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문제를 이론화하고 그것을 운동을 통해 현실화하려 했던 탁월한 여성이었다. 엘러너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자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에이블링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받고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그녀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으로 자신의 길을 충분히 펴지 못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훌륭한 이론가이자 혁명가로서 사회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지만 여성으로서 많은 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녀 역시 엘러너처럼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가려고 했고 그것을 개인이 극복할 문제로 보았다. 클라라 체트킨은 산업에서 여성의 역할과 노동조건을 강조하고 여성노동자 조직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녀는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가족, 재생산노동 등 여성에 고유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여성 혁명가들이 겼었던 갈등과 어려움은 콜론타이에 의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새로운 이론으로 제시된다. 콜론타이는 앞선 여성혁명가들이 여성으로서의 고통에 굴복하거나 여성으로서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그것을 이론화, 체계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녀는 여성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하고 여성문제의 해결을 혁명의 과제로 제기했다. 이런 면에서 콜론타이는 탁월했다. 물론 콜론타이가 그런 문제의식을 제기한 데는 당시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던, 혁명이라는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한 측면도 있었다. 혁명 전야, 주체적 여성으로 성장 꼬마 소녀, 슈라(1872~1888) 슈라(콜론타이의 아명)는 1872년 4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도몬토비치는 핀란드 상인의 딸이었다. 그녀는 첫 남편 므라빈스키와 헤어지고 육군 대령인 미하일 도몬토비치와 살았는데 이혼하기도 전에 도몬토비치의 딸을 낳았다. 도몬토비치는 우크라이나의 오랜 지주 가문의 귀족출신이었으며 이후에는 장군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덕분에 슈라는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영어와 불어, 독일어를 깨칠 수 있었으며 교양 있는 여성들을 존경하도록 배웠다. 슈라는 아버지로부터 정의감을 배웠고 어머니로부터는 저항감을 배웠다. 그녀의 아버지가 불가리아 정당에서 자유주의파에 가담한 것으로 인해 정치적 탄압을 받을 때 슈라는 분노했다. 한번은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손님이 집에 왔을 때 담배 갑을 건네주길 거부하여 부모님을 당황하게 한 일도 있었다. 슈라는 일반사회규범을 따르지 않는 아이였고 그녀는 이를 어린 나이에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엄마 속을 많이 썩였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구하고 전제군주를 쫓아내고 민중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영웅’이 되는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 슈라의 스승은 언니 제니아의 가정교사였던 마리아 스트라호바였다. 그녀는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진 독립적인 여성의 전형으로 스트라호바는 활동적인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슈라를 여성 혁명가들의 세계에 좀 더 가까이 가게 해 주었다. 1881년 소피아 페롭스카야라는 여성이 지도한 테러리스트 그룹이 짜르를 암살한 사건은 콜론타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콜론타이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국왕을 시해한 여성에게 동정심을 느낄 뿐이었지만 슈라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도 급진적 여성들의 진실된 군대가 전제군정을 끌어내리기 위해 남성동지들과 함께 투쟁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블라디미르와의 우울한 관계(1888~1896) 1888년 슈라는 젊은 여성 알렉산드라가 되었고 마리아 스트라호바의 교육을 받은 후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사랑과 교육은 알렉산드라의 관심 영역에서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첫사랑은 그녀가 흠모하던 사람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을 함으로써 끝났다. 그녀는 페미니스트들의 요구에 의해 1878년 정부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마련한 여성을 위한 대학수준의 교육 프로그램을 받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곳의 급진적 분위기를 염려하여 그녀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는 대신 사립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폴란드의 정치적 망명가의 아들이었던 그녀의 먼 친척 블라디미르 콜론타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슈라의 어머니는 자신의 비전통적인 행적에도 불구하고 슈라가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슈라의 아버지는 블라디미르가 독서나 진지한 대화에 관심이 없고 슈라와 정신적 친밀감이 없다는 점에서 결혼에 반대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서둘러 알렉산드라를 유럽으로 보냈고 그곳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게 된다. 슈라는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으면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해 결국 부모의 동의를 얻었고 러시아로 돌아와 1893년 블라디미르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생활에 만족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정치활동에 대한 책임과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은 엔지니어였던 그녀의 남편의 이해와 직업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녀는 후에 “남편을 사랑했지만 주부와 아내로서의 행복한 생활이 나에겐 하나의 새장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했다. 슈라는 가장 친한 친구 조야 샤두르스카야의 독립적인 생활에 자극을 받았다. 당시 조야는 1893년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로 와서 이들 신혼부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슈라는 그녀의 자유와 그녀 주위의 연주회와 강연과 학생들의 모임을 부러워했다. 슈라는 곧 남편과 단둘이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을 그만두고 조야와 함께 독서하고 토론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러시아의 ‘두꺼운 잡지들’ 속에서 1890년대 러시아 인텔리겐차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을 읽고 토론하였다. 블라디미르가 공학도들과 함께 수학 문제를 풀 때면 조야와 슈라는 그들을 시사적인 사회, 경제 문제들에 대한 토론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곧잘 웃어 넘겨 버리거나 “조용히, 조용히.당신은 아이를 재워야 하오”라는 말로 토론을 망쳤다. 슈라는 사랑받기를 원했지만 자신에 대한 성취욕구 또한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그녀의 관심사를 공유해보려는 시도는 실망스러운 결과로 끝났다. 블라디미르는 이미 그녀에게 방해스러운 존재였다. 조야는 콜론타이에게 가정 일을 유모에게 맡기고 글을 쓰라고 충고해주었지만 문을 잠그고 일을 시작해도 어린 아이가 넘어져서 울고 엄마를 찾을 때 달려 나와 무슨 일인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어 도무지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녀는 단편 소설을 썼는데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던 여인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남편을 버리고 애인과 결합한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남자들의 자유와 대조되는 여성들의 이중적 규범을 타파하려는 콜론타이의 최초의 시도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 소설을 잡지사에 보냈을 때 잡지사에서는 문학이 아닌 선전문을 써 보냈다는 평과 함께 반려해 보냈다. 블라디미르는 편집자가 아마도 중년 여인보다는 젊고 예쁜 여주인공을 좋아하는 모양이라며 아내를 놀려댔다. 잡지사의 거절에 상처받고, 남편의 경박한 농담에 화가 난 콜론타이는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마르크스주의에 입문(1896~1898) 아내와 어머니를 넘어선 자아를 찾고 있던 콜론타이는 노동계급의 절박한 경제적 상황과 접촉할 기회를 갖게 된다. 1896년 남편과 그의 동료, 그리고 조야와 함께 나르바를 여행했을 때 12,000명의 남녀직공을 고용하고 있는 거대한 직물 공장 통풍 시설을 개선하는 기술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공장에는 기혼과 미혼 노동자들의 침대가 뒤섞여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그 침대 사이사이에 많은 어린아이들이 울거나 놀고 있었다. 콜론타이는 그녀의 아들 또래의 한 조그마한 아이에게 관심이 쏠렸는데 그 아이는 조용히 누워 죽어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콜론타이가 그 아이들을 돌보는 듯한 늙은 여자에게 아이가 죽어있다고 하자 늙은 여자는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누군가가 그 아이를 치웠다. 바라크에서의 전율, 그날의 광경과 악취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후에 콜론타이는 말한다. 이 일로 그녀는 통풍을 개선하기 위해 기술자들이 계획을 세우는 일보다도 경제 체제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크론호름에서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콜론타이는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소설을 쓰는 대신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마리아 스트라호바는 콜론타이에게 의미있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그녀에게 노동자들의 야간학교에 교육자료를 공급하는 이동 박물관의 업무에 참여하도록 권했다. 여기에서 콜론타이는 베라 멘진스카야와 뤼드밀라 멘진스카야, 엘레나 스타소바와 같은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만났다. 어느 날 엘레나 스타소바가 콜론타이에게 어떤 모임에 참석해달라고 했을 때 콜론타이는 처음으로 비합법적인 회합을 접할 수 있으리라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그녀가 요구받은 것은 그녀가 부유한 사람들과 친분이 많다는 이유로 단순히 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콜론타이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진정으로 의미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엘레나 스타소바는 콜론타이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질 필요는 없으며 조직에 헌신하는 것만큼 유용한 것이 없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그녀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엘레나 스타소바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부르크 위원회의 창설 요원이었지만 그녀는 스스로에게 한계를 설정하고 그녀의 생애를 이차적이고 비이론적인 임무에 기꺼이 바쳤다. 반면에 콜론타이는 스스로에게 자기 한계를 허용할 수는 없었으며 탁월해지기를 갈망했다. 콜론타이는 이론적 인물, 생산적인 사상의 저술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취리히에서의 유학생활(1899~1905) 1899년 그녀는 취리히 대학에 가서 자신이 읽었던 책의 저자인 경제학자 하인리히 헤르크너에게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그곳에서는 남편과의 갈등에서 벗어나 학생으로서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러시아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많은 저작들을 읽을 수 있었다. 콜론타이의 아버지는 딸의 계획이 불만스러웠지만 재정적 지원과 감정적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어린 아들 미샤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콜론타이는 결코 취리히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콜론타이는 그녀의 자서전에서 페테르부르크를 떠난 기차에서 5살 난 아들의 조그맣고 따뜻한 손이 어른거리고, 자신을 떠나보낸 남편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매 역 마다 열차를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진정으로 탁월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면서 두 통의 편지를 썼다. 하나는 남편에게 그녀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왜 그녀가 가족을 떠나면서까지 노동계급과 여성의 권리를 위한 싸움 속으로 뛰어들게 됐는지 조야에게 밝히는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콜론타이는 아내가 결혼생활을 버리고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혼란스런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블라디미르는 그가 표현했듯, 아내가 ‘남자들의 세계’인 정치에 뛰어드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시각에서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전통적인 아내의 역할에 만족해야만 했던 것이다. 80세의 노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콜론타이는 블라디미르에게 입힌 고통을 상기하는 것은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쓰고 있다. 콜론타이는 그녀의 모성애를 만족시키는 것과 ‘남자들의 세계’에서 ‘커다란 업적’을 성취해야 한다는, 두 가지의 양립될 수 없는 욕구의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중년에 “사랑, 결혼, 가족 등 모든 것이 부차적이고 순간적이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들에 대한 그녀의 헌신과 아들과 떨어져 있는 아픔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그녀는 또 미샤가 자기를 이해해 줄까를 걱정하며 우울해 하기도 했다. 콜론타이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는 운동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혁명과 여성운동에 뛰어들다 혁명가로 데뷔(1905) 1896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섬유노동자 4만 명이 하루 14~15시간 노동에 반대하는 파업을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된 ‘피의 일요일’까지 러시아 군대에 의해 무자비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수많은 파업이 발생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소비에트와 노동조합을 탄생시켰다. 콜론타이는 1905년의 전환점이 될 때까지 유럽과 러시아를 오가며 지냈다. 그녀는 카우츠키, 플레하노프,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에 이끌렸다. 그녀는 자유주의적 친구들과 이념적 그룹을 형성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네브스키 지역에서 노동자들에게 불법 사회주의 선전물을 배포했다. 1904년에 콜론타이는 빠르게 급진주의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콜론타이가 이후에 집중한 여성해방에 대한 관심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콜론타이는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독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한 서점에서 <공산주의자 선언>을 통해 마르크스를 발견했다. 이는 빠르게 그녀의 얕고 감정적이었던 인민주의를 대체했고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그녀는 많은 청년들이 그랬듯이 지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콜론타이가 혁명가로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짜르 니콜라스 2세에게 청원을 하려는 평화적인 수백 명의 노동자들을 향해 짜르 정부의 군대가 총살을 자행했던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이었다. 지역의 사회민주주의 위원회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콜론타이는 동궁을 향해 행진하는 데 참여했고 거기서 서늘한 장면을 목격했다. 이 경험은 그녀를 전업 혁명가로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선전물을 배포하고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연락책을 제공했으며 책자를 만들고 기금을 마련하고 위원회에서 회계를 담당하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불법 공장 모임에서 콜론타이는 민중지도자로 데뷔를 하게 된다. 그녀의 음악적이고 열정적인 목소리와 깔끔하게 손질한 외모는 산업지대 빈민가의 거친 프롤레타리아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여성운동에 첫걸음(1905) 당시 러시아에서 페미니즘이 태동된 지는 50년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자선, 반성매매 활동, 교육을 위한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러시아 전국 규모의 여성운동 조직은 러시아여성상호자선회로 1895년 설립되었다. 이 조직은 러시아의 페미니스트들을 단합시키고자 했지만 명확하게 비정치적이었다. 그 와중에 여성투표권에 대한 요구로 두 개의 새로운 페미니스트 조직이 탄생했다. 여성평등을 위한 동맹(1905~08)과 여성진보당(1905~17)이었다. 이들은 모두 여성투표권의 쟁취를 목표로 했다. 그 중에서도 ‘여성평등을 위한 동맹’은 가장 전투적이었는데 이들은 노동자계급 여성에 대한 동정심이 있었고 개혁과 여성권리를 위한 “모든 여성”의 투쟁에 그들을 조직하길 원했다. 콜론타이가 페미니즘에 처음 발을 내딛게 된 것은 1905년 4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여성평등을 위한 동맹‘의 총회 개회식이었다. 1905년 혁명 초기 선거권 획득을 위해 결합한 모스크바의 전문직업 여성들과 지식층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창설된 ‘동맹’은 사회주의자들처럼 급진적 사회개혁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고, 사회주의 대열에서 여성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콜론타이는 이런 부르주아 여성들의 활동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콜론타이는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비계급적인” 페미니즘에 반대하며 여성노동자들이 사회민주당에 가입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에 함께 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녀는 적은 수의 여성하인들, 여성숙련공, 여성섬유노동자 등에게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여성문제에 대해 교육을 함으로써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콜론타이는 여성문제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석해내지 못했다. 그녀의 주요 입장은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이 ‘노동계급의 생활과는 관계없다는 점’에서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해방을 위해 그녀에게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완전한 여성 해방도 이룰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어거스트 베벨의 <사회주의와 여성>(1883)은 여성들이 불가피하게 생산활동에 참여하게 되고 경제적 자립을 하게 되는 과정과 사회주의 미래에서의 여성들의 밝은 전망을 묘사함으로써 그런 공백들을 채워주었다. 