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랜도 파이지스, 『속삭이는 사회』 (후편)
1. 들어가며
저자는 스탈린 이후 혁명이 굴절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특히 그 속에서 나타나는 개인들의 비극을 다루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이러한 비극을 초래한 독재, 폭력의 문제를 단순히 스탈린 개인의 잘못으로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소련 사회가 역사적 시기마다 마주했던 곤란과 그때마다 취했던 선택에 대한 저자의 평가가 함축되어 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논점을 꼽아 보았다. ‘신경제정책의 중단을 어떻게 볼 것인가?’, ‘농업 집단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대숙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전시의 국민적인 단합이 소련을 승리로 이끌었는가?’, ‘전후 스탈린의 개혁 거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스탈린 사후에도 소련 시민들은 왜 오래도록 침묵했는가?’ 2. 신경제정책의 중단: 스탈린주의의 전조
저자는 이 과정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해 설명한다. 실제로 1920년대 소련사 연구에서는 네프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핵심 쟁점이다. 기존 연구 경향은 네프를 1917~1921년의 혁명과 내전, 그리고 1930년대 ‘스탈린 혁명’ 사이에 있었던 ‘숨 쉴 틈’으로 규정했다. 즉 전시 공산주의와 스탈린 혁명 사이에 있었던 혁명의 휴지기라는 의미다. 한편, 부하린의 전기를 쓰기도 했던 미국의 학자 스티븐 코헨은 네프를 전시 공산주의의 가혹함과 스탈린주의의 공포에 대한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 간주했다. 네프는 ‘숨 쉴 틈’이 아니라, 점진적 수단으로 사회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영구적 모델이라는 것이다. 홀란드 헌터와 로버트 앨런은 소련이 네프를 유지했어도 1930년대 중반까지 비슷한 수준의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고 계산하기도 했다.
저자는 네프의 성격을 규명하기보다는, 네프가 중단된 맥락을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이는 기층 볼셰비키와 대중적 차원의 지지와 결합한 스탈린이 권력 투쟁 속에서 부상하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개인 상점의 가격을 감당할 수 없었던 많은 프롤레타리아는 네프에 반대했다. 네프에 대한 이들의 불신은 시장의 심각한 시세 변동으로 더욱 강화됐다. 농촌의 재화 부족으로 농민들이 식료품 공급을 보류할 때마다 가격이 급등하며 혼란이 나타났다.
네프 지지자들은 위기에 대응하는 방법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부하린은 국가 지출의 확대가 산업 투자율을 둔화시킨다고 하더라도, 시장 메커니즘과 농민들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조달 가격을 인상하고자 했다. 통합반대파(트로츠키,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는 농민에게 더 양보하는 것이 사회주의 산업화라는 소련의 목표를 연기할 뿐이라고 우려했다. 이들은 국가가 소비재 생산을 늘리는 데 필요한 식량과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의 곡물을 일시적으로 징발하고, 그런 다음에 시장 메커니즘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부하린 편에 일시적으로 섰다가,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패배한 이후에는 네프를 등졌다. 스탈린은 곡물 위기를 ‘쿨라크(부농, 농업자본가)들의 파업’ 때문이라고 비난했으며, 5개년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전 시기의 징발 정책으로 되돌아가자고 요구했다.
이러한 스탈린의 수사는 프롤레타리아에게 폭넓은 호소력을 발휘했다. 많은 사람이 네프가 사회주의 이상에서 후퇴했다고 생각했고, 자본주의 경제의 부활을 가져올까 두려워했다. 한 볼셰비키는 “우리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화폐가 단번에 일소된다는 믿음 속에 성장했다. 만일 내전 동안 폐지되었던 화폐가 다시 나타난다면, 부자도 다시 나타나지 않겠는가? 우리는 자본주의로 돌아가는 파멸의 길 위에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이 질문을 근심 어린 마음으로 자신에게 던졌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전시 공산주의 방식으로 복귀하자는 스탈린의 요청은 1917~1921년의 혁명적 싸움에 참여하기에는 어렸으나, 내전 이야기에 바탕을 둔 투쟁 숭배 분위기 속에 교육받은 젊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특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스탈린은 내전을 영웅적 시기로, 소련을 국내외 자본주의 적들과 끊임없이 투쟁하는 국가로 보는 낭만적 인식을 이용했다. 또한 스탈린은 전쟁 공포를 조성했는데, 네프가 산업 장비를 마련하는 수단으로는 너무 느리며 전쟁이 일어날 경우 곡물을 조달하는 수단으로도 안정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1928~1929년에 당의 통제권을 차지하기 위한 부하린과의 경쟁에서, 부하린이 계급투쟁이 시간이 흐를수록 약화할 것이고 ‘자본주의적 요소들’이 사회주의 체제와 융화할 것이라는 위험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나아가 이러한 견해는 당이 자본주의 적들에 맞서는 방어 체제를 느슨하게 하도록 만들고, 그 결과 적들이 소비에트 체제에 침투하여 내부에서부터 체제를 전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로 나아감에 따라 부르주아의 저항은 반드시 강화되며, 그래서 “착취자들의 반대를 뿌리 뽑고 분쇄할”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단언했다. 저자는 이 대목이 이후 대숙청에서 억압을 합리화하는 주장의 전조라고 강조한다.
파이지스가 보기에 반 신경제정책 운동은 스탈린 혁명전쟁의 전초전이었다. 수천 명의 네프만(네프로 재산을 모은 신자본가)이 투옥되거나 집에서 쫓겨났다. 1928년 말까지 40만 개의 자영업체 중 절반 이상이 세금 때문에 사라졌다. 리셴치(시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로 전락한 수많은 네프만과 그 가족들은 곤궁한 처지에 내몰렸다. 그들에게는 배급표가 지급되지 않았고, 결국 얼마 남지 않은 개인 상점에서 가격이 엄청나게 솟은 식품을 살 수밖에 없었다. 또 국영 주택에서 쫓겨났고, 자녀들은 학교와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3. 공업화를 위한 농촌의 희생: 스탈린 혁명
공업화와 농업집단화로 대표되는 스탈린 혁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는 네프에 대한 평가와 함께 소련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논쟁적인 쟁점 중 하나다. 스탈린은 레닌의 진정한 계승자인가, 아니면 혁명의 배반자인가? 소련 내부에서의 논쟁을 먼저 살펴보자. 1980년대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의 집단화 정책을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네프를 시행한 레닌의 결정에 자신의 급진적 개혁을 비유했다. 하지만 당 보수파는 스탈린에 대한 공격을 혁명 이후 소련이 물려받은 유산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했다. 결국 정치국 내 진보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으로 혁명 이후 역사 서술에 대해 이견이 발생했고, 급기야 1988년 고등학교 역사 시험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구에서도 스탈린 혁명에 대한 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됐다. 미국 정치학자 제리 호크는 1937~1938년의 대숙청을 제외하면, 스탈린은 레닌이 원하는 일을 했다고 규정했다. 모셰 르윈은 내전 이후 전자본주의적 양식으로 되돌아간 농촌은 사회주의 경제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레닌이나 스탈린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즉, 호크와 르윈은 스탈린이 레닌을 계승했다고 보았다. 반면 캐서린 메리 데일은 스탈린 혁명의 기원을 레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겪은 곤경에서 찾았다. 세상을 반동과 진보라는 흑백논리의 충돌로 봤던 대중들이, 일자리가 없었던 시기에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약속했던 공업화를 열렬히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근간이 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스탈린 시대에 들어 혁명이 굴절되었다는 견해에 따라 농업집단화를 비판한다. 즉, 농촌의 해체, 그리고 쿨라크에 대한 탄압 과정에서 드러나는 폭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쿨라크로 낙인찍힌 유능한 농민들에 대한 탄압이 소련 경제에 큰 타격을 줬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저자는 농업집단화를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기반이 되었던 세력에 대한 분석을 덧붙인다.
농업집단화는 농촌의 생활방식을 철저히 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대다수 농민은 몇백 년 동안 지켜온 생활방식을 포기하는 것을 주저했다. 농민을 설득하지 못한 활동가들은 폭력적인 조치를 동원하기 시작했고, 스탈린이 ‘계급으로서 쿨라크 청산’을 요구한 1929년 12월부터 농민들을 집단농장으로 몰아넣는 운동은 전쟁의 형태를 띠었다. 지역 민병대, 특별 군대, 오게페우 부대가 동원되어 집단농장을 조직했다. 이들은 “목표에 미치지 못하는 것보다 목표를 초과하는 것이 더 낫다”, “지나친 행위를 했다고 비난받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기억하시오. 그러나 만일 목표에 미치지 못한다면, 조심하시오!”와 같은 압박을 했다. 1930년의 첫 두 달 동안 소련 농민의 절반인 약 6천만 명이 집단농장으로 내몰렸고, 집단화에 반대 목소리를 낸 농민은 쿨라크로 분류되어 집과 마을에서 쫓겨났다.
스탈린은 집단농장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쿨라크에 맞선 전쟁’을 활용했다. 스탈린의 쿨라크 박해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집단화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제거하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집단화를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농민들이 집단농장에 가입하도록 추동하기 위함이었다. 쿨라크는 정의상 고용 노동을 사용하는 농촌자본가였으나, 1929년 이후 실제로 쿨라크로 몰려서 억압당한 상당수의 사람은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저자는 네프 시기 농민이 자신의 노동으로 부자가 되는 것은 허용됐지만, 고용 노동 사용은 통제됐으며, 농민에게 부과하는 세금이 늘어난 1927년 이후에는 부유한 농민이 사유재산의 상당 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농촌자본가로 이루어진 ‘쿨라크 계급’이라는 개념은 환상에 불과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허구적인’ 쿨라크 말살은 소련 경제에 재앙을 가져왔다. 쿨라크라는 명목으로 탄압받은 이들은 보통 마을에서 가장 근면한 농민들이었다. 쿨라크를 박해하면서 이들의 노동 윤리와 전문 기술은 사라졌고, 결국 소련 농업 부문은 출구 없는 사양길로 들어서게 된다. 스탈린의 쿨라크 박해는 경제적 고려라기보다 사실상 농촌 집단화에 대한 잠재적 저항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였다. 탈쿨라크화 운동이 최고조에 올랐던 1930~1931년에 총 170~180만 명의 쿨라크와 그 가족들이 시베리아와 같은 소련의 오지로 추방됐다.
그렇다면 농민들은 쿨라크 박해에 저항했는가? 놀랍게도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마을 연대라는 러시아의 강력한 역사적 전통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는 특히 이례적이었다. 물론 거부 반응을 보인 지역도 있었으나, 농민 대다수는 이웃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실종을 보며 공포에 사로잡혀 소극적인 체념으로 반응했다. 농민들은 때로는 마을에서 누가 쿨라크로 없어져야 하는지를 회의를 통해, 혹은 제비뽑기를 통해 직접 결정했으며, 마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나 외따로 사는 농부, 과부, 노인과 같은 약자들이 그 대상이 되기 쉬웠다.
쿨라크 박해에 앞장섰던 자들의 동기는 무엇이었나? 일명 ‘집단화주의자’ 대다수는 징집되었던 병사와 노동자였고, 이들은 농업집단화를 지지하며 스탈린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이들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기를 갈망했으며, 쿨라크를 인민의 적으로 묘사한 선전을 통해 쿨라크를 향한 증오를 주입받았다. 몇몇은 공산주의적 열정에 휩싸인 자들이기도 했다. 이들은 5개년 계획의 선전이 불러일으킨 낭만적 열의에 고무되어, 볼셰비키와 함께 인간의 의지만으로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새로운 사회의 창조를 위해서는 구사회 세력과 치르는 격렬한 투쟁이 필요했다. 이런 식으로 집단화주의자들은 쿨라크를 향한 폭력과 자신들의 유토피아적 믿음을 결합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따라서 이들이 단순히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거나, “명령을 따르고 있었을” 뿐이었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그들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으며 자기 행동을 합리화했다.
대부분의 농민은 쿨라크 박해는 묵인했지만 농업집단화에는 저항했다. 경찰에 따르면, 1929~1930년에 44,779건의 ‘심각한 소요’가 있었고 볼셰비키 농촌 활동가들이 공격받았다. 농민 시위와 폭동, 기관 습격, 방화와 함께, 집단농장 재산을 공격하고 교회를 폐쇄한 조치에 항의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했다. 하지만 소비에트 체제는 농민들의 저항을 분쇄할 만큼 강력했다. 무력한 농민들은 집단농장의 징발을 막기 위해 가축을 도살하는 식으로 약자의 저항을 이어갔다.
