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 2006-04-27

    태국, ‘American Breakfast'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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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민중, 치앙마이에 모이다 500여명은 경찰의 방어망을 뚫고 호텔로 진입하기 위해 심한 몸싸움을 벌였고, 쉐라톤 호텔 옆을 흐르는 핑강 건너편에는 수 십 명이 핑강을 헤엄쳐 건너 호텔 진입을 시도했다. 이날 태국 북부 관광지인 치앙마이에서는 미국과 태국 간 FTA 6차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1만 명의 태국 반세계화 활동가, 소농민, 에이즈환자, 보건의료 활동가들이 태미FTA 6차 협상을 저지하기위해 모였다. 태미FTA에 반대하는 시위가 격화되자 10일에는 협상 자체가 잠시 중단되었고, 양국협상단은 비밀리에 협상장소를 옮겼다. 태미FTA는 부시 대통령이 아세안 사업계획(Enterprise for ASEAN Initiative)1) 을 발표한 이후 싱가폴에 이어 두 번째 맺는 FTA로 상품과 서비스무역은 물론이고 지식재산권, 투자, 금융, 환경, 노동, 섬유, 통신, 농업, 전자상거래 및 정부조달까지 포함하는 가장 포괄적인 협상이 될 것으로 관심을 모아왔다.2) 탁신총리는 공기업의 민영화와 적극적인 FTA체결을 정권의 양대 목표로 삼고 추진해왔는데, 태국민중들은 ‘사유화반대, 태미FTA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태국언론들도 태미FTA가 태국의 농업 및 금융서비스 시장에 장기적으로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우려하며, 정부가 이러한 잠재 위험을 감추고 거대 재벌 및 정권의 이익을 위해 FTA 협상을 서두르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번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은 에이즈환자와 에이즈운동 활동가들이었다. 탁신 총리는 미국과의 FTA 협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하지 않고 폐쇄적으로 진행해왔는데, 이번 6차 협상에서 지적재산권 보호조항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의약품의 특허는 6~70만 명의 태국 HIV감염인의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에 태미FTA반대투쟁의 주요한 내용이 되고 있다. 태국의 HIV감염인은 6~70만 명이고, 이중 17만 명이 에이즈치료제 복용을 통해 치료를 받아야하지만 8만 명만이 치료를 받고 있다. 그나마 8만 명의 에이즈환자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태국국영제약회사(Government Pharmaceutical Organization:GPO)를 비롯한 국내제약회사가 에이즈치료제를 직접 생산하여 싸게 공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용절감을 통해 태국정부는 전체에이즈치료접근프로그램(Thai program of universal subsidized access to AIDS treatment)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제시한대로 지적재산권이 강화되면 비싼 2차 치료제를 값싸게 생산할 수 없게 되고, 급격한 비용증가로 에이즈치료접근프로그램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 또한 태국은 브라질, 인도와 함께 제네릭 에이즈치료제를 싸게 생산할 수 있는 주요한 센터중 하나로서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에도 공급하고 있기 때문에 태미FTA의 영향은 더욱 파괴적이다. [%=사진1%] 유치하고 비상식적인 의약품특허 의약품과 특허가 무슨 상관이 있냐고? 특허의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길래 FTA에서 특허권을 강화하라고 요구하느냐고? FTA와 의약품 특허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고? 좀 거칠게 말하면 초국적 제약자본이 떼돈을 벌기 위한 장난질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것이다. 세계무역기구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WTO TRIPS)은 개발자에 대한 보상으로 20년 이상의 독점을 보장하는 특허권을 전 세계적으로 강제하고 있다. 따라서 초국적 제약자본은 신약에 대한 특허권을 이용하여 유치하고 비상식적인 장난을 쳐서 떼돈을 벌 수 있게 되어있다. 전 세계 의약품 시장의 절반이상을 차지하는 미국제약사들은 더 쉽고 더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장난을 칠 수 있도록 세계무역기구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WTO TRIPS)에다 규정하고 싶었지만, 세계무역기구는 다자간 협정이다 보니 개발도상국의 반대가 심해서 미제약사의 기대에 못 미쳤다. 그래서 양자협정인 FTA에서 이런 장난질을 더 쉽고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일방적인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치하고 비상식적인 장난질 몇 가지를 이야기하고 태미FTA이야기로 가자. 아래의 이야기는 필자가 몇 차례 한 적이 있어서 또 읽는 분들은 노여워 마시길. 그리고 약 이름이 많이 나와도 외울 필요는 없으니 노여워 마시길. 좋은 치료제가 빨리 개발되기를 기다리는 것만이 환자의 몫은 아니다. 2004년 2월, 미국의 에이즈건강관리재단이 초국적 제약사 애보트에 대해 미국반독점법 위반으로 소송을 제기한 일이 있었다. 애보트사가 노비르(성분 명: 리토나비어)라는 에이즈치료제의 가격을 500%나 인상했기 때문이다. 애보트사가 노비르의 약가를 갑작스레 500%나 인상한 이유는 노비르를 시장에서 퇴출시키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도 수요부족이라는 이유로 노비르는 판매중단 되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제약사에서 노비르를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노비르는 다른 에이즈치료제와 같이 복용했을 때 다른 치료제의 효능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가진다. 애보트사는 리토나비어와 로피나비어의 복합제인 칼레트라를 출시했고, 칼레트라의 시장을 확대함과 동시에 다른 제약사의 경쟁을 억제하기위해 노비르의 가격을 500%나 인상한 것이다. 노비르에 대한 특허 때문에 애보트사 외에는 노비르와 똑같은 약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에이즈환자는 다른 치료제와 노비르와의 병용복용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 태국의 에이즈환자들은 최근까지 6년이 넘는 시간동안 미국 제약사의 유치한 장난질에 맞서 싸워야했다. 1998년 미국의 거대제약사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의 에이즈치료제 ‘바이덱스’(성분 명: 디다노신)에 대한 특허가 태국에서 승인되었다. 그러나 바이덱스의 한 달 비용은 태국 민중의 월수입보다 많은 136달러였다..3) 태국국영제약회사GPO는 자국에서 싸게 디다노신을 생산하기위해 강제실시권.4) 발동을 요구하였지만, 태국정부는 거절했다. 그 이유는 미국이 디다노신에 대한 강제실시권 발동 계획을 취소하고 태국의 특허법과 무역관련법을 개정하여 강제실시를 불법화하도록 태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태국정부가 말을 안 들으면 태국의 최대 해외 수출품인 보석의 미국 시장 진출을 줄이겠다는 위협과 함께, 말을 잘 들으면 목재와 보석에 대한 관세를 깎아 주겠다는 제의를 했다. 결국 2000년 1월, 태국정부는 디다노신에 대한 강제실시 계획을 철회했다. 그러나 태국의 NGO와 에이즈환자단체들은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사와 태국지적재산권부의 유치하고 비상식적인 장난질을 폭로하면서 정면 대응했다. 스스로 강제실시권을 청구하고,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사와 태국지적재산권부(DIP)를 상대로 특허법위반소송과 바이덱스에 대해 특허권무효소송을 제기했다. 태국지적재산권부(DIP)는 애초에 디다노신5~100mg에 대해서만 특허를 승인해주었는데, 몇 년 후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사는 태국지적재산권부(DIP)에 함량제한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태국지적재산권부는 특허에 해당하는 함량을 명기하지 않음으로써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사의 디다노신 제조권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디다노신은 미국립보건연구소(NIH)에서 발명되었고, 바이덱스는 디다노신에다 제산제를 혼합한 것이기 때문에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사가 새로운 발명을 한 것이 아니었다. 결국 2002년. 10월 태국 법정은 디다노신5~100mg에 대해서만 특허권이 있다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제 3자가 100mg이상의 디다노신을 제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판결로 인해 태국 국영제약사(GPO)는 125, 150, 200mg의 디다노신을 제조하겠다고 발표했다(125mg 한 알 당 약 45센트). 그러나 이 판결에 대해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사는 불복하였다. 두 소송을 둘러싼 싸움은 지속되었는데, 2004년 2월 17일 결국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사는 “태국민중에게 특허권을 바친다”고 말함으로써 태국 국영제약사GPO는 바이덱스보다 훨씬 싼 가격으로 디다노신을 자체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태국의 에이즈환자들은 스스로 6~70만 명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에이즈를 치료할 때 1차 요법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 중 한 가지가 스타부딘+라미부딘+네비라핀의 병용요법이다. 삼제병용요법에 사용하는 에이즈치료제의 복용법은 복잡하고 개수가 많다. 어린이를 비롯한 많은 에이즈환자들이 매일, 하루 몇 차례씩, 복용법도 다르고 개수도 많은 치료제를 잘 챙겨서 복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복용법을 간편하게 하기위해 캡슐 한 개에 세 가지 약물을 포함시키는 방법이 기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면 스타부딘, 라미부딘, 네비라핀을 개발한 제약사는 각각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 글락소스미스클라인, 베링거인겔하임이고, 이들 제약사는 각각의 치료제에 대한 특허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시플라사와 헤테로사는 이 복합제를 싼 가격으로 공급하고 있는데, 이는 2005년 이전까지 인도에 물질특허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특허제도로 인해 에이즈환자는 간편한 복용법을 차단당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이 특허로 인한 약가이다. 2000년 8월 기준 스타부딘 + 라미부딘 + 네비라핀의 연간 환자 당 비용을 비교해보면 오리지널 의약품(특허의약품) 비용은 10,439달러(약 1,043만원)이고, 브라질에서 공급한 제네릭 의약품의 비용은 2,767달러(약276만원)였다. 세상에서 가장 약값이 비싼 미국에서는 약 3,650만원이 든다. 2001년 1월 오리지널 의약품을 공급하는 초국적 제약사는 브라질의 제네릭 의약품만큼 파격적인 가격인하를 하였다. 그리고 2001년 2월에 인도제약사 시플라가 350달러에 공급하였고, 2003년 4월 인도제약사 헤테로가 201달러에 공급하는 등 제네릭 경쟁이 지속되면서 2005년 2월기준 오리지널 의약품 비용은 562달러(약56만원), 헤테로사의 제네릭 의약품 비용은 168달러(약16만원)로 인하되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실제 생산비용이 168달러가 안되는데 10,439달러 즉 약 62배나 비싸게 팔 수 있는 특허의 위력이다. 그리고 4년간 경쟁을 통해 오리지널 의약품 비용은 약 18배 인하되었고, 제네릭 의약품도 약 16배 인하되었다. [%=사진2%] FTA에 포함된 제약자본의 장난질 엄청 돌아왔다. 태미FTA와 의약품에 관한 얘기를 해보자. 미국은 앞서 체결한 호주, 싱가폴, 칠레, 중앙아메리카와의 FTA에서 약간의 가감이 있을 뿐 거의 똑같은 지적재산권 보호를 요구하고 있다. 태미FTA 6차 협상에서 공개된 지적재산권 조항은 중앙아메리카나 페루보다 더 강화된 요구라는 평가를 받는다.5) 앞서 말했듯이 특허보호기간은 특허출원 후 20년 이상의 독점기간이다. 미국과 미 제약자본은 특허보호기간을 30년으로 늘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교묘하게 다른 방법을 이용한다. 제약회사가 특허출원신청을 하면 특허청(혹은 지적재산권부)은 심사를 해서 특허를 승인해준다. 그리고 의약품은 안전하고 효과가 좋다는 것을 인정받아야 판매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안전성, 유효성 심사를 받게 된다. 즉 신약을 개발해서 판매를 하려면 특허출원 후 특허청과 식품의약품안전청과 같은 곳에서 두 차례의 시험을 거쳐야 한다. 미 제약자본은 이 두 차례의 시험기간에 대해 보상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특허심사기간에 대해 4년 이상, 의약품의 판매승인을 받기위한 심사기간만큼 특허기간을 연장해달라는 얘기다. 미국은 미제약사의 독점기간을 연장시키기 위한 장난질 중 다른 하나로 정보배타권을 요구한다. 의약품의 판매승인을 받을 때 제출하는 안전성, 유효성에 대한 정보를 5년간 배타적으로 보호하라는 것이다. 태미FTA나 CAFTA의 경우.6) 브랜드 의약품이 세계 어느 곳에서 판매 승인되더라도 브랜드제약사에게 5년간의 정보배타권을 보장해야한다. 만약 A제약사가 미국시장에 신약B를 시판하고 온두라스에는 시판하지 않았을지라도 온두라스는 5년간 신약B의 제네릭(카피 약)을 승인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5년 후 A제약사가 온두라스에 B의약품을 시판한다면 그 후 5년간 B의약품에 대한 정보배타권을 보장해야한다. 따라서 온두라스는 B의약품의 정보배타권을 A제약사에게 10년간 보장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B의약품보다 싼 제네릭(카피약)을 복용하기위해 환자는 10년간 더 기다려야한다. 정보배타권은 오리지널제약사의 독점기간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새로운 화합물이 아닌 기존 의약품의 화학구조를 약간 변형시키거나 약의 용도와 용법을 바꾸는 등의 방법으로도 특허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 포함되어있다. 이미 알려진 생산품을 사용하는 방법이나 새로운 사용에 대해서도 특허를 승인해야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국가에서 현재도 허용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예를 들면 릴리 사가 판매하고 있는 우울증 치료제인 ‘푸로작’은 2001년 8월에 특허가 만료될 예정이었다. 그러자 릴리 사는 푸로작이 여성의 월경증후군에 효과가 있다고 발표하면서 ‘세라팜’이라는 상품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동일한 화합물이지만 새로운 치료용도를 발견했기 때문에 ‘세라팜’은 2007년까지 특허를 연장 받게 되었다..7) 지도부딘(AZT)은 원래 미국에서 항암제로 개발되었으나 실험 결과 부작용이 나타나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인데, 나중에 에이즈 치료에 효과가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를 영국 웰컴사가(현재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 에이즈 치료제로 용도 특허를 받았다. 또 다른 예로 골다공증환자는 골다공증치료제와 함께 칼슘을 처방받기도 하는데, 유유산업이 판매하고 있는 복합신약 맥스마빌정은 알렌드로네이트와 칼시트리올을 혼합시킨 것이다. 기존에 있던 성분 두 가지를 혼합함으로써 칼슘을 따로 먹어야하는 번거로움을 덜게 되었다는 극찬(?)을 받으며 2005년 한국신약대상을 받았고 특허청으로부터 100대 특허제품상을 받았다.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사의 바이덱스를 싸게 먹을 수 있도록 태국국영제약회사와 태국의 에이즈환자들이 강제실시를 청구했었다. 한국에서도 몇몇 사회단체들이 백혈병치료제 글리벡에 대해 강제실시를 청구했었다. 그러나 이것도 불가능해진다. 태미FTA에서 미국은 정부이외에는 강제실시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것마저도 공공의 비상업적 사용, 국가비상사태나 응급상황, 반 경쟁행위를 시정하기 위한 것으로 제한한다. 최근 중앙아메리카와 안데스의 개발도상국과의 협상에서 미국은 FTA 협상안에서 강제실시권을 제한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미국은 미제약사의 특허로 인한 독점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강제실시를 완벽히 제한하기위해 태국과 한국에서는 반드시 강제실시를 제한하려 할 것이다. 아니면 교묘하게 FTA 협상문에는 포함하지 않되 side letter에다 언급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미국은 특허로 모든 것을 판단하도록 요구한다. 의약품의 판매승인은 그 약이 안전하고 효과가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미국은 식품의약품안전청 같은 정부기구에서 안전하고 효과적인 의약품을 환자가 복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주 임무보다 특허권자의 사익을 먼저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즉 태국 의약품관리기구는 특허권자의 소송이 없을 때에만 제네릭의약품(복제의약품)의 판매를 승인해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장 비상식적인 장난질은 세계무역기구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WTO TRIPS)에서도 금지하고 있는 동물, 식물 뿐 아니라 인간이나 동물에 이용하는 진단, 치료, 외과적 과정을 특허화하라고 요구한다. 미국정부와 미제약자본의 요구는 유치하고 비상식적이고 교묘하고 끝이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조짐은 벌써 진행되고 있다. 태국국영제약회사는 지도부딘+라미부딘 혼합제인 GPO-VIR를 한 코스 당 1500바트에 공급하고 있다. 반면 영국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콤비드를 8340바트에 공급하고 있다.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은 태국에서 1997년 10월에 지도부딘+라미부딘 혼합제 컴비드에 대해 특허출원을 신청했지만 에이즈환자들의 강력한 반대 때문에 허여되지 않았다(한국에서는 컴비비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컴비드는 새로 개발된 약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성분을 혼합한 것이기 때문에 혁신성이 없고 특허대상이 될 수없다고 환자들은 주장했다. 영국정부도 같은 이유로 컴비드의 특허를 거절했다. 태국 지적재산권부는 최근 컴비드의 특허를 허용하려고 한다. 태미FTA 지적재산권 보호조항에는 컴비드처럼 구성상의 약간의 변화에도 특허화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콤비드의 특허화는 태미FTA의 서막을 열고 있는 것이다. 태국보다 기술발전수준이 더 높은 한국의 경우에는 태국보다 더 강화된 지적재산권 보호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는 태국민중들보다 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날로 교묘해지고 비상식적으로 변해가는 제약자본의 장난질에 제대로 딴지를 걸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American Breakfast'가 아니다. [%=사진3%] 1)2002년 10월, 제 10회 APEC정상회의를 기해 부시대통령은 각 아세안 국가들과 FTA를 체결할 목표로 아세안 사업계획(Enterprise for ASEAN Initiative: EAI)를 발표했다. 부시대통령은 ASEAN에서의 거점국으로서 싱가폴과 FTA를 체결하였고, 미-싱가폴FTA를 기본형태로 하여 ASEAN국가들과의 FTA를 추진하고 있다. 본문으로 2)2005년 9월 5차 협상에서 태국은 미국 측의 주장을 적극 수용해 금융서비스 개방, 지식재산권 보호 및 FTA 협정에 노동과 환경조항을 포함할 것 등에 동의하였음. 홍수연(세계지역연구센터 동서남아팀 연구원), 「미․태국 제6차 FTA 협상의 성과와 전망」,『 KIEP 세계경제초점』, 2006. 1. 18 본문으로 3)태국에서 가장 높다는 방콕과 푸켓의 최저임금은 하루에 165바트(약 5000원)이다(2001년). 본문으로 4)특허권은 독점적 권리이지만, 개발자의 이익과 사회발전간의 균형을 위한 방법 중 하나로써 국가비상사태, 응급상황,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경우 등에 대해서는 특허권자외의 제 3자가 특허권을 이용할 수 있는 권리이다. 즉 강제실시권이 허락되면 BMS 외의 제 3자가 디다노신을 생산, 판매할 수 있다. 본문으로 5)Brook K. Baker, Health GAP. U.S. IPR Proposals for US-Thai FTA Worse than Feared. Feb. 1, 2006 본문으로 6) Robert Weissman. Essential Action. DYING FOR DRUGS: HOW CAFTA WILL UNDERMINE ACCESS TO ESSENTIAL MEDICINES. 2004. 3 본문으로 7) http://www.washtonpost.com/wp-dyn/articlew/A17664-2001Apr28.html 본문으로

  • 2006-04-19

    몰락을 향한 미국의 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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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 핵문제의 본질과 반미반전 투쟁의 과제 최근 이란의 핵문제로 인해 중동 지역에 새로운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4월 11일 이란이 발전용 농축 우라늄 생산에 성공했으며 이로써 세계 핵국가 대열에 오르게 됐다고 선언했다. 또한 그는 4월 13일 “우라늄 농축 중단 요구를 거절한다”고 밝혔다. 이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14일 “이란이 국제사회의 우라늄 농축 중단 요구를 거절한다면 무력 사용을 허용토록 한 유엔 헌장 7조의 규정을 통해 이란을 강하게 조치해야한다”고 말했으며 미국 언론에서는 연일 이란에 대한 군사공격 임박설을 보도하고 있다. 이로써 수년간 지속된 이란 핵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란 핵문제의 경과 미국은 이란의 핵개발 과정에 항상 개입해왔다.1960~70년대, 미국은 이란에 원자력 기술을 공급했다. 그러나 이란과 미국과의 마찰이 격렬해지면서 미국은 지원을 중단했다. 그러던 중 2002년 이란의 한 반체제단체가 이란 내 비밀 핵시설이 존재한다고 폭로하였고, 미국은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려 한다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에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3차례에 걸쳐 사찰을 실시했다. 같은 해 9월, IAEA는 ‘이란에서 보고되지 않은 수 개의 핵물질과 활동을 발견했으나, 이란이 핵확산방지조약(NPT)을 위반하지는 않았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이란은 우라늄 농축ㆍ재처리 활동의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였고, 미국과 계속 공방을 벌여 왔다. 그리고 2006년 4월 이란은 ‘발전용 우라늄 농축 생산’에 성공했다고 선언하였다. 이란의 주장은 현재까지 IAEA의 사찰을 받은 결과 NPT를 위반하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으며 NPT 회원국으로서 평화적 핵을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란의 주장은 미국과 계속 갈등을 빚었는데, 미국은 이란이 결코 핵을 평화적으로만 이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의 강경한 태도와 강경보수파로 분류되는 이란의 새 대통령 아흐마디네자드의 강경한 대외전략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사태의 본질 -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과 이란에 대한 고립 정책 미국은 냉전 이후 새로운 위협으로 테러리즘,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독재 국가들의 존재 등을 꼽으며 그 대표적인 국가로 이라크, 이란, 북한, 리비아, 쿠바 등을 지목했다. 그리고 그러한 위협을 저지하기 위하여 핵을 포함한 선제공격을 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혀 왔다. 이러한 군사 전략에 기초하여 미국은 이란을 테러리즘에 대한 강력한 지원국으로 규정했다. 이로써 이란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비정상적인 국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러한 새로운 군사전략을 실현하는 과정은 세계 민중들의 무한한 고통을 동반한다.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할 것이라는 ‘혐의’를 근거로 침공당하여 현재까지 지속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이라크 민중들의 현실을 보라. 미국은 이란, 이라크 등 중동 국가들에 대한 가혹한 보복 조치로 20년 가까이 각종 외교적-경제적 봉쇄를 시도해 왔는데, 이것이 중동 민중들의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 이란은 동쪽과 서쪽 국경에서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군대인 미군을 마주하고 있다. 동쪽은 아프가니스탄이며 서쪽은 이라크이다. 이 두 나라는 미국의 침공으로 정권이 붕괴되는 경험을 치렀고, 여전히 수십만 명의 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또한 미사일 사정권 내에 위치한 이스라엘과 인도, 파키스탄은 NPT에 가입하지 않은 채 여전히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결국 이란이 현재로선 핵무기 개발은 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자국 방위론을 내세우며 결국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은 있다. 이것이 이란 핵문제의 진실이다. 평화적인 핵 이용에 대한 권리는 과연 존재하는가 이란과 미국 사이의 쟁점은 단 한가지,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다. 이란은 이미 IAEA의 사찰을 통해 평화적 핵 이용을 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이란은 테러 지원국이며 평화적 핵 이용이라는 것은 결국 기만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평화적인 핵 이용에 대한 권리는 존재하는가? 우라늄 원광을 원자력 연료로 이용하기 위해선 반드시 우라늄 농축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단 우라늄 농축이 되면 이것은 곧장 우라늄 폭탄으로 제조 가능하다. 또한 우라늄 연료를 사용한 후 발생하는 추출물로 플루토늄 폭탄 제조도 가능하다. 전력 생산을 위한 평화적 핵 이용과 인류를 절멸시키게 될 핵무기 개발 과정은 기술적으로 동일한 과정이다. 핵이 전력 생산에 이용되는 것과 가공할만한 무기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동전의 양면인 상황에서 평화적 핵 이용에 대한 증거를 찾고 있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핵무기 보유를 통한 외교전술이 평화를 보장할 수는 없다. 핵경쟁을 통한 세력균형은 결코 평화를 약속하지 못한다. 일례로 인도-파키스탄 간의 군사적 대결이 지속되었을 때 서로 핵무기를 쓰겠다는 엄포를 놓았던 적이 있다. 수천만 명의 민중들을 절멸시킬 협박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 민중의 생존에 대한 권리는 무참히 짓밟혔다. 이러한 상황은 핵무기를 보유한 후라면 언제든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핵무기를 보유를 통한 자국 방어와 외교 전술은 해당국의 민중들의 삶과 권리를 지켜주기는커녕 언제라도 파멸로 치달을 수 있는 가능성만을 갖게 될 뿐이다. 또한 이는 미국 등 강대국의 핵무기 보유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해주게 되는 것이다. 핵경쟁은 결국 지속적인 전쟁 위협만을 조장할 뿐이며 평화체제 구축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사진1%] 이란 핵문제 해결과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반미-반전-반핵 투쟁 최악의 시나리오는 미국이 실제로 이란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핵무기’를 주요 수단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이란 지하시설을 파괴하는 용도로 개발된 것이 바로 ‘초정밀 지하관통 핵무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하시설을 파괴하는 동시에 지상에 심각한 낙진을 유발하고 지반을 붕괴시키게 되는데, 결국 이란 민중 수만 명이 한꺼번에 학살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 후 미국은 냉전 시대에는 그 사용처가 불분명했던 핵무기의 사용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며 최소한의 합의인 NPT 역시 실질적으로 폐기처분될 것이다. 그리고 서구에 대한 테러는 오히려 급증할 것이 분명하고 테러의 주요 수단 역시 ‘핵무기’가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모든 측면에서 미국의 이란 공격은 전세계 민중들에게 최악의 재앙이다. 현재의 사태에 가장 커다란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히도 미국이다. 미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그것을 언제라도 사용하겠다고 공언하는 마당에 평화에 대한 권리는 언제라도 짓밟힐 수 있다. 또한 미국이 일방적인 핵공격을 전제하고 있는 한 전 세계적인 핵 경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량한 국가는 다름 아닌 미국이다. 민중이 평화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폭력적 질서에 저항해야 하며 핵을 포함한 선제공격 전략을 폐기하도록 투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미 이라크 전쟁을 경과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세계 반전운동이 앞장서야 한다. 세계 반전운동은 미국의 호전적인 군사전략을 폐기시키고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 지역의 미군이 즉각 철수할 것을 주장해야 한다. 또한 이란에 대한 공격을 반대하고 중동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또한 핵무기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확보해야 한다. 자국의 방위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유일무이한 현실적 대안으로 활개를 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국 방위론이 결국 자국의 민중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핵무기 보유를 통한 군사 강국으로의 발돋움을 꿈꾸는 경우가 간혹 있고 언론이나 여러 매체들을 통해 은연중에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유포되고 있다. 그러나 핵무기 보유를 통해 무엇인가 해보려는 꿈은 결국 공동의 절멸을 예고하는 것이며 새로운 위기를 조장할 뿐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는 결국 전 민중이 누려야할 평화에 대한 권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결국 사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 민중이 평화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스스로 미국-전쟁-핵무기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 2006-04-19

