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첫 간이 보고서로 도요타 사태에 대한 분석을 해보았습니다. 목차 1. 도요타 리콜 사태 개요 2. 도요타 리콜 사태에 대한 의견들 3. 도요타 사태의 진실 4. 한국 노동자들에게 던지는 함의
최재훈, 「르완다와 아이티 사태를 통해 본 유엔 개입의 모순과 문제점」, 『인권법평론』 창간호, 2007.
아이티 역사와 자연재해의 정치경제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자연적이지 않은 재해 1월 12일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으로 한순간에 20만의 생명이 사라졌다. 부상자와 이재민은 정확한 집계조차 불가능하다. 200만 인구가 집중해있는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피해가 집중됐다. 수도에는 거대한 슬럼이 형성되어 있었고, 진원지가 불과 10여 킬로미터 옆이었다. 피해를 수습하고 복구에 착수해야 할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르네 프레발 대통령은 지진 발생 후 이틀 동안 행방이 묘연했다. 대통령궁을 포함한 정부 시설과 유엔 시설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국가 기능이 마비된 것이다. 세계 각지의 구조대와 구호단체가 긴급구호에 나섰지만 정작 아이티 시민들이 필요한 곳에 물품이 전달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맨손과 작대기로 무너진 건물 잔해를 파냈다. 대혼란과 참상이 언론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2010년 초 재앙적인 지진이 닥치기 전에도 아이티는 자연재해로 인한 고통을 빈번하게 겪었다. 지진으로 1770년 6월에 수백 명이, 1842년 3월에 천 명이 사망했다. 허리케인과 홍수로 인한 피해는 훨씬 빈번했다. 최근 기록만 보더라도 2004년과 2008년의 강력한 허리케인으로 모두 3,500여명이 사망했다. 아이티는 지진과 허리케인이 때마다 할퀴고 지나가는 저주받은 자연재해의 땅일까? 그러나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는 전혀 ‘자연적’이지 않다. 2004년 9월 카리브해 일대를 초토화한 허리케인이 아이티에서 2,500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 이웃 나라 쿠바에서는 단 1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나? 미국의 사회주의자 마이크 데이비스는 19세기 후반 엘리뇨 현상으로 인한 세계적 기근을 연구했다(『엘리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 2008, 이후). 그는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세계질서 속에서 제3세계가 “기근의 땅”, 즉 자연재해에 취약한 지역으로 현대역사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1877~78년 중국의 대가뭄 당시 기아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1천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그러나 1743~44년의 대가뭄 때는 사망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대가뭄의 원인은 모두 엘리뇨 현상으로 인한 계절풍의 중단이었다. 자연재해의 충격을 흡수하고 복구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능력의 변화가 큰 차이를 낳은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자연재해가 사회경제적 구조와 맺는 유기적 관계가 변화하면서 제3세계 농촌 공동체에 결정적인 취약성을 안겨 주었다. 첫째, 제국주의가 소농의 생산을 상품 및 금융 체제로 강제 통합하면서 전통적인 식량 안보가 무너져 버렸다. 둘째, 농민 수백만 명이 세계시장으로 통합되면서 전통적인 거래와 농민경제가 급격하게 몰락했다. 셋째, 제국주의가 지방 재정을 몰수하고, 국가 차원의 개발 전략을 저지하면서 수자원과 관개시설에 대한 투자가 중단되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제국주의와 결합한 엘리뇨가 수천만 명의 중국 인민을 학살한 것이다. 아이티, 노예 혁명과 제국주의의 유산 그렇다면 아이티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비극의 근원을 캐기 위해서는 이 땅의 역사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이티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사이에 위치한 이스파뇰라 섬의 서쪽에 있다. 이 섬의 1/3이 아이티이고 나머지 동쪽은 도미니카이다. 프랑스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1697년 리스윅 조약으로 이스파뇰라 서쪽의 1/3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다. 이것이 아이티의 시초다. [%=사진1%] 18세기에 아이티는 프랑스의 값진 식민지로 육성되었다. 1780년대에 이르면 아이티는 프랑스 대외교역의 2/3가량을 차지했고, 유럽에 설탕 및 커피 소비량의 절반을 공급했다. 프랑스는 아이티 한 곳에서 영국이 북미 13개 식민지에서 벌어들이는 수입 전체보다 더 많은 수입을 얻었다. 그런데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화 과정에서 300만에 이르는 아이티의 원주민이 거의 전멸했고, 그 자리를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이 채우게 된다. 18세기 말에 아이티 인구 중 흑인 노예는 인구의 90%에 육박하는 50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플랜테이션에서의 극단적인 착취로 당시 아이티 노예들의 평균 수명이 20세를 채 넘기지 못했다. 노예들은 가혹한 착취에 저항했다. 이들은 1789년 프랑스 혁명과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아 1791년 세계 최초의 노예 혁명을 일으켰다. 혁명의 지도자는 흑인 노예 출신인 투생 루베르튀르였다. 영국, 스페인, 프랑스는 연합하여 혁명을 진압하려고 했으나 13년에 걸친 전쟁 끝에 아이티 혁명군은 나폴레옹의 군대를 물리치고 1804년 1월 독립에 성공하게 된다. 그리고 혁명 전사들은 새로운 공화국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이 사용한 원지명인 ‘아이티’(산악이 많은 지방이라는 뜻)를 택했다.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 못지않게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유일무이한 노예 혁명을 통해 건립된 아이티는 세계 최초의 흑인 공화국일 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대륙의 두 번째 독립 공화국이었다. 아이티의 독립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해방운동에 영감과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따라서 식민지 경쟁을 벌이고 있던 유럽 열강과 노예제를 유지하고 있던 미국은 아이티를 주권국으로 승인하기를 거부했다. 프랑스는 1825년에야 아이티와 외교 및 무역을 재개하는데, 아이티는 그 대가로 1억5천만 프랑의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프랑스가 노예 손실 비용으로 청구한 이 금액은 당시 프랑스 1년 예산에 맞먹고, 아이티 10년 치 총수입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따라서 아이티는 탄생부터 외채의 덫에서 허덕이게 된다. 19세기 후반에 아이티는 1년 예산의 80%를 프랑스에 외채를 갚는 데 써야 했다. 아이티는 120여 년만인 1947년에야 첫 번째 외채를 다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전체 외채의 규모는 훨씬 커져 있었다.) 미국의 개입과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 20세기에도 아이티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1862년에야 아이티를 승인한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겨 푸에르토리코와 쿠바의 관타나모를 점령했다. 미국은 카리브해를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대외정책의 거점으로 삼았다. 따라서 아이티도 미국의 개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15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불안한 정정을 빌미로 해병대를 파병하여 아이티를 장악했다. 미국은 1915년부터 1934년까지 약 20년 간 아이티를 직접 지배했다. 이 기간에 미국은 아이티의 경제와 제도를 미국의 의도 대로 뜯어고쳤다. 아이티에서 외국인의 재산 소유를 금지한 헌법 조항을 폐지하고, 국립은행을 접수하고, 외채 상환에 적합하도록 경제를 구조조정하고, 플랜테이션을 만들기 위해 토지를 빼앗았다. 아이티 민중들은 봉기를 하고 파업을 벌였지만 미군은 잔혹하게 저항을 진압했다. 미국이 물러난 후 아이티는 잠깐 동안 안정된 정국을 맞았으나 1940년대부터 다시 쿠데타와 군정의 혼란이 계속됐다. 이러한 혼란 뒤에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체제가 수립됐다. 1957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프랑스와 뒤발리에(일명 ‘파파독’)가 당선됐다. 그는 1961년 의회를 해산하고 1964년에는 종신대통령을 선언했다. 그는 1만 명가량의 ‘통통 마쿠트’라는 친위보안대를 조직해 저항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납치, 살해했다. 미국은 초기에 뒤발리에의 부두교 민족주의 또는 흑인 민족주의를 우려했지만, 뒤발리에가 강력한 반공주의를 견지하자 그를 지지했다. 뒤발리에는 아이티 공산당을 탄압하고 저항하는 좌파 세력을 축출하려고 했다. 당시 미국은 카리브해에서 혁명의 확산을 막아야 했다. 1959년 쿠바 혁명이 성공한 이후 카리브해와 중미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도전을 받았다. 특히 1979년 3월 그라나다에서 “새로운 보석 운동”이 에릭 게리 보수정부를 전복시키고, 4개월 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이 아나스타시오 소모사의 독재를 무너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카리브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을 구상해 1980년 <산타페 문서>로 발표했다. 요지는 카리브해에서 혁명적ㆍ민족적 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서 쿠바-그라나다-니카라과의 위협에 맞서 관타나모-푸에르토리코-파나마의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하는 ‘방어의 삼각선’을 구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쿠바 바로 아래에 있는 아이티의 ‘안정’은 미국의 전략에서 매우 중요했다. 1971년 아버지 뒤발리에가 죽자 그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일명 ‘베이비독’)가 종신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미국은 그를 더욱 강력히 후원하면서 아이티를 자국의 패권 아래에 두려고 했다. 