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서는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독재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지역이 점점 늘고 있다. 무아마르 엘 카다피는 반정부 세력을 “집집마다” 찾아내서 살해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이다. 바레인에서는 다음 달 열릴 예정이던 F1 그랑프리 경기가 취소되었다. 바레인 인구의 5분의 1이 넘는 10만여 명이 진주 광장에 모여 하마드 빈 이살 칼리파 국왕 정권의 종식을 요구하였다. 예멘에서도 수천 명의 인파가 수도 사나의 광장에 모여 반정부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다.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속한 여당 전국민회의(General People’s Congress) 소속 의원들은 독립 정당 창당을 위해 사퇴하였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요르단, 알제리, 모로코 등지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아랍세계 지도자들은 전례 없이 벌어지고 있는 이 저항의 물결을 두고 외세의 개입 또는 순간의 열정에 사로잡힌 철부지 젊은이들의 치기가 만들어낸 전염병 같은 것이라 한다. 주류 언론은 이보다는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대개 이 시위를 두고 온라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의 힘을 빌어 번개처럼 갑자기 등장하여 들불처럼 번져가는 우발적인 집단행동으로 묘사할 뿐이다. 실제로 반정부 시위가 번져가는 속도를 보면 놀라우며, 여기에 SNS의 역할은 간과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태를 이렇게 서술하는 것은 현재 진행 중인 투쟁의 특정한 요구와 그 역사적 성격을 해명하는 데 불충분하다. 이러한 묘사만으로는 아랍 세계의 저항 운동이 등장하게 된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이 지역 각국의 장기적 변화의 잠재성을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여기서는 무바라크의 하야로 이어진 이집트의 저항(1.25혁명)을 중심으로 현재 아랍세계 변화의 미묘한 동역학을 살펴볼 것이다. 1.25 혁명은 이 지역 다른 국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집트인들 역시 튀니지의 경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무바라크를 퇴진으로 이끈 1월 25일 타흐리르 광장의 대규모 시위가 있기 바로 며칠 전, 튀니지에서는 시민들의 힘으로 독재자 벤 알리 대통령을 축출한 바 있었던 것이다. 1.25혁명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으며,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세력, 젊은이, 노동자들이 지난 몇 년간 벌인 조직화의 결과였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1.25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고, 혁명을 통해 창출된 구조적 변화의 잠재성을 평가하는 데 필수적이다. 혁명의 기원: 30년간의 신자유주의와 독재 대체 무엇이 1월 25일 수백만의 이집트인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하고, 특히 타흐리르 광장을 중심으로 18일 동안 그 동력을 유지한 것일까? 반체제 및 청년 단체들에 의해 폭로된 경찰의 부패와 인권유린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다. 애초 계획은 이집트 경찰의 날이던 1월 25일에 내무부 앞에서 집회를 열어 장관의 사퇴를 촉구할 예정이었다. 시위대의 요구 중에는 최저임금 부활, 대통령의 연임을 두 번으로 제한, 억압적인 계엄법의 철폐(아래에서 상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수십 년간 이집트 사회에 만연한 경제적 격차의 확대와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는 상황이 점점 더 절망적이 되면서 이러한 요구들이 제출된 것이며, 집회를 조직한 이들은 1월 25일에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계급 양극화, 독재정권과 미국과의 동맹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집트의 현재 정치, 사회적 구성의 기원은 1970년 가말 압델 나세르 초대 대통령의 죽음 이후 혼란상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세르의 민족주의적 외교정책과 인민주의적 독재통치가 해체되었고, 1970년대 나세르의 후임자인 무함마드 안와르 사다드 대통령은 나세르의 국가주도 산업화 정책으로 등장한 신도시자본가계급과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외국자본에 개방했다. 또한 사다드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과 동맹을 맺어, 미국의 중동 패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수십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 미국, IMF, 세계은행 등이 전파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공기업의 사유화를 시작하고, 보건의료, 교육, 공공 부문 임금, 사회복지에 대한 공공 지출을 삭감했다. 1981년 사다드 대통령 암살 이후 정권을 장악한 무바라크 대통령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했다. 무바라크 치하 30년 동안 시행된 경제개혁은 나세르가 도입한 식량 보조금 삭감, 토지개혁 역전, 농촌지역 부동산시장 자유화, 공공기업 사유화, 국제금융시장과 외국투자에 대한 추가 개방, 세제혜택과 미약한 노동기준이 적용된 경제특구 건설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토지개혁의 역전으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떠났고, 도시는 곧 도시빈민과 실업자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공공기업의 사유화와 함께 정리해고, 실질 임금 축소, 노동조건 악화, 노동유연화 등이 도입되었다. 2002년의 도입된 경제 특구법은 이러한 노동조건 악화를 심화시켰다. 티모시 미첼 콜롬비아 대학 교수에 따르면 무바라크의 정책은 공공재원을 더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것이었고, 자원을 노동집약적 산업, 농업발전, 교육에서 금융자본과 투기세력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었다. 무바라크 정권은 소수 자본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들에게 공공기업 매각이나 정부조달 관련 특혜를 제공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무바라크의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와 아흐메드 나지프 전 총리(2004년~2011년 1월)의 영향 아래 이 밀월관계는 더욱 공고화되었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아흐메드 에즈(Ahmed Ezz)라는 기업가는 여당인 민족민주당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의회 기획재정위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에즈는 무바라크 부자와 유착하여 공식적으로 국유 철강회사를 통제하였고, 그 생산분을 자신이 소유한 에즈(Ezz) 철강으로 돌렸다. 지난 10년 동안 에즈의 이집트 철강 시장 점유율은 35%에서 60%를 상회하게 되었다.1) 이들 재계 엘리트들이야말로 이집트의 놀라운 경제성장(2005년~2008년 사이 평균 GDP 성장률 7%)의 핵심 수혜자이다. 그렇지만 높은 경제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계급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이집트 국민의 약 40%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생활한다. 100여 개 가문이 이집트 부의 9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실업률은 10%에 달하고, 대졸 청년 실업률은 30%이다. 취업인구 중 60%는 비공식부문에 종사한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민주적 권리에 대한 광범위한 탄압을 통해 소수 엘리트의 부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왔다. 1981년 사다드의 암살로 인해 시행된 비상계엄을 테러위험에 대한 대응으로 정당화하며 30여 년 동안 유지했다. 비상계엄법률은 경찰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고, 무기한 구금을 허용하며, 헌법에 명시된 권리를 유예했다. 또한 검열을 합법화하고, 집회시위 자유를 제한하며, 승인 받지 않은 정치조직의 형성을 금지했다. 2010년 11월에 시행된 지난 총선의 부패상은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총선에서 크게 선전한 이집트의 최대 야당인 무슬림 형제단은 광범위한 탄압을 받았다. 이들은 선거운동을 제한당하고, 당원과 지지자 천여 명이 구속되어 선거권을 박탈당했으며, 유권자들의 투표권은 원천 봉쇄되었다. 이렇게 구조화된 경제적 양극화와 광범위한 정치탄압은 이집트 민중의 더욱 격렬한 분노를 불러왔고 결국 1.25 혁명을 촉발했다. 여러 계급으로 구성된 광범위한 대중들은 이집트 정부가 민중이 아닌 다른 이들, 즉 신자유주의 엘리트, 미국, 이스라엘에 봉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와 이 정부가 대변하는 체제에 대해 다양한 사회경제적, 정치적인 불만을 품은 이집트 시민들이 무바라크 정권을 하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혁명의 주체: 청년과 자주적 노동자 운동 주류 언론은 고등교육을 받은 이집트 청년들이 시위의 핵심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또 페이스북, 트위터 등 온라인 매체가 집회 동원에 보여준 역할에도 주목한다. 이렇게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를 강조함에 따라 청년층의 집회 참여는 아무런 기획 없이 조직되지 않은 우발적인 행동으로 묘사된다. 물론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사람들 중 과거에 집회 참여 경력이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활동을 해왔고, 정치적 세력으로 조직화해 왔던 집단도 분명 있었다. 예컨대 1월 25일 첫 집회를 공동주최하고, 이후 18일 동안 주도적 역할을 한 4.6 청년운동(April 6 Youth Movement)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의 활동은 2008년 4월 나일텔타 주변에 위치한 섬유업 중심지에서 일어난 노동자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또 다른 단체로는 경찰들이 몰수한 마약을 서로 나누어 갖는 사진을 개인 블로그에 올린 후 경찰한테 살해당한 소기업인의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도 있다. 이 단체는 결성 직후 광폭한 경찰의 폭력과 부패에 반대하는 전면적인 투쟁으로 확산됐다. 이와 같은 단체들이 유동적인 네트워크 형태를 가지고, 주로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에게 리더가 없는 것도 아니며, 이들이 지닌 힘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이집트 청년들이 온라인 매체를 폭압적 상황과 사이버시대에 적합한 조직화 수단 및 형태로 활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언론의 주목을 받는 두 세력이 있다. 무슬림 형제단과 변화를 위한 국민연합(National Association for Change)이다. 국민연합의 경우 그 리더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가 특히 이목을 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 최대 여당이라는 점 외에도 특히 미국인들에게 이슬람 극단주의라는 망령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지난 몇 년간 무장투쟁을 지양하고 법적 체계 아래서 활동해 왔으며, 무바라크 정권은 지난 총선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을 어느 정도 용인해 왔다. 2009년까지 IAEA사무총장을 지낸 엘바라데이는 시위대 공식대표로 정부와 협상을 주도했고, 차기 대통령직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언론을 많이 타게 되었다. 그렇지만 무슬림 형제단이건 엘바라데이건 1.25혁명을 주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들 모두 1월 25일 최초의 시위에 대해선 신중한 태도를 취했었으며, 엘바라데이는 시위대를 지지하지만 이들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이야기한 바도 있다. 이들보다 관심을 못 받긴 했지만 또 다른 중요한 운동 주체가 있다. 바로 이집트의 노동자들이다. 2월 9~11일에 다양한 업종(섬유, 군용품, 우편, 운송, 병원, 행정 등)에 종사하는 공공, 민간부문 노동자들 수만 명이 파업에 나섰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모인 시민들은 이러한 노동자의 행동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정권을 압박하는 데 파업이 갖는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했다. 국제노동진영은 노동자들의 행동이 형세를 일변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집트 노동자들이란 이집트 유일 합법 노조인 이집트노동조합총연맹(ETUF)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957년 설립된 이집트 노동자 총연맹은 61년 이집트노총으로 바뀐 후 정권의 통제 아래 노동자의 투쟁을 억압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노총 후세인 메가웨르 위원장은 집권여당인 민족민주당원으로서 무바라크 치하에서 인력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메가웨르는 수에즈 시멘트 회사의 이사회 임원이기도 한데, 이러한 지위를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축재한 혐의를 받고 있다.2) 따라서 이집트노총이 대부분의 이집트 노동자들과 국민들이 무바라크의 하야를 요구하는 가운데도, “인민과 조국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위대한 지도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정통성을 전적으로 지지”한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법적으로 이집트의 모든 노조는 이집트노총에 가입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2월 9~11일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이집트 노총이라는 공식체계 밖에 파업위원회를 구성하여 자신들을 대표하고 그 지도를 따랐다. 이러한 조직화는 선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이집트 노동자들은 무바라크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투쟁해 왔다. 1984년부터 1989년 워싱턴 컨센서스에 따른 정책들, 예를 들면 의료보험과 연금의 임금 공제액이 두 배로 상승한 데 반대하며 도로를 막고, 방화를 하거나 열차를 부수는 등 극단적인 전술을 동원하여 투쟁한 바 있다. 2004년에서 2009년 사이에 17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1,900건이 넘는 파업 등 쟁의 행위에 참여하였고, 이때에도 2월 9~11일 파업과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파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004년부터 이어진 파업은 2008년 4월 섬유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절정에 달해 4.6 청년운동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 반대 대중투쟁과 더불어 이집트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집트사회에 저항의 문화를 심었”고, “시민권과 권리에 대한 인식을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몇 년간에 걸친 노동자들의 행동은 민주노조운동으로 싹트기 시작하였다. 