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말, 2010년 초 세계 주요 경제기관에서 제시한 표준적 전망은 ‘미약한 회복으로 전환’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미국은 경기부양 효과가 하반기로 갈수록 약화되고, 고용사정 개선도 지연되고, 가계부채 조정도 지속되기 때문에 회복세가 완만할 것이며 세계경제는 금융기관 부실 확대나 과다채무국의 외환사정 악화, 달러 캐리트레이드 청산 가능성과 같은 위험요인이 존재하지만 이중침체(더블딥)에 빠질 정도는 아니라는 분석이었다. 하지만 2010년 1월 하순 들어 중국이 긴축강화 조치를 발표할 때나 미국이 금융개혁안과 재정 축소 방침이 발표할 때 국제금융시장이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나아가 그리스 재정문제가 터지면서 새로운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2월 11일 유럽연합(EU) 회원국은 정상회의에서 그리스에 대한 금융지원에 원칙적으로 합의했으나 구체적인 방안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은 왜 회원국 지원에 대해 그렇게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나? 그것은 유럽연합과 유럽통화연맹(EMU)이 위기에 대비한 비상수단이 극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독일연방은행이나 영국정부는 회원국이 국가부도를 우려한다면 구제금융 제공과 구조조정 경험이 많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럽연합 차원의 지원이 이뤄진다면 회원국의 도덕적 해이를 낳고 유럽연합이 체결한 <안정성장협약>, 즉 재정적자를 GDP의 3% 이하로 제한하고 정부부채를 GDP의 60% 이하로 제한하는 협약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통화기금에 유럽통화동맹 국가의 구제와 구조조정을 위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유럽화폐동맹의 결함을 자인하고 유로화의 신뢰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반면 유럽연합 차원의 구제금융 제공도 선택하기 어렵다. 유럽연합은 규정상 회원국 정부가 발행한 부채를 다른 정부가 인수할 수 없으나(구제금융금지 조항)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정부 간 지원이 가능하다는 유보조항이 있다. 구제금융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떤 정부가 다른 정부로부터 부채를 인수한다면, 자국 국민 세금으로 타국의 부실을 떠안는 셈이기 때문에 심각한 정치적 부담이 동반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럽연합은 그리스 정부에게 계속 추가적 긴축안을 요구하면서도 지원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 위기는 어떻게 나타났나? 일부 보수언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좌파 파퓰리즘 정부가 인기에 영합해 재정을 거덜냈기 때문인가? 여기에도 유럽통화동맹의 모순이 결정적으로 작동했다. 유럽 경제가 그럭저럭 잘 돌아갈 때는 유로화가 도입되면서 환리스크가 소멸됨으로써 자본이동이 자유로워지고 교역도 확대되면서 유로화가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럽통화동맹이 출범한 후 자국 산업의 경쟁력이 낮은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은 상대적으로 실질환율이 고평가되어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적으로 누적되는 반면, 산업 경쟁력이 높은 독일은 실질환율이 저평가되어 경상수지 흑자가 지속적으로 누적되었다. 1999년 이후로 회원국별로 경상수지 흑자국과 적자국 사이 경계가 분명히 나타났고, 특히 적자국은 상품수지 적자액 중 역내 적자액이 90%에 육박했다. 즉 적자국은 화폐주권이 없기 때문에 환율조정을 통한 경상수지 불균형을 해소할 수단이 없었다. (이는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원화 가치가 대폭 하락해서 수출 확대를 꾀할 수 있었으나 그리스는 유로존에 속해 있는 한 자국 화폐의 평가절하를 시도할 수 없다.) 또한 유로존 국가는 국내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확장정책을 실행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도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실시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중앙은행(ECB)이 긴축적 통화정책을 고수한다면 확장정책 실행을 위한 수단이 재정정책의 팽창 밖에 없기 때문에 재정적자가 더 확대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즉 유로존 국가는 독자적으로 금리인하와 유동성 확대정책을 실행할 수단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경제정책이 지극히 제한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럽통화동맹에 속한 주변국은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과 정부 재정적자의 팽창이라는 경향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결국 유럽통화동맹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통화안정성 지대, 즉 환리스크를 제거하는 지대가 창출될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회원국의 경제정책(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 중심국, 특히 독일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경쟁력이 뒤쳐진 국가는 유럽통화동맹에 가입함으로써 확장정책이나 평가절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국가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저임금, 장시간, 고강도 노동을 강요하는 것만 남는다. 유럽통화동맹은 중심국 자본에게 항구적 이익을 제공하지만 그 대가는 노동자가 치러야 하는 결과를 낳는다. (유럽통화동맹의 본질에 대해서는 『사회운동』 2005년 9월호에 실린 카르케디의 「유럽 경제화폐동맹, 화폐위기, 단일유럽통화」를 참고할 수 있다.) 이런 조건에서 그리스나 그리스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유럽 국가들에서 재정긴축, 임금동결에 항의하며 총파업을 계획, 실행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운동의 대응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번 『사회운동』은 2007-20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이 처한 현실에 주목하고 한다. 「2010년 여성운동의 과제」는 이명박 정부가 일자리 정책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여성에게 적합한 일자리’나 출산장려정책이 여성에 대한 공격과 통제로 이어지는 현실을 분석한다. 「개정 노동조합법의 영향과 대응방향」은 노동조합 파괴 전략의 핵심이 노동조합에서 사회운동 성격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2010년 벽두에 ‘노사관계 선진화’ 법안이 통과된 후 현장에서 혼란이나 활동력 약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을뿐만 아니라 추가적인 노사관계 선진화, 노동시장 신축화 방안이 추진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 2010년 내내 노동조합 운동은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리의 분노를 냉철한 계획으로 전환할 때다.
더 많은 노동조합에 더 많은 이주노동자 참여를 “사람이 사람이 아니예요. 너무 심해요. 우리가 동물이예요?” “이렇게 설날까지 와서 잡아가면 누가 맘놓고 쉬어요?” “우리는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왜 범죄자처럼 대해요?” - 설날 연휴 동대문 식당 단속 후 이주노동자들의 호소 이주민 현황 2009년 말 현재 국내에 체류 중인 이주민 총 숫자는 1,168,477명으로 2008년 대비 0.8% 증가했다. 방문취업제 동포 306,283명을 포함하여 등록 이주노동자는 565,898명,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177,955명, 결혼이주민은 125,087명, 유학생은 80,985명으로 나타났다. <표1> 이주민 연도별 증감현황 (단위: 명) <표2> 국적별 및 체류자격별 이주민 현황 (2009년 12월말 현재, 단위: 명) <표3> 미등록 이주민 연도별 증감현황 (단위: 명) (표 생략. 첨부파일 참조) 위 자료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첫째, 경제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유입 이주민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고 계속 늘고 있는 추세다. 이는 이주민 본국의 경제가 더욱 어려워서 계속적인 이주 압력이 존재한다는 것과 국내 중소영세 업체들의 인력난이 여전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째, 전체 117만여 명의 이주민 가운데 절대 다수인 74만여 명이 이주노동자이고 그 숫자도 증가하고 있는 것은 이주민 정책에서 이주노동자 정책이 중심에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셋째, 미등록 이주민 숫자가 노무현 정부 당시 23만 명에 육박했는데 현재 17만 8천 명 수준으로 줄어든 것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 2008년에 30,576명, 2009년에 29,043명을 강제출국시키는 등 강도 높은 단속추방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정책전환이 없는 이상 이 문제는 계속 부각될 것이다. 이주노동자 정책 전망과 과제 경제위기를 빌미로 한 공세에 대한 대응 경제위기 상황이 근본적으로 나아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는 올해에도 노동자들의 임금과 일자리, 노동조합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경기 부양의 효과는 미미하고 실업률과 실업자 숫자는 최대에 달하고 있으며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가 늘어간다. 또한 노사관계 선진화와 노동유연화는 최소한의 안정성도 보장하지 않고 노동자를 쥐어짜는 방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노동자의 고용과 임금, 생활수준은 계속 하락할 가능성이 높고 그 속에서 이주노동자의 상황 역시 악화될 것이다. 특히 노동자 사이의 분열을 확대시키기 위해서 정부와 자본은 이주노동자를 내국인 일자리 위협 집단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한 악선전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작년에도 정부는 내국인 일자리를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이주노동자 유입 쿼터를 3분의 1로 줄인 바 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를 내보낸 자리에 내국인을 고용하면 일시금 120만 원을 지급한다는 정책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이미 실패했다. 쿼터는 이미 작년 상반기에 소진되어 현장에서는 인력난으로 아우성이었고, 내국인 대체 일시금을 신청한 사업장이 있다는 소식도 없었다. 더욱이 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5인 이상 사업체의 생산인력 부족률은 2008년 현재 2.71%이고 30인 이하 사업장은 4.02%로 2000년에 비해서도 높은 수준이다. 따라서 올해 유입 쿼터는 작년보다는 늘어날 전망이다. 또한 정부는 건설현장 중국 동포 이주노동자들을 규제하기 위해 작년에 ‘건설업종 취업등록제’를 실시하여 취업 인정 증명서가 없는 이주노동자들을 퇴출시키려 하고 있다.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이들 가운데 5만여 명을 제조업이나 농축산업으로 돌리거나 강제출국시키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할 갈등도 불을 보듯 뻔하고 이미 외국인력 없이 돌아가지 않는 건설현장이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인력부족을 겪을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중소기업중앙회를 중심으로 하여, 이주노동자 임금 부담이 크다며 최저임금제를 개악해서 이주노동자 임금을 삭감하려는 기도나, 숙식비 등을 월급에서 공제하려는 시도도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이주노동자운동 진영은 이러한 공세에 대해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며 정부와 자본의 논리를 비판하고 연대를 확장해야 할 것이다. 이주민에 대한 범죄자화 비판 청와대의 지시로 작년 10월부터 대검찰청은 법무부, 경찰청, 관세청, 국가정보원, 금융정보분석원 등으로 구성된 ‘외국인조직범죄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그 산하에는 9개 지역본부도 있어서 일상적인 정보수집과 전담수사를 한다. 