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 2023-09-12

    심화하는 전략적 경쟁, 어떻게 볼 것인가?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2020년대 세계정세를 규정하는 핵심 중 하나는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지난 2020~21년 미국 바이든 행정부 출범을 전후로 미국의 새로운 대중국 접근법인 ‘전략적 경쟁’에 주목하고 자세히 분석한 바 있다. (김진영, 「미국과 중국, ‘전략적 경쟁’의 시대로」,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0년 겨울호, 임필수, 「미국의 전략적 경쟁과 한국의 전략적 선택」,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1년 겨울호) 이에 따르면, ‘전략적 경쟁’은 중국이 변화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 역시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에 기초해 있다. 그렇다면 중국의 무엇이 변화했는가? 미국이 보기에 중국은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칙에 기초한 질서를 악용하기로 선택했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자신의 이익과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도록 국제질서의 수정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세계정세를 국제적 표준을 둘러싼 국가자본주의와 민간자본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정과 권위독재정의 경쟁으로 특징지으면서, 전략적 경쟁을 경제·안보·가치를 포함하는 장기간의 체제 경쟁으로 한층 심화했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 시기 훼손되었던 규칙 기반의 다자적 질서와 동맹 질서를 복원하면서 양국의 경쟁은 양자적 차원을 넘어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중국은 지난해 10월 시진핑 집권 3기를 공식화한 20차 당대회에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현대화 노선을 변함없이 이어갈 것임을 재차 강조했다.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행보를 볼 때, ‘전략적 경쟁’은 적어도 2020년대에 지속해서 세계정세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사회운동은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정세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할 것인가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먼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강화와 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전략적 경쟁의 형성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재정립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략적 경쟁의 특징을 짚고, 그에 대응하는 중국의 쌍순환 전략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마지막으로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이른바 ‘반도체 전쟁’의 경과를 살펴보고 전략적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갖는 의미를 짚어본다.
     
     

    1. 미중관계의 결정적 변곡점, 2008년 세계금융위기

     

    1) ‘국진민퇴’와 ‘군민융합’: 중국 국가자본주의의 강화

    중국은 세계금융위기로 급속한 성장 둔화와 사회적 불안을 경험했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국가자본주의 또는 당-국가 자본주의를 강화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중국 경제의 국가자본주의 강화란, 개혁개방 이후 시장개방이 이뤄지고 민간부문이 발전해 온 경향이 역전되어, 다시 민간기업과 금융부문, 특히 핵심 경제부문에 대한 국가와 당의 장악력이 증대하는 최근의 현상을 말한다. 이는 시진핑 주석 집권기에 중국공산당 내부로 점차 권력이 집중되고 당-국가의 권위주의가 강화되는 경향과 쌍을 이루는 것이다.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는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를 가장 잘 설명하는 용어가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중국을 국가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특징으로 ▲ 경제에서 민간과 공공 부문이 6:4의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 ▲ 금융자산의 85~90%가 국유기구에 의해 통제된다는 점, ▲ 국가와 당이 국유기업을 직접 통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민간부문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 ▲ 경제에 있어 정부의 큰 역할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합의가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나아가 중국공산당이 중국 경제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는 기존의 역할을 넘어 구체적인 정책까지 집행하고 감독하는 경향에 주목해, 중국의 경제체제를 ‘당-국가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관점도 있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중국 국가자본과 당 조직이 민간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는 이른바 ‘대조타’(大操舵, Grand Steerage)에 주목한다. 이에 따르면, 최근 중국에서는 국가자본이 국유자산관리공사와 산업인도기금을 통해 민간기업 지분에 대규모로 참여하고 있고, 민간기업과 외국인 투자기업 내에 당 조직 설립을 강제하고 있다. 베리 노튼에 따르면, 산업인도기금의 규모는 2018년 1.34조 달러로 중국 GDP의 10%에 이른다. 또한 2018년 현재 민간기업의 48%가 공산당 조직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진민퇴’(國進民退)로도 일컫는 이러한 중국 당-국가 자본주의의 출현 또는 국가 자본주의의 강화는 세계금융위기를 전후로 후진타오 주석 집권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후진타오 정부는 경제성장 일변도에서 벗어나 균형발전과 질적성장을 이루겠다는 경제정책 기조를 내세웠으나, 2008년 금융위기에 대응하고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4조 위안에 이르는 재정지출과 함께 무제한적인 유동성 공급을 시행했다. 또한 국유기업과 국유은행을 동원한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 중국은 2009년 GDP의 33.4%에 달하는 국유기업 주도의 고정자본투자를 통해 2010년 10.8%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함으로써 금융위기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과잉투자가 극대화되었고, 국유기업의 수익성 하락과 부채율 상승이라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또한 이 시기 대부분의 투자가 거대한 인프라 건설 사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때부터 대규모 건설 부문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경제의 투자 의존성이 구조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부동산 가격 급등과 불평등 증대라는 사회문제 역시 심화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산업생산량이나 생산요소 투입을 늘려 급속한 성장을 끌어내는 방식이, 이제는 중국 경제가 성장 속도가 둔화하는 ‘신창타이’(新常態, New Normal)에 진입하는 것을 가속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기술혁신과 제도개혁을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지 못하면 중국 경제가 중진국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2013년 집권한 시진핑 주석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국유자본(주로 에너지, 건설 부문)의 해외진출 전략으로서 ‘일대일로’와, 첨단산업 중심의 기술적 도약을 위한 전략으로서 ‘중국제조2025’ 계획을 추진했다. 먼저 ‘일대일로’ 전략은 중국의 막대한 외환준비금과 대규모 과잉자본을 활용해 중국 경제를 지지할 세계적 공급망을 확립하는 한편,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를 하나의 모형으로 확립하고 세계화하려는 시도를 상징한다. 일대일로 전략에 따라, 중국의 국유기업은 국가와 당의 지침을 받아서 주로 부채가 누적된 주변부 국가를 목표로 기반시설을 건설하고 해외 영업을 수행하고 있다. 2022년 12월 현재 80개의 중앙정부 국유기업이 138개 국가 및 지역에서 4700개 이상의 일대일로 건설 프로젝트에 투자하거나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제조2025’ 계획은 중국의 제조업을 노동·자원집약형 산업에서 기술집약형 산업으로 도약시키려는 산업고도화 전략이다. 이를 위해 ▲ 정부 주도의 R&D 프로그램과 기업의 연구개발 투자 활성화, ▲ 반도체, AI, 신에너지 자동차 분야 등 보조금 확대, ▲ 해외투자 진출과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통한 기술 노하우와 브랜드 획득을 장려한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또한 이후 2018년에 갱신된 ‘중국제조2025’ 계획은 13차 5개년 규획(2016~2020)과 14차 5개년 규획(2021~2025)의 일부로서 2049년까지 3단계에 걸쳐서 핵심기술에서 세계적인 지배력을 획득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과거의 산업정책과 달리, ‘중국제조2025’ 계획은 산업·기술·생산물의 우선순위에 대한 포괄적이고 세부적인 설명이 제시되었고, ‘자급목표’라는 형태로 국내에서 개발된 기술의 점유율 목표가 제시되었다. 또한 ‘군민융합’(军民融合)이라는 표어에서 드러나듯 군사 부문과 민간 부문의 혁신 역량을 통합함으로써 군사용 기술이 상업용 기술 개발로 파생될 수 있도록 하고, 역으로 상업 기술을 활용하여 첨단기술 기반의 군사 능력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산업과 안보가 결합되고, 국가자본과 당이 주도하여 민간자본도 참여시킨 대규모 국가기금이 투자에 활용되면서 당-국가-민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제조2025’ 계획은 ‘강군몽’(强軍夢)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시진핑 주석은 2013년 집권과 함께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을 제시했고, 2015년부터는 그 핵심으로 ‘강군몽’을 강조하며 군사 현대화를 추진했다. 이는 ‘적극적 방어전략’으로서 반(反)접근·지역거부(A2·AD) 전략의 고도화와 첨단무기를 바탕으로 한 국지전쟁 전략을 골자로 하는데, 여기에는 첨단반도체 기술이 필수적이다. 이에 따라 2019년 말까지 약 1.5조 달러 규모의 정부 주도 산업발전기금이 파운드리 기업인 SMIC와 같은 전략부문에 투입되었다. 
     

    2) 중국에 대한 미국과 유럽연합의 인식 변화

    시진핑 집권기에 본격화된 중국 국가자본주의의 강화와 군민융합 발전전략은 미중갈등의 뇌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연합과 일본을 비롯한 자유주의 진영이 중국에 대한 우려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중국이 첨단기술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지식재산권 편취 문제와 안보 위협 문제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세계경제에 통합되는 과정에서 점차 자유주의적 규칙 기반 질서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이 힘을 잃고, 중국식 권위주의와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며 국제질서를 교란하고 재편하려 한다는 비관적 전망이 힘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첨단기술 확보를 위한 전략은 미국과의 극심한 무역갈등을 초래했는데,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중국의 불공정한 기술이전 문제였다. 예를 들어 중국의 산업 스파이가 직접 기술을 탈취하거나 외국 기업 직원에게 뇌물을 제공해 영업 비밀을 도용하고, 외국 기업을 인수합병 해 기술을 이전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중국에 외국기업이 투자할 때 중국 기업과의 합작회사 설립을 강제하고 기술이전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관행도 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지식재산권 문제로 중국 법인을 상대로 한 미국 기업의 소송이 급증하였고, 미국 기업들은 미국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특히 ‘중국제조2025’ 계획이 발표된 이후, 미국은 이 계획이 단순한 산업정책을 넘어선 중국 국가안보 전략의 핵심이라고 인식하고 중국의 첨단기술 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먼저 미국 반도체 기업을 인수하려는 중국 반도체 기업의 시도에 여러 번 제동이 걸렸다. 2015년 중국 칭화유니그룹이 마이크론을 인수하려다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의 반대로 실패한 일이 대표적 사례다. 2016년에는 오바마 행정부가 처음으로 중국의 통신 장비회사 ZTE에 대한 수출 규제조치를 발동하였다. 이러한 규제조치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본격화되었고,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미국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더해, 매년 증가하는 대중 무역적자가 미국 제조업의 쇠퇴와 일자리 축소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사회적 문제의 주요 원인이라는 인식이 확산하였다.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는 중국이 2001년 WTO에 가입한 이후 빠르게 증가했고, 이러한 추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2000년과 2017년을 비교하면, 대중 무역수지 적자는 820억 달러에서 3357억 달러로 네 배 증가했고, 전체적자 대비 중국의 비중이 22%에서 60.8%로 세 배 가까이 상승했다.

    미국은 이렇게 대중 무역불균형이 심화한 원인으로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즉 중국이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비용과 역할을 분담하지 않고 그 혜택만을 일방적으로 편취한 결과 무역불균형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2018년 3월 발표한 국별 무역장벽보고서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으로 ▲ 중국의 기술이전 요구, ▲ 지적재산권 보호 미비, ▲ 중국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투자 제한 등 차별적 대우, ▲ 중국 정부의 부가세 환급정책과 보조금 지원 등 비관세장벽을 명시했다. 미국 정부는 이후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지적할 때마다 이러한 항목을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다. 보고서는 또한 중국의 기술이전과 ‘중국제조2025’ 계획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도 명시했다.

    유럽연합 역시 중국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하는 기술이전을 더 이상 순수한 경제적 상호 이득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고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2016년 이중용도(dual use) 품목에 대한 수출통제를 규정한 입법을 채택했고, 2019년 3월 역내 외국인직접투자 심사를 강화했다. 또한 유럽연합은 2019년 전략전망(Strategic Outlook)에서 중국에 대한 외교노선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유럽은 여전히 중국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경제적·체제적 경쟁자로 규정했다. 또한 중국이 글로벌 행위자이자 선도적인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에 더 큰 책임감과 호혜성을 보이고 개방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유럽연합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에 따른 비시장적 관행을 시정하는 문제에 대해 미국과 행보를 같이 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2016년 유럽연합이 WTO에서 중국에 시장경제지위(MES) 부여를 거절한 것이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할 당시, 가입 의정서 15조는 “중국기업이 시장경제 조건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반덤핑 절차에서 중국을 비시장경제로 취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은 15년이 지나면 만료되는 것이었지만, 2016년 12월 유럽연합과 미국은 중국에 대한 시장경제지위 부여를 거부하면서 그 근거로 각각 ‘시장왜곡’과 ‘시장지향조건’을 들었다. 

    이후 2018년 5월 미국, 유럽연합, 일본은 중국의 시장경제 지위 부여와 관련해 산업보조금 규칙의 개정, 기술이전 정책과 관행에 대한 공동성명, 그리고 시장경제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7개 조건을 담은 ‘시장지향조건에 관한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공동성명은 중국을 시장경제로 인정할 수 없는 중대한 이유 중 하나로 국유기업의 시장 장악을 명시했고, 중국 공공기구와 국유기업 그리고 정부의 시장 왜곡 행위 개선을 위해 공동 대응할 것을 밝혔다. 시장경제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7개 조건에는 기업의 자유로운 가격결정권, 투자결정권, 요소(자본, 노동, 기술 및 기타 요소) 가격의 시장 결정, 기업의 자율적 자본 배분 결정, 독립적 회계 등 국제기준에 부합한 회계, 기업법·파산법·사유재산법 준수, 기업의 의사결정에 있어 정부의 간섭이 없을 것이 포함되었다.

    나아가 미국과 유럽연합은 2021년 9월 무역과 기술 분야에서 협력하고 중국의 비시장적·비민주적 행위에 공동으로 대응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역기술위원회’(TTC)를 출범했다. TTC 공동성명은 민주주의 가치를 증진하는 방향에서 글로벌 차원의 기술과 무역 영역에서 협력하고 ‘비시장경제’의 불공정한 무역관행과 정책으로부터 기업과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방향을 밝혔다. 

    그러면서 6대 협력 분야로 ▲ 국가 안보 관련 분야에 대한 투자 심사, ▲ 이중 용도 분야 수출 규제, ▲ 인공지능 기술 남용 대응, ▲ 반도체 공급사슬 재조정, ▲ 비시장적인 무역 왜곡 정책 대응, ▲ 민간기업을 포함하는 모든 이해당사자 참여를 제시했다. 부속서와 10대 실무그룹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민군융합 정책을 통한 기술 획득 전략을 경계하며, 인공지능이 사회 감시 체제 작동에 남용되는 것에 반대하고, 비시장경제가 기술이전 강요와 지식재산 절도·국유기업 우대·강제노동 정책 등을 추구하는 것에 대응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TTC가 직간접적으로 중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소결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미국과 중국의 양국 관계에 결정적 변곡점으로 작용했다. 세계금융위기는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의 구제금융과 비전통적 수량완화(QE)와 같은 비상 위급대책으로 ‘대불황’으로 심화하지는 않았다. 또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미중 전략경제대화에서 보호주의에 반대하고 세계금융위기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데 합의함으로써 국제경제질서가 붕괴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식 경제모델에 대한 회의가 확산하는 동시에 시진핑 주석 취임 이후 중국이 국가자본주의 성장 전략을 ‘중국몽’으로 일반화하고 중국식 경제모델로 부각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정치적·경제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중국의 변화는 국유자본의 팽창적 해외진출 전략으로서 일대일로와 상위 가치사슬로 도약하고 강군몽을 이루기 위한 군민융합을 내세운 중국제조2025 계획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국가에 중국이 자유무역 질서에 깊이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이를 악용해 배타적인 민족적 이익을 강화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확산시켰다. 또한 중국이 점차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보다는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국제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에 대응하는 국내적 조치와 국제적 공조로 이어졌다. 

    미국에서는 특히 미중 무역불균형을 포함한 세계적 무역불균형이 부각되면서, 미국에 대한 중국의 대규모 무역흑자가 미국 제조업의 위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이러한 인식은 경제민족주의를 앞세운 인민주의와 탈세계화 요구를 등에 업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중국과 무역분쟁을 벌이는 하나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2. ‘무역분쟁’에서 ‘전략적 경쟁’으로

     

    1)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분쟁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를 강화하는 중국에 대한 우려가 증대하면서, 미국 의회와 행정부는 중국에 대한 정책 방향을 재수립하기 시작했다. 이는 ‘관여 정책’(engagement policy)에서 ‘전략적 경쟁’으로의 전환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중국을 국제질서에 참여시키면 점차 중국이 개혁에 나서고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가 될 것으로 기대했던 지난 20년간의 ‘관여 정책’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인식하고, 중국과 체제 간 ‘장기 전략적 경쟁’에 돌입한 상황에서 포괄적인 전략을 수립하고 원칙적 현실주의로 복귀하여 미국의 이익과 영향력을 증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국 전략의 전환은 트럼프 행정부 시기부터 본격화되었다. 2017년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국가안보전략 2017」은 지역 차원의 전략 중 첫째로 ‘인도-태평양 지역’을 다루면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가 미국의 국익을 침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2019년 미국 의회가 국방수권법에서 중국에 관한 포괄적인 전략을 수립할 것을 요구한 데 부응하여,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이 2020년 5월 발표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은 미국과 중국이 경제·가치·안보 측면에서 ‘전략적 경쟁 상태’에 있다는 점을 명시했다. 2020년 국방수권법 역시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인도-태평양 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에 예산을 배정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국내의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하는 상황에서도, 대외정책에 대해서는 의회가 초당적 합의를 도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효과적인 경쟁전략을 채택하지 못하고 중국과의 무역분쟁에 몰두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행위’를 근거로 무역법 301조에 따라 2018년 7월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전체 대중 수입 중 약 3분의 2 이상에 해당하는 품목, 36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최대 25%의 추가관세를 부과했다. 이에 중국 역시 추가관세 조치로 맞대응함으로써 본격적인 미중 ‘무역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무역적자는 금융세계화와 달러 환류메커니즘이라는 구조적 요인으로 인한 것이기에, 무역적자 감축 자체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단기적이고 협소한 시도였다. 게다가 그 수단으로 활용한 관세전쟁은 미국의 소비자와 생산자에게 오히려 해를 가할 뿐 실제 무역수지를 개선하는 효과도 분명하지 않았다. 2018년 무역분쟁 이후 양국의 무역에서 상대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하락했고, 특히 미국의 대중국 수입 비중은 2017년 21.9%에서 2022년 상반기 17.3%로 하락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대중국 전체 무역 규모와 무역적자 규모는 2019년과 2020년 감소했다가 2021년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2022년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게다가 트럼프의 무역분쟁은 미국 우선주의를 추구하면서, 그간 미국이 강조해 온 ‘규칙에 기반한 세계질서’라는 원칙을 스스로 파괴했다. 나아가 2017년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철강과 알루미늄 수입에 부과한 관세와 무역법 201조에 따라 산업보호를 이유로 태양광과 세탁기에 발동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연합과 같은 전통적 동맹국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또한 WTO 상소기구를 사실상 기능정지 상태로 만들고 본래 미국이 주도했던 TPP에서 탈퇴하는 등 다자적 국제협력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2)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경쟁

    바이든 대통령은 당선 이후 “미국이 돌아왔다”고 선언하며,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와 일방주의를 폐기하고 자유주의와 국제주의 노선으로 복귀하는 한편 동맹국과의 관계를 복원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의 불공정·반시장적 무역관행을 시정하는 문제는 중국에 대한 무역적자 규모를 줄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다자적 동맹질서를 활용해 함께 대응해야 한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면서 바이든 행정부는 큰 틀에서 트럼프 행정부 시기 수립된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과 이를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은 폐기하지 않고 계승했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중국제조2025’ 같은 국가자본주의적 산업정책이 자유주의적 국제경제 질서를 위협하는 불법적 무역관행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경쟁 구상에는 2020년 발생한 코로나19 대유행이 큰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대유행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략적 경쟁을 한층 심화했다. 먼저 미중갈등의 성격을 무역분쟁에서 체제경쟁으로 확고히 바꿔놓았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 미국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국내적으로도 큰 피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우선주의를 고수하고 세계보건기구(WHO)를 탈퇴하며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라는 원칙을 스스로 저버리고 지구적 문제에 대응하는 데 명백한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냈다. 중국은 국가 주도의 강력한 봉쇄정책인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빠르게 코로나 종식에 성공했다고 선언하는 한편, 이를 자국 체제의 우월성으로 내세웠다. 

    코로나19 대유행은 또한 글로벌 공급망 문제를 국가안보상의 과제로 부각했다. 대유행 초기에는 일부 국가가 다자적 협력보다는 마스크를 포함한 의료용품에 대한 수출금지 조치를 시행하는 보호주의적 움직임을 강화하면서 글로벌 의료공급망이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우려는 이후 백신 개발과 보급을 둘러싸고 반복되었다. 2020년 하반기에는 세계적으로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나타났는데, 특히 미국은 차량용 반도체의 병목 현상이 심화하여 완성차 생산에 큰 지장이 생기면서 글로벌 공급망 교란의 피해를 절감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민간자본주의의 중추가 되는 중산층을 복원하고, 코로나19에 대한 국제적 공동대응을 수행하며, 중국에 대한 세계적·지역적 대응을 강화하는 다양한 대내외적 정책을 종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바이든 행정부의 인식은 백악관이 2021년 3월 발표한 국가안보전략잠정지침 「미국의 우위/장점을 쇄신하자」에 집약되어 있다. 잠정지침은 세계의 안보 상황이 자유주의·민주정과 권위주의·독재정이라는 정치이념과 체제 경쟁이라는 특징을 보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중심으로 동지적인 동맹국·협력국과의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잠정지침은 코로나19 대유행과 같은 세계적 의제의 등장으로 인해 국가안보전략에서 대내정책과 대외정책의 구별과 국가안보·경제안보·보건안보·환경안보와 같은 전통적 구별이 무의미해지고 있으므로 이를 통합적으로 조정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국 전략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전략과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양자간 무역분쟁을 넘어서 체제와 가치 그리고 종합적인 안보를 둘러싼 경쟁으로 좀 더 명확하게 규정하려 한다. 즉 바이든 행정부에서 다시 정립된 전략적 경쟁은 국제적 표준을 둘러싼 국가자본주의와 민간자본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정과 권위독재정의 경쟁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코로나19와 기후변화에 대한 공동대응,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중국특색의 개발협력’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적인 기반시설 구축계획, 5G와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과 관련된 국제적 표준을 설정하는 문제가 포함된다.

    또한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국내외 공급망의 구조적 취약성이 미국의 경제 및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인식에 따라, 글로벌 스탠더드 재건의 핵심으로 (중국이 아닌)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공급망의 구축’(Supply America)를 강조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 ‘미국 공급망’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4대 핵심품목(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등 핵심광물, 의약품)과 6대 주요 산업(국방, 보건, ICT, 에너지, 운송, 농업)의 공급망을 점검하고 위험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범정부적으로 도출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4대 핵심 품목에 대한 공급망 취약점과 대응방안이 포함된 100일 공급망 검토보고서가 작성되었다. 

    공급망 강화를 위한 대응방안의 핵심은 대내정책과 대외정책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대내적으로는 국내로 생산시설을 돌아오게 하는 ‘리쇼어링’(reshoring) 정책과 투자 지원을 통해 전략 부문의 미국 내 제조 역량을 중장기적으로 재건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2022년 반도체 및 첨단기술 생태계 육성에 총 2800억 달러를 투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반도체 칩과 과학법’과 전기자동차 배터리 부문의 보조금 정책이 포함된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입법했다. 한편 두 법안에는 공통으로 보조금 지급 조건에 중국을 비롯한 ‘우려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규정이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에 반도체 시설을 건립하여 보조금을 받으면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에 따라 10년간 중국 같은 우려 국가에 반도체 시설을 투자하는 데 제한을 받게 되며, 전기차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해외의 우려 국가에서 추출, 제조, 재활용된 광물이 배터리에 일정 비율 이하로만 들어가야 한다. 

    대외적으로는 동맹국과의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정책으로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미국과 체제와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협력국과의 다자간 협력이 대외정책의 핵심 과제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바이든 행정부에서 구체적으로 가시화된 계획 중 하나가 바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라고 할 수 있다.

    IPEF는 2021년 10월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처음 제안한 이후, 2022년 5월 23일 공식 출범하여 현재 미국을 비롯해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인도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7개국(브루나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베트남)과 피지가 참여하고 있다. IPEF는 시장개방을 핵심으로 하는 기존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나 자유무역협정(FTA) 방식의 경제통합은 아니면서도, 행정협정이라는 형태로 무역, 공급망, 인프라 및 청정에너지와 탈탄소화, 조세와 반부패를 망라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일정하게 구속력 있는 합의와 약속을 맺는 경제협력체를 표방한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역시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 구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해 IPEF가 공식 출범한 이후 올해 5월 27일 공급망 협정이 네 개 부문 중 가장 먼저 타결되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공급망 협정의 핵심 내용으로는 ▲ 공급망 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 간 공조기구인 ‘위기대응네트워크’ 구축, ▲ 평상시 공급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불필요한 조치를 자제하는 한편 공급선 다변화를 위한 투자 확대와 공동 연구개발 노력을 위한 ‘공급망 위원회’ 설치, ▲ 공급망 안정화에 필수적인 숙련 노동자 육성과 노동권 개선 노력을 위한 ‘노사정 자문기구’ 구성이 담겼다. 

