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의 안정화 계획과 제국주의 개입의 모순 리비아 반란군은 10월 4일 카다피의 고향 시르테에 대한 최후의 일격을 선언했다. 반란군 지도자는 나토 군의 공습을 등에 업고 시르테에 대한 대대적인 폭격을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언론은 카다피를 붙잡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리비아인들은 이미 그를 지난 과거의 인물로 간주하는 듯 보인다. [%=사진1%]지난 8월 20일 아침부터 수도 트리폴리 내에서 민중봉기가 시작되었고 다음날인 8월 21일 정오경에 이르러 트리폴리 여러 구역에서 봉기세력이 정부 보안기구를 격퇴하였다. 8월 21일 저녁 트리폴리 외부에 있던 반란군 중 첫 번째 부대가 트리폴리에 도착했고 남아 있는 카다피 군 거점을 공격했다. 트리폴리는 내부의 민중봉기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트리폴리의 국가과도위원회(NTC) 성원은 나토의 ‘인어작전’이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토는 사전에 계획된 40개 목표에 대한 공습을 수행하지 않았고, 외부 전사는 실제로 봉기계획 시간보다 48시간 후에야 트리폴리에 도착했으며 아무런 전투도 수행하지 않고 녹색광장으로 행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리비아 반군은 8월 23일 카다피 군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트리폴리의 핵심 거점인 아지지야 요새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신중한 트리폴리 주민은 처음 일주일간은 망설이는 듯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10여 일이 지난 후부터는 정부가 사라진 트리폴리에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트리폴리 각 지구별로 주민들이 원로, 반란을 계획했던 지하지도부, 종교지도자와 함께 지구위원회를 구성하여 공공서비스를 재개하고 사회시스템을 작동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카다피가 선언했지만 진정으로 실현된 적이 없는 ‘자마히리야’(대중의 공동체), 즉 분권적 기층 네트워크이자 비당파적 인민위원회가 카다피가 사라진 바로 그 곳에서 실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지구위원회는 NTC의 이름으로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실제로 NTC와 직접 접촉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리비아 봉기는 결정적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인다. 카다피 군의 저항이 남아 있지만 그것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는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리비아 봉기는 이제 해피엔딩만을 남겨 두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사회를 건설할 것이고, 누가 그것을 주도할 것이냐는 문제로 진입하는 새로운 국면이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과도위원회의 안정화 계획과 헌법 초안 국가과도위원회(지브릴 정부)가 설계한 ‘안정화 계획’은 그들이 구질서를 유지하겠다는 단호한 의도를 보여준다. 안정화 계획은 이라크에서 미군정이 행한 것과 정반대의 방책을 제시한다. 안정화 계획은 ‘이라크의 교훈과 모범사례를 통합한다’고 선언하면서, 미군정의 바트당 축출 구상이 국가장치를 공백으로 만들고 이라크 중산층이 미국의 점령에 등을 돌리게 한 원인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안정화 계획은 과거 정권과 관계를 맺은 모든 인물을 배제하거나 그들을 조사하는 것에 반대하며, 카다피 정권 인사를 향후 정치계획에 포괄하는 구상을 지지한다. 구정권 인사들을 사회에 통합하고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곧바로 무기를 들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논거가 된다. 과거 정권에서 정부와 보안기구에서 고위직을 차지했던 부족이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리비아 임시헌법 초안도 공개되었다. 리비아 헌법 초안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정식 헌법 초안이 2개월 내로 마련되어야 한다는 규정이다. 하지만 40년에 걸친 카다피 독재를 고려하면, 리비아 사회에 산적한 여러 근본적 문제를 토론하기에 2개월이란 시간은 너무나 짧다. 게다가 전선에서 전투를 수행한 혁명세력이 이미 발표된 초안을 미리 검토했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 리비아 사회가 민주주의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헌법과 제도를 창출하기 위한 토론에 모든 리비아인이 참여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무시된다면 새로운 헌법과 정부는 정통성을 결여할 수밖에 없다. (임시헌법 초안에서 국가과도위원회는 혁명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끌어오지만, 국가과도위원회 인사들과 전선에서 희생한 혁명전사의 관계가 희박하기 때문에 그러한 규정은 곧 긴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국가과도위원회 구성원 자격에 관한 정의도 불충분하다. 그 구성원은 지역 위원회에 의해 선출되어야 하지만 그 선출 메커니즘이 정의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비민주적 수단에 의해 직접 임명될 가능성도 있다.) 카다피가 사라진 후에도 구질서로 회귀한다면 이는 반란군의 희망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 반란군은 여전히 카다피가 소유했던 부동산과 트리폴리의 항구, 중앙은행을 손에 쥐고 있으며 방어군이란 이름으로 주요 시설에 주둔해 있다. 해외 추방을 당했다가 돌아온 이들과 이슬람주의자들도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기회를 도모하고 있다. 반란군, 해외 망명객, 이슬람주의자 모두 구 국가제도를 완전히 갈아엎고 처음부터 새롭게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미 넘쳐나고 있는 무기와 새로운 질서를 원하는 강력한 열정이 결합하면 심각한 내부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가 반란군을 정치적으로 통합하지 못한 채 그들의 무장해제를 시도한다면 분리주의적 경향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스트라 지휘부는 트리폴리 지휘부의 명령을 따르라는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나푸사 산맥지역의 베르베르인도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미스트라 반란군과 달리 트리폴리 점령 후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전투에서 획득한 무기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 리비아 민족통합과 부족주의 최악의 경우 리비아가 소말리아 유형으로 분할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는 논자는 리비아가 진정으로 민족적 통합을 경험하지 못했고 언제나 지역주의․부족주의가 강력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다른 논자는 리비아 봉기가 부족 간 충돌이 아니라 민족 혁명이라면서 이와 같은 견해를 부정한다. 물론 카다피 정권과 국가과도위원회 양자 모두 전쟁 기간 동안 부족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고자 고심했다. 카다피는 트리폴리가 포위되기 전에 부족 대표 회의를 조직하고 텔레비전 방송을 내보냈으며, 그의 연설은 항상 리비아 부족들을 언급했다. 국가과도위원회도 카다피 제거를 요구하는 부족 지도자들의 선언을 장려했다. 하지만 리비아 봉기가 민족혁명이라고 주장하는 논자는 리비아 부족주의 문제를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리비아에서 부족 관계는 견고한 동맹․분할 체계가 아니며 매우 신축적인 존재다. 어떤 리비아인은 부족 정체성을 중시하지만 다수는 과거의 유물로 간주하며,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원래 ‘소속된’ 부족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 리비아에 300개 부족이 있다지만 다수는 단일 지역에 위치한 균질적 집단이 아니며 서로 멀리 떨어져 살며 부족 지도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단순한 네트워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리비아인은 부족관계와 민족적 정체성 사이의 충돌을 경험하지 않았다. 나아가 리비아 부족 문제는 카다피의 정치 프로젝트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카다피는 40년 동안 진정한 시민사회의 형성을 가로막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족관계에 의존해서 일상을 영위해야 했다. 또한 민족적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한 카다피의 시도는 항상 부족 간 ‘분할과 지배’라는 형태를 띠었다. 카다피는 교묘하게 부족 간 불협화음을 조장하면서 자신이 떠나면 리비아가 부족들에 따라 분할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수의 리비아인은 리비아 민족이라는 관념으로 투쟁을 전개했고, 현재의 무장충돌이 종식된 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추구할 것이다. 민족혁명을 지지하는 논자가 제시하는 결론은 부족 파벌이 부족적 공감대를 통해서 권력을 획득하려 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리비아 혁명이 지방주의․부족주의적 지향의 분리주의에 추동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리비아 혁명에 참여한 다양한 반란군 세력을 실질적으로 대표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과도정부위원회의 안정화 계획이나 헌법제정 시도가 반란군 세력을 정치적으로 통합하지 못한다면 리비아 혁명이 전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리비아 혁명과 유엔의 보호책임 리비아 혁명은 국제정치에도 중대한 쟁점을 던진다. 유엔의 비행금지구역 설치와 나토의 군사행동을 지지하는 논자는 리비아 혁명의 결과가 곧 유엔이 자임한 ‘보호책임’의 가장 성공적 사례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것을 비판하는 논자는 제국주의가 리비아 민중혁명을 납치(hijacking)했다고 주장한다. 나토의 군사행동을 지지하는 논자는 비서구 세계의 반권위주의 운동과 국제 정부의 행동의 시너지가 나토의 성공적인 리비아 개입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미국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정권교체를 추진할 당시에는 이라크 민주화운동을 군사개입으로 대체함으로써 시너지를 중단시켰다면 리비아의 사례에서는 나토와 반란세력 간 동맹이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고 그로 인해 시너지가 발휘되었다는 것이다. 시너지 효과를 통해 리비아 반권위주의 운동도 성공을 거두고, 서구 세계도 인도주의적 개입을 위한 더욱 효과적인 방식을 계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반면 서구 제국주의가 리비아 민중혁명을 납치했다고 주장하는 논자는 서구가 리비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이권에 주목한다. 물론 카다피 집권 시절부터 서구의 석유회사는 이미 리비아 석유를 장악했지만 언제 카다피가 인도와 중국 같은 경쟁자들과 흥정을 벌일지 불안을 느꼈다. 프랑스 기업은 리비아의 막대한 수자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미국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아프리카군사령부(AFRICOM) 기지를 설치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다. (지금 AFRICOM 기지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다.) 국가과도위원회가 구질서를 보호한다는 분명한 방침을 세우고 있는 현실은 제국주의가 혁명을 납치하고자 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 또한 나토의 리비아 군사개입은 인도주의의 효과적 실행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하이테크 전쟁’이라는 21세기 판본의 미국 주도 군사모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2001년 럼스펠드가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공군과 해군 능력을 극대화하고 지상군 활용을 최소화하는 전쟁, 즉 하이테크 전쟁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지녔다. 하이테크 전쟁이라는 전망은 9․11 사건, 이라크전쟁을 거치며 더욱 현실화되었다. 이에 따라 두 가지 경향이 강화되었다. 첫째, 특수부대가 강조되었다. 미국 합동특수전사령부 인원은 9․11 이후 10배 증가했지만 거의 주목을 받지 않았고 그 비밀성은 CIA를 능가한다. 둘째 다양한 유형의 무인항공시스템이 널리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현재 보잉사는 스텔스 무인전투기 팬텀 레이와 고고도 장기체공 무인정찰기 팬텀 아이를 개발 중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토는 리비아 전쟁을 최근 성공 사례로 추켜세울 것이다. 6개월 이상 계속된 공습, 무인항공기의 지속적 활용, 광범위한 특수부대 작전 등. 이에 따라 공습으로 인해 수백 명의 군인 또는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거의 무시된다. 리비아에서 얻은 결과는 전쟁을 수행하는 효과적이고 수지가 맞는 새로운 방식이 있다는 증거로 활용될 것이다. 리비아 혁명의 미래 카다피가 수도 트리폴리에서 도피한 후 리비아 민중은 지역별로 주민위원회를 결성하여 사회시스템을 복원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지역 주민위원회나 반란군을 실질적으로 대표한다고 볼 수 없는 국가과도위원회가 제시하는 안정화계획과 헌법제정 절차는 구질서의 완전한 해체와 민주주의의 건설이라는 민중혁명의 목표와 근본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나토의 군사작전을 통해 리비아 개입의 정당성을 획득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신의 이권을 관철시키려고 골몰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며 하이테크 전쟁 모형을 가속화할 것이다. 리비아 민중 스스로 시작한 리비아 혁명은 어떤 사회를 누가 주도해서 건설할 것이냐는 혁명의 본질적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나는 승리혁신연맹(Change to Win, 이하 CtW) 방문단(공공노조 6명,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1명)과 함께 7월 10일에서 16일까지 남부 캘리포니아를 방문하여 CtW 소속 운송 및 서비스 노조를 만났다. 이번 방문은 작년 G20을 계기로 한국을 방문한 CtW와 공공운수노조 간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서 기획된 것이다. 공공운수노조는 이번 방문을 통해 현재 공공운수노조가 진행 중인 전략 조직화 사업 영역에서 CtW 소속 노조들이 사용한 조직화 전략에 대해 알아보는 기회로 삼았다. CtW는 소속 노조가 한국의 해당 분야 노조와 만남을 가짐으로써 국제연대와 세계적 차원의 공동행동을 모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것을 목표로 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한국과 미국의 노조들과 직접적 관계를 맺고 아마도 내가 가장 편안하게 위치할 수 있는 양국의 노동운동 사이의 경계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번 방문은 원래 공공운수노조에서 제안한 것인데, 그 재정은 거의 다 CtW에서 부담하였다. 