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일 밤 9시 반 비행기로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 MTU) 미셸 카투이라 위원장이 본국인 필리핀으로 귀국했습니다. 2006년 2월에 입국한 지 6년 만입니다. 미셸 카투이라 위원장은 필리핀에서 나고 자란 노동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돈을 벌기 위해 전자제품 엔지니어, 건설노동자, 집 수리공, 학교 직원, 상담교사, 비서, 주유원, 쇼핑몰 점원, 가정부, 베이비시터, 유리창닦이 등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노조활동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가진 성소수자로서, 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에 와서는 처음에 울산에 있는 어느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첫 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필리핀 여성노동자가 한국인 동료 직원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뻔한 사건을 겪습니다. 그가 술먹고 밤에 기숙사에 와서 강제로 성관계를 요구를 하는 것을 겨우 뿌리치고 그녀는 미셸 동지와 함께 도망을 쳤습니다. 나중에 신고를 했지만 그 직원은 별다른 처벌 없이 겨우 2주 정직만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러한 차별과 폭력적인 행위는 다른 공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화성의 전자제품 조립 공장에서는 휴일도 주지 않아 한 달에 한 번 꼴로 쉬었다고 합니다. 쉬지 못하는 달도 있었습니다. 임신한 여성을 해고해서 본국으로 돌려보내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 했습니다. 미셸 동지는 혼자서 이러한 노동법 위반을 노동부에 고발해서 회사 측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에 동료의 해고 문제에 대응하다가 이주노조를 알게 되었고 노동조합 활동의 취지에 공감해서 노조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노조에 가입하고 나서 화성 지역에서 필리핀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엄브렐라’(Umbrella)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여성문제, 성차별 문제 등을 논의하고 교육하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던 중 이주노조 4대 위원장인 토르너 림부 위원장과 압두스 소부르 위원장이 2008년 5월 2일에 동시다발로 출입국에 의해 표적단속 되어 강제추방을 당했습니다. 이주노조에서는 후임 지도부를 선출하지 못하고 비상대책위원회 체계로 운영되었는데, 2009년에 미셸 동지에게 위원장 제안이 되었습니다. 미셸 동지는 이를 받아들였고 2009년 7월 5일에 임시총회에서 5대 위원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최초의 성소수자 위원장을 뽑았습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가슴 뭉클 했던지요. 위원장으로 당선된 이후 미셸 동지는 이주노동자, 특히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주력하는 한편, 각종 인터뷰, 기자회견, 집회를 통해 이주노동자를 차별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고발하고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하여 행동에 나설 것을 호소해 왔습니다. 위원장이 되어서도 공장에서 계속 일을 해야 했기에 낮에는 일을 하고 밤늦게 사무실에 와서 노조 일을 하는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2009년에 일했던 서울의 봉제공장도 역시 휴게시간 위반, 수당 미지급 등 노동법 위반사항이 많았습니다. 초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은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사업장에서도 미셸 동지는 노동부에 진정을 내서 노동조건을 개선하도록 유도했습니다. 2010년에는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검찰경찰출입국관리소에 의한 정부합동 강제단속 추방이 강화되었습니다. 이주노동자를 잠재적 범죄자, 테러리스트로 보면서 정부는 단속을 강화했고 이주노조는 7월에 미셸 위원장 주도로 ‘G20을 빌미로 한 이주노동자 단속추방에 대한 항의 농성’을 명동 향린교회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농성은 8월 말까지 50일 간 계속되었고 그 사이 미셸 위원장은 30일 간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습니다. 단식 중에 쓰러져 병원신세까지 지기도 했지만 의지를 꺾지 않고 30일을 채웠습니다. 이 항의농성에 노동운동, 진보운동의 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폭넓게 연대를 하면서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다시 한 번 한국사회에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2010년 9월에는 민주노총 사상 최초로 이주노동자로서 대의원이 되어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참석했습니다. 2011년 2월 이주노조 총회에서 미셸 동지는 위원장으로 재선됩니다. 이렇게 이주노동자 권리를 위한 행동과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무부 서울출입국관리소는 미셸 위원장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2010년 3월부터 등록되어 일을 하던 회사가 일감이 없어 실질적인 휴업상태에 들어가자 서울출입국관리소는 이를 ‘허위취업’으로 규정했고, 노동부에서는 12월 초 해당 회사에 대한 고용허가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12월 21일에 서울출입국관리소에서는 미셸 위원장을 소환조사 했고 2011년 2월 10일자로 체류비자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이는 이주노동자 운동, 이주노조 활동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이자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행동하면 다 추방하겠다는 인종차별적인 억압입니다. 이에 이주노조에서는 민주노총을 위시한 제 단체와 함께 지속적인 반대투쟁을 했으며 소송을 제기하여 9월 15일 1심 결과가 나왔습니다. 재판부는 노조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출입국 측의 체류비자 취소 처분을 취소했습니다. 1차적인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출입국 측이 항소하여 현재 2심이 진행 중입니다. 이주노조 미셸 위원장은 이주노동자이자 트랜스젠더 성소수자로서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중과 노동자로서의 기본권을 쟁취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억압과 탄압을 받고 단속추방의 위기에 내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꺾지 않고 계속 노조운동을 했습니다. 필리핀으로 돌아가서도 노동운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주노조, 그 이전의 평등노조 이주지부에서 활동했던 지도부나 활동가들은 모두 이중 삼중의 굴레 속에서도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습니다. 평등노조 이주지부장을 했고 2003-2004년 명동성당 농성투쟁단 단장을 했던 샤말 타파 동지는 그 따뜻하고 넓은 마음씨로 이주노동자들을 이끌면서도 집회현장에서는 항상 분노와 결의의 연설로 힘을 주었습니다. 2004년 초 과천 법무부 앞에서 집회를 할 때 500여 명의 이주노동자 앞에서 샤말 동지가 모든 이들의 평등한 인권을 역설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2004년 4월에 표적단속되어 네팔로 강제추방 되었지만 돌아가서도 네팔노총(GEFONT)에서 이주사업 담당자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샤말 동지에 이어 농성단장과 이주지부장을 하고 이주노조 초대 위원장이 된 아느와르 후세인 동지는 노조 설립 2주 만에 뚝섬 역에서 새벽 1시에 단속반원들에게 폭행을 당하였고 단속되었습니다. 외국인보호소에서 1년 여 구금되어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상할대로 상했는데도 일시 보호해제된 이후에 위원장 역할을 다시 수행했습니다. 그는 2007년에 방글라데시로 귀국하고 나서도 계속 약을 먹고 치료를 받을 정도로 건강이 완전하지 않았지만 자기 지역에서 정치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구청장 같은 위치에 당선되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2007년 지도부였던 까지만 까풍 위원장, 라주 구릉 부위원장, 마숨 사무국장은 지도부 역할을 하기 전부터 꾸준히 이주노조 간부로서 활동해 왔습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신분으로서 이 동지들은 이주노조의 맨 선두에 서서 활동하였습니다. 단속추방에 맞서 매주 서울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집회를 여는 등 추방을 무릅쓰고 활동하였지요. 급기야 11월에 동시에 표적단속되어 네팔과 방글라데시로 추방되었습니다. 까지만 동지는 부인과 함께 영국으로 가서 다시 이주 노동을 하고 있고 라주 동지 역시 일본 오사까에서 식당 주방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숨 동지는 방글라데시에서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연대 네트워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8년 지도부였던 토르너 림부 위원장, 압두스 소부르 부위원장은 선출된 지 한 달 만에 동시에 표적단속 되었습니다. 표적단속이라는 것은 일단 단속대상을 찍고 며칠 동안 미행을 해서 동선을 파악하고 잠복을 통해 특정 시간에 각기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급습하여 잡아가는 방식입니다. 토르너 위원장은 광우병 촛불집회 참가를 위해 사무실을 나서다 사무실 앞에서, 소부르 부위원장은 집에 있다가 들이닥친 출입국 단속반원들에 의해 잡혔습니다. 토르너 동지는 지금 홍콩에서 경비 일을 하고 있고, 소부르 동지는 방글라데시에서 앞서 말한 단체 활동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정부의 탄압에 의해 ‘이주노조 지도부=단속추방’이라는 등식이 작동해 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도부 뿐만 아니라 많은 간부, 조합원들이 단속추방을 당했지요.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더욱이 노조라는 운동단체를 만들어 정부비판 활동을 하니 더욱 눈엣가시지요. 그래도 그 많은 동지들이 자기 권리를 위해, 자기보다 이후에 한국에 올 후배 이주노동자들의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위해 단속추방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활동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헌신과 열정, 조직화와 투쟁이 지금까지의 이주노동자운동 역사와 성과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끝이 아닙니다. 한국에서의 활동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동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8년 6월에 네팔 카트만두에서, 본국으로 돌아간 네팔과 방글라데시 활동가들과 이주노조가 모여서 ‘국제 이주노동자연대 네트워크’를 결성하였습니다. 이제 미셸 동지가 필리핀으로 돌아가서 활동을 하게 되면 이 네트워크에 필리핀도 함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이전에 평등노조 이주지부 활동을 했던 동지가 한국에서 돌아간 노동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주 본국에서부터 이주노동자들을 접촉하고 교육하고 정보를 제공해서 그것이 이주노조 조직화로 이어질 수 있다면 이 네트워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활동을 한국의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이 지원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이주노조로서는 여전히 활동가를 재생산해야 하는 힘든 과제가 계속 남아 있습니다. 미셸 동지가 귀국한 이후 이주노조는 위원장이 공석이 되었고, 남아 있는 간부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조합원 숫자는 600명 수준으로 늘어났지만 활동하는 간부들은 줄어든 어려운 상황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활동가를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한 교육과 조직사업, 지역투쟁 등이 이뤄져야 하고 연대와 지원도 더 커져야 할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투쟁하던 당시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현재 이주노동자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일하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중의 비정규직이고 국적과 피부색, 인종차별이라는 겹겹의 차별 속에서도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인간으로서 대우받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씩 싸워 나가고 있습니다. 2003-2004년 이주노동자들이 단속추방 중단과 합법화 쟁취를 위해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하던 당시, 이주노동자 활동가 버즈라 라이 동지가 했던 인상 깊은 말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인간선언’을 하셨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노동자선언’을 하셨으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투쟁선언’을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노동자들은 전태일 열사 정신을 이어받아 국경과 민족을 넘어 단결하여 노동해방을 이뤄가야 합니다.”
