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정상이 되어 버린 비상사태 클리시 수 부아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전역의 방리유로 번져 나간 소요 사태가 발생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지난 17일 프랑스 경찰은 소요 사태가 완전히 진정되었으며, 프랑스 전역이 정상적인 (치안) 상황을 회복했다고 발표했다. 지배자들은 이렇게 하나의 국면 혹은 시퀀스가 끝났다고 선언하려 애쓴다. 하지만 과연 무엇이 정상이란 말인가? 70% 이상의 국민이 비상사태의 선언 및 그것의 연장에 찬성하면서 '비상사태는 정상적인 것이야'라고 말하는 가운데, 정상적으로 된 것은 오히려 비상사태가 아니던가? 사고, 소요,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 시청자들의 '두려움 혹은 공포'라는 '정서의 모방', 비상사태 선언, 그것에 대한 인정. 이번 사건은 9.11 사태에서 우리가 경험한 '이미지화된 (공포) 정치' 메커니즘을 재확인하는 자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공포 정치 및 자발적 예속 혹은 복종 논리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가? 내무부 장관 사르코지의 '쓰레기' 운운하는 발언들 및 클리시 수 부아에서 검문을 피해 달아나던 두 소년의 죽음, 그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무성의한 대응은 방리유의 저조한 생활수준 및 대규모 청년 실업 문제에 휘발유를 끼얹은 것일 뿐, 이번 사건의 원인은 이미 수십 년 동안 누적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인 혹은 이민자들의 반란쯤으로 보이는 이 사건은 분명히 프랑스 국적을 가진 자들 - 우리는 아마도 그들을 반은 프랑스인(fran ais)이고 반은 외국인( trangers)인 fran trangers로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1) - 이 '무장경찰-국가'를 자처하는 프랑스 정부의 폭력, 백인 프랑스인들의 미묘한 인종차별 규정, 계속되는 사회 보장 예산 삭감 및 대규모 청년 실업이라는 장기적인 불안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비록 그네들이 어떠한 정치적인 모토도 내세우지 않고 제도화된 시위 문화를 보여주지 못한 듯이 보이더라도, 어떠한 주모자도 없이 순식간에 우발적으로 확산되는 폭력적 소요의 형태를 띠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기꺼이 봉기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는 이 짤막한 글에서 방리유 청소년들이 폭력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 까발리고 싶어했던 프랑스의 비가시적인 차별들의 원인을 보다 구조적인 차원에서 성찰하고자 한다. 특히 우리는 방리유 혹은 씨떼의 공간-정치적 작동 원리를 살펴보고, 그 경계에서 발명해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 '씨떼의 권리'의 가능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지금도 재판을 받고 있는 100명이 넘는 청소년들 그리고 강화된 불심검문 및 경찰(폭)력에 의해 긴장된 삶을 살고 있는 방리유 거주자들에게 이렇게 우리는 다시 한 번 빚을 지게 되었다. 방리유 그리고 씨떼: 포함적 배제의 논리 프랑스에서는 도시 외곽지역을 방리유라고 부른다. 그리고 특히 방리유에서도 대규모 HLM(서민임대주택) 단지들을 씨떼(cit )라고 부른다. 일단 이 단어들이 갖고 있는 정치철학적 함의를 살펴보는 것은 현 사건의 주체들이 형성되고 있는 '장소'에 대한 이해를 도울 것이다. 방리유(Banlieue)라는 단어는 ban과 lieue의 합성어이다. 옛 게르만어에서, ban이라는 단어는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을 의미하는 동시에, '주권자의 명령 및 휘장'을 뜻하는 단어였다. 옛 프랑스어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ban이란 proclamation, 즉 포고령인 동시에, 역사적으론 추방을 의미했다.2) 그리고 lieue란 거리의 단위로서, 4km에 해당한다. 따라서 방리유란 'ban의 법이 실행되는 도시 주변 4km 내의 공간'을 의미한다. 물론 오늘날 4km라는 규정은 더 확장되었으며, 법의 실행 역시 아감벤의 말을 빌자면 포함적 배제라는 복잡한 메커니즘을 따른다. 우리는 이 단어의 정의 자체 내에서 도시와 그 주변의 배치 문제, 그리고 그 공간을 구획·배치하는 원리로서의 법 혹은 포고령의 문제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여기에서는 주권이 실행되는 패러다임의 한 형태인 방리유의 면모를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방리유는 어떤 역할을 해 왔던 것인가? 그것은 도심지(중심으로서의 도시)의 외곽이자 하위도시 역할을 해 왔다. 방리유는 단순히 교외지가 아니라 '외곽'이었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즉, 그것은 도심지를 보호하는 성곽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죽음 앞에 선 인간』에서 필립 아리에스는 도시의 경계에는 공동묘지가 있었으며, 이것은 전시에 성벽 역할을 하기도 했음을 밝혔다.3) 바로 이런 지역에 거주하는 방리유 사람들은 평시나 전시에 도시를 방어하는 보호막 역할을 했으며, 역설적이게도 그네들은 유령(!)들과 함께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위'인가? 방리유 거주자들은 도시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토대이자 하부, 기층 노동자였다. 방리유라는 공간은 각종 공장과 작업장, 도살장, 벼룩시장들로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현재 프랑스 방리유의 근간을 이룬 19세기 말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이러한 미묘한 위상학으로부터 파생되는 병리학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발리바르가 스피노자로부터 대중들의/에 대한 공포를 말했듯이, 우리는 방리유 거주자들의/에 대한 공포를 말할 수 있다. 