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의 기원과 현황
[%=사진1%]
2001년 10월 7일, 인도양의 미해군 함정들로부터 발사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이 남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Taliban)1) 군사기지들을 타격했다. 9.11 테러가 벌어진 지 26일도 채 되지 않아 ‘항구적 자유(Operation Enduring Freedom)’로 이름붙여진 일련의 군사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이것은 이후 7년 간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점령으로 이어진 기나긴 침략전쟁, 이른바 ‘대테러전쟁’의 신호탄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를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부가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을 비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 미국은 탈레반 정부에 알 카에다 지도부의 신병을 미국에 넘길 것과 아프가니스탄 국내의 모든 알 카에다의 훈련기지들을 즉각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탈레반은 자신들과 9.11 테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주장했고, 빈 라덴이 테러의 주범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제시한다면 그의 신병을 넘기겠다고 답했다. 탈레반 정부를 인정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이 탈레반에 대한 승인을 철회하고, 미국의 최후 통첩일이 다가오자 탈레반은 파키스탄에서 국제법정을 열어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따라 빈 라덴을 재판하겠다는 제안도 내놓았지만 거절당했다. 탈레반의 요구조건은 제3국이 아니어도 좋다는 쪽으로 계속 후퇴했지만 미국의 입장은 이미 보복공격을 실시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이미 항공모함 전단과 공군 항공단들이 작전을 위한 전개를 끝마친 뒤였다.
10월 7일의 순항미사일 공격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각지의 탈레반 군기지와 알 카에다의 훈련시설에 미국과 영국 공군기들이 대대적인 공습을 개시했다. 공습은 탈레반의 본거지인 칸다하르(Kandahar)를 비롯해 수도 카불(Kabul), 잘랄라바드(Jalalabad) 등의 지역에 집중되었다. 탈레반의 무장력은 대부분 소련군 침공 당시 쓰였던 노후 장비들이었고 그나마 며칠 만에 모두 파괴되었다.
지상에서는 탈레반에 패퇴하여 反탈레반 연합전선을 이루었던 북부동맹의 병력들이 공세를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의 특수부대원들이 합류한 북부동맹군은 NATO 공군의 지원을 받아 탈레반 병력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11월 9일, 북부의 주요도시 마자르 이 샤리프(Mazar-i-Sharif)가 북부동맹군에게 점령되자, 다수의 지역 군벌들이 탈레반에서 북부동맹으로 돌아섰다. 11월 12일,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잘랄라바드와 쿤두즈(Kunduz) 등의 도시들도 북부동맹에게 점령당했고 12월에 이르러 탈레반의 최후의 보루였던 칸다하르까지 함락되었다. 탈레반의 잔여 병력들은 파키스탄 국경지대로 도망쳤고, 험준한 산악지대에 숨어들어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탈레반의 등장
탈레반의 시작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던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과 파키스탄은 비밀리에 이슬람 무장세력3)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고, 이들을 소련의 침공에 맞선 대항마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무자헤딘 훈련캠프의 주요 일원이었다. 미국은 막대한 원조자금을 퍼부었고, 87년까지 6만 5천톤에 달하는 미제 무기가 공급되었다. 이중에는 신형 스팅거 견착식 지대공미사일과 같은 장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4)
여기서 훈련받으며 對소련 무장항쟁 활동을 벌였던 무자헤딘 세력 중의 일부가 탈레반의 기원이다. 이들의 근거지는 헬만드(Helmand)와 칸다하르를 비롯한 파슈툰족 지역이었고, 이러한 종족적 기반이 이후 탈레반의 성격을 특징짓게 된다. 이들 역시 미국, 그리고 기타 중동국가들(주로 수니파 이슬람권)로부터 훈련과 보급을 지원받았다. 이러한 지원은 표면적으로는 파키스탄 정부, 특히 정보국(ISI;Inter-Services Intelligence)에 의한 것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Mohammed Omar)5). 그 휘하로 마드라사(이슬람학교)에서 수학하던 교육자들과 소규모 군벌조직의 리더들이 섞여 있었다. 여기에 파키스탄 내 마드라사에서 온 아프간 출신 망명자들이 합류했다. 구성원 대부분은 남부 아프간과 서부 파키스탄의 파슈툰족이었고, 유라시아와 중국 출신의 소수의 자원자들이 있었다. 이처럼 탈레반의 주축을 이루었던 무자헤딘 출신들은 철저히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에는 다수의 마드라사들이 세워져 있었고6), 여기서 수학했던 많은 이들이 이슬람원리주의의 기치를 들고 탈레반에 참가하게 된다.
애초 탈레반의 취지는 잔학한 무자헤딘 군벌들 간의 끊임없는 내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을 구휼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탈레반의 등장 배경으로 두 가지의 설이 유력하게 알려져 있는데 하나는 칸다하르 지역에서 지역 게릴라들이 어린이들의 납치와 강간․살해 등을 일삼자 이에 분노한 오마르와 그의 학생들이 범죄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일어섰다는 것이다. 1994년 초 오마르가 16정의 소총으로 무장한 30명을 이끌고 지역 군벌에게 납치당했던 두 소녀를 구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댓가를 요구하지 않고 대중들에게 이슬람의 신앙에 충실한 삶을 살 것을 강조하였으며, 그로써 대중적인 신망을 얻었다.
다른 하나는 ‘Afghanistan Transit Trade’로 알려진 파키스탄의 마피아 무역상단과 파키스탄정부 내의 협력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중앙아시아 공화국들로 향하는 남부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탈레반에 무장과 자금을 제공했다는 설이다. 94년을 기점으로,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복잡한 군벌 간의 난립구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탈레반의 성장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의 민족과 종파에 대한 이해가 수반된다. 통계마다 약간씩의 오차가 존재하나, 파슈툰족이 전체 인구 중 가장 많은 36~42%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타지크족이 27~33%, 하자라족과 우즈벡족이 8% 안팎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기타 아이막족과 누리스탄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이 10% 정도가 있다. 아프간 인구의 99%에 달하는 절대다수가 무슬림이다. 이 중 하자라족을 포함하여 9~25%가 시아파, 나머지 89~74%가 수니파 이슬람이다. 하지만 종족 내부에서도 다시금 수많은 계파와 부족들로 분화되어 있기에 파슈툰족이라고 해서 모두 단일한 종족적 정체성과 연대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계파와 부족단위에서의 다양한 갈등요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종족과 종교적 차이는 아프간 내 군벌들의 세력갈등을 설명하는 요인이 될 수 있는데, 탈레반의 조직 기반이 남부의 파슈툰족이었다는 사실은 이후 북부동맹으로 결집하게 되는 반(反)탈레반 연합세력들이 북부의 타지크족과 우즈벡족, 하자라족들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89년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 각지의 군벌세력들 간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각 무자헤딘 파벌들 간 대립의 이면에는 소련군과의 전쟁기간 중에 자신들을 지원했던 이란, 중국,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고, 이후 아프간은 심각한 내전상태에 빠졌다.7)
오마르를 중심으로 모인 탈레반들의 최종 목표는 평화회복과 무장해제, 샤리아(이슬람종교법)의 실시에 입각한 사회정화로 집약된다. 즉 내전과 무정부상태를 종식시키고 이슬람의 근본원리에 입각한 ‘순수한’ 이슬람의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깊은 신앙심으로 결집한 탈레반의 이상은 내전으로 지친 대중들의 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탈레반을 지지하는 지역이 확대될수록 탈레반의 무장력은 점차 강해졌다.
1994년 10월 탈레반의 첫 군사활동이 시작되었다.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남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온 이들은 불과 10여 명의 사상자만을 낸 채 아프가니스탄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칸다하르를 접수했다. 현지어로 탈레반, 즉 학생조직이라는 명칭만으로 알려져 있었던 이 ‘정체불명의 군대’는 불과 3개월 만에 아프가니스탄의 34개 주 중 12개 주를 점령했고, 지역 군벌들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탈레반의 휘하로 항복했다. 이들 군벌들이 보유하고 있는 전차, 전폭기와 헬리콥터 등의 중화기는 고스란히 탈레반의 손으로 들어갔고, 전력을 배가시켰다. 1996년 9월,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부르하누딘 랍바니(Burhanuddin Rabbani) 정권8)을 축출했다.
탈레반의 갑작스런 등장은 일거에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반(反)탈레반 세력들은 북부동맹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항했지만 전력의 차이가 확연했다. 98년 8월, 탈레반군은 최대 군벌세력 중의 하나인 압둘 라시드 도스툼(Abdul Rashid Dostum)9)의 근거지이기도 한 마자르 이 샤리프를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고 소수의 외교관 신분의 이란인들도 사망하여 국제문제로 비화되었다. 북부동맹은 전 국토의 10%정도만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위축되었다.
[%=박스1%]
탈레반 집권기
카불을 점령한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탈레반은 모든 여학교와 방송국 등의 시설들을 폐쇄시키고 카불 전역을 계엄령 상태로 만들었다. 탈레반은 처음부터 이념적으로 무슬림에서도 전례가 없는 ‘샤리아(율법)의 가장 엄격한 해석’을 표방했고, 이러한 통치정책으로 인해 특히 여성에 대한 인권탄압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금지한 대표적인 사례로써, 공공장소에서는 반드시 부르카를 착용해야 하며, 8세 이후 여성은 어떠한 교육도 받을 수 없으며 노동도 할 수 없으며, 오로지 코란의 학습만을 할 수 있었다. 단속을 피해 지하에서 교육받을 경우 적발 시 교수자와 학습자 모두 처형되었다. 또한 남성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을 수 없게 함으로써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여성들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금지조항을 어기는 여성들에게는 길거리에서 매질을 당하는 등의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고 심지어 율법을 위반한 죄목으로 공개처형당하기도 했다.
또한 기존의 모든 문화적 활동을 금지시켰다. 음악, 동물을 키우는 일, 서구식의 복장을 입거나 면도를 하는 행위, 사진과 그림, 도박 등의 행위는 율법의 위반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를 단속하기 위한 종교경찰이 운영되었다.
이처럼 종교적 극단주의가 실정에 반영되면서 많은 부작용을 낳았는데, 여기에는 탈레반 세력이 카불과 같은 국제적인 대도시를 접했던 경험이 미숙하였다는 점이 일정 부분 기인하기도 했다.
98년 북부의 마자르 이 샤리프 점령 당시 문제가 되었던 학살에서는 8천여 명에 달하는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학살의 배경에는 종족적 문제가 있었는데, 마자르 이 샤리프시는 북부에 퍼져 있는 하자라족과 우즈벡족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인구 대부분이 수니파인 아프간에서 하자라족만이 시아파로써, 시아파 국가인 이란이 하자라족 군벌들을 지원하고 있기도 했다. 또한 도시를 둘러싼 공방전에서 탈레반군 측의 피해 역시 극심했는데,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증폭된 갈등이 인종학살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불렀다. 이처럼 탈레반의 통치는 일정부분 종족적 갈등요소를 담지하고 있었는데, 집권 후 양대 공용어인 다리어(비파슈툰족 지역에서 널리 사용)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파슈툰어의 사용만을 강제함으로써 종족적 이질감을 심화시켰다.
2001년 3월, 탈레반은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얀 석불을 폭파하여 파괴함으로써 세계를 경악시켰다. 원래 물라 오마르는 문화유산의 보존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탈레반 집권 몇 년 후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율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역사적인 문화재가 모조리 파괴된 것이다. 파키스탄을 비롯한 탈레반의 지지국들마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폭파가 결행된 것에 대하여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다.
[%=사진2%]
미국의 침공 이후
애초 미국은 탈레반 정권에 대하여 우호적인 입장이었지만,15) 9.11 테러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정세는 다시 한 번 급격히 변화하였다. 축출된 탈레반 대신 북부동맹이 카불에 집권했고, 군벌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근거지와 병력을 되찾았다. 애초 북부동맹이 통일된 연대체가 아닌 임시적 결집이었던 만큼, 북부동맹의 구성원들 역시 새로운 정치질서의 설립보다는 자신들의 기반과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2002년에 세워진 과도정부의 수반이었던 하미드 카르자이16)는 2004년 선거를 통해 재선하여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사실상 현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수도 카불을 비롯한 몇몇 대도시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며 아프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과 NATO연합군의 힘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수도 이외의 지역은 지역 군벌의 통제 아래 있으며, 아프간 정부의 통치력은 지역 군벌과 중앙정부 간의 관계가 얼마나 우호적인가에 따라 좌우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서, 탈레반 역시 지역적 기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비록 집권기의 극단주의로 인해 비난받았지만 칸다하르 인근을 비롯한 지역에서는 아직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탈레반의 게릴라전 양상 또한 변화했다. 과거에는 무장 수준이 비슷한 정부군이나 무자헤딘 군벌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지만 이제 탈레반의 상대는 고도의 훈련수준과 첨단장비를 갖춘 미국과 NATO의 정규군 병력이기 때문이다. 월등한 전력의 차이를 상쇄하기 위해 2001년까진 아프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살폭탄 공격이 등장했다.
그간 아편재배는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던 아프간 민중들의 경제력을 지탱해 왔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2000년 아프가니스탄의 아편생산은 전세계 생산량의 75%에 달했다. 그해 탈레반 정권은 아편재배를 공식적으로 금지하였고, 이듬해 아편 생산은 12,600에이커에서 17에이커로 급감했다.17) 하지만 미국의 침공 이후 아편생산은 다시 급증했다. 뒤늦게 NATO군은 아편재배 단속에 나섰고,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생활의 기반을 잃고 이러한 자살폭탄 공격에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18) 이러한 자살폭탄 공격은 적의 시설이나 병력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는 것보다는 공포와 같은 심리적 효과를 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국제구호단체나 민간 외국인에 대한 납치와 살해 등의 양상도 생겨났다. 이전에 비교적 국제사회의 관심 밖에 치우쳤던 내전기와 달리 미국의 침공 이후에는 서방세계에서 온 언론과 민간단체, 기업 등의 왕래가 활발해졌고, 비무장의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방패로 삼거나 특정 요구사항들을 내놓음으로써 국제적인 주목을 끄는 방식이다. 이러한 새로운 양상으로의 변모는 알 카에다와 같은 세력과의 교류의 결과이기도 한데, 무자헤딘 게릴라에서 출발한 탈레반이 심리전과 같은 고도의 기법을 구사하는 정치세력으로 진화했음을 의미한다.
현재 탈레반은 파슈툰족이 거주하는 중남부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파키스탄이 있다. 현재 탈레반의 활동은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파키스탄 접경지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인접해 있는 파키스탄의 북와지리스탄주는 탈레반의 근거지가 된 지 오래이다. 때문에 파키스탄에 거점을 두고 있는 탈레반은 미국과 파키스탄 정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파키스탄의 북서변방 지역은 파키스탄 내 6개 급진 이슬람정당의 연합체 <연합행동전선(MMA; Muttahida Majlis-e-Amal, United Council of Action)>가 득세하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파슈툰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기에 탈레반에 매우 우호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슬람성직자회의(JUI; Jamiat Ulema-e-Islam, Assembly of Islamic Clergy)당>은 탈레반의 형성 배경이었던 파키스탄의 데오반드(Deoband) 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꾸준히 탈레반을 지원해 왔다. 지금도 이 지역에서 마드라사에서 교육받은 청년들이 탈레반에 지원해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때문에 미국은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정권에 이 지역의 탈레반을 소탕할 것을 요구했고, 2004년부터 와지리스탄 지역에서 파키스탄군은 대대적인 알 카에다와 탈레반 세력의 소탕작전에 나섰다. 와지리스탄을 비롯한 북부 변방지역은 파키스탄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고 탈레반을 지원하는 북와지리스탄의 부족장들의 연합체인 <와지리스탄이슬람연합(Islamic Emirate of Waziristan)>의 통제 아래 있었다. 전투는 2006년 7월 와지리스탄 지역의 탈레반 지도자 시라주딘 하콰니(Sirajuddin Haqqani)가 파키스탄군과의 전투행동을 중지하는 포고를 발령하므로써 마무리되었다.
이는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보조하기 위한 파키스탄 정부의 조치였으며 한편으로는 쿠데타로 집권하여 정치적 기반이 약한 무샤라프 정권의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탈레반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세력을 갖고 있는 파키스탄 국내의 파슈툰족과 야권의 이슬람정당들을 자극하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기에, 탈레반 문제는 무샤라프 정권의 딜레마이자 동시에 미국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2006년 9월, 무샤라프정권은 지역 부족장들과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파키스탄군이 철수하는 대신 <와지리스탄이슬람연합>의 부족장들이 탈레반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한 내용이었다.
이 협정은 오히려 탈레반이 세력을 재정비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아프간 국내에 진공해 있는 탈레반 세력의 공세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2006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NATO연합군, 그리고 아프간 정부에 대한 폭탄공격은 훨씬 더 빈번해졌다. 2006년 7월, 아프간 주둔 캐나다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판지와이(Panjwaii)지역에서 탈레반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전쟁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미국
패퇴한 탈레반이 파키스탄 접경지대를 근거지로 삼으면서 아프간의 정치상황은 파키스탄 내부의 정치적 문제까지 얽혀 한층 더 복잡해졌다. 무샤라프 독재정권에 대한 파키스탄 국민들의 반감은 상당한 수준에까지 고조되어 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데다가 수차례에 걸친 민정이양 약속을 어기고 군부의 힘을 빌어 철권 통치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슬람 정권인 탈레반을 축출하는 미국의 전쟁에 가담하므로써 야당과 이슬람근본주의 세력들은 무샤라프를 이슬람의 배신자로 규정했다.
미국은 이처럼 불안정한 무샤라프 체제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더 안정적이고 친미적인 정권이 들어서길 바라지만 자칫 극단적인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이 파키스탄의 정권을 잡을 지도 모르기에 ‘가장 혐오스러운 독재정권의 전형’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미국의 딜레마이다. 무샤라프는 파키스탄이 탈레반을 축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미국 행정부에 흐르는 전반적인 기류이다.19) 하지만 최악의 수를 피하고 파키스탄이 지닌 전략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미국은 한편으로는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이면에서는 부도덕한 독재 정권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탈레반에 이어 이젠 파키스탄이 미국에게 양날의 검이 되어버린 형국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미명으로 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던 미국. 이제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이라는 비수를 안은 채 미국을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수렁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다.