그러나 수사본부 설치 당시에는 외국인 조직폭력배 수십 개가 암약하고 있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정작 지금까지 이렇다 할 보고는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이주민 전체, 특히 미등록 이주민들이 마치 범죄자 집단인 것 같은 인식을 퍼뜨린 효과만이 전부인 듯하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 2월 15일 설날 연휴에 동대문의 한 네팔 식당에서 발생한 사건은 이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경기도경찰청이 주도하고 인천공항출입국이 협조한 이 단속에서 경찰은 ‘불법도박, 폭력행위’에 대해 압수수색을 한다는 빌미로 영장을 받아왔다. 그러나 현장에는 설날 모임을 하려던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범죄행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출입국은 식당 내 모든 이들을 못 움직이게 하고 심지어 전화도 쓰지 못하게 하면서 신분증 검사를 해서 미록 이주민 10명을 단속했다. 경찰 스스로도 장소를 잘못짚었다고 나중에 시인할 정도로 엉뚱한 수색이었지만 이를 사과하기는커녕 비자가 없다는 이유로 범죄자처럼 이들을 체포하여 출입국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그 과정에서 지켜져야 할 절차와 규정이 무시된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런 식이라면 신고가 들어왔다는 것을 빌미삼아 언제 어디라도 출동해서 미등록 이주민을 단속하게 될 것이다. 이주민 숫자의 증가에 따라 범죄가 늘어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이주민의 범죄를 따로 전담하는 기구까지 설치한다는 것은 인종차별적인 행위이다. 오히려 사회적인 차별과 냉대, 이주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공정한 정책의 부재를 시정하는 것이 시급하다. 공포분위기만 잔뜩 조성하는 것은 대안이 아니다. 이주노동자운동은 인종차별적인 범죄자화에 맞서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사회세력과 연대하여 비열하고 야만적인 행위들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행동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지속적인 강제 단속추방 대응 이명박 정부 2년 동안 6만여 명을 강제추방해서 미등록 이주민을 17만 명 수준으로 줄였고 이러한 기조는 변화하지 않을 전망이다. 이는 이미 2008년에 발표한 외국인정책 5개년 계획에서 미등록 이주민을 향후 5년 내에 체류 외국인의 10% 수준으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 이래 지속적인 집중단속으로 현실화되었다(이러한 목표치는 주로 OECD 국가들에서 이정도 선에서 미등록 이주민을 관리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주민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당연히 미등록 이주민 숫자도 늘어나기 때문에 정부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계속 잡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비용과 갈등을 수반하는 이러한 강제단속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현장에서의 인권침해와 폭력은 근절될 수 없다. 더욱이 올해에는 건설업종 취업등록제로 인해 정부가 대대적으로 건설현장 단속을 예고하고 있어서 상반기에 이 문제가 또다시 커다란 이슈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건설현장 이주노동자 쿼터를 절반 정도로 줄였는데 중국 동포 노동자들이 제조업이나 다른 분야로 이동하지 않는다면 쫓고 쫓기는 사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건설이 급여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이동하려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기존의 집중단속도 계속될 것이므로 이래저래 1년 내내 강제단속과의 싸움이 이어질 것이다. 이주노동자운동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강제단속을 고발하고 인권을 옹호하는 활동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출입국관리법 개악에 대한 대응 법무부가 추진 중인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데 매우 개악된 안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2012년부터 입국하는 모든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지문정보와 얼굴정보를 채취한다. 외국인 관리와 범죄 수사에 효율적이라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이미 노무현 정부 당시 도입하려 했다가 인권침해 논란에 부딪혀 철회되었던 사안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공안 정책의 강화와 더불어 추진되고 있다. 이는 전체 외국인들을 잠재적으로 범죄자로 보는 것이고, 특히 그 중에서도 아시아 출신 외국인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또 다른 내용은 기존의 불법적 단속 관행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단속과 구금, 추방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대해 이주민 인권운동 진영에서는 지속적으로 비구금화를 요구하였고 영장주의를 도입할 것을 촉구해 왔지만 법무부는 이를 도입하기는커녕 오히려 공장이나 주택, 이주민 거주 시설에 대한 무단진입을 합법화하고 있다. 또한 길거리에서도 별다른 절차 없이 아무나 정지시켜 신분검사를 할 수 있게 하는 등 인권침해 조항들이 가득하다. 우리는 이러한 반인권적인 출입국관리법 개악안이 통과되지 않도록 힘을 모아 대응해야 할 것이다. 개정된 고용허가제의 문제점 비판과 대안 촉구 작년 하반기에 고용허가제법이 개정되었지만 개정 내용의 대부분이 사업주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서 문제가 많다. 첫째, 사업장 변경 문제이다. 개정된 법에서는 다음의 경우에 예외적으로 사업장 변경을 허용한다. ①사용자가 정당한 사유로 근로계약기간 중 근로계약을 해지하려고 하거나 근로계약이 만료된 후 갱신을 거절하려는 경우. ②휴업, 폐업, 그 밖에 외국인근로자의 책임이 아닌 사유로 그 사업장에서 근로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고 인정되는 경우. ③(기업의) 고용허가가 취소되거나 고용이 제한된 경우. ④사업장의 근로조건이 근로계약조건과 상이한 경우, 근로조건 위반 등 사용자의 부당한 처우 등으로 인하여 사회통념상 근로계약을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 ⑤그 밖에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유가 발생한 경우. 이 가운데 사업장 변경 횟수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②항뿐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회사가 쉬거나 문을 닫거나 이주노동자의 책임이 아닌 경우 사업장 변경 횟수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④항에서 규정하는 것도 사실은 이주노동자의 책임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임금체불이나 휴식시간 미부여, 폭행이나 성희롱 등은 이주노동자 책임이 아니기 때문에 ②항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는 ④항의 ‘근로조건 위반’에도 해당될 수 있다. 그렇다면 고용지원센터의 해석에 따라 어느 조항에 해당되는지 결정되는 것인가? 최근 들리는 얘기로는 노동부에서도 두 조항이 중복될 수 있다고 보고 노동관계법 위반은 ④항으로 적용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사업장 변경 횟수에 포함되게 되는데, 이는 이주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적용되는 것으로 갈등을 유발할 소지가 많다. 둘째, 재고용 문제다. 전에는 3년이 끝나기 전에 고용주가 재고용을 신청하면 1개월 출국하여 본국에 다녀온 후 3년을 더 일할 수 있었다. 개정된 법에서는 출국 없이 2년을 더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즉 3년을 일해도 본국에 갔다 올 수도 없고 또 더 일할 수 있는 기간도 2년으로 줄어든 것이다. 셋째, 근로계약 기간을 3년 이하에서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한 것이다. 기존에는 1년 이하에서 계약을 맺었는데, 이제는 3년 이하가 됨으로써 고용주들 마음대로 계약기간을 늘릴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이주노동자의 선택권이 줄어든 것이다. 넷째, 사업장 변경 시 구직기간을 2개월에서 3개월로 연장한 것이다. 1개월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이는 부족하다. 3개월 안에 직장을 다시 못 구하면 출국하거나 미등록 체류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법은 개정되었지만 그에 따른 현장의 문제 발생 여지는 크다. 우리는 이에 대해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대응하면서 고용허가제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근본적 대안을 촉구하는 활동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이주노동자 노동조합 조직화 노동조합 조직화 상황 이주노동자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이주노동자의 사회 경제적 지위 향상과 노동과 삶의 영역에서 권리 실현을 추구하는 운동으로서 이주노동자운동은 아직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70만 이주노동자 가운데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숫자나 이주노동자 활동가들 역시 많지 않다. 오래된 미등록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은 단속으로 인한 강제추방에 시달려 왔고, 새로운 고용허가제 노동자들은 아직 활동가로 본격적으로 단련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조금씩 노동조합 조직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일찍부터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을 표방해 온 서울경인 이주노조나 대구 성서공단 노조를 제외하고 비교적 최근에 조직된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금속노조나 일반노조의 사례는 단위 현장에서 내국인 노동자들이 노조를 설립하고자 할 때 이주노동자를 제외하고는 파업의 효과나 교섭력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조직화를 시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과정에서 내국인들은 이주노동자들과 소통의 기회를 가지고 연대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고 이주노동자 역시 노동조합이 고용안정과 노동조건 향상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위 사례 외에도 공공노조 시설환경 쪽에도 중국 동포 이주노동자들이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 민주노총은 ①이주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이주노동권 담당자 회의 강화, ②조직 내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식변화 사업(조합원용 교육자료 제작 등), ③이주활동가 양성 사업(이주활동가 학교 등), ④송출국 노총과의 연대를 통한 지원 사업(활동가 파견, 입국 전 사전 교육 등), ⑤이주노동자를 위한 교육자료 제작 등의 사업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이 외에도 지역별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 강화, 지역별 연대 확장 등 연대활동을 확대 강화하려는 노력도 계획하고 있다. 금속노조의 경우 이주노동자 조직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계획을 세우고 있다. ①신규 사업장 조직 시 이주노동자의 비율이 높고 계급적 연대를 위해 이주노동자 조직화의 필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기본방향은 ‘1사 1조직’ 사업에 이주노동자도 포함되도록 한다. ②이주노동자 조직사업지원을 위한 지원태세(예산, 통역)를 구축한다. ③이주노동자 조직화의 필요성을 위한 간부대상 교안과 이주조합원을 위한 교안을 제작한다. 이러한 노력은 과거보다 훨씬 진일보한 내용이고 특히 금속노조의 경우 사업계획과 이에 대한 예산 배정을 거의 처음으로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크다. 