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종족적 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범민련 남측본부가 발행하는 <민족의 진로>에 실린 기사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실용주의의 해악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은 이렇게 주장했다. "이남사회에는 갈수록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외국인노동자 문제, 국제결혼, 영어 만능적 사고의 팽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유학과 이민자의 급증, 극단적 이기주의의 만연, 종교의 포화상태, 외래자본의 예속성 심화, … 유형은 달라도 결국은 이남사회가 민족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민족문화전통을 홀대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외래적으로 침습 해 오고 그것이 또한 확대 재생산되는 구조 속에서 이 문제들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과 <동성애자인권연대>가 비판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주노조>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 논리는 외국에서 노동 이주를 해 온 이주노동자들, 결혼 이민을 온 이주자들은 한국의 '민족성'과 나아가 '혈통'을 어지럽히는 존재가 된다. … 이주자들의 존재 자체가 문제라는 식으로 바라본다면, 정부의 이주자 차별과 억압에 진지하게 반대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또 우파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이주자들을 희생양 삼아 인종주의적 공격을 시도할 때, 이 피억압자들을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박했다. 우리 역시 이주노동자를 민족 고유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은 혼혈과 이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유럽의 극우세력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민족의 단일한 기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며, 민족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하는 모든 시도는 철저히 ‘야만적 이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는 인류사에 대한 무지를 넘어서 인류사를 조작, 왜곡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민족의 순수화(정화)’라는 반동적 해결책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와 손쉽게 결합한다고 주장한다. 종족적 민족주의의 반동성 그런데 이처럼 민족 고유성, 특히 언어적·문화적 단일성과 나아가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가 동북아 지역에서 최근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종족적 민족주의는 종족의 신화·상징의 공통성에 기초해 ‘민족주의 이전에 민족이 존재했다.’는 관점을 지지하며,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인종주의적 관점과 친화성이 높다. 이방인에 대한 공포, 경멸, 적대심을 뜻하는 ‘외국인혐오증’을 넘어서는 강한 의미의 인종주의는 인류의 역사를 인종의 위계에 따라 구성하고, 우월한 인종의 신성한 임무와 불필요한 인종의 배제·제거를 주장한다. 또한 종족적 민족주의는 민족공동체를 초월적·유기체적 존재로 간주하는 보수주의와 매우 가깝다. 종족적 민족주의가 강화될수록 자유·평등한 시민의 권리에 근간을 두는 근대적 정치이념보다는 전근대적 이념·사조가 강화된다. 반면 종족적 민족주의와 대비되는 시민적 민족주의는 대체로 ‘근대 민족주의에 의해 민족이 발명되었다.’는 관점을 공유하며, 시민으로서 민족구성원의 인격적 동등성이라는 관념이 작동하므로 민족자결과 함께 인민주권, 즉 자유, 평등한 시민의 권리가 강조되며, 사회혁명을 촉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시민적 민족주의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다. 2005년 프랑스의 도시외곽 지역에서 벌어진 소요사태나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미국 남부지역에서 벌어진 사태로 드러나듯이, 공식적으로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서구 국가들에서 인종주의는 결코 ‘제거’되지 않았다. 동북아지역의 종족적 민족주의 동북아 지역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19~20세기 서구의 유사과학적 종족, 인종 관념이 도입되면서 이미 등장했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을 비롯해 동북아 공산주의 운동의 성과와 일본의 패전을 통해 종족적 민족주의가 다소 억제된 상태였으나, 최근 상호 경쟁적으로 다시 확산되고 있다. 중국은 모택동 당시의 ‘중국인민’이라는 구호를 장개석의 ‘중화민족’이라는 반동적 구호로 대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나아가 ‘중화민족’의 인종적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도 활발해지고 있다.1) 이는 기존의 과학적 입장을 뒤집는 주장으로도 나타났다. 즉 호모 에렉투스에서 호모 사피엔스로의 진화가 전 세계적으로 각기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했고, 오늘날 중국인은 수 만년에 걸쳐 독자적으로 진화했으므로 ‘흑인’이나 ‘백인’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 인류가 동일한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에서 파생한 것이라는 일반적 견해와 대별된다. 또한 대중서적에서는 400만년 가까이 대중화지역에서 살아온 ‘중화인종’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으며, 중국 운남성이 세계 인류 발흥지의 하나이며, 중국이 현대 황인종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군사력 보유 금지'와 '교전권 부인'을 규정한 일본 헌법 9조의 개정을 추진하며, 국기·국가의 법제화,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교과서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은 곧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의 상징이다.2) 한편 남한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1945년 이후로 종족적 민족주의, 이른바 ‘단군민족주의’(단군숭배)가 법으로 보장되고,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대중의 내면을 강력히 장악하고 있다. 1945년 직후 남한은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하고 ‘단기’ 연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며, 고대노예제 국가 고조선의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법제화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걸었고, 1993년 돌연 평양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동북아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예외를 발견하기란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 남한의 ‘단군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한 어머니의 소생을 뜻하는 ‘동포’(同胞), 같은 핏줄의 사람을 뜻하는 ‘겨레’(族)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혈연의식과 민족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철저히 근대 이후의 일이다. ‘2천만 동포’, ‘삼천리 강토’, ‘4천년 역사’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1907~8년 이후부터이며, 조선혼, 조선마음이란 말은 1910년대에 등장하여 1930년대에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배달겨레라는 말도 1920년대에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근대사회에서 인격적으로 동등한 개인들의 관계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혈연공동체라는 민족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시대 일종의 국가공인 교과서인 『동몽선습』은 역사의 첫머리를 단군의 건국으로 시작하지만, 국가 지배자들의 국가계승 의식을 민족주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본격적으로 ‘단군 민족주의’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19세기 말 평안도나 백두산 지역에서 민간신앙 수준을 넘고자 하는 본격적인 단군 신앙운동이 나타났고,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항일의병활동에서 단군 찬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말 애국 계몽운동기에 단군 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사조가 사상계에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하여 종교에서는 1909년 대종교의 창건으로, 역사학에서는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으로 투사되었다. 특히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은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를 이론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신채호는 대한제국 수립 이후 학부에서 주관한 학부 교과서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본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던 이 교과서는 ‘조선’ 계승 의식보다 ‘한(韓)’ 계승 의식을 강조했고, 기자문화(기자조선→마한)에 모든 개화정책을 결부시켰다. 