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사민주의체제는 무엇보다도 스웨덴식 노사관계의 산물이다. 역사적 타협에 기원을 둔 사민당정권 및 LO(스웨덴 노총)과 SAF(사용자단체) 간의 협조주의적 노사관계가 그것이다. 스웨덴은 90%가 넘는 노동조합조직률을 자랑한다. 그리고 그 같은 스웨덴 모델의 근간은 역사적 타협 이후 확립된 중앙집권적 산별 교섭체계다. 또한 이러한 협조주의적 노사관계는 스웨덴 사민당의 사상 이념적 전통과 결합된다. 경제정책, 사회화정책을 집대성한 비그포르스와 소련식 사회주의와 혁명주의를 배격하고 점진적인 사민주의적 개혁을 정치이념화한 칼레비가 대표적이다. 또 다른 스웨덴 체제의 주요구성요소는 거대기업 중심의 성장주의적 경제정책이다. 연대임금정책과 렌-마이드너 모델의 기본 구상 역시, 높은 고용률을 추구하는 동시에 거대 독점 대기업 중심의 경제 성장 정책에 기본 토대를 두고 있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스웨덴은 거대 법인자본의 활동이 어느 나라보다 왕성한 나라다. 스웨덴은 일찍이 독점기업을 용인하고, 차등 의결권을 부여하며, 아주 낮은 법인세를 유지해왔다.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와 거대 법인자본이 공존해온 셈이다. 실제로 1932년 집권한 스웨덴 사민당은 1970년대 초까지 시장주의적인 성장모델을 선택했다. 평등주의적 정책으로 일컬어지는 동일업종 내의 임금평준화 정책은 경쟁력 낮은 기업의 시장 퇴출을 통해 산업합리화와 자본집중을 촉진했다. 스웨덴 사민당은 집권 초기부터 재정지출에도 매우 신중했다. 스웨덴은 전후 경제 호황기에 긴축재정 기조를 바탕으로 임금인상 자제, 간접세 인상 등을 통해 인플레를 관리했다. 시장 친화적 정책은 효율성을 높여 성장에 기여했고, 이를 기반으로 고용증대,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확대, 생산적인 복지, 삶의 질 향상 등을 성취해왔다. 다만 스웨덴식 성장경제 모델이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구분되는 점은 성장과 함께 고용에 중점을 두면서도, 특수한 국내외의 역사적 조건들로 인해 시장 친화적 경제정책과 평등주의적 분배정책을 결합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스웨덴 모델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한 대안이라기보다는 냉전과 자본주의적 호황이 만들어낸 특수한 조건의 효과로 자본주의적 모순에서 빗겨나 있을 수 있었던 예외적인 사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자본주의가 금융세계화로 수렴하는 과정에서, 스웨덴은 더 이상 예외로 남지 못하고 여타의 서구유럽국가들과 엇비슷한 신자유주의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일국적인 자본주의적인 성장을 보장해주었던 특수한 국내외적 조건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살쮀바덴 협약정신과 협조주의적 노사관계 스웨덴의 노사관계는 국가의 개입보다는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 간의 장기간의 협조주의적 협상을 특징으로 해왔다. 이러한 노사관계 정착의 기점이 되는 것이 1938년에 체결된 살쮀바덴 협약이다. 이 협약의 핵심내용은 첫째, SAF와 LO로부터 각기 3인씩 파견되는 대표들로 노동시장위원회를 구성하여, 기업단위나 산업단위에서 노사간 교섭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다루도록 하는 것이다. 둘째, 노동쟁의 절차를 제도화하는 동시에, 직장폐쇄도 어렵게 하고, 노동자들의 파업도 실행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었다. 살쮀바덴 협약은 그 구체적인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가진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 이른바 살쮀바덴 정신이 바로 그것인데, 노사간 분쟁사항에 대한 LO와 SAF의 조정권한을 대폭 강화시킴으로써 분쟁사항이 국가의 직권중재나 노동법원을 통한 사법적 절차로 다루어지기 전에 노사중앙조직들이 가능한 한 자율적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한편, 파업이나 직장폐쇄와 같은 대결을 되도록 피한다는 것이다. 협조주의적 노사관계의 정착과 계급교차연합의 형성 과정 살쮀바덴 협약이 체결되기 이전에 스웨덴 노동운동은 매우 격렬한 양상으로 진행되었고, 자본가단체들 역시 매우 중앙집권적인 결속력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SAF는 LO보다 앞서서 전국적인 중앙집권적 조직형태를 완성했다. 이에 반해 초기 LO는 소속연맹들을 확고하게 통제하지 못했다. 당시 건설부문노동자들은 스웨덴의 건설 산업이 국제경쟁으로부터 보호되는데다 스웨덴 특유의 기후조건에 힘입어 강한 교섭력을 가졌다. 이 때문에 건설노동자들은 LO소속의 다른 부문 노동자들보다 높은 임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수출의존도가 높은 제조업부문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노동자 스스로 억제하는 계급 협조주의 입장을 취했다. 대표적으로 LO내에 가장 규모가 커다란 금속노련의 노선이 그러했다. 그 결과 1931년 현재 건설부문노동자들의 임금은 전체산업노동자들의 평균 시간당 임금에 비해 1.7배 높은 수준이었다. LO는 이러한 노동자들 간의 격차와 입장 차이를 조정하지 못한 채 강한 결속력을 가진 SAF의 공세를 맞이해야 했다. 결국 LO는 수출부문 노동자들이 수출부문 자본가 및 사민당정부와 연합하고, 전투적인 노동자운동을 분쇄하는 대가로 협조주의적 노사관계를 정착시키는 계급교차연합(Cross-class Coalition, 계급연합)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앙 단체교섭 틀의 형성 1980~90년대 스웨덴 노동운동에 대한 신자유주의 공세의 핵심은 중앙교섭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애초에 스웨덴에서 중앙교섭은 노동조합이 아니라 자본가단체인 SAF가 먼저 요구한 것이다. LO는 1952년에야 SAF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당시 SAF의 입장에서 산업별 노동자들의 임금상승 경쟁을 유도하기 쉬운 산업별 단체교섭보다는 중앙단체교섭이 임금인상을 억제하는데 보다 유리했다. 반면 LO의 입장에서는 LO산하 연맹들 간의 경제적조건과 입장차이가 컸기 때문에 중앙교섭요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LO가 중앙교섭 요구를 받아들이게 된 이유는 1950년대에 극심했던 인플레이션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스웨덴은 인플레이션을 동반하는 장기호황국면에 진입했는데, 호황은 노동에 대한 수요증가와 그로 인한 임금인상을 가져왔고, 이는 다시 물가인상과 뒤이은 임금상승이라는 인플레이션 순환을 일으켰다. 인플레이션 억제를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아온 집권 사민당의 입장에서 이것은 하나의 거대한 악순환이었다. 이에 따라 사민당은 LO에게 인플레이션 악순환 해결을 위한 임금동결을 요청하였고, LO는 사민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1949~1950년, 2년간 산하연맹들에게 단체교섭을 갱신하지 말도록 했다. 그러나 호황국면에서 이 같은 임금동결조치는 산하연맹들의 강한 불만을 낳았고, 1951년이 되자 LO는 산하연맹별 단체교섭을 허용하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23%대의 폭발적인 임금상승이 이루어졌고, 사민당정권과 LO를 당혹스럽게 했다. 사민당은 다시금 LO에게 임금동결을 요구했고, LO는 물가상승에 따른 생계비 상승분만큼만 임금인상을 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중앙 단체교섭 → (중앙교섭 결과를 전제조건, 즉 하한선으로 하는) 산업별 단체교섭 → 기업별 교섭 → 작업장단위 교섭]으로 이루어진 중앙교섭 체계가 마련된 것이다. 결국 스웨덴의 중앙 단체교섭은 노총 중앙이 집권 사민당의 임금동결 요청을 산하 노조들에게 강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1980년대 이후 스웨덴의 자본은 거꾸로 중앙 교섭체계를 무너뜨리는 데 총력을 기울였는데, 불황기에 자본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임금을 줄이고 투쟁하는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는 목적은 일관되었다. 연대임금정책 중앙교섭이 단체교섭의 형식이라면, 연대임금정책은 중앙교섭을 통해 LO가 추진한 임금정책의 내용이다. 연대임금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실현이다. 그런데 이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이 충실하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방대한 직무조사가 반드시 요구된다. 무엇이 동일노동인가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이종 노동들 간의 난이도, 위험성 정도의 차이를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체계적인 직무조사가 있어야 다양하고 수많은 이종 노동들 간의 임금격차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설령 그런 조사가 (거대한 물리적인 기술적 난관을 해결하고)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더 중요하게는 이러한 격차와 또한 차이를 노동자 스스로 납득하고 능동적으로 해소하고 축소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 비전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제아무리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조사 결과가 이루어진다 해도 실제 현장에서 적용되기도 어렵고, 이것만으로는 긍정적인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는 평의회주의적인 이행(변혁)과정에 대한 역사적 평가 차원에서 모색되어온 노동자 민주주의와 교통(communication), 대중의 지적 차이 감축이라는 사회변혁적인 과제들과 연관된다. 하지만 스웨덴 사민주의 체제의 틀 안에서 이 문제들은 임금정책 실행을 위한 직무조사라는 실무정책집행 차원에 머무르는 한계를 가진다. 주체형성과 이행, 대중운동과 같은 차원이 아니라, 행정적인 정책집행 수준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는 한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부터 올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 노동자들 간의 계급적 통합과 연대는 그저 하나의 불합리한 현실의 모순, 말 그대로 실현 불가능한 난제일 뿐이었다. 행정 정책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스웨덴에서 충분히 체계적인 직무조사에 입각하여 연대임금정책이 추진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실제로 LO가 연대임금정책을 추진한 방식은 임금격차를 낳는 원인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가능한 전반적인 임금균등화를 추진하는 방식이었다. 즉 임금격차의 원인이 노동의 난이도나 위험도이든, 기업들 간 수익성의 격차든 관계없이 가능한 한도에서 임금균등화를 추구하는 방식이었다. 구체적으로 전체 노동자층의 임금상승률을 고임금 노동자층의 임금상승률보다 높게 책정하는 방식으로 연대임금정책을 추진했다. 다시 말해 평등주의적인 임금균등화 정책이 위로부터 행정적으로 집행된 것이다. 연대임금정책의 확장과 변화, 렌-마이드너 모델 결국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삶과 노동, 경제구조를 실질적으로 바꾸어내는 연대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연대임금정책은 애초에 목적했던 만큼의 효과를 얻지 못했다. 거기에 고도성장에 힘입은 임금유동의 발생이 최초의 균열점을 만들어냈다. 