이러한 흐름이 성과로 이어지고 그 성과에 기반하여 더욱 확대되면 내국인과 이주노동자가 연대하는 노조가 점점 더 늘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주노조 서울경인 이주노조는 2005년 설립 이래 5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신분에 관계없이 전체 이주노동자를 위해 이주노동자 스스로 활동하는 노조지만 아직 설립신고를 못하고 있고 관련 소송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또한 그동안 미등록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에 대한 표적단속과 이에 대한 대응투쟁을 지속해 오면서 노동조합 규모의 확대나 저변 확장이 부족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들의 독자적인 노동조합으로서 일상적인 권익 옹호 활동, 국내 국제 연대활동, 노동운동 내에서의 인식 제고 등 전체 이주노동자를 대변하여 활발한 활동을 해 왔다. 특히 올해에는 더 많은 조합원 확대, 조합원과 활동가 교육에 중점을 두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민주노총, 금속노조 등과 협력을 강화하여 노동조합 조직화 흐름이 노동운동 내에서 더욱 커지도록 해야 하는 과제 또한 안고 있다. 이러한 과제는 이주노조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사회운동, 노동운동 전체의 몫이기도 하다. 더 많은 노동조합에 더 많은 이주노동자 참여를 경제위기로 인해 전 세계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은 나쁘다. 북반구의 각국은 이주노동자를 규제하거나 쫓아내기 위한 조치를 계속 만들어 내고 있고 이주노동자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고 있다. 구조조정이나 해고의 1차 대상도 이주노동자가 된다. 이주노동자가 유입되는 아시아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국내 경제가 어려우면 가장 취약한 계층이 타격을 먼저 받듯이 세계 경제가 어려우면 가난한 나라들이 제일 큰 고통을 겪는다. 이주노동자들을 보내는 본국의 상황들이 그러하다. 일자리와 생계의 막막함은 고난을 겪더라도 이주의 길을 선택하게 만든다. 인간의 존엄이 더욱 침해당하는 시기에 이주노동자들의 비빌 언덕이 되고 발언의 통로가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사회의 노동운동일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이 노동자를 조직하고 저항의 보루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사회의 노동조합, 민주노총의 노동조합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 더 손을 내밀고 동등한 주체로서 연대하기를 요구한다. 2010년을 더 많은 노동조합에 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하는 해로 만들어 나가자.
2007-2009년 세계 금융위기는 치유되고 있는가? 2009년 말, 2010년 초 세계 주요 경제기관에서 제시한 표준적 전망은 미약한 회복으로 전환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미국은 경기부양 효과가 하반기로 갈수록 약화되고, 고용사정 개선도 지연되고, 가계부채 조정도 지속되겠지만 완만한 회복세가 지속될 것이다’, ‘세계경제는 금융기관 부실 확대나 과다채무국의 외환사정 악화, 달러 캐리트레이드 청산 가능성과 같은 위험요인이 존재하지만 이중침체(더블딥)에 빠질 정도는 아니다’라는 분석이었다. 세계경제가 미약한 회복세로 전환된다는 것이 곧 2007-2009년 세계 금융위기를 낳은 요인들이 차차 해소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2010년 미국 금융개혁 전망과 그리스 사태를 살펴보면서 위기 요인이 거의 해소되지 못하고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금융시스템은 매우 위험하며 2007-2009년 위기 이후 오히려 더 위험해지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는 이러한 위기를 스스로 치유할 능력을 상실했고, 더 큰 위험에 직면하여 임기응변, 미봉책으로 위기의 폭발을 봉합하고 있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금융규제안 2010년 1월 21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은행과 은행지주회사의 과도한 위험투자를 막고 대마불사를 차단하기 위해 금융기관의 업무범위와 영업규모를 제한하는 금융개혁안을 발표했다. 세계 금융위기로 미국은 실업률이 10%대로 치솟고 2009년 미국 재정적자가 1조 4,000억 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미국에서는 위기의 주원인을 제공했고 공적자금을 투입 받은 대형은행이 위기에 대한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되었다. 이번 금융규제안 발표 직전에도 미국 정부는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 손실 보전을 목적으로 시티그룹, 아메리카은행, JP 모건체이스, 웰스파고를 겨냥해 미국 50여 개 대형은행에 대한 ‘금융위기 책임세’라는 특별과세안을 발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12월에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은행들이 수십억 달러를 보너스로 줄 자금 여력이 있다면 납세자들에게 받은 돈도 되돌려줄 수 있을 것"이라며 자산 규모가 500억 달러가 넘는 50대 대형 금융사에 최소 10년 동안 세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1월에 발표한 금융규제안은 우선 은행 또는 은행지주회사가 헤지펀드나 사모펀드를 보유하거나 그것에 투자하는 것을 금지한다. 또한 은행이 고객의 자금이 아닌 자체적으로 조달한 자금으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 주식, 채권, 옵션, 원자재, 파생상품 등을 거래하는 자기계정거래(proprietary trading)를 금지하며 고객의 요청에 한해서만 이와 같은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것이 허용된다. 이는 은행이 위험성이 높은 주택담보증권(MBS)을 활용한 자기계정거래가 대형은행 부실 확산의 주요인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대형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예금 규모의 시장점유율 상한선을 현형 10%에서 하향조정하고 예금 이외에 자금조달도 규제한다. 이러한 규제안이 실행되면 시티그룹, 아메리카은행, JP 모건체이스, 웰스파고, 골드만삭스와 같이 자기계정거래 비중이 높은 대형은행의 사업구조 개편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왔다. 예를 들어 JP 모건체이스는 운용자산 규모가 210억 달러에 이르는 헤지펀드 하이브리지캐피탈매니지먼트를 자회사 형태로 보유하고 있다. 시티그룹은 헤지펀드, 사모펀드 등 대체투자 부문 운용자산의 약 40%가 자기계정거래로 조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JP 모건체이스는 금융규제안이 2011년에 실행된다면 주요 은행의 주당순이익(당기 순이익을 발행 주식 총수로 나눈 값)이 최대 20%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이러한 규제안은 투자은행 유형의 금융회사가 수행하는 광범위한 업무에 비해 매우 협소한 범위에 가해지는 제한적인 규제라는 평가가 제기되었다. 또한 고객의 이익을 위한 투자 또는 고객의 이익을 위한 거래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헷징(회피)하기 위한 투자와 자기계정거래를 엄밀히 구분하는 것이 실제로는 매우 어렵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즉 오바마 정부가 제안한 규제안은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를 강제했던 글래스-스티걸법에 미달하는 미세조정안일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측면에서 완전히 실현되기가 어렵다는 비판이다. 게다가 최근 미국 정치지형을 볼 때 원안대로 통과될 것이냐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최근 보궐선거에서 민주당은 상원에서 단독으로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의석을 상실했다. 또한 민주당 내부에 있는 중도파 의원 모임인 신민주당연합은 월가를 지지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2009년 12월 하원을 통과한 ‘월가 개혁 및 소비자보호 법안’은 당초안보다 크게 후퇴했다. 미국에서 입법 과정은 하원의 단일안 마련과 표결, 상원의 단일안 마련과 표결, 상하원 법안 통합과 표결, 대통령 최종서면이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변화의 여지가 상당히 크다. 또한 이런 규제안을 미국만 실행할 경우 미국계 은행만 경쟁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반발이 상당히 클 것이다. 2009년 봄 미국이 대형은행을 대상으로 실시한 스트레스 테스트(자본충실도 평가)는 사실상 매우 관용적이었다. 미국 은행은 추가 손실을 견딜 만큼 충분한 자본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 정확한 현실이다. 이런 조건에서 금융규제가 유야무야 넘어갈 경우 미국 은행은 더블딥의 근원이 될 수 있다. 그리스 재정 위기와 유럽통화동맹의 모순 2월 11일 유럽연합(EU) 회원국은 정상회의에서 그리스에 대한 금융지원에 원칙적으로 합의했으나 구체적인 방안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유럽연합은 왜 회원국 지원에 대해 그렇게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나? 그것은 유럽연합과 유럽통화연맹(EMU)이 위기에 대비한 비상수단이 극히 취약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독일연방은행이나 영국정부는 회원국이 국가부도를 우려한다면 구제금융 제공과 구조조정 경험이 많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유럽연합 차원의 지원이 이뤄진다면 회원국의 도덕적 해이를 낳고 유럽연합이 체결한 <안정성장협약>, 즉 재정적자를 GDP의 3% 이하로 제한하고 정부부채를 GDP의 60% 이하로 제한하는 협약이 무력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통화기금에 유럽통화동맹 회원국의 구제와 구조조정을 위탁하는 것도 쉽지 않다. 유럽화폐동맹 결함을 자인하고 유로화의 신뢰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반면 유럽연합 차원의 구제금융 제공도 선택하기 어렵다. 유럽연합은 규정상 회원국 정부가 발행한 부채를 다른 정부가 인수할 수 없으나(구제금융금지 조항) 예외적인 상황에서는 정부 간 지원이 가능하다는 유보조항이 있어 구제금융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정부가 다른 정부로부터 부채를 인수한다면, 자국 국민 세금으로 타국의 부실을 떠안는 셈이기 때문에 심각한 정치적 부담이 동반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럽연합은 그리스 정부에게 계속 추가적 긴축안을 요구하면서도 지원에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 위기는 어떻게 나타났나? 여기에도 유럽통화동맹의 모순이 결정적으로 작동했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럽통화동맹은 단일환율이 적용되었다. 유럽 경제가 그럭저럭 잘 돌아갈 때는 환리스크가 소멸되면서 자본이동도 자유로워지고 교역도 확대되면서 유로화 도입이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럽통화동맹이 출범한 후 자국 산업의 경쟁력이 낮은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은 상대적으로 실질환율이 고평가되어 경상수지 적자가 지속적으로 누적되는 반면, 산업 경쟁력이 높은 독일은 실질환율이 저평가되어 경상수지 흑자가 지속적으로 누적되었다. 유로화가 출범한 1999년 이후로 회원국별로 경상수지 흑자국과 적자국 사이 경계가 분명히 나타났고, 특히 적자국은 상품수지 적자액 중 역내 적자액이 90%에 육박했다. (예를 들어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원화 가치가 대폭 하락해서 수출 확대를 꾀할 수 있었으나 그리스는 유로존에 속해 있는 한 자국 화폐의 평가절하를 시도할 수 없다.) 또한 유로존 국가는 국내 경제 상황을 고려할 때 확장정책을 실행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도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실시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중앙은행(ECB)이 긴축적 통화정책을 고수한다면 확장정책 실행을 위한 수단이 재정정책의 팽창 밖에 없기 때문에 재정적자가 더 확대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즉 유로존 국가는 독자적으로 금리인하와 유동성 확대정책을 실행할 수단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경제정책이 지극히 제한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유럽통화동맹에 속한 주변국은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과 정부 재정적자의 팽창이라는 경향에 직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결국 유럽통화동맹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통화안정성 즉 환리스크를 제거하는 무역조건이 창출될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회원국의 경제정책이 중심국, 특히 독일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통화정책은 독일이 지배하는 유럽중앙은행에 완전히 종속되었고, 재정정책에는 심각한 제한이 가해졌다.) 경쟁력이 뒤쳐진 국가는 유럽통화동맹에 가입함으로써 확장정책이나 평가절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국가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저임금, 장시간, 고강도 노동을 강요하는 것만 남는다. 유럽통화동맹은 중심국 자본에게 항구적 이익을 제공하지만 그 대가는 노동자가 치러야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조건에서 그리스나 그리스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유럽 국가들에서 재정긴축, 임금동결에 항의하며 총파업을 계획하거나, 이미 실행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운동의 대응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것이다.