2007년 12월, 5만 5천 명의 지방 세무원 파업의 결과, 경제적 요구를 쟁취했을 뿐 아니라 부동산세무원 독립 노조라는 이집트노총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노조가 사상 처음으로 결성되었다. 그리고 1.25혁명이 한창 무르익던 1월 30일, 독립 노조들과 노동자위원회가 이집트노총으로부터 독립된 이집트독자노조연맹(EFTU)의 결성을 발표했다. 2월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중에는 자신의 요구를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 지은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 노동자는 무바라크의 사임을 요구했다. 일부는 근본적인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를 요구하였다. 예컨대 철강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1) 무바라크 대통령과 정권과 관계된 모든 인사들의 즉각적인 사임, 2) 정권 인사 등 모든 부정부패 인사의 재산 몰수, 3) 이집트노총 해산과 민주노조 결성, 4) 매각, 폐쇄, 사유화된 공기업의 몰수, 노동자 민중의 통제를 통한 공공부문 국유화, 5) 생산, 가격, 분배와 임금을 감시할 수 있는 직장위원회 구성, 6) 모든 사회집단들이 참여하는 제헌의회 소집. 새롭게 결정된 이집트독자노조연맹의 요구는 월 최저임금 1,200이집트 파운드(1984년에 규정된 현 최저임금의 약 4배), 최저임금 10배로 최고임금 제한, 사회보장, 보건, 주거, 교육, 연금, 복지, 결사의 자유 등에 대한 권리보장 등이 있다. 2월 13일 이집트독자노조연맹은 노동자들에게 이집트노총을 탈퇴하고 독자적 노조를 건설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3) 이러한 요구는 이집트 민주화운동에 유의미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며, 노동자와 민주노조의 역할이 무바라크 정권을 전복하는 데 중요했던 만큼 미래에도 그러해야 함을 보여 준다. 2월 무바라크의 하야 이후에도 파업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은행을 닫고, 대중교통을 멈추고, 섬유공장 가동을 멈추고, 인플레이션에 한참 미달한 임금상승률을 보전하기 위한 임금상승과 경영구조의 변화를 요구함으로써 경찰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서로 다른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연대투쟁에 나서며 연대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이제 단결된 노동자의 힘을 깨달은 것으로 보이며, 이집트의 변혁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역할을 예감하게 한다. 군부의 위치 무바라크 사임 후 군 최고위원회가 이집트의 통치를 맡고 있다. 최고위원회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위원장은 2월 11일까지 무바라크 정권의 국방부 장관이었다. 탄타위는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위대에 참여하고 이외에도 몇 가지 포퓰리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시위대의 호감을 사긴 했지만, 정치적 변화에는 극도로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 군부는 무바라크 정권 및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었으며, 이를 통해 많은 특혜를 받아왔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한다면 왜 시위대가 무바라크의 사임에 군부의 개입을 강력히 요구하였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집회가 벌어지는 동안 군이 개입을 자제하였기 때문에 집회참가자들은 군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이집트 군대는 나세르 시절부터 이스라엘과 서구열강에 맞서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상당한 사회적 존중을 받고 있다는 이유도 있다. 더욱이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사병과 하급 장교들의 처지가 이집트 청년들이 겪는 현실과 유사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군사 엘리트는 구체제 아래서 많은 특혜를 받았다. 군은 지난 30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받은 400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의 수혜자였다. 이 돈은 국가안보와 방위 산업뿐 아니라 시멘트, 건설, 석유, 올리브유, 식수 등 다양한 산업에 투자되었다. 또한 군부는 넓은 사막과 해안 토지를 내외국인 소비자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쇼핑몰, 관문도시, 해변 휴양지 등으로 개발했다. 군부는 명백히 현상 유지에 관심이 있다. 현재 군부는 이집트인들의 분노를 자극하지 않는 방식으로 최대한 빠르게 저항을 진정시키고 사회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일단 파업 금지조치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극단적인 방법 대신 노동자들에게 직장으로 복귀하라는 문자 메시지를 먼저 보냈다. 군부는 그 정당성이 심히 의심되던 의회를 해산시키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6개월 이내에 선거를 실시할 것을 약속하였다. 군부는 애초에 헌법 개정 초안 마련에 직접 개입하겠다는 입장을 바꿔서 현재는 이를 담당할 전문가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이 위원회에는 무슬림 형제단 단원 등 야당 세력들이 참여하고 있고 집회 지도자들은 이를 수용한 상태이다. 군 임시 정부에 느끼는 절망감이 커지고 있다. 노동계와 재야세력은 얼마 전 개각을 통해 무바라크 시설 주요 장관들이 유임되고, 이집트노총의 간부가 노동이민부 장관으로 임명된 데 대해 비판을 하였다. 시위대는 여전히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 임시정부 폐지, 최근 시위로 투옥된 모든 인사 석방, 내무부 구조조정을 비롯한 국가 치안 기구 해체라는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시위를 계속 이어나갈 것임을 천명하였다. 4.6운동은 2월 25일부터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타흐리르 광장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였다. 미래에 대한 전망 이집트인들은 그간의 약속에 대한 이행을 보증하고, 민간으로의 권력 이양을 진행해야 하지만, 대중동원 이외에는 군부의 권력을 견제할 수단이 없는 상황이다. 설령 이집트 민중들이 이 과업에 성공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권력이 이양된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이집트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여론조사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암르 무사(Amr Moussa)는 외부무 장관으로 활동하다 무바라크 정권 동안 아랍연맹의 사무총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아랍세계 저항의 물결의 근본적 원인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꼽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정부와 재계 엘리트의 강력한 공조를 통한 개발을 제시한다. 무사는 또한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 유지 및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지지하는 편이라, 오마르 술래이만 부통령에 이어 미국이 두 번째로 선호하는 카드이다. 무사는 이집트에 다당제 민주주의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며, 더 자유로운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무사 또는 그 지지율이 훨씬 낮은 엘바라데이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정부주도의 개혁을 통해 이집트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수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집트 노동자와 좌파의 단호한 장기 투쟁을 통해서만 재계와 군부 엘리트의 권력을 해체하고, 이집트 경제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역전시키고, 혁명적 변화라는 약속을 이룰 수 있다. 이집트의 미래에 좀 더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는 전문가들도 있다. 존 윅스(John Weeks) 런던대학 교수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근본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 근본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윅스 교수는 80년대와 90년대 독재에서 민주적 이행이 일어난 중남미, 중앙유럽 및 동유럽, 남아공 등지에서 수립된 정부는 “철두철미하게 신자유주의적이었다”며 “진보세력의 힘이 약하면, 강력한 자본의 힘은 항상 권력 공백을 뚫고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이집트 1.25혁명과 유사한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은 군사독재에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계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한국 민중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중요한 성과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직선제 개헌을 독재 종식을 위해 가장 실현 가능한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는 요구로 눈을 돌리지 못했다. 군부가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수용하자, 운동세력은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기 보다는 어느 야당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을 거듭하였다. 결국 야당은 단결에 실패하였고, 이듬해 치러진 직선제 대선은 군 장성 출신의 노태우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정당성만 부여해 준 꼴이 되었다. 이 과정과 뒤이은 3당 합당 과정에서 군부는 야당과 타협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상당 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 군부의 권력을 유지했던 사회경제적 체계는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었고, 이후 집권세력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권리를 대가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6월 항쟁은 한국 노동자 운동에서 7,8,9 노동자 대투쟁으로 대변되는 중요한 공간을 열었다. 1987년 7, 8월 노동자들은 임금인상뿐 아니라, 민주노조의 건설을 위해 싸웠다.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은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의 연속선상에 위치하며, 이집트에서도 응당 그래야만 한다. 다만 한 가지 불행한 점은 당시 한국의 노동자 운동이 견결한 정치적 역량으로 결집할 만큼 단결되어 있지도, 그럴만한 경험도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1997년과 1998년 IMF 위기에 대해서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도 아쉬운 측면이다. 만약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이 한국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를 이해하고, 혁명에 대한 장기적 관점을 견지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를 정확히 분석하며, 내부의 차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단결을 강화해 나가는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 6월 항쟁이 그랬던 것처럼 무바라크 정권의 전복과 중동지역 독재정권의 붕괴가 노동자 민중에게 변화를 계획하고 요구하기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군부와 신자유주의 엘리트가 이집트의 차기 정권 아래서도 권력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한 번 열린 정치적 장을 다시 닫기는 어려울것이다. 노동자와 민주세력이 자기조직화를 계속하고, 새로운 정부 형성뿐 아니라 부패한 엘리트의 축출과 경제적 평등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놓지 않는다면 말이다. 부의 재분배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고, 장기적 안목의 꾸준한 투쟁(혁명적인 투쟁)을 통해 양자를 모두 달성해 나가는 것. 이 모두가 이집트 민중의 손에 달렸다. 이집트 민중이 자신들의 집단적 힘을 통해 무바라크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더 근본적인 변화가 자연히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근본적인 변화를 향한 투쟁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은 이집트 민중과 이집트의 미래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지금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 더 나아가 전 세계적 연대와 세계 노동자와 민중 운동의 잠재성이 모두 시험대에 오른 시점이다. 투쟁에 나선 아랍세계 민중들은 서로 서로를 지원하고 힘을 받아가며 투쟁하였다. 자신들의 투쟁이 서로에게 양분이 되어 이 투쟁은 전례 없는 규모로 자라났다. 연대는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 노동자들은 시위구호, 슬로건, 성명서를 통해 심각한 단협권 침해에 맞서 싸우는 위스콘신의 교사와 공무원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였다. 이집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힘을 통해 미국과 전 세계 각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조의 권리와 양질의 노동조건을 위한 투쟁이 본질적으로 노동해방이라는 동일한 과정의 일부분임을 알려낸 것이다. 이번 사태는 미국과 이집트 정부뿐 아니라, 국제 노동연대의 지배적인 모델, 즉 북반구 노조가 남반구 노동자들의 안내자이자 후원자 역할을 하며 북반구 노조의 기득권과 세계관만이 특권화되는 모델을 바꾸어 내기 위한 도전이기도 하다. 한국과 전세계의 노동자들은 이집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노조의 권리를 방어하고 진정한 정치적 권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싸움을 벌여나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공유해야 한다. 국제 노동운동은 무바라크의 하야까지 이집트에 많은 연대를 표시했다. 