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활동가에 대한 제주도 입국금지를 규탄한다! 오늘 제주도에 가려던 일본인 평화활동가 한 명이 제주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되었다고 한다. 한국정부에서 “당신은 제주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조차 말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정부는 강정마을을 방문하는 걸로 추측되는 모든 외국인들을 입국금지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출입국 통제권한을 활용해 마을 방문조차 가로막는 출입국 상의 ‘공안정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올해 1월에 '미.일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반대하는 아시아 공동행동(AWC)' 회의에 참가하려던 일본 활동가에 대한 입국금지, 지난해 8월 일본 평화활동가 2명에 대한 제주 입국금지, 3월 15일 미국의 평화재향군인회 활동가 2명에 대한 제주 입국금지 조치가 있었다. 심지어 지난 3월 28일에는 독립기념관을 방문하려던 일본인 모녀가 지난해 강정마을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입국을 금지 당했다고 한다. 또 강정마을에서 시위를 벌이던 영국인 평화활동가 엔지 젤터는 출국명령을 받았고, 프랑스인 뱅자맹 모네는 강제출국 되기도 했다. 수 년 간 아무 문제없이 한국을 드나들던 외국인들이 강정을 방문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입국을 금지당하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부는 출입국관리법 상의 '대한민국의 이익이나 공공의 안전을 해칠 수 있는 자는 입국을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규정을 내세우지만, 이는 내용도 광범위하고 자의적 적용을 남발할 수 있는 조항이어서 대표적인 출입국 독소조항으로 꼽힌다. 악법을 근거로 무차별적인 입국금지 칼날을 휘두르고 있는 형국이다. 강정의 평화와 제주의 평화, 동북아의 평화를 위해 구럼비를 지키고 해군기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는 것이 오히려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 아닌가? 여전히 정부는 정권의 안위나 이익으로만 공익을 판단한단 말인가. 정부는 강정마을을 방문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무조건 외국인들을 입국 금지하는 저열한 작태를 당장 멈춰야 한다.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국제적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2012. 3. 30 사회진보연대
탈핵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입국거부! 핵없는 사회를 위한 열망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 반핵아시아포럼 사토 다이스케 사무국장 입국거부에 대한 긴급성명서- 오늘(18일) 반핵아시아포럼 사토 다이스케 사무국장이 입국거부되는 일이 벌어졌다. 사토 다이스케 사무국장은 19일부터 열리는 반핵아시아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반핵아시아포럼은 아시아각국 반핵운동가들의 연대 프로그램으로 올해는 19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삼척, 영덕, 부산에서 진행될 예정으로 30여명의 아시아반핵운동가들이 참여할 예정이다. 관계당국은 사토 다이스케 사무국장의 입국거부 이유 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채, 즉시 자국(일본)으로 돌아갈 것으로 명령하고 있는 상태이며, 사토 다이스케 사무국장은 현재 인천 공항에 억류되어 있는 상태이다. 오늘의 사태는 핵안보정상회의를 앞두고 핵발전소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이를 잠재우고자하는 정부의 탄압이다. 그간 사토 다이스케 사무국장은 수차례 한국을 드나들었으며, 심지어 같은 이명박 대통령 시절인 2010년 G20 정상회의 당시에도 국내를 방문, 한일반핵포럼을 공동 개최한 바 있다. 그는 적극적인 반핵운동가이기는 하지만, 정부가 우려하는 것 같은 테러리스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정부에 의해 고통받는 각국 지역주민들과 적극적으로 함께 해 온 이이다. 우리는 정부의 입국거부사태에 강력히 항의한다. 설사 정부가 반핵아시아포럼 사무국장의 입국을 거부하더라도 전국적인 반핵흐름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예정대로 반핵아시아포럼은 열릴 것이며, 오히려 현재와 같은 정부의 행태에 대해 더욱 강력히 항의하는 기회가 될 것임을 정부는 알아야할 것이다. 2012.3.18. 핵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핵안보정상회의 대항행동
탈핵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입국거부! 핵없는 사회를 위한 열망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 반핵아시아포럼 사토 다이스케 사무국장 입국거부에 대한 긴급성명서-
2012.3.18. 핵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핵안보정상회의 대항행동
서울 핵안보정상회의는 핵없는 세상과는 반대로 가는 길 오는 3월 26-27일, 서울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린다. 핵안보 정상회의는 ‘핵 없는 세상’을 주창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제안으로 2010년 4월 워싱턴에서 처음 열렸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회의가 서울에서 열리는 것이다. 핵안보정상회의에는 약 40개국 정상들과 국제연합(UN), 유럽연합(EU), 국제원자력기구(IAEA), 국제형사경찰기구(INTERPOL) 대표가 참석할 예정이다. 국격을 높일 기회라며 선전에 선전을 반복했던 G20 보다도 훨씬 많은 국가 정상들이 한국을 방문한다. 실로, 단군 이래 최대 정상회의라 할만하다. 핵안보정상회의는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막아야 하는 것으로 ‘핵테러’를 꼽았다. ‘핵안보’란 한마디로 ‘핵 테러로부터의 안전’을 의미한다. 물론 핵테러를 예방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핵의 위험성을 검토함에 있어 ‘핵테러’는 전혀 핵심이 아니다. 핵테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지만, 핵무기는 1945년 일본에 실제 투하되었다. 또한 핵발전소 사고는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에서 차례로 일어나 인류에게 핵재앙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알렸다. 핵은 그 존재 자체가 위험하다. 핵의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지키려면 핵을 없애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핵무기 감축과 핵발전소 가동중단이다. 하지만 핵안보정상회의는 이와는 반대로 가고 있다. 핵무기 감축 논의는 없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핵으로부터의 안전을 이야기할 때 기존에는 핵군축과 비확산이 주된 의제였다. 핵군축은 이미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이 핵무기를 줄여나가는 것을, 비확산은 더 이상 핵무기를 보유하는 국가가 늘어나지 않게 막는 것이다. 지금까지 핵물질이나 핵무기, 핵기술의 통제는 주로 비확산 체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비확산 체제는 핵비확산조약(NPT)으로 대표되는데, NPT는 5개 핵무기 보유국(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 외의 국가들의 핵무기 개발 방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조약 하에서 비핵보유국은 자체 핵개발을 할 수 없고, 핵시설에 대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의무적으로 받아야한다. 하지만 핵무기 보유국들의 핵군축 노력은 미미한 상황에서, 안보위협을 느끼는 나라들은 ‘핵의 평화적 이용’을 근거로 핵발전을 확대하고, 뒤로는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렸다. 북한은 NPT를 탈퇴하고 핵실험을 지속하고 있고, 애초 NPT에 가입하지 않은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은 NPT가 인정하진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핵무기 보유국이다. 핵무기는 2011년 현재 최대 20,500기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오바마는 2010년 ‘핵태세 검토 보고서’(NPR)를 발표하여 러시아와 전략무기 감축을 약속하고 미국의 전략에서 핵무기의 역할을 축소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NPR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장거리 폭격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등 ‘3원 전략 핵전력’은 유지한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의 전력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핵무기는 전혀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오바마는 핵무기 생산 인프라 현대화에 20억 달러의 예산을 증액했고, 새로운 크루즈 핵 미사일 개발에 8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했다.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공식 홈페이지는 핵안보정상회의가 “핵안보에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핵군축 및 비확산 문제는 논의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핵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들이 핵무기를 줄이는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할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핵무기 감축을 논의조차 하지 않는 회의는 ‘핵 없는 세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핵 테러 방지를 위해 호전적 군사행동 허용 NPT보다 강력하게 핵무기와 핵물질을 통제하는 대표적인 방법이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이다. 이 협약은 해상이나 상공에서 대량살상무기를 싣고 있다고 의심되는 선박과 항공기를 세워서 검색, 나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이 때 군사력 사용을 하게 된다. 