클라라 체트킨은 1889년 비사회주의적인, ‘모든 여성의’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여성노동자들을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으로 조직하여 자본주의 철폐를 향한 행진에 남성노동자들과 함께 할 것, 그리고 모성 보호와 같은 여성노동자의 문제들에 대해 선전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여성운동의 모호함을 제거하였다. 콜론타이는 1906년까지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 문헌들을 잘 알지 못했으므로 여성운동에서 그녀의 첫걸음은 시험적이고 임의적이었다.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과의 대결 1905년 혁명 이후, 1906~07년 동안 노동조합은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1907년 힘을 재집결한 정부의 재공세를 물리칠 만큼 세력이 공고하지 못했다. 1907~1911년 반동기 동안 활동가들은 클럽, 협동조합, 문화단체 등에서 활동하면서 노동조합이 부활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이 시기에 콜론타이는 1908년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를 썼고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과 대결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1908년 부르주아 여성들은 ‘전 러시아 여성대회’를 개최하는데 콜론타이는 이에 파견할 노동자 여성대표단을 구성할 것을 당에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내 남성혁명가들과 이견과 갈등을 유발되었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굽히지 않고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라는 팜플렛을 작성하고 대표단을 이끌고 대회에 참석했다. 노동자계급의 대표 1,000여 명이 모인 대회에서 수배 중이었던 콜론타이를 대신해 바르바라 볼코바는 콜론타이의 연설문을 읽었다.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에서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이 여성노동자들의 해방을 위해 싸울 수 없다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의 요구가 아무리 급진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들의 계급적 지위 때문에 여성해방에 필수적인 현재의 경제사회적인 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해방론자들이 “현존하는 계급 사회의 틀 안에서 평등을 구하고”, “이미 존재하는 특권들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싸운다”고 비판했다. 콜론타이의 비판은 당시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의 운동이 노동자 여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없었고 여성해방론이 자유주의와 결합함으로써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여성의제를 부차화시키는 정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여러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초>는 여성운동으로서 초기 투표권 운동의 제한적 관점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유럽에서의 망명생활 콜론타이가 여성대회에 참여하여 여성해방론자들과 심각한 공방이 이어져 그녀의 소재가 경찰에 탐지되었다. 그녀는 구속되고 감옥에서 몇 년을 보내기보다 러시아를 떠나기로 했다. 그녀는 1908년에서 1914년까지 독일에서, 1914년부터 1917년까지는 스톡홀름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콜론타이는 유럽에서의 황폐하고 쓸쓸한 10년 간의 망명 기간 동안 공허함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콜론타이는 유럽에 있는 동안 중년의 (결혼한) 경제이론가인 P.P.마슬로브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후에 그녀가 회고하듯이 그것은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적 욕망과 활동가로서의 결의를 존중받고 관심을 받고 싶어했지만 마슬로브는 혼외의 성적인 모험을 원할 뿐이었다. 수번의 만남과 기차역에서의 쓰라린 이별 후에 콜론타이는 마슬로브와의 관계를 끝내고 당의 전업 정치선동가로 돌아가게 된다. 마슬로브는 가족과 아이들에게로 돌아간다. 이런 경험들과 성적관계에 대한 생각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썼던 여러 개의 글로 나타났다. 그녀는 정신분석에 관심있는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레테 마이젤-헤스의 글을 읽게 되었다. 콜론타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1) 결혼은 부부간의 불일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많은 경우 애정의 침식으로 끝난다. 2) 매춘은 더 심하다. 콜론타이는 “(매춘은) 사랑을 질식하게 한다. (매춘의) 에로스는 황금빛 날개를 더럽히게 될까 하는 두려움 속에 날아간다”고 썼다. 마지막으로 3) 대안적인 자유결합 또한 부적절했다. 왜냐면 그것은 대개 “위대한 사랑”이라는 형식을 띠었는데 그것은 파트너 모두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특히 여성의 자존감을 훼손시키는 고통스럽고 소비적이며 비극적인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런 세가지 형식의 성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 여성들은 반대로 그녀들의 “사랑의 역할”을 통해 “사랑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성적 우정으로서, 서로를 유폐시키거나 소멸시키지 않으면서도 주의깊고 서로를 인지하며 서로에게 민감하고 세심한 관계였다. 그녀 스스로를 “신여성”이라고 부르며 그녀는 “감정보다는 자기절제, 복종과 정체불명의 인간성보다는 자유와 독립의 가치 인정, ‘사랑받는 이’의 고립된 성질에 몰두하고 골몰하기보다는 개인성을 인정하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녀는 “남성의 그림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되어야만 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국제사회주의가 붕괴되자 콜론타이는 멘셰비키 경향의 유보적 자세를 청산하고 1915년 여름, 레닌과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콜론타이는 볼셰비키로서 레닌의 반전 국제주의 슬로건을 생생한 호소로 바꾸어 곳곳에서 연설을 했고 그해 9월 미국으로 건너가 4개월 동안 4개 국어로 123회의 강연과 연설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로서 여성운동을 전개 볼셰비키 중앙위원으로 선출(1917) 1907년에서 1911년까지 노동자운동의 침체기가 지나고 1911년 다시 노동자 파업이 증가하기 시작하고 러시아 도시지역에서 다시금 폭발적인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는 혁명의 열기에 찬물이 끼얹었다. 1914년 세계대전 발발 이후 노동자계급은 전쟁이라는 비상사태에서 굴복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의 정체는 오래가지 않아 1915년 다시 파업의 물결이 일어났다. 1916년 초에는 전쟁중지와 같은 정치적 요구까지 나타났다. 1914년 전쟁 발발 후 페트로그라드는 국방장비의 3분의 2를 생산하는 러시아 군수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6년 말~1917년 초 임금은 상승했지만 작업조건은 열악해지고 노동강도는 강화되었으며 노동시간이 연장되었다. 이에 따라 산업재해가 증가했지만 노동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전선으로 보내지거나 체포 또는 해고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혁명은 예기치 않게 도래했다. 1917년 2월 23일(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에 여성들이 시위를 하면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3월 3일 니콜라이 2세는 이런 봉기의 물결에 밀려 퇴위에 동의했다. 8월 31일 전국 소비에트 헤게모니를 장악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을 대표하는 정부, 대영지의 몰수, 산업상의 노동자관리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볼셰비키 결의안을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그해 10월 25일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에서는 소비에트 전체 대의원의 60%가 볼셰비키였다. 이어 10월 26일 2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서 볼셰비키만으로 구성된 인민위원회가 결성되고 이로써 볼셰비키 정부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렇게 볼셰비키의 권력이 막강해지는 가운데 콜론타이는 1917년 8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전체 위원 중에서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출되었고, 스탈린과 스베르들로프보다 더 많은 표를 받았다. 그것은 여러 정황적 요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혁명적 연설가로서의 탁월함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은 콜론타이를 재능 있는 선동가로서만 보지 않고, 비록 일시적이나마 이론가로서 인정을 했다. 이것은 10월 이론적 문서인 ‘최중요 임무’에 관한 당강령 초안 작업을 위한 위원회에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케메네프, 소콜니코프와 함께 콜론타이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중요 인물로 인정받은 후 콜론타이는 여성의 것으로 분류되는 일들을 회피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여성해방에 대한 신념을 지속적으로 실천해나갔다. “새로운 계층들을 분리시키고 후진 부분에서 새로운 주도권을 각성시켜라”라는 레닌의 지시는 콜론타이에게 여성들을 대상으로 작업하라는 명령으로 해석되었다. 콜론타이는 ‘프라우다’에 실은 최초의 논설 중 하나에서 임시정부의 남자들은 빵을 달라는 시위와 요구로써 2월 혁명을 점화시켰던 노동계급의 여성들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했다. 콜론타이는 여성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위원회나 담당부서를 설치해야 한다고 1906년 이래로 수없이 제안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계획은 진척되지 않았다. 레닌의 명령은 분리주의에 대한 혐의 때문인지 콜론타이의 계획과 조화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콜론타이는 끊임없이 병사부인과 여성노동자들을 흡수해나갔다. 1917년 봄, 콜론타이는 세탁부들의 파업을 지도하도록 파견되었다. 사설세탁소에서 극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던 세탁부들은 처음에는 본질적인 경제적인 요구를 했지만 콜론타이의 지도 아래 전쟁에 반대하고 소비에트를 지지하는 볼셰비키들의 결의를 찬성하게 되었다. 볼셰비키 여성운동은 콜론타이가 원했던 중앙화된 기구를 갖지는 못했지만 대신 잡지 ‘라보트니차(여성노동자)’를 복간했다. ‘라보트니차’의 편집인들은 실업과 같은 시사적인 문제들, 여성들을 괴롭게 하는 높은 생계비와 전쟁의 관계 등을 기재하여 반전과 국제주의의 깃발 아래 여성노동자들은 대중 시위를 벌이라고 호소했다. 집회는 ‘라보트니차’의 예상을 뛰어넘어 수천의 군중이 운집했다. 1917년 10월 초가 되어 볼셰비키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반대해왔던 당내 여성사업 전담 기관을 설치하는 데 동의했다. 그것은 1910년 이래 러시아 노동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이 보다 명백하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들은 공장노동자이거나 파업참가자라할지라도 ‘여자’는 동지로서 진지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17년의 역경 속에서 볼셰비키가 깨닫게 된 것은 노동계급여성을 조직하려는 ‘라보트니차’ 그룹, 특히 ‘콜론타이’의 잠재력이었다. 10월에 페트로그라드의 공장과 상점을 연결하는 조직망이 발전해 가는 가운데 ‘라보트니차’의 편집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의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콜론타이는 중앙위원회 앞에서 비당원 여성노동자들이 볼셰비키를 따라 결집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191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제1차 전 러시아 여성대회가 열렸고 여기에는 공장, 노동조합, 당 조직의 8만 명 여성을 대표하여 500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 콜론타이는 <가족과 공산주의>를 발표했다. 콜론타이는 러시아 여성들에게 1)혁명과 더불어 남성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는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에 대해 마음을 열어야 하며, 2)이혼에 대한 권리로서 “새로운 자유”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또 3)낡은 가족의 유형은 그 종말을 보이고 있으며 4)가정생활이란 여성들을 종속적으로 묶어두며 집단적 사회의 발전을 방해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핵심적이자 강제적인 사회적 제도다, 5)집단이 가족을 대체하게 될 것이며, 6)노동자들의 국가는 두 평등한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결합을 필요로 한다고 호소했다. 콜론타이는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의 사회화를 통해 여성의 출산과 생산적인 노동이 결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정부는 여성의 결혼 여부를 떠나 생계를 보장해야 하며 공동체 양육으로 여성들로 하여금 출산의 부담에서 벗어나 모성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성보호소와 탁아소가 보장된다면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또한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 동료애, 연대 상호부조, 집단생활에서의 헌신을 배워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협동을 습득하길 원했다. 그리고 여성들이 자기 자식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노동자 농민의 모든 자식에게도 어머니가 될 것을 촉구했다. 그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적토대인 가족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이는 모두 여성해방을 위한 여성의 사회적 노동과 경제적 독립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비에트연방공화국 후생성인민위원으로 임명 1917년 11~12월 총선거에서 볼셰비키는 병사 표의 42%와 노동자 표의 과반수를 얻었지만 제헌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1918년 1월 5일 제헌의회를 옹호하는 시위대에게 볼셰비키 병사들이 총격을 하는 암울한 분위기에서 제헌의회가 개최되었다. 볼셰비키가 제헌의회 측에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라고 했지만 제헌의회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이들은 제헌의회를 폐쇄해버린다. 이와 동시에 개최된 3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는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여기서 콜론타이는 공화국의 후생성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인민위원회는 임시정부와의 차별성을 보여주기 위해 1918년 1월 평화, 토지, 노동자 생산관리, 이혼 등에 관한 116개의 포고령을 발표한다.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이 경시했던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보호할 방책을 강구하였다. 1918년의 소비에트 가족헌장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콜론타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부분 반영하고 있다. 출산전후의 휴가를 보장하는 법률은 노동여성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규정 중의 하나였다. 가족헌장은 정부 부담의 아동보호 및 인민들이 무관심한 친지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는 ‘질병과 노후에 대한 보험조항’, 그리고 입양의 금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입양 금지 조항은 입양아가 아동노동에 대한 농민들의 착취를 은폐하는 데 이용되는 것에 대한 우려와 고아들이 쁘띠 부르주아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아동보호소에서 보다 더 잘 양육될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녀가 부유한 알렉산더 네브스키 수도원을 퇴역군인들을 위한 병원으로 급격하게 탈바꿈하려고 하자 이에 수도승들은 그녀를 바빌론의 창녀라고 부르며 저항하였고 볼셰비키의 복지부가 만든 어린이 보호소를 불태웠다. 수병과 병사들이 인민위원회로 몰려와 그들이 전선에 나가있는 동안 그들의 사랑하는 딸들을 모성보호소에서 맡아달라고 콜론타이에게 애원했지만 보호소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시설이 부족했던 아동보호소는 곧 황량한 장소로 변했고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그런 한심한 상태에 맡기려 하지 않았다. 콜론타이는 혁명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원조가 전무한 상태 속에서 좌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혁명을 구하려는 필사적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18년 전시 공산주의 시기, 소비에트 여성정책을 주도 1918년 여름, 반볼셰비키 백군 대 볼셰비키 적군 사이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으로 인해 3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티푸스, 천연두, 이질 등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내전은 경제를 황폐화시켰고 산업은 거의 정체상태에 빠졌다. 1917년 이후 기계마손, 공급차질, 노동강도 약화 등으로 인해 공업생산성이 하락하고 대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소비에트 여성정책 주도 콜론타이는 권력에 있어서는 아니지만 정치적 활동에 있어서는 내전 중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혁명정부에서 여성관련 정책들은 대부분 콜론타이에 의해 주도되었고 레닌은 이를 지지, 지원하는 형식이었다. 당시 콜론타이는 ‘여자 레닌’으로 불리며 소비에트 정부와 적극적 공조를 펼쳤다. 소비에트 정부는 가장 먼저 가족법을 새로운 소비에트 여성상에 맞도록 제정하였다. 1918년 정부는 교회의 결혼에 대한 영향력을 제거하고 여성이 자신의 성이나 남편의 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으며 사생아도 적자와 같은 법적 권리를 갖도록 하는 가족법을 공표했다. 이 법은 남편과 아내의 법적 신분이 동등함을 명시하고 부인이 획득한 재산에 대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또 이혼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혼 후에는 남편이 자녀 부양비를 아내에게 지급하도록 조치하였다. 1918년 10월 새로운 가족법에 근거하여 여성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8년 가족법 제정은 가족제도가 쇠퇴할 미래를 대비하는 콜론타이와 같은 급진론자들과 가족을 강화하려는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긴장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가족에 대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개별가족이 자식을 부양할 책임, 교육과 양육의 책임 등이 규정되었다. 1920년 낙태가 합법화 되지만 이데올로기적 이유가 아닌 기아와 내전 속 불가피한 비상조치였다. 볼셰비키정부의 정책은 그 미사여구와는 반대로 처음부터 콜론타이의 입장에 따라 핵가족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노텔의 건설과 활동(1919~1921) 콜론타이는 후생성과 제노텔을 통해 여성해방론을 현실화시키려고 했다. 1918년 12월 레닌의 적극적인 지지로 아르망, 콜론타이, 니꼴라예바가 주축이 되어 개최한 ‘제1차 전 러시아 여성노동자, 농민대회’에는 10월 혁명 이후 최초의 전국규모의 대회로 1천여 명의 노동자계급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 대회 이후 여성해방을 위한 전국적인 여성조직을 결성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고 기존 여성국을 중앙위원회 사무국 산하의 여성부로 전환시켜 소비에트 여성사업 전담기구인 제노텔로 승격시킨다. 제노텔은 콜론타이가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설립하기 원했던 것이었다. 여성문제를 전담하는 정치기구를 따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콜론타이를 배제하고 당 통제가 가능했던 아르망을 초대 국장으로 임명했다(1919-1920). 