    바이든 행정부는 나머지 무역, 청정경제, 공정경제 부문의 협정도 마무리하여, 올해 11월로 예정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IPEF 최종 타결을 발표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12월 반권위주의, 부패 척결, 인권 증진을 의제로 하는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한편, 미국·인도·일본·호주 4개국의 안보협의체인 쿼드와 같은 다자협력의 틀을 활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중 경쟁은 양국의 무역분쟁을 넘어, 첨단기술, 공급망, 기반시설 투자와 같은 주제를 포함하는 지역 차원의 체제 경쟁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3) 쌍순환: 전략적 경쟁에 대한 중국의 대응

    2018년부터 격화된 미국과의 무역갈등이 다양한 영역에서 체제 경쟁적 성격으로 심화하면서, 중국은 미국의 전략적 경쟁에 대응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그중에서 2020년 5월 시진핑 주석이 처음 제기한 이후 중국공산당 19기 5차 전체회의에서 14차 5개년 규획의 기본 개념으로 채택된 ‘쌍순환’(雙循環) 전략은 2013년 ‘일대일로’와 2015년 ‘중국제조2025’에 이은 시진핑 집권 2~3기 중국의 주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쌍순환 전략은 대내적으로 내수를 키우고 활성화해 국내경제(국내대순환)를 최대한 발전시키고, 대외적으로 수출과 개혁개방을 지속하며 세계경제와의 선순환(국내·국제 순환)을 상호 촉진한다는 새로운 발전전략이다. 즉, 미중 갈등의 심화와 장기화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이 거대한 내수시장을 활용하여 자체적으로 선순환할 수 있는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국내대순환의 측면에서는 핵심 원천기술을 자주화하고, 산업구조 고도화를 통해 공급망을 강화하며, 소비와 투자를 촉진해 내수를 활성화할 것을 강조했다. 국내·국제 순환과 관련해서는 핵심 부품과 원자재의 안정적 공급을 추구하는 한편 대내외 무역 규범을 일체화할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소비 촉진을 통한 내수 활성화를 위해서는 가계의 소비역량 확대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당히 강한 중국 가계의 저축성향을 약화할 필요가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6년 중국의 총저축률은 세계 평균보다 약 20%p 높은 46%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가계저축률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며 세계 평균에 비해 높은 편이다. 이렇게 중국 가계의 저축성향이 강한 이유로는 사회안전망 부족과 큰 소득 격차가 지적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가운데 사회보장제도를 정비하고 소득 불평등을 개선해야 하지만,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정치적 안정을 우선순위에 두고 관련한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있다. 2021년 제시된 ‘공동부유’ 전략 역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소득재분배를 강화하는 정책이라기보다는, 알리바바와 같은 민간 빅테크 플랫폼 기업을 불평등의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이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국유기업이 주도하는 첨단산업 육성에 보조를 맞추도록 하려는 구상에 가깝다.

    결국 쌍순환의 내수 확대 노력은 가계 저축률 감소로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투자 확대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부동산 부채와 과잉투자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세계금융위기 이후처럼 대규모 기반시설과 부동산 건설투자가 중심이 되기보다는, 기술적 자립자강을 위한 첨단산업의 기술혁신과 기반시설 확충을 위한 투자가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첨단산업의 기술혁신과 관련해서 중국 정부는 2021년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기초연구비를 전년대비 10.6% 늘리고, 반도체 분야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대규모 기금인 ‘국가반도체산업투자기금’(国家集成电路产业投资基金, 빅펀드)을 조성했다. 14차 5개년 규획은 특히 반도체를 국가안보의 핵심 영역으로 규정하고, 그중에서도 반도체 설계(EDA), 소재, 첨단메모리와 차세대 전력 반도체(SiC, GaN)의 발전을 강조했다. 기반시설 확충과 관련해서는 2020년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7대 신형 기반시설에 대해 2025년까지 총 10조 위안 규모의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신형 기반시설은 디지털 전환과 신산업에 중심인데, 세부적으로 4개의 정보통신망(5G 기지국, 산업 인터넷, 데이터센터, 인공지능)과 2개의 에너지망(특고압 송전설비, 전기차 충전시설) 그리고 고속철도 교통망으로 구성된다. 

    시진핑의 세 번째 집권을 확정한 자리이기도 했던 2022년 10월 중국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도, 중국공산당은 쌍순환 전략을 재차 강조한 가운데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현대화를 위한 전략 중 하나로 과학기술과 교육을 강조하는 ‘과교흥국’ 전략을 별도의 장으로 내세웠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 중앙이 과학기술 작업에 대해 통일적으로 영도할 수 있도록 신형거국체제를 강화할 것이라고 밝힌 점이다. 거국체제란 정부가 국가의 자원을 모아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체제를 의미하는데, 현재 중국이 직면한 새로운 도전, 즉 ‘조임목’(choke point)에 해당하는 관건 핵심기술을 확보하는 데 전력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이어 2023년 3월 양회(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도 중국 정부는 ‘발전과 안보의 균형’을 강조하며 미국의 견제에 대응하기 위한 과학기술 자립, 공급망 안정, 신형거국체제 구축 등 경제안보 전략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내세웠다.
     

    4) 소결

    종합해보면,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국 전략은 가치와 체제를 둘러싼 경쟁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는 점과 동맹국과의 공조를 바탕으로 중국에 대응할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전략과 차이를 보인다. 바이든 행정부는 국내적으로 산업역량 강화를 도모하는 한편 국제적으로 미국의 체제와 가치에 동의하는 동맹국과 협력국을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고 무역·노동·환경·디지털 분야에서 다자적인 규칙 기반의 질서를 재구축하려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양국 간의 무역분쟁을 넘어 국제적 표준을 둘러싼 경쟁이라는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다만 이것이 중국에 대한 관여 정책의 완전한 폐기나 중국 경제와의 탈동조화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관건은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이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될 것이다.

    중국의 쌍순환 전략은 미국의 전략적 경쟁에 맞서 대내적으로 첨단산업과 전략산업 분야의 자립자강을 추구하고 이에 적합한 기반시설을 확충하면서 자체적인 공급안전망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전략은 대외적으로 국내대순환과 국제순환의 상호 촉진이라는 측면에서 주변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며 중국의 제도와 규정을 국제규범에 맞추어가는 방향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시진핑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계속해서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현대화와 다른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현대화를 강조하고 국가자본주의에 기초한 내적 체제 공고화에 힘쓰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의 전략이 규칙에 기반을 둔 ‘제2의 개혁개방’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국내공급망의 자급화에 집중하며 이른바 ‘홍색공급망’의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반도체로 대표되는 첨단기술 영역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3. 전략적 경쟁의 최근 쟁점: ‘반도체 전쟁’

     

    1) 미국의 대중 반도체 산업 제재

    첨단반도체 기술을 둘러싼 이른바 ‘반도체 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에서 경제와 안보를 연계하는 핵심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반도체 산업이 가치사슬별로 고도로 분업화되어 글로벌 공급사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은 ‘개발 초기단계인 칩리스(Chipless)-설계전문(Fabless)-수탁전문(Foundry)-패키징·검사(ATP)-납품(Delivery)’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주로 부가가치가 높은 설계와 장비산업에 강한 미국과 일본·유럽, 제조공정기술이 강한 한국과 대만, 부가가치가 낮고 노동집약적인 공정의 비교우위가 높은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국제분업화가 이루어져 있어, 오늘날 하나의 반도체 칩을 만드는 데는 약 4개 국가의 4만km에 걸친 생산공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반도체 공급망 병목 현상이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각국은 공급망 회복력을 제고하기 위한 정책 대응에 주목하게 되었다. 

    또 하나 좀 더 중요한 이유는 반도체가 거의 모든 현대 산업과 군사 체계에 필요한 대표적인 이중용도 품목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이 미국과 상이한 가치와 체제를 추구한다는 사실은 해당 기술을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체제경쟁이라는 성격을 더한다. 이에 따라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은 경제·안보 복합체(nexus)로 묘사되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중국이 반도체 국산화율을 제고하고 글로벌 공급사슬에서 상위로 진입하며 강군몽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으로 ‘중국제조2025’을 제시한 이후,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우려가 커지면서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 위험을 줄이기 위한 일련의 경제안보 정책이 다각도로 제출되었다.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말기 중국 ZTE의 통신장비 수입을 규제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트럼프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를 거치며 중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수출통제와 투자제한 조치를 강화해왔다. 미국에서 중국산 통신장비에 대한 우려는 미중 관계가 악화되기 이전부터 비교적 일찍 제기되었다. 미 의회는 2012년 중국산 통신장비의 안보 위협을 지적하면서 정부 조달에서 중국산 장비를 배제할 것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2018년 8월에는 초당적인 지지 하에 정부 기관의 중국산 통신장비 조달을 금지하는 국방수권법을 제정했다. 나아가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군민융합을 명시적으로 비판하며 2019년 화웨이를 수출통제리스트에 올렸고, 이어 2020년에는 두 차례에 걸친 제재를 통해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수출을 사실상 전면 금지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산업 제재는 점차 첨단반도체 기술을 표적으로 하여 ‘마당은 좁게, 담장은 높게’ 하는 방식으로 강화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SMIC와 D램 제조 기업인 푸젠진화를 수출통제리스트에 올리고 첨단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의 수출을 규제했다. 또한 2018년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고 있는 최첨단 극자외선 노광장비(EUV)를 중국 기업에 판매할 수 있도록 네덜란드 정부가 허가하자, 트럼프 행정부는 네덜란드 정부와 협상을 벌였고 이후 네덜란드 정부가 ASML의 대중 수출 면허를 갱신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2021년 4월 출범 이후 발표한 첫 수출통제리스트에 중국의 슈퍼컴퓨터 회사 7개를 포함한 데 이어, 2022년 10월에는 중국의 반도체 기업에 첨단반도체 장비 판매를 금지하고 AI와 슈퍼컴퓨터에 사용되는 반도체에 대한 수출을 제한하는 새로운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먼저 미국 기업이 특정 수준 이상 반도체를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 첨단반도체 제조 장비를 판매할 경우 별도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특히 중국 내 생산시설을 중국 기업이 소유한 경우 ‘거부 추정 원칙’을 적용해 수출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올해 초에는 일본과 네덜란드가 이 수출통제 조치에 동참하기로 합의했다. 세부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은 니콘과 도쿄 일렉트론이 7월부터 23종의 반도체 제조 장비를 중국으로 수출하는 것을 제한하기로 했고, 네덜란드는 ASML이 생산하는 심자외선(DUV) 노광장비의 중국 수출 승인 요구조건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발표할 예정이라는 입장을 6월 말에 밝혔다. 중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에서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37.2%에 달하는 한편 노광장비가 중국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취약한 분야라는 점에서, 일본과 네덜란드의 수출통제 조치는 중국의 첨단반도체 자립화 시도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고성능 AI와 슈퍼컴퓨터용 반도체 칩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에는 화웨이에 부과되었던 제재와 마찬가지로 ‘해외직접생산규칙’이 적용되어, 미국의 기술을 사용했을 경우 제3국 기업이 만든 칩 역시 수출을 금지하도록 했다. 미 상무부는 중국이 첨단반도체, AI, 슈퍼컴퓨터 기술을 대량살상무기와 첨단무기 시스템을 생산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데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수출통제 조치를 시행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미국이 반도체와 관련해 개별 기업이 아닌 특정 기술을 기준으로 중국을 겨냥해 고강도의 수출통제 조치를 부과한 것은 이 10월 수출통제 조치가 처음이다. CSIS는 이 조치가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전의 대중국 무역·기술 정책과 완전히 다르다고 분석했다. 첫째, 새로운 정책은 최종 사용자와 관련이 있는지와 관계없이 중국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둘째, 이전의 정책이 중국의 기술 진보를 허용하되 속도를 제한하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정책은 중국이 특정 수준 이상의 최첨단 기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제한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또한 중국의 첨단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 제한 조치도 강화했다. 2021년 6월에는 중국의 군 관련 반도체 기업에 대해 직·간접 주식투자 금지를 발표했고, 올해 8월에는 ‘우려 국가의 특정 국가안보 기술·제품에 대한 미국 투자 대응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내년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이는 이 조치에 따르면,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 등 미국 자본이 우려 대상 국가로 지정된 중국·홍콩·마카오의 첨단반도체, 양자 정보 기술, AI 시스템 3개 분야에 투자할 때 재무부의 허가를 받도록 해 사실상 투자가 금지된다. 
     
    [%=사진1%]
     
     

    2) 중국의 반도체 자립화 전략

    중국의 반도체 시장 규모는 2010년 570억 달러에서 2020년 1,434억 달러로 빠르게 성장했다.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으로 성장한 중국은 대략 글로벌 반도체 소비의 60%, 최종 수요의 33%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글로벌 반도체 매출 점유율의 5%만을 차지하고 있으며, 글로벌 공급망 측면에서 조립·테스트·패키징(ATP) 부문을 중심으로 제한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2020년 중국 내 반도체 생산은 227억 달러(15.9%)에 그치며, 그중에서 중국 기업의 생산은 83억 달러(5.8%)에 불과하다. 또한 반도체 설계와 제조에 필요한 소프트웨어, 소재, 장비 등은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은 2013년부터 반도체 수입액이 원유 수입액을 넘어서며 수입액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반도체 수지 적자도 2020년 2337억 달러에 달한다. 중국 정부는 반도체 산업의 취약점인 높은 수입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국내 반도체 역량 강화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14년 ‘국가 집적회로 산업 발전 추진 강요’에서 처음으로 반도체를 전략산업으로 규정하고, 2015년 ‘중국제조2025’ 계획에서 2030년까지 반도체 국산화율을 75%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2014년 200억 달러 규모의 1기 국가반도체산업투자기금(빅펀드)을 설립했다. 빅펀드는 지방정부, 금융기관, 민간기업과 국유기업이 참여하는 한편, 기존의 보조금과 결합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될 방향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1기 빅펀드는 반도체 제조 능력 확대에 중점을 두고 23개 기업의 70개 프로젝트에 투자되었다. 분야별로 보면 제조 67%, 설계 17%, 후공정 10%, 장비 및 소재가 6%를 차지했다. 

    이후 군민융합을 내세운 ‘중국제조2025’에 대한 각국의 우려가 커지는 한편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촉발되어 중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제재가 본격화되면서, 중국의 반도체 국산화 전략은 한층 더 국가안보적 성격을 강화했다. 2019년 설립된 2기 빅펀드는 자금 규모가 훨씬 더 커졌을 뿐만 아니라, 1기에서는 없었던 통신, AI 반도체, 차세대 전력 반도체 분야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다. 나아가 중국은 해당 분야 혁신기업에 대한 자금 조달을 지원하고 미국 자본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2019년 상하이증권거래소에 중국식 나스닥이라고 할 수 있는 ‘커촹반’(科創板)을 개설했다. 커창봔은 중국의 주요 기술기업이 홍콩이나 미국 증시에 상장하는 관행을 끊고자 시진핑 주석의 지시로 추진된 정보기술 주식 전문 거래소다. 커촹반은 상장 절차와 규정을 간소화한 주식발행 등록제로 운영되어 반도체 기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중요 통로로 성장했다.

    이러한 흐름은 앞서 살펴본 대로 2021년 14차 5개년 규획에서 종합되었다. 14차 5개년 규획은 반도체 분야를 국가안보의 핵심 분야이자 전략육성 분야 중 하나로 선정하고, 중국의 약점이 되는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고순도 소재, 주요 제조장비와 기술, 첨단메모리 기술, 차세대 반도체를 개발할 것을 명시했다. 또한 쌍순환 전략의 일환으로 자국의 거대한 반도체 소비시장을 활용해 독자적인 반도체 산업생태계와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방향 역시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점은 지난 7월 중국 정부가 갈륨과 게르마늄 관련 품목에 대해 상무부 허가 없이 수출을 금지하는 방안을 담은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이 조치는 일차적으로는 최근 확대된 미국의 반도체 수출통제에 대한 보복 조치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중국의 첨단산업 공급망 내재화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갈륨은 최근 중국이 육성하는 차세대 반도체 중 하나인 질화갈륨(GaN) 반도체의 핵심 재료로, 전 세계 매장량 가운데 중국이 80~85%를 점하고 있다. 차세대 반도체 분야는 기존의 실리콘 기반 반도체에 비해 고급 노광장비가 필요하지 않으며, 5G와 전기차에 주로 사용되기 때문에 중국 내수시장에서 향후 많은 수요가 존재할 것이므로 중국 정부는 관련 공급망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종합해 보면, 중국은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의 제재가 집중되고 있는 첨단반도체 영역에서 장기적인 국가 전략으로 반도체 설계, 제조 장비, 소재에 대한 자체적인 기술 역량을 개발하려 하고 있다. 또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중국이 경쟁력을 갖춘 중저위 분야를 발판 삼아 독자적인 반도체 공급망과 산업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방향을 명확히 하고 있다. 
     

    3) 소결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반도체 전쟁’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상호의존성을 무기로 기술·규범·제도를 둘러싼 경쟁이 벌어지는 극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드러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핵심기술을 독점적으로 보유한 기업이 소재해 있는 미국과 그 우방국의 정책이다. 미국은 중국의 첨단반도체 산업을 대상으로 ‘좁고 높은’ 담장을 세우면서 단기적으로 일본과 네덜란드와 공조하는 한편 장기적으로 명확한 규범에 기반하는 다자간 협력을 강화하고자 하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재편에는 다양한 비용이 따르지만, 경제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국가 안보적 중요성이 반도체 기술과 공급망에서 강조되고 있어서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전략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전략에 비대칭적인 조건에서 수립되었고 점차 제재가 강화됨에 따라 수세적인 대응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대규모 투자와 지원을 통해 일부 소재와 장비 그리고 범용 반도체를 중심으로 자급률을 높이고는 있지만, 첨단반도체를 포함하는 자체적인 산업생태계와 공급망을 온전히 구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21년 칭화유니그룹의 파산에서 볼 수 있듯, 국가 주도 투자에 의존하며 수익성 하락과 부채위기가 나타나는 중국 경제의 한계가 반도체 굴기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장기적으로 자본시장과 기술 규범의 분리가 강화될수록 중국의 반도체 생태계는 혁신의 한계가 두드러질 것이며, 결과적으로 ‘적당히 작동하는 반도체와 인공지능에 기반하여 글로벌 서비스 플랫폼과 분리된 채 작동하는 권위주의적 체계’에 머무를 수 있다는 부정적 전망 역시 제기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반도체 전쟁’이 기술과 군사안보 경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와 체제를 지향하는 기술규범과 제도를 형성할 것인가를 둘러싼 체제경쟁의 성격을 포함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기술이 경제, 군사, 사회 전반이 작동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면서, 이를 조직하는 원리와 제도 역시 중요해진 것이다. 중국의 인터넷 관리·통제 제도인 ‘만리방화벽’과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감시 시스템이 권위주의적 디지털 기술 모델로 확산하면서 우려와 비판이 증대하는 가운데, 그러한 모델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첨단반도체 기술에 중국이 접근하는 것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국제사회에서 커지고 있다.
     
     

    4. 결론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회의가 커지는 가운데, 중국은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한편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이를 중국몽과 결합해 독자적인 중국식 모델로 부각했다. 이러한 중국의 변화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국가들은 지식재산권 절취를 포함하는 불공정 무역관행과 비시장적 행위를 우려하면서 군민융합 발전에 따른 안보상의 위협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특히 미중 무역불균형을 강조하며, 2018년부터 무역분쟁이라는 형태로 양국 간의 대결을 폭발시켰다. 이후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며 양국의 대결은 무역분쟁을 넘어 정치·경제·보건의료를 아우르는 전략적 경쟁의 성격으로 심화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를 자유주의·민주정과 권위주의·독재정의 대결로 특징짓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내세우며 동맹국·협력국과의 다자적인 규칙 기반 질서 재정립과 공급망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시진핑 주석과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권력을 더욱 집중하는 한편 경제에서도 국가와 당의 역할을 심화하고 쌍순환 전략으로 대표되는 중국 특색의 현대화와 자립자강의 길을 내세우고 있다.

    이렇게 본격화된 미중 전략적 경쟁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간 많은 분석이 제기되어왔다. 과거 미국과 소련의 냉전처럼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과 중국을 비롯한 반서방 진영이 뚜렷하게 분리되는 ‘신냉전’으로 보는 견해나, 도전자 국가로 부상한 중국과 기존 패권 국가인 미국 간의 헤게모니 경쟁으로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은 국제적 표준을 둘러싸고 어떤 자본주의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를 둘러싼 경쟁이라는 점에서 과거 냉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체제 경쟁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전략적 경쟁은 세계 경제가 긴밀히 상호 연결된 가운데, 특히 중국이 세계 경제에 깊이 통합된 가운데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인적 교류가 막힌 봉쇄정책을 기본으로 했던 과거의 냉전과는 다르다. 최근 경제와 안보 결합의 최전선에 놓인 이른바 ‘반도체 전쟁’에서 첨단반도체 산업의 일부 영역을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미국과 동맹국의 수출통제와 공급망 분리 조치가 비교적 두드러지고 있지만, 이 역시 중국 반도체 산업 전반에 대한 탈동조화(decoupling)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요 7개국(G7)은 지난 5월 정상회담에서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의 성격을 탈동조화가 아닌 ‘위험억제’(de-risking)로 명확히 규정했다. 즉 “탈동조화가 아닌 위험억제와 다변화에 기초하여 경제 복원력과 경제안보를 위한 구체적 조치를 조율”하기로 합의하고 공급망 분야에서 과도한 중국 의존을 줄여나가는 동시에, “중국과 솔직하게 관여하고 우려를 직접 표명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가운데 중국과 건설적이고 지속가능한 관계를 구축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가 강화되면서 중국이 미국의 경제·가치·안보에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에 대비하는 한편, 트럼프 행정부 시기 침식되었던 자유주의적인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복원하고 재편하려 하고 있다. 이 점에서 전략적 경쟁은 분명히 관여정책의 완전한 폐기나 봉쇄정책으로의 복귀를 지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관여정책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새롭게 창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한편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은 진정한 의미에서 헤게모니 경쟁이라고 보기 어렵다. 헤게모니는 단순히 힘에 의한 패권이 아니라 제도적, 문화적 지도력을 바탕으로 동의를 끌어냄으로써 유지되는 지배 질서를 의미한다. 세계금융위기와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며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는 가운데, 중국 특색의 현대화와 신형대국관계를 내세우는 중국은 그러한 의미의 헤게모니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중국은 중국몽의 실현을 추구하면서 ‘중국제조2025’ 계획에서 드러나듯 다양한 비시장적 수단을 활용해 첨단기술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부국과 강병을 연계하고 있고, 일대일로 계획에서 드러나듯 대외지원을 필요로 하는 주변국을 목표로 해외에서 기반시설과 공급망을 확충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은 국제질서에서 규칙 기반의 다자주의적 질서를 존중하기보다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양자적 관계를 확대하며 자국의 패권적 지도력을 강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한편, 어떤 국가가 새롭게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대안적이고 안정적인 축적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러나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모델이 대안적 체제가 될 수 있는지 역시 의심스럽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부상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동시에 중국 경제가 중진국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도 제시되었다. 이는 중국 경제가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대규모 저임금 노동력 투입과 자본 투입에 의한 성장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이에 중국은 민간부문에 대한 당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국유부문이 장악하고 있는 핵심 경제부문에 자원을 집중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대규모 투자를 앞세운 일부 국유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GDP의 약 25%를 차지하는 부동산 부문의 거대한 부채 문제와 국유기업의 낮은 생산성 문제가 잠재적 위험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잠재적 위험은 최근 부동산 부문의 부채위기와 민간 투자의 감소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말 중국 정부가 ‘제로 코로나’ 정책을 포기하면서 중국 경제가 반등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전반적인 성장세가 둔화하는 가운데 부동산 부문의 부채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 시기를 거치며 중국의 저축률이 다시 증가하는 가운데 민간 소비와 투자가 상당히 저조하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중국은 민간 부문의 활력이 떨어질수록 정부의 재정 투입과 국유부문의 투자에 의존할 가능성이 큰데, 이는 수익성 악화와 부채위기 심화로 대표되는 중국 경제의 모순을 더욱 응축하는 방향이 될 것이다.

    20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를 강화해 온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정치적·군사적 위협을 증대할 뿐만 아니라, 장기 저성장에 빠진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심화하고 위기관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무역분쟁과 코로나19 대유행 시기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안정적이고 개방된 시장과 같은 세계적 공공재(public goods)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자적 국제질서를 훼손하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보호주의를 강화하는 공공악(public bads)을 제공하면서 ‘G 마이너스 2’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남겼다. 이후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 다자적 동맹질서를 복원해 중국에 공동으로 대응하려는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한층 심화하는 가운데, 중국은 계속해서 ‘제2의 개혁개방’보다는 당 지도부로 권력을 집중하며 중국 특색의 현대화와 자립자강 노선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세계적 위기에 대한 공조와 협력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를 좁히면서, 2020년대의 세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하나의 ‘초거대 위협’이 되고 있다. 
     
     
     

  • 2023-06-28

    ‘프리고진의 행진’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나?

    바그너 그룹의 반란과 그 결과에 관한 러시아 좌파매체의 성명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바그너 그룹의 반란과 그 결과에 관한 러시아 좌파매체의 성명

    번역 | 김진영 정책교육국장
     
    역자 해설
     
    6월 23일~24일, 러시아 민간군사기업 바그너 그룹의 ‘행진’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모스크바에서 20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던 바그너 그룹이 벨라루스 루카셴코 대통령이 중재한 밀실협상을 통해 철수하면서 사태가 종결된 이후에도, 이 사건의 의미와 앞으로 미칠 영향에 관한 분석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번 사건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당사자인 러시아 사회운동의 분석을 소개한다.
     
    아래의 글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창간된 러시아 좌파 반전 매체 《포슬레》(После, Posle, 러시아어로 ‘이후’라는 뜻)가 626일 발표한 성명을 번역한 것이다. 《포슬레》는 창간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이 두 나라에서의 삶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앞으로 살아가고 활동하기 위해, 우리는 몇몇 결정적인 질문의 답을 찾아야 한다. 이 전쟁은 왜 시작되었는가? 왜 이 전쟁을 멈추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이 전쟁 이후의 미래는 어떠한 모습일 것인가? 《포슬레》는 이 질문들에 답하려는 시도다.” 일리야 부드라이츠키스, 일리야 마트베예프 등 러시아 좌파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포슬레》는 침공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사회운동과 활발히 교류해왔으며, 러시아 제국주의 비판, 마르크스주의와 민족자결권, 러시아 내 반전운동 등의 주제를 다뤄왔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튀르키예, 스웨덴, 이탈리아, 독일, 미국, 인도, 아르헨티나 등 각국 좌파 내 논쟁을 소개하고 토론하는 장으로도 기능해왔다.
     
