조인을 못 쓰는 거죠. 또 시급제도 문제입니다. 좀 전에 말했듯이 장애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활동보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활동보조인이 장애인과 연결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들쭉날쭉합니다. 만약 한 달 내내 연결이 되지 않으면 한 달 수입이 없는 거지요. 게다가 이용자 장애인이나 센터의 마음에 안 드는 활동보조인의 경우에는 아예 일을 못 받습니다. 이렇게 생활을 불안정하게 하는 시급제가 아니라, 활동보조인들이 안정된 조건에서 책임감 있게 일 할 수 있도록 월급제를 도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동시간도 노동시간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강원도 정선에 사는 활동보조인의 경우 이동시 왕복 7시간이 걸린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하는 시간보다 이동하는 시간이 더 많고, 임금은 임금대로 적은데 그나마 서울이야 사정이 상대적으로 낫다고 쳐도 지방 같은 곳은 서비스가 안정적으로 제공될 수 없는 것이지요. 돌봄노동자들의 조직 현황과 활동 사회자: 저출산 고령화 시대라고 호들갑 떨며 정부가 내놓은 각종 돌봄 정책이 잘못된 것이라면, 새로운 대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안을 만드는 주체는 우선 돌봄노동자들이 되어야겠지요. 주현숙 감독 영화 제목이기도 한데, ‘미래를 돌보는 사람들’이 바로 돌봄노동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전국의 돌봄노동자 수에 비해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투쟁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재 돌봄노동자들의 조직 상황이나 조직화 관련해서 평소 갖고 계신 고민들을 말씀해 주십시오. 심선혜: 서울의 보육교사가 3만 3천 명입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면서도 함께 뭉쳐서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왜 그럴까, 왜 참고만 살까, 생각해보면 보육교사의 꿈은 훗날 원장이 되는 거니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 만성피로에 찌들어있어서 자기 목소리를 낼 힘조차 없거나, 단 한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아이들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만 익숙해져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변화를 원한다면 함께 모여야 합니다. 그동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면 이제는 그런 방식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집을 직접 찾아다니는 등 보육교사들을 직접 만나는 계기들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보육 정책 관련해서 정부를 상대하는 싸움도 멈출 수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보육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입니다. 지금의 보육의 틀을 완전히 뒤엎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나라당까지 무상교육을 들고 나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인데, 단순히 보육료를 지원하는 차원이 아니라 보육시설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게 요구하려고 합니다. 보육교사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는 채널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보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게 하는 요구를 해나가고자 합니다. 보육정책위원회 참가를 해서 보육조례를 만드는 것에 우리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다면 제대로 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하나는 시설보육에 갇히지 않는 보육 전반의 문제, 예를 들어 아이돌보미 서비스를 제기하는 것도 고민 중입니다. 보육노동자의 권리가 제대로 인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정에 파견이 되었을 때, 가사일까지 도맡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또 보육교사가 아이를 돌보고 교육할 때 지도와 협조가 필요한데, 무조건 한 사람에게 집에 가서 알아서 아이를 돌보라는 식이 되면 안 됩니다. 차승희: 간병인과 요양보호사가 함께 모이는 자리를 적극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육도 힘쓰고 있어요. 우리가 단순히 돈 벌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우리 스스로 적극적으로 개선해나가고 있다는 점을 함께 알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렇게 개개인의 의식을 모아서 집단적으로 문제해결을 해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각종 토론회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데도 힘쓰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노동부도 찾아다니면서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도 있습니다. 박윤기: 지금 ‘활동보조인 권리 찾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의 경우 현재 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에서 중개기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보적인 운동단체라고 이름이 나있는 곳에서도 활동보조인의 권리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 고민이 됩니다. 