이 사실은 CtW가 한국 노조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존경(국제 노동운동계에 유명한 한국 노동운동의 “전투성”)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세계적 차원의 캠페인을 조직하고자 하는 CtW의 관심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이는 또한 미국 노조의 상대적 재정 안정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공공운수노조는 재정에서의 부족분을 준비과정의 치밀함으로 메웠다. 방문단은 방미 전 5차례의 사전 미팅을 통해 우리가 만나게 될 노조들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고, 발표 자료를 준비하고, 동선을 토론하였다. 미국에 가면서 미국 노동운동에 대한 정보가 담긴 자료집을 읽어 가고, 미국 활동가들 앞에서 발표할 공공운수노조 영문 발표문을 준비하고, 조끼, 머리띠, 버튼을 비롯한 선물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승리혁신연맹(Change to Win) CtW는 미국 제2의 내셔널센터다. 2005년 AFL-CIO와 이견을 보이던 노조가 이탈하여 CtW를 결성하였다. 당시 쟁점이 되었던 문제는 민주당 로비에 대한 조합비 사용 규모, 새로운 조직화의 방법과 속도에 대한 것 등이었다. CtW는 AFL-CIO에 비하면 그 규모가 매우 작았는데, 현재도 4개의 가맹 노조와 대규모 전략 조직화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그 규모는 크지 않다. CtW의 웹사이트를 보면 자신의 임무를 “외주화되거나 외국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산업에 종사하는 5,000만 미국 노동자를 강력한 노동조합으로 단결시켜 높은 임금, 양질의 노동조건, 직장에서 발언권을 누릴 수 있는 중산층으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CtW는 SEIU가 주도적으로 건설한 조직인데, SEIU는 노조 조직율을 높이는 데 사력을 다하는 것으로, 또 앤디 스턴(Andy Stern) 전 위원장이라는 논쟁적 인물로 유명하다. 수백만 달러의 예산과 100명이 넘는 인원을 보유한 CtW의 시카고 소재 전략조직화센터(Strategic Organizing Center)는 SEIU의 톰 우드러프(Tom Woodruff) 부위원장이 그 수장을 맡고 있다. 전략조직화센터는 각 노조들간의 조직화 사업 협력을 조율하고, 전례 없는 규모의 독자적인 조직화 캠페인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있다. 현재 소매, 항만 트럭운송, 창고업 영역에서 그러한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전략조직화센터는 암스테르담에 해외사업본부를 두고 있는데, 해외사업본부는 유럽의 공항 및 청소노동자 조직화에 기여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대부분 초민족적 기업에 고용된 이들로서 미국에 SEIU 소속 조합원과 같은 기업에 고용되어 있다. 일정 방문단은 LA에 7월 10일 오후에 도착하였다. 이후 4일 동안 아침부터 저녁 9~10시까지 CtW 소속 노조를 방문하고 조합원들이 일하는 현장을 방문하였다. 간략한 일정은 다음과 같다. 7/10 (일) 16:50 인천 출발 한국 출국, 15:05 LA 도착, 미국 입국; 숙소 체크인, 환영 만찬 7/11 (월) 창고노동자연합(WWU) 사무실 방문, 인사말, WWU캠페인 소개, 남캘리포니아지역 창고단지 (Inland Empire Warehouse Complex) 방문; 창고노동자 간담회, 저녁식사 7/12 (화) 북미서비스노조 서부보건노동자연합(UHW) 방문 간담회, 월마트 캠페인과 대안경제연합 간담회; 저녁식사(월마트캠페인) 7/13 (수) 항만트럭운송 캠페인 및 화물운송노조(Teamsters) 간담회; 공공운수노조 발표: 동영상 상영 LA 및 롱비치 항 방문; 전미트럭운수노조(Teamsters) 간담회; 공공운수노조 발표: 화물연대 투쟁과 전략; 저녁식사(항만트럭운송 캠페인) 7/14 (목) 북미서비스노조 서부서비스노동자연합(USWW) 간담회; 공공운수노조 발표: 시설관리노동자 조직화, 민족학교방문(비공식 일정) 한인타운노동연대(KIWA) 간담회; 코리아타운 순회; 공공운수노조 발표: 동영상 상영; 저녁식사 7/15 (금) 평가회의; 방문단 주최만찬 7/16 (토) 06:50 LA 출발; 11:00 샌프란시스코 공항, 출국 일정을 하나하나 되짚기 보다는(공공운수노조에서 자세한 방문기를 작성할 예정이다), 이번 방문을 진행하면서 몇 개의 주목할 만한 점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조직화를 정의하는 방식 하나 우리는 항상 ‘조직화’를 이야기하지만 종종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하지 않을 때가 있다. 사실 ‘조직화’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사업의 방식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CtW 소속의 많은 노조들, 특히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SEIU에게 조직화는 지난 수십 년간 ‘포괄적 캠페인’을 통해 고용주로부터 노조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 내는 것을 의미했다. 포괄적 캠페인이란 노동자를 만나서, 이들을 노조에 가입시키고, 파업을 비롯한 여러 저항행동을 벌이는 것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SEIU는 또한 다양한 측면에서 고용주를 압박하기 위해 연구작업, 언론활동, 로비, 법정싸움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기업의 불법적, 반환경적, 기타 불미스러운 측면을 폭로하여 이들을 압박하는 전략을 기업상대캠페인이라고 한다. 기업상대캠페인의 궁극적 목적은 미국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 이하 NLRA)에서 규정하고 있는 까다로운 노조인정 선거 없이 고용주가 노조를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업상대 캠페인에서 다루어지는 이슈는 임금이나 노동조건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병원의 수납 방식이 너무 공격적이라거나, 건물 주인의 새 건설 프로젝트가 환경파괴를 일으키는 문제, 기업의 탈세 행위 등을 가지고 기업을 압박하는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기업상대캠페인은 노동자들이라기보다는 지역사회 활동가, 변호사, 정치인, 연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기업상대캠페인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던 사례가 몇 개 있는데, 우리가 방미 이튿날 방문했던 노조인 SEIU의 캘리포니아 보건의료 지부인 서부보건의료연합(United Healthcare Workers West, 이하 UHW)을 들 수 있다. UHW는 기업상대캠페인을 통해 캘리포니아 주 전역의 카톨릭계 병원들에서 노조조직화를 위한 권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기업상대캠페인을 잘 벌이면 노조-NGO-지역사회 동맹의 긍정적인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 보겠지만,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조직화가 기업상대캠페인에 너무 의존하다 보면 투쟁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자를 배제하는 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UHW는 최근 조직화를 위한 공간을 열기 위한 방법으로 기업상대캠페인을 비롯한 기업에 적대적인 전술에서 기업과의 협조로 바꿨다고 말했다. 적대적인 전술을 통한 성과가 없던 것이 아니지만, UHW의 지도부는 이 방식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힘이 드는 사업이라고 한다. 몇 년간 가톨릭계 병원과 이러한 방식의 싸움을 벌인 UHW는 최근 정부 보조금 인상을 위한 로비를 병원과 함께 함으로써 노조 인정을 얻는 방식의 전략을 채택했다. UHW는 이러한 전략을 훨씬 효과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UHW는 이렇게 협조적인 전략을 통해 10여 년 동안 노조를 거부해 왔던 성빈센트(St. Vincent) 병원에서 최근 조직화 권한을 획득했다. 분명한 것은 UHW가 이해하는 조직화에선 고용주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 역량 증진이 핵심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직화를 정의하는 방식 둘 CtW 소속 전 노조들이 UHW와 같은 방식으로 조직화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CtW 노조들에게 조직화는 노동자를 만나고, 이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노동자들이 조합원이나 리더로서 활동할 수 있을 잠재성을 평가하고, 이들의 잠재성을 충분히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 행동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만난 창고노동자연합(Warehouse Workers United, 이하 WWU)의 간부들과 조합원들은 조직화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WWU는 CtW의 직할 전략조직화 캠페인(CtW 산하 산별연맹이 주도하는 캠페인이 아니라)으로 남부 캘리포니아의 인랜드엠파이어(Inland Empire) 지역과 미국 전역 대형 창고단지의 파견노동자 조직화를 목표로 삼고 있다. WWU는 캠페인을 통해서 동일한 이름의 노동자조직을 건설하여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조건 향상을 위한 힘을 결집시키는 경로로 삼고 있다. WWU는 아직 정식승인을 받은 노조가 아니며 당분간 노조승인을 신청할 계획도 없다. 현재 창고 노동자의 고용형태나 미국의 노동법제를 고려하면 WWU가 노조승인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신 WWU는 파견업체, 창고운영업체(warehouse operator), 원청(창고를 사용하는 거대 유통업체)등에 노조승인 선거 없이 노조 인정을 요구할 수 있을 때까지 힘을 기를 예정이다. WWU의 조직활동가들은 자신들의 노동자 조직화 체계를 설명해 주었다. 먼저 조직화는 가정방문으로 시작된다. 가정방문이란 방식은 한국 노동운동에는 생소한 방식일 것이다. 공공운수노조 참가단은 주소를 얻거나, 노조활동가가 여러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는 것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뿐더러, 문화적으로도 어색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이러한 방식이 효과적일 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WWU의 조직활동가들과 우리가 만난 다른 노조의 조직활동가들은 가정방문을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항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한 핵심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집이 주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노동자들은 직장, 심지어는 직장에서 떨어진 곳에서 약속을 잡고 만나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사업장의 문제들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는 조직활동가들이 기본원칙(역시 SEIU로부터 기원한 것이다)을 적절히 따를 때 특히 그러한 분위기가 조성되는데, 그 원칙이란 70-75%의 시간을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곱 단계에 걸쳐 대화를 이어나가는 데, 그 7단계란 (1) 기본 사안에 대한 대화 (2) 노동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 파악 (3) 노동자의 분노를 고용주에게 돌리기 (4) 노조의 비전을 설명 (5) 노조 참여 의지를 북돋움 (6) 고용주의 반노조 전술에 대한 사전 대응 (7) 참여의지에 대한 재확인으로 이루어진다. SEIU와 WWU의 교육프로그램의 초점은 주로 신규 조직활동가가 성공적으로 가정방문을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맞추어져 있다. WWU에게 가정방문은 매우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우리가 만난 현장 조직활동가 중 절반 이상이 자신이 처음 WWU를 알게 된 계기가 가정방문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나는 이러한 WWU가 설명한 대화 모델이 한국에서 일상적인 상담을 통한 조직화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정방문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신이 문제라고 느끼는 부분을 분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조(혹은 조직)에 참여할 것인지 질문을 받으면서 조직활동가와 노동자 사이에는 평등한 관계가 형성되고 처음부터 노동자들은 자신의 문제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상담의 경우 노조를 찾아오는 노동자는 노조가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전문가를 기대하게 된다. WWU의 조직화 방식에 있어 또 다른 중요한 부분은 노동자의 조직/노조에 대한 성향을 체계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가정방문이 끝나면 조직활동가들은 회의를 가지고 가정방문 시 있었던 일을 토론한다. 이러한 토론을 통해 조직활동가들은 각 노동자의 성향을 1에서 5까지 나누어 파악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조건에 불만이 많고, 노조(조직)에 대해 열성적으로 참여할 의사가 있어, 활동가나 리더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이 있는 노동자는 1을 매긴다. 반면 노조에 매우 부정적이며, 노조에 반대하여 다른 노동자를 조직할 이들은 5를 매기는 식이다. WWU의 조직활동가들은 목표 창고의 각 부서와 근무조에서 1에 속하는 노동자를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여한다. WWU는 우리에게 각 부서 및 근무조별 노동자의 등급과 이들에 대한 조직화 내역이 적혀 있는 커다란 모의 ‘조직화 도표’를 보여주었는데, 이 도표를 보자마자 참가단은 저마다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다른 경험에서 시사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한국참가자의 의지를 보여준 순간이었다. 또한 한국에서의 조직화 방식도 그렇게 다르지는 않지만, WWU 조직화 방식의 철저함과 체계화 수준은 관심을 가질 정도로 드물다는 의미였다. 물론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니라는 점도 지적해 두어야겠다. 간담회가 끝나고 다음 일정으로 데려다 줄 차를 기다리면서 WWU 상근자 한 명과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이 상근자는 가정방문을 통해 그룹 1로 분류되었다가 결국엔 전임 조직활동가가 된 사람이었다. 이 상근자는 매우 솔직하게 자신이 창고단지에서 일하면서 느꼈던 멸시적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버티기조차 힘들었던 점, 자신을 인간이 아닌 단지 하나의 소모품으로 취급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투명인간처럼 느껴졌던 점 등. 그녀에게 WWU는 자신의 존엄성을 찾고 자아를 찾는 계기였다. 이 상근자는 곧 있을 직접행동은 WWU에게 ‘커밍아웃’이 될 거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행동은 그녀는 자신에게 새로 부여된 힘을 공개적으로 천명할 기회가 될 것이며, 창고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는 투쟁의 첫 걸음이 될 것이다. 나는 그녀의 말을 통해 느낀 바가 있었고, 이는 WWU가 어떤 자세로 노동자 조직화와 리더 양성에서 성공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노동자를 중심에 두지 않은 결과 팀스터(Teamster) 지부 848의 상황은 WWU와는 사뭇 달랐다. 지난 몇 년 동안 CtW는 항구에서 화물을 실어 나르는 트럭노동자 조직화를 위해 팀스터를 지원했다. LA와 롱비치(Long Beach)에 있는 대규모 항구가 이 캠페인의 주요 목표이다. 한국의 다수 화물운송노동자와 같이, 미국의 항만 트럭 노동자 역시 지입차주로서 노조결성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CtW의 전략은 최근까지도 주로 입법을 통한 것이었다. 