이는 17세기 후반부의 ‘마한정통론’을 부활시키는 것이고, 대일본주의에 바탕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신채호는 ‘부여’ 계승의식을 제기하였다. 신채호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은 우리 역사에서 부여족이 주족(主族)이고 외래족인 중국족, 선비족, 말갈족과 토착족인 한족, 예맥족이 그들에게 동화된 객족(客族)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단군조선이 부여→고구려로 이어진다고 해석했다. 기자조선 정통주의는 ‘사대모화’, ‘중화주의’이며, ‘한’ 계승의식은 임나일본부설의 수용으로 연결되면서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고 결국 ‘일본숭배의 노예근성’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훗날 신채호가 북경에서 조직한 무정부주의 테러단체의 이름은 ‘다물단’이었다. 신채호 이후 종족적 민족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 발전되었다. 대종교의 최고 이론가이자 2대 교주인 김교현이 1914년에 서술한 『신단실기』는 우리 민족이 배달종족에서 출발했으며, 그 계통은 조선족, 북부여족, 예맥족, 옥저족, 숙신족이라고 서술했다. 민족의 주류가 조선족→한족→신라족으로 형성되었고, 중국족인 기자와 그 후예 마한은 반배달족으로 조선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의 조선족과 북의 부여족이 모두 주족이라고 보았고, 신채호가 외래족이라고 간주했던 선비, 거란, 여진, 만주족을 모두 고구려, 백제와 함께 배달족의 한 계통인 북부여족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신채호의 부여족 계승의식을 범동이족 계승의식으로 확대하면서, 한 계승의식도 종합함으로써, 민족의 구성을 대폭 확대한 ‘대단군주의’를 주창한 것이었다. 김교현의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조선인이 서술한 한국사 서적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조선총독부의 식민교육은 한국사의 출발이 단군조선이 아니라 중국의 식민지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고, 한국문화의 독자적 발전을 부인했다. 즉 단군(조선)이 실존하지 않고, 단군 전설은 고려 중기에 조작된 것이며, 그나마 조선남부의 한(韓) 종족과는 관계가 없고 순전히 조선 북부와만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의 시도에 대응해, 일제하 민족교육에서 국가교육을 중시하고 단군의 건국신화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신단실기』는 만주에서 군사교육을 실시하던 사관학교의 국사교재로도 애용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대동이주의의 정통이 신교(神敎) 또는 한(韓) 종족을 바탕으로 일본으로 갔다는 주장을 매개로 대동이주의는 대일본주의, 곧 대동아공영론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최남선은 일본의 단군말살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대단군주의/대동이주의를 대일본주의로 변형시켰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동이문화권을 더 확대시켜 발칸·반도, 카스피해, 일본, 유구를 포함시켰고, 한일문화 동원론(凍原論)을 승인했다. 대일본주의로 변형된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유포되었고, 현재 위서로 판명난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규원사화』는 일본, 조선, 만주족 연합을 통한 중국제패를 주장했고, 『환단고기』는 단군조선과 일본 건국신화와 일본 신도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단기고사』는 고대 단군민족과 중국민족의 전쟁 체험을 강조하면서 불함문화권을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종족과 일본문화를 포괄하는 대동아시아문화우월주의를 내세웠다. 이처럼 종족적 민족주의를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던 시도는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포섭되었다. 결국 고대사를 당대의 정치적 맥락에 따라 조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낳은 역설인 셈이다. 한편, 1945년 이후 남한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국가적 제도 속에서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내에서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고, 정치이념이 모호했던 한국의 민족주의 경향은 단군주의를 정치적 상징, 구심으로 내세운 것이다.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되고, 단기(檀紀) 연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정인보가 작사한 개천절의 노래가 교과서에 실려 불려졌다. 1절은 이렇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3절은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로 시작한다. 또한 ‘홍익인간’은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이었던 조소앙의 삼균주의나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를 매개로 국가의 교육이념으로 법제화되었다(1949년 법률 제86호로 제정된 교육법 1조 1항). 그러나 고대사회의 이념을 현대의 정치이념·교육이념으로 계승한다는 것은 종족적 민족주의가 작동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고조선 사회는 이미 계급이 분화된 고대 노예제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 고조선보다 약간 후대인 부여에는 귀족이 죽으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여서 무덤에 함께 묻는 순장이 유행했다. 고조선도 분명한 증거는 없으나 노예를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에도 단군주의는 “단일민족”, “혈연공동체”라는 신화를 뒷받침하며, “대통일국가를 건설했던 위대하며 선택받은 민족”이란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며, 특히 “대륙에 대한 영토의식”을 자극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민족주의의 대전환과 단군릉 사건 1957년 북한에서 발표된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새로운 단계'는 민족주의가 “인민들간의 친선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자체의 민족적 이익과 계급적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밝혔다. 1973년 발행된 정치사전에서도 민족주의는 “계급적 이익을 전 민족적 이익으로 가장하고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면서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증오하며 민족들 사이의 불화와 적대를 일삼는 부르죠아 사상”이며 “민족주의는 언제나 부르죠아적 성격을 띤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1986년 북한의 후계자 김정일이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180도 전환하게 되었다. 조선민족 제일주의는 “조선민족의 위대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조선민족의 위대성을 더욱 빛내어 나가려는 높은 자각과 의지로 발현되는 숭고한 사상·감정”으로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조선민족이 제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수령을 모시고 위대한 당의 영도를 받으며 위대한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 제도에서 사는 긍지와 자부심”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 민족의 위대성은 우리 수령, 우리 당의 위대성”인 것이다. 한편, 북한의 민족 개념에 대한 정의도 변화하였다. 1950~60년대까지 북한의 민족 개념은 스탈린의 정식화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언어, 영토, 경제생활, 심리적 상태(문화의 공통성)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오랜 역사를 거쳐서 형성된 사람들의 공고한 집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민족의 구성요소에 ‘혈통’이 포함되었고, 1980년대 이르러서는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삭제하고 혈연의 공통성을 크게 강조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민족적 혈통이 “혈연성에 기초하여 맺어진 공동체인 씨족, 종족의 인종적 특징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차원에서 동질적, 이질적 주민집단이 동화, 융합되는 인간 세대교체를 통해 이루어진 징표”라고 설명했다.3) 그러나 민족의 지표로서 핏줄과 언어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핏줄과 언어는 사실상 불변의 본질로 간주되고, 민족의 형성 시기는 상고시기로 소급되었다. 