아르망이 있는 동안 제노텔은 콜론타이의 구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성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제기하기보다는 백군과의 내전기간 동안 적국에서 선전선동 활동을 하거나 군인들에게 보낼 물자를 만들고 부상군을 치료하는 일 등에 여성인력을 동원하는 기구로 전락한 것이다. 제노텔이 여성노동자들을 동원하는 데 그치는 것에 불만이었던 콜론타이는 1920년 제노텔의 대표로 임명되면서 제노텔의 자율성 문제를 거론한다. 그녀는 제노텔이 전체 노동자 운동의 하나이며 서로 불가분의 것이라는 입장에서 자율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제노텔이 당 사업에 여성을 동원하기 위한 하부조직이 아님을 강조했다. 콜론타이의 이러한 입장은 제노텔 회의에서 채택되었으나 이는 당 지도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당내에서는 콜론타이의 견해를 경계했다. 노동자반대파(1920~1922) 1920년대 초반 트로츠키의 ‘노동군’ 계획은 동원해제하기로 되어있는 적군 병사들을 주요 공공작업장과 공업체에 배치하여 군사적 규율에 따라 노동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노조가 국가에 통합되어 국가의 관리를 받고 국가 계획에 따라 노동자를 훈련, 교육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선봉대의 임무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 3월 9차 당대회에서 이에 반대한 것이 ‘노동자 반대파’였고 이것이 노동자 반대파의 시초였다. 노동자 반대파는 노동 조직을 군사화함으로써 사회주의 체제의 선봉그룹을 만든다는 트로츠키의 구상을 권위주의적이라 비판했다. 콜론타이의 의견이 처음부터 노동자 반대파와 의견이 합치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1920~21년의 겨울 동안 그녀는 노동자 반대파가 자신의 항의를 전달할 수 있는 적합한 매개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 운동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도자가 되었다. 극도로 불안한 사회경제적인 상황에서 레닌은 권력의 문제보다 생산성의 문제를 더 절박하게 생각했다. 이에 콜론타이는 레닌이 생산력 향상에만 몰두한 나머지 새로운 체제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생산과정과 경영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레닌 동지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조합에 경영권을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노동자는 혁명을 수행했음에도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하였다. 노동자는 사소한 임무나 수행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고 비판했다. 1921년 3월 10일 제10차 당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크론슈타트 수병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중앙집권적인 당의 통제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강화되었다. 제10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는 노동자반대파의 입장을 ‘아나코-생디칼리즘’으로 매도했다. 이로써 콜론타이의 정치적 생명도 타격을 입게 된다. 콜론타이는 노동자 반대파 내에서 운동이론가로의 역할을 자임하며 단순히 노조의 문제가 아닌 소비에트 사회의 근본적인 병폐에 대해 말하며, 날카롭게 노조에 대한 분석을 했다. 당시 자율적 노동자조직이 붕괴되고 내전을 거치면서 생산성이 극도로 저하된 상황에서 노동자 반대파의 이상과 프로그램이 실행 가능했는가는 또 다른 문제지만 노동자 반대파와 콜론타이의 문제제기는 혁명정신의 원칙을 상기하는 것이었다. 제노텔의 위기와 해체(1921~1930) 내전을 겪으면서 생산성이 하락하고 대중들의 생활이 비참해짐에 따라 민중봉기가 점증했다. 이런 위기에 직면하여 당은 전시 공산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정책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꼈다. 1921년 봄부터 레닌에 의해 진행된 ‘신경제정책’은 여성노동자의 대량실업사태를 초래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과 취업차별 철폐의 원칙이 무너지고 여성노동자 우선해고가 진행되었다. 제노텔의 대중기반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의 실업은 제노텔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노텔은 해고 범위 결정에 대표자 참석과 실업자에 대한 기술 교육 실시를 당에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콜론타이는 1920년 10월 제노텔 조직자 회의에서 ‘제노텔의 임무는 당의 과업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보다 어떤 영역이든 여성문제가 제기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주도권을 쥐고 할동하는 것’이라는 강령을 채택했다. 이는 당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당은 콜론타이를 제노텔에서 해임시키고 골루베바로 교체했다. 그러나 골루베바는 콜론타이와 의견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23년 12차 당 대회에서 골루베바와 콜론타이의 주장을 ‘여성의 일상생활을 개선한다는 기치 아래 남녀의 공통 과제인 계급투쟁으로부터 여성을 멀어지게 하는 여권론적인 일탈’로 규정하고 제노텔에 대한 모든 논의를 종결시키기로 한다. 결국 여성해방을 위한 콜론타이의 원대한 프로그램은 내전과 경제적 위기로 실현되지 못했다. 콜론타이의 ‘새로운 도덕’ 콜론타이는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1918)에서 전통적 결혼관계를 논박하고 이 관계를 갖지 않고 살 수 있는 ‘새로운 여성’을 묘사하며 가족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완성시켰다. 그녀는 ‘성적인 면에서 유연성을 가진 덜 안정된 결혼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적합하다’라고 주장했다. 개인적인 부부나 가족의 연계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노동자의 연대는 약해질 것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족 보존을 위해 자본을 빼돌리는 자본가처럼 파업 중에 가족의 보존을 위해 일을 하는 파업파괴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전의 가족관계가 몰락하는 공동체 내에서는 두 명의 동등한 노동자간에 ‘애정과 동지의식’에 기초한 새롭고도 자유로운 결혼관계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도덕은 당내에서 격렬한 반대와 비난에 직면하였다. 콜론타이의 이론은 소련에서 공동체 생활의 기초를 제공하기보다는 정치적 방해물로 간주되었다. 콜론타이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계급과 국가, 종교의 소멸과 더불어 부르주아 가족제도 역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들은 가족을 대체하기보다는 노동자 어머니를 위한 가사노동의 사회적 대체를 구상하는 정도였다. 여성들에게 결혼의 문제가 그들의 종속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하는 출발점임을 인식하지 못한 레닌은 1918년 독일 노동자들이 결혼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다루려는 토론회를 구성했다는 말을 듣고 통탄한다. 한편 부하린은 <공산주의의 기초> 중 당 프로그램의 설명에서 종교, 국가, 은행, 금융제도는 소멸될 것이나 가족은 가사와 육아를 제외하고는 손상되지 않고 보전될 것이라 보았다. 볼셰비키는 핵가족의 붕괴를 바라지 않았다. 이는 결혼이 여성에게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한 콜론타이 견해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날개달린 에로스 콜론타이는 여전히 전통적인 생활을 하는 볼셰비키들을 놀랍게 하는 여성이었다. 46세의 콜론타이는 1917~1918년 29세의 혁명 해군인 파벨 디벤코와 혼인등록을 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했다. 콜론타이가 디벤코의 육체적 매력과 혁명적 에너지에 이끌렸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그와의 관계를 결혼을 통해 신성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의 설득으로 인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콜론타이의 이런 결혼에 불만이었다. 레닌은 한번은 “연애가 정치와 뒤섞이는 여성은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하였고 스탈린은 트로츠키에게 이 커플에 대해 거친 농담을 던지기도 하였다. 디벤코와의 결혼생활이 5년이 된 즈음 디벤코는 한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결국 그들의 결혼은 불행으로 끝났다. 콜론타이는 다시 한번 혁명적 정치와 혁명적 사랑을 결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달았다. 그 불행의 상처는 콜론타이로 하여금 애인인 동시에 공산주의자인 남성들과 여성들 사이의 감정, 의사소통, 그리고 신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만약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면 왜 그들은 진정으로 동료가 되지 못하는가, 콜론타이는 반문하였다. 노동자 반대파 활동과 제노텔에서 당과 마찰을 빚는 활동으로 인해 쫓겨나고 디벤코와도 헤어짐으로써 1922년은 그녀의 정치생명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최저점이었다. 거칠고 고통스러운 나날들 속에서도 그녀는 페미니스트로서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혁명이후(1918~1923) 시기 동안 성에 관한 글을 썼는데 이 당시 글은 교육받지 못한 여성과 남성, 그리고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당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여성의 종속을 토대로 한 과거의 결혼관습을 거부하면서 두 평등한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결합으로서 새로운 소비에트적 남녀결합의 이상형으로서 “동지애적 결합”을 제시했다. 1860년대 이미 많은 인텔리겐차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녀는 비합법적 결합도 합법적 결합만큼이나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결혼제도 안이든 밖이든 태어난 아이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 젊은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1923)에서 그녀는 성에 대해 통속적이고 생리적이며 “물질적인” 이론들에 반대하면서 친구이면서도 동지인 파트너에 대한 정제된 열정과 숙려를 전제로 하는 “날개달린 에로스”라는 그녀 고유의 개념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녀가 사랑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한 것은 사회주의에서 이전의 부르주아 계급의 사랑과 결혼을 대체할 노동자계급에 알맞은 사랑의 방식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었다. <날개달린 에로스>에서 콜론타이는 사랑이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당대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구성되었음을 지적한다. “사랑은 절대 사랑하는 두 당사자들만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한 집단에 가치 있는 요소들을 결합하게 해준다. 역사적인 발전의 각각 단계들에서 사회는 어떤 조건 하에서 사랑이 ‘적합한지’(즉 주어진 사회의 집단적 이익에 부합하는지) 혹은 죄악시되는지(주어진 사회의 업무에 반하는지) 정의하는 규범들을 마련했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는 명확해진다.” 이를테면 봉건제 하에서 정신적 사랑과 영주의 부인이나 여왕에 대한 동경은 귀족 계급의 이해에 봉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가족의 기반은 부에 대한 공동소유보다 자본의 축적을 위한 것으로 부의 축적에 공통의 이해가 달려있는 가족 구성원들은 강력한 감정적, 심리적 유대로 묶이게 되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도덕은 에로스의 자유를 단호하게 제한하며 법적으로 혼인한 부부에게만 오직 협조적이다. 이들의 사랑은 서로에 대한 배타적 소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결혼 외부에서 남성은 성적 관계를 돈으로 사거나(성매매) 은밀한 간음을 통해 성욕을 해결하게 된다. 반면 여성의 성욕은 무시된다. 그러나 콜론타이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의 도덕은 어떤 공식화되어 있는 사랑의 형식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단지 성적 본능이 아니라 동지애에 대한 다면적인 경험을 추구한다. 이는 다음의 원리에 입각하는 것이다. 1)관계에 있어서의 평등(남성이기주의와 여성 개인에 대한 노예적 억압의 종식), 2)타인의 권리와 타인의 마음과 영혼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부르주아 문화에 의해 고무되는 소유 관념과 달리), 3)동지적 감성, 사랑하는 이의 내적 움직임을 이해하고 들을 수 있는 능력(부르주아 문화는 오로지 여성에게만 이를 요구한다). 그러나 레닌은 콜론타이의 ‘자유로운 남녀 결합’ 사상이 소비에트 젊은이들에게 도덕적 혼란을 야기한다고 비판했다. 콜론타이의 자유결합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여성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데 레닌은 여성을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자녀의 재생산과 교육을 담당하는 존재로 설정했다. 자녀를 공산주의 재원으로 양육하는 이러한 노동자-어머니 모델은 70년 간 소비에트 국가의 여성상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여성관에 의하면 소비에트 여성들은 남편과 자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제노텔에서 제거되고 노르웨이로 추방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레닌은 죽고 스탈린과의 평화적인 관계로 그녀는 쉴리아프니코프와 디벤코를 포함한 그녀의 동지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간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에 그녀는 스웨덴의 왕립의회에서 소비에트 연합을 대표하도록 임부를 부여받는다. 그녀는 첫 여성 외교관(스웨덴)으로서 마지막 활동을 장식했다. 그녀는 러시아로 돌아와서 은퇴생활을 하며 글을 쓰다가 1952년 모스코바에서 생을 다했다. 콜론타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콜론타이는 여성문제에 사회적 기초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사와 양육의 문제, 낙태, 성매매, 남성에 대한 경제적, 심리적 의존 등 여성에게 고유한 여러 문제들이 사회경제적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여성이 2차 노동력으로 착취되는 문제, 재생산노동을 위해 착취되는 문제들이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를 이룬다. 콜론타이는 여성문제의 사회적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그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갖는 이해는 부르주아 여성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자본주의가 철폐되면 자동적으로 여성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성의 문제를 사회경제적 문제로 환원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족제도가 변혁되지 않고는 여성이 자유로워질 수 없으며, 새로운 사회는 그런 변화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가족을 대체하는 대안적인 관계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것이 기존 가족의 근간을 이루는 배타적 관계, 결혼관계 내에서만 긍정되는 관계가 아닌 공동체적인 동지애적 사랑이다. 콜론타이에게 노동력 착취의 문제와 가족, 사랑의 문제, 이 두 가지 측면이 콜론타이의 사상의 근거가 된다. 첫 번째 측면에서 여성이 가족에서 불평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여성이 감정적으로 남성에 의존하게 되는 문제는 일차적으로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존재였고 이로 인해 여성은 공적인 일을 하더라도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콜론타이는 경제적으로 독립적이며 감정적으로도 남성에 의존하지 않는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신여성’이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그런데 신여성 모델이 가능하려면 가사, 육아가 사회화되어야 했다. 여성 개인, 혹은 개별 가족이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시스템이 필요했고 콜론타이는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분투했다. 두 번째 측면에서 콜론타이는 끊임없이 노동자 대중들에게 가족의 약화와 새로운 관계가 필요함을 호소했다. 콜론타이가 말했던 육아의 사회화는 단지 공공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는 것을 넘어 여성들이 자식에 대한 배타적 사랑을 넘어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공동체의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즉 자식에 대한 소유 관념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부르주아 가족제도 안에서 형성되는 사랑의 개념을 깰 것을 요구한다.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적 조건은 여성해방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개념화한 것이 기존의 서로에 대한 소유 관념에 얽혀 있던 ‘날개 없는 에로스’를 버리고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 간의 동지애적 사랑을 추구하는 ‘날개달린 에로스’였다. 그것은 여성의 역할이 남성을 보조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며 독립적인 운동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공동체적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여성과 남성 모두의 변화를 요구한다. 유념할 점은 콜론타이가 제시한 동지애적 사랑이 ‘혁명의 주체로서 노동자들이 추구해야 할 사랑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동지애적 사랑이 노동자들의 주체화 과정과 결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날개달린 에로스‘를 노동자운동의 관점과 유리시켜 사고하는 것은 콜론타이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그녀가 제안한 것은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와 문화적 변화의 동시적 진행이었다. 또 그녀의 사상에서 여성 고유의 문제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문제와 분리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여성권과 노동권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여성문제를 제기하고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결합하려 했던 그녀의 관점은 탁월한 것이었다. 참정권 운동을 위시로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이 노동자 여성들의 이해에 복무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며 노동자운동 내에서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여성들을 아래로부터 조직함으로써 여성문제를 알려내려 했던 그녀의 노력은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이 처한 어려운 현실에서 감정적 늪에 빠지지 않고 그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고민하려 했던 그녀의 노력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는 단순히 여성 스스로 ‘이성적이 되자’거나 ‘감정을 억제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이 운동의 한 주체로 살면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요인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바꿔나가기 위한 집단의 실천을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콜론타이는 아들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개인적 감정 문제로 축소하지 않고 그러한 문제의 사회적 맥락을 분석하여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토대를 만들고자 했다. 돌봄 노동의 사회화를 혁명의 과제로 제기하고 새로운 사랑의 형태, 방식을 제안한 것이 그런 것들이다. 그녀의 사상을 현재적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일 것이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현대가족 이야기』 노동자 운동이 다시 서야할 곳 ‘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대대적인 정리해고, 구조조정은 고용불안을 확산시켰다. 