트럭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기 위해선 먼저 이들이 직고용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 CtW는 트럭노동자를 직접 만나기 보다는 NGO등과 함께 트럭노동자의 법적 지위를 변화시키는 입법 노력에 방점을 찍었다. 2006년 환경단체와 변호사 단체등과 함께 깨끗하고 안전한 항구연합(Coalition for Clean and Safe Ports, 이하 항구연합)을 결성한 CtW는 항구의 환경기준 강화와 함께 노동권을 요구하였다. 캘리포니아에서 항구연합은 청정트럭 프로그램(Clean Truck Program)을 위한 로비활동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다. 이 프로그램은 롱비치와 LA 항구에 배기가스 배출이 많은 경유 차량을 퇴출시키고 더 ‘친환경적인’ 차량을 도입할 것을 요구하고, 트럭회사에는 기사를 직고용하고 새 차량 구입을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항구연합은 대중선전 활동을 진행하고, LA에서 ‘친환경적인’ 인사를 시장으로 선출하기 위한 캠페인을 벌여 결국 2008년 청정트럭 프로그램이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그 직후 미국트럭연합회(American Trucking Association, 트럭회사 연합체)가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청정트럭법 중에 회사가 기사를 직고용하도록 되어 있는 부분을 무력화하는 가처분을 내렸다. 현재 트럭 회사는 새 배기가스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항만 트럭 노동자들로 하여금 친환경 트럭을 리스형식으로 구입하게 해서 구입비용을 전가하고 있다. 팀스터를 방문한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불러온 결과를 명확히 볼 수 있었다. 항구를 돌아보며 화물 적재를 기다리고 있는 트럭 기사 한 명이 처음 한 말은 새 트럭 때문에 비용이 더 들어가는 데 대한 분노였다. 트럭기사는 격앙된 표정으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이 트럭에 들어가는 리스 비용이 매달 임금에서 빠져나가요”라고 말했다. “내가 리스비용을 다 지불하고 이 차를 소유할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어요.” 우리가 CtW의 항만 운송노동자 캠페인 담당자에게 노조가 노동자들의 불만의 대상이 되고 있냐는 질문을 했을 때, 그 담당자는 어느 정도 그러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노조 간부들은 최선을 다해 노동자들에게 이러한 결과는 고용주들이 교묘한 전술 때문에 촉발된 것이지, 노조가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한다고 했다. 직고용에 대한 법원의 최종판단은 올해 말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만약 법원의 판단이 노조에 유리하게 내려진다면 CtW로서는 중요한 승리를 거두게 되고, 팀스터는 훨씬 수월하게 노조 조직화에 나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노동자들의 이 투쟁에 대한 이해와 지지는 미약해 보였다. 회사들이 법 효력 금지 신청소송을 낸 이후에야 노조 상근자들은 노동자를 만나고 노동자 위원회를 건설하려는 체계적인 노력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항만 운송노동자 조직화 캠페인은 투쟁의 법적 측면에 대한 과도한 강조가 노동자들을 부차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집단적인 힘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이때, 그것을 만들어가기가 훨씬 쉽지 않아 보인다. 계급이라는 문제 여기서 왜 노동자를 활동가와 리더로 만드는 노조가 있는 반면 어떤 노조는 노동자들의 권력 강화를 포기하면서까지 로비와 고용주와의 협력관계 설정에 집중하는지를 완전히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각 산업의 특수성과 각 노조의 역사와 내부 분위기가 그 노조가 택하는 전략에 큰 영향을 준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노동조합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가장 큰 조건이며 동시에 한국과 명확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은 바로 한국의 노조들이 계급의식과 계급투쟁의 개념에 익숙해진 반면, 미국의 노동운동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이다. 대신 AFL-CIO나 CtW 모두 노동자를 중산층으로 상승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 이는 앞서 말한 CtW의 임무에서도 볼 수 있다. 결국 미국의 노조들은 자신들의 투쟁을 근본적으로 자본과 적대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자신의 ‘몫’을 찾도록 하고, 미국 사회와 정치계에 노동운동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미국에서 계급권력 건설이라는 목표는 노조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 확대라는 목표로 대체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CtW 노조들은 최대한 빨리 조합원 수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노동자들의 행동을 통해 이를 달성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경우 강력한 노동자 리더 양성에 방점이 찍힌다. 만약 고용주와의 협력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면 그것을 우선하는 것이다. 더욱이 CtW나 AFL-CIO 모두 고용주에 압박을 가하거나 협상을 하는 데 도움을 받아 조직화를 촉진할 수만 있다면 중도 정치인(민주당)과 손잡는 것을 저어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국 노동운동은 오랜 기간 연방 및 지역 차원에서 민주당과 긴밀한 동맹이 있었다. 이 동맹이야말로 노조가 정치적 힘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이해되어 온 측면이 있다. 한국 방문단과 우리가 만난 미국 노조 활동가들 사이에 계급과 투쟁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이번 일정 내내 여러 곳에서 드러났다. 양 쪽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한 통역’을 하려다 보니 이러한 시각의 차이가 ‘오해’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미국 노조의 계급지향(혹은 그러한 지향의 부재)은 냉전시기와 맥카시즘이라는 반공 선풍의 역사를 거치며 거의 뼈에 각인된 수준이 되었다. 미국 노조에 정파가 있냐는 질문에 미국의 활동가들은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냉전 이후 대부분의 좌파들이 투쟁의 기초로서 보편적인 이데올로기와 이론(계급과 혁명 이데올로기 및 이론)을 폐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국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분할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전략적 전술적 관점과 기타 차이에 기반한 분할이 없지 않다. 특히 팀스터를 방문하였을 때 이러한 계급지향성(의 부재)의 영향이 쉽게 눈에 띄었다. 화물연대의 역사와 전략을 파워포인트와 투쟁영상을 통해 발표를 하였다. 조합원들이 각목을 들고 대체인력의 트럭 진입을 막고 경찰버스를 부수는 장면을 본 미국 노조의 조합원들과 간부들은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발표가 끝난 뒤 항만 운송노동자 캠페인 담당자는 “미국에서 이렇게 싸울 수는 없어요. 당장 소송에 걸릴 것이고, 조합원들도 힘들어 할 겁니다. 다른 투쟁방식을 찾아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이 말을 통역하자 많은 공공노조 참가단이 웃었다. “물론 우리도 법정으로 갑니다. 체포되고 투옥되기도 해요. 돈도 많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만큼 조합원들의 요구가 절박한 겁니다. 이 정도의 결의를 가지고 싸우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러면 화물연대에 가입할 이유도 없는 것이죠.” 참가단의 대답이었다. 항만 운송노동자 캠페인 담당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질문을 계속 했다. “노조가 파산하지는 않나요? 더 나은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그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목숨을 건 투쟁의 문제이며, 그렇게나 큰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이해를 못하고,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생각으로 여기는 듯 했다. 이러한 반응을 미국의 평화적인 저항문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60~1970년대 이래 정부와 사회운동 모두 폭력적 대응을 삼가 온 것이다. 그렇지만 양국 운동의 차이는 또한 이데올로기적 차이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자본가와 노동계급 사이의 근본적 적대관계로 인식하지 않는 한 노동운동을 목숨을 건 무엇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미국에서는 완전히 질식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깊이 숨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산업간 경계를 뛰어넘은 세계적 조직화 미국 노동운동의 계급의식 부재를 비판한다는 것이 CtW가 자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노동자들에 맞서는 이 적의 힘과 규모를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CtW의 전략조직화 캠페인은 저임금 비정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조가 전세계적 차원에서 조직되어 산업을 넘나들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국적 기업을 상대로 해야만 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CtW의 활동가들은 또한 이를 위해서는 산업간 연대와 구체적인 국제 연대와 국제 활동을 조직해야 함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 아래 CtW의 초국적 소매업체 캠페인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의 초국적 소매업체들이 미국 내 최고의 고용주이며 전 세계적에 거친 공급사슬에 있는 노동자의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친다. 특이 제품을 보다 낮은 가격으로 제공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낮은 임금을 강요함으로 비용을 절감한다. 이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CtW와 CtW 소속의 미국식품산업노조(United Food and Commercial Workers Union, 이하 UFCW)는 다산업과 세계적인 틀에서 생각하고 더 넓은 차원에서 조직화 사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CtW의 조직활동가들은 이들은 미국 소매업체의 수입 공급사슬을 따라 창고에서부터 항만까지, 또 바다 건너 공급업체들이 위치한 나라들까지 시선을 넓히고 있다. CtW는 제조업과 유통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임금은 소매업체와 공급업체에 의해 통제되고, 이들 자본의 이해는 자본의 초국적 조직을 따라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이 활동은 시작한 지 아직 일년이 되지 않았지만, 장기적으로는 세계적 차원의 조직화를 실제로 실천하는 것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인랜드 엠파이어 창고단지를 차로 돌아보면서 ‘한진’이라는 마크가 선명한 컨테이너를 싣고 가는 기차가 우리 옆을 지나갔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월마트나 기타 미국의 대형 소매점 선반에서 팔리게 될 상품일 수도 있다. 이 때 역시 참가단은 모두 카메라를 꺼내 이 장면을 찍었다. 자본이란 실로 유동하는 가치(value in motion)임을, 그것도 세계적 차원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 순간이었다. 미국의 CtW와 한국의 공공운수노조는 유통 노동자들의 잠재적 힘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가치가 움직임을 멈출 때 그것은 자본이기를 멈춘다. 그리고 자본가들에게 더 이상 이익이 아니게 될 것이다. 유통산업 노동자들은 주요 항구, 공항, 창고, 즉 CtW가 병목점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공급사슬을 끊어버리고 고용주들에게 막강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초국적 기업과 그들의 공급사슬은 거대하고, 복잡하며 다양하다. 노동자와 노조가 자신의 잠재적 힘을 사용하려면 자신들이 초국적 기업과 그들의 공급사슬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서로를 배우며, 협력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 말하고 있는 국제적 조직화라는 그림을 실현하는 것은 여기에 글로 쓰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힘들다. 하지만 미국을 방문하면서 그러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항만 운송노동자 캠페인을 통해 우리는 머스크(Maersk)와 같은 초국적 해운사들이 자신이 활동하는 전 세계 항구에서 운송비를 정하고, 이것이 트럭노동자의 임금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서부서비스노조(United Service Workers West, 이하 USWW)는 1980년대 잘 알려진 '청소노동자에게 정의를'(Justice for Janitors) 캠페인을 주도한 SEIU의 지부다. 이곳을 방문한 우리는 동일한 초국적 기업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항의 청소 및 서비스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데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USWW의 활동가들은 또한 LA국제공항에서 대한항공에 관계된 여객서비스 노동자 조직화를 희망하고 있음을 이야기해 주었다. 잠재적인 공통의 목표를 밝혀내기 위하여 그러한 연결점을 분석하는 것이야말로 지역 투쟁을 강화하고 세계적 차원에서 노동자의 힘을 쌓기 위한 진정한 국제연대를 만드는 첫 걸음일 것이다. 일회성 방문이 아닌 장기적인 교류의 기반으로 이번 방문 기간 내내 우리는 조직화 방법 교류를 일회성 행사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야 함을 이야기했다. CtW와 소속 노조들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공공운수노조가 배울 것이 있는 전략과 체계를 발전시켜 왔다. 또한 팀스터 노조를 보면서 공공운수노조가 투쟁의 방향성과 관련해 미국의 노조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피상적인 비교와 (미국 노조는 이성적이고 돈이 많으며, 한국 노조는 ‘전투적’이고 감성적이다라는 식의) 정형화된 형상화를 넘기 위해선 양국의 노조가 가진 강점과 약점이 어떤 구체적인 조건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이해하고, 현재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더 심도 깊은 논의를 해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접촉과 소통을 통해 논의를 심화시켜 나갈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 국제연대 사업이 제안될 때마다 자원의 문제는 항상 불거질 수밖에 없다. 몇 사람이 잠깐 비행기 타고 외국에 나가는 데 돈을 쓰느니 그 재원을 지부로 돌리는 것이 더 유용하다는 주장도 있다. 