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한 세계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세계적인 위기는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탈냉전시기 들어 세계적으로 발전주의적 틀이 해체되고 이를 신자유주의가 대체하면서,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 전략이 한계에 봉착하고, 금융 우위의 축적 구조에서 배제된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구도 하에서는 미국과 유럽을 잇는 범대서양적 축적공간을 중심으로 자본의 이동이 집중되며, 예외적으로 새로운 생산의 중심지로 등장한 동아시아 몇몇 국가 정도에만 자본 유입이 지속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처럼 자본의 필요에 따른 한정된 지역과 지정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들만이 세계화의 구도 속에 편입될 뿐, 그 외의 광범하게 배제된 지역들에서는 사회적 몰락이 관찰된다. 이들 지역에서 국가성 또는 국가 구조의 해체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자유주의에 통합된 지역 내에서도 빈곤의 증대와 경제의 불안전성 증가는 일반적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가 무장한 세계화를 동반하는 것은 이처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질서의 해체에 대해, 쇠퇴하는 세계 헤게모니인 미국이 불안전성을 관리하고자 반동적 대응을 전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배제된 지역이 증가하면서 기존의 세계질서의 틀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워졌고, 이탈 세력은 점차 증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적 축적을 지속하고자 선별된 지역들만을 포함, 관리하는 구상만으로는 해체되는 세계질서 전체를 관리하기 어려워지며, 이러한 '카오스적' 상태가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금융적 축적구조 자체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의 이점을 가진 동시에 세계 금융흐름이 집중되고 있는 국가인 미국에게 자국 중심의 금융 우위의 신자유주의적 축적구조를 지속시키기 위한 세계질서의 안정적 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따라서 미국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9·11을 계기로 미국의 세계 전략은 선제공격/예방공격이라는 논지까지 동원하면서 매우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을 노골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세계 여러 지역의 불안전성을 더 키우고 있을 뿐이다. 9·11 이후 신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새로운 노선은 클린턴 시기의 세계전략만으로는 세계질서로부터 이탈한 지역에 대한 관리가 불가능함을 강조하고, 이들 지역에 대한 적극적 개입 전략, 즉 군사적 개입에서 정권교체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개입 전략을 주창하였다.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시기 들어서, 냉전 하 얄타 체제에 기초한 미국 헤게모니의 세계전략은 새롭게 등장하는 도전에 취약해졌는데, 미국이 새로운 위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세 가지 정도다. 첫째는 미국적 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고,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된 지역에서 새로운 구도로 지역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세력의 등장이다. 이라크가 그 대표적 사례였다. 두 번째는 국가의 응집력이 약화되거나 국가구조가 해체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위협요소들로, '세력균형'의 논리에 따라 상대 국가를 통제하는 이전의 방식은 이런 위협요소를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발칸 반도의 위기, 그리고 알카에다는 이런 특징을 보여주는 위협요소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앞의 둘과 달리 그 자체로는 인근지역이나 미국에 대한 즉각적 위협의 확대라 볼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적 통치전략의 토대를 침식할 것으로 보이는 지역이나 국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다. 북한은 이런 차원의 문제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럼스펠드의 말처럼).1) 여기서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 보자면, 현재 우호적 영향 하에 있는 지역들에서도 향후 미국의 우위에 대한 도전이 제기될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클린턴 시기의 미국의 국제전략은 군사적 개입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긴 했지만, 이런 위협적 요소들을 현상유지하거나, 제한적으로 개입하거나, 그리고 이들 지역을 세계경제 구도 속에 편입시키는 등의 정책을 혼합하는 방식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이 침식되는 것을 되돌리기에는 그 효과가 미미했고, 9·11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의 침식을 두드러지게 부각시켰다. 9·11 이후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세계질서를 다시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목표를 향해 출발했으나, 그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만큼 세계적인 군사적 개입은 군사적 위협성과 불안전성을 더욱 증폭시키게 되었다. 이라크 전쟁의 시작점에서는 새로운 세기를 만들어 내겠다는 강력한 미국의 이미지가 확산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그 귀결점에 이르러서는 직접적 군사개입의 확대라는 무장한 세계화로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다시 되살려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재삼 확인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잠시 1990년대 중반 이후 무장한 세계화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적 세계전략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미국에게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세계지역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유럽으로, 여기서는 대서양 공동지배를 유지하면서, 유럽의 주변부의 '해체된 국가들'로부터 발생하는 불안전성을 자체 제어할 수 있는 군사적 구도를 재형성하고, 또한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분리를 유지하도록 미국의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두 번째는 세계적 생산의 중심지인 동아시아 지역으로, 여기서는 중국과 일본 양국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이 지역 전체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세 번째는 중동지역으로, 여기서는 석유자원에 대한 미국의 장기적 통제력을 확보하고, 이 지역 내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성을 감소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현재 미국의 영향력은 이 세 지역에서 모두 난관에 봉착해 있는 셈이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던 윈-윈(win-win) 전략, 즉 세계 두 지역에서 동시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동시에 두 지역에 모두 개입해 미국이 원하는 방향의 승리를 획득한다는 전략은 이미 1990년대 중반에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어졌다. 세계적으로 배치된 미국의 군사기지는 미국 군사력의 상징이긴 하지만, 냉전 하의 세력균형과 달라진 세계의 구도 하에서는 적절한 개입력을 발휘할 수 없는 약한 상징성을 지닐 뿐이었다. 미국은 이런 변화된 상황에 대처해 주둔군 체제에서 신속대응군 체제로 군사전략 구도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를 몇 개의 주요 지역으로 묶고, 각 지역 내에서는 발생하는 분쟁들에 대해 동맹국과 함께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 광범한 지역에 걸친 대응을 전개할 수 있도록 대응방식을 전환하는 것을 뜻했다. 이를 위해 분산 배치된 주둔군을 몇 개의 거점 중심으로 집중 배치하고, 개별 국가의 상황에 매이지 않는 군사작전의 유연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커졌다. 현재 한반도에서 추진되고 있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처럼, 신속대응군 중심의 군사편제와 동맹국들의 군사적 책임의 강화, 개별국가 중심이 아닌 더 넓은 지역을 포괄하는 군사무기 체계의 개발 등의 변화가 진행되어 온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이전에 비해 군사적 위협을 감소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증폭시키게 되는데, 미국의 전략적 판단이 중심에 놓임에 따라 국지적 분쟁이라도 이것이 세계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증폭되어, 특정한 국가/지역들이 비대칭적 군사적 위협 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세계질서에 대한 헤게모니적 통제의 역량은 약화된데 비해 군사적 대응의 범위와 정도가 확대됨에 따라 분쟁과 충돌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일단 분쟁에 미국의 초국가적 개입이 개시되면 해당 국가나 지역에 대한 파괴력이 급가속화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군사적 개입력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우위를 유지한다는 구도 하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 앞서 말했듯이 이는 무장한 세계화로 진행된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관철되면서 나타나듯이, 그 축적기반의 안정적 구도를 형성하기 위한 무장한 세계화의 개입력 또한 세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둘째, 이 무장한 세계화는 미국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 하에서 유지된다. 이는 미국의 핵우위에 의해서, 그리고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틀이 보여주듯이 기존 핵보유국을 미국의 군사적 통제 하에서 관리함으로써 유지되며, 다른 한편 군사기술혁명의 추진이 보여주듯 새로운 군사무기 개발기술의 독점에 의해 유지된다. 셋째, 이는 전쟁의 성격 또한 바꾸어 놓았는데, 군사력의 우위가 있는 쪽에서 보자면 전쟁은 점점 더 '자동화한 전쟁'이 된다. 그러나 반면 군사적 열위에 있는 쪽에서 보자면 점점 더 일반화한 대량학살과 대량 파괴의 전쟁이 된다. 넷째, 자동화한 전쟁의 성과를 강화하고, 전략핵의 사용불가능성이라는 제약을 돌파하기 위해, 소규모 국지화한 전술핵이 집중적으로 개발된다. 이미 벙커버스터나 열화우라늄탄의 개발에서 보듯이, 핵억지력 차원의 전략핵과 별개로 실용무기로서 핵의 실전 적용은 군사력의 비대칭성에 있어서 중요한 시금석이 되고 있다. 다섯째, 군사적 공격대상이 국가 대 국가에서부터 다양한 형태로 변환되면서 선제공격/예방공격이라는 새로운 개전의 논리가 정당화된다. 여섯째, 이렇게 변화된 군사적 구도를 확립하기 위해 미국은 세계적 군사력 배치를 신속대응군 중심으로 전환하여, 좀 더 광범한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력을 확대하려 한다. 이렇게 변화된 구도 하에서 우리 편과 적의 구분은 수시로 변경되며, 세계적 개입력의 확대를 위한 연합세력의 재편 또한 수시로 일어난다. 각 지역/국가들의 이해관계는 자체적으로 결정되지 못하고, 미국의 세계적 전략 하에서 늘 새롭게 재해석되며, 부차적이거나 국지적 성격을 지닌 갈등들이 미국의 전략적 의미 해석에 따라 전면적으로 확대될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북한 핵실험 그러나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이 성공할 것이라는 것은 미국만의 기대였고, 오히려 새로운 세계전략은 스스로의 한계를 노정하면서 미국 헤게모니의 토대를 빠르게 침식해 들어가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데, 한편에서 미국의 군사적 제스추어는 커지고, 또 미국은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에 더욱더 군사적 개입에 의존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러한 군사적 개입의 효과는 점점 더 의심스러운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지구 도처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노출되어 있는 국가와 지역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역설적이다. 그 첫 번째 메시지는 미국이 이라크에 매어 있고 이라크에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다른 지역으로 확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미국의 윈-윈의 구도가 오히려 'fail-fail'(실패-실패)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발생할 가능성은 9·11 이전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두 번째로 이라크가 미국의 집중적 군사적 침공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대량살상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억지력을 갖지 못했다는 교훈을 준 것이다. 미국이 내세우는 선제공격/예방공격의 대상은 군사력의 비대칭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지역/국가가 되는데, 따라서 위협에 노출된 국가들은 확실한 군사적 억지력을 보유함으로써 이 구도를 다시 국가 간의 세력균형의 구도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새롭게 재편된 국가 간 체계의 구도로부터 받는 위협을, 아직 해체 중인 이전의 국가 간 체계의 구도 속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보호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세계적인 군사적 위험성을 더욱 확대하고 세계적 군비경쟁을 확대할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주도의 NPT를 결국 붕괴시키는 주요한 촉발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북한의 핵실험은 이런 맥락 하에서 등장했다. 북한 문제는 더 이상 냉전 하의 체제 간 대립의 문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지만,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북한은 이라크 전쟁의 수렁 속에서 미국이 발을 빼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동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으며, 여기서 국가 간 체계의 '생존의 논리'를 전면에 부각시킨 것이다. 미국이 사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 중국 내에서 이른바 '국제파'와 '아시아파' 사이의 대립이 있고, 남한 내에서도 북한 제재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긴 하지만, 지정학적인 고려 때문에 중국과 남한이 중기적으로 미국과 완전히 같은 보조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도 북한의 핵실험 카드가 단기적으로 효과를 갖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물론 당분간 경제제재의 고난은 고스란히 북한 민중에게 돌아갈 것이고, 북한은 이란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과정을 견뎌냄으로써 얻게 되는 다른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대립에서 얻고자 하는 목적은 '정상국가화'라고 알려져 있다. 이 점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이란의 경우와 다르다. 이란은 미국의 개입을 배제함으로써 자립적 힘과 지역적 영향력 확대를 달성하려 하며, 이를 위해 핵억지력을 확보하려고 한다면,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의 도구로서 핵억지력을 활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 목표의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중기적으로 보자면, 포용정책을 통해 북한을 동아시아 경제 구도 내에 포섭한다는 목표를 갖는 클린턴 시기의 '페리 프로세스'로의 복귀가 반드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보인다. 북한 또한 이 점에서 이견은 없는 듯하다. 이는 핵실험의 핵심 관건이 방코델타아시아 거래중지와 관련되어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선군정치가 정상국가화를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북한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게 남는다. 그리고 페리 프로세스는 그 자체로 평화정착의 구도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만 클린턴식 무장한 세계화의 틀 속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위기의 구도는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해결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현 시점에 북한 핵실험을 둘러싸고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에는 국가 간 체계에서 발생하는 현실정치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다.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 핵억지력은 그것을 지님으로써 갖게 되는 위험성과 파급력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간 체계의 현실정치의 논리에서 발생한 핵실험의 과정을 '민족', '사회주의', '약소국'이라는 차원으로 덧칠함으로써 마무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오래전부터 한반도 통일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쟁점, 즉 북한의 국가 전략에 여타의 중요한 고려들이 모두 종속되는 문제가 다시 등장하게 된다. 동아시아 평화구도라는 문제 이라크 전쟁이 NPT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체제임을 보여준 역설적 사건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문제는 누가 그것을 깨느냐, 그리고 세계적으로 이것이 지역적 구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이다. 북한의 핵실험은 중기적으로 볼 때 세계적인 핵확산을 가속화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핵보유는 선제공격/예방공격의 위협에서 다소나마 벗어나 핵보유국을 세력균형의 보호틀로 복귀시켜주는 외피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붕괴하는 세력균형을 되돌리기 위해 핵보유에 의한 세력균형으로 돌아간다는 구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세계적 위험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특히 현 상황은 진영 간 대립 하에서 미 소간에 존재한 세력균형과 핵우산이라는 구도와도 매우 달리, 핵보유의 아나키적 상태를 낳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핵확산은 당장 민감한 지역인 동아시아보다는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개시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1980~90년대에 핵개발을 진행하다 중단한 지역들에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봐가면서 핵개발을 재개할 가능성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이 문제는 민감한 사안이고, 단기적으로는 이 지역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개별 국가 내에서의 저항도 적지 않기 때문이 빠른 시일 안에 핵확산의 움직임이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핵확산이 진행되고, 핵확산에 대한 동아시아 내의 제약 요인이 약해지면서, 첫 주자가 출발을 하게 되면 연이은 연쇄반응이 나타날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북한의 핵문제를 북한과 미국 사이의 국제적 거래 차원의 문제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에서 핵확산을 막고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평화를 정착할 수 있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필요성, 특히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통제력을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필요성이 매우 높아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세 가지 측면이 중요해 질 것이다. 첫 번째는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미국의 전략적 구도가 이 지역의 군사적 위협성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통제력을 늘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 자체적 대립구도를 최소화하고, 국지적 분쟁이 증폭되지 않도록 하는 집단적 대응의 틀을 만들어 낼 필요성을 사고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물론 국가들 사이의 협력구도겠지만, 이것만을 통해서 이 과제가 달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핵무장 반대가 전쟁 위협에 대한 반대와 결합하는 것이 과제일 것이고, 이는 다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와도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전쟁과 핵무장에 대한 반대가 국가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내에서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출발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핵무기라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대중적 통제를 가능케 하기 위해 국가를 어떻게 변환시킬 것인가의 과제도 제기된다.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또는 국가권력에 청원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상일 뿐이지만, 극단적 폭력에 대한 억제와 국가 사이의 고리를 사고해야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와 핵무기 그렇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핵무기의 문제는 좀 더 역사적이고 근본적인 재사고를 요구한다. 북한 핵실험은 이런 재사고를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인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핵억지력은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데, 핵무기는 특히 국가 간 체계의 논리를 매우 강하게 부과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대중적 개입의 여지를 배제하는 특징을 갖는다. 