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반 CPE투쟁 우리는 ‘크리넥스’가 아니다 2월 7일 40만에 이르는 대규모 학생시위를 시작으로 한 달이 넘게 프랑스 전역이 노동자, 학생시위로 들끓고 있다. 사안의 핵심은 우파정부인 드빌팽 내각이 ‘CPE’라 불리는 새로운 고용계약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CPE는 불어로 ‘Contrat Premiere Embauche’의 약자로서 ‘최초고용계약’을 의미한다. 그 내용은 20인 이상 사업장에서 26세 미만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용자는 최초 고용 2년간 특별한 사유나 설명 없이도 노동자를 자유로이 해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1월 16일 이 법안이 발의되자 이 법의 직접적인 대상이 되는 대학생들이 즉각 반발하고 나섰으며 대학생들의 시위에 노동자들이 동조하면서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3월 7일 시위에는 프랑스 전국 주요 도시에서 주최 측 추산 100만 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벌어졌으며 3월 8일에는 학생들이 68혁명의 상징인 파리 소르본 대학을 점거했고, 전국 84개 대학 가운데 60여개 대학 이상에서 동맹휴업이나 점거농성이 진행되고 있다. 3월 13일, 3월 16일에도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고 거리에서는 공화국기동대(CRS)가 최루탄과 물대포, 곤봉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번 시위에는 고등학생들까지 대거 가세하고 있다. 3월 18일에는 대학생, 고등학생, 노동계, 학부모, 야당까지 결집하여 전국적으로 150만, 파리에서 35만이 참여한 시위가 전개되었고 시위조직들은 48시간 안에 CPE를 철회하라는 최후통첩을 정부에 전달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을 중심으로 하는 노동계는 3월 28일로 파업을 선언했다. 시위대들은 “우리는 크리넥스(휴지)가 아니다”, “CPE는 착취와 불안정 계약”, “시라크와 드빌팽은 끝났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CPE 철회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CPE가 실시되면 사용자들이 언제든지 청년노동자들을 ‘한 번 쓰고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3월 23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렬해져 곳곳이 불에 탔으며 일부 지역은 치안불능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 사태의 원인 이번 시위와 파업사태가 CPE 도입을 계기로 촉발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우파 정부 하에서 이제까지 계속되어 온 신자유주의 정책과 노동자 권리에 대한 공격, 사회보장의 후퇴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몇 가지로 나눠서 살펴보자. 첫째, 프랑스의 높은 실업률과 이로 인한 사회적 불만이다. 프랑스는 지난 10년 동안 실업률이 점진적으로 상승해 왔고 유럽연합 내에서도 가장 높은 축에 속해서 2006년 1월 9.6%를 기록하고 있다. 작년 4월 이후 조금씩 하락하던 실업률이 올해 1월 다시 반등되어서 드빌팽 정부의 노동유연화 정책의 실효성 자체도 의문시되고 있다. 청년실업률은 더욱 심각해서 18살~25살 사이의 실업률은 23%에 이르며, 빈곤지역의 청년실업률은 40~50%에 달한다고 한다. 작년 하반기에 프랑스 전역을 불태웠던 이민자 2세들의 반란도 인종차별과 실업문제가 결합되어 나타난 소요사태였던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 불만이 높은 터에 청년고용의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조치를 도입하려는 정부의 시도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둘째, 정부가 노동 불안정화를 불러올 조치들을 연이어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CPE 도입은 드빌팽 총리가 계획하는 3단계 실업대책의 두 번째라고 한다. 이미 작년에 그 첫 조치로서 20인 미만 기업에 대해 신규 직원을 2년간 수습을 거쳐 고용할 수 있게 하는 CNE(신고용계약)이 도입되었다. 이는 CPE와 같은 내용이다. 다음 조치는 올해 내에 고용계약 체계 전반을 개편하는 것으로서, 현재 존재하는 기간을 정하지 않은 고용계약(CDI)과 기간을 정한 고용계약(CDD)를 합쳐서 유연한 단일 고용계약 체계 만든다는 계획이다. 노동계가 들고 일어난 이유도 CPE가 나중에는 청년노동자 뿐만 아니라 노동자 전반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셋째, 우파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인민의 사회적 권리를 계속 공격하는 것이다. 예컨대 1994년 청년층의 최저임금안을 삭감하는 최저임금안(CIP) 추진은 수십 만 학생시위로 좌절되었다. 2003년에는 노동자들의 퇴직연금에 대해 납입기간을 늘리고 수급액수를 낮추는 연금개악을 추진하여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2004년에는 교육장관이 대학재정 자율화 계획을 추진하다가 학생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쳐 계획이 무산되었다. 2005년에는 주35시간근로제의 조건이 완화됐고 연장근로 허용도 연 180시간에서 220시간으로 늘어났다. 정부의 공공부문 사유화 추진 역시 계속적인 노동자 파업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계속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대중적인 거부는 최근 2005년 5월의 유럽연합 헌법 국민투표 부결로 드러난 바 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유럽연합 헌법조약을 부결시키기 위한 캠페인에 아탁을 비롯한 사회운동, 여성운동, 프랑스공산당, 혁명적공산주의동맹(LCR), 노동총동맹(CGT) 등이 총력을 기울였다. 또한 2007년 대선을 앞둔 드빌팽 총리가 성과를 내기 위해 무리하게 CPE를 추진한 것도 반발을 확대시킨 요인이다.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만들면 수치상의 실업률이 내려갈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헌법상의 조항을 이용하여 하원에서 표결 없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결국 낮은 경제성장률과 높은 실업률의 경제 불황 상태가 초래한 사회적 위기와 불안, 이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처방에 대한 대중적 반발이 프랑스의 봉기적 전통과 맞물려 68년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와 파업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개혁을 위한 진통인가, 신자유주의의 실패인가 프랑스 학생과 노동자들의 투쟁은 좁게 보면 CPE법안에 대한 반대투쟁이지만 그 근본적인 성격은 신자유주의 정책과 우파정부에 대한 반대투쟁이다. 이번 사태를 둘러싸고 각국 정부나 기업, 우파 정치세력들은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노동시장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한편에서는 덴마크 사례를 들며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대신 많은 금전적 보상을 주는 소위 ‘유연안정성(flexecurity)’을 강조한다. 그러나 노동계와 학생, 좌파 정치세력들은 “고용불안을 통해 안정적인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없고 CPE는 오히려 고용불안을 가중시켜 노동자 보호를 약화시키고 결국 실업률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경제위기와 사회불안, 청년실업, 공적 사회서비스 후퇴, 노동 불안정화 등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독일에서도 추가 보수 없이 노동시간을 38.5시간에서 40시간으로 연장하려는 정부에 맞서 공공노조(Ver.di)가 6주간 파업을 벌이고 있는 상태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자본의 위기에 따른 신자유주의적 대응이 불러온 재앙이자, 전체 민중의 권리와 삶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이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노동자 착취에 기반하여 거대한 부를 금융자산가 계급으로 이전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이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서 체제의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 “2005년 한 해 프랑스 다국적기업들이 벌어들인 이익이 840억 유로나 되는데, CPE를 도입하는 것은 더 큰 이익을 기업들에게 안겨주려는 정치인들의 사기”라는 어느 프랑스 학생의 말에서 이러한 분노를 읽을 수 있다. 덴마크 사례도 예외적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엄청난 재정이 필요할 뿐 아니라 적은 인구, 비교적 안정된 사회상황 등 사회적 차이가 크기 때문에 프랑스나 다른 나라에 일반적으로 적용되기 힘들다. 또한 이는 세계 경제의 위기 속에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유연성과 안정성 사이의 줄타기일 수밖에 없으므로 지속가능성 여부가 의문시된다. 따라서 반CPE 투쟁은 보수 세력들이 얘기하는 ‘개혁을 위한 진통’이 아니라 명백히 신자유의의 실패를 나타내는 것이다. 소수 기득권 지키기인가, 다수 민중의 요구인가 또한 이번 사태는 종종 68혁명과 비교된다. 대규모 학생시위로 불붙은 전 국민적인 투쟁, 소르본 대학 점거 등은 68혁명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보수언론에서는 68혁명이 긍정적이고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것이었는데 지금의 시위는 부정적이고 사회변화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함으로써 68혁명을 왜곡하여 현재 시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격하는데 이용한다. 예컨대 독일 <슈피겔>은 “68혁명은 기득권과 구질서에 맞서 싸운 것인데 지금은 기득권을 보호해 달라며 싸우고 있다”고 했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즈>는 “68세대는 부모세대의 자기만족에 도전함으로써 세상을 바꾸려한 반면, 지금 학생들은 특권을 즐기기 위해 현상유지를 원한다.”면서 프랑스의 투쟁을 애써 깎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 선동은 프랑스 투쟁의 의미를 축소시켜 투쟁의 불길이 번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다. 68혁명이 자본주의 기성체제에 대한 반란이었듯이 현재 프랑스의 투쟁 역시 더 나은 삶과 권리를 위해 체제에 저항하는 것이며, 자본과 지배세력의 기득권을 타파하고 다수 민중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CPE에 대한 반대 여론이 2/3를 넘는 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프랑스 시위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프랑스 정부도 노동유연성 정책으로 전환하는데 국내에서도 비정규직법안을 빨리 통과시켜야 하고, 민주노총 파업 예고도 시대착오라고 경고한다. 프랑스 사태의 원인은 복지병폐, 고용 과보호라며 노조가 기득권을 고수하는 것이 청년들의 일자리를 뺏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국내 보수언론의 공격 역시, CPE와 유사한 비정규직법안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는 상태에서 투쟁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가 간취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가 실패한 것이고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에 대해 프랑스처럼 강력한 대중저항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반CPE 투쟁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지난 2월 27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비정규 법안은 신자유주의 자본과 정치세력들이 1천5백만 전체 노동자들을 정면으로 겨냥한 ‘노동자 학살법안’이다. 기간제(계약제)는 사용사유 제한이 없어 모든 업종에서 전면 자유화되고 2년 이내에는 계약기간 만료를 이유로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다. 