이는 근대에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스탈린의 이론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아가 원시시대부터 ‘조선옛유형사람’의 존재를 상정하여, 민족을 생물학적 인종 개념으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와중에 1993년 북한은 난데없이 평양시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고구려의 무덤양식과 금동관 조각 때문에 고구려 당시의 고분이라고 생각했으나, 출토된 인골을 측정하니 5011(±267)년 전에 죽은 사람의 뼈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때 개장한 단군묘라고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녕성이라는 그 이전 30년간의 주장을 일거에 뒤집는 것이었고 북한 역사학계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4) 남한에서는 위서로 간주하는 『단기고사』, 『태백일사』, 『규원사화』가 사료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북한은 단군릉을 근거로 단군이 실재했고, 고조선은 5천 년 전에 건국되었고, 평양에서 이미 5천년 이전에 청동기 문명을 꽃피웠으니, “평양은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인류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주장의 객관적 근거가 극히 미약하기 때문에, 남한의 대북 인식 상의 냉소주의가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민족주의는 김일성 유일사상(주체사상)의 강화에 따라 수령론/대가족론이 득세하고, 정치공동체의 초월적, 유기체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으며 (앞서 언급한 보수적·반동적 민족주의), 이는 자연스럽게 자유·평등한 시민적 권리를 강조하는 정치이념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초월적, 유기체적 공동체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언어와 핏줄로 맺어진 공통성을 부각시키고, 이는 인종주의적 민족관으로 퇴행하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진1%]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단군민족주의,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신화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선택으로 합리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반제 저항운동이 종족적 민족주의에 의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은 종족적 민족주의와 관련이 없으며, 중국의 공산주의운동은 ‘중화민족’을 주창한 장개석 세력을 격렬히 비판했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객관적 조건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반동성이 강화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종족적 민족주의의 위험을 강력히 비판해야 한다. 첫째, 중국의 역사 해석에 대응해 한국 역시 역(逆)동북공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사나 중세사는 결코 특정 민족사의 기원으로 해석될 수 없다. 동북아지역 고대사를 현존 국가의 민족사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허구적인 ‘종족적 민족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한국에서 최근 대중문화를 통해 고대사를 민족사로 흡수하려는 시도는 동북아의 종족적 민족주의의 부활을 부추긴다. 따라서 최근 민주노총이 ‘주몽’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어떤 이유든 간에 대중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정서에 편승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또한 영유권 분쟁을 고대사로 환원하려는 시도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를 강화하며, 자연·자원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소유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강화할 따름이다. 둘째,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는 세계화 시대에 이주노동자의 권리가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되고 있는 국면에서 반동적 기능을 한다. 민족이 과거 지향적(사실은 허구적) 종족적 동일성이 아니라 현실에 실존하는 ‘정치공동체’를 의미한다면 마땅히 이주노동자가 정치공동체의 시민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노동자운동의 미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셋째, 동북아시아 각 국가에서 종족적 민족주의가 확산되는 것은 지역적 차원의 안보위험성이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상당부분 미국, 일본과의 잠재적 갈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상호작용 속에서 일본만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한 위선이다. 남북한, 중국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일본만은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일본이 패전국이니까.’라고 강요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각 국이 일본 평화헌법이 지향하는 바를 동일하게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 특히 미국이 동북아지역에서 군사동맹, 군사기지를 통해 행사하는 군사적 압력과 철저하게 단절해야 한다. 현재 유럽은 '새유럽의 역사'와 같은 공동교과서를 통해 반동적 민족사 교육을 극복하려는 시도하고 있다(공동교과서에서 고대사와 중세사가 다뤄지는 비중은 현저히 낮다). 최근 동북아시아에서도 이와 같은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탈민족화'를 주장하는 주류 세력은 보수세력이다. <조선일보>가 영어공용화를 주창하고, '일본에 의해 근대화가 이뤄졌고, 식민지 시기에 한국의 경제발전의 토대가 구축되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가 편협한 국사/세계사 교과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세계화를 주도하는 지배 엘리트가 훨씬 더 민족적 특수주의를 지양할 태세를 갖추고 있고, 오히려 피지배 대중이 민족주의나 인종주의에 훨씬 더 유혹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라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종족적 민족주의의 파괴적 효과는 결국 민중이 짊어져야 한다. 민중운동은 민족에 대한 종족적·인종적 관점을 철저히 비판, 지양해야 하며, 현존하는 정치공동체에서 자유·평등한 시민적 권리라는 관점을 견지하여 세계화에 대항하는 운동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또한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반동적 부활을 비판하기 위해서, 1980년대 민족·민족주의를 둘러싼 민중운동 내의 논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새로운 지평 위에서 재개되어야 한다. 1)장개석이 저술했다고 발표된 『중국의 운명』은 아주 오래전 동일한 선조로부터 다양하게 분화된 종족들로 이루어진 ‘중화민족’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레닌의 국제주의의 특징인 (반제국주의를 의미하는) ‘민족자결주의’와 (영토분리주의를 극복하는) ‘연방주의’를 수용했다. 1931년 중화소비에트전국대표대회에서 작성된 헌법대강에서는 “몽골족, 회족, 장족, 묘족, 려족, 고려인 등 중국 전역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은 중국소비에트연방에 가입하든 이탈하든, 자치구역을 건립하든 완전한 자결권을 지닌다.”고 선언했다.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의 『중국의 운명』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1980년대까지도 종족, 인종은 금기어였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 대장정 이후 몽골, 회족 등에 대한 분리 제안을 중단하고, 다민족중국이라는 관념을 수용하기 시작했다.본문으로 2)일본의 민족주의는 유럽세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고, 그것을 민감하게 의식한 것은 구(舊)국가의 특권적인 지배계급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민족주의는 지배계급의 특권적 신분을 유지, 강화하려는 욕구와 강하게 결합했다. 따라서 명치유신 초기에 등장했던 자유민권운동은 강력한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국민의 종가(宗家)로서의 황실,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관념이 강요되었다. 일본의 팽창주의가 확대되면서 정치, 문화적 동화와 배제, 인종적 정의가 동시에 등장했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전에 아이누(북해도)와 류큐(오키나와) 주민을 야만인이라고 보고 중심으로부터 가능한 한 분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명치유신 이후로 북해도와 오키나와를 팽창주의의 거점으로 삼으려 하면서, 그들에 대한 일본화를 시도했다. 그 결과 아이누인과 류큐인은 명치유신을 주도한 과두세력과 동일한 일본 인종의 원시적, 고대적 유형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그들에 대한 일본화(동화) 과정은 배제과정과 맞물렸고, 이들에 대한 동화·지배전략은 대만과 조선에 대한 동화·지배전략의 원형이 되었다.본문으로 3)물론 이러한 변화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과의 논리적 정합성 문제가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의 이론대로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강조하면, 북한과 남한은 서로 다른 경제생활,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인해 서로 다른 민족이 되기 때문이며,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에 동독은 스탈린의 명제를 적용하여 ‘2민족, 2국가, 2체제’, 즉 동서독이 서로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할 때 ‘혈통의 공통성’이 가장 강조된다. (고연제안은 1민족, 1국가, 2체제를 주장했다.)본문으로 4)따라서 북한의 단군릉 발표는 북한 역사학계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정치지도자의 의지에 따른 결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미 1967년 북한에서 ‘당의 유일사상 체계를 세우자.’는 5·15 교시가 발표된 후, 김일성 수령 개인에 대한 우상화와 절대화가 이뤄졌다. 이에 따라 역사학계의 활력은 크게 저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령은 역사학계에서 역사연구의 최종 판단자가 되었다.본문으로