방리유 거주자들은 언제나 도심지로부터 파견된 경찰력에 의해 위협을 받는 반면, 도시민들에게 그들은 일종의 유령이었으며, 낮과 밤에 '출몰하는 자들'이었다. 낮에는 노동을 하러 출몰하고(그네들은 '죽은' 노동을 하기 때문에 유령이다), 밤에는 (실제의 여부를 떠나서) 잠재적으로나마, 일종의 도적으로서 출몰했던 것이다.4) 씨떼라는 단어 역시 다의적이다. 첫째,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polis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번역어이다. 그런데 폴리스는 좁은 의미의 '도시'를 지칭하는 동시에, 정치적인 의미에서 '도시-국가'를 지칭하기도 한다. 도시-국가(polis)는 원래 정치적, 종교적, 상징적 중심으로서의 도시(polis)와 생산 및 거주지로서의 대지(ch ra)를 포함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도시-국가와 도시가 모두 polis로 명명되는 가운데, 도시가 곧 도시-국가를 대표하는 논리가 발견된다. 둘째, 씨떼는 영어의 city와 마찬가지로 도시만을 의미한다. 이는 그리스적인 도시-국가 체계가 국가(Etat) 대 도시(ville)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뤄진 것이다. 셋째, 1848년부터 노동자 계급의 가족들을 위한 저렴한 주택 단지를 cit ouvri re라는 단어로 부르기 시작했고, 오늘날 방리유의 공영 주택 단지에 대해서도 프랑스에서는 씨떼라고 부른다. 씨떼라는 단어에 함축된 역사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씨떼의 전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 1) 도시-국가 = 도시 [사적인 영역(oikos)을 사회적으로 포함하나 정치적으로 배제하는 공공 영역(polis)], 2) 국가 對 도시 [공공 영역 대 사적 영역의 이분법적 구분], 3) 국가+도시 對 씨떼 [공공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불가능과 유기된 주변부]. 현재 진행되고 있는 프랑스 정부의 대응, 씨떼를 마치 국가 안의 (내부적 적으로서의) 국가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전쟁 및 비상사태를 선언하는 것 속에서 우리는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 단지(씨떼)가 도시-국가(씨떼)로 상승 혹은 중첩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재현 혹은 대표로부터는 배제되어 있지만, 국가, 정치, 법의 메커니즘으로부터는 늘 통제 가능한 거리 내에 위치하는 동시에 버려지는 곳으로서의 방리유 혹은 씨떼는 평상시에는 '무이거나 공백'이지만, 국가의 통제력이 위기에 처하게 되는 시기에는 '충만한 적'으로 둔갑하게 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역으로 반란과 봉기는 이러한 내부의 외부로부터 시작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인종주의? 이러한 공간 분할 및 (위로부터 규정된) 국가 안의 국가 구도는 철저히 프랑스인 대 외국인, 이민자, 무슬림의 대립 구도에 기초하고 있다. 무슬림 = 잠재적 테러라는 손쉬운 등식을 암묵적으로 전제한 채, 이미지를 통해서만 이번 사건을 경험하는 시청자들은 이 놀라운 사건 앞에서 그리 놀라지 않는다. "쟤들은 원래 저러니까"라는 낙인에 대한 재인(再認)만이 존재할 뿐. 그러나 이번 소요 사태의 주체는 서두에서도 지적했듯이 엄연히 프랑스 국적을 가진 혹은 가질 청소년들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간극이 존재한다. 비록 '법적인' 차원에서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적인 차원에서는 그네들의 시민'권'은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법의 힘'의 아포리아뿐 아니라 '권리의 힘'의 아포리아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이다. 법적인 차원에서의 권리는 어디까지나 명목적일 뿐,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권리는 그네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한에서 표현되는 것이다. 방리유의 '프랑스'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몫소리'를 요구하고 외친 것뿐이다. 그렇다면 방리유 청소년들 나아가 이주민들(특히 프랑스의 옛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출신들)의 시민권을 무력화시키는 요인은 무엇일까? 우리는 그에 대해 민족주의와 인종주의라고 답해야 한다.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의 경계들』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주장하는 주요 테제는 인종주의의 제도적 구조이다. 모든 인종주의가 공식화된 국가적 인종주의는 아니지만, 그것은 제도들의 구조에, 이 제도들과 개인 및 대중의 의식적, 무의식적 관계에 정박해 있다. 따라서 제도들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의 평등한 형태와 불평등한 메커니즘 사이의 모순, 시민(권)(citoyennet )과 주체화[복종](sujetion)의 모순이 결정적으로 된다."5) 덧붙여 그는 '민주주의'의 경계들에 대해 그곳은 민주주의가 정지하는 지점이자, 그 지점 너머에서는 민주주의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곳이라고 규정한 뒤, 바로 그 경계야말로 민주주의가 확장되는 곳이자 위험을 감수하는 가운데 새로운 공간이 발견되는 곳이자 정치가 발명되는 곳이라고 말한다. 방리유는 분명 발리바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경계라 불릴 만 하다. 우리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민주주의 뿐 아니라 '공화국'이라는 관념 자체를 의문에 부쳐야 한다. 