국제법에는 공해상에서 자유롭게 운항할 수 있는 권리와, 다른 나라의 영해라 할지라도 그 나라에 해를 끼치거나 해적질을 하지 않은 선박은 자유롭게 통항하도록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PSI는 의심만으로 배를 세우거나 승선하고 나포할 수 있으며, 무력까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국제법 위반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은 이명박 정부 들어 PSI에 정식으로 참여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는 옵서버 자격을 유지했는데,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차관 시절인 2006년 말 국회에 출석해, “한반도 주변에서 PSI가 시행될 경우 북한과의 충돌이 우려되는 등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낳을 것” 이라며 PSI에 정식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정부도 인정했듯이 PSI같은 호전적인 정책은 군사적 긴장을 높여 평화를 위협한다. PSI자체가 핵안보정상회의의 의제로 선정되어 있거나, 핵안보정상회의 공동성명에 담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핵안보정상회의는 우회적인 방식으로 PSI의 제도화를 추구하고 있다. 워싱턴 회의에서 발표한 작업계획 문서를 보면, ‘비국가행위자의 대량살상무기, 그 운반체 및 특히 핵물질과 연관된 관련 물질 취득 방지에 대한 안보리결의 1540호의 전면적인 이행 필요성에 주목’한다고 밝히고 있다. 안보리결의 1540호는 UN의 모든 회원국이 비확산과 수출통제 입법과 집행을 의무화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아무런 국제법적 근거가 없는 PSI를 제도화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핵안보정상회의는 이러한 안보리결의안에 대한 강조를 통해서 ‘핵 없는 세상’이 아니라 ‘핵 테러 없는 세상’을 위해 세계 각국의 협조와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며, 이는 PSI로 대표되는 적극적 반확산 정책의 국제적 수용과 확산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호전적인 반확산 정책과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적극적 편입은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는 커다란 원인이 되고 있다. 핵발전 정책을 확대하려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지난 3월 11일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1년이 되는 날이었다. 후쿠시마 사고는 우리에게 핵발전소의 위험성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동안 핵 산업계와 정부가 주장하던 핵발전소 안전 신화는 냉각장치 고장이라는 단순한 사고로 산산조각이 났다. 사고의 피해는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여러 대에 걸쳐 지속될 것이다. 핵발전소는 한번 사고가 나면 돌이킬 수 없을 뿐 아니라, 핵무기로도 바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인도와 이스라엘은 산업용 핵발전 기술을 전용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 가장 기본적인 핵무기 또는 핵폭발 장치는 25kg정도의 고농축우라늄(HEU)이나 8kg정도의 플루토늄이 있으면 만들 수 있는데, 현재 세계에는 약 1,600톤의 고농축 우라늄과 약 500톤의 플루토늄이 있다. 이는 약 126,500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양인데, 이러한 핵물질은 핵발전으로 인해 계속 늘어나고 있다. 후쿠시마 사고로 전세계에서 탈핵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 국가들은 탈핵을 선언하며 핵발전소 가동을 차례로 중단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사고 전 54개의 핵발전소가 가동 중이었지만, 안전점검을 위해 차례로 가동이 중단되어 2012년 2월 현재 3기만이 운전 중이며 5월에는 모든 핵발전소가 멈춘다. 일본의 반핵운동진영에서는 핵발전소의 재가동을 막기 위한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의는 ‘원자력 및 원전산업에 대한 국내외적 신뢰 회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위축된 원자력에 대한 신뢰를 회복시킴으로써, 국내외적으로 원자력 시장의 지속적이고 안전한 발전을 도모’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후쿠시마와 같은 큰 사고는 아니어도, 핵발전소 사고는 국내에서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최근에도 부산에 있는 핵발전소인 고리 1호기에서 전원이 끊기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2월 9일 12분간 전원이 끊겼는데도 비상발전기도 작동하지 않았고, 책임자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3월 13일에 밝혀졌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데도 ‘후쿠시마 사고로 핵발전을 축소하는 것은 인류 역사의 퇴보’라며 핵발전 확대 의지를 분명히 한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핵안보정상회의를 핵발전확대와 핵발전소 수출 확대를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우리는 원한다, 핵안보가 아니라 핵 없는 세상을! 핵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핵 테러 때문이 아니라 이미 세계에 너무 많은 핵무기가 존재하고, 후쿠시마 사고에서 알 수 있듯 핵발전소 자체가 우리의 삶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핵 없는 세상’은 정말로 ‘핵이 없어야’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안보정상회의는 ‘핵 테러 방지’를 주장하며 핵무기 보유국들의 패권을 유지하고 북한 같은 나라를 위협하며 군사적 긴장을 높여 인류의 평화적 생존을 위협할 뿐이다. 또한 ‘핵의 평화적 이용’이 가능하다는 거짓 선전으로 핵발전을 다시금 확대하고자 한다. 핵안보는 부족하지만 핵없는 세상으로 가는 중간 단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 핵분열 물질을 생산하지 않고, 핵무기 개발을 위해 핵실험을 하지 않고, 핵보유국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핵무기를 하루빨리 폐기하는 것이 핵무기와 핵 테러의 확산을 차단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리고 후쿠시마 사고로 핵발전의 위험이 전 세계에 폭로된 지금, 핵발전을 축소하고 탈핵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다. 세계평화를 바라는 민중들은 오히려 평화를 위협하는 ‘핵안보’가 아니라 핵무기도 핵발전도 없는 진짜 ‘핵 없는 세상’을 원한다. 오는 3월 25일 핵안보정상회의 규탄대회에서 함께 외치자. 우리는 원한다, 핵안보가 아니라 핵 없는 세상을!
2012년 2월 1일 밤 9시 반 비행기로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이주노조, MTU) 미셸 카투이라 위원장이 본국인 필리핀으로 귀국했습니다. 2006년 2월에 입국한 지 6년 만입니다. 미셸 카투이라 위원장은 필리핀에서 나고 자란 노동자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서 돈을 벌기 위해 전자제품 엔지니어, 건설노동자, 집 수리공, 학교 직원, 상담교사, 비서, 주유원, 쇼핑몰 점원, 가정부, 베이비시터, 유리창닦이 등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노조활동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가진 성소수자로서, 쉽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한국에 와서는 처음에 울산에 있는 어느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 첫 공장에서 같이 일하던 필리핀 여성노동자가 한국인 동료 직원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할 뻔한 사건을 겪습니다. 그가 술먹고 밤에 기숙사에 와서 강제로 성관계를 요구를 하는 것을 겨우 뿌리치고 그녀는 미셸 동지와 함께 도망을 쳤습니다. 나중에 신고를 했지만 그 직원은 별다른 처벌 없이 겨우 2주 정직만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러한 차별과 폭력적인 행위는 다른 공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화성의 전자제품 조립 공장에서는 휴일도 주지 않아 한 달에 한 번 꼴로 쉬었다고 합니다. 쉬지 못하는 달도 있었습니다. 임신한 여성을 해고해서 본국으로 돌려보내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 했습니다. 미셸 동지는 혼자서 이러한 노동법 위반을 노동부에 고발해서 회사 측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에 동료의 해고 문제에 대응하다가 이주노조를 알게 되었고 노동조합 활동의 취지에 공감해서 노조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노조에 가입하고 나서 화성 지역에서 필리핀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엄브렐라’(Umbrella)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여성문제, 성차별 문제 등을 논의하고 교육하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던 중 이주노조 4대 위원장인 토르너 림부 위원장과 압두스 소부르 위원장이 2008년 5월 2일에 동시다발로 출입국에 의해 표적단속 되어 강제추방을 당했습니다. 이주노조에서는 후임 지도부를 선출하지 못하고 비상대책위원회 체계로 운영되었는데, 2009년에 미셸 동지에게 위원장 제안이 되었습니다. 미셸 동지는 이를 받아들였고 2009년 7월 5일에 임시총회에서 5대 위원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아직도 그 순간이 생생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최초의 성소수자 위원장을 뽑았습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가슴 뭉클 했던지요. 위원장으로 당선된 이후 미셸 동지는 이주노동자, 특히 고용허가제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주력하는 한편, 각종 인터뷰, 기자회견, 집회를 통해 이주노동자를 차별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고발하고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하여 행동에 나설 것을 호소해 왔습니다. 위원장이 되어서도 공장에서 계속 일을 해야 했기에 낮에는 일을 하고 밤늦게 사무실에 와서 노조 일을 하는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2009년에 일했던 서울의 봉제공장도 역시 휴게시간 위반, 수당 미지급 등 노동법 위반사항이 많았습니다. 