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철군논의와 평화적인 길의 의미 엄 한 진(한림대 사회학과) 1. 대안을 요구하는 이라크 문제 지난 12월 6일 공개된 <베이커 보고서>를 계기로 본격화된 철군 논의 등 앞으로 이라크정세에 대한 전망은 전지구적인 대테러전쟁, 동유럽․중앙아시아․중동 등 서유럽 및 러시아의 접경 지역에서 격화되고 있는 미국과 이들 지역간의 헤게모니 투쟁, 그리고 중동문제 일반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대테러 전선의 하나로서 이라크의 상황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고 내전 상태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제는 국제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아프가니스탄을 닮아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다시 세력을 결집하고 있는 것처럼 이라크에서도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점령군에 대한 저항이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라크인들의 고통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2006년 10월에는 3,709명으로 한 달 희생자수의 최고기록을 경신하였고 걸프전 이후 서방의 경제봉쇄는 이라크 민중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다. 한편 최근 중동 분쟁의 새로운 양상의 하나는 팔레스타인문제가 주변국으로 확산되고 이렇게 확대된 팔레스타인문제가 이라크문제와 연계됨으로써 분쟁이 중동 전체로 번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9․11테러를 빌미로 한 미국의 이라크 점령이 계기가 되어 이제 팔레스타인문제와 이라크, 이란 등이 연관된 걸프지역 갈등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른바 대테러 전쟁의 틀에서 연계되는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제2차 이라크 전쟁에 뒤이은 지난 7, 8월의 제2차 레바논 전쟁은 레바논 전쟁(1975-1990)과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제1차 인티파다(1987), 걸프전(1991)으로 치달은 지난 중동전쟁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유사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과거 걸프전이 평화협상의 시대를 열었듯이 최근 극도로 불안정해진 이라크와 중동의 상황을 타개하는 대안으로 철군과 외교적 해결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 <베이커 보고서>와 그에 대한 반응 최근의 변화는 미국 자체에서 시작되었다. 이라크전쟁은 점점 더 혼돈에 빠져들고 있고 저항세력과 자살테러의 증대로 미군의 이라크 주둔이 점점 더 위험해졌다. 게다가 대테러전쟁으로서의 이라크 전쟁은 역설적으로 미국 내 새로운 테러의 가능성을 높인다. 그리고 현 상황을 타개하는데 미군의 철수 이외에는 다른 가능한 대안이 없어 보인다. 지난 11월 미 의회선거의 결과는 이라크문제에 대한 불만, 이란과의 대결에 대한 망설임의 표현이었다. <베이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66%가 이라크 전쟁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고 60%가 전망이 불투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라크전쟁에 분명히 반대하지 않는 정치인은 정치적 입지가 약해지는 등 변화양상이 뚜렷하다. 정치권에서도 공화, 민주를 막론하고 철군론이 급물살을 타면서 2003년 3월 이라크침공이 개시된 후 처음으로 2006년 11월 의회에서 철군안이 제안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국의 대이라크 정책의 변화를 촉구하는 <베이커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들로 구성된 <이라크연구모임>이 펴낸 이 보고서는 일종의 위기탈출 방안을 담고 있다. 140쪽 분량의 이 보고서에는 모두 79개 항의 권고안이 제시되어 있는데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2008년 초까지 이라크 주둔 미군의 대부분 철수 △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 △ 이라크문제 해결에 주변국들의 참여 △ 시리아 및 이란과의 대화 △ 이라크에 대한 <국제지원그룹> 구성 △ 구 바트당 지도자들의 이라크 정치에의 복귀 이 중 민감한 사안인 시리아 및 이란과의 대화 촉구는 이라크에서의 군사적 실패로 인해 미국이 중동정책에 대해 주변국들의 협조가 절실해졌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이 보고서에 대한 반응을 보면 프랑스 등 유럽의 정치인들 대부분은 미국의 신보수주의 외교정책의 종식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여겨 환영하는 분위기이다. 반면 이라크 현 수상이 포함된 이라크의 시아파, 특히 현 정부의 대통령이 포함된 쿠르드족, 그리고 이스라엘은 사안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보고서에 나타난 주요 제안들에 반대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라크에서의 미군 철수를 자신이 직접 주변국들과 맞서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철군안에 반대했다. 겉으로는 철군이 이스라엘의 안전에 대한 위협을 가중시키게 될 것이라는 점을 내세우지만 이스라엘이 반대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지역정세가 안정적인 국면으로 접어들고 그간 이라크에 집중된 국제사회의 중동 관심이 중동문제 전반으로 옮아가게 되면 그 중 제일 비중있는 사안인 팔레스타인문제가 다시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간 이라크에서의 대테러전쟁의 논리에 힘입어, 그리고 이라크전쟁의 그늘에서 마음껏 자행할 수 있었던 팔레스타인인 억압에 대해 국제사회의 견제가 조금은 심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꺼리는 정착촌 문제, 난민문제, 예루살렘의 지위문제 등 팔레스타인문제의 핵심 사안들이 다시 부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역에 대한 경제적 통합에만 몰두하는 미국과 유럽도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본 해결에는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부시정권의 관심은 갈등의 해결보다는 석유자원의 안정적 확보, 그리고 미-모로코 자유무역협정(2004년)을 시작으로 2013년까지 중동에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3. 예상되는 <평화의 길>의 중동적 의미 한편 <베이커 보고서>에 대해 부시는 아직 두드러진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거기 담긴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을 터이고 그 대안을 찾는 작업을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부시가 보고서에서 제시된 권고안 중 어떤 것을 어떤 식으로 수용할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백악관에 따르면 부시는 가능하면 크리스마스 이전에 이라크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 하니 아직은 기다려봐야 할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부시는 대부분의 제안에 대해 머뭇거린다. 즉각 철군은 이 지역 전체를 불안정과 전쟁으로 몰아갈 것이라며 반대하고, 이란과의 협력관계는 이 나라가 핵을 포기할 경우에, 시리아와의 협력관계는 오랫동안 후견인 역할을 해 온 이웃나라 레바논에 대한 개입을 중지할 경우에 가능하다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다만 팔레스타인 문제 등 중동문제에 대한 외교적 노력에 대한 제안은 수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은 이 협상의 길이 한편으로는 현 상황에서 불가피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라크 침공 이후 격화된 중동 전반의 갈등을 은폐하는 효과적인 방편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중동. 걸프전 이후 아버지 부시는 이스라엘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평화협상의 길을 택했다. 우리는 또다시 10여 년 전처럼 또 다른 마드리드 협상, 오슬로협정 등 수많은 평화회담과 협정을 보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90년대의 경험을 보면 이런 식의 평화의 길은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길이면서 그러나 더 격렬한 모순의 폭발을 준비하는 일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당초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게 설정된 이 평화의 길 뒤에는 2차 인티파다 이후의 내전상황과 2차 이라크전쟁, 2차 레바논전쟁 등 더욱 비합리적이고 잔혹해진 폭력적인 양상이 그 뒤를 이었다. 1999년 2차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고통만 더 안겨준 지리한 평화협상에 대한 환멸의 표현이었고 2006년 1월 하마스의 총선승리는 이스라엘과의 대화를 통한 평화의 길에 대한 불신의 표현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워싱턴포스트지가 내부 소식통을 통해 얻어낸 부시행정부의 대이라크 정책 변화 시나리오 세 가지 중 하나는 바로 바그다드의 치안확보와 이라크군 창설을 본격화하기 위해 필요한 파병군인의 수 증대이다. 따라서 철군이나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참여하는 외교적 길에 대한 성급한 논의는 금물이다. 그러나 설사 부시행정부가 외교적 방안을 채택한다 하더라도 이번 2차 이라크전쟁과 2차 레바논 전쟁, 그리고 지난 7년간 쉽없이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붙인 이스라엘의 공세 이후 휴지기가 지나면 새로운 대안과 새로운 세력의 등장이 없는 한 또 다시 폭력의 회오리가 몰아칠 것이다. 그것은 분열, 불안정과 폭력이 적어도 중동지역에서는 미국과 유럽의 전통적인 지배전략이었고 앞으로도 별 이변이 없는 한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창설 이후 중동지역이 반 세기 이상 겪어 온 것은 바로 이 진전없는 반복이었다. 4. 대안 없는 중동 문제 따라서 문제는 중동문제에 대한 대안, 그리고 이 대안을 담지할 주체의 부재이다. 그리고 이 대안 부재의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전망을 제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수십만의 무고한 이라크인들을 희생시킨 미국과 동맹국들의 범죄, 국제사회가 ‘나 몰라라’ 하는 가운데 저질러지는 팔레스타인의 참극, 그리고 황당한 레바논 전쟁 등 유례없이 극단적인 최근의 중동 현실은 바로 이 대안과 전망 부재의 적나라한 표현이다. 중동 현대사는 최근 논의되고 있는 철군과 평화적인 길이 중동문제 해결의 첫 걸음에 불과함을 말해준다. (2006. 12. 13) (*출처 : 민주노조운동연구소홈페이지자료실 dli.nodong.net)
지난 30일 비정규직법안 개악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날치기 통과됐다. 신자유주의 정부와 여야 정당은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울음을 깡끄리 짓밟았다. 지배계급은 평택 미군기지 확장, 한․미 FTA강행, 극단적인 노동유연화 정책 추진 등 한국사회를 통째로 위기의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저항하는 많은 민중들의 목소리를 ‘일부 폭력적인 집단의 교통방해’로 치부하면서 집회․결사의 자유를 원천 봉쇄하고 있다. 하지만 민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국 곳곳에서 분노를, 슬픔을,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민중총궐기를 끝나지 않았다. 1, 2차 총궐기에 이어 12월,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나가는 싸움을 전개해야한다. <특집>에서는 올해 사회운동의 가장 큰 이슈였던 한․미 FTA저지 투쟁과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투쟁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담고 있다. 정지영은 한․미FTA 저지 투쟁을 신자유주의 금융/군사세계화를 주도하며 한반도에서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는 미국과 이를 추종하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대안 세계에 대한 대중들의 토론과 합의를 모아가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박준도, 문설희, 이소형은 쟁점토론을 통해 그 동안 진행되었던 평택미군지기 확정저지투쟁의 쟁점과 난점을 정리하고 이후 투쟁의 방향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전쟁을 멈춰라>에서 정영섭은 정부의 자이툰 철군으로 포장된 자이툰 1년 파병연장과 레바논 파병계획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지은은 미국의 아프간 침공 5년째를 맞은 아프간의 상황을 폭로하며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과 나토군은 지금 당장 철수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수열은 이라스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설치하고 있는 고립장벽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해방을 향한 여성행동>에서 김원정은 한․미 FTA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며 이에 맞서는 여성운동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노동자운동으로 세계를 변혁하자>에서 학습지산업노조는 정부에서 발표한 특수고용노동자 대책이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문제를 봉합할 뿐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다음으로 건설산업연맹 국제부장 이진숙과의 인터뷰를 통해 국제노총 출범의 의의를 밝히고 있다. 노동국은 주연테크 노조와 서울대병원 노조와의 인터뷰를 통해 민주노총 총파업을 조직하는 현장의 솔직한 고민과 상황을 담고 있다. 김효는 본격화 될 체신부문 구조조정에 맞서 체신현장운동의 과제를 밝히고 있다. <대안세계화를 향하여>에서는 얼마 전에 열린 국제토론회 “FTA에 반대하는 여성들”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태국 빈민연합과 콜롬비아 농민연합의 활동가들을 만났다. 각 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미국과의 FTA에 저항하는 운동의 구체적인 쟁점과 현황에 대해 들어보았다. <사회운동과 연대>에서는 최은숙은 올해로 여섯 번째를 맞는 노숙인추모제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 아닌, 새로운 투쟁을 일궈나가는 12월을 만들자. 사회운동도 그 길에 함께 할 것을 약속한다.