발리바르와 오질비 등이 11월 16일자 『뤼마니떼』에 기고한 기사는 "공화국의 목을 쳐라!"라는 선언으로 끝을 맺고 있다.6) 왜 '공화국'이 문제인가? 오늘날 프랑스의 민족주의, 제도화된 인종주의가 바로 '공화국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슬람 여성들의 히잡(두건) 착용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문제제기였다. 이는 여성 차별 반대라는 페미니즘적 외양을 동원함으로써 이뤄졌을 뿐 아니라, 학교에서의 히잡 착용이 프랑스의 정교분리주의 교육 정신에 위배된다는 '공화국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Res publica, 공적인 일을 일컫기도 하는 이 공화국이라는 단어는 개인의 의지가 아닌 보편적인 이익과 의지에 입각한 통치 질서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보편이 도대체 무엇인가?7)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10조에 따르면, "누구도 그의 의견이 법률에 의하여 정해진 공공질서를 교란하지 않는 한 그의 의견이 비록 종교상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방해되어서는 안 된다." 스카프 착용이 그리도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것이었던가? 오히려 그 배후에는 '수용 가능하고, 동화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이 들어있지 않은가? 발리바르가 폭로하듯이 유럽의 백인 이민자들은 쉽게 동화되지만, 북아프리카의 흑인, 아랍 이민자들의 문화는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동화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오히려 후자가 전자와 달리 프랑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동등한 문화로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또 다른 예는 비상사태. 68혁명 시기에도 선언되지 않았던 '비상사태'가 아무렇지도 않게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것은 단순히 '비상사태'가 소위 포스트 911, 미국의 애국자법(Patriot Act) 이후 유행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한 행동에는 프랑스인들 내부의 분란과 프랑스인 대 외국인의 그것에 대한 엄격한 구분이 전제되는 것이며, '그들'이 우리 '공화국'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 함축되어 있다. 아감벤은 희생물이 될 수 없으나 죽여도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는 '호모 사케르'에 대해 말한 바 있으나,8) 이런 형상은 고대 그리스에도 이미 존재했다. 도시-국가에 반하는 죄를 지은 자에 대한 처벌을 atimia라고 했는데, 이런 죄인(atimos)은 법정, 재판, 의회에 참석할 권리는 물론 그곳에서 말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종교도 금지되며, 모든 시민권을 상실한다. 무엇보다 이들을 때려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씨떼의 신이나 법은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도시 내의 이방인'으로 전락하게 되는 바,9) 우리는 현재 씨떼 거주자들 속에서 이 형상을 재발견할 수 있다. 공화국은 더 이상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씨떼에 소속된다는 것, 즉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은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하나의 가정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동일화 과정을 수반한다. 오늘날 프랑스의 이주민 통합 정책의 실패를 비판하는 자들 중 일부는 프랑스가 사실상의 두 시민권을 인정한 것을 비판하며 더 강도 높은 공화국 이념에 입각한 교육을 강조한다. 그러나 공화국이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는 가장 많은 이질성을 인정하는 체제를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독특성을 거세하면서 동화되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고정된 문화적 동일성/정체성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새로이 구성되어 가는 이질성의 공존이 사유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변화 작금의 방리유 지역 청소년들의 대규모 실업 현상은 그곳의 열악한 교육 환경, 빈번한 유급 및 문맹, 대학 입시에서의 차별 - 프랑스의 그랑제꼴들에서 아랍 출신자나 방리유 출신자들을 찾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 취업시 서류 전형에서부터 배제되는 상황들에서 그 표면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여기에만 주목하는 현재 프랑스 내 좌우의 토론들은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고 있다. 예를 들어, 정부에서 내놓은 청소년 실업 대책은 이전 16세부터로 되어있던 직업 교육을 14세부터 가능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사회당의 일부 의원들이나 방리유의 교사들은 이 안을 방리유 뿐 아니라 전 학교로 확장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16세까지의 고등 의무 교육 기한을 14세까지 낮추는 것뿐 아니라, 제대로 판단을 하기도 이른 나이에 직업 전선에 뛰어들게 만드는 현대판 산업혁명 식 인력 동원을 통해 이 경제적 위기를 타개하겠다는 것인가? 일부 의원들은 서류전형 시 이름을 기입하지 않고 직원을 채용하도록 강제하자고 말한다. 이른바 익명 이력서. 