초장시간 노동과 저임금, 열악한 노동조건은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사업장에서도 미셸 동지는 노동부에 진정을 내서 노동조건을 개선하도록 유도했습니다. 2010년에는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검찰경찰출입국관리소에 의한 정부합동 강제단속 추방이 강화되었습니다. 이주노동자를 잠재적 범죄자, 테러리스트로 보면서 정부는 단속을 강화했고 이주노조는 7월에 미셸 위원장 주도로 ‘G20을 빌미로 한 이주노동자 단속추방에 대한 항의 농성’을 명동 향린교회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농성은 8월 말까지 50일 간 계속되었고 그 사이 미셸 위원장은 30일 간 단식농성을 하기도 했습니다. 단식 중에 쓰러져 병원신세까지 지기도 했지만 의지를 꺾지 않고 30일을 채웠습니다. 이 항의농성에 노동운동, 진보운동의 많은 단체와 개인들이 폭넓게 연대를 하면서 이주노동자의 문제를 다시 한 번 한국사회에 제기할 수 있었습니다. 2010년 9월에는 민주노총 사상 최초로 이주노동자로서 대의원이 되어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참석했습니다. 2011년 2월 이주노조 총회에서 미셸 동지는 위원장으로 재선됩니다. 이렇게 이주노동자 권리를 위한 행동과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무부 서울출입국관리소는 미셸 위원장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2010년 3월부터 등록되어 일을 하던 회사가 일감이 없어 실질적인 휴업상태에 들어가자 서울출입국관리소는 이를 ‘허위취업’으로 규정했고, 노동부에서는 12월 초 해당 회사에 대한 고용허가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12월 21일에 서울출입국관리소에서는 미셸 위원장을 소환조사 했고 2011년 2월 10일자로 체류비자를 취소해 버렸습니다. 이는 이주노동자 운동, 이주노조 활동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이자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위해 행동하면 다 추방하겠다는 인종차별적인 억압입니다. 이에 이주노조에서는 민주노총을 위시한 제 단체와 함께 지속적인 반대투쟁을 했으며 소송을 제기하여 9월 15일 1심 결과가 나왔습니다. 재판부는 노조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출입국 측의 체류비자 취소 처분을 취소했습니다. 1차적인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출입국 측이 항소하여 현재 2심이 진행 중입니다. 이주노조 미셸 위원장은 이주노동자이자 트랜스젠더 성소수자로서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중과 노동자로서의 기본권을 쟁취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억압과 탄압을 받고 단속추방의 위기에 내몰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꺾지 않고 계속 노조운동을 했습니다. 필리핀으로 돌아가서도 노동운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주노조, 그 이전의 평등노조 이주지부에서 활동했던 지도부나 활동가들은 모두 이중 삼중의 굴레 속에서도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했습니다. 평등노조 이주지부장을 했고 2003-2004년 명동성당 농성투쟁단 단장을 했던 샤말 타파 동지는 그 따뜻하고 넓은 마음씨로 이주노동자들을 이끌면서도 집회현장에서는 항상 분노와 결의의 연설로 힘을 주었습니다. 2004년 초 과천 법무부 앞에서 집회를 할 때 500여 명의 이주노동자 앞에서 샤말 동지가 모든 이들의 평등한 인권을 역설하던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2004년 4월에 표적단속되어 네팔로 강제추방 되었지만 돌아가서도 네팔노총(GEFONT)에서 이주사업 담당자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샤말 동지에 이어 농성단장과 이주지부장을 하고 이주노조 초대 위원장이 된 아느와르 후세인 동지는 노조 설립 2주 만에 뚝섬 역에서 새벽 1시에 단속반원들에게 폭행을 당하였고 단속되었습니다. 외국인보호소에서 1년 여 구금되어 있으면서 몸도 마음도 상할대로 상했는데도 일시 보호해제된 이후에 위원장 역할을 다시 수행했습니다. 그는 2007년에 방글라데시로 귀국하고 나서도 계속 약을 먹고 치료를 받을 정도로 건강이 완전하지 않았지만 자기 지역에서 정치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한국으로 치면 구청장 같은 위치에 당선되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2007년 지도부였던 까지만 까풍 위원장, 라주 구릉 부위원장, 마숨 사무국장은 지도부 역할을 하기 전부터 꾸준히 이주노조 간부로서 활동해 왔습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신분으로서 이 동지들은 이주노조의 맨 선두에 서서 활동하였습니다. 단속추방에 맞서 매주 서울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집회를 여는 등 추방을 무릅쓰고 활동하였지요. 급기야 11월에 동시에 표적단속되어 네팔과 방글라데시로 추방되었습니다. 까지만 동지는 부인과 함께 영국으로 가서 다시 이주 노동을 하고 있고 라주 동지 역시 일본 오사까에서 식당 주방일을 하고 있습니다. 마숨 동지는 방글라데시에서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연대 네트워크’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8년 지도부였던 토르너 림부 위원장, 압두스 소부르 부위원장은 선출된 지 한 달 만에 동시에 표적단속 되었습니다. 표적단속이라는 것은 일단 단속대상을 찍고 며칠 동안 미행을 해서 동선을 파악하고 잠복을 통해 특정 시간에 각기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급습하여 잡아가는 방식입니다. 토르너 위원장은 광우병 촛불집회 참가를 위해 사무실을 나서다 사무실 앞에서, 소부르 부위원장은 집에 있다가 들이닥친 출입국 단속반원들에 의해 잡혔습니다. 토르너 동지는 지금 홍콩에서 경비 일을 하고 있고, 소부르 동지는 방글라데시에서 앞서 말한 단체 활동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정부의 탄압에 의해 ‘이주노조 지도부=단속추방’이라는 등식이 작동해 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도부 뿐만 아니라 많은 간부, 조합원들이 단속추방을 당했지요.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더욱이 노조라는 운동단체를 만들어 정부비판 활동을 하니 더욱 눈엣가시지요. 그래도 그 많은 동지들이 자기 권리를 위해, 자기보다 이후에 한국에 올 후배 이주노동자들의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위해 단속추방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활동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헌신과 열정, 조직화와 투쟁이 지금까지의 이주노동자운동 역사와 성과를 만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가더라도 끝이 아닙니다. 한국에서의 활동을 이어나가고자 하는 동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08년 6월에 네팔 카트만두에서, 본국으로 돌아간 네팔과 방글라데시 활동가들과 이주노조가 모여서 ‘국제 이주노동자연대 네트워크’를 결성하였습니다. 이제 미셸 동지가 필리핀으로 돌아가서 활동을 하게 되면 이 네트워크에 필리핀도 함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이전에 평등노조 이주지부 활동을 했던 동지가 한국에서 돌아간 노동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주 본국에서부터 이주노동자들을 접촉하고 교육하고 정보를 제공해서 그것이 이주노조 조직화로 이어질 수 있다면 이 네트워크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활동을 한국의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이 지원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나 이주노조로서는 여전히 활동가를 재생산해야 하는 힘든 과제가 계속 남아 있습니다. 미셸 동지가 귀국한 이후 이주노조는 위원장이 공석이 되었고, 남아 있는 간부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조합원 숫자는 600명 수준으로 늘어났지만 활동하는 간부들은 줄어든 어려운 상황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활동가를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한 교육과 조직사업, 지역투쟁 등이 이뤄져야 하고 연대와 지원도 더 커져야 할 것입니다. 전태일 열사가 투쟁하던 당시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현재 이주노동자들이 그대로 이어받아 일하고 있습니다. 이주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중의 비정규직이고 국적과 피부색, 인종차별이라는 겹겹의 차별 속에서도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인간으로서 대우받기 위해 한걸음 한걸음씩 싸워 나가고 있습니다. 2003-2004년 이주노동자들이 단속추방 중단과 합법화 쟁취를 위해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하던 당시, 이주노동자 활동가 버즈라 라이 동지가 했던 인상 깊은 말로 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인간선언’을 하셨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노동자선언’을 하셨으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투쟁선언’을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노동자들은 전태일 열사 정신을 이어받아 국경과 민족을 넘어 단결하여 노동해방을 이뤄가야 합니다.”
사회진보연대가 제작한 소책자 '핵안보정상회의 10문 10답'- 핵안보가 아니라 핵 없는 세상을! 입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론. 우리는 왜 핵안보정상회의에 반대하는가 핵안보정상회의에 대해 궁금한 것 10가지 1. 핵안보정상회의란 무엇인가요? 2. 핵안보란 무엇인가요? 3. 핵 테러 예방은 좋은 것 아닌가요? 4. 오바마 대통령이 주창한 '핵 없는 세상'은 꼭 필요한 것 아닌가요? 5. 핵발전소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것 아닌가요? 6. 한국에서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리는 것은 좋은 것 아닌가요? 7. 핵안보정상회의가 북핵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8. 원자력 인더스트리 서밋은 무엇인가요? 9. 핵발전소 수출은 우리나라 경제에 큰 도움을 주지 않나요? 10. 핵 없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주장해야 할까요? 자료 1. 핵안보정상회의에 대한 해외 단체, 활동가들의 입장 2. 핵안보 관련 주요 협약 및 문서 함께 합시다!
