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 2007-02-12

    뼈아픈 비판과 반성이 없다면, 단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의 최근 상황에 대하여 언론에 의해 알려진 주민-정부 간의 협상의 왜곡보도 2007년 1월 초, 언론은 팽성 주민대책위와 정부 간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으며, 주민 이주문제가 곧 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를 보도하였다. 또한 이 기사들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이 이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전망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언론 보도는 협상의 내용자체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로 주민들의 입지를 좁히고 협상을 속전속결로 끝내려는 정부의 입장을 대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지난 1월 2일에 시작된 팽성 주민대책위와 정부 간의 협상에 대해서 국무조정실 주한미군이전대책기획단 관계자는 논의 의제를 '주민이주와 생계지원'으로 한정하기로 했다고 발언했고, 언론은 주민들이 이주 원칙에 완전히 합의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대책위는 이날 협상 자리에서 주민 이주 문제를 논의하는 것과 함께 평택 미군기지 확장사업의 재협상과 철조망 철거를 계속해서 요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1) 주민대책위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사업의 재협상을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요청했고 정부는 이에 "하나의 의제로 받아서 이야기하자"고 답하였다. 따라서 주민이 이주에 대한 협의를 시작한 것은 사실이나, 협의의 주제를 이주 문제에 한정지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일 합의문에서 '주민이주와 생계지원'이라는 문구는 주민측이 제시한 재협상에 대한 요구를 포함하여, 그 문구 뒤에 '등, 주민요구사항'을 추가하여 정리된 바 있다. 따라서 현재 진행된 협상으로 인해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언론 보도는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일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평택투쟁의 불씨를 잠재우려는 치졸한 행태에 불과하다. 주민들의 상황과 주민대책위의 판단 1월 2일, 정부는 국무조정실 보도 자료를 통해 "정부는 인도가처분 승소에 따른 (생가) 철거시한인 1월 4일을 앞두고 평택미군기지 이전반대 팽성 주민대책위(위원장: 김지태)가 1월 1일 이주관련 협의를 전격 제의해 옴에 따라 이를 수용"한다며 "이번 협의는 지난해 11월 말 주민 측이 대화재개 의사를 전달해옴에 따라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됐다"고 발표했다. 국무조정실의 발표대로, 주민대책위는 김지태 이장의 석방을 조건으로 주민들의 이주대책 협의를 정부 측에 요청하였다. 주민대책위 간부들은 현재 장기화된 투쟁에서 주민들의 피로와 좌절이 극에 달했다는 상황을 인식하여 주민들의 동요를 막고 마을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해 최선의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 12월 27일 오전, 주민대책위는 주민모임을 소집하여, 김지태 위원장 석방을 조건으로 이주에 관해 정부와 협의하고 있음을 주민들에게 공식적으로 보고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12월 28일, 김지태 위원장이 석방되었다. 1월 2일 첫 번째 합의문이 발표되고, 1월 3일 두 번째 협상이 진행되었다. 1월 6일에 열린 주민총회에서 김지태 위원장은,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주민들의 솔직한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주민들 모두 계속 싸워나갈 의지를 밝히지 못했다. 현재 이주의 상과 정부의 생계대책지원 내용에 대한 주민들의 통일된 의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남아있는 가구들이 흩어지지 않고 대추리, 도두리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집단적인 이주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을 분명히 밝히고 있을 뿐이다. 주민들에게 투쟁의 구심이었던 김지태 위원장이 구속된 지 7개월이 지나는 동안, 주민들은 투쟁의 동력을 잃어갔으며 이 와중에 10월 추석이후, 도두리 20여 가구 전체가 이주에 합의하게 되었다. 이후, 남은 대추리 46가구 주민들은 좌절과 고립감으로 괴로워했고,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결정도, 포기하고 이주해야 한다는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김지태 위원장의 석방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9.24 4차 평화대행진 이후, 범대위의 겨울나기 사업, 자매결연 사업 등의 계획이 제출되었지만 주민들의 막막한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주민들이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원칙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주민대책위 내에서는 아직까지 미군기지 확장 반대라는 운동의 대의와 원칙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운동의 대의와 원칙만으로 더 이상 싸움을 지속시키기 어렵다는 주민들의 판단이 이미 내려졌지만, 향후 범대위와의 연대방식은 여전히 쟁점으로 남아있다. 장기화된 싸움으로 주민과 주민대책위 간부들은 극도로 지쳐있는 상태고, 생계대책의 현실적 막막함에 가로막혀 있다. 평택 범대위의 인식과 판단 12월 10일, 평택 범대위 공동 집행위원장단 회의에서 주민대책위는 김지태 위원장 석방을 조건으로 이주대책에 대해 정부와 대화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주민대책위는 이 사실을 공동 집행위원장단 회의에 한정하여 공유할 것을 요청하였고, 회의에 참석한 공동집행위원장들은 이를 존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2월 14일 다시 열린 공동 집행위원장단회의에서는 주민-정부간 협상문제에 대한 이견이 확인되었고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22일 김지태 위원장의 재판 이후, 12월 23일 공동집행위원장과 집행위원회 참가단체들, 평택지킴이들이 참가하여 확대 공동집행위원회 수련회를 개최하였고, 당시 상황에 대한 범대위의 판단을 논의하였다. 주민대책위 측은 주민들이 더 이상 투쟁을 지속할 수 없기에, 김위원장의 석방을 조건으로 이주문제를 협상하고 있으며, 주민들이 3년간의 투쟁을 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존중해 달라는 요지로 발언하였다. 이 자리에서 12월 10일 공동집행위원장단의 결정에 대해 몇 가지 이견이 제기되었다. 첫째, 주민-정부 간의 협의 방식과 과정을 비롯해 주민들의 열악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공동 집행위원장단에서만 공유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긴급한 상황에 대한 범대위의 조직적인 논의와 판단이 계속 유보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기간 공집장 회의-집행위원회로 이어지는 논의구조의 비민주성 문제로 제기되었다. 둘째, 현재 진행되고 있는 주민-정부 간 합의가 주민대책위의 상황을 더욱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이를 즉각 중단하고 범대위와 함께 새로운 협상의 방식과 내용, 정책적 대안을 모색할 것이 제안되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 공동 집행위원장단은 주민대책위에 양해를 구하고 12월 27일 집행위원회에서 이 상황을 공유하고 논의하기로 결정하였고,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들이 개진되었으나 결국 주민대책위의 기존 입장을 바꿔내지 못했다. 12월 27일, 66차 집행위원회에서 주민-정부 간 협상 사실이 보고되었고, 범대위가 이에 대한 자기평가와 향후 운동의 방침을 시급하게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2월 29일과 31일 확대 공동 집행위원장단 회의와 팽성 주민대책위와의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범대위는 '평택주민-정부 간 대화에 즈음한 주민대책위, 평택 범대위의 입장'을 공동으로 발표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민대책위는 공동성명서의 일부문안의 삭제와 이견을 제기하였고, 공동 입장발표 여부 자체에 대해 주민대책위에서 판단할 시간을 요청했다. 1월 4일 67차 집행위원회에 주민대책위의 입장을 모아오기로 하였으나, 현재까지 주민대책위의 입장이 정리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1월 4일 67차 집행위원회에서는 2006년 투쟁평가와 향후계획을 논의하면서 1>현재 주민-정부 간의 협의를 범대위가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와, 2>기간의 논의과정에서 드러난 범대위 논의구조의 폐쇄성과 비민주성에 대한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이에 대한 토론이 장시간 이어졌으나 범대위의 인식과 판단에 대한 결론은 모아지지 못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해 공동 집행위원장단 참가 단체들이나 집행위원회 내부적으로도 기본적인 인식을 통일하지 못한 채 각기 상이한 입장을 제기하고 있다.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팽성 주민대책위는 2003년에 결성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으며, 평화의 땅을 지켜내기 위해 치열한 투쟁의 고삐를 결코 늦춘 적이 없다. 900일에 가까운 주민촛불집회가 매일같이 진행되었고, 농성, 항의방문, 집회 등 평택 범대위 투쟁의 최전선에서 주민들은 언제나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미군기지 반대운동 중 가장 많은 주민들이 그 어떤 투쟁보다 더욱 강력한 단결로 결속되어 있었고, 그 힘은 2006년 한 해 동안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운동의 대중적 공간을 열어내었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의 군사패권전략과 이에 조응하는 한국정부는 유례없는 국가폭력을 휘둘러 주민들의 투쟁 의지를 질식시켜왔다. 5월 4일에 자행된, 80년 광주를 연상케 하는 군사작전과 유혈진압은 주민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고, 이후 공권력의 잔인무도한 폭력은 주민들의 기본적인 인권과 생존권을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민 개개인에게 가해지는 회유와 협박은 끊임없이 이어져 주민공동체를 파괴하였고, 평택 범대위와의 연대투쟁의 정신을 훼손시켰다. 정부는 단 하루 만에 들판과 마을을 '군사보호시설'로 둔갑시켰고, 이중삼중의 불법검문소를 설치하여 대추리, 도두리를 '감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주민들은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농토와 피 같은 작물이 시커먼 철조망과 군부대에 의해 짓밟히는 모습을 매일같이 보아야만 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국방부관계자들과 경찰은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주민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다. 이처럼 대추리, 도두리에서는 경악할 만한 인권유린사태가 몇 달째 지속되어왔고, 수세적인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대중투쟁은 전개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민대책위는 6월 초 정부의 대화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대화를 시작하면서 6월 5일 자진 출두한 김지태 위원장을 구속시켰으며, 대화국면을 곧 의도적으로 파기하였다. 애초부터 정부는 주민과 협상할 생각이 없었고, 주민들이 지쳐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들려 했다. 정부는 현재까지 평택 미군기지 확장사업에 대한 마스터플랜조차 만들지 않았고, '2008년까지 공사완료'라는 LPP개정안은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공사강행과 주민굴복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탄압의 고삐를 전혀 늦추지 않았고, 주민에게는 공갈협박을 가하고, 국민전체를 상대로 해서는 대사기극을 거리낌 없이 벌여왔던 것이다. 2006년 하반기 동안 이는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9.24 평화대행진을 앞두고 빈집을 철거하여 공사단행의 의지를 표명하였고, 김지태 위원장의 재판을 고의적으로 연기시키며 주민들을 지치게 하고, 도두리 주민들을 회유, 협박하고 매수하였다. 또한 도탄에 빠진 주민들의 분노를 자극하기 위해, 김지태 위원장에게 실형2년을 선고하고, 주민들을 '죄인'으로 매도하였다. 이렇듯 정부가 행사한 일련의 행태는 목숨을 걸고 끝까지 투쟁을 이어가고자 했던 주민들에게 살인적인 폭력 그 자체였다. 그리고 최근 주민들이 투쟁을 지속하는 길을 다시 한 번 선택하려 했을 때, 정부는 이제 생계문제를 볼모로 주민들을 옥죄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해 11월, 주민대책위 간부들은 장기 투옥된 김지태 위원장의 조속한 석방과 파괴 위협에 놓인 주민 공동체의 보존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주민들의 마지막 저지선이라고 판단, 정부와의 협상을 먼저 제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부는 현재 주민대책위의 마지막 생존의 몸부림조차 고압적인 자세로 제압하며 주민들의 고통을 기만하고 있다. 12월 15일, 법원이 다시 한 번 정부 편에 손을 들어주면서 인도가처분 신청에 대한 항소심 판결은 뒤집어졌고, 정부는 1월 4일자로 주민들의 생가를 철거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는 심지어 평택 미군기지 확장사업의 5년 연기가 불가피하다는 언론 보도가 나간 직후의 일이었다. 정부는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듯 김지태 이장의 석방을 위해 법원에 탄원서를 내줬고, '주민대책위가 대화요청을 받아들이고', 1월 4일 생가철거를 유보해 줌으로써,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가능해졌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이처럼 정부당국의 체계적인 탄압과 주민들에 대한 고사작전은 주민대책위로 하여금 김 위원장의 석방과 주민-정부 간의 협상을 맞바꾸는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주민대표가 없는 상태에서 투쟁을 지속하는 것도, 협상을 진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던 주민들의 가장 취약한 조건 그 자체가 협상의 보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주민들의 불리한 입지를 활용하여 속전속결로 협상을 끝내려 언론보도를 조작하는 작태를 보이는 한편, 주민들에게는 전에 협의 매수된 주민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상금을 올려주겠다며 역겨운 생색을 내고 있다. 우리는 한미동맹과 공권력의 노골적인 폭력에 의해 민중의 투쟁이 물리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으며, 생존의 벼랑 끝에서 정부와의 협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주민대책위의 판단을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의 상황이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패배주의적이며 청산주의적인 인식에 견결히 반대한다. 미국의 군사패권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있는 한국 민중들의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만약 우리의 운동 조건이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다면, 전술적으로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며, 투쟁을 가로막는 장벽과 탄압에는 오직 새로운 투쟁주체의 형성과 정세에 적합한 조직적 대응이 필요할 뿐이다. 2006년 가장 치열하고 지난한 투쟁의 선봉에 서있던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은 이제 또 다른 조건에서 새로운 역할과 내용으로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에 연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협상과정에서 운동의 대의와 원칙을 최대한 유지해 나가고, 2007년 성토작업을 저지하는 투쟁의 현장에서, 지금 어깨 걸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의 연대의 힘을 다시 한번 믿는 것이며, 또한 다시 한 번 함께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뼈아픈 비판과 반성으로 현실을 직시하자 평택 범대위 공동 집행위원장단 및 집행위원회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고 평가해야 한다. 지난 12월 10일 공동 집행위원장단 회의에서 주민대책위로부터 주민-정부간의 협상과정을 '통보받았다'는 사실부터가 매우 심각한 문제다. 9.24 평화대행진 이후 범대위 및 운동진영은 주민들의 열악한 조건을 함께 책임지며 이후 투쟁을 예비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 주민대책위가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결국엔 이후 투쟁을 한 치도 전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운동진영은 무능하게 상황을 방기하고 있었다. 2006년 하반기 민중 총궐기가 진행되었던 시기에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은 멈춰져 있었고, 투쟁동력을 복구하기 위한 조직 재정비의 노력은 부재했다. 두 번째 문제는 협상사실이 공개적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평택 범대위를 비롯한 운동진영은 이 상황을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의 중차대한 국면의 변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일련의 상황은 결코 정보공유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고, 또한 특정 회의 차원에 한정해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12월 10일 범대위 공동 집행위원장단 회의의 결정은 무책임했다. 당시 범대위는 주민-정부 간의 협상을 핵심 투쟁주체의 보존과 대중투쟁을 고양시키는 하나의 계기로써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못했고, 그 결과 현재에도 주민들이 처한 불리한 입지를 바꿀 수 있는 운동적인 개입이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여기서 당시 주민대책위 측이 요구한 정보의 비공개원칙을 존중하는 것과 당시 상황을 심각한 국면의 변화로 인식하여 평택 범대위 집행위원회 및 참가단체들이 어떻게 대응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소통하고 지혜를 모아가는 과정이 결코 배치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자. 긴급한 상황에 대한 조직적인 대응방안에 대한 논의는, 평택 범대위의 논의체계와 집행구조를 최대한 유연하게 활용하면서 진행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을 조직하고 책임져왔던 범대위 및 운동진영 모두는 다음과 같은 철저한 평가와 반성을 진행해야 한다. 2006년 하반기 내내, 김지태 이장 석방문제에 대해 주민들이 매우 절박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더 이상 투쟁의 원칙만으로 주민들을 설득할 수 없는 열악한 현지 상황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면, 우리는 이 긴급하고 심각한 상황에 대해 얼마나 주민대책위의 입장을 존중하며 주민들과 소통하려했고 운동의 전망을 설득하려 노력했는가? 또한 우리는 투쟁 국면의 중요한 변화가 충분히 예상되고 있는 상황에서 평택 범대위 내부의 취약한 논의력을 보완하고, 보다 조직적인 투쟁의 결의를 모아내기 위해 집행위원회 및 참가단체, 각 지역의 운동단위들과 소통하고 이후 투쟁방향을 모색하려 했는가? 또한 우리는 하반기 이후 급속히 소진된 평택 투쟁의 동력과 범대위 참가단체들의 결합력을 높이기 위해, 주민들의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발빠르게 공유하고 투쟁을 호소하기 위한 재조직화의 노력을 기울였는가? 아직까지도 운동진영의 뼈아픈 반성과 평가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으며, 평택 범대위의 향후 운동방향은 분명하게 제출되지 못하고 있다. 평택 범대위 내에 현재의 주민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가 있지만, 운동의 대의와 원칙에 입각해 현 상황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이 운동을 함께했던 대중들에게 '이제부터 이렇게 싸워나가자'는 입장을 제시하는 것은 운동진영의 기본 임무일 것이다. 언론의 왜곡에 의해 주민들의 상황과 협상 과정에 대한 불필요한 의문과 오해가 생겨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주민들이 처한 객관적인 조건을 다시금 운동의 불씨로 만들어 내고, 평택투쟁의 대중적 동력을 우리 스스로 지켜나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주민-정부 간 협상국면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의 중대한 국면변화를 의미한다. 전쟁기지로 바뀌게 될 농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곳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온 주민들의 평화적 생존권을 사수하고자 했던 투쟁은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수많은 대중들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택한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을 지지하였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반대하는 평택투쟁은 단지 경기도 지역의 사안이 아니라 양심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동참해야 하는 범국민적인 운동이 되어왔다. 정부의 살인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지난 4년 동안 평화를 향한 민중들의 역사적인 투쟁을 이끌어왔던 것이다. 주민총회를 통해 결정된 주민대책위의 입장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협상은, 이제부터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이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군기지 확장사업이 5년 유예되었고, 아직 전쟁기지 확장이라는 문제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이 이제부터 전혀 다른 조건에서 전혀 다른 싸움으로 준비되어야 할 때임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제 우리 앞엔 더욱 어렵고 열악해진 투쟁의 조건과 5년이라는 시간만이 남아있다. 지난 투쟁 과정에서 운동진영이 해내지 못했던 한계와 무능함에 대해 뼈아픈 비판과 반성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단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1)1.2일 공개된 주민-정부간의 협상내용 중 일부 김춘석 주한미군이전대책기획단 부단장 : 재협상 이런 것을 말하면서 정부가 계획대로 추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재협상을) 논의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논의의제가 아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금년 3.4월 이전에 (주민들이) 떠나야 하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김지태 팽성주민대책위 위원장 : 언제까지 뭐 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 말대로 꼭 이뤄야 겠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 시키는 것 밖에 없다. 그 윗선에서는 변경 계획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민들에게 그런 이야기 하지말라는 것은 주민들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고, 단지 '우리가 당신들이 불쌍하니까 집행시기를 미루고 있을 뿐이다. 말 잘들으면 며칠 미뤄주겠다.' 이런 발상은 안된다. 김춘석 : 협상의제를 주민 생계지원, 이주 관련 이런 것에 한정하면 어떤지? 김지태 : 그 의제를 받아들이겠는데, 대신에 철조망을 철거하라, 재협상을 하라는 것에 대해 어느 분들을 소개해 줄 수 있느냐. 저희한테 그 분들을 만나게 해줘야 한다. 여기 있는 세 분(정부측 대표자)들에게는 다시는 '재'자라는 소리도 안꺼낼 테니까. 그런 일을 하는 분이 있지 않느냐 만나게 해달라. 김춘석 : 그것은 외교부라든가 국방부가 미군과 같이 하고 있다. 대추리 주민이 한다고 해서 재협상 할 것을 안하고 안할 것을 안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 외교부나 국방부 그런 부서와 미군이 (협상)하고 있다. 김지태 : 자기들끼리 계획 못 세우게 (우리가)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김춘석 : 그러면 계속 이 대화가 늦어진다. 김지태 : 여기 세분들에게는 다시는 이야기 안 한다는 것이다. 강수명 국방부 주한 미군기지이전사업단 단장 직무대리 : 그 의제를 하나로 받아서 이야기 하자. 김지태 : 그 쪽 채널이 별도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 없이 이 쪽만 가지고 갈 수 없다. (동영상촬영-들소리 방송국, 녹취록정리-통일뉴스) 본문으로

  • 2007-02-12

    뼈아픈 비판과 반성이 없다면, 단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의 최근 상황에 대하여 언론에 의해 알려진 주민-정부 간의 협상의 왜곡보도 2007년 1월 초, 언론은 팽성 주민대책위와 정부 간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으며, 주민 이주문제가 곧 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기사를 보도하였다. 또한 이 기사들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이 이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전망도 내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언론 보도는 협상의 내용자체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로 주민들의 입지를 좁히고 협상을 속전속결로 끝내려는 정부의 입장을 대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지난 1월 2일에 시작된 팽성 주민대책위와 정부 간의 협상에 대해서 국무조정실 주한미군이전대책기획단 관계자는 논의 의제를 '주민이주와 생계지원'으로 한정하기로 했다고 발언했고, 언론은 주민들이 이주 원칙에 완전히 합의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대책위는 이날 협상 자리에서 주민 이주 문제를 논의하는 것과 함께 평택 미군기지 확장사업의 재협상과 철조망 철거를 계속해서 요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1) 주민대책위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사업의 재협상을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요청했고 정부는 이에 "하나의 의제로 받아서 이야기하자"고 답하였다. 따라서 주민이 이주에 대한 협의를 시작한 것은 사실이나, 협의의 주제를 이주 문제에 한정지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일 합의문에서 '주민이주와 생계지원'이라는 문구는 주민측이 제시한 재협상에 대한 요구를 포함하여, 그 문구 뒤에 '등, 주민요구사항'을 추가하여 정리된 바 있다. 따라서 현재 진행된 협상으로 인해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언론 보도는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일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평택투쟁의 불씨를 잠재우려는 치졸한 행태에 불과하다. 주민들의 상황과 주민대책위의 판단 1월 2일, 정부는 국무조정실 보도 자료를 통해 "정부는 인도가처분 승소에 따른 (생가) 철거시한인 1월 4일을 앞두고 평택미군기지 이전반대 팽성 주민대책위(위원장: 김지태)가 1월 1일 이주관련 협의를 전격 제의해 옴에 따라 이를 수용"한다며 "이번 협의는 지난해 11월 말 주민 측이 대화재개 의사를 전달해옴에 따라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됐다"고 발표했다. 국무조정실의 발표대로, 주민대책위는 김지태 이장의 석방을 조건으로 주민들의 이주대책 협의를 정부 측에 요청하였다. 주민대책위 간부들은 현재 장기화된 투쟁에서 주민들의 피로와 좌절이 극에 달했다는 상황을 인식하여 주민들의 동요를 막고 마을 공동체를 보존하기 위해 최선의 방안을 찾고자 하였다. 12월 27일 오전, 주민대책위는 주민모임을 소집하여, 김지태 위원장 석방을 조건으로 이주에 관해 정부와 협의하고 있음을 주민들에게 공식적으로 보고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12월 28일, 김지태 위원장이 석방되었다. 1월 2일 첫 번째 합의문이 발표되고, 1월 3일 두 번째 협상이 진행되었다. 1월 6일에 열린 주민총회에서 김지태 위원장은,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 주민들의 솔직한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주민들 모두 계속 싸워나갈 의지를 밝히지 못했다. 현재 이주의 상과 정부의 생계대책지원 내용에 대한 주민들의 통일된 의견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남아있는 가구들이 흩어지지 않고 대추리, 도두리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집단적인 이주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을 분명히 밝히고 있을 뿐이다. 주민들에게 투쟁의 구심이었던 김지태 위원장이 구속된 지 7개월이 지나는 동안, 주민들은 투쟁의 동력을 잃어갔으며 이 와중에 10월 추석이후, 도두리 20여 가구 전체가 이주에 합의하게 되었다. 이후, 남은 대추리 46가구 주민들은 좌절과 고립감으로 괴로워했고,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결정도, 포기하고 이주해야 한다는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김지태 위원장의 석방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9.24 4차 평화대행진 이후, 범대위의 겨울나기 사업, 자매결연 사업 등의 계획이 제출되었지만 주민들의 막막한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주민들이 투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원칙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주민대책위 내에서는 아직까지 미군기지 확장 반대라는 운동의 대의와 원칙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운동의 대의와 원칙만으로 더 이상 싸움을 지속시키기 어렵다는 주민들의 판단이 이미 내려졌지만, 향후 범대위와의 연대방식은 여전히 쟁점으로 남아있다. 장기화된 싸움으로 주민과 주민대책위 간부들은 극도로 지쳐있는 상태고, 생계대책의 현실적 막막함에 가로막혀 있다. 평택 범대위의 인식과 판단 12월 10일, 평택 범대위 공동 집행위원장단 회의에서 주민대책위는 김지태 위원장 석방을 조건으로 이주대책에 대해 정부와 대화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주민대책위는 이 사실을 공동 집행위원장단 회의에 한정하여 공유할 것을 요청하였고, 회의에 참석한 공동집행위원장들은 이를 존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2월 14일 다시 열린 공동 집행위원장단회의에서는 주민-정부간 협상문제에 대한 이견이 확인되었고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22일 김지태 위원장의 재판 이후, 12월 23일 공동집행위원장과 집행위원회 참가단체들, 평택지킴이들이 참가하여 확대 공동집행위원회 수련회를 개최하였고, 당시 상황에 대한 범대위의 판단을 논의하였다. 주민대책위 측은 주민들이 더 이상 투쟁을 지속할 수 없기에, 김위원장의 석방을 조건으로 이주문제를 협상하고 있으며, 주민들이 3년간의 투쟁을 접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존중해 달라는 요지로 발언하였다. 이 자리에서 12월 10일 공동집행위원장단의 결정에 대해 몇 가지 이견이 제기되었다. 첫째, 주민-정부 간의 협의 방식과 과정을 비롯해 주민들의 열악한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공동 집행위원장단에서만 공유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긴급한 상황에 대한 범대위의 조직적인 논의와 판단이 계속 유보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기간 공집장 회의-집행위원회로 이어지는 논의구조의 비민주성 문제로 제기되었다. 둘째, 현재 진행되고 있는 주민-정부 간 합의가 주민대책위의 상황을 더욱 불리하게 만드는 것이기에 이를 즉각 중단하고 범대위와 함께 새로운 협상의 방식과 내용, 정책적 대안을 모색할 것이 제안되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 공동 집행위원장단은 주민대책위에 양해를 구하고 12월 27일 집행위원회에서 이 상황을 공유하고 논의하기로 결정하였고,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들이 개진되었으나 결국 주민대책위의 기존 입장을 바꿔내지 못했다. 12월 27일, 66차 집행위원회에서 주민-정부 간 협상 사실이 보고되었고, 범대위가 이에 대한 자기평가와 향후 운동의 방침을 시급하게 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12월 29일과 31일 확대 공동 집행위원장단 회의와 팽성 주민대책위와의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범대위는 '평택주민-정부 간 대화에 즈음한 주민대책위, 평택 범대위의 입장'을 공동으로 발표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민대책위는 공동성명서의 일부문안의 삭제와 이견을 제기하였고, 공동 입장발표 여부 자체에 대해 주민대책위에서 판단할 시간을 요청했다. 1월 4일 67차 집행위원회에 주민대책위의 입장을 모아오기로 하였으나, 현재까지 주민대책위의 입장이 정리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1월 4일 67차 집행위원회에서는 2006년 투쟁평가와 향후계획을 논의하면서 1>현재 주민-정부 간의 협의를 범대위가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의 문제와, 2>기간의 논의과정에서 드러난 범대위 논의구조의 폐쇄성과 비민주성에 대한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이에 대한 토론이 장시간 이어졌으나 범대위의 인식과 판단에 대한 결론은 모아지지 못했다. 현재의 상황에 대해 공동 집행위원장단 참가 단체들이나 집행위원회 내부적으로도 기본적인 인식을 통일하지 못한 채 각기 상이한 입장을 제기하고 있다.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팽성 주민대책위는 2003년에 결성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평택 미군기지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으며, 평화의 땅을 지켜내기 위해 치열한 투쟁의 고삐를 결코 늦춘 적이 없다. 900일에 가까운 주민촛불집회가 매일같이 진행되었고, 농성, 항의방문, 집회 등 평택 범대위 투쟁의 최전선에서 주민들은 언제나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다.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미군기지 반대운동 중 가장 많은 주민들이 그 어떤 투쟁보다 더욱 강력한 단결로 결속되어 있었고, 그 힘은 2006년 한 해 동안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운동의 대중적 공간을 열어내었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의 군사패권전략과 이에 조응하는 한국정부는 유례없는 국가폭력을 휘둘러 주민들의 투쟁 의지를 질식시켜왔다. 5월 4일에 자행된, 80년 광주를 연상케 하는 군사작전과 유혈진압은 주민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고, 이후 공권력의 잔인무도한 폭력은 주민들의 기본적인 인권과 생존권을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민 개개인에게 가해지는 회유와 협박은 끊임없이 이어져 주민공동체를 파괴하였고, 평택 범대위와의 연대투쟁의 정신을 훼손시켰다. 정부는 단 하루 만에 들판과 마을을 '군사보호시설'로 둔갑시켰고, 이중삼중의 불법검문소를 설치하여 대추리, 도두리를 '감옥'으로 만들어 버렸다. 주민들은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농토와 피 같은 작물이 시커먼 철조망과 군부대에 의해 짓밟히는 모습을 매일같이 보아야만 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국방부관계자들과 경찰은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주민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였다. 이처럼 대추리, 도두리에서는 경악할 만한 인권유린사태가 몇 달째 지속되어왔고, 수세적인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대중투쟁은 전개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민대책위는 6월 초 정부의 대화요청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대화를 시작하면서 6월 5일 자진 출두한 김지태 위원장을 구속시켰으며, 대화국면을 곧 의도적으로 파기하였다. 애초부터 정부는 주민과 협상할 생각이 없었고, 주민들이 지쳐 스스로 무릎 꿇게 만들려 했다. 정부는 현재까지 평택 미군기지 확장사업에 대한 마스터플랜조차 만들지 않았고, '2008년까지 공사완료'라는 LPP개정안은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공사강행과 주민굴복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탄압의 고삐를 전혀 늦추지 않았고, 주민에게는 공갈협박을 가하고, 국민전체를 상대로 해서는 대사기극을 거리낌 없이 벌여왔던 것이다. 2006년 하반기 동안 이는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9.24 평화대행진을 앞두고 빈집을 철거하여 공사단행의 의지를 표명하였고, 김지태 위원장의 재판을 고의적으로 연기시키며 주민들을 지치게 하고, 도두리 주민들을 회유, 협박하고 매수하였다. 또한 도탄에 빠진 주민들의 분노를 자극하기 위해, 김지태 위원장에게 실형2년을 선고하고, 주민들을 '죄인'으로 매도하였다. 이렇듯 정부가 행사한 일련의 행태는 목숨을 걸고 끝까지 투쟁을 이어가고자 했던 주민들에게 살인적인 폭력 그 자체였다. 그리고 최근 주민들이 투쟁을 지속하는 길을 다시 한 번 선택하려 했을 때, 정부는 이제 생계문제를 볼모로 주민들을 옥죄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해 11월, 주민대책위 간부들은 장기 투옥된 김지태 위원장의 조속한 석방과 파괴 위협에 놓인 주민 공동체의 보존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주민들의 마지막 저지선이라고 판단, 정부와의 협상을 먼저 제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부는 현재 주민대책위의 마지막 생존의 몸부림조차 고압적인 자세로 제압하며 주민들의 고통을 기만하고 있다. 12월 15일, 법원이 다시 한 번 정부 편에 손을 들어주면서 인도가처분 신청에 대한 항소심 판결은 뒤집어졌고, 정부는 1월 4일자로 주민들의 생가를 철거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는 심지어 평택 미군기지 확장사업의 5년 연기가 불가피하다는 언론 보도가 나간 직후의 일이었다. 정부는 마치 큰 선심이라도 쓰듯 김지태 이장의 석방을 위해 법원에 탄원서를 내줬고, '주민대책위가 대화요청을 받아들이고', 1월 4일 생가철거를 유보해 줌으로써,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 가능해졌다고 떠들어대고 있다. 이처럼 정부당국의 체계적인 탄압과 주민들에 대한 고사작전은 주민대책위로 하여금 김 위원장의 석방과 주민-정부 간의 협상을 맞바꾸는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다. 주민대표가 없는 상태에서 투쟁을 지속하는 것도, 협상을 진행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던 주민들의 가장 취약한 조건 그 자체가 협상의 보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주민들의 불리한 입지를 활용하여 속전속결로 협상을 끝내려 언론보도를 조작하는 작태를 보이는 한편, 주민들에게는 전에 협의 매수된 주민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상금을 올려주겠다며 역겨운 생색을 내고 있다. 우리는 한미동맹과 공권력의 노골적인 폭력에 의해 민중의 투쟁이 물리적으로 밀릴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으며, 생존의 벼랑 끝에서 정부와의 협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주민대책위의 판단을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의 상황이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패배주의적이며 청산주의적인 인식에 견결히 반대한다. 미국의 군사패권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 있는 한국 민중들의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만약 우리의 운동 조건이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다면, 전술적으로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며, 투쟁을 가로막는 장벽과 탄압에는 오직 새로운 투쟁주체의 형성과 정세에 적합한 조직적 대응이 필요할 뿐이다. 2006년 가장 치열하고 지난한 투쟁의 선봉에 서있던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은 이제 또 다른 조건에서 새로운 역할과 내용으로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에 연대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협상과정에서 운동의 대의와 원칙을 최대한 유지해 나가고, 2007년 성토작업을 저지하는 투쟁의 현장에서, 지금 어깨 걸고 있는 수많은 민중들의 연대의 힘을 다시 한번 믿는 것이며, 또한 다시 한 번 함께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뼈아픈 비판과 반성으로 현실을 직시하자 평택 범대위 공동 집행위원장단 및 집행위원회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고 평가해야 한다. 지난 12월 10일 공동 집행위원장단 회의에서 주민대책위로부터 주민-정부간의 협상과정을 '통보받았다'는 사실부터가 매우 심각한 문제다. 9.24 평화대행진 이후 범대위 및 운동진영은 주민들의 열악한 조건을 함께 책임지며 이후 투쟁을 예비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 주민대책위가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결국엔 이후 투쟁을 한 치도 전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운동진영은 무능하게 상황을 방기하고 있었다. 2006년 하반기 민중 총궐기가 진행되었던 시기에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은 멈춰져 있었고, 투쟁동력을 복구하기 위한 조직 재정비의 노력은 부재했다. 두 번째 문제는 협상사실이 공개적으로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평택 범대위를 비롯한 운동진영은 이 상황을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의 중차대한 국면의 변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일련의 상황은 결코 정보공유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고, 또한 특정 회의 차원에 한정해 상황을 이해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12월 10일 범대위 공동 집행위원장단 회의의 결정은 무책임했다. 당시 범대위는 주민-정부 간의 협상을 핵심 투쟁주체의 보존과 대중투쟁을 고양시키는 하나의 계기로써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못했고, 그 결과 현재에도 주민들이 처한 불리한 입지를 바꿀 수 있는 운동적인 개입이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 여기서 당시 주민대책위 측이 요구한 정보의 비공개원칙을 존중하는 것과 당시 상황을 심각한 국면의 변화로 인식하여 평택 범대위 집행위원회 및 참가단체들이 어떻게 대응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소통하고 지혜를 모아가는 과정이 결코 배치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자. 긴급한 상황에 대한 조직적인 대응방안에 대한 논의는, 평택 범대위의 논의체계와 집행구조를 최대한 유연하게 활용하면서 진행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을 조직하고 책임져왔던 범대위 및 운동진영 모두는 다음과 같은 철저한 평가와 반성을 진행해야 한다. 2006년 하반기 내내, 김지태 이장 석방문제에 대해 주민들이 매우 절박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더 이상 투쟁의 원칙만으로 주민들을 설득할 수 없는 열악한 현지 상황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다면, 우리는 이 긴급하고 심각한 상황에 대해 얼마나 주민대책위의 입장을 존중하며 주민들과 소통하려했고 운동의 전망을 설득하려 노력했는가? 또한 우리는 투쟁 국면의 중요한 변화가 충분히 예상되고 있는 상황에서 평택 범대위 내부의 취약한 논의력을 보완하고, 보다 조직적인 투쟁의 결의를 모아내기 위해 집행위원회 및 참가단체, 각 지역의 운동단위들과 소통하고 이후 투쟁방향을 모색하려 했는가? 또한 우리는 하반기 이후 급속히 소진된 평택 투쟁의 동력과 범대위 참가단체들의 결합력을 높이기 위해, 주민들의 상황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발빠르게 공유하고 투쟁을 호소하기 위한 재조직화의 노력을 기울였는가? 아직까지도 운동진영의 뼈아픈 반성과 평가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으며, 평택 범대위의 향후 운동방향은 분명하게 제출되지 못하고 있다. 평택 범대위 내에 현재의 주민 상황에 대한 인식의 차가 있지만, 운동의 대의와 원칙에 입각해 현 상황을 공동으로 인식하고, 이 운동을 함께했던 대중들에게 '이제부터 이렇게 싸워나가자'는 입장을 제시하는 것은 운동진영의 기본 임무일 것이다. 언론의 왜곡에 의해 주민들의 상황과 협상 과정에 대한 불필요한 의문과 오해가 생겨나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주민들이 처한 객관적인 조건을 다시금 운동의 불씨로 만들어 내고, 평택투쟁의 대중적 동력을 우리 스스로 지켜나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주민-정부 간 협상국면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의 중대한 국면변화를 의미한다. 전쟁기지로 바뀌게 될 농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곳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아온 주민들의 평화적 생존권을 사수하고자 했던 투쟁은 한국사회의 보편적인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수많은 대중들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선택한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을 지지하였고,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반대하는 평택투쟁은 단지 경기도 지역의 사안이 아니라 양심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동참해야 하는 범국민적인 운동이 되어왔다. 정부의 살인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지난 4년 동안 평화를 향한 민중들의 역사적인 투쟁을 이끌어왔던 것이다. 주민총회를 통해 결정된 주민대책위의 입장과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협상은, 이제부터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이 더 이상 기존의 방식으로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군기지 확장사업이 5년 유예되었고, 아직 전쟁기지 확장이라는 문제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투쟁이 이제부터 전혀 다른 조건에서 전혀 다른 싸움으로 준비되어야 할 때임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제 우리 앞엔 더욱 어렵고 열악해진 투쟁의 조건과 5년이라는 시간만이 남아있다. 지난 투쟁 과정에서 운동진영이 해내지 못했던 한계와 무능함에 대해 뼈아픈 비판과 반성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단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을 것이다. 1)1.2일 공개된 주민-정부간의 협상내용 중 일부 김춘석 주한미군이전대책기획단 부단장 : 재협상 이런 것을 말하면서 정부가 계획대로 추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재협상을) 논의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논의의제가 아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금년 3.4월 이전에 (주민들이) 떠나야 하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김지태 팽성주민대책위 위원장 : 언제까지 뭐 해야 한다는 것은 자기 말대로 꼭 이뤄야 겠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의견을 묵살 시키는 것 밖에 없다. 그 윗선에서는 변경 계획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민들에게 그런 이야기 하지말라는 것은 주민들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고, 단지 '우리가 당신들이 불쌍하니까 집행시기를 미루고 있을 뿐이다. 말 잘들으면 며칠 미뤄주겠다.' 이런 발상은 안된다. 김춘석 : 협상의제를 주민 생계지원, 이주 관련 이런 것에 한정하면 어떤지? 김지태 : 그 의제를 받아들이겠는데, 대신에 철조망을 철거하라, 재협상을 하라는 것에 대해 어느 분들을 소개해 줄 수 있느냐. 저희한테 그 분들을 만나게 해줘야 한다. 여기 있는 세 분(정부측 대표자)들에게는 다시는 '재'자라는 소리도 안꺼낼 테니까. 그런 일을 하는 분이 있지 않느냐 만나게 해달라. 김춘석 : 그것은 외교부라든가 국방부가 미군과 같이 하고 있다. 대추리 주민이 한다고 해서 재협상 할 것을 안하고 안할 것을 안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 차원에서 외교부나 국방부 그런 부서와 미군이 (협상)하고 있다. 김지태 : 자기들끼리 계획 못 세우게 (우리가)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김춘석 : 그러면 계속 이 대화가 늦어진다. 김지태 : 여기 세분들에게는 다시는 이야기 안 한다는 것이다. 강수명 국방부 주한 미군기지이전사업단 단장 직무대리 : 그 의제를 하나로 받아서 이야기 하자. 김지태 : 그 쪽 채널이 별도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 없이 이 쪽만 가지고 갈 수 없다. (동영상촬영-들소리 방송국, 녹취록정리-통일뉴스) 본문으로

