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원칙한 반MB연합은 자멸의 길이다 6.2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두 달이 채 남지 않았다. 그 동안 노동자민중운동의 공동 선거대응이 부재한 가운데, 이명박 정권 심판을 명분으로 소위 ‘5+4 협상’(지방선거 공동승리를 위한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야5당의 협상테이블로 민주통합시민행동, 시민주권, 희망과 대안, 2010연대 4개 시민단체가 입회)을 중심으로 선거대응 논의가 이루어졌다. 3월 16일 진보신당을 제외한 야4당의 선거연대 잠정 합의가 있었으나 민주당 최고위원회가 이를 거부하였다. 진보신당은 “민주당의 패권주의와 묻지마 들러리 연대로는 이명박 정권을 심판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며 최종 불참을 선언했다. 이후 3월 30일 진보신당을 제외한 채로 ‘4+4 협상’이 다시 재개되었으나, 경기도지사 경선방식을 둘러싼 갈등과 민주당 내 비주류들의 반발이 강화되고 있어 전망을 낙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명확히 하지 않는 반MB연합은 노동자민중운동의 무덤 노동자민중운동이 반노동자적인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고 이를 위해 반MB 전선을 강화하는 것은 기본적인 원칙이다. 다만 반MB 전선의 성격과 주체를 명확히 하지 않는 ‘묻지마 반MB연합’이어서는 곤란하다. 현재 노동자민중운동의 일각에서 추진하고 있는 반MB 전선은 소위 사회적 영향력 확대라는 명분하에서 내용적으로 ‘반신자유주의’라는 기조를 유실하고, 주체적인 측면에서도 노동자 민중의 단결을 중심으로 사고하기보다는 민주당과 같은 과거 집권세력이나 소위 영향력 있는 시민단체와의 상층협상에 치우쳐 있다. 노동조합에 대한 이명박 정권의 파상적인 공세가 강화되는 정세에서 노동자민중운동의 공동대응을 통해 투쟁과 계급적 단결을 확대하기보다는 선거에서의 득표를 위해 ‘5+4 협상’ 혹은 ‘4+4 협상’에 집착하고 있다. 또한 민주당 등과의 선거연합 성사를 위해 한미FTA, 비정규직, 파병문제 등 주요한 정치 쟁점 논의를 회피하고 당면한 노동자들의 요구와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무원칙한 반MB연합의 효과는 노동자민중운동에 파괴적이다. 노동자민중운동의 요구가 부차화되고 당선을 위한 ‘선거연합’에 집착한다면 노동자민중의 이해를 대변하겠다는 진보정당의 정체성은 유실되고 제1야당인 민주당의 영향력만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노동자민중운동을 ‘김대중, 노무현 정부 집권 10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민중운동을 탄압했던 구 집권세력인 민주당의 이중대’로 전락시키는 무원칙한 반MB 연합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지방선거, 분열과 갈등을 딛고 노동자민중운동의 단결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모두 진보대연합(진보대통합)을 중요 정치방침으로 확정했다. 민주노총 또한 현장 조합원들의 진보정당 통합에 대한 열망에 근거해 진보정치대통합을 요구했다. 하지만 ‘5+4 협상’이라는 반MB 선거연합은 실물화된 반면, 진보대연합의 방식과 경로를 둘러싼 정치 공방 이외에 실질적인 통합의 흐름을 현실화하지 못하고 있다. 사태가 이러한 데에는 민주노동당의 입장과 태도에 일차적인 문제가 있다. 외형적으로는 진보신당에게 진보정당 통합에 대한 합의를 요구하면서도 진보정당 간의 전면적인 선거연합에 무게를 두지 않고 민주당과의 선거연합 성사에 목을 매고 있다. 또한 한미FTA 반대, 노동3권 보장, 비정규직 사유제한 등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이 반대하는 쟁점을 사실상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이 불참선언을 한 현재 상황에서도 ‘4+4 협상’을 통한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다. 진보신당 또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민주노동당의 행보를 비판하면서도 현실적 어려움을 근거로 ‘5+4 협상’에 함께 참여했다. 진보대연합이라는 진보신당의 방침에 근거한다면 인부 유명 정치인에 기대어 진보신당의 독자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노동자민중운동의 공동대응을 중심으로 활동의 방점을 찍어야 마땅하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대통합을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민주노총의 방침이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다. 3월 17일 5차 중앙집행위원회에 제출된 초안은 ‘반MB연대 단일후보 적극 지지, 당내 공식적인 의결기구를 거쳐 대중적으로 책임 있게 진보정당 간 대통합을 공식화한 진보정당 후보, 대통합을 공식화한 정당의 후보로서 진보정당 통합에 동의하고 실천한다는 후보서약서를 쓴 후보에 대한 지지’로 압축된다. 이는 민주노동당의 선거기조를 그대로 수용하고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고수하는 안이었는데, 이 방침이 통과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선거방침 초안은 3월 24일 6차 중앙집행위원회를 통해 ‘6.2지방선거에 한하여, 진보정당 통합(추진)을 대중적으로 공식화한 정당, 진보정당 통합과 큰 틀의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동의하고 실천한다는 후보서약서를 쓴 후보, 반MB연대 단일후보 중 민주노총 후보(지지후보)와 배치되지 않고 민주노총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후보에 대한 지지’로 변경되어 결정되었다. 초안과 비교해서 공식 의결기구의 결정이 아니라도 통합을 대중적으로 공식화한 정당의 후보로 다소 방침을 완화하였으며,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에서 진보신당까지 포괄하는 지지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고, 반MB연대 단일후보와 관련해서도 일정한 기준을 마련했다.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던 초안에 비해 긍정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방침에 모호한 측면이 존재하여 지역의 운동조건에 따라 ‘무원칙한 반MB연대’가 추진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이러한 우려는 이미 몇몇 지역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인천의 경우 그동안 ‘진보대연합’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후보단일화를 모색해왔고, 실제로 시장후보와 한 명의 기초의원 선거구를 제외하고 모두 조정하는 성과를 이뤘다. 그런데 최근 인천에서 진보신당을 제외한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국민참여당이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에 대한 배분을 원칙으로 한 합의문을 발표하면서 선거연합의 중심축이 ‘반MB연합’으로 급전환되었다. 또한 울산광역시의 경우 진보양당뿐만 아니라 민주당과 창조한국당 까지 포함된 연석회의 틀이 갖춰졌지만, 진보신당이 불참을 통보한 뒤 야 3당이 민주노동당 김창현 후보를 공동 시장후보로 추대함으로써 진보대연합이 불발로 끝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미 노동자민중운동 중심의 단결과 연대보다 ‘반MB연대’가 중심이 되면서 진보정당 간의 갈등이 현실화되고 있고 이는 곧 민주노총 내부의 갈등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반면 서울지역의 경우 노동조합의 힘을 바탕으로 선거연합을 통해 진보진영 단일후보를 결정한 첫 사례로 현재와 같이 무원칙한 ‘4+4 협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의미 있는 행보를 시작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사회당과 민주노총 서울본부로 구성된 ‘진보서울연석회의’는 4월 6일 기자회견을 통해 강호원 민주노총 서울본부 사회공공성 위원장(민주노동당 소속, 노원4선거구 출마)과 허섭 전 서울지하철공사노동조합 위원장(진보신당 소속, 노원6선거구 출마)을 진보진영의 공동 후보로 발표했다. 연석회의는 이후 공동의 선거강령 합의, 후보 단일화를 위한 노력을 통해 공동후보를 확대하고 발표한다는 계획이다. 따라서 지방선거가 진보정당 간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노동자민중운동의 단결의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민주노총의 적극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진보정당에 대한 수동적 지지와 모호한 반MB연대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방침은 한계가 많다. 민주노총은 지자체 선거를 통해 주요한 투쟁요구가 사회적 쟁점이 될 수 있도록 민주노총의 상반기 투쟁과 연동하여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등 진보정당을 비롯하여 노동자민중운동의 공동대응을 위해 적극적인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민중운동의 주체적 투쟁태세를 구축하고 단결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노동자민중운동의 후보 단일화와 노동권-생존권 요구를 중심으로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강화하자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로 촉발된 세계경제위기의 부담은 대량해고, 임금억제, 노동강도 강화 등으로 고스란히 노동자에게 전가되었다. 한국이 금융위기에서 가장 일찍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실질임금은 아직 위기 이전 수준에 미달하고 고용불안은 여전히 심각하다. 두바이 월드의 채무상환유예, 그리스 등 남유럽의 위기는 이번 경제위기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도 상당기간 동안 노동자들의 고통은 계속될 것이며 위기 이전 수준의 노동조건을 회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위기에 따른 이명박 정부의 고용위기에 대한 ‘전략’은 노동유연화와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자리 늘리기, 정규직 공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노동조합에 대한 탄압 또한 광폭하게 진행되고 있다. ‘법과 원칙’이라는 미명 아래 노동배제정책으로 일관하고 있고 13년간 유예된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와 복수노조-창구단일화 법안 통과는 노조활동을 심각하게 제약할 것이다. 단위 노동조합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힘 있게 대응하지 못하고 투쟁 보다는 양보교섭이 속출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를 역전시키기 위해서 진보정당은 당선 가능성을 중심으로 노동자민중운동의 현실쟁점과 괴리된 ‘정책대안’을 제시하기보다 대중운동의 주체역량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일관된 계획을 가져야 한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것처럼 노동조합운동이 무력화된 조건에서 진보정당의 미래가 있을 수 없다. 현재 노동조합운동의 한계는 공동의 노력과 단결투쟁을 통해 극복해야할 문제이지 진보정당의 뿌리인자 근거지인 노동조합과 거리두기를 통해 해결할 수 없다. 이명박 정권의 강력한 공세 속에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 노동자 민중이 투쟁의 자신감을 얻을 수 있도록 투쟁을 확대하고 엄호하기 위한 정책과 이슈를 제기해야 한다. 노동자 시민의 고용과 임금, 생존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으로 단결해야 함을 적극적으로 알려내야 한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천명하면서 지역과 현장을 누벼야 한다. 이와 같이 엄혹한 정세와 운동의 과제에도 불구하고 진보정당들의 현실적 행보는 심히 우려스럽다.