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 머리말 지난 6개월간 표적단속으로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이하 이주노조) 중앙 간부 5명이 잡혀갔다. 2003~2004년 명동성당 농성투쟁 이래 이주노동자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까지만, 라주, 마숨 세 동지는 잠복하고 있던 출입국관리소 단속반원들에 의해 집 앞과 일터에서 체포되었고 3주 뒤 한 밤중에 추방되었다. 그리고 2008년 5월 이주노조는 새로 선출된 토르나 위원장과 소부르 부위원장을 똑같은 방식으로 잃었다. 이 두 사건은 이주노조와 이주노동자 운동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이주노조는 이러한 공공연한 탄압에 직면하여 노조를 재조직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이를 위해 네팔과 방글라데시 출신 미등록 남성 이주노동자라는 기존의 조직적 기반을 확장하여 국적, 성별, 비자 상태에 있어 훨씬 다양한 이들을 조합원으로 포괄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다. 지난 4월에 열린 총회에서는 이러한 인식을 명문화했는데, 이주자 공동체 구성원, 고용허가제 노동자, 여성 이주노동자를 조합원으로 조직하는 데 노력을 집중하기로 결의했다. 표적탄압이 있은 후 이주노조가 전진하도록 노력을 기울이면서, 그리고 그 동안 공백 상태였던 여성 이주노동자 조직화를 담당하게 되면서 나는 노조 내 활동에서 인종과 젠더 문제를 가장 먼저 고민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이주노동자운동, 그리고 더 나아가 진보운동 내에서 별로 논의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 이 문제들을 충분히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두 부분간의 관련성은 분명치 않다. 첫 번째 부분은 구체적으로는 인종주의 정책으로서 표적단속을, 더욱 일반적으로는 이주노동자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인종주의를 다룬다. 두 번째 부분은 남성/여성이 선천적이며 엄격히 구분되는 두 성별로 다뤄질 때 젠더 분할선에 따른 조직화가 가지는 한계를 살핀다. 이러한 이분법에 이의를 제기하는 성별 정체성을 지닌 한 이주노조 조합원과 만났던 필자의 경험을 통해 이를 다룬다. 이 작업을 통해 이주노동자운동의 현 상태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이주노조의 토대와 지도력을 재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방향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인종주의에 대하여 인종주의란 무엇인가? 이주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강제단속과 탄압에 대한 수사는 여러 가지가 있다. 반인권적, 반노동자적, 야만적, 인간사냥 등. 그러나 이를 두고 인종주의적이라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표적단속을 더 넓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살펴본다면, 그리고 이것이 시위를 조직하는 이주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펴본다면, 표적단속이 인종주의적인 정책이며 장기적으로 우리운동의 활력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인종주의라는 개념은 인종적 차이에 기반을 둔 차별(인종차별)이라는 단순한 개념 또는 사람들을 인종 집단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인종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둔 개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 보다는 사회를 조직하는 체계라는 의미로 인종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하고자 한다. 인종 차별 행위(개인적 행위, 정부 정책, 법제)와 인종 이데올로기(인종주의화된 언사, 미디어 보도, 정책 설명을 통해 표현되는) 양자 모두 이 체계적인 인종주의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다. 이 요소들은 체계적인 인종주의 안에서 반복되고 상호작용하며 부, 기회, 권력에 있어서 불평등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렇게 해서 일상적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돈을 버는 방식을 조직하는 인종주의적 사회 구조를 형성하고 정당화한다. 인종적 범주와 인종적 위계는 선전척이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종에 기반을 둔 정책과 인종적 사고의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변하고 형성되고 재형성된다. 그러나 이는 개인의 의식 수준에서부터 자원 분배 수준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표적단속을 포함한 강제단속을 인종주의적이라고 일컬을 때, 바로 이러한 정의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이것이 인종주의인 이유는 국적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고 표적으로 삼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인종주의적이라는 수사를 사용함으로써 이주자들을 위험한 “아시아” 외국인(마치 한국인은 인종 체계 내에서 “아시아인”이 아니라는 듯이!!)으로 딱지를 붙이고 범죄화하는 정부와 언론이 강제단속을 정당화하고, 이를 통해 이주노동자들을 인종적으로 낙인찍는 역할을 한다는 점 또한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표적단속이 한국 사회 내에서, 그리고 우리 운동 내에서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사이에서 권리와 힘의 불평등을 확대, 강화 하는 방식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어떻게 증가하는가? 우선 표적단속이 단지 개인들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이주노동자들로부터 지도부와 그들이 축적한 집단적 경험을 박탈함으로써 이주노동자들의 세력화를 위한 공동 노력을 공격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조직화하고 집단적 힘과 경험을 구축하는 것은 억압받는 소수자(노동자, 인종화된 소수 등)가 권리 불평등을 상쇄하고 억압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근본적인 수단이다. 정부는 이주노조를 공격함으로써 평등을 향한 기세를 꺾고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인종적, 계급적 위계 안에서 그들의 위치에 머무르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불평등의 강화를 극복하기 위해 당장 우리 운동 내에서 이 불평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까지만 위원장, 라주 부위원장, 마숨 사무국장이 2007년 11월에 연행되었을 때, 이주노조는 민주노총 및 40여 다른 단체들과 함께 ‘이주탄압분쇄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결성하였다. 비대위는 처음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건물에서 농성투쟁을 시작하였고 이후 민주노총 건물로 옮겼다. 이 농성에 적을 때는 약 4~5명에서 많을 때는 15~20명의 이주노동자가 참여하였다. 이주노동자 대부분은 농성투쟁에 처음 참여하는 것이었지만 이번 농성이 세 번째인 이주노동자들도 있었다. 처음 참여하는 이들은 평등노조 이주지부나 명동성당 농성투쟁의 경험이 없는 새로운 조합원들이었다. 실제로 일부는 이주노동자 운동을 잘 모르기도 했다. 이주노조는 전략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민주노총 서울본부 및 다른 경험 있는 단체들에 의지했다. 비대위 집행위원회, 상황실회의에는 이주노동자보다 한국인이 더 많이 참석했고 한국인들이 이주노동자들의 의견을 주도하거나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농성장에 있는 대부분의 이주노동자들은 명백하게도 경험이 더 많은 한국 활동가들이 주도하는 투쟁에서 같은 발언권을 누리지 못했다. 그래도 많은 이주노동자들은 이주노조의 기반을 재건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주노조 지부와 분회 간부가 되었다. 농성의 결과로 이주노조는 100여명이 넘는 조합원과 연대단위들이 참여하는 성공적인 총회를 열었고,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했다. 앞으로 위험이 닥쳐올 것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도부가 앞에 나섰다. 토르너 위원장과 소부르 부위원장 체포 이후 긴장감이 더욱 확대되었다. 가장 경험이 많은 다섯 명의 활동가들이 사라진 후 노조 중앙 사무실에는 사무국장만 남게 되었다. 남은 사무국장은 헌신적인 활동가였지만 노조 중앙지도부 활동 경험은 없었다. 그 후로 표적 단속이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다시금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될 때까지는 당분간 한국인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안전과 이동의 자유는 물론이거니와 경험과 언어능력 상의 불평등이 농성투쟁 시기와 작년 11월 지도부 표적단속 이전 기간 동안보다 훨씬 커졌다. 그러나 또한 전반적인 자원과 역량은 훨씬 부족한 상황에서 강제단속에 맞서 이주노조를 방어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다. 한국인 활동가들은 지도력, 인력, 능력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이주노조에 대한 탄압을 비판하고 노조를 전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왔다. 한국인 동지들이 연일 계속되는 기자회견, 헌법소원, 소송, 국가인권위 제소 등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일상적인 노조활동을 지속하는 것을 보면 감탄스럽고 부끄럽다. 이겨내기 어려워 보이는 뜻밖의 상황에서도 그들의 확고한 헌신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 단체와 개별 한국 활동가들이 제공하는 자원에 의존함으로써 생기는 장기적인 효과에 대해 우려감이 들기 시작했다. 한국 활동가들이 일을 추진할 때 그들의 전문적 능력과 그들에게 편한 공간에 맞는 활동이 우선시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되면 이주노동자의 목소리와 목표는 뒤쪽으로 훨씬 멀리 물러나게 된다. 