[%=박스1%] 2012년은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가 심화하고 한반도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국내 정치권력이 재편되는 격동의 시기다. 그러나 민중운동은 침체와 무기력 속에 이전 집권세력이 주도하는 ‘반한나라당 정권교체’에 종속되며 이념과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사진1%] 세계 경제의 구조적 위기 심화 2007-09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장기적 원인은 1970년대 이후 자본생산성 및 이윤율의 장기적 하락 추세다. 중기적 원인은 1970년대의 ‘징후적 위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출현한 금융세계화와 이중적자다. 이에 따라 1990년대와 2000년대 자본생산성 및 이윤율이 얼마간 회복되면서 ‘대완화’가 발생하지만, 결국 금융세계화가 야기한 금융혁신과 신용의 증권화가 이번 금융위기의 단기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2007-09년 금융위기는 실물경기의 침체로 파급되면서 성장 및 고용·임금의 후퇴를 낳았다. 금융위기가 은행위기를 거쳐 대불황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취한 통화·재정정책의 결과로 2009-11년에는 세계적인 재정위기가 발생했다. 특히 유럽연합(EU)은 주변부에서 발발한 재정위기가 중심부로 전염되면서 현재 세계 경제위기의 핵으로 부상하는 중이다. 미국도 적자재정정책과 이를 지지하는 수량완화정책을 통해 위기를 일시적으로 진정시켰지만, 그 후과로 2011년 들어 재정위기 위험이 제기되며 2012년 경기침체 가능성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는 임시방편을 통해 일시적으로 진정되다가 다시 악화되는 악순환을 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이 과정에서 일부 국가가 유로존을 이탈하거나 심지어 유로존이 붕괴할 가능성도 더욱 커질 것이다. 세계 교역의 1/4, 생산의 1/5을 차지하는 유럽의 경기침체가 장기화함에 따라 세계 경제의 위축은 불가피하다. 재정위기와 은행위기의 상호작용 속에서 유럽 은행들이 해외 투자자금을 회수할 경우 세계적인 신용경색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 경제는 수출의 10%, 외국인투자의 30% 가량을 차지하는 유럽의 위기가 심화·확산될 경우 큰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경우 2011년 실물경기 회복세의 둔화, 특히 장기에 걸친 고용 및 주택시장 부진 속에서 재정건전성의 악화와 유럽 재정위기의 영향으로 경기재침체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경우 금융연계와 무역연계를 통해 전 세계에 큰 충격이 미칠 것이다.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대한 무역의존도와 금융연계가 강한 한국 경제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또 중국도 대내외 위험 요인이 불거지면서 경착륙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중국은 저임금 기반 가공무역을 통해 세계 공급사슬에서 최종공급자로 기능하는 한편, 무역흑자로 벌어들인 외화를 다시 국외에 투자하는 최종대부자로 기능하면서 과거 세계 경제위기 시 안전판 역할을 담당했는데, 오히려 현재는 중국이 세계 경제 불확실성의 또 다른 원천으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아진 셈이다. 동북아 국제질서의 변화와 한반도 불안정성의 고조 유럽의 위기와 대조적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축으로 부상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유지·확대하는 것은 경제위기에 처한 미국에게 사활적인 과제다. 미국으로서는 경기침체에 대비하여 금융과 함께 이른바 지식기반경제의 다른 한 축을 구성하는 비즈니스서비스를 중심으로 수출주도 성장을 달성하고, 이를 위해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를 건설하는 것이 필수적 과제로 대두된다. 중국의 군사력 증강, 북한의 핵무기 보유 등 역내 안보 불안도 미국의 아시아 재관여의 빌미가 되고 있다. 미국은 이라크 전쟁 종전 선언과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통해 대외 전략의 무게중심을 유럽이나 중동에서 아시아 태평양으로 옮길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상태다. 게다가 올해 대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와 안보 문제의 동시적 해결을 위해 공세적인 아시아 전략을 펼쳐야 할 국내 정치적 요인도 결부되어 있다. 현재 수출 달러 환류 메커니즘으로 특징지어지는 미중 관계는 서로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맞물려있기 때문에 갈등이 조정되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쌍방의 이해관계가 상충할 수밖에 없어 잠재적인 갈등이 확대되는 형세에 있다. 한국은 미국의 아시아 태평양 전략에 적극 조응하여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화하고 있다. 이는 미국의 FTAAP 구상의 시발점으로서 한미 FTA가 비준된 것과 함께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에 따라 주한미군사령부가 한국사령부(KORCOM)로 재편되는 것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정부는 한미 FTA 비준으로 ‘한미동맹은 정치·안보동맹에 경제동맹이 더해져 다원적·포괄적 동맹으로 진화했다’고 평가한다. 군사 안보라는 ‘평화와 안정의 축’과 경제협력이라는 ‘번영과 발전의 축’이라는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한미관계가 운영되고 발전하는 새로운 틀을 갖추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또 한국은 미국의 후원 아래 2012년 3월 서울에서 2차 핵안보정상회의를 주최할 예정인데, 이것이 미국의 북핵 관리 전략에 조응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2011년 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이라는 돌발 변수가 발생하였다. 일단 대다수 전문가들은 북한이 순조롭게 집단지도체제로 이행하고, 상당 기간 동안 내부 정치적 안정화에 주력하고, 경제난 해결을 위해 개혁·개방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다. 중국이 김정은 후계 체제를 인정한 것도 안정화를 예상케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집단지도체제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미국이 대북 정책을 재검토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므로 북미 관계는 한동안 교착 상태에 머물 것이다. 기본적으로 한미의 북핵 포기 전략이 유지되는 상황에서 강성대국 원년과 체제 교체를 맞는 북한이 공세적 전술을 구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이명박 정부의 친재벌-반노동 정책 한국 경제는 1997-98년 경제위기·외환위기 이후 저성장 국면으로 진입한 상황에서 금융자유화와 구조조정·평가절하와 같은 수출-재벌 주도 세계화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금융자유화와 수출-재벌 주도 성장전략, 그리고 이를 종합하는 FTA 전략은 투자활성화와 수출경쟁력을 위해 노동력을 신축화함으로써 저임금·장시간·고강도 노동의 악순환을 강화한다. 또 무역의존도와 금융개방도를 심화시켜 국민경제를 세계 경제위기의 충격에 대단히 취약하게 만든다. 단적으로, 2007-09년 금융위기 당시 한국의 환율 및 주가 변동폭과 실질임금 삭감률은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이명박 정부의 친재벌-반노동 정책은 세계 경제위기의 격랑 속에서 크게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사회저변의 모순을 심화하였다. 첫째, 이명박 정부의 집권 5년(2012년 전망치 포함) 경제성장 실적을 단순 평균하면 3.1%에 불과하다. 이는 자신의 공약이었던 7%는 물론이거니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그토록 비판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적(각각 5.0%, 4.3%)에도 미달하는 것이다. 둘째, 경제위기 아래 고용도 악화되었다. 잠재실업자와 불완전취업자(부분실업)를 포함하는 확장실업률은 공식실업률의 2-3배에 달하는 8-1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경제위기 하에서 여성·청년, 중소기업·자영업 등 취약계층이 집중적인 타격을 입었다. 셋째, 명목임금인상률에 물가인상률을 반영한 실질임금인상률도 대폭 악화되었다(2007년 3.0%, 2008년 -8.5%, 2009년 -0.1%, 2010년 3.8%, 2011년 -3.5%). 그 결과 노동소득분배율은 2007년 56.7%에서 2010년 52.5%까지 하락했다. 넷째, 조세 감면, 규제 완화, 개발 확대를 통해 건설 및 부동산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정부 여당의 발상은 용산 참사와 4대강 개발로 상징되는 거대한 재앙을 낳았다. 부채로 주택 구입을 장려하는 정부의 금융·부동산 정책은 가계부채 급증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한국 경제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폐해가 누적된 상황에서 2012년 세계 경제위기의 영향으로 다시 한 번 심각한 위기를 경험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역의존도가 높고 금융개방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세계 경기침체와 국제 금융시장 불안에 따른 영향으로 수출이 둔화하고 자본유출입 변동성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정부의 경제위기 대책은 중기적으로 재정건전화 기조를 유지하면서 FTA 글로벌 네트워크 구상과 노동신축화 법제화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정부는 ‘위기일수록 대외 개방을 적극 추진하고 무역 장벽을 걷어내야 국가간 장벽이 희미해진 글로벌 시대에 새로운 부를 창출할 수 있다’며 한미FTA 글로벌 네트워크 전략을 보다 공세적으로 추진하려 한다. 정부의 노동신축화 정책은 정리해고제와 같은 고용량의 신축화와 파견제·기간제와 같은 고용형태의 신축화를 거쳐, 이제 ‘일자리 나누기’라는 외피를 쓴 시간제를 통해 임금 및 노동시간 신축화로 진화하고 있다. 