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이 불참을 선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4+4 협상’을 통해 민주당과의 연대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진보신당은 진보대연합과 노동자민중운동의 단결을 중심으로 활동하기보다 ‘5+4 협상’에 함께 참여했다 탈퇴하여 민주노동당의 행보에 힘을 실어준 꼴이 되었다. 한편 서울지역에서 노동조합의 주도적 역할을 중심으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이 진보진영의 공동후보를 결정하는 첫 사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노동자민중운동의 단결을 확대하기 위한 노동조합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증하는 사례이다. 따라서 민주노총은 각 지역본부를 중심으로 노동자민중운동의 공동선거 대응을 통해 이명박 정권에 노동권-생존권 요구, 경제구조를 투기화하고 있는 금융에 대한 전면통제 요구를 적극 제기하고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확대하기 위한 활동을 펼쳐야 한다.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노동자민중운동의 분열만 가속화하는 민주당과의 선거연합 추진은 즉각 중단해야 한다. 대신 노동자민중운동의 후보단일화와 공동의 선거강령 마련에 착수해야 한다. 이를 통해 노동자민중운동의 단결을 확대하고 현장노동자들이 주체로 나서는 선거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보호감호제도 재도입에 반대한다 지난 3월 16일, 이귀남 법무부 장관은 경북 청송교도소를 방문하여 형법상 상습범 및 누범 가중조항을 없애고 보호감호제를 재도입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라 밝혔다. 또한 청송교도소에 사형집행시설 설치를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어 다음날, 법무부는 살인과 성폭력, 강도 등 3대 중범죄를 보호감호가 필요한 흉악범죄의 범주에 포함하는 것을 골자로 한 ‘보호감호제 시안’을 마련 중이라 밝혔다. 특히 성폭력 범죄에서는 아동 성폭행을 포함한 모든 성폭행 범죄자에 대해 보호감호제를 적용하기로 하였고, 절도와 폭력도 상습성과 죄질을 따져 사안별로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곧 형법개정을 위해 ‘형사법개정특별위원회’에 이러한 내용의 시안을 올릴 예정이라 밝혔다. 행정처분으로서의 보호감호제도의 문제 법무부가 재도입하고자 하는 보호 감호제는 <사회보호법>에 속해있는 법제도로서 인권유린과 위헌성논란으로 인해 2005년 8월에 폐지된 법안이다. 1980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사회정화’라는 미명 하에 “불량배 일제검거에 관한 계엄포고 13호‘를 발동, 전국 60,755명을 검거하고 이중 39,742명을 군부대로 강제 이송해 삼청교육을 실시한 이후, 이들을 장기간 격리하기 위해 보호감호제를 시행하고 이와 함께 <사회보호법>을 제정했다. <사회보호법>에 명기되어 있는 법의 목적은 ‘죄를 범한 사람들 중 재범의 위험성이 있고 특수한 교육 개선 및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별도의 보호처분을 함으로써 사회복귀를 촉진하고 사회를 보호’하는 것이다(사회보호법 제1조). ‘보호처분’의 종류로는 보호감호, 치료감호, 보호관찰이 있다. ‘보호감호’의 경우 상습범 중 재범의 위험이 있는 자에게 부과되며 최대 7년의 기간 동안 청송보호감호소에서 집행되었다. ‘치료감호’는 심신장애자 및 마약 알코올 등 약물중독자로서 죄를 저지른 자에게 부과되며 공주치료감호소에서 집행되고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보호관찰’은 피보호자의 가출소 및 피치료감호자에 대한 집행 종료 후 3년간 일상생활에 대한 신고 의무 및 준수사항을 부과해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2005년 사회보호법이 폐지되면서 이 세 가지 보호처분 중 치료감호제만이 대체 입법되어 남아있다. 이처럼 <사회보호법>은 상습범 누범에 대한 ‘교화’를 명분으로 형 집행 종결 후에 보호처분을 추가로 부과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보호처분’은 1975년 제정된 <사회안전법>, 그리고 1989년도에 명칭이 바뀐 <보호관찰법>의 ‘보안처분’ 제도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사회안전법>은 1975년 한국전쟁 포로 및 장기 수감된 ‘반국가사범’의 사상전향을 강제하고 이들에 대한 사회격리를 연장하기 위해 제정된 치안법이다. 보안처분에는 사상범에 대한 ‘보호감호’ 처분과 ‘주거제한’ 처분과 함께 ‘보호관찰’ 처분이 존재하였다. 이 법은 1989년 <보안관찰법>으로 개정되었다. <보안관찰법>은 보호감호와 주거제한은 폐지하고 보호관찰 처분을 대폭 강화했다. <사회보호법>의 보호처분과 <보안관찰법>의 보안처분은 각각의 적용대상과 목적은 다르지만 모두 형사법 이외에 추가로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형벌 제도다. 법원에 판단에 의한 판결과 집행이 아닌 법무부장관과 법무부 관할 하에 집행되는 강력한 행정처분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는 법원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검찰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무부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사회보호법 부활 및 관련 법제도의 강화를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미 형사법으로 처벌을 받았으나 추가로 인신을 구속하여 사회로부터 격리, 보호조치를 한다는 발상은 이미 헌법에 의해 보장되어 있는 ‘이중처벌금지’와 ‘소급적용 금지’ 조항을 위반한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법률적 논란이 되었다. 상습범과 누범에 대한 규제와 특히 사상범에 대한 강력한 규제라는 측면에서 보호처분과 보안처분 제도는 체제유지의 수단으로 발전되어 왔다. 보호처분과 보안처분은 사회불안 요소를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추가적인 감금과 감시를 통해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될 수 있다는 공포를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즉 법적 규제 장치인 형사법 이외에 이 같은 제도를 만들어 사후처벌만이 아닌 예방적인 처벌을 시행해서 사회 불안요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통제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행정처분으로서의 보호처분과 보안처분은 국가에 의해 직접적인 폭력이 관철되는 수단으로써 과거 나치가 유태인 학살에 치료감호제도를 통해 악용한 사례도 있다. 현재까지도 <보안 관찰법>은 <국가보안법>과 함께 대표적인 사상통제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법을 이용하여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인 정치 사상의 자유를 부정하고, 인신을 구속하는 것이다. 사회보호법을 폐지하기 위한 투쟁 2003년 3월에 발족하여 2005년 8월까지 사회 보호법 폐지를 위한 활동을 벌인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이중 처벌의 부당성과 재범 예방정책의 실효성을 근거로 보호감호제 폐지 활동을 벌였다. 공대위는 범죄 재발의 위험성을 누가, 무슨 근거에서 판단할 수 있는가를 문제 제기했다. 또 설사 재범의 위험성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국가가 재범의 위험성을 제거한다는 미명 하에 죄 없는 시민을 구금하여 개조시킬 권한이 있다는 발상을 비판했다. 보호감호를 선고할 당시 판사는 ‘재범의 위험성 소멸 여부’를 보호감호 집행기간 중 알 수 있다는 이유로 따로 보호감호 기간을 정하지 않는다. 이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재판청구의 권리를 말살하는 것이다. 공대위는 당시 청송 보호감호소에서 집행되었던 보호감호가 과연 범죄자의 사회복귀라는 목적에 부합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보호감호라 행해지는 구금은 교도소의 집행실태와 다를 바 없고 오히려 더욱 열악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회적 유대관계와 완전히 단절되기 때문에 감호기간에 수감자가 재사회화되는 과정 자체가 불가능하다. 오히려 보호감호소의 구금 자체가 수감자의 사회적 유대를 말소시킴으로서 재범의 위험을 증대시킬 수 있다. 더불어 공대위는 한국 법체계는 이미 누범 가중이나 상습성 가중 규정을 두고 있어 상습범, 누범에 대해서는 이미 법원이 매우 무거운 형을 선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보호법은 공포를 과장하는 불필요한 법이라 규정했다. 공대위는 청송보호감호소 수감자들과 함께 사회보호법과 보호감호제를 철폐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수감자들은 구금생활의 반인권성과 불합리성을 폭로하며 단식 농성을 했다. 이들의 증언과 투쟁을 통해 사회보호법은 시민의 민주적 권리를 침해하는 악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년여 동안의 투쟁을 통해 공대위는 사회보호법이 ‘사회와 국민’을 보호한다는 주장은 기만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또 사회보호법이 처음부터 불평등하고 비틀린 사회에 태어나 언제든 ‘범죄’의 유혹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빈곤계층을 통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임을 비판했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로 법안을 폐지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보호감호제 재도입 시도의 위험성 법무부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성범죄 및 흉악범죄를 예방한기 위해서 보호감호제 부활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범죄발생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진단 없이 낙인, 가중처벌, 격리와 같은 강화된 처벌이 대안이라는 주장은 범죄 자체를 개선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특히 정부는 아동 성범죄에 대한 대중들의 공포와 분노를 활용하여 더욱 강력한 형벌체계를 도입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성범죄에 대한 근본적인 근절대책과 가해자를 재사회화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안은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대중들의 공포와 분노를 다스릴 수 있는 과격한 언사와 상징적인 조치를 통해서 문제를 무마하려 하지만, 성범죄 및 잔혹 범죄들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실제 책임은 회피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와 보수세력은 ‘사회정화’라는 명목으로 ‘사회불안세력’에 대한 응징을 강화하는 한편, 사전예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를 확산시키고 있다. 이미 이명박 정부는 사문화되었던 국가보안법을 다시 활용해 각종 공안사건을 조작하고 정치적 반대세력을 억압하고 있다. 이제는 투쟁을 통해 철폐된 보호감호제 마저 재도입하려고 한다. 보안관찰법이 존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보호법의 보호감호제도가 재도입된다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부정하는, 그러나 ‘합법적’인 통제장치가 전면적으로 부활되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호감호제 재도입에 단호히 반대하고 이러한 움직임을 사전에 저지해야 한다. 나아가 보안감찰법과 국가보안법과 같은 악법이 오히려 폐지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대중적 투쟁으로 금융세계화와 이명박 정부에 일격을 가하자! 올 11월 11~12일에 서울에서 5차 G20 정상회의가 열린다. 올해 G20 의장국인 한국은 2월 27~28일에 인천 송도에서 열린 재무차관 중앙은행부총재 회의를 시작으로 회의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 개최를 ‘국격 향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6월 지방선거 이후 정세를 G20 정상회의로 몰고 가 정국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을 계획이다. 