예컨대 국제연대차장으로서 내가 주되게 맡고 있는 활동 분야, 즉 국제 인권조약들과 UN, ILO 보고와 제소 메커니즘의 세부사항들이 이주노조 조합원과 간부들 다수가 파악하기에 얼마나 힘든 일인지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출입국관리법과 고용허가제의 대안적 개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그 내용을 토론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하려는 시도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여기에 드는 시간과 노력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이러한 중요한 과제들을 진행하면서, 우리는 가장 영향 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활동을 지도하도록 하는 의무를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의 “이주노동자 운동”은 다른 한국인들과 점점 더 많이 얘기하고 있지만 이주노동자 자신들과는 점점 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주노조의 활동과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해 신규 조합원들과 지도부가 주인 자격을 주장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러한 주인 자격에 대한 의식이 없이는 우리의 활동을 발전과 경험 축적의 기회로 전환시키는 것이 어렵고, 결국에는 경험 많은 한국 활동가들의 주도성만 강화하게 된다. 확실하게도 여기서 묘사한 경향이 항상 존재했는데, 대부분의 이주 센터와 지원 단체들은 이런 경향을 기껏해야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식하는 정도였고 최악의 상황에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여겼다. 이주노조는 사실 이러한 유형의 불평등을 인식하고 이에 맞서는 용기 있는 노력을 통해 형성되었다. 우리의 가장 경험 많고 훌륭하고 헌신적인 지도부들의 다수가 폭력적으로 추방된 후 문제의 경향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문제를 인식하는 한편 그 문제를 점검할 때 이주노조의 원래 목표, 즉 이주노동자들에 의한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조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는 것이 어느 때보다 필수적이다.(이주노조 규약에서 한국인들을 조합원과 선출 직위에서 배제하는 것은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표적단속 이후 한국인들이 숫자로나 경험으로나 중앙상황실을 주도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이러한 규약의 정신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해법? 우리 운동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의 효과와 싸우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한국 활동가와 이주노동자 활동가들 사이에서 조심스럽지만 솔직한 토론과 비판이 필요 할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필자의 능력을 넘어선다. 그러나 여기에서 개인적인 몇 가지 반성을 해 보겠다. 지난 6월에 홍콩에 있었을 때, 필자는 주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출신의 가사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몇몇 이주노동자 단체와 노조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이주노동자협회(Association of Indonesian Migrant Workers in Hong Kong, ATIK), 인도네시아이주노동자노동조합(Indonesian Migrant Workers Union, IMWU), 필리핀이주노동자노동조합(Filipino Migrant Workers Union, FMWU)을 포함하여 많은 조직들이 상근자도 없고 중심적 역할을 하는 홍콩 활동가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이 조직들을 지원하는 NGO의 소수 상근 활동가들은 이전에 가사 노동자였거나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에서 운동 경험이 있는 그 나라 출신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이 조직들이 감당하는 활동의 양은 더 많은 상근자들이 있거나 홍콩에서 오랜 경험을 가진 홍콩 활동가들의 많은 도움이 있는 경우보다는 적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헌신적인 지도력을 발전시키고, 비교적 많은 회원들을 조직하고(IMWU의 경우2000명 이상에 달한다)홍콩 사회에서 이주노동자 이슈에 관해 실질적인 정치적 행위자가 되는데 성공했다. 홍콩과 한국의 환경은 매우 다르고(홍콩에서는 강제단속이 없고 조직된 이주노동자들은 대부분 완전히 등록되어 있다), 필자가 한국 활동가들이 한국 이주노동자 운동에서 없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홍콩 조직들은 우리가 이주노동자 지도력의 더 큰 발전을 위해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사고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첫째, 우리의 활동과 일상 어휘에서 다음과 같은 어휘를 중심에 놓을 필요가 있다. “역량강화(Empowerment)”, “지도력 개발(leadership development)”은 동등한 노동권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원칙으로 삼아야 하고, 단속추방 중단과 고용허가제 폐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원칙과 목표를 수행함에 있어 우리는 한국 활동가들이 이주노동자로부터 ‘지도력을 끌어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해야 하고, 가혹한 탄압이 벌어지는 중에 이주노동자들이 이러한 지도력을 행사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말들의 의미에 대해 집단적 토론을 지속하지 않고서는 이를 그리는 것은 역시 어렵다. 그러나 생각해볼 만한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있다. 회의 구조를 바꿔서 일부 회의는 이주노동자의 언어로 하고 (불가피하게 부분적으로) 한국말로 통역하는 식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언어가 특권을 가지는 현실에 대응해서 이주노동자의 발언, 의견, 분석을 우선시 할 수 있는 하나의 구체적인 방법일 수 있다. 또한 이는 신규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이 현재의 회의 형식에 비해 더 비판적인 능력과 지도력을 개발할 수 있는 보다 편안한 공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게 하려고 노력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개요 파악, 추론, 기억 등과 같은 인식 과정을 얼마나 방해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새로운 지도부를 이주노조 지역 간부들과 조합원들, 지지자들 가운데에서 발굴하고, 그들이 이미 공동체 조직과 센터들에서 하는 활동을 더 알아가고 지원하며, 이주노동자들이 생각과 제안에서 도출된 활동을 한국 활동가들의 것보다 우선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주노조는 물론 더 폭넓은 이주노동자운동이 주력하는 활동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운동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젠더에 대하여 여성 이주노동자를 말해 본 적이 있는가? 머리말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기반이 취약해진 상황에서 이주노조가 시도하고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새로운 부문에서 조직화를 확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 다양한 국적을 지닌 이주노동자, 고용허가제 노동자, 여성 이주노동자를 조직하려고 한다. 활동가가 심각한 정도로 부족하고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이 없는 상황에서 이주노조의 여성 이주노동자 모임(우리의 일차적 조직화 방식)을 운영하는 것이 필자의 몫이 되었다. 여성 이주노동자 조직화와 “여성 이주노동자 모임”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할 때, 모호하고 분명치 않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것은 “여성 이주노동자”라는 범주를 만드는 순간 우리가 특정한 경험을 정의하고 특정한 정체성을 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흔히 본국의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 혹은 딸, 성희롱의 대상, 육체적으로 약해서 이주노동자들의 가혹한 노동조건에 의해 더욱 억압받고, 가장 불쌍한 희생자를 여성 이주노동자의 본질로 여기곤 한다. 이러한 정의들은 진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복수적이고 다양한 경험의 가능성을 즉각적으로 대상화하고 봉쇄한다. 심지어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경험 중에는 여성에 대한 진보적 관념과 들어맞지 않는 것도 있다. 여성모임 참가자들과 교류하면서 여성의 신체를 가진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여러 형태의 차별과 곤란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참가자들은 이러한 고정관념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들 중 상당수가 결혼하지 않았고 당분간은 생각조차도 않고 있다. 수원에 있는 한 공장의 여성들은 주간작업보다 야간작업을 선호하고, 14시간 교대로 일하고 일요일에 일하는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불만이 적다. 다른 한편으로, 남성 이주노동자 상담 사례를 몇 건 다루었는데 그들은 동일한 노동조건을 견딜 수 없어서 작업장을 옮기고 싶어 했다. “여성 이주노동자” 범주에 대해 실제로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는 12월에 이주노조에 가입한 K와 알게 되면서이다. K에게서 즉시 감명을 받았는데, 야간조로 일하면서 낮에는 영어를 가르치고 일요일도 거의 쉬지 못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을 위해 시간을 내기까지 한다. 그는 공장에서 노동조건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친구들을 이주노조 조합원과 여성모임 참가자로 조직해서 자기 집에서 모임을 개최하는 등 이주노조 활동에 빠르게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열정은 이주노조 다른 상근자들도 곧 주목했다. 우리는 그가 여성 이주노동자를 대표해서 발언하고 글을 쓰고 여성모임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공식적인 여성모임이 열리기 약 한 달 전에 K가 나에게 전화해서 무언가 불편한 것이 있다며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다. 