[%=사진1%] "이장님이 나온다, 안 나온다, 나온다, 안 나온다, 나온다!" 2006년 6월 6일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던 날, 평택경찰서 앞. "우리 이거 해보자!" 대추리 사는 10살 도희가 장미꽃 한 송이를 내게 쭉 내밀고는, 이장님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장미꽃잎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우리는 경찰서 담벼락에 핀 장미꽃 송이를 따서 꽃잎을 하나하나 떼어내며 장미꽃 점을 쳐봤다. 그게 끝나면 또 한 송이를 따서"우리가 계속 대추리에 산다, 안산다, 산다, 안산다, 산다…."도 했고, "경찰이 나쁘다, 안 나쁘다, 나쁘다, 안 나쁘다, 나쁘다…."도 했고, "군인들이 마을을 나간다, 안 나간다, 나간다, 안 나간다, 나간다…."도 했다. 빨간 꽃잎들이 바닥에 흩어져 경찰서 담 아래가 꽃길이 되어 버릴 만큼 오랫동안 장미꽃에게 주문을 걸었다. 이장님이 나오기를, 대추리에 계속 살 수 있기를, 군인들이 우리 마을에서 나가기를. 그 때 그 장미꽃 송이들이 우리에게 이장님이 나온다고 했는지 아닌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날부터 5개월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대추리 김지태 이장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도희는 대추리 김영녀 할머니의 외증손녀다. 웃는 모습이 하회탈처럼 예쁘신 김영녀 할머니는 김지태 이장의 고모이기도 하다. 친인척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추리는 한 집 걸러 한 집이 가까운 친척으로 연결이 된다. 그래서인지 마을 일을 함께 겪는 사람들은 더 끈끈하게 그 일들을 공유하는가 하면, 등 돌리고 떠난 것에 대한 배신감과 아픔은 더 크게 느낀다. 언젠가 김지태 이장을 면회하고 오신 할머니는 가슴을 치며 말씀하셨다. “어제는 이장 보고 왔어. 멀쩡한 놈, 죄 없는 놈 가둬놓고. 아휴, 천불이 나. 열나고. 걔 보고 온 날은 밤새도록 잠이 안 와. 걔만 떠올라서.” 그렇게 속 터지고 화나는 것은 김영녀 할머니 뿐 만이 아니라 대추리 주민 모두가 그렇다. 이장을 잡아두고 한국정부가 벌이는 이 엄청난 범죄의 대가를 대추리 주민들이 몸으로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것이다. 검찰의 의도적 재판연기 4월 29일자로 체포영장이 발부되어 가족들과도 떨어져 지내야 했던 김지태 이장은 6월 5일 평택경찰서에 자진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당시 대화를 하자고 떠들어대던 한국정부는 자진출두한 김지태 이장을 구속시켰다. 6월 4일 29회 대추리민의 날 행사에 함께 해 오랜만에 주민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그렇게 또 다시 긴 이별을 해야 했다. 그 이후 검찰은 어떻게든 김지태이장을 더 오랫동안 잡아 두려고 안달을 하는 듯 보였다. 김지태 이장의 선고일이었던 9월 22일을 며칠 앞두고 검찰은 새로운 증거 자료가 나왔다며 변론 재개를 신청했다. 추석을 함께 보낼 거라는 기대가 깨진 주민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는지, 또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말로 다 하지 못한다. 10월 13일 재판에서, 수원지검 최임열 검사가 제출한 ‘새로운’ 자료는 2005년 7월 10일 평화대행진을 전후한 김 이장의 통화 기록과 자신이 다쳤다고 주장하는 전경들의 피해 진술이 전부였다. 그러한 증거가 김 이장 구속수사 4달 만에 ‘새로’ 발견될 수 있는 것인지, 변호인단의 변론을 뒤엎을 만한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기소사유가 되지도 않는 증거를 제출해 김지태 이장의 구속을 연장하려 한 것이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했던 그 날, 재판부는 11월 3일로 선고일을 연기했다. [%=사진2%] 징역 2년 실형 선고 11월 3일 열린 김지태 이장의 1심 판결에서 김지태 이장은 징역 2년 실형 선고를 받았다. 수원지법 평택지원 성지용판사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등 7가지 혐의를 들어 실형을 선고하고,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죽봉과 쇠파이프가 난무하는 대규모 폭력사태를 초래한 점 등을 볼 때 죄질이 가볍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이날 재판부는 주민들의 법정소란을 이유로 들어 3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안정된 판결과 판사의 의견개진을 위해서" 방청권을 교부했고, 경찰에 시설보호요청을 하고, 법정에 CCTV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경찰의 방패에 가로막힌 주민들은 서둘러 끝낸 재판을 결국 보지 못했고 법원 앞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앉아 징역 2년 선고 소식을 들었다. 팔순을 바라보는 부모님조차 재판을 보지 못했고 법원 앞에서 오열해야만 했다. ‘초범’인 김지태 이장에게 이 같은 판결이 내려진 것은 대한민국 사법부가 여전히도 정부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극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지태 이장의 실형선고는 미군기지확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정치재판이며, 공정한 법집행을 해야 할 사법부가 법을 이용하여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김지태 이장을 볼모로 삼아 주민들을 더욱 더 지치게 하고 시간을 끌며 포기하게 하려 한다는 것을 주민들은 알고 있다. 한국정부와 국방부는 지금 주민들에게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싸움을 포기하라, 그러면 김지태 이장을 풀어줄 것이다."라고. 실형선고를 받은 김지태 이장은 지난 11월 13일 평택구치소에서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싸움이 시작된 처음부터, 차가운 감옥에 있는 그 시간동안에도 김지태 이장은 끝까지 싸우자고 말하고 있다. 주민들의 정당한 저항을 폭력으로 누르며 보상금으로 해결하려는 정부에게 김지태 이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 너른 들판을 사시겠다고? 그 금액은 너무 어마어마해서 나는 상상을 못할 지경이니깐. 힌트를 드리자면 대추리, 도두리 들판에서 지금껏 거두었던 벼의 낱알의 개수만하다고나 할까. 그것을 일구기 위해 굽혔다 폈던 관절의 운동 횟수만하다고 해도 될 것 같다. 한 가지 더. 그들의 시간, 한숨, 울음, 웃음 그것을 내려다보았을 별빛이나 시름을 달래주던 바람의 총량까지 합하면 대충은 나올 것 같다." 양심수가 된 아들, 애타는 부모님 “우리 아들 보고 왔어” 김지태 이장이 안양교도소로 이감 된 후 면회를 갔다 오신 황필순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그 아들에 대해 한참 동안 이야기하고는 결국 눈물을 쏟아내셨다. “뭘 시켜도 착실히 잘 하니께 맨날 걔만 시켰지. 새끼도 잘 꼬고 소 먹이는 것도 잘 하고 그랬어.” 할머니는 요즘 메주를 쑤느라 바쁘시다. 10월에 털어 말린 노란 콩을 가마솥에 가득 넣고 아궁이에 불을 땠다. 연기가 가득 차오르는 아궁이 앞에 앉아 이른 아침부터 할머니는 나무를 잘라 넣는다. “8남매를 낳았는데, 4남매가 죽고 4남매 남은 겨. 못 먹여서 애들이 자꾸 죽고 그러니께 애들 하나하나 얼마나 소중하게 길렀나 몰러. 그렇게 기른 자식이여."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연기가 가득 차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눈이 아픈데도 할머니는 끄떡 없이 그 앞에 앉아 계신다. “할머니, 눈 아프지 않으세요?” “이걸 몇 십 년을 했는디, 아무렇지도 않어.” 까만 연기를 내 뿜는 아궁이 앞에서도 너무나 잘 견디는 할머니지만 아들 생각만 하면 눈물을 멈추지 못하신다는 걸 안다. 이 땅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동네 어른들 뜻에 따라 싸우다 감옥에 갇힌 아들, 양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시골 마을 이장인 아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소밥 주러 나가던 아들을 생각하면 눈물을 멈추지 못하신다. 새벽 다섯 시에 소밥 주러 나가는 일은 이제 김석경 할아버지의 일이 되었다. 김지태 이장은 감옥에서 “아버지가 힘드니 소를 팔았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소일거리라도 삼아 해야 산다며 할아버지는 반대하셨다. 언젠가 할아버지는 아들의 면회를 가면서 어디 가시냐고 묻는 내게 “소 이야기 하러”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정말 “소 이야기”만 하고 오셔서는 오후 다섯 시가 되자 또 다시 소 밥 주러 가셨다. 할아버지가 자꾸 마르시는 것 같아, 부쩍 늙으신 거 같아 마음 다스릴 수 없이 아프다. 예전 비닐하우스에서 촛불행사를 할 때, 언제나 두 분 할머니 할아버지가 맨 앞 자리에 앉아 촛불을 하늘높이 치켜 들며 함성을 지르셨다. 요즘은 가끔씩 촛불행사를 빠지기도 하시고 예전처럼 그렇게 힘있게 촛불을 들지도 못하신다. 두 분의 상처가, 아픔이 걱정될 뿐이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싸우셨던 두 분이 양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아들을 감옥에 보내고 맞는 이 겨울이 부디 매섭지 많은 않기를. 하루 빨리 김지태 이장이 석방되어야 한다. 더 이상은 안 된다. 더 이상 평화와 정의와 인권을 가둬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모든 권력이 뒤엉켜 벌이는 이 사기행각을 당장 멈추고 양심수 김지태 이장은 평화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
한미 FTA를 넘어, 민중의 대안으로 [쟁점토론]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 새로운 시작을 위한 투쟁
한미 FTA 저지 투쟁의 전진을 위하여 [%=사진1%] 한미 FTA 저지 투쟁을 비롯한 노동자민중의 투쟁에 한 노무현 정부의 탄압이 거세지고 있다. 경찰은 지난 11월 초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도심 집회 금지를 명목으로 집회를 제한하려 했다. 그 이후 경찰은 도심에서 진행하는 집회를 자신들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만 허용하려 했고, 이를 ‘평화집회’라 명명하며 집회를 관리하려는 자신들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1월 22일 ‘한미FTA저지 1차 범국민총궐기’ 이후 정부와 경찰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틀을 벗어난 모든 행동을 폭력으로 몰아붙이며 한미 FTA 반대 투쟁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했고, <한미FTA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의 모든 집회를 불허하면서 사실상 한미 FTA 반대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경로 자체를 차단했다. 무능한 노무현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며, 한미 FTA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에 대한 반대와 저항의 의사 표현을 경찰과 정부가 정해준 틀 안에서만 하라고 강요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이는 스스로 참여정부를 자처한 노무현 정부가 이제 ‘공권력’ 밖에 의존할 것이 없는 배제의 정부임을 자백하는 꼴이기도 하다. 더불어 한미 FTA는 노무현 정부가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국민의 의사를 폭력적으로 짓밟으면서까지 사활을 걸고 추진하는 중대한 사안임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미 FTA 반대는 용납할 수 없다? 지난 22일 1차 범국민총궐기 이후 한미 FTA 반대 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과 제한이 상상을 초월하는 지경이다. 한명숙 총리와 관계부처 장관들은 담화를 발표해 ‘폭력시위 엄단’을 운운했고, 주류 언론들은 집회의 폭력성을 부각시키며 탄압을 부추겼다. 그리고 이어 집회 참가단체 인사 170여명에게 소환장이나 체포영장을 발부했고, 전국농민회총연맹이나 <범국본> 지역 단위 사무실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게다가 경찰은 11월 29일 2차 총궐기를 비롯한 한미 FTA 반대 집회를 원천 금지하겠다고 밝혔으며, 2차 총궐기를 앞두고는 5만여 병력을 투입해 전국에서 총궐기를 무산시키려 시도했다. 사실 29일 2차 총궐기에 대한 경찰의 대응은 계엄을 방불케 하는 수준이었다. 톨게이트를 막아 서울로 올라오는 시위대를 차단하는 방법은 이제 놀랍지도 않다. 각 지역 관광버스 회사에 공문을 보내 총궐기 참가자에게 버스를 대절해주지 말 것을 강요하고, 농민회 간부들 집에까지 찾아가 불참을 종용・협박하는가 하면, 총파업에 돌입하고 총궐기에 참여하려는 노동자들을 막기 위해 공장 앞에 병력을 배치하기도 했다. 