    몰락을 향한 미국의 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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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 핵문제의 본질과 반미반전 투쟁의 과제 최근 이란의 핵문제로 인해 중동 지역에 새로운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아흐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4월 11일 이란이 발전용 농축 우라늄 생산에 성공했으며 이로써 세계 핵국가 대열에 오르게 됐다고 선언했다. 또한 그는 4월 13일 “우라늄 농축 중단 요구를 거절한다”고 밝혔다. 이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14일 “이란이 국제사회의 우라늄 농축 중단 요구를 거절한다면 무력 사용을 허용토록 한 유엔 헌장 7조의 규정을 통해 이란을 강하게 조치해야한다”고 말했으며 미국 언론에서는 연일 이란에 대한 군사공격 임박설을 보도하고 있다. 이로써 수년간 지속된 이란 핵문제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이란 핵문제의 경과 미국은 이란의 핵개발 과정에 항상 개입해왔다.1960~70년대, 미국은 이란에 원자력 기술을 공급했다. 그러나 이란과 미국과의 마찰이 격렬해지면서 미국은 지원을 중단했다. 그러던 중 2002년 이란의 한 반체제단체가 이란 내 비밀 핵시설이 존재한다고 폭로하였고, 미국은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하려 한다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에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3차례에 걸쳐 사찰을 실시했다. 같은 해 9월, IAEA는 ‘이란에서 보고되지 않은 수 개의 핵물질과 활동을 발견했으나, 이란이 핵확산방지조약(NPT)을 위반하지는 않았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이란은 우라늄 농축ㆍ재처리 활동의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였고, 미국과 계속 공방을 벌여 왔다. 그리고 2006년 4월 이란은 ‘발전용 우라늄 농축 생산’에 성공했다고 선언하였다. 이란의 주장은 현재까지 IAEA의 사찰을 받은 결과 NPT를 위반하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으며 NPT 회원국으로서 평화적 핵을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란의 주장은 미국과 계속 갈등을 빚었는데, 미국은 이란이 결코 핵을 평화적으로만 이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의 강경한 태도와 강경보수파로 분류되는 이란의 새 대통령 아흐마디네자드의 강경한 대외전략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사태의 본질 -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과 이란에 대한 고립 정책 미국은 냉전 이후 새로운 위협으로 테러리즘,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독재 국가들의 존재 등을 꼽으며 그 대표적인 국가로 이라크, 이란, 북한, 리비아, 쿠바 등을 지목했다. 그리고 그러한 위협을 저지하기 위하여 핵을 포함한 선제공격을 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혀 왔다. 이러한 군사 전략에 기초하여 미국은 이란을 테러리즘에 대한 강력한 지원국으로 규정했다. 이로써 이란은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비정상적인 국가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이러한 새로운 군사전략을 실현하는 과정은 세계 민중들의 무한한 고통을 동반한다.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할 것이라는 ‘혐의’를 근거로 침공당하여 현재까지 지속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이라크 민중들의 현실을 보라. 미국은 이란, 이라크 등 중동 국가들에 대한 가혹한 보복 조치로 20년 가까이 각종 외교적-경제적 봉쇄를 시도해 왔는데, 이것이 중동 민중들의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 이란은 동쪽과 서쪽 국경에서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군대인 미군을 마주하고 있다. 동쪽은 아프가니스탄이며 서쪽은 이라크이다. 이 두 나라는 미국의 침공으로 정권이 붕괴되는 경험을 치렀고, 여전히 수십만 명의 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또한 미사일 사정권 내에 위치한 이스라엘과 인도, 파키스탄은 NPT에 가입하지 않은 채 여전히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고 있다. 결국 이란이 현재로선 핵무기 개발은 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자국 방위론을 내세우며 결국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은 있다. 이것이 이란 핵문제의 진실이다. 평화적인 핵 이용에 대한 권리는 과연 존재하는가 이란과 미국 사이의 쟁점은 단 한가지,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한 문제다. 이란은 이미 IAEA의 사찰을 통해 평화적 핵 이용을 할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이란은 테러 지원국이며 평화적 핵 이용이라는 것은 결국 기만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평화적인 핵 이용에 대한 권리는 존재하는가? 우라늄 원광을 원자력 연료로 이용하기 위해선 반드시 우라늄 농축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일단 우라늄 농축이 되면 이것은 곧장 우라늄 폭탄으로 제조 가능하다. 또한 우라늄 연료를 사용한 후 발생하는 추출물로 플루토늄 폭탄 제조도 가능하다. 전력 생산을 위한 평화적 핵 이용과 인류를 절멸시키게 될 핵무기 개발 과정은 기술적으로 동일한 과정이다. 핵이 전력 생산에 이용되는 것과 가공할만한 무기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동전의 양면인 상황에서 평화적 핵 이용에 대한 증거를 찾고 있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핵무기 보유를 통한 외교전술이 평화를 보장할 수는 없다. 핵경쟁을 통한 세력균형은 결코 평화를 약속하지 못한다. 일례로 인도-파키스탄 간의 군사적 대결이 지속되었을 때 서로 핵무기를 쓰겠다는 엄포를 놓았던 적이 있다. 수천만 명의 민중들을 절멸시킬 협박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 민중의 생존에 대한 권리는 무참히 짓밟혔다. 이러한 상황은 핵무기를 보유한 후라면 언제든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핵무기를 보유를 통한 자국 방어와 외교 전술은 해당국의 민중들의 삶과 권리를 지켜주기는커녕 언제라도 파멸로 치달을 수 있는 가능성만을 갖게 될 뿐이다. 또한 이는 미국 등 강대국의 핵무기 보유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해주게 되는 것이다. 핵경쟁은 결국 지속적인 전쟁 위협만을 조장할 뿐이며 평화체제 구축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사진1%] 이란 핵문제 해결과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반미-반전-반핵 투쟁 최악의 시나리오는 미국이 실제로 이란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핵무기’를 주요 수단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이란 지하시설을 파괴하는 용도로 개발된 것이 바로 ‘초정밀 지하관통 핵무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하시설을 파괴하는 동시에 지상에 심각한 낙진을 유발하고 지반을 붕괴시키게 되는데, 결국 이란 민중 수만 명이 한꺼번에 학살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 후 미국은 냉전 시대에는 그 사용처가 불분명했던 핵무기의 사용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며 최소한의 합의인 NPT 역시 실질적으로 폐기처분될 것이다. 그리고 서구에 대한 테러는 오히려 급증할 것이 분명하고 테러의 주요 수단 역시 ‘핵무기’가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모든 측면에서 미국의 이란 공격은 전세계 민중들에게 최악의 재앙이다. 현재의 사태에 가장 커다란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히도 미국이다. 미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그것을 언제라도 사용하겠다고 공언하는 마당에 평화에 대한 권리는 언제라도 짓밟힐 수 있다. 또한 미국이 일방적인 핵공격을 전제하고 있는 한 전 세계적인 핵 경쟁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량한 국가는 다름 아닌 미국이다. 민중이 평화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폭력적 질서에 저항해야 하며 핵을 포함한 선제공격 전략을 폐기하도록 투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미 이라크 전쟁을 경과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세계 반전운동이 앞장서야 한다. 세계 반전운동은 미국의 호전적인 군사전략을 폐기시키고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 지역의 미군이 즉각 철수할 것을 주장해야 한다. 또한 이란에 대한 공격을 반대하고 중동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또한 핵무기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확보해야 한다. 자국의 방위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유일무이한 현실적 대안으로 활개를 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국 방위론이 결국 자국의 민중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핵무기 보유를 통한 군사 강국으로의 발돋움을 꿈꾸는 경우가 간혹 있고 언론이나 여러 매체들을 통해 은연중에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유포되고 있다. 그러나 핵무기 보유를 통해 무엇인가 해보려는 꿈은 결국 공동의 절멸을 예고하는 것이며 새로운 위기를 조장할 뿐임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이는 결국 전 민중이 누려야할 평화에 대한 권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결국 사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 민중이 평화에 대한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스스로 미국-전쟁-핵무기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 투쟁에 나서는 것이다.

  • 2006-04-15

    미국 이민개혁 관련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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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4-13

    [성명]프랑스 반CPE투쟁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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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달 반 동안 프랑스 전역을 뒤흔든 CPE(최초고용계약) 법안 반대 투쟁에 정부가 항복하여 지난 10일 법안을 철회하였다. 이는 노동불안정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여 끈질기게 연대투쟁을 전개한 학생과 노동자, 프랑스 민중의 승리다. 프랑스 노동자와 학생들은 11일 '승리의 행진'을 벌였다

    애초 도미니크 드빌팽 총리는 실업률을 낮추겠다는 명분으로 지난 1월 26세 미만 청년노동자들에 대해 최초 고용 2년 내에 해고를 자유롭게 하는 CPE를 내놓았으나 이는 고용불안을 통해 비정규직 일자리를 확대하려는 신자유주의 정책이었다. 이에 대해 대학생, 고등학생, 노동계를 중심으로 한 반대운동 진영에서는 2월 7일 1차 행동의 날을 시작으로, 3월 7일, 3월 18일, 3월 28일, 4월 4일 등 5차례에 걸친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와 파업, 대학점거 등을 조직하면서 CPE 철회투쟁을 벌였다. 특히 3월 28일과 4월 4일은 노동계의 파업 물결이 더해져 ‘검은 화요일’이라고 불릴 정도로 투쟁이 고조되었으며 3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CPE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였다.

    다급해진 우파정부와 집권당이 ‘수습기간을 1년으로 줄이고 해고 설명의무 부과하는’ 수정안을 내놓았지만 시위대는 CPE 철회요구를 밀어붙였다. 법안 철회 발표 이후에도 학생과 노동계는 새로운 승리로 나아갈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CPE와 동일한 내용으로서, 20인 이하에 적용되는 CNE(신고용계약) 폐지도 요구하고 있다.

    프랑스 반CPE 투쟁 승리는 신자유주의의 실패라는 의미와 함께 한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민중들에게 많은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전체 노동자, 미래의 노동자를 비롯하여 전 국민들에게 노예로 살기를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는 투쟁과 저항이 가능하고, 승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자와 학생 그리고 모든 민중이 연대하여 거리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국내에서도 CPE법안보다 훨씬 더 파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비정규직법안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비정규직법안은 기간제, 파견제를 맘대로 쓸 수 있게 하여 비정규직을 확대 양산하고 노동기본권을 보장하지 않는 ‘노동자학살법’이다. 전 민중의 단결과 연대 투쟁으로 비정규악법은 반드시 철폐시키도록 전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 2006-04-05

    4차 카이로 국제회의 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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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과 시오니스트 점령에 저항하는 국제 캠페인 4차 카이로 국제회의, 2006년 3월 23~26일 세계화, 제국주의, 시오니즘에 맞서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의 저항과 함께.. 최종 선언문 제국주의와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투쟁에 있어 중대하고 위험한 전개가 진행되는 시기에 4차 카이로 국제회의가 열리고 있다. 이라크에서는 미-영의 점령군과 그들의 앞잡이들에 저항하는 무장 저항이 계속 확산되고 있고 꼭두각시 정부는 점점 더 무력해지고 고립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점령군은 저항을 약화시키고 그 사태를 변화시키고 이미지를 훼손시키기 위해 수니와 시아 사이에 긴장을 부추기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시오니스트 군대가 날마다 학살을 하고 봉쇄함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지난 총선에서 투쟁과 저항을 선택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하마스의 승리는 시오니스트들과 미국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민중이 굴복하기를 바랬던 아랍 정권들에게도 고통스로운 교훈이었다. 팔레스타인 민중은 오늘날 중요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시오니스트들은 고립장벽을 계속 건설하고 있고 가자지구와 서안 도시들을 거대한 감옥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또한 그들은 팔레스타인 민중에 대한 공격과 범죄행위를 가속화하고 있다. 미국 행정부와 유럽의 동맹자들은 재정 원조를 끊어서 팔레스타인 민중을 굶주리게 하겠다고 위협하고 있고 아랍 정권들은 하마스 정부가 양보하도록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압력으로 강제하고 있다. 이 모든 강제는 저항을 무장해제시키고 시오니스트 정부를 인정하게 하고, 지난 20년간 팔레스타인 민중에게 아무것도 가져다 주지 못한 평화 프로세스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가해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민중은 투쟁을 지속할 것이고 하마스는 압력과 도전에 맞설 것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지지와 연대의 흐름, 특히 아랍과 무슬림 민중들의 지지와 연대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러한 과제를 아랍과 무슬림 민중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분리시켜서는 안된다. 아랍 정권들은 부패, 신자유주의 정책, 미국과 시오니스트 전략과 이해와의 동맹 등으로 인해 주요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정권들도 오늘날 그들의 정책과 억압에 대한 점증하는 분노와 마주하고 있다. 아마도 미국 헤게모니와 신자유주의 정책을 거부하는 라틴 아메리카 대중운동의 성공은 그것들(미 헤게모니와 신자유주의)의 지속불가능성과 우리의 적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역사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주요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미국 행정부는 이란과 시리아를 포함하여 전쟁을 확대하려는 위협을 하고 있다. 시오니스트들은 서안의 대부분과 예루살렘 전 지역을 집어삼킬 경계를 강제하려고 위협하고 있다. 그리고 아랍 정권들은 그들의 취약성에도 불구하고 탄압을 지속하고 워싱턴과 텔아비브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도전에 맞서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결책과 권고가 4차 카이로 국제회의에서 결의되었다. 이라크에 대하여 1. 미국과 시오니스트 점령에 맞서기 위해 아랍 세계에서 민중의 전략을 발전시킨다. 2. 미국과 영국 제품에 대한 보이코트를 활성화한다. 3. 전쟁을 확대(이란과 시리아)하려는 위협에 대해 저항한다. 4. 저항의 문화를 확산시키고 이라크 저항에 대한 포위를 깨뜨리며 주변 국가들이 정당한 이라크 저항을 지원하도록 호소한다. 5. 이라크 저항을 이라크 민중의 유일한 대표로 간주하며 이라크의 독립과 단결을 확실히 한다. 6. 점령의 희생자를 보조하고 도우며, 의약품과 다른 형태의 지원을 보내는 캠페인을 활성화한다. 이라크 저항 지원을 위한 위원회를 결성한다. 7. 이라크 점령에 저항하고 어떠한 다른 군대도 이라크에 보내는 것을 반대하는 정기적인 시위를 조직한다. 팔레스타인에 대하여 1. 시오니스트 국가 인정에 대하여 양보하지 않고, 모든 팔레스타인 세력들이 팔레스타인 민중의 이해와 그 국가적 단결을 보장하는 새로운 정치적 조직적 기초 위에서 PLO 재건에 대해 개최한 2005년 3월 카이로 회의의 결정을 활성화할 것을 호소한다. 2. 우리의 투쟁이 유대교가 아니라 시오니즘에 대한 투쟁임을 명확히 한다. 3. 국가적 요구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국경, 난민...) 4. 가자지구에서의 철수에도 불구하고 점령은 지속되고 있다. 5. 하마스는 저항정책을 지속하도록 위임받았다. 팔레스타인 세력들이 새로운 팔레스타인 정부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호소한다. 6. 저항 프로젝트를 후퇴시키지 않고 자살 공격을 비난하지 않는다. 7. 팔레스타인 저항 방식을 발전시킨다. 8. 시오니스트 국가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보이코트를 활성화한다. 9. 아랍과 무슬림 민중의 단순한 원조로부터 투쟁에의 실질적인 참여로 이동한다. 10. 팔레스타인 저항 지원을 위한 아랍 민중의 지원 프로젝트를 실시한다. 11. 저항에 대한 모든 형태의 연대를 활성화한다. 12. 아랍 평화 이니셔티브를 활성화하거나 그것에 로드맵을 부가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반대한다. 아랍 정부들에게 시오니스트 국가와 관계를 단결하고 팔레스타인 정부에 지원을 늘리도록 호소한다. 민주주의에 대하여 1. 변화를 위한 새로운 아랍 운동을 촉구한다. 2. 5월 25일을 이집트 민중과의 국제연대의 날로 한다. 3. 각기 다른 민주주의 운동 간에 모든 가능한 형태의 협력을 활성화한다. 4. 법률가, 언론인, 교수,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모든 정치세력을 포함하는 연대 위원회를 결성한다. 이란과 시리아에 대한 위협에 대하여 1. 이란과 시리아에 대한 미국의 위협 가속화에 대항하는 캠페인과 운동을 전개한다. 2. 저항을 지원하고 이란과 시리아에 대한 전쟁을 막는 국제 동맹을 결성한다. 3. 중동지역에서 미군기지를 제거하기 위해 대중적 압력을 행사한다. 4. 미국의 위협에 대항하여 이란과 시리아에 대한 국제연대의 날에 합의한다.(2006년 5월 6일) 5. 레바논 전국대회를 지지하고 시오니스트 점령에 저항하는 레바논 저항을 지지한다. 유엔안보리 결의안 1559호에 대한 미국과 서구의 해석에 반대한다. 마지막으로, 참가자들은 이전 무슬림형제단 사무총장이었던 요르단에 있는 압둘 마지드 주네이바트의 입국 거부를 강력히 비난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초청자에 대해 비자발급을 거부한 이집트 당국을 강력히 비난한다. Dr. Sattam Al-Qaoud Dr. Osama Matta Zanoun Dr. Hassan Al-Rabei Sheikh Majid Al-Qaoud Dr. Mohamed Al-Obeidy Dr. Salem Al-Azawi 참가자들은 전 세계에 걸쳐,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모든 반전 평화운동과 반 시오니스트 운동과 협력할 것을 결정하였고 각 국에서 정부에 대해 팔레스타인 정책을 변화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할 것을 호소하고 팔레스타인 민중의 민주적 선택을 지지한다. 마지막으로 조직위원회는 이러한 결의 이행을 점검하고 이를 5차 카이로 국제회의에 보고할 것을 요청받았다. 국제회의는 이란과의 연대 호소를 채택하였다. 이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전쟁을 막기 위한 국제적 행동 호소 4차 카이로 국제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단체, 기관, 개인들은 미 행정부와 그 동맹자들에 의해 전쟁위협을 받고 있는 이란 민중에 대해 연대를 표한다. 그리고 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를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하겠다는 결정을 표한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인도적 환경적 재앙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란에 대한 군사공격 준비에 대항하여 5월 6일에 국제행동을 호소한다. 따라서 국제행동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날 전쟁에 반대하여 시위하는 유럽운동과 4차 유럽사회포럼과 함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전쟁이 시작되면 우리는 이란에 폭격이 시작된 다음날 시위, 파업, 동맹휴업, 봉쇄를 포함하여 대규모 반전행동을 벌일 것을 호소한다. 이란에 대한 전쟁반대 ! 이란 민중과 연대 ! (*출처 : 국제반전운동 메일링리스트)