    《포슬레》가 요약한 이번 사건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이 사건은 푸틴 체제에 영구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미래에 비슷한 시도를 고무시킬 것이다. 이 전쟁이 푸틴 정권의 안정성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해졌으며, 필연적으로 이는 푸틴 정권의 궁극적인 붕괴로 귀결될 것이다.
     
    * [] 안은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설명이다. 본문의 링크들은 원문에 있던 것이다.
     
     
    *     *     *
     
     
    6월 23일~24일의 사건은 이미 푸틴 정권에 대한 가장 심각한 국내 정치적 도전으로 묘사된다. 바그너 그룹 부대는 러시아 남부 주요 도시인 로스토프나도누와 보로네즈를 몇 시간 만에, 거의 저항 받지 않고 점령했다. 그들은 심지어 모스크바에서 단지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갔다. 바그너 그룹의 지도자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군사 반란 시작을 선언함으로써 전면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의 필요성에 공개적으로 도전했다. 그는 러시아군 지도부의 제거를 요구했으며, 자신의 목표가 '정의'의 회복이라고 주장했다. 이 갈등은 피를 거의 흘리지 않고 해소되었지만, 푸틴의 안정에 대한 약속과 정권의 통합을 영구적으로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프리고진이 전범이며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반란을 일으키기 몇 달 전, 프리고진은 러시아의 전과자들과 퇴역 장교들로 구성된 바그너 부대의 통제권을 잡으려는 러시아 군 지도부를 비난하는 수많은 성명을 발표했다. 푸틴의 후원 덕분에 경력을 쌓았고 국가 안보 기구 내에 광범위한 인맥을 갖고 있는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정권의 약점과 푸틴의 '지휘 체계'의 취약점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로 드러났다. 이른바 우크라이나 내 '특별군사작전'에서 핵심 역할을 해온 수로비킨 장군과 알렉세예프 장군은 프리고진에게 "정신을 차리고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군의 대부분은 반란군에 대해 침묵으로 중립을 지켰다. 프리고진이 만나자고 요구한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언급 한 번 없이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바그너 그룹이 배포한 전단은 이들의 사임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쇼이구와 게라시모프를 군인에 대한 잔혹한 대우, 군대에 대한 형편없는 보급, 전쟁 과정의 진실 은폐 혐의로 즉각 군사재판에 회부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에 주목하자.
     
    6월 24일 아침, 블라디미르 푸틴은 국가를 대상으로 5분간의 긴급 연설을 했다. 그는 바그너 그룹의 반란은 러시아군의 "등에 칼을 꽂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은 언급하지 않았다. 푸틴은 이 반란의 도덕적, 정치적 차원을 강조하며 이는 가장 가혹하게 대응해야 마땅한 배신이라고 불렀다. 그는 반란자들이 러시아를 내전과 군사적 패배 직전에 몰아넣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러시아 대통령이 어떠한 구체적 이름도 연설에서 언급하지 않은 사실은, 상황에 대한 그의 준비 부족과 불확신을 드러냈다. 무장한 바그너 전사 수천 명의 대열은 만 하루가 안 되는 시간 동안 광활한 거리를 가로질렀고, 모스크바에서 200km 떨어진 지점에서 자발적으로 행군을 멈췄다. 같은 시간, 푸틴 대통령은 수도를 뛰쳐나와 발다이에 있는 외딴 시골 별장에서 연설을 녹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지사들과 친크렘린 정치인들은 반란이 일어난 지 몇 시간 뒤에야 소셜 미디어에 나타나 대통령과 헌법 질서에 충성을 맹세했다.
     
    [%=사진1%]
     
    예상대로, 일부 세력, 파벌, 시민들은 배신자들에 저항하라는 대통령의 요구를 따르지 않고 반군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다. 여기에는 전선 양측의 극우세력이 포함된다. 우크라이나군과 함께 싸우는 러시아의용대와, 러시아의 대리인으로서 2014년부터 우크라이나와 무장충돌을 벌여온 루시치 사보타주 그룹이다. 프리고진은 푸틴의 메시지에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는 바그너 그룹의 배신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이 "잘못됐다"고 말했고, 자신과 바그너 전사들을 "조국의 애국자"라고 불렀으며, 모스크바 관리들의 부패를 비난했고, 물러나는 것을 거부했다. 자신에 대한 지지세를 확대하기 위해, 프리고진은 반푸틴 세력의 특징적인 주장 두 가지를 언급했다. 즉, 러시아 각 지역은 모스크바가 러시아의 자원을 몰수하는 것에 대해 반대해야 하며, 러시아 지도부는 사기꾼과 부패한 관리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이들의 죄는 폭로되고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프리고진은 오로지 무장부대에만 의존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표한 프로그램은 쿠데타에 대중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로스토프나도누 주민들이 바그너 전사들을 영웅들로 환영한 일은, 프리고진의 구호가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바그너 그룹의 반란 시도는 보안기관들이 이러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린다는 것을 드러냈다.
     
    [%=사진2%]
     
    프리고진의 '정의의 행진'은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예상치 못하게 끝났다. 벨라루스의 독재자 루카셴코의 중재로 바그너 그룹과 크렘린이 합의했다. 합의에 따라 프리고진은 부대를 철수해야 하고, 반란자들은 소위 "무공"에 대한 처벌을 면하게 되었다. 루카셴코와의 합의에는 바그너 그룹에 특정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러시아군 지도부와의 향후 관계를 위한 틀을 정의하는 비밀 조항들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 거래는 푸틴의 대변인 드미트리 페스코프가 나중에 언급했듯이 "러시아 대통령의 말"을 통해 보장되었다. 즉, 국민들은 이런 비공식 합의의 조건과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남겨진 셈이다. [‘행진’ 와중에] 모든 러시아 군대와 일반 시민이 반란에 참여하라는 요구와 반란자들에게 저항하라는 요구 양자를 받았음에도, 이 위기는 [푸틴과 프리고진이라는] 두 전범, 그리고 중개인과 심판 역할을 겸한 벨라루스 독재자의 공모로 해소되었다.
     
    이러한 사건의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이 일이 푸틴의 정치 체제를 영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다. 이번 군사 반란 시도가 이렇게 성공적이었다면, 이 사례의 성공을 기반으로 미래의 다른 시도를 고무시키지 못할 이유가 뭐겠는가? 러시아 엘리트 내부의 모순은 언론 공간을 넘어 러시아 도시와 군대의 현실로 옮겨갔다. 전 세계는 그 모순이 법적 틀 밖에서, 푸틴의 "말"이 보장하는 타협으로 (일시적으로) 해결되는 것을 목격했다. 러시아에서는 법치주의가 마피아 관례에 자리를 내주었다. 폭력으로 뒷받침되는 말이 검찰보다도, 심지어 대통령의 '즉각 처벌' 선언보다도 더 강하다. 푸틴 정권이 촉발한 전쟁은 그 어느 때보다 푸틴 정권의 안정성에 대한 명백한 위협이 되고 있으며, 필연적으로 이는 푸틴 정권의 궁극적인 붕괴로 귀결될 것이다. 이 붕괴는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가? 겁에 질렸고 힘이 빠진 러시아 대중은 전면에 나설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들의 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
     

  • 2023-06-12

    민주당식 국제정세 인식 비판

    균형외교는 가능한가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균형외교는 가능한가

     
    지난 3월 한일정상회담을 가진 윤석열 대통령은 4월에는 한미정상회담을 개최했고, 5월에는 기시다 총리 방한을 계기로 일본과 셔틀외교를 복원했으며, 며칠 후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서 미일 정상을 한자리에서 만났다. 이로써 몇 개월간의 숨 가쁜 외교일정이 일단락됐다.

    윤석열 대통령의 한일, 한미정상회담은 한·미·일 간의 안보와 경제협력을 활성화하려는 구상 아래서 추진되었다. 정부는 중국과 러시아가 국제질서를 위협하고 있으며, 중국, 러시아가 미국과 대립하는 구도가 체제유지에 유리하다고 여기는 북한이 중·러와 밀착하는 것을 위협적이라고 판단했다. 특히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이 고도화되면서 한국 내 불안이 커지자, 핵무장 여론이 부상하는 것에 대응이 필요했다. 그래서 국내 반발을 무릅쓰고 일본과의 관계복원 의지를 밝히고, 북·중·러의 항의를 감수하며 한일·한미 정상회담을 개최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외교노선과 확실한 선을 그은 것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노선을 계승한 민주당은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표방하며, 윤석열 정부가 미·일에 치우쳐 북·중·러와의 관계가 나빠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정책이 북한과의 관계개선에도 실패했고, 균형외교라는 명분 아래 중국과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행보를 묵인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무엇보다 실패한 정책을 어떻게 다시 적용할 수 있는지 답하지 않는다.
     
     

    1. 민주당의 한일정상회담 비판의 문제점

     
    윤석열 대통령은 3월 6일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고, 3월 16일 일본에 방문하여 기시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그로부터 두 달 만인 5월 8일에는 기시다 총리가 한국에 답방하여 정상회담을 했다. 그리고 한일 정상은 5월 19일에 개막하는 G7 정상회의에서 다시 만났다. 문재인 정부 시기 냉각된 한일관계가 회복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3월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은 한국에 수출하는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를 해제했고, 이에 상응하여 한국 정부도 일본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취하했다. 중단되었던 셔틀외교도 재개하기로 했으며, 한일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 정상화와 경제안보 협의체를 출범하고, ‘한일 미래 파트너십 기금’을 설립하기로 했다.

    5월 한일정상회담에서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를 복원했으며, 후쿠시마 오염수 관련 한국 전문가의 현장 시찰단 파견에 합의했다. 또한, 기시다 총리는 역대 내각의 역사인식을 계승한다고 밝히고, “고통스럽고 슬픈 일을 겪으셨다는 것에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과거사 문제에 대한 개인적 애도를 표명했다. 그리고 G7 정상회의에서 윤 대통령과 함께 히로시마 원자폭탄 한국인 피해자 위령비를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한일정상회담에 비판적인데, 정작 문재인 정부 시기는 한일관계가 악화했으므로 비판의 정당성이 상당히 약하다. 그나마 그들의 비판이 힘을 얻기 위해서는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한일관계 개선의 방법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한일정상회담에 대한 거친 말만 난무할 뿐 책임 있는 대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재명 대표는 일본과의 셔틀외교 재개를 “빵셔틀”이라 깎아내리고, 장경태 최고위원은 윤 대통령의 방일을 “나라 팔아먹으러 간다”고 격하했으며, 고민정 최고위원도 “친일대통령”이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2019년 조국 민정수석의 ‘죽창가’선동에 이어 반일선동을 반복했다.
     

    민주당의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 비판은 타당한가?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초래한 강제동원 배상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윤석열 대통령은 제3자 변제안을 제시했다.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지원재단>이 조성한 재원으로 일본의 피고 기업 대신 판결금을 변제하는 방안이다. 재원 마련을 위해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자금 수혜를 입은 국내 기업이 재단에 출연하고 일본기업의 참여를 열어두었다. 그러나 일본의 피고 기업은 참여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와 별도로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는 3월 16일 ‘한일 미래 파트너십 기금’ 창설을 발표했다. 

    제3자 변제안에 반대하며 민주당 의원들은 ‘윤석열 정부의 굴욕적·반역사적 강제동원 해법 철회 및 일본 정부와 기업의 사죄와 배상 촉구 결의안’(3/10)을 발의했다. 반대 근거로 첫째, 제3자 변제안이 2018년 대법원판결에 배치되며, 삼권분립에 대항하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사법부의 판결을 행정부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주장인데 사실에 부합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공익과 관련된 재판인 경우,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는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고, 대법원도 제출을 요청할 수 있다. 미국도 외교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연방대법원이 국무부의 의견을 듣는 ‘법정 조언자’ 제도가 존재한다. 영국도 외교 문제나 국제법과 관련된 재판을 맡는 경우 외교부에 확인서를 보내 입장을 요청하는 것이 관행이다. 그리고 고도로 정치적인 사안일수록 국민의 정치적 대표자가 판단을 내리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원칙에 부합한다. 외교적 사안마저 사법부의 판단에 의존한다는 것은, ‘정치의 사법화’의 극단적 형태이며 실제로는 정치의 소멸이다.

    둘째로 윤 정부의 해법이 일본의 ‘합법적 식민지배’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2018년 대법원판결은 청구권협정으로 불법적 식민지배 피해가 보상된 것이 아니므로 피해구제가 가능하다는 취지인데, 이러한 법원 판결을 수용하지 않아서라는 이유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대법원판결대로 일본 피고 기업의 압류 자산을 현금화하는 것 이외의 모든 외교적 해법은 ‘합법적 식민지배’를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민주당은 압류 자산 현금화로 일본과의 단교를 불사하는 것을 강제동원의 해법이라고 여기는지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동시에 문재인 정부도 한국기업과 일본기업이 공동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소위 ‘1+1안’을 제안했는데, 문재인 대통령도 ‘합법적 식민지배’를 인정했다는 것인지도 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아서 문제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대법원에서 승소를 확정한 피해자 15명(생존자 3명 포함) 중 10명은 일본의 피고 기업 대신 재단으로부터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받는 방안을 수용했고, 최근에는 생존자 한 명도 기존 생각을 바꿔 판결금을 수용하겠다고 했다. 정부의 해법을 수용한 피해자의 뜻도 존중할 필요가 있다.
     

    해법제시 없이 반일 여론몰이에 몰두하는 민주당

    민주당이 제3자 변제안에 반대한다면 실현 가능한 해법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재명 대표는 외신기자와의 간담회(4/11)에서 ‘집권하게 되면 강제동원 제3자 변제방식을 무효로 할 것이냐’는 질문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의 해법을 ‘대일 항복문서’라고 비난하면서 정작 강제동원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밝히지 않는 것은 무책임하다. 

    민주당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 반일 정서에 의존하여 정략적 이해를 추구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특히 민주당이 일본 언론 보도로 촉발된 독도와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 쟁점을 집중적으로 부각하는 모습은 문재인 정부 시기 반일선동과 흡사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대법원판결 이후 일본기업의 자산 현물화 시기가 도래하여 일본이 수출제한 조치를 결정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외교적으로 무능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강제동원 배상판결에 외교적으로 개입하면 지지율이 하락할까 우려해서 외면하다가 파국을 초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정치적 호기’로 간주한 정황이 포착되었다는 점이다. 2019년 한일 갈등이 고조되던 시점에 “일본에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이 내년 총선에 유리할 것”이라는 민주연구원 보고서를 민주당 의원 전원에게 배포했는데, 강력한 반일 메시지를 토해내라고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조국 민정수석의 ‘죽창가’선동을 필두로 민주당 의원과 지지자들은 반일선동에 앞장섰다.

    이처럼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은 외교적 무능으로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초래했으나, 수습보다는 정치적 이해를 좇아 반일민족주의를 선동했다. 오늘날에도 민주당에서 반성과 책임감 있는 대응을 찾아보기 어렵다. 윤 정부가 제시한 해법이 문제라고 여긴다면 대안을 제시하고 진지한 논의에 임해야 하지만, 한층 과격해진 반일민족주의 선동만 난무했다.
     
     

    2. 민주당의 한미정상회담 비판의 문제점

     
    윤석열 대통령은 4월 27일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한미동맹 70주년 기념 한미정상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한미정상은 한미 양국이 보편적 인권, 자유, 법치 수호에 기반하여,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해협의 평화 문제에 공조하고, 글로벌 공급망과 기후위기와 같은 분야에서 협력하는 글로벌 동맹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공동성명과 함께 채택한 ‘워싱턴선언’에서는 한미 핵협의그룹(NCG)을 설립하고 미국의 전략자산을 정기적으로 전개하겠다고 했다. 

    워싱턴선언은 미국의 확장억제를 강화한 것으로 최근 국제정세의 변화, 특히 북핵 위협의 새로운 단계에 대한 반응적 조치라는 측면을 외면한 채로 평가할 수 없다. 북한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하자, 미국이 북한의 핵공격 위험을 무릅쓰고 핵우산을 발동할지 불확실해지면서 한국의 자체핵무장 여론이 확산했다. 이처럼 북핵에 대한 불안감이 고조되자 워싱턴선언에서 미국의 핵보복을 명문화하여 핵무장 및 전술핵 배치 여론을 진정시키고, 한국의 핵무기비확산조약(NPT) 체제준수를 재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국제정세 변화의 맥락을 무시한 채 한미정상회담을 혹평했다. 이재명 대표는 “아낌없이 퍼주는 글로벌 호갱 외교”라고 깎아내렸다. 또한 무력에 의한 현상변경 반대는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책무임에도, 민주당은 윤석열 대통령이 러시아 침공과 대만문제를 언급해 중국·러시아와의 관계가 얼어붙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워싱턴선언이 나토식 핵공유에 미치지 못해 성과가 없고, 자체핵무장의 길을 닫아서 문제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확장억제 강화가 한반도 핵전쟁을 초래할 것이라는 모순적인 주장을 했다.
     

    우크라이나와 대만 침공 반대가 국익 포기란 말인가?

    한미정상 공동성명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한미 양국은 자국의 주권과 영토보전을 수호하는 우크라이나와 함께하며, 양 정상은 민간인과 핵심 기반시설을 대상으로 하는 러시아의 행위를 가장 강력한 언어로 규탄하였다.” 대만해협에 대해서도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확인한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이재명 대표는 “우크라이나, 대만 문제에도 매우 큰 불신을 남겼다”며 “감당하지 못할 청구서만 잔뜩 끌어안은 채 많은 부분에서 국가가 감당하지 못할 양보를 했다”고 비판했다. 27일 민주당 대변인 논평도 동일한 맥락에서 “중국과 러시아 관계 포기가 국익입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근시안적인 태도다. 민주당의 논리대로라면 우크라이나와 대만 침공을 반대하면 국익을 포기하게 된다. 즉,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무력에 의한 영토와 주권침해를 반대하는 책무가 국익에 반한다는 의미다. 제1 야당이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무책임한 발언이다. 

    또한, 지금은 근시안적으로 주변국인 중·러와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것만 염려할 때가 아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데 이어 중국까지 대만을 침공한다면, 힘에 의한 현상변경 시도가 확산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국제질서가 붕괴할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앞으로 국제질서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서도 전쟁반대가 중요하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할 경우, 중국과 북한이 미국의 대응을 분산시키기 위해 남한에 대한 군사행동을 취할 위험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만을 향한 중국의 무력행동을 저지하는 것이 오히려 민주당이 강조하는 국익, 즉 평화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워싱턴선언에 관한 모순된 평가

    워싱턴선언의 핵심은 한미 핵협의그룹(NCG)을 신설하여 미국이 핵우산 제공 계획을 한국에 공유하고, 그 계획에 한국이 관여하는 것이다. 이는 나토식 핵공유와 차이가 있는데, 유럽에는 전술핵무기를 배치했지만 한국에는 그렇지 않아서다. 대신 미 전략자산을 정례적으로 한반도에 전개하기로 했다. 그리고 북한의 핵공격에 미국이 대응할지 불확실하다는 국내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워싱턴선언에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는 핵을 포함한 미국 역량을 총동원하여 지원된다”고 명문화했다. 미국의 확장억제에서 대량 응징 보복의 의미는 핵무기와 함께 고위력·초정밀 타격 능력의 재래식 무기도 동원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미국의 핵우산을 강화하면서 한국은 자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고 NPT의무를 이행할 것을 다시 확인했다.

    대통령실은 워싱턴선언이 “특정한 하나의 동맹국에 핵억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플랜을 담아서 선언하고 미국 대통령이 약속한 최초의 사례”라며 방미의 최대성과로 꼽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핵협의그룹만으로는 자체 핵무장 여론을 불식시키긴 역부족이라며, 앞으로 핵연료 재처리 능력을 보장받거나 전술핵 재배치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술핵 반입과 핵무장에 정부가 선을 그은 것은 불가피하고, 앞으로 미국과 정보공유 및 기획·실행 과정에서 핵협의그룹의 실효성을 갖춰나가야 한다는 평가도 있다. 

    민주당은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전술핵 배치가 골격인 나토식 핵공유보다, 독자 핵개발이나 한반도 내 핵무기 재배치가 불발된 워싱턴선언이 어떻게 북핵 대응에 더 효과적인지 납득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나토처럼 전술핵을 배치하지 못해서 성과가 없다는 평가로 보인다. 연장선상에서 민주당 안민석 의원은 언론 인터뷰에서 워싱턴선언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며, “미국과의 협상에 있어서 (자체핵무장 카드를) 계속 쥐고 있으면서 협상용으로 써야 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이 카드를 포기해 버렸다”고 비판했다. 워싱턴선언 수준을 넘어 자체 핵무장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동시에 상반된 주장도 한다. 안민석 의원은 같은 인터뷰에서 “북한이 핵을 공격하면 핵으로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것인데 한반도는 핵 전쟁터가 되고 우리 민족은 말살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선언이 자체 핵무장의 길을 닫아 문제라면서, 미국의 확장억제력으로 북핵에 대응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주장은 모순적이다. 민주당에 일관된 입장이 있다기보다 정략적 비판만 내세우다 보니 앞뒤가 맞지 않은 주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3. 민주당식 균형외교, 실체가 있나

     
    윤석열 대통령이 잇달아 일본·미국 정상과 회담을 개최한 것은 한·미·일 간의 안보와 경제 동맹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크다. 대통령 선거 시기부터 표방한 ‘가치외교’의 일환으로,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진영 간의 대결이 고조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인권 등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국제연대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즉,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국제질서에 균열이 발생했고, 현실적 위협으로 부상한 북한의 핵무력 완성과 중국의 대만침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공조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된다. 

    ‘가치외교’행보는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직후 한미정상회담을 개최하여 미국과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을 확인하고,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에 가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 한국 정상으로서는 처음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했으며, 올해 3월에는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을 제시하면서 한일관계 정상화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토대로 한·미·일 동맹을 일정한 궤도에 올리는 것이 이번 정상회담의 목표로 보인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기조와 확실한 선을 그은 윤석열 정부의 가치외교에 비판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은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한미동맹 의존도 줄어들고 미국과 중국과의 균형외교를 전개할 공간이 확대되면서, 한국이 역량을 발휘해 미·중 협력관계의 선순환구도를 조성할 수 있다는 구상이다. 민주당은 이러한 노선을 계승하며 균형외교를 주장하고 있다. 

    한미정상 공동선언이 발표된 4월 27일, 문재인 전 대통령은 판문점 선언 5주년 기념사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중·러와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민주당도 28일 대변인 논평에서 “자유의 나침반을 자처하며 미국의 대외 전략에 무조건적 동참 의지를 표명한 것은 균형외교에 파산선고를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비판했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균형외교를 통해 실리를 추구해야 하는데, 윤석열 정부가 미국 편향적 외교노선을 취해서 문제라는 취지다. 민주당이 주장하는 균형외교로 추구할 수 있는 실리란, 안보 측면에서는 북한과 관계개선을 위해 중국과 러시아가 중재를 서는 것이고, 경제 측면에서는 중국 수출을 확대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균형외교의 실체가 있는지 의문이다. 우선 중국과 러시아에 북한 비핵화에 관한 의지를 확인하기 어렵다. 단적으로 2022년 3월 북한이 ICBM을 발사하여 2018년 선언한 모라토리엄을 파기했음에도 UN안보리는 대북 경제제재를 부결했고 규탄성명도 채택하지 못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해서다. 이들은 북한에 동조적인데, 오히려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과 경제협력을 강화했으며, 북한이 러시아로 무기를 판매하고 러시아는 군사기술을 제공하는 등 군사적 측면에서도 밀착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북한은 미국에 대항하는 북·중·러 진영이 구축된다면 UN 경제제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여 비핵화를 거부하고 있다. 현재 구도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북한 비핵화를 위한 역할을 기대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기대가 최근 좌절된 것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 시기에도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동안 중국에 북한과의 중재를 바라며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삼갔다. 그 결과 문재인 정부는 홍콩민주화 시위에 대한 중국의 폭력적 탄압, 신장위구르 강제노동 문제, 대만 무력침공 위협에 침묵하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나서지 않았다.

    경제적 측면에서 실리추구라는 주장도 실체가 불분명하다. 중국과 관계가 경색되면 수출에 타격이 발생한다는 주장은 대만의 사례만 보더라도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대만에 무력통일도 불사하겠다고 중국이 엄포를 놓고 있고, 작년에는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해 중국이 공격적 군사훈련을 감행했음에도, 대만은 막대한 대중 무역흑자를 보았다. 특히 대중국 반도체 수출이 20.9% 증가했다. 중국은 경제적 필요가 있다면, 정치적 관계만 따져 손해 보는 선택을 하진 않는다는 점이 확인된다.

    따라서 작년 한국의 대중국 무역적자가 윤 대통령이 균형외교를 저버린 결과라는 비판은 문제가 있다. 한국무역협회의 분석(2022.11)에 따르면 무역적자는 중국의 실물경기 회복 부진과 국제경제 환경 불안정에서 기인한 일시적 성격이 크다고 진단한다. 경기적 요인이 달라진다면 수출은 어느 정도 회복될 것이다. 그런데 동시에 한국무역협회는 대중국 수출이 점차 고기술 중간재로 변하고 있어 수출을 확대하려면 고기술 품목에 주력해야 한다며 기술혁신을 강조했다. 즉 대중국 수출확대는 궁극적으로 기술혁신에 달려있다는 의미다.
     

