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종족적 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범민련 남측본부가 발행하는 <민족의 진로>에 실린 기사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과 동성애자인권연대가 반박 성명서를 발표했다.(바로가기) 우리 역시 이주노동자를 민족 고유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은 혼혈과 이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유럽의 극우세력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민족의 단일한 기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며, 민족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하는 모든 시도는 철저히 ‘야만적 이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는 인류사에 대한 무지를 넘어서 인류사를 조작, 왜곡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민족의 순수화(정화)’라는 반동적 해결책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와 손쉽게 결합하기 때문이다. [%=사진1%] 동북아시아의 종족적 민족주의 그런데 민족 고유성, 특히 언어적·문화적 단일성과 나아가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는 동북아 지역에서 전반적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종족적 민족주의는 종족의 신화·상징의 공통성에 기초해 ‘민족주의 이전에 민족이 존재했다’는 관점을 지지하며,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인종(주의)적 관점과 친화성이 높다. (이방인에 대한 공포, 경멸, 적대심을 뜻하는 ‘외국인혐오증’을 넘어서 강한 의미의 인종주의는 인류의 역사를 인종의 위계에 따라 구성하고, 우월한 인종의 신성한 임무와 불필요한 인종의 배제·제거를 주장한다). 또한 종족적 민족주의는 민족공동체를 초월적·유기체적 존재로 간주하는 보수주의와 매우 가깝다. 종족적 민족주의가 강화될수록 자유·평등한 시민의 권리에 근간을 두는 근대적 정치이념보다는 전근대적 이념·사조가 강화된다. 반면 종족적 민족주의와 대비되는 시민적 민족주의는 대체로 ‘근대 민족주의에 의해 민족이 발명되었다’는 관점을 공유하며, 시민으로서 민족구성원의 인격적 동등성이라는 관념이 작동하므로 민족자결과 함께 인민주권, 즉 자유·평등한 시민의 권리가 강조되며, 사회혁명을 촉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시민적 민족주의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다. 동북아 지역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19-20세기 서구의 유사과학적 종족/인종 관념이 도입되면서 등장했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을 비롯해 동북아 공산주의 운동의 성과와 일본의 패전을 통해 종족적 민족주의가 다소 억제된 상태였으나, 최근 상호 경쟁적으로 다시 확산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의 ‘중국인민’이라는 구호를 장개석의 ‘중화민족’이라는 구호로 대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대중서적에서는 400만년 가까이 대중화지역에서 살아온 ‘중화인종’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일본은 '군사력 보유 금지'와 '교전권 부인'을 규정한 일본 헌법 9조의 개정을 추진하며, 국기·국가의 법제화,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교과서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은 곧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의 상징이다. 한편 남한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1945년 이후로 종족적 민족주의, 이른바 ‘단군민족주의’(단군숭배)가 법으로 보장되고,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대중의 내면을 강력히 장악하고 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걸었고, 1993년 돌연 평양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동북아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예외를 발견하기란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 남한의 ‘단군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한 어머니의 소생을 뜻하는 ‘동포’(同胞), 같은 핏줄의 사람을 뜻하는 ‘겨레’(族)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혈연의식과 민족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철저히 근대 이후의 일이다. ‘2천만 동포’, ‘삼천리 강토’, ‘4천년 역사’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1907-8년 이후부터이며, 배달겨레라는 말은 1920년대에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근대사회에서 인격적으로 동등한 개인들의 관계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데, 혈연공동체라는 민족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시대 일종의 국가공인 교과서인 <동몽선습>은 역사의 첫머리를 단군의 건국으로 시작하지만, 국가 지배자들의 국가계승 의식을 민족주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본격적으로 ‘단군민족주의’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한말 애국계몽운동기에 단군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사조가 사상계에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하여 종교에서는 1909년 대종교의 창건으로, 역사학에서는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으로 투사되었다. 특히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은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를 이론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신채호는 대한제국 수립 이후 학부에서 주관한 학부 교과서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본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던 이 교과서는 ‘조선’ 계승 의식보다 ‘한(韓)’ 계승 의식이 강조했고, 기자문화(기자조선→마한)에 모든 개화정책을 결부시켰다. 이는 17세기 후반부의 ‘마한정통론’을 부활시키고, 대일본주의에 바탕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긍정하는 이었다. 반면 신채호는 ‘부여’ 계승의식을 제기하였다. 신채호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은 우리 역사에서 부여족이 주족(主族)이고 외래족인 중국족, 선비족, 말갈족과 토착족인 한족, 예맥족이 그들에게 동화된 객족(客族)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단군조선이 부여→고구려로 이어진다고 해석했다. 기자조선 정통주의는 ‘사대모화’, ‘중화주의’이며, ‘한’ 계승의식은 임나일본부설의 수용으로 연결되면서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고 결국 ‘일본숭배의 노예근성’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신채호 이후 종족적 민족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 발전되었다. 대종교의 최고 이론가이자 2대 교주인 김교현이 1914년에 서술한 <신단실기>는 우리 민족이 배달종족에서 출발했으며, 그 계통은 조선족, 북부여족, 예맥족, 옥저족, 숙신족이라고 잡았다. 민족의 주류가 조선족→한족→신라족으로 형성되었고, 중국족인 기자와 그 후예 마한은 반배달족으로 조선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의 조선족과 북의 부여족이 모두 주족이라고 보았고, 신채호가 외래족이라고 간주했던 선비, 거란, 여진, 만주족을 모두 고구려, 백제와 함께 배달족의 한 계통인 북부여족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신채호의 부여족 계승의식을 범동이족 계승의식으로 확대하면서, 한 계승의식도 종합함으로써, 민족의 구성을 대폭 확대한 ‘대단군주의’를 주창한 것이었다. 김교현의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조선인이 서술한 한국사 서적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대동이주의의 정통이 신교(神敎) 또는 한(韓) 종족을 바탕으로 일본으로 갔다는 주장을 매개로 대동이주의는 대일본주의, 곧 대동아공영론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최남선은 일본의 단군말살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대단군주의/대동이주의를 대일본주의로 변형시켰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동이문화권을 더 확대시켜 발칸·반도, 카스피해, 일본, 유구를 포함시켰고, 한일문화동원론를 승인했다. 대일본주의로 변형된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유포되었고, 현재 위서로 판명난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규원사화>는 일본, 조선, 만주족 연합을 통한 중국제패를 주장했고, <환단고기>는 단군조선과 일본 건국신화와 일본 신도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단기고사>는 고대 단군민족과 중국민족의 전쟁 체험을 강조하면서 불함문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종족과 일본문화를 포괄하는 대동아시아문화우월주의를 내세웠다. 이처럼 종족적 민족주의를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하고자 했지만, 이것이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포섭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고대사를 현재의 정치적 맥락에 따라 조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낳은 역설인 셈이다. 1945년 이후 남한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국가적 제도 속에서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내 정치적 기반과 정당성이 취약했던 한국의 민족주의 경향은 단군주의를 정치적 상징, 구심으로 내세운 것이다.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되고, 단기(檀紀) 연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홍익인간’은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이었던 삼균주의(조소앙), 신민족주의(안재홍)를 매개로 국가의 교육이념으로 법제화되었다. 