임금유동이란 기업수준에서 최종 확정된 임금상승률이 중앙단체교섭이나 산업별 단체교섭을 통해 합의된 임금상승률을 상회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임금유동의 성격을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임금유동이 중앙단체교섭이나 연대임금정책이라는 인위적인 절차와 임금정책으로 결정된 임금수준을 교정하여, 시장원리가 제약 없이 작용했을 경우에 결정되었을 임금수준으로 복귀시켜준 것으로 해석된다면, 결과적으로 중앙단체교섭이나 연대임금정책은 아무런 효과를 낳지 못한 셈으로 볼 수 있다. 그냥 시장에 맡겨두면 마찬가지 결과일 것을, 공연히 절차만 복잡하게 만든 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임금유동은 LO가 추진한 연대임금정책이 임금인상 억제의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분명하게 부각시켜 버렸다. 이러한 문제점이 부각되자, LO 연구국의 연구책임자였던 마이드너는 “임금유동에도 불구하고 연대임금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고 주장하면서, 임금유동에도 불구하고 보존되는 임금균등화를 그 효과로 꼽았다. 마이드너는 이후 LO의 경제학자인 렌과 함께 연대임금정책을 보다 확장하고 종합한 렌-마이드너 모델을 제시한다. 임금균등화를 추구하는 연대임금정책을 경기안정화정책(인플레이션 억제정책, 긴축정책), 산업합리화정책(산업구조조정),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확장-결합시킨 것이다. 그 후 렌-마이드너 모델은 종합적인 경제발전전략으로서 1950년대 후반 이후 사민당정권 경제정책의 골간이 된다. 렌-마이드너 모델의 핵심 정책 내용과 문제점 경기안정화정책 - 긴축정책 - 간접세 도입 렌은 긴축정책수단으로 간접세를 도입한다. 하지만 간접세는 역진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노동자들의 기본이익과 상충된다. 렌의 논리는 간접세 재정수입의 일부를 가장 빈곤한 계층을 지원하는데 사용함으로써 이 간접세의 역진성을 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렌은 정부가 강력한 긴축정책을 실시하여 흑자예산을 유지할 것을 권유한다. 연대임금정책 - 저임금노동자지원, 산업합리화 촉진 연대임금제도는 대기업 노동자의 양보를 전제로 설계된 것이다. LO는 연대임금제도를 통해 동일업종 동일노동의 성격을 가지는 경우 기업규모나 이윤 수준과 관계없이 동일한 임금을 지불하도록 하였다. 연대임금제도는 대기업에 소속된 노동자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임금을 양보하는 한편, 동일임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중소자본은 퇴출(구조조정)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스웨덴의 연대임금정책은 경쟁력 있는 거대 법인자본 중심의 구조조정 정책과 결합되는 것이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노동인력의 원활한 이동을 지원한다. 성장하는 부문과 지역은 보다 많은 노동인력을 필요로 하고 쇠퇴하는 부문과 지역은 노동인력을 방출한다. 이때 방출되는 노동인력을 성장하는 부문과 지역으로 효율적으로 이동시킬 수 있어야 실업을 막을 수 있다. 특히 연대임금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하면, 저수익 기업들로부터 대량의 인력이 방출되기 때문에 이 정책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 노동자들을 위한 직업알선, 재교육, 새로운 지역으로의 이주에 필요한 지원 등이 필요하다. (겐트제도와 같은 실험보험제도도 그중 하나이다.) 강한 성장주의적 사고방식 이처럼 렌-마이드너 모델은 강한 성장주의적 사고방식을 기본으로 한다. 완전고용과 경제성장, 물가안정이라는 거시 경제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과 관련해서도, 수요보다는 공급측 요인을 더 강조한다. 산업합리화, 경제효율화는 지상과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경제성장에 따른 부작용은 심각하게 고려되지 않는다. 렌-마이드너 모델에서는 중소기업이나 낙후지역의 발전을 지원함으로써 경제구조의 균형을 이룬다는 식의 사고는 찾아볼 수 없다. 생산적 복지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구조조정 정책의 보조정책일 따름이다. 스웨덴 모델이 위기에 빠지면서 등장한 임노동자기금 본래 임노동자기금안은 민간 대기업들의 이윤 중 일부를 신규 발행 주식의 형태로 노동조합이 소유-관리하는 임노동자기금에 매년 의무적으로 적립케 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노동조합이 민간 대기업들의 지배주주가 되도록 한다는 웅대한 청사진이었다. 일부 논자들은 이러한 청사진이 사회주의적 이행의 다른 길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웨덴 사민주의 모델의 꽃으로 소개되는 임노동자기금은 실은 스웨덴 모델이 고유한 내적 모순으로 위기에 빠지면서 나오게 되었다. 특히 임노동자기금은 LO가 직면한 대내적 정당성위기의 산물이다. 스웨덴 모델의 모순과 LO의 정당성위기의 표출 연대임금정책은 고수익부문 노동자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연대임금정책은 점차 직업 내부 임금억제정책에서 직업 간 임금억제정책으로 전환되었고, 인플레이션과 투자축소, 노동자집단 간 분열의 원인이라고 공격받게 되었다. 중앙단체교섭은 기업 단위노조들의 역할과 권한을 위축시켜, 풀뿌리노동자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그 결과 다양한 비공인 와일드캣 파업들이 발생했고, 노총 상층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들이 표출되었다. 또 거대기업 위주의 경제성장 정책은 결과적으로 재산과 경제적 권력이 소수 사적 거대 주주들에게 집중되는데 일조함으로써, 사민주의운동의 평등주의적 이념과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모순을 가진다. 이러한 문제들이 하나둘 부각되자, LO는 임노동자기금안이라는 급진적인 정책안을 제출함으로써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LO의 급작스러운 제안은 1975년부터 1983년에 걸친 혼란스럽고 지루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자본가진영이 자본주의의 근간을 지키기 위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결집한 반면, 사민당과 LO진영은 제 각각의 계급적 기반과 정치적 이해관계와 이념적 기반에 따라 분열했다. 게다가 기금논쟁이 진행되는 중에 폭발한 1979~1980년 세계경제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임노동자기금을 찬성 추진하는 진영이 기금안을 본래의 급진적인 사회경제적 이행의 관점보다는 경제위기 극복 방안의 하나로 강조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노동자권력과 사회경제적 힘을 형성하기보다는 임노동자기금을 시장에 동원해서 불황을 해결하자는 정책대안이 그것이다. 또 사민주의운동의 평등주의적 이념과 배치되는 기금안의 여러 한계점들에 대해서도, 그러한 문제들보다는 효율적인 사회-경제운영 모델로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 더욱 부각 되었다. 그러한 변화를 거쳐, 마침내 1983년 사민당이 제출하여 의회에서 최종 통과된 실제 임노동자기금안 법안은 애초의 급진적인 성격과 취지가 무색해진 모습이었다. 당초에 계획했던 기금규모가 현격하게 축소되어 실질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만한 위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본연의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시장원리 중심적인 기금운영방식이 전면화된 형태이었던 것이다. 임노동자기금안 실패의 원인 평가 첫째, 임노동자기금안은 부르주아 진영의 강한 결집과 격렬한 저항으로 변질되었고 실질적으로 좌초되었다. 둘째, LO와 사민당 진영은 노동자계급 내외부의 계급적, 이념적, 사회경제적 차이에 따른 이해관계의 분열과 대립을 통합하는데 실패했다. 예컨대, 육체노동자와 비육체노동자, 특히 1980년대 들어 더욱 격렬해지는 공공노동자와 사적부문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경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 셋째, 임노동자기금 논쟁은 위력적인 대중운동의 전개와 결합하지 못했다. 그것은 국회나 국가연구위원회와 같은 전통적인 조합주의적인 의사결정구조 내부의 정책적 논쟁으로 국한되었다. 넷째, LO는 처음에는 매우 의욕적이고 공세적인 자세로 제도도입을 추진했으나, 전반적인 경제여건이 악화되고 자본가 진영과의 대립이 격렬해지자, 줄곧 수세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결과적으로, 계급적 이념적 통합력이 부족한 가운데, 연대임금정책을 둘러싼 LO 내부의 분열을 해소하기 위한 맥락에서 제안된 경제 정책안으로서의 임노동자기금안만으로는 부르주아 진영의 격렬한 저항을 이겨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임노동자기금논쟁 종결 이후 스웨덴 사민주의 모델의 해체와 신자유주의화 변질된 임노동자기금안이 도입된 이후, 사민당 정권은 1980년대 내내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민간기업의 수익성 제고와 시장규제완화, 복지국가 팽창억제를 뚜렷한 정책노선으로 삼아왔다. 이에 힘입어 스웨덴 자본은 자유화된 외환시장 등을 통해 상당량의 자본 해외이전을 단행했고, LO의 힘의 근간인 중앙 단체교섭으로부터 이탈해 갔다. 1990년 SAF는 중앙교섭단위를 해체했고, 1년 뒤에는 노사정위원회에서 대표를 철수시켰다. 스웨덴 노동운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스웨덴식) 연대임금정책 또한 1980년대 들어 그 제도적 기반인 중앙단체교섭 체계가 와해됨에 따라 더 이상 작동될 수 없었다. 그러나 LO는 중앙단체교섭이 와해된 원인인 자본주의의 위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기득권들의 방어를 넘어서는 공세적인 운동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위기의 원인을 직시한 계급 통합적 운동보다는 자본의 위기에 조응하는 계급내부 특수이익 방어에 머물렀던 것이다. 결국 신자유주의 공세에 직면한 LO의 모든 요구는 (불황기에 불가능해진) 더 많은 재정지출과 중앙단체교섭 복원을 요구하는 즉자적인 방어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고, LO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반복적인 패배를 경험하며 쇠퇴했다. 반면 사민당의 오랜 집권에도 불구하고 학계, 언론계 등의 지식인사회 영역에 뿌리내린 오랜 부르주아적 권력은 건재했다. 거대하지만 오랜 집권과정에서 운동성을 잃어버리고 새로운 혁신의 전망을 세우지 못한 노동자운동은 거센 신자유주의 공세를 이겨내지 못했다. 소련사회주의권 붕괴 이후로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화되어 이어졌고, 2000년대에 이르러 스웨덴 사민주의 모델은 이미 여타 유럽연합 소속국가들의 사회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1990년대 금융위기와 통화주의적 규범주의 정책의 전면화 1970년대 불황기에 스웨덴 사민당 정부와 우파정부는 모두 케인즈주의적인 수요부양정책을 가교로 삼아 불황을 건너뛴다는 일명 가교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가교정책은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어 사민당 정부는 1980년대에 이른바 ‘제3의길’을 내세우며, 통화주의적인 규범정책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제3의길 정책의 핵심은 ‘규범정책’이라고 불리는 시장주의적 정책개혁을 도입하는 것이다. 즉 완전고용보다는 물가안정을 중시하고, 단기적 임기응변적 처방(주로 케인즈주의적이거나 사민주의적 처방들)보다는 장기적으로 일관성 있는 정책을 통해 스웨덴 경제의 기초체력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제3의길 정책 역시 1980년대 말에 높은 인플레이션과 부동산-금융거품을 야기함으로써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만다. 