  • 2006-04-05

    볼리바리안 혁명과 대안세계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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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지난 1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개최된 다중심 세계사회포럼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 신자유주의적 금융-군사세계화에 대항하여 분출 중인 사회운동과 최근 잇따라 등장하고 있는 ‘좌파’ 정권의 관계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특히 이 논란의 중심에는 본 포럼을 직접 지원하며 미 제국주의에 맞서 역내 좌파정부와 사회운동이 단결할 것을 호소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위치했다. 지난 해 11월 아르헨티나 마르 델 플라타에서 열린 미주정상회의에 즈음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운동들은 ‘미주지역자유무역협정(FTAA)’ 체결 논의를 효과적으로 중단시켰는데, 당시 차베스 대통령은 정상회의장 안팎에서 ‘미주대륙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ALBA)’을 주장한 바 있다. 포럼의 마지막 날 행사로 열린 세계사회운동총회에서 사회운동들은 최근 들어 각 국에서 좌파 정권이 줄을 이어 등장하고 있는 현상이 남미 대륙에서 폭발하고 있는 자유무역, 군사주의, 사유화 정책에 반대하고, 자연자원과 식량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사회운동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세계사회운동총회가 ‘좌파 정권에 대한 정치적 자율성’과 ‘각국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도록 압박’하는 것을 (재)천명하며 논쟁은 일단락되었지만, 당초 세계사회포럼 원리헌장의 ‘정당 및 무장조직 배제 원칙’ 논란이 전진적으로 해소된 것은 아니다.1) 오히려 이러한 쟁점 이동은, 세계사회포럼의 원리헌장이 과거 라틴 아메리카의 좌익적 정당과 대중운동이 인민주의로 변질된 역사적 조건을 고려한 결과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하지만 역으로 ‘운동의 운동’ 또는 ‘공간’으로서 규정된 세계사회포럼이 이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실현해 나갈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 결과 세계사회포럼에 관한 복합적인 논란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는 세계사회포럼 자체의 전망을 둘러싼 논쟁을 넘어 이행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쇄신하기 위한 이론적·정치적 차원 전반의 기획을 요청하기 때문이다.2) 이에 오늘날 차베스-베네수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이행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쇄신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향후 대안세계화 운동의 전망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이 글은 우선 라틴 아메리카와 베네수엘라의 정치적·경제적 조건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도한다. 다음으로, 일종의 지역적·민족적 특수성으로서 제국주의의 지배와 인민주의적 전통의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사회운동의 출현과 대응, 변모를 살펴본다. 이 속에서 차베스 정권의 성격 및 ‘볼리바리안 혁명’의 특징을 분석하면서 대안세계화 운동의 진전을 위한 몇 가지 쟁점을 추출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의 정치학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유주의 정치이념이 안정적인 토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지배세력은 의회정치 대신 과두제적·권위주의적 지배체제에 의존했다. 동시에 사회주의나 급진주의를 표방했던 좌익적 사회운동은 폭압적으로 억압됐다. 그 결과 사회개혁과 하층계급의 사회적·정치적 통합은 권위주의적·위계적 분할과 포섭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빈번하게 출현하는 인민주의는 이러한 경제적·정치적 불안정을 표현한다. 사회경제적 불균등성과 극단적인 불평등은 인민주의의 조건이 되며 정치제도의 취약성은 ‘반정치의 정치’에 기여한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 사회운동의 출현과 변모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 자본주의의 변동에 대한 지역의 대응양상, 계급구조의 변화와 지배체제의 변동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주의적 전통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도시화와 제한적인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대의 뿌리 깊은 유산을 극복하지 못했다. 정치적 독립 이후에도 전통적인 토지귀족의 지배력은 지속되었고 독자적 군대를 보유하고 대사제이자 행정관의 역할을 하는 토지귀족이 지방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국적 차원에서는 대중적 참여를 제한하는 토지귀족의 ‘과두제적’ 의회제가 확립되었고, 국가는 지역 영주들의 연맹체로서 권위적·전제적 성격을 유지했다. 그런데 토지귀족의 자유주의는 민족적 통합이나 민주주의와는 대비되며, 이들은 영지를 중심으로 강력한 연고주의적 통치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며 라틴 아메리카의 종속 유형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쟁-세계시장의 붕괴-1차 상품 수출의 위기에 따라 브라질·멕시코·아르헨티나 등에서 경공업 중심의 초보적 수입대체 산업화가 시작됐다. 이와 함께 토지귀족의 지배력과 과두제적 픽망ㅔ〉?약화되었다. 또 국내시장, 국가, 도시의 팽창으로 연고주의라는 전통적인 정치적 통제방식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토지귀족은 새로운 부유층을 상류사회의 하층으로 포섭하는 한편, 기존의 정치제도와 정당은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도시의 중산층, 노동자, 빈민을 배제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전통적 인민주의는 대공황에서 2차 세계대전 동안 급속히 성장하여,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1940-50년대에 확립된 인민주의 정권은 미국의 ‘발전주의’가 본격적으로 이식되기까지 지속되었다. 1950년대 미국의 전략은 ‘자유 세계주의’라는 냉전의 틀 내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공산주의 세력을 봉쇄하는데 집중했다. 반면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지역 차원의 냉전 질서가 가시화되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는 상대화되었다. 라틴 아메리카 관료들은 미국에게 발전원조를 호소했지만 마셜플랜은 구상되지 않았고, 발전의 쇼케이스로 수출지향적 산업화가 지원된 아시아와 달리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주로 미국계 법인자본의 직접투자를 위한 우호적 조건 형성이 강조되었다. 이 시기에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주의는 국내외적인 정치·경제적 권력의 공백과 교착 상황에 대한 대응의 성격을 띤다. 인민주의는 기존의 발전전략과 통치구조에 대한 반대를 중산층, 노동자, 도시빈민들의 요구와 결합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이들은 새롭게 형성된 국내 산업자본가들과 노동자계급의 제휴를 형성하고 토지귀족과 타협함으로써 국내산업을 중심으로 한 민족적 발전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립하는 세력들 사이의 특수한 제휴형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대중적 동원이 추가되어야 했다. 즉 인민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세력 및 그와 결탁한 토지귀족 세력, 자유무역과 과두제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성장했다. 이들은 제국주의로 변질된 19세기 자유주의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영향을 받아 열정적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 감정을 동원하면서 민족적 갱생을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인민은 노동자·농민·빈민과 같은 계급적 범주를 초월한 유기체적 통일성으로 이상화된 주체였다. 그 결과 인민은 기존의 연고주의에서 배제된 도시 노동자, 프티 부르주아, 농촌 출신 이주자, 학생, 지식인, 사병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인민주의적 동원 과정에서 사회적 관계는 인격화되고 정치는 인민의 지도자와 적 사이의 투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인민주의는 결코 근본적인 변혁을 지향하지 않았다. 혁명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소유권과 생산관계의 변혁을 추구하지 않으며 토지귀족과 타협했다. 동시에 그들은 대중적 선거 과정에서 다양하고 이질적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독창적인 정치적·문화적 동원방식을 발전시켰다. 한편 인민주의는 자율적인 노동자운동을 억압하고 노동조합을 확대된 국가기구로 통합했다. 노조는 국가의 권위 하에서 자본가조직과의 기능적 조정을 통해 계급적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 위계적 질서 내에서 노동자 개인에게 고정된 지위를 제공하는 코포러티즘 기구로 전락했다. 노동자는 인민주의 정권에 대한 충성을 대가로 국가에 의해 승인된 틀 내에서 임금교섭과 복지혜택, 인정적인 사회적 지위와 선거권을 획득했다. 미국 헤게모니의 형성과 군부독재의 폭정 1950년대부터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해외직접투자가 거대하게 이뤄졌고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법인자본과 초민족화된 국내 부르주아지는 확고한 지위를 확립하기에 이른다. 이에 기초한 자본축적은 더 이상 인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울러 1960년대 초 라틴 아메리카 내외의 정치상황도 인민주의의 토대를 해체하는 요소였다. 1955년 반둥회의로 상징되는 비동맹운동의 확산과 1959년 쿠바혁명의 영향으로 민족적·민중적 발전의 요구가 증가되고 있었다. 인민주의의 틀을 벗어나려는 노동자와 농민의 저항도 증가하고 일부에서는 게릴라 무장 투쟁도 출현했다.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중반에 이르는 “동시적인 혁명의 고조”는 1940-50년대 인민주의와 비교할 때 새로운 중요한 특징을 반영한다. 첫째, 혁명적 고조는 이전 시기의 민족적 인민주의를 넘어 강력한 급진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포함했다. 둘째, 이들은 게릴라, 대중봉기, 총파업 등 의회 외부적 투쟁과 연계했다. 셋째, 이들은 이전의 프티 부르주아 선거주의자들과의 연합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넷째, 새로운 혁명적 운동이 중앙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연안 국가의 강탈적·권위적·자유주의적인 수출지향적 체제와 남아메리카의 인민주의적인 수입대체적 체제에 대해 동시에 도전했다. 다섯째, 혁명주의적 물결의 기원은 각국의 특수성에 기반했지만, 미국의 반봉기 전술에 대한 투쟁과 함께 특히 쿠바혁명에 의해 창안된 수렴점을 공통적인 혁명적 ‘참고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3) 이에 미국은 1961년 ‘진보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고, 사회주의 및 비동맹운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다. 전술적으로 워싱턴은 다중적 정책을 적용했다. 가령 ‘진보를 위한 동맹’을 통한 개량의 쟁취,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반봉기, 군사쿠데타 등 고도의 군사 전략, 해외 군대 파견과 군사적 원조, 프로그램의 이식 등이 그것이다. 혁명을 제국주의적으로 봉쇄하려는 이러한 노력에서 국내 프티 부르주아 선거 지도자들이 주된 역할을 수행되었다. 그러나 다중적 전술의 시기는 결국 군사적 선택이 우위를 점하며 막을 내리게 된다. 미국의 전술 변경은 혁명적 물결을 봉쇄하는 데 있어 민간 선거 체제와 개량에 대한 워싱턴의 의심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워싱턴은 일련의 군사 쿠데타를 후원하는 쪽으로 방향 선회하며 혁명세력의 부상을 제거하고 민족주의적-인민주의적 개량을 역전시켰다. 아울러 ‘혁명적·국제주의적’ 쿠바를 고립시키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 군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강화되었고 역내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동반하는 반공과 냉전의 논리가 확산되었다. 결국 좌파를 고무할 수 있는 인민주의 정부를 제거하기 위해 군부가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군부-반혁명-권위주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물론 아메리카에서 군부의 정치개입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다만 이 시기의 군사정부는 쿠데타 이후 토지귀족과 보수주의 정당에 권력을 이양한 1930년대와 달리, 수출주도 산업화라는 사회·경제적 전망 속에서 군사혁명위원회를 통해 장기 집권한다는 차별점이 있다. 또 미국은 군사정부를 관료적 능력과 기술적 역량을 갖춘 현대화의 주도세력으로 간주했다. 이 시기 군부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인민주의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군부는 민족경제를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개방하고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진출을 장려했다. 또 수출산업을 중심으로 급속한 경제발전과 현대화를 추진하고 노동자에 대한 수혜를 철회했다. 임금하락, 장시간노동, 노조탄압, 비공식부문 노동자·빈민에 대한 탄압은 자연스러운 산물이었다. 미국은 군사 독재 시기 동안 신자유주의적 경제를 위한 법적·이데올로기적·제도적 기초를 창조했다. 미국의 지배를 위한 정치·경제적 파라미터는 군사 정권이 새로운 대중적 사회-정치적 운동이 부상하는 1980년대 초 쇠퇴할 때까지 유지된다. 그러나 미국 및 유럽의 제국주의는 단순히 군사적 지배만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인민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사회주의 정당, 즉 ‘시장 해법’을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정치적으로 추방했다. 제국주의 세력은 대중들이 군사 정권을 위기로 몰아붙일 때 이들이 정치에 복귀할 경우를 대비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치하는 한편 이들을 대체할 미래의 선거 정당을 후원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선거주의적인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의 복귀가 제국주의적-군사 국가가 기초한 신자유주의적 파라미터 내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前인민주의, 前사회주의, 前민족주의 선거 엘리트들은 반독재 운동을 해체하고 오히려 선거 정치의 물꼬를 텄다. 군부가 신자유주의의 기초를 닦았다면 민간 선거주의자들은 모든 전략 부문에 대한 집단적인 사유화, 총체적인 탈규제, 영속적인 부채 지불, 부의 유출과 역진 등을 구조화했다. 외채위기와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 한편 1980년대에 이르러 수출주도 산업화의 한계들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와 달리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제한적이었으며 오히려 역내에서 활동하는 초민족적 법인자본을 후원하는 것이었다. 또 역내 국가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외채에 과도하게 의존한 결과 높은 경제적 비용을 내포하고 있었다. 결국 유가상승과 고금리·고달러로 인해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외채위기가 발생하고 생산마비, 자본도피, 대중적 소요가 발생했다. 1982-83년 외채위기 이후 라틴 아메리카는 만성적 경제위기에 진입했다. 미국은 1985년 ‘베이커 플랜’을 통해 재정긴축을 전제로 외채의 상환시기를 재조정할 것을 제안하고 수출을 통한 외환확보와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무역자유화를 권고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이 대중적 불만과 사회적 소요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우려 속에 경제개혁의 정치적 조건을 둘러싼 논쟁이 개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기구의 변화와 민주화 운동세력의 분할, ‘책임있는’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지원 등이 모색되었다. 즉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위해 군부의 퇴진과 자유주의 또는 중도좌파의 집권이 권고된 것이다. 이것은 곧 민주주의에 대한 관리적 관념의 출현을 의미한다. 군사정부에서 이뤄진 경제적 자유화는 정치적 자유화를 필요로 하고 정치적 자유화는 민주화와 동일시되거나 경제적 위기를 관리할 유일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민주주의는 선거와 같은 절차와 규칙으로 환원되거나 탈정치화되고 순수한 기술적 문제로 파악된다. 동시에 민주적 민간정부의 책임성이 강조되고 문민화의 구체적 경로로서 군부와 책임있는 야당의 협상이 권장되기에 이른다. 아르헨티나(1983년), 칠레(1990년) 등 군사정부의 퇴진 또는 문민정부로의 ‘협상된 이행’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4)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대다수 국가들은 외채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협상된 이행’에도 성공하지 못한다. 무능력하고 부패한 보수정당, 분명한 정치적 전망이 결여된 중도좌파 등 군부의 퇴진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대의제로 동원할 수 있는 정당의 역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셈이다. 문민화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통치구조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거의 의미는 자연스레 축소되었다. 기술관료들은 국제금융기구의 정책지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경제엘리트와 정치엘리트의 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편 경제위기는 사회적 불평등과 노동자들의 이질성을 심화하면서 노동자운동의 자율성을 침식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가치절하가 이뤄지고, 정치는 부패한 직업정치가와 귀족집단의 이기적인 게임으로 간주되었다. 정치엘리트와 노조 등 기존제도의 수혜자에 대한 대중적 불만이 누적되고 ‘원한의 정치’가 득세하게 된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외채위기를 거쳐 금융세계화로 포섭되는 과정에서 군부와 전통적 인민주의 세력은 무능을 노정한다. 기존의 정당들은 신자유주의를 추진함으로써 내적 위기를 경험하고 대중적 토대를 상실했다. 또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당들도 독자적인 이념을 상실하고 내적 분할을 경험했다. 결국 기존의 어떤 정치세력도 분명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를 등에 업고 새로운 인민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하기에 이른다(아르헨티나의 메넴, 브라질의 콜로, 페루의 후지모리, 멕시코의 살리나스, 베네수엘라의 페레즈). 새로운 인민주의자들은 ‘반정치의 정치’를 통해 경제적 위기와 계급적 갈등을 기존의 정치와 정치 엘리트, 정당과 의회제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했다. 그러나 이들은 극단적 위기를 진정시키고 민족을 재건하기 위한 필요악으로 여전히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수용한다. ‘충격요법’의 과감성은 전통적 인민주의에 대한 국제금융기구와 자본가의 불신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긴축정책, 부채-주식 전환, 국유기업 사유화, 남미공동시장, 북미자유무역협정 등). 이는 곧 광범위한 실업·빈곤을 야기하고 실질임금 하락, 소득불평등을 확대하며 경제적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베네수엘라의 정치·경제적 조건 석유경제의 형성과 농업의 위기, 도시화 19세기 초 식민 치하 베네수엘라는 광물 자원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코코아, 커피, 설탕, 면화, 담배 등) 여전히 농업이 주된 경제 활동이었고 최소한 70%의 인구가 농촌에 거주했다. 하지만 19세기 내내 토지는 독립전쟁(1821-39년)에 참가했던 강자의 수중에서 분할, 점유되었다. 이러한 불공평한 토지 분배에 맞서 독립 후 내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에세키엘 사모라), 불공평한 토지 분배 구조를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그 후 구스만 블랑코와 같은 군부 지도자들은 충직한 부하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는데, 이 점에서 가장 악명 높은 후안 빈센트 고메스와 같은 독재자는 막대한 토지를 개인 소유로 전유했다. 고메스 독재 치하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농업경제에서 천연 자원 개발(특히 석유) 기반 경제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종국적으로 농업을 황폐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고메스 독재가 1935년 막을 내리자, 농업은 전체 노동력의 60%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GDP의 단 22%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최대 석유수출국이 되었다. 석유 생산이 점점 다른 산업 부문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경제학자들이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 북해 천연가스/원유 발견이 네덜란드 경제에 끼친 효과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야기되었다. ▲석유 수출로 인한 해외 통화 유입 ▲구매력 증가로 인한 인플레이션 발생 ▲국산품에 비해 수입 공산품·농산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결과 수입량이 증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품으로 인해 농업 생산 파괴 산업 발전 저해라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5) 1960년에 이르자 농촌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은 단 35%로 급감했다(1990년에는 12%). 이로써 베네수엘라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도시화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네덜란드 병”의 또 다른 결과는 베네수엘라가 역내에서 유일한 농산물 수입 국가이자 GDP에서 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율이 최소인 국가로 전락한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급격한 농업의 쇠락은 도시화가 굉장히 급속히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도시는 수용 가능한 인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 결과 도시 변두리에 거대한 슬럼/바리오가 형성되었고, 농촌 쇠락에 조응하는 슬럼/바리오 규모의 확대는 1960-70년대 석유 수익이 어마어마하게 증대한 결과였다. 1980-90년대 20여 년 동안 석유 수익이 꾸준히 하락하자 국가는 재분배 조치를 통해 빈곤의 충격을 완화할 수 없었고 대신 사회적 소비를 삭감하는 극약처방을 내세웠다. 한편 전반적인 농업의 쇠락 이외에도, 베네수엘라 농민들은 극심한 토지 소유 불평등에 처했다.6) 국가가 보증하는 토지개혁은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독재가 막을 내리고 1958년 자유 민주주의가 도입된 직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토지개혁법(1960년)에 따라 전국농업연구소가 설립되고 20만 이상의 가구에 국유지가 분배되었는데, 차기 정부는 연구소와 토지개혁 강령을 다시 무시했다. 1970년대 석유 호황기에 “네덜란드 병”이 심화되면서 농산물은 이윤이 남지 않았고, 도시화는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토지개혁 수혜자의 1/3이 탈락했고, 수혜자의 90% 가량이 온전한 토지 소유권을 획득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따라서 토지개혁은 필연적으로 토지 소유권의 개혁을 필요로 했다. 즉 토지소유자의 수중이 아닌 국가에서 소농으로 소유권의 이전이 요구된 것이다. 1997년 농업 인구조사에 따르면, 토지분배는 1960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불평등한 상황에 머물렀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소유자를 위한 시장이 확대되고(종종 투기 목적으로 토지 매매) ▲대토지소유자들이 농업노동자/소작농을 내쫓는 경향이 증가하고(신기술의 도입 또는 농산물이 더 이상 경쟁력이 없자 생산을 포기한 결과로, 이는 결국 도시화에 기여), ▲토지소유자들이 점점 개인보다는 기업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계속 진행되었다. 단적으로 현재 베네수엘라의 인구 중 90%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는 1970년 ‘오일 붐’의 결과로서, 그 이후에도 정부는 석유산업에 전적으로 집중했으며 이촌향도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석유로 인한 소득은 대부분 도시의 기반시설을 구축하는데 투자되었고, 중산층, 백인에게 돌아갔다. 이는 농업 기반을 축소시키고 경제에 대 혼란을 가져왔다(OPEC의 공동 창설자 후안 파블로 알폰소는 “석유는 악마의 배설물이다”라고 표현했다). 푼토피지협약 체계와 경제 위기 푼토피지협약(1958년)으로 건설된 양당 협조 체제에 대한 반대가 볼리바리안 프로젝트의 시초를 구성한다. 대부분 군사 독재 하에 있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건전하고 민주적이고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는 제국주의적 시각과 달리 차베스는 이 체제를 사회적으로 배타적이고 부패한 체제로 규정했다. 가령 사회민주적 경향 하에서 기조직된 도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민주행동당(AD)과 베네수엘라 노총(CTV)의 사례가 그것이었다.8) 푼토피지협약 이후 베네수엘라 지배계급은 중동과 유사한 실책을 저질렀고, 전국민을 석유로 혜택을 받는 자와 고통 받는 자로 양분했다. 국제 유가의 하락과 국제이자율의 상승은 석유 수출 의존적이고 해외 금융 도입 의존적인 국가 경제에 침체를 가져왔다. 특히 1980년대 초 라틴 아메리카 전반의 외채위기로 인한 긴축이 장기화된 결과 많은 국가들에서 자산의 평가절하가 일어났다. 긴축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안겨 주는 반면, 유동 자본의 소유자들에게는 그 지역의 자산을 최저 가격에 구매하여 축적과정을 회복시킬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다. 긴축기간 동안 라틴 아메리카 국가로부터 미국으로의 대규모 자본도피는 그 지역에서 생성된 자본 분파를 고위험의 국내 투자로부터 보호하는데 복무했다. 또한 도피한 자본가들이 자신의 자본을 본국으로 재송환하기를 원하는 경우에 외채문제는 자산 비용의 하락을 통해 자본가들의 미래의 기회를 확장하기도 했다.9)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페레즈(1988년 당선)는 IMF를 신봉했다(사유화, 공공지출 삭감, 자유화, 탈규제). 경제는 8.6% 수축했고, 빈곤도 급증했다. 신자유주의적 조치는 인플레이션처럼 지배계급 스스로 해결을 공언했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인구 다수를 황폐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자유주의적 조치들이 빈곤을 심화하고 거대한 빈농들의 도시 이주를 촉진하고 실질임금을 하락시키고 비공식부문 노동자를 팽창시킨 원인이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바로 빈민 봉기인 ‘카라카소’였다. 페레즈 집권 3년간 60만의 노동자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농업 노동자, 빈농, 중농의 상당수가 감소했다. 비공식부문 노동자 비율은 1980년 34.5%에서 1999년 53%로 급증한 반면 산업 노동자 비율은 감소했다. 1989년 이후 통신, 항만, 석유, 철강, 항공 등이 사유화되면서 외국자본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고용이 감소했다. 경제적 불평등과 실업이 창궐하고 실질임금이 급락하고 사회적 분할선이 심화되었다. 경제적 위기는 정치적 위기를 동반했고, 부패와 무능은 정치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또 연이은 은행 위기로 대량의 자본도피에 직면해야 했다. 