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세계 저항운동 평가 2011년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격변의 해로 역사책에 기록될 것이다. 2011년이라는 제목 하의 처음 몇 단락은 아마도 부채에 시달리는 유럽에 집중된 경제위기의 분출과 그리스,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에서 촉발된 정치적 위기로 채워질 것이다. 그 다음 몇 단락은 필시 북아프리카에서 중동, 유럽과 미국을 휩쓴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렇게 채워진다면 이는 지속되고 있는 이 운동의 사회, 정치, 문화적 중요성 때문일 것이다. 이번 호 『사회운동』의 다른 글들은 경제위기를 세부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글은 2011년 민중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 성격, 세계 각 지역의 정치문화에 대한 영향, 좌파운동에 대한 의미를 평가할 것이다. 투쟁의 개요 2011년의 투쟁은 실제로 2010년 12월 17일에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날 튀니지에서 노점 수레를 경찰에 빼앗긴 한 젊은 노점상이 경찰본부 앞에서 분신했다. 이 사건은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고 이는 수 일간 지속되면서 강력해졌다. 시위대들은 실업과 식료품 가격 폭등, 정부 부패, 정치적 자유 부재에 대해 커다란 분노를 표출했다. 이런 것들이 그 노점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문제들이었다. 거리 시위는 반정부 봉기로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는 2011년 1월 14일 독재자 벤 알리를 쫓아내는 것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 저항운동은 비슷한 조건에 놓인 주변 지역의 나라들로 퍼져갔다. 이집트는 1월 25일부터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사임하는 2월 10일까지 혁명을 경험했다. 이 시기에 수 십 만의 젊은 이집트 민중들이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 결집했고 용감하게 경찰과 대결했다. 아랍의 봄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군중 시위는 바레인, 시리아, 예멘, 알제리 등과 여타 나라들에서 발생했다. 이 가운데 많은 나라들에서 대규모 파업이 반정부 시위와 함께 일어났고 젊은 민주화 시위대와 노동자들은 서로 힘과 사기를 얻었다. 11월과 12월에 젊은이들과 노동자들은 다시 타흐리르 광장으로 돌아와서 압도적인 경찰폭력과 다시금 맞섰다. 그들은 무바라크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최고군사위원회(SCAF)가 최저임금 인상, 물가 통제와 같은 사회 개혁 이행의 실패하는 데 맞서 저항했다. 그들은 또한 최고군사위원회가 정부에 대한 통제를 지속하고자 하는 혁명 참가자를 탄압하는 것에 대해 저항했다. 5월 초에는 ‘분노하는 사람들’이라 스스로 칭하는 젊은이들의 시위가 유럽을 뒤흔들었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첫 시위는 높은 실업률(40%의 청년 실업률), 공공부문 정리해고와 사회서비스 축소로 이어진 몇 번의 긴축 조치와, 이러한 조치로 비난받은 집권 사회민주당에 대한 불만 등에 대응하여 5월 15일 스페인에서 발생하였다. 시위는 마드리드의 푸에르토 델 솔 광장(태양의 광장) 및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플라자에서의 텐트 농성으로 이어졌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8월에 경찰이 철거할 때까지 정치계급의 특권 철폐, 실업 해결, 주거권 증진, 교육과 건강 및 대중교통 등 공공서비스의 개선, 금융산업에 대한 규제 강화, 군비지출 축소,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 등을 요구하는 몇 차례의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는 근거지로 이 농성투쟁을 활용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이 창조하고 싶었던 평등한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텐트촌을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다. 텐트촌의 관리에 대한 결정, 정치적 입장, 시위 전술은 ‘전체 총회’를 통한 합의로 만들어졌다. 모든 출석자들은 동등한 기반 위에서(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참여하고 발언하고 의사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요리, 청소, 기타 일상 업무는 높은 수준의 자발적 지원제를 통해 집단적으로 행해졌다. 아랍 세계의 봉기가 그러했듯이, ‘분노하는 사람들’의 운동 역시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긴축과 정치적 부패에 반대하는 이와 비슷한 텐트농성과 대규모 시위가 5월에서 8월 사이에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일어났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온라인, 오프라인 커뮤니티 역시 독일, 아일랜드 및 기타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발전하였다. ‘분노하는 사람들’의 가시적인 점거는 여름의 끝 무렵에 많이 없어졌지만, 운동 참가자들은 주거권에서 이민자 단속에 이르는 다양한 이슈에 관해 지역 총회를 개최하고 운동을 조직하면서 활동을 굳게 지속하고 있다. 더욱이 10월에 유럽 전역에서 군중 시위가 다시금 일어났다. 시위는 그리스에서 10월 19-20일과 12월 1일의 총파업을 동반하여 11월과 12월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들은 유럽연합의 구제금융 조건으로 실행된 세금 인상, 임금 삭감, 공공부문 정리해고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9월에는 미국이 대중 저항운동으로 충격을 받았다. 아랍의 봄과 ‘분노하는 사람들’에게 자극받은 젊은 시위대들은 스스로를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으로 부르며 맨하탄 중심가의 월스트리트에서 몇 블록 떨어진 주코티 공원에 집결하였다. 그들은 공식 요구사항 작성을 거부하며, 소수 금융자본가와 이들을 지원하는 정치인들(1%)의 손에 부와 권력을 집중시키는 미국의 정치-경제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서 “우리가 99%다”라는 구호를 만들어냈다. ‘분노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운동의 목표 자체로서 수평적이고 이상적 저항 형태를 강조하며 전체 총회를 주요한 의사결정 구조로 활용했다. 10월 초까지 점거운동 단위들은 미국 전역의 수백 개 도시에 존재했다. 열 명에서 200여 명에 이르는 텐트농성이 뉴욕, 오클랜드, 포틀랜드, 보스톤, 기타 미국 내 주요 도시들에서 경찰에 의해 대부분 철거된 11월 중순까지 어디에서든 지속되었다. 10월 15일 점거 시위는 세계 80개 이상의 나라에서 벌어졌고 99%라는 생각을 진정 지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 시위들은 미국에서 발생한 점거 운동과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 운동을 하나로 만들었다. 10월 15일 공동 행동의 날 호소는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이 처음 제안했고 나중에 미국에서 채택되었다. 그 날 포르투갈,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거리의 민중들은 애초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깃발 아래 조직된 이들이었다. 10월 15일에 이어서 캐나다, 영국, 노르웨이, 뉴질랜드, 기타 서구 몇 나라들에서도 텐트농성이 진행됐다. 이 나라들은 이전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운동이 퍼지지 않은 곳들이었다. 유럽에서처럼 미국에서는 대부분의 가시적인 점거 텐트농성은 없어졌지만 점거 시위대들은 지역 총회를 개최해서 예산 삭감, 주택 압류, 개인 부채, 경찰 폭력 문제를 포함하여 수많은 이슈들에 관한 운동을 계속 조직하고 있다. 운동의 성격 2011년 대중운동은 지역과 국가마다 매우 달랐고 같은 국가 내 도시들 사이에서조차 달랐다. 예컨대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긴축 조치들의 철회를 위한 구체적 요구안을 만들었지만 미국의 점거 운동은 공식적 요구나 공식적 강령 개발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무라바크 퇴진 이후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들은 정당 건설에 매진해서 11월 말과 12월 초에 실시된 총선에 참여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스페인에서 실시된 총선에서는 많은 ‘분노하는 사람들’이 선거를 거부했다. 뉴욕의 점거 텐트농성은 주로 조직적 배경 없이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이들로 구성된 반면 워싱턴의 점거 시위대들은 환경, 사회정의, 반전 단체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차이점을 가진 2011년의 각기 다른 운동들은 몇 가지 두드러진 유사점을 보인다. 이는 이 운동들을 동일한 국제적 현상의 일부로 파악하는 근거를 제공한다. 우선, 이 세 가지 운동 모두 사회 경제적 불만이 쌓인 결과로 형성되었고 급격히 정치적 목표를 발전시켰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물가 폭등과 공식 경제의 저발전, 유럽에서 사회서비스 축소와 증세, 미국에서 은행과 기업에 대한 대규모 구제금융 및 개인 부채의 증가, 세 지역 모두에서의 높은 실업률은 처음에는 시위대를 거리로 나서게 했다. 그러나 단지 불만에 쌓인 시위에 그치지 않고 아랍세계에서 경제적 불만과 결합된 장기간의 정치적 억압은 시위대를 독재 체제의 타도를 요구하도록 추동했다. 유럽에서는 ‘분노하는 사람들’의 요구가 긴축조치 철회로 집중되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금!”으로 대표되는 것처럼 매우 정치적인 비판으로 나아갔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부채위기에 대한 책임이 있는 정치인들을 면책하고, 권력이 있는 거대 기업과 IMF, 유럽중앙은행과 결탁하는 정치 시스템의 변혁을 추구했다. 상황은 미국에서도 유사하다. 점거 시위대들은 일자리 창출을 위한 예산지출과 글래스 스티걸 법 재도입뿐만 아니라, 기업 로비 철폐를 위한 선거시스템 개혁을 촉구하는 ‘비공식적’ 언론을 대거 만들어냈다. 나아가 시위대들은 텐트농성을 일종의 정치적 선언으로 간주했다. 