그 후 1990년대 초반에 스웨덴은 고평가된 크로나화에 대한 환투기 공격으로 심각한 금융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로써 스웨덴은 1992년에 제3의길 정책의 근간이었던 고정환율제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 이행한다. 변질된 형태로 도입된 임노동자기금 또한 이때 폐지된다. 1993년부터 스웨덴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의 기조로 인플레이션 타깃팅을 채택하였다. 또 1994년에 집권한 사민당 정권은(1994년~2006년)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예산개혁을 단행하고,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강화했다. 이는 1990년대 들어 물가안정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하는 통화주의적 합의 또는 (시장)규범 정책적 합의를 사민당도 확고하게 수용하게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반면 LO는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해왔다. LO는 특히 정부의 긴축정책에 반대하면서 수요부양정책을 요구했고, 무력화된 중앙집권적 단체교섭체계의 복원을 주장했다. 그러나 LO의 반대는 별다른 성과를 못 보고, 1990년대 이후 통화주의적 거시경제정책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자 LO는 점차 신자유주의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1996년 LISA프로젝트 보고서에서 LO는 “과도한 임금상승을 자제해야 하며, 노동시장정책은 인력의 이동성을 높이는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웨덴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한 약평 세계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빠지면서 스웨덴 모델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소개하는 논의가 간혹 있다. 하지만 스웨덴은 세계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의 외부에 존재했던 것이 아니고, 보수주의적인 통화정책과 거대자본 중심의 성장주의적 경제정책이 결합된 자본주의 경제체제다. 스웨덴 모델이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아니라, 오히려 스웨덴 모델이 1980~90년대에 실패하면서 선택한 대안이 신자유주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신자유주의가 곤경에 빠진 상황을 놓고 스웨덴을 대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웨덴 모델은 말하자면 ‘일국 사민주의’인데, 그 골간은 일국수준의 계급타협에 기반한 국민경제적 성장모델이다. 스웨덴 모델은 자본주의적 성장과 수출지향 공업화전략을 기반으로 성립했다. 스웨덴의 경제모델은 물가상승을 억제하면서도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는 방향을 찾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그렇기 때문에 불황기인 신자유주의 시대에 그 본연의 모습대로 작동되기 어렵다. 케인즈주의적 수요관리정책은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무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사민당 내에서조차 신뢰를 잃었다. 게다가 일국적인 사민주의를 실현시키는 전제조건이었던 강한 고정환율 규범과 일국적인 금융통제체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초민족적인 금융세계화의 결과 사민주의적인 계급타협은 경제적인 토대를 잃어버리고 크게 변형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웨덴 모델을 가능케 했던 다른 한 축은 강력하고 거대한 노동조합과 사민당정권의 코포라티즘 체제다. 그런데 스웨덴의 강력한 노동조합-사민당 권력은 애초부터 거대 법인기업과 국가가 주도하는 국민경제적 성장모델과 생산양식을 바꾸는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그러한 자본주의적 체제의 유지를 조건으로 하는 계급타협을 추구했다. 그 대신 노동조합-사민당 권력은 자본주의적 성장의 몫을 효과적으로 분배하는 복지정책-정치에 힘썼다. 문제는 이러한 복지 분배정책-정치가 계급 내 분할과 갈등에 매우 취약하다는 고유한 문제점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복지정책은 필연적으로 비용부담의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계급 간 분배개선에는 어느 정도의 구조적인 제한선이 있고, 계급 내 분배를 강화하게 된다. 복지의 수혜자와 부담자의 이해가 충돌하고, 정규직-비정규직, 남성-여성, 실업자-취업 노동자, 노동빈민-상위계층 노동자 사이에서 수혜계층과 부담계층의 이익이 갈등을 빚는다. 그 결과 복지정책-정치는 계급적 통합력을 형성하거나 계급주체 형성에 기여하기보다는 계급 내부 분할과 갈등을 양산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경제 위기 시기에 복지정책-정치는 자본주의 지배체제와 함께 위기에 빠지면서, 계급투쟁을 약화시키고 계급분할을 확대한다. 나아가 이렇게 분할된 노동자 계급대중은 자본가 내부의 갈등에 손쉽게 동원되어, 노동-자본-국가가 연합하여 다른 노동계급 집단을 공격하는 데 이르기도 한다. 예컨대 스웨덴에서 1950년대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자 수출중심의 금속산업 자본들이 고전을 면치 못했고, 이 와중에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던 건설노동자들과 수출기업 소속의 저임금 금속노동자들이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이런 갈등국면은 나중에는 수출기업 자본가 그룹과 금속노동자들이 노동-자본 연합을 맺고, 전투적인 건설-고임금노동자들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을 보장받던 공공부문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요구가 자본과 국가로부터 강력하게 제기되는 가운데, 민간부문 남성 노동자들이 민간부분 사용자협회 SAF 및 사민당정권과 연합하여 공공부문 여성노동자들을 공격하기에 이른다. 사건의 발단은 생산성이 낮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생산성이 높은 금속노조와 동일한 수준의 임금인상을 요구하자, 스웨덴 총연맹인 LO의 금속노조가 민간부문 사용자협회인 SAF-사민당 정권과 손을 잡고 공공부문 노조를 민간부문에 기생하는 집단이라고 비판하고,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을 요구한 것이다.
파업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종차별적 구속에 맞서자 밥이라도 제대로 먹게 해 달라! 2010년 7월 22일-25일과 2011년 1월 9일-10일, 인천 신항만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고용허가제 베트남 이주노동자 180여 명이 단체로 작업거부를 하는 파업을 벌였다. 이에 앞서 7월 9일에는 21명이 작업거부를 했다. 이는 고용허가제 하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이주노동자 집단 파업이다. [%=사진1%]1차 파업의 원인은 사측이 세 끼 제공하던 식사를 한 끼로 줄인 것(그러면서도 하루 두 끼씩 계산해 월급에서 24만원씩 공제), 형편없는 식사 질,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근무, 강압적인 야간근로 등이었다. 1차 파업 후 사측은 베트남 노동자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며 근무시간 12시간 중 1시간을 제외하고 11시간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바꾸었고, 이에 반발한 노동자들이 2차 파업을 벌였다. 한마디로 밥을 제대로 먹게 해 달라는 것과 저임금이나마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친구들의 숙소출입 허용, 숙소에 음식물 및 주류반입 허용, 취사도구 압수 중단 등과 같은 극히 기본적이고 인간적인 요구를 한 것을 보면 노동통제와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해고와 협박에서 체포, 구속까지 사측은 7월 9일 경에 작업거부를 한 21명을 해고했다. 1차 파업 이후에는 "노동부에 신고하여 본국으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하며, 12시간의 노동 중 11시간만 인정하는 식으로 오히려 노동조건을 악화시켰다. 또한 업무방해로 10명의 노동자를 고소했다. 이러한 협박과 노동탄압은 자본가들이 흔히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공포로 일부를 이탈시켜 노동자를 분열시키기 위해 쓰는 전형적인 수법들이다. 경찰은 2011년 3월 21일부터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3월에는 7명, 4월에는 3명이 체포되어 모두 구속당했다. 검찰은 이들이 불법파업을 벌이고,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직적인 폭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하며, 징역 1년에서 3년을 구형했다(2명에 징역 3년, 1명에 징역 1년 6개월, 6명에 징역 1년, 1명에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이주노동자 범죄자화 사건 발생 이후 8개월이나 지나 이들을 구속까지 하면서 중형을 구형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이주노동자에 대한 범죄자 취급이 계속 강화ㆍ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정치권, 검찰, 경찰, 주류 미디어들은 이주노동자들의 조직범죄가 늘어가기 때문에 이에 대한 특별 대책이 필요하다며 지난 수년 간 틈날 때마다 이주노동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해왔다. 정부는 2009년 10월 '외국인 조직범죄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해서 5개월 간 집중 단속을 벌였지만, 조직범죄로 단속된 사례는 거의 없고 단순범죄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수부의 구성과 집중 단속, 미디어의 보도는 이주민인 것과 범죄자라는 것 사이의 경계를 흐려 은연중에 이를 동일시하게 만드는 효과를 냈다. 2010년에 G20을 앞두고 실시된 '외국인 밀집지역 특별단속' 당시에는 단속 '범죄 대상'에 '불법 체류'를 버젓이 올려놓아 미등록 체류를 무조건 범죄로 취급했다. 이주민은 잠재적 범죄자이고(이때의 이주민은 부국이 아닌 빈국 출신의 가난한 이들로 특정 지역/인종을 전제한다) 미등록 체류자는 이미 범죄자라는 식의 인식을 강화시켜 이주민에 대한 통제와 규제, 단속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그렇게 강화된 통제는 이주민에 대한 범죄자 취급을 또다시 강화하는 효과를 지닌다. 올해에도 경찰청은 4월 5일부터 3개월 간 외국인 범죄를 집중 단속하겠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외국인 조직폭력과 조직성 폭력배의 불법행위'가 중점 단속 대상이며 '외국인 범죄의 폭력화, 세력화를 적극 차단하겠다'고 했다. 이 발표를 전후로 베트남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체포와 구속이 이뤄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만연한 인종차별 아시아 출신 이주민에 대한 만연한 인종차별이 여전히 지속되는 것도 또 하나의 원인이다. 특히 이 사건처럼 수사와 구금, 재판과 같은 법적 처벌 절차에서 통역 같은 기본 의사소통 수단마저 부실하게 제공되거나, 한국인이라면 그냥 넘어갈 일이 이주민이라서 법적 처벌까지 가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끼리 조그만 카드놀이 판을 벌인다고 신고당하거나 체포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주민은 다르다. 2010년 설 연휴 당시 동대문 네팔식당 단속 사건도 도박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기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가 도박 행위를 발견하지 못하자, 애꿎은 식당 손님들의 체류자격을 검문하여 미등록 체류자들을 대거 연행한 경우다. 