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금속노조 파업에 대한 거짓 선전과 탄압을 중단하고
한미FTA 체결을 즉각 중단하라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한미FTA 저지 총파업에 대한 정부와 재계의 비난과 탄압이 거세다. 이들은 이번 파업이 국민도 조합원도 지지하지 않는 불법 정치파업이라고 비난하며 노동자와 시민을, 노동조합과 조합원을 분열시키는데 총력을 다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속노조가 흔들리지 않고 파업의 의지를 꺾지 않자 정부는 "과거에는 공권력 투입을 가급적 자제했지만 이번 총파업과 관련해서는 파업 초기부터 단호하게 대처하겠다"(이상수 노동부 장관)며 대규모 물리력을 투입해서라도 파업을 기필코 막겠다고 나서고 있다. 1년 전에는 포항에서 하중근 건설노동자를, 2년 전에는 전용철, 홍덕표 농민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 공권력이 자제한 수준이란다. 이보다 강력한 공권력 투입이 또 어떠한 결과를 불러 올 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정부와 재계는 이번 파업이 파업 절차도 지키지 않았을 뿐더러 노동조건의 개선과 무관한 정치적 파업이므로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조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FTA와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어떠한 파업도 '불법'으로 매도하고 탄압해 온 정부에게 이번 파업을 절차 운운하며 불법으로, 비민주적 결정으로 매도할 자격은 없다. 아니 절반 이상의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토론이나 의사수렴 없이 협상을 하고 체결을 향해 무조건 돌진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야 말로 반민주이고 불법이다.
정부와 재계는 한미FTA로 한국경제와 국민 전체에게 어마어마한 이득이 돌아오고 특히 최대 수혜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완성차 부문에서 파업을 추진하는 것은 명분도 실리도 없는 '밥그릇 깨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미FTA로 이득을 보는 것은 자동차산업 자본일 수는 있지만 노동자는 아니다. 한미FTA로 한국 자동차의 수출이 큰 폭으로 증가할지도 의문이지만 한국의 자동차 수출 증가가 노동자들의 몫의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은 매우 적다.
현대자동차가 북미 지역에 수출하는 자동차 중 현지 생산 비율은 이미 절반을 넘었고 더 증가할 전망이다. 현대는 2010년 해외공장 생산 규모를 현행 25%에서 50%인 310만대까지 확장하고 국내 공장은 내수를 해외 공장은 현지 판매를 전문화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미FTA는 국내 자동차 자본의 미국 진출에 더욱 좋은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결국 대미 수출의 증가로 인한 한국 현지에서의 자동차 생산의 증가분은 매우 적은 수준일 것이다. 당연히 추가적인 투자, 새로운 고용의 창출분도 매우 적다. 더구나 대미 수입의 증가로 인한 내수시장 중심의 국내 공장의 생산량 감소를 고려하면 전체적으로 국내 공장의 물량의 감소와 이에 따른 구조조정이나 인력 감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더 크다.
한미FTA의 체결로 자본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 진다. '이행의무부과 금지조항' 하나만으로도 고용승계 의무, 내국인 일정 비율 고용 의무, 기술이전, 현지생산품 사용 의무 등의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이처럼 결코 자동차 산업의 노동자들은 한미FTA의 수혜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한미FTA로 인한 국내외 자동차산업 자본의 세계적 이동의 자유의 확대와 소유권의 안전한 보장은 모든 자동차산업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하락시키고 권리를 파괴할 뿐이다. 이미 세계적으로 과잉투자 된 자동차산업의 기업들은 생존을 위해 생산기지를 세계화하여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고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강화하고 고용 불안을 자극하여 노동조건을 악화시켜 왔다. 한미FTA와 같은 자유무역협정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강화한다.
이것이 바로 한미FTA의 본질이다. FTA는 일부 자본에게 보다 자유롭게 이윤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에게는 재앙일 뿐이다. 농업 등 일부 산업에서는 피해가 생길지 모르지만 자동차나 섬유 등 경쟁력 있는 산업은 커다란 이득을 보고 이러한 이득이 국민 전체에게 분배된다는 한미FTA 추진의 근거가 금속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그 허구성이 낱낱이 폭로되고 있다. 정부와 재계가 유독 완성차 부문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며 공세를 가하는 것은 이들의 투쟁이 FTA의 본질을 명확히 폭로하기 때문이다.