우리가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내가 이성애자가 아닌지 알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레즈비언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래요.”라고 얘기했다. 그때서야 필자는 여성 젠더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그것을 강요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K는 여성이면서 남성을 지향하는 트랜스젠더였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리고 언젠가 수술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외모로 드러내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대 K의 경험은 여성의 신체를 가진 사람이 항상 여성 정체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K의 정체성을 훨씬 더 일찍 감지했어야 했다. 우리가 여성모임에 대해 얘기할 때 K의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그러면 왜 그가 여기 있어요?”라고 물은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리고 한번은 내가 K를 일컫기 위해 언니에 해당하는 필리핀 단어를 사용했을 때 K는 “아니요. 그건 맞지 않아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필자는 뉴욕에 있을 때 많은 성소수자 단체들과 일하는 동안 이성애중심주의, 동성애혐오, 트랜스젠더 혐오에 대해 훈련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성적/젠더 정체성에 대해서 짐작하면 안 된다고 배웠다. 연대 공간에서 우리는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이 선호하는 대명사를 얘기하곤 했다(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월산입니다. 저는 이주노조 국제연대 차장입니다. 저는 여성 대명사를 씁니다).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자마자 왜 이러한 원칙을 잊어버렸을까? K는 마치 어떤 대표적인 여성 이주노동자인 것처럼 놀랍게도 나의 요청을 이해해왔다. 그는 여성이 처한 억압과 여성 이주노동자의 특수한 경험이 여성모임의 중요성을 더한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여성 친구들 사이에서 친구이자 지지자로서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워준다. 그러나 가끔 K는 여성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불편하고 명예멤버로서 참여한다는 것을 필자에게 상기시킨다. 이러한 경험은 필자에게 반성과 자기비판을 하게끔 했다. 여성 이주노동자 정체성을 가진 활동가를 찾으려는 나의 열망이 K가 일상에서 대면하는 억압을 반영하는 억압적인 방식으로 그러한 정체성을 그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해법 여성모임을 어떻게 지속하고 동시에 K의 경험과 정체성을 인정하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은 어려운 과제다. 이주노조나 대부분의 한국 진보운동 내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관한 집단적인 이해가 부족하고, 심지어 이를 위한 기본적 개념조차도 없다. 필자는 여성모임 참가자들과 어느 정도 (그리고 K의 동의하에) 논의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젠더 정체성과 젠더 유동성(gender-fluidity)을 제기할 공간이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K와 함께 나는 그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다른 이들과 함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성소수자 공간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를 통해 K가 혼자가 아니고 한국 이주노동자 사이에 넓은 범위의 젠더와 성적 정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성모임 안에서 우리는 그 공간을 대략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간략하게 논의했다. 그것은 참여하는 K의 친구가 K의 정체성에 대해 짐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가능했다. 이것은 한 개인의 이야기지만 필자에게 그 경험은 젠더 정체성이 얼마나 유동적인지 그리고 여성모임이나 이주노조에 다른 트랜스젠더가 없더라도(있을지도 모르지만) 여성(또는 남성) 이주노동자라는 특정한 생각에 들어맞지 않는 범위의 정체성과 경험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결론 K의 사례는 인종과 마찬가지로 젠더가 억압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부과될 수 있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것을 재확인해 준다. 젠더와 인종 양자가 조직화의 기반이 되는 것은 그것들이 억압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쓰면서 필자는 인종과 젠더구조 혹은 인종과 젠더 분할선을 따르는 조직화가 대등하다고 간단히 결론을 이끌어내는 실수를 바라지는 않는다. 사실 위의 두 가지 이야기는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다. 첫 번째 것은 인종화된 그룹 사이의 차이와 불평등을 보다 명확하게 인정할 것을 요청하고 두 번째 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관념을 흔들고 젠더 유동성의 현실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궁극적 목표가 계급 자체의 폐지에 있듯이 인종기반의 투쟁의 목표는 인종적 위계를 폐지하고 인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철폐하는 것이다. 그러면 젠더 기반의 투쟁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종과 젠더 분할선을 따라 조직하는 것은 권리, 사회적 신분과 권력의 불평등과 이러한 불평등이 경험을 형성하는 방식을 인식하고 명명하는 것에 기반을 두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이러한 범주를 선천적이거나 고정된 것으로 여기면 그것이 구성되는 성질과 바뀔 수도 있는 가능성을 망각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K가 남성 또는 여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나만의 가정들을 넘어서는 길을 제시해 준 것처럼, 전 사무국장이 마숨 동지는 최근에 이주민/한국인의 구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글을 썼다. “저를 외국인, 이주노동자로 부를 때 저는 한국 경제에 도움 되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사장을 먹여 살리고 공장의 기계를 돌리고 한국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3D업체는 한국 경제의 없을 수 없는 산업입니다. 그 업체에 이주노동자 없이 기계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한국말 배우고, 한국 문화도 배우고 한국사회를 아는 사람인 저를 어떻게 외국 노동자라고 불렀나? 저는 외국인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지만 한국의 노동자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보더라도, 마숨 동지는 한국의 노동자로서 삶을 경험했고, 자신의 투쟁이 한국 노동자의 투쟁과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를 한국 노동자로 여겼다. 이주노조를 만들 때 “이주노동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한국 활동가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규약을 만든 것은 필요한 것이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말을 하고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다수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사회, 정부, 진보운동에 도전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집단적 힘과 지도력을 발전시키는 공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은 이주노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의 궁극적 목표는 언젠가 마숨 동지의 꿈 즉, 그와 같은 사람 역시 한국 노동자로 인정받겠다는 꿈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 운동 내부에서부터 이주노동자들을 한국 노동자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주노동자로부터 지도력을 이끌어 내거나 지도력을 이주노동자들에게 부여하며, 지도력 개발과 역량강화를 실천한다면, 우리는 이주노동자운동 내에서 권력 차이를 평등화하고 한국 활동가의 실질적인 한계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한국인/이주민이라는 이분법을 깰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여성들의 공간이, 그리고 여성들의 구체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이주노동자운동 내에서 지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여성”이라는 범주가 어떻게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는지, 그것이 여성 억압의 기초인 젠더 이분법에 도전하는 우리의 노력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인식해야 한다고 믿는다. 덧붙여, K의 경험이 보여주듯이, “여성”이라는 범주의 설정은 그러한 이분법에 이미 도전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여지를 주지는 않는다. 성소수자의 정치학은 적어도 이러한 이분법에 부분적으로 도전하기 때문에, 여성해방을 위해 성소수자로서 조직하는 것이 여성으로서 조직하는 것만큼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처럼 어떤 점에서 우리는 이주노동자운동 내에서 성소수자 이슈에 대응하기 위한 개념을 익히고 경험을 배워서 젠더에 기초한 억압에 대항하는 우리의 투쟁에서 그것들을 우리의 디딤돌로 삼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7월 비공식 각료회의, 세부원칙 합의 도출 실패 WTO 도하개발의제(DDA) 협상을 타결하려는 또 한 차례의 시도가 좌초되었다. 