사회진보연대가 제작한 소책자 '핵안보정상회의 10문 10답'- 핵안보가 아니라 핵 없는 세상을! 입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론. 우리는 왜 핵안보정상회의에 반대하는가 핵안보정상회의에 대해 궁금한 것 10가지 1. 핵안보정상회의란 무엇인가요? 2. 핵안보란 무엇인가요? 3. 핵 테러 예방은 좋은 것 아닌가요? 4. 오바마 대통령이 주창한 '핵 없는 세상'은 꼭 필요한 것 아닌가요? 5. 핵발전소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것 아닌가요? 6. 한국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리는 것은 좋은 것 아닌가요? 7. 핵안보정상회의가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8. 원자력 인더스트리 서밋은 무엇인가요? 9. 핵발전소 수출은 우리나라 경제에 큰 도움을 주지 않나요? 10. 핵 없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주장해야 할까요? 자료 1. 핵안보정상회의에 대한 해외 단체, 활동가들의 입장 2. 핵안보 관련 주요 협약 및 문서 함께 합시다!
[%=박스1%] 2012년은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심화하고 한반도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국내 정치권력이 재편되는 격동의 시기다. 그러나 민중운동은 침체와 무기력 속에 이전 집권세력이 주도하는 ‘반한나라당 정권교체’에 종속되며 이념과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사진1%] 세계 경제의 구조적 위기 심화 2007-09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장기적 원인은 1970년대 이후 자본생산성 및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 추세다. 중기적 원인은 1970년대의 ‘징후적 위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현한 금융세계화와 이중적자다. 이에 따라 1990년대와 2000년대 자본생산성 및 이윤율이 얼마간 회복되면서 ‘대완화’가 발생하지만, 결국 금융세계화가 야기한 금융혁신과 신용의 증권화가 이번 금융위기의 단기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2007-09년 금융위기는 실물경기의 침체로 파급되면서 성장 및 고용·임금의 후퇴를 낳았다. 금융위기가 은행위기를 거쳐 대불황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취한 통화·재정정책의 결과로 2009-11년에는 세계적인 재정위기가 발생했다. 특히 유럽연합(EU)은 주변부에서 발발한 재정위기가 중심부로 전염되면서 현재 세계 경제위기의 핵으로 부상하는 중이다. 미국도 적자재정정책과 이를 지지하는 수량완화정책을 통해 위기를 일시적으로 진정시켰지만, 그 후과로 2011년 들어 재정위기 위험이 제기되며 2012년 경기침체 가능성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는 임시방편을 통해 일시적으로 진정되다가 다시 악화되는 악순환을 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일부 국가가 유로존을 이탈하거나 심지어 유로존이 붕괴할 가능성도 더욱 커질 것이다. 세계 교역의 1/4, 생산의 1/5을 차지하는 유럽의 경기침체가 장기화함에 따라 세계 경제의 위축은 불가피하다. 재정위기와 은행위기의 상호작용 속에서 유럽 은행들이 해외 투자자금을 회수할 경우 세계적인 신용경색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 경제는 수출의 10%, 외국인투자의 30% 가량을 차지하는 유럽의 위기가 심화·확산될 경우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경우 2011년 실물경기 회복세의 둔화, 특히 장기에 걸친 고용 및 주택시장 부진 속에서 재정건전성의 악화와 유럽 재정위기의 영향으로 경기재침체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경우 금융연계와 무역연계를 통해 전 세계에 큰 충격이 미칠 것이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대한 무역의존도와 금융연계가 강한 한국 경제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또 중국도 대내외 위험 요인이 불거지면서 경착륙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은 저임금 기반 가공무역을 통해 세계 공급사슬에서 최종공급자로 기능하는 한편, 무역흑자로 벌어들인 외화를 다시 국외에 투자하는 최종대부자로 기능하면서 과거 세계 경제위기 시 안전판 역할을 담당했는데, 오히려 현재는 중국이 세계 경제 불확실성의 또 다른 원천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동북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한반도 불안정성의 고조 유럽의 위기와 대조적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축으로 부상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유지·확대하는 것은 경제위기에 처한 미국에게 사활적인 과제다. 미국으로서는 경기침체에 대비하여 금융과 함께 이른바 지식기반경제의 다른 한 축을 구성하는 비즈니스서비스를 중심으로 수출주도 성장을 달성하고, 이를 위해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를 건설하는 것이 필수적 과제로 대두된다. 중국의 군사력 증강, 북한의 핵무기 보유 등 역내 안보 불안도 미국의 아시아 재관여의 빌미가 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 종전 선언과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통해 대외 전략의 무게중심을 유럽이나 중동에서 아시아 태평양으로 옮길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상태다. 게다가 올해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와 안보 문제의 동시적 해결을 위해 공세적인 아시아 전략을 펼쳐야 할 국내 정치적 요인도 결부되어 있다. 현재 수출 달러 환류 메커니즘으로 특징지어지는 미중 관계는 서로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맞물려있기 때문에 갈등이 조정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쌍방의 이해관계가 상충할 수밖에 없어 잠재적인 갈등이 확대되는 형세에 있다. 한국은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전략에 적극 조응하여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화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FTAAP 구상의 시발점으로서 한미 FTA가 비준된 것과 함께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에 따라 주한미군사령부가 한국사령부(KORCOM)로 재편되는 것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정부는 한미 FTA 비준으로 ‘한미동맹은 정치·안보동맹에 경제동맹이 더해져 다원적·포괄적 동맹으로 진화했다’고 평가한다. 군사 안보라는 ‘평화와 안정의 축’과 경제협력이라는 ‘번영과 발전의 축’이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한미관계가 운영되고 발전하는 새로운 틀을 갖추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또 한국은 미국의 후원 아래 2012년 3월 서울에서 2차 핵안보정상회의를 주최할 예정인데, 이것이 미국의 북핵 관리 전략에 조응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2011년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이라는 돌발 변수가 발생하였다. 일단 대다수 전문가들은 북한이 순조롭게 집단지도체제로 이행하고, 상당 기간 동안 내부 정치적 안정화에 주력하고, 경제난 해결을 위해 개혁·개방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다. 중국이 김정은 후계 체제를 인정한 것도 안정화를 예상케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집단지도체제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미국이 대북 정책을 재검토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므로 북미 관계는 한동안 교착 상태에 머물 것이다. 기본적으로 한미의 북핵 포기 전략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강성대국 원년과 체제 교체를 맞는 북한이 공세적 전술을 구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이명박 정부의 친재벌-반노동 정책 한국 경제는 1997-98년 경제위기·외환위기 이후 저성장 국면으로 진입한 상황에서 금융자유화와 구조조정·평가절하와 같은 수출-재벌 주도 세계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금융자유화와 수출-재벌 주도 성장전략, 그리고 이를 종합하는 FTA 전략은 투자활성화와 수출경쟁력을 위해 노동력을 신축화함으로써 저임금·장시간·고강도 노동의 악순환을 강화한다. 또 무역의존도와 금융개방도를 심화시켜 국민경제를 세계 경제위기의 충격에 대단히 취약하게 만든다. 단적으로, 2007-09년 금융위기 당시 한국의 환율 및 주가 변동폭과 실질임금 삭감률은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명박 정부의 친재벌-반노동 정책은 세계 경제위기의 격랑 속에서 크게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사회저변의 모순을 심화하였다. 첫째, 이명박 정부의 집권 5년(2012년 전망치 포함) 경제성장 실적을 단순 평균하면 3.1%에 불과하다. 이는 자신의 공약이었던 7%는 물론이거니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그토록 비판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적(각각 5.0%, 4.3%)에도 미달하는 것이다. 둘째, 경제위기 아래 고용도 악화되었다. 잠재실업자와 불완전취업자(부분실업)를 포함하는 확장실업률은 공식실업률의 2-3배에 달하는 8-1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경제위기 하에서 여성·청년, 중소기업·자영업 등 취약계층이 집중적인 타격을 입었다. 셋째, 명목임금인상률에 물가인상률을 반영한 실질임금인상률도 대폭 악화되었다(2007년 3.0%, 2008년 -8.5%, 2009년 -0.1%, 2010년 3.8%, 2011년 -3.5%). 그 결과 노동소득분배율은 2007년 56.7%에서 2010년 52.5%까지 하락했다. 넷째, 조세 감면, 규제 완화, 개발 확대를 통해 건설 및 부동산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정부 여당의 발상은 용산 참사와 4대강 개발로 상징되는 거대한 재앙을 낳았다. 부채로 주택 구입을 장려하는 정부의 금융·부동산 정책은 가계부채 급증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한국 경제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폐해가 누적된 상황에서 2012년 세계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다시 한 번 심각한 위기를 경험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역의존도가 높고 금융개방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세계 경기침체와 국제 금융시장 불안에 따른 영향으로 수출이 둔화하고 자본유출입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정부의 경제위기 대책은 중기적으로 재정건전화 기조를 유지하면서 FTA 글로벌 네트워크 구상과 노동신축화 법제화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부는 ‘위기일수록 대외 개방을 적극 추진하고 무역 장벽을 걷어내야 국가간 장벽이 희미해진 글로벌 시대에 새로운 부를 창출할 수 있다’며 한미FTA 글로벌 네트워크 전략을 보다 공세적으로 추진하려 한다. 정부의 노동신축화 정책은 정리해고제와 같은 고용량의 신축화와 파견제·기간제와 같은 고용형태의 신축화를 거쳐, 이제 ‘일자리 나누기’라는 외피를 쓴 시간제를 통해 임금 및 노동시간 신축화로 진화하고 있다. 정치 위기와 총대선 지형 정부 여당은 경제위기로 인한 민심 이반과 각종 실정·부패로 집권 하반기 레임덕에 빠진 상태다. 그 이유는 반민주적·억압적 통치 스타일과 남북관계의 악화라는 여러 요인들도 있겠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명박-한나라당의 ‘747 공약’과 ‘뉴타운 공약’과 같은 장밋빛 경제성장 전망이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에게 치명타를 가했다는 사실을 핵심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한미 FTA 비준안 날치기 통과의 후과와 선거 개입 의혹 등 각종 권력형 비리가 터지며 대대적인 위기에 봉착한 한나라당은, 박근혜 전 대표가 전권을 행사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다. 비대위는 정책적으로는 복지 공약을 보강하면서 중도적 이미지를 강화하고 조직적으로는 외부 인사 영입, 개방형 국민경선제 등의 방안을 도입하여 재창당 수준의 인적 쇄신을 감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확실한 미래권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나라당의 구심력이 급격히 약해진 반면 당내 친박계를 제외한 여타 계파의 원심력이 확대되고 있다.