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핵무기 20세기 전쟁에서 대략 1억 5천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들 중 비전투원 비율이 전투원 비율보다 훨씬 높다.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모두 1억 명이 사망하였는데, 이 중 3/4이 비전투원이다. 갈수록 비전투원의 사망률은 높아져 2차 대전 이후에는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가운데 자그마치 4/5가 비전투원이며, 난민은 2천 4백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은 1천 8백만에 이른다. 근대의 전쟁은 과거와 달리 전쟁에 참여한 민족국가 구성원(민족) 전체의 문제다. 한 민족국가의 상비군은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핵심요체며, 그 상비군을 유지하는 사회통합의 힘 즉, 이데올로기(민족주의)는 민족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자원 즉, 상비군을 구성하는 국민뿐만 아니라, 산업기반, 과학기술, 국가행정기구 모두를 총동원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전쟁에서는 상비군(그들이 전쟁의 직접적인 행위 당사자라 할지라도)을 유지하는 사회통합의 힘과 그 물질적 근거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승리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현대전에서는 적의 군대뿐만 아니라 적의 전쟁 수행기구를 파괴하고, 적 인민의 전쟁의지를 상실하게 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관건이 된다. 식민지 점령전쟁에서 시도된 공중폭격이 2차 세계대전에서 본격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종종 교착상태에 빠질 수 있는) 길게 늘어선 전선을 돌파하여 후방(모든 전쟁 수행기구)을 교란하고 파괴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공중폭격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폭격에서 남는 문제는 좀 더 빠른 기동력과 광범위한 이동능력, 막대한 파괴력뿐이다. 미국과 영국은 바다 건너 독일(/일본)과의 전쟁에서 (대량)폭격의 효과를 확실히 깨달았고, 그리하여 대량파괴를 향해 자신의 모든 기술력과 정보력, 산업기반을 총동원한다. 이렇게 해서 핵무기가 탄생하였다. 전세(戰勢)가 이미 미국과 영국에 기울었음에도(독일은 다행히 항복 선언을 한 뒤였다), 미국은 두 차례에 걸쳐 핵무기를 사용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20만에 이르는 사람이 죽었고, 또 2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방사능 오염과 후유증으로 죽었다. 한편 세계대전의 막대한 민간인 피해를 보며 어느 정도 전쟁을 규제할 필요성을 느꼈던 외교수반들은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 의정서'(1949)를 채택하였는데, 이 의정서는 정작 가장 많은 민간인을 죽였던 폭격 행위는 문제삼지 않는다. (따라서 민간인 살상 목적이 분명한) 핵보유 및 핵무기 사용 역시 (통상적인 폭격행위이기 때문에) 불법화되지 않는다. 물론 이는 독일의 독가스 실험·사용, 일본의 생화학무기 실험·사용이 범죄행위라며 규탄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20만의 민간인을 단번에 학살한 미국의 핵무기 사용에는 관대했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핵과 공포의 균형, 그리고 냉전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할 때까지, 미국의 군사지도자들은 핵무기 효용성에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핵무기가 전쟁의 승패를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유럽과 아시아에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는 소련의 통상전력을 한정된 몇 개의 핵무기로 완전히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무기를 독점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은 적을 충분히 '위협'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소련이나 중국이 점령한 지역의 경계에서 우세한 세력권에 미국이 개입할 권한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에 근거해 독일과 일본을 포함하여 유럽 열강이 지배했던 그리스와 터키, 중동(특히 이란)에서 그리고 일본이 지배했던 동아시아(특히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미국은 그들의 영향력을 승계한다. 미국은 다자주의에 기반을 두어 단일한 자본주의 세계시장을 재건하고, 더불어 우호적인 세력균형을 만들고자 했다. (마샬플랜 기획 아래 독일마저 단일한 자본주의 세계시장으로 묶어두려는 시도였던) 서독의 통화개혁에 놀란 소련은 베를린으로 유입되는 재화를 봉쇄하고, 마샬플랜에 편입하려던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압하기 위해 쿠데타를 시도한다. 소련의 이런 움직임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1949)의 필요성을 자극했고, NATO 동맹은 다시금 바르샤바조약기구(1955)의 근거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이런 미국의 구상이 전지국적 규모로 실현되는 수단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일본을 정점으로 하는 동아시아를 자본주의 시장 통합의 기반을 마련했고, 한·미, 미·일 군사동맹에 기반을 둔 봉쇄정책의 근거를 제공했다.(물론, 미국의 봉쇄전략이 처음 구체화되었던 것은 애치슨 선언에서부터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전쟁은 다소간 모호했던 미국의 핵전략(과 냉전시대 군사전략)을 구체화하는 계기도 제공했다. 소련의 핵개발과 한국전쟁에서 북한과 중국의 재래식 공격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던데 충격을 받은 미국은 강력한 지상군을 억지하기 위한 대량보복전략을 수립한다. 이는 재래식공격에도 핵무기로 대응하겠다(비대칭대응)는 전면적인 핵전쟁론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서독을 재무장시키는 한편, 자신의 핵 보유량을 급격히 늘리고, 핵운반체의 3지주라 불리는 지상발사탄도미사일(ICBM), 해상발사탄도비사일(SLBM), 장거리폭격기(RLB) 개발을 본격화한다. 그리고 유럽 NATO와 동아시아(한반도 포함)에 소련, 중국 들을 겨냥하는 핵무기를 배치한다(1950년대 후반). 하지만 소련이 ICBM 개발에(1957) 성공하면서 미국 본토에 대한 핵위협이 현실화되자 미국은 핵전쟁을 가정한 전략개념을 조금 더 정교화 한다. 케네디 행정부는 (핵)전쟁이 발발하면 그 정도에 따라 선별적으로 보복하겠다는 유연대응전략을 표방했다(1962). 이는 제2공격력 강화를 필요로 하고, 그래서 손쉽게 노출될 수 있는 전략폭격기보다는 은폐가 용이한 ICBM, SLBM에 중점을 두는 한편, 핵공격에도 보복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정보통신지휘체계(C3I) 개발에 나서게 된다(이 때, 민방위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미니트맨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폴라리스 잠수함발사 유도탄 등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미국의 핵전력의 우위는 확고히 보장되었다. 이 전략은 제2공격력 확보가 목표인 만큼(반대로 적의 제2공격력 파괴가 목표인 만큼) 카운터밸류(도시와 인구를 목표로 하는 작전개념)보다는 카운터포스(군사목표물을 목표로 하는 작전개념)가 작전의 중심이 된다. 더불어 재래식 무기 성능개선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내전이나 소규모 분쟁에서는 핵무기의 효용가치가 낮았기 때문이다. 1962년 쿠바 사태에서 케네디 행정부는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위협으로 소련의 구상(대륙간탄도미사일배치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쿠바에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구상)을 좌절시킨 바 있는데, 이는 동시에 유연반응전략의 유용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지도부는 소련의 철수가 군사행동보다는 상호절멸이라는 핵전쟁 위협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2공격력에 기반을 둔 유연반응전략과 카운터포스 작전은 군비팽창을 야기한다. 1963년 소련이 수중발사가 가능한 SLBM을 개발하고, 1967년부터는 1000해리가 넘는 미사일을 탑재한 원자력잠수함을 배치하면서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제2공격력 격차는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소련이 탄도탄요격미사일(ABM)개발에 나서자 1967년 존슨 행정부는 제2공격력을 확보하면서 지속적인 핵경쟁을 강화하기보다는 상호확증파괴(MAD, Mutual Assured Destruction)전략으로 전환하게 된다. 상호확증파괴란 상호 절멸을 보증함으로서 핵전쟁을 도발할 수 없도록 핵억지력을 갖자는 것으로, 카운터벨류(도시 및 시민이 공격목표)에 기반을 두어 핵전력을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공포의 균형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자는 발상이었다. 이런 균형을 달성하려면 제2공격력을 제한하면서 핵전력에 있어서 상호간 양의 균형을 이루어야한다. '탄도미사일방어체제(ABM)제한협정'과 '공격형전략무기제한을위한잠정협정'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도 이 때문이다. 바로 미·소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Ⅰ1), Ⅱ)이다. 최초의 군축협상은 상호확증파괴능력(반대편에서는 '평화공존')을 보장에서 시작한다. 승리하는 핵전쟁을 향한 핵경쟁 1918~1920년 내전, 1920년대 서구사회주의혁명(특히, 독일혁명)의 실패 이후 사회주의 건설을 (독자적으로) 수행해야 했던 소련은 1928~1929년 대전환을 거치면서 전시공산주의 모델(생산단위의 중앙 집중화, 전면적인 집단화)을 일반화한다.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일국사회주의론)을 이론적 전거로 하는 '사회주의 조국건설'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에 따르면 계급모순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외부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강력한 국가기구(강력한 경찰기구인 소련내무인민위원회(NKVD), 상비군으로 전화된 붉은군대)와 생산력의 발전을 독려하는 계획아래 말이다. 또한, 다민족을 포괄하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대러시아 쇼비니즘이 조심스럽게 부활하고, 소련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외국과 맺은 각종 협약에서 소련은 대외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한다. 이런 경향은 소련과 나치 독일의 전쟁에 이르러서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한다. 막강한 히틀러의 군대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소련 공산당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러시아 인민의 '애국심'에 호소해야 했다. '혁명을 수호하자'는 구호는 당시 그 의미를 거의 상실했기 때문이다. 1921년 독일과 맺은 비밀협정 이후 소련과 독일의 군사협력은 상당히 강화되었고, 이때 독일의 최신 군사기술과 개념이 소련에 전파된다. 1930년대 군에 대한 대숙청이 있기는 했지만 히틀러와의 전쟁을 앞두고 군은 현대전 형태에 걸맞게 조금씩 적응되어가고 있었고, 소련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현대식 무기 개발에 모든 노력을 집중한다. 1941년 핵개발을 시도한지 8년 만에 소련은 핵실험에 성공한다(1949). 스탈린 사후 '제국주의와의 전쟁 불가피성'이라는 그의 교조적 명제가 부정된다. 핵시대에 국제정치(여기에 한정된다)는 '정치의 수단으로서 전쟁'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회피가능성은 소련의 방위력 증강을 전제하는 것(핵심적으로는 핵균형)이기 때문에, 이것이 또 핵무장을 전제한다. 이에 따라 고전전인 작전관(기습과 적군의 섬멸)의 연장에서 '핵기습' 계획이 수립된다. 핵전쟁초기 '핵기습' 이야말로 전쟁 승리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소련은 미국과 벌일 핵전쟁을 대비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핵운반체 개발에서 소련은 미국 본토에 핵무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탄도미사일(로켓)개발에 집중했다. 공군력에서 소련은 절대열세였다. 소련에게 미국의 방어망을 뚫고 장거리를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 개발이란 요원한 일이었고, 그래서 탄도미사일 개발에 집중한다. 1957년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에 성공하였고, 3개월 뒤에는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닉호를 발사한다.(탄도미사일과 인공위성 발사체는 동일한 원리다) 이는 소련이 핵운반체까지 보유한 핵보유국임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것이었고, 이렇게 해서 본격적인 핵경쟁의 시대가 열린다.2) 그래도 당시 소련의 핵전략은 여전히 열세였고, 제2공격력 면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소련의 전략폭격기는 대부분 프로펠러로 추진되어 항속거리가 짧았고, SLBM 역시 400마일의 사정거리를 넘지 못한 상태였으며, 그나마 해저발사 기술도 개발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의 핵공격력은 NATO를 향한 중거리 미사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미·소의 이런 간극을 뛰어넘기 위해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 배치를 시도하지만 미국의 전면적인 핵공격 위협 앞에 굴복하고 만다.3) 한편 상호확증파괴전략을 마련했다고 해서 미국이 제1공격 능력의 질적 전환, 제2공격 능력의 배가를 포기했던 것은 아니며,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개선시켜왔다. 다탄두체(MIRV) 개발4), ABM 체계5)와 이동식 미사일 개발6), 핵공격에도 잔존전력을 지휘할 수 있는 지휘통신체계(C3I) 등 핵무기(체계)의 질적 강화를 모색해온 것이다. 이때(1970년대) 상호확증파괴전략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다. 핵억지력에만 기반을 둔 태세는 핵전쟁능력 향상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설정(군사시설에 대한 정밀타격/핵공격)이 가능하고, 전략 핵무기의 파괴력이 압도적인 상황이 되면 제한적인 핵전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순항미사일을 위시한 각종 전술핵무기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전면적으로 배치한다(NATO의 윈텍스 훈련, 한국의 팀스피리트 훈련). 유연대응전략이 제한핵전쟁론 아래 본격화되고, 핵전역(核戰域)이 미·소 본토 밖 - 특히유럽과 동아시아(특히 한반도)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은 (한편으로는 핵억지력을 인정하여 SALT 협정에 참여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NATO의 유연대응전략에 자극받아 제한핵전쟁 개념을 받아들이고 전술핵무기를 강화하는 한편, 제2공격력을 강화한다. 소련 역시 미국 본토 공격을 상정한 전면적인 핵전쟁 가능성보다는 NATO 동맹국을 상대하는 다양한 작전을 수립하고 핵능력을 강화한 것이다. 소련 역시 유럽을 향하는 전술핵무기(특히 중거리핵미사일)를 근대화한다. 이렇게 미·소의 유연대응전략과 전술핵무기의 근대화 및 중거리 미사일 확대 배치는 양국 사이 핵경쟁을 더욱 가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핵전쟁의 위기조차 지역으로 확대시켰다. 핵전역을 확대시킨 것이다. 이는 한편에서 핵확산(지역국가들의 핵무장)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고, 또 다른 한편에서 광범위한 반핵운동의 출현을 예고한다.7) 소련의 몰락과 핵 일방주의 강화 1960년대 말 베트남 전쟁의 위기와 서독과 일본의 성장은 미국 헤게모니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직접적 위협을 받는 나라의 정부와 국민은 자기방어를 위한 군사력을 먼저 제공할 책임이 있다는'는 닉슨 독트린(1969)은 그동안 미국이 견지해왔던 전지구적 봉쇄 정책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다. 미국은 브라질, 남아프리카, 이스라엘, 이란(/이라크), 사우디, 남한 같은 반주변 국가들에게 지역의 하위제국 역할을 하도록 권고한다. 미국은 해외주둔 지상군 규모를 조금씩 축소하였고, 하위제국 국가의 군사력과 자신의 해·공군력 의존도를 높여나갔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반주변부 및 주변부 국가의 사회적 격변이 대규모로 일어나고,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미 대사관 점거, 이란혁명)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미국은 닉슨 독트린을 일부 수정한다. 소련과 직접 대결하면서 제3세계의 도전을 저지하려 하려 했던 것이다. 바로 신냉전이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은 (전술핵무기가 아니라) 재래식 무기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하였고, 최첨단 재래식 무기 개발에 엄청난 금액을 쏟아 붓는다. 군비경쟁을 가속한 것이다. 