그러나 어차피 면접 때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은밀한 차별이 이뤄지는 것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나마 자국 내에서의 인종차별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기피해온, 쿼터제를 아랍 출신자들에게도 적용하고, 교육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차별 정책(discrimination positive)을 써야 한다는 공동체주의적 대안들이 이제야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국 현재의 시장 경쟁 논리는 그대로 유지한 채 그나마 평등한 기회를 마련해보겠다는 궁여지책들에 그치기 쉽다. 왜냐하면 현재의 위기는 비단 프랑스만의 위기가 아니라 포스트-포드주의 하의 유연화된 고용 시장이 가져온 자본주의 전반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씨떼 청소년들이 인터뷰에서 요구한 바람은 한결 같았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다. 남들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얻고, 가족을 꾸리고 싶다." 이들이 그네들의 주거 공간인 씨떼 내에서 자기 파괴적인 봉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빼앗겨야 했던 장래에 대한 요구와 평범한 삶에 대한 요구 때문이다. 오늘날 평범한 것은 오히려 드물고 어렵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요구가 그네들만의 것일까?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강화되는 노동 강도 및 조기 퇴직을 비롯한 일자리의 위협은 모든 노동자가 직면한 현실이 아니던가?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이번 봉기에 대해 어떤 연대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프랑스의 노조는 그네들의 민족주의적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포드주의-복지국가 형태 내에서 제도화된 노동 운동은 '국익 우선'(pr f rence nationale) - 이는 동시에 국민 선호를 의미한다 - 을 얻어내는 대신 '시민권=국적'을 공고히 해 주었던 것이다. 도시와 방리유의 구분은 교환 가치와 사용 가치의 구분과 유비적이다. 기간의 노동 운동은 노동자들이 생산을 하는 한에서 공적인 일의 물적 토대 형성에 기여하며 그런 한에서 정치적인 몫소리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논리에 근거했다. 그러나 오늘날 방리유에 있던 공장들의 해외 이전 등으로 인해 사용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방리유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탈중심화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현재의 자본의 흐름은 오히려 대도시의 재현성을 높이는 다국적화로 진행되고 있다. 더불어 지식 기반 경제 혹은 비물질 노동의 경향적 우위는 도시의 교환 가치가 보다 생산적이라고 자처하는 상황을 만들었으며, 상대적으로 방리유는 그 몫소리를 더욱 상실하고 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갈수록 중심화되어가는 도시 중심의 발전 논리에 맞서 도시의 위상도를 줄이는 탈중심화 및 국지적인 망건설을 통해 독점적 교환 체계를 민주적으로 확장하는 것이자, 갈수록 감소되는 전통적인 일자리로부터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적 강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는 기존의 교환 가치냐 사용 가치 혹은 노동 가치냐의 대립에서 벗어나는 '존재 가치' - 기하학적 평등론에서 산술적 평등론으로, 훌륭함(aret )의 논리에서 평등(isonomia)의 논리로의 전화 - 에 대한 인정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것의 구체적인 표현 방식은 '사회 보장 임금'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야 한다. 나가며: 씨떼의 권리 사람들은 시민권(droit de cit )에 대해 말해왔다. 우리는 앞에서 cit 라는 개념의 이중성 및 그것의 재현 논리에 대해 살펴보았다. 적어도 그런 규정 하에서 보자면, 시민권이란 공적 공간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함축하며, 그것의 적용 방식은 도심지를 경계 쪽으로 좀 더 확장하는 것으로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씨떼의 권리(droit des cit s)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시민권이 갖는 재현 논리에 포섭되지 않으며, 씨떼들 사이의 이질적인 독특성을 간직한 채 공통된 것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불화의 힘을 간직한 민주주의든, 네그리의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역량이든, 발리바르가 말하는 '프랙탈'적인 구조를 갖는 비-전체적인 경계(fronti re non-enti re)든 그들은 공통되게 국가자본주의의 일괴암적 주권성을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이루는가이다. 물론 공리(公理)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이 땅에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자들'의 정치 참여에의 권리이자, 그들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생존의 권리를 의미한다. 이 모든 것들은 언제나 발명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 [각주] 1) 국민과 외국인의 중첩 혹은 구분 불가능은 이번 사태와 같이 위로부터 부과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국민적 동일성(정체성)을 비판하는 한 방법, 즉 불가능한 동일화 전략이 되기도 한다. 