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계파 간 이해 갈등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총선에서 패배할 경우 내부 분열이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민주통합당으로 대표되는 전 집권세력은 위기의 책임을 현 정부 여당에게 전가하는 인민주의적 정치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민주당은 12월 (‘혁신과 통합’의 후신인) 시민통합당과 한국노총과 통합하여 민주통합당으로 재편하였다. 동시에 진보정당을 포함하는 범야권공조를 통해 한나라당과 1:1 구도를 만들면 총대선 승리가 가능하다는 구상 하에 대여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시민단체와 한국노총의 합류로 민주통합당은 이전에 비해 진보적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지만, 이들이 제시할 개혁 의제의 폭과 수위는 대단히 협소할 것이다. 조직적 특성으로 보더라도 민주통합당은 정당 외부 전문가들의 참여와 국민경선제 등을 통해 선거승리와 유권자 전반의 동원에 주력하는 포괄정당적, 선거전문가정당적 성격을 띤다. 역사적으로 민주통합당이 무수한 이합집산을 반복했다는 점은 이들의 이념적·조직적 토대가 대단히 부실하고 지지층의 휘발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반복, 심화하는 경제위기 속에서 기성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현재 반한나라당-비민주당을 상징하는 ‘안철수 돌풍’으로 나타나고 있다. ‘안철수 돌풍’은 정당을 기반으로 삼지 않더라도 대중적 명망과 미디어의 힘을 활용하여 선거 자금과 운동원을 조직할 수 있는 정치적 토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안철수 돌풍’은 그 실체와 무관하게 한국 정치의 이념적·조직적 취약성을 반영한다. 이런 측면에서 안철수 원장이 ‘정치의 본질은 행정’이라고 언급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정치 위기의 중요한 증후 중 하나는 사회적 갈등의 대의 과정이자 집단적 운동으로서 정치가 행정이나 치안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일단 안철수 원장이 단호하게 신당 창당설을 부인함에 따라 총선은 현재 구도대로 치러질 가능성이 크지만, 신당론의 불씨는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그가 직접 총선과 대선에 출마하지는 않더라도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그랬듯이 간접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다. 통합진보당으로 대표되는 민중운동 주류가 총선과 대선에서 원내교섭단체 진출과 연립정부 구성에 몰두할 경우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전면적 타협과 양보는 불가피하다. 계급타협 속에서 이러한 정당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스스로 침식할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이념 및 노선의 우경화와 선거정치의 빌미를 제공한다. 특히 세계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현 정세에서 통합진보당이 만에 하나 연립정부에 참여할 경우, 이는 그로 표상되는 민중운동이 집권세력의 정치적 책임을 공동 부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히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한다면 이는 향후 노동자운동의 주류가 미국식 자유주의(민주당)-노동자운동 공조로 재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경제위기와 정치위기에 대한 민중적 대안의 건설이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운동이 야권 단일화 프레임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적·조직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총대선 국면에서 범야권의 일부로 흡수 통합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민중운동의 대응 이상의 분석을 요약하면서 2012년 민중운동의 투쟁 방향을 도출해보자. 첫째, 2012년 세계경제는 미국의 경기침체 가능성 고조와 유럽의 재정위기 확산, 중국의 경착륙 위험 등으로 대단히 심각한 위기를 경험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세계적인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경제위기는 세계화된 금융연계와 신자유주의 정책의 모순이 폭발한 결과로서, 일시적인 순환적 위기가 아니라 장기적인 구조적 위기의 성격을 갖는다. 무역의존도와 금융개방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세계 경제위기가 심화할 경우 직접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정권 말기 레임덕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여당이 복지 공약을 강화하고 정부가 감세정책을 일부 철회했지만, 재벌주도 성장 및 노동력 관리 기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 결과 정부의 경제위기 대응은 중기적으로 재정건전화 기조를 이어가는 가운데 FTA 글로벌 네트워크 전략과 노동신축화 법제를 추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본은 긴축경영 기조 속에 임금을 억제하고 고용을 축소하면서 노동자에게 위기 비용을 전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민중운동은 거시적 수준에서 금융자유화와 노동신축화를 주축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를 전면 비판해야 한다. △한미 FTA를 필두로 하는 FTA 글로벌 네트워크 전략 비판 △자본시장통합법 개정안을 비롯하여 금융거품과 부실을 양산하는 금융자유화 조치 반대 △국가고용전략 2020 이후 제출되고 있는 각종 노동신축화 법제 반대 △노동기본권을 무력화하는 현행 노조법의 전면 개정 등이 당면 주요 과제다. 둘째, 미국은 경상적자 해소책으로 중국 등 신흥국의 환율유연성 제고와 자국의 서비스산업 수출 주도 정책 전환을 강조하며 한미FTA 이후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수출 달러 환류 메커니즘으로 특징지어지는 미중 관계는 ‘미중 전략 및 경제 대화’(G2)를 통해 이해관계가 조정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잠재적인 정치·경제적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이는 최근 미국의 ‘태평양 세기’ 구상에서 드러나듯이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의 수정과 전력 증강으로 귀결되고 있다. 천안함-연평도 사태를 거치며 군사적 긴장 상태가 한층 고조된 한반도에서는 북한 체제의 변화로 불확실성이 확대됐다. 당분간 조정 국면을 맞겠지만, 기본적으로 한미의 북핵 포기 전략이 유지되고 2012년 강성대국 원년과 체제 교체를 맞는 북한의 공세가 충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민중운동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과 한국의 한미동맹 강화 기조가 동북아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한다는 점을 명확히 폭로하면서 반전평화 운동을 적극 전개해야 한다. △핵안보정상회의 비판 △평택 미군기지, 제주 해군기지를 비롯한 주둔미군 재배치 계획에 대한 비판 △한국의 전력 증강 사업 비판 등이 주요 과제다. 셋째, 고용·임금과 민중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총노동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정부가 제기하는 노동시간 단축 방안은 실상 노동시간을 신축화하여 단시간·저임금·비정규 노동을 양산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이러한 노동시간 단축 방안의 본질을 정확히 비판하면서, 이전부터 금속노조가 주장해온 주간연속2교대제와 야간노동철폐 투쟁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쟁취하기 위한 구체적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그동안 실질임금 하락폭이 컸고 올해 선거라는 정치 일정도 있어서 임금인상 요구 관철이 상대적으로 쉬울 수도 있지만, 교섭력이 취약한 부문은 경제위기 여파가 커질 경우 여전히 실질임금 삭감이 우려된다. 또 경영난을 이유로 물량이나 생산기지를 국외로 이전하려는 기업도 늘어날 것이다. 총연맹 수준에서는 노동자계급 전반의 사정 악화와 함께 내부 격차의 확대를 감안하여 연대임금 정책을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 산별연맹 수준에서는 산업적 위계의 정점이자 임금협상의 기준이 되는 주요 완성차 대기업 노동조합들이 산별교섭에 동참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또 3·8 여성의날과 연계한 공공운수노조서울경인지부의 대학비정규직 집단교섭, 공단 차원의 전략조직화와 연계한 금속노조서울남부지회의 집단교섭도 계속해서 발전시켜야 한다. 쌍용자동차·한진중공업 투쟁으로 부상한 정리해고 이슈를 진전시키고 사내하청·특수고용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경제위기에 사각지대로 몰리게 될 민중들의 기초생활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도 중요하다. 복지 정책의 수혜자로서 정책적 요구에 매몰되기보다는 사회적 권리의 주체로서 대중 저항 주체 형성에 주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경제위기와 민심이반을 바탕으로 2010년 지방선거와 2011년 상하반기 재보궐 선거에서 승리한 야권은 민중운동의 일부를 포섭하는 정당통합과 선거연합을 통해 다가올 총선·대선에서 반한나라당 공세를 지속할 전망이다. 만성적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현직의 실패와 정당의 위기가 반복되고 있는데, 반한나라당-비민주당 무당파를 상징하는 ‘안철수 돌풍’은 한국 정치의 근본적 불안정성을 의미한다. 민중운동의 이념적·조직적 위기를 반영하는 통합진보당의 등장 및 이들의 민주통합당과의 선거 제휴 속에서 민중운동 전반의 주류화가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의 정세는 향후 대중운동을 재건하여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기초를 유실하지 않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요구한다. 민중운동 좌파는 전선의 유실과 진보정당 및 노동조합의 우경화를 저지하고 향후 민중운동의 발전적 재편을 추동하기 위해 상호 긴밀히 공조해야 한다. 나아가 국제 사회운동의 경제위기 대응에 대해 주의 깊은 관찰과 연대가 필요하다. 국제적 수준에서 보면 2010-11년 유럽 긴축반대 운동, 2011년 상반기 중동 및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 2011년 하반기 미국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 등 경제위기에 맞서 투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것이 한동안 추동력을 상실한 대안세계화 운동의 부활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자본주의의 체계적 위기에 맞서 국제적 수준에서 민중적 대안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2011년 세계 저항운동 평가 2011년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격변의 해로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2011년이라는 제목 하의 처음 몇 단락은 아마도 부채에 시달리는 유럽에 집중된 경제위기의 분출과 그리스,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에서 촉발된 정치적 위기로 채워질 것이다. 그 다음 몇 단락은 필시 북아프리카에서 중동, 유럽과 미국을 휩쓴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렇게 채워진다면 이는 지속되고 있는 이 운동의 사회, 정치, 문화적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이번 호 『사회운동』의 다른 글들은 경제위기를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글은 2011년 민중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 성격, 세계 각 지역의 정치문화에 대한 영향, 좌파운동에 대한 의미를 평가할 것이다. 투쟁의 개요 2011년의 투쟁은 실제로 2010년 12월 17일에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날 튀니지에서 노점 수레를 경찰에 빼앗긴 한 젊은 노점상이 경찰본부 앞에서 분신했다. 이 사건은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이는 수 일간 지속되면서 강력해졌다. 시위대들은 실업과 식료품 가격 폭등, 정부 부패, 정치적 자유 부재에 대해 커다란 분노를 표출했다. 이런 것들이 그 노점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문제들이었다. 거리 시위는 반정부 봉기로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는 2011년 1월 14일 독재자 벤 알리를 쫓아내는 것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 저항운동은 비슷한 조건에 놓인 주변 지역의 나라들로 퍼져갔다. 이집트는 1월 25일부터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하는 2월 10일까지 혁명을 경험했다. 