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은 글 -기획: 03년 열사투쟁 평가 -초점: 이주노동자투쟁 -현장: 기아자동차, 도시철도, 노동해방학생연대 -쟁점: 비정규직 조합주의와 대공장 하청활동가의 임무 *첨부파일을 열어보세요. 읽기전용입니다. B4(타블로이드)로 편집되어 있으니 A4 출력하실 때는 80% 축소 인쇄하 시면 됩니다.
지난 2월 2일 사회진보연대 워크샵에 제출된 발제문입니다. 이날 정책워크샵은 사회진보연대 박상현 전 집행위원께서 발제를 해주셨습니다. 발제문 제목은 '사회운동 노조주의의 이론적, 역사적 배경과 의미'이고, 참고문서로 '현재의 정치상황에 관한 단상'을 제출해 주셨습니다. 참고로 당일 논의정리는 회의자료 게시판에 올려놓겠습니다.
지난 민주노총 선거는, 민주노총의 향후 3년의 향방을 결정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선거는 이수호-이석행 후보조(2번 진영)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들의 당선은 같은 후보조로 출마한 다른 네 명의 부위원장 후보의 당선과 함께 이루어졌고, 경쟁하던 유덕상-전재환 후보조(1번 진영)의 후보는 한 명도 당선되지 않았다. 게다가 '어느 진영의 후보이냐'라는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문제들도 있다. 기간 민주노총 내부에서 비정규직 사업을 진지하게 고민해왔고, 이후 비정규직 투쟁을 더욱 확산시킬 고민을 가지고 있었던 '비정규직 후보'들이 모두 낙선했다. 그리고 여성할당제를 통한 여성부위원장 선출 또한 여성노동자들의 조직화나 여성운동의 고민보다는 철저하게 양분된 선거구도의 영향을 받았다. 사실 당장 눈에 보이는 선거 결과만을 두고 이번 선거를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투쟁보다는 협상이나 타협을 통한 자기 이해의 확보를 선택했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은 상당히 한계적인 평가이다. 이번 선거 결과는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조운동이 처한 위기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며, 더불어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혁신이 없다면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노동자운동의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민주노총의 선거 결과에 대한 평가는 좀 더 깊은 숙고와 분석을 필요로 한다. 구조조정 이후, 노동자운동의 현실을 반영한 선거결과 이번 선거결과는 직접적으로는 정파간의 대립구도 속에서 철저한 조직선거로 진행된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동표'가 어디에 쏠렸는지, 정파간의 연합이 어떠한 효과를 불러왔는지에 주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선거결과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남한 노동자운동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봐야한다. 구조조정 이후 전체 노동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위기의식은 전반적인 노동의 불안정화에서 기인한다. 노동의 불안정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비정규직은 말할 나위 없고, 정규직조차 비정규직에 대해 '상대적인' 안정감만을 가질 뿐, 실질임금의 하락, 노동강도의 강화, 고용의 불안정성 등으로 인한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수세적인 타협으로 마무리되는 패배의 과정을 겪으면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짤리기 전에 많이 벌자"는 태도가 확산되었고, 비정규직을 상대적인 고용안정을 위한 방패막이로 인식하는 경향이 늘어났다. 일부 대기업 노조의 어용화도 이런 효과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지만, 이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른바 '민주노조' 안에도 이러한 정규직 조합원들의 태도는 노사-노정 관계에 대한 노조의 행보에 분명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번 선거에 출마한 양진영 모두가 자유롭지 못하다. 상대적으로 전투적인 입장을 밝힌 1번 진영조차도 2기 지도부 이후 3기 지도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변화에 그대로 휩쓸려왔다. 1번 진영의 후보들조차 이제까지 대기업 정규직 노조에 과도하게 의존해온 상황에서 여전히 이들에 의존한 '힘있는 민주노총'이란 선언에 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민주노총 2기와 3기 지도부를 구성했던 1번 진영의 기간의 투쟁과 활동이 정규직이던 비정규직이던 전체 노동자들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는 노동운동을 만들지 못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번 선거의 결과는 이 상황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이 불만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정규직 노동자들의 중심성을 택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민주노총 내부에서 '과잉대표'되고 있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실리적인 선택의 결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과정에서 좀 더 '전투적'임을 자임하던 1번 진영조차 현재의 노동자들의 위기가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가속화시키면서 이를 통해 전반적인 노동의 불안정화를 꾀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혁신된 투쟁이 없이는 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지 않았다. 선거 과정에서 그 누구도 지금의 노동자운동이 처해있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혁신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았으며, 그 실내용으로 노동자들을 조직하지도 않았던 것이다.(민주노총은 그간 위기 시마다 해당 지도부를 교체하는 식으로 사태를 마무리하곤 하였다. 1998년 노사정합의 때도 그러하였고, 2002년 발전총파업 철회 때도 그러하였다. 그럴 때마다 민주노조운동은 위기의 담론에 휩싸였지만, 그 위기를 근본적으로 전화할 수 있는 민주노조운동의 변혁적 이념과 사상의 재구축, 새로운 주체형성과 같은 근본적인 반성과 혁신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점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이번 선거결과는 2003년 하반기에 분출한 노동자들의 극렬한 투쟁이 노동자운동 전체 방향에 의미있는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보여주었다. 2003년 하반기 투쟁이, 민주노총 차원의 정세인식에 근거해서 전체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진행되었다기 보다는 '열사'를 낳은 지역과 연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상황에서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도 했다. 민주노총은 11월9일 노동자대회 이후 이 투쟁을 전국적, 전계급적 투쟁으로 도저히 더 이상 밀고 나가지 못했다. 정권과 언론의 공세를 받자 곧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이 투쟁은 "우리도 아직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 이상이 아니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개별 투쟁들은 모두 '적절한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각각의 투쟁에 가시적인 소득이 있었다는 자평들이 있지만, 하반기 정세에서 계급역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는 아무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투쟁들은 정리되었다. 가혹한 노동탄압에 시달릴뿐더러, 대규모 노조처럼 이를 혼자 힘으로는 분쇄할 수 없는 노조, 비정규직 노조의 투쟁은 '열사'들을 낳으면서까지 전개되었으나 이들 투쟁에 연대한 단위들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남발'을 비판한 2번 진영의 주장이 오히려 총파업에 결합하지 않았던 노조에 더 호소력이 있었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총파업에 동참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민주노총의 총파업 결의에 부담을 가졌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적합한 새로운 노동체제의 구축은 성공할 것인가? 노무현 정권은 2003년 한해동안 좌충우돌하면서도 "타협하지 않는 세력에게는 탄압뿐이다"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해왔다. 2003년 하반기 투쟁에 있어서도 이 투쟁이 전국적인 연대투쟁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같은 내용의 경고를 계속했다. 이번 민주노총 선거가 이러한 정권의 태도의 효과 아래 있었다는 것도 주목해야한다. 