냉전과 핵억지력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냉전이 보여주듯 '상시화된 전쟁'은 전쟁을 대중적 정치의 통제력 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 정치를 전쟁과 국가 간 체계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따라서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통제라는 문제는 처음부터 제기될 수 없었다. 북한 핵실험이 보여주는 문제의 근원에도 같은 쟁점이 놓여 있다. 1970년대 유럽에 퍼싱II 미사일 배치를 둘러싸고 등장한 유럽의 핵무기 반대 평화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것은 당시 유럽 공산당들의 모호한 태도였다. 이는 사회주의 운동이 역사적으로 핵무기 반대 운동과 결합되지 못한 역사를 되풀이해 보여준 것이었다. 유럽 공산당의 모호한 태도는 소련의 핵보유와 관련된 문제였다. 소련은 미국 제국주의의 침공 위협에 대한 생존의 논리로서 핵보유를 정당화했다. 소련의 핵보유는 방어적이고 생존적인 것이라는 논리는 자기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논리였다. 소련의 핵보유는 사실 2차 대전에 대한 평가와도 관련된 문제다. 미국의 핵개발은 나치의 핵개발 첩보에 대한 대응으로 개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절대적 평화주의자'이던 아인슈타인이 나치의 핵개발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의 핵개발을 촉구하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에 서명한 사실은 그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독일 패전 후 미국은 대일전의 조기 종전을 위해 각각 농축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원료로 제조된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고, 25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사망하였다. 핵무기의 등장과 그 실전 사용은 사실 전쟁의 종료인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파멸적 전쟁의 개시와 무기 확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인구밀집지역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민간인 대량학살을 초래한 전쟁범죄 행위였지만, 파시즘에 반대한 정의의 전쟁이라는 2차 대전의 공식적 정리방식이 이 쟁점을 덮어버렸다. 2차 대전 종전 후 핵무장과 핵무기에 대한 반대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핵무장이었다. 소련은 1949년 핵실험에 성공했고, 미국 핵보유에 대한 억지력을 갖기 위해 핵무장을 정당화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핵폭격 위협에 노출된 중국 또한 핵개발을 추진하였으며, 중소분쟁이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핵보유의 논리를 더욱 정당화하여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여기서 모두 핵보유는 '국가생존'의 차원에서 정당화되었으며, 소련의 핵보유는 소련이나 소련 외부에서 모두 사회주의 운동이 핵무장에 반대하는 싸움을 전제할 수 없는 자기무력화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조국을 방위'해야 하기 때문에 핵무기 개발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기파괴적이었다. 핵보유는 결국 국가 간 체계의 논리를 사회주의 국가들에 깊숙이 내장시키는 핵심 기제로 작동했으며, 국가권력의 논리가 대중보다 우위에 서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관련해 중국혁명의 경험은 두 가지 서로 충돌하는 논리를 보여준 바 있다. 한편에서 마오의 '정치우위'는 전쟁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강조하면서 군사력의 우위가 아닌 대중의 조직력의 우위로 군사적 승리와 혁명을 달성할 것을 주장했다. 중국혁명에서 베트남 전쟁까지 이어진 과정은 이 논리가 관철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문화혁명 기간 제기된 사회주의 과도기론은 사회주의에 대한 위협이 외부의 침입에 있기보다 내부의 모순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권력 장악 과정까지만 정치우위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 설립 이후에도 정치우위는 계속해서 중요한 쟁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핵보유를 통해 국가권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대중노선의 우위가 관건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중국 또한 소련과 마찬가지로 핵억지력 보유를 통한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 포섭되는 과정이 발생했다. 문화혁명 기간에 인민해방군은 문화혁명의 영향 밖에 남아 있었다는 점과 1967년 중국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이것을 민족적 경사로 추앙한 것은 이후 중국이 걷게 되는 길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핵보유가 대중운동을 희생하는 대가로 국가를 생존시키고 국제주의를 억압하는 계기이자 논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반대로 국가권력의 지속성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더라도 운동을 소생시키고 국제주의로 나아가는 길은 봉쇄되었다. 세력의 비대칭성을 운동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체계의 동학을 통해 세력균형의 틀 속에 들어감으로써 좀 더 쉽게 비대칭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이 커졌던 것이다. 이 쟁점은 사실 1차대전 시기 제2인터내셔널을 붕괴시킨 '조국방위전쟁'의 쟁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1차대전이 촉발되자,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태도를 놓고 분열되었다. 다수가 자국의 운동을 살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데 동의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국제주의를 붕괴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결성된 찜머발트 좌파는 국제주의를 다시 내걸었고, 이는 러시아 혁명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로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그 맥락이 핵보유와 같은 것은 아닐 텐데, 당시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아니었고, 이 전쟁은 제국주의 간 전쟁이었다는 이유를 들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작동하는 논리와 쟁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핵보유는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되었고, 대중운동의 억압 기제로 작동하게 되었다. 소련의 핵우산 하에 있던 동유럽 사회주의의 역사가 그것을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차르 봄바'라는 최대 수소폭탄 실험은 핵보유를 통해 사회주의를 유지한다는 소련의 역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2) 15년 내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흐루시쵸프의 선언은 핵무기 개발에서도 나타나, 1961년 지금까지 최대의 위력을 지닌 수소폭탄 개발을 개시해 10월 30일 미츄시카 만 핵실험장에서 공중투하 방식의 핵실험을 시행하였다. 그 위력은 50메가톤으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15킬로톤이었으니 그보다 3천배 이상의 위력을 지녔다. 미국이 실제 실험한 수소폭탄은 15메가톤 규모였다. 차르 봄바는 무게 27톤에, 길이 8미터 직경 2미터의 어마어마한 괴물이었고, 투하 후 발생한 버섯구름이 직경 40km 높이 64km에 이르렀고, 4천 미터 상공에서 폭발하였음에도 지상에서 폭발의 화구만 반경 7km를 넘게 남겼고, 모든 사물을 파괴해버리는 반경만 25km였으며, 100km 밖에서도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의 가공할 위력을 보였다. 그리고 25년 후 체르노빌에서 노심용해의 대참사가 발생했고, 그 후 5년이 지나서 사회주의 소련은 붕괴했다. 차르 봄바도 소련 사회주의를 지켜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대안세계화와 핵무장 해제-반전의 길로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세계전략이 세계적인 군사위협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일상화한 전쟁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중단시키지 않고서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위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다시금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신자유주의 반대와 무장한 세계화 반대가 핵무장 반대와 함께 진행되지 않을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북한 핵실험 정세 하에서도 더욱 속도를 붙여 진행되는 한 미FTA 협상과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으로 나아가는 군사적 재편은 이를 다시 확인시켜 준다. 카오스 상태로 나아가는 국가 간 체계의 위기는 생존의 논리로서 핵무장에 대한 유혹을 더욱 확산시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핵무장의 길은 신자유주의 반대와 무장한 세계화를 반대하는 길과 함께 가는 길일 수 없다. 대안세계화를 향한 길은 대중의 정치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고 전쟁의 위협을 통제하는 길이다. 사회주의의 역사 또한 군사력 우위의 신화가 결국은 국가를 국가 간 체계 속의 전쟁기계로 변신시키면서 사회운동을 억압해 온 과정을 보여주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속에서 우리는 국가보다 호흡이 길고, 국가의 테두리로 한정되지 않는 운동이 가능하고 또 필요함을 발견하게 된다. 늘 위기는 새로운 돌파의 지점이기도 했다. 1) 북한 핵실험 이후 여러 가지 '음모론'이 등장했는데, 그 중 중국을 통제하기 위해 북한 핵실험을 용인했다는 음모론이나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위기를 증폭시켰다는 음모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이런 맥락에서 적절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2) 차르봄바에 대해서는 http://nuclearweaponarchive.org/Russia/TsarBomba.html, http://blog.naver.com/bloodredglow?Redirect=Log&logNo=90000100422 본문으로
무장한 세계화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세계적인 위기는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 탈냉전시기 들어 세계적으로 발전주의적 틀이 해체되고 이를 신자유주의가 대체하면서, 국가 주도의 경제성장 전략이 한계에 봉착하고, 금융 우위의 축적 구조에서 배제된 지역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의 구도 하에서는 미국과 유럽을 잇는 범대서양적 축적공간을 중심으로 자본의 이동이 집중되며, 예외적으로 새로운 생산의 중심지로 등장한 동아시아 몇몇 국가 정도에만 자본 유입이 지속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처럼 자본의 필요에 따른 한정된 지역과 지정학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들만이 세계화의 구도 속에 편입될 뿐, 그 외의 광범하게 배제된 지역들에서는 사회적 몰락이 관찰된다. 이들 지역에서 국가성 또는 국가 구조의 해체 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신자유주의에 통합된 지역 내에서도 빈곤의 증대와 경제의 불안전성 증가는 일반적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가 무장한 세계화를 동반하는 것은 이처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질서의 해체에 대해, 쇠퇴하는 세계 헤게모니인 미국이 불안전성을 관리하고자 반동적 대응을 전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배제된 지역이 증가하면서 기존의 세계질서의 틀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워졌고, 이탈 세력은 점차 증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적 축적을 지속하고자 선별된 지역들만을 포함, 관리하는 구상만으로는 해체되는 세계질서 전체를 관리하기 어려워지며, 이러한 '카오스적' 상태가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금융적 축적구조 자체도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의 이점을 가진 동시에 세계 금융흐름이 집중되고 있는 국가인 미국에게 자국 중심의 금융 우위의 신자유주의적 축적구조를 지속시키기 위한 세계질서의 안정적 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따라서 미국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이전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9·11을 계기로 미국의 세계 전략은 선제공격/예방공격이라는 논지까지 동원하면서 매우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을 노골화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세계 여러 지역의 불안전성을 더 키우고 있을 뿐이다. 9·11 이후 신보수파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군사적 개입은 강화되었는데, 이러한 새로운 노선은 클린턴 시기의 세계전략만으로는 세계질서로부터 이탈한 지역에 대한 관리가 불가능함을 강조하고, 이들 지역에 대한 적극적 개입 전략, 즉 군사적 개입에서 정권교체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개입 전략을 주창하였다.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시기 들어서, 냉전 하 얄타 체제에 기초한 미국 헤게모니의 세계전략은 새롭게 등장하는 도전에 취약해졌는데, 미국이 새로운 위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세 가지 정도다. 첫째는 미국적 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고,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된 지역에서 새로운 구도로 지역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세력의 등장이다. 이라크가 그 대표적 사례였다. 두 번째는 국가의 응집력이 약화되거나 국가구조가 해체되면서 등장한 새로운 위협요소들로, '세력균형'의 논리에 따라 상대 국가를 통제하는 이전의 방식은 이런 위협요소를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발칸 반도의 위기, 그리고 알카에다는 이런 특징을 보여주는 위협요소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앞의 둘과 달리 그 자체로는 인근지역이나 미국에 대한 즉각적 위협의 확대라 볼 수 없지만, 지속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적 통치전략의 토대를 침식할 것으로 보이는 지역이나 국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다. 북한은 이런 차원의 문제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럼스펠드의 말처럼).1) 여기서 더 나아가 장기적으로 보자면, 현재 우호적 영향 하에 있는 지역들에서도 향후 미국의 우위에 대한 도전이 제기될 수 있음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클린턴 시기의 미국의 국제전략은 군사적 개입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긴 했지만, 이런 위협적 요소들을 현상유지하거나, 제한적으로 개입하거나, 그리고 이들 지역을 세계경제 구도 속에 편입시키는 등의 정책을 혼합하는 방식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이 침식되는 것을 되돌리기에는 그 효과가 미미했고, 9·11은 역설적으로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의 침식을 두드러지게 부각시켰다. 9·11 이후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세계질서를 다시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목표를 향해 출발했으나, 그 목표 달성이 불가능한만큼 세계적인 군사적 개입은 군사적 위협성과 불안전성을 더욱 증폭시키게 되었다. 이라크 전쟁의 시작점에서는 새로운 세기를 만들어 내겠다는 강력한 미국의 이미지가 확산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그 귀결점에 이르러서는 직접적 군사개입의 확대라는 무장한 세계화로는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다시 되살려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재삼 확인되었을 뿐이다. 여기서 잠시 1990년대 중반 이후 무장한 세계화가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군사적 세계전략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미국에게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세계지역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유럽으로, 여기서는 대서양 공동지배를 유지하면서, 유럽의 주변부의 '해체된 국가들'로부터 발생하는 불안전성을 자체 제어할 수 있는 군사적 구도를 재형성하고, 또한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분리를 유지하도록 미국의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두 번째는 세계적 생산의 중심지인 동아시아 지역으로, 여기서는 중국과 일본 양국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이 지역 전체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세 번째는 중동지역으로, 여기서는 석유자원에 대한 미국의 장기적 통제력을 확보하고, 이 지역 내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위협성을 감소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현재 미국의 영향력은 이 세 지역에서 모두 난관에 봉착해 있는 셈이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던 윈-윈(win-win) 전략, 즉 세계 두 지역에서 동시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동시에 두 지역에 모두 개입해 미국이 원하는 방향의 승리를 획득한다는 전략은 이미 1990년대 중반에 더 이상 유지되기 힘들어졌다. 세계적으로 배치된 미국의 군사기지는 미국 군사력의 상징이긴 하지만, 냉전 하의 세력균형과 달라진 세계의 구도 하에서는 적절한 개입력을 발휘할 수 없는 약한 상징성을 지닐 뿐이었다. 미국은 이런 변화된 상황에 대처해 주둔군 체제에서 신속대응군 체제로 군사전략 구도를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를 몇 개의 주요 지역으로 묶고, 각 지역 내에서는 발생하는 분쟁들에 대해 동맹국과 함께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 광범한 지역에 걸친 대응을 전개할 수 있도록 대응방식을 전환하는 것을 뜻했다. 이를 위해 분산 배치된 주둔군을 몇 개의 거점 중심으로 집중 배치하고, 개별 국가의 상황에 매이지 않는 군사작전의 유연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커졌다. 현재 한반도에서 추진되고 있는 전략적 유연성 문제처럼, 신속대응군 중심의 군사편제와 동맹국들의 군사적 책임의 강화, 개별국가 중심이 아닌 더 넓은 지역을 포괄하는 군사무기 체계의 개발 등의 변화가 진행되어 온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이전에 비해 군사적 위협을 감소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증폭시키게 되는데, 미국의 전략적 판단이 중심에 놓임에 따라 국지적 분쟁이라도 이것이 세계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증폭되어, 특정한 국가/지역들이 비대칭적 군사적 위협 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세계질서에 대한 헤게모니적 통제의 역량은 약화된데 비해 군사적 대응의 범위와 정도가 확대됨에 따라 분쟁과 충돌이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일단 분쟁에 미국의 초국가적 개입이 개시되면 해당 국가나 지역에 대한 파괴력이 급가속화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군사적 개입력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의 우위를 유지한다는 구도 하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 몇 가지 점이 주목된다. 첫째, 앞서 말했듯이 이는 무장한 세계화로 진행된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관철되면서 나타나듯이, 그 축적기반의 안정적 구도를 형성하기 위한 무장한 세계화의 개입력 또한 세계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둘째, 이 무장한 세계화는 미국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 하에서 유지된다. 이는 미국의 핵우위에 의해서, 그리고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틀이 보여주듯이 기존 핵보유국을 미국의 군사적 통제 하에서 관리함으로써 유지되며, 다른 한편 군사기술혁명의 추진이 보여주듯 새로운 군사무기 개발기술의 독점에 의해 유지된다. 셋째, 이는 전쟁의 성격 또한 바꾸어 놓았는데, 군사력의 우위가 있는 쪽에서 보자면 전쟁은 점점 더 '자동화한 전쟁'이 된다. 그러나 반면 군사적 열위에 있는 쪽에서 보자면 점점 더 일반화한 대량학살과 대량 파괴의 전쟁이 된다. 넷째, 자동화한 전쟁의 성과를 강화하고, 전략핵의 사용불가능성이라는 제약을 돌파하기 위해, 소규모 국지화한 전술핵이 집중적으로 개발된다. 이미 벙커버스터나 열화우라늄탄의 개발에서 보듯이, 핵억지력 차원의 전략핵과 별개로 실용무기로서 핵의 실전 적용은 군사력의 비대칭성에 있어서 중요한 시금석이 되고 있다. 다섯째, 군사적 공격대상이 국가 대 국가에서부터 다양한 형태로 변환되면서 선제공격/예방공격이라는 새로운 개전의 논리가 정당화된다. 여섯째, 이렇게 변화된 군사적 구도를 확립하기 위해 미국은 세계적 군사력 배치를 신속대응군 중심으로 전환하여, 좀 더 광범한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력을 확대하려 한다. 이렇게 변화된 구도 하에서 우리 편과 적의 구분은 수시로 변경되며, 세계적 개입력의 확대를 위한 연합세력의 재편 또한 수시로 일어난다. 각 지역/국가들의 이해관계는 자체적으로 결정되지 못하고, 미국의 세계적 전략 하에서 늘 새롭게 재해석되며, 부차적이거나 국지적 성격을 지닌 갈등들이 미국의 전략적 의미 해석에 따라 전면적으로 확대될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북한 핵실험 그러나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이 성공할 것이라는 것은 미국만의 기대였고, 오히려 새로운 세계전략은 스스로의 한계를 노정하면서 미국 헤게모니의 토대를 빠르게 침식해 들어가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를 가속화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는데, 한편에서 미국의 군사적 제스추어는 커지고, 또 미국은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에 더욱더 군사적 개입에 의존하게 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러한 군사적 개입의 효과는 점점 더 의심스러운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이라크 전쟁이 지구 도처에서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노출되어 있는 국가와 지역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역설적이다. 그 첫 번째 메시지는 미국이 이라크에 매어 있고 이라크에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다른 지역으로 확장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상황은 미국의 윈-윈의 구도가 오히려 'fail-fail'(실패-실패)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발생할 가능성은 9·11 이전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두 번째로 이라크가 미국의 집중적 군사적 침공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대량살상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없었기 때문'에 억지력을 갖지 못했다는 교훈을 준 것이다. 