참고자료
-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한겨레21』2007년08월01일 제671호 "네오 탈레반, 더 센놈이 돌아왔다“
-『주간조선』2007년08월13일 제1967호 "[포커스] 파키스탄 파슈툰 지역은 탈레반의 해방구“
- Ahmed Rashid, "Taliban"
- 피터 마스던, "탈레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역, 박종철출판사, 2005
- 구동회, “세계의 분쟁지역”, 푸른길, 2005
- 위키피디아 “taliban" (http://en.wikipedia.org/wiki/Taliban)
CRS Report for Congress : "Afghanistan: Post-War Governance, Security, and U.S. Policy" Kenneth Katzman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crs/47083.pdf)
- "Afghanistan - Taliban Era"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afghanistan/taliban.htm)
- IRIN news : "AFGHANISTAN: Taliban propaganda effective among Pashtoons"
(http://www.irinnews.org/Report.aspx?ReportId=73535)
- IRIN news : "AFGHANISTAN: Killing of de-miners suggests change in Taliban tactics"
(http://www.irinnews.org/Report.aspx?ReportId=73618)
- ACIG journal: "Afghanistan, 1979-2001; Part 3", Tom Cooper
(http://www.acig.org/artman/publish/article_339.shtml)
평화네트워크 국제분쟁자료실
(http://www.peacekorea.org/main/board/zboard.php?id=argument)
국방연구원 세계분쟁정보 (http://www.kida.re.kr/neowoww/html/)
1)탈리브(Ṭālib)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이슬람 전통학교) 학생들을 가리키는 단어로써, 그 복수형 단어가 '탈리반'(혹은 탈레반)이다. 서방 언론에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탈레반’이 이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에 ‘탈레반’이란 명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탈리반’ 대신 ‘탈레반’으로 표기했다.본문으로
2)
빈 라덴의 신병인도를 놓고 2주일간 벌인 이 협상과정은 미국이 이미 사건 직후부터 9.11테러사건과 아프간 탈레반 정권이 무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배후에 대한 정보 역시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은 사건이 사우디-시리아-이라크-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척결하고 중동 내부의 반미 블럭을 형성한다는 목적으로 뭉친 특정 동맹세력이 벌인 행동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동맹세력의 비밀군사조직의 지도자 격인 빈 라덴을 일차적으로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참조.본문으로
3)
무자헤딘(Mujahideen)은 “싸우는 자”를 뜻하는 아랍어 단수 “mujahid"의 복수형어휘로써, 성전을 뜻하는 지하드(jihad)와 같은 어원을 두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교도에 맞서는 이슬람의 투사를 지칭해 왔던 이 단어는 20세기에 이르러 무슬림 게릴라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 활약했던 이슬람 무장세력들이 무자헤딘의 상징이 되었다.본문으로
4)
이러한 미국의 지원은 단지 소련군의 아프간 점령을 방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장기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지역에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최소한 미국에 충성스런 정치세력을 만들어 놓기 위한 마스터플랜에 따른 것이었다. 군사지원이 비밀리에 이루졌으며 파키스탄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이루어졌던 것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미국과 파키스탄이 反소련(-反파슈타니스탄) 전선의 주축으로 이슬람세력을 선택한 후,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들은 ‘저항전쟁’을 지휘할 ‘합법적’ 권위를 갖는 아프간의 정치적 대표체를 만드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방기했다. 대신 저항전쟁을 수행할 7개의 단위를 창출하면서 미국과 파키스탄은 이슬람세력 각각을 분할, 통제하는 방식을 취했다. CIA와 ISI는 헤크마티야르에게 특별 대우를 베풀었지만 대표권을 부여하지는 않았고, 각각을 대체로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미국의 개입과 무자헤딘 세력의 이후 내분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을 참조. 본문으로
5)
물라(Mullah, 또는 Mulla)는 ‘스승’을 뜻하는 이슬람어이다. 무함마드 오마르는 파슈툰족의 분파 중 하나인 Ghilzai 파의 Hotak족 출신으로써, 59년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 침공 당시 무자헤딘으로써 활약했던 그는 89년부터 92년까지 소련이 세운 나지불라 정권에 맞서 게릴라활동을 벌였고 이때 산탄파편에 맞아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파키스탄 접경지대의 도시 Quetta의 마드라사에 머물며 이슬람 학문활동에 몰두했고, 일군의 추종자들을 모아 세력화시키기에 이른다.본문으로
6)
“아프간-파키스탄 접경지역에 세워진 학교들은 다알 울름(Dar-al ‘Ulum) 계열이었다. 19세기 중반 인도의 도시 데오반드에서 수니 이슬람의 원리 교육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운동이 출발하였는데, 이들이 세운 이슬람 고등교육기관이 다알 울름이었다. 파키스탄의 데오반드 운동과 관련된 조직은 정치정당인 자미아티 울라마 이슬람(Jamiat-i Ulama-Islam, JUI)이다. 1978년 이후 JUI는 아프간 난민 소년들을 위한 수백개의 마드라사를 세웠다..”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참조.본문으로
7)
소련군 철수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임시정부를 세우려던 미국의 의도는 쉽사리 관철될 수 없었다. 소련의 힘을 배경으로 세워졌던 나지불라 정권은 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더 이상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퇴진했으며, 이로 인해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다.“1995년까지 카불은 세 번 파괴되었고 최소한 5만 명이 사망하였고, 수십만 명의 카불 시민이 파키스탄으로 몸을 피했다. 이 기간 동안 파벌 또는 군벌(warlord)은 아프가니스탄을 분할하였고, ‘법’과 ‘안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군벌세력은 국제기구의 난민 지원 물품을 약탈했다. 미국은 아프간 지역에 대해 손을 씻었고, 특별한 정책을 수립하지도 않았다. 단지 이슬람세력의 혈투 끝에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한 세력을 지지한다는 방침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로 인해 각 세력간의 전투는 더욱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참조.본문으로
8)
92년 나지불라 정권이 무너지자 <이슬람평의회(Jamiat-e Islami. 우즈벡족과 타지크족이 중심)> 의장으로써 권력을 이양받은 뒤, 같은 해 12월 임기 2년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96년 탈레반에 패퇴한 랍바니는 <북부동맹>의 명목상의 대표가 되나 실질적인 군권은 아흐마드 샤 마수드에게 있었다.본문으로
9)
Abdul Rashid Dostum. 아프가니스탄 국방차관을 지낸 적이 있는 우즈벡족 군벌이며 <이슬람민족운동(National Islamic Movement Afghanistan)>의 지도자이다. 80년대 공산정권에서 지역군사령관을 맡았던 그는 92년 나지불라 정권이 위기에 놓이자 반란을 일으켜 아흐마드 샤 마수드군에 연합하여 카불을 점령했다. 이 시기 그의 군대는 납치와 약탈, 집단성폭력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94년 도스툼은 다시 진영을 바꾸어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와 동맹을 맺고 다시 카불을 포위해 랍바니 정권과 전투를 벌였다. 탈레반의 진격이 시작되자 그는 또다시 랍바니와 마수드 세력과 손잡고 북부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그는 탈레반군에 ?겨 이란으로 망명했고, 2001년 미국의 침공과 함께 다시 재등장했다. 표면적으로는 과도정부의 국방차관직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북부지역을 자신의 영지처럼 독립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2005년 카르자이 내각에서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역시 실질적인 직함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본문으로
10)
Ahmad Shah Massoud. 민족주의자이자 타지크족 출신의 카불대 공과대 학생이었던 그는 학생 시절 부르하누딘 랍바니(당시 교수)가 의장이었던 <이슬람평의회(Jamiat-e Islami)>의 영향을 받았다.
:탈레반의 기원과 현황
[%=사진1%]
2001년 10월 7일, 인도양의 미해군 함정들로부터 발사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이 남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Taliban)1) 군사기지들을 타격했다. 9.11 테러가 벌어진 지 26일도 채 되지 않아 ‘항구적 자유(Operation Enduring Freedom)’로 이름붙여진 일련의 군사작전이 개시된 것이다. 이것은 이후 7년 간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점령으로 이어진 기나긴 침략전쟁, 이른바 ‘대테러전쟁’의 신호탄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를 테러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부가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을 비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 미국은 탈레반 정부에 알 카에다 지도부의 신병을 미국에 넘길 것과 아프가니스탄 국내의 모든 알 카에다의 훈련기지들을 즉각 폐쇄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탈레반은 자신들과 9.11 테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주장했고, 빈 라덴이 테러의 주범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제시한다면 그의 신병을 넘기겠다고 답했다. 탈레반 정부를 인정했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이 탈레반에 대한 승인을 철회하고, 미국의 최후 통첩일이 다가오자 탈레반은 파키스탄에서 국제법정을 열어 이슬람 율법(샤리아)에 따라 빈 라덴을 재판하겠다는 제안도 내놓았지만 거절당했다. 탈레반의 요구조건은 제3국이 아니어도 좋다는 쪽으로 계속 후퇴했지만 미국의 입장은 이미 보복공격을 실시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이미 항공모함 전단과 공군 항공단들이 작전을 위한 전개를 끝마친 뒤였다.
10월 7일의 순항미사일 공격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각지의 탈레반 군기지와 알 카에다의 훈련시설에 미국과 영국 공군기들이 대대적인 공습을 개시했다. 공습은 탈레반의 본거지인 칸다하르(Kandahar)를 비롯해 수도 카불(Kabul), 잘랄라바드(Jalalabad) 등의 지역에 집중되었다. 탈레반의 무장력은 대부분 소련군 침공 당시 쓰였던 노후 장비들이었고 그나마 며칠 만에 모두 파괴되었다.
지상에서는 탈레반에 패퇴하여 反탈레반 연합전선을 이루었던 북부동맹의 병력들이 공세를 시작했다. 미국과 영국의 특수부대원들이 합류한 북부동맹군은 NATO 공군의 지원을 받아 탈레반 병력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11월 9일, 북부의 주요도시 마자르 이 샤리프(Mazar-i-Sharif)가 북부동맹군에게 점령되자, 다수의 지역 군벌들이 탈레반에서 북부동맹으로 돌아섰다. 11월 12일,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잘랄라바드와 쿤두즈(Kunduz) 등의 도시들도 북부동맹에게 점령당했고 12월에 이르러 탈레반의 최후의 보루였던 칸다하르까지 함락되었다. 탈레반의 잔여 병력들은 파키스탄 국경지대로 도망쳤고, 험준한 산악지대에 숨어들어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탈레반의 등장
탈레반의 시작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던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과 파키스탄은 비밀리에 이슬람 무장세력3)에 대한 지원을 시작했고, 이들을 소련의 침공에 맞선 대항마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무자헤딘 훈련캠프의 주요 일원이었다. 미국은 막대한 원조자금을 퍼부었고, 87년까지 6만 5천톤에 달하는 미제 무기가 공급되었다. 이중에는 신형 스팅거 견착식 지대공미사일과 같은 장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4)
여기서 훈련받으며 對소련 무장항쟁 활동을 벌였던 무자헤딘 세력 중의 일부가 탈레반의 기원이다. 이들의 근거지는 헬만드(Helmand)와 칸다하르를 비롯한 파슈툰족 지역이었고, 이러한 종족적 기반이 이후 탈레반의 성격을 특징짓게 된다. 이들 역시 미국, 그리고 기타 중동국가들(주로 수니파 이슬람권)로부터 훈련과 보급을 지원받았다. 이러한 지원은 표면적으로는 파키스탄 정부, 특히 정보국(ISI;Inter-Services Intelligence)에 의한 것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Mohammed Omar)5). 그 휘하로 마드라사(이슬람학교)에서 수학하던 교육자들과 소규모 군벌조직의 리더들이 섞여 있었다. 여기에 파키스탄 내 마드라사에서 온 아프간 출신 망명자들이 합류했다. 구성원 대부분은 남부 아프간과 서부 파키스탄의 파슈툰족이었고, 유라시아와 중국 출신의 소수의 자원자들이 있었다. 이처럼 탈레반의 주축을 이루었던 무자헤딘 출신들은 철저히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사상적 경향을 갖고 있었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에는 다수의 마드라사들이 세워져 있었고6), 여기서 수학했던 많은 이들이 이슬람원리주의의 기치를 들고 탈레반에 참가하게 된다.
애초 탈레반의 취지는 잔학한 무자헤딘 군벌들 간의 끊임없는 내전으로 인해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을 구휼하려는 동기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탈레반의 등장 배경으로 두 가지의 설이 유력하게 알려져 있는데 하나는 칸다하르 지역에서 지역 게릴라들이 어린이들의 납치와 강간․살해 등을 일삼자 이에 분노한 오마르와 그의 학생들이 범죄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일어섰다는 것이다. 1994년 초 오마르가 16정의 소총으로 무장한 30명을 이끌고 지역 군벌에게 납치당했던 두 소녀를 구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댓가를 요구하지 않고 대중들에게 이슬람의 신앙에 충실한 삶을 살 것을 강조하였으며, 그로써 대중적인 신망을 얻었다.
다른 하나는 ‘Afghanistan Transit Trade’로 알려진 파키스탄의 마피아 무역상단과 파키스탄정부 내의 협력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중앙아시아 공화국들로 향하는 남부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탈레반에 무장과 자금을 제공했다는 설이다. 94년을 기점으로,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복잡한 군벌 간의 난립구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탈레반의 성장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프가니스탄의 민족과 종파에 대한 이해가 수반된다. 통계마다 약간씩의 오차가 존재하나, 파슈툰족이 전체 인구 중 가장 많은 36~42%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타지크족이 27~33%, 하자라족과 우즈벡족이 8% 안팎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기타 아이막족과 누리스탄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이 10% 정도가 있다. 아프간 인구의 99%에 달하는 절대다수가 무슬림이다. 이 중 하자라족을 포함하여 9~25%가 시아파, 나머지 89~74%가 수니파 이슬람이다. 하지만 종족 내부에서도 다시금 수많은 계파와 부족들로 분화되어 있기에 파슈툰족이라고 해서 모두 단일한 종족적 정체성과 연대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계파와 부족단위에서의 다양한 갈등요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종족과 종교적 차이는 아프간 내 군벌들의 세력갈등을 설명하는 요인이 될 수 있는데, 탈레반의 조직 기반이 남부의 파슈툰족이었다는 사실은 이후 북부동맹으로 결집하게 되는 반(反)탈레반 연합세력들이 북부의 타지크족과 우즈벡족, 하자라족들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89년 소련군이 철수한 이후, 각지의 군벌세력들 간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각 무자헤딘 파벌들 간 대립의 이면에는 소련군과의 전쟁기간 중에 자신들을 지원했던 이란, 중국,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고, 이후 아프간은 심각한 내전상태에 빠졌다.7)
오마르를 중심으로 모인 탈레반들의 최종 목표는 평화회복과 무장해제, 샤리아(이슬람종교법)의 실시에 입각한 사회정화로 집약된다. 즉 내전과 무정부상태를 종식시키고 이슬람의 근본원리에 입각한 ‘순수한’ 이슬람의 이상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깊은 신앙심으로 결집한 탈레반의 이상은 내전으로 지친 대중들의 넓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탈레반을 지지하는 지역이 확대될수록 탈레반의 무장력은 점차 강해졌다.
1994년 10월 탈레반의 첫 군사활동이 시작되었다.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남부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온 이들은 불과 10여 명의 사상자만을 낸 채 아프가니스탄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칸다하르를 접수했다. 현지어로 탈레반, 즉 학생조직이라는 명칭만으로 알려져 있었던 이 ‘정체불명의 군대’는 불과 3개월 만에 아프가니스탄의 34개 주 중 12개 주를 점령했고, 지역 군벌들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탈레반의 휘하로 항복했다. 이들 군벌들이 보유하고 있는 전차, 전폭기와 헬리콥터 등의 중화기는 고스란히 탈레반의 손으로 들어갔고, 전력을 배가시켰다. 1996년 9월,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부르하누딘 랍바니(Burhanuddin Rabbani) 정권8)을 축출했다.
탈레반의 갑작스런 등장은 일거에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반(反)탈레반 세력들은 북부동맹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항했지만 전력의 차이가 확연했다. 98년 8월, 탈레반군은 최대 군벌세력 중의 하나인 압둘 라시드 도스툼(Abdul Rashid Dostum)9)의 근거지이기도 한 마자르 이 샤리프를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했고 소수의 외교관 신분의 이란인들도 사망하여 국제문제로 비화되었다. 북부동맹은 전 국토의 10%정도만 영향력을 미칠 정도로 위축되었다.
[%=박스1%]
탈레반 집권기
카불을 점령한지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탈레반은 모든 여학교와 방송국 등의 시설들을 폐쇄시키고 카불 전역을 계엄령 상태로 만들었다. 탈레반은 처음부터 이념적으로 무슬림에서도 전례가 없는 ‘샤리아(율법)의 가장 엄격한 해석’을 표방했고, 이러한 통치정책으로 인해 특히 여성에 대한 인권탄압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금지한 대표적인 사례로써, 공공장소에서는 반드시 부르카를 착용해야 하며, 8세 이후 여성은 어떠한 교육도 받을 수 없으며 노동도 할 수 없으며, 오로지 코란의 학습만을 할 수 있었다. 단속을 피해 지하에서 교육받을 경우 적발 시 교수자와 학습자 모두 처형되었다. 또한 남성 보호자를 동반하지 않고서는 남성 의사에게 진료받을 수 없게 함으로써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여성들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금지조항을 어기는 여성들에게는 길거리에서 매질을 당하는 등의 가혹한 처벌이 가해졌고 심지어 율법을 위반한 죄목으로 공개처형당하기도 했다.
또한 기존의 모든 문화적 활동을 금지시켰다. 음악, 동물을 키우는 일, 서구식의 복장을 입거나 면도를 하는 행위, 사진과 그림, 도박 등의 행위는 율법의 위반으로 간주되었으며 이를 단속하기 위한 종교경찰이 운영되었다.
이처럼 종교적 극단주의가 실정에 반영되면서 많은 부작용을 낳았는데, 여기에는 탈레반 세력이 카불과 같은 국제적인 대도시를 접했던 경험이 미숙하였다는 점이 일정 부분 기인하기도 했다.
98년 북부의 마자르 이 샤리프 점령 당시 문제가 되었던 학살에서는 8천여 명에 달하는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학살의 배경에는 종족적 문제가 있었는데, 마자르 이 샤리프시는 북부에 퍼져 있는 하자라족과 우즈벡족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인구 대부분이 수니파인 아프간에서 하자라족만이 시아파로써, 시아파 국가인 이란이 하자라족 군벌들을 지원하고 있기도 했다. 또한 도시를 둘러싼 공방전에서 탈레반군 측의 피해 역시 극심했는데,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증폭된 갈등이 인종학살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불렀다. 이처럼 탈레반의 통치는 일정부분 종족적 갈등요소를 담지하고 있었는데, 집권 후 양대 공용어인 다리어(비파슈툰족 지역에서 널리 사용)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파슈툰어의 사용만을 강제함으로써 종족적 이질감을 심화시켰다.
2001년 3월, 탈레반은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얀 석불을 폭파하여 파괴함으로써 세계를 경악시켰다. 원래 물라 오마르는 문화유산의 보존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탈레반 집권 몇 년 후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율법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역사적인 문화재가 모조리 파괴된 것이다. 파키스탄을 비롯한 탈레반의 지지국들마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폭파가 결행된 것에 대하여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다.
[%=사진2%]
미국의 침공 이후
애초 미국은 탈레반 정권에 대하여 우호적인 입장이었지만,15) 9.11 테러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정세는 다시 한 번 급격히 변화하였다. 축출된 탈레반 대신 북부동맹이 카불에 집권했고, 군벌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근거지와 병력을 되찾았다. 애초 북부동맹이 통일된 연대체가 아닌 임시적 결집이었던 만큼, 북부동맹의 구성원들 역시 새로운 정치질서의 설립보다는 자신들의 기반과 영향력을 회복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2002년에 세워진 과도정부의 수반이었던 하미드 카르자이16)는 2004년 선거를 통해 재선하여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사실상 현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수도 카불을 비롯한 몇몇 대도시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며 아프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과 NATO연합군의 힘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수도 이외의 지역은 지역 군벌의 통제 아래 있으며, 아프간 정부의 통치력은 지역 군벌과 중앙정부 간의 관계가 얼마나 우호적인가에 따라 좌우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상황에서, 탈레반 역시 지역적 기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비록 집권기의 극단주의로 인해 비난받았지만 칸다하르 인근을 비롯한 지역에서는 아직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탈레반의 게릴라전 양상 또한 변화했다. 과거에는 무장 수준이 비슷한 정부군이나 무자헤딘 군벌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지만 이제 탈레반의 상대는 고도의 훈련수준과 첨단장비를 갖춘 미국과 NATO의 정규군 병력이기 때문이다. 월등한 전력의 차이를 상쇄하기 위해 2001년까진 아프간에 존재하지 않았던 자살폭탄 공격이 등장했다.
그간 아편재배는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던 아프간 민중들의 경제력을 지탱해 왔던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2000년 아프가니스탄의 아편생산은 전세계 생산량의 75%에 달했다. 그해 탈레반 정권은 아편재배를 공식적으로 금지하였고, 이듬해 아편 생산은 12,600에이커에서 17에이커로 급감했다.17) 하지만 미국의 침공 이후 아편생산은 다시 급증했다. 뒤늦게 NATO군은 아편재배 단속에 나섰고,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생활의 기반을 잃고 이러한 자살폭탄 공격에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18) 이러한 자살폭탄 공격은 적의 시설이나 병력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주는 것보다는 공포와 같은 심리적 효과를 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국제구호단체나 민간 외국인에 대한 납치와 살해 등의 양상도 생겨났다. 이전에 비교적 국제사회의 관심 밖에 치우쳤던 내전기와 달리 미국의 침공 이후에는 서방세계에서 온 언론과 민간단체, 기업 등의 왕래가 활발해졌고, 비무장의 민간인들을 납치하여 방패로 삼거나 특정 요구사항들을 내놓음으로써 국제적인 주목을 끄는 방식이다. 이러한 새로운 양상으로의 변모는 알 카에다와 같은 세력과의 교류의 결과이기도 한데, 무자헤딘 게릴라에서 출발한 탈레반이 심리전과 같은 고도의 기법을 구사하는 정치세력으로 진화했음을 의미한다.