서울역에서는 총궐기를 위해 상경한 농민들을 잡는 데 혈안이 된 경찰들이 불심검문을 자행하고, 3명만 모여도 강제 해산시키겠다고 위협하며 사람들이 역사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았다. 전경버스 30여대로 서울시청 광장을 에워싸 단 한 사람도 들어갈 수 없었던 그 텅 빈 광장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한 편의 코미디였다. 그 뿐만 아니라 정부와 경찰은 <범국본> 명의로 된 플래카드가 단 한 장이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며 합법적으로 신고된 집회의 물품까지도 검색했고,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방송 차량은 모두 세워서 검문하며 도심 진입을 가로 막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집회․결사의 자유를 침해하는 심각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미 FTA를 반대하는 의사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정부의 노골적인 선전포고라는 점에서 더 엄중한 사안이다. 노무현 정부에게는 그만큼 한미 FTA가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사활이 걸린 한미 FTA 한미 FTA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억압하기 위해 기본적인 집회의 자유도 제한하며 어마어마한 폭력과 불법을 자행하고 있는 노무현 정부의 현재 모습은 5월 4일 군부대와 경찰을 투입해 평택의 대추초등학교를 철거했던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 자신이 일궈서 농사짓고 살아온 땅에서 ‘올해에도 농사짓겠다’는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의 요구는 군경의 폭력 앞에 무참히 짓밟혔다. 이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 노무현 정부와 지배세력에게는 어떻게 해서라도, 1980년 광주를 재현하는 한이 있더라도, 추진해야할 사활이 걸린 문제라는 점을 확인시켜준 계기였다. 평택에 미군기지를 확장 이전하는 문제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여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군사적 우위와 관리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한 축이며, 이는 한미동맹의 강화와 현대화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투쟁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저지하는 투쟁이자 나아가 한미동맹을 전제로 한 미국과 한국의 지배세력들의 전망을 민중 주도의 다른 전망으로 바꾸는 투쟁이고, 정부와 지배세력은 이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한미 FTA 또한 마찬가지다. 한미 FTA에 대한 반대의 의견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봉쇄하려는 노무현 정부의 탄압을 보면, 한미 FTA가 진정 노무현 정부와 지배세력이 사활을 걸고 밀어붙이고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초민족자본의 이해를 보장하고 금융세계화의 통치성을 유지하려는 미국은 FTA를 대외정책의 중요한 일환으로 사고하고, 경쟁적 자유주의 전략을 통해 세계로 확산하려 한다. 한미 FTA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초민족자본의 활동을 보장하는 주요한 발판이 될 것이다. 농업, 의료, 교육과 같이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투자자의 지위를 모든 것에 앞서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하의 자유무역은 세계 곳곳에서 인민들의 권리와 날카롭게 배치되면서 삶을 파괴하고 있다. FTA는 이런 자유무역을 더욱 심화․확산하려는 초민족자본의 적극적인 요구다. 재벌을 중심으로 이런 세계화에 적응해왔던 한국 정부와 지배세력은 이제 한미 FTA를 통해 미국과의 경제통합을 심화하여 살 길을 모색하려 한다. 한국 정부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적극적으로 편입하기 위해 노동을 유연화하고 농업을 포기하며 각종 서비스 시장을 개방해왔지만, 한국 경제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장기적인 침체에 빠져있다. 노무현 정부와 재벌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더 많은 개방과 더 많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요구하며 미국과 경제를 통합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들에게 한미 FTA는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는 중요한 문제지만, 한미 FTA가 무엇을 대가로 하는지는 ‘민족의 이익’이나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라는 현란한 수사 속에 가려지고 있다. 1997년 이후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추진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의 재편은 비정규직 양산, 노동기본권 제한, 빈곤 확대, 농촌 파괴와 같이 재앙과 같은 현실을 낳았다. 이런 재편의 방향성은 노동자민중의 수많은 투쟁에도 변하지 않았고, 이제 한미 FTA를 통해 한국 사회 전체의 완전한 재편을 꾀하고 있다. 이로써 민중이 처한 재앙과 같은 현실은 더 심각해질 판이지만, 이 모든 걸 짓밟고서라도 자신들은 살아야겠다는 재벌과 정부의 강력한 의지는 한미 FTA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한 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탄압으로 드러나고 있다. 한미 FTA 저지 요구는 협상 테이블 안에 갇힐 수 없다 사실 정부와 언론은 지금까지 한미 FTA 반대를 주장하는 민중의 요구와 목소리를 진지하게 고려해 본 적이 없다. 정부와 언론은 이번 총궐기를 놓고 참가자들의 집회 방식이 폭력적이라고 비난하거나, 이러한 시위를 사전에 기획했다는 사실이 무슨 범죄 성립요건이라도 되는 양 매도하면서도, 이러한 시위에 참가하는 이들이 어떤 요구와 주장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다루지 않았다. 지금까지 언론이나 정부는 미국 협상단과 한국 협상단 사이의 쟁점과 논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미 FTA를 다뤄왔다. 전문성으로 무장한 한미 FTA 협상단이 각 분과별로 어떤 협상을 했는지, 이것이 각 분야에 몇 퍼센트, 몇 원의 손익을 내는지 만을 집중해서 다뤄온 것이다. 이는 한미 FTA가 파괴하는 민중의 삶과 권리는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됨을 의미한다. 노무현 정부는 집회의 폭력성을 부각하며 한미 FTA에 대해 합법적인 방식으로 의견을 전달하라고 하지만, 이는 이미 주어진 협상의 틀을 인정한 한에서 얼마를 더 주고받을 것인가로 논의를 국한하자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 FTA 협상에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분야별 이해당사자로 제한된다. 하지만 한미 FTA 저지 투쟁은 각 산업과 분야별로 얼마를 더 얻어내겠다는 투쟁이 아니다. 농민들이 한미 FTA에 맞서 싸우는 것은 한미 FTA가 농업을 말살하고 농민들의 토지와 종자에 대한 권리를 파괴하고 민중의 식량권을 위협하기 때문이지, 민감 품목 몇 개를 더 얻고, 몇몇 농산품을 개방에서 제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한미 FTA가 여성들에게 적극적 조치 등을 통해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할 것이라는 선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한미 FTA를 반대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FTA가 여성들을 활용하여 노동을 유연화하고 빈곤을 확산하며, 이것이 전체 민중의 삶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한미 FTA를 반대하는 민중의 요구는 한미 FTA를 추진하는 세력들이 전제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민중의 평화롭고 자율적인 생존이 함께 갈 수 없다는 선언이고, 따라서 근본적인 틀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노무현 정부와 언론은 이런 요구를 대세를 모르는 세력들의 하소연으로 매도하고 무시하며,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의사를 표현하라고 종요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노무현 정부의 기만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지금 한미 FTA를 둘러싼 쟁점은 소수의 재벌과 초민족자본을 위한 금융세계화인가 민중의 보편적 권리와 평화적인 생존을 위한 다른 세계화인가다. 전쟁과 FTA를 강요하는 미국의 하위 파트너가 될 것인가 민중이 주도하는 다른 세계의 동맹이 될 것인가를 가르는 쟁점이다. 노무현 정부는 이를 은폐하고 협상단이 국익을 대표하여 막중한 임무를 지고 있는 것처럼, 민중의 투쟁은 이를 방해하는 폭력인 것처럼 호도하면서 재벌과 초민족자본의 충실한 파트너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한미 FTA 저지 투쟁의 진전을 모색하자 현재 한미 FTA 저지 투쟁은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한미 FTA를 민족과 국가의 이익으로 포장하면서 장밋빛 미래를 남발한 노무현 정부의 시도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하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려온 민중의 현실 앞에서 무기력했다. 노무현 정부는 마치 한미 FTA를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엄청난 세금을 들여 홍보물을 제작하고 국민들의 감정에 호소하며 한미 FTA 체결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3, 4차 협상 과정을 통해 이런 정부의 호언장담이 결코 실현될 수 없으며, 미국과 초민족자본의 일방적인 요구를 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광우병 쇠고기 뼈조각이 발견되어 전량 폐기되는 등 한미 FTA가 민중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문제가 터지면서 한미 FTA 협상의 정당성은 점차 땅으로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사회 양극화 해소’니 ‘비정규직 차별 해소’니 하는 정부의 구호는 허울뿐임이 드러나고 있으며, 무엇 하나 제대로 못하는 무능하고 반민주적인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는 높아지고 있다. 이제 노무현 정부에게 남은 것이라곤 자신의 실패와 무능을 무마할 공권력의 폭력밖에 없다. 한미 FTA 저지 투쟁은 이런 탄압을 뚫고 좀 더 강고하고 광범위한 운동을 만들어가야 할 중요한 처지에 놓여있다. 하지만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 삶의 어려움이 즉각 투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한미 FTA 저지 투쟁 또한 전 민중의 분노를 모아내고 행동을 촉발하는 투쟁으로 나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신자유주의 금융/군사세계화는 초민족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민중의 삶과 권리를 박탈하지만, 이를 넘어설 대안적인 전망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대중은 삶의 불안을 자신의 경쟁력 강화와 같은 개인적인 전망으로 돌파하려 한다. 더불어 신자유주의 개혁은 집단적인 문제인식과 연대를 통한 문제 해결을 가로막고, 행정 관료들을 통한 갈등의 관리와 조정을 장려하면서 대중을 수동화한다. 한미 FTA 저지 투쟁이 처한 본질적인 어려움은 바로 이것이다. 한미 FTA가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대중들도 인식하고는 있지만, 이와 다른 어떤 전망에 대한 확신도 가질 수 없는 불안함이 만연하다. 더군다나 한미 FTA를 거부하는 것은 기나긴 한미동맹의 역사를 단절하겠다는 의미를 가지며, 한미동맹과의 단절이란 상상조차 금기시되었던 어려운 문제다. 따라서 한미 FTA 저지 투쟁은 대중들이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 갈 것을 결단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한미 FTA 저지 투쟁을 만들어 온 투쟁 주체들 내부에는 스크린쿼터나 광우병 쇠고기 같은 사람들의 분노와 공포를 자극할 수 있는 국소적인 이슈를 부각시켜 반대 여론을 만들면 FTA 협상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존재했다. 하지만 정당성을 잃고 탄압으로 일관하는 노무현 정부와 지배세력에 맞서 한미 FTA 협상을 진정 중단시키고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투쟁을 지속, 확산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금융/군사세계화를 주도하며 한반도에서 민중의 생존을 위협하는 미국과 이를 추종하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분명하고도 단호한 입장을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민중운동의 정치적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 더불어 이를 바탕으로 대중과 토론하고, 대안적 전망을 스스로 만들어 갈 주체로 조직해야 한다.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의 어려움은 절실하지만, 이를 타개하는 우회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누차 지적했듯이 노무현 정부는 명운을 걸고 이를 추진하고 있으며, 국민의 여론에 좌우될 생각이 전혀 없다. 