2010년 2월 19일 현재에도 6자회담 재개 여부가 불투명하다. 2월 6~9일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의 방북과 2월 9~13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의 방중이 이루어지면서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이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본격적으로 중재에 나섰다는 분석이 있다. 현재 북한은 6자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으로서 2009년 북한의 로켓 실험 발사, 핵실험에 대한 UN 제재의 해제, 평화협정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6자회담 재개 가능성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이는 무엇보다 북한이 제시하는 6자회담 전제조건에 대해 미국이 명확한 견해 차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6자회담 재개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지난해부터 분명히 밝혔다. 또한 한국정부가 6자회담 재개 여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한국정부가 6자회담 재개를 위한 고유한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연합사령부는 3월 8일부터 18일까지 키리졸브/독수리 군사연습(KR/FE 2010)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빠른 시일 내에 6자회담이 재개될 수 있겠냐는 회의론도 나오고 있다. (다만 왕자루이 방북 중에 중국이 100억 달러에 이르는 대북투자에 합의했다는 보도가 2월 15일에 나왔고, 이는 6자회담 개최를 향한 우회로를 의미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현재 미국정부는 6자회담 복귀에 대한 대가로 어떤 새로운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북미 접촉이 다른 6자회담 당사국을 배제하는 양자협상으로 전환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원칙 외에는 뚜렷한 대북정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는 2009년 오바마 정부의 등장 이후, 북한이 로켓실험과 핵실험을 단행하면서 과연 북한이 궁극적으로 비핵화 의지가 있냐는 회의론이 미국 내에서 폭넓게 제기되면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미로에 빠진 상황을 반영한다. 이 글에서는 2009년 미국 내에서 새롭게 제기된 북한 핵문제에 대한 시각을 소개하고 이러한 시각이 현재 미국의 대북정책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그리고 2010년 1월 북한이 공식적으로 제안한 평화협정 회담이 새로운 전환점으로 기능할 것인지 검토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은 북한의 궁극적인 목표가 핵을 매개로 한 협상이 아니라 핵보유 그 자체라는 의구심을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품고 있다. 미국과 북한은 협상이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기만술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서로 강하게 품고 있다. 따라서 협상은 어떤 경우 더욱 위험천만한 갈등 국면으로 넘어가는 매개가 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태세는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운동 진영은 북한과 미국 양자가 선의를 발휘해서 대화와 양보를 통한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주문하는 것 이상으로 동아시아 (핵)전쟁태세에 대해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미국 내 새로운 분석: 북한은 미국-인도 유형의 핵 협정을 바라는가? 2009년 12월 8일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평양을 방문했다. 전 주한 미국 대사였던 보즈워스가 2009년 2월 20일 특별대표로 임명된 지 9개월이 더 지난 후에야 방북이 성사되었다. 대북 특별대표 임명은 곧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접촉이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2월 24일 북한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대변인 담화를 통해 광명성 2호 발사를 준비한다고 밝히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보즈워스 특별대표 임명 전 2009년 2월 13일 힐러리 장관은 “북한이 진정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미국은 관계정상화, 평화조약체결, 에너지경제지원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밝히면서 대화 의지를 천명했다. 오바마 정부는 부시 정부가 합의한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을 존중하면서 6자회담을 진행하고 북한과의 고위급 대화로 이를 보강한다는 의지를 밝혔다.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새 정부가 다자포럼과 양자대화를 통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계획은 꽤 좋아 보였고 다른 6자회담의 참가국도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북한이 4월 5일 로켓발사를 실행하고 5월 25일 2차 지하핵실험을 단행하자 미국 내 정치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 한편에서는 북한이 미국 새 행정부와 대화를 할 의사가 있기는 있는 것이냐는 회의론이 제기되었다. 또 한편에서는 설사 북한이 미국과 협상을 할 의사가 있더라도 북한이 협상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이냐 의문이 제기되었다. 미국이 보기에 북한의 의도가 무엇인지 점점 더 수수께끼처럼 여겨졌다. 대북협상에 대한 회의론이나 의문이 제기되면서 미국 내 일각에서는 북한이 진정 원하는 것은 실제 핵무기 보유이며, 이를 미국과 인도가 맺은 핵 협정과 같은 방식으로 미국이 보장하기를 원하며, 나아가 북한 정권에 대한 안전보장도 원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예를 들어 미국 전략국제연구소(CSIS)의 한국 담당 빅토르 차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실험, 핵 실험이 단순히 미국의 관심을 끌고 워싱턴을 양자회담으로 이끌려는 전술로 더 이상 이해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북한이 2002년 10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밝히거나 2006년 10월 핵실험을 단행했을 때도 어떤 전문가들은 부시 정부가 평양과 고위급 양자협상을 하기 꺼려했기 때문에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한 것이라며 부시 정부를 비난했다. 이는 북한이 꺼낸 것이 폭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은 올리브가지 즉 화해 제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사실 부시 행정부 1기에는 북한을 ‘악의 축’이나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불렀고 지난 클린턴 행정부 당시 체결된 모든 북미 합의를 의도적으로 무시했기 때문에, 이런 인식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양자 직접대화를 포함한 협상을 준비하는 시기에 북한이 미사일, 핵 실험을 단행했기 때문에 북한의 이번 조치도 대화 성사를 위한 전술이라는 설명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견해가 미국 내에서 우세해졌다. 탄도미사일 실험이나 지하핵실험은 최소한 몇 개월 이상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북한의 행동은 오바마 정부 대북정책에 대한 사후적 반응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치밀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 미국이 보기에 가장 분명한 사실은 북한이 더욱 강화된 핵, 미사일 능력을 보유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핵 실험이나 미사일 실험을 단행하는 것보다 더 대량살상무기 능력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왜 북한은 대량살상무기 능력 보유를 위해 그처럼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가? 단지 “게임에 거는 판돈을 키우기 위해서”인가? 즉 대량살상무기 포기의 반대급부를 더 키우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실제로 핵미사일 보유로 나아가기 위한 것인가? 미국 내 비둘기파는 북한이 안전보장과 자신의 핵무기를 거래할 의지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이 협상에서 보인 입장을 보면 북한이 어떤 합의를 원하기는 하지만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합의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미국 내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시각이다. 그렇다면 그런 합의란 무엇인가? 6자회담에서 북한은 1994년 제네바합의가 약속한 경수로형 원자로를 부시 행정부가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화가 과열되는 과정에서 북한은 미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북한을 핵무기 국가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은 북한의 일방적 비핵화가 아니라 두 핵무기 국가 사이의 상호 핵무기 감축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현재 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고 있다. 또한 미국은 6자회담 9.19 공동성명 1항에서 “미합중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명문화했다. 즉 이는 미국이 핵무기가 있는 국가가 핵무기가 없는 국가에게 핵 공격을 단행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을 명문화한 것으로서, 미국 외교 전례에서 파격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북한이 진정 원하는 것은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이 언급한 소극적 안전보장이나 미국의 핵무기 감축이 아니라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한 상태에서 북미관계 정상화라는 것이 미국 내 새로운 시각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미국과 인도가 맺은 민간핵에너지협정이다. 그 협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도의 원자로 중 일부(22개 중 8개)가 국제사찰을 받지 않게 합의한 사실이다. 결국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복귀할 의지가 있지만 또한 민간 핵에너지를 보장받고자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이 핵에너지와 핵무기 프로그램의 일부를 국제 사찰 외부에서 통제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북한은 공식적인 6자회담이나 미국과의 양자협상에서 인도 유형의 협정을 상정한 적 없다. 아마도 북한도 이러한 입장을 다른 6자회담 참가국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협상이 지연되면서 어느 시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 후 시점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미국 내 부상하는 새로운 시각은 북한이 그런 시점이 도래할 때까지 핵무기 프로그램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분석이 제기된다. 