농촌이 황폐해지자 스탈린은 집단화 운동의 일시적 중단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1930년 3월부터 6월 사이에 집단농장에 가입한 농가의 비율이 58%에서 24%로 급격히 감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들이 집단농장을 떠나는 것은 어려웠으며, 사유재산과 농기구, 가축을 되찾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6개월의 불안정한 휴전 이후, 9월부터 스탈린은 집단화의 두 번째 물결을 개시했다. 스탈린은 1931년 말까지 농가의 최소 80%를 집단화하고 쿨라크들을 절멸시킬 것을 공언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4. 대숙청: 극단적 형태의 폭력
이와 같은 극단적 폭력의 기원에 대한 논의 역시 쟁점적이다. 스탈린 전기작가인 로버트 터커는 대숙청의 원인을 스탈린 개인의 심성과 개성에서 찾는다. 신경증에서 비롯된 편집증은 스탈린에게 자신이 레닌과 같은 위상을 갖는 혁명적 영웅임을 입증할 것을 강요했다. 스탈린은 진보를 가로막는 반역 분자인 고참 볼셰비키로부터 인민을 구원하는 영웅으로 자신을 상상했다는 것이다. 엘렌느 까레르 당꼬스는 거의 10세기 동안 지속했던, 폭력에 의존하고자 하는 러시아 정치 체제의 경향이 스탈린에게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았다. 혁명 발생 이후부터 이어진 테러가 스탈린에 이르러 법과 테러의 결합으로 죽음의 차원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와 정반대로 아치 게티는 소련 정부는 스탈린 하에서조차도 전체주의적이지 않았으며, 스탈린은 너무나 바빠서 숙청에 사사건건 관여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았다. 폭력은 오히려 당과 국가 기구의 하급 수준에서 일어난, “혼란에 대한” 급진적이고 “심지어 히스테리적이기까지 한 대응”이라고 보았다. 돈 라우니는 숙청이 이뤄지기 직전까지 자신의 기대만큼 상향 이동을 하지 못한 소련 사회의 비 엘리트층이, 자신들의 승진을 막는 상급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행동하며 벌어진 비극으로 보았다. 파이지스는 이러한 관점들 중에서 몇몇 측면을 수용하고 있다.
우선 파이지스는 대숙청이 집중되었던 시기에 대해서 주목한다. 일각에선 대숙청의 기원을 1934년 12월에 발생한 레닌그라드 지구당 서기장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까지 거슬러 올라가 찾지만, 이러한 주장은 키로프 암살과 대숙청 사이인 1935년과 1936년의 고요한 소강상태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저자는 대숙청이 내부 위협에 대한 스탈린의 두려움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관점도 기각한다. 그 당시 엔카베데의 보고는 내부 위협이 다른 시기보다 1937년에 특별히 더 심각했음을 시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왜 대숙청이 고참 볼셰비키를 대상으로 한 전시재판, 정치 엘리트 숙청, 도시에서의 대규모 체포, 쿨라크 작전, 민족 작전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동시에 일어났는지에 주목한다. 이는 각각의 현상을 그 자체로 독자적인 것으로서 설명함으로써 대숙청을 별개의 사건으로 이해하는 시각에 대한 저자의 비판을 함의한다. 저자는 대숙청이 다양한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는 하나의 통일된 작전이라고 판단한다. 즉 대숙청이 통제받지 않았거나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며, 스탈린 시기에 언제든 발생할 수 있었던 대혼란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았다. 더불어 돈 라우니가 묘사한 것처럼, 저자는 대숙청에 대한 시민들의 침묵과 방조와 더 나아가 적극적인 고발이 그 광기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그 결과는 수많은 죽음, 체포, 그리고 고발을 두려워하면서 나타난 인간관계의 단절이었다.
파이지스는 대숙청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 다가올 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두려움과 소련을 위협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스탈린의 인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1937년 스탈린은 소련이 유럽에서는 파시즘 국가들,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기 바로 직전의 상황에 놓였다고 확신했다. 스탈린은 파시스트들과의 전쟁을 벌이기 전에 ‘파시스트 첩자와 적’이라는 제5열만이 아니라, 모든 잠재적 반대자들을 분쇄하기 위한 정치적 억압이 소련에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로버트 터커처럼 대숙청의 원인을 스탈린의 개인적 결함으로 환원하지는 않지만, 파이지스 역시 적에 대한 편집증적 두려움이라는 스탈린 특유의 성격이 대숙청에 영향을 끼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이러한 두려움이 1932년 부인 나데즈다의 자살, 그리고 형제처럼 사랑한다고 주장한 키로프의 암살로 더욱 심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은 위험을 피하고자 했다”며 죽을 때까지 이러한 입장을 변호했다. 대숙청은 지도부가 전쟁 시기에 위험 요소인 당 내부의 동요자, 출세주의자, 숨은 적을 찾아내는 수단이었다. 숙청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고 불공정한 체포 역시 많았음을 인정하지만, 내부 충돌을 허용했으면 전쟁에서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났을 것이고, 아마도 패배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카가노비치 역시 몰로토프와 비슷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자와 동요자들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5.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소비에트 체제와는 거리가 먼 요인들
파이지스에 따르면, 전시의 국민적 단합이라는 소비에트 신화와는 반대로, 소련 사회는 전쟁 동안 그 어떤 시기보다 분절되어 있었다. 소비에트 국가가 일부 소수민족들을 희생양으로 추방함에 따라 인종 분리가 악화되었으며, 사회 전반에 잠재되어 있던 반유대주의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그런데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 요인은 일반 병사들의 활약이었다. 병사들을 싸우게 한 것은 두려움이나 영웅심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소비에트 모국이라는 추상적 관념보다는 특정 지역 사회, 현실 속 인간관계의 방어를 위해 더더욱 적극적으로 싸우고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1941년 4백만 명의 사람들이 국민 의용군에 자원했다. 사실상 국민적 단합보다는 병사들 간의 동지애가 전쟁의 승리요인 중 하나였다. 병사들은 신뢰받는 동지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에 충성심을 느끼면서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들의 동지애는 위급한 상황에 직면하면서 발전했고, 이러한 신뢰는 개개인을 생존할 수 있게 하기도 했다. 퇴역 군인들은 동료 병사들로 이루어진 무리 속에서 전쟁 전에는 자신들의 삶에 없었던 ‘진정한’ 가족을 발견한 것처럼 회고하기도 한다.
일반 병사들의 활약 외에도, 소련이 군사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전쟁의 첫 1년이 지난 후 소련군 내부의 권위 구조가 변한 것이었다. 스탈린은 자신과 당의 개입이 군 사령부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며, 지휘관들의 자율에 맡기는 게 가장 좋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8월 주코프가 최고사령관 대리로 임명됐으며, 전쟁 수행 정책의 전략적 계획과 운용은 점차 국가방위위원회의 정치인들에서 참모본부로 이전됐다. 정치장교를 비롯한 정치 지도위원들의 군사적 결정 권한은 급격히 축소됐다. 당의 통제에서 벗어난 군 사령부는 안정된 군 전문가 집단을 창출하며 소련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전쟁 수행에서 100만 명이 넘는 징용 노동자들의 존재 역시 중요했다. 이들은 경비병의 감시를 받으며 굴라크 죄수와 똑같은 노동 임무에 징용됐다. 이들 중 대다수는 소비에트 체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소수민족이었고, 소비에트 체제의 적으로 탄압받던 쿨라크도 포함되었다. 굴라크 노동은 전시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굴라크는 소련 탄약의 15%와 군복, 군 식량의 상당 부분을 생산했다. 50만 명의 죄수가 전선에 동원됨에 따라 1943년까지 감소했던 수용소 인구는, 1943년 말부터 막대한 인력을 동원하기 위한 대량 체포가 이뤄지면서 다시 급속히 증가했다.6. 전쟁 시기 해빙, 그리고 다시 스탈린주의로
하지만 자유가 확대될 것이라는 희망은 스탈린의 수많은 전후 정책하에서 무너졌다. 그 원인에 대해서 쉴라 피츠패트릭은 1945년부터 1953년까지 국가 통제를 다시 부과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당의 정치 문화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파이지스도 전쟁 기간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사람들 사이에 유대가 형성됐고, 유럽이나 미국과 교류하는 등 소련 내에 잠시나마 해빙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분명한 사실임을 짚는다. 하지만 전후 스탈린이 정치 개혁을 거부하고, 긴축적인 계획경제를 추진하며 강제 노동을 강화하면서 통제가 복귀했다는 사실 역시 짚는다. 저자는 피츠패트릭이 언급한 당의 정치 문화를 체현한 새로운 중간 계급의 존재를 지적한다. 이들은 스탈린 시기에 출세를 위해 적어도 겉으로는 당에 복무한 전문가들로, 스탈린이 전후에 개혁을 거부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반이었다.
전쟁 시기에는 이전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표현의 자유가 생겼다. 사람들은 감정과 의견을 표출했고, 정치적 토론과 체제에 대한 비판까지 이루어졌다. 군대의 병사 집단, 그리고 식품을 사려고 늘어선 줄에서 비판과 토론이 즉석에서 벌어지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신뢰와 상호작용이 확대됨에 따라 시민 정신과 국민 의식이 부흥했다. 파이지스는 이러한 변화의 핵심에 가치관의 근본적 변화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고, 모든 시민적 의무는 국가의 명령으로 수행됐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는 동안 시민적 의무는 나라의 방어라는 실질적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는 국가의 통제와는 무관하게 사람들을 단합시켰으며 새로운 공적 태도를 낳았다.
전쟁은 다른 방식으로 자극을 주기도 했다. 전쟁 막바지에 소련군 상당수가 유럽에 들어가 다른 생활방식에 노출되면서 자신과 사회를 되돌아보는 경향이 널리 퍼졌다. 콘스탄틴 시모노프는 “유럽의 생활 수준과 우리 소련의 생활 수준 사이에 가로놓인 격차는 감정적, 심리적 충격을 안겨주었고, 수백만 병사들의 관점을 바꾸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서구 세계를 접한 병사들은 전쟁이 끝나면 집단농장이 소멸할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새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또 소련이 영국, 미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소련 사회 내부도 서구의 영향력에 노출됐다. 미국과 맺은 무기 대여 조약을 계기로 할리우드 영화, 서구의 서적과 물품이 소련에 유입됐고, 수많은 사람이 소련의 거짓 선전이 아닌 서구의 실제 모습을 알게 됐다. 모스크바에는 레스토랑과 상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전쟁이 끝나면 생활이 좀 더 편해지고, 소련이 서구에 문호를 열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부채질했다. 심지어 경제 개혁조차 토론의 주제가 됐으며, 일부 경제학자는 전쟁 후 생산을 촉진하기 위해 시장으로 복귀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스탈린은 모든 정치 개혁 사상을 거부했다. 1946년 2월 9일, 전후 시대에 들어와 처음 한 중요한 연설에서 스탈린은 소비에트 체제가 느슨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스탈린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조짐이 보이면 강력히 타격하라고 부하들에게 주문했다. 전쟁 이후 군대와 당 지도부에서 ‘자유주의 개혁가’, 혹은 1945년 승리로 큰 인기를 누리게 된 최고위 지도자들을 잘라내는 숙청도 개시됐다. 이 과정에서 승장인 주코프 원수가 우랄 지역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전후의 정치적 탄압은 긴축적인 계획경제로 복귀하는 흐름과도 연계됐다. 국제적으로 긴장이 높은 상황에서 1946년 새로운 5개년 계획이 도입됐다. 하지만 생산 목표는 여전히 비현실적이었고, 전후 경제에서 강제 노동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다.
전후 스탈린주의의 복귀에는 새로운 유형의 중간 계급이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엔지니어, 행정가, 경영자 계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스탈린 체제가 의식적으로 추진한 정책(고등교육 제도의 확대)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은 교육을 더 많이 받았고, 덜 이데올로기적이었으며, 더 안정적이었다. 또한 전문적 능력을 갖췄기 때문에 높은 직책을 보장받았고, 계급적, 이데올로기적 비순수성 때문에 강등당할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스탈린은 전후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압력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이들의 지지가 필요했고, 이들의 충성을 획득하기 위해 안정되고 급료가 높은 직업, 개인 아파트와 같은 부르주아적 열망을 충족시켜줬다.
이들은 출세하기 위해서 적어도 겉으로는 체제의 요구에 순응했다. 당시 가장 흔한 소련의 관리 유형은 공산주의 신봉자나 열성분자가 아니라, 당이나 당의 목표를 불신하더라도 당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하는 출세주의자였다. 일부는 성공, 혹은 사회적 지위의 유지를 위해 과거의 이력을 숨기는 선택을 했다. 이와 달리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출세를 위해 엔카베데의 정보원이 되기도 했다.7. 스탈린 사후에도 여전히 속삭이는 사회: 소련 시민들은 왜 침묵했는가?