발리바르가 "알제리, 프랑스 : 하나 혹은 두 국민?"에서 말한 "무슬림적인 프랑스인(Fran ais musulman)", "프랑스적인 무슬림(musulman fran ais)", 랑시에르가 언급하는 1968년의 슬로건, "우리는 모두 독일인 유태인이다" 같은 것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Etienne Balibar, Droit de cit : Culture et politique en d mocratie, Paris, ditions de l'Aube, 1998, p. 81과 Jacques Ranci re, Aux bords du politique, Paris, La Fabrique, 1998 : Gallimard, 2004, p. 120 참조.본문으로 2) 죠르지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예외의 관계가 추방의 관계이며, 추방당했던 자는 단순히 법의 바깥에 놓이는 것(법과 무관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법에 의해 유기된 것이라고 말한다. Giorgio Agamben, Homo Sacer : le pouvoir souverain et la vie nue, Paris, Seuil, p. 36-37 참조.본문으로 3) 필립 아리에스 지음, 유선자 옮김,『죽음 앞에 선 인간』, 서울, 동문선, 1997.본문으로 4) 물론 프랑스에서 방리유는 이중적이다. 파리를 중심으로 서쪽과 남쪽의 방리유는 오히려 부자들이 도시로부터 거리를 취하면서 부촌을 형성하고 있고, 문제가 되고 있는 방리유는 대부분의 경우 동쪽과 북쪽의 방리유들이다. 따라서 방리유라는 단어를 일의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본문으로 5) Etienne Balibar, "avant-propos", Les fronti res de la d mocratie, Paris, La D couverte, 1992, p. 11.본문으로 6) Etienne Balibar et al., "Casse-cou la R publique!", L'Humanit , 16 novembre 2005. 본문으로 7) 프랑스 정부가 말하는 '보편'은 가톨릭 십자가 착용도 안 되니, 히잡도 안 된다(ni ... ni ...)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내용 없는 순수 형식으로서의 부정적 보편성이 아닌, 동시에 ... 이고 ... 이다를 요구해야 한다( la fois ...et ...). 물론 바디우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대립시키면서, 특수성을 부정하는 부정적 보편성을 독특성을 드러내는 계기로 사용하기도 한다. 부정적 보편성을 봉기적 보편성의 형식으로 사유하는 것은 부정적 변증법을 전유하는 한 전략이라고 생각된다. 부정적 보편성이냐 독특성들의 긍정적 연접(conjonction) 혹은 불가능한 동일화냐 라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판단은 잠시 미뤄두자.본문으로 8) Giorgio Agamben, 앞의 책, p. 81이하.본문으로 9) Fustel de Coulanges, La cit antique. tude sur le culte, le droit, les institutions de la Gr ce et de Rome, Paris, 1864 : Flammarion, 1984, p. 232. 영예를 박탈당한 자를 의미하는 atimos에는 여러 등급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공통된 것은 아테네에 계속 머무는 그들이 공적인 장소로부터 배제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Claude Moss , Politique et soci t en Gr ce ancienne : Le "mod le ath nien", Paris, Aubier : Champs-Flammarion, 1995, p. 23-24.본문으로
연일 신문 지상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화두는 바로 '양극화'다. 상위소득 10%의 평균소득이 하위소득 10%의 평균소득의 18배라는 충격적인 통계수치와 함께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이런 저런 해법들이 제시된다. 그런데 이러한 양극화는 대다수 인구의 빈곤화의 하나의 현상이다. 아래 표를 보자. 지난 97년 이후 작년까지 도시에 거주하는 근로자가구의 가계 흑자율1)은 IMF 직전보다 악화된 수준이며, 전체 근로자가구 20%가 먹고 살 소득도 벌지 못하는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1>이 도시의 근로자가구라는 비교적 사정이 나은 가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의 빈곤의 확산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다. {{자료 : 통계청, 도시가계조사(근로자가구) 각 연도 <그림 > 소득10분위별 가계 흑자율(단위 : %) }} 이렇듯 빈곤문제가 사회를 붕괴시킬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자, 정부는 <희망한국 21 - 함께 하는 복지> 대책을 내놓았다. 과연 <희망한국 21>은 빈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대책을 담고 있는가? 빈민층의 규모가 700만 명에 이르고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열심히 일을 해도 더 가난해지는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고 있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될 것인가? 빈약한 기본생활보장과 현실 빈곤의 무게 <희망한국 21>은 사회안전망 확충으로 국민기본생활보장과 사회통합 제고, 사후지원에서 탈빈곤과 빈곤예방으로 정책 패러다임 전환, 사회보장제도의 형평성 및 건강성 제고, 저출산·고령사회에 대비한 지속가능한 사회안전망 구축 등의 4가지 기본방향을 제시한다. <희망한국 -21>은 크게 나누어 ① 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개선과 차상위 계층에 대한 지원 확대, ② 빈곤층에 대한 빈곤예방, 탈빈곤을 위한 자활과 사회적 일자리의 강화라는 두 가지 방향에서 정책들이 제시되고 있다. 먼저 전자의 측면에서 구체적인 정책을 살펴보자. 