현재에도 단군주의는 “단일민족”, “혈연공동체”라는 신화를 뒷받침하며, “대통일국가를 건설했던 위대하며 선택받은 민족”이란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며, 특히 최근에는 “대륙에 대한 영토의식”을 자극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민족주의의 대전환과 단군릉 사건 [%=사진2%] 1957년 북한에서 발표된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새로운 단계>는 민족주의가 “인민들간의 친선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자체의 민족적 이익과 계급적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밝혔다. 1973년 발행된 정치사전에서도 “민족주의는 언제나 부르죠아적 성격을 띤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1986년 북한의 후계자 김정일이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180도 전환되었다. 조선민족 제일주의는 “조선민족의 위대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조선민족이 제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수령을 모시고 위대한 당의 영도를 받으며 위대한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 제도에서 사는 긍지와 자부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 민족의 위대성은 우리 수령, 우리 당의 위대성”인 것이다. 한편, 북한의 민족 개념에 대한 정의도 변화하였다. 1950-60년대까지 북한의 민족 개념은 스탈린의 정식화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언어, 영토, 경제생활, 심리적 상태의 공통성).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민족의 구성요소에 ‘혈통’이 포함되었고, 1980년대 이르러서는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삭제하고 혈연의 공통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민족의 지표로서 핏줄과 언어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핏줄과 언어는 사실상 불변의 본질로 간주되고, 민족의 형성 시기는 상고시기로 소급되었으며 이는 근대에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스탈린의 이론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과의 논리적 정합성 문제가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의 이론대로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강조하면, 북한과 남한은 서로 다른 경제생활,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인해 서로 다른 민족이 되기 때문이며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이제 통일의 당위성을 말할 때 ‘혈통의 공통성’이 가장 강조될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1993년 북한은 난데없이 평양시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고구려의 무덤양식과 금동관 조각 때문에 고구려 당시의 고분이라고 생각했으나, 출토된 인골을 측정하니 5011(±267)년 전에 죽은 사람의 뼈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때 개장한 단군묘라고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 북한 역사학계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남한에서는 위서로 간주하는 <단기고사>, <태백일사>, <규원사화>가 사료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북한은 “평양이 인류의 발상지로, 민족문화의 중심지로, 조선민족의 성지로 온 세상에 이름 떨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민족주의는 김일성 유일사상이 강화되고 수령론/대가족론이 득세하면서 정치공동체의 초월적, 유기체적 성격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유·평등한 시민적 권리를 강조하는 정치이념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언어와 핏줄로 맺어진 공통성을 부각되면서 인종적 관점의 민족관으로의 퇴행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과 실천 단군 민족주의,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신화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합리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반제국주의 저항운동이 종족적 민족주의에 의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은 종족적 민족주의와 관련이 없으며 지역적 차원의 해방을 모색했다. 특히 현재의 정치적 조건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반동성이 강화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중국의 역사 해석에 대응해 한국 역시 역(逆)동북공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사나 중세사는 결코 특정 민족사의 기원으로 해석될 수 없다. 동북아지역 고대사를 현존 국가의 민족사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허구적인 ‘종족적 민족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따라서 최근 민주노총이 ‘주몽’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어떤 이유든 간에 대중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정서에 편승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또한 영유권 분쟁을 고대사로 환원하려는 시도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를 강화하며, 자연·자원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소유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강화할 따름이다. 둘째,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는 세계화 시대에 이주노동자의 권리가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하는 국면에서 반동적 기능을 한다. 민족이 과거지향적(사실은 허구적) 종족적 동일성이 아니라 현실에 실존하는 ‘정치공동체’를 의미한다면 마땅히 이주노동자가 정치공동체의 시민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노동자운동의 미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셋째, 동북아시아 각 국가에서 종족적 민족주의 확산에는 지역적 차원의 안보위험성이 기능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미국, 일본과의 잠재적 갈등에 상당히 기인한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상호작용 속에서 일본만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한 위선이다. 남북한, 중국이 군사력을 증강하는 가운데 일본만이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단지 ‘일본이 패전국이니까’라고 강요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각 국이 일본 평화헌법이 지향하는 바를 동일하게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 <조선일보>가 영어공용화를 주창하고, ’일본에 의해 근대화가 이뤄졌고, 한국의 경제발전의 토대가 구축되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가 편협한 국사/세계사 교과서를 개혁해야 한다고 나서는 등 세계화를 주도하는 지배 엘리트가 훨씬 더 민족적 특수주의를 지양할 태세인데 반해 피지배 대중이 ’민족주의‘, ’인종주의‘에 훨씬 더 유혹을 느끼는 것은 역설적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의 파괴적 효과는 결국 민중이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와 근본적으로 대결하고 시민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사회운동의 진지한 모색과 대응이 시급하다.
남북한의 종족적 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범민련 남측본부가 발행하는 <민족의 진로>에 실린 기사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노동조합과 동성애자인권연대가 반박 성명서를 발표했다.(바로가기) 우리 역시 이주노동자를 민족 고유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은 혼혈과 이주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유럽의 극우세력의 주장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민족의 단일한 기원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허구적이며, 민족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하는 모든 시도는 철저히 ‘야만적 이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는 인류사에 대한 무지를 넘어서 인류사를 조작, 왜곡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정치적 문제를 ‘민족의 순수화(정화)’라는 반동적 해결책으로 몰고 가려는 시도와 손쉽게 결합하기 때문이다. [%=사진1%] 동북아시아의 종족적 민족주의 그런데 민족 고유성, 특히 언어적·문화적 단일성과 나아가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는 동북아 지역에서 전반적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종족적 민족주의는 종족의 신화·상징의 공통성에 기초해 ‘민족주의 이전에 민족이 존재했다’는 관점을 지지하며, 유전적·육체적 단일성을 강조하는 인종(주의)적 관점과 친화성이 높다. (이방인에 대한 공포, 경멸, 적대심을 뜻하는 ‘외국인혐오증’을 넘어서 강한 의미의 인종주의는 인류의 역사를 인종의 위계에 따라 구성하고, 우월한 인종의 신성한 임무와 불필요한 인종의 배제·제거를 주장한다). 또한 종족적 민족주의는 민족공동체를 초월적·유기체적 존재로 간주하는 보수주의와 매우 가깝다. 종족적 민족주의가 강화될수록 자유·평등한 시민의 권리에 근간을 두는 근대적 정치이념보다는 전근대적 이념·사조가 강화된다. 반면 종족적 민족주의와 대비되는 시민적 민족주의는 대체로 ‘근대 민족주의에 의해 민족이 발명되었다’는 관점을 공유하며, 시민으로서 민족구성원의 인격적 동등성이라는 관념이 작동하므로 민족자결과 함께 인민주권, 즉 자유·평등한 시민의 권리가 강조되며, 사회혁명을 촉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시민적 민족주의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다. 동북아 지역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19-20세기 서구의 유사과학적 종족/인종 관념이 도입되면서 등장했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을 비롯해 동북아 공산주의 운동의 성과와 일본의 패전을 통해 종족적 민족주의가 다소 억제된 상태였으나, 최근 상호 경쟁적으로 다시 확산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의 ‘중국인민’이라는 구호를 장개석의 ‘중화민족’이라는 구호로 대체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으며, 대중서적에서는 400만년 가까이 대중화지역에서 살아온 ‘중화인종’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일본은 '군사력 보유 금지'와 '교전권 부인'을 규정한 일본 헌법 9조의 개정을 추진하며, 국기·국가의 법제화, 야스쿠니 신사참배, 역사교과서 개정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은 곧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의 상징이다. 