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된 비디오는 셀 수 없이 반복되는 잔혹한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점령의 진실을 보여 준다 ― 모든 미군은 즉각 이라크에서 철수하라! 2007년 7월 12일 이라크 바그다드 시내에서 무장 헬리콥터에 탄 미군들이 일단의 군중을 향해 발포해 12명이 사망했고 두 아이들이 부상당했다. 미군들은 이들이 AK 소총과 로켓추진수류탄발사기(RPG)를 소지한 무장저항군이라며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러나 사망한 이들은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 운전수, 민간인들이었다. 학살당한 이들은 AK 소총과 RPG가 아니라 카메라와 대형 망원렌즈를 들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지난 5일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비디오 영상에서 확인됐다. 이 영상은 웹사이트 http://www.collateralmurder.com에서 볼 수 있다. 민간인들을 학살한 미군들은 “하, 하, 하 내가 그들을 쐈다”, “저기 죽은 놈들을 봐”, “좋았어” 하며 애꿎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모욕했다. 게다가 총에 맞은 사람들을 태우러 온 승합차를 향해 다시 발포하는 비열한 짓을 멈추지 않았다. 이 때문에 차에 타고 있던 아이들이 다친 것이다. 끔찍한 학살 장면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오른다. 민간인들을 정조준하며 사냥하듯 총격을 하는 미군들의 만행은 ‘재건’을 위해 미군이 이라크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이 얼마나 위선으로 가득찬 거짓말인지 똑똑히 보여준다. 이미 미군은 2007년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 이 모든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 당국은 당시 민간인 학살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고,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미군들을 처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미 국방부는 이 영상을 폭로한 ‘위키리크스’ 사이트를 2008년 미군 병사의 안전에 위협을 줄 수 있는 사이트로 규정하며 “병사들의 안전과 예민한 정보의 보안과 작전 상의 안전에 잠재적 위협이 되고 있다”고 했다. 미군 당국의 이런 작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리고 비디오 영상의 처참한 장면들도 셀 수 없을 만큼 이라크에서 반복되는 현실이다. 또한, 오늘의 아프가니스탄 상황이기도 하다. 최근 나토군이 민간인 5명을 학살하고 이를 은폐하려다은폐하려다 발각된 것처럼 이라크에서건 아프가니스탄에서건 외국군은 민간인들의 인권을 존중하기는커녕 파리 목숨으로 여기고 있다. 우리는 미군의 만행을 강력히 규탄한다. 오바마 정부는 미군을 이라크에서 “완전 철군”하겠다지만 올해 5만 명이 넘는 미군이 이라크에 남게 될 것이다. 미군이 이라크에 남아 있는 한 민간인 학살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즉각 이라크에서 모든 미군을 철수하라!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도 학살 전쟁을 중단하고 모든 외국군은 철수하라! 반전평화연대(준)
침략적 전쟁연습, 키 리졸브 훈련을 중단하라! 한미연합 전시증원훈련인 키 리졸브 훈련이 오늘부터 18일까지 진행된다.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평화를 바라는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은 그간 침략적 전쟁 훈련인 키 리졸브 훈련 중단을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 당국은 키 리졸브 훈련이 통상적 방어연습이라는 거짓말만 되풀이하며 전쟁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다. 키 리졸브 훈련은 한미연합사/유엔사 작전계획 5027에 따라 진행된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작전계획 5027은 북한군 격멸, 북 정권 제거 등을 목적으로 하는 공격적인 군사 계획이다. 또한 북한 내부 불안사태에 대해 한미 연합군이 선제적 군사작전을 펼치는 작전계획 5029 역시 이번 키 리졸브 훈련에 반영된다. 훈련 내용을 보면 키 리졸브 훈련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키 리졸브 훈련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제거 작전, MD(미사일방어) 작전, 북한지형 숙달을 위한 산악전, 도시지역 전투, 평양 시가전을 상정한 훈련, 북한지역에서의 민군 작전 등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같이 북한 체제 붕괴와 점령을 상정한 훈련이다. 이런 공격적 전쟁 연습이 3만 8천여 명(미군과 한국군 포함)의 병력을 동원해 야외기동훈련인 독수리 훈련까지 연계하여 무려 44일 동안이나 지속된다. 이런 군사 훈련을 위해 <한미 상호공수지원협정>에 따라 민간 항공기를 이용한 미군 병력과 물자의 수송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키 리졸브 훈련에 참가하는 미군이 지난 달 25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바 있으며, 대구와 군산 역시 미 증원전력의 통로가 되고 있다. 이는 민간 항공기를 이용한 공수훈련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으로, 한반도를 항시적인 전시동원체제로 만드는 것이다. 북한의 체제 붕괴를 목표로 진행되는 침략적 군사 훈련은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키 리졸브 훈련은 자위적 방어전쟁의 범위를 벗어나 국제법 위반이며 방어만을 목적으로 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도 위배된다. 이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강화하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남한 전역을 전쟁 연습장과 기지로 만들 뿐이다. 우리는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진정한 평화를 바라는 모든 민중들과 함께 연대하여 침략적 전쟁 연습을 중단시키고, 나아가 침략적 한미동맹을 해체하기 위해 강고한 투쟁을 만들어갈 것이다. 2010년 3월 8일 사회진보연대
침략적 전쟁연습, 키 리졸브 훈련을 중단하라!
2010년 3월 8일 사회진보연대
2010년 2월 19일 현재에도 6자회담 재개 여부가 불투명하다. 2월 6~9일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의 방북과 2월 9~13일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의 방중이 이루어지면서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이 6자회담 재개를 위해 본격적으로 중재에 나섰다는 분석이 있다. 현재 북한은 6자회담 재개의 전제조건으로서 2009년 북한의 로켓 실험 발사, 핵실험에 대한 UN 제재의 해제, 평화협정 논의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정부는 6자회담 재개 가능성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이는 무엇보다 북한이 제시하는 6자회담 전제조건에 대해 미국이 명확한 견해 차이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6자회담 재개에 대한 직접적인 보상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지난해부터 분명히 밝혔다. 또한 한국정부가 6자회담 재개 여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은 한국정부가 6자회담 재개를 위한 고유한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연합사령부는 3월 8일부터 18일까지 키리졸브/독수리 군사연습(KR/FE 2010)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따라서 빠른 시일 내에 6자회담이 재개될 수 있겠냐는 회의론도 나오고 있다. (다만 왕자루이 방북 중에 중국이 100억 달러에 이르는 대북투자에 합의했다는 보도가 2월 15일에 나왔고, 이는 6자회담 개최를 향한 우회로를 의미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현재 미국정부는 6자회담 복귀에 대한 대가로 어떤 새로운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원칙과 북미 접촉이 다른 6자회담 당사국을 배제하는 양자협상으로 전환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원칙 외에는 뚜렷한 대북정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는 2009년 오바마 정부의 등장 이후, 북한이 로켓실험과 핵실험을 단행하면서 과연 북한이 궁극적으로 비핵화 의지가 있냐는 회의론이 미국 내에서 폭넓게 제기되면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미로에 빠진 상황을 반영한다. 이 글에서는 2009년 미국 내에서 새롭게 제기된 북한 핵문제에 대한 시각을 소개하고 이러한 시각이 현재 미국의 대북정책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그리고 2010년 1월 북한이 공식적으로 제안한 평화협정 회담이 새로운 전환점으로 기능할 것인지 검토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은 북한의 궁극적인 목표가 핵을 매개로 한 협상이 아니라 핵보유 그 자체라는 의구심을 어느 때보다 더 강하게 품고 있다. 미국과 북한은 협상이 상대방을 속이기 위한 기만술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서로 강하게 품고 있다. 