게다가 한미 FTA가 민중의 미래와 운명을 걸고 결단해야 하는 중요한 사안인 만큼 민중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주체로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 이제는, 우리에게 FTA가 아닌 무엇이 필요한가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한미 FTA를 넘어 어떤 세계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해 흔들림 없는 방향성을 제시하고 이를 기초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민중의 토론과 연대를 활성화해야 한다. 초민족자본의 이익이 아닌 민중의 필요와 요구에 기반을 둔 새로운 무역의 원칙을 확인하고, 반전평화, 노동권, 여성권, 식량주권, 건강권, 교육권과 같은 민중의 보편적 권리에 기반을 둔 대안적인 세계화의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를 모아가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민중의 주도성을 기본으로 운동들의 연대를 지향하는 투쟁을 만들어가며, 세계 곳곳에서 대안을 세계화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민중의 지식, 문화, 경험을 배우고 교류해야 한다. 한미 FTA를 저지하고 대안을 세계화하자! 결국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미 FTA 저지 투쟁이 한미 FTA와 한미동맹을 넘어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단초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당장의 급한 불을 끄고 위기를 모면하자는 인식으로는 새로운 대안적 전망을 열 수 없다. 지금까지 한미 FTA가 각각의 부문과 영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이루어졌지만, 이것이 FTA와 전쟁을 강요하는 미국과 이를 추종하는 노무현 정부에 대한 반대라는 정치적 방향성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있다. 한미 FTA 저지 투쟁 내에는 여전히 자신의 산업이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흐름도 있고, 동북아 중심국의 비전을 가진 흐름도 있다. 이런 인식을 넘어서 한미 FTA 저지 투쟁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이라는 공통의 인식과 합의를 모아내도록 정치적 방향성을 둘러싼 토론과 논의가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 더불어 한미 FTA는 한미동맹 강화와 금융세계화로의 편입을 통해 자신의 살 길을 모색하는 지배세력의 전망에 불과하다. 그리고 노동자 농민, 여성, 빈민의 미래는 이와 단절할때만 모색될 수 있다. 이제 한미 FTA 저지 투쟁을 통해 우리가 어떤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지 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토론을 개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민중의 보편적 권리와 결코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이를 넘어선 다른 세계는 우리 스스로의 투쟁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자. 한미 FTA 저지 투쟁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삶을 지켜내는 투쟁이다. 한미 FTA를 저지하고 민중의 대안을 세계화하자.
사회자: 안녕하세요. 민중총궐기로 한창 바쁘신 중에도 토론에 참가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올해의 대표적인 투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 투쟁일 것입니다. 『사회운동』 12월호에 이 투쟁을 평가하는 글을 싣자는 것이 애초의 기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이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주체들이 모여 함께 평가를 하는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총궐기를 비롯한 여러 일정 때문에 평가의 자리를 잡는 것 자체가 여의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쁘더라도 지금쯤은 논의를 시작해야 내년 계획을 내실 있게 세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번 쟁점 토론을 본격적인 평가를 시작하는 계기로 삼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아직 생각이 충분히 정리되지 않으셨더라도 그동안 고민했던 쟁점을 격의 없이 제기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각자의 위치에서 평택 투쟁을 하시면서 느낀 소회를 말하는 것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얘기를 시작했으면 합니다. [%=사진4%] 평택 투쟁과 우리 박준도: 소규모이긴 하지만 인천 지역에서 독자적 실천 공간을 연 것이 성과다 문설희: 초기와 달리 최근 들어 사회진보연대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이소형: 평택 투쟁에 관한 전국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전선을 만들어가기 위한 구호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고민이었다 박준도: 인천지역에서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을 한 경험에서 얘기를 시작해 [%=사진1%]볼까 합니다. 다른 지역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데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에 대한 인천지역 사회단체들 사이의 고유한 연대 운동은 무척 미비했었습니다. 집중 일정에 단체들이 개별적으로 참가하는 방식이 주였고, 그에 비하면 인천지역에서 단체들 사이의 독자적인 실천 활동은 너무도 부차적이었습니다. 2006년 내내 이 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었던 것 같습니다. 소규모 선전활동이라도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이라는 주제에 대한 인천지역의 독자적인 실천을 안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작은 규모로라도 책임 있는 단위들이 인천지역에서 실천 공간을 여는 것이 필요했고, 그렇게 시작한 것이 5월, 6월, 7월에 있었던 목요촛불문화제입니다. 그리고 이런 실천 흐름이 9월 빈집 철거 반대를 위한 긴급행동과 목요촛불문화제, 전국행진으로까지 이어졌죠. 실천 규모가 무척 미비하긴 했지만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 주체의 참여 범위를 넓혀놓은 점이나 인천 지역에서 독자적인 실천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의 실마리를 풀려 했다는 점이 성과라면 성과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말 그대로 선전전 이상을 넘지 못했고, 이데올로기적 대응에서 미비했던 점 등은 두고두고 아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제가 초반에 평택미군기지 반대 운동과 한미FTA 투쟁을 함께 묶어서 투쟁하자는 식의 논의에 반대했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죠. 대중조직 내에서 평택미군기지 반대 운동이 선언적인 수준인데, 여기다 한미FTA 투쟁과 묶자는 이야기는 제가 보기에 이 모두를 다 조직 기구와 명칭만 있는 선언적인 실천 수준에 묶어두자는 이야기로 보였습니다. 운동의 결합은 의제에 대한 대중의 참여 과정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결합을 주장하면 회의 참가자 일손만 덜어주는, 상층 중심의 결합이 될 뿐이라는 것이죠. 그것의 실천적 양상은 운동이 아니라 구호의 나열입니다. 문설희: 제가 평택 투쟁에 결합했던 과정을 돌아보면, 처음에는 사회진보연대 회원으로서 결합했고, 다음으로는 제가 속한 단체의 문제의식과의 결합 방안을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고, 마지막에는 전국행진에 철폐연대가 결합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 중 특히 두 가지 점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우선 사회진보연대의 활동에 대한 평가입니다. 올해의 경우 초반에는 농활이나 회원 소모임을 꾸리는 등 각자의 위치에서 고민할 지점을 모아내서 회원들이 일조할 수 있는 공간들이 만들면서 고민을 심화시킬 수 있었는데 후에는 그런 공간들이 전반적으로 축소되면서 활동이 많이 위축된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최근 사회화와 노동 ‘평택 대추리를 잊었는가’를 보고 당황했습니다. 9. 24 이후 상황을 잘 듣지 못했고, 김지태 이장의 실형 선고 소식을 듣고 안타깝다는 생각만 했었어요. 그런데 안타까운 마음을 풀어낼 대중행동 공간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가을추석연휴기간을 활용한 가을농활이나, 800일 촛불집회의 대규모 회원참가를 독려해봄직도 했을 텐데 그러한 지점에 대한 아쉬움이 큽니다. 사회진보연대의 평택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동참했던 입장에서, 9. 24 평화대행진 이후 사회진보연대의 실천 계획이 부재한 상황이 아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후 계획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11월 22일 민중총궐기로 집중한다는 것 외의 답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평택 대추리를 잊었는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아가 9. 24 이후 평택투쟁에 대한 사회진보연대의 입장과 계획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선동은 계몽에 불과하다는 점을 문제제기하고 싶습니다. 단지 잊지 않는다고 하여 운동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진보연대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평택 투쟁의 이후 계획을 실천적으로 제기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소형: 올해 초 평택범대위 회의에 참가하면서 평택 투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진재연 동지의 평택지킴이 활동을 조직적으로 소통[%=사진2%]하고 대추리, 도두리 현지에서의 투쟁을 서울 및 전국적인 투쟁의 흐름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저의 과제였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평택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3월 용수로 파괴 공사를 막아내는 포크레인 투쟁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2006년에 평택 문제가 어떻게 전개될지, 미군기지 건설을 위해 그 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 아닌가 싶어요. 주민들도 그렇고, 활동가들도 그렇고, 그 누구도 5월 4일의 폭력, 유혈 진압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3, 4, 5월에 벌어진 현지의 급박한 투쟁을 활동가들이 정말 열심히 조직했고, 긴박한 하루하루의 대응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결과적으로 보면, 평택 미군기지확장 저지 투쟁이 대추리, 도두리 현지를 지켜내는 투쟁 이외에 일상적이고 다양한 차원의 미군기지 반대운동의 흐름이나 전국적인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다는 것이 냉정한 평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조직적으로 준비된 국가 폭력을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운동진영이 5월 4일을 맞이한 후, 수세적인 투쟁의 조건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당시에도 “현지에서의 투쟁만으로 막아낼 수 없고 전국적인 투쟁 전선이 만들어져야 하며 그만큼 강력한 정치적인 투쟁이 서울에서 필요하다.”는 의견이 이미 3월부터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3, 4월 평택투쟁에서 최초의 구속자가 생기면서 서울에서 촛불집회를 열자는 의견이 제안되면서 서울 지역의 운동 단위들이 적극 결합했는데, 이는 당시 상황이 급박한 점도 있었지만, 평택 투쟁을 정치화하고 전국화해야 한다는 인식, 그리고 현지에서의 투쟁만으로는 수세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동아일보사 앞에 서울 촛불집회의 거점을 확보하였고 특히 5월 4일 이후에 서울에서의 대중적인 투쟁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이 성과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성과들이 모여 평택서울대책회의를 실천적인 활동을 중심으로 건설할 수 있었고 당시 평택투쟁에 있어 필요했던 운동의 공간을 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에서 생각해 볼 때 ‘올해에도 농사짓자’라는 슬로가 현재의 농지를 수호하자는 구호였다면, 이 투쟁에 대한 전국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전선을 만들어가기 위한 구호를 찾아내는 것이 저를 포함한 활동가들의 고민이었습니다. 9. 24 평화대행진을 앞두고 전국행진을 하면서 그런 과제들을 풀어가고자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결국 할 수 있었던 것은 소수의 상징적인 선도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략적 유연성의 문제와 민중의 평화적 생존권에 대해 선전할 때 어느 순간 그 추상성 때문에 막혔던 어려움들은 여전히 과제로 남습니다. 