정치 위기와 총대선 지형 정부 여당은 경제위기로 인한 민심 이반과 각종 실정·부패로 집권 하반기 레임덕에 빠진 상태다. 그 이유는 반민주적·억압적 통치 스타일과 남북관계의 악화라는 여러 요인들도 있겠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명박-한나라당의 ‘747 공약’과 ‘뉴타운 공약’과 같은 장밋빛 경제성장 전망이 부메랑이 되어 스스로에게 치명타를 가했다는 사실을 핵심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한미 FTA 비준안 날치기 통과의 후과와 선거 개입 의혹 등 각종 권력형 비리가 터지며 대대적인 위기에 봉착한 한나라당은, 박근혜 전 대표가 전권을 행사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다. 비대위는 정책적으로는 복지 공약을 보강하면서 중도적 이미지를 강화하고 조직적으로는 외부 인사 영입, 개방형 국민경선제 등의 방안을 도입하여 재창당 수준의 인적 쇄신을 감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확실한 미래권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나라당의 구심력이 급격히 약해진 반면 당내 친박계를 제외한 여타 계파의 원심력이 확대되고 있다.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계파 간 이해 갈등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총선에서 패배할 경우 내부 분열이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민주통합당으로 대표되는 전 집권세력은 위기의 책임을 현 정부 여당에게 전가하는 인민주의적 정치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민주당은 12월 (‘혁신과 통합’의 후신인) 시민통합당과 한국노총과 통합하여 민주통합당으로 재편하였다. 동시에 진보정당을 포함하는 범야권공조를 통해 한나라당과 1:1 구도를 만들면 총대선 승리가 가능하다는 구상 하에 대여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시민단체와 한국노총의 합류로 민주통합당은 이전에 비해 진보적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지만, 이들이 제시할 개혁 의제의 폭과 수위는 대단히 협소할 것이다. 조직적 특성으로 보더라도 민주통합당은 정당 외부 전문가들의 참여와 국민경선제 등을 통해 선거승리와 유권자 전반의 동원에 주력하는 포괄정당적, 선거전문가정당적 성격을 띤다. 역사적으로 민주통합당이 무수한 이합집산을 반복했다는 점은 이들의 이념적·조직적 토대가 대단히 부실하고 지지층의 휘발성이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반복, 심화하는 경제위기 속에서 기성 정치세력에 대한 대중의 불신은 현재 반한나라당-비민주당을 상징하는 ‘안철수 돌풍’으로 나타나고 있다. ‘안철수 돌풍’은 정당을 기반으로 삼지 않더라도 대중적 명망과 미디어의 힘을 활용하여 선거 자금과 운동원을 조직할 수 있는 정치적 토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안철수 돌풍’은 그 실체와 무관하게 한국 정치의 이념적·조직적 취약성을 반영한다. 이런 측면에서 안철수 원장이 ‘정치의 본질은 행정’이라고 언급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정치 위기의 중요한 증후 중 하나는 사회적 갈등의 대의 과정이자 집단적 운동으로서 정치가 행정이나 치안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일단 안철수 원장이 단호하게 신당 창당설을 부인함에 따라 총선은 현재 구도대로 치러질 가능성이 크지만, 신당론의 불씨는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그가 직접 총선과 대선에 출마하지는 않더라도 지난 서울시장 선거에서 그랬듯이 간접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다. 통합진보당으로 대표되는 민중운동 주류가 총선과 대선에서 원내교섭단체 진출과 연립정부 구성에 몰두할 경우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전면적 타협과 양보는 불가피하다. 계급타협 속에서 이러한 정당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스스로 침식할 수밖에 없고, 이는 다시 이념 및 노선의 우경화와 선거정치의 빌미를 제공한다. 특히 세계 경제위기가 심화되는 현 정세에서 통합진보당이 만에 하나 연립정부에 참여할 경우, 이는 그로 표상되는 민중운동이 집권세력의 정치적 책임을 공동 부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히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한다면 이는 향후 노동자운동의 주류가 미국식 자유주의(민주당)-노동자운동 공조로 재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경제위기와 정치위기에 대한 민중적 대안의 건설이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중운동이 야권 단일화 프레임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정치적·조직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총대선 국면에서 범야권의 일부로 흡수 통합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민중운동의 대응 이상의 분석을 요약하면서 2012년 민중운동의 투쟁 방향을 도출해보자. 첫째, 2012년 세계경제는 미국의 경기침체 가능성 고조와 유럽의 재정위기 확산, 중국의 경착륙 위험 등으로 대단히 심각한 위기를 경험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세계적인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경제위기는 세계화된 금융연계와 신자유주의 정책의 모순이 폭발한 결과로서, 일시적인 순환적 위기가 아니라 장기적인 구조적 위기의 성격을 갖는다. 무역의존도와 금융개방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세계 경제위기가 심화할 경우 직접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정권 말기 레임덕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여당이 복지 공약을 강화하고 정부가 감세정책을 일부 철회했지만, 재벌주도 성장 및 노동력 관리 기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그 결과 정부의 경제위기 대응은 중기적으로 재정건전화 기조를 이어가는 가운데 FTA 글로벌 네트워크 전략과 노동신축화 법제를 추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본은 긴축경영 기조 속에 임금을 억제하고 고용을 축소하면서 노동자에게 위기 비용을 전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민중운동은 거시적 수준에서 금융자유화와 노동신축화를 주축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기조를 전면 비판해야 한다. △한미 FTA를 필두로 하는 FTA 글로벌 네트워크 전략 비판 △자본시장통합법 개정안을 비롯하여 금융거품과 부실을 양산하는 금융자유화 조치 반대 △국가고용전략 2020 이후 제출되고 있는 각종 노동신축화 법제 반대 △노동기본권을 무력화하는 현행 노조법의 전면 개정 등이 당면 주요 과제다. 둘째, 미국은 경상적자 해소책으로 중국 등 신흥국의 환율유연성 제고와 자국의 서비스산업 수출 주도 정책 전환을 강조하며 한미FTA 이후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 구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수출 달러 환류 메커니즘으로 특징지어지는 미중 관계는 ‘미중 전략 및 경제 대화’(G2)를 통해 이해관계가 조정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잠재적인 정치·경제적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이는 최근 미국의 ‘태평양 세기’ 구상에서 드러나듯이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해외주둔미군재배치계획(GPR)의 수정과 전력 증강으로 귀결되고 있다. 천안함-연평도 사태를 거치며 군사적 긴장 상태가 한층 고조된 한반도에서는 북한 체제의 변화로 불확실성이 확대됐다. 당분간 조정 국면을 맞겠지만, 기본적으로 한미의 북핵 포기 전략이 유지되고 2012년 강성대국 원년과 체제 교체를 맞는 북한의 공세가 충돌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민중운동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과 한국의 한미동맹 강화 기조가 동북아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한다는 점을 명확히 폭로하면서 반전평화 운동을 적극 전개해야 한다. △핵안보정상회의 비판 △평택 미군기지, 제주 해군기지를 비롯한 주둔미군 재배치 계획에 대한 비판 △한국의 전력 증강 사업 비판 등이 주요 과제다. 셋째, 고용·임금과 민중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총노동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정부가 제기하는 노동시간 단축 방안은 실상 노동시간을 신축화하여 단시간·저임금·비정규 노동을 양산하는 효과를 낳을 것이다. 이러한 노동시간 단축 방안의 본질을 정확히 비판하면서, 이전부터 금속노조가 주장해온 주간연속2교대제와 야간노동철폐 투쟁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쟁취하기 위한 구체적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그동안 실질임금 하락폭이 컸고 올해 선거라는 정치 일정도 있어서 임금인상 요구 관철이 상대적으로 쉬울 수도 있지만, 교섭력이 취약한 부문은 경제위기 여파가 커질 경우 여전히 실질임금 삭감이 우려된다. 또 경영난을 이유로 물량이나 생산기지를 국외로 이전하려는 기업도 늘어날 것이다. 총연맹 수준에서는 노동자계급 전반의 사정 악화와 함께 내부 격차의 확대를 감안하여 연대임금 정책을 적극 모색할 필요가 있다. 산별연맹 수준에서는 산업적 위계의 정점이자 임금협상의 기준이 되는 주요 완성차 대기업 노동조합들이 산별교섭에 동참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또 3·8 여성의날과 연계한 공공운수노조서울경인지부의 대학비정규직 집단교섭, 공단 차원의 전략조직화와 연계한 금속노조서울남부지회의 집단교섭도 계속해서 발전시켜야 한다. 쌍용자동차·한진중공업 투쟁으로 부상한 정리해고 이슈를 진전시키고 사내하청·특수고용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경제위기에 사각지대로 몰리게 될 민중들의 기초생활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도 중요하다. 