  • 2007-02-12

    사회주의와 세계대전: 제 2 인터내셔널의 붕괴(1)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박스1%] 국제 사회주의 정책을 향해 '프롤레타리아란 무엇인가?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혐오하는 대중들이 프롤레타리아다.' 조레스(Jean Jaur s)의 이 말은 50년 동안 인터내셔널이 만들어낸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국제 사회주의는 자신들을 '평화의 당파'라고 정의했다. 사회주의와 反군국주의, 사회주의와 국제주의는 동의어였으며, 모든 선전의 중심테마였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 평화로웠던 유럽의 인터내셔널은 원칙적인 선언과 자본주의가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그쳤다. 군국주의와 전쟁을 비판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라는 결의안이 제1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의 모든 대회1)마다 채택되었다. 결의안들은 자본의 분파가 전쟁을 만들고, 노동자들이 평화를 만든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자본주의 체계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고, 사회주의의 확립을 통해서만 중단될 수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체계가 정점에 달할수록 무력 충돌이 더욱 폭력적이고 빈번해질 것이라 주장했다.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조직된 프롤레타리아뿐이었다. 프롤레타리아가 서로의 절멸에 이용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어책은 국제주의와 계급의식이었다. 군국주의를 막고, 세계평화 체계를 설립하기 위해 인터내셔널 대회는 비밀 외교의 폐지, 직업군인을 민병대로 대체할 것, 전면적인 군축 등을 제안했다. 1896년 런던대회에서는 중재 시스템을 설립하기로 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는 전쟁을 찬성하는 자들에게 반대해서 투표하는 것,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군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총파업은 아나키스트적 편향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2) 1893년에서 1907년까지의 인터내셔널 대회는 총파업이 전쟁을 방지하는데 실효성이 없다고 보았고, 사회주의자들이 의회를 장악해서 전면적 군축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군비지출에 반대하는 투표가 최선책이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위협은 점점 심각해졌고, 전쟁과 군군주의는 더 이상 단순히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파쇼다 위기, 스페인-미국 전쟁, 의화단 사건 당시 중국에 대한 개입, 보어전쟁,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독일의 분쟁, 러-일 전쟁, 발칸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분쟁을 거치면서 평화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바이앙( douard Vaillant)과 조레스는, 평화가 사회주의 발전의 전제조건이며, 전 세계적인 충돌에 직면한 유럽의 미래에 대한 사회주의적 해법과 사회주의 국제정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일반원칙만을 주장하는 결의문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 당들의 상호협력과 공동행동이 필수적이었다. 1902년 12월 국제사회주의사무국(ISB, International Socialist Bureau)3)이 암스테르담 대회의 의제 선정을 위해 소집되었을 때, 조레스는 전쟁을 더 이상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귀결로 보고자 했다. 그는 범게르만주의나 3국 동맹과 같은 문제,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전면적 군축의 달성방안과 중재재판소 등의 실현방안에 대한 검토를 요구했다. 조레스는 사회주의자들의 반전행동에서 '최대한'의 행동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독일과 러시아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공연히 그를 불신했다.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정책이 구체화되고, 실천적으로 적용되는 데는 몇 가지 중요한 장애물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제2인터내셔널의 제도적 구조였다. 제2인터내셔널은 자율적 당들의 연맹으로, 가입자들에게 정치적/전술적 문제에 있어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다. 각 당들은 자신의 고유한 프로그램과 목표를 고수했고, 인터내셔널의 유일한 이슈는 최대한 협동을 조직하는 것뿐이었으며, 실질적 결정력이 없었다. 이런 구조는 결의안을 실행하는데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규약 제정에 20년이 걸렸고, 1900년까지 제2인터내셔널은 정기 대회로만 구성되었다. 대회의 결의안들은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었지만, 가맹 당들의 협력이나 국제적 행동을 보장할 조직이 없었다. 1900년 파리 대회에 이르러서야 ISB와 집행위, 서기관의 상설 기관이 설립되고 브뤼셀에 본부를 두었다. 하지만 이런 제도화에도 가맹 당과 조직의 자율성의 원칙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으며, 인터내셔널은 여전히 독립된 조직이 아닌 연합조직으로, 지부들과 분리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대회만으로 인터내셔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 세계적 운동의 확산을 위해 ISB가 만들어졌지만 아무런 권위가 없었으며, 수 년 동안 사회주의 세계의 우편함 역할만을 했다. 전쟁의 기미가 커질수록 사무국의 권력과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아졌고, 1905년 위스망스(Camille Huysmans)4)가 서기장으로 임명되면서 ISB는 최종적 지위를 획득한다. ISB는 사회주의자의 활동을 조정하고, 대회들 사이의 업무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이는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 결의안을 이끌어내게 된다. 하지만 사무국의 지위 강화 속에서도 1889년에 만들어진 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고, 대회의 역할도 손상되지 않았다. 응집력 있는 조직과 제도적 기구의 부재는 뿌리 깊은 상황을 반영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시기 동안 주요 유럽 국가들의 사회주의 운동은 수적, 정치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다양한 당들의 민족적 현실이 중시되었고, 경험과 이해의 차이로 인해 정치적 판단은 민족적 이해로 협소하게 제한되었다. 두 번째 큰 장애물은 독일사회민주당(SPD)과 프랑스 사회주의자 그룹 사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독일의 半숙명론적 입장과 실천없는 평화주의는 프랑스의 낙관적인 행동 요청을 가로막았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 차이로 SPD와 프랑스는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지도력을 다투게 되었다. 인터내셔널에서 우위에 있던 SPD에 맞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다른 개념, 노동자들의 다른 행동을 승인받기 위해 싸웠다. 이런 맥락에서 조레스는 SPD의 정치적 무능력과 함께, SPD가 혁명적 행동이 아니라 의회에 집중한다고 비판한다. 평화에 대한 입장 차이는 특히 1905-6년 모로코 위기5)동안 명백하게 드러났다. SPD 집행부의 미봉책들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근심어린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바이앙과 조레스는 1905년 9월, 각국 사회주의자들이 공동행동을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을 ISB에 요청했다. 이 제안은 1906년 3월 6일 ISB회의에서 논의되고 승인되었지만, 일반적 내용만이 다루어질 뿐이었다.6) 1907년 8월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의제로 '군국주의와 국제분쟁'이 선정되었다. 비록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군국주의와 전쟁 문제에 대해 정치, 이론의 영역에서 활기찬 논쟁이 장시간 진행되었지만, 문제는 철저히 규명되지 못했고, 전쟁이 벌어질 때 사회주의자의 행동과 태도의 가이드라인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논쟁과 더불어 좌파 대표자들(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중도, 수정주의 우파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갈등도 심해졌다. 모든 논쟁은 학파간의 차이와 국제 사회주의 내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분열의 징후를 드러냈다. 다수파가 유럽전쟁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반적 정책을 원했던 반면, 좌파들은 자본주의 전쟁에서 연원할 수 있는 혁명에 관심을 가지면서 역사적 시각과 전략에서 심대한 차이를 드러냈다. 공동 결의안 준비를 맡은 위원회의 논쟁은 이런 다양한 관점을 반영했다. 바이앙, 조레스는 의회개입에서부터 총파업과 폭동에 이르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전쟁을 방지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요청했다. 사회주의자의 전술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총파업에 반대한 독일 대표는 이 제안에 격렬히 반대했다. 합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중재를 위한 소위원회가 구성되어, 로자(Rosa Luxemburg)와 레닌(Lenin), 마르토프(Martov)가 '전쟁은 발발해서는 안 되고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킬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하고,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 정치적 위기를 이용해 모든 힘을 다해서 대중들이 자본주의 계급 지배를 빨리 중단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대표들이 이 좌익적 개정안을 채택했지만, 이들 중 다수는 이것이 가상의 미래일 뿐이라며 결의안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임박한 혁명'은 부르주아를 협박하는데 효과적이었을 뿐, 전략적 목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결의안은 방어전쟁과 제국주의 전쟁을 구별하는 사람들과, 민족적 방어와 계급투쟁을 찬성하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을 무시했다. 이 문제는 순전히 이론적일 뿐 긴급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합의는 불가능했고, 이 갈등은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이 무딘 결의안은 사회주의 반전행동에 복무하지 못했으며, 인터내셔널에 존재하는 분열을 영속화했다. 역설적으로 이 결의안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켰다. 레닌은 결의안이 개량주의에 대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SPD 지도부는 극단주의에 대한 승리라고, 조레스는 국제 정책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의 결정적 승리라고 보았다. 분명 슈투트가르트 대회는 전환점이었다. 인터내셔널에서 SPD의 권위는 분명한 타격을 받은 반면, 프랑스 사회주의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획득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두 '열강' 사이의 갈등은 남아있었으며, 좌파와 중도/우파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고,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 전략에 대한 문제가 격렬하게 논쟁되었다. 비록 논쟁이 인터내셔널의 일반 방침이나 활동들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에 사회주의의 국제 정책에 대한 논쟁은 완전히 이론적 영역으로 격하되지 않았다. 뒤이은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과 발칸위기7)는 더욱 불안을 일으켰다. 1908년 10월 회의에서 ISB는 재빨리 국제 상황을 분석하고 프랑스가 제안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전쟁의 지속적 위협을 언급하며 모든 사회주의 당들이 경계와 활동을 배가하고, 정세와 상황에 따라 국가/국제적 틀에서 적용할 수 있는 실천 방법과 조치들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실천은 수동적이었고, 선언적인 평화주의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영국 대표인 글래시어(Bruce Glasier)는 '이런 결의안은 정치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다. 그러나 사실 ISB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비난에 대해서는 조직의 어려움에 대한 언급으로 답했다.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가 국제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고' 반복하면서, 제한된 국가적 관점에서 구체적인 정치 문제를 바라보았다. 전쟁 거부는 동의가 되었지만, 공동 대외정책의 자세한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달랐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이론이 빠져있는 모순과 취약성들을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인터내셔널의 다수파는 전쟁을 자본주의의 고유한 문제이며, 열강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증대되는 위협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전쟁은 다양한 형태의 정의 없이 비난되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식민지 전쟁이나 정복 전쟁에 국한되었고, '침략 전쟁'과 '방어전쟁'은 정치적 행동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으로 충분히 정의되지 않은 채 사용되었다. 이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었지만, 지도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경멸적으로 거절했다. 예를 들어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의 SPD 에센 당 대회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당의 전술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결정은 자국 정부가 침략전쟁을 치르는지, 방어전쟁을 치르는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가? 침략인가 혹은 조국을 방어하는 것인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가? 베벨(August Bebel)은 특유의 방법으로 질문을 회피했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확신을 갖고 전쟁이 침략적인지 아니면 방어적인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판(Van Ravestejn)과 같은 몇몇 젊은 사회주의 투사들은 일체의 단일화 시도를 거부하면서, 방어적 공격이나 방어 전쟁이라는 구별의 어려움을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사회 계급과 민족의 이해가 존재하더라도 침략전쟁과 방어전쟁에 대한 명확한 구별은 어쩌면 언제라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모든 전쟁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반대되어야 했다. 카우츠키(Karl Kautsky)도 비슷한 입장으로 1907년에서 1909년 사이에 침략과 방어전쟁 이론을 명확히 거부했다. 그는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도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위한 전쟁은 불가능하며, 프롤레타리아는 국제적 세계 정책에서 발생하는 전쟁의 위협을 처음부터 단호히 거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인터내셔널은 순전히 학술적 문제라고 간주했던 논의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랐고, 결국 유럽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정의하는 것을 회피했다. 인터내셔널의 활동은 예방 전략에 집중되었다. 전쟁 가능성의 검토, 위협이 현실이 되는 것을 예방하는 것, 어떤 참사라도 제한하는 것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위기가 발발하자 즉시 적용된 인터내셔널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예방 전략을 통해 '전쟁에 대한 전쟁' 슬로건을 현실로 만들 수 있도록 공동의 계획을 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이 1910년 코펜하겐 대회의 목표였고, 대회 의제에 다시 '군국주의와 군축 문제'가 포함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차는 키어하디(Keir Hardie)8)와 바이앙이 제시한 운동에 대한 격렬한 논쟁에서 다시 드러났다. 키어하디-바이앙은 "대회는 전쟁을 예방하고 저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수단들 중 가장 적극적 형태의 선동과, 대중행동뿐만 아니라 특별히 전쟁 도구(무기와 탄약, 수송 등)를 공급하는 산업의 효과적인 총파업을 고려한다."고 제출했다. 이 제안은 독일의 좌파 대표자들에게조차 너무 혁명적이었고 혼란을 일으켰다. 독일 대표단의 격렬한 반대에 반데르벨데(Vandervelde)9)는 결의안을 ISB에 회부해 더 많은 검토를 거쳐 다음 인터내셔널 대회의 의제로 제출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결국 채택된 결의안은 독일대표단의 관점을 드러냈다. 결의안은 무장경쟁이 가속되지 않는다고 한정하고, 행동수단을 순전히 의회적인 것들과, 전쟁을 찬성하는 투표 거부, 강제력이 있는 국제 중재 재판소 회부, 무장 제한, 모든 국가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대회에서 결정된 유일한 것은 非사회주의자들의 평화운동 프로그램과 거의 동일했다. 코펜하겐 대회는 또 한 번 중심 문제에 정면대처하지 못했다. ISB는 여전히 전쟁이 일어날 경우 사회주의자의 행동을 조정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지만, 각국의 행동을 명확히 정의하고 그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 한 이런 책임은 거의 무의미했다. 유일하게 내려진 결정은,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위협적인 수준일 때는 언제나, 한 단체 이상이 요구할 경우 ISB 서기장이 사무국 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코펜하겐 대회는 슈투트가르트 대회부터 존재했고 모로코 위기가 결정적 촉매가 된 분열을 촉진했다. 좌파들은 코펜하겐 대회를 부르주아 평화주의로 향하는, 이전 대회로의 후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다수는 코펜하겐 대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두 차례의 인터내셔널 대회를 통해 국제 사회주의 정책의 특정 원리들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고, 전쟁의 위협에 대해 취해야할 조치들을 결정하는 것은 다음 1913년 비엔나 인터내셔널 대회로 넘겨졌다. 최대한 각국 정당들의 행동을 조정하고 반군국주의 운동을 강화하고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중요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임무는 어떻게 수행될 것인가? 평화주의에 의해 혹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총공격으로? ISB에서 프랑스-독일의 차이: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후 국제 상황의 악화는 사회주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제국주의 개념과 정세 에 대한 분석은 모로코 위기, 이탈리아의 트리폴리타니아(리비아) 침공, 발칸 전쟁이 일어난 1911-1913년 사이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외교적 긴장과 분쟁의 국지화 가능성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이론에 대한 관심부족이 드러났고, 이론은 단지 배경지식의 문제로 격하되었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원인이라고 보았던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 대한 조사는 거의 없었다. 국제정책의 장기적 프로그램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공식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했다. 장기적이지만 모호한 공식과, 즉각적으로 타당하지만 극단적인 것 사이에서는 항상 전자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1911년과 1912년, ISB와 전원회의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점 차이는 더 이상 추상적 논의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모든 논쟁의 끝에는 대중을 동원할지, 거리로 나설 것인지, 의회 활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 결정해야했다. 이 때 각국 조직들의 진정한 색채가 드러났다. 외교적 위기가 발생하자 관련 국 사회주의 당들은 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다. 각 당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정당화하면서 자국의 책임을 최소화하고 다른 정당들의 행동을 요구했다. 간신히 인터내셔널 대회를 열 수 있을 정도의 당들 사이에 내재된 불신은 위기가 나타나자 명확해졌다. 1908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문제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회주의 세력 사이의 격렬한 충돌을 낳았다. 약소 세르비아 정당은 오스트리아 당이 국제적 관점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 위기를 판단해 비엔나 정부를 돕고 있다고 비난했다. 1910년 영국과 독일의 해군력 경쟁에 대한 독일과 영국 사이의 문제도 심각했다. 노동당(Labour Party)과 ILP(Indepedent Labour Party of Great Britain)가 명확히 재무장에 반대했지만, 사회민주연합(Social Democratic Federation) 대표는 독일의 위협을 비난하며 자국의 해군 증강을 변호했다. 힌드만(Hyndman)이 이끄는 영국 사회주의 그룹은 민족주의적 경향을 드러냈다. 코펜하겐 대회에서 힌드만의 지지자들은 독일이 세계 정복을 꾀한다며 격렬하게 비난했지만, 자국의 무장 정책, 특히 해군력 향상을 지지했다. 힌드만은 SPD에 대한 적대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1905년에 그는 SPD의 정치적 근시안과 무능력을 비판하는데 그쳤지만, 1908년에는 공개적으로 독일이 행동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의문시했다. 1911년에는 SPD가 인터내셔널의 모든 반전 캠페인을 방해한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가 전쟁의 위협과 가능한 예방수단을 검토하기 위해 프랑스, 영국, 독일 대표를 모으자고 ISB에 세 차례 제안했을 때마다 SPD가 참석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카우츠키는 즉시 ISB 서기장에게, 힌드만의 주장이 비방임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긴장은 완화되지 않았고, '힌드만 사건'은 더욱 심한 갈등으로 반복되었다. 국제적 긴장의 심화로 SPD 집행부와 프랑스 대표는 다시 ISB에서 갈등을 겪었다. 그들은 1>국제 상황에 대한 해석과 평가, 2>고유한 평화 요인으로서 인터내셔널의 역할, 3>위협에 대처할 수단에 대한 판단에서 불일치를 드러냈다. 이러한 차이는 1905년 초에 확연해졌다. 이들은 각자 행동하면서 인터내셔널의 행동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베벨은 주의를 요청하며, 1905년 6월 모로코 분쟁에 대한 ISB 회의 소집을 요청한 힌드만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1914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는 영국이 상황을 너무 심각하고 예민하게 본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위기마다 회의를 소집하고 결의안을 통과시키면 신뢰를 잃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는 프랑스와 정반대였다. 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심각한 외교적 위기가 발생했던 모든 순간에 낙관주의적 태도를 보이며 침묵했다. 반면 인터내셔널이 심각한 충돌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던 프랑스는 국제 정세가 악화될 때마다 근심했고, 활발하게 움직였다. 상황을 정확히 인식했던 조레스, 바이앙, 장 롱게(Jean Longuet)는 오랫동안 외로이 자신의 관점을 유지했다. 외교 분쟁의 위험을 인식했기 때문에 조레스와 바이앙은, 사회주의자들이 중재와 화해 노력으로 국제 분쟁을 진정시키는데 활발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프랑스인들은 이론적 고려보다는 조레스가 합리적으로, 바이앙이 직관적으로 도달한 현실주의적 평가에 자극되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의 실용주의에 상당한 의심을 갖고 있었고, 프랑스의 예측과 분석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계속 유지했다. 조레스의 평화에 대한 전망도, 중요한 국제 분쟁 해결에서 사회주의자들의 건설적 역할에 대한 개념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 SPD는 대외 정책의 문제에 대한 합의를 만들지도, 크게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SPD는 그것이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대외 정책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꺼려했다.10) 독일의회(Reichstag)의 사회주의 그룹은 독일 정부의 팽창주의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들을 지지하기도 했다. 특히 모로코 문제에서 이런 태도가 잘 드러난다. 1908년 10월 ISB 회의에서 몰켄부르(Molkenbuhr)는 모로코 위기에 대한 독일 정부의 태도를 '양동작전'이라고 묘사하며, 위협이 가상적이고 피상적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사실관계를 심하게 단순화하는 것으로, 당 우파가 제안한 '아프리카에 남아있을 독일의 권리' 이론에서 볼 수 있는 민족주의적 경향의 선언에 가깝다. 전쟁 이전에는 정부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반대는 더욱 없었다. 프랑스계 모로코가 독일이 지브랄터 해협으로 가는 것을 막아 식민지로 접근할 수 없게 되자, 1911년 SPD는 모로코 주권의 보호를 주장했다. 콩고 배상문제와 관련해서도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은, 그들이 받는 금액이 보잘 것 없다는 것에 국한되었다. 프랑스-독일이 보인 두 번째 차이는 인터내셔널이 평화의 요인인지에 대한 것이다. 국내 정책에 실질적 영향력이 있었고, 의회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독일 사민당은 인터내셔널을 신경 쓰지 않았다. SPD 대표들은 ISB가 반전 투쟁의 믿을만한 조정자인지 의심했으며, 사무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했다. SPD는 인터내셔널에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통해 타국의 당들과 ISB를 다룰 수 있는 위선적인 후원 정책을 추구했다. 외교적 문제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능력에 대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국제 사회주의의 행동을 조정하는 것이 달성 불가능한 것으로,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보았다. 몰켄부르는 ISB가 노동자 정책에 한정되지 않고, 화려한 성명밖에 만들지 못하면서 대외 정책의 주요 문제들에 개입하는 것을 비난했다. 모로코 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1911년 아들러(Victor Adler)11)도 ISB의 외교영역에서의 활동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며, 대중 집회 이상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대중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 특히 조레스와 바이앙의 믿음은 이와 정반대였다. 조레스는 혼란 속에서 사회주의의 국제적 조직이 마침내 출현하여 실질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또한 인터내셔널의 행동을 촉구했으며, 사회주의 국제 정책에서 ISB의 역할을 강조했다. ISB의 프랑스 대표 바이앙도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어떤 전쟁의 징후에도 바이앙은 놀랄만한 속도로 반응했다. 분쟁이 있을 때마다, 외교적 긴장이 있을 때마다 그는 ISB에 자신의 우려를 알렸고, 사회주의 세계에 경고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제안, 그의 부단한 행동 요청, 그의 예측은 오스트리아 당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심지어 적대를 낳기도 했다. SPD 집행위원회는 프랑스의 활동을 성급하거나 틀린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1908년 9월에 바이앙이 제안한 프랑스-독일의 공동 집회를 SPD 집행위원회가 반대했다. 하지만 SPD는 이전의 회의주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는 평화투쟁에 개입할 필요성을 인정했던 SPD 지도부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했다. 이런 변화는 부르주아 사회가 계속 발전,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전쟁의 결과가 잘못된 혁명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1908년 이래로 SPD의 평화주의 운동은 특정한 '정치적 변화'보다는, '지속적으로 증대하는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야한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당의 행동들은 자본주의를 조금씩 파괴하는 전략에 기반한 것이었고, 군비 경쟁의 위협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중간계급의 이해가 일시적으로 만나 협력이 가능했기 때문에, 평화주의 행동은 부르주아를 위협하지 않는 것으로 국한되어야 했다. 독일은 이에 따라 조직된 노동자의 편에서 중간/중하위 계급이 공동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고전적 형태의 반대 전술을 취했다. 여론이 전쟁을 예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카우츠키의 관점에 따라, 선전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당의 선전 주제는 집행위원회의 공식 관점(전쟁이 일어난 뒤에 저항하는 것은 뒤늦은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중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호전적 성향을 막는 것이다. 근대전쟁은 대중의 동의 없이 발발하기 어렵고, 만약 발발한다면 지배자들은 그것의 참혹한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에 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반전 행동에 적합한 분야는 언론과 의회였다. 카우츠키가 보기에 최후의 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럽의 시민들이 연합하여 공동의 상업 정책을 추구하고, 의회, 정부, 군대를 갖는 국가의 연합으로' 유럽연합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지만, 이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전술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프랑스는 '세계평화의 유일한 보증인은 조직된 사회주의 노동자'라는 코펜하겐 대회 결의안을, 행동 촉구로 해석했다. 대중들은 결집되어야 하며, 전투적 노동자들의 방식으로 전쟁의 위협을 막아야 했다. SPD에게 이는 현실에 조응하지 않는 원리일 뿐이었다. 독일 내부의 논쟁도 벌어졌다. 판네쿠크(Pannekoek)에게 반제 투쟁의 목적은 제국주의 성장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항하는 대중을 결집시키는 것이었고, 이렇게 조직된 대중들이 자본주의를 정복할 것이었다. 그는 카우츠키에게 있어 마르크스주의는 수동적인 대기주의이고, 모든 혁명적 행동은 비과학적 아나키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독일의 국경을 넘지도, 교의상의 논쟁 틀을 넘어서지도 못했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논쟁은 아가디르 위기12) 이후에 더 격렬해졌다. 비록 이것은 여전히 '무대 뒤쪽에' 있었지만, 그 결과로 ISB는 반전 캠페인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고, 이와 같은 긴장의 순간에 효과적 행동을 조직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독일이 모로코에 전함을 보내기로 한 급작스런 결정때문에 관련국 사이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위스망스는 즉시 관련된 국가 대표들을 소집해 파리에서 ISB 회의를 개최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반데르벨데는 이런 문제들에 어떤 '대단한 위급함'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SFIO13)는 반대의 입장이었고, 7월 4일 CAP(Commissin Adinistrative Permanante de la SFIO)는 긴급하게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의 사회주의 당 대표들을 소집해서 심각한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ISB에 요구했다. 이틀 후 위스망스는 이 요구에서 제안된 모든 사회주의당 대표들을 초대했다. 독일 대표 몰켄부르는 모로코 위기에서 위기의 징후를 발견할 수 없다며 프랑스의 제안을 거부했다. 모로코 문제는 단지 독일 정부의 양동정책일 뿐이고, '이를 통해 자국 정부가 국내 상황에 대한 관심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며, 독일 의회 선거에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베벨도 단호하게 이와 같은 입장을 밝혔고, ISB 서기장은 회의 계획을 중단했다. 조레스와 프랑스는 인터내셔널 대회 결의안에 따른 행동을 촉구했다. SPD 집행부는 이런 제안에 매우 공감한다며 응답했지만 명확한 선을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했고, 입장조차 결정되지 않았다. 당의 태도는 상황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혼란스런 독일의 행동은 사실 '민족적 논리'와 공명하는 것이었다. 고요함 뒤에는 완전한 무능력이 있었다. SPD의 고민은 독일이 관련될 때에만 시작되었다.14) 1911년 7월 21일 프랑스와 독일의 협상 파기의 조짐이 생기고 영국의 태도가 비판적이 되었을 때, 베벨은 위스망스에게 ISB 소집과, 브뤼셀에서 국제 총궐기를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베벨은 이런 조치들이 '만약 위기가 심각해질 경우'에만 취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3일 후, 사회민주연합과 노동당의 서기장이 ISB 소집을 요구했다. 하지만 베벨은 그동안 '상황이 평화로워졌고', 프랑스가 영국을 위해 독일과의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 제안에 반대했다. 반면 프랑스 대표들은 상황이 다시 한 번 악화되었다고 판단해 영국의 제안을 지지했다. ISB 집행위원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결국 아들러가 독일의 핑계를 지지함에 따라 회의는 다시 한 번 연기되었다. 당 집행부가 반전 투쟁의 임무에 무능력하다고 생각한 좌파들은 SPD의 우유부단함과 느린 반응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1911년 7월 24일 로자는 몰켄부르와 위스망스의 서신 교환을 발표하고, 당 집행부의 기회주의적 전술을 엄하게 비난했다. 뒤이은 논의에서 SPD 집행부는 꼴사납게 행동했고, 사람들은 몰켄부르의 침묵을 유죄 시인으로 받아들였다. 로자의 비판에 분개한 베벨은 당 집행부의 어리석음에 절망했고, 특히 몰켄부르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다. 그러나 베벨은 1911년 9월 예나 당 대회에서 당의 단결을 핑계로 당 집행부에 완전히 동조했다. 좌파들의 강력한 비판에도 SPD는 신중정책을 계속했고, 반전 행동 강화의 요청이 계속되어 베를린 트렙토우 공원의 인상깊은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15) 1911년 9월 11일 반데르벨데는 몇몇 프랑스 정치-경제 그룹의 공격적 캠페인에 대해 독일 정부가 불쾌해하며, 상황이 악화될 위험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또 프랑스와 독일 정부의 모든 협상이 실패로 돌아갈 것 같다는 정보도 있었다. 만약 협상이 실패하거나 관계가 결렬된다면 상황이 진짜 위험해질 것이고, 전면적인 반전의 노력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당황한 ISB 집행부는 신속히 행동해야만 했다. 최근의 충돌 요인들과 관련해서 슈투트가르트와 코펜하겐 결의안의 이행 수단을 찾자는 반데르벨데의 제안에 따라 CAP가 긴급히 소집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강경노선을 강화하려한다는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위스망스는 ISB가 즉시 소집되어 국제 반전 행동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묵인했다. 급진적으로 표현된 선언에서 대참사를 막기 위해 취해져야할, 심지어 폭동까지 포함된 모든 수단이 논의되었다. '모든 국가의 노동계급이 동의하는 답은 정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혁명적 봉기를 통해 국제 평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위스망스는 SPD에도 개입했다.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예나 대회에 프랑스, 영국, 독일 대표의 회합에 대한 의견을 묻는 전신을 보냈다. 베벨, 아들러, SPD 집행위는 이 의견의 진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9월 14일 반데르벨데는 우려가 일정 부분 사라졌으며, ISB 회의가 긴급하지 않다는 편지를 베벨에게 보냈다. 9월 17일 위스망스는 문제의 핵심이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에 있다는 것과 ISB 회의 소집을 결정했음을 독일 당 지도부에 전했다. 코펜하겐 결의에 따라 가맹 당에게 회의 소집의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SPD 집행부는 마지못해 회의를 받아들였다. 9월 23, 34일 취리히에서 ISB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다. 의제의 중심주제는 프랑스-독일 대결을 초래할 수 있는 모로코 위기였다. 베벨은 코펜하겐 결의안을 재확인하려 했고, 바이앙이 제출한 발의는 총파업 문제에 대한 활기찬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 논의는 즉각 인터내셔널이 행동을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신 검사'로 이어졌다.16) 이것은 또다시 식민지 분할이 벌어질 경우 이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사회주의 당들을 초청하자는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11월 4일 프랑스와 독일은 모로코에 대한 협정을 체결했다. 위기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심각하지 않은 수준에서 정리되었다. 독일의 예측이 실현되면서 그들의 위세가 커진 반면, 프랑스는 또 한 번 침착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모로코 위기에 뒤이어 1911년 가을 이탈리아의 트리폴리타니아에 대한 식민전쟁이 이어졌다. 발칸의 벌집 3개월 동안 주저하고 망설인 후에 인터내셔널은 취리히에서 채택한 결의안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노동자의 반전운동은 모로코 위기 동안 효과적 행동을 취하지 못했지만, 이탈리아의 침략에서는 시의적절한 행동을 보여주었다.17) ISB는 이탈리아 정부가 터키에 최후통첩을 보낸 후 즉시 전쟁을 시작하리라는 사실을 48시간 전에 알았다. ISB가 반전운동을 지도하게 되었고, 집행위는 즉시 이탈리아의 침공을 비판하며 행동계획을 제시했다. 10월 7일 ISB의 입장을 명백히 담은 비밀 회보 초안이 대표들에게 보내졌다. 코펜하겐 결의안에 따라 무장 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분쟁이 발칸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과 발칸에서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계획에 반대하는 것이 목표로 제시되었다. 집행위는 동시에 터키의 노동계급이 너무 취약하거나, 이탈리아의 행동이 불충분하거나,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있을 경우 ISB가 직접 개입하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ISB는 언론, 성명, 의회 질의와 저항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열강의 노동자당에 사회주의자들의 결집을 요구했다. 또한 ISB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과 발칸 사회주의자들을 지원했다. 이 캠페인들을 실행함에 있어서 인터내셔널은 만족스러운 결과와 실패를 모두 보여주었다. 먼저 긍정적인 면으로, 중앙과 서부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대규모 저항 운동을 살펴보자. 1911년 10월 초, ISB 집행위원회는 최대한 대중적으로 각국에서 동시에 발칸침략에 저항하는 국제공동행동을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상황을 집행위처럼 심각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많은 대표들이 제안에 찬성했다. 베벨은 공개적으로 여전히 모로코 사태가 중요하며, 발칸에서 분쟁은 없을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독일의회 선거 직전이었기 때문에 SPD는, 삼국 동맹의 일원으로 이탈리아의 편이었던 자국 정부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캠페인에 무모하게 참가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베벨의 응답은 동시에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터키에 대한 깊은 혐오를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공격에 희생당했음에도 터키에 대한 어떤 연민도 없었으며, 대신 오토만 제국에 대한 전통적인 적대와 청년투르크 당에 대한 불신을 찾을 수 있다. 1908년 7월에 일어난 청년투르크 혁명18)은, 이를 중요한 진보로 본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혁명은 후진적 터키가 평화를 위한 투쟁과 발칸의 현상유지에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불러일으켰다. 1908년 10월 11일 ISB는, 오토만 제국의 인민들이 이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근대적 자유'들을 도입할 수 있으며, 따라서 노동자 운동의 발전에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라며 혁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런 지지는 청년 투르크 혁명의 노선이 변화되면서 약해졌다. (이 운동이 정권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청년 사회주의자 운동에 대한 청년투르크 정권의 보복은 그 야만성이 이전 정권을 능가했고, 인터내셔널을 걱정하게 했다. 1911년 1월 살로니카에 모인 터키의 다양한 사회주의자 그룹의 대표들은 반동에 맞선 오토만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지원을 요구했고, ISB 서기장은 이 호소에 응답했다. 하지만 터키의 사회주의자 박해는 청년투르크 정권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불러왔다. 조레스만은 상황이 우선적으로 유럽 열강의 파멸적 정책의 결과라고 보았고, 터키 정권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신중을 요청했다. 터키가 유럽의 발전과 진보를 공유하도록 청년투르크 정권을 지원하는 것이 유럽사회주의의 의무였다. 비록 터키의 반사회주의 정책은 끔찍했지만, 인터내셔널은 평화라는 더 중요하며 일반적 문제로 사태를 바라봐야 했다. 1908년 이래로 동부, 특히 발칸은 유럽열강들의 세력 다툼의 핵심이며, 유럽 전쟁을 일으킬 분쟁의 중심이었고, 터키 새 정권의 강화는 동쪽 상황의 안정화를 의미했다. 조레스의 관점은 오랫동안 전체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되고, 심지어 공격받기도 했지만, 불안정한 발칸의 균형이 끝장날 수 있는 침략에 직면한 1911년 10월 ISB 집행위에서는 조레스의 관점이 우세했다. 인터내셔널은 도덕적 고려만이 아니라 정치적 고려, 평화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가맹 당들에게 터키를 지원하는 운동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터키의 반노동자 정책이라는 문제가 남아있었지만, 인터내셔널은 분쟁의 예방과 종식을 위해 청년투르크와의 반목을 잊으려했다.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자 연합(Worker's Socialist Federarion of Salonica)의 완화된 태도와 청년투르크 지도자들의 화해 노력 덕분에 이 관점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미 1911년 10월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자 연합의 집행부는 ISB 서기장에게, 조직은 이탈리아의 침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떠한 적대적 반대 행위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왔다. 한편, 터키 하원 의장은 10월 16일 반데르벨데에게 유럽 사회주의의 원조를 호소하는 서신을 보냈고, 원하던 결과를 얻었다. ISB는 11월 3일 터키 의원들의 순례에 맞춘 유럽 각 도시의 공동행동 혹은 집회 요청을 채택한다. ISB 대표단의 다수는 이탈리아의 공격이 강대국이 군사 행동을 할 변명을 제공하며, 이슬람과 유럽의 전쟁으로, 세계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제안에 동의했다. 침략자를 규탄하고 터키를 지지하며 제국주의 정책을 규탄하는 인터내셔널의 슬로건은 사회주의 당과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이탈리아가 트리폴리의 합병을 발표한 날인) 1911년 11월 5일의 대규모 집회는 상당한 규모여서, 낙관주의와 국제 사회주의의 역량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사회주의는 모든 역량을 이 평화공세에 쏟았고, 평화주의 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평화공세는 1911년 말과 1912년 초 SPD 선거 캠페인의 중심테마였고, 이를 통해 1912년 1월 선거는 SPD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이런 성공에도 인터내셔널은 무엇보다 이탈리아, 부분적으로 발칸의 행동부족으로 실패한다. 인터내셔널의 이전 결의안들은 사문화되었다. 취리히의 ISB 회의에서 이탈리아 대표 치오티(Pompeo Ciotti)는, 자국 정부의 어떤 군국주의적 움직임에도 당이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9월 26/27일 저녁 이탈리아 정부가 터키에 최후통첩을 보냈을 때, 그리고 48시간 후 전쟁을 선언했을 때, ISB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1905년과, 특히 1911년 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ISP(Italian Socialist Party)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군비 지출과 전쟁 위협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하여, 국제주의와 평화를 보존하려는 당의 결정을 증명했다. 하지만 1911년 9월 말 총파업을 준비하던 ISP 집행부19)는 자유주의 개량과 보통선거권 도입에 대한 약속에 매수당했고, 후퇴했다. 증대하는 민족주의의 압박 하에서 비쏠라티(Bissolati)와 보노미(Bonomi)가 이끄는 당의 개량주의 우익은, 공식적으로 정부 정책과 트리폴리타니아 전쟁을 지원했다. 이 전환은 이탈리아 노동자 운동과 인터내셔널 양자에 막대한 동요를 일으켰다.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 연합의 대표는 즉각 ISB 서기장에게 이탈리아의 혼란과 이것의 위험성을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는 두 개의 입장, 정책을 추구할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의 반전행동은 만장일치여야 한다는 내용의 비밀회보가 10월 12일에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에게 회람되었다. 사무국과 다른 가맹 당들에 대한 비난이 담긴 위스망스의 편지는 ISP 집행부 전원회의에서 논의되었고, (결국) 기각되었다. ISP 집행부는 당이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확신한다며, 서기장 치오티로 하여금 이탈리아에 대한 정당하지 못한 비난에 대해 ISB에 항의하도록 했다. ISB 집행위는 이탈리아인들을 달래는 것처럼 했지만, 불안을 감추지 않았다. 사무국은 ISP에 대해 규탄하지는 않았지만, ISP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전쟁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도록 압박했다. 이탈리아인들은 ISP 집행부가 인터내셔널 결의안과 원칙에 따른 의무를 다할 것이라며 집행위를 안심시켰다. 치오티는 모든 응답에서 당이 신용을 지킬 것이라 주장했고, 1911년 12월에는 비판은 모두 중단되어야 하며, 집회에 대한 요구는 모두 과장되고 불합리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치오티는 계속 이탈리아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전쟁 반대의 의무를 다했다고 강조했지만, 위스망스는 그의 해명을 의심했다. 인터내셔널의 입장에서 ISP는 터키-이탈리아 전쟁동안 신용을 잃었고, 이후 이탈리아 당의 제안은 의심을 받았고, 경멸당했다. 이탈리아에서 같은 당 내 다양한 경향의 공존과 우익의 지배가 영향력 있는 평화주의 행동을 마비시켰다면, 발칸에서는 다양한 좌익 분파 사이의 경쟁과 적대가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발칸 사회주의 당들은 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시안적인 관점을 버리고 발칸을 전체로 간주하지 못했다.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 동남부 유럽 사회주의 당들이 발칸의 사회적, 민족적 문제에 합의하고, 공통의 문제로 풀어가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고, 1910년 1월 7일에서 9일까지 베오그라드에서 발칸 사회주의 당의 첫 번째 협의가 열렸다. 발칸의 심각한 민족성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 개혁을 보장하고, 민주적 변화들을 이끌 발칸 국가들의 민주 공화국 연합 창설이 공통의 목표로 결정되었다. 