무바라크의 퇴장으로 이러한 연대와 상호교류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교류와 상호지원은 이집트인들이 시위를 계속하고, 자신들이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를 그릴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제 노동운동은 이집트 민중의 투쟁이 전해주는 핵심 메시지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혁명이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1) http://www.thenation.com/article/158682/great-arab-revolt 본문으로 2) http://www.thedailynewsegypt.com/human-a-civil-rights/etuf-to-schedule-a-meeting-with-pm-sector-protests-continue.html 본문으로 3) http://www.anarkismo.net/article/18851 본문으로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에서는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독재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는 지역이 점점 늘고 있다. 무아마르 엘 카다피는 반정부 세력을 “집집마다” 찾아내서 살해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이다. 바레인에서는 다음 달 열릴 예정이던 F1 그랑프리 경기가 취소되었다. 바레인 인구의 5분의 1이 넘는 10만여 명이 진주 광장에 모여 하마드 빈 이살 칼리파 국왕 정권의 종식을 요구하였다. 예멘에서도 수천 명의 인파가 수도 사나의 광장에 모여 반정부 시위를 이어나가고 있다.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속한 여당 전국민회의(General People’s Congress) 소속 의원들은 독립 정당 창당을 위해 사퇴하였다.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요르단, 알제리, 모로코 등지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아랍세계 지도자들은 전례 없이 벌어지고 있는 이 저항의 물결을 두고 외세의 개입 또는 순간의 열정에 사로잡힌 철부지 젊은이들의 치기가 만들어낸 전염병 같은 것이라 한다. 주류 언론은 이보다는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대개 이 시위를 두고 온라인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의 힘을 빌어 번개처럼 갑자기 등장하여 들불처럼 번져가는 우발적인 집단행동으로 묘사할 뿐이다. 실제로 반정부 시위가 번져가는 속도를 보면 놀라우며, 여기에 SNS의 역할은 간과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태를 이렇게 서술하는 것은 현재 진행 중인 투쟁의 특정한 요구와 그 역사적 성격을 해명하는 데 불충분하다. 이러한 묘사만으로는 아랍 세계의 저항 운동이 등장하게 된 정치, 경제, 사회적 맥락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이 지역 각국의 장기적 변화의 잠재성을 평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여기서는 무바라크의 하야로 이어진 이집트의 저항(1.25혁명)을 중심으로 현재 아랍세계 변화의 미묘한 동역학을 살펴볼 것이다. 1.25 혁명은 이 지역 다른 국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집트인들 역시 튀니지의 경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무바라크를 퇴진으로 이끈 1월 25일 타흐리르 광장의 대규모 시위가 있기 바로 며칠 전, 튀니지에서는 시민들의 힘으로 독재자 벤 알리 대통령을 축출한 바 있었던 것이다. 1.25혁명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으며,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세력, 젊은이, 노동자들이 지난 몇 년간 벌인 조직화의 결과였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1.25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고, 혁명을 통해 창출된 구조적 변화의 잠재성을 평가하는 데 필수적이다. 혁명의 기원: 30년간의 신자유주의와 독재 대체 무엇이 1월 25일 수백만의 이집트인들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하고, 특히 타흐리르 광장을 중심으로 18일 동안 그 동력을 유지한 것일까? 반체제 및 청년 단체들에 의해 폭로된 경찰의 부패와 인권유린에 대한 대중적 저항의 목소리가 높아진 것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다. 애초 계획은 이집트 경찰의 날이던 1월 25일에 내무부 앞에서 집회를 열어 장관의 사퇴를 촉구할 예정이었다. 시위대의 요구 중에는 최저임금 부활, 대통령의 연임을 두 번으로 제한, 억압적인 계엄법의 철폐(아래에서 상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수십 년간 이집트 사회에 만연한 경제적 격차의 확대와 민주적 권리를 억압하는 상황이 점점 더 절망적이 되면서 이러한 요구들이 제출된 것이며, 집회를 조직한 이들은 1월 25일에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길 바라고 있었다. 이집트에서 계급 양극화, 독재정권과 미국과의 동맹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집트의 현재 정치, 사회적 구성의 기원은 1970년 가말 압델 나세르 초대 대통령의 죽음 이후 혼란상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세르의 민족주의적 외교정책과 인민주의적 독재통치가 해체되었고, 1970년대 나세르의 후임자인 무함마드 안와르 사다드 대통령은 나세르의 국가주도 산업화 정책으로 등장한 신도시자본가계급과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외국자본에 개방했다. 또한 사다드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과 동맹을 맺어, 미국의 중동 패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수십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 미국, IMF, 세계은행 등이 전파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공기업의 사유화를 시작하고, 보건의료, 교육, 공공 부문 임금, 사회복지에 대한 공공 지출을 삭감했다. 1981년 사다드 대통령 암살 이후 정권을 장악한 무바라크 대통령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했다. 무바라크 치하 30년 동안 시행된 경제개혁은 나세르가 도입한 식량 보조금 삭감, 토지개혁 역전, 농촌지역 부동산시장 자유화, 공공기업 사유화, 국제금융시장과 외국투자에 대한 추가 개방, 세제혜택과 미약한 노동기준이 적용된 경제특구 건설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토지개혁의 역전으로 농촌 인구가 도시로 떠났고, 도시는 곧 도시빈민과 실업자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공공기업의 사유화와 함께 정리해고, 실질 임금 축소, 노동조건 악화, 노동유연화 등이 도입되었다. 2002년의 도입된 경제 특구법은 이러한 노동조건 악화를 심화시켰다. 티모시 미첼 콜롬비아 대학 교수에 따르면 무바라크의 정책은 공공재원을 더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것이었고, 자원을 노동집약적 산업, 농업발전, 교육에서 금융자본과 투기세력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었다. 무바라크 정권은 소수 자본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들에게 공공기업 매각이나 정부조달 관련 특혜를 제공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무바라크의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와 아흐메드 나지프 전 총리(2004년~2011년 1월)의 영향 아래 이 밀월관계는 더욱 공고화되었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아흐메드 에즈(Ahmed Ezz)라는 기업가는 여당인 민족민주당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의회 기획재정위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에즈는 무바라크 부자와 유착하여 공식적으로 국유 철강회사를 통제하였고, 그 생산분을 자신이 소유한 에즈(Ezz) 철강으로 돌렸다. 지난 10년 동안 에즈의 이집트 철강 시장 점유율은 35%에서 60%를 상회하게 되었다.1) 이들 재계 엘리트들이야말로 이집트의 놀라운 경제성장(2005년~2008년 사이 평균 GDP 성장률 7%)의 핵심 수혜자이다. 그렇지만 높은 경제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계급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이집트 국민의 약 40%는 하루 2달러 이하로 생활한다. 100여 개 가문이 이집트 부의 9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실업률은 10%에 달하고, 대졸 청년 실업률은 30%이다. 취업인구 중 60%는 비공식부문에 종사한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민주적 권리에 대한 광범위한 탄압을 통해 소수 엘리트의 부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왔다. 1981년 사다드의 암살로 인해 시행된 비상계엄을 테러위험에 대한 대응으로 정당화하며 30여 년 동안 유지했다. 비상계엄법률은 경찰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고, 무기한 구금을 허용하며, 헌법에 명시된 권리를 유예했다. 또한 검열을 합법화하고, 집회시위 자유를 제한하며, 승인 받지 않은 정치조직의 형성을 금지했다. 2010년 11월에 시행된 지난 총선의 부패상은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총선에서 크게 선전한 이집트의 최대 야당인 무슬림 형제단은 광범위한 탄압을 받았다. 이들은 선거운동을 제한당하고, 당원과 지지자 천여 명이 구속되어 선거권을 박탈당했으며, 유권자들의 투표권은 원천 봉쇄되었다. 이렇게 구조화된 경제적 양극화와 광범위한 정치탄압은 이집트 민중의 더욱 격렬한 분노를 불러왔고 결국 1.25 혁명을 촉발했다. 여러 계급으로 구성된 광범위한 대중들은 이집트 정부가 민중이 아닌 다른 이들, 즉 신자유주의 엘리트, 미국, 이스라엘에 봉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정부와 이 정부가 대변하는 체제에 대해 다양한 사회경제적, 정치적인 불만을 품은 이집트 시민들이 무바라크 정권을 하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혁명의 주체: 청년과 자주적 노동자 운동 주류 언론은 고등교육을 받은 이집트 청년들이 시위의 핵심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또 페이스북, 트위터 등 온라인 매체가 집회 동원에 보여준 역할에도 주목한다. 이렇게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를 강조함에 따라 청년층의 집회 참여는 아무런 기획 없이 조직되지 않은 우발적인 행동으로 묘사된다. 물론 타흐리르 광장에 모인 사람들 중 과거에 집회 참여 경력이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활동을 해왔고, 정치적 세력으로 조직화해 왔던 집단도 분명 있었다. 예컨대 1월 25일 첫 집회를 공동주최하고, 이후 18일 동안 주도적 역할을 한 4.6 청년운동(April 6 Youth Movement)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의 활동은 2008년 4월 나일텔타 주변에 위치한 섬유업 중심지에서 일어난 노동자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또 다른 단체로는 경찰들이 몰수한 마약을 서로 나누어 갖는 사진을 개인 블로그에 올린 후 경찰한테 살해당한 소기업인의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도 있다. 이 단체는 결성 직후 광폭한 경찰의 폭력과 부패에 반대하는 전면적인 투쟁으로 확산됐다. 이와 같은 단체들이 유동적인 네트워크 형태를 가지고, 주로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에게 리더가 없는 것도 아니며, 이들이 지닌 힘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이집트 청년들이 온라인 매체를 폭압적 상황과 사이버시대에 적합한 조직화 수단 및 형태로 활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언론의 주목을 받는 두 세력이 있다. 무슬림 형제단과 변화를 위한 국민연합(National Association for Change)이다. 국민연합의 경우 그 리더인 모하메드 엘바라데이가 특히 이목을 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집트 최대 여당이라는 점 외에도 특히 미국인들에게 이슬람 극단주의라는 망령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지난 몇 년간 무장투쟁을 지양하고 법적 체계 아래서 활동해 왔으며, 무바라크 정권은 지난 총선까지만 하더라도 이들을 어느 정도 용인해 왔다. 2009년까지 IAEA사무총장을 지낸 엘바라데이는 시위대 공식대표로 정부와 협상을 주도했고, 차기 대통령직을 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언론을 많이 타게 되었다. 그렇지만 무슬림 형제단이건 엘바라데이건 1.25혁명을 주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들 모두 1월 25일 최초의 시위에 대해선 신중한 태도를 취했었으며, 엘바라데이는 시위대를 지지하지만 이들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이야기한 바도 있다. 이들보다 관심을 못 받긴 했지만 또 다른 중요한 운동 주체가 있다. 바로 이집트의 노동자들이다. 2월 9~11일에 다양한 업종(섬유, 군용품, 우편, 운송, 병원, 행정 등)에 종사하는 공공, 민간부문 노동자들 수만 명이 파업에 나섰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모인 시민들은 이러한 노동자의 행동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정권을 압박하는 데 파업이 갖는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했다. 국제노동진영은 노동자들의 행동이 형세를 일변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집트 노동자들이란 이집트 유일 합법 노조인 이집트노동조합총연맹(ETUF)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1957년 설립된 이집트 노동자 총연맹은 61년 이집트노총으로 바뀐 후 정권의 통제 아래 노동자의 투쟁을 억압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집트노총 후세인 메가웨르 위원장은 집권여당인 민족민주당원으로서 무바라크 치하에서 인력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메가웨르는 수에즈 시멘트 회사의 이사회 임원이기도 한데, 이러한 지위를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축재한 혐의를 받고 있다.2) 따라서 이집트노총이 대부분의 이집트 노동자들과 국민들이 무바라크의 하야를 요구하는 가운데도, “인민과 조국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위대한 지도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정통성을 전적으로 지지”한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법적으로 이집트의 모든 노조는 이집트노총에 가입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2월 9~11일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이집트 노총이라는 공식체계 밖에 파업위원회를 구성하여 자신들을 대표하고 그 지도를 따랐다. 이러한 조직화는 선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이집트 노동자들은 무바라크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투쟁해 왔다. 1984년부터 1989년 워싱턴 컨센서스에 따른 정책들, 예를 들면 의료보험과 연금의 임금 공제액이 두 배로 상승한 데 반대하며 도로를 막고, 방화를 하거나 열차를 부수는 등 극단적인 전술을 동원하여 투쟁한 바 있다. 2004년에서 2009년 사이에 17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1,900건이 넘는 파업 등 쟁의 행위에 참여하였고, 이때에도 2월 9~11일 파업과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파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004년부터 이어진 파업은 2008년 4월 섬유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절정에 달해 4.6 청년운동의 형성으로 이어졌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 반대 대중투쟁과 더불어 이집트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집트사회에 저항의 문화를 심었”고, “시민권과 권리에 대한 인식을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몇 년간에 걸친 노동자들의 행동은 민주노조운동으로 싹트기 시작하였다. 