파견노동은 ‘업무의 성질 등을 고려하여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업무’도 추가하여 정부가 자의적으로 파견을 무한정 확대할 수 있게 하였으며, 파견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간주하는 고용의제를 규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고용의무만을 규정하여 사용자가 과태료만 내고 끝날 수 있는 면죄부를 주었다. 이러한 악법이 통과된다면 사용자는 2년 내에서 비정규직을 마음대로 쓰다가 버리는 권리를 갖게 되고, 노동자는 2년을 주기로 무한정 착취당하는 노예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프랑스의 CPE 역시 최초 고용 2년 내에 해고를 자유화하는 것이어서 국내의 기간제법과 유사하다. 오히려 기간제법은 연령제한이 없어서 CPE에 비해 훨씬 더 기간제고용을 확대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사용 사유제한’이 이미 시행 중이기도 하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소위 ‘비정규보호법’은 CPE에 비할 수 없는 악법이며 프랑스보다 더한 투쟁이 벌어져서 심판받아 마땅하다. 프랑스 반CPE 투쟁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전체 노동자, 미래의 노동자를 비롯하여 전 국민들에게 노예로서 살기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는 투쟁과 저항이 가능하고, 노동자와 학생 그리고 모든 민중이 연대하여 거리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정치권이나 제도 세력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가 투쟁으로 나서고 행동으로 요구를 말하는 것이 정치적인 변화를 촉진시키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이다. 향후 전망 “100만이 부족하면 200만을 모으겠다.”는 프랑스 학생 대표의 말처럼, 노동계 파업투쟁과 연대하는 3월 28일은 이전보다 훨씬 대규모 투쟁이 전개되었다. 70여개 대학에서 점거농성이 지속되고 있고 1,000여개 고등학교에서 행동이 진행되었다. ‘검은 화요일(마르디 누아르)’라 불린 3월 28일 파업에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파업에 나서 500만 명이 참여했다고 노동계는 밝혔다. 주요 교통수단이 정지되었고, 관공서와 병원이 문을 닫는 등 국가기능 마비사태가 발생하였으며 파리를 비롯한 200여개 지역에서는 최대 규모의 노학연대 시위가 개최되었다. 이번 파업이 ‘총파업’은 아니었다고 하는 바, 이후 파업사태가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다급해진 드빌팽 총리가 대화를 하자고 나섰지만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CPE를 철회하는 것이 전제조건이라며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추세대로라면 저항의 규모가 더욱 커져서 우파정부가 결정적 궁지에 몰릴 가능성이 크다. 학생들은 30일에 기차역과 주요 도로를 점거하겠다고 밝혔으며 4월 4일에도 시위를 벌이겠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완전한 CPE 철회와 승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노동자 총파업이 관건이며 거리시위와 대학점거가 파업과 결합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CPE(최초고용계약) 반대투쟁 관련 기사모음입니다.
3.19 국제공동반전행동을 맞이하여 이라크 민중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전쟁과 점령 소위 ‘대량살상무기 보유, 9.11테러세력과의 연계’ 등을 명분으로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시작한지 3월 20일이면 벌써 3년이 된다. 그동안 이라크 민중들은 10만 명이 넘게 사망했고 물, 에너지, 의료, 교육 등 기본적인 필수서비스가 갈수록 악화되는 고통 속에 생존하고 있다. 침략 명분이 거짓으로 드러난 이후에 미국이 내세운 ‘민주주의와 재건’은 이미 공문구가 되었다. 2003년 개전 이후 미국은 184억 원의 재건기금 대부분은 저항세력을 진압하는 데 사용했을 뿐 이라크 민중들을 위한 사회 재건에는 별다른 투자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중의 생활 상태는 침공 이전보다 현저하게 나빠졌다. 예컨대 전기와 석유 생산의 감소로 하루 6시간 이하로 전기 공급이 이뤄지고 있고, 유가는 지난 12월 15일 총선 이후 최소 5배 이상 올랐다. 가스요금, 대중교통 요금 역시 엄청나게 인상되었다. 이는 즉각적으로 이라크 전역에서 소요사태를 발생시켰고 미국 주도의 점령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더욱 키웠다. 미국의 군사적 점령에 더해 IMF도 이라크를 점령하려 하고 있다. 유가의 급상승은 IMF가 지난 12월에 6억8천5백만 달러를 대출해주는 조건으로 강요한 협정 때문에 이라크 정부가 석유 생산물에 대한 정부보조금을 삭감했기 때문이다. IMF는 임금통제와 석유산업 사유화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재무장관은 가증스럽게도 IMF와의 협정이 이라크 경제안정의 토대가 되고 개방과 번영에 초석이 될 것이라며 파괴적인 IMF의 조치를 옹호했다. 그러나 IMF와 UN개발프로그램이 이라크 정부와 함께 작업하여 지난 1월에 발표된 연구에 의하면, 이라크 인구의 5분의 1이 하루 1달러로 살아가는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전쟁과 점령은 식량, 생필품, 에너지, 공적 서비스, 치안 등 인간생활의 모든 기본조건을 파괴한 것이다. 이라크에서 군사적 점령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민중의 삶을 붕괴시키고 있다. 점령 치하 민주주의의 불가능성 민중이 중심이 되어 스스로를 통치하는 민주주의는 전쟁과 점령이 지속되는 한 불가능하다. 이라크 민중들은 이라크 정부나 정치세력들이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총선 이후 80여일이 지났지만 정치적 힘겨루기로 인해 의회도 아직 개원하지 않아서 정부 구성 자체가 난항을 겪고 있다. 과반수에 10석 모자란 의석을 차지한 시아파 계열의 ‘통일이라크연맹’(UIA)은 자파리 현 총리를 새 총리로 내정하였지만 쿠르드 출신인 탈라바니 대통령은 최대 석유지대인 키르쿠크를 쿠르드 자치지역으로 포함시키는 국민투표를 2007년에 실시해야 한다며 자파리 총리 임명을 반대하고 있다. 또한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이라크 내 사원에 대한 무장공격으로 인해 각 종파들은 치안과 군대를 관장하는 내무부와 국방부를 서로 차지하려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정치세력들의 갈등의 이면에는 미국이 있다. 미국은 이란과 시아파가 가깝다고 못마땅해 해왔고 연정을 위한 정치협상에 있어서도 칼릴자드 미 대사를 내세워 친미정부를 구성하려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근래에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유혈사태의 근본원인 또한 미국의 점령정책이다. 미국은 점령 초기부터 이라크를 종파 사회로 재단하고 종파 및 종족을 분할통치하는 정책을 강제하여 이라크의 전통적인 공존과 조화를 파괴했고 갈등을 끊임없이 조장해왔다. 또한 친미적인 해외 망명인사들을 앞세워 점령행정처, 과도통치위원회, 임시정부로 이어져 오는 동안 정치적인 공작을 진행했다. 미국은 점령정책이 초래한 갈등과 반목을 도리어 자신들의 주둔과 개입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아 온 것이다. 따라서 이라크 민중이 스스로의 힘으로 사회를 재건하고 민주적 자치를 실현하는데 최대의 걸림돌은 바로 미국을 비롯한 점령세력이다. 점령 하에서 민주주의란 없으며 미국이 이라크를 떠나고 모든 점령군이 철수하는 것이 해결의 출발점이다. 이라크 수렁에 빠져 무덤으로 향하는 부시 <타임>지는 최근 부시의 레임덕이 시작되었다고 보도했다. 이와 더불어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부시 지지율은 바닥을 치고 있다. 특히 지난 2월 22일 시아파 성지인 아스카리야 사원 폭파사건 이후 1000여명이 사망한 것에서도 보이는 이라크 내전 위기와 지금까지 2300명이 넘는 미군 전사자 증가로 인해 이라크전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최악의 상황이다. 의 3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부시 지지도는 37%에 그쳤고, 미국민 70%가 이라크전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월 13일 방송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도 부시 지지도는 36%였고 테러와의 전쟁 지지율도 43%로 하락했다. 방송 여론조사에서는 지지도가 34%였다. 다급해진 부시가 이라크 관련 연설만 세 차례 하기로 하고 첫 연설에서 “테러분자들이 내전위기로 몰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올해 연말까지 이라크 대부분의 치안을 이라크에 넘기겠다”고 했지만 떠나간 민심이 돌아올 리 없으며, 이라크에 대해 없던 통제력이 생길 리도 없다. 더욱이 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대통령 불신임 결의안을 제출할 예정이고 공화당원들도 등을 돌리고 있다. 네오콘의 핵심이자 ‘악의 축’ 연두교서를 작성했고, ‘제1의 전쟁광’이라는 리처드 펄 전 국방정책자문위원장도 이라크 전쟁의 결과가 잘못됐다고 인정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 2월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끔찍한 포로 학대 사진이 추가로 폭로되고 영국 군인들의 이라크 청소년 집단구타 비디오가 공개되었으며 관타나모 수용소 등 미군이 해외에서 운영하는 수용소의 인권유린에 대한 비난이 높아지는 등 세계 여론의 분노가 비등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1월 무역적자는 685억 달러로 사상 최대에 이르렀고 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군비증가가 재정적자를 증가시킴에 따라, 국가부채가 법정한도인 ‘8조 1800억 달러’를 초과하는 채무불이행 사태에 이를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저돌적으로 이라크를 침공하고 승리를 선언했지만 부시 행정부는 지난 3년 동안 이라크라는 수렁에 빠져 있었으며 어떠한 전망도 보여주지 못한 채 이라크 사회를 파괴하고 세계를 위협했을 뿐이다. 미국의 전쟁과 점령은 이라크를 엄청난 갈등과 분열로 몰아넣었고 이는 부시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와 이라크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 상실로 이어졌으며 ‘제2의 베트남’, ‘부시의 무덤’이 되고 있다. 그런데도 부시 행정부는 최근 핵개발을 빌미로 이란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군사적 개입을 추진하면서 또 다른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과 같은 재앙이 다시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확전에 반대하고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를 해체해 나가야 한다. 자이툰 부대는 도대체 왜 이라크에 있나? 작년 말에 또다시 자이툰 부대 파병 재연장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 자이툰은 스스로 재앙의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자이툰 부대는 아르빌 지역의 유엔이라크지원단(UNAMI) 사무소와 유엔 요원들에 대한 경호임무를 맡기로 했으며 아르빌에 있는 미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USAID) 사무소도 4월에 자이툰 부대 안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이러한 계획은 소위 ‘평화와 재건’이라는 자이툰 부대의 파견 명분에도 어긋나는 위법적인 임무일 뿐 아니라 실제로 전투활동을 포함하게 되어 자이툰 부대를 극히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 UN역시 이라크에서는 점령세력과 동일시되고 있고 미국 정부기관은 저항세력의 핵심 타깃이기 때문이다. 자이툰 부대 초대 사단장이 미국 공로훈장을 받고, 한국군 장성이 이라크 다국적군 사령부 민군작전처장으로 파견되는 등 이미 미군과 자이툰 부대는 한 몸이 되어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무현 정부는 4월 말부터 12월까지 단계적으로 1,000명을 줄인다고 하지만 철수 일정은 밝히지도 않으면서 미군과의 운명공동체를 자임하며 장기주둔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라크가 부시의 수렁이자 무덤이 되고 있듯이 자이툰 파병은 노무현의 수렁이 될 것이다. 한미 전쟁동맹 강화, 전략적 유연성 합의, 한미 FTA 추진, 평택 미군기지 확장 등 부시 행정부와 스스로를 일체화시켜 온 노무현 정부가 부시의 몰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이라크 정세, 자이툰 부대를 둘러싼 위험 증가는 민중을 배반한 노무현에게 화살로 돌아올 것이다. 바그다드와 평택은 다르지 않다. 전쟁과 점령에 맞서 거리로! 