한편 남한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1945년 이후로 종족적 민족주의, 이른바 ‘단군민족주의’(단군숭배)가 법으로 보장되고,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대중의 내면을 강력히 장악하고 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걸었고, 1993년 돌연 평양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동북아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예외를 발견하기란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 남한의 ‘단군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환상 한 어머니의 소생을 뜻하는 ‘동포’(同胞), 같은 핏줄의 사람을 뜻하는 ‘겨레’(族)라는 단어가 등장하여 혈연의식과 민족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은 철저히 근대 이후의 일이다. ‘2천만 동포’, ‘삼천리 강토’, ‘4천년 역사’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1907-8년 이후부터이며, 배달겨레라는 말은 1920년대에 자주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근대사회에서 인격적으로 동등한 개인들의 관계라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데, 혈연공동체라는 민족의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조선시대 일종의 국가공인 교과서인 <동몽선습>은 역사의 첫머리를 단군의 건국으로 시작하지만, 국가 지배자들의 국가계승 의식을 민족주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본격적으로 ‘단군민족주의’가 등장한 것은 20세기 초였다. 한말 애국계몽운동기에 단군민족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사조가 사상계에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하여 종교에서는 1909년 대종교의 창건으로, 역사학에서는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으로 투사되었다. 특히 신채호의 고대사 저작은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를 이론화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신채호는 대한제국 수립 이후 학부에서 주관한 학부 교과서를 비판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일본의 영향이 강하게 미쳤던 이 교과서는 ‘조선’ 계승 의식보다 ‘한(韓)’ 계승 의식이 강조했고, 기자문화(기자조선→마한)에 모든 개화정책을 결부시켰다. 이는 17세기 후반부의 ‘마한정통론’을 부활시키고, 대일본주의에 바탕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긍정하는 이었다. 반면 신채호는 ‘부여’ 계승의식을 제기하였다. 신채호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독사신론>은 우리 역사에서 부여족이 주족(主族)이고 외래족인 중국족, 선비족, 말갈족과 토착족인 한족, 예맥족이 그들에게 동화된 객족(客族)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단군조선이 부여→고구려로 이어진다고 해석했다. 기자조선 정통주의는 ‘사대모화’, ‘중화주의’이며, ‘한’ 계승의식은 임나일본부설의 수용으로 연결되면서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고 결국 ‘일본숭배의 노예근성’을 부추긴다는 것이었다. 신채호 이후 종족적 민족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변화, 발전되었다. 대종교의 최고 이론가이자 2대 교주인 김교현이 1914년에 서술한 <신단실기>는 우리 민족이 배달종족에서 출발했으며, 그 계통은 조선족, 북부여족, 예맥족, 옥저족, 숙신족이라고 잡았다. 민족의 주류가 조선족→한족→신라족으로 형성되었고, 중국족인 기자와 그 후예 마한은 반배달족으로 조선족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남의 조선족과 북의 부여족이 모두 주족이라고 보았고, 신채호가 외래족이라고 간주했던 선비, 거란, 여진, 만주족을 모두 고구려, 백제와 함께 배달족의 한 계통인 북부여족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신채호의 부여족 계승의식을 범동이족 계승의식으로 확대하면서, 한 계승의식도 종합함으로써, 민족의 구성을 대폭 확대한 ‘대단군주의’를 주창한 것이었다. 김교현의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조선인이 서술한 한국사 서적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대동이주의의 정통이 신교(神敎) 또는 한(韓) 종족을 바탕으로 일본으로 갔다는 주장을 매개로 대동이주의는 대일본주의, 곧 대동아공영론으로 변형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로 최남선은 일본의 단군말살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대단군주의/대동이주의를 대일본주의로 변형시켰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동이문화권을 더 확대시켜 발칸·반도, 카스피해, 일본, 유구를 포함시켰고, 한일문화동원론를 승인했다. 대일본주의로 변형된 대단군주의는 1920년대 이후로 유포되었고, 현재 위서로 판명난 <규원사화>, <환단고기>, <단기고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규원사화>는 일본, 조선, 만주족 연합을 통한 중국제패를 주장했고, <환단고기>는 단군조선과 일본 건국신화와 일본 신도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단기고사>는 고대 단군민족과 중국민족의 전쟁 체험을 강조하면서 불함문화론을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종족과 일본문화를 포괄하는 대동아시아문화우월주의를 내세웠다. 이처럼 종족적 민족주의를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하고자 했지만, 이것이 일본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포섭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결국 고대사를 현재의 정치적 맥락에 따라 조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낳은 역설인 셈이다. 1945년 이후 남한에서 종족적 민족주의는 국가적 제도 속에서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국내 정치적 기반과 정당성이 취약했던 한국의 민족주의 경향은 단군주의를 정치적 상징, 구심으로 내세운 것이다. 개천절이 국경일로 제정되고, 단기(檀紀) 연호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홍익인간’은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이었던 삼균주의(조소앙), 신민족주의(안재홍)를 매개로 국가의 교육이념으로 법제화되었다. 현재에도 단군주의는 “단일민족”, “혈연공동체”라는 신화를 뒷받침하며, “대통일국가를 건설했던 위대하며 선택받은 민족”이란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며, 특히 최근에는 “대륙에 대한 영토의식”을 자극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민족주의의 대전환과 단군릉 사건 [%=사진2%] 1957년 북한에서 발표된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새로운 단계>는 민족주의가 “인민들간의 친선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자체의 민족적 이익과 계급적 이익에도 배치된다”고 밝혔다. 1973년 발행된 정치사전에서도 “민족주의는 언제나 부르죠아적 성격을 띤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1986년 북한의 후계자 김정일이 ‘조선민족 제일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180도 전환되었다. 조선민족 제일주의는 “조선민족의 위대성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규정되었다. 그렇다면 조선민족이 제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위대한 수령을 모시고 위대한 당의 영도를 받으며 위대한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 제도에서 사는 긍지와 자부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우리 민족의 위대성은 우리 수령, 우리 당의 위대성”인 것이다. 한편, 북한의 민족 개념에 대한 정의도 변화하였다. 1950-60년대까지 북한의 민족 개념은 스탈린의 정식화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언어, 영토, 경제생활, 심리적 상태의 공통성). 그러다가 1970년대에 이르러 민족의 구성요소에 ‘혈통’이 포함되었고, 1980년대 이르러서는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삭제하고 혈연의 공통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민족의 지표로서 핏줄과 언어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핏줄과 언어는 사실상 불변의 본질로 간주되고, 민족의 형성 시기는 상고시기로 소급되었으며 이는 근대에 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스탈린의 이론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에는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방안과의 논리적 정합성 문제가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의 이론대로 경제생활의 공통성을 강조하면, 북한과 남한은 서로 다른 경제생활,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인해 서로 다른 민족이 되기 때문이며 통일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이제 통일의 당위성을 말할 때 ‘혈통의 공통성’이 가장 강조될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 1993년 북한은 난데없이 평양시에서 단군릉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고구려의 무덤양식과 금동관 조각 때문에 고구려 당시의 고분이라고 생각했으나, 출토된 인골을 측정하니 5011(±267)년 전에 죽은 사람의 뼈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때 개장한 단군묘라고 단번에 결정을 내렸다. 