인종차별의 영역은 사회 전반에 걸쳐 있다. 작업장에서의 욕설과 인격무시, 공공기관에서의 반말과 부당한 대우, 이주민의 의사표현 무시, 길거리나 대중교통 안에서 모욕적인 시선이나 행동, 이주여성에 대한 가정폭력 등은 제도적인 차별과 상호작용하며 재생산된다. 고용허가제만 보더라도 권한은 사업주에 집중시키고 노동자의 권리는 박탈된다. 사업장 이동의 자유 제한, 구직 기간 제한, 업종 제한, 정착 제한, 가족결합 제한 등은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사업주의 이윤 최대화를 위한 것이며, 동시에 이주노동자들을 사회 최하층에 위치지어 인종차별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제도적 기반이 된다. 이주노동자들을 가장 낮은 위치에 두고 착취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금번과 같은 집단적 행동은 애초에 뿌리를 뽑아야 하는 사안이 되며, 강력한 처벌을 통해 다른 이주노동자들에게 선례를 보이고 공포를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 노조 조직화, 노동권 쟁취를 옹호하자 노동권을 원천적으로 박탈하는 고용허가제 하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그러한 틀이 없는 상황에서도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투쟁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는 사실 이 땅에 이주노동자들이 들어올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90년대에 많은 사업장에서 산업연수생이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임금인상, 식사개선, 수당지급, 해고철회, 폭력과 같은 인권침해 근절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고, 성공한 경우도 많다. 2002년 1월에 체불임금 지급을 요구하며 벌어진 포천 아모르 가구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90여명의 파업과 농성은 가장 극적인 사례였다. 고용허가제의 원천적인 제한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작업장에서 자발적인 작업거부나 태업을 하는 사례가 많다. 우리는 자기문제 해결을 위해 스스로 조직하고 행동하는 이주노동자들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채용하면서 상황은 매우 열악한 건설현장에서 향후 투쟁의 가능성은 매우 크다. 또한 이러한 현실은 국내 노동조합 운동이 이주노동자 조직화와 이들의 노동권 쟁취를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시급함을 말해 준다. 이주노동자를 활용하여 전반적인 노동조건을 하락시키고 노동자를 분열시키려는 권력과 자본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이주노동자 조직화와 노동권 쟁취 운동은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건설 현장에서 자본이 내국인과 중국동포 이주노동자, 베트남 노동자와 같은 비동포 이주노동자 사이에 위계를 만들어 분열시키고 노동자들의 갈등을 부추기고 단결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타파하기 위한 운동이 생기는 것은 자본의 전략을 위협한다. 그래서 자본과 공권력은 노동자들을 더욱 쉽게 통제하고 노동조건을 지속적으로 하락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파업을 철저하게 탄압하고자 한다. 결국 내국인 노동자뿐 아니라 이주노동자가 함께 조직되고 연대하고 단결해야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권을 신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내국인 노동자들이 이 사안의 중요성을 각인하고 연대에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이번 사안에 건설노조가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만큼(건설연맹은 베트남 건설노조와 교류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이 사안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향후 건설 이주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고민과 계획을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관련 단위들이 구성한 '검,경의 인종차별적 수사 중단! 이주노동자 노동권 보장! 베트남이주노동자 10인의 무죄석방을 위한 대책위원회'에 더 많은 단체들이 결합하여 이주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과 노동권을 옹호하자.
한미FTA 10문 10답 발간사> 우리는왜한미FTA를반대하는가? 한미자유무역협정(이하 한미 FTA) 국회 비준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2006년 이래 뜨겁게 타올랐던 한미 FTA 반대 물결은 한동안 소강 상태입니다. 이대로라면 한미 FTA가 국회에서 통과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따름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정부는 이미 44개국과 FTA를 체결한 상태이고, 지금도 계속해서 FTA 대상국을 발굴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FTA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한국을 ‘FTA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정부와 자유무역론자들은 FTA가 수출 증대, 투자 확대, 통상제도 선진화를 통해 한국 경제에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 양국 간 협상에서 이익균형만 잘 맞추면 FTA는 쌍방 모두에게 이득이 된다는 논리를 폅니다. 농업 등 일부 부문에서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므로 대책만 잘 마련하면 된다고 강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FTA의 핵심적 문제점을 감춥니다. FTA는 단순히 국가 간 통상전략이나 부문간 이해득실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서 시작해서 한미 FTA로 완성된 미국식 FTA는 무역뿐만 아니라 투자의 자유화와 서비스·지적재산권에 관한 협정을 포괄합니다(질문1). 이에 따라 자본에게는 국경을 오가며 막대한 이윤을 누릴 자유가 보장되지만, 노동자에게는 구조조정과 저임금·장시간·고강도 노동의 굴레가 강요됩니다. 국민경제 차원에서는 자본도피와 국부유출이라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런 점에서 자유무역이 세계를 빈곤과 불평등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또한 FTA가 체결되면 수출경쟁력을 갖춘 재벌에게는 큰 이익이 되지만 경제 전체적인 성장과 고용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질문2, 질문3). 따라서 FTA가 1997년 이후 장기침체에 빠진 한국경제의 탈출구가 될 수 있다는 노무현·이명박 정부의 주장은 아무런 현실적 근거가 없습니다(질문5). 한미 FTA는 비단 경제적 측면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미 FTA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 특히 금융위기와 천안함 사태 이후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지배권을 한층 강화하려는 전략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질문4). 또 한미 FTA에 포함된 각종 투자 자유화 조치들은 우리의 주권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독소조항들을 다수 내포하고 있습니다(질문6). 이와 관련하여 특히 보건의료 서비스 부문에서는 초국적 제약회사의 독점권이 대폭 강화되고 의료민영화를 촉진하는 조치들이 도입될 것으로 예상됩니다(질문8). 얼마 전 국회에서 통과된 한EU FTA도 한미 FTA 못지 않은 파괴적 효과를 낳을 것입니다(질문9).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우선 당면한 한미 FTA를 막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임으로써 정부의 ‘FTA 글로벌 네트워크’ 구상을 저지해야 합니다. 동시에 FTA에 대한 민중적·국제적 대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정부가 무차별적으로 FTA를 추진하는 상황에서 개별 FTA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한계가 자명하기 때문입니다(질문10, 질문7). 이 소책자는 이상 10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한미 FTA의 문제점을 비판합니다.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각각의 질문 당 4-5쪽 분량으로 짧게 쓰려고 노력했고 사이사이 사진도 넣었습니다. 아무쪼록 이 소책자가 한미 FTA 국회 비준에 반대하는 운동의 물결을 다시 일으키는 데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011년 5월 31일 사회진보연대
한미 한EU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에서 2011. 4. 11에 발표한 '한EU FTA 50개 점검과제' 입니다.
올해 초부터 중동ㆍ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시작된 독재정권에 대항한 민주화 시위는 현재 진행형이지만, 운명보다도 강고해 보였던 이 지역 독재자들의 카르텔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흔히 언론에서는 이러한 운동을 두고 ‘소셜 네트워크(SNS) 혁명’으로 소개하며 자연발생적인 투쟁으로 묘사하곤 한다. 물론 이러한 요소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분명하지만, 노동자 운동이 그 속에서 미친 영향이라든가 민주화 시위의 사회운동적 전망에 대한 주류 언론의 분석은 상대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 이 지역에서의 투쟁은 지역 민중들과 노동자 운동의 진전을 위한 가능성을 열었고, 여기서 노동자운동의 국제주의적 연대를 위한 계기를 찾아야 한다. 중동ㆍ북아프리카 지역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펴보자면, 석유 산출 여부에 따라 국가 간 빈부격차가 매우 크며(최빈국 예멘에서부터 초부국 카타르, UAE 등), 중동지역 전체 실업률은 13%, 청년실업률은 25%에 달할 정도로 실업률이 높다. 노동자 운동은 1920년대 식민통치 반대 투쟁을 통해 등장하였다. 중동ㆍ북아프리카의 노동조합의 권리는 일반적으로 매우 심각한 제약을 겪고 있다. 또한 법적으로 여성, 이주노동자, 공공부문 노동자에 대한 차별 및 배제가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 지역에서 독재자들의 카르텔이 형성된 배경에는 석유산출이라는 지정학적 요인과 이슬람 세력의 존재라는 정치적 요인이 있다. 이 지역의 ‘세속화된’ 독재자들은 이슬람 세력을 이유로 대내외적으로 자신들의 독재를 정당화해 왔다. 