우리는 활동보조인도, 중개기관도 함께 잘해보자는 생각인데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활동보조인이 함께 모여서 우리의 권리를 찾아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리 찾기 모임을 점점 확장하면서 활동보조인의 권리를 대변할 조직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봄노동은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자: 국가와 사회가 공적으로 책임져야 할 역할을 가족,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에게 떠넘겼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를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성의 노동을 아무나 할 수 있는, 비숙련 노동으로 여겼던 사회적 인식은 저임금의 불안정한 여성일자리를 늘려왔습니다. 또 이는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열악하게 만들었지요. 돌봄노동자의 노동조건과 돌봄노동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것은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도 해소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차승희: 고민 고민하다 보면 결국 거기에 결론이 닿습니다. 우리 여성들이 먼저 깨어야 하고, 우리의 목소리가 제대로 사회에 반영이 될 수 있도록 되어야 할 것입니다. 돌봄노동이 여성만의 일로 여겨지는 우리사회의 인식의 틀을 바꾸려면 돌봄노동자들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심선혜: 돌봄을 사적인 영역으로 볼 것이냐, 공적인 영역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는 이데올로기 차원의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아이를 돌보고 노인과 환자를 돌보는 일은 가정에서 책임져야 하고 국가는 일부 지원만 하면 되는 일로 여겨지면 여성은 이러한 조건에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보육료를 지자체에 내고 지자체에서 보육시설을 관리합니다. 그러다보니 임금 수준이 높아서 남성들도 보육교사 일을 많이 합니다. 일본이 잘 사는 나라라서 가능한 문제라기보다, 돌봄을 공적인 영역으로 인정할 때 이것은 여자의 일이 아니라 사회의 일로, 제대로 된 가치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박윤기: 현행 복지제도 중 가장 큰 문제는 아직도 무료봉사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기부문화만 강요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돌봄에 대해 희생과 봉사만 요구한다면 여성의 현실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이후 공동 투쟁 결의와 노동운동에 바라는 점 사회자: 돌봄노동자들의 연대와 공동 투쟁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2010년 3.8 돌봄노동자 희망대회의 경험을 발판으로 하반기에 돌봄노동자 대회를 개최해 공동 투쟁을 이어가면 어떨까요?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세요. 또 마지막으로 돌봄노동자들의 투쟁과 관련해서 기존의 노동운동에 바라는 바가 있으시면 덧붙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차승희: 그동안은 우리의 문제를 함께 고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자꾸 만들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번의 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의식을 계속하여 이어나가고 발전시켜 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간병노동자들도 우리가 행동한 것이 어떠한 의미였는지 스스로 확인해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선혜: 같은 돌봄 영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만나지 않으면, 보육교사만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그런 기회가 돌봄노동의 범주에 있는 더 많은 노동자로 확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8 여성의 날에 그나마 사회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소중하지만, 일 년에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성을 가지고 우리의 요구를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자 운동에 바라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돌봄은 우리의 삶 전반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돌봄노동자의 노동조건이 개선될수록 노동자 전반의 삶의 질도 향상됩니다. 지금까지는 각자의 영역에서 일하는 노동자 정도로 인식하는 수준이었다면, 노동자 운동 전체가 우리 삶의 질을 바꾸는 근본적인 활동의 시작으로서 돌봄노동자의 행동에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박윤기: 연대는 당연히 해야지요. 문제는 어떠한 방법으로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봐야 할 것이고, 노동자 운동 관련해서는 돌봄노동 관련한 학습이나 인식의 기회를 늘려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 운동이 새롭게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라는 인식 하에 새롭게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좋겠습니다. 