이 세 가지 사안에서 무엇이 진정한 민주주의인지, 왜 정부는 민주적이지 않은지 명확히 대비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 세 지역에서 저항운동은 전통적 좌파에 친숙한 중앙집중적 조직 형태와의 단절을 드러낸다. 그들은 좌파 정당과 조직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개인들의 높은 참여로 온라인 사회관계망을 통해 주로 조직되었다. 미국과 유럽의 운동 지도부들은 전체 총회 구조, 화장실에서 선전홍보에 이르는 일들을 다루는 실무팀을 통해 광장 텐트농성에서 창조된 수평적이고 자발적인 문화를 자랑스러워했다. 미국과 유럽 지역에서는 중앙집중을 반대하고 다양한 관점과 경향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드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미국에서 이러한 환경은 개인주의를 숭배하고 위계체제와 보편적 사회변혁 이데올로기(예컨대 마르크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가진 사회에서 자란 미국 중산층이나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있어 핵심적이었다. 이집트 혁명의 지도부들 또한, 미국의 경우보다는 덜 강조하지만, 무바라크 퇴진 이전에 타흐리르 광장에 넘쳐났던 이와 비슷한 평등주의와 자발주의의 분위기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2011년의 운동들이 공공장소에 대한 점거뿐 아니라 운동의 이상적인 재창조도 중심에 두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운동들이 그들이 표현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에 항상 따랐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폭력적인 시위전술 구사 여부를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져 시위 역량이 축소되는 사례도 있었다. 미국의 점거 운동은 유색인과 이민자 같은 경제위기의 최대 피해자들의 지도력 육성은커녕 동등한 참여조차 촉진하지 못했다. 게다가 많은 전통적 좌파들은 더 지속적인 조직형태와 더 명확한 강령이 없이는 이러한 새로운 대중운동들이 진정한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1년 운동들에서 확산된 수평주의적 성격은 어떤 측면에서 평가되느냐에 따라 최대의 장점 혹은 최대의 약점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와 함께할 가능성이 큰 새로운 형태의 운동을 나타내며 따라서 좌파가 많이 배워야 할 운동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지막으로 2011년의 운동들은 서로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었고 지역적, 국제적 규모로 발전하였으나, 또한 강력한 일국적 성격을 유지하였다.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튀니지와 이집트 민중 봉기로부터 자극을 받았다. 뉴욕 점거운동을 기획했던 사람들은 스페인과 그리스에서 벌어졌던 것과, 규모는 다르더라도 그 성격이 유사한 운동을 만들고 싶어했다. 또한 초기 기획회의에 참가한 이들은 전략과 전술에 관한 중요한 참조점으로 타흐리르 광장을 언급하였다. 미국 무정부주의자들은 운동 경험을 공유하고 서로 배우기 위한 목적으로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그리스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각기 다른 지역의 시위대들은 서로 메시지와 지지 영상을 주고 받으며 그들이 똑같은 99%의 일부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랍과 유럽, 미국에서 나왔던 많은 담론은 실업, 빈곤, 긴축조치, 정치부패와 같은 일국적 이슈의 틀 안에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와 미국의 개입이라는 지역적 문제가 중동과 북아프리카 봉기의 배경이 되었지만 이 투쟁들은 일국 독재체제에 대한 요구를 강조했고 국가적인 사회경제적 개혁 요구에 더욱 초점을 맞췄다. 그리스 민중들의 분노는 ‘트로이카(유럽위원회, 유럽중앙은행, IMF)’가 요구한 긴축조치에 동의한 그리스 정부를 향한 것이었지 이러한 지역적 국제적 기구들 자체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의 전통적 좌파들은 지역적 반자본주의 운동의 전망을 위해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하는 것의 의미를 논의하지만, ‘분노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논의를 대개 무시했다. 대신에 그들은 지역 총회를 개최하고 공동 식당을 운영하고 공동체 공원을 건설하는데 매달렸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그들이 미래에 바라는 그리스 사회와 그리스 시민의 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미국의 점거 운동에서 나오는 선언들은 “모든 미국인들”을 위한 부채탕감과 일자리를 요구했다. 그들은 지구적 범위에서 금융자본의 규제 요구보다는 미국 정치시스템의 개혁 요구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다. 2011년 운동들의 일국적면서도 국제적인 성격은 이전 시기 반세계화/대안세계화운동과의 단절과 지속 양자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들과 그 사이의 연계 형성에 대한 주도력은 1999년 시애틀의 반WTO 투쟁과 그 이후의 세계사회포럼에 의해 형성된 네트워크의 바깥에서 온 것이다. 반세계화/대안세계화 운동은 국제회의(WTO, IMF, G7/8) 대응 투쟁 중심으로 구체화된 반면 이 새로운 운동들은 일국 정부에 더 초점을 맞추면서 이러한 기구들을 대개 무시했다. 그러나 각 대륙을 가로지르는 동일성-우리가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고 비슷한 적들과 싸우고 있다는 의미에서-은 어느 때보다 생생하며 서로 배우고 공유하려는 의지도 그러하다. 운동의 영향 세 지역 모두에서 민중들의 운동이 상당한 정치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아랍권에서 민중봉기는 두 독재정권을 물러나게 했고 다른 정권들에서 유의미한 정치적 자유와 사회 개혁을 쟁취했다. 그러나 리비아에서 내전과 나토 폭격이 지속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아랍권의 운동은 완전히 성공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민중운동이 정치적 개혁을 요구하면서 과도정부에 맞서 지속적으로 싸워 왔다. 튀니지에서는 새로운 연립정부가 설립되었지만 이집트 민중은 완고하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군부정권에 맞서 계속 투쟁 중이다. 그러나 군부정권의 지속적인 권력 장악에도 불구하고 무바라크의 퇴임 이후 좌파세력의 정치적 활동은 활발해졌다. 1월 이후에 여러 사회주의 정당과 조직들이 공공연한 활동을 시작하거나 새롭게 만들어졌다. 그 중 이집트노조총연맹(FETU)에 의해서 창당된 민주노동당(DWP)은 이집트의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1)기업의 재국유화와 노동자들이 정한 관리자에 의한 운영, 2)사유화와 독점화 촉진 정책 철회, 3)최저임금 인상, 4)모든 종교적 신념에 대한 존중, 5)종교, 피부색이나 성별에 기반한 모든 차별 철폐라는 다섯 가지 요구를 내걸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타 사회주의 정당 및 조직들과 ‘좌파세력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서 ‘사회주의세력연합’이라는 사회주의 노선을 결성하였다. 또한 일부 사회주의 정당들은 새롭게 창당된 자유민주주의, 사민주의 정당들과 ‘혁명은지속된다’라는 선거연합을 결성하였다. 선거연합은 11월 초 1차 총선에서 하원 7석 달성이라는 큰 성과를 내기도 했다. 아직도 영향이 크지 않지만 이집트의 사회주의·좌파운동은 젊은 층의 지지를 천천히 얻어나가고 있다. 타흐리르 광장 활동가와 달리 유럽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선거청지를 대체적으로 피해 왔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서 대규모 대중 집회는 노동자의 파업과 더불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와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가 궁극적으로 퇴임하는 데 기여했다. 세금 인상과 공공지출 삭감 정책을 막지 못했지만 두 나라의 대중운동이 대규모 시위를 동원하여 권력을 이어받은 과도 정권을 계속 압박하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분노하는 사람들’이 새롭게 도입된 통행료, 지하철 요금과 재산세의 보이콧을 조직하였다. 일부 ‘분노하는 사람들’은 선거를 보이콧 하였지만 그들의 운동은 좌파 정당이 강화될 수 있는 환경을 형성하였다. 이번 선거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집권당인 중도 성향의 사회노동당이 보수적 성향의 국민당에 참패한 것이다. 반면 국회에서 2석밖에 없던 좌파연합인 통일좌파(United Left)는 8석을 더 얻게 되었다. 그리스에서 전반적인 좌파정당의 지지율 또한 급상승하여 30%에 달한다. 미국에서 점령운동은 금융위기에 대한 책임이 왜 금융자본에 있는지 설득력 있는 설명을 시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이들의 설명은 티파티(Tea Party)의 ‘큰 정부가 개인의 자산과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을 대체하고 있다. 민주당은 재산 격차의 심화에 대한 점령운동의 비판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민주당은 다가오는 선거에서 점령운동이 가지는 잠재적 영향력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에 있어서 점령운동이 어떠한 영향이 끼칠 것인가는 아직 불투명하다. 민주당이 점령운동과 99%의 대변인으로서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점령운동의 선거정치에 대한 거부감과 오바마 정권에 대한 불만이 공화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지 이 시점에서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점령운동이 미국에서 정책결정 과정을 더 좌파적인 방향으로 추동할 능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점령운동은 이미 오하이오 주의 공공부문 단체교섭권 제약 법안을 폐지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바 있다. 2011년 대중운동은 좌파 정치운동을 활성화했을 뿐 아니라 노조운동에 힘을 실어주었고 일부 지역에서 노조운동과 상호 강화하는 관계를 맺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노동자의 파업은 벤 알리와 무바라크를 굴복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 혁명이 진행되는 와중에 이집트 민주노조들은 이집트노동조합연맹(FETU)을 결성해 국가가 통제하는 이집트노총(ETUF)에 도전하였다. 