복지 정책의 수혜자로서 정책적 요구에 매몰되기보다는 사회적 권리의 주체로서 대중 저항 주체 형성에 주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경제위기와 민심이반을 바탕으로 2010년 지방선거와 2011년 상하반기 재보궐 선거에서 승리한 야권은 민중운동의 일부를 포섭하는 정당통합과 선거연합을 통해 다가올 총선·대선에서 반한나라당 공세를 지속할 전망이다. 만성적 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현직의 실패와 정당의 위기가 반복되고 있는데, 반한나라당-비민주당 무당파를 상징하는 ‘안철수 돌풍’은 한국 정치의 근본적 불안정성을 의미한다. 민중운동의 이념적·조직적 위기를 반영하는 통합진보당의 등장 및 이들의 민주통합당과의 선거 제휴 속에서 민중운동 전반의 주류화가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의 정세는 향후 대중운동을 재건하여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기초를 유실하지 않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요구한다. 민중운동 좌파는 전선의 유실과 진보정당 및 노동조합의 우경화를 저지하고 향후 민중운동의 발전적 재편을 추동하기 위해 상호 긴밀히 공조해야 한다. 나아가 국제 사회운동의 경제위기 대응에 대해 주의 깊은 관찰과 연대가 필요하다. 국제적 수준에서 보면 2010-11년 유럽 긴축반대 운동, 2011년 상반기 중동 및 북아프리카 민주화 혁명, 2011년 하반기 미국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 등 경제위기에 맞서 투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것이 한동안 추동력을 상실한 대안세계화 운동의 부활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자본주의의 체계적 위기에 맞서 국제적 수준에서 민중적 대안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2011년 세계 저항운동 평가 2011년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격변의 해로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2011년이라는 제목 하의 처음 몇 단락은 아마도 부채에 시달리는 유럽에 집중된 경제위기의 분출과 그리스,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에서 촉발된 정치적 위기로 채워질 것이다. 그 다음 몇 단락은 필시 북아프리카에서 중동, 유럽과 미국을 휩쓴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렇게 채워진다면 이는 지속되고 있는 이 운동의 사회, 정치, 문화적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이번 호 『사회운동』의 다른 글들은 경제위기를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글은 2011년 민중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 성격, 세계 각 지역의 정치문화에 대한 영향, 좌파운동에 대한 의미를 평가할 것이다. 투쟁의 개요 2011년의 투쟁은 실제로 2010년 12월 17일에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날 튀니지에서 노점 수레를 경찰에 빼앗긴 한 젊은 노점상이 경찰본부 앞에서 분신했다. 이 사건은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이는 수 일간 지속되면서 강력해졌다. 시위대들은 실업과 식료품 가격 폭등, 정부 부패, 정치적 자유 부재에 대해 커다란 분노를 표출했다. 이런 것들이 그 노점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문제들이었다. 거리 시위는 반정부 봉기로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는 2011년 1월 14일 독재자 벤 알리를 쫓아내는 것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 저항운동은 비슷한 조건에 놓인 주변 지역의 나라들로 퍼져갔다. 이집트는 1월 25일부터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하는 2월 10일까지 혁명을 경험했다. 이 시기에 수 십 만의 젊은 이집트 민중들이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 결집했고 용감하게 경찰과 대결했다.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군중 시위는 바레인, 시리아, 예멘, 알제리 등과 여타 나라들에서 발생했다. 이 가운데 많은 나라들에서 대규모 파업이 반정부 시위와 함께 일어났고 젊은 민주화 시위대와 노동자들은 서로 힘과 사기를 얻었다. 11월과 12월에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은 다시 타흐리르 광장으로 돌아와서 압도적인 경찰폭력과 다시금 맞섰다. 그들은 무바라크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최고군사위원회(SCAF)가 최저임금 인상, 물가 통제와 같은 사회 개혁 이행의 실패하는 데 맞서 저항했다. 그들은 또한 최고군사위원회가 정부에 대한 통제를 지속하고자 하는 혁명 참가자를 탄압하는 것에 대해 저항했다. 5월 초에는 ‘분노하는 사람들’이라 스스로 칭하는 젊은이들의 시위가 유럽을 뒤흔들었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첫 시위는 높은 실업률(40%의 청년 실업률), 공공부문 정리해고와 사회서비스 축소로 이어진 몇 번의 긴축 조치와, 이러한 조치로 비난받은 집권 사회민주당에 대한 불만 등에 대응하여 5월 15일 스페인에서 발생하였다. 시위는 마드리드의 푸에르토 델 솔 광장(태양의 광장) 및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플라자에서의 텐트 농성으로 이어졌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8월에 경찰이 철거할 때까지 정치계급의 특권 철폐, 실업 해결, 주거권 증진, 교육과 건강 및 대중교통 등 공공서비스의 개선,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 강화, 군비지출 축소,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 등을 요구하는 몇 차례의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는 근거지로 이 농성투쟁을 활용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창조하고 싶었던 평등한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텐트촌을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다. 텐트촌의 관리에 대한 결정, 정치적 입장, 시위 전술은 ‘전체 총회’를 통한 합의로 만들어졌다. 모든 출석자들은 동등한 기반 위에서(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참여하고 발언하고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요리, 청소, 기타 일상 업무는 높은 수준의 자발적 지원제를 통해 집단적으로 행해졌다. 아랍 세계의 봉기가 그러했듯이, ‘분노하는 사람들’의 운동 역시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긴축과 정치적 부패에 반대하는 이와 비슷한 텐트농성과 대규모 시위가 5월에서 8월 사이에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온라인, 오프라인 커뮤니티 역시 독일, 아일랜드 및 기타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발전하였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가시적인 점거는 여름의 끝 무렵에 많이 없어졌지만, 운동 참가자들은 주거권에서 이민자 단속에 이르는 다양한 이슈에 관해 지역 총회를 개최하고 운동을 조직하면서 활동을 굳게 지속하고 있다. 더욱이 10월에 유럽 전역에서 군중 시위가 다시금 일어났다. 시위는 그리스에서 10월 19-20일과 12월 1일의 총파업을 동반하여 11월과 12월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들은 유럽연합의 구제금융 조건으로 실행된 세금 인상, 임금 삭감, 공공부문 정리해고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9월에는 미국이 대중 저항운동으로 충격을 받았다. 아랍의 봄과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자극받은 젊은 시위대들은 스스로를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으로 부르며 맨하탄 중심가의 월스트리트에서 몇 블록 떨어진 주코티 공원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공식 요구사항 작성을 거부하며, 소수 금융자본가와 이들을 지원하는 정치인들(1%)의 손에 부와 권력을 집중시키는 미국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서 “우리가 99%다”라는 구호를 만들어냈다. ‘분노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운동의 목표 자체로서 수평적이고 이상적 저항 형태를 강조하며 전체 총회를 주요한 의사결정 구조로 활용했다. 10월 초까지 점거운동 단위들은 미국 전역의 수백 개 도시에 존재했다. 열 명에서 200여 명에 이르는 텐트농성이 뉴욕, 오클랜드, 포틀랜드, 보스톤, 기타 미국 내 주요 도시들에서 경찰에 의해 대부분 철거된 11월 중순까지 어디에서든 지속되었다. 10월 15일 점거 시위는 세계 80개 이상의 나라에서 벌어졌고 99%라는 생각을 진정 지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 시위들은 미국에서 발생한 점거 운동과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 운동을 하나로 만들었다. 10월 15일 공동 행동의 날 호소는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이 처음 제안했고 나중에 미국에서 채택되었다. 그 날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거리의 민중들은 애초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깃발 아래 조직된 이들이었다. 10월 15일에 이어서 캐나다, 영국, 노르웨이, 뉴질랜드, 기타 서구 몇 나라들에서도 텐트농성이 진행됐다. 이 나라들은 이전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운동이 퍼지지 않은 곳들이었다. 유럽에서처럼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가시적인 점거 텐트농성은 없어졌지만 점거 시위대들은 지역 총회를 개최해서 예산 삭감, 주택 압류, 개인 부채, 경찰 폭력 문제를 포함하여 수많은 이슈들에 관한 운동을 계속 조직하고 있다. 