확실히 그러한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노동운동이 지속적으로 활력을 가지기 위해서 전략조직화가 갖는 중요성을 이해하고, 새롭고 혁신적이며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필요성을 인식한다면, 이번 CtW와의 교류 프로그램과 같은 사업에 대한 투자가 갖는 유용함을 보아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자본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국제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조직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한다면 자원 부족이라는 문제를 절대적인 장애물로 볼 것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과제로 여겨야 한다. 나는 이번 캘리포니아의 CtW 방문이 일회성 행사가 되어서는 안되며 앞으로도 계속되고 구체화되어야 할 전략과 집단행동에 대한 논의의 출발점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나와 사회진보연대가 그러한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튀니지 혁명은 아랍 세계를 고무했다. 튀니지 혁명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던 데 반해, 그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다. 23년간 튀니지를 지배한 철권통치자 벤 알리 대통령이 해외로 망명했고 그 직후 법원은 궐석재판을 통해 3차 재판까지 도합 66년 형을 선고했고 앞으로 남은 재판에서 최종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릴 가능성이 크다. 집권 여당 헌법민주주의회의(RCD)는 법원 명령에 의해 해산을 당했고, 과도정부는 시위자의 요구를 받아들여 제헌의회 선거를 발표했다. 따라서 튀니지 혁명은 아랍사회를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한 힘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이집트 혁명은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었다. 바레인, 시리아, 예멘에서 봉기가 발생했고, 알제리, 요르단, 모로코, 이스라엘 국경지역, 이라크, 모리타니아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현재에 이르러 ‘아랍의 봄’이 갈 길이 멀고도 험난하다는 보도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는 독재자가 물러났지만 장기독재 잔재의 청산이나 사회경제적 변화가 더디어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으며, 시리와와 예멘에서는 정권이 대중시위의 요구를 무시하고 강력한 탄압으로 맞서면서 사상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리비아의 대중시위는 내전으로 발전했고 더구나 서방의 군사개입으로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그렇다면 아랍 민중은 무엇을 자각했고 아랍사회는 2011년 봉기를 통해 지금 어디에 도달하였는가. 앞으로 아랍 민중과 아랍 사회는 어떤 과제를 안고 있으며 어떤 역경이 이를 가로막고 있는가. 이 글은 북아프리카 민중혁명의 선도자이자 그 대표적 사례라고 말할 수 있는 튀니지 혁명의 특징과 성과, 의의를 살펴보면서 그러한 질문에 부분적으로나마 답하고자 한다. 튀니지 혁명, 어떻게 가능했나 국제연합 인권팀에 따르면 튀니지 혁명 과정에서 2011년 2월 1일 현재 219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 중 72명은 형무소에서 발생한 폭동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 후에도 간헐적으로 시위 중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최근 7월 18일에도 처음 시위가 발생했던 시디 부지드에서 14살 소년이 시위대와 보안군의 충돌 과정에서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1960년 4·19 혁명의 경우 사망자가 187명이고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경우 한국정부가 인정한 사망자가 154명, 행방불명자가 70명이다. 이 숫자만 보아도 튀니지 민중이 얼마나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는지, 얼마나 값비싼 희생을 감내해야 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유명 UCC 사이트에는 사망자를 추모하는 동영상이 수십 편 등록되어 있다.) 튀니지에서 시위가 발생했을 때 서방 관측가들은 시위가 성공을 거둘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시위가 비조직적이고 반대 세력의 공식적 지도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장기간 발전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반정부 조직은 빈혈증 상태다”, “벤 알리 정권이 한 주 또는 한 달 내에 무너질 것이라고 아무도 주장하지 않는다” 등등.) 그러나 대중운동은 23년에 이르는 벤 알리의 철권통치를 무너뜨렸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남동부 도시 시드 부지드의 한 청년의 분신으로 시작된 시위가 마침내 12월 27일 수도 튀니스에 도달했을 때, 튀니스에 모인 시위자는 실업자, 학생, 법률가, 블로거, 예술가, 해커, 주부, 의사, 교수, 상인 등 정말로 이질적인 집단이었고 지도자를 자처하는 집단도 없었다. 따라서 서방 관측가의 단언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놀라운 속도로 하나의 저항운동으로 융합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융합이 가능했는가? 첫째, 정보 공유가 빠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시위 참여자 스스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비디오, 사진, 인터뷰를 유포하고 다음 시위의 시간과 장소를 공유했다. 둘째, 튀니스, 카프사, 수스, 시드 부지드 같은 도시의 거리들에서 광범위한 대중토론이 벌어졌다. 시위자들은 과거 벤 알리 정권 치하에서 경험했던 권리 박탈과 부패에 대해 토로했을 뿐만 아니라 정세분석과 운동노선을 서로 제안하고 토론했다. 사실상 정부의 통치도구로 기능했던 기관들, 예를 들어 튀니지노동조합총연맹(UGTT)도 이러한 변화를 점차 수용했다. (튀니지 노동조합의 어떤 열성 활동가는 노동조합운동이 튀니지 혁명의 후위대 역할을 했다고 자부했다. 즉 혁명운동의 전진을 위해 그 후방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UGTT는 1980년대 후반 이후로 벤 알리 정권을 지지했으나 태도를 완전히 바꾸었고, 특히 우체국, 통신 부문 노동자와 초등학교 교사를 시발로 수많은 지역지부가 기층 수준의 토론을 조직했다. (UGTT 조합원 517,000명 중 초등, 중등학교 교사가 10만 명에 달한다.) 셋째, 여성의 시위 참여가 인상적인 수준이었다. 모든 시위에서 남성과 여성이 함께 행진했다. 이들이 ‘이슬람’이 아니라 ‘시민권’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가능했다. 이처럼 튀니지 혁명이 보여준 힘은 튀니지 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와 대조되는 사회운동의 극도의 무기력을 극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튀니지 혁명의 배경 1990년대 후반 이후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한목소리로 북아프리카 경제개혁의 모델로서 튀니지를 지목했다. 예를 들어 2008년 세계은행은 튀니지를 북아프리카 지역 ‘최상의 개혁국가’로 칭송했고, 국제통화기금 총재 스트라우스 칸은 ‘신흥국가의 훌륭한 사례’로 언급했다.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 튀니지의 현실은 훨씬 더 어두웠다. (집권 여당인 헌법민주주의회의는 독일 사회민주당, 프랑스 사회당, 영국 노동당 등 서구 사민주의 정당 주도로 구성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가입 정당이다. 이는 서구 사민주의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례다.) 1987년 벤 알리의 집권 이후 권위주의 체제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다. 국가의 감시 프로그램은 세 차원에서 작동했다. 첫째, 정치활동가는 경찰의 수중에서 심각한 억압과 협박을 받았다. 튀니지는 인구 1,040만 명에 경찰이 13만 명에 이를 정도로 강력한 경찰국가다. (한국은 2010년 현재 인구 4,821만 명에 직업경찰이 약 10만 명, 전의경이 약 5만 명이다.) 고문과 정치범 사례는 튀니지 국내외 인권단체에 의해 끊임없이 보고되었다. 둘째, 집권여당 헌법민주주의회의(RCD)는 매우 복합적이며 광범위한 시민 감시체제를 확립했다. 일반 시민은 진학, 취직, 여행과 같은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지역 RCD 감시자들의 심사를 건드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셋째, 23년간 공포가 내부화되면서 주민 스스로 검열자가 되었다. 하지만 억압이 벤 알리 정권이 장수하게 된 유일한 요인은 아니었고. 상대적으로 신용과 소비재에 대한 접근이 용이했기 때문에 일종의 ‘암묵적 용인’이 존재했다는 분석도 있었다(즉 정부가 제공하는 대출 프로그램과 소비재 보조금). 그러나 신용제공 약속은 단명하였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만연한 부패였다. 고위직과 연결된 사람이 신용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벤 알리 정부는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권고에 따라 공공부문 산업과 농업협동조합을 매각하거나 축소했다. 그 대신에 해외투자자가 운영하는 섬유산업과 콜센터가 성장했지만 이는 단기 저임금 일자리를 제공할 따름이었다. 관광산업과 콜센터는 튀니지의 주요 산업이 되었다. 벤 알리 정권하에서 빈곤층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었고 중간층이 쇠퇴했고 실업이 급상승했다. 대학졸업자의 46%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도달하였다. 튀니지 경제는 수출을 위한 아웃소싱 기지로 전환되었다. 튀니지에 있는 1,250개 프랑스 기업이 대 프랑스 수출의 1/3을 차지했다. 주변부 국가는 중심부 국가에 비해 2007-2009 금융위기로부터 더욱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2008년부터 공장폐쇄, 실업, 노동조건 악화가 심화되었다. 또한 벤 알리 일가의 부패에 염증을 느낀 투자자들이 튀니지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벤 알리 일가는 은행, 통신, 수출입업, 자동차, 농업, 식량분배, 석유, 관광, 부동산 등 경제의 광범위한 부분을 통제했다. (이번 튀니지 혁명을 계기로 망명지에서 돌아온 부흥당 당수 간노우치는 튀니지와 아랍 국가들이 ‘정치적 권위와 마피아의 혼합’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마피아가 국가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2010년 12월 시드 부지드 지역 시위에서 나온 구호는 “일자리는 권리다. 도둑놈들아!”였다. 이는 튀니지 실업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튀니지의 실업률은 약 14%로 추산되지만 지역별, 세대별로 큰 차이가 있다. 해안지역 도시의 실업률은 7% 미만으로 추산되지만 내륙지역은 30% 이상이다. 특히 시위가 처음으로 발생한 시드 부지드는 50%로 추산된다. 또한 30세 이하 실업률은 26%에 이르고, 이 중에는 40만 명의 대학졸업자가 포함된다. 튀니지 혁명의 전개 과정 튀니지 혁명이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 대통령의 망명과 과도정부 수립으로 절정에 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후 과정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단계를 통해 더욱 강력한 대중시위의 압력을 통해 과도정부에서 집권여당이 배제될 뿐만 아니라 집권여당이 공식적으로 해산명령을 당하고 제헌의회 수립 일정이 발표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의미는 한국 1987년 6월항쟁의 결과와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새 장을 연 기념비로 묘사되지만 그 성과는 매우 불완전했다. 6월항쟁 과정에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사실상 단일 이슈로 채택되었다. (물론 ‘혁명으로 제헌의회’와 같이 더욱 급진적 구호를 제시한 운동 집단도 있었다.) 전두환 정부는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비상사태 선포를 검토했지만 미국의 압력과 군부 내 이상기류, 즉 항명 가능성 때문에 결국 이를 포기했고, 6월항쟁은 노태우 후보가 6·29 선언 형식으로 대통령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 대중운동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사실상 막을 내렸다. (개헌안은 여야 협상을 통해 마련되었다.) 군사쿠데타와 민중학살의 주인공 전두환 대통령은 즉각 퇴임하거나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임기종료 후 퇴임하여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집권여당 민정당은 해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정당 후보 노태우가 1987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87년 당시 김영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야당세력은 6·29 선언 발표 후 ‘반동의 역공세’를 근거로 대중운동의 확산을 제지하려 했고 7~8월 노동자대투쟁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야당 세력은 광범위한 사회변혁 요구를 대통령 선거 후의 문제로 지연시키면서 대선 준비에 몰입했다. 개헌 문제도 ‘단임 5년제 대통령 직선제’ 도입만 합의되었기 때문에 한국민은 헌법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대통령직선제 개헌의 경우도 결선투표제 도입 문제가 논의되지 않았다.) 개헌 후 김대중 후보는 4자필승론에 근거하여 야권후보 단일화를 사실상 거부하였다. 4자 필승론이란 김영삼 후보가 경상도 표를 분할하고 김종필 후보가 충청도 표를 분할하면 자신이 노태우 후보를 제치고 1위로 당선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선거 결과 36.6%로 노태우 후보가 1위로 당선되었고, 김영삼 후보가 28%로 2위, 김대중 후보가 27%로 3위, 김종필 후보가 8.1%.로 4위를 차지했다. (사실 전두환 대통령은 민정당의 재집권을 위해서는 야권분열이 그 전제조건이라고 여겨 6·29 선언에 김대중 사면복권을 포함시켰을 뿐만 아니라 두 후보 중 어느 누가 확연히 불리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은밀히 개입했다.) 시야를 1987년에 벌어진 사건들로 좁힌다면 1987년 6월항쟁의 결과는 뭐라 말할 수 없이 허망했다. 그럼 2011년 튀니지 혁명의 전개과정을 1단계, 즉 2010년 12월 17일 부아지지의 분신으로부터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 대통령의 망명에 이르는 시기와 2단계, 즉 1월 17일 과도정부의 새 내각 발표부터 3월 3일 제헌의회 선거계획 발표에 이르는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한다. 튀니지 혁명의 1단계: 2010년 12월 17일 부아지지의 분신으로부터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 대통령의 망명까지 시드 부지드 봉기 이후 처음 두 주 동안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주로 가난한 도시의 노동자와 실업자였다. 즉 내륙지방의 도시들을 중심으로 격렬한 시위가 발발했다. 같은 기간 동안 해안지역 거대도시의 주민들의 시위 참여는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물론 UGTT의 좌파 활동가들은 시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노력했다. 1차 혁명 초기에 단일한 정치적 지도부가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UGTT는 대중의 폭발을 지지하는 ‘후위’(또는 ‘후진’) 역할을 했다. 2011년 1월 초, 좌파활동가들의 요구에 따라 UGTT는 지역노조들이 총파업을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했다. 