무바라크 정권 시절에 ETUF은 유일한 합법 노총이었고 시위노동자를 회유하고 탄압하는 기능을 하였다. 혁명 이후에 ETUF가 많이 약화된 반면 FETU는 조합원을 배가하고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또한 위에서 DWP에 대해 언급했듯이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처음으로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리스에서 그리스노총(GSEE)은 긴축정책 반대운동에 앞장 서 왔고 7차례의 총파업을 조직하였다. 그리스 노조들은 ‘분노하는 사람들’과 협조하여 총파업에 돌입할 때마다 수만 명의 시위대를 조직하였다. 저항의 분위기 속에서 유럽 다른 나라에서도 노동자의 투쟁이 활발해졌다. 11월 24일 포르투갈 노조들이 1988년 이후 최초의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6월 이후 영국 노동자들은 1926년 이래 가장 큰 파업을 조직했다. 미국노조들도 평소에 파업에 대해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에 거쳐 길거리로 나섰다. 미국노총(AFL-CIO)이나 서비스노조(SEIU), 화물운송노련(Teamsters), 통신노조(Communication Workers of America)와 같은 강력한 노동조합 조직들이 운동에 물질적, 재정적 지원을 하고 자신들의 온라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점령운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지지를 표명하고, 이 운동의 요구를 알려내었다. 노조 조합원들은 여러 도시에서 점거 시위자들과 함께 행진을 벌이거나 진행 중인 노동자 투쟁을 환기시키며 일자리 창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과도한 경찰력 사용에 대한 반발이 특히 심했던 오클랜드에서는 점거 시위자들이 11월 2일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요청했고(미국에서는 1940년대 이후로 찾아볼 수 없던 일이다) 노동조합은 이에 화답했다. 비록 11월 2일 시위가 총파업 수준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이 날 거의 5%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작업을 멈추었다. 노조원들과 점거 시위자들은 또한 미국의 5대 항인 오클랜드 항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2011년 대중운동에 대한 평가 2011년에 아랍권, 유럽과 미국에서 발생한 대중운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몇 개월 전만큼 가시적이지는 않지만 지금도 점령운동과 ‘분노하는 사람들’ 운동 참가가는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고 아직도 대규모 집회를 동원할 능력이 있다. 이집트의 정치는 아직도 역동적이고 대규모 집회가 지속되고 있다. 2011년에 생긴 대중운동들은 2012년에 들어서면서 영향력을 계속 행사할 것이다. 물론 이 운동들이 정치·경제 체제를 변혁할 능력이 있는 반자본주의운동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과장일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부패, 탄압과 지나친 빈부 격차를 규탄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근본적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편 이러한 운동들은 이미 여러 나라의 정치와 정치적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노동자의 조직화와 정치적 표현을 활성화시켰고 급진적 좌파들의 활동과 입장을 위한 공간을 열었다. 더욱이, 기존 좌파조직들이 오랫동안 대중적인 동원에 실패한 가운에 수많은 대중들을 길거리로 불러내었다. 이러한 성과를 인식하면 한국에서 왜 유사한 운동을 하지 못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SNS과 점령운동의 담론을 빌려 대중적인 한미FTA 반대 운동을 촉발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대규모운동을 건설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2008년 촛불시위, 보다 최근에는 희망버스 등 우리도, 같진 않더라도 비슷한 형태의 운동을 경험했음에도 말이다. 결국 대중운동을 어렵게 하는 어떤 객관적인 조건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금융자본의 탐욕은 미국만큼 가시적이지 않고 긴축정책과 실업이 유럽만큼 고통스럽지 않다. 또 한미FTA의 효과를 피부로 느낄 때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그러나 중요하게 고려할 주관적인 요인도 있다. 특히, 우리는 2011년의 운동을 이끌었던 핵심 추진력을 잘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SNS 활용은 중요했고 ‘모든 곳을 점령하라’나 ‘우리는 99%’라는 슬로건은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광범위한 대중들의 참여를 유도한 핵심 요인은 아니다. 오히려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카이로에서 뉴욕까지 민중총회가 상징하는 수평적인 집회와 평등한 의사결정 방식, 사람들이 꿈꿔왔던 민주주의를 실제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주체들의 자신감 고취였다. 물론, 각 도시에서 똑같은 집회문화나 형식이 나타난 것은 아니다. 카이로에 적합한 운동 형태는 뉴욕에 적합하지 않을 수 있고, 카이로와 뉴욕의 운동방식이 서울에 꼭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울에 맞는 운동 형태를 찾아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임무다. 그것은 ‘조직화’란 무엇이고 ‘투쟁’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버리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세계의 좌파들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 급진적인 좌파조직, 노조, 노동자단체는 물론 2011년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대중운동들과 유기적인 관계맺기를 시도해야 한다. 이는 2012년 뿐 아니라 앞으로 수년 간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 남을 것이다.
2010년 4월 27일 신용평가기관인 S&P는 그리스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투자 부적격 등급인 BB+로 3등급 하향조정했다. 이 조치는 유로존 회원국과 IMF가 그리스에 대한 지원의사를 확정한 이후에 내려진 조치이므로, 그 여파가 상당했다. 이는 유로화를 사용하는 국가에 대한 최초의 투자부적격 사례로서, 신용평가기관들의 이와 같은 조치는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의 재정위기에 대한 시장의 불안감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같은 해 5월 2일 유로존 회원국들과 IMF가 단일 국가에 대해서는 사상최대 규모인 1,100억 유로의 구제 금융을 그리스에 지원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5월 10일 유로존 회원국들은 회원국에 대한 대출을 목적으로 하는 특수목적법인(SPV)인 유럽금융안정기금(European Financial Stability Facility, EFSF)을 설립에 합의하여, IMF의 지원금까지 포함하면 약 7,500억 유로에 달하는 유럽안정메커니즘(Europe Stabilization Mechanism, ESM)을 갖추게 되었다(표1).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 남유럽의 재정위기는 그리스에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로 번져갔고, 2011년 10월 유럽 정상들은 민간 채권자의 그리스 국채 손실부담률(헤어컷비율)을 50%로 상향조정하고 EFSF의 레버리지, 즉 EFSF가 채권을 매입하여 금융기관의 자본을 확충하고 이렇게 매입한 채권을 담보로 차입을 해서 다시 채권을 매입하는 신용차입을 가능케 하여 EFSF의 규모를 1조 유로까지 확대하기로 합의한다. [표 1] 유럽안정 메커니즘의 구조 그리고 같은 해 12월 9일 영국을 제외한 EU 26개국 정상은 연간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최대 3.5% 이하, 누적 공공적자를 60% 이하로 유지하지 못하는 회원국을 자동제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재정통합에 합의했다. ‘통화동맹’이었던 유로존이 ‘재정동맹’으로 한걸음 옮긴 것이다. 그리고 같은 달 21일 ECB(유럽중앙은행)가 새로 도입한 3년 만기 장기대출(LTRO) 입찰이 실시됐다. 3년 만기 LTRO는 ECB가 유럽의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A- 등급 이상의 유럽 국채를 담보로 이들에게 3년간 1%의 저리로 무제한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ECB의 대출프로그램 만기는 1년이 가장 긴 것이었다. 유로존 국가들의 부채 위기가 심화되면서 국채 수익률이 치솟자(국채 가격 하락) 유럽권 은행들은 신용시장 경색으로 유동성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ECB 장기대출 프로그램(LTRO)이 시행되어 국채 위기 안정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이날 스페인 정부가 실시한 3개월과 6개월물 단기국채 입찰은 56억 유로 규모를 발행해 목표치를 웃돌았고 발행수익률도 크게 떨어졌다. 참고로 앞서 ECB가 실시한 가장 큰 규모의 단일 대출프로그램은 2009년 6월의 4,420억 유로였다. 그러나 이러한 금융시스템 안전망 공급에도 불구하고 S&P, 무디스, 피치 등 국제 신용평가회사들은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AAA 등급 국가에 대해 신용등급 강등 위협을 계속하고 있다. 숨가쁘게 진행되어 온 유럽 재정위기의 전개를 제도적 측면에서 정리하자면 대략 위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재정위기에 대한 유럽 좌파의 분석과 입장을 정리하고 소개한다. 유로존에 내재한 근본적 모순 유로화 도입의 편익과 위험 전후 유럽의 통화제도는 미국의 달러화를 기축통화로 하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기반으로 구성되었다. 