금속노조의 한미FTA 저지 파업은 노동조건의 개선과 무관한 정치파업, 불법파업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들의 이해가 걸려 있는 사안에 대해 자신들의 의사를 반영하기 위한 국민으로서의 당연한 '정치적' 권리의 행사다. 한미FTA 저지 파업은 일부 노동자의 '밥그릇 지키니'나 혹은 '밥그릇 깨기'가 아니라 민중의 삶과 권리를 지키기 위한 숭고한 투쟁이다.
정부와 재계는 이번 파업에 대한 거짓 선전과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공권력 투입 협박을 중단하라. 나아가 한미FTA가 우리 국민 모두에게 장밋빛 미래를 가져 올 것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낱낱이 폭로되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하라. 지금 당장 한미FTA 체결을 중단하라!
우리는 금속노조, 민주노총과 함께 아니 이 땅의 모든 노동자-시민들과 함께 한미FTA 체결을 저지시키는 그 날까지 끝까지 싸워 갈 것이다.
2007년 6월 25일
광주인권운동센터, 구속노동자후원회, 국제민주연대, 노동자의힘, 노동전선, 노동조합기업경영연구소, 동성애자인권연대, 문화연대, 민주노동자연대,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민중복지연대, 사회진보연대, 이윤보다인간을, 인권운동사랑방,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전국빈민연합,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전국학생행진(건),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남북한의 종족적 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범민련 남측본부가 발행하는 <민족의 진로>에 실린 기사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과 동성애자인권연대가 반박 성명서를 발표했다.(바로가기) 우리 역시 이주노동자를 민족 고유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은 혼혈과 이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유럽의 극우세력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민족의 단일한 기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며, 민족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하는 모든 시도는 철저히 ‘야만적 이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는 인류사에 대한 무지를 넘어서 인류사를 조작, 왜곡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민족의 순수화(정화)’라는 반동적 해결책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와 손쉽게 결합하기 때문이다. [%=사진1%] 동북아시아의 종족적 민족주의 그런데 민족 고유성, 특히 언어적·문화적 단일성과 나아가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는 동북아 지역에서 전반적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종족적 민족주의는 종족의 신화·상징의 공통성에 기초해 ‘민족주의 이전에 민족이 존재했다’는 관점을 지지하며,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인종(주의)적 관점과 친화성이 높다. (이방인에 대한 공포, 경멸, 적대심을 뜻하는 ‘외국인혐오증’을 넘어서 강한 의미의 인종주의는 인류의 역사를 인종의 위계에 따라 구성하고, 우월한 인종의 신성한 임무와 불필요한 인종의 배제·제거를 주장한다). 또한 종족적 민족주의는 민족공동체를 초월적·유기체적 존재로 간주하는 보수주의와 매우 가깝다. 종족적 민족주의가 강화될수록 자유·평등한 시민의 권리에 근간을 두는 근대적 정치이념보다는 전근대적 이념·사조가 강화된다. 반면 종족적 민족주의와 대비되는 시민적 민족주의는 대체로 ‘근대 민족주의에 의해 민족이 발명되었다’는 관점을 공유하며, 시민으로서 민족구성원의 인격적 동등성이라는 관념이 작동하므로 민족자결과 함께 인민주권, 즉 자유·평등한 시민의 권리가 강조되며, 사회혁명을 촉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시민적 민족주의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다. 동북아 지역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19-20세기 서구의 유사과학적 종족/인종 관념이 도입되면서 등장했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을 비롯해 동북아 공산주의 운동의 성과와 일본의 패전을 통해 종족적 민족주의가 다소 억제된 상태였으나, 최근 상호 경쟁적으로 다시 확산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의 ‘중국인민’이라는 구호를 장개석의 ‘중화민족’이라는 구호로 대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대중서적에서는 400만년 가까이 대중화지역에서 살아온 ‘중화인종’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일본은 '군사력 보유 금지'와 '교전권 부인'을 규정한 일본 헌법 9조의 개정을 추진하며, 국기·국가의 법제화,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교과서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은 곧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의 상징이다. 한편 남한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1945년 이후로 종족적 민족주의, 이른바 ‘단군민족주의’(단군숭배)가 법으로 보장되고,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대중의 내면을 강력히 장악하고 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걸었고, 1993년 돌연 평양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동북아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예외를 발견하기란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 남한의 ‘단군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한 어머니의 소생을 뜻하는 ‘동포’(同胞), 같은 핏줄의 사람을 뜻하는 ‘겨레’(族)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혈연의식과 민족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철저히 근대 이후의 일이다. ‘2천만 동포’, ‘삼천리 강토’, ‘4천년 역사’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1907-8년 이후부터이며, 배달겨레라는 말은 1920년대에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근대사회에서 인격적으로 동등한 개인들의 관계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데, 혈연공동체라는 민족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시대 일종의 국가공인 교과서인 <동몽선습>은 역사의 첫머리를 단군의 건국으로 시작하지만, 국가 지배자들의 국가계승 의식을 민족주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본격적으로 ‘단군민족주의’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한말 애국계몽운동기에 단군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사조가 사상계에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하여 종교에서는 1909년 대종교의 창건으로, 역사학에서는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으로 투사되었다. 