저임금, 불안정한 고용상태의 비정규직 증가는 청년 세대의 절망을 낳았고 안정된 고용에 대한 열망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구조조정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는 정규직 노동조합은 정부와 자본이 붙여놓은 ‘이기주의’라는 딱지를 떼버리지 못하고 있다. 신축화 , 사유화가 최선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세대와 계층을 막론하고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가 되고 있는 지금, 상황이 이리 되도록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현대가족 이야기』는 대표적인 제조업 공장인 울산 현대자동차 사례에 비추어 민주노조 운동의 실패를 평가한다.『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은 엘리트 중심의 노동자 문화, 노동자 정체성의 변화, 물량의 논리가 현장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과 가상화되는 파업들을 다루며 ‘민주노조’ 정치양식을 분석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기존의 파업이 조합원들이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활동가가 재생산되는 ‘노동자의 학교’로서 역할을 했다면 현재 파업은 사측과의 협상을 위한 물리력 동원으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를 ‘파업의 가상화’라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다음으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몰성적(sex-blind)이었음을 비판하며 가족임금의 신화, 가족중심성의 문제를 짚는다. 『현대가족이야기』는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 가족의 삶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특징적인 것은 현재 ‘전업주부’의 삶에 생애사적으로 접근하면서 페미니즘은 물론이고 현대자본과 노동조합의 적대, 지역(공동체)에서의 삶, 노동운동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그래서 두 책이 주는 결론은 다른 듯 유사하다. 그것은 노동자운동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변화한 자본의 전략을 적절히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실리주의와 조합주의에 빠져 자본이 만들어 낸 게임의 룰에서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 노동조합은 엘리트 활동가만의 조직이 되어 현장에 군림하고 노동자 대중의 신뢰를 잃어 ‘민주노조’라는 말조차 무색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현실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노동운동, 바로 그 민주노조운동의 시효소멸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책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노동운동 혁신’의 과제를 부여잡고 2010년을 맞이하는 노동자운동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장소가 무지개 넘어 어딘가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이념과 가치로 재구성되어야 하는 곳은 바로 여기라고 말한다는 것, 그걸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민주노조 운동의 시효소멸 과거 민주노조운동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이었고 우리 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민주노조운동은 국가의 노동배제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에 저항하는 사회민주화 투쟁이자, 인간해방과 평등세상을 추구하던 해방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공장, 지역, 가족, 학교 등의 공간을 노동자 투쟁의 역사적 장소, 노동자 정치의 현장으로 구성한 정치양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서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유효성은 점차 상실되기에 이른다. ‘고용안정’의 배타적 강조 유효성 상실의 첫 번째 근거는 민주노조 운동이 내세우던 노조 민주화, 노동해방의 가치를 ‘고용안정’이 대체한 것으로 꼽을 수 있다. 갑작스러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변화는 전국적인 노-사 대리전이었던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에서 노동조합이 정리해고를 인정하던 순간이 계기가 되었다고 지목된다. 1990년대 내내 현대 자동차는 사측의 신경영전략과 노조 간의 현장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곤 했다. 하지만 현장 자체는 여전히 민주노조의 가치가 사측의 노사협력적 가치와 경쟁하던 정치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1998년 ‘정리해고자는 단 한 명도 받아들일 수 없다’던 지도부가, 함께 투쟁하던 남성 노동자와 여성노동자 277명의 정리해고에 합의하면서 조합원 개개인에게는 그 무엇보다 ‘고용안정’ 논리가 우위에 서게 된다. ‘불황으로 물량이 감소하고, 물량이 감소하니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는 사측의 논리에 노조가 무릎 꿇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 자동차 조합원들은 불황과 해고의 불안으로 고용주와 노조 모두에 이중몰입(혹은 충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 잘릴지 모르니 돈벌이가 될 때 쎄 빠지게 벌기’ 위해 조합원 개개인은 더욱 잔업, 특근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고용불안은 잔업, 특근으로 가능한 ‘상대적 고임금’과 함께 현대자동차 조합원과 그 가족의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현대자동차 노동자 부인의 인터뷰를 보면 정체성 혼란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남편 월급으로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내가 뭔가를 하고 싶을 때 바로바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정도”는 된다고 생각하고, 빈부차가 거의 없는 동질화된 집단거주지에서 “기죽을 일도,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지만” 98년 명예퇴직을 하면서 퇴직금과 위로금을 받고 떠나 “잘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며 중산층과 구별되는 자신들의 계층적 지위를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생활비를 최소화하고, 저축액수를 늘리고, 각종 보험에 가입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자녀교육을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두게 된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불안을 대비하는 동안 노조는 아무런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불황이면 물량이 감소하고, 물량이 감소하면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는 자본의 논리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 없이 ‘물량 감소=구조조정’이라는 등식에 충실하게 물량확보에만 열을 올린다. 그리고 이는 조합원의 요구이니 노동조합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자위하는 것에 그친다. 노동자의 최우선 가치가 변하고, 노조 역시 다른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파업’ 역시 더 이상 ‘노동자의 학교’일 수가 없다. 비전 없는 노조가 이끄는 파업은 사측과 협상하기 위한 물리력 동원 이상이 될 수 없고, 조합원들의 파업 참여도 형식적으로 관리되는 수준에 머문다. 그나마도 특근처리가 되어야 파업에 참가하는 정도이니 투쟁이 ‘속전속결’로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설상가상으로 노동조합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2000년 현대자동차 지도부는 노동비용 삭감을 위해 노동현장의 신축성을 높이기 원했던 사측의 요구를 수용하며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완전고용 합의서’를 체결한 것이다. 차별받고 억압받던 노동자가 부르짖었던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가치가, 그 가치의 구현이자 상징이었던 노동조합 스스로에 의해 훼손된 것이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민주노조운동의 보루가 아니라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 고용안정의 방패막이가 될 수 있는 상대적 고임금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으로 상징되고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은 현장에서 화석화되고 말았다. 물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들은, 같은 노동이지만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에 대해 ‘동등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같은 노동자로서 조건 없이 연대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당장 자신의 고용불안 앞에서 비정규직과 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자동차 현장 활동가가 말한 대로 ‘당시에 노조가 정리해고를 끝까지 반대하고 나섰다면... 조합원들은 정리해고를 끝까지 반대하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합원들은 그렇게 순응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런 순응의 방식은 노조에 대한 불신과 노동자 계급의 분열, 노동자 개개인의 파편화로 이어졌다.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부재 두 번째로는 민주노조 운동이 자본의 남녀 노동자 분할 - 통제전략을 바로 보지 못했거나 실리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전략의 부재를 들 수 있다. 1998년 정리해고 투쟁에서 144명의 여성노동자 전원 정리해고에 합의한 사건은 노조가 남성노동자-부양자, 여성노동자-피부양자 혹은 생계 보조자로 가정하는 자본의 남녀 노동자 분할 - 통제 전략에 실천적으로 동조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실제로 ‘현모양처’를 만들기 위해 회사가 진행하는 조합원 부인 대상 교육은 그 내용이 노조의 활동을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이유로 노조가 방관해왔다. 조합원 설문조사를 보면 절반이 넘는 응답자가 ‘결혼한 여성은 남편과 자녀를 중심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여 다수의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을 아내이자 어머니로 유폐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사가 진행하는 각종 교육과 매체는 자본이 바라는 이데올로기와 논리를 주입하는 일상적 통로로서 ‘고생하는’ 남편, ‘훌륭한’ 아버지, ‘대견한’ 아들의 이미지를 노동자에게 주입한다. 좋은 가장되기, 자기 계발교육, 부부감성교육, 재태크 교육 등을 통해 생계부양자이자 고용불안에 처한 ‘회사인’으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발적으로 노후를 대비하는 ‘노동하는 주체’로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불가능한 가족임금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고강도 장시간 노동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그 부인인 여성 역시 ‘행복한 가정 만들기’, ‘공장 견학’ 프로그램 참여 등을 통해 ‘내조’의 내용과 형식을 배우게 된다. 여성으로 하여금 ‘가정에서 큰 불만 없이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의 교육에 충실하여’ 남성의 노동력을 효과적이고 안정적으로 재생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가사 전담자로서의 여성의 자기 인식은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따라서 저임금의 노동인 것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실제로 교육에 참여한 여성들의 평가를 보면 회사의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먹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교육이 초기 노조비판, 경영현황, 판매기법 등에서 ‘교양특강’이라는 형태로 바뀌다 보니 참여를 꺼리던 여성들은 ‘노느니 뭐해’ 하며 참여하게 되었고 “회사에 대한 자긍심이 생기고, 이렇게 큰 회사 덕택에 별 그거 없이 산다고 고마운 마음도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가서 남편 내조 잘하고 자식 교육과 건강에 더 신경써야 겠다”는 다짐이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회사 교육 참여에는 사측의 동원전략도 한 몫 한다. 초청장을 남편 노동자를 통해서 부인에게 전달한 뒤, 교육 참여에서 초청장을 수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확인이 되다보니 회사에 찍힐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남편이나 부인이나 매한가지다. 초청장을 주는 남편이나 받는 부인이나 ‘노느니 뭐해’라며 참가로 마음이 기울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회사는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친기업적인 정서를 심어주고, 중산층을 지향하는 남성 생계부양 가족 형태와 가족 중심성을 강화하면서 남녀 모두의 노동권을 축소하려 해왔다. 그리고 이에 대응했어야 하는 노동조합, 민주노조운동은 자본이 만들어 놓은 계층 피라미드에서 여성의 노동권을 은폐하고 억압하는 데 암묵적으로 동조해왔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이 자신의 역할을 남성 노동자들의 노동권 방어로 한정하며 상대적 특권에 안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본의 공격은 다시 그들에게 향하고 있다. ‘노동의 여성화’라는 말처럼 자신이 의도적으로 방기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조건이 전체 노동시장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을 파괴하고, 끊임없이 노동비용을 삭감하려 하는 자본의 공격은 저임금 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려고 하는 ‘정규직 고임금 노동자’라는 칼날을 벼려 민주노조를 향해 겨누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공동체주의 훼손 세 번째는 노동자 거주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투쟁의 해방구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던 ‘민주노조’운동의 공동체주의가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과거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은 구 시가지인 양정동에서 노동자 거주 밀집지역을 형성하고 살았다. 그러나 이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새롭게 형성된 중형 아파트 단지로 이동하면서 노동자 공동체 거주 지역은 파편화되고 조합원을 비롯한 조합원 가족들 간의 네트워크는 상실되었다. 공동육아, 공동투쟁, 정보교류, 상호 토론이 이루어지던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앉을 의자도 없이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공돌이 인생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노동자와 전업주부는 자녀의 계층상승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좀 더 학군 좋은 곳으로, 더 잘 가르치는 학원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고 목돈이 들더라도 해외유학에 열을 올린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남편은 잔업, 특근에 부인은 남편 건강, 자식 교육의 최전방에 나서고 있다. 민주노조의 공동체적 가치가 사라진 곳에 노동몰입, 중산층 지향성이 뿌리를 내리면서 노동조합 역시 기본적인 노조 활동 이외의 지역 차원의 집단적 실천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방범활동, 경로당 자원 봉사 활동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조합원들이 동네 일에 관심 없다. 회사, 노조도 지역 기여도 거의 없다....” 노동조합과 조합원이 지역 공동체에 개입하지 못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동안 현대자동차를 상징하는 빨간 조끼에 대한 울산 지역의 거부감은 시기와 원망 섞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지역의 부정적 시선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상대적 고임금’인 현대 자동차 노동자들이야 파업을 하면 임금이 인상되고 노동조건이 개선되겠지만 현대차 하청업체, 협력업체는 부도위기에 빠지고 해당 기업 노동자는 생계의 위험에 처하는 일이 지역 내에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갑득 후보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 노조 전체가 지난 18년 역사에서 협력업체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한 적이 없다.” 2005년 울산 북구 재보궐 선거에서 지역 비정규직이 정규직 출신 정갑득 후보에 대해 보인 반응이다. 이 말은 사내하청을 제도화한 정갑득 전 위원장에 대한 비판이자, 정갑득으로 대표되는 정규직 노조에 대한 지역 비정규직의 비판이기도 하다. 18년 역사에서 협력업체와 연대한 적이 없다는 표현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같은 노동자로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와 같은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현대자동차 노조에 대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지역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민주노조운동’ 가치의 재구성 지역과 공장, 가족이 자본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분화되고 파편화되었다고 해서, 노동자 정치가 가능한 공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치가 가능한 공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비가시적인 것일 뿐이다. 자본과 노동이 교차하고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희망과 불안의 모순에 노출되는 그 현장을 포착하고 비판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곳이 노동자 정치의 장소가 될 수 있다. 과거 민주노조 운동이 회사, 민족, 국가라는 공동체의 통합된 이미지와 그 재현을 깨뜨려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가치를 통해 공장, 지역, 가족, 학교를 ‘정치의 장소’로 재구성했던 것처럼 새로운 노동자운동 역시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 경쟁과 착취, 억압으로 보이지 않게 된 장소들을 새롭게 구성해 나갈 수 있다. 물량과 고용안정의 논리를 부수고 노동자 단결의 가치를 복원할 때, 고용 시간에 귀속된 일상을 깨고 지역의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 실업, 빈곤층과 연대해 나갈 수 있을 때, 여성을 착취ㆍ주변화하고 결국엔 남성에게도 굴레가 되는 가족임금과 성별분업, 가족중심성을 비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노동자 정치의 공간이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민주노조운동’의 정치 양식이 시효소멸 했을 지라도 정치의 공간을 발견하고 재구성하려 했던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더 멀리 더 높이 뛰려면 움츠려 긴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긴장하다 주저앉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11월 19~20일 진행된 민주노총 성평등 강사단 캠프 자료집입니다. 캠프에서 진행된 강연은 아래와 같습니다. 성폭력과 여성의 권리(정지영 |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장) 오늘날 한국에서 여성의 삶, 노동, 가족(김정은 |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차장) 그 밖에 교안 작성법, 강사 훈련법 등의 내용이 첨부되어있습니다.
11월 19~20일 진행된 민주노총 성평등 강사단 캠프 자료집입니다.
캠프에서 진행된 강연은 아래와 같습니다.
성폭력과 여성의 권리(정지영 |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장)
오늘날 한국에서 여성의 삶, 노동, 가족(김정은 |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차장)
그 밖에 교안 작성법, 강사 훈련법 등의 내용이 첨부되어있습니다.