따라서 협상은 어떤 경우 더욱 위험천만한 갈등 국면으로 넘어가는 매개가 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태세는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운동 진영은 북한과 미국 양자가 선의를 발휘해서 대화와 양보를 통한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주문하는 것 이상으로 동아시아 (핵)전쟁태세에 대해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미국 내 새로운 분석: 북한은 미국-인도 유형의 핵 협정을 바라는가? 2009년 12월 8일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평양을 방문했다. 전 주한 미국 대사였던 보즈워스가 2009년 2월 20일 특별대표로 임명된 지 9개월이 더 지난 후에야 방북이 성사되었다. 대북 특별대표 임명은 곧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접촉이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2월 24일 북한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대변인 담화를 통해 광명성 2호 발사를 준비한다고 밝히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보즈워스 특별대표 임명 전 2009년 2월 13일 힐러리 장관은 “북한이 진정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미국은 관계정상화, 평화조약체결, 에너지경제지원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밝히면서 대화 의지를 천명했다. 오바마 정부는 부시 정부가 합의한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을 존중하면서 6자회담을 진행하고 북한과의 고위급 대화로 이를 보강한다는 의지를 밝혔다.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새 정부가 다자포럼과 양자대화를 통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계획은 꽤 좋아 보였고 다른 6자회담의 참가국도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북한이 4월 5일 로켓발사를 실행하고 5월 25일 2차 지하핵실험을 단행하자 미국 내 정치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 한편에서는 북한이 미국 새 행정부와 대화를 할 의사가 있기는 있는 것이냐는 회의론이 제기되었다. 또 한편에서는 설사 북한이 미국과 협상을 할 의사가 있더라도 북한이 협상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이냐 의문이 제기되었다. 미국이 보기에 북한의 의도가 무엇인지 점점 더 수수께끼처럼 여겨졌다. 대북협상에 대한 회의론이나 의문이 제기되면서 미국 내 일각에서는 북한이 진정 원하는 것은 실제 핵무기 보유이며, 이를 미국과 인도가 맺은 핵 협정과 같은 방식으로 미국이 보장하기를 원하며, 나아가 북한 정권에 대한 안전보장도 원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예를 들어 미국 전략국제연구소(CSIS)의 한국 담당 빅토르 차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실험, 핵 실험이 단순히 미국의 관심을 끌고 워싱턴을 양자회담으로 이끌려는 전술로 더 이상 이해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북한이 2002년 10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밝히거나 2006년 10월 핵실험을 단행했을 때도 어떤 전문가들은 부시 정부가 평양과 고위급 양자협상을 하기 꺼려했기 때문에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한 것이라며 부시 정부를 비난했다. 이는 북한이 꺼낸 것이 폭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은 올리브가지 즉 화해 제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사실 부시 행정부 1기에는 북한을 ‘악의 축’이나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불렀고 지난 클린턴 행정부 당시 체결된 모든 북미 합의를 의도적으로 무시했기 때문에, 이런 인식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양자 직접대화를 포함한 협상을 준비하는 시기에 북한이 미사일, 핵 실험을 단행했기 때문에 북한의 이번 조치도 대화 성사를 위한 전술이라는 설명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견해가 미국 내에서 우세해졌다. 탄도미사일 실험이나 지하핵실험은 최소한 몇 개월 이상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북한의 행동은 오바마 정부 대북정책에 대한 사후적 반응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치밀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 미국이 보기에 가장 분명한 사실은 북한이 더욱 강화된 핵, 미사일 능력을 보유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핵 실험이나 미사일 실험을 단행하는 것보다 더 대량살상무기 능력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왜 북한은 대량살상무기 능력 보유를 위해 그처럼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가? 단지 “게임에 거는 판돈을 키우기 위해서”인가? 즉 대량살상무기 포기의 반대급부를 더 키우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실제로 핵미사일 보유로 나아가기 위한 것인가? 미국 내 비둘기파는 북한이 안전보장과 자신의 핵무기를 거래할 의지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이 협상에서 보인 입장을 보면 북한이 어떤 합의를 원하기는 하지만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합의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미국 내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시각이다. 그렇다면 그런 합의란 무엇인가? 6자회담에서 북한은 1994년 제네바합의가 약속한 경수로형 원자로를 부시 행정부가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화가 과열되는 과정에서 북한은 미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북한을 핵무기 국가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은 북한의 일방적 비핵화가 아니라 두 핵무기 국가 사이의 상호 핵무기 감축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현재 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고 있다. 또한 미국은 6자회담 9.19 공동성명 1항에서 “미합중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명문화했다. 즉 이는 미국이 핵무기가 있는 국가가 핵무기가 없는 국가에게 핵 공격을 단행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을 명문화한 것으로서, 미국 외교 전례에서 파격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북한이 진정 원하는 것은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이 언급한 소극적 안전보장이나 미국의 핵무기 감축이 아니라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한 상태에서 북미관계 정상화라는 것이 미국 내 새로운 시각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미국과 인도가 맺은 민간핵에너지협정이다. 그 협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도의 원자로 중 일부(22개 중 8개)가 국제사찰을 받지 않게 합의한 사실이다. 결국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복귀할 의지가 있지만 또한 민간 핵에너지를 보장받고자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이 핵에너지와 핵무기 프로그램의 일부를 국제 사찰 외부에서 통제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북한은 공식적인 6자회담이나 미국과의 양자협상에서 인도 유형의 협정을 상정한 적 없다. 아마도 북한도 이러한 입장을 다른 6자회담 참가국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협상이 지연되면서 어느 시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 후 시점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미국 내 부상하는 새로운 시각은 북한이 그런 시점이 도래할 때까지 핵무기 프로그램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분석이 제기된다. 즉 북한의 의도는 한반도에 국한된 ‘제한적 핵 억지력’ 보유를 인정받는 대신에, 미국의 우려사항 중에서 중장거리 미사일과 핵 이전을 최대한 해소하고, 더 나아가 미래 동북아 전략구도에서 미국이 여전히 우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함으로써 미국의 중국 견제에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북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조미관계 정상화이고, 미국과의 전략적 관계 수립이라는 분석이다.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PSI의 국제적 제도화 북한의 의도에 대한 미국 내 새로운 시각이 과연 적절한 분석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미국이 북한의 의도를 완전히 투명하게 파악하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미국은 북한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조건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화와 제재라는 이중 트랙을 구사하고 있다. 