통화 가치 저평가는 70.8%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을 야기했고, 물가 및 환율 통제가 또 다시 부과됐다. 1995년 협상을 통해 또 다시 14억 달러의 IMF 차관이 도입됐지만 이는 더 많은 구조조정, 사유화, 외국인 투자와 함께 유가 하락과 빈곤을 강요하는 것이었다.10) 이것이 바로 1999년 차베스가 승계한 정치적·경제적 상황이었다. 차베스는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전통적인 정치체제에 회의적인 대중들의(56%) 지지를 얻어 1998년 12월 당선되었다. 차베스는 1992년 봉기 실패 및 수감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들에게 제도적 변화를 확신시켰고, 베네수엘라의 난국을 종식시키기 위해 사회·경제적 변화를 강조했다(차베스는 봉기 실패 이후 군사 쿠데타 대신 제도적 변화 노선을 채택했다). 차베스는 칠레 아옌데 이후 평화적 방식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심도 깊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수행하고자 시도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되기도 한다. 차베스는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고(군대에 대한 영향력 유지), 제도 영역에서 게임의 법칙을 변화시킨다는 기본 전제 하에 변화를 모색한 것이 차이점일 것이다.11) 차베스의 집권과 반혁명, 그리고 개혁 개혁을 위한 제도적 조건의 창출 반대세력은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기존 과두제가 여전히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국영석유회사의 경영, 입법·사법 권력 및 지방 정부에서 높은 수준의 동맹을 유지했고, 미디어에 대한 독점적 통제와 경제인 연합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베네수엘라노총(CTV)의 지지, 고위 장교, 카톨릭과의 연계도 굳건했으며 무엇보다도 미국의 후원이 결정적이었다. 중간계급과 군부는 차베스 정권에 미온적이거나 비판적이었다. 또 베네수엘라에는 강력한 좌파 정당이 부재했다. ‘제5공화국운동(MVR)’은 현재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당이지만, 그 속에는 기회주의적 요소가 상당한 정도로 포함되었다.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은 대체로 취약했으며 전통적인 지배 정당들에 의해 조종되는 등 자율성이 심각히 훼손된 상태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차베스는 그의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 구조로서 군부에 의존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기회를 거의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정부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제도적 게임의 법칙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제헌의회를 소집하기 위한 국민투표에 이어 ‘볼리바리안 헌법’이 제정되었다(1999년). 신헌법은 반신자유주의, 참여 민주주의, 협동조합 및 노동자 자주 관리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과 인간주의와 연대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12) 다음 단계는 정부 내 세력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주지사, 시장, 국회의원 등을 선출하는 거대 총선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고, 이로써 차베스가 국가기구를 장악한 반면 반대세력은 분할되어 국회에서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그 결과 2001년 12월 토지법, 어업법, 탄화수소법, 소액대출신용법, 협동조합법 등 49개 개혁법안이 제정되었다. 또 반대세력의 역공에 대처하기 위해 차베스는 ‘볼리바리안 써클’을 제창, 차베스 지지자들 스스로 10명 내외로 그룹을 지어 헌법에 대해 주변을 교육하고 구체적인 발안을 취하게 했다.13) 아울러 차베스는 핵심산업인 석유부문에 대한 정부 통제를 강화했다. 차베스는 석유 국영회사인 PdVSA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해외자산 매각, 생산량 축소를 통해 국제 유가 상승을 유도하고, 각종 세제 개편을 통해 국고에 대한 PdVSA의 재정 기여도를 제고시키고자 했다.14) 석유산업에 대한 통제 강화는 재정 증대로 귀결됐고, 이는 다시 빈곤 해결을 위한 재분배 정책으로 이어졌다. ‘볼리바르 2000 프로젝트’라는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볼리바리안 스쿨’이라는 교육 정책은 차베스 집권 초기 개혁의 대표적 사례다(<표1>참고). 반대세력의 역공과 지지 세력의 확대 그러나 49개 개혁법안이 제정되는 날에 맞춰 반대세력은 거대한 시위를 조직하고 총파업을 시도했다. 이때 루이스 미킬레나 등 ‘기회주의’ 세력은 차베스의 개혁법안에 반대하며 이탈했는데, 그 결과 여권은 의회 과반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불리한 정치 역관계 속에서 2002년 4월 군사 쿠데타의 발발은 베네수엘라 정치사에 일대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이는 점증하던 반대세력의 정치 투쟁의 효과로서 정부와 반대세력 사이에 총격전으로까지 비화하게 된다. 군부 지도자들이 차베스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차베스를 일시적으로 축출한 뒤 베네수엘라 상공회의소 의장인 카르모나를 임시 대통령으로 옹립한다(2002.4.11). 이들은 워싱턴의 암묵적 동의 하에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들의 쿠데타는 빈민층을 중심으로 한 차베스 지지자들의 대규모 시위에 의해 이틀 만에 수포로 돌아갔다(2002.4.13).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의 이웃 국가들도 이번 쿠데타를 헌정파괴행위라며 신임 정부를 불신임했다. 2002년 4월 반차베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군부 내 차베스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지고 반대세력을 숙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울러 쿠데타를 배후에서 지원한 미국과 차베스의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이자 반대세력을 분할하고 개혁에 미온적/비판적이었던 중간계급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볼리바리안 써클’은 전국적으로 배가되었고, 다양한 형태로 포진할 수 있었다. 또 농·어민 운동 조직이 결성되고, 반대세력의 미디어 보이콧에 맞선 시청자운동, 도시토지위원회, 의사, 교사, 변호사 등 특수 중간계급 단체 등 새로운 조직이 출현했다. 무엇보다도 CTV에 비판적이었던 노조 지도자들이 혁명 과정을 지지하기 위해 독립 노조 세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차베스를 지지하지만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다양한 좌파 정당들은 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공동 전선을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해외 좌파 세력 및 진보세력에게 잘 이해되지 않거나 높게 평가되지 않았던 베네수엘라 이행 과정이 세계적으로 동조 세력을 얻어갔다. 한편 반혁명 쿠데타의 실패와 헌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언제 발발할지 모를 쿠데타에 대비해서 차베스는 지지세력, 특히 군부를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나아가 경제인 단체에 더 친화적인 사람을 경제 부문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반대세력에게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아울러 자격부여법(Qualifying Law) 일부를 수정하고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반대세력들은 이러한 차베스의 행동을 정부가 취약하다는 신호로 간주하고 2002년 말 - 2003년 초 관리자 총파업/사보타지 등 역공세를 다시 취했다. 그러나 차베스의 강력한 지도력과 석유 부문 노동자 등 노동자들의 반대로 반대세력은 두 번째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 차베스 정부는 1만8천에 이르는 관리자와 상층 노동자를 파면할 법적 근거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석유수출이 마비되는 등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는 근 8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국회경제자문처에 따르면, GDP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석유 부문이 총 37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고 비석유부문이 12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실제로 베네수엘라 경제는 2003년 10% 가량 수축했다. 재정부 장관 토비아스 노브레가는 2003년 경제가 회복하기 시작하면서 4/4분기 GDP 성장률이 대략 0% 즈음이고 2003년 인플레이션율은 25% 정도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완연한 회복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차베스 정권에 대한 맹렬한 반대 상황에서 경제가 안정화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16) 국민소환투표 승리와 집권 기반의 안정화 쿠데타와 총파업/사보타지 결과 베네수엘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후 국민소환투표가 시행된 2004년 8월까지, 1년 반 사이에 사회경제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환경은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경제는 10% 이상 성장하고 있었고 국제 유가는 기록적으로 상승했고 이로 얻어진 소득은 사회복지 지출로 환류되었다. 그 사회적 효과는 대단히 두드러졌고 친차베스 조직은 전국적으로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한편 미주국가기구(OAS) 및 ‘미국의 우방국’은 국내 반대세력과 합세하여 차베스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가했고, 그 결과 차베스는 헌법상 보장된 국민소환투표를 수용하게 된다. 이에 친차베스 세력은 쿠데타와 총파업/사보타지 당시 자생적으로 분출된 차베스 지지 시위 과정에서 도시빈민 등 풀뿌리 민중 운동을 조직했다. 특히 2003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시오네스(Misiones, 미션) 프로그램은 빈민에 대한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을 시도하며 지지율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100만에 달하는 콜럼비아 출신 이주자들을 귀화시킴으로써 차베스의 지지층 더욱 확대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끝에 차베스는 국민소환투표(2004.8.15)에서 60%에 달하는 찬성률로 자격을 재확보한다. <표1> 차베스의 사회 복지 프로그램15) [%=사진1%] 차베스의 국민소환투표 승리는 반대세력에게 3번째 패배이자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 대한 지지를 의미했다. 차베스 정부는 국내적·국제적으로 더욱 강력한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고, 이제 그 누구도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의 정당성과 차베스를 지지하는 거대한 대중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반대세력에 대한 신뢰는 더욱 추락했고 이들의 분할은 가속화됐다. 이어 2005년 말 총선에서도 차베스 정부 여당이 승리하면서 지지기반은 더욱 공고화되었다(MVR이 의석의 68% 차지). 빈민의 절대다수(90% 이상)가 차베스를 지지했으며, 이는 라티푼디오와 파산 공장의 몰수, 대규모사회간접투자 등을 가속화하는 조처로 나아갈 동력을 의미했다. 또 차베스의 세 번째 집권을 가능케 할 개헌도 가능해지게 되었다. 차베스의 개혁을 제약하는 구조적·객관적인 요인 미국의 대 베네수엘라 저강도 분쟁 현재까지 차베스 정권과의 대결 과정에서 미국은 점진주의적·내재적 정치 전략을 거부하고 최단기간에 국가권력을 접수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베네수엘라 내외부의 전략적 연대 대상을 상실하고 말았다.17) 무엇보다 국내 반정부 야당이나 NGO의 세력이 약화된 것이 미국의 고민이다. 현재 미국과 반대세력이 차베스 정권에 대한 즉각적인 전복 시도에 나서기는 힘들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우선 차베스 정권을 지지하는 활동가가 많으며 대중적 기초도 튼튼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익들이 대중을 동원하고 대중운동을 기획할 이슈가 거의 부재하다. 이는 차베스 정권의 복지 프로그램이 대중적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경제가 성장 중이며 삶의 질도 높아지고 있고 부패가 억제되고 언론, 출판, 집회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보수적인 기업 협회도 정부와의 계약으로 점점 번영하고 있으며 여당과의 접촉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NGO나 정당들과 달리 위험한 도박에 매달리지 않는다. 현재 반정부 친미 선전을 수행하는 민간 언론사 정도가 미국이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뿐이다.18) 따라서 현재 미 정책결정자들은 베네수엘라 국내 사안에 개입하거나 양분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어느 한편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차베스 정부가 민주적 원칙을 고수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하는 가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베네수엘라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오히려 차베스 정부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부 정책결정자들은 더욱 과감한/호전적인 접근법은 양자간 관계를 멀게 하고 긴장을 증폭시킬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또 일부 논자들은 미국이 차베스 정부와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하고 가령 마약 수출 등 상호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대해 공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또 다른 장기 정책 접근법의 경우, 미국은 차베스가 부상하게 된 정황에 착목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 정책접근법은 비단 베네수엘라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업, 범죄, 정치적 부패에 시달리는 여타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19) 결론적으로, 미 국부무는 ‘민주주의’나 ‘인권’ 마약문제를 빌미로 간섭을 지속할 것을 정책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20) 그 구체적 방안은 ①베네수엘라 시민사회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침해를 고발하기 위해 OAS, EU, 등 국제기구와 협력하고 ②인권 및 기타 NGO들이 베네수엘라 시민사회를 지지하고 방어하기 위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결성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③베네수엘라 정부 기관에 대항하여 기조직된 노동자, 독립 미디어, NGO, 종교단체를 조직할 것 등이다. 이미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원조기금’(NED, 라틴 아메리카에 반공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미국 해외홍보처(USIA)에서 지원하는 자금)이 후원하는 SUMATE와 같은 NGO가 암약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21) ‘플랜 콜럼비아’로 대표되는 일련의 군사작전과 함께 내부 반대세력을 후원, 규합하여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의 종합으로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저강도 분쟁은 항상-이미 전개 중이었고, 이는 베네수엘라의 급진화를 제약하는 잠재 요소다.22) 자본의 초민족화와 미국 주도의 경제통합 차베스의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의 대외적 축을 이루는 ALBA가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를 넘어 대안적인 지역통합을 추구할 수 있을지도 중요한 관심사다. 미국이 구상한 FTAA 협상이 장벽에 부딪치며 정의와 평등, 연대를 원칙으로 대륙의 경제적 인프라를 구축하자는 차베스의 ALBA 제안이 대안으로 부상 중이다 그런데 ALBA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 우선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경제통합 시도가 다변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FTAA 협상 타결 실패 이후 미국은 하위-지역 협정을 병행 추진하며 경제통합을 시도 중이다. 도미니카공화국-중앙아메리카-미국 자유무역협정(DR-CAFTA)을 법제화하고 파나마와 여타 안데스 3개 국가들과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을 추진 중이다. 한편 역내에서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인 브라질은 메르코수르 8개 회원국을 확대 규합한데 이어 2004년 10월에는 안데스공동체(CAN, Andean Community of Nation)들과 정치·경제 협정을 수립했다. 또 2004년 12월에는 총 12개국이 남미공동체(SACN, South American Community of Nation)를 결성하는데 합의했다. 이에 거의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자주적인 경제정책을 실용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미국·브라질과 협상중이거나 모종의 협정에 가입하고 있다. 따라서 ALBA가 실질적으로 역내 국가들에 끼치게 될 영향력이 얼마나 클지는 미지수다.23) 게다가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open regionalism)’ 구상의 핵심은 공동시장을 직접 활용하는 것보다는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매개하지 않은 역내 국가들 간의 호혜평등한 교역이라는 일차적 목표를 넘어 미국의 경제통합으로부터 이탈하기 위해서는 자본도피라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외채위기를 기화로 초민족적 법인자본에 철저히 잠식당한 라틴 아메리카 경제는 일상적인 자본유출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초민족적 은행으로 저축을 이전시킨 자본가들은 국내의 위험에서 자유로워진 반면 국제금융체제의 재생산에 종속되며 사회가 수탈당하는 구조가 고착화 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자본도피와 경제 성장 사이에는 음의 상관관계가 강하게 나타났음을 상기할 때, 자본도피는 역내 국가들의 자주적 경제정책 수립 및 내생적 경제성장에도 큰 장애가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석유산업에 대한 통제 강화를 통해 차베스 정부가 ‘오일 달러’를 활용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초민족적 법인자본에 대한 통제를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최근 차베스가 석유산업의 대미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며 민족자본 육성과 투자 및 판로 다변화에 나서고 있지만, 미국이 수입하는 원유 중 15% 가량이 베네수엘라 산이고 베네수엘라가 수출하는 원유 중 절반가량이 미국으로 수출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과의 정치-외교적 마찰이 급격한 경제적 단절로 이어지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볼리바리안 혁명’의 주체적 조건과 한계 차베스 개혁 노선의 한계 이처럼 라틴 아메리카에서 ‘무적의 제국’으로서 자신의 권력과 ‘신자유주의 정책의 비가역성’이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간섭과 자본의 초민족화는 차베스의 개혁을 제약하는 구조적·객관적 요인이다. 이런 맥락에서 차베스 개혁의 성격을 몇 가지 측면에서 평가해보도록 하자. 집권 초기, 차베스 정부는 기존의 외채상환을 지속하고 외채지불정지 같은 조치는 없을 것으로 약속했다(단, 재정지출의 30%에 달하는 외채상환부담을 줄이기 위해 외채재협상(만기연장)을 추진하고, 채무주식화 제도를 도입한다는 요지의 계획을 발표한 바 있음). 또 차베스는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재산, 특권, 부에 대해서 어떠한 조치도 없을 것이라고 반복했다. 게다가 이들 엘리트들이 정부에 대해 세 번의 비합법적인 정부 전복 시도를 하고도 여전히 그들의 계급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베스 대통령이 여전히 민관 협력과 사회복지 지출에 기초한 발전 구상에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극심한 계급 갈등을 거치면서도 최소한 정부 수준에서는 소유 관계 또는 계급 관계의 파열이 없었으며, 외국인 채권자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원유 고객들과의 어떠한 관계 단절도 없었다. 정부는 의료제도, 교육, 중소기업, 그리고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국가의 자금지출을 증가시키긴 했는데, 이는 외채 상환, 민간 수출업자에 대한 보조금 지급, 산업자본가에 대한 저리의 융자라는 재정 계획의 틀이라는 제약조건 안에서만 제시된 것이었다.24) 더욱이 국내적·국제적으로 차베스의 업적 중 상당부분이 석유 수입에 의존한 결과라는 점도 분명하다. 석유로부터 얻는 초과수익이 없었다면 거대기업과 빈곤층 사이의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석유부문을 제외하면 사적 투자는 고갈 상태이며 예년 수준으로 유가가 견조하게 하락한다면 베네수엘라의 경제 문제는 매우 심각히 위기에 처할 것이다. 지난 2년간 베네수엘라가 GDP 3%에 달하는 재정적자를 보인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 상태는 당분간 현재의 유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차베스의 집권 기반도 큰 수준에서 현재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26) 또 차베스의 개혁정책 중 가장 급진적이라고 평가받는 토지개혁도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2001년 11월 “농촌으로 돌아가자”라는 프로그램이 토지및농업개발에관한법률에 따라 시행되었는데 이 법의 목표는 ▲토지소유 규모 제한 ▲농업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유휴 토지에 대한 과세 ▲국가 소유의 미사용 토지를 소농 가구 또는 협동조합에 분배 ▲사유의 미경작지, 휴경지를 징발, 재분배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001년 토지개혁법은 전 세계 토지개혁의 역사와 비교할 때 그다지 급진적인 것이 아니었다. 본 법은 대토지소유자가 자기 토지에 대해 소유권을 가진다고 명시했고, 오직 휴경지나 특정 규모 이상 토지의 경우 그 질에 따라 그 일부가 징수될 수 있을 뿐이라고 규정했다. 가장 모순적인 목표는 토지소유자들에게 시장 가격으로 배상한다는 것이었다. 차베스 정부는 국유지 200만 헥타르를 13만 소농 및 협동조합에 분배했지만 사유지는 전혀 징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국유지에서 라티푼디오로 확장하려고 하자 대토지소유주와 농민 사이에는 긴장이 팽팽하게 형성됐다.27) 2005년 변경된 토지개혁법은 토지소유자가 소유할 수 있는 유휴지 규모를 개정했다.28) 대규모 유휴 부동산을 국가가 징발할 수 있는 권한 이외에도, 토지개혁법은 유휴 부동산에 비례해 과세되어야 함을 규정했다. 이 조치는 대토지소유주의 큰 반발을 샀고, 현재까지 이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지불유예를 사실상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이유는 ▲법적 회피와 토지 등기부의 부실(취약한 법적 틀거리) ▲총체적인 법의 불비와 불처벌 관행 ▲취약한 농민 조직 ▲빈약한 농촌 지원 구조 등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석유경제를 다변화하고 농업을 근본적으로 회상하는 현실적 경로의 문제다. 현재 베네수엘라 경제 구조상 농민이 토지를 불하받고 농업기술을 습득하더라도 농산품을 판매할 경로를 확보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를 위해 정부가 베네수엘라농업협동조합(CVA)을 설립했지만, CVA가 판매를 대행할 것이라는 보증도 없다. 정부가 베네수엘라 농산품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수입품에 대해 국산품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농산품들이 국내외 시장에서 좋은 가격에 판매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러한 경제적 “네덜란드 병”은 베네수엘라 농업이 현재 GDP 5% 수준에 머무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이 문제에 관한한 차베스를 포함한 역대 어느 정권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베네수엘라의 역대 정권들은 고유가 시절, 예산 외의 잉여수입을 사회 간접자본 확충 또는 비석유산업의 성장기반 마련에 투자하지 않고 단순한 빈민구제정책 등에 집행함으로써 유가 하락시 전 산업이 함께 몰락하는 경험을 되풀이한 바 있다. 경제를 다각화하고자 하는 차베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석유산업으로부터 얻어지는 거대한 수익이 베네수엘라 통화가치를 고평가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악화시키는 역설적 결과를 가져오고 있으며 최근 유가 상승(차베스 임기 동안 4배 상승)은 이 문제를 더욱 격화시켰을 따름이다.29) 차베스 지지 세력의 이념적 불균등성 차베스는 자신의 지도력이 위협받을 때에는 저항적이고 급진적인데 그에 대한 도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했을 때에는 유화적이고 중도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헌정 질서에 대해 군사 쿠데타와 폭력적인 공격을 선동한 반대세력에 대해 어떠한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단적인 사례다. 현재 차베스 정권 내에는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 민족주의,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그룹 등이 자유롭게 경합하고 있다.30) 차베스 자신은 ‘개량주의’, 실용주의 및 혁명주의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차베스를 지지하는 세력들 가운데 온건주의적 또는 보수주의적 분파는 정권의 정당성/합법성을 염려하고 실용주의자들은 재정 건전성/규율, 사회 지출 제한, 합동 공사 및 공공-민간 협력 증진 등을 주장한다. 중앙파는 점진적 개혁, 사회 지출 및 분배 증가, 진보적 부르주아지와의 기간 시설 계약 등을 통해 국가 기관 및 선거구 내에서 정치권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좌파의 경우 주로 새로운 계급적 지향의 노조, 지역 및 공동체에 기초한 협동조합, 농민 사회운동 및 특히 노동자 자주 관리 기업 및 운동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좌파는 사회화 과정을 심화하고 지방의 생산적 기업에 더 많이 투자함으로써 실업/불완전 고용 상태에 있는 노동력의 절반을 감소시킬 것을 주장한다. 동시에 이들은 하향식 후보 선정에 반대한다. 차베스는 좌파와 대중운동에 찬성하지만 거시경제정책을 결정하는 실용주의자들을 무시하지도 않고 정치권력을 제도화하려는 중앙파도 존중한다. 차베스는 이 과정에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며 상이한 입장들을 종합하는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32) 그런데 정당들의 확산은 명확한 정치적 노선에 기초하기보다는 국가 기구 내에서 입지를 점유하고 요구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 구조를 갖추려는 일부 지도자들의 속성에서 기인한 측면이 많다. 이러한 기회주의적 요소는 베네수엘라 구체제의 오랜 관행이자 악습으로,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1998년 차베스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해지자, 다수의 정치 그룹들은 다수파가 되기 위해 차베스와 경합했다. 장관직 획득이나 권력 분점에 대한 희망이 좌절되자, 정당들은 야당 진영을 규합했다. 전국적 수준에서 서로 대치하던 정당들이 지역적 수준에서는 제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이 앞서 루이스 미킬레나가 이탈하거나 ‘사회주의를 향한 운동(MAS)’이 분리된 이유 중의 하나다. 두 번째 요인은 차베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전반적으로 급진화되면서 정당이 더 이상 이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1998년 차베스가 당선될 때만 하더라도 그가 토지개혁, 어업 및 은행 개혁 법안을 제도화했던 2001년만큼 진보적이지 않았다. 한편 차베스를 지지하는 정당이나 사회세력의 통합력도 현재로선 미미하다. 단적으로, 2003년 10월 창설된 ‘코만도 아야쿠소’라는 차베스주의 정당들의 선거 연합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이에 차베스는 전국 선거 순회단을 제안했고, 10여명의 정치·사회 활동가로 구성된 단위 성원들은 현장과 가가호호를 누비며 차베스 지지 운동을 전개했다. <표2> 베네수엘라 주요 정당 현황31)