남북한의 종족적 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범민련 남측본부가 발행하는 <민족의 진로>에 실린 기사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실용주의의 해악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은 이렇게 주장했다. "이남사회에는 갈수록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되고 있습니다. 외국인노동자 문제, 국제결혼, 영어 만능적 사고의 팽배,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유학과 이민자의 급증, 극단적 이기주의의 만연, 종교의 포화상태, 외래자본의 예속성 심화, … 유형은 달라도 결국은 이남사회가 민족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민족문화전통을 홀대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외래적으로 침습 해 오고 그것이 또한 확대 재생산되는 구조 속에서 이 문제들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과 <동성애자인권연대>가 비판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주노조>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 논리는 외국에서 노동 이주를 해 온 이주노동자들, 결혼 이민을 온 이주자들은 한국의 '민족성'과 나아가 '혈통'을 어지럽히는 존재가 된다. … 이주자들의 존재 자체가 문제라는 식으로 바라본다면, 정부의 이주자 차별과 억압에 진지하게 반대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또 우파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이주자들을 희생양 삼아 인종주의적 공격을 시도할 때, 이 피억압자들을 방어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박했다. 우리 역시 이주노동자를 민족 고유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은 혼혈과 이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유럽의 극우세력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민족의 단일한 기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며, 민족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하는 모든 시도는 철저히 ‘야만적 이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는 인류사에 대한 무지를 넘어서 인류사를 조작, 왜곡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민족의 순수화(정화)’라는 반동적 해결책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와 손쉽게 결합한다고 주장한다. 종족적 민족주의의 반동성 그런데 이처럼 민족 고유성, 특히 언어적·문화적 단일성과 나아가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가 동북아 지역에서 최근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종족적 민족주의는 종족의 신화·상징의 공통성에 기초해 ‘민족주의 이전에 민족이 존재했다.’는 관점을 지지하며,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인종주의적 관점과 친화성이 높다. 이방인에 대한 공포, 경멸, 적대심을 뜻하는 ‘외국인혐오증’을 넘어서는 강한 의미의 인종주의는 인류의 역사를 인종의 위계에 따라 구성하고, 우월한 인종의 신성한 임무와 불필요한 인종의 배제·제거를 주장한다. 또한 종족적 민족주의는 민족공동체를 초월적·유기체적 존재로 간주하는 보수주의와 매우 가깝다. 종족적 민족주의가 강화될수록 자유·평등한 시민의 권리에 근간을 두는 근대적 정치이념보다는 전근대적 이념·사조가 강화된다. 반면 종족적 민족주의와 대비되는 시민적 민족주의는 대체로 ‘근대 민족주의에 의해 민족이 발명되었다.’는 관점을 공유하며, 시민으로서 민족구성원의 인격적 동등성이라는 관념이 작동하므로 민족자결과 함께 인민주권, 즉 자유, 평등한 시민의 권리가 강조되며, 사회혁명을 촉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시민적 민족주의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다. 2005년 프랑스의 도시외곽 지역에서 벌어진 소요사태나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미국 남부지역에서 벌어진 사태로 드러나듯이, 공식적으로 인종주의를 부정하는 서구 국가들에서 인종주의는 결코 ‘제거’되지 않았다. 동북아지역의 종족적 민족주의 동북아 지역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19~20세기 서구의 유사과학적 종족, 인종 관념이 도입되면서 이미 등장했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을 비롯해 동북아 공산주의 운동의 성과와 일본의 패전을 통해 종족적 민족주의가 다소 억제된 상태였으나, 최근 상호 경쟁적으로 다시 확산되고 있다. 중국은 모택동 당시의 ‘중국인민’이라는 구호를 장개석의 ‘중화민족’이라는 반동적 구호로 대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나아가 ‘중화민족’의 인종적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도 활발해지고 있다.1) 이는 기존의 과학적 입장을 뒤집는 주장으로도 나타났다. 즉 호모 에렉투스에서 호모 사피엔스로의 진화가 전 세계적으로 각기 다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했고, 오늘날 중국인은 수 만년에 걸쳐 독자적으로 진화했으므로 ‘흑인’이나 ‘백인’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 인류가 동일한 최초의 호모 사피엔스에서 파생한 것이라는 일반적 견해와 대별된다. 또한 대중서적에서는 400만년 가까이 대중화지역에서 살아온 ‘중화인종’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으며, 중국 운남성이 세계 인류 발흥지의 하나이며, 중국이 현대 황인종의 기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군사력 보유 금지'와 '교전권 부인'을 규정한 일본 헌법 9조의 개정을 추진하며, 국기·국가의 법제화,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교과서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은 곧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의 상징이다.2) 한편 남한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1945년 이후로 종족적 민족주의, 이른바 ‘단군민족주의’(단군숭배)가 법으로 보장되고,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대중의 내면을 강력히 장악하고 있다. 1945년 직후 남한은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하고 ‘단기’ 연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하며, 고대노예제 국가 고조선의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법제화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걸었고, 1993년 돌연 평양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동북아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예외를 발견하기란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 남한의 ‘단군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한 어머니의 소생을 뜻하는 ‘동포’(同胞), 같은 핏줄의 사람을 뜻하는 ‘겨레’(族)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혈연의식과 민족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철저히 근대 이후의 일이다. ‘2천만 동포’, ‘삼천리 강토’, ‘4천년 역사’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1907~8년 이후부터이며, 조선혼, 조선마음이란 말은 1910년대에 등장하여 1930년대에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배달겨레라는 말도 1920년대에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근대사회에서 인격적으로 동등한 개인들의 관계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혈연공동체라는 민족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시대 일종의 국가공인 교과서인 『동몽선습』은 역사의 첫머리를 단군의 건국으로 시작하지만, 국가 지배자들의 국가계승 의식을 민족주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본격적으로 ‘단군 민족주의’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19세기 말 평안도나 백두산 지역에서 민간신앙 수준을 넘고자 하는 본격적인 단군 신앙운동이 나타났고, 1905년 을사조약 이후 항일의병활동에서 단군 찬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말 애국 계몽운동기에 단군 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사조가 사상계에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하여 종교에서는 1909년 대종교의 창건으로, 역사학에서는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으로 투사되었다. 특히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은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를 이론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신채호는 대한제국 수립 이후 학부에서 주관한 학부 교과서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본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던 이 교과서는 ‘조선’ 계승 의식보다 ‘한(韓)’ 계승 의식을 강조했고, 기자문화(기자조선→마한)에 모든 개화정책을 결부시켰다. 이는 17세기 후반부의 ‘마한정통론’을 부활시키는 것이고, 대일본주의에 바탕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신채호는 ‘부여’ 계승의식을 제기하였다. 신채호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은 우리 역사에서 부여족이 주족(主族)이고 외래족인 중국족, 선비족, 말갈족과 토착족인 한족, 예맥족이 그들에게 동화된 객족(客族)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단군조선이 부여→고구려로 이어진다고 해석했다. 