그들이 유럽 자본주의의 개입과 정복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발칸 인민들을 지방주의와 고립에서 해방시켜 동일한 문화와 경제적 정치적 자산을 갖게 하고, 밀접한 국가들 간 경계를 없애고, 외국지배의 멍에를 없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갖도록 해야 했다. 첫 번째 베오그라드 협의는 반제국주의적 원칙을 명확히 했다. 이 원칙을 시행하고 공동 전술을 만드는 것은 두 번째 협의의 임무였다. 1911년 8월 루마니아의 사회 민주당이 두 번째 발칸 사회주의자 협의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 제안은, 1903년 이래로 불가리아의 두 사회주의 당(좌익 '좁은 사회주의당(Narrow Socialist Party)'과 개량주의 '넓은 사회주의당(Broad Socialist Party)') 사이에 고조되어온 투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터키-이탈리아 전쟁으로 발칸에 대한 위협은 갑자기 끔찍한 현실이 되었고,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현실적이고 발 빠른 행동 협의가 필요했다. 1911년 10월 초에 세르비아 사회주의당이 새롭게 협의 소집을 요청했고, ISB 집행위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좁은 당'은 '넓은 당' 대표의 협의 참석을 불허해야한다는 요구를 고수했다. 그들의 주장은 ISB가 커다란 정치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기대를 좌절시켰다. '좁은 당'의 불참 때문에 단순한 예비회의만이 열렸으며,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공동 반전 행동에 대한 희망과 필요성에 대한 성명서만을 발표했을 뿐 어떠한 구체적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이 때 ISB가 직접 개입해서 불가리아의 두 당을 2차 협의에 참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좁은 당'은 양보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세르비아 사회주의 당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소국으로의 분열(Balkanization)'에 반대하고, 발칸인민연합을 건설하려던 사회주의자들은 결정적 순간에 불화와 적대를 드러냈다. 그들 사이의 차이뿐만 아니라 남부유럽 사회주의자와 중앙, 서유럽 사회주의자들의 발칸 문제에 대한 불일치가 혼란을 가중시켰다.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 연합의 대표들은 발칸 문제에 대한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통일된 지침과, 발칸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을 인터내셔널에 요구했다. 그들은 인터내셔널이 발칸 내 사회주의 당들의 차이를 없앨 수 있으며, 발칸의 제국주의적이고 반노동계급적 전술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거대 당파들은 오랜 기간 동안 일반적 진술에 만족했다. 1904년 ISB는 오토만 제국의 억압받는 소수자들의 자율성에 찬성을 한다고 선언했으며, 코펜하겐 대회 결의안도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의 사회주의 당들은 발칸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을 이해하거나 공유하는 것을 꺼려했으며, 할 수도 없었다. 서부 유럽의 목표는 유럽의 평화 유지였으며, 최악의 경우에 분쟁이 일어나도 발칸으로 국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발칸 문제를 발칸 사회주의자들의 좁은 관점이 아니라 세계적 맥락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가정에서 서유럽은 동남유럽의 현상유지를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발칸 연합의 원칙을 지지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변화된 환경에 순응하고 현실에 이데올로기를 조화시키라고 조언했다. 이런 조언들은 단지 발칸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했을 뿐이었으며, 그들이 '국제주의'라는 개념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놀라움은 더 커졌다. 발칸사회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당이 정부의 대외 정책에 반대하지만, 이와 동시에 군주정이 발칸에서 문화적 사명을 갖고 있다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합병에 저항했지만, 동시에 오스트리아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세르비아 정부를 비난했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은 화가 나서 ISB와 모든 가맹 당들에게 논의를 요구했다. ISB는 스스로의 역할을 오로지 정보제공에만 한정했다. ISB는 조정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관점을 완전히 지지하던 체코 대표 네멕(Nemec)의 응답과 세르비아 대표가 제출한 문서를 어떤 논평도 없이 회람의 형태로 보냈다. 그리고 코펜하겐 대회 전 오스트리아 당의 이름으로 레너(Karl Renner)20)가 공식 사과를 하면서, 수사적 국제주의의의 모습을 좋아하는 인터내셔널의 입장에서 공식적인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불신은 남아있었다. 1911년과 1912년에 발칸과 독일, 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의 활발한 분석과 논쟁이 있었다. 이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양자 간 관점의 간극은 메워지지 않았으며, 입장의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서구 사회주의자와 발칸 사회주의자 사이의 차이는 단지 전술이 아니라, 민족성 문제, 민족 문제, 제국주의적 현상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 때문이었다. 1912년 8월 1일, 세르비아 사회주의 당 서기장 포포비치(Du an Popovi )가 발칸의 관점을 대변해 위스망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발칸의 모든 긴장과 민족주의, 쇼비니즘의 발현이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는 유럽자본주의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상유지는 발칸의 불화와 무질서, 혁명과 전쟁의 영속적인 요소로 자본가 권력을 돕는 것이며, 평화와 문명의 적이었으며, 발칸의 죽음을 의미했다. 현상유지는 발칸 인민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으며, 발칸인민연합이라는 중대한 목표를 가로막았다. 현상유지는 평화의 보증이 아니라, 반대로 영원한 전쟁의 근원이었다. 거대 서구 사회주의 당들은 非개입이라는 한 가지 방법으로만 발칸 문제를 가두어 둘 수 있었다. 유럽에게 최고의 해답은 발칸 문제가 해결되지 않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열강의 식민정책과 발칸 문제로의 개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전면전은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의 관점은 발칸전쟁이 기정사실이 될 때까지 무시되었고, 이때에 이르러서야 오스트리아는 즉시 '발칸을 발칸 인민에게'라는 슬로건을 제출했다. 인터내셔널 정책의 역설을 보여준 것은 이론적이며 정치적인 차이였다. 사회주의지도자들은 발칸이 세계의 균형에 대한 위협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위기가 끝나고 분쟁이 해결되자마자 ISB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분규의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한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 ISB는 발칸에서 분쟁의 국지화 전술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중재야말로 '평화로운 국가들 사이에서 제국주의자들을 고립시킬' 이상적 해법이라고 보았다. 1912년 사회주의 언론들이 임박한 파국과, 갈등과 적대에 대한 예측을 했지만,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외교적 위기에 따른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소집된 ISB는, 다양한 갈등적 관점들 사이의 실용주의와 소극적 합의만을 보여주었다. 평온한 시기에 인터내셔널이 보인 활동은, 평화를 위한 그들의 투쟁이 사실상 끊임없는 즉흥극이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12년은 그 전 해보다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 알바니아의 폭동, 마케도니아의 불안과 유태인 학살, 불가리아에서 민족주의의 발호와 같은 위험징후가 발칸에 나타났다.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발칸의 지정학적 특징을 강조하며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폭발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발칸의 소식과 경계를 알리는 보고서들은 가맹당의 대다수에게 무시되었다. SPD는 언제나 냉정했다. 오직 프랑스 대표들만이 ISB에서 우려를 표하고 행동을 촉구했다. 반면 정보서비스만을 하던 ISB 집행위는 다음 국제 대회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결의안에 따라 대회는 1913년 열릴 예정이었지만, 네덜란드 대표단이 국제 대회를 소집할 만한 위급함이 없다는 이유로 1914년까지 대회를 연기하자고 제안했다. 1914년이 인터내셔널 50주년이기 때문에 선전하기 더욱 좋은 대회가 될 수 있다는 근거가 제시되었다. 네덜란드의 제안이 모든 가맹당 대표에게 제출되었고, 레닌 등 소수의 대표가 응답을 하지 않은 채 근소한 차로 제안이 가결되었다.21) 네덜란드의 제안 뒤에 SPD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단순한 과정의 문제로 다루었다. SPD 집행위는 바이앙-키어하디 수정안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국제무대의 소강상태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었다. 네덜란드의 제안은 다른 이유로 프랑스와 영국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22) 영국은 대회 연기를 원칙상의 이유로 거부했다. 이들은 1912년 10월 항의를 발표해서, 이런 과정이 '위대한 독일 당의 전통에 어울리지 않으며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대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반대는 정치적 특성에 의한 것이었다. 발칸 위기가 불러올 수 있는 불안정에 대한 행동을 논의하기 위해 국제 대회는 예정된 대로 열려야 했다. 정치적 상황이 혼란스럽고 전면전의 위협이 있다고 생각한 발칸 사회주의 당들의 대표들이 같은 주장을 제시했다. 최대한 빨리, 진지하게 평화에 대한 열망을 호소하고,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인터내셔널의 의무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위스망스에게 대회 연기에 관한 진실 해명을 요구했다. 그의 답변은 인터내셔널 내의 심각한 의견차와 불안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바이앙과 힌드만에게 독일-체코의 적대 속에서 대회를 열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한 폴란드와 러시아, 불가리아와 다른 국가들 사이의 의견차가 심각해 대회가 사회주의의 분열을 드러낼 것을 걱정했다. 그동안 발칸의 상황은 극적 전환을 맞아 무장 분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은 9월 20일 위스망스에게 발칸의 전반적 분위기가 억압적이며, 전쟁이 언제라도 발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2차 발칸 사회주의자 회합이 중요하고, 위급했으며, 이에 대한 ISB의 도움을 요청했다. 문제는 불가리아의 '좁은 당'과 '넓은 당'을 같은 석상에 앉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논의를 단축하기 위해 사무국이 공식적으로 루마니아 대표 라코프스키(Rakovsky)를 보낼 것이 제안되었지만,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고, 이전 해의 행동들이 반복되었다. 즉각적인 전쟁의 위협에도 '좁은 당'과 '넓은 당' 사이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없었고, 갈등만이 두드러졌다. 10월 초, 이 발칸 폭풍의 규모와 중요성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낙관주의 대신에 불확실성과 공황상태를 심어주었다. 인터내셔널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함에 따라 전통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전쟁의 위협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프랑스와 영국은 즉각 ISB 회의를 요구했지만, 독일 당이 다시 이를 가로막았다. 첫 번째 위협이 지나가자마자 베벨은 평정을 되찾았고, 다시 한 번 신중함을 권고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공포가 확실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조레스는 즉각 ISB에 가능한 빨리 비엔나 대회를 열자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현재의 분쟁이 안정되더라도 여전히 전쟁의 씨앗은 남을 것이기 때문에 대회를 통해 분쟁을 국지화하고, 외교적 수단으로 해법을 찾으려는 환상적 희망을 버리고 위협에 맞설 필요가 있었다. 10월 28일 브뤼셀에서 ISB 전체 회의가 소집되었다. 조레스는 이 회의를 통해 ISB가 전쟁의 확산에 반대하는 행동을 조직할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번에는 항상 신중하고 희망에 차 있던 아들러도 서기장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인정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베벨은 독일 대표에게 프랑스, 영국에 속지 말 것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라고 조언했다. ISB가 브뤼셀에서 모였을 때 1차 발칸 전쟁이 한창이었고, 분쟁을 국지화하고 전쟁의 확산을 막는 방법에 관한 문제에 논의가 집중되었다. 아들러는 인터내셔널이 '발칸의 슬라브 국가들의 자율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된 전쟁에 대해 저항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바이앙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개입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며 인터내셔널의 행동을 촉구했다. 그는 충분히 강력한 운동을 펼쳐 각국 정부가 혁명적 선동을 두려워하게 된다면, 분쟁이 확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가정에서 그는 강력하고 전면적 선동을 각국에 요구했다. 조레스는 낙관주의를 유지했다. 그는 각국 정부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국제대회의 소집으로 프롤레타리아의 행동 결정을 정부에 알리고, 열강의 어떤 개입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대회 일정을 앞당길 것인지, 1914년까지 연기할 것인지, 단독으로 국제협의를 소집할 것인지에 대해 오랜 논의가 진행되었다. 조레스는 대회 연기는 패배의 승인이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나 적절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법의 문제로 회의가 망쳐질 것처럼 보이자 반데르벨데는 크리스마스에 바젤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대회는 원래 날짜대로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크리스마스 바젤 특별대회와 비엔나 대회의 1914년 개최가 결정되었다. 바젤 대회를 효과적이고 인상적으로 열기 위해 ISB는, 전쟁과 유럽 열강의 발칸 개입에 반대하는 집중 캠페인을 요청했다. 유럽 프롤레타리아들은 모든 조직적 역량과 대중행동으로 이 지침을 따랐다. 10월 20일에 시작해서 베를린에서만 25만 명이 조직된 이 대중 집회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았다. 구체적이고, 대규모의, 그리고 적극적인 위험에 직면해 유럽 사회주의 당들이 행동을 통해 통일되는 특별한 시기였다. 여론이 조직되었고, 노동자들은 전면전을 반대하는 그들의 결심을 증명했다. 이를 통해 인터내셔널의 가상적 힘은 바젤 대회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바젤: 전쟁에 대한 전쟁 1912년 11월 초 상황이 악화되어 SPD의 요구에 따라 바젤 특별대회의 일자가 11월 24, 25일로 앞당겨졌다. 전쟁의 참상은 점점 위협적이 되었고, 세계전쟁의 위험이 있었다. 아들러도 SPD 집행부도, '나는 모든 것이 이성적으로 만족스럽게 해결될 것이고, 우리가 유럽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한다.'는 베벨의 낡은 낙관주의를 공유하지 않았다. 아무도 더 이상 '발칸 국가들이 휴전을 하고 평화협정을 시작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있지 않았다. 발칸의 화약고가 폭발할 가능성에 직면해서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태도를 명확히 하여 평화주의 활동에 힘을 쏟았고, 집중적인 반군국주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당 의장 하세(Hugo Haase)는 평화주의 활동이 재앙을 피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운동을 강화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인민의 대다수가 전쟁을 혐오하고 반대한다면, 정부는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이었다. 템펠호퍼 공원에서는 20만 명이 모인 평화 집회가 열렸다. 인터내셔널의 가맹당 모두는 SPD의 제안에 따라 이 반전 캠페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11월 17일, 수많은 유럽 도시에서 보다 대규모의 대중 투쟁을 조직했다. 11월 1일 유럽 논동자들은, '전쟁과 발칸 분쟁의 확산에 반대하는 행동'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호소에 응했다. 파리 근처 Pre Saint Gervais에서 10만 명이 집회를 열었다. 대회에 앞서 ISB의 결정에 따라 조레스, 바이앙, 베벨, 키어하디, 아들러, 라바노비치(Rubanovich)23), 위스망스로 구성된 위원회가 대회에서 제출할 결의안 초안 작성을 위해 모였다. 인터내셔널의 '현자들'은 국제 사회주의의 상황과 임무를 명확하고 자세하게 분석하는 것과 동시에, 입장 차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모였다. 바젤 대회는 반전투쟁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과, 인터내셔널의 힘을 표현해야 했으므로, ISB는 코펜하겐 대회에서 있었던 바이앙-키어 하디 수정안에 대한 논쟁이 재발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당시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바이앙의 입장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10년 11월 초에 바이앙은 위스망스에게 코펜하겐에서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인터내셔널의 모든 당파들이 자세히 검토하고 논평을 할 수 있도록 제안문 초안을 보낼 것을 주장했다. 바이앙은 프랑스 철도 노동자의 파업을 예로 들며, 이것이 국가적, 국제적 수준에서 실행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위스망스는 이에 따라 12월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문을 담은 회람문을 모든 가맹당에 보내면서 최대한 빨리 논평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직 네 개의 당만이 응답했다. 불만을 느낀 바이앙은 노조를 통해 당 지도부에 압력을 행사하려는 생각으로 위스망스에게 노조 조직에 직접 자문을 구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프랑스 CGT가 이미 총파업과 봉기를 포함해서 어떤 전쟁 계획에도 반응할 것을 결정했다는 것을 지적했다.24) 결국 (이전 회람문에 대한) 답변과, 각국 노조 조직에 자문을 구할 것을 요청하는 새로운 회람문이 보내졌지만, 만족할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의안 문안을 준비하려고 비밀리에 회합을 한 특별 위원회는 몇 가지 초안들을 검토했고, 총파업 문제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했다. 바이앙은 논평을 통해 폭동과 파업이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의 최선의 무기였으며, 짜르주의의 음모와 군사적 모험을 제어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인터내셔널은 모든 국가조직이 전쟁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할 것을 요청하고, 사용가능한 모든 방법과 역량으로 의무를 다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하지만 전쟁에 반대하는 최후의 수단으로써 총파업과 폭동은 거부되지도, 결정되지도 않았다. 독일은 여전히 입장을 유보했으며, 의심했다.25) 대회 전 날인 1912년 11월 23일, ISB는 위원회의 선언 초안을 검토하고, 550명의 대표들에게 만장일치로 채택될 문서를 준비하기 위해 모였다. 강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선언은 로자를 포함한 몇몇 대표들을 만족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전쟁을 예방하거나 끝내기 위해 반군국주의 대중파업과 같은 급진적 조치들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단락을 문서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했다. 결국 대회에 제출된 문서는 전쟁을 예방하는 구체적 수단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못했다. 조레스는 갖가지 커다란 가능성 때문에 결의안이 어떤 특정한 행동 방침을 정하지 못했고, 동시에 하나도 배제하지 못했다고 논평했다. 예측불가능하고 특별한 상황에서만 결정이 내려질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하는 수단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쟁 발발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사전에, 예외 없이 유효한 답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떤 수단이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둠으로써, 결의안은 다양한 분파 대표들과 정당 지도자들에게 완전한 해석의 자유를 허락했다. 이전 대회 결의안들과 달리 이번에는 상황에 따른 프롤레타리아의 국제 정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진술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결의안은 앞으로 있을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뿐이라는 단언적 진술로 시작되었다. 문서의 두 번째 부분은 발칸,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의 사회주의 당의 임무를 약술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독일, 프랑스, 영국의 노동계급에 맡겨졌다. 그들은 열강들 사이의 차이를 메우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받았다. 동시에 대회는 전쟁이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격분과 분노만을 일으킬 뿐이며, 혁명을 일어나게 할 것이라고 지배계급에 경고했다. 선언은 수 년 동안 사회주의자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문제에 대한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해법을 제공했다. 반전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외에도, 중간 계급과 모든 평화주의 요소들을 포함할 수 있도록 반전운동이 확장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바젤 대회는 새로운 어떤 것도 제시하지 못한 채, 이전 정책들에 대한 성과 없는 논의로 끝나게 되었다.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바젤 특별대회는 1914년 이전에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된 가장 강력하고 인상적인 반전 시위였다.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정부 집단들과 유럽의 여론에서 대회의 반향은 상당했다. 바젤 대회는 1912년 11월 유럽이 경험한 심각한 위기의 순간을 진정시켰다. 대회 때 높아진 긴장이 완화되자마자 단결의 부재가 명백해졌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했던 바젤 대회의 보고서에서 독일 보고서 편집자는 '기회주의적 이유로' 연설의 급진적 부분을 삭제했고, 이는 독일 사민당 조직의 혼란을 보여준다. 노조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정당들은 대회 이후 몇 달간 바젤 결의안을 문자 그대로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12년 12월 노동자들의 대규모 반전 집회가 유럽 전역에서 벌어졌다. ISB가 자신들의 관점을 고수했기 때문에 노동자 대중의 평화주의 열정이 계속 커졌음에도, 실제로는 아무런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 바젤에서 원칙은 정해졌지만, 그것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위협에 대해 평가할 수 있어야 했다. 사실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는 열강들 간 분쟁의 변동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이 정보의 부족은 1912년 12월에서 1913년 1월에 두드러졌다. 심각하게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평가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없이 ISB는 너무 성급하거나, 너무 늦게 행동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때 이른 행동으로 인터내셔널은 위신을 잃거나 전체 평화주의 투쟁의 미래를 위태롭게 할 것이었고, 반대로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패배를 뜻했다. 1912년 12월 상황은 다시 더 끔찍한 것으로, 유럽 전쟁은 더욱 가까워 진 것으로 보였다. 상황을 평가하는데 있어 ISB와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언론 특파원이나 분쟁에 관련된 국가의 사회주의 당 집행부가 제공하는 정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 가장 즉각적인 위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로부터의 정확한 정보가 간절했다. 언론은 오스트리아의 침략과 도발과 같은 위협을 전했지만, 이는 단지 혼란만을 낳았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언론의 대부분이 발칸 위기의 시초부터 러시아 대사관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912년 12월, 혼란의 한 가운데서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은 아들러와 같은 분별력 있는 인사로부터 위험이 임박한 것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인지, 혹은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기대했고, 12월 10일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당의 기관지(Arbeiter Zeitung)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즉각적인 무력 분쟁의 위험은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은 발칸 전쟁이 발칸 인민들의 정의와 해방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지만, 그것을 유럽 사회주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피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터내셔널은 실제로 발칸과 슬라비아 인민의 자율성을 대의로 내세웠지만, 실천 수준에서는 위험을 완화시키는 지연 전술만을 택했다. 심지어 바이앙도 전쟁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로 퍼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ISB의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제안을 따랐다. 평화주의를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인터내셔널은 사건들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사건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압력 단체로서 인터내셔널은 실천적으로 무능력했다. 인터내셔널은 모로코 위기 동안 했던 것처럼, 외교적 영역에서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남은 힘이 없었다. 이런 임무는 집행위에 맡겨진 것이었다. 12월 중순 바이앙은 위스망스에게 협상을 쉽게 할 수 있는 두 가지 수단을 제안했다. 첫 번째는 최대한 빨리 오스트리아와 발칸 사회주의자들의 공동 협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바이앙의 입장에서 즉각적인 위협은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었고, 따라서 이 긴장 완화는 유럽의 평화에 기여할 것이었다. 그는 모든 분쟁에서 관련국 사회주의자들의 개입이 사회주의적으로, 실천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덧붙여서 바이앙은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와 같은 중립 국가들에 중재 재판을 요청하라고 했다. 상황 상 이런 협의 소집이 어려웠으므로 위스망스는 첫 번째 제안을 보류했지만, 바이앙의 주장을 아들러에게 전했다. 두 번째 제안은 스칸디나비아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위스망스가 이미 제안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립국을 규합하여 열강들에게 점진적 군축을 제안하자는 스칸디나비아 그룹의 제안에 따라 그는 벨기에 정부에 이런 의견을 제시했고, 그 결과 중립국 간의 특별회의가 개최되기도 했었다. 아들러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보다 상황을 덜 심각하고, 덜 절망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의 상황이 위협적이지 않으며, 완전히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평화가 보장된 것으로 평가하면서, 집행위와 프랑스 조직의 대표들이 편향적 언론을 통해 사실을 판단하는 것을 비난했다. 아들러는 계속해서 바이앙이 제안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회주의자의 협의를 강력히 지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협의가 실천적이지도 필요하지도 않다고 보았다. 분쟁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아니라 불가리아와 터키 사이의 것이었으므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었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와 마찬가지로 CAP도 발칸 문제가 곧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프랑스 대표들은 반복해서 ISB가 정력적인 반군국주의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들은 계속 걱정했으며, 매일 면밀히 국제 사태의 변화를 주시했다. 상황이 다시 한 번 악화되는 것처럼 보이자, 1913년 2월 18일의 회의에서 CAP는 유럽 국가들의 군비 지출 증가에 따른 위험에 대해 검토했다. 일반적인 의견은 '군비증가와 발칸에서의 계속된 전쟁 때문에 국제 평화가 이전보다 더욱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CAP는 ISB가 소집되어서 (1)바젤에서 결의된 반전행동을 어떻게 계속할 것이며, 조정할 것인지, (2) 제국주의의 공격과 독일, 프랑스의 무장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 논의할 것을 요청했다. 이 제안은 당시 독일의 군비 경쟁 가속화와 프랑스의 적개심 증대에 놀라고 있었던 SPD 집행부와 아들러에게 전해졌다. SPD 집행부는 바이앙의 편지를 받은 2월 21일에 곧 모였다. SPD 집행부는 CAP의 제안에 반대했지만, 근본적인 문제의식에 동의했다. SPD 집행부는 1912년 SFIO 대표들이 공개적으로 제안했던 상호 관계와 공동 행동을 강화하자는 역제안을 제출했다. 2월 24일 SFIO 대표 토마(Albert Thomas)가 조레스가 쓴 프랑스-독일 선언의 초안을 갖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48시간 동안의 격렬한 논쟁에서 베벨과 샤이데만은 반대했고, 하세, 베른슈타인과 다른 사람들은 찬성했다. 오랜 논의를 거쳐 더 정제된 최종 문서에서 원 저자의 가장 중요한 의견들을 유지하는 가운데, 프랑스-독일의 군비 경쟁에 대한 공동의 반대라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913년 3월 초,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과 SFIO는 이에 따라 발칸 위기가 여전히 잠재적 문제의 근원이지만, 평화적 해법에 다다르고 있거나, 적어도 국지화되고 있다고 믿었다. 인터내셔널은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조기에 분쟁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는 것은 더 이상 긴급한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은 국제적 데탕트를 조성하는 것, 논쟁 중인 문제(예를 들어 알자스-로렌)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 열강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중재재판소를 주장하고, 그리고 총체적, 단계적인 군축에 합의하는 것이었다. 인터내셔널은 무엇보다 '무장한 평화'의 지배를 끝내야한다고, 프랑스와 독일의 무장경쟁, 군국주의적ㆍ쇼비니즘적 경향의 출현을 저지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두 국가들 사이의 화해에 기여하는 것이 영국, 프랑스, 독일의 연합을 위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인터내셔널이 1913년에 제시하고, 1914년 7월까지 매달린 새로운 이론이었다. 따라서 프랑스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공동행동은, 바젤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의 결과만이 아니었다. 이는 국제 사회주의자 정책의 전환점과 새로운 지침의 도래를 나타냈다. 1) [역주] 18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기념일에 20개국 391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파리 창립대회 이후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의결은 '국제 노동자의 의회'라고 스스로 부른 대회들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는 어떤 조직도 출현하지도 않았고, 지도자도 선출되지 않았으며, 현실적 제도 마련도 없었다. 이후 2차 1891년 브뤼셀 대회, 3차 1893년 취리히 대회, 4차 1896년 런던 대회에서는 매번 대회마다 전쟁의 위협에 대한 대처방안이 결의되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뉴벤호이스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총파업을 진행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지만 매번 부결된다. 5차 1900년 파리 대회에 이르러 사무국과 집행위회, 서기장으로 구성된 본부를 브뤼셀에 두게 된다. 이후에는 6차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7차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 8차 1910년 코펜하겐 대회까지 진행되었다. 전쟁의 위협이 커짐에 따라 1912년 바젤 임시대회가 진행되었고, 1914년으로 예정되었던 비엔나 대회는 전쟁 발발로 열리지 못했다.본문으로 2) [역주] 제2인터내셔널 당시 총파업의 유효성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즉 총파업은 목표와 상관없이 대중들의 무절제한 군중심리에 휩쓸려 단순한 폭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고, 이럴 경우 오히려 대대적 탄압을 불러일으켜 기존 운동의 기반을 와해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런 우려 속에 투쟁수단으로서 파업 자체가 부정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현실적 문제가 되었다. 1893년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벨기에의 정치적 총파업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고, 스웨덴에서 1894년, 1898년, 1902년 일어난 파업도 성공하지 못했다. 1903년 네덜란드에서 실시된 총파업은 사회주의 진영의 내분과 함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런 경험에 따라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총파업 문제가 제기되었다. 총파업은 대중파업과 구별되었고, 사회 전체의 존립을 대상으로 하는 무정부주의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의 존립까지 위협하는 것이었다. 대중파업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만 승인 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인터내셔널에서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서 총파업의 기능이 부인되었다. 하지만 1905년 러시아에서 정치적 대중파업이 사회주의적 목표를 향한 사회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인터내셔널에서 총파업의 전술적 성격에 대한 논의가 재개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러시아 혁명이 진압되고 실패로 돌아가 버리면서 다시 무관심 속에 묻히게 된다. 본문으로 3) [역주] 제1인터내셔널의 총평의회와 같은 조직적 구심체가 없다는 것이 제2인터내셔널의 취약점으로 지적되었고, 개선요구가 이어짐에 따라 1900년 파리 대회에서 ISB가 설립된다. 사무국은 의장과 서기, 각국이 2명씩 보낸 대표들로, 전체 약 50~70명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각국 대표들이 자치권을 강력히 고집함에 따라 그 권한은 제한적이었으며, 결합도도 제1인터내셔널의 총평의회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본문으로 4) [역주] 벨기에의 사회주의 작가 정치가. 본문으로 5) [역주] 1905~1906, 1911년 두 차례 모로코의 분할을 둘러싸고 국제분쟁이 일어난다. 모로코는 대서양과 지중해의 연결점이라는 지정학적 이유로 유럽열강의 분열대상이었다. 1880년 체결된 마드리드조약에 의해 모로코 독립이 인정되었지만, 20세기 들어 프랑스의 모로코 침투가 두드러졌다. 프랑스가 모로코의 내정개혁을 요구한데 대해, 1905년 3월 31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모로코 탕헤르항을 방문해서 모로코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연설을 한다. 독일이 프랑스의 이권을 방해하고, 프랑스에 반감을 가진 술탄을 원조함에 따라 프랑스와 독일이 극도의 대립상태에 이른다. 1906년 1~4월 사건 해결을 위해 국제회의가 열렸다. 프랑스와 영국의 결속을 통해 독일이 고립되고 프랑스의 진출이 인정되었다.본문으로 6) 바이앙은 ISB에서 채택된 자신의 제안이 최종적 해법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1907년 7월 9일 ISB 회의에서 그는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의제로 이 문제를 올리는 것을 반대했다. 조레스는 인터내셔널 전체가 이 문제를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바이앙의 제안에 반대한다. 본문으로 7) [역주]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여 강대해진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는 발칸 제국(諸國)의 상호유대와 결속을 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12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사이에 발칸동맹(Balkan League)이 성립되었다. 원래 러시아는 이 발칸동맹을 반(反)오스트리아동맹으로 할 의도였으나, 발칸 제국은 그보다는 투르크 제국에 대항하여 발칸반도에 있는 투르크의 영토를 획득하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1912년 10월 발칸동맹국은 유럽 열강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오스만투르크 영내의 마케도니아 알바니아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몬테네그로가 먼저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어 다른 3국도 투르크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1차 발칸전쟁). 열강들의 예상과는 달리 투르크는 패전을 거듭하여 불가리아를 통해 동맹국에 휴전(休戰)을 요청했고, 그 결과 12월 휴전이 성립되었다. 12월 16일부터 런던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어 아드리아노플 등의 할양문제를 둘러싸고 난항을 거듭하다가, 1913년 1월 23일 투르크 내에서 청년투르크당(黨)의 쿠데타가 발생하자, 1월 29일 동맹국은 휴전을 취소하고, 2월 4일 전투를 재개하였다. 5월 30일 강화조약이 성립되어 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지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의 영토 전부와 크레타섬을 발칸동맹 제국에 할양하였다. 강화조약에서의 영토분배를 둘러싸고 발칸동맹 내부의 대립이 심화되자, 1913년 6월 29일 불가리아가 돌연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함으로써 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몬테네그로ㆍ세르비아ㆍ그리스ㆍ루마니아ㆍ투르크 등이 불가리아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결과 불가리아는 연전연패하여, 7월 30일부터 부쿠레슈티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8월 10일 부쿠레슈티조약이 성립되어 불가리아는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 할양하고,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와 세르비아에 할양하였으며, 카바라 일대를 그리스에 넘겨주었다.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세르비아를 원망하게 되었고 러시아와도 사이가 멀어졌으며,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였다. 발칸전쟁으로 발칸 제국 간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었고, 내셔널리즘이 팽배한 제국들이 유럽 대륙으로의 영토확대를 꾀하면서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가 되었다. 본문으로 8) [역주] James Keir Hardie 1856-1915년 영국 정치가. 초기 노동당 지도자. 극빈한 가정에서 자랐고, 소년시절부터 탄광 갱부(坑夫)로 일하였는데, 20대에 이미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또 저널리스트로도 활동, 1887년 《갱부》지(紙)를 간행하였다. 당시 자유당의 영향 아래 있었던 노동자의 정치적 자립을 주장하였고, 88년 미드라나크의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스코틀랜드노동당을 조직하였고, 92년 사우스웨스트햄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93년에는 독립노동당을 결성, 의장이 되었다. 1900년 이후로는 노동자대표위원회 및 노동당의 중심멤버로 활동하였다.본문으로 9) [역주] (1866. 1. 25 벨기에 익셀-1938. 12. 27 브뤼셀) 유럽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1914~39년 벨기에 연립내각에 몸담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전후 평화협상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발휘했다. 1889년 벨기에 노동당에 가입하여 당수가 되었다. 1894년 사회당 소속 의원으로 처음 의회에 진출했으며, 1900년 이후 여러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보통선거권의 관철을 위하여 노력했으며 마침내 1919년 결실을 거두었다. 1914년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반데르벨데는 전쟁기간 내내 내각에 몸담았다. 1919~20년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근로조건개선 조항을 포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고, 법무장관으로서 형법의 개정을 추진하기도 했다(1919). 1925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자 사회당과 가톨릭당의 연립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위촉되었고, 그해 독일ㆍ프랑스ㆍ영국ㆍ이탈리아와의 로카르노 조약을 성사시켰다. 이후 2년 동안 앙리 자스파르 내각에서 외무장관직을 수행했으나, 병역기간을 6개월로 한정시키고 반(反)군국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다는 이유로 야당의 비난을 받았다. 무임소장관(1935~36)과 공공보건장관(1936~37)을 역임한 뒤 은퇴하여, 브뤼셀자유대학교에서 법률을 강의했다. 주요저서로 〈집산주의와 산업발전 Le Collectivisme et l' volution industrielle〉(1900), 〈사회주의 대(對) 국가 Le Socialisme contre l' tat〉(1918), <벨기에 노동당, 1885~1925 Le Parti Ouvrier Belge, 1885~1925〉(1925) 등이 있다.본문으로 10) 1908년 9월 영국-독일의 해군력 증강에 반대하는 집회에 독일 대표로 카우츠키가 지목되었을 때, 베벨은 카우츠키가 독일에서 추방될 수도 있다는 걱정을 드러냈다. 본문으로 11) [역주] 오스트리아 통일사회민주당에 참여했으며 지도자로 활동했다. 1881년 이래 노동운동에 참가하여, 1886년 주간지 《평등 Gleichheit》을 창간, 1889년 당기관지 《노동신문 Arbeiter Zeitung》을 창간 편집하였다. 또한 분열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하인페르트 당대회에서 통일사회민주당으로 통합시키는 데 성공했고, 당 강령을 기초하였다. 1905년 의회에 진출, 죽을 때까지 의원으로 활약했는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후 외무장관에 취임하였으나 곧 병사하였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였으며, 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의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12) [역주] 1911년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가 출병한다. 그해 7월 독일이 군함을 파견해 프랑스를 위협했는데, 이 사건을 아가디르 사건이라고 한다. 영국이 프랑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독일이 프랑스에 양보를 하고 양국 간 협정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독일에 콩고 북부를 할양하고,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보호권을 승인한다. 본문으로 13) [역주] 프랑스 통합사회당,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로 1905년 4월 창당되었다. le Parti socialiste unifi , Section Fran aise de l'Internationale Ouvri re.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은 당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우위를 표시하는 것이며, 통합이라는 말은 통합이 항구적일 것이라는 것을 뜻했다. 여기에 노동자 성향이 강한 프랑스 혁명사회노동당의 주장으로 노동자라는 뜻의 Ouvri re가 붙여졌다. 본문으로 14) SPD의 대기주의도 고려되어야 한다. SPD 집행위는 임박한 독일의회 선거 때문에 독일 대표가 ISB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보았다. 집행위는 모로코 정책에 반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경우, 유권자들이 당을 애국적이지 않다고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문으로 15) 집회의 슬로건도 각국 당의 관점을 나타냈다. 1911년 9월 프랑스 집회에서는 폭동과 총파업이 요구된 반면, 트렙토우 공원 집회에서는 단지 모든 정치적 경제적 수단이 평화유지에 사용되어야 하며, 독일 유권자들은 다음 독일 의회 선거에서 후보들에게 이를 권고해야 한다는 것이 주장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3-4천 명이 조직되고, 베를린에서는 경찰 추산 5-6만 명, 포어베르츠 추산 20만 명이 조직되었다.본문으로 16) 바이앙의 제안에 대한 논의는 공동행동을 효과저긍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관주의자와 낙관주의자 사이에는 많은 간극이 있었다. 전자 중 베벨은 무능력을 선언하는 것에만 동의했다. 다양한 대표들이 전쟁이 선언된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그 이전에 행동을 취하는 것에는 동의했다. 로자와 바이앙은 전쟁 선언 이후에도 인터내셔널의 힘을 믿으려고 했다.본문으로 17) 예를 들어 CGT는 1911년 10월 긴급히 파리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전쟁이 선언될 경우 즉각 혁명적 총파업을 일으킬 것이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본문으로 18) [역주] 19세기 중엽부터 터키에서 사회개혁이 추진되고 있었고, 1876년에는 파샤가 헌법제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술탄은 터키-러시아전쟁(1877~78)을 이유로 헌법을 정지시켰다. 청년투르크당은 이에 헌법을 부활시키고 전제정치를 폐지하기 위해 처음에는 비밀결사로 발족하여 단기간에 사관학교ㆍ기술학교의 장교ㆍ교사ㆍ학생ㆍ정부 직원들 중에서 많은 동조자를 얻어냈다. 20세기에 들어와 청년장교 층이 혁명세력의 지주가 되기에 이르자 당세는 신장되어, 1908년 살로니카에서 혁명을 일으켜 입헌정치를 선언한 뒤, 다음 해 압둘하미드 2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본문으로 19) 9월 23/24일 ISB 회의에서 치오티는 이탈리아 당이 총파업을 결정했고, 곧 이를 위한 회의들이 잡힐 것이며, 의회의 사회주의자 그룹 일부만이 이탈리아의 침략에 찬성할 뿐이라고 선언했다. 본문으로 20) [역주] 1907년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1919 1920년 오스트리아공화국 초대 총리가 되고, 1931 1933년 의회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1934년 나치스파(派)에 의하여 투옥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 오스트리아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지도자. 본문으로 21)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스, 아르헨티나, 아르메니아 대표들이 이 안에 찬성했다. 본문으로 22) 대회의 원래 날짜대로 치르자는 안은 러시아 혁명적 사회주의자, 스위스, 미국, 불가리아 '좁은 사회주의자',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자 연합의 동의를 받았다.본문으로 23) 러시아 사회혁명당 대표 루바노비치는 당시 병중이었던 플레하노프와, 크라쿠프에 머물고 있어 바젤에 참석하지 못했던 레닌의 합의 하에 이 회의에 참석했다. 본문으로 24) 위스망스는 5월 10일 바이앙에게, ISB가 CGT에도 자문을 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냐고 물었다. 바이앙은 CGT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위스망스가 개인적으로 호소하라고 제안했다. 본문으로 25) 카메네프에 따르면 '총파업과 폭동'은 슈투트가르트와 코펜하겐 대회 결의안에서 결정되었던 것과 같은 내용이므로, 바젤대회 결의안에 포함되지 않았다.본문으로