국가별로 미국에 대한 태도는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으로 민주주의의 억압을 대가로 한 정치적 안정 보장(이슬람 세력 배제)이라는 논리로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고 및 국내적으로 이슬람 반대세력을 억압함으로써 중도세력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지난 호 『사회운동』의 「이집트의 민주주의 혁명,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에서 이집트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 운동의 역할을 다룬 바 있는데, 이번 호에서는 이집트 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튀니지와 대규모 민중투쟁이 발생했던 알제리를 중심으로 이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튀니지 1) 재스민혁명의 전개 튀니지 민중혁명의 도화선은 한 청년 노점상의 분신이었다. 튀니지 중부의 소도시 시디 보우치드(Sidi Bouzid) 거리에서 무허가로 과일을 팔던 모하메드 부아지지는 지난해 12월 경찰 단속에 걸려 청과물을 모두 빼앗겼다. 그는 시청을 찾아가 수차례 민원을 제기했지만 당국이 관심을 보이지 않자 12월 17일 경찰 청사 앞 도로에서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분신했다. 부아지지의 소식이 퍼지자 시디 보우치드의 거리는 시위대로 뒤덮였고, 1월 3일 그의 사망을 기점으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1월 5일 부아지지의 장례가 치러졌고, 다음 날인 1월 6일 수천 명의 노동자가 청년들의 시위를 지지하며 파업을 벌였다. 튀니지의 유일 공식 노총인 UGTT(Union Generale Tunisienne de Travail)는 총파업을 통해 헌법 개정과 구속된 노동조합 지도부 석방을 요구했다. 식료품값 인상과 최악의 실업난은 시민의 저항 열기에 기름을 끼얹었다. 시위는 이후 ‘독재 타도’를 전면에 내걸게 됐고 튀니지 국화의 이름을 따 ‘재스민 혁명’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이에 대해 벤 알리 정부는 철저한 탄압으로 대응했으나, 시위는 수도 튀니스까지 번져 정권을 위협하였다. 벤 알리 대통령은 차기 대선 불출마, 내각 해산 및 조기 총선 실시 등 유화책을 내놓으며 민심 수습에 나섰으나 이것만으로 저항의 불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1월 14일 하야 후 망명을 선택했다. 내무부 추산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최대 78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대부분 경찰의 발포에 의한 것이다. 2) 혁명의 원인 1956년 프랑스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튀니지의 하비브 부르기바(Habib Burqiba) 정권은 1970년대 코포라티즘에 기반한 수출주도 경제 정책을 추진하였다. 오랜 식민통치로 내수 기반은 처음부터 미약하였고, 해외직접투자 역시 자본집약 산업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고용 창출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980년대 중반, 외채위기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부르기바 정권은 1986년 가격 자유화, 관세인하, 부채상환비율 및 채무비율 저하, 100억 달러의 외채 상환기간 연장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IMF의 안정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신자유주의 정책 개혁이 본격화되면서 부르기바 정권의 코포라티즘은 그 기반이 붕괴한다. 튀니지 정부가 1987년 사유화 정책 도입 후 일부 또는 전부 민영화한 기업은 총 160개에 이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해고로 이후 실업은 청년 인구의 폭발과 함께 튀니지 경제의 큰 골칫거리로 등장한다. 사유화 등의 조치를 강제하기 위해 잠재적인 저항의 근원을 파괴할 필요가 대두되었고 역사적으로 이를 수행한 세력이 바로 당시 등장한 벤 알리 정권이었다. 1987년 벤 알리는 부르기바 정권 아래서 무시되던 법치주의의 확립을 내세우며 무혈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였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벤 알리가 권력을 잡을 당시 했던 약속은 2011년 민중들의 시위 앞에서 취했던 유화적 제스처와 무척이나 닮았다는 점이다. 벤 알리는 집권 여당을 민주헌법회의(RCD)로 쇄신하고, 정치범 석방, 고문금지에 관한 UN헌장 비준, 종신 대통령직 폐지, 정당설립과 결사에 관한 제한 완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1989년 선거조작을 통해 여당이 100%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끝난다. UGTT는 그 이전까지 누리던 예산상의 자율성을 빼앗기고 지도부가 제거되면서 정권에 굴복한다. 벤 알리 정권은 관세무역일반협정(GATT)과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2000년대 들어 관세와 상품수출 규제를 풀면서 EU와의 관계를 강화시켰다. 1990년대 들어 튀니지는 이라크, 사우디와 함께 ‘테러와의 전쟁’의 파트너로 자리매김한다. 벤 알리의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가 불러온 효과는 표면상으로는 놀라웠다. GDP는 유럽 주변부 국가의 그것에 필적했고, 공공부문 부채 비율은 낮은 수준을 유지했으며, 인플레이션은 안정적 수준에서 관리되고, 외채위기로 인해 하락했던 국가신용도가 회복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표면적 성공 뒤에 일반 노동계급이 겪는 고통 역시 막대하였다. 높은 실업률, 불평등 심화, 보조금 철폐, 주거비용 상승, 복지 후퇴 등이 그것이다. 부는 일부 경제 엘리트와 그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또한 해외 은행, 헤지펀드, 사모펀드 등이 공모하여 노동자 조직을 심각하게 탄압했고, 공교육과 보건의료 시스템은 사유화되어 그 기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또 실질임금은 인플레이션 상승에 훨씬 미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은 튀니지 정부에 균형재정을 위해 보조금 삭감을 권고하였다. 2011년 초 민심 이반을 일으킨 결정적 요인으로는 높은 실업률과 식료품 가격 상승을 들 수 있다. 특히 15세에서 29세까지 청년 실업률은 2008년 평균 실업률 14%의 두 배가 넘는 31.2%에 달하였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혁명은 아랍세계의 다른 지역들에 유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는데, 리비아, 바레인, 예멘 등이 그 예다. 이들 지역의 공통점은 석유, 가스, 천연광물 산업과 관광산업으로부터 이전되는 ‘지대’를 향유하는 지배계급과 민중들 사이의 불평등이 날로 심각해져 왔다는 것이다. 이들 ‘지대’ 산업은 대개 수출산업으로서 고용 효과는 극히 미미하며, 매우 특수한 경제구조(석유 경제)를 낳게 된다. 따라서 이들 국가의 내수산업은 저발전 상태에 머무를뿐더러, 금융과 기술 서비스 산업은 대개 초민족적 자본에 의해 통제된다. 이 중에서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공히 나타나는 ‘관광산업’이 어떻게 불평등을 심화시켰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튀니지의 ‘경제 기적’을 이끈 동력 중 하나는 관광산업인데, 이로 인한 경제적 혜택은 관광산업을 지배하는 초국적 자본과 소수 경제 엘리트에게만 전유 되었으며, 이들은 또한 부동산 투기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과 함께 국토가 관광자원으로 개발됨에 따라 주거비용이 상승하고, 농지가 관광지로 전환됨에 따라 농산품의 수입의존도가 높아졌다. 즉 수입농산물 가격 변동에 직접적인 취약점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전 세계적인 식료품값 상승에 따른 국민경제의 악화가 이번 혁명의 경제적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혁명에서 튀지니 노동자운동의 역할 튀니지 유일의 공식 노총인 UGTT의 조합원 총수는 약 50만 명 정도로 10~15%가량의 노동자를 포괄하고 있다. 튀니지의 노동법 아래서 노동조합의 권리 보장은 미약한 수준이다. 노조 결성에 허가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노총은 허가가 필요하다. 파업권은 보장되어 있으나, 모든 파업은 공식 노총인 UGTT의 승인을 얻어야만 하며, UGTT는 기층 노조의 행동을 과도하게 제약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파업을 하기 위해서는 파업 기간을 사전에 통보해야 하며, 불법 파업에 연루된 노동자는 3~8개월에 이르기까지 수감될 수 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 노총인 CGT에 대응하여 창립된 UGTT는 설립 당시부터 온건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고, 이후 부르기바 정권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벤 알리 정권에 들어서는 노골적인 친정부 성향을 보였다. 노동운동 전반으로 보자면 대부분의 중동·북아프리카 지역과는 달리 튀니지 노동자 운동은 대정부 투쟁에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투쟁의 경험이 존재하며, 이는 모두 UGTT라는 울타리를 넘나들며 벌어진 일이다. 예를 들어 UGTT는 1977년 크사르 헬랄(Ksar Hellal) 지역의 국영 섬유회사 파업과 동년 인산염 광산 파업 등에서 승리하였으며, 1978년에는 전국적 총파업을 시도하였다. 또 2007년 재스민 혁명에 앞서 가프사(Gafsa) 지역에서 벌어진 투쟁은 국영 인산염 광산에서 벌어지는 부패한 고용 관행에 맞서 청년 실업계층을 중심으로 벌어진 파업이었다. 당시 정부와 유착한 UGTT 중앙 지도부에 절망한 노동자들은 UGTT 가프사 지역 본부를 장악하고 6개월간 투쟁을 이끌었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벤 알리 정권에 대한 불만이 쌓이고 젊은이들이 정치적 자유와 일자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전까지 정권에 충성하던 UGTT의 지도부에 변화가 나타났다. 이후 UGTT를 중심으로 튀니지의 노동자 운동은 민중봉기 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를 들어 12월 17일 부아지지의 분신이 알자지라 방송과 페이스북, 그리고 블로그 등을 통해 알려져 전국적 공분을 얻게 되나, 이를 실제 오프라인에서의 투쟁으로 만든 것은 UGTT 시디 보우치드 지역본부였던 것이다. 14일 벤 알리의 도주 후 과도정부 구성에서도 UGTT는 민중의 대표자로서 과도정부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 UGTT는 애초 집권여당인 민주헌법회의에서 이탈한 모하메드 간노우치가 이끄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민중들의 저항이 계속되자 통합정부에서 철수한 후 민주헌법회의의 해체와 장관급 퇴진을 요구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주도권을 행사하는 벤 알리 추종세력은 모든 야당세력과 협력하겠다고 밝히고 과도내각을 구성하였으나, UGTT는 과도내각에 파견한 노동자 대표자를 사퇴시키고 UGTT의 국회의원들 또한 자리를 내놨다. 이후 구 여당세력의 척결을 주장하는 시위와 함께 1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 동안 튀니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스팍스에서 총파업을 벌였다. 4) 민주화 혁명 이후 튀지니 노동자운동의 전망 비록 약화되긴 하였으나 여전히 튀니지의 지배계급은 권력을 쥐고 있다. 혁명을 이끌었던 조직된 노동자 운동과 튀니지 좌파, 그리고 이슬람 세력은 여전히 투쟁하고 있지만 새로운 정치적 리더십의 형성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혁명 이후 UGTT는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나 정국을 주도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벤 알리의 퇴진 이후 열린 새로운 정치적 공간 속에서 다양한 세력이 조직화를 시도하고 있다. 2월 2일에는 벤 알리 정권 아래서 인정을 받지 못한 튀니지노동총연맹(Federation Generale Tunisienne du Travail, CGTT)이 임시행정부에 법적 승인을 요구하며 출범을 발표했다. CGTT의 성명서를 보면 현 UGTT 집행부의 지난 23년간의 친정부 행태를 비판하며, 정치권력의 ‘일당’ 모델에 조응하는 노동자 운동의 ‘단일노총’ 모델은 종식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간노우치 반대 운동에서도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경향성을 지닌 세력들이 출현하고 있다. 