사회자: 많은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시작으로 돌봄노동의 중요성과 사회적 책임의 필요성이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합니다. 또 이를 위해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고 있는 돌봄노동자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두고 힘찬 발걸음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1970~80년 정세와 노동운동 노동자들에게 저임금과 빈곤을 강요하는 정부의 경제성장 정책, 자본가들의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탄압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한국의 노동운동은 1970년대에 접어들어 전환점을 맞이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었던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고 1970년대 노동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외국자본을 도입해 수출중심의 공업화를 추진했다. 한국경제는 베트남 전쟁, 중동 건설 붐에 편승해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채에 의존한 성장으로 경제는 외국에 종속되어 갔고, 한국이 세계경제의 일부분으로 편입됨에 따라 세계경제의 변화에 따라 한국도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정부는 수출 기업체에게 금융지원, 면세혜택을 주어 독점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이에 드는 비용이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졌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으로 재벌을 키운 셈이었다. 한국 기업들이 외국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법은 값싼 임금비용을 더 줄여서 가격 경쟁력을 가지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동자의 임금은 매우 낮은 수준에서 유지되었고, 어디에서나 장시간의 고된 노동이 강요되었다. 노동법은 법전 속에 있을 뿐이었다.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환경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은 침묵하지만은 않았다. 1970년 165건이던 노동쟁의가 1971년에는 1656건으로 10배나 늘어났다. 1970년 11월의 전태일 열사 분신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71년 8월에는 도시 빈민들의 분노가 광주대단지사건으로 폭발하였다. 노동자와 민중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서 박정희 정부는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선포해 광폭한 군사독재를 한층 강화했다. 모든 민주화운동과 노동자운동은 사실상 금지되었다. 특히 외국자본의 한국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서 1970년 제정된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으로 외자기업에서 노동자의 기본권이 제한되었다. 1971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노동3권 중 단체행동권과 단체 교섭권이 전면적으로 제한됐다. 1979년 박정희의 암살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지만 노동운동의 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1980년 봄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이 권력 장악을 시도했다. 이에 대항하여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원 민주화, 병영집체훈련제도 폐지, 계엄령 해제, 언론자유 보장을 내건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사이 노동자의 쟁의도 급속하게 확대되고 격화되어갔다. 그러나 신군부는 5.17 계엄확대 이후 노동운동을 또다시 처참하게 짓밟았다. 신군부는 한국노총의 민주파를 제압하기 위해서 8월 21일 산별위원장 12명 사퇴, 지역지부 폐지를 골자로 한 ‘노동조합 정화지침’을 시행했다. 급기야 1980년 마지막 날 신군부는 기업별노조로의 전환, 제3자 개입 금지를 골자로 노동법을 개악했다. 김경숙과 YH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1970년대 장시간의 노동과 생명을 위협하는 작업조건 속에서 최저생계비에 턱없이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일했던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저항했다. 1970년 11월 청계피복 노조가 결성되었고 1973년 신진자동차(나중에 대우가 인수), 원풍모방, 아세아자동차에서 노조 결성되었다. 한국모방 노조 민주화와 임단협 체결 투쟁, 동일방직 노조의 민주노조 사수 투쟁 등이 벌어졌다. YH노조의 김경숙(1958~1979)은 어린 나이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김경숙이 8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날품팔이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다. 김경숙은 겨우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졸업 전부터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내가 못한 공부를 동생에게 가르쳐서 동생만은 성공할 수 있도록 하자’고 다짐하며 고향을 등지고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그녀는 처음에 하청공장에 취직해 코피가 그치는 날이 없을 정도로 고되게 일했지만 임금체불에 시달렸다. 