미국이 내세우는 선제공격/예방공격의 대상은 군사력의 비대칭성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지역/국가가 되는데, 따라서 위협에 노출된 국가들은 확실한 군사적 억지력을 보유함으로써 이 구도를 다시 국가 간의 세력균형의 구도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새롭게 재편된 국가 간 체계의 구도로부터 받는 위협을, 아직 해체 중인 이전의 국가 간 체계의 구도 속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보호받을 수 있다는 판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세계적인 군사적 위험성을 더욱 확대하고 세계적 군비경쟁을 확대할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 주도의 NPT를 결국 붕괴시키는 주요한 촉발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북한의 핵실험은 이런 맥락 하에서 등장했다. 북한 문제는 더 이상 냉전 하의 체제 간 대립의 문제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지만,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 것은 사실이다. 북한은 이라크 전쟁의 수렁 속에서 미국이 발을 빼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동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하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으며, 여기서 국가 간 체계의 '생존의 논리'를 전면에 부각시킨 것이다. 미국이 사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응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 중국 내에서 이른바 '국제파'와 '아시아파' 사이의 대립이 있고, 남한 내에서도 북한 제재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긴 하지만, 지정학적인 고려 때문에 중국과 남한이 중기적으로 미국과 완전히 같은 보조로 나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도 북한의 핵실험 카드가 단기적으로 효과를 갖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물론 당분간 경제제재의 고난은 고스란히 북한 민중에게 돌아갈 것이고, 북한은 이란이 아니기 때문에 그 과정을 견뎌냄으로써 얻게 되는 다른 더 큰 목적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말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대립에서 얻고자 하는 목적은 '정상국가화'라고 알려져 있다. 이 점에서 북한의 핵개발은 이란의 경우와 다르다. 이란은 미국의 개입을 배제함으로써 자립적 힘과 지역적 영향력 확대를 달성하려 하며, 이를 위해 핵억지력을 확보하려고 한다면,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의 도구로서 핵억지력을 활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궁극적 목표의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중기적으로 보자면, 포용정책을 통해 북한을 동아시아 경제 구도 내에 포섭한다는 목표를 갖는 클린턴 시기의 '페리 프로세스'로의 복귀가 반드시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보인다. 북한 또한 이 점에서 이견은 없는 듯하다. 이는 핵실험의 핵심 관건이 방코델타아시아 거래중지와 관련되어 있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선군정치가 정상국가화를 통해 달성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북한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게 남는다. 그리고 페리 프로세스는 그 자체로 평화정착의 구도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만 클린턴식 무장한 세계화의 틀 속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위기의 구도는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해결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런데 현 시점에 북한 핵실험을 둘러싸고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에는 국가 간 체계에서 발생하는 현실정치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다.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 핵억지력은 그것을 지님으로써 갖게 되는 위험성과 파급력을 고스란히 돌려받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간 체계의 현실정치의 논리에서 발생한 핵실험의 과정을 '민족', '사회주의', '약소국'이라는 차원으로 덧칠함으로써 마무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오래전부터 한반도 통일론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쟁점, 즉 북한의 국가 전략에 여타의 중요한 고려들이 모두 종속되는 문제가 다시 등장하게 된다. 동아시아 평화구도라는 문제 이라크 전쟁이 NPT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체제임을 보여준 역설적 사건이라는 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다. 문제는 누가 그것을 깨느냐, 그리고 세계적으로 이것이 지역적 구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이다. 북한의 핵실험은 중기적으로 볼 때 세계적인 핵확산을 가속화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핵보유는 선제공격/예방공격의 위협에서 다소나마 벗어나 핵보유국을 세력균형의 보호틀로 복귀시켜주는 외피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붕괴하는 세력균형을 되돌리기 위해 핵보유에 의한 세력균형으로 돌아간다는 구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세계적 위험성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특히 현 상황은 진영 간 대립 하에서 미 소간에 존재한 세력균형과 핵우산이라는 구도와도 매우 달리, 핵보유의 아나키적 상태를 낳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핵확산은 당장 민감한 지역인 동아시아보다는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개시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1980~90년대에 핵개발을 진행하다 중단한 지역들에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봐가면서 핵개발을 재개할 가능성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이 문제는 민감한 사안이고, 단기적으로는 이 지역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작동하고 있으며, 개별 국가 내에서의 저항도 적지 않기 때문이 빠른 시일 안에 핵확산의 움직임이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아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핵확산이 진행되고, 핵확산에 대한 동아시아 내의 제약 요인이 약해지면서, 첫 주자가 출발을 하게 되면 연이은 연쇄반응이 나타날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북한의 핵문제를 북한과 미국 사이의 국제적 거래 차원의 문제로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아시아에서 핵확산을 막고 동아시아 전체적으로 평화를 정착할 수 있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필요성, 특히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통제력을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필요성이 매우 높아진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세 가지 측면이 중요해 질 것이다. 첫 번째는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미국의 전략적 구도가 이 지역의 군사적 위협성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통제력을 늘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 자체적 대립구도를 최소화하고, 국지적 분쟁이 증폭되지 않도록 하는 집단적 대응의 틀을 만들어 낼 필요성을 사고해야 한다. 그 출발점은 물론 국가들 사이의 협력구도겠지만, 이것만을 통해서 이 과제가 달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핵무장 반대가 전쟁 위협에 대한 반대와 결합하는 것이 과제일 것이고, 이는 다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와도 필연적으로 연결된다. 전쟁과 핵무장에 대한 반대가 국가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내에서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출발시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세 번째는 핵무기라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대중적 통제를 가능케 하기 위해 국가를 어떻게 변환시킬 것인가의 과제도 제기된다.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또는 국가권력에 청원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상일 뿐이지만, 극단적 폭력에 대한 억제와 국가 사이의 고리를 사고해야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와 핵무기 그렇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핵무기의 문제는 좀 더 역사적이고 근본적인 재사고를 요구한다. 북한 핵실험은 이런 재사고를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인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핵억지력은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서 작동하는데, 핵무기는 특히 국가 간 체계의 논리를 매우 강하게 부과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대중적 개입의 여지를 배제하는 특징을 갖는다. 냉전과 핵억지력은 밀접한 관계가 있었는데, 냉전이 보여주듯 '상시화된 전쟁'은 전쟁을 대중적 정치의 통제력 하에 두는 것이 아니라 대중적 정치를 전쟁과 국가 간 체계의 논리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따라서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통제라는 문제는 처음부터 제기될 수 없었다. 북한 핵실험이 보여주는 문제의 근원에도 같은 쟁점이 놓여 있다. 1970년대 유럽에 퍼싱II 미사일 배치를 둘러싸고 등장한 유럽의 핵무기 반대 평화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것은 당시 유럽 공산당들의 모호한 태도였다. 이는 사회주의 운동이 역사적으로 핵무기 반대 운동과 결합되지 못한 역사를 되풀이해 보여준 것이었다. 유럽 공산당의 모호한 태도는 소련의 핵보유와 관련된 문제였다. 소련은 미국 제국주의의 침공 위협에 대한 생존의 논리로서 핵보유를 정당화했다. 소련의 핵보유는 방어적이고 생존적인 것이라는 논리는 자기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논리였다. 소련의 핵보유는 사실 2차 대전에 대한 평가와도 관련된 문제다. 미국의 핵개발은 나치의 핵개발 첩보에 대한 대응으로 개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절대적 평화주의자'이던 아인슈타인이 나치의 핵개발에 대한 대응으로 미국의 핵개발을 촉구하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에 서명한 사실은 그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독일 패전 후 미국은 대일전의 조기 종전을 위해 각각 농축우라늄과 플루토늄을 원료로 제조된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했고, 25만 명 이상의 사람이 사망하였다. 핵무기의 등장과 그 실전 사용은 사실 전쟁의 종료인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파멸적 전쟁의 개시와 무기 확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인구밀집지역에 원폭을 투하한 것은 민간인 대량학살을 초래한 전쟁범죄 행위였지만, 파시즘에 반대한 정의의 전쟁이라는 2차 대전의 공식적 정리방식이 이 쟁점을 덮어버렸다. 2차 대전 종전 후 핵무장과 핵무기에 대한 반대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소련의 핵무장이었다. 소련은 1949년 핵실험에 성공했고, 미국 핵보유에 대한 억지력을 갖기 위해 핵무장을 정당화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핵폭격 위협에 노출된 중국 또한 핵개발을 추진하였으며, 중소분쟁이 가속화하는 과정에서 핵보유의 논리를 더욱 정당화하여 1964년 핵실험에 성공하였다. 여기서 모두 핵보유는 '국가생존'의 차원에서 정당화되었으며, 소련의 핵보유는 소련이나 소련 외부에서 모두 사회주의 운동이 핵무장에 반대하는 싸움을 전제할 수 없는 자기무력화의 원천으로 작용하였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조국을 방위'해야 하기 때문에 핵무기 개발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기파괴적이었다. 핵보유는 결국 국가 간 체계의 논리를 사회주의 국가들에 깊숙이 내장시키는 핵심 기제로 작동했으며, 국가권력의 논리가 대중보다 우위에 서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관련해 중국혁명의 경험은 두 가지 서로 충돌하는 논리를 보여준 바 있다. 한편에서 마오의 '정치우위'는 전쟁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강조하면서 군사력의 우위가 아닌 대중의 조직력의 우위로 군사적 승리와 혁명을 달성할 것을 주장했다. 중국혁명에서 베트남 전쟁까지 이어진 과정은 이 논리가 관철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문화혁명 기간 제기된 사회주의 과도기론은 사회주의에 대한 위협이 외부의 침입에 있기보다 내부의 모순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권력 장악 과정까지만 정치우위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 설립 이후에도 정치우위는 계속해서 중요한 쟁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핵보유를 통해 국가권력을 유지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고, 대중노선의 우위가 관건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 중국 또한 소련과 마찬가지로 핵억지력 보유를 통한 국가 간 체계의 논리 속에 포섭되는 과정이 발생했다. 문화혁명 기간에 인민해방군은 문화혁명의 영향 밖에 남아 있었다는 점과 1967년 중국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이것을 민족적 경사로 추앙한 것은 이후 중국이 걷게 되는 길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핵보유가 대중운동을 희생하는 대가로 국가를 생존시키고 국제주의를 억압하는 계기이자 논리가 되었다는 점이다. 반대로 국가권력의 지속성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더라도 운동을 소생시키고 국제주의로 나아가는 길은 봉쇄되었다. 세력의 비대칭성을 운동을 통해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체계의 동학을 통해 세력균형의 틀 속에 들어감으로써 좀 더 쉽게 비대칭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이 커졌던 것이다. 이 쟁점은 사실 1차대전 시기 제2인터내셔널을 붕괴시킨 '조국방위전쟁'의 쟁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1차대전이 촉발되자,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태도를 놓고 분열되었다. 다수가 자국의 운동을 살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데 동의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국제주의를 붕괴시켰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결성된 찜머발트 좌파는 국제주의를 다시 내걸었고, 이는 러시아 혁명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구호로 이어지게 되었다. 물론 그 맥락이 핵보유와 같은 것은 아닐 텐데, 당시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아니었고, 이 전쟁은 제국주의 간 전쟁이었다는 이유를 들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서 작동하는 논리와 쟁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핵보유는 사회주의와 국제주의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게 되었고, 대중운동의 억압 기제로 작동하게 되었다. 소련의 핵우산 하에 있던 동유럽 사회주의의 역사가 그것을 잘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차르 봄바'라는 최대 수소폭탄 실험은 핵보유를 통해 사회주의를 유지한다는 소련의 역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2) 15년 내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흐루시쵸프의 선언은 핵무기 개발에서도 나타나, 1961년 지금까지 최대의 위력을 지닌 수소폭탄 개발을 개시해 10월 30일 미츄시카 만 핵실험장에서 공중투하 방식의 핵실험을 시행하였다. 그 위력은 50메가톤으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15킬로톤이었으니 그보다 3천배 이상의 위력을 지녔다. 미국이 실제 실험한 수소폭탄은 15메가톤 규모였다. 차르 봄바는 무게 27톤에, 길이 8미터 직경 2미터의 어마어마한 괴물이었고, 투하 후 발생한 버섯구름이 직경 40km 높이 64km에 이르렀고, 4천 미터 상공에서 폭발하였음에도 지상에서 폭발의 화구만 반경 7km를 넘게 남겼고, 모든 사물을 파괴해버리는 반경만 25km였으며, 100km 밖에서도 3도 화상을 입을 정도의 가공할 위력을 보였다. 그리고 25년 후 체르노빌에서 노심용해의 대참사가 발생했고, 그 후 5년이 지나서 사회주의 소련은 붕괴했다. 차르 봄바도 소련 사회주의를 지켜주지는 못했던 것이다. 대안세계화와 핵무장 해제-반전의 길로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세계전략이 세계적인 군사위협을 증폭시키고 있으며, 일상화한 전쟁을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다는 점과, 그것을 중단시키지 않고서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위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다시금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신자유주의 반대와 무장한 세계화 반대가 핵무장 반대와 함께 진행되지 않을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북한 핵실험 정세 하에서도 더욱 속도를 붙여 진행되는 한 미FTA 협상과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으로 나아가는 군사적 재편은 이를 다시 확인시켜 준다. 카오스 상태로 나아가는 국가 간 체계의 위기는 생존의 논리로서 핵무장에 대한 유혹을 더욱 확산시킬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핵무장의 길은 신자유주의 반대와 무장한 세계화를 반대하는 길과 함께 가는 길일 수 없다. 대안세계화를 향한 길은 대중의 정치가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고 전쟁의 위협을 통제하는 길이다. 사회주의의 역사 또한 군사력 우위의 신화가 결국은 국가를 국가 간 체계 속의 전쟁기계로 변신시키면서 사회운동을 억압해 온 과정을 보여주었다. 과거에 대한 반성 속에서 우리는 국가보다 호흡이 길고, 국가의 테두리로 한정되지 않는 운동이 가능하고 또 필요함을 발견하게 된다. 늘 위기는 새로운 돌파의 지점이기도 했다. 1) 북한 핵실험 이후 여러 가지 '음모론'이 등장했는데, 그 중 중국을 통제하기 위해 북한 핵실험을 용인했다는 음모론이나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 때문에 의도적으로 위기를 증폭시켰다는 음모론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둘 모두 이런 맥락에서 적절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본문으로 2) 차르봄바에 대해서는 http://nuclearweaponarchive.org/Russia/TsarBomba.html, http://blog.naver.com/bloodredglow?Redirect=Log&logNo=90000100422 본문으로