2007년 12월, 5만 5천 명의 지방 세무원 파업의 결과, 경제적 요구를 쟁취했을 뿐 아니라 부동산세무원 독립 노조라는 이집트노총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노조가 사상 처음으로 결성되었다. 그리고 1.25혁명이 한창 무르익던 1월 30일, 독립 노조들과 노동자위원회가 이집트노총으로부터 독립된 이집트독자노조연맹(EFTU)의 결성을 발표했다. 2월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중에는 자신의 요구를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 지은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 노동자는 무바라크의 사임을 요구했다. 일부는 근본적인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를 요구하였다. 예컨대 철강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1) 무바라크 대통령과 정권과 관계된 모든 인사들의 즉각적인 사임, 2) 정권 인사 등 모든 부정부패 인사의 재산 몰수, 3) 이집트노총 해산과 민주노조 결성, 4) 매각, 폐쇄, 사유화된 공기업의 몰수, 노동자 민중의 통제를 통한 공공부문 국유화, 5) 생산, 가격, 분배와 임금을 감시할 수 있는 직장위원회 구성, 6) 모든 사회집단들이 참여하는 제헌의회 소집. 새롭게 결정된 이집트독자노조연맹의 요구는 월 최저임금 1,200이집트 파운드(1984년에 규정된 현 최저임금의 약 4배), 최저임금 10배로 최고임금 제한, 사회보장, 보건, 주거, 교육, 연금, 복지, 결사의 자유 등에 대한 권리보장 등이 있다. 2월 13일 이집트독자노조연맹은 노동자들에게 이집트노총을 탈퇴하고 독자적 노조를 건설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하였다.3) 이러한 요구는 이집트 민주화운동에 유의미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며, 노동자와 민주노조의 역할이 무바라크 정권을 전복하는 데 중요했던 만큼 미래에도 그러해야 함을 보여 준다. 2월 무바라크의 하야 이후에도 파업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은행을 닫고, 대중교통을 멈추고, 섬유공장 가동을 멈추고, 인플레이션에 한참 미달한 임금상승률을 보전하기 위한 임금상승과 경영구조의 변화를 요구함으로써 경찰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서로 다른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연대투쟁에 나서며 연대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들은 이제 단결된 노동자의 힘을 깨달은 것으로 보이며, 이집트의 변혁과정에서 노동운동의 역할을 예감하게 한다. 군부의 위치 무바라크 사임 후 군 최고위원회가 이집트의 통치를 맡고 있다. 최고위원회 모하메드 후세인 탄타위 위원장은 2월 11일까지 무바라크 정권의 국방부 장관이었다. 탄타위는 타흐리르 광장에서 시위대에 참여하고 이외에도 몇 가지 포퓰리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시위대의 호감을 사긴 했지만, 정치적 변화에는 극도로 부정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 군부는 무바라크 정권 및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었으며, 이를 통해 많은 특혜를 받아왔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한다면 왜 시위대가 무바라크의 사임에 군부의 개입을 강력히 요구하였는지 의문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집회가 벌어지는 동안 군이 개입을 자제하였기 때문에 집회참가자들은 군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이집트 군대는 나세르 시절부터 이스라엘과 서구열강에 맞서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상당한 사회적 존중을 받고 있다는 이유도 있다. 더욱이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사병과 하급 장교들의 처지가 이집트 청년들이 겪는 현실과 유사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군사 엘리트는 구체제 아래서 많은 특혜를 받았다. 군은 지난 30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받은 400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의 수혜자였다. 이 돈은 국가안보와 방위 산업뿐 아니라 시멘트, 건설, 석유, 올리브유, 식수 등 다양한 산업에 투자되었다. 또한 군부는 넓은 사막과 해안 토지를 내외국인 소비자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쇼핑몰, 관문도시, 해변 휴양지 등으로 개발했다. 군부는 명백히 현상 유지에 관심이 있다. 현재 군부는 이집트인들의 분노를 자극하지 않는 방식으로 최대한 빠르게 저항을 진정시키고 사회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일단 파업 금지조치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극단적인 방법 대신 노동자들에게 직장으로 복귀하라는 문자 메시지를 먼저 보냈다. 군부는 그 정당성이 심히 의심되던 의회를 해산시키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6개월 이내에 선거를 실시할 것을 약속하였다. 군부는 애초에 헌법 개정 초안 마련에 직접 개입하겠다는 입장을 바꿔서 현재는 이를 담당할 전문가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이 위원회에는 무슬림 형제단 단원 등 야당 세력들이 참여하고 있고 집회 지도자들은 이를 수용한 상태이다. 군 임시 정부에 느끼는 절망감이 커지고 있다. 노동계와 재야세력은 얼마 전 개각을 통해 무바라크 시설 주요 장관들이 유임되고, 이집트노총의 간부가 노동이민부 장관으로 임명된 데 대해 비판을 하였다. 시위대는 여전히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 임시정부 폐지, 최근 시위로 투옥된 모든 인사 석방, 내무부 구조조정을 비롯한 국가 치안 기구 해체라는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시위를 계속 이어나갈 것임을 천명하였다. 4.6운동은 2월 25일부터 대규모 시위를 벌이고, 타흐리르 광장에서 농성투쟁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였다. 미래에 대한 전망 이집트인들은 그간의 약속에 대한 이행을 보증하고, 민간으로의 권력 이양을 진행해야 하지만, 대중동원 이외에는 군부의 권력을 견제할 수단이 없는 상황이다. 설령 이집트 민중들이 이 과업에 성공하여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에 권력이 이양된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이집트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여론조사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받는 암르 무사(Amr Moussa)는 외부무 장관으로 활동하다 무바라크 정권 동안 아랍연맹의 사무총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아랍세계 저항의 물결의 근본적 원인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꼽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정부와 재계 엘리트의 강력한 공조를 통한 개발을 제시한다. 무사는 또한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 유지 및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지지하는 편이라, 오마르 술래이만 부통령에 이어 미국이 두 번째로 선호하는 카드이다. 무사는 이집트에 다당제 민주주의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며, 더 자유로운 정치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무사 또는 그 지지율이 훨씬 낮은 엘바라데이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정부주도의 개혁을 통해 이집트의 사회경제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수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집트 노동자와 좌파의 단호한 장기 투쟁을 통해서만 재계와 군부 엘리트의 권력을 해체하고, 이집트 경제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역전시키고, 혁명적 변화라는 약속을 이룰 수 있다. 이집트의 미래에 좀 더 회의적인 시각을 보내는 전문가들도 있다. 존 윅스(John Weeks) 런던대학 교수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근본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 근본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윅스 교수는 80년대와 90년대 독재에서 민주적 이행이 일어난 중남미, 중앙유럽 및 동유럽, 남아공 등지에서 수립된 정부는 “철두철미하게 신자유주의적이었다”며 “진보세력의 힘이 약하면, 강력한 자본의 힘은 항상 권력 공백을 뚫고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앞으로 닥칠 어려움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이집트 1.25혁명과 유사한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은 군사독재에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계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한국 민중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중요한 성과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직선제 개헌을 독재 종식을 위해 가장 실현 가능한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는 요구로 눈을 돌리지 못했다. 군부가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수용하자, 운동세력은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기 보다는 어느 야당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을 거듭하였다. 결국 야당은 단결에 실패하였고, 이듬해 치러진 직선제 대선은 군 장성 출신의 노태우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정당성만 부여해 준 꼴이 되었다. 이 과정과 뒤이은 3당 합당 과정에서 군부는 야당과 타협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상당 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 군부의 권력을 유지했던 사회경제적 체계는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었고, 이후 집권세력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권리를 대가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6월 항쟁은 한국 노동자 운동에서 7,8,9 노동자 대투쟁으로 대변되는 중요한 공간을 열었다. 1987년 7, 8월 노동자들은 임금인상뿐 아니라, 민주노조의 건설을 위해 싸웠다.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은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의 연속선상에 위치하며, 이집트에서도 응당 그래야만 한다. 다만 한 가지 불행한 점은 당시 한국의 노동자 운동이 견결한 정치적 역량으로 결집할 만큼 단결되어 있지도, 그럴만한 경험도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1997년과 1998년 IMF 위기에 대해서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도 아쉬운 측면이다. 만약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이 한국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를 이해하고, 혁명에 대한 장기적 관점을 견지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를 정확히 분석하며, 내부의 차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단결을 강화해 나가는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 6월 항쟁이 그랬던 것처럼 무바라크 정권의 전복과 중동지역 독재정권의 붕괴가 노동자 민중에게 변화를 계획하고 요구하기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군부와 신자유주의 엘리트가 이집트의 차기 정권 아래서도 권력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이들이 한 번 열린 정치적 장을 다시 닫기는 어려울것이다. 노동자와 민주세력이 자기조직화를 계속하고, 새로운 정부 형성뿐 아니라 부패한 엘리트의 축출과 경제적 평등에 대한 자신들의 요구를 놓지 않는다면 말이다. 부의 재분배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고, 장기적 안목의 꾸준한 투쟁(혁명적인 투쟁)을 통해 양자를 모두 달성해 나가는 것. 이 모두가 이집트 민중의 손에 달렸다. 이집트 민중이 자신들의 집단적 힘을 통해 무바라크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더 근본적인 변화가 자연히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근본적인 변화를 향한 투쟁이 가능해졌음을 의미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은 이집트 민중과 이집트의 미래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지금은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 더 나아가 전 세계적 연대와 세계 노동자와 민중 운동의 잠재성이 모두 시험대에 오른 시점이다. 투쟁에 나선 아랍세계 민중들은 서로 서로를 지원하고 힘을 받아가며 투쟁하였다. 자신들의 투쟁이 서로에게 양분이 되어 이 투쟁은 전례 없는 규모로 자라났다. 연대는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 노동자들은 시위구호, 슬로건, 성명서를 통해 심각한 단협권 침해에 맞서 싸우는 위스콘신의 교사와 공무원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였다. 이집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집단적 힘을 통해 미국과 전 세계 각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노조의 권리와 양질의 노동조건을 위한 투쟁이 본질적으로 노동해방이라는 동일한 과정의 일부분임을 알려낸 것이다. 이번 사태는 미국과 이집트 정부뿐 아니라, 국제 노동연대의 지배적인 모델, 즉 북반구 노조가 남반구 노동자들의 안내자이자 후원자 역할을 하며 북반구 노조의 기득권과 세계관만이 특권화되는 모델을 바꾸어 내기 위한 도전이기도 하다. 한국과 전세계의 노동자들은 이집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노조의 권리를 방어하고 진정한 정치적 권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싸움을 벌여나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공유해야 한다. 국제 노동운동은 무바라크의 하야까지 이집트에 많은 연대를 표시했다. 무바라크의 퇴장으로 이러한 연대와 상호교류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교류와 상호지원은 이집트인들이 시위를 계속하고, 자신들이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를 그릴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제 노동운동은 이집트 민중의 투쟁이 전해주는 핵심 메시지를 가슴에 새겨야 한다. “혁명이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1) http://www.thenation.com/article/158682/great-arab-revolt 본문으로 2) http://www.thedailynewsegypt.com/human-a-civil-rights/etuf-to-schedule-a-meeting-with-pm-sector-protests-continue.html 본문으로 3) http://www.anarkismo.net/article/18851 본문으로