정권은 신자유주의에 적합한 새로운 노동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노동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이제까지 신자유주의자들이 추진해왔던 노동정책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고 있다. 이제까지 신자유주의자들은 개별적 노동관계제도(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촉진하면서 집단적 노동관계의 제도화를 완성해왔다. 노무현 정권은 집단적 노동관계에 있어서 노동운동과 정권, 노동운동과 자본, 즉 노사정 차원의 새로운 제도화라는 단계로 나가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노사정위원회를 중심으로 노동조합 상층에 사회적 합의를 강제하는 한편 전투적인 현장 투쟁을 더욱 제어하는 방향으로 제도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노사관계 선전화방안"은 이러한 맥락에서 집단적 노동관계에 대해서도 '글로벌스탠더드'를 적용, 제도의 경직성을 줄이고 유연화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사회적 합의'를 강제하는 명분은 '전국민적' 관심사인 실업/고용 대책에 대한 합의이다. 정부는 구조조정 이후 실리주의에 경도된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비롯한 노조운동 상층을 코포러티즘적으로 포섭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조직된 노동자운동을 순치하고, 터져나오는 불안정노동자들의 투쟁을 분쇄하면서 노동의 불안정화를 더욱 밀고 나갈 것이다. 이번 선거결과로 인해 이러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이수호-이석행 당선자 진영은 노사정위원회 참가를 (약간의 단서를 붙이고 있기는 하지만) 기정 사실화하고 있으며, '일자리 창출'이라는 '국민적 요구'에 노동운동도 적극적으로 기여해야한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러나 정부의 실업/고용 대책이라는 것은 노조에는 고용 증진을 위한 효과가 뚜렷하지 않은 일련의 양보를 요구하는 것일 뿐이다. 더구나 정부의 대책 자체도 노동의 불안정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방안일 것이 명확한 상황이다. 정부는 또한 실업/고용 대책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사안으로 노사정위에 민주노총을 포섭한 후 노사정위 차원의 합의로 "노사관계 선진화방안"에 대한 합의를 만들어낸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굳이 코포러티즘 반대의 입장까지도 갖지 않아도 실업/고용 대책을 매개로 한 노사정위 참가가 가지는 한계를 지적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정부의 구상은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운동의 주류는 새로운 차원에서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노동자 대중에 대한 정부의 사회적 관리망의 일부로 포섭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속에서 국내 생산기지의 해외이전, 노동의 불안정화 증가로 인한 노동자들의 삶의 위기를 이러한 제도화로 계속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노동자 운동을 이러한 관리에 포섭하려는 노력은 쉽게 성공할 수 없다. 노동자운동이 내부의 분열과 분할을 심화하고 민주노총의 대표성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이러한 포섭을 거부하고, 억압 불가능한 삶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자주적인 투쟁을 만들 수 있느냐가 관권이다. 노동자운동의 사회운동적 개조와 새로운 노동자운동 주체형성으로 매진하자! 이번 선거결과는 남한노동자운동의 현실에 대해 발본적인 반성을 할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경제위기와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남한노동자운동의 주력을 형성해왔던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과 조합원들 사이에 퍼지던 실리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에 영합해온 결과는 타협주의의 확산으로 드러나고 있다. 구조조정 이후 노동자운동의 대응이 현재의 결과에 이르게된 과정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 두 가지 방향에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야한다. 우선 여전히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노동자운동을 혁신하기 위한 방향을 도출해야한다. 또한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주체를 형성하기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한다. 구조조정 이후 현장에 만연한 실리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다시 중요한 과제다.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운동의 제도화를 통해 노조운동이 국가에 포섭되는 것에 대한 적극적인 반경향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은 개별 노조의 실리주의에 영합하거나 이의 확대판인 정권의 합의주의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 원칙을 견지한 가운데 노동자운동을 개조할 수 있는 투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상반기 임단협과 시기집중 파업 - 하반기 제도개혁 투쟁'이라는 고착화된 싸이클을 극복하는 문제는 그 출발점이다. 이는 단순히 싸이클을 바꾸는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운동이 노동의 권리를 자신들만의 갇힌 권리가 아닌,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빈곤, 실업, 배제의 문제와 연관된 보편적인 권리로 쟁취할 수 있는 투쟁의 요구와 방식을 해명하고, 받아안아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노동자운동에 새로운 주체형성과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효과로서 노동자 대중의 불안정화에 주목하고 여성/이주/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등 불안정노동자들이 새로운 주체로 형성되고 있음을 강조해왔다. 민주노총 선거를 거치면서 이러한 불안정노동자 운동이 가지는 정세적인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올해도 작년에 이어 수많은 투쟁사안이 우리의 눈앞에 놓여져 있다. 올해 말로 협상시효가 다가오는 WTO 개방화반대투쟁, 경제특구지역 설치로 인한 노동권 생활권 파괴, 노사간계선진화방안이란 탈을 쓰고 나타난 노사관계로드맵과 비정규보호방안 등의 노동법개악저지투쟁, 카드사 유동성위기와 제조업 생산기지 해외이전과 매각, 철도 등 공공부문도 대규모의 비정규직 도입과 외주화를 발표하고 있어, 그 어느 한해보다도 강도높은 구조조정 저지투쟁이 진행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미 구조조정 대응과정에서 계속해서 패배해온 남한 노동자운동이 향후 합의주의와 제조업공동화 등의 자본과 정권의 공세에 밀려 더욱더 고용과 임금문제 등에 방어적인 투쟁의 위치에 몰릴 것임이 자명하다. 이미 은행과 제조업 일부에서는 노조의 동의 하에 임금피크제가 시행되고 있어 노동자운동에서 노동유연화를 기업별로 수용하는 곳도 여러 곳 된다. 이렇게 고립분산적으로 투쟁을 전개하고, 방어적인 투쟁을 전개한다면 노동자운동은 혁신은 커녕, 그 기회마저 잃어버려 계속적인 패배를 맞이하던가 정권과 자본에 관리되는 노동자운동이 진행될 것이다. 따라서 현 단계 노동자투쟁의 방향은 노동자운동의 고립분산성을 극복하면서도 노동자운동의 사상이념의 혁신과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주체를 발굴하여 노동자운동이 새로운 변혁적 토양을 일굴 수 있는 출발점에 다시 서야 한다. 올해 투쟁은 이 과정에 위치 지워져야 한다. 구조적 경제위기 시에 노동자운동이 방어적 투쟁과 실리적 태도를 일관한다면 일반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 이것은 금융세계화로 인한 세계적 경향임과 동시에 외환위기 이후 겪어온 남한 노동자운동의 계속적인 실패에서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현재 투쟁의 승패의 갈림길은 준비된 파업을 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아니라 정세를 명확히 인식하고 변혁적 전망을 갖는 노동자운동으로 재출발하느냐에 따라 달려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사회운동의 이념을 개조하자! '참여정부'의 악순환 노무현 정권이 '서로 다른 집단들을 모두 기쁘게 하겠다'는 약속의 핵심에는 '참여정부'라는 구호가 있었다. 즉 정부가 나서서 정책을 완성하고 집행하기보다는 각 사안에 대해 이해당사자들이 정부의 공식·비공식 기관에 참여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이해 당사자들이 적극적인 대화와 타협의 자세로 임해야 하며, 정부는 공정하게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결정된 정책이야말로 힘을 갖고 추진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노무현 정권이 내건 참여정부는 '민간'의 참여를 장려하는 민주적인 외양을 띠었다. 게다가 노무현 캠프에 '386세대', 운동권 인사가 가담하면서, 이러한 방식은 실제로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그러나 그 본질은 오히려 행정관료나 미디어가 선호하는 갈등조정의 방식일 뿐이거나, 문제의 책임을 정부의 밖으로 돌리는 데 있었다. 