: 북한 핵실험과 반핵평화운동의 현재성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예고했던 핵실험을 단행했다. 10월 14일 국제연합(UN)은 북한 핵·미사일의 완전한 폐기를 목표로 하는 대북결의안을 채택했고, 10월 20일 한미안보연례협의회(SCM)는 확장된 핵억지력(extended deterrence)을 천명했다. 이로써 한반도의 핵위기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1945년 미국의 핵투하로 시작된 세계적 핵경쟁은 1970년에 체결된 UN의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통해 타협점을 찾은 듯 보였다. 그러나 1974년 인도의 핵실험은 '핵의 평화적 이용'(핵발전)이 핵무기로 전환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1980년대 미국이 전략방위구상(SDI)을 발표하면서 '우주 핵전쟁'이라는 새로운 위험이 대두했고, 소련은 감당할 수 없는 핵경쟁의 수렁에서 침몰했다. 소련의 붕괴 이후 핵무기와 절멸주의의 위험은 인류의 역사에서 점차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도 떠올랐다. 하지만 15년 이상이 지난 현재의 세계는 어떤가? 1995년 NPT의 무기한 연장이 결정되고 1996년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이 채택되면서 핵무장에 대한 제한은 강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실이 그러한가? NPT가 허용한 핵의 평화적 이용을 핵무장으로 전환하려는 현실적·잠재적 시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 2차 대전의 전승국인 미국, 소련/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의 핵독점·핵패권 체제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핵독점체제의 해체는 국가 간 질서가 평등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의미하는가? 아니면 핵무기의 확산이 인류를 더 큰 무질서와 혼돈의 세계로 몰아넣을 것인가? 우리는 불행히도 후자가 현 사태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현존하는 NPT 체제로는 세계적 핵확산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핵보유국의 핵위협과 핵공격을 막을 수 없으며, 비보유국의 '국가주권'에 대한 요구와 항상 충돌하고 핵개발 욕구를 자극한다. 또한 NPT 체제를 보완하려는 경제제재 역시 사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경제제재는 무차별 대중을 목표로 하는 '소리 없는 공습'이며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NPT나 경제제재가 핵패권을 위한 제국주의적 논리의 연장이라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우리는 20세기를 지배했던 핵숭배사상과 미소의 핵군비 확대와 대결했던 반핵평화운동에서 교훈과 지향을 끌어와야 한다.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이 무의미해지고 모든 민중이 절멸의 목표물이 되는 핵전쟁에서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핵평화운동은 '핵보유가 전쟁을 막는다'라는 군사적 세력균형의 논리를 거부하고, 핵보유 그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라는 사실을 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오늘 미국의 세계전략은 세계경제를 삼극 중심으로 재편·집중함으로써 배제된 지역을 창출한다. 미국은 배제된 지역에 대해 의도적 무관심을 보이거나 민중의 절멸을 조장한다. 미국의 대북정책은 민주당·공화당을 막론하고 배제와 위협의 편에 있고, 강압적·군사적 대응방안을 조합한다. 한국정부는 한반도 핵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호소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나쁜 경찰/좋은 경찰' 모형에 따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다 (직접적 폭력을 가하는 '나쁜' 경찰과 말로 구슬리는 '좋은' 경찰). 오히려 노무현정부는 전쟁의 실행가능성을 높이는 주한미군 재편전략을 지지하고, 한국군의 대규모 군비증강을 추진한다.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해체, 한국의 군비감축을 지향함으로써 남한에서부터 (핵)전쟁유발요인을 먼저 제거하는 것이 반전반핵운동의 선결과제다. 이것이야말로 '일방적 핵무장해제'와 '일방적 군사동맹해체'라는 평화운동의 이념을 한국에서 실현하는 길이다. 1. 세계적 핵확산과 동아시아 핵경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1) 미국의 핵일방주의와 세계적 핵확산 지금까지 미국은 총 1127회의 핵분열·핵융합 실험을 실행했다 (그 중 217회는 지상실험이었다). 소련/러시아는 969회를 진행하였고 (219회의 지상실험), 프랑스는 210회 (50회 지상실험), 영국은 45회 (21회의 지상실험), 중국은 45회 (23회의 지상실험), 인도와 파키스탄은 13회의 지하실험을 실행했고, 남아공과 이스라엘은 1979년 한 차례의 지상실험을 단행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의 가공할 만한 핵실험 횟수와 핵무기 보유 규모와 비교해 볼 때,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UN의 제재 결정(2006년 10월 14일)은 분명히 위선적인 것으로 보인다. UN 제재안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선언을 즉각 철회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하는 것이 마치 국제법에 따른 의무인 것처럼 선언했지만, 이 역시도 기만적인 주장일 따름이다. 1970년 3월, UN에서 발효된 NPT는 핵무기 보유국과 비보유국에 대해 각각 다른 조약 의무를 부과했다. 핵무기 비보유국은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고 보유국에서 수령하지도 않는 대신에, 핵무기 보유국은 비보유국에게 핵무기를 이전하지 않고 자신의 핵무기를 단계적으로 감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로써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 중국은 핵무기 보유의 배타적 특권을 공인받았지만, 핵무기를 단계적으로 감축하고 비보유국에게 핵공격을 가하지 않는다는 의무는 공허한 약속이 되었다. 핵무기 비보유국은 모든 핵활동에 관해 IAEA의 사찰과 제재를 받지만, 보유국의 핵무기 제조, 개량 과정은 사찰 대상이 될 수 없었다. 2002년 부시정부가 발표한 '핵태세보고서'는 핵무기 비보유국에 대해서도 선제 핵공격을 가할 수 있다고 공언했고, 그 명시적인 대상의 하나로 북한을 지목했다. 또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핵무기를 개발하고 전략핵무기의 보유 상태를 혁신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편 2006년 3월 미국과 인도는 핵협력협정에 전격 합의했다. 그 내용은 인도의 22개 핵시설 가운데 민수용시설에 대해서는 국제사찰을 실시하는 대신 8개 군수용시설은 불문에 붙이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도는 미국의 승인 하에서, NPT에 가입하지 않고도 여섯 번째 공식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특별지위를 누리게 된 셈이다 (인도는 현재 75~115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에 파키스탄이 적극적으로 협조한 후 파키스탄과의 전략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핵실험 이후 파키스탄에 가해진 제재의 대부분을 완화했다. 2005년 미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F-16 전투기 판매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한 대 당 약 44억 원인 F-16 전투기를 24대 판매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1979년 핵실험을 단행하고 현재 200기에 가까운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UN이나 미국이 제재를 가하겠다고 한 적은 전혀 없다. 이처럼 NPT는 미국을 비롯한 핵보유국에게 면죄부를 부여했다. 그것은 핵보유국의 핵무기 개발을 전혀 제한하지 못했고, 그들이 비보유국에게 핵위협이나 핵공격을 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또한 미국은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의 사례처럼 자신의 전략적 이해에 따라 NPT를 자의적으로 활용하거나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핵패권주의와 NPT 체제의 자의적 활용은 핵비보유국의 핵개발 욕구를 자극할 뿐이다. 결국 현재의 NPT 체제는 반핵을 염원하는 세계 민중의 요구를 실행하는 데 근본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으며, 미국은 NPT 체제를 근저에서 허물고 핵확산을 촉발시킨 원흉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2) 제재는 민중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이다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재(sanction)는 군사력 사용의 대안이라는 믿음이 있다 (제재에는 여행금지, 무기 수출입금지로부터 완전한 무역금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이 있다). 비군사적 처벌을 가함으로써 전쟁에 따른 대중의 고통과 희생 없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제재가 민중에 대한 무차별 폭력을 낳는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억지 주장일 따름이다. 냉전 시기 동안 UN 제재가 실제로 실행된 적은 거의 없었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을 지지하는 국가를 끌어 모으기 위해 경쟁했고, 따라서 상대방의 반대로 인해 제재가 실행될 수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UN이 승인한 제재는 로디지아와 남아공 단 두 건이었다). 그러나 냉전 이후 UN 안보리는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아이티, 이라크, 세르비아, 소말리아, 수단 등 여러 국가에 대해 군사 침략, 테러리즘 지지, 민주주의 억압 등 여러 이유를 들어 제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UN의 일방적 제재가 급증한 것은 더 이상 미국의 경쟁 상대가 없고 따라서 제재 조치에 반대할 세력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유일 패권국 미국이 세계 각국의 질서 유지를 위해 직접적으로 자신의 군사력을 사용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98년 어떤 논평가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2/3는 어떤 유형이든 간에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유럽연합 역시 이러한 흐름에 따라 각종 제재를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제재가 군사력 사용을 대체하는 효과적 수단이란 믿음은 극히 위험한 환상일 뿐이다. 제재는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위압적'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부메랑 효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제재를 받는 당사국의 폭력적 대응을 유도한다. 제재는 기대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가해지기 마련이고, 적대와 차별의 메시지를 보내므로 반드시 긴장과 분쟁을 유발한다. 이는 합리적인 문제해결 능력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으며, 제재의 위협을 받은 당사자는 기회가 있다면 역으로 상대방에게 모종의 위협을 가하길 바란다. 하지만 제재의 문제점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제재는 그 목표가 된 사회의 파괴와 민중의 고통을 낳는다. 1999년의 어떤 연구에 따르면 냉전 이후의 제재에 따른 희생자는 전 역사 동안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희생자보다 더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 1991-2001년 사이의 이라크 제재 동안 수십만 명의 아이가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재라는 방식 그 자체가 국제법(제네바협정)을 위반한다는 주장도 있다.1) 그 근거는 첫째 민간인을 목표로 하며(48조, 51조 2항 위반). 둘째 무차별적 공격을 가하며(51조 3항 위반), 셋째 기아를 전쟁의 무기로 사용한다(54조 위반)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제재/봉쇄 조치가 원래 불법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제재에 따른 민중의 참상이라는 결과를 알고서도 제재를 지속하는 것은 제네바협정 위반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재는 모든 문제를 외부의 제재에 대한 불만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지배 집단이 국내의 민주적·민중적 세력을 쉽게 억압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며, '국기를 향한 집결' 즉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촉발시킬 수 있는 계기를 형성하게 한다. 결국 제재라는 제국주의의 위압적 수단은 전쟁과 마찬가지로 적대국의 절대적 섬멸을 추구하는 '극단으로 향하는 경향'을 작동케 하며, 민주적·민중적 역량을 파괴하고 맹목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함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부채질할 뿐이다. 제재를 통해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막자는 접근법 그 자체가 제국주의적 논리의 연장이며 세계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린다.2) 3) 미국의 단계적 제재 확대와 북한의 추가 핵실험 가능성 이번 UN의 대북제재안은 북한의 핵-미사일 확산 방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며, 따라서 UN에 의한 전면적, 포괄적 제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실제로 지금까지 UN이 포괄적 제재를 결정한 것은 네 차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을 가하고, 테러리즘을 지원하고, 비시장국가이며, 대량살상무기를 확산하는 국가라는 근거를 들어 1950년대 이래 포괄적이고 '충분한' 제재를 이미 가하고 있다 (대북 경제제재를 규정한 미국의 법안은 이미 20여 개에 이른다). 최근 미국은 대북 제재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북한의 정치집단에게 타격을 가할 목적으로 금융제재를 확대하고 있다. 특히 불법적인 마약·위폐·무기거래를 근거로 북한과 거래하는 해외은행의 북한계좌를 동결했다. 이는 한미 간 합의를 통해 이뤄지는 조치다. 2003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와 노무현은 "한반도에서 위협이 증대될 때 추가적 조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의했다. 이는 언론을 통해 '맞춤형 봉쇄'라고 보도된 것으로, 경제제재와 해상봉쇄(무기수출 금지)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한국정부는 이에 호응하여 2005년 8월에 합의된 남북해운협정을 통해 한국 영해에서 북한 선박에 대한 검열과 세관 검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결국 미국은 중국과 한국을 적극적으로 추동하면서 대북 제재의 수위를 차츰 상승시키기 위한 기존의 구상을 단계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3) 미국의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미국은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의 기술적 수준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아직 북한이 자국의 영토와 부에 현실적 위협을 가할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미국이 현 수준에서 특히 우려하는 것은 첫째 북한이 남한이나 일본에 대해 핵테러를 가할 가능성, 둘째 이란을 위시해 핵보유를 목표로 하는 국가들에게 끼칠 악영향, 셋째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수출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미국은 군사적 위협과 제재를 결합하는, 지극히 강압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첫째는 남한에 대한 핵우산 제공을 분명하게 재천명하고 북한의 파멸을 강력히 보증하는 것이다. 10월 20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는 남한에 대한 핵우산 제공 공약을 확인하며 여기에는 "확장된 억지력(extended deterrence)의 지속이 포함된다"고 천명했다. '확장된 억지력'이란 1978년 시작된 SCM에서 처음으로 공표된 개념으로, 북한에 대해 전술핵무기뿐만 아니라 전략핵무기 공격도 가능함을 시사한다 (한미 SCM은 미국이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을 중단시키는 대신에 매년 국방장관급 회담을 개최하고 매 회담마다 미국의 핵우산 제공을 보증한다는 약속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둘째는 이란에 대해서도 선제공격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강력한 대응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하 핵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핵탄두가 탑재된 벙커버스터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고, 실전에서의 활용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셋째는 이번 UN 결의를 호기로 삼아서 중국과 한국까지 끌어들여 대북 해상봉쇄(PSI)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의 일차적 움직임은 모두 군사적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경제제재의 실행이 군사적 수단을 통해 보증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북한과의 대화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실행하는 가운데에서 하나의 '옵션' 정도로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남한의 대북 군사력 증강과 제재의 확대라는 위협의 메시지는 상대방의 폭력적 대응을 촉발한다. 이미 북한은 미국이 자신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추가 핵실험뿐만 아니라 핵미사일의 해상수출 시도, UN탈퇴, 미사일 시험발사 등의 카드를 들 수 있다고 암시했다. 미국의 대응에 따라 북한은 추가 핵실험을 통해 자신의 핵무기에 대한 신빙성을 높이고 핵보유국 반열에 가담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북한이 미국, 일본, 한국의 민중을 향해 겨눠질 핵미사일 능력을 보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핵실험이 실제로는 실패했고 기술수준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기 때문에 북한의 핵보유는 선언은 '상징' 수준에 머문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압도적인 정치적·군사적 힘을 활용하여 북한의 경제적 취약성을 단계적으로 공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천명했다. 북한은 핵무기가 협상의 대상이 안 된다면 핵능력을 실증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핵무기를 매개로 우위에 서고자 하는 경쟁에서는 결국 상대방 민중에 대한 절대적 파괴(섬멸) 능력을 과시하는 경향이 강화될 뿐이다. 바로 이 때문에 반핵평화운동의 관점이 도입되어야 한다. 2. 왜 반핵평화운동의 관점이 절실한가? 1) 소련의 핵보유가 핵전쟁을 막았는가? 이쯤에서 남한의 사회운동 내에도 존재하는 핵문제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여러 논평가들이 '북한의 핵보유는 미국의 전쟁위협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다', 또는 '북한의 핵보유로 인해 한반도 전쟁 발발 가능성이 실제로 낮아졌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듯하다. (심지어 북한의 '핵우산'으로 인해 한반도 민중의 안전이 보장될 것이라는 핵숭배사상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유포되어 있다. 심지어 북한의 핵보유가 결국 한국의 핵보유가 될 것이라는 대중적 '공상'도 떠돌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 미국과의 핵대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던 소련과 이를 지지했던 세계 각국의 공산당의 크나큰 오류를 다시금 반복할 수밖에 없다.4) 과연 소련의 핵보유가 핵전쟁은 막은 것이 사실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1945년 미국이 일본에 핵공격을 가한 후로 핵무기가 실제로 사용되지 않은 이유가 소련의 핵억지력 때문이라는 믿음은 결정적인 오류를 낳는다. 핵무기가 의미하는 인류 절멸의 위험에 대해 분연히 떨쳐 일어난 거대한 반핵평화운동의 물결이 1950-60년대에 일어났기 때문에 핵무기 사용이 어려워진 것이다. 미국의 대일 핵공격이 낳은 참화, 일본의 추산에 따르면 20만 명 이상이 죽고 또 20만 명 이상이 핵공격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는 현실(수많은 조선인 피폭자들도 포함된다)은 인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아가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간교한 은폐 시도는 민중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이러한 현실에 항거하는 반핵평화운동의 세계적 물결이 없었다면 제2, 제3의 핵사용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소련이 미국과의 핵경쟁의 길로 나아가지 않고 그 반대의 길, 즉 반핵평화운동을 지지하는 길을 걸었더라면 지금의 세계는 정말로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기실 미국의 대일 핵공격은 국제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미국은 전쟁종결을 위해 핵공격이 불가피했던 것인 양 합리화했다. 하지만,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은 소련의 남진과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전쟁을 더 빨리 종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핵을 사용했고, 또한 핵무기를 실전에서 활용하고 싶은 지배 엘리트들의 욕망이 이를 부추겼다 (남한의 지배세력은 세계 민중의 격렬한 투쟁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마치 미국의 핵폭격 때문에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식의 환상을 유포했고, 미국의 핵무기주의를 철저히 숭배했다). 따라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을 핵공격으로 마무리한 것은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더 확대하고, 핵무기라는 절멸의 공포를 과시함으로써 세계적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미국의 핵무기 투하는 종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과의 3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는 냉전의 형태로 실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미국을 모방하여 핵무기주의의 길을 걸은 것은 반전반핵평화운동의 염원을 짓밟는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오류였다. 2) 소련 핵무기주의의 귀결 소련이 미국과 동일하게 핵무기 개발에 뛰어든 것은 소련이 직면한 내적 모순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1930년대 소련은 '사회주의 생산양식'의 완성과 '전인민의 국가'를 선언했다. 사회주의 생산양식의 수립으로 이제 소련에서 계급모순이 소멸했지만, 반혁명적 스파이 활동이나 외부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강력한 국가기구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경찰기구인 소련내무인민위원회(NKVD)와 상비군으로 전화된 붉은군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소련의 건설 과정에서 '대러시아' 쇼비니즘이 조심스럽게 부활했고, 소련은 대외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했다.5) 소련의 팽창주의와 국가주의는 더욱 확대되었고, 이는 소련 핵개발의 배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소련의 핵개발은 역으로 소련 사회와 국제사회주의 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소련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자국의 '점령지'를 정치적·군사적 피보호국으로 재편하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미국의 냉전전략과 군사적·정치적 도발은 적당한 빌미를 제공했고, 소련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팽창된 군사력을 영향력 확대 수단으로서 적극 활용했다. 소련은 각국에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정치집단을 선택하여 정치적으로 조정하고, 군사지원(무기지원, 군사훈련)과 군사기지 설치를 통해 각국의 군사요새화를 촉진했다. 이 과정에서 동유럽과 아시아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연스럽게 군사주의적 국가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소련은 자국의 핵개발 이후에도 타 사회주의 국가의 핵보유를 적극적으로 막으면서, 핵우산을 제공(강요)했다. 이런 모든 시도는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관계를 보호국-피보호국의 위계적 관계로 변질시켰다. 결국 소련의 핵보유는 곧 팽창주의적 지배-종속 논리에 적극적으로 편승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또한 핵무기주의는 필연적으로 소련의 국가주의를 한층 더 강화했다. 핵무기라는 고도로 복잡하고 위험한 무기를 개발하고, '안전'하게 통제하고,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운영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규모의 군사조직이 상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핵무기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소수의 군사특권층에게 집중된다. 하지만 민중의 통제를 벗어난 대규모 상비군 조직의 존재 자체가 사회주의 이상에 위배된다. 결론적으로 소련의 핵무기는 소련 팽창주의의 역사적 발로이자, 국제 사회주의 진영을 위계적 관계로 재편하는 무기가 되었다. 