북한 역사학계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남한에서는 위서로 간주하는 <단기고사>, <태백일사>, <규원사화>가 사료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북한은 “평양이 인류의 발상지로, 민족문화의 중심지로, 조선민족의 성지로 온 세상에 이름 떨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북한의 민족주의는 김일성 유일사상이 강화되고 수령론/대가족론이 득세하면서 정치공동체의 초월적, 유기체적 성격이 강조되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유·평등한 시민적 권리를 강조하는 정치이념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언어와 핏줄로 맺어진 공통성을 부각되면서 인종적 관점의 민족관으로의 퇴행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과 실천 단군 민족주의, 단일민족이라는 허구적 신화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에 저항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합리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반제국주의 저항운동이 종족적 민족주의에 의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인도, 인도네시아, 인도차이나 지역의 민족해방운동은 종족적 민족주의와 관련이 없으며 지역적 차원의 해방을 모색했다. 특히 현재의 정치적 조건에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반동성이 강화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중국의 역사 해석에 대응해 한국 역시 역(逆)동북공정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사나 중세사는 결코 특정 민족사의 기원으로 해석될 수 없다. 동북아지역 고대사를 현존 국가의 민족사로 환원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허구적인 ‘종족적 민족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따라서 최근 민주노총이 ‘주몽’ 이미지를 차용한 것은, 어떤 이유든 간에 대중의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정서에 편승하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또한 영유권 분쟁을 고대사로 환원하려는 시도 역시 종족적 민족주의를 강화하며, 자연·자원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소유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원리를 강화할 따름이다. 둘째,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는 세계화 시대에 이주노동자의 권리가 첨예한 쟁점으로 부상하는 국면에서 반동적 기능을 한다. 민족이 과거지향적(사실은 허구적) 종족적 동일성이 아니라 현실에 실존하는 ‘정치공동체’를 의미한다면 마땅히 이주노동자가 정치공동체의 시민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는 노동자운동의 미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셋째, 동북아시아 각 국가에서 종족적 민족주의 확산에는 지역적 차원의 안보위험성이 기능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미국, 일본과의 잠재적 갈등에 상당히 기인한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상호작용 속에서 일본만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철저한 위선이다. 남북한, 중국이 군사력을 증강하는 가운데 일본만이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단지 ‘일본이 패전국이니까’라고 강요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일본이 평화헌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각 국이 일본 평화헌법이 지향하는 바를 동일하게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 <조선일보>가 영어공용화를 주창하고, ’일본에 의해 근대화가 이뤄졌고, 한국의 경제발전의 토대가 구축되었다‘고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자가 편협한 국사/세계사 교과서를 개혁해야 한다고 나서는 등 세계화를 주도하는 지배 엘리트가 훨씬 더 민족적 특수주의를 지양할 태세인데 반해 피지배 대중이 ’민족주의‘, ’인종주의‘에 훨씬 더 유혹을 느끼는 것은 역설적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의 파괴적 효과는 결국 민중이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종족적 민족주의와 근본적으로 대결하고 시민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사회운동의 진지한 모색과 대응이 시급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되자 재계와 대부분의 언론은 노무현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을 환영했고, 각종 연구소들은 한미 FTA가 한국 경제에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보고서를 내어 한미 FTA를 지지·옹호하는 데 몰두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하 나프타)으로 미국과 FTA를 체결한 멕시코는 한미 FTA가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선례로 제시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삼성경제연구소>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회원국 경제에 미친 영향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여 나프타가 멕시코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나프타를 둘러싼 엇갈린 해석이 나프타의 영향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대부분은 나프타 이후 멕시코 등의 상황을 전적으로 나프타의 영향으로 해석하는 단순한 평가에 기반하고 있다면서, 나프타의 영향에 대한 ‘객관적’ 실증 분석을 시도했다. 그 결과 나프타는 각 회원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되었다. 특히 보고서는 멕시코의 경우 경제성장률 하락 추세가 반전되었고, ‘외국인투자 증가 → 투자율 상승 → 경제성장’의 효과가 강하게 나타났으며, 하이테크 제품의 수출 비중이 크게 상승하여 산업구조 고도화의 효과를 누렸다고 분석하면서, 멕시코 경제난의 원인은 나프타가 아니라 오랜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며 내부개혁의 부진으로 개방 효과를 최대화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나프타의 영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근거 없는 과도한 우려나 기대를 불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보고서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경제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경제체질을 강화하는 대내적 개혁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시사점을 도출하면서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나프타 이후 어려워진 멕시코의 현실에서 한국 사회의 미래를 보았던 사람들의 우려는 불충분한 분석이나 단순한 평가에 기반을 둔 것인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이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프타가 경제에 미친 영향을 별도로 분리해서 평가한” 보고서의 실증 분석 결과나 구체적인 수치가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되면서부터 우리는 “한미 FTA는 제2의 성장 동력”이라거나 “한미 FTA를 기회로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선진화를 이루자”는 이야기를 지겹게 들어왔다. 분명 이런 수사는 경제성장률 상승, 외국인투자 증가와 같은 경제 지표상의 변화 이상의 기대를 자극하고 있다. 현재까지 추진되어 온 신자유주의 개혁,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더욱 확실하게 추진하는 것이 우리의 장밋빛 미래를 위한 길이며, 한미 FTA는 이를 위한 중요한 매개가 될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프타가 멕시코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나프타가 멕시코의 신자유주의적 전환 과정에서 가진 의미는 무엇이었고 이 과정에서 약속된 미래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실현되었는지 또는 실현될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결론을 맺어야 할 문제다. 이것은 순전히 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문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사회의 암울한 모습은 현재 한미 FTA가 자극하고 있는 기대가 과연 실현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다소나마 보여줄 수 있다. 나프타에 이르는 길: 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신자유주의로 1994년 멕시코, 미국, 캐나다는 나프타를 출범시켰는데, 이것은 지역 내 무역 장벽을 완전히 제거하는 선구적인 협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멕시코 정부에게, 나프타는 무역을 촉진하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멕시코가 1940년대부터 지속해 온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은 1980년대 이후 급격히 변화되었는데, 이 변화는, 세계 도처에서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워싱턴 컨센서스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전환이었고, 나프타는 이런 전환의 절정을 의미한다. 통상 이러한 전환은 멕시코의 수입대체 산업화 모델의 한계와 문제점 때문에 불가피했던 것처럼 설명된다. 물론 수입대체 산업화에는 국제수지 불균형, 외채에 대한 높은 의존도, 만성적인 재정 적자, 높은 인플레이션과 같은 취약성이 있긴 했지만, 1940년에서 1980년까지 이 전략 하에서 멕시코는 평균 6.4%에 달하는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멕시코가 1982년 직면하게 된 급작스럽고 파괴적인 위기는 이런 취약성에서 바로 도출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외부로부터 부과된 측면이 크다. 주지하다시피 1970년에 들어서면 세계적으로 성장률이 저하하는데, 이에 대한 해법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이었다. 미국을 위시한 중심부 국가들의 이행은 동시에 자신들의 위기를 (반)주변부, 제3세계 국가들로 이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79년 새롭게 연방준비은행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는 긴축정책을 시행하고 이자율을 20%로 올리는 ‘반혁명’을 통해 그 이전 뉴딜적 정책전통을 최종적으로 청산하고, 신자유주의로 가는 결정적 발판을 마련했다. 이 정책은 그 이전 석유달러의 환류 메커니즘 속에서 대규모 외채를 도입해 중화학공업화를 꾀하던 제3세계 국가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이 시기 제3세계 국가들이 도입한 외채의 대부분은 미국의 금리와 연동되는 변동 금리였고, 따라서 미국의 이자율 인상은 이 국가들의 원리금 상환 비용을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게다가 미국의 이자율이 높아지자 금융기관들은 위험부담이 큰 제3세계 국가들에게 차관을 제공하지 않으려 했고 결국 외채 상환이 어려워진 제3세계 국가들은 외채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위기는 1982년 멕시코에서 시작되었는데, 멕시코는 1970년대 후반 세계 경제의 침체로 인해 수입대체 전략이 쇠퇴기에 접어들자 석유 수출과 외채에 의존하는 발전 전략을 구상했으나, 이는 결국 1982년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끝이 났다. 