    북핵 대응을 위해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가야 하나?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한미정상이 선언문을 채택한 4월 27일 판문점선언 5주년 기념사에서 “한반도 정세가 더욱 악화되고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며 “남과 북, 국제사회가 대화 복원, 긴장 해소, 평화의 길로 나서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판문점선언을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평화의 이정표”라고 평가했다. 이 발언은 윤석열 대통령과 미국이 북한과의 외교적 노력을 등한시하고 대결 구도를 지향한다며 우회적으로 한미정상회담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판문점선언을 이정표로 삼자는 취지는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번 한미정상회담 결과가 남한에 전술핵을 배치하거나 독자적으로 핵무장을 하는 식의 급격한 현상변경은 아니다. 오히려 한국의 핵무장 여론을 진정시키고 NPT체제를 준수한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핵전쟁을 우려한다면, 그 일차적 원인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워싱턴선언’은 북한의 핵무장 고도화에 대한 반응적 결과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북한이 핵무력을 고도화하면서, 핵무기 사용의 문턱을 낮추고 남한을 향해 사용할 수 있다고 협박하지 않았는데, 미국이 핵우산을 강화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한미정상은 공동성명에서 북한과의 외교협상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의 지속적인 평화를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서 북한과의 외교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하며, 북한이 협상으로 복귀할 것을 촉구”하면서,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

    북한과의 관계를 외교로 풀어가야지 강 대 강을 고수하다가는 전쟁위기가 높아진다는 우려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확장억제를 구체화하는 과정이 핵전쟁을 원하지 않는 민중에게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북한과의 협상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대화의 물꼬를 트려면 북한의 핵보유를 현실로 인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경계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서 북한 비핵화가 필수라는 원칙을 무시하고 북한의 요구인 ‘조선반도 비핵화’(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고 핵동결·핵감축 협상을 하자는 북한의 접근법)를 두둔하는 방식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는 북한의 핵보유가 NPT체제를 위협한다고 국제사회가 판단하면서 좌초했다. 핵전쟁을 피하고자 핵으로 무장한 상대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핵을 막기 위해서 핵을 가져야 한다는 교리에 따라 연쇄적인 핵무장 흐름으로 이어진다. 가령 러시아의 핵위협이 성과를 거두면, 비핵보유국은 우크라이나의 비핵화를 ‘역사적 실수’로 인식하게 되고, 북한을 비롯하여 비공식 핵무장을 했거나 시도하는 국가에겐 ‘핵이 만능’이라는 신호를 주게 된다. 즉, 핵무장 국가에 투항하는 것은 오히려 모두가 핵을 더욱 절박하게 보유하려고 하는 상황을 낳는 역설을 불러온다. 마찬가지로 북한 비핵화라는 목표를 포기하면 남한도 핵무장으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곧바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정리하면, 민주당의 주장대로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협상을 하더라도 확장억제는 강고해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한반도 핵전쟁의 위험은 영구화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북한이 핵전력을 고도화하는 한, 어떤 식으로 협상이 진행되더라도 그에 비례하여 동북아의 핵태세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바람직하지도, 실현할 수 있지도 않다.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미화하면서 과거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자는 주장일 뿐이다.

    민주당의 균형외교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을 계승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운전자론은 출발점인 북한과의 관계개선부터 좌초했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에게 북한과의 중재를 기대했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팽창주의적 행태를 묵인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이처럼 문재인 정부의 외교노선은 실패했으며, 북·중·러의 공조가 한층 강화된 현재 국면에서 적용은 더욱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지난 정부의 대외정책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보다 정상회담을 비난하기 바쁘다. 민주당이 책임감 있고 진지하게 대응한다기보다 정략적 이해만 좇는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이유다. 
     
     

    4. 사회운동 대응 평가

     
    오늘날 동아시아 정세가 심상치 않다. 평화를 위한 선택지가 핵우산 강화와 ‘조선반도 비핵화’로 좁아져선 안 된다. 사회운동은 대안적 길을 만들기 위해 국제연대를 통한 동아시아 반핵평화운동을 시급히 건설해야 한다. 러시아의 침공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민중과 연대해 군사적 모험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 또한, 대만의 민중과 연대하여, 동아시아 전쟁으로 번질 수 있는 중국의 대만침공을 저지해야 한다. 북한의 핵공격 위협에 맞서 일본 민중과 연대해 반핵 평화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이것만이 상호 절멸이라는 공포의 균형과 핵무장 국가에 투항하는 길을 벗어나는 방법이다.

    그러나 사회운동이 민주당식 외교노선을 추종한다면 평화를 위한 대안적 길을 만들 수 없다. 균형외교라는 핑계로 사회운동이 중국과 러시아의 팽창주의적 행보를 묵인한다면, 우크라이나와 대만 민중과의 연대가 불가능해진다. 또한, 북한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북한의 핵무장을 인정하고 핵동결 협상으로 전환하자고 한다면, 한국의 반핵평화운동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핵무장 담론이 거세질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 사회운동은 민주당의 외교노선을 지지하면서 한일, 한미정상회담을 비판했다. 시민단체와 민주당은 3월 7일 강제동원 피해배상 해법을 성토하는 공동기자회견을 시작으로, 3월 11일, 18일, 25일, 세 차례에 걸쳐 ‘대일 굴욕외교 규탄 범국민대회’를 개최했다. 기시다 총리 방한을 앞둔 5월 4일에도 정의당, 진보당, 시민단체가 민주당과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윤석열 정부의 굴욕외교 중단을 촉구했다. 동참한 진보정당과 시민단체는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이 사법주권을 부정하고, 식민지배가 합법이라는 일본의 주장을 수용한 것이며, 피해자의 요구를 외면했다고 민주당과 한목소리를 냈다. 강제동원 해법을 토대로 성사된 한일정상회담 또한 굴욕적인 외교 참사라고 비판했다. 

    한미정상회담에 대해서도 균형외교에서 벗어난 미국 편향적 외교노선으로 국익을 상실했다는 민주당의 평가에 상당수 사회운동이 동조했다. 한미정상이 공동선언문에서 중국의 대만침공 위협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했다고 비판한 것이다. 전국민중행동은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살상무기 지원, 대만 문제는 국제문제, 힘에 의한 현상변경 반대 등의 발언으로 러시아와 중국을 적국으로 돌렸고”다고 지적했고(4.27), 진보당도 공동선언문에서 대만과 우크라이나 언급은 반중 반러 태도를 분명히 한 것이라며, “중국과 러시아의 보복으로 한국은 경제와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도래할 것”이라고 비판했다(4.27). 

    대북정책에서도 문재인 정부의 판문점선언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민주노총은 한미정상회담을 비판하면서 판문점 선언 5주기를 “동맹의 핵무기가 없이도 한반도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던 시기였음을 상기”(4.27)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이 민주당의 균형외교를 지지하는 것은 국제정세를 반미 진영론에 근거하여 분석하기 때문이다. 쇠락하는 미국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유도했고, 대만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러나 러시아가 전쟁에서 선전하면서 미국의 패권이 약화하고 있으며, 그 결과 미국 중심의 세계가 중러가 주도하는 다극화로 이동한다고 진단한다. 러시아의 침공을 미국 패권에 대항하는 정당한 행동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반미 진영론은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을 균형외교라는 명분으로 묵인하는 외교노선에 친화성을 보인다.

    반미진영론자들은 한·미·일의 군사협력 강화가 전쟁을 유발한다고 비판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이 그러한 것처럼,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는 대만에서 미국이 유사한 행태를 반복할 위험이 있다는 주장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군사대응 수준 강화를 우려하는 것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무력으로 우크라이나 국경을 침범한 것은 러시아이며, 대만침공을 위협하는 것 역시 중국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또한, 우크라이나 침공은 푸틴이 대러시아 애국주의를 통해 장기집권의 명분을 마련하고, 러시아 시민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주변국의 탈권위주의 흐름을 억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의 대만침공 위협도 시진핑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사회운동이 사태를 거꾸로 보면서 중국과 러시아가 전쟁 위험을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면, 팽창주의를 저지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세계 각지의 팽창주의 세력은 힘에 의한 현상변경을 시도하면서 지속해서 국제질서를 허물 것이고, 팽창주의에 대항하는 군사적 동맹은 더욱더 강화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운동의 대안적 길은 요원해질 것이다. 

    북한에 대한 상황인식도 거꾸로 서 있다. 반미진영론자들은 워싱턴선언을 동아시아에서 한미일과 북중러의 진영대결 구도를 형성하려는 미국의 패권전략으로 해석하면서 전쟁위기가 극대화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북중러 진영구축이 핵보유와 체제수호에 유리하다고 판단해 군사행동의 수위를 높인 것은 북한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북한은 국제질서의 판도가 바뀐다고 봤다. 북중러 진영이 구축된다면 UN 경제제재를 피할 수 있다는 계산 아래 2022년 3월 ICBM을 발사하여 2018년 선언한 모라토리엄을 파기했다. 이후에도 북한은 IC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극초음속미사일과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이어갔고, 핵무력 정책을 법제화했으며, 한국을 겨냥해 전술핵 공격위협을 가했다. 이로 인해 남한에서는 미국의 핵우산조차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 고조되면서 자체 핵무장을 바라는 여론이 치솟았다. 그 결과 워싱턴선언이 채택되었다. 즉, 북한의 핵위협이 가증되지 않았다면 워싱턴선언도 없었다는 의미다. 

    북한의 핵위협이 전쟁 위험을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북한의 요구대로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한 협상을 진행한다면, 한반도 평화가 아니라 핵전쟁 위험이 영구화된다.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불러들일 수는 있다더라도 한국의 핵무장으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곧바로 제기될 것이며 이는 NPT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북한과 대화를 위해 북한의 비핵화를 포기하자는 의미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사회운동이 반미진영론에 근거해 민주당의 외교노선을 지지한다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침략을 물리치고, 중국의 대만침공 야욕을 저지하며, 북한의 비핵화를 요구하는 평화운동을 건설하기 어려워진다. 사회운동은 적극적인 토론을 통해 국제정세 인식을 전면쇄신하고 국제연대를 모색해야 한다. ●
     
     
     

  • 2023-06-06

    대만 사회운동의 새로운 희망, 대만연대전선노총 건설준비회 인터뷰②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 알려진 대만의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에 관한 정보는 여전히 많다고 할 수 없다. 이 인터뷰는 앞으로 한국과 대만 사회운동의 연대가 확대되기를 기대하며, 현재 대만 사회운동의 가장 중요한 시도인 대만연대전선노총(臺灣工人鬥陣總工會) 건설준비회의 활동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회진보연대는 5월 11일 오후, 대만 타이베이시에 있는 타오위안시승무원노조(桃園市空服員職業工會) 사무실에서 대만연대전선노총(臺灣工人鬥陣總工會) 건설준비회에 참여하는 여러 노동조합의 활동가들을 만나, 대만 노동운동의 역사와 새로운 전국 노총을 만들려는 까닭, 새로운 노총 건설 준비에 참여하는 노조들의 현황과 공동투쟁, 이후의 계획 등을 들었다. 인터뷰에는 타오위안시노총(桃園市產業總工會, TYCTU) 위원장 주메이쉬에(朱梅雪), 타오위안시노총 상무이사 스슈화(施淑華), 전국환경보호공무기관노총(全國環保公務機關總工會) 비서장 양쥔화(楊俊華), 중화민국(대만)소방관노동권익촉진회(中華民國消防員工作權益促進會) 비서장 천옌카이(陳彥凱), 국립대만대병원노조(臺大醫院職業工會) 비서장/타이베이시의사노조(臺北市醫師職業工會) 비서 치우위훙(邱宇弘) 씨가 참석했다. 중국어-영어 통역은 타오위안시승무원노조 비서 황스팅(黃士庭) 씨가 맡았다. 인터뷰는 사회진보연대 김진영 정책교육국장, 허지선 광주전남지부 조직국장의 질문과 대만 노조 활동가들의 답변으로 진행되었다. 
     
     
    * 대만연대전선노총(臺灣工人鬥陣總工會)이란 명칭 중 ‘鬥陣’은, 대만어(민남어)에서 ‘연대’를 뜻하는 ‘逗陣’의 ‘逗’를 발음이 같은 한자 ‘鬥’(싸울 투)로 바꾼 것이다. 한국어 번역은 ‘Taiwan Solidarity Front Confederation of Trade Unions’라는 영문 명칭에서 따왔다.
    * 대만에서 ‘비서’(장)이란 표현은 노조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는 상근자의 직책으로 흔히 쓰인다.
    * 괄호 안의 설명은 사회진보연대가 인터뷰를 정리하며 덧붙인 것이다.
     
    *   *   *
     

    대만연대전선노총 건설준비회에는 어떤 노조들이 참여하고 있습니까? 참여하는 노조들의 최근 대표적인 투쟁이나 활동은 무엇입니까?

     

    “작은 회사의 파업이었지만, 전체 노동운동의 티핑 포인트”

     
    스슈화: 중화항공의 자회사인 화지에세탁서비스(華潔洗滌)의 2015년 투쟁을 소개하겠습니다. 당시 화지에세탁서비스의 노동조건은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노동자 대부분이 최저임금을 받았고, 노동강도는 매우 높았고 노동환경은 나빴습니다. 그때 이들에겐 노조가 없었는데, 자신의 권익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타오위안시노총의 도움을 받아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타오위안시에 대만 최대 규모의 국제공항인 타오위안 국제공항이 있다.)
     
    노조를 만든 화지에세탁서비스 노동자들은 파업 투쟁에 나섰습니다. 그때까지 대만은 상당한 기간 동안 파업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오랜만에 벌어진 파업 투쟁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얻었습니다. 작은 회사의 파업이었지만, 전체 노동운동의 티핑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파업을 통해 기존 임금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5,000대만 달러 임금 인상에 성공했습니다. 이 사건은 항공업계 노동자 전체의 의식 상승을 낳았고, 그 뒤 2016년 중화항공과 2019년 EVA항공 승무원들의 파업 투쟁이 이어졌습니다. (중화항공은 대만의 국책 항공사로, 2016년 중화항공 파업이 대만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항공 승무원 파업이었다. EVA항공은 대만 제2의 항공사다.)
     
    이러한 흐름은, 노동자들이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노동조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단결과 투쟁을 통해 노동조건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줍니다.
     
    [%=사진1%]
     
    주메이쉬에: 우리 타오위안시노총에는 다양한 직종과 회사의 노조들이 가맹되어 있습니다. 2015년부터 작년까지, 우리 노총 소속의 노조들은 여러 차례 파업 투쟁을 했습니다. 방금 이야기 나온 화지에세탁서비스 파업과 항공승무원 파업 말고도, 2016년 유니플러스 전자(合正科技) 파업, 2017년 홈박스(普來利) 파업, 2018년과 2021년 미라마 골프 컨트리 클럽(美麗華) 파업, 2018년 후지 제록스(富士全錄) 파업, 2022년 중화택배(中華快遞) 파업이 있었습니다.
     
    [%=사진2%]
     
    이렇게 다양한 산업에서 노조와 파업을 조직한 결과, 오늘날 대만에서 발생하는 파업의 절반 이상은 타오위안시노총이 조직한 것입니다. 우리는 단사 수준에 국한되는 기업별 노조와 달리 직종별, 산업별 노조는 산업 정책이나 산업 전반의 노동조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물론 여전히 직종별 노조의 99%는 사회보험을 목적으로 하지만, 우리는 소방관노동권익촉진회, 승무원노조, 대만철도산업노조(臺灣鐵路產業工會)와 같은 중요한 예외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파업’에 관한 대만 대중의 인식을 바꾼 소방관들의 투쟁”

     
    천옌카이: 저도 2013년 설립된 소방관노동권익촉진회의 활동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초창기에 우리는 소방관의 순직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당시에는 소방관의 순직은 정책의 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개인의 비극으로만 치부되었고, 사망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조사하는 절차조차 없었습니다. 2015년에 소방관 6명이 숨진 타오위안시 신우(新屋) 볼링장 화재가 발생했고, 2018년, 2019년에도 비슷한 순직 사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을 이슈화하며 투쟁하여, 소방관들이 직접 참여하여 순직 원인을 조사하는 진상조사 체계를 쟁취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입니다.
     
    [%=사진3%]
     
    그다음으로 중요한 의제는 소방관의 노동시간입니다. 대만의 소방관은 24시간 혹은 48시간 연속으로 일한 다음에 24시간 혹은 48시간 쉽니다. 이는 너무나 가혹한 제도이며,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하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소방관의 초과노동시간에 아무런 법적 제약이 없었습니다. 투쟁을 통해, 우리는 소방관의 초과노동시간과 전체 노동시간을 줄이는 합의를 작년에 이뤘습니다. 한편 대만의 소방 제도는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형식인데, 앞으로 소방관의 장시간 노동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중앙정부가 전국적인 인력 관리와 충원에 협조할 필요도 있습니다.
     
    [%=사진4%]
     
    이러한 투쟁들은 ‘파업’에 관한 대만 대중의 인식을 바꿔놓았습니다. 이전에는 파업을 역사책 속이나 다른 나라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로만 여겼다면, 지금은 파업이 대만 내에, 자신의 일상 주변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파업이 단순히 불편을 초래하는 일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정당한 행위라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이는 대만 사회에서 매우 큰 변화입니다. 특히 소방관들이 공무원인 동시에 노동자, 항쟁자로서 대중 앞에서 표상을 얻게 된 일은 다른 공무원 노동자들에게 미친 효과가 매우 컸습니다. 대만에서는 공무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방관‘노조’가 아니라 ‘촉진회’ 형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투쟁 성과는 지금 당장 노조를 결성하거나 파업을 할 법적 권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단결과 투쟁으로 노동조건을 바꾸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행정구역의 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이 목표”

     
    양쥔화: 전국환경보호공무기관노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겠습니다. 정식으로 노총을 설립한 것은 2018년 12월이지만, 쓰레기 수거 노동자의 전국적 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은 2012년에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쓰레기 수거 노동자의 노동조건은 열악했는데, 예를 들면, 쓰레기 수거 차량을 주차할 장소가 보장되지 않아서 많은 불편함이 있었고 심지어 노동자의 안전이 위협받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쓰레기 수거 노동자들의 비공식 모임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곧 단결을 통한 영향력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먼저 타오위안, 타이베이 등지에서 6천 명을 모았고, 2014년부터는 가오슝, 타이중과 같은 다른 주요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합류를 권했습니다. 현재 대만 법에서 ‘전국 노조’로 인정받으려면 전체 행정구역의 절반 이상에 지부를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년간의 노력 끝에 2018년에 그 요건을 채워 노총을 출범했고, 조합원은 15,000명 이상입니다. 앞으로도 모든 행정구역에 지부를 만들 때까지 계속 조직 사업을 할 것입니다.
     
    [%=사진5%]
     
    우리의 다음 과제는 쓰레기 수거 노동자의 지위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지자체마다 다른 시스템으로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어서, 어떤 곳에서는 쓰레기 수거 노동자가 계약직이고 또 다른 곳에서는 공무원인 식입니다. 모든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동일한 법적 노동기준이 없습니다. 우리는 쓰레기 수거 노동자 공통의 정체성을 만들고 이들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을 만들고자 합니다.
     

    대만연대전선노총 건설준비회에 참여하는 노조들은 그동안 어떤 공동의 활동을 했습니까?

     
    주메이쉬에: 대표적으로는 2016년 시작된 총통선거 공동대응 노동자 투쟁체(工人鬥總統)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노조와 산업의 노동 의제를 모아서 모든 출마자에게 질의서를 보내고, 우리의 정책 제안을 공약에 반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내년에 있을 총통선거에 대해서도 비슷한 대응을 조직할 것입니다.

    [%=사진6%]
     
    치우위훙: 2016년 당시에는 사진에 보이는 5대 요구와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 문제를 해결할 것을 후보들에게 요구했습니다. 이 사진은 2020년 선거 투쟁 때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구아바와 망고는 말장난 같은 것입니다. 구아바는 정치인들은 일단 선거가 끝나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하고, 망고는 차이잉원 정부가 대만-중국 갈등을 고조시켜, 유권자들이 중국에 대한 공포심으로 인해 민진당을 찍게 만드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의미입니다.
     
    [%=사진7%]
     
    황스팅: 2020년 총통선거 투쟁의 주요한 요구는 기초연금 신설, 국가공휴일 늘리기, 최저임금 인상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노조 설립의 문턱(30인 이상 서명 필요)을 낮추라는 요구도 있었습니다. 정부가 실제로는 상용직처럼 일하는 노동자들을 계약직으로 써서는 안 된다고도 요구했습니다. 이주노동자 중간 착취 근절,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해고 문제 해결도 요구였습니다.
     
    내년 1월 총통선거 대응은, 아직 각 당의 후보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공동 대응이 있을 것은 확실하며, 논의 일정을 조율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공동 대응은 올해 하반기에 시작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5월 17일 국민당과 민중당이 총통선거 후보를 확정하면서, 집권 중인 민진당을 포함하여 1, 2, 3당의 후보가 확정되었다.)
     

    새로운 전국적 노총을 설립하는 데 있어서 난점과 과제는 무엇입니까?

     
    치우위훙: 2011년 노동조합법이 대거 개악되면서 노총 설립에 제한을 잔뜩 부과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노동조합법 8조는 ‘같은 종류의’ 노동조합 중 1/3 이상을 조직해야만 전국적 노총으로 인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노동조합의 ‘종류’나 전체 노동조합의 숫자 자체가 모호하고 논쟁의 대상입니다. 대만연대전선노총 건설준비회에 참여하는 노조들만 보더라도, 지역 차원의 노총도 있고, 승무원노조와 같은 직종별 노조도 있고, 소방관들이 만든 것과 같은 ‘유사노조’도 있습니다. 또한 건설준비회에 참여하지 않는 노조 중 상당수는 실제로 거의 활동하지 않음에도, 전체 노동조합 개수를 계산할 때 포함됩니다. 우리는 정부가 이렇게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근거로 단결권을 제한하는 것을 규탄하며, 이 법을 바꾸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편, 내년에는 총통선거가 있는데, 이에 따라 대만의 정치적 상황이 노동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건설준비회 내의 논의를 활성화할 것입니다.
     

    대만연대전선노총의 내부 구조는 어떻게 구상하고 있나요? 여러분이 말했듯 다양한 종류의 노조들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모습이 될지가 궁금합니다.

     
    천옌카이: 중소기업노조가 대다수인 대만은 한국과 상황이 많이 달라서 이 부분을 궁금해 하시는 것 같습니다. 현재 건설준비회에 참여하는 노조들을 두 축으로 나누면, 한 축은 지역 차원에서 기업별 노조들을 모아서 형성된 지역노총들입니다. 이들이 준비위원회의 주요한 기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주요한 축은 승무원, 철도노조와 같은 직종별 노조입니다. 물론 우리 소방관노동권익촉진회와 같은 ‘유사노조’도 있지요.
     
    치우위훙: 기업노조들이 모여있는 지역노총들은 각 지역이나 단사의 의제에 주로 관심을 보이는 반면, 직종별 노조들은 중앙정부의 정책을 투쟁 대상으로 삼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 두 경향을 하나로 모으고, 공통의 투쟁을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금방 가능한 일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만연대전선노총은 대만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자 합니까? 어떤 목표와 과제에 집중할 계획입니까?

     
    천옌카이: 전국적 노총을 만들려는 가장 큰 목적은 대만 전체의 노동정책에 대한 방향성과 과제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초연금, 노조 조직 요건 완화, 국가공휴일 확대, 소방관을 포함한 공무원의 노동시간 체계 개혁, 가사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향상 등 우리가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목표들은, 새로운 전국적 노총에서도 당연히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황스팅: 한국에도 연금 개혁 이슈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기초연금 신설 요구를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현재 대만의 연금 체계는 직업과 수입을 중심으로 짜였기 때문에, 수입이 많은 사람은 연금도 많이 받는 반면 수입이 적은 사람은 연금도 적게 받게 됩니다. 그리고 국유기업과 민간 부문에 서로 다른 연금 체계가 적용되어, 전체 연금 체계가 매우 복잡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연금을 통합한 뒤, 모든 대만 시민이 직업이나 과거 수입에 상관없이 은퇴 뒤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기초연금을 지급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주요한 요구 중 하나입니다.
     
    [%=사진8%]
     

    마지막으로, 대만-중국 관계, 대만-미국 관계와 같은 사안은 대만 노동운동 안에서 어떻게 논의되고 있습니까? 국제정치 속 대만의 행보에 대해 노조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치우위훙: 2014년 ‘해바라기 운동’에는 노조 활동가들도 많이 참여했습니다. (해바라기 운동은 ‘318운동’이라고도 한다. 2014년 3월 18일, 마잉주 국민당 정부가 추진한 대만-중국 ‘양안서비스무역협정’(CSSTA) 비준을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대가 입법원(국회) 건물을 점거한 사건을 계기로 벌어진 운동이다. 21세기 대만에서 가장 큰 학생운동이었고, 이후 대만 사회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에게는 일반적인 여론이나 주류 언론들이 부각한 ‘중국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면보다는, ‘서비스무역협정 반대’의 의미가 컸습니다. 당시 사회운동 안에서도 국민당 반대, 중국 반대의 목소리가 중심이 되면서, 정작 서비스무역협정이라는 사안 자체에 대해서는 분석과 논의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우리는, 말하자면 중국과의 협정이냐, 미국과의 협정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협정이 대만 노동자와 농민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대만의 빈부격차가 날로 심해지는 상황에서 이 협정은 취약한 노동자계층과 경제에 타격을 줄 우려가 있으며, 마잉주 정부의 협정 강행 통과 시도는 비민주적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비판 행동을 전개했습니다.
     
