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은 지역사회와 노동조합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지난 2월 15일 결국 172명에 대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사측은 경영상의 이유를 정리해고 근거로 이야기하지만 한진중공업은 정리해고 발표 직전에 현금배당을 결정하는 등 여유만만한 경영을 계속하고 있다. 한진중공업은 2009년에 4천6백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고, 2010년 3/4분기까지 1천8백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고 있다. [%=사진1%]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는 노동조합과 지역시민사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 조선소를 폐쇄하고 필리핀의 저임금 지역으로 생산 시설을 이전하기 위한 사전조치다. 사측은 영도 조선소에 물량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같은 기간 필리핀 수빅 조선소에는 서른 척이 넘는 선박 건조를 계획하고 있다. 사측이 의도적으로 수빅 조선소로 물량을 몰아주고 있다는 뜻이다. 필리핀 수빅 공장, “꿈을 안고 들어가 시체가 되어 나오는 곳” 그렇다면 한진중공업의 물량 몰아주기로 필리핀의 노동자들은 좀 더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을까? 불행하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필리핀 수빅 조선소는 인근 지역에서도 유명한 저임금 고강도 노동 착취 사업장이다. 한 수빅 지역 노동 단체의 표현에 따르면 수빅 조선소는 “꿈을 가지고 들어가 시체로 나오는 곳”이라고 한다. 한진중공업 수빅 조선소는 2006년 필리핀 정부의 적극적 지원 속에서 건설이 시작되어 2007년 12월 1단계 완공, 2009년 4월 2단계 완공을 마쳤다. 현재 2만여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으며, 2015년까지 약 4만 5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할 계획이다. 수빅 자유경제구역에 위치한 한진중공업 조선소는 필리핀에서 가장 큰 직접투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한 외양과 달리 수빅 조선소의 노동조건은 필리핀 내에서도 최악으로 꼽힌다. 필리핀의 한 노동단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수빅 조선소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최장 3개월까지 훈련 기간을 거쳐야 하는데 이 기간에는 하루 3달러의 임금만 지급된다. 그리고 이 훈련 기간을 거치면 약 6개월 가까이 수습 기간을 추가로 또 거치는데 이 수습 기간에 관리자의 눈에 들어야 정식 채용이 된다. 수습 기간에 시급은 0.6달러(약 7백원)에 불과하다. 수빅 조선소의 노동자들은 정식 채용이 된다고 해도 정규직이 되는 것이 아니다. 40여개에 달하는 하청 업체에 고용이 되는데, 우리의 불법 파견과 비슷하다. 필리핀 노동법에서도 금지하는 불법 파견인데, 한진중공업은 자유무역구역에서의 특권적 지위를 활용해 불법적 작태를 지금도 공공연히 저지르고 있다. 임금 착복도 존재한다. 한진중공업은 철야 맞교대 조의 교대 시간 간격 조정을 통해 30분 이상의 추가 근로를 의무화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추가 근로 수당을 지불하고 있지 않다. 이렇게 지불되지 않는 임금이 연 830만 달러(약 100억 원)에 이른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수빅 조선소 노동자들 대부분은 출퇴근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6~8명이 기숙사 한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진중공업은 노동안전과 관련해서도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약 5천 건의 안전 사고가 공식 보고되었고, 28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열악한 위생 조건으로 인해 321명의 말라리아 환자가 발생한 적도 있었다. 조선소에는 반상근을 하는 의료진 한 명이 있을 뿐이며 가까운 병원은 27Km 밖에 위치하고 있다. 한진중공업의 노조 탄압은 더욱 가관이다. 2009년에는 노조 지도자가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노동 안전 협약을 근거로 노조 간부들 60여명을 안전 협약 위반으로 해고하기도 했다. 최악의 노동 조건은 방치한 체 정작 노동 안전 협약을 노조 간부들의 해고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 영도 조선소와 필리핀 수빅 조선소의 노동자들은 모두 한진중공업 자본으로부터 노동 착취와 노조 탄압에 힘겨워하고 있다. 한진중공업 자본은 영도 조선소 물량을 줄여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그 물량이 이동하는 필리핀 수빅에서도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통해 노동자들을 사지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국제적 연대 투쟁으로 공장 철수를 막아낸 노동조합들 이러한 자본 이동에 대응하는 노동자들의 무기는 역시 국제적 단결과 공동 투쟁뿐이다. 노동자들의 공동 투쟁을 통해 공장 폐쇄를 막아낸 사례는 많지 않지만 꾸준하게 보고되고 있다. 최근의 대표적인 예는 브라질 계 철강 자본인 발레가 2009~2010년 캐나다의 광산을 폐쇄하려 했을 때 보여준 국제적 공동 투쟁이다. 캐나다 노동조합은 1년이 넘는 기간 단결된 파업투쟁을 벌였고, 본사가 있는 브라질의 철강 노조가 캐나다 공장 폐쇄 문제 해결을 임단협 요구에 함께 넣어 파업을 조직했다. 캐나다 광산의 대체지로 선정된 호주 인근에서는 호주 철강 노동자들이 연대 캠페인을 벌였다. 결국 발레 자본은 2010년 말 이러한 국제적 노동자 연대 투쟁에 두 손을 들었다. 발레 자본은 캐나다 광산을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회복시키기로 결정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투쟁 역시 국제적 연대에서 해법을 찾아봐야 한다. 한국과 필리핀의 노동자들은 물량을 놓고 경쟁하는 사이가 아니라 한진중공업 자본으로부터 노동 착취와 노조 탄압을 당하는 같은 노동자들이다. 한국에서는 필리핀 수빅 조선소의 노동 조건 개선을 내걸고, 필리핀 수빅 조선소에서는 한국의 정리해고 철회를 내걸고 공동 투쟁을 벌인다면 한진중공업 자본도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세계 민중들은 지난 1월 25일부터 18일 동안 전 이집트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서 구호를 외치고, 기도하고, 전경들과 싸우며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결국 이집트 민중들의 요구가 관철되었다. 2월 11일 금요일, 무바라크 일가는 카이로를 떠나 홍해 해안에 위치한 별장으로 도망쳤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에 대한 회유책으로 불과 12일 전 임명된 오마르 술래이만 부통령은 무바라크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군사최고위원회에 이양했다고 발표했다. 군부는 2일만에 발표된 3번의 성명을 통해 ‘공정한 자유선거’를 실시하고 국민의 ‘정당한 요구들을 지지할 것’을 약속했다. 주류 언론은 이집트 현지에선 1.25 혁명으로 불리는 이 운동을 우발적인 봉기로 묘사하며, 이를 1월 14일에 벤 알리 대통령 체제를 전복한 튀니지 시민항쟁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집트인들의 봉기가 튀니지의 투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1.25 혁명의 근원을 따지고 보면 이집트의 정치제도와 사회경제적 구조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1.25 혁명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민주화 활동가, 청년과 노동자들이 지난 몇 년간의 활동과 조직화를 통해 맺은 결실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이것이 1.25 혁명의 의의를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배경이다. 1.25 혁명의 이집트 내적 원인을 검토하고, 이러한 원인 분석을 바탕으로 혁명을 통해 가능하게 된 구조적인 변화의 전망을 살펴보자. 1.25 혁명의 기원: 30년 동안 이어진 독재와 신자유주의 이집트에서 계급 양극화, 독재정권과 미국과의 동맹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집트의 현재 정치, 사회적 구성의 기원은 가말 압델 나세르 초대 대통령의 죽음(1970) 이후 혼란상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세르의 민족주의적 외교정책과 인민주의적 독재통치가 해체되었고, 1970년대 나세르의 후임자인 무함마드 안와르 사다드 대통령은 나세르의 국가주도 산업화 정책으로 등장한 신도시자본가계급과 동맹을 맺고 이집트를 해외자본에 개방했다. 또한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과 동맹을 맺어, 미국의 중동 패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수십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 미국, IMF, 세계은행 등이 전파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공기업의 사유화를 시작하고 보건의료, 교육, 공공 부문 임금, 사회복지에 대한 공공 지출을 삭감했다. 1981년 사다드 대통령의 암살 이후 정권을 장악한 무바라크 대통령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했다. 무바라크 치하 30년 동안 시행된 경제개혁은 나세르가 도입한 식량 보조금 삭감, 토지개혁 역전, 농촌지역 부동산시장 자유화, 공공기업 사유화, 국제금융시장과 해외투자에 대한 추가 개방, 세제혜택과 미약한 노동기준이 적용된 경제특구 건설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토지개혁의 역전으로 인해 농촌 인구가 도시로 떠났고, 도시는 곧 도시빈민과 실업자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공공기업의 사유화와 함께 정리해고, 실질 임금 축소, 노동조건 악화, 노동유연화 등이 도입되었다. 2002년의 도입된 경제 특구법은 이러한 노동조건 악화를 심화시켰다. 무바라크 정권은 소수 자본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이들에게 공공기업 매각이나 정부조달 관련 특혜를 제공했다. 지난 몇 년 동안 무바라크의 아들인 가말 무바라크와 아흐메드 나지프 전 총리(2004년~2011년 1월)의 영향 아래 이 밀월관계는 보다 공고화되었다. 이들 재계 엘리트들이야 말로 이집트의 놀라운 경제성장(2005년~2008년 사이 평균 GDP 성장률 7%)의 핵심 수혜자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높은 경제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빈곤과 계급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이집트 국민의 약 40%는 하루 2달러 이하의 생계비로 생활한다. 100여 개 가문이 이집트 부의 9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실업률은 10%에 달하고, 대졸 청년 실업률은 30%이다. 취업인구 중 60%는 비공식부문에 종사한다. 무바라크 대통령은 민주적 권리에 대한 광범위한 탄압을 통해 소수 엘리트의 부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 왔다. 1981년 사다드의 암살로 인해 실시된 비상계엄을 테러위험에 대한 대응으로 정당화하며 30여 년 동안 유지했다. 비상계엄법률은 경찰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고, 무기한 구금을 허용하며, 헌법에 명시된 권리를 유예한다. 또한 검열을 합법화하고, 집회시위 자유를 제한하며, 승인 받지 않은 정치조직의 형성을 금지한다. 2010년 11월에 시행된 지난 총선의 부패상은 잘 알려져 있다. 2005년 총선에서 크게 선전한 이집트의 최대 야당인 무슬림 형제단은 광범한 탄압을 받았다. 