정부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내용도 없는 '참여'를 주장하면서 각각의 사안에 관해 개혁법안이나 '사회적 협약'을 추구한다. 하지만 행정관료나 미디어가 선호하는 대화와 타협은 사실 절충적인 미봉책에 머물고 만다. 따라서 모두를 기쁘게 하기는커녕 아무도 만족시킬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오히려 종종 갈등을 더 증폭시키거나,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아 문제 해결이 고착되는 효과를 낳을 뿐이다. 마지막에는 정부가 이해당사자의 '집단 이기주의'를 운운하며, 그 책임을 정부 밖으로 전가하게 된다. 결국 악순환이 성립된다. 특히 노동자에게 그 참여의 경계는 명확하다 (이미 노무현 대통령은 인수위 시절부터 노동운동 지도자들과의 자리에서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다.). 더군다나 광범위한 실업-반실업, 빈곤 대중은 '참여'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곧 '시민'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정부가 포괄하려는 참여의 범위는 다양한 직업적 집단이나 NGO, 전문가 집단이다. NGO가 불안정한 노동자 대중을 대체하여, 이들 집단의 '관리의 주체'로 승인된다.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정치적 모순 물론 정부 정책의 기본 방향은 존재한다. 하지만 한국정부의 고유한 정책 방향이란 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개혁방향은 이미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이름으로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간주된다. 이미 다양한 초민족적 국제기구들은 각종 경제·사회 정책을 고안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국제화폐기금(IMF), 세계은행,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의 국제기구는 정부재정, 금융 정책을 비롯해 거시·미시 경제정책, 노동, 교육, 여성, 사회복지, 인구 노령화 등 다루는 사회이슈를 끊임없이 확대해 나가며 정책연구 보고서들을 쏟아내고 있다. 이러한 기구들이 제시하는 정책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각론들을 구성한다. 물론 이러한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본투자에 안정적이며 우호적인 방향으로 사회를 개조해 나간다는 것이다. 특히 노무현 정부는 한국 사회의 '성장 잠재력의 고갈'을 내세우며 신자유주의 개혁을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추진하고 있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며, 기업집단간, 개인간 경쟁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연히 각종 사회적 위기의 지표들이 출현하고 있다 - 실업의 만연('고용없는 성장'), 가계대출과 개인신용불량자 급증, 출산율 저하, 중소기업 붕괴, 농업 해체, 이민열풍과 두뇌유출 등등. 물론 몇몇 특화된 산업과 기업이 선두를 달리며 초민족 기업으로 자태 변환을 시도하고 일부의 엘리트집단이 세계화된 생활양식을 영유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민은 하향 평준화되거나 사회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관리'의 대상이 된다. (금융)투자에 우호적인 환경을 창출하라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지상명령와 노동권-시민권의 보편적 요구는 근본 모순을 낳는다. 개혁과 정치의 슬림화 하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이 동반하는 정치개혁은 근본적 모순을 비켜 간다. 그 목적은 오히려 단순하다.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정치 비용을 경량화하자는 것이다. 결국은 정치 자체를 행정적 관리로 대체하고 슬림화하자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어느 때 못지 않게 강한 '리더쉽'을 요구한다. 하지만 정당과 의회의 역할은 계속 축소된다. 정당들이 전통적인 정치 이념과 지지 기반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고 입법활동을 펼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미 다방면에 걸친 개혁안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주어진 것이다. 실질적인 정책결정의 장소는 행정부고, 행정부는 수완을 부려서 해결사의 노릇을 해야한다. 정당성의 위기, 대중들의 불안과 불만, 사회운동들의 저항을 헤쳐나가기 위해 정부의 권력은 증대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개혁은 결코 '강한' 정부를 포기하지 않는다 (DJ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은 '작지만 강한 정부'라는 구호를 항상 주장했다). 물론 과거 군사독재의 폭압적인 동원 체제를 대체할 방법을 찾는데, 문제는 효율적인 위기관리, 갈등조정 체제다. 이에 따라 정당의 역할도 변형된다.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들은 마치 학계나 NGO의 전문가들처럼 정책적 전문성을 갖추어 그러한 흐름에 부합하는 게 가장 우수한 활동인 것처럼 평가된다 (NGO가 정치인을 욕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말은 '무식하다'는 것이다). 이미 정당들은 스스로 '국민정당'이나 '무지개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떤 이념보다는 사회갈등을 행정적인 방식으로 조정하는 데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정치개혁의 중요한 목적은 정당과 의회의 역할을 재조정하는데 있다. 또한 정치자금의 투명화와 그 결과로 정치비용의 경량화도 중요한 요구다 (최근 전경련의 행보에서 볼 수 있듯이 대자본의 요구이기도 하다). 개인적 부패스캔들에 휘말린 정치인이 공정한 조정자의 역할을 자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한국에서 정치개혁의 주요 이슈에는 각 정당들의 '당략'적인 목적이 담긴 내용들도 포함되어 있다. 보통 '지역구도 타파'로 선전이 되는 간선제 국회의원의 확대, 선거구 재조정 등은 한나라당의 의석 비율을 잠식하여 정당들의 세력관계를 바꾸자는 것이다. 이는 정치개혁의 성패가 달린 문제인 것처럼 선전되지만, 최종적인 목적지가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정치계급 또는 지배엘리트들에게는 지분이 걸린 생사의 문제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미디어들은 효율적인 행정의 중요성과 무능부패한 국회의 문제를 대비시키며, 거듭하여 대립을 인위적으로 조장하고 있다. 행정부는 대통령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충실히 따라야 한다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공무원의 할 일이 아니다), 국회에서의 논란은 대부분 불필요한 것이고 개혁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 이것이 미디어의 요구다. 참여정부와 코포라티즘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운동에 끼치는 심각한 효과는 '참여'라는 허구적인 쟁점을 놓고 대중운동들을 분할한다는 점이다. '참여'는 사실 대중운동에게 매우 부분적인 타협의 가능성을 흘려주지만, 그 악순환의 끝은 부분적인 포섭과 배제다. '참여정부'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운동에 끼치는 효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정부가 특정한 분야나 사안별로 '참여'의 경로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운동은 실제로 '참여냐 비타협적 투쟁이냐'고 하는 의도된 쟁점에 휘말리게 된다. 또는 각자 자기의 몫을 챙기기 위해 공식적, 비공식적 경로로 대화에 참여하거나 정부의 개혁안 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오히려 '빠지면 나만 손해다'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로 사회운동의 활동은 공통의 연대를 추구하기보다는 각 부문이나 분야별로 분산된다. 그리고 주요한 활동이 정부와 '정부개혁안'을 수립하는 데 참여하거나 여러 형태의 '사회적 협약'을 맺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이 애초 목표를 이루지 못할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국회통과를 저지하거나 또는 관철시키기 위한 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개별 국회의원에 대한 로비 활동을 벌이고, 이 때 특히 총선에서 당선 또는 낙천·낙선운동을 무기로 삼게 된다). 사실 이미 이러한 방식의 활동이 사회운동에서 대체로 정형화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운동은 효율성과 편의성이라고 하는 '덕목'을 내세우고 있다. 가시적인 성과를 따낼 수 있다는 기대, 단일 이슈에 집중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효율성, 그래서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문제에 대한 무관심의 정당화, 코포라티즘적인 동원에서의 편의성 등등. 