민중의 통제를 벗어난 소련의 군사기구는 핵개발로 치달았고, 군사기구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핵무기는 '노동자 국제주의', '노동자 통제를 통한 국가의 전화'라는 사회주의적 지향과 양립할 수 없다. 3) 핵전쟁에서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 사이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18세기까지의 전쟁은 군사 카스트의 지휘 하에 용병, 직업군인에 의해 강압적인 방식으로 수행되었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전쟁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프랑스혁명은 혁명조국을 방어하기 위한 애국주의와 민중의 무장을 낳았고, 전쟁은 점차 민족적 동원의 형태를 취해 갔다. 19세기에 걸쳐 국가 간 전쟁은 민족의 모든 역량을 투여함으로써 상대방 군사력의 완전한 섬멸을 추구하는 '절대전쟁'의 형태로 진화했다. 1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유럽 각국의 노동자운동은 민족적 동원에 포섭되고 2인터내셔널이 결국 붕괴하는 데 이르렀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레닌의 구호는 제국주의 전쟁이 결국 절대전쟁으로 상승할 것이며, 전쟁동원에 항거하는 민중의 반역이란 계기는 필연적이라는 인식이 근거했다. 20세기 초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 운동은 노동자가 각국의 '독점자본'의 이해를 위해 서로 살육하는 전쟁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도덕적 호소로부터 출발하였지만, 절대전쟁의 지속 불가능성이란 현실의 정세 속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10월혁명을 통해 '즉각적인 전쟁중단'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의 구호와 함께 현실화되었다.6) 그러나 전쟁의 역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민족적 총력전(total war)은 점차 적국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모든 인민 역량의 파괴를 향한 경향으로 진화했다 (총력전이란 용어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군의 동부전선 참모장이었던 루덴도르프가 1935년에 『총력전론』이라는 저서를 출판한 후부터 널리 쓰이게 되었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군사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민족적 총동원 체제가 확립됨 따라 전 국토가 전장화되었다. 총력전에서는 대도시, 산업시설, 교통시설에 대한 전략적 폭격이 일반화되어 더 이상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이 무의미해졌다. 오히려 비전투원의 사상자가 전투원의 사상자를 훨씬 초월하는 양상이 극대화되었다.7) 이런 맥락에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실행된 핵폭격은 총력전의 완성이자 초월로 간주할 수 있다. 핵전쟁이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 군사시설과 비군사시설의 구별이 완전히 무의미해지는 절대적 파괴, 절멸의 극한을 현실화했다는 의미에서는 총력전의 완성이다. 하지만, 핵전쟁은 근대전쟁이 수반했던 민족적·민중적 동원 체계를 상대화한다는 점에서는 총력전의 초월이다. 핵전쟁은 대중을 전쟁에 참여시키기 보다는 체계적으로 배제하며, 모든 권한을 지배세력에게 집중시킨다. 핵전쟁 발발 여부는 최고 지도자의 배타적 권한에 속하게 되거나,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자동화된 반응으로 진화한다. 민중에 대한 절대적 파괴, 민중의 절대적 소외로서의 핵전쟁에서 더 이상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은 무의미해진다. 이는 '사회주의 조국방어를 위한' 핵전쟁이란 말 역시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4) 핵무기 그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다! 또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핵전쟁을 막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은 핵보유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라는 인식을 가로막는다. 핵무기 그 자체가 '절대무기'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핵무기의 개발, 배치, 이전 등 매 국면마다 이를 강행하려는 세력과 막으려는 세력 간의 충돌 위험과 긴장이 발생했다. 미소 간에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변형된 형태의 전쟁과 분쟁 특히 대리전이 냉전시기의 전쟁양상을 지배했던 것도 사실이다. 1970년대 제한핵전쟁 전략이 등장하면서 서유럽과 동유럽은 미소 핵전쟁을 위한 대리 전장으로 전환되었고, 유렵에 강한 긴장과 격렬한 반핵평화운동을 낳았다. 1962년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시도가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쿠바의 사례는 사회운동을 희생시키고, 쿠바 사회주의를 미소 간 핵무기 경쟁의 논리로 포섭하려는 추악한 시도였다).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도 군사적 요충지를 장악하기 위한 미소간의 첨예한 대결과 이른바 미소 대리전이 수십 차례 벌어졌다. 나아가 이러한 과정에서 각국의 민중운동은 소련의 지배전략에 순응하는 지배세력으로 변질되거나 소련 세계전략의 희생양이 되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청년 장교들과 공산당이 연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권력을 장악하면, 소련은 이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소련의 군사기지를 설치했다. 그 후 군부가 공산당 세력을 배제하거나 숙청하더라도 소련이 이를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이처럼 핵능력을 향상시키고, 군사적 요충지에 배치하려는 모든 시도는 세계의 무차별적 대중을 볼모로 핵보유국의 세력균형을 달성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를 강행하려는 세력과 막으려는 세력 간의 긴장과 대리전을 낳았다. 핵의 존재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3. 한반도 핵위기의 전망 1) 미국의 대북전략: 구조적 요인 현재 한반도의 상황이 위급하게 전개되면서 북미 간 공식적인 대화채널이 빨리 복원되고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 내 여론조사도 부시 정부가 아무런 조건 없이 북한과 이란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 더 높은 비율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사태가 더욱 위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기대가 쉽게 충족될 수 없는 구조적 요인 때문이다. 오늘 미국의 세계전략은 배제를 동반하며, 북한은 동아이사의 '섬'으로서 포섭과 배제의 경계에 있다. 따라서 미국의 대북전략은 근본적으로 모호하다. 신자유주의 체제전환 이론은 '대폭발'(big bang) 또는 '충격요법'을 선호하고, 정권교체도 승인한다. 따라서 미국의 대북전략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차이는 백지 한 장일 뿐이며, '접촉을 통한 변화' 정책과 '봉쇄' 정책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이러한 사실을 부연해보자. 현재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초민족기업의 활동은 점점 더 세계경제의 삼극으로 집중되고 있다. 초민족기업이 구축하는 해외직접투자, 기업 내 무역, 자회사의 수출, 국가 간 하청의 연결망은 북아메리카, 서유럽, 동아시아를 삼극으로 하는 위계화된 세계를 구축한다. 이제 삼극체제 외부의 국가는 시스템의 주변부로 밀려났고, 배제되거나 또는 단순히 관리되는 지역으로서 남게 되었다. 미국 경제는 이미 형성된 부를 금융적 팽창을 통해 빼앗아 배타적으로 향유하려는 새로운 수탈 경로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원조와 역개방을 통한 동아시아 경제육성 모형과 완전히 다르다. 이에 따라 초민족기업이 구축하는 세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통합된 세계'라는 그들의 구호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세계경제 시스템의 삼극을 이루는 동아시아에서 고립된 '섬'으로 남아 있다. 금융세계화라는 맥락에서 북한 경제는 초민족기업이 통합하고자 하는 특별히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다. 최근 동남아시아 경제 역시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중국과 출혈적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고 점차 중국에 비해 이점을 잃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생산거점은 점차 중국으로 집중되고 있다 (한국의 대북경협은 경제외적 동인이 더 강하고, 중국의 대북투자는 원자재 수급에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에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 때문에 대북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1990년대까지 미국에게 북한은 1970년대의 중국처럼 거대한 정책전환을 요구하는 대상이 아니었고, 외교정책 상 우선순위에 두는 중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8) 소련의 붕괴, 중국의 체제전환으로 인해 미국의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은 더욱 희미해졌다. 하지만 미국의 사활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동아시아에서 10만 명의 주둔미군과 핵·재래식 전력을 유지할 명분을 찾기 위해 미국은 중국이 핵전력과 대규모 재래식전력을 지닌 '지역강국'(regional power)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9) 이와 동시에 상당한 규모의 재래식 전력과 생화학무기, 잠재적 핵능력을 보유한 북한의 군사적 위험성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군사적 위험성에 대한 강조와 북한의 실질적 변화를 추구하기 위한 전략의 부재가 동시에 나타났다. 그 결과 미국이 북한에 대해 취한 실제 태도는 무엇인가? 실제로 미국에게 북한은 동아시아에서 심각한 교란요인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준으로 봉쇄해야 할 대상 즉 '위기관리'의 대상 정도로 여겨졌다. 특히 미국은 북한을 대량살상무기 확산과 테러리즘 지원을 차단해야 할 상대국 정도로 인식했다. 이런 인식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와 무관하게 미국 정가를 지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대화 분위기를 통해 갈등이 완화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이는 새로운 쟁점을 포괄하면서(북한 핵에서 미사일로, 재래식 전력으로) 더 큰 갈등으로 비약했다. 한편 미국 경제학과 경제정책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이론가들의 입장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이미 동유럽에서 '이행기 경제'를 지도하면서 점진주의적 개혁보다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와 같이 충격요법을 통한 급진적 체제전환이 오히려 파생되는 폐해를 줄이고 더욱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충격요법의 시행을 위해서는 '정치적 주체'의 문제가 남는데, 이는 이중적 결론으로 나아간다. 기존 특권관료(노멘클라투라)가 충격요법을 가장 잘 실행할 수 있는 주체라면 이들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실제로 동유럽의 이행기에서 (군사관료를 포함한) 당정관료, 경제관료, 대학관료 등 주요 특권관료는 상징적인 몇몇 인물을 제외하곤 이행기 이후에도 사회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들이 충격요법을 거부한다면?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노선도 정권교체를 지지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북 인식은 사실상 종이 한 장 차이뿐이다. 북미 갈등은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의 정권교체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며, 양자의 차이는 수단과 절차에 대한 다소간의 이견일 뿐이다. 민주당은 접촉을 통해 변화를 추구한다는 접촉정책(engagement)을 제시했지만, 그 목적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확산을 방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며, 군사력 증강을 통해 이를 압박한다는 점에서 냉전 시대의 '봉쇄정책'(containment)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보다는 그들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군사주의적 노선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2) 핵폐기 프로그램의 정치적·기술적 난점 북미간의 갈등 사안에서 세부적 쟁점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북미 타협은 요원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상황은 금융제재 중단과 6자회담 복귀의 선후를 두고 교착 상태에 빠져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공식적인 논의테이블이 마련되면,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전기 마련'이란 외양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핵무기를 매개로 하는 협상에서 '잠정적인' 해결책이 나오는 것조차도 얼마나 오랜 기간이 걸릴지, 그 과정에서 어떤 사태가 도래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10) 특히 부시 정부의 등장 이후 미국은 북한 핵 프로그램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방법'으로 폐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 문구는 이번 UN 제재안에 명문화되었다. 이는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핵연구시설이나 핵발전시설 모두가 폐기되어야 하고, 북한의 모든 시설에 대한 자유로운 사찰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에 북한이 완전히 호응할 것인지, '핵동결'이 어느 수준에서 이뤄질지는 지금으로서 예측하기 어렵다. 그것은 협상의 가장 첨예한 쟁점이 될 것이며, 협상은 항상 더 큰 충돌을 준비할 위험을 내포한다. 또한 IAEA의 사찰활동은 항상 '국가주권'의 경계를 침범하고 I'갈등유발' 행위로 전환되고, 곧장 격렬한 충돌로 비화하곤 했다 (이라크에서 UN의 무기사찰단 활동을 상기하라). 모종의 협상을 통해 북한 일정 수준의 핵폐기 프로그램이 합의되더라도 그 실행가능성은 불투명하다. 부시 정부의 등장 이후, 일부 분석가는 미국 측이 더욱 '대담한' 제안을 내놓아서 클린턴 정부 시기의 지루한 협상을 단번에 넘어설 수도 있다는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근거 없는 낙관에 불과했다는 게 현실로 증명되었다. 현재의 국면은 미국의 강압적·군사적 대응과 북한이 핵능력 실증을 위한 시도가 회오리처럼 상승할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북미간의 협상이 과연 가능한지, 얼마나 걸릴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4. 북한 핵실험과 반전반핵운동의 과제: 남한에서부터 전쟁유발요인을 제거하자 1) 우리 운동의 맹목을 극복하자 우리는 앞서 핵무기주의가 모든 측면에서 사회주의적 지향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점, 핵전쟁에서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 사이의 구별은 무의미하다는 점, 핵무기 그 자체가 전쟁의 유발요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미국의 대북전략은 접촉을 통한 변화와 봉쇄 사이의 경계에 서있으며, 현재 미국의 강압적·군사적 대응은 북한의 강경대응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지만, 반면 협상을 통한 조정 가능성은 그리 밝지 않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여기에서 민중운동 일각에서 주장하는 '북미 일괄타결'이 안고 있는 맹점을 지적하자. 첫째는 북미갈등이 장기화될 때 북한의 추가 핵실험을 비롯한 핵무장화의 단계적 진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는 문제다. 여기서 일괄타결 주장은 미국의 강압적·군사적 대응이 지속되는 한 협상수단이든 자위수단이든 북한의 핵보유를 지지해야 한다, 또는 최소한 주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핵문제에 대한 대중의 비판적 인식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으며 반전반미, 반핵평화운동의 대중적 토대마저 상실케 할 위험마저 있다. 최근 MBC 여론조사 결과, '자위적 수단으로 북한이 핵실험을 할 수 있다'는 견해가 30%를 넘었다. 이러한 견해는 과연 진보적인 것인가? 이는 남한의 핵무장을 지지하는 입장과 공명하며, 핵의 위험성에 대한 반전평화운동의 모든 노력을 무화시킬 위험이 크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한 민중운동의 모호한 입장은 핵문제에 대한 대중적 혼란이나 무감각을 조장한다. 오히려 우리는 북한 핵보유에 대한 방어적·수세적 관점을 전도하여 적극적인 반핵평화운동을 지향함으로써 미국의 핵전쟁 위협과 남한의 독자적 핵무장화 주장을 적극적으로 무력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반공·반북주의에 기반을 두고 미국의 핵우산(핵공격·핵위협)을 지지하는 한국의 보수세력과 신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적극적인 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 둘째, 국가 간 외교를 통한 해결책의 모색은 국가 간 외교의 담당자, 즉 정치세력(정당)에 대한 선택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즉 당선 가능한 '온건세력'을 지지하는 게 현실적 대안이라는 대중의 인식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다시피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과 노무현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을 추종하고, 북한에 대한 강압적·군사적 수단을 강화하는 데 적극 기여했다. '그래도 부시는 안 된다, 한나라당은 안 된다'는 인식은 이러한 악순환을 부채질하며, 대중운동이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전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셋째, 최근 북미협상의 기본구도를 검토하면, 북한의 협상전략이 대체로 방어적, 수세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압도적으로 북한에게 불리한 세력관계를 반영하며, 현 사태로 북미 간에 일정한 타협이 이뤄지더라도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력은 근본적으로 침식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11) 또한 북미간의 대결과정에서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 동북아시아 전반의 무기 증강 시도는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일본은 비핵보유국 중에서 유일하게 핵재처리 시설을 공인 받고 있으며, 핵물질과 핵기술 양 측면에서 언제라도 핵보유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일본은 북한의 핵실험 이후 지속적으로 핵무장화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중국은 군사력 현대화 프로그램에 착수한 후 최근 사거리 7000km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 중이이다. 대만 역시 과거에 핵개발을 시도한 적이 있으며, 중국의 '무력통일' 시도를 막으려면 궁극적 대안은 핵개발 밖에 없다고 확고히 믿는 세력이 잠재하고 있다. 어느 시점까지는 미국의 적극적인 반대 때문에 한국, 일본, 대만이 핵을 보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각국이 핵보유 능력을 꾸준히 향상하고 있다는 것 역시 현실이다. 북미 일괄타결만으로는 이러한 경향을 막을 수 없다. 동아시아 전쟁의 근본적 유발요인인 주둔미군의 철수와 한미일 삼각동맹의 해체를 목표로 하는 반전평화운동이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이런 경향은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강화될 것이다. 넷째, 북미갈등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든 간에, 북한의 핵무기가 '자위용'이 되든지 아니면 '협상용'이 되든지 간에 북한의 핵개발은 동일한 파급효과를 낳는다. 북한의 핵실험은 강대국의 핵독점체제를 파괴하는 신호탄이 되고, 세계 각국의 핵개발 의지를 북돋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세계를 더욱 큰 위험과 혼돈을 초래한다. 북한 핵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일시적'인 방편이라거나 북한의 핵개발은 다른 나라의 핵개발과 다르다는 주장은 이러한 현실을 애써 감추는 것일 뿐이다. 2) 반전반미, 반핵평화의 기치로 그렇다면 우리의 대안을 가로막는 가장 강고한 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군사적 억지력이란 믿음이며, 한국의 대중을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는 핵무기숭배나 핵문제에 대한 무감각이다. 따라서 우리의 실천은 반전반미, 반핵평화라는 견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첫째 미군이 한반도의 군사적 억지력이란 믿음과 정반대로 한미동맹의 강화, 주한미군의 주둔, 미국의 핵우산과 선제핵공격 옵션이 한반도 전쟁의 유발 요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주장하자. 미국은 신무기를 도입하지 않는다는 정전협정의 조항을 파기하고 1957년 핵무기를 도입했고, 1990년대 초반까지 수백 또는 천여 개의 전술핵무기를 배치하고 핵전쟁 연습을 실시했으며, 지금도 북한을 선제핵공격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다. 미국의 핵패권주의와 절멸주의야말로 세계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강력히 제기하자. 둘째, 노무현정부의 모든 군사주의적 노선을 반대하고, 남한에서부터 전쟁유발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을 펼쳐나가자. 최근 노무현정부는 주한미군 재배치(한강 이남으로 이전)와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허용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미국의 전쟁 개시 가능성을 더 높이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노무현정부는 이지스함,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도입함으로써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 시스템을 암묵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노무현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빌미로 한국의 무기증강을 시도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 모든 움직임이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고 전쟁의 실행 가능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주둔미군의 철수, 호전적 한미동맹의 해소, 한반도 군비감축을 통해 전쟁유발요인을 남한에서부터 제거하는 것이 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낮추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다. 그것은 적대국이나 경쟁국이 '먼저 해야 한다' 또는 '동시에 해야 한다'는 세력균형 논리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남한에서부터 일방적인 군비축소와 전쟁태세 해소가 이뤄져야 한다는 우리의 이상을 확실하게 천명하자. 셋째, 핵무기에 대한 숭배나 무감각을 깨고, 핵무기주의에 철저히 반대하자. 2005년 8월 미국의 핵폭격 5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가 해외기관과 공동으로 진행한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남한의 핵문제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그 단면을 파악할 수 있다. 일본의 86%, 독일의 93%가 핵보유에 대해 반대의견을 피력했지만, 한국은 52%가 핵보유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30, 40대 응답자들은 20대나 50대 이상에 비해 한국의 핵무기 보유 찬성률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고(각각 58.5%, 58.7%, 46%, 46.35%), 북한의 핵 보유를 용인하는 비율도 더 높았다.