그러나 스탈린 체제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전히 침묵했다. 흐루쇼프 시기의 해빙이 지속될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체포될 수도 있다는 공포는 스탈린 사망 이후에도 사람들을 수십 년 동안 침묵시킬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실제로 해빙기는 짧았고 제한적이었다. 또 흐루쇼프 시기 내내 정권은 소비에트 체제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스탈린 시기 억압에 대한 어떤 논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1960년대 초 해빙이 절정기였을 때조차도, 스탈린 시기 수백만 명이 죽거나 억압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공식적 인정도, 정부의 사과도 없었다. 마지못해 복권해준 희생자들에게 적절한 배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은 불신과 적대의 대상이 됐다.
시민들의 예상처럼, 1964년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 시대가 열리면서 해빙 분위기는 돌연 끝났고 다시 검열이 강화됐다. 승전 20주년 기념으로 위대한 전쟁 지도자로서 스탈린의 명성이 되살아났고, 정권은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며 스탈린 시기 억압에 대한 논의를 가로막았다. 다시 체포될 수도 있다는 위협은 스탈린 시대의 희생자들을 1956년 이후 수십 년 동안 더욱 무겁게 침묵시킬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공포 정치는 종결됐지만, KGB(국가보안위원회)는 여전히 엄청난 범위의 가혹한 처벌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석방된 죄수였던 지나이다 부슈예바는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내 끊임없는 걱정과 다시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1981년에 노동수용소 수감 기록이 없는 새 여권을 받은 뒤에야 두려움이 가시기 시작했지만, 그녀의 딸에 따르면 “일생에 걸쳐, 세상을 하직하는 바로 그날까지도 공포 체제가 부활할지 모른다고 무서워”했다고 한다. 마리야 부트케비치는 오늘날(2004년)까지도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어딘가로 멀리 보내질까 봐 계속 불안에 떨었다. 스베틀라나 브론시테인은 노동수용소가 등장하는 악몽을 계속 꾸며, 서류를 작성해서 미국 대사관 앞에 줄을 설 기력만 있다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겠다고 말했다.8. 나가며
하지만 전쟁 시기에 스탈린주의의 공백이 일제히 드러났다. 전시에 소비에트 이상을 중심으로 한 국민적 단합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당의 통제하에 있던 소련군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를 대체하여 소련을 승리로 이끈 것은 스탈린 체제가 의식적으로 부정해왔던 개인 간의 관계들이었다. 자기 집과 지역 사회, 그리고 인간관계를 지키기 위한 일반 병사들의 활약이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기간 해빙의 시기가 나타나며 시민들이 사회 변화에 대한 기대를 품기도 했지만, 스탈린이 개혁의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또다시 사회는 전쟁 이전의 억압적 체제로 회귀했다. 여기에는 체제의 존속과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새로운 중간 계급의 등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자는 특히 대숙청에 주목한다. 대숙청이 보여주는 충격적인 수치를 보면, 왜 소련 시민은 이러한 극단적 폭력을 경험하면서도 스탈린의 통치에 순응했는지,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뒤에도 입을 열지 못했는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스탈린 혁명이 본격화되던 농업 집단화와 제1차 5개년 계획 시기에는 사회주의 경제 건설이라는 대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 중심으로 계획이 제출되고 실행됐다. 이 과정에서 소련 시민은 주체적인 위치에 있지 못했다. 누군가는 사회주의 혁명을 ‘현대화’로 이해하며 스탈린 혁명의 충실한 지지 기반이 됐고, 누군가는 자유와 권리를 억압당하고 체제에 순응하기를 요구받았다. ‘혁명의 완수’, ‘혁명 조국의 수호’가 절대적인 가치로 여겨졌으며, 이를 위해서는 이견의 배제, ‘인민의 적’에 대한 억압이 용인됐다. 이러한 배제와 억압을 합리화하는 과정은 결국 스탈린 시기 억압적 체제, 나아가 극단적인 폭력의 동원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가 바로 ‘속삭이는 사회’였다. ●
또한 2021년 말에 발표한 경제전망에서도 이렇게 언급했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또 다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인 굴리에모 카르케디와의 공동연구를 바탕으로, 미국이 향후 수년간 3% 이상의 인플레이션과 2% 미만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생산성이 하락 중이고 유동성이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2022년은 세계 각국이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 빠지지 않게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조정할 수 있을지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시기다.”
이제는 2023년 경제전망에서, 이미 폭발한 인플레이션의 충격과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이 가하는 경기침체 위험을 살펴보아야 할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다. 2023년에 특히 주목해야 할 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이 강력한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유지할 수 있을까. 연준의 금리인상, 양적 긴축이 단행된 후, 자금경색과 금융 불안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연준의 결단이 지속될 것인가.
둘째, 중국의 부동산 시장 악화, 소비 위축이 정부의 적극적인 부동산 대책, 소비 진작책으로 역전될 수 있을까. 정부가 부동산 시장을 구제하려는 구제금융 정책은 부동산 거품을 키우는 결과를 낳지 않을 것인가.
셋째, 대외경제 상황에 취약한 한국경제는 세계적 통화긴축, 경기침체를 버텨낼 수 있을까. 수출 부진과 투자 부진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부동산 시장의 하방 압력은 경제 전반에 걸쳐 어떤 파급효과를 낼 것인가.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핵심 문제들을 살펴보고, 이러한 문제가 얼마간 관리된다고 하더라도 장기적인 저성장, 이른바 ‘장기침체’라는 본질적 문제가 세계경제와 한국경제의 기저에 깔려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도록 하겠다.1. 2023년 세계경제 전망
1) 국가별 전망
먼저, 선진국들을 살펴보면, 경기침체가 곧 닥칠 듯하다(그림1). 미국의 2022년 GDP는 2021년보다 1.7% 상회했으나, 2023년에는 2022년보다 0.5% 하락할 전망이다. 유로지역 경제는 2023년에 수축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는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제한으로 타격을 입었다. 영국의 경우, 에너지 위기, 고인플레이션, 기타 요인이 경제를 짓누르며, 최근 데이터는 이미 경기침체가 진행되고 있다고 시사한다. 일본의 경우, 인플레이션이 온건하고 따라서 통화긴축이 별로 필요 없지만, 다른 나라들의 경기감속 때문에 후퇴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행이 11월 24일 발표한 「경제전망」에서는 2023년 미국의 GDP 성장률을 0.3%, 유로존 –0.2%, 일본 1.3%, 중국 4.5%로 내다보았다.)
신흥시장국도 2023년에 대부분 부진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 경제부양책이 코로나 폐쇄에 따른 상당한 장애와 부동산 부문의 하강을 상쇄할 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 결과 경제성장이 계속해서 정부 목표에 밑돌 가능성이 크다. 인도는 팬더믹 취약성에서 회복하기 시작했으나, 올해의 성과가 통화긴축과 외부역풍으로 약화될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상당한 경제적 파급효과와 제재로 인해 계속 고통을 받을 것이다. 브라질의 경제적 성과는 정치적 교착상태로 인해 손상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룰라 후보에게 1.8%p 격차로 패배한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결과에 불복하고 지지자들이 대선 후 3주 이상 폭력을 동반하는 강력한 시위를 전개하고 있다. (룰라 당선인은 친시장 성향의 부통령 후보와 출마했고, 집권 당시에도 재정안정과 아마존 환경보호에 긍정적인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에 그의 당선이 경제적 성과를 불러올 것이라 기대하는 흐름도 있다. 그러나 브라질의 정치적 양극화가 워낙 격렬하므로 정책집행에서 큰 갈등과 충돌을 예상할 수 있다.)2) 미국의 인플레이션 전망
미국의 핵심 이슈는 거의 1년에 걸친 경제성장 감속이 주목할 만한 인플레이션 하락을 낳지 못했다는 점이다(그림2). 연준은 정책금리를 올렸고, 금융긴축이 이어졌다. 주택수요가 하락했고, 소비자 지출도 감소했다. 그러나 미국 노동시장은 여전히 타이트하고, 임금성장은 팬더믹 이전에 비해 여전히 빠르다. 나아가 노동공급이 증대하여 노동시장이 느슨해질 것이라는 전망도 없어 보인다.
가장 최근의 상황을 보면, 2022년 10월 중 단기(1년) 기대인플레이션이 7개월 만에 상승세로 돌아서고, 장기(5년) 기대인플레이션도 4개월 만에 다시 상승하였다. 이를 반영하여, 한국은행의 보고서, 「최근의 미국경제 상황과 평가」(2022.11.)는 “적극적인 통화긴축에도 불구하고 서비스관련 가격은 오히려 상승세가 확대되고 기대 인플레이션까지 오르는 등 높은 인플레이션 지속 가능성이 커진다”고 평가했다. 현재 조건을 볼 때, 연준의 금리인상 속도와 폭이 온건해질 것이라고 예상하기가 쉽지 않다.
이에 따라 미국경제의 연착륙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미국 실업률은 2022년 8월 3.7%에서 상승하여, 내년에는 5.5%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다만 이렇게 실업률이 올라갈 경우, 코어 개인소비지출(PCE) 인플레이션은 2022년 4분기 동안 4.6%에서 2023년 4분기 동안 3.6%로 완만해질 가능성이 언급되기도 한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견해에 따르면, 경기침체가 불가피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경기침체는 역사적 기준에서 보면 온건한 편에 속한다. 모든 소득분포 수준에서 (즉 소득이 높건 낮건 간에) 개별 가계의 자산이 팬더믹 이전 수준보다 높고, 기업 이윤도 역사적 기록 중에서 높은 축에 속하기 때문에, 가계와 기업이 이러한 수준의 경기침체는 견딜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반면 미국의 전 재무장관 래리 서머스는 이미 2022년 6월 21일 시점에 훨씬 더 어두운 예측을 한 바 있었다. 그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면 실업률이 5년간 5%를 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2년간 7.5%의 실업률, 5년간 6%의 실업률, 아니면 1년간 10%의 실업률을 겪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머스는 10월 31일에 발표한 글, 「인플레이션 억제가 최우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멈출 수 없다」는 글에서도 미국의 거시경제가 처한 심각성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이 지난 75년을 통틀어 가장 복잡한 거시경제적 도전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물론 현재는 실업률이 낮고, 그래서 2007~9년 금융위기나 1970년대 인플레이션만큼 암울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서로 얽혀있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코어 인플레이션율이 여전히 7%에 가까우며 하락하지 않고 있다. 둘째, 인플레이션의 역기능과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의 역기능이 결합함으로써 2023년에 경기침체가 개시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최근 연준은 실업률이 4.4%를 넘지 않고서도 인플레이션이 2% 목표치로 내려올 수 있다고 암시했는데, 이는 타당성이 없다. 셋째, 연준은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수준으로 이자율을 올렸다. 시장은 충격을 받아 휘청거렸는데, 이는 국채시장을 혼란에 빠뜨리고 다른 시장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줄 가능성이 있는 수준이었다. 넷째, 미국의 이자율이 오르고 기록적인 달러 강세가 나타나자 세계경제 모든 곳에서 어려움이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코로나 상황이 완전히 종식된 것도 아니며, 이번 겨울에 발병이 늘어날 수 있다. 수백만 명의 노동자가 장기적인 코로나 상황으로 고용에서 철수한 것으로 추산되며, 나아가 코로나의 영향으로 미국의 생산성 성장이 둔화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 8월 10일 보도에 따르면 비농업부문에서 시간당 산출로 측정된 2분기 노동생산성은 전년 대비 2.5% 하락했다. 반면 단위노동비용은 급상승하여, 강한 임금압박이 지속되고 있다고 시사했다.)
평상시라면 이러한 문제 각각이 매우 중요한 의제로 다뤄졌을 것이다. 서머스는 이러한 문제들이 서로 얽혀있는 복잡한 상황에서 정책입안자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질문한다. 그는 정책목표는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일자리를 원하는 노동자가 최대한 많이 고용되고, 가능한 한 높은 소득을 얻는 것이다. 나머지는 오로지 고용과 소득이라는 목표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고려해야 한다. 그는 1980년대 초반, 연준 의장 폴 볼커가 심각한 경기침체라는 비용을 무릅쓰고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구사한 것도, 그가 노동자의 고용과 소득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인플레이션 억제가 늦어질수록 고통이 가중될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원칙이 현 상황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업의 구인공고(job opening)가 최대 수준에 도달하고 노동부족이 심각해 노동자의 협상력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노동자의 실질소득은 상당히 감소했다. 인플레이션이 진정되지 않으면, 노동자의 구매력이 증가하기 어렵다.
따라서 서머스는 연준이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한다. 연준 의장 파월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통화정책을 충분히 긴축적으로 끌고 가겠다고 약속한 바 있는데, 사람들이 연준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신뢰할수록, 인플레이션 억제가 성공할 가능성도 커지고, 고통도 감소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재 바이든 행정부가 연준에게 이자율을 높게 올리지 말라고 정치적 압력을 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매우 유익하다.