    미중관계 문제로 돌아가면, 대만의 노조가 미중갈등의 고조라는 국제정세에서 큰 영향을 끼치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대만 노동자가 이러한 국제정치의 각축장 속에서 통일-독립 논쟁이나 주류정당의 선동에 따라, 쉽게 중국이나 미국에 종속되는 길을 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득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황스팅: 대만의 선거에서 친중이냐 반중이냐, 친미냐 반미냐는 아주 중요한 쟁점으로 받아들여지죠. 하지만 대만과 중국, 대만과 미국의 관계와 여러 정책, 합의가 대만 노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분석하려는 노력은 드뭅니다. 우리는 중국의 침공 위협이나 민주주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러한 부분도 진정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   *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에서 ‘전노협 건설’은 실로 중대한 사건이었다.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는 해방 직후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이후 최초의 전국적, 민주적 노동조합총연맹이었으며, 오늘날 120만 명 이상의 노동자를 조직한 민주노총의 역사도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대만에 새로운 전국적, 민주적 노총을 건설하려는 노력의 무게도 결코 이보다 가볍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대만 동지들이 그간 걸어온 길과 솔직한 고민을 들을 수 있었다. 기사에 담지는 못했지만, 한국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과 연대 의지가 크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만연대전선노총의 성공적인 출범과, 한국과 대만 사회운동의 연대 확대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 2023-06-05

    대만 사회운동의 새로운 희망, 대만연대전선노총 건설준비회 인터뷰①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 알려진 대만의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에 관한 정보는 여전히 많다고 할 수 없다. 이 인터뷰는 앞으로 한국과 대만 사회운동의 연대가 확대되기를 기대하며, 현재 대만 사회운동의 가장 중요한 시도인 대만연대전선노총(臺灣工人鬥陣總工會) 건설준비회의 활동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회진보연대는 5월 11일 오후, 대만 타이베이시에 있는 타오위안시승무원노조(桃園市空服員職業工會) 사무실에서 대만연대전선노총(臺灣工人鬥陣總工會) 건설준비회에 참여하는 여러 노동조합의 활동가들을 만나, 대만 노동운동의 역사와 새로운 전국 노총을 만들려는 까닭, 새로운 노총 건설 준비에 참여하는 노조들의 현황과 공동투쟁, 이후의 계획 등을 들었다. 인터뷰에는 타오위안시노총(桃園市產業總工會, TYCTU) 위원장 주메이쉬에(朱梅雪), 타오위안시노총 상무이사 스슈화(施淑華), 전국환경보호공무기관노총(全國環保公務機關總工會) 비서장 양쥔화(楊俊華), 중화민국(대만)소방관노동권익촉진회(中華民國消防員工作權益促進會) 비서장 천옌카이(陳彥凱), 국립대만대병원노조(臺大醫院職業工會) 비서장/타이베이시의사노조(臺北市醫師職業工會) 비서 치우위훙(邱宇弘) 씨가 참석했다. 중국어-영어 통역은 타오위안시승무원노조 비서 황스팅(黃士庭) 씨가 맡았다. 인터뷰는 사회진보연대 김진영 정책교육국장, 허지선 광주전남지부 조직국장의 질문과 대만 노조 활동가들의 답변으로 진행되었다.
     
    * 대만연대전선노총(臺灣工人鬥陣總工會)이란 명칭 중 ‘鬥陣’은, 대만어(민남어)에서 ‘연대’를 뜻하는 ‘逗陣’의 ‘逗’를 발음이 같은 한자 ‘鬥’(싸울 투)로 바꾼 것이다. 한국어 번역은 ‘Taiwan Solidarity Front Confederation of Trade Unions’라는 영문 명칭에서 따왔다.
    * 대만에서 ‘비서’(장)이란 표현은 노조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는 상근자의 직책으로 흔히 쓰인다.
    * 괄호 안의 설명은 사회진보연대가 인터뷰를 정리하며 덧붙인 것이다.
     
    *   *   *
     
    [%=사진1%]

     

    먼저, 대만연대전선노총 건설준비회를 결성한 배경을 듣고 싶습니다. 한국 독자들에게는 대만에 자주적인 전국적 노동조합총연맹이 없기 때문에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평가 자체가 생소할 수 있습니다.

     
    주메이쉬에: 현재 대만 노동부에 전국 차원의 조직으로 등록된 노조는 188개 있지만, 그중에서 ‘노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례는 단 10개뿐입니다. 그중에서도 7개는 사실 직종별 노총이고, 여러 산업 노동자를 조직한 노총은 3개뿐입니다. 직종별 노총들의 주된 목표는 대개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연금과 보험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전투적이라거나 독립적인 노조로 보기 어렵고, 실제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지 않습니다.
     
    3개의 노총 중에서는 2000년에 설립된 전국산업총공회(全國產業總工會, TCTU, 이하 ‘전산총’)가 그나마 진보적이고, 다른 두 개는 활동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대만의 많은 노조는 국민당(KMT)이 대만으로 퇴각한 뒤에 국민당의 후원으로 세워졌습니다. 당시 국민당은 자신들이 중국 노동자들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했기에 정권을 잃고 대만으로 물러나게 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국민당은 대만 내에 기업별, 산업별 노조들을 만들고 이를 통제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이런 노조들은 지금도 전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전산총은 독립적인 노조들을 모으려는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전산총에 소속된 노조 대부분은 국가 소유의 기업, 은행 노조이고, 이들의 고용주는 정부입니다. 이는 대부분 기업이 민간 중소기업인 대만의 현실과 괴리되어 있습니다. 전산총은 거리에서 집회, 시위를 조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노동자 전체에게 중요한 노동권 관련 정책이나 최저임금, 연금 체계와 같은 전국 차원의 정책 요구를 제대로 내놓지 않고, 변혁적인 전망이 없습니다.
     
    [%=사진2%]
     

    “자주적이고 전투적인 전국 노총을 새롭게 건설할 것”

     
    치우위훙: 대만의 노동조합은 크게 두 흐름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국민당이 후원하는 보수적 노동조합들의 총연맹인 중화민국전국총공회(中華民國全國總工會, CFL)가 있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이러한 기존 노조 질서를 반대하며, 자주성, 진보성을 지향해온 노동조합들이 있습니다. 1994년 이래로, 타오위안시노총과 같은 진보적 노조들이 실제로 전국 각지에서 기존 노조들을 대체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모여 2000년에 전산총을 결성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영기업 노조 출신인 전산총 초대, 2대 위원장은 민주진보당(민진당, DPP)에 합류하여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거리에서 투쟁하는 대신, 주류 정치권에 진출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전산총이 체제 내 개혁 위주의 노선과, 대형 국공영기업 노동조합을 주요 세력으로 하는 운영방향을 선택하였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모두, 우리 생각에는 자주적인 전국적 노총이 맡아야 할 기능과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방향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적이고 전투적인 전국적 노총을 새롭게 건설하기로 했습니다.
     
    [%=사진3%]
     

    새로운 전국적 노총을 건설하려는 시도를 구체화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기존 노조가 아닌 독립노동자들과 사회운동의 투쟁”

     
    주메이쉬에: 대만 노동운동의 중요한 국면들에서, 전산총은 치열하게 투쟁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당시 의류, 섬유산업 기업이 대거 문을 닫았습니다. 이에 해고된 노동자들이 철로 위에 드러눕는 등 격한 저항이 있었는데,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식으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2012년, 정부는 이 보상금은 노동자들에게 대출해준 것이지, 무상으로 지급한 것이 아니므로 노동자들이 이를 갚을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타오위안시노총은 격렬한 투쟁을 벌였고, 이것은 당시 대만 노동운동에서 가장 큰 투쟁 중 하나였습니다. 2015년의 국도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투쟁도 중요합니다. 정부가 요금 수납 업무를 자동화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요금수납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해고에 대한 보상조차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벌어진 큰 투쟁은 2010년대 대만 노동운동에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전산총은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타오위안시노총과 같은 지역 차원의 노조들이 투쟁의 주된 주체로 나섰습니다. 2012년부터의 투쟁에 더해 요금수납원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지자, 정부는 해고 보상금이 ‘빌려준 돈’이라는 주장을 철회했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기존의 기업별 노조 덕분이 아닙니다. 실제 변화를 만들어낸 것은 독립노동자들과 사회운동의 투쟁입니다.
     
    [%=사진4%]
     
    대만 노조 대부분은 단일기업 내에 조직된 기업 노조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활동은 주로 임금 인상, 상여금 지급 등을 요구하는 것에 그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급한 대표적인 투쟁들의 사례를 보면, 톨게이트 요금수납원이나 의류산업 노동자들은 이미 해고되었거나 직장이 사라졌기 때문에 노조 조합원이 아니었고, 하나의 기업 안에 묶인다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투쟁을 조직한 것은 하나의 노조가 아니라, 여러 진보적 노조와 사회운동의 활동가들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기업별 노조의 테두리 안에서만 쟁취하는 자기이익적 경제투쟁으로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중요한 투쟁들도, 그 배경에 있는, 총체적 노동자의 현실도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노조 대다수가 기업별 노조인 구조에서는 노조들이 최저임금, 연금 체계와 같이 국가 전체에 적용되는 정책에 대해 연합하여 정책 변화를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국 차원에서 새로운 진보적, 독립적 노총을 건설하려는 주된 이유입니다. 새로운 전국적 노총을 만들면, 우리는 노동기준법 개정 등 정책 결정에 개입하고, 최저임금 결정 협상을 실현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대만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노동법이 좀 더 진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롭게 노동자를 규합하려는 시도는 대만 사회운동의 희망”

     
    양쥔화: 저는 계엄령(1949~1987년)이 1987년 해제된 직후에, 중국시보(대만 4대 신문 중 하나)에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당시에는 사측과 싸우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계엄령이 해체된 바로 다음 해였기 때문에, 사회의 정치적 분위기는 매우 억압적이었습니다. 정부는 직접적으로 노조를 파괴하려고 했고, 실제로 비밀경찰의 개입이 있었습니다.
     
    저는 전산총 설립에도 참여했습니다. 아까 이야기 나왔듯 그때 당시 전국 차원에서 조직된 노조들은 모두 국민당의 영향 아래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바꾸려 했습니다. 그러나 대만 법에 규정된 노총과 산별노조 설립 조건은 매우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전산총은 고용주가 단일하지 않은 노동자들은 조직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는데, 이러한 방식으로는 노동자의 단결을 이루기 어려웠습니다. 전산총이 친민진당으로 기운 뒤, 저는 타이베이시노총이나 제가 지금 활동하는 전국환경보호공무기관노총과 같은 노조들을 조직하는 데에 힘을 쏟았습니다.
     
    1990년대를 돌이켜보면, 계엄령이 막 해제된 상태라 아직 노동 관련 기준이나 법적 제한이 많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명확한 노동법이 없었다는 뜻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운동을 제한하는 규제들이 적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가 오히려 지금보다 사회운동이 활발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온갖 법과 조정 과정이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제한합니다. 전산총 또한 친민진당 경향이 강해지며 독립성, 활동성을 잃었습니다. 저는 이런 현실에서 새롭게 노동자를 규합하려는 시도가 무척이나 중요하며, 사회운동의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만연대전선노총 건설 준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대만연대전선노총 건설준비회는 현재 차이잉원 민진당 정권의 노동정책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양쥔화: 기본적으로는 민진당에 ‘노동정책’이란 것이 아예 없다고 봅니다.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노동운동이 먼저 제기한 것입니다. 노동조합이 정책을 만들면, 민진당은 선거 운동의 일환으로 이를 실현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민진당이 선거에 이기고 나면 그 약속을 깨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3년 전 총통선거에서 차이잉원은 쓰레기 수거 노동에 예산 7억 대만달러를 투입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당선 뒤 약속을 파기했습니다. 이런 행태는 민진당 정부든, 국민당 정부든 다르지 않아요.
     
    [%=사진5%]
     
    치우위훙: 민진당이 국민당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진당은 선하고 진보적인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 하죠. 그래서 최저임금을 인상했고, 산재 관련 법을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개정했습니다. 그러나 자본가 대 노동자라는 근본적인 갈등 구도에서 보면, 민진당도 다르지 않습니다. 민진당 정부는 2016년 당시 노동시간을 늘리기 위해 노동시간 규제와 초과노동수당을 완화하고, 국가공휴일을 연간 19일에서 12일로 7일 삭감하는 노동기준법 개악안을 내놓았습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상당수의 노동운동단체, 사회운동단체, 학생조직이 한데 모여 타이베이 시내에서 강도 높은 거리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럼에도 민진당은 결국 의회에서 수적 우위로 밀어붙여 개악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일은 대만 전역의 노동운동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국가 차원의 정책을 놓고 여당과 대치하려면 전투적인 전국적 노총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무엇보다도 정부가 노동조합 설립 조건을 완화하지 않는 문제가 있습니다. 대만에서는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업장 내 노동자 30인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합니다. 문제는, 대만은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로, 전체 기업의 90% 이상이 35인 미만 사업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고용된 노동자 규모 자체가 30명을 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이러한 법적 요건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은 이 법을 고칠 것을 오랫동안 요구해왔지만, 민진당 정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 2023-04-28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지원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책무다

    더불어민주당, 민주노총, 전국민중행동의 전도된 인식을 비판한다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더불어민주당, 민주노총, 전국민중행동의 전도된 인식을 비판한다

    4월 26일 한미정상회담에서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이 결정될 것인지가 관심을 모았으나, 한미 정상이 러시아의 침공을 강력히 규탄하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한 협력을 약속하는 선에서 끝났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은 전쟁이 장기화되는 속에서 언제든 다시 의제에 오를 수 있으므로, 한국 사회운동의 대응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4월 19일, 윤석열 대통령은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할 가능성이 있다고 최초로 시사했다. (같은 인터뷰에서 “힘에 의한 대만해협의 현상 변경에 반대한다”는 언급도 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즉각 윤 대통령에게 발언 철회와 대국민 사과를 요구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21일 기자회견에서 “‘전쟁지역에 살인을 수출하는 국가’가 무슨 염치로 국제사회에 한반도 평화를 요청할 수 있겠나”라고 발언했다. 같은 날 더불어민주당은 “일본에게 뺨 맞고, 미국에 발등 찍히고도 왜 그렇게 비굴합니까? 주요 산유국 러시아, 최대 교역국 중국과 긴장을 고조시켜 얻을 이익은 무엇입니까?”라는 논평을 냈다.
     
    민주노총, 전국민중행동 등 주요 민중운동진영 단위도 21일 비슷한 논거로 성명을 냈다. 두 성명이 공유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은 미국 정부의 압박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민주노총은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한국 정부가 꼼수까지 동원하여 전쟁무기를 지원하는 배경에는 결국 미국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의 국익과는 무관하게 동맹의 이익만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는 윤석열 정부는 안보를 이야기 할 자격이 없다.” “굴욕적이고 굴종적인 외교”라고 평가했다. 전국민중행동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 가능성, 남북 핵전쟁, 대만 문제까지 미국의 입장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로써 ‘오로지 미국’을 향한 윤석열 정부의 충성심이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썼다.
     
    둘째, 이를 통해 러시아와 중국의 반발을 사는 것은 남한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민주노총과 전국민중행동은 “‘가치 외교’를 표방하며 한미 동맹에만 모든 것을 쏟아붓고 있는 윤석열 정권은, 러시아를 적국으로 돌리며 한국을 우크라이나 전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고 있을 뿐 아니라, 자국의 실리와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국제 외교 무대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똑같은 문장이 두 성명에 포함되었다.) 전국민중행동은 “한국과 인접한 러시아와 중국을 적국으로 돌리면서까지 미국의 편에 서서 우리가 취할 국익은 대체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다.
     
    셋째, “살상무기 지원”은 그 자체로 전쟁을 확대하는 부도덕한 행위라고 묘사한다. 민주노총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그 어떤 곳에도 전쟁을 위한 살상무기를 지원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이유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전쟁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썼다. 전국민중행동은 “기만적인 전쟁 살상무기 우회 지원”, “국민들은 살상무기를 지원하는 전쟁 국가를 원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썼다. 참여연대, 전쟁없는세상 외 9개 단체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적대와 폭력의 악순환만을 불러올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이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사건의 본질을 왜곡하고, 국제사회와 우크라이나의 대응을 부당하게 평가한다고 본다. 세 가지 주장 각각에 대해 우리의 판단을 아래에 담았다.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면, 미국 정부의 압박에 굴복하는 것인가?

    :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지원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책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어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부담이 커진 만큼, 미국이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에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을 강하게 요청했으며, 윤 대통령의 발언도 이를 고려한 것이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를 전적으로 ‘미국의 압박’에 따른 ‘굴복’이라는 프레임으로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UN헌장과 국제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불법 침략 전쟁이다. UN헌장 1장 1조에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이를 위하여 평화에 대한 위협의 방지, 제거 그리고 침략행위 또는 기타 평화의 파괴를 진압하기 위한 유효한 집단적 조치”를 취할 것이 명시되었듯, 한국을 비롯하여 국제사회는 이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방관할 것이 아니라 공동으로 대처할 책무가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원칙대로라면 UN의 집단안보 시스템이 발동했어야 할 사안이다. 그러나 침략의 주체인 러시아와 이를 옹호하는 중국이 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현실 때문에, 이는 실현되지 못했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지원하는 것은 러시아와 중국이 가로막은 UN의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를 “살인 수출국”이라거나 “미국의 압박에 대한 굴복”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그러한 주장은 부당한 침략을 겪고 있는 나라가 침략국에 맞서 싸우는 것을 지원할 책임이 국제사회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다.
     

    러시아와 중국의 반발을 사지 않는 것이 “국익”인가?

    : 러시아의 침략전쟁 승리는 전 세계와 한반도에 치명적 결과를 낳을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다른 국가가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가능성이나 ‘힘에 의한 대만해협 현상 변경 반대’를 언급하는 것을, 물론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력에 의해 영토를 변경하는 행위를 반대하고, 이러한 행위를 공동으로 저지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보편적 원칙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향후 세계에 중대한 문제다. 만약 러시아가 전쟁에 승리한다면, 그 파급력은 가히 세계사적일 것이다. 다른 나라를 침공하여 국경과 현상 상태를 바꾸려는 시도의 성공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의 붕괴를 가속하고 세계 각지의 권위주의, 팽창주의 세력에 비슷한 군사적 모험을 부추기는 효과를 낸다. 한반도와 동아시아는 여기에 직접적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은 3연임을 확정하며 대만과의 “통일 추진”을 전면에 내세우며 “무력사용 포기를 결코 약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북한은 당국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선제 핵공격이 가능하다는 법을 만들고 남한 전역을 타격권에 두는 전술핵무기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과 핵 위협을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러시아와 중국이 한국 정부의 발언에 유독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들의 이해에 반하는 발언 자체 탓만으로 볼 수 없다. 지난 몇 년 간 한국이 우크라이나 침공, 홍콩보안법, 신장 위구르 인권 탄압과 같은 문제들에 원칙에 따라 단호한 행보를 취하기보다는, 러시아와 중국의 눈치를 봐온 것이 오히려 문제다. 예를 들어, 독일, 프랑스는 홍콩보안법을 규탄하고 신장 위구르 인권 침해 성명에 동참하는 등 중국의 인권 탄압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국으로서 러시아뿐만 아니라 최초로 중국을 ‘위협’으로 규정한 ‘2022년 전략 개념’ 문서를 채택했다. 우크라이나 정부에 무기 지원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독일, 프랑스 정상은 최근 중국 방문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나아가 러시아와 중국이 주창하는 ‘다극 세계’ 구상이란, 세계를 각 지역 강대국 관할 하의 여러 지역으로 나누는 ‘세력권 분할’이다. 이러한 구상은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며 UN을 창설하고 미국과 소련, 중국이 함께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맡은 전후 세계질서에 역행한다. (최근 러시아, 중국 정권이 자국이 ‘제국’이던 시절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침공을 개시했다. 이어 러시아는 올해 발표한 새 ‘대외정책개념’ 문서에서, 이전과 달리 세계를 9개 지역으로 나누고, 구소련 국가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던 ‘근외’ 개념을 부활시켜 구소련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중국의 ‘신형대국관계’는 세계 질서를 미국 중심의 일극주의에서 중국과 미국의 양극체제로 재편하자는 구상으로, 사실상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국의 관할로 인정하라는 요구다. 이러한 구상 속에서 중국이 생각하는 한반도의 미래는 중국의 ‘천하’에 종속하는 것일 공산이 크다.
     

    ‘살상무기 지원’은 그 자체로 전쟁을 확대하는 부도덕한 행위인가?

    :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지원하는 것이 곧 전쟁 확대라는 주장은 비약이다

     
    좌파와 평화운동 세력은 군비증강에 반대하고 무기 수출에 비판적인 활동을 해왔다. 무기 지원 문제가 민감한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이러한 맥락이 있다. 그러나 군축 요구를 방어권조차 인정하지 않는 무조건적 비폭력주의로 환원할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 일체가 문제라는 주장은 타국의 부당한 무력행사에 대한 주권국가의 방어권 자체, 그리고 방어권 행사 과정에서 살상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재 진행 중인 전쟁 폭력에 대한 책임을, 우크라이나의 항전과 이를 지원하는 국가들에 돌린다.
     
    그러나 폭력의 책임을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군 양자에게 동등하게 지울 수 없다. 러시아는 주권국가를 불법 침략하였으며, 도시 전체를 섬멸하고 민간인 밀집 지역을 폭격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이 침략에 맞서 싸우는 것은 UN헌장 51조가 규정한 ‘개별적 자위권’(자국이 무력공격을 받았을 때 방어를 위해 무력행사를 할 권리)에 해당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점령지 확대를 막고 러시아 점령 하의 자국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 싸운다. 양측의 명분과 군사 행위의 양상이 명확히 다르다.
     
    좌파 평화운동 내에도 방어적 무력행사를 인정하는 흐름이 있다. ‘평화헌법’(일본국 헌법 9조. 전쟁 포기, 전력 포기, 교전권 부인) 수호와 일본의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핵심 과제로 두는 일본공산당의 시이 가즈오 위원장은, “러시아의 불법 침략 전쟁에 맞선 우크라이나의 무장저항은 UN헌장, 국제법상 합법적이고 정당한 싸움이다”(2022년 4월 24일)라고 주장했다. 시이 위원장은 평화헌법도 ‘무저항주의’가 아니며, 개별적 자위권은 평화헌법 하 일본에도 존재하는 ‘자연권’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우크라이나가 이를 행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일본공산당은 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미국의 침략을 패퇴시키기 위해 싸우는 베트남 민중과 연대했다고 덧붙였다. ‘페미니스트 반전 저항’, ‘사회주의 운동’ 등의 러시아 반전운동도 우크라이나의 방어권을 옹호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요구한다.
     
    한편, 참여연대 외의 성명은 “전쟁이 길어지고 무기 사용이 늘어날수록 이득을 보는 것은 방산업체뿐이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을 지속하는 방법으로는 민주주의도, 자유도, 인권도, 평화도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저항은 희생을 낳고 군수업체를 배불릴 뿐이며 무망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전쟁이 어떠한 방식으로 끝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 사회의 미래는 완전히 달라진다. 즉,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가 완전히 철군하고 우크라이나 민중이 민주적으로 선출한 정부가 통치하느냐, 우크라이나의 일부분이 러시아의 점령 통치를 받는 식으로 분단이 되느냐, 우크라이나 전역에 러시아의 영향력이 적용되고 친러 정권이 수립되느냐는 우크라이나 민중에게 결정적인 문제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민중이 항전하는 이유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사회운동과 노동조합은 우크라이나의 항전을 베트남전쟁, 알제리전쟁과 비견할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하며, 러시아군의 전면 철수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세계 좌파는 이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해야 한다.
     

    사회운동의 대응은 침략 행위 중단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세계 사회운동의 대응은 침략전쟁을 개시한 러시아와, 러시아를 직간접적으로 지지, 지원하는 국가들에 대한 규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한국 사회운동에서 이러한 활동은 처참할 정도로 과소하다. 항전을 지원하는 것이 비극의 원인이라는 왜곡된 묘사가, 침략전쟁에 대한 원칙적 반대를 압도하고 있다. 침략국 러시아를 ‘미국 주도의 세계를 넘어 다극 세계로의 전환을 주도하는’ 나라로, 대러시아 제재를 우회하여 러시아의 전쟁 수행을 돕는 나라들을 ‘미국의 대러 포위 압박에 굴복하지 않은’ 나라들로 평가하는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과거 이라크 전쟁 당시 남한 사회운동은 침략전쟁을 개시한 미국과, 이를 지원하는 각국 정부를 규탄했다. 여기에는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 규탄이 포함되었다. 여러 단체들의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비판 성명이나, 한미정상회담 대응의 일환으로 열린 4월 25일 전국민중행동 촛불(“불법도청 주권침해 미국사죄 받아내라!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반대한다! 굴욕적 한미동맹, 윤석열 규탄 촛불”)을 보면, 마치 이러한 대응을 당시의 이라크 파병 규탄 행동과 같은 맥락에 두는 듯하다. 일부 표현은 마치 전쟁 범죄를 주도하는 것이 서방 국가와 한국인 듯 보일 정도다. 대응의 적극성도 차이가 난다. 민주노총은 전쟁이 발발하고 한 달이 지나서야 침략을 규탄하고 러시아 철군 요구, 우크라이나 노동자와의 연대를 표명한 성명을 발표한 반면,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언급 비판 성명은 이틀 만에 발표했다. 전국민중행동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개시했을 당시, 이를 규탄하고 침공 중단을 요구하는 공동기자회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성명을 낸 적도 없다. 
     
    그러나 이는 사태를 완전히 거꾸로 보는 것이다. 이라크 파병은 침략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은 침략에 맞서는 항전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 명확한 차이를 인식하지 않는 실천은, 부당한 침략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민중과 어떠한 연대도 이룰 수 없다.
     
     
     

  • 2023-03-16

    한 세기가 지난 1917년 10월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번역: 임지섭 정책교육국장


    역자 해설


    이 글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편집위원으로 함께하는 반연간지
    《위기와 비판》(CRISIS AND CRITIQUE)의 4권 2호(2017년 11월)에 실린 글이다. 발리바르는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한다. 1917년 10월은 이제 먼 과거에 속하게 되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여전히 잔혹하고 완전한 실패라는 평가와 탁월한 반(反)자본주의 혁명으로서 현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라는 평가가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대조적인 담론이 동일한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가?
     
    이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방법을 따라, 10월 혁명에 대한 표상 또는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두고 세 가지 시간성을 고려하는 비판적 분석이 필요하다. 발리바르가 설정하는 세 가지 시간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적 ‘사건’으로서 볼셰비키 혁명의 시간, 둘째, 10월 혁명의 흔적이 남은 20세기라는 ‘극단의 시대’라는 시간, 셋째,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공산주의 혁명이 세계적으로 만들어낸 역설적 ‘결과’로서 ‘사회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라는 시간이 그것이다.
     
