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노무현 정부는 폭력탄압 사죄하고 한미 FTA 중단하라!
1. 제주에서 열리고 있는 한미 FTA 4차 협상에 반대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위대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연일 폭력진압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1만 명에 달하는 경찰병력을 뭍에서 군사작전 하듯 수송하여 FTA반대 시위대를 짓밟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집회를 불법화하고 23일에도 폭력적인 강제진압으로 일관하더니 24일에는 무차별적으로 방패와 곤봉을 휘두르고 물대포를 쏘아대서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방송차량마저 두들겨 부수고 차량 운전자와 집회사회자를 집단 폭행했다. 지금 제주도는 사상 최대의 병력이 들어가 있는 준 계엄상태다. 정녕 노무현 정부는 FTA에 반대하는 범국민적인 여론을 폭력으로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2. IMF 위기 이후 가속화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한국사회는 피폐할 대로 피폐해져 있다. 실업자가 양산되고 사회양극화는 극에 달해 초국적자본, 소수 재벌들과 가진 자들은 부를 누리고 있지만 빈곤층은 1천만 명이 넘고 노동자, 농민들의 삶은 나락에 빠져 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문제를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화하여 해결하자고 한다. 앞뒤도 맞지 않거니와, 누가 보아도 한미 FTA는 국내외 초국적자본과 지배계층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3. 노무현 정부는 졸속적이고 일방적인 협상, 대다수 국민들의 생존조건을 악화시킬 FTA를 추진하면서 미국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국민들에게는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 교육, 의료, 물, 전기, 가스 등 공공서비스의 사유화와 개방화, 농업 개방과 농민생존 파탄, 초국적 금융자본의 금융투기 확대, 외국투자자들의 권리 강화, 노동권 약화 등 어느 것 하나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정부에서 돈을 쏟아 부어 한미 FTA 찬성 광고를 해대도 대다수 여론은 FTA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4. 민중의 의사를 무시하고 폭력만 행사하는 정권, 미국과 초국적자본, 재벌과 지배계층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정권을 민중은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 한 번 시작했기 때문에 협상을 끝까지 할 수밖에 없다는 오만한 생각을 가지고 귀를 닫고 눈을 감고 있다면, 노무현 정부는 역사와 민중에 죄만 짓고 물러나게 될 것이다.
2006. 10. 24
사회진보연대
정부는 지난 8월 9일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발표했다. 언론은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이 대거 정규직화되는 것처럼 보도했고,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를 공공부문이 선도한다고 선전했다. 경총 등 자본측에서는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은 민간부문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면서 정부를 비난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은 공공부문부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정부의 의지가 담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부 대책이 나오는 과정이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기대는 무리였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정부 대책이 처음 준비된 '4월 11일' 정부가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처음 준비한 것은 4월 11일 열린 '국정과제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노동부에 지시를 하고 나서부터였다. 당시 회의 주제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이었는데, 이는 국회에 계류 중이던 정부의 비정규법안 개악안에 대한 내용이 논의되었음을 의미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도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럼 4월초는 어떤 시기였을까? 민주노총은 4월 17일 대의원대회를 예정하고 있었고 총파업 결의를 안건으로 상정한 시기였다. 실제 과정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법안 처리가 연기되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정부는 5월초까지 비정규법안을 처리하겠다고 공언하던 시기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부의 비정규직 개악안과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 같은 맥락에서 논의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태생적인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연관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는 이제부터 정부 대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알게 될 것이다. 김근태의 뉴딜 행보와 정부대책이 발표되기까지 정부 대책은 정부 내에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추진위원회'가 관계부처 합동으로 구성된 5월 4일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한다. 정부는 내년 예산에 비정규직대책의 내용을 반영하기 위해서 8월까지는 정부 차원의 대책 수립을 마무리하고 부처별로도 8월중으로 예산을 책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을 작성한다. 이에 따라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책수립 계획이 마련된 5월 중순 이후, 약 20여 일간 전국의 1만 여개 공공기관에 대한 비정규직 실태 전수조사와 (중앙행정기관, 공기업·산하기관, 학교, 지방자치단체 등 69개 조사 기관에 대한) 심층조사가 이루어진다. 이 방대한 자료는 7월초까지 정리가 되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연구원은 1차적으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여 노동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촉박한 실태조사는 아무래도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어느정도 조사가 진행되고 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점검하고 심층조사까지 진행하며, 자료로서 활용 가능하도록 정리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부실함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예를 들어 지방자치단체에 비정규직 환경미화원(외주·용역 포함)은 불과 3천 여명이라고 발표되었는데, 그 수치는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환경미화원 숫자 규모에 불과하다. 또한 주요 대학의 청소용역노동자가 200여명 이상은 되는 상황에서 전국의 국공립대학 전체에 불과 천 여명의 청소용역노동자가 있다는 조사결과는 당장 수치상으로만 보더라도 조사가 부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부가 이번 대책 중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비정규직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각 기관에서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기관에서 사용자조차도 자기 기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의 정확한 규모와 실태를 알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이렇게 기초 실태조사가 부실한 상태에서 마련된 대책이라는 것이 가지는 한계는 분명하다. 비정규직의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위한 기본적인 예산과 제도개선의 필요성마저도 제대로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노동연구원이 노동부에서 용역을 받아 작성한 연구보고서까지만 해도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 사용이 가지는 문제점을 인정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이후 노동부는 두 차례 정도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과 간담회를 진행한 바 있는데, 이 과정에서 소개된 '초안'도 한계는 분명했지만 긍정적인 부분이 없지 않았다. 노동부는 우선적으로 7월 24일, 열린우리당과 당정협의를 갖고 대책초안을 발표한다. 당시 발표가 있은 이후 열린우리당의 우원식 의원은 정부 조사 상 약 31만 명 중 18만 명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가 상시고용 되어있기 때문에 정규직화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정부 내 협의를 통해 최종안을 준비하는 사이, 김근태 열린우리당 대표의 '뉴딜' 행보가 계속되었다. 재벌과의 간담회에서 자본측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직접 언급하면서 '우려'를 나타내었다. 이후 노동부의 최종안 발표는 7월말에서 8월초로 연기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안은 수정되었다. 그 수정결과가 바로 우리가 들고 있는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다. 여기에는 애초 '정규직화'로 되어 있던 대책의 핵심이 '무기계약'으로 변화한 것은 물론, 그 규모도 5만 4천명으로 크게 줄었다.1) 외주·용역과 관련된 각종 규제도 후퇴해있었다. 저임금과 차별을 고착화하는 '무기계약화' 언론의 발표와는 달리 이번 대책의 핵심내용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아니다. 기관의 기존 정규직 직제로의 편입과 이를 통한 고용안정·차별해소를 의미하는 '정규직화'라는 표현을 정부는 한사코 거부하고 '무기계약화'라는 용어를 고집했다. 기존의 정규직과 같은 처우를 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이렇게 나오는 것은 정부 스스로 추진하고 있는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있다. '기간제근로자보호법안'에 따르면 2년 이상 근무한 기간제 노동자에 대해서는 정규직(무기근로계약)으로 간주한다는 조항이 있다. 정부는 이 법안을 올해 하반기에 기필코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공공부문에서도 장기간 같은 업무에 기간제 노동자를 고용하지는 못하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예산적용시기, 제도변경에 소요되는 기간 등을 예상하여 이번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올해 마련된 대책은 예산 수립과의 관련성 때문에 2008년에야 적용되는데 이 시기가 되면 공공부문에서도 기간제 노동자의 고용보장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게 된다. 정부 대책에 언급하고 있는 '무기계약화'는 현재의 처우를 유지한 가운데, 1년 단위, 혹은 6개월 단위로 이루어지던 고용계약을 자동으로 갱신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고용하던 노동자들의 처우는 개선할 수 있는 대책이 되지 못한다. 정부가 밝힌 정규직화 대상인원 5만 4천명은 결국 저임금 일자리를 5만 4천개 만든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공공부문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며 정부의 비정규법안 개악안이 통과될 경우 민간부문에도 폭넓게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으로 금융부문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주로 채워오던 은행 창구 직원 등에 대해서 현재의 처우를 유지하는 가운데 새로운 직제를 신설하여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이른바 금융권의 '신인사제도'와 '직군분리제'2) 이 과정에서 고과평가제도를 엄격하게 적용하여 일정한 점수에 미달하는 노동자는 매년 해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여 고용불안과 노동자 사이의 경쟁, 노동강도 강화를 조장한다. 구조조정의 방식으로서 외주·용역의 활성화 이번 대책의 중요한 특징은 외주·용역 등 간접고용 확산을 규제한다는 미명하에 오히려 광범위하게 외주·용역을 활성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IMF 외환위기 때 공공부문에 대한 1차 구조조정이 완료된 이후 공공부문의 구조조정 양상은 변화하고 있다. 공기업 전체를(주로 초민족금융투기자본에) 매각하고 인원을 정리해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1차 구조조정과는 달리, 최근에는 공기업의 분할매각, 외주·용역 등 아웃소싱의 활성화를 통한 업무분할과 수익성 재고가 특징적이다. 이번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은 이러한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논리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고 이를 보완하고 있다.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관리 정책이라는 것이 공공부문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한다. 이번 정부 대책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공기업들도 나름대로 '대책'을 준비해왔다. 대표적인 공기업인 철도공사는 "비정규직보호법안관련 비정규계약직 대책 검토(안)"이라는 내부 문서를 작성했다가 노동조합이 이를 확보하는 바람에 폭로되었다. 이 문서를 보면 철도공사는 자체적으로 예산절감을 위하여 기존의 비정규직을 외주화하려는 자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 직접고용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동일업무를 수행하는 상황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차별처우를 개선할 경우 수 십억 원의 예산이 추가 소요될 것이라고 보고 외주화를 중심으로 하는 구조조정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이다.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나 '기간제근로자보호법안'에 따라 그나마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무기계약'으로 전환하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철도공사는 1단계로 2007년 1월까지 현재의 비정규직업무를 모두 외주화하고, 반드시 필요한 업무를 정규직으로 전환배치하려고 계획했다. 이 경우 해당업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해고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2008년까지는 외주화된 업무에 함께 근무하는 정규직 노동자도 외주화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어 이 계획이 단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뿐만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상시업무이지만 정규직 업무 대상이 아니라고 자의적으로 판단된 업무에 대해서는 법에 예외로 규정된 고령자를 채용한다는 계획까지 있다. 정부는 이번 '공공부문비정규지대책'에서 기관의 "핵심-주변" 업무를 구분하고, 이에 따라 "핵심"업무는 정규직 사용을 원칙으로, "주변" 업무에 대해서는 외주화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주변"으로 규정되는 업무가 너무나 자의적이라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한국공항공사'는 자신의 주업무인 공항시설관리업무를 '현업업무'라는 이유로 "주변"업무로 취급하고 전체를 외주화하였다. 지방자치단체는 법률에 지자체장의 책임으로 규정된 생활폐기물 처리 업무를 '단순노무'라는 이유로 민간위탁하고 있다. 또한 상수도 사업에서는 '세계적인 물기업 육성' 운운하면서 민간위탁을 확산시킨다. 게다가 "핵심"으로 규정된 업무라도 비용절감 효과가 큰 경우에는 외주화가 가능하다. 결국 모든 종류의 공공부문 업무에 대한 외주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이번 대책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최근 확산되고 있는 고용의 원거리화를 공공부문에서도 전면적으로 적용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 효과는 이미 각종 공기업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최근 철도공사를 제외하고도 몇몇 주요 공기업에서는 신규계약을 1년 단위가 아니라 3~6개월 단위로만 체결하면서, 계약기간이 만료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 순차적으로 계약을 해지하고 있다. 이번 정부대책에서 말하는 '무기계약화'조차 예산이 적용되는 2008년부터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공공기관에서는 2007년 말까지 대부분의 기간제 노동자에 대해서 계약해지를 통보를 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정부의 비정규직 개악안이 통과될 경우 우려했던 비정규직노동자의 대량해고가 공공부문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비정규직 개악안과 다르지 않은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은 정부가 하반기에 반드시 통과시키기 위해 벼르고 있는 비정규직법안 개악안을 공공부문에서부터 사전에 준비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그 효과는 저임금의 차별적인 일자리를 고착화하고 외주·용역 등 아웃소싱을 확대하는 구조조정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 대목을 보면 정부는 스스로 민간부문에 '모범'을 보이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정규직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고 관리하면 되는지를 정부는 민간 자본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인 불안요인으로 확대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관리하면서도 계속적인 착취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공공부문이든 민간부문이든 자본의 입장에서 관건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부가 이번 대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현안 문제로 투쟁하고 있는 공공부문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투쟁의 원인이 되는 제도적인 모순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3) 따라서 우선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 가지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 대책과 관련하여 '정부도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한계가 있으니 참여해서 몇몇 조항을 넣어보자'는 식의 요구는 사실상 적용되기 난망하다. 이미 정부 대책의 기조가 현장의 개별적인 요구조차도 인정할 수 없도록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기조는 정부의 비정규법안 개악안 추진과도 완전히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에 대한 투쟁은 하반기에 다시 예정되어 있는 비정규법안 개악안 저지 투쟁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야한다. 정부가 공공부문에서부터 자신들의 개악안을 적용하려고 시도한다면 공공부문에서도 선도적으로 정부의 의도를 저지하는 것은 물론, 정부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책'이라는 것이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고착시키고 고용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밝혀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서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현안투쟁 사업장은 물론 정규직 노동조합도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 단지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투쟁해야한다. 이번 정부 대책은 공공부문이 신자유주의적 (인력)구조조정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매뉴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 대책이 발표되고 나서 당장 시작되고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현장의 구조조정에 적극대응하고 이러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투쟁할 수 있도록 조직해야한다. 1) 5만 4천이라는 규모를 산출한 과정은 주먹구구 식었다. 노동부는 기간제 계약직 중 1년 이상 계약직은 10만 8000명 가량이라고 예상하고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이 심의를 통해 필수업무의 상시 종사자로 판정 받고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5만4천이라는 수치를 제시한다. 이는 어떠한 구체적인 근거도 없다. 한편, 언론에서는 학교 조리종사원과 각 기관의 사무보조원, 청소, 시설관리 노동자들을 일차적 심의 대상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정작 노동부는 직종별 대책을 세우는 것은 아니며, 1년 이상 근무한 상시업무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 교육인적자원부는 대표적인 정규직화 대상 직종으로 보도된 학교 조리종사원에 대해서 이들은 상시노동을 하지 않으므로 정규직화(무기계약화) 계획이 전혀 없다고 밝히고 있는 실정이다. 본문으로 2) ‘금융권 신인사제도, 차별시정의 대상인가?’ 토론회(창구업무 여성 비정규직 사례를 중심으로), 단병호 의원실 본문으로 3) 정부는 이번 대책에서 △ 철도노조 KTX승무지부와 마사회, 부산지하철매표소의 불법파견 문제, △ 옥천 환경미화원의 저가낙찰제로 인한 해고, △ 전북도청, 광주 마사회의 용역업체 변경으로 인한 해고 등 제도적 문제에 대해서는 신기하게도 전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원청 기관의 책임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본문으로