    당명 주요특징 비고
    제5공화국운동(MVR)제1여당1998년 군부 중심 창당
    우리는 할 수 있다(Podemos)여권 내 우파 2001년 MAS에서 분리
    모두를 위한 조국(PPT) 여권 내 마르크스주의 계열 1997년 급진주의에서 분리
    민주행동당(AD)구 지배정당, 우익 민주주의 1936년 창당
    기독사회당(COPEI)구 지배정당, 우익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향한 운동(MAS)중도 우파 1971년 베네수엘라 공산당(PCV)에서 분리
    적기(Bandera Roja)




    혁명적 좌파, 무장노선 1970년 혁명적 좌파운동(MIR)에서 분리
    급진주의(La Causa Radical) 급진주의1971년 MAS 및 PCV 출신 활동가들이 결성
    단결(Union)구 차베스 지지세력 1999년 창당
    연대(Solidaridad)루이스 미킬레나 주도 2001년 창당
    혁명사회주의당(PRS)전국노조(UNT) 내 트로츠기 그룹 2005년 창당
    <표3> 차베스 지지-반대 주요 정당
    구분
    차베스지지
    차베스반대

    선거연합
    공동전선

    애국의 기둥(Polo Patriotico, 1998)
    코만도 아야쿠소(2003)

    민주공조
    (CD, Coordinadora Democratica)

    정치적 스펙트럼
    좌파
    군부
    우파
    좌파
    중도
    우파
    정당
    PPT
    MVR
    Podemos
    적기
    급진주의
    단결
    연대
    MAS
    AD
    COPEI
    차베스 개인 카리스마에 대한 과도한 의존 따라서 개혁 과정이 차베스 개인의 지도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편향이 발생했다. 우선 비상 국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 발휘가 요구되는 상황적 논리를 들 수 있다.33)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좌익적 정당의 부재와 자율적 사회운동의 경험이 부재한 결과다. 주요 선거 및 국민소환투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대통령 개인이 전국 순회 캠페인을 통해 직접 지지자를 조직하고 이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를 통해 차베스는 복지정책을 장려하고 구호자금을 수집·전달함으로써 대통령 자신의 지지층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또 이 과정에서 군부가 대통령 개인 및 대통령의 정치 프로그램에 직접적으로 봉사하는 경향이 대두했다. 차베스는 종종 민중과 군대의 관계를 수정해야 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군이 가진 유용한 자원을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플랜 볼리바르 2000의 사례). 차베스의 개혁정책이 기층 민중들을 대열에 동참하도록 자극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민중들은 스스로 전국 순회 선거운동을 조직, 투표를 조직하기보다는 거리에서 투쟁을 조직하고 선거구보다는 현장에 근거해서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서 전국 순회는 가장 중요한 조직적 형태였다. 이들은 조직적인 정당의 지도 없이도 수십만의 지지자를 규합하고 구체적인 정치적 과제를 독립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또 차베스는 정기적으로 방송에 출연하면서 개혁에 대해 국민과 직접 대화를 시도했다. 분명 대중 동원의 성공이야말로 차베스가 국내적으로 사회적 변화를 심화하고 대외적으로 반미적 태도를 강화하게 된 요소였다. 그런데 대중적 사회운동이 성장하고 또 자율성을 획득하는 역동적인 과정이 동반되지 않는 한, 개혁이 차베스 개인에게 의존하는 경향은 점차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인민주의의 위험을 환기한다. 구조적·객관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개혁이 위기에 처하고 단기간의 가시적 성과가 사라지면, ‘개혁’은 지도자 자신의 정치적 승리와 경제정책의 근본적 쟁점의 호도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며 결과적으로 정부도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적 사회운동의 자율성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빈민 정책이 주효하면서 사회 변화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높아지고 있다. 도시 이외에 농촌에서도 토지개혁의 확장 및 지주들의 민병대에 반대하는 빈농들의 투쟁이 형성되고 있다(인디안 공동체 운동 포함). 이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UNT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운동의 변화 흐름이다. 반대세력의 쿠데타와 총파업/사보타지에 즈음하여 일부 노조지도자들이 CTV와 거리를 두고 새로운 전국노조의 결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석유, 공공, 자동차, 고무 등 전략분야의 많은 지도자들은 UNT에 가입해서 현재 전국적으로 약 100만의 조합원을 확보한 상태다. 많은 현장에서 구체제에 반대하는 새로운 노동조합 활동가 네트워크가 조직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정부에 대한 노조의 자율성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서도 UNT 일부에서 전개 중인 노동자 통제와 평의회 건설 흐름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34) <상자1>에서 보듯이 사유화 반대 투쟁, 관리자들의 사보타지에 맞선 공장 점거 등을 경험하며 UNT 소속의 많은 노조와 활동가들이 노동자 통제(공동관리/자주관리)나 평의회 운동에 대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이들은 국유 기업에서 사기업으로 노동자 통제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주관리, 공동 관리 및 협동조합을 통해 사회·경제적으로 민중이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확장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차베스도 생산을 포기하거나 유기된 산업 및 공장을 몰수할 것을 발표하며 산업 발전, 생산 증진을 위해 노동자들이 관리의 일주체가 될 것을 호소했다.35) 자본가들의 자본유출 또는 사보타지로 유기, 폐쇄된 직장을 점거하고 노동자 스스로 생산과 작업을 통제하는 노동자 통제 또는 평의회의 경험은 역사적으로 위기와 이행의 시기에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단순한 소유관계의 변형(사유에서 국유 또는 집단적 소유)을 넘어 노동자들의 대중권력,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 극복, 민주주의 등의 쟁점을 제기했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노동자 통제 또는 평의회 운동이 기존 노조운동의 혁신, 노동자운동과 지역운동의 결합, 비공식부문 노동자 조직화를 추구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다.[%=박스1%] 한편 차베스 정부의 다양한 빈곤 퇴치 프로그램이 거둔 가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빈민 대중운동이 고양되고 있는가의 여부에 주목해야 한다. 온정주의적 방식으로 분배된 복지가 정치적 능동성을 자동적으로 고양하지 않으며 복지정책의 수혜자들은 아래로부터 투쟁하는 것보다 위로부터 시혜를 얻는데 더 익숙해졌기 때문에 수동적일 가능성이 상존한다. 미션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기회가 확대되고 도시토지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빈민들의 자기 조직화, 자기 통치의 가능성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베네수엘라 농민 조직이 취약한 이유는 농업 경제의 붕괴에 기인한다. 따라서 차베스 정부의 토지개혁을 급진화할 대중적 세력이 미미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2001년 토지개혁법 시행 후 현재까지 약 130명의 농민이 대토지소유주의 사병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토지분배의 결과로 협동조합이 맹아적으로 형성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는 농민 조직의 성장 여부는 향후 농업경제의 회생과 토지개혁의 급진화를 좌우할 변수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네수엘라 여성운동은 차베스 집권 이후 몇 가지 주요 양성 평등 법안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서 ▲여성적 이슈가 여전히 부차적으로 다뤄지는 문제 ▲여성운동이 제도화되면서 사회운동과의 결합이 약화되는 문제 ▲1990년대 쟁취한 법률적 성과를 사회운동적으로 확산하는 문제 등이 과제로 남아 있다.36) 사회운동들이 자율성을 확산하고 대중적·지역적 토대를 확장하는 과정은 여전히 험난하지만 도시와 농촌, 공장과 지역에서 자주관리 운동, 평의회, 협동조합 등이 출현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지표다. 향후 차베스 정부가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권력의 보전과 사회경제적 ‘현상유지’를 위한 실용적 방편을 찾는 방향으로 경도될 것인가는 결국 대중적 사회운동의 역량을 어떻게 신장시켜나갈 것인지에 달린 문제라 할 수 있다. 결론 차베스-베네수엘라는 ▲개헌 등을 통해 정치권력을 강화하고 재분배 정책을 중심으로 제도적·대중적 기반을 다진 집권 초기를 거쳐 ▲쿠데타·총파업/사보타지 등 구 지배세력의 반격에 처한 수세기를 지나 ▲국민소환투표와 총선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대내외적으로 볼리바리안 프로세스가 가속화되는 국면을 맞고 있다. 이 과정에서 차베스는 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규합한 것이 사실이지만 ‘볼리바리안 혁명’은 여전히 모호한 측면이 많다.37) 그런데 라틴 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의 확산과 이에 맞선 사회운동의 출현이 항상적인 정치과정이라면, 과거 라틴 아메리카 사회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반추하는 가운데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한 몇 가지 쟁점을 추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1940-5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주의는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하지 않은 채 제한적 코포러티즘을 시도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자율성을 침식하는 방식으로 대중을 동원했다. 오늘날 ‘볼리바리안 혁명’이 인민주의적 전통으로 회귀하지 않기 위해서는 소유권과 생산관계의 근본적 변혁 및 토지개혁의 급진화를 추구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은 대중적 사회운동의 자율성이 적극적으로 신장될 때만 가능하며, 따라서 최근 고조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자통제, 평의회 운동 및 빈민, 농민, 여성들의 자기 조직화에 주목할 수 있다. 둘째, 1960-70년대 사회주의적 지향 속에서 급진화된 군사조직, 정당, 노동조합 및 이를 포괄하는 전선체 등은 대개 군부 독재와 미국의 ‘저강도전쟁’으로 압살 당한다. 지금도 라틴 아메리카에서 ‘무적의 제국’으로서 자신의 권력과 ‘신자유주의 정책의 비가역성’이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간섭은 상수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차베스가 시도 중인 군사노선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1960-70년대 좌익적 사회운동이 좌초한 원인을 ‘무장’ 여부에서 찾기보다는 반혁명에 맞설 수 있는 대중적 토대의 문제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쿠바나 칠레의 사례처럼 노동자운동 등 사회운동이 독자적인 사회변혁의 전망을 갖추고 그 계획을 물질화시켰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1980년대 평화협상을 거쳐 선거정당으로 전환한 기존 사회운동 세력은 1990년대를 거쳐 선거정치와 신자유주의에 순응하게 되었고, 일부는 NGO로 흡수되었다. 이들은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금융기구와 초민족적 법인자본에게 권력을 대폭 이양할 것을 주장하며 ‘사회운동의 자율적 요구와 상호조정’을 참조하기보다는 선거승리를 위한 캠페인 기술에 전도되었다. 이에 반해 1990년대 후반부터 촉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운동은 기존 정당과 노동조합이 선거정치에 매몰되거나 코퍼러티즘을 수용하면서 대중운동을 분할하는 상황을 극복하고 신자유주의적 금융-군사 세계화에 정면으로 맞서는 한편, 다양하게 분출하고 있는 사회운동 간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했다.38) 이런 점에서 차베스의 ‘볼리바리안 혁명’과 ALBA 제안에 대한 환호는 그 자체로 정당한 반응이지만 일견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는 향후 세계사회운동이 연대와 자율성을 바탕으로 ‘대안’에 대한 전망과 역량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장해 나갈 때만이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차베스-베네수엘라가 구조적·객관적 제약을 극복하고 진정한 ‘21세기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질문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할 것이다. 1) 류미경,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맞서 연대를 확장하자! - 다중심 세계사회포럼으로 본 대안세계화 운동의 과제」, 『월간 사회운동』 통권 62호(2005.3) 참조. 본문으로 2) 대안세계화 운동과 세계사회포럼에 대해서는 임필수, 「세계화와 세계사회운동 - 대안세계화 운동과 세계사회포럼을 중심으로」, 『월간 사회진보연대』 통권 37호(2003.7-8) 참조. 본문으로 3) James Petras (2004), "The politics of imperialism: Neoliberalism and Class Politics in Latin America", http://www.rebelion.org 본문으로 4) 칠레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문민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대표적 사례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 기민당과 사회당은 피노체트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의 성과를 인정하고 정치적 타협을 수용, 1990년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간 제휴’ 연정이 성립된다. 신자유주의로 전향한 기민당과 사회당이 참여한 에일윈 정부는 여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보다 훨씬 안정적인 형태로 의회와 정당정치 체제를 유지하면서 신자유주의를 지속하게 된다. 본문으로 5) Gregory Wilpert (2005), "Land for People not for Profit in Venezuela", http://www.venezuelanalysis.com 본문으로 6) 1937년 당시 토지 소유는 1000ha 이상의 토지를 보유한 대농장에 집중됐다(4.5%가 88.8% 소유). 10ha 이하의 토지를 소유한 소농은 전체 토지 소유자의 57.7%를 차지한 반면 0.7%의 농지만 소유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7) 5% 대지주가 75% 토지를 소유하고, 75%의 소토지소유자가 고작 6%의 토지를 소유했다. 농지의 경우 더욱 심각한데 2%의 인구가 60%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중 대부분이 휴경지다. 본문으로 8) Richard Lapper (2005), "Venezuela and the Rise of Chavez: A Background Discussion Paper", http://www.cfr.org 본문으로 9) 제임스 페트라스 외, 「라틴 아메리카의 초민족적 자본가와 외채 문제: 계급 분석적 시각」, 다이앤 엘슨 외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페미니즘의 시각』, 공감, 1998 참조. 본문으로 10) C.P. Pandya and Justin Podur (2004), “The Chavez Government's Economic Policies”, ZNet, http://www.zmag.org 본문으로 11) Marta Harnecker (2004), "After the Referendum: Venezuela Faces New Challenges", Mothly Review, Vol. 56, No. 6. 본문으로 12) 그 주요내용은 ▲국호 변경 ▲양성 평등 참여 ▲법치와 정의 ▲인권과 국제조약 준수 ▲여성의 권리 신장 ▲정보의 자유 ▲정당 관련 국고 보조 금지 ▲국민투표 ▲사회·교육·문화·경제적 권리 ▲원주민의 권리 ▲환경권 ▲삼권분립이 아니라 오권분립(입법행정사법에 선거관리위원회, 시민 또는 공공의 권력을 추가) ▲입법부/대통령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 ▲시민불복종 등이다. 신헌법에 관해서는 Gregory Wilpert (2003), "Venezuela's New Constitution", http://www.venezuelanalysis.com 참조. 본문으로 13) ‘볼리바리안 써클’에 관해서는 Alvaro Sanchez (2003), "Bolivarian Circles: A Grassroots Movement", http://www.venezuelanalysis.com 참조. 본문으로 14) 2000년 2월 PdVSA의 중장기 사업계획(2000-2009 Business Plan)을 발표했는데, 이 계획은 ▲국내 민간자본 형성 강조(석유산업에 대한 민간부문 참여 확대) ▲생산구조 개편(가스 및 경중질유 비중을 제고) ▲생산성 및 정유산업 활성화를 위한 수출 경쟁력 제고 ▲화학 및 유화산업 개발 및 생산성 향상 ▲석유정책의 국제적 협력 등을 가이드라인으로 삼고 있다. 본문으로 15) C. P. Pandya and Justin Podur, 앞의 글 본문으로 16) 차베스 정부의 빈곤정책과 관련해서는 Gregory Wilpert (2003), "Mission Impossible? - Venezuela's Mission to Fight Poverty", http://www.venezuelanalysis.com 참조. 본문으로 17) 이에 미국이 거듭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관된 정책을 추진한 이유가 무엇인지가 쟁점인데, 이에 대해서 대략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네오콘의 맹동성. 2001-02년, 반테러리즘이 발호하는 가운데 미국은 차베스 정권을 지체없이 처리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네오콘은 베네수엘라 군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언론 및 기업 엘리트들의 권력을 과신한 것이다. 둘째, 이라크전과 차베스와 OPEC 주도국인 이라크·이란 간 결속으로 불어 닥친 석유위기가 미국의 간섭을 촉진했다. 셋째, 차베스가 FTAA에 반대하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ALBA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차베스의 복지정책과 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 그리고 석유 외교가 역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잠식하는 주요 원인이자 ‘좌파의 중심’이라고 간주했을 수 있다. 본문으로 18) James Petras (2005), "The Venezuelan Election: Chavez Wins, Bush Loses (Again)! Now What?", http://www.counterpunch.org 본문으로 19) Mark P. Sullivan (2005), "Venezuela: Political Conditions and U.S. Policy",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Report for Congress, http://www.state.gov/ 본문으로 20) U.S Department of State Bureau of Public Affairs, "The State of Democracy in Venezuela" (2005.12.1) 참조. 본문으로 21) 미국이 베네수엘라와 미국의 반(反)차베스 단체들에 수십만 달러를 제공했으며 이 중에는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베네수엘라노동자연맹(CVW)도 포함돼 있다고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바 있다(2002.4.25). 이 신문은 이 자금이 NED에서 제공된 것이라며 지난해 반차베스 단체에 대한 지원액은 전년보다 4배 가까이 늘어난 87만7천달러(약 11억 4천만원)였다고 밝혔다. NED는 AFL-CIO 산하 대외관계기구인 ‘국제노동연대를 위한 아메리카 센터’에 15만4천3백7십7달러를 지원했는데, 전액이 베네수엘라의 노동권 향상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CTV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또 미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외관계 외곽조직들에 상당 액수의 자금지원을 했으며 양당은 이들 자금을 차베스 비판세력들의 워싱턴 방문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본문으로 22) 지금도 미국은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의 접경지대에서 - 이 곳은 서반구 최대의 수자원 보유지역이기도 한데 -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군의 파라과이 주둔을 정당화한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파라과이 군기지는 볼리비아의 천연가스 매장지로부터 약 200km 떨어진 곳이다. 이 가스전은 미주대륙 전체에서 2번째로 큰 규모다. 미국의 대다수 주류 언론들은 서반구에서의 차베스의 영향력이 지닌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해 “반테러”라는 수사를 즐긴다. 한편 미 플로리다에 본부를 둔 선교단체가 베네수엘라 남부와 브라질 아마존 접경의 고립된 인디오부족 선교를 위해 대규모 시설물을 설치한 데 대해 차베스는 ‘CIA에 의한 침투’라고 규정하고 이들 단체들을 향해 90일 내에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국경지역에서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기도 했다. 이상 벤자민 당글, 「미군의 파라과이 진주」, 프레시안(2005.10.17) http://www.pressian.com 참조. 본문으로 23) J. F. Hornbeck (2005), "A Free Trade Area or the Americas: Major Policy Issues and Status of Negotiations",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Report for Congress, http://www.state.gov 본문으로 24) James Petras (2004), "President Chavez and the Referendum: Myths and Realities", http://www.rebelion.org (국역: 『월간 사회진보연대』, 통권49호(2004.10)에 수록) 본문으로 25) 국제 원유가격이 폭락할 경우 베네수엘라 경제가 항상 침체와 위기에 봉착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거시경제안정화기금(FIEM) 마저 정부가 소진하는 것은 베네수엘라의 유일한 위기관리체제를 마비시킬 수 있어 우려스럽다는 문제 제기도 있다. 본문으로 26) Richard Lapper, 앞의 글. 본문으로 27) Seth R. Delong (2005), “Chavez’s Agrarian Land Reform: More like Lincoln than Lenin”, The Council on Hemispheric Affairs, http://www.coha.org 본문으로 28) 2001년 법에 의하면,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는 생산성이 낮은 휴경지의 최대 면적은 5000ha였다. 2005년 토지개혁법은 생산성이 높은 휴경지 토지의 경우 100ha에서 50ha로, 생산성이 낮은 휴경지의 경우 5000ha에서 3000ha로 제한했다. 본문으로 29) Gregory Wilpert (2005), "Land for People not for Profit in Venezuela", http://www.venezuelanalysis.com 본문으로 30) 현재 여권을 구성하는 주요 정당은 ‘제5공화국운동(MVR)’ 및 ‘우리는 할 수 있다(Podemos, ‘우리는 할 수 있다 - 사회 민주주의를 향하여’), ‘조국을 모두에게(PPT)’ 등이다. MVR은 차베스 본인이 1998년 대선을 위해 군부를 중심으로 창건한 정당으로서, 정치적 스펙트럼을 불문하고 우선 차베스 지지자를 규합한 성격을 띤다. 당원 중에는 더러 구체제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당내 민주적 장치나 안정적인 평당원 구조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Podemos’는 MAS(사회주의를 향한 운동)에서 기원하며 차베스 지지자 중 합리적인 부위를 자처하는 세력이다. 유럽적 스타일의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에서 유래하는 ‘Podemos’는 차베스 정부의 우파를 대표한다. PPT는 선거인단 수로는 가장 취약하지만 노동, 교육, 문화 등 다수의 내각을 책임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으로부터 유래하는 PPT는 ‘급진주의’로부터 분리되었다. PPT는 스스로를 ‘운동중의 운동’으로, 또 노조운동(자율 노조)과 청년운동(‘구국 청년’), 여성운동(마누엘리타 사엔스 운동) 및 지역 공동체에 대한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상 Edouard Diago (2003), "Venezuela’s political forces", IV 353,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 참조. 본문으로 31) James Petras (2005), "The Venezuelan Election: Chavez Wins, Bush Loses (Again)! Now What?", http://www.counterpunch.org 본문으로 32) 베네수엘라의 전반적인 정당 분포와 관련해서는 "Leftist Parties of the World", http://www.broadleft.org 참조. 본문으로 33) 일례로 베네수엘라 의회는 1999년 3월 경제난 극복을 목적으로 차베스 정부가 출범 직후 상정한 일련의 비상경제조치법안(일명 Enabling Law)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향후 6개월간 의회의 추가 승인 없이 ▲금융거래세 도입 및 소득세법 개정 등 세제 개편 ▲국가 행정 조직 개편 ▲비상금융법안 개정과 같은 경제 조치들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 1999년 제정된 신헌법은 불신임투표를 포함한 국회해산권, 국가긴급조치 선포권, 내각임명권, 대통령 임기의 연장(5년에서 6년으로) 및 이에 따른 즉각적인 재선 허용 등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본문으로 34) 베네수엘라 노동자운동에 대해서는 Daina Green and Barry Lipton (2004), "Report on Venezuela's Trade Union Situation", http://www.venezuelananaysis.com 참조. 본문으로 35)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와 평의회 흐름에 대해서는 Marta Harnecker (2005), "Joint Responsibility and Confidence in Venezuela’s Worker Co-Managed Industries", The challenges of congestion: Cadafe and Cadela's experiences, Popular Library, Colection Testimonials Nº2, La Burbuja Editorial, Caracas, April 2005, http://www.venezuelananaysis.com; Bill Burgess (2005), "On the road to a new society: Venezuelan workers debate workers control of industry and government enterprises", http://www.socialistvoice.com; Rafael Rodriguez (2005), “Co-management” in the Alcasa aluminium factory, IV 371,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 참조. 본문으로 36) 베네수엘라 여성운동에 대해서는 Sarah Wagner (2005), "Women and Venezuela’s Bolivarian Revolution", http://www.venezuelanalysis.com 참조. 본문으로 37) ‘볼리바리안 혁명’이 페미니즘적 정치, 반인종주의적 정치, 심지어 반자본주의적 정치에 대해서도 성격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Michael Albert (2005), "Venezuela's Path", ZNet, http://www.zmag.org 참조. 본문으로 38) 라틴 아메리카 사회운동의 역사에 대한 개괄로는 James Petras, "Latin America: The Resurgence of the Left," NLR, no. 223, 1997; James Petras and Timothy F. Harding, "Introduction", Latin America Perspective, Issue 114, Vol. 27 No. 5, September 2000, pp.3-10. (국역: 『월간 사회운동』 통권 57호(2005.9)에 수록) 참조. 아울러 라틴 아메리카의 좌익적 사회운동이 선거주의로 전환한 것에 대한 비판으로는 James Petras, (2004), "Class-based Direct Action versus Populist Electoral Politics", http://www.rebelion.org 참조. 본문으로