현재 탈레반은 파슈툰족이 거주하는 중남부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파키스탄이 있다. 현재 탈레반의 활동은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파키스탄 접경지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아프가니스탄과 인접해 있는 파키스탄의 북와지리스탄주는 탈레반의 근거지가 된 지 오래이다. 때문에 파키스탄에 거점을 두고 있는 탈레반은 미국과 파키스탄 정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파키스탄의 북서변방 지역은 파키스탄 내 6개 급진 이슬람정당의 연합체 <연합행동전선(MMA; Muttahida Majlis-e-Amal, United Council of Action)>가 득세하고 있는 지역이다. 또한 파슈툰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기에 탈레반에 매우 우호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이슬람성직자회의(JUI; Jamiat Ulema-e-Islam, Assembly of Islamic Clergy)당>은 탈레반의 형성 배경이었던 파키스탄의 데오반드(Deoband) 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꾸준히 탈레반을 지원해 왔다. 지금도 이 지역에서 마드라사에서 교육받은 청년들이 탈레반에 지원해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때문에 미국은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정권에 이 지역의 탈레반을 소탕할 것을 요구했고, 2004년부터 와지리스탄 지역에서 파키스탄군은 대대적인 알 카에다와 탈레반 세력의 소탕작전에 나섰다. 와지리스탄을 비롯한 북부 변방지역은 파키스탄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고 탈레반을 지원하는 북와지리스탄의 부족장들의 연합체인 <와지리스탄이슬람연합(Islamic Emirate of Waziristan)>의 통제 아래 있었다. 전투는 2006년 7월 와지리스탄 지역의 탈레반 지도자 시라주딘 하콰니(Sirajuddin Haqqani)가 파키스탄군과의 전투행동을 중지하는 포고를 발령하므로써 마무리되었다.
이는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보조하기 위한 파키스탄 정부의 조치였으며 한편으로는 쿠데타로 집권하여 정치적 기반이 약한 무샤라프 정권의 정치적 계산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탈레반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세력을 갖고 있는 파키스탄 국내의 파슈툰족과 야권의 이슬람정당들을 자극하는 자충수가 될 수도 있기에, 탈레반 문제는 무샤라프 정권의 딜레마이자 동시에 미국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2006년 9월, 무샤라프정권은 지역 부족장들과 평화협정을 맺었는데, 파키스탄군이 철수하는 대신 <와지리스탄이슬람연합>의 부족장들이 탈레반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골자로 한 내용이었다.
이 협정은 오히려 탈레반이 세력을 재정비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아프간 국내에 진공해 있는 탈레반 세력의 공세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2006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과 NATO연합군, 그리고 아프간 정부에 대한 폭탄공격은 훨씬 더 빈번해졌다. 2006년 7월, 아프간 주둔 캐나다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판지와이(Panjwaii)지역에서 탈레반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전쟁의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미국
패퇴한 탈레반이 파키스탄 접경지대를 근거지로 삼으면서 아프간의 정치상황은 파키스탄 내부의 정치적 문제까지 얽혀 한층 더 복잡해졌다. 무샤라프 독재정권에 대한 파키스탄 국민들의 반감은 상당한 수준에까지 고조되어 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데다가 수차례에 걸친 민정이양 약속을 어기고 군부의 힘을 빌어 철권 통치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슬람 정권인 탈레반을 축출하는 미국의 전쟁에 가담하므로써 야당과 이슬람근본주의 세력들은 무샤라프를 이슬람의 배신자로 규정했다.
미국은 이처럼 불안정한 무샤라프 체제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더 안정적이고 친미적인 정권이 들어서길 바라지만 자칫 극단적인 이슬람근본주의 세력이 파키스탄의 정권을 잡을 지도 모르기에 ‘가장 혐오스러운 독재정권의 전형’을 지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미국의 딜레마이다. 무샤라프는 파키스탄이 탈레반을 축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미국 행정부에 흐르는 전반적인 기류이다.19) 하지만 최악의 수를 피하고 파키스탄이 지닌 전략적 가치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미국은 한편으로는 강경한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이면에서는 부도덕한 독재 정권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탈레반에 이어 이젠 파키스탄이 미국에게 양날의 검이 되어버린 형국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미명으로 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던 미국. 이제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이라는 비수를 안은 채 미국을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수렁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다.
참고자료
-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한겨레21』2007년08월01일 제671호 "네오 탈레반, 더 센놈이 돌아왔다“
-『주간조선』2007년08월13일 제1967호 "[포커스] 파키스탄 파슈툰 지역은 탈레반의 해방구“
- Ahmed Rashid, "Taliban"
- 피터 마스던, "탈레반",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역, 박종철출판사, 2005
- 구동회, “세계의 분쟁지역”, 푸른길, 2005
- 위키피디아 “taliban" (http://en.wikipedia.org/wiki/Taliban)
CRS Report for Congress : "Afghanistan: Post-War Governance, Security, and U.S. Policy" Kenneth Katzman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library/report/crs/47083.pdf)
- "Afghanistan - Taliban Era"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afghanistan/taliban.htm)
- IRIN news : "AFGHANISTAN: Taliban propaganda effective among Pashtoons"
(http://www.irinnews.org/Report.aspx?ReportId=73535)
- IRIN news : "AFGHANISTAN: Killing of de-miners suggests change in Taliban tactics"
(http://www.irinnews.org/Report.aspx?ReportId=73618)
- ACIG journal: "Afghanistan, 1979-2001; Part 3", Tom Cooper
(http://www.acig.org/artman/publish/article_339.shtml)
평화네트워크 국제분쟁자료실
(http://www.peacekorea.org/main/board/zboard.php?id=argument)
국방연구원 세계분쟁정보 (http://www.kida.re.kr/neowoww/html/)
1)탈리브(Ṭālib)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이슬람 전통학교) 학생들을 가리키는 단어로써, 그 복수형 단어가 '탈리반'(혹은 탈레반)이다. 서방 언론에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탈레반’이 이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에 ‘탈레반’이란 명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탈리반’ 대신 ‘탈레반’으로 표기했다.본문으로
2)
빈 라덴의 신병인도를 놓고 2주일간 벌인 이 협상과정은 미국이 이미 사건 직후부터 9.11테러사건과 아프간 탈레반 정권이 무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배후에 대한 정보 역시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은 사건이 사우디-시리아-이라크-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척결하고 중동 내부의 반미 블럭을 형성한다는 목적으로 뭉친 특정 동맹세력이 벌인 행동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동맹세력의 비밀군사조직의 지도자 격인 빈 라덴을 일차적으로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참조.본문으로
3)
무자헤딘(Mujahideen)은 “싸우는 자”를 뜻하는 아랍어 단수 “mujahid"의 복수형어휘로써, 성전을 뜻하는 지하드(jihad)와 같은 어원을 두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교도에 맞서는 이슬람의 투사를 지칭해 왔던 이 단어는 20세기에 이르러 무슬림 게릴라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 활약했던 이슬람 무장세력들이 무자헤딘의 상징이 되었다.본문으로
4)
이러한 미국의 지원은 단지 소련군의 아프간 점령을 방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장기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지역에 미국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최소한 미국에 충성스런 정치세력을 만들어 놓기 위한 마스터플랜에 따른 것이었다. 군사지원이 비밀리에 이루졌으며 파키스탄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이루어졌던 것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미국과 파키스탄이 反소련(-反파슈타니스탄) 전선의 주축으로 이슬람세력을 선택한 후,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들은 ‘저항전쟁’을 지휘할 ‘합법적’ 권위를 갖는 아프간의 정치적 대표체를 만드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방기했다. 대신 저항전쟁을 수행할 7개의 단위를 창출하면서 미국과 파키스탄은 이슬람세력 각각을 분할, 통제하는 방식을 취했다. CIA와 ISI는 헤크마티야르에게 특별 대우를 베풀었지만 대표권을 부여하지는 않았고, 각각을 대체로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미국의 개입과 무자헤딘 세력의 이후 내분에 대한 더욱 자세한 내용은 이 글을 참조. 본문으로
5)
물라(Mullah, 또는 Mulla)는 ‘스승’을 뜻하는 이슬람어이다. 무함마드 오마르는 파슈툰족의 분파 중 하나인 Ghilzai 파의 Hotak족 출신으로써, 59년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 침공 당시 무자헤딘으로써 활약했던 그는 89년부터 92년까지 소련이 세운 나지불라 정권에 맞서 게릴라활동을 벌였고 이때 산탄파편에 맞아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파키스탄 접경지대의 도시 Quetta의 마드라사에 머물며 이슬람 학문활동에 몰두했고, 일군의 추종자들을 모아 세력화시키기에 이른다.본문으로
6)
“아프간-파키스탄 접경지역에 세워진 학교들은 다알 울름(Dar-al ‘Ulum) 계열이었다. 19세기 중반 인도의 도시 데오반드에서 수니 이슬람의 원리 교육을 강조하는 개혁주의 운동이 출발하였는데, 이들이 세운 이슬람 고등교육기관이 다알 울름이었다. 파키스탄의 데오반드 운동과 관련된 조직은 정치정당인 자미아티 울라마 이슬람(Jamiat-i Ulama-Islam, JUI)이다. 1978년 이후 JUI는 아프간 난민 소년들을 위한 수백개의 마드라사를 세웠다..”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참조.본문으로
7)
소련군 철수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임시정부를 세우려던 미국의 의도는 쉽사리 관철될 수 없었다. 소련의 힘을 배경으로 세워졌던 나지불라 정권은 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더 이상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퇴진했으며, 이로 인해 내전은 더욱 격화되었다.“1995년까지 카불은 세 번 파괴되었고 최소한 5만 명이 사망하였고, 수십만 명의 카불 시민이 파키스탄으로 몸을 피했다. 이 기간 동안 파벌 또는 군벌(warlord)은 아프가니스탄을 분할하였고, ‘법’과 ‘안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군벌세력은 국제기구의 난민 지원 물품을 약탈했다. 미국은 아프간 지역에 대해 손을 씻었고, 특별한 정책을 수립하지도 않았다. 단지 이슬람세력의 혈투 끝에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한 세력을 지지한다는 방침을 드러냈을 뿐이다. (이로 인해 각 세력간의 전투는 더욱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임필수, 「아프가니스탄, 1978년 이후」, 월간 『사회운동』2001년 12월호 참조.본문으로
8)
92년 나지불라 정권이 무너지자 <이슬람평의회(Jamiat-e Islami. 우즈벡족과 타지크족이 중심)> 의장으로써 권력을 이양받은 뒤, 같은 해 12월 임기 2년의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96년 탈레반에 패퇴한 랍바니는 <북부동맹>의 명목상의 대표가 되나 실질적인 군권은 아흐마드 샤 마수드에게 있었다.본문으로
9)
Abdul Rashid Dostum. 아프가니스탄 국방차관을 지낸 적이 있는 우즈벡족 군벌이며 <이슬람민족운동(National Islamic Movement Afghanistan)>의 지도자이다. 80년대 공산정권에서 지역군사령관을 맡았던 그는 92년 나지불라 정권이 위기에 놓이자 반란을 일으켜 아흐마드 샤 마수드군에 연합하여 카불을 점령했다. 이 시기 그의 군대는 납치와 약탈, 집단성폭력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94년 도스툼은 다시 진영을 바꾸어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와 동맹을 맺고 다시 카불을 포위해 랍바니 정권과 전투를 벌였다. 탈레반의 진격이 시작되자 그는 또다시 랍바니와 마수드 세력과 손잡고 북부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그는 탈레반군에 ?겨 이란으로 망명했고, 2001년 미국의 침공과 함께 다시 재등장했다. 표면적으로는 과도정부의 국방차관직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북부지역을 자신의 영지처럼 독립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2005년 카르자이 내각에서 육군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역시 실질적인 직함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본문으로
10)
Ahmad Shah Massoud. 민족주의자이자 타지크족 출신의 카불대 공과대 학생이었던 그는 학생 시절 부르하누딘 랍바니(당시 교수)가 의장이었던 <이슬람평의회(Jamiat-e Islami)>의 영향을 받았다.
8월 28일, 탈레반에 의해 피랍된 한국인 19명의 석방이 합의되었다. 7월 19일 피랍이후, 꼭 41일만의 일이다. 한국정부와 탈레반 간의 네 번째 대면협상을 통해 결정된 합의사항은 연내 한국군 철군 비정부기구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 이달 말까지 철수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의 선교활동의 중단 인질 석방 중 탈레반을 공격하지 않을 것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의해 구금된 탈레반 포로들의 석방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것. 이상 5개 항이다. 인질의 몸값 지불여부, 한국의 외교 협상력의 치적, 기독교의 배타적·공격적 선교라는 맹비난 여론 등. 몇 가지의 선정적인 뉴스거리를 남기면서, 아프간 피랍사태는 일단락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미군사동맹이 초래한 죽음과 비극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미국의 '대테러전쟁'이 몰고 온 끔찍한 증오와 폭력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고 이라크와 레바논서, 그리고 중동지역 전역에서 한국은 이미 그 전쟁의 한 가운데 서 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한, 또 다른 참극은 이미 예고되고 있다. '대 테러동맹'의 참혹한 대가 정부와 언론은 피랍초기부터 줄곧 사태의 원인을 '기독교의 무리한 선교'로 돌리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탈레반은 처음부터 한국인이 탑승한 버스인지도 몰랐고, 따라서 파병국가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표적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한국군 파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문제의 핵심은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 국가'를 찾아간 23명의 '공격적 선교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21명의 피랍자들에게 구상권을 행사하겠다는 방침까지 밝히고 나섰다. 이 얼마나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주장인가. 아프가니스탄을 '위험국가'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이 참전하고 있는 미국의 아프간 점령이다. 가옥과 결혼식장, 장례식장을 무차별 공격하는 미국과 동맹국의 점령이 탈레반의 민간인 납치, 살해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대한민국은 이미 많은 이들의 무고한 목숨을 전쟁의 희생양으로 삼으며 '테러와의 전쟁'에 온갖 충성을 갖다 바치고 있었고, 그 덕분에 탈레반은 23명을 납치, 살해할 수 있는 명분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번 양보해 23명의 피랍자들이 '무리한 선교'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치자. 한국정부의 파병과 한·미 군사동맹이 아프가니스탄을 향하지 않았었다면, 탈레반은 민간인을 살해하고 장기간을 피랍 할 수 있는 어떠한 명분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한국정부를 통해 미국과 카르자이 정부에게 요구할 협상카드도 사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고 배형규, 심성민 씨가 무참히 살해되는 그 순간까지, '즉각 철군' 이라는 카드를 결코 꺼내지 않았다. 잔인하고 참혹한 두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미국과의 '대테러동맹'을 굳건히 지켜냈다는 치적을 뽐내며, 이제 살려놨으니 돈으로 갚으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라크 자이툰 부대 파병에 이어, 아프간과 레바논의 파병은 오무전기 노동자들과 김선일 씨의 피살, 윤장호 씨의 죽음과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까지 죽음과 비극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참혹한 기록이 말하고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한·미 전쟁 동맹이 앞으로 더 많은 죽음, 더 많은 비극을 예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테러전쟁'이 몰고 온 증오와 폭력은 이제 어느덧 한반도를 겨냥하고 있다. 한국은 한·미 동맹의 이름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레바논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면서 언제든, 누구든, 어느 때이든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 공포는 더 많은, 더 강력한 '대 테러동맹'을 원할 것이고 그 결과 더 많은, 더 강력한 폭력이 그에 대한 대가로 돌아올 것이다. [%=사진1%]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의 논란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점령반대, 한국군 즉각 철군을 요구하며 시민과 함께 하는 촛불집회를 지속해나갔다. 그러나 정부의 파병정책에 대한 분노는 위력적인 대중운동으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대중들의 지배적인 정서는 기독교 선교에 대한 반감으로 표상되었고, 미국의 점령과 파병이 사태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는 인식은 지배적 여론에 밀려 대중적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한편 반전평화운동 내적으로는 무엇에 초점을 두고 운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시각차이가 드러난 계기였다. 탈레반은 23명을 납치한 직후, 아프간에 있는 한국의 동의·다산부대의 즉각적인 철군을 요구했다. 반전평화운동은 <파병반대 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을 중심으로 기자회견(7월 21일)과 촛불집회를 시급히 조직하였고, 즉각 철군과 미국의 점령 중단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탈레반에게 피랍자 석방을 요구할 것인가"의 문제가 쟁점으로 등장했다. 7월 26일 열린 <국민행동> 기획단회의에서는 '피랍자 즉각 석방'의 요구를 슬로건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입장이 제출되었다. 탈레반에게 인질석방을 요구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양비론으로 몰고 갈 위험(미국 반대/탈레반 반대)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현 시기 운동의 방향은 점령과 파병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을 제기하였다. 토론 끝에 이 문제는 결국 다수결을 통해 결정되었고 결국 다수 안으로 <국민행동>의 핵심요구는 "피랍자 석방, 점령종식, 즉각 철군"으로 정리되었다. 7월 말, 피랍 20일이 경과하면서 탈레반의 인질석방 조건이 '탈레반 수감자 석방'으로 변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행동>은 당면 핵심요구에 탈레반의 '포로교환요구 수용'을 추가하는 것을 논의에 부쳤다. 이는 또 한 번의 논쟁을 일으켰는데 "민간인의 생명을 볼모로 한 탈레반의 잘못된 요구를 대변할 수 없다."는 입장과 "미국의 점령을 비판하고, 점령 종식을 압박할 수 있는 요구로써 탈레반의 요구는 수용 가능하다."는 입장이 대립되었다. 이 문제 역시 다수의 의견을 따라 '포로교환요구 수용'이 핵심적인 요구에 추가되었다. 이러한 쟁점들은 성명 발표, 촛불집회 기조를 결정할 때마다 참가단체들 간에 상당한 논란을 빚었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피랍자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활동을 독자적으로 조직하기도 하였다. (8월 7일, 평화 여성 환경 종교, 문화 분야 78개 시민단체, '노란 리본 달기'운동.) 논란은 8월 27일에 개최된 <국민행동> 운영위원회에서 일단락 되었는데, 당면 슬로건을 "무사귀환, 점령종식, 즉각 철군"으로 정리하고 이외에 '포로교환요구 수용'은 미국의 책임을 묻는 내용과 결합시키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78개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를 호소하는 성명에는 탈레반에 대한 비판과 인질들의 조속한 석방이 가장 중심적인 내용으로 담겨있다. 이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 살해하는 탈레반의 폭력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키고, 인질을 구해내는 것으로 사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국민행동>의 촛불집회 기조와 관련해서도 한·미 동맹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로부터 무사귀환의 염원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한편에서는 이 사태를 계기로 반전·반미의 목소리를 보다 확산시켜 나가는 적극적인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운동진영이 해야 할 역할은 피랍자 석방의 기술적 방법 자체를 제시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한·미 동맹 반대라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여 반전평화운동의 정치적 고양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양자의 입장은 모두 아프간 피랍사태에 대한 각자의 '평화주의적 해결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고도의 군사공격에 의해 격퇴 당한 탈레반이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복을 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피랍자들의 생명구제는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일 수 밖 에 없다. 또한 탈레반 전쟁포로들이 미군에 의해 최소한의 포로대우도 받지 못하고, 끔찍한 인권유린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은 탈레반으로 하여금 민간인 납치를 볼모로 포로석방을 요구하게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추동하고 있다. '피랍자 즉각 석방'의 요구나 '탈레반 수감자 석방'의 요구들은 각각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것 하나가 '절대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자의 입장이 모두 가로막혀 있는 지점은 결국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전쟁과 새로운 폭력의 양상들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이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범세계적 공안정국과 새로운 폭력의 시대 9·11이후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시작으로 이라크 전쟁, 가자, 레바논, 소말리아 전쟁으로 번져갔고, 현재는 이란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테러'는 정치· 군사적 약자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제아무리 압도적인 정치· 군사적 우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확산해 나간다 하여도 반복적으로, 심지어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으로, 출현할 수 밖 에 없다. )1)따라서 '테러'에 대한 공격은 승리도 패배도 없는 끝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오직 항구적인 전투과정과 그렇기 때문에 더 넓고 광범위한 전장을 필요로 할 뿐이다. 2001년 10월 미국은 9·11의 배후세력인 빈 라덴을 '죽이거나 생포하는 것'을 전쟁의 목표로 삼았으나 7년이 지난 지금, '테러와의 전쟁'은 더 이상 알카에다, 탈레반과 같이 이미 드러난 무장단체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는 점차 이슬람 전체에 대한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아프간에서 탈레반의 재등장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을 재생산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테러와의 전쟁'이 '테러'의 위협을 전 지구적으로 확산시켰기 때문에 이제 전쟁은 단지 중동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거대한 '대 테러 동맹'을 결성하여 범세계적인 차원의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있다. 무슬림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 '악마화'된 이미지를 유포하여 새로운 종교적, 종족적 분쟁을 촉진한다. 또한 각 국가는 다양한 차원에서 대 테러정책을 계발하고, 대 테러 대비 군사안보 시스템을 첨단화하고, 테러를 겨냥해 기존의 군사동맹의 성격을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흐름은 새로운 유형의 국가폭력을 자연스럽게 양산하고 있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저항수단, 새로운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다. 아프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레반에 의한 외국인 피랍, 살해의 방식 역시 새롭게 등장한 폭력의 한 유형이며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그들의 '피의 보복'인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에게 던져진 질문 민주주의와 정치가 말살된 장소에서,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은 반전평화운동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일부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 운동'은 이 폭력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답하였다. 그러나 탈레반의 극악무도한 테러행위가 아프간의 평화를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는 점이 분명한 사실일지는 몰라도, 그들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작동시키는 '대 테러전쟁'의 정교한 시스템을 사고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요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다만 무고한 인간의 생명 볼모로 하는 저항수단이 '평화'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반전평화운동의 다른 측면에서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탈레반의 요구와 행동을 '테러와의 전쟁'의 시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간 민중의 평화적 원칙의 시각에서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반전평화운동은 그 원칙과 관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하고 토론해야 한다. 지난 30년 동안 전쟁으로 얼룩진 아프간의 대지에 미국의 점령과 대 테러전쟁의 암흑을 거두어내고 어떠한 대안과 전망으로 새로운 민중의 평화를 건설해 나가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찾는 것이 탈레반의 극단적 폭력을 비판할 수 있는 우리의 출발점일 것이다. 이제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새로운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졌다는 점에서, 아프간 피랍사태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국가적, 지역적 틀을 넘어서는 국제주의적인 반전평화운동의 성장은 어떠한 '평화주의'를 필요로 하는가? 세계적 차원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은 '즉각적인 거부'와 '맹목'이라는 양자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와 정치가 말살되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 인류 절멸로 치닫고 있는 전쟁에 맞서 평화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대안이다. 대안 세계화로서 반전 평화운동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우리에게 던져진 이 질문들에 차근차근 답해나가자. 1).「미국은 결국 패배할 것이다」,사회화와 노동 105호 참고.본문으로