평택 투쟁에서 무엇을 평가할 것인가 이소형: 5월 4일 이후 수세적인 상황에서, “올해에도 농사짓자”는 구호를 대체할 보다 확장된 계획을 제대로 제출하지 못한 것이 가장 뼈아프다 박준도: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모든 이들이 지배 세력의 반동성을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것 아닌가 문설희: 바뀐 국면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계획이 부재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사회자: 각자의 소회를 간략히 들어 보았는데요, 그러면 올해 투쟁에 관한 좀 더 본격적인 평가에 들어가 보면 좋겠습니다. 박준도: 5월 4일 난폭한 국가 폭력이 드러나면서 운동 지형에 상당한 변화가 옵니다. 이소형씨도 이야기했지만 사실 누구도 이 만큼의 국가 폭력이 노골적으로 자행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문제는 바로 이것인데, 이는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운동 주체들이 평택 투쟁 자체를 상당히 낙관적으로 생각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련하여 다음 두 가지는 발본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지배 세력에게 평택미군기지 확장이란 국회동의절차가 끝난, 그리하여 강력한 행정집행만 남아있는 사업에 불과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이런 처지에 놓인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조차도 국가의존적인 활동방식에서 크게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두 알다시피 평택미군기지 확장이전 사업은 해외주둔 미군재배치의 일환인데, 사실 이 사업야말로 무질서와 폭력의 확산에 대한 지배 세력들의 가장 강력한 반동적 조치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배세력들이 자신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죠. 더구나 2004년 겨울 관련된 법안들을 처리한 마당에 국가로서는 동의를 구하는 과정은 끝났고 이제는 말 그대로 집행만 남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지배세력들의 반동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상당히 낙관적이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 올해 상반기 주요하게 제기했던 ‘올해에도 농사짓자’라는 구호를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이 구호는 일단 씨 뿌리고 농사를 짓는 데 성공만 하면 당분간 저들이 어찌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서 제기된 측면이 강합니다. 저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였구요. 물론, 이 구호가 평택미군기지반대운동을 조직하려면 농민 생존권 문제를 부각시켜야 했고, 그런 면에서 일정한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당장 사회진보연대만 하더라도 이 구호가 회원들의 정치실천 공간을 확장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그렇다 해도 지배세력들의 반동성을 폭로하는 데는 물론이거니와 이 반동성의 실체를 대중들과 공유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죠. 미군기지확장을 강행하려는 사람들과 그래도 농사를 짓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 이상을 드러내기에는 한계였다는 것이죠.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둘러싼 대립구도는 사실 한반도, 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길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 그러니까 무장력을 강화하는 반동적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확장, 평화를 향한 사회운동의 구조화를 선택할 것인가 ― 에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는 투쟁의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쟁점입니다. 보편적인 슬로를 제시할 수 있는 운동이야말로 대중의 운동이니까요. 이소형: ‘올해에도 농사짓자’라는 구호는 농민생존을 결합시키기 위한 구호였다기보다는 행정대집행을 막아내기 위한 실천적인 구호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구호는 5월 4일 땅을 빼앗기기 전까지만 유효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5월 4일 전까지는 이미 미군기지 협정의 법적인 절차가 다 끝난 상태에서도 주민들은 땅과 마을을 점유하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투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올해에도 농사짓자”라는 슬로는 3, 4월의 ‘포크레인 투쟁’을 조직하고 대추분교를 사수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구호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5월 대추분교가 무너지고 땅을 빼앗기고 군부대가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운동진영은 상대적으로 열악하고 수세적인 입지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부터 평택투쟁을 좀 더 다른 조건에서 확장시키기 위한 구호, 즉 “올해에도 농사짓자”를 대체할 구호가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박준도: 요컨대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진행했던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이 자신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적이었는가라는 점입니다.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모든 정부기관들은 이 문제를 대의를 외면한 ‘보상’ 문제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몰아붙였고, 우리는 팽성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로 대응하거나, 군사기지건설에 맞서는 투쟁으로서 ‘평택’에서 농사짓는 투쟁이 유력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문제의 접점을 너무 ‘평택’으로만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식의 사고가 실천 투쟁의 거점을 또한 모조리 ‘평택’으로만 맞추게 하였다는 것이죠. 결국 5월 4일, 5일 이후 모든 사고는 오로지(!) 대추리 사수 투쟁으로만 집중되었고, 이것이 불가능해지자 다른 구체적인 수단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사고가 멈춰버린 것이죠. 이것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왜 그 쪽으로만 생각이 몰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돌이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구나 평택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 역시 국가 의존적 경향이 강화되고 있는 현 시기 운동의 흐름과 쉽게 결별할 수 있는 운동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상을 뛰어넘는 국가 폭력이 다가오자, 한 편에서는 국가 폭력에 압도되어 아예 투쟁이 위축되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국가 기구의 개입을 통한 중재와 문제 해결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다시금 강화된 것이죠. 사고가 ‘평택’으로만 몰리다 느닷없이 중재라는 방향을 찾게 된 것이죠. 문설희: 동의하는데, 그 구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국면이 바뀌었을 때 어떠한 구호를 걸 것인가, 어떠한 쟁점을 보편화시킬 것인가에 있어 미흡했다는 것이 오히려 더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이전까지는 대추리·도두리라[%=사진3%]는 최소한의 거점 확보,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이라는 최소한의 투쟁 주체 확보에 성공한 셈인데, 그 이후 이를 전국적인 투쟁으로 확장시키고 투쟁의 다른 주체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미흡했다는 것이지요. 평택 투쟁과 대중운동, 그리고 장애물 문설희: 다양한 실천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준도: 정치적 수사를 넘어서 대중들과 함께 토론하고 조직하는 실천을 밟아가지 않는다면 평화운동은 결코 지속될 수 없다 문설희: 저는 평택 투쟁이 남한 평화운동에서 첫 걸음의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평화를 택하라”라는 구호의 탄생이라고 봅니다. ‘평택’이라는 지명에 ‘평화를 택하라’는 정치적 의미를 담아 대중적으로 외칠 수 있었다는 점은 성과로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평택 투쟁이 평화운동의 맥락 속에 자리매김되었다는 사실이 또한 한계로 작동하기도 했다는 점도 동시에 지적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전체운동에서 평화운동이 지녀온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한계 중의 하나가 노동자운동과의 결합이 미흡하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지점은 평택 투쟁을 더욱 확장시키고 급진화시키는 데에 걸림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덤프연대에서 평택투쟁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였으나 그것이 실천적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된 것이 평택투쟁과 노동자운동과의 결합이 실패로 그친 단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덤프연대가 5월4일 대추분교 침탈 이후 발표한 성명서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지요. 그러나 이러한 상징을 계기로 덤프연대를 비롯한 노동자대오를 평택투쟁으로 적극적으로 견인하려는 과정이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덤프 연대 자체도 자기 고민을 발전시키지 못하면서, 지금은 성토작업에 덤프노동자들이 동원되는 비극적 결말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박준도: 덤프의 사례를 말씀하시니까, 이라크 파병 반대할 때 비행사 노조에서 수송을 거부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던 게 생각납니다. 물론 시의적절한 성명은 자체로도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어떻게 그것을 수행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은 채 정치적 수사들을 모은다고 될 일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행동계획이 동반되지 않는 수사적인 성명으로는 곧바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비행사노조는 물론 덤프노조도 되씹어 보아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최근에 반전팀에서 검토하고 있는 자료 가운데 재미있는 것 중 하나가, 1차 세계대전 당시 총파업을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노동자운동 내에서 벌어진 논란입니다. 당시 논의를 보면, 총파업을 한 나라는 전쟁에서 패할 것이고, 전쟁에서 패하기 때문에 그 나라의 노동자운동은 망한다, 총파업을 안 한 나라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따라서 노동자운동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총파업을 하면 안 된다 는 식으로 논리가 나오는데, 이게 아주 만만치 않은 얘기입니다. 저는 덤프 연대 문제도 비슷하게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평택과 관련된 일체의 작업 거부를 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구체적인 실천을 채택한 조합원은 생계에 어려움이 생기고, 채택을 안 하면 2년간 보장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되면 지도부의 지침을 따르는 노동자들은 경제적으로 불리해지고, 그 지침을 따르지 않는 노동자들이 경제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지도부에 대한 불만이 올라오게 될 거구요. 제가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이냐면, 말로 작업 거부를 하는 것 자체는 쉬울 수 있지만, 그 구체적인 실행으로 들어가면 사태가 매우 어렵고 복잡해진다는 점에서, 이런 어려움을 충분히 감안한 계획을 세워서 대중들과 함께 토론하고 조직하는 실천을 밟아가지 않는다면, 운동이 결코 지속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런 문제는 비단 특정 노동자 집단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노동자운동 전반, 나아가 학생, 여성, 농민운동 등 다른 사회운동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겠지요. 이런 각각의 지형을 고려한 구체적인 방법들이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봅니다. 