이들은 선거운동을 제한당하고, 당원과 지지자 천여 명이 구속되어 선거권을 박탈했으며, 유권자들의 투표권은 원천 봉쇄되었다. 이렇게 구조화된 경제적 양극화와 광범위한 정치탄압은 이집트 국민으로부터 더욱 결렬한 분노를 불러왔고 결국 1.25 혁명을 촉발했다. 여러 계급의 광범위한 대중들은 이집트 정부가 민중이 아닌 다른 이들, 즉 신자유주의 엘리트, 미국, 이스라엘에 봉사하고 있을 따름임을 깨닫게 되었다. 정부와 이 정부가 대변하는 체제에 대해 다양한 사회경제적, 정치적인 불만을 품은 이집트 시민들은 무바라크 정권을 하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혁명의 주체: 청년과 자주적 노동자 운동 주류 언론은 고등교육을 받은 이집트 청년들이 시위의 핵심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또 페이스북, 트위터 등 온라인 매체가 집회 동원에서 보여준 역할에도 주목한다. 이렇게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에 대해 강조함에 따라 청년층의 집회 참여는 어떠한 기획도 없이 조직되지 않은 자발적인 행동으로 묘사된다. 물론 타흐리르 광장에서 모인 사람들 중 과거에 집회 참여 경력이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활동을 해왔고, 정치적 세력으로 조직화해 왔던 집단도 분명 있었다. 예컨대 1월 25일 첫 집회를 공동주최하고, 이후 18일 동안 주도적 역할을 한 4.6 청년운동(April 6 Youth Movement)이라는 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2008년 4월 나일텔타 주변에 위치한 섬유업 중심지에서 일어난 노동자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또 다른 단체로는 경찰들이 몰수한 마약을 서로 나누어 갖는 사진을 개인 블로그에 올린 후 경찰한테 살해당한 소기업인의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도 있다. 이 단체는 결성 직후 광폭한 경찰의 폭력과 부패에 반대하는 전면적인 투쟁으로 확산됐다. 이와 같은 단체들이 유동적인 네트워크의 형태를 가지고, 주로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에게 리더가 없는 것도 아니며, 이들이 지닌 힘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집트 청년들이 온라인 매체를 폭압적 상황과 사이버시대에 적합한 조직화 수단 및 형태로 활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주류 언론에서 많은 관심을 못 받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운동 주체가 있다. 바로 이집트의 노동자들이다. 2월 9~11일에 다양한 업종(섬유, 군용품, 우편, 운송, 병원, 행정 등)에 종사하는 공공, 민간부문 노동자들 수만 명이 파업에 나섰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모인 시민들은 이러한 노동자의 행동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집회 참가자들은 정권을 압박하는 데 파업이 갖는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했다. 국제노동진영은 노동자들의 행동이 형세를 일변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이집트 노동자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들은 친정부 성향의 이집트노동조합총연맹(ETUF)의 노동자들이 아니다. 이집트노총은 무바라크정권을 끝까지 지지했다. 법적으로 이집트의 모든 노조는 이집트노총에 가입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2월 9~11일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이집트 노총이라는 공식체계를 벗어나 자신들을 대표하고 지도할 파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러한 독자적인 조직화는 선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이집트 노동자들은 무바라트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서 투쟁해 왔다. 2004년에서 2009년 사이에 17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1,900건이 넘는 파업 등 쟁의 행위에 참여하였고, 이때에도 2월 9~11일 파업과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파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2004년부터 이어진 파업은 4.6 청년운동의 형성으로 이어진 2008년 4월 섬유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절정에 달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 반대 대중투쟁과 더불어 이집트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집트사회에 저항의 문화를 심었”고 “시민권과 권리에 대한 인식을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몇 년간에 걸친 노동자들의 행동은 민주노조운동으로 싹트기 시작하였다. 2007년 12월 5만 5천 명의 지방 세무원 파업의 결과, 경제적 요구의 쟁취뿐 아니라 부동산세무원 독립 노조라는 이집트노총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노조가 사상 처음으로 결성되었다. 그리고 1.25혁명이 한창 무르익던 1월 30일 독립 노조들과 노동자위원회가 이집트독자노조연맹(EFTU)의 결성을 발표했다. 투쟁에 참여한 노동자 중에는 자신의 요구를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 지은 이들도 있었지만, 노동자 대다수는 무바라크의 사임을 요구했다. 일부는 근본적인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를 요구하였다. 예건대 철강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다. 1)무바라크 대통령과 정권과 관계된 모든 인사들의 즉각적인 사임, 2)정권 인사 등 모든 부정부패 인사의 재산 몰수, 3)이집트노총 해산과 민주노조 결성, 4)매각, 폐쇄, 사유화된 공기업의 몰수, 노동자 민중의 통제를 통한 공공부문 국유화, 5)생산, 가격, 분배와 임금을 감시할 수 있는 직장위원회 구성, 6)모든 사회집단들이 참여하는 제헌의회 소집. 새롭게 결정된 EFTU의 요구는 월 최저임금 1,200이집트 파운드(1984년에 규정된 현 최저임금의 약 4배), 최저임금 10배로 최고임금 제한, 사회보장, 보건, 주거, 교육, 연금, 복지, 결사의 자유 등에 대한 권리보장 등이 있다. 이러한 요구는 이집트 민주화운동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며, 무바라크 정권을 전복하는 데 있어 노동자와 민주노조의 역할이 중요했던 만큼 미래에도 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함을 보여 준다. 전망: 군부의 반혁명을 저지하고,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현재 권력을 이양받은 군부는 무바라크 정권 및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이를 통해 많은 특혜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집회 참가자 대부분은 무바라크 퇴진에 군부의 개입을 강력히 요청했고 군부의 역할을 대체로 인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집회가 벌어지는 동안 군이 개입을 자제하였기 때문에 집회참가자들은 군을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이집트 군대는 나세르 시대부터 이스라엘과 서구열강에 맞서온 역사가 있는 만큼, 이미 상당한 사회적 존중을 받았다는 이유도 있다. 더욱이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사병과 하급 장교들의 처지가 이집트 청년들이 겪는 현실과 유사한 것도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군사 엘리트는 구체제 아래서 많은 특혜를 받았다. 군은 지난 30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받은 400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의 수혜자였다. 이 돈은 국가안보와 방위 산업뿐 아니라 시멘트, 건설, 석유, 올리브유, 식수 등 다양한 산업에 투자되었다. 넓은 사막과 해안 토지를 개발하여 내․외국인 소비자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쇼핑몰, 관문도시, 해변 휴양지 등으로 개발했다. 분명히, 군부는 항쟁의 조속한 종결과 현상 유지를 원하였다. 군이 여전히 야당 정치인에게 권력을 이양하지 않은 핵심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집회 참가자들 대다수는 군부나 향후 집권할 정권이 바람직한 행보를 취하도록 자신들이 압박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집회에 참여한 한 활동가는 기자로부터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자 “상관없습니다. 타흐리르 광장에 가는 길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라고 답했다. 현재 군부는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정당성이 의심되던 국회를 해체시키고 6개월 이내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한 상태다. 또한 헌법 개정안을 직접 작성하겠다는 입장을 바꿔서 현재 이를 담당할 전문가 위원회를 소집했다. 무슬림 형제단 단원 등 야당 세력들이 위원회에 참여하고, 집회 지도자들이 이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는 점 역시 특기할만하다. 반면에 노조의 회합을 금지함으로써 파업을 사실상 불허했고 비상계엄법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1.25 혁명에 참여한 많은 시민들은 군부가 선거 일정을 명확히 제시한 데 대해 만족하였다. 그러나 파업은 계속되고 있고 시위참여자 중 일부는 자신들의 요구가 전부 관철되기 전까진 타흐리르 광장에서 물러나지 않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집회 외에 군부의 권력을 억제할 다른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시급한 과제는 군부가 약속을 이행토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군부가 약속을 지켜, 민주적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선출된 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근본적인 변화를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집트의 심각한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선 기업과 군사 엘리트의 권력을 해체하고 이집트 경제에 구조화된 신자유주의 정책을 역전하는 투쟁이 필요하다. 한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난점에 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이집트 1.25혁명과 유사한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은 군사독재에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계로의 전환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는 한국 민중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낸 중요한 성과이다.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은 직선제 도입을 독재 종식의 가장 유효한 수단으로 여기며 이를 넘어서는 요구를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군부가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를 수용하자, 운동세력은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기 보다는 어느 야당 후보를 지지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을 거듭하게 되었다. 