정부는 지난 8월 9일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발표했다. 언론은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이 대거 정규직화되는 것처럼 보도했고,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를 공공부문이 선도한다고 선전했다. 경총 등 자본측에서는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은 민간부문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면서 정부를 비난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은 공공부문부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자하는 정부의 의지가 담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부 대책이 나오는 과정이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기대는 무리였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정부 대책이 처음 준비된 '4월 11일' 정부가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처음 준비한 것은 4월 11일 열린 '국정과제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노동부에 지시를 하고 나서부터였다. 당시 회의 주제는 '비정규직 종합대책'이었는데, 이는 국회에 계류 중이던 정부의 비정규법안 개악안에 대한 내용이 논의되었음을 의미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도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럼 4월초는 어떤 시기였을까? 민주노총은 4월 17일 대의원대회를 예정하고 있었고 총파업 결의를 안건으로 상정한 시기였다. 실제 과정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법안 처리가 연기되었지만, 당시 상황에서 정부는 5월초까지 비정규법안을 처리하겠다고 공언하던 시기였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정부의 비정규직 개악안과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 같은 맥락에서 논의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태생적인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연관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는 이제부터 정부 대책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알게 될 것이다. 김근태의 뉴딜 행보와 정부대책이 발표되기까지 정부 대책은 정부 내에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추진위원회'가 관계부처 합동으로 구성된 5월 4일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한다. 정부는 내년 예산에 비정규직대책의 내용을 반영하기 위해서 8월까지는 정부 차원의 대책 수립을 마무리하고 부처별로도 8월중으로 예산을 책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을 작성한다. 이에 따라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대책수립 계획이 마련된 5월 중순 이후, 약 20여 일간 전국의 1만 여개 공공기관에 대한 비정규직 실태 전수조사와 (중앙행정기관, 공기업·산하기관, 학교, 지방자치단체 등 69개 조사 기관에 대한) 심층조사가 이루어진다. 이 방대한 자료는 7월초까지 정리가 되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연구원은 1차적으로 공공부문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여 노동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촉박한 실태조사는 아무래도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어느정도 조사가 진행되고 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점검하고 심층조사까지 진행하며, 자료로서 활용 가능하도록 정리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부실함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예를 들어 지방자치단체에 비정규직 환경미화원(외주·용역 포함)은 불과 3천 여명이라고 발표되었는데, 그 수치는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환경미화원 숫자 규모에 불과하다. 또한 주요 대학의 청소용역노동자가 200여명 이상은 되는 상황에서 전국의 국공립대학 전체에 불과 천 여명의 청소용역노동자가 있다는 조사결과는 당장 수치상으로만 보더라도 조사가 부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정부가 이번 대책 중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비정규직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각 기관에서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기관에서 사용자조차도 자기 기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의 정확한 규모와 실태를 알지 못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다. 이렇게 기초 실태조사가 부실한 상태에서 마련된 대책이라는 것이 가지는 한계는 분명하다. 비정규직의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위한 기본적인 예산과 제도개선의 필요성마저도 제대로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노동연구원이 노동부에서 용역을 받아 작성한 연구보고서까지만 해도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 사용이 가지는 문제점을 인정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이후 노동부는 두 차례 정도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과 간담회를 진행한 바 있는데, 이 과정에서 소개된 '초안'도 한계는 분명했지만 긍정적인 부분이 없지 않았다. 노동부는 우선적으로 7월 24일, 열린우리당과 당정협의를 갖고 대책초안을 발표한다. 당시 발표가 있은 이후 열린우리당의 우원식 의원은 정부 조사 상 약 31만 명 중 18만 명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가 상시고용 되어있기 때문에 정규직화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정부 내 협의를 통해 최종안을 준비하는 사이, 김근태 열린우리당 대표의 '뉴딜' 행보가 계속되었다. 재벌과의 간담회에서 자본측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직접 언급하면서 '우려'를 나타내었다. 이후 노동부의 최종안 발표는 7월말에서 8월초로 연기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부안은 수정되었다. 그 수정결과가 바로 우리가 들고 있는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다. 여기에는 애초 '정규직화'로 되어 있던 대책의 핵심이 '무기계약'으로 변화한 것은 물론, 그 규모도 5만 4천명으로 크게 줄었다.1) 외주·용역과 관련된 각종 규제도 후퇴해있었다. 저임금과 차별을 고착화하는 '무기계약화' 언론의 발표와는 달리 이번 대책의 핵심내용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아니다. 기관의 기존 정규직 직제로의 편입과 이를 통한 고용안정·차별해소를 의미하는 '정규직화'라는 표현을 정부는 한사코 거부하고 '무기계약화'라는 용어를 고집했다. 기존의 정규직과 같은 처우를 해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이렇게 나오는 것은 정부 스스로 추진하고 있는 비정규직 법안과 관련있다. '기간제근로자보호법안'에 따르면 2년 이상 근무한 기간제 노동자에 대해서는 정규직(무기근로계약)으로 간주한다는 조항이 있다. 정부는 이 법안을 올해 하반기에 기필코 통과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공공부문에서도 장기간 같은 업무에 기간제 노동자를 고용하지는 못하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예산적용시기, 제도변경에 소요되는 기간 등을 예상하여 이번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올해 마련된 대책은 예산 수립과의 관련성 때문에 2008년에야 적용되는데 이 시기가 되면 공공부문에서도 기간제 노동자의 고용보장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게 된다. 정부 대책에 언급하고 있는 '무기계약화'는 현재의 처우를 유지한 가운데, 1년 단위, 혹은 6개월 단위로 이루어지던 고용계약을 자동으로 갱신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저임금의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고용하던 노동자들의 처우는 개선할 수 있는 대책이 되지 못한다. 정부가 밝힌 정규직화 대상인원 5만 4천명은 결국 저임금 일자리를 5만 4천개 만든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공공부문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며 정부의 비정규법안 개악안이 통과될 경우 민간부문에도 폭넓게 확산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으로 금융부문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주로 채워오던 은행 창구 직원 등에 대해서 현재의 처우를 유지하는 가운데 새로운 직제를 신설하여 기간의 정함이 없는 고용계약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이른바 금융권의 '신인사제도'와 '직군분리제'2) 이 과정에서 고과평가제도를 엄격하게 적용하여 일정한 점수에 미달하는 노동자는 매년 해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여 고용불안과 노동자 사이의 경쟁, 노동강도 강화를 조장한다. 구조조정의 방식으로서 외주·용역의 활성화 이번 대책의 중요한 특징은 외주·용역 등 간접고용 확산을 규제한다는 미명하에 오히려 광범위하게 외주·용역을 활성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IMF 외환위기 때 공공부문에 대한 1차 구조조정이 완료된 이후 공공부문의 구조조정 양상은 변화하고 있다. 공기업 전체를(주로 초민족금융투기자본에) 매각하고 인원을 정리해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던 1차 구조조정과는 달리, 최근에는 공기업의 분할매각, 외주·용역 등 아웃소싱의 활성화를 통한 업무분할과 수익성 재고가 특징적이다. 이번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은 이러한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논리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고 이를 보완하고 있다.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관리 정책이라는 것이 공공부문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맥락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한다. 이번 정부 대책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공기업들도 나름대로 '대책'을 준비해왔다. 대표적인 공기업인 철도공사는 "비정규직보호법안관련 비정규계약직 대책 검토(안)"이라는 내부 문서를 작성했다가 노동조합이 이를 확보하는 바람에 폭로되었다. 이 문서를 보면 철도공사는 자체적으로 예산절감을 위하여 기존의 비정규직을 외주화하려는 자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존 직접고용 비정규직이 정규직과 동일업무를 수행하는 상황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으로 차별처우를 개선할 경우 수 십억 원의 예산이 추가 소요될 것이라고 보고 외주화를 중심으로 하는 구조조정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이다.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나 '기간제근로자보호법안'에 따라 그나마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무기계약'으로 전환하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철도공사는 1단계로 2007년 1월까지 현재의 비정규직업무를 모두 외주화하고, 반드시 필요한 업무를 정규직으로 전환배치하려고 계획했다. 이 경우 해당업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해고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2008년까지는 외주화된 업무에 함께 근무하는 정규직 노동자도 외주화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어 이 계획이 단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뿐만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상시업무이지만 정규직 업무 대상이 아니라고 자의적으로 판단된 업무에 대해서는 법에 예외로 규정된 고령자를 채용한다는 계획까지 있다. 정부는 이번 '공공부문비정규지대책'에서 기관의 "핵심-주변" 업무를 구분하고, 이에 따라 "핵심"업무는 정규직 사용을 원칙으로, "주변" 업무에 대해서는 외주화 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주변"으로 규정되는 업무가 너무나 자의적이라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한국공항공사'는 자신의 주업무인 공항시설관리업무를 '현업업무'라는 이유로 "주변"업무로 취급하고 전체를 외주화하였다. 지방자치단체는 법률에 지자체장의 책임으로 규정된 생활폐기물 처리 업무를 '단순노무'라는 이유로 민간위탁하고 있다. 또한 상수도 사업에서는 '세계적인 물기업 육성' 운운하면서 민간위탁을 확산시킨다. 게다가 "핵심"으로 규정된 업무라도 비용절감 효과가 큰 경우에는 외주화가 가능하다. 결국 모든 종류의 공공부문 업무에 대한 외주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이번 대책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최근 확산되고 있는 고용의 원거리화를 공공부문에서도 전면적으로 적용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 효과는 이미 각종 공기업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최근 철도공사를 제외하고도 몇몇 주요 공기업에서는 신규계약을 1년 단위가 아니라 3~6개월 단위로만 체결하면서, 계약기간이 만료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 순차적으로 계약을 해지하고 있다. 이번 정부대책에서 말하는 '무기계약화'조차 예산이 적용되는 2008년부터라는 것을 생각하면, 대부분의 공공기관에서는 2007년 말까지 대부분의 기간제 노동자에 대해서 계약해지를 통보를 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정부의 비정규직 개악안이 통과될 경우 우려했던 비정규직노동자의 대량해고가 공공부문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비정규직 개악안과 다르지 않은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은 정부가 하반기에 반드시 통과시키기 위해 벼르고 있는 비정규직법안 개악안을 공공부문에서부터 사전에 준비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그 효과는 저임금의 차별적인 일자리를 고착화하고 외주·용역 등 아웃소싱을 확대하는 구조조정을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 대목을 보면 정부는 스스로 민간부문에 '모범'을 보이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정규직을 어떤 방식으로 활용하고 관리하면 되는지를 정부는 민간 자본에게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인 불안요인으로 확대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를 관리하면서도 계속적인 착취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공공부문이든 민간부문이든 자본의 입장에서 관건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부가 이번 대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현안 문제로 투쟁하고 있는 공공부문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투쟁의 원인이 되는 제도적인 모순에 대해서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3) 따라서 우선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 가지는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 대책과 관련하여 '정부도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한계가 있으니 참여해서 몇몇 조항을 넣어보자'는 식의 요구는 사실상 적용되기 난망하다. 이미 정부 대책의 기조가 현장의 개별적인 요구조차도 인정할 수 없도록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기조는 정부의 비정규법안 개악안 추진과도 완전히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에 대한 투쟁은 하반기에 다시 예정되어 있는 비정규법안 개악안 저지 투쟁의 맥락에서 이루어져야한다. 정부가 공공부문에서부터 자신들의 개악안을 적용하려고 시도한다면 공공부문에서도 선도적으로 정부의 의도를 저지하는 것은 물론, 정부의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책'이라는 것이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고착시키고 고용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점을 밝혀낼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서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현안투쟁 사업장은 물론 정규직 노동조합도 정부의 '공공부문비정규직대책'이 단지 비정규직 노동자, 당사자에 대한 내용만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투쟁해야한다. 이번 정부 대책은 공공부문이 신자유주의적 (인력)구조조정을 수행하기 위한 하나의 매뉴얼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부 대책이 발표되고 나서 당장 시작되고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들에 대한 현장의 구조조정에 적극대응하고 이러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투쟁할 수 있도록 조직해야한다. 1) 5만 4천이라는 규모를 산출한 과정은 주먹구구 식었다. 노동부는 기간제 계약직 중 1년 이상 계약직은 10만 8000명 가량이라고 예상하고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이 심의를 통해 필수업무의 상시 종사자로 판정 받고 정규직으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5만4천이라는 수치를 제시한다. 이는 어떠한 구체적인 근거도 없다. 한편, 언론에서는 학교 조리종사원과 각 기관의 사무보조원, 청소, 시설관리 노동자들을 일차적 심의 대상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정작 노동부는 직종별 대책을 세우는 것은 아니며, 1년 이상 근무한 상시업무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 교육인적자원부는 대표적인 정규직화 대상 직종으로 보도된 학교 조리종사원에 대해서 이들은 상시노동을 하지 않으므로 정규직화(무기계약화) 계획이 전혀 없다고 밝히고 있는 실정이다. 본문으로 2) ‘금융권 신인사제도, 차별시정의 대상인가?’ 토론회(창구업무 여성 비정규직 사례를 중심으로), 단병호 의원실 본문으로 3) 정부는 이번 대책에서 △ 철도노조 KTX승무지부와 마사회, 부산지하철매표소의 불법파견 문제, △ 옥천 환경미화원의 저가낙찰제로 인한 해고, △ 전북도청, 광주 마사회의 용역업체 변경으로 인한 해고 등 제도적 문제에 대해서는 신기하게도 전혀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원청 기관의 책임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본문으로
: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변이들 [%=박스1%] 우리는 이중적 의미에서 진정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다. 우선 활기차게 진행 중인 논쟁이 있다. 이것은 동시대 전쟁의 클라우제비츠적인 또는 비-클라우제비츠적인 성격에 관한 논쟁으로, 이는 ‘전쟁학자’들의 협소한 논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이 논쟁은 대략 25년 전[1980년대 초반 미국 레이건 정부 당시에] 시작되었다. 그 시점에서 [핵무기에 의한] 강대국의 상호파괴에 대한 전형적인 냉전 시대의 강박증은 주로 제3세계에서 발발한 ‘저강도분쟁’(low intensity conflicts)에 대한 군사전문가와 정치이론가의 첨예한 관심으로 대체되었다(제 3세계라는 범주는 제 2세계가 붕괴한 후에도 여전히 많이 사용된다). 저강도전쟁은 극히 비대칭적이었는데, 게릴라 형태의 적에 대항하는 북반구의 기술적으로 정교한 군대의 개입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마틴 반 크레벨드와 미국의 사무엘 헌팅턴은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정치환경에서 ‘비(非)-클라우제비츠적’ 전쟁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한 최초의 인물들인 듯하다. 그 후 전(前)유고연방과 다른 지역에서 ‘종족전쟁’(ethnic war)이 일어났다. 이 전쟁들은 영국의 평화이론가이자 정치학자인 매리 캘도어와 다른 학자들로 하여금 과거의 전쟁(Old War)과 대비되는 새로운 전쟁(New Wars)이란 슬로건을 제시하도록 자극했다. 새로운 전쟁은 정규군을 지닌 민족국가가 아닌 [전쟁의 새로운] 역사적 ‘주체’를 동반한다. 또한 그들에 따르면, 클라우제비츠의 저명한 저작 『전쟁론』에서 파생한 관념들이 일반화되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전략적 관심사와 새로운 기술에 적용되고 지난 150년 동안 전쟁이론가의 주요한 관심사였더라도 그 관념들이 지닌 설명의 효용성은 한계에 달했다. 전쟁과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 인종, 경제를 포함하는 [새로운] 종류의 상호작용이 지금 일어나고 있지만 그 관념들은 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현실 물리세계를 설명하며 영예로운 이력을 쌓은 후 어느 시점에서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클라우제비츠의 전략과 전쟁학은 또 다른 유형의 [군사적] ‘계산’(calculation)을 고려하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새로운 비-클라우제비츠적 이해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현대 전쟁에 대한 분석가들이 클라우제비츠의 도식과 개념을 분석적으로나 규범적으로 계속 사용할 수 있다고 옹호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나는 특히 『무질서의 제국』(Empire of Disorder)이라는 주목할 만한 저서를 발간한 알랭 족스가 그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는 클라우제비츠를 사회·정치적 현상이자 국가주권의 상관물인 전쟁에 대한 이론가들 중 하나로 간주한다. 그는 투키디데스, 마키아벨리, 슈미트뿐만 아니라 홉스, 마르크스, 베버를 전쟁이론가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상당 부분 미국이 중동에서 전쟁을 개시하고 처음 3년 동안 전쟁이 전개된 방식의 결과다. [미국의 중동전쟁에서] 신속히 이어진 성공적인 공격과 점점 더 어려워지는 방어 전투는 (심지어 퇴각의 가능성, 나아가 필연성에 늘 시달린다.) 베트남 전쟁과의 유사성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지리적 또는 지리-문화적 조건에서 군사작전 내부에서 정치적 요인의 복귀에 관한 고전적 논의와,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군의 효율성이 감소하므로 결국 공격 전략보다 방어 전략이 우월하다는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명제를 부활시킨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적용하기에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난점이 있다. 그것은, 철학적 범주를 사용해서 말해보자면 ‘순수한’ 클라우제비츠 모델에서 결국 승리하게 되는 전략의 ‘주체’는 이미 형성된 것이든 전쟁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든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군대-인민-국가의 통일체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미국의 침략에 대한 베트남의 저항에는 적용될 수 있지만 이라크 전쟁의 경우에는 매우 의심스러우며 아마도 부적합한 주장이 될 것이다. ‘인민의 저항’ 또는 ‘반제국주의 지하드’를 주창하는 일부 무명의 이데올로그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단순한 방식으로 반미 군사행동의 ‘주체’를 식별할 수 없으며 ‘이라크’ 국가와 통합된 인민의 존재 자체가 문제다. 현재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적 관념이나 용어, 또는 그와 유사한 것을 적용하려고 할 때 이와 비슷한 난점이 작용하는 듯하다. 현재 상황에 관한 표상은 두 적들 간의 (세계적 규모의) ‘격투’이며 각각은 상대방의 섬멸을 추구한다. 미국 정부는 이를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두 적들 간에 명백한 비대칭성이 존재하지만 현재 상황은 ‘순수한 전쟁’(pure war)의 법칙으로서 ‘극단으로의 상승’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 역시 난관에 부딪친다. 클라우제비츠의 모델에서 폭력을 극단으로 상승하게 하는 가동장치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사활적인’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각 적대국의 의지이며, 이는 합리적인 도박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극단으로의 상승에는 제한 또는 자기제한의 원칙 역시 포함된다. 전쟁을 위한 전쟁, 자신의 권력을 파괴하는 전쟁은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하며 시공간의 제한이 없는 전쟁, ‘악마’와 동일시되는 불확정적인 적에 대항하는 전쟁이란 관념 역시 불가능하다. 이러한 전쟁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전쟁’이라고 불러선 안 되며 정치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인 또는 신화적인 다른 이름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고찰이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 왜 전쟁과 정치의 본질적, 또는 구성적인 관계에 대한 반성이 심원하게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채로 남아있는지 사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 비판적인 의미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모든 명제와 정의를 재조사하고, 전도하고, 개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리 폰 클라우제비츠가 남편이 남긴 원고를 『전쟁론』으로 출판한 후 지난 150년 동안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그것은 필수적이다). 1) 나에게 시간이 있다면 나는 클로드 르포르와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에 관해 쓴 모델에 근거해서 (그들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자신들의 정의를 클라우제비츠에서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클라우제비츠가 항상, 완전히 합리적이진 않더라도 정치를 사고 가능하게 하는 핵심을 건드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정치이론 내부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문헌에 대한 ‘연구’는 결코 끝나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클라우제비츠를 독해함으로써 생산되는 영속적인 곤란함이 동반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충분한 문헌적 근거를 결여한 채 내린 결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확히 문헌으로 돌아가서 개념적 독자성들을 개략적으로 평가하자. 나는 발표를 상당히 불균등한 두 부분으로 나눌 것이며, 각 부분은 훨씬 더 논의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첫 번째, 훨씬 더 긴 부분에서는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을 해석 또는 재구성하는 문제를 다룰 것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서 클라우제비츠에게서 ‘파생’된 개념과 클라우제비츠에 대한 ‘대응’을 다룬다. 이는 상이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클라우제비츠의 민족전쟁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대응물로서 ‘계급’이 상기될 수 있다. 이어 매우 간략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서 나는 하나의 본질적 통일체 내에서 전쟁과 정치를 접합하는 방식들에 함축된 ‘주체’(또는 비(非)주체, 또는 불가능한 주체) 개념의 쟁점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제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을 읽을 때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를 상기해보자. 그의 저작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고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저작의 상태는 파스칼의 『명상록』이나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와 비슷하다. 클라우제비츠는 저술 과정에서 결정적인 수정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작 전체를 다시 쓰길 원한다고 선언했다. 이런 저작에서 철학적, 실용적 수준의 내적 일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지금까지 수백 편의 논평들이 출판되었을 만큼 매우 어려운 과제다. 