물론 이는 근본적으로는 사회운동의 취약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저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애초 논의 지형 자체가 다소 협소하게 만들어진 데도 그 원인이 있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이소형: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막아내기 위한 대중들의 다양한 실천과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조직화 과정이 부족했던 점을 지적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양하고 적극적인 노동자의 대중적 실천이 촉발되지 못했는지 좀 더 깊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략적 유연성 반대’라는 구호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한미군이 신속 기동군으로 재배치되고 한반도가 전쟁위협에 더 많이 휩쓸리게 된다는 주장을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해봤습니다. 한국사회에서 평화군축운동은 대중적인 투쟁으로 진행되지 못했고 운동의 내용 자체도 매우 전문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반대하는 운동 역시 한미동맹의 군사안보정책들을 전문적으로 비판하는 것을 넘어, 대중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했던 점을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06년 대추리에서 벌어진 투쟁은 단순히 남한사회의 군사안보정책을 비판하고 개선하는 기존의 평화운동의 지평을 완전히 새롭게 확장한 사건이었습니다. 평택기지를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을 위한 사활적인 전쟁기지로 확장하겠다는 계획이 남한의 지배계급을 통해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삶을 지켜내고 전쟁을 거부하는 민중들의 보편적인 평화운동이 유례없이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 Vs 이를 거부하는 민중의 생존을 건 투쟁"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는 곳이 바로 대추리였다는 뜻이죠. 평택투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선전한 내용을 살펴봅시다. 주되게 주한미군주둔의 부당성(한반도 전쟁위협, 대북공격력 증강, 민족의 자주권 침해)을 언급하면서 통한 민족주의적인 반미투쟁을 호소하고, 여기에 덧붙여 조직적인 (남한의)국가 폭력의 야만성을 폭로한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증요한 문제는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 남한의 지배계급이 왜 그토록 조직적이며 치밀한 폭력을 휘두르고 있느냐인 점인데, 이 부분은 운동 주체 내에서도 여전히 명확하게 토론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5월 4일 그토록 엄청난 행정대집행의 규모를 운동진영이 예측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시간을 다시 돌려 아직 대추분교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면, 평택미군기지확장 저지투쟁과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의 의미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토론을 조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설희: 저는 다양한 실천의 공간을 마련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고 싶습니다. 5월 4일 대추 초등학교 철거상황을 실시간으로 접하면서도 대추리로 뛰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대단히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죄책감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서울 대책회의 주최로 열린 서울지역 촛불집회는 혼자서 꾸역꾸역 삼키던 분노를 표출하고 투쟁의 의지를 다질 수 있게 한 최소한의 공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이러한 소중한 공간을 계속 열어 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는 오히려 서울대책회의의 실천이 확장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대책회의의 실천이 하나의 모델이 되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필요했을 텐데, 오히려 서울대책회의의 실천은 더 축소되었던 것에 대해 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사회진보연대 같은 경우에도, 평택으로 지킴이 파견을 하고 농활을 조직해내고 사수투쟁을 하러 가는 것과 더불어 회원들과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들을 개발했어야 합니다. 물론 그런 시도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평택 회원 소모임을 만들어서 회원 소모임 자리에서 토론했을 때, 적지 않은 참석이 있었고, 적지 않은 논의가 됐었고, 적지 않은 결의들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지속되지 못한 원인이 무엇인지, 이런 것들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그런 토론을 진행하면서 내가 농활이라든지 범국민대회라든지 혹은 일상적으로 평택을 가는 것이 아닌, 내 공간에서 평택 투쟁을 할 수 있는 것을 이 사람들과 같이 논의해 가면서 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 것들이 지속되지 못했다는 점을 저는 주로 평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투쟁이 보편화되지 못한 것과 관련하여 사회진보연대 내적 평가를 하자면, 이런 점을 지적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박준도: 지역운동의 취약성이라는 부분도 지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그동안 총력 집중 투쟁이라고 얘기했던 것들을 돌이켜 보면, 각 지역의 투쟁이 취약하고 부재한 것을 가리는 알리바이가 됐던 면도 없지 않습니다. 좀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이번 총궐기 투쟁을 봅시다.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진행하자 가장 형편없는 지역이 서울이 되지 않았습니까. 이 점은 인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천 지역의 경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잘 되지 못한 측면이 있긴 하지만, 평택으로 내려가자고 하면 상당히 많이 내려간 편입니다. 철거 투쟁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최대치가 80명이라는 것이지요. 요는 전국 집중을 하지 말자 그런 얘기가 아니고, 각자의 취약성을 냉정하게 인식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집중을 통해 이 같은 취약성과 성장의 필요성을 가리는 식으로만 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문설희: 대추리로 집중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거점의 사수는 기본이니까요. 문제는 그것과 병행해서 투쟁을 전국화시킬 수 있는 계획일 텐데, 그것이 왜 되지 않았는가에 관해서는 평가가 꼭 필요합니다. 촛불 집회를 예로 들면, 물론 촛불 집회 자체가 갖는 운동 방식 상의 한계도 있겠지만, 그 공간에 모인 사람들의 역동성을 제대로 북돋지 못한 방식으로 갔던 게 문제가 아니었나 싶어요. 초반에는 대추리의 소식을 알리고 공감하는 공간이면 충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 공간을 전환해서 평화운동을 하기 위해 어떤 요구를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에 반대하는 투쟁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내용이 발전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냥 추상적인 ‘평화를 사랑해요’ 식으로 가게 되다 보니까, 무력감을 느끼면서 동력이 이탈된 면도 있다고 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평가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자: 지금까지 주로는, 평택 사수 투쟁을 넘어서는 어떤 다른 투쟁 태세나 계획, 방식과 수단 등에 관한 평가를 제기해 주신 것 같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앞으로 지속적인 토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이런 문제도 토론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실제 투쟁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장애물로 작용한 대중 이데올로기상의 난점이 어떤 것이었는지 하는 것 말이지요. 좀 성글게 말하자면, 한미동맹에 대한 (원칙적이든, 실리적이든) 수용, 급진적이고 대중적인 평화운동이나 평화주의의 부재 같은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관련해서 이런 것이 어떤 식으로 나타났는지,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실마리는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지 등을 얘기해 봤으면 합니다. 박준도: 경험적인 문제라 일반화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인천에서 집회를 하면 온갖 분들이 와서 방해를 합니다. 니들은 김정일이 품에나 안기라고 말하고, 서명을 하면 서명 자체를 방해하고... 근데 이 분들한테, 미국이 이렇게 나쁜 짓을 하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이런 걸 지지하려 하느냐 식으로 맞대응을 하면 그 판은 난리가 납니다. 동네 주민들 다 모이고, 열혈 보수주의자들 다 와서 다 뒤집어져요. 이럴 때 우리가 미군 나가란 소리 하는 거 아니다, 확장만 하지 말라는 거다 는 식으로 수세적으로 말하면, 대충 무마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죠. (웃음) 그런데 누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 모두 전쟁을 겪었고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너무 잘 알지 않느냐, 현재 한반도의 경우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전쟁 가능성이 극히 높아진 상황이다, 그러니 그게 미국이건, 북한이건, 남한이건 간에 누구라도 이 가능성을 단 1%라도 올려선 안 된다, 그런데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라는 것은 이 가능성을 높이는 행위다, 그러면 안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이지요. 그러니까 분위기가 역전되는 거에요. 물론 그렇게 말한 분 특유의 설득력도 있었겠지만 여기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제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것이 누구에 의한 것이든 전쟁 가능성을 1%도 올려선 안 된다는 논리에는 누구도 쉽게 반박할 수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한미동맹을 해체하는 운동이 대중화되려면, 한반도에서의 민족적 순결성 같은 민족주의 논리를 넘어서야 할뿐더러, 한미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게 많다, 누가 옳고 그른지 따져보자는 식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으로 얘기하려는 것 중 하나가, 논리적 완결성을 갖춘 지식만 가지고는 대중들을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거 아닙니까. 뭔가 틀이 바뀌면서 쟁점이 바뀌거나, 아니면 새로운 쟁점이 출현하면서 틀 자체가 바뀌거나 하는 식으로 해 줘야 문제에 대해서 재사고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지요. 저는 고 김선일씨의 예가 그런 경우가 아니었나 싶어요. 당시를 생각해 보면, 미국이 잘 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어쨌거나 미국은 우리의 은인이었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데 좀 도와줘야 되는 거 아니냐는 입장도 있었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 그런 얘기도 있고 했지요. 그런데 사실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그 대가가 이렇게까지 비극적일 것이라고 대부분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이 비참한 죽음을 앞에 두고, 뭐 과거 한국전쟁이 어쩌고 얘기할 것 없이 지금 이 상황만 놓고 얘기하자, 이렇게까지 사태가 비극적으로 가야 하나 등으로 얘기가 진행되면서, 그 때까지와는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저는 고착되어 있는 쟁점과 대립선을 이동시킬 수 있어야 뭔가 가능해지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한미동맹 문제에 대해서도 그런 고민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설희: 전략적 유연성 반대투쟁에 대한 입장을 대중적 실천으로 풀어내지 못한 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말이 되게 어렵잖아요. 사실 서명을 받을 때에도 그래요. 평택 주민들이 이렇게 잔인무도한 짓을 당하고 있습니다, 서명해주세요 하면 쉬운데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말을 하자면 상당히 많은 설명이 필요하거든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추상적인 어휘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중들과 어떻게 결합하고 대중운동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지 개발이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저 개인적으로는 전국행진 당시 경험한 군산에서의 선전전이 이 문제를 풀어나갈 단초를 보여준 것 같아요. 