그런데, (폴 크루그먼처럼) 인플레이션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던 논자들 중에는 연준의 통화정책 긴축이 과잉될 경우, 과도한 경기침체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목소리를 내는 경우도 있다. 물론 민간주택 부문 데이터나 여타 일부 지표는 2023년에 인플레이션이 진정될 것이라고 암시하기도 하지만 아직 확신을 줄 정도는 아니다. 혹자는 기대 인플레이션 상승이 억제되고 있으므로 연준이 좀 느긋해져도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역이다. 즉 서머스는 연준이 예상보다 훨씬 더 공격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기대 인플레이션 상승이 억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통화정책 긴축이 당연히 독성효과를 동반하므로 여러 정책대응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첫째, 미국 국채시장이나 여타 시장의 위기가 나타나기 전에 정책당국이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 은행 부문에 대한 규제가 강화된 데 비해 비은행 금융부문에 대한 규제는 미흡한 측면이 많기 때문에, 다음번 위기는 비은행 금융부문에서 출현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적절한 규제조치가 필요하다. 둘째, 1980년대나 2009년 금융위기 당시 나타난 라틴아메리카의 부채위기와 같은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 따라서 신흥시장 국가들을 위한 채무 구조조정, 금융지원책을 찾아야 한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좀 더 살펴보자. 3) 연준의 양적 긴축 이후: 금융불안과 기업의 자금경색
2022년 5월 연준의 연방공개시장위원회는 0.5%p의 금리인상(빅 스텝)을 단행하면서, 동시에 양적 긴축(quantative tightening, QT)을 실시한다고 공식화했다. 여기서 양적 긴축은 양적 완화(quantative easing, QE, 수량 완화)의 반대라고 볼 수 있다. 양적 완화 정책은 연준이 시장에서 국채나 주택저당증권(MBS)을 매입함으로써, 긴급하게 유동성을 주입해 채권금리를 낮추고 금융시장의 안정을 도모하는 정책을 뜻한다. 반대로 양적 긴축은 보유자산의 재투자 중단이나 보유자산의 매각을 통해 연준의 자산과 부채(즉 대차대조표 규모)를 줄이는 정책을 뜻한다. 이럴 경우 시중의 유동성을 흡수하고, 채권의 금리를 높인다.
연준이 5월에 발표한 방식은 보유자산의 재투자 중단이었다. 즉 만기가 도래하는 국채나 MBS를 만기정산을 하는 방식으로 보유채권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연준은 줄여나가는 양을 국채의 경우 월 300억 달러에서 시작하여 3개월 후 600억 달러로 하고, MBS의 경우 175억 달러에서 시작하여 3개월 후 350억 달러로 한다고 발표했다. 이럴 때 국채의 발행자인 재무부는 재정균형을 이루고자 한다면 매달 300억 달러(9월 후는 600억 달러)의 국채를 새로 발행해 연준이 아닌 다른 주체에게 팔아야 한다.
여기에다가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야심 찬 재정지출 프로그램에 따라 매년 1조 달러의 재정적자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미국을 제외한 나라들이 달러 강세 기조에 따라 자국 통화 약세 흐름을 방어하기 위해 환율 개입에 나설 때, 각국 중앙은행은 미국 국채를 팔아 달러를 조달해야 한다.
따라서 이처럼 어마어마한 미국 국채와, 그에 덧붙여 MBS를 미국 민간과 해외부문이 어떻게 흡수할 것이냐는 문제가 떠오른다. 민간과 해외부문이 미국 국채물량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유동성이 증발할 경우, 세계 최고의 안전자산으로 평가받는 미국 국채 가격이 추락하고 시장이 마비되면서 금융시장 전체가 불안에 빠질 위험이 있다.
또한 세계적 수준에서 달러 유동성이 위축되면서 기업의 자금경색이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할 수 있다. 기업이 채권을 발행해서 직접 자금을 조달하는 여건도 악화하고, 은행의 대출기준이 강화되면서 은행대출이라는 간접 조달 경로로 좁아지고 있다.
국제금융센터가 발표한 「주요국의 기업부도 증가와 전망」(2022.11.22.)에 따르면, 주요국의 기업부도 건수는 코로나 발생 이전보다 대체로 낮은 수준이지만, 올해 2분기 이후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점차 증가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이어진 저금리 여건에서 존속할 수 있었던 한계기업, 중소기업이 재정, 통화정책의 동시적 긴축과 경기둔화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 있다. 또한 회사채의 디폴트가 증가할 경우, 채권시장의 불안이 확대될 것이다.4) 미국의 통화정책과 근린궁핍화
다른 한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모리스 옵스트펠드는 「세계적 조정이 없는 통화정책이 역사적인 세계적 경제둔화라는 위험을 낳는다」(2022.9.12.)에서 미국 통화정책의 국제적 측면을 분석한다. 먼저 그는 1980년대의 반인플레이션 정책이 ‘근린궁핍화’(beggar-thy-neighbor), 즉 이웃국가를 가난하게 하는 효과를 발휘했다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 이자율을 올리면, 한국의 통화는 그에 대비해 가치가 하락한다. 한국의 수출이 미국 통화로 이루어진다면, 한국의 수입물가가 올라갈 것이다. 즉 미국의 통화 긴축은 인플레이션을 무역상대국에 수출함으로써, 근린궁핍화 효과를 냈다는 뜻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미국이 이자율을 올릴 때 다른 나라 중앙은행의 고금리 정책도 고려하여 너무 과도한 수준에 이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달리 말해, 외국의 중앙은행이 이자율을 올리면 그 나라의 유휴수준이 높아지며, 그 나라로부터 수입하는 상품의 가격이 낮아져서 자국의 인플레이션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나라의 모든 중앙은행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즉 고금리 정책으로 가면 다른 나라들의 금리상승 효과를 한층 더 강화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경기침체를 더 심화시킬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기본적으로 타당성이 있으나, 이를 고려한 각국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적정 수준을 계량적으로 도출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 또 한편, 서머스와 같은 논자는 과도한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보다 과소한 정책을 오히려 우려한다는 사실을 볼 때, 중앙은행의 금리 정책에 대한 논란은 불식되지 않을 것이다.5) 중국의 부동산 위기
한국은행은 「경제전망」(11.24)에서 제로코로나 지속, 부동산 시장 침체로 경기부진이 당분간 이어지리라 전망했다. 올해 중국의 (전년동기대비) GDP 성장률은 1/4분기 4.8%, 2/4분기 0.4%, 3/4분기 3.9%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은 내년 전망치를 4.5%로 내놓았다. 그런데 중국 경제의 부진한 실적은 단지 제로코로나 정책과 같은 일시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올해 10월 26일 《월 스트리트 저널》은 중국이 ‘중간소득국가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기고문을 내놓았다.
중진국 함정이란 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 초기에는 ‘후진성의 이점’을 활용하여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보이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증가하여 중진국 수준에 도달하고 나면 이러한 이점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여기서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생산성 상승과 자체적인 기술혁신을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모형을 구축해야 하나, 숱한 개도국이 이에 실패하여 장기간 중진국 수준의 국민소득에 머물게 된다. (중진국 함정은 뒤에서 한국경제를 언급할 때 다시 나온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시진핑 주석의 독주체제, 강압통치가 강화될수록 중국의 장기적 성장전망은 어두워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미 중진국 함정에 접어들고 있는 와중에, 국유기업이 늘어나고 국가자원의 관료적 배분이 확대되면서 비효율과 낭비가 커지고, 혁신역량이 감소한다는 의미다.
중국의 부동산 부문은 이러한 한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베이징의 정책당국이 GDP의 고성장을 설정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인프라 투자와 주거용 부동산 활황 덕분이었다. 지방정부는 토지매각과 부동산 개발회사의 일자리에 큰 덕을 보았다. 개발 붐에 따른 부동산 가격 상승이 GDP의 25% 수준을 뛰어넘고, 가계소득 성장의 75%를 차지하는 것은 불건전하고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상황이 너무 지나쳤기 때문에 탈이 날 수밖에 없었다. 주택가격 폭락으로 가계소득이 줄고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줄었다. 그러면서 소비지출이 줄고, 곤경에 처한 대형 부동산회사가 디폴트에 빠지게 되었다. 주택을 분양받은 사람들은 완공되지도 않은 아파트 대출금 상환을 거부하고 있다. 정부는 소비 진착책을 펴고 부동산회사에 대한 구제금융에 나섰지만, 상황이 빠르게 개선되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이외에도 중국경제가 처한 상황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면서, 중국은 GDP 규모에서나 세계적 생산허브, 수출대국으로서의 위상에서나 여전히 경제대국으로 남겠지만, 중진국 함정에 빠진 채로, 세계적 불안정성을 유발하는 진원지가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지금 당장 위기의 폭발점으로 꼽히고 있는 중국의 부동산 시장 상황을 좀 더 살펴보면, 15위 부동산 개발 업체인 쉬후이는 10월 말 만기였던 4억 달러(약 5,554억 원) 해외 채무 상환에 실패한 뒤 11월 1일 상환 연기를 발표했다. 쉬후이는 정부의 보증을 받았는데도 상환에 실패했다. 11월 8일 쉬후이의 2024년 만기 채권은 시장에서 96센트에 거래되고 있다. 올해 1월만 해도 15달러에 거래됐는데 1년도 안 돼 가격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같은 날 중국에서 가장 큰 부동산 개발사인 비구이위안의 2024년 만기 채권도 1.59달러에 거래돼 지난 1월보다 89% 급락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 중국의 달러 표시 역외채권의 최근 1년간 디폴트율은 5.79%를 기록했다. 작년 12월만 해도 2.42%였지만 이후 급등해 지난 7월부터 4개월 연속 6%를 넘기기도 했다. 문제는 부동산 업체들의 대규모 채무 만기가 계속 도래한다는 점이다. 블룸버그는 올 연말까지 중국 부동산 업계의 국내외 채무 537억 달러(약 74조 3000억 원)에 대한 만기가 도래하고, 내년까지는 최소 2,920억 달러(약 404조 7,000억 원)를 갚아야 할 것으로 본다. 미국 투자사 루미스세일즈는 “중국 부동산 업계의 달러 채권 위기가 심각해져 더는 분석이 불가능한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빚을 상환하기 위해 필요한 수입은 오히려 줄고 있다. 지난 9월 중국의 주거용 부동산 거래량은 9,200만㎡로 전월 대비 12.5% 상승하긴 했지만, 여전히 작년 동기의 66% 수준에 불과하다. 최근 3개년과 비교하면 55% 수준이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달 미완성 상태로 방치되고 있는 주택이 중국 전역에 200만 채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중국 정부는 부동산 경기의 급격한 둔화를 막기 위해 다종다양한 지원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나, 여전히 거대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6) 소결: 강력한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을 지속할 수 있을까
2023년 세계경제 상황을 살펴보았을 때, 초점은 결국 미국의 인플레이션 억제 정책이 금융불안, 기업의 자금경색과 부도 위기로 나타날 조짐이 확대될 경우에도 금리인상 정책을 지속할 수 있느냐는 문제로 모인다.
지난 호 기관지에서 소개했듯이, 루비니 교수는 중앙은행의 금리인상이 경기침체로 이어질 때, 과연 중앙은행이 매파적 결단, 즉 고금리 기조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많은 분석가는 매파적 태도를 유지하리라 예측하지만, 루비니 교수는 중앙은행이 겁을 먹고 오히려 높은 인플레이션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왜 그런가? 세계 GDP에 대비할 때 민간, 공공의 부채수준이 과거보다 훨씬 높다. 1999년 200%에서 2022년 350%로 상승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이자율이 상승하면 대출이 많은 좀비 가계, 기업, 금융기관, 정부는 파산과 지급불능으로 빠질 것이다. (여기서 좀비란 죽었는데 산 것처럼 행동하는 자를 뜻한다. 곧 갚기 어려운 부채로 연명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즉 경기침체와 함께 금융위기의 가능성이 커지면 중앙은행이 매파적 입장을 포기할 공산이 크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공급요인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금리인상이 중단, 역전되면 스테그플레이션이 도래할 것이다. 그런데, 1970년대에는 스테그플레이션이 있었지만 대규모 부채위기는 없었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부채위기가 있었지만, 그 후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 압력이 뒤따랐다.) 따라서 우리는 1970년대식 스테그플레이션과 2008년식 부채위기가 결합할 가능성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즉 금리인상이 중단, 역전되더라도 스테그플레이션이 장기간 이어진다면 부채위기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중앙은행과 정부는 사면초가에 빠질 수 있다.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통화정책을 공격적으로 완화하기도 어렵고, 정부가 부채위기 상황에서 재정수단을 활용하기도 어렵다. 달리 말하면, 부채위기를 우려하여 매파적 입장을 포기한다고 해도, 결국 부채위기를 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2. 저생산성과 부채위기라는 늪에 빠진 세계경제
1) 세계적인 생산성 하락
그런데, 더 본질적인 문제는, 경기침체를 감내해내면 세계경제가 팬더믹 이전 상황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빠른 경제성장으로 진입할 수 있냐는 데 있다. 그러나 코로나 위기가 발생하기 전인 2019년 시점에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아담 포젠과 제로민 제텔마이어는 『저생산성 성장을 직시하자』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지적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속한 사실상 모든 나라는 평균 생산성 증가율이 감소했는데 이는 이전 10년 동안의 평균과 전후 장기 평균에 비해 크게 떨어진 것이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총요소생산성(TFP) 성장의 일시적 호황이 끝난 후 하락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다른 주요 국가에서는 1970년대 초에 시작된 [하락] 추세가 지속됐다.”