먼저 제재의 측면을 살펴보자. 미국이 더욱 강력한 제재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제재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막는 실질적 조치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이 무기수출이 봉쇄됨에 따라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 그만큼 대화에 나설 가능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북한 2차 핵실험 이후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부시 행정부가 추진했던 확산방지조약(PSI)을 유엔이라는 맥락에서 더욱 효과적이고 포괄적으로 제도화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2009년 4월 5일 북한의 로켓 발사 후, 4월 13일 유엔 안보리는 2006년 북한 1차 핵실험 이후 채택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18호>가 ‘북한의 탄도미사일과 관련되는 모든 활동을 금지한다’는 조항을 포함하므로 북한의 로켓발사가 대북결의 1718호 위반이라는 의장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북한은 “6자회담에 다시는 절대로 참가하지 않을 것”이며 “6자회담의 어떤 합의에도 더 이상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북한은 사용 후 연료봉 재처리, 핵억제력 강화, 경수로 발전소 재검토, 우주 이용 권리 행사를 언급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또한 5월 25일 북한의 2차 핵실험 후, 6월 12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 1874호>이 채택되었다. 결의안은 북한이 모든 무기 관련 물자를 대외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모든 무기 관련물자와 연관된 금융거래, 자문과 기술훈련을 금지했다. 결의안 1718호는 수출통제 대상을 유엔재래식무기등록제도(UNRCA) 하에 7대 무기류(탱크, 장갑차, 대포, 전투기, 공격형 헬기, 전함, 미사일)와 관련 물자, 핵/미사일/생화학무기 관련 통제품목으로 제한했으나 1874호는 모든 무기와 관련 물자로 확대했다. 특히 결의안은 화물검색 강화 조항을 담아서 무기 운반을 실질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조치를 강화했다. 1817호에서는 재래식 무기가 검색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선박검색에 대한 조항이 없었으나 이번 결의안에는 포함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북한은 6월 13일 외무성 성명을 발표해 플루토늄 전량을 무기화하고 우라늄 농축 작업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북한은 9월 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우라늄 농축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폐연료봉 재처리로 추출된 플루토늄이 무기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2006년 결의안에 비해 2009년 결의안은 매우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다. 2002년 미군은 예멘행 북한산 스커드 미사일을 적발하고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예멘이 합법 무기수출이라고 반발하자 미군은 북한 서산호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고 예멘은 무기를 다 넘겨받았다. 하지만 2009년 결의안에 따라 북한의 무기수출은 잇따라 적발, 압류되고 있다. 2009년 6월 미얀마로 향하던 북한 강남1호가 미군 추격을 받다 북한으로 되돌아갔다. 7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는 호주선적 ANL-오스트레일리아를 억류하고 북한산 무기를 압수했다.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은 ANL-오스트레일리아가 북한산 로켓발사기, 뇌관을 싣고 이란으로 향하던 중이었다고 발표했다. 8월에는 북한 무산호가 인도 해군에 나포되었다. (그러나 무산호에서는 무기나 핵물질이 발견되지 않았다.) 12월 태국 당국은 미국의 제보로 35톤 규모 북한 무기를 실은 항공기를 억류했다. 이와 같은 사례처럼 새로운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북한의 무기수출에 실질적 타격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2월의 항공기 억류 사례처럼 북한이 고액의 운송료를 부담하면서 항공기를 통한 무기수출을 시도한다는 것은 실제로 선박을 통한 무기수출이 큰 장애에 직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보즈워스 방북으로 드러난 미국의 대북 전략 오바마 정부가 대화와 제재라는 이중 트랙 중에서도 제재에 방점을 찍는 가운데 2009년 12월 보즈워스의 방북이 이루어졌다. 보즈워스의 방북은 부시 정부 말기인 2009년 말 핵 검증 의정서 합의 실패 이후 첫 번째 북미 간 공식회담이었다. 미국의 의제는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2005년 9.19 공동성명> 이행을 분명히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번 회담이 몇 가지 전술적 이익이 있다고 보았다. 미국의 정책을 북한에게 직접 분명하게 제시하고, 다른 6자회담 당사국과 정책 협력을 강화할 수 있으며, 북한의 의사결정구조에서 고위층을 차지하는 인사들과 접촉함으로써 북한이 전략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촉진하며, 북한이 6자회담 복귀에 합의하지 않더라도, 중국이 북한에게 6자회담 복귀를 더욱 강하게 압박하게 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는 이번 회담에 몇 가지 제한을 가했다. 첫째, 미국의 공식 방침은 6자회담 복귀에 대한 대가로 어떤 새로운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2009년 5월 북한의 핵실험 이후 미국 내에서는 제재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매우 강해졌다. 회담 복귀를 위해 북한에게 어떤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면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해 오히려 보상을 해주는 학습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나쁜 행동은 곧 제재라는 분명한 등식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 정부는 북미 공식회담을 한 차례로 제한했다. 추가적인 북미회담을 필요하냐는 문제는 회담 이후에 결정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북미 접촉이 다른 6자회담 당사국을 배제하는 양자협상으로 전환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북한이 실제 핵보유국 위상을 추구하고 미국이 이를 보장하는 미국-인도 유형의 핵협정을 희망하고 있다고 보는 비관론자도 북한과 협상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간주한다. 6자회담이나 그로부터 유래하는 미래의 어떤 대화형식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아니더라도 북한 핵능력의 동결, 불능화 또는 저하라는 목적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평화협정 회담 제안과 6자회담 전망 2010년 1월 11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올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회담을 조속히 시작할 것을 정전협정 당사국들에 정중히 제의한다”고 밝혔다. 평화협정 회담 형식에 대해서는 “9.19공동성명에 지적된 대로 별도로 진행될 수도 있고,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조미회담처럼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테두리 내에서 진행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북한은 “애초에 평화협정은 핵문제와 관계없이 자체의 고유한 필요성으로부터 이미 체결 되었어야 했고, 조선반도에 일찍이 공고한 평화체제가 수립되었더라면 핵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평화협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북한은 “제재라는 차별과 불신의 장벽이 제거되면 6자회담 자체도 곧 열리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필립 크롤리 미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현지시각) 11일 정례 브리핑을 통해 “미국은 북한이 단지 회담에 복귀하는 것만으로 보상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 측이 6자회담에 복귀하고 비핵화를 위한 긍정적 조치를 취한 이후에야, 광범위한 범위의 기회가 제공될 것”이라고 반응했다. 또한 이라고 말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도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할 경우 제재의 적절한 완화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릴 것”이라면서 6자회담 복귀가 먼저라는 답을 보냈다. 