대테러 전쟁과 식민지 유산의 청산 없이 해적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설 연휴는 해적 얘기로 가득했다. 향후 정치권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이른바 ‘설 민심’이 정치나 세금 이야기가 아니라 머나 먼 아프리카 땅의 해적 이름으로 채워졌다. 해적에 대한 분노, 단호한 응징의 목소리 속에는 피격된 선장의 몸에서 한국 해군의 총탄이 발견되었다는 것도, 군사작전이 가져다 줄 참극의 가능성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주의 이면 계약 문제와 충청권 개발 문제, 구제역 문제로 시끄러운 정국을 덮기 위한 대통령의 전격 담화가 시답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적을 두둔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상당한 난감함에 빠져야 했다. 해적이라는 이름의 비즈니스 현재 소말리아 인근 해역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적질은 단순 강도를 넘어 하나의 ‘산업’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다. 과거 소말리아 해적은 소말리아 인근 해역이나 자신들의 본거지 주변에서만 활동했다. 정박 중이거나 항해 중인 선박에 올라 타 선박 운행을 위해 금고에 보관 중인 현금을 털거나 선원들의 금품을 뺏어가는 형태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활동 범위나 조직 규모가 몰라보게 커졌다. 현재의 해적은 배의 이동 경로를 사전에 파악하는 팀, 직접 배를 나포하는 팀, 해적 본거지에서 협상을 진행하는 팀, 협상 결과에 따라 돈을 받아오는 팀 등으로 구성돼 매우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장거리 원정에 필요한 위성항법장치를 갖춘 모선과 승선에 필요한 장비(갈고리, 사다리 등)를 갖춘 서너 척의 스피드 보트를 이용해 움직인다. 자동소총은 물론 로켓추진탄(RPG)도 보유하고 있다. 나포한 어선을 모선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조업 중인 다른 어선과 함께 이동할 경우 적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해적 산업이 커지면서 나포 사건이 일어났을 때 협상을 도와주는 협상 전문가들도 등장해 협상 당사국과 해적 양쪽에서 수수료를 챙긴다. 이들은 대부분 런던 선박거래소의 브로커들과 연결되어 있거나 소말리아의 군벌 출신인 것으로 알려진다. 해적 소탕을 위해 여러 나라가 군사작전에 나서면서 위험성은 커지고, 이 산업에 연루된 사람들이 많아지니 ‘몸값’의 규모도 점점 커진다. 이렇게 챙긴 돈의 일부는 소말리아 지역 군벌의 자금으로 흘러들거나 두바이의 은행을 통해 세탁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분명, 현재 발생하는 해적 행위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낭만이 아니라 중대한 범죄 행위다. 각종 첨단 장비와 무기를 동원해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며, 이를 이용해 몸값을 뜯어내는 조직범죄다. 그러나 문제는 해적질을 제외하고 소말리아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는 데에 있다. 산업 기반은 커녕 다른 나라들처럼 돈이 되는 부존자원도 별로 없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추정한 바에 따르면 소말리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0달러 이하로,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 소말리아의 해적은 근절되어야 하지만, 군사작전을 통한 소탕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해적에 나서는 상황에서 소말리아인 전부를 ‘소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해적이 아니라 자경단 소말리아는 남한의 6배가 넘는 637,000㎢의 면적에 8-9백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인구가 얼마인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정부의 기능이 붕괴되어 있기 때문이다. 1991년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소말리아는 20년째 내전 상태에 놓여 있다. 현재 과도정부, 소말리랜드, 푼틀랜드 자치정부 등 3개 지역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10여 개의 군벌이 상호 갈등하고 있다. 해안선이 3,000㎞에 달하는 소말리아는 풍부한 어장을 갖추었고, 내전이 시작되던 무렵 고기잡이가 주요 생계 수단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붕괴되고 혼란스러운 시절이 계속되자 소말리아 해안에는 외국 선박들의 불법 조업이 시작됐다. 외국 선박들은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 소말리아 연안의 해산물을 싹쓸이 해갔다. 유럽의 거대한 쌍끌이 선박들이 매년 3억 달러 이상의 참치와 새우, 바다가재를 비롯한 해상 생물들을 쓸어갔다. 조그만 어촌 마을들은 하루아침에 생계수단을 잃어버리고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들도 나타났다. 그들은 거대한 드럼통을 소말리아 바다에 버리고 사라졌다. 유럽에서 톤당 1천 달러의 처리비용이 드는 폐기물을 톤당 3달러만 주고 바다에 버렸다. 이렇게 버려진 폐기물에는 중금속뿐만 아니라 핵폐기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안가 마을의 사람들은 병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렸고, 기형아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2005년에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버려지고 깨진 수백 개의 드럼통이 파도를 타고 해변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3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사능 질병으로 사망했다. UN의 소말리아 특사 아흐메두 아브달라는 “누군가 여기에 핵 물질을 버리고 있다. 카드뮴이나 수은 같은 중금속도 있다”라고 말했다. 해안가 마을 사람들이 소형 보트를 이용해 불법 조업선이나 폐기물 투기 선박들을 막기 시작했다. 때때로 그들은 배에 승선해 조업이나 투기에 대한 대가, 즉 일종의 벌금을 걷었다. 외국 선박들의 불법 조업과 폐기물 투기로 생계 수단을 잃고 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이렇게 거두어들인 돈을 마을의 생계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소말리아 해적’의 출발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해적이 아니라 ‘소말리아 해안 자경단’이라 부른다. 수굴레 알리라는 해적 리더 중 한 명은 해외 언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해상 강도라 여기지 않는다. 우리 바다에서 불법적으로 조업을 하고 투기하고, 무기를 운반하는 자들이 해상 강도다.”라고 말했다. 소말리아의 한 독립 언론 사이트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해적들은 나라의 영해를 지키는 국가 방위군으로, 그들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현재 산업화된 해적 행위를 정당화시켜주진 않는다. 그러나 군사작전을 통한 해적 소탕이 소말리아 해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히 보여준다. 불법 조업과 폐기물 투기로 생계 수단을 빼앗기고 질병에 고통 받는 소말리아 사람들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적개심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냉전이 끝나고 자신들의 전략적 이해가 사라지자 소말리아를 버렸던 미국은 ‘알 카에다와의 연계’를 운운하며 소말리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이웃 나라 에티오피아를 부추겨 전쟁까지 일으켰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룬다.) 오랜 내전으로 식량 확보조차 어려운 소말리아에서 해적 행위는 거의 유일하게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사업이다. 현실에 대한 절망, 외국에 대한 분노 속에 소말리아 사람들은 오늘도 해적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너도나도 몰려들어도 현재 소말리아 인근에는 20여개 국가가 해군함을 파견해 해적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그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연합해군 산하 ‘151-연합함대’(CTF-151)다. 151-연합함대는 해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2009년 1월 창설되었다. 한국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터키, 호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파키스탄, 캐나다, 덴마크 등 22개 국가가 참가하고 있으며, 30여 척의 군함과 항공기를 운용하고 있다. 둘째는 유럽연합(EU) 차원의 활동이다. 원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이루어지던 해적 퇴치 활동이 2008년 12월부터 EU의 ‘아틀란타 작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주도 아래 독일, 영국, 그리스 등이 군함과 군용기를 파견하고 있다. 셋째는 개별적으로 군함을 파견한 경우인데 일본, 중국, 러시아, 인도, 이란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고 있는 국가들은 UN 안보리 결의 1816호와 1846호에 따라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협의를 통해 소말리아 영해에 진입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고 있다. 한번 권한을 확보하면 유효기간 내에는 사전 통보 없이 자유롭게 소말리아 영해에 출입하면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이 집중되고 있지만 소말리아의 해적 산업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순찰해야 하는 범위만 해도 아덴만, 오만만, 아라비아해, 홍해, 인도양 등 너무 넓다. 그러나 군함의 보통 항해속도는 30노트로, 시속 약 55㎞ 정도에 불과하다. 우연히 현장에 있지 않으면 신고를 받고 출동해봤자 해적의 나포 행위를 사전에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군함 파견을 늘릴 수도 없다. 비용이 많이 들고 전력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나라들이 자국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해적퇴치 외에도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파견된 군대는 자국 선박의 보호 업무와 해적 대응 등 일상적인 군사작전 수행을 통해 일반적인 해상 훈련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군사훈련을 할 수 있다. 소말리아 해적들의 화력이 예전에 비해 성장했다고는 해도 각국의 해군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복싱에서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부러 져주는 스파링 파트너처럼, 각국은 군사력 향상을 위해 소말리아 해적을 이용하는 셈이다. 이러한 셈법은 소말리아 해적 퇴치에 나서고 있는 국가들 사이의 견제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현재 EU의 아틀란타 작전 사령관은 영국 해군이 맡고 있고 사령부 역시 영국의 노스우드에 설치되어 있다. 이는 아틀란타 작전을 주도한 프랑스의 해군력 증강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럽의회의 한 의원은 “EU의 독자행동이 NATO와의 기능 중복 등 불필요한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며 해적퇴치를 빌미로 한 군사력 증강 움직임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해적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보았지만 2006년 6월, 소말리아 이슬람법정연맹(Islamic Courts Union)이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했다. 이슬람법정연맹은 소말리아의 이슬람법정과 사업가, 지역 관리들이 바탕이 되어 1999년 4월 전국적인 연대체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이슬람법정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의 적용을 담당하는 일종의 법관들로, 1990년대 내전으로 혼란한 소말리아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자체적인 무장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슬람법정연맹은 소말리아 사람들에게 치안, 식량, 교육 등 각종 사회서비스를 제공했다. 또한 미국의 물밑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군벌들에 맞서 싸우면서 대중의 지지를 넓혀갔다. 소말리아 전역으로 세력을 넓힌 이슬람법정연맹이 2006년 가을에 군벌 연합을 몰아내고 모가디슈를 장악하면서 내전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소말리아에는 안정이 찾아왔다. 7월에는 10여 년간 폐쇄되었던 모가디슈 국제공항이, 8월에는 중동과 아프리카를 잇는 교두보라 할 수 있는 모가디슈 항구가 다시 문을 열었다. 소말리아의 해적 행위도 주춤했다. 이슬람 율법은 도둑질을 큰 범죄로 여긴다. 이슬람법정연맹은 자체 해상경비대를 구성해 해적 근거지를 소탕하기도 했다. 모가디슈에서 약 500㎞ 떨어진 하라데레를 비롯해 삼호 드림호가 피랍되어있던 호비요 등 동부 해안가 일대 해적들의 전초기지를 장악해나갔다. 2006년 이슬람법정연맹의 대표 셰이크 하산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해적질도 이슬람이 범죄로 금지하기 때문에 소말리아 땅에서 모두 몰아내려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실현될 수 없었고, 소말리아의 안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말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소말리아를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주춤했던 해적 사건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소말리아를 집어 삼킨 대테러 전쟁 미국은 2001년 9·11테러부터 소말리아를 주시해왔다. 장기간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알카에다 등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소말리아로 흘러들었다거나 소말리아 이슬람 진영과 헤즈볼라가 연계되어 있다, 이란 정부가 소말리아의 이슬람법정연맹을 지원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소말리아가 알카에다의 도피처가 되는 것이 가장 우려스럽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슬람법정연맹이 모가디슈를 장악하자 미국은 위기감을 느꼈다. 미국은 소말리아에 이웃한 에티오피아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다.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는 오랜 동안 영토 분쟁을 겪어 왔다. 