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 이후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 비율은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기류는 동아시아의 핵무장화에 크나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핵무기주의는 민중에 대한 절대적 파괴와 절대적인 정치적 소외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하자. 넷째, 현재 대북제재를 강화하려는 모든 움직임은 제국주의적 논리의 연장이며 전쟁의 은폐된 형태일 뿐이라고 분명히 주장하자. 이미 포괄적 경제제재가 야기한 대규모 참상은 이라크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그것은 민중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 기아와 죽음을 낳으며, 폭력의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미국의 대북제재 움직임은 북한의 핵무장을 촉발하고, 남한의 정치이데올로기 지형을 냉전 시대의 맹목적 대결 양상으로 치닫게 함으로써 반전평화 운동의 싹을 짓밟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러한 전망으로 남한의 민중운동은 반전반미, 반핵평화의 기치로 장기적인 운동을 실천해야 한다. 국가들 간의 세력균형을 통한 '공포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반전반미, 반핵평화운동이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실천이 절실하다. '여건상 미국이 당장 북한과 전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는 비핵화를 위한 일시적 대책일 뿐이다'라는 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와 운동을 재활성화하기 위한 계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1) 'Sanction, Genocide and War Crimes', A Paper Presented to the International Law Association on 29 February 2000 BY Shuna Lennon LLB (Hons). (http://www.zmag.org) 본문으로 2) 이라크 제재의 참상에 대한 국제적 고발이 이어지자 미국 중도파를 중심으로 제재 프로그램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제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첫째 국제사회의 협력이 전제되어야 하며, 둘째 목표가 된 정부는 국내적 저항에 직면해 있어야 하며, 셋째, 제재와 인센티브가 결합되어야 한다. 또한 포괄적, '우둔한' 무역제재가 아니라 목표가 분명한, '영리한' 제재(smart sanction)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전자가 전체 인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면, 후자는 정부기구나 군사기구에 초점을 맞추는 세심한 제재를 뜻한다. 포괄적 제재가 낳는 문제를 고려할 때, 목표가 된 사회에서 책임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제재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특정집단에 대한 금융제재나 압류, 여행금지 등). 나아가 모든 사회 부문(기업, 공동체)으로 범위가 확장되어야 한다면, 제재의 대상은 그 사회의 전략 물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무기, 석유생산물,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처럼 정책결정가에게 큰 이익을 주는 상품). 그러나 영리한 제재 프로그램 역시 강대국의 이익을 위한 위압적 수단이며, 오히려 더욱 강도 높은 제재에 앞서 명분을 쌓기 위한 예비 단계를 제시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본문으로 3) 현재 UN 결의안은 전면적 경제제재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의 '일시적' 중단은 포괄적 제재가 가해질 수 있다는 미국의 위협을 뜻한다. 최근 중국은 북한이 6자회담 복귀를 거부하거나 추가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몇 주 안으로 석유공급을 단계적으로 삭감할 준비가 돼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중국은 현재 북한 수입 석유량의 80~90%를 국제가격보다 매우 낮게 공급하고 있는 만큼, 이에 제재가 가해지면 북한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보도에 따르면 아직 중국이 대북 곡물공급 중단 문제를 고려하지는 않는 듯 보인다). 또한 '인도적' 지원의 삭감 또는 중단은 북한 민중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다. 현재 북한이 연간 필요로 하는 식량은 500-650만 톤이지만, 실제로 북한의 생산능력은 350-400만 톤 수준이라는 분석이 있다. 인도적 지원이든, (저가격, 대금납입 연기 등 지원의 성격이 강한) 상업교역을 통해서든 부족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엄청난 규모의 기아와 죽음을 낳을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4) 소련의 핵개발에 대한 열광은 결국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노심용해라는 대파국으로 끝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체르노빌의 대비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핵오염 때문에 목숨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지금도 남아 있는 폭발 현장의 잔해처리 작업으로 연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사고 복구 작업에 참가한 노동자 가운데 사망한 사람만 8천여 명에 이르며 1만 2천여 명이 심각하게 방사능에 피폭됐다고 밝혔다. 독일 뮌헨 방사선 연구소는 사고 후유증으로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을 포함해 모두 7만여 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했다. 여기에 방사능 유출로 인해 암에 걸린 사람을 합하면 사망자는 10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다. 얼마 전 그린피스는 암 이외의 질병까지 포함해 사망자가 20만 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한겨레21 2006년 4월 26일자(606호) '지옥의 르네상스 계속되는가'를 보라.) 본문으로 5) 박준도, '핵경쟁과 핵확산, 비극의 역사'(『사회운동』 2005년 10월호)를 보라. 또한 소련 사회성격에 대한 분석으로는 샤를 베틀렘,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서문'(『사회진보연대』 2002년 3월호)을 보라. 본문으로 6) 에티엔 발리바르 '전쟁으로서의 정치, 정치로서의 전쟁: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변이들'(『사회운동』 2006년 10월호)을 보라. 본문으로 7) 20세기 전쟁에서 대략 1억 5천만 명이 사망했다. 이들 중 비전투원 비율이 전투원 비율보다 훨씬 높다.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모두 1억 명이 사망하였는데, 이 중 3/4이 비전투원이다. 갈수록 비전투원의 사망률은 높아져 2차 대전 이후에는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가운데 자그마치 4/5가 비전투원이며, 난민은 2천 4백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은 1천 8백만에 이른다. (박준도, '핵경쟁과 핵확산, 비극의 역사') 본문으로 8) 임필수, '2000년대 미국의 대외정책과 한반도'(『사회진보연대』 2000년 5월)를 보라. 본문으로 9)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의 군사모델은 오직 '고강도전쟁'과 '저강도전쟁'이라는 두 가지 모델밖에 없었다. 고강도전쟁은 유럽전역에서 나토 동맹국가들과 바르샤바조약기구 동맹국가들간의 대규모 전면전을 상정한 것으로서, 이 전략에는 핵전쟁에 대비해 핵무기의 선제사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저강도전쟁은 제3세계의 급증하는 게릴라전이나 '민족해방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계발되었으며, 반란 지원 또는 반공폭동의 지원, 군대파견 등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군사전략은 냉전체제의 급속한 붕괴 이후 오히려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즉 소련이 붕괴하고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된 마당에 고강도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대규모 전력을 유지할 명분이 사라졌으며, 만약 저강도전쟁만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이는 당시 미군의 10분의 1의 규모만 있어도 충분히 가능했다. 이러한 심대한 위기에 직면하여 미국은 새로운 적을 필요로 하였다. 미국은 비교적 대규모의 재래식전력과 초보적인 핵·화학·미사일 능력을 갖추었거나 갖추리라 추측되는 '지역강국'들을 주목하면서 이른바 '중강도전쟁'이라는 군사전략 개념을 계발하기에 이른다. 이는 미국의 군사안보를 위협하는 적으로 묘사되기에 시기적절했고, 걸프전쟁을 걸치면서 1990년대 초반 미국의 군사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수정이 가해진다.) 본문으로 10) 클린턴 정부 말미에 발표된 북미 공동코뮤니케를 클린턴 정부 스스로 파기한 사건을 회고해 볼 필요가 있다. 2000년 10월 12일 발표된 북미 공동코뮤니케는 '미국 대통령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올브라이트장관이 북한을 방문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선언은 북한의 장거리미사일에 대한 협상타결이 임박했다는 신호였고, 미국과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관련 부품 및 기술의 수출, 특정 사거리의 미사일의 자체 실험 및 생산의 중단 문제에 관해서 대체적인 합의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 영토에 직접 들어가 '검증'하는 문제와 일본을 향해 이미 배치된 약 100여기의 노동미사일의 해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합의는 무산되었고, 클린턴의 방북 역시 중단되었다. 한편 클린턴의 퇴임 이후 새로 등장한 부시 정부는 다음과 같은 노선을 검토했다. ① 제네바합의 자체를 변경하거나(경수로 제공 중단, 화력 발전으로 대체), ② 북한의 미사일 및 재래식전력의 감축 요구를 제네바합의 이행과 연계하거나, ③ 제네바합의는 존중하되, 그 외 추가적인 협상 의제에 대해서는 미국의 요구가 선결적으로 관철될 때까지 북한의 요구를 계속 무시하고, 만약 북한이 이에 반발하여 '도발행위'를 감행할 경우 군사적 응징조치를 취한다. (사회화와노동, '미국의 우산 속의 햇볕정책, 그 한계는 드러나는가?'(2001년 2월 28일)를 보라) 북한 핵프로그램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폐기'는 부시정부의 검토 사항을 종합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본문으로 11) 지난 1994년 제네바합의는 북한이 흑연감속로를 포기하는 대신에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위협·핵사용을 하지 않으며 연락사무소 설치로부터 대사급 관계로 격상해 나간다고 약속했다. 2005년 6자회담의 9·19합의는 북한이 모든 핵무기·핵프로그램의 포기하는 대신에 미국은 핵공격뿐만 아니라 재래식공격도 하지 않으며 북미간 정상화 조치를 취해나간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북한의 체제보장과 미군의 동아시아 주둔을 맞바꾸는 것이다. 본문으로
: 북한 핵실험과 반핵평화운동의 현재성 2006년 10월 9일 북한은 예고했던 핵실험을 단행했다. 10월 14일 국제연합(UN)은 북한 핵·미사일의 완전한 폐기를 목표로 하는 대북결의안을 채택했고, 10월 20일 한미안보연례협의회(SCM)는 확장된 핵억지력(extended deterrence)을 천명했다. 이로써 한반도의 핵위기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다. 1945년 미국의 핵투하로 시작된 세계적 핵경쟁은 1970년에 체결된 UN의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통해 타협점을 찾은 듯 보였다. 그러나 1974년 인도의 핵실험은 '핵의 평화적 이용'(핵발전)이 핵무기로 전환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1980년대 미국이 전략방위구상(SDI)을 발표하면서 '우주 핵전쟁'이라는 새로운 위험이 대두했고, 소련은 감당할 수 없는 핵경쟁의 수렁에서 침몰했다. 소련의 붕괴 이후 핵무기와 절멸주의의 위험은 인류의 역사에서 점차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도 떠올랐다. 하지만 15년 이상이 지난 현재의 세계는 어떤가? 1995년 NPT의 무기한 연장이 결정되고 1996년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이 채택되면서 핵무장에 대한 제한은 강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실이 그러한가? NPT가 허용한 핵의 평화적 이용을 핵무장으로 전환하려는 현실적·잠재적 시도는 끊이지 않고 있다. 2차 대전의 전승국인 미국, 소련/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의 핵독점·핵패권 체제는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핵독점체제의 해체는 국가 간 질서가 평등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의미하는가? 아니면 핵무기의 확산이 인류를 더 큰 무질서와 혼돈의 세계로 몰아넣을 것인가? 우리는 불행히도 후자가 현 사태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현존하는 NPT 체제로는 세계적 핵확산을 막을 수 없다. 그것은 핵보유국의 핵위협과 핵공격을 막을 수 없으며, 비보유국의 '국가주권'에 대한 요구와 항상 충돌하고 핵개발 욕구를 자극한다. 또한 NPT 체제를 보완하려는 경제제재 역시 사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경제제재는 무차별 대중을 목표로 하는 '소리 없는 공습'이며 폭력의 악순환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NPT나 경제제재가 핵패권을 위한 제국주의적 논리의 연장이라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가? 우리는 20세기를 지배했던 핵숭배사상과 미소의 핵군비 확대와 대결했던 반핵평화운동에서 교훈과 지향을 끌어와야 한다.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이 무의미해지고 모든 민중이 절멸의 목표물이 되는 핵전쟁에서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핵평화운동은 '핵보유가 전쟁을 막는다'라는 군사적 세력균형의 논리를 거부하고, 핵보유 그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라는 사실을 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오늘 미국의 세계전략은 세계경제를 삼극 중심으로 재편·집중함으로써 배제된 지역을 창출한다. 미국은 배제된 지역에 대해 의도적 무관심을 보이거나 민중의 절멸을 조장한다. 미국의 대북정책은 민주당·공화당을 막론하고 배제와 위협의 편에 있고, 강압적·군사적 대응방안을 조합한다. 한국정부는 한반도 핵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호소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나쁜 경찰/좋은 경찰' 모형에 따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다 (직접적 폭력을 가하는 '나쁜' 경찰과 말로 구슬리는 '좋은' 경찰). 오히려 노무현정부는 전쟁의 실행가능성을 높이는 주한미군 재편전략을 지지하고, 한국군의 대규모 군비증강을 추진한다.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해체, 한국의 군비감축을 지향함으로써 남한에서부터 (핵)전쟁유발요인을 먼저 제거하는 것이 반전반핵운동의 선결과제다. 이것이야말로 '일방적 핵무장해제'와 '일방적 군사동맹해체'라는 평화운동의 이념을 한국에서 실현하는 길이다. 1. 세계적 핵확산과 동아시아 핵경쟁의 원인은 무엇인가? 1) 미국의 핵일방주의와 세계적 핵확산 지금까지 미국은 총 1127회의 핵분열·핵융합 실험을 실행했다 (그 중 217회는 지상실험이었다). 소련/러시아는 969회를 진행하였고 (219회의 지상실험), 프랑스는 210회 (50회 지상실험), 영국은 45회 (21회의 지상실험), 중국은 45회 (23회의 지상실험), 인도와 파키스탄은 13회의 지하실험을 실행했고, 남아공과 이스라엘은 1979년 한 차례의 지상실험을 단행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의 가공할 만한 핵실험 횟수와 핵무기 보유 규모와 비교해 볼 때,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UN의 제재 결정(2006년 10월 14일)은 분명히 위선적인 것으로 보인다. UN 제재안은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선언을 즉각 철회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하는 것이 마치 국제법에 따른 의무인 것처럼 선언했지만, 이 역시도 기만적인 주장일 따름이다. 1970년 3월, UN에서 발효된 NPT는 핵무기 보유국과 비보유국에 대해 각각 다른 조약 의무를 부과했다. 핵무기 비보유국은 핵무기를 생산하지 않고 보유국에서 수령하지도 않는 대신에, 핵무기 보유국은 비보유국에게 핵무기를 이전하지 않고 자신의 핵무기를 단계적으로 감축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로써 미국, 소련, 프랑스, 영국, 중국은 핵무기 보유의 배타적 특권을 공인받았지만, 핵무기를 단계적으로 감축하고 비보유국에게 핵공격을 가하지 않는다는 의무는 공허한 약속이 되었다. 핵무기 비보유국은 모든 핵활동에 관해 IAEA의 사찰과 제재를 받지만, 보유국의 핵무기 제조, 개량 과정은 사찰 대상이 될 수 없었다. 2002년 부시정부가 발표한 '핵태세보고서'는 핵무기 비보유국에 대해서도 선제 핵공격을 가할 수 있다고 공언했고, 그 명시적인 대상의 하나로 북한을 지목했다. 또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다양한 전술핵무기를 개발하고 전략핵무기의 보유 상태를 혁신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편 2006년 3월 미국과 인도는 핵협력협정에 전격 합의했다. 그 내용은 인도의 22개 핵시설 가운데 민수용시설에 대해서는 국제사찰을 실시하는 대신 8개 군수용시설은 불문에 붙이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인도는 미국의 승인 하에서, NPT에 가입하지 않고도 여섯 번째 공식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특별지위를 누리게 된 셈이다 (인도는 현재 75~115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에 파키스탄이 적극적으로 협조한 후 파키스탄과의 전략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핵실험 이후 파키스탄에 가해진 제재의 대부분을 완화했다. 2005년 미국은 파키스탄에 대한 F-16 전투기 판매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한 대 당 약 44억 원인 F-16 전투기를 24대 판매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1979년 핵실험을 단행하고 현재 200기에 가까운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UN이나 미국이 제재를 가하겠다고 한 적은 전혀 없다. 이처럼 NPT는 미국을 비롯한 핵보유국에게 면죄부를 부여했다. 그것은 핵보유국의 핵무기 개발을 전혀 제한하지 못했고, 그들이 비보유국에게 핵위협이나 핵공격을 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또한 미국은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의 사례처럼 자신의 전략적 이해에 따라 NPT를 자의적으로 활용하거나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핵패권주의와 NPT 체제의 자의적 활용은 핵비보유국의 핵개발 욕구를 자극할 뿐이다. 결국 현재의 NPT 체제는 반핵을 염원하는 세계 민중의 요구를 실행하는 데 근본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으며, 미국은 NPT 체제를 근저에서 허물고 핵확산을 촉발시킨 원흉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2) 제재는 민중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이다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제재(sanction)는 군사력 사용의 대안이라는 믿음이 있다 (제재에는 여행금지, 무기 수출입금지로부터 완전한 무역금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형이 있다). 비군사적 처벌을 가함으로써 전쟁에 따른 대중의 고통과 희생 없이 분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제재가 민중에 대한 무차별 폭력을 낳는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억지 주장일 따름이다. 냉전 시기 동안 UN 제재가 실제로 실행된 적은 거의 없었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을 지지하는 국가를 끌어 모으기 위해 경쟁했고, 따라서 상대방의 반대로 인해 제재가 실행될 수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UN이 승인한 제재는 로디지아와 남아공 단 두 건이었다). 그러나 냉전 이후 UN 안보리는 아프가니스탄, 앙골라, 아이티, 이라크, 세르비아, 소말리아, 수단 등 여러 국가에 대해 군사 침략, 테러리즘 지지, 민주주의 억압 등 여러 이유를 들어 제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UN의 일방적 제재가 급증한 것은 더 이상 미국의 경쟁 상대가 없고 따라서 제재 조치에 반대할 세력이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유일 패권국 미국이 세계 각국의 질서 유지를 위해 직접적으로 자신의 군사력을 사용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98년 어떤 논평가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2/3는 어떤 유형이든 간에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유럽연합 역시 이러한 흐름에 따라 각종 제재를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제재가 군사력 사용을 대체하는 효과적 수단이란 믿음은 극히 위험한 환상일 뿐이다. 제재는 근본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의 '위압적'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부메랑 효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으며, 제재를 받는 당사국의 폭력적 대응을 유도한다. 제재는 기대하는 효과를 얻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가해지기 마련이고, 적대와 차별의 메시지를 보내므로 반드시 긴장과 분쟁을 유발한다. 이는 합리적인 문제해결 능력에 악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으며, 제재의 위협을 받은 당사자는 기회가 있다면 역으로 상대방에게 모종의 위협을 가하길 바란다. 하지만 제재의 문제점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제재는 그 목표가 된 사회의 파괴와 민중의 고통을 낳는다. 1999년의 어떤 연구에 따르면 냉전 이후의 제재에 따른 희생자는 전 역사 동안 '대량살상무기'에 의한 희생자보다 더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 1991-2001년 사이의 이라크 제재 동안 수십만 명의 아이가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재라는 방식 그 자체가 국제법(제네바협정)을 위반한다는 주장도 있다.1) 그 근거는 첫째 민간인을 목표로 하며(48조, 51조 2항 위반). 둘째 무차별적 공격을 가하며(51조 3항 위반), 셋째 기아를 전쟁의 무기로 사용한다(54조 위반)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제재/봉쇄 조치가 원래 불법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제재에 따른 민중의 참상이라는 결과를 알고서도 제재를 지속하는 것은 제네바협정 위반이라는 것이다. 또한 제재는 모든 문제를 외부의 제재에 대한 불만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지배 집단이 국내의 민주적·민중적 세력을 쉽게 억압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며, '국기를 향한 집결' 즉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촉발시킬 수 있는 계기를 형성하게 한다. 