지난 7월 21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TO 비공식 각료회의는 농업, 비농산물시장접근, 서비스 등 도하개발의제의 주요 세 분야의 세부원칙을 확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파스칼 라미 WTO 사무총장이 제출한 초안을 바탕으로 무역협상위원회와 그린룸 회의(소규모 비공식회의), 주요 7개국 회의(G7-미국, 유럽연합, 브라질, 인도, 호주, 일본, 중국)를 번갈아 진행하며 각국 간의 입장 차이를 좁혀 최종 세부원칙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라미 사무총장은 7월 29일 153개 전 회원국 협상대표가 참가하는 무역협상위원회에서 협상이 결렬되었음을 선언했다. 현재 WTO 협상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우루과이라운드에 이어 더 많은 분야를 포괄하고, 무역 자유화 수준을 훨씬 높인 새로운 무역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WTO의 구상이 합의 도출에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WTO 4차 각료회의에서 개시된 도하개발의제는 2005년 말 타결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2003년 5차 각료회의에서 협상의 기본골격과 구체 일정을 마련하려던 계획이 무산된 후 2004년 7월 비공식 각료회의를 통해 기본골격을 타결했다. 그러나 2005년 홍콩에서 열린 6차 각료회의에서 정한 각국의 이행계획서 제출 시한이었던 2006년 7월에는 라미 사무총장이 협상의 잠정 중단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2009년 말 라미 사무총장의 임기 만료 및 올해 말~내년 초에 이루어질 미국 대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개최, 인도 총선 등으로 협상이 원활히 진행되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협상의 진척정도에 비해 무리하게 소집된 이번 비공식 각료회의에서도 다자간 무역협상이 처한 교착상태를 돌파하지는 못했다.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이토록 난항을 거듭하는 것은 이 의제가 가지는 모순 때문이다. 도하개발의제는 “무역 자유화로 각국의 경제적 발전을 확대하고 그 혜택을 전 세계 민중이 고루 누리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표방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연합은 막대한 농업 보조금을 고수하며 자유무역의 원칙을 스스로 거스르면서도 개도국에게는 이를 통해 값싸게 생산한 농산물을 덤핑하기 위해 관세 감축을 요구하고 있다. 비농산물시장접근 협상을 통해 추진하는 공산품 관세인하 역시 관세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는 개도국일수록 더 큰 비율로 급속하게 관세를 감축하는 안을 추진하고 있다. 따라서 각국의 발전을 촉진하기는커녕 개도국의 유치산업을 세계적인 경쟁에 내몰아 실업을 유발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개도국에 부여되는 우대조치와 관련된 여러 문제들이나, 서아프리카 면화 4개국이 요구하고 있는 미국 정부의 면화 보조금 감축 등은 논의 테이블에 오르지도 않고 있다는 점도 큰 쟁점사항이다. 결국 개발은 개도국과 최빈국들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명분이었을 뿐이며, 선진국의 입장만 대폭 반영되고 있다는 비판이 WTO 회원국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개도국과 최빈국들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협상 결렬의 원인 미국은 농업 분야에서 인도가 무리한 주장을 고수했기 때문에 이번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주장한다. 칸쿤 각료회의 무산 이후 협상의 교착상태가 계속되자 결렬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많은 나라들은 미국의 태도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주장한다. 대선을 코앞에 둔 부시 행정부가 도하개발의제 협상 타결의 중요한 고리인 농업보조금 감축을 이행할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 협상은 지난 2004년 7월 일반이사회와 2005년 홍콩 5차 각료회의를 거쳐 마련된 기본골격에서 더 나아가 관세 및 보조금 감축의 구체적인 수치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그 중 특별긴급관세(SSM) 발동 요건이 막판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특별긴급관세는 관세감축 등 시장개방 확대에 따라 농산물 수입이 급증할 경우 추가적인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조치를 말한다. 인도는 특별긴급관세 그룹(G33)의 입장을 대변하여 이 조치가 실효성을 갖기 위해서 해당연도 수입량이 이전 3개년 평균수입량(발동기준물량)의 110%를 초과할 때부터 우루과이라운드 양허관세보다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도는 이것이 농산물 수입 확대로 인한 개도국 농민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G7이 마련한 안대로 발동기준물량의 140%이상이 되어야 특별긴급관세 조치를 부과할 수 있으며 초과 수준도 훨씬 낮게 책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특별긴급관세 발동으로 인해 정상적인 무역흐름이 방해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미국과 인도로 대표되는 G33과 G7의 입장이 계속 대립하자 유럽연합은 우루과이라운드 양허관세보다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경우를 2가지로 나누어 (115~120%와 135~140%) 각기 다른 수준의 양허관세 초과범위를 설정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인도는 이를 바탕으로 조율안을 제시했으나 미국은 여기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 결국 협상 결렬이 선언되었다. 특별긴급관세 문제가 결렬 직전 부각되어 직접적인 결렬요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잠복된 쟁점들이 많았다. 비농산물시장접근 분야의 ‘분야별자유화’ 문제 역시 중대한 쟁점이었다. 개도국일수록 높은 비율로 관세를 감축하도록 하는 일반적인 관세감축 외에 특정 공산품 분야를 선정해서 관세를 철폐하는 것을 분야별 자유화라고 하는데, 이는 원칙적으로 회원국의 자발적 의사에 따르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G7이 마련한 안은 주요 회원국들이 최소한 2개 이상의 분야별 자유화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여기에 참여하는 개도국은 관세감축에서 신축성을 부여받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중국과 인도는 G7의 안이 자발적 참여라는 원칙을 거스르는 것이며, 이를 관세감축과 연계시키는 것 역시 2005년 홍콩의 합의를 벗어나는 것임을 지적하며 반대했다. 면화 보조금 감축 역시 중대한 문제였다. 면화수출이 국가 소득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아프리카 4개국(말리, 부르키나 파소, 차드, 베넹)은 정부로부터 막대한 보조금을 지급받는 미국 농기업의 면화 시장 독점으로 소득이 1년에 10억 달러씩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미국의 면화보조금을 감축할 것을 줄곧 요구해왔다. 그러나 미국은 자국의 면화보조금 감축문제를 중국의 면화관세감축 문제와 연계시키며 실질적인 협상을 회피했다. 즉 중국이 면화를 개도국 특별품목으로 지정하여 관세감축을 하지 않는다면 자국의 면화보조금 감축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미국은 협상 결렬의 직접적인 원인이 특별긴급관세에 대한 인도의 무리한 요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G33뿐만 아니라 주로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로 구성된 여타의 협상그룹들도 지지한 입장이었다. 더불어 유럽연합이 제시한 중재안을 거부한 것은 오히려 미국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특별긴급관세 문제를 크게 부각시키면서 면화보조금 감축 문제에 관한 논의가 본격화되는 것을 사전에 회피하려는 것이 미국의 의도였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지난 5월 22일 미국에서는 2012년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2002년 농업법의 주요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농업보호의 수준을 한층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2008년 식품.보전.에너지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는 ‘관세감축’, ‘국내보조금의 실질적인 감축’, ‘수출보조금 철폐’라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의 원칙을 크게 훼손하며 면화보조금을 비롯한 농업보조금을 유지/확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은 이 법에 반하는 내용의 협상을 타결할 의지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WTO를 넘어 대안적 무역체계로 도하개발의제 협상 개시 후 지난 8년 동안 이 협상의 모순은 거듭 확인되어왔다. 시애틀에서도, 칸쿤에서도 미국과 유럽연합은 도리어 스스로 자유무역의 원칙을 훼손하며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여러 개도국과 최빈국 정부는 도하개발의제가 오히려 불평등을 심화한다며 저항했다. 여러 차례 협상이 결렬되고 좌초되면서 온갖 회유와 협박, 밀실협상만이 도하개발의제를 추동하는 힘이 되고 있다. 이제는 그 누구도 WTO 도하개발의제가 완성할 새로운 무역체제가 전 세계 민중에게 부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환상을 믿지 않는다. WTO의 자유무역은 국경을 넘나들며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초민족자본의 자유만을 보장할 뿐 전 세계 민중에게는 재앙만을 가져다주었다. 초국적 농기업이 지배하는 농산물 무역체제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농업협정은 농민을 농촌에서 쫓아내고 민중의 식량주권을 파괴했다. 서비스협정은 공공서비스 사유화를 부추기며 이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박탈한다. 비농산물시장접근 협상은 개도국의 탈산업화를 조장하고 실업과 빈곤을 확대하고 있다. 지적재산권협정은 초민족자본에 지식과 기술에 대한 무한한 독점권을 부여하며, 종자를 비롯한 농산물 투입재와 농업 지식에 대한 농민의 권리, 민중의 의약품 접근권 등을 박탈하고 있다. 2008년 상반기 한국사회를 휩쓸었던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논란은 이러한 WTO 무역체제가 초민족 농업자본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 혈안이 되어 민중의 식량주권과 건강을 내팽개친다는 사실을 여실히 확인시켜주었다. 뿐만이 아니다. WTO가 획책한 농산물 무역자유화는 세계의 수많은 민중을 굶주리게 만든 식량위기를 낳았다. 초민족자본의 이익을 전적으로 대변하면서 민중의 권리를 박탈하는 도하개발의제 협상은 현재와 같은 회유와 협박, 밀실협상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타결될 수 없을 것이다. 1999년 시애틀 3차 각료회의를 계기로 개시되어 꾸준히 성장해온 대안세계화운동은 WTO가 내세우는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 아니라 진정 민중에게 이익이 되는 무역체계의 원칙을 제시했다. 대안세계화운동은 국제적인 무역이 실질적인 발전으로 귀결되기 위해서는 초민족자본의 이익에 일차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필요를 바탕으로 해아 하며 노동권, 식량주권, 필수서비스(교육, 의료, 에너지, 물, 의약품)에 대한 민중의 접근권 등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사회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WTO의 자유무역체제가 낳은 현재의 위기는 대안세계화운동이 제시하는 국제적인 무역의 새로운 토대 위에서만 극복 가능할 것이다. 이는 다자간 협상이 위기에 빠졌으니 한미 FTA를 비롯한 양자간 무역자유화 협상에 주력해야 한다는 이명박 정부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박스1%]