중국도 평화협정 회담 제의에 대해서는 직접 논평을 달지 않고 조속히 6자회담을 재개하기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이 발표한 외무성 성명은 ‘선 평화협정, 후 비핵화’를 요구하거나 ‘평화협정 당사국 회담과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병행’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미국은 ‘선 6자회담 복귀와 비핵화 조치, 후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대해 미국과 북한 사이에 타협 여지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9·19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대로 6자회담을 재개해 비핵화 협상과 함께 평화보장체제를 위한 당사국 포럼(4자회담)을 여는 쪽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6자회담 복귀의 전제조건으로서 제재 해제 문제는 북한과 미국이 팽팽히 맞서는 쟁점이므로 난항이 예상된다. 또한 6자회담 2단계에서 가장 난제였던 북한 핵 신고서 검증방안은 2008년 말 결국 합의 도출에 실패했고, 2009년 북한은 “우라늄 농축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폐연료봉 재처리로 추출된 플루토늄이 무기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2008년에 제출된 핵 신고서는 이미 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이를 북한이 새로이 작성해야 하고 또한 이를 검증하는 방안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결국 6자회담 재개의 입구와 출구가 무엇이냐를 두고 북한과 미국이 강력히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6자회담이 순탄하게 진행되리라 예상하기 매우 힘들다. 2010년 NPT 재검토회의와 한반도 핵 문제 북한은 미국이 자신의 선의를 항상 무시했고 비핵화에 상응하여 미국이 평화협정,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궁극적으로 핵무기 보유를 목표로 한다는 강한 의심을 품고 있다. 북한과 미국은 상대방에 대해, 양자회담이든 다자회담이든 협상에서 상대방이 진정한 목표를 숨기고 대화한 형식을 통해 시간을 지연시킬 뿐이기 때문에 결국 협상이 기만술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항상 품고 있다. 따라서 협상과정은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태세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하와이-동경-괌-평택을 잇는 동아시아 주둔미군의 전쟁태세를 한층 더 강화하며, 최근 확장억지라는 명분으로 동아시아 핵우산 정책을 재확인했다. 북한은 핵, 미사일 실험을 반복하면서 장거리 핵미사일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평화운동은 북한과 미국 양자가 선의를 발휘해서 대화와 양보를 통한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주문하는 것 이상으로 동아시아 (핵)전쟁태세에 대해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북미협상은 입구와 출구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매우 어렵다. 여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가 있다면 핵무기 폐지를 열망하는 세계적 차원의 운동 밖에 없다. 2010년에는 5년 마다 열리는 핵확산방지조약(NPT)의 재검토 회의가 5월 뉴욕에서 열린다. 미국 오바마 정부는 ‘핵무기 없는 세계’ 구상에 따라 러시아와 전략핵무기감축협상을 진행하고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의회 비준을 주도함으로써 세계적 핵감축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NPT 체제 강화나 PSI의 제도화를 통해 강력한 비확산/반확산 정책을 구사할 수 있다. 물론 오바마 정부가 미국 의회의 지지를 얻어 전략핵무기감축협정이나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을 조기에 실현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미국은 NPT 체제 강화를 통해 NPT 탈퇴국(예를 들어 현재의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를 강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따라서 세계 평화운동은 NPT 재검토회의가 핵무기 보유 국가를 위한 일방적인 도구로 기능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고, 세계 평화운동의 주도로 핵무기 폐지의 당위성과 현실성을 세계에 전파시키기 위한 계기가 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최재훈, 「르완다와 아이티 사태를 통해 본 유엔 개입의 모순과 문제점」, 『인권법평론』 창간호, 2007.
'눈먼 학살자' 무인공습기 미, 아프팍 전쟁서 2008년이후 80차례 무인기 공격 오폭논란 가열…“민간인 사망 최대 98%” 분석도 * 출처: 한겨레 (기사등록: 2010-01-25 오후 02:00:39)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아프팍) 전쟁의 주역은 이제 미군·나토군이 아니라 프레더터 같은 무인기(무인공격기)다. 무인기 활용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2009년 이후엔 더욱 빈번해졌다. 새로운 전쟁 트렌드라고도 하지만, 민간인 오폭으로 인한 반미감정 격화, 효율성 논란 등 부작용이 끊이지 않는다. 새해 들어 파키스탄의 남와지리스탄 지역은 1.5일에 한번꼴로 무인기의 공습을 받고 있다. 지난 19일 무인기 공격으로 5명이 숨졌고, 지난 17일에는 2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된다. 올해 들어서만 이 지역에 12차례의 무인기 공격이 집중됐다. 지난해 말 아프간 주둔 미국 기지 내의 중앙정보국(CIA) 요원 7명을 숨지게 한 탈레반 테러에 대한 보복이다. 외신들은 아프팍 지역에서 2008년 8월 이후 약 80여 차례의 무인기 공습이 감행돼, 모두 7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한다. 무인기의 주요 활동지역은 남와지리스탄·북와지리스탄 등 아프간-파키스탄 접경 연방부족자치지역이다. 미군의 무인기 공습은 엄연히 파키스탄에 대한 주권 침해이나, 파키스탄 당국은 암묵적인 동의를 한 상태이다. 미군의 무인기가 파키스탄 영내에서 발진한다는 정황도 있다. 파키스탄 내 반미감정의 주요 도화선이 되고 있지만, 미국은 지난해 파키스탄 탈레반 지도자 바이툴라 마흐수드를 사망시키는 등 탈레반에 주는 타격이 크다며 이를 확대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민간인 오폭이다. 군사전문지인 <롱워저널>의 편집장 빌 로지오는 무인기 공격으로 인한 사망자 중 10%만이 민간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군사전문가인 데이비드 킬컬런과 앤드루 엑숨은 지난 2006년 <뉴욕 타임스>에 2004년부터 시작된 무인기 공격으로 모두 700명의 민간인이 숨졌으며, 이는 “탈레반 무장대원 1명을 죽이는 데 민간인 50명이 사망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엔인권특별보고관 필립 올스턴도 지난해 무인기의 공격 목표를 설정하는 법적 기준을 미국 정부가 공개하지 않는다면, 이는 국제법을 위반한 무차별적인 학살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비난했다. 비교적 중립적인 뉴아메리카재단의 피터 버건 선임연구원은 지난해 10월 <포린 폴리시>에서 오바마 행정부 들어 무인기 공습으로 사망한 약 450명 가운데 3분의 2가 무장대원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이도 탈레반 무장대원의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무인기 활용은 전쟁을 더욱 혼란으로 밀어넣을 수도 있다. 무인기 공격에선 사전 정보 획득이 필수적이다. 지난해 연말 중앙정보국 요원 테러 사건도 미군 쪽이 결국 이와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다가, 탈레반의 역공작에 걸려 당한 것이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의 무인기 공격이 강화되고, 다시 지난 18일 카불 도심에선 탈레반이 시가전을 방불케 한 테러를 벌이는 등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조지타운대의 평화안보센터 소장인 대니얼 비먼은 <포린어페어스>에서 “2000~2008년 이스라엘군의 무인기 공격으로 숨진 팔레스타인 주민 가운데 40%가 애초 공격 대상이 아니었다”며 “가자 지역에 촘촘한 정보망을 가진 이스라엘이 이럴진대, 광대한 지역에다 정보망도 부실한 아프팍에서 무인기의 성과는 회의적”이라고 지적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세계적 차원의 핵무기 폐지 운동에서 출구를 찾아야 한다 2009년 12월 8일 보즈워스 미국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평양을 방문했다. 전 주한 미국 대사였던 보즈워스가 2009년 2월 20일 특별대표로 임명된 지 9개월이 더 지난 후에야 방북이 성사되었다. 대북 특별대표 임명은 곧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를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기 때문에 빠른 시일 내에 접촉이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2월 24일 북한 <조선우주공간기술위원회>가 대변인 담화를 통해 광명성 2호 발사를 준비한다고 밝히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보즈워스 특별대표 임명 전 2009년 2월 13일 힐러리 장관은 “북한이 진정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미국은 관계정상화, 평화조약체결, 에너지경제지원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밝히면서 대화 의지를 천명했다. 오바마 정부는 부시 정부가 합의한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을 존중하면서 6자회담을 진행하고 북한과의 고위급 대화로 이를 보강한다는 의지를 밝혔다.