독일 사회주의 운동과 세계 여성노동자 운동의 헌신적 지도자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1857.7.5.~1933.6.20.)은 ‘세계 여성의 날’을 최초로 제안한 독일의 혁명가로 매년 3월 8일이면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듣게 된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10년 2차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에서 제안되었고 1911년 처음 개최되었다. 첫 세계 여성의 날 행사에서 세계 각국 여성노동자들은 무장한 경찰에 맞서 대규모 투쟁을 벌여 여성노동자의 힘을 확인시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시작도 세계 여성의 날에 즈음한 여성들의 횃불로부터였다. 매년 3월 우리는 현재 여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며 이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 때마다 우리는 오늘에 되살아나는 클라라 체트킨을 만난다. 이번 연재에서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지도자 클라라 체트킨의 삶 가운데 노동조합과 당의 헌신적 조직가로서, 세계 여성노동자 운동의 지도자로서, 수정주의 노선과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 평화주의자, 국제주의자로서의 모습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사회변혁과 여성해방을 결합시키려 한 혁명가의 삶으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나아갈 바를 고민하기 위해서다. 클라라 체트킨은 76년에 이르는 일생의 대부분을 사회주의 이념의 실현, 여성운동의 건설과 확산을 위해 헌신했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 격정적 투사로 살았던 긴 세월에 비해 그녀의 삶과 고민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그녀의 수많은 연설과 기고, 편지의 내용이 책으로 남아있고, 그녀가 편집장이었던 잡지 『평등』을 통해서 일부를 접할 수 있다. 그녀의 일생이 길고 치열했던만큼 먼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그녀의 일생을 짧게 살펴보고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장면으로 다시 들어가보자. 식지 않는 이상과 열정을 가진 혁명가 클라라 체트킨 클라라 체트킨이 혁명운동에 헌신했던 당시는 독일이 영국의 세계적 헤게모니와 경쟁하며 산업과 무역을 발전시키고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던 시기다. 급격한 산업의 발전은 독일 사회민주당(SPD,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이하 독일사민당)과 자유노동조합의 급격한 성장 배경이 되었다. 독일사민당은 1914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사회주의 정당이었고, 자유노동조합 또한 유럽 최대의 노동조합으로 성장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까지에 이르는 고도의 경제 성장에서 여성노동자의 산업 부문 진출도 급격히 증가했다. 독일의 여성 대중 조직화는 독일사민당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급격히 성장했다. 1908년 이전까지는 여성의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법 하에서 사회주의 운동도 많은 탄압을 받았지만 사회주의 여성들의 운동은 성장했다. 독일의 여성운동은 사회 경제적 조건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변화함에 따라 구시대적 여성억압을 타파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의지로부터, 그리고 여성 노동자를 사회주의 혁명에 동원하기 위한 독일사민당의 필요로부터 시작되고 조직되었다. 사회주의 여성노동자운동은 당시 상당한 전통을 가지고 있던 부르주아 여권운동의 대중적 영향을 능가해 20만에 이르는 여성들을 당과 노조로 조직했다.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 노동자들을 여기에 동참시키고 여성 문제를 제기하는 데 열정적인 활동을 벌였다. 특히 그녀는 여성 억압의 원인을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적 분석에서부터 도출하고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운동을 결합시키기 위해 일생을 헌신한 활동가로 평가되고 있다. 나아가 그녀는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를 창설하고 세계 여성의 날을 제안, 조직하는 등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국제적 확산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내 독일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제국주의 정책 하에 수정주의가 등장하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독일사민당은 분열한다. 체트킨은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에 합류하고 독일 공산당 창설에 동참했다. 이들은 독일사민당이 의회주의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수정주의를 수용하고, 국제주의적 이상을 기각하고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해 민족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는 데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1918년과 1919년 독일 노동자들의 혁명적 봉기가 독일사민당과 군대에 의해 패배한 후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잔혹하게 암살당했다. 다행히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체트킨은 그 후 1919년 결성된 독일공산당(KPD,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의 중앙위원회에서 일하며 로자와 칼의 이상을 이어가고자 했다. 1920년 이후 그녀는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멤버로 러시아와 베를린을 오가며 활동을 벌인다. 코민테른의 서기 활동과 병마로 인해 소련에 머무르면서 그녀는 국제적색원조(MOPR, International Red Help)라는 조직을 지도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의해 살인혐의를 뒤집어쓰고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스코츠보로 흑인 청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제적 지원을 조직했던 일은 그 대표적 활동이다. 그녀의 마지막 투쟁은 파시즘과 맞섰던 것이다. 그녀는 1932년 독일 연방의회 개원사를 하러 나서서 파시즘에 맞설 노동자계급의 연합전선을 건설하자고 연설했다. 당시 연방의회 제 1당이었던 나치스 의원들 앞에서 파시즘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연설을 한 것이다. 70대 중반 클라라 체트킨의 목소리는 그녀가 일생동안 그랬던 것처럼 두려움 없이 당당했다. 그녀는 1933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국주의 전쟁에 맞선 활동에 헌신했다. 이렇게 짧게 살펴보아도 혁명과 전쟁의 시대 한 가운데에서 한 치도 비켜서지 않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그녀를 느낄 수 있다. 이제 클라라 체트킨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그녀 삶의 중대한 시점들로 다시 돌아가보자. 클라라 아이스너의 탄생과 사회주의자로의 성장 우리가 기억하는 여성 혁명가들 대부분이 그렇듯 클라라 체트킨 또한 교육받은 여성이었다. 클라라 아이스너(Clara Eissner)는 1857년 섬유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마을 뷔데라우에서 오르간 연주자인 아버지 고트프리드 아이스너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신봉했던 어머니 조세핀 비탈레 사이에 태어났다. 어머니 조세핀은 교육받은 여성으로 뷔데라우에서 여성들을 위한 교육 협회를 설립하기도 했고, 종교제도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해 남편과 대립하기도 했다. 조세핀은 클라라가 평생 동안 여성의 권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헌신하게 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클라라의 부모는 교육을 위해 1872년 라이프찌히로 이사해 곤궁한 생활을 했다. 당시 여성은 김나지움에 입학할 수 없었지만 명석했던 클라라는 반슈타이버대학 사범학교에 무료로 입학했다. 이는 여성에게 허용된 당대 최상의 교육과정이었고, 교육받은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대개 교사였다. 대학에서 그녀는 아우구스테 슈미트, 루이제 오토 등을 스승으로 만나 여성 권리 운동에 대한 의지를 높였고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때 배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는 그녀가 나중에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활약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클라라는 러시아 망명학생그룹과 인연을 맺고 독일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석해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 사회주의자들과 만났다. 그녀는 이후 스승들뿐 아니라 가족과도 인연을 끊고 마르크스주의를 더욱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때 만난 새로운 스승 오십 체트킨(Ossip Zetkin)은 러시아 망명자로, 후에 그녀와 사실혼 관계로 10년을 함께 한다. 그는 목수 일을 하며 혁명 활동을 하고, 모임이 끝난 후 클라라에게 과학적 사회주의를 강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라는 오십과 함께 노동자들에게 강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878년 중반에 클라라는 독일사회민주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활동하지만, 여성의 정치 활동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원이 될 수는 없었다. 같은 해에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자법이 통과되자 그녀는 당과 추방된 지도자들을 위해 자금을 모으며 비합법 활동을 벌였다. 1880년 오십 또한 체포되어 독일에서 추방당하자 그녀는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 스위스 취리히로 옮겨가며 당 중앙조직을 재건하고 당 문헌을 독일에 배포하는 활동을 했다. 1882년 파리로 가서 오십과 함께 살며 두 아들 막심과 콘스탄틴을 낳았는데, 독일 시민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삶은 무척 고단했다. 추방당한 사회주의자들은 직업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둘은 집필, 번역 작업을 했고 클라라는 주부, 어머니, 가정교사로도 일했다. 하지만 수입은 적었고, 심지어 1885년에는 입고 있는 옷 외에 아무 것도 없이 거리로 내쫓기기도 했다. 그녀는 가사와 양육, 생계를 책임지는 열악한 일상 속에서도 정치활동에 참여하며 파리의 사회주의 노동 여성들을 결집시키는데 힘썼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고단한 삶으로 두 사람 다 건강이 나빠졌다. 클라라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지만 오십은 이로 인해 1889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국제적 지도자로 1886년 가난과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잠시 독일로 돌아간 클라라는 라이프찌히의 비밀회합에서 첫 연설을 하게 된다. 서른 즈음에 하게 된 첫 연설에서 그녀는 운동에서 증대하고 있는 여성들의 역할, 그리고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라는 책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망명 생활에 관한 이야기와 여성문제를 다룬 연설은 대단히 인기를 끌어서 다른 그룹들에서도 요청이 쇄도했다. 몇 개월에 걸친 독일에서의 활동 후 파리로 돌아가 1889년에 오십이 사망하기까지 클라라는 가사일과 간호에 전력을 다했다. 오십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지만, 그녀는 이내 수습하고 1889년 개최된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 준비 조직위원회에 참가했다. 그녀는 베를린 노동여성 대표로 대회에 참가하도록 결정되었는데, 당시 대회에 참석하는 19개국 대표 400명 중 여성은 클라라를 포함해 8명이었다고 한다. 이 후 수 년 동안 인터내셔널의 서기로 활동하면서 그녀는 노동조합 운동과 당 운동에서 수많은 역할을 했다. 그녀는 제본공 노동조합 실행위원으로 활동했고, 브러쉬공, 의류, 목제공, 손장갑 제조공 등의 노동조합과 몇 개의 남부 노동조합에도 관여했다. 재단사 및 재봉사노동조합에서도 활동했다. 또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 최초의 여성 당 집행부로 활약했다. 1908년까지는 공식적으로 당원이 될 수 없었지만, 대신 별도의 여성 집회에서 여성들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었다. 체트킨은 1892년 초부터 매년 모든 당 대회에 여성협의회 대표로 파견되도록 선출되었고 1895년에는 당 최상위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여성의 정치참여가 인정된 후 1909년에는 교육부를 책임지는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다. 노조와 당에서 그녀의 활동은 주로 독일 전역의 당 지부를 찾아다니는 연설자 역할을 비롯해 전단 작성과 배포, 해고되거나 파업 중인 노동자 지원, 그리고 민족이나 국제적인 차원의 노동조합 대회 계획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기 위한 그녀와 여성 지도자들의 활동은 많은 성과를 낳았다. 한편 클라라 체트킨은 1891년부터 25년 간 여성 잡지『평등』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재정적 어려움과 내용에 대한 비판 속에서도 25년 가까이 『평등』을 지켰다. 1902년 『평등』은 독일 사민당의 공식 기관지가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국제적 기구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1917년 클라라 체트킨은 적극적인 반전 활동으로 『평등』 편집진에서 제명된다. 그녀가 했던 많은 연설과 『평등』의 원고를 통해 여성문제에 대한 그녀의 분석과 입장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독일사민당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 독일사민당은 미조직된 여성들을 당과 노조에 동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미조직 여성들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에서 우익적으로 동원되거나 남성 노동자와 경쟁하도록 활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대다수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훔친다’고 생각했지만 사민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진출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보았다. 이에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당 중앙과 지역 지도자들의 활발한 지원이 이어졌다. 당시 독일의 여성노동자들은 대부분이 미숙련 노동자로 남성들도 조직되지 않은 부문에서 일했다. 여성들은 농업, 가내 노동, 목화 산업, 미숙련 직물 제조업 등에 집중되어 지리적으로 분산되어 있었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따라서 교섭력도 없고 손쉽게 대체되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조직이 어려웠다. 그래서 독일사민당으로 조직된 여성 당원들은 대개 당원의 아내인 주부였다고 한다. 한편 여성들은 투표권과 정치적 참여의 권리가 없었고,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아 대다수 여성들이 독일사민당을 불경시했다. 또한 일부 조직된 여성들은 노조와 당에 만연한 성차별주의에 밀려나기도 했다. 독일사민당이 여성 노동자 조직화에 많은 역량을 쏟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주의로 조직된 여성의 이상적 모델은 남편의 높은 이상 추구에 헌신하는 희생적인 아내였다. 사회변혁에서 여성문제의 공백은 1910년대에 독일사민당과 자유노조연합이 20만여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눈부신 성과를 달성했음에도 이 후 그 성과가 유실된 것에서 드러난다. 여성문제에 대한 독일사민당과 독일 노동자운동의 공백은 독일 사회주의 운동이 가졌던 여러 공백 중 일부다.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직접적 영향 하에 세계 최대 규모의 당과 노조를 건설하고 엄청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수정주의와 민족주의를 수용하는 실용주의적 노선을 택한다. 독일 사민당과 노조 운동은 1870년대 독일이 통일과 함께 중화학 공업 중심의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고 영국 자본주의가 유력한 경쟁자로 등장하는 상황에서 성장했다. 산업사회로의 급속한 이행은 대규모 노동력의 이동을 필요로 했다. 출신지역이나 인종, 종교, 직업, 숙련도에서 노동자간 이질성이 심화되었고 그 중에서도 여성은 전형적인 미숙련 노동자였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노동자운동은 숙련공들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노동자들의 가장 빈곤화된 집단에 대한 조직화에는 언제나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 사민당이 여성문제를 사회주의 운동에 여성 노동자를 동원하는 문제로 기계적으로 인식했던 것은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대중적, 이론적 토대를 그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산업의 발달은 자본가들의 산업별 조직화에도 토대가 되었고, 노동자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자본의 대응도 강력해졌다. 또한 성장하는 산업은 필연적으로 더 큰 시장을 요구했고 제국적 팽창을 자극했다. 노동자운동 진압을 위한 강력한 국가 개입과 제국주의 정책 하에서 독일 노동자운동은 상대적으로 고임금 노동자들의 숙련과 지위를 방어하려는 실용적 성격을 띠면서 민족주의에 포섭되었다. 여성문제에 대한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공백은 클라라 체트킨을 비롯해 당시 여성 지도자들도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였다. 동원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운동은 변혁운동과 여성운동의 기계적 결합에서 오는 수많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알리고 그녀들을 조직했던 사회주의 여성들의 활동은 여성문제에 관한 이론을 진척시킬 대중적 토대를 마련했다. 여성문제에 대한 클라라 체트킨의 입장 “… 오늘날 그토록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여성노동의 유해한 결과는 일단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소멸함으로써만 사라질 수 있다.” 1889년 파리, 2인터내셔널에서의 연설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일, 파리에서 개최된 2인터내셔널에서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노동 철폐 주장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그녀의 분석을 최초로 제시한 연설이었다. 당시 남성들은 일하는 여성들은 타락했고, 그들에 의해 남성의 임금이 압박받기 때문에 여성들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성노동자와 경쟁해 임금을 떨어뜨리는 것은 여성의 노동 그 자체가 아니며, 남성노동을 더욱 철저히 착취하기 위해 값싼 여성노동을 이용하는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주장했다. 산업 발전 과정에서 싼 값의 여성노동과 생산수단의 개선은 여성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고, 여성 노동자의 유입은 남녀 노동자 간의 경쟁과 분열을 불러왔다. 체트킨은 여성의 임금이 낮은 것은 그들이 노조로 뭉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남녀 노동자 전체의 이해관계에서 볼 때 여성노동자를 노동조합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가장 긴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또한 여성의 노동은 여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므로, 여성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기치 하에서 남성과 동맹함으로써만 자신의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체트킨의 연설은 파리 대회에서 민족의 차별 없이 남녀 노동자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요구를 원칙으로 채택하도록 하는 성과를 낳았다. 한편, 당시 그녀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보호에는 반대했다. 노동계급의 일반적 이상과 여성의 이상을 분리시키지 않기 위하여 임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보호조치를 반대했다. 그녀는 자기 해방을 향한 싸움에서 여성들이 투사가 되는 데는 남성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보호조치에 관한 당시의 입장은 당시 여권주의 운동에 대한 방어 측면도 고려되었겠지만 그녀가 아직 여성 억압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모성을 부정하고 여성이 남성과는 다른 사회적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절대적 평등이란 개념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체트킨은 입장을 정정해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법’을 옹호한다. 노동 여성들에 대한 법률적 보호는, 여성들이 열악한 노동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여성의 진정한 노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여성은 어머니로서 가지는 특별한 기능과 더불어 취약한 사회적 지위 때문에 많은 위험에 처한다. 그 때문에 여성이 노동으로부터 철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성노동자에게는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입장을 정정한 것이다. 이러한 체트킨의 입장 변화는 엥겔스를 필두로 한 당시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같은 것이었다. 