미국의 달러는 금의 가치에 고정되고 유럽 각국의 통화는 다시 달러를 중심으로 ±1%, 일시적으로는 ±2%의 변동을 허용하는 고정환율제로 운영되었다. 유럽 각국이 고정환율제를 선호했던 것은 1919-26년 변동환율제를 일시적으로 도입한 결과 무역수지 흑자를 위해 자국화폐를 경쟁적으로 평가절하하며 벌어졌던 화폐전쟁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였고 동시에 당시 공동농업정책(Common Agricultural Policy)의 성공을 위해서는 각국 농산물 가격의 안정이 절실히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대 독일의 경기과열과 그에 따른 독일정부당국의 통화환수 정책으로 인해 마르크화의 가치가 급등한 반면 프랑스 프랑화의 가치는 절하되는 현상이 벌어지면서 유럽 공동체 차원의 통화협력의 틀이 필요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EC 집행위원회는 EMU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통화통합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는데(베르너 보고서), 1971년 미국의 달러 불태환 선언으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하면서 베르너 보고서의 내용이 실제로 집행이 되지는 않았지만, 유럽 각국의 통화 통합을 위한 노력은 계속된다. 1970년대 초 EEC 6개국과 노르웨이는 일종의 공동변동환율제(joint float)를 채택하게 된다(달러화에 대해선 변동폭의 제한 없으나, 유럽 각국 화폐간에는 고정환율제). 유럽의 공동통화를 향한 시도는 1979년 유럽통화제도(European Monetary System)의 도입으로 한 단계 진전을 맞게 된다. 유럽통화제도의 특징은 외환보유고로서의 역할을 하는 유럽통화단위(European Currency Unit, ECU)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전의 체제와 차별화된다. 이러한 통화협력과 관세동맹의 출범으로 역내교역이 원칙적으로는 자유화되었으나, 규범과 제도적 차이로 인해 비관세 장벽은 여전히 존재하였고 이로 인해 국가 간의 시장은 분절현장을 보였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단일시장을 향한 논의가 지지를 얻으면서부터 단일통화 구축을 위한 프로젝트 역시 진전을 보이게 된다. 1991년 합의된 마스트리히트 조약(Treaty on European Union)은 유럽연합(EU)의 제도적 틀을 완성시키고 통화동맹의 완성을 위한 3단계 계획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게 되는데, 여기에 명시된 EMU의 원칙은 1) 통화정책의 주체는 ECB이며, 2)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운 ECB는 물가안정을 우선 목표로 하고, 3) 재정준칙을 기반으로 회원국들간의 경제정책 수렴을 목표로 하고, 4) ECU를 단일통화로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2년 영국의 고금리 정책으로 인한 경기침체는 파운드화에 대한 평가절하 압력으로 작용했고, 영란은행의 환율 방어 시도는 조지 소로스로 대표되는 헤지 펀드의 파운드에 대한 대규모 투기 때문에 실패한다. 결국, 영국은 1992년 9월 17일 유럽 환율 조정 메커니즘에서 탈퇴한다. 이러한 유럽적 차원의 외환위기를 겪으며 통화동맹에 대한 공감대가 더욱 절실해져 통화동맹 구축을 위한 프로젝트는 진전을 보이게 된다. 유로존의 모순: 불균형성 심화, 정책 제약 이러한 단일시장과 이를 위한 단일통화 사용을 통해 노릴 수 있는 명목상의 편익은 다음과 같다. 1) 교환비용의 감소: 환전비용의 감소로 인한 경제적 효과는 독일, 프랑스 같은 큰 국가에는 GDP의 0.1~0.2% 정도로 측정되며, 작은 국가들에서는 1%까지 나타난다. 2) 환율 불확실성 제거: 금융자본의 이동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명목환율은 경제력을 반영하는 실질환율로부터 괴리되는 것이 보통이며, 이러한 환위험 관리를 위한 정부나 개별 기업의 헤징은 부가적인 비용을 발생시킨다. 또 개별통화에 대한 대규모 환투기에 대한 직접 노출을 피할 수 있다. 3) 투명성 제고: 재화에 대한 직접적 가격비교가 가능해져 일물일가 법칙에 가까운 가격체계가 나타난다. 이러한 편익에 대비해 단일통화 사용이 갖는 비용은 다음과 같다. 1) 독자적 통화정책의 상실: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명목환율의 변동을 통해 대외불균형을 교정할 수 있는 수단을 상실한다. 2) 독자적 재정정책 제약: 통화정책 이외에도 재정정책의 독립성 또한 상당히 제한된다. 각 회원국들간의 정책 수렵을 요건으로 하는 통화동맹의 특성상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수준을 규정하는 1997년 성장-안정 협약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통화동맹 구축의 함의는 세계시장에서 통용되는 지불과 축장(보유통화)의 수단인 세계통화를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안정적인 회계단위를 창출하여 금융화 아래서 유럽 산업 및 금융자본의 이해에 복무한다. 중심부 국가의 자본으로서는 역내교역증가의 수혜를 입을 수 있고, 달러만이 독점적으로 누리던 발권이익을 노려볼 수 있기 때문이며, 자국의 통화가치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주변부 소규모 국가로서는 상존하는 외환위기의 위험성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 2] 유럽 각국의 명목 단위 노동비용 유로화가 출범하고 유로존의 모든 통화정책을 관장하는 ECB가 재정적자와 총 공공부채 비율에 대한 상한선을 설정하였으나, 이를 준수할 것인지는 개별국가에 맡겨두었다. 문제는 통화 및 재정 정책에 대한 제약이 설정된 아래서 한 국가의 경쟁력은 생산성 향상과 노동 비용 절감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로존 전체에서 노동자의 임금수준과 노동조건을 두고 “바닥을 향한 경쟁”이 심화되었다.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중심부 유럽과 주변부 유럽으로의 분화의 핵심에는 (노동에 대한 통제를 기반으로 한) 독일의 경쟁력 향상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경쟁력의 근원은 전적으로 임금 제약을 통해 독일 노동자들의 명목임금을 낮은 수준으로 유지했기 때문이다(표2).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과 같은 중심부 국가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희생하여 획득된 경쟁력은 중심부 국가들의 경상수지 흑자와 주변부 국가의 적자로 귀결되며, 주변부 국가는 중심부 국가로부터 자본을 차입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주변부 국가의 부채는 증가한다. 이러한 격차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2007년 금융위기 전까지는 거시경제적으로는 물가가 안정되고, 유럽 각국의 국채수익률이 수렴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표3) 유로화 도입을 통한 리스크가 감소 효과가 나타났고, 역내 교역이 크게 증가하여 독일이 세계 2위의 수출국으로 부상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국가채무 역시 일본이나 미국의 그것을 하회하는 수준에서 관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07년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각국 정부는 재정지출을 증가시킬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이미 대외 불균형과 중심과의 격차가 확대되어가던 유럽 주변부 국가들의 재정건전성은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그리스가 숨겨온 재정적자 있음을 인정하면서 남유럽 국가의 재정 안정성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는 가운데 유럽 각국과 대형금융기관들의 신용등급이 줄줄이 강등되는 도미노현상이 벌어졌다. 2011년 12월 현재 유로존에서 최상위 트리플A(AAA) 국가는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핀란드, 네덜란드 등 6개국 뿐이다. EU는 재정위기 국가에 대한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가혹한 구조조정 프로그램 시행을 요구했고, 이미 졸라맨 허리띠를 더 졸라매는 ‘긴축’은 ‘99%’ 서민들에게 고통을 안겼으며, 국가시스템의 변화까지 초래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는 추가긴축 재정안을 둘러싼 정치적 혼란으로 정부가 무너지고 과도내각이 들어섰으며, 스페인에서는 실업률이 20%선(청년실업 약 45%)을 넘어서면서, 이른바 ‘분노한 사람들’의 대규모 시위가 수도 마드리드를 넘어 EU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유럽은 청년세대가 부모세대보다 생활수준이 떨어지는 상황을 맞게 됐고, 프랑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비유로존 국가인 영국에서도 은퇴연령과 연금전액수령 연령이 늦춰지면서, 유럽인들은 더 오래 일하고, 더 적은 연금과 복지혜택을 받는 새로운 변화에 직면하게 됐다. [표 3] 독일 국채 기준 주요국채 스프레드 문제는 주변부 국가의 채무불이행은 곧바로 중심부 은행의 건전성을 위협하고, 나아가 또 다른 세계 경제 위기의 단초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변부 국가의 채무위기 극복은 중심부 국가에게도 사활적 이해가 걸린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ECB는 원칙을 어기면서까지 주변부 국가 부채를 유통시장에서 구매하였고, 중심부 국가들은 공동 지급보증을 통해 위기국가들이 공개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의 결과 2010년 4/4분기와 2011년 1/4분기 그리스의 GDP 성장률 저하와 실업률 증가는 1930년대 대불황 시기 미국의 그것에 필적하는 것이었다. 이는 또다시 부채 부담을 증폭시키고 건전성 위험을 심화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해법은 독일의 지배계급의 이해에는 정확히 부합한다. 은행위기를 회피함으로써 유로의 세계통화로서의 지위를 유지시키고, 주변부 국가의 디폴트에 따른 비용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행에는 유동성을 공급하고, 주변부 국가에는 긴축재정을 압박한다. 이러한 전략의 성공 가능성 역시 낮기는 하지만, 만약 성공하기만 한다면 독일은 명실상부한 유럽 자본주의의 패자로 등극하며, 제2세계 화폐에 대한 통제권을 쥐게 된다. 