기자조선 정통주의는 ‘사대모화’, ‘중화주의’이며, ‘한’ 계승의식은 임나일본부설의 수용으로 연결되면서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고 결국 ‘일본숭배의 노예근성’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훗날 신채호가 북경에서 조직한 무정부주의 테러단체의 이름은 ‘다물단’이었다. 신채호 이후 종족적 민족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 발전되었다. 대종교의 최고 이론가이자 2대 교주인 김교현이 1914년에 서술한 『신단실기』는 우리 민족이 배달종족에서 출발했으며, 그 계통은 조선족, 북부여족, 예맥족, 옥저족, 숙신족이라고 서술했다. 민족의 주류가 조선족→한족→신라족으로 형성되었고, 중국족인 기자와 그 후예 마한은 반배달족으로 조선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의 조선족과 북의 부여족이 모두 주족이라고 보았고, 신채호가 외래족이라고 간주했던 선비, 거란, 여진, 만주족을 모두 고구려, 백제와 함께 배달족의 한 계통인 북부여족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신채호의 부여족 계승의식을 범동이족 계승의식으로 확대하면서, 한 계승의식도 종합함으로써, 민족의 구성을 대폭 확대한 ‘대단군주의’를 주창한 것이었다. 김교현의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조선인이 서술한 한국사 서적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조선총독부의 식민교육은 한국사의 출발이 단군조선이 아니라 중국의 식민지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고, 한국문화의 독자적 발전을 부인했다. 즉 단군(조선)이 실존하지 않고, 단군 전설은 고려 중기에 조작된 것이며, 그나마 조선남부의 한(韓) 종족과는 관계가 없고 순전히 조선 북부와만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의 시도에 대응해, 일제하 민족교육에서 국가교육을 중시하고 단군의 건국신화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예를 들어 『신단실기』는 만주에서 군사교육을 실시하던 사관학교의 국사교재로도 애용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대동이주의의 정통이 신교(神敎) 또는 한(韓) 종족을 바탕으로 일본으로 갔다는 주장을 매개로 대동이주의는 대일본주의, 곧 대동아공영론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최남선은 일본의 단군말살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대단군주의/대동이주의를 대일본주의로 변형시켰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동이문화권을 더 확대시켜 발칸·반도, 카스피해, 일본, 유구를 포함시켰고, 한일문화 동원론(凍原論)을 승인했다. 대일본주의로 변형된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유포되었고, 현재 위서로 판명난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규원사화』는 일본, 조선, 만주족 연합을 통한 중국제패를 주장했고, 『환단고기』는 단군조선과 일본 건국신화와 일본 신도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단기고사』는 고대 단군민족과 중국민족의 전쟁 체험을 강조하면서 불함문화권을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종족과 일본문화를 포괄하는 대동아시아문화우월주의를 내세웠다. 이처럼 종족적 민족주의를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던 시도는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포섭되었다. 결국 고대사를 당대의 정치적 맥락에 따라 조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낳은 역설인 셈이다. 한편, 1945년 이후 남한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국가적 제도 속에서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내에서 정치적 기반이 취약하고, 정치이념이 모호했던 한국의 민족주의 경향은 단군주의를 정치적 상징, 구심으로 내세운 것이다.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되고, 단기(檀紀) 연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정인보가 작사한 개천절의 노래가 교과서에 실려 불려졌다. 1절은 이렇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3절은 “오래다 멀다 해도 줄기는 하나”로 시작한다. 또한 ‘홍익인간’은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이었던 조소앙의 삼균주의나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를 매개로 국가의 교육이념으로 법제화되었다(1949년 법률 제86호로 제정된 교육법 1조 1항). 그러나 고대사회의 이념을 현대의 정치이념·교육이념으로 계승한다는 것은 종족적 민족주의가 작동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고조선 사회는 이미 계급이 분화된 고대 노예제 사회일 가능성이 높다. 고조선보다 약간 후대인 부여에는 귀족이 죽으면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여서 무덤에 함께 묻는 순장이 유행했다. 고조선도 분명한 증거는 없으나 노예를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에도 단군주의는 “단일민족”, “혈연공동체”라는 신화를 뒷받침하며, “대통일국가를 건설했던 위대하며 선택받은 민족”이란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며, 특히 “대륙에 대한 영토의식”을 자극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민족주의의 대전환과 단군릉 사건 1957년 북한에서 발표된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새로운 단계'는 민족주의가 “인민들간의 친선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자체의 민족적 이익과 계급적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밝혔다. 1973년 발행된 정치사전에서도 민족주의는 “계급적 이익을 전 민족적 이익으로 가장하고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면서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증오하며 민족들 사이의 불화와 적대를 일삼는 부르죠아 사상”이며 “민족주의는 언제나 부르죠아적 성격을 띤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1986년 북한의 후계자 김정일이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180도 전환하게 되었다. 조선민족 제일주의는 “조선민족의 위대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 조선민족의 위대성을 더욱 빛내어 나가려는 높은 자각과 의지로 발현되는 숭고한 사상·감정”으로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조선민족이 제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수령을 모시고 위대한 당의 영도를 받으며 위대한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 제도에서 사는 긍지와 자부심”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 민족의 위대성은 우리 수령, 우리 당의 위대성”인 것이다. 한편, 북한의 민족 개념에 대한 정의도 변화하였다. 1950~60년대까지 북한의 민족 개념은 스탈린의 정식화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언어, 영토, 경제생활, 심리적 상태(문화의 공통성)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오랜 역사를 거쳐서 형성된 사람들의 공고한 집단”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민족의 구성요소에 ‘혈통’이 포함되었고, 1980년대 이르러서는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삭제하고 혈연의 공통성을 크게 강조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민족적 혈통이 “혈연성에 기초하여 맺어진 공동체인 씨족, 종족의 인종적 특징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차원에서 동질적, 이질적 주민집단이 동화, 융합되는 인간 세대교체를 통해 이루어진 징표”라고 설명했다.3) 그러나 민족의 지표로서 핏줄과 언어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핏줄과 언어는 사실상 불변의 본질로 간주되고, 민족의 형성 시기는 상고시기로 소급되었다. 이는 근대에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스탈린의 이론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아가 원시시대부터 ‘조선옛유형사람’의 존재를 상정하여, 민족을 생물학적 인종 개념으로 전환시켰다. 