세계 민중은 신자유주의 금융-군사세계화라는 21세기 제국주의에 맞서 대안적인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각국의 노동자, 농민, 여성 사회운동은 무장한 세계화에 저항하며 국내, 국제적으로 반전운동과 대안세계화운동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같은 날 세계 곳곳에서 동시에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서는 반전시위는 이라크 개전일인 3월 20일에 맞춰 해마다 전개되어 올해 3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 1월에 개최된 베네수엘라 세계사회포럼 국제반전총회에서 역시 이 시위가 호소되었으며 올해에는 세계적으로 3월 18일(토), 19일(일)에 집중되어 개최된다. 이 국제 공동시위 웹사이트(www.march-in-march.org)에 따르면 이미 50여개 국가에서 시위가 준비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파병반대 국민행동’에서 “자이툰 부대 철수, 미국의 이라크 점령 중단, 한-미 전쟁동맹 반대, 이란에 대한 공격반대”를 주로 하여 3월 19일(일) 오후3시에 서울역 시위를 개최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라크를 둘러싼 정세가 긴급하게 전개되고 있고 더욱이 국내적으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 평택 미군기지 확장에 대한 반대투쟁이 고조되고 있는 만큼, 제국주의에 맞서는 국제 공동시위의 중요성은 두말할 것이 없다. 특히 우리는 미군의 점령과 파괴에 고통 받으면서 생존과 평화를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이라크 민중과 평택 주민은 다르지 않다고 인식하고 이 두 투쟁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평택에서는 연일 미군기지 확장을 위한 국방부의 침탈 시도에 맞서는 주민들의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주한 미군 재배치를 통해 세계 어디로든 군사적 출동을 하고자 하는 미국의 계획을 파탄내고 한미 전쟁동맹에 파열구를 내는 저항이다. 전쟁과 폭력의 야만, 부시와 노무현의 더러운 동맹을 단호히 규탄하고 이라크-평택 민중과 연대하여 힘차게 나아가자. 이라크 점령 중단하고 자이툰 부대 철수하라 ! 한-미 전쟁동맹 해체하라 ! 이라크를 민중에게, 평택을 주민에게 ! 미군은 이라크-한반도를 떠나라 ! 제국주의 분쇄하고 민중의 투쟁을 세계화하자 !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맞서 연대를 확장하자 [%=박스1%] 세계사회포럼이 6회를 맞이하여 ‘다중심 포럼’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 1월 19~23일에는 서아프리카 말리의 수도 바마코에서 10,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2006년 다중심 포럼의 첫 번째 행사가 진행되었고, 바로 뒤를 이어 1월 24~29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두 번째 행사에는 십만 여 명이 참석했다. 세계사회포럼은 전 세계의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오늘날 세계 민중이 처한 삶의 위기의 원인에 대한 공동의 인식을 넓히고 이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도록 ‘개방적인 토론의 장’을 제공해왔다. 세계사회포럼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여기에 결합한 여러 사회운동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의 군사적 개입으로 인한 폭력의 확산, ▶WTO 혹은 지역/양국 간 자유무역협정 체결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민의 권리 축소, ▶남반구의 외채-경제위기를 매개로 한 구조조정과 이에 따른 약탈체계의 강화, ▶의료·교육 등 기초서비스, 에너지·물과 같은 공유물의 상품화, ▶이주의 상업화와 불법화로 인한 이주자의 권리 박탈 등‘금융-군사세계화’에 따른 빈곤과 폭력의 현실을 분석하고, 이를 사회운동의 의제로 제기해왔다. 이 과정에서 ‘인민의 자율성-자기통치를 바탕으로 권리를 실현하고, 사회·경제적인 변혁을 지향하며, 사회운동과 공동체 사이의 교통과 연대를 확장하려는 운동’이 세계 민중이 경험하고 있는 위기의 해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또한 각종 초국적 기구와 각 국 정부가 내세우는 ‘신자유주의’라는 해법은 오히려 위기 심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한 편, 지난 6년 동안의 성과를 세계 곳곳으로 확산하고 더 많은 이들의 참여로 그 토대를 굳건히 다진다는 취지에서 2006년 세계사회포럼은 개최지를 분산하여 진행하는 '다중심 포럼'의 형식을 채택했다. 이러한 다중심 포럼은 해당 지역 사회운동의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기 때문에, 규모와 내용을 비롯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균등한 형태를 띠고 있다. 각 지역에서 열리는 포럼의 면면을 통해 해당 지역/대륙의 사회운동이 안고 있는 고유한 의제 및 해당 지역/대륙 민중들의 요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006년 세계사회포럼은 앞선 두 행사에 이어 파키스탄 카라치(3.24~29)와 그리스 아테네(5.3~7)에서, 그리고 소지역별, 나라별, 주제별 포럼의 형태로 계속될 예정이다. 대안 형성, 공동 행동 조직: 세계사회포럼의 의미 세계사회포럼이 거듭되는 동안 세계사회포럼의 위상과 전망을 둘러싼 갖가지 논쟁이 제기되었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슬로건 속의‘또 다른 세계’는 과연 무엇인가?", "세계사회포럼이 '조직'이 아닌 '공간'이라면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차원의 행동 계획을 수립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정당과 무장조직의 참여를 배제하고 있는 원리헌장이 세계사회포럼의 힘을 약화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문제들은 거듭 제기되는 논쟁거리다. 이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5년 동안 세계사회포럼에 결합한 사회운동들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전망을 꾸준히 제출해왔다. 또한 이를 통해 스스로를 ‘신자유주의 금융-군사 세계화’를 넘어설 대안으로 표상해왔다. 이러한 성과는 2006년 다중심 사회포럼의 첫 번째 행사가 시작되기 전 날 발표된 ‘바마코 호소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50년 전의 ‘반둥회의’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 ‘미 제국주의에 맞선 남반구-북반구 민중의 연대를 강화’한다는 취지에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회의를 개최하고 바마코 호소문을 작성했다. 이 호소문은 지난 5년 동안 진행된 세계사회포럼 및 지역별․주제별 사회포럼에서 제출된 ‘대안’을 둘러싼 원칙을 다음과 같이 집약하고 있다. ① 경쟁이 아닌 연대를 바탕으로 한다. ② 시민권과 양성의 평등을 전적으로 옹호한다. ③ 모든 다양한 구성원에게 창조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보편적인 문명을 구축한다. ④ 민주주의를 통한 생산과 재생산의 사회화 ⑤ 자연·자원 및 농지의 시장화를 거부한다 ⑥문화적 산물, 과학적 지식, 교육, 의료의 상품화를 저지한다 ⑦ 제한 없는 민주주의, 사회진보, 각 나라와 개인의 자율성을 포함하는 정책을 촉진한다 ⑧ 반-제국주의에 기초한 국제주의와 남-북반구 민중의 연대를 강화한다. 이에 기반을 두어 바마코 호소문은 세계 곳곳의 민중들이 제기해 온 요구를 모아, 다음을 사회운동이 시급하게 진행해야 할 과제로 제안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과 군사적 점령에 반대하는 운동 및 분쟁 지역의 저항하는 민중들과의 연대를 강화할 것, WTO 도하개발의제 협상 중단을 요구하는 투쟁 및 남반구 외채의 즉각적이고 조건 없는 탕감을 요구하는 캠페인을 지속할 것,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지역통합을 중단하고 지역 내 민중의 연대와 자율성을 바탕으로 한 통합을 촉진할 것 등이 제기된 과제이다. 이를 실현하려는 사회운동이 꾸준히 출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원칙이 단지‘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인 세계를 추동할 힘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있음을 뒷받침한다. 뿐만 아니라, 세계사회포럼은 전 지구적인 차원의 공동행동을 제안하고 이를 추동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비아캄페시나, 세계여성행진 등과 같은 대중조직은 <세계사회운동총회>를 개최하고 1년 간 세계 사회운동이 집중해야 할 운동의 의제와 행동의 계기를 제시해왔다. <세계사회운동총회>는 세계사회포럼의 공식기구와는 관련이 없지만 전 지구적인 공동행동을 조직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올 해 역시 카라카스 사회포럼의 마지막 행사로 진행된 <세계사회운동총회>에서는 2006년 세계사회운동이 집중해야 하는 공동행동 계획을 담은‘사회운동 호소문’이 발표되었다. ‘바마코 호소문’의 제안을 반영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 중단’,‘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중단’, ‘ 대량살상무기와 핵무기 사용 중단’, ‘베네수엘라, 쿠바 등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저항하는 민중과의 연대 강화’, ‘도하개발의제 협상 저지’, ‘ 남반구 외채의 즉각적이고 조건 없는 탕감’을 주요 요구로 하여 3월 18/19일 국제반전공동행동, 5월 경 제네바에서 열릴 WTO 일반이사회 대응 행동, 6월 러시아 성 뻬쩨르부르크에서 열리는 G-8 정상회담 반대투쟁, 9월 IMF-세계은행 연차총회 반대행동을 다양하게 조직하고 이러한 행동들을 결합시켜 내자는 호소를 담고 있다. 사회운동총회에 참석한 여성운동, 농민운동, 원주민운동 등은‘여성 신체의 상품화 중단’, ‘ 식량주권(토지, 종자, 농업지식에 대한 농민의 통제권, 민중의 식량에 대한 보편적 접근권)’강화, ‘원주민의 자치 실현’고유한 의제와 이를 중심으로 한 각자의 행동계획을 공유했다. <세계사회운동총회>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분출한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서로 어떻게 발견한 공동의 인식을 확보하고 연대를 실현하는지 그 방법을 잘 보여준다. 006년 다중심 포럼을 통해 드러난 각 지역 사회운동의 현재 그동안의 세계사회포럼이 주 개최지였던 남미 사회운동에 치중되어 있었다. 바마코 행사에 참가한 인원이 카라카스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바마코 행사 참가자들은 세계사회포럼 장소가 분산되어 더 많은 아프리카 민중들이 세계사회포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전에는 활발하게 제기되지 못했던 아프리카의 고유한 의제들이 세계사회포럼의 주제로 다루어지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바마코 사회포럼에서는 수단-콩고의 분쟁, 오랫동안 아프리카 여성들의 권리를 침해해 온 성기절단 및 조혼과 같은 문제들이 다루어졌다. 아프리카 사회운동들은 각국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아프리카 발전을 위한 새로운 파트너십(NEPAD)’과 같은 프로그램이 IMF와 세계은행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구조조정프로그램(SAPs), 빈곤감축전략계획서(PRSPs)와 같은 맥락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프로그램임을 분명히 하고 이에 맞서 싸울 것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그동안 여러 비정부기구(NGO)가 진행해 온 IMF, 세계은행의 개혁을 위한 개입이 결국은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수용하는 결과를 낳고 있을 뿐이라며, 이제는 사회운동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바마코 사회포럼은 아프리카 사회운동들에게 던져진 시급한 과제는 ‘내전’ 및 ‘지역분쟁’을 종식하기 위한 활동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카라카스 사회포럼에서는 남미지역에서 ‘금융-군사세계화’에 대항하여 분출하는 사회운동과, 잇따라 등장하고 있는 좌파정권의 관계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남미 지역의 사회운동들은 세계사회포럼 프로세스의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하며 ‘신자유주의 금융-군사세계화’에 반대하는 대륙 차원의 연대를 꾸준히 강화해 왔다. 