그렇다면 민중운동은 G20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질문에 앞서 G20의 성격과 이번 정상회의의 주요 의제를 검토해보자. G7의 탄생과 운영구조 먼저 G20 창설을 주도한 G7의 역사와 운영구조를 살펴보면 G20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71년 닉슨의 금태환 중지 선언으로 브레튼우즈 체제가 흔들리자 세계경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1974년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이 참가한 G5 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 회의가 처음 열렸다. 1985년 9월 G5 회의에서 플라자 합의를 발표하는 중요한 결정을 하자, 이탈리아와 캐나다의 요구로 1986년부터 G7 회의로 확대되어 정상회의와 병행하여 열리게 되었다. (1975년 G6로 시작되어 1976년 G7로 확대된 후 정례화된 G7 정상회의는 원래 G7 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 회의와 별개였다.) G7 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 회의는 1년에 4차례 열리는데 그 중 2차례가 봄, 가을의 IMF와 세계은행 총회 전에 진행된다. 국제금융기관의 본회의가 열리기 전에 G7이 사전 토론과 합의를 통해 미리 의제와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다. 사전 논의를 통해 의제 설정권과 비토권을 가진 G7은 IMF와 세계은행의 운영을 사실상 지배했다. 따라서 G7 회의는 개도국과 최빈국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앞장섰던 IMF와 세계은행의 배후 조종자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함에도 G7 회의는 국제법적인 지위가 없이 회원국의 합의만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G7 회의는 소수의 고위관료에 의해 비공식적이고, 비밀스럽고, 배타적으로 진행된다. 이 과정을 주도하는 각국의 고위 경제관료, 즉 소수의 테크노크라트는 자신들만의 유대를 형성한다. 대부분 신고전학파 경제학 교육을 받은 고위관료들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지배 엘리트 집단으로서 IMF나 세계은행의 관료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금융투명성, 구조조정, 자본시장개방, 정책이행조건(conditionality)과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합의하고 추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G7에서 G20으로 초창기에 G7은 경제정책 공조와 환율 협정을 주로 논의했다. 1985년 플라자 합의, 1987년 루브르 합의는 모두 G7의 작품으로 달러의 가치를 안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를 거치면서 G7이 다루는 주요 의제가 변화했다. 첫째, 환율관리를 위한 정책공조가 상대화되었다. 1990년대 동안 정부의 재정 정책은 지양되고, 인플레이션 통제와 중앙은행의 독립성 및 신뢰성 강화에 초점을 맞춘 통화 정책이 강조되었다. 반면 환율은 G7 국가의 정책 목표에서 덜 중요해졌다. 금융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민간의 국내외 외환거래가 증가하면서 효과적인 외환시장 개입에 대해 회의가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G7에서 다루어지는 의제와 고려되는 주제가 확대되었다. 특히 1990년대 G7은 의제를 확대하여 국제금융기구 개혁과 개도국 발전, 외채 문제 등을 주요하게 논의했다. 이러한 변화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뒷받침하고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안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1994년 나폴리 회의에서 미국이 제기한 구상에 따라 1995년 캐나다 핼리팩스 회의에서 IMF의 기능을 강화하고, IMF가 회원국의 경제정책에 적극 개입할 것을 합의했다. 개도국 지원 문제도 주요하게 다루어졌다. 1996년 리옹 회의에서 개도국의 발전이 주요하게 논의되었고, 1997년 덴버 회의에서는 처음으로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문제를 다뤘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한 개도국의 경제적 지위를 감안하면, 세계 경제의 안정을 보장하기에 G7이 제한적이라는 지적이 계속 제기되었다. 일례로 1980년, 1996년, 2006년 구매력평가 GDP를 기준으로 세계경제에서 각 집단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G7은 54%, 46%, 40%로 감소한 반면 G7을 제외한 G20의 비중은 21%, 30%, 36%로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충격이 전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치자 G7보다 포괄적인 논의 기구를 만들자는 주장이 현실화되었다. 1997년 11월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먼저 밴쿠버 APEC 정상회의에서 국제금융체제의 개혁을 위한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총재의 회의로 G22를 제안했다. 1998년 4월 워싱턴에서 G22 회의가 처음 열리고, 그해 10월에 G26 회의로 확대되고, 1999년 3월에 다시 G33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의 포괄성과 효율성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이에 G7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총재는 1999년 9월 IMF 연차총회 당시 개최된 G7 회의에서 자신들과 12개 신흥국 및 유럽연합이 참여하는 G20 창설에 합의했다. 첫 G20 회의가 1999년 12월 베를린에서 열렸고, 이후 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의 회의로 정례화되었다. 즉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2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G20이 만들어진 것이다. 미국과 G7은 국제금융체제를 개혁하고 세계경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개도국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라 G20의 출범을 주도했다. 워싱턴, 런던, 피츠버그 G20 정상회의의 결과 10년 동안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총재의 회의로 이어지던 G20에 각국 정상이 참여하게 된 것은 예상치 못한 세계 금융위기의 급속한 확산 때문이었다. 2008년 11월 14~15일 워싱턴에서 처음으로 G20 정상회의가 열렸다. 세계적 금융위기에 대해 G20 정상이 어떤 처방에 합의할지 많은 기대가 이어졌다. 하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갈리는 가운데 탐색전 성격의 회의가 진행되면서 모호하고 일반적인 합의에 머물렀다. 정상들은 금융 규제 및 감독을 개선하겠다, 금융시장의 투명성과 금융기관의 책임성을 강화하겠다, 국제적인 협력을 강화하겠다, IMF와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에 개도국의 지분을 확대하겠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하지만 금융자본의 권력을 강력하게 통제하거나, IMF를 대체하는 새로운 기구를 만들자는 근본적인 개혁안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2009년 4월 1~2일 런던에서 두 번째 G20 정상회의가 열렸다. 금융위기가 실물부문의 위기로 확산되는 가운데 경기부양이 주요한 의제로 부각되었다. 정상들은 경기부양을 위해 1조 1천억 달러를 출자하는데, 그 중 7,500억 달러를 IMF의 자본 확충에 쓰기로 합의 했다. 금융규제 및 감독체제의 개선에 대해서는 금융안정포럼(FSF)을 개도국이 참여하는 금융안정위원회(FSB)로 확대 개편하고, IMF와 FSB가 협력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국제금융기구 개혁에 대해서는 2011년 1월까지 IMF의 쿼터 조정을 완료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개혁방안 마련도 기존의 국제기구에게 맡겨졌다. 결국 IMF와 같은 기존 국제금융기구의 자본과 기능을 강화해서 경제위기 대응력을 높이겠다는 합의였다. 한편, 런던 정상회의 직전에 중국인민은행총재가 언급한 기축통화 논의는 주요 이슈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기축통화체제의 변경은 세계경제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에 어느 나라도 쉽게 수용할 수 없었다. 2009년 9월 24~25일 피츠버그에서 세 번째 정상회의가 열렸다. 경제위기의 확산이 완화되는 가운데 열린 피츠버그 정상회의에서는 위기 이후 ‘지속가능한 균형성장’ 방안이 논의된 것이 특징이다. 아직까지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출구전략은 시기상조라는 데 합의했다. 금융규제 개혁에 대해서는 기존의 틀 내에서 보다 세세한 합의를 진전시켰다. 국제금융기구 개혁에 대해서는 IMF의 쿼터 5% 이상을 개도국으로 이전하고, 세계은행의 경우 3% 이상을 이전하는 데 합의했다. ‘지속가능한 균형성장을 위한 협력체계’를 논의해서 중장기적인 거시경제 정책 공조를 약속하고, 추진방향을 결정했다. 피츠버그 회의에서는 의제가 확대되어 에너지 안보, 기후변화, 최빈국 지원, 고용 문제 등도 다루어졌다. 2010년 서울 정상회의의 주요 예상 의제 그렇다면 올해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정상회의의 주요 의제는 무엇이 될 것인가? 첫째, 지속가능한 균형성장이 논의될 것이다. 2010년 세계경제가 미약하게 회복세를 보일 것이라는 예상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대형은행의 부실, 동유럽의 재정위기 등은 여전히 세계경제의 화약고다. 만약 지배계급의 바람대로 하반기까지 큰 일 없이 세계경제가 개선된다면, 올 G20 정상회의의 주요 의제는 위기 이후 관리방안이 될 것이다. 특히 2009년 9월 피츠버그 회의에서 지속가능한 균형성장을 위한 국제공조에 합의하고, 작년 11월에 열린 스코틀랜드 G20 재무장관 중앙은행총재 회의에서 세부 방안 및 일정에 합의했다. (①공유할 정책 목표에 합의 → ②회원국들은 IMF에 정책체계, 전망 등 자료 제출(2010.1.) → ③IMF와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아 중기 정책 방향의 목표 부합 여부에 대해 상호평가(2010.4.) → ④정책대안 제시(2010.6. 정상회의) → ⑤구체적인 정책제안 채택(2010.11. 정상회의)) 따라서 지속가능한 균형성장을 위한 각국의 정책공조 문제, 무역불균형 해소 문제가 주요하게 논의될 것이다. 둘째, 국제금융기구 개혁, 금융규제 개혁을 일단락 짓는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2011년 1월까지로 예정되어 있는 IMF의 쿼터개혁을 조기에 합의할 가능성이 있다. 2010년 정상회의는 현재 국제금융기구에서 진행되고 있는 금융규제 개혁을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은행자본 규제 개선 방안, 금융기관 경영자에 대한 보상체계 규제 방안, 거대 금융기관의 규제와 부실 처리를 위한 방안 등이 합의해야 하는 주요 과제다. 한편 한국정부는 해외자본의 급격한 유출입으로 개도국이 겪는 어려움을 완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금융안전망 확충 논의를 주도하겠다며 의욕을 보이고 있다. 셋째, 기후변화, 에너지, 빈곤국 지원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 것이다. G20에서 배제된 국가들은 여전히 G20 체제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올해 회의는 이러한 비판을 불식하고 G20을 글로벌 거버넌스 기구로 안착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빈곤국 지원 문제, 기후변화 및 에너지 문제가 지난 회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G20에서 선진국과 개도국을 중재하면서, 개도국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미국의 패권과 금융세계화를 지속시키는 G20에 맞서 대중적 투쟁을 전개하자 그렇다면 우리는 G20에 맞서 어떻게 투쟁해야 하나? 