운동의 성격 2011년 대중운동은 지역과 국가마다 매우 달랐고 같은 국가 내 도시들 사이에서조차 달랐다. 예컨대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긴축 조치들의 철회를 위한 구체적 요구안을 만들었지만 미국의 점거 운동은 공식적 요구나 공식적 강령 개발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무라바크 퇴진 이후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들은 정당 건설에 매진해서 11월 말과 12월 초에 실시된 총선에 참여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에서 실시된 총선에서는 많은 ‘분노하는 사람들’이 선거를 거부했다. 뉴욕의 점거 텐트농성은 주로 조직적 배경 없이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이들로 구성된 반면 워싱턴의 점거 시위대들은 환경, 사회정의, 반전 단체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점을 가진 2011년의 각기 다른 운동들은 몇 가지 두드러진 유사점을 보인다. 이는 이 운동들을 동일한 국제적 현상의 일부로 파악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우선, 이 세 가지 운동 모두 사회 경제적 불만이 쌓인 결과로 형성되었고 급격히 정치적 목표를 발전시켰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물가 폭등과 공식 경제의 저발전, 유럽에서 사회서비스 축소와 증세, 미국에서 은행과 기업에 대한 대규모 구제금융 및 개인 부채의 증가, 세 지역 모두에서의 높은 실업률은 처음에는 시위대를 거리로 나서게 했다. 그러나 단지 불만에 쌓인 시위에 그치지 않고 아랍세계에서 경제적 불만과 결합된 장기간의 정치적 억압은 시위대를 독재 체제의 타도를 요구하도록 추동했다. 유럽에서는 ‘분노하는 사람들’의 요구가 긴축조치 철회로 집중되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으로 대표되는 것처럼 매우 정치적인 비판으로 나아갔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부채위기에 대한 책임이 있는 정치인들을 면책하고, 권력이 있는 거대 기업과 IMF, 유럽중앙은행과 결탁하는 정치 시스템의 변혁을 추구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유사하다. 점거 시위대들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예산지출과 글래스 스티걸 법 재도입뿐만 아니라, 기업 로비 철폐를 위한 선거시스템 개혁을 촉구하는 ‘비공식적’ 언론을 대거 만들어냈다. 나아가 시위대들은 텐트농성을 일종의 정치적 선언으로 간주했다. 이 세 가지 사안에서 무엇이 진정한 민주주의인지, 왜 정부는 민주적이지 않은지 명확히 대비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 세 지역에서 저항운동은 전통적 좌파에 친숙한 중앙집중적 조직 형태와의 단절을 드러낸다. 그들은 좌파 정당과 조직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개인들의 높은 참여로 온라인 사회관계망을 통해 주로 조직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운동 지도부들은 전체 총회 구조, 화장실에서 선전홍보에 이르는 일들을 다루는 실무팀을 통해 광장 텐트농성에서 창조된 수평적이고 자발적인 문화를 자랑스러워했다. 미국과 유럽 지역에서는 중앙집중을 반대하고 다양한 관점과 경향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드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미국에서 이러한 환경은 개인주의를 숭배하고 위계체제와 보편적 사회변혁 이데올로기(예컨대 마르크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가진 사회에서 자란 미국 중산층이나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있어 핵심적이었다. 이집트 혁명의 지도부들 또한, 미국의 경우보다는 덜 강조하지만, 무바라크 퇴진 이전에 타흐리르 광장에 넘쳐났던 이와 비슷한 평등주의와 자발주의의 분위기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2011년의 운동들이 공공장소에 대한 점거뿐 아니라 운동의 이상적인 재창조도 중심에 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운동들이 그들이 표현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에 항상 따랐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폭력적인 시위전술 구사 여부를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져 시위 역량이 축소되는 사례도 있었다. 미국의 점거 운동은 유색인과 이민자 같은 경제위기의 최대 피해자들의 지도력 육성은커녕 동등한 참여조차 촉진하지 못했다. 게다가 많은 전통적 좌파들은 더 지속적인 조직형태와 더 명확한 강령이 없이는 이러한 새로운 대중운동들이 진정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1년 운동들에서 확산된 수평주의적 성격은 어떤 측면에서 평가되느냐에 따라 최대의 장점 혹은 최대의 약점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와 함께할 가능성이 큰 새로운 형태의 운동을 나타내며 따라서 좌파가 많이 배워야 할 운동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지막으로 2011년의 운동들은 서로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고 지역적, 국제적 규모로 발전하였으나, 또한 강력한 일국적 성격을 유지하였다.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튀니지와 이집트 민중 봉기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뉴욕 점거운동을 기획했던 사람들은 스페인과 그리스에서 벌어졌던 것과, 규모는 다르더라도 그 성격이 유사한 운동을 만들고 싶어했다. 또한 초기 기획회의에 참가한 이들은 전략과 전술에 관한 중요한 참조점으로 타흐리르 광장을 언급하였다. 미국 무정부주의자들은 운동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 배우기 위한 목적으로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그리스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각기 다른 지역의 시위대들은 서로 메시지와 지지 영상을 주고 받으며 그들이 똑같은 99%의 일부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랍과 유럽, 미국에서 나왔던 많은 담론은 실업, 빈곤, 긴축조치, 정치부패와 같은 일국적 이슈의 틀 안에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와 미국의 개입이라는 지역적 문제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봉기의 배경이 되었지만 이 투쟁들은 일국 독재체제에 대한 요구를 강조했고 국가적인 사회경제적 개혁 요구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 그리스 민중들의 분노는 ‘트로이카(유럽위원회, 유럽중앙은행, IMF)’가 요구한 긴축조치에 동의한 그리스 정부를 향한 것이었지 이러한 지역적 국제적 기구들 자체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전통적 좌파들은 지역적 반자본주의 운동의 전망을 위해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것의 의미를 논의하지만, ‘분노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논의를 대개 무시했다. 대신에 그들은 지역 총회를 개최하고 공동 식당을 운영하고 공동체 공원을 건설하는데 매달렸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그들이 미래에 바라는 그리스 사회와 그리스 시민의 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미국의 점거 운동에서 나오는 선언들은 “모든 미국인들”을 위한 부채탕감과 일자리를 요구했다. 그들은 지구적 범위에서 금융자본의 규제 요구보다는 미국 정치시스템의 개혁 요구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다. 2011년 운동들의 일국적면서도 국제적인 성격은 이전 시기 반세계화/대안세계화운동과의 단절과 지속 양자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들과 그 사이의 연계 형성에 대한 주도력은 1999년 시애틀의 반WTO 투쟁과 그 이후의 세계사회포럼에 의해 형성된 네트워크의 바깥에서 온 것이다. 반세계화/대안세계화 운동은 국제회의(WTO, IMF, G7/8) 대응 투쟁 중심으로 구체화된 반면 이 새로운 운동들은 일국 정부에 더 초점을 맞추면서 이러한 기구들을 대개 무시했다. 그러나 각 대륙을 가로지르는 동일성-우리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고 비슷한 적들과 싸우고 있다는 의미에서-은 어느 때보다 생생하며 서로 배우고 공유하려는 의지도 그러하다. 운동의 영향 세 지역 모두에서 민중들의 운동이 상당한 정치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아랍권에서 민중봉기는 두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했고 다른 정권들에서 유의미한 정치적 자유와 사회 개혁을 쟁취했다. 그러나 리비아에서 내전과 나토 폭격이 지속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아랍권의 운동은 완전히 성공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민중운동이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면서 과도정부에 맞서 지속적으로 싸워 왔다. 튀니지에서는 새로운 연립정부가 설립되었지만 이집트 민중은 완고하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군부정권에 맞서 계속 투쟁 중이다. 그러나 군부정권의 지속적인 권력 장악에도 불구하고 무바라크의 퇴임 이후 좌파세력의 정치적 활동은 활발해졌다. 1월 이후에 여러 사회주의 정당과 조직들이 공공연한 활동을 시작하거나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 중 이집트노조총연맹(FETU)에 의해서 창당된 민주노동당(DWP)은 이집트의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1)기업의 재국유화와 노동자들이 정한 관리자에 의한 운영, 2)사유화와 독점화 촉진 정책 철회, 3)최저임금 인상, 4)모든 종교적 신념에 대한 존중, 5)종교, 피부색이나 성별에 기반한 모든 차별 철폐라는 다섯 가지 요구를 내걸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타 사회주의 정당 및 조직들과 ‘좌파세력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세력연합’이라는 사회주의 노선을 결성하였다. 