유로화 논쟁: 유로존을 유지해야 하는가 탈퇴(혹은 해체)해야 하는가 유럽의 좌파 사이에서 일단 광의의 합의가 있는 해법은 다음과 같다. 1) 긴축재정 반대 2) 누진세/부유세 도입과 자본 통제 3) 은행의 국유화/사회와와 민주적 통제 4) 디폴트 후 민주적 통제 아래 부채 감사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구체적인 디폴트의 방식과 디폴트 이후의 전략에 있어서는 여러 상이한 입장이 제출되고 있다. 일단 좌파적 입장에서 재정긴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해법인 것은 당연하다. 재정긴축을 통해 노릴 수 있는 효과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긴축재정을 통해 채무 이행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얻어 자금조달 비용을 낮추어 재정위기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정긴축은 오히려 경기침체와 조세감소를 수반하여 지급여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또 하나의 효과는 인위적으로 디플레이션을 일으켜 임금을 억제함으로써 경쟁력을 회복하는 것인데, 이는 위기 극복 비용을 노동자 민중에게로 전가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유로존 해체? 부채위기에 대한 유럽 좌파 진영의 대응을 구분하기 위해 먼저 유로존 유지와 해체라는 양 스펙트럼으로 거칠게 나누어 보자. 먼저 유로존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주장을 살펴보면, 이러한 주장은 유럽좌파당과 유럽 전반에 걸쳐 널리 퍼져 있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그 적극성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 유로존 유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입장은 유로화의 위기가 소위 “사회적” 유럽의 위기를 의미하고, 유로존의 해체는 반동적인 국민국가로의 퇴행이라는 점 때문에 유로존을 유지시키는 것이 노동권과 복지를 지키는 길이라는 입장이다. 또 다른 흐름은 유로존이라는 구상 자체가 민족주의와 고립주의적 위험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유로존 유지를 정치적 목표로서 적극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이미 유럽의 인민이 공동체 구조 안에 깊숙이 포섭되었기 때문에 이의 붕괴 대신 유럽을 근본적으로 (아래로부터) 재설계할 것을 주장한다. 전자의 입장을 유럽좌파당 내의 전반적 흐름이라고 한다면, 후자의 입장은 제4인터내셔널의 후송(Michel Husson)이나 구 LCR의 사마리(Catherine Samary), 또 다른 IS계열 Socialist Resistance지의 오나란(Ozelam Onaran) 등이 대표한다. 후자의 입장에서는 ‘위기’의 원인을 유로에 내재된 모순이 아니라 “EU의 약한 고리에서 작동하는 투기적 금융”에서 찾는다. 이들의 주장은 대규모 디폴트 선언을 통해 범유럽적인 중심과 주변부 노동자들의 은행과 EU기구들에 대항한 투쟁을 촉발하고, 은행 사회화를 통해 ECB가 실질적으로 유럽의 중앙은행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탈바꿈시키자는 것이다. 부채에 관한 입장에서도 전자는 “채권자 주도”의 부채탕감(헤어컷)을 주장하는데, 이는 채권자(중심부 은행, 중심부 국가)의 합의를 통한 부채 탕감이다. 이 경우 충분한 규모의 부채가 탕감될 수 있을 지가 미지수이다. 오나란 등은 “아래로부터의 디폴트”를 주장하는데 이는 “채무자 주도”의 일방적인 디폴트 선언을 의미한다. 문제는 이 경우 디폴트 비용을 중심부 국가, 그 중에서도 중심부 국가의 은행들이 부담하게 될 수 밖에 없는데, 은행이 여전히 국민국가적 경계 속에서 활동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중심부 은행의 부담은 중심부 국가 정부와 나아가 그 국민들이 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연 주변부 국가의 일방적인 디폴트 이후 유로존의 해체는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때 기존의 유럽공동체의 구조가 유지될 수 있을 지는 낙관할 수 없다. 유럽적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되는 기술적 경로는 ECB의 대출(수량 완화)과 유로본드 발행으로 정리할 수 있다. 수량완화와 관련된 근본적인 논쟁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먼저 ECB의 주변부 국가의 부채 인수를 놓고 보자면, 1) ECB가 채무를 평가절하된 가격으로 인수하는 경우, 주변부 은행의 자본을 확충해야 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으며, 또 이를 액면가로 인수한다고 하면 그 위험부담은 ECB, 따라서 공적인 부담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는 중심부 국가 노동자들의 세금으로 충당될 수 밖에 없다. 유로본드의 경우에도 이러한 논리가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유로본드는 개별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채권을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재정통합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 전체가 위기에 빠지는 경우를 상상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유로본드가 발행되면 원칙적으로는 유럽 각국은 1차 시장에서 국채를 발행하지 못하거나, 만기연장 차환(롤오버, 만기 때 현금지급 대신 새로운 채권을 발행해 만기를 연장하는 것)을 하지 못해 재정위기에 빠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또 국채금리를 낮추어 재정조달 비용이 감소한다. 이 경우 해당 국가의 국채 스프레드(기준채권, 미연준국채나 독일 국채와 해당 국가의 국채와의 금리 차이, 스프레드가 높을수록 국채의 발행비용에 대한 부담이 높아진다)는 그리스나 이탈리아, 스페인과 같은 국가의 위험도를 반영하기 때문에 독일이 단독으로 국채를 발행할 경우에 비해서 높아 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독일이나 프랑스는 이를 극렬히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며, 더욱이 유로화 사용국의 공공채무에 대해 EU의 재정지원을 금하고 있는 조약에도 수정이 불가피하나, 각국의 국민투표시 통과될 지는 미지수이다. 또 ECB의 부채 인수는 세계 화폐로서의 유로화의 위상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이기 때문에, 독일이나 프랑스 지배계급을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유로존 유지를 전제로 한 입장과는 반대로 유럽 좌파당의 코스타스 라파비사스(Costas Lapavitsas)는 부채 위기에 대한 “급진적” 해결책으로 유럽 공동체의 해체를 주장한다. 유로화를 세계통화로 만들려는 시도는 중심부나 주변부 국가 노동자에게 모두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으며, 노동조건의 하락만을 불러오기 때문에 중심부 국가 노동자들은 통화 공동체로부터 부과되는 제약을 투쟁을 통해 거부해야 할 뿐 아니라, 금융통제를 통해 은행을 국유화하고 채무 이행을 위한 세금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독일이 수출중심 성장전략을 버리고 내수 중심의 정책을 취할 필요가 있는데, 따라서 통화정책 결정권한을 ECB로부터 되찾아 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변부 국가에서는 채무자 주도의 디폴트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때문에 금융시장 접근권 상실, 스프레드 급상승 등의 어려움을 겪겠지만, 노동자 주도의 부채감사 위원회를 설치하여 부채를 분류하여 이를 처리하고, 디폴트 선언에 따른 필연적인 유로존 탈퇴 이후 통화제도의 변화에 따른 충격이 은행위기로 번져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은행 사회화와 민주적 통제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새로운 화폐 도입에 따른 평가절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나 이를 통해 생산부문이 활성화 되고 수출 증대를 도모할 수 있으며, 수입물가 상승으로 인한 소득하락은 부의 재분배를 위한 누진세/부유세 도입을 요구함으로써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먼저 평가절하를 통해 과연 급속한 경쟁력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궁극적으로는 생산성에 종속되는 대외경쟁력을 평가절하만으로 역전시키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반론은 유로화 탈퇴에 이은 평가절하는 구매력 하락으로 이어져 실질임금이 저하되는 효과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가절하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변부 국가의 평가절하에 따라 얻어지는 일시적인 경쟁우위는 뒤이은 중심부 국가 통화의 평가절하로 상쇄된다는 것이다. 또 유로존 탈퇴를 전후로 한 은행의 대량인출 사태(뱅크런)의 위험도 있다. 2001년 말을 전후해 발생한 아르헨티나 외환위기가 역사적 사례인데, 당시 아르헨티나는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 속에 미 달러화의 1:1 고정환율 제도의 붕괴 가능성이 부각되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금리를 인상하고 재정긴축을 단행하는 등 이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기존 페소화 예금을 달러화 예금으로 바꾸려는 행렬이 줄을 이으면서 결국 외환위기를 맞이했다. 유로존 탈퇴에 대한 이 같은 현실적인 비판 이외에 후송(Husson)은 유로화를 둘러싼 논쟁 자체가 진정한 쟁점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오나란 등과 같이 후송은 현재 유로화의 폐기를 주장하는 라파비사스와 사피르(Jacques Sapir) 등이 전제하고 있는 (자국통화로의 복귀에 이은) 평가절하를 통한 경쟁력 회복은 재분배, 임금인상, 사회시스템의 개조, 자본통제, 은행에 대한 사회적 통제 등이 선행되어야 가능하며, 유로화를 탈퇴하는 동시에 투기의 위험에 노출되고, 유로화 탈퇴가 노동에 호의적인 측면으로의 역관계 전환을 보장하는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한다. 후송은 오히려 유로존 탈퇴는 은행과 사회의 민주적 통제 및 재구조화를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 중 하나일 뿐이며, 그 자체로 적극적인 좌파의 전략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수량완화 정책 프랑스 공산당, 체코 사민당, 독일 좌파당 등이 소속된 유럽 좌파당의 의장단(presidium)은 2011년 11월 22일 공동성명을 통해 긴축재정정책 철회, 부채 탕감 및 남은 부분의 ECB로의 이전, ECB 또는 특별기구를 통한 유동성 공급을 주문하였다. 