정부는 사회적 항의에 직면하여 몇 가지 양보와 약속을 내놓았으나 이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정부의 주된 반응은 강력한 억압이었다. 벤 알리 정부는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순차적으로 휴교령을 내리고, 경찰에 폭동진압 장비 사용을 허가하고, 야간통행금지를 선포하고, 군대를 주요 도시에 배치하고 궁극적으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하지만 어떤 조치도 시위 확산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시위가 더욱 강화되면서 ‘정부 억압의 강화와 시위의 급진화’라는 순환이 형성되었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그 목표는 벤 알리 일가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되었다. 그럼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남동부 도시 시디 부지드에서 과일, 채소 노점상을 하던 무하메디 부아지지가 분신자살 시도했다. 26세의 부아지지는 가족 8명의 유일한 부양자였으나, 경찰이 불법이라는 이유로 손수레와 상품을 몰수했다. 부아지지는 관청에 부당함을 호소하러 갔지만 냉대를 받고 이에 분개하여 바로 분신을 시도했다. 이 사건을 목격한 대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시위가 벌어졌으나 경찰은 폭력적으로 대응했다. 이에 따라 12월 18일 시디 부지드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부아지지는 수도 튀니스의 병원으로 이송되고 벤 알리 대통령은 폭동을 가라앉히기 위해 12월 28일 병원을 방문했다. 그러나 부아지지는 2011년 1월 5일 사망했다.) 그러자 이와 유사한 사건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2010년 12월 22일, 시위에 참여했던 라흐센 나지가 ‘배고픔과 실업’에 항의하며 송전탑에 올라 스스로 감전사를 선택했다. 같은 날 람지 알 아부디도 소액대출 연대프로그램에서 빌린 빚 때문에 자결했다. 12월 24일 튀니지 남부 도시 보우지아네에서는 모하메드 아마리가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했고, 역시 총을 맞은 차우키 벨하우시네 델 하드리도 12월 30일에 사망했다. 시드 부지드에서 정부 당국과 주민이 충돌할 때마다 폭력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졌다. 12월 27일, 마침내 시위가 수도 튀니스에 도달하게 되었다. 12월 27일 1,000명의 시민이 시드 부지드 주민에 대한 연대를 표현하고 일자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인 것이다. 하지만 독립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개최한 집회는 내무부 소속 보안군에 의해 제지되었다. 시위는 수스, 스팩스, 메크나시 등 주요 도시로 확대되었다. 12월 28일 튀니지노동조합총연맹(UGTT)도 카프사에서 집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역시 경찰이 제지했다. 12월 27일 300명의 법률가들도 튀니스 정부청사 주변에서 집회를 개최했다. 법률가들의 시위는 12월 29일까지 지속되었고, 경찰은 폭력으로 이를 진압했다. 12월 28일 벤 알리 대통령은 텔레비전 방송에서 시위대에 대해 ‘[이슬람]극단주의자와 용병’이라며 범죄자라고 부르고 강력한 처벌을 경고했다(벤 알리의 1차 텔레비전 발표). 하지만 시위대는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12월 29일 벤 알리 대통령은 유화책을 제시했다. 그는 내각을 교체하면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장기 실직 중인 청년들에게 생계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민간부문과 협력할 것을 내각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여러 지역들에 자원을 공평하게 할당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이는 시위대의 주요 요구 중 하나였다.). 다음날 1월 30일 벤 알리 대통령은 시드 부지드, 젠주바, 자그후안 주지사를 해임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믿는 시위자는 아무도 없었다. 12월 30일 경찰은 모나스티르에서 벌어진 시위는 평화적으로 해산시켰지만, 스비크하, 체바에서 벌어진 시위에 대해선 폭력을 사용했다. 12월 31일에도 시위가 지속되었고, <튀니지법률가집단>도 계속 시위를 이어나갈 것을 호소했다. 2011년 1월 3일, 타흘라에서 실업과 생계비용 상승에 항의하며 벌어진 시위가 폭력적으로 전환되었다. 대부분 학생이었던 250명의 시위에 대해 경찰은 최루가스를 발포했다. 그에 대응하여 시위자들은 집권여당인 헌법민주주의회의 당사를 공격했다. 1월 6일에는 <전국변호사협회> 의장의 요청에 따라 튀니지 8,000명의 법률가 중 95%가 파업에 돌입했다. 1월 7일 교사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급기야 1월 8~10일 시위 진압 과정에서 수십 명의 시위대가 사망했다. 1월 10일 벤 알리 대통령은 텔레비전 방송에서 3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결코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하지 못했다(벤 알리의 2차 텔레비전 발표). 동시에 그는 여전히 시위가 복면을 한 폭력단의 테러 행위라고 묘사하고 이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1월 10일 정부는 모든 학교와 대학의 무기한 휴업을 선언하며 시위 확산을 막고자 했고, 1월 11일에는 경찰이 시위 진압을 위해 폭동진압장비를 사용했다. (튀니스에서 건물 약탈, 타이어 소각, 차량 방화가 발생했다.) 또한 군대가 주요 도시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1월 12일에는 튀니스에 야간 통행금지가 선포되었다. 1월 12일 벤 알리는 세 번째로 유화책을 발표했다(벤 알리의 3차 텔레비전 발표). 그는 실탄 사용 중단을 명령했고 체포된 시위대를 풀어주고 언론에 가해진 제한을 해제했으며 내무부 장관을 해임했다. 또한 벤 알리는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면서 2014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시위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1월 12~14일 UGTT 소속 노동조합이 파업을 벌였다. 파업은 1월 12일 스팩스 지역, 1월 13일 카세린, 카이로운, 수스, 모나스티르 지역, 1월 14일 튀니스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또한 1월 12일 해방당(히즈브-우트-타흐리르)은 1월 14일 금요 정오 합동예배 후 시위를 조직하여 이슬람 칼리프 국가의 재수립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1월 15일 해방당은 정치범 석방을 위해 <4?9 형무소>로 행진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1월 14일에는 사진기자 루카스 돌레가 근거리에서 발사한 최루탄에 맞아 1월 16일에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어떤 억압이나 유화책에도 시위가 약화되지 않자 결국 1월 14일 벤 알리는 정부를 해산하면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세 명 이상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구속하고 만약 도주하면 발포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그는 6개월 내에 총선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1월 14일에도 시위가 벌어졌고, 결국 1월 14일 밤 벤 알리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그가 정치를 떠난다는 조건으로 망명을 수용했다. 그에 따라 1월 15일 아침 튀니지 방송은 벤 알리가 공식적으로 사임했다고 발표했다. 간노우치 총리는 권력 승계를 선언할 듯 보였으나 곧 국회의장 푸아드 메바자에게 권력을 넘긴다고 발표했다. 이는 튀니지 헌법재판소장 페티 아브덴나드헤르의 선언 직후 발표되었다. 그는 간노우치가 권력을 승계할 권리가 없고 메바자가 60일 이내에 새로운 총선을 조직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호응하여 메바자는 단일한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발표했다. 결국 서방 언론의 시각과는 정반대로 2010년 12월 17일 부아지지가 분신을 시도한 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2011년 1월 14일 벤 알리 정권이 무너졌다. 튀니지 혁명의 2단계: 1월 17일 과도정부의 새 내각 발표부터 3월 3일 제헌의회 선거계획 발표까지 벤 알리가 망명을 선택할 때까지 튀니지 혁명 과정에 단일한 정치 지도부가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벤 알리 망명 이후부터는 정치조직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부흥당 당수 간노우치가 1월 30일 귀국한 것을 비롯해 타국에 망명해 있던 정치활동가들이 대거 입국했다. 부흥당은 벤 알리 퇴진 이후 운동 주제를 분명히 밝혔다. 그것은 “RCD와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벤 알리 퇴진 후 25개 조직들이 <혁명수호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에는 UGTT, 전국법률가운동, 튀니지인권연맹, 튀니지노동자공산당 등 봉기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조직이 참여했다. <혁명수호위원회>는 자신이 일종의 ‘의회’ 역할을 하겠다고 과도정부에 요구했다. 즉 <혁명수호위원회>는 입법, 결정, 감독권한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과도정부는 이를 명확히 거부했다. 그 후 과도정부는 <혁명 목표의 실현, 정치개혁, 민주주의 이행을 위한 고위위원회>를 구성했고 여기에 <혁명수호위원회> 소속 단체가 참여했다. (튀니지노동자공산당과 같은 좌익조직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고위위원회>는 과도정부에 소속되어 자문역할을 맡았다. <고위위원회>는 RCD 지도자들의 선거 참여를 배제해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과도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혁명수호위원회>는 RCD의 제거, 제헌의회 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조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럼 그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1월 14일 벤 알리의 망명 직후에도 사태의 여파가 남아 있었다. 1월 15일 시위자들은 통행금지에 항의하며 시위를 지속했다. 또한 1월 16일에는 벤 알리의 측근으로서 내무부 소속 보안군 수장 알리 세리아티가 구속되었는데, 구속 직후 튀니스에서 군대와 보안군 간 총격이 발생하여, 군대가 보안군을 제압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1월 17일 새로운 내각이 발표되었다. 새 내각에는 집권 여당 RCD 소속 인사가 12명에 이르러 다수를 차지하였다. 나머지는 과거 벤 알리 정부 당시 합법으로 분류되었던 야당 인사 3명(<진보민주당 설립자> 체비가 지역개발장관에, <자유와 노동을 위한 민주포럼>의 당수 벤 자파르가 보건장관에, <쇄신운동> 당수인 이브라힘이 고등교육장관에 내정되었다), 튀니지일반노동조합(UGTT) 인사 3명(디마시 노동장관, 베두이 총리실 소속장관, 벤 게두르 교통장관), 시민사회 인사(저명한 블러거 아마모우 포함)로 구성되었다. 또한 헌법과 일반 법령 개정을 검토하는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내각 발표 직후부터 새로운 정부에 RCD 당원이 포함된 것에 항의하는 시위가 매일 개최되었다. 시위에 참여했던 일부는 과도정부에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대부분은 과도정부가 정통성을 결여했다고 규탄했다. 그에 따라 1월 18일 UGTT에 소속된 세 명의 장관은 RCD 인사들이 내각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사임을 발표했다. <자유와 노동을 위한 민주주의포럼>의 당수 무스타파 벤 자파르도 보건장관직을 거절했다. 임시 대통령 푸아드 메바자, 총리 간노우치도 항의 시위를 무마하기 위해 RCD를 탈당했다. 1월 18일 RCD의 내각 참여에 항의하는 거리 시위가 튀니스, 스팩스, 가베스, 비제르타, 수스, 모나스티르에서 벌어졌다. 1월 19일에는 튀니스 내무부장관 청사 주변에서 연좌시위가 벌어졌고 시위 참여자는 RCD 해체를 주장했고, “새로운 의회, 새로운 헌법, 새로운 공화국”을 요구했다. 1월 20일 수백 명의 시위대가 튀니스의 RCD 중앙당사 밖에서 시위를 벌였고, 1월 21일에도 내무부 밖에서 수천 명이 시위를 벌였다. 연일 시위가 지속되자 1월 20일 벤 알리의 측근 주하이르 음다파르가 내각에서 사임했고(그는 2002년 대통령 임기 제한을 제거하는 헌법개정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졌다), 1월 20일 모든 RCD 소속 장관들이 RCD에서 탈당했다. 또한 같은 날 1월 20일 RCD 중앙위원회가 해산되었다. 계속되는 시위에 밀려 1월 27일 간노우치 총리는 RCD 소속이었던 6명의 내각 구성원(국방부, 외무부, 재무부, 내무부 장관 등)이 과도정부를 떠날 것이라고 발표했다. 간노우치 본인을 제외하면 산업부 장관, 국제협력부 장관 등 2명만이 과거 벤 알리 정부의 장관 출신으로 남게 되었다. (그 두 명은 RCD 소속이 아니었다.) 이는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UGTT는 내각 재구성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월 28일에도 수백 명의 시위대가 간노우치가 과도정부에 잔류하는 것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총리실 밖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다. 2월 19일, 20일 다시금 시위가 고조되었다. 4만 명의 시위대는 새로운 과도정부에 구정권과 관계가 있는 어떤 인사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고, 또한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개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2월 25일 총선 일자가 2011년 7월 중순으로 발표되었다. 그 후에도 10만 명의 시위대가 과도정부 총리 간노우치의 사임을 요구했다. 결국 2월 27일 더 큰 규모의 시위가 벌어진 후 간노우치 총리가 사임하고 에셉시가 새로운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간노우치 총리의 사임 이후로는 제헌의회 문제가 가장 큰 쟁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2월 28일 UGTT는 제헌의회를 선출하여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3월 3일 메바자 대통령, 2011년 7월 24일 제헌의회 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총선이 그 후로 연기된다는 뜻이었고, 이러한 발표는 시위대의 핵심 요구를 받아들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3월 3일 제헌의회 선거 실시 발표는 튀니지 혁명에서 ‘최후의 일격’을 의미했다. 이로써 튀니지인은 출발점에서부터 헌법을 새롭게 제정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거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 이집트에서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임 이후 국방장관을 장으로 하는 군사최고평의회가 권력을 승계했고, 3월 20일 정부가 조정한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었다. 이집트에서 벌어진 일은 튀니지 시위대가 결사코 막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3월 3일 제헌의회 선거 계획 발표 후 최근 상황 3월 6일 내무부는 RCD의 모든 활동을 전면 금지했고 3월 9일 법원 명령에 따라 RCD가 해체되었다. (또한 3월 7일 과도정부는 비밀경찰이 해체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RCD의 영향력이 완전히 제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7월 24일로 예정되었던 제헌의회 선거가 10월 23일로 연기되었는데 가장 큰 요인이 RCD의 영향력이다. 