즉 북한의 의도는 한반도에 국한된 ‘제한적 핵 억지력’ 보유를 인정받는 대신에, 미국의 우려사항 중에서 중장거리 미사일과 핵 이전을 최대한 해소하고, 더 나아가 미래 동북아 전략구도에서 미국이 여전히 우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함으로써 미국의 중국 견제에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북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조미관계 정상화이고, 미국과의 전략적 관계 수립이라는 분석이다.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PSI의 국제적 제도화 북한의 의도에 대한 미국 내 새로운 시각이 과연 적절한 분석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미국이 북한의 의도를 완전히 투명하게 파악하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미국은 북한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조건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화와 제재라는 이중 트랙을 구사하고 있다. 먼저 제재의 측면을 살펴보자. 미국이 더욱 강력한 제재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제재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막는 실질적 조치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이 무기수출이 봉쇄됨에 따라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 그만큼 대화에 나설 가능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북한 2차 핵실험 이후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부시 행정부가 추진했던 확산방지조약(PSI)을 유엔이라는 맥락에서 더욱 효과적이고 포괄적으로 제도화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2009년 4월 5일 북한의 로켓 발사 후, 4월 13일 유엔 안보리는 2006년 북한 1차 핵실험 이후 채택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18호>가 ‘북한의 탄도미사일과 관련되는 모든 활동을 금지한다’는 조항을 포함하므로 북한의 로켓발사가 대북결의 1718호 위반이라는 의장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북한은 “6자회담에 다시는 절대로 참가하지 않을 것”이며 “6자회담의 어떤 합의에도 더 이상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북한은 사용 후 연료봉 재처리, 핵억제력 강화, 경수로 발전소 재검토, 우주 이용 권리 행사를 언급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또한 5월 25일 북한의 2차 핵실험 후, 6월 12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 1874호>이 채택되었다. 결의안은 북한이 모든 무기 관련 물자를 대외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모든 무기 관련물자와 연관된 금융거래, 자문과 기술훈련을 금지했다. 결의안 1718호는 수출통제 대상을 유엔재래식무기등록제도(UNRCA) 하에 7대 무기류(탱크, 장갑차, 대포, 전투기, 공격형 헬기, 전함, 미사일)와 관련 물자, 핵/미사일/생화학무기 관련 통제품목으로 제한했으나 1874호는 모든 무기와 관련 물자로 확대했다. 특히 결의안은 화물검색 강화 조항을 담아서 무기 운반을 실질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조치를 강화했다. 1817호에서는 재래식 무기가 검색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선박검색에 대한 조항이 없었으나 이번 결의안에는 포함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북한은 6월 13일 외무성 성명을 발표해 플루토늄 전량을 무기화하고 우라늄 농축 작업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북한은 9월 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우라늄 농축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폐연료봉 재처리로 추출된 플루토늄이 무기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2006년 결의안에 비해 2009년 결의안은 매우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다. 2002년 미군은 예멘행 북한산 스커드 미사일을 적발하고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예멘이 합법 무기수출이라고 반발하자 미군은 북한 서산호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고 예멘은 무기를 다 넘겨받았다. 하지만 2009년 결의안에 따라 북한의 무기수출은 잇따라 적발, 압류되고 있다. 2009년 6월 미얀마로 향하던 북한 강남1호가 미군 추격을 받다 북한으로 되돌아갔다. 7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는 호주선적 ANL-오스트레일리아를 억류하고 북한산 무기를 압수했다.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은 ANL-오스트레일리아가 북한산 로켓발사기, 뇌관을 싣고 이란으로 향하던 중이었다고 발표했다. 8월에는 북한 무산호가 인도 해군에 나포되었다. (그러나 무산호에서는 무기나 핵물질이 발견되지 않았다.) 12월 태국 당국은 미국의 제보로 35톤 규모 북한 무기를 실은 항공기를 억류했다. 이와 같은 사례처럼 새로운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북한의 무기수출에 실질적 타격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2월의 항공기 억류 사례처럼 북한이 고액의 운송료를 부담하면서 항공기를 통한 무기수출을 시도한다는 것은 실제로 선박을 통한 무기수출이 큰 장애에 직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보즈워스 방북으로 드러난 미국의 대북 전략 오바마 정부가 대화와 제재라는 이중 트랙 중에서도 제재에 방점을 찍는 가운데 2009년 12월 보즈워스의 방북이 이루어졌다. 보즈워스의 방북은 부시 정부 말기인 2009년 말 핵 검증 의정서 합의 실패 이후 첫 번째 북미 간 공식회담이었다. 미국의 의제는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2005년 9.19 공동성명> 이행을 분명히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번 회담이 몇 가지 전술적 이익이 있다고 보았다. 미국의 정책을 북한에게 직접 분명하게 제시하고, 다른 6자회담 당사국과 정책 협력을 강화할 수 있으며, 북한의 의사결정구조에서 고위층을 차지하는 인사들과 접촉함으로써 북한이 전략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촉진하며, 북한이 6자회담 복귀에 합의하지 않더라도, 중국이 북한에게 6자회담 복귀를 더욱 강하게 압박하게 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는 이번 회담에 몇 가지 제한을 가했다. 첫째, 미국의 공식 방침은 6자회담 복귀에 대한 대가로 어떤 새로운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2009년 5월 북한의 핵실험 이후 미국 내에서는 제재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매우 강해졌다. 회담 복귀를 위해 북한에게 어떤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면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해 오히려 보상을 해주는 학습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나쁜 행동은 곧 제재라는 분명한 등식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 정부는 북미 공식회담을 한 차례로 제한했다. 추가적인 북미회담을 필요하냐는 문제는 회담 이후에 결정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북미 접촉이 다른 6자회담 당사국을 배제하는 양자협상으로 전환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북한이 실제 핵보유국 위상을 추구하고 미국이 이를 보장하는 미국-인도 유형의 핵협정을 희망하고 있다고 보는 비관론자도 북한과 협상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간주한다. 6자회담이나 그로부터 유래하는 미래의 어떤 대화형식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아니더라도 북한 핵능력의 동결, 불능화 또는 저하라는 목적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평화협정 회담 제안과 6자회담 전망 2010년 1월 11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올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회담을 조속히 시작할 것을 정전협정 당사국들에 정중히 제의한다”고 밝혔다. 평화협정 회담 형식에 대해서는 “9.19공동성명에 지적된 대로 별도로 진행될 수도 있고,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조미회담처럼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테두리 내에서 진행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북한은 “애초에 평화협정은 핵문제와 관계없이 자체의 고유한 필요성으로부터 이미 체결 되었어야 했고, 조선반도에 일찍이 공고한 평화체제가 수립되었더라면 핵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평화협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북한은 “제재라는 차별과 불신의 장벽이 제거되면 6자회담 자체도 곧 열리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필립 크롤리 미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현지시각) 11일 정례 브리핑을 통해 “미국은 북한이 단지 회담에 복귀하는 것만으로 보상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 측이 6자회담에 복귀하고 비핵화를 위한 긍정적 조치를 취한 이후에야, 광범위한 범위의 기회가 제공될 것”이라고 반응했다. 또한 이라고 말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도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할 경우 제재의 적절한 완화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릴 것”이라면서 6자회담 복귀가 먼저라는 답을 보냈다. 중국도 평화협정 회담 제의에 대해서는 직접 논평을 달지 않고 조속히 6자회담을 재개하기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이 발표한 외무성 성명은 ‘선 평화협정, 후 비핵화’를 요구하거나 ‘평화협정 당사국 회담과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병행’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미국은 ‘선 6자회담 복귀와 비핵화 조치, 후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대해 미국과 북한 사이에 타협 여지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9·19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대로 6자회담을 재개해 비핵화 협상과 함께 평화보장체제를 위한 당사국 포럼(4자회담)을 여는 쪽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6자회담 복귀의 전제조건으로서 제재 해제 문제는 북한과 미국이 팽팽히 맞서는 쟁점이므로 난항이 예상된다. 또한 6자회담 2단계에서 가장 난제였던 북한 핵 신고서 검증방안은 2008년 말 결국 합의 도출에 실패했고, 2009년 북한은 “우라늄 농축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폐연료봉 재처리로 추출된 플루토늄이 무기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2008년에 제출된 핵 신고서는 이미 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이를 북한이 새로이 작성해야 하고 또한 이를 검증하는 방안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결국 6자회담 재개의 입구와 출구가 무엇이냐를 두고 북한과 미국이 강력히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6자회담이 순탄하게 진행되리라 예상하기 매우 힘들다. 2010년 NPT 재검토회의와 한반도 핵 문제 북한은 미국이 자신의 선의를 항상 무시했고 비핵화에 상응하여 미국이 평화협정,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궁극적으로 핵무기 보유를 목표로 한다는 강한 의심을 품고 있다. 북한과 미국은 상대방에 대해, 양자회담이든 다자회담이든 협상에서 상대방이 진정한 목표를 숨기고 대화한 형식을 통해 시간을 지연시킬 뿐이기 때문에 결국 협상이 기만술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항상 품고 있다. 