〈희망한국 21〉은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내실화를 통해 최저생계비 이하 빈곤층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내실화는커녕 극히 일부분의 개선에 머무르고 있다. 정부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엄격한 수급조건으로 인하여 현재 수급자의 두 배가 넘는 372만 명이 기초생활보장에서 배제되어 있다. 특히 2촌까지의 혈족을 부양의무자로 간주하고 부양비를 과도하게 추정하여 비수급 빈곤층의 49%가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해 수급에서 탈락하고 있다. 따라서 그동안 빈민운동진영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혹은 개선, 최저생계비의 현실화를 주장하여 왔다. 그런데 이번 대책은 부양의무자의 범위는 그대로 둔 채 부양능력의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을 최저생계비 120%에서 130%로 고작 10% 완화하는 것에 그쳤다. 이로 인해 새로 수급자가 되는 규모는 약 11만 명으로 예상된다. 결국 372만 명의 비수급대상자 중 나머지 361만 명은 또다시 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 물론 2단계로 부양의무자 범위 및 판정기준을 추가 확대하겠다고 언급하고 있지만 지금의 추세를 볼 때 그리 커다란 개선은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더구나 비현실적인 최저생계비와 과도한 소득 추정으로 인하여 실제 급여액이 턱없이 낮은 경우가 대부분임에도 이에 대한 어떠한 개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으로 〈희망한국 21〉은 차상위계층에 대한 욕구특성별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한다. 기존 제도의 커다란 사각지대였던 차상위계층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하고 안정적인 노동시장으로의 진입을 지원하기 위해 의료, 주거, 보육, 교육, 자활, 고용을 지원하고, 노인, 장애인, 아동 등 다양한 수요와 인구특성별로 급여와 수당을 지원하는 정책들이 제시된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제도들을 부분적으로 개선·확대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기초법 수급 대상자 중증 장애인에게 제공되고 있는 장애수당을 6만원에서 7만원으로 인상하고, 차상위계층으로 확대한다는 식이다. 7만원이라는 금액은 중증 장애인이 차별적인 사회구조가 개인에게 전담시키는 비용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다. 물가인상률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인상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다. 통계청 조사만 보더라도 하위소득 10%의 월평균 소득은 46만원에 불과하여 매월 42만 원의 적자를 부채 등으로 충당하며 살고 있다. 500만 명이 부채의 악순환에 자신의 생존을 걸어야 하는 현실이다. 〈희망한국 21〉이 제시하고 있는 사회안전망은 너무 성기고 또 약해서 도저히 이런 현실의 무게를 담아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희망한국 21〉은 빈곤층의 자립과 안정적 일자리 창출에 도움이 될 것인가? 다음으로 빈곤예방과 탈빈곤이라는 정책방향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정책을 평가해보자. 〈희망한국 21〉은 산업과 노동시장에서의 양극화가 소득의 양극화를 낳고 있다며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내야함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일자리가 없는 근로능력자에 대해서는 자활사업과 사회적 일자리를 확대하여 일할 기회를 제공하고 취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겠으며 취업해 있지만 빈곤한 근로능력자에게는 직업훈련 등의 고용서비스를 강화하고 근로소득 보전체계(EITC)2) 도입을 추진하겠다는 대책을 제시한다. 현재 진행 중인 자활사업과 사회적 일자리 사업이 빈곤층의 노동할 수 있는 권리의 보장 혹은 안정적인 일자리 창출의 측면 모두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행 자활제도에 따르면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하 기초법)에 포함되어 있어 근로능력이 있다고 인정되는 수급자는 자활사업에 참여해야 수급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 정부는 이러한 자활제도가 빈곤층의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고 실질적인 자립을 지원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폭력적인 굴레로 다가오고 노동의 능력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미를 부여할 만한 일자리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자활 사업을 종료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설령 취업이 되더라도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채용되어 재직기간이 짧으며 여러 직장을 전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3) 자활사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일자리 창출과 사회서비스의 강화라는 목표 하에 추진되고 있는 사회적 일자리 는 1인당 월 58-68만원에 평균 9-10개월의 고용기간을 보장하는 수준의 불안정한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근로빈곤층'이 확산되는 것은 비정규직이 확대되고 노동조건이 악화되고 있는 현실, 이를 보장하고 확산하는 정부의 노동유연화 정책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원인을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자활이니 사회적 일자리니 하며 이러한 불안정한 일자리 속으로 빈곤층을 밀어 넣어 노동자들 사이의 '바닥을 향한 경쟁'을 강화하고 있다. 2조원으로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정부의 코미디 앞에서 보았듯이 <희망한국 21>은 "빈곤 걱정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포부와는 달리 부실하기 짝이 없는 사회안전망, '근로빈곤층'을 양산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오히려 강화하는 자활과 사회적 일자리 정책을 내놓고 있을 뿐이다. 