결국 야당은 단결에 실패하였고, 이듬해 치러진 직선제 대선은 군 장성 출신의 노태우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정당성만 부여해 주는 꼴이 되었다. 이 과정과 뒤이은 3당 합당 과정에서 군부는 야당과 타협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상당부분 유지할 수 있었다. 군부의 권력을 유지시켰던 사회경제적 체계는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었고, 김대중 정권을 비롯한 이후 집권세력은 노동자 민중의 생존과 권리를 대가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6월 항쟁은 한국 노동자 운동에 있어 중요한 공간을 열었으며, 이는 7,8,9 노동자 대투쟁으로 대변된다. 1987년 7, 8월 노동자들은 임금인상뿐 아니라, 민주노조의 건설을 위해 싸웠다.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은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의 연속선상에 위치하는 것이며, 이집트에서도 응당 그래야만 한다. 다만 한 가지 불행한 점은 당시 한국의 노동자 운동이 견결한 정치적 역량으로 결집할 만큼 단결되어 있지도, 그럴만한 경험도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1997년과 1998년 IMF 위기에 대해서도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점도 아쉬운 측면이다. 만약 이집트의 민주화 운동이 한국의 경험으로부터 무언가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를 이해하고, 혁명에 대한 장기적 관점을 견지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를 정확히 분석하며, 내부의 차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단결을 강화해 나가는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 이집트 민중들에게 현 시점은 많은 난관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희망과 결의를 새로이 다질 시간이다. 무바라크의 퇴진까지 이어진 투쟁의 물결 속에서 무언가 다른 가능성이 포착되었다.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는 자신들이 지닌 권력을 실감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란 무엇인지 학습할 수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 진료소를 세우고, 무대장치를 설치하고, 질서유지단과 집회장 청소를 위한 봉사단을 조직하였다. 무슬림들이 기도를 할 때는 기독교인이 이들을 경호해 주었고, 기독교인의 기도시간에는 무슬림이 그 경비를 맡았다. 수많은 여성들이 거리에 나와 지도적 역할을 행하였다. 노동자들은 파업 위원회를 꾸리고 독립 노조를 결성하면서 민주주의를 실천하였다. 그 무엇보다 이집트 민중들이 단지 정권 교체가 아닌 부패한 엘리트의 제거와 경제적 평등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부의 재분배와 실질적 민주주의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히고, 이 모두를 달성할 수 있는 장기적 안목의 꾸준한 투쟁(혁명적인 투쟁)을 만들어 나가는 것. 이 모두가 이집트 민중의 손에 달려 있다. 국제 노동계와 민중운동의 역할도 중요하다. 지난 3주간 세계 각국의 노조와 좌파 단체들은 이집트 민중을 지원하였다. 연대 집회를 조직하고, 무바라크의 검열을 피해 정보를 공유하며, 자국정부를 통해 무라바크를 압박하였다. 무바라크가 사퇴하였다고 이러한 노력이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이집트 민중들이 투쟁하는 한, 이들과의 계속 교류하고 연대하여 국제적 투쟁을 조직해 나가야 한다. 이제 막 시작된 독립노조운동은 실질적인 정치적 실체로 발전되어 나가야 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수호하는 강력한 힘을 갖추어야 한다. 타국의 노조와 교류나 국제 노총의 지원을 통해 이를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 세계 좌파들은 이집트 민중들이 보낸 메시지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중동을 넘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메시지다. “혁명이 쉽지는 않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주노동자운동을 위한 새로운 전진 지난 9월 28일 민주노총과 네팔노총(General Federation of Nepalese Trade Unions, GEFONT)은 이주노동자 관련 활동 협력에 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양해각서를 통해 민주노총과 네팔노총은 1)공동의 전략을 논의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두 노총 지도부들의 상호 방문 추진, 2)이주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경험 공유, 3)관련된 법제도, 연구, 자료 교환, 4)이주노동자와 관련된 각자의 활동 지원 등에 대해 합의했다. 양해각서 하에서 수행되는 사업의 일부로 네팔노총은 출국 전 선전과 교육을 계획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한국으로 이주를 준비하는 네팔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법, 노동조건, 민주노총 노동조합에 대해 안내받게 될 것이다. 민주노총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조직화 책임을 지기 위해 네팔노총에서 훈련받은 이주민 활동가를 채용하는 데 합의했다. 국제연대의 새로운 전진 첫걸음에 불과하지만 민주노총과 네팔노총의 양해각서는 국제연대 영역에서 중대한 발전이다. 이는 민주노총이 네팔과 같은 이주노동자 본국의 노총과 함께 이주노동자와 관련된 활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처음으로 실질적인 성과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 노동계에서 이주 본국과 목적국 노조 사이의 협력은 중요한 전략으로 자주 강조된다. 이를 통해 노동조합이 이주 과정의 모든 단계에 개입하고, 빈번히 이동하는 노동자들과 장기간 접촉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노총(ITUC)이 노조들의 협력관계 설정을 유도하기 위해 표준 양해각서를 개발했지만, 맺어진 협정은 많지 않고 실질적인 성과를 낸 사례는 여전히 매우 적다. 네팔노총과의 협력이 성공적이게 되면 그것은 민주노총과 다른 이주 본국 노총 간의 유사한 협정 뿐 아니라 다른 목적국 노조들이 체결한 협정에도 긍정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총-네팔노총의 양해각서는 또한 상징적인 성명과 연대행동을 넘어 양 당사자들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진전시키는 국제협력의 실천적인 형태를 나타낸다. 해마다 수십만 명을 해외로 보내는 나라의 총연맹으로서 네팔노총은 해외 네팔노동자의 권리에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있고, 그들이 결국 네팔 노동시장으로 돌아올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이와 유사하게 민주노총도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주노동자들이 노동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에는 이주 관련 활동가들이 부족하고 한국의 이주노동자 공동체들과 연계가 약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오기 전과 한국에 머무르는 동안, 한국에서 떠난 후에 정보를 교류하고 접촉을 유지하는 것을 통해 두 노총은 양자의 목표 달성을 위해 서로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은 네팔노총과 체결한 양해각서를 모델로 삼아 한국에 이주노동자를 보내는 다른 나라의 노조와도 유사한 협정을 체결할 계획이다. 이렇게 된다면 민주노총-네팔노총 양해각서의 중요성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민주노총이 이주의 모든 과정에서 접촉할 수 있는 노동자층이 더 확대·다양화될 뿐만 아니라, 네팔노총과 한국에 있는 네팔 활동가들이 엄호될 수 있기 때문에 이 계획을 실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한국정부는 한국에 있는 네팔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운동에 앞장선다는 이유로 압박해 왔고 양해각서를 체결한 직후 한국 G20 투쟁에 참여하려는 네팔노총 간부들의 비자를 거부한 바 있다. 한국 내 조직화에 이어지는 다른 나라 노조들과의 협력은 한국정부가 네팔활동가들을 표적으로 삼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이주노동자 조직화의 새로운 전진 국제연대 영역에서의 진전에 더하여, 이번 양해각서는 이주노동자에 관한 민주노총의 국내 사업에 새로운 국면을 만들 것으로 기대된다. 처음으로 한국인이 아닌 활동가가 한국인 민주노총 간부와 함께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실행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주노동자 본국의 단체에서 파견된 활동가들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매우 성공적이었다. 예를 들어 홍콩에서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 온 활동가들이 3개 국적의 가사노동자 노동조합들을 설립하고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태국에서는 버마노조연맹(FTUB)이 두 개의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설립을 성공적으로 지원했고 태국 노동조합에 이주 공동체들을 소개했다. 민주노총의 상황은 약간 다르다. 네팔노총은 장기간 한국에서 일할 활동가를 네팔 내에서 찾을 수 없었다. 대신에 민주노총은 한국인과 결혼해서 이미 한국에 살고 있는 네팔 이주노동자 라이 동지를 채용했다. 그는 이주노조 전신인 평등노조 이주지부(ETU-MB)의 조합원이었고 이후에 이주노조의 간부가 되었다. 그는 지난 10월부터 민주노총에서 일하고 있고 12월 말에 네팔로 가서 네팔노총에서 한 달 반가량 연수를 받을 계획이다. 여전히 이주노동자 권리와 조직화에 적극적이지 않은 민주노총에서 한 사람의 이주 활동가가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물론 과도하다. 그렇지만 네팔 사람이자 이주노동의 경험이 있는 라이 동지는 민주노총에 특별한 자원이 된다. 민주노총이, 특히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들과 접촉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강화할 가능성 때문이다. 지난 2개월 동안 라이 동지와 민주노총 담당자는 이미 네팔, 베트남, 버마, 방글라데시, 우즈베키스탄 공동체 지도자들을 만났고 노동권과 노조 조직화에 관한 간담회를 해오고 있다. 민주노총의 목표는 내년 중반까지 전국에서 이주노동자 500명, 2년에 걸쳐 2,000명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계획에서 이주노동자들은 지역과 상황에 따라 민주노총 소속 노조에 가입하게 된다. 산별노조의 지회나 일반노조, 혹은 이주노조 같은 이주노동자 독자노조가 될 수도 있다. 