뒤발리에 부자는 수만 명의 아이티 민중을 학살하고, 수억 달러를 사적으로 착복했지만 미국은 자국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했다. ‘인권외교’를 내세운 카터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미국과 국제금융기구가 부과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30년 가까이 지속된 뒤발리에 부자의 독재에 염증을 느낀 아이티 민중들의 저항으로 1986년에 아들 뒤발리에가 국외로 피신하면서 2대에 걸친 독재는 막을 내리게 된다. 1980년대 이후 진행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아이티의 경제는 전통적으로 농업경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1970~80년대 미국은 아이티의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아이티를 제2의 푸에르토리코로 발전시키려고 했다. 1970년대부터 경공업과 조립 산업을 중심으로 아이티의 산업화가 시도됐다. 당시 아이티의 임금 수준은 세계 최저였고, 독재체제에서 노동조합의 결성은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건은 미국 기업의 투자를 끌어들였다. 따라서 1970년대 후반에는 약 6만 명 정도가 미국 기업에 고용되었다. 이들은 시급 11센트, 즉 하루 12시간을 일하고 1.3달러를 받는 고한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취약한 아이티의 경제는 원조와 외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1986년 아들 뒤발리에가 쫓겨나던 해의 외채 규모는 7억5천만 달러로 1957년 아버지 뒤발리에 정권 시작 때보다 17.5배나 증가했다. 따라서 아이티는 국가예산의 30~40%를 해외원조에 의존해야 했고, 외채의 이자를 갚기에도 벅찼다. 이런 상황에서 채권자로서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은 아이티 경제에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정책을 적용시켰다. 임금 삭감, 국영기업의 민영화, 환금작물 재배로의 전환, 관세의 철폐 등 악명 높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이어졌다. 그 결과는 파국적이었다. 대표적으로 아이티의 농업이 완전히 붕괴했다. 2008년 세계적 식량위기 당시 ‘진흙 쿠키’로 상징되었던 아이티 식량난의 근원도 여기에 있다. 아이티 민중의 주식인 쌀에 대한 관세는 50%에서 IMF가 설정한 3%로 대폭 인하되었다. 전통적으로 아이티는 식량을 대부분 자급했다. 하지만 관세 인하 이후 쌀 수입이 1985년 7,000톤에서 2002년 220,000톤으로 30배 이상 급증했다. 국내의 쌀 생산은 거의 사라졌다. 가금류 생산도 비슷한 과정을 겪어서 이 부문에서만 1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한편 1982년에는 아이티 농촌 경제의 큰 버팀목이던 토종 돼지도 전멸했다. 작고 검은 크리올 돼지는 손쉽게 기를 수 있어서 아이티 농촌 가구의 80~85%가 이 돼지를 길렀다. 돼지는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거름을 제공했고, 농민의 개인 저축은행 역할을 했다. 아이티에서 돼지는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나 팔아서 요긴하게 쓰였다. 그런데 1982년 돼지 콜레라의 확산을 우려한 국제기구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하여 13개월 동안 아이티의 토종 돼지를 모두 몰살시켰다. 대신 더 나은 돼지의 도입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미국의 아이오와에서 수입된 돼지는 아이티의 사회와 생태에 완전히 부적합했다. 그 돼지는 아이티 인구의 80%가 식수난에 처했을 때도 깨끗한 물을 먹여야 했고, 1인당 국민소득이 130달러인 상황에서 90달러나 하는 수입 사료를 먹여야 했다. 아이티 농민들보다 훨씬 나은 환경을 필요로 했던 이 돼지는 곧 “네 발 달린 왕자”로 불렸다. 그 결과 농민들의 단백질 섭취량이 급격히 줄고, 농촌 학교의 등록생 수도 30%나 감소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아이티 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대 50%에서 1990년대 후반에는 25%까지 감소했다. 농촌이 붕괴하고 농민의 생존권이 위협받으면서 식량난도 확대되었다. 하지만 농업을 대체할 산업화 확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포르토프랭스와 같은 도시로 몰렸지만 일자리가 없었다. 거대한 슬럼만 형성되었다. 저임금과 낮은 세금으로 이득을 얻은 미국 자본은 아이티의 기반시설에 투자를 전혀 하지 않았고, 1990년대에는 중국이나 방글라데시와 같은 더 좋은 투자처를 찾아 떠났다. 아이티 경제의 큰 몫을 차지하던 관광산업도 1980년대 말 이후 에이즈가 확산되고 정치적 불안정이 지속되자 급속히 퇴조했다. 따라서 아이티 경제는 원조와 외채의 늪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2000년 아이티의 1인당 실질GDP는 1990년보다 크게 줄어들었다. 민중운동의 성장과 아리스티드 1980년대 악화된 아이티의 경제적 상황과 뒤발리에 정권의 정치적 위기는 민중운동의 성장을 낳았다. 1983~86년에 확대된 반뒤발리에 운동으로 독재자는 해외로 도주하고 1987년에 민주적인 헌법이 제정됐다. 구체제로의 복귀를 꿈꾸는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민중들의 저항에 의해 다시 전복되었다. 1989년 가을에 군부 세력에 저항하는 노동조합, 농민단체, 정지조직, ‘작은 교회’ 공동체의 거대한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고 결국 1990년 3월에 군사정권이 축출되었다. 민중운동 세력은 해방신학의 영향을 받은 신부 아리스티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아이티의 빈민가 포르살루에서 태어난 아리스티드는 아이티 빈민들을 대변하는 활동을 벌였고, 1980년대 중반 뒤발리에의 독재정권에 맞선 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라발라스(‘거센 물줄기’라는 뜻의 크리올어) 운동으로 결집한 아이티 민중연합의 지도자가 됐다. 1990년 12월의 선거에서 아리스티드는 빈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67.5%를 얻어 승리했다. 반면 뒤발리에 정권의 장관이자 세계은행의 경제학자였던 마르크 바쟁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으나 겨우 14%를 얻었다. 그러나 취임 후 7개월 만인 1991년 9월에 기득권 세력과 군부에 의한 쿠데타로 아리스티드는 망명을 떠나야 했다. 아이티 내부에서 아리스티드의 지지자들과 민중운동은 군부에 저항했지만, 군부는 또 다시 납치, 고문, 살해와 같은 방식으로 탄압했다. 약 3년 동안 1만 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수십만 명이 보트피플이 되어 카리브해를 건넜다. 이에 대응하여 유엔은 1993년 10월 아이티에 대한 석유 및 무기 금수조치와 쿠데타 주동자들의 해외자산 동결로 군부를 압박했다. 1994년 7월에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 940”을 통과시켜, 회원국들에게 아이티의 군부를 축출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했다. 그해 10월 미국이 주도한 2만 2천여 명(미군이 2만 명)의 다국적군이 아이티를 공격하여 쿠데타 세력을 축출하고 아리스티드를 대통령으로 복귀시켰다. 아리스티드는 복귀 후 1년여의 임기를 채우고 1995년 말 선거에서 87%의 지지로 당선된 그의 후계자 르네 프레발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아이티에 개입한 동기는 무엇인가? 당시 클린턴 정부는 소말리아에서의 군사 작전 실패를 만회하고, 미국으로 쏟아지는 아이티 난민들의 행렬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아이티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아리스티드는 망명지에서 이러한 지원을 이끌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이는 유엔으로 대표되는 국제사회 역시 미국을 위시한 열강과 국제금융기구의 이해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1994년 유엔의 개입은 아리스티드가 다시 축출된 후 이루어진 2004년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의 선례가 되었다. 아이티에 대한 해외 세력의 제도적인 개입을 정당화하는 한편, 아이티 민중 스스로에 의한 대안적인 발전을 가로막는 길에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아리스티드의 통치 기간에 아이티는 어떻게 변화했나, 그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강력히 저항했나? 1991년 첫 번째 당선 당시 아리스티드는 급진적인 재분배 정책을 계속 이야기했으나, 국제 채권자들의 지지를 이끌기 위해서 균형재정과 부패한 관료제도의 개혁을 약속했다. 반면에 그는 토지개혁과 교육개혁, 지난 5년간 발생한 불법 살인 행위에 대한 조사 위원회 설치 공약을 완화했다. 미국에 의해 1994년 권좌에 복귀했을 때도 그는 고강도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이행을 약속하도록 요구 받았다. 미국과 유럽의 채권국, 초민족 금융기관은 그가 복귀한지 2달 후인 1994년 8월에 회의를 열어 아이티에게 재정 지원의 대가로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합체인 <파리 플랜>을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파리 플랜은 △공공부문에 고용된 45,000명 중 절반을 해고하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고 △최저임금을 낮추고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 △지역식량 생산 대신 환금작물 재배로 농업을 구조조정하고 △외국 ‘전문가’를 정부에 고용하라는 내용이었다. 아리스티드는 일부를 수용했으나 특히 국영 밀가루 공장과 시멘트 공장에 대한 민영화 계획에 강력히 저항했다. 1995년 9월 IMF는 급진적인 정책을 배제하고, 구조조정을 조속히 시행하고, 파리 플랜을 이행하라는 긴급 협정서를 다시 제시했다. 아리스티드는 그 제안도 거부했지만 단지 2년을 지연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다. 1997년 국제금융기구와 채권국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후임 프레발 정부가 1년에 2천5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던 국영 밀가루 공장을 단 9백만 달러에 매각한 것이다. 그러나 성과도 있었다. 아리스티드는 공공부문의 민영화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동시에 재정 제약 속에서도 지난 190년 동안에 설립된 학교보다 더 많은 학교를 세웠다. 수백 개의 문맹퇴치센터를 세워 문맹률이 1990년 61%에서 2002년 48%로 감소했다. 쿠바의 도움으로 의대를 개설하고, 1970~80년대 섹스 관광의 유산으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던 HIV 감염율의 증가를 막았다. 