나는 이 논평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불완전하고 편향적일 수 있으나 인위적이지 않길 바라는 해석 절차를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나의 해석은 클라우제비츠의 명제가 계속 난점을 제기하거나 새로운 재해석을 요청한다는 독해 결과에 근거를 둔다. 나는 네 가지 명제를 추려내서,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 또는 공리로 구성할 것이다. 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적 기획이 각 명제들의 (서로 분리되어 있든, 서로 반작용하든) 과도한 결론을 통제하려는 계속되는 시도라고 설명할 것이다. 나는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사상가들이 상이하게 이해하든가, 또는 재정식화하든가, 아니면 서로 분리하려고 시도하는 문제의 명제들이 동일한 집단에 속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클라우제비츠의 명제 중에서 (최소한 현재) 군사전문가 집단을 넘어서 가장 유명하고 자주 논의된 것은 전쟁의 정의 또는 특징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독일어로 Fortsetzung)”(때로는 단순한 계속이다.)이라는 명제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략으로서 ‘방어’는 본질적으로 ‘공격’이나 ‘공세’보다 우월하다.”는 명제다 (그런데 전략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 역시 분명히 동반된다). 나는 두 명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할 것이지만, 다른 두 명제를 더 언급해야만 [체계 또는 공리가] 완성된다고 제안할 것이다. 나는 네 가지의 사실상 독립적인 명제들의 체계 또는 공리를 통해서만 클라우제비츠의 의도와 난점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제안할 것이다. ‘계속’ 명제는 『전쟁론』의 분리된 두 곳, 1편과 8편에서 [서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뉘앙스로 두 번 반복된다. 그것은 저작의 양끝에서 제시될 뿐만 아니라, 저자의 암시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상이한 개념들에 상응한다. 첫 번째는 확실히 전쟁이 ‘계속해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다른 수단을 통해’ 또는 ‘다른 수단을 도입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관념을 강조한다. 이 때 다른 수단은 위협이나 압박뿐만 아니라 현실의 폭력, 심지어 극단적 폭력의 수단이다. 이것은 정치의 통상적 또는 정상적 수단은 비폭력이지만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에] 불충분하므로 정상적 수단을 넘어서 ‘다른 수단’(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면, 즉 정치의 가능성(과 권력)을 확대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정치 행위는 절대적 한계에 도달한다는 관념을 함의한다. 그러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며, 정치적 주체의 존재가 위험에 빠질 뿐만 아니라 [정치]행위의 정치적 성격과 정치의 정치적 ‘논리’ 자체가 전복될 수 있는 위험 지대, 제한 영역으로 진입한다는 관념 역시 함의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클라우제비츠는 폭력적 수단(전쟁이라는 수단, 군사제도와 애국주의의 발생과 같은 수단[전쟁]의 수단)의 사용은 정치에 반작용하거나 정치를 변화시킨다는 관념을 도입한다. 정치는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면 변형될 수밖에 없으며, 아마도 근본적으로 변형되고 변성될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전쟁의 접합이라는 문제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처음 진술의 본체가 위태로워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즉각 변증법적 진술로서 제시된다. 하지만 두 번째 정식이 있다. 두 번째 관념이 강조하는 것은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일 뿐’이며 정치적인 것의 정상적 한계를 침해하지 않지만, 이러한 한계 내에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정치적 주체는 상황, 세력, 이익에 따라 어떤 정치적 ‘도구’로부터 다른 도구로 이동할 수 있으며 (클라우제비츠는 ‘도구’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한다) 이제 정치적 주체의 특징은 바로 폭력적 수단과 비폭력적 수단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또는 비폭력적 수단의 사용에만 자신을 제한하지 않는 능력이라는 것이다(우리는 이를 주권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확실히 이러한 정식으로부터 정치의 합리적 성격에 대한 어떤 표상이 나타난다. 특히 정치의 목적을 달성하거나 어떤 상황을 조정하기 위하여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방식에 의해 정치의 합리성이 설명된다. 하지만 이러한 표상 역시 변증법적 관념이라는 것이, 또는 잠재적 긴장과 위험성을 동반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묘사로 해석될 수도 있고, 처방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한편으로 정치는 자신의 본성을 바꾸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의 폭력적 수단은 전쟁의 결과, 전쟁을 사용하는 자에게 끼치는 반작용 효과, 전쟁의 ‘논리’가 정치적 합리성을 벗어나지 않거나 전복하지 않을 때만, 즉 독립적 논리가 되지 않을 때만 정치적 수단으로 남는다는 경고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독립적’ 논리이지 않은가? 클라우제비츠가 함의하는 것은 정치가 전쟁을 도구화할 수도 있고 전쟁이 정치를 도구화할 수도 있지만 후자는 불가능하거나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는 정치에는 ‘논리’(logic)가 있고 전쟁에는 오직 ‘문법’(grammar)만 있을 뿐이며, 전자가 후자에 대해 최우선권(primacy)을 지닌다고 썼다. 내가 보기에 바로 여기에 난점이 존재한다. 우리도, 클라우제비츠도 이 난점을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클라우제비츠는 다른 정식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한 난점은 앞으로의 고찰을 통해 규명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정치와 관련하여 전쟁을 두 번, 서로 다른 두 각도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정치의 전부가 아니지만 (왜냐하면 정치는 전쟁과 다른 절차를 지니며, 이 역시 동일하게 필수적이다) 정치의 본질과 관계를 맺고 그것에 영향을 끼친다. 정치가 전쟁에 의존하는 방식과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정치에 미치는 결과는 정치의 본질을 드러내고 실제적으로 정치를 결정한다. 확실히 클라우제비츠가 피하고자 했던 것은 전쟁에 대한 의존이 정치의 본질이라는 주장이며, 전쟁의 폭력적 수단의 사용과 전쟁의 논리적이고 실존적 함의(예컨대 하나 이상의 ‘적’을 지목해야 할 필요성)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처음 진술의 역(‘정치는 전쟁의 계속이다,’ ‘정치는 전쟁의 결과다.’)으로 나아갈 수 있다(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이러한 주장을 피하고자 했지만 이런 시도 역시 난점들을 지니며, 그 문제들은 클라우제비츠의 계승자들을 늘 괴롭혔다는 것을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도구’로서 전쟁의 활용과 그것이 정치 그 자체에 미치는 역효과에 대해 문제제기하길 원한다(또는 필요로 한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이 과거 로마의 사법적·정치적 원리를 근대적으로 다시 정식화한 것이라고 이해하고자 할 수도 있다. “문관이 군을 제압한다(cedant arma togae).”, 이는 전쟁의 무장행동과 군사제도가 문관의 최우선권에 복종되어야한다는 것이다.2) 그러나 규범적 가치를 지닌 이 정식은 클라우제비츠를 괴롭혔던 문제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 수단으로서 활용되는 전쟁은 정치에 반작용하고, 정치를 가장 심원하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하는 새로운 형태로 변형하며, 이러한 형태에서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문제가 되고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반면 전쟁을 정치적인 것의 최우선권에 영속적으로 종속시킨다는 것은 전쟁이 합리적이라고(또는 합리적인 채로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전쟁의 합리성은 하나의 고리를 형성하는 수단과 목적의 ‘실천적’ 관계를 통해 본질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전쟁의 합리성은 정치적인 것 자체로부터 유래하는 목적론적 합리성이며, 정치적인 것은 전쟁의 합리성에 대한 척도다. 이러한 주장은 다른 무엇보다도 놀라운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이 폭력의 극단에 이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의 극단, 즉 현실적 파괴가 문제가 되는 폭력의 극단에 이른다는 것은 ‘순수한 폭력’의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클라우제비츠가 전투(Gefecht)의 관리로 규정한 전술의 수준에서 폭력이 극단에 이르고, 여기서 인간이 개별적으로, 집단적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다. 그러나 전술과 전투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전쟁의 일부이며,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전략적’ 목표에 종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전략의 문제(전략의 정의, 기능)가 클라우제비츠에게 가장 중요하고 또한 (아마도) 가장 곤란한 문제인지, 결국에는 이 문제가 [클라우제비츠에게서] 회피되고 마는지를 (이미) 이해할 수 있다. 전략은 전쟁에 대한 (역사적, 개념적) 분석 속에서 극단적 폭력(절대적 수단)의 수준과 정치적 합리성(절대적 목적)의 수준을 접합한다. 우리는 인간학의 용어법을 도입해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이란 이름으로 정치와 결합시키는 ‘폭력’은 무제한적 폭력이 아니라 제도적 폭력이며, 제도적 폭력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은 ‘폭력이 정치의 계속’이 아니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에게 문제는 어떻게 폭력이 극단에 이르면서도 제도의 한계 내에서, 제도적인 것으로 남게 할 수 있느냐이다. 하지만 대립물의 통일이 유지될 수 없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또는 발생할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변이들이 실천적 동기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매번 어떻게, 왜 발생하는지 이미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변이들은 ‘전쟁이 다른 수단, 즉 극단적 폭력의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며, (본래의 가설에 따라) 정치는 정치적 합리성 또는 목적에 종속된 도구로서 폭력을 사용한다’는 원리를 형식적으로는 유지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이들은 정치적인 것에 관한 통념과 ‘전쟁’의 정의에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다. 역으로 그 변이들은 정치, 전쟁, 폭력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만 ‘계속’이라는 관념을 주장하거나 문제 삼을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러한 변이들은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이 지닌 순환성과 동시에 초기 조건을 훨씬 뛰어넘는 생산성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클라우제비츠가 더욱 구체적인 일련의 공리들 내에서 일반적 원리와 결부시킨 다른 명제들을 고려함으로써만 가능해질 것이다. 공격 전략에 대한 방어 전략의 우월성 『전쟁론』에서 발견되는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두 번째 명제는 ‘공격’에 대한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과 관련된다. 이 명제 역시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고, 여러 번 다시 정식화된다. 특히, 방어와 공격을 다루고, 이런 관점에서 상호 검토를 다루는 6편과 7편에서 주요 논의가 전개된다. 클라우제비츠는 방어의 우월성이 전술 수준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것도 아니며, 따라서 방어의 우월성이란 전략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수준에서 전형적으로 존재하고 전략 이론의 전체 대상은 이 명제를 확립하고 여러 환경과 조건에 따라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전형적인 순환을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방어의 전술적 우월성이란 주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전술적 공격은 모든 전략적 방어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관념은 그와 대단히 상반된다 (왜냐하면 전술적 공격은 적에게 피해를 주고 적의 전쟁수행 능력, 즉 기동과 판단 능력을 부단히 파괴하기 위해서 세력관계에서 나타나는 시공간적 불균형을 활용하며, 이는 특히 최초 공격에서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의 계승자 중에서 마오쩌둥은 유격대 전쟁을 이론화하면서 [방어 전략과 전술적 공격의] 상호 보완성를 일관되게 발전시키지만, 이는 클라우제비츠에게 이미 명백히 존재했다. 또한 ‘방어적 정치의 우월성’ 또는 본질적으로 우월한 방어의 정치(예를 들어 민족의 방어, 민족경계의 방어, 독립의 방어)라는 주장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이는 아마도 가장 어려운 지점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방어의 정치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 이론의 ‘현실주의적’ 판본과 같거나 그 일부다.3) 폭력의 적법성(ius ad bellum)의 근대적 판본은 오로지 외부의 침략에 반응하여 민족이 수행하는 방어적 전쟁만이 적법하다는 것이다. 이런 전쟁은 적법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그리고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수 있다(‘결국에는’이란 여러 예외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방어의 정치는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이 아니다. 그에게는 전쟁에 관한 도덕적이거나 신학적인 개념이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훗날 칼 슈미트가 유럽 공법(ius pulicum Europaeum)으로 체계화한 관념, 즉 민족국가는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전쟁에 호소할 고유한 권리를 지닌다는 관념의 전형적인 주창자다. 방어의 우위라는 관념은 정치적 목적(Zweck)과 무관하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군사적 목표(Ziel)와 ‘오직’ 관련된다. 확실히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은 정치와 전쟁의 접합의 형식적 합리성에 본질적 한계를 부과한다(물질적 한계 또는 유물론적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치가 전쟁의 궁극적 목적을 부과하는 한에서만 이러한 접합은 합리적이거나, 이론화할 수 있는 합리적 구조를 보여준다(의식적이든 아니든, 전쟁 행위자가 정치의 결정을 의식하든 못하든, 모든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항상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바로 군사적 목표의 달성가능성이 정치가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한에서만(대개 사후적으로 결정한다.), [전쟁과 정치의 정합은 합리적이다.] 그리고 [군사적 목표의 달성가능성은] 확실히 현실 전투의 형태로 결정된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낯선 상황에 이르게 된다. ‘전략’이 클라우제비츠의 숙고의 주요 대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이를 위해 역사적 상황을 비교하고, 전략의 천재성를 보여주는 군사 천재의 사례들을 검토하고, ‘전쟁계획’ 또는 ‘전략적 통일성’의 개념이 되는 특유한 ‘문법적’ 개념을 분리하고, 이러한 전쟁계획이 고안되고 실험될 수 있는 지리적, 시간적 한계(‘전투’, ‘전장’ 등등)를 지적하려고 대부분의 분석을 할애했다.4)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역설적이다. 그러한 작업이 점점 더 정교해지고 실체화될수록, 작업의 대상[전략]의 자율성은 점점 더 모호해지거나 문제가 되는 듯하고, 또는 오히려 논리적 역설에 말려든다. 즉, 이는 마치 전략적 사고와 전략적 계획의 주요 목표는 궁극적으로 전장에서 전략의 자율성과 같은 것이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 주는 것처럼 된다. 전략은 내적 긴장과, 아마도 전쟁 개념의 아포리아(aporia)[철학의 난제]를 응축한다. 세 가지 문제를 추가적으로 검토해서 이를 해명해보자. 첫째, 이는[전략의 문제는] ‘이론’과 ‘역사’가 문제의 통일체에서 만나는 곳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항상 독자적(singular) 과정이며 연역적인 전쟁과학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항상 강조했다. 그러나 『판단력 비판』의 칸트적 의미에서 정치와 전쟁이 접합되는 규칙과 경향에 대한 반성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반성은 가설로 남는다. 우리는 전략의 자율성이란 개념은 전적으로 자신의 조건들과 한계들, 그것들의 역사적 변이들과 관련을 맺으며, 자신의 유효성을 영속적으로 시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조정되는 개념이며 판단의 범주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합리적이며 주관적인 이유로 이러한 고찰에 흥미를 느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주어진 역사적 정세에서 역사로부터 끌어낸,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참여한 전쟁인 프랑스와 나머지 유럽 국가들의 혁명전쟁과 제국전쟁으로부터 끌어낸 ‘교훈’이 결국 방어 전략이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는지, 이런 교훈이 미래로 확장될 수 있는지 결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는 전쟁이 정치의 도구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또는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전쟁이 정치의 ‘계속’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또는 이미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또는 [정치의 계속이라는 전쟁의] 논리적 기능을 제거하는 위험을 무릅쓸 뿐이라고 의미하는지 결정하고자 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역사의 경향적 결과로서 방어 전략에 우월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방어 전략의 우월성을 다루는 논증에는 이 문제가 [항상] 수반된다. 클라우제비츠를 늘 괴롭혔던 이 문제가 전쟁에 대한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반성에 영속적으로 출몰할 것이고, 현재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그러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인상적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명제를 역설로서 제시했고(어떻게 오직 소극적인 결과를 낳는 방어 전략이 적극적인 결과를 낳는 공격 또는 정복 전략에 비해 우월하다고 증명될 수 있는가?), 이러한 역설은 전쟁의 수단이 극단으로 나아갈 때 명백해질 어떤 잠재적 불가능성의 신호가 아닌지 의심했다. 둘째, 우리는 방어 전략과 공격 전략이 마치 분리된 채 존재하는 것처럼 두 가지 ‘상이한’ 전략들 각각의 특질을 비교하는 표면적인 도식을 극복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다른 것으로] 변형해야 한다. 그것은 방어의 공격으로의 변형과 반전, 또는 방어가 공격으로 전환되는 변곡점의 탐색이라는 더욱 심원한 문제다. 이것은 전쟁의 시간과 공간의 문제 즉 전쟁의 ‘역사’의 문제이며, 전쟁 행위자의 문제이므로 다시금 실질적인 의미에서 전쟁의 역사의 문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격투’의 복합적 형태이고 시간에 따라 발전하며, 다시 말하자면 행위자들의 세력관계를 부단히 변형한다고 썼다. 그 행위자들은 복합적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정부와 인민을 포함하고, ‘군대’란 전형적인 형태로 통합된 제도와 인간을 포함하며 (군대는 역사의 행위자가 전쟁의 영역에 등장하는 일반적 형태다) 동맹과 동맹의 변화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시간은 공격에서 방어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지닌 시간이다. 그것은 예정된 순환을 지닌 순전히 논리적인 시간이 아니며, 결국 전략적 ‘태세’ 중 하나[방어 또는 공격]를 강화하는 모든 요인들의 경향적 우월성에 의해 지배되는 역사적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의 효과를 요약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가 사용한 일반적인 통념은 마찰이다. 마찰이라는 용어가 암시할 수 있는 것과 반대로, 그것은 기계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도덕적, 기술적, 심리적, 사회학적 요인을 ‘통합’한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의 문제, 즉 전략적 숙고의 대상은 왜 즉각 성공하지 못한 (또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공격은 방어를 취하는 적에게 점차 굴복할 수밖에 없는지, 어떤 수단이 이런 불가피한 결과를 지연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방어 전략이 성공적인 반격의 준비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이는 반격이 방어로부터 준비되며, 어떤 의미에서 방어는 내재적으로 공세국면에서도 계속되고 연장된다(fortgesetzt)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이상적인 변곡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문제는 이런 변곡점을 규정할 수 있느냐, 어떤 종류의 사건이 이런 변곡점으로 규정될 수 있느냐가 된다. 클라우제비츠가 이 문제를 절대적으로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 문제에 이론적 공식을 부여했다. 그것은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공세 전략’과 쿠투조프의 ‘방어 전략’의 대치 과정에서 거대한 규모로 실행되었다. 프러시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승자가 주도하는 동맹에 다소 자발적으로 참여한 후 [프러시아와 프랑스가 대(對)러시아 연합전선을 펴게 되자] 클라우제비츠는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서 러시아 군대의 보좌관으로 참전하기로 결단하고 전쟁에 참여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레오 톨스토이를 포함해 19세기 이후 전쟁 이론가들이 반복해서 언급할 정도로 극적인 사건은 보로디노 전투였다(엥겔스와 톨스토이는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 착수하기 이전에 보로디노 전투에 대해 서술한 글을 신뢰했으며, 그 글은 나중에 클라우제비츠의 누이에 의해 출판했다.).5) 비슷한 규모와 전력을 지닌 두 ‘대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고, 보로디노 전투는 나폴레옹의 전술적 승리로 보였지만, 결국 나폴레옹의 전략적 패배로 입증되었다. 보로디노 전투는 즉각 러시아 수도의 정복을 낳았지만, 사실상 나폴레옹의 최후의 패배를 예비하였다. 그러나 이 대치 역시 [방어에서 공세로] 변곡점이 발생하는 어떤 전형적인 조건을 보여주었다. 그 조건은 전투의 지속, 광대한 지리적 환경, 주민의 적대감 상승으로 인한 정복 그 자체의 반(反)생산적 효과뿐만 아니라 정규전과 게릴라전의 결합, [정규전과 게릴라전] 양 측에서 전쟁의 주요 행위자로서의 인민의 무장과 통합이었다(게릴라전은 스페인에서 수입된 새로운 개념이다. 비록 그러한 전투형태가 스페인에서 처음 벌어진 것은 아니더라도6)). 이는 우리를 세 번째 고찰로 이끈다. 그곳에서는 ‘정치’, ‘전략’, ‘전술’이라는 세 가지 수준은 더욱 명백히 변증법적으로 얽혀있다. 이는 아마도 클라우제비츠의 가장 심원한 딜레마일 것이다. 그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을 이해할 때 두 개의 논리적 ‘대립항’ 또는 ‘극단’이라고 묘사한 것들 간의 관계와 관련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전쟁이 있는 곳에는 전쟁이 추구하고 직면하는 섬멸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고, 또 한편으로 전쟁에서 고유한 정치적 능력은 전쟁이 동반하는 특정한 위험과 전쟁이 정치적인 것에 미치는 특정한 효과 속에서 이미 시작된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지 또는 중단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 즉 언제, 어떤 대가로 ‘전쟁을 끝낼 것인지’ 결정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섬멸에는 한계가 있고, [섬멸이] 그 한계에 접근할 수는 있지만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믿는다. 그는 자신이 ‘절대전쟁’(absolute war)이라고 부른 것을 고찰했지만, 훗날 ‘총력전’(total war)이라고 불린 것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절대전쟁에서는 격투가 극단으로 상승하며 국가 또는 민족의 모든 세력이 전쟁에 참여하지만, 총력전에서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비전투원도 목표물이 된다. 