카프카스 전쟁의 거대한 위험 지난 8월 7일 그루지야 내 남(南)오세티야 자치공화국을 둘러싼 민족갈등이 러시아와 그루지야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발발 몇 주 전부터 그루지야 정부와 남오세티야 사이의 크고 작은 군사적 갈등이 고조되었는데, 친미 성향의 미하일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은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휴전 제안 몇 시간 뒤에 그루지야 정부가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발리에 폭격을 가했고, 이 폭격으로 남오세티야의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사망했다.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에 대한 안전보호를 명분으로 즉각 그루지야 국경을 침공하였고, 전투기 공습과 지상군 공격으로 개전 3일 만에 그루지야 영토의 절반을 점령했다. 다급해진 그루지야는 미국과 서방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들은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제재하기 위한 뚜렷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루지야의 휴전제의는 러시아로부터 거부당했고, 수도 트빌리시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중재로 가까스로 휴전을 합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철군을 지연하며 그루지야 내 친러 성향의 자치공화국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공화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전쟁이 남긴 위기 이번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막강한 화력으로 그루지야를 순식간에 초토화시켜버린 러시아가 무엇을 노리고 그루지야에 침공했는지에 집중되어 있다. 그루지야는 1991년 소련에서 독립했고 2003년 ‘장미혁명’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대표적인 미국의 동맹국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침공했다는 사실은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미국의 패권적 지위에 대한 러시아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것이다. 그루지야는 카스피해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에너지 송유관의 요충지인 카프카스 지역의 핵심에 위치해 있다는 점. 그리고 러시아는 그루지야 침공을 통해 카프카스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여 서유럽으로 유입되는 에너지 통로를 통제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 또한 러시아가 이 전쟁을 통해 주변의 구 소련 소속 국가와 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국가들에게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드러냄으로써 지역 패권 의지를 명백히 표명했다는 점 등이 부각되고 있다. 나아가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서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며 중동지역까지 그 패권을 뻗어나가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전후 점령과정에서 계속되는 저항과 분쟁으로 난관에 봉착한 나머지 중동지역에서 ‘대테러전쟁’의 명분과 실리를 확고하게 챙기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더해 최근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침공한 지 열흘 만에 미국의 대테러전쟁의 거점인 파키스탄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사임한 사건, 또한 몇 해째 해결되지 못하는 이란 핵 프로그램 추진 문제 등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서의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가 전례 없이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과 러시아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군사적 대결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신냉전’의 도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미국이 폴란드와 미사일 방어(MD)협정을 체결하자 러시아는 냉전 종식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겨냥해 발틱 함대 소속 잠수함과 전폭기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또한 미국이 그루지야에 대한 인도적 지원 물자 수송명분으로 흑해에 이지스 급 군함을 배치한 것에 대해 러시아는 그루지야의 주요 석유 수출항을 봉쇄하고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통제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지역 패권을 향한 러시아의 움직임과 미국의 ‘대테러전쟁’의 정치적 명분약화와 군사력의 부침은 향후 새로운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미국의 ‘대테러전쟁’으로 들쑤셔진 중동지역의 혼탁한 정치지형이 이란, 시리아로의 확전 가능성으로 이어지고 있다면, 카프카스 지역에서 충돌하고 있는 민족, 인종간의 극심한 갈등과 정치적 불안정성은 카스피해 유전개발과 송유관 지배를 둘러싼 미국-러시아 간 경쟁과 혼합되어 또 다른 전쟁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카프카스, 민족 분쟁과 지정학적 갈등의 무대 이번 전쟁의 진원지인 남오세티야 공화국은 압하지야, 아자리야 공화국과 함께 그루지야 영토 내에서 러시아의 강력한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자치주로서 친미국가인 그루지야 정부와 역사적으로 갈등관계였다. 그루지야가 있는 카프카스(코카서스) 지역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동양과 서양, 유럽과 아시아, 북반부와 남반부,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교차하는 다양한 종족, 종교, 문화의 경계들이 응집되어 있다. 그런 만큼 오래 전부터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아랍을 포함하여 터키,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민족들이 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주도권 싸움을 벌여왔다. 카프카스는 과거 제정 러시아 시기부터 소련 시기까지 러시아의 지배력이 집중되었던 곳이며 소련 해체 후 힘의 공백상태에서 잠시 영향력을 상실하기는 하였지만, 현재 에너지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역내 송유관 체제를 장기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 러시아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주요 거점지역이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력들에게도 카프카스는 중앙아시아 지역과 더불어 유라시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교두보인 동시에 에너지 자원의 공급지 및 파이프라인의 경유지로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서방세계는 이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배타적인 영향력을 방지하고, 카스피해 및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한 요충지로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20세기 소련에 편입된 이 지역의 다양한 중소 국가들은 1991년 소련 해체기에 주권국가로 독립하였다. 그러나 대내적으로는 정치, 경제, 사회적 불안정이 지속되었고, 대외적으로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관계에 휘둘리면서 아직도 제대로 된 주권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국가인 그루지야는 19세기 러시아 제국에 병합된 이후, 그 내부의 다양한 민족공동체들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무차별적인 강제이주정책이 진행되면서 민족, 종족, 종교 간의 무수한 갈등의 역사를 끌어안게 되었다. 1921년 그루지야와 인근 자치주들이 모두 소비에트화 됨에 따라 압하지야 공화국을 비롯한 자치 국가들은 잠시나마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1년 그루지야 출신 스탈린의 집권 이후, 과거 그루지야 영토에 포함되어 있던 자치주들이 일방적으로 그루지야로 합병되었고, 1950년대까지 강제적인 그루지야화 정책이 시행되었다. 남오세티야, 압하스 민족에 대한 의도적인 차별 및 탄압이 자행되고, 민족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민족적 특성 무시되고, 이 지역에 대한 그루지야인들의 대량이주 정책이 펼쳐졌다. 