새롭거나 그렇게 새롭지 않을 수도 있는 질문들 민주노총에서 라이 동지의 활동, 민주노총이 이후에 다른 이주 활동가를 채용할 것이라는 예상, 민주노총 이주노동자 조합원 숫자의 증가 가능성 등은 노동운동에서 이주민과 비이주민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운동이 언어, 경험수준,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불평등을 뚫고 나갈 효과적인 수단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민주노총 내에 이러한 것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한국의 인종화된 사회적 위계가 노동운동에서 어느 정도로 재생산될 것인지와 민주노총에 소속된 이주노동자들이 의사결정력을 행사하고 지도부로 활동할 수 있는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이주민과 비이주민 활동가 사이의 구조적인 불평등 문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회적 연관관계와 자원이 많고 온정주의적인 이주센터 활동가들이 이주민들을 대신해서 발언하는 경향에 대한 분노는 2001년 평등노조 이주지부 설립으로 이어졌다. 2003-2004년 명동성당 농성투쟁 당시 투쟁방향을 정하고자 하는 경험 많은 한국단체들과 활동가들 사이의 경쟁 역시 이주노동자의 지도력을 억압했다. 이러한 인식은 이주노동자 스스로가 이끌어가는 독자 노조로서 이주노조를 설립하게 된 주된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이주노조의 지도부들 다수가 표적단속 되어 추방되면서 비이주민 활동가의 권한과 그에 대한 의존이 증가한 것은 남아 있는 이주 간부들을 질식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비이주민 활동가들이 한 발 물러서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양쪽에서 느끼게 했다. 평등노조 이주지부와 이주노조의 경험은 사회 구조적 불평등이 이주민과 비이주민 사이의 연대에 장애물이 되고 이주민의 지도력을 질식시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민주노총이 진심으로 향후에도 라이 동지와 같은 다른 이주 활동가들을 양성하려 한다면 이러한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 해결에 실패하면 이주노동자 조합원을 늘린다는 민주노총의 계획도 어려워질 것이다. 구조적인 불평등에 대처하는 첫걸음은 물론 인식과 교육, 관련 당사자들 사이의 진실한 대화다. 그러나 이를 넘어 민주노총의 가맹산하 노조들은 이주민들이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공간과, 이주노동자들이 주체화되고, 그들의 운동에서 지도부로 발전할 수 있는 운동과정을 만들어내야 한다. 결국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또 무엇을 위해서 조직화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이다. 새로운 조직화 목표 조직화에 대한 라이 동지의 관점은 평등노조 이주지부와 이주노조에서의 활동 경험에 주로 기반해 있다. 서로 자기들의 의견을 밀어붙이려는 한국단체들과 활동가들에게 실망해서 그는 한동안 활동에서 떠나 있었지만, 이주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갖는 것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다시 이주노조에 돌아와 지금은 민주노총에 있다. 산별노조나 일반노조를 통해 이주노동자를 조직하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는 이주노조와 같은 독자적 노조가 이상적인 조직형태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 독자적 노조조직화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중요한 함의가 있지만, 라이 동지가 인식하듯 많은 경우 실제로 적용되지 않고 있다. 이주노동자가 어떤 노조에 가입하든 노조조직화는 단순히 조합원 숫자를 늘리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고용주가 파업을 파괴하거나 저임금을 강제하기 위해 이주노동자를 이용하는 것을 막는 것 이상이어야 한다. 즉 이는 구조적인 불평등을 바로잡는 세력화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맞다면, 이주노동자 지도력의 발전은 처음부터 조직화의 중심 목표로서 설정되어야 한다. 이 목표를 달성할 최선의 수단은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만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과 다른 나라의 조직화 경험에 기반 해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설정할 수 있다. 첫째, 노동자들은 대개 수동적인 교육이나 상담이 아니라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계급의식과 지도력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사실은 이랜드나 기륭투쟁에서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비정규노동자 투쟁에서 반복적으로 증명되었다. 2003-2004년 명동성당 농성투쟁은 (한국인들의 과도한 개입 문제에도 불구하고) 이주노조 초창기 간부들에게 이전의 어떤 공식적 노조 교육프로그램보다 더 나은 훈련의 장으로 기능했다. 농성투쟁 당시에 고용허가제 철폐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추방 중단 요구는 실현가능한 것처럼 보였는데, 그 정책들이 완전히 제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공 가능성은 농성투쟁 참가자들, 초기 이주노조 조합원과 간부들에게 희망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이 요구들을 쟁취하기 위한 6년 투쟁의 성과는 미미했고, 실망으로 이어졌다. 이는 커다란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는 오랜 투쟁이 그 변화의 중요성과 정당성과는 무관하게 운동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정치적 요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 조직화와 주체화의 수단이 될 수 있는 중단기적인 달성 가능한 목표들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뉴욕의 몇몇 이민자 공동체 단체들은 작은 승리들을 통해 주체화를 이루고 운동의 소속감을 형성하는 조직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조직화 수단도 겸하는 투쟁들은 종종 ‘승리할 수 있는 목표’를 중심으로 발전했다. 중국직원·노동자협회(CSWA)는 배달과 식당 및 여타 산업에서 노동법을 강제하고 상습적인 임금·봉사료(팁) 체불 근절을 위해 대부분 미등록인 중국 이주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상당히 성공했다. 법적 소송과 행동의 결합은 대부분 법의 기준에 못 미치는 관행을 충분히 알려냈다. 노동조건은 실제로 개선되었고 협회원 숫자와 핵심 활동가 숫자도 증가하였다. 30년이 넘는 조직화 기간 동안, 협회의 지도부는 노조로 등록하거나 공식적인 집단교섭권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주 조합원이 있는 이주노조나 일반노조들이 임금과 노동조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무사에 위임하여 노동부 진정이나 사업장 집회 같은 전술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면 그것은 이주노동자 주체화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또 다른 사례를 보면, 이주 가사노동자들이 설립하여 이끄는 단체인 가사노동자연합(DWU)은 뉴욕주 당국으로 하여금 ‘가사노동자 권리헌장(Domestic Workers Bill of Rights)’을 채택하도록 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활동가들은 결사의 자유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뉴욕의 가사노동자들의 부당한 현실을 인식했지만 우선 권리헌장을 요구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 목표가 달성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캠페인은 가사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지도력을 획득하는 수단이 되었다. 가사노동자연합의 사례는 조직화 캠페인이 고용주를 타깃으로 삼아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사노동의 경우 사업장에 집중된 투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노동자들의 고용주가 다 다르고 고용주 바로 곁에서 일하고 살며, 일하는 중에는 노동자들이 매우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이주노동자들이 주로 영세규모 공장들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서로 고립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고용허가제로 인한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의 극히 불평등한 관계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취약한 위치는 노동자들이 고용주에 대해 직접 맞서는 것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필자는 ‘사업장 투쟁 대신에 지역 고용센터들이 사업장 이동을 다루는 방식을 바꾸는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통해 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없을까’라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필자는 2007년에 이주노조가 사업장 이동을 처음에 거부당한 필리핀 이주노동자 사건을 다루면서, 고용센터 직원들이 이주노동자 권리행사를 쉽고 효과적으로 방해하기 위해 법적 조사를 태만히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우리가 약간 시끄럽게 하자 수원 고용센터로부터 잘못했다는 시인을 받아낼 수 있었기에 이러한 투쟁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 명확해 보였다. 또한 이주노동자 처지에서도, 날마다 봐야 하는 고용주를 타깃으로 하는 투쟁보다는 이러한 운동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 더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중요한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운동은 등록 이주노동자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정부기관에서 구체적인 개선조치를 성취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는 참여자들에게 지도력을 배우고 단결을 발전시키고 활동가로서 자신감을 갖게 할 수 있다. 2011년을 위한 몇 가지 생각들 고용센터 캠페인에 대한 필자의 생각은 구체적인 제안이라기보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민주노총-네팔노총 협약 체결과 라이 동지의 민주노총 활동이 이주노동자 조직화에 있어 새로운 국면을 나타낸다면(이것은 객관적 현실보다 더 많이 필자가 부여하고자 하는 의미이다),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고를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이주노동자를 단순히 조합원으로 가입시키는 것으로 조직화를 사고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조직화의 매개로 기능해 제도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단계가 될 수 있는, 승리가 가능한 지역투쟁을 모색해야 한다. 이제는 언어, 거주 지위와 인종에 기반한 한국사회의 구조적 불평등 문제를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이제는 이주노동자의 지도력 발전과 주체화를 위한 새로운 조직화 방식을 찾아야 한다. 2011년에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해야 한다.