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새 정부가 다자포럼과 양자대화를 통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계획은 꽤 좋아 보였고 다른 6자회담의 참가국도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북한이 4월 5일 로켓발사를 실행하고 5월 25일 2차 지하핵실험을 단행하자 미국 내 정치 지형이 크게 바뀌었다. 한편에서는 북한이 미국 새 행정부와 대화를 할 의사가 있기는 있는 것이냐는 회의론이 제기되었다. 또 한편에서는 설사 북한이 미국과 협상을 할 의사가 있더라도 북한이 협상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최종 목표가 무엇이냐 의문이 제기되었다. 미국이 보기에 북한의 의도가 무엇인지 점점 더 수수께끼처럼 여겨졌다. 북한 핵 문제에 대한 미국 내 새로운 분석: 북한은 미국-인도 유형의 핵 협정을 바라는가? 대북협상에 대한 회의론이나 의문이 제기되면서 미국 내 일각에서는 북한이 진정 원하는 것은 실제 핵무기 보유이며, 이를 미국과 인도가 맺은 핵 협정과 같은 방식으로 미국이 보장하기를 원하며, 나아가 북한 정권에 대한 안전보장도 원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 전략국제연구소(CSIS)의 빅토르 차는 북한의 탄도미사일 실험, 핵 실험이 단순히 미국의 관심을 끌고 워싱턴을 양자회담으로 이끌려는 전술로 더 이상 이해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북한이 2002년 10월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밝히거나 2006년 10월 핵실험을 단행했을 때도 어떤 전문가들은 부시 정부가 평양과 고위급 양자협상을 하기 꺼려했기 때문에 북한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한 것이라며 부시 정부를 비난했다. 이는 북한이 꺼낸 것이 폭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은 올리브가지 즉 화해 제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사실 부시 행정부 1기에는 북한을 ‘악의 축’이나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불렀고 지난 클린턴 행정부 당시 체결된 모든 북미 합의를 의도적으로 무시했기 때문에, 이런 인식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양자 직접대화를 포함한 협상을 준비하는 시기에 북한이 미사일, 핵 실험을 단행했기 때문에 북한의 이번 조치도 대화 성사를 위한 전술이라는 설명이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는 견해가 미국 내에서 우세해졌다. 탄도미사일 실험이나 지하핵실험은 최소한 몇 개월 이상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북한의 행동은 오바마 정부 대북정책에 대한 사후적 반응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치밀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 미국이 보기에 가장 분명한 사실은 북한이 더욱 강화된 핵, 미사일 능력을 보유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핵 실험이나 미사일 실험을 단행하는 것보다 더 대량살상무기 능력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왜 북한은 대량살상무기 능력 보유를 위해 그처럼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가? 단지 “게임에 거는 판돈을 키우기 위해서”인가? 즉 대량살상무기 포기의 반대급부를 더 키우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실제로 핵미사일 보유로 나아가기 위한 것인가? 미국 내 비둘기파는 북한이 안전보장과 자신의 핵무기를 거래할 의지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이 협상에서 보인 입장을 보면 북한이 어떤 합의를 원하기는 하지만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합의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미국 내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시각이다. 그렇다면 그런 합의란 무엇인가? 6자회담에서 북한은 1994년 제네바합의가 약속한 경수로형 원자로를 부시 행정부가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화가 과열되는 과정에서 북한은 미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북한을 핵무기 국가로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은 북한의 일방적 비핵화가 아니라 두 핵무기 국가 사이의 상호 핵무기 감축이 논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현재 미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고 있다. 또한 미국은 6자회담 9.19 공동성명 1항에서 “미합중국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으며, 핵무기 또는 재래식 무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공격 또는 침공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명문화했다. 즉 이는 미국이 핵무기가 있는 국가가 핵무기가 없는 국가에게 핵 공격을 단행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을 명문화한 것으로서, 미국 외교 전례에서 파격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시각에서 볼 때, 북한이 진정 원하는 것은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이 언급한 소극적 안전보장이나 미국의 핵무기 감축이 아니라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인정한 상태에서 북미관계 정상화라는 것이 미국 내 새로운 시각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미국과 인도가 맺은 민간핵에너지협정이다. 그 협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도의 원자로 중 일부(22개 중 8개)가 국제사찰을 받지 않게 합의한 사실이다. 결국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복귀할 의지가 있지만 또한 민간 핵에너지를 보장받고자 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이 핵에너지와 핵무기 프로그램의 일부를 국제 사찰 외부에서 통제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북한은 공식적인 6자회담이나 미국과의 양자협상에서 인도 유형의 협정을 상정한 적 없다. 아마도 북한도 이러한 입장을 다른 6자회담 참가국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북한은 협상이 지연되면서 어느 시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 그 후 시점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미국 내 부상하는 새로운 시각은 북한이 그런 시점이 도래할 때까지 핵무기 프로그램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분석이 제기된다. 즉 북한의 의도는 한반도에 국한된 ‘제한적 핵 억지력’ 보유를 인정받는 대신에, 미국의 우려사항 중에서 중장거리 미사일과 핵 이전을 최대한 해소해 주고, 더 나아가 미래 동북아 전략구도에서 미국이 여전히 우위를 차지할 수 있도록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함으로써 미국의 중국 견제에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북한이 염두에 두고 있는 조미관계 정상화이고, 미국과의 전략적 관계 수립이라는 분석이다.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PSI의 국제적 제도화 북한의 의도에 대한 미국 내 새로운 시각이 과연 적절한 분석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미국이 북한의 의도를 완전히 투명하게 파악하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미국은 북한의 의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조건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대화와 제재라는 이중 트랙을 구사하고 있다. 먼저 제재의 측면을 살펴보자. 미국이 더욱 강력한 제재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제재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막는 실질적 조치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이 무기수출이 봉쇄됨에 따라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면 그만큼 대화에 나설 가능성이 더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북한 2차 핵실험 이후 채택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부시 행정부가 추진했던 확산방지조약(PSI)을 유엔이라는 맥락에서 더욱 효과적이고 포괄적으로 제도화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2009년 4월 5일 북한의 로켓 발사 후, 4월 13일 유엔 안보리는 2006년 북한 1차 핵실험 이후 채택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18호>가 ‘북한의 탄도미사일과 관련되는 모든 활동을 금지한다’는 조항을 포함하므로 북한의 로켓발사가 대북결의 1718호 위반이라는 의장성명을 발표했다. (그러자 북한은 “6자회담에 다시는 절대로 참가하지 않을 것”이며 “6자회담의 어떤 합의에도 더 이상 구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북한은 사용 후 연료봉 재처리, 핵억제력 강화, 경수로 발전소 재검토, 우주 이용 권리 행사를 언급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또한 5월 25일 북한의 2차 핵실험 후, 6월 12일 <유엔 안보리 결의안 1874호>이 채택되었다. 