  • 2006-04-05

    볼리바리안 혁명과 대안세계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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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지난 1월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개최된 다중심 세계사회포럼에서는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 신자유주의적 금융-군사세계화에 대항하여 분출 중인 사회운동과 최근 잇따라 등장하고 있는 ‘좌파’ 정권의 관계가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특히 이 논란의 중심에는 본 포럼을 직접 지원하며 미 제국주의에 맞서 역내 좌파정부와 사회운동이 단결할 것을 호소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이 위치했다. 지난 해 11월 아르헨티나 마르 델 플라타에서 열린 미주정상회의에 즈음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운동들은 ‘미주지역자유무역협정(FTAA)’ 체결 논의를 효과적으로 중단시켰는데, 당시 차베스 대통령은 정상회의장 안팎에서 ‘미주대륙을 위한 볼리바리안 대안(ALBA)’을 주장한 바 있다. 포럼의 마지막 날 행사로 열린 세계사회운동총회에서 사회운동들은 최근 들어 각 국에서 좌파 정권이 줄을 이어 등장하고 있는 현상이 남미 대륙에서 폭발하고 있는 자유무역, 군사주의, 사유화 정책에 반대하고, 자연자원과 식량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사회운동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결과적으로 세계사회운동총회가 ‘좌파 정권에 대한 정치적 자율성’과 ‘각국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도록 압박’하는 것을 (재)천명하며 논쟁은 일단락되었지만, 당초 세계사회포럼 원리헌장의 ‘정당 및 무장조직 배제 원칙’ 논란이 전진적으로 해소된 것은 아니다.1) 오히려 이러한 쟁점 이동은, 세계사회포럼의 원리헌장이 과거 라틴 아메리카의 좌익적 정당과 대중운동이 인민주의로 변질된 역사적 조건을 고려한 결과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하지만 역으로 ‘운동의 운동’ 또는 ‘공간’으로서 규정된 세계사회포럼이 이를 어떤 방식으로 해결/실현해 나갈 것인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 결과 세계사회포럼에 관한 복합적인 논란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는 세계사회포럼 자체의 전망을 둘러싼 논쟁을 넘어 이행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쇄신하기 위한 이론적·정치적 차원 전반의 기획을 요청하기 때문이다.2) 이에 오늘날 차베스-베네수엘라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이행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쇄신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향후 대안세계화 운동의 전망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이 글은 우선 라틴 아메리카와 베네수엘라의 정치적·경제적 조건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도한다. 다음으로, 일종의 지역적·민족적 특수성으로서 제국주의의 지배와 인민주의적 전통의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사회운동의 출현과 대응, 변모를 살펴본다. 이 속에서 차베스 정권의 성격 및 ‘볼리바리안 혁명’의 특징을 분석하면서 대안세계화 운동의 진전을 위한 몇 가지 쟁점을 추출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의 정치학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유주의 정치이념이 안정적인 토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지배세력은 의회정치 대신 과두제적·권위주의적 지배체제에 의존했다. 동시에 사회주의나 급진주의를 표방했던 좌익적 사회운동은 폭압적으로 억압됐다. 그 결과 사회개혁과 하층계급의 사회적·정치적 통합은 권위주의적·위계적 분할과 포섭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빈번하게 출현하는 인민주의는 이러한 경제적·정치적 불안정을 표현한다. 사회경제적 불균등성과 극단적인 불평등은 인민주의의 조건이 되며 정치제도의 취약성은 ‘반정치의 정치’에 기여한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 사회운동의 출현과 변모를 역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 자본주의의 변동에 대한 지역의 대응양상, 계급구조의 변화와 지배체제의 변동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주의적 전통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도시화와 제한적인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대의 뿌리 깊은 유산을 극복하지 못했다. 정치적 독립 이후에도 전통적인 토지귀족의 지배력은 지속되었고 독자적 군대를 보유하고 대사제이자 행정관의 역할을 하는 토지귀족이 지방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국적 차원에서는 대중적 참여를 제한하는 토지귀족의 ‘과두제적’ 의회제가 확립되었고, 국가는 지역 영주들의 연맹체로서 권위적·전제적 성격을 유지했다. 그런데 토지귀족의 자유주의는 민족적 통합이나 민주주의와는 대비되며, 이들은 영지를 중심으로 강력한 연고주의적 통치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며 라틴 아메리카의 종속 유형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쟁-세계시장의 붕괴-1차 상품 수출의 위기에 따라 브라질·멕시코·아르헨티나 등에서 경공업 중심의 초보적 수입대체 산업화가 시작됐다. 이와 함께 토지귀족의 지배력과 과두제적 픽망ㅔ〉?약화되었다. 또 국내시장, 국가, 도시의 팽창으로 연고주의라는 전통적인 정치적 통제방식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토지귀족은 새로운 부유층을 상류사회의 하층으로 포섭하는 한편, 기존의 정치제도와 정당은 산업화 과정에서 형성된 도시의 중산층, 노동자, 빈민을 배제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전통적 인민주의는 대공황에서 2차 세계대전 동안 급속히 성장하여,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1940-50년대에 확립된 인민주의 정권은 미국의 ‘발전주의’가 본격적으로 이식되기까지 지속되었다. 1950년대 미국의 전략은 ‘자유 세계주의’라는 냉전의 틀 내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공산주의 세력을 봉쇄하는데 집중했다. 반면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지역 차원의 냉전 질서가 가시화되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는 상대화되었다. 라틴 아메리카 관료들은 미국에게 발전원조를 호소했지만 마셜플랜은 구상되지 않았고, 발전의 쇼케이스로 수출지향적 산업화가 지원된 아시아와 달리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주로 미국계 법인자본의 직접투자를 위한 우호적 조건 형성이 강조되었다. 이 시기에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주의는 국내외적인 정치·경제적 권력의 공백과 교착 상황에 대한 대응의 성격을 띤다. 인민주의는 기존의 발전전략과 통치구조에 대한 반대를 중산층, 노동자, 도시빈민들의 요구와 결합하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이들은 새롭게 형성된 국내 산업자본가들과 노동자계급의 제휴를 형성하고 토지귀족과 타협함으로써 국내산업을 중심으로 한 민족적 발전을 추진했다. 그러나 대립하는 세력들 사이의 특수한 제휴형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대중적 동원이 추가되어야 했다. 즉 인민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세력 및 그와 결탁한 토지귀족 세력, 자유무역과 과두제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성장했다. 이들은 제국주의로 변질된 19세기 자유주의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영향을 받아 열정적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 감정을 동원하면서 민족적 갱생을 주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인민은 노동자·농민·빈민과 같은 계급적 범주를 초월한 유기체적 통일성으로 이상화된 주체였다. 그 결과 인민은 기존의 연고주의에서 배제된 도시 노동자, 프티 부르주아, 농촌 출신 이주자, 학생, 지식인, 사병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되었다. 인민주의적 동원 과정에서 사회적 관계는 인격화되고 정치는 인민의 지도자와 적 사이의 투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인민주의는 결코 근본적인 변혁을 지향하지 않았다. 혁명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소유권과 생산관계의 변혁을 추구하지 않으며 토지귀족과 타협했다. 동시에 그들은 대중적 선거 과정에서 다양하고 이질적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독창적인 정치적·문화적 동원방식을 발전시켰다. 한편 인민주의는 자율적인 노동자운동을 억압하고 노동조합을 확대된 국가기구로 통합했다. 노조는 국가의 권위 하에서 자본가조직과의 기능적 조정을 통해 계급적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 위계적 질서 내에서 노동자 개인에게 고정된 지위를 제공하는 코포러티즘 기구로 전락했다. 노동자는 인민주의 정권에 대한 충성을 대가로 국가에 의해 승인된 틀 내에서 임금교섭과 복지혜택, 인정적인 사회적 지위와 선거권을 획득했다. 미국 헤게모니의 형성과 군부독재의 폭정 1950년대부터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해외직접투자가 거대하게 이뤄졌고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법인자본과 초민족화된 국내 부르주아지는 확고한 지위를 확립하기에 이른다. 이에 기초한 자본축적은 더 이상 인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아울러 1960년대 초 라틴 아메리카 내외의 정치상황도 인민주의의 토대를 해체하는 요소였다. 1955년 반둥회의로 상징되는 비동맹운동의 확산과 1959년 쿠바혁명의 영향으로 민족적·민중적 발전의 요구가 증가되고 있었다. 인민주의의 틀을 벗어나려는 노동자와 농민의 저항도 증가하고 일부에서는 게릴라 무장 투쟁도 출현했다. 1950년대 중반에서 1960년대 중반에 이르는 “동시적인 혁명의 고조”는 1940-50년대 인민주의와 비교할 때 새로운 중요한 특징을 반영한다. 첫째, 혁명적 고조는 이전 시기의 민족적 인민주의를 넘어 강력한 급진적 사회주의적 요소를 포함했다. 둘째, 이들은 게릴라, 대중봉기, 총파업 등 의회 외부적 투쟁과 연계했다. 셋째, 이들은 이전의 프티 부르주아 선거주의자들과의 연합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넷째, 새로운 혁명적 운동이 중앙아메리카 및 카리브해 연안 국가의 강탈적·권위적·자유주의적인 수출지향적 체제와 남아메리카의 인민주의적인 수입대체적 체제에 대해 동시에 도전했다. 다섯째, 혁명주의적 물결의 기원은 각국의 특수성에 기반했지만, 미국의 반봉기 전술에 대한 투쟁과 함께 특히 쿠바혁명에 의해 창안된 수렴점을 공통적인 혁명적 ‘참고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3) 이에 미국은 1961년 ‘진보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고, 사회주의 및 비동맹운동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다. 전술적으로 워싱턴은 다중적 정책을 적용했다. 가령 ‘진보를 위한 동맹’을 통한 개량의 쟁취, 직접적인 군사적 개입(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반봉기, 군사쿠데타 등 고도의 군사 전략, 해외 군대 파견과 군사적 원조, 프로그램의 이식 등이 그것이다. 혁명을 제국주의적으로 봉쇄하려는 이러한 노력에서 국내 프티 부르주아 선거 지도자들이 주된 역할을 수행되었다. 그러나 다중적 전술의 시기는 결국 군사적 선택이 우위를 점하며 막을 내리게 된다. 미국의 전술 변경은 혁명적 물결을 봉쇄하는 데 있어 민간 선거 체제와 개량에 대한 워싱턴의 의심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워싱턴은 일련의 군사 쿠데타를 후원하는 쪽으로 방향 선회하며 혁명세력의 부상을 제거하고 민족주의적-인민주의적 개량을 역전시켰다. 아울러 ‘혁명적·국제주의적’ 쿠바를 고립시키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 군부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강화되었고 역내에서 위로부터의 개혁을 동반하는 반공과 냉전의 논리가 확산되었다. 결국 좌파를 고무할 수 있는 인민주의 정부를 제거하기 위해 군부가 직접적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군부-반혁명-권위주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 물론 아메리카에서 군부의 정치개입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었다. 다만 이 시기의 군사정부는 쿠데타 이후 토지귀족과 보수주의 정당에 권력을 이양한 1930년대와 달리, 수출주도 산업화라는 사회·경제적 전망 속에서 군사혁명위원회를 통해 장기 집권한다는 차별점이 있다. 또 미국은 군사정부를 관료적 능력과 기술적 역량을 갖춘 현대화의 주도세력으로 간주했다. 이 시기 군부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인민주의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다. 군부는 민족경제를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개방하고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진출을 장려했다. 또 수출산업을 중심으로 급속한 경제발전과 현대화를 추진하고 노동자에 대한 수혜를 철회했다. 임금하락, 장시간노동, 노조탄압, 비공식부문 노동자·빈민에 대한 탄압은 자연스러운 산물이었다. 미국은 군사 독재 시기 동안 신자유주의적 경제를 위한 법적·이데올로기적·제도적 기초를 창조했다. 미국의 지배를 위한 정치·경제적 파라미터는 군사 정권이 새로운 대중적 사회-정치적 운동이 부상하는 1980년대 초 쇠퇴할 때까지 유지된다. 그러나 미국 및 유럽의 제국주의는 단순히 군사적 지배만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인민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사회주의 정당, 즉 ‘시장 해법’을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정치적으로 추방했다. 제국주의 세력은 대중들이 군사 정권을 위기로 몰아붙일 때 이들이 정치에 복귀할 경우를 대비해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치하는 한편 이들을 대체할 미래의 선거 정당을 후원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반 선거주의적인 “중도좌파”와 “중도우파”의 복귀가 제국주의적-군사 국가가 기초한 신자유주의적 파라미터 내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前인민주의, 前사회주의, 前민족주의 선거 엘리트들은 반독재 운동을 해체하고 오히려 선거 정치의 물꼬를 텄다. 군부가 신자유주의의 기초를 닦았다면 민간 선거주의자들은 모든 전략 부문에 대한 집단적인 사유화, 총체적인 탈규제, 영속적인 부채 지불, 부의 유출과 역진 등을 구조화했다. 외채위기와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 한편 1980년대에 이르러 수출주도 산업화의 한계들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동아시아와 달리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제한적이었으며 오히려 역내에서 활동하는 초민족적 법인자본을 후원하는 것이었다. 또 역내 국가들은 경제성장을 위해 외채에 과도하게 의존한 결과 높은 경제적 비용을 내포하고 있었다. 결국 유가상승과 고금리·고달러로 인해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외채위기가 발생하고 생산마비, 자본도피, 대중적 소요가 발생했다. 1982-83년 외채위기 이후 라틴 아메리카는 만성적 경제위기에 진입했다. 미국은 1985년 ‘베이커 플랜’을 통해 재정긴축을 전제로 외채의 상환시기를 재조정할 것을 제안하고 수출을 통한 외환확보와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무역자유화를 권고했다. 그런데 이런 정책이 대중적 불만과 사회적 소요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우려 속에 경제개혁의 정치적 조건을 둘러싼 논쟁이 개시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가기구의 변화와 민주화 운동세력의 분할, ‘책임있는’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지원 등이 모색되었다. 즉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위해 군부의 퇴진과 자유주의 또는 중도좌파의 집권이 권고된 것이다. 이것은 곧 민주주의에 대한 관리적 관념의 출현을 의미한다. 군사정부에서 이뤄진 경제적 자유화는 정치적 자유화를 필요로 하고 정치적 자유화는 민주화와 동일시되거나 경제적 위기를 관리할 유일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민주주의는 선거와 같은 절차와 규칙으로 환원되거나 탈정치화되고 순수한 기술적 문제로 파악된다. 동시에 민주적 민간정부의 책임성이 강조되고 문민화의 구체적 경로로서 군부와 책임있는 야당의 협상이 권장되기에 이른다. 아르헨티나(1983년), 칠레(1990년) 등 군사정부의 퇴진 또는 문민정부로의 ‘협상된 이행’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4)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 대다수 국가들은 외채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협상된 이행’에도 성공하지 못한다. 무능력하고 부패한 보수정당, 분명한 정치적 전망이 결여된 중도좌파 등 군부의 퇴진에도 불구하고 대중을 대의제로 동원할 수 있는 정당의 역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던 셈이다. 문민화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통치구조가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선거의 의미는 자연스레 축소되었다. 기술관료들은 국제금융기구의 정책지침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경제엘리트와 정치엘리트의 이익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편 경제위기는 사회적 불평등과 노동자들의 이질성을 심화하면서 노동자운동의 자율성을 침식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 가치절하가 이뤄지고, 정치는 부패한 직업정치가와 귀족집단의 이기적인 게임으로 간주되었다. 정치엘리트와 노조 등 기존제도의 수혜자에 대한 대중적 불만이 누적되고 ‘원한의 정치’가 득세하게 된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외채위기를 거쳐 금융세계화로 포섭되는 과정에서 군부와 전통적 인민주의 세력은 무능을 노정한다. 기존의 정당들은 신자유주의를 추진함으로써 내적 위기를 경험하고 대중적 토대를 상실했다. 또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당들도 독자적인 이념을 상실하고 내적 분할을 경험했다. 결국 기존의 어떤 정치세력도 분명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를 등에 업고 새로운 인민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하기에 이른다(아르헨티나의 메넴, 브라질의 콜로, 페루의 후지모리, 멕시코의 살리나스, 베네수엘라의 페레즈). 새로운 인민주의자들은 ‘반정치의 정치’를 통해 경제적 위기와 계급적 갈등을 기존의 정치와 정치 엘리트, 정당과 의회제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했다. 그러나 이들은 극단적 위기를 진정시키고 민족을 재건하기 위한 필요악으로 여전히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수용한다. ‘충격요법’의 과감성은 전통적 인민주의에 대한 국제금융기구와 자본가의 불신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긴축정책, 부채-주식 전환, 국유기업 사유화, 남미공동시장, 북미자유무역협정 등). 이는 곧 광범위한 실업·빈곤을 야기하고 실질임금 하락, 소득불평등을 확대하며 경제적 불안정성을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베네수엘라의 정치·경제적 조건 석유경제의 형성과 농업의 위기, 도시화 19세기 초 식민 치하 베네수엘라는 광물 자원이 있는지 몰랐기 때문에 (코코아, 커피, 설탕, 면화, 담배 등) 여전히 농업이 주된 경제 활동이었고 최소한 70%의 인구가 농촌에 거주했다. 하지만 19세기 내내 토지는 독립전쟁(1821-39년)에 참가했던 강자의 수중에서 분할, 점유되었다. 이러한 불공평한 토지 분배에 맞서 독립 후 내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에세키엘 사모라), 불공평한 토지 분배 구조를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그 후 구스만 블랑코와 같은 군부 지도자들은 충직한 부하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는데, 이 점에서 가장 악명 높은 후안 빈센트 고메스와 같은 독재자는 막대한 토지를 개인 소유로 전유했다. 고메스 독재 치하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농업경제에서 천연 자원 개발(특히 석유) 기반 경제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종국적으로 농업을 황폐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었다. 고메스 독재가 1935년 막을 내리자, 농업은 전체 노동력의 60%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GDP의 단 22%만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베네수엘라는 세계에서 최대 석유수출국이 되었다. 석유 생산이 점점 다른 산업 부문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경제학자들이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 북해 천연가스/원유 발견이 네덜란드 경제에 끼친 효과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야기되었다. ▲석유 수출로 인한 해외 통화 유입 ▲구매력 증가로 인한 인플레이션 발생 ▲국산품에 비해 수입 공산품·농산품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결과 수입량이 증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수입품으로 인해 농업 생산 파괴 산업 발전 저해라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5) 1960년에 이르자 농촌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은 단 35%로 급감했다(1990년에는 12%). 이로써 베네수엘라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도시화된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네덜란드 병”의 또 다른 결과는 베네수엘라가 역내에서 유일한 농산물 수입 국가이자 GDP에서 농산물이 차지하는 비율이 최소인 국가로 전락한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급격한 농업의 쇠락은 도시화가 굉장히 급속히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도시는 수용 가능한 인구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 결과 도시 변두리에 거대한 슬럼/바리오가 형성되었고, 농촌 쇠락에 조응하는 슬럼/바리오 규모의 확대는 1960-70년대 석유 수익이 어마어마하게 증대한 결과였다. 1980-90년대 20여 년 동안 석유 수익이 꾸준히 하락하자 국가는 재분배 조치를 통해 빈곤의 충격을 완화할 수 없었고 대신 사회적 소비를 삭감하는 극약처방을 내세웠다. 한편 전반적인 농업의 쇠락 이외에도, 베네수엘라 농민들은 극심한 토지 소유 불평등에 처했다.6) 국가가 보증하는 토지개혁은 마르코스 페레스 히메네스 독재가 막을 내리고 1958년 자유 민주주의가 도입된 직후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토지개혁법(1960년)에 따라 전국농업연구소가 설립되고 20만 이상의 가구에 국유지가 분배되었는데, 차기 정부는 연구소와 토지개혁 강령을 다시 무시했다. 1970년대 석유 호황기에 “네덜란드 병”이 심화되면서 농산물은 이윤이 남지 않았고, 도시화는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토지개혁 수혜자의 1/3이 탈락했고, 수혜자의 90% 가량이 온전한 토지 소유권을 획득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따라서 토지개혁은 필연적으로 토지 소유권의 개혁을 필요로 했다. 즉 토지소유자의 수중이 아닌 국가에서 소농으로 소유권의 이전이 요구된 것이다. 1997년 농업 인구조사에 따르면, 토지분배는 1960년 이전과 마찬가지로 불평등한 상황에 머물렀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소유자를 위한 시장이 확대되고(종종 투기 목적으로 토지 매매) ▲대토지소유자들이 농업노동자/소작농을 내쫓는 경향이 증가하고(신기술의 도입 또는 농산물이 더 이상 경쟁력이 없자 생산을 포기한 결과로, 이는 결국 도시화에 기여), ▲토지소유자들이 점점 개인보다는 기업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계속 진행되었다. 단적으로 현재 베네수엘라의 인구 중 90%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이는 1970년 ‘오일 붐’의 결과로서, 그 이후에도 정부는 석유산업에 전적으로 집중했으며 이촌향도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석유로 인한 소득은 대부분 도시의 기반시설을 구축하는데 투자되었고, 중산층, 백인에게 돌아갔다. 이는 농업 기반을 축소시키고 경제에 대 혼란을 가져왔다(OPEC의 공동 창설자 후안 파블로 알폰소는 “석유는 악마의 배설물이다”라고 표현했다). 푼토피지협약 체계와 경제 위기 푼토피지협약(1958년)으로 건설된 양당 협조 체제에 대한 반대가 볼리바리안 프로젝트의 시초를 구성한다. 대부분 군사 독재 하에 있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건전하고 민주적이고 안정적인’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는 제국주의적 시각과 달리 차베스는 이 체제를 사회적으로 배타적이고 부패한 체제로 규정했다. 가령 사회민주적 경향 하에서 기조직된 도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민주행동당(AD)과 베네수엘라 노총(CTV)의 사례가 그것이었다.8) 푼토피지협약 이후 베네수엘라 지배계급은 중동과 유사한 실책을 저질렀고, 전국민을 석유로 혜택을 받는 자와 고통 받는 자로 양분했다. 국제 유가의 하락과 국제이자율의 상승은 석유 수출 의존적이고 해외 금융 도입 의존적인 국가 경제에 침체를 가져왔다. 특히 1980년대 초 라틴 아메리카 전반의 외채위기로 인한 긴축이 장기화된 결과 많은 국가들에서 자산의 평가절하가 일어났다. 긴축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재난을 안겨 주는 반면, 유동 자본의 소유자들에게는 그 지역의 자산을 최저 가격에 구매하여 축적과정을 회복시킬 수 있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다. 긴축기간 동안 라틴 아메리카 국가로부터 미국으로의 대규모 자본도피는 그 지역에서 생성된 자본 분파를 고위험의 국내 투자로부터 보호하는데 복무했다. 또한 도피한 자본가들이 자신의 자본을 본국으로 재송환하기를 원하는 경우에 외채문제는 자산 비용의 하락을 통해 자본가들의 미래의 기회를 확장하기도 했다.9)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페레즈(1988년 당선)는 IMF를 신봉했다(사유화, 공공지출 삭감, 자유화, 탈규제). 경제는 8.6% 수축했고, 빈곤도 급증했다. 신자유주의적 조치는 인플레이션처럼 지배계급 스스로 해결을 공언했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인구 다수를 황폐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신자유주의적 조치들이 빈곤을 심화하고 거대한 빈농들의 도시 이주를 촉진하고 실질임금을 하락시키고 비공식부문 노동자를 팽창시킨 원인이었다. 이에 대한 반발이 바로 빈민 봉기인 ‘카라카소’였다. 페레즈 집권 3년간 60만의 노동자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농업 노동자, 빈농, 중농의 상당수가 감소했다. 비공식부문 노동자 비율은 1980년 34.5%에서 1999년 53%로 급증한 반면 산업 노동자 비율은 감소했다. 1989년 이후 통신, 항만, 석유, 철강, 항공 등이 사유화되면서 외국자본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고용이 감소했다. 경제적 불평등과 실업이 창궐하고 실질임금이 급락하고 사회적 분할선이 심화되었다. 경제적 위기는 정치적 위기를 동반했고, 부패와 무능은 정치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또 연이은 은행 위기로 대량의 자본도피에 직면해야 했다. 