  • 2007-02-12

    사회주의와 세계대전: 제 2 인터내셔널의 붕괴(1)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박스1%] 국제 사회주의 정책을 향해 '프롤레타리아란 무엇인가? 평화를 사랑하고 전쟁을 혐오하는 대중들이 프롤레타리아다.' 조레스(Jean Jaur s)의 이 말은 50년 동안 인터내셔널이 만들어낸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국제 사회주의는 자신들을 '평화의 당파'라고 정의했다. 사회주의와 反군국주의, 사회주의와 국제주의는 동의어였으며, 모든 선전의 중심테마였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 평화로웠던 유럽의 인터내셔널은 원칙적인 선언과 자본주의가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그쳤다. 군국주의와 전쟁을 비판하고, 전쟁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라는 결의안이 제1인터내셔널과 제2인터내셔널의 모든 대회1)마다 채택되었다. 결의안들은 자본의 분파가 전쟁을 만들고, 노동자들이 평화를 만든다고 주장했다. 전쟁은 자본주의 체계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고, 사회주의의 확립을 통해서만 중단될 수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생산체계가 정점에 달할수록 무력 충돌이 더욱 폭력적이고 빈번해질 것이라 주장했다.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조직된 프롤레타리아뿐이었다. 프롤레타리아가 서로의 절멸에 이용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어책은 국제주의와 계급의식이었다. 군국주의를 막고, 세계평화 체계를 설립하기 위해 인터내셔널 대회는 비밀 외교의 폐지, 직업군인을 민병대로 대체할 것, 전면적인 군축 등을 제안했다. 1896년 런던대회에서는 중재 시스템을 설립하기로 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의무는 전쟁을 찬성하는 자들에게 반대해서 투표하는 것,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군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총파업은 아나키스트적 편향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2) 1893년에서 1907년까지의 인터내셔널 대회는 총파업이 전쟁을 방지하는데 실효성이 없다고 보았고, 사회주의자들이 의회를 장악해서 전면적 군축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군비지출에 반대하는 투표가 최선책이었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위협은 점점 심각해졌고, 전쟁과 군군주의는 더 이상 단순히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파쇼다 위기, 스페인-미국 전쟁, 의화단 사건 당시 중국에 대한 개입, 보어전쟁,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프랑스-독일의 분쟁, 러-일 전쟁, 발칸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분쟁을 거치면서 평화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바이앙( douard Vaillant)과 조레스는, 평화가 사회주의 발전의 전제조건이며, 전 세계적인 충돌에 직면한 유럽의 미래에 대한 사회주의적 해법과 사회주의 국제정책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전 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일반원칙만을 주장하는 결의문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 당들의 상호협력과 공동행동이 필수적이었다. 1902년 12월 국제사회주의사무국(ISB, International Socialist Bureau)3)이 암스테르담 대회의 의제 선정을 위해 소집되었을 때, 조레스는 전쟁을 더 이상 숙명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귀결로 보고자 했다. 그는 범게르만주의나 3국 동맹과 같은 문제, 평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전면적 군축의 달성방안과 중재재판소 등의 실현방안에 대한 검토를 요구했다. 조레스는 사회주의자들의 반전행동에서 '최대한'의 행동을 강력히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독일과 러시아의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공공연히 그를 불신했다. 사회주의자들의 국제정책이 구체화되고, 실천적으로 적용되는 데는 몇 가지 중요한 장애물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제2인터내셔널의 제도적 구조였다. 제2인터내셔널은 자율적 당들의 연맹으로, 가입자들에게 정치적/전술적 문제에 있어 완전한 자유가 주어졌다. 각 당들은 자신의 고유한 프로그램과 목표를 고수했고, 인터내셔널의 유일한 이슈는 최대한 협동을 조직하는 것뿐이었으며, 실질적 결정력이 없었다. 이런 구조는 결의안을 실행하는데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규약 제정에 20년이 걸렸고, 1900년까지 제2인터내셔널은 정기 대회로만 구성되었다. 대회의 결의안들은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었지만, 가맹 당들의 협력이나 국제적 행동을 보장할 조직이 없었다. 1900년 파리 대회에 이르러서야 ISB와 집행위, 서기관의 상설 기관이 설립되고 브뤼셀에 본부를 두었다. 하지만 이런 제도화에도 가맹 당과 조직의 자율성의 원칙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으며, 인터내셔널은 여전히 독립된 조직이 아닌 연합조직으로, 지부들과 분리된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대회만으로 인터내셔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 세계적 운동의 확산을 위해 ISB가 만들어졌지만 아무런 권위가 없었으며, 수 년 동안 사회주의 세계의 우편함 역할만을 했다. 전쟁의 기미가 커질수록 사무국의 권력과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아졌고, 1905년 위스망스(Camille Huysmans)4)가 서기장으로 임명되면서 ISB는 최종적 지위를 획득한다. ISB는 사회주의자의 활동을 조정하고, 대회들 사이의 업무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이는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 결의안을 이끌어내게 된다. 하지만 사무국의 지위 강화 속에서도 1889년에 만들어진 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고, 대회의 역할도 손상되지 않았다. 응집력 있는 조직과 제도적 기구의 부재는 뿌리 깊은 상황을 반영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시기 동안 주요 유럽 국가들의 사회주의 운동은 수적, 정치적으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하지만 다양한 당들의 민족적 현실이 중시되었고, 경험과 이해의 차이로 인해 정치적 판단은 민족적 이해로 협소하게 제한되었다. 두 번째 큰 장애물은 독일사회민주당(SPD)과 프랑스 사회주의자 그룹 사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독일의 半숙명론적 입장과 실천없는 평화주의는 프랑스의 낙관적인 행동 요청을 가로막았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입장 차이로 SPD와 프랑스는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지도력을 다투게 되었다. 인터내셔널에서 우위에 있던 SPD에 맞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다른 개념, 노동자들의 다른 행동을 승인받기 위해 싸웠다. 이런 맥락에서 조레스는 SPD의 정치적 무능력과 함께, SPD가 혁명적 행동이 아니라 의회에 집중한다고 비판한다. 평화에 대한 입장 차이는 특히 1905-6년 모로코 위기5)동안 명백하게 드러났다. SPD 집행부의 미봉책들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근심어린 태도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바이앙과 조레스는 1905년 9월, 각국 사회주의자들이 공동행동을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할 것을 ISB에 요청했다. 이 제안은 1906년 3월 6일 ISB회의에서 논의되고 승인되었지만, 일반적 내용만이 다루어질 뿐이었다.6) 1907년 8월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의제로 '군국주의와 국제분쟁'이 선정되었다. 비록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군국주의와 전쟁 문제에 대해 정치, 이론의 영역에서 활기찬 논쟁이 장시간 진행되었지만, 문제는 철저히 규명되지 못했고, 전쟁이 벌어질 때 사회주의자의 행동과 태도의 가이드라인에 대한 합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논쟁과 더불어 좌파 대표자들(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중도, 수정주의 우파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갈등도 심해졌다. 모든 논쟁은 학파간의 차이와 국제 사회주의 내의 이데올로기적ㆍ정치적 분열의 징후를 드러냈다. 다수파가 유럽전쟁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일반적 정책을 원했던 반면, 좌파들은 자본주의 전쟁에서 연원할 수 있는 혁명에 관심을 가지면서 역사적 시각과 전략에서 심대한 차이를 드러냈다. 공동 결의안 준비를 맡은 위원회의 논쟁은 이런 다양한 관점을 반영했다. 바이앙, 조레스는 의회개입에서부터 총파업과 폭동에 이르는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해 전쟁을 방지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요청했다. 사회주의자의 전술과 모순된다는 이유로 총파업에 반대한 독일 대표는 이 제안에 격렬히 반대했다. 합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중재를 위한 소위원회가 구성되어, 로자(Rosa Luxemburg)와 레닌(Lenin), 마르토프(Martov)가 '전쟁은 발발해서는 안 되고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킬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하고,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제, 정치적 위기를 이용해 모든 힘을 다해서 대중들이 자본주의 계급 지배를 빨리 중단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개정안을 제출했다. 대표들이 이 좌익적 개정안을 채택했지만, 이들 중 다수는 이것이 가상의 미래일 뿐이라며 결의안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임박한 혁명'은 부르주아를 협박하는데 효과적이었을 뿐, 전략적 목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결의안은 방어전쟁과 제국주의 전쟁을 구별하는 사람들과, 민족적 방어와 계급투쟁을 찬성하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을 무시했다. 이 문제는 순전히 이론적일 뿐 긴급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합의는 불가능했고, 이 갈등은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노동계급의 투쟁을 통해서만 해결될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이 무딘 결의안은 사회주의 반전행동에 복무하지 못했으며, 인터내셔널에 존재하는 분열을 영속화했다. 역설적으로 이 결의안은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켰다. 레닌은 결의안이 개량주의에 대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의 승리라고 생각했다. SPD 지도부는 극단주의에 대한 승리라고, 조레스는 국제 정책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의 결정적 승리라고 보았다. 분명 슈투트가르트 대회는 전환점이었다. 인터내셔널에서 SPD의 권위는 분명한 타격을 받은 반면, 프랑스 사회주의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획득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두 '열강' 사이의 갈등은 남아있었으며, 좌파와 중도/우파 지도자들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각해졌고,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 전략에 대한 문제가 격렬하게 논쟁되었다. 비록 논쟁이 인터내셔널의 일반 방침이나 활동들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지만,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에 사회주의의 국제 정책에 대한 논쟁은 완전히 이론적 영역으로 격하되지 않았다. 뒤이은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과 발칸위기7)는 더욱 불안을 일으켰다. 1908년 10월 회의에서 ISB는 재빨리 국제 상황을 분석하고 프랑스가 제안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전쟁의 지속적 위협을 언급하며 모든 사회주의 당들이 경계와 활동을 배가하고, 정세와 상황에 따라 국가/국제적 틀에서 적용할 수 있는 실천 방법과 조치들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전히 실천은 수동적이었고, 선언적인 평화주의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영국 대표인 글래시어(Bruce Glasier)는 '이런 결의안은 정치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다. 그러나 사실 ISB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비난에 대해서는 조직의 어려움에 대한 언급으로 답했다.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가 국제 평화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라고' 반복하면서, 제한된 국가적 관점에서 구체적인 정치 문제를 바라보았다. 전쟁 거부는 동의가 되었지만, 공동 대외정책의 자세한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달랐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이론이 빠져있는 모순과 취약성들을 해명할 필요가 있었다. 인터내셔널의 다수파는 전쟁을 자본주의의 고유한 문제이며, 열강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증대되는 위협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전쟁은 다양한 형태의 정의 없이 비난되었다. '제국주의 전쟁'은 식민지 전쟁이나 정복 전쟁에 국한되었고, '침략 전쟁'과 '방어전쟁'은 정치적 행동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으로 충분히 정의되지 않은 채 사용되었다. 이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었지만, 지도적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경멸적으로 거절했다. 예를 들어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의 SPD 에센 당 대회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당의 전술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결정은 자국 정부가 침략전쟁을 치르는지, 방어전쟁을 치르는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가? 침략인가 혹은 조국을 방어하는 것인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하는가? 베벨(August Bebel)은 특유의 방법으로 질문을 회피했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확신을 갖고 전쟁이 침략적인지 아니면 방어적인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판(Van Ravestejn)과 같은 몇몇 젊은 사회주의 투사들은 일체의 단일화 시도를 거부하면서, 방어적 공격이나 방어 전쟁이라는 구별의 어려움을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사회 계급과 민족의 이해가 존재하더라도 침략전쟁과 방어전쟁에 대한 명확한 구별은 어쩌면 언제라도 불가능할 것이었다. 모든 전쟁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반대되어야 했다. 카우츠키(Karl Kautsky)도 비슷한 입장으로 1907년에서 1909년 사이에 침략과 방어전쟁 이론을 명확히 거부했다. 그는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도 프롤레타리아의 이해를 위한 전쟁은 불가능하며, 프롤레타리아는 국제적 세계 정책에서 발생하는 전쟁의 위협을 처음부터 단호히 거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인터내셔널은 순전히 학술적 문제라고 간주했던 논의에 말려들지 않기를 바랐고, 결국 유럽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정의하는 것을 회피했다. 인터내셔널의 활동은 예방 전략에 집중되었다. 전쟁 가능성의 검토, 위협이 현실이 되는 것을 예방하는 것, 어떤 참사라도 제한하는 것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위기가 발발하자 즉시 적용된 인터내셔널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예방 전략을 통해 '전쟁에 대한 전쟁' 슬로건을 현실로 만들 수 있도록 공동의 계획을 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것이 1910년 코펜하겐 대회의 목표였고, 대회 의제에 다시 '군국주의와 군축 문제'가 포함되었다. 프랑스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차는 키어하디(Keir Hardie)8)와 바이앙이 제시한 운동에 대한 격렬한 논쟁에서 다시 드러났다. 키어하디-바이앙은 "대회는 전쟁을 예방하고 저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수단들 중 가장 적극적 형태의 선동과, 대중행동뿐만 아니라 특별히 전쟁 도구(무기와 탄약, 수송 등)를 공급하는 산업의 효과적인 총파업을 고려한다."고 제출했다. 이 제안은 독일의 좌파 대표자들에게조차 너무 혁명적이었고 혼란을 일으켰다. 독일 대표단의 격렬한 반대에 반데르벨데(Vandervelde)9)는 결의안을 ISB에 회부해 더 많은 검토를 거쳐 다음 인터내셔널 대회의 의제로 제출하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결국 채택된 결의안은 독일대표단의 관점을 드러냈다. 결의안은 무장경쟁이 가속되지 않는다고 한정하고, 행동수단을 순전히 의회적인 것들과, 전쟁을 찬성하는 투표 거부, 강제력이 있는 국제 중재 재판소 회부, 무장 제한, 모든 국가의 자율성을 요구하는 것으로 제한했다. 대회에서 결정된 유일한 것은 非사회주의자들의 평화운동 프로그램과 거의 동일했다. 코펜하겐 대회는 또 한 번 중심 문제에 정면대처하지 못했다. ISB는 여전히 전쟁이 일어날 경우 사회주의자의 행동을 조정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지만, 각국의 행동을 명확히 정의하고 그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는 한 이런 책임은 거의 무의미했다. 유일하게 내려진 결정은,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 위협적인 수준일 때는 언제나, 한 단체 이상이 요구할 경우 ISB 서기장이 사무국 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코펜하겐 대회는 슈투트가르트 대회부터 존재했고 모로코 위기가 결정적 촉매가 된 분열을 촉진했다. 좌파들은 코펜하겐 대회를 부르주아 평화주의로 향하는, 이전 대회로의 후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다수는 코펜하겐 대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두 차례의 인터내셔널 대회를 통해 국제 사회주의 정책의 특정 원리들에 대한 동의가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다양한 차이를 극복하고, 전쟁의 위협에 대해 취해야할 조치들을 결정하는 것은 다음 1913년 비엔나 인터내셔널 대회로 넘겨졌다. 최대한 각국 정당들의 행동을 조정하고 반군국주의 운동을 강화하고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지만, 중요한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 임무는 어떻게 수행될 것인가? 평화주의에 의해 혹은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총공격으로? ISB에서 프랑스-독일의 차이: 모로코 위기 1911년 이후 국제 상황의 악화는 사회주의 세계에 대한 도전이었다. 제국주의 개념과 정세 에 대한 분석은 모로코 위기, 이탈리아의 트리폴리타니아(리비아) 침공, 발칸 전쟁이 일어난 1911-1913년 사이에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외교적 긴장과 분쟁의 국지화 가능성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이론에 대한 관심부족이 드러났고, 이론은 단지 배경지식의 문제로 격하되었다. 상황을 악화시키는 원인이라고 보았던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 대한 조사는 거의 없었다. 국제정책의 장기적 프로그램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공식을 넘어서는 것이 불가능했다. 장기적이지만 모호한 공식과, 즉각적으로 타당하지만 극단적인 것 사이에서는 항상 전자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1911년과 1912년, ISB와 전원회의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점 차이는 더 이상 추상적 논의에 국한되지는 않았다. 모든 논쟁의 끝에는 대중을 동원할지, 거리로 나설 것인지, 의회 활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 결정해야했다. 이 때 각국 조직들의 진정한 색채가 드러났다. 외교적 위기가 발생하자 관련 국 사회주의 당들은 심한 분열 양상을 보였다. 각 당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정당화하면서 자국의 책임을 최소화하고 다른 정당들의 행동을 요구했다. 간신히 인터내셔널 대회를 열 수 있을 정도의 당들 사이에 내재된 불신은 위기가 나타나자 명확해졌다. 1908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문제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회주의 세력 사이의 격렬한 충돌을 낳았다. 약소 세르비아 정당은 오스트리아 당이 국제적 관점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 위기를 판단해 비엔나 정부를 돕고 있다고 비난했다. 1910년 영국과 독일의 해군력 경쟁에 대한 독일과 영국 사이의 문제도 심각했다. 노동당(Labour Party)과 ILP(Indepedent Labour Party of Great Britain)가 명확히 재무장에 반대했지만, 사회민주연합(Social Democratic Federation) 대표는 독일의 위협을 비난하며 자국의 해군 증강을 변호했다. 힌드만(Hyndman)이 이끄는 영국 사회주의 그룹은 민족주의적 경향을 드러냈다. 코펜하겐 대회에서 힌드만의 지지자들은 독일이 세계 정복을 꾀한다며 격렬하게 비난했지만, 자국의 무장 정책, 특히 해군력 향상을 지지했다. 힌드만은 SPD에 대한 적대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1905년에 그는 SPD의 정치적 근시안과 무능력을 비판하는데 그쳤지만, 1908년에는 공개적으로 독일이 행동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의문시했다. 1911년에는 SPD가 인터내셔널의 모든 반전 캠페인을 방해한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가 전쟁의 위협과 가능한 예방수단을 검토하기 위해 프랑스, 영국, 독일 대표를 모으자고 ISB에 세 차례 제안했을 때마다 SPD가 참석을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카우츠키는 즉시 ISB 서기장에게, 힌드만의 주장이 비방임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긴장은 완화되지 않았고, '힌드만 사건'은 더욱 심한 갈등으로 반복되었다. 국제적 긴장의 심화로 SPD 집행부와 프랑스 대표는 다시 ISB에서 갈등을 겪었다. 그들은 1>국제 상황에 대한 해석과 평가, 2>고유한 평화 요인으로서 인터내셔널의 역할, 3>위협에 대처할 수단에 대한 판단에서 불일치를 드러냈다. 이러한 차이는 1905년 초에 확연해졌다. 이들은 각자 행동하면서 인터내셔널의 행동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베벨은 주의를 요청하며, 1905년 6월 모로코 분쟁에 대한 ISB 회의 소집을 요청한 힌드만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1914년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는 영국이 상황을 너무 심각하고 예민하게 본다고 생각했으며, 모든 위기마다 회의를 소집하고 결의안을 통과시키면 신뢰를 잃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태도는 프랑스와 정반대였다. 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심각한 외교적 위기가 발생했던 모든 순간에 낙관주의적 태도를 보이며 침묵했다. 반면 인터내셔널이 심각한 충돌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자신했던 프랑스는 국제 정세가 악화될 때마다 근심했고, 활발하게 움직였다. 상황을 정확히 인식했던 조레스, 바이앙, 장 롱게(Jean Longuet)는 오랫동안 외로이 자신의 관점을 유지했다. 외교 분쟁의 위험을 인식했기 때문에 조레스와 바이앙은, 사회주의자들이 중재와 화해 노력으로 국제 분쟁을 진정시키는데 활발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프랑스인들은 이론적 고려보다는 조레스가 합리적으로, 바이앙이 직관적으로 도달한 현실주의적 평가에 자극되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의 실용주의에 상당한 의심을 갖고 있었고, 프랑스의 예측과 분석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계속 유지했다. 조레스의 평화에 대한 전망도, 중요한 국제 분쟁 해결에서 사회주의자들의 건설적 역할에 대한 개념도 관심을 끌지 못했다. SPD는 대외 정책의 문제에 대한 합의를 만들지도, 크게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SPD는 그것이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에, 대외 정책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꺼려했다.10) 독일의회(Reichstag)의 사회주의 그룹은 독일 정부의 팽창주의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들을 지지하기도 했다. 특히 모로코 문제에서 이런 태도가 잘 드러난다. 1908년 10월 ISB 회의에서 몰켄부르(Molkenbuhr)는 모로코 위기에 대한 독일 정부의 태도를 '양동작전'이라고 묘사하며, 위협이 가상적이고 피상적이라고 말했다. 이 주장은 사실관계를 심하게 단순화하는 것으로, 당 우파가 제안한 '아프리카에 남아있을 독일의 권리' 이론에서 볼 수 있는 민족주의적 경향의 선언에 가깝다. 전쟁 이전에는 정부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반대는 더욱 없었다. 프랑스계 모로코가 독일이 지브랄터 해협으로 가는 것을 막아 식민지로 접근할 수 없게 되자, 1911년 SPD는 모로코 주권의 보호를 주장했다. 콩고 배상문제와 관련해서도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은, 그들이 받는 금액이 보잘 것 없다는 것에 국한되었다. 프랑스-독일이 보인 두 번째 차이는 인터내셔널이 평화의 요인인지에 대한 것이다. 국내 정책에 실질적 영향력이 있었고, 의회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독일 사민당은 인터내셔널을 신경 쓰지 않았다. SPD 대표들은 ISB가 반전 투쟁의 믿을만한 조정자인지 의심했으며, 사무국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했다. SPD는 인터내셔널에서의 강력한 영향력을 통해 타국의 당들과 ISB를 다룰 수 있는 위선적인 후원 정책을 추구했다. 외교적 문제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능력에 대해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회의적이었다. 그들은 국제 사회주의의 행동을 조정하는 것이 달성 불가능한 것으로, 심지어 위험한 것으로 보았다. 몰켄부르는 ISB가 노동자 정책에 한정되지 않고, 화려한 성명밖에 만들지 못하면서 대외 정책의 주요 문제들에 개입하는 것을 비난했다. 모로코 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1911년 아들러(Victor Adler)11)도 ISB의 외교영역에서의 활동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며, 대중 집회 이상을 할 수 없다면 차라리 대중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 특히 조레스와 바이앙의 믿음은 이와 정반대였다. 조레스는 혼란 속에서 사회주의의 국제적 조직이 마침내 출현하여 실질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또한 인터내셔널의 행동을 촉구했으며, 사회주의 국제 정책에서 ISB의 역할을 강조했다. ISB의 프랑스 대표 바이앙도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어떤 전쟁의 징후에도 바이앙은 놀랄만한 속도로 반응했다. 분쟁이 있을 때마다, 외교적 긴장이 있을 때마다 그는 ISB에 자신의 우려를 알렸고, 사회주의 세계에 경고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제안, 그의 부단한 행동 요청, 그의 예측은 오스트리아 당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심지어 적대를 낳기도 했다. SPD 집행위원회는 프랑스의 활동을 성급하거나 틀린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1908년 9월에 바이앙이 제안한 프랑스-독일의 공동 집회를 SPD 집행위원회가 반대했다. 하지만 SPD는 이전의 회의주의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는 평화투쟁에 개입할 필요성을 인정했던 SPD 지도부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했다. 이런 변화는 부르주아 사회가 계속 발전,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부담과, 전쟁의 결과가 잘못된 혁명이 될 수 있다는 공포에 의한 것이었다. 1908년 이래로 SPD의 평화주의 운동은 특정한 '정치적 변화'보다는, '지속적으로 증대하는 전쟁의 위협에 직면해야한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당의 행동들은 자본주의를 조금씩 파괴하는 전략에 기반한 것이었고, 군비 경쟁의 위협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중간계급의 이해가 일시적으로 만나 협력이 가능했기 때문에, 평화주의 행동은 부르주아를 위협하지 않는 것으로 국한되어야 했다. 독일은 이에 따라 조직된 노동자의 편에서 중간/중하위 계급이 공동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고전적 형태의 반대 전술을 취했다. 여론이 전쟁을 예방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카우츠키의 관점에 따라, 선전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당의 선전 주제는 집행위원회의 공식 관점(전쟁이 일어난 뒤에 저항하는 것은 뒤늦은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중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호전적 성향을 막는 것이다. 근대전쟁은 대중의 동의 없이 발발하기 어렵고, 만약 발발한다면 지배자들은 그것의 참혹한 결과에 대해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에 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반전 행동에 적합한 분야는 언론과 의회였다. 카우츠키가 보기에 최후의 분쟁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럽의 시민들이 연합하여 공동의 상업 정책을 추구하고, 의회, 정부, 군대를 갖는 국가의 연합으로' 유럽연합을 창설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익숙한 것이었지만, 이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전술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프랑스는 '세계평화의 유일한 보증인은 조직된 사회주의 노동자'라는 코펜하겐 대회 결의안을, 행동 촉구로 해석했다. 대중들은 결집되어야 하며, 전투적 노동자들의 방식으로 전쟁의 위협을 막아야 했다. SPD에게 이는 현실에 조응하지 않는 원리일 뿐이었다. 독일 내부의 논쟁도 벌어졌다. 판네쿠크(Pannekoek)에게 반제 투쟁의 목적은 제국주의 성장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항하는 대중을 결집시키는 것이었고, 이렇게 조직된 대중들이 자본주의를 정복할 것이었다. 그는 카우츠키에게 있어 마르크스주의는 수동적인 대기주의이고, 모든 혁명적 행동은 비과학적 아나키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논쟁은 독일의 국경을 넘지도, 교의상의 논쟁 틀을 넘어서지도 못했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논쟁은 아가디르 위기12) 이후에 더 격렬해졌다. 비록 이것은 여전히 '무대 뒤쪽에' 있었지만, 그 결과로 ISB는 반전 캠페인의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고, 이와 같은 긴장의 순간에 효과적 행동을 조직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독일이 모로코에 전함을 보내기로 한 급작스런 결정때문에 관련국 사이의 긴장이 더욱 고조되었다. 위스망스는 즉시 관련된 국가 대표들을 소집해 파리에서 ISB 회의를 개최하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반데르벨데는 이런 문제들에 어떤 '대단한 위급함'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SFIO13)는 반대의 입장이었고, 7월 4일 CAP(Commissin Adinistrative Permanante de la SFIO)는 긴급하게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국의 사회주의 당 대표들을 소집해서 심각한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ISB에 요구했다. 이틀 후 위스망스는 이 요구에서 제안된 모든 사회주의당 대표들을 초대했다. 독일 대표 몰켄부르는 모로코 위기에서 위기의 징후를 발견할 수 없다며 프랑스의 제안을 거부했다. 모로코 문제는 단지 독일 정부의 양동정책일 뿐이고, '이를 통해 자국 정부가 국내 상황에 대한 관심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며, 독일 의회 선거에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베벨도 단호하게 이와 같은 입장을 밝혔고, ISB 서기장은 회의 계획을 중단했다. 조레스와 프랑스는 인터내셔널 대회 결의안에 따른 행동을 촉구했다. SPD 집행부는 이런 제안에 매우 공감한다며 응답했지만 명확한 선을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했고, 입장조차 결정되지 않았다. 당의 태도는 상황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혼란스런 독일의 행동은 사실 '민족적 논리'와 공명하는 것이었다. 고요함 뒤에는 완전한 무능력이 있었다. SPD의 고민은 독일이 관련될 때에만 시작되었다.14) 1911년 7월 21일 프랑스와 독일의 협상 파기의 조짐이 생기고 영국의 태도가 비판적이 되었을 때, 베벨은 위스망스에게 ISB 소집과, 브뤼셀에서 국제 총궐기를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베벨은 이런 조치들이 '만약 위기가 심각해질 경우'에만 취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3일 후, 사회민주연합과 노동당의 서기장이 ISB 소집을 요구했다. 하지만 베벨은 그동안 '상황이 평화로워졌고', 프랑스가 영국을 위해 독일과의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 제안에 반대했다. 반면 프랑스 대표들은 상황이 다시 한 번 악화되었다고 판단해 영국의 제안을 지지했다. ISB 집행위원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결국 아들러가 독일의 핑계를 지지함에 따라 회의는 다시 한 번 연기되었다. 당 집행부가 반전 투쟁의 임무에 무능력하다고 생각한 좌파들은 SPD의 우유부단함과 느린 반응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1911년 7월 24일 로자는 몰켄부르와 위스망스의 서신 교환을 발표하고, 당 집행부의 기회주의적 전술을 엄하게 비난했다. 뒤이은 논의에서 SPD 집행부는 꼴사납게 행동했고, 사람들은 몰켄부르의 침묵을 유죄 시인으로 받아들였다. 로자의 비판에 분개한 베벨은 당 집행부의 어리석음에 절망했고, 특히 몰켄부르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다. 그러나 베벨은 1911년 9월 예나 당 대회에서 당의 단결을 핑계로 당 집행부에 완전히 동조했다. 좌파들의 강력한 비판에도 SPD는 신중정책을 계속했고, 반전 행동 강화의 요청이 계속되어 베를린 트렙토우 공원의 인상깊은 집회가 열리게 되었다.15) 1911년 9월 11일 반데르벨데는 몇몇 프랑스 정치-경제 그룹의 공격적 캠페인에 대해 독일 정부가 불쾌해하며, 상황이 악화될 위험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또 프랑스와 독일 정부의 모든 협상이 실패로 돌아갈 것 같다는 정보도 있었다. 만약 협상이 실패하거나 관계가 결렬된다면 상황이 진짜 위험해질 것이고, 전면적인 반전의 노력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당황한 ISB 집행부는 신속히 행동해야만 했다. 최근의 충돌 요인들과 관련해서 슈투트가르트와 코펜하겐 결의안의 이행 수단을 찾자는 반데르벨데의 제안에 따라 CAP가 긴급히 소집되었다. 프랑스 정부가 강경노선을 강화하려한다는 두려움이 고개를 들었다. 위스망스는 ISB가 즉시 소집되어 국제 반전 행동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묵인했다. 급진적으로 표현된 선언에서 대참사를 막기 위해 취해져야할, 심지어 폭동까지 포함된 모든 수단이 논의되었다. '모든 국가의 노동계급이 동의하는 답은 정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혁명적 봉기를 통해 국제 평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위스망스는 SPD에도 개입했다. 상황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예나 대회에 프랑스, 영국, 독일 대표의 회합에 대한 의견을 묻는 전신을 보냈다. 베벨, 아들러, SPD 집행위는 이 의견의 진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9월 14일 반데르벨데는 우려가 일정 부분 사라졌으며, ISB 회의가 긴급하지 않다는 편지를 베벨에게 보냈다. 9월 17일 위스망스는 문제의 핵심이 독일이 아니라 프랑스에 있다는 것과 ISB 회의 소집을 결정했음을 독일 당 지도부에 전했다. 코펜하겐 결의에 따라 가맹 당에게 회의 소집의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SPD 집행부는 마지못해 회의를 받아들였다. 9월 23, 34일 취리히에서 ISB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다. 의제의 중심주제는 프랑스-독일 대결을 초래할 수 있는 모로코 위기였다. 베벨은 코펜하겐 결의안을 재확인하려 했고, 바이앙이 제출한 발의는 총파업 문제에 대한 활기찬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이 논의는 즉각 인터내셔널이 행동을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신 검사'로 이어졌다.16) 이것은 또다시 식민지 분할이 벌어질 경우 이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사회주의 당들을 초청하자는 합의로 마무리되었다. 11월 4일 프랑스와 독일은 모로코에 대한 협정을 체결했다. 위기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심각하지 않은 수준에서 정리되었다. 독일의 예측이 실현되면서 그들의 위세가 커진 반면, 프랑스는 또 한 번 침착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모로코 위기에 뒤이어 1911년 가을 이탈리아의 트리폴리타니아에 대한 식민전쟁이 이어졌다. 발칸의 벌집 3개월 동안 주저하고 망설인 후에 인터내셔널은 취리히에서 채택한 결의안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노동자의 반전운동은 모로코 위기 동안 효과적 행동을 취하지 못했지만, 이탈리아의 침략에서는 시의적절한 행동을 보여주었다.17) ISB는 이탈리아 정부가 터키에 최후통첩을 보낸 후 즉시 전쟁을 시작하리라는 사실을 48시간 전에 알았다. ISB가 반전운동을 지도하게 되었고, 집행위는 즉시 이탈리아의 침공을 비판하며 행동계획을 제시했다. 10월 7일 ISB의 입장을 명백히 담은 비밀 회보 초안이 대표들에게 보내졌다. 코펜하겐 결의안에 따라 무장 분쟁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분쟁이 발칸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것과 발칸에서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계획에 반대하는 것이 목표로 제시되었다. 집행위는 동시에 터키의 노동계급이 너무 취약하거나, 이탈리아의 행동이 불충분하거나,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있을 경우 ISB가 직접 개입하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ISB는 언론, 성명, 의회 질의와 저항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열강의 노동자당에 사회주의자들의 결집을 요구했다. 또한 ISB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과 발칸 사회주의자들을 지원했다. 이 캠페인들을 실행함에 있어서 인터내셔널은 만족스러운 결과와 실패를 모두 보여주었다. 먼저 긍정적인 면으로, 중앙과 서부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대규모 저항 운동을 살펴보자. 1911년 10월 초, ISB 집행위원회는 최대한 대중적으로 각국에서 동시에 발칸침략에 저항하는 국제공동행동을 조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상황을 집행위처럼 심각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많은 대표들이 제안에 찬성했다. 베벨은 공개적으로 여전히 모로코 사태가 중요하며, 발칸에서 분쟁은 없을 것이라고 반대 입장을 밝혔다. 독일의회 선거 직전이었기 때문에 SPD는, 삼국 동맹의 일원으로 이탈리아의 편이었던 자국 정부의 대외정책을 비판하는 캠페인에 무모하게 참가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베벨의 응답은 동시에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퍼진 터키에 대한 깊은 혐오를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공격에 희생당했음에도 터키에 대한 어떤 연민도 없었으며, 대신 오토만 제국에 대한 전통적인 적대와 청년투르크 당에 대한 불신을 찾을 수 있다. 1908년 7월에 일어난 청년투르크 혁명18)은, 이를 중요한 진보로 본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혁명은 후진적 터키가 평화를 위한 투쟁과 발칸의 현상유지에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불러일으켰다. 1908년 10월 11일 ISB는, 오토만 제국의 인민들이 이제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근대적 자유'들을 도입할 수 있으며, 따라서 노동자 운동의 발전에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라며 혁명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런 지지는 청년 투르크 혁명의 노선이 변화되면서 약해졌다. (이 운동이 정권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청년 사회주의자 운동에 대한 청년투르크 정권의 보복은 그 야만성이 이전 정권을 능가했고, 인터내셔널을 걱정하게 했다. 1911년 1월 살로니카에 모인 터키의 다양한 사회주의자 그룹의 대표들은 반동에 맞선 오토만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지원을 요구했고, ISB 서기장은 이 호소에 응답했다. 하지만 터키의 사회주의자 박해는 청년투르크 정권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불러왔다. 조레스만은 상황이 우선적으로 유럽 열강의 파멸적 정책의 결과라고 보았고, 터키 정권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신중을 요청했다. 터키가 유럽의 발전과 진보를 공유하도록 청년투르크 정권을 지원하는 것이 유럽사회주의의 의무였다. 비록 터키의 반사회주의 정책은 끔찍했지만, 인터내셔널은 평화라는 더 중요하며 일반적 문제로 사태를 바라봐야 했다. 1908년 이래로 동부, 특히 발칸은 유럽열강들의 세력 다툼의 핵심이며, 유럽 전쟁을 일으킬 분쟁의 중심이었고, 터키 새 정권의 강화는 동쪽 상황의 안정화를 의미했다. 조레스의 관점은 오랫동안 전체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되고, 심지어 공격받기도 했지만, 불안정한 발칸의 균형이 끝장날 수 있는 침략에 직면한 1911년 10월 ISB 집행위에서는 조레스의 관점이 우세했다. 인터내셔널은 도덕적 고려만이 아니라 정치적 고려, 평화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가맹 당들에게 터키를 지원하는 운동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터키의 반노동자 정책이라는 문제가 남아있었지만, 인터내셔널은 분쟁의 예방과 종식을 위해 청년투르크와의 반목을 잊으려했다.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자 연합(Worker's Socialist Federarion of Salonica)의 완화된 태도와 청년투르크 지도자들의 화해 노력 덕분에 이 관점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미 1911년 10월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자 연합의 집행부는 ISB 서기장에게, 조직은 이탈리아의 침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떠한 적대적 반대 행위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왔다. 한편, 터키 하원 의장은 10월 16일 반데르벨데에게 유럽 사회주의의 원조를 호소하는 서신을 보냈고, 원하던 결과를 얻었다. ISB는 11월 3일 터키 의원들의 순례에 맞춘 유럽 각 도시의 공동행동 혹은 집회 요청을 채택한다. ISB 대표단의 다수는 이탈리아의 공격이 강대국이 군사 행동을 할 변명을 제공하며, 이슬람과 유럽의 전쟁으로, 세계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제안에 동의했다. 침략자를 규탄하고 터키를 지지하며 제국주의 정책을 규탄하는 인터내셔널의 슬로건은 사회주의 당과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이탈리아가 트리폴리의 합병을 발표한 날인) 1911년 11월 5일의 대규모 집회는 상당한 규모여서, 낙관주의와 국제 사회주의의 역량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켰다. 유럽 사회주의는 모든 역량을 이 평화공세에 쏟았고, 평화주의 운동을 촉진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평화공세는 1911년 말과 1912년 초 SPD 선거 캠페인의 중심테마였고, 이를 통해 1912년 1월 선거는 SPD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나 이런 성공에도 인터내셔널은 무엇보다 이탈리아, 부분적으로 발칸의 행동부족으로 실패한다. 인터내셔널의 이전 결의안들은 사문화되었다. 취리히의 ISB 회의에서 이탈리아 대표 치오티(Pompeo Ciotti)는, 자국 정부의 어떤 군국주의적 움직임에도 당이 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9월 26/27일 저녁 이탈리아 정부가 터키에 최후통첩을 보냈을 때, 그리고 48시간 후 전쟁을 선언했을 때, ISB는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1905년과, 특히 1911년 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ISP(Italian Socialist Party)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군비 지출과 전쟁 위협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하여, 국제주의와 평화를 보존하려는 당의 결정을 증명했다. 하지만 1911년 9월 말 총파업을 준비하던 ISP 집행부19)는 자유주의 개량과 보통선거권 도입에 대한 약속에 매수당했고, 후퇴했다. 증대하는 민족주의의 압박 하에서 비쏠라티(Bissolati)와 보노미(Bonomi)가 이끄는 당의 개량주의 우익은, 공식적으로 정부 정책과 트리폴리타니아 전쟁을 지원했다. 이 전환은 이탈리아 노동자 운동과 인터내셔널 양자에 막대한 동요를 일으켰다.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 연합의 대표는 즉각 ISB 서기장에게 이탈리아의 혼란과 이것의 위험성을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는 두 개의 입장, 정책을 추구할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의 반전행동은 만장일치여야 한다는 내용의 비밀회보가 10월 12일에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에게 회람되었다. 사무국과 다른 가맹 당들에 대한 비난이 담긴 위스망스의 편지는 ISP 집행부 전원회의에서 논의되었고, (결국) 기각되었다. ISP 집행부는 당이 자신의 의무를 다할 것을 확신한다며, 서기장 치오티로 하여금 이탈리아에 대한 정당하지 못한 비난에 대해 ISB에 항의하도록 했다. ISB 집행위는 이탈리아인들을 달래는 것처럼 했지만, 불안을 감추지 않았다. 사무국은 ISP에 대해 규탄하지는 않았지만, ISP 지도자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며 전쟁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도록 압박했다. 이탈리아인들은 ISP 집행부가 인터내셔널 결의안과 원칙에 따른 의무를 다할 것이라며 집행위를 안심시켰다. 치오티는 모든 응답에서 당이 신용을 지킬 것이라 주장했고, 1911년 12월에는 비판은 모두 중단되어야 하며, 집회에 대한 요구는 모두 과장되고 불합리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치오티는 계속 이탈리아가 다른 어떤 나라보다 전쟁 반대의 의무를 다했다고 강조했지만, 위스망스는 그의 해명을 의심했다. 인터내셔널의 입장에서 ISP는 터키-이탈리아 전쟁동안 신용을 잃었고, 이후 이탈리아 당의 제안은 의심을 받았고, 경멸당했다. 이탈리아에서 같은 당 내 다양한 경향의 공존과 우익의 지배가 영향력 있는 평화주의 행동을 마비시켰다면, 발칸에서는 다양한 좌익 분파 사이의 경쟁과 적대가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발칸 사회주의 당들은 많은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시안적인 관점을 버리고 발칸을 전체로 간주하지 못했다. 슈투트가르트 대회 이후 동남부 유럽 사회주의 당들이 발칸의 사회적, 민족적 문제에 합의하고, 공통의 문제로 풀어가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고, 1910년 1월 7일에서 9일까지 베오그라드에서 발칸 사회주의 당의 첫 번째 협의가 열렸다. 발칸의 심각한 민족성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 개혁을 보장하고, 민주적 변화들을 이끌 발칸 국가들의 민주 공화국 연합 창설이 공통의 목표로 결정되었다. 