정치를 계속하는 전쟁에서 문제가 되는 섬멸은 군대를 물리적으로 섬멸하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진압하거나 해산시키는 것이고, 적이 타인의 의지와 목적을 강요당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으로 전쟁을 중단하는 능력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불린 프러시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를 클라우제비츠가 매우 존경했던 이유는 그가 정복지를 계속 보유하기 위해 자신의 승리들을 통제하고 유리한 순간에 화친을 맺는 능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결국 비참하게 끝나고 그와 그의 나라를 패배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가 정복의 논리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복의 논리에서는 모든 예정된 한계를 넘어서 전쟁규모를 확대해야만 [나폴레옹의] 정치적 목적이 달성될 수 있고, [러시아의] 방어가 우세하고 압도적인 반격을 준비하며 이전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극단 사이에 강한 긴장이 있다. 왜냐하면 전쟁을 중단하는 능력(이는 ‘부정적인’ 전략적 통념이고, 클라우제비츠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여기에 최우선권을 두었다)은 전쟁이 군사력과 자원의 일부분만을 포함할 때, 즉 적대국들 간에 섬멸의 가능성이 거의 없을 때에만 극대화된다. 반면에 물리적 섬멸이라는 전략적 목적은 군사력과 자원, 무엇보다도 인력의 동원을 초래하고, 이는 의지에 따른 전장으로부터 철수를 불가능하게 하며, [철수가 시도된다면] 국가의 실존에 대한 배후의 공격[내분]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한다. 또 다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평형’점이며 또는 ‘불가능한’ 지점, 즉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관한 ‘불가능성’의 지점이다. 즉 그것은 전쟁의 불가능성이란 유령을 되살리지만, 그 유령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나를 마지막 고찰로 이끈다. 나는 시작 부분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주요 명제를 하나의 공리 형태로 배열할 수 있으며, 그 공리의 지위 자체는 명백하다기보다는 가설적이며 문제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공리를 구성하는 두 명제만을 검토했고, 각각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나는 남은 두 명제를 급히 다루어야 하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옹호하고자 하는 관념은 클라우제비츠의 담론이 네 명제의 결합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고, 전쟁의 주체(또는 전쟁의 ‘정치적 주체’, 따라서 전쟁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주체’)라는 그의 궁극적 문제는 네 가지 명제사이에서 아마도 끊임없이, 모순적인 방식으로 순환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한전쟁과 절대전쟁 세 번째 명제는 ‘절대 전쟁’과 ‘제한 전쟁’(limited war)의 구분과 관련된다. 이것은 그가 『전쟁론』을 저술하는 동안 생각을 바꿨고(그의 저작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론 전체를 고쳐 써야만 하는 ‘새로운’ 입장에 도달했다고 주장하게 한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분명하지 않고, 사실상 징후적 독해를 필요로 한다. 그 후 해석자들은 클라우제비츠에게 다양한 인식론적 도식(변증법, 이념형 등)을 투사하여 모든 가능한 방향에서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절대’ 전쟁이 아닌 것을 가리키는 두 가지 용어를 두고 주저했다는 점이다. 그는 ‘제한’전쟁과 ‘현실’전쟁(real war)을 언급하지만, 거기서 그는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전쟁은 항상 제한전쟁이고 절대전쟁은 가상적 모형이라는 관념으로 도약한다. 즉 가상적 모형에 따라 경험적 사례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관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너무나 단순하며, 문헌과 사실상 모순된다. 아주 성급히 말하자면, 나는 이런 관념이 레이몽 아롱과 어긋나며 엠마뉴엘 테레이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이 ‘절대전쟁’이라는 통념을 가상적 모형이나 이념형으로 환원하지 않으며, 역사적 현실 즉 역사적으로 관찰되었던 전쟁의 성격 변화와 관련을 맺는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우리가 극적인 딜레마에 직면하게 한다고 믿는다. 분명히 ‘절대전쟁’과 ‘제한전쟁’은 상반되는 두 극점을 의미한다. 그것은 논리적 의미의 극점이고, 현실전쟁은 두 극점 사이에서 움직이고 다양한 단계와 결합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은 최소한 두 가지 상황에서 거의 순수한 방식으로 두 극점에 접근했다. 나는 최근 시기에서 그에 관한 등가물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18세기 절대왕정 시기에 정부 간의 전쟁(Kabinettskriege)은 군사 카스트[특권계급]의 지휘 하에 용병, 직업군인, [모병된] 신병에 의해 강압적으로 수행되었고, 그것의 목적은 이른바 ‘유럽의 균형’ 내부에서 세력균형을 바꾸고 적대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동반하더라도 정의상 제한전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과 함께 개시된 ‘새로운 전쟁’(Volkskriege)은 절대전쟁이었고, 규모와 폭력의 측면에서 극단으로의 상승을 동반했다. 새로운 전쟁은 인민봉기에서 처음 나타난 ‘민족의 무장’을 동반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대륙의 헤게모니를 위한 제국주의 도구로 변형했다.7) 그 후 무장한 민족들은 서로 경쟁하고 싸웠으며, 각자는 민족주의적 비책을 계발했으며, 그들은 자신의 실존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싸웠다. 이러한 전개는 전쟁의 세계사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비범한 설명이 담겨있는 8편에 약술되어 있고, 이것은 뒤따른 시도들의 모형이 되었다(여기에는 1860년대에 저술, 출판된 『신아메리카백과사전』(New American Cyclopedia)에 담긴 엥겔스의 항목도 포함된다.). 그리고 클라우제비츠의 질문은 명백하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이러한 전개가 비가역적이고 역사는 ‘전쟁의 절대화’를 향한 방향으로 전개한다고 믿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떤 가능성에 의거해 이러한 경향에 저항해야만 하는가? 이런 경향은 민족과 국가의 실존을 위태롭게 하고, 모든 정치적 문제들 중에서 전쟁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게 하며, 결국 정치의 도구인 전쟁에 대한 정치의 최우선권을 파기한다. 여기서 클라우제비츠 개인이 누구였는지 회고하는 게 유용할 것이다. 그는 불안한 귀족 가문 출신의 프러시아 장교로서 (주로 칸트적인) 철학교육을 받았고, 대적(大敵) 프랑스와 계속 싸우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떠나는 위험을 무릅썼고 직접적인 외교적 조정보다는 애국적인 관심을 우선시했다. 그는 인민 징병제에 기초해서 19~20세기에 이르러 거대한 군대로 발전할 것을 창안함으로써 프러시아 군대가 민족군대로 변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8) 하지만 이러한 전개가 군사 카스트와 국가 관료로부터 정치적 결정의 완전한 독점권을 박탈할 가능성에 대해 그가 우려한 것은 분명하다(나아가 빨치산이나 게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궁극적인 무기이지만, 그들을 활용할 때 사회적 위험성이 동반된다는 점을 우려했던 것도 명백하다.). 이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명제로 우리를 이끈다. 전략에서 도덕적 요인의 최우선성 네 번째 명제 역시 가장 크게 논쟁된 것 중 하나다. 그것은 전쟁의 역사에서 다른 전략적 요인에 대한 ‘도덕적 요인’의 궁극적인 최우선성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이라는 통념으로 열거한 일련의 복합적 요소들과 그것들이 철학적 견지에서 함의하는 바를 살펴보면, 우리는 매우 복합적인 힘들의 체계를 발견하게 된다. ‘도덕적’ 요인은 확실히 도덕성에 대한 고찰과 관련되지만, 그것은 역사에서 주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개인적, 집단적 정서라는 더 광범위한 문제틀과 분리할 수 없다. 도덕적 요인들은 집단적인 것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것과 관련된다. 그래서 우리는 군대가 난폭한 죽음의 위험과 대치할 수 있게 하는 병사의 용맹과, 어떤 전장 상황의 무한한 복잡성을 독자적인 직관으로 대체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는 총사령관의 자질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국가의 ‘지성’ 또는 국가의 정치적 합리성이라고 부른 것을 고려해야 한다(이는 수단과 목적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우리는 인민의 애국심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군인의 전투능력, 자원과 인명의 희생을 유지할 수 있는 민족적 능력의 배경을 형성한다. 애국심 역시 새로운, 즉 ‘근대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모든 도덕적 요인은 집단적인 역사적 작용인, 또는 제도적 작용인의 차원 또는 계기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는 내가 말했던 것처럼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전략’의 수준이 분리될 가능성을 반영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도덕적 요인을 검토하는 것에 클라우제비츠가 대부분의 시간을 쏟은 이유다. 즉 그는 도덕적 요인을 군대의 통일성이 형성되고, 그것의 소멸에 저항하고, 적의 폭력을 압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검토했다. 역으로 다른 요인(예를 들어 경제적, 기술적 계기)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요인에 부여된 중요성은 다른 요인의 유효성을 더욱 심원한 도덕적 심급에 종속시킨다(예를 들어 조세인상 등의 방식으로 경제자원을 전쟁에 동원하는 민족적 능력). 후대의 이론가들이 자신이 더욱 유물론적이고 현실주의적이라고 간주하고 클라우제비츠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예를 들어 클라우제비츠가 군사기술의 발전과 그것이 전략의 역사적 변형과 전쟁의 결과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등장한 생산양식과 결합된 기술변화의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전쟁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 긴 연구(『신아메리카백과사전』의 ‘군대’ 항목)에 전념한 엥겔스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조차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이라고 부른 것의 등가물을 고찰해야만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쟁의 가능성과 전쟁의 발전에 관한 계급의식, 더욱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클라우제비츠의 네 명제 간 관계를 살펴보면, 각각의 명제가 다른 명제의 결과를 지지하고 규명하거나 또는 제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는 우리가 무한한 논리적 순환에 들어서게 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제한전쟁의 절대적 인민전쟁으로의 근대적 변형은 어떤 도덕적 요인에 결정적 역할을 부여한다. 도덕적 요인은 전쟁의 ‘정치화’라는 의미에서 방어 전략과 방어의 반격으로의 전환에서 사활적 요소다. 그러나 애국주의는 국가가 조종할 필요가 있지만 지배할 수 없는 대중의 정서이기 때문에 도덕적 요인은 정치의 합리성을 위협하는 양면성을 생산한다. 전쟁 시기에 애국주의는 공포를 포함하며 또한 공포를 압도하는 적에 대한 증오(Feindschaft)가 된다. 그것은 지배자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될 수도 없으며(그것은 심지어 지배자에 반대하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를 통해 주관적으로 통제될 수도 없다. 그것은 정치를 파괴할 수 있는 정치를 실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의 주체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가차 없는 질문의 비밀을 만나게 된다. [전쟁의] 직접적인 주체는 군대이지만, 군대는 최소한 근대 시대에 결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 없다. 군대는 계속 생산·재생산되고, 전쟁의 환경과 그 누적된 효과는 이러한 재생산을 변조한다. 그러나 군대는 하나의 괴물이다. 군대는 국가와 인민의 결합이자 접합점이며, 민족이라는 관념은 [국가와 인민이라는] 두 가지 계기로 분열된다. 이것이 클라우제비츠의 딜레마였다. 이제 전쟁은 오직 민족전쟁, 곧 민족주의적 전쟁의 형태로만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결론을 끌어내야 하지만, 역사의 무대에 출현한 새로운 인민권력을 통제해야 하며, 인민권력은 국가 자체가 인민의 정서를 영속적으로 능가하도록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민족국가가 일반적으로 직면하는 정치적 문제의 군사적, 전략적 등가물이었다. 즉 어떻게 ‘봉기를 제도화할 것인가’, 어떻게 대중들에게 고삐를 채울 것인가? 놀라운 것은 이 문제가 19세기 초반 혁명전쟁과 제국전쟁 직후 정치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떠올랐던 상황을 넘어서 의제로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전쟁과 마르크스주의 전통 복잡한 문제를 동반하지만, 나는 여기서 매우 간략하게나마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담론을 들여오고자 한다. 오늘은 [포스트-클라우제비츠 담론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담론만을 다룰 것이다(만약 마르크스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 차이는 마르크스가 최소한 초기에는 클라우제비츠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클라우제비츠를 감탄하여 읽고 마르크스에게 그 중요성을 조언해준 사람은 엥겔스다(1849년 프러시아 군대와 맞선 혁명세력의 분견대를 훌륭히 퇴각시킨 후 엥겔스에게 붙여진 별명은 ‘장군’이었고, 그는 항상 군사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9) 그렇지만 비교는 『공산주의자 선언』을 새롭게 독해하면서, 특히 1장의 구절들을 엄밀히 독해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1장은 계급투쟁의 연속적 형태가 역사적 변형, 특히 국가의 상이한 형태와 정치적인 것의 상이한 제도들을 이해하기 위한 안내선을 구성하며, 계급투쟁은 계속되는 내전(civil war)과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내전이란 표현은 1장의 끝에 있으며, 분리되어 있지만 확실히 두드러진다.)10) 내전의 행위자들(또는 정당들)은 전쟁과정에서 생겨나며, 가시적일 수도 비가시적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가 1장의 서두에서 제시한 놀라운 정식처럼 내전은 상쟁하는 계급들 중 하나의 승리로 귀결될 수도 있고, 상호 파괴로 끝날 수도 있다.11) 나아가 우리는 클라우제비츠와의 연결고리를 확립한 푸코가 제시한 논평을 따라 이러한 구절들을 독해하자. 1) 사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인종전쟁’으로서의 정치라는 이전의 해석을 ‘전도’했다. 인종전쟁은 프랑스혁명 이전의 유럽 사서(史書)를 지배했고 그 후에도 살아남았다. 2)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적 통념은 ‘인종전쟁’의 변질된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여기서 계급은 구체제 사회 내부의 인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은 19세기의 적대적 통념, 즉 ‘인종투쟁’의 통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와 마르크스를 넘어서 ‘인종전쟁’이라는 초기 관념으로 돌아가는 것은 투쟁 또는 갈등과 동일시되는 정치적인 것의 어떤 순수성 또는 확실성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통념에서 나는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출현하는 것을 둘러싸고 전쟁과 정치의 통념에 대한 역사적, 논리적으로 엇갈리는 스텝(chasse crois )이 존재한다는 관념만을 유지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푸코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것은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과 마르크스의 관념의 대결이다. 확실히 가장 인상적인 차이는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을 분산과 집적의 단계, 잠재와 발현의 단계를 지닌 내전(즉 일반적인 의미에서 혁명)으로 이해함으로써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범주에서 배제하길 원했던 바로 그것을 ‘전쟁’이라고 확실히 부른다는 사실이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볼 때 대외전쟁, 민족전쟁처럼 내전도 ‘순수한’, 무차별적 폭력의 형태가 아니며, 그 역시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내전은 심지어 문명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보일 정도로 (또는 과거에 그렇게 보였을 정도로) 잔혹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더라도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그러나 내전은 특정한 유형의 정치제도 즉 ‘도시’ 또는 ‘국가’의 파괴로서 나타난다(또는 그리스 이후로 그렇게 나타났다.). 바로 이런 이유로 클라우제비츠의 용어법은 ‘폭력의 합법적 사용에 대한 독점’이란 국가의 정의를 예상하며(이는 폭력의 정치적 활용에 대한 독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용어법에 따르면 내전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반(反)정치의 도구다. 슈미트에 이르러서야 내전을 포함하는 반정치의 도구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이율배반적으로 통합된다(나는 이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루겠다.). 사실 마르크스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두고 분열을 겪었던 듯하다(우리는 이러한 딜레마가 결코 해소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치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계속 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치적인 것이 ‘정치국가’를 의미하며, 국가를 둘러싸고 정치적인 것의 분리된 공간이 공적 대행자로서 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그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만 외형적으로 또는 사법적으로 계급이익을 초월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계급투쟁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정치적인 것을 초과하며, 결국 분리된 공간으로서의 정치국가를 억제할 것이다(마르크스는 이를 ‘정치국가의 종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이 투쟁, 투쟁의 증대되는 양극화, 투쟁에 대한 ‘의식’과 ‘조직’의 형성, 역사의 변화를 생산하는 투쟁의 역할을 의미한다면 정치는 바로 영속적, 초역사적 ‘내전’으로 정의된다. 그러한 내전은 결코 정확히 동일한 형태를 취하지 않지만 (‘최후’까지,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최종 대결까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쟁’이란 용어의 은유적 활용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클라우제비츠와 비교한다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내전은 전쟁의 개념을 확실히 반성적으로 활용하며, 특정한 전쟁 개념을 단순히 적용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와 변형을 동반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 또는 가설을 독해할 수 있다. 1) 오직 ‘내전’으로서 사회적 전쟁(social war)만이 ‘절대’전쟁, 또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전쟁이 된다. 그것은 극단에 도달하고, 절멸의 위험이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본연의 의미’에서 전쟁이다. 2) 이러한 전쟁은 ‘정치’를 구성하고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전도하지만, 클라우제비츠에게는 단지 경향(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포)으로 남아 있던 것을 논리적 결론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그 결론은, 정치의 ‘수단’으로서 폭력은 정치적인 것에 반작용하며, 정치가 전쟁의 계속이 되게 한다는 관념이다. 나아가 이것은 전쟁 ‘주체’의 표상의 총체적인 변화와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제도적·사법적 주체 곧 국가가 아니며 오히려 내재적인 사회적 주체다. 전쟁의 사회적 주체는 자신의 역사적 형성과 부단한 자율화 과정 자체와 진정 구분될 수 없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가 (또는 마르크스를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사람들이 -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이들이 매우 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계급투쟁이라는 약호를 통해 클라우제비츠의 명제 또는 클라우제비츠의 문제를 치환 또는 ‘번역’함으로써 그 명제와 문제를 부활시키게 한다. 그러한 문제들 중 하나는 계급을 ‘군대’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된다. 이것은 계급투쟁을 점점 더 통일되고 양극화되는 두 적대적 세력들 간의 대결로 표현하는 것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자격부여(qualification)에 종속된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결과일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계급투쟁은 진정으로 자신의 행위자를 창조하거나 생산한다. 그 조건은 피착취계급과 착취계급의 초역사적 대결의 마지막 무대 또는 등장인물,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경향이다. 오직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의 편에서 계급투쟁의 조직자로서 직접적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 적대자는 어떤가?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볼 때 조직화된 세력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나 ‘정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마르크스는 그 개념[군대로서의 계급]을 최종적 결론으로 밀고 나아가는 데 주저했고, 좀 더 은유적인 활용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혁명을 계급전쟁(class war)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어도 공산주의 전통에서 1세기 동안 매우 강력했다는 것을 알지만, 마르크스에게서 군대 형태의 혁명정당, 즉 계급정당 또는 ‘전체 계급의 정당’이라는 개념의 가능성만을 발견한다(왜 그런지는 조금 후에 말하겠다.). 그러나 그 전에 방어의 문제와 관련된 두 번째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파생개념, 또는 클라우제비츠와 유사한 파생개념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비정치적’ 요소의 복귀를 준비하는 놀라운 역전을 목격한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심지어 혁명을 준비하고 자본가계급을 전복할 때라도 ‘방어적’ 투쟁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정치철학이 되며, 사실상 묵시론이 된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임금노동자를 절대적 빈곤과 실업에 빠뜨리며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임금노동자, 더욱 일반적으로는 노동자[임금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노나 노예]가 사회를 부양하고 유지하므로) 사회의 재생산과 생존을 위협한다는 관념과 결합된다. 마르크스가 여기서 묘사한 것처럼, 자본주의에는 허무주의적 요소가 있으며, 이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사회 내부의 적에 대항하여 사회를 방어하는 것과 동일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더욱 전략적, 또는 준(準)전략적 고려가 나타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자신의 힘, 의식, 조직을 경쟁하는 부르주아 조직으로부터 이끌어낸다는 관념에 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라리아 계급 정당을 반(反)국가로 가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가 착취적 사회질서를 위해 사회를 억압하는 한에서 국가의 부정, 즉 ‘부정의 부정’으로 간주했다. 이 모든 것은 대외 전쟁의 상황과 반대로 ‘내전’으로 인식되는 ‘사회적 전쟁’에서 적대자들은 진정 외부적이지 않고,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들은 하나의 분할[분업] 형태에서 동일한 사회적 주체의 진화 양식이며, 그렇게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전쟁과 정치의 접합을 이해한 결과는 결정적인 동시에 모호하다. 