이 위기의 원인을 논할 때, 세계 경제의 둔화와 이에 대응하는 자본의 정책으로서 국제적인 고도금융의 팽창이라는 측면은 통상 사장된 채 과도한 외채에 의존한 수입대체 전략이 문제라는 식의 논리가 우세했기 때문에, 외채 위기는 멕시코를 신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은 IMF가 부과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방향.1) 을 따르며, 국가예산 삭감, 금융시장 자유화, 경쟁적 수준으로의 환율 단일화, 관세 인하, 국유산업의 사유화, 경쟁을 기초로 한 외국인 투자에 대한 경제 개방, 정부 규제의 합리화 및 축소, 소유권의 보장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합의를 담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내용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델 라 마드리드(Del la Madrid) 대통령(1982~1988)은 무역·금융 자유화, 외국인직접투자(FDI) 탈규제, 사유화를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84년부터 시작된 이 조치는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의 일방적인 축소·철폐나 1985년 미국과 체결한 <보조금 및 상계조치에 관한 협정>과 같은 국제협정 체결을 통해 곧 가속이 붙었다. 같은 해 약 8,000개의 품목 중 908개를 제외한 모든 품목에 대해 수입허가요건이 철폐됨으로써 멕시코 국내 시장은 급속히 개방되었다. 1986년 멕시코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가입했고, FDI, 특히 자본 집약적이거나 기술 집약적 산업에 대한 FDI에 관한 제한은 완화되었다. 1988년 취임한 살리나스 대통령은 GATT의 규정에 따라 일체의 보조금, 세금 감면, 무역 보호 체계를 철폐했다. 더불어 부문별 발전 전략의 내용은 무역 장벽 제거나 투자 유치를 위한 행정 절차 간소화 같은 것으로 채워졌다. 이 같은 조치들은 멕시코의 산업 정책이 수출 지향적인 전략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당시에는 이런 조치들을 통해 수출 정거장(특히 미국으로의 수출)으로서 멕시코의 가능성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일반적인 합의가 존재했고, 이를 위해 재수출을 목적으로 한 일시적 수입품에 대한 면세 제도가 시행되었다. 나프타가 이런 신자유주의적 전환 과정과 궤를 같이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심화하고 안착시키는 데 중요한 매개이자 그 절정이었음은 분명하다. 나프타가 약속한 것 나프타 협상이 시작되자 멕시코 내부에서는 이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진행되었다. 살리나스 당시 대통령은 “나프타가 ‘제1세계’로 가는 티켓이 될 것”이라 생각했고, 지지자들 또한 북반구 이웃 국가들과의 통합이 멕시코 경제를 민주화·선진화할 것이며 따라서 불법 이주가 줄어들 것이라 주장했다. 미 무역위원회는 멕시코를 나프타의 최대 수혜국으로 지목했고, 그 혜택은 주로 자본유입과 교역확대 등에 의해 발생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나프타로 인해 멕시코 경제의 신인도가 상승하여 자본이 유입될 것이며, 특히 멕시코의 저임금을 활용하려는 미국과 캐나다 기업의 투자뿐만 아니라 멕시코를 경유하여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유럽, 일본 등 제3국의 직접투자도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단기적으로는 대미교역에서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 문제를 완화시킬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무엇보다 나프타는 멕시코의 새로운 경제 전략 내에서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주요한 수단으로 생각되었다. 첫째는 멕시코 경제를 제조업 상품의 수출에 주력하고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수출 주도적 경로에 안착시키는 것이다. 나프타가 1980년대 후반부터 추진된 무역자유화를 심화시켜 수출 상품에 대한 국내 및 외국인 투자를 촉진시킬 것이고 이로써 미국으로 수출하는 상품의 정거장으로서의 멕시코의 가능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기본 가정이었다. 멕시코 제조업 부문의 급속한 성장(특히 노동집약적인 상품 수출로 인한 성장)은 국내 경제의 나머지 부문을 지속적인 고성장 궤도에 올릴 수 있는 동력이라 주장되었다. 더불어 공공 부문의 축소와 보조금 철폐를 통해 재정 적자가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이 통제될 것이었다. 둘째는 이전에 자발적으로 추진된 무역자유화 조치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개혁 과정을 국가 간 협정을 통해 되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나프타 이후 멕시코는 번영했는가? 1) 수출과 경제성장 무역 자유화와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수출은 증가했다. 1985년 이래, 특히 나프타 발효 이후인 1995년 이래로 멕시코는 세계 (비-석유) 시장에서 계속 점유율이 커졌고, 특히 1994년 1.71%였던 점유율은 2001년 3.28%로 증가해 그 증가율이 중국 다음으로 2위를 기록했다. 멕시코의 수출 붐은 나프타 타결로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 기회가 전례 없이 커진 것에서 기인한다. 이런 수출 붐의 주력 부문은 제조업이었는데, 오늘날 제조업이 멕시코의 총 수출 중 차지하는 비중은 85%를 넘었다. 그러나 제조업의 수출과 동시에 제조업 상품에 대한 수입 또한 증가했다. 처음에 이런 수입 증가는 오랫동안 지속된 보호주의가 해체되면서 일시적으로 수입이 증가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었지만, 나프타 발효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수입은 감소하지 않고 있다. 사실 멕시코 제조업 수출품의 70%는 면세나 세금 보조를 받아 싸게 수입된 중간재를 조립하여 수출하는 것이다. 수입 중간재를 사용하는 제조 기업은 국산 중간재를 사용하는 기업에 비해 약 30%의 비용을 절감한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제조업 상품의 수입은 수출 비중의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 결과 경제가 성장하면 무역적자도 증가하는 구조가 되었다. 현재 수입품 수요의 소득탄력성은 약 3%에 달한다.2) 이런 상황은 수출이 국내 생산과 가지는 연관이 파괴되었음을 증명하며, 결국 초민족적 자본과 연관이 있거나 외국인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기업들만 수출 시장에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입된 중간재를 조립해 (주로 미국으로) 수출하는 정거장 역할은 숙련이나 지식과 같은 경쟁력 요인보다는 차라리 저임금 요인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현재 제조업 수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문은 금속이고, 그 다음이 섬유와 의복이며, 이외에 식품과 음료 산업의 비중도 늘었다. 이 부문들은 전통적으로 노동집약적인 산업이고, 노동조건이나 임금에서의 바닥을 향한 경쟁을 통해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한다. 멕시코에 진출한 해외 기업의 경우 일차적으로 노동비용 절감을 통해 미국으로의 수출에서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나프타가 보장하는 멕시코 국내 규정들이 기업에 주는 혜택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게다가 멕시코의 대미 수출은 미국 경제의 둔화로 인해 크게 증가하지 못했으며, 최근에는 멕시코의 대미 수출 정거장의 지위는 중국에게 1위를 내주었다. 2) 외국인직접투자 1990년대 초반 멕시코 정부가 나프타를 원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수출지향 제조업 분야에서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유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프타가 발효된 후 유입된 외국인직접투자는 대부분 기존의 기업을 매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미 잘 알려진 시티그룹의 바나멕스(BANAMEX) 은행 매입이다. 바나멕스 은행은 나프타 이전 추진된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사유화되었고, 은행에 대한 외국인 소유 금지 조항이 나프타로 인해 폐지된 후 시티그룹에 매각된 것이다. 이 매입금 125억 달러가 들어온 2001년은 멕시코에 가장 많은 외국인자본이 유입된 해로 기록되고 있다.3) 외국인직접투자는 특히 마낄라도라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했는데, 이는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목적의 자본 유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유입된 외국인 투자의 멕시코 전체에 큰 이익을 주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기술 이전 효과가 거의 없고 다른 멕시코 기업이나 산업의 생산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투자금이 대부분 기업 간 거래를 통해 다시 나가고, 직접적으로 남는 것은 얼마 안 되는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에 그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3) 고용과 실업 나프타의 긍정적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되는 사례 중 하나는 멕시코의 실업률이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프타 이후 멕시코에서 창출된 일자리 수는 노동력이 증가하는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낮은 실업률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우선 하나의 요인으로 잘 알려진 미국으로의 불법 이민을 들 수 있다. 나프타 이후 불법 이민자 수는 상당히 증가했다. 1990년~1994년 동안 연평균 불법이민자 수는 26만 명이었지만, 2000년~2004년에는 연평균 49만 명에 달한다. 그리고 나프타 이후 창출된 일자리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00년 2/4분기~2004년 2/4분기 동안 새롭게 창출된 임금노동 일자리는 약 150만 개에 이르는데, 이 중 23%는 사회보장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것이었고, 완전하게 모든 사회보장 혜택을 받는 일자리는 37%였다. 2004년 2/4분기에 전제 임금 노동자의 43%가 구두 계약 하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의 65%는 5인 이하 사업장에서 창출되었다. 2000년 2/4분기와 2004년 2/4분기에 일시적으로 실업자 수가 급증했는데, 이것은 일시적 해고와 임시직 노동의 계약 종료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통계는 새로운 일자리의 성격이 저숙련, 저임금, 불안정 노동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다. 