한편 2011년 12월 3년 만기 LTRO의 무제한 공급이 시작되면서 인플레이션을 둘러싼 쟁점이 부각되었다. 인플레이션은 국가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다. 1960년대 미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대규모 재정적자가 발생했지만, 미국 정부의 순 부채는 오히려 감소했다. 이는 바로 인플레이션 때문인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국가의 조세수입은 증가하며, 또 기존 채권의 가치는 큰 폭으로 절하되어 국가부채의 부담이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재정긴축 정책 등의 시행을 조건으로 IMF, EU, ECB가 그리스 등에 제공한 구제금융에서 보여지듯 유동성 공급을 요구하는 것 자체는 결코 민중들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또 수량완화에 이은 인플레이션은 거의 전적으로 임금에 수입을 의존하는 대다수 민중들의 실질 임금을 저하시킬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위기의 해법이 가지는 딜레마 2011년 한 해 동안 EU 회원국들 중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곳은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핀란드, 덴마크, 슬로비니아 등 6개국이다. 추가 긴축재정안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를 제안했다가 물러난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정권과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정권까지 합치면 8개국이다. 과도정부가 들어선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도 조기총선 결과 야당이 승리할 경우, 소위 PIIGS에서 모두 정권교체가 이뤄지게 된다. 이미 민중들은 기존의 세력과 체제가 대안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의 극우정단인 대중정교회(LAOS)가 그리스 내각 구성에 참여한 것을 보면, 이러한 민중들의 움직임이 유럽적 차원의 연대가 아니라 반동적 민족주의, 퇴행적 고립주의로 귀결될 가능성도 다분하다 하겠다. 문제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입장들이 진정한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자본통제, 재분배, 산업정책, 국가 재구조화와 같은 광범위한 경제/사회적 프로그램 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거나, 위기 극복의 전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의 시행을 위해서는 중심부와 주변부 국가 민중들의 연대, 현재의 계급 역관계를 뒤바꿀 아래로부터의 흐름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유럽에서 좌파들의 위기 해법에 대한 논의만이 아니라, 정치적 운동의 동향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북한 사회는 변화할 것인가? 혹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권력승계 과정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조건’에서의 권력승계라고 말한다. 후계자 김정은이 공식적인 승계과정에 돌입한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뿐이고(후계자 수업은 길게 잡아도 3년 정도로 볼 수 있다), 권력의 중추로 떠오른 김정은-장성택-김경희는 결코 이상적인 ‘드림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북한은 어떤 변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인가? 그 전망은 여전히 추측에 지나지 않겠지만, 북한의 객관적 현실을 파악하면 몇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에서 후계자의 현재 지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당내 직함은 당 총비서, 당 중앙군사위원장, 정치국 상무위원장 겸 정치국원, 당 비서국 내 조직담당 비서 겸 조직지도부 부장이었다. 한마디로 김정일 위원장은 당의 모든 요직을 겸직하였다. 그에 따라 당의 의사결정 김정일 위원장에게 고도로 집중되었고, 당 규약을 따르지 않는 편의적이고 변칙적인 당 운영이 일상화되었다. [%=사진1%] 조선노동당 중앙조직의 조직구조는 상식적으로 볼 때도 매우 변칙적이다. 중앙위원회 위원장의 역할은 제한적이고 중앙위원회 산하 비서국 총비서가 당수 역할을 한다. 중앙군사위원회의 위상은 중앙위원회와 동급이다. (중앙위원회 산하의 군사위원회가 당 대회 승인 없이 중앙군사위원회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선군정치’가 현실 권력구조에 반영된 형태다.) 당 구조가 변칙적이기 때문에 당 내 권한 충돌이 발생할 여지가 큰 게 사실이지만, 김정일 위원장이 모든 핵심 요직을 장악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2010년 개최된 당 대표자회의에서는 당 규약을 개정해서 총비서가 중앙군사위원장을 겸직하도록 규정해서 권한 충돌을 예방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1980년 이후로 30년 간 당 대회가 개최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이 사실상 마비 상태에 있고 김정일 위원장이 당의 의사결정을 독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후계자 김정은이 당에서 지도권을 확립한다는 것은 당을 정상화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달리 말하면, 김정일 위원장이 조직지도부 활동을 통해 유일지도체제를 수립하면서 당권을 장악했던 과정에 비하면, 김정은은 당을 사실상 ‘재건’해야 한다는 더욱 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게다가 김정은이 현재 당 내에서 공식적으로 맡은 직함은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뿐이다. (조직지도부 역할을 수행한다는 보도도 있기는 하다.) 따라서 김정은이 당 내에서 맡은 역할이나 지금까지 수행한 임무도 아직도 지극히 제한적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김정은이 과거 김정일 위원장이 당에서 맡은 모든 역할을 빠른 시일 내에 실질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권력 배분, 곧 ‘집단지도체제’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당의 운영이 재활성화되고 공정한 규칙이 수립되어야 하며, 이는 당의 실질적 체질 변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할지는 현재로서 예상하기 어렵다. 국가 체계 내에서 후계자의 현재 지위 김정은은 국가 체계 내에서는 어떤 공식 직함도 맡지 않고 있다. (국방위원회 지도원으로 활동한다는 보도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국방위원회 위원은 아니다.) 올해 2011년 4월에 개최된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은이 국방위원회의 공식직함(부위원장)을 맡지 않겠냐는 전망이 있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김정은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인지도 아직 불확실하다. [%=사진2%] [%=박스1%] 북한 헌법 상 최고인민회의가 최고주권기관이다. 최고인민회의는 ‘최고영도자’인 국방위원장의 선출권과 소환권을 지닌다. (국방위원장의 임기는 5년이고 연임에 관한 규정이 없기 때문에 특정인이 국방위원장 직을 언제까지라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최고권력기관은 국방위원장과 그를 보좌하는 국방위원회다. 이는 김일석 주석 생존 당시의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국방위원장은 국가의 전반 사업을 지도하며, 조약의 비준, 폐기권을 행사하며, 국가의 비상사태, 전시상태, 동원령을 선포할 수 있다. 김일성 주석 생존 시 국방위원장이라는 직위는 국가주석의 지도를 받는 중앙인민위원회 산하의 위원회 중 하나였다. 김정일은 1990년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1993년 위원장에 취임했다. 김일성 주석 사망 후 국가주석은 공석이 되었고, 국방위원장이 사실상 국가주석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다가 2009년에 와서야 헌법을 개정해서 국방위원장의 역할과 임무를 명문화했다. 과거 권력승계 과정을 보면, 김정일 위원장조차도 국가주석직을 곧바로 승계하지 못했고,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및 상임위원장)와 내각(및 총리)의 권한이 확대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 헌법개정을 통해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권한 중 일부가 국방위원장에게 이관되었다.) 따라서 현재 후계자 김정은이 국방위원장 직을 곧바로 승계할지는 불확실하다. 김정은이 어떤 경로를 통해 국가체계 내에서 성장할지 단언할 수 없으나 상당 기간 동안 권력의 거대한 공백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한 현실이다. 아마도 김정일의 권력승계 과정에서의 권한 분산보다 더욱 확대된 형태의 권한 분산이 불가피해 보인다. 미국과 중국의 대북정책 향후 북한 전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중국과 미국의 대북정책일 것이다. 북한 경제의 전반적인 대외의존도를 고려할 때 중국과 미국이 새로운 북한 체제에 향후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는 북한의 생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은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한 군사적 대책을 수립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의 태도는 ‘주시하고, 기다리고, 준비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한다면 그 출발점은 데프콘, 즉 전투준비태세의 격상이다. 