이는 많은 운동단체들에게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패턴의 활동은 종종 운동 주체화 과정이 제거된 협상과 동원 체계로 전환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구속력을 갖는 협상을 원하게 되고 따라서 제도화를 추구하게 된다. 또한 협상이 성사될 경우에는 그것을 사회운동 내부에서 관철시켜야 한다. 오히려 정부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려야 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설득해야 한다? 이는 사회운동이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 흡수되는 경로다. 문제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특정 부문이나 분야를 이슈로 하는 운동은 사회운동의 주체를 형성하는데 근본적 난점을 갖는다. 물론 특정 분야 개혁에서 미디어의 여론 조사 결과는 그것을 추진하는 세력에게 우호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단일한 이슈, 협소한 쟁점이 개인들을 일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도 장기적인 운동 주체화의 과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단일 이슈 운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슈, 정책아이템을 찾아 부유한다. 사회의 해체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 그러나 이것이 운동 방식의 문제만은 아니다. 광범위한 실업-반실업, 빈곤 대중은 '참여'의 대상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중대한 문제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기존의 국가장치가 과거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될 수 없는 조건이다. 정당과 노동조합과 같은 기관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가족의 해체, 학교의 붕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위기는 노동의 불안정화와 중첩되는 현상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참여세력에서 배제된 집단들에게는 삶의 고통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키는 직격탄이다 (해고나 카드 빚이 자살의 직접적인 이유인가? 그에 따른 가족의 파탄, 기존 공동체로부터 배제된다는 공포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사회적 노동과 정치에 대한 참여가 전제되지 않은 교육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노동과 연계된 교육의 위계화와 실업의 공포는 교육을 붕괴시킨다. 또한 빈곤의 여성화는 중산층 핵가족 모델을 해체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다. 이러한 현상은 기존의 생활양식을 파괴하고, 사회로부터의 배제라는 개인들의 극단적인 불안을 형성한다. 이러한 문제는 대중들의 일상적인 삶에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지만, 종종 개인들의 '사적'인 문제처럼 여겨진다. 신자유주의 정부의 사회정책은 파편적인 미봉책을 제시할 뿐이다. 사회운동은 이를 뚜렷한 정치 쟁점으로 전환하지 못하지만, 기존의 방식으로도 그 괴리를 따라 잡지 못한다 ('최대한의 임금상승'과 '고용안정'으로 가족과 학교를 매개로 하는 기존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게 가장 간편한 해결책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해결책이 적용 가능한 범위는 단지 일부일 뿐이다). 또는 종종 정부와 유사한 방식으로 부분적인 정책공약으로 이를 대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실로 기존 공동체의 붕괴를 의미하므로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몇 가지 대증요법으로 해결할 수 없다. 사회운동이 기존 제도들의 붕괴로 인해 현재 대중들이 겪고 있는 직접적인 고통들에 대해 적합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과연 어디서부터 운동을 출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적합하게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사태의 원인이 무엇인가 적합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운동의 이념을 개조하자! 이 즈음하여 우리가 '사회운동 노조주의'를 토론하게 된 맥락을 다시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1990년대 말 IMF 경제개혁과 민주노총 위기논쟁이 불거졌을 때 우리의 화두였다. 이는 새로운 국면에서 사회운동의 공통의 과제를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주체형성'(계급형성적 노동운동)으로 설정하자는 제안이었다. 특히 노동자대중 내부의 광범위한 실업-반실업-빈곤 대중 문제, 노동자운동 내의 성차별주의와 인종주의 문제를 자율적인 노동자운동을 통해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것과 노동자운동의 전망이 평의회에 대한 지향(코포라티즘이 아닌 노동자통제)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 빈곤, 성, 인종의 문제는 필연코 공동체의 문제를 낳는 것이었다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 따라서 사회운동 노조주의는 무엇보다 노동자운동의 이념을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현재 노동조합의 많은 활동가들이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은 이러한 이념적 지향과 관성화된 사업 패턴 사이의 괴리를 어떻게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운동방식을 개척하지 못함으로 인해, 대중들이 기존의 '안전한'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가?) 노동조합의 활동이 '상반기 임단협과 시기집중 파업-하반기 사회개혁투쟁'으로 고착화되고, 민주노총의 활동가들이 '사실 남아 있는 우리의 무기는 시기집중 파업이 유일할 뿐'이라고 자조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지도부 교체로 바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당장 어떤 활동으로도 상황이 크게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조건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출발점은 없을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억압의 관용' 우리는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이 오히려 정부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재신임 선언은 이미 실패한 정권의 '국민협박극'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래도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겠다'는 정말로 거대한 협박. 이는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을 승인하라는 위협이었다. 그러나 사회운동이 코포라티즘적인 지향과 활동 방식을 체화한다면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쉽은 달가운 일이 된다. 그가 사회운동의 특정한 부위의 '후견인' 역할을 자인하는 한에서. 오히려 억압이 일상화된다면 '관용'은 보호자가 베푸는 큰 혜택이 된다 (그야말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노무현 정부의 '참여정부'와 '억압의 관용'은 사실 백지 한 장 차이다. 참여정부의 논리가 대중운동의 동원과 무력화를 동시에 수반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한, 억압의 관용은 그들의 가장 매력적인 수단이 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2003년은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이제 2003년이 저물어가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망년(忘年)이 아니다. 2003년은 노동자 민중에겐 잊을 수 없는 죽음과 절망의 한 해였다.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민중들의 삶은 빈곤과 처참함의 수렁에 빠져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노동자, 민중에게는 어떤 이익도 없는 '외자유치'라는 허울좋은 명분 속에서 노동자, 민중의 절박한 생존의 요구와 저항은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당하며 죽음으로 내몰려야 했다. 농민들은 WTO와 자유무역협정의 물결 속에서 잊혀지고, 존재하지 않는 국민들이 되었다. 이 땅의 누구 하나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없는 한 해였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2004년도 암울한 전망을 지속할 뿐이다. 가족 동반 자살이라는 끔찍하고 이례적인 사건들이 이제는 매일같이 TV와 신문에 보도되고 있다. 