결의안은 북한이 모든 무기 관련 물자를 대외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모든 무기 관련물자와 연관된 금융거래, 자문과 기술훈련을 금지했다. 결의안 1718호는 수출통제 대상을 유엔재래식무기등록제도(UNRCA) 하에 7대 무기류(탱크, 장갑차, 대포, 전투기, 공격형 헬기, 전함, 미사일)와 관련 물자, 핵/미사일/생화학무기 관련 통제품목으로 제한했으나 1874호는 모든 무기와 관련 물자로 확대했다. 특히 결의안은 화물검색 강화 조항을 담아서 무기 운반을 실질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조치를 강화했다. 1817호에서는 재래식 무기가 검색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선박검색에 대한 조항이 없었으나 이번 결의안에는 포함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도 북한은 6월 13일 외무성 성명을 발표해 플루토늄 전량을 무기화하고 우라늄 농축 작업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북한은 9월 4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우라늄 농축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폐연료봉 재처리로 추출된 플루토늄이 무기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2006년 결의안에 비해 2009년 결의안은 매우 강력한 내용을 담고 있다. 2002년 미군은 예멘행 북한산 스커드 미사일을 적발하고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예멘이 합법 무기수출이라고 반발하자 미군은 북한 서산호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고 예멘은 무기를 다 넘겨받았다. 하지만 2009년 결의안에 따라 북한의 무기수출은 잇따라 적발, 압류되고 있다. 2009년 6월 미얀마로 향하던 북한 강남1호가 미군 추격을 받다 북한으로 되돌아갔다. 7월 아랍에미리트연합(UAE)는 호주선적 ANL-오스트레일리아를 억류하고 북한산 무기를 압수했다. 아랍에미레이트연합은 ANL-오스트레일리아가 북한산 로켓발사기, 뇌관을 싣고 이란으로 향하던 중이었다고 발표했다. 8월에는 북한 무산호가 인도 해군에 나포되었다. (그러나 무산호에서는 무기나 핵물질이 발견되지 않았다.) 12월 태국 당국은 미국의 제보로 35톤 규모 북한 무기를 실은 항공기를 억류했다. 이와 같은 사례처럼 새로운 유엔 안보리 결의안은 북한의 무기수출에 실질적 타격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2월의 항공기 억류 사례처럼 북한이 고액의 운송료를 부담하면서 항공기를 통한 무기수출을 시도한다는 것은 실제로 선박을 통한 무기수출이 큰 장애에 직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보즈워스 방북으로 드러난 미국의 대북 전략 오바마 정부가 대화와 제재라는 이중 트랙 중에서도 제재에 방점을 찍는 가운데 2009년 12월 보즈워스의 방북이 이루어졌다. 보즈워스의 방북은 부시 정부 말기인 2009년 말 핵 검증 의정서 합의 실패 이후 첫 번째 북미 간 공식회담이었다. 미국의 의제는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2005년 9.19 공동성명> 이행을 분명히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번 회담이 몇 가지 전술적 이익이 있다고 보았다. 미국의 정책을 북한에게 직접 분명하게 제시하고, 다른 6자회담 당사국과 정책 협력을 강화할 수 있으며, 북한의 의사결정구조에서 고위층을 차지하는 인사들과 접촉함으로써 북한이 전략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촉진하며, 북한이 6자회담 복귀에 합의하지 않더라도, 중국이 북한에게 6자회담 복귀를 더욱 강하게 압박하게 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는 이번 회담에 몇 가지 제한을 가했다. 첫째, 미국의 공식 방침은 6자회담 복귀에 대한 대가로 어떤 새로운 인센티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2009년 5월 북한의 핵실험 이후 미국 내에서는 제재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매우 강해졌다. 회담 복귀를 위해 북한에게 어떤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면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해 오히려 보상을 해주는 학습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에 나쁜 행동은 곧 제재라는 분명한 등식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미국 정부는 북미 공식회담을 한 차례로 제한했다. 추가적인 북미회담을 필요하냐는 문제는 회담 이후에 결정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북미 접촉이 다른 6자회담 당사국을 배제하는 양자협상으로 전환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북한이 실제 핵보유국 위상을 추구하고 미국이 이를 보장하는 미국-인도 유형의 핵협정을 희망하고 있다고 보는 비관론자도 북한과 협상이 완전히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고 간주한다. 6자회담이나 그로부터 유래하는 미래의 어떤 대화형식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아니더라도 북한 핵능력의 동결, 불능화 또는 저하라는 목적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한의 평화협정 회담 제안과 6자회담 전망 2010년 1월 11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올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 위한 회담을 조속히 시작할 것을 정전협정 당사국들에 정중히 제의한다”고 밝혔다. 평화협정 회담 형식에 대해서는 “9.19공동성명에 지적된대로 별도로 진행될 수도 있고, 현재 진행 중에 있는 조미회담처럼 조선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테두리 내에서 진행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북한은 “애초에 평화협정은 핵문제와 관계없이 자체의 고유한 필요성으로부터 이미 체결 되었어야 했고, 조선반도에 일찍이 공고한 평화체제가 수립되었더라면 핵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평화협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북한은 “제재라는 차별과 불신의 장벽이 제거되면 6자회담 자체도 곧 열리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필립 크롤리 미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현지시각) 11일 정례 브리핑을 통해 “미국은 북한이 단지 회담에 복귀하는 것만으로 보상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 측이 6자회담에 복귀하고 비핵화를 위한 긍정적 조치를 취한 이후에야, 광범위한 범위의 기회가 제공될 것”이라고 반응했다. 또한 이라고 말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도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할 경우 제재의 적절한 완화를 검토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릴 것”이라면서 6자회담 복귀가 먼저라는 답을 보냈다. 중국도 평화협정 회담 제의에 대해서는 직접 논평을 달지 않고 조속히 6자회담을 재개하기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이 발표한 외무성 성명은 ‘선 평화협정, 후 비핵화’를 요구하거나 ‘평화협정 당사국 회담과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병행’을 요구하는 것이라면, 미국은 ‘선 6자회담 복귀와 비핵화 조치, 후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대해 미국과 북한 사이에 타협 여지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9·19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대로 6자회담을 재개해 비핵화 협상과 함께 평화보장체제를 위한 당사국 포럼(4자회담)을 여는 쪽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6자회담 복귀의 전제조건으로서 제재 해제 문제는 북한과 미국이 팽팽히 맞서는 쟁점이므로 난항이 예상된다. 또한 6자회담 2단계에서 가장 난제였던 북한 핵 신고서 검증방안은 2008년 말 결국 합의 도출에 실패했고, 2009년 북한은 “우라늄 농축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마무리 단계에 있으며 폐연료봉 재처리로 추출된 플루토늄이 무기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따라서 2008년에 제출된 핵 신고서는 이미 시효가 만료되었기 때문에 이를 북한이 완전히 새로이 작성해야 하고 또한 이를 검증하는 방안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결국 6자회담 재개의 입구와 출구가 무엇이냐를 두고 북한과 미국이 강력히 대립하고 있기 때문에 6자회담이 순탄하게 진행되리라 예상하기 매우 힘들다. 2010년 NPT 재검토회의와 한반도 핵 문제 북한은 미국이 자신의 선의를 항상 무시했고 비핵화에 상응하여 미국이 평화협정, 북미관계 정상화를 위한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의구심을 품고 있다. 미국은 북한이 궁극적으로 핵무기 보유를 목표로 한다는 강한 의심을 품고 있다. 북한과 미국은 상대방에 대해, 양자회담이든 다자회담이든 협상에서 상대방이 진정한 목표를 숨기고 대화한 형식을 통해 시간을 지연시킬 뿐이기 때문에 결국 협상이 기만술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항상 품고 있다. 