따라서 협상과정은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태세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하와이-동경-괌-평택을 잇는 동아시아 주둔미군의 전쟁태세를 한층 더 강화하며, 최근 확장억지라는 명분으로 동아시아 핵우산 정책을 재확인했다. 북한은 핵, 미사일 실험을 반복하면서 장거리 핵미사일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평화운동은 북한과 미국 양자가 선의를 발휘해서 대화와 양보를 통한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주문하는 것 이상으로 동아시아 (핵)전쟁태세에 대해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북미협상은 입구와 출구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매우 어렵다. 여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가 있다면 핵무기 폐지를 열망하는 세계적 차원의 운동 밖에 없다. 2010년에는 5년 마다 열리는 핵확산방지조약(NPT)의 재검토 회의가 5월 뉴욕에서 열린다. 미국 오바마 정부는 ‘핵무기 없는 세계’ 구상에 따라 러시아와 전략핵무기감축협상을 진행하고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의회 비준을 주도함으로써 세계적 핵감축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NPT 체제 강화나 PSI의 제도화를 통해 강력한 비확산/반확산 정책을 구사할 수 있다. 물론 오바마 정부가 미국 의회의 지지를 얻어 전략핵무기감축협정이나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을 조기에 실현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미국은 NPT 체제 강화를 통해 NPT 탈퇴국(예를 들어 현재의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를 강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따라서 세계 평화운동은 NPT 재검토회의가 핵무기 보유 국가를 위한 일방적인 도구로 기능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고, 세계 평화운동의 주도로 핵무기 폐지의 당위성과 현실성을 세계에 전파시키기 위한 계기가 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이티 역사와 자연재해의 정치경제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자연적이지 않은 재해 1월 12일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으로 한순간에 20만의 생명이 사라졌다. 부상자와 이재민은 정확한 집계조차 불가능하다. 200만 인구가 집중해있는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피해가 집중됐다. 수도에는 거대한 슬럼이 형성되어 있었고, 진원지가 불과 10여 킬로미터 옆이었다. 피해를 수습하고 복구에 착수해야 할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르네 프레발 대통령은 지진 발생 후 이틀 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대통령궁을 포함한 정부 시설과 유엔 시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국가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세계 각지의 구조대와 구호단체가 긴급구호에 나섰지만 정작 아이티 시민들이 필요한 곳에 물품이 전달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맨손과 작대기로 무너진 건물 잔해를 파냈다. 대혼란과 참상이 언론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2010년 초 재앙적인 지진이 닥치기 전에도 아이티는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을 빈번하게 겪었다. 지진으로 1770년 6월에 수백 명이, 1842년 3월에 천 명이 사망했다. 허리케인과 홍수로 인한 피해는 훨씬 빈번했다. 최근 기록만 보더라도 2004년과 2008년의 강력한 허리케인으로 모두 3,500여 명이 사망했다. 아이티는 지진과 허리케인이 때마다 할퀴고 지나가는 저주받은 자연재해의 땅일까? 그러나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전혀 ‘자연적’이지 않다. 2004년 9월 카리브해 일대를 초토화한 허리케인이 아이티에서 2,500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 이웃 나라 쿠바에서는 단 1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나? 미국의 사회주의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19세기 후반 엘리뇨 현상으로 인한 세계적 기근을 연구했다(『엘리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2008, 이후). 그는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제3세계가 “기근의 땅”, 즉 자연재해에 취약한 지역으로 현대역사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1877~78년 중국의 대가뭄 당시 기아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1천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그러나 1743~44년의 대가뭄 때는 사망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대가뭄의 원인은 모두 엘리뇨 현상으로 인한 계절풍의 중단이었다. 자연재해의 충격을 흡수하고 복구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능력의 변화가 큰 차이를 낳은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자연재해가 사회경제적 구조와 맺는 유기적 관계가 변화하면서 제3세계 농촌 공동체에 결정적인 취약성을 안겨 주었다. 첫째, 제국주의가 소농의 생산을 상품 및 금융 체제로 강제 통합하면서 전통적인 식량 안보가 무너져 버렸다. 둘째, 농민 수백만 명이 세계시장으로 통합되면서 전통적인 거래와 농민경제가 급격하게 몰락했다. 셋째, 제국주의가 지방 재정을 몰수하고, 국가 차원의 개발 전략을 저지하면서 수자원과 관개시설에 대한 투자가 중단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제국주의와 결합한 엘리뇨가 수천만 명의 중국 인민을 학살한 것이다. 아이티, 노예 혁명과 제국주의의 유산 그렇다면 아이티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비극의 근원을 캐기 위해서는 이 땅의 역사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이티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사이에 위치한 이스파뇰라 섬의 서쪽에 있다. 이 섬의 1/3이 아이티이고 나머지 동쪽은 도미니카이다. 신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은 이스파뇰라 섬에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하지만 금광과 원주민이 급감하자 라틴아메리카 대륙으로 관심을 옮긴다. 스페인이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에 열중하자 카리브해에는 라틴아메리카와 스페인 간 교역항로에서 교역품을 갈취하려는 해적들이 들끓게 된다. 해적을 피해 스페인 식민지배자들은 이스파뇰라 섬 동쪽으로 이주하고, 섬 서쪽에는 프랑스 해적과 ‘일반거주자’(예전에 해적이었으나 지금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가 자리를 잡게 된다. 이후 프랑스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1697년 리스윅 조약으로 이스파뇰라 서쪽의 1/3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이것이 아이티의 시초다. (당시 이 프랑스 식민지의 명칭은 ‘생도맹그’였으나 이 글에서는 편의상 아이티로 쓴다.) 18세기에 아이티는 프랑스의 값진 식민지로 육성되었다. 1780년대에 이르면 아이티는 프랑스 대외교역의 2/3가량을 차지했고, 유럽 설탕 및 커피 소비량의 절반 정도를 공급했다. 프랑스는 아이티 한 곳에서 영국이 북미 13개 식민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 전체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었다. 그런데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화 과정에서 300만에 이르는 아이티의 원주민이 거의 전멸했고, 그 자리를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이 채우게 된다. 18세기 말에 아이티 인구 중 백인이 3만800명, 자유유색인이 2만4,800명인 반면에 흑인 노예는 인구의 90%에 육박하는 50만 명 정도였다. 아프리카 태생의 노예들은 모국에서 전해오는 독자적인 문화를 가꾸었고, 그들만의 크리올어도 발달시킨다. 그러나 플랜테이션에서의 극단적인 착취로 당시 아이티 노예들의 평균 수명이 20세를 채 넘기지 못했다. 노예들은 가혹한 착취에 저항했다. 이들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아 1791년 세계 최초의 노예 혁명을 일으켰다. 혁명의 지도자는 흑인 노예 출신인 투생 루베르튀르였다. 영국, 스페인, 프랑스는 연합하여 혁명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13년에 걸친 전쟁 끝에 아이티 혁명군은 나폴레옹의 군대를 물리치고 1804년 1월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혁명 전사들은 새로운 공화국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이 사용한 원지명인 ‘아이티’(산악이 많은 지방이라는 뜻)를 택했다.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 못지않게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유일무이한 노예 혁명을 통해 건립된 아이티는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일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두 번째 독립 공화국이었다. 아이티의 독립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해방운동에 영감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아이티는 1810~20년대 남아메리카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시몬 볼리바르를 지원했고, 볼리바르 자신이 두 번이나 아이티로 피신했다. 따라서 당시 식민지 경쟁을 벌이고 있던 유럽 열강과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미국은 아이티를 주권국으로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심지어 바티칸 교황청은 가톨릭 사제들을 아이티에서 완전히 철수시켰다. 상당수가 노예농장 소유주이던 미국 지배계급의 심기는 특히 불편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아이티 혁명군을 공공연히 ‘식인종’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제국주의 열강에게 노예 혁명을 통해 독립한 아이티는 존재 자체가 거대한 위협이었다. 새로운 공화국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노예제와 식민주의의 유산이 신생 공화국에 무거운 짐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혁명 이후 토지개혁으로 대농장이 소규모로 쪼개져 노예 출신 소농들이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게 됐다. 그러나 식민지 모국과의 무역망이 붕괴되면서 농산물 가격이 하락했다. 플랜테이션으로 인한 지력고갈, 적절한 신규 투자의 결핍이 겹치면서 신생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는 1825년에야 아이티와 외교 및 무역을 재개하는데, 아이티는 그 대가로 1억5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프랑스가 노예 손실 비용으로 청구한 이 금액은 당시 프랑스 1년 예산에 맞먹고, 아이티 10년 치 총수입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따라서 아이티는 탄생부터 외채의 덫에서 허덕이게 된다. 19세기 후반에 아이티는 1년 예산의 80%를 프랑스에 외채를 갚는 데 써야 했다. 아이티는 120여 년만인 1947년에야 첫 번째 외채를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체 외채의 규모는 훨씬 커져 있었다.) 미국의 개입과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 20세기에도 아이티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1862년에야 아이티를 승인한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겨 푸에르토리코와 쿠바의 관타나모를 점령했다. 미국은 카리브해를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대외정책의 거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아이티도 미국의 개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편 아이티는 19세기 중반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과 내정의 혼란으로 매우 불안정했다. 