김경숙은 여러 공장을 옮겨 다나며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체험했다. 젊은 나이에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공장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자신과 같은 어린 노동자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녀는 몸은 병들더라도 마음은 상하지 않는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자고 다짐하며 8년간 공장생활을 이어갔다. 김경숙은 1978년에 가발공장 YH무역에 입사했다. 임금이 조금 높았기 때문이다. 가발을 수출하는 YH무역은 노동자들에게 하루 16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다. YH무역은 휴일도 없이 철야 노동을 강요하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물 마시는 것도 통제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숙은 노동자의 지위와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이후 김경숙은 노조 대의원으로, 조직부 차장으로 선출되고 노조 소그룹의 장으로 활약했다. YH 노조는 민주노조를 건설한 후 잔업거부 운동과 일요일 연장 거부 투쟁으로 해고자 원직복직과 추석보너스를 타냈다. 또 노조는 부모 사망 시 5일간 주어지는 휴가를 여성노동자들에게 보장하지 않던 차별적인 관행을 개선했다. 김경숙은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노동자가 단결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YH무역 경영진들은 노동조합의 힘이 커지자 회사 자금 빼돌린 후에 폐업 공고를 냈다. 이에 맞서 전 조합원이 폐업 반대 농성에 참여하며 5일 만에 정부와 사측으로부터 폐업철회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백일 만에 휴지조각이 됐다. 김경숙을 비롯한 조합원들은 1979년 8월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그녀들은 “공장폐쇄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비인도적인 처사이고 몇 사람만을 위한 사기극”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요구가 정치권을 비롯한 세간의 이목을 끌자, 투쟁이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경찰이 농성 이틀 만에 농성장에 난입했다. 김경숙은 경찰의 난입에 항의 하던 과정에서 완고하게 저항했다. 경찰의 진압 작전이 끝난 후 그녀는 건물 아래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김경숙은 작전개시 30분 전 스스로 투신했다”고 서둘러 사건을 수습했다. 그러나 30년 후, 김경숙의 사인은 경찰에 의한 타살로 밝혀졌다. 김경숙 열사의 짧은 삶은 ‘공순이’라고 무시당하며 ‘가족’과 ‘국가’의 이름 아래 고된 노동을 감내했던 여성노동자와 그녀들의 저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박영진과 구로공단 노동운동 신군부가 들어선 이후 1980년대에도 노동조합의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1983년 정권의 유화조치 발표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고조됐다. 1980년대는 1970년대와는 달리 대공장 남성노동자가 운동의 전면에 등장하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민주노조 건설의 움직임이 특히 활발해졌다. 투쟁방식도 공장점거, 경찰과의 직접적인 대결로 발전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대우어패럴 간부 구속에 맞서 구로공단의 9개 노동조합이 7일간 폭발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박영진(1960~1986)은 구로동맹파업의 영향을 받고 구로지역 노동운동의 한복판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박영진은 중학교 3년을 끝으로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와 행상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박영진은 가난한 생계를 돕기 위해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를 하며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다. 그는 1983년 시흥 소재의 마찌코바(영세작업장)에 취직해 노동자로서 삶을 시작했다. 평소 성실했던 박영진은 회사의 전화기 관리를 맡았다. 그러나 전화기를 담당한지 얼마 안 되어 전화요금이 10만 원이나 나왔고 사장은 책임을 물어 박영진의 월급에서 9만 원을 제해버렸다. 그가 전화국에 찾아가 시외전화 사용의 내막을 알아보니 대부분이 사장이 사용한 것이었다. 박용진은 결국 뺏긴 월급을 돌려받고 밀린 체불임금까지 받고 퇴사했다. 이 과정에서 박영진은 자본가의 교활하고 탐욕스런 속성과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83년 초 배움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야학을 찾아간 박영진은 노동법과 노동운동, 노동자의 삶을 학습하면서 노동자의 현실을 체계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전태일 열사의 삶을 듣고 198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4년 구로에 있는 동일제강에 입사한 박영진은 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을 알리며 그들을 조직했다. 친목회를 통해 노동법 교육팀을 꾸렸고 동료들의 믿음과 신뢰를 얻어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그러나 구청과 공권력은 합법적인 노조결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측의 어용노조를 인정하고 민주노조의 서류는 반려시킨 것이다. 