자살을 택한 사람들이 옳고 그름을 가리기에 앞서 이 빈번한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제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까운 이 땅 민중의 삶이다. 극복될 것 같지 않은 경제불황 속에서 삶은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다. 자본의 위기를 민중에게 전가하고, 더욱 착취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자 민중의 삶에 남은 것은 빈곤과 불안, 절망과 죽음이다. 노무현 정권은 노동자 민중의 절망과 분노 앞에서 무엇 하나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력과 폭력성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런 정권의 대응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시간의 단위에 따라 바뀌는 한 해가 우리에겐 어떤 의미도 될 수 없다. 무엇 하나 전진하지 못하고, 여전히 제자리에서 신자유주의 공세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우리에게 2004년은 여전히 2003년의 연장이다.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오직 우리의 투쟁을 통해 지금의 상황을 바꿔내는 것일 뿐이다. 올해 내내 진행해왔던 많은 투쟁들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계속해서 진행해왔고, 지금도 끝나지 않은 투쟁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망년과 송년이 아닌 멈출 수 없는 투쟁으로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자. 지금 당장 강력하게 진행되어야 할 투쟁들이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확인하자. 학살동맹 '참여정부' 노무현 정권 규탄한다! 노무현 정권은 23일 국무회의를 열고 국회에 상정할 이라크 추가 파병동의안을 최종 확정했다.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 즉시 파병동의안에 대한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국회에 상정하고 가능한 연내에 처리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미 올해 초 서희, 제마 부대의 파병 결정은 노무현 정권이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동참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제 또 한 번의 파병 결정으로 노무현은 자신의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이번 파병동의안은 자본 투자의 불안요인을 제거하고 세계화 과정에서 드러난 극단적인 배제와 억압에 따른 저항을 진압하기 위한 미국의 '예방전쟁'에 자신들의 전망을 일치시키겠다는 의지를 거듭해서 확인시켜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번 파병 결정의 과정은 노무현이 이야기해온 '대화와 타협'의 기만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파병동의안을 처리하기 앞서 노무현은 '국민의 합의'를 누누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국민과의 합의 과정은 순전히 말뿐이었고, 파병은 반대하는 수많은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노무현의 대화법이 결국은 민중을 기만하고, 달래기 위한 겉치레에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자신이 정한 룰에 따른 대화, 자신의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대화가 아니면 무시와 탄압으로 일관하는 그의 정치기술이 파병문제에 있어서라고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이라크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 점령은 미국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처럼 '악의 축'을 '산뜻하게' 제거하고 새로운 통치성을 구축하는 것으로 결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패권과 점령에 맞선 이라크 내부의 저항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며,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 이라크 민중들을 모두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간주하고, 폭력적인 점령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의 평화를 위해 파병에 동참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전투병, 비전투병의 구분이 무의미하며, 파병은 그것이 어떤 성격의 군대라고 할지라도 곧 미국의 점령통치와 대테러 전쟁에 동참하는 것이다. 더불어 유의 깊게 봐야할 점은 전 세계적으로 추가파병을 추진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과 한국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예방전쟁', '선제공격 독트린'이라는 미국의 군사전략 재편과 깊은 연관을 맺는 문제다. 이 새로운 전략에 따르면 동아시아 지역은 미국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된다. 그 이유는 우선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 신흥시장으로 미국 경제에 중요한 위치라는 점, 지역적 수준에서 군사적인 패권 국가가 불분명하고 이에 따라 대규모 군사적 경쟁 혹은 충돌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 잠재적으로 미국에게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중국의 부상을 제어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 구상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고하게 구축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노무현 정권의 파병 결정이 미국의 군사전략에 동참하겠다는 굳은 의지임을 더욱 확인하게 된다. 파병을 반대하고 저지하기 위한 투쟁은 올해 내내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파병을 막아내는 것뿐만 아니라 미국의 군사전략에 동참하려는 정권의 전망을 비판하는 것, 나아가 미국의 패권주의를 반대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전쟁을 반대하는 투쟁의 강고한 기초와 흔들리지 않는 내용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당장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로 강력하게 불붙어야 한다. 파병반대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제추방 분쇄! 이주 노동자 전면 합법화 쟁취! 현재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강제추방에 맞서 농성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명동성당 농성단의 경우 현재 농성 40일을 넘었다. 정부는 내년 8월부터 시행될 고용허가제에 앞서 현재 불법체류 중인 이주노동자들을 '정리'할 계획을 세웠고, 그것이 바로 4년 이상 불법체류자를 자진신고를 통해 출국시키거나, 강제추방시키는 것이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강제추방과 예정되어있는 고용허가제는 이미 저임금, 불안정 노동의 일부가 되어있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관리와 통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이미 이 땅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이 필요는 오히려 자본과 지배계급 측이 더욱 절실히 느끼는 바이다. 점점 더 불안정 노동을 확산시키고, 이들에 대한 적절한 관리를 통해 노동력의 공급과 노동조건을 조절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의도하는 바이다. 불안정 노동층에 있어서 이주노동자들의 존재는 이제 필수조건이다. 하기에 정부도 더욱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고용허가제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말로는 이주노동자들을 노동자로 인정해준다고 하지만, 노동기본권은 하나도 보장되지 않으며, 한 술 더 떠 사업장 이동의 자유조차 통제한다. 결국 고용허가제의 목표란 불법체류자들을 정부의 관리가 가능하도록 등록시켜, 적절히 조절, 통제하겠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 노동자임을 선언하고 투쟁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쟁취하는 투쟁은 불안정 노동에 맞서는 투쟁의 한복판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남한에서 오늘을 함께 살아내는 당당한 노동자로서 스스로 일어섰다. 강제추방을 박살내고, 고용허가제를 철폐시키는 것은 이들이 노동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요구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자유주의 정책은 불안정 노동의 확산을 통해 노동자들을 분할시키고, 관리한다. 