이는 소련 민족정책 전반의 문제였는데 소련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다양한 민족, 종교적 갈등의 문제가 범이슬람 또는 범터키계의 광범위한 동일성의 연대로 확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소수 민족이나 혹은 부족규모의 민족 집단에게도 독립적인 민족의 지위를 부여하여 행정단위를 세분화하였다. 가령 캬바르지노-발카르 지역과 카라차이 지역의 경우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는 민족에게 아랍어를 금지하고, 인종과 언어가 주변지역과 다른 카프카스 남부지역의 일부를 아제르바이잔으로 통합하여 아제르바이잔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도록 하였다. 특히 스탈린 집권시절 강행된 인종 강제추방 조치에 의해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의 많은 민족들이 역사적인 거주지역으로부터 강제추방을 당했고 스탈린은 강제추방이 자행된 지역의 천연자원 및 에너지 자원들을 국유화하고 그곳으로 새로운 민족들을 이주시켜 인위적인 자치 국가를 만들었다. 나고르노-카바르흐의 경우도 소련에 편입될 당시 역사적으로 구분되었던 종교와 민족과는 상관없이 행정구역이 정해진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강제조치들은 다민족 사회에서 정치세력화의 핵심기반인 인구 구성비의 인위적인 변동을 발생시켰고, 따라서 거주 민족은 한순간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겨난 상대적 박탈감과 피해의식은 강력한 민족 분리주의를 생성시켰고 유혈충돌을 무릅쓴 민족 분리, 독립운동을 촉발하게 된다. 20세기 말 냉전이 종식되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카프카스 지역은 ‘힘의 진공상태’ 속에 패권 장악을 위한 강대국들의 ‘거대한 체스 게임판’이 되었다. 따라서 그루지야와 같은 신생독립국은 새로운 대내외적 환경변화에 부합하는 국가발전전략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그루지야의 선택은 미국 및 서방세계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루지야는 내부의 수많은 민족 갈등을 봉합한 채 ‘탈러시아 친서방 정책’을 구사하는 친미국가가 되었다. 2003년 11월 ‘장미혁명’을 통해 집권한 친미 성향의 사카쉬빌리 대통령은 ‘그루지야의 완전한 통합정책’을 공세적으로 추진하면서 자국내 3개의 자치 공화국에 대한 적대정책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이들로 하여금 ‘탈 그루지야 독립선언’ 및 ‘러시아로의 병합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분리 독립 운동의 흐름에는 카프카스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할 수 없는 러시아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었다. 무엇이 폭력을 부르는가 카프카스 지역의 불안정한 정치경제적 권력 관계 속에서 그루지야의 국가통합 정책은 독립 국가의 존립을 위한 주요 과업이다. 그러나 그루지야 정부정책과 3개의 자치공화국의 분리 독립운동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미국과 러시아의 지역 패권 경쟁은 그루지야의 국가 통합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루지야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미국과 서방의 자본의 이해에 따라 그루지야 정부는 러시아의 지역패권을 견제하는 것을 목표로 내외부의 민족 갈등을 진압해야한다는 강박을 버릴 수 없다. 또한 러시아의 관광, 무역업에 깊숙이 의존하고 있는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열악한 경제 상황은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분리 독립운동을 확산해 나갈 것을 요구받고 있다. 따라서 남오세티야, 압하지야와 같은 자치공화국은 유혈충돌과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그루지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러시아로 귀속되고자 한다. 반면에 그루지야는 무력충돌 및 경제봉쇄와 같은 강경책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카프카스 지역에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을 타고 일시적으로 잠복되어 있는 수많은 갈등요인들이 시간이 갈수록 위기를 더해가고 있다. 체첸 분쟁을 비롯하여 아르메니아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 영토 안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의 인종갈등, 그리고 압하지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러시아 북카프카스 지역의 압하스 민족의 군사적 도발 가능성, 또한 남오세티야와의 통합을 목표로 러시아와 공조하는 북오세티야 독립운동의 흐름 등 “언어와 민족의 전시장”인 카프카스에서 폭발하게 될 분쟁요인은 무수히 많다. 만일 그루지야 정부가 남오세티야 자치 공화국의 분리를 용인하게 된다면, 이는 필경 친 러시아 성향의 아자리아와 압하지야를 자극하여 그루지야는 사실상 분리주의의 도미노 현상으로 국가붕괴의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사태는 순식간에 그루지야를 넘어 카프카스 전 지역의 민족, 인종의 분리주의 운동을 자극할 것이다. 따라서 그루지야 정부는 공식적으로 ‘국가 통합성 유지’의 목표를 버릴 수 없다. 반면 러시아는 체첸의 분리 독립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그루지야 자치 공화국들에 대해 불분명한 정치적 입장과 모순된 행동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거대한 위험 인종, 종족전쟁의 화약고와도 같은 카프카스 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성은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 냉전 시기에는 미-소 진영 간의 팽팽한 이데올로기 대결로 인해 사회, 문화적 갈등이 봉합되었다. 반면에 탈냉전과 소련 해체 이후 중앙정부 및 국가의 행정력이 약화되고, 중앙차원의 자원분배 및 경제지원이 감소하면서 경제상황이 악화되면서 내재되어 있는 갈등요인이 폭발하고 있다. 이에 더해 오늘날 카리브해 연안과 카프카스 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경쟁이 심해져 역내 갈등을 부추기고 더욱 큰 군사적 대결과 충돌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제정 러시아와 소련의 강압적 민족분리, 통합정책의 비극적 산물이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하에서 ‘정상 국가’의 존립과 민족공동체의 생존을 목표로 하는 치열한 경쟁이 인종적, 종교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만성적인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불안정에 노출되어 있는 카프카스 지역의 대다수 민족국가 및 공동체들은 에너지 파이프라인과 이 지역을 지배하는 강대국의 이해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경제 재건과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명분삼아 강대국 간의 대리전을 수행하는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가장 거대한 위험은 오늘날 이 지역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이 군사적 대결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에너지 자원의 보고이자 유럽을 향하는 송유관이 교차하는 남부 카프카스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위한 사활적인 요충지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패권 경쟁이 간단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극심한 민족분쟁의 불씨가 세계 최강대국들의 군사적 긴장에 의해 점화된다면 서로 반목하고 있는 민족들의 증오와 분노는 돌이킬 수 없이 증폭될 수 있다. 카프카스 민중들을 위한 길 교전 6일 동안 남오세티야와 그루지야에서 민간인 2,100명이 죽고 3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카프카스 지역의 역사적 상흔의 대가와 강대국들의 지역패권을 향한 경쟁은 필연적으로 인민에 대한 공격을 낳을 것이다. 이로 인해 민족적 반감과 증오는 한층 더 심해질 것이고 이를 또 다시 활용하는 ‘동일성의 정치’는 극단적 폭력의 순환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언어와 민족, 그리고 종교의 다양성이 반드시 중앙정부와 혹은 주변지역 및 국가와의 갈등을 빚어내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러한 다양한 동일성들이 한 지역에 공존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역사적 맥락과 오늘날 벌어지는 세계화의 폭력적 통치방식에 있다. 따라서 언어와 인종,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한 민족분리,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으로는 인종청소와 학살이라는 더 큰 재앙을 막을 수 없다. 이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민족, 종족, 종교의 배타적 동일성 때문에 벌어지는 ‘새로운 전쟁’이 ‘전장’과 ‘적의 대상’을 무한히 넓혀가고 있는 미국의 ‘대테러전쟁’과 조우할 때, 그 야만과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가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늘날 세계화가 주창하는 선별적인 포섭과 배제의 논리, 그리고 ‘무한 전쟁’의 악순환 속에 수많은 인민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 카프카스 민중들을 위한 유일한 길은 협소한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에서 벗어나 국경을 초월하는 연대를 도모하는 것, 그리고 오랜 역사적 갈등을 분리주의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상호간의 갈등과 반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의 연합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계화와 아시아에서의 여성 이주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연구보고서(2005) <이주의 여성화와 이주여성인권>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10주년 기념 아시아 이주여성 국제포럼(2005) 원문입니다.
<세계화와 아시아에서의 여성 이주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연구보고서(2005)
<이주의 여성화와 이주여성인권>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10주년 기념 아시아 이주여성 국제포럼(2005) 원문입니다.