특히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은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를 이론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신채호는 대한제국 수립 이후 학부에서 주관한 학부 교과서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본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던 이 교과서는 ‘조선’ 계승 의식보다 ‘한(韓)’ 계승 의식이 강조했고, 기자문화(기자조선→마한)에 모든 개화정책을 결부시켰다. 이는 17세기 후반부의 ‘마한정통론’을 부활시키고, 대일본주의에 바탕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긍정하는 이었다. 반면 신채호는 ‘부여’ 계승의식을 제기하였다. 신채호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은 우리 역사에서 부여족이 주족(主族)이고 외래족인 중국족, 선비족, 말갈족과 토착족인 한족, 예맥족이 그들에게 동화된 객족(客族)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단군조선이 부여→고구려로 이어진다고 해석했다. 기자조선 정통주의는 ‘사대모화’, ‘중화주의’이며, ‘한’ 계승의식은 임나일본부설의 수용으로 연결되면서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고 결국 ‘일본숭배의 노예근성’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신채호 이후 종족적 민족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 발전되었다. 대종교의 최고 이론가이자 2대 교주인 김교현이 1914년에 서술한 <신단실기>는 우리 민족이 배달종족에서 출발했으며, 그 계통은 조선족, 북부여족, 예맥족, 옥저족, 숙신족이라고 잡았다. 민족의 주류가 조선족→한족→신라족으로 형성되었고, 중국족인 기자와 그 후예 마한은 반배달족으로 조선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의 조선족과 북의 부여족이 모두 주족이라고 보았고, 신채호가 외래족이라고 간주했던 선비, 거란, 여진, 만주족을 모두 고구려, 백제와 함께 배달족의 한 계통인 북부여족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신채호의 부여족 계승의식을 범동이족 계승의식으로 확대하면서, 한 계승의식도 종합함으로써, 민족의 구성을 대폭 확대한 ‘대단군주의’를 주창한 것이었다. 김교현의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조선인이 서술한 한국사 서적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대동이주의의 정통이 신교(神敎) 또는 한(韓) 종족을 바탕으로 일본으로 갔다는 주장을 매개로 대동이주의는 대일본주의, 곧 대동아공영론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최남선은 일본의 단군말살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대단군주의/대동이주의를 대일본주의로 변형시켰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동이문화권을 더 확대시켜 발칸·반도, 카스피해, 일본, 유구를 포함시켰고, 한일문화동원론를 승인했다. 대일본주의로 변형된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유포되었고, 현재 위서로 판명난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규원사화>는 일본, 조선, 만주족 연합을 통한 중국제패를 주장했고, <환단고기>는 단군조선과 일본 건국신화와 일본 신도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단기고사>는 고대 단군민족과 중국민족의 전쟁 체험을 강조하면서 불함문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종족과 일본문화를 포괄하는 대동아시아문화우월주의를 내세웠다. 이처럼 종족적 민족주의를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하고자 했지만, 이것이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포섭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고대사를 현재의 정치적 맥락에 따라 조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낳은 역설인 셈이다. 1945년 이후 남한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국가적 제도 속에서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내 정치적 기반과 정당성이 취약했던 한국의 민족주의 경향은 단군주의를 정치적 상징, 구심으로 내세운 것이다.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되고, 단기(檀紀) 연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홍익인간’은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이었던 삼균주의(조소앙), 신민족주의(안재홍)를 매개로 국가의 교육이념으로 법제화되었다. 현재에도 단군주의는 “단일민족”, “혈연공동체”라는 신화를 뒷받침하며, “대통일국가를 건설했던 위대하며 선택받은 민족”이란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며, 특히 최근에는 “대륙에 대한 영토의식”을 자극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민족주의의 대전환과 단군릉 사건 [%=사진2%] 1957년 북한에서 발표된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새로운 단계>는 민족주의가 “인민들간의 친선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자체의 민족적 이익과 계급적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밝혔다. 1973년 발행된 정치사전에서도 “민족주의는 언제나 부르죠아적 성격을 띤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1986년 북한의 후계자 김정일이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180도 전환되었다. 조선민족 제일주의는 “조선민족의 위대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조선민족이 제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수령을 모시고 위대한 당의 영도를 받으며 위대한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 제도에서 사는 긍지와 자부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 민족의 위대성은 우리 수령, 우리 당의 위대성”인 것이다. 