세계적인 생산성 하락은 신흥국으로서도 매우 어두운 소식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신흥국과 미국 사이의 1인당 GDP 격차는 좁혀졌지만 이는 대부분 신흥국의 빠른 물적, 인적 자본 축적에 따른 결과였다. 사실 신흥국의 총요소생산성 성장은 미국보다도 느렸다. 신흥국의 생산성 상승은 선진국의 생산성 상승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으며, 아마도 대체로 무역과 관련된 파급효과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선진국의 생산성 상승세가 둔화하면 신흥국은 이미 어려운 상황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신흥국이 생산성 상승을 가속할 수 없다면 선진국의 생활수준을 추격하는 일은 매우 힘들어질 것이다. 2) 저생산성과 재정위기
그런데 생산성 하락은 국가의 부채 문제에도 분명한 영향을 미친다. 부채수준이 높을 때, 노동생산성 성장률의 하락, 인구 고령화, 이자율 상승은 국가채무의 지속 가능성에 심각한 위협을 가한다. 노동생산성 성장 하락이 정부 채무에 영향을 끼치는 각 요소, 즉 기초적자, 이자율-성장률 격차, 환율, 우발부채에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 살펴보자.
먼저 생산성 성장률의 하락은 정부의 기초적자를 늘릴 개연성이 매우 높다. 생산성 성장의 감속은 소득 성장의 감속으로 이어지고, 따라서 정부지출이 필요한 사람들의 수를 늘릴 것이므로 GDP 대비 정부지출은 증가할 것이다. 반면 GDP 대비 세금수입은 감소할 개연성이 높다. 누진세 구조에서는 실질소득이 증가해야 납세자의 과세율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자율과 경제성장률의 격차 문제를 보자. 개념적으로 생각하면, 이자율이 경제성장률보다 높다면 GDP 대비 채무의 비중이 증가하기 때문에 충분한 기초흑자가 필요하다. 반대로 경제성장률이 이자율보다 높다면 정부적자가 크더라도 채무가 안정화될 수 있다. 2007~2009년 금융위기 이후 이자율이 역사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에 머물렀기 때문에, 정부의 채무 상환 비용을 크게 낮추었다.
그런데 노동생산성 상승률 감속은 이 격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노동생산성 상승이 감속하면 성장률 상승도 감속한다. 그런데 저생산성이 이자율에 미치는 영향은 다소 모호하다. 그렇지만 현재와 같이 생산성 성장은 감속하는데 이자율이 급격히 상승할 경우, 정부부채에 큰 부담을 줄 것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세 번째로, 환율을 살펴보자. 이자율의 하락은 환율의 평가절하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해외통화표시 채무를 지닌 국가에서 GDP 대비 채무가 추가로 증가한다는 함의를 지닌다. 부채의 추가적 증가 정도는 국내 이자율과 세계 이자율의 격차, 해외통화표시 채무의 비중에 달려 있다.
네 번째로, 우발부채를 보자. 1990~2014년, 80개국에서 우발부채의 현실화로 GDP 대비 평균 6%의 채무가 확대되었다. (최고 기록은 아시아 위기 당시 인도네시아로, GDP 대비 57%가 늘었다.) 한국은 우발부채와 관련된 재정비용이 GDP의 31.2%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노동생산성 하락과 연결된 GDP 성장률 하락은 GDP 대비 우발부채의 비중이 커진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자율 하락은 위기가 발생할 때 통화정책의 효과를 떨어뜨린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글은 코로나 위기 발생 이전에 쓰인 글로, 코로나 위기가 또다시 대규모의 정부 부채를 축적한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종합해보면, 미국, 일본, 영국은 지난 15년간 기초예산적자가 채무창출의 주요 추동력이었다. 또한 우발부채의 물질화(예를 들어 은행 구제금융)에 따른 비용은 재정적자로 기록되었다. 그에 따라 이러한 국가들은 낮은 성장률과 과중한 채무라는 난관에 직면해 있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 경제에서 장기침체와 노동생산성의 장기적 하락은 국가의 부채위기라는 형태로 표출될 잠재력을 지닌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국가의 부채위기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은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3. 한국의 경제전망
1) 2023년 경제전망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22년 11월 10일에 발표한 「KDI 경제전망」에서 “우리 경제는 2023년에 수출 증가세가 크게 둔화하고 투자 부진도 지속되면서 1.8%의 낮은 성장률을 기록할 전망”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는 세계 경제의 성장률이 2.7%라는 낮은 수치를 보이고, 원유 도입단가가 2022년보다 15% 하락한 배럴당 84달러를 기록하고, 실질실효환율로 평가한 원화가치가 4% 절하될 것이라는 전제로 도출한 것이다. (한국은행이 11월 24일 발표한 「경제전망」에서는 경제성장률을 1.7%로 예측했다.)
특히 수출의 경우, 세계적 경기둔화로 1.6% 증가하는 데 그칠 것이라고 보았다. 설비투자는 반도체 경기둔화와 대외불확실성으로 인해 2022년 –3.7%를 기록한 데 이어, 2023년에도 0.7%라는 낮은 증가율을 보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 상황은 이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다. 미국의 매우 빠른 금리인상이 지속되면 세계무역이 위축되면서 한국의 수출도 부정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중국이 제로코로나 정책과 부동산 시장 위축으로 수요 부진이 나타날 때도 한국의 수출이 둔화할 것이다. 또 한편, 우크라이나 전쟁도 원자재와 곡물가격 불안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남아 있다.
국내요인을 보더라도, 민간부채가 많은 상황에서 기준금리가 가파르게 오르면 경기둔화가 커질 것이다. 최근 회사채 시장을 중심으로 기업의 자금조달 문제가 큰 이슈로 떠올랐는데, 자금조달 사정이 나빠지면 투자에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특히 부동산 경기 하락은 건설업체의 자금경색으로 이어지고 건설투자 부진으로 나타날 것이다.
다만 경기회복세가 약화하고 있음에도 2022년 고용은 ‘양호한’ 흐름을 보인다. 고용률이 높은 수준으로 빠르게 상승하고, 실업률도 장기추세를 크게 하회하여 경기상황과 대조적인 흐름을 보여서 그 원인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최근 고용 확대에 가장 기여한 업종은 ▵전문과학, 정보통신, ▵운수창고업, ▵보건업, 사회복지 서비스업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업종은 코로나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대면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배달 관련 인력수요가 빠르게 증가했고, 디지털화가 가속화되면서 정보통신 관련 일자리도 증가했다. 물론 방역과 돌봄 인력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반면 숙박, 도소매와 같이 코로나 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업종은 아직도 뚜렷한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KDI는 취업자 수가 2022년에 79.1만 명 증가한 데 비해, 2023년에는 8.4만 명 늘어나는 데 그치리라 전망했다. 특히 생애주기에서 고용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시기인 핵심노동인구(30~59세)의 비중이 급락하고, 대면서비스업의 고용회복세가 빨라지더라도 경기둔화의 영향으로 제조업과 비대면서비스업의 증가세는 둔화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는 인구요인이나 (2022년의 급증에 따른) 기저효과에 의한 것으로, 고용여건은 여전히 양호한 흐름을 이어간다는 뜻이다.2) 11월 한국은행 금리 정책의 의미
11월 24일 금융통화위원회는 한국은행 기준금리를 3.00%에서 3.25%로, 0.25%p 올리면서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첫째, 높은 수준의 물가오름세가 지속되고 있어 물가대응 정책대응을 이어갈 필요가 있다. 소비자 물가는 10월에도 5.7%의 높은 오름세를 지속했고, (식료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인플레이션율과 기대인플레율도 4%대 초반의 높은 수준을 이어갔다. 따라서 이는 금리인상 기조를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둘째, 그런데 경기둔화 정도가 8월 전망치에 비해 커질 것으로 예상되며, 외환부문의 리스크가 완화되고, 단기금융시장이 위축된 점을 고려해야 한다. 아래 표를 보면, 여기서 외환부문의 리스크가 완화되었다는 것은 원달러 환율이 (여전히 높은 수준이지만) 10월에 달러당 1,424원에서 11월 23일 1,352원으로 내려가 리스크가 어느 정도는 완화된 것으로 판단한다는 뜻이다. 단기금융시장이 위축되었다는 것은 기업어음(CP) 금리의 상승으로 표현되는데, 특히 프로젝트 파이낸싱과 관련된 자산담보부기업어음(PF-ABCP)의 금리가 큰 폭으로 상승하고 거래가 위축된 상황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요소들은 한국은행이 금리인상 폭을 좁게 한 근거가 된다.
역으로 보면, 한국은행이 인플레이션을 강하게 누르기 위해 금리인상 폭을 넓힌다면 단기금융시장의 위험이 커지고, 경기둔화가 심해질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먼저, 이른바 ‘레고랜드 사태’가 보여주는 프로젝트 파이낸싱 문제를 살펴보자. 3) 레고랜드 사태의 파급효과: 프로젝트 파이낸싱 부실에서 채권시장 경색으로
한국은행은 이미 9월 22일에 발표한 「금융안정 상황」에서 비은행권의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의 “건전성이 저하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2011~2013년 부동산 PF대출 부실사태 후, 은행권은 PF대출을 크게 늘리지 않았지만, 비은행권, 즉 저축은행, 증권사, 여신전문회사는 이를 대폭 확대했다. 2014년부터 2022년 6월까지 증가액을 보면 은행은 6.9조 원인데 반해, 비은행권은 70.1조 원에 이르렀다. 또한 은행과 보험사의 대출은 대형사업장의 아파트를 중심으로 하지만, 저축은행과 증권사, 여신전문회사는 중소규모 사업장의 아파트 외 주택, 상업시설을 중심으로 했다. 게다가 PF대출 관련 유동화증권 발행이 증가하면서 증권사의 채무보증도 크게 증가했다. 따라서 주택가격이 하락하면, 비은행권의 PF대출 부실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보고서 발표 직후인, 9월 28일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레고랜드의 개발을 맡은 강원중도개발공사의 기업회생을 신청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사태가 눈덩이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기업회생 신청이란 상환해야 할 금액 중 대부분을 자사의 주식으로 대신 지불하고, 나머지 15%를 수년에 걸쳐 갚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발행한 ‘아이원제일차’가 10월 4일 부도처리 되면서, 기업어음 시장이나 회사채 시장에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다. 그 후 추경호 경제부총리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등이 참여한 비상 거시경제금융회의가 열려 채권시장 경색에 대처하기 위해 ‘50조+α’를 공급하겠다는 입장을 공식 발표했다. (여기서 50조라는 수치는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뽑은 수치일 것이다.) 채권시장안정펀드 중 여유자금 1.6조 원으로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사들이고, 산업은행·기업은행·신용보증기금의 회사채·기업어음 매입프로그램도 8조 원에서 16조 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주택도시보증공사와 주택금융공사는 프로젝트 파이낸싱 시장 안정을 위해 2023년까지 10조 원 규모의 보증지원에 나서겠다고 밝혔다.4) 주택담보대출 금리인상의 파급효과: 기업의 자금난 확대
부동산 시장의 냉각이 미치는 파급효과는 프로젝트 파이낸싱과 기업어음, 회사채 시장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안심전환대출’ 문제도 있다. 안심전환대출은 고금리로 받은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을 연 3.7~4.0% 고정금리 대출로 바꿔주는 정책 금융상품으로, 주택가격 6억 원 이하, 부부 합산 소득 1억 원 이하여야 신청할 수 있다. 올해와 내년에 총 45조 원이 공급될 예정이다.
문제는 신용등급이 높은 주택금융공사가 관련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MBS(주택담보대출 유동화증권)를 발행할 경우 올해 한전채가 시중자금을 빨아들였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주택금융공사가 국내에서 발행하는 MBS 잔액은 올해 말 139조 5,980억 원에서 내년 말 167조 4,641억 원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주택금융공사의 MBS는 신용등급이 AAA로 최상급인 데다 금리도 연 5%대 수준으로 높아 시중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올해 회사채 금리 급등을 촉발한 한국전력도 내년에 추가로 한전채를 발행해야 하는 상황이다. 11월 22일 국회 산업통상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한전채 발행 한도가 자본금과 적립을 더한 금액의 2배에서 5배로, 경영위기 상황에선 6배로 늘리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될 경우, 올해 말 70조 원 내외일 것으로 추정되는 누적 한전채 발행 잔액은 내년에는 110조 원 규모까지 늘어나게 될 수 있다.