함께 노동하며 살아가는 이주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니라 그저 불법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으로 차별하는 것, 함께 노동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을 노동자가 아니라 그저 남성보다 열등한 여성으로 차별하는 것,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것. 이미 수많은 분할과 차별이 우리 내에 존재하고 있다. 이에 맞서는 투쟁은 노동자들 스스로 내부의 분할을 극복하고, 단결하고 연대함을 통해서만 승리의 길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러한 차별과 분할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매우 소중한 단초이다. 이를 통해 노동자로서의 단결을 이루는 투쟁은 우리 운동의 매우 절실한 과제이다.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제 시작 단계이지만, 모든 노동자들이 함께 연대해야 할 불안정 노동을 철폐시키는 투쟁이다. 명동성당에서, 전국 곳곳에서 고용허가제를 철폐하라는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은 현재 진행중이다. 핵폐기장 건설계획 전면 백지화! 대체 에너지 개발! 핵폐기장 건설을 막아내기 위한 부안 주민들의 끈질긴 투쟁은 결국 노무현이 한 발 물러서도록 만들었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지만, 부안에 핵폐기장이 건설될 수 없음은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투쟁이 끝났다고 섣부르게 말할 수 없다. 부안 주민들은 스스로 투쟁의 과정에서 핵폐기장이 핵 산업의 확장, 강화를 위한 것임을 알게되었고, 따라서 문제는 부안에 건설될 핵폐기장을 막는 것을 넘어서 남한의 어느 곳에서도 핵폐기장이 건설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 국가'임을 천명하는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이 어떻게 짓밟히는지, 정부와 군수가 이야기하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기만하는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주민들은 촛불집회를 벌였던 민주광장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의견과 입장을 함께 이야기하고, 결정하는 자치와 민주주의를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이 투쟁이 승리로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핵폐기장 건설 계획이 전면 백지화되고, 주민들이 투쟁의 경험 속에서 스스로 획득한 자신들의 민주주의가 성과로 남을 수 있어야 한다. 현재 정부의 입장은 주민투표를 통해 유치여부를 결정하고, 다른 지역의 유치 신청을 받겠다는 것이다. 더불어 현재 국회에서 통과 절차에 들어가 있는 '주민투표법안'을 통해 이후 지방자치단체 등의 주요 정책에 대해 주민투표를 시행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주민투표를 통한 부지 선정은 크게 두 가지 지점을 은폐, 왜곡한다. 우선은 지역경제 발전이라는 문제다. 노무현 정권이 천명한 외자유치를 중심으로 한 경제성장이라는 발전전략에 따르면 지역경제는 발전은커녕 오히려 지역은 배제되는 결과를 낳는다. 대부분의 금융인프라가 서울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는 상황에서 금융 투기가 주를 이루는 외국인 자본의 투자가 지역으로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보니 지역경제는 날로 쇠퇴하고, 인구도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이에 대한 정부의 방책이라는 것은 지역별로 '알아서' 살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경제특구, 관광특구 등 실제로 경제 성장의 효과는 검증되지 않았지만 노동권과 공공성, 환경을 파괴할 것으로 예상되는 수많은 조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핵폐기장도 그것의 위험성이나 그것이 향후 핵 산업의 확장에 가져올 영향은 고려되지 않은 채 지역경제의 발전을 위해 유치해야 한다는 논리가 앞서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부안에서 핵폐기장 건설이 불가능해진 지금의 상황에서도 지역경제 운운하는 기만을 멈추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자신들이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 하에서는 지역의 배제와 소외가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은 채, 핵폐기장 건설을 통한 지역경제 회생이라는 불가능한 정책을 던져놓고 주민들의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오히려 '핵폐기장이라도 유치해 먹고 살 것인지, 아닌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해주겠다며 주민투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주민투표라는 방식이 가지게 되는 문제가 드러난다. 주민투표법안을 만들면서 정권은 부안이 아닌 다른 지역에 유치할 때도 주민투표라는 방식을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지역발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주민투표는 주민들의 민주적인 의사를 반영할 수 있다기보다는 정권의 정책을 갈등 없이 추진할 수 있는 '50% 이상의 찬성'이라는 허울을 만드는 방식일 수 있다. 부안 주민들이 정권과 공권력의 폭력과 민주주의 파괴에 맞서 탄생시킨 민주주의가 '주민투표법안'으로 대체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안 주민들은 촛불 집회와 민주광장에서 일궈낸 자신들의 민주주의 속에서 핵폐기장 건설이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가지는 의미를 배웠고, 지역경제 회생이 정부가 던져준 시설을 유치하는 것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여기까지 전진했다. 이 성과를 온전히 남기는 것은 자신의 미래와 그를 위한 투쟁을 민중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주민투표법안'으로 민중이 스스로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투쟁의 가능성마저 봉쇄하는 것은 부안이 남긴 성과를 왜곡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투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전국의 어느 지역에도 핵폐기장이 들어설 수 없도록 계속해서 투쟁해가는 것, 부안 주민들이 남긴 소중한 민주주의를 주민투표로 갈음하려는 시도를 막아내는 것. 우리가 이후의 투쟁으로 쟁취해야 할 것이다. 부안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파병과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그리고 부안의 핵폐기장이 아니더라도 끝낼 수 없는 저항과 투쟁이 민중의 삶 곳곳에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서있는 오늘이고, 끝나지 않은 2003년이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민중에게 새해의 해맞이는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2003년 11월 5일 - 7일까지 한국여성개발원에서 진행되었던 [아시아지역 노동조합 연대회의] 자료집 편집본 파일을 올립니다. 한글과 영문이 모두 있습니다. ----------------------------------------------------- <아시아 지역 노동조합 연대회의 개괄> 1) 회의 프로그램 개회식 -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 개막 연설 : "아시아 지역 노동자의 단결과 연 대를 위하여" 전체 회의 Ⅰ :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노동조합 운동의 미래" → 사회자 : 비쉬누 리말(네팔노총 사무총장) ·아시아 노동조합운동의 과제 - IMF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 선 민주노총 투쟁의 교훈과 함의를 중심으로 : 김태연(민주노총 정책기획 실장) ·자본의 지역화 경향에 맞선 동남아시아 노동조합운동의 과제 - ASEAN 자 유무역협정을 중심으로 : 잠브리 압둘 라하만(말레이시아 전국고무생산노 조 사무총장) ·노동조합운동과 민중·사회운동 부문과의 연대 - 태국 사례를 중심으 로 : 솜삭 코사이숙(태국 철도노동조합 위원장) ·국제노동운동의 진보적·민주적 발전을 위한 아시아 노동조합 운동의 역 할 : 엘머 라보그(필리핀 5.1절운동KMU 위원장) ·아시아 노동조합 운동의 단결과 연대의 장벽과 극복 전망 : 나까오카 모 토야키(전노협 부위원장) 전체 회의 Ⅱ : "미국의 군사패권주의와 아시아 그리고 노동조합의 과제" → 사회자 : 엘리자베스 탕(홍콩노총 집행위원장) ·미 군사패권주의와 동북아시아, 그리고 노동조합의 과제 : 이회수(민주 노총 대협실장) ·일본 군국주의화 흐름에 맞선 노동조합의 대응 - 한일노동자연대 전략 을 중심으로 : 유키오 이와타(일본 전노련 사무부총장) ·동남아시아 반전투쟁과 노동조합의 역할 - 인도네시아 사례를 중심으 로 : 카타리나 푸지아츄티(인도네시아전국노동자투쟁전선FNPBI 국제국장) ·남아시아 반전투쟁과 노동조합의 역할 - 인도 사례를 중심으로 : A K 파 드만반(인도노동조합회의CITU 사무처장) 워크숍 Ⅰ : "아시아 이주 노동과 여성" → 사회자 : 잠브리 압둘 라하만(말레이시아 전국고무생산노조 사무총장) ·이향원(민주노총 부위원장) ·엘리자베스 탕(홍콩노총 집행위원장) ·엘머 라보그(KMU 위원장) ·샤말(민주노총 이주지부 지부장) 워크숍 Ⅱ : "초국적기업과 노동기본권, 그리고 노동조합의 대응 방향" → 사회자 : 정식화(금속연맹 부위원장) ·노재열(금속연맹 정책실장) ·몽콜 솜크라부안(태국 민주노조연맹) ·누어 라쉬드(말레이시아 전기산업노동조합 사무총장) ·A K 파드만반(인도노동조합회의CITU 사무처장) ·이토 아키노부(전全일본항만노조 중앙본부 서기장) 워크숍 Ⅲ :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 사회자 : 박수근(교수노조) ·석태호(공무원노조 정책기획실장) ·레이문드 빌라누에바(필리핀 교원노조 사무총장) ·안딜레 실랄라(남아공 지방공무원노조SAMWU 사무부총장) ·유병홍(공공연맹 정책국장) ·이을재(전교조 교섭국장) 워크숍 Ⅳ : "사유화·개방화와 노동조합의 대응" → 사회자 : 유키오 이와타(일본 전노련 사무부총장) ·마하데반(전全인도노동조합회의 사무총장) ·조희주(전교조 부위원장) ·솜삭 코사이숙(태국철도노조 위원장) ·나상윤(공공연맹 정책실장) ·비쉬누 리말(네팔노총 사무총장) 워크숍 Ⅴ : "신자유주의와 노동의 비정규직, 비공식화 그리고 빈곤화" → 사회자 : 아로키아 다스(SIGTUR 방콕 총회 조직담당자) ·롭 램버트(SIGTUR 코디네이터) ·플로엔피티 스리시리(태국 여성노동자단결 사무처장) ·툐노(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노동조합SBR 위원장) ·빅토르 브리즈(필리핀BMP 위원장) ·이상학(민주노총 정책국장) 전체토론 Ⅲ : 아시아 노동운동 지도자 전략 회의 → 사회자 : 아로키아 다스(SIGTUR 방콕총회 조직 담당자) ·기조발제 : 이재웅(민주노총 사무총장)