보호입법을 통해 여성 노동자의 취약한 조직화를 보완하고 가내노동을 금지시키는 동시에 부르주아 여권주의와의 분리 선을 명확히 그으려는 맥락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호입법을 주장하면서 여성 노동권 요구를 철회한 것은 아니지만, 국가를 여성노동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던 보호입법의 옹호는 운동 주체로서 여성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여성노동의 계속적인 증가와 그 결과라는 관점에서 볼 때, …… 남성노동자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의 관심을 여성노동자들에게 기울이지 않는다면 노동운동은 자살을 범하게 될 것이다.” 『평등』, 슈투트가르트, 1894년 11월 1일 클라라 체트킨을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들은 전국 순회강연, 클럽, 교육 집회, 위원회 등을 통해 여성 대중에게 다가갔다. 여성노동자들에게 접근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때문에 그녀들은 노동계급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조사하는 데 많은 정력과 시간을 쏟았다. 체트킨은 독일 여성 노동자 현황을 발표하면서 여성노동자 조직화가 어려운 원인과 조직화를 위한 과제를 제시했다. 먼저 여성 조직화가 어려운 것은 1) 여성들이 미숙련 노동, 가내 산업에서 대다수 일하고 있다는 점, 2) 집과 공장에서 이중의 부담을 지고 있기에 시간이 없다는 점이 주요한 이유라고 보았다. 또 하나 중요하게 지적한 것은 3) 여성들의 정서적 상태였다. 여성들 대부분은 자기 일을 결혼 전의 일시적 노동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체념, 유대감의 결핍, 소심함, 공장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나서기를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경제적 관계의 변화만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여성들이 가족과 사회에서의 종속적 역할에서 비롯된 나약함과 의존성을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을 그녀는 강조했다. 즉 여성들을 조직할 때는 그녀들의 오래된 조건과 경험에 따른 특성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조사 보고를 통해 체트킨은 남성 노동자들의 변화를 함께 주문했다. 여성노동자들이 동등하게 노조로 조직되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여성노동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여성으로 보기를 멈추어야 하며, 성적 목적으로 여성들을 괴롭히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했다. 여성들을 조직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에서 광범위한 대중을 포함시키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남성들이 여성들을 동등한 동지로 고려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여성들이 당과 노조 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1908년 여성의 정치 참여가 합법화되면서 기존의 여성 조직들은 대부분 당으로 통합되었다. 여성 조직의 제도적 자율성에 대한 요구도 있었지만, 여성의 분리주의를 거부하며 완전한 통합에 찬성하는 입장이 다수였다. 여성의 정치참여 합법화로 여성당원이 급증했지만, 여성협의회의 활동은 당으로의 통합 이후 여러 제약에 직면했다. 여성들 중 오직 한 명이 집행위원회에서 인정될 수 있었고, 남성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대표로 여성을 선출하지 않았다. 또 독일사민당의 남성들이 아내나 딸을 당원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결의사항은 약화되었다. 통합 이후 여성들은 아동노동위원회와 복지정책 영역을 장악하고 확대했는데, 이러한 외연적 확장은 오히려 여성운동의 보편적 전망을 제한했다. 1908년 이전에는 위원회 활동이 여성 조직화의 주요 경로이자 정치 참여를 고무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통합 이후 여성들의 활동이 여기에만 제한된 것은 1908년 이전의 여성운동과 변혁운동이 결합하기 어려웠던 것이 단지 법적 제약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사회주의 여성들 또한 이 분야를 여성들의 특수한 문제로 인식하는데 머물러 스스로의 전망을 제한하는 한계를 보였다. 노조운동에서도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당시 노동자운동의 인식은 조합비 책정에서도 드러난다. 대다수의 노조들은 성별에 따라 조합비를 달리 책정했는데, 여성들의 조합비가 적게 책정된 것은 그만큼 여성의 노동이 저평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성 지도자들은 여성노동력에 대한 가치 평가를 높이는 중요한 조치로 여성의 조합비 인상을 주장하기도 했다. 체트킨은 당 내에서 남성들의 반여성적 편견과 싸웠다. 여성들이 여성 차별에 항의할 때 남성 지도자들은 항상 농담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어 넘겨버리려 했다. 체트킨은 여성의 문제제기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혁명적 이론과 결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은 실행위원회에 참석할 여성 대표 자리에서 체트킨을 끌어내렸고, 새로 선출된 루이제 찌츠는 여성조직들을 당으로 완전히 통합하고 여성운동의 입장을 당의 결정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혁운동에서 여성해방이 갖는 의미와 여성문제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당과 노조에서 여성운동은 후퇴하고 있었다. 반면 체트킨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은 발전하고 있었다. 초기 체트킨과 여성 지도자들은 여성문제를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인식해 여성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자본주의 철폐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체트킨은 여성을 상류계급, 부르주아 계급, 노동계급으로 분류하고 가족 내 여성억압의 문제는 주로 상류, 중류계급 여성과 관련된 문제로 보았다. 또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여성도 생산 활동을 함께 했기 때문에 여성문제는 드러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인식하면서 재생산과 가족 등 여성의 고유한 문제로 고민을 확장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평등』이 가정주부와 어머니인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보충판을 제공하게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전까지 『평등』은 조직된 여성들에 대한 교육과 선동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보충판에서는 어머니들이 이타심과 계급연대감정을 불어넣고 어린이들의 독립적 사고력을 발전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다. 또 어린이들에게 과학과 기술, 생물학, 문화인류학에 대한 글을 제공하고, 노동의 존엄성을 강조했다. 1903년 경 11,000부가 배포되던 『평등』은 1914년에 이르러 125,000부로 증가했고 분량도 12 페이지에서 24 페이지로 늘어났다. “여성선거권 …… 그것은 우리에게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 목표를 위한 싸움의 한 단계로서 여성 선거권을 쟁취하고자 한다.” 1907. 8. 18. 베를린 국제사회주의자 대회의 연설 여성 참정권 투쟁에 있어서도 클라라 체트킨은 국제적 기여를 했다. 1908년 코펜하겐에서 결정된 세계 여성의 날 제정도 여성참정권 요구를 주 내용으로 했다. 1907년 7월 체트킨은 최초의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를 창설하고 슈투트가르트에서 단결력을 과시했다.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의 결의를 바탕으로 그녀는 1907년 베를린 국제사회주의자 대회에서 각국 사회주의 운동이 여성의 보통선거권 쟁취를 위해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동의안이 채택되었다. 그녀는 여성의 발전과 활동을 제약하는 사회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있어 선거권 쟁취 운동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왜냐하면 선거권이 여성 억압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선거권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남녀 간에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부분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참정권 투쟁은 선거권의 쟁취를 ‘목표’로 삼는 부르주아 여성의 운동과는 명확히 다르며 최후 목표를 위한 싸움의 한 단계, 무기로서 여성 선거권을 쟁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이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고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주체가 되면서 여성들은 오랜 세월 당연하게 생각했던 정치적 무능력에 대해 스스로 불평등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전개되었던 참정권 운동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소유 계급 여성들에게 국한되는 여성 투표권 운동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남성에게 국한되는 보편적 투표권을 지지할 것인가. 체트킨은 여성 노동자들이 변혁 운동에 굳건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본적 권리로 선거권을 사고했다. 사회주의 진영의 선거권 운동은 제한된 여성선거권이나 단계적 확대 계획 같은 절충안이 아니라 모든 선거권 투쟁을 여성 선거권 쟁취투쟁으로, 즉 보편적 선거권 쟁취라는 사회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투쟁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녀는 투쟁이 이 원칙에 충실하면 할수록 더욱 더 철저하게 광범위한 남녀 노동자 대중을 흔들어 깨울 것이며, 이 과정에서 당장 선거권을 쟁취하지 못하더라도 이 행동들 자체가 미래의 승리를 위한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체트킨은 여성선거권 쟁취 투쟁에서 사회주의진영이 더 넓은 근거와 설득력 있는 목표, 신뢰를 얻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강화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반목을 초래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수정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 “억누를 수 없는 수백만의 함성이 터져나와야 한다. 살인을 중지하라! 파괴를 중지하라! 인민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전쟁을 종식하라! 평화! 평화! 영원한 평화를!” 『평등』, 슈투트가르트, 1914, 11,7. 검열관에 의해 삭제됨. 당내에서의 갈등은 여성 조직의 독립성과 영향력 문제로 국한되지 않았다. 체트킨은 독일사민당의 수정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일에서도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급속한 경제 성장과 민족적,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 하에서 독일사민당 지도부는 선거 승리를 사회주의로의 통로로 암암리에 인정하면서 계급투쟁에 대한 신념을 포기해가고 있었다. 체트킨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베른슈타인과 당의 수정주의에 맞서 싸웠다. 체트킨은 당의 교육요원으로 로자를 임명하도록 하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더 많은 중점을 차지하도록 애썼다. 또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전 독일로 확산시키면서 의회주의가 아닌 노동자의 자발성과 힘을 더욱 강조할 것을 촉구했다. 제국주의에 대한 당의 수정주의적 해석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소유는 원칙적으로 반대해야 할 죄악이 아니라 개량할 수 있는 혼재된 축복이라는 주장에까지 이르렀다. 체트킨은 군사력 유지와 확대에 대해 부르주아 정당들과 똑같은 이해관계를 주장하는 자들을 강력히 비판했다. 1911년 예나 당대회에서는 로자와 함께 전쟁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한 대중행동 결의를 요구했다. 이 안은 일부 수용되었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관철되지 못했고, 이후 독일의 대외 정책에 대해 독일사민당은 행동하지 않았다. 독일 민족의 단결이라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군국주의의 결합은 독일사민당과 노동자들을 애국주의로 흡수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노조와 기업가 단체는 전쟁 중 모든 노동쟁의를 중지하는 ‘성내 평화’에 합의하고, 제국의회는 전쟁채권 발행을 승인했다. 독일사민당은 전쟁 중에 다른 정당과의 투쟁이나 반정부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체트킨은 8월 14일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전쟁채권 발행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을 때 공개적으로 당의 입장을 비난한 최초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체트킨은 『평등』에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계속해서 표명했다. 당의 검열로 잡지에 검은 공백이 늘어가는 만큼 『평등』은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국제적 기구로 인정받게 되었다. 체트킨은 당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1915년 스위스 베른에서 ‘불법적으로’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를 조직했다. 이 회의는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반대 입장을 최초로 조직적으로 표명했다. 이 비합법적 활동 때문에 그녀는 체포되어 넉 달 동안 보호감금조치를 당했고, 이후 1917년 5월 『평등』 편집진에서 제명당했다. 1917년 체트킨은 독일사민당을 떠나 독립사회민주당(USPD)으로 이적하고, 1918년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쯔 메링 등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에 합류했다. 1918년 경 독일의 패전이 확실시 되자 독일 내부에서 많은 균열이 발생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같은 혁명으로 나아가지는 못했고 1920년까지에 이르는 노동자들의 봉기는 잇따라 실패하고 결국 독일사민당과 자유군단에 의해 진압되었다. 독립사회민주당도 전쟁 후 분열했고 체트킨은 많은 이들을 이끌고 스파르타쿠스단의 후신인 독일공산당(KPD)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15일 지속되는 혼란의 원흉으로 지목된 로자와 리프크네히트가 정부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당시 멀리 있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체트킨은 충격 속에서도 로자의 모든 정신적 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로자와 리프크네히트의 삶을 기리는 원고를 『라이프찌히 인민신문』에 실었다. 둘의 죽음 이후 로자는 독일공산당 내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전 세대 지도자로서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첫 국회부터 마지막까지 독일공산당원으로서 연방의회의 의석을 유지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그녀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봄 코민테른 실행위원회의 여성서기로 임명된 그녀는 서기 활동과 건강 문제로 소련과 베를린을 오가다가 점차 소련에 정착하게 된다. 60세가 넘은 그녀는 소련에서 국제노동계급운동에 헌신하고 인종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1932년 체트킨은 시력 상실과 질병, 그리고 나치의 살해위협을 무릅쓰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8월 30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개원사에서 최고령자로서 명예의장이 된 그녀는 연단에 등장해 파시즘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 연단 앞에는 당시 의회의 제 1당이던 나치스의 의원들이 앉아 있었다. 75세의 이 투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한 모든 노동자 계급의 연합전선을 형성하자’고 외쳤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고, 체트킨은 소련으로 돌아가 6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직전에 그녀가 남긴 최후의 저작은 『제국주의 전쟁에 저항하는 근로인민들』이라는 원고였다. 질병으로 인해 완성할 수는 없었던 이 원고에는 제 1차 세계전쟁 동안의 반전운동, 전쟁이 전체 인민에게 미친 영향, 소련에 대항하는 전쟁을 개시하려는 자본주의 국가와 이에 대한 소련의 정책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또 전쟁의 시기에 처참했던 여성들의 삶도 담았다. 체트킨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민족 간의 평화는 언제나 노동계급의 이익’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하며, 노동자들이 어떤 주저함도 없이 제국주의 전쟁에 저항하는 투쟁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을 촉구했다.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참는 자가 아닌, 어리석은 노예가 아닌, 굳건하게 투쟁하는 여성으로부터 강력한 남녀 투사의 세대가 자라난다. …… 우리 머리 속의 강인한 사고와 가슴 속의 뜨거운 소망을 먹고 자란 아이들, …… 우리를 능가할 훌륭한 남녀 투사들이 바로 우리의 뼈로부터 자라날 것임을 확신한다.” 『1907. 8. 18 국제사회주의자대회』, 베를린 클라라 체트킨의 삶은 견결한 혁명가의 삶 그 자체다. 그녀가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에 있어 뛰어난 이론가로 주목받는 것은 아니지만, 최초로 여성 억압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적 분석을 결합하고자 했고 거대한 여성 노동자 대중의 조직화를 이끈 조직가로서 그녀는 언제나 타협과 맞서 싸운 투사였다. 여성 문제나 당의 이념과 전략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녀의 주장은 이론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지 않다. 또 그녀 삶의 개인적 고뇌나 기쁨을 담은 기록도 별로 없어서 가족과 사랑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고민을 찾아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여성의 해방은 자본주의의 철폐를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가능하다’는 그녀의 주장을 통해 그녀를 그저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체트킨이 경제적 조건의 변화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여성문제에 대해 충분히 이론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통적 가족과 여성상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 하에서 엘러너와 로자 등 탁월한 여성 사회주의자들도 여성으로서의 삶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체트킨의 주장과 실천들에 대한 평가 또한 당대 여성들의 삶,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상황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여성해방과 사회변혁에 있어서 체트킨의 입장도 넓게는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의 여성 대중 조직화 전략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독일 사회주의 운동은 여성들을 동원할 필요성에 의해 광범위한 조직화를 실행했고 이는 사회주의 운동이 여성 문제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여성 문제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부재는 여성 대중의 눈부신 조직화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이론적, 조직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체트킨도 처음에는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영향력으로부터 노동 여성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계급의식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편 여성 문제를 둘러싼 당내에서의 갈등, 여성의 주체적 성장을 가로막는 가족 문제 등을 차차 인식하면서 고민을 확장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수정주의와 전쟁에 맞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력을 다했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민의 보편적 해방’에 대한 그녀의 신념은 여성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 클라라 체트킨은 직접 여성 대중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부딪힌 문제들로부터 새로운 여성운동의 필요성을 후세대가 고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분리주의적 여권운동도 아니고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여성 동원에 그치는 것도 아닌, 사회변혁운동과 여성운동이 도구적으로 결합하는 것도 아닌 새로운 여성운동. 변혁운동으로서의 보편성과 여성문제의 독자성이 결합되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고민할 가능성이 클라라 체트킨이 헌신한 대중적 여성운동으로부터 열릴 수 있었다. 앞서 연재했던 엘러너와 로자에게 사랑과 가족, 여성문제의 고유한 쟁점들이 그녀들 개인의 과제로만 남았었다면 체트킨은 그 문제들을 사회변혁의 과제와 결합시킬 수 있는 대중적 여성운동의 경험을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체트킨의 성과가 사랑, 결혼, 가족, 여성 억압에 대해 이론화하고 새로운 사회상을 그렸던 콜론타이의 획기적 시도를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클라라 체트킨의 삶에서 인상적 요소였던 투철한 의지와 헌신을 다시 생각해 본다. 