8월 28일, 탈레반에 의해 피랍된 한국인 19명의 석방이 합의되었다. 7월 19일 피랍이후, 꼭 41일만의 일이다. 한국정부와 탈레반 간의 네 번째 대면협상을 통해 결정된 합의사항은 연내 한국군 철군 비정부기구에서 활동하는 한국인들 이달 말까지 철수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의 선교활동의 중단 인질 석방 중 탈레반을 공격하지 않을 것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의해 구금된 탈레반 포로들의 석방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을 것. 이상 5개 항이다. 인질의 몸값 지불여부, 한국의 외교 협상력의 치적, 기독교의 배타적·공격적 선교라는 맹비난 여론 등. 몇 가지의 선정적인 뉴스거리를 남기면서, 아프간 피랍사태는 일단락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미군사동맹이 초래한 죽음과 비극은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 미국의 '대테러전쟁'이 몰고 온 끔찍한 증오와 폭력이 이미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고 이라크와 레바논서, 그리고 중동지역 전역에서 한국은 이미 그 전쟁의 한 가운데 서 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는 한, 또 다른 참극은 이미 예고되고 있다. '대 테러동맹'의 참혹한 대가 정부와 언론은 피랍초기부터 줄곧 사태의 원인을 '기독교의 무리한 선교'로 돌리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탈레반은 처음부터 한국인이 탑승한 버스인지도 몰랐고, 따라서 파병국가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표적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한국군 파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며, 문제의 핵심은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 국가'를 찾아간 23명의 '공격적 선교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21명의 피랍자들에게 구상권을 행사하겠다는 방침까지 밝히고 나섰다. 이 얼마나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주장인가. 아프가니스탄을 '위험국가'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한국이 참전하고 있는 미국의 아프간 점령이다. 가옥과 결혼식장, 장례식장을 무차별 공격하는 미국과 동맹국의 점령이 탈레반의 민간인 납치, 살해행위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대한민국은 이미 많은 이들의 무고한 목숨을 전쟁의 희생양으로 삼으며 '테러와의 전쟁'에 온갖 충성을 갖다 바치고 있었고, 그 덕분에 탈레반은 23명을 납치, 살해할 수 있는 명분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번 양보해 23명의 피랍자들이 '무리한 선교'때문에 스스로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치자. 한국정부의 파병과 한·미 군사동맹이 아프가니스탄을 향하지 않았었다면, 탈레반은 민간인을 살해하고 장기간을 피랍 할 수 있는 어떠한 명분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한국정부를 통해 미국과 카르자이 정부에게 요구할 협상카드도 사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고 배형규, 심성민 씨가 무참히 살해되는 그 순간까지, '즉각 철군' 이라는 카드를 결코 꺼내지 않았다. 잔인하고 참혹한 두 사람의 죽음 앞에서도 미국과의 '대테러동맹'을 굳건히 지켜냈다는 치적을 뽐내며, 이제 살려놨으니 돈으로 갚으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라크 자이툰 부대 파병에 이어, 아프간과 레바논의 파병은 오무전기 노동자들과 김선일 씨의 피살, 윤장호 씨의 죽음과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까지 죽음과 비극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참혹한 기록이 말하고 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한·미 전쟁 동맹이 앞으로 더 많은 죽음, 더 많은 비극을 예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테러전쟁'이 몰고 온 증오와 폭력은 이제 어느덧 한반도를 겨냥하고 있다. 한국은 한·미 동맹의 이름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레바논에서 '테러와의 전쟁'에 동참하면서 언제든, 누구든, 어느 때이든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 공포는 더 많은, 더 강력한 '대 테러동맹'을 원할 것이고 그 결과 더 많은, 더 강력한 폭력이 그에 대한 대가로 돌아올 것이다. [%=사진1%] <파병반대 국민행동> 내의 논란 한국의 반전평화운동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점령반대, 한국군 즉각 철군을 요구하며 시민과 함께 하는 촛불집회를 지속해나갔다. 그러나 정부의 파병정책에 대한 분노는 위력적인 대중운동으로 형성되지 못하였다. 대중들의 지배적인 정서는 기독교 선교에 대한 반감으로 표상되었고, 미국의 점령과 파병이 사태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는 인식은 지배적 여론에 밀려 대중적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한편 반전평화운동 내적으로는 무엇에 초점을 두고 운동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시각차이가 드러난 계기였다. 탈레반은 23명을 납치한 직후, 아프간에 있는 한국의 동의·다산부대의 즉각적인 철군을 요구했다. 반전평화운동은 <파병반대 국민행동>(이하 국민행동)을 중심으로 기자회견(7월 21일)과 촛불집회를 시급히 조직하였고, 즉각 철군과 미국의 점령 중단을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탈레반에게 피랍자 석방을 요구할 것인가"의 문제가 쟁점으로 등장했다. 7월 26일 열린 <국민행동> 기획단회의에서는 '피랍자 즉각 석방'의 요구를 슬로건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입장이 제출되었다. 탈레반에게 인질석방을 요구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양비론으로 몰고 갈 위험(미국 반대/탈레반 반대)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현 시기 운동의 방향은 점령과 파병에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점을 제기하였다. 토론 끝에 이 문제는 결국 다수결을 통해 결정되었고 결국 다수 안으로 <국민행동>의 핵심요구는 "피랍자 석방, 점령종식, 즉각 철군"으로 정리되었다. 7월 말, 피랍 20일이 경과하면서 탈레반의 인질석방 조건이 '탈레반 수감자 석방'으로 변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행동>은 당면 핵심요구에 탈레반의 '포로교환요구 수용'을 추가하는 것을 논의에 부쳤다. 이는 또 한 번의 논쟁을 일으켰는데 "민간인의 생명을 볼모로 한 탈레반의 잘못된 요구를 대변할 수 없다."는 입장과 "미국의 점령을 비판하고, 점령 종식을 압박할 수 있는 요구로써 탈레반의 요구는 수용 가능하다."는 입장이 대립되었다. 이 문제 역시 다수의 의견을 따라 '포로교환요구 수용'이 핵심적인 요구에 추가되었다. 이러한 쟁점들은 성명 발표, 촛불집회 기조를 결정할 때마다 참가단체들 간에 상당한 논란을 빚었고, 일부 시민단체들은 피랍자들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는 활동을 독자적으로 조직하기도 하였다. (8월 7일, 평화 여성 환경 종교, 문화 분야 78개 시민단체, '노란 리본 달기'운동.) 논란은 8월 27일에 개최된 <국민행동> 운영위원회에서 일단락 되었는데, 당면 슬로건을 "무사귀환, 점령종식, 즉각 철군"으로 정리하고 이외에 '포로교환요구 수용'은 미국의 책임을 묻는 내용과 결합시키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78개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를 호소하는 성명에는 탈레반에 대한 비판과 인질들의 조속한 석방이 가장 중심적인 내용으로 담겨있다. 이들은 무고한 민간인을 납치, 살해하는 탈레반의 폭력을 즉각적으로 중단시키고, 인질을 구해내는 것으로 사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국민행동>의 촛불집회 기조와 관련해서도 한·미 동맹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로부터 무사귀환의 염원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 한편에서는 이 사태를 계기로 반전·반미의 목소리를 보다 확산시켜 나가는 적극적인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운동진영이 해야 할 역할은 피랍자 석방의 기술적 방법 자체를 제시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한·미 동맹 반대라는 정치적인 목소리를 높여 반전평화운동의 정치적 고양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양자의 입장은 모두 아프간 피랍사태에 대한 각자의 '평화주의적 해결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과 동맹국들의 고도의 군사공격에 의해 격퇴 당한 탈레반이 '테러'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복을 감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피랍자들의 생명구제는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일 수 밖 에 없다. 또한 탈레반 전쟁포로들이 미군에 의해 최소한의 포로대우도 받지 못하고, 끔찍한 인권유린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은 탈레반으로 하여금 민간인 납치를 볼모로 포로석방을 요구하게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추동하고 있다. '피랍자 즉각 석방'의 요구나 '탈레반 수감자 석방'의 요구들은 각각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것 하나가 '절대적으로 수용될 수 없는 문제'라고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자의 입장이 모두 가로막혀 있는 지점은 결국 "오늘날 나타나고 있는 전쟁과 새로운 폭력의 양상들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이 어떠한 시각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범세계적 공안정국과 새로운 폭력의 시대 9·11이후 시작된 '테러와의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시작으로 이라크 전쟁, 가자, 레바논, 소말리아 전쟁으로 번져갔고, 현재는 이란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 '테러'는 정치· 군사적 약자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제아무리 압도적인 정치· 군사적 우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확산해 나간다 하여도 반복적으로, 심지어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으로, 출현할 수 밖 에 없다. )1)따라서 '테러'에 대한 공격은 승리도 패배도 없는 끝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오직 항구적인 전투과정과 그렇기 때문에 더 넓고 광범위한 전장을 필요로 할 뿐이다. 2001년 10월 미국은 9·11의 배후세력인 빈 라덴을 '죽이거나 생포하는 것'을 전쟁의 목표로 삼았으나 7년이 지난 지금, '테러와의 전쟁'은 더 이상 알카에다, 탈레반과 같이 이미 드러난 무장단체만을 표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는 점차 이슬람 전체에 대한 전쟁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아프간에서 탈레반의 재등장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폭력을 재생산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테러와의 전쟁'이 '테러'의 위협을 전 지구적으로 확산시켰기 때문에 이제 전쟁은 단지 중동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미국의 동맹국들은 거대한 '대 테러 동맹'을 결성하여 범세계적인 차원의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있다. 무슬림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 '악마화'된 이미지를 유포하여 새로운 종교적, 종족적 분쟁을 촉진한다. 또한 각 국가는 다양한 차원에서 대 테러정책을 계발하고, 대 테러 대비 군사안보 시스템을 첨단화하고, 테러를 겨냥해 기존의 군사동맹의 성격을 전환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흐름은 새로운 유형의 국가폭력을 자연스럽게 양산하고 있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저항수단, 새로운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다. 아프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레반에 의한 외국인 피랍, 살해의 방식 역시 새롭게 등장한 폭력의 한 유형이며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그들의 '피의 보복'인 것이다. 반전평화운동에게 던져진 질문 민주주의와 정치가 말살된 장소에서,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은 반전평화운동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일부 시민단체들의 '노란리본 달기 운동'은 이 폭력의 의미를 즉각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답하였다. 그러나 탈레반의 극악무도한 테러행위가 아프간의 평화를 더욱 어렵게 하는 요인이라는 점이 분명한 사실일지는 몰라도, 그들의 폭력을 직접적으로 작동시키는 '대 테러전쟁'의 정교한 시스템을 사고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요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우리는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다만 무고한 인간의 생명 볼모로 하는 저항수단이 '평화'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반전평화운동의 다른 측면에서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탈레반의 요구와 행동을 '테러와의 전쟁'의 시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아프간 민중의 평화적 원칙의 시각에서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반전평화운동은 그 원칙과 관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하고 토론해야 한다. 지난 30년 동안 전쟁으로 얼룩진 아프간의 대지에 미국의 점령과 대 테러전쟁의 암흑을 거두어내고 어떠한 대안과 전망으로 새로운 민중의 평화를 건설해 나가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찾는 것이 탈레반의 극단적 폭력을 비판할 수 있는 우리의 출발점일 것이다. 이제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새로운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졌다는 점에서, 아프간 피랍사태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국가적, 지역적 틀을 넘어서는 국제주의적인 반전평화운동의 성장은 어떠한 '평화주의'를 필요로 하는가? 세계적 차원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증오와 보복의 폭력들에 대해 반전평화운동은 '즉각적인 거부'와 '맹목'이라는 양자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무엇을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와 정치가 말살되고 있는 세계 곳곳에서 인류 절멸로 치닫고 있는 전쟁에 맞서 평화운동의 국제적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대안이다. 대안 세계화로서 반전 평화운동이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우리에게 던져진 이 질문들에 차근차근 답해나가자. 1).「미국은 결국 패배할 것이다」,사회화와 노동 105호 참고.본문으로
1.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인질로 잡힌 지 40여 일이 지난 상황에서, 살해당하거나 석방되지 않고 남아있는 19명의 석방을 위한 협상이 급진전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사태가 어떻게 종결되더라도 피랍 사태 40여 일 동안 한국정부가 보였던 입장들, 이번 납치사태가 제기하는 쟁점들에 대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 7월31일,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되고 나서 곧 청와대, 외교통상부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정부는 여기서 이번 사태에 대한 자신들의 대응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능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정부는 탈레반의 포로교환이라는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피랍 한 달이 되어간 이 당시에야 '공식확인'하는 등 사태가 진행될 때마다 '확인 중'이라는 말로 일관했다. 협상에서 무능을 감추기 위한 수사도 대거 동원한다. 언론에는 협상․타협 가능성을 흘리는 한편,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까지 늘어놓았는데. 남한 정부가 탈레반에 책임을 묻겠다는 말은 정부 당국자 스스로도 진지하게 믿지 못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미국 괴뢰 '정부'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책임전가도 진행되었지만 남한 정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시종 일관 돋보인 것은 미국의 책임을 배제해주는 '감동적인' 충성이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물론, 미국도 공식적으로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마치 故김선일 씨 납치 때 노무현이 '철군은 없다'고 곧장 대응하면서 살해를 재촉한 것을 반복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여기서 납치 사건은 탈레반은 물론 미국도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납치 사태의 해결에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심지어는 피랍자 가족들까지 미국대사관에 '호소'하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상태에서 해결할 의지가 별로 없는데 그것은 단지 '테러범과 협상없다'는 공허한 원칙 때문이 아니다. -이미 곳곳의 납치 사건에서 각국 정부들의 협상은 일반적인 것이다. 미국도 선례가 있으나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 현재의 갈등, 즉, 탈레반의 잔인성을 부각하는 것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럼 탈레반은 어떨까? 이들 역시, 자신들의 건재함과 주장을 전세계에 위성 TV로 매일 중계하고 있는 마당에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탈레반, 양 극단주의자들의 이해가 이렇게 일치하는 사건인데다가, 이들이 사태 해결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마당에 남한 정부의 무능은 구조적으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남한 정부가 이러한 자신의 무능에 대해서 책임지지는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한 발 더 나아가 기만으로 일관해왔다는 점이다. 남한 정부의 무능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충실한 동맹국으로 복무해온데서 비롯된다. 독자적인 정치적 결정은 실종되고 미국의 전쟁전략이 곧 남한 정부의 결정사항이 되는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남한정부는 가장 미국에 충실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장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여준 무능은 인질협상에서의 무능이라기보다 미국에 대한 무능이라는 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1) 따라서 정부가 기자회견을 통해서 한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능이 노무현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이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데 이르면 정부의 태도는 ‘기만'이 된다.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것의 해결을 요구하지도 못하는 전적인 무능. 더구나 자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자리에서조차 미국의 책임을 끝까지 배제하는 태도는 정부의 기만이 매우 ’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사태의 해결을 위해 미국이 나서야한다는 반전운동의 진단과 주장은 정당했다. 그러한 요구가 이 사태의 원인은 물론 해결되지 않는 원인 또한 미국의 전쟁에 있다는 것과 남한 정부의 '묻지마 한미동맹'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된 당일, 곧장 정부가 한 또 하나의 일은 뉴코아 농성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다. 필수공익사업장도 아닌 민간사업장, 국가기간산업도 아닌 사업장에 공권력을 두 번이나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 '신속한 집행'도 더 이례적이다. 남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완전한 무능을 국내에서 '만회'라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은 구할 수 없지만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이랜드-뉴코아 악질자본은 구해줄 수 있다는 뜻일까? 정부가 '인질 살해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황당한 공문구라는 것을 아는 대중들은,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공문구'를 날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탈레반에 대해서는 (자신이 불가능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무력사용을 배제하지만,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그것을 ‘당장’ 사용한다. 신중함의 시차조차 없다. 이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전혀 해결할 능력이 없는, 오직 쉽게 사용가능한 폭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남한 정부의 무능을 더욱 부각시킨다. 3.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들이 미국이 벌인 전쟁과, 이에 무조건 동조한 남한 정부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은 사태가 어떻게 정리되더라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것이 바로 정세적 개입이다. 따라서 피랍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이 문제라는 식(여러가지 판본의 피랍자 책임론)으로,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고 정부의 무능을 실천적으로 비호하는 입장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다소 논쟁적일 수도 있는 하나의 쟁점을 피해갈 수 있을까? 피랍자들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남한 보수 기독교회의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일까라는 점이다. 피랍자들과 보수 기독교회(라는 제도와 사회적 세력)은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피랍자들이 살아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단기선교' 혹은 '봉사'활동이 정당하거나 혹은 부당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그것과 무관하게 그/녀들이 인간으로서, 조건없는 인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탈레반의 납치행태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다.) 피랍자들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샘물교회는 기독교 우익 NGO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기독교 뉴라이트 등과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의 기독교 뉴라이트 단체는 신지호 등이 주도하는 또 다른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와 통합을 논의하기도 했다. 강남과 신도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 대형교회들은 적극적으로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정치화되고 있다. 