한국전쟁 정전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항시적으로 테프콘 4가 발령되어 있는데 이는 ‘적과 대립하지만 군사적 행동 가능성이 낮은 상태’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로 데프콘 3으로 격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데프콘 3이 발령된다면 작전권이 한국군에서 한미연합사령부로 넘어간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미국은 데프콘 격상과 같은 방식으로 즉각 북한의 탈안정화를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으로 인해 대북정책 전반을 재검토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면, 미국은 누구를 접촉선으로 해야 할지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김정은을 중심축에 두고 접촉한다면 군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김정은의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고, 역으로 다른 자를 중심축에 둔다면 김정은이 무력화될 수도 있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누가 자신의 대화 파트너로 적절한지 정보를 획득해야 하며, 나아가 그 파트너의 기본 성향이 어떤지를 파악해야 한다. 미국은 바로 최근까지 식량지원과 핵 협상 재개 문제를 두고 북한과 접촉을 했지만, 이제 새로운 정권을 전반적으로 다시 파악하기 위한 시간을 설정할 것이다. 따라서 북미 대화는 얼마간 접촉이 유지되더라도 상당 기간 교착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현재 중국이 권력승계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는 것은 미국의 전략에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반확산을 핵심적 전략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의 ‘나쁜 행위’에 대한 제재가 필요한데, 지금까지 중국은 미국의 요구를 순순히 수용한 적이 없다. 미국은 시진핑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차기 지도부가 미국과 함께 북한 비핵화를 압박하기를 원하지만 중국이 종래의 방침을 순식간에 바꿀 것 같지는 않다. 북한이 핵보유 수준을 높이면서 중국(및 러시아)과 경제관계를 발전시킨다면 미국으로서는 북한을 압박하는 지렛대를 잃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북한의 변화 가능성은? 현재 북한 조선노동당의 상황을 볼 때 과거와 같은 유일지도체제가 실질적으로 수립되고 기능하리라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김정일 위원장의 권력승계 과정이 잠재적인 경쟁 집단, 개인을 제거하고 ‘유일’ 지도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이었다면, 현재는 후계자 홀로 당 구조와 운영을 정상화할 수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체계 내에서도 후계자가 국방위원장의 모든 권한을 곧바로 승계 받는 것도 상상하기 어렵다. 이미 김정일 국방위원장 하에서도 최고인민회의와 내각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권력분점이 불가피했다면, 현재 조건에서는 그러한 필요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과거 1953년 스탈린의 사망 후 그와 같은 카리스마적 권력자를 대체하는 방법은 집단지도체제였다. 즉 권력분점의 제도화였다. 하지만 집단지도체제 내부에서도 권력쟁투는 늘 발생할 수 있다. (스탈린 사망 직후 가장 유력한 권력자였던 KGB 베리야가 전격 체포되었고, 나머지 스탈린 측근들이 권력 배분을 통해 일종의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집단지도체제 내부에서 권력 쟁투가 발생했다. 흐루시초프의 개혁 노선의 실패 후 또 다시 ‘궁정쿠데타’ 형식으로 브레즈네프가 권력을 장악했다.) 따라서 당분간은 북한 정권 담당자들은 급격한 정치적·사회적 변동을 막기 위한 안정화를 추구할 것이고 권력배분을 모색할 수 있다. 그러나 집단지도체제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다. 이는 순전한 권력 다툼이라기보다는 정책 갈등을 계기로 비화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권력분점 속에서 정치적, 정책적 갈등의 표면화는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과정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정치엘리트들은 실질적 의미에서 대중동원을 철저히 배제하는 통치방식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에 엘리트 간 권력쟁투가 곧 체제 위기로 치닫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 북한에서 수령제가 확립되는 과정을 보면 수령의 직접적인 현지 지도를 매개로 당과 기업소에서 중간관리자의 관료주의, 보수주의를 공격하는 일종의 ‘대중동원’이 이뤄졌다. 과거 중국에서는 모택동과 유소기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건설 노선의 대립이 문화혁명과 대중투쟁을 매개로 내전의 위기로까지 발전된 적이 있다. 그러나 현재 북한은 당 내부의 문제를 진정한 의미의 대중동원, 대중운동의 형태로 제기하고 해결하는 과정을 배제하고 있다.) 또한 중국이 북한의 권력승계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면 지도부 내부의 첨예한 갈등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 수도 있다.
이번 이슈페이퍼는 한미FTA 이후 물 민영화 전망을 담았습니다. 한 줄로 요약한다면 상수도는 사실상 유보 목록이 아니고, 개방 이후 한국에서도 익숙한 기업인 맥쿼리 , 베올리아 등이 몰려올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문서를 참조바랍니다. --------------------요약 --------------------------- 한미FTA로 한국의 상수도 부분은 사실상 개방. 음용수 처리 및 공급 서비스에 대한 유보조항은 민간 공급이 허용되는 부분에서 적용되지 않는데, 이미 한국 수도법에서는 광범위한 지방상수도 민간 위탁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 이로 인해 민간위탁 부분에서 민간 기업과 같은 영업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수자원공사나 환경관리공단은 ISD와 내국민대우 의무에 따라 미국 물 기업에 의해 제소 당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나마 민간위탁 피해를 줄여보려 만든 환경부의 여러 규제들도 최소시장규제 의무에 따라 무력화될 가능성이 큼. 미국에는 세계적 물기업 대부분이 법인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한미FTA 발표와 함께 한국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될 것이며,이로 인해 한국 지방상수도 위탁 시장은 빠른 속도로 확대 될 것. 베올리아와 맥쿼리(템즈워터)가 한국 시장에 가장 빨리 진출할 것으로 보이며, 이미 미국에서도 민간위탁으로 인해 발생한 피해가 적지 않은 만큼 한국에서도 많은 분쟁이 발생할 것으로 보임. 물 민영화의 가장 높은 수준 중 하나인 장기 민간위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한미FTA 폐기와 함께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정부의 지방상수도 통합 위탁 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함.
출입국·외국인력 제도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이주노동자의 새로운 조직화가 필요하다 또 한명의 이주노동자가 죽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으로 또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불과 한 달 전 광주에서 베트남 노동자 2명이 경찰과 출입국의 단속을 피해 도망가다 죽었는데, 11월 8일 출입국의 단속 과정에서 중국 이주노동자 H(남, 44세)씨가 사망했다. 출입국 단속이 죽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진1%]H씨의 죽음은 특별히 비극적이다. 지난 11월 8일 H씨와 다른 중국노동자 3명이 김포에서 출입국 단속반원의 불심검문에 걸려 연행되었다. H씨는 200m가량을 도주하다 다시 붙잡혔다. 수갑 채운 상태에서 단속차량에 실렸는데 타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같이 있던 이주노동자가 단속반 직원에게 상황을 알렸지만 30분 정도가 지나서야 심폐소생술을 진행했고, H씨를 차량에서 내려 병원에 데리고 간 것은 증상이 나타난 지 1시간~1시간 반 후였다. 반성할 줄 모르는 출입국 부검결과 H씨는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의사는 H씨가 심장질환이 있었으며, 그 상태에서 수백 미터를 달렸으면 심근경색이 올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즉 단속으로 인해 도주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심근경색이 와서 사망한 것이다. 아마도 처음 증상이 나타났을 때 H씨를 병원에 데려갔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다. H씨의 죽음을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출입국은 책임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고 있다. 오히려 ‘경찰이 범죄자 잡다가 범죄자가 도망가다 사망하면 경찰이 사과하냐’는 식으로 책임과 사건의 비극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이주노동자에 대한 출입국의 잔인함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출입국의 비인권적인 태도만이 H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주노동자의 생명에 대한 경시는 출입국관리제도와 외국인인력관리제도에 구조화되어 있다. 출입국·외국인력 제도의 본질 출입국관리법, 고용허가제 등 한국의 전체 출입국․외국인력 제도는 근본적으로 출신국가와 계급 차이의 차별화를 기초로 하고 있다. 선진국에서 온 동포와 거액을 투자할 능력이 있는 자에게 장기 체류할 기회를 제공한다. 반면 제3세계에서 이주하고자 하는 자를 ‘외국인근로자’고 규정해 체류기간과 국내 활동범위를 엄격히 제한한다. ‘외국인’이라는 지칭은 민족국가의 외각에 있다는 뜻으로, 국가가 필요에 따라 관리하고 배제할 수 있는 존재다. ‘근로자’는 노동력 필요에 따라 국경 안쪽으로 도입된 자로, 고용주의 편의에 맞게 제공된 인력인 것이다. 출입국․외국인력 제도는 제3세계에서 온 이주민을 정부가 선정한 산업과 사업장에서만 일하게 하고, 고용주에 종속시켜서 속박된 노동으로 만든다. 법제도는 이주노동자를 권리나 자유의 주체 아니라 상품이나 통제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전제를 두고 있다. 