비록 RCD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지만 인적, 조직적 영향력이 막강한 데 비해 벤 알리의 집권기 동안 불법화된 정당들은 여전히 준비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6월 8일 에셉시 총리는 이날 정당 및 시민단체, 지역 대표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우리는 모든 견해를 검토해 선거를 10월 23일에 치르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벤 알리의 망명 후 궐석재판과 폭로를 통해서 벤 알리 집권기의 막대한 규모의 비리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 5월 2일 스위스 외교부가 북아프리카 지도자들의 은닉 재산을 공개했다.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와 그 측근이 3억 6,000만 스위스프랑(약 4,428억 원), 무바라크 이집트 전 대통령과 연계된 자산 규모는 4억 1,000만 스위스프랑, 벤 알리 튀니지 전 대통령의 자산은 6,000만 스위스프랑에 달했다. (외교부 대변인은 “연방정부 지시에 따라 불법일 가능성이 큰 이들의 자산은 동결된 상태”라고 밝혔다.) 또한 6월 20일 월스트리트저널은 국제투명성기구(TI)의 집계를 인용해 벤 알리와 인척들이 집권 23년 동안 은행과 통신, 부동산 업체 등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해왔다면서 440억 달러 규모의 튀니지 경제 중 3분의 1가량을 이들이 통제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벤 알리는 1987년 권력을 잡은 뒤 대부분 국가가 운영하던 경제 각 부문의 업체를 민영화하면서 이를 인척들에게 배분하는 방식으로 재산을 축적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벤 알리 대통령에 대한 궐석재판이 진행 중이다. (튀니지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벤 알리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사우디가 이를 거부함에 따라 궐석재판이 진행되었다.) 6월 20일 튀니지 형사법원은 공금횡령과 오용 등의 혐의로 벤 알리 대통령에게 35년 형을 판결하며 벌금 5천만 디나르(약386억 원)를 선고했고, 또 부인 트라벨시에게도 징역 35년과 벌금 4천100만 디나르를 선고했다. 7월 4일에는 무기, 마약 등의 불법소지 혐의로 벤 알리 전 대통령에게 징역 15년형을 추가로 선고했다. 7월 28일에도 부패와 권력남용 혐의로 벤 알리 대통령에게 징역 16년이 추가로 선고되었다. 벤 알리의 딸인 네스린과 사위 사케르 마테리도 각각 징역 8년과 16년형을 선고받았다. 조카인 소피엔 벤 알리도 징역 2년이 선고받았다. 앞으로 튀니지 혁명 과정에서 시위대 살해와 같은 중대 혐의가 남아 있기 때문에 벤 알리에게 최종적으로 사형선고가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 대중 시위도 여전히 진행 중이고 사망자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벤 알리 대통령이 물러났지만 튀니지의 공식 실업률이 오히려 높아지는 상황이 말해주듯이 사회경제적 상황은 과거와 달라진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5월 7~9일 사이에는 에셉시 총리의 퇴진과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벌어져 군경과의 충돌로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에셉시 정부는 5월 7일부터 통행금지령을 발령하고 대대적인 단속을 실시하고 5월 10일에도 “경찰을 공격하거나 절도를 저지르고 최근 발효된 통행금지령을 어긴” 혐의로 197명을 체포하면서 시위를 적극적으로 억압하고 있다. 7월 18일에도 시드 부지드에서 벌어진 시위 과정에서 14살 소년이 보안군의 발포로 목숨을 잃었다. 이에 따라 7월 21일에는 수도 튀니스에 6,000여 명의 시위대가 폭력중단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튀니지 혁명의 역사적 의의 그렇다면 서방 관측가들이 “모든 반정부 세력은 빈혈증에 빠져 있다”고 단언할 만큼 2011년 튀니지 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기존 반정부운동, 사회운동은 극도의 무기력에 빠져 있었는가.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튀니지 현대사를 지배한 두 명의 정치지도자인 부르기바와 벤 알리 집권기의 통치전략, 국가와 사회운동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생전에 튀니지 독립의 영웅이자 국가건설의 아버지로 칭송되던 부르기바는 자신의 정당인 신헌법당을 사회주의헌법당으로 개편하면서 사회주의를 실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민중의 민주적 참여를 실질적으로 배제한 것이었고 부르기바는 노동조합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지도자들의 사적인 이익을 거래수단으로 삼는 일종의 후원-수혜 관계로 경쟁자와 사회운동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적 정책전환으로 인한 위기 속에 권력을 찬탈한 벤 알리는 노골적인 억압과 탄압으로 경쟁자와 사회운동을 제거하기로 결단했다. 부르기바 집권기에 권력이 제공하는 후원에 취해 있던 사회운동은 더 이상 집권당과의 후원-수혜 관계라는 거래에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에 당황했고 정부의 강력한 탄압에 처하자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부르기바 집권기(1956년~1987년)의 후원-수혜 관계 1956년 3월 프랑스와 튀니지가 의정서를 교환하여 마침내 프랑스의 튀니지 위임통치가 종식되었다. 부르기바는 제헌의회 의장과 내각 총리를 맡게 되었다. 1957년 제헌의회가 베이(오토만 제국이 소규모 부족집단의 수장에게 부여한 명칭)의 권한을 박탈함으로써 부르기바를 국가수반으로 하는 독립 튀니지 공화국이 탄생했다. 1959년 헌법은 부르기바에게 사법, 입법, 행정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부르기바는 사법부를 통제했고, 입법부에 최소한의 권한만 부여했으며 언론의 자유에 제한을 가했다. 따라서 그의 권력은 거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부르기바는 자이투나 모스크(대학)의 국유화나 가족법 개혁과 같은 세속화 정책으로 종교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부르기바는 일부다처제 금지, 여성 이혼권 확대, 결혼 연령의 17세로 상향 조정을 입법했다. 1965년 통과된 <개인 지위에 관한 법률>도 여성의 권리를 확대했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가족의 장으로 제도화한다.) 식민 해방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노동조합과 여성운동은 국가의 통제 하에 들어가고 당 기구에 통합되었다. 1958년에 설립된 튀니지전국여성연합이 대표적 사례다. (여성연합의 초대 명예의장은 1962년 부르기바와 결혼한 와실라 벤 아마르였다.) 1959년에 제정된 법률에 따라 시민조직 설립은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예를 들어 공산당에 가맹한 여성조직은 정부 승인을 받을 수 없었고 1961년 불법화되었다. 1963년 이후로 신헌법당은 튀니지의 유일한 합법정당이 되었다. 1964년 부르기바는 신헌법당을 사회주의헌법당(PSD)로 개편했고, 당원 수는 약 2백만 명으로 증가했다. 부르기바는 선거법과 선거구 조작, 협박, 투표함 조작, 투표용지의 선택적 분배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90~98%에 이르는 득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부르기바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통치전략은 ‘후원-수혜’(patron-client) 관계였다. 그는 이러한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정당과 국가관료제에 대한 통제권을 공고히 했다. 부르기바는 튀니지의 유일한 정치적 후원자가 아니라 여러 후원자 중 최고 후원자 역할을 자임했다. 그는 중요한 직위를 수여하거나 박탈하면서 충성심에 대한 현실적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이는 오직 억압과 공포에 의존한 체계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방식으로 부르기바의 개인 권력을 강화시켰다. 또한 부르기바는 시위와 분쟁을 활용하는 데도 능통하였다. 부르기바는 대중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을 하며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노동조합 지도부를 교체시키기 위해 노동자의 불만을 활용하기도 했다. 즉 부르기바는 엘리트 정치와 대중 시위를 혼합하는 데 능숙하였다. 그는 경쟁자를 궁지에 빠뜨리려고 개별적으로 불만을 자극하고 학생운동, 노동자운동과 동맹을 형성하기 위해 협상을 벌임으로써 대중적 지지를 유지하였다. 1967년 부르기바의 건강 문제가 등장하자 분명한 후계자도 없고 후계자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엄청난 경쟁이 발생했다. 부르기바는 총리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엘리트 간 경쟁을 자신에 유리한 방식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는 대통령이 총리를 선출할 권한을 지니고 대통령이 죽거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총리가 대통령직을 자동 승계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정당의 고위 인사들은 부르기바에 대항하여 동맹을 형성하기보다는 총리가 되기 위해 부르기바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부르기바가 고령으로 접어들자 튀니지 정치는 부르기바의 죽음에 판돈을 건 집단적 도박이 되었다. (즉 부르기바가 죽을 때 총리인 자가 권력을 승계한다는 도박.) 1975년 부르기바는 헌법 40조를 수정하여 스스로 ‘종신대통령’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부르기바는 사회주의헌법당으로 당명 개칭이 보여주듯이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실험하였다. (물론 그것은 민중의 민주적 참여가 배제된 국가주의, 엘리트주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부르기바 정부는 1970년대 초반부터 그 실험을 포기하고 헤디 누이라 총리를 선봉으로 삼아 10년간에 걸친 자유주의 경제발전 모델에 착수했다. 이는 사기업의 융성과 사적부문의 강화로 이끌었다. 그로 인한 1977년 노동조합 운동의 급진화는 부르기바가 더 이상 정치상황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두 가지 요인 때문에 부르기바는 사회적 갈등이 폭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첫째, 1970년대 높은 경제성장률은 지속적인 임금인상과 광범위한 소비자 보조금 체계가 작동할 수 있게 했다. 둘째, 노동조합, 학생조합이 공적 기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부르기바는 그들의 내부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이러한 조건조차 지속되지 않았다. 1980년대 초반부터 재정적자 축소를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했고, 1986년부터는 일부 무역부문에 지원을 집중하는 구조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처럼 경제 악화, 외채 위기, 국제금융기구가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개혁은 사회적 평화를 ‘매수’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을 잠식했다. 부르기바는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를 더 이상 인내하지 않았고 1984-85년 노동조합을 강력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부흥당의 전신인 <이슬람경향운동>은 노동조합 억압이 창출한 공백에 진입하여 사회세력으로 성장했다. 정치인들은 공개적으로는 <이슬람경향운동>을 비난했지만 사적으로는 그 조직의 환심을 사려 했다. <이슬람경향운동>은 비밀조직이었고 외부 조정이 가능한 틈이 없는 독립적 실체였다. 따라서 부르기바는 <이슬람경향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무리한 싸움을 시작했고, 이는 1987년 벤 알리가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튀니지 사회운동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 튀니지 정치문화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대중시위를 활용하는 부르기바의 전략은 저항을 위한 기회를 제공했으나 노동자, 학생, 이슬람주의자 지도자들은 그러한 기회를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고자 했다. 벤 알리 집권기(1987~2011)의 권위주의 체제 1980년대 총리와 내무부장관을 맡았던 벤 알리는 1987년 11월 헌법을 수정하여 대통령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공직을 수행할 수 있을 때만 종신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조항을 추가했고, 의사를 불러 부르기바의 건강상태가 나쁘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는 벤 알리가 기습적인 ‘궁정 쿠데타’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벤 알리는 쿠데타를 ‘변화’로 선전했다. 1987년 집권 후 벤 알리는 법의 지배, 인권 존중, 민주적 정치개혁을 약속했다. 집권 첫해, 벤 알리는 개혁에 열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정치범을 사면하고, 국가보안법원과 대통령 종신제를 폐지하고, 재판 전 구금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고 국제연합의 고문에 관한 협약을 비준했다. 벤 알리는 정당, 사회단체 결성이 용이하도록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고 주요 정치조직, 사회단체와 ‘전국협약’을 체결했다. 또한 1988년 부르기바의 사회주의헌법당을 헌법민주주의회의(RCD)로 개편했다. 그러나 1989년 선거는 튀니지가 더욱 깊숙이 권위주의로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1988년 벤 알리는 부흥당의 합법화를 거부했다. 또한 야당이 비례대표제 도입을 요구했지만 1989년 총선은 과거의 다수대표제 하에 치러졌다. 다수대표제와 언론 제한을 통해 1989년 4월 총선에서 RCD는 모든 의석을 독차지했다. 1989년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유일한 후보자였고 99%를 득표했다. 그 후 벤 알리 정부는 부흥당과 튀니지노동자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심야 급습, 가택 수색이 일상사가 되었다. 1991년 튀니스 바브수이카 구역의 집권여당 RCD 사무실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고 보안군이 부흥당의 정권 전복 음모를 밝혀냈다고 발표한 후 부흥당을 붕괴시키려는 공세가 더욱 강화되었다. 1990~92년 사이 8,000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그 중 일부는 고문을 받았다. 최소 8명이 고문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벤 알리 집권기에 언론은 일자리가 경쟁적 환경에서 해외투자를 유치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했다. 또한 알제리와 이집트를 지목하면서 어떤 종류의 이슬람 정당도 경제적 카오스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2년 말에 이르러 경제성장률이 8% 이상으로 상승하고, 부흥당도 더 이상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1992년 12월 벤 알리는 새로운 선거법을 제정했지만 합법적 야당이 매우 적은 의석만 차지할 수 있게 했다. 벤 알리 집권 후 10년간 보안기구가 극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확장은 내무부와 공식 경찰력 외부에서 이루어졌다. 