이처럼 주택금융공사나 한전이 발행하는 막대한 규모의 채권은 다시금 회사채 시장을 압박하는 위험요인이 된다. 기업은 이자율 상승으로 회사채를 통한 자금조달이나, 은행을 통한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되고, 부동산 시장 침체로 부동산 자산 매각도 곤란할 수 있다. 경기침체에 따른 이익의 감소도 당연히 동반될 것이다. 이는 기업의 투자, 고용증대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5) 소결
2023년 전망을 보면 수출 부진, 설비투자와 건설투자 부진이 직접적으로 경제성장률을 끌어내리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부동산 시장 하방압력이 미치는 다각적인 파급효과가 있다. 프로젝트 파이낸싱 대출 부실이 기업어음이나 회사채 시장을 압박하고, 여기에 대응하기 위한 채권시장안정펀드는 다시금 은행채 발행을 늘려 회사채 시장을 압박하여, ‘아랫돌을 빼서 윗돌로 괴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또한 주택담보대출 금리인상에 따른 정부의 정책대응 역시 채권시장을 압박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를 종합하면 경기침체, 금리인상이 장기화될 경우 자금시장 경색, 기업의 재무 상황 악화가 위험 수위에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 경제의 위기 상황이 연출되면 정부의 직접적인 정책개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 그렇지만 정부의 미시적인 경제개입은 다양한 이해당사자 간의 갈등을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전이시킬 수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안심전환대출의 경우, 주택가격 6억 원 이하, 부부 합산 소득 1억 원이라는 제한이 있는데,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현재 수도권에 살거나 부부 맞벌이를 하는 경우 받을 수 없다는 불만이 나올 수 있다. 반대로 이러한 요건을 완화할 경우, 이른바 ‘영끌족’, 즉 주택가격이 치솟을 때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라 기대하면서 변동금리 상 저금리로 돈을 빌려 집을 마련한 사람들까지 세금으로 구제해 주어야 하냐는 불만이 나올 수 있다. 또한 금리가 오르는 상황을 대비해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고정금리를 선택한 사람만 손해 보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나올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미시적 정책개입을 하면 할수록, 즉 정부가 직접 나서서 금리, 가격, 임금의 결정에 개입하면 할수록, ‘누구는 도와주고 누구는 안 도와주고, 기준이 무엇이냐’라면서 형평성을 따지는 문제제기가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경제위기는 ‘인민 내부의’ 갈등과 불화가 커질 뿐만 아니라 그 불만이 정부로 집중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4. 한국의 장기 경제성장률 전망
KDI의 「장기 경제성장률 전망과 시사점」은 (성장률 간 관계를 뜻하는) 성장회계를 통해서, 성장률 하락을 분석한다. 즉 경제성장률에 기여하는 항목을 총요소생산성 상승률, 노동공급 증가율, 자본공급 증가율로 구분하여, 각각이 경제성장에 기여하는 정도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살펴본다.
KDI의 추산에 따르면, 2000년대에는 경제성장률 하락이 자본공급 증가세의 둔화에 기인했다면, 2010년대에는 생산성 증가세의 둔화에 주로 기인한다. (노동공급의 기여도는 전체 기간에서 비교적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먼저 노동공급 측면을 보면, 2021년 통계청이 발표한 『장래인구추계: 2020~2070년』에 따르면 생산연령(16~64세) 인구는 2011~2020년에 117만 명 증가했으나, 2021~3030년에 357만 명 감소하고, 2031~2040년에는 더 확대되어 529만 명이 감소할 것이다. 그에 따라 생산연령비중이 2020년 72.1%에서 2050년 51.1%로 하락할 것이다.
이처럼 노동공급이 감소한다고 했을 때, 이를 보완하여 경제성장률을 높이려면 총요소생산성 상승이 필수적이다. KDI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국 중 상위 25%와 50% 사이의 값인 1.0%를 총요소생산성 상승률의 기준값으로 잡고, 낙관적 시나리오는 상위 25% 수준인 1.3%로, 비관적 시나리오는 2011~2019년 사이에 한국에서 나타난 실제 값 0.7%로 설정하였다. (KDI는 2011~2019년에 나타난 0.7%라는 낮은 수치가 금융위기의 여파에 따른 일시적 현상인지, 아니면 영구적 현상인지 판별하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이 수치를 ‘비관적’ 시나리오의 기준치로 설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KDI가 추산한 값은 아래 표와 같다. 2023~2030년에, 낙관적 시나리오는 2.4%, 비관적 시나리오는 1.5%이며, 2041~2050년에 낙관적 시나리오는 1.1%, 비관적 시나리오는 0.2%다. 기준시나리오로 보면 2010년대 2%대에서 2020년대 1%대로, 2040년대에 0%대로 하락하는 셈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장기적으로 하락한다는 분석과 전망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시되었다. 나아가, 2013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한국개발연구원(KDI), 하버드대학 공동 연구시리즈 중 첫 번째 책, 『기적에서 성숙으로』는 성장률 하락 현상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과거 빈곤국가로 저수준 균형 함정을 성공적으로 벗어나 빠른 성장을 구가한 특성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따라잡게 되는 것은 곧 인건비 상승과 그로 인한 가격경쟁력 약화를 의미한다. 단순히 기술을 수입하는 것만으로는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고, 그 대신 비용이 많이 발생하고 어려운 원천기술 개발에 투자해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성숙기와 수렴의 시대에 성장둔화는 불가피하다.” 즉, 일반적으로 1인당 소득이 1만 4천 달러 수준에 도달하면 성장둔화가 발생한다는 것이고, 이를 이른바 ‘중진국 함정’이라고 부른다. 한국도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는 뜻이다.
다만, 『기적에서 성숙으로』는 한국의 경험에서는 몇 가지 독특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탈산업화의 속도가 이례적으로 빠르다. 제조업 고용비중이 1989년에 정점에 도달한 후 10년간 연 0.91%p 하락했다. (대만을 제외하면 어느 국가보다 빠르다.) 또한 탈산업화가 시작된 GDP 수준 역시 이례적으로 낮았다.
둘째, 생산·고용 부진을 개선해주리라 예상되는 서비스 부문이 만성적인 저생산성을 보인다. 특히 도소매업과 의료, 교육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정보통신 분야는 기술적으로 빠르게 성장하지만, 서비스 부문 고용에서 차지하는 부분이 작다.)
셋째, 한국의 상품수출은 비교적 잘 지탱되어 왔다. 기적적인 성장의 시기에 이룬 높은 수출증가율 대비 그 후 부진한 상품수출 증가는 한국경제의 성숙으로 인한 필연적인 성장둔화의 결과다. (누적수출증가율이 둔화한 시점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이후에 나타난다.) 다만 수출의 증가가 과거처럼 고용을 창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는 수출산업이 생산하는 제품에 기본적으로 들어가는 노동집약적 투입요소를 해외에서 조달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중국에서 부품을 수입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서비스 수출실적이 미미하다. OECD 국가는 서비스 수출이 GDP의 10% 이상을 차지하는데, 한국은 7%에 불과하다.
넷째,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규모는 한국경제의 특징을 근거로 기대되는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 (또한 외국인직접투자가 중국으로 몰리게 되어 한국의 외자유치는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의 해외직접투자 수준은 정상적이다. (‘한국의 해외직접투자 규모가 지나치게 커서 국가경제의 공동화를 초래한다’는 대중의 불만과는 상반된다.)
다섯째, 한국경제는 위기에 대한 취약성을 보였다. 지난 40년간 네 차례의 위기를 겪은 것이 이례적인 것은 아니지만 평균보다는 좀 더 위기에 취약한 편이었다. 이는 주식발행을 통한 자금조달보다 부채(특히 단기부채)를 선호하는 개발전략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다양한 연구에서 제시되는 성장률 하락에 대한 진단과 대책은 사실 모두 대동소이하다. 문제는 한국경제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어떤 대책이든 단기적 처방으로 해소될 수 없는 중장기적 과제라는 사실에 있다. 경제성장론의 관점에서는 경제의 개방성을 높여야 한다, 교육과 연구개발을 혁신해야 한다, 기업활동과 노동 관련 규제 제도를 바꿔야 한다 등등 과제는 제시된다. 이러한 과제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도 달성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실제 현실에서는 ‘정치적 실행가능성’이라는 문제가 개입하므로, 급격한 변화를 꾀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교육제도의 개편 문제를 보더라도, 수많은 쟁점과 갈등이 존재한다. 단적인 사례를 들면, 현 정부는 반도체 인재 양성을 위해 수도권 대학의 첨단분야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는데, 보도에 따르면 전국 대학총장 133명 중 수도권 대학총장은 87.5%가 찬성, 비수도권 대학은 92.9%가 반대하여, 종합적으로 대학총장 65.9%가 반대한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이해관계가 명확히 갈리는 가운데, 정부 정책은 힘을 얻어 추진하기 어렵고, 추진하더라도 심각한 갈등과 후유증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한국경제의 장기 저성장 추세는 그 누구도 쉽게 역전시키지 못할 것이다.5. [보론] 장기침체와 마르크스의 정상상태론/구조적 위기론
부르주아 경제학에서 말하는 ‘장기침체’를 마르크스의 정상상태론/구조적 위기론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더 분명한 정치적 함의를 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마르크스의 이론을 간략히 살펴보자.
성장의 한계라는 관념은 이미 스미스가 고전파 경제학을 확립하는 시기에 제시한 것이다.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상태를 정상상태(定常狀態)라고 지칭한다. 즉 고정자본과 국민소득의 성장이 정지한 상태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다. 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이러한 쟁점을 포괄한다.
마르크스는 스미스와 리카도를 비판하면서 이윤율 하락을 자본주의의 내재적 법칙으로 설명한다. 자본축적의 진전에 따른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즉 자본생산성의 하락이 이윤율 하락을 야기한다. 이윤율 하락은 자본축적의 둔화, 즉 고정자본 성장률의 하락을 야기하고 그것이 경제성장률도 하락시킨다. 마르크스는 스미스와 반대로 이윤율의 하락의 원인이 제한된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아니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인해 잉여가치를 추출할 기회가 감소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윤율의 하락의 결과 제한된 잉여가치를 둘러싼 경쟁이 심화되고 자본의 집중이 발생한다. 그 결과 성장의 한계에서 ‘자본의 과잉’과 ‘인구의 과잉’(상대적 과잉인구)이라는 ‘역설적’ 상황이 연출된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보면 정상상태에 근접하는 것은 사회의 경쟁과 갈등과 불행을 증폭시킨다. 왜냐하면 정상상태에 근접하면 점차 확대재생산의 규모가 축소되면서, 단순재생산으로 수렴하고, 자본간 경쟁이 심화될 뿐만 아니라 노동자 내부에서의 경쟁도 심화된다. 취업노동자와 실업노동자의 경쟁, 취업노동자 내부의 경쟁,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경쟁, 생산적 노동 및 비생산적 노동 각 내부에서의 경쟁도 심화된다. 다만 생활수준은 과거보다 높다. 이것이 궁핍화의 현실적 의미일 수 있다. 즉, 과거보다 생활수준은 높지만 경쟁과 갈등이 격해지고,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마르크스 이후 부르주아 경제학자, 대표적으로는 존 스튜어트 밀과 케인즈는 정상상태로 근접할수록 풍요와 행복이 늘어난다고 주장했다. 밀은 정상상태를 향한 경향의 기본적 원인을 자본축적에 의해 야기된 부의 증가에서 찾는다. 즉 너무나 많은 부가 존재해서 더 이상 자본축적이 심화될 필요가 없고 자본축적에 대한 자극도 없는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이자율은 0이 되고, 어떤 사람도 자기노동의 생산물 이상의 것을 벌지 않게 될 것이다. 즉 밀에게 정상상태란 곧 ‘사회주의’다.
자유주의자로서 케인즈도 밀과 유사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우리의 자손들을 위한 경제전망』에서 단기적 불안정성이 50~60년 정도 안정화될 수 있다면 자본의 한계 생산성이 0이 되는 지점까지 자본축적이 진행될 것이고 이윤율과 이자율도 매우 낮아지리라 생각했다. 밀과 유사하게 이는 사실상 자본가계급의 소멸을 의미한다. 매우 높은 노동생산성과 낮은 이윤율 수준에서 임금은 거대한 양의 소득을 나타낼 것이며 이에 따라 소득분배는 훨씬 더 평등할 것이다. 막대한 부를 물질적 소비에는 좀 더 작게 지출하고 여가와 자기발전에는 더 많이 지출할 것이다. 밀과 케인즈에게 있어 정상상태는 행복이 최대화되는 상태다.