지난 해 아르헨티나 마르 델 플라타(Mar del Plata)에서 열린‘미주지역정상회의’에 즈음하여 사회운동들이 미주지역자유무역협정(FTAA) 체결 논의를 효과적으로 중단시킨 바 있는데, 이는 이 지역에서 대륙차원의 연대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포럼의 마지막 날 행사로 열린<세계사회운동총회>에서 사회운동들은 최근 들어 각 국에서 좌파 정권이 줄을 이어 등장하고 있는 현상이 남미 대륙에서 폭발하고 있는 자유무역, 군사주의, 사유화 정책에 반대하고, 자연자원과 식량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사회운동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좌파정권의 등장과 함께 남미 각 국의 좌파정부와 사회운동이 미 제국주의에 대한 대항블록을 구축하자는 제안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는데, 이러한 제안은 카라카스 사회포럼에서도 중요한 의제였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주요 행사에 직접 참석하여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남미 각 국의 좌파정부와 사회운동이 연대를 강화할 것을 호소했다. 또한‘미주지역자유무역협정’에 맞서 민중의 권리를 바탕에 둔 ‘미주대륙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ALBA)’를 중심으로 단결을 강화할 것을 호소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이번 포럼을 진행하는 데 직접 나서서 지원했으며 차베스 대통령이 상당한 주목을 끌었던 상황에서, 사회운동의 자율성에 관한 쟁점은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이제 세계사회포럼 원리헌장이 제시하고 있는 ‘정당과 무장조직 배제의 원칙’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쟁점은‘남미 각 국의 좌파정권과 사회운동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라는 쟁점으로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세계사회운동총회>에 모인 사회운동들은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스스로 내리고 있다. 이들은 ‘사회운동은 좌파정권에 대해 정치적 자율성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며, 우리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의 조직화에 복무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각국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도록 압박하는 것이 사회운동의 임무’라고 했다. 금융-군사 세계화가 파괴하는 민중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이를 연대와 자율성을 바탕으로 운동을 통해 실현하려고 노력해 온 사회운동들의 활동과 역할이 축소되지 않고, 스스로 ‘대안’에 대한 전망과 역량을 더욱 확장해 나아가는 것이 사회운동들이 실현해야 할 지난한 과제이다. 6년 다중심 포럼과 한국 사회운동의 과제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며 대중을 분할하고 특정 계층에게만 제한된 시혜를 제공하면서 저항을 무마하는 한 편, ‘사회 양극화’라는 말로 신자유주의로 더욱 심화된 위기의 원인을 가리며 ‘사회통합 담론’을 내세워 계급 형성을 가로막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06년 다중심 포럼이 주는 교훈은 중요하다. 특정 계층-부문의 이익을 집단적으로 방어하는 식의 실리주의적인 투쟁방식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우는데 무력하며,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라는 조건에 놓여 있는 각 국의 정부가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지 않고 사회운동이 자율성을 유지하며 독자적인 역량을 구축해갈 때, 삶의 위기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용형태와 임금조건, 성별, 국경과 인종에 따른 분할을 뛰어넘는 연대를 실현하기를 주저하여 분할과 타협에 노출된 채 사회변혁에 대한 전망을 탈각하지 않도록 사회운동의 독자성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기울여야 한다. 그 출발점으로, 2006년 다중심 포럼이 제기한 몇 가지 과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다. 우선, 초민족 자본의 이해를 위해 민중의 권리를 축소하는 데에 적극 나서고 있는 노무현정권의 반민중성을 폭로해야 한다. 노동의 불안정화, 농민생존권의 파괴, 식량주권의 파괴, 공공서비스와 지식에 대한 대중의 권리의 파괴는 뒤로 한 채, 초민족 금융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기위해 각종 규제완화에 박차를 가하고 한국 기업 또한 초민족화의 길에 적극 나서려는 시도를 막아야 한다. 조만간 본격화 될 한미 FTA 협상, 그리고 도하개발의제 협상이 그 계기가 될 것이다. 한편, ‘군사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반전운동의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 미국의 이라크 점령 중단을 위한 3.18/19 국제 반전공동행동을 적극 조직해야 한다. 또한 평택미군기지 확장 저지를 위한 주민들의 투쟁에 적극 연대하고, 이를 통해 전략적 유연성-평택미군기지 확장- PSI참여로 이어지는 한미군사동맹의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을 확장해야 한다. 오는 3월 24일~29일 파키스탄 카라치 사회포럼을 앞두고 아시아 차원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적극 모색하는 것 또한 우리에게 던져진 과제이다. ‘미주지역자유무역협정’ 체결 저지를 위한 공동행동으로 대륙 차원의 사회운동의 연대를 꾸준히 강화해 온 미주 대륙이나, ‘신자유주의적 원리에 따른 유럽통합’에 맞서 ‘다른 유럽’을 건설하기 위한 공동의 과제를 형성해 온 유럽 대륙과 비교해 볼 때 아시아 지역 사회운동들 간의 연대는 취약한 편이며, 지역 차원의 이슈를 발굴해 내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군사전략에 따른 인민의 자결권의 파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이주의 확산과 이에 대한 불법화로 인한 이주노동자들의 권리 박탈, 초민족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각종 무역협정에 따른 인민의 권리 축소 등 공동의 이슈를 제기하고 이에 맞서는 연대의 흐름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
[%=박스1%] 반전운동의 흐름 국제적인 반전운동의 흐름은 대안세계화 운동과 맥락을 같이 한다. 1997-1998년 아시아의 연쇄적인 경제위기를 경과하면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해 비판하는 문제의식과 운동이 활발해졌고 이는 1999년 시애틀에서 개최된 WTO 각료회의 반대투쟁으로 이어졌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세계 민중들의 불만과 저항이 WTO에 대한 투쟁으로 폭발하면서 민중의 투쟁과 희망을 아래로부터 세계화하고자 하는 대안세계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2001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시작된 세계사회포럼으로 모아졌으며 세계사회포럼에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화에 반대하여 대안세계화 운동과 반전운동의 결합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왔다. 더욱이 2001년 9.11 사태 이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과 예방전쟁 전략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침략전쟁을 낳았고 이에 따라 전쟁을 종식시키고 민중의 평화를 쟁취하고자 하는 반전운동의 강화가 긴급하게 요청되었다. 이에 각국에서는 반전운동 연대체가 결성되었고 시민들을 거리로 불러내었다. 2002년 9월 28일 런던에서 개최된 이라크 전쟁 반대시위, 2001년 11월 9일 피렌체에서 열린 유럽사회포럼 폐막 행진으로 전개된 ‘이라크 침략전쟁 반대 100만 행진’ 등에 이어 반전운동은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특히 유럽사회포럼에서 호소되고 2003년 1월 3회 세계사회포럼을 계기로 확대되어 전 세계적으로 조직된 2003년 2월 15일의 국제적인 공동시위에는 1천 5백만명이 참여하였다. 이어서 2003년 5월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국제반전회의가 개최되어 ‘자카르타 평화 컨센서스’가 채택되었다. 자카르타 평화 컨센서스는 ‘단결 선언’, ‘이라크에 대한 입장과 행동계획’, ‘세계화와 군사주의에 대한 행동계획’ 등 세 가지로 구성되어 반전운동의 기본 입장과 계획을 담았다. 또한 G8 정상회담, 칸쿤 WTO 각료회의, 지역사회포럼 등에서의 공동행동을 계기로 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세계적 평화를 위한 연대네트워크(Solidarity Network for Global Peace)를 결성하기로 했다. 이에 2004년 1월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국제반전총회가 열렸고 여기에서 대안세계화 운동과 반전운동의 결합, 이라크 침략 1년이 되는 3월 20일 국제 공동시위가 광범위하게 호소되었다. 2004년 9월에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국제 반전-반세계화 운동 전략회의’가 개최되어 중동지역과의 연대를 형성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2005년 5회 세계사회포럼에서 역시 국제반전총회가 개최되었고 3.20시위를 비롯한 여러 가지 행동계획이 제안되었다. 2005년 6월에는 이라크 국제전범재판이 터키에서 열렸다. 이는 한국을 포함하여 각국에서 진행된 전범민중재판을 총화하여 개최되었고 부시, 블레어, 노무현 등 의지연합 50여 개 국가의 수반들을 이라크 전쟁 범죄자로 심판했다. 2005년 9월 24일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30만 명이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에 참여하였다. 반전운동의 주요 이슈 반전운동은 무엇보다도 이라크 점령 종식을 주장하고 요구한다. 이라크 전쟁과 점령은 21세기 미국 중심의 군사주의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결합되어 나타난 대표적인 재앙이다. 이라크 민중 10만명 이상, 미군 2천명 이상이 사망하였으며 이제까지 전쟁비용으로 미국은 3천억달러 이상을 지출하였다. 이라크에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파괴와 약탈이 횡행하고 있다. 미국의 초국적자본은 전쟁에서 이익을 얻으며 이라크 경제를 수탈하고 있고, IMF는 차관 제공의 조건으로 국유기업 사유화와 필수 서비스에 대한 생활보조금 삭감을 강요하고 있다. 이러한 이라크 전쟁과 점령에 대한 반대운동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이라크 침략 개시일인 3월 20일을 전후한 세계 동시다발 규탄 시위는 올해 3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이는 특히 이라크에 파병을 하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철군운동과 결합되어 전개된다. 미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들에서는 전쟁을 거부한다는 의미로 모병과 징집에 대한 반대운동도 벌어지고 있다(www.nodraftnoway.org 참조). 또한 이라크 저항세력 혹은 운동단체들과 직접적으로 연대하는 것도 확대되고 있다. 예컨대 2004년에 개최된 베이루트 국제회의, 2005년 세계사회포럼 반전총회, 런던 국제회의, 올해 네 번째를 맞이하는 카이로 국제회의 등에서는 그동안 이라크인들이 직접 참여하여 지지와 연대를 호소하였다. 이라크 석유산업과 경제의 사유화에 반대하는 이라크 노동조합들과의 연대도 노동운동 진영에서 진행되어 왔다(www.iraqoccupationfocus.org, www.uslaboragainstwar.org 참조). 이외에도 핼리버튼과 벡텔과 같은 전쟁기업에 대한 불매운동과 직접행동, 이라크 점령군에 대한 감시운동, 전범민중재판운동,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운동, 정당들의 운동 등 이라크 전쟁과 점령을 종식시키기 위한 행동들이 벌어지고 있다. 반전운동은 또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반대한다.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온 팔레스타인에 대한 점령과 공격, 학살은 중동지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핵심적인 이슈이다. 팔레스타인 민중은 수십 년 동안 현재 이라크 민중이 겪는 고통을 나날이 겪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반전운동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저항권과 자결권,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권리를 옹호하며 이스라엘의 분리장벽 건설에 반대한다. 