먼저 G20 회의 진행 과정을 투명화하자거나 G20에서 논의되는 의제를 확장하자는 식으로, G20을 개혁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환상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G20은 IMF와 같은 기존 국제금융기구의 확대 재편을 통해 미국 중심의 세계적 경제 질서를 안정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G20 정상회의에서 논의되는 금융규제는 금융자본의 권력을 조정해서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이들에게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자본의 권력 문제는 애초에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회의에 개입해서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다는 개입 전술은 순진한 바람일 뿐이다. 대신 우리는 현재의 경제위기가 금융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근본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2008년 하반기부터 본격화된 금융위기는 금융세계화 내부의 위기가 아니라 그 자체의 위기다. 한국은 특히 1997~98년 IMF 위기 이후 채권, 주식 등 자본시장을 완전히 개방해 초국적 자본의 자유로운 유출입이 가능하게 되었다. 해외자본은 단기이익을 추구하면서 금융거품 형성하거나, 외환시장과 주식시장의 불안정을 키우고 있다. 또한 투자 명목으로 들어온 해외 자본은 기업의 인수합병과 구조조정을 주도한 후에 수익을 거두면 재빠르게 나간다. 금융시장을 교란하고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자에게 고통을 안겨 주는 초국적 자본에 대한 통제방안이 필요하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한국 정부 역시 IMF의 권고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한국 경제의 금융화, 투기화를 조장했다. 금융자본의 이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중앙은행의 목표를 물가관리에 한정하고, 경제 관료의 독립성을 강화했다(이른바 한국은행 독립). 자본시장을 육성하기 위해서 자본시장통합법을 제정하고, 지주회사 설립의 요건을 완화해 재벌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융합을 촉진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 방향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부터 본격화되어서 이명박 정부까지 계속되고 유지되고 있다. 이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도 본격화되지 못했다. 따라서 G20 투쟁과정에서 금융세계화의 문제점을 폭로하면서 금융 통제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토론하고 이슈화시켜야 한다. 민주노총, 전농과 같은 대중운동 조직이 G20 투쟁의 이러한 의의를 공유하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필요하다. 11월 11~12일에 서울에서 대중적인 투쟁을 벌일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민주노총은 노동자 대회를 G20 정상회의 사전에 배치하여 한국 노동자 민중들의 분노와 요구를 구체적으로 알릴 수 있어야 한다. G20 정상회의에 대한 선전으로 올 하반기 정국을 돌파하려는 이명박 정부에서 ‘순조롭고 평화로운’ 회의는 매우 중요하다. 노동조합과 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 맞서 대안세계화를 기치로 한 대중적 투쟁을 성사시킨다면 그 의미는 매우 클 것이다. 둘째, 동아시아 차원의 국제연대도 필요하다. 금융위기 과정에서 글로벌 불균형, 즉 미국의 이중적자와 달러환류 메커니즘의 불안정성이 부각되었다. 2010년 G20 정상회의에서 주요하게 논의되는 지속가능한 균형성장에 무역불균형 조정 문제가 포함된다. 미국은 중국 위안화 절상과 자국 금융자산에 대한 꾸준한 투자를 요청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환율 조작을 통해 미국의 부채를 해외로 이전 탕감하고, 미국의 금융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법이다. 따라서 G20 투쟁을 11월 13~14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 투쟁과 연계할 필요가 있다. 2009년 APEC 정상회의에서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 구상을 구체화시키기를 원했다. 그 결과 APEC은 2010년 말까지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 구축 방안을 모색하기로 합의했다. 무역개방을 통해서 무역적자를 조정하는 것 역시 미국에게 매우 중요하다. 미국은 특히 도하개발아젠다(DDA)의 지체 이후 주춤하고 있는 농업, 서비스, 금융 부문의 개방을 가속화하려고 한다. 미국이 이 분야에서 세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아시아 사회운동은 G20과 APEC 정상회의를 경제위기를 극복하려는 미국 및 국제 지배계급의 전략 속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이에 맞서 연대를 강화하고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
355일이나 걸렸다. 자본과 정권의 ‘개발’이라는 괴물에 맞선 이들이 하루아침에 도심 테러리스트로 몰려 검은 숯덩이가 된 지, 숯덩이가 되어서도 차가운 냉동고에 갇혀 지낸 지 355일이 지나서야 하얀 눈꽃이 되어 가실 수 있었다. 지난 1월 9일 용산철거민 열사들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곧 용산참사 1주기를 맞았다. 2010년 1월 20일을 끝으로 유가족과 철거민, 용산범대위는 남일당 참사현장을 떠났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 용산투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용산참사의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에 지금도 또 다른 용산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참사가 보여준 이명박 정권의 야만 용산참사는 이명박 정권과 지배세력이 민중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참혹하게 보여주었다. 그 하나가 바로 ‘망루 이후’, 즉 ‘살인진압’으로 나타난 지배권력의 야만적 폭력성이다. 생존권을 요구하며 망루 농성중인 철거민 30여 명에게, 1600여 명의 경찰병력과 대테러를 전담하는 경찰특공대까지 투입해,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무리한 진압을 감행하며 정권의 야만성을 보여주었다. 가깝게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진압과정에서 보여주었던 그 살기들이, ‘살고 싶다’는 ‘같이 살자’는 목소리들을 어떻게 짓밟는지를, 1월 20일 새벽 캄캄한 망루 안에서 잔인하게 각인시켜주었다. 정권의 이러한 폭력성은 1월 20일 이후에도 끊임없이 철거민들과 용산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민중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참사 당일 유족들의 동의 없이 망자들을 강제 부검하는 야만을 저지르더니, 즉각 농성 철거민들을 구속했다. 전국철거민연합에 대한 마녀사냥과 집행부에 대한 구속 등 철거민들에게만 일방적이고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하고 탄압하며, 결국 ‘경찰무죄’ ‘철거민유죄’라는 왜곡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불법 철거용역업체 직원인 용역깡패들과 경찰의 합동 진압작전, 무리한 토끼몰이 진압이 언론을 통해 폭로되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연쇄살인사건을 이용해 용산에 집중된 여론을 돌리려 했다. 결국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자진사퇴라는 전형적인 꼬리 자르기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사태를 무마해서 진실을 덮으려는 추악한 작태를 보였다. 이러한 은폐와 조작, 그리고 용산범대위가 주최하는 모든 추모제를 불허하고 차벽과 병력으로 봉쇄하는 등, 강도 높은 탄압에도 참사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민중들의 외침과 추모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상습 시위꾼 엄단’을 들고 나왔다. 3월 초에 ‘상습 시위꾼 200여 명을 전원 검거’하겠다는 엄포로 추모인파를 잠재우려했다. 또한 노동절과 촛불 1주년을 앞두고 용산으로 집중되는 민중들의 저항을 잠재우고자, “6개 사회단체와 20개 네티즌 단체 총 2,500여명을 발본색원해 이를 와해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는 공안정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후로도 참사의 해결을 촉구하는 삼보일배와 단식, 일인시위마저 불법이라며 봉쇄하고 연행하였으며, 유족들을 위로하며 참사현장을 지키던 천주교 사제들에게도 폭행을 가하는 등 진실을 감추기 위한 정권의 폭력성과 야만성이 극에 달했다. 용산참사가 보여준 살인개발의 현실 용산참사가 보여준 또 하나의 본질은 바로 ‘망루 이전’, 즉 철거민들을 망루에 오르게 한 ‘살인개발’의 야만성에 있다. 자본의 공간 구성을 위한 도심지 개발이 진행되면서 명품도시에 걸맞지 않은 사람들을 짝퉁 취급하며 쓸어버리겠다는, 쓸려나지 않고 버티면 어떻게 되는지를, 용산을 통해 참혹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즉 이명박 정권과 서울시가 도심광역개발로 밀어붙이는 개발사업의 속도와 규모가 더욱 광폭해지는 국면에서 용산참사가 발생하였다. 정부와 보수언론은 보상을 더 받기위한 ‘이기적 투쟁’이라는 논리와 철거민들의 폭력성을 내세우며 ‘도심 테러세력’으로 철거민들을 매도하며 여론을 몰고 가려 했다. 그러나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이웃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권력자들의 매도의 논리를 압도하였다. 이는 6명의 죽음을 부른 진압의 폭력성에 대한 분노이기도 하지만, 참사의 배경이 된 살인적인 재개발 정책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폭발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 국토가 거대한 공사장처럼 느껴지게 해야 한다, 전국 곳곳에서 해머 소리가 들리도록 하지 않으면 이 난국을 돌파하는 동력을 얻기 어렵다”, “전광석화와 같이 착수하고 질풍노도처럼 몰아붙여야한다.” 용산참사가 일어나기 불과 한 달 전, 이명박 대통령과 당시 여당 대표가 나눈 이야기다. ‘전 국토의 공사장화를 통한 난국 돌파’는 이명박 정권이 경제위기 극복의 방안을 건설 부동산 등 각종 투기적 개발사업, 즉 거품의 유지 확대에서 찾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용산참사 직전 주요 부동산 정책이자 경제위기 극복 정책이었던 ‘9.19 주택공급대책’과 ‘11.3 경제난국 극복 대책’의 핵심은 부동산 투기조장 및 개발 규제 완화를 통한, 도심공급확대라는 명분의 도심광역개발이었다. 건설자본과 투기세력의 배를 채워 주면서 인위적으로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것이다. 개발로 인한 철거민들의 주거권과 생존권의 박탈은 이명박 정부에서만 있었던 일이 분명 아니다. 역대 정권마다 경제성장을 내세우며 각종 개발 사업과 부동산 거품 유지 정책을 추진했다. 흔히 달동네로 불리는 도심지 저소득층 주거 밀집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철거가 끝난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주로 택지 개발 방식의 신도시 개발이 진행되어 왔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2002년 뉴타운개발을 시작으로 다시금 대대적인 도심 광역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도심에서 진행되는 광역개발은 수많은 이해당사자, 특히 도시에서 하루하루 힘겨운 노동으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에게 닥치는 직접적인 문제다. 