결국 제재라는 제국주의의 위압적 수단은 전쟁과 마찬가지로 적대국의 절대적 섬멸을 추구하는 '극단으로 향하는 경향'을 작동케 하며, 민주적·민중적 역량을 파괴하고 맹목적인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함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부채질할 뿐이다. 제재를 통해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막자는 접근법 그 자체가 제국주의적 논리의 연장이며 세계를 더 큰 위험에 빠뜨린다.2) 3) 미국의 단계적 제재 확대와 북한의 추가 핵실험 가능성 이번 UN의 대북제재안은 북한의 핵-미사일 확산 방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며, 따라서 UN에 의한 전면적, 포괄적 제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실제로 지금까지 UN이 포괄적 제재를 결정한 것은 네 차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을 가하고, 테러리즘을 지원하고, 비시장국가이며, 대량살상무기를 확산하는 국가라는 근거를 들어 1950년대 이래 포괄적이고 '충분한' 제재를 이미 가하고 있다 (대북 경제제재를 규정한 미국의 법안은 이미 20여 개에 이른다). 최근 미국은 대북 제재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북한의 정치집단에게 타격을 가할 목적으로 금융제재를 확대하고 있다. 특히 불법적인 마약·위폐·무기거래를 근거로 북한과 거래하는 해외은행의 북한계좌를 동결했다. 이는 한미 간 합의를 통해 이뤄지는 조치다. 2003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와 노무현은 "한반도에서 위협이 증대될 때 추가적 조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합의했다. 이는 언론을 통해 '맞춤형 봉쇄'라고 보도된 것으로, 경제제재와 해상봉쇄(무기수출 금지)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한국정부는 이에 호응하여 2005년 8월에 합의된 남북해운협정을 통해 한국 영해에서 북한 선박에 대한 검열과 세관 검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결국 미국은 중국과 한국을 적극적으로 추동하면서 대북 제재의 수위를 차츰 상승시키기 위한 기존의 구상을 단계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3) 미국의 언론 보도를 살펴보면, 미국은 북한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의 기술적 수준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아직 북한이 자국의 영토와 부에 현실적 위협을 가할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미국이 현 수준에서 특히 우려하는 것은 첫째 북한이 남한이나 일본에 대해 핵테러를 가할 가능성, 둘째 이란을 위시해 핵보유를 목표로 하는 국가들에게 끼칠 악영향, 셋째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수출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 미국은 군사적 위협과 제재를 결합하는, 지극히 강압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첫째는 남한에 대한 핵우산 제공을 분명하게 재천명하고 북한의 파멸을 강력히 보증하는 것이다. 10월 20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는 남한에 대한 핵우산 제공 공약을 확인하며 여기에는 "확장된 억지력(extended deterrence)의 지속이 포함된다"고 천명했다. '확장된 억지력'이란 1978년 시작된 SCM에서 처음으로 공표된 개념으로, 북한에 대해 전술핵무기뿐만 아니라 전략핵무기 공격도 가능함을 시사한다 (한미 SCM은 미국이 박정희 정권의 핵개발을 중단시키는 대신에 매년 국방장관급 회담을 개최하고 매 회담마다 미국의 핵우산 제공을 보증한다는 약속으로부터 유래되었다). 둘째는 이란에 대해서도 선제공격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강력한 대응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지하 핵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핵탄두가 탑재된 벙커버스터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고, 실전에서의 활용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셋째는 이번 UN 결의를 호기로 삼아서 중국과 한국까지 끌어들여 대북 해상봉쇄(PSI)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의 일차적 움직임은 모두 군사적 대응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경제제재의 실행이 군사적 수단을 통해 보증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북한과의 대화는 이러한 전제조건을 실행하는 가운데에서 하나의 '옵션' 정도로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남한의 대북 군사력 증강과 제재의 확대라는 위협의 메시지는 상대방의 폭력적 대응을 촉발한다. 이미 북한은 미국이 자신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면, 추가 핵실험뿐만 아니라 핵미사일의 해상수출 시도, UN탈퇴, 미사일 시험발사 등의 카드를 들 수 있다고 암시했다. 미국의 대응에 따라 북한은 추가 핵실험을 통해 자신의 핵무기에 대한 신빙성을 높이고 핵보유국 반열에 가담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북한이 미국, 일본, 한국의 민중을 향해 겨눠질 핵미사일 능력을 보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핵실험이 실제로는 실패했고 기술수준이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기 때문에 북한의 핵보유는 선언은 '상징' 수준에 머문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미국은 압도적인 정치적·군사적 힘을 활용하여 북한의 경제적 취약성을 단계적으로 공격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천명했다. 북한은 핵무기가 협상의 대상이 안 된다면 핵능력을 실증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핵무기를 매개로 우위에 서고자 하는 경쟁에서는 결국 상대방 민중에 대한 절대적 파괴(섬멸) 능력을 과시하는 경향이 강화될 뿐이다. 바로 이 때문에 반핵평화운동의 관점이 도입되어야 한다. 2. 왜 반핵평화운동의 관점이 절실한가? 1) 소련의 핵보유가 핵전쟁을 막았는가? 이쯤에서 남한의 사회운동 내에도 존재하는 핵문제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여러 논평가들이 '북한의 핵보유는 미국의 전쟁위협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다', 또는 '북한의 핵보유로 인해 한반도 전쟁 발발 가능성이 실제로 낮아졌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듯하다. (심지어 북한의 '핵우산'으로 인해 한반도 민중의 안전이 보장될 것이라는 핵숭배사상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유포되어 있다. 심지어 북한의 핵보유가 결국 한국의 핵보유가 될 것이라는 대중적 '공상'도 떠돌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리를 수용하게 되면, 결국 미국과의 핵대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던 소련과 이를 지지했던 세계 각국의 공산당의 크나큰 오류를 다시금 반복할 수밖에 없다.4) 과연 소련의 핵보유가 핵전쟁은 막은 것이 사실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1945년 미국이 일본에 핵공격을 가한 후로 핵무기가 실제로 사용되지 않은 이유가 소련의 핵억지력 때문이라는 믿음은 결정적인 오류를 낳는다. 핵무기가 의미하는 인류 절멸의 위험에 대해 분연히 떨쳐 일어난 거대한 반핵평화운동의 물결이 1950-60년대에 일어났기 때문에 핵무기 사용이 어려워진 것이다. 미국의 대일 핵공격이 낳은 참화, 일본의 추산에 따르면 20만 명 이상이 죽고 또 20만 명 이상이 핵공격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는 현실(수많은 조선인 피폭자들도 포함된다)은 인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나아가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한 미국 정부의 간교한 은폐 시도는 민중의 분노에 불을 지폈다. 이러한 현실에 항거하는 반핵평화운동의 세계적 물결이 없었다면 제2, 제3의 핵사용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소련이 미국과의 핵경쟁의 길로 나아가지 않고 그 반대의 길, 즉 반핵평화운동을 지지하는 길을 걸었더라면 지금의 세계는 정말로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기실 미국의 대일 핵공격은 국제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미국은 전쟁종결을 위해 핵공격이 불가피했던 것인 양 합리화했다. 하지만,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은 소련의 남진과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전쟁을 더 빨리 종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핵을 사용했고, 또한 핵무기를 실전에서 활용하고 싶은 지배 엘리트들의 욕망이 이를 부추겼다 (남한의 지배세력은 세계 민중의 격렬한 투쟁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마치 미국의 핵폭격 때문에 조선이 해방되었다는 식의 환상을 유포했고, 미국의 핵무기주의를 철저히 숭배했다). 따라서 미국이 2차 세계대전을 핵공격으로 마무리한 것은 동아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더 확대하고, 핵무기라는 절멸의 공포를 과시함으로써 세계적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미국의 핵무기 투하는 종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소련과의 3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는 냉전의 형태로 실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이 미국을 모방하여 핵무기주의의 길을 걸은 것은 반전반핵평화운동의 염원을 짓밟는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오류였다. 2) 소련 핵무기주의의 귀결 소련이 미국과 동일하게 핵무기 개발에 뛰어든 것은 소련이 직면한 내적 모순에 비추어 볼 때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1930년대 소련은 '사회주의 생산양식'의 완성과 '전인민의 국가'를 선언했다. 사회주의 생산양식의 수립으로 이제 소련에서 계급모순이 소멸했지만, 반혁명적 스파이 활동이나 외부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강력한 국가기구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경찰기구인 소련내무인민위원회(NKVD)와 상비군으로 전화된 붉은군대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소련의 건설 과정에서 '대러시아' 쇼비니즘이 조심스럽게 부활했고, 소련은 대외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했다.5) 소련의 팽창주의와 국가주의는 더욱 확대되었고, 이는 소련 핵개발의 배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소련의 핵개발은 역으로 소련 사회와 국제사회주의 운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소련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자국의 '점령지'를 정치적·군사적 피보호국으로 재편하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미국의 냉전전략과 군사적·정치적 도발은 적당한 빌미를 제공했고, 소련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팽창된 군사력을 영향력 확대 수단으로서 적극 활용했다. 소련은 각국에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정치집단을 선택하여 정치적으로 조정하고, 군사지원(무기지원, 군사훈련)과 군사기지 설치를 통해 각국의 군사요새화를 촉진했다. 이 과정에서 동유럽과 아시아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연스럽게 군사주의적 국가체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소련은 자국의 핵개발 이후에도 타 사회주의 국가의 핵보유를 적극적으로 막으면서, 핵우산을 제공(강요)했다. 이런 모든 시도는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관계를 보호국-피보호국의 위계적 관계로 변질시켰다. 결국 소련의 핵보유는 곧 팽창주의적 지배-종속 논리에 적극적으로 편승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또한 핵무기주의는 필연적으로 소련의 국가주의를 한층 더 강화했다. 핵무기라는 고도로 복잡하고 위험한 무기를 개발하고, '안전'하게 통제하고, 언제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운영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규모의 군사조직이 상시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핵무기에 대한 모든 결정권은 소수의 군사특권층에게 집중된다. 하지만 민중의 통제를 벗어난 대규모 상비군 조직의 존재 자체가 사회주의 이상에 위배된다. 결론적으로 소련의 핵무기는 소련 팽창주의의 역사적 발로이자, 국제 사회주의 진영을 위계적 관계로 재편하는 무기가 되었다. 민중의 통제를 벗어난 소련의 군사기구는 핵개발로 치달았고, 군사기구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핵무기는 '노동자 국제주의', '노동자 통제를 통한 국가의 전화'라는 사회주의적 지향과 양립할 수 없다. 3) 핵전쟁에서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 사이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18세기까지의 전쟁은 군사 카스트의 지휘 하에 용병, 직업군인에 의해 강압적인 방식으로 수행되었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전쟁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프랑스혁명은 혁명조국을 방어하기 위한 애국주의와 민중의 무장을 낳았고, 전쟁은 점차 민족적 동원의 형태를 취해 갔다. 19세기에 걸쳐 국가 간 전쟁은 민족의 모든 역량을 투여함으로써 상대방 군사력의 완전한 섬멸을 추구하는 '절대전쟁'의 형태로 진화했다. 1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유럽 각국의 노동자운동은 민족적 동원에 포섭되고 2인터내셔널이 결국 붕괴하는 데 이르렀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레닌의 구호는 제국주의 전쟁이 결국 절대전쟁으로 상승할 것이며, 전쟁동원에 항거하는 민중의 반역이란 계기는 필연적이라는 인식이 근거했다. 20세기 초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 운동은 노동자가 각국의 '독점자본'의 이해를 위해 서로 살육하는 전쟁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도덕적 호소로부터 출발하였지만, 절대전쟁의 지속 불가능성이란 현실의 정세 속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10월혁명을 통해 '즉각적인 전쟁중단'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의 구호와 함께 현실화되었다.6) 그러나 전쟁의 역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민족적 총력전(total war)은 점차 적국의 군사력뿐만 아니라 모든 인민 역량의 파괴를 향한 경향으로 진화했다 (총력전이란 용어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군의 동부전선 참모장이었던 루덴도르프가 1935년에 『총력전론』이라는 저서를 출판한 후부터 널리 쓰이게 되었다). 20세기 전반에 걸쳐 군사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민족적 총동원 체제가 확립됨 따라 전 국토가 전장화되었다. 총력전에서는 대도시, 산업시설, 교통시설에 대한 전략적 폭격이 일반화되어 더 이상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이 무의미해졌다. 오히려 비전투원의 사상자가 전투원의 사상자를 훨씬 초월하는 양상이 극대화되었다.7) 이런 맥락에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에 실행된 핵폭격은 총력전의 완성이자 초월로 간주할 수 있다. 핵전쟁이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 군사시설과 비군사시설의 구별이 완전히 무의미해지는 절대적 파괴, 절멸의 극한을 현실화했다는 의미에서는 총력전의 완성이다. 하지만, 핵전쟁은 근대전쟁이 수반했던 민족적·민중적 동원 체계를 상대화한다는 점에서는 총력전의 초월이다. 핵전쟁은 대중을 전쟁에 참여시키기 보다는 체계적으로 배제하며, 모든 권한을 지배세력에게 집중시킨다. 핵전쟁 발발 여부는 최고 지도자의 배타적 권한에 속하게 되거나,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자동화된 반응으로 진화한다. 민중에 대한 절대적 파괴, 민중의 절대적 소외로서의 핵전쟁에서 더 이상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은 무의미해진다. 이는 '사회주의 조국방어를 위한' 핵전쟁이란 말 역시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4) 핵무기 그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다! 또한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핵전쟁을 막는 유일한 길이라는 믿음은 핵보유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라는 인식을 가로막는다. 핵무기 그 자체가 '절대무기'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핵무기의 개발, 배치, 이전 등 매 국면마다 이를 강행하려는 세력과 막으려는 세력 간의 충돌 위험과 긴장이 발생했다. 미소 간에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변형된 형태의 전쟁과 분쟁 특히 대리전이 냉전시기의 전쟁양상을 지배했던 것도 사실이다. 1970년대 제한핵전쟁 전략이 등장하면서 서유럽과 동유럽은 미소 핵전쟁을 위한 대리 전장으로 전환되었고, 유렵에 강한 긴장과 격렬한 반핵평화운동을 낳았다. 1962년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시도가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쿠바의 사례는 사회운동을 희생시키고, 쿠바 사회주의를 미소 간 핵무기 경쟁의 논리로 포섭하려는 추악한 시도였다).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도 군사적 요충지를 장악하기 위한 미소간의 첨예한 대결과 이른바 미소 대리전이 수십 차례 벌어졌다. 나아가 이러한 과정에서 각국의 민중운동은 소련의 지배전략에 순응하는 지배세력으로 변질되거나 소련 세계전략의 희생양이 되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청년 장교들과 공산당이 연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권력을 장악하면, 소련은 이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소련의 군사기지를 설치했다. 그 후 군부가 공산당 세력을 배제하거나 숙청하더라도 소련이 이를 암묵적으로 승인했다). 이처럼 핵능력을 향상시키고, 군사적 요충지에 배치하려는 모든 시도는 세계의 무차별적 대중을 볼모로 핵보유국의 세력균형을 달성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를 강행하려는 세력과 막으려는 세력 간의 긴장과 대리전을 낳았다. 핵의 존재 자체가 전쟁유발요인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3. 한반도 핵위기의 전망 1) 미국의 대북전략: 구조적 요인 현재 한반도의 상황이 위급하게 전개되면서 북미 간 공식적인 대화채널이 빨리 복원되고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 내 여론조사도 부시 정부가 아무런 조건 없이 북한과 이란과의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 더 높은 비율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사태가 더욱 위중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기대가 쉽게 충족될 수 없는 구조적 요인 때문이다. 오늘 미국의 세계전략은 배제를 동반하며, 북한은 동아이사의 '섬'으로서 포섭과 배제의 경계에 있다. 따라서 미국의 대북전략은 근본적으로 모호하다. 신자유주의 체제전환 이론은 '대폭발'(big bang) 또는 '충격요법'을 선호하고, 정권교체도 승인한다. 따라서 미국의 대북전략에서 민주당과 공화당의 차이는 백지 한 장일 뿐이며, '접촉을 통한 변화' 정책과 '봉쇄' 정책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이러한 사실을 부연해보자. 현재 세계경제를 지배하는 초민족기업의 활동은 점점 더 세계경제의 삼극으로 집중되고 있다. 초민족기업이 구축하는 해외직접투자, 기업 내 무역, 자회사의 수출, 국가 간 하청의 연결망은 북아메리카, 서유럽, 동아시아를 삼극으로 하는 위계화된 세계를 구축한다. 이제 삼극체제 외부의 국가는 시스템의 주변부로 밀려났고, 배제되거나 또는 단순히 관리되는 지역으로서 남게 되었다. 미국 경제는 이미 형성된 부를 금융적 팽창을 통해 빼앗아 배타적으로 향유하려는 새로운 수탈 경로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원조와 역개방을 통한 동아시아 경제육성 모형과 완전히 다르다. 이에 따라 초민족기업이 구축하는 세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통합된 세계'라는 그들의 구호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세계경제 시스템의 삼극을 이루는 동아시아에서 고립된 '섬'으로 남아 있다. 금융세계화라는 맥락에서 북한 경제는 초민족기업이 통합하고자 하는 특별히 매력적인 투자처가 아니다. 최근 동남아시아 경제 역시 중국의 부상으로 인해 중국과 출혈적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고 점차 중국에 비해 이점을 잃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생산거점은 점차 중국으로 집중되고 있다 (한국의 대북경협은 경제외적 동인이 더 강하고, 중국의 대북투자는 원자재 수급에 제한되어 있다). 따라서 미국이 북한에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득 때문에 대북정책을 수립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1990년대까지 미국에게 북한은 1970년대의 중국처럼 거대한 정책전환을 요구하는 대상이 아니었고, 외교정책 상 우선순위에 두는 중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8) 소련의 붕괴, 중국의 체제전환으로 인해 미국의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은 더욱 희미해졌다. 하지만 미국의 사활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동아시아에서 10만 명의 주둔미군과 핵·재래식 전력을 유지할 명분을 찾기 위해 미국은 중국이 핵전력과 대규모 재래식전력을 지닌 '지역강국'(regional power)으로 부상하고 있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9) 이와 동시에 상당한 규모의 재래식 전력과 생화학무기, 잠재적 핵능력을 보유한 북한의 군사적 위험성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북정책에서 군사적 위험성에 대한 강조와 북한의 실질적 변화를 추구하기 위한 전략의 부재가 동시에 나타났다. 그 결과 미국이 북한에 대해 취한 실제 태도는 무엇인가? 실제로 미국에게 북한은 동아시아에서 심각한 교란요인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준으로 봉쇄해야 할 대상 즉 '위기관리'의 대상 정도로 여겨졌다. 특히 미국은 북한을 대량살상무기 확산과 테러리즘 지원을 차단해야 할 상대국 정도로 인식했다. 이런 인식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와 무관하게 미국 정가를 지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대화 분위기를 통해 갈등이 완화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이는 새로운 쟁점을 포괄하면서(북한 핵에서 미사일로, 재래식 전력으로) 더 큰 갈등으로 비약했다. 한편 미국 경제학과 경제정책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이론가들의 입장에도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이미 동유럽에서 '이행기 경제'를 지도하면서 점진주의적 개혁보다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와 같이 충격요법을 통한 급진적 체제전환이 오히려 파생되는 폐해를 줄이고 더욱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보았다. 다만 충격요법의 시행을 위해서는 '정치적 주체'의 문제가 남는데, 이는 이중적 결론으로 나아간다. 