미국에 대해 비판의식이 전무한 것은 시청 앞 성조기 집회를 주도하는 순복음교회, 금란교회 등과 같은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 주류의 선발대형교회와 다를 바 없다. 다만 보다 중산층의 구미에 맞게 보다 세련된 정치적 포지션을 유지할 뿐이다. 이들 기독교 보수주의 진영, 복음주의이자 근본주의자들인 이들의 행태는 비판적으로 보아야한다. 이들이 공격적인 '해외선교'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국내에서의 선교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측면도 작용한다. 그럼 이들이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곳에서 하는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에서 '선교'하면서 반공발전주의에 기반한 이들 기독교 교회를 '부흥'시킨 것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수행하는 ‘테러와의 전쟁’의 유기적인 일부, CNN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전쟁의 일부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오히려 보수주의 기독교가 수행하는 '해외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은 제기될 필요가 있으며 피랍자들은 그것과 무관하게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점을 요구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비판이 없는 상황에서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피해자 책임론은 안 된다'는 여론, 혹은 더 정확히는 '피랍 피해당사자' 뒤에 숨어서 자신들도 '피해자'인 척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보수 기독교 교회는 오히려 23명을 사지로 내몬 가해자의 유기적 일부다. 이들은 지금도 일말의 회개와 반성이 없다. <한기총>에서 어떤 진지한 반성적인 입장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대중들의 이들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숨김없이 표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납치피해자=보수 기독교 교회’로 더욱 강하게 등치되고 있다. 극단적인 네티즌들은 '반-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할 만큼 극단적인 (상징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고, 그 폭력은 성격에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주류 기독교 교회들과 그렇지 않은 기독교 교회를 구별할 수 있는 비판, 책임묻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중 하나이다. 이미 그러한 은폐구도, 등치구조가 공고해진 지금 시점에서 다른 비판이 실제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늦어서 이제는 그것을 대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실천적으로는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문제제기라고 해도,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에서 그것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선교는 이번 사태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서도 그 순진함을 의심해볼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다함께>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과 억압"이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모두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관용적인 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에도 역시 그런 것일까? 그러나 그 제국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그런 극단의 이데올로기들이라는 점을 인식해야한다. 제국주의 지배 세계체제의 유기적 일부인 종교적 근본주의에게만 면죄부를 주는 방식은 이해하기 힘들다. 모든 지배체제와 같이 제국주의 역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이 필요한 이유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행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남한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는 어떤 반성도 없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계속 복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비극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예고할 수밖에 없다. ※ 이 글이 최종적으로 작성된 시점은 아프가니스탄 인질이 석방되기 전인 8월 25일 경이다. 1)탈리브(Ṭālib)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이슬람 전통학교) 학생들을 가리키는 단어로써, 그 복수형 단어가 '탈리반'(혹은 탈레반)이다. 서방 언론에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탈레반’이 이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에 ‘탈레반’이란 명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탈리반’ 대신 ‘탈레반’으로 표기했다.본문으로
1. 아프가니스탄에서 23명의 한국인이 인질로 잡힌 지 40여 일이 지난 상황에서, 살해당하거나 석방되지 않고 남아있는 19명의 석방을 위한 협상이 급진전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사태가 어떻게 종결되더라도 피랍 사태 40여 일 동안 한국정부가 보였던 입장들, 이번 납치사태가 제기하는 쟁점들에 대해서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난 7월31일,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되고 나서 곧 청와대, 외교통상부의 기자회견이 진행됐다. 정부는 여기서 이번 사태에 대한 자신들의 대응은 하나하나가 모두 무능과 기만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정부는 탈레반의 포로교환이라는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피랍 한 달이 되어간 이 당시에야 '공식확인'하는 등 사태가 진행될 때마다 '확인 중'이라는 말로 일관했다. 협상에서 무능을 감추기 위한 수사도 대거 동원한다. 언론에는 협상․타협 가능성을 흘리는 한편, "책임을 묻겠다"는 엄포까지 늘어놓았는데. 남한 정부가 탈레반에 책임을 묻겠다는 말은 정부 당국자 스스로도 진지하게 믿지 못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미국 괴뢰 '정부'에 책임을 묻는 방식으로 책임전가도 진행되었지만 남한 정부 자신의 무능을 드러낼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도 시종 일관 돋보인 것은 미국의 책임을 배제해주는 '감동적인' 충성이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물론, 미국도 공식적으로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마치 故김선일 씨 납치 때 노무현이 '철군은 없다'고 곧장 대응하면서 살해를 재촉한 것을 반복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여기서 납치 사건은 탈레반은 물론 미국도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사건이라는 점을 생각해야한다. 납치 사태의 해결에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라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심지어는 피랍자 가족들까지 미국대사관에 '호소'하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상태에서 해결할 의지가 별로 없는데 그것은 단지 '테러범과 협상없다'는 공허한 원칙 때문이 아니다. -이미 곳곳의 납치 사건에서 각국 정부들의 협상은 일반적인 것이다. 미국도 선례가 있으나 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다. - 현재의 갈등, 즉, 탈레반의 잔인성을 부각하는 것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럼 탈레반은 어떨까? 이들 역시, 자신들의 건재함과 주장을 전세계에 위성 TV로 매일 중계하고 있는 마당에 아쉬울 것이 없다. 미국과 탈레반, 양 극단주의자들의 이해가 이렇게 일치하는 사건인데다가, 이들이 사태 해결의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마당에 남한 정부의 무능은 구조적으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남한 정부가 이러한 자신의 무능에 대해서 책임지지는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한 발 더 나아가 기만으로 일관해왔다는 점이다. 남한 정부의 무능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충실한 동맹국으로 복무해온데서 비롯된다. 독자적인 정치적 결정은 실종되고 미국의 전쟁전략이 곧 남한 정부의 결정사항이 되는 상황에서 남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남한정부는 가장 미국에 충실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장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보여준 무능은 인질협상에서의 무능이라기보다 미국에 대한 무능이라는 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1) 따라서 정부가 기자회견을 통해서 한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능이 노무현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점에서, 게다가 이에 대한 일말의 반성도 없는 데 이르면 정부의 태도는 ‘기만'이 된다. 국민들의 생명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것의 해결을 요구하지도 못하는 전적인 무능. 더구나 자신의 무능을 폭로하는 자리에서조차 미국의 책임을 끝까지 배제하는 태도는 정부의 기만이 매우 ’의식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서 사태의 해결을 위해 미국이 나서야한다는 반전운동의 진단과 주장은 정당했다. 그러한 요구가 이 사태의 원인은 물론 해결되지 않는 원인 또한 미국의 전쟁에 있다는 것과 남한 정부의 '묻지마 한미동맹'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인질이 살해된 당일, 곧장 정부가 한 또 하나의 일은 뉴코아 농성장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다. 필수공익사업장도 아닌 민간사업장, 국가기간산업도 아닌 사업장에 공권력을 두 번이나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그 '신속한 집행'도 더 이례적이다. 남한 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완전한 무능을 국내에서 '만회'라도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프가니스탄 피랍자들은 구할 수 없지만 비정규직을 탄압하는 이랜드-뉴코아 악질자본은 구해줄 수 있다는 뜻일까? 정부가 '인질 살해에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 황당한 공문구라는 것을 아는 대중들은, 그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공문구'를 날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게다가 정부는 탈레반에 대해서는 (자신이 불가능하고 무능하기 때문에) 무력사용을 배제하지만,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그것을 ‘당장’ 사용한다. 신중함의 시차조차 없다. 이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전혀 해결할 능력이 없는, 오직 쉽게 사용가능한 폭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남한 정부의 무능을 더욱 부각시킨다. 3. 마지막으로 한가지.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원인들이 미국이 벌인 전쟁과, 이에 무조건 동조한 남한 정부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은 사태가 어떻게 정리되더라도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것이 바로 정세적 개입이다. 따라서 피랍자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간 것이 문제라는 식(여러가지 판본의 피랍자 책임론)으로, 정부의 책임을 면제하고 정부의 무능을 실천적으로 비호하는 입장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다소 논쟁적일 수도 있는 하나의 쟁점을 피해갈 수 있을까? 피랍자들에게 어떤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남한 보수 기독교회의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일까라는 점이다. 피랍자들과 보수 기독교회(라는 제도와 사회적 세력)은 구별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피랍자들이 살아 돌아와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단기선교' 혹은 '봉사'활동이 정당하거나 혹은 부당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전적으로 그것과 무관하게 그/녀들이 인간으로서, 조건없는 인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탈레반의 납치행태도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다.) 피랍자들을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샘물교회는 기독교 우익 NGO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고, 기독교 뉴라이트 등과 관계를 가져왔다. 이들의 기독교 뉴라이트 단체는 신지호 등이 주도하는 또 다른 뉴라이트 단체인 <자유주의연대>와 통합을 논의하기도 했다. 강남과 신도시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 대형교회들은 적극적으로 뉴라이트 운동을 통해 정치화되고 있다. 미국에 대해 비판의식이 전무한 것은 시청 앞 성조기 집회를 주도하는 순복음교회, 금란교회 등과 같은 <한국기독교총연합(한기총)> 주류의 선발대형교회와 다를 바 없다. 다만 보다 중산층의 구미에 맞게 보다 세련된 정치적 포지션을 유지할 뿐이다. 이들 기독교 보수주의 진영, 복음주의이자 근본주의자들인 이들의 행태는 비판적으로 보아야한다. 이들이 공격적인 '해외선교'에 나서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는 국내에서의 선교가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측면도 작용한다. 그럼 이들이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곳에서 하는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전쟁 이후에 남한에서 '선교'하면서 반공발전주의에 기반한 이들 기독교 교회를 '부흥'시킨 것과 같은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수행하는 ‘테러와의 전쟁’의 유기적인 일부, CNN과 더불어 이데올로기 전쟁의 일부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오히려 보수주의 기독교가 수행하는 '해외 선교활동''에 대한 비판은 제기될 필요가 있으며 피랍자들은 그것과 무관하게 살아 돌아와야 한다는 점을 요구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비판이 없는 상황에서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기독교 교회들은 '피해자 책임론은 안 된다'는 여론, 혹은 더 정확히는 '피랍 피해당사자' 뒤에 숨어서 자신들도 '피해자'인 척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보수 기독교 교회는 오히려 23명을 사지로 내몬 가해자의 유기적 일부다. 이들은 지금도 일말의 회개와 반성이 없다. <한기총>에서 어떤 진지한 반성적인 입장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대중들의 이들 보수주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숨김없이 표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납치피해자=보수 기독교 교회’로 더욱 강하게 등치되고 있다. 극단적인 네티즌들은 '반-기독교 근본주의'라고 할 만큼 극단적인 (상징적) 폭력을 자행하고 있고, 그 폭력은 성격에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 교회와 신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사태의 원인의 일부인 보수주의 주류 기독교 교회들과 그렇지 않은 기독교 교회를 구별할 수 있는 비판, 책임묻기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중 하나이다. 이미 그러한 은폐구도, 등치구조가 공고해진 지금 시점에서 다른 비판이 실제로 가능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늦어서 이제는 그것을 대중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실천적으로는 너무 위험하고 불가능한 문제제기라고 해도,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고에서 그것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선교는 이번 사태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들에 대해서도 그 순진함을 의심해볼 필요도 있다. 예를 들어 <다함께>는 "근본적인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과 억압"이라면서 이슬람 근본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 모두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관용적인 이들이 기독교 근본주의에도 역시 그런 것일까? 그러나 그 제국주의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그런 극단의 이데올로기들이라는 점을 인식해야한다. 제국주의 지배 세계체제의 유기적 일부인 종교적 근본주의에게만 면죄부를 주는 방식은 이해하기 힘들다. 모든 지배체제와 같이 제국주의 역시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런 비판이 필요한 이유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동행해서 그것을 지지하는 미국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 그리고 여기에 동조하는 남한의 근본주의-복음주의 기독교는 어떤 반성도 없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테러와의 전쟁’에 계속 복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 비극을 또 다른 방식으로 예고할 수밖에 없다. ※ 이 글이 최종적으로 작성된 시점은 아프가니스탄 인질이 석방되기 전인 8월 25일 경이다. 1)탈리브(Ṭālib)는 원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이슬람 전통학교) 학생들을 가리키는 단어로써, 그 복수형 단어가 '탈리반'(혹은 탈레반)이다. 서방 언론에 이들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탈레반’이 이들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언론보도를 통해 한국에 ‘탈레반’이란 명칭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탈리반’ 대신 ‘탈레반’으로 표기했다.본문으로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한․미 FTA 체결의 선결과제로 제시된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지난 4월에 재개되었으나, 검역조건에 맞지 않는 뼛조각과 척수가 계속 발견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한․미 FTA반대 운동은 미국산 소고기가 광우병의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이슈화하고 있다. 반면 정부는 미국산 소고기의 안전성을 장담하면서 국제수역사무국(OIE)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형식 논리로 일관하고 있는데, 수입과 검역에 대한 무원칙한 대응으로 미국의 눈치 보기라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은 국민의 건강권과 농민의 생존권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수입만 막으면 되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은 높아지고, 농민의 삶은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 광우병은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나 한․미 FTA 외에도 많은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현안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여유도 필요하다. [%=사진1%] 미국산 소고기만 문제인가? 한국에서 광우병이 이슈화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 말에 광우병의 안전지대라고 생각한 독일, 이탈리아에서 광우병에 감염된 소가 발견되고 프랑스의 까르푸 등 대형유통매장에서 감염된 소고기의 유통 의혹이 번지면서 광우병 문제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이때 광우병에 대한 우려가 한국에까지 확산되었다. 당시에 정부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적이 없고, 한국은 전통적으로 소의 부산물을 먹었으나 인간 광우병이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에 광우병 청정지역이라고 주장했다. 또 정부는 광우병에 대한 공포를 감정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언론과 광고를 통해 국민을 계몽하면 문제가 사라질 것처럼 행동했다. 정말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막으면 국내에서 광우병의 위험은 사라지는 것일까? 2000년 이후 광우병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을 살펴보면 국산 소고기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부는 2000년 12월과 2001년 1월에 각각 육골분 사료와 남은 음식물 사료를 소, 양과 같은 반추동물에게 먹이는 행위를 금지했다. 영국은 1988년, 미국은 1998년부터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것이다. 또 유럽과 일본에서는 모든 동물에게 동물성 사료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반추동물에게 반추동물1)로 만든 동물성 사료를 먹이는 것만 금지하고 있어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교차 오염2)의 위험이 높다. 국내에는 250만 두 가량의 소가 있는데 2006년에 그 중 6,016 두에 대해서 광우병 검사를 했다. 이를 비율로 따지면 0.24%이다. 전수 검사를 시행하는 일본에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0.1%를 검사하는 미국보다는 나은 것일까? 문제는 검사한 소의 90% 이상이 정상 도축된 건강한 소라는데 있다. 축산 농가들이 의심이 가는 소나 폐사 한 소에 대한 신고를 꺼리기 때문에 건강한 소를 대상으로 광우병 검사를 한 것이다. 정부는 광우병 검사를 실질화 하기 위한 계획 대신에 폐사 한 소를 신고하면 30만원을 준다는 사탕발림 정책을 내놓고 있다. 실정이 이러하다 보니 정부도 광우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농림부는 작년에 국제수역사무국에 광우병 등급 신청을 하려다가 신청 직전에 포기하였다. 등급판정을 신청했다가 미국과 같은 2등급(광우병 위험 통제국가)을 받을 경우를 우려한 것이다. 한국의 광우병 위험 수준이 미국과 같은 정도라면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부분적으로나마 제한할 근거를 찾기 어려워 협상에 치명적이었다. 국제수역사무국은 2005년 5월에 등급 판정 기준 중의 하나를 '광우병 검사 마리 수'에서 '광우병 고위험 군에 대한 검사이냐, 정상 도축소에 대한 검사이냐'로 변경했다. 한국과 같은 광우병 관리체계가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워진 것이다.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를 인간이 먹었을 때 걸리는 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인간광우병)이 국내에서 발병했을 가능성도 있다. 국내에는 연간 26명 정도의 산발성 크로이츠펠트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 병은 알 수 없는 이유로 100만 명 당 0.5~1명에게 발병하는데 인간광우병과 증상이 유사하여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부검과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 그 동안 국내에는 전문 부검시설이 없고 유족들이 부검을 반대해 정확한 진단을 할 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2001년 인간광우병으로 의심이 가는 젊은 환자가 있었지만 부검을 못해서 정확히 진단을 할 수 없었다. 산발성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대부분 50대 이상에서 발생하지만, 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환자의 평균 연령이 27세로 젊은 나이에 발생한다. 전문가들도 자인하는 것처럼 한국은 광우병의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광우병은 하나의 현상일 뿐! 상황이 이러한데 왜 미국산 소고기 수입만 문제가 됐을까? 우리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이슈화되고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과정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회적 이슈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투쟁과 담론의 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위험'과 '공포'도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인지된다. 미국산 소고기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도 광우병 위험 요인이 국내에 풍부하게 존재했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고 유통되지 않은 것이다. 광우병은 대중이 위험을 인지할 수 있는 선정적인 요인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동안 언론과 운동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한․미 FTA 반대 운동도 광우병의 위험을 강조하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채택해왔다. 광우병은 초식동물에게 육식을 강제한, 자연 생태계에서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 일이 원인이라는 점에서 현대문명(또는 자본주의)의 괴기스러움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소가 소를 먹는 동종식육은 식인 행위와 유비되어 "문명세계와 문명인"의 공포를 가중시킨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식인풍습으로 발생한 쿠루병, 양의 스크래피, 밍크 뇌종 등과 광우병(소해면상뇌증)의 원인과 증상이 유사하기 때문에 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과학의 지지를 받는다. 광우병이 인간에게 전염된다는 유력한 근거가 있고, 인간광우병에 걸리면 인간이 "미친소"와 유사한 증상으로 죽기 때문에 공포는 배가된다(고상하게 죽을 수도 없다!). 또 누구나 먹는 소고기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전염되고, 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치료제도 없고, 치사율이 100%다. 더군다나 잠복기가 길어서 10년 전에 먹은 소고기 때문에 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다니. 