또한 군사기술의 최첨단 분야에서의 우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전략폭격기용 전술핵무기와 핵잠수함의 SLBM을 중점에 놓으면서, 미래 핵전력의 기술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우주의 군사화(각종 군사위성에 의한 핵무기 컨트롤의 우위확보)를 강화하고, 탄도미사일 요격시스템으로 미국 본토를 대규모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방어한다는 전략방위구상(SDI: 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추진한다.8) 냉전이 해체된 후 벌어진 1차 이라크 전쟁(1990)에서 최첨단 재래식 무기의 위력을 다시 확인하면서(당시 군사력 4위였던 이라크를 굴복시키고 미국의 승리를 보장했던 것은 핵이 아니라 최첨단 재래식 무기였다) 미국은 최첨단 재래식 무기 개발에 다시금 돈을 쏟아 부었고(러시아는 재정 여건상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반미성향이 강한 지역군사강국의 핵 보유시도에 대응하기 위해 핵독점을 향한 조치들을 취한다. 1991년 미국은 지상 및 해상의 전술핵무기를 전면 폐기할 것을 선언했는데9), 이것의 정치적 목적은 분명했다. 전술핵이 지역적 불안정(지역군사강국의 핵개발 자극)을 높일 수 있다는 인식 아래 스스로 먼저 철수하여 전술핵무기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며, 핵독점 아래 핵우산 정책을 펼치겠다는 발상이었다.(그렇기 때문에 공중폭격기용 전술핵무기는 제외되었다) 1994년 발표된 핵태세보고서(NPR)의 핵심은 미국의 핵전력을 현상유지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기존 핵 억지 전략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반미성향이 강한 지역군사강국(중국, 러시아, 이라크, 이란, 북한, 리비아, 시리아 등)에 대해서는 핵보유국 여부에 관계없이 핵선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계획을 수립했다(2001년 NPR). 그리고는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 조인을 거부한 채(1999), 사용가능한 전술핵(예컨대 '벙커 버스터'용 핵무기 들) 개발에 나섰다. 미국의 핵 일방주의가 절정에 이른 것이다. 한편 하위제국 국가의 무장을 돕는 조치들(무기판매)과 카터정부의 '인권'외교는 소련을 더욱 고립시켰고, 소련에게 '적으로부터의 포위'에 대한 공포를 다시금 상기시켰다. 이에 맞서 소련은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시도한다.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 역시 이의 일환이었으나 이는 미국이 겪은 베트남 재앙의 재판(再版)이 되고 만다. 1970년대 중반 소련은 자본생산성의 급격한 하락(이윤율 저하)을 겪게 되고, 1970년대 말에는 흉작까지 겹쳐 심각한 불황을 겪게 된다. 핵경쟁이 주도하는 군비경쟁은 소련으로 하여금 회생의 여지를 찾지 못하게 하였다. 소련 지도부는 군사력 경쟁에 대해 회의를 품고, 군비삭감 조치를 모색한다. 브레즈네프는 통치 말년에 '핵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발상은 위험스러운 광기'라며 군부 강경파를 견제했고,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핵선제공격 포기를 선언했다(1980). 체르넨코 역시 '핵전쟁이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며, 핵전쟁의 위협을 회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체제가 상이한 나라들과의 평화공존'을 선언한다. 이런 사정으로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소련의 군비 증액은 동결된다. 동유럽의 폭동과 주변의 종족 분규에 직면하여 소련은 경제적 쇠퇴를 막기 위해 본격적인 개혁·개방을 모색한다. 고르바초프는 이 모든 것을 달성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냉전을 종식시키는 조치를 취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1989), 동유럽의 전진배치군 역시 철수할 것(1988-1990)과 소련군 감축(1989)을 선언한다. 고르바초프는 긴장완화와 군비축소를 위한 방도로 과거 미국이 제시했던 '전략적 안정'10) 개념을 받아들여, '합리적 충분성 원칙'에 따라 핵보유량을 최소 수준으로 줄이고, '방어적 방위' 원칙에 따라 모든 선제공격 가능성을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 중거리핵미사일협정(INF)이 조인되어 유럽에 배치된 미(독일 포함 소 중거리 핵미사일이 모두 폐기된다(1987). 이런 흐름은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 Ⅰ, Ⅱ)으로까지 이어진다.11) 하지만 이런 조치가 위기에 빠진 소련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경제위기 속에서 소련의 헤게모니는 급속히 감소했고, 동유럽과 소련 인민들의 항의는 빗발쳤다.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유혈사태와 1991년 군부쿠데타의 실패 이후에는 연방내 공화국들의 분리 독립 요구가 더욱 거세졌다. 그해 12월 11개의 공화국이 서명했던 독립국가연합(CIS) 조약 의정서가 발효(1992)됨으로써 냉전의 한축을 이루던 소련은 해체된다. 러시아 공화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소련의 지위를 공식 승계할 것임을 UN에 통보한다(1991.12). 미국의 군사적 위협만 제어하면 생산력의 지속적인 발전 아래 공산주의적 전망을 닦을 수 있다는 소련의 기획은 이렇게 끝났다. 핵 일방주의와 핵확산 1969년 닉슨독트린 이후 하위제국과 제3세계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무장 지원(무기판매)이 반주변 국가들의 군사적 자급자족을 향한 열망과 섞이면서 지역 차원의 군사화가 급증한다. 냉전 아래 유지되던 미·소의 헤게모니에 균열이 생기자 (편입을 열망하든, 분리를 열망하든 관계없이) 안보위협을 느낀 지역 국가들이 차례로 무장을 시도한 것이다. 무장을 향한 노력들은 핵 보유 시도에서 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핵전력 강화, 인도의 핵실험(1974)과 파키스탄의 핵개발 시도(1972),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핵보유 의혹(1977 핵실험 장소 발견), 한국의 핵개발 시도(1973)와 북한의 핵개발 시도(1975),12)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핵개발경쟁(1970년대), 이라크 오시라크 핵시설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1981)과 같은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핵보유 시도가 지역 차원으로 확대된 것이다. 더구나 이란혁명과 (반)주변부 국가에서의 빈번한 미 대사관 점령은 미 헤게모니의 정치적 안정성을 극도로 흔들었고, 미국은 대응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핵비확산조약(NPT) 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미 헤게모니아래 남아있으려는 국가들에게는 핵우산으로 해당 국가의 안위를 보장하지만, 일탈하려는 국가에 대해서는 정치·군사적 제제를 가하는 정책을 시도한다. 1990년 1차 이라크 전쟁은 이러한 시도의 완성이자 지역군사강국에 대한 경고이면서, 미국의 앞으로 수행하게 될 미래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기도 하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이라크의 가동 중인 오시라크 원자력 발전소를 폭격했다. 핵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의 노력은 1945년 미국이 처음 핵을 보유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원자 에너지 법안-맥마흔 법안(1946년, 핵무기 관련 핵물질과 핵정보·핵기술의 타국 이전을 금지하는 법안)을 마련하는 한편, 핵개발 경쟁을 제어하려는 목적에서 바루치 계획(UN원자력 위원회가 핵을 관리하여 원자력에너지 사용을 보장하는 한편, 핵무기 개발은 제한하겠다는 계획)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계획은 즉각적인 핵무기 폐지 요구에 대한 미국의 거부, 엄격한 현장 감시에 대한 소련의 거부로 실패한다.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한 뒤, 1952년 영국도 핵실험에 성공하고, 같은 해 프랑스마저 원자력 에너지의 이용가능성 타진을 명분으로 핵개발에 돌입하였다. 미국은 핵독점이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였고, 핵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할 방안을 찾았다. 1953년 UN총회에서 아이젠하워는 '핵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을 선언하고 이를 구체화한다. 핵독점을 포기(?)하고, '핵의 평화적 이용'을 내세워 핵보유국의 비핵보유국에 대한 핵관련 기술을 이전하는 대신 공급국이 인수국의 핵관련 프로그램을 관찰 및 통제(안전조치)하겠다는 것이다. 핵 프로그램 통제의 권위를 위해 미국은 안전조치의 권한을 공급국에서 UN으로 이관한다. 이렇게 해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설립된다. 사실, '핵의 평화적 이용'은 비핵보유국의 핵무기 보유시도에 대한 제어 수단, 즉 IAEA(/핵공급국)가 비핵보유국을 일상적으로 감시하도록 하는데 제공할 명분에 불과하며, 동시에 핵보유국(특히 미국)의 핵독점과 핵무기의 엄청난 파괴력에서 비롯되는 대중의 공포를 무마하고, 핵무기 보유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얻으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천연우라늄원자력에너지에 대한 신화는 이때부터 형성된다.13)14) '핵의 평화적 이용'은 이런 '정치적 기획'아래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7년 IAEA가 출범했음에도 프랑스(1960년), 중국(1964년), 이스라엘(1966년)이 차례로 핵실험에 성공하자 IAEA의 정관만으로는 핵확산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핵보유국들은 더욱 '국제적이고',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 아래 '포괄적 안전조치'가 가능한 형태를 모색한다. 이를 위해 미국은 소련과 함께 NPT를 제안한다(1970). 이것이 법적 구속력을 띠기 위해서는 상호 구체적인 이행의무가 있어야 하는데, 비핵국가들이 NPT에 가입하는 대신 핵보유국가들은 핵감축과 핵의 평화적 사용권 보장, 그리고 소극적인 안전보장(비핵국가에 대해 선제 핵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선언)을 약속한다. 핵군축과 핵비확산 두 가지가 불평등조약임에도 NPT를 유지하는 힘이다. 이 와중에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인도가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온 플루토늄으로 '평화의 핵실험'을 성공한 것이다(1974).15) 미국 역시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플루토늄으로 네바다의 실험장에서 핵실험을 해보았고, 여지없이 성공했다(1977). 핵의 평화적 이용과 핵의 군사적 이용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16) 그리고 이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인도의 원폭 실험 이후 미국은 핵무기뿐만 아니라 핵물질 일반의 용도, 사용에 관한 수출통제장치를 구축한다. 쟁거위원회(1974년, 핵 물질 및 장비에 대한 국제 원자력수출 통제그룹), 원자력공급자그룹(1978년, 미국, 캐나다, 영국, 일본, 소련, 프랑스, 독일 등 7개국이 민감한 원자력 품목을 수출할 때 부과할 조건과 수출통제 대상품목에 합의), 미사일기술통제체제(1987, 대량살상무기를 운반할 수 있는 로켓 및 무인비행체 등의 미사일시스템 관련 부품·기술의 수출을 통제하는 체제)들이 그것이다. 확산예방정책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조지 HW. 부시의 국방장관 폴 월포비츠는 국방부의 임무와 기술 통제에서 대량살상무기시설 파괴에 이르기까지 (핵)확산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 대처하도록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1989), 이에 따라 클린턴의 국방장관 아스핀은 확산대응정책으로 전환한다. 예방정책에도 불구하고 확산이 진행될 경우, 상대방의 무기사용을 억제시키기 위해 군사적인 대응조치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1993). 이른바 '1차 북핵위기' 에 대한 클린턴 정부의 강경대응은 여기서 기인한다. 5년마다 열리는 NPT 평가회의는 '미·소의 불성실한 핵군축'과 '비핵국가에 대한 적극적 안전보장 거부'로 늘 논란이 되었다. 1975년 1회 평가회의에서 비동맹·중립국가 77개 그룹은 '우리는 NPT를 완전히 지켰으나 핵 강대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핵 군비경쟁을 중단하고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자는 NPT 규정을 핵 강대국 스스로 어겼다'며 강하게 성토했다. NPT 2차 평가회의(1980)에서 핵강대국들이 여전히 핵을 감축하지 않은 채(SALT Ⅱ의 난관), 핵확산을 빌미로 핵 공급 규제를 강화하려하자, 77개 그룹은 반발한다. 최종선언문이 채택되지 못한다. NPT 3차 평가회의(1985)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NPT의 일반원칙 정도를 선언문을 채택하는 것으로 끝난다. NPT 4차 회의(1990)에서 핵보유국들은 NPT를 무기한 연장하려 했다. 비핵보유국들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체결을 선언하고는 적극적 안전보장을 요구하며, 이를 NPT 무기한 연장과 연계하고자 했다. 결국 이견은 해소되지 않았고 최종선언문 채택에도 실패한다. 5차 회의(1995)에서는 핵보유국들의 일방적 핵감축 조치를 높이 평가하며 NPT 무기한 연기를 결정한다. 하지만 비핵보유국의 요구한 시한부 핵군축 일정 및 핵무기의 궁극적 완전 철폐, 소극적 안전보장 등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면서 최종선언문은 끝내 채택되지 못한다. 뉴욕에서 열린 2000년 NPT 6차 평가회의에서는 15년 만에 최종문서를 채택하는데, NPT 체제 유지 및 강화를 위한 노력을 재확인한다. 그것은 미봉책이었을 뿐이었다. 2005년 6차 평가회의에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은 핵개발을 시도하고 있는 북한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것을 제안하고, 이참에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든 국가의 농축 및 재처리를 아예 불허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NPT가 보장해 온 비핵국가의 평화적 이용권을 근본에서부터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비핵보유국이 보기에 이는 완전히 적반하장이었는데, 미국이야말로 핵군축 의지에 역행하는 정책으로 일관해왔기 때문이다.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을 거부해놓고는(1999) 소형핵무기의 연구개발을 금지해 온 '스프랫페이스' 조항마저 폐지하더니(2003), '강력한 지표 관통형 핵무기'의 연구비로 4백만 달러를 책정하는 예산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2005). 더구나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을 위해 ABM 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는(2002) 비핵보유국을 포함한 몇몇 나라들을 핵선제공격 대상으로 정했다(2001 NPR). 비핵보유국에 대한 소극적 안정보장조치마저 져버린 것이다. 비핵보유국들은 이를 강하게 비난했다. 2005년 NPT 평가회의는 결국 완전히 무산되고 만다. 핵 숭배 이데올로기 비판 1983년 미국의 가톨릭 사제단은「평화의 도전」에서 '억지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는 없지만, 점진적인 군축을 향한 한 계단으로서 균형에 기반을 둔 억지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있다'고 선언하며, 핵에 의한 억지를 용인했다. 동시에 그들은 대규모 핵감축, 포괄적인 핵실험 금지, 새로운 핵무기 체계의 실험 및 배치 금지, 재래식 군비경쟁 통제, 국제적 공동선의 필요에 적합한 지구적 권위체의 설립을 강조했다. 이는 방어적 핵억지론의 주요한 논거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제안은 핵에 의한 억지가 가능하다는 전제인데, 논리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핵에 의한 억지는 불가능하다. (상호확증파괴가 목적이긴 하지만) 핵에 의한 억지(군축)를 위해 출발한 SALT 핵감축 협상이 핵무기의 질적 도약을 자극했었던 역사와 그에 따라 '핵시대 균형은 핵경쟁을 자극한다'는 (핵무기 개발을 주도하는 자들의 논리인) '전략적 안정' 논리가 출현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더구나 핵위협은 국가간 균형적인 관계, 평화로운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불균형한 관계, 대립적인 관계에서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핵에 의한 억지는 핵을 감축하는 방향이 아니라 핵경쟁을 가속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핵은 분명히 절멸적인 것이고 두려운 것이며, 공포 그 자체다. 하지만 핵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이해하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절멸의 전쟁이 어떻게 해서 출현하게 되었으며, 해결방안은 무엇인가를 둘러싼 대중들의 과학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는 상황에서 핵이란 또 다른 폭력(핵)으로 대응해야 하는 대립물이거나 그저 없어져만 하는 존재로 남기 때문이다. 핵위기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핵이 공동의 정치적 토론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럴 때에만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핵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핵과 핵전쟁(핵위기)이 어떻게, 왜 출현하는지를 둘러싼 공동의 인식을 확보하면서 공동의 해결능력을 대중들이 갖춰나가야만 가능하다. 핵무기는 대량살상·대량파괴 무기이며, 이 무기의 목표는 엄밀한 의미의 군인/군사시설이 아니다. 광의의 의미에서 군인(민간인과 구별되지 않는)과 군사시설(민간시설과 구별되지 않는)이다. 핵전쟁은 대중들이 가꿔놓은 공동체와 사회관계를 (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전쟁이며, 정치를 향한 대중들의 모든 가능성을 뿌리부터 제거할 뿐이다. 