한편, 북한의 민족 개념에 대한 정의도 변화하였다. 1950-60년대까지 북한의 민족 개념은 스탈린의 정식화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언어, 영토, 경제생활, 심리적 상태의 공통성).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민족의 구성요소에 ‘혈통’이 포함되었고, 1980년대 이르러서는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삭제하고 혈연의 공통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민족의 지표로서 핏줄과 언어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핏줄과 언어는 사실상 불변의 본질로 간주되고, 민족의 형성 시기는 상고시기로 소급되었으며 이는 근대에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스탈린의 이론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과의 논리적 정합성 문제가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의 이론대로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강조하면, 북한과 남한은 서로 다른 경제생활,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인해 서로 다른 민족이 되기 때문이며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이제 통일의 당위성을 말할 때 ‘혈통의 공통성’이 가장 강조될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1993년 북한은 난데없이 평양시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고구려의 무덤양식과 금동관 조각 때문에 고구려 당시의 고분이라고 생각했으나, 출토된 인골을 측정하니 5011(±267)년 전에 죽은 사람의 뼈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때 개장한 단군묘라고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 북한 역사학계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남한에서는 위서로 간주하는 <단기고사>, <태백일사>, <규원사화>가 사료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북한은 “평양이 인류의 발상지로, 민족문화의 중심지로, 조선민족의 성지로 온 세상에 이름 떨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민족주의는 김일성 유일사상이 강화되고 수령론/대가족론이 득세하면서 정치공동체의 초월적, 유기체적 성격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유·평등한 시민적 권리를 강조하는 정치이념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언어와 핏줄로 맺어진 공통성을 부각되면서 인종적 관점의 민족관으로의 퇴행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과 실천 단군 민족주의,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신화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합리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반제국주의 저항운동이 종족적 민족주의에 의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은 종족적 민족주의와 관련이 없으며 지역적 차원의 해방을 모색했다. 특히 현재의 정치적 조건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반동성이 강화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중국의 역사 해석에 대응해 한국 역시 역(逆)동북공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사나 중세사는 결코 특정 민족사의 기원으로 해석될 수 없다. 동북아지역 고대사를 현존 국가의 민족사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허구적인 ‘종족적 민족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따라서 최근 민주노총이 ‘주몽’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어떤 이유든 간에 대중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정서에 편승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또한 영유권 분쟁을 고대사로 환원하려는 시도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를 강화하며, 자연·자원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소유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강화할 따름이다. 둘째,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는 세계화 시대에 이주노동자의 권리가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하는 국면에서 반동적 기능을 한다. 민족이 과거지향적(사실은 허구적) 종족적 동일성이 아니라 현실에 실존하는 ‘정치공동체’를 의미한다면 마땅히 이주노동자가 정치공동체의 시민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노동자운동의 미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셋째, 동북아시아 각 국가에서 종족적 민족주의 확산에는 지역적 차원의 안보위험성이 기능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미국, 일본과의 잠재적 갈등에 상당히 기인한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상호작용 속에서 일본만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한 위선이다. 남북한, 중국이 군사력을 증강하는 가운데 일본만이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단지 ‘일본이 패전국이니까’라고 강요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각 국이 일본 평화헌법이 지향하는 바를 동일하게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 <조선일보>가 영어공용화를 주창하고, ’일본에 의해 근대화가 이뤄졌고, 한국의 경제발전의 토대가 구축되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가 편협한 국사/세계사 교과서를 개혁해야 한다고 나서는 등 세계화를 주도하는 지배 엘리트가 훨씬 더 민족적 특수주의를 지양할 태세인데 반해 피지배 대중이 ’민족주의‘, ’인종주의‘에 훨씬 더 유혹을 느끼는 것은 역설적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의 파괴적 효과는 결국 민중이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와 근본적으로 대결하고 시민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사회운동의 진지한 모색과 대응이 시급하다.