88올림픽과 버금가는 국제행사라며 TV에서 디데이 카운트다운까지 했던 G20 정상회의가 11월 11-12일 서울에서 열렸다. 연평도 사태로 인해 2010년의 한국은 G20 정상회의 개최국이 아니라 여전히 전쟁위협에 직면해있는 나라로 기록되겠지만, 전 세계의 가진 자들을 위한 회의와 가지지 못한 수많은 자들의 저항이 11월 초 한국에서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가진 자들은 항상 ‘모두를 위한 것’이라며 자신들의 회의를 포장하지만 이에 끊임없이 배신당한 전 세계 민중들은 다른 회의를 연다. 다보스포럼에 맞서 세계사회포럼이 열리듯이 G20 정상회의에 맞서 각국에서도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G20 정상회의가 열리기 전, 11월 7일~10일에 걸쳐 서울에서도 ‘서울국제민중회의’라는 이름으로 민중들의 대안을 논의하는 회의자리가 열렸다. 그러나 서울국제민중회의는 개최되기 전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포럼의 발표자로 섭외된 해외 활동가들에 대한 비자거부·입국거부가 이어졌으며, 개막식 3일 전에 장소 취소 통보를 받아 급하게 장소를 옮겨야 했다. 민주노총과 2-3개 단체만이 행사 진행 스텝을 파견하면서 원활한 회의 진행을 위한 인원도 또한 크게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7일 개막식 이후, 8일부터 3일 동안 총 17개의 포럼이 진행되었고 폐막식에서는 한국의 노동·시민사회운동과 세계의 사회운동이 논의하여 ‘서울선언’을 채택했다. 서울국제민중회의는 한국 민중운동에 G20 정상들이 지키고자 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어떤 특징을 가지며, 이와는 다른 세계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논의할 수 있는 기회였다. 또한 이번 계기로 직접 교류하기 어려웠던 남미의 활동가들과 한국의 활동가들이 폭넓게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이 글에서는 주목할만한 두 포럼과 사회진보연대가 기획한 워크숍을 살펴보며 한국 민중운동이 이러한 기회를 통해 어떤 성과를 얻었으며 또 어떤 한계를 드러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재정·금융·개발에 관한 국제시민사회포럼 11월 8일에는 금융규제 강화와 투기자본과세를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경실련,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상상연구소,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새세상연구소,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 투기자본감시센터, 참여연대), 이본 재단(필리핀), 에버트 재단(독일)이 공동 주최한 <재정·금융·개발에 관한 국제시민사회포럼>이 열렸다. 정부의 입국거부로 인해 4명의 발제자와 토론자가 참석하지 못한 채 심포지엄이 진행되었다. 이 심포지엄은 모두 3개의 세션으로 이루어졌다. 이 중 <세션 1: 금융·재정위기: 기원과 해법>, <세션 2: G20 금융개혁 논의의 한계와 시민사회의 요구>가 G20 정상회의의 가장 큰 명분이면서도 한계로 비판받아온 금융규제와 관련한 부분을 다루었다. [%=사진1%] 세션 1에서 이정우 교수는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IMF의 강요에 의해 시장근본주의를 도입하였고 특히 월가 모델의 단기 실적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다”며 이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지적하였다. 미국의 사라 앤더슨은 금융산업이 금융 개혁법안을 막기 위해 수억 달러를 사용하고 3,000명의 로비스트를 고용한 결과, 미국의 법안이 시민들이 필요로 하는 월스트리트의 개혁에는 매우 부족한 상태로 서명되었다고 발표했다. 인도의 카발지트 싱도 “현재와 같이 불확실한 시기에는 자본통제가 필수적이다. 금융시장은 글로벌한 차원에서 작동하는데 자본흐름에 대처하는 규제체계는 국가적이기 때문”이라며 자본통제를 주장했다. 모두 금융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지만, 발표자들의 주장은 각 국의 상황과 입장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정우 교수는 “성장지상주의를 극복하고 동반성장, 즉 성장과 분배가 조화할 수 있도록 개혁/성장과 사회통합을 병행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복지와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사라 앤더슨은 ‘시민사회의 전략’으로 △거대 은행 축소, 지역은행으로의 자본이동, 국제적 은행규제에 의한 감시 △금융거래세 도입 △상품 투기에 대한 규제 강화 △WTO와 기타 무역협정에서 금융서비스 조항 삭제 △자본통제와 다른 수단들의 사용 허용 △남반구 국가에 대한 부채청산을 제시했다. 카발지트 싱은 한국은행이 2010년 6월에 일련의 통화규제책을 발표했다며 한국정부의 금융규제에 대한 노력에 대해 주로 소개했다. 그는 이 규제가 여전히 핫머니 유입을 억제하거나 신흥시장의 인플레이션과 자산 거품에 대한 공포를 없애지는 못한다고 지적하면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세션 2에서도 서로의 인식차를 드러내는 발표문이 제출되었다. 첫 번째 발표자였던 조모 순다람(말레이시아)은 ‘UN총회 의장 산하 전문가위원회의 금융개혁안’을 발표했는데, G20이 G7에 비해 더 개방적이거나 정당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도, 금융규제 정도와 남반구 국가의 부채 문제 등에서 사라 앤더슨보다 상당히 보수적인 안을 제출하였다. 두 번째 발표자인 유철규 교수는 “이번 위기는 한국이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본받아야 할 모델로 삼아왔던 미국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금융기관의 대형화 문제, 한국의 ‘신자유주의’ 금융개혁의 역사, 최근의 자본시장통합법과 금산분리완화 조치 등을 구체적으로 짚었다. 그는 한국 금융의 대안적 발전 방향으로 △대형화와 종합화를 특징으로 하는 미국 따라 하기 투자은행 육성전략을 재고하고 △국민의 주거, 의료, 노후 문제가 금융시장 특히 주식사장의 변동에 대해 직접 노출되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 번째 발표자인 페터 발(독일)은 금융거래세가 현재의 금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주장했고, 액션에이드(ActionAid)의 소렌 암브로스는 G20 내의 전문적인 위원회를 만들어 편견 없이 국제통화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여러 대안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심포지엄 내에서 주되게 문제로 삼는 부분이 각기 달랐다. 이는 G20과 IMF 등 국제금융기구에 대한 평가, 금융 규제의 정도에 대한 인식과 주장 차이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몇몇 단체들은 지난 여러 번의 회의에서 이미 그 실체를 드러낸 G20에 여전히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금융규제완화흐름에서 재규제화 흐름으로 전환되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라고 본 몇몇 발표자들의 인식도 과도한 부분이 있다. 최소한의 규제조치로 금융거래세를 적극 요구하면서도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다음 G20 정상회의에서 적극 논의하기로 했다’며 기대를 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금융통제는 금융세계화의 본질을 폭로하고 금융-산업자본에 주어진 특권을 빼앗아오기 위한 '정세적'(즉 제한적) 문제제기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연금개혁으로 프랑스 시민들의 엄청난 저항에 부딪힌 사르코지에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2007-2009년 금융위기로 인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문제라는 것은 모두가 지적하지만, 누가 주체가 되어, 어떤 행동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세계 질서를 바꿔나갈 것인가를 토론하고 의견을 좁히기 위해서는 여전히 시간이 예상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기획 워크숍: 초국적 자본의 변화와 노동자운동의 대응 전략 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는 G20 공동행동 주간을 맞아 <초국적 기업에 맞선 노동운동의 전략> 워크숍을 기획했다. 이 워크숍에는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과 브라질 노총의 퀸티노 마르케스 세베로 사무총장이 발제자로 참가하였다. 또한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 미국 참가자들도 각국의 현황을 소개하며 초국적 자본에 맞선 대응 전략을 제안하였다. 한지원 연구실장은 초국적기업에 맞선 한국노동자들의 투쟁을 소개했다. 그는 “초국적 기업의 가장 큰 힘은 국경을 초월한 이동성이지만, 다른 한편 민족 국가 수준에서만 작동하는 노동운동의 한계에서도 기인한다”며 “경제위기에 따른 초국적 기업의 구조조정은 향후 세계 노동운동에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지원 연구실장은 이어 각국 노조 관계자들에게 쌍용차, 발레오만도와 같은 한국에 진출한 초국적 기업의 구조조정을 설명하고 이에 맞서는 국제적인 노동운동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한지원 실장은 “발레오전장은 철저한 계획으로 중국과 프랑스 공장에서 부품을 역수입해 현대차에 어떤 식으로든 납품을 한다는 약속으로 사실상 파업을 유도하고 노동자들을 협박해 반노조 조직을 만들어 노조를 깨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또 “회사청산으로 발레오공조 노조는 프랑스로 4차례 원정투쟁을 갔지만 사측은 한국노동자와 일체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2009년 프랑스의 노사정 협상에서 프랑스 고용을 유지하고 필요할 시 국외공장부터 구조조정을 하기로 약조해 프랑스 노조도 쉽게 나설 수 없는 상황”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그는 “지금까지는 구조조정이 발생한 이후에야 대응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초국적기업의 노동조합 대응은 구조조정 발생이전부터 해야 효과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초국적 구조조정은 국제적 차원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국제적 교류로 사전정보를 알고 사전조치를 취해야 제약을 넘을 수 있다”며 “국내에서 파업을 해도 국외 생산공장에서 역수입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국제적인 연대로 함께하는 사회적 압력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세베로 브라질 노총 사무총장도 “브라질도 초국적 기업에 대항하기 위해서 노조연합을 이루고 독일, 프랑스, 스페인의 노조들과 함께 한다”며 “연합노조 결성은 초국적기업의 공격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 2013년까지 확대해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거대한 힘과 기업에 대항하기 위해 국제노조활동은 필수로 해야 한다”며 “노동조합 간 상호연계로 초국적기업에서 발생하는 많은 노동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토론에서는 초국적 자본에 맞선 대응전략으로 다음과 같은 전략이 제기되었다. △초국적 기업의 구조조정과 국제적 생산 재조정·노동조건·노동자투쟁에 관한 정보의 공유 △국제기본협약·OECD가이드라인의 활용 검토 △각국 노조가 개별적으로 진행하는 임단협 투쟁에 대한 공동 전략 △초국적 기업을 압박하기 위한 사회운동과의 연대 △유통·운수 등 공급 사슬 노동자 조직화 △지역사회문제·환경문제 등 사업장 외 문제에 관한 캠페인 △비공식·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 △국제노총의 역할 강화 △남반구 노조 간의 연대 강화 등이 발제자와 각국의 참가자들을 통해 제안되었다. 노동자 대토론회: 세계경제·사회위기에 관한 남반구 노동자의 목소리 셋째 날인 11월 9일에는 민주노총, 남아공노총, 브라질노총, 아르헨티나노총 주최로 주로 남반구 노동조합이 모여 세계 경제·사회위기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응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하는 노동자 대토론회가 열렸다.