게다가 적(/군)이 아니라 (국경선 밖의) 대중을 섬멸하는 것이 바로 핵전쟁의 목표다. 핵무기가 적의 완전한 섬멸을 목표로 했던 2차 세계대전에서, 그 전쟁이 동원한 국가주의적이며, 민족주의적인 (그리고 인종주의적인) 이데올로기아래 출현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전쟁에서 승자가 누구든, 누가 먼저 핵을 개발했든 간에 그 전쟁이 잉태한 핵이 바로 우리들 자신을 겨누고 있고, 왜 우리가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17) 핵이 어떻게 생존해왔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국가간 체계 속에서 상대의 절멸을 향한 전쟁이 핵을 낳았고, 이 전쟁은 국가간 체계들을 양극으로 재구성하여 냉전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냉전을 가능하게 했던 핵(/경쟁)은 한쪽 극(소련)의 체제 유지를 곤란하게 하였다. 또 다른 극(미국)의 국가가 세상을 일방적으로 이끄는 가운데, 국가들 사이 생존경쟁이 또다시 핵의 확산을 낳고 있다.18) 소련 인민들은 독일 나치의 공격에 주저앉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과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를 송두리째 파괴하려 했기 때문에 그들과 맞서 싸웠다. 독소전쟁에서 그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싸웠다. 그들은 승리해야만 했고, 그래서 이겼다. 독일 통상전력의 80%를 무찔렀던 것이다.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이후 새로 도래한 세상은 2차 세계대전이 남겨 놓은 핵무기와 그것으로 무장한 체제였다. 냉전체제, 그것은 자유로운 체제가 아니었다. 냉전체제는 모두를 군비경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끊임없는 군비경쟁 속에서 인민들에 대한 착취, 정치적 억압으로 인민들이 누려야 할 모든 권리를 박탈해왔다. '소련 인민들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그 승리를 통해 자유와 해방을 얻지는 못했다.' 지금 또 다시 이 비극의 새로운 순환이 열리려 하고 있다. 미국은 핵일방주의로 전 세계 인민들을 위협하고 있고, 이에 따른 전쟁 공포는 전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핵전쟁(핵위기)과 핵경쟁에 맞서 싸워야 한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갇히지 않는, 조금 더 확장되고, 조금 더 보편적이며, 조금 더 개방적인 경계 위에서 싸워야 한다. 그곳에서 핵전쟁의 위기를 야기하는 원인을 감축/제거하는, 전쟁을 통제할 수 있는 대중의 역량을 쌓아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유력한 경로는 핵전쟁의 위기를 고조시키는 지배세력들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강화하는 가운데, 대중들의 연대를 더욱 확장하고, 보편적인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는 운동을 벌여나가는 것이다(민주주의). 이는 반전(그리고 대안세계화)을 이념으로 하는 대중운동의 성숙에서만 비롯한다. 1) SALTⅠ의 협정대상은 폭탄이나 미사일이 아니라 운반체 즉, 탄도미사일격납고(SILO), 잠수함, 폭격기다. 폭탄이나 미사일의 생산기수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어도 SILO와 잠수함, 폭격기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핵폭탄이라 할지라도 운반체 없이는 무용지물이라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핵운반체(특히 3지주)는 그 자체로 핵무기와 동렬의 지위를 갖는다. 본문으로 2) '만약 서방측이 전쟁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소련도 이 같은 핵전쟁에 있어서 거대한 피해를 입겠지만 전쟁으로부터는 살아남을 것이다. … 현대의 국방능력은 병력수가 아닌 화력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소련은 핵병기를 보유하기 위해 병력을 감축할 것이다.' 1960년 1월 14일 소련 최고회의에서 발표된 후르시초프의 연설내용이다. 핵에 대한 소련지도부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본문으로 3) 소련의 군사전략에는 대도시 공격이라는 미국의 카운트밸류같은 작전이 명시된 적이 없다. 소련의 군사전략은 전통적으로 (기습에 의한) 적군의 궤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핵기습 전략은 미국의 상호확증파괴구상(공포의 균형)과는 달리 항상 승리를 목표로 한다. 본문으로 4) 이는 대륙간탄도미사일(SLBM)의 능력을 획기적으로 증진코자 하는 시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2개 이상의 탄두를 탑재하는 다탄두체(MRV)와 2개 이상 목표물을 독립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독립적 다탄두체(MIRVs) 개발, 그리고 교란장치(decoy 가짜탄두 탑재)의 개선이다. 탄두가 하나인 미사일전쟁에서는 1개의 핵미사일을 파괴하기 위해 2개의 핵미사일이 필요하다고 가정한다. 전략무기제한협상(SALTⅠ)은 이런 가정아래 하여 핵미사일을 제한한다. 만약 쌍방이 1,000개의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면, 상대의 전면적인 공격에 자신의 핵미사일은 500개가 파괴된다. 그럼에도 500개의 핵미사일이 있기 때문이 이것으로 적을 공격한다. 상호확증파괴 량은 바로 적의 제1공격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그리하여 적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는 핵무기의 양을 의미한다(이 경우는 500개). 그런데 다탄두체가 개발되어 파괴능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면(1개의 핵미사일로 적의 사일로 1개 이상을 파괴할 수 있다면) 상호확증파괴량이 보장이 안 된다.(이 경우에는 0이 되거나 오히려 적의 미사일이 남는다) 2개 이상 목표물을 독립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다탄두체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전략무기제한은 오히려 다탄두체같은 미사일의 개발을 종용한 셈이다. 본문으로 5) 1950년대 기술부족과 예산 부족으로 좌절된 나이키-제우스 탄도미사일방어계획(우주에서 비행 중인 미사일을 핵무기로 요격한다는 구상)을 나이키-X 계획으로 이어갔으며, 1976년에는 센티널계획(주요 도시에 국한하여 얇은 탄도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한다는 것), 닉슨정부 시절에는 세이프가드(대륙간탄도미사일 SILO와 전략공군사령부, 워싱턴의 비상지휘본부 등 주요 군사시설만을 방어하는 시스템 구축)로 발전한다. 본문으로 6) 미사일 발사체를 공격받기 어렵도록 이동체에 싣는 방식을 모색한다. 미국은 이를 MX미사일이라고 하는데, 결국 비용문제로 소형 대륙간탄도미사일(미니트맨)을 제외하고는 지하 SILO를 강화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이와 관련 기술은 오히려 소련이 우위인데, 중거리탄도미사일인 SS-20은 차량이동식이며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SS-X-25 역시 이동식이다. 본문으로 7) 미·소의 전술핵무기에 대한 강조는 유럽을 핵전역화하고 유럽의 핵밀도를 높였다. 소련은 중거리핵미사일을 현대화하여 유럽에 SS-20을 배치하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NATO에 퍼싱Ⅱ 미사일을 배치한다. 이를 기화로 핵전쟁 위협에 직면한 유럽의 반핵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선다. 본문으로 8) SDI 계획은 기술적 한계와 막대한 재정소요로 지지부진하다 결국 1993년 중단된다. 하지만 이는 전역미사일방어망(TMD)/미국본토미사일방어망(NMD)으로 승계되었고, 지금은 방어대상을 미국에 한정하지 않고 우방국까지 확대하는 미사일 방어망(MD)으로 이어진다. 본문으로 9) 전술핵무기폐기선언의 성격은 같은 해 노태우의 한반도 비핵화선언(1991.11)과 이어 남북 간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1992.1)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한반도 비핵화선언은 '남과 북은 핵무기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않는다', '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사용한다',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가 주요 골자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핵무기가 전면 철수되고, 이를 근거로 (남한은 물론) 북한의 핵개발을 제어한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남과 북의 핵이 금지된 것이지, 미국 핵무기의 영내 출입까지 금지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맹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핵잠수함의 영내 출입이 자유롭고,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전략폭격기의 핵공격 연습이 가능한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미국의 핵우산은 유지되는 가운데 한반도에 배치된 전술 핵무기 철수를 기화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는 근거가 된다. 본문으로 10) 상대의 핵전력을 선제공격으로 파괴할 수 있는 정확성과 파괴력을 갖춘 무기는 전략적 불안정요인이 되기 때문에 이를 제거해야 전략적 안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SALT에 이은 MIRV 개발사례에서 보이듯 전략적 '균형'은 핵무기의 질적 전환을 모색하게 하여 핵경쟁을 자극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략적 안정이란 반대로 상대의 선제공격에 취약한 것 역시 전략적 불안정 요인이기도 해서 제2공격력을 강화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예컨대 MD 개발). 본문으로 11) 전략적 안정에 따른 핵감축은 오히려 미국의 핵 독점을 보장했을 뿐이다. 미국은 1970년대 해군을 중심으로 하는 해양전력을 더욱 강화시켜왔었다. '전략적 안정' 원칙에 따라 미국의 SLBM은 (전략적 안정을 꾀할 수 있는 무기여서) 언급되지 않거나 충분히 보유할 만큼 상한선이 그어졌지만, 러시아가 우위였던 ICBM은 (전략적 불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 무기여서) 종류에 따라 완전히 폐기되거나 충분히 감축할 만큼 상한선이 명시된다. 본문으로 12) 1970년대 남한과 북한의 핵개발 시도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한의 경우, 1971년 원자력발전소 착공(이중 월성 1호기는 캐나다의 캔두형 중수로 발전소), 1973년 3월 장거리지대지 미사일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플루토늄을 얻기 위해 프랑스 SGN사의 재처리 시설, 캐나다의 NRX형 연구용 원자로 등을 도입하기로 함. 1974년 인도 핵폭발 실험 이후 핵확산을 철저히 경계하던 미국정부의 압력으로 중단. 1975년 핵확산방지조약 체결. 하지만 1976년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프로젝트를 '국산 핵연료 개발계획'으로 위장한 뒤 추진. 1979년 박정희의 죽음과 전두환의 군사쿠데타 이후 구체적인 핵보유 시도는 중단된 것으로 알려짐(2004년 IAEA는 한국이 1982년 4~5월 TRIGA Mark Ⅲ 연구용 원자로에서 태우고 나온 열화우라늄(2.5kg)으로부터 플루토늄·우라늄 혼합물을 추출한 의혹을 제기. 플루토늄 보유는 아니더라도 관련 기술을 축적하려 했던 시도로 평가됨). 한편 북한은 1973년 실험용 원자로 IRT-200을 4Me급으로 개조, 1975년 미사일 개발 시작, 1975년 플루토늄 생산 실험에 성공. 1979년 5Me급 흑연감속 원자로 공사 시작(1986년 완성). 본문으로 13) 원자력에너지에 관한 신화는 거의 대부분 허구다. 원자력은 무한한 에너지원도 아니며(현재 추세로는 40~50여년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우라늄을 보유하고 있다) 값이 싼 에너지도 아니며(초기 건설비용이 매우 많이 들어가고, 더구나 핵폐기물 보관· 폐기비용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효율이 좋은 에너지도 아니며(원자력 발전소의 에너지 전환 효율이 30~34%정도인데 이는 화력발전소의 효율보다도 훨씬 못한 수치다) 안전하지도 않으며(원자력 발전소의 사고가능성은 원자폭탄이 떨어질 가능성과 동일하다 - 원자력 관련 사고는 인류에게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든다) 방사능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그래서 발전소용과 해상용이 아닌 원자력을 직접 동력으로 하는 기관은 개발이 불가능하다 - 방사능 때문이다 - 방사능은 가장 치명적인 위험이다) 제거 불가능한 핵폐기물 나온다(이를 저장 보관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며 심지어 사고위험조차 있다). 본문으로 14) 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살펴보면 원자력에너지의 전용이 어떻게 시도되었는지를 바로 알 수 있다. 사실, 미국의 대다수 전력 회사는 원자력 발전소 사업에 뛰어들기를 꺼렸다. 당시만 해도 석유와 석탄의 값이 싼데다 개발비용이 막대했다. 제너럴일렉트릭과 웨스팅하우스 정도만이 미국 국가기구인 원자에너지위원회(AEC)의 전적인 재정적 지원 아래 뛰어든다. 최초의 민간용 원자로라는 영국의 콜더홀형 원자로(1956)는 원자폭탄용 플루토늄 생산과 발전(發電)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한꺼번에 달성하려는 원자로였다. 미국의 첫 원자력 발전소는 (세계 최초인)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호의 원자로(1954)를 떼어서 만든 필라델피아의 쉬핑포트 발전소다(1958). 원자력잠수함의 추진기관이 가압경수로의 시조인 셈이다. 본문으로 15) 인도가 핵개발을 시도한 것은 중국 위협(중국의 핵개발)에 맞서고 대국으로서, 남아시아의 지역 맹주로서 인도의 존위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이유때문이었다. 인도의 핵개발은 인도에서 분리 독립한 파키스탄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고, 결국 파키스탄 역시 핵개발에 나선다. 1998년 인도가 핵실험을 하자 같은 해 파키스탄 역시 핵실험으로 대응한다. 미국의 핵이 중국의 핵으로, 중국의 핵이 인도의 핵으로, 인도의 핵이 파키스탄의 핵으로 … 인도의 핵개발은 지역의 핵위기를 어떻게 증폭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본문으로 16) 원자로의 세 가지 기본요소는 '핵연료/감속재/냉각제'다. 세 요소에 따라 원자로를 분류해보면 경수로는 '저농축우라늄/경수/경수'고, 중수로는 '천연우라늄/중수/중수'고, 흑연감속로는 '천연우라늄/흑연/경수'다. 고속증식로는 '농축플루토늄/사용안함/나트륨'이다. 앞서 3개의 원자로에서 경수로 원자로는 1~3년 사이 폐연료봉을 교체하지만, 중수로와 흑연감속로는 연속적인 핵연료 교체가 가능하다. 따라서 중수로나 흑연감속로는 경수로에 비해 순도가 높은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 인도의 핵실험과 미국의 핵실험에서 확인되었듯 이 플루토늄으로도 핵폭발이 가능하다. 따라서 재처리기술은 사실상 플루토늄 확보와 동의어다. 또 다른 핵무기 재료인 농축우라늄은 천연우라늄에서 별도의 농축기술로 추출한다. 경수로에 쓰이는 저농축 기술과 핵폭탄 원재료에 사용되는 고농축 기술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농축기술 역시 고농축우라늄 확보와 동의어인 셈이다. 1970년대 남한이 핵개발을 시도할 때 월성에 중수로 발전소를 건설한 것이나 북한이 흑연감속로 발전소를 영변에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같은 맥락(플루토늄 확보)이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전력 부족이 염려되어 원자력 발전소를 지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해 두자. 1986년 원자력 발전이 크게 확대되어 전력예비율이 과잉이 된다(1976년 3.9%에서 1986년 61.2%). 그 결과 후속 원자로 건설은 5,6년 연기된다. 정부는 전력소비를 늘리기 위해 전기료를 인하한다. 전기소비는 대폭 늘었고 다시 1990년대는 다시금 전력예비율이 줄어든다(1990년 8.3%). 이후 핵발전소 건설은 원자로에 대한 독립적인 기술을 얻기 위해서다. 바로 '한국형 경수로'다. 본문으로 17) 핵무기는 전쟁의 종식과 함께 출현했다(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 구름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의 상징이다). '핵이 평화를 가져왔다', '핵이 우리 민족을 해방시켰다'는 관념이 대중들 사이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다 준 해방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물어야 한다. 이것인 소련의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에게도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한국의 대중들 이 같은 관념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8) 이는 (또 다른) 국가주의/민족주의적 기획 아래에서 혹은 그 영향 아래에서는 핵에 맞서는 평화, 대중들의 평화를 쟁취하기는 상당히 곤란함을 시사한다. 북의 선군정치(핵에 의한 핵의 억지)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와 국가 간 핵무기 감축(한반도 비핵화 선언/비핵지대화)에 기대를 거는 것이 한계적이라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 제네바 협정, 6자 회담 이후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었는지, 군비경쟁이 감소되고 있는지를 되돌아 볼 일이다. 사실 이것은 애당초 곤란한 기획인 것이다. 국가 간 핵감축은 (한반도 비핵화에서도, 제네바 협정에서도, 6자회담에서도) 자신의 핵(군사력) 우위를 보장하면서 서로의 핵(군사력)을 감축하겠다는 시도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전쟁과 핵무기 20세기 전쟁에서 대략 1억 5천만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들 중 비전투원 비율이 전투원 비율보다 훨씬 높다.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모두 1억 명이 사망하였는데, 이 중 3/4이 비전투원이다. 