남북한의 종족적 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범민련 남측본부가 발행하는 <민족의 진로>에 실린 기사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과 동성애자인권연대가 반박 성명서를 발표했다.(바로가기) 우리 역시 이주노동자를 민족 고유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은 혼혈과 이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유럽의 극우세력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민족의 단일한 기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며, 민족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하는 모든 시도는 철저히 ‘야만적 이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는 인류사에 대한 무지를 넘어서 인류사를 조작, 왜곡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민족의 순수화(정화)’라는 반동적 해결책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와 손쉽게 결합하기 때문이다. [%=사진1%] 동북아시아의 종족적 민족주의 그런데 민족 고유성, 특히 언어적·문화적 단일성과 나아가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는 동북아 지역에서 전반적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종족적 민족주의는 종족의 신화·상징의 공통성에 기초해 ‘민족주의 이전에 민족이 존재했다’는 관점을 지지하며,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인종(주의)적 관점과 친화성이 높다. (이방인에 대한 공포, 경멸, 적대심을 뜻하는 ‘외국인혐오증’을 넘어서 강한 의미의 인종주의는 인류의 역사를 인종의 위계에 따라 구성하고, 우월한 인종의 신성한 임무와 불필요한 인종의 배제·제거를 주장한다). 또한 종족적 민족주의는 민족공동체를 초월적·유기체적 존재로 간주하는 보수주의와 매우 가깝다. 종족적 민족주의가 강화될수록 자유·평등한 시민의 권리에 근간을 두는 근대적 정치이념보다는 전근대적 이념·사조가 강화된다. 반면 종족적 민족주의와 대비되는 시민적 민족주의는 대체로 ‘근대 민족주의에 의해 민족이 발명되었다’는 관점을 공유하며, 시민으로서 민족구성원의 인격적 동등성이라는 관념이 작동하므로 민족자결과 함께 인민주권, 즉 자유·평등한 시민의 권리가 강조되며, 사회혁명을 촉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시민적 민족주의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다. 동북아 지역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19-20세기 서구의 유사과학적 종족/인종 관념이 도입되면서 등장했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을 비롯해 동북아 공산주의 운동의 성과와 일본의 패전을 통해 종족적 민족주의가 다소 억제된 상태였으나, 최근 상호 경쟁적으로 다시 확산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의 ‘중국인민’이라는 구호를 장개석의 ‘중화민족’이라는 구호로 대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대중서적에서는 400만년 가까이 대중화지역에서 살아온 ‘중화인종’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일본은 '군사력 보유 금지'와 '교전권 부인'을 규정한 일본 헌법 9조의 개정을 추진하며, 국기·국가의 법제화,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교과서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은 곧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의 상징이다. 한편 남한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1945년 이후로 종족적 민족주의, 이른바 ‘단군민족주의’(단군숭배)가 법으로 보장되고,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대중의 내면을 강력히 장악하고 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걸었고, 1993년 돌연 평양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동북아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예외를 발견하기란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 남한의 ‘단군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한 어머니의 소생을 뜻하는 ‘동포’(同胞), 같은 핏줄의 사람을 뜻하는 ‘겨레’(族)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혈연의식과 민족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철저히 근대 이후의 일이다. ‘2천만 동포’, ‘삼천리 강토’, ‘4천년 역사’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1907-8년 이후부터이며, 배달겨레라는 말은 1920년대에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근대사회에서 인격적으로 동등한 개인들의 관계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데, 혈연공동체라는 민족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시대 일종의 국가공인 교과서인 <동몽선습>은 역사의 첫머리를 단군의 건국으로 시작하지만, 국가 지배자들의 국가계승 의식을 민족주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본격적으로 ‘단군민족주의’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한말 애국계몽운동기에 단군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사조가 사상계에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하여 종교에서는 1909년 대종교의 창건으로, 역사학에서는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으로 투사되었다. 특히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은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를 이론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신채호는 대한제국 수립 이후 학부에서 주관한 학부 교과서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본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던 이 교과서는 ‘조선’ 계승 의식보다 ‘한(韓)’ 계승 의식이 강조했고, 기자문화(기자조선→마한)에 모든 개화정책을 결부시켰다. 