아동노동 착취 관행도 크게 개선되었고, 재분배 중심의 세제개혁이 이루어졌고, 최저임금도 2배 상승했다. 이러한 아리스티드가 2000년 선거를 통해 재집권에 성공하자 국내외의 반대파들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2000년의 국회의원 선거와 지방선거, 대선을 거치면서 아이티의 군부와 기득권 세력은 당분간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교체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리스티드가 이끄는 라발라스가족당이 선거를 통해 지방정부는 115개 중 89개, 하원은 89개 중 72개, 상원은 19개 중 18개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까지 90%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았다. 반아리스티드 세력은 곧바로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며 정권 퇴진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2001년에 집권한 미국의 부시 정부도 이런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조해 경제제재 조치를 취했다. 또 세계은행 등의 국제기구에 압력을 넣어 5억 달러 규모의 경제원조와 차관을 중단시켰다. 결국 2004년 2월 반군세력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수도를 향해 진격해 오는 와중에 아리스티드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으로 강제로 사임하여 망명에 오른다. 아이티의 유엔, 평화유지군이라는 신화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사임하고 아이티의 정정이 불안해지자 유엔 안보리가 긴급 소집되어 만장일치로 치안유지를 위해 다국적군의 파병을 결의했다. 이번 지진 복구 과정에서도 미국을 위시하여 세계 각지에서 군대가 파병되고 있고, 한국도 동참할 계획이다. 그들은 평화유지군이라는 이름을 단다. 그런데 내전이나 분쟁을 겪고 있는 나라에 대한 유엔과 국제사회의 이른바 ‘인도주의적 개입’은 문제를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인가? 유엔 평화유지군은 불가피하게 군사적 개입이라는 형태를 띠지만 무장해제, 치안유지, 인도적 지원 등 원래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는가? 아이티의 사례는 이러한 신화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보여준다. 2004년 2월 아리스티드가 축출되고 아이티의 정정이 불안해지자 유엔은 기민하게 대응했다. 반군 세력의 쿠데타를 막아달라는 아리스티드의 요청은 외면해온 유엔이 그의 사임 소식이 전해진 날 밤에 바로 안보리를 긴급 소집했다. 그리고 곧장 만장일치로 아이티의 치안유지를 위한 다국적군 파병을 결의했다. 바로 다음 날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선발대로 해병대 150명을 아이티에 배치했다. 프랑스, 캐나다, 브라질, 칠레 등이 다국적국에 합류하고, 이 다국적군이 그해 6월 유엔 평화유지군인 아이티안정화임무단(MINUSTAH, 이하 평화유지군)으로 이름을 바꿔단다. 평화유지군 관할 하에 2006년 2월 대선이 치러지고 이 선거에서 프레발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그렇다면 평화유지군의 활동 중에 드러난 문제점은 무엇이었나? 첫째, 아이티의 민주주의를 확립하기보다는 불법적인 쿠데타를 사실상 용인해줬다. 평화유지군이 아이티 민중들의 자치권을 존중한다면 당연히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리스티드 대통령이 귀국하는 것을 도와야 했다. 하지만 평화유지군은 반대로 파병 당시부터 아리스티드의 지위를 부인하고 오히려 아리스티드의 귀국 자체를 막고 있다. 즉 아리스티드의 좌파적 정책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미국 정부가 아이티에 혹독한 경제제재 조치와 더불어 반군 세력에게 무기와 자금을 제공해 쿠데타를 사실상 사주한 것이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이러한 권력 재편을 기정사실화하고 안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둘째, 치안과 인권 상황을 구조적으로 개선하지 못했다. 평화유지군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고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다. 그러나 평화유지군이 육성하고 있는 아이티 국립경찰의 상당수는 과거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경찰이라는 공권력을 사용하여 라발라스가족당 지지자들과 빈민촌 주민들, 좌파 세력들을 상대로 살인, 강간 같은 보복 테러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또 이런 범죄에 가담하는 우파 갱단을 비호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따라서 아리스티드의 축출과 평화유지군의 파병 이후 아이티의 치안과 인권 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었다는 보고들이 증가하고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아리스티드 정권이 무너진 후 22개월 동안 포르토프랭스에서만 8천 명가량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 70% 정도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것이다. 셋째, 평화유지군에 의한 직접적인 살인과 인권 침해가 계속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5년 7월과 2006년 12월 빈민촌인 시떼솔레일에서 일어났다. 두 사건 모두 평화유지군이 갱단을 단속한다는 명분으로 탱크를 앞세우고 슬럼 지역으로 들어와 도로를 봉쇄하고 가택 수색을 벌이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총을 난사했다는 점이 동일했다. 2005년 7월에는 최소한 23명 이상이, 2006년 12월에는 3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는 비단 아이티 평화유지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2004년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코피 아난이 평화유지군에 의한 각종 성적 착취의 문제를 인정하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결국 유엔 평화유지군은 아이티에서 좌파와 민중세력의 성장을 막고, 미국과 채권국의 이해관계를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의 표현을 따르자면 미국은 현 대통령인 프레발을 아리스티드와는 달리 “경제성장을 중시하는 관료로서 지난 수십 년 간 아이티를 분열시킨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평화유지군은 이러한 아이티의 재구조화 작업에 핵심적인 정당성과 권력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대재앙은 자본주의 역사가 낳은 홀로코스트 따라서 이번 지진은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탄생부터 아이티를 옭죄었던 제국주의의 유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가 자연재해에 극히 취약한 아이티 사회를 만들어냈다. 채권국과 국제금융기구의 개입 속에서 아이티 정부의 행정력은 극도로 취약해져, 실패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띠게 되었다. 따라서 지진으로 인한 대량 사망은 자본주의의 역사가 낳은 홀로코스트의 다름 아니다. 그 과정을 세 가지를 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아이티는 독립 후 200년 간 지속된 제국주의의 개입으로 경제발전과 근대적인 주권국가의 형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외채의 덫은 아이티 경제를 무겁게 짓눌렀다. 2009년 6월 아이티의 외채 규모는 18억8천4백만 달러로 계속해서 늘고 있다.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따라 침략과 개입을 반복하면서 아이티 인민들의 주권을 부정하고 대안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따라서 아이티는 과소경제, 과소국가로 부를 수 있는 제3세계 저발전의 전형적인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둘째, 1980년대 이후 부과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그나마 유지되고 있던 전통적인 농촌 경제마저 붕괴했다. 벼와 돼지를 축으로 하는 농촌 경제가 무너지자 많은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몰리게 되었다. 따라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는 거대한 슬럼이 형성되어, 열악한 주거지가 만들어졌다. 이는 대규모 자연재해, 특히 지진에 매우 취약한 주거형태다. 셋째,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금융기구뿐만 아니라 유엔도 채권국과 미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아이티에 대한 지배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는 평화유지군은 군사적 개입으로 아이티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한편 구호와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세계적 민간기구(NGO) 역시 아이티 민중들의 운동과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다. 민간기구는 ‘위임받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권력’으로 각종 기금과 구호품을 활용해 자신의 이해를 만족시키거나, 아이티의 계급적 문제를 오히려 은폐한다. 민간기구가 오히려 정치적 운동을 상대화하고 국가기능 마비를 합리화하는 대리자로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티 사태에 대한 올바른 대응 방법을 숙고해보아야 한다. 긴급 구호는 필요하지만 매우 불충분하고, 단순한 구호 활동은 종종 더 나쁜 결과를 낳는다. 외채를 늘리는 방식의 기금 지원은 즉각 중단되어야 한다. 유엔 평화유지군 파병이라는 군사적인 수단을 사용한 개입은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현재 국회에서 계류 중인 한국 정부의 아이티 파병 계획은 백지화되어야 한다. 아이티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해결책은 분명하다. 우선 미국과 국제기구가 부과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당장 중지되어야 한다. 부당하게 부과된 아이티의 외채를 모두 탕감해야 한다. 쿠데타로 축출된 아리스티드의 귀국이 허용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아이티 민중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권을 행사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낳은 홀로코스트를 중단하고, 아이티 혁명의 의미를 잇는 길이다.