통화 가치 저평가는 70.8%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을 야기했고, 물가 및 환율 통제가 또 다시 부과됐다. 1995년 협상을 통해 또 다시 14억 달러의 IMF 차관이 도입됐지만 이는 더 많은 구조조정, 사유화, 외국인 투자와 함께 유가 하락과 빈곤을 강요하는 것이었다.10) 이것이 바로 1999년 차베스가 승계한 정치적·경제적 상황이었다. 차베스는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전통적인 정치체제에 회의적인 대중들의(56%) 지지를 얻어 1998년 12월 당선되었다. 차베스는 1992년 봉기 실패 및 수감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들에게 제도적 변화를 확신시켰고, 베네수엘라의 난국을 종식시키기 위해 사회·경제적 변화를 강조했다(차베스는 봉기 실패 이후 군사 쿠데타 대신 제도적 변화 노선을 채택했다). 차베스는 칠레 아옌데 이후 평화적 방식으로 라틴 아메리카에서 심도 깊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수행하고자 시도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되기도 한다. 차베스는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고(군대에 대한 영향력 유지), 제도 영역에서 게임의 법칙을 변화시킨다는 기본 전제 하에 변화를 모색한 것이 차이점일 것이다.11) 차베스의 집권과 반혁명, 그리고 개혁 개혁을 위한 제도적 조건의 창출 반대세력은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기존 과두제가 여전히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국영석유회사의 경영, 입법·사법 권력 및 지방 정부에서 높은 수준의 동맹을 유지했고, 미디어에 대한 독점적 통제와 경제인 연합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베네수엘라노총(CTV)의 지지, 고위 장교, 카톨릭과의 연계도 굳건했으며 무엇보다도 미국의 후원이 결정적이었다. 중간계급과 군부는 차베스 정권에 미온적이거나 비판적이었다. 또 베네수엘라에는 강력한 좌파 정당이 부재했다. ‘제5공화국운동(MVR)’은 현재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당이지만, 그 속에는 기회주의적 요소가 상당한 정도로 포함되었다.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대중운동은 대체로 취약했으며 전통적인 지배 정당들에 의해 조종되는 등 자율성이 심각히 훼손된 상태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차베스는 그의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 구조로서 군부에 의존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기회를 거의 가질 수 없었다. 따라서 정부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제도적 게임의 법칙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제헌의회를 소집하기 위한 국민투표에 이어 ‘볼리바리안 헌법’이 제정되었다(1999년). 신헌법은 반신자유주의, 참여 민주주의, 협동조합 및 노동자 자주 관리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경제 모델과 인간주의와 연대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12) 다음 단계는 정부 내 세력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주지사, 시장, 국회의원 등을 선출하는 거대 총선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고, 이로써 차베스가 국가기구를 장악한 반면 반대세력은 분할되어 국회에서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그 결과 2001년 12월 토지법, 어업법, 탄화수소법, 소액대출신용법, 협동조합법 등 49개 개혁법안이 제정되었다. 또 반대세력의 역공에 대처하기 위해 차베스는 ‘볼리바리안 써클’을 제창, 차베스 지지자들 스스로 10명 내외로 그룹을 지어 헌법에 대해 주변을 교육하고 구체적인 발안을 취하게 했다.13) 아울러 차베스는 핵심산업인 석유부문에 대한 정부 통제를 강화했다. 차베스는 석유 국영회사인 PdVSA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해외자산 매각, 생산량 축소를 통해 국제 유가 상승을 유도하고, 각종 세제 개편을 통해 국고에 대한 PdVSA의 재정 기여도를 제고시키고자 했다.14) 석유산업에 대한 통제 강화는 재정 증대로 귀결됐고, 이는 다시 빈곤 해결을 위한 재분배 정책으로 이어졌다. ‘볼리바르 2000 프로젝트’라는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볼리바리안 스쿨’이라는 교육 정책은 차베스 집권 초기 개혁의 대표적 사례다(<표1>참고). 반대세력의 역공과 지지 세력의 확대 그러나 49개 개혁법안이 제정되는 날에 맞춰 반대세력은 거대한 시위를 조직하고 총파업을 시도했다. 이때 루이스 미킬레나 등 ‘기회주의’ 세력은 차베스의 개혁법안에 반대하며 이탈했는데, 그 결과 여권은 의회 과반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불리한 정치 역관계 속에서 2002년 4월 군사 쿠데타의 발발은 베네수엘라 정치사에 일대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이는 점증하던 반대세력의 정치 투쟁의 효과로서 정부와 반대세력 사이에 총격전으로까지 비화하게 된다. 군부 지도자들이 차베스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고, 차베스를 일시적으로 축출한 뒤 베네수엘라 상공회의소 의장인 카르모나를 임시 대통령으로 옹립한다(2002.4.11). 이들은 워싱턴의 암묵적 동의 하에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러나 이들의 쿠데타는 빈민층을 중심으로 한 차베스 지지자들의 대규모 시위에 의해 이틀 만에 수포로 돌아갔다(2002.4.13).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의 이웃 국가들도 이번 쿠데타를 헌정파괴행위라며 신임 정부를 불신임했다. 2002년 4월 반차베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군부 내 차베스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지고 반대세력을 숙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울러 쿠데타를 배후에서 지원한 미국과 차베스의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이자 반대세력을 분할하고 개혁에 미온적/비판적이었던 중간계급을 견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볼리바리안 써클’은 전국적으로 배가되었고, 다양한 형태로 포진할 수 있었다. 또 농·어민 운동 조직이 결성되고, 반대세력의 미디어 보이콧에 맞선 시청자운동, 도시토지위원회, 의사, 교사, 변호사 등 특수 중간계급 단체 등 새로운 조직이 출현했다. 무엇보다도 CTV에 비판적이었던 노조 지도자들이 혁명 과정을 지지하기 위해 독립 노조 세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차베스를 지지하지만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다양한 좌파 정당들은 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공동 전선을 결성하기로 결정했다. 특히 해외 좌파 세력 및 진보세력에게 잘 이해되지 않거나 높게 평가되지 않았던 베네수엘라 이행 과정이 세계적으로 동조 세력을 얻어갔다. 한편 반혁명 쿠데타의 실패와 헌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언제 발발할지 모를 쿠데타에 대비해서 차베스는 지지세력, 특히 군부를 강화하는데 주력했다. 나아가 경제인 단체에 더 친화적인 사람을 경제 부문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반대세력에게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아울러 자격부여법(Qualifying Law) 일부를 수정하고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반대세력들은 이러한 차베스의 행동을 정부가 취약하다는 신호로 간주하고 2002년 말 - 2003년 초 관리자 총파업/사보타지 등 역공세를 다시 취했다. 그러나 차베스의 강력한 지도력과 석유 부문 노동자 등 노동자들의 반대로 반대세력은 두 번째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 차베스 정부는 1만8천에 이르는 관리자와 상층 노동자를 파면할 법적 근거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석유수출이 마비되는 등 결과적으로 국가 경제는 근 8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국회경제자문처에 따르면, GDP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석유 부문이 총 37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고 비석유부문이 12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실제로 베네수엘라 경제는 2003년 10% 가량 수축했다. 재정부 장관 토비아스 노브레가는 2003년 경제가 회복하기 시작하면서 4/4분기 GDP 성장률이 대략 0% 즈음이고 2003년 인플레이션율은 25% 정도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완연한 회복기에 접어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차베스 정권에 대한 맹렬한 반대 상황에서 경제가 안정화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16) 국민소환투표 승리와 집권 기반의 안정화 쿠데타와 총파업/사보타지 결과 베네수엘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이후 국민소환투표가 시행된 2004년 8월까지, 1년 반 사이에 사회경제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환경은 역동적으로 변화했다. 경제는 10% 이상 성장하고 있었고 국제 유가는 기록적으로 상승했고 이로 얻어진 소득은 사회복지 지출로 환류되었다. 그 사회적 효과는 대단히 두드러졌고 친차베스 조직은 전국적으로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한편 미주국가기구(OAS) 및 ‘미국의 우방국’은 국내 반대세력과 합세하여 차베스에 대한 정치적 압력을 가했고, 그 결과 차베스는 헌법상 보장된 국민소환투표를 수용하게 된다. 이에 친차베스 세력은 쿠데타와 총파업/사보타지 당시 자생적으로 분출된 차베스 지지 시위 과정에서 도시빈민 등 풀뿌리 민중 운동을 조직했다. 특히 2003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시오네스(Misiones, 미션) 프로그램은 빈민에 대한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적극적인 재분배 정책을 시도하며 지지율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100만에 달하는 콜럼비아 출신 이주자들을 귀화시킴으로써 차베스의 지지층 더욱 확대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끝에 차베스는 국민소환투표(2004.8.15)에서 60%에 달하는 찬성률로 자격을 재확보한다. <표1> 차베스의 사회 복지 프로그램15) [%=사진1%] 차베스의 국민소환투표 승리는 반대세력에게 3번째 패배이자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 대한 지지를 의미했다. 차베스 정부는 국내적·국제적으로 더욱 강력한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고, 이제 그 누구도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의 정당성과 차베스를 지지하는 거대한 대중의 존재를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반대세력에 대한 신뢰는 더욱 추락했고 이들의 분할은 가속화됐다. 이어 2005년 말 총선에서도 차베스 정부 여당이 승리하면서 지지기반은 더욱 공고화되었다(MVR이 의석의 68% 차지). 빈민의 절대다수(90% 이상)가 차베스를 지지했으며, 이는 라티푼디오와 파산 공장의 몰수, 대규모사회간접투자 등을 가속화하는 조처로 나아갈 동력을 의미했다. 또 차베스의 세 번째 집권을 가능케 할 개헌도 가능해지게 되었다. 차베스의 개혁을 제약하는 구조적·객관적인 요인 미국의 대 베네수엘라 저강도 분쟁 현재까지 차베스 정권과의 대결 과정에서 미국은 점진주의적·내재적 정치 전략을 거부하고 최단기간에 국가권력을 접수하려고 시도함으로써 베네수엘라 내외부의 전략적 연대 대상을 상실하고 말았다.17) 무엇보다 국내 반정부 야당이나 NGO의 세력이 약화된 것이 미국의 고민이다. 현재 미국과 반대세력이 차베스 정권에 대한 즉각적인 전복 시도에 나서기는 힘들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우선 차베스 정권을 지지하는 활동가가 많으며 대중적 기초도 튼튼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익들이 대중을 동원하고 대중운동을 기획할 이슈가 거의 부재하다. 이는 차베스 정권의 복지 프로그램이 대중적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경제가 성장 중이며 삶의 질도 높아지고 있고 부패가 억제되고 언론, 출판, 집회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보수적인 기업 협회도 정부와의 계약으로 점점 번영하고 있으며 여당과의 접촉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NGO나 정당들과 달리 위험한 도박에 매달리지 않는다. 현재 반정부 친미 선전을 수행하는 민간 언론사 정도가 미국이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뿐이다.18) 따라서 현재 미 정책결정자들은 베네수엘라 국내 사안에 개입하거나 양분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어느 한편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차베스 정부가 민주적 원칙을 고수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하는 가라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베네수엘라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오히려 차베스 정부에 대한 대중적 지지가 확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일부 정책결정자들은 더욱 과감한/호전적인 접근법은 양자간 관계를 멀게 하고 긴장을 증폭시킬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또 일부 논자들은 미국이 차베스 정부와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하고 가령 마약 수출 등 상호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에 대해 공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또 다른 장기 정책 접근법의 경우, 미국은 차베스가 부상하게 된 정황에 착목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 정책접근법은 비단 베네수엘라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업, 범죄, 정치적 부패에 시달리는 여타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19) 결론적으로, 미 국부무는 ‘민주주의’나 ‘인권’ 마약문제를 빌미로 간섭을 지속할 것을 정책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20) 그 구체적 방안은 ①베네수엘라 시민사회를 지지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침해를 고발하기 위해 OAS, EU, 등 국제기구와 협력하고 ②인권 및 기타 NGO들이 베네수엘라 시민사회를 지지하고 방어하기 위한 국제적 네트워크를 결성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③베네수엘라 정부 기관에 대항하여 기조직된 노동자, 독립 미디어, NGO, 종교단체를 조직할 것 등이다. 이미 ‘민주주의를 위한 국가원조기금’(NED, 라틴 아메리카에 반공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미국 해외홍보처(USIA)에서 지원하는 자금)이 후원하는 SUMATE와 같은 NGO가 암약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21) ‘플랜 콜럼비아’로 대표되는 일련의 군사작전과 함께 내부 반대세력을 후원, 규합하여 정권을 전복하려는 시도의 종합으로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저강도 분쟁은 항상-이미 전개 중이었고, 이는 베네수엘라의 급진화를 제약하는 잠재 요소다.22) 자본의 초민족화와 미국 주도의 경제통합 차베스의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의 대외적 축을 이루는 ALBA가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를 넘어 대안적인 지역통합을 추구할 수 있을지도 중요한 관심사다. 미국이 구상한 FTAA 협상이 장벽에 부딪치며 정의와 평등, 연대를 원칙으로 대륙의 경제적 인프라를 구축하자는 차베스의 ALBA 제안이 대안으로 부상 중이다 그런데 ALBA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 우선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경제통합 시도가 다변화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FTAA 협상 타결 실패 이후 미국은 하위-지역 협정을 병행 추진하며 경제통합을 시도 중이다. 도미니카공화국-중앙아메리카-미국 자유무역협정(DR-CAFTA)을 법제화하고 파나마와 여타 안데스 3개 국가들과 양자간 자유무역협정을 추진 중이다. 한편 역내에서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인 브라질은 메르코수르 8개 회원국을 확대 규합한데 이어 2004년 10월에는 안데스공동체(CAN, Andean Community of Nation)들과 정치·경제 협정을 수립했다. 또 2004년 12월에는 총 12개국이 남미공동체(SACN, South American Community of Nation)를 결성하는데 합의했다. 이에 거의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자주적인 경제정책을 실용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미국·브라질과 협상중이거나 모종의 협정에 가입하고 있다. 따라서 ALBA가 실질적으로 역내 국가들에 끼치게 될 영향력이 얼마나 클지는 미지수다.23) 게다가 미국의 ‘개방적 지역주의(open regionalism)’ 구상의 핵심은 공동시장을 직접 활용하는 것보다는 초민족적 법인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을 매개하지 않은 역내 국가들 간의 호혜평등한 교역이라는 일차적 목표를 넘어 미국의 경제통합으로부터 이탈하기 위해서는 자본도피라는 문제를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외채위기를 기화로 초민족적 법인자본에 철저히 잠식당한 라틴 아메리카 경제는 일상적인 자본유출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초민족적 은행으로 저축을 이전시킨 자본가들은 국내의 위험에서 자유로워진 반면 국제금융체제의 재생산에 종속되며 사회가 수탈당하는 구조가 고착화 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자본도피와 경제 성장 사이에는 음의 상관관계가 강하게 나타났음을 상기할 때, 자본도피는 역내 국가들의 자주적 경제정책 수립 및 내생적 경제성장에도 큰 장애가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석유산업에 대한 통제 강화를 통해 차베스 정부가 ‘오일 달러’를 활용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초민족적 법인자본에 대한 통제를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최근 차베스가 석유산업의 대미 의존도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며 민족자본 육성과 투자 및 판로 다변화에 나서고 있지만, 미국이 수입하는 원유 중 15% 가량이 베네수엘라 산이고 베네수엘라가 수출하는 원유 중 절반가량이 미국으로 수출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미국과의 정치-외교적 마찰이 급격한 경제적 단절로 이어지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볼리바리안 혁명’의 주체적 조건과 한계 차베스 개혁 노선의 한계 이처럼 라틴 아메리카에서 ‘무적의 제국’으로서 자신의 권력과 ‘신자유주의 정책의 비가역성’이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간섭과 자본의 초민족화는 차베스의 개혁을 제약하는 구조적·객관적 요인이다. 이런 맥락에서 차베스 개혁의 성격을 몇 가지 측면에서 평가해보도록 하자. 집권 초기, 차베스 정부는 기존의 외채상환을 지속하고 외채지불정지 같은 조치는 없을 것으로 약속했다(단, 재정지출의 30%에 달하는 외채상환부담을 줄이기 위해 외채재협상(만기연장)을 추진하고, 채무주식화 제도를 도입한다는 요지의 계획을 발표한 바 있음). 또 차베스는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재산, 특권, 부에 대해서 어떠한 조치도 없을 것이라고 반복했다. 게다가 이들 엘리트들이 정부에 대해 세 번의 비합법적인 정부 전복 시도를 하고도 여전히 그들의 계급적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차베스 대통령이 여전히 민관 협력과 사회복지 지출에 기초한 발전 구상에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극심한 계급 갈등을 거치면서도 최소한 정부 수준에서는 소유 관계 또는 계급 관계의 파열이 없었으며, 외국인 채권자들과 투자자들 그리고 원유 고객들과의 어떠한 관계 단절도 없었다. 정부는 의료제도, 교육, 중소기업, 그리고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국가의 자금지출을 증가시키긴 했는데, 이는 외채 상환, 민간 수출업자에 대한 보조금 지급, 산업자본가에 대한 저리의 융자라는 재정 계획의 틀이라는 제약조건 안에서만 제시된 것이었다.24) 더욱이 국내적·국제적으로 차베스의 업적 중 상당부분이 석유 수입에 의존한 결과라는 점도 분명하다. 석유로부터 얻는 초과수익이 없었다면 거대기업과 빈곤층 사이의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석유부문을 제외하면 사적 투자는 고갈 상태이며 예년 수준으로 유가가 견조하게 하락한다면 베네수엘라의 경제 문제는 매우 심각히 위기에 처할 것이다. 지난 2년간 베네수엘라가 GDP 3%에 달하는 재정적자를 보인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 상태는 당분간 현재의 유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으며 차베스의 집권 기반도 큰 수준에서 현재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26) 또 차베스의 개혁정책 중 가장 급진적이라고 평가받는 토지개혁도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2001년 11월 “농촌으로 돌아가자”라는 프로그램이 토지및농업개발에관한법률에 따라 시행되었는데 이 법의 목표는 ▲토지소유 규모 제한 ▲농업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유휴 토지에 대한 과세 ▲국가 소유의 미사용 토지를 소농 가구 또는 협동조합에 분배 ▲사유의 미경작지, 휴경지를 징발, 재분배하는 것을 요지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001년 토지개혁법은 전 세계 토지개혁의 역사와 비교할 때 그다지 급진적인 것이 아니었다. 본 법은 대토지소유자가 자기 토지에 대해 소유권을 가진다고 명시했고, 오직 휴경지나 특정 규모 이상 토지의 경우 그 질에 따라 그 일부가 징수될 수 있을 뿐이라고 규정했다. 가장 모순적인 목표는 토지소유자들에게 시장 가격으로 배상한다는 것이었다. 차베스 정부는 국유지 200만 헥타르를 13만 소농 및 협동조합에 분배했지만 사유지는 전혀 징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국유지에서 라티푼디오로 확장하려고 하자 대토지소유주와 농민 사이에는 긴장이 팽팽하게 형성됐다.27) 2005년 변경된 토지개혁법은 토지소유자가 소유할 수 있는 유휴지 규모를 개정했다.28) 대규모 유휴 부동산을 국가가 징발할 수 있는 권한 이외에도, 토지개혁법은 유휴 부동산에 비례해 과세되어야 함을 규정했다. 이 조치는 대토지소유주의 큰 반발을 샀고, 현재까지 이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지불유예를 사실상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 이유는 ▲법적 회피와 토지 등기부의 부실(취약한 법적 틀거리) ▲총체적인 법의 불비와 불처벌 관행 ▲취약한 농민 조직 ▲빈약한 농촌 지원 구조 등으로 지적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석유경제를 다변화하고 농업을 근본적으로 회상하는 현실적 경로의 문제다. 현재 베네수엘라 경제 구조상 농민이 토지를 불하받고 농업기술을 습득하더라도 농산품을 판매할 경로를 확보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를 위해 정부가 베네수엘라농업협동조합(CVA)을 설립했지만, CVA가 판매를 대행할 것이라는 보증도 없다. 정부가 베네수엘라 농산품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수입품에 대해 국산품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농산품들이 국내외 시장에서 좋은 가격에 판매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러한 경제적 “네덜란드 병”은 베네수엘라 농업이 현재 GDP 5% 수준에 머무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이 문제에 관한한 차베스를 포함한 역대 어느 정권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베네수엘라의 역대 정권들은 고유가 시절, 예산 외의 잉여수입을 사회 간접자본 확충 또는 비석유산업의 성장기반 마련에 투자하지 않고 단순한 빈민구제정책 등에 집행함으로써 유가 하락시 전 산업이 함께 몰락하는 경험을 되풀이한 바 있다. 경제를 다각화하고자 하는 차베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석유산업으로부터 얻어지는 거대한 수익이 베네수엘라 통화가치를 고평가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악화시키는 역설적 결과를 가져오고 있으며 최근 유가 상승(차베스 임기 동안 4배 상승)은 이 문제를 더욱 격화시켰을 따름이다.29) 차베스 지지 세력의 이념적 불균등성 차베스는 자신의 지도력이 위협받을 때에는 저항적이고 급진적인데 그에 대한 도전을 성공적으로 극복했을 때에는 유화적이고 중도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헌정 질서에 대해 군사 쿠데타와 폭력적인 공격을 선동한 반대세력에 대해 어떠한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단적인 사례다. 현재 차베스 정권 내에는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 민족주의, 다양한 마르크스주의 그룹 등이 자유롭게 경합하고 있다.30) 차베스 자신은 ‘개량주의’, 실용주의 및 혁명주의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차베스를 지지하는 세력들 가운데 온건주의적 또는 보수주의적 분파는 정권의 정당성/합법성을 염려하고 실용주의자들은 재정 건전성/규율, 사회 지출 제한, 합동 공사 및 공공-민간 협력 증진 등을 주장한다. 중앙파는 점진적 개혁, 사회 지출 및 분배 증가, 진보적 부르주아지와의 기간 시설 계약 등을 통해 국가 기관 및 선거구 내에서 정치권력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좌파의 경우 주로 새로운 계급적 지향의 노조, 지역 및 공동체에 기초한 협동조합, 농민 사회운동 및 특히 노동자 자주 관리 기업 및 운동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좌파는 사회화 과정을 심화하고 지방의 생산적 기업에 더 많이 투자함으로써 실업/불완전 고용 상태에 있는 노동력의 절반을 감소시킬 것을 주장한다. 동시에 이들은 하향식 후보 선정에 반대한다. 차베스는 좌파와 대중운동에 찬성하지만 거시경제정책을 결정하는 실용주의자들을 무시하지도 않고 정치권력을 제도화하려는 중앙파도 존중한다. 차베스는 이 과정에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며 상이한 입장들을 종합하는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32) 그런데 정당들의 확산은 명확한 정치적 노선에 기초하기보다는 국가 기구 내에서 입지를 점유하고 요구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 구조를 갖추려는 일부 지도자들의 속성에서 기인한 측면이 많다. 이러한 기회주의적 요소는 베네수엘라 구체제의 오랜 관행이자 악습으로,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실제로 1998년 차베스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해지자, 다수의 정치 그룹들은 다수파가 되기 위해 차베스와 경합했다. 장관직 획득이나 권력 분점에 대한 희망이 좌절되자, 정당들은 야당 진영을 규합했다. 전국적 수준에서 서로 대치하던 정당들이 지역적 수준에서는 제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이 앞서 루이스 미킬레나가 이탈하거나 ‘사회주의를 향한 운동(MAS)’이 분리된 이유 중의 하나다. 두 번째 요인은 차베스를 지지하는 세력이 전반적으로 급진화되면서 정당이 더 이상 이를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1998년 차베스가 당선될 때만 하더라도 그가 토지개혁, 어업 및 은행 개혁 법안을 제도화했던 2001년만큼 진보적이지 않았다. 한편 차베스를 지지하는 정당이나 사회세력의 통합력도 현재로선 미미하다. 단적으로, 2003년 10월 창설된 ‘코만도 아야쿠소’라는 차베스주의 정당들의 선거 연합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이에 차베스는 전국 선거 순회단을 제안했고, 10여명의 정치·사회 활동가로 구성된 단위 성원들은 현장과 가가호호를 누비며 차베스 지지 운동을 전개했다. <표2> 베네수엘라 주요 정당 현황31)