따라서 협상과정은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태세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하와이-동경-괌-평택을 잇는 동아시아 주둔미군의 전쟁태세를 한층 더 강화하며, 최근 확장억지라는 명분으로 동아시아 핵우산 정책을 재확인했다. 북한은 핵, 미사일 실험을 반복하면서 장거리 핵미사일 능력을 향상시키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평화운동은 북한과 미국 양자가 선의를 발휘해서 대화와 양보를 통한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주문하는 것 이상으로 동아시아 (핵)전쟁태세에 대해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북미협상은 입구와 출구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매우 어렵다. 여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변수가 있다면 핵무기 폐지를 열망하는 세계적 차원의 운동 밖에 없다. 2010년에는 5년 마다 열리는 핵확산방지조약(NPT)의 재검토 회의가 5월 뉴욕에서 열린다. 미국 오바마 정부는 ‘핵무기 없는 세계’ 구상에 따라 러시아와 전략핵무기감축협상을 진행하고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의회 비준을 주도함으로써 세계적 핵감축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NPT 체제 강화나 PSI의 제도화를 통해 강력한 비확산/반확산 정책을 구사할 수 있다. 물론 오바마 정부가 미국 의회의 지지를 얻어 전략핵무기감축협정이나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을 조기에 실현할지는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미국은 NPT 체제 강화를 통해 NPT 탈퇴국(예를 들어 현재의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를 강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따라서 세계 평화운동은 NPT 재검토회의가 핵무기 보유 국가를 위한 일방적인 도구로 기능하는 것을 막고, 세계 평화운동의 주도로 핵무기 폐지의 당위성과 현실성을 세계에 전파시키기 위한 계기가 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프팍 전략의 핵심인 파키스탄 9ㆍ11테러를 빌미삼아 시작된 9년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파키스탄으로 확대되었다. 2009년 3월 오바마가 ‘아프팍(Afpak=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합성어)’전략을 발표하게 된 이유도 전선이 파키스탄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2001년 궤멸직전까지 갔던 탈레반은 파키스탄 국경지역을 거점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지금도 국경지역을 근거지 삼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넘나들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이처럼 아프간에서 미군과 점령군에 맞서는 탈레반을 지원하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세력이 파키스탄 국경지역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파키스탄 정부의 도움 없이 탈레반을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에 지원금을 쏟아 부으며 탈레반 격퇴에 앞장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파키스탄의 상황은 미국의 바람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대테러전쟁에 동조하는 파키스탄 정부는 국민들의 외면으로 통치권이 약화되고 있고 탈레반과 알카에다의 세력은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슬람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인 파키스탄이 이슬람 무장 세력에게 넘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해야 할 지경이다. 파키스탄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미국이 조치를 취하면 취할수록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파키스탄의 불안정한 상황은 아프팍 전쟁이 오바마의 베트남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설득력을 가지게 한다. 이슬람 전사를 양성한 파키스탄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면서 파키스탄은 독립했다. 그러나 다양한 민족과 언어를 가진 국가로서 통합력을 형성하는 유일한 요소가 이슬람일 정도로 공통의 기반이 취약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정치도 불안정했는데 건국 이후 네 번의 군사독재 정권이 등장해서 총 30년이 넘게 집권할 정도다.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은 파키스탄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려는 미국의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 미국은 1980년대 아프간에 진주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군사정권을 옹호했고, 현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군사독재정권인 무샤라프를 지지했다. 이러한 역사는 파키스탄의 민주주의가 안착되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어 정치를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군사정권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슬람에 호소하는 전략을 썼다. 대표적으로 지아 울 하크 장군은 1977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폐지한 후, 기존의 법제도를 이슬람 법전에 부합되도록 개조했다. 이와 같은 이슬람화 정책은 자연스럽게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정치적 영향력 또한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파키스탄의 핵심적인 불안요소로 국경분쟁을 들 수 있다. 탈레반의 거점지역으로서 파키스탄 북서 국경지역도 그 중 하나다. 이 지역은 탈레반과 같은 부족인 파슈툰족 거주 지역이다. 파슈툰족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나눠져 살고 있는데, 영국이 19세기에 아프간을 식민지배할 목적으로 국경인 ‘듀란드 라인’을 설정해 강제 분할했기 때문이다. 결국 파슈툰족이 살고 있는 북서변경주와 연방부족자치지역이 파키스탄에 편입되기는 했으나 일종의 자치구로서 중앙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파키스탄의 외교정책 1순위는 파슈툰 영토문제를 쟁점으로 삼지 않는 세력을 지원하는 것이 되었다. 물론 파키스탄 대외정책의 핵심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은 아프가니스탄과의 서부접경지역이 아니라, 인도와의 동부접경지역이다.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인도와 적대 관계가 심화될 때, 파키스탄 정부는 서부 국경이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권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실제로 파키스탄과 인도와의 뿌리 깊은 갈등은 여러 차례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카슈미르 분쟁은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각각 독립하던 시기, 카슈미르 지역 귀속문제가 대두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주민의 77%가 이슬람으로 대다수를 차지했는데, 지배계층은 소수의 힌두교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힌두교인들이 인도로 편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대다수의 이슬람 주민들은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파키스탄과 인도가 개입하면서 제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그 이후로도 정전 경계선 주변에서 교전이 끊이지 않다가 1964년 전면전으로 번져 2차 인-파 전쟁이 발생했으며, 1971년 동파키스탄의 분리(현재 방글라데시)로 인해 3차 인-파 전쟁(벵골전쟁)이 발생했다. 카슈미르 분쟁은 1988년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 세력인 잠무카슈미르 해방전선이 결성된 이후로, 통제선 주변의 교전이 아니라 테러와 게릴라전의 형태로 변화했다. 이들 무장세력의 활동은 파키스탄과 인도를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몰아가기도 했다. 그 예로 2001년 인도 국회의사당 테러를 들 수 있다. 인도는 테러의 배후가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는 라슈카르에타이바라는 의혹을 제기했고 양 국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국경지대에 100만의 군대가 배치되었으며 핵무기를 국경선으로 이동시키는 등 극한 대치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국내외적으로 불안요소가 산재해있던 파키스탄의 상황은 군부독재가 자리 잡기 좋은 토양이 되었으며, 군사정권은 국민을 호도하고 외교정책의 목적을 추진하기위해 이슬람 전사들의 지하드(성전)을 활용하였다. 