갈수록 비전투원의 사망률은 높아져 2차 대전 이후에는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가운데 자그마치 4/5가 비전투원이며, 난민은 2천 4백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은 1천 8백만에 이른다. 근대의 전쟁은 과거와 달리 전쟁에 참여한 민족국가 구성원(민족) 전체의 문제다. 한 민족국가의 상비군은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핵심요체며, 그 상비군을 유지하는 사회통합의 힘 즉, 이데올로기(민족주의)는 민족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자원 즉, 상비군을 구성하는 국민뿐만 아니라, 산업기반, 과학기술, 국가행정기구 모두를 총동원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전쟁에서는 상비군(그들이 전쟁의 직접적인 행위 당사자라 할지라도)을 유지하는 사회통합의 힘과 그 물질적 근거들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승리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현대전에서는 적의 군대뿐만 아니라 적의 전쟁 수행기구를 파괴하고, 적 인민의 전쟁의지를 상실하게 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도 관건이 된다. 식민지 점령전쟁에서 시도된 공중폭격이 2차 세계대전에서 본격화된 것도 이 때문이다. (종종 교착상태에 빠질 수 있는) 길게 늘어선 전선을 돌파하여 후방(모든 전쟁 수행기구)을 교란하고 파괴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공중폭격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폭격에서 남는 문제는 좀 더 빠른 기동력과 광범위한 이동능력, 막대한 파괴력뿐이다. 미국과 영국은 바다 건너 독일(/일본)과의 전쟁에서 (대량)폭격의 효과를 확실히 깨달았고, 그리하여 대량파괴를 향해 자신의 모든 기술력과 정보력, 산업기반을 총동원한다. 이렇게 해서 핵무기가 탄생하였다. 전세(戰勢)가 이미 미국과 영국에 기울었음에도(독일은 다행히 항복 선언을 한 뒤였다), 미국은 두 차례에 걸쳐 핵무기를 사용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20만에 이르는 사람이 죽었고, 또 2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방사능 오염과 후유증으로 죽었다. 한편 세계대전의 막대한 민간인 피해를 보며 어느 정도 전쟁을 규제할 필요성을 느꼈던 외교수반들은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 의정서'(1949)를 채택하였는데, 이 의정서는 정작 가장 많은 민간인을 죽였던 폭격 행위는 문제삼지 않는다. (따라서 민간인 살상 목적이 분명한) 핵보유 및 핵무기 사용 역시 (통상적인 폭격행위이기 때문에) 불법화되지 않는다. 물론 이는 독일의 독가스 실험·사용, 일본의 생화학무기 실험·사용이 범죄행위라며 규탄의 목소리를 내면서도 20만의 민간인을 단번에 학살한 미국의 핵무기 사용에는 관대했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핵과 공포의 균형, 그리고 냉전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할 때까지, 미국의 군사지도자들은 핵무기 효용성에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핵무기가 전쟁의 승패를 가늠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유럽과 아시아에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는 소련의 통상전력을 한정된 몇 개의 핵무기로 완전히 '제압'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핵무기를 독점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은 적을 충분히 '위협'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소련이나 중국이 점령한 지역의 경계에서 우세한 세력권에 미국이 개입할 권한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이에 근거해 독일과 일본을 포함하여 유럽 열강이 지배했던 그리스와 터키, 중동(특히 이란)에서 그리고 일본이 지배했던 동아시아(특히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미국은 그들의 영향력을 승계한다. 미국은 다자주의에 기반을 두어 단일한 자본주의 세계시장을 재건하고, 더불어 우호적인 세력균형을 만들고자 했다. (마샬플랜 기획 아래 독일마저 단일한 자본주의 세계시장으로 묶어두려는 시도였던) 서독의 통화개혁에 놀란 소련은 베를린으로 유입되는 재화를 봉쇄하고, 마샬플랜에 편입하려던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압하기 위해 쿠데타를 시도한다. 소련의 이런 움직임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1949)의 필요성을 자극했고, NATO 동맹은 다시금 바르샤바조약기구(1955)의 근거가 되었다. 한국전쟁은 이런 미국의 구상이 전지국적 규모로 실현되는 수단이 되었다. 한국전쟁은 일본을 정점으로 하는 동아시아를 자본주의 시장 통합의 기반을 마련했고, 한·미, 미·일 군사동맹에 기반을 둔 봉쇄정책의 근거를 제공했다.(물론, 미국의 봉쇄전략이 처음 구체화되었던 것은 애치슨 선언에서부터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전쟁은 다소간 모호했던 미국의 핵전략(과 냉전시대 군사전략)을 구체화하는 계기도 제공했다. 소련의 핵개발과 한국전쟁에서 북한과 중국의 재래식 공격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었던데 충격을 받은 미국은 강력한 지상군을 억지하기 위한 대량보복전략을 수립한다. 이는 재래식공격에도 핵무기로 대응하겠다(비대칭대응)는 전면적인 핵전쟁론이다. 이에 따라 미국은 서독을 재무장시키는 한편, 자신의 핵 보유량을 급격히 늘리고, 핵운반체의 3지주라 불리는 지상발사탄도미사일(ICBM), 해상발사탄도비사일(SLBM), 장거리폭격기(RLB) 개발을 본격화한다. 그리고 유럽 NATO와 동아시아(한반도 포함)에 소련, 중국 들을 겨냥하는 핵무기를 배치한다(1950년대 후반). 하지만 소련이 ICBM 개발에(1957) 성공하면서 미국 본토에 대한 핵위협이 현실화되자 미국은 핵전쟁을 가정한 전략개념을 조금 더 정교화 한다. 케네디 행정부는 (핵)전쟁이 발발하면 그 정도에 따라 선별적으로 보복하겠다는 유연대응전략을 표방했다(1962). 이는 제2공격력 강화를 필요로 하고, 그래서 손쉽게 노출될 수 있는 전략폭격기보다는 은폐가 용이한 ICBM, SLBM에 중점을 두는 한편, 핵공격에도 보복공격을 수행할 수 있는 정보통신지휘체계(C3I) 개발에 나서게 된다(이 때, 민방위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미니트맨 대륙간 탄도미사일과 폴라리스 잠수함발사 유도탄 등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가운데 미국의 핵전력의 우위는 확고히 보장되었다. 이 전략은 제2공격력 확보가 목표인 만큼(반대로 적의 제2공격력 파괴가 목표인 만큼) 카운터밸류(도시와 인구를 목표로 하는 작전개념)보다는 카운터포스(군사목표물을 목표로 하는 작전개념)가 작전의 중심이 된다. 더불어 재래식 무기 성능개선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내전이나 소규모 분쟁에서는 핵무기의 효용가치가 낮았기 때문이다. 1962년 쿠바 사태에서 케네디 행정부는 전면전을 불사하겠다는 위협으로 소련의 구상(대륙간탄도미사일배치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쿠바에 중거리탄도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구상)을 좌절시킨 바 있는데, 이는 동시에 유연반응전략의 유용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지도부는 소련의 철수가 군사행동보다는 상호절멸이라는 핵전쟁 위협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2공격력에 기반을 둔 유연반응전략과 카운터포스 작전은 군비팽창을 야기한다. 1963년 소련이 수중발사가 가능한 SLBM을 개발하고, 1967년부터는 1000해리가 넘는 미사일을 탑재한 원자력잠수함을 배치하면서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제2공격력 격차는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소련이 탄도탄요격미사일(ABM)개발에 나서자 1967년 존슨 행정부는 제2공격력을 확보하면서 지속적인 핵경쟁을 강화하기보다는 상호확증파괴(MAD, Mutual Assured Destruction)전략으로 전환하게 된다. 상호확증파괴란 상호 절멸을 보증함으로서 핵전쟁을 도발할 수 없도록 핵억지력을 갖자는 것으로, 카운터벨류(도시 및 시민이 공격목표)에 기반을 두어 핵전력을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공포의 균형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자는 발상이었다. 이런 균형을 달성하려면 제2공격력을 제한하면서 핵전력에 있어서 상호간 양의 균형을 이루어야한다. '탄도미사일방어체제(ABM)제한협정'과 '공격형전략무기제한을위한잠정협정'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도 이 때문이다. 바로 미·소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Ⅰ1), Ⅱ)이다. 최초의 군축협상은 상호확증파괴능력(반대편에서는 '평화공존')을 보장에서 시작한다. 승리하는 핵전쟁을 향한 핵경쟁 1918~1920년 내전, 1920년대 서구사회주의혁명(특히, 독일혁명)의 실패 이후 사회주의 건설을 (독자적으로) 수행해야 했던 소련은 1928~1929년 대전환을 거치면서 전시공산주의 모델(생산단위의 중앙 집중화, 전면적인 집단화)을 일반화한다.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일국사회주의론)을 이론적 전거로 하는 '사회주의 조국건설'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주의 생산양식론에 따르면 계급모순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외부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강력한 국가기구(강력한 경찰기구인 소련내무인민위원회(NKVD), 상비군으로 전화된 붉은군대)와 생산력의 발전을 독려하는 계획아래 말이다. 또한, 다민족을 포괄하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대러시아 쇼비니즘이 조심스럽게 부활하고, 소련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외국과 맺은 각종 협약에서 소련은 대외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후계자임을 자처한다. 이런 경향은 소련과 나치 독일의 전쟁에 이르러서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한다. 막강한 히틀러의 군대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소련 공산당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러시아 인민의 '애국심'에 호소해야 했다. '혁명을 수호하자'는 구호는 당시 그 의미를 거의 상실했기 때문이다. 1921년 독일과 맺은 비밀협정 이후 소련과 독일의 군사협력은 상당히 강화되었고, 이때 독일의 최신 군사기술과 개념이 소련에 전파된다. 1930년대 군에 대한 대숙청이 있기는 했지만 히틀러와의 전쟁을 앞두고 군은 현대전 형태에 걸맞게 조금씩 적응되어가고 있었고, 소련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현대식 무기 개발에 모든 노력을 집중한다. 1941년 핵개발을 시도한지 8년 만에 소련은 핵실험에 성공한다(1949). 스탈린 사후 '제국주의와의 전쟁 불가피성'이라는 그의 교조적 명제가 부정된다. 핵시대에 국제정치(여기에 한정된다)는 '정치의 수단으로서 전쟁'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회피가능성은 소련의 방위력 증강을 전제하는 것(핵심적으로는 핵균형)이기 때문에, 이것이 또 핵무장을 전제한다. 이에 따라 고전전인 작전관(기습과 적군의 섬멸)의 연장에서 '핵기습' 계획이 수립된다. 핵전쟁초기 '핵기습' 이야말로 전쟁 승리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소련은 미국과 벌일 핵전쟁을 대비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핵운반체 개발에서 소련은 미국 본토에 핵무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탄도미사일(로켓)개발에 집중했다. 공군력에서 소련은 절대열세였다. 소련에게 미국의 방어망을 뚫고 장거리를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 개발이란 요원한 일이었고, 그래서 탄도미사일 개발에 집중한다. 1957년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에 성공하였고, 3개월 뒤에는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닉호를 발사한다.(탄도미사일과 인공위성 발사체는 동일한 원리다) 이는 소련이 핵운반체까지 보유한 핵보유국임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것이었고, 이렇게 해서 본격적인 핵경쟁의 시대가 열린다.2) 그래도 당시 소련의 핵전략은 여전히 열세였고, 제2공격력 면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소련의 전략폭격기는 대부분 프로펠러로 추진되어 항속거리가 짧았고, SLBM 역시 400마일의 사정거리를 넘지 못한 상태였으며, 그나마 해저발사 기술도 개발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의 핵공격력은 NATO를 향한 중거리 미사일에 집중되어 있었다. 미·소의 이런 간극을 뛰어넘기 위해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 배치를 시도하지만 미국의 전면적인 핵공격 위협 앞에 굴복하고 만다.3) 한편 상호확증파괴전략을 마련했다고 해서 미국이 제1공격 능력의 질적 전환, 제2공격 능력의 배가를 포기했던 것은 아니며,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개선시켜왔다. 다탄두체(MIRV) 개발4), ABM 체계5)와 이동식 미사일 개발6), 핵공격에도 잔존전력을 지휘할 수 있는 지휘통신체계(C3I) 등 핵무기(체계)의 질적 강화를 모색해온 것이다. 이때(1970년대) 상호확증파괴전략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다. 핵억지력에만 기반을 둔 태세는 핵전쟁능력 향상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설정(군사시설에 대한 정밀타격/핵공격)이 가능하고, 전략 핵무기의 파괴력이 압도적인 상황이 되면 제한적인 핵전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순항미사일을 위시한 각종 전술핵무기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전면적으로 배치한다(NATO의 윈텍스 훈련, 한국의 팀스피리트 훈련). 유연대응전략이 제한핵전쟁론 아래 본격화되고, 핵전역(核戰域)이 미·소 본토 밖 - 특히유럽과 동아시아(특히 한반도)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은 (한편으로는 핵억지력을 인정하여 SALT 협정에 참여하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NATO의 유연대응전략에 자극받아 제한핵전쟁 개념을 받아들이고 전술핵무기를 강화하는 한편, 제2공격력을 강화한다. 소련 역시 미국 본토 공격을 상정한 전면적인 핵전쟁 가능성보다는 NATO 동맹국을 상대하는 다양한 작전을 수립하고 핵능력을 강화한 것이다. 소련 역시 유럽을 향하는 전술핵무기(특히 중거리핵미사일)를 근대화한다. 이렇게 미·소의 유연대응전략과 전술핵무기의 근대화 및 중거리 미사일 확대 배치는 양국 사이 핵경쟁을 더욱 가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핵전쟁의 위기조차 지역으로 확대시켰다. 핵전역을 확대시킨 것이다. 이는 한편에서 핵확산(지역국가들의 핵무장)을 자극하는 요인이 되고, 또 다른 한편에서 광범위한 반핵운동의 출현을 예고한다.7) 소련의 몰락과 핵 일방주의 강화 1960년대 말 베트남 전쟁의 위기와 서독과 일본의 성장은 미국 헤게모니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직접적 위협을 받는 나라의 정부와 국민은 자기방어를 위한 군사력을 먼저 제공할 책임이 있다는'는 닉슨 독트린(1969)은 그동안 미국이 견지해왔던 전지구적 봉쇄 정책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다. 미국은 브라질, 남아프리카, 이스라엘, 이란(/이라크), 사우디, 남한 같은 반주변 국가들에게 지역의 하위제국 역할을 하도록 권고한다. 미국은 해외주둔 지상군 규모를 조금씩 축소하였고, 하위제국 국가의 군사력과 자신의 해·공군력 의존도를 높여나갔다. 하지만 1970년대 말부터 반주변부 및 주변부 국가의 사회적 격변이 대규모로 일어나고,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미 대사관 점거, 이란혁명)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미국은 닉슨 독트린을 일부 수정한다. 소련과 직접 대결하면서 제3세계의 도전을 저지하려 하려 했던 것이다. 바로 신냉전이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은 (전술핵무기가 아니라) 재래식 무기의 위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하였고, 최첨단 재래식 무기 개발에 엄청난 금액을 쏟아 붓는다. 군비경쟁을 가속한 것이다. 또한 군사기술의 최첨단 분야에서의 우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전략폭격기용 전술핵무기와 핵잠수함의 SLBM을 중점에 놓으면서, 미래 핵전력의 기술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우주의 군사화(각종 군사위성에 의한 핵무기 컨트롤의 우위확보)를 강화하고, 탄도미사일 요격시스템으로 미국 본토를 대규모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방어한다는 전략방위구상(SDI: 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추진한다.8) 냉전이 해체된 후 벌어진 1차 이라크 전쟁(1990)에서 최첨단 재래식 무기의 위력을 다시 확인하면서(당시 군사력 4위였던 이라크를 굴복시키고 미국의 승리를 보장했던 것은 핵이 아니라 최첨단 재래식 무기였다) 미국은 최첨단 재래식 무기 개발에 다시금 돈을 쏟아 부었고(러시아는 재정 여건상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반미성향이 강한 지역군사강국의 핵 보유시도에 대응하기 위해 핵독점을 향한 조치들을 취한다. 1991년 미국은 지상 및 해상의 전술핵무기를 전면 폐기할 것을 선언했는데9), 이것의 정치적 목적은 분명했다. 전술핵이 지역적 불안정(지역군사강국의 핵개발 자극)을 높일 수 있다는 인식 아래 스스로 먼저 철수하여 전술핵무기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며, 핵독점 아래 핵우산 정책을 펼치겠다는 발상이었다.