당시 연사로 나선 분이 군산 직도 폭격장 얘기에서 시작해 평택의 사안과 군산의 사안이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군사 패권 유지를 위해 전세계적으로 전략을 바꾸고 있다는 얘기도 하고, 그러면서 새만금 얘기도 하시더라구요. 새만금이 농지로 쓰이는 게 아니라 군용으로 쓰인다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죽 확장시켜 내면서 대중적으로 동의를 받아내는 방식이 짧은 순간이었지만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이 부분은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인데, 앞으로 이에 관한 고민을 더 해 볼 생각입니다. 박준도: 저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말 만들어내는 데 천재들이 만들어내는 말이다 보니, 그 말이랑 싸우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워요. 예전 90년대 말, 2000년 때를 생각해 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노동유연화 그러면 대단히 좋은 말인 것처럼 보이고 그랬는데, 요새는 유연성이라는 말만 붙으면 나쁜 말이라 생각해서 뭔가 싸워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됐거든요. 그런데 평택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든 누구든 그런 일을 해 내지 못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보자면,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얘기하면, 용산 미군기지 확장, LPP 협정 뭐 이런 것들하고 연계가 되는데, 그러다 보니까 어쨌거나 사울에서는 없어져 지방으로 가는 것이고, 하여튼 다 몰아놓는 건데, 왜 난리냐는 식의 생각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과거 노동유연화를 노동의 불안정화라는 말로 대체했듯, 뭔가 그런 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러니까 군사기지 유연성이라는 것은 곧 침략기지화다 뭐 이런 건데, 이런 말을 계속 고민해 보기는 하는데 아직은 잘 잡히지가 않아요. 사실 이 문제를 한 번씩 얘기하려면 미군기지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미군의 군사 작전의 변화, 뭐 이런 것들을 최소한 10분에서 20분 정도 설명을 해줘야만 하는 것인데, 이래가지고는 쟁점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큰 한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평택 투쟁과 평화운동 이소형: “평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제시되어 온 민족주의적인 해법 자체가 변화해야 한다 박준도: 일종의 부문운동으로 사고되는 평화운동이 아니라, 사회운동의 핵심 주체인 노동자, 농민, 여성을 재조직할 수 있는 평화운동이 필요하다 문설희: 평택투쟁의 수많은 스펙트럼 중에서 무엇을 더 밀고 나갈지 토론해야 한다 이소형: 저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평택 투쟁을 경험하면서도 다시 한 번 느낀 것이지만, “평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동안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제시되어 왔던 해법 자체가 변화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 동안의 평화 공식이라는 것이, 미국으로 인한 한반도 전쟁위협을 막아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우리 민족끼리 단결하여 미국을 몰아내야 한다, 뭐 대략 이런 식이었잖아요. 반면 그동안 사회진보연대는, 신자유주의와 군사세계화 속에서 한미동맹의 양상은 변화하고 있으며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구체적 전략의 변화를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렇지만 그 주장은 결국 “그러니까 투쟁을 더 대중화시키고 더 정세적인 투쟁을 하자는 것 아니냐” 식으로 논리에 귀결되고 말았던 것 같아요.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문제를 폭로하고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에 저항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결국에는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내는 투쟁을 대중적으로 확장하기 위한 선전의 매개 정도로 인식되었다는 것이지요. 사실 평택 투쟁에서도 사회진보연대가 갖고 있는 입장 자체가 쟁점이 되어서 토론이 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의 활동이 기존의 ‘평화’ 관념을 제대로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평택 투쟁 과정에서 인권운동 등에서 ‘평화권’이나 ‘평화적 생존권’ 등을 제기하는 흐름이 있기도 했습니다. 평화를 민중의 보편적인 권리로서 제기하고 대추리 주민들의 생존의 권리가 바로 모든 민중의 평화적 생존권이라는 주장이었지요. 이에 관해서는 저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면이 있는데, 여전히 평화운동의 구체적인 전략과 전망을 밝혀내는 것은 중요한 과제인 것 같습니다. 박준도: 말씀하신 부분은 기존 운동 진영이 평화 운동을 바라보는 일반적 관점과 연결될 것 같습니다. 대개는 고전적인 의미에서 통일전선, 즉 당의 방침을 전제하는 가운데 구체적인 해당 시기의 몇 가지 의제를 놓고 포괄할 수 있는 범위를 최대한 넓히자는 사고방식이지요. 평화운동에 대해서도, 이 운동이 기본적으로는 개량이지만, 현 단계에서는 필요하니까 데리고 가자는 게 기본 발상입니다. 그런데 이 점은 민족주의 세력과 좌파 할 것 없이 마찬가지입니다. 전자의 경우, 한민족이 미군기지 없이 살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비록 개량적이고 좌익모험주의적인 양상을 띠고 있는 애들이 있지만 품을 넓혀서 얘들을 다 끌어안고 가자 이런 식이겠지요. 후자의 경우도 평화운동에 관해서, 말하자면 합법적인 운동도 필요한 거 아니냐는 정도의 판단을 갖고, 헌법 소원하는 거 가져다 맡기고, 개량적인 실천이지만 필요한 것들을 맡기는 식으로 하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는 평화운동에 대한 그런 식의 접근은 평화운동 자체를 더욱더 몰락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운동 자체는 언제나 합법적인 운동이나, 몇몇 전문가들이 대표해서 하는 운동이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거기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되는 게 되고, 그 운동 자체는 계속 그런 식으로 머무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합법주의적이고 국가 장치에 의존하는 방식의 비폭력 노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평택 투쟁에서도 보면, 대중운동이 잘 되지 않는 상황에서, 국회에서 뭘 해야 한다는 둥, 중재자를 데리고 와야 한다는 둥, 중간층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등의 얘기를 하면서 투쟁을 교란시킨 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더욱 문제는 평화운동의 상징을 그런 세력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급진적이고 대중적인 평화운동의 역사가 부재하고 그것이 투쟁의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이소형: 사실 남한의 경우 평화운동이 전통이라든지, 이론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부재하고 척박한 면이 많죠. 그렇기 때문에 국가 정책들을 반대하는 투쟁 이상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고, 말씀하신대로 국가 장치에 의존하지 않는 평화운동의 가능성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것을 돌파하려면, 좀 더 알아듣기 쉬운 구호를 만들어내자는 식의 접근으로는 안 될 거라고 봅니다. 결국 전략적 유연성이라고 하는 것이 미국의 전반적인 새로운 군사 재편의 중심 기조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민중들의 대안적인 평화나 세계라는 그만큼의 전망을 갖고 있는지, 그 전망 하에서 평택 투쟁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일단 활동가 차원에서라도 제대로 토론하고 정리하고 있는가를 우선 평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쟁점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한번 이런 식으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 비핵지대화 선언이라든지 하는 정책적인 목표를 가지고 그 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군축의 문제라든지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평화운동 단체들이 있습니다. 그런 운동들이 한계적이며 대중운동을 제대로 고양할 수 없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평택 투쟁을 하면서 우리가 느꼈던 답답함이랄지, 특정 정책에 대한 반대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운동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런 정도의 목표, 평화운동의 목표와 전망이라는 것을 한반도나 동아시아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앞으로 직도 등의 투쟁들이 이어질 텐데, 그런 투쟁이 우리가 앞서 지적한 한계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런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저의 이 같은 견해에 관해서는 쟁점이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의 평화운동이 한계적이라고 해서, 대안세계화 운동이 말하는 평화의 전망 식으로 가는 것도 다소 추상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 역시 논의 과제이지요. 박준도: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일종의 부문운동으로 사고되는 평화운동이 아니라, 사회운동의 핵심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 농민, 여성을 재조직할 수 있는 평화운동이며, 그런 점에서 평화운동의 고민은 이런 사람들이 평화운동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수단들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평화운동 조직이 대중조직처럼 자기 회원을 늘려 운동을 확장하는 방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대중, 대중운동 내에서 평화의 쟁점을 확산시키는 문제, 그 운동들의 다양한 의제들 중에서 평화라는 쟁점을 어떻게 우선 순위로 올릴 것인지 하는 고민들을 같이 진행하지 않으면, 결국 제자리걸음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조직화라는 말의 의미를 다르게,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건설이라는 식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고 봅니다. 특정 조직에 대중들을 가입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대중들 내에서 토론과 실천의 구조를 건설하는 문제로 말입니다. 사실 제가 일부 평화운동에 대해 갖는 문제의식은 그들이 민주주의의 문제를 제대로 사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무장이나 제한된 선도투의 반복, 개인적 실천들의 중요성을 앞세우는 것 등은 대중투쟁에 대한 고민의 결여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러저러한 대중운동들을 혁신하고 건설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및 동아시아의 평화라는 의제가 우선 순위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벌여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그것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른바 사회운동적 노조주의고, 사회운동적인 실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라크 전쟁이 터질 무렵에 세계사회포럼에서 선택하려 했던 여러 정치적 실천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급의 대중 조직들과 각급의 정당 조직들, 여러 운동 주체들이 이런 것은 안 된다, 이런 것이 운동의 의제여야 한다 면서 반전평화의 문제를 운동의 1번, 2번 의제들로 상승시켜 낸 것입니다. 앞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반전팀에서 1차 대전 자료를 검토하다 보니까 재미있는 게 많습니다. 제가 좀 충격을 받았던 것은, 당시 제2 인터내셔널에서 독일 노총이건 프랑스 노총이건 간에 조직의 10가지 의제에 전쟁반대가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운동의 우선 순위가 되지 못한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당시 운동의 한계와 동시에 전쟁을 막을 수 없었던 이유를 가장 극명히 보여 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너무 원칙적인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사회운동이 사회운동답게 갈 수 있는 각고의 노력이 동반되어야지, 그것 없이 평화운동의 독자적 노력만 가지고는 안 되는 면이 클 것입니다. 