적대의 화해 불가능한 성격을 현실화함으로써 내전의 모형은 계급사회, 특히 자본주의에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정치적인 것의 종언을 준비하는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이행의 형태로 명백히 나타나며, 우리는 이를 자기절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이 마르크스가 후속 작업에서 이러한 설명을 단념하거나 무시하게 하였는가? 후속 작업은 그가 계급투쟁의 전개에 관한 다른 모형을 모색하도록 이끌었고, 그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제시했던 반정치로서의 정치적인 것이란 날카로운 서술로부터 어떤 의미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왜 그런가? 내 견해로는 일련의 긍정적인 요인들이 작동했다. 그것에는 점증하는 빈곤과 부의 양극화라는 ‘묵시론적’인 선형모형을 희생시키는 자본주의 발전의 경제적 축적사이클에 부여된 중요성의 증대도 포함된다. 그러나 전쟁과 내전의 현상들에 대한 더 많은 경험 역시 부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 현상들은 계급투쟁을 내전과 유비하는 것을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했고, 그것은 극단으로 밀린 내전 즉 ‘절대적 내전’으로서 혁명 모형에 관한 모든 부정적 측면을 보여주었다(그 교훈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에서 ‘개량주의’와 ‘혁명주의’간에 뜨겁게 논쟁되었다.). ‘제한적 내전’ 또는 ‘억제된’ 내전은 형용모순으로 보였다. 1848년과 1872년(파리코뮨)에 일어난 현실의 내전은 대량학살의 비극적 경험이었다. 이 때 부르주아 국가는 프롤레타리아를 궤멸시키기 위해서 (식민지 전쟁을 포함해) 대외전쟁 동안 형성된 군사 장치를 손쉽게 사용했고, 프롤레타리아는 결코 ‘군대’가 아니었다(심지어 게릴라 군대도 아니었다.). 게다가 (20세기는 물론이거니와) 19세기 동안 민족전쟁은 계급투쟁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정치와 전쟁이 접합하는 바로 그 장소이자 전략적 사고의 장소로서 남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증거가 있었다. 민족전쟁을 ‘현실’과 현실의 ‘정치’과정을 은폐하는 외양 또는 인공현실로 묘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코 완전히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민족전쟁은 서로 다른 나라의 지배계급이 ‘자신의’ 노동자가 서로를 절멸하도록 하고, 민족주의 담론으로 노동자를 기만하려는 노력을 결합해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민족전쟁의 엄연한 현실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했으며, 이는 클라우제비츠와 그의 문제를 직접 이해하는 것으로 복귀해야한다고 요청한 것이었다. 이는 엥겔스에 의해 준비되었다. 그는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을 ‘관념론적’으로 강조했다고 비판했고, 그것의 유물론적 등가물을 모색했다. 그것은 전쟁의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에 대한 강조와 양립할 수 있다고 입증되어야 했다. 이러한 등가물은 인민의 군대 또는 대중 징병이 (최소한 민주공화국에서는) 군대 내부에 계급투쟁을 잠재적으로 도입할 것이며, 따라서 군사문제에서 대중들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공포를 대중들이 국가와 군사장치를 희생시키며 새로운 전략적 행위자로서 부상한다는 예언으로 역전시킬 것이라는 관념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레닌과 마오쩌둥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변증법적 원칙이 전쟁과 정치의 새로운 접합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전략적 결합체에 대한 관념이 국가-군대-인민의 통일체로부터 계급, 인민, 혁명정당이라는 새로운 통일체로 대체되었다. 알다시피 레닌은 클라우제비츠를 철저히 읽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되고 2인터내셔널과 반전결의안이 붕괴된 후 『전쟁론』에 관한 주석과 논평을 남겼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라는 구호를 기초했고, (적어도 자신의 나라에서는)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그 구호는 ‘도덕적 요인’(국제주의적 계급의식)이 시간이 지남에 따른 ‘대중’전쟁(즉 대중으로 구성된 민족군대가 수행하는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방어’로부터 준비되는 ‘공세’라는 관념에 대해 완전히 독창적인 해석을 제공하며, ‘절대’전쟁은 유지될 수 없거나 유지될 수 없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그 필연성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그것은[내전으로 전환은] 반드시 국가를 파괴해야 하며 차라리 국가를 희생시켜 정치의 조건들을 반드시 재창조해야 한다. 국가는 인민을 무장시키고 인민의 무장력 활용을 통제하는 능력을 보유하는 한에서만 정치를 구현할 수 있지만, 그러한 능력을 박탈당하자마자 정치적 환영(幻影)이 될 것이다. 또는 합법적 폭력의 국가 독점으로부터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폭력의 계급 독점으로 변화되자마자 그렇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클라우제비츠의 전위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칼 슈미트의 비정치적 개념의 출발점을 형성한다는 것에 잠시 주목하자.12) 여기서 주권은 계급투쟁을 예방적으로 억압하기 위해서 국가의 핵심에 ‘예외상태’를 설치할 수 있는 능력으로 동일시되며, ‘내부의 적’ 즉 ‘계급적 내전’의 적에 대한 정의는 대외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폭력의] 국가 독점과 그 능력을 항상 재창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오쩌둥의 ‘유격대의 지구전’ 이론에 이르러서야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방식의 탈환이자 정치적인 것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영속적으로 클라우제비츠를 괴롭혔던 아포리아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사실 나는 여러 논평자들이 인정했던 것처럼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 이후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라고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는 클라우제비츠의 공리 중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모두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실제로 클라우제비츠를 직접 읽었거나 일부 인용문을 읽었는지 알기 어렵다(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이 그가 읽을 수 있던 유일한 언어인 중국어로 번역되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항일전쟁 이후 (더 정확히는 대장정의 종료 이후) 마오쩌둥의 다양한 소책자와 논문에서는 레닌이 제국주의에 대한 에세이에서 클라우제비츠를 직접 인용한 대목에서 다시 인용한 것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오쩌둥이 그 문제틀을 실질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모택동의 핵심적인 관념은, 처음에는 제국주의 적국과 지배 부르주아는 군대가 있지만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은 군대가 없기 때문에 방어 전략이 강요되지만, 이는 결국 대립물[공격전략]으로 역전되고, ‘가장 강한 적’의 실제 절멸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지구전’(또는 전쟁의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전쟁의 지속시간은 ‘마찰’의 변증법적 등가물이며, 농민 대중들 내부에서 피난처를 찾는 혁명적 노동자와 지식인의 소규모 핵심에게 필요한 시간이다(그들은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인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은 세 가지 결과를 동시에 추구한다. 첫째, 침략군의 고립된 분견대에 맞서 지역적 게릴라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적군의 희생을 대가로 스스로 무장한다. 둘째, 전장을 전국적 수준으로 (중국에서는 반(半)대륙 수준으로) 확장함으로써 전략의 기술을 ‘배운다.’ 셋째, 헤게모니를 외부의 권력(식민지 정복자 또는 민족의 특권계급)으로부터 내재적 권력으로 이동하고, 피지배계급들의 공통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고’ 인민을 인민의 적(또는 당의 적)으로부터 분리한다. 공산당은 바로 그 내재적 권력으로 간주된다(그리고 장기간 동안 내재적 권력으로 머무른다고 간주된다.). 오늘 이런 분석의 맹목점은 오히려 더 분명해 보인다(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다.). 즉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민족 내부의 세력들만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처럼, 2차 세계대전의 국제적 맥락을 사실상 무시한다는 것이다. ‘자력갱생’이라는 마오주의의 위대한 구호는 잠재적으로 민족주의적 차원을 지닌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전쟁의 합리성이란 관념(이는 정치적 주체를 함축한다.)에 대해 하나의 새로운 역사적 해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결과는 인상적으로 남는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완전한 순환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종결이 특히 국가가 수행하는 제도적 전쟁과 인민의 게릴라 전쟁 간에 확립된 위계적 관계의 역전이라는 것은 필시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역전이 클라우제비츠에서 발견되는 아포리아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 아포리아를 전위할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난점은 전쟁을 ‘절대전쟁’ 즉 무장한 인민이 수행하는 전쟁으로 변형하는 과정을 통해서 수립되고 활용되어야 하는 ‘도구’에 대해 국가가 선험적으로 절대적 지배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또한 중국혁명의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끌어오면서 생기는 마오쩌둥의 난점 또는 우리가 그를 사후적으로 독해할 때의 난점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계급 이데올로기를 통해 인민을 군대 또는 ‘인민군’으로 내부로부터 변형한 조직[공산당]의 내재적 권력, 즉 혁명정당이 스스로 국가가 되는 조건에서만 [방어에서 공세로] 전략적 반전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으며 정치적 대행자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이는 심지어 국가가 혁명적 사건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파괴되고 재건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하며, ‘문화혁명’으로 나아갔던 마오주의적 전망 또는 문화혁명 동안 교육되었던 마오주의적 전망에서도 그러하다). 사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민족해방전쟁의 조건에서는 가망성이 매우 낮지만) 혁명정당이 ‘권력장악’ 또는 적의 완전한 파괴라는 ‘최종’목적(Zweck)까지 혁명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며, 따라서 ‘절대전쟁’을 ‘제한전쟁’으로 어떻게든지 축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략적 과정의 주체(또는 전략적 과정 내부로부터 결정되는 주체)는 모든 상황에서 분열된 주체 또는 주권과 봉기 사이에서 동요하는 주체로 머문다. ‘분자전쟁’(엔첸스베르거)에 대한 일부 근대 이론가와 논평자는 주체의 범주를 단순히 제거하거나 그것을 부정적이거나 불완전한 형상으로 환원함으로써 아포리아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전쟁’의 범주 그 자체가 유지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1) [역주] 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프러시아 부르크에서 태어나 1831년 51세의 나이로 프러시아 브레슬라우에서 콜레라로 병사할 때까지 39년 간 군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폰 마리는 1832년 유고를 정리하여 10권의 선집계획 중 1차 저작계획으로 1권에서 3권까지를 묶어 『전쟁론』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마리는 남편이 생전에 자신의 저작이 출판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고 술회했다). 그 후 1837년까지 『전쟁과 작전술에 관한 칼 폰 클라우제비츠 장군의 유작집』이 10권으로 출판되었다. 본문으로 2) [역주] 마르쿠스 키케로(기원전 106년 - 기원전 43년)는 카이사르와 동시대 사람으로 기원전 63년에 집정관의 자리에 올랐다. 같은 해 63년에는 카틸리나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자 키케로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무기 삼아 이를 진압한다. 키케로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Consul sine armis(군사력을 갖지 않은 집정관), Dux et imperator togae(토가 차림의 최고 사령관), Cedant arma togae(文이 武를 제압하다). 키케로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에 관한 이론을 제시했고, 이는 훗날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계승된다. 본문으로 3)[역주] ‘정의로운 전쟁’(just war=bellum justum) 이론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화한 후 중세 기독교 전쟁사상의 핵을 이룬다(콘스탄니누스(301-337)는 군대를 로마로 진격시키면서 군대의 방패에 십자가 표지를 달게 했으며, 테오도시우스는 416년 칙령을 내려 기독교도만을 군인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키케로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받아들여 전쟁이 다음의 조건을 갖추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첫째, 전쟁이 사회의 보편적인 선을 위한 것으로 합법적 당국에 의해 선포되어야 한다. 둘째, 전쟁의 원인이 정당해야 하며 결코 법질서에 위협이나 손상을 주어선 안 된다. 셋째, 전쟁의 목적은 전쟁 이전보다 훨씬 더 법질서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합법적 당국을 황제로 규정하고 방어전이 아닌 공격전까지 정의로운 전쟁에 포함시키는 것이며, 정복전쟁 이후 적대국을 포괄적인 법질서로 융화시켜야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한편 십자군 전쟁의 참화가 지난 후 아퀴나스(1225~1274)는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을 재정식화하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전쟁방식은 공격전이 아니라 방어전이어야 하며, 정당방위의 경우에만 살상이 인정되고, 전투요원이 아닌 민간인은 결코 전쟁 대상이 되어선 안 되고, 적을 살상하기보다는 적이 스스로 상용하는 처벌을 자임할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본문으로 4) [역주] 클라우제비츠는 전략 일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략이란 전쟁의 목적(적의 무장해제)을 획득하기 위한 전투의 원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은 총체적인 군사행동에 목표를 부여하는 것이며, 전쟁계획을 형성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여러 행동계열을 하나로 묶어서 최종적인 결정행위로 유도하는 국면으로 연결시켜주어야만 한다. 요컨대 전략은 분리된 전역을 수행하기 위해 제반계획을 마련하며, 각 전역에서 행해질 전투행위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략의 구성요소를 ①정신적 요소, ②물리적 요소(전투병력, 조직과 편성, 3개 병종의 구성비), ③수학적 요소(작전선의 각도, 집중운동과 원심운동), ④지리적 요소(지형지세의 영향, 지휘소의 지점, 야산·삼림·도로), ⑤통계적 요소(모든 종류의 자재보급 수단)로 제시한다. 본문으로 5) [역주] 1812년 9월 7일 나폴레옹의 모스크바원정 도중에 있었던 최대의 격전. 초토화전술을 써가며 후퇴만 계속하던 러시아군은 신임 총사령관 쿠투조프 장군 지휘 하에 모스크바 서쪽 약 90㎞ 지점인 보로디노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맞아 싸웠다. 양군의 병력은 프랑스군 13만 5,000명, 러시아군 12만 6,000명이었으며, 쌍방 모두 500~600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전투는 새벽부터 시작되었고, 맹렬한 포격전에 이어 치열한 백병전까지 벌였는데, 프랑스군 5만 8,000명, 러시아군 4만 4,000명의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저녁까지도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다. 쿠투조프는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려고 야음을 틈타서 퇴각하였으므로, 프랑스군은 그대로 전진하여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이 전투는 표면상 나폴레옹군의 승리로 보이지만, 그 후 러시아군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프랑스군의 러시아 원정 실패의 시초가 되었다.본문으로 6) [역주] 게릴라는 스페인어로 ‘소규모 전투’를 뜻하는 말로서 나폴레옹이 스페인 원정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무장저항을 게릴라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전략적으로 열세한 측이 대중의 지지와 험준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스스로 선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형태로 전술적 공격을 취하는 전쟁 과정중의 한 국면을 이루는 싸움의 한 형태이다. 참고로 빨치산(partisan)이란 parti 즉 도당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게릴라전에 종사하는 인간의 집합체 조직을 뜻한다. 1818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시에 고전하는 자국의 군대를 도와 이에 저항하였던 러시아 농민을 프랑스군이 호칭한 데서 비롯된다. 또한 유격전은 중국의 마오쩌둥이 사용한 용어이며, 1927년 이후의 국공내전 및 대일전쟁을 통하여 중국공산당 무장저항조직의 별동대가 소부대로 유격하면서 틈을 보아 적을 치는 비정규적 방식의 전법을 지칭한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게릴라, 유격대, 빨치산이란 용어는 유래가 다르지만 지금은 대체로 혼용하여 사용된다.본문으로 7)[역주]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가 프랑스 국내의 반혁명파와 손을 잡고 혁명파를 공격을 한 이후로 프랑스 군대의 역할과 성격이 변용되었다. 더 넓은 범위의 프랑스국민을 무장시킨다는 방침이 세워졌고, 정규군과 의용군의 통합이 이뤄졌다. 1793년 프랑스 국민공회에서 가결된 법령의 문안은 다음과 같다. “모든 프랑스 국민은 군복무를 위해 징발된다. 젊은 남성은 전선의 전투부대에 참여하고, 기혼남성은 무기를 만들거나 군수품을 수송하며, 여성은 천막이나 의복을 만들거나 병원에서 복무하고, 어린이는 낡은 아마포로 붕대를 만들며, 노인은 광장에 나가서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공화국의 단결과 국왕에 대한 증오를 선전한다.” 이러한 국민총동원령에 따라 징병제(국민개병제·의무병역제)가 도입된다. 본문으로 8) [역주] 나폴레옹이 프러시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강요한 조약은 1808년 이후 프러시아 육군의 규모를 4만 2천명으로 제한했다. 프랑스의 강제적인 동원해제, 점령과 징발로 인해 프러시아 국민들의 감정은 악화되었고, 1813년 해방전쟁이 시작되고 프러시아 정부가 대대적으로 징병에 돌입하자 국민들은 기꺼이 징병에 응했다. 클라우제비츠는 1812년 러시아로 넘어가서 러시아군 중위계급의 옷을 입고 참전했다가 1813년 프러시아로 돌아오고 3월에 프러시아 군으로 복직한다. 그는 프러시아의 ‘국민총동원’(Landstrum)과 ‘후방군 민병조직’(Landwehr)을 구상했지만, 국왕의 냉대로 인해 그 활동에 직접 기여할 수 없었다.본문으로 9) [역주] 엥겔스는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 독일제국헌법을 반혁명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독일 라인 지방에서 일어난 바덴-팔쯔 봉기(badisch-pf lzischer Aufstand)에서 빌리히의 부관으로 직접 참여했다(프러시아 포병장교 출신 혁명가인 빌리히는 엥겔스를 ‘대단히 쓸모있는 장교 가운데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 해 10월 영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그가 겪은 경험은 그의 혁명적 군사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문으로 10)[역주]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발전의 가장 일반적인 단계를 서술함으로써, 다소간 가려져 있는 기존 사회 내부의 내란[내전]이 공개적인 혁명으로 바뀌고,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를 공개적으로 타도하여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는 데까지 고찰했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p 64, 거름, 1991.) 본문으로 11) [역주]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 (…) 서로 영원한 적대 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 왔다. 그리고 이 투쟁은 항상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p 52, 거름, 1991.)본문으로 12) [역주] 칼 슈미트(1888-1985년)는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이다. 1933년 그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나치 당에 입당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쓴 주권에 대한 저작들은 논쟁적인 저서로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주권이 존재하는 장소는 사법적 질서의 안과 바깥 모두이며, 주권은 어떠한 법률로도 제한할 수 없는 권력이고,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대해 결정하는 자이다. 본문으로