가족과 사회에서의 종속적 지위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여성 스스로의 의지와 헌신, 의식화 노력에 대한 강조는 그녀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남편을 간호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부양했고, 남편 사후에는 적극적인 사회주의 운동가로서의 정치적 역할도 고스란히 해낸 여성이다.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혁명가가 된 경험이 노동 여성들의 조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신자유주의는 전체 노동자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단결을 저해하는 유연한 노동력으로서 여성을 활용하고,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한 사회적 위기는 가족과 여성의 역할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운동과 여성운동의 통합적 전망을 밝히는 일이 시급한 지금, 우리에게 클라라 체트킨과 같은 의지와 헌신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살아있다는 증거: 또 다른 세상을 꿈꾸다 작년 이맘 때 즈음 활동공간을 옮겼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면서,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쏟아지는 일거리에 파묻혀 허우적대면서, 정신없이 지내다보니까 어느새 겨울-봄-여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와 있다. 계절이 한 바퀴 돌아갈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생각이 많아지는 요즈음이다. 집회나 회원모임에 빠지기 일쑤이고, 회원게시판에 글 한줄 남길 여유도 없이 살다보니 종종 주변 사람들로부터 “잘 살아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면 나는 나 자신에게 다시 물어본다. “당신, 살아있는가?” 잘 살고 있는지, 아니면 마지못해 살고 있는지, 나의 경우는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말을 상기함으로써 그것을 가늠해보곤 한다. 이 말에 대한 설렘이 남아있다면 너는 살아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너는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면서. 다행스럽게도 나는 또 다른 세상을 여전히도 꿈꾸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또 다른 세상, 특히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 여성억압의 제반조건들이 분쇄되고 여/남이 새로운 관계를 맺어 더욱 자유로워지는 그런 사회를, 여/전/히/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본 적 없는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현실로 만들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이 쉽지 않음을 뼈저리게 깨달아가고 있는 요즈음이기에, 살아있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괴로움과 때로는 좌절감을 맛보기도 하는 요즈음이다. 쉽게 이루어질 꿈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꿈을 꾼다는 것이 이토록 지난하고 외로운 일일 줄이야….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사회진보연대와 함께 걸어온 길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에 대한 꿈은 가깝게는 2003년에서부터 시작된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에서는 여성억압이 남녀의 적대관계 및 남녀불평등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가부장적 젠더관계가 재생산되는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여기고, 그것의 핵심적 장소이자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가족’에 주목한다. 그리고 ‘가족제도의 사회화’를 일찍이 주장했던 콜론타이와 같은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역사적 유산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통해 여성해방 이론을 재정립해나간다. 당시 여성위원회 세미나에 함께했던 나는 내 인식 속의 ‘여성억압’에 드리워져 있었던 추상적 정념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비로소 그 실체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해방을 위한 사상적 무기를 벼리는 속에서 만난 콜론타이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간 길에서 더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후세대인 우리가 그녀를 정당하게 기억하는 방법이자 그녀에게서 꿈을 빚진 우리가 응당 지녀야 할 역사적 몫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는 또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처절하게 전개되어가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1997년 말 IMF 경제위기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노동력 재생산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가족구조 해체와 편부모 가족의 증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 등은 여성의 노동력 재생산 부담을 가중시켰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저임금 노동력인 여성을 노동시장에 동원하기 위해 각종 재생산 노동을 최저가격으로 제공할 필요를 낳았다. 2003년 겨울을 뜨거웠던 계절로 기억하게 해준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동자들의 투쟁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중심에 놓여있었다. 간호사 등이 해야 할 의료 행위와 어머니 등이 해야 할(것으로 여겨지는)돌봄의 행위 그 중간의 빈 부분을 하루 24시간 노동에 일당 5만 원이라는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메우던 간병인. 노동자로 취급되지도 못하였던 그녀들이 세상에 목소리를 내게 된 계기는 서울대병원 간병인 무료소개소가 폐지됨에 따른 고용불안과 생존의 위협이었다. 서울대병원은 ‘간병’이라는 영역의 시장화에 따른 사용자 책임을 덜기 위해 병원이 직접 운영하던 소개소를 유료업체로 넘겼고, 이 과정에서 간병인 여성노동자들이 저항하게 되면서 우리는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깊이를 더해나가는 소중한 계기를 얻게 되었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간병인 문제 해결 및 공공병원으로서 서울대병원 제자리찾기 공동대책위원회’를 함께 꾸리고 간병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지지함과 동시에 간병제도의 사회화,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실천을 전개하였다. 이때 학생의 신분으로 투쟁에 동참했던 나는 처절하게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당위적으로 연대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노동자로 병원 안에서 24시간 일하는 ‘간병인’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알려냄으로써 그녀들의 노동의 의미를 재평가하고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켜나가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대개의 공대위가 현안이 해결되면 해소되기 마련이었던데 반해, 간병인 공대위는 간병노동자들이 치열한 싸움 끝에 비로소 2004년 봄에 ‘노동조합이 운영하는 무료소개소’를 통해 서울대병원으로 복귀하게 되는 성과를 이룬 후에도 해소하지 않고 간병노조를 정책적, 조직적으로 지원한다. 또 2005년 노무현정권이 저출산 고령화 대책 하에서 제출한 노인수발보험제도(현재의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본격시행을 앞두게 되자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노무현 정부가 “이제는 국가가 효도를 하겠습니다”라면서 야심차게 추진한 ‘노인수발보험제도’는 노인을 비롯한 요양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돌봄의 영역을 본격적으로 시장화하겠다는 정부와 자본의 전략의 발로라는 점에서, 이제까지 우리가 요구해왔던 간병제도의 사회화와는 정반대의 성질을 지닌 것이었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 가족과 여성이 더 이상 책임지기 어려워진 재생산의 영역을 시장화함으로써 가족을 기능적으로 보완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기에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 담론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운동진영조차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섭되어있던 상황에서 이러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간병인 공대위 참여단위를 중심으로 그나마 공유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기간 간병투쟁에 밀착 지원하면서 ‘재생산 영역의 사회화’라는 문제의식을 주체들과 나누려했던 사회진보연대(여성위원회)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사회운동의 첫 발을 내딛고 있던 나에게 있어, 우리의 선도적 문제제기가 오랜 기간의 헌신을 매개로 하여 일련의 실천으로 발전해나갔던 이시기의 경험은 운동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있다. 문제제기를 넘어서 한판 싸움을 벌이자: 재생산의 사회화인가 재생산의 시장화인가 ‘노인수발보험제도’이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로 이름이 고쳐져 추진되어나가는 것과 동시에 2006년부터는 가족을 둘러싼 지배계급의 전략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가 함께 추진한 ‘보호자 없는 병동’시범사업과,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충이라는 장밋빛 슬로건이 동반된 ‘사회서비스바우처 사업’등이 그것이다. ‘보호자 없는 병동’사업은 몇 개의 병원사업장을 모델로 가족간병이 필요 없는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얼핏 보면 간병제도화가 비로소 실현되어 여성들이 가족간병의 부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도의 수혜자는 누구이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는 누구인지를 따져보면 제도의 모순적 면모가 선명히 드러난다. 최저임금에 준하는 열악한 임금, 혼자서 여러 명의 환자를 돌봐야 하는 높은 노동 강도, 파견노동자라는 불안정한 고용조건 하에서 간병인 노동자들이 신음하는 가운데 몇몇 여성들만이 가족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가족제도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을까?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은 보육, 간병, 방과 후 활동, 장애인 활동보조인 서비스, 노인 돌봄 등 그동안 가족이 책임져 왔던 재생산 영역을 사회서비스로 가시화하고 바우처 방식으로 사업화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표적으로 노인돌보미, 장애인활동보조인, 산모·신생아돌보미라는 노동자군이 양산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를 두고 취약계층과 중고령 여성에게 적합한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이라고 선전하였지만, 직업여성의 가사노동에의 해방과 기존의 전업주부들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꾀한다는 정부의 사업 목적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듯이, 이는 재생산의 위기를 다시금 여성노동력의 유연한 활용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전략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하여 간병제도의 사회화 등을 요구해왔던 운동단위들이 결집하여 ‘사회서비스 공대위’을 꾸려서 이동 시간조차 노동시간으로 보장받지 못한 채 이 집, 저 집을 전전해야하는 시간제 시급제의 불안정한 일자리의 양산에 불과한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사업의 기만을 밝혀내는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노동자 민중의 재생산과정을 노동시장의 유연한 활용을 극대화하는 전략 내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시도에 맞서 재생산의 사회화의 문제의식을 확대해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누구와 함께 싸울 것인가? 재생산 영역의 사회화냐, 아니면 시장화냐? ‘가족’을 둘러싼 상반된 전략이 부딪치는 가운데 이제는 문제의식을 선도적으로 제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가족’을 둘러싼 저들의 전략과 우리의 전략이 경합을 벌이며 한판 싸움을 치뤄야 하는 때임은 분명한데, 그 싸움에 나설 해당주체들은 여전히도 문건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에 사회서비스 공대위는 지역사업을 통해 해당 주체들과 직접 만남을 시도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애초 느슨한 공대위의 틀거리로 조직화사업을 목표했다는 것 자체가 한계적이었을 뿐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분당이라는 악조건과 맞물리면서 지역운동 단위들이 합력을 내지 못하게 된 연유 등으로 인해 사회서비스 공대위의 시도는 아쉽게도 문제의식의 제기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요양보호사와 함께 한 1년 사회서비스 공대위의 지역사업을 마지막으로 나는 2008년이 저물어갈 무렵 요양보호사와 동고동락할 수 있는 곳으로 활동의 공간을 옮기게 되었다. 요양보호사는 2008년 7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이 시행됨에 따라 생겨난 직군으로 50-60대 여성노동자들이 주를 이루며 간병인으로 일을 했던 경력을 가진 이들이 상당수를 점한다.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이 생긴다는 소식에 간병인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이제야 우리도 족보를 찾는다며 (간병인 노동자들은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를 스스로 ‘족보 없는 노동자’라고 불렀다.) 굉장히 기뻐했다. 열악한 간병인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국가가 인정한 자격증을 가지고 요양기관의 직접고용 하에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으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신분상승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십만 원의 학원비와 240시간 교육을 이수하는 동안 벌이를 포기하는 것까지 감수하며 앞 다투어 요양보호사 학원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요양보호사 교육기관들이 장삿속을 차릴 요량으로 수요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양보호사를 배출함에 따라 제도 시행 1년 만에 애초 필요인력의 열배가 넘는 50만 명의 요양보호사가 양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지역에서는 서비스를 받는 노인의 수보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지닌 인구가 더 많게 되어버린 웃지 못할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다. “‘요양보호사’과 같은 사회서비스 일자리야말로 경기한파에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중고령 여성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라는 달콤한 선전으로 수많은 이들을 유료학원으로 발걸음하게 만들고서는, 정작 자격을 취득하고서도 취업이 막막한 절망적인 상태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장기요양기관들의 출혈적인 경쟁 속에서 요양보호사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불안정한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말이 좋아 요양보호사지 이건 일용직에 불과하다는 한탄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식모살이를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통곡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기본적인 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낮은 임금, 언제 일이 없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노동조건, 인력기준이 턱없이 낮음으로 인한 높은 노동 강도,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감내하며 비인격적 대우를 감수해야 하는 불안정한 위치, 근로기준법 및 최저임금법이 무시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환경, 노인복지는 뒷전이고 영리추구가 목적이 된 본말전도의 요양현장 속에서 겪게 되는 양심의 고통…. 노인요양기관 설립 및 운영에 있어서 민간기업의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함으로써 시장을 형성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야심찬 계획 속에서 만들어진 요양보호사 일자리는 결국 요양보호사에 대한 착취와 노인들에 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실망한 이들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서도 다시금 병원간병으로 발걸음을 돌리기도 하고(공식노동에서 비공식노동으로의 역행이라니, 이 얼마나 부실한 제도인지!), 큰 용기를 내어 어렵사리 딴 자격증을 그저 장롱 속에 넣어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양현장을 개척해나가면서 부당한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요양제도 개선의 주역을 자처하는 이들이 있다. 어쨌거나 제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요양보호사이니만큼,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노인요양의 시장화가 가져온 폐해가 사회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시점이다. “언제나 일손이 모자라서 전전긍긍하고, 어르신들을 충분히 돌봐드리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인력이 부족하니 어르신들이 그저 얌전히 누워계시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어르신들이 최대한 잘 움직이시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요양보호사의 일일 텐데…. 안타까울 뿐입니다.” 2009.3.28, <전국요양보호사대회-요양보호사 이야기> 중에서. 가끔 “요양보호사 일을 하게 되니 뭐가 좋으세요?”라고 몇몇 친한 요양보호사분들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이토록 열악한 조건에서 꿋꿋이 일을 해나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 동력이 무엇일지 궁금하기도 해서다. 돌아오는 답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 나이에 내 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다”, “이제는 가족이나 자식들이 노인들을 뒷바라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아니냐, 누구라도 그 일을 대신 하긴 해야 하는데 우리 같은 직업이 생겨 얼마나 다행이냐”, “나도 나이가 들면 이 제도의 혜택을 받아야 할 텐데 그때 고생하지 않으려면 제도개선이 하루라도 빨리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 일을 쉽게 관둘 수가 없다.” 요양보호사, 아직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들이지만 이들의 절실함과 현명함, 그리고 강인함이 존재하는 한 희망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이들이 가족의 기능을 보완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첨병의 역할에 그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신자유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재생산 영역의 사회화, 즉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라는 사실을 모순의 중심에서 알려나가는 주체로 거듭나게 될 지는 아직 남은 과제다. 이 과제를 잘 풀어나가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그동안 가족이 담당해왔던 기능이 여성노동력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전되는 것이 지금의 암울한 시대를 헤쳐나갈 해법이 결코 아니라, 가족을 구성하지 않고서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가 우리에게 보장되는 것만이 진정한 대안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사실이 요양보호사를 비롯한 투쟁의 주체들과 공유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그/녀들이 현재의 열악한 조건에서 자신의 발로 현장에서 설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과 관심과 연대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도 꿈을 꾸기 위해, 여전히도 살아가기 위해 고작 1년인데도 퍽이나 지쳐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여전히도 꿈을 꾸기 위해, 그리고 여전히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생각이 많아지는 요즈음이다. 우선적으로 외롭지 않아야 하겠다. 불가능에 가까운 꿈을 꾼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괴로움과 좌절감은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로 해소될 수 있기에…. 그동안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와 함께 꿔온 꿈을 더욱더 많은 이들과 함께 꾸는 꿈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은 말에 여전히도 가슴이 뜨거울 수 있는 나, 그리고 우리를 계속 만나고 싶다.