그들이 유럽 자본주의의 개입과 정복 정책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었다. 발칸 인민들을 지방주의와 고립에서 해방시켜 동일한 문화와 경제적 정치적 자산을 갖게 하고, 밀접한 국가들 간 경계를 없애고, 외국지배의 멍에를 없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갖도록 해야 했다. 첫 번째 베오그라드 협의는 반제국주의적 원칙을 명확히 했다. 이 원칙을 시행하고 공동 전술을 만드는 것은 두 번째 협의의 임무였다. 1911년 8월 루마니아의 사회 민주당이 두 번째 발칸 사회주의자 협의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 제안은, 1903년 이래로 불가리아의 두 사회주의 당(좌익 '좁은 사회주의당(Narrow Socialist Party)'과 개량주의 '넓은 사회주의당(Broad Socialist Party)') 사이에 고조되어온 투쟁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터키-이탈리아 전쟁으로 발칸에 대한 위협은 갑자기 끔찍한 현실이 되었고,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현실적이고 발 빠른 행동 협의가 필요했다. 1911년 10월 초에 세르비아 사회주의당이 새롭게 협의 소집을 요청했고, ISB 집행위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좁은 당'은 '넓은 당' 대표의 협의 참석을 불허해야한다는 요구를 고수했다. 그들의 주장은 ISB가 커다란 정치적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기대를 좌절시켰다. '좁은 당'의 불참 때문에 단순한 예비회의만이 열렸으며,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공동 반전 행동에 대한 희망과 필요성에 대한 성명서만을 발표했을 뿐 어떠한 구체적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이 때 ISB가 직접 개입해서 불가리아의 두 당을 2차 협의에 참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좁은 당'은 양보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세르비아 사회주의 당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소국으로의 분열(Balkanization)'에 반대하고, 발칸인민연합을 건설하려던 사회주의자들은 결정적 순간에 불화와 적대를 드러냈다. 그들 사이의 차이뿐만 아니라 남부유럽 사회주의자와 중앙, 서유럽 사회주의자들의 발칸 문제에 대한 불일치가 혼란을 가중시켰다.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 연합의 대표들은 발칸 문제에 대한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통일된 지침과, 발칸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을 인터내셔널에 요구했다. 그들은 인터내셔널이 발칸 내 사회주의 당들의 차이를 없앨 수 있으며, 발칸의 제국주의적이고 반노동계급적 전술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거대 당파들은 오랜 기간 동안 일반적 진술에 만족했다. 1904년 ISB는 오토만 제국의 억압받는 소수자들의 자율성에 찬성을 한다고 선언했으며, 코펜하겐 대회 결의안도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영국의 사회주의 당들은 발칸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을 이해하거나 공유하는 것을 꺼려했으며, 할 수도 없었다. 서부 유럽의 목표는 유럽의 평화 유지였으며, 최악의 경우에 분쟁이 일어나도 발칸으로 국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발칸 문제를 발칸 사회주의자들의 좁은 관점이 아니라 세계적 맥락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가정에서 서유럽은 동남유럽의 현상유지를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발칸 연합의 원칙을 지지했지만, 오히려 그들에게 변화된 환경에 순응하고 현실에 이데올로기를 조화시키라고 조언했다. 이런 조언들은 단지 발칸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당황하게 했을 뿐이었으며, 그들이 '국제주의'라는 개념을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놀라움은 더 커졌다. 발칸사회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당이 정부의 대외 정책에 반대하지만, 이와 동시에 군주정이 발칸에서 문화적 사명을 갖고 있다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관점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합병에 저항했지만, 동시에 오스트리아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고 세르비아 정부를 비난했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은 화가 나서 ISB와 모든 가맹 당들에게 논의를 요구했다. ISB는 스스로의 역할을 오로지 정보제공에만 한정했다. ISB는 조정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관점을 완전히 지지하던 체코 대표 네멕(Nemec)의 응답과 세르비아 대표가 제출한 문서를 어떤 논평도 없이 회람의 형태로 보냈다. 그리고 코펜하겐 대회 전 오스트리아 당의 이름으로 레너(Karl Renner)20)가 공식 사과를 하면서, 수사적 국제주의의의 모습을 좋아하는 인터내셔널의 입장에서 공식적인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불신은 남아있었다. 1911년과 1912년에 발칸과 독일, 오스트리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의 활발한 분석과 논쟁이 있었다. 이론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양자 간 관점의 간극은 메워지지 않았으며, 입장의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서구 사회주의자와 발칸 사회주의자 사이의 차이는 단지 전술이 아니라, 민족성 문제, 민족 문제, 제국주의적 현상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관점 때문이었다. 1912년 8월 1일, 세르비아 사회주의 당 서기장 포포비치(Du an Popovi )가 발칸의 관점을 대변해 위스망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발칸의 모든 긴장과 민족주의, 쇼비니즘의 발현이 현상유지를 목표로 하는 유럽자본주의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상유지는 발칸의 불화와 무질서, 혁명과 전쟁의 영속적인 요소로 자본가 권력을 돕는 것이며, 평화와 문명의 적이었으며, 발칸의 죽음을 의미했다. 현상유지는 발칸 인민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했으며, 발칸인민연합이라는 중대한 목표를 가로막았다. 현상유지는 평화의 보증이 아니라, 반대로 영원한 전쟁의 근원이었다. 거대 서구 사회주의 당들은 非개입이라는 한 가지 방법으로만 발칸 문제를 가두어 둘 수 있었다. 유럽에게 최고의 해답은 발칸 문제가 해결되지 않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열강의 식민정책과 발칸 문제로의 개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전면전은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의 관점은 발칸전쟁이 기정사실이 될 때까지 무시되었고, 이때에 이르러서야 오스트리아는 즉시 '발칸을 발칸 인민에게'라는 슬로건을 제출했다. 인터내셔널 정책의 역설을 보여준 것은 이론적이며 정치적인 차이였다. 사회주의지도자들은 발칸이 세계의 균형에 대한 위협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위기가 끝나고 분쟁이 해결되자마자 ISB는 일상으로 돌아갔고, 분규의 가능성에 대처하기 위한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 ISB는 발칸에서 분쟁의 국지화 전술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중재야말로 '평화로운 국가들 사이에서 제국주의자들을 고립시킬' 이상적 해법이라고 보았다. 1912년 사회주의 언론들이 임박한 파국과, 갈등과 적대에 대한 예측을 했지만,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외교적 위기에 따른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소집된 ISB는, 다양한 갈등적 관점들 사이의 실용주의와 소극적 합의만을 보여주었다. 평온한 시기에 인터내셔널이 보인 활동은, 평화를 위한 그들의 투쟁이 사실상 끊임없는 즉흥극이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1912년은 그 전 해보다 더 이상 평온하지 않았다. 알바니아의 폭동, 마케도니아의 불안과 유태인 학살, 불가리아에서 민족주의의 발호와 같은 위험징후가 발칸에 나타났다. 발칸 사회주의자들은 발칸의 지정학적 특징을 강조하며 유럽의 평화를 위협하는 폭발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끌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발칸의 소식과 경계를 알리는 보고서들은 가맹당의 대다수에게 무시되었다. SPD는 언제나 냉정했다. 오직 프랑스 대표들만이 ISB에서 우려를 표하고 행동을 촉구했다. 반면 정보서비스만을 하던 ISB 집행위는 다음 국제 대회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결의안에 따라 대회는 1913년 열릴 예정이었지만, 네덜란드 대표단이 국제 대회를 소집할 만한 위급함이 없다는 이유로 1914년까지 대회를 연기하자고 제안했다. 1914년이 인터내셔널 50주년이기 때문에 선전하기 더욱 좋은 대회가 될 수 있다는 근거가 제시되었다. 네덜란드의 제안이 모든 가맹당 대표에게 제출되었고, 레닌 등 소수의 대표가 응답을 하지 않은 채 근소한 차로 제안이 가결되었다.21) 네덜란드의 제안 뒤에 SPD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단순한 과정의 문제로 다루었다. SPD 집행위는 바이앙-키어하디 수정안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국제무대의 소강상태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었다. 네덜란드의 제안은 다른 이유로 프랑스와 영국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22) 영국은 대회 연기를 원칙상의 이유로 거부했다. 이들은 1912년 10월 항의를 발표해서, 이런 과정이 '위대한 독일 당의 전통에 어울리지 않으며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대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반대는 정치적 특성에 의한 것이었다. 발칸 위기가 불러올 수 있는 불안정에 대한 행동을 논의하기 위해 국제 대회는 예정된 대로 열려야 했다. 정치적 상황이 혼란스럽고 전면전의 위협이 있다고 생각한 발칸 사회주의 당들의 대표들이 같은 주장을 제시했다. 최대한 빨리, 진지하게 평화에 대한 열망을 호소하고, 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인터내셔널의 의무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위스망스에게 대회 연기에 관한 진실 해명을 요구했다. 그의 답변은 인터내셔널 내의 심각한 의견차와 불안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바이앙과 힌드만에게 독일-체코의 적대 속에서 대회를 열수는 없다고 말했다. 또한 폴란드와 러시아, 불가리아와 다른 국가들 사이의 의견차가 심각해 대회가 사회주의의 분열을 드러낼 것을 걱정했다. 그동안 발칸의 상황은 극적 전환을 맞아 무장 분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은 9월 20일 위스망스에게 발칸의 전반적 분위기가 억압적이며, 전쟁이 언제라도 발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2차 발칸 사회주의자 회합이 중요하고, 위급했으며, 이에 대한 ISB의 도움을 요청했다. 문제는 불가리아의 '좁은 당'과 '넓은 당'을 같은 석상에 앉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논의를 단축하기 위해 사무국이 공식적으로 루마니아 대표 라코프스키(Rakovsky)를 보낼 것이 제안되었지만, 편지는 도착하지 않았고, 이전 해의 행동들이 반복되었다. 즉각적인 전쟁의 위협에도 '좁은 당'과 '넓은 당' 사이의 장애를 제거하기 위한 어떤 행동도 없었고, 갈등만이 두드러졌다. 10월 초, 이 발칸 폭풍의 규모와 중요성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낙관주의 대신에 불확실성과 공황상태를 심어주었다. 인터내셔널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함에 따라 전통적인 문제가 제기되었다. 전쟁의 위협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프랑스와 영국은 즉각 ISB 회의를 요구했지만, 독일 당이 다시 이를 가로막았다. 첫 번째 위협이 지나가자마자 베벨은 평정을 되찾았고, 다시 한 번 신중함을 권고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의 공포가 확실한 것이라고 보았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조레스는 즉각 ISB에 가능한 빨리 비엔나 대회를 열자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현재의 분쟁이 안정되더라도 여전히 전쟁의 씨앗은 남을 것이기 때문에 대회를 통해 분쟁을 국지화하고, 외교적 수단으로 해법을 찾으려는 환상적 희망을 버리고 위협에 맞설 필요가 있었다. 10월 28일 브뤼셀에서 ISB 전체 회의가 소집되었다. 조레스는 이 회의를 통해 ISB가 전쟁의 확산에 반대하는 행동을 조직할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번에는 항상 신중하고 희망에 차 있던 아들러도 서기장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인정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베벨은 독일 대표에게 프랑스, 영국에 속지 말 것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하라고 조언했다. ISB가 브뤼셀에서 모였을 때 1차 발칸 전쟁이 한창이었고, 분쟁을 국지화하고 전쟁의 확산을 막는 방법에 관한 문제에 논의가 집중되었다. 아들러는 인터내셔널이 '발칸의 슬라브 국가들의 자율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된 전쟁에 대해 저항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바이앙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개입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며 인터내셔널의 행동을 촉구했다. 그는 충분히 강력한 운동을 펼쳐 각국 정부가 혁명적 선동을 두려워하게 된다면, 분쟁이 확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가정에서 그는 강력하고 전면적 선동을 각국에 요구했다. 조레스는 낙관주의를 유지했다. 그는 각국 정부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믿었지만, 국제대회의 소집으로 프롤레타리아의 행동 결정을 정부에 알리고, 열강의 어떤 개입에 대해서도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대회 일정을 앞당길 것인지, 1914년까지 연기할 것인지, 단독으로 국제협의를 소집할 것인지에 대해 오랜 논의가 진행되었다. 조레스는 대회 연기는 패배의 승인이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나 적절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법의 문제로 회의가 망쳐질 것처럼 보이자 반데르벨데는 크리스마스에 바젤에서 회의를 소집하고, 대회는 원래 날짜대로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결국 크리스마스 바젤 특별대회와 비엔나 대회의 1914년 개최가 결정되었다. 바젤 대회를 효과적이고 인상적으로 열기 위해 ISB는, 전쟁과 유럽 열강의 발칸 개입에 반대하는 집중 캠페인을 요청했다. 유럽 프롤레타리아들은 모든 조직적 역량과 대중행동으로 이 지침을 따랐다. 10월 20일에 시작해서 베를린에서만 25만 명이 조직된 이 대중 집회는 역사적 기록으로 남았다. 구체적이고, 대규모의, 그리고 적극적인 위험에 직면해 유럽 사회주의 당들이 행동을 통해 통일되는 특별한 시기였다. 여론이 조직되었고, 노동자들은 전면전을 반대하는 그들의 결심을 증명했다. 이를 통해 인터내셔널의 가상적 힘은 바젤 대회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바젤: 전쟁에 대한 전쟁 1912년 11월 초 상황이 악화되어 SPD의 요구에 따라 바젤 특별대회의 일자가 11월 24, 25일로 앞당겨졌다. 전쟁의 참상은 점점 위협적이 되었고, 세계전쟁의 위험이 있었다. 아들러도 SPD 집행부도, '나는 모든 것이 이성적으로 만족스럽게 해결될 것이고, 우리가 유럽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한다.'는 베벨의 낡은 낙관주의를 공유하지 않았다. 아무도 더 이상 '발칸 국가들이 휴전을 하고 평화협정을 시작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있지 않았다. 발칸의 화약고가 폭발할 가능성에 직면해서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태도를 명확히 하여 평화주의 활동에 힘을 쏟았고, 집중적인 반군국주의 캠페인을 시작했다. 당 의장 하세(Hugo Haase)는 평화주의 활동이 재앙을 피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운동을 강화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인민의 대다수가 전쟁을 혐오하고 반대한다면, 정부는 전쟁에 나서지 않을 것이었다. 템펠호퍼 공원에서는 20만 명이 모인 평화 집회가 열렸다. 인터내셔널의 가맹당 모두는 SPD의 제안에 따라 이 반전 캠페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11월 17일, 수많은 유럽 도시에서 보다 대규모의 대중 투쟁을 조직했다. 11월 1일 유럽 논동자들은, '전쟁과 발칸 분쟁의 확산에 반대하는 행동'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호소에 응했다. 파리 근처 Pre Saint Gervais에서 10만 명이 집회를 열었다. 대회에 앞서 ISB의 결정에 따라 조레스, 바이앙, 베벨, 키어하디, 아들러, 라바노비치(Rubanovich)23), 위스망스로 구성된 위원회가 대회에서 제출할 결의안 초안 작성을 위해 모였다. 인터내셔널의 '현자들'은 국제 사회주의의 상황과 임무를 명확하고 자세하게 분석하는 것과 동시에, 입장 차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모였다. 바젤 대회는 반전투쟁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과, 인터내셔널의 힘을 표현해야 했으므로, ISB는 코펜하겐 대회에서 있었던 바이앙-키어 하디 수정안에 대한 논쟁이 재발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당시 독일 사회주의자들과 바이앙의 입장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1910년 11월 초에 바이앙은 위스망스에게 코펜하겐에서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인터내셔널의 모든 당파들이 자세히 검토하고 논평을 할 수 있도록 제안문 초안을 보낼 것을 주장했다. 바이앙은 프랑스 철도 노동자의 파업을 예로 들며, 이것이 국가적, 국제적 수준에서 실행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위스망스는 이에 따라 12월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문을 담은 회람문을 모든 가맹당에 보내면서 최대한 빨리 논평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오직 네 개의 당만이 응답했다. 불만을 느낀 바이앙은 노조를 통해 당 지도부에 압력을 행사하려는 생각으로 위스망스에게 노조 조직에 직접 자문을 구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프랑스 CGT가 이미 총파업과 봉기를 포함해서 어떤 전쟁 계획에도 반응할 것을 결정했다는 것을 지적했다.24) 결국 (이전 회람문에 대한) 답변과, 각국 노조 조직에 자문을 구할 것을 요청하는 새로운 회람문이 보내졌지만, 만족할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의안 문안을 준비하려고 비밀리에 회합을 한 특별 위원회는 몇 가지 초안들을 검토했고, 총파업 문제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했다. 바이앙은 논평을 통해 폭동과 파업이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의 최선의 무기였으며, 짜르주의의 음모와 군사적 모험을 제어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인터내셔널은 모든 국가조직이 전쟁에 반대하는 행동을 취할 것을 요청하고, 사용가능한 모든 방법과 역량으로 의무를 다할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하지만 전쟁에 반대하는 최후의 수단으로써 총파업과 폭동은 거부되지도, 결정되지도 않았다. 독일은 여전히 입장을 유보했으며, 의심했다.25) 대회 전 날인 1912년 11월 23일, ISB는 위원회의 선언 초안을 검토하고, 550명의 대표들에게 만장일치로 채택될 문서를 준비하기 위해 모였다. 강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선언은 로자를 포함한 몇몇 대표들을 만족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들은 전쟁을 예방하거나 끝내기 위해 반군국주의 대중파업과 같은 급진적 조치들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단락을 문서에 포함시킬 것을 요청했다. 결국 대회에 제출된 문서는 전쟁을 예방하는 구체적 수단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못했다. 조레스는 갖가지 커다란 가능성 때문에 결의안이 어떤 특정한 행동 방침을 정하지 못했고, 동시에 하나도 배제하지 못했다고 논평했다. 예측불가능하고 특별한 상황에서만 결정이 내려질 수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반대하는 수단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쟁 발발이라는 중대한 문제에 사전에, 예외 없이 유효한 답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떤 수단이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둠으로써, 결의안은 다양한 분파 대표들과 정당 지도자들에게 완전한 해석의 자유를 허락했다. 이전 대회 결의안들과 달리 이번에는 상황에 따른 프롤레타리아의 국제 정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진술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결의안은 앞으로 있을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뿐이라는 단언적 진술로 시작되었다. 문서의 두 번째 부분은 발칸,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의 사회주의 당의 임무를 약술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행동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독일, 프랑스, 영국의 노동계급에 맡겨졌다. 그들은 열강들 사이의 차이를 메우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요구받았다. 동시에 대회는 전쟁이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격분과 분노만을 일으킬 뿐이며, 혁명을 일어나게 할 것이라고 지배계급에 경고했다. 선언은 수 년 동안 사회주의자들의 사고를 지배했던 문제에 대한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해법을 제공했다. 반전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외에도, 중간 계급과 모든 평화주의 요소들을 포함할 수 있도록 반전운동이 확장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바젤 대회는 새로운 어떤 것도 제시하지 못한 채, 이전 정책들에 대한 성과 없는 논의로 끝나게 되었다. 사회주의의 역사에서 바젤 특별대회는 1914년 이전에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된 가장 강력하고 인상적인 반전 시위였다.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정부 집단들과 유럽의 여론에서 대회의 반향은 상당했다. 바젤 대회는 1912년 11월 유럽이 경험한 심각한 위기의 순간을 진정시켰다. 대회 때 높아진 긴장이 완화되자마자 단결의 부재가 명백해졌다.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했던 바젤 대회의 보고서에서 독일 보고서 편집자는 '기회주의적 이유로' 연설의 급진적 부분을 삭제했고, 이는 독일 사민당 조직의 혼란을 보여준다. 노조의 지원을 받는 사회주의 정당들은 대회 이후 몇 달간 바젤 결의안을 문자 그대로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12년 12월 노동자들의 대규모 반전 집회가 유럽 전역에서 벌어졌다. ISB가 자신들의 관점을 고수했기 때문에 노동자 대중의 평화주의 열정이 계속 커졌음에도, 실제로는 아무런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 바젤에서 원칙은 정해졌지만, 그것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위협에 대해 평가할 수 있어야 했다. 사실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는 열강들 간 분쟁의 변동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이 정보의 부족은 1912년 12월에서 1913년 1월에 두드러졌다. 심각하게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평가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정보가 없이 ISB는 너무 성급하거나, 너무 늦게 행동하는 딜레마에 직면했다. 때 이른 행동으로 인터내셔널은 위신을 잃거나 전체 평화주의 투쟁의 미래를 위태롭게 할 것이었고, 반대로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패배를 뜻했다. 1912년 12월 상황은 다시 더 끔찍한 것으로, 유럽 전쟁은 더욱 가까워 진 것으로 보였다. 상황을 평가하는데 있어 ISB와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언론 특파원이나 분쟁에 관련된 국가의 사회주의 당 집행부가 제공하는 정보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 가장 즉각적인 위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로부터의 정확한 정보가 간절했다. 언론은 오스트리아의 침략과 도발과 같은 위협을 전했지만, 이는 단지 혼란만을 낳았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프랑스 언론의 대부분이 발칸 위기의 시초부터 러시아 대사관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912년 12월, 혼란의 한 가운데서 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은 아들러와 같은 분별력 있는 인사로부터 위험이 임박한 것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인지, 혹은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에 대한 평가를 기대했고, 12월 10일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당의 기관지(Arbeiter Zeitung)는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즉각적인 무력 분쟁의 위험은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은 발칸 전쟁이 발칸 인민들의 정의와 해방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지만, 그것을 유럽 사회주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피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터내셔널은 실제로 발칸과 슬라비아 인민의 자율성을 대의로 내세웠지만, 실천 수준에서는 위험을 완화시키는 지연 전술만을 택했다. 심지어 바이앙도 전쟁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로 퍼지지 않게 하는 것으로 ISB의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제안을 따랐다. 평화주의를 구체적 행동으로 옮기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인터내셔널은 사건들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사건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압력 단체로서 인터내셔널은 실천적으로 무능력했다. 인터내셔널은 모로코 위기 동안 했던 것처럼, 외교적 영역에서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외에는 남은 힘이 없었다. 이런 임무는 집행위에 맡겨진 것이었다. 12월 중순 바이앙은 위스망스에게 협상을 쉽게 할 수 있는 두 가지 수단을 제안했다. 첫 번째는 최대한 빨리 오스트리아와 발칸 사회주의자들의 공동 협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바이앙의 입장에서 즉각적인 위협은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분쟁이었고, 따라서 이 긴장 완화는 유럽의 평화에 기여할 것이었다. 그는 모든 분쟁에서 관련국 사회주의자들의 개입이 사회주의적으로, 실천적으로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덧붙여서 바이앙은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와 같은 중립 국가들에 중재 재판을 요청하라고 했다. 상황 상 이런 협의 소집이 어려웠으므로 위스망스는 첫 번째 제안을 보류했지만, 바이앙의 주장을 아들러에게 전했다. 두 번째 제안은 스칸디나비아의 제안에 대한 응답으로 위스망스가 이미 제안하고 있는 것이었다. 중립국을 규합하여 열강들에게 점진적 군축을 제안하자는 스칸디나비아 그룹의 제안에 따라 그는 벨기에 정부에 이런 의견을 제시했고, 그 결과 중립국 간의 특별회의가 개최되기도 했었다. 아들러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보다 상황을 덜 심각하고, 덜 절망적인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의 상황이 위협적이지 않으며, 완전히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평화가 보장된 것으로 평가하면서, 집행위와 프랑스 조직의 대표들이 편향적 언론을 통해 사실을 판단하는 것을 비난했다. 아들러는 계속해서 바이앙이 제안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회주의자의 협의를 강력히 지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협의가 실천적이지도 필요하지도 않다고 보았다. 분쟁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가 아니라 불가리아와 터키 사이의 것이었으므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공포를 느낄 필요가 없었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와 마찬가지로 CAP도 발칸 문제가 곧 평화적 수단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프랑스 대표들은 반복해서 ISB가 정력적인 반군국주의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들은 계속 걱정했으며, 매일 면밀히 국제 사태의 변화를 주시했다. 상황이 다시 한 번 악화되는 것처럼 보이자, 1913년 2월 18일의 회의에서 CAP는 유럽 국가들의 군비 지출 증가에 따른 위험에 대해 검토했다. 일반적인 의견은 '군비증가와 발칸에서의 계속된 전쟁 때문에 국제 평화가 이전보다 더욱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CAP는 ISB가 소집되어서 (1)바젤에서 결의된 반전행동을 어떻게 계속할 것이며, 조정할 것인지, (2) 제국주의의 공격과 독일, 프랑스의 무장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 논의할 것을 요청했다. 이 제안은 당시 독일의 군비 경쟁 가속화와 프랑스의 적개심 증대에 놀라고 있었던 SPD 집행부와 아들러에게 전해졌다. SPD 집행부는 바이앙의 편지를 받은 2월 21일에 곧 모였다. SPD 집행부는 CAP의 제안에 반대했지만, 근본적인 문제의식에 동의했다. SPD 집행부는 1912년 SFIO 대표들이 공개적으로 제안했던 상호 관계와 공동 행동을 강화하자는 역제안을 제출했다. 2월 24일 SFIO 대표 토마(Albert Thomas)가 조레스가 쓴 프랑스-독일 선언의 초안을 갖고 베를린에 도착했다. 48시간 동안의 격렬한 논쟁에서 베벨과 샤이데만은 반대했고, 하세, 베른슈타인과 다른 사람들은 찬성했다. 오랜 논의를 거쳐 더 정제된 최종 문서에서 원 저자의 가장 중요한 의견들을 유지하는 가운데, 프랑스-독일의 군비 경쟁에 대한 공동의 반대라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1913년 3월 초,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과 SFIO는 이에 따라 발칸 위기가 여전히 잠재적 문제의 근원이지만, 평화적 해법에 다다르고 있거나, 적어도 국지화되고 있다고 믿었다. 인터내셔널은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조기에 분쟁을 예방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는 것은 더 이상 긴급한 문제로 보이지 않았다. 장기적으로 중요한 것은 국제적 데탕트를 조성하는 것, 논쟁 중인 문제(예를 들어 알자스-로렌)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 열강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중재재판소를 주장하고, 그리고 총체적, 단계적인 군축에 합의하는 것이었다. 인터내셔널은 무엇보다 '무장한 평화'의 지배를 끝내야한다고, 프랑스와 독일의 무장경쟁, 군국주의적ㆍ쇼비니즘적 경향의 출현을 저지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두 국가들 사이의 화해에 기여하는 것이 영국, 프랑스, 독일의 연합을 위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인터내셔널이 1913년에 제시하고, 1914년 7월까지 매달린 새로운 이론이었다. 따라서 프랑스와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공동행동은, 바젤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의 결과만이 아니었다. 이는 국제 사회주의자 정책의 전환점과 새로운 지침의 도래를 나타냈다. 1) [역주] 1889년 7월 14일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 기념일에 20개국 391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파리 창립대회 이후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중요한 의결은 '국제 노동자의 의회'라고 스스로 부른 대회들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는 어떤 조직도 출현하지도 않았고, 지도자도 선출되지 않았으며, 현실적 제도 마련도 없었다. 이후 2차 1891년 브뤼셀 대회, 3차 1893년 취리히 대회, 4차 1896년 런던 대회에서는 매번 대회마다 전쟁의 위협에 대한 대처방안이 결의되었다. 특히 네덜란드의 뉴벤호이스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총파업을 진행하자는 결의안을 제출하지만 매번 부결된다. 5차 1900년 파리 대회에 이르러 사무국과 집행위회, 서기장으로 구성된 본부를 브뤼셀에 두게 된다. 이후에는 6차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7차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 8차 1910년 코펜하겐 대회까지 진행되었다. 전쟁의 위협이 커짐에 따라 1912년 바젤 임시대회가 진행되었고, 1914년으로 예정되었던 비엔나 대회는 전쟁 발발로 열리지 못했다.본문으로 2) [역주] 제2인터내셔널 당시 총파업의 유효성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즉 총파업은 목표와 상관없이 대중들의 무절제한 군중심리에 휩쓸려 단순한 폭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고, 이럴 경우 오히려 대대적 탄압을 불러일으켜 기존 운동의 기반을 와해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런 우려 속에 투쟁수단으로서 파업 자체가 부정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현실적 문제가 되었다. 1893년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벨기에의 정치적 총파업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고, 스웨덴에서 1894년, 1898년, 1902년 일어난 파업도 성공하지 못했다. 1903년 네덜란드에서 실시된 총파업은 사회주의 진영의 내분과 함께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런 경험에 따라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총파업 문제가 제기되었다. 총파업은 대중파업과 구별되었고, 사회 전체의 존립을 대상으로 하는 무정부주의적인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의 존립까지 위협하는 것이었다. 대중파업은 일정한 조건 하에서만 승인 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인터내셔널에서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서 총파업의 기능이 부인되었다. 하지만 1905년 러시아에서 정치적 대중파업이 사회주의적 목표를 향한 사회혁명으로 이어지면서, 인터내셔널에서 총파업의 전술적 성격에 대한 논의가 재개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러시아 혁명이 진압되고 실패로 돌아가 버리면서 다시 무관심 속에 묻히게 된다. 본문으로 3) [역주] 제1인터내셔널의 총평의회와 같은 조직적 구심체가 없다는 것이 제2인터내셔널의 취약점으로 지적되었고, 개선요구가 이어짐에 따라 1900년 파리 대회에서 ISB가 설립된다. 사무국은 의장과 서기, 각국이 2명씩 보낸 대표들로, 전체 약 50~70명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각국 대표들이 자치권을 강력히 고집함에 따라 그 권한은 제한적이었으며, 결합도도 제1인터내셔널의 총평의회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본문으로 4) [역주] 벨기에의 사회주의 작가 정치가. 본문으로 5) [역주] 1905~1906, 1911년 두 차례 모로코의 분할을 둘러싸고 국제분쟁이 일어난다. 모로코는 대서양과 지중해의 연결점이라는 지정학적 이유로 유럽열강의 분열대상이었다. 1880년 체결된 마드리드조약에 의해 모로코 독립이 인정되었지만, 20세기 들어 프랑스의 모로코 침투가 두드러졌다. 프랑스가 모로코의 내정개혁을 요구한데 대해, 1905년 3월 31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모로코 탕헤르항을 방문해서 모로코의 영토보전과 문호개방을 요구하는 연설을 한다. 독일이 프랑스의 이권을 방해하고, 프랑스에 반감을 가진 술탄을 원조함에 따라 프랑스와 독일이 극도의 대립상태에 이른다. 1906년 1~4월 사건 해결을 위해 국제회의가 열렸다. 프랑스와 영국의 결속을 통해 독일이 고립되고 프랑스의 진출이 인정되었다.본문으로 6) 바이앙은 ISB에서 채택된 자신의 제안이 최종적 해법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1907년 7월 9일 ISB 회의에서 그는 슈투트가르트 대회의 의제로 이 문제를 올리는 것을 반대했다. 조레스는 인터내셔널 전체가 이 문제를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바이앙의 제안에 반대한다. 본문으로 7) [역주]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여 강대해진 오스트리아가 발칸반도로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는 발칸 제국(諸國)의 상호유대와 결속을 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12년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사이에 발칸동맹(Balkan League)이 성립되었다. 원래 러시아는 이 발칸동맹을 반(反)오스트리아동맹으로 할 의도였으나, 발칸 제국은 그보다는 투르크 제국에 대항하여 발칸반도에 있는 투르크의 영토를 획득하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1912년 10월 발칸동맹국은 유럽 열강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오스만투르크 영내의 마케도니아 알바니아의 독립운동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몬테네그로가 먼저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하고, 이어 다른 3국도 투르크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1차 발칸전쟁). 열강들의 예상과는 달리 투르크는 패전을 거듭하여 불가리아를 통해 동맹국에 휴전(休戰)을 요청했고, 그 결과 12월 휴전이 성립되었다. 12월 16일부터 런던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어 아드리아노플 등의 할양문제를 둘러싸고 난항을 거듭하다가, 1913년 1월 23일 투르크 내에서 청년투르크당(黨)의 쿠데타가 발생하자, 1월 29일 동맹국은 휴전을 취소하고, 2월 4일 전투를 재개하였다. 5월 30일 강화조약이 성립되어 투르크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의 지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의 영토 전부와 크레타섬을 발칸동맹 제국에 할양하였다. 강화조약에서의 영토분배를 둘러싸고 발칸동맹 내부의 대립이 심화되자, 1913년 6월 29일 불가리아가 돌연 세르비아와 그리스를 공격함으로써 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그로 인해 몬테네그로ㆍ세르비아ㆍ그리스ㆍ루마니아ㆍ투르크 등이 불가리아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 결과 불가리아는 연전연패하여, 7월 30일부터 부쿠레슈티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8월 10일 부쿠레슈티조약이 성립되어 불가리아는 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 할양하고,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와 세르비아에 할양하였으며, 카바라 일대를 그리스에 넘겨주었다.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를 모두 잃었기 때문에 세르비아를 원망하게 되었고 러시아와도 사이가 멀어졌으며,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였다. 발칸전쟁으로 발칸 제국 간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었고, 내셔널리즘이 팽배한 제국들이 유럽 대륙으로의 영토확대를 꾀하면서 발칸반도는 유럽의 화약고가 되었다. 본문으로 8) [역주] James Keir Hardie 1856-1915년 영국 정치가. 초기 노동당 지도자. 극빈한 가정에서 자랐고, 소년시절부터 탄광 갱부(坑夫)로 일하였는데, 20대에 이미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또 저널리스트로도 활동, 1887년 《갱부》지(紙)를 간행하였다. 당시 자유당의 영향 아래 있었던 노동자의 정치적 자립을 주장하였고, 88년 미드라나크의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그 뒤 스코틀랜드노동당을 조직하였고, 92년 사우스웨스트햄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93년에는 독립노동당을 결성, 의장이 되었다. 1900년 이후로는 노동자대표위원회 및 노동당의 중심멤버로 활동하였다.본문으로 9) [역주] (1866. 1. 25 벨기에 익셀-1938. 12. 27 브뤼셀) 유럽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1914~39년 벨기에 연립내각에 몸담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전후 평화협상에 참여하여 영향력을 발휘했다. 1889년 벨기에 노동당에 가입하여 당수가 되었다. 1894년 사회당 소속 의원으로 처음 의회에 진출했으며, 1900년 이후 여러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보통선거권의 관철을 위하여 노력했으며 마침내 1919년 결실을 거두었다. 1914년 국무장관으로 임명된 반데르벨데는 전쟁기간 내내 내각에 몸담았다. 1919~20년 파리 평화회의에 참석,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근로조건개선 조항을 포함시키는 성과를 거두었고, 법무장관으로서 형법의 개정을 추진하기도 했다(1919). 1925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자 사회당과 가톨릭당의 연립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위촉되었고, 그해 독일ㆍ프랑스ㆍ영국ㆍ이탈리아와의 로카르노 조약을 성사시켰다. 이후 2년 동안 앙리 자스파르 내각에서 외무장관직을 수행했으나, 병역기간을 6개월로 한정시키고 반(反)군국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다는 이유로 야당의 비난을 받았다. 무임소장관(1935~36)과 공공보건장관(1936~37)을 역임한 뒤 은퇴하여, 브뤼셀자유대학교에서 법률을 강의했다. 주요저서로 〈집산주의와 산업발전 Le Collectivisme et l' volution industrielle〉(1900), 〈사회주의 대(對) 국가 Le Socialisme contre l' tat〉(1918), <벨기에 노동당, 1885~1925 Le Parti Ouvrier Belge, 1885~1925〉(1925) 등이 있다.본문으로 10) 1908년 9월 영국-독일의 해군력 증강에 반대하는 집회에 독일 대표로 카우츠키가 지목되었을 때, 베벨은 카우츠키가 독일에서 추방될 수도 있다는 걱정을 드러냈다. 본문으로 11) [역주] 오스트리아 통일사회민주당에 참여했으며 지도자로 활동했다. 1881년 이래 노동운동에 참가하여, 1886년 주간지 《평등 Gleichheit》을 창간, 1889년 당기관지 《노동신문 Arbeiter Zeitung》을 창간 편집하였다. 또한 분열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하인페르트 당대회에서 통일사회민주당으로 통합시키는 데 성공했고, 당 강령을 기초하였다. 1905년 의회에 진출, 죽을 때까지 의원으로 활약했는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후 외무장관에 취임하였으나 곧 병사하였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였으며, 마르크스주의 수정주의자(修正主義者)의 대표적인 사람으로서,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본문으로 12) [역주] 1911년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가 출병한다. 그해 7월 독일이 군함을 파견해 프랑스를 위협했는데, 이 사건을 아가디르 사건이라고 한다. 영국이 프랑스를 지지했기 때문에 독일이 프랑스에 양보를 하고 양국 간 협정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프랑스는 독일에 콩고 북부를 할양하고,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에 대한 보호권을 승인한다. 본문으로 13) [역주] 프랑스 통합사회당,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로 1905년 4월 창당되었다. le Parti socialiste unifi , Section Fran aise de l'Internationale Ouvri re.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라는 이름은 당에 대한 인터내셔널의 우위를 표시하는 것이며, 통합이라는 말은 통합이 항구적일 것이라는 것을 뜻했다. 여기에 노동자 성향이 강한 프랑스 혁명사회노동당의 주장으로 노동자라는 뜻의 Ouvri re가 붙여졌다. 본문으로 14) SPD의 대기주의도 고려되어야 한다. SPD 집행위는 임박한 독일의회 선거 때문에 독일 대표가 ISB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보았다. 집행위는 모로코 정책에 반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할 경우, 유권자들이 당을 애국적이지 않다고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본문으로 15) 집회의 슬로건도 각국 당의 관점을 나타냈다. 1911년 9월 프랑스 집회에서는 폭동과 총파업이 요구된 반면, 트렙토우 공원 집회에서는 단지 모든 정치적 경제적 수단이 평화유지에 사용되어야 하며, 독일 유권자들은 다음 독일 의회 선거에서 후보들에게 이를 권고해야 한다는 것이 주장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3-4천 명이 조직되고, 베를린에서는 경찰 추산 5-6만 명, 포어베르츠 추산 20만 명이 조직되었다.본문으로 16) 바이앙의 제안에 대한 논의는 공동행동을 효과저긍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관주의자와 낙관주의자 사이에는 많은 간극이 있었다. 전자 중 베벨은 무능력을 선언하는 것에만 동의했다. 다양한 대표들이 전쟁이 선언된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그 이전에 행동을 취하는 것에는 동의했다. 로자와 바이앙은 전쟁 선언 이후에도 인터내셔널의 힘을 믿으려고 했다.본문으로 17) 예를 들어 CGT는 1911년 10월 긴급히 파리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는 전쟁이 선언될 경우 즉각 혁명적 총파업을 일으킬 것이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본문으로 18) [역주] 19세기 중엽부터 터키에서 사회개혁이 추진되고 있었고, 1876년에는 파샤가 헌법제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술탄은 터키-러시아전쟁(1877~78)을 이유로 헌법을 정지시켰다. 청년투르크당은 이에 헌법을 부활시키고 전제정치를 폐지하기 위해 처음에는 비밀결사로 발족하여 단기간에 사관학교ㆍ기술학교의 장교ㆍ교사ㆍ학생ㆍ정부 직원들 중에서 많은 동조자를 얻어냈다. 20세기에 들어와 청년장교 층이 혁명세력의 지주가 되기에 이르자 당세는 신장되어, 1908년 살로니카에서 혁명을 일으켜 입헌정치를 선언한 뒤, 다음 해 압둘하미드 2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본문으로 19) 9월 23/24일 ISB 회의에서 치오티는 이탈리아 당이 총파업을 결정했고, 곧 이를 위한 회의들이 잡힐 것이며, 의회의 사회주의자 그룹 일부만이 이탈리아의 침략에 찬성할 뿐이라고 선언했다. 본문으로 20) [역주] 1907년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1919 1920년 오스트리아공화국 초대 총리가 되고, 1931 1933년 의회 의장을 역임하였으나 1934년 나치스파(派)에 의하여 투옥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5년 오스트리아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지도자. 본문으로 21)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그리스, 아르헨티나, 아르메니아 대표들이 이 안에 찬성했다. 본문으로 22) 대회의 원래 날짜대로 치르자는 안은 러시아 혁명적 사회주의자, 스위스, 미국, 불가리아 '좁은 사회주의자', 살로니카 노동자 사회주의자 연합의 동의를 받았다.본문으로 23) 러시아 사회혁명당 대표 루바노비치는 당시 병중이었던 플레하노프와, 크라쿠프에 머물고 있어 바젤에 참석하지 못했던 레닌의 합의 하에 이 회의에 참석했다. 본문으로 24) 위스망스는 5월 10일 바이앙에게, ISB가 CGT에도 자문을 구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냐고 물었다. 바이앙은 CGT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위스망스가 개인적으로 호소하라고 제안했다. 본문으로 25) 카메네프에 따르면 '총파업과 폭동'은 슈투트가르트와 코펜하겐 대회 결의안에서 결정되었던 것과 같은 내용이므로, 바젤대회 결의안에 포함되지 않았다.본문으로