마낄라도라에서도 일자리가 창출되었지만, 이곳의 노동조건과 임금 수준은 더 열악하다. 최근 마낄라도라의 생산성은 정체되어 있고, 기술 수준 역시 평균에 못 미치고 있다. 이것은 마낄라도라가 다른 어떤 것보다 저임금에 의해 유지되었다는 의미이자 이제 많은 기업들이 멕시코보다 더 낮은 임금을 찾아 마낄라도라를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4) 농업 농업은 나프타의 부정적인 영향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지만, 나프타 찬성론자들은 이조차 나프타 때문만은 아니고 낙후한 멕시코 농업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프타 이전 멕시코는 주식인 옥수수를 자급했지만, 현재에는 세계 3위의 옥수수 수입국이 되었다. 나프타 협정에 따라 멕시코는 대부분의 농산품 관세를 10년 동안 단계적으로 철폐했다. 그 결과 농산물 수입은 급증하여 농산물 수입액은 현재 120억 달러를 넘어섰고, 이는 나프타 이전의 2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멕시코 정부는 나프타를 추진하면서 선결 과제로 에히도(소작농들의 공동소유·공동경작 농지)를 보장하는 헌법 27조를 폐지했고, 이 때문에 땅을 잃은 많은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비(非)농민이나 외국인도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12개 주요 곡물에 대한 약정가격수매제를 포함한 보조금도 철폐했으며, 게다가 농산물의 가공·유통 단계를 민영화하면서 카길, 아처대니얼스(ADM)와 같은 초국적 농기업들이나 멕시코 대형 기업들이 이를 장악했다. 물론 과일, 채소, 원예 작물과 같은 환금작물의 대미 수출은 증가했지만, 이런 농사는 멕시코 민중을 위한 식량 자급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단작성 환금작물 재배는 토지와 생태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치고, 세계적인 식량 공급과는 상관없이 초민족 농기업들의 이윤과 농업 지배를 강화하는 지속 불가능한 농업의 대표적인 사례다. 결국 나프타를 매개로 추진된 농업 개방과 수출성 환금작물 재배는 수많은 농민들(전체 농민의 1/6)을 토지에서 쫓아내 도시와 농촌의 빈민으로 전락시켰고, 소농과 가족농을 파괴했으며, 멕시코의 식량자급률을 떨어뜨렸고, 남아 있는 농민들은 농업 노동자로 전락시켰다.4) 최근의 한 통계에 따르면 2002년 현재 빈곤한 소작농의 74%가 도시와 미국에서 일하는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송금을 받아 소득의 38%를 보충한다(참고로 멕시코 가계의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미국에서 들어오는 이런 송금액은 2005년 현재 총 150억 달러에 달한다.). 멕시코 북부 지역의 몇몇 수출 농가는 성공했겠지만, 멕시코는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농산물 수입국이 되었고, 멕시코의 농업은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다. 한미 FTA는 장밋빛 미래인가?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경제 실적은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수출 증가, 외국인직접투자 증가, 낮은 실업률), 그렇다고 좋다고 볼 수도 없다(지속되는 무역적자, 불안정한 일자리 증가, 농업 및 농민의 파탄). 그래서 한미 FTA를 찬성하는 진영이나 반대하는 진영 모두가 나프타 이후 멕시코를 자기주장의 근거로 드는 것이다. 사실 나프타는 애초에 그것을 추진한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이나 성공한 사례다. 나프타는 분명 자본의 위기를 민중에게 전가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절정에 있었다. 멕시코 민중이 겪고 있는 빈곤과 삶의 어려움, 그리고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멕시코의 백만장자들5)과 초민족자본의 높은 수익은 나프타가 의도했던 바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나프타가 약속한 장밋빛 미래는 분명 모두의 미래가 아니었다. 현재 멕시코 민중들이 겪고 있는 빈곤과 불안정한 일자리, 목숨을 건 이주와 비참한 삶은 나프타와 상관없는 멕시코 내부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나프타에 예정된 결과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상황에 대한 처방으로 좀 더 근본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을 주문하는 것은 더 높은 자유화, 탈규제, 금융화를 통해 초민족자본과 소수 부유층의 이익을 위해 민중에게 더 큰 희생과 착취를 인내하라는 말일 뿐이다. 하기에 나프타 사례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경제 지표상의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문제이며, 이 관점에서 보자면 나프타가 민중에게 재앙이었음은 분명하다. 지난 해 한미 FTA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멕시코의 현실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들이 많이 방영되었다. 그 중 PD 수첩에서 취재한 멕시코 민중의 삶은 한국인 대다수를 경악시켰고, 이에 따라 한미 FTA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청와대가 반박 자료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이 보여준 나프타 이후 멕시코 민중의 삶은 거짓이나 과장이 아닌 현실이다. 나프타의 혜택은 애초부터 그들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고, 초민족자본과 지배 세력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달성했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완성시킬 한미 FTA가 가져올 미래는 과연 다를 것인가? 1) 이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제통화기금의 안정화 프로그램을 통해 조직된 채무국에 대한 긴축적 구조조정, 둘째, 협상 시간을 벌기 위한 단기적 지불 유예, 셋째, 무역을 위한 은행 간 신용, 넷째, 국제통화기금의 조정을 통한 민간은행의 대부 갱신과 재조정, 다섯째, 민간과 국제통화기금의 대부가 실행되기까지 채무국을 지탱시킬 긴급융자. 이를 반영하는 긴축-재조정 프로그램은 위기의 비용을 채무국으로 전가시킨다. 채권자 측은 이 프로그램에 기초해 순조롭게 공동행동을 진행하지만, 채무자들은 개별적이고 분리된 개인으로 취급되면서 고립된다. 결과적으로 금융순환의 보존은 가능해지지만, 축적과정이 훼손당하고, 기존 자산의 청산에까지 이른다.본문으로 2) 소득탄력성이란 소득이 1% 증가했을 때 수요는 몇 % 증가했는가를 나타내는 수치로, 멕시코는 현재 GDP가 1% 성장하면 수입에 대한 수요는 2.66% 증가할 정도로 수입에 대한 의존이 크다.본문으로 3) 참고로, 시티그룹에 매각된 바나멕스 은행은 중소기업 대출보다는 주로 상류층 고객을 공략하는 전략을 유지함으로써 “인수 2년 만에 빈부격차가 심한 멕시코에서 영업수익 34% 증가라는 놀라운” 기록을 보여주며 세계 여러 은행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또 시티그룹은 바나멕스를 인수한 후 멕시코 전역에서 1,400여 개의 지점을 폐쇄했고, 대규모 인원 감축을 단행했다.본문으로 4)자본의 농업 지배와 이로 인한 농민의 농업 노동자화, 생태 파괴, 지속 불가능한 농업의 세계적 확산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이 책에 실린 <좌담> 「농민운동의 전망」을 참조하시오.본문으로 5) 멕시코 인구 0.000001%의 소득은 4천만 명의 소득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 사실 이들은 경제위기에 대한 처방으로 추진된 신자유주의 정책(최저임금 삭감, 사회서비스에 대한 공공 지출 삭감, 노동규제 완화 등)을 통해 백만장자가 되었다. 특히 핵심적인 기제는 사유화 정책이었다. 세계 2대 부자인 카를로스 슬림(그는 얼마 전 워렌 버핏을 제치고 2위에 등극했다.)은 사유화 정책을 통해 헐값에 전국전화망을 장악하여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의 뒤를 잇는 다른 두 백만장자들(알프레도 하프와 로베르토 헤르난데스)은 은행 사유화 정책을 통해 바나멕스를 차지한 후 이를 시티은행에 매각함으로써 지금의 부를 축적했다.본문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되자 재계와 대부분의 언론은 노무현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을 환영했고, 각종 연구소들은 한미 FTA가 한국 경제에 어떻게 도움이 될 것인지에 대한 보고서를 내어 한미 FTA를 지지·옹호하는 데 몰두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하 나프타)으로 미국과 FTA를 체결한 멕시코는 한미 FTA가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선례로 제시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삼성경제연구소>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회원국 경제에 미친 영향과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여 나프타가 멕시코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나프타를 둘러싼 엇갈린 해석이 나프타의 영향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대부분은 나프타 이후 멕시코 등의 상황을 전적으로 나프타의 영향으로 해석하는 단순한 평가에 기반하고 있다면서, 나프타의 영향에 대한 ‘객관적’ 실증 분석을 시도했다. 그 결과 나프타는 각 회원국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되었다. 특히 보고서는 멕시코의 경우 경제성장률 하락 추세가 반전되었고, ‘외국인투자 증가 → 투자율 상승 → 경제성장’의 효과가 강하게 나타났으며, 하이테크 제품의 수출 비중이 크게 상승하여 산업구조 고도화의 효과를 누렸다고 분석하면서, 멕시코 경제난의 원인은 나프타가 아니라 오랜 정치·경제·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며 내부개혁의 부진으로 개방 효과를 최대화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나프타의 영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통해 근거 없는 과도한 우려나 기대를 불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시작된 보고서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경제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경제체질을 강화하는 대내적 개혁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시사점을 도출하면서 끝을 맺었다. 그렇다면 나프타 이후 어려워진 멕시코의 현실에서 한국 사회의 미래를 보았던 사람들의 우려는 불충분한 분석이나 단순한 평가에 기반을 둔 것인가?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이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프타가 경제에 미친 영향을 별도로 분리해서 평가한” 보고서의 실증 분석 결과나 구체적인 수치가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되면서부터 우리는 “한미 FTA는 제2의 성장 동력”이라거나 “한미 FTA를 기회로 국내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선진화를 이루자”는 이야기를 지겹게 들어왔다. 