알 나다(Al Nahda)와 1.14 전선이 그 대표적 예이다. 알 나다는 벤 알리 정권 아래 탄압을 당하던 중도 이슬람 조직이며, 1.14 전선은 좌파 정당과 조직의 연합체다. 1.14 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조직은 노동좌파연맹(League of the Labor Left), 나세르 노동자 운동(Movement of Nasserist Unionists), 민주국민운동(Movement of Democratic Nationalists), 민주국민당(Democratic Nationalists, Al-Watad), 독립좌파(Independent Left), 튀니지 공산노동당(Tunisian Communist Workers Party), 그리고 애국민주노동당(Patriotic and Democratic Labor Party) 등이다. 튀니지의 노동자 운동이 앞으로 국가권력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민주정부 구성에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 서방세계의 리비아 침공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열강의 패권 다툼이 향후 어떠한 정치적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특히 튀니지 노동자 운동이 이슬람 세력과의 정치적 관계 형성을 두고 어떤 입장을 취할지 역시 초미의 관심사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민중들의 요구가 주로 정권퇴진, 계엄법 철폐, 고문금지, 자유선거 실시 등 정치적 자유에 관한 것임과 동시에 사회경제적 평등과 분배에 대한 요구가 공권력의 힘을 뚫고 정권 전복에 이르게 하였던 중요한 요소였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튀니지의 노동자 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향후 사회경제적 변화를 만들어갈 책임이 자신들에게 지워져 있다는 것이다. 알제리 튀니지와 이집트에 비해 알제리는 미디어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덜했는데, 그 이유는 알제리의 시위가 두 국가만큼 고조되지 못하였고, 또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정권의 전복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 16위의 석유 생산국인 알제리(리비아는 17위)에서의 사회변화는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 더욱이 미국의 오랜 동맹인 부테플리카 정권이 카다피를 지지하면서 알제리와 부테플리카 정권의 운명이 이 지역 전체의 운명에 매우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 맥락을 고려한다면 현 시점에서 알제리 노동자 운동이 가지는 정세적 중요성 또한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알제리는 또한 아랍 국가들 중에서는 특이하게도 강력한 독립노조가 활동하고 있다.) 1) 2010-2011년 시위의 전개 2011년 초 알제리의 대규모 시위는 2010년 12월 주거공간 부족에 항의하는 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연초 설탕과 식용유, 밀가루의 국제 시세가 상승하면서 가격이 올랐고, 때마침 암시장에 가해진 규제가 이를 부채질하였다. 이 때문에 시위는 더욱 고조되었고, 1월 초부터 몇 주 동안 알제리 전역에 시위가 발생하게 되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소식에 고무된 알제리인들 역시 주거공간의 부족, 청년실업, 정부 부패, 정치적 억압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튀니지에서의 시위가 정부를 전복한 뒤, 알제리에서도 수 명의 분신이 이어졌다. 그렇지만 대규모 시위는 1월 중순을 지나면서 사그라졌다. 그리고 1월 21일 독립노조들과 진보적 사회단체들은 변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국 연합(National Coordination for Change and Democracy, CNCD)을 결성하였다. CNCD는 그때까지는 상당히 자연발생적이었던 대중집회를 부테플리카 정권의 종식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모아낼 방안을 강구하였다. CNCD는 실업, 주택부족, 생필품 가격 상승을 이유로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 알제리의 일부 여당들과 함께 CNCD는 2월 말까지 간헐적인 시위를 조직하였고, 2월 12일 시위에는 경찰의 저지에도 불구, 수천의 시위대가 수도 알제의 ‘5월 1일’ 광장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1월 이후 알제리 정부는 유화책과 강경책을 모두 동원해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였다. 알제리 정부는 수만의 경찰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고, 2월 12일을 비롯 몇 번의 충돌을 겪으며 수 명의 사상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1월 8일 정부는 설탕과 식용유에 대한 세금을 8월까지 임시로 낮추는 데 동의했지만, 이는 표면적인 해결책에 불과했다. 결국 2월 22일 알제리 정부는 지난 19년 동안 시위를 금지하고, 헌법적 자유를 제약하며, 임의 구금을 가능케 했던 계엄법의 철폐를 발표하였다. 계엄법이 철회되었음에도 그 효과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여전히 수도 알제에서 시위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2) 시위의 원인 1월의 시위가 규모로 따지자면 근래 최대의 시위였으나, 이와 비슷한 시위가 지난 몇 년간 계속 이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2001년 베르베르족 영토인 카빌리아 지방에서는 대규모의 장기 소요사태가 있었다. 2005년 이후 알제리에서는 거의 2주에 한 번 꼴로 시위가 일어났다는 통계도 있다. 이러한 소요사태는 국가의 분배 기능이 제구실을 못하고 있으며, 대중들 역시 기존의 정치체계가 너무도 부패한 나머지 공식 정치체계 속에선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할 경로를 찾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알제리의 사회위기는 극히 심각하다. 인플레이션은 2011년 11월까지 평균 5.7%였는데, 농산물 가격은 1년 사이 21% 이상 올랐다. 2002년 내전 종식 이후 5년간 정규직 일자리를 얻은 노동자는 전체의 30%에 그쳤다. 비공식 부문이 계속 커지고, 민간 부문은 점점 임시직으로 채워졌다. 평균 실업률은 30%인데, 청년층의 실업률은 35%에 달한다. 최근 시위에 깊이 참여한 베르베르족의 경우, 경제적 고통에 더해 언어적·문화적 차별로 인한 피해를 받아온 역사가 있다. 높은 실업률과 저임금, 생활수준 하락을 겪은 알제리의 청년층은 규제가 없는 길거리 시장의 노점상과 같은 비공식 부문으로 유입되었다. 그렇지만 정부는 이들을 잘못된 경제정책의 결과로 인식하기보다는 경제적·사회적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다. 지난 10월부터 정부는 시장을 폐쇄하고 세금탈루를 이유로 노점상을 단속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비공식 부문에 대한 단속은 시위의 또 다른 직접적 원인이었다. 3) 석유경제 알제리인들이 겪는 가난과 실업이라는 문제는 알제리가 탄화수소 경제(석유경제)에 편향적으로 의존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1980년대 후반부터 추진된 신자유주의 개혁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알제리에서 유전이 처음 발견된 해는 1956년이며, 1958년부터 원유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후 알제리 경제의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에 대한 의존도는 높아졌으나, 기타 산업은 저발전 상태로 머물러 있다. 탄화수소 경제는 현재 수출의 95%, GDP의 51%, 전체 고용의 13.6%를 차지한다. 알제리는 현재 거의 1,500만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고를 지니고 있으며, 대외부채는 거의 없고, 2011년 4%의 경제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만 석유산업에서 창출되는 부는 군부와 정부의 일부 엘리트, 그리고 1990년대부터 알제리에 진입한 초국적 석유회사의 손에 떨어질 뿐이다. 알제리는 척박한 토양과 만성적 물 부족, 농업부문 발전을 등한시하는 정책 때문에 농산물에 대한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다. 따라서 세계 식량가격 변동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지난 6개월간 알제리의 기초 식량 가격은 상승 일로에 있었으며, 일부 식품의 경우 50%까지 인상되기도 하였다. 식료품 가격 상승이 일반 가계에 끼친 부담이 2011년 초부터 일어난 봉기의 주요 동력 중 하나였다. 이러한 상황은 요르단, 수단, 예멘 등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러니한 점은 알제리 경제 전반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유가 상승이 식료품 가격 상승의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세계적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기계화된 대규모 농업에는 농기계와 운송수단에 석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석유는 또한 살충제, 제초제, 화학비료 등의 제조에 사용된다. 더욱이 유가상승은 지구 온난화 문제 대처를 위한 각국 정부의 시도로 식량이 아닌 바이오연료용 작물 재배에 대한 유인을 강화했고, 이 역시 식료품 가격 상승에 기여했다. 따라서 유가 상승이라는 현상이 알제리 엘리트에게는 부의 원천이었던 반면 민중들에게는 고통의 근원이 된 것이다. 4) 군부, 내전, 신자유주의 개혁 사회주의 성향의 알제리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FLN) 정부가 1988년 말 무너진 이후 나타난 정쟁과 신자유주의 개혁 때문에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1988년 유가 하락으로 인한 경제위기와 정부의 전체주의적 성향에 대한 불만이 겹쳐 대규모 파업과 학생들의 동맹휴업이 벌어졌다. 정부는 경찰력을 대규모로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충돌이 끝날 때까지 500명이 희생되었고, 3,500명이 투옥되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차들리 벤제디드는 내각 대부분을 해임하고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다. 1989년 2월 정부는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는 새 헌법을 승인하였다. (그렇지만 이 법에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양보조치로서 이전 헌법에서는 보장되었던 여성의 권리를 박탈하였다.) 군의 역할은 국방으로 국한되었다. 그렇지만 (남성에게만 주어진) 상대적인 정치적 자유의 시기는 얼마 가지 못해 끝이 났다. 이슬람 급진주의 세력인 이슬람해방전선이 1990년 지방선거에서 62%의 지지를 얻고, 이듬해 전국선거에서는 최대 다수당이 되었다.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벤제디드 대통령을 사퇴시키고 급격히 급진화된 이슬람 세력과의 내전을 시작하였다. 