다른 세상을 향한 꿈 “내 이상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사회질서다. 그것을 추구하면서,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이름으로 나는 언젠가 증오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188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7세의 로자가 친구들과 사진을 나눠가지며 뒷면에 남긴 글귀이다. 그녀는 함께 했던 학창시절을 추억하며 누군가의 부인이자 어머니로 살아갈 것을 꿈꾸는 소녀들 가운데서 범상치 않은 고백을 하고 있다. 폴란드에 살고 있는 유태인 여성으로서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학교인 바르샤바 제2 여자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가 이러한 꿈을 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러시아 짜르 제국의 통치아래 있던 폴란드는 어떠한 비판적 행위도 반역으로 간주되었고 정치활동 역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만일 짜르의 비밀경찰 오흐라나에 적발되기라도 한다면 시베리아 강제노역에 처해지거나 요새의 지하 감옥으로 사라지고 때로는 교수형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했다. 그럼에도 폴란드의 젊은이들은 민족 억압의 문제에 분노하고 비합법 노동운동과 접촉하면서 사회비판적인 인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로자 역시 비합법 학생조직에 가담해 금서였던 <공산당 선언> 등을 읽으며 다른 세상을 꿈꿨다. 그리고 졸업 후 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인 프롤레타리아 당의 비밀 세포조직을 위해 일했다. 그녀는 활동을 하면서 식민지에서 태어난 유태인, 더구나 장애를 가진 여성이라는 굴레에 속박되지 않는 삶은 억압과 착취 받는 자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길에서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굳혀갔다. 그러한 확신은 더 큰 세상으로 나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세상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발전해 그녀를 스위스를 향해 떠나게 한다. 동지이자 연인 취리히는 온갖 나라로부터 온 망명자들로 넘쳐나고 있었고, 취리히일반대학은 남녀 차별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1889년 넬켄가에 있는 뤼베크의 집에 방을 구한 로자는 곧 취리히 대학에 등록했다. 로자는 동료 학생들과 추운 다락방에 모여서 밤늦게까지 뜨거운 토론을 나누고는 했다. 그곳에서 로자는 폴란드 빌나에서 온 청년 레온 그로소프스키를 만나게 된다. 로자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 청년 레오 요기헤스가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한 것이다. 로자는 학교 동료들의 소문을 통해 레오를 주목했다. 전설적인 활동에 대한 이야기와 비밀스러움이 그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는 러시아령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으로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혁명에 헌신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비합 지하활동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는 이러한 활동으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군대로 징집명령이 떨어지자 위험을 무릅쓰고 빌나를 탈출하여 취리히로 왔다. 그는 철두철미하고 과묵했으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으나 동료들로부터 권위적이고 오만하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그런 레오 역시도 로자에게 매료되었는데,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자는 지적이고 언변이 유창했으며 뛰어난 문장력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타인과 대화를 즐기는 성격에다 매력과 열정을 통해 청중을 사로잡는 재능까지 있었다. 레오는 그녀와 함께라면 불패의 조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레오의 직감은 적중했다. 식민지 폴란드 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로자와 레오는 <스프라바 로보니차>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레오는 당의 숨은 두뇌로서 지도력을 발휘했고 로자는 열정적인 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활약했다. 그 결과 민족주의적 노선을 추구하던 폴란드 사회당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893년 8월 취리히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3차 총회에서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은 공식 정당으로 승인되었다. 뤼베크 박사, 베를린을 정복하다 1898년 취리히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로자는 베를린에 도착한다. 그러나 당시 독일에서 외국인이 정치활동을 하는데 제약이 많았다. 로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위스에서 하숙하던 뤼베크 가의 아들과 위장결혼을 해 독일 국적을 취득한다. 이제 거침없이 그녀의 능력을 발휘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녀의 데뷔무대는 슐레지엔 북부 지역의 선거였다. 로자는 뛰어난 연설가로서의 실력을 발휘해 독일사회민주당에 큰 성과를 안겨주었다. 그 성과는 독일에 오기 전부터 국제무대에서 주목받던 로자의 존재감을 사민당 내에서 다시금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로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존경받던 베른슈타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른바 수정주의 논쟁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역사에 로자의 이름이 길이 남게 될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논쟁의 발단은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현실에서 적합성을 가지는가라는 의구심에서 시작되었다. 1890년대 후반에 영국은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기 위해 금융을 팽창시켜 일시적 호황을 누렸고, 유럽 대륙에서는 중상주의적 산업화가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1899)에서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물질적 조건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뛰어넘으며 대불황의 시대는 종결되었고 붕괴이론도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는 주식시장을 통해 부가 공평히 분배되고 실질임금도 상승하고 있으니 궁핍화 경향은 역전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생산의 점진적인 사회화로 인해 일시적인 과잉생산과 과소소비에 기인하는 위기도 덜 빈번하고 덜 파괴적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인식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하고 적극적인 의회주의를 채택해야 한다는 실천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베른슈타인이 당의 기본입장을 심대하게 위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사민당은 이렇다한 대응도 못하고 기존의 입장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나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입장이 마르크스에 대한 근원적 부정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1899)를 출간해 그를 논박했다. 그리고 이후에 그녀는 <자본축적>(1913)을 쓰면서 자신의 이론을 보다 체계화했다. 로자는 시장의 무정부성으로 인한 부문 간의 불비례는 주기적 경기순환을 낳지만, 그것을 성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더라도 자본주의는 과소소비라는 장기적 경향에 의해 궁극적인 붕괴에 도달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구조적인 소비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제3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환경을 항상 필요로 한다. 제국주의 팽창의 원인이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나 모든 비자본주의 사회들이 제국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로 전환되면 자본주의의 붕괴는 하나의 논리적 필연성이 된다. 이처럼 로자는 경기순환상의 위기로 환원될 수 없는 구조적 위기가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파국적 위기가 사회주의 이행의 출발점이 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자생주의에 입각한 실천만이 사회주의로의 길을 보장함을 주장하면서 의회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같은 로자의 문제의식은 수정주의자들이 영국헤게모니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금융적 팽창이 야기한 일시적 호황을 자본주의의 질적 변화로 인식하여 구조적 위기를 부정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녀는 영국헤게모니 붕괴와 유럽 자본주의의 일반적 붕괴 경향에 부합하는 분석을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붕괴가 제국주의적 충돌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진행될 것이라는 점 또한 역사적으로 타당한 분석이었다. 수정주의 논쟁은 격렬했으며 로자는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게다가 독일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사회민주당 전당대회의 대의원 자격을 획득하고, <작센노동자신문> 편집장 자리를 제안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단시간 안에 독일 사민당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손꼽히게 된 로자의 출현은 혜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오세요 죠죠 로자와 레오는 역할분담을 하고 있었다. 레오는 공식적인 위치에 나서지 않은 채 지도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로자가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레오는 로자의 스승으로서 그녀의 활동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독일에서 예상치 못하게 빠른 속도로 로자는 성장해 버렸고 그는 변화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실 로자가 공적인 영역에서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은 그가 바라던 일이었다. 그녀를 독일로 보내 독일사민당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국제적 영향력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레오도 로자의 성장과 성공을 바라보면서 자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것이라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점차 로자는 하나에서 열까지 가르치려는 태도를 고수하는 그의 태도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순간순간 그보다 자신이 더 적확한 판단을 하고 있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레오는 그녀가 자신을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자부심이 뒤흔들리는 상황에서 통제의 고삐를 더 죄려했다. 하지만 상황이 역전될 수는 없었다. 1900년에 레오는 폴란드 당을 재건하고 베를린에 당 지도부를 건설하기 위해 독일로 간다. 치슈카라는 가명을 쓰며 열정적으로 과업에 매진한 결과 폴란드 대도시에서 파괴된 그룹들을 소생시키고 당 지하 세포조직 확립을 짧은 시간 안에 이뤄낸다. 이러한 성과를 계기로 치슈카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젊은 세대들은 그 가명이 로자의 새로운 필명이 아닐까 추측할 정도였다. 레오의 정체를 감추는 지하활동의 공적이 로자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그녀 없이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둘의 관계구도가 변화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었으나 로자는 ‘죠죠’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연인이 베를린에 와서 함께 살기를 끊임없이 바라면서 이렇게 편지했다. “우리는 참으로 서로를 필요로 해요! 정말이에요. 다른 어떤 커플도 서로가 서로를 통해 한 ‘인간’이 된다는 삶의 과제를 우리만큼 절실히 느끼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당시 결혼 전 사랑이 비밀과 치욕으로만 가능했음에도 부르주아적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공동의 삶의 형태를 찾고자 했다. 비록 새로운 세상을 세우는 일이 먼 미래의 것이라도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새로운 관계가 이뤄지길 원했다. 그것은 대등한 개인들의 결합이었다.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둘 다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 함께 살고자 했다. 그리고 독일사민당 동료들이 부르주아적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 역시 그럴 필요가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레오는 가까이 있길 바라는 로자의 갈망을 줏대 없는 모습으로 치부해버리곤 해서 로자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부르주아적인 가정생활을 꿈꾸는 그 무엇도 그는 이미 10년 전 빌나에 벗어던지고 떠나왔다. 부르주아적 삶은 도망, 망명, 체포,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직업적 혁명가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혁명 시대의 사랑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제국 도처에서 총파업이 일어났으며 러시아령 폴란드까지 퍼져나갔다.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 당원은 1년 전만 해도 천 명 정도의 규모였으나 삽시간에 3만 명으로 늘어났다. 레오는 혁명의 최전선에 서기 위해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인 코라코프로 달려갔다. 그는 공식적인 역할을 맡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인 당 수뇌부로서 당의 활동을 지도했다. 로자는 베를린에 남아 폴란드와 독일의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자금을 조달했다. 망명자들과 밀사들이 그녀의 집을 끊임없이 거쳐 갔다. 이렇게 격무에 시달리던 그녀가 늑막염으로 몸져눕게 되면서 그녀는 둘 사이 관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로자는 두 사람의 대등한 동반자 관계라는 것은 자신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자는 레오가 그녀와 떨어져 자율적인 활동을 하고 멀리서 그가 요구하는 것을 조달하는 그녀에게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삶을 바랬고 정열적이었던 로자는 곁에서 다정하게 애정을 표하는 연인이 필요했다. 이에 로자는 25세 청년과 연애를 시작했다. 숨기는 것이 성미에 맞지 않던 로자는 레오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레오는 충격으로 거의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다. 로자는 그의 충격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청년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레오가 자신에 대한 애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사랑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여전히 그가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 둘의 관계는 예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해 10월 레오는 오토 엥겔만이라는 가명으로 바르샤바로 갔고, 로자는 독일사민당 기관지 <전진> 편집국의 정치적 지도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혁명에 대해 보도하기보다는 직접 현장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결국 로자는 안나 마취케라는 사민당 당원의 신분증을 가지고 바르샤바로 떠난다. 그들은 같은 하숙집에 머물면서 많은 일들을 해냈다. 신문 <체르보니 스탄다르>를 발행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의 새로운 강령을 작성했으며 당 활동을 지도했다. 이후 로자는 당시가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비밀활동능력과 지도력을 겸비한 레오와 예리한 지성과 문장력을 가진 로자의 능력은 각각 빛을 발했다. 그들은 위대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동지이자 연인으로서 서로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혁명은 절정기를 지나 패배로 돌아서고 있었고, 그들을 향한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결국 1906년 3월 독일로 귀환을 준비하던 중 로자와 레오는 체포되었다. 동지들은 시청 감방에 갇혀 있던 두 사람을 탈옥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둘은 요새 구금형이나 시베리아 강제노역, 어쩌면 사형까지 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탈옥 계획을 실행하기 하루 전에 파비악 형무소로 이송되었고, 다시 바르샤바 요새의 제 10성루에 이감되었다. 구출계획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독일사민당 역시 로자를 구출하는 데 적극적이어서 그녀가 병세가 위중하여 요양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받아내기 위해 관리를 매수하고 보석금을 지불하였다. 바르샤바 당국 역시도 로자가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매우 저명한 인사여서 외교 분쟁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반면 레오는 러시아인으로서 탈영병이었고 매우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보석금으로도 석방되지 않았다. 그는 요새에 남게 되고 로자는 요양을 명목으로 핀란드로 망명했다. 실제로 로자는 위와 간에 생긴 병과 신경쇠약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로자는 요양지에서 혁명에 뛰어들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파업과 당, 노동조합>을 썼다. 로자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레오가 없는 삶에 적응해가고 있었으며, 관계를 정리하기 원했다. 그 무렵 로자는 클라라 체트킨의 아들, 스물한 살의 코스챠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시베리아 강제노역을 구형받고 가까스로 탈출한 레오가 돌아왔을 때 관계가 끝났음을 알렸다. 2년 전과 달리 그는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로자를 괴롭혔다. 심지어 권총을 보이며 그녀와 그녀의 정부 그리고 자신을 쏘겠다고 협박했다. 로자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권총을 마련해 두었다. 이처럼 둘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공동의 업무는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은 1907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대회에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당 대표단으로 함께 참석했다. 로자와 레오는 혁명이 어떻게 지도되어야 하며 러시아당의 역할은 무엇이고 마르크스주의를 현재 상황에 적용하는 방법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입장을 공동으로 구상하고, 로자가 대표로 연설하였다. 세 사람의 관계를 둘러싼 격정과 흥분은 무서운 속도로, 마치 회전목마처럼 상승과 하강을 거듭했다. 이를 계기로 코스챠가 로자를 떠나게 되고 레오와의 관계는 정상적인 동지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투쟁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해 8월 독일사민당은 전쟁예산을 찬성하는 투표를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모든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레닌은 독일군 사령부가 조작한 것이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인터내셔널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독일사민당의 배신은 제2인터내셔널이 붕괴되었음을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자본주의의 안정적 발전에 기초하여 의회주의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암암리에 받아들이고 있던 독일사민당으로서는 어찌 보면 일관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의회주의를 이행의 정치적 수단으로 공고화하면서 국제주의적 세계혁명은 기각되고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세기 전환기 유럽 자본주의의 특수성과 제국주의의 필연적 연관성을 간과했다. 제국주의를 국내 정치 세력관계의 변화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타난 정책으로 보았다. 따라서 정치 세력관계의 역전을 통해 제국주의적 팽창에 소요되는 자본을 국내 산업에 대한 투자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자 역시 독일사민당의 배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곧바로 전시공채 재결의안 투표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칼 리프크네히트 등의 동지들을 규합해서 전쟁에 반대하고 독일사민당에 대항하는 느슨한 연합체로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했다. 그녀는 자본주의 붕괴경향이 제국주의 열강 간 전쟁의 필연성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자본주의 체계의 붕괴를 나타내는 동시에 혁명의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갈림길에 서있는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을 촉구했다. 반전투쟁을 앞장서서 이끌던 로자는 1915년에서 1916년까지 투옥되었다. 1913년 프랑크푸르트 집회에서 “만약 우리들이 프랑스나 그 밖의 나라의 형제를 살해하라고 명령받는다면 단호히 ‘하지 않겠다’라고 답해야 합니다”라는 연설을 했다는 이유였다. 그녀는 감옥에서도 쉬지 않고 반전투쟁을 지도하고 <사회민주당의 위기>를 저술했다. 이 책은 “이 무서운 광란과 지옥에서 온 피투성이의 유령은 독일, 프랑스, 영국 및 러시아의 노동자들이 마침내 발광하는 흥분 속에서 깨어나 정답게 손을 잡고, 제국주의 귀신들의 축제를 노동자의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몰아낼 때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출소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16년 메이데이 날 베를린에서 격렬한 반전투쟁을 벌이다가 칼 리프크네히트가 체포되고 로자 역시 1918년까지 보호구금을 당한다. 지도부가 대거 검거되자 로자는 레오에게 스파르타쿠스단의 지도를 맡겼다. 그는 스파르타쿠스단에 비밀활동 방법을 익혀주었고, 단기간에 지하조직 체계를 만드는 등 활약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로자는 이에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10월 혁명의 의미와 독일 사민당이 취해야할 입장, 독일 혁명의 전망에 대해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레오와 로자는 먼 거리를 뛰어넘어 이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녀는 러시아혁명이 사회주의의 명예를 되살린 것으로, 독일사민당이 취하고 있던 의회주의 전략을 보기 좋게 극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볼셰비키혁명을 방어하려면 무엇보다도 세계의 노동자들, 특히 독일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를 독려하기 위해 러시아혁명을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독일 혁명세력들은 볼셰비키의 정치적 조치를 비판 없이 절대화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이를 경계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로자는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통해 토지문제와 민족자결 문제에 대한 볼셰비키의 정책방향은 반혁명세력에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로자는 볼셰비키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인 계급독재를 전면화하지 않고 소수의 독재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로자는 인민대중들이 능동적이고 제한받지 않는 민주주의를 통해 정치적으로 훈련되고 교육되어 각성되어야만 혁명의 길이 열리고 사회주의가 우뚝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독일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된 스파르타쿠스단의 혁명강령에도 반영된다. 1918년 10월 독일 해군본부가 8만 명의 목숨이 달린 북해항전을 결행하려고 하자, 킬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전국적인 노동자들의 파업과 병사들의 항명이 이어졌고 노동자병사평의회가 곳곳에서 생겨났다. 이에 황제가 퇴위하고 독일의 실질적인 권한을 노동자병사평의회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병사평의회의 주도권을 장악한 독일사민당은 혁명을 진압하고 헌법제정을 위한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국가를 의회주의적 공화국으로 확정하려 했다. 결국 그해 12월 전국노동자병사평의회 총회에서 독일사민당의 뜻대로 1월에 국민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진행한다고 결정되었고, 이에 대해 로자는 평의회의 정치적 자살이라고 비판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을 볼셰비키처럼 단기적인 봉기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노동자 대중에 대한 교육과 조직 그리고 실질적인 혁명 과정에 대중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은 정치권력을 장악할 만한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베를린에서 1919년 1월 봉기가 발생했지만 군대가 노동자들을 진압했다. 농촌지역 역시도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투쟁이 확대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이미 1918년 12월에 리프크네히트와 로자를 살해하라는 현수막이 등장했다. 정부는 혼란과 굶주림, 지속되는 불안의 책임이 스파르타쿠스단에게 있으며 이들이 독일을 볼셰비즘에 내맡기려 한다고 악선동 했다. 1월 15일 민병대가 리프크네히트와 로자를 찾아냈다. 그들은 그녀를 근위기병대 저격병 사단본부로 끌고가 팝스트 대위가 심문을 하고 노스케와 협의해 처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로자는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고 있다가 포겔 중위가 쏜 총을 맞고 강물에 던져졌다. 레오는 체포되었다가 다시 풀려났지만 로자의 소식을 접하고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로자를 잃은 것을, 나는 극복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1919년 2월 12일 <스탄타르>에 주목을 끄는 기사가 났다. 레오가 로자의 죽음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해 폭로한 것이었다. 이 기사는 여론을 동요시켰고 결국 당국은 정식 조사를 벌이고 재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레오가 로자에게 해준 마지막 봉사였다. 그러나 대가가 그의 목숨이었다. 1919년 3월 10일 레오는 체포되어 그날로 살해되었다. 양쪽에서 타들어가는 양초처럼 “양쪽에서 타들어가는 양초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녀가 남긴 말처럼 로자는 점점 밝게 빛나면서 더욱 더 빠르게 사라져 가는 양초처럼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사회주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하고 지적인 여성으로 평가받았고, 혁명을 향한 신념을 끝가지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혁명가로 기억되고 있다. 이처럼 대단한 혁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로자 역시 같은 시대 여성혁명가들이 처했던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활동 주 무대였던 독일에서 당시 남성들은 여성이 회합에 참석하거나 정치 클럽에 가입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여성이 조직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발적인 논쟁을 일으키는 로자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더군다나 로자가 외국인이고 유태인이고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더 많은 멸시와 배척을 감당해야만 했다. 화려한 그녀의 명성 뒤에 고통스러움과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았음에도 로자는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한다면 여성과 남성 모두가 해방될 것이기 때문에 계급투쟁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 전반이 여성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 여성문제는 여성노동자 조직화 관점에서 투표권 운동과 결합하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여성운동 역시 1세대 페미니즘의 전성기였으나 여성의 고유한 억압에 관한 문제를 과학적으로 제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지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로자는 여성문제의 고유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의 문제와 여성억압을 연관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랑에 있어서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로자가 한편으로는 안정된 가정을 끊임없이 갈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배적인 가족형태의 문제를 인식하고 도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인데 로자 같이 탁월한 여성도 그 때문에 평생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우리에게는 엘러너나 로자와 같은 여성 사회주의자들의 삶이 보여주는 교훈이 있다. 또 콜론타이 이후에 결혼, 가족, 여성억압에 대해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론화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