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다 표적단속과 강제추방, 그 후에는? 한국의 이주노동자운동은 1990년대 초반부터 형성되었다. 1994년 1월 산재 인정을 촉구하는 경실련 강당농성, 1995년 1월 네팔 산업기술연수생 13인의 명동성당 쇠사슬 농성투쟁 등이 그것들이다. 그 이후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 이주노동자의 권리를 제기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2000년에 이주노동자 투쟁본부가 결성되었고 이는 2001년 평등노동조합 이주노동자지부로 이어졌다. 2003년 11월에는 강제추방 저지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전면 합법화 쟁취를 위한 농성투쟁단을 구성하여 386일 동안 명동성당을 거점으로 농성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투쟁 속에서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이 대거 형성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이주노동자에 의한, 이주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으로서 서울경인이주노조가 2005년 4월 건설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투쟁은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단속추방이라는, 목숨을 내놓는 것과도 같은 위험을 무릅쓰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의 문제는 이주노동자가 제기해야 하고, 나아가 한국 노동자와 이주노동자가 국경 없는 연대를 통해 전체 노동자의 해방을 앞당겨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은 스스로를 내던져 노조를 결성하고 이를 사수해 왔다. 그 과정에서 표적단속 되고 강제추방 된 이들은 부지기수다. 평등노조이주지부 활동가인 비두, 명동성당 농성투쟁단장 샤말, 이주노조 초대위원장 아느와르, 3대 위원장 까지만, 부위원장 라주, 사무국장 마숨, 3대 보궐 위원장 토르너, 부위원장 소부르 등이 대표적인 이들이다. 많은 이주노조 지부장, 간부, 조합원 등도 단속추방 당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표적단속과 강제추방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단속과 추방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폭력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당사자로서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단속에서 추방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겪는 인격적인 모욕은 물론이거니와 범죄자 취급이나 보호소의 반인권적 환경으로 인한 분노, 한국에서의 생활과 활동을 정리할 최소한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본국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적응해서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감 등은 심리상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필자의 눈앞에서 붙잡혀간 토르너 위원장이 분노와 아쉬움으로 보호소 면회실에서 흘리던 눈물, 연행 당하던 당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마냥 전화번호 수첩이 펼쳐져 있고 이런저런 명함이 널려있었던 소부르 부위원장의 쓸쓸한 방을 생각하면 그들의 심사가 어떨지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것이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짐을 이리저리 챙기고 통장의 돈을 찾아서 보내주고 안부 전화를 하고 하지만 역시 쓰리고 뼈저리기는 마찬가지다. 하도 강제추방을 당하다보니,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한국의 이주운동과 연계를 가지며 본국에서도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예전부터 있었다. 이미 네팔에서는 샤말과 버즈라 동지가 네팔노총(General Federation of Nepali Trade Union, GEFONT)에서 이주위원회(Migrant Committee)를 만들어 이주노동자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고, 방글라데시에서는 비두 동지가 BPS(Bikrampur Patriot Society)라는 단체를 만들어 지역공동체 운동을 왕성하게 벌이고 있었다. 또 어떤 동지는 지역에서 이주노동자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기도 했다. 최근에 본국으로 돌아간 동지들은 한국에서의 이주노동자운동 경험을 본국에서의 활동으로 어떻게 이어나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은 대부분 본인들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본국 적응과 생계 때문에 활동이 이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운동을 계속 이어나가고 그것이 그 나라와 한국의 노동자운동에 기여하도록 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었다. [%=사진1%] 국제회의 제안 경과 이주노동자들이 일단 나라로 추방되면 운동의 경험이 단절되고 더 이상의 관계를 가지기 힘들기 때문에 그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어야 이주노동자운동이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여러 이주노동자 지원센터들은 본국으로 돌아간 이주노동자들을 일찍부터 지원하여 그 나라에서 NGO 활동을 하도록 돕는 상황이다. 또한 이주노조로서는 계속되는 국가권력의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표적단속과 강제추방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서 투쟁을 지속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올해 초부터 전 평등노조이주지부 사무국장에 의해 구체적으로 제안되었고 6월경에 가능한 사람들이 네팔에서 모여서 회의를 가지자는 내용이 이메일과 국제전화 등을 통해서 관련된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이주노조도 제안을 접하고 국제회의를 개최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이런 동지들이 한국에서 활동했을 당시 한국의 노동자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서로의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운동의 중요한 신뢰 및 동지애를 형성했다. 이 신뢰와 동지애는 연대 및 공동 활동의 든든한 바탕을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주노조는 본국으로 돌아간 활동가들과 체계적으로 소통하지 못하고 조직적으로 묶어내지 못했다. 그러하기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간 활동가들을 직접 만나서 각 나라의 정세/조건을 확인하고 한국과 송출국 노동운동 사이의 지속적인 소통과 연대를 강화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건설해야 하며 추후 공동의 조직사업과 투쟁사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회의 제안문- 구체적인 목표로 설정한 것은 다음과 같다. 각국의 정치상황, 노동 사회 이주운동 상황을 공유하고 활동 가능성에 대해 논의한다. 고용허가제(EPS) 노동자 교육과 조직, 세계이주민의 날 등을 포함하여 구체적인 공동활동을 논의한다. 한국 이주노조 탄압 현황을 공유하고 공동의 대응 방향을 논의한다. 송출국에서 이주하는 노동자들의 교육 및 조직 사업을 함께 논의하고 이를 추진 할 구체적 계획을 세운다. 송출국과 한국 이주노조 사이의 소통 및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송출국에서 이주노동자 이슈에 대한 연대체 형성 가능성에 대해 논의한다. 신뢰와 동지애를 새롭게 확인하고 미래 활동의 영감을 키운다. 이러한 목표를 현지에서 참가자들과 다시 한 번 공유하고 2박 3일 간의 회의를 진행하였다. 참고로 회의 주최는 이주노조와 네팔동지회(가칭), 방글라데시동지회(가칭)였고 경북일반노조, 경산이주노동자센터, 건설노조, 금속노조, 다산인권센터, 민주노총, 민주노총서울본부, 문화연대, 사회진보연대, 이주노동자운동후원회, 전교조, 참세상 변정필 동지, 금속노조 김혁 동지 등이 재정후원을 해주었다. 2박 3일의 발걸음 드디어 6월 12일 오후에 회의 개막식이 시작되었다. 이번 회의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주목하고 있던 네팔노총에서는 사무총장을 비롯한 지도부가 대거 참석하여 힘을 실어 주었고, 또 다른 노총인 네팔노조회의(Nepali Trade Union Congress)에서도 부위원장이 참석하였다. 네팔에서는 주요 정당별로 이를 지지하는 노총이 있는데, 지난 4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1당이 된 네팔공산당(마오이스트, CPN-M) 계열로 전네팔노조연맹(All Nepal Federation of Trade Union), 2당이 된 국민의회당(Nepali Congress Party) 계열의 네팔노조회의, 3당이 된 네팔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 CPN-ML. 흔히 UML이라고 함) 계열의 네팔노총이 있다. 네팔노총이 35만 명 규모로 가장 크다고 한다. 참고로 네팔 정치 상황은 현재 지난 4월 선거를 통해 제헌의회가 구성되었고 1차 회의에서 왕정폐지를 선언해서 왕이 시민이 되어 왕궁에서 쫓겨난 상태다. 601석의 제헌의회 의석에서 마오이스트가 220여석으로 과반에서 약80석이 모자라는 1당이 되었고, 국민의회당이 40여석, UML이 30여석으로 3당이 되었다. 이 세 당이 권력분점(대통령, 총리, 국회의장)을 놓고 정치협상을 하고 있고 제헌의회에서는 2년의 시한을 두고 헌법 제정 과정을 밟고 있다. 그야말로 새로운 공화국으로서 네팔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네팔노총 관계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개막식에서는 네팔노총의 사무총장인 비노드 슈레스타(Binod Shrestha)와 네팔노조회의의 부위원장인 라마 포우델(Rama Poudel) 동지가 축사를 해주었다. 참가자로는 방글라데시에서 마숨(이주노조 전 사무국장), 비두(평등노조이주지부 전 활동가), 소부르(이주노조 전 부위원장), 민뚜(이주노조 전 서울부지부장), 네팔에서 샤말(명동성당농성투쟁단장), 버즈라(평등노조이주지부 전 활동가), 까지만(이주노조 전 위원장), 토르너(이주노조 전 위원장), 라주(이주노조 전 부위원장), 검(이주노조 전 동대문분회장), 바브람(이주노조 전 조합원), 건까시(라주동지 부인), 한국에서 필자를 포함하여 이주노조 2인, 영상활동가 문성준, 노동넷 이원배, 소냐(평등노조이주지부 전 사무국장) 등이 인사하였다. 개막식의 분위기는 약간의 흥분과 설렘이 교차하였다. 볼 수 있으리라 생각 못했던 동지들이 한 자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확인하게 되니 반가운 마음과 투쟁의 고락을 같이했던 동지애 등이 충만했다. 이렇게 모인 것만으로 절반은 성공한 것이라는 마음이었다. 매일의 뒤풀이로도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다 할 수 없었다. 국제 이주노동자 연대 네트워크 결성 회의의 가시적인 성과는 국제 이주노동자 연대 네트워크(International Migrant Workers Solidarity Network)를 결성한 것이다. 비록 지금은 방글라데시, 네팔, 한국 사이의 네트워크로 출발하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이주노동자운동에 함께하는 다른 나라에도 확장하자는 결의도 하였다. “본국으로 돌아가든 한국에 있든, 우리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한국에서 투쟁경험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신뢰와 동지애는 연대와 공동활동의 기반이 될 것이다. 이에 우리는 우리 사이의 지리적 거리를 제한으로 여기지 않고 기회로 생각한다. 이주와 이주민 권리의 문제는 한국이나 다른 유입국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님이 명확하다. 그것은 네팔과 방글라데시 같은 송출국의 사회적 조건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한국 이주노동자운동과 본국으로 돌아간 동지들 사이의 강고한 연대가 이러한 문제들을 국제적 수준에서 제기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아야 한다. 이를 위해 체계적인 소통과 공동활동 구조가 있어야 한다.” -네트워크 제안문- 네트워크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한국 이주노동자운동, 이주노조와 방글라데시, 네팔 등 송출국 동지들 사이의 체계적인 소통 구조를 만든다. 각 국의 정치, 사회, 노동운동 상황을 정기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구조를 만든다. 공동활동을 논의하고 실천하는 구조를 만든다. 다른 송출국과 유입국을 포함하도록 네트워크를 확장한다. 또한 실천을 다음과 같이 하기로 하였다. 정기적인 소통과 정보공유(이주노조와 전직 평등노조이주지부/이주노조 간부, 관련 단체들을 포함하여)를 위해 온라인 상에 메일링리스트와 블로그를 만든다. 각 나라에서 전직 평등노조 이주지부, 이주노조 멤버들의 모임을 만들고 책임자를 정한다. 정기적인 회합을 가진다. 공동활동을 논의하기 위해 이주노조와 각 나라 모임이 1년에 한 번씩 국제회의를 개최한다. 이 활동을 위해 방글라데시 동지들은 방글라데시에서 ‘이주 연대 네트워크’(Bangladesh Migrant Solidarity Network)를 만들기로 했고,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들어올 노동자들에게 한국의 노동문제에 대해 선전하고 민주노총과 이주노조에 대해 알리겠다고 얘기했다. 또한 방글라데시로 돌아온 이주노동자들이 새로운 생활과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이주노동자 관련 여러 단체들과 연대하겠다고 얘기했다. 