전 세계적으로 건설되어 있는 미군기지 철수운동 역시 중요한 문제다. 중남미, 아시아, 유럽 등 미군기지는 세계적으로 850여 개에 달한다. 미군기지는 각 지역에서 미국의 정치·경제적 지배력을 군사력으로 뒷받침하면서 각종 사회문제를 발생시킨다.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군사외교 전략은 세계 각지 인민의 자결권을 파괴한다. 이에 한국, 일본, 필리핀 등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는 오랫동안 미군기지 철수운동이 주요한 사회운동의 한 축이었다. 미군기지 철수운동은 미국과의 군사동맹, 전쟁동맹에 반대하는 운동으로서 현지 주민들의 저항을 주축으로 하여 전개되어 왔다. 세계사회포럼에서도 군사기지 반대 토론회가 개최되고, 지역적으로도 연대운동이 추진되고 있다(www.nobases.net 참조). 반전운동은 이란, 북한, 시리아, 쿠바, 베네수엘라 등에 대한 미국의 전쟁과 무력개입에 반대한다.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주의에 반대하고 일방적 패권에 저항하는 소위 ‘반미’국가에 대한 위협을 반대하는 것은 그 국가들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억압을 비판하는 것이다. 다양한 나라에서 이러한 이슈에 대한 캠페인들이 벌어지고 있다. 반전운동의 주요 이슈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반핵’이다. 반핵운동은 핵무기 뿐만 아니라 모든 핵사용에 반대하는 운동이다. 반핵운동의 최대 사안은 미국의 선제 핵공격 정책인데, 2005년 5월 1일 미국에서는 히로시마, 나가사키 핵무기 투하 60년을 맞아 핵무기 철폐를 위한 대규모 국제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미국의 군사주의가 강화되면서 핵위협은 더 커진 상황에서 반핵운동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반전운동의 주요 쟁점 반전운동의 경향은 도식적으로 구분하자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 사회와 세계의 급진적인 변화를 통해서만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보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중들의 정치적 각성을 통한 운동과 투쟁이 중요하다고 보는 경향이다. 둘째, 평화 그 자체를 강조하는 평화주의로서 개인의 감수성과 불복종 행동(혹은 비폭력 행동)을 강조하는 경향이다. 셋째, 의회나 정치권과의 대화를 중심으로 놓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제도적 해결책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물론 각 나라에서는 이러한 경향들이 공동으로 반전 연대체를 결성하여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개별 운동조직 내에서도 여러 입장들이 공존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들에서 비롯되어 반전운동 내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주요 쟁점들을 살펴보자. 우선, 전쟁을 시작했거나 동참한 지배세력에 대한 쟁점이다. 예컨대 한국에서는 노무현 정부의 파병강행 방침으로 인해 故김선일씨가 죽음을 당했을 당시,‘노무현 퇴진’을 놓고 벌어진 논쟁을 들 수 있다. 운동의 대중적 급진화와 정치적 확장을 지향하는 입장에서는 지배세력에 대한 폭로와 타격을 최우선으로 놓고 운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제도적 해결을 추구하는 입장에서는 파병반대 주장을 넘어서는 정치적 구호 채택을 반대했다. 미국에서도 일부 진영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전쟁정책의 유사성을 애써 외면하여 대선 당시에 민주당 후보 지지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전쟁과 점령에 대한 반대는 그것을 추진하는 세력에 대한 반대를 포함하는 것이므로, 정부, 정치권, 기업들을 포함하여 지배세력에 대한 저항은 일차적이고 당연한 것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치가 정치의 공간 자체를 축소시키고 대중의 민주주의를 배반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반전운동은 이를 지속적으로 폭로하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둘째, 이라크 저항세력에 대한 입장이다. 특히 이라크의 무장저항에 대한 지지 여부이다. 이는 민간인에 대한 납치 문제, 자살폭탄 공격과도 연관된다. 보통 이라크 민중의 저항권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무장저항 역시 저항의 고유한 방식으로 보고 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또한 납치나 자살폭탄 공격을 비판하지만 그 맥락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다른 입장에서는 일반적으로 무장저항의 방식은 거부하거나 비난한다. 즉, 폭력적인 탄압을 받는다 할지라도 폭력으로 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반전운동이 시위나 행동 과정에서 물리력을 쓸 수 없다는 입장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국가테러나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을 없애고, 운동 내부에서도 있을 수 있는 폭력을 제어하는 것이 핵심이지 시위과정에서 무조건 공권력의 폭력을 감내하는 것이 핵심은 아니다. 셋째,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운동과의 결합 여부에 대한 입장이다. 평화주의나 제도적 해결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전쟁은 그 자체로 독자적인 사안으로만 파악되며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운동과의 관련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다. 따라서 반전 이슈 자체에만 골몰하기 쉽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쟁은 미국과 초국적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로부터 비롯되는 이익을 사활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미국과 제국주의 세력들이 군사주의를 강화하는 가운데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민중은 전쟁과 빈곤의 고통 속에서 권리를 파괴당하고 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며 동일한 원인에 대한 저항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 한미동맹의 파괴적 결과에 반대하는 운동,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처참하게 희생된 민중의 생존권 투쟁, 노동의 불안정화와 여성억압에 맞서 노동권과 여성권을 확대하기 위해 싸우는 운동 사이에 광범위한 연대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국제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인식은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사회포럼이나 다양한 국제회의에서 반전-대안세계화 운동은 동시적인 과제로 제기되며 소통과 연대 강화를 지향하고 있다. 동의 전망과 과제 -3·19 국제공동행동을 앞두고 세계의 반전운동은 9·11 사태이후 서로를 강화하면서 새롭게 성장해왔다. 그 과정에서 반전운동의 내부에 다양한 경향과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위에서 서술한 내용 이외에도 다양한 쟁점들이 있다. 그리고 각국의 정치, 경제, 사회, 역사적인 배경과 상황의 차이에 따라 수많은 형태의 운동들이 전개되고 있다. 갈등과 대립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운동의 역동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건강한 상호토론과 의사소통을 통해 공동의 목표를 설정하고 대중의 저항을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나타낸다. 따라서 반전운동은 스스로를 더욱 성장시키고 대중들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토론을 촉진하고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일국의 반전운동은 국제적인 토론과 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세계 반전운동으로 일부로서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또한 국내적 차원에서 반전운동의 다양한 이슈들을 결합시키면서 주체를 확대해야 한다. 세계 반전운동은 운동의 단결과 연대를 통해 전쟁과 점령,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세계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힘과 의지를 결집시켜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동력이 될 것이다. 지난 1월에 다중심 세계사회포럼의 일환으로 개최된 베네수엘라 세계사회포럼의 반전총회에서는 이라크 전쟁과 점령 반대, 이라크 주둔 외국군의 즉각적인 철수, 이라크 에너지 자원의 사유화 중단, 팔레스타인 점령 반대, 다른 나라들에 대한 군사개입이나 경제봉쇄 반대,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 폐기, 고문과 불법감금 중단 등이 주장되었다. 이를 위한 국제적인 공동행동으로서 올해에도 이라크 침략일인 3월 20일을 맞아 3월 19일(혹은 18일) 국제 시위가 호소되었고 각 나라별로 준비되고 있다(www.march-in-march.org 참조). 신자유주의의 폭력과 전쟁의 야만에 저항하는 민중의 의지를 중단없이 모아나가야 할 것이다. [%=박스2%]
12월 12일 월요일 오후 12시 30분 농민주유소에서 해자언니를 만나 서상IC로 갔다. 오후 1시 서상IC에서 버스를 탔다. 고성, 창녕, 진주, 합천에서 먼저 출발한 경남도여농 참가단이 타고 있었다. 우리를 태워준 도여농 회장인 혜숙이 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서울로 향했다. 홍콩투쟁에 대한 결의를 나누고, 간단한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어린 아이들이 있고, 많은 농사일들을 두고 8일에 이르는 긴 날을 투쟁의 현장으로 가는 우리로서는 큰 뜻을 갖고 떠나는 길이라 해도 마음이 무거웠다. 5시 30분경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민주노총사무실에 도착해 짐을 두고 영등포 백화점에서 촛불집회를 가졌다. 홍콩의 날씨가 우리나라보다는 따뜻하다고 해서 두꺼운 옷을 많이 준비하지 않았기에 더 추웠다.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7시부터 출정식을 가졌다. 반세계화의 깃발을 세우고 WTO를 저지하기 위한 결의를 다지고, 출국수속안내와 기내에서의 유의사항을 들었다. 출정식을 마치고, 잠을 자기위해 인근 찜질방으로 갔다. 12월 13일 화요일 새벽 4시경부터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민주노총 사무실로 가서 짐을 챙겨 인천공항으로 갔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산더미 같은 짐을 보내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런 저런 수속절차를 마치고 8시 마카오행비행기를 탔다. 12시경 마카오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과 1시간의 시차가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오기까지 생소한 많은 절차를 거쳤다. 한국 보수 언론에서 폭도들이 홍콩으로 간다고 난리 법석을 떨어 혹시 홍콩에 도착해 입국거부나 당하지 않나 걱정도 했는데, 기우였다. 마카오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행사의 대절버스를 타고 선착장으로 가서 다시 배를 타고 홍콩섬으로 가야 했다. 버스에서 짐을 내려 다시 배로 옮기는 데는 괴력적인 힘이 필요했다. 모두들 짐 때문에 진이 빠져 버릴 정도였다. 홍콩섬에 도착해서 짐을 숙소로 보내고, 4시경 모두들 빅토리아 공원으로 이동했다. 처음 대하는 홍콩의 모습은 한국의 여느 도시와 똑같았다. 유독 높디높은 빌딩이 홍콩이 얼마나 좁은 도시인가를 알게 해 주었다. 빅토리아공원에 도착해 먼저 2003년 칸쿤각료회의에서 자결하신 이경해열사의 영정 앞에 묵념을 드렸다. 그리고는 도착해 있는 도시락을 먹었다. 모래알 같은 흰밥에 채 썬 당근이 올려져 있었고 반찬은 고기와 삶은 시금치가 나왔다. 음식마다 홍콩 사람들이 먹는 특유의 조미료가 들어있어 먹기가 힘들었다. 가방에 든 깻잎과 김치를 꺼내니 여기저기서 젓가락이 몰려든다. 몇 끼를 먹으려고 가져온 반찬이 동이 나 버렸다. 식사 후 한국투쟁단이 있는 컨벤션센터 인근 집회장으로 향했다. 우리는 등에 ‘NO! WTO!’가 적힌 빨간색 조끼를 입었다. 빅토리아공원 입구를 벗어나자마자 홍콩경찰이 우리 대열을 막았다. 