    먼저 첫 번째로, 발리바르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볼셰비키 혁명의 시간성을 검토한다. 그는 볼셰비키 혁명이 봉기적 상황과 소비에트라는 주역이 처음 등장하는 1905년에 시작하여, 스탈린이 유일한 지도자로 등장하고 5개년 계획과 집단화 과정이 시작되며 신경제정책이 종료되는 때 끝이 나는 것으로 설정한다. 이러한 시간성에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어떻게 혁명이 단기간에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전위와 대중을 결합해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시도할 수 있었는지, 그런 결합이 파괴되고 혁명이 국가화되며 혁명적 과정이 끝나게 된 것은 언제인지, 마지막으로 무엇이 이 혁명에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부여하는지다.

    이 대목에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적 개념인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을 가져온다. 과잉결정은 사회 변혁 과정을 시작할 힘을 집중시켜 결정화하는 이질적인 역사적 요인들의 복잡성을 의미하며, 과소결정은 만약 어떤 요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그런 ‘우연적’ 사실을 의미한다. 발리바르는 혁명의 조건과 내용이라는 측면에서 러시아혁명을 과잉결정한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러시아혁명은 전쟁의 결과였다. 동시에, 전쟁을 억누르려던 혁명은 내전으로 인해 또 다른 전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혁명적 조직은 군사화되었고, 공산주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은 전쟁을 정치의 최고 형태로 여기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이는 혁명이 국가화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변질되는 데 분명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편 과소결정과 관련하여, 발리바르는 당과 소비에트라는 대립물의 통일을 실천적으로 이루어냄으로써 러시아혁명을 결정화한 것은 다름 아닌 역사적 개인으로서 레닌이었다고 단언한다. 달리 말해, 당시의 정세에서 전위와 대중, 조직과 자발성을 종합적으로 결합한 레닌의 역할이 없었다면 러시아혁명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1917년 혁명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만들어진’ 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결정화한’ 혁명이다. 즉 전쟁이라는 조건에서 형성된 혁명의 요인들이 레닌이라는 역사적 개인이 담지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실천적으로 결합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조직되고 혁명적 과정이 지속되었다. 반대로 내전을 거치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물리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파괴되었을 때 혁명적 과정도 끝났으며, 그 역으로도 그러했다.

    두 번째로, 발리바르는 10월 혁명의 ‘흔적’을 포함하는, 20세기의 ‘극단의 시대’라는 시간을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20세기의 특유한 역사적 궤적에는 혁명과 반혁명의 대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1차 세계전쟁 이후 세계 각지의 혁명적 시도들은 그 형태에 있어 볼셰비키 혁명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동시에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은 그러한 시도들이 실패한 주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했는데, 하나는 혁명에 맞서 반혁명이 세계적 무대에서 조직되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후의 혁명적 시도들이 볼셰비키 혁명의 승리를 보장했던 ‘당 형태’를 모방하고 반복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발리바르는 파시즘의 발전과 소련의 ‘주권’ 국가로의 변형이라는 요인을 지적하며 이러한 설명을 보충한다. 전쟁의 산물 그 자체로서 반혁명 정치를 대표하는 파시즘의 등장으로, 1929년 이후 세계는 자유주의, 파시즘, 공산주의라는 세 유형의 정치 체제가 민족국가라는 형태로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공산주의 운동에 파괴적인 효과를 낳았는데, 특히 ‘사회주의 조국’ 소련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파시즘과 타협함으로써 민주주의 세력으로서 공산주의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여기에는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이 주권 국가화된 효과가 결부된다. 스탈린 시기 소련, 더 나아가 공산주의 운동에서 당은 혁명적 조직에서 지배 기구로 변형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에 공백으로 남아 있던 실제 권력의 행사라는 측면을 채우고 지배했다. 이는 혁명을 과잉결정했던 요인들의 결합을 급속하게 붕괴시켰다. 결국 당은 정치권력에 대한 군사권력의 종속, 계획당국과 공장 내 당 기구에 대한 경제권력의 종속, ‘사회의 적’을 규정하는 국가에 대한 사법권력의 종속, 국가 철학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형성한 정부에 대한 정신적 권력의 종속이라는 네 겹의 예속을 혁명에 부과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과정은 자본주의와 파시즘과의 이중적 대결이라는 조건에서 이제 소련이라는 주권국가 자체가 필수적이고 영구적인 혁명의 도구이자 중심이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진행되었다.

    이 대목에서 발리바르는 20세기 공산주의의 혁명적 과정에서 일어난 하나의 분기로서 1920년 바쿠에서 열린 코민테른 동방인민대회에 주목한다. 그는 이 대회가 볼셰비키 혁명을 복제하려 했던 유럽 혁명의 실패를 상쇄, 보완하고자 했다고 본다. 아울러 마오쩌둥과 중국혁명은 시간성과 혁명의 주역이라는 측면에서는 10월 혁명과 완전히 다르지만, 그때와 같이 대중의 참여와 당의 지도력의 결합을 재현하면서 러시아 모델과의 분기를 만들어냈다. 

    또한 발리바르가 보기에, 1917년 혁명 모델의 모순적인 현실화로서 중국혁명은 유럽에서 비롯된 공산주의라는 정치적 언어가 더는 유럽 중심적이지 않은 맥락에서 간직된다는 ‘역사적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럽의 지방화’가 세계화 시대의 자본주의 이전에 공산주의에서 먼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또한 공산주의와 1917년 혁명의 흔적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발리바르가 마지막으로 검토하는 오늘날의 시간성으로 연결된다.

    발리바르는 결론을 대신하여,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새겨진 1917년의 사건과 그 흔적을 논의하기 위해 ‘거꾸로 뒤집힌 이행’이라는 공식을 빌린다. 그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그리고 그 반대인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두 가지 연속되는 전환이라는 공식으로부터, 종종 신자유주의의 승리로도 묘사되는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를 ‘사회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로 개념화하고자 한다. 이는 공산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체제가 패배하여 세계 시장에 장악당한 것으로 이어졌지만, 단순히 다시 자본주의로 ‘복귀’했다는 것을 넘어 20세기 자본주의 역사에 계급투쟁을 반영하는 일정한 노동력 보호와 국가의 경제정책이라는 형태로 그 흔적을 남겼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이후’의 시대에, 어떤 이는 여전히 1917년 혁명을 망각의 역사로부터 부활시켜야 할 이상적인 모델로 보거나, 반대로 급진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반면교사로 본다. 또한 이 양자를 매개하며, 1917년 레닌의 결정적 개입을 통해 작동한 전위와 대중의 ‘결합’이 미완으로 남았음을 제기하고 소비에트의 자율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사회주의와의 대립을 무시하고서는 다룰 수 없는 20세기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사함으로써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다고 본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 대립하며 만들어온 역사적 타협을 생산의 탈영토화와 금융화로 역전하려는 가운데, 새로운 사회주의적 역전과 공산주의적 대안은 여전히 자본주의 사회 관계와 통치 형태의 망에 얽혀있다. 따라서 발리바르는 공산주의 혁명의 충격과 흔적에서 비롯된 ‘역사적 사회주의’의 모순된 효과들에 대한 조사야말로, 사회주의 이후의 시대에 다른 길을 시도할 수 있는 정치적 상상력의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이 글을 열며 내밀었던 첫 질문, 즉 100년이 지난 시점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기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예비적인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 안은 원문의 설명이며, [] 안은 역자가 추가한 설명이다. 굵게 처리된 부분은 모두 원문에서 기울임체로 강조된 부분이다.
     

    ✽ ✽ ✽
     
    ‘1917년 10월’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논하기 전에, 방법과 목적에 관해 예비적인 몇 가지를 언급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우리는 왜 1917년 10월을 지금, 이 시점에 논하는가? 명확하지만 다소 가벼운 대답은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100주년은 역사적 사건을 쓰고, 기념하고, 부활시키거나 영원히 묻어버릴 기회이고, 학문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킬 기회이기 때문이다. 더 신중한 대답은 1917년(초등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셰비키’ 또는 ‘러시아’ 혁명을 떠올리는 날짜 또는 명칭)이 많은 사람에게 노골적인 모순을 포함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책이나 동화 속에서만 살지 않는 대부분 사람은 이 사건[1917년]이 일어났던 ‘세계’가 이제는 먼 과거에 속한다(기억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표준적인 기간인 3세대라는 시간을 넘어섰다)는 것을 인정한다. 바로 그 세계의 구조가 1917년의 사건이 벌어지는 상황을 창출하고, 그 주역들이 등장하는 틀을 짜고, 그 사건에 관한 가상을 구성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소련이 사라지자 선언된 ‘역사의 종말’[프랜시스 후쿠야마]이 우스꽝스러운 농담으로 밝혀진 뒤, 잔혹하고 자신감에 찬 자본주의 형태(‘절대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가 세계화되었고, 다양한 형태로 계속 변모하는 혁명에 대한 요구가 우리 사회에서, 특히 다른 미래를 꿈꾸며 적극적으로 그런 미래를 ‘만들고’ (또는 가능하게 하고) 싶어 하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1917년은 탁월한 반(反)자본주의 혁명이자, 모든 모순적 측면을 담고 있다. 1917년은 잔인함과 완전한 실패(아마도 범죄적인 실패)로 악명 높은 동시에, 현존 질서에 대한 저항의 돌이킬 수 없는 상징이었다. 어떻게 이러한 대립적인 담론이 동일한 ‘현실’에 대해 적용될 수 있는가? 이제, 그리고 아마도 과거와 똑같은 방식을 결코 반복하지 않는, 비판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 분석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나는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훈련받았으며,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구성요소였던 혁명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몇 없는 예외를 제외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무능력함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그저 현실에 대한 (사죄와 유토피아적 항변 사이에서 진동하는) 이데올로기적 비평으로 몰락하게 된 주된 이유라고 믿기 때문에, 나는 우리가 기본적인 방법론적 원칙을 마르크스 본인(『정치경제학 비판』의 서문)으로부터 빌려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어떤 개인이나 역사적 시대에 대한 판단과 마찬가지로, 어떤 혁명에 대한 ‘판단’(해석)은, 혁명 이후에 생산되거나 발생한 혁명 그 자체에 관한 표상(representation)을 따라서는 안 된다. 혁명은 아름답든 추악하든 혁명의 이미지로부터 반드시 거리를 두고 떨어져야 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예를 들어 오래된 공산주의자로서, 그 사건이 낳은 사후적 효과의 범위 안에 주관적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건이 커다란 열정과 판단을 동반했다고 한다면, 그것이[혁명의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가능할까?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완전히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립성이나 객관성을 가장한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10월 혁명에 대한 어떠한 평가에도 영향을 미치는 세 가지 시간성(temporality)에 대한 검토를 안내선으로 삼아서, 혁명의 영향과 거리를 결합하는 전략을 시도해보려 한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혁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논한다. 이는 10월 혁명의 시간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라는 혁명의 주역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로 시작한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그 사건의 흔적을 논할 것인데, 이는 우리를 10월 혁명의 특이점과 연결시키기도 하고 분리시키기도 한다. 달리 말해, 나는 ‘극단의 시대’(‘단기’ 20세기에 대한 에릭 홉스봄의 신조어)로 돌아갈 것이다. 이러한 성격 규정은 주로 혁명의 비극적 발전과 혁명이 상대 세력과 맞서는 과정에서 나타난 극단적 폭력에 기인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글의 작업을 이어가는 것을 준비하며) ‘공산주의’ 혁명이 세계적으로 생산해낸 역설적 결과를 공식화하려 할 것이다. 이 ‘공산주의’ 혁명의 결과는, 적어도 현재의 관점에서는, 공산주의도 아니고 심지어 사회주의도 아닌 자본주의의 새로운 조직 양식이다. 이는 실로 극적인 ‘역사의 간지(奸智)’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가장 어려운 쟁점을 마주하는 곳이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은 우리를 어떠한 정치적 결론으로 이끄는가? 이것이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혁명적 사건의 시간

    이 첫 번째 절에서 나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을 실제로 역사를 두 개의 구분되는 시대로 나눠버렸을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묘사하고자 한다. 이는 (이 혁명의 재림을 ‘준비’하며) 이 혁명을 숭배했거나 (이 혁명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으며) 혐오했던 여러 세대의 상상 속뿐만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도 그러했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를 포함하여) 혁명이 깨어난 후 불러일으킨 거의 모든 것이 달라졌고, 그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그 무엇도 정말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비가역성이야말로, 강한 의미에서 이 사건을 가장 반박 불가능하게 설명하는 단어이며, 특히 ‘혁명들’을 다룰 때 이러한 비가역성에 주목해야 한다. [1917년] 당시에도 프랑스 혁명은 이미 그러한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에 [두 혁명 간의] 비교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10월 혁명의 주역들 사이에서 압도적이었고 많은 비평가에게 쉽게 채택되었던 표상을 바로잡기 위해 거리를 두기 시작해야 한다. 그 표상은 프랑스 혁명을 묘사하는 극작법을 러시아혁명의 순간들을 읽는 기호(code)로써 러시아혁명에 투영하는 것이다. (이는 종종 정반대로 프랑스 혁명을 러시아혁명의 전조로 읽는 경향을 낳기도 했다) 자코뱅과 볼셰비키는 등가물로 여겨지고, 레닌은 또 다른 로베스피에르이고, 스탈린은 또 다른 보나파르트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또 다른 공안위원회이고, 적색 테러는 또 다른 청색 테러이고 등등. 이런 식의 투영은 비극을 (비극의 반복으로서) 소극(笑劇)으로 보이게 하는 위험성이 있을뿐더러, 이미 확립된 대답이 없는 문제들, 즉 10월 혁명의 역사적 특이성에 대한 모든 질문을 데자뷔라는 그릇된 감각을 일으킴으로써 가로막는다. 우리의 분석은 ‘역사를 만드는’ (혹은 장기간에 걸쳐 역사를 추동하는 힘을 결정하고, 그 이해관계들을 결정하며 또한 그 표상을 결정하는) 그 어떠한 두 사건도 같은 시나리오에 따를 수 없다는 우리의 방법론적 규칙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10월’ [혁명]이 완전히 독창적인 역사적 단절 또는 사건이 되게 하는 계기들의 연쇄와 과정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의 시간적 경계를 규정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사건의 시간성을 결정하는 데에는 물론 혁명적 힘으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고, 이 권력을 반혁명의 맞불로부터 지켜내고, 이 권력을 사회 변혁을 시작하는 데 사용한 순간들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기준은 너무 짧다. 여러 이유로(이러한 이유는 불가피하게 순환논리를 따르는데, 즉 그 이유 자체는 내가 혁명의 역사적 성격에 결정적이라고 생각할 행동들에 달려있다), 나는 혁명적 사건이 비록 하나의 문제(하나의 사회-정치 체제를 파괴하는 것과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또 하나의 체제를 창조하는 것)를 중심으로 ‘집중’되어 있긴 하지만, 에피소드들의 특정한 연쇄를 포함하고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한 연쇄에서 상황, 세력들의 성격과 세력들 사이의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이러한 연쇄적인 사건들은 적어도 ‘2월’과 ‘10월’ 양자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이 둘은 두 개의 혁명(하나는 ‘민주적’이고 다른 하나는 ‘쿠데타’, 혹은 좀 더 마르크스주의적 표현으로 전자는 ‘부르주아’[혁명]고 후자는 ‘공산주의’[혁명])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봉기로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페트로그라드에서 ‘이중권력’의 상황(임시정부 대 소비에트)이 나타날 시기에 발생한 하나의 혁명이다. 이는 이중권력의 마지막 잔재가 제거되면서, 즉 볼셰비키가 (1918년 초) 제헌의회를 해산하면서 끝이 났고(이를 로자 룩셈부르크가 비판한 것은 유명하다. 그렇지만 그녀가 [러시아혁명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은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끊는 것은 불충분한데, 왜냐하면 봉기적 상황과 이중권력의 형성은 이미 1905년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혁명’(연대기에도 ‘혁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의 발전은 차르의 탄압에 의해 잔혹하게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전쟁으로 인해) 다른 조건들이 주어지고, 그 이면으로, 혁명적 병사들이 군대 내에서 등장했던 1917년에 다시 시작되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따라서 ‘1917년 혁명’은 1905년에 시작되었으며, 혁명의 주역들은 이미 그때부터 식별할 수 있는 형태로 활성화되어 있었다고 관찰하는 게 타당하다. 이는 대칭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사건’을 형성하는 완전한 순환, 즉 혁명적 과정이 끝나는 때는 언제인가? 1918년 초는 중요한 의심할 여지 없이 중요한 기점인데,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이유와 함께, 이때 단독강화(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와 당의 ‘공산당’으로의 변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아직 아무것도 달성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즉 이 시기에 절대적인 불확실성을 가진 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은 특정한 폭력의 형태들과 제도들(적군, 체카), 제국주의 강대국(프랑스, 영국, 폴란드, 일본)의 반혁명적 개입, 노동자와 농민 간의 교환과 과세 ‘체제’, 또는 상호의존 ‘체제’를 확립하려는 연쇄적인 시도 등등을 동반했다. 그래서 [혁명적 과정의] ‘끝’은 언제인가? 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각각은 그 근거가 있다. 하나는 1922년이다. 이때 내전이 실질적으로 승리를 거두고, ‘전시 공산주의’가 신경제정책(NEP)을 위해 폐지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공식적으로 새로운 국가로 탄생했다. (비록 새로운 국가의 체제가 과도적이고, 그 [영토적] 경계가 잠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신경제정책의 종료다. 이때 스탈린이 (서로 긴밀히 연결된) 당과 국가의 유일한 지도자로 등장하고, 5개년 계획이 준비되고, (불균형적이었지만 그래도 소비에트 권력과 농민이 맺었던 ‘동맹’을 끝낸다는 함의를 지닌) 집단화 과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두 번째 가능성, 즉 ‘더 넓은’ 시기 구분을 택하고자 하는데, 왜냐하면 신경제정책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증법적 발전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이때까지는 혁명적 이행을 위한 새로운 전략이 시도되었으며, 당은 아직 국가기능의 위계질서를 통제하고 주민에게 국가의 명령을 분배하는 국가의 최고 기관이 되지 않았다. 다른 한편, 이 시점에 이르면, 혁명에 그 이름을 부여했던 대중기관, 즉 소비에트가 이미 오래전에 자율적인 기능을 잃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만 한다. (그것은 아마도 1921년 초로, 이때 크론슈타트 수병 봉기와 그에 대한 진압이 발생했다) 나아가 문제의 일부분으로서 첫 번째 시기 구분[즉 1922년까지]에서는 레닌 본인이 아직 살아 있었던 반면 (우리가 알고 있듯, 레닌은 심각한 병마와 싸우면서도, 모셰 르윈(Moshe Lewin)의 표현에 따르면, ‘최후의 투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두 번째 시기 구분[즉 신경제정책 종료까지]에서는 레닌이 이미 사망하여 미라가 되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볼셰비키 지도자 간에 발생한 ‘승계 투쟁’에서 스탈린이 부하린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 당시 부하린은 [스탈린의 권력 장악 후]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렇게 더 복잡한 시간적 경계 설정을 통해서, (알튀세르적 방식으로 표현하면) 내가 혁명적 사건의 ‘과잉결정’과 ‘과소결정’이라고 부를 논의의 틀이 마련되었다. 물론 나는 극도로 도식적이고 부분적이게 될 수밖에 없다. 즉 이것은 [1917년] 혁명의 역사가 아니라, 그 역사서술을 조직할 수 있게 하는 문제제기의 몇 가지 노선에 대한 논의일 뿐이다. 과잉결정을 통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질적인 역사적 ‘요인들’의 복잡성인데, 이런 요인들이 결정체를 이루어, 앞으로 권력을 장악할 세력들을 집적하고, 낡은 제정 체제를 파괴하고, ‘부르주아적’ 대안의 발전을 저지하고, 기존에는 없었던 (따라서 그 효과를 예측할 수 없었고, 단지 ‘계급 없는 사회로의 전환’과 같은 추상적인 공식만 있었던) 유형의 사회적 변형 과정을 개시했다. 과소결정을 통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연성’(또는 불확정성)인데, 이는 그런 요인들이 결정체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었고, 다른 무엇보다도, 그 요인들의 효과가 융합되거나 조합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만약 정치 행위자가 그 전략적 순간에 남겨졌던 ‘공백을 채우지’ 않았다면, 동일한 기회(chance)에서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오래된 수사학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기회를 카이로스[Kairos, 기회 또는 특별한 시간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라고 부를 수 있다) 도식적으로 말해서, 나는 과잉결정의 핵심적 구성요인이 억압적인 ‘봉건적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사회적 반란과, (조지 모스(George Mosse)의 범주를 빌면) 전쟁의 ‘야수화’ 효과의 결합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전쟁[1차 세계대전]은 전 유럽에서 대규모 파괴와 살육을 동반했고, (러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처럼) 종종 ‘절멸주의’라는 지경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 결과는, 러시아혁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전쟁에 저항했고, 그러나 또한 새로운 형태로 전쟁을 수행했다) 이야말로 [즉 전쟁과 맺는 불가분의 관계야말로] 전적으로 러시아혁명의 담론이나 이데올로기, 제도, [러시아혁명과 함께 등장한] 역사적인 정치 ‘스타일’ 또는 정치 개념 등의 틀을 구성했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혁명 초기의 경계를 넘어 혁명을 확장하려는 정치운동(즉 20세기 공산주의)에 대체로 전달되었고, [혁명의] 비극적인 결과도 함께 전달되었다. (물론 이는 혁명에 대한 적대자들의 본성이라는 또 다른 요인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나는 과소결정의 ‘우연적’ 요소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역사에서 위인의 역할’을 강력히 주장하기를 두려워하는 역사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처럼) 볼셰비키 정당이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볼셰비키 정당이 단독으로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왜냐하면 정당은 아무리 지식을 갖추고, 조직적이고, 급진적이고, 기존 질서와의 단절을 준비했더라도, 전통적인 제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레닌이라는 이름의 우연적 개인(혹은 전 생애 중 특정 순간의 우연적 개인[즉 특정 순간의 레닌], 이 순간에 그는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할 선택을 했다)이 대표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즉 레닌이 없었다면, 볼셰비키 정당은 전통적인 정당의 발상을 뛰어넘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와 같은 슬로건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 때문에 레닌은 완전히 ‘예외적인’ 역사적 인물이 되는데, 아마 레닌이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그에 견줄만한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차원[과잉결정과 과소결정](두 차원은 물론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있을 수 없다)에 대한 몇 가지 세부 사항을 덧붙이고자 한다.

    내가 과잉결정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하나의 측면[즉 전쟁]은 물론 잘 알려져 있고, 혁명의 조건과 내용, 양자의 측면에서 이러한 측면[전쟁]이 결정적 기능을 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강조해야 하지만, 항상 이런 강조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혁명을 촉발한 것은 전쟁을 지속하기를 거부하는 부대들의 반란이었고, 이는 전체 주민의 격분을 배경으로 했다. 일반적으로 전쟁의 마지막 해에 러시아군은 200만 명을 잃었다고 여겨진다. 물론 다른 교전국들에서도 엄청난 손실이 있었고, 1917년에는 프랑스 전선에서도 반란이 일어났지만, 프랑스 공화국의 장군들은 (아무리 야만적이고, 오만하고, 무능하고, 자기 병사들을 총알받이로 소모하더라도) 병사들을 열등한 인간(moujiks, 제정 러시아 시대 농민)으로 간주하는 귀족이 아니었다. 그렇게 병사들을 취급한 러시아 장군들이야말로 러시아 농민들로부터 그들이 경작하는 땅을 빼앗은 귀족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봉기의 혁명적 기관은 ‘노동자와 병사의 소비에트’였다. 그러나 병사들은 농민이었고, 전쟁을 위해 그들의 공동체로부터 대규모로 뿌리 뽑혔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급속한 ‘산업혁명’의 산물이었고, 이 산업혁명은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비참하고 고도로 집적된 프롤레타리아를 창출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차례로 (남성) 주민에게 부여했던 완전한 시민권이 전혀 없었다. 봉기의 요구는 평화, 보통선거권, 노동자의 권리, 그리고 토지의 분배였다. 특히, 대중은 2월 이후 새로운 임시정부가 전쟁을 중단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자 임시정부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볼셰비키가 일방적 평화(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를 선언하자 곧바로 내전이 뒤따랐고, 외국군이 러시아를 침략했다. (처칠은 볼셰비즘을 “그 요람에서 교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백군’ 장군들은 학살을 일으키는 군벌이 되고, 농민들은 두 진영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았다. 혁명은 반혁명세력들을 진압하기 위한 고유한 군사장치(적군)와 경찰을 창출했다. 따라서 전쟁을 억누르려던 혁명은 직간접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또 다른 전쟁이 되었다. (사망자 비율은 미국 남북전쟁과 비슷하다) 1915년 (짐머발트 대회에서) 제기된 레닌의 역사적 표어,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변형하자”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얻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모든 혁명적 기관은 ‘군사화’되었으며, 공산주의 지도자와 활동가들은 ‘전쟁’을 정치의 최고 형태로 여기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틀 안에서 주도력을 행사하고, 연대를 실행하고, 상상력을 발휘했다. 