네팔 동지들 역시 고용허가제로 들어올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활동을 하고, 이주노조의 합법화를 위해 국제적인 활동을 펼치겠다고 하였다. 또한 지속적인 연대와 지원 활동을 하고 네팔 국내에서 이주노동자 연대운동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네팔노총에서 이주위원회를 각 지역본부에도 두는 계획을 올해 대의원대회에서 결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주노조에 대한 제언도 많았다. 어렵더라도 직무대행을 선출하자, 웹사이트에 영문판도 만들고 업데이트를 잘 하자, 조합원 확대를 위해 한국노동조합이 있는 이주노동자 사업장을 잘 조직하자, 리더십 교육을 체계적으로 하자 등 애정 어린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공동활동에 대해서는 각 나라 이주노동자들에게 이주노조를 알리는 활동을 주로 논의했다. 이주노조 소개 자료와 현재 한국정부의 정책의 문제점 등을 선전물로 만들어 배포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하자고 얘기했다. 이미 네팔과 방글라데시에서는 고용허가제로 들어오는 이주노동자들을 접촉하고 있었고 그러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 보였다. 물론 그것이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조직화로 직결되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한국의 이주노동자운동과 본국의 노동자운동에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국제연대에 대해서는 이주노조 합법화를 위해 각 나라 단체들에게서 서명을 받기로 했고, 우선 이 회의에 참여한 활동가들의 서명을 받았다. 또한 가능한 국제회의에 이주동지들이 직접 참여해서 경험을 발표하고 이주노조 합법화 지지를 호소하는 방안도 추진하기로 했다. 12월 18일 세계 이주민의 날에는 이주노조와 연계하여 각 나라에서 행사를 추진하기로 했고, 현수막을 교환해서 걸자는 제안도 있었다. 그리고 여수보호소 화재참사가 일어난 2월 11일을 국제적으로 이주노동자 추모의 날로 제안하자는 얘기도 되었다. 그리고 한국노동네트워크협의회에서 ‘아시아 노동넷’(Asia Labornet) 구축 계획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웹사이트를 통해 아시아 각국의 노동운동 뉴스를 자국어와 영어로 올리고 이를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계획이다. 올해 말에는 각국의 웹마스터를 교육할 계획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회의 내용을 14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 기자회견에는 회의 참가자들과 더불어 네팔노총 간부들, 말레이시아에 있는 네팔 이주노동자 대표 등이 참여하여 이주노동자운동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발표하였고 회의 선언문을 마숨 동지가 낭독하였다. 기자회견 이후에는 한국에서 촬영해 간 한국 동지들의 영상메시지를 보면서 연대의 인사를 들었고, 투쟁 영상과 ‘필승 연영석 ver 2.0’을 보면서 한국에서의 투쟁 경험을 다시 한 번 되새겼다. 그 후 이번 회의에 대한 평가 시간을 간략하게 가졌다. 여러 동지들이 공통적으로 이 회의를 성공적이고 훌륭한 만남이었다고 성과적으로 평가했다. 이런 모임을 예전부터 생각만 했는데 현실로 되어서 좋았고, 이주노조가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했다. 또한 회의를 통해 서로 힘을 얻었고 회의에서 논의한 것을 앞으로 잘 실천하자고 다짐했다. “시작이 반이라는 한국 속담이 있다. 우리가 국제 이주노동자 연대 네트워크 만들었다. 한국 이주동지들이 나라에 돌아가면 어느 나라든 자유롭게 이주노동자 권리 위해 활동할 수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런 꿈 있었고 그게 현실이 되었다. 많은 일이 남아 있고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의 결정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단지 종이에 써 놓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꼭 고민해야 한다. 지난 3일 너무 좋았고 네팔에서 하나의 매뉴얼이 될 것이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MTU 만들지 못했지만 여러 동지들의 희생으로 MTU 만들었다. 그 동지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MTU에서 현재 활동하는 동지들과 연대 동지들께 매우 감사드린다. 우리의 빚이라고 생각한다. MTU는 합법화될 것이고 세계적인 선례가 될 것이라는 믿음 갖고 있다.” -샤말 동지 평가 발언- 한편 회의에서 제안된 한국대사관 앞 항의집회가 6월 16일 오전 11시에 네팔 한국대사관 앞에서 개최되었다. 회의 참가자들을 포함하여 네팔노총 100여 명이 참석하였고 동지들이 발언도 잘하고 한국영사를 만나 항의서한과 선언문을 전달하는 등 힘차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작지만 큰 걸음 이번 회의는 작지만 큰 걸음이었다. 대규모는 아니었지만 한국에서 이주노동자운동을 주도적으로 하였던 활동가들이 많이 모였고 실천적인 고민을 나누며 무엇을 할 것인지 논의하고 결과를 냈다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방글라데시, 한국, 네팔 동지들이 모여서 그 동안의 투쟁과 경험, 아픔 등을 서로 나누고 토론과 논의를 통해 결과를 도출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한 공통의 고민을 나누고 동지애를 재확인 할 수 있었다. 단속추방이 이주노동자운동의 끝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운동의 시작이라는 점을 서로 확인하고 나아가 국내외적으로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이번 회의가 참가자들에게 하나의 치유의식이지 않았나 한다. 이주노동자운동을 하면서 단속추방당한 동지들은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분노와 상처와 아쉬움이 있고 계속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한국 동지들 역시 저마다 그러한 마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회의하는 사이사이에, 차를 마시면서, 뒤풀이를 하면서 마음속의 얘기들을 서로 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동안 맺혔던 부분을 정서적으로 어느 정도 푸는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어느 때보다 어렵다. 국내적으로 이명박 정부가 5월부터 7월까지 집중적인 정부 합동단속을 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이 전국적으로 날마다 잡혀가고 있고, 보호소는 잡혀온 이주노동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며칠 동안 한 지역에 계속 들어가서 그 지역의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을 싹쓸이하는가 하면, 야간에도 단속을 하고 경찰의 검문을 강화하여 이주노동자들을 단속하고 있다. 그래서 단속 과정에서 다치는 이주노동자들도 많다. 한번쯤 산으로 도망가보지 않은 이주노동자가 거의 없을 정도다. 거듭되는 표적단속으로 인해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이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심지어 정부는 앞으로 단속반원을 5백 명 수준으로 늘리고 상시적인 합동단속 체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한마디로 상시화된 인간사냥 시스템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국가권력의 폭력이 이주노동자들을 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주노조 역시 단속추방 중단과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 이주노조 인정을 위해 더욱 분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6~7월에는 단속추방 반대운동과, 대법원에 계류 중인 이주노조 인정 소송에서 승리하기 위해 합법화 캠페인, 지역조직 확대 등에 집중할 계획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현재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에 결합하여 이주노동자 단속추방 중단과 이주노조 합법화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고, 6월 5일부터 매주 목요일에 이주노동자 밀집지역에서 단속반대 선전전을 벌이고 있다. 7월에는 이주공동행동 차원으로 서울출입국관리소 앞에서 집중행동을 펼칠 예정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주노조 합법화를 위해 민주노총, 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을 추진하고 있고 국제조직들의 지지 입장을 조직하고 있다. 지역에서도 경기이주공대위가 매월 이주문화제를 개최하고 있고, 대구경북투쟁대책위원회에서 대구출입국사무소 앞 농성투쟁과 집중집회를 지속하고 있다. 부산경남대책위원회에서도 부산출입국사무소 앞 집회와 캠페인을 하고 있다. 이주노조 내부적으로는 각 지역 조직을 정비하는 한편, 조직화 계획을 새로이 세우고 추동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번 회의를 통한 성과가 현실화되어 현재의 한국 이주노동자운동과 송출국의 노동자운동이 연대를 강화하고 확장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송출국과 한국 이주노동자의 연대를 위한 국제회의 선언문 2008년 6월 14일, 네팔 카트만두 한국의 이주노동자운동은 평등노조이주지부, 명동성당 농성투쟁, 서울경기인천이주노조 활동을 통해 형성되었다. 이러한 운동을 만드는 과정에서 2002년부터 현재까지 많은 이주노동자 활동가들이 한국정부의 표적단속으로 인해 강제로 본국으로 추방되었다. 평등노조이주지부와 이주노조 전 간부들, 이주노조 현 간부들인 우리들은 표적탄압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주노동자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6월 12-14일 네팔 카투만두에 모였다. 우리는 ‘송출국과 한국 이주노동자의 연대를 위한 국제회의’를 조직했다. 지난 2박 3일 동안 우리는 네팔, 방글라데시, 그 외 송출국 이주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주제에 관해 논의했고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 우리는 네팔, 방글라데시, 한국 그리고 나아가 다른 나라들 사이에 체계적인 소통과 공동활동을 위해 ‘국제 이주노동자 연대 네트워크(International Migrant Workers Solidarity Network, IMWSN)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 우리는 고용허가제(EPS)를 통해 한국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에게 교육과 훈련 활동을 할 것이다. - 우리는 이주노동자 권리 보호를 위해서 ‘12월 18일 세계이주민의 날’과 같은 국제 행동을 조직할 것이다. - 우리는 네팔, 방글라데시, 그 외 다른 나라들 사이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간 평등노조이주지부와 이주노조 조합원들의 모임을 조직할 것이다. - 우리는 네팔 GEFONT 이주위원회를 지지하고 본국으로 돌아온 이주노동자에 대한 광범위한 조직화를 지원할 것이다. - 우리는 비자 상태 여부에 상관없이 이주노동자를 위해 이주노동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주노조의 상징적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이주노조의 합법화를 위해 필요한 노력을 할 것이다. - 우리는 한국정부에 우리의 요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각 나라 한국 대사관 앞에서 항의집회를 개최할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정부의 탄압에 의해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거에 함께 했던 운동의 경험을 한국 이주노동자운동의 강화의 기회로 만들고 송출국과 유입국 운동 간의 의미있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를 위해 우리는 미등록 이주노동자 결사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이주노조의 투쟁에 대해 본국과 국제적인 관심을 이끌어내고 한국정부가 이주노조의 법적 지위를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집단적인 목소리를 높이기로 결의하였다. 이번 국제회의를 통해 우리는 신뢰와 동지애를 새롭게 하였고 새로운 국제적 공간에서 함께 활동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단지 네트워크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나라와 세계에서 노동자의 권리 운동을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 이주노조에 대한 표적단속과 탄압을 중단하라! - 단속추방 중단하고 모든 미등록 이주노동자 합법화하라! - 이주노조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라! 송출국과 한국 이주노동자의 연대를 위한 국제회의 참가자 일동
G8 정상회담에 즈음하여 G8 행동 네트워크 및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이 발표한 2종의 성명서입니다. * <홋카이도 정상회의를 G8의 마지막으로>, 7월 8일 국제 연대행동의날 참가자 선언문 * < G8 기후 선언은 전진이 아니라 후퇴다>, G8 기후 성명에 관한 논평
G8 정상회담에 즈음하여 G8 행동 네트워크 및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이 발표한 2종의 성명서입니다.