이미 도착한 투쟁단들이 확보한 코스였기에 그 부당함에 항의했다. 여자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등 갖은 이유를 대며 우리 대열을 30분 이상 지체시켰다. 기다리는 동안 여성농민가를 비롯해 준비된 문예팀, 청보리사랑과 즉석에서 만들어진 매력덩어리라는 율동패의 신나는 공연이 이어져 축제분위기가 연출되었고, 몰려든 홍콩시민들의 표정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마 국내보수언론이 제공한 자료로 폭도로만 알고 있던 한국투쟁단이 두려운 존재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첫 시발점인 것 같다. 홍콩경찰은 몸만 만져도 잡아 간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결국 우리는 홍콩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한국투쟁단이 있는 곳으로 향해 나가기로 했다. 두려움도 컸지만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찾은 것이기에 힘찬 환호성이 터졌다. 그들은 당황해하며 선두에 서서 “OK, OK”를 연발하며 전여농 대열을 안내하듯 앞서갔다. 밤새 잠도 자지 못하고, 비행기와 배, 버스를 번갈아 타고 달려오자마자 시작된 우리의 반(反)WTO 목소리는 많은 인파들과 홍콩거리를 스며들어갔다. 우리는 끊임없이 “Down, Down WTO!” “WTO Kills Farmers!”(WTO가 농민을 죽인다)를 외쳤다. 바다에 접해 있는 컨벤션센터를 눈앞에 둔 집회장에 도착하니 전농 동지들을 포함한 많은 동지들이 와 있었다. 평소에는 소 닭 보듯 하는 전농과 전여농의 첫 만남은 감격스러울 만큼 뜨거웠다. 서로 환호하며 박수를 쳤고, 신나는 풍물팀에 꼬리를 물고 서로 손뼉을 맞추며 마주 돌았다. 두 명의 전농동지가 바다에 뛰어들어 컨벤션센터까지 헤엄쳐서 가서 경찰에 붙잡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부는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고, 우리는 컨벤션센터를 뒤흔들 만큼 큰 함성으로 우리의 WTO 반대 의지를 보였다.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무슨 일인지 버스가 위약금을 물고 모두 취소해 버렸다고 했다. 홍콩당국이나 경찰이 압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여행사에서도 발을 동동 굴렀지만, 당장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이틀간의 강행군에 금방이라도 뻗어버릴 것 같은 상태였지만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다시 숙소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50~60대의 연세 드신 여성농민들은 걷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일정이 끝나 숙소인 폭플람캠프장으로 돌아오니 저녁 9시 30분이었다. 어제 집을 떠나 지금까지 이틀을 하루같이 보냈다. 한 곳에 수북하게 쌓인 각자의 짐을 찾아 정리하고 씻고 나니 12시가 다 되었다. 난방도 되지 않는, 잠자리도 불편한 2층짜리 나무침대에서 겨울 긴 코트까지 껴입고 잠을 청해야 했다. 모두가 피곤에 절은 몸과 마음을 이불에 묻는 그 즈음 평가와 다음날 일정을 위해 회의를 가지는 집행부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이내 잠에 골아 떨어졌다. 12월 14일 수요일 아침 7시에 기상했다. 그리 낮지 않아 보이는 산꼭대기에 몇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는 것이 참 신기했다. 괴력 전여농의 위력은 새벽부터 이어졌다. 힘들었던 이틀의 일정에도 불구하고 자고 일어나 움직이는 모습이 하룻밤 사이 생생하게 재충전되어 있었고, 제주여농 동지들은 새벽 등산도 다녀왔다고 한다. 아침은 스스로 해결하게 되어있다. 모여 앉아 밥을 먹을 자리도 없어 침대아래 있는 사물함을 2개 쌓아 간이 살림대를 만들었다. 각자 가지고 온 음식을 한 곳에 모았다. 오늘 아침식사는 우리들 대부분이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인 컵라면에 햇반을 말아 먹었다. 그리고 일부는 생식으로 해결했다. 9시 30분에 폭플람 숙소 강당에 모여 다양하고 효율적인 시위를 위해 준비에 들어갔다. 풍물팀과 율동패를 조직했다. 그리고 함께 율동을 배웠다. 바로 옆에 학교가 있는 관계로 풍물은 연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가야 했다. 12시경 풍물과 방송기구는 임시로 부른 밴에 싣고, 연세 드신 어른들을 태우고 나머지 동지들은 버스를 타고, 다시 전철을 타고 빅토리아공원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떠들면 벌금이 있다는 말에 모두들 ‘교양시럽게’ 앉아 이동을 했다. 2시부터 비아캄페시아 투쟁단 결의대회가 있었다. 초국적 자본의 힘으로 농민에게 땅을 빼앗고,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잃게 하고, 가난한 사람에겐 교육, 의료, 물, 전기 등 인간에게 필수적인 기초서비스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만들어 전 세계 민중을 도탄에 빠뜨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횡포에 맞서 투쟁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연대투쟁의 결의를 마치고, 4시가 넘어 전농숙소인 YMCA캠프장으로 출발했다. 전농의 협상노력으로 다행히 버스편을 구할 수 있어 편안히 버스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동할 때마다 만나는 홍콩시민들은 손을 흔들어 보였고, “Down Down WTO!”를 외치기도 했다. 이런 홍콩시민들의 지지는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우리 숙소 주변과는 비교가 될 만큼 전농 숙소 주위에는 홍콩의 부자들만 모여 산다는 호화로워 보이는 아파트촌이 있었다. YMCA 캠프장의 넓은 운동장에서 반WTO투쟁단 친목의 밤 행사가 열렸다. 800여명의 전농과 100여명의 전여농 동지들이 양 옆에 앉고, 외국에서 참가한 투쟁단이 가운데 자리했다. 11월 15일 농민대회 중 발생한 한국경찰의 폭력진압 과정을 영상으로 보며 한국의 치열한 투쟁현장을 공유하고, 홍콩에서 신(新)한류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전여농의 많은 문예팀들이 다양하고 확실한 전술의 공연으로 열기를 더했다. 특히 청보리사랑과 강원도 횡성댁, 매력덩어리(율동패), 풍물패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일정이 끝나고, 여러 나라 동지들이 어울려 친목의 밤을 보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며 각 나라의 전통음악에 맞춰 춤추고 박수치고 진지한 관심과 지지로 친목을 다졌다. 서울에서는 견디기 힘든 추위 속에서 청와대 앞 농성을 하고, 많은 동지들이 잡혀갔다는 소식과 컨벤션센터 내에서 한국협상단이 미국의 개가 되어 협상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남미의 반대 목소리를 죽이려 한다는 참담한 소식이 들려 다른 나라 투쟁단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밤 10시가 넘어 버스로 숙소로 이동했다(우리나라처럼 관광버스가 아니라 스쿨버스였다.). 11시경 숙소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내려 숙소로 걸어가는 걸음걸음이 천근만근이었고, 온기 없이 서늘하게 기다리고 있을 방을 생각하니 서글펐다. 12월 15일 목요일 “자기야, 자기야!”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잠을 깼다. 아니 이 아침에 웬 자기타령“ 부스스 복도로 나가보니 복도 공중전화기에 매달린 선애진 단장님이다. “단비야, 단비야 엄마야.” 그 때까지도 불량전화기를 붙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밤새 자다 눈을 뜨면 아침이다. 오늘은 어제 아침보다 피로감이 덜하다. 모두들 신기하게도 아침이면 생생한 모습들이다. 컵라면이나 햇반, 생식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는 WTO가 여성농민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주제의 포럼이 결의 대회형식으로 열리는 빅토리아공원으로 향했다. 공원 입구에서 풍물을 선봉대 삼아 입장했다. 우리가 지날 때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 대열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있었고,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대회장에는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높은 농업보조금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유럽, 미국 농민들의 참가하였다. 그들 역시 다국적 기업농에 의해 소농들이 설자리를 잃고 있다고 했다. 모두들 한결같은 목소리로 WTO가 인류의 재앙임을 말했다. 특히 농산물의 상품화로 초국적 자본에 땅을 뺏기고 성매매로 삶은 이어가야 하는 동남아 여성농민들의 호소는 절망에 가까웠다. 참석한 많은 나라의 이야기는 하나의 주제로 모였다. “WTO, 10년이면 충분하다.” 전농 측 통역자의 발언은 분명한 메시지를 담았다. “10년이면 충분히 해쳐먹지 않았나!” 1시 30분에 포럼을 마치고, 모든 나라의 투쟁단들이 전여농의 풍물팀을 선봉대로 하여 구호를 부르며 홍콩시내를 가로질러 컨벤션센터 인근 집회장으로 이동했다. 도로가에 몰려든 홍콩시민들은 주먹이나 손을 들어 보이며 지지를 보냈고, 많은 사람들은 우리 행렬과 함께 걸어갔다. 우리 투쟁단을 거슬러 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97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중국에 반환된 이후 경제적인 급성장을 하던 홍콩은 90년대 후반부터 발생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로 빈부격차가 커지고, 복지에 대한 요구가 급증했으며, 그리고 보통선거제도입 등의 민주개혁에 대한 요구 또한 심화되는 상황이라고 한다. 98년 금융위기 이후 늘어나는 실업률에 대한 불만으로 2003년에는 50만 명의 민중이 모여 시위를 벌렸다고 한다. 영국의 문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홍콩의 집시법은 홍콩시민들의 민주적 행동표현에 많은 제약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다양한 시위문화가 그들에게 해방감과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지 않았나 싶다. 전농은 빅토리아 공원에서 컨벤션센터 인근 집회장까지 삼보일배에 들어갔다. 오랜 단식으로 건강이 나빠진 강기갑국회의원님과 연세 드신 오종렬 전국연합의장님도 함께 했다. 그리고 일부 홍콩시민들도 함께 했다. 홍콩언론은 하루 종일 생중계로 그 모습을 보도했고, 신문은 절반 이상을 특보로 보도했다. 삼보일배가 홍콩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한다. 걸어서 3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를 3시간이 넘도록 삼보일배를 하며 온 몸으로 WTO의 부당함을 알렸다. 전여농은 컨벤션센터가 보이는 집회장에 도착해 다시 전농대열을 향해 삼보일배에 들어갔다. 100여 미터도 가지 않았는데 전농의 삼보일배단과 만났다. 총 300m도 되지 않는 거리를 삼보일배한 우리도 무릎 붕대가 다 닳아 버렸는데, 전농 동지들의 무릎은 얼마나 까져 아릴지. 늘 때려 부수고, 불지르고 하던 과격한 시위를 해야만 그나마 언론에 보도되던 우리나라 언론 양태로 인해 더 확산된 ‘폭력적인’ 시위 방식을 제외하니 삼보일배나 차가운 겨울 바닷물에 뛰어드는 것처럼 스스로의 몸을 혹사시키는 방법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전농의 동지들의 몸부림이 안타까웠다. 농민가와 아프팔트농사, 구호만 외치며 3~4시간의 시위를 꾸려가는 하는 남성 동지들의 이야기에 우리는 웃긴 했지만, 함께 할 수 있는 서로의 역할에 대해 고민을 하고 대안까지 내었다. “전농이여, 앞으로는 인원동원과 밥만 대라, 우리가 데모의 모든 기획을 하겠노라”고. 전농과 전여농이 만나 어색하고 더러는 뜨거운 포옹을 나누며 한 대열이 되어 컨벤션센터를 향해 삼보일배를 이어갔다. 그리고 해가 지면서 한국투쟁단 친목의 밤 행사를 가졌다. 전여농 문예팀은 투쟁 일정 속에 쌓인 피로를 말끔히 가시게 해주었고, 횡성댁은 시위대의 중심에 섰다. 횡성댁이 준비한 오나라의 개사곡과 율동패 매력덩어리의 “10년이면 충분하다”, “짠짜라”, “아줌마”는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그리고 촛불의식 중 순천여농의 김재임 회장님의 잔잔한 이야기에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 “집을 떠나서는 하루 밤도 살기 힘든 여성농민들이 자식새끼 떼놓고, 나라도 버린 농민의 신세가 되어 이국 만리까지 이렇게 와서…” 이어지는 눈물 머금은 잔잔한 이야기는 피눈물 그 자체였다. 숙소로 이동하면서 컨벤션센터 인근 바다에 있는 보트피플을 볼 수 있었다. 부산 아펙 개최 전 노점상들을 폭력적으로 모조리 철거해 버린 우리나라와 비교가 되었다. 어느 여성농민이 물었다. “태풍이 오면 저 사람들은 어떡해?” 이내 누군가 답했다. “죽어야지.” 썰렁한 대답이었지만, 아무도 웃지 않았다. 