(그렇기 때문에 공중폭격기용 전술핵무기는 제외되었다) 1994년 발표된 핵태세보고서(NPR)의 핵심은 미국의 핵전력을 현상유지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기존 핵 억지 전략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전력을 다하며, 반미성향이 강한 지역군사강국(중국, 러시아, 이라크, 이란, 북한, 리비아, 시리아 등)에 대해서는 핵보유국 여부에 관계없이 핵선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계획을 수립했다(2001년 NPR). 그리고는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 조인을 거부한 채(1999), 사용가능한 전술핵(예컨대 '벙커 버스터'용 핵무기 들) 개발에 나섰다. 미국의 핵 일방주의가 절정에 이른 것이다. 한편 하위제국 국가의 무장을 돕는 조치들(무기판매)과 카터정부의 '인권'외교는 소련을 더욱 고립시켰고, 소련에게 '적으로부터의 포위'에 대한 공포를 다시금 상기시켰다. 이에 맞서 소련은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시도한다.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 역시 이의 일환이었으나 이는 미국이 겪은 베트남 재앙의 재판(再版)이 되고 만다. 1970년대 중반 소련은 자본생산성의 급격한 하락(이윤율 저하)을 겪게 되고, 1970년대 말에는 흉작까지 겹쳐 심각한 불황을 겪게 된다. 핵경쟁이 주도하는 군비경쟁은 소련으로 하여금 회생의 여지를 찾지 못하게 하였다. 소련 지도부는 군사력 경쟁에 대해 회의를 품고, 군비삭감 조치를 모색한다. 브레즈네프는 통치 말년에 '핵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발상은 위험스러운 광기'라며 군부 강경파를 견제했고,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핵선제공격 포기를 선언했다(1980). 체르넨코 역시 '핵전쟁이 인류를 파멸시킬 것이며, 핵전쟁의 위협을 회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체제가 상이한 나라들과의 평화공존'을 선언한다. 이런 사정으로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소련의 군비 증액은 동결된다. 동유럽의 폭동과 주변의 종족 분규에 직면하여 소련은 경제적 쇠퇴를 막기 위해 본격적인 개혁·개방을 모색한다. 고르바초프는 이 모든 것을 달성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냉전을 종식시키는 조치를 취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1989), 동유럽의 전진배치군 역시 철수할 것(1988-1990)과 소련군 감축(1989)을 선언한다. 고르바초프는 긴장완화와 군비축소를 위한 방도로 과거 미국이 제시했던 '전략적 안정'10) 개념을 받아들여, '합리적 충분성 원칙'에 따라 핵보유량을 최소 수준으로 줄이고, '방어적 방위' 원칙에 따라 모든 선제공격 가능성을 제거할 것을 제안했다. 중거리핵미사일협정(INF)이 조인되어 유럽에 배치된 미(독일 포함 소 중거리 핵미사일이 모두 폐기된다(1987). 이런 흐름은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 Ⅰ, Ⅱ)으로까지 이어진다.11) 하지만 이런 조치가 위기에 빠진 소련을 구원할 수는 없었다. 경제위기 속에서 소련의 헤게모니는 급속히 감소했고, 동유럽과 소련 인민들의 항의는 빗발쳤다.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유혈사태와 1991년 군부쿠데타의 실패 이후에는 연방내 공화국들의 분리 독립 요구가 더욱 거세졌다. 그해 12월 11개의 공화국이 서명했던 독립국가연합(CIS) 조약 의정서가 발효(1992)됨으로써 냉전의 한축을 이루던 소련은 해체된다. 러시아 공화국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소련의 지위를 공식 승계할 것임을 UN에 통보한다(1991.12). 미국의 군사적 위협만 제어하면 생산력의 지속적인 발전 아래 공산주의적 전망을 닦을 수 있다는 소련의 기획은 이렇게 끝났다. 핵 일방주의와 핵확산 1969년 닉슨독트린 이후 하위제국과 제3세계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무장 지원(무기판매)이 반주변 국가들의 군사적 자급자족을 향한 열망과 섞이면서 지역 차원의 군사화가 급증한다. 냉전 아래 유지되던 미·소의 헤게모니에 균열이 생기자 (편입을 열망하든, 분리를 열망하든 관계없이) 안보위협을 느낀 지역 국가들이 차례로 무장을 시도한 것이다. 무장을 향한 노력들은 핵 보유 시도에서 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핵전력 강화, 인도의 핵실험(1974)과 파키스탄의 핵개발 시도(1972),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핵보유 의혹(1977 핵실험 장소 발견), 한국의 핵개발 시도(1973)와 북한의 핵개발 시도(1975),12)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핵개발경쟁(1970년대), 이라크 오시라크 핵시설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1981)과 같은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 핵보유 시도가 지역 차원으로 확대된 것이다. 더구나 이란혁명과 (반)주변부 국가에서의 빈번한 미 대사관 점령은 미 헤게모니의 정치적 안정성을 극도로 흔들었고, 미국은 대응책을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핵비확산조약(NPT) 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미 헤게모니아래 남아있으려는 국가들에게는 핵우산으로 해당 국가의 안위를 보장하지만, 일탈하려는 국가에 대해서는 정치·군사적 제제를 가하는 정책을 시도한다. 1990년 1차 이라크 전쟁은 이러한 시도의 완성이자 지역군사강국에 대한 경고이면서, 미국의 앞으로 수행하게 될 미래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기도 하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이라크의 가동 중인 오시라크 원자력 발전소를 폭격했다. 핵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의 노력은 1945년 미국이 처음 핵을 보유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원자 에너지 법안-맥마흔 법안(1946년, 핵무기 관련 핵물질과 핵정보·핵기술의 타국 이전을 금지하는 법안)을 마련하는 한편, 핵개발 경쟁을 제어하려는 목적에서 바루치 계획(UN원자력 위원회가 핵을 관리하여 원자력에너지 사용을 보장하는 한편, 핵무기 개발은 제한하겠다는 계획)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계획은 즉각적인 핵무기 폐지 요구에 대한 미국의 거부, 엄격한 현장 감시에 대한 소련의 거부로 실패한다.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한 뒤, 1952년 영국도 핵실험에 성공하고, 같은 해 프랑스마저 원자력 에너지의 이용가능성 타진을 명분으로 핵개발에 돌입하였다. 미국은 핵독점이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였고, 핵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할 방안을 찾았다. 1953년 UN총회에서 아이젠하워는 '핵의 평화적 이용(Atoms for Peace)'을 선언하고 이를 구체화한다. 핵독점을 포기(?)하고, '핵의 평화적 이용'을 내세워 핵보유국의 비핵보유국에 대한 핵관련 기술을 이전하는 대신 공급국이 인수국의 핵관련 프로그램을 관찰 및 통제(안전조치)하겠다는 것이다. 핵 프로그램 통제의 권위를 위해 미국은 안전조치의 권한을 공급국에서 UN으로 이관한다. 이렇게 해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설립된다. 사실, '핵의 평화적 이용'은 비핵보유국의 핵무기 보유시도에 대한 제어 수단, 즉 IAEA(/핵공급국)가 비핵보유국을 일상적으로 감시하도록 하는데 제공할 명분에 불과하며, 동시에 핵보유국(특히 미국)의 핵독점과 핵무기의 엄청난 파괴력에서 비롯되는 대중의 공포를 무마하고, 핵무기 보유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얻으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천연우라늄원자력에너지에 대한 신화는 이때부터 형성된다.13)14) '핵의 평화적 이용'은 이런 '정치적 기획'아래 시작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7년 IAEA가 출범했음에도 프랑스(1960년), 중국(1964년), 이스라엘(1966년)이 차례로 핵실험에 성공하자 IAEA의 정관만으로는 핵확산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핵보유국들은 더욱 '국제적이고',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 아래 '포괄적 안전조치'가 가능한 형태를 모색한다. 이를 위해 미국은 소련과 함께 NPT를 제안한다(1970). 이것이 법적 구속력을 띠기 위해서는 상호 구체적인 이행의무가 있어야 하는데, 비핵국가들이 NPT에 가입하는 대신 핵보유국가들은 핵감축과 핵의 평화적 사용권 보장, 그리고 소극적인 안전보장(비핵국가에 대해 선제 핵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선언)을 약속한다. 핵군축과 핵비확산 두 가지가 불평등조약임에도 NPT를 유지하는 힘이다. 이 와중에 놀라운 사건이 발생한다. 인도가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온 플루토늄으로 '평화의 핵실험'을 성공한 것이다(1974).15) 미국 역시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플루토늄으로 네바다의 실험장에서 핵실험을 해보았고, 여지없이 성공했다(1977). 핵의 평화적 이용과 핵의 군사적 이용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16) 그리고 이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인도의 원폭 실험 이후 미국은 핵무기뿐만 아니라 핵물질 일반의 용도, 사용에 관한 수출통제장치를 구축한다. 쟁거위원회(1974년, 핵 물질 및 장비에 대한 국제 원자력수출 통제그룹), 원자력공급자그룹(1978년, 미국, 캐나다, 영국, 일본, 소련, 프랑스, 독일 등 7개국이 민감한 원자력 품목을 수출할 때 부과할 조건과 수출통제 대상품목에 합의), 미사일기술통제체제(1987, 대량살상무기를 운반할 수 있는 로켓 및 무인비행체 등의 미사일시스템 관련 부품·기술의 수출을 통제하는 체제)들이 그것이다. 확산예방정책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조지 HW. 부시의 국방장관 폴 월포비츠는 국방부의 임무와 기술 통제에서 대량살상무기시설 파괴에 이르기까지 (핵)확산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 대처하도록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1989), 이에 따라 클린턴의 국방장관 아스핀은 확산대응정책으로 전환한다. 예방정책에도 불구하고 확산이 진행될 경우, 상대방의 무기사용을 억제시키기 위해 군사적인 대응조치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1993). 이른바 '1차 북핵위기' 에 대한 클린턴 정부의 강경대응은 여기서 기인한다. 5년마다 열리는 NPT 평가회의는 '미·소의 불성실한 핵군축'과 '비핵국가에 대한 적극적 안전보장 거부'로 늘 논란이 되었다. 1975년 1회 평가회의에서 비동맹·중립국가 77개 그룹은 '우리는 NPT를 완전히 지켰으나 핵 강대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핵 군비경쟁을 중단하고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자는 NPT 규정을 핵 강대국 스스로 어겼다'며 강하게 성토했다. NPT 2차 평가회의(1980)에서 핵강대국들이 여전히 핵을 감축하지 않은 채(SALT Ⅱ의 난관), 핵확산을 빌미로 핵 공급 규제를 강화하려하자, 77개 그룹은 반발한다. 최종선언문이 채택되지 못한다. NPT 3차 평가회의(1985)에서도 마찬가지로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다. NPT의 일반원칙 정도를 선언문을 채택하는 것으로 끝난다. NPT 4차 회의(1990)에서 핵보유국들은 NPT를 무기한 연장하려 했다. 비핵보유국들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체결을 선언하고는 적극적 안전보장을 요구하며, 이를 NPT 무기한 연장과 연계하고자 했다. 결국 이견은 해소되지 않았고 최종선언문 채택에도 실패한다. 5차 회의(1995)에서는 핵보유국들의 일방적 핵감축 조치를 높이 평가하며 NPT 무기한 연기를 결정한다. 하지만 비핵보유국의 요구한 시한부 핵군축 일정 및 핵무기의 궁극적 완전 철폐, 소극적 안전보장 등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면서 최종선언문은 끝내 채택되지 못한다. 뉴욕에서 열린 2000년 NPT 6차 평가회의에서는 15년 만에 최종문서를 채택하는데, NPT 체제 유지 및 강화를 위한 노력을 재확인한다. 그것은 미봉책이었을 뿐이었다. 2005년 6차 평가회의에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은 핵개발을 시도하고 있는 북한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할 것을 제안하고, 이참에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든 국가의 농축 및 재처리를 아예 불허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NPT가 보장해 온 비핵국가의 평화적 이용권을 근본에서부터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비핵보유국이 보기에 이는 완전히 적반하장이었는데, 미국이야말로 핵군축 의지에 역행하는 정책으로 일관해왔기 때문이다.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을 거부해놓고는(1999) 소형핵무기의 연구개발을 금지해 온 '스프랫페이스' 조항마저 폐지하더니(2003), '강력한 지표 관통형 핵무기'의 연구비로 4백만 달러를 책정하는 예산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2005). 더구나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을 위해 ABM 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하고는(2002) 비핵보유국을 포함한 몇몇 나라들을 핵선제공격 대상으로 정했다(2001 NPR). 비핵보유국에 대한 소극적 안정보장조치마저 져버린 것이다. 비핵보유국들은 이를 강하게 비난했다. 2005년 NPT 평가회의는 결국 완전히 무산되고 만다. 핵 숭배 이데올로기 비판 1983년 미국의 가톨릭 사제단은「평화의 도전」에서 '억지는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는 없지만, 점진적인 군축을 향한 한 계단으로서 균형에 기반을 둔 억지는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있다'고 선언하며, 핵에 의한 억지를 용인했다. 동시에 그들은 대규모 핵감축, 포괄적인 핵실험 금지, 새로운 핵무기 체계의 실험 및 배치 금지, 재래식 군비경쟁 통제, 국제적 공동선의 필요에 적합한 지구적 권위체의 설립을 강조했다. 이는 방어적 핵억지론의 주요한 논거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제안은 핵에 의한 억지가 가능하다는 전제인데, 논리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핵에 의한 억지는 불가능하다. (상호확증파괴가 목적이긴 하지만) 핵에 의한 억지(군축)를 위해 출발한 SALT 핵감축 협상이 핵무기의 질적 도약을 자극했었던 역사와 그에 따라 '핵시대 균형은 핵경쟁을 자극한다'는 (핵무기 개발을 주도하는 자들의 논리인) '전략적 안정' 논리가 출현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더구나 핵위협은 국가간 균형적인 관계, 평화로운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불균형한 관계, 대립적인 관계에서 발생한다. 이런 상황에서 핵에 의한 억지는 핵을 감축하는 방향이 아니라 핵경쟁을 가속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핵은 분명히 절멸적인 것이고 두려운 것이며, 공포 그 자체다. 하지만 핵을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이해하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절멸의 전쟁이 어떻게 해서 출현하게 되었으며, 해결방안은 무엇인가를 둘러싼 대중들의 과학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이것이 없는 상황에서 핵이란 또 다른 폭력(핵)으로 대응해야 하는 대립물이거나 그저 없어져만 하는 존재로 남기 때문이다. 핵위기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핵이 공동의 정치적 토론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럴 때에만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핵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첫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핵과 핵전쟁(핵위기)이 어떻게, 왜 출현하는지를 둘러싼 공동의 인식을 확보하면서 공동의 해결능력을 대중들이 갖춰나가야만 가능하다. 핵무기는 대량살상·대량파괴 무기이며, 이 무기의 목표는 엄밀한 의미의 군인/군사시설이 아니다. 광의의 의미에서 군인(민간인과 구별되지 않는)과 군사시설(민간시설과 구별되지 않는)이다. 핵전쟁은 대중들이 가꿔놓은 공동체와 사회관계를 (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전쟁이며, 정치를 향한 대중들의 모든 가능성을 뿌리부터 제거할 뿐이다. 게다가 적(/군)이 아니라 (국경선 밖의) 대중을 섬멸하는 것이 바로 핵전쟁의 목표다. 핵무기가 적의 완전한 섬멸을 목표로 했던 2차 세계대전에서, 그 전쟁이 동원한 국가주의적이며, 민족주의적인 (그리고 인종주의적인) 이데올로기아래 출현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전쟁에서 승자가 누구든, 누가 먼저 핵을 개발했든 간에 그 전쟁이 잉태한 핵이 바로 우리들 자신을 겨누고 있고, 왜 우리가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17) 핵이 어떻게 생존해왔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국가간 체계 속에서 상대의 절멸을 향한 전쟁이 핵을 낳았고, 이 전쟁은 국가간 체계들을 양극으로 재구성하여 냉전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냉전을 가능하게 했던 핵(/경쟁)은 한쪽 극(소련)의 체제 유지를 곤란하게 하였다. 또 다른 극(미국)의 국가가 세상을 일방적으로 이끄는 가운데, 국가들 사이 생존경쟁이 또다시 핵의 확산을 낳고 있다.18) 소련 인민들은 독일 나치의 공격에 주저앉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과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를 송두리째 파괴하려 했기 때문에 그들과 맞서 싸웠다. 