경제성장률이 0으로 접근하는 정상상태에 대한 마르크스와 밀·케인즈의 분석 중 어떤 것이 현실에 더 부합하는가. 자본주의의 내재적 원리가 극대화되는 경쟁과 불행인가, 자본주의의 현실적 모순이 사라져가는 풍요와 행복인가. 우리는 마르크스의 전망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함의는 사실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다. 장기침체에 빠질수록 노동자 내부의 경쟁과 불화가 증폭된다는 사실은 노동자운동에 매우 심각한 도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속성장 시대에 전형화된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과연 장기침체 시대에 적합한 변화를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가 가장 근본적 문제다. ●
위구르 투쟁의 전략과 연대에 관한 편지
재한 러시아 평화활동가 초청강연
<기후정의를 위한 노동의 지구적 연대와 체제전환 국제노조포럼> 참관기(2)
세 가지 ‘전환’과 노동의 전환역량에 대한 논의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겠다.정의로운 전환에서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역할
[%=사진5%]
는 방안을 찾는다. 이를 위해 6개 광역단체를 중심으로 공공교통 관련 시민사회단체 연대를 조직하여, 지역 시민과 노동자가 주체로 나서서 공공교통 체계 마련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러시아와 세계의 반전 이니셔티브들
징병 거부 운동
페미니스트 반전 저항
전쟁과 민족 학살을 멈추라고 외치는 소수민족들
노동자들의 저항
청년,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푸틴의 전쟁 동원에 맞서는 러시아의 반전운동을 지지하자
<기후정의를 위한 노동의 지구적 연대와 체제전환 국제노조포럼> 참관기(1)
녹색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조합의 의문
기후 위기 대응을 명분으로 자행하는 환경파괴
정의로운 산업전환과 지구적 연대의 필요성
남겨진 과제들
재한 벨라루스인 커뮤니티 인터뷰
만약, 한국 정부가 러시아의 침공을 지지하면서 러시아에 무기를 지원하고 한국 영토에서 우크라이나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어떨까? 우크라이나에 영토를 양보할 것을 요구하고 한국 시민들을 참전시킬 가능성을 운운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들은 터무니없는 가정이 아니다. 벨라루스 시민들이 반년 넘게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벨라루스는 러시아의 서쪽, 우크라이나의 북쪽 경계와 맞닿아 있으며 대표적인 러시아 우방국이다. 1994년부터 29년째 벨라루스 대통령으로 재임 중인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는 전쟁 직후부터 러시아의 침공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벨라루스 시민들은 루카셴코를 비판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지하고 있다. 노동조합, 시민단체, 언론인 등 수많은 시민들이 독재 정권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전쟁의 진실을 알리고, 우크라이나에 연대를 표하고 있다. 많은 벨라루스 시민들이 우크라이나에 연대하는 이유는 이 전쟁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만의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전쟁 전부터 루카셴코의 독재를 도왔다. 그리고 주변국들을 침공하고 군사적 불안을 조성해왔다. 벨라루스 시민들은 러시아가 타국의 주권과 자유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러시아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벨라루스를 비롯한 주변국들도 러시아에 자유를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에서 하루빨리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에 사는 벨라루스 시민들의 공동체인 ‘재한 벨라루스인 커뮤니티’에서도 전쟁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재한 우크라이나인들과 연대하며 한국 시민들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 장기화로 인해 관심이 식어가는 상황에서 벨라루스 시민들의 입장은 더욱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평화 실천단 in 서울>에서는 전쟁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어 평화를 위협받고 있는 벨라루스 시민의 입장을 한국 사회에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본 인터뷰를 기획했다. 인터뷰를 통해 자국의 정권이 러시아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이를 비판하는 운동의 어려움과 의미는 무엇인지, 이번 전쟁이 왜 전 세계의 문제인지를 직접 듣고자 했다. 아래는 8월 20일 인터뷰 당시의 답변을 최대한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Q1. 본인 소개 부탁드립니다. 알렉세이 : 저는 알렉세이입니다. 한국에 4년 동안 있었고 생명 과학 박사 학위 과정에 있습니다. 폴리나 : 저는 폴리나입니다. 저도 박사 학위 과정에 있습니다. 저의 전공은 약학과 화학이고 현재는 사회운동도 하고 있어요. 이 자리에 초대되어 영광이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Q2. 재한 벨라루스인 커뮤니티를 소개해주세요. 알렉세이 : 다시 한 번 우리를 여기에 초대해주셔서 고맙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벨라루스인들의 견해에 관심을 가져줘서 감사합니다. 저희는 벨라루스 부정 선거 시위 이전인 2020년 8월에 모였어요. 그 때는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그 이후 우리는 같이 모여 집회나 기자회견 같은 활동을 하고 있어요. 벨라루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한국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죠. 벨라루스는 멀리 있고 한국보다 5배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저희 커뮤니티는 아주 작아요. 통계 이민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는 약 250명의 벨라루스인이 일하고, 공부하고, 살고 있어요. 대략 50명 정도가 커뮤니티를 통해서 소통하고 있고요, 그중 30명은 현재 상황(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활동을 하고 있어요. 폴리나 : 그리고 우리는 벨라루스 독재정권(regime) 피해자들을 위한 기금 펀딩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한국의 언론사들과 소통하려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의견이나 활동에 대한 정보를 한국 언론에서 접하기는 아주 어려워요. [%=사진1%] Q3.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벨라루스 시민들의 여론은 어떠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폴리나 : 그때(2월 24일)가 목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러시아가 북쪽과 남쪽, 동쪽의 3면에서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어요. 이전에도 많은 예측이 들렸지만 아무도 비행기, 배, 로켓을 이용해 3면에서 수도를 침공하는 전면전이 되리라는 것은 몰랐어요. 저는 친구들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이것은 유럽에서의 전면전이다. 한 국가가 우크라이나의 일부도 아닌 국가 전체를 침공한 것이다.”라고 설명했고, 우리 모두 “이것은 잘못됐다.”라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어제도, 오늘도 죽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끔찍해요. 이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 정말 싫습니다. 그들은 잔인한 괴물이에요. 시민들의 여론은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에요. 분명한 것은 100%의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에요. 제가 본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달해드릴게요. 첫 번째, 벨라루스 시민의 30%가 루카셴코를 지지한다고 밝혔어요. 30%가 최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어요. 두 번째, 벨라루스 시민의 80% 이상이 벨라루스 군대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세 번째,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것을 지지합니까?”라는 질문에 벨라루스인들은 40%가 그렇다고 답하지만, 러시아인들은 아마 70~80%가 그렇다고 답할 거예요. 또 흥미로운 것은 66%의 시민들이 벨라루스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옳다고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일반적인 여론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70%의 시민들은 루카셴코를 지지하지 않아요. 80% 이상의 시민들은 벨라루스 군대가 우크라이나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절반 이상의 시민들은 벨라루스가 전쟁 참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해외에 있는 벨라루스인의 95%는 전쟁을 지지하지 않아요. 이 사람들을 한국에서 만날 수 있어요. 이 숫자들은 믿을 만한 사실이에요. 그리고 벨라루스의 여론이 흑백으로 매우 나뉘어 있다는 것 역시 중요해요. (이 전쟁에 대해)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는 벨라루스인은 거의 없어요. 알렉세이 :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벨라루스에서 많은 소문이 있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저도 그랬고요. 제가 처음 전쟁에 대해 들었을 때 직장에 있었어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던 것처럼 매우 이른 시간에 시작됐죠. 뉴스를 보고 믿을 수 없었어요. 저는 우크라이나인 동료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벨라루스 영토에서도 공격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저는 큰 배신감을 느꼈어요. 사실 우리 정부는 이전에도 시민들을 배신했어요.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향한 공격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어요. 그리고 한국의 우크라이나인 커뮤니티가 교회 앞 집회를 조직했다는 사실을 들었어요. 그래서 우크라이나인 커뮤니티의 시위에 참여했어요. 그 이후로 우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맞선 벨라루스인 시위도 조직했어요.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벨라루스에서도 철군할 것을 요구했죠. 우리는 러시아 군대가 우리의 영토에서 공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폴리나 : 침공 이후 일주일 동안, 벨라루스에서도 시위가 있었어요. 목요일에 침공이 발생했고, 그 주 일요일에 제 가족이 시위를 하러 갔어요. 저의 여동생과 어머니, 대학 친구들이 두려워했던 기억이 나요. 여동생이 저에게 영상을 보내줬어요. 영상 속에서 여동생이 우크라이나 대사관 대문 앞에 꽃을 두자, 벨라루스 경찰들이 “여기서 나가라. 당신들은 법을 어기고 있다. 멈추지 않으면 체포하겠다.”라고 소리치고 있었어요. 알렉세이 : 벨라루스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해요. 우크라이나 침공 3일 뒤인 일요일에 벨라루스의 헌법 개정에 관한 국민 투표가 있었어요. 폴리나 : 벨라루스에서는 거리에 10명 이상 모이는 것이 불법이에요. 그래서 만약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싶다면, 합법적인 이유가 있는 것처럼 가장해야 해요. 사람들은 헌법 개정 국민 투표를 합법적인 이유로 활용해서 전쟁 반대 시위를 했어요. 공식 투표소 앞에서 전쟁을 멈추라고 항의했고, 많은 사람들이 체포됐어요. [%=박스2%] Q4. 벨라루스의 루카셴코 정부가 푸틴을 지지하고 러시아에 군사적 지원을 하는 것에 대한 벨라루스인들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앞서 말씀해주신 부분 외에 추가하실 부분이 있으신가요? 폴리나 : 네, 이미 말했듯이 시민들 중 30%만 루카셴코를 지지해요. 루카셴코는 28년 동안 권력을 잡고 있고, 우리가 여러 번 물러나라고 말했지만 듣지 않고 있어요. 2020년에 큰 반정부 시위가 있었어요. 거리에서 100,000명의 사람들이 루카셴코에게 물러나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그때 러시아가 루카셴코를 도왔기 때문에 아직도 그가 권력을 유지하고 있어요. 미국, 유럽연합(EU), 국제사회에 루카셴코가 당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큰 운동이 있었어요. 루카셴코는 러시아나 다른 독재 국가들 외에는 지지자가 없어요. 그래서 푸틴이 침략을 계획하고 있을 때, 그는 루카셴코에게 "나는 당신의 친구이고, 당신은 나에게 의존하고 있다. 나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기 위해 벨라루스의 영토를 사용하고 싶다."라고 말했을 거예요. 루카셴코는 여기에 “NO”라는 선택지가 없었겠죠. 그래서 저는 루카셴코가 벨라루스의 독립성을 푸틴에게 팔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진2%] 저는 국제사회가 2014년 당시처럼 아무것도 요청하지 않는 것에 동의한다고 생각해요.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벨라루스에서 평화를 위한 큰 회의가 있었어요. 루카셴코가 "나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평화를 만드는 것을 도울 것이다. 벨라루스에 오면 평화를 이룰 수 있다."라고 말했어요. 이제 아무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는 러시아의 꼭두각시이기 때문이죠. 그는 범죄자에요.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범죄를 저지르고 있고, 벨라루스 시민들을 배신하고 있어요. 알렉세이 : 벨라루스 정부의 행보와 벨라루스 시민들의 요구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해요. 왜냐하면 벨라루스 시민들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2년 동안 이 정권에 저항하는 시위를 해왔기 때문이죠. 현재 정부가 벨라루스 시민들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해요. 폴리나 : 루카셴코는 무엇을 하든지, 벨라루스 시민들을 생각하고 움직이지 않아요. 그는 “벨라루스 시민들을 위한 것이 무엇일까?”가 아니라 “내가 대통령을 유지하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될까?”를 생각해요. 알렉세이 : 물론 루카셴코는 이 일(전쟁)에 관여한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죠. 우리는 그에게 투표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가 이 전쟁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해결책은 필요해요. 폴리나 : 벨라루스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것을 돕고 있어요. 우크라이나는 반격할 권리가 있어요. 우크라이나는 스스로를 방어하고 벨라루스에 반격할 권리가 있어요. 벨라루스는 우크라이나를 향해 로켓을 발사하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는 벨라루스에 그렇게 하지 않아요. 우리가 두려운 것은 루카셴코가 우리의 신뢰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실질적인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는 거예요. Q5.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소기의 성과를 거두거나, 이긴다면 어떤 미래가 예상되시나요? 폴리나 : 만약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긴다면, 벨라루스는 러시아의 일부가 돼요. 저는 몇 주 동안 울 거예요. 우리는 "자유로운 우크라이나 없이 자유로운 벨라루스는 없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크라이나 군대는 이미 8년 동안 싸워왔어요. 그리고 우크라이나 군대는 나토의 지원을 받고 있죠. 만약 우크라이나군이 이 전쟁에서 진다면, 벨라루스 사람들은 러시아에 저항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미 보신 것처럼, 푸틴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벨라루스로 갔죠.