<차례> 1. 세계경제 ● 재무부, 금융위기책임세 부과 방안 발표 ● 미 행정부, 금융규제개혁 방안 추가 발표 ● 2010년 남북경협 전망 2. 국제정세 ● 세계사회포럼 ● 유럽 공공서비스 지출 삭감 ● 국제분쟁지역 리포트 3. 한국경제 ● 2010년 한국경제의 당면과제(삼성경제연구소) ● Job Sharing의 확장모델: 일본기업의 ‘Two Jobs' 사례를 중심으로(삼성경제연구소) 4. 한국정세 ● 화폐개혁 이후 북한 경제상황 평가 및 전망 5. 노동 ● 총연맹 - 총연맹 6기 임원선거 및 정기대대 ● 금속 - 금호타이어 구조조정 - 쌍용자동차 지부 임원선거 돌입 - 금속노조 26차 정기대대 ● 공공부문 - 전교조, 전공노 정당가입 혐의 수사 * 2월 셋째 주 정세동향은 쉽니다
<차례> 1. 세계경제 ● 재정위기(Sovereign Risk) ● 유럽 재정위기가 공적연금 위기를 거쳐 정치적 위기로 변질 가능성 ● 토빈세에 관한 최근의 국제적 논의와 시사점 2. 국제정세 ● 아이티 지진 사태: 프랑스, 미국, IMF 등이 어떻게 아이티를 빈곤국으로 전락시켰는가 ● 국제분쟁지역 모니터 3. 한국경제 ● 한국 재정정책의 효과와 재정 건전성 4. 한국정세 ● 국민참여당 창당 - 지방선거 전략 ● 북한 2010년 정세 전망 - 김정일의 건강과 김정은의 후계체제 구축 - 북핵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의 진전 가능성 - 제3차 남북정상회담과 남북한 관계의 미래
2010년 1-2월 호 기관지 원고에 편집상의 어려움으로 표와 그림들이 빠져 있어서 표와 그림을 복원한 원고를 올립니다.
1월 첫째 주 정세동향(2010년 1월 7일) <차례> 1. 국제경제 ● 2010년 글로벌 경제기상도 ● 2010 국내외 금융리스크 2. 국제정세 ● 2010년 10가지 주목할 이야기들 3. 한국경제 ● 2010년 국내경제전망 4. 한국정세 ● 1월 11일 세종시 수정안 발표 ● 6.2 지방선거 ● 개헌, 선거구제 개편, 지역행정구역 통합
12월 셋째 주 정세동향(2009년 12월 17일) <차례> 1. 세계경제 ● 주요국의 통화정책 출구전략 이행현황 ● 국제적 자본규제 확대 움직임 2. 국제정세 ● 코펜하겐 기후회의 3. 한국경제 4. 한국정세 ● 보즈워스 미국 특사의 2박3일 평양방문 ● 여야 사활 건 4대강 예산 3대 쟁점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대의 위기라던 세계 경제위기는 끝났는가? 적어도 지표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회복양상이 활기차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지배세력의 대부분도 인정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논자들은 이중침체(더블딥)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위기의 진원지인 미국경제가 다시 회복되고 있는지, 회복되고 있다면 회복양상이 어떠한지와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지,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더블딥에 빠져들 가능성은 없는지, 더블딥에 빠져든다면 또다시 위기극복이 가능할 것인지 등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또한 미국경제와 세계경제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한국경제에 대한 간략한 전망도 해보기로 하자. 미국경제의 회복양상 미국을 중심으로 성장률, 금융시장, 주택시장, 달러가치와 유가를 통해 경기회복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각국의 성장률 각국의 성장률를 보면, 국가별로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2/4분기까지 1년여의 마이너스 성장 뒤 3/4분기에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서고 있다. 미국이 전형적이다. 일본은 2/4분기부터, 한국은 1/4분기부터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고, 영국, 스페인, 헝가리 같은 나라는 3/4분기에도 여전히 마이너스 성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동안의 위기 전개과정을 보면 “미국경제가 재채기를 하면 다른 나라나 지역의 경제는 독감에 걸린다”는 것이 실증되고 있다. 즉 미국경제 위기 관련 뉴스가 지난 1-2년간 전 세계 언론을 지배했으나 다른 나라 사정은 미국보다 훨씬 심각했음을 알 수 있다. 발트 3국(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의 연간성장률은 -20% 정도의 최악의 성장률을 보였으며, 아이슬란드, 아일랜드의 성장률도 매우 열악하고 일본, 독일의 성장률도 미국에 비해서는 매우 나빴다. 거의 유일한 예외가 중국이다. 물론 중국도 전분기 대비 성장률로 환산하면 2008년 4/4분기에는 1% 정도까지 하락해 미국경제 위기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렇게 세계 각국 경제가 위기를 경험한 이유는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무역과 금융이 깊숙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교역규모가 줄고 국제 금융이 일시적으로 원활치 않음으로써 경제활동이 대폭 축소된 것이다. 당연히도 대미 수출의존도가 높은 국가들과 해외금융 의존도가 높은 나라들에서 타격이 컸다. 미국은 무역의존도도 낮을 뿐만 아니라 수입감소보다 수출감소가 적어 대외교역의 축소로 인한 피해가 멕시코, 대만, 한국, 일본, 독일 등에 비해 적었다. 또한 국제 금융체계의 위기에 직면해서 경상수지 적자가 심하거나 외채비중이 높은 (반)주변부의 타격이 컸던 반면에 국제신인도가 높은 중심부 국가들의 피해는 비교적 적었다. 미국경제는 3/4분기 성장률이 연율로 쳐서 2.2%로 발표되었는데, 일반적으로 회복기의 성장률은 하강기의 마이너스 성장률보다 그 절대치가 더 큰 체크(√)형을 띤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낮은 수치다. 금융시장 금융시장도 안정을 되찾았다. 우선 신용경색과 금융기관 및 기업들의 부도위험성으로 인해 높아진 가산금리들이 위기 이전 수준으로 내려갔다. 테드(TED) 스프레드(LIBOR(런던 은행간 금리)와 미 재무성 증권 3개월 물(안전자산)의 수익률의 차이)가 0.5%(50 basis) 이하로 하락했고(한 때 4.5%까지 치솟았다), A2P2 스프레드(양질의 비금융 기업어음 30일물 금리와 양호하지 않은 비금융 기업어음 30일물 금리 사이의 차이)도 한 때 6% 수준까지 상승했다가 현재로서는 1% 이하로 하락한 상태다. 투자은행 리만 브라더스 붕괴 이후 폭락세를 보였던 각국의 주가도 많이 상승하였다. 남미 등 일부 개도국의 주가는 거의 위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갔고, 미국의 경우도 위기 이전 최고치에 비해 한 때 56.8%까지 하락했던 주가(에스앤피 500 지수 기준)는 이제 그 하락이 30%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한 때 1929년 대불황 당시의 주가 하락 수준을 보였던 것에 비하면 많이 회복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주택시장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연체 및 주택차압 증대와 폭등했던 주택가격의 하락 이 서로 물고 물리면서 각종 대출자산과 유사채권들(모기지기반 채권 MBS, 부채담보부증권 CDO 등)의 가격이 폭락했다. 이런 대출자산과 유사채권을 보유한 금융기관들은 부실해지고, 금융기관 부실로 인한 신용경색 및 부도가 증가하면서 이것이 전체 시스템의 붕괴로 이어질 지경에까지 이르고, 최종적으로는 각종 산업생산과 수요를 위축시킨 것이 현재 경제위기의 연쇄들이라면, 주택가격의 상승은 위기탈출의 중요한 신호다. 주택가격의 상승세로의 전환은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연체 및 주택 차압 감소의 한 원인이 되고, 이는 다시 금융기관들이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대출자산과 유사채권들의 가격회복을 의미하고, 금융기관들이 보유한 자산가격 회복은 금융기관의 기능을 다소 정상화하여 산업생산 및 수요 증대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케이스-쉴러 주택가격 지수에 따르면, 2006년 중반의 최고치에 비해 2009년 5월까지 약 32-33% 하락한 주택가격은 전월대비로 9월까지 연속해서 4개월 동안 상승하고 있다. 최초 주택구입자에 대한 세금 감면 정책이 효과를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9월 상승률은 0.3% 정도로서 8월달의 상승률 1.0%에 비하면 상승세가 둔화되고 있다. 정부 지원프로그램은 11월로 종료예정이었으나 2010년 4월까지 연장되었다. 