* <홋카이도 정상회의를 G8의 마지막으로>, 7월 8일 국제 연대행동의날 참가자 선언문
* < G8 기후 선언은 전진이 아니라 후퇴다>, G8 기후 성명에 관한 논평
자본주의 농업과 곡물가격 폭등 | 구준모 국제식량가격 위기에 대한 입장 | 비아 캄페시나 미국 서브프라임 금융위기의 원인과 전망 | 임필수
오는 7월 초 일본 홋카이도 토야코에서 열릴 2008년 G8 정상회담을 앞두고 전 세계 사회운동이 다시 한 번 결집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일본의 여러 사회운동 단체는 <G8 행동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자유무역, 전쟁과 군사주의, 필수서비스 및 천연자원 사유화, 부당한 외채와 금융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고 지구 온난화에 대한 민중의 진정한 해법을 만들어내기 위해 투쟁하는 전 세계 사회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이주자, 도시와 농촌의 빈민, 어민, 시민사회가 일본에 모여 G8에 반대하는 행동주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일본에서 G8 정상회담에 대응하기 위한 체계는 지향과 노선에 따라 여러 흐름으로 분화되어 결성되었다. 이 중 아탁 재팬, 일본소비자연맹, 평화포럼 등 32개 도쿄 소재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G8 행동 네트워크는> “G8 반대”를 기본 입장으로 삼고 있으며 ‘반군사주의’, ‘반빈곤’, ‘기업세계화-자유무역, 기후변화’, ‘젠더’, ‘농업-식량주권’을 주요 의제로 7월 4일~7일(가안) ‘G8 반대 행동 주간’ 및 ‘아시아 사회운동 결의대회’ 등을 준비하고 있다. 홋카이도 소재 NGO, 시민운동, 개인들을 중심으로 2007년 9월에 결성된 <홋카이도시민포럼>은 “G8 정상회담을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 한 편 아이누(홋카이도 원주민)에 관해 전 세계적 관점에서 토론하고, 민중들의 목소리를 G8 정상회담에 반영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일본 정부가 G8 관련 공식 NGO 대표체로 간주하는 <G8 정상회담 NGO 포럼>은 G8의 외채탕감, 빈곤감축계획등에 대한 성실한 실행을 촉구하는 단체들로 2006년에 결성되어 정부와 정례 면담을 진행하고 있다. <반-G8 정상회의 홋카이도(아이누모시리) 연락회준비위>는 일본 내 아나키스트 단체들을 중심으로 지난 3월 15일 결성되었으며 신자유주의반대! 빈곤과 차별을 확대하는 G8 반대, G8의 금융투기 반대, 전쟁반대, 선주민 자결권 보장, 자유무역협정 반대를 주요 슬로건으로 삼고 있다. 한편 지난 3월 초 <G8 행동 네트워크>가 주관하고, 한국의 <민주노총>, <사회진보연대>, <한국진보연대>, <한미 FTA 반대 범국민운동본부> 및 <비아캄페시나>, <남반구포커스>, <홍콩 세계화 감시> 등이 참석한 ‘G8 정상회의 반대행동 국제 조정회의’에서는 일본에서 열리는 이번 G8 정상회의를 계기로 아시아 사회운동이 공동 행동과 연대를 강화하여 세계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반전대안세계화 운동에 다시 한 번 적극적으로 참여하자는 논의를 진행했다. 일본 정부는 G8, WTO와 같은 국제기구들의 여느 회합과 마찬가지로 넓은 호수를 앞에 둔 높은 언덕 맨 꼭대기에 있는 토야코 윈저호텔을 회담장소로 택해놓고 시위대의 접근을 철저하게 차단할 준비를 하고 있다. 특히 일본 언론은 99년 시애틀 WTO 3차 각료회의 반대투쟁, 2005년 부산 아펙 및 홍콩 WTO 반대 시위를 사례로 들어 ‘반세계화 운동세력의 과격성’을 부각하며 보안에 만전을 기할 것을 주문하고 있으며, 30년 전 나리타공항 건설 반대투쟁 이후 대규모 시위를 경험한 적이 없는 일본 경찰은 당시 경찰 보안 담당자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시위 진압 방법을 전수받고 있다고 한다.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일본 당국이 2006년 한일월드컵 당시 제정된 훌리건 법을 적용하여 과격 시위로 인한 처벌 경력이 있는 이들의 입국을 거부할 것도 검토하고 있으며, 특히 한미 FTA 반대투쟁을 활발하게 벌였던 민주노총과 전농이 주요 타깃이 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 언론은 이번 G8 정상회담을 놓고 이명박 대통령이 일본 후쿠다 총리로부터 초청을 받아 한국 대통령 중 최초로 G8 정상회담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것이 한국 경제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늘어놓고 있다. G8 정상회담의 역사: 신자유주의의 조종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8개국의 모임(Group 8)을 뜻하는 G8은 IMF나 WTO 등의 여타 국제기구처럼 공식적인 의사결정 체계나 상설적인 집행기구를 갖춘 ‘기구’가 아니라 자본주의 선진국 정상들의 ‘연례 회담’일 뿐이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막대하다. G8을 구성하는 나라들 중 러시아를 제외한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캐나다, 이탈리아 7개국의 생산량은 전 세계의 70%이상을 차지하며, 이들 나라의 군사비 지출은 전 세계의 90% 가량을 차지한다. 이들은 이러한 구속력 없는 연례 회담을 통해 각 국의 정책 방향을 조정하고 이를 각종 국제기구들을 통해 확산하며 전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서방 선진국 정상들의 모임은 탄생 후부터 현재까지 미국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중심부 국가들 간의 질서를 구축하는 한편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앞장서서 이끌어내는 역할을 했다. 현재와 같은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러시아 8개국 정상들의 연례회의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97년이지만, 그 기원은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하 자본주의 선진국들 간의 질서는 미국의 압도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구축되었다. 전후 서유럽의 재건은 미국의 우산 아래서 이루어졌고 일본의 전후 재건 역시 미국의 강력한 개입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한편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경제 질서를 규정한 브레튼우즈 체계는 금-달러 태환, 고정환율제를 바탕으로 국제적인 자본의 흐름을 조절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이러한 전후 세계질서는 변화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 금으로 태환 가능한 달러는 미국 외부에 계속 축적되는 한편 미국의 무역적자가 지속되자 미국은 독일 등 주요무역상대국에 달러화 평가절하를 요청했다. 그러나 물가인상의 우려로 이것이 거절되자 미국은 일방적으로 금-달러 태환을 중단했다. 그러자 달러화 가치는 급락했고 브레튼우즈 체계는 실질적으로 붕괴했다. 이로써 큰 폭으로 변동하는 환율을 통제하는 것이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고, 이를 조율해야 할 IMF 등 국제기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국 정부들 간의 직접적인 조율이 절실해졌다. 이렇게 해서 현재 G8 정상회담의 모태가 된 미국, 독일, 영국, 프랑스 4개국 재무장관의 회의가 1973년 미국 백악관 도서관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발생한 1973년~1974년 유가 파동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대항하기 위한 이들 간의 긴밀한 협력의 필요성을 증폭시켰고, 여기에 더하여 1974년부터 개시된 경기침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뒤 4개국 재무장관 회의는 일본을 포함하는 5개국 재무장관 회의로 확대되었고, 1975년에는 이탈리아를 포함하며 정상회의로 그 수준을 높였다. 1976년에는 캐나다까지 포함한 G7 정상회담이 정례화되었고, 러시아가 가입하기 전인 1996년까지 지속되었다. G8 정상회의로 변화한 후에도 재무장관 회의, 중앙은행 회의 등은 러시아를 제외한 G7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국제적인 통화시스템의 위기, 석유위기, 경기침체로 탄생한 G7은 초반에는 각국 간의 대립을 피하고 협력을 강화하는 한편 변동환율제와 같은 새로운 메커니즘을 제대로 다루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로 확대되어 성장과 투자가 줄어드는 한편 실업률이 급증하고 이윤율이 하락하는 등 케인즈주의가 위기에 빠졌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G8은 신자유주의를 확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1979년 미국 연방준비위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이자율을 인상하기로 결정한 후 미국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본격화했다. 1982년부터 몇 년 동안 경기침체와 금융위기로부터 빠져나오고 성장이 반등하자 미국은 낙관적 전망과 신자유주의의 우월성을 G7 사이에 전파했다. 이후 유럽의 신자유주의적 전환, 그 뒤의 일본의 전환은 G7의 조정력과 각국 간의 관계가 실질적이었음을 보여준다. G7이 낙관적 전망에 도취해 있는 동안 신자유주의는 전 세계적인 질서로 확대되어갔다. 1990년대에 들어서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러시아, 터키 등지에서 발생한 외환?금융위기, 세계적인 불평등과 빈곤의 확산에 직면하여 G7(또는 G8)은 국제금융기구의 개혁과 중채무빈국의 외채탕감, 개발원조, 지구의 환경과 문화적 다양성의 보전과 같은 의제를 논의테이블에 올리게 된다. 1994년 멕시코 페소화 사태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된 IMF, 세계은행, 지역개발은행을 개혁할 필요성에 대한 언급, 1999년 쾰른 정상회의에서 제시된 중채무빈국 외채탕감 계획, 그리고 아프리카 개발원조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개혁은 무역자유화와 금융개방 등 신자유주의의 원칙을 거스르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원칙을 재확인하고 이것이 원활하게 작동하는지를 감시하자는 것이었으며, 개혁의 목표는 IMF가 행사하는 통제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또한 외채탕감 및 발전원조는 대상이 되는 주변부 국가들에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무역투자의 자유화를 철저하게 단행할 것을 조건으로 강요했다. G8에 대항하는 세계 사회운동: 대안세계화 Vs.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 G8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은 1998년 개시된 3세계 외채탕감 운동인 주빌리(Jubilee) 운동으로 본격화되었다. 성서에서 유래한 죄수를 풀어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50년마다 돌아오는 주빌리(기쁜 해)에 기원을 둔 이 운동은 중심부 국가 내의 종교단체 및 NGO들이 1998년 국제회의를 통해서, 돌아오는 주빌리인 2000년까지 중심부 국가 정부에 부당한 외채를 탕감할 것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제안하면서 시작했다. 이어 1999년 쾰른에서 개최된 G8 정상회담을 겨냥하여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고, 이에 영향을 받아 쾰른 정상회의에서는 중채무빈국의 2000억불 외채 중 700억불을 탕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G8 정상회담은 외채탕감운동의 주된 타깃이 되었다. 그러나 1999년 시애틀 WTO 3차 각료회의 반대투쟁을 계기로 활성화된 주요 국제기구의 회의를 겨냥하여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를 내건 국제적인 직접행동, 그리고 신자유주의를 넘어 민중적 대안을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2001년에 개시된 세계사회포럼은 G8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2001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개최된 G8 정상회담 당시, 시애틀과 세계사회포럼을 경험한 세계 사회운동은 신자유주의 조종사로서 G8의 본질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G8 반대투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이 되었다. 