또한 일부 사회주의 정당들은 새롭게 창당된 자유민주주의, 사민주의 정당들과 ‘혁명은지속된다’라는 선거연합을 결성하였다. 선거연합은 11월 초 1차 총선에서 하원 7석 달성이라는 큰 성과를 내기도 했다. 아직도 영향이 크지 않지만 이집트의 사회주의·좌파운동은 젊은 층의 지지를 천천히 얻어나가고 있다. 타흐리르 광장 활동가와 달리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선거청지를 대체적으로 피해 왔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대규모 대중 집회는 노동자의 파업과 더불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가 궁극적으로 퇴임하는 데 기여했다. 세금 인상과 공공지출 삭감 정책을 막지 못했지만 두 나라의 대중운동이 대규모 시위를 동원하여 권력을 이어받은 과도 정권을 계속 압박하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분노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도입된 통행료, 지하철 요금과 재산세의 보이콧을 조직하였다. 일부 ‘분노하는 사람들’은 선거를 보이콧 하였지만 그들의 운동은 좌파 정당이 강화될 수 있는 환경을 형성하였다. 이번 선거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집권당인 중도 성향의 사회노동당이 보수적 성향의 국민당에 참패한 것이다. 반면 국회에서 2석밖에 없던 좌파연합인 통일좌파(United Left)는 8석을 더 얻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전반적인 좌파정당의 지지율 또한 급상승하여 30%에 달한다. 미국에서 점령운동은 금융위기에 대한 책임이 왜 금융자본에 있는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시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이들의 설명은 티파티(Tea Party)의 ‘큰 정부가 개인의 자산과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을 대체하고 있다. 민주당은 재산 격차의 심화에 대한 점령운동의 비판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주당은 다가오는 선거에서 점령운동이 가지는 잠재적 영향력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에 있어서 점령운동이 어떠한 영향이 끼칠 것인가는 아직 불투명하다. 민주당이 점령운동과 99%의 대변인으로서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점령운동의 선거정치에 대한 거부감과 오바마 정권에 대한 불만이 공화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지 이 시점에서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점령운동이 미국에서 정책결정 과정을 더 좌파적인 방향으로 추동할 능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점령운동은 이미 오하이오 주의 공공부문 단체교섭권 제약 법안을 폐지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2011년 대중운동은 좌파 정치운동을 활성화했을 뿐 아니라 노조운동에 힘을 실어주었고 일부 지역에서 노조운동과 상호 강화하는 관계를 맺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노동자의 파업은 벤 알리와 무바라크를 굴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 혁명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집트 민주노조들은 이집트노동조합연맹(FETU)을 결성해 국가가 통제하는 이집트노총(ETUF)에 도전하였다. 무바라크 정권 시절에 ETUF은 유일한 합법 노총이었고 시위노동자를 회유하고 탄압하는 기능을 하였다. 혁명 이후에 ETUF가 많이 약화된 반면 FETU는 조합원을 배가하고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또한 위에서 DWP에 대해 언급했듯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리스에서 그리스노총(GSEE)은 긴축정책 반대운동에 앞장 서 왔고 7차례의 총파업을 조직하였다. 그리스 노조들은 ‘분노하는 사람들’과 협조하여 총파업에 돌입할 때마다 수만 명의 시위대를 조직하였다. 저항의 분위기 속에서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노동자의 투쟁이 활발해졌다. 11월 24일 포르투갈 노조들이 1988년 이후 최초의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6월 이후 영국 노동자들은 1926년 이래 가장 큰 파업을 조직했다. 미국노조들도 평소에 파업에 대해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에 거쳐 길거리로 나섰다. 미국노총(AFL-CIO)이나 서비스노조(SEIU), 화물운송노련(Teamsters), 통신노조(Communication Workers of America)와 같은 강력한 노동조합 조직들이 운동에 물질적,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자신들의 온라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점령운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지를 표명하고, 이 운동의 요구를 알려내었다. 노조 조합원들은 여러 도시에서 점거 시위자들과 함께 행진을 벌이거나 진행 중인 노동자 투쟁을 환기시키며 일자리 창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과도한 경찰력 사용에 대한 반발이 특히 심했던 오클랜드에서는 점거 시위자들이 11월 2일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요청했고(미국에서는 1940년대 이후로 찾아볼 수 없던 일이다) 노동조합은 이에 화답했다. 비록 11월 2일 시위가 총파업 수준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이 날 거의 5%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작업을 멈추었다. 노조원들과 점거 시위자들은 또한 미국의 5대 항인 오클랜드 항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2011년 대중운동에 대한 평가 2011년에 아랍권, 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한 대중운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몇 개월 전만큼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점령운동과 ‘분노하는 사람들’ 운동 참가가는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고 아직도 대규모 집회를 동원할 능력이 있다. 이집트의 정치는 아직도 역동적이고 대규모 집회가 지속되고 있다. 2011년에 생긴 대중운동들은 2012년에 들어서면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것이다. 물론 이 운동들이 정치·경제 체제를 변혁할 능력이 있는 반자본주의운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장일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부패, 탄압과 지나친 빈부 격차를 규탄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운동들은 이미 여러 나라의 정치와 정치적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의 조직화와 정치적 표현을 활성화시켰고 급진적 좌파들의 활동과 입장을 위한 공간을 열었다. 더욱이, 기존 좌파조직들이 오랫동안 대중적인 동원에 실패한 가운에 수많은 대중들을 길거리로 불러내었다. 이러한 성과를 인식하면 한국에서 왜 유사한 운동을 하지 못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SNS과 점령운동의 담론을 빌려 대중적인 한미FTA 반대 운동을 촉발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대규모운동을 건설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2008년 촛불시위, 보다 최근에는 희망버스 등 우리도, 같진 않더라도 비슷한 형태의 운동을 경험했음에도 말이다. 결국 대중운동을 어렵게 하는 어떤 객관적인 조건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금융자본의 탐욕은 미국만큼 가시적이지 않고 긴축정책과 실업이 유럽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또 한미FTA의 효과를 피부로 느낄 때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그러나 중요하게 고려할 주관적인 요인도 있다. 특히, 우리는 2011년의 운동을 이끌었던 핵심 추진력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SNS 활용은 중요했고 ‘모든 곳을 점령하라’나 ‘우리는 99%’라는 슬로건은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를 유도한 핵심 요인은 아니다. 오히려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카이로에서 뉴욕까지 민중총회가 상징하는 수평적인 집회와 평등한 의사결정 방식, 사람들이 꿈꿔왔던 민주주의를 실제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주체들의 자신감 고취였다. 물론, 각 도시에서 똑같은 집회문화나 형식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카이로에 적합한 운동 형태는 뉴욕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고, 카이로와 뉴욕의 운동방식이 서울에 꼭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울에 맞는 운동 형태를 찾아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다. 그것은 ‘조직화’란 무엇이고 ‘투쟁’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세계의 좌파들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급진적인 좌파조직, 노조, 노동자단체는 물론 2011년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대중운동들과 유기적인 관계맺기를 시도해야 한다. 이는 2012년 뿐 아니라 앞으로 수년 간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