몹시 좁은 골목사이를 대로처럼 질주하는 홍콩의 이층버스는 묘기를 보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홍콩은 모든 것이 엄청 빨랐다. 에스컬레이터도 정신없이 빨라 전철을 탈 때마다 우리는 초긴장을 해야 했고, 거리를 달리는 차들도 거의 경이로움을 갖게 했다. 그리고 하늘을 찌르는 빌딩숲. 그런 빠른 흐름 속에 홍콩시민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지 모두들 연민으로 바라봤다. 12월 16일 금요일 어제와 비슷한 메뉴로 아침 식사를 하고 9시에 숙소 강당에 모였다. 생기 넘치던 체력도 조금씩 바닥이 나는지 기운이 없었다. 교육시간을 가졌다. 이정옥 정치위원장의 짧은 교육에 이어 볼리바리안 혁명에 관한 비디오를 보았다. 남미 베네수엘라의 민중봉기와 이후 차베스대통령이 민중정권을 세워 민중을 위한 개혁을 해 가는 과정들이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많은 사람들이 부패한 보수정권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키지만 무고한 죽음만 당한 채, 민주정부를 수립하지 못했다. 군부 쿠데타를 일으킨 차베스대령이 지도자로 나서고 민중에 의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패 보수정권의 거짓 공작으로 차베스대통령이 섬으로 쫓겨나고 이후 다시 민중에 의해 대통령이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었다. 현재 베네수엘라는 고기의 씨마저 말려버리는 기업어농의 저인망어업을 금지하여 가난한 어민들이 다시 삶의 터전을 가꾸고 있다 한다. 농민을 위한 농업개혁도 진행 중인데, 자본의 투기처로 전락한 농지 중 농사를 짓지 않는 농지를 국가에서 모두 몰수해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농사를 짓게 해 준다고 한다. 척박한 삶으로 농민들이 떠나면서 버려지고 있는 농지가 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개발과 성장이라는 명목으로 갯벌을 매립하여 대규모 우량농지를 만들고 있는 상황과 비교해보면 한숨만 나온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환경을 파괴하고 농업을 파괴하여 삶의 터전을 망치고 그 대가로 결국 부자들의 주머니만 불리는 악랄한 미국의 농간에 불과하다. 비디오 교육 이후 오종렬 의장님의 강연이 있었다. 연로한 몸으로 홍콩까지 몸소 오셔서 우리 여성농민들을 향해 간절한 강의를 하셨다.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실천할 수 있는 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참 맞는 말이다. 아무리 WTO니 FTA니 해도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같은 대통령이 있다면 왜 이리 우리 농민들이 설움을 당하겠는가? 850만의 비정규직과 350만의 농민이 모이면 대통령도 뽑을 수 있는데, 왜 이리 한국경찰에 맞아 머리 터지고 죽음을 당해야하고, 먼 이국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국제적인 투쟁을 해야 하는지 답답하다. 한국이라는 한 나라에서 관료들과 농민들이 각기 다른 목적으로 날아와 관료들은 우리 농업 포기할 테니 협상하자 하고, 농민들은 목숨을 내걸고 반대를 하고 있으니. 홍콩시민들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홍콩에 왔는지에 관해 관심을 기울였고, 그것을 이해해주고 지지해 주었다. 보수언론에 귀 막고 판단력을 잃어버린 한국 사람들보다 더 고마웠다. 2시가 넘어 전 투쟁단이 둘로 나누어 미국영사관과 한국영사관으로 찾아갔다. 경찰의 인도에 따라 인도와 빌딩숲을 지나 풍물을 울리며 행진했다. 허용된 코스 외에는 경찰이 두세 명씩 막고 있었는데, 우리나라 같으면 새까만 경찰이 깔려 위협적인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이동하면서 머리가 부딪힐 것 같은 장애물이 있으면 홍콩경찰은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일러주고 그 장애물을 받치고 있기도 했다. 홍콩시민들에게 거만하고 위압적인 홍콩경찰이 우리에게는 감동을 줄만큼 친절했다. 우리가 홍콩경찰이 참 친절하다고 말하면 홍콩시민이나 기자들은 “kind, kind?”(뭐 친절하다고요?)를 연발하며 이상하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이 왜 그랬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한국영사관으로 간 투쟁단이 영사관의 박대에 분노해 점거농성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영사관으로 간 우리 전여농과 민주노총 등의 투쟁단은 영사관 입구에서 비웃음을 흘리며 우리를 보고 있는 빨간 점퍼의 사람 때문에 더욱 분노하였다. 민주노총과 몇 단체 투쟁단에서 나온 사람들이 항의 표시로 삭발을 하였다. 이 나라에서 시위라는 건 자기 몸을 학대하며 하는 시위밖에 가능한 게 없었다. 그리고는 빨간 스프레이로 “Down, Down WTO!”를 적고, 계란을 투척했다. 나눠주는 사람이 절대 던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먹지 않고, 세계의 강도 나라 간판에 던져 항의를 했다. 해가 지면서 11월 15일 농민대회에서 발생한 폭력진압장면 영상을 틀어놓고, 촛불집회에 들어갔다. 그 곳에서 역시 청보리사랑과 풍물패, 매력덩어리, 강원도 횡성댁의 문예공연은 투쟁단과 홍콩시민을 하나로 엮어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손에 촛불을 든 홍콩시민들은 늘어갔다. 홍콩시민들은 핸드폰 카메라로 우리를 찍었고, 구호도 함께 하고, 홍콩 시민의 통역(한 홍콩 시민이 통역을 자청해주었다)이 끝날 때 마다 홍콩시민들의 박수세례가 넘쳐났다. 고맙게도 그들은 우리가 홍콩에 온 목적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고 있었다. 9시가 넘어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전철을 타러갔다. 민주노총 및 다른 팀들도 같이 내려왔는데, 인원을 확인하는데 9명이 모자랐다. 난리가 났다. 그렇게 걱정했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다. 이정옥 위원장 왈 “이제 간이 배 밖에 나왔군.” 홍콩에서 길 잃어버리거나 납치될까봐 화장실을 갈 때도 둘 이상 짝지어 다니고 했는데, 9명이나 실종이 되었으니…. 여기저기서 어디서 마지막으로 봤는지 추적을 해 보니 이곳까지는 왔던 것 같고, 민주노총에 쓸려 전철을 타고 갔다는 추정이 우세했다. 전철직원과 홍콩경찰의 수고로 그들이 몇 정거장 앞에 내려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전철을 타고 그 곳으로 이동하니 미아들은 쏟아질 비판에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전철이나 버스에서 이동할 때마다 만나는 홍콩시민들은 우리들에게 함께 사진 찍을 것을 부탁하기도 하고, 짧은 영어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진주 공부방선생님이 홍콩학생으로부터 사진을 찍자는 부탁을 받고, 왜 찍으려 하느냐고 물으니 친구에게 보여 주려한다 답했고, 무슨 말을 하며 친구에게 보여 줄 거냐고 물으니 “자랑스럽지 않냐?”고 했다. 전철에서 내려 대중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가 묵고 있는 폭플람 캠프 주변은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달동네 정도 되는 듯 했다. 숙소에 다다르기 전 조그마한 과일가게가 있다. 그 가게를 많은 사람들이 이용했는데, 귤, 바나나, 망고, 사과, 감과 이름을 알 수없는 과일들을 아주 싼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가지고간 홍콩달러를 쓸 수 있는 유일한 가게였다. 그 가게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그 주인아줌마는 늘 잔돈이 없다했다. 잔돈이 없다며 한 주먹 더 얹어주고는 홍콩말로 뭐라 몇 마디만 하고 말아 모두들 그 수법에 당하고 말았다. 나중에는 알고도 당해 주었다. 11시에 숙소에 도착하니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두드린 풍물로 팔도 뭉치고 다리도 뭉쳤다. 18일이 폐막이니 내일 하루만 잘 지내면 각료회의가 무산인데, 그 남은 하루에 대해 모두들 마음을 졸였다. 미국이 유럽의 농업보조금을 지원해 주겠다며 유럽을 꼬드기고 있다는데…. 어떻든 전 세계에서 모인 투쟁단의 거센 투쟁이 협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하니 내일 하루 남은 투쟁의 방법과 수위가 집행부가 아닌 사람들로서도 고민거리였다. 다행히 각료회의가 성과 없이 폐막을 해 버리면, 우리의 투쟁이 그야말로 승리로 장식되지만, 만에 하나 협상에 이른다면 홍콩경찰의 순진한 양이 되어 지낸 홍콩에서의 투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들진대 집행부의 고민은 어떨까 싶었다. 12월 17일 토요일 날이 밝았다. 홍콩각료회의 폐막 하루 전이다. 오늘마저 각료회의 협상이 무산된다면 우린 홍콩까지 날아와 몸과 마음을 다한 투쟁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모두들 비장한 마음으로 바다에 뛰어들고 밤새워 투쟁을 할 준비를 하고 나섰다. 조별로 바다에 뛰어들 지원자를 받았는데, 경남은 생리하는 사람 빼고는 모두 뛰어들기로 마음을 모았다. 풍물을 든 사람들로 인해 남은 사람들은 짐꾼이 되어야 했다. 바다에 뛰어들고 난 뒤 입을 속옷과 겉옷 그리고 밤샘 노상투쟁을 위해 두터운 외투까지 챙기느라 커다란 여행용가방까지 등장했다. 9시에 숙소에서 출발 빅토리아공원에 도착했다. 반WTO 홍콩투쟁의 중심이었던 한국투쟁단 결의대회가 열렸다. 외국의 투쟁쟁단들도 함께 모였다. 1시 30분 대열을 정리하고, 거리로 나섰다. 홍콩민중투쟁단의 방송이 나오는 방송차가 맨 앞에 서고, 그 뒤를 전농의 상여와 여성농민 상복대열이 맨 앞에 섰다. 경찰의 저지선을 따라 가다가 홍콩 시내에서 컨벤션센터 인근에 마련된 집회장으로 향해 오른쪽으로 방송차가 돌고 난 뒤, 전농의 상여가 컨벤션센터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홍콩시내로 돌진했다. 뒤를 따르던 투쟁단은 일부만 상여 뒤를 따랐고, 경찰 저지선을 뚫기는 홍콩 도착 첫날을 빼고는 처음이었기에 우왕좌왕했고, 풍물팀은 열심히 따라가며 풍물을 쳤다. 다시 뚫은 도로에서 대열을 정비하고 전여농 상복팀이 다시 경찰의 저저대를 향해 나갔다. 상복을 입은 분들은 연세가 드신 여성농민들이었고, 돌아가신 분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나섰다. 어제까지 홍콩경찰의 신사적인 진압방법을 믿었다. 그러나 예상을 벗어난 상황이 벌어졌다. 홍콩경찰이 상복을 입고 영정을 든 연로한 여성농민들의 얼굴에 최루액을 떡이 되도록 사정없이 쏘아 부었고, 플라스틱 방패로 사정없이 밀어붙여 넘어지고 밟히는 일이 벌어졌다. 전농 투쟁단이 몸으로 막아섰다. 그리고 진로를 막은 두 대의 버스를 흔들어 댔다. 홍콩경찰은 맨손의 전농투쟁단을 향해 사정없이 가운데 쇠가 든 방망이를 내리쳐 많은 농민들이 피를 흘렸다. 한 기자가 넘어져 밟혀 내장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은 명백한 폭력진압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무장하지 않았다. 그 당시 사진을 보면 무장한 농민의 모습은 어느 신문에서도 볼 수 없다. 더 이상의 충돌을 피해 다른 도로를 통해 컨벤션센터를 향해 나아갔다. 얼마가지 않아 또 홍콩경찰과 대치했다. 불과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컨벤션센터가 있다고 했다. 우리 투쟁단과 비슷한 수의 홍콩시민들이 우리 주위에 있었고, 얼마인지는 몰라도 우리와 투쟁을 함께 하고자 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를 경찰이 에워쌌다. 컨벤션센터로 가고자 하는 투쟁단은 맨몸으로 경찰의 방패를 밀었다. 여지없이 최루액과 최루탄이 터지고 사람들은 고통에 시달렸다. 드디어 농민들의 손에는 가로수 지지대를 뽑은 각목이 들렸고, 퍼포먼스에 사용되었던 하나의 쇠사슬도 등장했다. 가로수 지지대는 사람 키만한 크기라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방패로 무장한 경찰에게 상해를 입힐 만큼 폭력적이고 위력적이지 못했다. 그 와중에서도 홍콩시민들은 난사된 최루액을 씻어내는 생수를 끝도 없이 공수했고, 물안경도 사서 지원해줬다. 물대포를 쏘아대자 홍콩시민들은 긴 팔 티를 사서 보내주었다. 또 홍콩경찰을 향해 항의를 하기도 했다. 농업인구가 천명도 안 되는 홍콩이란 나라의 시민들이 남의 나라 투쟁단에게 보내주는 지지는 그야말로 눈물겨웠다. 소위 지랄탄이 발사되면서 모두들 뒤로 퇴각했다. 숨구멍이 탁 막히면서 현기증이 돌고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중앙분리대가 있는 아주 넓은 도로로 밀려났다. 풍물을 든 여성농민들과 종일 무거운 짐을 들고 다녀야 했던 투쟁단은 피난민의 모습이었다. 하루 종일 장구나 북을 메거나 무거운 짐가방을 들거나 끌고 다니며 겨드랑이까지 오는 경계펜스를 넘고, 중앙분리대로 만들어 놓은 높은 화단을 주위의 도움을 받아 가며 넘었다. 해가 졌다. 우스개지만 이런 말이 있다. 한국농민은 해가 지면 가만 내버려둬도 자진해산하고 집으로 간다고. 오늘은 사정이 다르지만(숙소를 나올 때부터 각료들이 출근하는 도로를 밤새도록 막아서라도 각료회의를 저지하겠다고 결의하고 나온 터) 그래도 해가 지고 추워지니 그 온기 없이 썰렁한 숙소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화장실마저도 봉쇄되었다. 홍콩경찰과 마지막으로 대치하던 그 곳에서 경찰과 함께 같은 화장실을 쓰며 지나가는 인사를 나누기도 했는데, 그 화장실도 가지 못하게 막았다. 