달러가치와 유가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가장 안전한 화폐로 인식되어온 달러가치는 다른 화폐의 가치에 비해 상승했고 유가는 폭락했는데, 경제위기가 완화되거나 경기회복 징후가 나타나면서 달러가치는 다른 통화(예를 들어 유로화)에 비해 다시 하락하고 있고, 유가는 다시 상승하고 있다. 달러가치는 위기가 한창이던 2월에 1유로당 약 1.28달러까지 상승했다가 11월에 약 1.5달러까지 하락했다. 2008년 7월 11일 1배럴당 147달러까지 치솟은 유가는 경제위기가 심화하면서 2008년 12월 21일 약 34달러까지 하락했다가 현재는 다시 7-80달러까지 상승하였다. 그런데 달러가치는 12월 현재 약간 상승하였고, 유가도 70달러 후반대 가격을 유지하고 있다. 소결 결국 미국경제가 3/4분기 들어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서 회복되고 있는 것은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그 회복세는 그리 강하지 않다. 그리고 이런 회복마저도 주로는 노후차 교체시 제공되는 세금감면, 최초 주택 구매자에 대한 정부 지원 등 경기부양책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데 경기부양이 경제성장률에 미치는 효과는 2009년 3/4분기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2010년 3/4분기부터는 경기부양 규모가 전기에 비해 감소하게 되어 있어 2010년 하반기에는 성장률에 미치는 효과가 당연히도 마이너스를 나타낼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정부의 위기대응 정책: 회복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전체 시스템의 붕괴가 일어날 수도 있었던 시기, 일부에서는 1929년 대불황보다 더 심각한 경제위기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시기가 올 1/4분기였다는 것을 상기하면 현재의 상황은 많이 나아진 상태다. 미국 정부나 연방준비위원회(연준)는 이 정도나마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하여 흡사 전쟁을 치르듯 가능한 한 모든 수단들을 동원하고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1930년대 대불황 당시에 동원된 정책들이 다시 동원되었다. 통화정책 ① 이자율 인하(가격 완화) 우선 대공황 전문가인 벤 버냉키 의장이 이끄는 연준은 시장에 ‘홍수가 날 정도로’ 자금을 공급하였다. 일단 이자율을 대폭 내렸다. 2007년 12월과 2008년 4월 사이에 연방기금금리 목표를 여섯 차례에 걸쳐 5.25%에서 2%로 내렸고 할인율은 같은 기간에 5.75%에서 2.25%로 낮췄다. 결국 2008년 12월에는 연방기금금리 목표를 0-0.25%로까지 낮췄다. 금융기관들이 공개시장조작정책을 통하여 금융기관들이 자금을 풍부히 보유할 수 있도록 하였고 회원 은행들에 대한 대출이자율도 낮췄다. ② 수량완화 이자율이 0에 접근한 상태에서 통화량을 더 늘리기 위하여 미 연방준비은행은 기존에 구매 해주지 않았던 자산들을 구매 해주면서 통화량을 늘리는 수량완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2008년 11월에는 모기지 금리를 낮추기 위하여 국책 모기지 기관에서 6,000억 달러 규모의 모기지기반 증권(MBS)을 구매한다고 발표하였다. 또한 단기 입찰 대출(TAF), 기간자산담보부증권대출(TALF) 같은 다양한 대출제도를 통해 은행 비은행 금융기관들에 자금을 공급하였다. 2009년 3월에 공개시장 조작위원회는 국책모기지 기관의 MBS 7,500억 달러를 추가로 구매하여 국책 모기지 기관의 MBS를 1.25조 달러까지 늘린다는 결정을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국책 모기지 기관 발행 채권 1,000억 달러를 추가 구매하여 2,000억 달러까지 늘리고, 장기 재무성증권을 2009년 동안 3,000억 달러어치를 구매하여 시중 자금 시장의 여건을 개선시키기로 하였다. 그만큼 연방준비은행의 자산규모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2008년 10월 이후 연방준비은행의 자산규모는 대폭 증가하였다. 초기에는 단기 금융시장,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대출이 대폭 늘었다가, 인수합병 등 구조조정 정책을 통해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져 단기 금융시장이 정상화되면서, 국책 모기지기관 발행 MBS 등의 구매가 대폭 늘어났다. 주택 모기지 시장을 국책 기관을 중심으로 살리고자 한 데서 초래된 변화라 할 수 있다. 재정정책 2008년 2월 부시 정부 아래에서 1,680억불의 소득세 환급조치가 있었고, 오바마 당선 이후 2009년 2월에 7,870억불의 경기부양법안(ARRA)이 통과되었다. 이 중 35%는 감세를 내용으로 하고 있고, 65%는 재정지출 증대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즉 연방 세금 삭감, 실업보험 및 다른 사회보장 급여 확대, 교육, 의료, 인프라(에너지 부문 포함)에 대한 투자 증대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중 750억불은 주택소유자에게 지원이 되었다(HASP). 노후 차량 대신 친환경차 구입 시 주어지는 세금감면, 최초 주택구입자에 대한 8,000달러 세제 혜택(11월 말 종료예정이었으나 2010년 4월까지 연장하였다) 등으로 인하여 자동차 판매가 늘어나고 주택판매가 증가하였다. 골드만 삭스 은행에서는 이런 정책효과로 주택가격이 5% 정도 상승하였다고 하고했다. 구조조정정책 1930년대 대불황 당시 재건금융공사(RFC)를 본 딴 부실자산 구조 프로그램(TARP)을 통해 7,000억 달러의 자금이 조성되었고, 시티그룹과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 많은 은행들의 주식을 매입하여 자본금확충을 도왔고, 세계 최대 보험사인 아메리칸인터내셔널그룹(AIG)을 국유화하였다. 또한 자동차 회사 지엠과 크라이슬러도 지원하였다. 그리고 3,060억 달러의 시티그룹 자산에 대한 지급보증을 해 주었고, 뱅크오브아메리카에 대해서도 1,180억 달러의 지급보증을 해주었다. AIG의 구제금융은 수차례에 걸쳐 무려 1,820억달러에 달했는데, AIG로부터 일종의 채권보험상품인 신용부도스왑(CDS)을 구매한 금융기관들은 자신이 보유한 유사채권들의 부실을 AIG에게 전가시킬 수 있었다. AIG는 이런 부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정부가 개입하였다. 즉 정부가 AIG에 계속해서 자금을 투입하고 국유화하였는데, 이로써 미국계 금융회사(대표적으로 골드만 삭스)뿐만 아니라 스위스, 독일 은행도 구제했다. 수혜를 입은 AIG의 거래상대방 중 골드만 삭스는 129억 달러, 프랑스의 소시에테제네랄(Societe Generale)는 119억 달러, 독일의 도이치방크(Deutsche Bank)는 118억 달러, 영국의 바클레이스(Barclays)는 79억 달러를 지불받았다(2008년 9월 16일-2008년 12월 31일). 민관 합작 부실자산 매입 프로그램(PPIP)을 가동하여 금융기관의 부실자산을 매입하려 하였으나 계획이 대폭 축소되었다. 국제협력 G20 회의를 개최하여 보호무역 방지, 재정지출 증대 결의 등을 통해 경제위기의 확산을 방지하고자 했다. 개도국 경제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G20은 G8을 대체해 가고 있다. 특히 중국은 경기부양규모를 국내총생산 대비 12% 이상으로 책정하여 세계적인 경제회복에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불안한 회복 미국 경제가 위와 같은 요인에 의하여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으나 매우 불안한 회복과정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한 변수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고용: 실업률 증가 미국경제가 3/4분기에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다고 하나 실업률은 계속해서 오르고 있다. 실업률은 6월 9.5%, 7월 9.4%, 8월 9.7%, 9월 9.8%를 기록한 이후 10월에는 10.2%를 기록하였고 11월에는 10.0%로 약간 하락하였다. 위기 이전에 비해 거의 740만 개의 일자리가 감소하였는데 경제위기가 아닌 시기 약간씩 증가했을 일자리수까지 감안하면 정상적인 시기보다 800-900만 개가 적은 것이다. 실업자와 구직단념자, 그리고 경제상황 때문에 단시간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합친 최광의의 실업률(U6)은 5월 16.4%, 6월 16.5%, 7월 16.3%, 8월 16.8%, 9월 17.0%, 10월 17.5%로 급증하다가 11월엔 17.2%로 약간 하락하였다. 경기부양책이 시행되고 이로 인해 일자리가 일부 지켜지거나 늘어났음에도 이런 성과가 나온 것인데, 미국의 실업률 증가세는 경제성장률에 비하면 이례적으로 높다.