제노바에는 시혜적 성격의 주빌리2000 운동에서 분화하여 중심부국가가 주도하는 외채탕감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지렛대임을 지적하며 모든 외채의 무조건적 탕감을 주장하는 주빌리사우스 운동뿐만 아니라, 초국적금융자본의 민중적 통제를 주장하는 아탁, WTO 반대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농민운동 등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10만 명 규모의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세계사회포럼으로 대표되는 대안세계화운동에 적극 참여해서 변화된 현실에 걸맞은 변혁적 전망을 다시금 세워내고자 했던 이탈리아 공산주의재건당 역시 제노바 시위를 기층에서부터 조직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G8 정상들은 ‘거리를 가득 메운 폭도’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빈곤과 불평등이라는 세계화의 모순을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무장한 이탈리아 경찰이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며 시위에 참가한 한 청년을 총으로 쏴 사망하게 한 사건은 그들이 전 세계 민중이 제기하는 여러 요구를 폭력으로 묵살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해법도 제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2005년 글랜이글스/에딘버러 정상회담은 G8 반대투쟁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2001년 제노바 투쟁 이후 칸쿤 5차 WTO 각료회의와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무산시키고 이에 대한 민중적 전망을 제시해온 대안세계화운동은 미국의 이라크침공을 계기로 확산된 국제 반전운동과 결합하여 성장을 거듭해왔다. 2005년 정상회의 개최국인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아프리카 원조, 기후변화, 에이즈 퇴치와 같은 의제를 전면에 내세워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를 표방하며 대안세계화운동을 무력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채탕감을 요구하는 ‘빈곤을 역사 속으로(Make Poverty History)’와 같은 비정부기구와 아일랜드 출신 가수 밥 겔도프가 주최하고 엘튼 존, 폴 매카트니, 마돈나, U2 등 유명한 대중가수들이 출연한 대규모 순회공연 ‘라이브 에이드(Live Aid)’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의 자리를 대신했다. 이런 상황에서 “G8 반대 운동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인간적인 면모로 채색하려는 자들에게 부지불식간에 포섭 당했으며, 이것이 지속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G8,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제하는 각국 정부들에 대항해서 싸우려는 노력, G8이 지도하는 WTO, IMF, 세계은행 등의 정당성을 허무는 노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이러한 두 차례의 경험을 바탕으로 2007년 독일 로스톡 정상회담 당시에는 여러 사회운동들이 “제노바 정신으로 돌아가자”를 기치로 삼아 빈곤과 불평등의 ‘해결자’가 아닌 ‘주범’으로서의 G8의 본질을 비판하며 강력한 투쟁을 전개했다. 2008년 홋카이도 G8 정상회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확산된 국제적인 금융 불안, 국제 곡물가 폭등 등으로 대표되는 세계 경제의 위기와 지구온난화로 대표되는 생태위기는 이번 G8 정상회담을 가로지르는 대표적인 화두다. 올 1월 다보스포럼에 참석한 후쿠다 일본 총리는 “세계경제, 기후변화, 아프리카 발전”이 이번 G8 정상회의에서 다룰 핵심 이슈라고 언급했다. “후퇴를 겪고 있는 세계경제의 위기는 증폭되고 있다. G8 지도자들이 세계경제와 금융시장의 21세기형 위기에 대해 신속하게 대응하여 신용위기 가능성을 조기에 없애야 한다.”는 후쿠다 총리의 발언은 미국 발 세계경제의 위기기 폭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중심부 국가들 간의 정책 공조가 절박하다는 점을 호소하는 것이다. 한편 2007년 12월 발리에서 개최된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로 개시된 포스트 교토 체제에서 일본이 주도적인 역할을 점하는 것 역시 이번 G8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일본 정부의 주요 관심사다. 다보스 포럼에서 후쿠다 총리는 “개도국들이 성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100억 달러를 내놓겠다.”며 “일본 정부가 2050년까지 온실가스 50%를 감축하는 데 앞장설 것이며, 이 기금을 개도국들의 기후변화 완화 노력 지원과 청정에너지 체계로 전환하려는 나라에 대한 기술지원, 대부, 원조에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더불어 일본정부는 G8 정상회담과 함께 기후변화에 관한 정상회담을 병행할 계획으로 한국정부를 비롯한 G8 회원국 외 여러 정상들을 초청했다. 최근 더욱 심화하는 세계경제 위기로 그동안 G8이 중심이 되어 추진해 온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전 세계 민중의 희생을 담보로 자본의 구조적 위기를 지연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초민족자본의 이윤 확대를 위한 전 세계적인 구조조정과 무역?투자의 자유화가 확산되면서, 인간이 생존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식량에 대한 권리마저도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하여 자본은 지구온난화로 대표되는 생태위기 마저도 투자와 이윤확대의 계기로 활용하려고 시도하며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 G8 반대투쟁을 거치며 성장해 온 사회운동들의 경험은 ‘발전과 평등’이라는 수사로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을 은폐하며 위기를 지연하려는 G8 정상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조종사들이 아닌, 이러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중단하고 새로운 전망을 개척하려는 민중들의 운동이 현재의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안임을 보여준다. 이명박 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친-재벌정부’임을 노골적으로 내세우며 쇠고기협상 타결과 한미 FTA의 조속한 비준, 한일 FTA 재개, 여타 FTA 확대를 통해 위기로 치닫고 있는 세계 경제에 더욱 깊숙이 편입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도 없음을 자인하고 있다. 초민족자본과 재벌만을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경제성장’이라는 구호로 은폐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 맞서는 투쟁을 다시금 조직하면서 대안적 전망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는 것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국익론’과 ‘경제성장론’에 가로막히고 분야별 이해득실 논리에 갇혀 답보 상태에 놓여 있는 한미 FTA 반대투쟁을 반성적으로 평가하면서 세계경제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고 이를 근본적으로 지양하는 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 7월 홋카이도 G8 정상회담은 이러한 노력을 펼치는 전 세계 사회운동과 만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역자 해제] 5월 1일 노동절을 앞두고 민주노총이 발표한 5대 요구사항에는 ‘양질의 일자리 확보’가 포함되었다. 2000년 이후 국제노동기구(ILO)와 국제노총(ITUC)은 세계적인 수준에서 노동기준을 향상시킨다는 목적으로 ‘양질의 일자리’(Decent Work)를 구호로 캠페인과 국제회의, 로비를 진행했다. 하지만 국제적민족적 차원에서 평화롭게 노동협약을 채결하자는 운동은 노동협약이 가능했던 조건이 파괴된 신자유주의 시대에 흘러간 옛 노래를 반복하는 것이다. 특히 더 큰 우려점은 양질의 일자리 캠페인이 국제기구의 틀 내에서 초민족자본과의 대화를 통해 사회협약이 달성될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한다는 점이다. 국제노총은 올해 10월 8일을 ‘양질의 일자리의 날’로 정하고 세계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ILO나 국제노동조합에 대해 실용주의적 태도를 취해온 한국 노동자운동이 ‘양질의 일자리’를 활용할 만한 담론이라는 식으로 차용할 수 있을까? 노동자운동의 전략이 메마른 시기이지만 목이 마르다고 아무거나 마실 수는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1980년대 사회협약 이데올로기의 한 가운데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고, 비판적인 입장에서 그 허구성을 폭로하는 노르웨이 노동운동가의 글을 싣는다. 출처는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2004년 1월호에 실린 “European labour: The Ideological Legacy of the Social Pact”다. 또 관련된 글로『사회운동』 2005년 11월호에 실린 “유럽사회포럼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을 참고할 수 있다. ************************ 유럽의 노동조합 운동은 수세적이다. 또한 심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위기에 빠졌다. 현재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의 직접적인 경제적, 사회적 이해를 옹호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노동조합들은 모든 부문과 산업에서 기반을 잃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었던 노동조합 운동은 오늘날 공공연히 혼란을 겪고 있으며, 분명한 비전 없이 자신의 새로운 사회적, 정치적 지향에 대해 머뭇거리고 있다. 역설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시대에 강력한 힘이 되었던 것과 똑같은 이론, 분석, 정책이 이제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 “사회협약” 이데올로기의 유산은 현재 노동조합 운동의 방황을 낳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공격 이러한 전개의 배경에는 현재 우리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변화가 있다. 이것이 글의 주제는 아니기 때문에 몇 가지 중요한 점만 언급하고자 한다. 지난 20여년 이상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력의 거대한 공격에 직면했다. 자본가의 이해는 공세적이 됐으며, 우리는 노동과 자본 사이 권력균형의 거대한 이동을 보았다. 물론 초민족기업은 이러한 변화에 앞장섰다. 전후 노동조합과 사용자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 정책인 노동과 자본의 “사회협약”은 파괴되었다. 자본은 사회협약으로부터 철수했으며 노동조직에 대해 점점 더 적대적인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초민족기업과 그들의 정치적 하수인들은 자신이 새롭게 성취한 권력을 심화하고 제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는 변화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노력은 주로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국제기구들과 조약들, 유럽연합(EU) 같은 지역적 권력구조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 기구들은 지방정부나 중앙정부보다 덜 민주적이기 때문에 기업권력을 제도화하기 위해서 가장 유용하고 효율적인 도구임이 입증되었다. 이어지는 분석은 EU가 오늘날 유럽에서 신자유주의 사회경제 모델을 제도화하는 통로가 되었다는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새로운 권력균형의 기초 위에 건설된 EU와 다른 지역적초민족적 제도들은 노동자들이 현재의 권력균형을 자신들 쪽으로 이동시킬 때까지 개선할 수도, 민주화할 수도, 패퇴시킬 수도 없다. 이 권력균형을 다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운동이 민중과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조직하는 것을 자신의 장기적인 주요 과제로 삼아야할 것이다. 새로운 환경, 오래된 정책 불행히도 노동자계급의 권력을 조직하는 것은 오늘날 유럽 노동조합 운동의 계획이 아니다. 노동자운동 측의 역설은 노동조합이 활동하는 경제적정치적 여건은 완전히 변화했는데도 노동조합 대부분이 여전히 사회협약 정책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소위 세계화가 의도적인 전략과 새로운 권력계급관계의 결과가 아니라, 기술적이고 조직적인 변화의 필연적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입장은 분명히 마가렛 대처의 악명 높은 말 “대안은 없다”와 비슷하다. 그들은 민족적 수준의 사회협약 정책을 지역적이고,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들의 전략은 사용자조직, 국가, 초민족 기구들과의 “사회적 대화”이고, 국제무역협정과 무역기구에 노동기준(무엇보다 강제 노동의 금지, 결사의 자유와 단체협상의 권리보장, 고용차별 금지 등의 ILO 협정)을 공식적으로 도입하기 위한 캠페인이다. 또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행동규범과 초민족기업과의 기본협약 추진이다. 이 후자와 같은 자발적이고, 비구속적이고, 비강제적인 행동규범은 초민족기업 자신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지금까지 행동규범은 기업 행위에 대한 실질적 효과가 없었고, 초민족기업들이 자신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이미지에 대응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사회적 대화” 전략은 권력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무관하게 추진되며, 사회변화를 위해 계급과 민중 권력을 조직할 필요성에 대한 인식 없이 추구된다. 