: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변이들 [%=박스1%] 우리는 이중적 의미에서 진정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듯하다. 우선 활기차게 진행 중인 논쟁이 있다. 이것은 동시대 전쟁의 클라우제비츠적인 또는 비-클라우제비츠적인 성격에 관한 논쟁으로, 이는 ‘전쟁학자’들의 협소한 논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이 논쟁은 대략 25년 전[1980년대 초반 미국 레이건 정부 당시에] 시작되었다. 그 시점에서 [핵무기에 의한] 강대국의 상호파괴에 대한 전형적인 냉전 시대의 강박증은 주로 제3세계에서 발발한 ‘저강도분쟁’(low intensity conflicts)에 대한 군사전문가와 정치이론가의 첨예한 관심으로 대체되었다(제 3세계라는 범주는 제 2세계가 붕괴한 후에도 여전히 많이 사용된다). 저강도전쟁은 극히 비대칭적이었는데, 게릴라 형태의 적에 대항하는 북반구의 기술적으로 정교한 군대의 개입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마틴 반 크레벨드와 미국의 사무엘 헌팅턴은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정치환경에서 ‘비(非)-클라우제비츠적’ 전쟁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한 최초의 인물들인 듯하다. 그 후 전(前)유고연방과 다른 지역에서 ‘종족전쟁’(ethnic war)이 일어났다. 이 전쟁들은 영국의 평화이론가이자 정치학자인 매리 캘도어와 다른 학자들로 하여금 과거의 전쟁(Old War)과 대비되는 새로운 전쟁(New Wars)이란 슬로건을 제시하도록 자극했다. 새로운 전쟁은 정규군을 지닌 민족국가가 아닌 [전쟁의 새로운] 역사적 ‘주체’를 동반한다. 또한 그들에 따르면, 클라우제비츠의 저명한 저작 『전쟁론』에서 파생한 관념들이 일반화되고 새로운 환경, 새로운 전략적 관심사와 새로운 기술에 적용되고 지난 150년 동안 전쟁이론가의 주요한 관심사였더라도 그 관념들이 지닌 설명의 효용성은 한계에 달했다. 전쟁과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 인종, 경제를 포함하는 [새로운] 종류의 상호작용이 지금 일어나고 있지만 그 관념들은 이를 설명할 수 없었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현실 물리세계를 설명하며 영예로운 이력을 쌓은 후 어느 시점에서 비(非)-유클리드 기하학에게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클라우제비츠의 전략과 전쟁학은 또 다른 유형의 [군사적] ‘계산’(calculation)을 고려하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새로운 비-클라우제비츠적 이해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현대 전쟁에 대한 분석가들이 클라우제비츠의 도식과 개념을 분석적으로나 규범적으로 계속 사용할 수 있다고 옹호하는 것을 가로막지 않는다. 나는 특히 『무질서의 제국』(Empire of Disorder)이라는 주목할 만한 저서를 발간한 알랭 족스가 그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는 클라우제비츠를 사회·정치적 현상이자 국가주권의 상관물인 전쟁에 대한 이론가들 중 하나로 간주한다. 그는 투키디데스, 마키아벨리, 슈미트뿐만 아니라 홉스, 마르크스, 베버를 전쟁이론가에 포함시킨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상당 부분 미국이 중동에서 전쟁을 개시하고 처음 3년 동안 전쟁이 전개된 방식의 결과다. [미국의 중동전쟁에서] 신속히 이어진 성공적인 공격과 점점 더 어려워지는 방어 전투는 (심지어 퇴각의 가능성, 나아가 필연성에 늘 시달린다.) 베트남 전쟁과의 유사성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지리적 또는 지리-문화적 조건에서 군사작전 내부에서 정치적 요인의 복귀에 관한 고전적 논의와,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군의 효율성이 감소하므로 결국 공격 전략보다 방어 전략이 우월하다는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명제를 부활시킨다. 하지만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적용하기에는] 모두가 알고 있는 난점이 있다. 그것은, 철학적 범주를 사용해서 말해보자면 ‘순수한’ 클라우제비츠 모델에서 결국 승리하게 되는 전략의 ‘주체’는 이미 형성된 것이든 전쟁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든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군대-인민-국가의 통일체와 동일시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는 미국의 침략에 대한 베트남의 저항에는 적용될 수 있지만 이라크 전쟁의 경우에는 매우 의심스러우며 아마도 부적합한 주장이 될 것이다. ‘인민의 저항’ 또는 ‘반제국주의 지하드’를 주창하는 일부 무명의 이데올로그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단순한 방식으로 반미 군사행동의 ‘주체’를 식별할 수 없으며 ‘이라크’ 국가와 통합된 인민의 존재 자체가 문제다. 현재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적 관념이나 용어, 또는 그와 유사한 것을 적용하려고 할 때 이와 비슷한 난점이 작용하는 듯하다. 현재 상황에 관한 표상은 두 적들 간의 (세계적 규모의) ‘격투’이며 각각은 상대방의 섬멸을 추구한다. 미국 정부는 이를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두 적들 간에 명백한 비대칭성이 존재하지만 현재 상황은 ‘순수한 전쟁’(pure war)의 법칙으로서 ‘극단으로의 상승’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유비 역시 난관에 부딪친다. 클라우제비츠의 모델에서 폭력을 극단으로 상승하게 하는 가동장치는 더 큰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사활적인’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각 적대국의 의지이며, 이는 합리적인 도박으로 제시된다. 따라서 극단으로의 상승에는 제한 또는 자기제한의 원칙 역시 포함된다. 전쟁을 위한 전쟁, 자신의 권력을 파괴하는 전쟁은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하며 시공간의 제한이 없는 전쟁, ‘악마’와 동일시되는 불확정적인 적에 대항하는 전쟁이란 관념 역시 불가능하다. 이러한 전쟁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전쟁’이라고 불러선 안 되며 정치적이기보다는 신학적인 또는 신화적인 다른 이름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고찰이 매우 단순하고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 왜 전쟁과 정치의 본질적, 또는 구성적인 관계에 대한 반성이 심원하게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채로 남아있는지 사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 비판적인 의미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모든 명제와 정의를 재조사하고, 전도하고, 개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리 폰 클라우제비츠가 남편이 남긴 원고를 『전쟁론』으로 출판한 후 지난 150년 동안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현재에도 그것은 필수적이다). 1) 나에게 시간이 있다면 나는 클로드 르포르와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에 관해 쓴 모델에 근거해서 (그들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자신들의 정의를 클라우제비츠에서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 클라우제비츠가 항상, 완전히 합리적이진 않더라도 정치를 사고 가능하게 하는 핵심을 건드린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정치이론 내부에서 클라우제비츠의 문헌에 대한 ‘연구’는 결코 끝나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클라우제비츠를 독해함으로써 생산되는 영속적인 곤란함이 동반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충분한 문헌적 근거를 결여한 채 내린 결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확히 문헌으로 돌아가서 개념적 독자성들을 개략적으로 평가하자. 나는 발표를 상당히 불균등한 두 부분으로 나눌 것이며, 각 부분은 훨씬 더 논의를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첫 번째, 훨씬 더 긴 부분에서는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을 해석 또는 재구성하는 문제를 다룰 것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서 클라우제비츠에게서 ‘파생’된 개념과 클라우제비츠에 대한 ‘대응’을 다룬다. 이는 상이한 방식으로 존재하며,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클라우제비츠의 민족전쟁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대응물로서 ‘계급’이 상기될 수 있다. 이어 매우 간략할 수밖에 없는 결론에서 나는 하나의 본질적 통일체 내에서 전쟁과 정치를 접합하는 방식들에 함축된 ‘주체’(또는 비(非)주체, 또는 불가능한 주체) 개념의 쟁점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제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을 읽을 때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를 상기해보자. 그의 저작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고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저작의 상태는 파스칼의 『명상록』이나 안토니오 그람시의 『옥중수고』와 비슷하다. 클라우제비츠는 저술 과정에서 결정적인 수정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저작 전체를 다시 쓰길 원한다고 선언했다. 이런 저작에서 철학적, 실용적 수준의 내적 일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지금까지 수백 편의 논평들이 출판되었을 만큼 매우 어려운 과제다. 나는 이 논평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불완전하고 편향적일 수 있으나 인위적이지 않길 바라는 해석 절차를 단도직입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나의 해석은 클라우제비츠의 명제가 계속 난점을 제기하거나 새로운 재해석을 요청한다는 독해 결과에 근거를 둔다. 나는 네 가지 명제를 추려내서, 그것들을 하나의 체계 또는 공리로 구성할 것이다. 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적 기획이 각 명제들의 (서로 분리되어 있든, 서로 반작용하든) 과도한 결론을 통제하려는 계속되는 시도라고 설명할 것이다. 나는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사상가들이 상이하게 이해하든가, 또는 재정식화하든가, 아니면 서로 분리하려고 시도하는 문제의 명제들이 동일한 집단에 속한다고 제안할 것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클라우제비츠의 명제 중에서 (최소한 현재) 군사전문가 집단을 넘어서 가장 유명하고 자주 논의된 것은 전쟁의 정의 또는 특징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독일어로 Fortsetzung)”(때로는 단순한 계속이다.)이라는 명제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전략으로서 ‘방어’는 본질적으로 ‘공격’이나 ‘공세’보다 우월하다.”는 명제다 (그런데 전략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 역시 분명히 동반된다). 나는 두 명제에 대해 간략히 언급할 것이지만, 다른 두 명제를 더 언급해야만 [체계 또는 공리가] 완성된다고 제안할 것이다. 나는 네 가지의 사실상 독립적인 명제들의 체계 또는 공리를 통해서만 클라우제비츠의 의도와 난점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제안할 것이다. ‘계속’ 명제는 『전쟁론』의 분리된 두 곳, 1편과 8편에서 [서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뉘앙스로 두 번 반복된다. 그것은 저작의 양끝에서 제시될 뿐만 아니라, 저자의 암시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상이한 개념들에 상응한다. 첫 번째는 확실히 전쟁이 ‘계속해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다른 수단을 통해’ 또는 ‘다른 수단을 도입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관념을 강조한다. 이 때 다른 수단은 위협이나 압박뿐만 아니라 현실의 폭력, 심지어 극단적 폭력의 수단이다. 이것은 정치의 통상적 또는 정상적 수단은 비폭력이지만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에] 불충분하므로 정상적 수단을 넘어서 ‘다른 수단’(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수 없다면, 즉 정치의 가능성(과 권력)을 확대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정치 행위는 절대적 한계에 도달한다는 관념을 함의한다. 그러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며, 정치적 주체의 존재가 위험에 빠질 뿐만 아니라 [정치]행위의 정치적 성격과 정치의 정치적 ‘논리’ 자체가 전복될 수 있는 위험 지대, 제한 영역으로 진입한다는 관념 역시 함의한다. 동일한 맥락에서 클라우제비츠는 폭력적 수단(전쟁이라는 수단, 군사제도와 애국주의의 발생과 같은 수단[전쟁]의 수단)의 사용은 정치에 반작용하거나 정치를 변화시킨다는 관념을 도입한다. 정치는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면 변형될 수밖에 없으며, 아마도 근본적으로 변형되고 변성될 것이다. 따라서 정치와 전쟁의 접합이라는 문제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라는] 처음 진술의 본체가 위태로워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즉각 변증법적 진술로서 제시된다. 하지만 두 번째 정식이 있다. 두 번째 관념이 강조하는 것은 전쟁이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일 뿐’이며 정치적인 것의 정상적 한계를 침해하지 않지만, 이러한 한계 내에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정치적 주체는 상황, 세력, 이익에 따라 어떤 정치적 ‘도구’로부터 다른 도구로 이동할 수 있으며 (클라우제비츠는 ‘도구’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한다) 이제 정치적 주체의 특징은 바로 폭력적 수단과 비폭력적 수단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능력, 또는 비폭력적 수단의 사용에만 자신을 제한하지 않는 능력이라는 것이다(우리는 이를 주권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확실히 이러한 정식으로부터 정치의 합리적 성격에 대한 어떤 표상이 나타난다. 특히 정치의 목적을 달성하거나 어떤 상황을 조정하기 위하여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방식에 의해 정치의 합리성이 설명된다. 하지만 이러한 표상 역시 변증법적 관념이라는 것이, 또는 잠재적 긴장과 위험성을 동반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묘사로 해석될 수도 있고, 처방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한편으로 정치는 자신의 본성을 바꾸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침범하지 않으면서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사용한다는 주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의 폭력적 수단은 전쟁의 결과, 전쟁을 사용하는 자에게 끼치는 반작용 효과, 전쟁의 ‘논리’가 정치적 합리성을 벗어나지 않거나 전복하지 않을 때만, 즉 독립적 논리가 되지 않을 때만 정치적 수단으로 남는다는 경고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독립적’ 논리이지 않은가? 클라우제비츠가 함의하는 것은 정치가 전쟁을 도구화할 수도 있고 전쟁이 정치를 도구화할 수도 있지만 후자는 불가능하거나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는 정치에는 ‘논리’(logic)가 있고 전쟁에는 오직 ‘문법’(grammar)만 있을 뿐이며, 전자가 후자에 대해 최우선권(primacy)을 지닌다고 썼다. 내가 보기에 바로 여기에 난점이 존재한다. 우리도, 클라우제비츠도 이 난점을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없으며 이 때문에 클라우제비츠는 다른 정식을 제시해야만 했다. 그러한 난점은 앞으로의 고찰을 통해 규명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정치와 관련하여 전쟁을 두 번, 서로 다른 두 각도에서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정치의 전부가 아니지만 (왜냐하면 정치는 전쟁과 다른 절차를 지니며, 이 역시 동일하게 필수적이다) 정치의 본질과 관계를 맺고 그것에 영향을 끼친다. 정치가 전쟁에 의존하는 방식과 전쟁의 폭력적 수단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정치에 미치는 결과는 정치의 본질을 드러내고 실제적으로 정치를 결정한다. 확실히 클라우제비츠가 피하고자 했던 것은 전쟁에 대한 의존이 정치의 본질이라는 주장이며, 전쟁의 폭력적 수단의 사용과 전쟁의 논리적이고 실존적 함의(예컨대 하나 이상의 ‘적’을 지목해야 할 필요성)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정의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처음 진술의 역(‘정치는 전쟁의 계속이다,’ ‘정치는 전쟁의 결과다.’)으로 나아갈 수 있다(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이러한 주장을 피하고자 했지만 이런 시도 역시 난점들을 지니며, 그 문제들은 클라우제비츠의 계승자들을 늘 괴롭혔다는 것을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도구’로서 전쟁의 활용과 그것이 정치 그 자체에 미치는 역효과에 대해 문제제기하길 원한다(또는 필요로 한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이 과거 로마의 사법적·정치적 원리를 근대적으로 다시 정식화한 것이라고 이해하고자 할 수도 있다. “문관이 군을 제압한다(cedant arma togae).”, 이는 전쟁의 무장행동과 군사제도가 문관의 최우선권에 복종되어야한다는 것이다.2) 그러나 규범적 가치를 지닌 이 정식은 클라우제비츠를 괴롭혔던 문제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치적 수단으로서 활용되는 전쟁은 정치에 반작용하고, 정치를 가장 심원하고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하는 새로운 형태로 변형하며, 이러한 형태에서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문제가 되고 위태로워진다는 것이다. 반면 전쟁을 정치적인 것의 최우선권에 영속적으로 종속시킨다는 것은 전쟁이 합리적이라고(또는 합리적인 채로 유지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전쟁의 합리성은 하나의 고리를 형성하는 수단과 목적의 ‘실천적’ 관계를 통해 본질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전쟁의 합리성은 정치적인 것 자체로부터 유래하는 목적론적 합리성이며, 정치적인 것은 전쟁의 합리성에 대한 척도다. 이러한 주장은 다른 무엇보다도 놀라운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이 폭력의 극단에 이른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력의 극단, 즉 현실적 파괴가 문제가 되는 폭력의 극단에 이른다는 것은 ‘순수한 폭력’의 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클라우제비츠가 전투(Gefecht)의 관리로 규정한 전술의 수준에서 폭력이 극단에 이르고, 여기서 인간이 개별적으로, 집단적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다. 그러나 전술과 전투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전쟁의 일부이며,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전략적’ 목표에 종속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왜 전략의 문제(전략의 정의, 기능)가 클라우제비츠에게 가장 중요하고 또한 (아마도) 가장 곤란한 문제인지, 결국에는 이 문제가 [클라우제비츠에게서] 회피되고 마는지를 (이미) 이해할 수 있다. 전략은 전쟁에 대한 (역사적, 개념적) 분석 속에서 극단적 폭력(절대적 수단)의 수준과 정치적 합리성(절대적 목적)의 수준을 접합한다. 우리는 인간학의 용어법을 도입해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이란 이름으로 정치와 결합시키는 ‘폭력’은 무제한적 폭력이 아니라 제도적 폭력이며, 제도적 폭력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은 ‘폭력이 정치의 계속’이 아니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에게 문제는 어떻게 폭력이 극단에 이르면서도 제도의 한계 내에서, 제도적인 것으로 남게 할 수 있느냐이다. 하지만 대립물의 통일이 유지될 수 없다면 무슨 일이 발생하는가, 또는 발생할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변이들이 실천적 동기와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따라 매번 어떻게, 왜 발생하는지 이미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변이들은 ‘전쟁이 다른 수단, 즉 극단적 폭력의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며, (본래의 가설에 따라) 정치는 정치적 합리성 또는 목적에 종속된 도구로서 폭력을 사용한다’는 원리를 형식적으로는 유지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이들은 정치적인 것에 관한 통념과 ‘전쟁’의 정의에 완전히 새로운 내용을 부여한다. 역으로 그 변이들은 정치, 전쟁, 폭력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만 ‘계속’이라는 관념을 주장하거나 문제 삼을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러한 변이들은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이 지닌 순환성과 동시에 초기 조건을 훨씬 뛰어넘는 생산성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클라우제비츠가 더욱 구체적인 일련의 공리들 내에서 일반적 원리와 결부시킨 다른 명제들을 고려함으로써만 가능해질 것이다. 공격 전략에 대한 방어 전략의 우월성 『전쟁론』에서 발견되는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두 번째 명제는 ‘공격’에 대한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과 관련된다. 이 명제 역시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고, 여러 번 다시 정식화된다. 특히, 방어와 공격을 다루고, 이런 관점에서 상호 검토를 다루는 6편과 7편에서 주요 논의가 전개된다. 클라우제비츠는 방어의 우월성이 전술 수준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것도 아니며, 따라서 방어의 우월성이란 전략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수준에서 전형적으로 존재하고 전략 이론의 전체 대상은 이 명제를 확립하고 여러 환경과 조건에 따라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자 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전형적인 순환을 발견한다. 일반적으로 방어의 전술적 우월성이란 주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전술적 공격은 모든 전략적 방어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관념은 그와 대단히 상반된다 (왜냐하면 전술적 공격은 적에게 피해를 주고 적의 전쟁수행 능력, 즉 기동과 판단 능력을 부단히 파괴하기 위해서 세력관계에서 나타나는 시공간적 불균형을 활용하며, 이는 특히 최초 공격에서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의 계승자 중에서 마오쩌둥은 유격대 전쟁을 이론화하면서 [방어 전략과 전술적 공격의] 상호 보완성를 일관되게 발전시키지만, 이는 클라우제비츠에게 이미 명백히 존재했다. 또한 ‘방어적 정치의 우월성’ 또는 본질적으로 우월한 방어의 정치(예를 들어 민족의 방어, 민족경계의 방어, 독립의 방어)라는 주장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이는 아마도 가장 어려운 지점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 방어의 정치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 이론의 ‘현실주의적’ 판본과 같거나 그 일부다.3) 폭력의 적법성(ius ad bellum)의 근대적 판본은 오로지 외부의 침략에 반응하여 민족이 수행하는 방어적 전쟁만이 적법하다는 것이다. 이런 전쟁은 적법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그리고 모든 것들을 고려할 때 결국에는 승리를 거둘 수 있다(‘결국에는’이란 여러 예외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방어의 정치는 클라우제비츠의 개념이 아니다. 그에게는 전쟁에 관한 도덕적이거나 신학적인 개념이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훗날 칼 슈미트가 유럽 공법(ius pulicum Europaeum)으로 체계화한 관념, 즉 민족국가는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전쟁에 호소할 고유한 권리를 지닌다는 관념의 전형적인 주창자다. 방어의 우위라는 관념은 정치적 목적(Zweck)과 무관하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군사적 목표(Ziel)와 ‘오직’ 관련된다. 확실히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은 정치와 전쟁의 접합의 형식적 합리성에 본질적 한계를 부과한다(물질적 한계 또는 유물론적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정치가 전쟁의 궁극적 목적을 부과하는 한에서만 이러한 접합은 합리적이거나, 이론화할 수 있는 합리적 구조를 보여준다(의식적이든 아니든, 전쟁 행위자가 정치의 결정을 의식하든 못하든, 모든 전쟁의 궁극적 목적은 항상 정치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바로 군사적 목표의 달성가능성이 정치가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한에서만(대개 사후적으로 결정한다.), [전쟁과 정치의 정합은 합리적이다.] 그리고 [군사적 목표의 달성가능성은] 확실히 현실 전투의 형태로 결정된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낯선 상황에 이르게 된다. ‘전략’이 클라우제비츠의 숙고의 주요 대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이를 위해 역사적 상황을 비교하고, 전략의 천재성를 보여주는 군사 천재의 사례들을 검토하고, ‘전쟁계획’ 또는 ‘전략적 통일성’의 개념이 되는 특유한 ‘문법적’ 개념을 분리하고, 이러한 전쟁계획이 고안되고 실험될 수 있는 지리적, 시간적 한계(‘전투’, ‘전장’ 등등)를 지적하려고 대부분의 분석을 할애했다.4)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역설적이다. 그러한 작업이 점점 더 정교해지고 실체화될수록, 작업의 대상[전략]의 자율성은 점점 더 모호해지거나 문제가 되는 듯하고, 또는 오히려 논리적 역설에 말려든다. 즉, 이는 마치 전략적 사고와 전략적 계획의 주요 목표는 궁극적으로 전장에서 전략의 자율성과 같은 것이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정확히 보여 주는 것처럼 된다. 전략은 내적 긴장과, 아마도 전쟁 개념의 아포리아(aporia)[철학의 난제]를 응축한다. 세 가지 문제를 추가적으로 검토해서 이를 해명해보자. 첫째, 이는[전략의 문제는] ‘이론’과 ‘역사’가 문제의 통일체에서 만나는 곳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항상 독자적(singular) 과정이며 연역적인 전쟁과학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항상 강조했다. 그러나 『판단력 비판』의 칸트적 의미에서 정치와 전쟁이 접합되는 규칙과 경향에 대한 반성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반성은 가설로 남는다. 우리는 전략의 자율성이란 개념은 전적으로 자신의 조건들과 한계들, 그것들의 역사적 변이들과 관련을 맺으며, 자신의 유효성을 영속적으로 시험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조정되는 개념이며 판단의 범주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합리적이며 주관적인 이유로 이러한 고찰에 흥미를 느꼈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주어진 역사적 정세에서 역사로부터 끌어낸,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참여한 전쟁인 프랑스와 나머지 유럽 국가들의 혁명전쟁과 제국전쟁으로부터 끌어낸 ‘교훈’이 결국 방어 전략이 승리하는 것을 보여주는지, 이런 교훈이 미래로 확장될 수 있는지 결정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는 전쟁이 정치의 도구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또는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전쟁이 정치의 ‘계속’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을(또는 이미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또는 [정치의 계속이라는 전쟁의] 논리적 기능을 제거하는 위험을 무릅쓸 뿐이라고 의미하는지 결정하고자 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역사의 경향적 결과로서 방어 전략에 우월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방어 전략의 우월성을 다루는 논증에는 이 문제가 [항상] 수반된다. 클라우제비츠를 늘 괴롭혔던 이 문제가 전쟁에 대한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인 반성에 영속적으로 출몰할 것이고, 현재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그러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인상적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명제를 역설로서 제시했고(어떻게 오직 소극적인 결과를 낳는 방어 전략이 적극적인 결과를 낳는 공격 또는 정복 전략에 비해 우월하다고 증명될 수 있는가?), 이러한 역설은 전쟁의 수단이 극단으로 나아갈 때 명백해질 어떤 잠재적 불가능성의 신호가 아닌지 의심했다. 둘째, 우리는 방어 전략과 공격 전략이 마치 분리된 채 존재하는 것처럼 두 가지 ‘상이한’ 전략들 각각의 특질을 비교하는 표면적인 도식을 극복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다른 것으로] 변형해야 한다. 