이 시기에 수 십 만의 젊은 이집트 민중들이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 결집했고 용감하게 경찰과 대결했다.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군중 시위는 바레인, 시리아, 예멘, 알제리 등과 여타 나라들에서 발생했다. 이 가운데 많은 나라들에서 대규모 파업이 반정부 시위와 함께 일어났고 젊은 민주화 시위대와 노동자들은 서로 힘과 사기를 얻었다. 11월과 12월에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은 다시 타흐리르 광장으로 돌아와서 압도적인 경찰폭력과 다시금 맞섰다. 그들은 무바라크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최고군사위원회(SCAF)가 최저임금 인상, 물가 통제와 같은 사회 개혁 이행의 실패하는 데 맞서 저항했다. 그들은 또한 최고군사위원회가 정부에 대한 통제를 지속하고자 하는 혁명 참가자를 탄압하는 것에 대해 저항했다. 5월 초에는 ‘분노하는 사람들’이라 스스로 칭하는 젊은이들의 시위가 유럽을 뒤흔들었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첫 시위는 높은 실업률(40%의 청년 실업률), 공공부문 정리해고와 사회서비스 축소로 이어진 몇 번의 긴축 조치와, 이러한 조치로 비난받은 집권 사회민주당에 대한 불만 등에 대응하여 5월 15일 스페인에서 발생하였다. 시위는 마드리드의 푸에르토 델 솔 광장(태양의 광장) 및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플라자에서의 텐트 농성으로 이어졌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8월에 경찰이 철거할 때까지 정치계급의 특권 철폐, 실업 해결, 주거권 증진, 교육과 건강 및 대중교통 등 공공서비스의 개선,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 강화, 군비지출 축소,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 등을 요구하는 몇 차례의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는 근거지로 이 농성투쟁을 활용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창조하고 싶었던 평등한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텐트촌을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다. 텐트촌의 관리에 대한 결정, 정치적 입장, 시위 전술은 ‘전체 총회’를 통한 합의로 만들어졌다. 모든 출석자들은 동등한 기반 위에서(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참여하고 발언하고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요리, 청소, 기타 일상 업무는 높은 수준의 자발적 지원제를 통해 집단적으로 행해졌다. 아랍 세계의 봉기가 그러했듯이, ‘분노하는 사람들’의 운동 역시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긴축과 정치적 부패에 반대하는 이와 비슷한 텐트농성과 대규모 시위가 5월에서 8월 사이에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온라인, 오프라인 커뮤니티 역시 독일, 아일랜드 및 기타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발전하였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가시적인 점거는 여름의 끝 무렵에 많이 없어졌지만, 운동 참가자들은 주거권에서 이민자 단속에 이르는 다양한 이슈에 관해 지역 총회를 개최하고 운동을 조직하면서 활동을 굳게 지속하고 있다. 더욱이 10월에 유럽 전역에서 군중 시위가 다시금 일어났다. 시위는 그리스에서 10월 19-20일과 12월 1일의 총파업을 동반하여 11월과 12월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들은 유럽연합의 구제금융 조건으로 실행된 세금 인상, 임금 삭감, 공공부문 정리해고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9월에는 미국이 대중 저항운동으로 충격을 받았다. 아랍의 봄과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자극받은 젊은 시위대들은 스스로를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으로 부르며 맨하탄 중심가의 월스트리트에서 몇 블록 떨어진 주코티 공원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공식 요구사항 작성을 거부하며, 소수 금융자본가와 이들을 지원하는 정치인들(1%)의 손에 부와 권력을 집중시키는 미국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서 “우리가 99%다”라는 구호를 만들어냈다. ‘분노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운동의 목표 자체로서 수평적이고 이상적 저항 형태를 강조하며 전체 총회를 주요한 의사결정 구조로 활용했다. 10월 초까지 점거운동 단위들은 미국 전역의 수백 개 도시에 존재했다. 열 명에서 200여 명에 이르는 텐트농성이 뉴욕, 오클랜드, 포틀랜드, 보스톤, 기타 미국 내 주요 도시들에서 경찰에 의해 대부분 철거된 11월 중순까지 어디에서든 지속되었다. 10월 15일 점거 시위는 세계 80개 이상의 나라에서 벌어졌고 99%라는 생각을 진정 지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 시위들은 미국에서 발생한 점거 운동과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 운동을 하나로 만들었다. 10월 15일 공동 행동의 날 호소는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이 처음 제안했고 나중에 미국에서 채택되었다. 그 날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거리의 민중들은 애초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깃발 아래 조직된 이들이었다. 10월 15일에 이어서 캐나다, 영국, 노르웨이, 뉴질랜드, 기타 서구 몇 나라들에서도 텐트농성이 진행됐다. 이 나라들은 이전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운동이 퍼지지 않은 곳들이었다. 유럽에서처럼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가시적인 점거 텐트농성은 없어졌지만 점거 시위대들은 지역 총회를 개최해서 예산 삭감, 주택 압류, 개인 부채, 경찰 폭력 문제를 포함하여 수많은 이슈들에 관한 운동을 계속 조직하고 있다. 운동의 성격 2011년 대중운동은 지역과 국가마다 매우 달랐고 같은 국가 내 도시들 사이에서조차 달랐다. 예컨대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긴축 조치들의 철회를 위한 구체적 요구안을 만들었지만 미국의 점거 운동은 공식적 요구나 공식적 강령 개발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무라바크 퇴진 이후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들은 정당 건설에 매진해서 11월 말과 12월 초에 실시된 총선에 참여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에서 실시된 총선에서는 많은 ‘분노하는 사람들’이 선거를 거부했다. 뉴욕의 점거 텐트농성은 주로 조직적 배경 없이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이들로 구성된 반면 워싱턴의 점거 시위대들은 환경, 사회정의, 반전 단체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점을 가진 2011년의 각기 다른 운동들은 몇 가지 두드러진 유사점을 보인다. 이는 이 운동들을 동일한 국제적 현상의 일부로 파악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우선, 이 세 가지 운동 모두 사회 경제적 불만이 쌓인 결과로 형성되었고 급격히 정치적 목표를 발전시켰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물가 폭등과 공식 경제의 저발전, 유럽에서 사회서비스 축소와 증세, 미국에서 은행과 기업에 대한 대규모 구제금융 및 개인 부채의 증가, 세 지역 모두에서의 높은 실업률은 처음에는 시위대를 거리로 나서게 했다. 그러나 단지 불만에 쌓인 시위에 그치지 않고 아랍세계에서 경제적 불만과 결합된 장기간의 정치적 억압은 시위대를 독재 체제의 타도를 요구하도록 추동했다. 유럽에서는 ‘분노하는 사람들’의 요구가 긴축조치 철회로 집중되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으로 대표되는 것처럼 매우 정치적인 비판으로 나아갔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부채위기에 대한 책임이 있는 정치인들을 면책하고, 권력이 있는 거대 기업과 IMF, 유럽중앙은행과 결탁하는 정치 시스템의 변혁을 추구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유사하다. 점거 시위대들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예산지출과 글래스 스티걸 법 재도입뿐만 아니라, 기업 로비 철폐를 위한 선거시스템 개혁을 촉구하는 ‘비공식적’ 언론을 대거 만들어냈다. 나아가 시위대들은 텐트농성을 일종의 정치적 선언으로 간주했다. 이 세 가지 사안에서 무엇이 진정한 민주주의인지, 왜 정부는 민주적이지 않은지 명확히 대비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 세 지역에서 저항운동은 전통적 좌파에 친숙한 중앙집중적 조직 형태와의 단절을 드러낸다. 그들은 좌파 정당과 조직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개인들의 높은 참여로 온라인 사회관계망을 통해 주로 조직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운동 지도부들은 전체 총회 구조, 화장실에서 선전홍보에 이르는 일들을 다루는 실무팀을 통해 광장 텐트농성에서 창조된 수평적이고 자발적인 문화를 자랑스러워했다. 미국과 유럽 지역에서는 중앙집중을 반대하고 다양한 관점과 경향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드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미국에서 이러한 환경은 개인주의를 숭배하고 위계체제와 보편적 사회변혁 이데올로기(예컨대 마르크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가진 사회에서 자란 미국 중산층이나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있어 핵심적이었다. 이집트 혁명의 지도부들 또한, 미국의 경우보다는 덜 강조하지만, 무바라크 퇴진 이전에 타흐리르 광장에 넘쳐났던 이와 비슷한 평등주의와 자발주의의 분위기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2011년의 운동들이 공공장소에 대한 점거뿐 아니라 운동의 이상적인 재창조도 중심에 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운동들이 그들이 표현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에 항상 따랐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폭력적인 시위전술 구사 여부를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져 시위 역량이 축소되는 사례도 있었다. 미국의 점거 운동은 유색인과 이민자 같은 경제위기의 최대 피해자들의 지도력 육성은커녕 동등한 참여조차 촉진하지 못했다. 게다가 많은 전통적 좌파들은 더 지속적인 조직형태와 더 명확한 강령이 없이는 이러한 새로운 대중운동들이 진정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1년 운동들에서 확산된 수평주의적 성격은 어떤 측면에서 평가되느냐에 따라 최대의 장점 혹은 최대의 약점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와 함께할 가능성이 큰 새로운 형태의 운동을 나타내며 따라서 좌파가 많이 배워야 할 운동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지막으로 2011년의 운동들은 서로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고 지역적, 국제적 규모로 발전하였으나, 또한 강력한 일국적 성격을 유지하였다.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튀니지와 이집트 민중 봉기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뉴욕 점거운동을 기획했던 사람들은 스페인과 그리스에서 벌어졌던 것과, 규모는 다르더라도 그 성격이 유사한 운동을 만들고 싶어했다. 또한 초기 기획회의에 참가한 이들은 전략과 전술에 관한 중요한 참조점으로 타흐리르 광장을 언급하였다. 미국 무정부주의자들은 운동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 배우기 위한 목적으로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그리스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각기 다른 지역의 시위대들은 서로 메시지와 지지 영상을 주고 받으며 그들이 똑같은 99%의 일부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랍과 유럽, 미국에서 나왔던 많은 담론은 실업, 빈곤, 긴축조치, 정치부패와 같은 일국적 이슈의 틀 안에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와 미국의 개입이라는 지역적 문제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봉기의 배경이 되었지만 이 투쟁들은 일국 독재체제에 대한 요구를 강조했고 국가적인 사회경제적 개혁 요구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 그리스 민중들의 분노는 ‘트로이카(유럽위원회, 유럽중앙은행, IMF)’가 요구한 긴축조치에 동의한 그리스 정부를 향한 것이었지 이러한 지역적 국제적 기구들 자체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전통적 좌파들은 지역적 반자본주의 운동의 전망을 위해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것의 의미를 논의하지만, ‘분노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논의를 대개 무시했다. 