독소전쟁에서 그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싸웠다. 그들은 승리해야만 했고, 그래서 이겼다. 독일 통상전력의 80%를 무찔렀던 것이다.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이후 새로 도래한 세상은 2차 세계대전이 남겨 놓은 핵무기와 그것으로 무장한 체제였다. 냉전체제, 그것은 자유로운 체제가 아니었다. 냉전체제는 모두를 군비경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끊임없는 군비경쟁 속에서 인민들에 대한 착취, 정치적 억압으로 인민들이 누려야 할 모든 권리를 박탈해왔다. '소련 인민들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그 승리를 통해 자유와 해방을 얻지는 못했다.' 지금 또 다시 이 비극의 새로운 순환이 열리려 하고 있다. 미국은 핵일방주의로 전 세계 인민들을 위협하고 있고, 이에 따른 전쟁 공포는 전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핵전쟁(핵위기)과 핵경쟁에 맞서 싸워야 한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갇히지 않는, 조금 더 확장되고, 조금 더 보편적이며, 조금 더 개방적인 경계 위에서 싸워야 한다. 그곳에서 핵전쟁의 위기를 야기하는 원인을 감축/제거하는, 전쟁을 통제할 수 있는 대중의 역량을 쌓아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유력한 경로는 핵전쟁의 위기를 고조시키는 지배세력들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강화하는 가운데, 대중들의 연대를 더욱 확장하고, 보편적인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는 운동을 벌여나가는 것이다(민주주의). 이는 반전(그리고 대안세계화)을 이념으로 하는 대중운동의 성숙에서만 비롯한다. 1) SALTⅠ의 협정대상은 폭탄이나 미사일이 아니라 운반체 즉, 탄도미사일격납고(SILO), 잠수함, 폭격기다. 폭탄이나 미사일의 생산기수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어도 SILO와 잠수함, 폭격기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는 핵폭탄이라 할지라도 운반체 없이는 무용지물이라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핵운반체(특히 3지주)는 그 자체로 핵무기와 동렬의 지위를 갖는다. 본문으로 2) '만약 서방측이 전쟁을 시작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종말을 의미한다. 소련도 이 같은 핵전쟁에 있어서 거대한 피해를 입겠지만 전쟁으로부터는 살아남을 것이다. … 현대의 국방능력은 병력수가 아닌 화력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소련은 핵병기를 보유하기 위해 병력을 감축할 것이다.' 1960년 1월 14일 소련 최고회의에서 발표된 후르시초프의 연설내용이다. 핵에 대한 소련지도부의 인식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본문으로 3) 소련의 군사전략에는 대도시 공격이라는 미국의 카운트밸류같은 작전이 명시된 적이 없다. 소련의 군사전략은 전통적으로 (기습에 의한) 적군의 궤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핵기습 전략은 미국의 상호확증파괴구상(공포의 균형)과는 달리 항상 승리를 목표로 한다. 본문으로 4) 이는 대륙간탄도미사일(SLBM)의 능력을 획기적으로 증진코자 하는 시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2개 이상의 탄두를 탑재하는 다탄두체(MRV)와 2개 이상 목표물을 독립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독립적 다탄두체(MIRVs) 개발, 그리고 교란장치(decoy 가짜탄두 탑재)의 개선이다. 탄두가 하나인 미사일전쟁에서는 1개의 핵미사일을 파괴하기 위해 2개의 핵미사일이 필요하다고 가정한다. 전략무기제한협상(SALTⅠ)은 이런 가정아래 하여 핵미사일을 제한한다. 만약 쌍방이 1,000개의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면, 상대의 전면적인 공격에 자신의 핵미사일은 500개가 파괴된다. 그럼에도 500개의 핵미사일이 있기 때문이 이것으로 적을 공격한다. 상호확증파괴 량은 바로 적의 제1공격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그리하여 적을 완전히 섬멸할 수 있는 핵무기의 양을 의미한다(이 경우는 500개). 그런데 다탄두체가 개발되어 파괴능력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면(1개의 핵미사일로 적의 사일로 1개 이상을 파괴할 수 있다면) 상호확증파괴량이 보장이 안 된다.(이 경우에는 0이 되거나 오히려 적의 미사일이 남는다) 2개 이상 목표물을 독립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다탄두체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전략무기제한은 오히려 다탄두체같은 미사일의 개발을 종용한 셈이다. 본문으로 5) 1950년대 기술부족과 예산 부족으로 좌절된 나이키-제우스 탄도미사일방어계획(우주에서 비행 중인 미사일을 핵무기로 요격한다는 구상)을 나이키-X 계획으로 이어갔으며, 1976년에는 센티널계획(주요 도시에 국한하여 얇은 탄도 미사일 방어망을 구축한다는 것), 닉슨정부 시절에는 세이프가드(대륙간탄도미사일 SILO와 전략공군사령부, 워싱턴의 비상지휘본부 등 주요 군사시설만을 방어하는 시스템 구축)로 발전한다. 본문으로 6) 미사일 발사체를 공격받기 어렵도록 이동체에 싣는 방식을 모색한다. 미국은 이를 MX미사일이라고 하는데, 결국 비용문제로 소형 대륙간탄도미사일(미니트맨)을 제외하고는 지하 SILO를 강화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이와 관련 기술은 오히려 소련이 우위인데, 중거리탄도미사일인 SS-20은 차량이동식이며 대륙간 탄도 미사일인 SS-X-25 역시 이동식이다. 본문으로 7) 미·소의 전술핵무기에 대한 강조는 유럽을 핵전역화하고 유럽의 핵밀도를 높였다. 소련은 중거리핵미사일을 현대화하여 유럽에 SS-20을 배치하고,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NATO에 퍼싱Ⅱ 미사일을 배치한다. 이를 기화로 핵전쟁 위협에 직면한 유럽의 반핵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선다. 본문으로 8) SDI 계획은 기술적 한계와 막대한 재정소요로 지지부진하다 결국 1993년 중단된다. 하지만 이는 전역미사일방어망(TMD)/미국본토미사일방어망(NMD)으로 승계되었고, 지금은 방어대상을 미국에 한정하지 않고 우방국까지 확대하는 미사일 방어망(MD)으로 이어진다. 본문으로 9) 전술핵무기폐기선언의 성격은 같은 해 노태우의 한반도 비핵화선언(1991.11)과 이어 남북 간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 선언'(1992.1)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한반도 비핵화선언은 '남과 북은 핵무기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않는다', '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사용한다',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가 주요 골자다. 이에 따라 한반도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핵무기가 전면 철수되고, 이를 근거로 (남한은 물론) 북한의 핵개발을 제어한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남과 북의 핵이 금지된 것이지, 미국 핵무기의 영내 출입까지 금지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맹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핵잠수함의 영내 출입이 자유롭고,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전략폭격기의 핵공격 연습이 가능한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미국의 핵우산은 유지되는 가운데 한반도에 배치된 전술 핵무기 철수를 기화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는 근거가 된다. 본문으로 10) 상대의 핵전력을 선제공격으로 파괴할 수 있는 정확성과 파괴력을 갖춘 무기는 전략적 불안정요인이 되기 때문에 이를 제거해야 전략적 안정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SALT에 이은 MIRV 개발사례에서 보이듯 전략적 '균형'은 핵무기의 질적 전환을 모색하게 하여 핵경쟁을 자극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전략적 안정이란 반대로 상대의 선제공격에 취약한 것 역시 전략적 불안정 요인이기도 해서 제2공격력을 강화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예컨대 MD 개발). 본문으로 11) 전략적 안정에 따른 핵감축은 오히려 미국의 핵 독점을 보장했을 뿐이다. 미국은 1970년대 해군을 중심으로 하는 해양전력을 더욱 강화시켜왔었다. '전략적 안정' 원칙에 따라 미국의 SLBM은 (전략적 안정을 꾀할 수 있는 무기여서) 언급되지 않거나 충분히 보유할 만큼 상한선이 그어졌지만, 러시아가 우위였던 ICBM은 (전략적 불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 무기여서) 종류에 따라 완전히 폐기되거나 충분히 감축할 만큼 상한선이 명시된다. 본문으로 12) 1970년대 남한과 북한의 핵개발 시도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남한의 경우, 1971년 원자력발전소 착공(이중 월성 1호기는 캐나다의 캔두형 중수로 발전소), 1973년 3월 장거리지대지 미사일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플루토늄을 얻기 위해 프랑스 SGN사의 재처리 시설, 캐나다의 NRX형 연구용 원자로 등을 도입하기로 함. 1974년 인도 핵폭발 실험 이후 핵확산을 철저히 경계하던 미국정부의 압력으로 중단. 1975년 핵확산방지조약 체결. 하지만 1976년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프로젝트를 '국산 핵연료 개발계획'으로 위장한 뒤 추진. 1979년 박정희의 죽음과 전두환의 군사쿠데타 이후 구체적인 핵보유 시도는 중단된 것으로 알려짐(2004년 IAEA는 한국이 1982년 4~5월 TRIGA Mark Ⅲ 연구용 원자로에서 태우고 나온 열화우라늄(2.5kg)으로부터 플루토늄·우라늄 혼합물을 추출한 의혹을 제기. 플루토늄 보유는 아니더라도 관련 기술을 축적하려 했던 시도로 평가됨). 한편 북한은 1973년 실험용 원자로 IRT-200을 4Me급으로 개조, 1975년 미사일 개발 시작, 1975년 플루토늄 생산 실험에 성공. 1979년 5Me급 흑연감속 원자로 공사 시작(1986년 완성). 본문으로 13) 원자력에너지에 관한 신화는 거의 대부분 허구다. 원자력은 무한한 에너지원도 아니며(현재 추세로는 40~50여년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우라늄을 보유하고 있다) 값이 싼 에너지도 아니며(초기 건설비용이 매우 많이 들어가고, 더구나 핵폐기물 보관· 폐기비용은 거의 무한에 가깝다) 효율이 좋은 에너지도 아니며(원자력 발전소의 에너지 전환 효율이 30~34%정도인데 이는 화력발전소의 효율보다도 훨씬 못한 수치다) 안전하지도 않으며(원자력 발전소의 사고가능성은 원자폭탄이 떨어질 가능성과 동일하다 - 원자력 관련 사고는 인류에게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든다) 방사능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고(그래서 발전소용과 해상용이 아닌 원자력을 직접 동력으로 하는 기관은 개발이 불가능하다 - 방사능 때문이다 - 방사능은 가장 치명적인 위험이다) 제거 불가능한 핵폐기물 나온다(이를 저장 보관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며 심지어 사고위험조차 있다). 본문으로 14) 미국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살펴보면 원자력에너지의 전용이 어떻게 시도되었는지를 바로 알 수 있다. 사실, 미국의 대다수 전력 회사는 원자력 발전소 사업에 뛰어들기를 꺼렸다. 당시만 해도 석유와 석탄의 값이 싼데다 개발비용이 막대했다. 제너럴일렉트릭과 웨스팅하우스 정도만이 미국 국가기구인 원자에너지위원회(AEC)의 전적인 재정적 지원 아래 뛰어든다. 최초의 민간용 원자로라는 영국의 콜더홀형 원자로(1956)는 원자폭탄용 플루토늄 생산과 발전(發電)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한꺼번에 달성하려는 원자로였다. 미국의 첫 원자력 발전소는 (세계 최초인)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호의 원자로(1954)를 떼어서 만든 필라델피아의 쉬핑포트 발전소다(1958). 원자력잠수함의 추진기관이 가압경수로의 시조인 셈이다. 본문으로 15) 인도가 핵개발을 시도한 것은 중국 위협(중국의 핵개발)에 맞서고 대국으로서, 남아시아의 지역 맹주로서 인도의 존위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이유때문이었다. 인도의 핵개발은 인도에서 분리 독립한 파키스탄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고, 결국 파키스탄 역시 핵개발에 나선다. 1998년 인도가 핵실험을 하자 같은 해 파키스탄 역시 핵실험으로 대응한다. 미국의 핵이 중국의 핵으로, 중국의 핵이 인도의 핵으로, 인도의 핵이 파키스탄의 핵으로 … 인도의 핵개발은 지역의 핵위기를 어떻게 증폭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본문으로 16) 원자로의 세 가지 기본요소는 '핵연료/감속재/냉각제'다. 세 요소에 따라 원자로를 분류해보면 경수로는 '저농축우라늄/경수/경수'고, 중수로는 '천연우라늄/중수/중수'고, 흑연감속로는 '천연우라늄/흑연/경수'다. 고속증식로는 '농축플루토늄/사용안함/나트륨'이다. 앞서 3개의 원자로에서 경수로 원자로는 1~3년 사이 폐연료봉을 교체하지만, 중수로와 흑연감속로는 연속적인 핵연료 교체가 가능하다. 따라서 중수로나 흑연감속로는 경수로에 비해 순도가 높은 플루토늄을 얻을 수 있다. 인도의 핵실험과 미국의 핵실험에서 확인되었듯 이 플루토늄으로도 핵폭발이 가능하다. 따라서 재처리기술은 사실상 플루토늄 확보와 동의어다. 또 다른 핵무기 재료인 농축우라늄은 천연우라늄에서 별도의 농축기술로 추출한다. 경수로에 쓰이는 저농축 기술과 핵폭탄 원재료에 사용되는 고농축 기술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농축기술 역시 고농축우라늄 확보와 동의어인 셈이다. 1970년대 남한이 핵개발을 시도할 때 월성에 중수로 발전소를 건설한 것이나 북한이 흑연감속로 발전소를 영변에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같은 맥락(플루토늄 확보)이다. 참고로 한국의 경우 전력 부족이 염려되어 원자력 발전소를 지었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해 두자. 1986년 원자력 발전이 크게 확대되어 전력예비율이 과잉이 된다(1976년 3.9%에서 1986년 61.2%). 그 결과 후속 원자로 건설은 5,6년 연기된다. 정부는 전력소비를 늘리기 위해 전기료를 인하한다. 전기소비는 대폭 늘었고 다시 1990년대는 다시금 전력예비율이 줄어든다(1990년 8.3%). 이후 핵발전소 건설은 원자로에 대한 독립적인 기술을 얻기 위해서다. 바로 '한국형 경수로'다. 본문으로 17) 핵무기는 전쟁의 종식과 함께 출현했다(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핵 구름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의 상징이다). '핵이 평화를 가져왔다', '핵이 우리 민족을 해방시켰다'는 관념이 대중들 사이에서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져다 준 해방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물어야 한다. 이것인 소련의 인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에게도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한국의 대중들 이 같은 관념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8) 이는 (또 다른) 국가주의/민족주의적 기획 아래에서 혹은 그 영향 아래에서는 핵에 맞서는 평화, 대중들의 평화를 쟁취하기는 상당히 곤란함을 시사한다. 북의 선군정치(핵에 의한 핵의 억지)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와 국가 간 핵무기 감축(한반도 비핵화 선언/비핵지대화)에 기대를 거는 것이 한계적이라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 선언, 제네바 협정, 6자 회담 이후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되었는지, 군비경쟁이 감소되고 있는지를 되돌아 볼 일이다. 사실 이것은 애당초 곤란한 기획인 것이다. 국가 간 핵감축은 (한반도 비핵화에서도, 제네바 협정에서도, 6자회담에서도) 자신의 핵(군사력) 우위를 보장하면서 서로의 핵(군사력)을 감축하겠다는 시도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차 6자회담 공동성명의 의미와 한계 ‘공동성명’은 과연 진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6자회담 성공은 평화통일로 가는 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용산구협의회가 육교 위에 커다랗게 걸어놓은 현수막의 제목이다. 9월 19일 북경발 뉴스를 통해 13개월만에 재개된 4차 6자회담의 극적인 합의가 알려졌다. 그 이후 동북아 평화체제로의 진입, 평화통일의 이정표, 남북 정상회담의 정례화 등등 각종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날부터 시작된 경수로 제공 여부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성명전을 살펴본다면 오는 이후 6자회담이 과연 순조롭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 반드시 낙관할 수는 없다. 우선 6개항으로 되어있는 공동성명을 살펴보면 핵심적으로 1조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과 그 달성방안, 미국의 대북침공 의사 없음과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권 존중과 적당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논의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2조는 북한의 주권 존중, 북미평화공존,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를 다루고 있다. 이번 공동성명의 수준은 강제적인 이행의무를 부과하는 조약이 아니라 5조에서 규정한 것처럼 추후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입각하여 상호조율된 조치를 취하기 위한 ‘말 대 말’ 수준에서의 합의에 불과하며 북한과 미국, 남한 및 참가국들의 행동이 접속사 없이 무미건조하게 병렬적으로 나열되고 있다. 