이는 17세기 후반부의 ‘마한정통론’을 부활시키고, 대일본주의에 바탕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긍정하는 이었다. 반면 신채호는 ‘부여’ 계승의식을 제기하였다. 신채호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은 우리 역사에서 부여족이 주족(主族)이고 외래족인 중국족, 선비족, 말갈족과 토착족인 한족, 예맥족이 그들에게 동화된 객족(客族)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단군조선이 부여→고구려로 이어진다고 해석했다. 기자조선 정통주의는 ‘사대모화’, ‘중화주의’이며, ‘한’ 계승의식은 임나일본부설의 수용으로 연결되면서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고 결국 ‘일본숭배의 노예근성’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신채호 이후 종족적 민족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 발전되었다. 대종교의 최고 이론가이자 2대 교주인 김교현이 1914년에 서술한 <신단실기>는 우리 민족이 배달종족에서 출발했으며, 그 계통은 조선족, 북부여족, 예맥족, 옥저족, 숙신족이라고 잡았다. 민족의 주류가 조선족→한족→신라족으로 형성되었고, 중국족인 기자와 그 후예 마한은 반배달족으로 조선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의 조선족과 북의 부여족이 모두 주족이라고 보았고, 신채호가 외래족이라고 간주했던 선비, 거란, 여진, 만주족을 모두 고구려, 백제와 함께 배달족의 한 계통인 북부여족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신채호의 부여족 계승의식을 범동이족 계승의식으로 확대하면서, 한 계승의식도 종합함으로써, 민족의 구성을 대폭 확대한 ‘대단군주의’를 주창한 것이었다. 김교현의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조선인이 서술한 한국사 서적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대동이주의의 정통이 신교(神敎) 또는 한(韓) 종족을 바탕으로 일본으로 갔다는 주장을 매개로 대동이주의는 대일본주의, 곧 대동아공영론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최남선은 일본의 단군말살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대단군주의/대동이주의를 대일본주의로 변형시켰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동이문화권을 더 확대시켜 발칸·반도, 카스피해, 일본, 유구를 포함시켰고, 한일문화동원론를 승인했다. 대일본주의로 변형된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유포되었고, 현재 위서로 판명난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규원사화>는 일본, 조선, 만주족 연합을 통한 중국제패를 주장했고, <환단고기>는 단군조선과 일본 건국신화와 일본 신도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단기고사>는 고대 단군민족과 중국민족의 전쟁 체험을 강조하면서 불함문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종족과 일본문화를 포괄하는 대동아시아문화우월주의를 내세웠다. 이처럼 종족적 민족주의를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하고자 했지만, 이것이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포섭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고대사를 현재의 정치적 맥락에 따라 조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낳은 역설인 셈이다. 1945년 이후 남한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국가적 제도 속에서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내 정치적 기반과 정당성이 취약했던 한국의 민족주의 경향은 단군주의를 정치적 상징, 구심으로 내세운 것이다.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되고, 단기(檀紀) 연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홍익인간’은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이었던 삼균주의(조소앙), 신민족주의(안재홍)를 매개로 국가의 교육이념으로 법제화되었다. 현재에도 단군주의는 “단일민족”, “혈연공동체”라는 신화를 뒷받침하며, “대통일국가를 건설했던 위대하며 선택받은 민족”이란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며, 특히 최근에는 “대륙에 대한 영토의식”을 자극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민족주의의 대전환과 단군릉 사건 [%=사진2%] 1957년 북한에서 발표된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새로운 단계>는 민족주의가 “인민들간의 친선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자체의 민족적 이익과 계급적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밝혔다. 1973년 발행된 정치사전에서도 “민족주의는 언제나 부르죠아적 성격을 띤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1986년 북한의 후계자 김정일이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180도 전환되었다. 조선민족 제일주의는 “조선민족의 위대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조선민족이 제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수령을 모시고 위대한 당의 영도를 받으며 위대한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 제도에서 사는 긍지와 자부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 민족의 위대성은 우리 수령, 우리 당의 위대성”인 것이다. 한편, 북한의 민족 개념에 대한 정의도 변화하였다. 1950-60년대까지 북한의 민족 개념은 스탈린의 정식화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언어, 영토, 경제생활, 심리적 상태의 공통성).