서투른 영어로 윗사람에게 전화해서 물어봐라, 화장실은 가게 해 줘야하지 않나 해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오후 2시경 경찰 방망이에 맞아 병원에 간 사람들을 구속해간 시점부터 연행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개별적으로 숙소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마저 돌아가지 못했다. 도로가에 있던 홍콩시민들도 여전히 돌아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들 중 누군가가 긴팔 옷을 사서 보내주었고, 빵과 음료수가 끊이지 않았다. 1,500명 가까운 투쟁단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빵을 홍콩시민들은 보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본적인 생리현상도 해결하지 못한 채 추위에 떨었다. 한 홍콩시민이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홍콩경찰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왜 이런 투쟁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물러나 줄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면 도로를 봉쇄하고 육교까지 밀려들었다. 홍콩시민들은 그런 경찰을 향해 야유를 보내고, 육교에 서 있던 홍콩시민 중 몇 사람이 육교로 밀려드는 경찰을 막아서 우리를 향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 우리 투쟁단은 그분들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도로가의 홍콩시민들도 큰 소리로 함께 하며 지지를 보내왔다. 그 자리에는 홍콩의 대학생 및 고등학생도 함께 했다. 반바지차림으로 대열에 함께 있었던 한 고등학생에게 우리는 옷을 벗어 입혔다. 엄격한 법으로 혹시 잡혀가면 어쩌나 두려움도 들기도 했는데, 홍덕표 어른의 사망소식이 들리면서 연행이 되더라도 담담해질 만큼 비장해졌다. 손발이 묶일 때까지 최선을 다해 투쟁을 하겠다는 결의가 생겼다. 12월 18일 월요일 이리저리 도로에 누워 몸을 잔뜩 웅크리고 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새벽 2시쯤 홍콩경찰이 전원연행방침이 방송으로 나왔다. 처음엔 한국말로, 그 다음은 영어로 마지막으로 홍콩말로 했다. 새벽 3시가 넘어 경찰 버스가 도착하고, 연행이 시작되었다. 맨 앞에 있던 전여농은 연행 이후 연락할 집행부의 비상연락처를 적은 후 서로 팔을 끼고 연행당할 준비를 했다. 연행이 될 때마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쏟아졌고, 여성농민들은 전율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렸다. 단지 5%의 부자들을 위한 잔치 WTO에 항거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하나뿐인 몸마저 포박당한 채 끌려가야하는 신세가 한탄스러웠고, 농민을 버린 한국이란 나라가 원망스러웠다. 경찰차 앞에서 몸수색을 당하고, 팔이 뒤로 꺾인 채 플라스틱 수갑을 차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피가 통하지 않았고, 뒤로 꺾인 어깨 죽지가 고통스러웠다. 심한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들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발악에 가까운 저항을 하면 그 수갑을 자르고 앞으로 채웠다. 수갑을 채우거나 조사하는 과정에서 지문날인을 거부해 폭행을 당한 사람들도 속출했다. 그리고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해도 그들은 “ Later(나중에)”나 “Wait(기다려)”만을 연발했다. 악을 쓰고 발악을 해야만 그들은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화장실도 함께 들어가야 했고, 어떤 경찰은 문을 열어 놓고 볼일을 볼 것을 강요했다. 충격으로 인해 걷지도 못할 만큼 아픈 사람이 있어도 그들은 모른 척했다. 우리가 연행되어간 경찰서 마당은 우시장 같았다. 스테인리스 펜스로 구역을 가르고, 의자나 바닥에 앉혀 조사를 했다. 번호가 적힌 종이를 들고 네 차례 사진 찍기를 강요당했고,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서류에 사인을 해야 했다. 그러나 투쟁단은 홍콩경찰서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했다. 그리고 다시 경찰버스를 타고 영화에서나 본 감옥으로 이동했다. 감옥 앞에는 연행에 항의하는 홍콩시민들이 있었고, 수많은 방송카메라가 있었다. 우리는 밖을 보며, 당당한 얼굴로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 안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감옥 장면 그대로였다. 많은 철창문이 있었고, 우리는 여러 철창문을 거쳐 좁은 방에 갇혔다. 서너 평이나 될까한 방에 20명이 넘는 사람이 갇혔다. 아픈 사람을 눕히고 나니 다리를 펴고 앉을 수도 없었다. 그 안에는 가리개도 없는 화장실이 같이 있었다. 참으로 황당했다. 변을 보고 싶어도 참았다. 참다 참다 할 수 없으면 분위기 봐서 눈치껏 볼 일을 봤다. 일단 아픈 사람을 위해 조처를 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집행부에서 보낸 변호사가 온 이후에야 그들은 환자들을 병원에 보내주었다. 그 변호사는 요구사항을 듣고, 밤 11시 30분 마카오행 배를 타고 예정된 2시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연락이 끊겼다. 대책도 없이 1,000명이 넘는 투쟁단을 호기롭게 연행한 홍콩경찰은 뒷수습을 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약속했던 권리들을 하나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했고 시간만 흘러 보냈다. 그들은 하나를 해결하는 데도 열 단계 이상의 결제를 걸쳐야 할 만큼 시간이 남아도는 나라였다. 그만큼 원칙에도 철저할 듯한데, 감당할 수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는 절절매고 있었다. 다리도 제대로 뻗지 못하는 좁은 감옥에서 오줌도 누고 똥도 누고 밥도 먹으며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단지 걱정하는 동지들에게 이 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가둬둘 수도 없을 것이고, 혐의도 없으니 오늘 내일 바로 풀려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말로 위로를 했다. 철장입구를 제외한 삼면이 햇볕 하나 들어오지 않는 시멘트벽이라 동틀 무렵 여기에 갇힌 이후 우리는 시간을 알 수 없었다. 어제 저녁부터 밥을 먹지 못한 터라 배도 고팠다. 점심시간이 다되어 도시락이 나왔다. 프랭크 소시지 2개와 얇게 썬 소시지와 삶은 야채가 나왔다. 화장실 문제로 밥을 먹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두 끼를 먹고 나니 저녁이 된 것 같은데, 제시간에 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영사관에서 나온 통역인을 통해 예정된 11시 30분 마카오행 배를 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난감했다. 농사이며, 어린 아이들과 가족들… 예정된 일정을 넘기며 이런 문제들을 감당하기에는 불안감이 컸다. 서로에게 용기를 줘가며, 여성농민가도 부르고 그동안의 평가시간도 갖고 쪼그려 앉자 잠을 청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경찰은 압수한 우리 짐을 이리로 옮겼다 저리로 옮겼다 하더니, 11시 쯤 석방이라는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경찰들끼리 나누고 있는 대화를 듣고 누군가가 석방소식을 알렸고, 갇혀있던 투쟁단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 나가기를 기다렸다. 12월 19일 화요일 가방을 돌려받고, 나가기 위해 지하로 내려갔다. 갑자기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민주노총의 한 여성노동자가 지문을 거부하다가 홍콩경찰에 뺨을 맞았다는 말을 하기 무섭게 경찰은 그 노동자를 데리고 올라가버렸다. 그리고는 잇달아 홍콩경찰의 폭력행위에 대한 성토들이 쏟아졌다. 이제 풀려났구나 싶었는데, 끌려올라간 동지를 두고 우리끼리 나올 수도 없었고, 홍콩경찰의 부당함에 대해 그냥 지나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홍콩경찰에 뺨을 맞은 그 여성노동자는 책임자 사과와 사인을 강요당한 개인 파일을 열람하게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일부는 그 담당 폭력경찰을 잡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누군가 그 경찰을 지목하자 경찰들은 그를 올려 보냈다. 심신이 지쳐있었고, 두려움의 연속이었던 내겐 정당하게 따져야 할 상황이었지만, 사과정도로 적당히 끝내고 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만 가득했다. 서양인으로 보이는 책임자라는 사람의 사과를 받고, 개인 파일을 복사해 받은 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조장들만 남고, 먼저 온 버스를 타고 앞에 석방된 사람들을 보냈다. 차가운 시멘트벽에 기대, 일렬로 붙어 앉아 남은 사람들을 기다렸다. 혹시 남은 사람이 없나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일부 투쟁단의 강경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홍콩경찰의 폭력행위에 대한 대응은 내일부터 조직적으로 하기로 미루고, 두 번째 버스를 타고 모두들 나왔다. 고맙게도 밖에서 소수지만 홍콩시민들과 외국인들이 밤샘 항의농성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숙소로 돌아왔다. 우리가 나올 즈음 감옥 창살을 붙들고, 자신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아봐 달라고 울며 말하던 외국의 여성들과 앞일을 예측하기 힘든 전농 투쟁단을 생각하니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가 나올 때 까지 끝까지 감옥에 남아 투쟁해야 했지만, 현실에선 그럴 수 없었던 나약함이 부끄럽기도 했다. 근 이틀간 양치는 물론 씻지 못한 엉망인 몸을 씻으려 하는데, 3시 50분까지 숙소 마당으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부족한 비행기삭 13만원(1인당)을 급히 모았다. 대부분이 한국에서 환전해간 돈 그대로 갖고 있던 터여서 모두들 별 어려움은 없었다. 4시 50분 배를 타야한다고 했다. 모두들 짐을 꾸려 마당으로 모이고 택시가 오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도망치듯 황급히 집을 꾸려 택시를 타고 선착장으로 갔지만 배는 이미 가고 없었다. 다음에 뜨는 6시 배를 타고 조금 늦게라도 비행기는 탈 수 있다고 해서 안심했다. 우리가 다 타면 출발할 비행기라 했다. 그리 심해 보이지 않는 파도이건만 배는 좌우로 뒤집어질 것처럼 울렁거렸다. 그럼에도 배멀미하는 사람 하나 없이 곤하게 잠을 잤다.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 짐을 부치고 난 뒤 잠시 틈이 생기니 망연자실한 기분이었다.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고 맨 먼저 맨몸으로 부딪혀 머리가 깨져 피 흘리던 전농 투쟁단의 모습과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누워 있을 모습을 상상하니 눈물이 났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각 지역에서 올라온 대절버스를 타고 광화문에 있는 열린공원으로 가서 간단한 보고대회를 갖고, 청와대 인근에 있는 중국대사관으로 향했다. 구속에 대한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끝나고 인근 한식당에 가서 저녁식사를 했다. 정말 게걸스럽게 밥을 먹어댔다. 배가 좀 부르고 나니, 정신이 돌아오는 듯 뜨거운 열정들이 다시 일었다. 웃음바다를 이루고 점점 헤어질 시간이 다가옴을 모두들 느껴갔다. 횡성댁이 “지금부터는 눈 마주치지 맙시다. 정 보고 싶으면 사팔눈을 뜨고 봅시다.” 라고 말했다. 그대로 아무 말 없이 헤어졌으면 아마 눈물바다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적당히 지나는 인사를 하고 애써 얼굴을 외면하며 식당을 빠져나와 각자의 대절 버스에 올랐다. 경남여농만 남은 버스 안. 빠지면 안 되는 순서, 평가시간. 우리는 그렇게 홍콩투쟁은 마무리 지었다. 내년 제네바 각료회의마저 박살낼 것을 기약하며. 반WTO 투쟁은 투기자본에 죽어가는 세계 가난한 사람들의 피맺힌 절규이고, 최소한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권리이다. 그 중심에 한국농민이 있었음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그리고 홍콩대학생들이 발표한 지지성명에서 한국투쟁단의 행위를 “시민불복종정신”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해 준 홍콩대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