코카서스 전쟁의 거대한 위험 숭구르 사브란 Sungur Savran (이스탄불의 신문 ‘노동자투쟁’의 편집자) www.iscimucadelesi.net
코카서스 전쟁의 거대한 위험
숭구르 사브란 Sungur Savran (이스탄불의 신문 ‘노동자투쟁’의 편집자)
www.iscimucadelesi.net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이 남긴 위기 지난 8월 7일, 그루지야 내 남(南)오세티야 자치공화국을 둘러싼 민족갈등이 러시아-그루지야 전쟁으로 발생하게 되었다. 전쟁은 몇 주 동안 그루지야 정부와 남오세티야 사이의 크고 작은 군사적 갈등이 고조되던 중, 친미 정권인 미하일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이 휴전을 제안한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루지야 정부가 남오세티야의 수도 츠힌발리에 폭격을 가한 행위로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남오세티야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에 대한 안전보호’의 명분으로 즉각 그루지야 국경을 침공하였고, 전투기 공습과 지상군 공격으로 개전 3일 만에 그루지야 영토 절반을 점령하게 된다. 다급해진 그루지야는 미국과 서방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들은 러시아의 군사적 개입을 효과적으로 제재하기 위한 뚜렷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루지야의 휴전제의는 러시아로부터 거부당하였고, 수도 트빌리시 함락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중재로 가까스로 휴전을 합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현재까지도 철군을 지연시키며, 그루지야 내 친 러 성향의 자치공화국인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공화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전쟁이 남긴 위기 이번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들은 막강한 화력으로 그루지야를 순식간에 초토화시켜버린 러시아의 침공행위가 무엇을 노리는지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과거 소련의 지배로부터 독립한 국가로서, 중앙아시아에서 대표적인 미국의 동맹국임을 자임하는 그루지야에 러시아가 무력침공을 감행했다는 사실은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미국의 패권적 지위에 대한 러시아의 ‘새로운 도전’이라는 것이다. 그루지야는 에너지 송유관 라인의 요충지인 카프카스 지역의 핵심에 위치해 있다는 점. 그리고 러시아는 그루지야 침공을 통해 카프카스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하여 서유럽으로 유입되는 에너지 통로를 통제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 또한 러시아가 이 전쟁을 통해 주변의 구 소비에트 연방 소속 국가 및 과거 소련의 지배하에 있던 국가들에게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의 힘을 드러냄으로써 지역 패권 의지를 명백히 표명했다는 점 등이 부각되고 있다. 나아가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서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며 중동지역까지 그 패권을 뻗어나가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전후 점령과정에 대한 역량 및 군비문제로 계속되는 난관에 봉착한 나머지, 중동지역에서 ‘대테러전쟁’의 명분과 실리를 확고하게 챙기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더해 최근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침공한 지 열흘 만에 미국의 대테러전쟁의 거점인 파키스탄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사임한 사건, 또한 몇 해째 해결되지 못하는 이란 핵 프로그램 추진 문제 등, 중동.중앙아시아에서의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가 전례 없이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과 러시아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군사적 대결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新냉전’의 도래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미국이 폴란드와 미사일 방어(MD)협정을 체결하자 러시아는 냉전 종식이후 처음으로 미국을 겨냥해 발틱 함대 소속 잠수함과 전폭기에 핵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또한 미국이 그루지야에 대한 인도적 지원 물자 수송명분으로 흑해에 이지스 급 군함을 배치한 것에 대해 러시아는 그루지야의 주요 석유 수출항을 봉쇄하고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을 통제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이처럼 그루지야 전쟁을 기화점으로 드러나게 된 러시아의 지역 패권을 향한 움직임, 그리고 미국의 ‘대테러전쟁’의 정치적 명분약화와 군사력의 부침은 향후 새로운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미국의 ‘대테러전쟁’으로 들쑤셔진 중동지역의 혼탁한 정치지형이 이란, 시리아로의 확전의 위험으로 이어지고 있다면, 카프카스 지역에서 충돌하고 있는 민족, 인종간의 극심한 갈등과 정치적 불안정성은 카스피 해 유전개발과 송유관 지배를 둘러싼 미국-러시아 간 경쟁과 혼합되어 또 다른 전쟁의 비극을 예고하고 있다. 카프카스, 돌이킬 수 없는 증오의 땅 이번 전쟁의 진원지인 남오세티야 공화국은 압하지야, 아자리야 공화국과 함께 그루지야 영토 내에서 러시아의 강력한 정치.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자치주로서 친미국가인 그루지야 정부와 역사적으로 갈등관계에 놓여있는 민족 분쟁지역이다. 그루지야가 있는 카프카스(코카서스) 지역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동양과 서양, 유럽과 아시아, 북반부와 남반부,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이 교차하는 다양한 종족, 종교, 문화의 경계들이 응집되어 있다. 그런 만큼 초기 역사에서부터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아랍을 포함하여 터키,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민족들이 이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주도권 싸움을 벌여왔다. 과거 제정 러시아 시기부터 소비에트 연방 시기까지 러시아의 지배력이 집중되었던 곳이며 소련 해체기에 힘의 공백상태에서 잠시 영향력을 상실하기는 하였지만, 현재 에너지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역내 송유관 체제를 장기적으로 관리, 통제하기 위해 러시아로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주요 거점공간이 되고 있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력들에게도 이 지역은 중앙아시아 지역과 더불어 유라시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교두보인 동시에 중동을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 자원의 보고로 떠오르는 중앙아시아와 연계하여 에너지 자원의 공급지 및 파이프라인의 경유지로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서방세계로서는 이 지역이 과거 제정러시아와 소련의 지배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배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방지하고 동시에 새롭게 카프카스 지역과 카스피해 및 중앙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로서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사활적 요충지인 것이다. 따라서 20세기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된 이 지역의 다양한 중소 국가들은 1991년 소련 해체기를 통해 주권국가로 독립하였지만, 대내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역적 불안정과 대외적으로 주변 강대국들의 편 가르기 식 세력관계 속에서 아직도 확실한 주권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국가인 그루지야는 19세기 러시아 제국에 병합된 이후, 그 내부의 다양한 민족공동체들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무차별적인 강제이주정책이 진행되면서 민족, 종족, 종교 간의 무수한 갈등의 역사를 끌어안게 되었다. 1921년 그루지야와 인근 자치주들이 모두 소비에트화 됨에 따라 압하지야 공화국을 비롯한 자치 국가들은 잠시나마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1931년 그루지야 출신 스탈린의 집권이후, 과거 그루지야 영토에 포함되어 있던 자치주들이 일방적으로 그루지야로 합병되었고, 1950년대까지 강제적인 그루지야화 정책이 자행되었다. 남오세티야, 압하스 민족에 대한 의도적인 차별 및 탄압, 민족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과 민족적 특성 무시, 이 지역에 대한 그루지야인들의 대량이주정책 등이 구체화되었다. 이는 소비에트 체제의 민족정책 전반의 문제였는데, 소비에트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다양한 민족, 종교적 갈등의 문제를 어떤 형태로든 범이슬람, 혹은 범터키계의 광범위한 동일성의 연대로 확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세분화되어있던 민족, 혹은 부족규모의 민족 집단에게도 민족의 지위를 부여하여 행정단위를 세분화하였다. 가령 캬바르지노-발카르 지역과 카라차이 지역의 경우, 아랍어를 사용하고 있는 민족에게 아랍어를 금지하고, 인종적.언어적으로 주변지역과 구분되는 카프카스 남부지역의 일부를 아제르바이잔으로 통합하여 아제르바이잔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도록 하였다. 