  • 2007-02-12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2006년 개괄, 2007년 전망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도입: 전쟁의 확대 2006년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관계, 그리고 2007년에 예상되는 궤적을 이해하려면 다음 세 가지 차원을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첫째, 미국-라틴 아메리카 관계의 전세계적 맥락. 둘째, 미국의 내적 동학. 셋째, 2006년 라틴 아메리카 선거의 실재적이고 실천적인 정치-경제적 결과들.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여전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추구하고 있고, 선거로 당선된 팔레스타인 정부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이란을 직접 또는 이스라엘을 통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즉 2006년 동안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그리고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지부진하고 비용이 많이 들며 결론이 나지 않는 전쟁이 2007년에도 계속될 것이다. 더 많은 군사력 증강은 중동에서의 전쟁 비용과 미군 증가를 포함하며,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특히 이란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쟁 계획에는, 매년 들어가는 30억 달러에 8억 달러가 추가되는 실정이다. 여론 조사나 선거 과정(민주당의 승리), 권고 보고서(베이커(James A. Baker)의 이라크 연구 그룹), 이라크에서의 사망자 통계 등을 통해 미국의 정책을 해석하고 점진적 철군을 예견했던 논평가들은, 백악관의 정치 전략이 갖는 논리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부시 정권이 볼 때, 군사적 실패는 충분한 힘을 쏟지 못한 결과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병력 규모와 군사 예산이다.(2006년 12월 6일 BBC 방송) 양극화 심원하고 점점 더 깊어지는 분할이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전 세계에 나타나, 정책 수립과 분쟁의 증가를 부채질하고 있다. 중동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결이냐 협상이냐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둘러싸고 그어진 미국 내 분할선은 두 주요 당파, 그리고 자유주의-보수주의 스펙트럼을 가로지르고 있다. 한 편에는 백악관이 있으며, 이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전쟁에 찬성하는 민주당원, 공화당원, 주류 유대인 조직들의 대표들, 우익 재향 군인회, 신보수주의 지식인들, 그리고 주류 언론 기업들이다. 다른 한 편에는, 주류 정당들과 언론들 내의 소수파들, 대다수 여론, 전·현직 장교들의 분파,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제임스 카터(James Carter), 제임스 베이커 등 전쟁 정책과 시오니스트들의 로비 활동을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저명한 지식인들이 있다. 유사한 분할이 라틴 아메리카 정책에 관해서도 나타난다. 백악관은 쿠바 망명자들의 로비, 펜타곤 그리고 소수 우익 이데올로그와 자본가들을 등에 업고 있는데, 이들은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에 대한 강제적 압력과 개입을 선호하고, 위법적인 [방법으로 당선된] 칼데론1) 대통령과 볼리비아 내 산타 크루즈(Santa Cruz) 분리주의자들, 이 지역의 권위주의적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을 선호한다. 이에 다양한 정도로 대립하는 자유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의원들이 있는데, 이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농산물 수출업자들, 여행사들, 대다수 여론,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담당 차관보 쉐넌(Thomas Shannon)―그는 외교와 협상, 그리고 ‘이중’(two-track) 접근을 보다 강조할 것을 옹호한다―이 이끄는 국무부 분파들이다. 이와 유사하게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2006년에 유사한 심원한 분할이 나타났는데, 2007년에는 그 골이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멕시코에서는 소수파인 칼데론 정권이 AMLO2) 연합, 와하까(Oaxaca)의 민중 회의들3), 노조와 사회운동들의 거대한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칼데론이 경제적 자유화를 심화시킬수록, 그리고 그의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국가를 군사화할수록 양극화는 심화될 것이다. 볼리비아에서는 우익 사업가들과 농기업 엘리트들이 재결집하여 (토지와 소득의) 어떤 주요 재분배 정책도 수행하지 못하는 모랄레스4)의 무능력과 타협적 정책들을 이용해 산타 크루즈의 권력 기반을 공고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모랄레스로 하여금 개혁에서 더욱 후퇴하게 만들고 대중적인 불만들을 불러일으켰다. 에콰도르에서도 안데스 지역의 농부/인디오들과 태평양 연안의 토지귀족/은행가들 사이에 동일한 분할이 나타났다. 또한 콜롬비아에서는 우리베5) 대통령과 동맹을 맺고 있는 준(準)군사조직들과 민중적인 시민 사회 조직들(과 게릴라들) 사이의 분할이 더욱 심화되었다.(Boston Globe December 14, 2006) 베네수엘라에서는, 차베스가 사회주의 의제를 위해 당과 내각의 변화를 이행하는 2007년에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자유주의적 차베스주의자들(그리고 ‘온건’ 반대파 쪽 동맹자들) 간의 양극화가 표현에 떠오를 것이다. 이러한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내적 분할들은 계급적·민족적 대립들을 발본화하는 국제적 맥락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국제적 맥락 세계사적인 두 과정이 미국의 대(對)라틴 아메리카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나는 지지부진한 중동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의 4대 유력 국가의 역동적 성장이다. 중동과 남부 아시아에서의 전쟁들은 미국의 군사력을 과도하게 확장시켰고 새로운 전쟁들에 대한 국내의 지지를 침식했으며, 예산을 무리하게 사용했다. 이러한 결과들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군사 쿠데타를 지원하거나, 직접적으로 무력침공할 수 있는 미국의 군사 개입 역량을 약화시켰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칼데론, 산타 크루즈의 토지/금융 귀족, 가르시아6), 우리베 등) 라틴 아메리카의 매판 세력에 대한 의존도를 더하게 된다. 아시아(특히 중국과 인도)의 역동적 성장과 (철광석, 구리, 그리고 석유 등) 원자재, (가령 콩 등) 식량 및 농산물에 대한 수요는, 라틴 아메리카 수출업자들과 공급자들에 대한 접근을 둘러싼 미국/EU와의 경쟁을 강화했으며, 가격 및 (주요 무역/예산 흑자로 인한) 라틴 아메리카 국고 수입 증대를 초래했다. 아시아는 라틴 아메리카 수출업자들에게 더 많은 다변화된 시장과 투자를 제공했다. 이러한 변화는 외부 재정(특히 IMF)과 미국 시장에 대한 의존이 줄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역으로 워싱턴이 라틴 아메리카 정권들 심지어 룰라, 바첼레트7), 키르치네르8), 그리고 바스케스9) 등 신자유주의 정권들에 대해서까지 정치적·외교적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군사적 역량 상실과 경제적 영향력 쇠퇴에 직면하여 워싱턴은 백악관의 강경 노선 군사주의자들과 국무부의 시장주의적 ‘협상파들’ 사이에서 ‘타협’을 시도하는 중이다. 타협의 핵심은 ‘이중 정책’의 수행으로, 정권을 전복할 만한 반대파가 강한 국가들(볼리비아)에서의 반대파 지원과, 반대파가 약한 국가들(베네수엘라)에서의 협상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등)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갖는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해서는, 양자간 관계를 강조하고 경제적 기회를 극대화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대중운동들 특히 사유화를 역전시키는 요구들에 대해 어떠한 양보도 하지 못하게 한다. 이중 정책은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경우 배합되어 나타날 것이다. 외교와 소유, 투자에서의 주요한 양보를 조건으로 하는 대화와 협정을 약속하는 한편, 불안정을 선동하는 첩자들에게 지속적인 금융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 정치적 변동과 미국의 대응 2006년 라틴 아메리카 선거 결과 나타난 정권 교체에 대해 미국이 온건하게 반응하는 것은, 정권 교체가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예견되는 아무런 중대한 사회경제적 구조 변화도 낳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중도 좌파’의 선거 승리가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은 룰라의 선거 승리 사례에서 가장 확실하게 증명되는데, 룰라는 (프레이 베토(Frei Betto), 에미르 사데르(Emir Sader), 조앙 페드로 스테딜리(Joao Pedro Stedile) 등) 자신의 가장 열렬한 지식인 지지자들에게조차도, 자신이 ‘좌파 사상은 유아기적 혼란’(La Jornada 2006년 12월 14일자)이라고 간주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는데, [북]반구 전역의 재계는 이 언급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월 스트리트는, 브라질 최저 임금이 159 달러에서 166 달러로 월 7 달러(인플레이션 후 약 1.7%) 오르는 동안, 의원들의 봉급을 월 6,500 달러에서 12,000 달러로(그리고 개별 의원들의 개인 예산은 월 75,000 달러로) 배가하는 것에 브라질 ‘노동자당’이 찬성표를 던졌다는 것에 틀림없이 크게 기꺼워했을 것이다.(Financial Times 2006년 12월 16~17일자) 브라질 의원들의 1/5(그들의 상당수가 룰라의 연립 여당 출신이다)는 현재 부패 혐의로 조사 중이다. 최근 마찬가지로 사기 혐의로 조사 중이지만 여전히 엄청난 연말 보너스를 받은 월 스트리트 투기꾼들은, 범죄 행위에 대한 기소를 기다리면서 자신들의 봉급을 두 배나 올린 브라질 입법자들과 진정으로 처지가 같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백악관의 예상과는 반대로, 하지만 백악관의 마음에 아주 들어맞게, 에보 모랄레스 정권은 흑자 예산을 겨냥한 교조적인 긴축적 재정 정책을 수행하고 있으며, 어떠한 재분배 정책도 피하고 있다.(사실상 어떤 토지나 광산, 에너지 자원도 몰수되지 않았다.) 모랄레스가 사회운동들을 해산시키고 끝없는 법적 절차에 집중하는 동안, 과두집단들은 재결집하여 산타 크루즈의 권력 기반을 확장했으며 정부를 붕괴시키겠다는 위협을 가하고 있다. 워싱턴의 과두제적 볼리비아 매판 세력들이 권력을 향해 진군하는 동안(La Jornada 2006년 12월 16일자), 에보 모랄레스는 상징적일 뿐인 급진 인민주의 수사를 구사하고 엘리트들에게 더욱 크게 양보하는 자기파괴적 정책을 계속하고 있다. 워싱턴은 양쪽 진영에 계속 발을 담그고 있는 바, 모랄레스에 대한 해외 원조에 6천만 달러 이상을 제공하는 한편, 거대한 ‘분리주의’ 시위를 조직하는 산타 크루즈의 반대파에게 수백만 달러를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다.(HoyBolivia.com 2006년 12월 16일자) 워싱턴의 ‘온건 노선’ 협상파들(쉐넌)은 (63%의 지지율을 얻은) 위고 차베스의 선거 승리를 국교 회복의 근거로 지적하면서, 백악관의 대(對)베네수엘라 ‘강경 노선’ 정책에 대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켰다.(La Jornada 2006년 12월 14일자) 쉐넌은 차베스 정부의 중요한 분파들이, 현상을 유지하고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을 완화하며 석유와 가스 협정을 강화하는 한편 경제의 사회화를 향한 어떤 진전도 가로막는 것 등을 포함하는 협상안들에 관용적이라는 주장을 워싱턴에 제출한 바 있다. 2007년 전망 2007년 미국의 국제적 지위는 지속적으로 악화될 것이다. 이라크에서 예정된 대규모 병력 증가,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란, 시리아, 헤즈볼라와 하마스를(또는 모든 곳을 일제히) 위협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돕기 위한 대규모 무기 이전은, 이라크에서의 무장 저항을 감소시키지 못할 것이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지역 국가 전역에 전쟁을 확대시킬 것이다. 2006년 12월 15일, 부시는 이스라엘 극단주의자 나탄 샤란스키(Natan Sharansky)―‘대(大)이스라엘’(greater Israel)에서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을 살육적으로 ‘이전’(transfer)할 것을 주창한―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는데, 이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사주의와 이스라엘의 잔인한 식민주의적 팽창주의의 정신이 맞닿아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베이커의 이라크 연구 그룹의 권고 같은) 어떤 새로운 외교적 해결책마저도 완전히 폐기한 것은, 강력한 친이스라엘 로비와 부시-체니-라이스로 이어지는 백악관의 힘이 결합된 결과다. 워싱턴은, 중동에서 군사적으로 과도하게 팽창한 상태이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이중’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백악관은 (예컨대 우리베, 칼데론, 그리고 가르시아 등) 현직에 있는 매판 세력들을 지원할 것이다. 미 국무부와 재무부, 상무부는 (룰라, 바첼레트, 키르치네르, 그리고 바스케스 등) 보다 ‘자율적’인 신자유주의 정권들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자 노력하면서, 쿠바 및 베네수엘라와는 더욱 거리를 두게 하고, 미국과의 외교 관계는 더욱 가깝게 만들고자 할 것이다. 볼리비아의 경우, 워싱턴은 산타 크루즈에 기반을 둔 극우파들의 공민적-과두제적(civic-oligarchic) 동맹에 더 많은 양보를 하도록 모랄레스에게 계속 압박을 가할 것인데, 이로써 지역 재계 엘리트들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에 ‘솔선’하도록 만들 것이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이중 정책’이 차베스주의 운동 내에서 정치적 분할을 더욱 깊게 만들고자 할 것인데, 그 목적은 더 많은 사회화를 향하는 새로운 차베스의 발의를 막는 것, 그리고 ‘온건 반대파’들과 자유주의적 차베스주의자들의 새로운 정치 형세를 촉진하는 것이다. 워싱턴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기획하고 있는 전략의 가장 약한 고리는, 1990년대 후반과 새로운 세기 첫 해에 폭발했던 것과 같은 사회-정치 운동들의 재출현이다. 브라질의 MST10), 볼리비아와 에콰도르에서의 노동자들, 농민들, 그리고 인디오 운동, 와하까의 대중 봉기와 멕시코의 선거 저항 등은 재결집의 도정에 있으며, 이 중 누구도 아직 역사적인 패배를 겪지 않았다. 모든 주요한 민중운동들은 조직 구조를 보존시키고 있으며, 정치적 독립성을 회복했다. 이들이, 권력을 점하고 있는 과두집단들, 또는 거리에 있는 그들의 돌격대들에 맞서는 거대한 봉기와 정치적 대결에 다시 한 번 가담할 수 있게 되는 날이 멀지 않았다. 새로운 해는 ‘지금까지와 같은 것’(more of the same)을 기약하지 않는다. 새해는 중동에서 미국의 군사력 증강으로 시작하겠지만, 더 큰 군사적 패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중동과 미국, 라틴 아메리카 모두에서 정치적 위기의 심화와 경제적 불안정성의 증대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미국 정치 체제의 약화는 미 제국과 결정적으로 단절하는 기회의 창을 열 것이다 ― 만일 재출현하는 사회-정치 운동들이 전통적 과두집단들과 전직 좌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이 부과한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면 말이다. 1) [역주] Felipe de Jes?s Calder?n Hinojosa, 현직 멕시코 대통령. 2006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본문으로 2) [역주] Andres Manuel Lopez Obrador, 멕시코 민주혁명당(PRD) 소속이며 멕시코시티 시장 역임. 2006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 후보. 본문으로 3) 멕시코 와하까에 벌어진 대중투쟁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와하카의 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은 하나다!」, 사회화와 노동 335호를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4) [역주] Evo Morales, 현직 볼리비아 대통령. 사회주의운동당(MAS)을 이끌었으며 2006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에보 모랄레스의 대선 승리와 볼리비아 국유화 정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권태훈, 「볼리비아 국유화 정책의 의미와 향후 과제」, 『월간 사회운동 2006년 6월』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5) [역주] Alvaro Uribe Velez, 현직 콜롬비아 대통령. 2006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친미보수 강경파이며 좌익 게릴라에 대한 잔인한 진압으로 악명이 높다. 본문으로 6) [역주] Alan Garc?a P?rez, 현직 페루 대통령. 1985년 집권했으며, 퇴임 후 부패혐의로 기소되어 프랑스와 콜롬비아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2006년 대선에서 다시 당선됐다. 본문으로 7) [역주] Ver?nica Michelle Bachelet Jeria, 사회당 출신의 현직 칠레 대통령. 본문으로 8) [역주] Nestor Carlos Kirchner, 아르헨티나 대통령. 페론당 내 중도파로 알려져 있으며 2003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본문으로 9) [역주] Frente Amplio Tabare Vazquez, 현직 우루과이 대통령. 2004년 대선에서 ‘야당연합전선’의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됐다. 본문으로 10) [역주] movimento dos trabalhadores rurais sem terras - 무토지 농민운동.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류미경,「대안세계화운동과 농민」,『월간 사회진보연대 2003년 7-8월호』를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 2007-02-12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2006년 개괄, 2007년 전망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도입: 전쟁의 확대 2006년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관계, 그리고 2007년에 예상되는 궤적을 이해하려면 다음 세 가지 차원을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첫째, 미국-라틴 아메리카 관계의 전세계적 맥락. 둘째, 미국의 내적 동학. 셋째, 2006년 라틴 아메리카 선거의 실재적이고 실천적인 정치-경제적 결과들.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은 여전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적 승리를 추구하고 있고, 선거로 당선된 팔레스타인 정부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으며, 이란을 직접 또는 이스라엘을 통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즉 2006년 동안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레바논, 그리고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지부진하고 비용이 많이 들며 결론이 나지 않는 전쟁이 2007년에도 계속될 것이다. 더 많은 군사력 증강은 중동에서의 전쟁 비용과 미군 증가를 포함하며,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특히 이란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쟁 계획에는, 매년 들어가는 30억 달러에 8억 달러가 추가되는 실정이다. 여론 조사나 선거 과정(민주당의 승리), 권고 보고서(베이커(James A. Baker)의 이라크 연구 그룹), 이라크에서의 사망자 통계 등을 통해 미국의 정책을 해석하고 점진적 철군을 예견했던 논평가들은, 백악관의 정치 전략이 갖는 논리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부시 정권이 볼 때, 군사적 실패는 충분한 힘을 쏟지 못한 결과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병력 규모와 군사 예산이다.(2006년 12월 6일 BBC 방송) 양극화 심원하고 점점 더 깊어지는 분할이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전 세계에 나타나, 정책 수립과 분쟁의 증가를 부채질하고 있다. 중동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결이냐 협상이냐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둘러싸고 그어진 미국 내 분할선은 두 주요 당파, 그리고 자유주의-보수주의 스펙트럼을 가로지르고 있다. 한 편에는 백악관이 있으며, 이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전쟁에 찬성하는 민주당원, 공화당원, 주류 유대인 조직들의 대표들, 우익 재향 군인회, 신보수주의 지식인들, 그리고 주류 언론 기업들이다. 다른 한 편에는, 주류 정당들과 언론들 내의 소수파들, 대다수 여론, 전·현직 장교들의 분파,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 제임스 카터(James Carter), 제임스 베이커 등 전쟁 정책과 시오니스트들의 로비 활동을 정치적으로 비판하는 저명한 지식인들이 있다. 유사한 분할이 라틴 아메리카 정책에 관해서도 나타난다. 백악관은 쿠바 망명자들의 로비, 펜타곤 그리고 소수 우익 이데올로그와 자본가들을 등에 업고 있는데, 이들은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에 대한 강제적 압력과 개입을 선호하고, 위법적인 [방법으로 당선된] 칼데론1) 대통령과 볼리비아 내 산타 크루즈(Santa Cruz) 분리주의자들, 이 지역의 권위주의적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을 선호한다. 이에 다양한 정도로 대립하는 자유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인 의원들이 있는데, 이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농산물 수출업자들, 여행사들, 대다수 여론,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담당 차관보 쉐넌(Thomas Shannon)―그는 외교와 협상, 그리고 ‘이중’(two-track) 접근을 보다 강조할 것을 옹호한다―이 이끄는 국무부 분파들이다. 이와 유사하게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2006년에 유사한 심원한 분할이 나타났는데, 2007년에는 그 골이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멕시코에서는 소수파인 칼데론 정권이 AMLO2) 연합, 와하까(Oaxaca)의 민중 회의들3), 노조와 사회운동들의 거대한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칼데론이 경제적 자유화를 심화시킬수록, 그리고 그의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 국가를 군사화할수록 양극화는 심화될 것이다. 볼리비아에서는 우익 사업가들과 농기업 엘리트들이 재결집하여 (토지와 소득의) 어떤 주요 재분배 정책도 수행하지 못하는 모랄레스4)의 무능력과 타협적 정책들을 이용해 산타 크루즈의 권력 기반을 공고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모랄레스로 하여금 개혁에서 더욱 후퇴하게 만들고 대중적인 불만들을 불러일으켰다. 에콰도르에서도 안데스 지역의 농부/인디오들과 태평양 연안의 토지귀족/은행가들 사이에 동일한 분할이 나타났다. 또한 콜롬비아에서는 우리베5) 대통령과 동맹을 맺고 있는 준(準)군사조직들과 민중적인 시민 사회 조직들(과 게릴라들) 사이의 분할이 더욱 심화되었다.(Boston Globe December 14, 2006) 베네수엘라에서는, 차베스가 사회주의 의제를 위해 당과 내각의 변화를 이행하는 2007년에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자유주의적 차베스주의자들(그리고 ‘온건’ 반대파 쪽 동맹자들) 간의 양극화가 표현에 떠오를 것이다. 이러한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내적 분할들은 계급적·민족적 대립들을 발본화하는 국제적 맥락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국제적 맥락 세계사적인 두 과정이 미국의 대(對)라틴 아메리카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나는 지지부진한 중동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의 4대 유력 국가의 역동적 성장이다. 중동과 남부 아시아에서의 전쟁들은 미국의 군사력을 과도하게 확장시켰고 새로운 전쟁들에 대한 국내의 지지를 침식했으며, 예산을 무리하게 사용했다. 이러한 결과들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군사 쿠데타를 지원하거나, 직접적으로 무력침공할 수 있는 미국의 군사 개입 역량을 약화시켰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칼데론, 산타 크루즈의 토지/금융 귀족, 가르시아6), 우리베 등) 라틴 아메리카의 매판 세력에 대한 의존도를 더하게 된다. 아시아(특히 중국과 인도)의 역동적 성장과 (철광석, 구리, 그리고 석유 등) 원자재, (가령 콩 등) 식량 및 농산물에 대한 수요는, 라틴 아메리카 수출업자들과 공급자들에 대한 접근을 둘러싼 미국/EU와의 경쟁을 강화했으며, 가격 및 (주요 무역/예산 흑자로 인한) 라틴 아메리카 국고 수입 증대를 초래했다. 아시아는 라틴 아메리카 수출업자들에게 더 많은 다변화된 시장과 투자를 제공했다. 이러한 변화는 외부 재정(특히 IMF)과 미국 시장에 대한 의존이 줄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역으로 워싱턴이 라틴 아메리카 정권들 심지어 룰라, 바첼레트7), 키르치네르8), 그리고 바스케스9) 등 신자유주의 정권들에 대해서까지 정치적·외교적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군사적 역량 상실과 경제적 영향력 쇠퇴에 직면하여 워싱턴은 백악관의 강경 노선 군사주의자들과 국무부의 시장주의적 ‘협상파들’ 사이에서 ‘타협’을 시도하는 중이다. 타협의 핵심은 ‘이중 정책’의 수행으로, 정권을 전복할 만한 반대파가 강한 국가들(볼리비아)에서의 반대파 지원과, 반대파가 약한 국가들(베네수엘라)에서의 협상을 결합시키는 것이다. (브라질, 칠레, 아르헨티나 등)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갖는 신자유주의 정권에 대해서는, 양자간 관계를 강조하고 경제적 기회를 극대화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대중운동들 특히 사유화를 역전시키는 요구들에 대해 어떠한 양보도 하지 못하게 한다. 이중 정책은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경우 배합되어 나타날 것이다. 외교와 소유, 투자에서의 주요한 양보를 조건으로 하는 대화와 협정을 약속하는 한편, 불안정을 선동하는 첩자들에게 지속적인 금융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 정치적 변동과 미국의 대응 2006년 라틴 아메리카 선거 결과 나타난 정권 교체에 대해 미국이 온건하게 반응하는 것은, 정권 교체가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 예견되는 아무런 중대한 사회경제적 구조 변화도 낳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중도 좌파’의 선거 승리가 거의 의미가 없다는 것은 룰라의 선거 승리 사례에서 가장 확실하게 증명되는데, 룰라는 (프레이 베토(Frei Betto), 에미르 사데르(Emir Sader), 조앙 페드로 스테딜리(Joao Pedro Stedile) 등) 자신의 가장 열렬한 지식인 지지자들에게조차도, 자신이 ‘좌파 사상은 유아기적 혼란’(La Jornada 2006년 12월 14일자)이라고 간주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는데, [북]반구 전역의 재계는 이 언급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월 스트리트는, 브라질 최저 임금이 159 달러에서 166 달러로 월 7 달러(인플레이션 후 약 1.7%) 오르는 동안, 의원들의 봉급을 월 6,500 달러에서 12,000 달러로(그리고 개별 의원들의 개인 예산은 월 75,000 달러로) 배가하는 것에 브라질 ‘노동자당’이 찬성표를 던졌다는 것에 틀림없이 크게 기꺼워했을 것이다.(Financial Times 2006년 12월 16~17일자) 브라질 의원들의 1/5(그들의 상당수가 룰라의 연립 여당 출신이다)는 현재 부패 혐의로 조사 중이다. 최근 마찬가지로 사기 혐의로 조사 중이지만 여전히 엄청난 연말 보너스를 받은 월 스트리트 투기꾼들은, 범죄 행위에 대한 기소를 기다리면서 자신들의 봉급을 두 배나 올린 브라질 입법자들과 진정으로 처지가 같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백악관의 예상과는 반대로, 하지만 백악관의 마음에 아주 들어맞게, 에보 모랄레스 정권은 흑자 예산을 겨냥한 교조적인 긴축적 재정 정책을 수행하고 있으며, 어떠한 재분배 정책도 피하고 있다.(사실상 어떤 토지나 광산, 에너지 자원도 몰수되지 않았다.) 모랄레스가 사회운동들을 해산시키고 끝없는 법적 절차에 집중하는 동안, 과두집단들은 재결집하여 산타 크루즈의 권력 기반을 확장했으며 정부를 붕괴시키겠다는 위협을 가하고 있다. 워싱턴의 과두제적 볼리비아 매판 세력들이 권력을 향해 진군하는 동안(La Jornada 2006년 12월 16일자), 에보 모랄레스는 상징적일 뿐인 급진 인민주의 수사를 구사하고 엘리트들에게 더욱 크게 양보하는 자기파괴적 정책을 계속하고 있다. 워싱턴은 양쪽 진영에 계속 발을 담그고 있는 바, 모랄레스에 대한 해외 원조에 6천만 달러 이상을 제공하는 한편, 거대한 ‘분리주의’ 시위를 조직하는 산타 크루즈의 반대파에게 수백만 달러를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다.(HoyBolivia.com 2006년 12월 16일자) 워싱턴의 ‘온건 노선’ 협상파들(쉐넌)은 (63%의 지지율을 얻은) 위고 차베스의 선거 승리를 국교 회복의 근거로 지적하면서, 백악관의 대(對)베네수엘라 ‘강경 노선’ 정책에 대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켰다.(La Jornada 2006년 12월 14일자) 쉐넌은 차베스 정부의 중요한 분파들이, 현상을 유지하고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을 완화하며 석유와 가스 협정을 강화하는 한편 경제의 사회화를 향한 어떤 진전도 가로막는 것 등을 포함하는 협상안들에 관용적이라는 주장을 워싱턴에 제출한 바 있다. 2007년 전망 2007년 미국의 국제적 지위는 지속적으로 악화될 것이다. 이라크에서 예정된 대규모 병력 증가,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란, 시리아, 헤즈볼라와 하마스를(또는 모든 곳을 일제히) 위협하거나 공격하는 것을 돕기 위한 대규모 무기 이전은, 이라크에서의 무장 저항을 감소시키지 못할 것이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지역 국가 전역에 전쟁을 확대시킬 것이다. 2006년 12월 15일, 부시는 이스라엘 극단주의자 나탄 샤란스키(Natan Sharansky)―‘대(大)이스라엘’(greater Israel)에서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을 살육적으로 ‘이전’(transfer)할 것을 주창한―에게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는데, 이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사주의와 이스라엘의 잔인한 식민주의적 팽창주의의 정신이 맞닿아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베이커의 이라크 연구 그룹의 권고 같은) 어떤 새로운 외교적 해결책마저도 완전히 폐기한 것은, 강력한 친이스라엘 로비와 부시-체니-라이스로 이어지는 백악관의 힘이 결합된 결과다. 워싱턴은, 중동에서 군사적으로 과도하게 팽창한 상태이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이중’ 정책을 추진할 것이다. 백악관은 (예컨대 우리베, 칼데론, 그리고 가르시아 등) 현직에 있는 매판 세력들을 지원할 것이다. 미 국무부와 재무부, 상무부는 (룰라, 바첼레트, 키르치네르, 그리고 바스케스 등) 보다 ‘자율적’인 신자유주의 정권들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고자 노력하면서, 쿠바 및 베네수엘라와는 더욱 거리를 두게 하고, 미국과의 외교 관계는 더욱 가깝게 만들고자 할 것이다. 볼리비아의 경우, 워싱턴은 산타 크루즈에 기반을 둔 극우파들의 공민적-과두제적(civic-oligarchic) 동맹에 더 많은 양보를 하도록 모랄레스에게 계속 압박을 가할 것인데, 이로써 지역 재계 엘리트들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에 ‘솔선’하도록 만들 것이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이중 정책’이 차베스주의 운동 내에서 정치적 분할을 더욱 깊게 만들고자 할 것인데, 그 목적은 더 많은 사회화를 향하는 새로운 차베스의 발의를 막는 것, 그리고 ‘온건 반대파’들과 자유주의적 차베스주의자들의 새로운 정치 형세를 촉진하는 것이다. 워싱턴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기획하고 있는 전략의 가장 약한 고리는, 1990년대 후반과 새로운 세기 첫 해에 폭발했던 것과 같은 사회-정치 운동들의 재출현이다. 브라질의 MST10), 볼리비아와 에콰도르에서의 노동자들, 농민들, 그리고 인디오 운동, 와하까의 대중 봉기와 멕시코의 선거 저항 등은 재결집의 도정에 있으며, 이 중 누구도 아직 역사적인 패배를 겪지 않았다. 모든 주요한 민중운동들은 조직 구조를 보존시키고 있으며, 정치적 독립성을 회복했다. 이들이, 권력을 점하고 있는 과두집단들, 또는 거리에 있는 그들의 돌격대들에 맞서는 거대한 봉기와 정치적 대결에 다시 한 번 가담할 수 있게 되는 날이 멀지 않았다. 새로운 해는 ‘지금까지와 같은 것’(more of the same)을 기약하지 않는다. 새해는 중동에서 미국의 군사력 증강으로 시작하겠지만, 더 큰 군사적 패주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중동과 미국, 라틴 아메리카 모두에서 정치적 위기의 심화와 경제적 불안정성의 증대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미국 정치 체제의 약화는 미 제국과 결정적으로 단절하는 기회의 창을 열 것이다 ― 만일 재출현하는 사회-정치 운동들이 전통적 과두집단들과 전직 좌파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정치 엘리트들이 부과한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면 말이다. 1) [역주] Felipe de Jes?s Calder?n Hinojosa, 현직 멕시코 대통령. 2006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본문으로 2) [역주] Andres Manuel Lopez Obrador, 멕시코 민주혁명당(PRD) 소속이며 멕시코시티 시장 역임. 2006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 후보. 본문으로 3) 멕시코 와하까에 벌어진 대중투쟁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와하카의 투쟁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은 하나다!」, 사회화와 노동 335호를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4) [역주] Evo Morales, 현직 볼리비아 대통령. 사회주의운동당(MAS)을 이끌었으며 2006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에보 모랄레스의 대선 승리와 볼리비아 국유화 정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권태훈, 「볼리비아 국유화 정책의 의미와 향후 과제」, 『월간 사회운동 2006년 6월』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5) [역주] Alvaro Uribe Velez, 현직 콜롬비아 대통령. 2006년 대선에서 당선됐다. 친미보수 강경파이며 좌익 게릴라에 대한 잔인한 진압으로 악명이 높다. 본문으로 6) [역주] Alan Garc?a P?rez, 현직 페루 대통령. 1985년 집권했으며, 퇴임 후 부패혐의로 기소되어 프랑스와 콜롬비아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2006년 대선에서 다시 당선됐다. 본문으로 7) [역주] Ver?nica Michelle Bachelet Jeria, 사회당 출신의 현직 칠레 대통령. 본문으로 8) [역주] Nestor Carlos Kirchner, 아르헨티나 대통령. 페론당 내 중도파로 알려져 있으며 2003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본문으로 9) [역주] Frente Amplio Tabare Vazquez, 현직 우루과이 대통령. 2004년 대선에서 ‘야당연합전선’의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됐다. 본문으로 10) [역주] movimento dos trabalhadores rurais sem terras - 무토지 농민운동.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류미경,「대안세계화운동과 농민」,『월간 사회진보연대 2003년 7-8월호』를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 2007-02-12