한나라당의 고용허가제 개정안 이주노동자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10월에 발의된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한나라당 개정안)에도 잘 드러난다. 법안은 △기업에는 숙련인력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이주노동자로부터 ‘성실근로’를 유도하면서도, △‘정주화 방지’와 ‘단기순환 원칙 견지’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고용주가 신청할 경우 사업장을 이동하지 않은 노동자에 한해 추가 체류기간을 부여한다. 추가 체류 자격을 얻으려면 여러 요건이 필요한데, 핵심은 현재 허용된 3번의 사업장 번경을 포기하는 것이다. 개정안의 추가 체류 기회는 기존 4년 10개월의 체류 기간 중에 사업장 변경(폐업, 휴업이나 비슷한 불가피한 상황은 제외)을 하지 않은 노동자에게만 적용된다. 즉, 이미 현행법 하에서 엄격히 제한된 사업장 선택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 이주노동자들에게만 추가체류가 허용된다. 사업장을 이동하지 않는 것을 ‘성실근로’와 연결시키지만, 이는 이주노동자를 고용주에게 보다 심각하게 종속시키고 온갖 학대와 착취에 노출시킬 것이다. 개정안은 또한 이주노동자가 기존 체류기간이 끝나면 추가체류기간을 시작하기 전에 1개월 동안 출국하도록 규정한다. 이 규정은 ‘정주화 방지’를 위한 수단이다. 현재 한국 국적법은 합법적으로 5년 연속 체류한 자에게 귀화할 기회를 주도록 하고 있다. 개정안은 일부 이주노동자는 최대 9년 8개월 동안 체류하도록 규정하면서도 출국 요건을 전제로 하여 합법적정착을 방지한다. 사업장 변경 포기와 1개월 출국이라는 두 요건은 이주노동자를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고용주가 보다 손쉽게 다룰 수 인력으로서의 취급을 영속시킨다. 개정안의 모순 개정안은 추가 체류기간을 규정함으로써 한국사회에서 이주노종자의 장기체류 필요성과 필연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점점 긴 체류기간을 허용하는 것은 출입국 정책의 최근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고용허가제 체류기간은 벌써 3년에서 4년 10개월로 연장되었다. 올해 상반기에 시행된 ‘재외동포 고충해소 프로그램’은 일부 미등록 동포에게 F-4 체류자격(영주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이제 국제사회는 이주노동자 체류가 장기화될수록 취업국 사회로의 통합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많은 국가는 장기 체류한 이주노동자에게 영주권이나 국적을 취득할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유엔이주노동자권리협약은 장기 이주로 인해 서로 떨어진 이주민 가족의 결합을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취업국가에 요구한다. 그러나 한나라당 개정안은 이주민의 장기 체류의 필연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주노동자를 원칙적으로 단기방문객으로 취급해 영주권 획득의 기회나 가족결합 등의 권리 보장은 아예 언급조차 않는다. 이 모순은 (제3세계에서 온 가난한) 이주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이 법안의 인종주의적 본질을 드러낸다. 단속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기능 단속은 개정안이 영속시키는 차별적인 출입국·외국인력 제도의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주축이다. 물질적으로 쉽게 관리되지 않은 노동자를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정부가 지정한 사업장 외에도 취업하고 정부가 정한 체류 기간을 초과해 한국사회에 정착함으로써 노동자에 대한 통제와 차별에 기반 한 출입국․외국인력 제도 전반을 위협한다. 그래서 정부가 단속을 통해서 내보내려고 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단속은 국가가 외국인으로 규정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선언이다. 국가가 외국인들을 완전히 혹은 부분적으로 배제하는 권리를 강조함으로써 국내에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노동자의 규제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단속은 차별적인 출입국․외국인력 제도를 유지하는 데에 물질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필수적이다. 그리고 출입국․외국인력 제도가 전제로 한 차별은 인간 아닌 관리할 노동력과 관리체계 바깥에 있을 때 제거하면 되는 존재, 단속으로 죽으면 어쩔 수 없는 존재로 만든다. 단속으로 인한 또 다른 비극적인 죽음을 방지하려면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출입국·외국인력 제도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조직화 출입국·외국인력 제도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조직화에 대한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단속반대 투쟁, 개정안 반대 투쟁도 시급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직접 내고 운동을 직접 건설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것이 핵심이다. 지금부터 그렇게 해야 단속을 막을 힘, 제도 개선을 쟁취할 힘을 키울 수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고용허가제 개정안에 당연히 관심이 많고 의견도 많다. 많은 이들은 추가체류 기회에 대해 큰 희망을 가질 것이다. 개정안의 의미와 효과에 대해 이주노동자 대중들과의 토론이 중요하다. 개정안 발의를 많은 이주노동자를 접촉하고 출입국·외국인력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대화할 기회로 삼자. 이주노동자의 요구를 수렴하고 그 요구를 바탕으로 제도개선투쟁을 점차 조직하는 것은 현재 시기에 제일 유의미하고 효과적인 활동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ISD 재협상 제안은 국회 강행처리를 위한 기만 술책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11월 15일 “일단 한미FTA를 비준하면, 3개월 내에 투자자국가제소조항(ISD) 재협상을 미국에 제안하겠다”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른바 ‘선 비준 후 ISD 재협상’ 안이다. 이에 미국 백악관과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11월 16일에 이러한 이명박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미국 측의 제안은 한미 FTA 국회비준 강행처리를 위한 기만에 불과하다. 위 세척을 약속해 줄 테니 독약을 먼저 먹으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명박 대통령의 제안은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 미국 측의 답변도 비준 후에 한국 측에서 ISD 시행과 관련된 구체적 협의안을 제기하면 ‘협의해 볼 수 있다’는 답변에 불과하다. 백악관과 USTR은 ISD를 재협상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이 없다. FTA 본항에 포함된 ISD를 수정, 폐기할 수 있는 권한은 미국 의회가 가진다. 이명박 대통령과 미국 측이 말하는 ‘재협상’이란 단지 한미 FTA 본안에 이미 적혀있는 ‘비준 후 협의’에 불과한 것이다. 이 협의는 말 그대로 비준이 결정된 이후에 실제 FTA시행을 위해 필요한 사항들을 한번 만나 협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대통령 제안의 속뜻은, 비준안이 국회에서 어떻게든 처리만 되면 그 이후 미국 측에 ISD 재협상을 하자는 제안을 건넨 뒤 몇 마디 의견을 나누는 모양새를 취하다가 재협상 결과 별 내용 없는 보완시행책이나 발표하고 어물쩡 넘어가려는 기만술책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대통령의 제안은 아무런 내용도 실효성도 없는 제안이다. 단지 목적은 하나다. 강행처리의 명분을 만들기 위함인 것이다. 민주당은 오늘 의원총회에서 이명박대통령의 이 제안에 대한 공식입장을 논의하기로 했다. 그동안 갈팡질팡하던 민주당에게 분명히 경고한다. 애초에 한미 FTA를 체결한 책임은 민주당에게 있다. 한미 FTA를 날치기하려는 한나라당을 방조한다면 한나라당에 앞서 온민중의 집중 규탄대상이 될 것이다. 더욱이 한미 FTA는 ISD 조항 말고도 독소조항이 넘쳐난다. ‘서비스 시장의 네거티브 방식’, ‘미래 최혜국 대우’, ‘역진방지 조항(Rachet)’, ‘비위반 제소’, ‘간접수용에 의한 손실보상’, '의약품 특허-허가 연계제' 등의 독소조항은 ISD와 유사하게 투자자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소권한을 제공한다. 이들 조항을 남겨둔 채 ISD 조항만을 손보는 것만으로는 한미 FTA의 독소조항을 해결했다고 볼 수 없다. - 한미 FTA 선 비준 후 ISD 재협상은 기만이다. 한미FTA 국회비준 강행 음모 즉각 중단하라! - ISD 이외 독소조항 넘쳐나는 한미FTA 비준안 즉각 폐기하라!! 2011년 11월 16일 사회진보연대
차례 요약 1 1장 서문 4 2장 미국서비스노조(SEIU)에 대한 기본 이해 6 1. SEIU 소개 6 2. 한-미 노동법제 비교 9 3. 미국의 노동조합 체계 13 3장 최근 조직화 사례 15 1. 마이애미대학교(UM) 청소노동자, 캠퍼스관리 노동자 조직화 캠페인 15 2. 재가요양보호사조직화활동(SEIU 1199P) 23 3. 공항 조직화 캠페인 31 LA공항 조직화 31 덴버국제공항조직화 34 4. SEIU 32BJ 지부의 뉴저지 건물 청소노동자 조직화 캠페인 37 5. 병원 조직화 사례 45 4장 한/미 조직화 프로그램 비교 51 1. 한/미 대학 청소노동자 전략조직화 비교 51 2. 미국 재가요양보호사와 병원 간병인 조직화 비교 56 3. 한/미 공항 전략조직화 비교 62 5장 결론 : 시사점과 제언 66 <자료> 추가 이해를 위한 참고 자료들 71 <부록 1> 미국서비스노조 활동가 인터뷰 자료 73 1. 마이애미대학 서비스노동자 조직화 담당자 인터뷰 74 2. Local 1199PA 재가요양보호노동자 조직화 담당자 인터뷰 83 3. SEIU 105 지부 덴버 국제공항 조직화 캠페인 담당자 인터뷰 94 4. SEIU 32BJ 지부 뉴저지 상용빌딩 청소노동자 조직화 캠페인 담당자 인터뷰 103 5. SEIU 병원 조직화 전략 담당자 인터뷰 114 <부록 2> 미국서비스노조 교육 자료 124 1. SEIU의 상근자 및 노동자 교육 소개 125 2. 실천단/상근자 훈련 프로그램(발췌) 129 3. 국장급 상근자 능력계발 교육 진행자 가이드 131 4. 리더쉽 아카데미 136 5. 노동자 동원에 관한 82 지부 상근자 및 노동자 실천단 교육자료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