특히 스탈린 집권시절 강행된 인종 강제추방조치에 의해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의 많은 민족들이 역사적인 거주 지역으로부터 강제추방을 당했고 스탈린은 강제추방이 자행된 지역의 많은 천연자원 및 에너지 자원들을 국유화하고 그곳으로 새로운 민족들을 이주시켜 인위적인 자치 국가를 만들어내었다. 나고르노-카바르흐의 경우도 이 지역이 소연방에 편입될 당시, 역사적으로 구분되었던 종교와 민족과는 상관없이 볼세비키 정부에 의해 행정구역이 정해진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강제조치들은 다민족 사회에서 정치세력화의 핵심기반인 인구구성비의 인위적인 변동을 발생시켰고 따라서 거주 민족은 한순간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겨난 상대적 박탈감과 피해의식은 강력한 민족 분리주의를 생성시켰고 유혈충돌을 무릅쓴 민족 분리, 독립운동을 촉발하게 된다. 냉전이 종식되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카프카스 지역은 ‘힘의 진공상태’ 속에 강대국들의 패권 장악을 위한 ‘거대한 체스게임’의 장이 되었다. 따라서 그루지야와 같은 신생독립국은 새로운 대내외적 환경변화에 부합하는 국가발전전략을 모색할 수 밖 에 없었고 이에 대한 그루지야의 선택은 미국 및 서방세계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루지야는 내부의 수많은 민족 갈등을 봉합한 채, ‘탈러시아’, ‘친 서방정책’을 구사하는 친미국가가 되었다. 2003년 11월 ‘장미혁명’을 통해 집권한 친미 정권 사카쉬빌리 대통령은 ‘그루지야의 완전한 통합정책’을 공세적으로 추진하면서 자국내 3개의 자치 국가들에 대한 적대정책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는 이들 국가들로 하여금 ‘탈 그루지야 독립선언’ 및 ‘러시아로의 병합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분리독립운동의 흐름에는 카프카스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할 수 없는 러시아의 사활적인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었다. 무엇이 폭력을 부르는가 카프카스 지역의 불안정한 정치, 경제적 역관계속에서 그루지야의 국가통합정책은 독립 국가의 존립자체를 위한 사활적인 과업이다. 그러나 그루지야 정부정책과 3개의 자치 국가들의 분리 독립운동에 각각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미국과 러시아의 지역 패권 경쟁은 그루지야의 국가 통합을 전혀 불가능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동되고 있다. 그루지야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미국과 서방의 금융자본의 이해에 따라 그루지야 정부는 러시아의 지역패권을 견제하는 것을 목표로 내 외부의 민족 갈등문제를 무력으로 진압해야한다는 강박을 버릴 수 없다. 또한 러시아의 관광, 무역업에 깊숙이 의존하고 있는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의 열악한 경제 상황은 이 지역에서의 러시아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분리 독립운동을 확산해 나갈 것을 요구받고 있다. 탈냉전 시기 남오세티야, 압하지야와 같은 자치 국가들이 유혈충돌과 전쟁을 불사하고서라도 이처럼 강력하게 그루지야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러시아로 귀속되고자 하는 이유, 그리고 그루지야 역시 지치국가에 대한 평화적인 분쟁의 해결방안을 배제한 채, 전쟁 및 경제봉쇄와 같은 강경책만을 구사할 수 밖 에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카프카스 지역은 민족.종족.종교 분쟁의 복잡다단한 역사의 결과, 유혈학살의 비극과 강대국 패권의 모순이 혼합되어 있는 인종전쟁의 지뢰밭이다. 인위적으로 그어진 국경선을 타고 일시적으로 잠복되어 있는 수많은 갈등요인들이 시간이 갈수록 폭발의 위기를 더해가고 있다. 러시아의 이슬람 탄압의 대표적인 유혈사태였던 체첸 분쟁을 비롯하여 아르메니아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 영토 안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의 인종갈등, 그리고 압하지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러시아 북 카프카즈 지역의 압하스 민족의 정치적, 군사적 도발의 가능성, 또한 남오세티야와의 통합을 목표로 러시아와 공조하는 북오세티야 독립운동의 흐름 등 “언어와 민족의 전시장”인 카프카스에서 폭발하게 될 분쟁요인은 무수히 많다. 만일 그루지야 정부가 남오세티야 자치 공화국의 분리를 용인하게 된다면, 이는 필경 친 러시아 성향의 아자리아와 압하지야를 자극하여 그루지야는 사실상 분리주의의 도미노 현상으로 국가붕괴의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사태는 순식간에 그루지야를 넘어 카프카스 전 지역의 민족, 인종의 분리주의 운동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결과할 것이다. 따라서 그루지야 정부는 공식적으로 ‘국가 통합성 유지’의 목표를 버릴 수 없으며, 이에 러시아 역시 체첸의 분리 독립에 대한 원칙적 입장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로 그루지야 자치 국가들에 대해 불분명한 정치적 입장과 모순된 행동을 지속할 수 밖 에 없는 것이다. 가장 거대한 위험 이 같은 이유에서 인종, 종족전쟁의 화약고와도 같은 카프카스 지역의 정치적 불안정성은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 냉전 시기, 미-소 진영 간의 팽팽한 이데올로기 대결을 바탕으로 사회, 문화적 갈등들이 외형상으로 봉합되었던 것에 반해, 탈냉전과 소비에트 해체 이후 중앙정부 및 국가의 행정력이 약화되고 중앙차원의 자원분배 및 경제지원이 감소하면서 경제상황이 악화되었다는 점, 따라서 내재되어 있는 민족, 종족, 종교간 갈등요인이 폭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 오늘날, 중동과 중앙아시아, 특히 카프카스 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강대국들 간 경쟁이 집중되고 있어 민족 분리, 독립을 둘러싼 복잡한 갈등이 더욱 큰 군사적 대결, 충돌로 비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제정 러시아, 소비에트로 이어져온 강압적인 민족분리, 통합정책의 고스란한 비극적 산물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하에서 ‘정상 국가’의 존립과 민족공동체의 생존을 목표로 하는 치열한 경쟁이 필연적으로 인종적, 종교적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만성적인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불안정성에 노출되어 있는 카프카스 지역의 대다수 민족국가 및 공동체들은 서유럽~중앙아시아 에너지 파이프라인에서 벌어지는 서방 대 러시아의 대결, 그리고 이 지역을 통과하는 금융자본의 이해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은 퇴행적인 민족적, 종교적 분리주의를 재 복원시키고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명분삼아 강대국 간의 대리전을 수행하는 주체로 등장하게 된다. 가장 거대한 위험은 오늘날 이 지역을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군사적 대결이 극단으로 치닫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점이다. 에너지 자원의 보고이자 서방을 향하는 송유관이 교차하는 지점으로써 남부 카프카스 지역이 세계화를 보호하기 위한 사활적인 요충지로 인식되고 있다면 이 지역에서의 패권 경쟁은 갈수록 격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극심한 민족분쟁의 불씨가 세계 최강대국들의 군사적 긴장에 의해 점화된다면 서로 반목하고 있는 민족들의 증오와 분노는 돌이킬 수 없이 증폭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언제든 상호간의 잔혹한 학살과 살육의 전쟁이 시작되는 빌미가 되고 말 것이다. 카프카스 민중들을 위한 길 교전 6일 동안, 남오세티야와 그루지야 일대에서 2100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집계되었고, 3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카프카스 지역의 역사적 상흔의 대가와 강대국들의 지역패권을 향한 경쟁은 필연적으로 인민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로 인해 민족적 반감과 증오는 한층 더 심해질 것이고 이를 또 다시 활용하는 ‘동일성의 정치’는 극단적 폭력의 순환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언어와 민족, 그리고 종교의 다양성이 반드시 중앙정부와 혹은 주변지역 및 국가와의 갈등을 빚어내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러한 다양한 동일성들이 한 지역에 공존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역사적 맥락과 오늘날 벌어지는 세계화의 폭력적 통치방식에 있다. 따라서 언어와 인종,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한 민족분리,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결국 인종청소와 학살이라는 더 큰 재앙만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이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민족, 종족, 종교의 배타적 동일성 때문에 벌어지는 ‘새로운 전쟁’이 ‘전장’과 ‘적의 대상’을 무한히 넓혀가고 있는 미국의 ‘대테러전쟁’과 조우할 때, 그 야만과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가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세계화가 주창하는 선별적인 포섭과 배제의 논리, 그리고 ‘무한 전쟁’의 악순환 속에 수많은 인민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는 오늘날, 카프카스 민족들을 위한 유일한 길은 좁은 민족, 인종주의로부터 벗어나 국경을 초월하는 연대를 도모하는 것, 그리고 오랜 역사적 갈등을 분리적인 국가 체계로 소급하려는 퇴행적 목적을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비극적인 국경분할의 모순을 넘어 상호간의 갈등과 반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의 연합을 만들어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