    이는 과소결정이라는 다른 측면으로 우리를 이끈다. 여기서 우리는 ‘혁명적 주체’, 즉 ‘혁명을 창출했던’ 집단적 행위자가 누구냐는, 고도로 민감한 주제를 다루게 된다. 이 주제는 봉기 그 자체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 중 하나다.) 토론은 전위를 강조하는 입장(오직 볼셰비키 당만을 강조하거나, 10월 이전 몇 주 동안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던 대중조직들과 함께한 볼셰비키 당을 강조하는 입장)과, 혁명의 대중적 성격을 강조하는 입장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나는 둘 다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당이 매우 조직적이고 기강이 있었기 때문이고, (비록 우리가 알고 있듯 전술이나 당면 목표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전술 또는 당면 목표에 따라 레닌은 동지들이 봉기에 나서도록 ‘밀어붙였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와 농민이 (초반에는) 대규모로 볼셰비키의 편에 섰고, 심지어 볼셰비키가 계속 전진하도록 밀어붙였고, 집단적인 정치 행동을 펼치는 데 적절한 형태(‘소비에트’ 또는 평의회)를 전국에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즉 당과 소비에트 양자가 모두 활발하게 운동하는 한, 혁명은 낡은 정치행동 양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 또는 혁명 그 자체가 새롭고, 공산주의적인 ‘정치적 실천’을 수반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특히 당과 소비에트의 실천적 종합은 대립물의 통일이었고, 이는 저절로 일어난 것도, 안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개인으로서 레닌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기능을 부여하는 이유다. 레닌은 4월 테제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통해 [혁명의] 주도권을 다른 혁명적 요소들에 넘겨주었고, 이를 꺼리는 (이는 소비에트가 순수한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 촉진되었다) 자기 당에 맞섰다. 이 시점에서 레닌은 당이 언제 어떻게 ‘지도자’로서 역할을 되찾을지 알 수 없었다. 레닌이 진정으로 예외적인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은 (단지 그의 이론뿐만 아니라) 바로 이 도박(wager)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도 특히나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해석을 통해서, 상황에 맞도록 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측면에서도 이러한 우연적 특이성을 살펴볼 수 있다. 즉 당과 소비에트 사이, 대립물의 통일이 결정적인 순간에 창출되었다는 사실은, 권력을 장악하고 역사의 경로를 바꿀 수 있는 혁명적 역량의 중심에 간극 또는 ‘공백’이 존재했음을 사후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간극은 레닌의 제안(initiative)에 의해 메워졌고, [당과 소비에트] 양측이 모두 이를 듣고 따를 수 있었다. 분명히도, 간극의 존재는 그러한 간극을 채우기 위한 충분조건이 아니다. 간극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적절한’ 주도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레닌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때, 그는 그 주도권의 ‘담지자’가 될 것이었다. 즉 그는 결코 되돌아가거나 후퇴할 수 없을 것이며, 오로지 그 모든 결과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것은 단지 외견상의 역설에 불과하다. 즉 널리 공유된 의견과 달리, 레닌이 혁명에서 행한 역할은 대립적인 힘과 논리를 통일했다는 점이고, 바로 이 때문에 혁명을 쿠데타라고 부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역할은 곧 전위대중의 참여를, 조직과 자발성을 ‘종합하여’ 결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혁명을 정의하는 데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경향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계급 사회를 ‘무계급 사회’로 ‘변형’하는 공산주의라는 프로젝트를 정의하고 창도하는 것은 당이지만, 그러나 급진적인 민주적 경험을 구현하는 것은 소비에트이며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대중이] 공적 기관에 참여하기 위한 집단적 구조들이며), 그러한 [즉 소비에트와 대중 참여라는] 경험이 없다면 공산주의란 존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몇 가지 중간 설명이 필요할 것이지만 이를 그냥 남겨둔 채, 바로 이로부터 나는 네 가지 언급과 질문을 도출하고 싶다.

    1. 왜 단지 며칠, 몇 주 만에 권력 이양을 달성할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다시금 사회적 위기와 전쟁의 결합으로 되돌아간다. 즉 볼셰비키가 성공적인 쿠데타를 ‘음모’했거나, 그람시(Gramsci)가 나중에 주장했듯 러시아에 ‘시민사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쟁이 국가권력을 군사화된 형태로 집중화하고, 국가권력의 생존이 군사기관의 작동과 성공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 활동의 전 부문(군수산업에서부터, 인간과 생산물의 징발에 이르기까지)도 군사기관에 종속되었다. 이는 [즉 군사화·집중화된 국가권력은] 환상이 아니라 (비록 전쟁이 환상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이며, 이러한 현실은 전쟁의 패배라는 도움을 얻는다면, 봉기에 그 대상[즉 군사화·집중화된 국가권력]을 ‘제공’하고, 그 대상에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와 동시에, ‘종합된’ 혁명적 행위자[즉 당과 소비에트]는 정치적 ‘의지’나 결정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중앙집중화된 국가를 능가했고, 대중의 지지라는 측면에서도 그것을 압도했다.

    2. 레닌(과 다른 많은 볼셰비키)이 생각하고 있던 혁명의 표상은 무엇이었나? 그리고 그들이 [10월 혁명이라는] 사건을 갑작스럽게 촉발된 시간(precipitated time)이라고 인식하게 한 혁명의 표상은 무엇이었나? (그러한 시간 속에서는 (종말론적 함의를 지닌 유명한 마르크스적 표어를 따르자면) “일 년이 걸릴 일을 며칠 만에 이룰 수 있다.”) 내 생각에, 여기에는 사실상 서로 연결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이들은 ‘제국주의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일어난 (또는 오히려 시작한) 러시아혁명이 하나의 세계혁명이라고 확신했다. 10월 혁명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과 그 목표는 완전히 이러한 [세계혁명이라는] 본질에 의존했다. 그러나 세계혁명이, 적어도 지금 당장은, 일어나지 않으리라 깨닫는 것은 이들에게 매우 극적이고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실행 불가능한 딜레마에 처했다. 즉, 공산주의 혁명으로서 그들의 혁명을 포기할 것이냐(그러나 어떻게 혁명을 ‘중단’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들의 혁명을 ‘세계화’하는 데 있어 빠져있는 조건들을 가능한 한 빠르게 창출할 것이냐(그러나 혁명의 세계화는, 코민테른의 도움을 받더라도, 오직 그들에 의해 달성될 수는 없었다). 둘째, 이들은 20년 전에 벌어졌던 그 유명한 ‘수정주의 논쟁’의 중심, 즉 (장기적인) ‘운동’과 ‘최종 목표’ 사이의 딜레마를 역사가 해결해주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경험했다.) 베른슈타인의 용어로 말하자면, 운동(Bewegung)과 최종 목표(Endzweck)는 이제 하나의 동일한 실천으로 재결합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공산주의적 미래를 향한 ‘이행’의 시작이 그 자체로 공산주의가 될 수 있다(그리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새로운 ‘레닌주의적’ 개념은 이러한 생각을 명료하게 밝히고 실행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개시가 곧 공산주의라는 생각은 그러한 레닌주의적 개념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 있다) 

    3. 언제 두 혁명적 힘[당과 소비에트]의 결합이 붕괴되고, 또는 양자 간의 공산주의적 종합이 변질되고, 또한 그에 따라 당이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 썼던 것처럼, ‘이미 비국가인 국가’라는) 이행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조직에서 국가의 형성을 기대하고 따라서 혁명의 국가화를 야기하는 ‘기계’ 또는 장치(dispositif)로 변형되었나? 국가주의적 경향은 매우 초기부터, 사실상은 [혁명의] 기원에서부터 존재했던 것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국가주의적 경향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녀의 선견지명을 보여준, 1918년 가을에 쓴(그러나 그녀가 죽고 난 뒤 1922년에야 출판된) 「러시아혁명에 관해」(On the Russian Revolution)에서 제기된 비판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후에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변형하게 한다. 즉, 언제 국가화를 향한 경향이 그 대립적 경향, 즉 우리가 ‘자치론적’ 또는 ‘무정부주의적’ 경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향을 압도하게 되었는가? ([국가주의적 경향과 자치론적·무정부주의적 경향] 양자는 [당이든 소비에트든 간에] 하나의 동일한 제도들 내에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1921년에 이르면, 비가역적인 지점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전환점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레닌의 ‘최후의 투쟁’은 대체로 새로운 권력체제의 양식을 협상하는 것이었다) 1921년, 크론슈타트의 ‘반혁명’ 소비에트와 농민 반란(탐보프)을 진압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과 공장 자주관리의 역할을 둘러싸고 당의 주요 세 분파 사이에 결정적인 분쟁이 일어난 뒤 볼셰비키 당에서 ‘분파’ 형성을 ‘임시적’으로 금지했다(10차 당대회). 나는 국가화에 대한 초기 충동(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개념의 점진적인 무력화)은 볼셰비키의 활동에 작용하는 삼중의 제약에서 발생한다고 제시한다. (1) 초민족적 ‘국가 체계’가 가하는 외부적 제약. 이에 맞서 볼셰비키는 [초민족적 국가 체계가] 그들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해야 했다. (이는 당장에는 전쟁에 대한 저항을 [즉 내전에 대한 외국의 개입 중단을] 의미했고, 나중에 그것은 외교와 경제관계가 [즉 정상적인 외교·경제관계 수립이] 되었다.) (2) 경제적 상황이 가하는 국내적 제약. (기근과 같은) 사회적 긴장이 커졌고,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억압하기보다는 ‘관리해야’만 했다. (그에 따라 신경제정책은 이를 실험하고자 시도했고, [인민 내부의 모순을] ‘조절하는’ 국가장치로 가는 길을 닦는다) (3) 마지막으로, 혁명운동 그 자체에 내재된 이데올로기적 제약. 특히나 당-형태는 [즉 당이라는 특수한 조직형태는] 두 가지 관점 사이에서 진동했다. 즉 한편으로는, 전략적 프로젝트를 고려하면서 ‘구체적 상황’을 해석하는 사회 변혁의 지도부라고 보는 관점과 다른 한편으로, 혁명이 직면한 [서로 대립하는] 대안들이라든가 사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갈등이 기층 당원을 통해서 반영 또는 표현된다고 보는 관점 말이다. (나중에 그람시는 후자를 ‘집단지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볼셰비키 당이 (혹은 ‘당 형태’ 그 자체가) (자치론자들이 판결하듯이) 국가화의 벡터(vector)는 아니고 [즉 당이 그 자체로 국가화라는 일정한 크기의 방향성을 가진다고 볼 수 없으며], (트로츠키주의의 주문(呪文)처럼) 당이 그 본질을 잃고 ‘관료화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세 가지 제약이 교차한 결과, 볼셰비키 당은 국가화되고, 또한 사회와 소비에트 국가 내에서 ‘주권적’ 기능을 획득했으며, 이 양자는 서로를 강화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또는, [스탈린주의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는 소비에트 국가를 탄생시킨 ‘선순환’이었다) 

    4. 마지막으로, 아마도 가장 어려운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이 혁명에 (혁명의 사상, 조직 형태, 그리고 이후에 미친 영향력이란 측면을 포함하여)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부여하는가? 나는 내전 말기에 도달한 (부정적인) 상황에서 계급 결정의 모순적인 양상을 읽는 것 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 내전 말기에 이르면, 외부의 적들이 패배하고 내부의 반혁명은 분쇄되었지만, 사회는 피폐해졌고 경제는 산산조각이 났으며, 농민과의 계급 동맹은 (아르노 마이어(Arno Mayer)가 ‘반혁명’이라고 말하기를 선호한) 상호불신이 되었고,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가 사멸해버렸다.” 이는 레닌이 극적이었던 10차 당대회 중간에 외친 절규였는데, 분명히 두 가지를 의미했다. (1) 혁명 이전부터 파업을 통해 계급의식을 강화하고 2월과 10월 봉기의 주역을 맡았던 전투적인 노동자, 특히 소비에트의 구성원들이 내전에 ‘먹혀버렸다’[죽거나 사라졌다]. 그들은 내전에서 적군과 적군 내 정치간부의 중추를 형성했다. (2) 경제가 황폐해졌고, 산업은 새로운 노동계급과 함께 재건되어야 했다. 이는 결정적인 문제다. (리타 디 레오(Rita di Leo)는 그녀의 책, 『세속적인 실험: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그리고 그 반대방향으로』(L’esperimento profano. Dal capitalismo al socialismo e viceversa), 2012에서 이를 적절하게 강조했다) 이는 혁명 이후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결정적인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나는 나중에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산업의 재건이 국가의 결정에 의한 노동계급의 ‘형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록 급속한 공업화와 집단화가 당의 이데올로기([스탈린주의적 의미의] ‘레닌주의’)와 함께 ‘계급의식’이라는 역할을 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강한 주장으로부터 더 중요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은 ‘노동계급’이나 ‘임금노동자 계급’과 동의어가 아니며, 오히려 프롤레타리아는 그와 다른 역사적 기능을 가진 집단을 형성한다. 이러한 집단에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은 대립물들의 통일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즉 한편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어떤 ‘본원적 축적’이라는 형태에 의해 ‘소유를 박탈당하고’ 불안정한 삶에 내던져진 궁핍화된 대중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부르주아의 지배(사실은 모든 계급적 지배)에 도전하는 근본적으로 착취 받는 계급이며, 다양한 (넓은 의미의) 정치적 조직을 형성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한다. 혁명적 ‘사건’의 ‘혁명적 순간’에는 이 두 가지 양상이 놀라울 정도로 연속하여 나타난다. 왜냐하면, 특히나 전쟁에서 벌어진 농민에 대한 강제 동원은 이례적인 수준, 즉 그전보다 훨씬 더 야만적인 프롤레타리아화라는 수준에 이르렀고, 2월 이후와 10월 이후의 집단적 행동은 전투적인 노동자들이 혁명적 행동과 논쟁에 높은 수준으로 참여하게 했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우리가 1917년을 (낡은 마르크스주의 도식을 뒤따라서, 또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을 뒤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의해 이뤄진 혁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라는 결정체를 형성한 혁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1917년 혁명은 정치적 행위자로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창조한 그들 자신[프롤레타리아]의 ‘독재’였다. 그러나 또한 그 프롤레타리아를 해체한 것은 그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질이었다. 혁명적 과정이 전개되었을 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그 자신을 형성하고 조직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물리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파괴되었을 때 혁명적 과정도 끝났으며, 그 역으로도 그러했다. [그 후] 완전히 새로운 과정, 즉 ‘사회주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사회주의적 노동자 계급의 형성이 핵심적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들 때문에, 같은 명칭,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보존되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이전에 혁명 전략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이제 정치·경제 체제를 의미하였다. 이는, 스탈린이 이론화한 것처럼, 그들을 [즉 혁명전략과 정치·경제 체제라는 이질적인 과정을] 하나의 동일한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연속적인 ‘국면들’로 보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이 두 과정이 사실상 서로 매우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왜 후자[정치·경제 체제를 건설하는 과정]가 전자[혁명전략으로서 프롤레타리아를 형성하는 과정]의 흔적을 유지했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소극이 아닌 비극으로서의 반복

    20세기의 궤적을 해석하려는 역사학자들이 직면한 어려움은 비교적 간단하게 표현되지만, 이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한편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효과가 결정적인 기능을 수행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20세기의 궤적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달리 말하면, 1917년 사건은 비가역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유발한 작용 때문에 또는 그것이 촉발한 반작용 때문에 지워질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 1917년 사건으로부터,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간에, 20세기의 궤적을 연역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20세기는 그 혁명이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형되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변형은 혁명이 일어났던 ‘영토’(물론 안정적인 국경은 아니다)의 안과 밖 모두에서 부정할 수 없는 흔적을 품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매우 일반적인 정의에 더해, 우리는 즉시 다른 두 가지 보완적인 지적을 추가해야 한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말대로, ‘단기 20세기’는 극단의 시대였다. (‘단기 20세기’는 1차 세계전쟁과 소비에트 혁명에서 시작하여,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냉전의 종식과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혹은 변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세계적’ 형세의 등장으로 ‘끝난다.’) 그는 극단의 시대라는 표현을 통해서, 정치운동들이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와 동시에, 그들의 적대가 전쟁, 대량학살(그중 일부는 집단학살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전체주의적 지배형태라는 연쇄고리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전달하고자 한다. 20세기 세계사의 전형적인 특징을 형성하는 이러한 잔혹성이라는 유례없는 요인들에, 우리는 혁명과 반혁명의 대립도 포함해야만 한다. [20세기에는] 혁명을 시도하려는 연속적인 흐름이 있었고, 이는 많든 적든 10월의 사례에서 영감을 얻었고, 그중에서 오직 일부만 성공을 거두었고 (그러나 물론 [성공을 거둔] 예외는 더욱 놀랄 만한 일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와 동등하게 반혁명 정책의 연속적인 흐름이 있었다. (그중 일부는 일반적으로 예방적인 반혁명 정책이었다) 이러한 반혁명 정책과 전자[일련의 혁명적 시도들]의 대립은 20세기 정치제도의 틀을 형성했다. 여기에서도 복합적인 난점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혁명의 모델이 오직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듯이 (심지어 1917년 10월이 [혁명] 개념을 재정의한 이후에도 그러하다), 정치제도의 핵심에 반혁명적 목적을 도입하는 모델도 오직 하나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비록 나는 공산주의 혁명과 그 후과가 세계에서 폭력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더 나쁜’ 형태들을 발생시켰다는 견해는 지지하지 않는데, 그러한 견해는 파시스트 정권(나치즘 등)의 잔혹성, 식민지 전쟁(그리고 식민화 그 자체)의 집단학살적 측면, ‘자유세계’의 ‘민주주의적’ 체제에 내재하는 거대한 차별 등등을 ‘망각’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리고 이것이 여기서 나의 핵심 관심사다), 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행사한 폭력을 흐릿하게 하고, 그 폭력을 체제 내부와 외부의 적들 탓으로 돌리려는 모든 시도는 속임수이고, 사실상 터무니없다고 주장한다. 특히나 다음과 같은 사실은 20세기라는 비극의 핵심을 구성한다. (여전히 우리는 이 비극을 이해함으로써, 이 비극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필요가 있다) 즉, 레닌 이후의 마르크스주의라는 매우 중요한 지적 도구 역시 (소련이라는 국가와 볼셰비키 당의 이익을 위해서) 이러한 폭력을 감싸주거나 최소한으로 축소 평가하고, 또는 그 폭력을 해석할 수 없는 무능력을 드러냈다는 사실 말이다. (왜냐하면 [폭력에 대한] 항의와 고발은 아무리 진정성이 있고 감명을 주더라도, 그것이 곧 적합한 해석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이제부터 지난 세기에 남은 10월의 ‘흔적’에 대해 몇 가지 질문과 반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그 흔적을 해석하기 위한 나의 열쇠가, 당연히도 일부분을 다룰 뿐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또한, 내가 말했듯, 나의 열쇠는 게임에서 결코 뺄 수 없기도 하다)

    내가 주의를 환기하고 싶은 첫 번째 지점은, 세계에서 다른 혁명들이 부상할 때 볼셰비키 혁명이 끼친 양면적인 효과다. 다른 혁명들은 나중에 임마누엘 월러스틴과 여러 사람들이 ‘자본주의 세계체계’라고 부르게 되는 것의 ‘중심부’와 ‘주변부’, 양자 모두에서 일어났다. (이는 본질적으로 유럽-아메리카 세계와 식민지를 의미한다) 우리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많은 사회와 국가에서 반란과 봉기, 혁명이 벌어질 환경이 무르익었지만, 그 가능성의 조건은 서로 달랐고, 이는 그들이 [전쟁의]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경계에서 어느 쪽에 서게 되느냐에 달려 있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서 시도되었던 그러한 혁명들은 그 형태에 있어 볼셰비키 혁명의 직접적인 반향, 혹은 결과였다. 그러한 혁명들이 계속 이어 나간 강령, 이데올로기, 집단적 상상력은 볼셰비키 혁명이 낳은 가장 가시적인 성과물인, (그리고 세계의 지배계급들 위에 출몰하는 새로운 ‘유령’이 되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구성하게 한 한 가지 원인이 되거나, 또는 코민테른의 조직과 계획에서 파생되었다. 그런데 실상은 이러한 혁명 대부분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전의 마지막 사례이자, 가장 비극적인 사례 중 하나는 파시스트가 공화국에 맞서는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발생한 1936~1939년의 스페인 혁명이다) 

    내가 논증하고자 하는 바는, 만약 볼셰비키 혁명이 이러한 혁명적 시도들에 대해 긍정적 조건이었다고 한다면, 볼셰비키 혁명은 그 시도들이 실패하게 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주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새로운 혁명들은 실패했는데, 왜냐하면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며,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죽이려는 시도들을 이겨내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먼저 한 가지 측면을 살펴보면, 반혁명이 세계적 무대에서 조직되었으며, 여기저기에서 혁명이 벌어지리라 예상하면서, 이를 견뎌내거나 분쇄하기 위해 힘을 모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예상치 못한 혁명이라는] 기습 효과는 없었다. 이것은 음모론이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모순들이 ‘보통의’ 수단으로는 처치 곤란한 지점에 다다랐다는 생각을 지배계급(자본주의 부르주아 계급, 제국주의·식민주의 열강)이 이제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의 증거다. 또한 이는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이 지역적 현상(예를 들어, 전쟁 전 러시아의 낡은 제국체제가 낳은 산물)이 아니라 (어쨌든 당시 세계에는 러시아와 맞먹는 체제가 많이 있었다), 사실상 세계혁명을 예고하거나, 지정학적 문제를 드러낸다는 생각을 공유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 가지 측면을 검토하도록 이끈다. 즉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은 그것을 반복하거나 복제하려는 시도를 낳았다는 점에서 [다른 혁명들에 영향을 미치는] 부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앞에서 내가 지적했듯, 볼셰비키(그리고 다른 나라의 동지들, 즉 독일의 스파르타쿠스단, 1919~1920년 토리노 봉기에 참여한 로르딘 누오보(L’Ordine Nuovo, 신질서)에 속한 이탈리아 사회주의자[그람시 그룹] 등등)는 공산주의 혁명이 자본주의 착취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이자, 정치권력의 신경중추들을 목표물로 삼을 때만 의미가 있다고 확신했다. 이는 볼셰비키의 승리를 보장했던 전략과 조직형태들, 특히 당 또는 ‘당 형태’의 구조를 모방하려는 강력한 동기였다. 제2인터내셔널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모델’의 지위를 점했던 것처럼, 사실상 그 이상으로, 소련 공산주의는 코민테른 내에서, 그리고 코민테른을 넘어서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민족적, 사회적 차이에 따라 (지배계급이든 피착취계급이든) 계급들은 매우 상이한 역사와 경제적 기반에 처하게 되는데, 이러한 민족적, 사회적 차이는 운동의 통일성과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만약 무시되지 않았다면, 상대화되었고, ‘구체적 분석’에 기초하여 [볼셰비키와 다른] 대안을 발명하려는 시도는 모델로부터의 일탈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예외는 중국에 대한 마오의 전략인데, 나는 나중에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제약은 ‘계급 대 계급’ 노선과 ‘인민전선’ 노선이라는 두 극 사이에서 진동하기 시작했던 코민테른(후에는 각국 공산당)의 연쇄적인 ‘전략들’에 압력을 가했다. ‘세계혁명’이라는 관념이 정밀하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을 때, 그 관념은, 세력들을 [각국에 맞는] 특정한 방식으로 축적함으로써 (이는 그람시가 ‘진지전’으로 부르게 되는 것의 일부분이다), 각 국가에서 혁명을 반드시 재창조해야만 한다는 관념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요인들을 도입해야만 한다. 다른 요인들은 이처럼 추상적이며, 사실 여전히 너무 단순한 설명방식을 비틀어 버린다. 첫 번째는 파시즘의 발전이다. 두 번째는 소련이 그 자신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와 방위전략을 갖는 ‘주권’(sovereign) 국가로 변형된 것이다.

    파시즘(특히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후 가장 중요한 세력이 된 나치즘)은 분명히 ‘순수한’ 형태의 반혁명 정치를 표상한다. 그러나 파시즘은 그 자신이 ‘혁명적’ 전술을 활용한 [반혁명적 정치]형태였고, 따라서 파시즘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들이 통제할 수 없었고 (심지어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들이 공산주의보다는 파시즘과의 ‘타협’을 선호할 때도 그러했다), 나아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체제에 파시즘은 [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위협이 되었다. ‘자유 군단’이나 준군사조직인 ‘동맹’ 등등의 형태를 취했던 파시즘(특히 유럽의 파시즘)은 그 자체가 전쟁의 산물이며, [전쟁에서] 민족적으로 패배하고 반혁명적 광풍이 불었던 지역에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파시즘의 중추는 인종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이며, 특히 (1929년) 거대한 경제 위기의 맥락에서 자신의 대중운동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혁명 이후의 공산주의는 파시즘의 모습에서 치명적인 적대자를 발견할 것이며, 러시아 내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과 생사를 건 대립을 [내전보다] 더 큰 규모로 벌일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은 이제 세 유형의 정치 체제(자유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간의 삼각 갈등이라는 모습을 취하고, 민족국가(와 국민군)의 형태로 서로 싸우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극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그중 일부는 혁명의식의 바로 그 핵심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는 특히 ‘사회주의 조국’이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유로 (또는 없는 체하면서), 또는 ‘반파시스트 동맹’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파시즘과의 ‘전술적’ 동맹을 선택할 때마다 그러했다. 프랑스가 소련과의 협정을 거부하고, 히틀러와 프랑스, 영국 사이에 뮌헨 협정이 체결된 이후, 독일-소련 간의 협정이 맺어졌다. 이 협정은 공산주의 투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또한 이는 공산주의가 민주주의 세력으로서의 권위를 잃게 했으며, 비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한 가지 종류로서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모두 속하게 되는] ‘전체주의’라는 정의를 예비했다. 이는 1945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냉전의 틀 속에서 단지 부분적으로만 상쇄되었다. 1920년대 초 ‘세계혁명’의 실패가 20세기의 첫 번째 비극이었다면, 반파시즘 전략에서 나타난 [파시즘과의] 타협은 두 번째 비극이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두 비극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이율배반적인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수백만 명에 이르는 소비에트 군인의 희생, 혁명의 자손들, 그리고 사회주의 계획화에 따른 군수산업이 없었다면, 유럽에서 나치즘에 맞서 민주주의가 승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와 나치즘, 둘 다 자국 주민에게 테러와 극단주의 정책을 가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번째 ‘과잉결정 요인’, 즉 스탈린 치하에서 소련이 ‘주권’ 국가화되면서 나타나는 효과가 개입한다.