에티오피아의 동부 오가덴 지역은 주로 소말리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에티오피아로 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며 무장투쟁을 벌여 왔다. 1977년에 소말리아가 소말리족이 살고 있는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범소말리아 주의’를 내세우며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서부소말리아해방전선을 필두로 한 오가덴의 반군 조직들은 소말리아 정부군과 함께 에티오피아에 맞섰다. 1978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은 결국 에티오피아의 승리로 끝났지만, 오가덴 지역의 무장 투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오가덴 지역의 문제로 불안을 느낀 에티오피아 정부는 이슬람법정연맹의 소말리아 장악을 일종의 위험신호로 받아들였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소말리아를 장악하는 것에 대해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가 지닌 거부감도 한 몫 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는 2006년 12월 초 이슬람법정연맹과 교전을 시작했고, 12월 20일부터는 전면적인 공세를 펼쳤다. 결국 12월 28일 이슬람법정연맹은 수도 모가디슈를 포기하고 소말리아 남부 지역으로 쫓겨 갔다. 에티오피아는 친 에티오피아 성향의 임시정부가 정권을 잡도록 지원했다. 이후 미국은 보다 직접적으로 소말리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미국은 소말리아에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최소 다섯 번의 미사일 공격을 퍼부었다. 2007년 1월에 소말리아 남부 항구도시 키스마요에 대대적인 공습작전을 벌이면서 미군 당국은 알카에다 지도부 3인방을 겨냥한 작전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소말리아로 확대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151-연합함대를 통해서도 대테러 전쟁이 소말리아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1-연합함대가 소속된 연합해군은 9·11 테러 이후 전 세계에서 진행되는 미국의 ‘항구적 자유 작전’을 해상에서 추진하기 위해 2002년 10월 구성되었다. ‘항구적 자유 작전’은 미국이 전 세계에서 벌이는 모든 대테러 전쟁을 통칭하는 작전명으로 아프가니스탄, 필리핀, 키르키즈스탄, 그루지아, 사하라 그리고 소말리아에서 펼쳐지고 있다. 연합해군은 이 중 ‘아프리카의 뿔(소말리아의 별칭) 작전’을 담당하고 있으며 해적퇴치, WMD를 비롯한 불법무기 차단, 테러 근절이 주요 임무다. 151-연합함대 창설로 해적퇴치 임무를 이양한 150-연합함대는 지금도 151-연합함대와 동일한 지역에서 대테러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되어가는 소말리아 대테러 전쟁의 확대는 2006년 소말리아 정국 안정을 수포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소말리아 안정의 기회를 파괴했다. 2008년 5월 1일 미국은 테러리스트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소말리아 다사마렙 지역에 크루즈 미사일을 퍼부었다.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반군 간의 평화회담을 앞두고 진행된 이 공격으로 30여 명의 소말리아인이 사망했다. 이 중에는 이슬람법정연맹의 소장파 그룹이 분화해 나온 ‘알 샤바브’(아랍어로 ‘젊은이’이라는 뜻)의 전 간부인 에이든 하시 이로우가 포함되어 있었다. 알 샤바브는 미국 정부의 테러조직 명단에 올라있는데, 미국은 공격 후 원래 목표로 했던 테러리스트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평화회담은 수포로 돌아갔다. 알 샤바브가 보복 의지를 천명하면서 알샤바브와 정부군, 에티오피아군은 모가디슈를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다. 미국의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CAP)가 2008년 4월 펴낸 보고서는 ‘소말리아 이슬람주의 진영은 에티오피아의 침공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해왔다. 2006년 말에 비해 지지 기반도 대폭 넓어졌으며, 더욱 급진적 성향을 띠고 있다. 미국과 에티오피아의 목표와는 정반대로 소말리아 이슬람 진영의 테러 연계 가능성은 도리어 커졌다’고 밝혔다. 미국의 파상공세에 파키스탄 국경지대까지 쫓겨 갔던 탈레반이 남부 헬만드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힌 것처럼, 모가디슈에서 쫓겨 갔던 이슬람법정연맹은 소말리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정비해 다시 모가디슈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미국과 미국을 등에 업은 에티오피아의 침략과 점령이 소말리아 전역에서 저항 세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군사력과 비용을 들이고 있지만 해적도, 저항 세력의 성장도 막지 못한 채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미국과 동맹국들은 소말리아라는 늪에 빠져들고 있다. 식민지배와 냉전의 유산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국가들 중 드물게 단일 인종(소말리족)과 단일 종교(이슬람교 99%)로 이루어져 대략 10세기경부터 평화롭게 살아왔다. 단일 인종이라 해서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말리족은 6개의 거대 씨족으로 구분되며, 각각의 씨족은 여러 개의 하위 씨족으로 나뉜다. 그리고 하위 씨족은 또한 부계 혈족 중심의 가족군인 ‘레르’(Reer)로 세분화된다. 각각의 씨족이 분할되어 있지만 언어와 종교, 생활양식의 동질성은 소말리아에 천년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침략으로 상황은 바뀌었다. 19세기 후반 서유럽의 식민지 침략 과정에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 의해 분할되었던 소말리아는 1960년 7월 1일 영국령을 북부지구로, 이탈리아령을 남부지구로 한 ‘소말리아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공화국은 식민지배가 남긴 유산을 극복해야 했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상이한 식민지 지배 정책 때문에 남부와 북부는 행정제도, 사법체계, 재정제도는 물론 공식적인 언어 표기조차 달랐다. 소말리아의 정치지도자들은 남부와 북부의 통합을 포함해 오가덴 지역처럼 에티오피아와 케냐, 지부티로 분할된 소말리족의 거주 지역을 통합하려 했다. 이른바 범소말리아 주의에 입각한 강경한 대외정책이 추진되면서 소말리아 내부의 정치사회적 분열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인접 국가들과의 잦은 분쟁으로 인해 소말리아의 대외 정책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와의 갈등이 잦아들자 내부의 혼란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씨족과 하위씨족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69년 3월 선거에서는 124개의 의석을 놓고 68개 정당 및 정치조직들에서 1천여 명의 후보가 난립했다. 1969년 10월 15일 대통령의 암살로 사회적 분열은 최고조에 달했고, 경찰과 연합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 사령관이었던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가 정권을 잡게 된다. 씨족 및 부족주의 타파와 분열 없는 민족주의를 주창한 바레 정권은 소말리아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1972년에는 수정 로마 알파벳을 공식 언어로 채택해 식민지배 이후 서로 다른 언어기술 체계 때문에 생겨난 정치적 종교적 갈등을 수습했다.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천명한 바레 정권은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중 1974년에 에티오피아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왕정을 쓰러뜨렸다. 소련은 영토분쟁 중이던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를 놓고 저울질하다 전략적 판단에 따라 에티오피아를 선택했다. 앞서 언급했던 1977년 소말리아의 오가덴 침공 당시 소련은 에티오피아를 지원했고, 소말리아는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소련이 떠난 자리는 미국이 메웠다. 소련제 무기 대신 미국제 무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레 정권이 22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소말리아의 미래는 점점 어두워져 갔다. 사회주의의 기치도, 부족주의 타파의 노력도 사라졌다. 독재자는 도전세력들의 부상을 막기 위해 점차 자신의 씨족과 양자(養子)의 씨족에서만 사람을 등용했다. 공무원직의 분배는 물론 사회적 자원과 경제적 기회의 배분 등 소말리아 사회 전반이 특정 씨족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독재자에 대항하는 군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소련과 미국이 준 양질의 무기들이 있었다. 1991년 1월 연합한 군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를 몰아냈다.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던 군벌들이 전투에 들어갔고, 기나긴 소말리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20년간 지속된 내전은 소말리아를 세계에서 손꼽히는 ‘실패한 국가’로 만들었다. 기아와 전쟁의 피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1992년 한 해에만 40만 명이 굶어 죽었고, 2006년에는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로 6천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난민 신세가 되었다. 실패한 국가? 실패하게 만든 국가! 그러나 이 실패는 소말리아만의 잘못이 아니다. 가깝게는 내전 종식의 기회를 앗아간 대테러 전쟁의 확대를 들 수 있지만, 멀게는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 때문이다. 이는 ‘블랙 아프리카’ 대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발전구조는 유럽의 식민지배로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를 떠나면서 아프리카 신생국의 경제구조를 유럽의 종속 하에 있도록 조작해 놓았다. 그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프리카의 노동력을 철저히 이용했다. 아프리카 대륙을 거대한 자원 및 원료 시장으로 만들어 이윤을 독점했지만 공업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노예무역을 통해 아프리카의 경제활동인구를 말살시켰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기초적인 자원을 박탈했다.1) 둘째, 서구의 필요에 의해 농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는 아프리카인의 식량재배와는 거리가 먼, 오직 서구의 필요에 기초한 커피, 땅콩, 면화, 차 등의 환금작물로 채워졌다. 환금작물 중심의 농업 구조는 식량자급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은 엄청난 양의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 시장의 영향에 민감한 환금작물의 특성상 보다 싼 시장이 등장하자 곧 경쟁력을 잃어버렸다.2)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이야기했듯, “주요 산업지역으로 남아 있는 세계의 한 부분을 위하여 다른 세계의 한 부분을 농업 생산물 지역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셋째, 공업원료를 값싸게 대량으로 공급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1차 원료산품의 가격을 낮게 유지했다. 반면 자신들의 공업 제품을 비싸게 수출하는 정책을 고수했다. 대부분 1차 산품들을 수출하는 아프리카 대륙은 무역에서 지속적인 하락을 경험했다.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 지역이다. 또한 지속적인 무역 불균형 때문에 외채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식량 수입과 외채에 대한 이자 지출이 전체 재정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의 자립과 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착취를 중단해야 우리가 무력을 이용한 해적 소탕을 긍정할 수 없는 것은 인질의 희생을 부를 수 있는 군사작전의 위험성 때문만이 아니다. 오늘날 소말리아의 해적 문제는 제국주의 침략에서부터 대테러 전쟁까지 아프리카의 구조적인 저발전 문제와 자본주의의 폐해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쟁탈 과정에서 아프리카 대륙에 임의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은 종족과 종교 갈등을 촉발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지배는 아프리카 대륙의 경제구조를 왜곡했다.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의 발전 가능성은 애초에 거세당한 채 대내외적 갈등으로 사회적 역량을 소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말리아 역시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처럼 쿠데타를 통해 군사 정권이 등장하게 된다. 냉전 시기 미소 진영은 전략적 이해에 따라 경제·군사적으로 소말리아를 지원했고 장기 독재를 묵인했다.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다양한 씨족 그룹들의 갈등이 터져 나왔지만 냉전 종식으로 소말리아의 전략적 중요성이 떨어지자 미국은 소말리아를 외면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수많은 무기만이 남아 내전의 수단을 제공했다. 내전 이후 서구의 불법 조업과 폐기물 투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숨졌다. 17년 간 내전으로 피폐해진 소말리아가 내부의 힘을 통해 안정을 찾으려던 무렵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소말리아를 집어 삼키면서 혼란은 증폭되었다. 해적 사건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미군의 폭격, 미국과 에티오피아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로 2006년에만 6천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난민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원인에 대한 접근이 없다면, 그리고 아프리카에 대한 역사적인 착취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해적 문제도 아프리카의 비극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2007년 10월 ‘휴먼라이츠워치’는 보고서를 통해 ‘소말리아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무시되고 있는 비극’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 1) 16세기부터 3백 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흑인 노예의 숫자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대략 1천 5백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항해 중에 사망한 숫자까지 합하면 약 4천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아프리카 대륙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수치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은 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그들의 산업을 번창시켰지만, 아프리카 대륙은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겪게 된다. 본문으로 2) 세네갈은 원래 쌀 생산국으로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 쌀이 훨씬 싸기 때문에 세네갈의 쌀 생산지를 모두 땅콩 생산지로 바꿨다. 땅콩은 세네갈 전체 수출의 8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네갈의 땅콩은 곧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렸고, 세네갈은 주요 식량곡물 수입국이 되었다. 본문으로