광우병과 인간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그 문제가 충분히 숙고되었고, 실제로 20여 년에 걸쳐 영국 등지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하지만 인간광우병에 감염된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더 안전한 소고기'를 먹거나 채식을 하는 것이 대안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광우병은 세계적 식량체계에서 생산된 먹거리가 가지는 문제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세계적 식량체계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광우병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제거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먼저 원인을 제대로 인식해야한다. 미국 축산의 역사와 광우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광우병은 소에게 스크래피에 감염된 양 또는 광우병에 걸린 소의 육골분 사료를 먹인 데서 비롯되었다. 1980년대부터 목축업자들은 상대적으로 비싼 곡물사료를 절약해서 이윤을 보장받기 위해 소에게 육골분 사료를 먹였다. 광우병 발생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과정을 조금 더 긴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우병과 같은 최근의 전세계적 식품 파동은 20세기에 녹색혁명을 통해 정착된 산업화된 농업과 세계화된 식품생산 및 유통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광우병은 산업화, 공장화된 자본주의 축산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세기 초부터 미국에서 진행된 녹색혁명과 백색혁명(축산에서의 생산성 혁명을 일컫는 말)은 생산성의 측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능케 했다. 이 미국식 농업․축산 체계가 하나의 모델로 전세계에 확장되었기 때문에 광우병 발생의 구조를 미국 축산의 역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미국은 농약과 비료를 다량 투입하여 하나의 특화된 작물을 생산하는 단작으로 곡물 생산의 혁명적 증가를 이루어냈다. 트랙터, 탈곡기 등 석유로 작동하는 농업기계를 사용하고 제초제, 살충제, 질소비료 등 화학투입물을 이용하여 자연의 생산력을 자본의 생산력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생태적으로는 그동안 한 덩어리로 이루어져 오던 농업, 임업, 축산 사이의 순환성과 연결성이 파괴되었다.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농산물의 다양성이 불과 몇 개의 작물로 획일화(단작)되면서 농약으로 인한 토양 및 수질오염, 토양 비옥도 저하, 생물 다양성 훼손, 수자원 고갈, 병해충 창궐과 같은 각종 생태적 문제가 야기되었다. 축산도 이제 가축을 가두어 놓고 필요한 사료, 영양제, 항생제를 투입하는 시스템으로 완전히 변모하였다. 예전처럼 집 마당이나 목초지에 소, 돼지, 닭, 염소 몇 마리를 키우던 목가적인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공장이나 다름없는 축사에서 움직일 틈도 주지 않고 사육하는 체제로 바뀐 것이다. 미국은 대공황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1935년 '농업 조정법'을 개정하여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고 국내 농산물 가격을 국제가격보다 높게 지지했다. 농가보호와 녹색혁명의 성공으로 잉여 농산물이 증가했는데 이를 1950년대에는 원조 물자로 해외에 처분했다. 처음에는 무상 원조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상업 가격으로 유통시킨 원조 정책으로 카길 같은 거대 곡물상이 부를 축적하고, 전세계에 미국식 농업관행과 식문화가 이식되었다. 대공황과 녹색혁명은 미국 축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공황으로 곡물가격이 떨어지자 미국 축산업자들은 저렴한 곡물을 가축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1950년대 이후에는 값싼 잉여 농산물이 본격적으로 동물의 사료로 전환되었다. 한편 1950년대 말부터 비육장이 성업하는데 비육장은 점차 교외로 이전한 도축장과 통합되었다. 20세기 전반까지 미국에는 도축장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했다. 하지만 도축장에서 발생하는 악취로 환경개선의 요구가 높았고 강력한 정육노조를 무력화하고 값싼 이주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서 도축장을 교외로 이전한다. 교외에서는 도축장과 비육장을 지리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다. 또 도축장은 정육장과 구분이 불가능해지는데 냉장과 포장 기술의 발전으로 도축한 소를 그 자리에서 부위별로 자르고 포장해서 출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축장과 이웃하고 있는 비육장은 도축되기 전에 소의 몸집을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소는 보통 3~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1400kg 정도의 곡물사료를 먹고 호르몬제, 항생제를 맞으면서 180kg 가량을 찌운다. 이렇게 되어 1960년대에 비육-도축-정육이 결합된 미국식 축산의 골격이 잡히게 되었다. 송아지를 키우는 전통적인 목축업자의 일과 정육한 소고기를 판매하는 소매업 등 나머지 부문은 1970년대 이후에 통합되기 시작한다. 1970년대 초에 미국정부는 국제수지 적자를 타개하기 위해서 농산물 수출을 추진했다. '1973년 농업법'으로 잉여농산물과 가격을 통제하기 위한 생산 제한을 해제하고 수출을 장려했다. 잉여 농산물 정책 변화로 미국이 세계농업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자 유럽과 미국 간의 시장 쟁탈전이 과열되었다. 이 과정에서 초국적 농기업은 제3 세계 농업 시장 진출을 가속화하고, 수직적 통합으로 농자재 산업과 영농, 유통, 가공, 판매를 장악한다. 현재 미국의 4대 정육업체인 콘아그라, IBP(타이슨 푸드), 엑셀(카길), 내셔널 비프는 미국 소의 84%를 도살한다. 또 이들은 비육장 운영이나 선계약과 입도선매 방식의 종속적 공급으로 미국에서 사육되는 소의 20%를 관리하고 있다. 카길은 세계 최대의 사료 업체이기도 하다. 농업자금 대출 부문도 초국적 농기업에 통합되고 있는데 농업자금을 대출받기 위해서 농민은 그 기업이 제공하는 송아지와 사료 구입을 약속해야 한다. 목축업자도 농민처럼 초국적 농기업의 자본축적 과정에서 위험성 높은 한두 부문을 떠맡는 일종의 도급 노동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수직적 통합과 독과점으로 자영 목축업자는 소의 가격을 낮추어 팔 수밖에 없어서 수익과 생존에 압박을 받았다. 광우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육골분 사료가 1980년대 초부터 확산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한편 육골분 사료를 생산하는 것은 랜더링 산업(rendering industry)이다. 미국에서 가축의 40%는 고기로 소비되지만 뼈, 머리, 내장, 피 등 나머지 60%는 버려진다. 이것을 재가공하여 동물성 지방과 사료를 생산하는 것을 고상한 용어로 랜더링(우리말로 옮기면 동물부산물가공?)이라고 한다. 랜더링 산업의 원료로는 도축장에서 나오는 가축의 부산물 외에도 소매점, 식당 등에서 버려지는 고기 부산물, 폐기름, 남은 음식물 등이 사용된다. 규제가 강화되기 전에는 병들거나 죽은 가축, 애완동물의 사체 등도 널리 사용되었다. 미국에서 연간 2,000만 톤 정도 발생하는 동물 부산물은 생태적 순환에서 괴리된 대량 육식 문화의 이면이다. 동물 부산물을 가공하여 유용한 물건을 만든다는 의미의 랜더링 산업은 역사 이전부터 있었지만, 근대적인 랜더링 산업은 19세기 말에 성립되었다. 원래 랜더링 산업의 주요 생산물은 비누제조의 원료로 사용되는 동물성 지방이었다. 1950년에 미국 랜더링 산업은 50만 톤의 동물성 지방을 비누 제조업에 공급했다. 하지만 비누의 원료가 화학 합성물로 대체되면서 동물성 지방의 수요가 급감한다. 랜더링 산업은 새로운 수요를 개척해야했고 이것이 동물성 사료의 개발로 이어졌다. 현재 랜더링 산업에서 동물성 사료의 비중은 생산량 기준으로 약 55%로 530만 톤 가량의 동물성 사료가 매년 생산되고 있다. 만약 미국에서 동물성 사료가 전면 금지된다면 랜더링 산업에게는 큰 재앙일 것이다. 한편 랜더링 과정도 독립적인 사업에서 도축장 옆에 설치된 초국적 농기업의 한 공정으로 대체되는 추세이다. 미국이 동물성 사료를 계속 허용하는 데는 랜더링 산업과 초국적 농기업의 압력이 작용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안을 세계화하고 지역화하기 위하여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막는다고 해도 광우병을 낳은 공업적 축산과 초국적 자본이 장악한 세계적 식량체계는 지속될 것이다. 설사 광우병이 사라진다고 해도 조류독감과 같은 새로운 문제가 계속 발생한다. 이번에는 그 장소가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고소득 국가가 아니라 제3 세계나 한국일 수도 있다. 생태적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는 농업과 생태의 위기를 치료할 근본적인 대안을 찾지 못하면 광우병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한․미 FTA와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한 정부의 대안은 한우의 질과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하여 유기농 축산까지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유기농을, 어떤 사람들은 채식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지불하는 돈에 따라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그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동물성 사료로 기른 수입 소고기를 먹고 호르몬이 듬뿍 쳐진 우유를 마실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의 목록을 늘리는 것은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세계를 움직이는 현실적인 힘(신자유주의 세계화)이 생태적 순환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생태적 이상 사회를 상상하거나 실험하는 것을 대안으로 내세울 수도 없다. 농업시장이 전세계적으로 통합되고 있는 상황에서 농업에 대한 민족적 통제를 주장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시장개방 반대를 요구하는 것은 위기를 지연시킬 수 있지만 위기가 발생하는 구조는 변화시키지 않는다. 한국도 녹색혁명, 백색혁명을 거치면서 석유와 화학합성물을 고투입하는 농업이 일반화되어 있다. 광우병과 같은 농업위기, 생태위기에 대한 대안은 초민족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세계적 식량체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자본의 세계화'에 '민중의 세계화'로 맞서는 것뿐이다. 최근 남미의 비아 캄페시아(Via Campesina)나, 무토지 농민운동(MST) 등 주변부를 중심으로 초민족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농민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올해 2월에는 말리 셀링게에서 비아 캄페시나를 비롯한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이 '식량주권포럼'을 열고 식량을 위한 국제회의 선언문3)을 채택했다. 대안세계화 농민운동의 이념으로 제시되고 있는 식량주권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농업에 대한 민족적 통제를 재확립하자는 요구가 아니다. 닐레니 선언은 식량주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식량주권은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된 안전하고, 문화적으로 적합한 식량에 대한 민중들의 권리이며, 또한 민중들이 그들의 고유한 식량과 농업 생산 체계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식량주권은 식량체계와 정책의 중심을 시장과 기업의 요구가 아니라 생산과 공급, 소비를 하는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하며 동시에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 식량주권은 현재 초국적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식량체계에 맞서 지역적 생산자들을 중심에 둔 식량, 농업, 소목축업, 어업 체계의 방향과 전략을 제시한다. 식량주권은 지역, 국민경제와 시장을 우선시하고, 독립적인 농민, 어민, 목축인과 환경적․사회적․경제적 지속가능성에 기초한 식량생산, 공급, 소비에 권한을 부여한다. 식량주권은 모든 민중에게 공정한 수입을 보증 할 수 있는 투명한 무역과 소비자가 식량과 영양물을 관리 할 수 있는 권리를 증진시킨다. 식량주권은 우리의 토지, 영토, 물, 종자, 가축, 생물의 다양성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권리가 식량 생산자에게 있다는 점을 보증한다. 식량주권은 남녀, 민중, 인종, 사회계급, 세대 사이에 불평등과 억압이 없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의미한다." 식량주권은 생물 다양성을 존중하고, 영농 지식과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를 옹호한다. 또 생태적인 영농과 농민의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고, 여성농민의 권리를 옹호한다. 지역적인 먹거리 생산과 소비도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농민뿐 아니라 모든 민중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보장한다. 광우병을 발생시키는 신자유주의 농업체계를 변혁하고, 미국식 금융세계화를 전면적으로 이식하는 한․미 FTA에 맞서기 위해서 우리는 식량주권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전략을 마련해야한다. 이것은 수입반대나 정책대안 제시로 환원되지 않는 것으로 차라리 새로운 농민운동, 생태환경운동을 만드는 문제이다. 새로운 운동의 형성, 다른 말로 운동의 혁신은 농업․생태 위기를 방기한 여타 사회운동과 농민운동, 생태환경운동의 반성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1) 되새김동물. 위가 4~5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위를 이용하여 먹이를 소화한다. 소과, 사슴과, 낙타과, 기린과 등의 많은 초식동물이 포함된다. 본문으로 2) 미국과 한국에서는 반추동물에게 반추동물로 만든 육골분 사료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을 뿐 돼지, 닭의 내장과 뼈, 고기로 만든 사료는 여전히 허용하고 있다. 또 돼지와 닭에게 반추동물의 육골분 사료를 먹이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교차오염은 우선 반추동물로 만든 육골분 사료를 반추동물에게 먹이는 경우에 발생한다. 법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으나 쉽게 구할 수 있고 값싼 돼지, 닭의 사료를 소의 사료로 사용할 수 있고, 사료 생산과정이나 축산과정에서 반추동물 육골분 사료가 다른 사료에 미량이라도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교차오염은 광우병과 유사한 질병에 걸린 가축(이 가축은 광우병에 감염된 소의 육골분 사료를 먹었을 것이다)을 사료로 만들어 소에게 먹일 경우에 발생할 수 있다. 영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원인이 스크래피에 걸린 양의 육골분 사료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한다. 국제수역사무국 과학위원회도 "미국 정부가 광우병 감염 가능성이 있는 원료를 동물용 사료로 이용하는 한 교차오염의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바 있다. 미국뿐 아니라 동물성 사료를 허용하는 국가는 모두 교차오염의 위험이 있다.본문으로 3) 닐레니(Nyeleni) 선언, 번역 전문은 사회진보연대 자료실 1039번 참고.본문으로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한․미 FTA 체결의 선결과제로 제시된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지난 4월에 재개되었으나, 검역조건에 맞지 않는 뼛조각과 척수가 계속 발견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한․미 FTA반대 운동은 미국산 소고기가 광우병의 위험이 높다는 사실을 이슈화하고 있다. 반면 정부는 미국산 소고기의 안전성을 장담하면서 국제수역사무국(OIE) 규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형식 논리로 일관하고 있는데, 수입과 검역에 대한 무원칙한 대응으로 미국의 눈치 보기라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은 국민의 건강권과 농민의 생존권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수입만 막으면 되는 것일까? 언제부터인가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은 높아지고, 농민의 삶은 사지로 내몰리고 있다. 광우병은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나 한․미 FTA 외에도 많은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현안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여유도 필요하다. [%=사진1%] 미국산 소고기만 문제인가? 한국에서 광우병이 이슈화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 말에 광우병의 안전지대라고 생각한 독일, 이탈리아에서 광우병에 감염된 소가 발견되고 프랑스의 까르푸 등 대형유통매장에서 감염된 소고기의 유통 의혹이 번지면서 광우병 문제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이때 광우병에 대한 우려가 한국에까지 확산되었다. 당시에 정부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적이 없고, 한국은 전통적으로 소의 부산물을 먹었으나 인간 광우병이 보고되지 않았기 때문에 광우병 청정지역이라고 주장했다. 또 정부는 광우병에 대한 공포를 감정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언론과 광고를 통해 국민을 계몽하면 문제가 사라질 것처럼 행동했다. 정말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막으면 국내에서 광우병의 위험은 사라지는 것일까? 2000년 이후 광우병에 대한 한국 정부의 대응을 살펴보면 국산 소고기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부는 2000년 12월과 2001년 1월에 각각 육골분 사료와 남은 음식물 사료를 소, 양과 같은 반추동물에게 먹이는 행위를 금지했다. 영국은 1988년, 미국은 1998년부터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것이다. 또 유럽과 일본에서는 모든 동물에게 동물성 사료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지만 한국은 반추동물에게 반추동물1)로 만든 동물성 사료를 먹이는 것만 금지하고 있어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교차 오염2)의 위험이 높다. 국내에는 250만 두 가량의 소가 있는데 2006년에 그 중 6,016 두에 대해서 광우병 검사를 했다. 이를 비율로 따지면 0.24%이다. 전수 검사를 시행하는 일본에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0.1%를 검사하는 미국보다는 나은 것일까? 문제는 검사한 소의 90% 이상이 정상 도축된 건강한 소라는데 있다. 축산 농가들이 의심이 가는 소나 폐사 한 소에 대한 신고를 꺼리기 때문에 건강한 소를 대상으로 광우병 검사를 한 것이다. 정부는 광우병 검사를 실질화 하기 위한 계획 대신에 폐사 한 소를 신고하면 30만원을 준다는 사탕발림 정책을 내놓고 있다. 실정이 이러하다 보니 정부도 광우병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농림부는 작년에 국제수역사무국에 광우병 등급 신청을 하려다가 신청 직전에 포기하였다. 등급판정을 신청했다가 미국과 같은 2등급(광우병 위험 통제국가)을 받을 경우를 우려한 것이다. 한국의 광우병 위험 수준이 미국과 같은 정도라면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부분적으로나마 제한할 근거를 찾기 어려워 협상에 치명적이었다. 국제수역사무국은 2005년 5월에 등급 판정 기준 중의 하나를 '광우병 검사 마리 수'에서 '광우병 고위험 군에 대한 검사이냐, 정상 도축소에 대한 검사이냐'로 변경했다. 한국과 같은 광우병 관리체계가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려워진 것이다. 광우병에 걸린 소고기를 인간이 먹었을 때 걸리는 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인간광우병)이 국내에서 발병했을 가능성도 있다. 국내에는 연간 26명 정도의 산발성 크로이츠펠트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 이 병은 알 수 없는 이유로 100만 명 당 0.5~1명에게 발병하는데 인간광우병과 증상이 유사하여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는 부검과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 그 동안 국내에는 전문 부검시설이 없고 유족들이 부검을 반대해 정확한 진단을 할 수가 없었다. 대표적으로 2001년 인간광우병으로 의심이 가는 젊은 환자가 있었지만 부검을 못해서 정확히 진단을 할 수 없었다. 산발성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대부분 50대 이상에서 발생하지만, 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콥병은 환자의 평균 연령이 27세로 젊은 나이에 발생한다. 전문가들도 자인하는 것처럼 한국은 광우병의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광우병은 하나의 현상일 뿐! 상황이 이러한데 왜 미국산 소고기 수입만 문제가 됐을까? 우리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이슈화되고 광우병에 대한 공포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과정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사회적 이슈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투쟁과 담론의 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위험'과 '공포'도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인지된다. 미국산 소고기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도 광우병 위험 요인이 국내에 풍부하게 존재했지만 그것이 사회적인 문제로 제기되고 유통되지 않은 것이다. 광우병은 대중이 위험을 인지할 수 있는 선정적인 요인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동안 언론과 운동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한․미 FTA 반대 운동도 광우병의 위험을 강조하는 전략을 지속적으로 채택해왔다. 광우병은 초식동물에게 육식을 강제한, 자연 생태계에서는 결코 발생하지 않는 일이 원인이라는 점에서 현대문명(또는 자본주의)의 괴기스러움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소가 소를 먹는 동종식육은 식인 행위와 유비되어 "문명세계와 문명인"의 공포를 가중시킨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식인풍습으로 발생한 쿠루병, 양의 스크래피, 밍크 뇌종 등과 광우병(소해면상뇌증)의 원인과 증상이 유사하기 때문에 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과학의 지지를 받는다. 광우병이 인간에게 전염된다는 유력한 근거가 있고, 인간광우병에 걸리면 인간이 "미친소"와 유사한 증상으로 죽기 때문에 공포는 배가된다(고상하게 죽을 수도 없다!). 또 누구나 먹는 소고기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전염되고, 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고, 치료제도 없고, 치사율이 100%다. 더군다나 잠복기가 길어서 10년 전에 먹은 소고기 때문에 내일 내가 죽을 수도 있다니. 광우병과 인간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그 문제가 충분히 숙고되었고, 실제로 20여 년에 걸쳐 영국 등지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합리적이다. 하지만 인간광우병에 감염된 여러 사례에서 보듯이 '더 안전한 소고기'를 먹거나 채식을 하는 것이 대안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광우병은 세계적 식량체계에서 생산된 먹거리가 가지는 문제를 보여주는 한 사례로, 세계적 식량체계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광우병 문제를 해결하려면 원인을 제거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먼저 원인을 제대로 인식해야한다. 미국 축산의 역사와 광우병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광우병은 소에게 스크래피에 감염된 양 또는 광우병에 걸린 소의 육골분 사료를 먹인 데서 비롯되었다. 1980년대부터 목축업자들은 상대적으로 비싼 곡물사료를 절약해서 이윤을 보장받기 위해 소에게 육골분 사료를 먹였다. 광우병 발생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과정을 조금 더 긴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광우병과 같은 최근의 전세계적 식품 파동은 20세기에 녹색혁명을 통해 정착된 산업화된 농업과 세계화된 식품생산 및 유통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광우병은 산업화, 공장화된 자본주의 축산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20세기 초부터 미국에서 진행된 녹색혁명과 백색혁명(축산에서의 생산성 혁명을 일컫는 말)은 생산성의 측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가능케 했다. 이 미국식 농업․축산 체계가 하나의 모델로 전세계에 확장되었기 때문에 광우병 발생의 구조를 미국 축산의 역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미국은 농약과 비료를 다량 투입하여 하나의 특화된 작물을 생산하는 단작으로 곡물 생산의 혁명적 증가를 이루어냈다. 트랙터, 탈곡기 등 석유로 작동하는 농업기계를 사용하고 제초제, 살충제, 질소비료 등 화학투입물을 이용하여 자연의 생산력을 자본의 생산력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생태적으로는 그동안 한 덩어리로 이루어져 오던 농업, 임업, 축산 사이의 순환성과 연결성이 파괴되었다. 수천 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농산물의 다양성이 불과 몇 개의 작물로 획일화(단작)되면서 농약으로 인한 토양 및 수질오염, 토양 비옥도 저하, 생물 다양성 훼손, 수자원 고갈, 병해충 창궐과 같은 각종 생태적 문제가 야기되었다. 축산도 이제 가축을 가두어 놓고 필요한 사료, 영양제, 항생제를 투입하는 시스템으로 완전히 변모하였다. 예전처럼 집 마당이나 목초지에 소, 돼지, 닭, 염소 몇 마리를 키우던 목가적인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공장이나 다름없는 축사에서 움직일 틈도 주지 않고 사육하는 체제로 바뀐 것이다. 미국은 대공황으로부터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1935년 '농업 조정법'을 개정하여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고 국내 농산물 가격을 국제가격보다 높게 지지했다. 농가보호와 녹색혁명의 성공으로 잉여 농산물이 증가했는데 이를 1950년대에는 원조 물자로 해외에 처분했다. 처음에는 무상 원조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상업 가격으로 유통시킨 원조 정책으로 카길 같은 거대 곡물상이 부를 축적하고, 전세계에 미국식 농업관행과 식문화가 이식되었다. 대공황과 녹색혁명은 미국 축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공황으로 곡물가격이 떨어지자 미국 축산업자들은 저렴한 곡물을 가축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1950년대 이후에는 값싼 잉여 농산물이 본격적으로 동물의 사료로 전환되었다. 한편 1950년대 말부터 비육장이 성업하는데 비육장은 점차 교외로 이전한 도축장과 통합되었다. 20세기 전반까지 미국에는 도축장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했다. 하지만 도축장에서 발생하는 악취로 환경개선의 요구가 높았고 강력한 정육노조를 무력화하고 값싼 이주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서 도축장을 교외로 이전한다. 교외에서는 도축장과 비육장을 지리적으로 결합할 수 있었다. 또 도축장은 정육장과 구분이 불가능해지는데 냉장과 포장 기술의 발전으로 도축한 소를 그 자리에서 부위별로 자르고 포장해서 출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도축장과 이웃하고 있는 비육장은 도축되기 전에 소의 몸집을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수소는 보통 3~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1400kg 정도의 곡물사료를 먹고 호르몬제, 항생제를 맞으면서 180kg 가량을 찌운다. 