게다가 내용을 살펴보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북한의 의무는 명확하게 표현된 것에 비해 미국이 이에 대한 반대급부(관계정상화와 경수로 제공)를 어떤 시점에 어떻게 제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서술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연 그 반대급부가 제공될 지 여부도 이번 회담에서 확인되지는 않았다. 이번 회담은 그동안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6자회담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데는 성공했지만 6조에서 앞으로의 회담일정(11월 5차 6자회담)을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애매모호한 채 남아있는데 이는 그만큼 북한과 미국 간의 이견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번 공동성명의 수준은 1994년 상호 반대급부(북한의 핵동결과 미국의 경수로 제공)와 관계정상화를 명시한 ‘제네바기본합의서’에 미치지 못하며 그야말로 잠정적인 각국 행동의 일반적인 원칙을 나열한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한계를 무시하고 ‘선군외교의 승리’라든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안정을 위한 출발점’으로 이번 공동성명의 의의를 과장하는 것은 오히려 6자회담 내부의 한계는 물론이고, 과연 이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가 정착될 수 있는지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봉쇄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현실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 지난 15년 동안 정부와 언론의 호들갑은 별반 새롭지 않다. 1991년 12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었을 때를 기억해보라. 혹은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북한과 미국이 합의에 이르렀을 때 언론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현재와 마찬가지로 온갖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졌지만 이후의 사태는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요구들을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는 미국의 태도에 따라 남북관계마저 경색․악화되어오지 않았던가? 어떻게 보면 이번 6자회담의 ‘합의’를 추켜세우기 전에 질문해야할 중요한 문제는 어째서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성공하지 못했는가, 혹은 어째서 남한과 미국은 ‘북핵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해 왔는가이다. 관계정상화를 꿈꾸는 북한 vs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려는 미국: 타협의 불투명성과 한계 미국은 6자회담 내내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 원칙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해왔다. 지난 3차 6자회담에서 미국은 ‘다단계 포괄적 비핵화방안’을 제시했는데 핵동결에 상응하는 중유지원, 3개월 후 핵폐기 절차가 시작되면 4단계에 걸쳐 잠정적 안전보장, 비핵 에너지 지원,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및 경제제재 해제 논의, 관계 정상화 등을 추진한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핵동결에 상응하여 200만kw의 에너지 지원(이는 지난 7월 12일 남한의 ‘중대제안’으로 수용된다),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경제제재 및 봉쇄 해제를 요구하였다. 비단 보상의 문제 뿐 아니라 동결과 폐기의 범위에 2차 북핵위기의 발원지였던 고농축 우라늄(HEU)이 포함되는지, 그리고 사찰의 주체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인지, 아니면 6자회담의 틀 속에서 새롭게 마련될 것인지도 추가적인 쟁점들이다. 하지만 양자의 입장이 대등하게 조율되는 것은 아니며 장기적으로는 북한이 대부분 미국의 제안을 수용하고 있는데 반해 미국이 이에 대한 반대급부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 것이 회담을 더욱 애매모호한 합의로 몰고 가는 주된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력한 反확산(counter-proliferation) 전략에 입각하여 정책의 우선순위를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의 제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미국과, 냉전시대의 종언 이후 외부로부터의 식량지원에 의존할 정도로 취약해진 경제적 기반을 복구하고 미국․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려는 북한의 정치적 목표가 얼마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는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문제이다. 舊소련과 현실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한 이후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구도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북한에게 커다란 정치․경제적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0여 년 동안 줄곧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서 미국은 북한에게 추가적인 양보를 강요하고 있고 대체적으로 북한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왔다(1994년 「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통한 핵 프로그램의 동결과 폐기, 1998년 「페리 보고서」에서의 중장거리 미사일 프로그램의 중단).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명시하며 전역미사일방어망구상(TMD)․미사일 방어망(MD) 계획을 1990년대 내내 추진해왔을 뿐 아니라, 2001년 「핵태세 보고서」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공격을 포기하는 「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명시적으로 위반하면서 북한을 핵선제공격이 가능한 7개국의 명단에 포함하는 등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유지․확장 속에서 대북 관계 정상화를 부차적이거나 종속된 문제로 취급해왔을 뿐이었다. 따라서 6자회담의 틀 안에서의 합의는 현재로서는 결코 낙관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앞으로 북미 간의 이견과 갈등은 지금까지의 6자회담보다 훨씬 격렬하게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설혹 6자회담의 틀 내에서 (‘제네바 합의’와 같은 수준의) 북한과 미국 사이에 구체적인 합의점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전지구적인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미국으로서는 현재의 한미군사동맹의 근간을 유지하는 한편, 한반도비핵화의 범위를 자국의 핵탑재 잠수함과 항공모함, 비행기의 출입을 제한하지 않는 방향으로 해석하려고 하며 이 경우 6자회담은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불러오기보다는 현존하는 군사적 갈등과 경쟁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생산하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확산 억제 시도의 자가당착: 미국의 핵독점을 전제한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추구 미국의 군사안보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보다 ‘테러와의 전쟁’,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예방전쟁․선제공격마저 마다하지 않는 강력한 반확산 정책이다. 따지고 보면 지난 2003년 결국 ‘제네바 합의’가 미국의 대북 중유 제공 중단과 북한의 핵비확산조약(NPT) 탈퇴로 인해 파탄에 처한 근본적인 이유는 ‘불량국가’에 대한 미국의 불신과 2003년 이라크 침략전쟁으로 가시화된 호전적인 군사․안보정책에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위한 시도는 지난 1970년 출범한 NPT를 최악의 위기상황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자가당착에 빠뜨리고 있다. 현재 미국의 반확산 정책은 자신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전제한다. 이는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 기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 1995년 NPT를 무기한 연장하기로 회원국들이 합의한 전제는 핵보유국들의 핵군축 및 핵폐기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미의회는 13개 핵폐기 의무사항으로 설정된 주요 조처 중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을 1999년 부결시켰고, 핵군비경쟁을 가속화할 수 있는 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금지하는 탄도미사일방어망조약(ABM)을 2002년 파기하였다. 1)부시행정부는 NPT 내 비핵국가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던 소극적 안전보장(핵보유국의 비핵국가에 대한 선제 핵공격 금지)을 명시적으로 철회하였고, (북한을 겨냥한 것으로 추측되는) 지하 벙커를 파괴하기 위해 지표를 관통하는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예산을 지출하고 있다. 올해 5월 열린 NPT 7차 평가회의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이러한 미국의 이중적 태도였으며, 비핵국가들과 미국 사이의 뿌리깊은 불신은 결국 회의가 결렬된 주된 원인이었다. 비핵국가들은 기존 NPT 체제의 이중적 잣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비핵국가에 대한 핵선제공격 금지를 명문화하고 우라늄 농축이나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을 포함하는 ‘평화적 핵이용권’을 주장하였으며, 미국은 서방국가들 중심으로 구성된 핵공급그룹(NSG)을 통해 모든 핵기술의 수출을 규제하고 NPT에서의 일방적인 탈퇴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또한 미국은 핵무기로 전용할 가능성이 있는 관련 기술의 확산을 엄격히 통제하기 위해 경제제재와 저지, 나포, 선제공격을 포함한 확산방지구상(PSI)을 2004년 발표하면서 핵무기의 ‘수평적 확산’(horizontal proliferation; 핵보유국이 늘어나는 것을 가리킴)을 저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천명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IAEA가 제안한 5년 간 핵분열 물질의 생산 중단에 대해서는 자국의 핵이용이 제한될 수 있다며 반대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수직적 확산’(vertical proliferation; 기존 핵보유국들의 핵전력이 강화되는 것을 가리킴)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NPT 비회원국들의 핵개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자신의 언명과는 다르게 미국은 핵무기의 수직적 확산이나 수평적 확산 모두에서 스스로 NPT 체제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 말대로 언제든지 핵무기로 전용 가능하고 사실상 평화적 목적의 핵이용의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라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반확산 정책의 전제는 바로 미국의 핵폐기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절멸의 무기’로서 순식간에 한 도시, 한 국가를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다른 국가들의 핵(무기)개발에 대한 동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오히려 핵무기에 대한 국제적이고 민주적인 통제 자체를 봉쇄한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해체하거나 감축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국가들간의 국제회담으로 평화를 운위한다는 것은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중재자적 역할’의 한계와 한반도․동아시아 평화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운동 세계평화의 대전제는 미국의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감축과 해체, 그리고 미국의 핵폐기이다. 이는 한반도․동아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번 6자회담을 해석하면서 마치 이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당장이라도 구축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과 오산이 아닐 수 없다. 당장 노무현 정권은 이번 공동성명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남한정부의 중재 아래 미국의 유연성(경수로 추후 논의 인정)과 북한의 결단(핵포기)을 이끌어내었다며 스스로의 외교적 노력을 자찬하기에 바쁘고 한반도․동북아 평화번영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6자회담이 타결되면 플랜A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을 정례화하고, 북한경제발전종합계획으로서 ‘북한식 마셜플랜’을 가동할 것으로 알려졌다(《국민일보》9월 24일).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굳건한 한미동맹”의 종속변수일 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정부는 플랜 B를 동시에 상정하고 있는데 이는 대북 경제제재와 PSI 참여, 봉쇄, 군사적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언제든지 과거 역대정권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의 전략에 따라 대북관계가 부침을 거듭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노무현정권의 ‘중재자적 역할’이 무력해질 수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속에 포섭되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모습을 ‘평화체제’라 부른다는 것은 이라크 침략전쟁이 이라크 민중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는 미국의 변명만큼이나 궁색하기 짝이 없다. 현재 전세계를 통틀어 군사적으로 미국에게 대적할 수 있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러할 것이다.2) 향후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경쟁국가의 부재는 바꿔 말하자면 오늘날의 세계평화를 국가간 체계의 유지나 존속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비현실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6자회담을 통해 북․미 관계정상화와 북한의 핵포기가 조율되는 것조차 지난한 과정일 뿐만 아니라, 설혹 어떤 합의가 도출된다고 하더라도 그로 환원되지 않는 그 이상의 것(한반도․동이사이의 평화)을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과정은 6자회담의 성공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에서, 다른 정치적 목표를 제기하는 문제이며, 미국의 군사패권을 해체하고 감축하는 아래로부터의 반미반전운동, 현실의 대중운동 속에서 그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밖에 없다. 1) NPT 4조에서는 “평화적 핵이용”에 대한 비핵국가의 권리를, 그리고 6조에서는 기존의 핵무기 보유국의 “전면적인 핵무기 폐기를 위한 협상 및 조약체결”의 책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6조는 미국 주도의 핵군비 경쟁으로 사문화되어가고 있으며 4조 역시 기존 핵무기 독점을 강화하기 위한 핵관련 기술 이전에 대한 규제로 인해 까다롭게 될 전망이다. 본문으로 2) 2003년도 미국 국방예산은 3,961억 달러로 러시아의 6배, ‘불량국가’로 지목된 북한,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수단, 쿠바 국방비 총합의 26배이다. 심지어 미국의 국방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인도, 남한, 호주의 국방비 총합보다 740억 달러가 많다. 2005년도 미국 국방예산 4,206억 달러는 부르키나파소, 부룬디, 콩고, 케냐, 레소토, 모리셔스, 모로코, 나이지리아, 르완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튀니지 등 아프리카 12개국 3억9천4백만 명의 국민총소득 총합 3,857억 달러보다 많다. 본문으로