대테러 전쟁과 식민지 유산의 청산 없이 해적 문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설 연휴는 해적 얘기로 가득했다. 향후 정치권의 향방을 결정한다는 이른바 ‘설 민심’이 정치나 세금 이야기가 아니라 머나 먼 아프리카 땅의 해적 이름으로 채워졌다. 해적에 대한 분노, 단호한 응징의 목소리 속에는 피격된 선장의 몸에서 한국 해군의 총탄이 발견되었다는 것도, 군사작전이 가져다 줄 참극의 가능성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주의 이면 계약 문제와 충청권 개발 문제, 구제역 문제로 시끄러운 정국을 덮기 위한 대통령의 전격 담화가 시답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적을 두둔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상당한 난감함에 빠져야 했다. 해적이라는 이름의 비즈니스 현재 소말리아 인근 해역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적질은 단순 강도를 넘어 하나의 ‘산업’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다. 과거 소말리아 해적은 소말리아 인근 해역이나 자신들의 본거지 주변에서만 활동했다. 정박 중이거나 항해 중인 선박에 올라 타 선박 운행을 위해 금고에 보관 중인 현금을 털거나 선원들의 금품을 뺏어가는 형태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활동 범위나 조직 규모가 몰라보게 커졌다. 현재의 해적은 배의 이동 경로를 사전에 파악하는 팀, 직접 배를 나포하는 팀, 해적 본거지에서 협상을 진행하는 팀, 협상 결과에 따라 돈을 받아오는 팀 등으로 구성돼 매우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장거리 원정에 필요한 위성항법장치를 갖춘 모선과 승선에 필요한 장비(갈고리, 사다리 등)를 갖춘 서너 척의 스피드 보트를 이용해 움직인다. 자동소총은 물론 로켓추진탄(RPG)도 보유하고 있다. 나포한 어선을 모선으로 활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조업 중인 다른 어선과 함께 이동할 경우 적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해적 산업이 커지면서 나포 사건이 일어났을 때 협상을 도와주는 협상 전문가들도 등장해 협상 당사국과 해적 양쪽에서 수수료를 챙긴다. 이들은 대부분 런던 선박거래소의 브로커들과 연결되어 있거나 소말리아의 군벌 출신인 것으로 알려진다. 해적 소탕을 위해 여러 나라가 군사작전에 나서면서 위험성은 커지고, 이 산업에 연루된 사람들이 많아지니 ‘몸값’의 규모도 점점 커진다. 이렇게 챙긴 돈의 일부는 소말리아 지역 군벌의 자금으로 흘러들거나 두바이의 은행을 통해 세탁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분명, 현재 발생하는 해적 행위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낭만이 아니라 중대한 범죄 행위다. 각종 첨단 장비와 무기를 동원해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며, 이를 이용해 몸값을 뜯어내는 조직범죄다. 그러나 문제는 해적질을 제외하고 소말리아 사람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별로 없다는 데에 있다. 산업 기반은 커녕 다른 나라들처럼 돈이 되는 부존자원도 별로 없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추정한 바에 따르면 소말리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0달러 이하로,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생활하고 있다. 소말리아의 해적은 근절되어야 하지만, 군사작전을 통한 소탕이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해적에 나서는 상황에서 소말리아인 전부를 ‘소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해적이 아니라 자경단 소말리아는 남한의 6배가 넘는 637,000㎢의 면적에 8-9백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인구가 얼마인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정부의 기능이 붕괴되어 있기 때문이다. 1991년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소말리아는 20년째 내전 상태에 놓여 있다. 현재 과도정부, 소말리랜드, 푼틀랜드 자치정부 등 3개 지역으로 분화되어 있으며, 10여 개의 군벌이 상호 갈등하고 있다. 해안선이 3,000㎞에 달하는 소말리아는 풍부한 어장을 갖추었고, 내전이 시작되던 무렵 고기잡이가 주요 생계 수단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붕괴되고 혼란스러운 시절이 계속되자 소말리아 해안에는 외국 선박들의 불법 조업이 시작됐다. 외국 선박들은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 소말리아 연안의 해산물을 싹쓸이 해갔다. 유럽의 거대한 쌍끌이 선박들이 매년 3억 달러 이상의 참치와 새우, 바다가재를 비롯한 해상 생물들을 쓸어갔다. 조그만 어촌 마을들은 하루아침에 생계수단을 잃어버리고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들도 나타났다. 그들은 거대한 드럼통을 소말리아 바다에 버리고 사라졌다. 유럽에서 톤당 1천 달러의 처리비용이 드는 폐기물을 톤당 3달러만 주고 바다에 버렸다. 이렇게 버려진 폐기물에는 중금속뿐만 아니라 핵폐기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해안가 마을의 사람들은 병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렸고, 기형아가 태어나기 시작했다. 2005년에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버려지고 깨진 수백 개의 드럼통이 파도를 타고 해변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3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사능 질병으로 사망했다. UN의 소말리아 특사 아흐메두 아브달라는 “누군가 여기에 핵 물질을 버리고 있다. 카드뮴이나 수은 같은 중금속도 있다”라고 말했다. 해안가 마을 사람들이 소형 보트를 이용해 불법 조업선이나 폐기물 투기 선박들을 막기 시작했다. 때때로 그들은 배에 승선해 조업이나 투기에 대한 대가, 즉 일종의 벌금을 걷었다. 외국 선박들의 불법 조업과 폐기물 투기로 생계 수단을 잃고 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이렇게 거두어들인 돈을 마을의 생계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소말리아 해적’의 출발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해적이 아니라 ‘소말리아 해안 자경단’이라 부른다. 수굴레 알리라는 해적 리더 중 한 명은 해외 언론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해상 강도라 여기지 않는다. 우리 바다에서 불법적으로 조업을 하고 투기하고, 무기를 운반하는 자들이 해상 강도다.”라고 말했다. 소말리아의 한 독립 언론 사이트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70%가 ‘해적들은 나라의 영해를 지키는 국가 방위군으로, 그들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현재 산업화된 해적 행위를 정당화시켜주진 않는다. 그러나 군사작전을 통한 해적 소탕이 소말리아 해적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히 보여준다. 불법 조업과 폐기물 투기로 생계 수단을 빼앗기고 질병에 고통 받는 소말리아 사람들은 다른 나라들에 대한 적개심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냉전이 끝나고 자신들의 전략적 이해가 사라지자 소말리아를 버렸던 미국은 ‘알 카에다와의 연계’를 운운하며 소말리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이웃 나라 에티오피아를 부추겨 전쟁까지 일으켰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룬다.) 오랜 내전으로 식량 확보조차 어려운 소말리아에서 해적 행위는 거의 유일하게 현금을 만질 수 있는 사업이다. 현실에 대한 절망, 외국에 대한 분노 속에 소말리아 사람들은 오늘도 해적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너도나도 몰려들어도 현재 소말리아 인근에는 20여개 국가가 해군함을 파견해 해적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그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는 연합해군 산하 ‘151-연합함대’(CTF-151)다. 151-연합함대는 해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2009년 1월 창설되었다. 한국을 비롯하여 미국, 영국, 터키, 호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파키스탄, 캐나다, 덴마크 등 22개 국가가 참가하고 있으며, 30여 척의 군함과 항공기를 운용하고 있다. 둘째는 유럽연합(EU) 차원의 활동이다. 원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통해 이루어지던 해적 퇴치 활동이 2008년 12월부터 EU의 ‘아틀란타 작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주도 아래 독일, 영국, 그리스 등이 군함과 군용기를 파견하고 있다. 셋째는 개별적으로 군함을 파견한 경우인데 일본, 중국, 러시아, 인도, 이란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고 있는 국가들은 UN 안보리 결의 1816호와 1846호에 따라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협의를 통해 소말리아 영해에 진입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고 있다. 한번 권한을 확보하면 유효기간 내에는 사전 통보 없이 자유롭게 소말리아 영해에 출입하면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군사력이 집중되고 있지만 소말리아의 해적 산업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순찰해야 하는 범위만 해도 아덴만, 오만만, 아라비아해, 홍해, 인도양 등 너무 넓다. 그러나 군함의 보통 항해속도는 30노트로, 시속 약 55㎞ 정도에 불과하다. 우연히 현장에 있지 않으면 신고를 받고 출동해봤자 해적의 나포 행위를 사전에 막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무작정 군함 파견을 늘릴 수도 없다. 비용이 많이 들고 전력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나라들이 자국 군대를 동원하는 것은 해적퇴치 외에도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파견된 군대는 자국 선박의 보호 업무와 해적 대응 등 일상적인 군사작전 수행을 통해 일반적인 해상 훈련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군사훈련을 할 수 있다. 소말리아 해적들의 화력이 예전에 비해 성장했다고는 해도 각국의 해군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복싱에서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부러 져주는 스파링 파트너처럼, 각국은 군사력 향상을 위해 소말리아 해적을 이용하는 셈이다. 이러한 셈법은 소말리아 해적 퇴치에 나서고 있는 국가들 사이의 견제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현재 EU의 아틀란타 작전 사령관은 영국 해군이 맡고 있고 사령부 역시 영국의 노스우드에 설치되어 있다. 이는 아틀란타 작전을 주도한 프랑스의 해군력 증강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럽의회의 한 의원은 “EU의 독자행동이 NATO와의 기능 중복 등 불필요한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며 해적퇴치를 빌미로 한 군사력 증강 움직임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해적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보았지만 2006년 6월, 소말리아 이슬람법정연맹(Islamic Courts Union)이 수도 모가디슈를 장악했다. 이슬람법정연맹은 소말리아의 이슬람법정과 사업가, 지역 관리들이 바탕이 되어 1999년 4월 전국적인 연대체로 만들어진 조직이다. 이슬람법정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의 적용을 담당하는 일종의 법관들로, 1990년대 내전으로 혼란한 소말리아의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자체적인 무장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슬람법정연맹은 소말리아 사람들에게 치안, 식량, 교육 등 각종 사회서비스를 제공했다. 또한 미국의 물밑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군벌들에 맞서 싸우면서 대중의 지지를 넓혀갔다. 소말리아 전역으로 세력을 넓힌 이슬람법정연맹이 2006년 가을에 군벌 연합을 몰아내고 모가디슈를 장악하면서 내전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소말리아에는 안정이 찾아왔다. 7월에는 10여 년간 폐쇄되었던 모가디슈 국제공항이, 8월에는 중동과 아프리카를 잇는 교두보라 할 수 있는 모가디슈 항구가 다시 문을 열었다. 소말리아의 해적 행위도 주춤했다. 이슬람 율법은 도둑질을 큰 범죄로 여긴다. 이슬람법정연맹은 자체 해상경비대를 구성해 해적 근거지를 소탕하기도 했다. 모가디슈에서 약 500㎞ 떨어진 하라데레를 비롯해 삼호 드림호가 피랍되어있던 호비요 등 동부 해안가 일대 해적들의 전초기지를 장악해나갔다. 2006년 이슬람법정연맹의 대표 셰이크 하산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해적질도 이슬람이 범죄로 금지하기 때문에 소말리아 땅에서 모두 몰아내려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실현될 수 없었고, 소말리아의 안정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말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소말리아를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주춤했던 해적 사건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소말리아를 집어 삼킨 대테러 전쟁 미국은 2001년 9·11테러부터 소말리아를 주시해왔다. 장기간의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알카에다 등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소말리아로 흘러들었다거나 소말리아 이슬람 진영과 헤즈볼라가 연계되어 있다, 이란 정부가 소말리아의 이슬람법정연맹을 지원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미국 부시 대통령은 “소말리아가 알카에다의 도피처가 되는 것이 가장 우려스럽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슬람법정연맹이 모가디슈를 장악하자 미국은 위기감을 느꼈다. 미국은 소말리아에 이웃한 에티오피아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다.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는 오랜 동안 영토 분쟁을 겪어 왔다. 