현재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더 긴밀히 살펴봐야 한다. 특히 우리가 진정으로 노동자운동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위기를 이해하기 원한다면, 사회협약 정책의 역사와 영향은 결코 긍정적으로 과대평가할 수 없다. 노동과 자본의 역사적 타협 20세기 동안에 서유럽 노동조합 운동은 점차 자본주의에 온건하게 적응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 적응은 1930년대 동안 유럽의 일부, 주로 북유럽 노동조합 운동이 사용자조직과 협정에 이르자 처음으로 제도화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비슷한 과정이 나머지 서유럽 대부분에서 발생했다. 노동과 자본 사이에 형성된 사회협약은 복지국가의 발전과 임금과 노동조건의 점진적인 개선의 기초가 되었다. 노동과 자본이 대립했던 기간이 끝나고 사회는 사회적 평화, 2자 협상이나 3자 협상(노동, 사용자, 국가), 정책합의의 국면으로 들어갔다. 사회협약 정책은 복지, 임금, 노동조건의 측면에서 중요한 성과를 이끌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지원을 얻었다. 그 결과 노동자운동의 더 급진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부분은 점차 주변으로 밀려났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는 노동자운동의 탈정치화와 탈급진화, 노동조합 운동의 관료화를 야기했다. 사민주의 정당들의 역사적 역할은 계급타협 정책을 관리하는 것이 되었다. 노동조합에 만연한 현재의 곤란이 유럽 사민주의 정당이 직면한 문제의 반영이라는 것은 놀랍지 않다. 노동과 자본 사이의 사회적 동반자 관계가 노동조합과 노동자운동의 현실적 힘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사용자조직은 자신이 노동조합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동조합을 노동자의 대표로 인정하고 협상해야만 했다. 즉 노동과 자본의 온건한 적응은 강력한 노동자운동에 달려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가 20년 이상 안정적이고 높은 경제성장을 경험했다는 것이 또 다른 주요 요인이다. 이것은 노동, 자본, 공적 복지 사이의 배당금 분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회협약의 결정적인 요소는 자본과 시장에 대한 민족적 규제다. 자본통제는 모든 나라에서 일상적이었다. 노동과 자본의 타협은 민족적 국경 내에서 평화롭고 질서정연한 경로를 만들었다. 그 주요 결과는 노동조합 운동이 매우 일국 지향적이 된 것이다. 비록 국제주의적 정치 수사가 일부 남아있더라도 노동조합 운동의 국제주의는 (ILO와 같은) 국제기구를 통한 외교의 일종으로 타락했다. 심지어 조합원의 이해나 필요와 거의 또는 아예 관계가 없는 다양한 노동조합 관광으로 타락했다. 사회주의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 운동에게 사회협약은 생산의 자본주의적 조직,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노동과정에 대한 사용자의 권리를 수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복지와 노동조건을 얻기 위한 교환 속에서 노동조합 연맹들은 산업평화와 임금협상 억제를 약속했다. 단순히 말하면, 복지국가와 점차 나아진 생활조건은 노동자운동이 사회주의 전략을 포기한 대가로 얻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협약이 노동자계급을 완전히 탈정치화하고 탈급진화하는 데 이바지한, 매우 특수한 역사적 맥락 속의 단기적인 성과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련과 동유럽에 경쟁적인 체제가 존재한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지적한 것처럼 이것이 서방의 자본가들이 타협을 수용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타협에 바탕을 두고 대부분의 주요 복지 개혁과 제도는 2차 세계대전 후 30년 동안 발전되었다. 즉, 1930년대 경제적사회적 위기와 전쟁을 배경으로 발전한 급진적 노동운동은 그의 대립 상대방인 자본가의 의도적인 전략에 응한 것이다. 자본가들은 자발적으로 사회협약을 수용했고, 노동자운동의 사회경제적 요구들에 양보 조치를 취했다. 이는 자본가들이 시간을 벌고 노동자운동의 사회주의 정서를 꺾기 위해서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봤을 때 우리는 이러한 기업의 전략이 꽤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운동 내부의 완전한 분업은 계급 타협의 두드러진 부작용이다. 노동조합 운동은 협상을 통해서 노동시장 환경을 규제했다. 반면 실업자를 위한 사회보장은 의회의 사민주의 정당에게 맡겨졌다. 분업은 사민주의 정당이 이전의 개량주의적 정치로부터 후퇴한 것처럼, 노동조합이 더욱 협소한 경제주의로 후퇴하게 한 배경이었고, 오늘날 노동조합의 약화를 낳았다. 사회협약의 이데올로기 사회협약의 시대 동안에 이러한 기업전략은 노동자운동이 판단력을 잃게 했다. 생활조건과 노동조건의 지속적인 개선이라는 20년 간의 실제 경험으로 공유된 견해는, 계급투쟁과 사회적 대립을 감내하지 않고 사회 진보와 보통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공정한 부의 분배를 이루는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높은 수준의 문명에 도달했다는 생각이다.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서 노동자운동은 경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증대했다. 위기 없는 자본주의는 현실이 되었다. 1930년대 같은 경제위기, 대량실업, 사회적 좌절, 민중의 고통은 더 이상 없을 것 같았다. 모든 사회적 변화는 전진적인 것이었다. 거의 대다수의 노동운동에게 이것은 사회주의로 가는 개량주의적 길이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현실의 사회적 성취는 유럽 노동조합 관료에게 뿌리 깊게 남은 사회적 동반자 이데올로기의 물질적인 기반을 형성했다. 개인적인 경험을 말하자면, 1980년대 초반 내가 노르웨이 노동조합연맹의 교육센터에서 기초적 노동조합 연수에 참가했을 때 처음으로 이러한 사회적 동반자 이데올로기가 공공연히 표현되는 것을 들었다. 거기서 나는 20세기의 첫 1/3은 총파업, 직장폐쇄, 노동자조직의 파업에 대한 경찰과 군사력의 사용 등 노동과 자본의 강력한 갈등이 특징이었다고 배웠다. 이 파괴적인 기간의 끝(1930년대)에 노동자계급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오직 적대적인 정책을 포기하고, 노동조합 운동이 완전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시작하자 노동조건의 개선, 임금인상, 복지개혁과 같은 진정한 진보가 성취되었다. 즉 사용자와의 대립은 파괴적일 뿐이고, 평화로운 사회적 대화가 나아갈 방향이다. 이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1980년대 초반에 노동조합 교육센터에서 가르치던 내용이다. 이 분석은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리다. 그러나 사회협약이 붕괴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오류의 귀결은 노동조합 운동에게 지금 더 위험하다.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계급 타협의 기간 동안 복지와 노동조건의 큰 성취가 앞선 시기 투쟁의 결실이었다는 점을 간과한다. 진보는 바로 20세기의 첫 번째 기간 동안 러시아혁명을 포함하여 대립과 강력한 계급투쟁으로 노동과 자본 사이의 권력 균형을 이동시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앞선 시기의 적대적 투쟁들이 훗날 평화적 협상을 통해 실현된 성과를 가능하게 했다. 사회협약의 붕괴 그러나 계급 타협은 그것의 존속이 자본주의 경제의 안정적인 고성장에 의존하기 때문에 취약한 구조였다. 계급타협은 1970년대 초반 발생한 서구 자본주의의 경제위기 심화로 점차 파괴되었다. 위기는 무엇보다 자본가가 비용 축소를 위해 노동조합의 권리, 임금, 공적 지출을 공격하게 했다. 자본가들은 바로 복지국가의 기초를 파괴했다. 탈급진화되고 탈정치화된 노동조합과 노동자운동은 이러한 변화에 매우 당황했다. 사용자들은 협상장에서 갑자기 훨씬 더 적대적으로 나왔다. 이전에 주로 임금과 노동조건의 향상에 관한 것이었던 협상은 이제 이미 존재하는 성과와 규제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계급 타협과 사회적 평화의 환경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공격을 준비하지 못했다. 사회협약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신자유주의의 공격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노동조합 관료는 여전히 수동적이었고, 노동조합 운동은 방어적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이해를 보호할 힘이 없음이 증명되자 여러 국가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완전히 떠났다. 따라서 1980년대는 몇몇 서유럽 주요국가들의 조직률(노동인구의 조직화) 통계가 보여주듯이 노동조합운동의 완전한 실패로 대표된다(표1을 보라). <표 1> 전체 노동자 중 조직된 노동자의 비율(%) 1985 1995 프랑스 15 9 이탈리아 48 44(1994) 영국 59(1979) 31 스페인 27(1980) 19(1994) 독일(서독) 35 29(1993) * 자료 : A Wahl, et. al, “‘Patide a lære fransk’: Strategi for motsand,” in F. Gustavsen and M. Thorkildsen eds., Markedets vidunderlige verden (Oslo: John Griegs Forlag, 1998). 영국의 광산노동자와 같은 소수의 노동조합은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맞섰지만 패배했다. 영국의 경우 패배의 중요한 원인은 대처정권이나 광산회사의 광포한 공격보다는 오히려 전투적인 노동자 쟁의행위를 사회협약의 정책합의를 더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 영국노총(TUC)의 관료다. 수년이 흐른 뒤에 TUC는 광부 파업을 지지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고 시인했지만 피해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놀랍게도 TUC는 사회협약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1990년을 전후로 동유럽의 명령 경제가 붕괴하자 서구자본주의에 대한 유일한 다른 선택지가 사라졌다. 자본주의는 모든 곳에서 승리했고 사용자에게 노동자운동과의 타협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자본가 세력은 이제 최소화된 규제 속에서 자신의 협소한 경제적정치적 이해를 추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서유럽 전체에서 계급 타협(또는 합의 모델)이 붕괴됐거나 붕괴되고 있는 이유다. 타협을 위한 역사적경제적 전제조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 합의의 가장 중요한 결과인 복지국가에 대한 압력도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노동조합 지도부의 지배적인 분파는 권력관계에 대한 이러한 분석을 이해하지 못한다. 약 20년 전 신자유주의 공격이 시작되고 사용자들이 사회적 동반자 정책을 점차 파괴할 때 대부분의 노동조합 관료의 대응은 정책합의의 지속뿐이었다. 일부 노동조합은 적대적인 사용자에게 사회협약으로 돌아오라고 거의 구걸했다. 합의 정책을 강력한 일국 지향적 노동조합 운동이 지지했다. 노동조합의 협소한 일국 지향과 사회적 동반자 이데올로기는 공세적인 자본의 이해에 맞서는 방향으로 스스로 변화하는 것을 막고, 국제적으로 경쟁하는 “민족”자본과 동맹을 맺고 결과적으로 종속되는 쪽으로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었다. 독일에서 “산업입지 경쟁”은 독일 기업과 노동조합의 동맹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이 다른 나라와 경쟁하는 독일 국가를 지원하는 것도 의미한다. 노동조합 운동의 대다수는 계급분석과 권력균형 평가에 바탕을 둔 전략으로 변화하기보다는, 비즈니스 노동조합주의와 법적 형식주의에 더 빠져들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일자리를 위한 통합”(unity for work)을 목표로 한 독일 노동조합의 투쟁은 사용자와의 민족적 동맹 정책의 좋은 사례다. 이것은 사회협약의 형식적 혁신을 위해 제안되었다. 이것은 독일 노동조합연맹이 제안했는데 일자리 보장을 대가로 열악한 노동조건을 수용할 것을 제안했다. 사용자는 이를 거부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국제노동조합 운동의 지도자들이 지난 10년 이상 추구했던 활동, 즉 WTO에 최소한의 노동기준을 도입하기 위한 협소한 투쟁은 노동과 자본 사이의 권력균형에 대한 분석이 없는 법적 형식주의의 완전한 사례다. 일국적국제적 수준의 노동조합 관료들은 여전히 그들 스스로를 노동과 자본 사이의 조정자로 생각한다. 오늘날은 자본가 세력이 공세적이며 기업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제 민중의 정의와 연대 운동(justice and solidarity movement)이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때에 국제노동조합 운동은 스스로를 운동과 기업 사이의 조정 세력으로 정의하려 한다. 이것은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열리는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세계경제포럼(WEF)에 대항하는, 2003년 1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WSF)에서 명백해졌다. 