이렇게 되어 1960년대에 비육-도축-정육이 결합된 미국식 축산의 골격이 잡히게 되었다. 송아지를 키우는 전통적인 목축업자의 일과 정육한 소고기를 판매하는 소매업 등 나머지 부문은 1970년대 이후에 통합되기 시작한다. 1970년대 초에 미국정부는 국제수지 적자를 타개하기 위해서 농산물 수출을 추진했다. '1973년 농업법'으로 잉여농산물과 가격을 통제하기 위한 생산 제한을 해제하고 수출을 장려했다. 잉여 농산물 정책 변화로 미국이 세계농업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자 유럽과 미국 간의 시장 쟁탈전이 과열되었다. 이 과정에서 초국적 농기업은 제3 세계 농업 시장 진출을 가속화하고, 수직적 통합으로 농자재 산업과 영농, 유통, 가공, 판매를 장악한다. 현재 미국의 4대 정육업체인 콘아그라, IBP(타이슨 푸드), 엑셀(카길), 내셔널 비프는 미국 소의 84%를 도살한다. 또 이들은 비육장 운영이나 선계약과 입도선매 방식의 종속적 공급으로 미국에서 사육되는 소의 20%를 관리하고 있다. 카길은 세계 최대의 사료 업체이기도 하다. 농업자금 대출 부문도 초국적 농기업에 통합되고 있는데 농업자금을 대출받기 위해서 농민은 그 기업이 제공하는 송아지와 사료 구입을 약속해야 한다. 목축업자도 농민처럼 초국적 농기업의 자본축적 과정에서 위험성 높은 한두 부문을 떠맡는 일종의 도급 노동자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수직적 통합과 독과점으로 자영 목축업자는 소의 가격을 낮추어 팔 수밖에 없어서 수익과 생존에 압박을 받았다. 광우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육골분 사료가 1980년대 초부터 확산된 데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다. 한편 육골분 사료를 생산하는 것은 랜더링 산업(rendering industry)이다. 미국에서 가축의 40%는 고기로 소비되지만 뼈, 머리, 내장, 피 등 나머지 60%는 버려진다. 이것을 재가공하여 동물성 지방과 사료를 생산하는 것을 고상한 용어로 랜더링(우리말로 옮기면 동물부산물가공?)이라고 한다. 랜더링 산업의 원료로는 도축장에서 나오는 가축의 부산물 외에도 소매점, 식당 등에서 버려지는 고기 부산물, 폐기름, 남은 음식물 등이 사용된다. 규제가 강화되기 전에는 병들거나 죽은 가축, 애완동물의 사체 등도 널리 사용되었다. 미국에서 연간 2,000만 톤 정도 발생하는 동물 부산물은 생태적 순환에서 괴리된 대량 육식 문화의 이면이다. 동물 부산물을 가공하여 유용한 물건을 만든다는 의미의 랜더링 산업은 역사 이전부터 있었지만, 근대적인 랜더링 산업은 19세기 말에 성립되었다. 원래 랜더링 산업의 주요 생산물은 비누제조의 원료로 사용되는 동물성 지방이었다. 1950년에 미국 랜더링 산업은 50만 톤의 동물성 지방을 비누 제조업에 공급했다. 하지만 비누의 원료가 화학 합성물로 대체되면서 동물성 지방의 수요가 급감한다. 랜더링 산업은 새로운 수요를 개척해야했고 이것이 동물성 사료의 개발로 이어졌다. 현재 랜더링 산업에서 동물성 사료의 비중은 생산량 기준으로 약 55%로 530만 톤 가량의 동물성 사료가 매년 생산되고 있다. 만약 미국에서 동물성 사료가 전면 금지된다면 랜더링 산업에게는 큰 재앙일 것이다. 한편 랜더링 과정도 독립적인 사업에서 도축장 옆에 설치된 초국적 농기업의 한 공정으로 대체되는 추세이다. 미국이 동물성 사료를 계속 허용하는 데는 랜더링 산업과 초국적 농기업의 압력이 작용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안을 세계화하고 지역화하기 위하여 미국산 소고기 수입을 막는다고 해도 광우병을 낳은 공업적 축산과 초국적 자본이 장악한 세계적 식량체계는 지속될 것이다. 설사 광우병이 사라진다고 해도 조류독감과 같은 새로운 문제가 계속 발생한다. 이번에는 그 장소가 영국이나 미국과 같은 고소득 국가가 아니라 제3 세계나 한국일 수도 있다. 생태적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는 농업과 생태의 위기를 치료할 근본적인 대안을 찾지 못하면 광우병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한․미 FTA와 미국산 소고기 수입에 대한 정부의 대안은 한우의 질과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그것이 성공하여 유기농 축산까지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유기농을, 어떤 사람들은 채식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지불하는 돈에 따라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에서 그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동물성 사료로 기른 수입 소고기를 먹고 호르몬이 듬뿍 쳐진 우유를 마실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상품의 목록을 늘리는 것은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세계를 움직이는 현실적인 힘(신자유주의 세계화)이 생태적 순환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생태적 이상 사회를 상상하거나 실험하는 것을 대안으로 내세울 수도 없다. 농업시장이 전세계적으로 통합되고 있는 상황에서 농업에 대한 민족적 통제를 주장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시장개방 반대를 요구하는 것은 위기를 지연시킬 수 있지만 위기가 발생하는 구조는 변화시키지 않는다. 한국도 녹색혁명, 백색혁명을 거치면서 석유와 화학합성물을 고투입하는 농업이 일반화되어 있다. 광우병과 같은 농업위기, 생태위기에 대한 대안은 초민족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세계적 식량체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그 방법은 '자본의 세계화'에 '민중의 세계화'로 맞서는 것뿐이다. 최근 남미의 비아 캄페시아(Via Campesina)나, 무토지 농민운동(MST) 등 주변부를 중심으로 초민족 자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농민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올해 2월에는 말리 셀링게에서 비아 캄페시나를 비롯한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이 '식량주권포럼'을 열고 식량을 위한 국제회의 선언문3)을 채택했다. 대안세계화 농민운동의 이념으로 제시되고 있는 식량주권은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농업에 대한 민족적 통제를 재확립하자는 요구가 아니다. 닐레니 선언은 식량주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식량주권은 생태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된 안전하고, 문화적으로 적합한 식량에 대한 민중들의 권리이며, 또한 민중들이 그들의 고유한 식량과 농업 생산 체계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식량주권은 식량체계와 정책의 중심을 시장과 기업의 요구가 아니라 생산과 공급, 소비를 하는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하며 동시에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다. 식량주권은 현재 초국적 기업이 주도하고 있는 식량체계에 맞서 지역적 생산자들을 중심에 둔 식량, 농업, 소목축업, 어업 체계의 방향과 전략을 제시한다. 식량주권은 지역, 국민경제와 시장을 우선시하고, 독립적인 농민, 어민, 목축인과 환경적․사회적․경제적 지속가능성에 기초한 식량생산, 공급, 소비에 권한을 부여한다. 식량주권은 모든 민중에게 공정한 수입을 보증 할 수 있는 투명한 무역과 소비자가 식량과 영양물을 관리 할 수 있는 권리를 증진시킨다. 식량주권은 우리의 토지, 영토, 물, 종자, 가축, 생물의 다양성을 사용하고 관리하는 권리가 식량 생산자에게 있다는 점을 보증한다. 식량주권은 남녀, 민중, 인종, 사회계급, 세대 사이에 불평등과 억압이 없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의미한다." 식량주권은 생물 다양성을 존중하고, 영농 지식과 토지에 대한 농민의 권리를 옹호한다. 또 생태적인 영농과 농민의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고, 여성농민의 권리를 옹호한다. 지역적인 먹거리 생산과 소비도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농민뿐 아니라 모든 민중에게 안전한 먹거리를 보장한다. 광우병을 발생시키는 신자유주의 농업체계를 변혁하고, 미국식 금융세계화를 전면적으로 이식하는 한․미 FTA에 맞서기 위해서 우리는 식량주권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전략을 마련해야한다. 이것은 수입반대나 정책대안 제시로 환원되지 않는 것으로 차라리 새로운 농민운동, 생태환경운동을 만드는 문제이다. 새로운 운동의 형성, 다른 말로 운동의 혁신은 농업․생태 위기를 방기한 여타 사회운동과 농민운동, 생태환경운동의 반성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1) 되새김동물. 위가 4~5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위를 이용하여 먹이를 소화한다. 소과, 사슴과, 낙타과, 기린과 등의 많은 초식동물이 포함된다. 본문으로 2) 미국과 한국에서는 반추동물에게 반추동물로 만든 육골분 사료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을 뿐 돼지, 닭의 내장과 뼈, 고기로 만든 사료는 여전히 허용하고 있다. 또 돼지와 닭에게 반추동물의 육골분 사료를 먹이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교차오염은 우선 반추동물로 만든 육골분 사료를 반추동물에게 먹이는 경우에 발생한다. 법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으나 쉽게 구할 수 있고 값싼 돼지, 닭의 사료를 소의 사료로 사용할 수 있고, 사료 생산과정이나 축산과정에서 반추동물 육골분 사료가 다른 사료에 미량이라도 섞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교차오염은 광우병과 유사한 질병에 걸린 가축(이 가축은 광우병에 감염된 소의 육골분 사료를 먹었을 것이다)을 사료로 만들어 소에게 먹일 경우에 발생할 수 있다. 영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한 원인이 스크래피에 걸린 양의 육골분 사료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한다. 국제수역사무국 과학위원회도 "미국 정부가 광우병 감염 가능성이 있는 원료를 동물용 사료로 이용하는 한 교차오염의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바 있다. 미국뿐 아니라 동물성 사료를 허용하는 국가는 모두 교차오염의 위험이 있다.본문으로 3) 닐레니(Nyeleni) 선언, 번역 전문은 사회진보연대 자료실 1039번 참고.본문으로
‘생태위기’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요즘이다. 언론 보도에서도 ‘지구온난화’라는 문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환경오염’이 공장에서 배출되는 가스나 폐수와 같은 ‘공해’로만 생각되던 때와 달리,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에게 인식될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맞춰 지배세력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요새 지자체들이 앞 다투어 태양광 발전소 등의 재생가능에너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 관광 단지 조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엄청난 규모의 태양광 발전-관광 단지를 건설하기 위해 멀쩡한 숲을 밀어버리겠다는 웃지 못할 계획들마저 쏟아지고 있다. 생태를 위한다며 도리어 생태를 파괴하려는 지배 세력의 황당한 대응은 지구적 차원에서는 좀 더 복잡하고 교활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동안 대표적인 시장 실패의 사례였던 환경과 생태에 적극적으로 시장 논리를 적용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생태위기의 원인을 은폐하고 악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지구온난화를 중심으로 생태 위기의 원인을 살펴보고, 생태 위기에 대처한다는 명목 아래 자연의 상품화, 공공재의 상품화를 가속시키고 있는 지배 세력의 대응을 짚어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생태적 가치에 대한 사회운동 내부의 인식과 실천을 강화할 수 있는 고민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남으로 창을 내면 더워 죽소 올여름 역시 많은 사람들이 무더위와 열대야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 전체의 기온은 약 0.6℃ 정도 상승했다. 같은 기간 동안 상승한 한국의 기온은 1.5℃ 정도로 상승폭이 2.5배에 달한다. 1960년대에는 하루 평균 기온이 30℃가 넘은 일수가 서울은 3일, 광주는 4일, 대구는 34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이 수치가 서울 18일, 광주 20일, 대구 75일로 급격하게 늘었다. 지난 9월 5일부터 갑자기 쏟아진 집중호우로 제주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가 큰 피해를 입은 것처럼,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해마다 아열대성 게릴라 폭우 현상이 수해의 주된 원인으로 자리 잡았다. 일부 기상학 전문가들은 한반도 일부 지역은 이미 아열대 기후로 바뀐 상태라고 말한다. 북반구의 경우 기온이 1℃ 올라가면 기후대는 평균 200-250㎞ 정도 북상한다. 이를 한반도에 적용시켜보면 대전 날씨가 목포 날씨로, 평양 날씨가 대전 날씨로 변한다는 말이다. 경남 진해에서 열리는 군항제는 1962년 4월 13일,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을 기념하기 위해 처음 열렸다. 벚꽃 축제로 유명한 이 군항제는 벚꽃이 만발하는 시기에 맞춰 3월말부터 4월초에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진해시의 4월 평균온도가 점점 올라, 올해에는 3월 23일부터 4월 8일에 진행되었다. 애초의 4월 13일보다 무려 22일이나 앞당겨졌다. 실제 진해시의 4월 평균온도는 2005년 기준 14.6℃로 1965년의 11.5℃보다 무려 3.1℃나 올랐다. 최근 10년 동안 보건당국에 신고된 말라리아 환자는 연평균 2317명으로, 이전 10년에 비해 45배에 달한다. 말라리아는 1960년대까지 창궐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1979년 ‘한국에서의 박멸’을 선언한 후 14년 동안 한 명도 발병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 이후엔 해마다 1,000-4,000명 정도가 말라리아에 걸리고 있다. 해외에서 걸려 입국하는 경우는 3% 정도일 뿐 대부분이 국내 발병환자다. 열대성 전염병인 뎅기열도 2001년 최초로 6건이 발생했다. 기후변화에 따른 기상이변이 전 세계적으로 속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뉴욕시는 평소 같으면 눈이 내렸을 한겨울에도 기온이 무려 22℃까지 오르면서 때 아니게 벚꽃이 피는가 하면, 유럽 또한 ‘1200년 만에 가장 따뜻한 12월’을 보냈다. 또한 지구온난화로 인해 건조하고 일조량이 많은 남유럽 날씨가 고온다습 형태로 변하면서 와인 생산지까지 바뀌고 있다. 대표적 와인 산지인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서는 포도 품질이 저하되고 포도주스처럼 단 맛이 강해져 첨가물까지 쓰는 처지라고 한다. 이 지방의 첫 포도 수확 시기는 1978년 10월 16일, 1998년 9월 14일에서, 올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8월 24일이었다. 프랑스뿐 아니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1000년 이상 포도와 와인을 제조해온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도 대형 와인업자들은 포도원 부지를 옮기기 위해 북쪽 지역 땅을 사들이고 있다. 대안 아닌 대안들 환경오염과 생태위기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지배 세력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지난 1월에 열린 다보스포럼에서는 전체 200개 토론 가운데 17개가 기후변화 관련된 주제로 채워졌으며, 6월에 열린 G8 정상회의에서도 기후변화가 핵심 의제로 등장했다. 각국 정부와 기업들은 지구 온난화 등의 문제가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수준에 달해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즉각적인 노력을 강조하면서 환경과 관련한 시장의 형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 공유재로 인식되어 왔던 환경을 적극적으로 시장에 편입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논리다. 지배 세력의 이러한 논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기후변화협약이다. [%=박스1%] 1) 국제배출권 거래제 국제배출권 거래제는 기후변화협약을 통해 온실기체의 감축에 합의한 국가들끼리 온실기체를 배출할 수 있는 권한을 거래하는 제도다. 일정량의 온실기체를 배출할 수 있는 권리를 일종의 재산권으로 규정하여 가격을 매긴 다음 이를 기후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국가나 기업들은 자신들이 합의한 감축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감축 목표량 초과달성으로 여분의 배출권을 가진 다른 국가로부터 배출권을 구입할 수 있다. 결국 오염 물질을 대기에 배출할 수 있는 권리-대기의 배타적 사용이라는 의미에서 공유지의 사유화-를 통해 대기 자체를 상품화한다. 또한 국제배출권 거래제는 온실기체의 배출 총량에만 초점을 두고 있어 선진국의 책임을 줄이는 효과를 갖는다. 국제배출권 거래제가 처음으로 명시된 기후변화협약의 교토의정서에는 각국의 1990년 온실가스 배출 수준을 기준으로 삼아 감축률이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애초에 배출량이 많은 나라일수록 더 많이 배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선진국은 기후변화의 진원지인 자신들의 탄소 집약적 생활양식을 유지할 수 있고, 비싼 투자가 요구되는 청정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할 필요가 줄어들게 된다. 결과적으로 과거 온실기체를 배출한 결과로 현재 부를 누리고 청정기술을 개발한 선진국이 가난하고 낙후된 기술을 보유한 개도국에게 지구온난화의 비용을 전가하는 효과를 낳는다. 2) 토지 및 삼림 이용 대표적인 온실 기체인 이산화탄소 배출의 주된 발생원은 첫째가 에너지 사용이며, 두 번째가 산림의 파괴다. 나무는 내부에 이산화탄소를 저장하고, 대기로부터 탄소를 흡수한다. 따라서 산림이 파괴되어 분해되면 내부의 탄소가 배출되어 대기에 축적되며, 이산화탄소의 흡수원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토지이용, 토지용도변경 및 산림’(Land Use, Land Use Change and Forestry. 이하 LULUCF) 사업으로 산림과 토지의 이산화탄소 흡수․저장 기능을 인정․활용하는 것이 국제기후협상의 다른 주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토지와 산림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다양한 생물종이 상호의존하고 있는 그물망으로서의 토지와 산림의 위치와 기능은 삭제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저장하는 기능만 남는다. 따라서 LULUCF 사업에 따라 조림 사업이 진행된다면 보다 빠르게 성장하면서 보다 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수종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단일 수종 확산은 생물 다양성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지역생태계의 기본 질서를 교란하게 된다.3) 또한 LULUCF 사업은 에너지체제 전환의 노력을 감소시킨다. 정유 업계나 선진국들처럼 현재의 화석연료 위주의 에너지체제를 바꾸고 싶지 않은 세력들이 의도적으로 LULUCF 사업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아직까지 토지이용과 용도 변경의 효과가 과학적으로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에너지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보다 저렴한 방법을 택하려는 것이다. 3) 공동이행제도와 청정개발체제 공동 이행제도와 청정개발체제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이루거나 재생가능 에너지 기술이나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기술 등을 이전하여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 감축분을 자국의 감축량으로 인정해주는 제도다. 선진국에는 보다 저렴한 감축 기회를 제공하고 개발도상국 국가에는 선진기술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환영받고 있다. 그러나 이는 기후변화의 일차적 책임자인 선진국이 자국 내에서 취해야할 조치들을 유보하고 화석연료 위주의 에너지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투자 상대국이 현재 가지고 있는 보다 저렴한 감축기회를 자국의 감축목표 달성을 위해 소진시키면서 감축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A국가가 B국가에서 대규모 조림사업을 진행할 경우 이후 B국가는 자국에 할당된 감축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방안-일반적으로 더 비싼 방안을 찾아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감축 부담이 없는 개발도상국들의 경우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시켜야 할 시점이 왔을 때 저렴한 감축 방안들은 이미 선진국들이 써버려 값비싼 방안들만 남게 될 경우 개발도상국의 미래 세대들이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더구나 선진국들이 LULUCF 사업을 청정개발체제의 방안으로 이용하게 되면 개도국의 토지와 산림이 선진국의 이산화탄소 저장소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 이미 많은 선진국들이 조림 사업을 위해 개발도상국의 토지를 장기 임대하고 있는 실정인데, 농사지을 땅이 부족한 이들 나라의 국민에게는 커다란 고통이 되고 있다. ‘시장’은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 지금의 기후변화는 성장만을 추구하며 자연을 착취하는 산업사회 때문에 발생한 생태적 위기다. 지배세력은 연구 및 기술개발과 자본의 재배치를 통해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얘기하는 대안은 전 세계적 불평등과 자연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자신들의 역사적 책임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 흔히 이제 한창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는 국가들의 온실가스 배출이 늘어나는 것이 대기 오염의 주요 원인인 것처럼 얘기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전체 온실가스의 80%를 차지하는 이산화탄소는 화석연료의 연소를 통해 배출되어 50-200년 동안이나 분해되지 않고 대기에 머물면서 지구 복사열을 흡수하여 지구온난화를 유발하면서 기후변화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 현재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산업화 과정동안 배출되어 분해되지 않고 축적된 것이다. 이는 일찍이 산업혁명을 경험하고 오랜 산업화 과정에서 장기간 화석연료를 연소시켜온 선진국에게 기후변화의 역사적 책임이 있음을 말해준다. 선진국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대기 공유지의 흡수 능력을 과도하게 남용해왔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에도 다르지 않다. 선진국의 이산화탄소 배출은 총 규모면에서나 1인당 배출 규모면에서도 개발도상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개발도상국들에서 산업화가 진전되고 에너지 소비량이 많아지면서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의 배출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 격차는 여전히 크다. 그리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라는 분류를 통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 역시 문제다. 흔히 이산화탄소의 바출량이 많고 배출잠재력이 크다고 얘기되는 중국이나 인도의 경우 국가의 배출규모는 1999년 기준으로 세계 2위와 5위에 이르고 있지만, 1인당 배출에 있어서는 OECD 평균인 10.96톤과 큰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세계 평균치인 3.88톤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생태위기는 결국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다 재앙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기후변화의 영향은 지역별로 그리고 같은 지역 내에서도 인구집단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기후변화에 대한 물리적 노출정도나 사회․경제체제가 다르고, 변화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나 기술의 수준 및 정도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생태위기의 파괴적 효과는 일반적으로 부유한 나라보다는 가난한 나라에, 부유한 이들보다는 가난한 이들에게 훨씬 더 큰 타격을 입힌다.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계층일수록 일상생활과 산업이 자연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며, 제도나 기술, 재정적 적응능력이 미흡하기 때문이다.4) 지구온난화로 인해 이전까지 경작하던 농작물을 더 이상 경작할 수 없게 되거나 가뭄으로 지하수가 마르거나 홍수 때문에 오염되기라도 한다면, 이들이 겪는 피해는 1차 산업의 비중이 낮고 잘 정비된 상수도와 물류 공급 체계를 갖추고 있는 선진국들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5) 또한 부유한 사회가 기후변화로 겪게 될 손실은 교통이나 통신 시설과 같이 보상․복원이 가능한 형태가 대부분이나, 가난한 사회의 손실은 인명의 손실과 같이 복원과 보상이 불가능한 형태가 대부분이다. 일례로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어떤 나라에는 그저 해변이 줄어드는 문제지만, 작은 도서 국가들에는 거주할 수 있는 영토가 사라지는 문제다. 더불어 공공재의 사유화는 이러한 피해를 훨씬 증폭시킨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세계은행의 촉구로 수도요금을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물 공급을 중단하자, 한 지역에서만 10만 명 이상이 콜레라에 걸리고 220명이 사망했다. 인도네시아에 가뭄이 닥치자 주민들이 사용하는 우물은 바닥이 드러났지만, 자카르타의 호화 골프장들은 각각 하루에 1천 톤의 물을 사용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발생하는 실제 물의 부족분보다 사유화로 인해 훨씬 더 적은 양만을 얻을 수 있다. 생태위기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물과 같은 공공재가 사유화되고, 대기마저 상품화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민중들은 생태위기의 파괴적 효과를 몇 배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이러한 파괴적 효과는 계급 내부의 약자들에게 한층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생태위기의 문제는 결국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윤 확보를 위해 민중을 착취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자본의 비열함은 생태위기에 대한 태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현재의 국제 정책이나 기구들은 자연의 상품화와 기후시장의 형성을 통해 불평등을 심화․확대시키면서, 위기의 원인을 은폐시킨다. 사회운동 내에서 생태적 가치가 공유되고 강화되어야 한다. 그동안 ‘인간의 자연 정복’은 인류 진보의 척도가 되어왔다. 자연에 대한 정복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공유지에 처음으로 나무 말뚝이 박힌 이래 그 속도는 가히 놀라울 정도로 빨라져, 이제는 인간의 세포에까지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정복과 착취의 후과가 이제 고스란히 생태위기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현재 드러나고 있는 생태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해야 한다. 지속 불가능한 상태까지 자연을 착취하는 사회체계를 바꾸지 않는 한 그 어떤 방법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생태 위기에 대한 지배 세력의 대응이 가져 올 문제점들을 분명하게 폭로하면서,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진지한 모색이 시급한 시점이다.