그것은 방어의 공격으로의 변형과 반전, 또는 방어가 공격으로 전환되는 변곡점의 탐색이라는 더욱 심원한 문제다. 이것은 전쟁의 시간과 공간의 문제 즉 전쟁의 ‘역사’의 문제이며, 전쟁 행위자의 문제이므로 다시금 실질적인 의미에서 전쟁의 역사의 문제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격투’의 복합적 형태이고 시간에 따라 발전하며, 다시 말하자면 행위자들의 세력관계를 부단히 변형한다고 썼다. 그 행위자들은 복합적일 수 있는데, 왜냐하면 정부와 인민을 포함하고, ‘군대’란 전형적인 형태로 통합된 제도와 인간을 포함하며 (군대는 역사의 행위자가 전쟁의 영역에 등장하는 일반적 형태다) 동맹과 동맹의 변화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전쟁의 시간은 공격에서 방어로, 방어에서 공격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지닌 시간이다. 그것은 예정된 순환을 지닌 순전히 논리적인 시간이 아니며, 결국 전략적 ‘태세’ 중 하나[방어 또는 공격]를 강화하는 모든 요인들의 경향적 우월성에 의해 지배되는 역사적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의 효과를 요약하기 위해 클라우제비츠가 사용한 일반적인 통념은 마찰이다. 마찰이라는 용어가 암시할 수 있는 것과 반대로, 그것은 기계적인 개념이 아니라 역사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도덕적, 기술적, 심리적, 사회학적 요인을 ‘통합’한다. 따라서 클라우제비츠의 문제, 즉 전략적 숙고의 대상은 왜 즉각 성공하지 못한 (또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한) 공격은 방어를 취하는 적에게 점차 굴복할 수밖에 없는지, 어떤 수단이 이런 불가피한 결과를 지연시키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떻게 방어 전략이 성공적인 반격의 준비인지를 이해하는 것이다(이는 반격이 방어로부터 준비되며, 어떤 의미에서 방어는 내재적으로 공세국면에서도 계속되고 연장된다(fortgesetzt)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이상적인 변곡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따라서 모든 문제는 이런 변곡점을 규정할 수 있느냐, 어떤 종류의 사건이 이런 변곡점으로 규정될 수 있느냐가 된다. 클라우제비츠가 이 문제를 절대적으로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 문제에 이론적 공식을 부여했다. 그것은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 나폴레옹의 ‘공세 전략’과 쿠투조프의 ‘방어 전략’의 대치 과정에서 거대한 규모로 실행되었다. 프러시아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승자가 주도하는 동맹에 다소 자발적으로 참여한 후 [프러시아와 프랑스가 대(對)러시아 연합전선을 펴게 되자] 클라우제비츠는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서 러시아 군대의 보좌관으로 참전하기로 결단하고 전쟁에 참여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레오 톨스토이를 포함해 19세기 이후 전쟁 이론가들이 반복해서 언급할 정도로 극적인 사건은 보로디노 전투였다(엥겔스와 톨스토이는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 착수하기 이전에 보로디노 전투에 대해 서술한 글을 신뢰했으며, 그 글은 나중에 클라우제비츠의 누이에 의해 출판했다.).5) 비슷한 규모와 전력을 지닌 두 ‘대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냈고, 보로디노 전투는 나폴레옹의 전술적 승리로 보였지만, 결국 나폴레옹의 전략적 패배로 입증되었다. 보로디노 전투는 즉각 러시아 수도의 정복을 낳았지만, 사실상 나폴레옹의 최후의 패배를 예비하였다. 그러나 이 대치 역시 [방어에서 공세로] 변곡점이 발생하는 어떤 전형적인 조건을 보여주었다. 그 조건은 전투의 지속, 광대한 지리적 환경, 주민의 적대감 상승으로 인한 정복 그 자체의 반(反)생산적 효과뿐만 아니라 정규전과 게릴라전의 결합, [정규전과 게릴라전] 양 측에서 전쟁의 주요 행위자로서의 인민의 무장과 통합이었다(게릴라전은 스페인에서 수입된 새로운 개념이다. 비록 그러한 전투형태가 스페인에서 처음 벌어진 것은 아니더라도6)). 이는 우리를 세 번째 고찰로 이끈다. 그곳에서는 ‘정치’, ‘전략’, ‘전술’이라는 세 가지 수준은 더욱 명백히 변증법적으로 얽혀있다. 이는 아마도 클라우제비츠의 가장 심원한 딜레마일 것이다. 그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을 이해할 때 두 개의 논리적 ‘대립항’ 또는 ‘극단’이라고 묘사한 것들 간의 관계와 관련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전쟁이 있는 곳에는 전쟁이 추구하고 직면하는 섬멸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고, 또 한편으로 전쟁에서 고유한 정치적 능력은 전쟁이 동반하는 특정한 위험과 전쟁이 정치적인 것에 미치는 특정한 효과 속에서 이미 시작된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지 또는 중단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능력 즉 언제, 어떤 대가로 ‘전쟁을 끝낼 것인지’ 결정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섬멸에는 한계가 있고, [섬멸이] 그 한계에 접근할 수는 있지만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믿는다. 그는 자신이 ‘절대전쟁’(absolute war)이라고 부른 것을 고찰했지만, 훗날 ‘총력전’(total war)이라고 불린 것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절대전쟁에서는 격투가 극단으로 상승하며 국가 또는 민족의 모든 세력이 전쟁에 참여하지만, 총력전에서는 군사력뿐만 아니라 비전투원도 목표물이 된다. 정치를 계속하는 전쟁에서 문제가 되는 섬멸은 군대를 물리적으로 섬멸하거나 무기력한 상태로 진압하거나 해산시키는 것이고, 적이 타인의 의지와 목적을 강요당하는 것에 대해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으로 전쟁을 중단하는 능력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불린 프러시아 국왕 프리드리히 2세를 클라우제비츠가 매우 존경했던 이유는 그가 정복지를 계속 보유하기 위해 자신의 승리들을 통제하고 유리한 순간에 화친을 맺는 능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결국 비참하게 끝나고 그와 그의 나라를 패배로 떨어뜨릴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가 정복의 논리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복의 논리에서는 모든 예정된 한계를 넘어서 전쟁규모를 확대해야만 [나폴레옹의] 정치적 목적이 달성될 수 있고, [러시아의] 방어가 우세하고 압도적인 반격을 준비하며 이전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극단 사이에 강한 긴장이 있다. 왜냐하면 전쟁을 중단하는 능력(이는 ‘부정적인’ 전략적 통념이고, 클라우제비츠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여기에 최우선권을 두었다)은 전쟁이 군사력과 자원의 일부분만을 포함할 때, 즉 적대국들 간에 섬멸의 가능성이 거의 없을 때에만 극대화된다. 반면에 물리적 섬멸이라는 전략적 목적은 군사력과 자원, 무엇보다도 인력의 동원을 초래하고, 이는 의지에 따른 전장으로부터 철수를 불가능하게 하며, [철수가 시도된다면] 국가의 실존에 대한 배후의 공격[내분]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한다. 또 다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평형’점이며 또는 ‘불가능한’ 지점, 즉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관한 ‘불가능성’의 지점이다. 즉 그것은 전쟁의 불가능성이란 유령을 되살리지만, 그 유령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나를 마지막 고찰로 이끈다. 나는 시작 부분에서 클라우제비츠의 주요 명제를 하나의 공리 형태로 배열할 수 있으며, 그 공리의 지위 자체는 명백하다기보다는 가설적이며 문제적이라고 말했다. 나는 공리를 구성하는 두 명제만을 검토했고, 각각은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나는 남은 두 명제를 급히 다루어야 하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옹호하고자 하는 관념은 클라우제비츠의 담론이 네 명제의 결합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고, 전쟁의 주체(또는 전쟁의 ‘정치적 주체’, 따라서 전쟁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주체’)라는 그의 궁극적 문제는 네 가지 명제사이에서 아마도 끊임없이, 모순적인 방식으로 순환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한전쟁과 절대전쟁 세 번째 명제는 ‘절대 전쟁’과 ‘제한 전쟁’(limited war)의 구분과 관련된다. 이것은 그가 『전쟁론』을 저술하는 동안 생각을 바꿨고(그의 저작이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론 전체를 고쳐 써야만 하는 ‘새로운’ 입장에 도달했다고 주장하게 한 바로 그 지점이다. 그러나 이는 전혀 분명하지 않고, 사실상 징후적 독해를 필요로 한다. 그 후 해석자들은 클라우제비츠에게 다양한 인식론적 도식(변증법, 이념형 등)을 투사하여 모든 가능한 방향에서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첫 번째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절대’ 전쟁이 아닌 것을 가리키는 두 가지 용어를 두고 주저했다는 점이다. 그는 ‘제한’전쟁과 ‘현실’전쟁(real war)을 언급하지만, 거기서 그는 실제로 벌어지는 현실전쟁은 항상 제한전쟁이고 절대전쟁은 가상적 모형이라는 관념으로 도약한다. 즉 가상적 모형에 따라 경험적 사례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관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너무나 단순하며, 문헌과 사실상 모순된다. 아주 성급히 말하자면, 나는 이런 관념이 레이몽 아롱과 어긋나며 엠마뉴엘 테레이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이 ‘절대전쟁’이라는 통념을 가상적 모형이나 이념형으로 환원하지 않으며, 역사적 현실 즉 역사적으로 관찰되었던 전쟁의 성격 변화와 관련을 맺는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의 이론은 우리가 극적인 딜레마에 직면하게 한다고 믿는다. 분명히 ‘절대전쟁’과 ‘제한전쟁’은 상반되는 두 극점을 의미한다. 그것은 논리적 의미의 극점이고, 현실전쟁은 두 극점 사이에서 움직이고 다양한 단계와 결합을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은 최소한 두 가지 상황에서 거의 순수한 방식으로 두 극점에 접근했다. 나는 최근 시기에서 그에 관한 등가물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18세기 절대왕정 시기에 정부 간의 전쟁(Kabinettskriege)은 군사 카스트[특권계급]의 지휘 하에 용병, 직업군인, [모병된] 신병에 의해 강압적으로 수행되었고, 그것의 목적은 이른바 ‘유럽의 균형’ 내부에서 세력균형을 바꾸고 적대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심지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동반하더라도 정의상 제한전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과 함께 개시된 ‘새로운 전쟁’(Volkskriege)은 절대전쟁이었고, 규모와 폭력의 측면에서 극단으로의 상승을 동반했다. 새로운 전쟁은 인민봉기에서 처음 나타난 ‘민족의 무장’을 동반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대륙의 헤게모니를 위한 제국주의 도구로 변형했다.7) 그 후 무장한 민족들은 서로 경쟁하고 싸웠으며, 각자는 민족주의적 비책을 계발했으며, 그들은 자신의 실존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싸웠다. 이러한 전개는 전쟁의 세계사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비범한 설명이 담겨있는 8편에 약술되어 있고, 이것은 뒤따른 시도들의 모형이 되었다(여기에는 1860년대에 저술, 출판된 『신아메리카백과사전』(New American Cyclopedia)에 담긴 엥겔스의 항목도 포함된다.). 그리고 클라우제비츠의 질문은 명백하다. 우리는 어떤 이유로 이러한 전개가 비가역적이고 역사는 ‘전쟁의 절대화’를 향한 방향으로 전개한다고 믿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떤 가능성에 의거해 이러한 경향에 저항해야만 하는가? 이런 경향은 민족과 국가의 실존을 위태롭게 하고, 모든 정치적 문제들 중에서 전쟁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게 하며, 결국 정치의 도구인 전쟁에 대한 정치의 최우선권을 파기한다. 여기서 클라우제비츠 개인이 누구였는지 회고하는 게 유용할 것이다. 그는 불안한 귀족 가문 출신의 프러시아 장교로서 (주로 칸트적인) 철학교육을 받았고, 대적(大敵) 프랑스와 계속 싸우기 위해 자신의 나라를 떠나는 위험을 무릅썼고 직접적인 외교적 조정보다는 애국적인 관심을 우선시했다. 그는 인민 징병제에 기초해서 19~20세기에 이르러 거대한 군대로 발전할 것을 창안함으로써 프러시아 군대가 민족군대로 변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8) 하지만 이러한 전개가 군사 카스트와 국가 관료로부터 정치적 결정의 완전한 독점권을 박탈할 가능성에 대해 그가 우려한 것은 분명하다(나아가 빨치산이나 게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궁극적인 무기이지만, 그들을 활용할 때 사회적 위험성이 동반된다는 점을 우려했던 것도 명백하다.). 이는 네 번째이자 마지막 명제로 우리를 이끈다. 전략에서 도덕적 요인의 최우선성 네 번째 명제 역시 가장 크게 논쟁된 것 중 하나다. 그것은 전쟁의 역사에서 다른 전략적 요인에 대한 ‘도덕적 요인’의 궁극적인 최우선성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이라는 통념으로 열거한 일련의 복합적 요소들과 그것들이 철학적 견지에서 함의하는 바를 살펴보면, 우리는 매우 복합적인 힘들의 체계를 발견하게 된다. ‘도덕적’ 요인은 확실히 도덕성에 대한 고찰과 관련되지만, 그것은 역사에서 주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개인적, 집단적 정서라는 더 광범위한 문제틀과 분리할 수 없다. 도덕적 요인들은 집단적인 것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것과 관련된다. 그래서 우리는 군대가 난폭한 죽음의 위험과 대치할 수 있게 하는 병사의 용맹과, 어떤 전장 상황의 무한한 복잡성을 독자적인 직관으로 대체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는 총사령관의 자질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클라우제비츠가 국가의 ‘지성’ 또는 국가의 정치적 합리성이라고 부른 것을 고려해야 한다(이는 수단과 목적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우리는 인민의 애국심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군인의 전투능력, 자원과 인명의 희생을 유지할 수 있는 민족적 능력의 배경을 형성한다. 애국심 역시 새로운, 즉 ‘근대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모든 도덕적 요인은 집단적인 역사적 작용인, 또는 제도적 작용인의 차원 또는 계기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는 내가 말했던 것처럼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전략’의 수준이 분리될 가능성을 반영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도덕적 요인을 검토하는 것에 클라우제비츠가 대부분의 시간을 쏟은 이유다. 즉 그는 도덕적 요인을 군대의 통일성이 형성되고, 그것의 소멸에 저항하고, 적의 폭력을 압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에 기여하는 것으로서 검토했다. 역으로 다른 요인(예를 들어 경제적, 기술적 계기)을 무시하지 않는다면, 도덕적 요인에 부여된 중요성은 다른 요인의 유효성을 더욱 심원한 도덕적 심급에 종속시킨다(예를 들어 조세인상 등의 방식으로 경제자원을 전쟁에 동원하는 민족적 능력). 후대의 이론가들이 자신이 더욱 유물론적이고 현실주의적이라고 간주하고 클라우제비츠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예를 들어 클라우제비츠가 군사기술의 발전과 그것이 전략의 역사적 변형과 전쟁의 결과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속적으로 등장한 생산양식과 결합된 기술변화의 영향이라는 관점에서 전쟁의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 긴 연구(『신아메리카백과사전』의 ‘군대’ 항목)에 전념한 엥겔스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조차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이라고 부른 것의 등가물을 고찰해야만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쟁의 가능성과 전쟁의 발전에 관한 계급의식, 더욱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영향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클라우제비츠의 네 명제 간 관계를 살펴보면, 각각의 명제가 다른 명제의 결과를 지지하고 규명하거나 또는 제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는 우리가 무한한 논리적 순환에 들어서게 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제한전쟁의 절대적 인민전쟁으로의 근대적 변형은 어떤 도덕적 요인에 결정적 역할을 부여한다. 도덕적 요인은 전쟁의 ‘정치화’라는 의미에서 방어 전략과 방어의 반격으로의 전환에서 사활적 요소다. 그러나 애국주의는 국가가 조종할 필요가 있지만 지배할 수 없는 대중의 정서이기 때문에 도덕적 요인은 정치의 합리성을 위협하는 양면성을 생산한다. 전쟁 시기에 애국주의는 공포를 포함하며 또한 공포를 압도하는 적에 대한 증오(Feindschaft)가 된다. 그것은 지배자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될 수도 없으며(그것은 심지어 지배자에 반대하는 것으로 전환될 수 있다), 이해관계에 대한 고려를 통해 주관적으로 통제될 수도 없다. 그것은 정치를 파괴할 수 있는 정치를 실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전쟁의 주체에 관한 클라우제비츠의 가차 없는 질문의 비밀을 만나게 된다. [전쟁의] 직접적인 주체는 군대이지만, 군대는 최소한 근대 시대에 결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 없다. 군대는 계속 생산·재생산되고, 전쟁의 환경과 그 누적된 효과는 이러한 재생산을 변조한다. 그러나 군대는 하나의 괴물이다. 군대는 국가와 인민의 결합이자 접합점이며, 민족이라는 관념은 [국가와 인민이라는] 두 가지 계기로 분열된다. 이것이 클라우제비츠의 딜레마였다. 이제 전쟁은 오직 민족전쟁, 곧 민족주의적 전쟁의 형태로만 실현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결론을 끌어내야 하지만, 역사의 무대에 출현한 새로운 인민권력을 통제해야 하며, 인민권력은 국가 자체가 인민의 정서를 영속적으로 능가하도록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민족국가가 일반적으로 직면하는 정치적 문제의 군사적, 전략적 등가물이었다. 즉 어떻게 ‘봉기를 제도화할 것인가’, 어떻게 대중들에게 고삐를 채울 것인가? 놀라운 것은 이 문제가 19세기 초반 혁명전쟁과 제국전쟁 직후 정치적인 것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떠올랐던 상황을 넘어서 의제로서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전쟁과 마르크스주의 전통 복잡한 문제를 동반하지만, 나는 여기서 매우 간략하게나마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담론을 들여오고자 한다. 오늘은 [포스트-클라우제비츠 담론 중에서] 마르크스주의적 담론만을 다룰 것이다(만약 마르크스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 차이는 마르크스가 최소한 초기에는 클라우제비츠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클라우제비츠를 감탄하여 읽고 마르크스에게 그 중요성을 조언해준 사람은 엥겔스다(1849년 프러시아 군대와 맞선 혁명세력의 분견대를 훌륭히 퇴각시킨 후 엥겔스에게 붙여진 별명은 ‘장군’이었고, 그는 항상 군사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9) 그렇지만 비교는 『공산주의자 선언』을 새롭게 독해하면서, 특히 1장의 구절들을 엄밀히 독해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1장은 계급투쟁의 연속적 형태가 역사적 변형, 특히 국가의 상이한 형태와 정치적인 것의 상이한 제도들을 이해하기 위한 안내선을 구성하며, 계급투쟁은 계속되는 내전(civil war)과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내전이란 표현은 1장의 끝에 있으며, 분리되어 있지만 확실히 두드러진다.)10) 내전의 행위자들(또는 정당들)은 전쟁과정에서 생겨나며, 가시적일 수도 비가시적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가 1장의 서두에서 제시한 놀라운 정식처럼 내전은 상쟁하는 계급들 중 하나의 승리로 귀결될 수도 있고, 상호 파괴로 끝날 수도 있다.11) 나아가 우리는 클라우제비츠와의 연결고리를 확립한 푸코가 제시한 논평을 따라 이러한 구절들을 독해하자. 1) 사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 더 엄밀하게 말하면 ‘인종전쟁’으로서의 정치라는 이전의 해석을 ‘전도’했다. 인종전쟁은 프랑스혁명 이전의 유럽 사서(史書)를 지배했고 그 후에도 살아남았다. 2) 계급투쟁이라는 마르크스적 통념은 ‘인종전쟁’의 변질된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여기서 계급은 구체제 사회 내부의 인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은 19세기의 적대적 통념, 즉 ‘인종투쟁’의 통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클라우제비츠와 마르크스를 넘어서 ‘인종전쟁’이라는 초기 관념으로 돌아가는 것은 투쟁 또는 갈등과 동일시되는 정치적인 것의 어떤 순수성 또는 확실성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통념에서 나는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출현하는 것을 둘러싸고 전쟁과 정치의 통념에 대한 역사적, 논리적으로 엇갈리는 스텝(chasse crois )이 존재한다는 관념만을 유지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푸코가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은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것은 전쟁과 정치의 접합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과 마르크스의 관념의 대결이다. 확실히 가장 인상적인 차이는 마르크스가 계급투쟁을 분산과 집적의 단계, 잠재와 발현의 단계를 지닌 내전(즉 일반적인 의미에서 혁명)으로 이해함으로써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의 범주에서 배제하길 원했던 바로 그것을 ‘전쟁’이라고 확실히 부른다는 사실이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볼 때 대외전쟁, 민족전쟁처럼 내전도 ‘순수한’, 무차별적 폭력의 형태가 아니며, 그 역시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내전은 심지어 문명의 한계를 넘어선다고 보일 정도로 (또는 과거에 그렇게 보였을 정도로) 잔혹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더라도 제도적 폭력의 형태다. 그러나 내전은 특정한 유형의 정치제도 즉 ‘도시’ 또는 ‘국가’의 파괴로서 나타난다(또는 그리스 이후로 그렇게 나타났다.). 바로 이런 이유로 클라우제비츠의 용어법은 ‘폭력의 합법적 사용에 대한 독점’이란 국가의 정의를 예상하며(이는 폭력의 정치적 활용에 대한 독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 용어법에 따르면 내전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반(反)정치의 도구다. 슈미트에 이르러서야 내전을 포함하는 반정치의 도구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이율배반적으로 통합된다(나는 이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루겠다.). 사실 마르크스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두 가지 개념을 두고 분열을 겪었던 듯하다(우리는 이러한 딜레마가 결코 해소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치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계속 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정치적인 것이 ‘정치국가’를 의미하며, 국가를 둘러싸고 정치적인 것의 분리된 공간이 공적 대행자로서 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면(그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지만 외형적으로 또는 사법적으로 계급이익을 초월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계급투쟁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계급투쟁은 정치적인 것을 초과하며, 결국 분리된 공간으로서의 정치국가를 억제할 것이다(마르크스는 이를 ‘정치국가의 종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이 투쟁, 투쟁의 증대되는 양극화, 투쟁에 대한 ‘의식’과 ‘조직’의 형성, 역사의 변화를 생산하는 투쟁의 역할을 의미한다면 정치는 바로 영속적, 초역사적 ‘내전’으로 정의된다. 그러한 내전은 결코 정확히 동일한 형태를 취하지 않지만 (‘최후’까지, 즉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최종 대결까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쟁’이란 용어의 은유적 활용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클라우제비츠와 비교한다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내전은 전쟁의 개념을 확실히 반성적으로 활용하며, 특정한 전쟁 개념을 단순히 적용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와 변형을 동반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 또는 가설을 독해할 수 있다. 1) 오직 ‘내전’으로서 사회적 전쟁(social war)만이 ‘절대’전쟁, 또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전쟁이 된다. 그것은 극단에 도달하고, 절멸의 위험이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본연의 의미’에서 전쟁이다. 2) 이러한 전쟁은 ‘정치’를 구성하고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전도하지만, 클라우제비츠에게는 단지 경향(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공포)으로 남아 있던 것을 논리적 결론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그 결론은, 정치의 ‘수단’으로서 폭력은 정치적인 것에 반작용하며, 정치가 전쟁의 계속이 되게 한다는 관념이다. 