당시 국제노동조합 운동은 “세계화의 민주화: 2003년 세계사회포럼과 세계경제포럼에 대한 노동조합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우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제노동조합 운동은 포르투 알레그레와 다보스에 같은 의사를 전달한다. 전 세계적 수준에서 발전을 달성하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전망 없이 불안정과 빈곤 속에서 사는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비전, 정치적 의지, 공식적 법률적 자격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원의 지원과 서면협약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또 우리의 공공선, 권리, 민주주의를 증진하는 관리 체계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효율적인 민주적 과정과 대화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세계경제포럼에 세계적 사회정의가 필요하다고 압력을 넣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세계사회포럼에 모든 노동자의 이해 속에서 민주화된 세계화를 추구하는 건설적인 방법을 찾는 것에 기여할 것이다. 즉 대부분의 국제노동조합 조직들은 스스로가 기업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새로운 운동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새로운 운동이 정치적으로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국제자유노련(ICFTU)이나 국제산별노련(Global Unions)은 그들이 세계사회포럼에 갔을 때 다른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회의와 포럼의 부수적인 회의에만 참석했다. 동시에 그들은 세계경제포럼에 똑같이 고위급 대표단을 파견했다. “우리는 대부분을 항상 대화를 통해서 성취했습니다”는 말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권력관계와 괴리된 정책들 권력관계 분석과 전략을 위한 준비가 전혀 없다는 것은 노동조합에 의해 국제적으로 진행된 교육에서 다시 명백해졌다. 일군의 서유럽 노동조합과 연맹은 연대 사업으로 동유럽과 개발도상국의 자매 노동조합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 교육에서 서유럽 노동조합은 자신의 큰 성과라고 생각한 사회협약을 유포했다. 그들은 세계의 다른 노동조합에게 사회적 동반자 모델을 추구하는 것이 이롭다는 확신을 주려고 노력했다. 현재의 권력관계에서 이러한 교육은 사용자의 공세적이고 적대적인 공격을 받고 있는 동유럽과 개발도상국의 노동조합에게 해롭다. 이러한 모든 변화가 공공 부문이나 운수산업 노동조합보다 제조업 노동조합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조업이 국제경쟁에 더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쇠퇴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우경화는 다른 산업 노동조합보다 제조업에서 더 만연하다. 사회적 동반자 관계의 경제적사회적 기반이 사라지는 상황에서 이 정책은 오늘날 대부분의 유럽 노동조합 관료들, 특히 유럽노조연맹(ETUC)에 의해서 계속 추진되면서 재앙을 낳고 있다. 따라서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노동시장에서 사회적 동반자 사이의 상담, 협상, 로비 등 이른바 사회적 대화 활동이 증가하는 것을 목격했다. 사회적 대화나 “EU 수준의 협상”은 일부에 의해 잘못 설명되고 있으며, 그것은 노동조합의 쟁의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 성과가 왜 그리 빈약한지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국제적으로 국제자유노련이 사회적 동반자 정책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임이 UN 세계협약에 대한 성명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무엇보다 유엔과의 공동성명이라고 선전되었는데 마치 유엔과 국제상공회의소(ICC)가 발표한 선언 같은 핵심 용어를 사용했다. 전 세계 시장에 전 세계적 규칙이 필요하다는 것이 동의되었다. 그 규칙의 목적은 세계화된 시장에 의해서 변화하고 있는 세계경제를 위한 다자간 규칙의 효과적 틀을 건설함으로써, 세계화의 이익이 점점 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세계협약에 동의하는 회의는 기업과 노동의 사회적 파트너십 건설을 도와 이러한 프로세스에 기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기업 수준에서 유럽직장평의회(EWC)는 관료적인 대응을 해왔다. 평의회의 노동자 대표들은 비록 그들이 정보를 수집하고 노동조합의 협약을 만드는 데는 능숙할지 몰라도 초민족 기업의 노동자들에게 실제 영향을 줄 수 없다. 비록 시장의 힘이 확대되면서 영향력을 잃고 있지만 북유럽 국가나 독일에서 전후에 발전된 유사한 제도들이 이 평의회보다 영향력 있다. 유럽에서 무력한 사회적 대화 정책은 노동조합 운동을 수렁으로 내몰고 있다. 사용자의 공격에 맞서고 투쟁하기 위해 조합원의 동원에 바탕을 둔 노동조합의 정책은, 이런 지향의 경향이 (1995년 프랑스와 2002년 이탈리아에서) 민족적인 수준에서는 보였지만, 유럽 차원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조합 운동의 지배적인 분파들이 복지와 노동조건의 점진적 감축을 수용해온 것은 그 침울한 결과다. 협상을 통해서 노동조합은 점차 확대된 노동의 “유연성”을 수용했다. 우리는 다른 유럽 국가에서 질병수당과 연금의 감액, 실업수당의 축소, 공립학교보육원보건의료서비스에 대한 요금 인상, 비영리 주택계획의 폐지 같은 복지 지출의 축소를 보았다. 노동시간 규제의 약화, 초과노동 수당의 감소, 여러 산업에서 교대 노동의 재도입, 고용보장(안정성)의 악화, 임시 단기계약직 확대, 계약파견 노동자의 증가, 탈중앙화된 교섭 등을 포함하는 노동법과 노동 조약의 개악으로 노동조건이 나빠졌다. 이 변화의 중요한 결과는 노동조합이 조합원을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동자의 탈동원과 노동조합 조합원의 감소로 나타났다. 우익 인민주의 정당들의 성장은 노동조합 정책의 실패가 초래한 가장 나쁜 결과다. 전략적 고려 요소들 그렇다면 전 세계적 기업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서 노동조합 운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국제적인 회의에 만연한 급진적인 수사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2002년 11월에 이탈리아 플로랑스에서 열린 첫 번째 유럽사회포럼의 경험은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거기서 최소한 두 가지 유형의 노동조합의 입장을 들을 수 있었다. 하나는 매우 전투적이고 비전형적인 소규모 집단의 입장이었다. 다른 입장은 유럽 노동조합의 주류로 대표되는 입장이었다. 예를 들어 독일 노동조합의 대표로 온 독일금속노조(IG Metall)는 주당 30시간 노동을 위해 투쟁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노동조합이 바로 1년 전에 폭스바겐과의 협상에서 회사가 저비용의 동유럽 국가가 아니라 독일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기존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후퇴시키는 데 동의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이러한 노동조합 대표들 중에 오늘날 유럽 노동조합 운동의 진정한 문제에 대해서 연설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합한 노동조합 전략의 발전을 위한 기초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노동조합과 정면으로 대결할 수밖에 없는 초민족기업과 다른 자본의 이해에 대립적인 정책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일국적, 지역적, 국제적 노동조합 운동 내부에 이러한 입장에 동의하지 못하거나 모순적인 입장이 존재한다. 따라서 자기 조직을 다시 활성화하기 원하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운동의 가장 건강한 부분에 바탕을 둔 새로운 동맹(연대)을 만들어야 한다. 비록 많은 예외가 있겠지만, 이러한 노동 조직은 주로 공공 부문, 운수, 일부 사적 서비스 부문, 그리고 노동조합 운동 각지의 몇몇 지역 지부에서 찾을 수 있다. 초민족기업에 맞서기 위해서 민족과 기업 경계를 가로지르는 동종 산업 노동자 사이의 협력 증진과 네트워크 건설이 필요하다. 국제적인 계급 연대의 발전을 위해서는 “다른 기업”보다 “우리” 기업을 선호하는 비즈니스 노동조합주의를 깨야 한다. 이 경향은 유럽보다 미국 노동조합 운동에 더 강한 전통이다. 하지만 탈급진화되고 탈정치화된 노동조합이 다른 나라의 기업과 경쟁하면서 일국 차원의 일자리 보호를 위해 “자신의” 사용자와 결탁했기 때문에 비즈니스 노조주의는 지난 20여 년 동안 유럽에서도 강화되었다. 이 협소하고 그릇된 전략은 반드시 생산과 분배의 민주적 통제를 전면에 내건 계급적 투쟁의 연대로 대체되어야 한다. 노동조합의 새로운 국제주의적 연대에 중요한 또 다른 투쟁은 공공 서비스의 지속적인 사유화에 저항하는 투쟁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유화와 싸우고 복지국가로 이룩한 성취를 방어하는 것이다. 공적 부분에 대한 사유화는 우리 사회에서 노동과 자본 사이의 권력 균형의 이동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진보적인 노동조합 전략의 또 다른 중요 부분은 사회적 동반자 이데올로기와 노동과 자본의 평화로운 타협 이데올로기와 같은 노동조합 관료의 지배적인 사고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 운동 속에 있는 이 문제에 대한 어렵지만 우호적인 내부 토론을 해야 한다. 이 토론은 사회적 동반자 정책이 음모나 배신의 결과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발전의 결과라는 이해에 바탕을 두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노동과 자본의 역사적 타협이 어떻게 실현되었고, 왜 파괴되었는지를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분석이 필요하다. 현재의 변화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진지하게 생각해야한다. 민중의 불안과 불만족을 정치화하고, 노동조합으로 끌어들이고, 노동과 삶의 조건에 대한 정치적인 계급투쟁으로 나아가야한다. 이것이 민중이 우익 인민주의 정당에 동원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는 복지와 노동조건에 주목하고, 시장 경쟁에 노출된 경제 영역의 증가, 노동일과 노동과정에 대한 노동자 영향력의 축소 등으로 나타나는 노동의 야만화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또한 민중의 자신감과 관련된 것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자의 존엄성은 부르주아의 사고와 가치, 신자유주의 정책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직장, 미디어, 공적 토론, 사회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체계적으로 공격받고 있다. 이것은 생산적 노동, 계급 관계, 계급 정체성이라는 관념들을 다시 주장함으로써만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노동계급 외부에서 강요될 수는 없다. 그것은 사회적 투쟁을 통해서, 그 투쟁의 일부로서 발전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민주주의, 세계적 정의와 연대를 위해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새로운 세계적 운동과 연대해야 한다. 이 세계적 ‘운동들의 운동’은 비록 계급 관계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지만 현재의 노동조합이나 노동운동보다 정치적으로 급진적이며 체제 비판적이다. 노동조합 운동이 계급타협의 환상을 깨기 위해서 이러한 민중운동의 급진주의와 전투성이 필요하다. 만약에 연대가 건설적이고, 올바르게 발전된다면 두 운동은 서로를 강화하고 더 높은 수준의 투쟁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협약은 노동자운동의 이미 정해진 목표점이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특정한 역사적 발전의 결과였으며, 노동과 자본 사이의 권력 균형의 거대한 이동의 결과로 가능한 것이었다. 러시아 혁명, 서구의 강력한 노동자운동과 노동조합, 제3세계의 강력한 해방운동, 2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경제의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경제성장이 바로 비교적 안정적인 계급타협을 가능하게 했던 매우 특수한 전제조건이었다. 현재의 훨씬 더 불리한 권력 조건 속에서 새로운 계급타협, 새로운 사회협약을 지향하는 것은 망상이다. 따라서 우리의 지향은 사회협약과 복지국가를 넘어서야만 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부활시킨 물질적 전제조건을 완전히 제거하는 사회변혁만이 노동자의 이해를 보호할 수 있다. 사회주의보다 못한 것으로 그것을 성취할 수는 없다. * 아스뵈른 발은 노르웨이 지자체보건부문 노동조합(Fagforbundet)의 간부이고 국제운수노동자연맹(ITF) 도로운수노동조합 부문의 부위원장이다. 그는 복지국가를위하여(For The Welfare State)의 전국 책임자이다. 이 단체는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구성된 전국적 연대체이며, 사유화와 탈규제에 대항하고 복지국가의 사회적 성취를 방어하기 위해 활동한다.