서울의 뉴타운 재개발은 그 규모와 속도 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최근에는 농촌뉴타운이라는 이름까지 등장하며 뉴타운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뉴타운 재정비 촉진지구가 35개 지구 150여 구역에 달하며, 재개발사업이나 재건축사업은 각각 300여 구역에 이른다. 35개 뉴타운 지구만 해도 지난 36년간 지정된 면적의 66%에 이르며, 연평균 재개발구역 지정 면적의 24배에 달하는 규모다. 이러한 규모와 속도의 개발은 최근 전세가의 기록적인 상승과 같은 현상을 촉발해 도시의 다수를 차지하는 세입자들을 잠재적 철거민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개발 구역 사이에 개발 경쟁을 불붙여서 세입자들을 보다 빨리 쫓아내고자 용역 깡패를 이용해 폭력을 사용하도록 만들고 있다. 용산 4구역에서 발생한 참사는 이처럼 광범위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이명박 정부와 오세훈 서울시장의 개발주의 정책 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했다. 물론 용산 4구역의 개발방식이 ‘뉴타운’이나 ‘재정비촉진’ 방식은 아니다. 그러나 용산 4구역의 개발은 단순히 작은 한 구역의 개발문제가 아니다. 서울역에서부터 한강까지 이어지는 ‘서울부도심’ 개발 사업으로 사업비만 50조 원에 달하며, 오세훈 시장의 재선을 넘어 대권 도전 핵심 플랜인 ‘한강르네상스’ 사업과 연계되는 거대한 개발프로젝트의 하나다. 따라서 용산 4구역 역시 도심광역 개발인 뉴타운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요구와 자본의 요구에 의한 거대 도심 개발의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참사 직후 참사의 근본원인이 무분별한 재개발 정책에 있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정부와 서울시, 여야 정치권은 재개발 제도의 개선을 이야기하며 일부 법 제도를 세입자 대책 강화라는 이름으로 개정했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실효성 없는 대책에 머물고 있다. 오히려 주춤했던 뉴타운 재개발 정책이 제도 개선을 빌미로 더욱 빠르게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10~11년 집중될 정비사업 관리처분인가(철거 직전의 마지막 인가단계)로 2008년 대비 3배나 이르는 주택이 사라지는 강제철거가 진행될 예정이다. 제2 제3의 용산참사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 용산참사 장례관련 담화문에서 “세입자 보호는 강화하면서도 사업은 신속하게 추진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하겠다고 발표하여, 이러한 우려를 확증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용산투쟁이 말해온, 그리고 끝나지 않은 용산투쟁의 핵심 과제인 ‘진상규명’은 진압과정에 관한 진실에 머물 수 없다. 핏빛 개발의 본질을 밝혀내는 진상규명, 제2의 용산참사를 막아내는 진상규명 투쟁이 전개되어야 한다. 개발에 맞선 운동진영의 현실 1년간의 끈질긴 용산투쟁은 개발문제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고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 낸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용산범대위로 결집된 사회운동진영은 살인개발의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투쟁을 본격화하지 못했다. 물론 공권력에 의한 집단학살이라는 충격적인 사건과 그에 대한 진상규명이 당면한 핵심 대응 과제로 제기되는 것은 당연했다. 또한 사건의 진상규명 투쟁이 개발의 본질적인 문제와 분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용산을 계기로 ‘개발’이나 ‘주거’의 문제가 사회운동 진영의 문제로 막 인식되기 시작했을 뿐이다. 사회운동 진영은 투쟁을 주도하지 못했으며 용산범대위 소속 단위들도 개발대응 운동의 관점에서 역량을 투여하고 연대하는 데 부족함이 있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개발 문제에 대한 범대위의 대응이 정치권의 고민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법 제도 개선 요구와 용산 4구역 세입자들의 생존권 대책마련 요구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무엇보다 이는 ‘개발’과 ‘주거’ 문제의 주체인 기존 철거민운동을 포함한 빈민운동 진영 및 개발대응 운동진영의 현실을 보여준 것이다. 개발에 맞선 기존 운동은 철거민 대중조직들만의 고립된 외로운 지역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되곤 했다. 게다가 철거민 대중조직을 포함한 빈민대중조직은 오랜 기간 세력 간 갈등과 분열의 역사를 반복해 왔다. 이로 인해 철거민 대중조직간 상호 연대의 틀이 부재하다시피하다. 따라서 정부의 개발정책과 건설자본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을 전개하지 못하고 당면한 요구를 넘어서는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개별 지역의 철거저지 투쟁이 중심이 되었다. 또한 지역 운동단위들과의 연대 틀이 부재해서 투쟁을 지역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장하지 못한 한계도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참사 직후 용산범대위 내에 빈민운동진영을 중심으로 ‘빈민대책회의’가 꾸려졌다. 빈민대책회의는 살인개발의 문제를 의제화하고 개발에 맞선 투쟁을 일정부분 전개하며 범대위 요구로 반영되기도 했다. 또한 빈민대중조직의 일정한 연대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빈민대중조직의 현실적 조건 때문에 중반부터는 이렇다 할 활동을 전개하지 못했다. 한편 그 동안 개발 문제에 대한 제도개선과 문제제기 방식의 운동이 한축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이슈 대응에 머물렀으며, 제도개선 역시 주체인 철거민 대중조직과 충분히 소통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어 이렇다 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일부 브레인의 정책생산에 머물렀다. 외환위기 이후 자영업자가 급격히 늘고, 2000년대 이후 확대된 도심개발로 인해 철거민 당사자 조직에 상가세입자 비중이 높아졌다. 하지만 정책 중 상가세입자 문제에 대한 접근은 극히 미약했다. 따라서 철거민 조직을 중심으로 한 지역 현장의 철거투쟁과 정책 사이에는 일정한 괴리가 있었다. 이렇게 각개약진 방식으로 진행되어 온 기존 개발대응 운동 진영의 현실 때문에, 빈민운동은 용산투쟁에서 전체 운동진영을 이끌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오히려 개발의 문제점과 대안에 대한 의제들은 정치권과 언론에 의해 주도적으로 제기되었고, 운동진영의 고민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은 일반적인 제도개선 수준의 요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개발동맹 체제의 강화와 보수적 공간구성 한국사회는 박정희 정권부터 경제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동맹 체제가 구축되어 왔다. 개발정권과 건설재벌, 그리고 금융세력과 대지주 등 토호세력으로 연결되었던 동맹체제는 10여 년 전부터 보수언론과 투기꾼, 연구자와 지방의 군소 토호세력까지 가세하여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이명박 정권의 뉴타운 도심 광역개발과 대운하 사업 등 각종 삽질정책에 따라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발동맹의 강화는 이미 드러나듯이 지역의 급속한 보수화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운동진영에 심각한 도전으로 작동한다. 단 하나의 작은 개발구역에서도 수천억 원에 달하는 사업비가 소요된다(용산 4구역의 경우 사업비가 2조 원에 달한다). 따라서 개발사업은 개발동맹에게 화수분이자, 지역을 보수적으로 구성하는 기회가 된다. 그 과정은 개발계획에서 완공까지 전 기간 동안 계속된다. 지역은 개발 현수막이 나부낄 때부터 개발 이권을 중심으로 재편되며, 원주민 몰아내기를 통해 개발 후 주민 80~90%의 계급이 변화되면서 더욱더 자본에 용이한 보수적 공간으로 구축된다. 뿐만 아니라 ‘보금자리 주택’ 정책과 같이 서민주거정책으로 둔갑한 각종 ‘개발 플러스 주거복지’ 정책은 공간의 계급분리를 가속화하며 도시의 보수화를 완성할 것이다. 철거민운동의 확장과 사회운동의 연대로, 제2의 용산참사를 막아내자 이러한 현실에서 지금과 같은 수준의 대응 틀로는 2010년부터 더욱 거세질 개발광풍에 맞선 투쟁에서 승리하기 어려우며, 제2 제3의 용산참사를 막아내는 힘을 형성하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빈곤사회연대를 중심으로 개발에 맞선 ‘주거권’ 연대 운동을 꾸준히 도모했다. ‘주거권공동행동’이나 ‘세계 주거의 날 공동행동’ 등의 기획을 통해 철거민 당사자 조직과 주거권운동 및 반빈곤운동 조직 간의 낮은 단계의 연대 틀이 형성되어 왔던 사례가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형태의 개발양상과 개발동맹 구조 하에서는 기존의 철거민 당사자만의 고립된 지역투쟁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또한 제도개선 및 법적 투쟁 중심으로 경도된 대응 역시, 안하무인격으로 진행되는 개발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운동의 조직과 연대가 꼭 필요한 시점이다. 기존의 연대운동은 형식적인 연대를 넘어서 운동의 재구성을 목표로 만나야 한다. 철거민운동은 일반 세입자의 불안정한 지위와 영세 가옥주, 상가세입자의 생존권에 대한 포괄적인 대응논리를 개발하고, 적절한 사업을 기획해 대중적인 설득을 통해 확장되어야 한다. 지역적 차원에서도 지역연대와 폭넓은 주민조직화라는 화두로 연대단위들을 설득해내고, 철거민대중조직이 중심에 서서 지역 연대를 조직해내고, 대응하는 구조를 만들어야한다. 그래야 소수 철거민의 당면 생존권 확보 문제를 넘어서는 지역적 개발대응 운동을 전개할 수 있다. 동시에 용산투쟁에 함께 했던, 사회운동 및 노동자운동 진영 그리고 문화 예술, 미디어 등 다양한 활동에 결합했던 단위들과 함께 하는 공동의 행동을 모색해야 한다. 용산투쟁의 성과는 지난 1년간의 투쟁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용산투쟁을 통해 한국사회와 운동진영이, ‘지금과 같은 개발은 더 이상 안 된다’는 절박한 문제의식에 일정한 공감대를 형성한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이러한 개발에 맞서 철거민운동과 사회운동이 어떻게 대응해 나갈지가 중요한 과제다. 제2의 용산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2010년에 몰아칠 개발 열풍에 맞설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일차적으로는 지역단위 철거민조직과 지역운동의 연대를 통해, 개발사업 초기 단계부터 문제에 대응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운동진영과의 연대의 틀도 확장되어야 한다. 철거민운동의 확장과 사회운동의 연대를 통해, 폭력적인 재개발에 맞서는 강고한 힘을 모아 내자. 용산을 ‘어제’의 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닥칠 ‘내일’로 새기고, 힘찬 투쟁을 조직해가자. 용산은 끝나지 않았다!