분명 이런 수사는 경제성장률 상승, 외국인투자 증가와 같은 경제 지표상의 변화 이상의 기대를 자극하고 있다. 현재까지 추진되어 온 신자유주의 개혁,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더욱 확실하게 추진하는 것이 우리의 장밋빛 미래를 위한 길이며, 한미 FTA는 이를 위한 중요한 매개가 될 것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프타가 멕시코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은, 나프타가 멕시코의 신자유주의적 전환 과정에서 가진 의미는 무엇이었고 이 과정에서 약속된 미래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실현되었는지 또는 실현될 것인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가운데 결론을 맺어야 할 문제다. 이것은 순전히 경제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문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사회의 암울한 모습은 현재 한미 FTA가 자극하고 있는 기대가 과연 실현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다소나마 보여줄 수 있다. 나프타에 이르는 길: 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신자유주의로 1994년 멕시코, 미국, 캐나다는 나프타를 출범시켰는데, 이것은 지역 내 무역 장벽을 완전히 제거하는 선구적인 협정이었다. 하지만 당시 멕시코 정부에게, 나프타는 무역을 촉진하는 것 이상을 의미했다. 멕시코가 1940년대부터 지속해 온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은 1980년대 이후 급격히 변화되었는데, 이 변화는, 세계 도처에서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워싱턴 컨센서스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전환이었고, 나프타는 이런 전환의 절정을 의미한다. 통상 이러한 전환은 멕시코의 수입대체 산업화 모델의 한계와 문제점 때문에 불가피했던 것처럼 설명된다. 물론 수입대체 산업화에는 국제수지 불균형, 외채에 대한 높은 의존도, 만성적인 재정 적자, 높은 인플레이션과 같은 취약성이 있긴 했지만, 1940년에서 1980년까지 이 전략 하에서 멕시코는 평균 6.4%에 달하는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멕시코가 1982년 직면하게 된 급작스럽고 파괴적인 위기는 이런 취약성에서 바로 도출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외부로부터 부과된 측면이 크다. 주지하다시피 1970년에 들어서면 세계적으로 성장률이 저하하는데, 이에 대한 해법은 이른바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이었다. 미국을 위시한 중심부 국가들의 이행은 동시에 자신들의 위기를 (반)주변부, 제3세계 국가들로 이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1979년 새롭게 연방준비은행장으로 취임한 폴 볼커는 긴축정책을 시행하고 이자율을 20%로 올리는 ‘반혁명’을 통해 그 이전 뉴딜적 정책전통을 최종적으로 청산하고, 신자유주의로 가는 결정적 발판을 마련했다. 이 정책은 그 이전 석유달러의 환류 메커니즘 속에서 대규모 외채를 도입해 중화학공업화를 꾀하던 제3세계 국가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이 시기 제3세계 국가들이 도입한 외채의 대부분은 미국의 금리와 연동되는 변동 금리였고, 따라서 미국의 이자율 인상은 이 국가들의 원리금 상환 비용을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게다가 미국의 이자율이 높아지자 금융기관들은 위험부담이 큰 제3세계 국가들에게 차관을 제공하지 않으려 했고 결국 외채 상환이 어려워진 제3세계 국가들은 외채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 위기는 1982년 멕시코에서 시작되었는데, 멕시코는 1970년대 후반 세계 경제의 침체로 인해 수입대체 전략이 쇠퇴기에 접어들자 석유 수출과 외채에 의존하는 발전 전략을 구상했으나, 이는 결국 1982년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끝이 났다. 이 위기의 원인을 논할 때, 세계 경제의 둔화와 이에 대응하는 자본의 정책으로서 국제적인 고도금융의 팽창이라는 측면은 통상 사장된 채 과도한 외채에 의존한 수입대체 전략이 문제라는 식의 논리가 우세했기 때문에, 외채 위기는 멕시코를 신자유주의적인 방향으로 역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은 IMF가 부과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방향.1) 을 따르며, 국가예산 삭감, 금융시장 자유화, 경쟁적 수준으로의 환율 단일화, 관세 인하, 국유산업의 사유화, 경쟁을 기초로 한 외국인 투자에 대한 경제 개방, 정부 규제의 합리화 및 축소, 소유권의 보장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합의를 담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내용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델 라 마드리드(Del la Madrid) 대통령(1982~1988)은 무역·금융 자유화, 외국인직접투자(FDI) 탈규제, 사유화를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84년부터 시작된 이 조치는 관세 및 비관세 장벽의 일방적인 축소·철폐나 1985년 미국과 체결한 <보조금 및 상계조치에 관한 협정>과 같은 국제협정 체결을 통해 곧 가속이 붙었다. 같은 해 약 8,000개의 품목 중 908개를 제외한 모든 품목에 대해 수입허가요건이 철폐됨으로써 멕시코 국내 시장은 급속히 개방되었다. 1986년 멕시코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가입했고, FDI, 특히 자본 집약적이거나 기술 집약적 산업에 대한 FDI에 관한 제한은 완화되었다. 1988년 취임한 살리나스 대통령은 GATT의 규정에 따라 일체의 보조금, 세금 감면, 무역 보호 체계를 철폐했다. 더불어 부문별 발전 전략의 내용은 무역 장벽 제거나 투자 유치를 위한 행정 절차 간소화 같은 것으로 채워졌다. 이 같은 조치들은 멕시코의 산업 정책이 수출 지향적인 전략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 당시에는 이런 조치들을 통해 수출 정거장(특히 미국으로의 수출)으로서 멕시코의 가능성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일반적인 합의가 존재했고, 이를 위해 재수출을 목적으로 한 일시적 수입품에 대한 면세 제도가 시행되었다. 나프타가 이런 신자유주의적 전환 과정과 궤를 같이 할 뿐만 아니라, 이를 심화하고 안착시키는 데 중요한 매개이자 그 절정이었음은 분명하다. 나프타가 약속한 것 나프타 협상이 시작되자 멕시코 내부에서는 이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진행되었다. 살리나스 당시 대통령은 “나프타가 ‘제1세계’로 가는 티켓이 될 것”이라 생각했고, 지지자들 또한 북반구 이웃 국가들과의 통합이 멕시코 경제를 민주화·선진화할 것이며 따라서 불법 이주가 줄어들 것이라 주장했다. 미 무역위원회는 멕시코를 나프타의 최대 수혜국으로 지목했고, 그 혜택은 주로 자본유입과 교역확대 등에 의해 발생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나프타로 인해 멕시코 경제의 신인도가 상승하여 자본이 유입될 것이며, 특히 멕시코의 저임금을 활용하려는 미국과 캐나다 기업의 투자뿐만 아니라 멕시코를 경유하여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유럽, 일본 등 제3국의 직접투자도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단기적으로는 대미교역에서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만성적인 무역수지 적자 문제를 완화시킬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무엇보다 나프타는 멕시코의 새로운 경제 전략 내에서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주요한 수단으로 생각되었다. 첫째는 멕시코 경제를 제조업 상품의 수출에 주력하고 인플레이션을 통제하는 수출 주도적 경로에 안착시키는 것이다. 나프타가 1980년대 후반부터 추진된 무역자유화를 심화시켜 수출 상품에 대한 국내 및 외국인 투자를 촉진시킬 것이고 이로써 미국으로 수출하는 상품의 정거장으로서의 멕시코의 가능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기본 가정이었다. 멕시코 제조업 부문의 급속한 성장(특히 노동집약적인 상품 수출로 인한 성장)은 국내 경제의 나머지 부문을 지속적인 고성장 궤도에 올릴 수 있는 동력이라 주장되었다. 더불어 공공 부문의 축소와 보조금 철폐를 통해 재정 적자가 감소하고 인플레이션이 통제될 것이었다. 둘째는 이전에 자발적으로 추진된 무역자유화 조치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개혁 과정을 국가 간 협정을 통해 되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나프타 이후 멕시코는 번영했는가? 1) 수출과 경제성장 무역 자유화와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수출은 증가했다. 1985년 이래, 특히 나프타 발효 이후인 1995년 이래로 멕시코는 세계 (비-석유) 시장에서 계속 점유율이 커졌고, 특히 1994년 1.71%였던 점유율은 2001년 3.28%로 증가해 그 증가율이 중국 다음으로 2위를 기록했다. 멕시코의 수출 붐은 나프타 타결로 미국 시장에 대한 접근 기회가 전례 없이 커진 것에서 기인한다. 이런 수출 붐의 주력 부문은 제조업이었는데, 오늘날 제조업이 멕시코의 총 수출 중 차지하는 비중은 85%를 넘었다. 그러나 제조업의 수출과 동시에 제조업 상품에 대한 수입 또한 증가했다. 처음에 이런 수입 증가는 오랫동안 지속된 보호주의가 해체되면서 일시적으로 수입이 증가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었지만, 나프타 발효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수입은 감소하지 않고 있다. 사실 멕시코 제조업 수출품의 70%는 면세나 세금 보조를 받아 싸게 수입된 중간재를 조립하여 수출하는 것이다. 수입 중간재를 사용하는 제조 기업은 국산 중간재를 사용하는 기업에 비해 약 30%의 비용을 절감한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제조업 상품의 수입은 수출 비중의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 결과 경제가 성장하면 무역적자도 증가하는 구조가 되었다. 현재 수입품 수요의 소득탄력성은 약 3%에 달한다.2) 이런 상황은 수출이 국내 생산과 가지는 연관이 파괴되었음을 증명하며, 결국 초민족적 자본과 연관이 있거나 외국인 자본을 조달할 수 있는 기업들만 수출 시장에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수입된 중간재를 조립해 (주로 미국으로) 수출하는 정거장 역할은 숙련이나 지식과 같은 경쟁력 요인보다는 차라리 저임금 요인에 그 성패가 달려 있다. 현재 제조업 수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문은 금속이고, 그 다음이 섬유와 의복이며, 이외에 식품과 음료 산업의 비중도 늘었다. 이 부문들은 전통적으로 노동집약적인 산업이고, 노동조건이나 임금에서의 바닥을 향한 경쟁을 통해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한다. 