이러한 와중에 1993년 북한은 난데없이 평양시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고구려의 무덤양식과 금동관 조각 때문에 고구려 당시의 고분이라고 생각했으나, 출토된 인골을 측정하니 5011(±267)년 전에 죽은 사람의 뼈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때 개장한 단군묘라고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녕성이라는 그 이전 30년간의 주장을 일거에 뒤집는 것이었고 북한 역사학계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4) 남한에서는 위서로 간주하는 『단기고사』, 『태백일사』, 『규원사화』가 사료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북한은 단군릉을 근거로 단군이 실재했고, 고조선은 5천 년 전에 건국되었고, 평양에서 이미 5천년 이전에 청동기 문명을 꽃피웠으니, “평양은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인류의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주장의 객관적 근거가 극히 미약하기 때문에, 남한의 대북 인식 상의 냉소주의가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민족주의는 김일성 유일사상(주체사상)의 강화에 따라 수령론/대가족론이 득세하고, 정치공동체의 초월적, 유기체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으며 (앞서 언급한 보수적·반동적 민족주의), 이는 자연스럽게 자유·평등한 시민적 권리를 강조하는 정치이념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초월적, 유기체적 공동체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언어와 핏줄로 맺어진 공통성을 부각시키고, 이는 인종주의적 민족관으로 퇴행하는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진1%]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 단군민족주의,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신화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선택으로 합리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반제 저항운동이 종족적 민족주의에 의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은 종족적 민족주의와 관련이 없으며, 중국의 공산주의운동은 ‘중화민족’을 주창한 장개석 세력을 격렬히 비판했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객관적 조건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반동성이 강화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한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종족적 민족주의의 위험을 강력히 비판해야 한다. 첫째, 중국의 역사 해석에 대응해 한국 역시 역(逆)동북공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사나 중세사는 결코 특정 민족사의 기원으로 해석될 수 없다. 동북아지역 고대사를 현존 국가의 민족사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허구적인 ‘종족적 민족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한국에서 최근 대중문화를 통해 고대사를 민족사로 흡수하려는 시도는 동북아의 종족적 민족주의의 부활을 부추긴다. 따라서 최근 민주노총이 ‘주몽’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어떤 이유든 간에 대중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정서에 편승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또한 영유권 분쟁을 고대사로 환원하려는 시도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를 강화하며, 자연·자원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소유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강화할 따름이다. 둘째,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는 세계화 시대에 이주노동자의 권리가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되고 있는 국면에서 반동적 기능을 한다. 민족이 과거 지향적(사실은 허구적) 종족적 동일성이 아니라 현실에 실존하는 ‘정치공동체’를 의미한다면 마땅히 이주노동자가 정치공동체의 시민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노동자운동의 미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셋째, 동북아시아 각 국가에서 종족적 민족주의가 확산되는 것은 지역적 차원의 안보위험성이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상당부분 미국, 일본과의 잠재적 갈등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상호작용 속에서 일본만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한 위선이다. 남북한, 중국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일본만은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일본이 패전국이니까.’라고 강요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각 국이 일본 평화헌법이 지향하는 바를 동일하게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 특히 미국이 동북아지역에서 군사동맹, 군사기지를 통해 행사하는 군사적 압력과 철저하게 단절해야 한다. 현재 유럽은 '새유럽의 역사'와 같은 공동교과서를 통해 반동적 민족사 교육을 극복하려는 시도하고 있다(공동교과서에서 고대사와 중세사가 다뤄지는 비중은 현저히 낮다). 최근 동북아시아에서도 이와 같은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탈민족화'를 주장하는 주류 세력은 보수세력이다. <조선일보>가 영어공용화를 주창하고, '일본에 의해 근대화가 이뤄졌고, 식민지 시기에 한국의 경제발전의 토대가 구축되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가 편협한 국사/세계사 교과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세계화를 주도하는 지배 엘리트가 훨씬 더 민족적 특수주의를 지양할 태세를 갖추고 있고, 오히려 피지배 대중이 민족주의나 인종주의에 훨씬 더 유혹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라는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종족적 민족주의의 파괴적 효과는 결국 민중이 짊어져야 한다. 민중운동은 민족에 대한 종족적·인종적 관점을 철저히 비판, 지양해야 하며, 현존하는 정치공동체에서 자유·평등한 시민적 권리라는 관점을 견지하여 세계화에 대항하는 운동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 또한 동아시아 민족주의의 반동적 부활을 비판하기 위해서, 1980년대 민족·민족주의를 둘러싼 민중운동 내의 논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새로운 지평 위에서 재개되어야 한다. 1)장개석이 저술했다고 발표된 『중국의 운명』은 아주 오래전 동일한 선조로부터 다양하게 분화된 종족들로 이루어진 ‘중화민족’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레닌의 국제주의의 특징인 (반제국주의를 의미하는) ‘민족자결주의’와 (영토분리주의를 극복하는) ‘연방주의’를 수용했다. 1931년 중화소비에트전국대표대회에서 작성된 헌법대강에서는 “몽골족, 회족, 장족, 묘족, 려족, 고려인 등 중국 전역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은 중국소비에트연방에 가입하든 이탈하든, 자치구역을 건립하든 완전한 자결권을 지닌다.”고 선언했다.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의 『중국의 운명』을 격렬하게 비판하고, 1980년대까지도 종족, 인종은 금기어였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 대장정 이후 몽골, 회족 등에 대한 분리 제안을 중단하고, 다민족중국이라는 관념을 수용하기 시작했다.본문으로 2)일본의 민족주의는 유럽세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했고, 그것을 민감하게 의식한 것은 구(舊)국가의 특권적인 지배계급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민족주의는 지배계급의 특권적 신분을 유지, 강화하려는 욕구와 강하게 결합했다. 따라서 명치유신 초기에 등장했던 자유민권운동은 강력한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국민의 종가(宗家)로서의 황실, 충군애국(忠君愛國)이라는 관념이 강요되었다. 일본의 팽창주의가 확대되면서 정치, 문화적 동화와 배제, 인종적 정의가 동시에 등장했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전에 아이누(북해도)와 류큐(오키나와) 주민을 야만인이라고 보고 중심으로부터 가능한 한 분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명치유신 이후로 북해도와 오키나와를 팽창주의의 거점으로 삼으려 하면서, 그들에 대한 일본화를 시도했다. 그 결과 아이누인과 류큐인은 명치유신을 주도한 과두세력과 동일한 일본 인종의 원시적, 고대적 유형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그들에 대한 일본화(동화) 과정은 배제과정과 맞물렸고, 이들에 대한 동화·지배전략은 대만과 조선에 대한 동화·지배전략의 원형이 되었다.본문으로 3)물론 이러한 변화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과의 논리적 정합성 문제가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의 이론대로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강조하면, 북한과 남한은 서로 다른 경제생활,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인해 서로 다른 민족이 되기 때문이며,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에 동독은 스탈린의 명제를 적용하여 ‘2민족, 2국가, 2체제’, 즉 동서독이 서로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할 때 ‘혈통의 공통성’이 가장 강조된다. (고연제안은 1민족, 1국가, 2체제를 주장했다.)본문으로 4)따라서 북한의 단군릉 발표는 북한 역사학계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정치지도자의 의지에 따른 결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미 1967년 북한에서 ‘당의 유일사상 체계를 세우자.’는 5·15 교시가 발표된 후, 김일성 수령 개인에 대한 우상화와 절대화가 이뤄졌다. 이에 따라 역사학계의 활력은 크게 저하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령은 역사학계에서 역사연구의 최종 판단자가 되었다.본문으로