대신에 그들은 지역 총회를 개최하고 공동 식당을 운영하고 공동체 공원을 건설하는데 매달렸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그들이 미래에 바라는 그리스 사회와 그리스 시민의 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미국의 점거 운동에서 나오는 선언들은 “모든 미국인들”을 위한 부채탕감과 일자리를 요구했다. 그들은 지구적 범위에서 금융자본의 규제 요구보다는 미국 정치시스템의 개혁 요구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다. 2011년 운동들의 일국적면서도 국제적인 성격은 이전 시기 반세계화/대안세계화운동과의 단절과 지속 양자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들과 그 사이의 연계 형성에 대한 주도력은 1999년 시애틀의 반WTO 투쟁과 그 이후의 세계사회포럼에 의해 형성된 네트워크의 바깥에서 온 것이다. 반세계화/대안세계화 운동은 국제회의(WTO, IMF, G7/8) 대응 투쟁 중심으로 구체화된 반면 이 새로운 운동들은 일국 정부에 더 초점을 맞추면서 이러한 기구들을 대개 무시했다. 그러나 각 대륙을 가로지르는 동일성-우리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고 비슷한 적들과 싸우고 있다는 의미에서-은 어느 때보다 생생하며 서로 배우고 공유하려는 의지도 그러하다. 운동의 영향 세 지역 모두에서 민중들의 운동이 상당한 정치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아랍권에서 민중봉기는 두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했고 다른 정권들에서 유의미한 정치적 자유와 사회 개혁을 쟁취했다. 그러나 리비아에서 내전과 나토 폭격이 지속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아랍권의 운동은 완전히 성공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민중운동이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면서 과도정부에 맞서 지속적으로 싸워 왔다. 튀니지에서는 새로운 연립정부가 설립되었지만 이집트 민중은 완고하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군부정권에 맞서 계속 투쟁 중이다. 그러나 군부정권의 지속적인 권력 장악에도 불구하고 무바라크의 퇴임 이후 좌파세력의 정치적 활동은 활발해졌다. 1월 이후에 여러 사회주의 정당과 조직들이 공공연한 활동을 시작하거나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 중 이집트노조총연맹(FETU)에 의해서 창당된 민주노동당(DWP)은 이집트의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1)기업의 재국유화와 노동자들이 정한 관리자에 의한 운영, 2)사유화와 독점화 촉진 정책 철회, 3)최저임금 인상, 4)모든 종교적 신념에 대한 존중, 5)종교, 피부색이나 성별에 기반한 모든 차별 철폐라는 다섯 가지 요구를 내걸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타 사회주의 정당 및 조직들과 ‘좌파세력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세력연합’이라는 사회주의 노선을 결성하였다. 또한 일부 사회주의 정당들은 새롭게 창당된 자유민주주의, 사민주의 정당들과 ‘혁명은지속된다’라는 선거연합을 결성하였다. 선거연합은 11월 초 1차 총선에서 하원 7석 달성이라는 큰 성과를 내기도 했다. 아직도 영향이 크지 않지만 이집트의 사회주의·좌파운동은 젊은 층의 지지를 천천히 얻어나가고 있다. 타흐리르 광장 활동가와 달리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선거청지를 대체적으로 피해 왔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대규모 대중 집회는 노동자의 파업과 더불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가 궁극적으로 퇴임하는 데 기여했다. 세금 인상과 공공지출 삭감 정책을 막지 못했지만 두 나라의 대중운동이 대규모 시위를 동원하여 권력을 이어받은 과도 정권을 계속 압박하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분노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도입된 통행료, 지하철 요금과 재산세의 보이콧을 조직하였다. 일부 ‘분노하는 사람들’은 선거를 보이콧 하였지만 그들의 운동은 좌파 정당이 강화될 수 있는 환경을 형성하였다. 이번 선거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집권당인 중도 성향의 사회노동당이 보수적 성향의 국민당에 참패한 것이다. 반면 국회에서 2석밖에 없던 좌파연합인 통일좌파(United Left)는 8석을 더 얻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전반적인 좌파정당의 지지율 또한 급상승하여 30%에 달한다. 미국에서 점령운동은 금융위기에 대한 책임이 왜 금융자본에 있는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시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이들의 설명은 티파티(Tea Party)의 ‘큰 정부가 개인의 자산과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을 대체하고 있다. 민주당은 재산 격차의 심화에 대한 점령운동의 비판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주당은 다가오는 선거에서 점령운동이 가지는 잠재적 영향력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에 있어서 점령운동이 어떠한 영향이 끼칠 것인가는 아직 불투명하다. 민주당이 점령운동과 99%의 대변인으로서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점령운동의 선거정치에 대한 거부감과 오바마 정권에 대한 불만이 공화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지 이 시점에서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점령운동이 미국에서 정책결정 과정을 더 좌파적인 방향으로 추동할 능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점령운동은 이미 오하이오 주의 공공부문 단체교섭권 제약 법안을 폐지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2011년 대중운동은 좌파 정치운동을 활성화했을 뿐 아니라 노조운동에 힘을 실어주었고 일부 지역에서 노조운동과 상호 강화하는 관계를 맺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노동자의 파업은 벤 알리와 무바라크를 굴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 혁명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집트 민주노조들은 이집트노동조합연맹(FETU)을 결성해 국가가 통제하는 이집트노총(ETUF)에 도전하였다. 무바라크 정권 시절에 ETUF은 유일한 합법 노총이었고 시위노동자를 회유하고 탄압하는 기능을 하였다. 혁명 이후에 ETUF가 많이 약화된 반면 FETU는 조합원을 배가하고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또한 위에서 DWP에 대해 언급했듯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리스에서 그리스노총(GSEE)은 긴축정책 반대운동에 앞장 서 왔고 7차례의 총파업을 조직하였다. 그리스 노조들은 ‘분노하는 사람들’과 협조하여 총파업에 돌입할 때마다 수만 명의 시위대를 조직하였다. 저항의 분위기 속에서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노동자의 투쟁이 활발해졌다. 11월 24일 포르투갈 노조들이 1988년 이후 최초의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6월 이후 영국 노동자들은 1926년 이래 가장 큰 파업을 조직했다. 미국노조들도 평소에 파업에 대해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에 거쳐 길거리로 나섰다. 미국노총(AFL-CIO)이나 서비스노조(SEIU), 화물운송노련(Teamsters), 통신노조(Communication Workers of America)와 같은 강력한 노동조합 조직들이 운동에 물질적,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자신들의 온라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점령운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지를 표명하고, 이 운동의 요구를 알려내었다. 노조 조합원들은 여러 도시에서 점거 시위자들과 함께 행진을 벌이거나 진행 중인 노동자 투쟁을 환기시키며 일자리 창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과도한 경찰력 사용에 대한 반발이 특히 심했던 오클랜드에서는 점거 시위자들이 11월 2일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요청했고(미국에서는 1940년대 이후로 찾아볼 수 없던 일이다) 노동조합은 이에 화답했다. 비록 11월 2일 시위가 총파업 수준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이 날 거의 5%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작업을 멈추었다. 노조원들과 점거 시위자들은 또한 미국의 5대 항인 오클랜드 항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2011년 대중운동에 대한 평가 2011년에 아랍권, 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한 대중운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몇 개월 전만큼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점령운동과 ‘분노하는 사람들’ 운동 참가가는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고 아직도 대규모 집회를 동원할 능력이 있다. 이집트의 정치는 아직도 역동적이고 대규모 집회가 지속되고 있다. 2011년에 생긴 대중운동들은 2012년에 들어서면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것이다. 물론 이 운동들이 정치·경제 체제를 변혁할 능력이 있는 반자본주의운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장일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부패, 탄압과 지나친 빈부 격차를 규탄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운동들은 이미 여러 나라의 정치와 정치적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의 조직화와 정치적 표현을 활성화시켰고 급진적 좌파들의 활동과 입장을 위한 공간을 열었다. 더욱이, 기존 좌파조직들이 오랫동안 대중적인 동원에 실패한 가운에 수많은 대중들을 길거리로 불러내었다. 이러한 성과를 인식하면 한국에서 왜 유사한 운동을 하지 못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SNS과 점령운동의 담론을 빌려 대중적인 한미FTA 반대 운동을 촉발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대규모운동을 건설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2008년 촛불시위, 보다 최근에는 희망버스 등 우리도, 같진 않더라도 비슷한 형태의 운동을 경험했음에도 말이다. 결국 대중운동을 어렵게 하는 어떤 객관적인 조건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금융자본의 탐욕은 미국만큼 가시적이지 않고 긴축정책과 실업이 유럽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또 한미FTA의 효과를 피부로 느낄 때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그러나 중요하게 고려할 주관적인 요인도 있다. 특히, 우리는 2011년의 운동을 이끌었던 핵심 추진력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SNS 활용은 중요했고 ‘모든 곳을 점령하라’나 ‘우리는 99%’라는 슬로건은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를 유도한 핵심 요인은 아니다. 오히려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카이로에서 뉴욕까지 민중총회가 상징하는 수평적인 집회와 평등한 의사결정 방식, 사람들이 꿈꿔왔던 민주주의를 실제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주체들의 자신감 고취였다. 물론, 각 도시에서 똑같은 집회문화나 형식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카이로에 적합한 운동 형태는 뉴욕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고, 카이로와 뉴욕의 운동방식이 서울에 꼭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울에 맞는 운동 형태를 찾아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다. 그것은 ‘조직화’란 무엇이고 ‘투쟁’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세계의 좌파들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급진적인 좌파조직, 노조, 노동자단체는 물론 2011년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대중운동들과 유기적인 관계맺기를 시도해야 한다. 이는 2012년 뿐 아니라 앞으로 수년 간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 남을 것이다.