“오줌! 좀 누코 합시다!” 김민수 교수는 장난스럽게 외치고 뚜벅뚜벅 화장실로 향한다. 5년 넘게 복직투쟁 중인 서울대 미대 김민수 교수. 나는 가끔 선생님의 수업 광경을 떠올리면서 혼자 큭큭 웃곤 한다. 그의 수업은 열정과 진지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것 못지 않게 유머와 풍자로 넘쳐난다. 그는 솔직한 표현을 즐기며 정곡을 찌르는 데 거침이 없다. 그를 아는 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김민수를 외면한다면 서울대엔 희망이 없다’고. 나 역시 훌륭한 스승을 잃고 싶지 않아 얼마 전 이 투쟁에 동참했다. 5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학교를 지켜주신 김민수 교수님과 교수․ 학생대책위에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바친다. 요즘 한국사회는 게릴라전을 치르고 있다. 부안군민들이, 중국조선족들이, 이주노동자들이, 농민과 노동자들이. 그리고 대학, 각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국지전이 전개되는 양상이다. 이 과정을 피할 순 없겠지만 모두들 너무도 힘겨워 보인다. 아, 누군가 나타나 일거에 싹 정리해 줬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우리는 백마 타고 올 이를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울대가 ‘김민수들’로 가득 찰 날을 그려본다. 우리는 진실의 ‘빨간 알약’을 전파하는 메트릭스의 전사들이다. 본문에 인용된 것은 김민수 교수 인터뷰들 중 일부이다. 각 인터뷰 전체 내용, 연구와 강의 내용 및 복직투쟁 등과 관련한 자세한 사항들은 김민수 교수 홈페이지를 통해 만날 수 있다. (http://www.kimminsoo.org) “디자인을 생산하는 쪽이든 소비하는 쪽이든, (사람들은 보통) 디자인을 아주 특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동차나 패션 디자인 같은 아주 특수한 영역에만 디자인을 국한시키는 것이죠. ‘디자이너’라고 하면 우선 ‘앙드레 김’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그런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디자인이라는 것은 일상생활을 가능케 해주는 문화 일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디자인은 특정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현상이라 할 수 있는 거죠.” <이야기1> 2003년 9월29일 시작된 무기한 천막농성. 천막농성장 옆에는 5년 동안의 복직투쟁을 상징하는 조형물이 서 있다. 김민수 교수는 1996년 학술 심포지움에서 서울대 원로교수의 친일문제를 지적했다가, 1998년 재임용심사를 빌미로 서울대에서 추방당했다. 하지만 재임용심사과정의 악의성과 몇몇 의혹이 법정공방을 통해 널리 공개되었으며, 재임용제도 자체는 ‘헌법불일치’ 판결을 받았다. “실은 교육적인 면에서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실기 위주의 교육을 받고, 특히 대학원생들이 교수들의 돈벌이를 돕는 도제식 교육을 받다보니 학문의 기초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이걸 바로잡으려 노력했는데, 다른 교수들은 이를 위기로 받아들이더군요. 그러다 일부 대학원생이 교수의 도제 제의를 거부하고 제 밑으로 들어오자, (다른 교수들이) ‘서울대는 실기 중심의 대학원이니까 이론은 할 수 없다’고 결의해 제가 대학원생을 받아들이는 것을 원천 봉쇄해버렸습니다.” <이야기2> 김민수 교수는 5년 동안 학교를 지키면서 ‘무학점 강의’를 계속해오고 있다. 한편 천막농성을 시작하면서 김민수 교수는 ‘유령의 노래’라는 시를 발표하였다. ‘유령의 노래’는 5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유령에 비유하고 있다. 이번 천막농성은 이 문제를 다시 공론화하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고, 새로운 국면에서 학교당국과 맞설 수 있는 힘을 되찾아 주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천막농성 선언에 대해 김민수 교수는 ‘본능적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문화’라고 할 때에는 그런 (삶과 괴리된, 화려하고 조명빨 받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는 현실, 생활 속에 드러나는 삶의 총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다리를 예를 들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리는 원래 만들어질 때부터 아름답게 디자인된 다리라는 겁니다. (무엇보다) 다리란 ‘보는 것’ 이전에 본질적으로 ‘건너면서 느끼는’ 구조물입니다. 시각적으로 감상의 대상이기 전에 온 몸으로 교감되어야 할 게 다리지요. 한데 한강의 다리는 거의가 차를 타고 60~70킬로의 속도로 휑하니 빨리 건너야 할 군사용 다리처럼 느껴져요.” <이야기3> 천막농성이 시작되면서 교수․학생대책위는 바빠졌다. 일인시위를 조직하고 유인물을 만들고 집회 일정을 계획했다. 교수노조, 민교협 등 교수들이 일인시위에 나섰고 학생들도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느 학생은 유령 의상까지 준비해 와서 ‘유령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농성 40일을 넘기면서 교수․학생대책위는 ‘학문의 자유 주간’을 선정하고, 외부 사회단체들과 연대투쟁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복직기원 노트’ 제작 판매와 서명운동, 각종 선전물 배포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디자인에 대한 생각이 있다고 봐요. 그 가운데 하나가 디자인이란 게 무슨 뭐, 예쁘게 꾸미는 하나의 장식적 수단이나 혹은 그 장식을 통해 경제적 부를 축적하게 할 수 있다는 수단으로 보려는 시각이에요. 물론 부수적으로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디자인의 본래의 의미는 일상의 삶에 있어 문화적 가치를 만들어 내는 부분이라고 봐요. 결국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학적 관찰과 인간이란 것에 대한 규정을 위한 인문학적 성찰도 필요하겠죠.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디자인은 그러한 부분에 대한 통찰과 성찰, 예술적 창조의 부분이 빠지고 단순히 하나의 기술적 측면만을 강조하나보니까 문화 자체에 내용이 실리질 않는 거겠죠. 저는 디자인이라는 것을 하나의 인문학적 시각성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야기4> 교수․학생대책위의 노력으로 지난 11월21일에 ‘김민수 교수 원직복직, 학문의 자유 그리고 대학 민주화를 위한 공투위’ 출범식이 열렸다. 이날 모인 70~80명의 참가자들은 함께 걸개그림을 그리고 학내를 행진했다. 이 집회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학교당국은 바로 ‘철거’ 경고장을 천막농성장에 붙였다. “이것은 용기가 아니라 지식인으로서의 상식입니다. 이 일이 있고 처음에는 허허벌판에 맨몸으로 찬바람에 서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더러워서 ‘내가 떠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 역시 들었고요. 그러나 그런 문제가 아닌 것이, 이런 시스템 속에서는 그런 문제가 계속 생기고, 누군가가 또 이런 일을 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모순도 있지만 꾸역꾸역 살아가는 서울대학…. 하지만 교훈만은 마음에 듭니다(‘진리는 나의 빛’). 적어도 이 대학에서 진리가 나의 빛이라는 것 말입니다. 80년대의 박종철 열사도 결국 우리 교훈, 진리에 가까이 하려다 산화한 사람입니다.” <이야기5> 천막농성장의 밤. 학생대책위는 김민수 교수의 저서를 판매하고, 관련 영상물을 방영하는 등 학내 홍보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대책위는 학교당국의 ‘철거협박’에 직면하여 이후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또한 밀실에서 독자적으로 모종의 ‘계획’을 마련하고 있는 학교당국에 맞설 힘겨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불굴의 소수’만으로는 저들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해직교수님들이 계세요. 