    연금 개혁 비판과 노동자 민중의 대응방향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반대 투쟁의 기초 위에서 노동자 민중의 지혜를 모으자!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연금 개혁 논쟁 이른바 '더 내고 덜 받는' 방향의 연금 개혁안이 작년 말 국회 상임위를 통과하여, 2월 임시국회 본회의 처리를 앞두고 있다. 또한 국민연금 개혁과 연동되어 추진 중인 공무원연금 개혁은 발전위원회 시안이 제출되어 있다. 2003년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시작되던 당시, 운동진영은 정부의 개혁 구상이 재정고갈 위험만을 고려하여 사각지대나 낮은 보장성, 기금운용 체계·방식과 같은 긴급한 쟁점들을 오히려 후퇴시키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치권 내의 논의가 급진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이러한 입장은 일정한 분화·굴절을 겪었다. 민주노동당이 기초연금 도입을 전제로 한 국민연금 개혁안을 제안한 것과 정부 주관 하의 <저출산·고령화대책연석회의>1)에 참가한 일부 시민단체들이 정부의 개혁방안을 수용한 것이 주요한 계기였다. 이들은 정부의 개혁방안을 큰 틀에서 수용하는 가운데, 기초연금을 더욱 확대하는 방안이나 저소득층 보험료 지원 사업 등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현재 국민연금 개혁을 둘러싼 논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연금제도의 측면에서 보자면, 공적연금(국민연금)-사적연금(퇴직연금)-개인보험으로 구성되는, 세계은행과 같은 신자유주의 집행기관들이 장려하는 다층적 노후소득보장체계의 도입이 기정사실화되어 추진 중이다. 또한 운동진영 내적으로 민주노동당에서 제안하는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 사업을 둘러싸고 계급적 해법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불붙고 있다. 더욱이 보험료 지원 사업에 관해서는 소득연대전략, 사회연대전략 등을 표방하며 추가적인 정책대안이 제안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노동자운동의 전략을 둘러싼 논쟁의 한 축으로 확대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정부 연금 개혁의 본질이 막대한 적립금을 유지하여 연기금의 금융화를 더욱 확대하는 데 있으며, 이는 노동자 민중의 노후소득을 금융자본의 불안정성과 직접 연계시키는 매우 위험한 발상임을 중심적으로 비판해왔다. 따라서 정부가 추진하는 연금 개혁의 기만성을 폭로하며 현행 연금제도를 방어하는 투쟁을 진행하는 가운데, 실질적인 노후소득 보장이 가능한 민중적 대안을 모색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글의 기본 목적은 이런 문제의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데 있다. 2월 임시국회에서 실제 법이 개정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혁과 연금기금의 금융화를 확대하려는 시도는 지속될 것이므로, 연금 개혁의 본질과 대응 원칙에 대한 대중적 논의는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나아가 그 동안 연금 개혁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형성된 쟁점뿐만 아니라 현재의 논의지형과 향후 전개방향을 차분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로부터 민중적인 대안을 구성함에 있어서 사회운동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 원칙에 대한 합의를 모아나갈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국민연금 개혁 논의 과정과 쟁점 국민연금 개혁의 과정과 쟁점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우선 연금제도의 기본 형태를 살펴보도록 하자. 연금제도는 기금의 적립여부, 그리고 보험료와 급여액 중 어떤 것을 사전에 확정하고 가느냐를 주요 축으로 하여 구성된다. 보험 가입자의 보험료와 국고보조금, 이자 등을 꾸준히 축적한 적립금에서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을 적립방식, 한해에 필요한 보험 급여액을 산정하여 이를 현세대 보험 가입자들이 납부하는 방식을 부과방식이라 한다. 한편 퇴직 후 받을 급여액을 처음부터 확정하는 방식을 확정급여형(DB, define benefit), 급여는 사전에 정해져 있지 않고 보험료만 정해 놓는 방식을 확정기여형(DC, define contribute)으로 구분한다. 이 두 가지 축을 상호 교차시켜 연금제도의 여러 형태를 도출하는데, 한국의 국민연금은 수정적립식, 확정급여형 체계다. 이 때 수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순수 적립식은 논리 상 가입자가 납부한 보험료만큼만 되돌려 받는, 사실상 저축과 유사한 형태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납입한 보험료에 비해 약 2배 이상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따라서 일정한 시점이 되면 적립금의 고갈이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연금 수급이 본격화되어 기금이 소진되면 부과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은 애초 국민연금 제도 도입 당시 기본 가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1998년 국민연금이 가입대상을 전 국민으로 확대하면서 기금운용법이 제정되었고, 이에 따라 5년 마다 재정추계를 통해 재정안정성을 점검하기로 하였다. 재정추계는 경제성장률, 임금상승률, 인구성장률 등을 고려하여 이루어지고, 2003년 재정추계 당시 정부는 추계 기간을 2070년까지로 설정하였다. 여기서 정부는 인구노령화2) 문제를 집중 부각시켰다. 공적연금은 적립방식이든 부과방식이든 현세대 노동자와 후세대 노동자 간의 소득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의 낮은 출산율과 고령화 문제를 통해 연금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재정추계 결과 국민연금 적립기금이 2036년까지는 계속 증가하여 약 1,715조(GDP대비 약 70%)에 달하지만, 이후 급격히 감소하여 2047년이면 적립금이 고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국민연금 개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정부의 재정추계 방식과 그에 근거한 개혁방안에 대해 운동진영은 정부 추계 기간이 지나치게 길고, 출산율과 노령화를 기계적으로 예측하는 추계방식을 절대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현행 국민연금 제도가 안고 있는 사각지대 문제, 낮은 보장성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사각지대 문제는 '전 국민 국민연금 시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매우 심각하다. 현재 국민연금의 사업장 가입자는 약 800만 명, 지역 가입자는 약 900만 명으로, 총 1,700만 명 정도가 국민연금에 가입해 있다. 전체 노동자 1,500만 명(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가입자가 약 120만 명) 중 600만 명가량이 일용직이나 특수고용직과 같이 고용형태 상의 제한으로 가입 자체를 못하거나,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경우와 같이 보험료 부담으로 가입을 회피하고 있다. 이들이 가입 자체를 배제당하는 제도 상의 사각지대에 있다면, 가입은 가능하지만 소득이 낮아 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하는 실질적인 사각지대에 놓인 납부예외자는 전체 가입자의 42%에 이른다. 특히 지역가입자의 절반가량인 450만 명이 이에 해당한다. 현재 한국의 경제활동인구가 2,4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중 실제 보험료를 납부하는 국민연금 가입자는 고작 1,000만 명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3). 그러나 사각지대 문제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장수준 문제와 연결된다. 작년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현재 노동자들이 한 직장에서 머무는 평균 기간은 6년 정도로 나타났다. 국민연금 현행제도 60% 급여율이나 개정안 50% 급여율은 모두 40년 가입을 조건으로 하는데, 불안정한 고용기간을 감안하면 실제 보장수준은 20% 안팎에 불과할 것이다. 당시 정치권 내에서는 정부 여당의 보험료를 높이고 급여율을 낮추는 개혁방안(모수적 개혁안)과 한나라당, 민주노동당의 기초연금 도입을 전제한 국민연금 조정 방안(구조적 개혁안)이 팽팽히 맞섰다. 정부 여당의 경우 재정안정화를 먼저 해결하고 사각지대, 보장성 등의 쟁점은 추후에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은 기초연금 도입 자체에서는 주장이 일치했지만, 세부적인 내용이나 명분은 달랐다4). 한나라당 안은 이른바 '국민연금 8대 비밀'로 상징되는 국민연금에 대한 대중적 불신에 편승하여, 세간의 평처럼 노인들 표를 의식한 전형적인 인기영합식 정책에 불과했다. 민주노동당은 국민연금의 후퇴를 다소 감수하더라도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초연금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의지형이 유지되던 가운데 작년 여름 경 정부 여당이 기초노령연금 도입을 수용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는데, 합의된 개정법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민연금은 평균소득액의 60%인 연금 급여 수준을 2008년부터 50%로 낮추고, 보험료율은 현행 소득의 9%에서 2009년부터 2018년까지 매년 0.39% 포인트씩 높여 12.9%까지 단계적으로 인상한다. 그리고 기초연금은 2008년 1월부터 70세, 7월부터 65세 이상 노인 중 소득 하위 60%를 대상으로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 소득의 5%의 급여(2008년 기준 8만9000원)를 지급한다. 이밖에 출산 시 최장 50개월, 군복무 기간 중 6개월은 보험료를 납입한 것으로 인정하는 크레딧 제도를 도입하는 등의 변화가 있다5)6)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혁의 기본가정과 본질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 국민연금의 수정적립방식은, 논리상으로 보자면, 미래의 일정 시점에 적립금이 고갈되어 급여가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고갈된 그 시점부터 부과방식으로 전환되어 그 해에 필요한 급여총액을 산정하고 가입자들이 나누어 납부하는 것이다. 만일 적립방식을 유지하면서 재정고갈을 피하고자 한다면, 주기적으로 재정을 추계하여 수익비를 저축과 가깝게 최대한 낮추고 급여율도 꾸준히 높여가는 방식을 택하는 수밖에 없다. 현재 정부가 제안하여 법 개정이 예정되어 있는 방안이 바로 이런 방식이다. 이에 대해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한 운동진영 일각에서는 애초의 제도 설계의 전제도 그러한 바, 장기적으로는 국민연금을 부과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는데, 여기서 이 주장의 핵심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핵심은 국민연금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급여율과 보험료율을 조정하는 데 있어 부과방식이 적립방식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정부 추계에 근거해 2045년 즈음을 바라보며 부과방식으로 전환을 추진했을 때, 보험료율의 인상이나 급여율 하락이 불필요한가? 현재 연금 개혁을 강제하는 객관적 조건과 연금제도의 기본 틀이 유지된다면 부과방식 하에서도 이는 불가피하다. 적립방식이든 부과방식이든 연금은 급여를 지급하는 시점의 노동인구의 수와 그들의 부담능력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구노령화가 객관적 조건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지 부양의무를 가진 집단과 부양을 받아야 할 집단의 구성비 문제로 단순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거기에는 노동기간, 퇴직기간, 생산성, 임금률 등의 다양한 변수가 연계되어 있다. 여기서 노무현 정부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지배계급의 연금 개혁의 본질이 확인된다. 인구노령화를 부르짖으며 연금 개혁을 추진하지만, 문제의 해법에서는 전혀 다른 행보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동기간과 퇴직기간의 불균형 요인을 해결하고 실업률을 낮추는 것은 인구노령화로 인한 문제를 해소하는 가장 현실 가능한 대안 중의 하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하에서 고용추세는 이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또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방식의 변종들도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노르웨이를 비롯한 일부 북유럽 국가들은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조기퇴직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는데, 그로써 연금과 실업보험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노동시장에 새롭게 진입한 청년세대의 일자리는 대부분 비정규직이었다. 결국 불안정노동이 확대되고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토양이 강화되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공적연금 축소와 민간보험 확대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혁은 인구고령화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선택지가 아니다. 오히려 공적연금이 담당해온 노후소득보장체계와 거기서 국가가 담당해 온 보충적 역할을 포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금제도를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1990년대 이후 시행된 많은 국가들의 연금 개혁은 세계은행이 제시하는 방안을 하나의 규범처럼 수용했다. 세계은행은 1980년대 제3세계 국가들의 연금운용에 관여한 경험을 토대로, 1994년 「고령기 위기의 회피」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여기서 담고 있는 내용이 익히 알려진 공적연금-사적연금-개인보험의 3층 체계 방안이다. 재정안정을 위해 정부부담을 축소하고 위험부담을 분산시킨다는 명문으로, 공적연금의 급여수준을 최소화하고 사적연금의 가입을 국가가 강제함으로써 사적연금 가입의 유인을 높이는 구상이었다. 1990년대 많은 국가들의 연금 개혁이 이와 같은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2005년 세계은행은 두 번째 보고서 「21세기 노인 소득지원」을 발간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3층 체계에 더해 빈곤층, 비정규직 등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0층(사회부조 차원의 기초연금)을 신설할 것과 1층 공적연금의 소득비례 부분을 강화할 것, 그리고 4층을 신설해 빈곤층 노인에 대한 주택, 의료서비스를 강화하고 가족 내 부양프로그램을 강화하는 것이다. 1994년 개혁에 대한 평가를 통해 추가적인 개혁방안을 내놓은 것인데, 공적·사적 연금 모두에서 배제되는 극빈계층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할 것과, 사적부문 활용방안을 더욱 높이는 것이 핵심이다. 세계은행의 새로운 권고안은 극도의 빈곤이 사회적 위험요인이 되지 않도록 적정수준에서 생활보장을 제공하는 소득지원 정책의 확대라는 신자유주의 복지개혁의 전반적인 방향7)과 부합한다. 이렇게 볼 때 현재 한국의 국민연금 개혁은 세계은행의 1994년, 2005년 보고서에서 제안하는 개혁방안이 동시에 추진되는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추가적인 개혁이 진행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개혁안에 포함된 기초연금은 사실 그 대상이나 급여수준 면에서 사회부조 수준을 넘지 못한다. 세계은행이 제안한 0층의 기초연금도 스웨덴과 같은 국가에서 개혁 이전에 시행하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고, 공적부조와 노령수당 등을 모두 포함한다.8) 또한 국민연금의 급여 삭감분이 기초연금 도입으로 상쇄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국민연금 수급 대상자들 대부분은 기초연금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연금 가입자들의 급여하락은 불가피하다. 이번 연금 개혁이 기초연금의 도입과 국민연금의 후퇴를 교환하는 방식이었듯이, 현재와 같은 다층적 연금구조 하에서 기초연금을 확대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2008년, 2013년 재정추계를 통해 공적연금을 더욱 축소하거나, 세계은행의 새로운 권고안처럼 공적연금에서 균등부분을 제거하고 소득비례 부분만을 남기는 방향9)의 개혁이 추진될 것이 분명하다. 연금기금 금융화 확대의 논리: 안정적이고 공익적인 금융투자?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혁이 추진되는 근본적인 배경에는 금융자본의 확장이 놓여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각종 연기금은 금융투자의 원천인데, 공적연금 적립기금과 적립식 민간보험의 기금을 확대하여 금융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연기금은 뮤추얼펀드, 보험회사와 함께 3대 기관투자자를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연금을 부과방식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의 핵심은 연금기금의 금융화를 저지하는 투쟁이 연금 개혁에 맞선 투쟁의 주요한 한 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정부 연금 개혁 방안은 무리한 재정추계를 동원해가면서까지 적립방식의 유지를 고집했는데, 국민연금 적립금 규모는 2006년 10월 기준 185조원, 개정법안의 추계에 근거하면 2054년에 5,820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된다. 이 엄청난 규모의 기금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당연히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데, 해외 투자자들과 외신은 한국 연금 개혁의 향방을 중국의 저축율과 함께 아시아의 주식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핵심적인 문제로 보고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표1> 국민연금 투자 내역 (단위: 억)

    구분200120022003200420052006(6월 기준)
    공공부문307,846301,989152,51263,77000
    복지부문6,3255,2594,3973,7523,1452,753(0.2%)
    금융부문442,232620,489965,7701,261,8511,556,1501,739,562(99%)
    기타부문2,6872,8162,9983,3963,53214,949(0.8%)
    759,091930,5521,125,6771,332,7691,562,8281,757,263(100%)
    * 공공부문 : 공공자금, 국채 등 * 복지부분 : 국민주택기금채, 복지타운, 보육시설 대여, 노인복지 대여 등 * 금융부분 : 채권, 주식, 대체투자, 단기 자금 등

    정부 연금기금의 운용은 크게 공공부문, 복지부문, 금융부문으로 나뉘는데, <표1>은 2001년 이후 투자내역이다. 2001년 당시에도 금융투자의 비중은 상당히 컸지만, 2006년이 되면 압도적으로 커진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금융투자의 세부 내용은, 2006년을 기준으로, 주식투자 11%, 채권투자 약 87%이다. 정부나 적립방식을 통한 기금 수익률 제고를 주장하는 논자들은 주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 평가되는 채권에 대한 투자 비중이 높다는 점을 근거로 연금기금의 금융화를 비판하는 논리를 반박한다. 그러나 주식투자가 전체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2001년 3%에서 2006년 현재 11%로 급성장했다. 더욱이 연기금의 주식투자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기금관리기본법이 2004년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현재 전체 연기금 약 250조 가운데 국민연금 기금이 180조원으로 가장 비중이 크기 때문에, 이 법은 사실상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확대를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2004년 정부의 「중장기 국민연금기금 운용 마스터플랜」에는 해외투자의 비중을 2009년 11.7%, 2014년 25%로 늘리겠다는 구상이 담겨있다. 물론 여기까지는 공적연금인 국민연금기금에만 한정된 얘기다. 2006년부터 시행된 퇴직연금은, 아직 시행초기지만, 각종 개인 보험 상품의 활성화와 함께 주식투자의 원천이 될 것이다. 벌써부터 퇴직연금 주식투자에 대한 비과세를 비롯하여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을 확대하기 위한 제도적 유인을 요구하는 민간 보험업계의 요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연기금 금융화의 확대만큼 그를 옹호하는 논리의 스팩트럼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세력들은 금융시장 활성화가 경제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 교리를 반복하는 가운데, 투기성 해외 투자자들로부터 한국 주식시장을 방어하기 위해 연금기금이 활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사실상 연기금이 금융시장의 투기성과 휘발성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역으로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이 외에도 최근 신자유주의 개혁성향의 일부 NGO10)들은 연금기금의 사회책임투자(SRI, social reponsibility investment)11)를 제안한다. 또한 일부 사회운동 세력들도 공공부문, 사회복지 부문에 대한 투자 확대를 통해 연금기금의 공공적 활용을 주장하던 연장에서 이런 고민을 진행 중이다. 사회책임투자는 세 가지 영역이 함께 한다고 얘기되는데, 투자상품과 기업을 선별하는 펀드 주주권리를 행사하는 주주운동 저소득 공동체나 지역 개발을 위해 투자하는 공동체 투자 또는 지역사회개발금융이 그 3대 축이다. 노동기준과 환경에 대한 고려, 지역사회에 대한 수익환원 등의 '공익적' 기준에 따라 투자대상을 선별한다는 사회책임투자는 199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활발해졌고, 2000년대 들어서는 연금기금 투자 방안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퇴직연금 펀드들은 유럽 사회책임투자 주식시장의 확대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 가장 큰 적립금을 보유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기금(캘퍼스, CalPERS)은 공적연금 분야에서 사회책임투자의 대명사로 인식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사회책임투자를 표방하는 연기금들 사이에서 국경을 초월한 연대의 흐름도 나타나는데, 주주행동주의를 표방하는 영국의 연기금 펀드 헤르메스(Hermes)와 캘퍼스는 자국 내에서 진행되는 초민족기업들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활동에서 서로의 의사를 대리할 것이라 선언했다. 또한 연금기금의 사회책임투자 확대는 몇몇 국가들에서 연금관련 법안을 개정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영국(2000년), 호주(2002년), 스웨덴(2002년), 독일(2002년), 프랑스(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2002년) 등에서 연금법을 개정하여 연금기금 투자에 사회책임투자 기준을 적용하도록 규정했다. 일부 공적연금들이 적립기금을 활용하여 지역사회에서 유의미한 활동을 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이 평가가 사회책임투자 일반에 적용되는 것은 곤란하다. 대표적으로 캘퍼스는 한편으로 지역사회의 고용창출, 공적서비스 확대에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2002년 연금법 개정에 사회책임투자를 반영한 후 캘퍼스가 개시한 활동은 아시아 신흥시장에 대한 투자였다. 더욱이 연기금 펀드의 사회책임투자는 장기적인 투자가 가능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는데, 연기금의 금융화가 심화되면서 사회책임투자가 확대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물론 금융투자 일반이 가지는 고유한 위험성은 사회책임투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사회책임투자 일반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통치성을 확대하는 방안 중 하나라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사실 한국에서도 사회책임투자가 그리 낯선 개념은 아닌데, 최근 재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사회공헌활동, 시민단체들이 주도했던 소액주주운동, 그리고 금융기관의 지원을 매개한 저소득층에 대한 소액대출사업이 넓은 의미에서 그와 연계된 흐름들이다. 이런 활동들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초민족자본의 금융적 지배가 용이한 조건을 만들었다는 평가는 사회운동 내에서는 이미 일반적인 인식이다. 세계적으로 시야를 확장하면,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들이 사회책임투자를 매개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자조와 자활을 명분으로 제3세계의 발전을 지원하지만, 실제로는 제3세계를 금융화된 세계경제 더욱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연기금의 주인인 노동자들을 투자자, 이해당사자로 변모시킴으로써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비판적 인식을 침식한다. 대중투자문화의 확산과 소득불평등의 확대 연금기금의 금융화는 대중투자문화를 확산하여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피해를 일선에서 감내하고 있는 노동자 민중을 투자자로 변모시킨다. 뿐만 아니라 사적 연금, 개인 보험상품의 확대와 투자문화의 확산은 광범위한 빈곤층을 형성하고 극단적인 소득격차를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다. 이런 격차는 금융세계화 아래에서 소득 흐름의 중심이 임금소득에서 금융소득으로 변모하는 것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하는데, 주주자본주의의 첨병인 미국의 사례를 통해 이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인구의 98%가 연간 총소득이 20만 달러 이하고, 연금을 포함한 임금이 이들의 소득 중 90.7%를 차지한다. 소득 구성에서 자본이익(capital gain)과 자본소득(capital income)이 차지하는 비중은 총소득 20만 달러의 문턱을 통과하면서 극적으로 상승한다. 상위 계층들이 차지하는 소득 비중은 1970년대에는 줄어들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 회복되었는데, 특히 부의 재집중이 일어나고 있는 미국의 최상위 404개 가계(인구비율로는 0.0002%)가 미국의 총 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83년 1%에서 2003년 3%로 상승한다. 또한 20세기 말부터 금융 자산이 보급되면서 미국 가계가 직간접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주식 자산의 비중은 1989년 32%에서 2001년 52%로 증가한다. 이런 현상은 미국 가계의 가장 가난한 층으로까지 확장된다. 2003년에는 연기금과 개인연금 형태로 미국 가계가 보유하고 있는 금융자산이 총 금융자산 중 36%를 차지한다. 1980년 미국 가계 중 뮤추얼 펀드를 보유한 가계는 5.7%지만, 2003년 이 비율은 47.9%로 나타난다. 또한 연기금과 퇴직연금으로 얻는 소득은 오직 은퇴한 가계에 한해서, 약간의 기능만 발휘한다. 2000년에 연기금이 65세 이상 인구의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에 그쳤다. 게다가 소득이 많은 층은 적은 층보다 연기금에서 얻는 이익이 더 크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금융투자를 통해 얻는 소득의 비중이 모든 계층에서 확대되지만, 그 크기는 소수의 상위계층에게 집중되며, 연금은 소득확대에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분석을 수행한 뒤메닐과 레비는 '일하는 빈민', '일하는 자본가', '자본가 노동자', '두 개 층의 자본주의'와 같은 표현들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묘사했다. 한국에서도 소득분배구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왔다. 2006년 3/4분기를 기준으로 최하위 소득계층인 1분위의 월평균 소득은 123만원, 2분위 223만원, 최상위 계층인 5분위는 656만원을 나타냈다. 전체 소득에서의 점유율은 하위 1, 2, 3분위를 합친 것이 상위 5분위와 같은 38%를 나타냈다. 한국에서 주식, 보험상품, 연금펀드 등을 활용한 금융투자는 아직 미국만큼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금융소득의 비중이 고소득 계층으로 갈수록 높아진다는 보고는 많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조사대상 가구의 81%가 연소득의 10~20% 정도를 재테크에 투자하고 있으며, 그 비중은 저축 및 적금 40%, 보험 상품 38%, 부동산 12%, 채권 0.4% 순으로 나타났다. 또한 고소득층 일수록 주식투자 비중은 높았고, 전체 가구의 40% 정도가 주식투자로 이득을 얻었다. 한편, 최근 생명보험 가입자들의 상품 구매 형태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분명히 나타나는데, 현재 전체 생명보험 가입자 중 연금저축성 상품이 71%, 사망 보험은 11%의 비중을 차지한다. 더욱이 연금저축 상품의 대부분은 변액연금 등의 투자형 상품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러한 보험 상품들은 주식시장 경기와 연동되어 해약과 가입의 유동성이 매우 크다. 이렇게 보았을 때, 연금기금의 금융화 확대를 저지하는 것은 연금 개혁에 대한 대응에 있어 이중, 삼중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사적연금의 확대, 공적연금의 축소에 대한 대응의 의미가 있다. 둘째, 연금기금이 주식투자의 수익률과 직접 연계됨으로써 나타나는 노후소득의 불안정성을 방어하는 것이다. 셋째, 악화일로에 있는 현재의 소득 격차 확대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민주노동당 연금 개혁 대응에 대한 비판 민주노동당을 비롯하여 일부 운동세력이 주장하는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 사업에 대한 논쟁이 분분하다. 이 사업은 소득연대전략의 출발점이며 부유세 도입 방안, 조세개혁 등의 추가적인 정책이 제안된다. 또한 소득연대전략은 임금연대전략이나 성장전략과 함께 제시되는데, 일종의 자본주의 조직모델에 대한 하나의 구상인 듯하다. 여기서는 민주노동당의 국민연금 개혁방안, 보험료 지원 사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보험료 지원사업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중위임금 70%(91만원) 이하 저소득 노동자와 영세 지역가입자에 대해 향후 5년간 보험료 절반(노동자 본인부담금 전액, 지역가입자 절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7%)을 지원한다. 8천 5억 원의 재원은 사업장 가입 노동자(미래급여 일부를 인하하여 3조원을 마련), 고소득자(현행 연금보험료 상한소득인 360만 원 이상 소득자에게 누진적 부가보험료 적용), 정부(국민연금 이자 미보전액 상환)가 공동으로 부담한다. 지원대상자인 저소득층은 5년 가입기간을 확보하고 노동시장 개선을 통해 연금수급권 최소 발생기간인 10년을 채우려는 자발적인 유인을 만드는 효과가 예상된다. 사실 노동자운동의 전략 차원의 논쟁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방안의 문제점은 민주노동당이 정부의 연금 개혁방안을 수용한 것 자체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세계적인 연금 개혁 추세나 한나라당의 기본 입장 등을 고려했을 때 기초연금의 추가적인 확대는 국민연금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12).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의 제안은 기초연금을 통해 최소 수준의 수당을 제공하고, 가입배제와 보험료 미납 등의 사각지대는 가입자 개인의 보험료 납부를 촉구하는 방향이다. 결국 국민연금 제도가 안고 있는 한계와 맹점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보험료를 납부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이중의 양보(국민연금 보장수준 후퇴, 보험료 지원 사업 참여)를 통해 오히려 제도의 맹점을 보완하는 방안인 것이다. 정부가 연금 개혁을 제안한 2003년 이후, 급여수준 제한을 전제로 보험료 소득상한선을 높이는 방안, 고용형태에 따른 가입제한을 대폭 완화하는 방안 등의 '현실적' 대안이 논의되어 왔는데, 이에도 훨씬 미달하는 방안인 것이다. 또한 여러 운동진영 매체들에서 지적되었듯이, 미래급여 일부를 인하하여 보험료를 지원하자는 발상은 국민연금의 개념이나 기본 원리에도 맞지 않다. 실현되지도 않은 소득을 현재의 보험료로 사용하겠다는 것은 개인 저축에서나 가능한 논리이다. 한편 민주노동당의 제안이 과연 계급적 해법, 노동자 민중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이번 합의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이 논의를 조직하는 방식을 통해 이미 예고되었던 바라 하겠다. 민주노동당은 2003년의 대응에서는 운동진영과 공동의 목소리를 냈지만, 이후 구체적인 개혁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는 당내 논의로 일관했다. 운동진영 내에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고 민주노동당의 연금 개혁 방안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이런 논의에 책임 있게 임하지 않았다. 또한 보험료 지원 사업의 추진 방안이 노동조합 상층의 결의를 이끌어 내는 방식을 중심으로 제안되었는데, 이것이 다양하게 진단되는 민주노총의 위기를 극복하는 노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 기대하긴 힘들다. 오히려 민주노동당의 입장에 대한 찬반을 중심으로 노동자운동 내에서 분할구도가 형성되는 결과를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덧붙여 민주노동당이 의회전술을 중심적인 대응방식으로 삼은 것에서 기인하는 다른 차원의 비판지점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저출산·고령화대책연석회의>에 참여한 일부 시민단체들과 함께 사회통합이라는 명목으로 정부의 연금 개혁 논의에 정당성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사실 복지개혁에서 이런 방식을 활용하는 것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에서 시작해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 <저출산·고령화대책연석회의>로 이어지는 노무현 정부의 주요 전략이었고, 때마다 운동진영 내의 논쟁을 가열시킨 요소였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의 연금 개혁에 대안 대응방식은 이후 운동진영이 지속되는 연금 개혁에 맞서 투쟁을 조직하는 데에 장애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연금 개혁을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는 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이는 국민연금과의 형평성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공무원연금 개혁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로, 마치 정규직의 지위, 일정한 임금수준, 노동조합의 존재 자체가 소득불평등을 만드는 주범처럼 오도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연금기금의 금융화는 노동자 민중 개개인을 금리소득과 직접 연계시켜 금융투자자로 변모시키는 방식을 띤다. 따라서 사각지대와 소득불평등의 근본적 원인, 사회보장에 대한 국가의 책임, 정부 연금 개혁의 근본적 문제 등 본질적인 쟁점에 대한 대중적 논의의 확대는, 현재에는 매우 어렵지만, 우회할 수 없다. 이를 우회한다면 노동자 민중을 처한 조건에 따라 이해와 갈등의 당사자로 만들어 분할을 유도하게 되고, 따라서 이후 계속될 노동자 민중에 대한 공격과 법제도의 후퇴는 피할 수 없다. 민주노동당의 소득연대전략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중적 논의를 오히려 회피하고 있으며, 노동자운동에 대한 공격, 그를 통한 노동자 민중에 대한 분할 전략에 수렴되는 방향이다. 금융화 비판 기조를 중심으로 민중적 대안을 모색하자! 국민연금을 둘러싸고 이렇듯 논쟁이 과열되는 것은 국민연금 개혁을 기화로 제기되는 쟁점들이 그만큼 현대 자본주의가 처한 조건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이해에 직접 연계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문제는 공적연금뿐만 아니라, 사회보험제도 일반이 역사적으로 구축되어온 과정과 그것이 지탱될 수 있는 정치적·물적 토대와도 연관된다. 19세기까지 구빈법과 같은 극빈층(실업-半실업자 혹은 산업예비군)에 대한 구제제도를 가지고 있던 서구 국가들이 20세기에 사회보험을 발달시켰다. 이런 제도들은 노동력 재생산에 대한 국가 개입의 한 형태로, '케인즈주의'로 알려진 국가의 경제정책에 동반하는 것이었으며, 전후 자본주의 성장기가 그 물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러한 물적토대와 국가의 개입력이 심각하게 침식된 현재, 공적연금 뿐 아니라,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 사회보험 전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신자유주의 지배계급의 접근은 문제의 본질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자본주의적' 해법도 될 수 없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연금기금의 금융화에 맞선 투쟁이 대응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장기적으로 연금제도를 방어하는 투쟁을 넘어서는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제도 밖에 놓여 있는 현재 상황이 방어투쟁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물론 사각지대 해소의 기본적 방향은 불안정 노동을 철폐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사각지대를 해소한다 해도, 현재의 공적연금 제도 내로 공식적 고용관계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주부, 비공식 부문 등)을 포괄하는 것은 어찌해도 불가능하다. 또한 부과방식으로 전환을 주장하는 것 역시 200조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적립금을 당장 해소하는 것이 간단치가 않다는 현실적 문제와 함께, 인구노령화 조건에서는 후세대의 부담 가중 등의 불안정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이런 고민은 현재의 제도를 변형하거나 보완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현 제도를 개조하는 접근 하에서는 현재 자본이 처한 위기를 보완하는 방식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고, 이는 노동자 민중에 대한 다른 방식의 부담을 전제할 것이다. 따라서 특정 형태의 제도를 고안하는 것이 당장의 직접적인 목적이 되지 않아도 무방하다. 오히려 국가에 대한 의존을 감축하고 노동자 민중의 통제가 가능한, 연대성에 입각한 대안적인 사회보장방안의 기본적 규범과 원리를 사고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에 대한 운동진영 내의 토론과 합의는 현 시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 확대 방안, 금융소득을 포함한 자산소득을 보험료 산정기준으로 삼는 방안, 공식적 고용관계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의 포괄방안 등 금융화 비판과 반(反)빈곤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고민들이 대안적 방안을 모색하는 데 있어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길게 본다면, 현행 제도 하에서 적립기금이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까지 3~40여 년의 시간이 남아 있는 셈이다. 짧게 본다면, 이번 임시국회에서 법을 개정하더라도 2008년 재정 추계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혁은 또 다시 추진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이 불가능하다거나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회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자 민중이 함께 지혜를 모으자. 1)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저출산·고령화 위기 담론은 민중의 의제가 아니가」, 『사회화와 노동』, 316호를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2)현재의 추계에 따르면 2050년이 되면 한국의 노인부양비는 55.13%가 되어, 약 1.8명의 노동인구가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하는 인구구성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구노령화 문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서구 대다수의 국가들에서 연금 개혁을 강제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현재는 15~64세 노동인구 9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고 있는데, 2050년이 되면 노동인구 4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는 체계가 된다고 한다. 특히 일본, 스페인, 이탈리아 등 인구노령화가 급속히 진전된 국가들의 경우 2040년이면 전체인구 중 노인비율이 45%를 넘어설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본문으로 3) 물론 사각지대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경제활동 인구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 예를 들어 가정주부나 비공식 부문 노동자 등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이들은 사회보험 제도의 맹목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데, 현재 사회보험 제도의 기본 틀을 넘어서는 대안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현재의 공적연금은 노동시장에 진출해 있지 않은 여성에 대해 배우자 지위에 근거한 배우자급여, 유족연금 등을 두고 있으나 그것의 정치적 의미, 현실적 한계는 너무나 자명하다. 본문으로 4)각 정당의 국민연금 개혁방안과 합의내용
     현행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한나라당3당합의
    급여율60%50%40%20%50%
    보험료율9%9%9%7%9-12.9%까지 점진적 인상
    기초(노령)연금 65세 이상없음노인 60%
    7-10만원
    노인 80%
    8만 3천원
    노인 100%
    월14만원
    대상 노인 60%
    월 8만 3천원
    본문으로 5)이와는 별도로 공무원연금 개혁 시안의 경우 재정안정성 제고와 국민연금과의 형평성 달성이 주요 목적인데, 연금 수급 퇴직자, 현공무원, 신규 공무원 각각에 대한 적용 내용을 달리했다. 퇴직자의 연금은 현행 유지, 현공무원과 신규공무원은 퇴직수당을 높이고 급여 산정 기준을 퇴직 전 3년 월평균에서 재직 전 기간 평균 월소득으로 변경하여 급여감소 효과가 있도록 했다. 특히 신규 공무원들에 대한 적용 안은 공무원연금-퇴직금-저축계정 신설의 3층 구조인데, 저축계정은 확정기여형, 매칭펀드(노동자, 정부 각 1%) 형태로 제안되었다. 이것은 국민연금을 비롯한 일반연금이 지향하는 다층체계 구상과 유사한 것으로 이후 추가적인 개혁이 진행될 것임을 암시는 것과 같다. 본문으로 6) 한편 국민연금 개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는 추진되는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몇 가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선 4대 사회보험 징수 통합방안이 작년에 확정되어 2009년 시행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징수업무로 통합의 대상이 한정된 만큼, 주요 명분은 징수율 제고, 행정적 효율성의 제고에 있다. 이로 인해 기존 3개 사회보험 공단(건강보험공단, 국민연금관리공단, 근로복지공단) 노동자들의 인력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며, 장기적으로 사회보험에 대한 강제징수를 강화하는 방향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2008년부터 근로소득보전세제(EITC)가 시행될 예정인데, 저소득층(특히 일용직 노동자)의 사회보험료 지원이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설정되어 있다. 또한 2006년 1월부터 퇴직연금법이 시행되고 있으며, 종합금융투자기관의 출현을 예고하며 연금기금의 금융화를 가속화 할 자본시장통합법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본문으로 7) 신자유주의 복지개혁 양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진숙, 「노무현 정부 복지개혁의 본질과 전망」, 『월간 사회운동』, 통권 66허, 2005년 7·8월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8) 실제 OECD 등에서 발간하는 연금관련 보고서에서는 극빈층 노인들에게 월 3~4만원 지급되는 한국의 노령수당이 기초연금으로 분류되어 분석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9) 현재 국민연금의 급여산식에는 전체 가입자들의 평균소득을 반영하여 소득재분배가 가능하도록 한 균등부분과 가입자 개인의 소득에 연계되는 소득비례 부분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10) 국민연금 개혁을 주제로 한 TV 토론회에 자주 등장하여 공적연금 축소, 민간보험 확대를 통한 다층체계를 제안하는 교수, 전문가 중 일부는 연금기금의 사회책임투자 확대를 주장하는 개혁 NGO의 일원이다. 본문으로 11)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김덕민, 「'장하성 펀드', 신자유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 거버넌스」, 『월간 사회운동』, 통권 69호, 2006년 11월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12) 위 각주 4번에서 확인되듯이, 사실 민주노동당의 기본 입장 자체가 이미 그러하다. 본문으로