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선 이후에도 실업률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것은 해고가 과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미미한 성장이 진행되는 가운데 노동강도의 강화 및 노동생산성 증대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실업증가는 소비증대를 어렵게 한다거나, 모기지 연체 및 주택차압 증대를 초래하여 주택 관련 각종 채권의 부실을 심화시켜, 현재의 플러스 성장추세를 꺾이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택시장: 연체 및 유질처분 증대 미국 모기지은행연합회(Mortgage Bankers Association, MBA)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연체 및 유질처분(차압) 과정에 있는 비율이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로 돌아선 2009년 3/4분기에도 14.4%로, 2009년 2/4분기 13.16%에 비해 1.24%포인트가 늘어났다. 9.64%가 연체상태에 있어 2009년 2/4분기 말 연체율 9.24%에 비해 0.4%포인트가 늘어났다. 유질처분 과정에 있는 건수의 비율은 2009년 3/4분기에 4.47%로 2/4분기 4.30%에 비해 늘어났다. 서브프라임(비우량) 모기지든 프라임(우량) 모기지든 계속해서 연체 및 유질처분 비율이 늘가고 있다. 서브프라임의 연체 및 유질처분 비율은 40%를 넘어섰다. 전체 모기지의 76%를 차지하는 프라임 모기지의 연체 및 유질처분 비율도 10%를 넘어서, “이제 우리 모두 서브프라임이다”라는 말까지 생겨나고 있다. 프라임 연체 및 유질처분이 늘어나는 이유는 실업률 증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겠다. 당연히 실업률이 늘어나는 한 프라임 모기지의 연체 및 유질처분도 늘어갈 것이다. 주택시장에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이 상환해야 할 모기지가액보다 집값이 더 싼 언더워터(속칭 깡통) 문제다. 퍼스트 아메리카 코로직(First American CoreLogic)에 따르면, 3/4분기에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가구 중 23%, 1천 7십만 가구가 언더워터 상태다. 그리고 언더워터 가구 비중이 매우 높은 주는 5개 주인데 네바다주(65%), 아리조나주(48%), 플로리다주(45%), 미시간주(37%), 그리고 캘리포니아주(35%)이다. 숫자로 보면 캘리포니아가 240만 가구, 플로리다주가 200만 가구에 이른다. 주별로 심각성이 매우 다르다. 이렇게 연체 및 유질처분 비율이 늘어가고 언더워터가 심각해져 유질처분이 늘어간다면 이런 모기지를 기초로 발행된 유사채권은 쉽사리 정상 가격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고 심지어는 더욱 하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국제화폐기금(IMF)에 따르면 세계 금융기관이 2009년 상반기까지 상각한 부실 규모는 1.3조달러에 이르고 2010년 4/4분기까지 추가로 1.5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위기를 경과하면서 금융기관의 자산가격을 기록하는 데 있어서 시가평가제를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회계방침을 변경해 주었기 때문에 금융기관의 부실은 공개된 대차대조표를 통해서는 알 수 없고 그 실체는 여전히 은폐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은폐된 부실로 인하여 금융기관들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좀비은행), 대출은 여전히 지지부진하여 소비와 투자 수요 증대를 어렵게 하고 있다. 상업용 부동산, 카드대출 부실 증대 주택모기지(11조 달러) 연체뿐만 아니라, 그 규모가 주택모기지 규모에 현저히 못 미치기는 하지만 상업용 부동산 모기지(3조 달러)와 카드 연체율도 2/4분기까지는 여전히 커지고 있다. 그리고 주택가격은 이전 최고치에 비해 32-33%가 하락한 반면, 신용평가회사 무디스에 따르면 상업용 부동산은 9월에 이전 최고치에 비해 약 43%가 하락하였다. 이로 인한 모기지대출 부실이 매우 심각할 것이다. (중소형 은행의 경우 상업용부동산 대출비중이 대형은행에 비해 매우 높은데 뒤에서 거론할 중소형 은행의 부실은 이것과 관련이 있다.) 주택담보대출 금융의 부진 주택시장의 거품형성과 붕괴로 인해 주택담보대출 투자주체가 현저히 변화하면서 주택담보대출이 현저히 감소하였다. 정부 보증 기관(패니매이, 프레디맥, 지니매이)이 보유하거나 보증하는 대출규모가 95% 정도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이고, 은행의 모기지대출도 줄었고, 한때 40% 정도에 달하던 ‘비국책기관에 의한 증권화’도 거의 소멸되었다. 결국 거품이 거대하게 형성되던 시기의 주택담보대출 방식이 거의 소멸하다시피 한 상태다. 그래서 2009년 10월 현재 순 주택담보대출가액은 마이너스 상태를 보이고 있다. 주택담보대출 시장이 이전과 같은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기타 감소한 수출입 규모의 더딘 회복, 개인저축률 증대, 재정적자/정부부채 증대, 금리인상, 투자부진으로 인한 잠재성장률 저하, 금융규제 미비 등도 미국경제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요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미국의 수출입이 경제위기 이후 한 단계 내려간 다음 그 회복이 쉽지 않다. 동아시아 수출달러 환류 위에서 소비와 투자를 늘렸던 미국민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리면서 수입을 줄이게 되었고, 또한 미국 이외의 국가들의 경제는 미국보다 더 나빠져 미국으로부터 수입(=미국의 대외수출)을 줄이면서 전반적으로 국제무역이 축소되고 있다. 이 공백을 중국이 중심이 되는 아시아 지역이 약간 메우고 있으나 아직은 역부족이다. 미국내 주택시장과 금융기관이 정상화되고, 미국민의 부채축소(디레버리징)가 중단되어야 국제무역이 성장할 것이다. 당분간 미미한 성장이나 이전보다 낮은 수준의 균형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이 와중에 그 규모는 처음 것보다 작다 할지라도 제 2의 금융위기가 발생한다면 국제무역의 미미한 성장도 어려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성장지체의 한 원인이 될 것이다. 미국의 개인저축률이 위기 이후 증가하였는데 이것도 경제를 위축시키는 요인이다. 저축이 증대했기보다는 전에는 소득 이상의 소비를 하던 계층이 소비자 신용이 주어지지 않아서 소비를 줄이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야기일 것이다. (미 연준에 따르면 10월 소비자대출규모는 연율로 쳐서 전월 대비 1.7% 하락하였다. 이는 9개월 연속 하락이다.) 아무튼 전반적으로는 저축률의 증대로 나타나는데 현재의 과다한 부채, 주택시장의 침체가 해소되기 전까지는 당분간 저축률이 이전보다 높게 유지될 것이다. 경상수지 적자도 축소될 것이다. 미국민의 소비둔화를 중국 등 경상수지 흑자를 크게 내고 있는 나라에서 내수를 진작시키면서 메워준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이 또한 이후 활발한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재정지출 증대로 미국은 재정적자가 대규모로 발생하고 정부부채가 급속히 증대되고 있다. 일본 등의 사례를 보았을 때 현재의 재정적자와 정부부채 규모를 통제불가능한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경제위기가 쉽게 극복이 안 되는 상황에서 최소한 추가적인 재정지출을 어렵게 하는 요소는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실업률 수준 등을 보았을 때 인플레이션이나 금리인상을 걱정할 단계는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일정하게 경제가 회복된 이후 단행될 금리인상은 저금리에 적응해 온 경제주체들에게 많은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하겠다. 투자부진으로 인한 잠재성장률 저하도 문제가 될 것이다. 혁신을 통한 생산성 증대가 담보되지 않는 투자확대는 이윤율저하를 가속화시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겠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생산수단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성장은 극히 제한적일 것이다. 