이는 <희망한국 21>의 빈곤에 대한 원인 진단 및 해법이 오히려 빈곤을 양산하고 있는 구조적 메카니즘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한국 21〉은 "양극화가 이대로 진행되면 감당하기 어려운 갈증과 분열의 원인이 되고 지속적인 성장기반 마저 무너질 수도 있다"(2005년 노무현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진단에서 출발한다. 특히 분배중시 정책이 성장둔화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분배문제에 대한 경시가 성장둔화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며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사회복지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복지투자는 '성장잠재력 훼손'이라는 관념을 타파하고 사회안전망의 개혁과 근로연계복지 투자 확대를 통해 소비를 확대하고 사회적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서 '복지투자로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운운하지만 생산적 복지-참여복지로 이어지는 정책기조는 그대로 유지된다. 위에서 보았듯이 대책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따른 필연적인 사회위기를 관리하기 위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되, 근로연계복지(workfare)를 도입하여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고 노동의무를 부과한다는 생산적 복지-참여복지의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다만 복지의 직접적인 투자론이 제시되었다는 점을 새로운 측면으로 볼 수 있다. 〈희망한국 21〉은 현재와 같은 산업구조나 고령화를 수반하는 사회에서 '복지 분야에 대한 잠재수요'를 생각한다면 전통적인 공공투자보다 복지의 인프라 정비 등에 대한 투자가 경제파급효과나 상승효과가 크다며 케인즈적인 유효수요 자극책으로서의 복지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인즈적인 경기부양책에 대한 평가는 일단 제쳐두더라도, 전체 재정의 1%에 불과한 연당 2조원 규모의 투자로 유효수요를 자극하겠다는 주장은 누가 보더라도 앞뒤가 안 맞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이런 코미디를 연출하는 것인가? 케인즈적 경기부양정책은 금융의 특권을 제한하는 타협을 조건으로 한다. 미국이 1929년 대공황을 나름대로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대규모 투자를 통해 수요를 창출하고 이것이 다시 기업의 투자확대 및 일자리 공급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창출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금융자본에게 물가상승(인플레이션)과 노동자에 대한 실질적인 양보를 감내하도록 만들었던 타협을 조건으로 해서만 기능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이후 이러한 타협은 역전되어 금융세계화가 진전되고 국가의 경제정책 차원에서 이러한 금융세계화를 지지하기 위한 엄격한 물가안정 정책이 중시된다. 복지투자로 유효수요를 자극하겠다는 주장이 코미디로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외형적인 경기회복 추세에도 불구하고 소수 상층부를 제외한 다수 민중들의 소득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감소하는 것은 경제에서 생산된 이윤이 초민족적 금융자본과 몇몇 소수 부유층들로 집중되는 금융화의 필연적인 결과이다. 또한 개별 기업 차원에서는 이윤 창출의 극대화를 위해 생산과정의 하청화, 노동력의 비정규직화, 노동조건의 악화를 시도하며 대다수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고 국가는 이를 정책적으로 보장하고 노동자 민중의 불만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려 하고 있다. 〈희망한국 21〉의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이라는 비전에는 '안정적 고용 없는 금융적 성장'이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국민대통합 연석회의와 사회적 협약 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경제 사회적 의제를 다룰 사회적 협의의 틀로서, 경제계 노동계 시민단체 종교 농민 전문가와 정당 등이 참여하는 가칭 '국민대통합 연석회의'"를 제의하고 나섰다. 12월부터 민간이 주도하여 50여명 규모의 회의체를 구성하고 이곳에서 양극화 해소, 노사문제, 국민연금 등의 경제·사회적 의제들에 대한 사회협약을 체결하자는 주장이다. 