문설희: 대안세계화 운동으로서의 평화운동을 위해 우리가 착목해야 하는 점이 무엇인지를 이번 평택 투쟁을 통해서 읽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평택 투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평화란 무엇이냐>는 노래 같은 경우, 평화운동에 대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잖아요. “공장에서 쫓겨난 노동자가 원직복직하는 것이 평화♪”라는 부분은 적극적으로 운동으로 만들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그 중에는 그렇지 않은 내용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이제까지 우리가 평택 투쟁을 하면서 보았던 수많은 스펙트럼에서 어떤 부분에 착목해서 계속 우리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라고 봅니다. 평택 투쟁을 평가하고 이후 투쟁의 준거지점을 명확하게 밝히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거지요. 평택 투쟁,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박준도: 전쟁가능성을 단 1%라도 높여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견지하면서 평택 투쟁과 평화운동을 함께 진전시킬 수 있는 계획을 토론해야 한다 문설희: 평화운동과 노동자운동 양자가 모두 변화해야만 평택 투쟁이 더 진전될 것이다 이소형: 북핵 문제를 계기로 한반도 평화운동 자체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 사회자: 평택 투쟁 당시 느꼈던 난점을 얘기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평화운동에 관한 생각까지 나온 것 같습니다. 앞서 나온 얘기이기도 한데, 대중들이 투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들을 개발, 확장해야 한다는 것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는 것 같구요. 평화운동과 관련해서는, 뭔가 고유한 의제를 가지는 평화운동의 독자적 전망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고, 별도의 부문운동으로서 평화운동이라기보다는 이념으로서 평화주의를 매개로 대중조직 자체를 재조직하는 평화운동이 더 필요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서서히 토론을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앞서 여러 가지 평가 지점과 의견을 제기해 주셨는데, 그러면 평택 투쟁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각자의 견해를 들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박준도: 덤프건 비행사 노조건 간에, 왜 실패한 것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것들을 좀 냉정히 돌이켜 봐야 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저 한 두 사람의 의식적인 선언이나 실천 가지고는 절대 안 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지속적인 노력만 강조하다 보니 열심히 하자는 식으로 되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긴 하네요. (웃음) 인천에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을 지역 비정규직 사업장 앞에서 진행하는 방식을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대우 자동차 사내 하청 노동자들 퇴근 시간 맞춰서 그 앞에서 촛불 집회를 진행하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방식들을 좀 더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건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게, 원래 1차 세계대전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지침이 공장 앞에서 제국주의 전쟁 반대를 선동해야 한다는 것이었거든요. 애매한 시민적 감수성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공장 앞에 가서 선전, 선동하고, 왜 노동자 민중들이 반전평화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맨 앞에 서야 하는가를 토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들을 다방면으로 벌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진보연대도 그런 고민과 계획들을 계속 확장하는 중에 있다고 봅니다. 예전에는 솔직히 말해서 기자회견만 쫓아 다녔죠. 그랬다가 매향리에 소수가 가보고, 그 다음에 파병반대 싸움하다가 지하철 선전전을 해 보고,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실천을 기획해 보는 등, 점점 선동과 실천의 공간을 확대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더 확대시켜 나갈지, 그러기 위한 역량을 내부적으로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소형: 지금 시점에서는 무엇보다 평택 범대위 투쟁의 궤적들에 대한 평가를 잘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함께 서울 대책회의의 실천들도 함께 평가해야겠지요. 사실 범대위의 상황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가면서, 그나마 실천력이 담보되었던 서울 대책회의가 예를 들어 전국행진 같은 실천을 기획했고, 그러다 보니 그 과정에서 서울 지역의 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점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걸 따로 떼서 평가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점 때문이지요. 어쨌거나 계속해서 범대위 운동에 적극 참여해서 운동을 함께 기획해 가야 할 것입니다. 겨울맞이 사업도 그렇고, 또 내년 3월에 있는 성토작업 저지를 계기로 다시 한 번 대중 투쟁을 만들 고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운동, 특히 덤프연대에 소속되거나 소속되지 않은 덤프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과정을 범대위의 주요 사업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범대위 및 서울대책회의 안에서 기획력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2007년 새로운 국면에서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인데요. 한반도 전쟁위기라는 문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내면서 평택의 상황들을 계속 알려내고 투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현재 이와 관련하여 범대위에서는, 지난 주택 철거 당시처럼 시민단체 중심의 평화 선언을 한반도 평화 선언으로 전환해서, 모든 시민사회 단체들의 모든 인사를 조직한다는 기획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획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사실 9월 주택 철거 투쟁 당시 조직된 선언이 별로 위력적이지도 못하고 일회성 참가로 끝난 이유는, 평화운동의 주체들을 발굴하고 조직하는 사회운동을 만들어내지 못한 데 있을 텐데, 현재의 기획 역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사실 이는 중간층의 참가라는 사고방식의 고유한 한계라고 보는데, 그런 식으로는 절대 운동이 확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제기하는 동시에, 그런 방식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동시에 제기해야 할 것입니다. 박준도: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의 향방과 관련하여 현재 시점에서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바로 북핵 문제입니다. 한반도 핵 위기라는 문제에 대해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이 어떤 입장과 태도를 취할 것인가가 라는 질문을 점점 더 회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북핵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정도의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기존의 논점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방식보다는, 논점 자체를 전환시키는 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저는 한미동맹이 아니라 남북공조라고 대응하는 것은 논점을 바꾸기보다는, 기존의 논점에 고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한미동맹에 의한 전쟁 추구가 아닌 동아시아 내에서의 평화를 주장하자는 것은 아니구요. 저는 일단 앞서 말한 것처럼, 전쟁가능성을 단 1%라도 높이는 것은 무엇이든 안 된다는 원칙을 분명하게 견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북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은, 그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게 되면 위의 원칙이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고 그 순간부터 대중들은 우리의 주장을 의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앞에서 힘의 비대칭성이나 역사적 기원을 얘기해 봤자 설득이 안 된다고 생각하구요. 동아시아 내에서의 전반적인 평화를 어떻게 사회운동적인 방식으로 구축해낼 것인가에 관한 수미일관된 입장들을 토론하고 만들어내는 계기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이 서야만 평택 투쟁도 살고 평화운동의 전망도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는 둘 모두에게 비극이 되겠지요. 어쨌든 이 문제가 평택 투쟁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소형: 북핵 관련해서 이 시기와 사안이 사실은 평택 투쟁뿐만이 아니라 남한 사회 반전 평화 운동 자체가 내용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9. 24 이후 투쟁이 굉장히 위축되어 있는 상황에서 북핵 사태를 계기로 평택 범대위나 평택 투쟁의 주체들이 이 문제로 토론을 벌였다면 그것이 이후 반전평화 운동의 미래와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통일연대 쪽에서는 자신들의 실천에 평택 사안을 함께 조직해 보자는 의견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본적인 정세토론조차 여의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이 문제가 쟁점이 되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대비해 사회진보연대가 의식적으로 논쟁을 기획해야 할 필요도 느낍니다. 문설희: 평택 투쟁이 평화를 향한 노동자 사회운동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번 투쟁의 걸림돌이 되었던 조건들을 명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평화운동이 갖는 그 자체의 한계나, 노동 단체에서 평화운동에 대해 갖는 부정적 인식이 결합하면서 이 운동과 만나지 못했던 조건들을 평가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안들이 실천적으로 제기되지 않는 한 평택 투쟁의 한계들은 계속 반복되지 않을까 싶어요. 또 한 가지는, 정치적인 선언에 그치지 않는 실천들에 대한 고민입니다. 평택 투쟁에 대한 덤프 연대의 선언에 굉장히 환호했다가 슬퍼했던 과정들을 보더라도, 평화운동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나는 평화주의자라는 선언을 넘어서는, 평화를 위한 투쟁 과제와 방식을 해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진보연대가 내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택 투쟁이 현재 끝난 건 아니지만, 국면이 전환되는 시기라고 한다면, 9. 24 평화대행진 이후 사회진보연대의 평가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 평가를 계기로 보다 실천적인 계획을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계속 만들었으면 합니다. 박준도: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사회진보연대가 평택 투쟁과 관련된 계획들을 수행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가 빠졌던 한계에 대한 냉혹한 인식이 필요하고 실천 공간을 넓혀 내야 할 것입니다. 이 같은 맥락에서, 지킴이 운동을 했던 흔적들을 어떤 식으로든 확산시켜 내어야 합니다. 사실 사회진보연대 회원들이 지금껏 이런 류의 활동을 한 적이 없었어요. 어떻게든 들어가 보겠다고 발버둥 치고, 들어가서 라면 끓여 먹고, 불법 검문 감시도 스스로 해보는 등, 집행위원들과 몇몇 위원들 중심의 활동을 넘어서 폭을 넓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들을 확장시킬 방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관련하여 지금이 분명 침체된 국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뭔가 토론할 수 있는 내부적 계획들을 내야 합니다. 아까 9. 24 이후 토론회라도 한 번 했어야 했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평택 지킴이를 결의했던 우리들은 평택 투쟁이나 좀 더 넓게 말해 평화주의의 진전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임을 다시 안정적으로 구축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것이 결국 내부 민주주의고 내부 조직화일 텐데, 이런 모임이 있어야만 조직 내의 민주주의도 확대되고 운동도 성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관해 사회진보연대 차원의 고민이 많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