벤 알리 정부는 예산에서 ‘주권 기금’이라고 명명된 비자금을 활용하여 대통령 직속으로 운영되는 보안기구를 구축했다. 내무부와 대통령 직속 보안기구는 감시와 전화도청, 비디오카세트 위조, 가족 협박, 여권 몰수, 구타, 암살을 자행했다. 저명한 야당 인사뿐만 아니라 기층 노동자, 인권활동가, 대학교수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 결과 벤 알리는 부르기바와 매우 상이한 국가-사회관계를 구축했다. 벤 알리가 1986년 내무부 장관이 되기 전 그의 경력은 군대와 보안군이 전부였다. 그는 1970년대 이후로 부르기바가 노동자, 학생, 이슬람주의자를 탄압할 때 이를 지휘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정치체계는 마비된 상태였고, 경제위기는 당의 전통적 엘리트의 평판을 악화시켰다. 야당과 다른 조직들은 내부 분열과 정부의 억압으로 인해 장애를 겪고 있었다. 즉 벤 알리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조직화된 도전 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 요인이 그에게 약점이었다. 첫째, 집권 후 10년 동안 부흥당은 벤 알리 정부의 가장 큰 근심사였다. 특히 알제리 벤자디드 정부의 사례는 충격적이었다. 알제리에서 1988년 대규모 식량폭동이 발발하여 600명 이상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1989년 2월 알제리 벤자디드 대통령은 민주화를 약속하며 다당제와 국민투표를 채택했다. 이에 따라 알제리 최초로 이슬람 정당이 구성될 수 있었다. 이슬람구국전선(FIS)은 1989년 6월 지방선거에서 55%의 득표율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알제리 군부는 1992년 총선을 취소하고 이슬람구국전선을 불법화하면서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다. 벤 알리는 이슬람 세력이 선거에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심했다. 둘째, 벤 알리는 전통적인 정당정치로부터도 자유로웠지만 이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당의 고위인사들이 벤 알리가 기습적으로 대통령직을 차지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이들이 정당, 국가관료, 또는 여타 조직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벤 알리의 권력을 훼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벤 알리는 부르기바의 통치 스타일을 실행하기에는 사회적 기반도 없었고 후원-수혜 네트워크도 없었다. 따라서 벤 아리는 부르기바처럼 강력한 정치인과 사회행위자들 간 경쟁을 촉발시킬 만한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벤 알리는 정당과 국가 관리가 권력 중심부에 진입하는 것을 억제했다. 그는 1970년대에 상당한 권력을 누린 당 고위직을 폐지하고 장관들의 자율성을 축소시켰다. 벤 알리의 내각은 정치경력이 전혀 없거나 당과 국가관료에 연계망이 없는 인사들로 구성되었고, 내각 교체도 빈번히 일어났다. 또한 그는 엘리트와 대중정치의 결합을 파괴하기 위해 시민사회를 무력화했다. 벤 알리도 초기에는 부르기바 스타일로 야당과 사회단체를 속박하려 시도했으나 1989~90년 광범위한 반대 전선이 형성되자 철저한 탄압을 가했다. 1990년 튀니지 내외부의 반대 집단이 참여한 튀니지구국전선이 결성되었다. 주도 인사는 전 총리 모하메드 음자리와 구 사회주의헌법당 인사들이었다. 튀니지구국전선은 부르기바 정권의 인사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 부흥당 인사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강력히 규탄하고, 이데올로기와 제휴조직에 상관없이 모든 민주주의자들이 통일 단결할 것을 촉구했다. 벤 알리 정부는 튀니지구국전선이 부흥당, 튀니지인권연맹(LTDH),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전투적 부위, 합법 야당 등과 동맹을 결성하는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벤 알리 정부는 모든 종류의 파업, 시위, 성명에 대해 강력한 탄압을 가했다. 벨 알리 정부의 억압 전략은 튀니지 시민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사회단체가 시위에 참여할 때 가해지는 위험이 커지고 집단행동을 조직하는 게 훨씬 더 어려워졌다. 벤 알리의 시도가 30년간 유지된 지배 엘리트와 대중정치의 연계를 파괴하자, 튀니지 시민사회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번 튀니지 혁명이 발발하기 전까지 튀니지 사회운동은 20여 년간 조직적 저항을 시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튀니지 혁명의 미래 벤 알리 대통령이 제거된 후 혁명의 사회적 측면은 언론에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전통적 지배층이 권력을 잡고 있으며 그들은 혁명의 심화를 원하지 않고 있다. 내각과 주류언론은 혁명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무시하거나 “순전히 물질적 관심사는 튀니지 경제의 안정화를 손상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류 언론은 노동자, 실업자가 경제적 요구를 내거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혁명의 고결한 목표를 훼손하는 것이라며 그들을 비난한고 있다. 특히 주류언론은 튀니지노동조합총연맹과 튀니지노동자공산당을 강력히 비난하고 있다. 또한 RCD는 해산했지만 그 영향력이 확실히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RCD 인사들은 새롭게 정당을 조직하여 선거에 참여할 수 있으며 벤 알리 치하에서 축적한 인적, 조직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RCD 인사들이 결국 과도정부에서는 배제되었지만 여전히 주요 국가기관과 기업에서 중요 직책을 맡고 있다. 벤 알리 직속 정치경찰은 해체되었지만 벤 알리를 지지했던 민병대, 경찰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특히 농촌지역으로 갈수록 악랄한 파괴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따라서 튀니지 혁명의 미래는 전혀 낙관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튀니지 혁명의 미래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대중운동의 발전 전망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지역별로 자율적인 혁명수호위윈회가 구축되었다. 시드 부지드, 멘젤 부아자이외네, 아가레브, 타흘라 지역의 혁명수호위원회가 그 대표적 사례다. 이 지역에서는 벤 알리 정부의 경찰, 지역정부의 억압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이 건설되었는데 이것이 대중적 조직이자 지방의 운동 지도부로 발전되었다. 벤 알리 정부가 붕괴된 후에도 벤 알리 정부에 충성했던 민병대나 경찰에 의한 공격이 벌어졌고 이에 따라 자위대가 조직되기도 했다. RCD가 붕괴한 후 RCD 사무실이 지역 자치조직의 사무실로 이용되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자발적인 조직형태가 유지되기도 하고 어떤 지역에서는 지역 지도부가 선출되기도 했다. 마을위원회는 사실상 지방자치체로 기능하기도 했다. 이는 일상생활을 조직하고 민병대, RCD, 경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며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토론하기 위한 자기 조직화의 과정이었다. 현재 여러 지역에 건설된 혁명수호위원회는 매우 이질적이지만 기층운동을 강화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또한 이러한 형태의 조직은 사회정의라는 문제가 다시 튀니지 사회의 최전선에 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둘째, 튀니지 혁명 과정에서 UGTT 조합원의 급진화가 나타났다. 또한 노동조합은 부패한 경영자를 제거하고 이를 적임자로 대체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튀니지 텔레콤에서 사유화된 30%의 지분을 재국유화하고 가장 부패한 관리자를 제거하기 위한 노동자 투쟁이 전개되었다. 정부 부문 노동자들도 부패한 장관들을 거부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2002년 UGTT 대회는 집행위원회의 임기를 2회로 제한했다. 그에 따라 다음 번 대회에서 UGTT 집행위원회가 대거 교체될 수도 있다. 혁명과정에서 모든 기관들에 대한 민주화 요구가 증진되었기 때문에 UGTT 지도자들과 운동 노선의 변화를 기대할 수도 있다. 또한 2011년 10월로 예정된 제헌의회 선거가 튀니지 혁명의 미래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지, 아니면 퇴행적 역할을 할지 주목해야 한다. 현재 튀니지에는 신생정당을 포함해 50개 정당이 활동하고 있다. 다가올 10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어떤 정당이 얼마나 득표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관측가들은 부흥당의 우세를 점치기도 한다. 혹자는 부흥당의 35% 득표가 가능하다고 말하고 혹자는 25%까지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부흥당이 얼마나 대중기반을 지니고 있는지 누구도 말할 수 없다. 부흥당은 1991~2011년 동안, 즉 20년 간 활동이 금지되었으므로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정당도 마찬가지다. 벤 알리 정권 하에서 튀니지 사회가 극단적으로 탈정치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흥당이 1980년대에 벤 알리 정부의 살인적 탄압에 저항하며 호텔에 폭탄 테러를 가하고 튀니지의 핵심산업인 관광산업에 위협을 가했던 사실이나 1991년 튀니스의 RCD 당사에 방화와 공격을 가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튀니지의 세속적 엘리트들은 과거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부흥당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현재 부흥당은 벤 알리 망명 이후 혁명 과정에서 협력했던 단체들이 선거에도 동맹을 유지하여 ‘민족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했다. 부흥당은 어떤 정당도 혼자 힘으로 정국을 이끌 수 없다며 사회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 노동조합, 인권단체 등이 모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부흥당이 다른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자유, 정교분리, 보통선거, 다당제, 자유언론을 지지한다고 주장하지만, 부흥당이 협력을 원하는 세력이 과연 부흥당을 동반자로 받아들일 것인가 문제는 아직까지 다소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슬람 신정국가를 표방하는 해방당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와 경쟁해야 하는 부흥당이 오히려 앞으로 이슬람적 요소를 강조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현재 튀니지에서는 선거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지만 튀니지 혁명의 미래는 기층 조직화, 대중운동의 발전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튀니지 혁명 과정에서 제기된 광범위한 사회변혁 요구를 담아내는 대중운동이 발전할 때만 제헌의회가 튀니지 민중에게 새로운 기회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 이슬람주의와 무슬림형제단 튀니지 제헌의회 선거에서 부흥당이 가장 많은 득표를 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부흥당이 가맹한 조직인 <무슬림형제단>과 이슬람주의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에 뿌리를 둔 조직이다. 이슬람주의는 다양한 용어로 표현된다. 이슬람 근본주의(Islamic Fundamentalism, 또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문자주의적 해석에 기초한 경전 중심주의, 구원에서 교회의 중재역할 부인, 세속화의 거부 등에서 볼 수 있는 19세기 말 미국의 개신교 근본주의와 유사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슬람 절대주의(Islamic Integralism)는 19세기 말 나타난 로마 카톨릭의 보수적 경향처럼 여타 사상, 종교의 존재가치를 전면 부정하고 그 자체로 충분한 이슬람 원리를 총체적으로 세상에 실현시키려는 측면을 강조한다. 이슬람주의(Islamism)는 이슬람 원리의 실현을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측면을 강조한다. 정치적 이슬람(political islam)은 현재 이슬람 종교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슬람 급진주의(Radical Islam, Islamic Radicalism)는 현 사회체제에 대한 평가와 대응방식, 교리해석에서 나타나는 급진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슬람주의는 이슬람의 가치를 세속적인 세계에 적용시키려는 이데올로기이자 운동을 뜻한다는 점에서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용어로 볼 수 있다. 현실세계의 이슬람은 제도권 정치세력으로서의 이슬람과 저항세력으로서의 이슬람, 아랍 근대성의 상징으로서 이슬람과 보수·반동의 주역으로서 이슬람이 공존한다. 따라서 통일적인 중동, 또는 동질적인 아랍사회를 전제로 한 이슬람의 정치와 종교나 아랍의 이슬람주의에 대한 논의는 모두 부적절하다. 1928년에 설립된 무슬림형제단의 창시자 하산 알 바나가 대중적인 지지를 얻게 된 것은 1936~38년이었고, 이 시기에 회원 수가 300명에서 20만 명으로 늘어났다. 무슬림형제단은 평등하고 부유하며 자유로운 이슬람사회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내세웠고 그 수단으로서 전도단, 교육, 교리화, 이슬람사원·학교·병원·의료봉사시설 건설을 제시했다. 이런 수단을 바탕으로 그는 모든 정당의 금지, 정부의 부패행위 종료, 사법권의 독립, 교육과 대중교육에 대한 정부의 관리 강화를 주장했다. 그 시기에 무슬림형제단은 내적으로는 교육, 의료 등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하고 외적으로는 당시 떠오르고 있던 팔레스타인 문제에 집중하면서 대중의 폭발적 지지를 모을 수 있었다. 1948년 12월 28일 무슬림형제단원이 이집트 수상이었던 노크라쉬를 암살하자(수상은 무슬림형제단을 불법화하려 함) 정부는 1949년 2월 지도자 하산 알 바나를 암살했다. 나세르 혁명 후 무슬림형제단은 1957년 이집트에서 불법단체가 되고 활동이 금지되었다. (1954년 무슬림형제단은 나세르 혁명정부가 영국군이 6년 이상 더 주둔하도록 영국과 협정을 맺자 나세르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70년대 사타트가 좌파에 대한 경쟁세력으로 형제단을 활용하였고 형제단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법에 반영했다. 즉 ‘위로부터 재이슬람화’가 추진되었다. 이러한 제도화를 배경으로 형제단은 무력사용을 포기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반발한 조직원들은 자마 이슬라미야를 구성하고 이들이 1981년 사다트 암살에 관여하게 되었다. 1984년 총선에서 무바라크 정권은 형제단을 정당으로는 인정하지 않지만 종교조직으로 인정하면서 유화정책을 펼쳤다. 형제단 소속 정치인은 무소속이나 다른 정당 후보자로 국회에 진출했다. 1990년대에 오면 형제단은 적극적으로 세속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인정하였다. ‘필수불가결한 민주주의’, ‘여성의 지위’, ‘소수자로서 형제단과 콥트족의 권리’에 대한 선언이 발표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양복을 착용하고 면도를 하고 단체의 로고를 부드럽게 수정하면서 이미지 개선을 추구했다. 한편 1999년 자마 이슬라미야도 모든 형태의 폭력을 중단한다고 선언했고, 지하드 역사 유사한 내용의 전술변화를 단행했다. 다수는 폭력사용 및 대정부투쟁 중단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받아들였지만 일부 소수는 글로벌한 차원의 테러리즘으로 선회했다.