나아가 이것은 전쟁 ‘주체’의 표상의 총체적인 변화와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은 더 이상 제도적·사법적 주체 곧 국가가 아니며 오히려 내재적인 사회적 주체다. 전쟁의 사회적 주체는 자신의 역사적 형성과 부단한 자율화 과정 자체와 진정 구분될 수 없다. 물론 이는 마르크스가 (또는 마르크스를 클라우제비츠의 관점에서 독해하는 사람들이 -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이들이 매우 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계급투쟁이라는 약호를 통해 클라우제비츠의 명제 또는 클라우제비츠의 문제를 치환 또는 ‘번역’함으로써 그 명제와 문제를 부활시키게 한다. 그러한 문제들 중 하나는 계급을 ‘군대’로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과 관련된다. 이것은 계급투쟁을 점점 더 통일되고 양극화되는 두 적대적 세력들 간의 대결로 표현하는 것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일 것이다. 마르크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자격부여(qualification)에 종속된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결과일 것이며, 이런 의미에서 계급투쟁은 진정으로 자신의 행위자를 창조하거나 생산한다. 그 조건은 피착취계급과 착취계급의 초역사적 대결의 마지막 무대 또는 등장인물,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직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경향이다. 오직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의 편에서 계급투쟁의 조직자로서 직접적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그 적대자는 어떤가?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볼 때 조직화된 세력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나 ‘정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마르크스는 그 개념[군대로서의 계급]을 최종적 결론으로 밀고 나아가는 데 주저했고, 좀 더 은유적인 활용으로 돌아갔다. 우리는 혁명을 계급전쟁(class war)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어도 공산주의 전통에서 1세기 동안 매우 강력했다는 것을 알지만, 마르크스에게서 군대 형태의 혁명정당, 즉 계급정당 또는 ‘전체 계급의 정당’이라는 개념의 가능성만을 발견한다(왜 그런지는 조금 후에 말하겠다.). 그러나 그 전에 방어의 문제와 관련된 두 번째 포스트-클라우제비츠적 파생개념, 또는 클라우제비츠와 유사한 파생개념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비정치적’ 요소의 복귀를 준비하는 놀라운 역전을 목격한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심지어 혁명을 준비하고 자본가계급을 전복할 때라도 ‘방어적’ 투쟁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정치철학이 되며, 사실상 묵시론이 된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임금노동자를 절대적 빈곤과 실업에 빠뜨리며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임금노동자, 더욱 일반적으로는 노동자[임금노동자뿐만 아니라 농노나 노예]가 사회를 부양하고 유지하므로) 사회의 재생산과 생존을 위협한다는 관념과 결합된다. 마르크스가 여기서 묘사한 것처럼, 자본주의에는 허무주의적 요소가 있으며, 이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을 사회 내부의 적에 대항하여 사회를 방어하는 것과 동일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더욱 전략적, 또는 준(準)전략적 고려가 나타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자신의 힘, 의식, 조직을 경쟁하는 부르주아 조직으로부터 이끌어낸다는 관념에 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라리아 계급 정당을 반(反)국가로 가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가가 착취적 사회질서를 위해 사회를 억압하는 한에서 국가의 부정, 즉 ‘부정의 부정’으로 간주했다. 이 모든 것은 대외 전쟁의 상황과 반대로 ‘내전’으로 인식되는 ‘사회적 전쟁’에서 적대자들은 진정 외부적이지 않고,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유래한다. 그들은 하나의 분할[분업] 형태에서 동일한 사회적 주체의 진화 양식이며, 그렇게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전쟁과 정치의 접합을 이해한 결과는 결정적인 동시에 모호하다. 적대의 화해 불가능한 성격을 현실화함으로써 내전의 모형은 계급사회, 특히 자본주의에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폭로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정치적인 것의 종언을 준비하는 ‘사라지는 매개자’라는 이행의 형태로 명백히 나타나며, 우리는 이를 자기절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이 마르크스가 후속 작업에서 이러한 설명을 단념하거나 무시하게 하였는가? 후속 작업은 그가 계급투쟁의 전개에 관한 다른 모형을 모색하도록 이끌었고, 그가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제시했던 반정치로서의 정치적인 것이란 날카로운 서술로부터 어떤 의미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왜 그런가? 내 견해로는 일련의 긍정적인 요인들이 작동했다. 그것에는 점증하는 빈곤과 부의 양극화라는 ‘묵시론적’인 선형모형을 희생시키는 자본주의 발전의 경제적 축적사이클에 부여된 중요성의 증대도 포함된다. 그러나 전쟁과 내전의 현상들에 대한 더 많은 경험 역시 부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 현상들은 계급투쟁을 내전과 유비하는 것을 어렵거나 불가능하게 했고, 그것은 극단으로 밀린 내전 즉 ‘절대적 내전’으로서 혁명 모형에 관한 모든 부정적 측면을 보여주었다(그 교훈은 마르크스주의 전통 내에서 ‘개량주의’와 ‘혁명주의’간에 뜨겁게 논쟁되었다.). ‘제한적 내전’ 또는 ‘억제된’ 내전은 형용모순으로 보였다. 1848년과 1872년(파리코뮨)에 일어난 현실의 내전은 대량학살의 비극적 경험이었다. 이 때 부르주아 국가는 프롤레타리아를 궤멸시키기 위해서 (식민지 전쟁을 포함해) 대외전쟁 동안 형성된 군사 장치를 손쉽게 사용했고, 프롤레타리아는 결코 ‘군대’가 아니었다(심지어 게릴라 군대도 아니었다.). 게다가 (20세기는 물론이거니와) 19세기 동안 민족전쟁은 계급투쟁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고 정치와 전쟁이 접합하는 바로 그 장소이자 전략적 사고의 장소로서 남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압도적인 증거가 있었다. 민족전쟁을 ‘현실’과 현실의 ‘정치’과정을 은폐하는 외양 또는 인공현실로 묘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결코 완전히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민족전쟁은 서로 다른 나라의 지배계급이 ‘자신의’ 노동자가 서로를 절멸하도록 하고, 민족주의 담론으로 노동자를 기만하려는 노력을 결합해야 한다. 하지만 이처럼 민족전쟁의 엄연한 현실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했으며, 이는 클라우제비츠와 그의 문제를 직접 이해하는 것으로 복귀해야한다고 요청한 것이었다. 이는 엥겔스에 의해 준비되었다. 그는 클라우제비츠가 도덕적 요인을 ‘관념론적’으로 강조했다고 비판했고, 그것의 유물론적 등가물을 모색했다. 그것은 전쟁의 기술적, 경제적, 사회적 요인에 대한 강조와 양립할 수 있다고 입증되어야 했다. 이러한 등가물은 인민의 군대 또는 대중 징병이 (최소한 민주공화국에서는) 군대 내부에 계급투쟁을 잠재적으로 도입할 것이며, 따라서 군사문제에서 대중들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공포를 대중들이 국가와 군사장치를 희생시키며 새로운 전략적 행위자로서 부상한다는 예언으로 역전시킬 것이라는 관념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레닌과 마오쩌둥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변증법적 원칙이 전쟁과 정치의 새로운 접합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전략적 결합체에 대한 관념이 국가-군대-인민의 통일체로부터 계급, 인민, 혁명정당이라는 새로운 통일체로 대체되었다. 알다시피 레닌은 클라우제비츠를 철저히 읽었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되고 2인터내셔널과 반전결의안이 붕괴된 후 『전쟁론』에 관한 주석과 논평을 남겼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라는 구호를 기초했고, (적어도 자신의 나라에서는)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그 구호는 ‘도덕적 요인’(국제주의적 계급의식)이 시간이 지남에 따른 ‘대중’전쟁(즉 대중으로 구성된 민족군대가 수행하는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방어’로부터 준비되는 ‘공세’라는 관념에 대해 완전히 독창적인 해석을 제공하며, ‘절대’전쟁은 유지될 수 없거나 유지될 수 없게 된다는 사실로부터 그 필연성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그것은[내전으로 전환은] 반드시 국가를 파괴해야 하며 차라리 국가를 희생시켜 정치의 조건들을 반드시 재창조해야 한다. 국가는 인민을 무장시키고 인민의 무장력 활용을 통제하는 능력을 보유하는 한에서만 정치를 구현할 수 있지만, 그러한 능력을 박탈당하자마자 정치적 환영(幻影)이 될 것이다. 또는 합법적 폭력의 국가 독점으로부터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폭력의 계급 독점으로 변화되자마자 그렇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클라우제비츠의 전위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칼 슈미트의 비정치적 개념의 출발점을 형성한다는 것에 잠시 주목하자.12) 여기서 주권은 계급투쟁을 예방적으로 억압하기 위해서 국가의 핵심에 ‘예외상태’를 설치할 수 있는 능력으로 동일시되며, ‘내부의 적’ 즉 ‘계급적 내전’의 적에 대한 정의는 대외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폭력의] 국가 독점과 그 능력을 항상 재창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마오쩌둥의 ‘유격대의 지구전’ 이론에 이르러서야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방식의 탈환이자 정치적인 것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영속적으로 클라우제비츠를 괴롭혔던 아포리아를 해결하고자 시도한다. 사실 나는 여러 논평자들이 인정했던 것처럼 마오쩌둥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 이후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라고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는 클라우제비츠의 공리 중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모두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실제로 클라우제비츠를 직접 읽었거나 일부 인용문을 읽었는지 알기 어렵다(나는 클라우제비츠의 저작이 그가 읽을 수 있던 유일한 언어인 중국어로 번역되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항일전쟁 이후 (더 정확히는 대장정의 종료 이후) 마오쩌둥의 다양한 소책자와 논문에서는 레닌이 제국주의에 대한 에세이에서 클라우제비츠를 직접 인용한 대목에서 다시 인용한 것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마오쩌둥이 그 문제틀을 실질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모택동의 핵심적인 관념은, 처음에는 제국주의 적국과 지배 부르주아는 군대가 있지만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은 군대가 없기 때문에 방어 전략이 강요되지만, 이는 결국 대립물[공격전략]으로 역전되고, ‘가장 강한 적’의 실제 절멸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지구전’(또는 전쟁의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전쟁의 지속시간은 ‘마찰’의 변증법적 등가물이며, 농민 대중들 내부에서 피난처를 찾는 혁명적 노동자와 지식인의 소규모 핵심에게 필요한 시간이다(그들은 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인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들은 세 가지 결과를 동시에 추구한다. 첫째, 침략군의 고립된 분견대에 맞서 지역적 게릴라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적군의 희생을 대가로 스스로 무장한다. 둘째, 전장을 전국적 수준으로 (중국에서는 반(半)대륙 수준으로) 확장함으로써 전략의 기술을 ‘배운다.’ 셋째, 헤게모니를 외부의 권력(식민지 정복자 또는 민족의 특권계급)으로부터 내재적 권력으로 이동하고, 피지배계급들의 공통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고’ 인민을 인민의 적(또는 당의 적)으로부터 분리한다. 공산당은 바로 그 내재적 권력으로 간주된다(그리고 장기간 동안 내재적 권력으로 머무른다고 간주된다.). 오늘 이런 분석의 맹목점은 오히려 더 분명해 보인다(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다.). 즉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민족 내부의 세력들만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처럼, 2차 세계대전의 국제적 맥락을 사실상 무시한다는 것이다. ‘자력갱생’이라는 마오주의의 위대한 구호는 잠재적으로 민족주의적 차원을 지닌다. 그러나 정치적인 것으로서의 전쟁의 합리성이란 관념(이는 정치적 주체를 함축한다.)에 대해 하나의 새로운 역사적 해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결과는 인상적으로 남는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완전한 순환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종결이 특히 국가가 수행하는 제도적 전쟁과 인민의 게릴라 전쟁 간에 확립된 위계적 관계의 역전이라는 것은 필시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역전이 클라우제비츠에서 발견되는 아포리아를 완전히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 아포리아를 전위할 것이다. 클라우제비츠의 난점은 전쟁을 ‘절대전쟁’ 즉 무장한 인민이 수행하는 전쟁으로 변형하는 과정을 통해서 수립되고 활용되어야 하는 ‘도구’에 대해 국가가 선험적으로 절대적 지배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유래했다. 또한 중국혁명의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끌어오면서 생기는 마오쩌둥의 난점 또는 우리가 그를 사후적으로 독해할 때의 난점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계급 이데올로기를 통해 인민을 군대 또는 ‘인민군’으로 내부로부터 변형한 조직[공산당]의 내재적 권력, 즉 혁명정당이 스스로 국가가 되는 조건에서만 [방어에서 공세로] 전략적 반전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으며 정치적 대행자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이는 심지어 국가가 혁명적 사건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파괴되고 재건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하며, ‘문화혁명’으로 나아갔던 마오주의적 전망 또는 문화혁명 동안 교육되었던 마오주의적 전망에서도 그러하다). 사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민족해방전쟁의 조건에서는 가망성이 매우 낮지만) 혁명정당이 ‘권력장악’ 또는 적의 완전한 파괴라는 ‘최종’목적(Zweck)까지 혁명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며, 따라서 ‘절대전쟁’을 ‘제한전쟁’으로 어떻게든지 축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전략적 과정의 주체(또는 전략적 과정 내부로부터 결정되는 주체)는 모든 상황에서 분열된 주체 또는 주권과 봉기 사이에서 동요하는 주체로 머문다. ‘분자전쟁’(엔첸스베르거)에 대한 일부 근대 이론가와 논평자는 주체의 범주를 단순히 제거하거나 그것을 부정적이거나 불완전한 형상으로 환원함으로써 아포리아를 해결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전쟁’의 범주 그 자체가 유지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1) [역주] 클라우제비츠는 1780년 프러시아 부르크에서 태어나 1831년 51세의 나이로 프러시아 브레슬라우에서 콜레라로 병사할 때까지 39년 간 군인으로 일생을 보냈다. 폰 마리는 1832년 유고를 정리하여 10권의 선집계획 중 1차 저작계획으로 1권에서 3권까지를 묶어 『전쟁론』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마리는 남편이 생전에 자신의 저작이 출판되는 것을 완강히 반대했다고 술회했다). 그 후 1837년까지 『전쟁과 작전술에 관한 칼 폰 클라우제비츠 장군의 유작집』이 10권으로 출판되었다. 본문으로 2) [역주] 마르쿠스 키케로(기원전 106년 - 기원전 43년)는 카이사르와 동시대 사람으로 기원전 63년에 집정관의 자리에 올랐다. 같은 해 63년에는 카틸리나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자 키케로는 원로원 최종권고를 무기 삼아 이를 진압한다. 키케로는 자신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Consul sine armis(군사력을 갖지 않은 집정관), Dux et imperator togae(토가 차림의 최고 사령관), Cedant arma togae(文이 武를 제압하다). 키케로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에 관한 이론을 제시했고, 이는 훗날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계승된다. 본문으로 3)[역주] ‘정의로운 전쟁’(just war=bellum justum) 이론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화한 후 중세 기독교 전쟁사상의 핵을 이룬다(콘스탄니누스(301-337)는 군대를 로마로 진격시키면서 군대의 방패에 십자가 표지를 달게 했으며, 테오도시우스는 416년 칙령을 내려 기독교도만을 군인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키케로의 정의로운 전쟁 이론을 받아들여 전쟁이 다음의 조건을 갖추면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첫째, 전쟁이 사회의 보편적인 선을 위한 것으로 합법적 당국에 의해 선포되어야 한다. 둘째, 전쟁의 원인이 정당해야 하며 결코 법질서에 위협이나 손상을 주어선 안 된다. 셋째, 전쟁의 목적은 전쟁 이전보다 훨씬 더 법질서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는 합법적 당국을 황제로 규정하고 방어전이 아닌 공격전까지 정의로운 전쟁에 포함시키는 것이며, 정복전쟁 이후 적대국을 포괄적인 법질서로 융화시켜야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한편 십자군 전쟁의 참화가 지난 후 아퀴나스(1225~1274)는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을 재정식화하했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전쟁방식은 공격전이 아니라 방어전이어야 하며, 정당방위의 경우에만 살상이 인정되고, 전투요원이 아닌 민간인은 결코 전쟁 대상이 되어선 안 되고, 적을 살상하기보다는 적이 스스로 상용하는 처벌을 자임할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본문으로 4) [역주] 클라우제비츠는 전략 일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략이란 전쟁의 목적(적의 무장해제)을 획득하기 위한 전투의 원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략은 총체적인 군사행동에 목표를 부여하는 것이며, 전쟁계획을 형성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여러 행동계열을 하나로 묶어서 최종적인 결정행위로 유도하는 국면으로 연결시켜주어야만 한다. 요컨대 전략은 분리된 전역을 수행하기 위해 제반계획을 마련하며, 각 전역에서 행해질 전투행위를 통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전략의 구성요소를 ①정신적 요소, ②물리적 요소(전투병력, 조직과 편성, 3개 병종의 구성비), ③수학적 요소(작전선의 각도, 집중운동과 원심운동), ④지리적 요소(지형지세의 영향, 지휘소의 지점, 야산·삼림·도로), ⑤통계적 요소(모든 종류의 자재보급 수단)로 제시한다. 본문으로 5) [역주] 1812년 9월 7일 나폴레옹의 모스크바원정 도중에 있었던 최대의 격전. 초토화전술을 써가며 후퇴만 계속하던 러시아군은 신임 총사령관 쿠투조프 장군 지휘 하에 모스크바 서쪽 약 90㎞ 지점인 보로디노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맞아 싸웠다. 양군의 병력은 프랑스군 13만 5,000명, 러시아군 12만 6,000명이었으며, 쌍방 모두 500~600문의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전투는 새벽부터 시작되었고, 맹렬한 포격전에 이어 치열한 백병전까지 벌였는데, 프랑스군 5만 8,000명, 러시아군 4만 4,000명의 많은 사상자를 냈으나, 저녁까지도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다. 쿠투조프는 더 이상의 희생을 피하려고 야음을 틈타서 퇴각하였으므로, 프랑스군은 그대로 전진하여 모스크바에 입성하였다. 이 전투는 표면상 나폴레옹군의 승리로 보이지만, 그 후 러시아군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프랑스군의 러시아 원정 실패의 시초가 되었다.본문으로 6) [역주] 게릴라는 스페인어로 ‘소규모 전투’를 뜻하는 말로서 나폴레옹이 스페인 원정에서 스페인 사람들의 무장저항을 게릴라라고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전략적으로 열세한 측이 대중의 지지와 험준한 지리적 조건을 이용하여 스스로 선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한 형태로 전술적 공격을 취하는 전쟁 과정중의 한 국면을 이루는 싸움의 한 형태이다. 참고로 빨치산(partisan)이란 parti 즉 도당이라는 뜻이며, 이것은 게릴라전에 종사하는 인간의 집합체 조직을 뜻한다. 1818년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시에 고전하는 자국의 군대를 도와 이에 저항하였던 러시아 농민을 프랑스군이 호칭한 데서 비롯된다. 또한 유격전은 중국의 마오쩌둥이 사용한 용어이며, 1927년 이후의 국공내전 및 대일전쟁을 통하여 중국공산당 무장저항조직의 별동대가 소부대로 유격하면서 틈을 보아 적을 치는 비정규적 방식의 전법을 지칭한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게릴라, 유격대, 빨치산이란 용어는 유래가 다르지만 지금은 대체로 혼용하여 사용된다.본문으로 7)[역주] 1792년 4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가 프랑스 국내의 반혁명파와 손을 잡고 혁명파를 공격을 한 이후로 프랑스 군대의 역할과 성격이 변용되었다. 더 넓은 범위의 프랑스국민을 무장시킨다는 방침이 세워졌고, 정규군과 의용군의 통합이 이뤄졌다. 1793년 프랑스 국민공회에서 가결된 법령의 문안은 다음과 같다. “모든 프랑스 국민은 군복무를 위해 징발된다. 젊은 남성은 전선의 전투부대에 참여하고, 기혼남성은 무기를 만들거나 군수품을 수송하며, 여성은 천막이나 의복을 만들거나 병원에서 복무하고, 어린이는 낡은 아마포로 붕대를 만들며, 노인은 광장에 나가서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공화국의 단결과 국왕에 대한 증오를 선전한다.” 이러한 국민총동원령에 따라 징병제(국민개병제·의무병역제)가 도입된다. 본문으로 8) [역주] 나폴레옹이 프러시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강요한 조약은 1808년 이후 프러시아 육군의 규모를 4만 2천명으로 제한했다. 프랑스의 강제적인 동원해제, 점령과 징발로 인해 프러시아 국민들의 감정은 악화되었고, 1813년 해방전쟁이 시작되고 프러시아 정부가 대대적으로 징병에 돌입하자 국민들은 기꺼이 징병에 응했다. 클라우제비츠는 1812년 러시아로 넘어가서 러시아군 중위계급의 옷을 입고 참전했다가 1813년 프러시아로 돌아오고 3월에 프러시아 군으로 복직한다. 그는 프러시아의 ‘국민총동원’(Landstrum)과 ‘후방군 민병조직’(Landwehr)을 구상했지만, 국왕의 냉대로 인해 그 활동에 직접 기여할 수 없었다.본문으로 9) [역주] 엥겔스는 1849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 독일제국헌법을 반혁명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독일 라인 지방에서 일어난 바덴-팔쯔 봉기(badisch-pf lzischer Aufstand)에서 빌리히의 부관으로 직접 참여했다(프러시아 포병장교 출신 혁명가인 빌리히는 엥겔스를 ‘대단히 쓸모있는 장교 가운데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 해 10월 영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그가 겪은 경험은 그의 혁명적 군사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본문으로 10)[역주]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발전의 가장 일반적인 단계를 서술함으로써, 다소간 가려져 있는 기존 사회 내부의 내란[내전]이 공개적인 혁명으로 바뀌고,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를 공개적으로 타도하여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는 데까지 고찰했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p 64, 거름, 1991.) 본문으로 11) [역주]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다. (…) 서로 영원한 적대 관계에 있는 억압자와 피억압자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는 투쟁을 벌여 왔다. 그리고 이 투쟁은 항상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투쟁하는 계급들이 함께 몰락하는 것으로 끝났다.”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 p 52, 거름, 1991.)본문으로 12) [역주] 칼 슈미트(1888-1985년)는 독일의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이다. 1933년 그는 베를린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나치 당에 입당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가 쓴 주권에 대한 저작들은 논쟁적인 저서로 남아 있다. 그에 따르면 주권이 존재하는 장소는 사법적 질서의 안과 바깥 모두이며, 주권은 어떠한 법률로도 제한할 수 없는 권력이고, 주권자란 예외상태에 대해 결정하는 자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