이번 위기를 교훈 삼아 다음 위기를 예방하기 위하여 금융규제가 일부 논의되었으나 그것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이번 위기를 경과하면서 대형 상업은행들이 투자은행들을 인수합병하면서 완전한 겸업은행체제를 갖추게 되었는데(글래스 스티걸법의 최종적인 역전 즉 케인즈주의적 금융억압이 실시되기 전인 대공황 이전 시기로의 복귀), 이는 이후 또 다른 거품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 물론 정보기술산업에서의 거품형성과 붕괴, 주택시장에서의 거품형성과 붕괴를 연이어 경험하였고, 주택시장과 금융기관의 정상화의 길이 멀어서, 단기간 안에 다시 거품이 형성되기가 쉽지 않고 정부당국으로서도 거품형성을 방치하지 않으려 노력할 것임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품형성 자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수단도 별반 없는 바에야 또 다른 거품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어 보인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거품이 형성될 수도 있고,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의 일일 수도 있겠으나, 거품이 형성된다면 그 거품의 붕괴 효과는 이번 거품 붕괴 효과보다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거품붕괴의 파괴력을 높일 수밖에 없는 국제적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미국의 순국제투자자산의 마이너스 규모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새로운 거품이 붕괴할 경우 국제 금융시장의 교란 규모가 더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어느 정도 줄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상당한 규모이고 이 경상수지 적자가 대폭 줄지 않는다면 미국의 순국제투자자산의 마이너스 규모도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미국 경제 전망 경제위기 이후 전망을 하기 전에 이윤율 곡선을 통해 현재의 경제위기를 가늠해 보기로 하자. 미국의 이윤율 대용으로서 비금융법인자본 수익률(=영업이익/생산된 고정자본) 곡선에 따르면 1960년대 중반 전후 최고치를 기록한 이윤율은 이후 하락하고 있다. 이윤율 하락은 금융화를 야기하였고, 1980년대 이후 이윤율을 회복시키기 위해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일반화되었다. <그림 1> 미국 비금융법인자본 수익률 * 자료: 미 경제분석청(http://www.bea.gov/index.htm)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 또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정책으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에서는 이윤율이 1997년까지는 약간 상승하는 추세를 나타낸다. 그 후 이윤율은 1997년의 고점, 2001년의 저점, 2006년의 저점을 오가다가, 2007년, 2008년에는 이윤율이 다시 낮아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현재의 위기는 이윤율 하락의 극복을 위해 시도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효력이 다하고, 그것이 야기한 금융투기거품의 형성과 붕괴가 반복되면서 초래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1960년대 중반 이윤율이 최고치로 올라갔고, 그 이후 이윤율이 낮아진 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인해 이윤율이 일정하게 회복되었는데, 2000/2001년에 정보기술부문의 거품이 형성되었다가 거품이 한차례 붕괴했고, 다시 주택시장에서 거듭 거품이 형성되었다가 붕괴하여 현재의 위기가 초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그림 1> 참조). 또한 현재의 위기를 이윤율을 구성하는 자본생산성의 위기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 2>에서 보듯이 ‘국민소득/민간 비주택부문 고정자산’으로 계산한 자본생산성은 1980년대 이후를 보면 1997-2000년 사이에 최고치를 형성했다가 그 이후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자본생산성(=노동생산성/기술적 구성)은 이윤율을 규정하는 변수인데, 1965-66년 자본생산성이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하락하면서 1973-74년 위기, 1980년, 1981-82년 위기가 초래된 것처럼 2001년의 위기와 2008년의 위기도 자본생산성이 하락하면서 초래된 위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에 대한 다양한 공격을 통해 이윤분배율을 높여 이윤율 회복 시도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자본생산성을 되돌릴 수 없다면 더욱 커다란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림 2> 미국의 자본생산성(1929-2008) * 자료: 미 경제분석청(http://www.bea.gov/index.htm) 이제 전망을 해 보도록 하자. 앞서 이야기했듯이 미국 경제 회복은 아직은 매우 미약하다. 그런데다 2009년 3분기에 피크에 이른 경기부양책 효과가 줄어들고 있고, 앞서 이야기한 여러 부정적인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경제가 V 자형태로 신속하고 활발하게 회복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서 U 자형(느린 회복), L 자형(장기침체), W 자형(더블딥) 중의 하나이거나 이들의 조합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예상으로는 연체 및 차압의 증가, 금융기관의 감추어진 부실, 주택담보대출 금융의 부진, 실업률 증가, 재정적자/정부부채의 증가 등의 변수를 고려하건대 장기침체에 가까운 느린 회복과정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기업이윤의 획기적인 증대는 어려울 텐데 몇 가지의 잠재적인 불안요인들이 겹친다면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추가부실로 인하여 2차 금융위기가 도래하고 이는 더블딥으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대형은행 부실 이후 중소규모 은행의 부도가 이어지고 있고, 미 연방예금보험공사가 문제은행으로 지목하고 있는 은행만도 500개 이상으로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런 중소규모 은행의 부실은 상업용 부동산의 가격하락과 관련 모기지의 연체 증가와 관련이 있다.) 물론 단기간 안에 더블딥이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윤율의 이론궤도가 추세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가운데(자본축적 궤도는 누운 S자형, 즉 로지스틱 곡선을 그린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금융규제 미비로 또 다른 거품이 형성되고 그것이 붕괴해 경제위기가 찾아올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다. 한편 경제위기가 일정하게 회복된다 하더라도 고용 없는 회복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일반적이다. 1990년대부터(1991년, 2001년) 성장률이 플러스로 돌아선 뒤에도 실업률이 장기에 걸쳐 하락했으며(이런 상황에서 성장률이 높을 수가 없다), 감소된 일자리를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매우 길어지고 있다. 현재의 위기에서도 이런 사태가 반복된다면 미국경제가 위기 이전의 고용규모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5-6년 이상이 소요되거나 그 안에 또 다른 위기를 맞이한다면 10% 내외의 실업률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경제 현황 및 전망 한국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저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고용문제가 지속되고 있고 임금억제나 비정규직 문제 또한 여전히 심각한 상태다. 그러다가 경상수지가 악화되거나 대외여건이 불리해지면 금융불안이 야기된다. 한국경제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깊숙이 편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의 현황을 살펴보고, 간략한 전망을 해보기로 하자. 