1843~1911년에 대통령이 된 16명 가운데 11명이 민중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으며, 1911~15년에는 5명이 갈렸다. 이런 상황에서 1915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불안한 정정을 빌미로 해병대를 파병하여 아이티를 장악했다. 미국은 1915년부터 1934년까지 약 20년 간 아이티를 직접 지배했다. 이 기간에 미국은 아이티의 경제와 제도를 미국의 의도 대로 뜯어고쳤다. 아이티에서 외국인의 재산 소유를 금지한 헌법 조항을 폐지하고, 국립은행을 접수하고, 외채 상환에 적합하도록 경제를 구조조정하고, 플랜테이션을 만들기 위해 토지를 빼앗았다. 아이티 민중들은 봉기를 하고 파업을 벌였지만 미군은 잔혹하게 저항을 진압했다. 미군의 점령 기간 동안 6만 명 정도의 아이티 민중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이 물러난 후 아이티는 잠깐 동안 안정된 정국을 맞았으나 1940년대부터 다시 쿠데타와 군정의 혼란이 계속됐다. 이러한 혼란 뒤에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체제가 수립됐다. 1957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스와 뒤발리에(일명 ‘파파독’)가 당선됐다. 그는 1961년 의회를 해산하고 1964년에는 종신대통령을 선언했다. 그는 1만 명가량의 ‘통통 마쿠트’라는 친위보안대를 조직해 저항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납치, 살해했다. 미국은 초기에 뒤발리에의 부두교 민족주의 또는 흑인 민족주의를 우려했지만, 뒤발리에가 강력한 반공주의를 견지하자 그를 지지했다. 뒤발리에는 아이티 공산당을 탄압하고 저항하는 좌파 세력을 축출하려고 했다. 당시 미국은 카리브해에서 혁명의 확산을 막아야 했다. 1959년 쿠바 혁명이 성공한 이후 카리브해와 중미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도전을 받았다. 특히 1979년 3월 그라나다에서 “새로운 보석 운동”이 에릭 게리 보수정부를 전복시키고, 4개월 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아나스타시오 소모사의 독재를 무너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카리브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을 구상해 1980년 <산타페 문서>로 발표했다. 요지는 카리브해에서 혁명적ㆍ민족적 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서 쿠바-그라나다-니카라과의 위협에 맞서 관타나모-푸에르토리코-파나마의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하는 ‘방어의 삼각선’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쿠바 바로 아래에 있는 아이티의 ‘안정’은 미국의 전략에서 매우 중요했다. 1971년 아버지 뒤발리에가 죽자 그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일명 ‘베이비독’)가 종신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미국은 그를 더욱 강력히 후원하면서 아이티를 자국의 패권 아래에 두려고 했다. 뒤발리에 부자는 수만 명의 아이티 민중을 학살하고, 수억 달러를 사적으로 착복했지만 미국은 자국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했다. ‘인권외교’를 내세운 카터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미국과 국제금융기구가 부과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30년 가까이 지속된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에 염증을 느낀 아이티 민중들의 저항으로 1986년에 아들 뒤발리에가 국외로 피신하면서 2대에 걸친 독재는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아이티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농업경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1970~80년대 미국은 아이티의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아이티를 제2의 푸에르토리코로 발전시키려고 했다. 1970년대부터 경공업과 조립 산업을 중심으로 아이티의 산업화가 시도됐다. 당시 아이티의 임금 수준은 세계 최저였고, 독재체제에서 노동조합의 결성은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건은 미국 기업의 투자를 끌어들였다. 따라서 1970년대 후반에는 약 6만 명 정도가 미국 기업에 고용되었다. 이들은 시급 11센트, 즉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1.3달러를 받는 고한노동(苦汗勞動)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취약한 아이티의 경제는 원조와 외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1986년 아들 뒤발리에가 쫓겨나던 해의 외채 규모는 7억5천만 달러로 1957년 아버지 뒤발리에 정권 시작 때보다 17.5배나 증가했다. 따라서 아이티는 국가예산의 30~40%를 해외원조에 의존해야 했고, 외채의 이자를 갚기에도 벅찼다. 이런 상황에서 채권자로서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은 아이티 경제에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을 적용시켰다. 임금 삭감, 국영기업의 민영화, 환금작물 재배로의 전환, 관세의 철폐 등 악명 높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이어졌다. 그 결과는 파국적이었다. 대표적으로 아이티의 농업이 완전히 붕괴했다. 2008년 세계적 식량위기 당시 ‘진흙 쿠키’로 상징되었던 아이티 식량난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아이티 민중의 주식인 쌀에 대한 관세는 50%에서 IMF가 설정한 3%로 대폭 인하되었다. 전통적으로 아이티는 식량을 대부분 자급했다. 하지만 관세 인하 이후 쌀 수입이 1985년 7,000톤에서 2002년 220,000톤으로 30배 이상 급증했다. 국내의 쌀 생산은 거의 사라졌다. 가금류 생산도 비슷한 과정을 겪어서 이 부문에서만 1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한편 1982년에는 아이티 농촌 경제의 큰 버팀목이던 토종 돼지도 전멸했다. 작고 검은 크리올 돼지는 손쉽게 기를 수 있어서 아이티 농촌 가구의 80~85%가 이 돼지를 길렀다. 돼지는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거름을 제공했고, 농민의 개인 저축은행 역할을 했다. 아이티에서 돼지는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나, 장례나 결혼과 같은 일을 치를 때, 병을 앓을 때, 학비가 필요할 때 팔아서 요긴하게 쓰였다. 그런데 1982년 돼지 콜레라의 확산을 우려한 국제기구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13개월 동안 아이티의 토종 돼지를 모두 몰살시켰다. 대신 더 나은 돼지의 도입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의 아이오와에서 수입된 돼지는 아이티의 사회와 생태에 완전히 부적합했다. 그 돼지는 아이티 인구의 80%가 식수난에 처했을 때도 깨끗한 물을 먹여야 했고, 1인당 국민소득이 130달러인 상황에서 90달러나 하는 수입 사료를 먹여야 했다. 아이티 농민들보다 훨씬 나은 환경을 필요로 했던 이 돼지는 곧 “네 발 달린 왕자”로 불렸다. 그 결과 농민들의 단백질 섭취량이 급격히 줄고, 농촌 학교의 등록생 수도 30%나 감소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아이티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대 50%에서 1990년대 후반에는 25%까지 감소했다. 농촌이 붕괴하고 농민의 생존권이 위협받으면서 식량난도 확대되었다. 하지만 농업을 대체할 산업화 확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포르토프랭스와 같은 도시로 몰렸지만 일자리가 없었다. 거대한 슬럼만 형성되었다. 저임금과 낮은 세금으로 이득을 얻은 미국 자본은 아이티의 기반시설에 투자를 전혀 하지 않았고, 1990년대에는 중국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더 좋은 투자처를 찾아 떠났다. 아이티 경제의 큰 몫을 차지하던 관광산업도 1980년대 말 이후 에이즈가 확산되고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자 급속히 퇴조했다. 따라서 아이티 경제는 원조와 외채의 늪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2000년 아이티의 1인당 실질GDP는 1990년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민중운동의 성장과 아리스티드 1980년대 악화된 아이티의 경제적 상황과 뒤발리에 정권의 정치적 위기는 민중운동의 성장을 낳았다. 1983~86년에 확대된 반(反)뒤발리에 운동으로 독재자는 해외로 도주하고 1987년에 민주적인 헌법이 제정됐다. 구체제로의 복귀를 꿈꾸는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민중들의 저항에 의해 다시 전복되었다. 1989년 가을에 군부 세력에 저항하는 노동조합, 농민단체, 정지조직, ‘작은 교회’ 공동체의 거대한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고 결국 1990년 3월에 군사정권이 축출되었다. 민중운동 세력은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부 아리스티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아이티의 빈민가 포르살루에서 태어난 아리스티드는 아이티 빈민들을 대변하는 활동을 벌였고, 1980년대 중반 뒤발리에의 독재정권에 맞선 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라발라스(‘거센 물줄기’라는 뜻의 크리올어) 운동으로 결집한 아이티 민중연합의 지도자가 됐다. 1990년 12월의 선거에서 아리스티드는 빈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67.5%를 얻어 승리했다. 반면 뒤발리에 정권의 장관이자 세계은행의 경제학자였던 마르크 바쟁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으나 겨우 14%를 얻었다. 그러나 취임 후 7개월 만인 1991년 9월에 기득권 세력과 군부에 의한 쿠데타로 아리스티드는 망명을 떠나야 했다. 아이티 내부에서 아리스티드의 지지자들과 민중운동은 군부에 저항했지만, 군부는 또 다시 납치, 고문, 살해와 같은 방식으로 탄압했다. 약 3년 동안 1만 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수십만 명이 보트피플이 되어 카리브해를 건넜다. 이에 대응하여 유엔은 1993년 10월 아이티에 대한 석유 및 무기 금수조치와 쿠데타 주동자들의 해외자산 동결로 군부를 압박했다. 1994년 7월에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940”을 통과시켜, 회원국들에게 아이티의 군부를 축출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했다. 그해 10월 미국이 주도한 2만 2천여 명(미군이 2만 명)의 다국적군이 아이티를 공격하여 쿠데타 세력을 축출하고 아리스티드를 대통령으로 복귀시켰다. 아리스티드는 복귀 후 1년여의 임기를 채우고 1995년 말 선거에서 87%의 지지로 당선된 그의 후계자 르네 프레발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아이티에 개입한 동기는 무엇인가? 당시 클린턴 정부는 소말리아에서의 군사 작전 실패를 만회하고, 미국으로 쏟아지는 아이티 난민들의 행렬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아이티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아리스티드는 망명지에서 이러한 지원을 이끌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이는 유엔으로 대표되는 국제사회 역시 미국을 위시한 열강과 국제금융기구의 이해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1994년 유엔의 개입은 아리스티드가 다시 축출된 후 이루어진 2004년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의 선례가 되었다. 아이티에 대한 해외 세력의 제도적인 개입을 정당화하는 한편, 아이티 민중 스스로에 의한 대안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길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아리스티드의 통치 기간에 아이티는 어떻게 변화했나, 그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강력히 저항했나? 1991년 첫 번째 당선 당시 아리스티드는 급진적인 재분배 정책을 계속 이야기했으나, 국제 채권자들의 지지를 이끌기 위해서 균형재정과 부패한 관료제도의 개혁을 약속했다. 반면에 그는 토지개혁과 교육개혁, 지난 5년간 발생한 불법 살인 행위에 대한 조사 위원회 설치 공약을 완화했다. 미국에 의해 1994년 권좌에 복귀했을 때도 그는 고강도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이행을 약속하도록 요구 받았다. 