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민족의 구성요소에 ‘혈통’이 포함되었고, 1980년대 이르러서는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삭제하고 혈연의 공통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민족의 지표로서 핏줄과 언어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핏줄과 언어는 사실상 불변의 본질로 간주되고, 민족의 형성 시기는 상고시기로 소급되었으며 이는 근대에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스탈린의 이론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과의 논리적 정합성 문제가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의 이론대로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강조하면, 북한과 남한은 서로 다른 경제생활,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인해 서로 다른 민족이 되기 때문이며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이제 통일의 당위성을 말할 때 ‘혈통의 공통성’이 가장 강조될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1993년 북한은 난데없이 평양시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고구려의 무덤양식과 금동관 조각 때문에 고구려 당시의 고분이라고 생각했으나, 출토된 인골을 측정하니 5011(±267)년 전에 죽은 사람의 뼈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때 개장한 단군묘라고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 북한 역사학계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남한에서는 위서로 간주하는 <단기고사>, <태백일사>, <규원사화>가 사료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북한은 “평양이 인류의 발상지로, 민족문화의 중심지로, 조선민족의 성지로 온 세상에 이름 떨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민족주의는 김일성 유일사상이 강화되고 수령론/대가족론이 득세하면서 정치공동체의 초월적, 유기체적 성격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유·평등한 시민적 권리를 강조하는 정치이념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언어와 핏줄로 맺어진 공통성을 부각되면서 인종적 관점의 민족관으로의 퇴행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과 실천 단군 민족주의,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신화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합리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반제국주의 저항운동이 종족적 민족주의에 의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은 종족적 민족주의와 관련이 없으며 지역적 차원의 해방을 모색했다. 특히 현재의 정치적 조건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반동성이 강화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중국의 역사 해석에 대응해 한국 역시 역(逆)동북공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사나 중세사는 결코 특정 민족사의 기원으로 해석될 수 없다. 동북아지역 고대사를 현존 국가의 민족사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허구적인 ‘종족적 민족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따라서 최근 민주노총이 ‘주몽’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어떤 이유든 간에 대중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정서에 편승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또한 영유권 분쟁을 고대사로 환원하려는 시도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를 강화하며, 자연·자원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소유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강화할 따름이다. 둘째,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는 세계화 시대에 이주노동자의 권리가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하는 국면에서 반동적 기능을 한다. 민족이 과거지향적(사실은 허구적) 종족적 동일성이 아니라 현실에 실존하는 ‘정치공동체’를 의미한다면 마땅히 이주노동자가 정치공동체의 시민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노동자운동의 미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셋째, 동북아시아 각 국가에서 종족적 민족주의 확산에는 지역적 차원의 안보위험성이 기능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미국, 일본과의 잠재적 갈등에 상당히 기인한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상호작용 속에서 일본만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한 위선이다. 남북한, 중국이 군사력을 증강하는 가운데 일본만이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단지 ‘일본이 패전국이니까’라고 강요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각 국이 일본 평화헌법이 지향하는 바를 동일하게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 <조선일보>가 영어공용화를 주창하고, ’일본에 의해 근대화가 이뤄졌고, 한국의 경제발전의 토대가 구축되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가 편협한 국사/세계사 교과서를 개혁해야 한다고 나서는 등 세계화를 주도하는 지배 엘리트가 훨씬 더 민족적 특수주의를 지양할 태세인데 반해 피지배 대중이 ’민족주의‘, ’인종주의‘에 훨씬 더 유혹을 느끼는 것은 역설적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의 파괴적 효과는 결국 민중이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와 근본적으로 대결하고 시민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사회운동의 진지한 모색과 대응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