미국 경제의 경착륙을 막기 위한 글로벌 정책공조의 불가능성 2008년 3월 13일 칼라일 캐피털이 사실상 청산을 선언했다. 세계 최대의 사모펀드를 운용하던 칼라일 캐피털은 자산규모의 30배가 넘는 돈을 빌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저당대출)에 투자했다가 결국 부도를 맞았다. 그리고 다음날 14일 미국 뉴욕 월가의 5위 투자 은행이었던 베어스턴스가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베어스턴스의 사례는 미국 금융기업 부실화의 파장이 모기지회사와 사모펀드를 넘어서 은행부문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때문에 누가 제2, 제3의 베어스턴스가 될 것인지에 관심이 쏠렸다. 투자은행의 ‘빅 파이브’라고 불리는 골드만삭스, 메릴린치, 모건스탠리, 리먼브라더스, 베어스턴스 중에서 베어스턴스와 함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가장 공격적으로 투자했던 리먼브라더스가 그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글로벌 은행들의 손실처리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올해 들어 가장 큰 손실액을 기록한 곳은 스위스 UBS로 금액이 190억 달러에 이르며, 그 다음을 차지한 미국 씨티그룹은 160억 달러를 상각처리했다. 씨티는 누계 손실액이 460억 달러에 이르러 최대 손실을 기록한 금융기관이 됐다. 메릴린치는 분기 66억 달러 손실을 처리해 총 320억 달러 누적 대손상각을 기록했다. 서브프라임과 관련하여 전 세계 투자은행과 헤지펀드들이 고백한 손실규모는 약 2500억 달러로 추산된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에서는 금융회사들의 서브프라임 관련 손실규모가 5650억 달러, 전체 예상 손실 규모가 945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조지 소로스는 1조 달러가 넘는다고 말했다. 1980년대 미국 모기지 혁신과 부동산 대부의 증권화 현재 미국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2006년 10년에 걸친 주택호황의 붕괴에 있다. 미국 정부는 오랫동안 다양한 세제상 특전과 보조금으로 주택소유를 지원했다. 안정적인 주택자금 공급을 위해 설립된 정부지원은행인 패니매이와 프레디맥은 미국 각각 2위와 3위 규모의 대부기관으로 성장했고, 미국 모기지(주택저당금융)의 거의 절반을 통제한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 미국 금융기관들은 자금조달 능력을 확대하기 위해 실로 독창적인 방법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기지를 집합(pool)으로 묶어서 채권을 발행했고, 이는 현재 주택연계증권(MBS)의 시초가 되었다. 이들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자, 머지않아 다른 은행들도 부동산 대부의 증권화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은행은 MBS를 통해 수수료가 높은 새로운 중개서비스를 제공하고, 채무불이행(디폴트) 위험을 외부로 이전하며 대부된 자금을 신속히 회수함으로써 새로운 대부를 제공할 수 있었다. 수익에 굶주린 투자기관들로부터 MBS 시장에 대한 자금공급이 쇄도했고, 은행은 흥청망청 모기지 대부를 확대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자 은행은 재융자(리파이낸싱)와 주택담보가계지원대출(홈에퀴티론)을 제공함으로써 신용수요를 부양했다. 재융자는 모기지 대출자가 주택가격 상승을 반영하여 은행으로부터 더 큰 액수를, 더 낮은 이자로 대출 받게 했다. 이로써 모기지 대출자는 기존 융자를 갚고도 남는 돈으로 추가로 주택을 구입하거나 다른 용도로 투자나 소비에 지출할 수 있게 되었다. 홈에퀴티론은 주택 구입가격에서 은행으로부터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을 제외한 집의 가치를 담보로 또 다시 대출받는 ‘2차대출’이다. 또한 2000년대 초반 미국 신경제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자 FRB는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기준금리(연방기금금리)는 2000년 6%에서 2001년 이후 2003년 중반까지 1%로 인하되었다. 초저금리 상태에서 기업과 가계의 부채가 확대되었다. 특히 가계부채는 대부분 모기지 부채로 누적되었다. 한편 기업의 부채는 주가부양을 위한 자사주 매입과 인수합병에 활용되었다. 결국 저금리 기조가 주식시장 부양과 부동산 투자 확대라는 쌍생아를 낳았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모든 것이 좋아보였고, 미래는 낙관적이었다. 주택 호황이 거품으로 전환되는 시점인, 2004년 후반부터 2006년 초까지 은행은 오히려 공격적이며 모험적인 혁신을 가속화했다. 모기지 추가대출(피기백)은 주택구입자가 계약초기에 납부하는 금액에 대해서도 대출을 해주는 것으로써, 이제 가계는 현금이 전혀 없어도 완전히 빚을 통해 주택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출자의 소득, 재산, 신용거래기록 등을 묻지 않는 조건으로 높은 이자율로 모기지를 제공하는 알트-A(중간) 등급 모기지와 서브프라임(비우량등급) 모기지가 확산되었다. 특히 서브프라임 모기지 규모는 750만 명의 대출자에 6천억 달러로 미국 모기지의 약 20%를 차지했다. 조정금리부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보통 3년 이상 운영되며 가입 3년 후 변동금리로 전환된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대부기관은 초기의 1% 수준의 ‘미끼금리’가 나중에 재설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았다. (2007년 4/4분기에는 서브프라임 금리가 20.2%까지 급등했다.) 다수의 대출자는 모기지 조건에 대한 적절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했거나, 금리 재설정이 이뤄지기 전에 주택가격 상승으로 재융자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FRB가 2004년부터 2006년 중반까지 여러 번에 걸쳐 기준금리를 1%에서 5.25%로 인상시키자 주택거품이 폭발했다. 주택판매, 주택건설, 모기지 대출, 주택가격이 모두 급락하기 시작했다. 2007년 23월 모기지 대출회사의 부실화와 파산 위기라는 서브프라임 발 금융위기의 태풍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이자율 상향조정의 첫 번째 물결이 강타했다(1차 위기). 금융위기의 신호탄이 쏘아진 것이다. 부동산대부 증권화 사슬의 연쇄 위기 2007년 8월 9일 프랑스계 투자은행 베엔뻬 빠리바가 서브프라임 관련 두 종류의 펀드에 대한 환매를 중단하자 세계적 연쇄반응이 일어났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채권을 유동화한 파생금융상품의 가격폭락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2차 위기). 먼저 MBS 시장이 사실상 소실되었고, 이는 모든 층위의 부채담보부증권(CDO) 시장을 동결시켰다. CDO는 MBS, 회사채, 신용카드매출채권담보증권 등 다양한 종류의 채권을 묶어놓은 금융상품이다. 예를 들어 주택을 구입하기 위해 10만 달러를 차입한 사람을 가정하면, 유동화전문회사(SPC)는 그 사람의 모기지를 다른 모기지와 섞은 뒤 MBS를 만든다. 그 다음 투자은행들은 CDO를 만들어 MBS와 회사채등을 섞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풀을 투자자들의 금리선호에 따라 자른다. 이는 구조화금융(structured finance)이라고 불리는 증권화 방식의 하나다. CDO가 처음 등장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최근에 그 발행이 본격화되었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2006년 투자은행들은 5천억 달러어치의 CDO를 발행했고, 이는 2002년의 840억 달러의 네 배를 넘는다. CDO 시장이 급격히 위기에 전염되자, 거래규모가 급격히 축소되었고 추정 가치의 약 80%가 하락했다. CDO에 투자한 헤지펀드, 보험회사, 연금, 은행 등이 줄줄이 손실을 입게 되었다. 메릴린치와 시티뱅크는 대규모 자산상각이 불가피해졌고, 2007년 10월 말 각각 80억 달러와 110억 달러의 손실을 발표했다. 또한 메자닌 트랑시(고수익고위험 등급) 이하 신용등급에 대한 투자 비중이 높았던 헤지펀드들은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위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2007년 11월, 투자은행들이 고수익 자산에 투자할 목적으로 세운 구조화투자회사(SIV)를 중심으로 하는 3차 위기가 발생했다. SIV는 은행들이 출자한 자산을 근거로 단기성 기업어음인 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을 발행해 단기자금을 조달하여 MBS, CDO와 같은 고수익 장기증권에 투자했다. 2007년 8월 말, 9월 초 ABCP 시장의 혼란은 은행, 헤지펀드, 사모펀드의 단기투자수단을 차단했다. 이는 기업어음시장이 압력을 받게 했다. 이제 은행은 갑작스럽게 고객의 즉각적인 유동성 투입 요구에 직면했다. 이러한 자금 소요는 은행간시장(inter-bank market)에서 폭발했다. 2007년 8월 세계적으로 조직된 은행간시장이 급속도로 무질서해지자, 전 세계의 중앙은행들(특히 유럽중앙은행과 미국 연방준비이사회)은 몇 주 동안 대규모 긴급자금을 투입해야 했다. 최고 중앙은행, 즉 ‘최종대부자’의 개입은 선례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9월 18일 미국 연방준비이사회의 갑작스러운 대규모 이자율 인하(0.5%)에 뒤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발 금융위기는 계속해서 제4, 제5의 위기로 이어졌다. 2008년 1월 채권보증회사들(모노라인)의 위기가 현실화되었다(4차위기). 모노라인은 신용파산스왑(CDS) 계약을 통해서 헤지펀드나 투자은행 등으로부터 특정기간 동안 주기적으로 일정 수준의 신용보증수수료를 받는 대신, 채권에 대한 원금과 이자지급을 보증했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사태가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자 모노라인들의 부실이 커졌고, 앞으로 대형 모노라인의 신용등급이 하향조정된다면 서브프라임 사태는 일반 채권시장으로 확대될 가능성마저 있다. 