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개회사에서 “G20은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공적 자금이라는 이름으로 막대한 민중의 혈세를 금융자본에 제공한 후, 이로 인해 재정위기 가능성이 부상하자 다시금 사회복지와 공공지출을 축소하며 노동자와 민중들에게 고통을 요구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또 G20이 더욱 ‘민주적인 구조’ 임을 내세우지만 이는 미국 패권 유지를 위한 ‘글로벌 불균형’을 관리하기 위해 개도국을 끌어들이는 것에 불과할 뿐, 오히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가장 큰 피해자인 저발전국가들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호르헤 야콥스키 아르헨티나 노총 전국위원은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 국제주의를 강화하고, 하나의 풍부한 비전을 갖기 위한 논의를 개시해야 한다”라며 세 가지 핵심 의제에 대한 행동 계획을 발전시킬 것을 제안했다. 세 가지 의제는 △노동의 불안정화 △다양한 사회운동들과의 동맹 △새로운 국제질서와 노동조합의 대응으로, 이 세 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연대를 강화하자고 말했다. 토론회는 ‘1) G20은 세계화의 최대 피해자인 남반구·최빈국의 이해를 대변하는가? 2) 경제위기와 초국적기업에 맞선 노동조합의 대응은 어떠해야 하는가? 3) G20은 좋은 일자리, 노동기본권을 확대하는가?’라는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진행되었으며 토론회 마지막엔 선언문이 채택되었다. 선언문에는 △신자유주의적 ‘긴축정책’을 부활시키는 조치에 반대하며, 재정적자의 탈출은 금융자본과 부자에 대한 증세를 통해 해결되어야 한다 △남반구 국가들에게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강요해왔던 IMF를 복권시키는 G20합의를 강력히 규탄한다 △G20정상회의는 대다수 남반구 국가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성과 대표성이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노동기본권 보장이 경제위기극복 및 향후 ‘위기 이후’ 체제 구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원칙이 되어야 한다 △보다 공정하고 노동친화적인 무역체제의 재구성을 위해 무차별적인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FTA)은 중단되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G20정상회의를 앞두고 벌인 인권, 노동권 탄압을 규탄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토론회가 끝난 후에 노동조합 간의 동맹을 진전시키기 위해 참가 조직들 간의 실무협의를 진행할 것을 결의했다. 이번 노동자 대토론회는 G20에 정당성이 결여되어있다는 점을 남반구의 노동조합이 직접 지적했다는 점, G20이 내세우고 있는 좋은 일자리와 노동 기본권의 보장에 관해 그 기만성을 노동조합이 직접 폭로했다는 점, 경제위기와 초국적기업에 맞선 각국 노동조합들의 공동 대응을 위한 토론을 시작했다는 점을 높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G20과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에 대한 좌파적 대안 9일 저녁에는 노동전선, 다함께, 이윤보다인간을, 사회진보연대, 사노위 다섯 단체들이 모여 워크숍을 열었다. 이 워크숍에서는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위기가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노동자들에게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는 인식 하에, 이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이들 다섯 단체는 워크숍 마지막에 채택한 결의문에서 G20정상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수장들이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강요하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기후 온난화를 주도해 환경을 파괴한 주범인 이들이 위기의 해결사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해결사를 자처하며 G20정상들이 진행해 온 것은 자본가와 부자들만을 살리는 경기부양·노동자들을 공격하는 긴축 정책이었고, 이제는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 전략을 뜻하는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고 있다고 폭로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무능하고 위험한 G20 정상회의에 반대하는 운동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우리는 G20 반대 목소리를 확산하고 항의 운동을 확대하고자 마지막까지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정상회의가 시작하는 11월 11일 ‘사람이 우선이다! 경제위기 책임전가 G20 규탄 국제민중공동행동’ 집회와 행진을 적극 조직해 힘찬 투쟁을 벌여 나갈 것” 이라며 당면한 투쟁을 적극 조직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 다섯 단체는 이명박 정부의 공격에 맞선 투쟁도 함께 할 것을 선언했다. 이들은 마지막으로 “위기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파산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자본주의의 정당성이 의심받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위기의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투쟁에 열정을 쏟아 부을 것”을 결의했다. 서울국제민중회의에서는 각 의제별 워크숍은 풍부히 진행되었지만, G20의 본질에 대한 논의 자체는 빠져 있어 참가자들이 ‘G20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히 합의하지 못한 채로 각 워크숍의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행동을 너르게 촉구하기에는 시기가 늦었다는 점 등의 아쉬움이 있지만, G20의 본질에 대해서 함께 논의하고 공동행동을 합의하는 워크숍은 의미 있는 것이었다. 한국 민중운동의 과제 G20 정상회의에 맞선 투쟁 전반을 통해서도 드러났지만, 한국 민중운동이 그간 위력적으로 진행해 왔던 신자유주의에 맞선 투쟁의 성과가 쌓이지 않았다는 것이 서울국제민중회의 역시 드러냈다. 물론 위기의 한복판에서 열렸던 G20 런던회의와 급한 불을 끄고 난 뒤의 서울회의에 대한 주목도는 다를 수밖에 없지만, 미약한 회복 이후 열린 피츠버그와 토론토 회의에서도 현지의 운동을 중심으로 벌어진 대규모 시위와 대안포럼에 비교했을 때 서울국제민중회의는 그 규모가 작았으며, 활기와 역동성도 부족했다. 한국 민중운동은 2000년 아셈반대투쟁, 2005년 아펙반대투쟁, 2006-2007년 한미FTA반대투쟁 등을 기획하고 진행해 온 역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정부가 강조하고 지배세력이 주목한 것이 비해 운동의 대응은 강력하지 못했을까? 이는 그동안의 금융세계화와 이를 대변하고 강제하는 국제공조·기구·협약에 대한 투쟁을 이해당사자들을 중심으로 한 부문별 방어투쟁을 기본으로 진행해왔기 때문이다. 10여 동안의 금융세계화 반대 투쟁이 있었음에도 G20정상회의에 전 세계의 지배세력이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또한 이에 맞선 투쟁에 전세계의 이목이 얼마나 집중되어 있는지, 이런 조건에서 어떤 투쟁을 벌여야 하는지를 운동 주체들 스스로도 충분히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서울국제민중회의를 비롯한 G20에 맞선 투쟁은 세계경제위기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문제점과 초국적 금융자본 통제의 필요성을 사회적으로 제기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계기였으며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국제연대투쟁에 있어서 한국 노동·민중·시민단체의 적극적인 역할을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신자유주의를 성공적으로 도입한 나라에서, 대안세계화 운동이 강력한 나라가 되는 것은 불가능할까? 한국 민중운동은 세계의 사회운동으로부터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이에 화답하는 것이 전세계의 투쟁하는 민중과 연대하는 길이다.
세계 노동운동 활동가 인터뷰 G20 서울회의를 반대하는 한국의 사회운동 단체들은 지난 11월 6일부터 12일까지 “G20 민중 공동행동 주간”을 선포하고 각종 활동을 벌였다. 공동행동주간에 참여하기 위해 노조 지도자와 활동가들이 세계 각국에서 한국을 방문하였다. 얼마 전 출범한 노동자운동연구소는 국제적 네트워크가 아직 부족하지만, 이 기회를 활용하여 각국의 노동자 운동 활동가와 인터뷰할 수 있었다. 남아공노총(COSATU) 제르고 하메스(Jeorgo Hames) 수석부위원장, 남아공노총 소속 전국교육보건노동조합(NEHAWU) 조 뭄비사(Jo Mumbisa) 수석부위원장), 이탈리아 제1노총(CGIL) 니콜레타 로시(Nicoletta Rocchi) 국제국장, 국제노점상연합(StreetNet International) 팻 혼(Pat Horn) 국제 코디네이터 등과 인터뷰할 수 있었으며, 아르헨티나 신생노총(CTA) 마테 야누스(Maite Llanos) 동지와 루이스 캄포스(Luis Campos) 동지는 이메일로 서면 인터뷰하였다. 인터뷰 내용을 경제위기에 대한 정부의 대응, 노동계의 반응과 대안, 정치력 영향력 증진이라는 주제별로 정리하였다. 경제위기에 대한 정부의 대응 이탈리아 2008년 말 시작된 세계 경제위기는 2007년부터 이미 GDP가 하락하기 시작한 이탈리아를 강타하였다. 2008년을 거치며 더욱 심화된 경제위기의 결과 이탈리아의 경제는 2009년 전년대비 5.1%의 위축을 경험한다. 공식통계로는 2007년 2/4분기 6%에 머물던 실업률은 2009년 4/4분기 8.2%까지 치솟았으며, 특히 청소년들과 임시직 노동자들에 대한 영향이 컸다. 2008년과 2009년 베를루스코니 정부는 세 가지 경기부양책을 도입하고 실업수당의 수혜 범위를 확장하였다. 이탈리아 로시 국제국장은 이러한 조치로는 전혀 충분치 않았다고 말한다. “(베를루스코니) 중도우파정부의 대응은 미약합니다. 이탈리아의 실업률은 [실제로는] 12%를 향해가고 있고 비공식 노동이 많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불안정노동자가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사회보장과 실업수당 제도의 부담도 클뿐더러, 실업자에 대한 사회적 보장조치가 끝나는 내년이 되면 상황은 더 크게 악화될 것입니다.” 로시 국제국장은 이어 긴축정책이 공공부문의 일자리와 노동조건에 미친 악영향에 대해 설명하였다. “정부는 [2013년까지] 30만 개의 공공부문 일자리를 삭감하겠다고 공언한 상태입니다. 정부기관에 고용되어 있거나, 교육부문에 종사하는 상당수 임시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게 되겠지요. 정부 소속 노동자들은 단협을 갱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임금도 동결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은행 부문의 차입 구조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독일이나 영국 정부에 비하면 이탈리아 정부에게 여유가 있었으며, 상당한 국가부채에도 불구, 그리스나 스페인의 재정위기 상황보다는 그 심각성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로시 국제국장은 이탈리아 정부는 이러한 사실에 자부심만 느끼고 있을 게 아니라 국가부채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고, “보건, 연금, 교육, 사회보장 축소 없는 경제 성장”을 가능케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아르헨티나 세계 금융경제 위기가 강타한 곳은 서구였지만, 중남미 역시 무역, 외국인직접투자, 송금 축소로 영향을 받았다. 