이후 박영진은 2개월 동안 구로지역 노동자들과 정치상황과 사상에 대해 학습한 후 1985년 악덕기업으로 소문난 신흥정밀(현 마이크로)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박영진은 구로동맹파업을 목격하고 공동투쟁을 계획했으나 경찰과 사측의 공작으로 투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1986년 3월 17일 박영진은 임금인상 파업을 주도하며 식당을 점거했다. 구사대와 경찰이 식당에 난입하고 박영진과 동료들을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과 분신을 경고하며 저항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경찰과 사측은 부모와 친척을 회유해 시신을 탈취하고 재빠르게 화장시켜 문제가 커지는 것을 막았다. 가난한 날품팔이의 영세업체 취직, 야학을 통한 의식화, 민주노조 건설, 격렬한 투쟁으로 이어진 박영진 열사의 삶은 1980년대 중반 구로공단 지역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대변한다. 성완희와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 성완희(1959~1988)는 1961년 아버지를 결핵으로, 어머니를 사고로 여의고 14살에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평화시장에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성완희는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노동자 의식을 조금씩 깨닫게 됐다. 1986년 10월 태백에 있는 강원탄광에 입사한 성완희는 막장광부로 일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물결은 강원도 탄광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해 7월 7일 어룡광업소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을 시작으로 16일 동해광업소, 18일 한보탄광 통보광업소, 26일 한성광업소 등 거의 모든 광업소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났다. 성완희는 1987년 10월 강원탄광 파업에 앞장서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강원탄광 노동자들은 헌신적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 투쟁에 나선 성완희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그를 눈에 가시로 여겼던 강원탄광은 작업 중 다리를 다친 성완희를 무단결근으로 해고했다. 이에 맞서 동료 노동자들과 성완희는 복직을 요구하며 작업거부에 나섰다. 회사는 사태 무마를 위해 성완희를 조합원 자격이 없는 청원경찰로 복직시키고 동료들을 해고시키는 기만적인 작태를 보였다. 이러한 사측의 분열과 탄압에 대해 성완희와 해고노동자들은 강원탄광 우정회를 결성하고 강력한 복직투쟁을 전개했다. 노동부와 지노위에서 복직판정, 복직명령을 받았지만 사측은 이를 거부했다. 성완희는 노조사무실에서 동료들과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사측이 각목을 들고 들어오려고 하자 성완희는 온 몸에 휘발유를 뿌리며 “인권탄압 중단하라”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라며 외치고 분신했다. 그는 화염에 휩싸여 아스팔트에 쓰러져서도 “강원탄광에 민주노조를 건설해 달라”고 부탁했다. 성완희의 분신 이후 태백, 도계, 고한, 사북 등 강원남부 탄광노동자들과 시민들은 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장례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지역마다 민주노조 쟁취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조직적인 투쟁이 벌어졌다. 1989-90년 탄광 노동운동의 마지막 불꽃이 타올랐다. 열사들의 삶에 새겨진 1970-80년대 한국 노동운동 김경숙, 박영진, 성완희 열사의 삶은 1970-80년대 한국 노동자의 평범한 자화상일 수도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족을 위해서 또는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일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가혹한 현실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측과 정권의 갖은 탄압을 겪으면서 노동자의 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깨닫고 노동조합의 결성과 투쟁에 자신의 온몸을 바쳤기 때문이다. YH노조 투쟁, 구로공단 노동운동, 강원도 탄광노동자들의 투쟁까지 열사들의 발자국은 민주노조운동 역사에 남아있다.
● 세계경제 1. 아시아지역에서의 중국효과 - 향후 전망 2. 대마불사를 둘러싼 논의들 - 대마불사와 관련된 주요 논점 - 대마불사 문제 완화를 위한 방안 ● 국제정세 - 특이사항 없음 ● 국내경제 1. 최근 국내경기의 제약요인과 정책과제 - 국내 경기 제약 요인 - 정책과제 2. 국내 가계부채, 대비책 필요하다 - 영국의 가계부채 급증과 경제 불안 현상 - 국내 가계부채 급증에 대한 시사점 3. 증가하는 가계부채 문제 ● 국내정세 1. 5+4협의의 전과정과 주요쟁점 - 시기별 흐름 - 주요 쟁점별 정리 ● 노동 1. 총연맹 - 민주노총 2010년 사업계획 확정 - 민주노총 임원 현장 순회 및 지방선거 대응 2. 금속 - 한진중공업 울산공장, 전 직원 전환배치 추진 - 현재자동차 전주공장 위원회의 정규/비정규 연대투쟁 - 금속노조 경주지역본부의 지역전면연대파업 - 캐리어 에러컨 지회, 광주노동청 앞 농성투쟁 3. 공공 - 공무원 노조 출범식 강행 4. 기타 - 새희망노동연대 출범 ● 여성 1. 낙태 관련 - 보건복지부 - 국회토론회 “낙태, 합법적 허용범위는?” - 일다 ‘낙태죄 폐지할 시기에 한국에서는 고발이라니...’ - 프로라이프 의사회
[기획] 3.8 여성의 날과 여성운동의 과제 2010년 여성운동의 과제 | 방민희 낙태 단속이 아니라 여성의 재생산권리를 이야기할 때다 | 최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