아이티 역사와 자연재해의 정치경제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자연적이지 않은 재해 1월 12일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으로 한순간에 20만의 생명이 사라졌다. 부상자와 이재민은 정확한 집계조차 불가능하다. 200만 인구가 집중해있는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피해가 집중됐다. 수도에는 거대한 슬럼이 형성되어 있었고, 진원지가 불과 10여 킬로미터 옆이었다. 피해를 수습하고 복구에 착수해야 할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르네 프레발 대통령은 지진 발생 후 이틀 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대통령궁을 포함한 정부 시설과 유엔 시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국가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세계 각지의 구조대와 구호단체가 긴급구호에 나섰지만 정작 아이티 시민들이 필요한 곳에 물품이 전달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맨손과 작대기로 무너진 건물 잔해를 파냈다. 대혼란과 참상이 언론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2010년 초 재앙적인 지진이 닥치기 전에도 아이티는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을 빈번하게 겪었다. 지진으로 1770년 6월에 수백 명이, 1842년 3월에 천 명이 사망했다. 허리케인과 홍수로 인한 피해는 훨씬 빈번했다. 최근 기록만 보더라도 2004년과 2008년의 강력한 허리케인으로 모두 3,500여 명이 사망했다. 아이티는 지진과 허리케인이 때마다 할퀴고 지나가는 저주받은 자연재해의 땅일까? 그러나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전혀 ‘자연적’이지 않다. 2004년 9월 카리브해 일대를 초토화한 허리케인이 아이티에서 2,500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 이웃 나라 쿠바에서는 단 1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나? 미국의 사회주의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19세기 후반 엘리뇨 현상으로 인한 세계적 기근을 연구했다(『엘리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2008, 이후). 그는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제3세계가 “기근의 땅”, 즉 자연재해에 취약한 지역으로 현대역사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1877~78년 중국의 대가뭄 당시 기아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1천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그러나 1743~44년의 대가뭄 때는 사망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대가뭄의 원인은 모두 엘리뇨 현상으로 인한 계절풍의 중단이었다. 자연재해의 충격을 흡수하고 복구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능력의 변화가 큰 차이를 낳은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자연재해가 사회경제적 구조와 맺는 유기적 관계가 변화하면서 제3세계 농촌 공동체에 결정적인 취약성을 안겨 주었다. 첫째, 제국주의가 소농의 생산을 상품 및 금융 체제로 강제 통합하면서 전통적인 식량 안보가 무너져 버렸다. 둘째, 농민 수백만 명이 세계시장으로 통합되면서 전통적인 거래와 농민경제가 급격하게 몰락했다. 셋째, 제국주의가 지방 재정을 몰수하고, 국가 차원의 개발 전략을 저지하면서 수자원과 관개시설에 대한 투자가 중단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제국주의와 결합한 엘리뇨가 수천만 명의 중국 인민을 학살한 것이다. 아이티, 노예 혁명과 제국주의의 유산 그렇다면 아이티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비극의 근원을 캐기 위해서는 이 땅의 역사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이티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사이에 위치한 이스파뇰라 섬의 서쪽에 있다. 이 섬의 1/3이 아이티이고 나머지 동쪽은 도미니카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은 이스파뇰라 섬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지만 금광과 원주민이 급감하자 라틴아메리카 대륙으로 관심을 옮긴다.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에 열중하자 카리브해에는 라틴아메리카와 스페인 간 교역항로에서 교역품을 갈취하려는 해적들이 들끓게 된다. 해적을 피해 스페인 식민지배자들은 이스파뇰라 섬 동쪽으로 이주하고, 섬 서쪽에는 프랑스 해적과 ‘일반거주자’(예전에 해적이었으나 지금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가 자리를 잡게 된다. 이후 프랑스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1697년 리스윅 조약으로 이스파뇰라 서쪽의 1/3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이것이 아이티의 시초다. (당시 이 프랑스 식민지의 명칭은 ‘생도맹그’였으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아이티로 쓴다.) 18세기에 아이티는 프랑스의 값진 식민지로 육성되었다. 1780년대에 이르면 아이티는 프랑스 대외교역의 2/3가량을 차지했고, 유럽 설탕 및 커피 소비량의 절반 정도를 공급했다. 프랑스는 아이티 한 곳에서 영국이 북미 13개 식민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 전체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었다. 그런데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화 과정에서 300만에 이르는 아이티의 원주민이 거의 전멸했고, 그 자리를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이 채우게 된다. 18세기 말에 아이티 인구 중 백인이 3만800명, 자유유색인이 2만4,800명인 반면에 흑인 노예는 인구의 90%에 육박하는 50만 명 정도였다. 아프리카 태생의 노예들은 모국에서 전해오는 독자적인 문화를 가꾸었고, 그들만의 크리올어도 발달시킨다. 그러나 플랜테이션에서의 극단적인 착취로 당시 아이티 노예들의 평균 수명이 20세를 채 넘기지 못했다. 노예들은 가혹한 착취에 저항했다. 이들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아 1791년 세계 최초의 노예 혁명을 일으켰다. 혁명의 지도자는 흑인 노예 출신인 투생 루베르튀르였다. 영국, 스페인, 프랑스는 연합하여 혁명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13년에 걸친 전쟁 끝에 아이티 혁명군은 나폴레옹의 군대를 물리치고 1804년 1월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혁명 전사들은 새로운 공화국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이 사용한 원지명인 ‘아이티’(산악이 많은 지방이라는 뜻)를 택했다.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 못지않게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유일무이한 노예 혁명을 통해 건립된 아이티는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일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두 번째 독립 공화국이었다. 아이티의 독립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해방운동에 영감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아이티는 1810~20년대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시몬 볼리바르를 지원했고, 볼리바르 자신이 두 번이나 아이티로 피신했다. 따라서 당시 식민지 경쟁을 벌이고 있던 유럽 열강과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미국은 아이티를 주권국으로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심지어 바티칸 교황청은 가톨릭 사제들을 아이티에서 완전히 철수시켰다. 상당수가 노예농장 소유주이던 미국 지배계급의 심기는 특히 불편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아이티 혁명군을 공공연히 ‘식인종’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제국주의 열강에게 노예 혁명을 통해 독립한 아이티는 존재 자체가 거대한 위협이었다. 새로운 공화국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노예제와 식민주의의 유산이 신생 공화국에 무거운 짐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혁명 이후 토지개혁으로 대농장이 소규모로 쪼개져 노예 출신 소농들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게 됐다. 그러나 식민지 모국과의 무역망이 붕괴되면서 농산물 가격이 하락했다. 플랜테이션으로 인한 지력고갈, 적절한 신규 투자의 결핍이 겹치면서 신생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는 1825년에야 아이티와 외교 및 무역을 재개하는데, 아이티는 그 대가로 1억5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프랑스가 노예 손실 비용으로 청구한 이 금액은 당시 프랑스 1년 예산에 맞먹고, 아이티 10년 치 총수입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따라서 아이티는 탄생부터 외채의 덫에서 허덕이게 된다. 19세기 후반에 아이티는 1년 예산의 80%를 프랑스에 외채를 갚는 데 써야 했다. 아이티는 120여 년만인 1947년에야 첫 번째 외채를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체 외채의 규모는 훨씬 커져 있었다.) 미국의 개입과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 20세기에도 아이티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1862년에야 아이티를 승인한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겨 푸에르토리코와 쿠바의 관타나모를 점령했다. 미국은 카리브해를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대외정책의 거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아이티도 미국의 개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편 아이티는 19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과 내정의 혼란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1843~1911년에 대통령이 된 16명 가운데 11명이 민중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으며, 1911~15년에는 5명이 갈렸다. 이런 상황에서 1915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불안한 정정을 빌미로 해병대를 파병하여 아이티를 장악했다. 미국은 1915년부터 1934년까지 약 20년 간 아이티를 직접 지배했다. 이 기간에 미국은 아이티의 경제와 제도를 미국의 의도 대로 뜯어고쳤다. 아이티에서 외국인의 재산 소유를 금지한 헌법 조항을 폐지하고, 국립은행을 접수하고, 외채 상환에 적합하도록 경제를 구조조정하고, 플랜테이션을 만들기 위해 토지를 빼앗았다. 아이티 민중들은 봉기를 하고 파업을 벌였지만 미군은 잔혹하게 저항을 진압했다. 미군의 점령 기간 동안 6만 명 정도의 아이티 민중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이 물러난 후 아이티는 잠깐 동안 안정된 정국을 맞았으나 1940년대부터 다시 쿠데타와 군정의 혼란이 계속됐다. 이러한 혼란 뒤에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체제가 수립됐다. 1957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스와 뒤발리에(일명 ‘파파독’)가 당선됐다. 그는 1961년 의회를 해산하고 1964년에는 종신대통령을 선언했다. 그는 1만 명가량의 ‘통통 마쿠트’라는 친위보안대를 조직해 저항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납치, 살해했다. 미국은 초기에 뒤발리에의 부두교 민족주의 또는 흑인 민족주의를 우려했지만, 뒤발리에가 강력한 반공주의를 견지하자 그를 지지했다. 뒤발리에는 아이티 공산당을 탄압하고 저항하는 좌파 세력을 축출하려고 했다. 당시 미국은 카리브해에서 혁명의 확산을 막아야 했다. 1959년 쿠바 혁명이 성공한 이후 카리브해와 중미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도전을 받았다. 