2010년 4월 27일 신용평가기관인 S&P는 그리스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투자 부적격 등급인 BB+로 3등급 하향조정했다. 이 조치는 유로존 회원국과 IMF가 그리스에 대한 지원의사를 확정한 이후에 내려진 조치이므로, 그 여파가 상당했다. 이는 유로화를 사용하는 국가에 대한 최초의 투자부적격 사례로서, 신용평가기관들의 이와 같은 조치는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의 재정위기에 대한 시장의 불안감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같은 해 5월 2일 유로존 회원국들과 IMF가 단일 국가에 대해서는 사상최대 규모인 1,100억 유로의 구제 금융을 그리스에 지원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5월 10일 유로존 회원국들은 회원국에 대한 대출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목적법인(SPV)인 유럽금융안정기금(European Financial Stability Facility, EFSF)을 설립에 합의하여, IMF의 지원금까지 포함하면 약 7,500억 유로에 달하는 유럽안정메커니즘(Europe Stabilization Mechanism, ESM)을 갖추게 되었다(표1).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 남유럽의 재정위기는 그리스에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로 번져갔고, 2011년 10월 유럽 정상들은 민간 채권자의 그리스 국채 손실부담률(헤어컷비율)을 50%로 상향조정하고 EFSF의 레버리지, 즉 EFSF가 채권을 매입하여 금융기관의 자본을 확충하고 이렇게 매입한 채권을 담보로 차입을 해서 다시 채권을 매입하는 신용차입을 가능케 하여 EFSF의 규모를 1조 유로까지 확대하기로 합의한다. [표 1] 유럽안정 메커니즘의 구조 그리고 같은 해 12월 9일 영국을 제외한 EU 26개국 정상은 연간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최대 3.5% 이하, 누적 공공적자를 60% 이하로 유지하지 못하는 회원국을 자동제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재정통합에 합의했다. ‘통화동맹’이었던 유로존이 ‘재정동맹’으로 한걸음 옮긴 것이다. 그리고 같은 달 21일 ECB(유럽중앙은행)가 새로 도입한 3년 만기 장기대출(LTRO) 입찰이 실시됐다. 3년 만기 LTRO는 ECB가 유럽의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A- 등급 이상의 유럽 국채를 담보로 이들에게 3년간 1%의 저리로 무제한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ECB의 대출프로그램 만기는 1년이 가장 긴 것이었다. 유로존 국가들의 부채 위기가 심화되면서 국채 수익률이 치솟자(국채 가격 하락) 유럽권 은행들은 신용시장 경색으로 유동성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ECB 장기대출 프로그램(LTRO)이 시행되어 국채 위기 안정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이날 스페인 정부가 실시한 3개월과 6개월물 단기국채 입찰은 56억 유로 규모를 발행해 목표치를 웃돌았고 발행수익률도 크게 떨어졌다. 참고로 앞서 ECB가 실시한 가장 큰 규모의 단일 대출프로그램은 2009년 6월의 4,420억 유로였다. 그러나 이러한 금융시스템 안전망 공급에도 불구하고 S&P, 무디스, 피치 등 국제 신용평가회사들은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AAA 등급 국가에 대해 신용등급 강등 위협을 계속하고 있다. 숨가쁘게 진행되어 온 유럽 재정위기의 전개를 제도적 측면에서 정리하자면 대략 위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재정위기에 대한 유럽 좌파의 분석과 입장을 정리하고 소개한다. 유로존에 내재한 근본적 모순 유로화 도입의 편익과 위험 전후 유럽의 통화제도는 미국의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기반으로 구성되었다. 미국의 달러는 금의 가치에 고정되고 유럽 각국의 통화는 다시 달러를 중심으로 ±1%, 일시적으로는 ±2%의 변동을 허용하는 고정환율제로 운영되었다. 유럽 각국이 고정환율제를 선호했던 것은 1919-26년 변동환율제를 일시적으로 도입한 결과 무역수지 흑자를 위해 자국화폐를 경쟁적으로 평가절하하며 벌어졌던 화폐전쟁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고 동시에 당시 공동농업정책(Common Agricultural Policy)의 성공을 위해서는 각국 농산물 가격의 안정이 절실히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 독일의 경기과열과 그에 따른 독일정부당국의 통화환수 정책으로 인해 마르크화의 가치가 급등한 반면 프랑스 프랑화의 가치는 절하되는 현상이 벌어지면서 유럽 공동체 차원의 통화협력의 틀이 필요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EC 집행위원회는 EMU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통화통합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는데(베르너 보고서), 1971년 미국의 달러 불태환 선언으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하면서 베르너 보고서의 내용이 실제로 집행이 되지는 않았지만, 유럽 각국의 통화 통합을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1970년대 초 EEC 6개국과 노르웨이는 일종의 공동변동환율제(joint float)를 채택하게 된다(달러화에 대해선 변동폭의 제한 없으나, 유럽 각국 화폐간에는 고정환율제). 유럽의 공동통화를 향한 시도는 1979년 유럽통화제도(European Monetary System)의 도입으로 한 단계 진전을 맞게 된다. 유럽통화제도의 특징은 외환보유고로서의 역할을 하는 유럽통화단위(European Currency Unit, ECU)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전의 체제와 차별화된다. 이러한 통화협력과 관세동맹의 출범으로 역내교역이 원칙적으로는 자유화되었으나, 규범과 제도적 차이로 인해 비관세 장벽은 여전히 존재하였고 이로 인해 국가 간의 시장은 분절현장을 보였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단일시장을 향한 논의가 지지를 얻으면서부터 단일통화 구축을 위한 프로젝트 역시 진전을 보이게 된다. 1991년 합의된 마스트리히트 조약(Treaty on European Union)은 유럽연합(EU)의 제도적 틀을 완성시키고 통화동맹의 완성을 위한 3단계 계획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게 되는데, 여기에 명시된 EMU의 원칙은 1) 통화정책의 주체는 ECB이며, 2)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ECB는 물가안정을 우선 목표로 하고, 3) 재정준칙을 기반으로 회원국들간의 경제정책 수렴을 목표로 하고, 4) ECU를 단일통화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2년 영국의 고금리 정책으로 인한 경기침체는 파운드화에 대한 평가절하 압력으로 작용했고, 영란은행의 환율 방어 시도는 조지 소로스로 대표되는 헤지 펀드의 파운드에 대한 대규모 투기 때문에 실패한다. 결국, 영국은 1992년 9월 17일 유럽 환율 조정 메커니즘에서 탈퇴한다. 이러한 유럽적 차원의 외환위기를 겪으며 통화동맹에 대한 공감대가 더욱 절실해져 통화동맹 구축을 위한 프로젝트는 진전을 보이게 된다. 유로존의 모순: 불균형성 심화, 정책 제약 이러한 단일시장과 이를 위한 단일통화 사용을 통해 노릴 수 있는 명목상의 편익은 다음과 같다. 1) 교환비용의 감소: 환전비용의 감소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독일, 프랑스 같은 큰 국가에는 GDP의 0.1~0.2% 정도로 측정되며, 작은 국가들에서는 1%까지 나타난다. 2) 환율 불확실성 제거: 금융자본의 이동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명목환율은 경제력을 반영하는 실질환율로부터 괴리되는 것이 보통이며, 이러한 환위험 관리를 위한 정부나 개별 기업의 헤징은 부가적인 비용을 발생시킨다. 또 개별통화에 대한 대규모 환투기에 대한 직접 노출을 피할 수 있다. 3) 투명성 제고: 재화에 대한 직접적 가격비교가 가능해져 일물일가 법칙에 가까운 가격체계가 나타난다. 이러한 편익에 대비해 단일통화 사용이 갖는 비용은 다음과 같다. 1) 독자적 통화정책의 상실: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명목환율의 변동을 통해 대외불균형을 교정할 수 있는 수단을 상실한다. 2) 독자적 재정정책 제약: 통화정책 이외에도 재정정책의 독립성 또한 상당히 제한된다. 각 회원국들간의 정책 수렵을 요건으로 하는 통화동맹의 특성상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수준을 규정하는 1997년 성장-안정 협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통화동맹 구축의 함의는 세계시장에서 통용되는 지불과 축장(보유통화)의 수단인 세계통화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안정적인 회계단위를 창출하여 금융화 아래서 유럽 산업 및 금융자본의 이해에 복무한다. 중심부 국가의 자본으로서는 역내교역증가의 수혜를 입을 수 있고, 달러만이 독점적으로 누리던 발권이익을 노려볼 수 있기 때문이며, 자국의 통화가치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주변부 소규모 국가로서는 상존하는 외환위기의 위험성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 2] 유럽 각국의 명목 단위 노동비용 유로화가 출범하고 유로존의 모든 통화정책을 관장하는 ECB가 재정적자와 총 공공부채 비율에 대한 상한선을 설정하였으나, 이를 준수할 것인지는 개별국가에 맡겨두었다. 문제는 통화 및 재정 정책에 대한 제약이 설정된 아래서 한 국가의 경쟁력은 생산성 향상과 노동 비용 절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로존 전체에서 노동자의 임금수준과 노동조건을 두고 “바닥을 향한 경쟁”이 심화되었다.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중심부 유럽과 주변부 유럽으로의 분화의 핵심에는 (노동에 대한 통제를 기반으로 한) 독일의 경쟁력 향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경쟁력의 근원은 전적으로 임금 제약을 통해 독일 노동자들의 명목임금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했기 때문이다(표2).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과 같은 중심부 국가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희생하여 획득된 경쟁력은 중심부 국가들의 경상수지 흑자와 주변부 국가의 적자로 귀결되며, 주변부 국가는 중심부 국가로부터 자본을 차입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주변부 국가의 부채는 증가한다. 이러한 격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2007년 금융위기 전까지는 거시경제적으로는 물가가 안정되고, 유럽 각국의 국채수익률이 수렴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표3) 유로화 도입을 통한 리스크가 감소 효과가 나타났고, 역내 교역이 크게 증가하여 독일이 세계 2위의 수출국으로 부상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국가채무 역시 일본이나 미국의 그것을 하회하는 수준에서 관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7년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각국 정부는 재정지출을 증가시킬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이미 대외 불균형과 중심과의 격차가 확대되어가던 유럽 주변부 국가들의 재정건전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그리스가 숨겨온 재정적자 있음을 인정하면서 남유럽 국가의 재정 안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는 가운데 유럽 각국과 대형금융기관들의 신용등급이 줄줄이 강등되는 도미노현상이 벌어졌다. 2011년 12월 현재 유로존에서 최상위 트리플A(AAA) 국가는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핀란드, 네덜란드 등 6개국 뿐이다. EU는 재정위기 국가에 대한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가혹한 구조조정 프로그램 시행을 요구했고, 이미 졸라맨 허리띠를 더 졸라매는 ‘긴축’은 ‘99%’ 서민들에게 고통을 안겼으며, 국가시스템의 변화까지 초래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추가긴축 재정안을 둘러싼 정치적 혼란으로 정부가 무너지고 과도내각이 들어섰으며, 스페인에서는 실업률이 20%선(청년실업 약 45%)을 넘어서면서, 이른바 ‘분노한 사람들’의 대규모 시위가 수도 마드리드를 넘어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유럽은 청년세대가 부모세대보다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상황을 맞게 됐고, 프랑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비유로존 국가인 영국에서도 은퇴연령과 연금전액수령 연령이 늦춰지면서, 유럽인들은 더 오래 일하고, 더 적은 연금과 복지혜택을 받는 새로운 변화에 직면하게 됐다. [표 3] 독일 국채 기준 주요국채 스프레드 문제는 주변부 국가의 채무불이행은 곧바로 중심부 은행의 건전성을 위협하고, 나아가 또 다른 세계 경제 위기의 단초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변부 국가의 채무위기 극복은 중심부 국가에게도 사활적 이해가 걸린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ECB는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주변부 국가 부채를 유통시장에서 구매하였고, 중심부 국가들은 공동 지급보증을 통해 위기국가들이 공개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의 결과 2010년 4/4분기와 2011년 1/4분기 그리스의 GDP 성장률 저하와 실업률 증가는 1930년대 대불황 시기 미국의 그것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다시 부채 부담을 증폭시키고 건전성 위험을 심화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해법은 독일의 지배계급의 이해에는 정확히 부합한다. 