한미 FTA 협상 타결이 발표된 직후, 가까운 한 활동가는 울먹이면서 얼마나 투쟁을 열심히 했는데, 이럴 수가 있냐며 울분을 터트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 한미 FTA추가협상이 최종 타결된 6월 29일 오후, 서울 곳곳에서는 한미 FTA체결저지를 위한 대규모 집회가 있었고, 범국민총궐기대회를 주관한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의 오종렬 정광훈 공동대표는 불법집회 감행과 ‘시내 교통을 마비!’시켰다는 이유로 7월 4일 구속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여의도 빌딩에 걸려있는 “한미 FTA 타결 환영”, “자본시장통합법 재정 환영”이란 커다란 플랜카드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제 한미 FTA 반대투쟁의 열기는 그 플랜카드를 넘어서지 못할 만큼 주춤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한미 FTA 반대 투쟁이 1년 이상 계속되는 중에도 EU와의 FTA가 추진 중이었고 이제 중국, 일본 심지어 남미의 메르꼬수르와의 FTA가 잘 짜여진 각본처럼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약간은 패배적인 그리고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들에 막연히 낙관적인 패를 던지면서 오늘도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다 문뜩 책장에 진열해 논 반세계화 투쟁을 담은 세계 각국의 비디오 테이프들을 보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 얘기하려고 한 것들이 떠올랐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 영상들의 이미지가 눈앞으로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다시 본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들이 바로 미래를 얘기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되새겨 본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운동』 5월호의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변화와 현실」과 「신자유주의 지속 불가능한 성장 :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경험」은 약간은 주춤하고 있는 한미 FTA 투쟁을 돌아보게 하고 장밋빛으로 그려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선을 다시 상기하게 한다. 정지영,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변화와 현실」, 『사회운동』 2007년 6월호 한국사회에서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이 대중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돌아본 사례가 바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겪은 멕시코의 과거와 현실이다. 마낄라도라의 현재로 대표되는 나프타의 효과는 멕시코 민중의 삶을 분명 과거와 다른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민중들의 삶이 파괴되는 현장을 경제적 수치가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그리고 생생한 증언들을 통해서 이미 확인한 바가 있다. 그러나 한미 FTA가 본격화 되면서 이런 멕시코의 현실은 누군가에 의해 왜곡되고 있었다. 한미 FTA 체결을 위해 정부에서 제작한 화려한 영상광고와 출판물들은 멕시코의 현실을 우리와는 다른, 정말 ‘남의 나라’ 얘기로 치부하였고 각종 연구소들은 자유무역협정의 긍정적 효과에 대한 보고서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 또는 한국 경쟁력 강화와 선진화라는 기조를 가장 충실히 지지해온 연구소라고 한다면 단연 <삼성경제연구소>를 꼽을 수 있다. 정지영이 글 서두에서 언급한 <삼성경제연구소>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회원국 경제에 미친 영향과 시사점」이란 보고서는 이런 왜곡에 쐐기를 박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보고서는 “객관적 실증 분석을 시도”하면서 “멕시코 경제난의 원인을 나프타가 아니라 오랜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며 내부개혁의 부진으로 개방 효과를 최대화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지적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지영은 “보고서의 실증 분석 결과나 구체적인 수치가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다.”고 하면서도 이 보고서에 대한 평가를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문제다.”고 꼬집어 얘기하고 있다. 즉 “나프타가 멕시코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나프타가 멕시코의 신자유주의적 전환 과정에서 가진 의미는 무엇이었고 이 과정에서 약속된 미래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실현되었는지 또는 실현될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결론을 맺어야 할 문제다.”라는 것이다. 정지영의 글은 멕시코가 나프타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한 국가의 선택이 아니며 나프타 이후 멕시코 경제난은 일국 차원의 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의 위기를 (반)주변주, 제3 세계 국가들로 이전하는 과정”에 멕시코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나프타는 세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과정에서 “이를 심화하고 안착시키는 데 중요한 매개이자 그 절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서 “나프타 이후 멕시코는 번영했는가?”라는 소제목의 글에서는 수출과 경제성장, 외국인직접투자, 고용과 실업, 농업 분야 걸친 평가와 현실을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다. 꼭 먹어봐야 쓴 줄 아나? 중요한 것은 멕시코의 과거와 현재가 수치로 어떻게 변했다는 것이 아니다. 자유무역협정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졌느냐가 핵심이다. 우리가 멕시코 사례를 받아들이면서 마치 한국이 우주의 안드로메다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객관적’인 수치라고 윽박지르면서 너네 분석이 잘못되었다고 홀리는 건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꼭 먹어봐야 쓴 줄 아냐는 말처럼 꼭 한미 FTA를 해봐야 그 결과를 알겠냐는 말이다. 1998년에 제작된 <티셔츠 속에 감춰진 착취>1) 라는 다큐멘터리는 나프타가 발효된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멕시코 민중의 현재를 자세히 그리고 있다. 미국 UCLA에 갓 입학한 여학생 알렌 벤야민은 학교 주변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티셔츠의 원산지가 미국이 아닌 것을 보고 누가 그 티셔츠를 만들고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멕시코의 티셔츠 공장을 찾아가서 자유무역지대의 미국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착취 실태를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99년에 제작된 <은폐>2) 라는 작품은 중미 자유무역지대 노동자들의 고통과 투쟁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 작품들은 그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을 경제 수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 나프타 실행 이후, 풍요와는 거리가 먼 멕시코 민중의 모습 앞에서 ‘경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와 지속 불가능한 성장: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경험」(『사회운동』 2007년 6월호)의 아르헨티나 동포 김선희 씨의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모범생 아르헨티나의 현실도 멕시코와 다르지 않다. 김선희 씨는 “경제 위기가 치안의 악화나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지는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위기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2001년에 제작된 <아르헨티나, 혁명은 시작되다>3)와 2005년에 제작된 <그들 역시 투쟁한다>4)에서는 경제위기에 따른 민중 생활의 붕괴와 그에 대항하는 투쟁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한미 FTA 홍보 광고로 ‘설득력 없는 주장’을 보여주기보다는 이들 다큐멘터리 작품에서 그려진 민중의 삶이 더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대안 세계화의 상 찾기 입 아프게 아니 손 아프게 자유무역협정의 비극적 효과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잔인함을 계속 얘기해야 하는 이 상황을 한번 돌아보자. 한미 FTA를 두고 국민에게 정부는 한번 해보자고 계속 지르고 언론은 이런 상황을 부추기면서, 삼성경제연구소를 위시한 각종 연구소는 그 뒤에서 끊임없이 근거를 만들어주고 있다. 한편 한미 FTA 반대 투쟁을 경과하면서 이렇게 배포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환상을 깨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왔다. <사회운동>의 [대안세계화를 향하여]라는 꼭지는 이런 노력의 하나였고, 이를 넘어서 대안 세계화의 상을 찾고자 모색하는 공간이다. [대안세계화를 향하여]에서는 세계에서 전개되는 사회운동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투쟁, 그리고 대안 세계를 위한 회의들을 조망해오고 있다. 한미 FTA협상이 타결된 지금,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면서 대안세계화를 전망하는 것을 넘어서 구체적인 그 상을 찾아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티셔츠 속에 감춰진 착취 Sweating for a T-Shirt> 27분, 미국, 98년 글로벌 익스체인지 제작, 서울국제노동영화제 2회 상영작본문으로 2)<은폐 Something to Hide> 26분, 미국, 99년 캐서린 도너 감독, 서울국제노동영화제 4회 상영작본문으로 3)<아르헨티나, 혁명은 시작되다 1부, 2부> 123분, 미국/아르헨티나/영국, 2001~2002년 빅노이즈필름, 노동자의 눈, 의식적 시네마, 서울국제노동영화제 6회 상영작본문으로 4)<그들 역시 투쟁한다> 30분, 아르헨티나, 2005년 노동자의 눈 제작, 서울국제노동영화 9회 상영작본문으로