미국과 유럽의 채권국, 초민족 금융기관은 그가 복귀한지 2달 후인 1994년 8월에 회의를 열어 아이티에게 재정 지원의 대가로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합체인 <파리 플랜>을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파리 플랜은 △공공부문에 고용된 45,000명 중 절반을 해고하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최저임금을 낮추고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지역식량 생산 대신 환금작물 재배로 농업을 구조조정하고 △외국 ‘전문가’를 정부에 고용하라는 내용이었다. 아리스티드는 일부를 수용했으나 특히 국영 밀가루 공장과 시멘트 공장에 대한 민영화 계획에 강력히 저항했다. 1995년 9월 IMF는 급진적인 정책을 배제하고, 구조조정을 조속히 시행하고, 파리 플랜을 이행하라는 긴급 협정서를 다시 제시했다. 아리스티드는 그 제안도 거부했지만 단지 2년을 지연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다. 1997년 국제금융기구와 채권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후임 프레발 정부가 1년에 2천5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던 국영 밀가루 공장을 단 9백만 달러에 매각한 것이다. 그러나 성과도 있었다. 아리스티드는 공공부문의 민영화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동시에 재정 제약 속에서도 지난 190년 동안에 설립된 학교보다 더 많은 학교를 세웠다. 수백 개의 문맹퇴치센터를 세워 문맹률이 1990년 61%에서 2002년 48%로 감소했다. 쿠바의 도움으로 의대를 개설하고, 1970~80년대 섹스 관광의 유산으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던 HIV 감염율의 증가를 막았다. 아동노동 착취 관행도 크게 개선되었고, 재분배 중심의 세제개혁이 이루어졌고, 최저임금도 2배 상승했다. 이러한 아리스티드가 2000년 선거를 통해 재집권에 성공하자 국내외의 반대파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2000년의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대선을 거치면서 아이티의 군부와 기득권 세력은 당분간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교체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리스티드가 이끄는 라발라스가족당이 선거를 통해 지방정부는 115개 중 89개, 하원은 89개 중 72개, 상원은 19개 중 18개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까지 90%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았다. 반아리스티드 세력은 곧바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정권 퇴진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2001년에 집권한 미국의 부시 정부도 이런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해 경제제재 조치를 취했다. 또 세계은행 등의 국제기구에 압력을 넣어 5억 달러 규모의 경제원조와 차관을 중단시켰다. 결국 2004년 2월 반군세력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수도를 향해 진격해 오는 와중에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으로 강제로 사임하여 망명에 오른다. 아이티의 유엔, 평화유지군이라는 신화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사임하고 아이티의 정정이 불안해지자 유엔 안보리가 긴급 소집되어 만장일치로 치안유지를 위해 다국적군의 파병을 결의했다. 이번 지진 복구 과정에서도 미국을 위시하여 세계 각지에서 군대가 파병되고 있고, 한국도 동참할 계획이다. 그들은 평화유지군이라는 이름을 단다. 그런데 내전이나 분쟁을 겪고 있는 나라에 대한 유엔과 국제사회의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은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인가? 유엔 평화유지군은 불가피하게 군사적 개입이라는 형태를 띠지만 무장해제, 치안유지, 인도적 지원 등 원래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는가? 아이티의 사례는 이러한 신화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2004년 2월 아리스티드가 축출되고 아이티의 정정이 불안해지자 유엔은 기민하게 대응했다. 반군 세력의 쿠데타를 막아달라는 아리스티드의 요청은 외면해온 유엔이 그의 사임 소식이 전해진 날 밤에 바로 안보리를 긴급 소집했다. 그리고 곧장 만장일치로 아이티의 치안유지를 위한 다국적군 파병을 결의했다. 바로 다음 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선발대로 해병대 150명을 아이티에 배치했다. 프랑스, 캐나다, 브라질, 칠레 등이 다국적국에 합류하고, 이 다국적군이 그해 6월 유엔 평화유지군인 아이티안정화임무단(MINUSTAH, 이하 평화유지군)으로 이름을 바꿔단다. 평화유지군 관할 하에 2006년 2월 대선이 치러지고 이 선거에서 프레발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그렇다면 평화유지군의 활동 중에 드러난 문제점은 무엇이었나? 첫째, 아이티의 민주주의를 확립하기보다는 불법적인 쿠데타를 사실상 용인해줬다. 평화유지군이 아이티 민중들의 자치권을 존중한다면 당연히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귀국하는 것을 도와야 했다. 하지만 평화유지군은 반대로 파병 당시부터 아리스티드의 지위를 부인하고 오히려 아리스티드의 귀국 자체를 막고 있다. 즉 아리스티드의 좌파적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미국 정부가 아이티에 혹독한 경제제재 조치와 더불어 반군 세력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해 쿠데타를 사실상 사주한 것이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이러한 권력 재편을 기정사실화하고 안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둘째, 치안과 인권 상황을 구조적으로 개선하지 못했다. 평화유지군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고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유지군이 육성하고 있는 아이티 국립경찰의 상당수는 과거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경찰이라는 공권력을 사용하여 라발라스가족당 지지자들과 빈민촌 주민들, 좌파 세력들을 상대로 살인, 강간 같은 보복 테러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또 이런 범죄에 가담하는 우파 갱단을 비호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따라서 아리스티드의 축출과 평화유지군의 파병 이후 아이티의 치안과 인권 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보고들이 증가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아리스티드 정권이 무너진 후 22개월 동안 포르토프랭스에서만 8천 명가량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70% 정도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셋째, 평화유지군에 의한 직접적인 살인과 인권 침해가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5년 7월과 2006년 12월 빈민촌인 시떼솔레일에서 일어났다. 두 사건 모두 평화유지군이 갱단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탱크를 앞세우고 슬럼 지역으로 들어와 도로를 봉쇄하고 가택 수색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했다는 점이 동일했다. 2005년 7월에는 최소한 23명 이상이, 2006년 12월에는 3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는 비단 아이티 평화유지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2004년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이 평화유지군에 의한 각종 성적 착취의 문제를 인정하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결국 유엔 평화유지군은 아이티에서 좌파와 민중세력의 성장을 막고, 미국과 채권국의 이해관계를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표현을 따르자면 미국은 현 대통령인 프레발을 아리스티드와는 달리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관료로서 지난 수십 년간 아이티를 분열시킨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평화유지군은 이러한 아이티의 재구조화 작업에 핵심적인 정당성과 권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대재앙은 자본주의 역사가 낳은 홀로코스트 따라서 이번 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탄생부터 아이티를 옭죄었던 제국주의의 유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가 자연재해에 극히 취약한 아이티 사회를 만들어냈다. 채권국과 국제금융기구의 개입 속에서 아이티 정부의 행정력은 극도로 취약해져, 실패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지진으로 인한 대량 사망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낳은 홀로코스트의 다름 아니다. 그 과정을 세 가지를 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아이티는 독립 후 200년 간 지속된 제국주의의 개입으로 경제발전과 근대적인 주권국가의 형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외채의 덫은 아이티 경제를 무겁게 짓눌렀다. 2009년 6월 아이티의 외채 규모는 18억8천4백만 달러로 계속해서 늘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침략과 개입을 반복하면서 아이티 인민들의 주권을 부정하고 대안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따라서 아이티는 과소경제, 과소국가로 부를 수 있는 제3세계 저발전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둘째, 1980년대 이후 부과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전통적인 농촌 경제마저 붕괴했다. 벼와 돼지를 축으로 하는 농촌 경제가 무너지자 많은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몰리게 되었다. 따라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는 거대한 슬럼이 형성되어, 열악한 주거지가 만들어졌다. 이는 대규모 자연재해, 특히 지진에 매우 취약한 주거형태다. 셋째,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금융기구뿐만 아니라 유엔도 채권국과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아이티에 대한 지배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는 평화유지군은 군사적 개입으로 아이티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한편 구호와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세계적 민간기구(NGO) 역시 아이티 민중들의 운동과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다. 민간기구는 ‘위임받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권력’으로 각종 기금과 구호품을 활용해 자신의 이해를 만족시키거나, 아이티의 계급적 문제를 오히려 은폐한다. 민간기구가 오히려 정치적 운동을 상대화하고 국가기능 마비를 합리화하는 대리자로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티 사태에 대한 올바른 대응 방법을 숙고해보아야 한다. 긴급 구호는 필요하지만 매우 불충분하고, 단순한 구호 활동은 종종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외채를 늘리는 방식의 기금 지원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이라는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한 개입은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한국 정부의 아이티 파병 계획은 백지화되어야 한다. 아이티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해결책은 분명하다. 우선 미국과 국제기구가 부과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당장 중지되어야 한다. 부당하게 부과된 아이티의 외채를 모두 탕감해야 한다. 쿠데타로 축출된 아리스티드의 귀국이 허용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아이티 민중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권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낳은 홀로코스트를 중단하고, 아이티 혁명의 의미를 잇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