은행위기를 회피함으로써 유로의 세계통화로서의 지위를 유지시키고, 주변부 국가의 디폴트에 따른 비용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행에는 유동성을 공급하고, 주변부 국가에는 긴축재정을 압박한다. 이러한 전략의 성공 가능성 역시 낮기는 하지만, 만약 성공하기만 한다면 독일은 명실상부한 유럽 자본주의의 패자로 등극하며, 제2세계 화폐에 대한 통제권을 쥐게 된다. 유로화 논쟁: 유로존을 유지해야 하는가 탈퇴(혹은 해체)해야 하는가 유럽의 좌파 사이에서 일단 광의의 합의가 있는 해법은 다음과 같다. 1) 긴축재정 반대 2) 누진세/부유세 도입과 자본 통제 3) 은행의 국유화/사회와와 민주적 통제 4) 디폴트 후 민주적 통제 아래 부채 감사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구체적인 디폴트의 방식과 디폴트 이후의 전략에 있어서는 여러 상이한 입장이 제출되고 있다. 일단 좌파적 입장에서 재정긴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해법인 것은 당연하다. 재정긴축을 통해 노릴 수 있는 효과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긴축재정을 통해 채무 이행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얻어 자금조달 비용을 낮추어 재정위기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정긴축은 오히려 경기침체와 조세감소를 수반하여 지급여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또 하나의 효과는 인위적으로 디플레이션을 일으켜 임금을 억제함으로써 경쟁력을 회복하는 것인데, 이는 위기 극복 비용을 노동자 민중에게로 전가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유로존 해체? 부채위기에 대한 유럽 좌파 진영의 대응을 구분하기 위해 먼저 유로존 유지와 해체라는 양 스펙트럼으로 거칠게 나누어 보자. 먼저 유로존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주장을 살펴보면, 이러한 주장은 유럽좌파당과 유럽 전반에 걸쳐 널리 퍼져 있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그 적극성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유로존 유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입장은 유로화의 위기가 소위 “사회적” 유럽의 위기를 의미하고, 유로존의 해체는 반동적인 국민국가로의 퇴행이라는 점 때문에 유로존을 유지시키는 것이 노동권과 복지를 지키는 길이라는 입장이다. 또 다른 흐름은 유로존이라는 구상 자체가 민족주의와 고립주의적 위험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유로존 유지를 정치적 목표로서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이미 유럽의 인민이 공동체 구조 안에 깊숙이 포섭되었기 때문에 이의 붕괴 대신 유럽을 근본적으로 (아래로부터) 재설계할 것을 주장한다. 전자의 입장을 유럽좌파당 내의 전반적 흐름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입장은 제4인터내셔널의 후송(Michel Husson)이나 구 LCR의 사마리(Catherine Samary), 또 다른 IS계열 Socialist Resistance지의 오나란(Ozelam Onaran) 등이 대표한다. 후자의 입장에서는 ‘위기’의 원인을 유로에 내재된 모순이 아니라 “EU의 약한 고리에서 작동하는 투기적 금융”에서 찾는다. 이들의 주장은 대규모 디폴트 선언을 통해 범유럽적인 중심과 주변부 노동자들의 은행과 EU기구들에 대항한 투쟁을 촉발하고, 은행 사회화를 통해 ECB가 실질적으로 유럽의 중앙은행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탈바꿈시키자는 것이다. 부채에 관한 입장에서도 전자는 “채권자 주도”의 부채탕감(헤어컷)을 주장하는데, 이는 채권자(중심부 은행, 중심부 국가)의 합의를 통한 부채 탕감이다. 이 경우 충분한 규모의 부채가 탕감될 수 있을 지가 미지수이다. 오나란 등은 “아래로부터의 디폴트”를 주장하는데 이는 “채무자 주도”의 일방적인 디폴트 선언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 경우 디폴트 비용을 중심부 국가, 그 중에서도 중심부 국가의 은행들이 부담하게 될 수 밖에 없는데, 은행이 여전히 국민국가적 경계 속에서 활동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중심부 은행의 부담은 중심부 국가 정부와 나아가 그 국민들이 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연 주변부 국가의 일방적인 디폴트 이후 유로존의 해체는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때 기존의 유럽공동체의 구조가 유지될 수 있을 지는 낙관할 수 없다. 유럽적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되는 기술적 경로는 ECB의 대출(수량 완화)과 유로본드 발행으로 정리할 수 있다. 수량완화와 관련된 근본적인 논쟁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ECB의 주변부 국가의 부채 인수를 놓고 보자면, 1) ECB가 채무를 평가절하된 가격으로 인수하는 경우, 주변부 은행의 자본을 확충해야 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으며, 또 이를 액면가로 인수한다고 하면 그 위험부담은 ECB, 따라서 공적인 부담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는 중심부 국가 노동자들의 세금으로 충당될 수 밖에 없다. 유로본드의 경우에도 이러한 논리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유로본드는 개별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채권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재정통합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 전체가 위기에 빠지는 경우를 상상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유로본드가 발행되면 원칙적으로는 유럽 각국은 1차 시장에서 국채를 발행하지 못하거나, 만기연장 차환(롤오버, 만기 때 현금지급 대신 새로운 채권을 발행해 만기를 연장하는 것)을 하지 못해 재정위기에 빠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또 국채금리를 낮추어 재정조달 비용이 감소한다. 이 경우 해당 국가의 국채 스프레드(기준채권, 미연준국채나 독일 국채와 해당 국가의 국채와의 금리 차이, 스프레드가 높을수록 국채의 발행비용에 대한 부담이 높아진다)는 그리스나 이탈리아, 스페인과 같은 국가의 위험도를 반영하기 때문에 독일이 단독으로 국채를 발행할 경우에 비해서 높아 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독일이나 프랑스는 이를 극렬히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며, 더욱이 유로화 사용국의 공공채무에 대해 EU의 재정지원을 금하고 있는 조약에도 수정이 불가피하나, 각국의 국민투표시 통과될 지는 미지수이다. 또 ECB의 부채 인수는 세계 화폐로서의 유로화의 위상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기 때문에, 독일이나 프랑스 지배계급을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유로존 유지를 전제로 한 입장과는 반대로 유럽 좌파당의 코스타스 라파비사스(Costas Lapavitsas)는 부채 위기에 대한 “급진적” 해결책으로 유럽 공동체의 해체를 주장한다. 유로화를 세계통화로 만들려는 시도는 중심부나 주변부 국가 노동자에게 모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으며, 노동조건의 하락만을 불러오기 때문에 중심부 국가 노동자들은 통화 공동체로부터 부과되는 제약을 투쟁을 통해 거부해야 할 뿐 아니라, 금융통제를 통해 은행을 국유화하고 채무 이행을 위한 세금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독일이 수출중심 성장전략을 버리고 내수 중심의 정책을 취할 필요가 있는데, 따라서 통화정책 결정권한을 ECB로부터 되찾아 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변부 국가에서는 채무자 주도의 디폴트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때문에 금융시장 접근권 상실, 스프레드 급상승 등의 어려움을 겪겠지만, 노동자 주도의 부채감사 위원회를 설치하여 부채를 분류하여 이를 처리하고, 디폴트 선언에 따른 필연적인 유로존 탈퇴 이후 통화제도의 변화에 따른 충격이 은행위기로 번져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은행 사회화와 민주적 통제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새로운 화폐 도입에 따른 평가절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나 이를 통해 생산부문이 활성화 되고 수출 증대를 도모할 수 있으며, 수입물가 상승으로 인한 소득하락은 부의 재분배를 위한 누진세/부유세 도입을 요구함으로써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먼저 평가절하를 통해 과연 급속한 경쟁력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궁극적으로는 생산성에 종속되는 대외경쟁력을 평가절하만으로 역전시키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반론은 유로화 탈퇴에 이은 평가절하는 구매력 하락으로 이어져 실질임금이 저하되는 효과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가절하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변부 국가의 평가절하에 따라 얻어지는 일시적인 경쟁우위는 뒤이은 중심부 국가 통화의 평가절하로 상쇄된다는 것이다. 또 유로존 탈퇴를 전후로 한 은행의 대량인출 사태(뱅크런)의 위험도 있다. 2001년 말을 전후해 발생한 아르헨티나 외환위기가 역사적 사례인데, 당시 아르헨티나는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 속에 미 달러화의 1:1 고정환율 제도의 붕괴 가능성이 부각되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금리를 인상하고 재정긴축을 단행하는 등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기존 페소화 예금을 달러화 예금으로 바꾸려는 행렬이 줄을 이으면서 결국 외환위기를 맞이했다. 유로존 탈퇴에 대한 이 같은 현실적인 비판 이외에 후송(Husson)은 유로화를 둘러싼 논쟁 자체가 진정한 쟁점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오나란 등과 같이 후송은 현재 유로화의 폐기를 주장하는 라파비사스와 사피르(Jacques Sapir) 등이 전제하고 있는 (자국통화로의 복귀에 이은) 평가절하를 통한 경쟁력 회복은 재분배, 임금인상, 사회시스템의 개조, 자본통제, 은행에 대한 사회적 통제 등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며, 유로화를 탈퇴하는 동시에 투기의 위험에 노출되고, 유로화 탈퇴가 노동에 호의적인 측면으로의 역관계 전환을 보장하는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후송은 오히려 유로존 탈퇴는 은행과 사회의 민주적 통제 및 재구조화를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 중 하나일 뿐이며, 그 자체로 적극적인 좌파의 전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수량완화 정책 프랑스 공산당, 체코 사민당, 독일 좌파당 등이 소속된 유럽 좌파당의 의장단(presidium)은 2011년 11월 22일 공동성명을 통해 긴축재정정책 철회, 부채 탕감 및 남은 부분의 ECB로의 이전, ECB 또는 특별기구를 통한 유동성 공급을 주문하였다. 한편 2011년 12월 3년 만기 LTRO의 무제한 공급이 시작되면서 인플레이션을 둘러싼 쟁점이 부각되었다. 인플레이션은 국가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1960년대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대규모 재정적자가 발생했지만, 미국 정부의 순 부채는 오히려 감소했다. 이는 바로 인플레이션 때문인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국가의 조세수입은 증가하며, 또 기존 채권의 가치는 큰 폭으로 절하되어 국가부채의 부담이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재정긴축 정책 등의 시행을 조건으로 IMF, EU, ECB가 그리스 등에 제공한 구제금융에서 보여지듯 유동성 공급을 요구하는 것 자체는 결코 민중들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또 수량완화에 이은 인플레이션은 거의 전적으로 임금에 수입을 의존하는 대다수 민중들의 실질 임금을 저하시킬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위기의 해법이 가지는 딜레마 2011년 한 해 동안 EU 회원국들 중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곳은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핀란드, 덴마크, 슬로비니아 등 6개국이다. 추가 긴축재정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를 제안했다가 물러난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정권과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정권까지 합치면 8개국이다. 과도정부가 들어선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도 조기총선 결과 야당이 승리할 경우, 소위 PIIGS에서 모두 정권교체가 이뤄지게 된다. 이미 민중들은 기존의 세력과 체제가 대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의 극우정단인 대중정교회(LAOS)가 그리스 내각 구성에 참여한 것을 보면, 이러한 민중들의 움직임이 유럽적 차원의 연대가 아니라 반동적 민족주의, 퇴행적 고립주의로 귀결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하겠다.