아르헨티나는 2008년 4/4분기와 2009년 1/4분기에 실질 GDP 하락을 겪었고, 실업률은 동기간 7.4%에서 8.4%로 소폭 상승하였다. 그렇지만 아르헨티나는 정부의 일자리 유지 대책과 포괄적 경기부양책, 연금제도의 재사회화(1994년 사유화) 등을 통해 위기에 대처하였다. 야누스와 캄포스는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자인 페르난데스 정부의 위기대응 정책을 대체로 긍정하는 입장이었다. “가장 중요한 대책 가운데 하나는 위기 상황 기업의 임금지급에 대한 정부 보조금을 집행한 것입니다. 정부는 국내산업을 수입품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환율도 높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르헨티나 정부는 보편소득 프로그램을 시행하였습니다. 그중에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보편적 아동수당(AUH) 프로그램을 들 수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공식적 사회보장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부모 슬하에 있는 350만에 달하는 아이들에게 한 달 180페소(약 5만 원)를 지급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또 정상 수급요건이 미달하는 노령층에게 연금지급을 확대한 것도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야누스와 캄포스는 이러한 조치를 정부의 공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사회단체와 노조가 지난 수년간 요구해온 것입니다. CTA의 입장에서는 이 조치들이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편적 아동수당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이 조치들이 위기 대응에 매우 효과적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남아공 세계 경제에 깊숙이 편입된 남아공은 경제위기 이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 경기후퇴를 겪었으며, 이미 어려운 고용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실질 GDP 성장률은 2008년 4/4분기 마이너스를 기록한 뒤, 2009년 1/4분기에는 거의 -8%를 기록하였다. 동기간 실업률은 21.9%에서 24.3%로 상승하였다. 실망 실업자까지 고려한다면 2009년 4/4분기 실업률은 훨씬 더 높은 31.2%로 추산할 수 있다. 정부대응은 노사정 3자 협상의 결과물인 핵심 산업에 대한 구제금융 지원과 공공 일자리 프로그램을 비롯한 대규모 공공투자였다. 이러한 조치들이 없었다면 위기의 영향이 더 심각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하메스와 뭄비사 두 수석부위원장은 이 조치들이 만족스럽지는 않다고 말하였다. “[2009년에] 백만 개의 일자리가 날아갔습니다. [구제금융 조치가 없었더라면] 광업과 자동차 부분에서 더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직물 분야 일자리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공장 대부분이 문을 닫았고, 수많은 노동자가 정리해고 당했습니다. COSATU는 여러 제안을 하였지만 [노사정 협상에서] 자본가들이 거부하였습니다. 가진 자들은 현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정부가 생각을 고쳐먹고 한 걸음 더 노동자의 편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비공식 부문 공식 부문 경제에 만연한 실업 때문에 많은 남아공인은 노점상이나 시장상인, 넝마주이 등 비공식 경제에 종사함으로써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러나 최근의 경기 침체 때문에 공식 부문과 마찬가지로 비공식 부분의 일자리도 감소하였다. 비공식 부문 고용은 2008년 2/4분기 기준 총고용의 17% 수준에서 2009년 3/4분기 15.5%로 하락하였다. 비공식 부문 실업자와 노동자 모두 상당 부분 정부의 구제 정책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다. StreetNet의 팻 혼 국제 코디네이터는 아프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이 이러한 상황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 노동자들이 위기로부터 완충지대에 있다는 생각은 신화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비공식 부문 노동자, 특히 여성은 세계 경제 피라미드의 최하층을 이루고 있고, 이들에 대한 보호조치도 공식 부문 노동자들보다 미흡한 것이 사실입니다. 비공식 부문 기업과 노동자들은 경제위기 시 충격을 완화할 장치도 없고 다만 일을 계속해야만 할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선 가난이 심화되면서 실업의 문제도 부차화됩니다. 차상위 계층이 더 가난해질 뿐이니까요. 노동관련 입법에서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이] 고려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들은 노동자나 기업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적대적 대접만 받게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예를 들어 위기상황에서 아프리카의] 지자체들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노점상이 일하는] 공공부지를 매각합니다. 지방정부는 정부의 위기경감 대책에 함께 하지 않고 손 놓는 일도 있습니다. 팻 혼 코디네이터는 이러한 상황은 최근 위기에 의해 악화된 측면도 있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어려움의 연장선에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항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노점상은 경제주체로 여겨진 적이 없어요.” 팻 혼 코디네이터는 이번 세계 경제위기에 대한 아프리카 지역의 일반적 반응은 “위기는 무슨 위기? 좋았던 적이 아예 없었는데…”였다며 현지 반응을 전했다. 노동계의 대응과 대안 남아공 COSATU 대표자들은 현재의 위기가 과거로부터 극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동의하였다. “이번 세계 금융위기는 남아공 노동자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남아공은 이번 위기 이전에도 이미 경기 침체를 겪고 있었습니다. 남아공이 민주화되기 이전부터 노동자들은 위기를 겪어온 것입니다. 1996년 성장·고용·재분배 전략(GEAR)이 도입은 이러한 위기에 일조하였습니다. 이 전략의 시행 결과 몇 개 부분의 일자리가 사라졌습니다. 경제성장은 겨우 3% 남짓이었습니다만, 그마저도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약속했던 재분배는 없었고, 있는 사람들 재산만 불릴 뿐이었지요.” 성장·고용·재분배 전략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정부가 추진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1996년 ANC 정부가 COSATU와 남아공 공산당(SACP)과의 3자 동맹에도 불구, 일방적으로 채택한 정책이다. 이 정책의 골자는 재정 적자 감소를 비롯하여 인플레이션 목표제, 세금 감면, 사유화, 무역 자유화, 외자유치, 수출주도 성장 등이다. COSATU는 남아공의 경기침체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성장·고용·재분배 전략을 폐기하고 새로운 경제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를 위해 COSATU는 ‘완전고용 성장경로’라는 새로운 경제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완전고용 성장경로 전략은 다음의 6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및 뒤이은 16년간의 민주화 기간 발생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부의 재분배 2) 금융자본에 대한 통제와 산업발전 및 재분배 지원을 위한 통화정책 3) 인프라 발전, 신용 제공, 기술지원, 기술발전 및 훈련을 통한 지역 산업 육성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 4) 공기업과 협동조합을 비롯한 집단적 형태의 소유권 보장 5) 기술 이전 및 경제 개발 정책 조율을 통한 지역 개발 6) 환경파괴, 생물 다양성 악영향, 토양 유실, 사막화, 온실가스 방출, 지표 및 지하수 오염 등에 대한 제한을 통한 환경적 지속 가능성 창출 등이 그것이다. 최근 몇 년간 COSATU와 ANC와의 관계가 경색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COSATU는 여전히 남아공 정부가 이러한 제안을 고려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COSATU의 두 대표자는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시 ANC 정부가 도입하여 제도화된 사회적 대화 기구를 노동자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으로서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우리는 ANC와 동맹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정부가 새 경제 계획을 시행하도록 강제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견해를 표출하고 다른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남아공에는] 사회적 대화를 위한 기구가 존재합니다. 이러한 기구를 없앤다면 문호를 닫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합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파업을 조직할 것입니다. 이미 공공부문, 자동차, 광업 부문에서 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두 대표자는 5개년으로 계획된 완전고용 성장경로 전략이 불평등과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지만 COSATU의 궁극적 목표가 이것에 그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역시 강조하였다. “[완전고용 성장경로는]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지금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약화시키는 것일 뿐이지요.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사회주의 국가입니다.” 이탈리아 CGIL은 대규모 대중집회를 통해 위기대응에 실패한 이탈리아 정부를 비판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CGIL의 로시 국제국장은 범유럽적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로시 국장은 또한 장기적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럽차원의 경제 정책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하였다. “유럽노총(ETUC)을 비롯한 유럽 전역의 다른 노동조합과 연계하여 지금껏 수많은 집회와 총파업을 벌여왔습니다. 10월 16일 금속 노동자들이 대규모 집회를 벌였습니다. 총연맹 차원에서 다른 노조들과 함께 11월 27일 또 한 번 대규모 집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 집회를 통해 일자리와 사회정의를 요구할 생각입니다. 유럽 차원의 투쟁이 더 필요합니다. 지금까진 ‘모두가 자국만을 위했을 뿐’입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간다면, 세계적 차원에서 승리란 요원한 일이 되겠지요. 