에티오피아의 동부 오가덴 지역은 주로 소말리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은 에티오피아로 부터의 분리를 주장하며 무장투쟁을 벌여 왔다. 1977년에 소말리아가 소말리족이 살고 있는 영토를 회복하겠다는 ‘범소말리아 주의’를 내세우며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서부소말리아해방전선을 필두로 한 오가덴의 반군 조직들은 소말리아 정부군과 함께 에티오피아에 맞섰다. 1978년까지 이어진 이 전쟁은 결국 에티오피아의 승리로 끝났지만, 오가덴 지역의 무장 투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오가덴 지역의 문제로 불안을 느낀 에티오피아 정부는 이슬람법정연맹의 소말리아 장악을 일종의 위험신호로 받아들였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소말리아를 장악하는 것에 대해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가 지닌 거부감도 한 몫 했다. 미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는 2006년 12월 초 이슬람법정연맹과 교전을 시작했고, 12월 20일부터는 전면적인 공세를 펼쳤다. 결국 12월 28일 이슬람법정연맹은 수도 모가디슈를 포기하고 소말리아 남부 지역으로 쫓겨 갔다. 에티오피아는 친 에티오피아 성향의 임시정부가 정권을 잡도록 지원했다. 이후 미국은 보다 직접적으로 소말리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미국은 소말리아에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최소 다섯 번의 미사일 공격을 퍼부었다. 2007년 1월에 소말리아 남부 항구도시 키스마요에 대대적인 공습작전을 벌이면서 미군 당국은 알카에다 지도부 3인방을 겨냥한 작전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소말리아로 확대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151-연합함대를 통해서도 대테러 전쟁이 소말리아로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1-연합함대가 소속된 연합해군은 9·11 테러 이후 전 세계에서 진행되는 미국의 ‘항구적 자유 작전’을 해상에서 추진하기 위해 2002년 10월 구성되었다. ‘항구적 자유 작전’은 미국이 전 세계에서 벌이는 모든 대테러 전쟁을 통칭하는 작전명으로 아프가니스탄, 필리핀, 키르키즈스탄, 그루지아, 사하라 그리고 소말리아에서 펼쳐지고 있다. 연합해군은 이 중 ‘아프리카의 뿔(소말리아의 별칭) 작전’을 담당하고 있으며 해적퇴치, WMD를 비롯한 불법무기 차단, 테러 근절이 주요 임무다. 151-연합함대 창설로 해적퇴치 임무를 이양한 150-연합함대는 지금도 151-연합함대와 동일한 지역에서 대테러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제2의 아프가니스탄이 되어가는 소말리아 대테러 전쟁의 확대는 2006년 소말리아 정국 안정을 수포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소말리아 안정의 기회를 파괴했다. 2008년 5월 1일 미국은 테러리스트를 소탕한다는 명목으로 소말리아 다사마렙 지역에 크루즈 미사일을 퍼부었다.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반군 간의 평화회담을 앞두고 진행된 이 공격으로 30여 명의 소말리아인이 사망했다. 이 중에는 이슬람법정연맹의 소장파 그룹이 분화해 나온 ‘알 샤바브’(아랍어로 ‘젊은이’이라는 뜻)의 전 간부인 에이든 하시 이로우가 포함되어 있었다. 알 샤바브는 미국 정부의 테러조직 명단에 올라있는데, 미국은 공격 후 원래 목표로 했던 테러리스트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평화회담은 수포로 돌아갔다. 알 샤바브가 보복 의지를 천명하면서 알샤바브와 정부군, 에티오피아군은 모가디슈를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다. 미국의 싱크탱크 미국진보센터(CAP)가 2008년 4월 펴낸 보고서는 ‘소말리아 이슬람주의 진영은 에티오피아의 침공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해왔다. 2006년 말에 비해 지지 기반도 대폭 넓어졌으며, 더욱 급진적 성향을 띠고 있다. 미국과 에티오피아의 목표와는 정반대로 소말리아 이슬람 진영의 테러 연계 가능성은 도리어 커졌다’고 밝혔다. 미국의 파상공세에 파키스탄 국경지대까지 쫓겨 갔던 탈레반이 남부 헬만드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힌 것처럼, 모가디슈에서 쫓겨 갔던 이슬람법정연맹은 소말리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정비해 다시 모가디슈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미국과 미국을 등에 업은 에티오피아의 침략과 점령이 소말리아 전역에서 저항 세력을 키웠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군사력과 비용을 들이고 있지만 해적도, 저항 세력의 성장도 막지 못한 채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미국과 동맹국들은 소말리아라는 늪에 빠져들고 있다. 식민지배와 냉전의 유산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국가들 중 드물게 단일 인종(소말리족)과 단일 종교(이슬람교 99%)로 이루어져 대략 10세기경부터 평화롭게 살아왔다. 단일 인종이라 해서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소말리족은 6개의 거대 씨족으로 구분되며, 각각의 씨족은 여러 개의 하위 씨족으로 나뉜다. 그리고 하위 씨족은 또한 부계 혈족 중심의 가족군인 ‘레르’(Reer)로 세분화된다. 각각의 씨족이 분할되어 있지만 언어와 종교, 생활양식의 동질성은 소말리아에 천년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침략으로 상황은 바뀌었다. 19세기 후반 서유럽의 식민지 침략 과정에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 의해 분할되었던 소말리아는 1960년 7월 1일 영국령을 북부지구로, 이탈리아령을 남부지구로 한 ‘소말리아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공화국은 식민지배가 남긴 유산을 극복해야 했다. 영국과 이탈리아의 상이한 식민지 지배 정책 때문에 남부와 북부는 행정제도, 사법체계, 재정제도는 물론 공식적인 언어 표기조차 달랐다. 소말리아의 정치지도자들은 남부와 북부의 통합을 포함해 오가덴 지역처럼 에티오피아와 케냐, 지부티로 분할된 소말리족의 거주 지역을 통합하려 했다. 이른바 범소말리아 주의에 입각한 강경한 대외정책이 추진되면서 소말리아 내부의 정치사회적 분열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인접 국가들과의 잦은 분쟁으로 인해 소말리아의 대외 정책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외부와의 갈등이 잦아들자 내부의 혼란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씨족과 하위씨족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조직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69년 3월 선거에서는 124개의 의석을 놓고 68개 정당 및 정치조직들에서 1천여 명의 후보가 난립했다. 1969년 10월 15일 대통령의 암살로 사회적 분열은 최고조에 달했고, 경찰과 연합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 사령관이었던 모하메드 시아드 바레가 정권을 잡게 된다. 씨족 및 부족주의 타파와 분열 없는 민족주의를 주창한 바레 정권은 소말리아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1972년에는 수정 로마 알파벳을 공식 언어로 채택해 식민지배 이후 서로 다른 언어기술 체계 때문에 생겨난 정치적 종교적 갈등을 수습했다.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천명한 바레 정권은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러던 중 1974년에 에티오피아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 왕정을 쓰러뜨렸다. 소련은 영토분쟁 중이던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를 놓고 저울질하다 전략적 판단에 따라 에티오피아를 선택했다. 앞서 언급했던 1977년 소말리아의 오가덴 침공 당시 소련은 에티오피아를 지원했고, 소말리아는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소련이 떠난 자리는 미국이 메웠다. 소련제 무기 대신 미국제 무기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레 정권이 22년간 장기 집권하면서 소말리아의 미래는 점점 어두워져 갔다. 사회주의의 기치도, 부족주의 타파의 노력도 사라졌다. 독재자는 도전세력들의 부상을 막기 위해 점차 자신의 씨족과 양자(養子)의 씨족에서만 사람을 등용했다. 공무원직의 분배는 물론 사회적 자원과 경제적 기회의 배분 등 소말리아 사회 전반이 특정 씨족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독재자에 대항하는 군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소련과 미국이 준 양질의 무기들이 있었다. 1991년 1월 연합한 군벌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자를 몰아냈다.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하던 군벌들이 전투에 들어갔고, 기나긴 소말리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20년간 지속된 내전은 소말리아를 세계에서 손꼽히는 ‘실패한 국가’로 만들었다. 기아와 전쟁의 피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1992년 한 해에만 40만 명이 굶어 죽었고, 2006년에는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로 6천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난민 신세가 되었다. 실패한 국가? 실패하게 만든 국가! 그러나 이 실패는 소말리아만의 잘못이 아니다. 가깝게는 내전 종식의 기회를 앗아간 대테러 전쟁의 확대를 들 수 있지만, 멀게는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 때문이다. 이는 ‘블랙 아프리카’ 대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발전구조는 유럽의 식민지배로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그리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를 떠나면서 아프리카 신생국의 경제구조를 유럽의 종속 하에 있도록 조작해 놓았다. 그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아프리카의 노동력을 철저히 이용했다. 아프리카 대륙을 거대한 자원 및 원료 시장으로 만들어 이윤을 독점했지만 공업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노예무역을 통해 아프리카의 경제활동인구를 말살시켰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기초적인 자원을 박탈했다.1) 둘째, 서구의 필요에 의해 농업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는 아프리카인의 식량재배와는 거리가 먼, 오직 서구의 필요에 기초한 커피, 땅콩, 면화, 차 등의 환금작물로 채워졌다. 환금작물 중심의 농업 구조는 식량자급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은 엄청난 양의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제 시장의 영향에 민감한 환금작물의 특성상 보다 싼 시장이 등장하자 곧 경쟁력을 잃어버렸다.2)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이야기했듯, “주요 산업지역으로 남아 있는 세계의 한 부분을 위하여 다른 세계의 한 부분을 농업 생산물 지역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셋째, 공업원료를 값싸게 대량으로 공급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1차 원료산품의 가격을 낮게 유지했다. 반면 자신들의 공업 제품을 비싸게 수출하는 정책을 고수했다. 대부분 1차 산품들을 수출하는 아프리카 대륙은 무역에서 지속적인 하락을 경험했다. 아프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량을 수입해야 하는 지역이다. 또한 지속적인 무역 불균형 때문에 외채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식량 수입과 외채에 대한 이자 지출이 전체 재정에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아프리카의 자립과 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착취를 중단해야 우리가 무력을 이용한 해적 소탕을 긍정할 수 없는 것은 인질의 희생을 부를 수 있는 군사작전의 위험성 때문만이 아니다. 오늘날 소말리아의 해적 문제는 제국주의 침략에서부터 대테러 전쟁까지 아프리카의 구조적인 저발전 문제와 자본주의의 폐해를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 쟁탈 과정에서 아프리카 대륙에 임의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은 종족과 종교 갈등을 촉발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지배는 아프리카 대륙의 경제구조를 왜곡했다.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의 발전 가능성은 애초에 거세당한 채 대내외적 갈등으로 사회적 역량을 소진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소말리아 역시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처럼 쿠데타를 통해 군사 정권이 등장하게 된다. 냉전 시기 미소 진영은 전략적 이해에 따라 경제·군사적으로 소말리아를 지원했고 장기 독재를 묵인했다.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다양한 씨족 그룹들의 갈등이 터져 나왔지만 냉전 종식으로 소말리아의 전략적 중요성이 떨어지자 미국은 소말리아를 외면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수많은 무기만이 남아 내전의 수단을 제공했다. 내전 이후 서구의 불법 조업과 폐기물 투기로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숨졌다. 17년 간 내전으로 피폐해진 소말리아가 내부의 힘을 통해 안정을 찾으려던 무렵 미국의 대테러 전쟁이 소말리아를 집어 삼키면서 혼란은 증폭되었다. 해적 사건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미군의 폭격, 미국과 에티오피아의 지원을 받는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로 2006년에만 6천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난민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원인에 대한 접근이 없다면, 그리고 아프리카에 대한 역사적인 착취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해적 문제도 아프리카의 비극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2007년 10월 ‘휴먼라이츠워치’는 보고서를 통해 ‘소말리아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무시되고 있는 비극’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 1) 16세기부터 3백 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흑인 노예의 숫자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대략 1천 5백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항해 중에 사망한 숫자까지 합하면 약 4천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아프리카 대륙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수치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은 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그들의 산업을 번창시켰지만, 아프리카 대륙은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겪게 된다. 본문으로 2) 세네갈은 원래 쌀 생산국으로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베트남 쌀이 훨씬 싸기 때문에 세네갈의 쌀 생산지를 모두 땅콩 생산지로 바꿨다. 땅콩은 세네갈 전체 수출의 8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네갈의 땅콩은 곧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렸고, 세네갈은 주요 식량곡물 수입국이 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