특히 1979년 3월 그라나다에서 “새로운 보석 운동”이 에릭 게리 보수정부를 전복시키고, 4개월 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아나스타시오 소모사의 독재를 무너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카리브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을 구상해 1980년 <산타페 문서>로 발표했다. 요지는 카리브해에서 혁명적ㆍ민족적 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서 쿠바-그라나다-니카라과의 위협에 맞서 관타나모-푸에르토리코-파나마의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하는 ‘방어의 삼각선’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쿠바 바로 아래에 있는 아이티의 ‘안정’은 미국의 전략에서 매우 중요했다. 1971년 아버지 뒤발리에가 죽자 그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일명 ‘베이비독’)가 종신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미국은 그를 더욱 강력히 후원하면서 아이티를 자국의 패권 아래에 두려고 했다. 뒤발리에 부자는 수만 명의 아이티 민중을 학살하고, 수억 달러를 사적으로 착복했지만 미국은 자국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했다. ‘인권외교’를 내세운 카터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미국과 국제금융기구가 부과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30년 가까이 지속된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에 염증을 느낀 아이티 민중들의 저항으로 1986년에 아들 뒤발리에가 국외로 피신하면서 2대에 걸친 독재는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아이티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농업경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1970~80년대 미국은 아이티의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아이티를 제2의 푸에르토리코로 발전시키려고 했다. 1970년대부터 경공업과 조립 산업을 중심으로 아이티의 산업화가 시도됐다. 당시 아이티의 임금 수준은 세계 최저였고, 독재체제에서 노동조합의 결성은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건은 미국 기업의 투자를 끌어들였다. 따라서 1970년대 후반에는 약 6만 명 정도가 미국 기업에 고용되었다. 이들은 시급 11센트, 즉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1.3달러를 받는 고한노동(苦汗勞動)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취약한 아이티의 경제는 원조와 외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1986년 아들 뒤발리에가 쫓겨나던 해의 외채 규모는 7억5천만 달러로 1957년 아버지 뒤발리에 정권 시작 때보다 17.5배나 증가했다. 따라서 아이티는 국가예산의 30~40%를 해외원조에 의존해야 했고, 외채의 이자를 갚기에도 벅찼다. 이런 상황에서 채권자로서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은 아이티 경제에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을 적용시켰다. 임금 삭감, 국영기업의 민영화, 환금작물 재배로의 전환, 관세의 철폐 등 악명 높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이어졌다. 그 결과는 파국적이었다. 대표적으로 아이티의 농업이 완전히 붕괴했다. 2008년 세계적 식량위기 당시 ‘진흙 쿠키’로 상징되었던 아이티 식량난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아이티 민중의 주식인 쌀에 대한 관세는 50%에서 IMF가 설정한 3%로 대폭 인하되었다. 전통적으로 아이티는 식량을 대부분 자급했다. 하지만 관세 인하 이후 쌀 수입이 1985년 7,000톤에서 2002년 220,000톤으로 30배 이상 급증했다. 국내의 쌀 생산은 거의 사라졌다. 가금류 생산도 비슷한 과정을 겪어서 이 부문에서만 1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한편 1982년에는 아이티 농촌 경제의 큰 버팀목이던 토종 돼지도 전멸했다. 작고 검은 크리올 돼지는 손쉽게 기를 수 있어서 아이티 농촌 가구의 80~85%가 이 돼지를 길렀다. 돼지는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거름을 제공했고, 농민의 개인 저축은행 역할을 했다. 아이티에서 돼지는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나, 장례나 결혼과 같은 일을 치를 때, 병을 앓을 때, 학비가 필요할 때 팔아서 요긴하게 쓰였다. 그런데 1982년 돼지 콜레라의 확산을 우려한 국제기구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13개월 동안 아이티의 토종 돼지를 모두 몰살시켰다. 대신 더 나은 돼지의 도입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의 아이오와에서 수입된 돼지는 아이티의 사회와 생태에 완전히 부적합했다. 그 돼지는 아이티 인구의 80%가 식수난에 처했을 때도 깨끗한 물을 먹여야 했고, 1인당 국민소득이 130달러인 상황에서 90달러나 하는 수입 사료를 먹여야 했다. 아이티 농민들보다 훨씬 나은 환경을 필요로 했던 이 돼지는 곧 “네 발 달린 왕자”로 불렸다. 그 결과 농민들의 단백질 섭취량이 급격히 줄고, 농촌 학교의 등록생 수도 30%나 감소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아이티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대 50%에서 1990년대 후반에는 25%까지 감소했다. 농촌이 붕괴하고 농민의 생존권이 위협받으면서 식량난도 확대되었다. 하지만 농업을 대체할 산업화 확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포르토프랭스와 같은 도시로 몰렸지만 일자리가 없었다. 거대한 슬럼만 형성되었다. 저임금과 낮은 세금으로 이득을 얻은 미국 자본은 아이티의 기반시설에 투자를 전혀 하지 않았고, 1990년대에는 중국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더 좋은 투자처를 찾아 떠났다. 아이티 경제의 큰 몫을 차지하던 관광산업도 1980년대 말 이후 에이즈가 확산되고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자 급속히 퇴조했다. 따라서 아이티 경제는 원조와 외채의 늪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2000년 아이티의 1인당 실질GDP는 1990년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민중운동의 성장과 아리스티드 1980년대 악화된 아이티의 경제적 상황과 뒤발리에 정권의 정치적 위기는 민중운동의 성장을 낳았다. 1983~86년에 확대된 반(反)뒤발리에 운동으로 독재자는 해외로 도주하고 1987년에 민주적인 헌법이 제정됐다. 구체제로의 복귀를 꿈꾸는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민중들의 저항에 의해 다시 전복되었다. 1989년 가을에 군부 세력에 저항하는 노동조합, 농민단체, 정지조직, ‘작은 교회’ 공동체의 거대한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고 결국 1990년 3월에 군사정권이 축출되었다. 민중운동 세력은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부 아리스티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아이티의 빈민가 포르살루에서 태어난 아리스티드는 아이티 빈민들을 대변하는 활동을 벌였고, 1980년대 중반 뒤발리에의 독재정권에 맞선 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라발라스(‘거센 물줄기’라는 뜻의 크리올어) 운동으로 결집한 아이티 민중연합의 지도자가 됐다. 1990년 12월의 선거에서 아리스티드는 빈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67.5%를 얻어 승리했다. 반면 뒤발리에 정권의 장관이자 세계은행의 경제학자였던 마르크 바쟁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으나 겨우 14%를 얻었다. 그러나 취임 후 7개월 만인 1991년 9월에 기득권 세력과 군부에 의한 쿠데타로 아리스티드는 망명을 떠나야 했다. 아이티 내부에서 아리스티드의 지지자들과 민중운동은 군부에 저항했지만, 군부는 또 다시 납치, 고문, 살해와 같은 방식으로 탄압했다. 약 3년 동안 1만 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수십만 명이 보트피플이 되어 카리브해를 건넜다. 이에 대응하여 유엔은 1993년 10월 아이티에 대한 석유 및 무기 금수조치와 쿠데타 주동자들의 해외자산 동결로 군부를 압박했다. 1994년 7월에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940”을 통과시켜, 회원국들에게 아이티의 군부를 축출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했다. 그해 10월 미국이 주도한 2만 2천여 명(미군이 2만 명)의 다국적군이 아이티를 공격하여 쿠데타 세력을 축출하고 아리스티드를 대통령으로 복귀시켰다. 아리스티드는 복귀 후 1년여의 임기를 채우고 1995년 말 선거에서 87%의 지지로 당선된 그의 후계자 르네 프레발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아이티에 개입한 동기는 무엇인가? 당시 클린턴 정부는 소말리아에서의 군사 작전 실패를 만회하고, 미국으로 쏟아지는 아이티 난민들의 행렬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아이티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아리스티드는 망명지에서 이러한 지원을 이끌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이는 유엔으로 대표되는 국제사회 역시 미국을 위시한 열강과 국제금융기구의 이해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1994년 유엔의 개입은 아리스티드가 다시 축출된 후 이루어진 2004년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의 선례가 되었다. 아이티에 대한 해외 세력의 제도적인 개입을 정당화하는 한편, 아이티 민중 스스로에 의한 대안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길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아리스티드의 통치 기간에 아이티는 어떻게 변화했나, 그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강력히 저항했나? 1991년 첫 번째 당선 당시 아리스티드는 급진적인 재분배 정책을 계속 이야기했으나, 국제 채권자들의 지지를 이끌기 위해서 균형재정과 부패한 관료제도의 개혁을 약속했다. 반면에 그는 토지개혁과 교육개혁, 지난 5년간 발생한 불법 살인 행위에 대한 조사 위원회 설치 공약을 완화했다. 미국에 의해 1994년 권좌에 복귀했을 때도 그는 고강도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이행을 약속하도록 요구 받았다. 미국과 유럽의 채권국, 초민족 금융기관은 그가 복귀한지 2달 후인 1994년 8월에 회의를 열어 아이티에게 재정 지원의 대가로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합체인 <파리 플랜>을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파리 플랜은 △공공부문에 고용된 45,000명 중 절반을 해고하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최저임금을 낮추고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지역식량 생산 대신 환금작물 재배로 농업을 구조조정하고 △외국 ‘전문가’를 정부에 고용하라는 내용이었다. 아리스티드는 일부를 수용했으나 특히 국영 밀가루 공장과 시멘트 공장에 대한 민영화 계획에 강력히 저항했다. 1995년 9월 IMF는 급진적인 정책을 배제하고, 구조조정을 조속히 시행하고, 파리 플랜을 이행하라는 긴급 협정서를 다시 제시했다. 아리스티드는 그 제안도 거부했지만 단지 2년을 지연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다. 1997년 국제금융기구와 채권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후임 프레발 정부가 1년에 2천5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던 국영 밀가루 공장을 단 9백만 달러에 매각한 것이다. 