8월 31일 국회 상임위 직권상정 시도에 부쳐 8월 31일 남경필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이 한미 FTA 비준 동의안 직권상정을 시도했다. 이에 반대하는 기자회견 도중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 소속 대표자와 회원들이 전원 연행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9월 국회 외통위 통과, 10월 본회의 통과라는 시나리오를 강하게 밀어붙이겠다는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의지를 보여준 하나의 사건이었다. [%=사진1%] 한미 FTA를 밀어붙이는 이명박 정부 작년 12월 한미 FTA 재협상 타결 이후, 정부·여당은 조속한 한미 FTA 국회 비준을 추진해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한미 FTA 비준은 하루빨리 이뤄져야한다”며 “FTA는 세계를 향한 핵심 전략”이라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대통령의 발언 직후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미국 의회가 한미 FTA 이행법안을 9월 회기 중 발 빠르게 처리할 것으로 전망 된다”며, “우리나라도 한미 FTA 비준안이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본격 심의되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도 “9월 초 개회되는 미국 의회에 FTA 이행법안이 공식 제출되면 인준절차가 신속하게 진행될 것”이라며 한국에서도 FTA 비준을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초 정부·여당은 미국 의회 상황과 연동해서 국회 비준을 처리하겠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동안 미국 의회가 국가 부채 상한 조정 등으로 난항을 겪다 최근 다시 한미 FTA 처리에 속도를 내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자본가 단체들의 한미 FTA 찬성 발언도 이어졌다. 전국경제인연합은 이명박 대통령이 한미 FTA의 조속한 비준을 촉구한 것에 대해 적극 환영하면서, FTA가 국가경제의 성장과 고용창출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주요 수출기업들도 하반기 수출둔화 우려를 타개하기 위해 서둘러 한미 FTA를 비준해 발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최근 10개 국책연구기관들은 ‘한미 FTA 경제적 효과 재분석’ 보고서를 통해 향후 10년 간 35만 개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근거 없는 장밋빛 전망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의 한미 FTA 강행 처리 시도 8월 초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는 미국이 FTA 이행법안을 9월 중 처리하기로 한 데 대해 “우리도 보다 박차를 가해 양국이 서로 어깨를 겨루듯 비슷한 시기에 처리됨으로써 국민 기대에 부응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은 현재 ‘9월 5일까지 외통위 상정, 17일까지 의결, 10월 본회의 처리’ 일정을 제시한 상태다. 다만 한나라당은 “한미 FTA 비준 처리는 야당과의 협상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며 한미 FTA 여야정협의체 회의를 열고 있는데, 이는 반대 여론이 높은 한미 FTA를 단독으로 통과시킬 경우 자신들에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2007년 체결된 협정안에 대해서는 ‘선 대책 후 비준’이란 기존 당론을 유지하면서도 작년 이명박 정부가 타결한 재협상안은 ‘굴욕적 퍼주기 협상’이라는 이유를 들어 재재협상을 주장해왔다. 이에 따라 지난 두 달간 한미 FTA 여야정협의체 회의가 여섯 차례 열렸으나 정부·여당은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김종훈 본부장은 “한미에서 비준 절차가 본격화한 시점에서 민주당의 재재협상 요구는 FTA를 하지 말자는 것”이라며, 재재협상 주장의 비현실성을 강조했다. 한나라당 역시 국내에서 보완해야 할 항목인 ‘2’ 부분은 협상이 가능하지만 미국과의 재재협상이 요구되는 ‘10’ 부분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 의회, 조만간 한미 FTA 법안 처리 가능성 높아 8월 초 미국 상원의 민주·공화 양당 지도부는 한국 등 3개국과의 FTA 이행법안을 9월 중 처리한다는 방침에 사실상 합의하였다. 미 상원의 해리 리드 민주당 원내대표와 미치 매코넬 공화당 원내대표가 성명을 통해 의회 휴회가 끝난 직후 무역조정지원제도(TAA) 연장안을 처리한 뒤 3개 FTA 이행법안을 처리하는 추진계획에 합의했다고 밝힌 것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자신의 주요 지지기반인 노조의 이해를 반영하여 TAA 연장과 한미 FTA 비준의 연계 처리를 주장해왔던 반면 공화당은 재정지출 추가 부담을 이유로 TAA 연장에 반대해왔다.(TAA는 FTA로 인해 발생하는 실직자들을 재교육하는 비용을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제도로 관련 재정지출 규모는 연간 70-90억 달러 정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백악관이 공화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TAA를 한미 FTA 이행법안의 부분으로 포함시키지 않고 별개 법안으로 제출하되, 공화당은 백악관의 요청대로 TAA와 한미 FTA의 병행 처리를 보장해줌으로써 양측이 실리와 명분을 각각 취하는 방식으로 접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민주당과 공화당은 FTA 이행법안 자체에 대해서는 초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경제위기가 지속, 심화되는 가운데 오바마 대통령이 “FTA가 처리되면 미국 내에 7만여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며 이행법안 처리를 거듭 강조한 것도 일정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사활적 이익, FTA 물론 현재 미국 의회의 복잡한 사정을 감안할 때 9월 중 처리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9월 의회 회기가 길지 않은데다 이른바 ‘슈퍼위원회’의 재정적자 감축 방안 등 논란이 될 만한 안건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또 FTA 추진계획에 구체적인 처리 일정이나 방식 등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행정부의 FTA 이행법안 제출과 의회의 TAA 제도 연장안 표결 처리의 선후관계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다. 이에 따라 미 의회가 오는 11월로 예정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직전인 10월말에나 FTA 이행법안을 처리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 정부와 의회가 빠른 시일 내에 FTA 이행법안을 처리하지 못할 경우 연말부터 사실상 대선국면이 본격화되어 실제로 무기한 연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한미 FTA가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동아시아를 자유무역지대로 묶기 위한 경제전략이자 군사안보전략 차원에서 제기되었다는 점, 특히 현재 무역적자와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FTA 이행법안 처리 무산은 미국에 큰 타격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29일 발표된 미국 의회조사국(CRS) 보고서는 한미 FTA 이행법안이 미 의회에서 불발되거나 지연되면 양국의 전략적 동맹관계에 심대한 상징적 타격을 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한미 FTA가 무산될 경우 2000년대 초부터 미국이 주로 동북아시아에서 추진해온 ‘경쟁적 자유화’ 전략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 콜롬비아, 파나마 등과의 FTA는 물론 도하개발의제(DDA) 협상 등 수많은 통상 관련 현안에 직면하고 있는 미국 정부로서는 한미 FTA가 향후 무역정책에 길잡이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을 감안할 때, 현재의 논란은 시기와 절차를 조율하는 소소한 문제일 뿐 머잖아 이행법안이 처리될 것은 분명하다. 민중의 힘으로 한미 FTA 막아내자 지난 27일 ‘한미 FTA 저지 결의대회’를 제외하면, 현재 FTA 범국본을 비롯한 민중운동의 계획은 주로 국회 대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2006년 뜨겁게 타올랐던 한미 FTA 반대 투쟁은 2008년 소강상태에 빠진 뒤 아직 그 불씨를 살려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5월 초 한EU FTA 국회 처리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피해부문 대책 마련과 재재협상을 요구하는 민주당의 당론은 언제든 찬성 입장으로 뒤바뀔지 모른다. 민주당이 국회에서 한미 FTA 재협상안에 반대하는 것도 실은 노무현 정부 시절 자신들이 체결한 협정은 별 문제가 없다는 인식에 근거한 정략적 계산일 따름이다. 민중운동이 대대적인 투쟁을 통해 FTA 반대 여론을 확산하고 이를 통해 국회를 압박하고 정부를 굴복시키지 못한다면 한미 FTA가 발효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9월 중 한미 FTA 반대 투쟁의 물결을 다시 일으키자.
지난 7월 22일 노르웨이 오슬로 총리 청사 인근에서 폭탄테러와 우퇴야 섬에서 총기난사가 일어났다. 이 끔찍한 증오범죄로 노르웨이 국민 76명이 숨졌다. 테러범죄자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는 집권 노동당의 다문화 정책과 무슬림 이민자의 위협을 비판하며 노르웨이 사회에 혁명을 가져오기 위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망자는 우퇴야 섬에서 열린 노동당 청소년지부(AUF) 행사에 참석한 16살에서 18살가량의 청소년들이다. 슬픔에 빠진 유족과 온 노르웨이 국민에게 위로를 보내며 범죄자의 잔인한 행위에 대해서 깊은 분노를 표현한다. 또한 이 사태의 원인이 한 명의 왜곡된 생각만이 아니라 지난 몇 년 동안 경제위기로 어려움을 겪은 유럽사회에서 강화된 우익 세력의 반이슬람주의와 외국인혐오주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특히 우익정당의 반이민자 입장 표방과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나 독일 메르켈 총리와 같은 정치지도자의 다문화 부정 발언은 노르웨이의 비극적인 참사가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브렌이비크는 유튜브에 올린 영상과 남긴 1,518쪽에 이르는 문서에서 한국의 ‘가부장제’, ‘문화적 보수주의’, ‘순혈주의’, ‘다문화 부정‘을 유럽이 따라야 할 모범으로 수차례 언급했다. 이는 주류 언론의 주목을 끌었으며 한국 인종주의자들을 고무한 것처럼 보인다. ‘외국인노동대책시민연대’, ‘외국인범죄척결국민연대‘나 ‘다문화정책반대 카페’와 같은 인종주의 모임들은 사이트나 언론 인터뷰를 통해서 브레이비크의 뜻에 동의하는 입장을 표방하고 있다. “한국은 안타깝게도 더 이상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다”라며 “한국도 다문화, 다문화 하다가 저 꼴 난다, 어느 날 한국인이 기관총과 수류탄을 들고 200명 사살(할 수 있다)”, 또는 “10년도 안 걸려서 우리나라가 바로 그런 문제가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 어느 나라든 무슬림이 사는 데는 폭탄테러가 안 일어나는 데가 없다”와 같은 공포스러운 발언이 표출되고 있다. 주류 언론들도 이만큼 노골적이지 않더라도, “다문화는 한국에 위험하지 않은지, 이민자사회를 경계해야 하지 않은지”라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을 표방하는 사람들은 노르웨이 테러사태의 원인과 한국에 던지는 함의를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극히 위험한 발상으로 증오와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있다. 노르웨이 테러사태는 무슬림, 이민자나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책 때문에 아니라 인종주의적 증오와 이를 용인하는 정치문화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또한 인종주의적 증오와 문화는 이민자사회에서 어쩔 수없이 생기는 사실은 아니라 정부와 지배세력의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정책과 태도에서 비롯한다. 한국으로 오는 이주는 막을 이유가 없고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현대사회의 현실이다. 이주민은 신자유주의와 군사적 세계화로 인해 생긴 본국의 사회불안, 실업, 저임금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고 한국의 인력난과 저출산을 해결하려는 정부와 자본의 대책으로 유입된다. 대부분 한국사회에서 한국인과 똑같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소비와 생산으로 한국경제를 돌리게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또한 이주민 커뮤니티는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소개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집단이다. 이민자와 같이 사는 사회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우리는 같이 살고 있는 이주민에 대한 태도와 처우를 잘 선택해야 한다. 혐오와 불신을 야기는 차별적인 태도와 정책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서로에 대한 존중과 평등한 대우를 선택할 것인가. 현재 한국정부는 전자를 선택하고 있다. ‘다문화‘를 선전하면서 이주민 일부에 대해서는 동화정책을 취하며 대다수에 대해서는 심각한 차별과 배제정책을 취하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체류기간과 자유롭게 일할 권리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고, 단순히 서류상의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미등록이민자에 대해 테러와 다름없는 강제 단속추방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한국의 내국인과 이주민을 분리해서 차별하여 한국의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강화하며 ‘이주민은 우리와 다르다,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통제와 배제의 대상이다’라는 잘못된 생각을 사회 전반에 퍼지게 한다. 이주민과 같이 사는 사회가 증오와 폭력을 야기하는 원인이 아니라 정부와 사회의의 이러한 인종주의적 정책과 태도가 주원인인 것이다. 노르웨이 테러사태와 같은 수준의 참사가 한국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하더라도 인종주의 자들의 발언에서 보듯이 외국인혐오주의는 강화되고 조장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이주민에 대한 차별적이고 인종주의적인 발언과 행위가 날마다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를 인식하고 꾸준히 폭로하고 비판해야 한다. 또한 외국인혐오에 토양을 제공하는 한국정부의 차별적이고 배타적인 정책을 당장 바꿔야 한다. 이것이 노르웨이 테러사태를 우리에게 던지 교훈이다. 2011. 8. 3 이주노동자 차별철폐와 인권·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
2011년 7월 20일에 열린 <2011 대안세계화 포럼> 중 '야만과 혁명의 갈림길에 선 북아프리카의 미래는?'이라는 제목의 섹션에서 발표한 글 중 일부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그 이전에 발표된 글과 겹쳐서 생략했습니다.) 2011년 튀니지 혁명의 미래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운동 연구소 부소장 [목차] 1. 튀니지 혁명, 어떻게 가능했나 2. 튀니지 혁명의 배경 3. 튀니지 혁명의 전개 과정 4. 튀니지 혁명에 대한 역사적 고찰 5. 튀니지 혁명의 미래 [참조] 2011년 이집트 혁명의 전개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