기존 특권관료(노멘클라투라)가 충격요법을 가장 잘 실행할 수 있는 주체라면 이들이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실제로 동유럽의 이행기에서 (군사관료를 포함한) 당정관료, 경제관료, 대학관료 등 주요 특권관료는 상징적인 몇몇 인물을 제외하곤 이행기 이후에도 사회를 지배했다. 하지만, 그들이 충격요법을 거부한다면?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노선도 정권교체를 지지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북 인식은 사실상 종이 한 장 차이뿐이다. 북미 갈등은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의 정권교체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며, 양자의 차이는 수단과 절차에 대한 다소간의 이견일 뿐이다. 민주당은 접촉을 통해 변화를 추구한다는 접촉정책(engagement)을 제시했지만, 그 목적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과 확산을 방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며, 군사력 증강을 통해 이를 압박한다는 점에서 냉전 시대의 '봉쇄정책'(containment)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공화당과 민주당의 차이보다는 그들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와 군사주의적 노선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2) 핵폐기 프로그램의 정치적·기술적 난점 북미간의 갈등 사안에서 세부적 쟁점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북미 타협은 요원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상황은 금융제재 중단과 6자회담 복귀의 선후를 두고 교착 상태에 빠져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공식적인 논의테이블이 마련되면,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전기 마련'이란 외양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핵무기를 매개로 하는 협상에서 '잠정적인' 해결책이 나오는 것조차도 얼마나 오랜 기간이 걸릴지, 그 과정에서 어떤 사태가 도래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10) 특히 부시 정부의 등장 이후 미국은 북한 핵 프로그램이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방법'으로 폐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 문구는 이번 UN 제재안에 명문화되었다. 이는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핵연구시설이나 핵발전시설 모두가 폐기되어야 하고, 북한의 모든 시설에 대한 자유로운 사찰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에 북한이 완전히 호응할 것인지, '핵동결'이 어느 수준에서 이뤄질지는 지금으로서 예측하기 어렵다. 그것은 협상의 가장 첨예한 쟁점이 될 것이며, 협상은 항상 더 큰 충돌을 준비할 위험을 내포한다. 또한 IAEA의 사찰활동은 항상 '국가주권'의 경계를 침범하고 I'갈등유발' 행위로 전환되고, 곧장 격렬한 충돌로 비화하곤 했다 (이라크에서 UN의 무기사찰단 활동을 상기하라). 모종의 협상을 통해 북한 일정 수준의 핵폐기 프로그램이 합의되더라도 그 실행가능성은 불투명하다. 부시 정부의 등장 이후, 일부 분석가는 미국 측이 더욱 '대담한' 제안을 내놓아서 클린턴 정부 시기의 지루한 협상을 단번에 넘어설 수도 있다는 기대 섞인 전망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근거 없는 낙관에 불과했다는 게 현실로 증명되었다. 현재의 국면은 미국의 강압적·군사적 대응과 북한이 핵능력 실증을 위한 시도가 회오리처럼 상승할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북미간의 협상이 과연 가능한지, 얼마나 걸릴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4. 북한 핵실험과 반전반핵운동의 과제: 남한에서부터 전쟁유발요인을 제거하자 1) 우리 운동의 맹목을 극복하자 우리는 앞서 핵무기주의가 모든 측면에서 사회주의적 지향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점, 핵전쟁에서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 사이의 구별은 무의미하다는 점, 핵무기 그 자체가 전쟁의 유발요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미국의 대북전략은 접촉을 통한 변화와 봉쇄 사이의 경계에 서있으며, 현재 미국의 강압적·군사적 대응은 북한의 강경대응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지만, 반면 협상을 통한 조정 가능성은 그리 밝지 않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여기에서 민중운동 일각에서 주장하는 '북미 일괄타결'이 안고 있는 맹점을 지적하자. 첫째는 북미갈등이 장기화될 때 북한의 추가 핵실험을 비롯한 핵무장화의 단계적 진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는 문제다. 여기서 일괄타결 주장은 미국의 강압적·군사적 대응이 지속되는 한 협상수단이든 자위수단이든 북한의 핵보유를 지지해야 한다, 또는 최소한 주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내포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핵문제에 대한 대중의 비판적 인식을 가로막을 수밖에 없으며 반전반미, 반핵평화운동의 대중적 토대마저 상실케 할 위험마저 있다. 최근 MBC 여론조사 결과, '자위적 수단으로 북한이 핵실험을 할 수 있다'는 견해가 30%를 넘었다. 이러한 견해는 과연 진보적인 것인가? 이는 남한의 핵무장을 지지하는 입장과 공명하며, 핵의 위험성에 대한 반전평화운동의 모든 노력을 무화시킬 위험이 크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에 대한 민중운동의 모호한 입장은 핵문제에 대한 대중적 혼란이나 무감각을 조장한다. 오히려 우리는 북한 핵보유에 대한 방어적·수세적 관점을 전도하여 적극적인 반핵평화운동을 지향함으로써 미국의 핵전쟁 위협과 남한의 독자적 핵무장화 주장을 적극적으로 무력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반공·반북주의에 기반을 두고 미국의 핵우산(핵공격·핵위협)을 지지하는 한국의 보수세력과 신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적극적인 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 둘째, 국가 간 외교를 통한 해결책의 모색은 국가 간 외교의 담당자, 즉 정치세력(정당)에 대한 선택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즉 당선 가능한 '온건세력'을 지지하는 게 현실적 대안이라는 대중의 인식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다시피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과 노무현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을 추종하고, 북한에 대한 강압적·군사적 수단을 강화하는 데 적극 기여했다. '그래도 부시는 안 된다, 한나라당은 안 된다'는 인식은 이러한 악순환을 부채질하며, 대중운동이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전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셋째, 최근 북미협상의 기본구도를 검토하면, 북한의 협상전략이 대체로 방어적, 수세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압도적으로 북한에게 불리한 세력관계를 반영하며, 현 사태로 북미 간에 일정한 타협이 이뤄지더라도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력은 근본적으로 침식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11) 또한 북미간의 대결과정에서 한국, 일본, 중국, 대만 등 동북아시아 전반의 무기 증강 시도는 더욱 힘을 얻을 것이다. 일본은 비핵보유국 중에서 유일하게 핵재처리 시설을 공인 받고 있으며, 핵물질과 핵기술 양 측면에서 언제라도 핵보유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일본은 북한의 핵실험 이후 지속적으로 핵무장화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중국은 군사력 현대화 프로그램에 착수한 후 최근 사거리 7000km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 중이이다. 대만 역시 과거에 핵개발을 시도한 적이 있으며, 중국의 '무력통일' 시도를 막으려면 궁극적 대안은 핵개발 밖에 없다고 확고히 믿는 세력이 잠재하고 있다. 어느 시점까지는 미국의 적극적인 반대 때문에 한국, 일본, 대만이 핵을 보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각국이 핵보유 능력을 꾸준히 향상하고 있다는 것 역시 현실이다. 북미 일괄타결만으로는 이러한 경향을 막을 수 없다. 동아시아 전쟁의 근본적 유발요인인 주둔미군의 철수와 한미일 삼각동맹의 해체를 목표로 하는 반전평화운동이 활성화되지 않는다면 이런 경향은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강화될 것이다. 넷째, 북미갈등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든 간에, 북한의 핵무기가 '자위용'이 되든지 아니면 '협상용'이 되든지 간에 북한의 핵개발은 동일한 파급효과를 낳는다. 북한의 핵실험은 강대국의 핵독점체제를 파괴하는 신호탄이 되고, 세계 각국의 핵개발 의지를 북돋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세계를 더욱 큰 위험과 혼돈을 초래한다. 북한 핵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일시적'인 방편이라거나 북한의 핵개발은 다른 나라의 핵개발과 다르다는 주장은 이러한 현실을 애써 감추는 것일 뿐이다. 2) 반전반미, 반핵평화의 기치로 그렇다면 우리의 대안을 가로막는 가장 강고한 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막는 군사적 억지력이란 믿음이며, 한국의 대중을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는 핵무기숭배나 핵문제에 대한 무감각이다. 따라서 우리의 실천은 반전반미, 반핵평화라는 견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첫째 미군이 한반도의 군사적 억지력이란 믿음과 정반대로 한미동맹의 강화, 주한미군의 주둔, 미국의 핵우산과 선제핵공격 옵션이 한반도 전쟁의 유발 요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주장하자. 미국은 신무기를 도입하지 않는다는 정전협정의 조항을 파기하고 1957년 핵무기를 도입했고, 1990년대 초반까지 수백 또는 천여 개의 전술핵무기를 배치하고 핵전쟁 연습을 실시했으며, 지금도 북한을 선제핵공격의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다. 미국의 핵패권주의와 절멸주의야말로 세계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강력히 제기하자. 둘째, 노무현정부의 모든 군사주의적 노선을 반대하고, 남한에서부터 전쟁유발요인을 제거하기 위한 투쟁을 펼쳐나가자. 최근 노무현정부는 주한미군 재배치(한강 이남으로 이전)와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허용함으로써 한반도에서 미국의 전쟁 개시 가능성을 더 높이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노무현정부는 이지스함,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도입함으로써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 시스템을 암묵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노무현정부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빌미로 한국의 무기증강을 시도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 모든 움직임이 긴장과 갈등을 유발하고 전쟁의 실행 가능성을 높이려는 시도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주둔미군의 철수, 호전적 한미동맹의 해소, 한반도 군비감축을 통해 전쟁유발요인을 남한에서부터 제거하는 것이 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낮추는 가장 확실한 방안이다. 그것은 적대국이나 경쟁국이 '먼저 해야 한다' 또는 '동시에 해야 한다'는 세력균형 논리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따라서 남한에서부터 일방적인 군비축소와 전쟁태세 해소가 이뤄져야 한다는 우리의 이상을 확실하게 천명하자. 셋째, 핵무기에 대한 숭배나 무감각을 깨고, 핵무기주의에 철저히 반대하자. 2005년 8월 미국의 핵폭격 5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가 해외기관과 공동으로 진행한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남한의 핵문제에 대한 인식이 어떤지 그 단면을 파악할 수 있다. 일본의 86%, 독일의 93%가 핵보유에 대해 반대의견을 피력했지만, 한국은 52%가 핵보유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30, 40대 응답자들은 20대나 50대 이상에 비해 한국의 핵무기 보유 찬성률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고(각각 58.5%, 58.7%, 46%, 46.35%), 북한의 핵 보유를 용인하는 비율도 더 높았다. 그리고 북한의 핵실험 이후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 비율은 더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기류는 동아시아의 핵무장화에 크나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핵무기주의는 민중에 대한 절대적 파괴와 절대적인 정치적 소외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하자. 넷째, 현재 대북제재를 강화하려는 모든 움직임은 제국주의적 논리의 연장이며 전쟁의 은폐된 형태일 뿐이라고 분명히 주장하자. 이미 포괄적 경제제재가 야기한 대규모 참상은 이라크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그것은 민중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 기아와 죽음을 낳으며, 폭력의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미국의 대북제재 움직임은 북한의 핵무장을 촉발하고, 남한의 정치이데올로기 지형을 냉전 시대의 맹목적 대결 양상으로 치닫게 함으로써 반전평화 운동의 싹을 짓밟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이러한 전망으로 남한의 민중운동은 반전반미, 반핵평화의 기치로 장기적인 운동을 실천해야 한다. 국가들 간의 세력균형을 통한 '공포의 균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의 반전반미, 반핵평화운동이 정세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실천이 절실하다. '여건상 미국이 당장 북한과 전쟁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는 비핵화를 위한 일시적 대책일 뿐이다'라는 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와 운동을 재활성화하기 위한 계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1) 'Sanction, Genocide and War Crimes', A Paper Presented to the International Law Association on 29 February 2000 BY Shuna Lennon LLB (Hons). (http://www.zmag.org) 본문으로 2) 이라크 제재의 참상에 대한 국제적 고발이 이어지자 미국 중도파를 중심으로 제재 프로그램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제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첫째 국제사회의 협력이 전제되어야 하며, 둘째 목표가 된 정부는 국내적 저항에 직면해 있어야 하며, 셋째, 제재와 인센티브가 결합되어야 한다. 또한 포괄적, '우둔한' 무역제재가 아니라 목표가 분명한, '영리한' 제재(smart sanction)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전자가 전체 인구에게 고통을 안겨준다면, 후자는 정부기구나 군사기구에 초점을 맞추는 세심한 제재를 뜻한다. 포괄적 제재가 낳는 문제를 고려할 때, 목표가 된 사회에서 책임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제재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 (특정집단에 대한 금융제재나 압류, 여행금지 등). 나아가 모든 사회 부문(기업, 공동체)으로 범위가 확장되어야 한다면, 제재의 대상은 그 사회의 전략 물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무기, 석유생산물, 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처럼 정책결정가에게 큰 이익을 주는 상품). 그러나 영리한 제재 프로그램 역시 강대국의 이익을 위한 위압적 수단이며, 오히려 더욱 강도 높은 제재에 앞서 명분을 쌓기 위한 예비 단계를 제시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본문으로 3) 현재 UN 결의안은 전면적 경제제재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미국이 한국에 요구하는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사업의 '일시적' 중단은 포괄적 제재가 가해질 수 있다는 미국의 위협을 뜻한다. 최근 중국은 북한이 6자회담 복귀를 거부하거나 추가 핵실험을 강행할 경우 몇 주 안으로 석유공급을 단계적으로 삭감할 준비가 돼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중국은 현재 북한 수입 석유량의 80~90%를 국제가격보다 매우 낮게 공급하고 있는 만큼, 이에 제재가 가해지면 북한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보도에 따르면 아직 중국이 대북 곡물공급 중단 문제를 고려하지는 않는 듯 보인다). 또한 '인도적' 지원의 삭감 또는 중단은 북한 민중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다. 현재 북한이 연간 필요로 하는 식량은 500-650만 톤이지만, 실제로 북한의 생산능력은 350-400만 톤 수준이라는 분석이 있다. 인도적 지원이든, (저가격, 대금납입 연기 등 지원의 성격이 강한) 상업교역을 통해서든 부족분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엄청난 규모의 기아와 죽음을 낳을 수밖에 없다. 본문으로 4) 소련의 핵개발에 대한 열광은 결국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노심용해라는 대파국으로 끝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체르노빌의 대비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가난한 노동자들이 핵오염 때문에 목숨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지금도 남아 있는 폭발 현장의 잔해처리 작업으로 연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사고 복구 작업에 참가한 노동자 가운데 사망한 사람만 8천여 명에 이르며 1만 2천여 명이 심각하게 방사능에 피폭됐다고 밝혔다. 독일 뮌헨 방사선 연구소는 사고 후유증으로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을 포함해 모두 7만여 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했다. 여기에 방사능 유출로 인해 암에 걸린 사람을 합하면 사망자는 10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다. 얼마 전 그린피스는 암 이외의 질병까지 포함해 사망자가 20만 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한겨레21 2006년 4월 26일자(606호) '지옥의 르네상스 계속되는가'를 보라.) 본문으로 5) 박준도, '핵경쟁과 핵확산, 비극의 역사'(『사회운동』 2005년 10월호)를 보라. 또한 소련 사회성격에 대한 분석으로는 샤를 베틀렘, '소련에서의 계급투쟁: 서문'(『사회진보연대』 2002년 3월호)을 보라. 본문으로 6) 에티엔 발리바르 '전쟁으로서의 정치, 정치로서의 전쟁: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변이들'(『사회운동』 2006년 10월호)을 보라. 본문으로 7) 20세기 전쟁에서 대략 1억 5천만 명이 사망했다. 이들 중 비전투원 비율이 전투원 비율보다 훨씬 높다.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모두 1억 명이 사망하였는데, 이 중 3/4이 비전투원이다. 갈수록 비전투원의 사망률은 높아져 2차 대전 이후에는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가운데 자그마치 4/5가 비전투원이며, 난민은 2천 4백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은 1천 8백만에 이른다. (박준도, '핵경쟁과 핵확산, 비극의 역사') 본문으로 8) 임필수, '2000년대 미국의 대외정책과 한반도'(『사회진보연대』 2000년 5월)를 보라. 본문으로 9)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의 군사모델은 오직 '고강도전쟁'과 '저강도전쟁'이라는 두 가지 모델밖에 없었다. 고강도전쟁은 유럽전역에서 나토 동맹국가들과 바르샤바조약기구 동맹국가들간의 대규모 전면전을 상정한 것으로서, 이 전략에는 핵전쟁에 대비해 핵무기의 선제사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저강도전쟁은 제3세계의 급증하는 게릴라전이나 '민족해방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계발되었으며, 반란 지원 또는 반공폭동의 지원, 군대파견 등이 포함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군사전략은 냉전체제의 급속한 붕괴 이후 오히려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즉 소련이 붕괴하고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된 마당에 고강도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대규모 전력을 유지할 명분이 사라졌으며, 만약 저강도전쟁만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이는 당시 미군의 10분의 1의 규모만 있어도 충분히 가능했다. 이러한 심대한 위기에 직면하여 미국은 새로운 적을 필요로 하였다. 미국은 비교적 대규모의 재래식전력과 초보적인 핵·화학·미사일 능력을 갖추었거나 갖추리라 추측되는 '지역강국'들을 주목하면서 이른바 '중강도전쟁'이라는 군사전략 개념을 계발하기에 이른다. 이는 미국의 군사안보를 위협하는 적으로 묘사되기에 시기적절했고, 걸프전쟁을 걸치면서 1990년대 초반 미국의 군사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 수정이 가해진다.) 본문으로 10) 클린턴 정부 말미에 발표된 북미 공동코뮤니케를 클린턴 정부 스스로 파기한 사건을 회고해 볼 필요가 있다. 2000년 10월 12일 발표된 북미 공동코뮤니케는 '미국 대통령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올브라이트장관이 북한을 방문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선언은 북한의 장거리미사일에 대한 협상타결이 임박했다는 신호였고, 미국과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관련 부품 및 기술의 수출, 특정 사거리의 미사일의 자체 실험 및 생산의 중단 문제에 관해서 대체적인 합의를 이룬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이 북한 영토에 직접 들어가 '검증'하는 문제와 일본을 향해 이미 배치된 약 100여기의 노동미사일의 해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합의는 무산되었고, 클린턴의 방북 역시 중단되었다. 한편 클린턴의 퇴임 이후 새로 등장한 부시 정부는 다음과 같은 노선을 검토했다. ① 제네바합의 자체를 변경하거나(경수로 제공 중단, 화력 발전으로 대체), ② 북한의 미사일 및 재래식전력의 감축 요구를 제네바합의 이행과 연계하거나, ③ 제네바합의는 존중하되, 그 외 추가적인 협상 의제에 대해서는 미국의 요구가 선결적으로 관철될 때까지 북한의 요구를 계속 무시하고, 만약 북한이 이에 반발하여 '도발행위'를 감행할 경우 군사적 응징조치를 취한다. (사회화와노동, '미국의 우산 속의 햇볕정책, 그 한계는 드러나는가?'(2001년 2월 28일)를 보라) 북한 핵프로그램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폐기'는 부시정부의 검토 사항을 종합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본문으로 11) 지난 1994년 제네바합의는 북한이 흑연감속로를 포기하는 대신에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위협·핵사용을 하지 않으며 연락사무소 설치로부터 대사급 관계로 격상해 나간다고 약속했다. 2005년 6자회담의 9·19합의는 북한이 모든 핵무기·핵프로그램의 포기하는 대신에 미국은 핵공격뿐만 아니라 재래식공격도 하지 않으며 북미간 정상화 조치를 취해나간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북한의 체제보장과 미군의 동아시아 주둔을 맞바꾸는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