유럽 차원에서 경제정책을 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CGIL은 유럽 차원의 인프라, 교육, 훈련에 관한 경제적·정치적 정책을 요구하는 ETUC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유럽 차원의 단협이 필요하며 공통의 재정정책과 노동정책을 펼쳐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은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사회모델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지 시스템을 방어하고 유럽적 차원에서 재형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시 국장의 언급은 ‘사회적 유럽’을 상기시켰는데, ‘사회적 유럽’이란 ‘유럽적 자본주의 사회 모델’의 우월성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파생되어 “유럽 시장의 긴밀한 통합 때문에 더 이상 국가적 수준만으로는 불가능해진 사회적 규제 및 보호를 더 높은 차원에서 재건할 것을 요구”하는 흐름이다. 사회적 유럽 담론은 유럽 통합의 불가피성과 필연성을 전제로 하며, 노동조합을 운동의 주체로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대화의 적극적 파트너로 파악한다. 이는 비단 유럽의 노동조합뿐 아니라, 유럽 각국 정부 및 유럽 차원 기구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수용된 개념이다. 로시 국장의 언급으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바, ETUC와 가입조직은 사회적 유럽 담론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요구를 주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르헨티나 남아공과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의 노동자들도 노사정 협의뿐만 아니라 파업과 시위를 통해 위기에 대응해 왔다. “아르헨티나에 최악의 위기는 2008년 10월부터 2009년 6월까지였습니다. 이 동안 대부분 노동쟁의는 위기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직위해제, 대규모 해고, 임금체불, 직장폐쇄 등이 그것이지요. 우리 자료를 보면 2009년 노동쟁의의 55%가 위기로 인해 발생하였습니다. CTA는 2009년 4월 22일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였습니다. 또한 위기의 비용의 노동자 전가를 반대하는 정책도 추진하였습니다. CTA와 다른 노동운동 단체들은 3자 기구에 참여하여 최저임금 인상을 비롯하여, 사회보장제도를 공식부문 노동자뿐 아니라 모든 노동하는 민중을 대상으로 확대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CTA의 비공식 부문 노동자에 대한 관심은 단지 립서비스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40%가 넘는 아르헨티나의 노동인구가 비공식 부문에 종사하고 있고, CTA는 노동운동 강화를 위해 이들을 조직하는 일이 필수적임을 인식하고 있다. “[CTA는] 실업자, 특수고용자, 농민, 원주민 등을 조직하고 있으며, 오로지 고용주만이 CTA에 가입할 수 없습니다. CTA에게 있어 모든 부문의 노동자들에 대한 대표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최우선 과제 중 하나입니다.” 비공식 부문 CTA는 StreetNet과 비공식적 관계를 맺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CTA는 StreetNet의 가맹조직과 유사한 논의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떻게 자가고용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증진시킬 것이며, 이들의 힘을 어떻게 정치적 세력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사회연대 경제’에 관한 논의가 점점 중요하게 부상하고 있다. 이것은 민주적이고 수평적 구조를 갖추고 자가고용/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운영되는 집단적 경제 행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그 주된 목적은 이윤의 극대화가 아니다. CTA에서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이러한 아르헨티나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이러한 경제형태는 지난 100년 이상 존재해왔다. StreetNet은 2010년 8월에 열린 3차 세계총회에서 사회연대경제 촉진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 결의안에는 노점상과 기타 자가고용 노동자들의 활동이 사회적 책임, 기업가정신, 연대의 원리와 가치로 운영되는 “새로운 경제부문(사회연대경제)의 형성으로 귀결됐으며, 이는 민주주의와 경제적 시민권의 발달에 핵심적 역할을 하고, 인간이 자본보다 중시되는 지속가능한 경제 모델 창출에 기여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 결의안은 StreetNet의 가맹조직들이 정부를 압박하여 사회연대경제와 그 구성원을 지원하여 지역 공동체를 강화하고, 새로운 기업문화를 창출하며, 경제활동을 지역적 필요와 연계시킬 수 있도록 촉구하고 있다. 팻 혼 코디네이터는 사회연대경제의 촉진이야말로 노점상과 기타 비공식부문 노동자들이 직면한 ‘항상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StreetNet이 제시하는 대안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긍정적인 비전입니다. [이 결의안은] 공식 입장으로서, 새로운 정치-경제적 비전의 시발입니다. 일종의 사회주의적 비전이지요. [이러한 비전을 통해서] 우리는 단순히 방어적인 투쟁에서 한 발 더 나갈 수 있습니다.” 정치력 영향력 강화 노동자운동연구소가 인터뷰한 모든 노조 대표들은 노동자의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의 단결과 정치적 영향력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탈리아 로시 국장은 정치적 영향력 강화를 위해선 CGIL과 다른 두 노총, 즉 기독교계 CISL과 사민주의계열의 UIL 사이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중도우파 정부는 3대 노총 사이의 관계를 경색시키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다른 두 노총은 정부에 조금 더 협력적입니다. 노총들과 정부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못 받아들일 합의를 맺었습니다.” 로시 국장은 CGIL 내부의 정치적 견해 차이가 단결의 장벽이 된다는 언급도 하였다. “[이탈리아에는] 새로운 정당이 생겼습니다. 니키 벤돌라(Niki Vendola)가 속한 SEL(좌파·생태·자유)이 그것인데요, 여기에 공산당과 민주당도 있습니다. CGIL은 이 모든 정당과 관계가 있지요. [다른 두 정당 소속도 있지만] 노조의 고위 간부 중 상당수가 SEL 소속입니다. 그렇지만 노조 간부와 평조합원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건 큰 문제입니다. 단결이 전제되지 않으면,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로시 국장은 이탈리아뿐 아니라 유럽 수준에서 단결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남아공 COSATU 의 대표자들은 ANC가 신성장경로 전략을 받아들이도록 압박하는 데 있어 사회운동과 시민사회세력과의 동맹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완전고용 성장경로 전략은 남아공에서 널리 반향이 있습니다. 시민사회와 함께 이를 논의하기 위한 토론회를 조직했으며, 앞으로 함께 캠페인을 벌여나갈 것입니다.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선 시민사회를 동원할 수 있어야 합니다.” COSATU의 대표자들은 ANC와 남아공 공산당과의 동맹 또한 강조하였지만,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만 ANC가 올바른 목표를 추구하도록 강제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ANC 안에는 노동자, 시민운동 세력, 자본가,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제반 세력이 투쟁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ANC의 정책에 영향력을 미치려고 합니다. 돈이 있는 이들은 노동자의 목소리를 묻어버리길 원합니다. 민중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는 실질적인 동맹이 필요합니다.” 아르헨티나 CTA 역시 노동운동과 시민사회단체 간의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CTA는 이를 원칙으로 확립하고 조직 구조 속에 반영하여 부문 간 장벽을 뛰어넘는 노동자의 단결을 목표로 하고 있다. CTA에는 개별 노동자의 직접 가입 이외에도 다양한 가입형태가 있다. “CTA에는 사회운동, 그러니까 실업자 단체, 농민단체 등이 가입할 수 있습니다. 이 단체들의 대표자가 CTA의 집행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CTA는 인권단체, 군사독재 청산 법정활동, 성차별에 반대하는 입법을 위한 여성단체, 거대 곡물기업로부터 보호를 위한 규제를 청원하는 농민 단체 등 대부분의 활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CTA는 이러한 활동들이 정치적 영향력 확산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단체들은 위기 시 전략적 동맹입니다. 민중들의 영향력 증진은 CTA의 근본적 변화와 지속가능하고, 배타적이지 않고, 평등하고, 공정한 개발 모델을 쟁취하기 위한 주요 전략 중 하나입니다.” 비공식 부문 CTA 대표자와 마찬가지로 팻 혼 코디네이터 역시 공식-비공식 부문 노동자 간 연대와 동맹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StreetNet은] 노조와 비공식 부문 노동자 조직이 함께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증진시킬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연대와 공동행동을 촉구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노조가 고용된 노동자만을 조직해서는 노동인구를 완전히 대변하기란 요원해질 것입니다.” 아직은 대부분 노조가 비공식 부문 노동자들의 이해에 무관심한 편이긴 하지만, 팻 혼 코디네이터는 이 분야에서 StreetNet의 성과에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 “StreetNet은 남반구 노조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중남미 지역의 CUT나, 민주노총, COSATU가 그 예이지요. 콜롬비아 CUT는 노점상 조직을 새로 출범시켰습니다. StreetNet은 현재 COSATU와 [비공식부문 노동자 조직의] 전국동맹을 건설하기 위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결론 COSATU와 CTA, CGIL, StreetNet 활동가와의 대화를 통해 이들 노동자 조직의 경제위기에 대한 인식과 그 대응방향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눈앞에 닥친 위기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 아닌, 장기적인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향한 역량 증진에 방점을 찍고 있는 노동운동의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CGIL의 범유럽 연대와 “사회적 유럽” 추구, COASTU의 완전고용 성장경로 전략, CTA의 혁신적인 부문을 초월한 조직화, StreetNet의 사회연대경제와 공식-비공식 부문 간 연대를 호소하는 결의문 등에서 사회 변화를 위한 비전과 국제 노동운동의 방향성을 살펴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에서 확인한 각국 노동운동의 전략에는 많은 쟁점이 포함되어 있다. 노동자운동연구소는 계급적 통일성 증진과 국제 연대를 위한 새로운 틀을 모색하면서 주요국 노동조합의 전략과 프로그램에 대해 비판적 평가를 수행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