멕시코에 진출한 해외 기업의 경우 일차적으로 노동비용 절감을 통해 미국으로의 수출에서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나프타가 보장하는 멕시코 국내 규정들이 기업에 주는 혜택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게다가 멕시코의 대미 수출은 미국 경제의 둔화로 인해 크게 증가하지 못했으며, 최근에는 멕시코의 대미 수출 정거장의 지위는 중국에게 1위를 내주었다. 2) 외국인직접투자 1990년대 초반 멕시코 정부가 나프타를 원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수출지향 제조업 분야에서 외국인직접투자(FDI)를 유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프타가 발효된 후 유입된 외국인직접투자는 대부분 기존의 기업을 매입하는 데 사용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미 잘 알려진 시티그룹의 바나멕스(BANAMEX) 은행 매입이다. 바나멕스 은행은 나프타 이전 추진된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사유화되었고, 은행에 대한 외국인 소유 금지 조항이 나프타로 인해 폐지된 후 시티그룹에 매각된 것이다. 이 매입금 125억 달러가 들어온 2001년은 멕시코에 가장 많은 외국인자본이 유입된 해로 기록되고 있다.3) 외국인직접투자는 특히 마낄라도라에서 지속적으로 증가했는데, 이는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하려는 목적의 자본 유입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유입된 외국인 투자의 멕시코 전체에 큰 이익을 주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기술 이전 효과가 거의 없고 다른 멕시코 기업이나 산업의 생산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투자금이 대부분 기업 간 거래를 통해 다시 나가고, 직접적으로 남는 것은 얼마 안 되는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에 그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3) 고용과 실업 나프타의 긍정적 효과를 보여주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되는 사례 중 하나는 멕시코의 실업률이 낮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프타 이후 멕시코에서 창출된 일자리 수는 노동력이 증가하는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낮은 실업률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우선 하나의 요인으로 잘 알려진 미국으로의 불법 이민을 들 수 있다. 나프타 이후 불법 이민자 수는 상당히 증가했다. 1990년~1994년 동안 연평균 불법이민자 수는 26만 명이었지만, 2000년~2004년에는 연평균 49만 명에 달한다. 그리고 나프타 이후 창출된 일자리의 성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00년 2/4분기~2004년 2/4분기 동안 새롭게 창출된 임금노동 일자리는 약 150만 개에 이르는데, 이 중 23%는 사회보장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것이었고, 완전하게 모든 사회보장 혜택을 받는 일자리는 37%였다. 2004년 2/4분기에 전제 임금 노동자의 43%가 구두 계약 하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일자리의 65%는 5인 이하 사업장에서 창출되었다. 2000년 2/4분기와 2004년 2/4분기에 일시적으로 실업자 수가 급증했는데, 이것은 일시적 해고와 임시직 노동의 계약 종료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통계는 새로운 일자리의 성격이 저숙련, 저임금, 불안정 노동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다. 마낄라도라에서도 일자리가 창출되었지만, 이곳의 노동조건과 임금 수준은 더 열악하다. 최근 마낄라도라의 생산성은 정체되어 있고, 기술 수준 역시 평균에 못 미치고 있다. 이것은 마낄라도라가 다른 어떤 것보다 저임금에 의해 유지되었다는 의미이자 이제 많은 기업들이 멕시코보다 더 낮은 임금을 찾아 마낄라도라를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4) 농업 농업은 나프타의 부정적인 영향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지만, 나프타 찬성론자들은 이조차 나프타 때문만은 아니고 낙후한 멕시코 농업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프타 이전 멕시코는 주식인 옥수수를 자급했지만, 현재에는 세계 3위의 옥수수 수입국이 되었다. 나프타 협정에 따라 멕시코는 대부분의 농산품 관세를 10년 동안 단계적으로 철폐했다. 그 결과 농산물 수입은 급증하여 농산물 수입액은 현재 120억 달러를 넘어섰고, 이는 나프타 이전의 2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멕시코 정부는 나프타를 추진하면서 선결 과제로 에히도(소작농들의 공동소유·공동경작 농지)를 보장하는 헌법 27조를 폐지했고, 이 때문에 땅을 잃은 많은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비(非)농민이나 외국인도 농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12개 주요 곡물에 대한 약정가격수매제를 포함한 보조금도 철폐했으며, 게다가 농산물의 가공·유통 단계를 민영화하면서 카길, 아처대니얼스(ADM)와 같은 초국적 농기업들이나 멕시코 대형 기업들이 이를 장악했다. 물론 과일, 채소, 원예 작물과 같은 환금작물의 대미 수출은 증가했지만, 이런 농사는 멕시코 민중을 위한 식량 자급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단작성 환금작물 재배는 토지와 생태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치고, 세계적인 식량 공급과는 상관없이 초민족 농기업들의 이윤과 농업 지배를 강화하는 지속 불가능한 농업의 대표적인 사례다. 결국 나프타를 매개로 추진된 농업 개방과 수출성 환금작물 재배는 수많은 농민들(전체 농민의 1/6)을 토지에서 쫓아내 도시와 농촌의 빈민으로 전락시켰고, 소농과 가족농을 파괴했으며, 멕시코의 식량자급률을 떨어뜨렸고, 남아 있는 농민들은 농업 노동자로 전락시켰다.4) 최근의 한 통계에 따르면 2002년 현재 빈곤한 소작농의 74%가 도시와 미국에서 일하는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송금을 받아 소득의 38%를 보충한다(참고로 멕시코 가계의 소득을 보충하기 위해 미국에서 들어오는 이런 송금액은 2005년 현재 총 150억 달러에 달한다.). 멕시코 북부 지역의 몇몇 수출 농가는 성공했겠지만, 멕시코는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농산물 수입국이 되었고, 멕시코의 농업은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다. 한미 FTA는 장밋빛 미래인가? 나프타 이후 멕시코의 경제 실적은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수출 증가, 외국인직접투자 증가, 낮은 실업률), 그렇다고 좋다고 볼 수도 없다(지속되는 무역적자, 불안정한 일자리 증가, 농업 및 농민의 파탄). 그래서 한미 FTA를 찬성하는 진영이나 반대하는 진영 모두가 나프타 이후 멕시코를 자기주장의 근거로 드는 것이다. 사실 나프타는 애초에 그것을 추진한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이나 성공한 사례다. 나프타는 분명 자본의 위기를 민중에게 전가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절정에 있었다. 멕시코 민중이 겪고 있는 빈곤과 삶의 어려움, 그리고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멕시코의 백만장자들5)과 초민족자본의 높은 수익은 나프타가 의도했던 바를 달성하는 데 성공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나프타가 약속한 장밋빛 미래는 분명 모두의 미래가 아니었다. 현재 멕시코 민중들이 겪고 있는 빈곤과 불안정한 일자리, 목숨을 건 이주와 비참한 삶은 나프타와 상관없는 멕시코 내부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나프타에 예정된 결과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상황에 대한 처방으로 좀 더 근본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을 주문하는 것은 더 높은 자유화, 탈규제, 금융화를 통해 초민족자본과 소수 부유층의 이익을 위해 민중에게 더 큰 희생과 착취를 인내하라는 말일 뿐이다. 하기에 나프타 사례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경제 지표상의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문제이며, 이 관점에서 보자면 나프타가 민중에게 재앙이었음은 분명하다. 지난 해 한미 FTA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멕시코의 현실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들이 많이 방영되었다. 그 중 PD 수첩에서 취재한 멕시코 민중의 삶은 한국인 대다수를 경악시켰고, 이에 따라 한미 FTA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청와대가 반박 자료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이 보여준 나프타 이후 멕시코 민중의 삶은 거짓이나 과장이 아닌 현실이다. 나프타의 혜택은 애초부터 그들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고, 초민족자본과 지배 세력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달성했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완성시킬 한미 FTA가 가져올 미래는 과연 다를 것인가? 1) 이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제통화기금의 안정화 프로그램을 통해 조직된 채무국에 대한 긴축적 구조조정, 둘째, 협상 시간을 벌기 위한 단기적 지불 유예, 셋째, 무역을 위한 은행 간 신용, 넷째, 국제통화기금의 조정을 통한 민간은행의 대부 갱신과 재조정, 다섯째, 민간과 국제통화기금의 대부가 실행되기까지 채무국을 지탱시킬 긴급융자. 이를 반영하는 긴축-재조정 프로그램은 위기의 비용을 채무국으로 전가시킨다. 채권자 측은 이 프로그램에 기초해 순조롭게 공동행동을 진행하지만, 채무자들은 개별적이고 분리된 개인으로 취급되면서 고립된다. 결과적으로 금융순환의 보존은 가능해지지만, 축적과정이 훼손당하고, 기존 자산의 청산에까지 이른다.본문으로 2) 소득탄력성이란 소득이 1% 증가했을 때 수요는 몇 % 증가했는가를 나타내는 수치로, 멕시코는 현재 GDP가 1% 성장하면 수입에 대한 수요는 2.66% 증가할 정도로 수입에 대한 의존이 크다.본문으로 3) 참고로, 시티그룹에 매각된 바나멕스 은행은 중소기업 대출보다는 주로 상류층 고객을 공략하는 전략을 유지함으로써 “인수 2년 만에 빈부격차가 심한 멕시코에서 영업수익 34% 증가라는 놀라운” 기록을 보여주며 세계 여러 은행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또 시티그룹은 바나멕스를 인수한 후 멕시코 전역에서 1,400여 개의 지점을 폐쇄했고, 대규모 인원 감축을 단행했다.본문으로 4)자본의 농업 지배와 이로 인한 농민의 농업 노동자화, 생태 파괴, 지속 불가능한 농업의 세계적 확산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이 책에 실린 <좌담> 「농민운동의 전망」을 참조하시오.본문으로 5) 멕시코 인구 0.000001%의 소득은 4천만 명의 소득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 사실 이들은 경제위기에 대한 처방으로 추진된 신자유주의 정책(최저임금 삭감, 사회서비스에 대한 공공 지출 삭감, 노동규제 완화 등)을 통해 백만장자가 되었다. 특히 핵심적인 기제는 사유화 정책이었다. 세계 2대 부자인 카를로스 슬림(그는 얼마 전 워렌 버핏을 제치고 2위에 등극했다.)은 사유화 정책을 통해 헐값에 전국전화망을 장악하여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의 뒤를 잇는 다른 두 백만장자들(알프레도 하프와 로베르토 헤르난데스)은 은행 사유화 정책을 통해 바나멕스를 차지한 후 이를 시티은행에 매각함으로써 지금의 부를 축적했다.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