물론 한나라당이 반대하고 있고, 민주노총이 강승규 부위원장 구속 사태 이후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면서 연석회의의 참여가 어려운 상황에서 연석회의의 출범이 난항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참여연대를 비롯한 거대 시민단체들이 연석회의의 출범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어 '사회양극화 국민연대' 등이 주축이 되어 연석회의가 구성될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홍영표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은 "'희망포럼'과 최근 결성된 '사회양극화해소 국민연대' 등은 우선적으로 참여 가능할 것으로 본다"며 12월에 출범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희망포럼은 참여연대, 여성재단, 환경재단, 경실련,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이 주축이 되어 양극화해소를 위한 사회협약 체결을 주장하며 활동하고 있는 조직인데 지난 10월 17일 이해찬 총리와 면담을 가지기도 했다. 연석회의의 구성 자체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러한 틀에서 어떠한 논의가 진행될지 예상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겠으나 정부 일각과 희망포럼 등에서 사회협약의 모델로 제시해 온 아일랜드의 사례를 검토해보면 대략의 방향성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사회협약은 1980년대 후반 극심한 경제위기의 진통 속에서 1987년 체결된 국가재건협약(Programme for National Recovery)을 근간으로 하는데, 이는 중앙집중화된 임금교섭을 통해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기업의 구조조정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이후 3년마다 새로운 협약이 계속 체결되었는데 임금인상율의 억제라는 큰 틀 속에서 사회적 양극화 방지와 빈곤층 보호의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합의는 정부, 경제단체, 노동조합, 정당, 농민단체 및 장애인, 실업자, 여성운동을 담당하는 각종 NGO가 참여하는 전국경제사회포럼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사회협약의 핵심은 무엇보다 물가상승을 억제하는데 있고 이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핵심 목표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금융자본의 입장에서는 물가의 인상은 화폐로 표시된 자산의 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물가가 안정되면 실업율을 상승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를 최소화하고 노동자들의 불만을 관리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임금억제를 통한 일자리나누기가 협약의 주요 내용이 되는 것이다. 사회협약의 구체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역사적 평가가 필요하겠지만 이렇듯 협약 자체의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그것이 어떠한 성격을 지니는지는 분명하다. 장기적 시야로 한 걸음씩 전진하자 우리는 소위 '양극화 문제'로 제기되는 빈곤의 심화와 불평등의 확산을 세계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이에 대한 지배체제의 반응으로서 금융세계화와 이에 조응하는 노동의 불안정화의 필연적인 효과로 인식하자고 주장해 왔다. 즉 빈곤의 문제는 현재의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장기적인 사회운동의 과정에서 해결 가능하다. 따라서 당장의 대중들의 불만이 집중되고 있는 사안에서 투쟁을 조직하되 투쟁의 과정에서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확산하고 대중들의 투쟁력과 의지, 이것의 결과물일 대중들의 개별 투쟁조직들을 강화해야 한다. 기본적인 생존과 생활에 대한 보장, 안정적인 일자리에 대한 요구를 쟁취하는 투쟁의 과정이 운동의 밑거름이 되고 다시 이것이 더 큰 투쟁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전진해나가야 한다. 올 하반기에도 몇 가지 사안에 대한 대중들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기초법의 전면 개정과 자활제도의 개선을 위한 투쟁, 노점상과 철거민에 대한 강제철거의 폭력적 측면을 제도화하고 최소한의 인권적 보호는 도외시하는 행정대집행법(行政代執行法)의 개악을 막기 위한 투쟁, 실질적인 권리구제 수단이 명시된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투쟁 등이 이미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투쟁의 힘을 모아내기 위한 공동행동이 계획되고 있다. 이러한 공동행동은 공동의 정치적 요구를 강화하고 조직간 연대의 경험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단순히 어떤 법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빈곤의 원인에 대한 서로의 분석을 심화하고 현재 빈곤을 양산하는 구조로서 금융세계화에 대한 인식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지역별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대중조직들 간의 공동의 투쟁 경험을 확장하기 위한 일상적 선전과 정치활동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 힘과 뜻을 모으자. 1) 가계흑자율은 가계의 가처분소득 중에서 생계비·교육비 등 소비성 지출을 하고 남은 부분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가처분소득은 총소득 중에서 세금과 연금 등 법정 분담금 지출을 뺀 금액이다. 가계 흑자율이 마이너스면 월 소득으로 생계비와 교육비도 못 낸다는 얘기다. 본문으로 2) EITC에 대한 비판은 권형은,「EITC는 노동시장 유연화의 제도적 보완 장치다」, 『사회운동』, 2005년 7-8월을 참고하시오. 본문으로 3) 강병구·이상훈, 「자활사업 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 한국노동연구원, 2002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