1979년 미국과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에 소련이 개입하자 이에 저항할 이슬람 무장 세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은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이슬람 블록을 형성함으로써 인도를 견제하는 전략적 힘을 창출하기 위해서 아프가니스탄에 집권하는 세력이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기를 바랐고,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은 원조금과 무기를 비공식적으로 제공하였고 표면적으로는 파키스탄 정보부가 이를 지원하는 것으로 포장되었다. 탈레반(파슈툰어로 학생이란 뜻) 역시 난민지역에 있던 마드라사(이슬람 교육기관)를 다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무장조직이었다. 그러나 198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하자, 소련군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한 전사를 훈련하던 곳은 카슈미르 지역에 게릴라전을 수행하기 위한 무장세력 양성장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이처럼 공공연하고 긴밀했던 파키스탄 정보부와 이슬람 무장세력과의 관계가 9?11테러 이후 달라진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무샤라프 대통령이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테러와의 전쟁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탈레반과 이슬람 무장 세력을 키워낸 대부라고 할 수 있는 파키스탄 군부가 이제는 이들을 제거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무장 세력은 이미 통제권을 벗어난 상태다. 바로 이 점이 파키스탄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손아귀를 벗어난 이슬람 전사들 파키스탄에는 미군의 추격을 피해 국경지역으로 숨어들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만 있는 것이 아니다. 2007년 북서변경주와 연방부족자치지역에 산개해 있던 13개의 무장 단체들을 규합해 탄생한 파키스탄 탈레반이 있다. 이들이 결성된 계기는 파키스탄 군대가 알카에다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족 밀집지역에서 대규모 소탕작전을 펼친 것에서 비롯됐다. 주민들은 아프간 탈레반을 지지하고 있었고 자치지역이나 다름없는 곳에 외세라고 여겨지는 파키스탄 군대가 쳐들어오자 거세게 반발했다. 결국 파키스탄 군대는 패배하고 철수했으며 파키스탄 탈레반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파키스탄 탈레반은 신생조직임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 정부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2007년 베르나지르 부토 전 총리를 암살한 배후로 파키스탄 탈레반의 지도자 바이툴라 메수드가 지목되면서 파키스탄 정부는 그를 공적으로 규정하고 사살명령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스와트 일대에서 정부군과 전투를 지속하면서 2008년에는 스와트 전역의 대부분이 탈레반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결국 파키스탄 정부는 올해 2월 평화협정을 맺었다. 탈레반은 무기를 내리고 파키스탄 정부는 스와트를 비롯한 북서부변경주 일부 지역에서 샤리아(이슬람 율법) 통치를 용인한 것이다. 그러자 곧바로 미국은 파키스탄이 세계 안보에 치명적 위협이 되고 있다고 비난하며 파키스탄이 보유한 핵무기 안전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경고했다. 파키스탄의 평화협정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탈레반도 무장해제 약속을 무시했고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서 100km 떨어진 디르와 부네르까지 세를 넓혔다. 결국 4월 26일 파키스탄군은 스와트 계곡에서 탈레반 소탕작전을 재개했다. 파키스탄군은 일부 지역을 탈환했고, 지난 8월 미군의 미사일 요격으로 바이툴라 메수드가 사망했다. 그의 후계자인 하키물라 메수드는 파키스탄 군 사령부에 잠입하여 20여 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이는 등 전 지휘관에 죽음에 대한 보복 테러를 자행하기도 했다. 한편 파키스탄 정부와 파키스탄 탈레반이 공방을 벌이는 가운데 탈레반은 펀자브 지역까지 영향력을 뻗어나갔다. 탈레반지지 세력과 파키스탄 이슬람 무장 단체들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강화된 계기는 2007년 탈레반의 온상인 랄마스지드(붉은 사원)를 유혈진압한 사건이었다. 이슬람교도들에게 랄 마스지드 사원에 대한 공격은 ‘탈레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이슬람 사원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졌고 이슬람 무장 세력들의 결집을 가져왔다. 펀자브지역 무장단체들은 파키스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카슈미르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지원이 중단되면서 탈레반 활동무대로 점차 이동했다. 내륙지방으로 영향력을 뻗어오는 탈레반은 은신처, 훈련소 등을 지원하고 펀자브 지역 무장단체들은 테러 목표와 병참을 제공하면서 공조하고 있다. 이들은 합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는데 2009년 3월 펀자브 주도인 라호르에서 발생한 파키스탄 크리켓 국가대표팀에 대한 테러와 2008년 9월 50여 명이 사망한 수도 이슬라마바드 매리어트 호텔 폭탄테러가 대표적이다. 크리켓 대표팀 테러 배후로 2001년 인도 뭄바이 테러 배후로 지목되었던 라슈카 에 타비아가 다시 지목되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딜레마는 오바마의 딜레마 끊이지 않는 테러와 파죽지세로 뻗어가는 이슬람 무장단체의 영향력은 이들이 더 이상 파키스탄 정부의 통제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대테러전쟁에 동참하고 있는 파키스탄 정부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파키스탄 국민들도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무인폭격기로 인한 오폭 사고와 대규모로 발생한 난민들의 비참한 상황으로 인해 반정부 정서와 반미 정서가 고조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파키스탄 정부가 딜레마에 처해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의 요구대로 탈레반을 강력하게 진압하면 테러는 더욱 거세질 것이고,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이슬람 세력의 지지를 상실해 파키스탄 정권의 존립이 위태로워 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동맹이자 막대한 지원금을 대고 있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무샤라프 전 대통령은 위태로운 줄타기를 했다. 국내에서 암약하는 탈레반 세력을 적당히 눈 감아주며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다. 파키스탄 탈레반과 평화 조약을 맺기도 하고 무장 세력의 움직임이나 지도부의 은신처를 알면서도 방치하기도 했다. 사실 파키스탄 군부와 정보부 내에는 여전히 탈레반을 비롯한 이슬람 무장 단체들을 비호하는 세력이 있기도 하다. 미국은 파키스탄 정부가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는 데 불만을 가지고 압력을 행사했다. 줄타기를 하던 무샤라프는 헌법을 초월해 집권을 연장하려다 지지율이 하락했고, 이슬람 세력은 무샤르프에게 등을 돌렸다. 무샤라프는 붉은 사원 유혈진압과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 토벌에 나섰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국내 여론만 악화되어 결국 물러나게 됐다. 무샤라프의 후임으로 대통령이 된 자르다리도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편 파키스탄 정부가 탈레반 세력을 소탕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는 이슬람 세력의 반발 때문만은 아니다.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인도와의 국경분쟁은 여전히 최대 현안이다. 군사력을 카슈미르 지역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 접경지역에 병력을 대거 이동시키기 어려울뿐더러, 파키스탄 군부는 인도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할 이슬람 무장 단체의 역할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군부는 인도가 발루치스탄(파키스탄의 한 주)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며 파키스탄 정부를 위협한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국은 파키스탄의 전적인 협조를 기대하기 어렵다. 오바마가 12월에 3만 명을 아프간에 증파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을 때에도 파키스탄 외교부는 “미군의 아프간 3만 명 증파가 파키스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탈레반이 대거 파키스탄으로 유입되어 정국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미국도 이 딜레마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미심쩍은 파키스탄 정부를 교체한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으며, 미국의 제스처는 오히려 파키스탄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오바마는 아프팍의 수렁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