10년간 계속된 내전에서 약 200,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과의 전쟁을 이유로 1992년 계엄법이 발효되었다. 내전 와중에 군부 정권은 IMF와 세계은행에 따라 신자유주의 경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1994년 IMF는 외채 조정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강요하였다. 4년간 지속된 이 프로그램에 따라 알제리 정부는 소비자 보조금 폐지, 부가가치세 인상, 공공지출 삭감, 공공부문 노동자 임금 동결 등을 시행하였다. 또한 구조조정, 사유화, 공기업 해체 조치도 취해졌다. 총 450,000명의 공공부문 노동자가 해고당했으며, 이 때문에 불만과 가난이 증대되었다. 1986년부터 1999년까지 1인당 GDP는 2,590달러에서 1,550달러로 하락하였다. 저임금 비정규 노동자로 채워진 민간부문의 확장과 사유화는 200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정부는 특히 석유산업에 해외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슬람주의 지지세력을 민주적 과정에 참여시키는 대신 광범한 탄압을 펼친 것은 해외 투자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2005년 통과된 탄화수소법을 통해 무역과 투자 규제가 해제되었고 석유산업에 자유경쟁이 도입되어 국영 석유회사 역시 경쟁에 노출되었다. 그 결과 미국과 프랑스의 초민족기업이 특히 석유산업에서 더 활발히 활동하게 되었고, 착취가 심화되었다. 5) 알제리 노동조합법과 노동조합 알제리의 노동조합법은 아랍세계 대부분의 국가보다는 제약이 덜하지만, 노동조합의 권리가 완벽히 보장되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법에 따르면 알제리인들은 노동조합 결사와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렇지만 노동조합을 등록하기 위해선 사업장 전체 노동자의 20%의 지지를 받아야 하며,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등록 노조는 단체협상의 권리가 보장된다. 파업권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매우 심각하게 제약되어 합법 파업을 벌이기란 매우 어렵다. 파업을 결의하기 위해선 전체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비밀투표를 해야 하며 파업 시작 1주일 전에 통보하여야 한다. 정부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유발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파업을 금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국제노동기구(ILO)가 계속해서 폐지를 요구해온 조항이기도 하다. 알제리에서 유일하게 승인된 노총은 알제리노총(General Union of Algerian Workers, UGTA)으로, 알제리가 여전히 식민상태에 있던 1956년 FLN에 의해 설립되었다. UGTA의 애초 목적은 프랑스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노동자를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식민통치 기간 동안 UGTA의 지도부는 FLN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유지했으나, 1962년 해방 이후 FLN의 국가구조 안에 포섭되게 된다. 공공부문 파업은 불법화되었고, UGTA 지도부의 임무는 노동쟁의를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 UGTA 하부조직 활동가들은 FLN으로부터 독립성을 가지고 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하기 위해 활동할 수 있었다.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일부나마 귀를 기울였으며, 1980년대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에는 몇 번의 대규모 파업도 기획하였다. 1988년 시위 이후 짧게 지속된 민주화 시기, 알제리 노동자 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1989년 신헌법은 집회의 자유와 파업권을 보장하였고, 복수노조를 가능케 하였다. 1989년 학생운동의 활동을 통해 몇몇 독립노조가 정부로부터 공식 승인을 받았다. 그렇지만 UGTA는 이러한 변화에 저항하였으며, 1991년 군부가 총선 결과를 무효화하고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군부를 지지하였다. 정부는 계엄법을 독립노조와 모든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의 도구로 삼았다. 정부는 과거 독립노조를 승인하긴 했지만, 단체협상과 사회적 대화로부터는 배제하였다. 정부는 고의적으로 일부 노조의 등록 신청 심사를 연기하거나, 등록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2004년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UGTA만을 공식 인정할 것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억압적 상황에도 현재 알제리에는 약 20개의 독립노조가 60만 노동자를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UGTA의 공식 포괄 노동자는 130만 명이다.) 독립노조는 보건 및 교육 부문에서 특히 강력하다.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간 알제리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싸워 왔다. 1990년대 동안 UGTA는 IMF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시행되는 동안 긴축 정책과 고용악화에 항의하여 수차례 파업과 투쟁을 벌였다. 2003년 UGTA의 총파업은 석유산업의 경쟁 심화와 외자 유치를 목적으로 하는 탄화수소법의 시행을 연기하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보건의료 및 교사 독립노조는 2003년 파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여 2008년 임금 인상을 쟁취할 수 있었다. 철도, 트럭, 항만, 철강 노동자들 역시 성공적인 파업을 벌인 바 있는데, 이들이 벌인 파업의 상당수는 비공인 파업이었다. 알제리 약 20개의 초민족적기업 노동자들은 처참한 노동조건과 노동법 회피 등에 맞서 UGTA 안팎을 넘나들며 투쟁을 벌였다. 6) 시위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역할 알제리 노동자 운동이 상대적으로 강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 노동조합이건 비공식부문 노동자 조직이건 거리시위가 가장 강력하게 펼쳐지던 1월 초의 자연발생적 투쟁에서 큰 역할을 하진 못했다. 이것이 튀니지와 이집트의 상황과는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알제리의 소규모 독립노조 중 4개 노조가 CNCD안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며, 야당과 사회단체와의 공조를 통해 2월 12일 시위를 비롯한 다른 시위를 기획하였다. 그렇지만 CNCD는 1월에 시위를 시작한 대다수 시민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데는 실패하였으며, 체제 변화를 위한 구체적 요구안 마련이나 알제리의 미래상을 그리지도 못하였다. 2월 말이 되어가면서 CNCD는 ‘운동을 재구성’한다는 명분으로 대중동원 기획을 그만두었다. 제1야당인 문화민주 행동당(Rally for Culture and Democracy, RCD)의 경우 3월 초까지 시위 조직화를 이어나갔지만, 수백 명만이 참석하는 소규모 집회에 그쳤다. 7) 알제리 혁명과 알제리 노동자운동의 전망 CNCD나 어떤 재야세력도 알제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부활시키고 혁명적 열정을 다시 불붙이기란 당분간은 요원해 보인다. 그렇다면 알제리에서는 무엇이 이집트, 튀니지와 달랐기에 이런 결과가 찾아왔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먼저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12월에서 2월까지 일어난 시위는 그동안 쌓여왔던 불만이 폭발하면서 이전까지와는 질적으로 다른 무언가를 창출해낸 반면, 알제리에서 이러한 자발적인 대중동원은 지난 몇 년간 거의 일상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1월의 시위는 많은 점에서 그 규모가 컸을 뿐 과거시위와 ‘거의 동일’했다. 이 때문에 처음부터 정치적 요구가 부재하였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다. 이집트에서 정치세력은 애초에 경제적 요구와 함께 부패한 국가와 억압적 권력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내걸었다. 반면 알제리에서는 몇 년 동안이나 똑같은 분배문제를 둘러싸고 시민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는 했지만, 정작 정치적 요구는 부재했다. CNCD는 2월 들어 정치적 요구를 포함하려 노력하였으나, 그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또한 소요에 대한 알제리인들의 피로감을 고려하여야 한다. 수년에 걸친 내전 때문에 정치적 안정과 평화를 갈구하는 이들이 많았다. 광범위한 불만에도 오랫동안 알제리인들의 삶을 위협했던 일상적 폭력을 다시금 불러올지 모르는 장기적 정치 불안정 상태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했던 것이다. 비록 혁명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알제리의 운동세력은 시위를 통해 비상계엄법이 해제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비록 작은 승리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직화와 노동자 운동 강화를 위한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다. 부테플리카 정권을 압박하여 그가 약속한 정치적 자유를 말이 아닌 현실에서 쟁취하고, 그를 통해 나타날 성장의 공간을 이용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알제리의 사회단체와 노조에 달렸다. 결론 리비아에 대한 서방의 ‘인도주의적 개입’이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리비아는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리비아에 대한 군사공격이 이 세 나라를 비롯한 아랍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판단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그 영향이 긍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독재정권을 지원해 왔던 서방세계는 현재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해있다. 명확한 것은 서방 강대국들이 ‘인도주의적 개입’을 구실로 변화된 상황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재확립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의도가 관철된다면 서방 강대국들은 자신들이 의존해 온 기초적인 정치경제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지역의 사회·정치적 변화를 억누르려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껏 얻어낸 성과를 공고히 하기 위해선 민주세력과 노동자 운동이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알제리 CNCD에 참가한 독립 노조와 운동조직들은 세력을 늘려 부테플리카를 압박하여 자신이 약속한 개혁을 수행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3국 모두에서 민주화 세력과 노동자 운동 세력은 정치적 제약이 느슨해짐으로써 형성된 정치적 공간을 활용하여 기반을 늘려갈 필요가 있다. 