한편 지난 2월 금융감독원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은행들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투자로 투자금액 중 5억 6300만 달러(5200억 원)의 손실을 입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채권이 편입된 CDO에 투자한 국내 은행은 우리, 농협, 외환, 신한, 산업, 부산, 대구은행 7곳이며, 특히 우리은행이 투자금액의 90.6%인 4억 4500만 달러, 농협은 78.7%인 1억 700만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겸업은행 모델의 확산과 금융혁신 부동산 대부의 증권화, 파생금융상품의 사슬의 중심에는 겸업은행 모델의 확산과 금융혁신이 존재한다. 1989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2차 은행업지침, 1999년 미국의 금융서비스현대화법률로 은행에 대한 장기간에 걸친 제약이 제거되자 은행들은 겸업은행모델을 추구했다. 겸업은행은 상업은행(예금유치와 대출), 투자은행(증권), 펀드관리, 보험 등을 결합함으로써 손쉽게 새로운 금융상품들을 도입했고, 이러한 상품들을 위한 시장을 조직하고 대량의 유동성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한 지붕 아래에서 모든 금융업무를 실행하는 겸업은행은 거대한 자산거품의 와중에서 시장조작의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투자은행들은 시장을 움직이는 뮤추얼펀드의 주문을 받아 체결해주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정보접근 측면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고객들의 매수주문을 미리 알아서 자기거래를 통해 해당 물량을 매입, 이득을 볼 수 있다 (이른바 프론트 러닝. 물론 투자은행들은 이에 대해 부인하고 있다.) 이처럼 투자은행은 정보의 강점을 이용해 고위험 부문에 대한 투자를 늘렸고, 이를 위해 단기자금 차입(레버리지) 확대도 불사했다. (SIV의 사례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다.) 나아가 거품이 커질수록 규제당국, 은행내부 평가인, 신용등급평가기관, 기업내부 회계감사관, 기관투자가 주주는 이를 억제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과실을 나누는 데 급급했다. 투자은행의 트레이더들은 “1~2년간 고위험에 베팅해 큰 수익을 얻으면 평생 먹고 살 만큼의 보너스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2006년 리먼브라더스의 실적 상위 6위권의 매니저들은 1억 5천만 달러의 인센티브를 챙겼고 베어스턴스의 제임스 케인 CEO는 4천만 달러의 인센티브를 받았다. 한편 겸업은행의 발전과 함께 은행간 경쟁의 가속화는 ‘금융혁신’을 자극했다. 금융상품은 쉽게 서로 모방하며, 발전 사이클이 매우 짧다. 따라서 은행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하라는 압력에 항상 노출된다. 증권화, 파생상품, 구조화금융과 같은 금융중개업의 새로운 경로가 세계적 규모에서 경쟁적으로 거대한 투자자 집단을 동원했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는 공황과 공포로 급격히 전환되었고, 신용체계의 단계적 붕괴가 개시되었다. 모기지 대출자-모기지대출회사-유동화전문회사-투자은행-투자자(헤지펀드, 보험회사, 은행)-구조화투자회사 등 다층적인 피라미드로 구성된 증권화 사슬에서 투자자들은 최종대출자(모기지대출자)와 여러 층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신용정도를 평가하고 손실을 예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누구도 증권화 풀에서 언제, 어떻게 손실이 발생할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연기금과 헤지펀드와 같은 기관투자가들은 CDO나 ABCP의 불투명한 특성에 대응하기 위해 그 가격을 책정하는 매우 정교한 컴퓨터 계산 모델을 활용한다. 그러나 그들의 모델은 판매하려는 금융상품을 어떤 가격에서 구매하려는 자가 항상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모델은 주어진 가격이 적절하다면 위험성을 이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가시화되면서 그들의 상품을 위한 시장 자체가 사라지는 상황이 도래할 때, 그들의 모델은 무용지물일 뿐이다. 최근 국제결제은행(BIS)은 신바젤협약(바젤2)을 통해 은행의 리스크 관리의 정교화를 추구하고 있다. 신바젤협약은 은행리스크에 신용리스크(기업부도로 인한 채권회수 불능 위험)와 시장리스크(투자목적의 주식, 채권, 외환, 파생상품의 손실위험) 외에 운영리스크(내부 통제제도 미흡, 담당자의 실수, 시스템의 오류로 인한 위험)를 추가했다. 그리고 신용리스크 산정 방식에서 기존 표준방법(신용평가기관의 신용등급에 따라 위험가중치 차등적용) 외에 감독기관의 승인 하에 은행 자체적으로 신용리스크를 측정, 관리하는 내부등급법을 인정했다. 결국 은행은 더욱 정교한 리스크 관리 체계 도입에 대한 보답으로 스스로 최소 자기자본비율을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신바젤협약은 은행이 위험자산을 보유할 경우 적립해야 할 자기자본 비율을 높임으로써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를 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평가 모델 역시 스스로 가정하고 있는 시나리오를 벗어나는 신용경색의 힘 앞에서는 무능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 경제의 경착륙을 막기 위한 글로벌 정책공조 그러나 미국 금융위기의 규모가 거대하고 전 금융분야에 단계적으로 파급효과를 내고 있는데도, 각 경제기관들은 1-2년 내로 미국의 금융부실이 점진적으로 해소될 것이라는 상대적으로 낙관적인 전망을 제기하고 있다. 낙관적 전망의 근거는 무엇일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금융기업들이 단기간 내에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자산상각을 신속히 발표했다. 주요 금융기업들이 호황기에 축적한 유보자금 규보가 워낙 크기 때문에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응능력을 보유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글로벌 투자은행의 부실화 위험에 조응하여 아시아와 중국의 이른바 ‘국부펀드’가 자원공급원 역할을 했다. (국부펀드는 대략 2005년부터 사용된 용어로서 정부자산을 운영하는 정부소유기관을 뜻한다. 대개 국부펀드는 외환보유고에서 유래했고, 국가의 전략적 목적을 위해 활용된다. 2005년 설립된 한국의 ‘한국투자공사’(KIC)가 여기에 해당된다. KIC는 2008년 1월 메릴린치에 20억 달러를 투자, 지원했다.)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성을 반영하는 외국 중앙은행의 준비통화에서 차지하는 달러 비중도 대체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달러 비중은 1995년 59.0%에서 2001년 70.7%로 상승한 후 점진적으로 하락했지만, 2007년 3/4분기 말에도 63.8%를 유지한다. 이처럼 미국경제를 지탱하는 세계 각국의 움직임은 최강 제국주의로서 미국경제의 특이성을 반영한다. 미국은 세계 각국, 특히 동아시아 국가(일본, 중국, 한국)에 대한 무역적자를 감당하는 세계경제의 ‘최종소비자’이며, 동시에 각국이 가정하는 최종적인 투자안전국(자본도피처)으로서 ‘자본수입국’의 역할을 수행한다. 미국이 해외로부터 흡수하는 이자, 배당, 초민족기업 계열사의 유보이윤과 같은 자본소득을 통해 이처럼 불균형한 메커니즘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메커니즘은 미국이 범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통해 엄청난 부를 직간접적으로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메커니즘의 붕괴는 세계 각국의 경제 메커니즘의 동반 붕괴를 가리킨다. 따라서 세계 각국 정부(특히 G7이나 G8)는 정책조정을 통해 미국경제의 요구를 반영하는 경제정책을 실행한다. 즉 미국 경제의 객관적 상태를 반영하여 달러에 대비한 자국통화(엔화, 유로)의 환율을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방향으로 조정했다(1985년의 플라자합의와 1995년의 역플라자합의). 특히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에는 전례 없이 세계 중앙은행들이 미국 FRB의 요구에 따라 금리조정을 단행했다. 서브프라임 사태 이전까지 정책금리를 잇달아 올려왔던 유럽중앙은행(ECB)이 인플레이션 우려에도 불구하고 금리 인상을 보류하는 조치를 취했다. 따라서 이번에도 미국 경제가 경착륙을 하지 않는다면, 경착륙이 의미하는 바대로 폭탄을 실은 비행기, 곧 세계경제의 폭발을 막기 위한 세계 각국의 정책공조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경제가 이윤율 하락 추세를 반등시킬만한 생산혁신을 조직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처해있고, 최강 제국주의 국가로서 누리는 달러 발권이익이 이중적자의 누적 때문에 장기적으로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회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미국경제의 경착륙이 중심부 국가들의 정책공조를 통해 지연되는 과정에서 세계 각국에서 먼저 폭탄이 터질 가능성은 높아지고 있다. 미국 경제의 침체에 따라 수출국가들의 타격도 불가피하다. 세계 증시를 주도하는 동아시아 신흥시장에서 증시가 폭락했으며, 글로벌 과잉유동성 축소에 따라 엔-캐리 트레이드 자금, 즉 저금리국가 일본에서 대출된 투자자금을 흡수했던 고금리국가(호주, 뉴질랜드)의 금융위기 우려나, 해외자금유입이 높은 유럽 신흥국(불가리아, 보스니아, 루마니아)의 위기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당분간은 세계경제의 몸통 격인 미국이 위기의 폭발을 그럭저럭 관리해나가더라도, 미국 제국주의의 부의 원천인 세계경제의 주변부에서부터 그 토대가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