한국경제의 현황 한국경제는 이번 심각한 위기국면 이전에도 1997-98년 경제위기 이후 장기불황이라 할만한 저성장상태를 지속하고 있었다. 1999/2000년 거품으로 판명된 IT 호황, 신용카드 남발로 인한 2002년의 호황 이후로는 연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줄곧 3-5%대를 기록하고 있다. 위기 이전 7% 내외의 성장률에 비하면 현저히 낮아진 것이다. 또한 민족경제 구성원의 소득상황을 보다 잘 보여주는 국민총소득(GNI) 성장률은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2년 이후 언제나 0-3%대를 기록하여 국내총생산 성장률보다 2%포인트 정도 낮았다. 즉 한국경제는 1997-98년의 경제위기를 계속적인 구조조정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확실히 극복하지 못한 채 이전의 활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림 3> 분기성장률(2001.1/4-2009.3/4) * 왼쪽 윗선: 전년동기대비성장률, 왼쪽 아랫선: 전기대비성장률 그러나 이런 저성장 아래에서도 작은 경기순환은 있는데 2년 정도를 주기로 짧은 경기회복과 경기후퇴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데 2007년 4/4분기에 정점을 기록한 작은 경기순환이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만나면서 심각한 경제위기로 빠져들었고 2008년 4/4분기에는 아이엠에프 당시 위기가 한창이던 때와 유사한 양상을 나타내기도 했다(<그림 3> 참조). 매출액영업이익률에 유형자산회전률(=매출액/유형자산)을 곱해 계산한 제조업 유형자산영업이익률을 이윤율 대용으로 사용하여 최근 한국경제에서의 이윤율 운동을 살펴보기로 하자(<그림 4>참조). 1979-80년 경제위기로 낮아졌을 이익률은 3저호황이 시작된 해인 86년까지 일정하게 회복한다. 그 이후 1989년, 1992-93년, 1996년, 1998-99년, 2001년 이익률은 저점을 형성한다. <그림 4> 제조업의 유형자산영업이익률(1984-2008년) * 자료: 한국은행, 『기업경영분석』, 각년호 2002년 이후 이윤율은 약간 회복하였는데 2004년 이익률이 최고점에 이르렀다가 2005년 2006년 연속 하락한 뒤 2007년과 2008년에는 이윤율이 고개를 약간 쳐든 상태다. 2004년의 높은 이익률과 1996년과 2006년의 낮은 이익률은 반도체 가격 상승과 하락으로 경기상황에 비해 과도하게 높아지고 낮아진 것으로 추측이 된다. 한편 2007년과 2008년의 이익률 회복은 유형자산회전율이 상승한데서 기인하였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IMF 위기 이후를 저성장 시기라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이후 이익률은 어느 정도 개선이 되었다. 이는 지속적인 구조조정 속에서 고정자본의 절약과 노동자에 대한 공격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번 위기에 부도기업이 급증하지 않은 이유는 2003년 이후 이렇게 확보한 상당한 규모의 이윤과 투자축소로 인한 부채비율 감소 때문으로 보인다. 한국경제는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맞이하여 대외부문에서 심각한 위기를 경험하였고, 이 여파로 2008년 4/4분기의 경우 심각한 마이너스 성장을 경험하였다. 경상수지 적자로의 전환, 대외채무의 급증 및 순국제투자잔액(=대외투자-외국인투자)의 마이너스 규모의 급증으로 인하여 환율이 폭등해 결국 미국과 통화스왑을 통해 달러를 조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물경제 역시 심각한 양상을 나타냈다. 국제무역은 심각한 수축을 경험하였고 물가폭등, 투자축소 등이 잇따라 2008년 4/4분기에는 전기대비 성장률이 -5.1%(미국처럼 연율로 환산할 경우 약 -19%)까지 추락하였다. 일부 한계기업은 파산지경에 이르렀고 쌍용자동차 등에서는 대규모 해고가 진행되었고 많은 기업에서 임금억제 및 감소가 있었다. 대체로 2009년 3/4분기에 들어서 미국경제와 세계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멈추게 되는데 한국경제는 이보다 먼저 1/4분기부터 전기대비 성장률이 미약하게나마 플러스로 돌아섰다. 미국경제와 세계경제의 이런 추세전환은 심각한 재정적자를 감수한 대규모 재정정책, 그리고 제로금리와 수량완화로 표현된 통화정책, 금융기관 정상화를 위한 구조조정정책 등이 미국에서 시행되었고 국제적인 협력과 공조를 통해 이와 유사한 정책이 각국에서 집행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가 1/4분기부터 미약하나마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선 것은 세계적으로 보면 이례적인데(영국이나 스페인같은 나라는 3/4분기까지도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이는 2008년 4/4분기 성장률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현격히 더 낮았고(기저효과), 대폭적인 환율상승(원화가치 평가절하)에 기초해 다른 나라들보다 수출감소가 덜했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미국 다음으로 컸던 경기부양 규모,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의 대규모 경기부양과 성장의 덕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한편 상대적으로 빠른 회복으로 인해 실업률도 3.2%로 매우 낮은데 그렇다고 고용의 질이 양호한 것은 아니다. 이런 낮은 실업률은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려 저임금 불안정 노동인 희망근로 등이 증가하여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열악한 일자리를 통해서나마 50대 이상의 실업률은 낮아졌는지 모르지만 30대 등 젊은 계층의 고용은 여전히 나쁜 상태이다. 요컨대 고용불안은 여전하고 저임금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경제 전망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경제는 2009년에 0.2% 성장을 할 것이라 한다. 그리고 2010년에는 4.6%, 2011년에는 4.8%의 성장을 할 것이라 한다. IMF 위기 이전의 7% 내외의 성장은 아니지만 위기국면에서 낮은 성장이나마 정상적인 성장궤도로의 복귀를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표 1> 한국은행의 경제성장 전망 전망을 위해 2009년의 분기별 성장률을 살펴보자. 1/4분기, 2/4분기, 3/4분기 성장률은 각각 0.1%, 2.6%, 3.2%에 달했다. 그리고 3/4분기 3.2% 성장의 대부분(2.8%)은 재고증가의 효과라 한다. 그래서 4/4분기 성장률은 대폭 낮아져서 0.3% 성장률을 보일 것이라 한다. 사정이 이렇다면 한국은행의 2010년 전망은 낙관적으로 보인다. 2008년 4/4분기 급격한 침체 이후 진행되었던 짧은 회복국면이 2009년 4/4분기부터 조정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OECD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경기부양의 순 효과가 2008년에 23%, 2009년에 49%, 2010년에 28%로 분배되어 있다. 앞서 미국의 사례에서 이야기했듯이 경기부양의 생산증대효과가 줄어들기 시작하는 순간 경기부양으로 인한 생산증가율 효과는 부(-)의 수치를 갖게 된다. 2010년의 경우 경기부양책으로 인한 국내총생산 증가효과가 2009년보다 적기 때문에 이것만 보면 2010년의 국내총생산 증가율 효과는 부(-)의 수치라는 것이다. 또한 2009년의 회복이 중국의 경기부양 및 성장에 힘입은 바가 큰데 중국경제의 경우 과잉투자로 인한 거품형성을 우려하여 최근 경기부양책을 다시 거둬들이고 있다. 이 역시 부정적인 변수다. 결국 2009년의 성장목표는 쉽게 달성 가능한 목표로 보이지 않는다. 한국경제의 중장기적 전망은 당연히도 미국경제와 중국경제, 그리고 세계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다. 또한 대외수지가 악화하거나 미국이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에서 금융위기에 발생하면 쉽게 금융적 불안이 커진다. 그래서 미국경제가 미약한 회복 이후 더블딥의 양상을 보인다면, 중국의 과잉투자가 문제가 된다면, 유럽 몇 나라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한다면 한국경제는 또다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거칠게 전망을 해 보면 한국경제는 IMF 위기 이후 저성장 혹은 장기불황 상태를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날 충격파에 끊임없이 요동을 칠 것이다. 당연히 저임금 비정규직 등 고용문제의 해결도 요원할 것이다. 현재의 위기적 양상이 지속되는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