북아프리카의 노동조합이 최근의 시위에서 배워야 할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젊은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의 잠재적 역량이다. 이들 집단은 아프리카 대부분 국가에서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프리카의 노동조합이 조직률 하락과 영향력 상실에 대응하기 위해선 이들 부문을 조직해야 한다.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에서 비공식 부문 노동자를 조직하고 그들의 요구에 대응할 방법을 찾는다면 이들 국가의 노동조합은 시위 주요 세력과의 결합을 강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시위는 국제 연대를 위한 좋은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민주화 시위대와 노동자들은 서로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고, 깃발과 현수막을 통해 서로의 투쟁을 지지하였다. 알제리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무라바크가 퇴임하기 불과 며칠 전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연대집회를 벌였다. 이제 상징적 연대를 넘어 실질적 교류를 할 때이다. 아프리카 노동자들은 독립노조의 설립과 운영,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대응, 그리고 정치적 참여의 계기를 모색하는 데 있어 서로의 경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노조와 다른 운동세력은 사회ㆍ경제적 변화를 위한 주장을 이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장기적 관점에서 조직화를 진행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투쟁을 주도해야 한다. 혁명은 진정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재정위기와 구제금융의 악순환에서 증폭되는 유럽연합의 위기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유럽연합(EU)에 지원을 신청하는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재정위기를 겪어오던 포르투갈이 결국 2011년 4월 6일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7-9일 헝가리에서 개최된 비공식 EU 재무장관 회의에서는 포르투갈에 약 800억 유로(약 125조 원)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잠정 결정했다. 이로써 포르투갈은 작년 5월 그리스(1,100억 유로)와 11월 아일랜드(850억 유로)에 이어 구제금융을 받는 세 번째 유로존 국가가 되었다. [%=사진1%] 포르투갈 재정위기의 전개 사실 포르투갈의 구제금융 신청은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다. 세계 금융위기의 여파로 포르투갈은 2008-2009년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경기침체로 세수가 감소한 반면 경기부양을 위해 세출이 증가하면서 재정적자 비율이 2008년 GDP 대비 -2.9%에서 2009년 -9.3%로 확대됐다. 정부부채 비율도 같은 기간 GDP 대비 65.3%에서 76.1%로 상승했다. 2010년 재정적자 비율이 -7.3%로 다소 개선되었으나 정부부채 비율은 82.1%로 악화됐다. 2010년 말 실업률은 역대 최고치인 11%를 기록했다. 그 결과 2011년 경제성장률이 다시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으로 전망됐다. 특히 아일랜드가 구제금융을 신청한 이후 포르투갈의 재정위기에 대한 우려가 급속히 확산됐다. 11월 말부터 포르투갈 국채 신용등급은 아일랜드와 동일한 '요주의 대상'으로 떨어졌다. 올해 2월에는 10년 만기 국채금리가 한계치(그리스와 아일랜드가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된 수치)인 7%를 넘어섰다. 유럽중앙은행(ECB)은 포르투갈의 자금조달비용을 낮추기 위해 그 동안 일시 중단했던 회원국 국채 매입을 2월 중순부터 재개하였으나 국채금리 상승세는 지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3월 23일 포르투갈 소크라테스 내각이 재정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마련한 긴축안이 의회에서 부결되자 국채금리가 또다시 급등했다. 그 직후 개최된 3월 24-25일 EU 정상회의에서도 유럽 금융안정화기구(EFSF) 개혁에 대해 실효성 있는 구체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올해 안에 총 200억 유로에 달하는 부채를 갚아야 하는 포르투갈은 결국 가중되는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구제금융을 신청하게 되었다. 구제금융안은 다음 달 EU 경제ㆍ재무장관이사회(ECOFIN)에서 승인될 예정이다. 안이 확정되면 작년 그리스 위기 이후 조성된 7,500억 유로 규모의 유럽금융안정기금(EFSF)에서 2/3를, IMF가 1/3을 지원하게 된다. 포르투갈 재정위기의 원인 포르투갈의 경우 2010년 긴축재정에도 불구하고 재정위기가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포르투갈은 2010년 공공부문 임금 삭감(5%)과 민영화, 신규채용 및 연금 동결, 부가세율 인상, 국민연금 축소, 공기업 및 지방정부 재정지원 축소 등 강력한 긴축정책을 실시했지만 결국 재정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포르투갈 경제의 취약성을 반영한다. EU의 자체 분석에 따르면, 포르투갈의 노동생산성은 EU 27개국 평균치의 70%에 불과하다. 그 원인으로는 미흡한 인적자본 축적, 낮은 연구개발 투자, 임금의 하방경직성 등이 거론된다. 또 포르투갈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 계속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2000년대 들어 경상수지 적자는 GDP 대비 10%에 달하고 있다. 장기에 걸친 경상수지 적자를 대외차입으로 보전함으로써 외채가 급증한 결과, 민간부문을 포함한 2010년 총외채는 그리스나 스페인보다 높은 GDP 대비 213%에 달한다. 유로존의 모순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사태의 현상을 열거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일랜드와 남부유럽 국가의 재정위기는 유로 단일 체제에 내재한 구조적 모순이 세계 금융위기라는 정세적 요인과 결합, 폭발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유로존 탄생 이후 이들 주변국의 국채금리는 독일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수렴했고, 그 결과 금융자본이 대거 유입되어 산업의 금융화와 서비스화를 촉진했다. 독일 등 유럽연합 중심국에 비해 기술력과 생산력이 열위에 놓인 이들 주변국의 제조업은 붕괴했다. 그 결과 무역적자가 누적되고 성장잠재력이 고갈됐다. 반대로 중심국은 주변국에 대한 무역흑자와 자본수출로 막대한 수익을 누렸다. 단적으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독일인과 프랑스인은 전체 부채 증권의 약 50%를 보유하고 있다. 구제금융이라는 것도 실은 자국 금융자본의 부실화를 막기 위한 방안이다. 다음은 스페인? 이제 초점은 스페인으로 모아지고 있다. EU의 2010년 말 통계에 따르면 스페인의 재정적자는 2009년 -11.1%, 2010년 -9.3%, 2011년 -6.4%로, 정부부채는 같은 기간 53.2%, 64.4%, 69.7%로 예상된다. 이는 지금까지 구제금융을 신청한 3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한 수치이지만,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스페인의 경우 무역적자가 만성화되어 그 규모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을 기록하고 있고, 특히 금융위기로 부동산 버블이 붕괴하면서 저축은행이 대거 부실화된 것이 커다란 위험요소다. 스페인의 공식 실업률은 20%를 상회하며 청년 실업률은 무려 40%를 상회한다. 물론 둘 다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재정위기에 처한 국가를 공략 대상으로 삼는 금융자본의 투기행태도 위기를 촉진할 수 있다. 최근 ECB가 중심부 국가의 통화긴축 압력에 따라 기준금리를 인상한 것도 스페인의 자금조달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구제금융 금리가 ECB의 기준금리에 연동되므로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 등 구제금융국의 디폴트 위험이 커질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적 유럽의 비민주성 유럽 5위 경제국인 스페인이 구제금융을 신청할 경우 그 규모는 포르투갈보다 4배 많은 3,000억 유로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만에 하나 이러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현재 EU가 조성한 재원으로는 구제금융을 제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맥락에서 작년 말부터 EU 차원의 공동국채(E-Bond) 발행이 일종의 대안으로 제기되었지만, 엄격한 재정규율을 주장하는 독일의 반대로 의제로 채택되지 않고 있다. 중심국 우파들은 '살찐 돼지들(PIGGS)'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우리 '국민'의 혈세를 쏟아 부을 수 없다는 여론을 조장하기도 한다. 분명, 재정위기와 구제금융의 악순환이 경제적 이유에서든 정치적 이유에서든 지속될 수는 없다. 하지만 '재정동맹 없는 화폐동맹'으로서 EU가 진정한 '연방국가'로 거듭나는 것도 요원하다. 현재 유럽 위기에 대한 지배계급의 해법은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중요한 사실은 EU와 각국의 지배계급이 유럽 민중을 자신의 삶과 직결된 정치적 논의로부터 철저히 배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유럽 민중의 삶과 미래와 직결된 EU의 화폐·재정 정책은 유럽의회의 현안이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스ㆍ아일랜드ㆍ포르투갈 구제금융 지원 계획도 유럽 민중의 의사를 철저히 무시한 결정이었다. 지배 엘리트에 의한 민주주의의 부정, 또는 혹자의 표현대로 '국가 없는 국가주의'야말로 EU의 근본적 결함이다. 또 다른 세계를 위한 투쟁만이 대안이다 2010년 이후 유럽 각국의 노동자들은 긴축재정이 경제위기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술책이라며 자국 정부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또한 구제금융이 중심부 국가와 금융자본의 이해를 위해 (주변부) 민중의 희생을 강요하는 방안이라며 EU와 IMF를 비판하고 있다. 포르투갈의 양대 노총인 노동자전국연맹(CGTP-Intersindical)과 노동자총연합(UGT)도 작년 11월 정부의 긴축정책에 항의하며 사상 최대 동맹 총파업을 전개한 바 있다. EU가 구제금융 제공 조건으로 포르투갈에 더욱 강력한 긴축정책을 부과한 다음 날, 헝가리에서는 유럽노조연맹(ETUC) 소속 노동자 5만여 명이 연대시위를 벌였다. 소중한 성과다. 관건은 이런 흐름을 '신자유주의적 유럽'을 변혁하기 위한 국제적 대안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지금까지 유럽 통합 프로젝트가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역으로 EU의 해체는 필연적으로 유럽 민중들을 세계화의 위험에 더 큰 강도로 노출시켜 상호 파괴적 경쟁을 야기할 것이다. 지금 당장 확실한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유럽 민중의 발의를 발판으로 삼아 '또 다른 유럽'을 건설하기 위한 국제적 대안을 구체화하는 것은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과제다. 이것은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와 정면으로 대결해야 할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