-4차 6자회담 공동성명의 의미와 한계 ‘공동성명’은 과연 진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6자회담 성공은 평화통일로 가는 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용산구협의회가 육교 위에 커다랗게 걸어놓은 현수막의 제목이다. 9월 19일 북경발 뉴스를 통해 13개월만에 재개된 4차 6자회담의 극적인 합의가 알려졌다. 그 이후 동북아 평화체제로의 진입, 평화통일의 이정표, 남북 정상회담의 정례화 등등 각종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날부터 시작된 경수로 제공 여부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성명전을 살펴본다면 오는 이후 6자회담이 과연 순조롭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 반드시 낙관할 수는 없다. 우선 6개항으로 되어있는 공동성명을 살펴보면 핵심적으로 1조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과 그 달성방안, 미국의 대북침공 의사 없음과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권 존중과 적당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논의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2조는 북한의 주권 존중, 북미평화공존,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를 다루고 있다. 이번 공동성명의 수준은 강제적인 이행의무를 부과하는 조약이 아니라 5조에서 규정한 것처럼 추후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입각하여 상호조율된 조치를 취하기 위한 ‘말 대 말’ 수준에서의 합의에 불과하며 북한과 미국, 남한 및 참가국들의 행동이 접속사 없이 무미건조하게 병렬적으로 나열되고 있다. 게다가 내용을 살펴보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북한의 의무는 명확하게 표현된 것에 비해 미국이 이에 대한 반대급부(관계정상화와 경수로 제공)를 어떤 시점에 어떻게 제공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서술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연 그 반대급부가 제공될 지 여부도 이번 회담에서 확인되지는 않았다. 이번 회담은 그동안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6자회담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데는 성공했지만 6조에서 앞으로의 회담일정(11월 5차 6자회담)을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애매모호한 채 남아있는데 이는 그만큼 북한과 미국 간의 이견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번 공동성명의 수준은 1994년 상호 반대급부(북한의 핵동결과 미국의 경수로 제공)와 관계정상화를 명시한 ‘제네바기본합의서’에 미치지 못하며 그야말로 잠정적인 각국 행동의 일반적인 원칙을 나열한 정도에 불과하다. 이러한 한계를 무시하고 ‘선군외교의 승리’라든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과 동북아 안정을 위한 출발점’으로 이번 공동성명의 의의를 과장하는 것은 오히려 6자회담 내부의 한계는 물론이고, 과연 이를 통해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가 정착될 수 있는지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봉쇄할 뿐이다. 돌이켜보면 현실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이후 지난 15년 동안 정부와 언론의 호들갑은 별반 새롭지 않다. 1991년 12월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었을 때를 기억해보라. 혹은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북한과 미국이 합의에 이르렀을 때 언론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현재와 마찬가지로 온갖 장밋빛 전망들이 쏟아졌지만 이후의 사태는 한반도 및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요구들을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는 미국의 태도에 따라 남북관계마저 경색․악화되어오지 않았던가? 어떻게 보면 이번 6자회담의 ‘합의’를 추켜세우기 전에 질문해야할 중요한 문제는 어째서 1994년 제네바 합의가 성공하지 못했는가, 혹은 어째서 남한과 미국은 ‘북핵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해 왔는가이다. 관계정상화를 꿈꾸는 북한 vs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려는 미국: 타협의 불투명성과 한계 미국은 6자회담 내내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 원칙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해왔다. 지난 3차 6자회담에서 미국은 ‘다단계 포괄적 비핵화방안’을 제시했는데 핵동결에 상응하는 중유지원, 3개월 후 핵폐기 절차가 시작되면 4단계에 걸쳐 잠정적 안전보장, 비핵 에너지 지원,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및 경제제재 해제 논의, 관계 정상화 등을 추진한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핵동결에 상응하여 200만kw의 에너지 지원(이는 지난 7월 12일 남한의 ‘중대제안’으로 수용된다), 테러지원국 명단 제외, 경제제재 및 봉쇄 해제를 요구하였다. 비단 보상의 문제 뿐 아니라 동결과 폐기의 범위에 2차 북핵위기의 발원지였던 고농축 우라늄(HEU)이 포함되는지, 그리고 사찰의 주체가 국제원자력기구(IAEA)인지, 아니면 6자회담의 틀 속에서 새롭게 마련될 것인지도 추가적인 쟁점들이다. 하지만 양자의 입장이 대등하게 조율되는 것은 아니며 장기적으로는 북한이 대부분 미국의 제안을 수용하고 있는데 반해 미국이 이에 대한 반대급부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 것이 회담을 더욱 애매모호한 합의로 몰고 가는 주된 원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강력한 反확산(counter-proliferation) 전략에 입각하여 정책의 우선순위를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의 제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미국과, 냉전시대의 종언 이후 외부로부터의 식량지원에 의존할 정도로 취약해진 경제적 기반을 복구하고 미국․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려는 북한의 정치적 목표가 얼마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는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문제이다. 舊소련과 현실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한 이후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구도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북한에게 커다란 정치․경제적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0여 년 동안 줄곧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서 미국은 북한에게 추가적인 양보를 강요하고 있고 대체적으로 북한은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왔다(1994년 「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통한 핵 프로그램의 동결과 폐기, 1998년 「페리 보고서」에서의 중장거리 미사일 프로그램의 중단).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명시하며 전역미사일방어망구상(TMD)․미사일 방어망(MD) 계획을 1990년대 내내 추진해왔을 뿐 아니라, 2001년 「핵태세 보고서」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공격을 포기하는 「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명시적으로 위반하면서 북한을 핵선제공격이 가능한 7개국의 명단에 포함하는 등 동아시아에서의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유지․확장 속에서 대북 관계 정상화를 부차적이거나 종속된 문제로 취급해왔을 뿐이었다. 따라서 6자회담의 틀 안에서의 합의는 현재로서는 결코 낙관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앞으로 북미 간의 이견과 갈등은 지금까지의 6자회담보다 훨씬 격렬하게 드러날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설혹 6자회담의 틀 내에서 (‘제네바 합의’와 같은 수준의) 북한과 미국 사이에 구체적인 합의점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전지구적인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의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미국으로서는 현재의 한미군사동맹의 근간을 유지하는 한편, 한반도비핵화의 범위를 자국의 핵탑재 잠수함과 항공모함, 비행기의 출입을 제한하지 않는 방향으로 해석하려고 하며 이 경우 6자회담은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불러오기보다는 현존하는 군사적 갈등과 경쟁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생산하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의 핵확산 억제 시도의 자가당착: 미국의 핵독점을 전제한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추구 미국의 군사안보 정책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보다 ‘테러와의 전쟁’, 대량살상무기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예방전쟁․선제공격마저 마다하지 않는 강력한 반확산 정책이다. 따지고 보면 지난 2003년 결국 ‘제네바 합의’가 미국의 대북 중유 제공 중단과 북한의 핵비확산조약(NPT) 탈퇴로 인해 파탄에 처한 근본적인 이유는 ‘불량국가’에 대한 미국의 불신과 2003년 이라크 침략전쟁으로 가시화된 호전적인 군사․안보정책에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위한 시도는 지난 1970년 출범한 NPT를 최악의 위기상황으로 내몰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자가당착에 빠뜨리고 있다. 현재 미국의 반확산 정책은 자신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전제한다. 이는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 기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지난 1995년 NPT를 무기한 연장하기로 회원국들이 합의한 전제는 핵보유국들의 핵군축 및 핵폐기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미의회는 13개 핵폐기 의무사항으로 설정된 주요 조처 중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을 1999년 부결시켰고, 핵군비경쟁을 가속화할 수 있는 미사일 방어망 구축을 금지하는 탄도미사일방어망조약(ABM)을 2002년 파기하였다. 1)부시행정부는 NPT 내 비핵국가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던 소극적 안전보장(핵보유국의 비핵국가에 대한 선제 핵공격 금지)을 명시적으로 철회하였고, (북한을 겨냥한 것으로 추측되는) 지하 벙커를 파괴하기 위해 지표를 관통하는 소형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예산을 지출하고 있다. 올해 5월 열린 NPT 7차 평가회의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은 이러한 미국의 이중적 태도였으며, 비핵국가들과 미국 사이의 뿌리깊은 불신은 결국 회의가 결렬된 주된 원인이었다. 비핵국가들은 기존 NPT 체제의 이중적 잣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비핵국가에 대한 핵선제공격 금지를 명문화하고 우라늄 농축이나 플루토늄 재처리 기술을 포함하는 ‘평화적 핵이용권’을 주장하였으며, 미국은 서방국가들 중심으로 구성된 핵공급그룹(NSG)을 통해 모든 핵기술의 수출을 규제하고 NPT에서의 일방적인 탈퇴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또한 미국은 핵무기로 전용할 가능성이 있는 관련 기술의 확산을 엄격히 통제하기 위해 경제제재와 저지, 나포, 선제공격을 포함한 확산방지구상(PSI)을 2004년 발표하면서 핵무기의 ‘수평적 확산’(horizontal proliferation; 핵보유국이 늘어나는 것을 가리킴)을 저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천명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IAEA가 제안한 5년 간 핵분열 물질의 생산 중단에 대해서는 자국의 핵이용이 제한될 수 있다며 반대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수직적 확산’(vertical proliferation; 기존 핵보유국들의 핵전력이 강화되는 것을 가리킴)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등 NPT 비회원국들의 핵개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자신의 언명과는 다르게 미국은 핵무기의 수직적 확산이나 수평적 확산 모두에서 스스로 NPT 체제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미국 말대로 언제든지 핵무기로 전용 가능하고 사실상 평화적 목적의 핵이용의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라면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반확산 정책의 전제는 바로 미국의 핵폐기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절멸의 무기’로서 순식간에 한 도시, 한 국가를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파괴력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다른 국가들의 핵(무기)개발에 대한 동인을 제공하고 있으며 오히려 핵무기에 대한 국제적이고 민주적인 통제 자체를 봉쇄한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이니셔티브를 해체하거나 감축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서 국가들간의 국제회담으로 평화를 운위한다는 것은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이다. 노무현정권의 ‘중재자적 역할’의 한계와 한반도․동아시아 평화를 향한 아래로부터의 운동 세계평화의 대전제는 미국의 군사적 이니셔티브의 감축과 해체, 그리고 미국의 핵폐기이다. 이는 한반도․동아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번 6자회담을 해석하면서 마치 이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당장이라도 구축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커다란 착각과 오산이 아닐 수 없다. 당장 노무현 정권은 이번 공동성명의 의의를 설명하면서 남한정부의 중재 아래 미국의 유연성(경수로 추후 논의 인정)과 북한의 결단(핵포기)을 이끌어내었다며 스스로의 외교적 노력을 자찬하기에 바쁘고 한반도․동북아 평화번영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6자회담이 타결되면 플랜A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을 정례화하고, 북한경제발전종합계획으로서 ‘북한식 마셜플랜’을 가동할 것으로 알려졌다(《국민일보》9월 24일).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은 “굳건한 한미동맹”의 종속변수일 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정부는 플랜 B를 동시에 상정하고 있는데 이는 대북 경제제재와 PSI 참여, 봉쇄, 군사적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언제든지 과거 역대정권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의 전략에 따라 대북관계가 부침을 거듭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노무현정권의 ‘중재자적 역할’이 무력해질 수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속에 포섭되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모습을 ‘평화체제’라 부른다는 것은 이라크 침략전쟁이 이라크 민중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는 미국의 변명만큼이나 궁색하기 짝이 없다. 현재 전세계를 통틀어 군사적으로 미국에게 대적할 수 있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상당 기간 그러할 것이다.2) 향후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위협할 수 있는 경쟁국가의 부재는 바꿔 말하자면 오늘날의 세계평화를 국가간 체계의 유지나 존속을 통해서 기대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비현실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6자회담을 통해 북․미 관계정상화와 북한의 핵포기가 조율되는 것조차 지난한 과정일 뿐만 아니라, 설혹 어떤 합의가 도출된다고 하더라도 그로 환원되지 않는 그 이상의 것(한반도․동이사이의 평화)을 기대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반도․동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과정은 6자회담의 성공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에서, 다른 정치적 목표를 제기하는 문제이며, 미국의 군사패권을 해체하고 감축하는 아래로부터의 반미반전운동, 현실의 대중운동 속에서 그 해결의 단초를 찾을 수밖에 없다. 1) NPT 4조에서는 “평화적 핵이용”에 대한 비핵국가의 권리를, 그리고 6조에서는 기존의 핵무기 보유국의 “전면적인 핵무기 폐기를 위한 협상 및 조약체결”의 책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6조는 미국 주도의 핵군비 경쟁으로 사문화되어가고 있으며 4조 역시 기존 핵무기 독점을 강화하기 위한 핵관련 기술 이전에 대한 규제로 인해 까다롭게 될 전망이다. 본문으로 2) 2003년도 미국 국방예산은 3,961억 달러로 러시아의 6배, ‘불량국가’로 지목된 북한,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수단, 쿠바 국방비 총합의 26배이다. 심지어 미국의 국방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인도, 남한, 호주의 국방비 총합보다 740억 달러가 많다. 2005년도 미국 국방예산 4,206억 달러는 부르키나파소, 부룬디, 콩고, 케냐, 레소토, 모리셔스, 모로코, 나이지리아, 르완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튀니지 등 아프리카 12개국 3억9천4백만 명의 국민총소득 총합 3,857억 달러보다 많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