    나는 주권(sovereignty)이야말로 국제주의 혁명이 민족국가로 변형된 것을 (그리고 점점 더, 제국주의적 요소를 지니게 된 것을) 분석하는 데 있어 핵심 범주라고 믿는다. 충분한 여유를 갖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상의 핵심부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이고 정치적인 딜레마로 되돌아가는 게 필요할 것이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법보다 상위에 존재하는 계급권력’이라고 정의했고 (따라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보다도 상위에 존재한다), ‘평화적 수단과 폭력적 수단’의 결합을 통한 사회의 변형을 추구했다. 물론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사상은 ‘주권자 없는 주권’, 즉 주권을 유일하게 보유하는 주권자는 곧 혁명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며, 또한 이는 계급 없는 사회로 나아가는 역사적 과정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실제로는 권력의 행사에서 빈 공간을 낳았다. 이러한 빈 공간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채워’지거나 점유될 수 있었는데, 그러한 방식 중 일부는 사실상 반혁명적이었고, 또는 ‘혁명당’이 그 대립물인 지배장치로 변형되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이것이 바로 스탈린 시대(와 그 이후)에 소련(그리고 더 나아가 공산주의 운동)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혁명의 최후 단계에, 레닌의 죽음 전후로, 공산당은 정치적 주도권을 ‘독점’했고, 순식간에 이는 혁명의 민주적 성격과 양립할 수 없게 되었고, 달리 말하면, 혁명에서 나타난 다양한 양상의 행위자들을 결합하는 ‘종합’을 붕괴시켰다. 다음 단계에서, 주권의 논리가 더 심화됨에 따라, 당은 자신의 위계제와 지배에 네 겹의 예속을 부과했다. [첫째] 군사권력정치권력에 종속되었다. (이는 ‘인민위원’을 통해 이루어졌고, 정치권력은 대조국전쟁에서도 여전히 결정적인 힘을 발휘했다) [둘째] 경제권력은 공장 내 당 기구와 계획당국(고스플란)에 종속되었다. [셋째] 사법권력은 ‘사회의 적들’을 규정하는 국가에 종속되었다. 부르주아는 범죄와 정치적 반대를 구별하는데, 사회의 적들에 대한 규정은 이러한 구별을 제거했다. (그에 따라 집단수용소 제도가 창출되었다) [넷째] 정신적 권력은 국가 철학(‘변증법적 유물론’)의 형성을 통해 정부에 종속되었고, 국가철학은 모든 지적 활동의 공식적 코드가 되었다. 이러한 종속은 소련이라는 국가가 다른 인민들에게도 혁명의 중심이자 아성이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심화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역설이 있다. 즉, 소련 국가 내부의 ‘주권적 기능’이 (자본주의의 폐지가 명확한 목표였고, 지도자와 간부들이 혁명적 봉기의 주인공이었던) 공산당에 의해 행사되었다는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소련 안팎의 수백만 노동자와 투사는 그 국가 그 자체가 혁명의 도구이며, 자본주의와 파시즘과의 이중적 대결이라는 조건에서 혁명은 그 자신의 대립물[국가]도 포함할 필요가 있는 ‘영구적인’ 과정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는 역설 말이다.

    과거에 스페인의 공산주의 지도자였던 페르난도 클라우딘(Fernando Claudin)은 여전히 귀중한 성찰의 수단으로 남아있는 그의 탁월한 저서 『코민테른에서 코민포름까지,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History of the Communist Movement from Comintern to Cominform, 1970년 스페인어로 출판)에서 정당하게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했다. 즉 디미트로프와 톨리아티가 이끌던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는 파멸적인 ‘계급 대 계급’ 전략을 파기하고 ‘인민전선’ 혹은 반파시즘 민주동맹 전략을 지지했다. 하지만 심지어 7차 대회 이후에도, 코민테른의 전략들은 스탈린이 규정한 소련의 국가이익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었고 (즉,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노동운동의 이익에 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소련의 국가이익은 코민테른 전략들의 한계와 진동을 좌우했다. 당연하게도, 클라우딘은 스페인 혁명(1936~1939)의 과정에서 이러한 종속이 미친 영향에 특히 관심을 두었다. 스페인 혁명은 2차 세계전쟁 이전 유럽에서, 1917년 러시아의 봉기에서 나타난 특징이었던, 무장한 민주적 운동과 정치조직 간의 일종의 ‘종합’이 다시 나타났던 아마도 유일한 계기였을 것이며, 모든 측면에서 거대한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소련은 무기(와 정치위원)를 보내고, 국제여단을 조직하는 것을 돕기는 했으나, 서유럽의 세력 균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했고 (그리고 소련은 2차 세계전쟁이 끝날 무렵 그리스에서 다시금, 훨씬 더 명확하게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이는 파시즘(그리고 행위자로서 나치즘)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이와 같은 사태의 전개과정에서, 또한 그는 7차 대회가 다른 대회들보다 더 혁신적이기는 하지만 (왜냐하면 7차 대회의 노선은 1930년대 자본주의의 거대한 위기에 따라 나타난 노동계급의 ‘독창성’에 의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가장 유럽 중심적’이었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도, 저서의 마지막 절을 바로 중국의 ‘마오주의’ 혁명에 할애한다. 그것은 볼셰비키 혁명을 반복하려는 도식과 효과적으로 결별하고, 혁명운동이 소련의 국가이익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한 (또는 심지어 소련의 국가이익과 모순을 빚기도 한) 유일한 사례다. 마오주의 혁명은 세계적인 수준에서 사회적·정치적 세력분포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작동하고 있다. 나도 이 점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며 이 절을 마치고 싶지만, 이를 위해서는 혁명의 흔적이라는 문제의 ‘원점’으로 잠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1917년 봉기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또한 (이것이 더욱 중요한데,) 소비에트 형태의 사회주의가 (집단적 상상이라는 측면에서) 공산주의 사상과 연결된 근본적 해방의 열망과 직접적으로 모순을 빚었다는 것이 사실로 나타나자, 우리가 혁명 속에서 혁명(revolution in revolution)을 달성하려는 시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이 두 가지는 다양하게 조합될 수 있다. 즉 [첫째] 현존하는 혁명이 전도되거나, 배신을 당하거나, 혹은 단지 ‘얼어붙어’ 버렸으므로, 본래의 이상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현존 혁명 모델을 되살리기 위한] 내적 혁명을 해야 한다. 아니면 [둘째] 새로운 혁명은 전략과 정의(definition)라는 측면에서 현존 모델과 단절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내전과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반제국주의 전쟁을 결합했던 ‘대장정’ 이후, 1949년에 승리를 거둔 중국혁명이 두 번째 길의 골자를 잘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마오주의자’로 불리는)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찬미자와 지지자의 눈에는 그것이 결국 첫 번째 길의 의미를 구체화한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중국혁명은 그것이 대체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 모델[러시아혁명]의 몇 가지 핵심적인 특성과 다방면의 관습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복잡성을 추적하려면, 우선 10월 혁명, 바로 그 과정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10월 혁명은 연쇄적인 계기들로 구성된 사건이며, 하나의 계기가 반드시 그다음의 계기에 이른다는 필연성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국가 혹은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나아가는 하나의 단일한 경향이 존재했다는 생각을 따랐다. 나는 이러한 표상에, 혁명적 과정의 분기가 (가상적으로라도) 일어날 가능성을 포함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상 적어도 한 가지 분기가 실제로 일어났다. 비록 그 결과가 즉각적으로 인지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것은 바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개최하여 1920년 바쿠에서 열린 동방인민대회의 의미였다. 여기에는 28개국(아시아가 아닌 나라도 있었다)의 대표단이 참가했는데, 당시 내전은 승리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내가 시사하고자 하는 바는, 이 대회가 볼셰비키 혁명을 복제하려던 유럽의 혁명들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는 유토피아적인 방식으로) ‘상쇄’하고, (넓은 의미에서) 피식민지 인민의 특수한 이해를 고려하면서 동양으로의 혁명의 이전을 기대했다는 점이다. 이는 ‘세계혁명’ 개념이,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는 혁명운동이 확장되는 국제적 과정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될 때 나타난 하나의 중요한 양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의 결과는 즉각 나타나지 않았고, [사실 즉각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혁명과정이 피로 물든 실패로 시작했는데, 이는 중국공산당이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국민당과 동맹을 맺었다가, 나중에 국민당의 헤게모니에 맞서 도시에서 봉기한 노동자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에 부분적으로 기인했다. (이 사건은 말로(Malraux)의 유명한 소설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 후 일본의 침략이 뒤따랐는데, 마오쩌둥은 본질적으로 소농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역사적 괴물(monster)을 창안하기 위해서 이러한 파국을 움켜잡았다. 마오의 혁명은 의심할 여지 없이 공산주의적이고, 이는 ‘공산주의 체제’의 수립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이 혁명은 비록 시간성이나 주역이라는 측면에서는 완전히 다르지만, 대중의 참여와 당의 지도력을 연합한다는 측면에서는 10월 혁명이 보인 ‘종합’이라는 특성을 재현한다. 그러나 중국혁명은 비록, ‘프롤레타리아적’ 용어법을 유지하지만 (중국혁명은 그 모델이라는 측면에서 [러시아혁명과] 분기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이러한 분기는 성공으로 판명되었다), 자신이 공식적으로는 1917년의 흔적과 ‘레닌주의’라는 틀 속에 있다고 보았다), 어떠한 유의미한 물질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분명히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아니다. 이것은 역사에서 기표(記標)들의 자율적 힘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며, 특히 그 기표들이 [사회가] 비가역적으로 변형되는 과정들에 대한 기억을 통합하고 있다면 그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역사에서 ‘문화혁명’이라고 알려진 훗날의 사건에서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이라는 자격[즉 기표]이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 그 이름이 사회 세력이나 계급의 존재와는 별로 관련이 없을 것이다. (소련의 계획적 산업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공장에서 청년 노동자들이 ‘생산되고’, 그들이 학생들과 함께 ‘홍위병’ 운동에서 적극적 역할을 할 것이지만 말이다) 사실상,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은 이제 본질적으로 이데올로기적 형성물을 지칭하게 되는데, 이는 급진적 평등주의 요소뿐만 아니라 허무주의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인 요소를 담고 있었다. 이는 국가와 당의 전문가라는 ‘새로운 계급’이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등장했기 때문인데, 그들을 프롤레타리아라고 지칭할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혁명은 1917년 혁명 모델을 이율배반적으로 실현하는데, 이는 그 모델에 예측할 수 없는 영향을 끼치고, 그 핵심적 측면들에서 1917년 혁명 모델과 모순된다. 이러한 핵심적 측면들은 ‘공산주의 사상’이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 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는 사실과 관련을 맺는다. 즉 이 다른 세계는 대체로 유럽의 역사에서 영향을 받은 정치적 언어를 계속 사용하지만, 더 이상 유럽 중심적이지 않다. 나아가 이러한 위대한 역사적 ‘전환’(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말에 따르면, 유럽의 지방화)이, 세계화된 세계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특징으로서 등장하기 이전에, 공산주의에서 (그리고 그것의 쌍둥이 개념인 ‘사회주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다. 이는 오늘의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따라서 1917년 혁명)의 흔적을 지녔으며, 공산주의가 없이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도 없고 이론적으로 정의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시사할 것이다. 
     

    거꾸로 뒤집힌 이행

    결론이라는 겉모습을 취하면서(사실은 추가적인 논의를 위한 시작일 뿐이다), 나는 1917년의 사건과 그 흔적을 또 다른 시간성 속에, 즉 세계화의 현재 추세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시간성 속에서 다루고 싶다. 나는 앞서 인용한 리타 디 레오의 책(『세속적 실험』)에서 ‘거꾸로 뒤집힌 이행’이라는 공식을 빌려오되, 그 해석을 변형하고자 시도한다. 디 레오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그리고 그 복귀(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라는 두 가지 연쇄적 이행을 논한다. 이는 역사의 순환이라는 표상과 양립할 수 있으며 (이러한 표상은 ‘혁명’이라는 범주의 의미론에 매우 깊이 뿌리박고 있다[revolution은 회전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그러한 표상은 [순환의] 도착점이 (영원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앞으로도 오랫동안, 근본적으로 바로 자본주의라는 생각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1989년 이후 자본주의로 복귀했던 사회주의 체제들의 운명을 묘사하는 것은 간편하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들은 어떤 종류의 자본주의로 ‘복귀’했는가, 따라서 오늘 우리는 어떤 종류의 자본주의에서 살고 (노동하고, 생각하고) 있느냐는 문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는 20세기의 혁명과 반혁명 과정이 끼친 영향을 (부정적일지라도)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 사실 내 작업의 가설은, 상당히도 (어느 정도인지는 내가 측정하고 개념화해야 하지만), 오늘의 세계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사회주의 이후의 자본주의는, 그 자본주의가 결국 제거하고 세계시장 속으로 삼키는 데 성공했던 바로 그 대립적인 체제[사회주의 체제]가 가한 영향을 받음으로써, 아마도 여전히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나오는 표현대로, 그 대립적 체제의] 유령이 출몰할 것이며, 내부적인 모순에 직면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사회주의 이후’의 시대에서 (종종 ‘신자유주의’가 승리를 거둔 시대로 묘사되기도 한다), 정치적 상상력의 조건을 명확히 밝히기 위해 우리가 수행해야만 할 결정적 논의라고 제안한다. 지배적인 서사에 따르면, 공산주의 혁명들(1917년, 1949년, 그 외 혁명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거나, 파괴되었다. 그러한 서사는 종종 ‘2단계’ 시나리오로 제시되기도 한다. 먼저 [1단계에서] 공산주의 혁명들은 (특히 후기 제국주의라는 지정학적 맥락에서 권위주의 국가가 됨으로써) 반혁명적 체제들이 되었고, [2단계에서] 그 반혁명 체제들은 다른 국가들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전복되었다. (여기서도 다시금 중국이라는 예외에 주목할 수 있다) 따라서 완전한 과정은 [공산주의 혁명의] 자기 파괴와, 자본주의와 그 담지자들과의 대치에서 발생한 패배의 결합일 것이다. 이러한 서사에서 내가 특히 놀란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반대자들도 이런 서사를 쉽게 채택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제 1917년 ‘세계를 바꾸려’ 했던 ‘공산주의적 시도’를 역사의 망각으로부터 부활시켜야 할 이상적인 모델로 보거나, 아니면 급진적인 대안이 요구되는 반면교사로 본다. 물론 이 양자를 매개하는 해법도 존재하는데, 전형적인 해법은 1917년 레닌의 결정적 개입을 통해 작동한 ‘종합’이 실제로는 완성되지 않았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는 대체로 [당의 기능을 위해 소비에트의 기능을 희생시키는 방식보다는] 오히려 소비에트의 ‘자율적이고’ ‘반권위주의적’인 기능을 위해 당의 ‘이론적’이고 ‘중앙집중적’ 기능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제안된다) 이에 따라 두 가지 대립적인 표어가 제기된다. 즉 지젝이 제시한 베케트풍의 명령(“다시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비관적인 부조리극을 남겼다] 아니면, 네그리가 포스트 산업시대에 맞게 번안한 프란치스코식 이상(“새로운 공유자원(commons)을 창조하자”). [프란치스코파는 작음과 청빈을 추구하는 가톨릭교회의 수도공동체로, 기독교적 공산주의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표어들 중 어느 것도 불합리하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역사적 사회주의’의 모순적 효과들을 조사함으로써, 하나의 다른 길을 찾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적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혁명의 충격과 흔적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논의에서 열쇠가 20세기 자본주의 역사의 두 가지 중심적인 측면이라고 믿는데,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사회주의와의 대립을 무시하고서는 다룰 수 없다. 그러한 측면들은 디 레오와 다른 저자들이 명확히 지적했다. 첫 번째는 러시아혁명이 자본주의 사회들의 ‘정치적 구성’에 대해, 특히 ‘선진’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의 형태와 결과에 미친 완곡한 효과와 관련이 있다. 이는 [선진국이] 절대적인 불안전에 대비하여 노동보호(복지정책과 공공서비스)를 수용했다는 사실로부터, 순수하게 시장에 의존하는 노동관계와 경쟁하면서 ‘간접임금’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사실(따라서 임금노동 형태 그 자체가 상당히 변형되었다는 사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두 번째는 20세기 사회주의가 (권위주의적이긴 하지만) 급진적인 경제계획 형태를 실제로 실행했고, 이를 위한 공식적인 수단 중 일부를 발명했으며, 이러한 수단들은 자본주의에 의해 국가의 경제정책이라는 변형된 형태로 사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두 가지 현상[즉, 선진국에서, 한편으로는, 정치적 구성에 변화가 나타나 노동보호와 간접임금이 도입되는 과정과,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정책의 형태로 경제계획이 도입되는 과정]이 서로 만나 혼합되었던 결정적인 순간(아마도 또 다른 카이로스)은, 우연이 아니라, 바로 1929년[대불황]이었다. 이때 자본주의는 순수한 자유주의 경제에서 발생하는 민족적, 국제적 위기를 피하기 위해 국가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파시즘이 부상하고 있었으며, (비록 갈등이 있긴 했지만) 공산주의와 많든 적든 조직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계급투쟁의 수위가 고조되어(프랑스의 사례처럼 특히 여러 총파업이 벌어졌다) 노동권을 인정하도록 강제하고 있었다. 또한 이는 반파시즘 민주전선을 창조할 필요성을 의미하기도 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마르크스’로서 케인스는 두 가지 필요성을 모두 인정했고, 시장과 국가정책의 새로운 결합을 이어나가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다. 이는 동시에 공산주의의 위협을 ‘중화’시키고 공산주의가 낳은 결과를 활용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본주의가 이러한 역사적 타협을 극복하는 데는 50년이 걸렸는데, 이는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을 ‘탈지역화’, ‘탈영토화’함으로써, 그리고 탈식민화 과정을 통해서 착취를 위해 ‘해방’된 빈곤한 노동자 대중을 [자본주의적 생산에] 편입함으로써 가능했다. 오늘날 우리는 레닌, 스탈린, 마오, 히틀러, 케인스나 루스벨트의 세계가 아니라 하이에크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하이에크에게 소련의 계획경제, 뉴딜과 사회복지정책, 나치의 ‘전쟁경제’는 진정한 자유주의로부터의 이탈이며, ‘농노제로 가는 길’에서 서로 대체될 수 있는 사례들이다. 그러나 탈규제와 금융화의 최근 형태들이 ‘순수한’ 시장경제(또는 보편적 상품화)라는 새로운 사건으로 이어지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사회주의적 역전, 따라서 아마도 공산주의적 대안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들과 통치형태들의 망과 서로 얽혀있다. 아마도 20세기에 보여준 형태들에 못지않게 폭력적인 형태들을 취하는 그것들이[즉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와 통치형태가], 어떻게 혁명적인 정치를 발생시킬 수 있는지는 가까운 미래에 가시화될 것이다. ●
     
     
     

  • 2023-02-27

    우크라이나 침공 1주년 규탄 세계시민 평화촛불집회

    러시아군은 즉각 군사행위를 멈추고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하라!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에 연대한다!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러시아군은 즉각 군사행위를 멈추고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하라!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에 연대한다!

     
    [%=사진8%]
     
    이날 사회를 맡은 이아림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운명의 날’ 시계가 100초에서 9초로 가장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면서,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 시민들이 이 자리에 모여 우크라이나 시민들과 연대하고 러시아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고 집회의 취지를 전했다. 이후 참가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간을 잠시 가졌다.
     
    [%=사진1%]
     

    우크라이나의 저항은 세계질서의 파괴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첫 번째 발언자로 나선 재한 우크라이나 시민 안드레이 리트비노프 씨는 “학교 교사로서 경험해보건대, 학교폭력 문제를 방치하면 학교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고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면서,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강자로서 법과 규칙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질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고, “우크라이나가 저항을 포기한다면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게 되며, 최근 대만 문제와 북한 문제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만큼, 이번 전쟁은 단순히 우크라이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사진2%]
     

    러시아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거듭 촉구한다!

     
    다음 발언자로 나선 전남대학교 용봉 교지편집위원회 이솔 씨는 “지난해 대학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은 명백히 러시아에 있음을 알리고자 하는 활동을 이어왔다”면서, “오늘 침공 1주년을 맞아, 전남대 학생을 비롯한 청년들도 평화의 목소리를 보태고자 이 자리에 섰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국제법과 국제사회의 원칙을 어기고 세계평화와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한 러시아의 즉각적인 철수를 촉구”하며 “우크라이나에 평화의 봄이 찾아오길 간절히 기원한다”는 의지를 밝혔다.
     
    [%=사진3%]
     

    일본 시민과 중국 시민이 전해온 연대의 메시지

     
    이어서 2월 23일 도쿄 신주쿠에서 우크라이나 침공 1년 침공 규탄, 우크라이나 연대 집회를 진행한 일본 ‘우크라이나 연대 네트워크’가 평화촛불집회에 보내온 연대 메시지와, 100명 이상의 중국 시민이 서명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중국 시민의 공동 성명’을 요약한 재한 중국인 그룹 ‘백지운동한국’ 활동가의 메시지를 사회진보연대 김진영 정책교육국장과 문설희 사무국장이 각각 대독했다. (각 연대 메시지 전문은 맨 아래에 첨부.)
     
    이러한 연대 메시지에 대해, 매주 열리는 재한 러시아인 반전시위에 자주 참가한다는 한 러시아인 참가자는 “일본 시민 연대 메시지가 인상 깊었다. 과거 침략을 저질렀던 일본의 시민들이 역사를 반성하고,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의 침략을 규탄하고 우크라이나에 연대하겠다고 하는 것을 듣고서, 언젠가는 러시아 시민들도 지금 벌어지는 침략을 반성할 수 있도록 활동해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소감을 전했다.
     
    [%=사진4%]
     

    전쟁에 반대하는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충북노동자노래패 ‘호각’의 ‘힘내라 마음아’와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노래 공연이 이어졌다. 그리고 “전쟁은 끝나야 하지만, 전쟁에 맞선 우리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 “우크라이나 민중에게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1년을 감히 짐작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를 잊지 말아야 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끊이지 않게 계속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연대 공연에 서게 된 취지를 밝혔다.
     
    [%=사진5%]
     

    자유를 위한 투쟁은 국경과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는 당연한 권리다!

     
    재한 이란인 네트워크 박씨마 목사는 “러시아에 전쟁 드론을 공급하는 이란 정부의 비인간적 행위를 규탄하고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송구함과 위로를 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면서 “자유를 위한 투쟁은 국경과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는 당연한 권리이며, 이란인들은 점령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권리를 위해 연대하고, 단합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사진6%]
     

    평화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의 자유발언

     
    이후 시민들의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송해건 씨는 러시아 밖의 러시아인들도 전쟁에 책임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재한 우크라이나 시민 볼로디미르 씨는 부모님을 잃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크라이나 전체를 위해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SNS를 통해 소식을 꾸준히 알려달라고 참가자들에게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재한 러시아인 반전단체 ‘보이시스 인 코리아’와 ‘페미니스트 반전 저항’ 활동가 다냐 씨는 러시아 시민으로서 러시아가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우크라이나의 영토에서 모든 러시아 군대를 철수하기를 바라며,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우크라이나인들과 반전운동을 지지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사진7%]
     
    [%=사진9%]
     
    [%=사진10%]
     

    [첨부1: 일본 ‘우크라이나 연대 네트워크’로부터의 연대 메시지]

    한국의 여러분! 조국의 평화와 해방을 원하는 우크라이나인 여러분! 조국의 침략을 반대하는 용감한 러시아인 여러분!
     
    우리는 오늘(23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1주년을 맞아 침공에 항의하고 우크라이나 민중에 대한 연대를 촉구하는 시위를 도쿄에서 진행했습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 푸틴 정권은 우크라이나 침략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점령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생활 기반을 파괴하는 폭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침략은 우크라이나 민중의 자결권을 빼앗고, 존엄성을 빼앗고, 다양성으로 가득 찬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과거 일본은 한국을 비롯한 이웃 나라들을 침략해 그들의 존엄성과 문화를 빼앗았습니다. 지금 러시아가 하고 있는 일은 바로 과거 일본이 했던 것과 똑같고, 우크라이나 민중의 저항은 과거 한국과 동아시아 민중의 저항과 똑같습니다. 러시아가 점령한 지역에서의 파르티잔 투쟁은 과거 항일 파르티잔과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 침략국인 일본의 진보 세력은 모든 침략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입장에서 우크라이나 민중의 자결권과 존엄성을 지지하며, 러시아 정부에 전쟁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합니다.
     
    서울의 촛불집회에 모인 여러분, 우크라이나 침략에 반대하면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함께 투쟁합시다. 투쟁!
     
    2023년 2월 23일 도쿄에서 연대를 담아. 우크라이나 연대 네트워크
     
     

    [첨부2: 중국 시민 연대메시지(중국 ‘백지운동한국’ 고진래)]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한국 내 중국 백지운동의 대표입니다. 중국공산당에 대항하는 동맹 그룹 인 백지혁명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백지혁명의 구성원은 지난해 방역 정책운동에 참여한 생존자들과, 국내외 백지운동 지지자들을 포함하며, 이 조직의 최고 비전은 중국 공산당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중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백지혁명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중국 시민의 3개 항목 공동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세 가지 요점을 읽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사악하고 부끄러운 전쟁 범죄이며, 전 세계 중국 공민은 부당한 전쟁 행위에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크라이나 국민이 겪고 있는 인도주의적 위기에 대해, 전 세계 중국 공민들은 깊은 애도를 표하며 계속해서 관심과 지지를 보낼 의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중국 공민과 중국 공산당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중국 공민은 정의와 인간성에 대한 인식에서 세계 다른 나라 시민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독재적이고 위헌적인 중국 공산당의 내정 외교는 모두 중국 공민의 의사에 반합니다. 전 세계 중국 공민은 비민주적이고 자유롭지 못한 중국 공산정부에 반대합니다.
    백지혁명은 이 공동성명에 참여한 전 세계의 모든 중국 공민들과 함께 이 성명을 실천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