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입장들이 진정한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자본통제, 재분배, 산업정책, 국가 재구조화와 같은 광범위한 경제/사회적 프로그램 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거나, 위기 극복의 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시행을 위해서는 중심부와 주변부 국가 민중들의 연대, 현재의 계급 역관계를 뒤바꿀 아래로부터의 흐름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유럽에서 좌파들의 위기 해법에 대한 논의만이 아니라, 정치적 운동의 동향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북한 사회는 변화할 것인가? 혹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권력승계 과정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조건’에서의 권력승계라고 말한다. 후계자 김정은이 공식적인 승계과정에 돌입한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고(후계자 수업은 길게 잡아도 3년 정도로 볼 수 있다), 권력의 중추로 떠오른 김정은-장성택-김경희는 결코 이상적인 ‘드림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북한은 어떤 변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인가? 그 전망은 여전히 추측에 지나지 않겠지만, 북한의 객관적 현실을 파악하면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에서 후계자의 현재 지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당내 직함은 당 총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장 겸 정치국원, 당 비서국 내 조직담당 비서 겸 조직지도부 부장이었다. 한마디로 김정일 위원장은 당의 모든 요직을 겸직하였다. 그에 따라 당의 의사결정 김정일 위원장에게 고도로 집중되었고, 당 규약을 따르지 않는 편의적이고 변칙적인 당 운영이 일상화되었다. [%=사진1%] 조선노동당 중앙조직의 조직구조는 상식적으로 볼 때도 매우 변칙적이다.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역할은 제한적이고 중앙위원회 산하 비서국 총비서가 당수 역할을 한다. 중앙군사위원회의 위상은 중앙위원회와 동급이다. (중앙위원회 산하의 군사위원회가 당 대회 승인 없이 중앙군사위원회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선군정치’가 현실 권력구조에 반영된 형태다.) 당 구조가 변칙적이기 때문에 당 내 권한 충돌이 발생할 여지가 큰 게 사실이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모든 핵심 요직을 장악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2010년 개최된 당 대표자회의에서는 당 규약을 개정해서 총비서가 중앙군사위원장을 겸직하도록 규정해서 권한 충돌을 예방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980년 이후로 30년 간 당 대회가 개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이 사실상 마비 상태에 있고 김정일 위원장이 당의 의사결정을 독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후계자 김정은이 당에서 지도권을 확립한다는 것은 당을 정상화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달리 말하면, 김정일 위원장이 조직지도부 활동을 통해 유일지도체제를 수립하면서 당권을 장악했던 과정에 비하면, 김정은은 당을 사실상 ‘재건’해야 한다는 더욱 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게다가 김정은이 현재 당 내에서 공식적으로 맡은 직함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뿐이다. (조직지도부 역할을 수행한다는 보도도 있기는 하다.) 따라서 김정은이 당 내에서 맡은 역할이나 지금까지 수행한 임무도 아직도 지극히 제한적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김정은이 과거 김정일 위원장이 당에서 맡은 모든 역할을 빠른 시일 내에 실질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권력 배분, 곧 ‘집단지도체제’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당의 운영이 재활성화되고 공정한 규칙이 수립되어야 하며, 이는 당의 실질적 체질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할지는 현재로서 예상하기 어렵다. 국가 체계 내에서 후계자의 현재 지위 김정은은 국가 체계 내에서는 어떤 공식 직함도 맡지 않고 있다. (국방위원회 지도원으로 활동한다는 보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국방위원회 위원은 아니다.) 올해 2011년 4월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은이 국방위원회의 공식직함(부위원장)을 맡지 않겠냐는 전망이 있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김정은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지도 아직 불확실하다. [%=사진2%] [%=박스1%] 북한 헌법 상 최고인민회의가 최고주권기관이다. 최고인민회의는 ‘최고영도자’인 국방위원장의 선출권과 소환권을 지닌다. (국방위원장의 임기는 5년이고 연임에 관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특정인이 국방위원장 직을 언제까지라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최고권력기관은 국방위원장과 그를 보좌하는 국방위원회다. 이는 김일석 주석 생존 당시의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국방위원장은 국가의 전반 사업을 지도하며, 조약의 비준, 폐기권을 행사하며, 국가의 비상사태, 전시상태, 동원령을 선포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 생존 시 국방위원장이라는 직위는 국가주석의 지도를 받는 중앙인민위원회 산하의 위원회 중 하나였다. 김정일은 1990년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1993년 위원장에 취임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 후 국가주석은 공석이 되었고, 국방위원장이 사실상 국가주석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다가 2009년에 와서야 헌법을 개정해서 국방위원장의 역할과 임무를 명문화했다. 과거 권력승계 과정을 보면, 김정일 위원장조차도 국가주석직을 곧바로 승계하지 못했고,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및 상임위원장)와 내각(및 총리)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 헌법개정을 통해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권한 중 일부가 국방위원장에게 이관되었다.) 따라서 현재 후계자 김정은이 국방위원장 직을 곧바로 승계할지는 불확실하다. 김정은이 어떤 경로를 통해 국가체계 내에서 성장할지 단언할 수 없으나 상당 기간 동안 권력의 거대한 공백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아마도 김정일의 권력승계 과정에서의 권한 분산보다 더욱 확대된 형태의 권한 분산이 불가피해 보인다. 미국과 중국의 대북정책 향후 북한 전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중국과 미국의 대북정책일 것이다. 북한 경제의 전반적인 대외의존도를 고려할 때 중국과 미국이 새로운 북한 체제에 향후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는 북한의 생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한 군사적 대책을 수립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의 태도는 ‘주시하고, 기다리고, 준비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한다면 그 출발점은 데프콘, 즉 전투준비태세의 격상이다. 한국전쟁 정전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항시적으로 테프콘 4가 발령되어 있는데 이는 ‘적과 대립하지만 군사적 행동 가능성이 낮은 상태’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로 데프콘 3으로 격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데프콘 3이 발령된다면 작전권이 한국군에서 한미연합사령부로 넘어간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미국은 데프콘 격상과 같은 방식으로 즉각 북한의 탈안정화를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으로 인해 대북정책 전반을 재검토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면, 미국은 누구를 접촉선으로 해야 할지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김정은을 중심축에 두고 접촉한다면 군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김정은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고, 역으로 다른 자를 중심축에 둔다면 김정은이 무력화될 수도 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누가 자신의 대화 파트너로 적절한지 정보를 획득해야 하며, 나아가 그 파트너의 기본 성향이 어떤지를 파악해야 한다. 미국은 바로 최근까지 식량지원과 핵 협상 재개 문제를 두고 북한과 접촉을 했지만, 이제 새로운 정권을 전반적으로 다시 파악하기 위한 시간을 설정할 것이다. 따라서 북미 대화는 얼마간 접촉이 유지되더라도 상당 기간 교착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현재 중국이 권력승계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는 것은 미국의 전략에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반확산을 핵심적 전략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의 ‘나쁜 행위’에 대한 제재가 필요한데, 지금까지 중국은 미국의 요구를 순순히 수용한 적이 없다. 미국은 시진핑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차기 지도부가 미국과 함께 북한 비핵화를 압박하기를 원하지만 중국이 종래의 방침을 순식간에 바꿀 것 같지는 않다. 북한이 핵보유 수준을 높이면서 중국(및 러시아)과 경제관계를 발전시킨다면 미국으로서는 북한을 압박하는 지렛대를 잃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북한의 변화 가능성은? 현재 북한 조선노동당의 상황을 볼 때 과거와 같은 유일지도체제가 실질적으로 수립되고 기능하리라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김정일 위원장의 권력승계 과정이 잠재적인 경쟁 집단, 개인을 제거하고 ‘유일’ 지도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이었다면, 현재는 후계자 홀로 당 구조와 운영을 정상화할 수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체계 내에서도 후계자가 국방위원장의 모든 권한을 곧바로 승계 받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이미 김정일 국방위원장 하에서도 최고인민회의와 내각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권력분점이 불가피했다면, 현재 조건에서는 그러한 필요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과거 1953년 스탈린의 사망 후 그와 같은 카리스마적 권력자를 대체하는 방법은 집단지도체제였다. 즉 권력분점의 제도화였다. 하지만 집단지도체제 내부에서도 권력쟁투는 늘 발생할 수 있다. (스탈린 사망 직후 가장 유력한 권력자였던 KGB 베리야가 전격 체포되었고, 나머지 스탈린 측근들이 권력 배분을 통해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집단지도체제 내부에서 권력 쟁투가 발생했다. 흐루시초프의 개혁 노선의 실패 후 또 다시 ‘궁정쿠데타’ 형식으로 브레즈네프가 권력을 장악했다.) 따라서 당분간은 북한 정권 담당자들은 급격한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막기 위한 안정화를 추구할 것이고 권력배분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지도체제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이는 순전한 권력 다툼이라기보다는 정책 갈등을 계기로 비화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권력분점 속에서 정치적, 정책적 갈등의 표면화는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정치엘리트들은 실질적 의미에서 대중동원을 철저히 배제하는 통치방식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엘리트 간 권력쟁투가 곧 체제 위기로 치닫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 북한에서 수령제가 확립되는 과정을 보면 수령의 직접적인 현지 지도를 매개로 당과 기업소에서 중간관리자의 관료주의, 보수주의를 공격하는 일종의 ‘대중동원’이 이뤄졌다. 과거 중국에서는 모택동과 유소기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건설 노선의 대립이 문화혁명과 대중투쟁을 매개로 내전의 위기로까지 발전된 적이 있다. 그러나 현재 북한은 당 내부의 문제를 진정한 의미의 대중동원, 대중운동의 형태로 제기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배제하고 있다.) 또한 중국이 북한의 권력승계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면 지도부 내부의 첨예한 갈등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