한미 FTA 협상 타결이 발표된 직후, 가까운 한 활동가는 울먹이면서 얼마나 투쟁을 열심히 했는데, 이럴 수가 있냐며 울분을 터트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어 한미 FTA추가협상이 최종 타결된 6월 29일 오후, 서울 곳곳에서는 한미 FTA체결저지를 위한 대규모 집회가 있었고, 범국민총궐기대회를 주관한 <한미FTA저지범국민운동본부>의 오종렬 정광훈 공동대표는 불법집회 감행과 ‘시내 교통을 마비!’시켰다는 이유로 7월 4일 구속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여의도 빌딩에 걸려있는 “한미 FTA 타결 환영”, “자본시장통합법 재정 환영”이란 커다란 플랜카드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이제 한미 FTA 반대투쟁의 열기는 그 플랜카드를 넘어서지 못할 만큼 주춤하고 있는 듯하다. 사실 한미 FTA 반대 투쟁이 1년 이상 계속되는 중에도 EU와의 FTA가 추진 중이었고 이제 중국, 일본 심지어 남미의 메르꼬수르와의 FTA가 잘 짜여진 각본처럼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약간은 패배적인 그리고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들에 막연히 낙관적인 패를 던지면서 오늘도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다 문뜩 책장에 진열해 논 반세계화 투쟁을 담은 세계 각국의 비디오 테이프들을 보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 얘기하려고 한 것들이 떠올랐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그 영상들의 이미지가 눈앞으로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를 다시 본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들이 바로 미래를 얘기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되새겨 본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운동』 5월호의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변화와 현실」과 「신자유주의 지속 불가능한 성장 :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경험」은 약간은 주춤하고 있는 한미 FTA 투쟁을 돌아보게 하고 장밋빛으로 그려진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위선을 다시 상기하게 한다. 정지영,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변화와 현실」, 『사회운동』 2007년 6월호 한국사회에서 자유무역협정이라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이 대중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돌아본 사례가 바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겪은 멕시코의 과거와 현실이다. 마낄라도라의 현재로 대표되는 나프타의 효과는 멕시코 민중의 삶을 분명 과거와 다른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민중들의 삶이 파괴되는 현장을 경제적 수치가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그리고 생생한 증언들을 통해서 이미 확인한 바가 있다. 그러나 한미 FTA가 본격화 되면서 이런 멕시코의 현실은 누군가에 의해 왜곡되고 있었다. 한미 FTA 체결을 위해 정부에서 제작한 화려한 영상광고와 출판물들은 멕시코의 현실을 우리와는 다른, 정말 ‘남의 나라’ 얘기로 치부하였고 각종 연구소들은 자유무역협정의 긍정적 효과에 대한 보고서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 또는 한국 경쟁력 강화와 선진화라는 기조를 가장 충실히 지지해온 연구소라고 한다면 단연 <삼성경제연구소>를 꼽을 수 있다. 정지영이 글 서두에서 언급한 <삼성경제연구소>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회원국 경제에 미친 영향과 시사점」이란 보고서는 이런 왜곡에 쐐기를 박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보고서는 “객관적 실증 분석을 시도”하면서 “멕시코 경제난의 원인을 나프타가 아니라 오랜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며 내부개혁의 부진으로 개방 효과를 최대화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지적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지영은 “보고서의 실증 분석 결과나 구체적인 수치가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다.”고 하면서도 이 보고서에 대한 평가를 한마디로 정리하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문제다.”고 꼬집어 얘기하고 있다. 즉 “나프타가 멕시코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나프타가 멕시코의 신자유주의적 전환 과정에서 가진 의미는 무엇이었고 이 과정에서 약속된 미래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실현되었는지 또는 실현될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결론을 맺어야 할 문제다.”라는 것이다. 정지영의 글은 멕시코가 나프타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한 국가의 선택이 아니며 나프타 이후 멕시코 경제난은 일국 차원의 위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중심부 국가의 위기를 (반)주변주, 제3 세계 국가들로 이전하는 과정”에 멕시코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나프타는 세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과정에서 “이를 심화하고 안착시키는 데 중요한 매개이자 그 절정”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서 “나프타 이후 멕시코는 번영했는가?”라는 소제목의 글에서는 수출과 경제성장, 외국인직접투자, 고용과 실업, 농업 분야 걸친 평가와 현실을 조목조목 제시하고 있다. 꼭 먹어봐야 쓴 줄 아나? 중요한 것은 멕시코의 과거와 현재가 수치로 어떻게 변했다는 것이 아니다. 자유무역협정이라는 과정을 겪으면서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졌느냐가 핵심이다. 우리가 멕시코 사례를 받아들이면서 마치 한국이 우주의 안드로메다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객관적’인 수치라고 윽박지르면서 너네 분석이 잘못되었다고 홀리는 건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꼭 먹어봐야 쓴 줄 아냐는 말처럼 꼭 한미 FTA를 해봐야 그 결과를 알겠냐는 말이다. 1998년에 제작된 <티셔츠 속에 감춰진 착취>1) 라는 다큐멘터리는 나프타가 발효된 3년이 지난 시점에서 멕시코 민중의 현재를 자세히 그리고 있다. 미국 UCLA에 갓 입학한 여학생 알렌 벤야민은 학교 주변 기념품 가게에서 파는 티셔츠의 원산지가 미국이 아닌 것을 보고 누가 그 티셔츠를 만들고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멕시코의 티셔츠 공장을 찾아가서 자유무역지대의 미국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착취 실태를 다양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또한 1999년에 제작된 <은폐>2) 라는 작품은 중미 자유무역지대 노동자들의 고통과 투쟁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다큐멘터리 작품들은 그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삶을 경제 수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보여주고 있다. 나프타 실행 이후, 풍요와는 거리가 먼 멕시코 민중의 모습 앞에서 ‘경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와 지속 불가능한 성장: 아르헨티나의 역사적 경험」(『사회운동』 2007년 6월호)의 아르헨티나 동포 김선희 씨의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 개혁의 모범생 아르헨티나의 현실도 멕시코와 다르지 않다. 김선희 씨는 “경제 위기가 치안의 악화나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지는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위기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2001년에 제작된 <아르헨티나, 혁명은 시작되다>3)와 2005년에 제작된 <그들 역시 투쟁한다>4)에서는 경제위기에 따른 민중 생활의 붕괴와 그에 대항하는 투쟁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한미 FTA 홍보 광고로 ‘설득력 없는 주장’을 보여주기보다는 이들 다큐멘터리 작품에서 그려진 민중의 삶이 더 확실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대안 세계화의 상 찾기 입 아프게 아니 손 아프게 자유무역협정의 비극적 효과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잔인함을 계속 얘기해야 하는 이 상황을 한번 돌아보자. 한미 FTA를 두고 국민에게 정부는 한번 해보자고 계속 지르고 언론은 이런 상황을 부추기면서, 삼성경제연구소를 위시한 각종 연구소는 그 뒤에서 끊임없이 근거를 만들어주고 있다. 한편 한미 FTA 반대 투쟁을 경과하면서 이렇게 배포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환상을 깨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왔다. <사회운동>의 [대안세계화를 향하여]라는 꼭지는 이런 노력의 하나였고, 이를 넘어서 대안 세계화의 상을 찾고자 모색하는 공간이다. [대안세계화를 향하여]에서는 세계에서 전개되는 사회운동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투쟁, 그리고 대안 세계를 위한 회의들을 조망해오고 있다. 한미 FTA협상이 타결된 지금,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면서 대안세계화를 전망하는 것을 넘어서 구체적인 그 상을 찾아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티셔츠 속에 감춰진 착취 Sweating for a T-Shirt> 27분, 미국, 98년 글로벌 익스체인지 제작, 서울국제노동영화제 2회 상영작본문으로 2)<은폐 Something to Hide> 26분, 미국, 99년 캐서린 도너 감독, 서울국제노동영화제 4회 상영작본문으로 3)<아르헨티나, 혁명은 시작되다 1부, 2부> 123분, 미국/아르헨티나/영국, 2001~2002년 빅노이즈필름, 노동자의 눈, 의식적 시네마, 서울국제노동영화제 6회 상영작본문으로 4)<그들 역시 투쟁한다> 30분, 아르헨티나, 2005년 노동자의 눈 제작, 서울국제노동영화 9회 상영작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