그러나 성과도 있었다. 아리스티드는 공공부문의 민영화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동시에 재정 제약 속에서도 지난 190년 동안에 설립된 학교보다 더 많은 학교를 세웠다. 수백 개의 문맹퇴치센터를 세워 문맹률이 1990년 61%에서 2002년 48%로 감소했다. 쿠바의 도움으로 의대를 개설하고, 1970~80년대 섹스 관광의 유산으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던 HIV 감염율의 증가를 막았다. 아동노동 착취 관행도 크게 개선되었고, 재분배 중심의 세제개혁이 이루어졌고, 최저임금도 2배 상승했다. 이러한 아리스티드가 2000년 선거를 통해 재집권에 성공하자 국내외의 반대파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2000년의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대선을 거치면서 아이티의 군부와 기득권 세력은 당분간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교체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리스티드가 이끄는 라발라스가족당이 선거를 통해 지방정부는 115개 중 89개, 하원은 89개 중 72개, 상원은 19개 중 18개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까지 90%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았다. 반아리스티드 세력은 곧바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정권 퇴진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2001년에 집권한 미국의 부시 정부도 이런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해 경제제재 조치를 취했다. 또 세계은행 등의 국제기구에 압력을 넣어 5억 달러 규모의 경제원조와 차관을 중단시켰다. 결국 2004년 2월 반군세력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수도를 향해 진격해 오는 와중에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으로 강제로 사임하여 망명에 오른다. 아이티의 유엔, 평화유지군이라는 신화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사임하고 아이티의 정정이 불안해지자 유엔 안보리가 긴급 소집되어 만장일치로 치안유지를 위해 다국적군의 파병을 결의했다. 이번 지진 복구 과정에서도 미국을 위시하여 세계 각지에서 군대가 파병되고 있고, 한국도 동참할 계획이다. 그들은 평화유지군이라는 이름을 단다. 그런데 내전이나 분쟁을 겪고 있는 나라에 대한 유엔과 국제사회의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은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인가? 유엔 평화유지군은 불가피하게 군사적 개입이라는 형태를 띠지만 무장해제, 치안유지, 인도적 지원 등 원래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는가? 아이티의 사례는 이러한 신화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2004년 2월 아리스티드가 축출되고 아이티의 정정이 불안해지자 유엔은 기민하게 대응했다. 반군 세력의 쿠데타를 막아달라는 아리스티드의 요청은 외면해온 유엔이 그의 사임 소식이 전해진 날 밤에 바로 안보리를 긴급 소집했다. 그리고 곧장 만장일치로 아이티의 치안유지를 위한 다국적군 파병을 결의했다. 바로 다음 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선발대로 해병대 150명을 아이티에 배치했다. 프랑스, 캐나다, 브라질, 칠레 등이 다국적국에 합류하고, 이 다국적군이 그해 6월 유엔 평화유지군인 아이티안정화임무단(MINUSTAH, 이하 평화유지군)으로 이름을 바꿔단다. 평화유지군 관할 하에 2006년 2월 대선이 치러지고 이 선거에서 프레발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그렇다면 평화유지군의 활동 중에 드러난 문제점은 무엇이었나? 첫째, 아이티의 민주주의를 확립하기보다는 불법적인 쿠데타를 사실상 용인해줬다. 평화유지군이 아이티 민중들의 자치권을 존중한다면 당연히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귀국하는 것을 도와야 했다. 하지만 평화유지군은 반대로 파병 당시부터 아리스티드의 지위를 부인하고 오히려 아리스티드의 귀국 자체를 막고 있다. 즉 아리스티드의 좌파적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미국 정부가 아이티에 혹독한 경제제재 조치와 더불어 반군 세력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해 쿠데타를 사실상 사주한 것이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이러한 권력 재편을 기정사실화하고 안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둘째, 치안과 인권 상황을 구조적으로 개선하지 못했다. 평화유지군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고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유지군이 육성하고 있는 아이티 국립경찰의 상당수는 과거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경찰이라는 공권력을 사용하여 라발라스가족당 지지자들과 빈민촌 주민들, 좌파 세력들을 상대로 살인, 강간 같은 보복 테러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또 이런 범죄에 가담하는 우파 갱단을 비호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따라서 아리스티드의 축출과 평화유지군의 파병 이후 아이티의 치안과 인권 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보고들이 증가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아리스티드 정권이 무너진 후 22개월 동안 포르토프랭스에서만 8천 명가량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70% 정도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셋째, 평화유지군에 의한 직접적인 살인과 인권 침해가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5년 7월과 2006년 12월 빈민촌인 시떼솔레일에서 일어났다. 두 사건 모두 평화유지군이 갱단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탱크를 앞세우고 슬럼 지역으로 들어와 도로를 봉쇄하고 가택 수색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했다는 점이 동일했다. 2005년 7월에는 최소한 23명 이상이, 2006년 12월에는 3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는 비단 아이티 평화유지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2004년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이 평화유지군에 의한 각종 성적 착취의 문제를 인정하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결국 유엔 평화유지군은 아이티에서 좌파와 민중세력의 성장을 막고, 미국과 채권국의 이해관계를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표현을 따르자면 미국은 현 대통령인 프레발을 아리스티드와는 달리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관료로서 지난 수십 년간 아이티를 분열시킨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평화유지군은 이러한 아이티의 재구조화 작업에 핵심적인 정당성과 권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대재앙은 자본주의 역사가 낳은 홀로코스트 따라서 이번 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탄생부터 아이티를 옭죄었던 제국주의의 유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가 자연재해에 극히 취약한 아이티 사회를 만들어냈다. 채권국과 국제금융기구의 개입 속에서 아이티 정부의 행정력은 극도로 취약해져, 실패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지진으로 인한 대량 사망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낳은 홀로코스트의 다름 아니다. 그 과정을 세 가지를 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아이티는 독립 후 200년 간 지속된 제국주의의 개입으로 경제발전과 근대적인 주권국가의 형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외채의 덫은 아이티 경제를 무겁게 짓눌렀다. 2009년 6월 아이티의 외채 규모는 18억8천4백만 달러로 계속해서 늘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침략과 개입을 반복하면서 아이티 인민들의 주권을 부정하고 대안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따라서 아이티는 과소경제, 과소국가로 부를 수 있는 제3세계 저발전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둘째, 1980년대 이후 부과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전통적인 농촌 경제마저 붕괴했다. 벼와 돼지를 축으로 하는 농촌 경제가 무너지자 많은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몰리게 되었다. 따라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는 거대한 슬럼이 형성되어, 열악한 주거지가 만들어졌다. 이는 대규모 자연재해, 특히 지진에 매우 취약한 주거형태다. 셋째,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금융기구뿐만 아니라 유엔도 채권국과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아이티에 대한 지배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는 평화유지군은 군사적 개입으로 아이티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한편 구호와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세계적 민간기구(NGO) 역시 아이티 민중들의 운동과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다. 민간기구는 ‘위임받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권력’으로 각종 기금과 구호품을 활용해 자신의 이해를 만족시키거나, 아이티의 계급적 문제를 오히려 은폐한다. 민간기구가 오히려 정치적 운동을 상대화하고 국가기능 마비를 합리화하는 대리자로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티 사태에 대한 올바른 대응 방법을 숙고해보아야 한다. 긴급 구호는 필요하지만 매우 불충분하고, 단순한 구호 활동은 종종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외채를 늘리는 방식의 기금 지원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이라는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한 개입은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한국 정부의 아이티 파병 계획은 백지화되어야 한다. 아이티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해결책은 분명하다. 우선 미국과 국제기구가 부과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당장 중지되어야 한다. 부당하게 부과된 아이티의 외채를 모두 탕감해야 한다. 쿠데타로 축출된 아리스티드의 귀국이 허용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아이티 민중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권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낳은 홀로코스트를 중단하고, 아이티 혁명의 의미를 잇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