  • 2007-02-12

    연금 개혁 비판과 노동자 민중의 대응방향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반대 투쟁의 기초 위에서 노동자 민중의 지혜를 모으자!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연금 개혁 논쟁 이른바 '더 내고 덜 받는' 방향의 연금 개혁안이 작년 말 국회 상임위를 통과하여, 2월 임시국회 본회의 처리를 앞두고 있다. 또한 국민연금 개혁과 연동되어 추진 중인 공무원연금 개혁은 발전위원회 시안이 제출되어 있다. 2003년 국민연금 개혁 논의가 시작되던 당시, 운동진영은 정부의 개혁 구상이 재정고갈 위험만을 고려하여 사각지대나 낮은 보장성, 기금운용 체계·방식과 같은 긴급한 쟁점들을 오히려 후퇴시키려 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치권 내의 논의가 급진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이러한 입장은 일정한 분화·굴절을 겪었다. 민주노동당이 기초연금 도입을 전제로 한 국민연금 개혁안을 제안한 것과 정부 주관 하의 <저출산·고령화대책연석회의>1)에 참가한 일부 시민단체들이 정부의 개혁방안을 수용한 것이 주요한 계기였다. 이들은 정부의 개혁방안을 큰 틀에서 수용하는 가운데, 기초연금을 더욱 확대하는 방안이나 저소득층 보험료 지원 사업 등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현재 국민연금 개혁을 둘러싼 논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연금제도의 측면에서 보자면, 공적연금(국민연금)-사적연금(퇴직연금)-개인보험으로 구성되는, 세계은행과 같은 신자유주의 집행기관들이 장려하는 다층적 노후소득보장체계의 도입이 기정사실화되어 추진 중이다. 또한 운동진영 내적으로 민주노동당에서 제안하는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 사업을 둘러싸고 계급적 해법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불붙고 있다. 더욱이 보험료 지원 사업에 관해서는 소득연대전략, 사회연대전략 등을 표방하며 추가적인 정책대안이 제안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이 문제는 노동자운동의 전략을 둘러싼 논쟁의 한 축으로 확대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정부 연금 개혁의 본질이 막대한 적립금을 유지하여 연기금의 금융화를 더욱 확대하는 데 있으며, 이는 노동자 민중의 노후소득을 금융자본의 불안정성과 직접 연계시키는 매우 위험한 발상임을 중심적으로 비판해왔다. 따라서 정부가 추진하는 연금 개혁의 기만성을 폭로하며 현행 연금제도를 방어하는 투쟁을 진행하는 가운데, 실질적인 노후소득 보장이 가능한 민중적 대안을 모색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글의 기본 목적은 이런 문제의식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데 있다. 2월 임시국회에서 실제 법이 개정되든 안 되든 상관없이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혁과 연금기금의 금융화를 확대하려는 시도는 지속될 것이므로, 연금 개혁의 본질과 대응 원칙에 대한 대중적 논의는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 나아가 그 동안 연금 개혁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형성된 쟁점뿐만 아니라 현재의 논의지형과 향후 전개방향을 차분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로부터 민중적인 대안을 구성함에 있어서 사회운동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 원칙에 대한 합의를 모아나갈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국민연금 개혁 논의 과정과 쟁점 국민연금 개혁의 과정과 쟁점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우선 연금제도의 기본 형태를 살펴보도록 하자. 연금제도는 기금의 적립여부, 그리고 보험료와 급여액 중 어떤 것을 사전에 확정하고 가느냐를 주요 축으로 하여 구성된다. 보험 가입자의 보험료와 국고보조금, 이자 등을 꾸준히 축적한 적립금에서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을 적립방식, 한해에 필요한 보험 급여액을 산정하여 이를 현세대 보험 가입자들이 납부하는 방식을 부과방식이라 한다. 한편 퇴직 후 받을 급여액을 처음부터 확정하는 방식을 확정급여형(DB, define benefit), 급여는 사전에 정해져 있지 않고 보험료만 정해 놓는 방식을 확정기여형(DC, define contribute)으로 구분한다. 이 두 가지 축을 상호 교차시켜 연금제도의 여러 형태를 도출하는데, 한국의 국민연금은 수정적립식, 확정급여형 체계다. 이 때 수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순수 적립식은 논리 상 가입자가 납부한 보험료만큼만 되돌려 받는, 사실상 저축과 유사한 형태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납입한 보험료에 비해 약 2배 이상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따라서 일정한 시점이 되면 적립금의 고갈이 불가피하다. 그러므로 연금 수급이 본격화되어 기금이 소진되면 부과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은 애초 국민연금 제도 도입 당시 기본 가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1998년 국민연금이 가입대상을 전 국민으로 확대하면서 기금운용법이 제정되었고, 이에 따라 5년 마다 재정추계를 통해 재정안정성을 점검하기로 하였다. 재정추계는 경제성장률, 임금상승률, 인구성장률 등을 고려하여 이루어지고, 2003년 재정추계 당시 정부는 추계 기간을 2070년까지로 설정하였다. 여기서 정부는 인구노령화2) 문제를 집중 부각시켰다. 공적연금은 적립방식이든 부과방식이든 현세대 노동자와 후세대 노동자 간의 소득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의 낮은 출산율과 고령화 문제를 통해 연금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재정추계 결과 국민연금 적립기금이 2036년까지는 계속 증가하여 약 1,715조(GDP대비 약 70%)에 달하지만, 이후 급격히 감소하여 2047년이면 적립금이 고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국민연금 개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이런 정부의 재정추계 방식과 그에 근거한 개혁방안에 대해 운동진영은 정부 추계 기간이 지나치게 길고, 출산율과 노령화를 기계적으로 예측하는 추계방식을 절대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현행 국민연금 제도가 안고 있는 사각지대 문제, 낮은 보장성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사각지대 문제는 '전 국민 국민연금 시대'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매우 심각하다. 현재 국민연금의 사업장 가입자는 약 800만 명, 지역 가입자는 약 900만 명으로, 총 1,700만 명 정도가 국민연금에 가입해 있다. 전체 노동자 1,500만 명(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가입자가 약 120만 명) 중 600만 명가량이 일용직이나 특수고용직과 같이 고용형태 상의 제한으로 가입 자체를 못하거나,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경우와 같이 보험료 부담으로 가입을 회피하고 있다. 이들이 가입 자체를 배제당하는 제도 상의 사각지대에 있다면, 가입은 가능하지만 소득이 낮아 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하는 실질적인 사각지대에 놓인 납부예외자는 전체 가입자의 42%에 이른다. 특히 지역가입자의 절반가량인 450만 명이 이에 해당한다. 현재 한국의 경제활동인구가 2,400만 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중 실제 보험료를 납부하는 국민연금 가입자는 고작 1,000만 명 수준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3). 그러나 사각지대 문제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보장수준 문제와 연결된다. 작년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현재 노동자들이 한 직장에서 머무는 평균 기간은 6년 정도로 나타났다. 국민연금 현행제도 60% 급여율이나 개정안 50% 급여율은 모두 40년 가입을 조건으로 하는데, 불안정한 고용기간을 감안하면 실제 보장수준은 20% 안팎에 불과할 것이다. 당시 정치권 내에서는 정부 여당의 보험료를 높이고 급여율을 낮추는 개혁방안(모수적 개혁안)과 한나라당, 민주노동당의 기초연금 도입을 전제한 국민연금 조정 방안(구조적 개혁안)이 팽팽히 맞섰다. 정부 여당의 경우 재정안정화를 먼저 해결하고 사각지대, 보장성 등의 쟁점은 추후에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은 기초연금 도입 자체에서는 주장이 일치했지만, 세부적인 내용이나 명분은 달랐다4). 한나라당 안은 이른바 '국민연금 8대 비밀'로 상징되는 국민연금에 대한 대중적 불신에 편승하여, 세간의 평처럼 노인들 표를 의식한 전형적인 인기영합식 정책에 불과했다. 민주노동당은 국민연금의 후퇴를 다소 감수하더라도 사각지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초연금 도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의지형이 유지되던 가운데 작년 여름 경 정부 여당이 기초노령연금 도입을 수용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는데, 합의된 개정법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민연금은 평균소득액의 60%인 연금 급여 수준을 2008년부터 50%로 낮추고, 보험료율은 현행 소득의 9%에서 2009년부터 2018년까지 매년 0.39% 포인트씩 높여 12.9%까지 단계적으로 인상한다. 그리고 기초연금은 2008년 1월부터 70세, 7월부터 65세 이상 노인 중 소득 하위 60%를 대상으로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 소득의 5%의 급여(2008년 기준 8만9000원)를 지급한다. 이밖에 출산 시 최장 50개월, 군복무 기간 중 6개월은 보험료를 납입한 것으로 인정하는 크레딧 제도를 도입하는 등의 변화가 있다5)6)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혁의 기본가정과 본질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 국민연금의 수정적립방식은, 논리상으로 보자면, 미래의 일정 시점에 적립금이 고갈되어 급여가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고갈된 그 시점부터 부과방식으로 전환되어 그 해에 필요한 급여총액을 산정하고 가입자들이 나누어 납부하는 것이다. 만일 적립방식을 유지하면서 재정고갈을 피하고자 한다면, 주기적으로 재정을 추계하여 수익비를 저축과 가깝게 최대한 낮추고 급여율도 꾸준히 높여가는 방식을 택하는 수밖에 없다. 현재 정부가 제안하여 법 개정이 예정되어 있는 방안이 바로 이런 방식이다. 이에 대해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한 운동진영 일각에서는 애초의 제도 설계의 전제도 그러한 바, 장기적으로는 국민연금을 부과방식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는데, 여기서 이 주장의 핵심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핵심은 국민연금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급여율과 보험료율을 조정하는 데 있어 부과방식이 적립방식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정부 추계에 근거해 2045년 즈음을 바라보며 부과방식으로 전환을 추진했을 때, 보험료율의 인상이나 급여율 하락이 불필요한가? 현재 연금 개혁을 강제하는 객관적 조건과 연금제도의 기본 틀이 유지된다면 부과방식 하에서도 이는 불가피하다. 적립방식이든 부과방식이든 연금은 급여를 지급하는 시점의 노동인구의 수와 그들의 부담능력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구노령화가 객관적 조건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지 부양의무를 가진 집단과 부양을 받아야 할 집단의 구성비 문제로 단순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거기에는 노동기간, 퇴직기간, 생산성, 임금률 등의 다양한 변수가 연계되어 있다. 여기서 노무현 정부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지배계급의 연금 개혁의 본질이 확인된다. 인구노령화를 부르짖으며 연금 개혁을 추진하지만, 문제의 해법에서는 전혀 다른 행보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노동기간과 퇴직기간의 불균형 요인을 해결하고 실업률을 낮추는 것은 인구노령화로 인한 문제를 해소하는 가장 현실 가능한 대안 중의 하나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하에서 고용추세는 이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또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방식의 변종들도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노르웨이를 비롯한 일부 북유럽 국가들은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분으로 조기퇴직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는데, 그로써 연금과 실업보험의 재정은 악화되었고, 노동시장에 새롭게 진입한 청년세대의 일자리는 대부분 비정규직이었다. 결국 불안정노동이 확대되고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토양이 강화되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공적연금 축소와 민간보험 확대로 나타나는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혁은 인구고령화 시대에 어쩔 수 없는 선택지가 아니다. 오히려 공적연금이 담당해온 노후소득보장체계와 거기서 국가가 담당해 온 보충적 역할을 포기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금제도를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1990년대 이후 시행된 많은 국가들의 연금 개혁은 세계은행이 제시하는 방안을 하나의 규범처럼 수용했다. 세계은행은 1980년대 제3세계 국가들의 연금운용에 관여한 경험을 토대로, 1994년 「고령기 위기의 회피」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여기서 담고 있는 내용이 익히 알려진 공적연금-사적연금-개인보험의 3층 체계 방안이다. 재정안정을 위해 정부부담을 축소하고 위험부담을 분산시킨다는 명문으로, 공적연금의 급여수준을 최소화하고 사적연금의 가입을 국가가 강제함으로써 사적연금 가입의 유인을 높이는 구상이었다. 1990년대 많은 국가들의 연금 개혁이 이와 같은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2005년 세계은행은 두 번째 보고서 「21세기 노인 소득지원」을 발간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3층 체계에 더해 빈곤층, 비정규직 등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0층(사회부조 차원의 기초연금)을 신설할 것과 1층 공적연금의 소득비례 부분을 강화할 것, 그리고 4층을 신설해 빈곤층 노인에 대한 주택, 의료서비스를 강화하고 가족 내 부양프로그램을 강화하는 것이다. 1994년 개혁에 대한 평가를 통해 추가적인 개혁방안을 내놓은 것인데, 공적·사적 연금 모두에서 배제되는 극빈계층에 대한 보완책을 마련할 것과, 사적부문 활용방안을 더욱 높이는 것이 핵심이다. 세계은행의 새로운 권고안은 극도의 빈곤이 사회적 위험요인이 되지 않도록 적정수준에서 생활보장을 제공하는 소득지원 정책의 확대라는 신자유주의 복지개혁의 전반적인 방향7)과 부합한다. 이렇게 볼 때 현재 한국의 국민연금 개혁은 세계은행의 1994년, 2005년 보고서에서 제안하는 개혁방안이 동시에 추진되는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추가적인 개혁이 진행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개혁안에 포함된 기초연금은 사실 그 대상이나 급여수준 면에서 사회부조 수준을 넘지 못한다. 세계은행이 제안한 0층의 기초연금도 스웨덴과 같은 국가에서 개혁 이전에 시행하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고, 공적부조와 노령수당 등을 모두 포함한다.8) 또한 국민연금의 급여 삭감분이 기초연금 도입으로 상쇄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국민연금 수급 대상자들 대부분은 기초연금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연금 가입자들의 급여하락은 불가피하다. 이번 연금 개혁이 기초연금의 도입과 국민연금의 후퇴를 교환하는 방식이었듯이, 현재와 같은 다층적 연금구조 하에서 기초연금을 확대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오히려 2008년, 2013년 재정추계를 통해 공적연금을 더욱 축소하거나, 세계은행의 새로운 권고안처럼 공적연금에서 균등부분을 제거하고 소득비례 부분만을 남기는 방향9)의 개혁이 추진될 것이 분명하다. 연금기금 금융화 확대의 논리: 안정적이고 공익적인 금융투자?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혁이 추진되는 근본적인 배경에는 금융자본의 확장이 놓여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각종 연기금은 금융투자의 원천인데, 공적연금 적립기금과 적립식 민간보험의 기금을 확대하여 금융투자를 활성화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연기금은 뮤추얼펀드, 보험회사와 함께 3대 기관투자자를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연금을 부과방식으로 전환하자는 주장의 핵심은 연금기금의 금융화를 저지하는 투쟁이 연금 개혁에 맞선 투쟁의 주요한 한 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정부 연금 개혁 방안은 무리한 재정추계를 동원해가면서까지 적립방식의 유지를 고집했는데, 국민연금 적립금 규모는 2006년 10월 기준 185조원, 개정법안의 추계에 근거하면 2054년에 5,820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된다. 이 엄청난 규모의 기금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당연히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데, 해외 투자자들과 외신은 한국 연금 개혁의 향방을 중국의 저축율과 함께 아시아의 주식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핵심적인 문제로 보고 엄청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표1> 국민연금 투자 내역 (단위: 억)

    구분200120022003200420052006(6월 기준)
    공공부문307,846301,989152,51263,77000
    복지부문6,3255,2594,3973,7523,1452,753(0.2%)
    금융부문442,232620,489965,7701,261,8511,556,1501,739,562(99%)
    기타부문2,6872,8162,9983,3963,53214,949(0.8%)
    759,091930,5521,125,6771,332,7691,562,8281,757,263(100%)
    * 공공부문 : 공공자금, 국채 등 * 복지부분 : 국민주택기금채, 복지타운, 보육시설 대여, 노인복지 대여 등 * 금융부분 : 채권, 주식, 대체투자, 단기 자금 등

    정부 연금기금의 운용은 크게 공공부문, 복지부문, 금융부문으로 나뉘는데, <표1>은 2001년 이후 투자내역이다. 2001년 당시에도 금융투자의 비중은 상당히 컸지만, 2006년이 되면 압도적으로 커진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금융투자의 세부 내용은, 2006년을 기준으로, 주식투자 11%, 채권투자 약 87%이다. 정부나 적립방식을 통한 기금 수익률 제고를 주장하는 논자들은 주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라 평가되는 채권에 대한 투자 비중이 높다는 점을 근거로 연금기금의 금융화를 비판하는 논리를 반박한다. 그러나 주식투자가 전체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시 2001년 3%에서 2006년 현재 11%로 급성장했다. 더욱이 연기금의 주식투자 확대를 핵심으로 하는 기금관리기본법이 2004년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현재 전체 연기금 약 250조 가운데 국민연금 기금이 180조원으로 가장 비중이 크기 때문에, 이 법은 사실상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확대를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2004년 정부의 「중장기 국민연금기금 운용 마스터플랜」에는 해외투자의 비중을 2009년 11.7%, 2014년 25%로 늘리겠다는 구상이 담겨있다. 물론 여기까지는 공적연금인 국민연금기금에만 한정된 얘기다. 2006년부터 시행된 퇴직연금은, 아직 시행초기지만, 각종 개인 보험 상품의 활성화와 함께 주식투자의 원천이 될 것이다. 벌써부터 퇴직연금 주식투자에 대한 비과세를 비롯하여 확정기여형 퇴직연금을 확대하기 위한 제도적 유인을 요구하는 민간 보험업계의 요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연기금 금융화의 확대만큼 그를 옹호하는 논리의 스팩트럼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세력들은 금융시장 활성화가 경제성장의 동력이 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 교리를 반복하는 가운데, 투기성 해외 투자자들로부터 한국 주식시장을 방어하기 위해 연금기금이 활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사실상 연기금이 금융시장의 투기성과 휘발성으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역으로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이 외에도 최근 신자유주의 개혁성향의 일부 NGO10)들은 연금기금의 사회책임투자(SRI, social reponsibility investment)11)를 제안한다. 또한 일부 사회운동 세력들도 공공부문, 사회복지 부문에 대한 투자 확대를 통해 연금기금의 공공적 활용을 주장하던 연장에서 이런 고민을 진행 중이다. 사회책임투자는 세 가지 영역이 함께 한다고 얘기되는데, 투자상품과 기업을 선별하는 펀드 주주권리를 행사하는 주주운동 저소득 공동체나 지역 개발을 위해 투자하는 공동체 투자 또는 지역사회개발금융이 그 3대 축이다. 노동기준과 환경에 대한 고려, 지역사회에 대한 수익환원 등의 '공익적' 기준에 따라 투자대상을 선별한다는 사회책임투자는 199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활발해졌고, 2000년대 들어서는 연금기금 투자 방안의 하나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 퇴직연금 펀드들은 유럽 사회책임투자 주식시장의 확대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 가장 큰 적립금을 보유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기금(캘퍼스, CalPERS)은 공적연금 분야에서 사회책임투자의 대명사로 인식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사회책임투자를 표방하는 연기금들 사이에서 국경을 초월한 연대의 흐름도 나타나는데, 주주행동주의를 표방하는 영국의 연기금 펀드 헤르메스(Hermes)와 캘퍼스는 자국 내에서 진행되는 초민족기업들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활동에서 서로의 의사를 대리할 것이라 선언했다. 또한 연금기금의 사회책임투자 확대는 몇몇 국가들에서 연금관련 법안을 개정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영국(2000년), 호주(2002년), 스웨덴(2002년), 독일(2002년), 프랑스(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2002년) 등에서 연금법을 개정하여 연금기금 투자에 사회책임투자 기준을 적용하도록 규정했다. 일부 공적연금들이 적립기금을 활용하여 지역사회에서 유의미한 활동을 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이 평가가 사회책임투자 일반에 적용되는 것은 곤란하다. 대표적으로 캘퍼스는 한편으로 지역사회의 고용창출, 공적서비스 확대에 기여하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2002년 연금법 개정에 사회책임투자를 반영한 후 캘퍼스가 개시한 활동은 아시아 신흥시장에 대한 투자였다. 더욱이 연기금 펀드의 사회책임투자는 장기적인 투자가 가능하기 때문에 수익성이 매우 높게 나타나고 있는데, 연기금의 금융화가 심화되면서 사회책임투자가 확대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물론 금융투자 일반이 가지는 고유한 위험성은 사회책임투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또한 사회책임투자 일반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통치성을 확대하는 방안 중 하나라는 점도 인식해야 한다. 사실 한국에서도 사회책임투자가 그리 낯선 개념은 아닌데, 최근 재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사회공헌활동, 시민단체들이 주도했던 소액주주운동, 그리고 금융기관의 지원을 매개한 저소득층에 대한 소액대출사업이 넓은 의미에서 그와 연계된 흐름들이다. 이런 활동들이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초민족자본의 금융적 지배가 용이한 조건을 만들었다는 평가는 사회운동 내에서는 이미 일반적인 인식이다. 세계적으로 시야를 확장하면,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들이 사회책임투자를 매개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자조와 자활을 명분으로 제3세계의 발전을 지원하지만, 실제로는 제3세계를 금융화된 세계경제 더욱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연기금의 주인인 노동자들을 투자자, 이해당사자로 변모시킴으로써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노동자운동의 비판적 인식을 침식한다. 대중투자문화의 확산과 소득불평등의 확대 연금기금의 금융화는 대중투자문화를 확산하여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피해를 일선에서 감내하고 있는 노동자 민중을 투자자로 변모시킨다. 뿐만 아니라 사적 연금, 개인 보험상품의 확대와 투자문화의 확산은 광범위한 빈곤층을 형성하고 극단적인 소득격차를 만드는 주범이기도 하다. 이런 격차는 금융세계화 아래에서 소득 흐름의 중심이 임금소득에서 금융소득으로 변모하는 것에서 직접적으로 기인하는데, 주주자본주의의 첨병인 미국의 사례를 통해 이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인구의 98%가 연간 총소득이 20만 달러 이하고, 연금을 포함한 임금이 이들의 소득 중 90.7%를 차지한다. 소득 구성에서 자본이익(capital gain)과 자본소득(capital income)이 차지하는 비중은 총소득 20만 달러의 문턱을 통과하면서 극적으로 상승한다. 상위 계층들이 차지하는 소득 비중은 1970년대에는 줄어들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 회복되었는데, 특히 부의 재집중이 일어나고 있는 미국의 최상위 404개 가계(인구비율로는 0.0002%)가 미국의 총 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83년 1%에서 2003년 3%로 상승한다. 또한 20세기 말부터 금융 자산이 보급되면서 미국 가계가 직간접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주식 자산의 비중은 1989년 32%에서 2001년 52%로 증가한다. 이런 현상은 미국 가계의 가장 가난한 층으로까지 확장된다. 2003년에는 연기금과 개인연금 형태로 미국 가계가 보유하고 있는 금융자산이 총 금융자산 중 36%를 차지한다. 1980년 미국 가계 중 뮤추얼 펀드를 보유한 가계는 5.7%지만, 2003년 이 비율은 47.9%로 나타난다. 또한 연기금과 퇴직연금으로 얻는 소득은 오직 은퇴한 가계에 한해서, 약간의 기능만 발휘한다. 2000년에 연기금이 65세 이상 인구의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에 그쳤다. 게다가 소득이 많은 층은 적은 층보다 연기금에서 얻는 이익이 더 크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금융투자를 통해 얻는 소득의 비중이 모든 계층에서 확대되지만, 그 크기는 소수의 상위계층에게 집중되며, 연금은 소득확대에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분석을 수행한 뒤메닐과 레비는 '일하는 빈민', '일하는 자본가', '자본가 노동자', '두 개 층의 자본주의'와 같은 표현들을 통해 이러한 상황을 묘사했다. 한국에서도 소득분배구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왔다. 2006년 3/4분기를 기준으로 최하위 소득계층인 1분위의 월평균 소득은 123만원, 2분위 223만원, 최상위 계층인 5분위는 656만원을 나타냈다. 전체 소득에서의 점유율은 하위 1, 2, 3분위를 합친 것이 상위 5분위와 같은 38%를 나타냈다. 한국에서 주식, 보험상품, 연금펀드 등을 활용한 금융투자는 아직 미국만큼 활성화되지 않았지만, 금융소득의 비중이 고소득 계층으로 갈수록 높아진다는 보고는 많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전체 조사대상 가구의 81%가 연소득의 10~20% 정도를 재테크에 투자하고 있으며, 그 비중은 저축 및 적금 40%, 보험 상품 38%, 부동산 12%, 채권 0.4% 순으로 나타났다. 또한 고소득층 일수록 주식투자 비중은 높았고, 전체 가구의 40% 정도가 주식투자로 이득을 얻었다. 한편, 최근 생명보험 가입자들의 상품 구매 형태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분명히 나타나는데, 현재 전체 생명보험 가입자 중 연금저축성 상품이 71%, 사망 보험은 11%의 비중을 차지한다. 더욱이 연금저축 상품의 대부분은 변액연금 등의 투자형 상품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러한 보험 상품들은 주식시장 경기와 연동되어 해약과 가입의 유동성이 매우 크다. 이렇게 보았을 때, 연금기금의 금융화 확대를 저지하는 것은 연금 개혁에 대한 대응에 있어 이중, 삼중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첫째, 사적연금의 확대, 공적연금의 축소에 대한 대응의 의미가 있다. 둘째, 연금기금이 주식투자의 수익률과 직접 연계됨으로써 나타나는 노후소득의 불안정성을 방어하는 것이다. 셋째, 악화일로에 있는 현재의 소득 격차 확대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 민주노동당 연금 개혁 대응에 대한 비판 민주노동당을 비롯하여 일부 운동세력이 주장하는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 사업에 대한 논쟁이 분분하다. 이 사업은 소득연대전략의 출발점이며 부유세 도입 방안, 조세개혁 등의 추가적인 정책이 제안된다. 또한 소득연대전략은 임금연대전략이나 성장전략과 함께 제시되는데, 일종의 자본주의 조직모델에 대한 하나의 구상인 듯하다. 여기서는 민주노동당의 국민연금 개혁방안, 보험료 지원 사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보험료 지원사업의 내용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중위임금 70%(91만원) 이하 저소득 노동자와 영세 지역가입자에 대해 향후 5년간 보험료 절반(노동자 본인부담금 전액, 지역가입자 절반,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 7%)을 지원한다. 8천 5억 원의 재원은 사업장 가입 노동자(미래급여 일부를 인하하여 3조원을 마련), 고소득자(현행 연금보험료 상한소득인 360만 원 이상 소득자에게 누진적 부가보험료 적용), 정부(국민연금 이자 미보전액 상환)가 공동으로 부담한다. 지원대상자인 저소득층은 5년 가입기간을 확보하고 노동시장 개선을 통해 연금수급권 최소 발생기간인 10년을 채우려는 자발적인 유인을 만드는 효과가 예상된다. 사실 노동자운동의 전략 차원의 논쟁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방안의 문제점은 민주노동당이 정부의 연금 개혁방안을 수용한 것 자체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세계적인 연금 개혁 추세나 한나라당의 기본 입장 등을 고려했을 때 기초연금의 추가적인 확대는 국민연금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12).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의 제안은 기초연금을 통해 최소 수준의 수당을 제공하고, 가입배제와 보험료 미납 등의 사각지대는 가입자 개인의 보험료 납부를 촉구하는 방향이다. 결국 국민연금 제도가 안고 있는 한계와 맹점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보험료를 납부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이중의 양보(국민연금 보장수준 후퇴, 보험료 지원 사업 참여)를 통해 오히려 제도의 맹점을 보완하는 방안인 것이다. 정부가 연금 개혁을 제안한 2003년 이후, 급여수준 제한을 전제로 보험료 소득상한선을 높이는 방안, 고용형태에 따른 가입제한을 대폭 완화하는 방안 등의 '현실적' 대안이 논의되어 왔는데, 이에도 훨씬 미달하는 방안인 것이다. 또한 여러 운동진영 매체들에서 지적되었듯이, 미래급여 일부를 인하하여 보험료를 지원하자는 발상은 국민연금의 개념이나 기본 원리에도 맞지 않다. 실현되지도 않은 소득을 현재의 보험료로 사용하겠다는 것은 개인 저축에서나 가능한 논리이다. 한편 민주노동당의 제안이 과연 계급적 해법, 노동자 민중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이번 합의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이 논의를 조직하는 방식을 통해 이미 예고되었던 바라 하겠다. 민주노동당은 2003년의 대응에서는 운동진영과 공동의 목소리를 냈지만, 이후 구체적인 개혁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는 당내 논의로 일관했다. 운동진영 내에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하고 민주노동당의 연금 개혁 방안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이런 논의에 책임 있게 임하지 않았다. 또한 보험료 지원 사업의 추진 방안이 노동조합 상층의 결의를 이끌어 내는 방식을 중심으로 제안되었는데, 이것이 다양하게 진단되는 민주노총의 위기를 극복하는 노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 기대하긴 힘들다. 오히려 민주노동당의 입장에 대한 찬반을 중심으로 노동자운동 내에서 분할구도가 형성되는 결과를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덧붙여 민주노동당이 의회전술을 중심적인 대응방식으로 삼은 것에서 기인하는 다른 차원의 비판지점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저출산·고령화대책연석회의>에 참여한 일부 시민단체들과 함께 사회통합이라는 명목으로 정부의 연금 개혁 논의에 정당성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사실 복지개혁에서 이런 방식을 활용하는 것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에서 시작해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 <저출산·고령화대책연석회의>로 이어지는 노무현 정부의 주요 전략이었고, 때마다 운동진영 내의 논쟁을 가열시킨 요소였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의 연금 개혁에 대안 대응방식은 이후 운동진영이 지속되는 연금 개혁에 맞서 투쟁을 조직하는 데에 장애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 연금 개혁을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는 이데올로기 지형에 대해 지적하고자 한다. 이는 국민연금과의 형평성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공무원연금 개혁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문제로, 마치 정규직의 지위, 일정한 임금수준, 노동조합의 존재 자체가 소득불평등을 만드는 주범처럼 오도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연금기금의 금융화는 노동자 민중 개개인을 금리소득과 직접 연계시켜 금융투자자로 변모시키는 방식을 띤다. 따라서 사각지대와 소득불평등의 근본적 원인, 사회보장에 대한 국가의 책임, 정부 연금 개혁의 근본적 문제 등 본질적인 쟁점에 대한 대중적 논의의 확대는, 현재에는 매우 어렵지만, 우회할 수 없다. 이를 우회한다면 노동자 민중을 처한 조건에 따라 이해와 갈등의 당사자로 만들어 분할을 유도하게 되고, 따라서 이후 계속될 노동자 민중에 대한 공격과 법제도의 후퇴는 피할 수 없다. 민주노동당의 소득연대전략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중적 논의를 오히려 회피하고 있으며, 노동자운동에 대한 공격, 그를 통한 노동자 민중에 대한 분할 전략에 수렴되는 방향이다. 금융화 비판 기조를 중심으로 민중적 대안을 모색하자! 국민연금을 둘러싸고 이렇듯 논쟁이 과열되는 것은 국민연금 개혁을 기화로 제기되는 쟁점들이 그만큼 현대 자본주의가 처한 조건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이해에 직접 연계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문제는 공적연금뿐만 아니라, 사회보험제도 일반이 역사적으로 구축되어온 과정과 그것이 지탱될 수 있는 정치적·물적 토대와도 연관된다. 19세기까지 구빈법과 같은 극빈층(실업-半실업자 혹은 산업예비군)에 대한 구제제도를 가지고 있던 서구 국가들이 20세기에 사회보험을 발달시켰다. 이런 제도들은 노동력 재생산에 대한 국가 개입의 한 형태로, '케인즈주의'로 알려진 국가의 경제정책에 동반하는 것이었으며, 전후 자본주의 성장기가 그 물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그러한 물적토대와 국가의 개입력이 심각하게 침식된 현재, 공적연금 뿐 아니라,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등 사회보험 전반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신자유주의 지배계급의 접근은 문제의 본질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자본주의적' 해법도 될 수 없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연금기금의 금융화에 맞선 투쟁이 대응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장기적으로 연금제도를 방어하는 투쟁을 넘어서는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제도 밖에 놓여 있는 현재 상황이 방어투쟁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물론 사각지대 해소의 기본적 방향은 불안정 노동을 철폐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사각지대를 해소한다 해도, 현재의 공적연금 제도 내로 공식적 고용관계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주부, 비공식 부문 등)을 포괄하는 것은 어찌해도 불가능하다. 또한 부과방식으로 전환을 주장하는 것 역시 200조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적립금을 당장 해소하는 것이 간단치가 않다는 현실적 문제와 함께, 인구노령화 조건에서는 후세대의 부담 가중 등의 불안정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이런 고민은 현재의 제도를 변형하거나 보완하는 것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현 제도를 개조하는 접근 하에서는 현재 자본이 처한 위기를 보완하는 방식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고, 이는 노동자 민중에 대한 다른 방식의 부담을 전제할 것이다. 따라서 특정 형태의 제도를 고안하는 것이 당장의 직접적인 목적이 되지 않아도 무방하다. 오히려 국가에 대한 의존을 감축하고 노동자 민중의 통제가 가능한, 연대성에 입각한 대안적인 사회보장방안의 기본적 규범과 원리를 사고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에 대한 운동진영 내의 토론과 합의는 현 시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 확대 방안, 금융소득을 포함한 자산소득을 보험료 산정기준으로 삼는 방안, 공식적 고용관계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의 포괄방안 등 금융화 비판과 반(反)빈곤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고민들이 대안적 방안을 모색하는 데 있어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길게 본다면, 현행 제도 하에서 적립기금이 고갈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까지 3~40여 년의 시간이 남아 있는 셈이다. 짧게 본다면, 이번 임시국회에서 법을 개정하더라도 2008년 재정 추계를 계기로 신자유주의적 연금 개혁은 또 다시 추진될 것이다. 이러한 접근이 불가능하다거나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회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자 민중이 함께 지혜를 모으자. 1) 이에 대한 비판으로는 「저출산·고령화 위기 담론은 민중의 의제가 아니가」, 『사회화와 노동』, 316호를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2)현재의 추계에 따르면 2050년이 되면 한국의 노인부양비는 55.13%가 되어, 약 1.8명의 노동인구가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하는 인구구성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구노령화 문제는 한국뿐만 아니라 서구 대다수의 국가들에서 연금 개혁을 강제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현재는 15~64세 노동인구 9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고 있는데, 2050년이 되면 노동인구 4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는 체계가 된다고 한다. 특히 일본, 스페인, 이탈리아 등 인구노령화가 급속히 진전된 국가들의 경우 2040년이면 전체인구 중 노인비율이 45%를 넘어설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본문으로 3) 물론 사각지대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경제활동 인구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 예를 들어 가정주부나 비공식 부문 노동자 등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사실 이들은 사회보험 제도의 맹목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데, 현재 사회보험 제도의 기본 틀을 넘어서는 대안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다. 현재의 공적연금은 노동시장에 진출해 있지 않은 여성에 대해 배우자 지위에 근거한 배우자급여, 유족연금 등을 두고 있으나 그것의 정치적 의미, 현실적 한계는 너무나 자명하다. 본문으로 4)각 정당의 국민연금 개혁방안과 합의내용
     현행열린우리당민주노동당한나라당3당합의
    급여율60%50%40%20%50%
    보험료율9%9%9%7%9-12.9%까지 점진적 인상
    기초(노령)연금 65세 이상없음노인 60%
    7-10만원
    노인 80%
    8만 3천원
    노인 100%
    월14만원
    대상 노인 60%
    월 8만 3천원
    본문으로 5)이와는 별도로 공무원연금 개혁 시안의 경우 재정안정성 제고와 국민연금과의 형평성 달성이 주요 목적인데, 연금 수급 퇴직자, 현공무원, 신규 공무원 각각에 대한 적용 내용을 달리했다. 퇴직자의 연금은 현행 유지, 현공무원과 신규공무원은 퇴직수당을 높이고 급여 산정 기준을 퇴직 전 3년 월평균에서 재직 전 기간 평균 월소득으로 변경하여 급여감소 효과가 있도록 했다. 특히 신규 공무원들에 대한 적용 안은 공무원연금-퇴직금-저축계정 신설의 3층 구조인데, 저축계정은 확정기여형, 매칭펀드(노동자, 정부 각 1%) 형태로 제안되었다. 이것은 국민연금을 비롯한 일반연금이 지향하는 다층체계 구상과 유사한 것으로 이후 추가적인 개혁이 진행될 것임을 암시는 것과 같다. 본문으로 6) 한편 국민연금 개혁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는 추진되는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몇 가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선 4대 사회보험 징수 통합방안이 작년에 확정되어 2009년 시행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징수업무로 통합의 대상이 한정된 만큼, 주요 명분은 징수율 제고, 행정적 효율성의 제고에 있다. 이로 인해 기존 3개 사회보험 공단(건강보험공단, 국민연금관리공단, 근로복지공단) 노동자들의 인력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며, 장기적으로 사회보험에 대한 강제징수를 강화하는 방향이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2008년부터 근로소득보전세제(EITC)가 시행될 예정인데, 저소득층(특히 일용직 노동자)의 사회보험료 지원이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설정되어 있다. 또한 2006년 1월부터 퇴직연금법이 시행되고 있으며, 종합금융투자기관의 출현을 예고하며 연금기금의 금융화를 가속화 할 자본시장통합법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본문으로 7) 신자유주의 복지개혁 양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이진숙, 「노무현 정부 복지개혁의 본질과 전망」, 『월간 사회운동』, 통권 66허, 2005년 7·8월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8) 실제 OECD 등에서 발간하는 연금관련 보고서에서는 극빈층 노인들에게 월 3~4만원 지급되는 한국의 노령수당이 기초연금으로 분류되어 분석되기도 한다. 본문으로 9) 현재 국민연금의 급여산식에는 전체 가입자들의 평균소득을 반영하여 소득재분배가 가능하도록 한 균등부분과 가입자 개인의 소득에 연계되는 소득비례 부분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본문으로 10) 국민연금 개혁을 주제로 한 TV 토론회에 자주 등장하여 공적연금 축소, 민간보험 확대를 통한 다층체계를 제안하는 교수, 전문가 중 일부는 연금기금의 사회책임투자 확대를 주장하는 개혁 NGO의 일원이다. 본문으로 11) 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김덕민, 「'장하성 펀드', 신자유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 거버넌스」, 『월간 사회운동』, 통권 69호, 2006년 11월을 참조하시오. 본문으로 12) 위 각주 4번에서 확인되듯이, 사실 민주노동당의 기본 입장 자체가 이미 그러하다. 본문으로

  • 2007-02-09

    노동부는 이주노조 설립신고 반려를 즉각 취소하라

    요약문이 있습니다.
    요약보기
    바로가기

    지난 2월 1일 서울고등법원은 서울지방노동청의 이주노조의 설립신고서반려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했다. 법원은 “불법체류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현실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면서 임금․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이상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는 근로자”이므로 노조의 주된 구성원이 불법체류 외국인이므로 노동조합 설립이 안 된다는 노동청의 주장이 부당함을 분명히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부는 이번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상고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노동부는 이주노조의 설립을 인정할 경우 강제출국 위기에 처한 불법체류자들이 노조설립을 통해 저항하여 마치 사회에 큰 혼란이 올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일부 언론에서는 마치 이번 판결이 국제적 기준에도 어긋나는 의외의 판결이라며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노동부의 단속․추방 정책으로 인해 확인되는 경우만 해도 일 년에 수십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혼란이고 사회적 문제 아닌가. 또한 국제적 기준 역시 불법체류자라 하더라도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도록 하고 있다. UN 이주노동자권리협약 제26조는 불법체류 근로자를 포함한 모든 이주노동자에 대해 노동조합 기타 단체의 회의 및 활동에 참가하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ILO 기본협약인 제87호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에 관한 협약' 제2조는 노동자는 어떠한 차별없이 결사의 자유와 단결권을 갖는다고 하고 있고 ILO 이주노동자 권고(1975년, 제151호)는 불법체류 근로자의 노동조합원의 자격과 노동조합권의 행사에 대해서도 현재 및 과거의 고용으로부터 나오는 권리는 보장된다고 정하고 있다.


    이처럼 국제적 기준으로보아도 이주노동자들은 그 체류자격 여부와는 노동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하고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활동에 참가할 권리가 있음에도 유독 한국정부만 고집을 부리며 자의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국정부는 불법체류 상태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을 단속과 추방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이들의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부정해 왔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한국 정부야 말로 헌법과 노동법을 무시하며 자의적으로 권력을 휘둘러 왔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한국 정부는 이번 판결을 불법체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과 정책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고 새롭게 수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만약 노동부가 이번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를 한다면 우리는 이를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되돌리려는 시도로 간주하고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이다.

    2006년 2월 8일

    사회진보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