‘생태위기’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요즘이다. 언론 보도에서도 ‘지구온난화’라는 문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환경오염’이 공장에서 배출되는 가스나 폐수와 같은 ‘공해’로만 생각되던 때와 달리,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들에게 인식될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맞춰 지배세력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요새 지자체들이 앞 다투어 태양광 발전소 등의 재생가능에너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대부분 관광 단지 조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엄청난 규모의 태양광 발전-관광 단지를 건설하기 위해 멀쩡한 숲을 밀어버리겠다는 웃지 못할 계획들마저 쏟아지고 있다. 생태를 위한다며 도리어 생태를 파괴하려는 지배 세력의 황당한 대응은 지구적 차원에서는 좀 더 복잡하고 교활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동안 대표적인 시장 실패의 사례였던 환경과 생태에 적극적으로 시장 논리를 적용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생태위기의 원인을 은폐하고 악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지구온난화를 중심으로 생태 위기의 원인을 살펴보고, 생태 위기에 대처한다는 명목 아래 자연의 상품화, 공공재의 상품화를 가속시키고 있는 지배 세력의 대응을 짚어보고자 한다. 이를 바탕으로 생태적 가치에 대한 사회운동 내부의 인식과 실천을 강화할 수 있는 고민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남으로 창을 내면 더워 죽소 올여름 역시 많은 사람들이 무더위와 열대야에 시달려야 했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 전체의 기온은 약 0.6℃ 정도 상승했다. 같은 기간 동안 상승한 한국의 기온은 1.5℃ 정도로 상승폭이 2.5배에 달한다. 1960년대에는 하루 평균 기온이 30℃가 넘은 일수가 서울은 3일, 광주는 4일, 대구는 34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는 이 수치가 서울 18일, 광주 20일, 대구 75일로 급격하게 늘었다. 지난 9월 5일부터 갑자기 쏟아진 집중호우로 제주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가 큰 피해를 입은 것처럼,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해마다 아열대성 게릴라 폭우 현상이 수해의 주된 원인으로 자리 잡았다. 일부 기상학 전문가들은 한반도 일부 지역은 이미 아열대 기후로 바뀐 상태라고 말한다. 북반구의 경우 기온이 1℃ 올라가면 기후대는 평균 200-250㎞ 정도 북상한다. 이를 한반도에 적용시켜보면 대전 날씨가 목포 날씨로, 평양 날씨가 대전 날씨로 변한다는 말이다. 경남 진해에서 열리는 군항제는 1962년 4월 13일,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을 기념하기 위해 처음 열렸다. 벚꽃 축제로 유명한 이 군항제는 벚꽃이 만발하는 시기에 맞춰 3월말부터 4월초에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진해시의 4월 평균온도가 점점 올라, 올해에는 3월 23일부터 4월 8일에 진행되었다. 애초의 4월 13일보다 무려 22일이나 앞당겨졌다. 실제 진해시의 4월 평균온도는 2005년 기준 14.6℃로 1965년의 11.5℃보다 무려 3.1℃나 올랐다. 최근 10년 동안 보건당국에 신고된 말라리아 환자는 연평균 2317명으로, 이전 10년에 비해 45배에 달한다. 말라리아는 1960년대까지 창궐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1979년 ‘한국에서의 박멸’을 선언한 후 14년 동안 한 명도 발병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 이후엔 해마다 1,000-4,000명 정도가 말라리아에 걸리고 있다. 해외에서 걸려 입국하는 경우는 3% 정도일 뿐 대부분이 국내 발병환자다. 열대성 전염병인 뎅기열도 2001년 최초로 6건이 발생했다. 기후변화에 따른 기상이변이 전 세계적으로 속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뉴욕시는 평소 같으면 눈이 내렸을 한겨울에도 기온이 무려 22℃까지 오르면서 때 아니게 벚꽃이 피는가 하면, 유럽 또한 ‘1200년 만에 가장 따뜻한 12월’을 보냈다. 또한 지구온난화로 인해 건조하고 일조량이 많은 남유럽 날씨가 고온다습 형태로 변하면서 와인 생산지까지 바뀌고 있다. 대표적 와인 산지인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에서는 포도 품질이 저하되고 포도주스처럼 단 맛이 강해져 첨가물까지 쓰는 처지라고 한다. 이 지방의 첫 포도 수확 시기는 1978년 10월 16일, 1998년 9월 14일에서, 올해에는 사상 처음으로 8월 24일이었다. 프랑스뿐 아니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1000년 이상 포도와 와인을 제조해온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도 대형 와인업자들은 포도원 부지를 옮기기 위해 북쪽 지역 땅을 사들이고 있다. 대안 아닌 대안들 환경오염과 생태위기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지배 세력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지난 1월에 열린 다보스포럼에서는 전체 200개 토론 가운데 17개가 기후변화 관련된 주제로 채워졌으며, 6월에 열린 G8 정상회의에서도 기후변화가 핵심 의제로 등장했다. 각국 정부와 기업들은 지구 온난화 등의 문제가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수준에 달해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즉각적인 노력을 강조하면서 환경과 관련한 시장의 형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동안 공유재로 인식되어 왔던 환경을 적극적으로 시장에 편입시킴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논리다. 지배 세력의 이러한 논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기후변화협약이다. [%=박스1%] 1) 국제배출권 거래제 국제배출권 거래제는 기후변화협약을 통해 온실기체의 감축에 합의한 국가들끼리 온실기체를 배출할 수 있는 권한을 거래하는 제도다. 일정량의 온실기체를 배출할 수 있는 권리를 일종의 재산권으로 규정하여 가격을 매긴 다음 이를 기후시장에서 매매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국가나 기업들은 자신들이 합의한 감축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감축 목표량 초과달성으로 여분의 배출권을 가진 다른 국가로부터 배출권을 구입할 수 있다. 결국 오염 물질을 대기에 배출할 수 있는 권리-대기의 배타적 사용이라는 의미에서 공유지의 사유화-를 통해 대기 자체를 상품화한다. 또한 국제배출권 거래제는 온실기체의 배출 총량에만 초점을 두고 있어 선진국의 책임을 줄이는 효과를 갖는다. 국제배출권 거래제가 처음으로 명시된 기후변화협약의 교토의정서에는 각국의 1990년 온실가스 배출 수준을 기준으로 삼아 감축률이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애초에 배출량이 많은 나라일수록 더 많이 배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게 된다. 따라서 선진국은 기후변화의 진원지인 자신들의 탄소 집약적 생활양식을 유지할 수 있고, 비싼 투자가 요구되는 청정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할 필요가 줄어들게 된다. 결과적으로 과거 온실기체를 배출한 결과로 현재 부를 누리고 청정기술을 개발한 선진국이 가난하고 낙후된 기술을 보유한 개도국에게 지구온난화의 비용을 전가하는 효과를 낳는다. 2) 토지 및 삼림 이용 대표적인 온실 기체인 이산화탄소 배출의 주된 발생원은 첫째가 에너지 사용이며, 두 번째가 산림의 파괴다. 나무는 내부에 이산화탄소를 저장하고, 대기로부터 탄소를 흡수한다. 따라서 산림이 파괴되어 분해되면 내부의 탄소가 배출되어 대기에 축적되며, 이산화탄소의 흡수원이 사라지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토지이용, 토지용도변경 및 산림’(Land Use, Land Use Change and Forestry. 이하 LULUCF) 사업으로 산림과 토지의 이산화탄소 흡수․저장 기능을 인정․활용하는 것이 국제기후협상의 다른 주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토지와 산림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다양한 생물종이 상호의존하고 있는 그물망으로서의 토지와 산림의 위치와 기능은 삭제되고, 이산화탄소를 흡수․저장하는 기능만 남는다. 따라서 LULUCF 사업에 따라 조림 사업이 진행된다면 보다 빠르게 성장하면서 보다 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수종이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단일 수종 확산은 생물 다양성을 위협할 뿐만 아니라 지역생태계의 기본 질서를 교란하게 된다.3) 또한 LULUCF 사업은 에너지체제 전환의 노력을 감소시킨다. 정유 업계나 선진국들처럼 현재의 화석연료 위주의 에너지체제를 바꾸고 싶지 않은 세력들이 의도적으로 LULUCF 사업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아직까지 토지이용과 용도 변경의 효과가 과학적으로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에너지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보다 저렴한 방법을 택하려는 것이다. 3) 공동이행제도와 청정개발체제 공동 이행제도와 청정개발체제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이루거나 재생가능 에너지 기술이나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기술 등을 이전하여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 감축분을 자국의 감축량으로 인정해주는 제도다. 선진국에는 보다 저렴한 감축 기회를 제공하고 개발도상국 국가에는 선진기술을 확산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환영받고 있다. 그러나 이는 기후변화의 일차적 책임자인 선진국이 자국 내에서 취해야할 조치들을 유보하고 화석연료 위주의 에너지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투자 상대국이 현재 가지고 있는 보다 저렴한 감축기회를 자국의 감축목표 달성을 위해 소진시키면서 감축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A국가가 B국가에서 대규모 조림사업을 진행할 경우 이후 B국가는 자국에 할당된 감축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방안-일반적으로 더 비싼 방안을 찾아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감축 부담이 없는 개발도상국들의 경우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시켜야 할 시점이 왔을 때 저렴한 감축 방안들은 이미 선진국들이 써버려 값비싼 방안들만 남게 될 경우 개발도상국의 미래 세대들이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더구나 선진국들이 LULUCF 사업을 청정개발체제의 방안으로 이용하게 되면 개도국의 토지와 산림이 선진국의 이산화탄소 저장소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 이미 많은 선진국들이 조림 사업을 위해 개발도상국의 토지를 장기 임대하고 있는 실정인데, 농사지을 땅이 부족한 이들 나라의 국민에게는 커다란 고통이 되고 있다. ‘시장’은 무엇도 해결할 수 없다 지금의 기후변화는 성장만을 추구하며 자연을 착취하는 산업사회 때문에 발생한 생태적 위기다. 지배세력은 연구 및 기술개발과 자본의 재배치를 통해 생태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얘기하는 대안은 전 세계적 불평등과 자연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자신들의 역사적 책임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 흔히 이제 한창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는 국가들의 온실가스 배출이 늘어나는 것이 대기 오염의 주요 원인인 것처럼 얘기되곤 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전체 온실가스의 80%를 차지하는 이산화탄소는 화석연료의 연소를 통해 배출되어 50-200년 동안이나 분해되지 않고 대기에 머물면서 지구 복사열을 흡수하여 지구온난화를 유발하면서 기후변화를 가져온다. 다시 말해 현재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는 산업화 과정동안 배출되어 분해되지 않고 축적된 것이다. 이는 일찍이 산업혁명을 경험하고 오랜 산업화 과정에서 장기간 화석연료를 연소시켜온 선진국에게 기후변화의 역사적 책임이 있음을 말해준다. 선진국들은 그동안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대기 공유지의 흡수 능력을 과도하게 남용해왔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에도 다르지 않다. 선진국의 이산화탄소 배출은 총 규모면에서나 1인당 배출 규모면에서도 개발도상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다. 개발도상국들에서 산업화가 진전되고 에너지 소비량이 많아지면서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의 배출이 늘어나고 있지만 그 격차는 여전히 크다. 그리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라는 분류를 통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평면적으로 비교하는 것 역시 문제다. 흔히 이산화탄소의 바출량이 많고 배출잠재력이 크다고 얘기되는 중국이나 인도의 경우 국가의 배출규모는 1999년 기준으로 세계 2위와 5위에 이르고 있지만, 1인당 배출에 있어서는 OECD 평균인 10.96톤과 큰 차이를 보일 뿐만 아니라 세계 평균치인 3.88톤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생태위기는 결국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다 재앙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기후변화의 영향은 지역별로 그리고 같은 지역 내에서도 인구집단별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기후변화에 대한 물리적 노출정도나 사회․경제체제가 다르고, 변화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나 기술의 수준 및 정도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생태위기의 파괴적 효과는 일반적으로 부유한 나라보다는 가난한 나라에, 부유한 이들보다는 가난한 이들에게 훨씬 더 큰 타격을 입힌다. 가난한 나라와 가난한 계층일수록 일상생활과 산업이 자연에 의존하는 정도가 크며, 제도나 기술, 재정적 적응능력이 미흡하기 때문이다.4) 지구온난화로 인해 이전까지 경작하던 농작물을 더 이상 경작할 수 없게 되거나 가뭄으로 지하수가 마르거나 홍수 때문에 오염되기라도 한다면, 이들이 겪는 피해는 1차 산업의 비중이 낮고 잘 정비된 상수도와 물류 공급 체계를 갖추고 있는 선진국들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5) 또한 부유한 사회가 기후변화로 겪게 될 손실은 교통이나 통신 시설과 같이 보상․복원이 가능한 형태가 대부분이나, 가난한 사회의 손실은 인명의 손실과 같이 복원과 보상이 불가능한 형태가 대부분이다. 일례로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어떤 나라에는 그저 해변이 줄어드는 문제지만, 작은 도서 국가들에는 거주할 수 있는 영토가 사라지는 문제다. 더불어 공공재의 사유화는 이러한 피해를 훨씬 증폭시킨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세계은행의 촉구로 수도요금을 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물 공급을 중단하자, 한 지역에서만 10만 명 이상이 콜레라에 걸리고 220명이 사망했다. 인도네시아에 가뭄이 닥치자 주민들이 사용하는 우물은 바닥이 드러났지만, 자카르타의 호화 골프장들은 각각 하루에 1천 톤의 물을 사용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발생하는 실제 물의 부족분보다 사유화로 인해 훨씬 더 적은 양만을 얻을 수 있다. 생태위기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물과 같은 공공재가 사유화되고, 대기마저 상품화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민중들은 생태위기의 파괴적 효과를 몇 배 더 크게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이러한 파괴적 효과는 계급 내부의 약자들에게 한층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생태위기의 문제는 결국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윤 확보를 위해 민중을 착취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자본의 비열함은 생태위기에 대한 태도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현재의 국제 정책이나 기구들은 자연의 상품화와 기후시장의 형성을 통해 불평등을 심화․확대시키면서, 위기의 원인을 은폐시킨다. 사회운동 내에서 생태적 가치가 공유되고 강화되어야 한다. 그동안 ‘인간의 자연 정복’은 인류 진보의 척도가 되어왔다. 자연에 대한 정복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공유지에 처음으로 나무 말뚝이 박힌 이래 그 속도는 가히 놀라울 정도로 빨라져, 이제는 인간의 세포에까지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이러한 정복과 착취의 후과가 이제 고스란히 생태위기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현재 드러나고 있는 생태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인식해야 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고민해야 한다. 지속 불가능한 상태까지 자연을 착취하는 사회체계를 바꾸지 않는 한 그 어떤 방법도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생태 위기에 대한 지배 세력의 대응이 가져 올 문제점들을 분명하게 폭로하면서,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진지한 모색이 시급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