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어요. 일부 벨라루스인들은 ”우리는 러시아 점령하에 있다."고 말해요. 그래서 만약 우크라이나인이 진다면, 벨라루스도 함께 지는 거예요. 일본이 한국을 침략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한국인들은 일본 점령에 맞서 싸웠죠. 똑같아요. 만약 우크라이나가 진다면, 벨라루스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러시아의 점령에 맞서 싸우는 거예요. 알렉세이 : 그런 일은 벨라루스의 독립성과 언어에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되겠죠. 왜냐하면 러시아는 강한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요. 우크라이나가 이 전쟁에서 진다면 벨라루스 역시 하나의 국가로서 러시아에 지는 것이에요. Q6. 이전부터 벨라루스를 포함한 러시아 인근 국가들에 군사적 긴장감이 있었나요? 그것이 이번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합니다. 알렉세이 : 먼저, 2008년 조지아의 사례가 있죠. 러시아가 조지아를 침공해서 일부를 차지했어요. 그 후 2014년에 크리미아 침공 사태가 있고, 돈바스 지역에 불안을 조성하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러시아는 세계에 불안정성을 확대하고 있어요. 러시아는 시리아, 베네수엘라 정부와도 연루되어 있어요. 몰도바에도 러시아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요. 전쟁 이후로 큰 (군사적) 긴장이 있어요. 벨라루스 영토에서 많은 러시아군의 군사 활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벨라루스 정부가 아니라 우크라이나나 민간 모니터링 프로젝트, 출판 활동을 하는 외국 정보기관으로부터 전달받아요. 폴리나 : 우리 모두가 많은 우크라이나 게시물을 볼 수 있죠. "러시아는 침략자다. 러시아는 제국주의 정부다. 많은 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했지만 흥미롭게도 국제사회는 여전히 "러시아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요. “러시아도 나쁘고, 미국도 나쁘다."라고 말하죠. 역사는 전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요. 이 역사는 우리에게 왜 이 전쟁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줘요. 왜냐하면 러시아 내부에는 병든 제국주의 사상이 있고, 러시아의 권력자들은 전쟁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에요. 역사는 많은 나라들이 "다음은 나다."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어요. 러시아는 매우 큰 불량배에요. 하지만 단결해서 맞서 싸우는 대신, 많은 나라들은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다치고 싶지 않아. 우리는 관여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요. 전문가들이 "러시아가 조지아와 크림반도를 침공했을 때 국제 사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국제사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가 더 큰 일(전쟁)을 생각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나네요. 이 전쟁은 러시아에 의해 행해진 다른 곳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보다 훨씬 더 많이 중요해요. Q7.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양보하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현재 가장 필요한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폴리나 : 그것은 ‘헛소리’에요. 방금까지 러시아 역사를 이야기했죠. 러시아는 체계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했어요. 비유를 해볼게요. 도둑이 당신의 집에 들어와서, 돈을 훔치고, 밖으로 나갔다면 당신은 도둑이 돈을 가져가도록 놔둬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지금은 러시아와 싸울 때가 아니라 영토를 포기하고 휴전하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나쁜 전략이에요. 왜냐하면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이기 때문이죠.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 하는 4천만 명의 시민들이 있어요. 반면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는 합쳐도 5백만 명이 되지 않는 작은 나라예요. 그래서 만약 우크라이나에 영토를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전쟁터의 최고의 군인에게 팔짱을 끼고 희생만 하라는 것과 같아요. 우크라이나인들을 만난 적이 있나요?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남아서 싸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나요? 조지아는 러시아가 침공했을 때 그러지 못했어요. 누가 러시아에 맞서 싸웠나요? 아무도 못 했지만, 우크라이나가 하고 있어요. 무기를 지원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을 지지해야 해요. 지금 지지하지 않는다면,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거예요. 알렉세이 : 우크라이나에 영토 일부를 양보하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러시아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는지 알아야 해요. 우크라이나 언어와 같이 우크라이나적인 모든 것이 타겟이 되었어요.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책을 불태웠어요. 그 지역에 있는 시민들은 위험에 처해있어요. 이전에 침공 당했던 크리미아나 돈바스 지역을 포함해서 우크라이나의 모든 영토에서 그들을 쫓아내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에요. 폴리나 : 제 생각에 우크라이나를 도울 방법이 무엇일지 궁금하실 것 같아요.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면서 그들을 도울 방법은 무엇일지요. 저의 대답은 우크라이나에 무기와 방어용 물품을 주는 거예요. 우크라이나는 도시를 지키기 위한 탄약과 로켓이 필요해요. 첫 번째 대안은 러시아산 가스와 연료를 훨씬 더 빠르게 불매하는 거예요. 독일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아니에요. 러시아는 매일 무역으로 수천억 달러를 벌고 있어요. 러시아와의 무역을 중단해야 해요. 한국에도 친러시아 로비가 있지 않을까요?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는 한국 정부에 벨라루스 대사를 돌려보내라고 요청했어요. 벨라루스 대사는 KGB(국가보안위원회) 요원이거든요. 우리는 한국 정부에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라. 그는 우리를 감시하고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한국 정부는 별 도움이 안 됐어요. 어쨌든 첫 번째로 우리는 희생할 필요가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우크라이나인들은 말 그대로 그들의 삶을 희생하고 있어요.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정부를 돕기 위해 캠페인을 조직하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을 돕고 싶지만, 무장시키고 싶지 않다면 다른 희생이 필요해요. 러시아와의 무역으로 겨울에 사용할 가스를 희생해야 해요. 전쟁은 희생 없이는 끝날 수 없어요. 우크라이나인들과 벨라루스인들은 같이 러시아에 대한 한국 정부의 더욱 적극적인 제재를 요구하는 청원을 조직했어요. 하지만 예상보다 지지가 아주 적었어요. 많은 대안이 있지만 저는 첫 번째로는 러시아의 연료나 가스와 같은 경제, 두 번째로는 사업, 세 번째로는 외교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Q8. 벨라루스 민주노총(BKDP)이 러시아를 비판하자 루카셴코 정부가 해산 명령을 내렸습니다. 벨라루스 내에서의 사회운동 탄압이 얼마나 심각한지 사례를 듣고 싶습니다. 알렉세이 : 작년 5월에 벨라루스 정부가 국가에서 가장 큰 언론사를 폐쇄했어요. 정부가 대통령이 싫어하는 말을 하는 CEO나 기자들을 체포하고 감옥에 넣고, 웹사이트를 차단한다고 상상해보세요. 그리고 당시에 벨라루스의 독립 NGO 단체 대부분이 폐쇄됐어요. 생태, 인권, 변호사 단체, 언론인 단체 등이었죠. 정부는 그 단체들을 고소해서 폐쇄했죠. 그다음으로 노동조합이 타겟이 됐어요. 왜냐면 작년까지 정부는 차라리 노동조합은 비교적 온건하다고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고 있죠. 언론이 가장 극단적으로 탄압받고 있어요. 왜냐하면 언론은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달하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벨라루스 언론은 인터뷰와 같은 방식으로 시위를 전달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정부의 첫 번째 타겟이 되었어요. 그래서 벨라루스의 5~10개 정도의 큰 언론사들이 불법이 되었어요. 기자들은 벨라루스를 떠나 해외에서 일하죠. NGO들은 완전히 불법이고 친정부적인 NGO들만 살아남을 수 있어요. 벨라루스에서는 아무도 체포되지 않는 날이 없어요. 그래서 2020년의 시위 이후 사회단체나 언론을 포함해서 시민들이 연합해서 지역 커뮤니티를 형성했어요. 경찰들은 그것을 멈추려 하고요. 이제는 공식적인 집회가 아니라 모든 모임이 공격받고 있어요. 폴리나 : 한국에서는 누군가를 체포할 때 (합리적인) 이유가 필요하죠. 예를 들어 볼게요. 벨라루스의 시위를 대표하는 깃발(제목 밑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을 보세요. 그 깃발은 1990년대 벨라루스의 공식 국기였고 지금은 시위의 상징이에요. 제가 백-적-백색의 사탕을 두고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에 게시한다면 체포돼요. 게시물의 사탕이 불법성을 표현한다는 이유로요. 옷, 운동화, 양말 어떤 것이든 백-적-백색을 나타내면 체포돼요. 만약 벨라루스에 온다면 백-적-백색으로 입지 마세요. 체포돼서 15일 동안 유치장에 있게 될 거예요.(웃음) 알렉세이 : 사실 경찰에게는 이유가 필요 없어요. 경찰은 언제나 “경찰에게 위협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보고서를 쓰면 감옥에 가두기 충분하니까요. 폴리나 : 기자와 변호사가 특히 더 위험하다고 할 수 있어요. Q9. 한국에 사는 벨라루스인들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뿐만 아니라 재한 러시아, 우크라이나인들은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알렉세이 : 2020년 벨라루스에서의 선거와 시위 이후, 한국에서도 활동이 있었는데요. 저는 이때가 재한 벨라루스인들이 가장 많이 모인 날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후로는 한국 정부에게 인권을 탄압하는 벨라루스 정부와 교류하지 말라는 기자회견을 한 적이 있어요. 왜냐하면 벨라루스에 대한 결의안을 한국이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거든요. 한국은 2020년의 벨라루스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지 않은 나라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한국 정부와 벨라루스 독재정권의 (무역적) 협력을 반대했어요. 그래서 여론을 모으기 위해서 기자회견을 열어 독재정권과 협력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주장했죠. 그리고 시위 1년을 맞은 2021년 8월에는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시작인 광주에 방문했어요. 5·18 관련 단체들과 공동 행사를 하기도 했어요. 그 후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고, 우리는 한국의 우크라이나인 커뮤니티를 지지하면서 시위에 참가했어요. 우크라이나인 커뮤니티에서는 2주에 한 번씩 정기적인 시위를 진행해요. 지금까지도 저희는 그 행사에 참여하고 있어요. 러시아인 커뮤니티도 다른 장소에서 작은 집회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폴리나 : 벨라루스에서는 목소리를 내기 어렵잖아요. 그래서 해외에서 벨라루스에서는 하기 힘든 주장을 하고, 벨라루스를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중요해요. 올해에는 벨라루스 영화를 상영하는 등 벨라루스 문화를 알리는 행사도 하려고 해요. 알렉세이 : 우리 단체가 아주 작기 때문에 다른 사회단체들과도 소통하려고 노력해요. 우리는 자원이 많지 않아서 우리를 도와줄 한국의 운동단체들과 접촉하려고 해요. Q10.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두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 문제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왜 전 세계 시민들이 우크라이나에 연대해야 하나요? 폴리나 : 앞서 러시아가 다른 나라들을 침공했던 것을 말했죠. 그 나라의 시민들이 볼 때 답은 명확해요. 우리(벨라루스인)도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 러시아의 점령을 멈춰야 벨라루스의 독립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요. 제가 알기로 우크라이나 군대 내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들이 벨라루스인이에요. 만약 한국이 러시아에 의해 침공 당한다면 아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한국은 그런 적이 없어서 왜 우크라이나를 지지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어요. 제 생각에 지금까지의 인터뷰에서 확실한 것은 러시아 정부가 위험하다는 것이에요. 러시아가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것에 타당한 이유를 하나라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러시아 정부는 아주 비합리적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러시아가 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러시아는 어디서든 핵폭탄을 발사할 수 있어요. 그게 나토, 유럽, 미국 등 어느 곳도 될 수 있어요.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영향을 받을 거예요. 우크라이나에 많은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데 러시아는 그곳을 폭격하면서 핵 연료 누출의 가능성이 있죠. 식량 위기도 들으셨을 텐데요. 아프리카는 우크라이나에 밀을 의존하고 있어요. 폭격 때문에 아프리카 시민들이 굶주릴 수 있어요. 또 다른 근본적인 문제는 국가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많은 국가가 모여 의견을 나누고 국제적으로 해결하는 것을 보셨을 거예요. 국제사회가 같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러시아가 많은 것들을 방해하고 있어요. 시리아, 미얀마, 북한, 베네수엘라 등과 같이요. 4차 산업혁명, 기후 위기, 격차 문제 등 국제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어요. 이 방해꾼들은 국제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이들은 사실상 적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해요. Q11.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폴리나 : 우리 커뮤니티와 우크라이나인 커뮤니티는 아주 작아요. 그래서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힘들어요. 우리를 지원하고 싶다면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요. 우리의 이야기는 한국 언론에서 보여지는 것과는 많이 다르죠. 우리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 해주세요. 커뮤니티 공식 웹사이트도 곧 만들려고 해요. 우리 커뮤니티는 성장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당장은 다른 단체에 도움을 구하고 우리도 다른 단체의 행사에 참여하려고 해요. 문화 행사나 정치 활동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다면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참석할 거예요. 우리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하고 행사에 참여해주는 것도 부탁드려요. 알렉세이 : 한국인들이 벨라루스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아주 기쁜 일이에요. 이 인터뷰도 정말 좋았어요. 전쟁이 길어지면서 벨라루스 내에서도 관심이 줄어들고 있는데 우리 커뮤니티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계속 노력할 거예요. 감사합니다. [%=사진3%] 인터뷰 취지
[%=박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