그동안 재임용 제도가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아니라는 판결 때문에 법적인 호소도 못하고, 저의 경우 보다 더 말도 되지 않는 깡패논리로 강단에서 쫓겨난 분들이지요. 그 분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대학의 민주화와 공공성 확보라는 측면을 위해서도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1심에서 승소했을 때 서울대 대학본부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죠. ‘김민수가 한번 이겼으니 이제 그만 학교를 떠나라’고 말이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절을 바꿔야죠.”PSSP .......................................... .......................................... <성명서> “학문의 자유는 대학의 생명이다.” - 김민수 교수 원직복직, 학문의 자유, 그리고 대학의 민주화를 위하여 - 학문의 자유는 대학의 생명이다. 학문의 자유가 억압받는 곳에서 지성과 진리는 그 빛을 잃고 신음한다. 자유로운 연구, 발표, 교육 그리고 학문적 집회, 결사의 자유는 대학을 대학답게 만드는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것은 대학을 지성과 진리가 살아 숨쉬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의 대학은 어떤 모습인가?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대학은 탄압의 대상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의 대상이었다. 최근 대학개혁과 관련하여 핵심적 문제로 떠오른 ‘교수재임용제’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1975년 5월13일 유신독재정권은 기존 긴급조치를 집대성한 ‘긴급조치 9호’를 발표하고 대대적인 인권탄압에 나섰다. 교육당국은 전국 98개 총장들을 소집하여 ‘문제교수들을 몰아 낼 것’을 지시하였고 같은 해 7월 23일에 ‘교육공무원법, ’사립학교법‘을 개정, 공포하였다. 이 법에 따라 1976년 2월에 전국에서 교수 4백60여명이 해직되었다. 전국 모든 대학의 정문에 커다란 단두대가 세워진 것과 같았다. 유신정권은 이 조치에 대한 무마책으로 대학교원에 대한 처우를 대폭 개선해주었다. 전형적인 ’당근과 채찍‘이었다. 재임용제도는 그 이후 28년 동안 아무런 사전적, 사후적 보완조치 없이 존속되면서 양심적 학자들을 대학에서 추방하는 합법적인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 그러다 2003년 2월 헌법재판소는 재임용제도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냈다. 헌법재판소는 판결문에서 ‘선진외국의 경우 기간임용 및 재임용제도가 없는 나라가 많고’ 이 제도가 있는 나라의 경우 ‘교수들의 단체와 대학단체간의 협상과 타협을 통하여’ ‘객관적인 기준과 절차’를 갖추어 놓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한국에서 재임용제도는 ‘재임용에서 탈락하지 않으려면 임면권자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또한 ‘심사기준도 모호하여 주관적 평가가 개입될 소지도 많으며 부당한 재임용거부에 대한 사전 및 사후의 구제절차도 없는 경우에는 자유로운 학문에 필요한 독립성은 그에 비례하여 심각하게 위협받게 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불행히도 한국의 대다수 대학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스스로 성찰하고 개혁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실정이다. 한국의 대학, 특히 사립대학의 경우 학문의 자유는 고사하고 끊임없는 재단비리 사건으로 얼룩져 대학의 존재이유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교육부 자료에 의하면 2003년 10월 현재 전국의 18개 대학에 관선이사(임시이사)가 파견되어 있는데, 그 사유를 보면 ‘임원 간 분쟁’, ‘이사회 부실 운영’, ‘회계부정’, ‘친인척 중심의 학교운영’, ‘불투명한 교원 신규채용 및 재임용탈락’ 등으로 나타나, 대학의 민주화 문제가 더 이상 개별 대학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사장의 친인척이 대학이나 법인에 근무중인 대학이 83개 사립대 가운데 75곳이나 되며, 2000년 현재 이사장 지위가 친인척에게 대물림된 비율이 거의 50%에 이른다는 현실(4년제 40%, 전문대 51.9%)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에서 지명도가 높은 대학조차 ‘교주’(敎主)에 의해 파행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것은 한국 대학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바로 이 현실에 대해 발언하던 양심적 교수들이 재임용제도에 의해 부당 해직되었고 그 숫자는 파악된 것으로만 3백 여 명이 넘고 있다. 국립대학은 어떠한가? 한국의 대표적 대학이라 불리는 서울대에서 일어난 일을 보자. 현재 5년 넘게 복직투쟁 중인 김민수 미대 교수는 1996년에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 ‘서울대학교 미술교육의 역사’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에서 김민수 교수는 초기 교수들 중 친일행위를 했던 교수가 있었다는 내용을 각주로 인용하였다가 선배교수들로부터 개별적, 공개적인 삭제요구를 받았다. 물론 사료에 따르면 친일행위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고심 끝에 김민수 교수는 삭제요구를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 미대에서 발간된 자료집에는 김민수 교수의 ‘논문발표 사실 자체’가 삭제되어 있었다. 부당한 외부적 압력에 대해 학문의 자유를 지켜내야 할 대학이 오히려 불합리한 압력, 검열 그리고 논문삭제라는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98년, 김민수 교수는 재임용심사 제도를 통해서 서울대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었다. 김민수 교수의 재임용심사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의혹으로 덮여 있다. 심사 전의 분위기, 3차까지 이어진 심사과정, 심사위원 선정, 심사 내용, 심사 방법, 그리고 대학본부의 최종 결정까지 제기되는 숱한 문제들에 대해서 서울대 당국은 오직 ‘절차상 하자는 없다’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다. 김민수 교수의 저서는 디자인 관련 상을 수상하였고, 그의 논문은 외국 학술지에 게재되었다. 학술적 능력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김민수 교수에 대해 ‘연구실적 부실’이라 평가한 서울대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재산권을 침해하고 인권을 억압하는 것만이 범죄는 아니다. 학문의 자유를 박탈하는 행위들, 즉 검열과 추방은 엄중한 사회적 범죄이다. 게다가 현행 재임용제도는 유신독재정권에 의해 도입된 ‘범죄도구’이지 ‘합법적 절차’는 전혀 아니다. 지금까지 재임용제도에 의해 자행된 해직교수들에 대한 ‘추방’ 결정은 모두 ‘원천 무효’이며, 따라서 무조건 원직복직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동안 억울하게 감수해야 했던 정신적, 물질적 피해에 대한 보상까지 받아야 마땅하다. 실상과 본질이 이러할 진데 개정입법을 추진하는 교육부는 한 마디 반성도 없이 ‘일부 부당해직 교수들을 구제해 주겠다’는 적반하장격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구제’한다는 말인가? 유신독재로부터 오늘날까지 학문의 자유를 침해한 ‘행동대장’이었고 부패 한 대학의 문제 하나 제대로 풀 능력도 의지도 없는 교육부는 우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부당해직 교수들 앞에 진심으로 사죄할 것을 촉구한다.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 ‘재심사절차’ 입법시도를 즉각 중단하라. 우리는 범죄자들의 손에 또 다시 칼자루를 쥐어줄 만큼 어리석지 않다. 대학인이여! 이제 유령이 보이는가. 김민수 교수가 보이는가. 21세기 대학 위에 드리워진 중세의 감옥이 느껴지는가. 바로 그 감옥에 갇히게 될 지 모르는 당신을 위해 김민수 교수는 5년 넘게 투쟁하고 있다. 대학을 민주화하고 학문의 자유를 지키는 일은 그 누구보다도 대학인 자신의 의무이다. 대학인이여! 검열과 추방에 맞서 투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학문의 자유를 짓밟는 대학권력의 떡고물에 우리의 영혼을 팔지 말자. 대학인이여! ‘자리’ 하나를 얻기 위해 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동료들과 등을 돌린 채 ‘침묵의 카르텔’의 일원이 되려하지 말자. 학문과 삶을, 그리고 지식과 실천을 분리하는 반(反)지성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구원하자. 대학인이여! 대학은 대학의 주체들이 지키자. 학문의 자유는 대학의 생명이다. - 김민수 교수 재임용 탈락은 원천 무효이다! 김민수 교수를 복직시켜라! - 부당해직 행위 사죄하고, 무조건적 원직복직을 실천하라! - 검열과 추방은 엄중한 범죄이다!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징계하라! -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다! 대학인이여, 학문의 자유를 쟁취하자! - 대학의 민주화와 학문의 자유를 쟁취할 때까지, 우리는 끝까지 투쟁한다! 2003. 11. 21. 김민수 교수 원직복직과 학문의 자유, 대학의 민주화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