    당명 주요특징 비고
    제5공화국운동(MVR)제1여당1998년 군부 중심 창당
    우리는 할 수 있다(Podemos)여권 내 우파 2001년 MAS에서 분리
    모두를 위한 조국(PPT) 여권 내 마르크스주의 계열 1997년 급진주의에서 분리
    민주행동당(AD)구 지배정당, 우익 민주주의 1936년 창당
    기독사회당(COPEI)구 지배정당, 우익 민주주의
    사회주의를 향한 운동(MAS)중도 우파 1971년 베네수엘라 공산당(PCV)에서 분리
    적기(Bandera Roja)




    혁명적 좌파, 무장노선 1970년 혁명적 좌파운동(MIR)에서 분리
    급진주의(La Causa Radical) 급진주의1971년 MAS 및 PCV 출신 활동가들이 결성
    단결(Union)구 차베스 지지세력 1999년 창당
    연대(Solidaridad)루이스 미킬레나 주도 2001년 창당
    혁명사회주의당(PRS)전국노조(UNT) 내 트로츠기 그룹 2005년 창당
    <표3> 차베스 지지-반대 주요 정당
    구분
    차베스지지
    차베스반대

    선거연합
    공동전선

    애국의 기둥(Polo Patriotico, 1998)
    코만도 아야쿠소(2003)

    민주공조
    (CD, Coordinadora Democratica)

    정치적 스펙트럼
    좌파
    군부
    우파
    좌파
    중도
    우파
    정당
    PPT
    MVR
    Podemos
    적기
    급진주의
    단결
    연대
    MAS
    AD
    COPEI
    차베스 개인 카리스마에 대한 과도한 의존 따라서 개혁 과정이 차베스 개인의 지도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편향이 발생했다. 우선 비상 국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 발휘가 요구되는 상황적 논리를 들 수 있다.33)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좌익적 정당의 부재와 자율적 사회운동의 경험이 부재한 결과다. 주요 선거 및 국민소환투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드러났듯이, 대통령 개인이 전국 순회 캠페인을 통해 직접 지지자를 조직하고 이들과 소통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를 통해 차베스는 복지정책을 장려하고 구호자금을 수집·전달함으로써 대통령 자신의 지지층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또 이 과정에서 군부가 대통령 개인 및 대통령의 정치 프로그램에 직접적으로 봉사하는 경향이 대두했다. 차베스는 종종 민중과 군대의 관계를 수정해야 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군이 가진 유용한 자원을 활용할 것을 주장했다(플랜 볼리바르 2000의 사례). 차베스의 개혁정책이 기층 민중들을 대열에 동참하도록 자극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민중들은 스스로 전국 순회 선거운동을 조직, 투표를 조직하기보다는 거리에서 투쟁을 조직하고 선거구보다는 현장에 근거해서 선거운동을 진행했다.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서 전국 순회는 가장 중요한 조직적 형태였다. 이들은 조직적인 정당의 지도 없이도 수십만의 지지자를 규합하고 구체적인 정치적 과제를 독립적으로 수행하기도 했다. 또 차베스는 정기적으로 방송에 출연하면서 개혁에 대해 국민과 직접 대화를 시도했다. 분명 대중 동원의 성공이야말로 차베스가 국내적으로 사회적 변화를 심화하고 대외적으로 반미적 태도를 강화하게 된 요소였다. 그런데 대중적 사회운동이 성장하고 또 자율성을 획득하는 역동적인 과정이 동반되지 않는 한, 개혁이 차베스 개인에게 의존하는 경향은 점차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인민주의의 위험을 환기한다. 구조적·객관적 제약으로 말미암아 개혁이 위기에 처하고 단기간의 가시적 성과가 사라지면, ‘개혁’은 지도자 자신의 정치적 승리와 경제정책의 근본적 쟁점의 호도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며 결과적으로 정부도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대중적 사회운동의 자율성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서 노동자운동의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빈민 정책이 주효하면서 사회 변화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높아지고 있다. 도시 이외에 농촌에서도 토지개혁의 확장 및 지주들의 민병대에 반대하는 빈농들의 투쟁이 형성되고 있다(인디안 공동체 운동 포함). 이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UNT를 중심으로 하는 노동자운동의 변화 흐름이다. 반대세력의 쿠데타와 총파업/사보타지에 즈음하여 일부 노조지도자들이 CTV와 거리를 두고 새로운 전국노조의 결성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석유, 공공, 자동차, 고무 등 전략분야의 많은 지도자들은 UNT에 가입해서 현재 전국적으로 약 100만의 조합원을 확보한 상태다. 많은 현장에서 구체제에 반대하는 새로운 노동조합 활동가 네트워크가 조직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정부에 대한 노조의 자율성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이 가운데서도 UNT 일부에서 전개 중인 노동자 통제와 평의회 건설 흐름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34) <상자1>에서 보듯이 사유화 반대 투쟁, 관리자들의 사보타지에 맞선 공장 점거 등을 경험하며 UNT 소속의 많은 노조와 활동가들이 노동자 통제(공동관리/자주관리)나 평의회 운동에 대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이들은 국유 기업에서 사기업으로 노동자 통제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주관리, 공동 관리 및 협동조합을 통해 사회·경제적으로 민중이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확장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차베스도 생산을 포기하거나 유기된 산업 및 공장을 몰수할 것을 발표하며 산업 발전, 생산 증진을 위해 노동자들이 관리의 일주체가 될 것을 호소했다.35) 자본가들의 자본유출 또는 사보타지로 유기, 폐쇄된 직장을 점거하고 노동자 스스로 생산과 작업을 통제하는 노동자 통제 또는 평의회의 경험은 역사적으로 위기와 이행의 시기에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단순한 소유관계의 변형(사유에서 국유 또는 집단적 소유)을 넘어 노동자들의 대중권력,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의 분할 극복, 민주주의 등의 쟁점을 제기했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노동자 통제 또는 평의회 운동이 기존 노조운동의 혁신, 노동자운동과 지역운동의 결합, 비공식부문 노동자 조직화를 추구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이다.[%=박스1%] 한편 차베스 정부의 다양한 빈곤 퇴치 프로그램이 거둔 가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빈민 대중운동이 고양되고 있는가의 여부에 주목해야 한다. 온정주의적 방식으로 분배된 복지가 정치적 능동성을 자동적으로 고양하지 않으며 복지정책의 수혜자들은 아래로부터 투쟁하는 것보다 위로부터 시혜를 얻는데 더 익숙해졌기 때문에 수동적일 가능성이 상존한다. 미션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기회가 확대되고 도시토지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빈민들의 자기 조직화, 자기 통치의 가능성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베네수엘라 농민 조직이 취약한 이유는 농업 경제의 붕괴에 기인한다. 따라서 차베스 정부의 토지개혁을 급진화할 대중적 세력이 미미한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2001년 토지개혁법 시행 후 현재까지 약 130명의 농민이 대토지소유주의 사병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토지분배의 결과로 협동조합이 맹아적으로 형성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는 농민 조직의 성장 여부는 향후 농업경제의 회생과 토지개혁의 급진화를 좌우할 변수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네수엘라 여성운동은 차베스 집권 이후 몇 가지 주요 양성 평등 법안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에서 ▲여성적 이슈가 여전히 부차적으로 다뤄지는 문제 ▲여성운동이 제도화되면서 사회운동과의 결합이 약화되는 문제 ▲1990년대 쟁취한 법률적 성과를 사회운동적으로 확산하는 문제 등이 과제로 남아 있다.36) 사회운동들이 자율성을 확산하고 대중적·지역적 토대를 확장하는 과정은 여전히 험난하지만 도시와 농촌, 공장과 지역에서 자주관리 운동, 평의회, 협동조합 등이 출현하고 있는 것은 긍정적인 지표다. 향후 차베스 정부가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권력의 보전과 사회경제적 ‘현상유지’를 위한 실용적 방편을 찾는 방향으로 경도될 것인가는 결국 대중적 사회운동의 역량을 어떻게 신장시켜나갈 것인지에 달린 문제라 할 수 있다. 결론 차베스-베네수엘라는 ▲개헌 등을 통해 정치권력을 강화하고 재분배 정책을 중심으로 제도적·대중적 기반을 다진 집권 초기를 거쳐 ▲쿠데타·총파업/사보타지 등 구 지배세력의 반격에 처한 수세기를 지나 ▲국민소환투표와 총선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대내외적으로 볼리바리안 프로세스가 가속화되는 국면을 맞고 있다. 이 과정에서 차베스는 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규합한 것이 사실이지만 ‘볼리바리안 혁명’은 여전히 모호한 측면이 많다.37) 그런데 라틴 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의 확산과 이에 맞선 사회운동의 출현이 항상적인 정치과정이라면, 과거 라틴 아메리카 사회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반추하는 가운데 볼리바리안 프로세스의 진전을 위한 몇 가지 쟁점을 추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1940-5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인민주의는 근본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하지 않은 채 제한적 코포러티즘을 시도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자율성을 침식하는 방식으로 대중을 동원했다. 오늘날 ‘볼리바리안 혁명’이 인민주의적 전통으로 회귀하지 않기 위해서는 소유권과 생산관계의 근본적 변혁 및 토지개혁의 급진화를 추구해야 한다. 물론 이 과정은 대중적 사회운동의 자율성이 적극적으로 신장될 때만 가능하며, 따라서 최근 고조되고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자통제, 평의회 운동 및 빈민, 농민, 여성들의 자기 조직화에 주목할 수 있다. 둘째, 1960-70년대 사회주의적 지향 속에서 급진화된 군사조직, 정당, 노동조합 및 이를 포괄하는 전선체 등은 대개 군부 독재와 미국의 ‘저강도전쟁’으로 압살 당한다. 지금도 라틴 아메리카에서 ‘무적의 제국’으로서 자신의 권력과 ‘신자유주의 정책의 비가역성’이라는 신화를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간섭은 상수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적 개입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차베스가 시도 중인 군사노선이 얼마나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1960-70년대 좌익적 사회운동이 좌초한 원인을 ‘무장’ 여부에서 찾기보다는 반혁명에 맞설 수 있는 대중적 토대의 문제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쿠바나 칠레의 사례처럼 노동자운동 등 사회운동이 독자적인 사회변혁의 전망을 갖추고 그 계획을 물질화시켰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1980년대 평화협상을 거쳐 선거정당으로 전환한 기존 사회운동 세력은 1990년대를 거쳐 선거정치와 신자유주의에 순응하게 되었고, 일부는 NGO로 흡수되었다. 이들은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금융기구와 초민족적 법인자본에게 권력을 대폭 이양할 것을 주장하며 ‘사회운동의 자율적 요구와 상호조정’을 참조하기보다는 선거승리를 위한 캠페인 기술에 전도되었다. 이에 반해 1990년대 후반부터 촉발되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운동은 기존 정당과 노동조합이 선거정치에 매몰되거나 코퍼러티즘을 수용하면서 대중운동을 분할하는 상황을 극복하고 신자유주의적 금융-군사 세계화에 정면으로 맞서는 한편, 다양하게 분출하고 있는 사회운동 간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했다.38) 이런 점에서 차베스의 ‘볼리바리안 혁명’과 ALBA 제안에 대한 환호는 그 자체로 정당한 반응이지만 일견 우려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는 향후 세계사회운동이 연대와 자율성을 바탕으로 ‘대안’에 대한 전망과 역량을 더욱 구체적으로 확장해 나갈 때만이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차베스-베네수엘라가 구조적·객관적 제약을 극복하고 진정한 ‘21세기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질문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할 것이다. 1) 류미경,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맞서 연대를 확장하자! - 다중심 세계사회포럼으로 본 대안세계화 운동의 과제」, 『월간 사회운동』 통권 62호(2005.3) 참조. 본문으로 2) 대안세계화 운동과 세계사회포럼에 대해서는 임필수, 「세계화와 세계사회운동 - 대안세계화 운동과 세계사회포럼을 중심으로」, 『월간 사회진보연대』 통권 37호(2003.7-8) 참조. 본문으로 3) James Petras (2004), "The politics of imperialism: Neoliberalism and Class Politics in Latin America", http://www.rebelion.org 본문으로 4) 칠레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문민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대표적 사례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 기민당과 사회당은 피노체트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의 성과를 인정하고 정치적 타협을 수용, 1990년 ‘민주주의를 위한 정당간 제휴’ 연정이 성립된다. 신자유주의로 전향한 기민당과 사회당이 참여한 에일윈 정부는 여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보다 훨씬 안정적인 형태로 의회와 정당정치 체제를 유지하면서 신자유주의를 지속하게 된다. 본문으로 5) Gregory Wilpert (2005), "Land for People not for Profit in Venezuela", http://www.venezuelanalysis.com 본문으로 6) 1937년 당시 토지 소유는 1000ha 이상의 토지를 보유한 대농장에 집중됐다(4.5%가 88.8% 소유). 10ha 이하의 토지를 소유한 소농은 전체 토지 소유자의 57.7%를 차지한 반면 0.7%의 농지만 소유할 수 있었다. 본문으로 7) 5% 대지주가 75% 토지를 소유하고, 75%의 소토지소유자가 고작 6%의 토지를 소유했다. 농지의 경우 더욱 심각한데 2%의 인구가 60%를 소유하고 있으며 이중 대부분이 휴경지다. 본문으로 8) Richard Lapper (2005), "Venezuela and the Rise of Chavez: A Background Discussion Paper", http://www.cfr.org 본문으로 9) 제임스 페트라스 외, 「라틴 아메리카의 초민족적 자본가와 외채 문제: 계급 분석적 시각」, 다이앤 엘슨 외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페미니즘의 시각』, 공감, 1998 참조. 본문으로 10) C.P. Pandya and Justin Podur (2004), “The Chavez Government's Economic Policies”, ZNet, http://www.zmag.org 본문으로 11) Marta Harnecker (2004), "After the Referendum: Venezuela Faces New Challenges", Mothly Review, Vol. 56, No. 6. 본문으로 12) 그 주요내용은 ▲국호 변경 ▲양성 평등 참여 ▲법치와 정의 ▲인권과 국제조약 준수 ▲여성의 권리 신장 ▲정보의 자유 ▲정당 관련 국고 보조 금지 ▲국민투표 ▲사회·교육·문화·경제적 권리 ▲원주민의 권리 ▲환경권 ▲삼권분립이 아니라 오권분립(입법행정사법에 선거관리위원회, 시민 또는 공공의 권력을 추가) ▲입법부/대통령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 ▲시민불복종 등이다. 신헌법에 관해서는 Gregory Wilpert (2003), "Venezuela's New Constitution", http://www.venezuelanalysis.com 참조. 본문으로 13) ‘볼리바리안 써클’에 관해서는 Alvaro Sanchez (2003), "Bolivarian Circles: A Grassroots Movement", http://www.venezuelanalysis.com 참조. 본문으로 14) 2000년 2월 PdVSA의 중장기 사업계획(2000-2009 Business Plan)을 발표했는데, 이 계획은 ▲국내 민간자본 형성 강조(석유산업에 대한 민간부문 참여 확대) ▲생산구조 개편(가스 및 경중질유 비중을 제고) ▲생산성 및 정유산업 활성화를 위한 수출 경쟁력 제고 ▲화학 및 유화산업 개발 및 생산성 향상 ▲석유정책의 국제적 협력 등을 가이드라인으로 삼고 있다. 본문으로 15) C. P. Pandya and Justin Podur, 앞의 글 본문으로 16) 차베스 정부의 빈곤정책과 관련해서는 Gregory Wilpert (2003), "Mission Impossible? - Venezuela's Mission to Fight Poverty", http://www.venezuelanalysis.com 참조. 본문으로 17) 이에 미국이 거듭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계속 일관된 정책을 추진한 이유가 무엇인지가 쟁점인데, 이에 대해서 대략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네오콘의 맹동성. 2001-02년, 반테러리즘이 발호하는 가운데 미국은 차베스 정권을 지체없이 처리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네오콘은 베네수엘라 군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언론 및 기업 엘리트들의 권력을 과신한 것이다. 둘째, 이라크전과 차베스와 OPEC 주도국인 이라크·이란 간 결속으로 불어 닥친 석유위기가 미국의 간섭을 촉진했다. 셋째, 차베스가 FTAA에 반대하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ALBA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차베스의 복지정책과 미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태도 그리고 석유 외교가 역내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를 잠식하는 주요 원인이자 ‘좌파의 중심’이라고 간주했을 수 있다. 본문으로 18) James Petras (2005), "The Venezuelan Election: Chavez Wins, Bush Loses (Again)! Now What?", http://www.counterpunch.org 본문으로 19) Mark P. Sullivan (2005), "Venezuela: Political Conditions and U.S. Policy",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Report for Congress, http://www.state.gov/ 본문으로 20) U.S Department of State Bureau of Public Affairs, "The State of Democracy in Venezuela" (2005.12.1) 참조. 본문으로 21) 미국이 베네수엘라와 미국의 반(反)차베스 단체들에 수십만 달러를 제공했으며 이 중에는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베네수엘라노동자연맹(CVW)도 포함돼 있다고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바 있다(2002.4.25). 이 신문은 이 자금이 NED에서 제공된 것이라며 지난해 반차베스 단체에 대한 지원액은 전년보다 4배 가까이 늘어난 87만7천달러(약 11억 4천만원)였다고 밝혔다. NED는 AFL-CIO 산하 대외관계기구인 ‘국제노동연대를 위한 아메리카 센터’에 15만4천3백7십7달러를 지원했는데, 전액이 베네수엘라의 노동권 향상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CTV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또 미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외관계 외곽조직들에 상당 액수의 자금지원을 했으며 양당은 이들 자금을 차베스 비판세력들의 워싱턴 방문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 본문으로 22) 지금도 미국은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의 접경지대에서 - 이 곳은 서반구 최대의 수자원 보유지역이기도 한데 -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이유로 미군의 파라과이 주둔을 정당화한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파라과이 군기지는 볼리비아의 천연가스 매장지로부터 약 200km 떨어진 곳이다. 이 가스전은 미주대륙 전체에서 2번째로 큰 규모다. 미국의 대다수 주류 언론들은 서반구에서의 차베스의 영향력이 지닌 위험성을 강조하기 위해 “반테러”라는 수사를 즐긴다. 한편 미 플로리다에 본부를 둔 선교단체가 베네수엘라 남부와 브라질 아마존 접경의 고립된 인디오부족 선교를 위해 대규모 시설물을 설치한 데 대해 차베스는 ‘CIA에 의한 침투’라고 규정하고 이들 단체들을 향해 90일 내에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국경지역에서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기도 했다. 이상 벤자민 당글, 「미군의 파라과이 진주」, 프레시안(2005.10.17) http://www.pressian.com 참조. 본문으로 23) J. F. Hornbeck (2005), "A Free Trade Area or the Americas: Major Policy Issues and Status of Negotiations",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Report for Congress, http://www.state.gov 본문으로 24) James Petras (2004), "President Chavez and the Referendum: Myths and Realities", http://www.rebelion.org (국역: 『월간 사회진보연대』, 통권49호(2004.10)에 수록) 본문으로 25) 국제 원유가격이 폭락할 경우 베네수엘라 경제가 항상 침체와 위기에 봉착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거시경제안정화기금(FIEM) 마저 정부가 소진하는 것은 베네수엘라의 유일한 위기관리체제를 마비시킬 수 있어 우려스럽다는 문제 제기도 있다. 본문으로 26) Richard Lapper, 앞의 글. 본문으로 27) Seth R. Delong (2005), “Chavez’s Agrarian Land Reform: More like Lincoln than Lenin”, The Council on Hemispheric Affairs, http://www.coha.org 본문으로 28) 2001년 법에 의하면, 소유권을 유지할 수 있는 생산성이 낮은 휴경지의 최대 면적은 5000ha였다. 2005년 토지개혁법은 생산성이 높은 휴경지 토지의 경우 100ha에서 50ha로, 생산성이 낮은 휴경지의 경우 5000ha에서 3000ha로 제한했다. 본문으로 29) Gregory Wilpert (2005), "Land for People not for Profit in Venezuela", http://www.venezuelanalysis.com 본문으로 30) 현재 여권을 구성하는 주요 정당은 ‘제5공화국운동(MVR)’ 및 ‘우리는 할 수 있다(Podemos, ‘우리는 할 수 있다 - 사회 민주주의를 향하여’), ‘조국을 모두에게(PPT)’ 등이다. MVR은 차베스 본인이 1998년 대선을 위해 군부를 중심으로 창건한 정당으로서, 정치적 스펙트럼을 불문하고 우선 차베스 지지자를 규합한 성격을 띤다. 당원 중에는 더러 구체제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으며 당내 민주적 장치나 안정적인 평당원 구조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Podemos’는 MAS(사회주의를 향한 운동)에서 기원하며 차베스 지지자 중 합리적인 부위를 자처하는 세력이다. 유럽적 스타일의 사회민주주의적 전통에서 유래하는 ‘Podemos’는 차베스 정부의 우파를 대표한다. PPT는 선거인단 수로는 가장 취약하지만 노동, 교육, 문화 등 다수의 내각을 책임지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으로부터 유래하는 PPT는 ‘급진주의’로부터 분리되었다. PPT는 스스로를 ‘운동중의 운동’으로, 또 노조운동(자율 노조)과 청년운동(‘구국 청년’), 여성운동(마누엘리타 사엔스 운동) 및 지역 공동체에 대한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 이상 Edouard Diago (2003), "Venezuela’s political forces", IV 353,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 참조. 본문으로 31) James Petras (2005), "The Venezuelan Election: Chavez Wins, Bush Loses (Again)! Now What?", http://www.counterpunch.org 본문으로 32) 베네수엘라의 전반적인 정당 분포와 관련해서는 "Leftist Parties of the World", http://www.broadleft.org 참조. 본문으로 33) 일례로 베네수엘라 의회는 1999년 3월 경제난 극복을 목적으로 차베스 정부가 출범 직후 상정한 일련의 비상경제조치법안(일명 Enabling Law)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향후 6개월간 의회의 추가 승인 없이 ▲금융거래세 도입 및 소득세법 개정 등 세제 개편 ▲국가 행정 조직 개편 ▲비상금융법안 개정과 같은 경제 조치들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 또 1999년 제정된 신헌법은 불신임투표를 포함한 국회해산권, 국가긴급조치 선포권, 내각임명권, 대통령 임기의 연장(5년에서 6년으로) 및 이에 따른 즉각적인 재선 허용 등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본문으로 34) 베네수엘라 노동자운동에 대해서는 Daina Green and Barry Lipton (2004), "Report on Venezuela's Trade Union Situation", http://www.venezuelananaysis.com 참조. 본문으로 35) 베네수엘라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와 평의회 흐름에 대해서는 Marta Harnecker (2005), "Joint Responsibility and Confidence in Venezuela’s Worker Co-Managed Industries", The challenges of congestion: Cadafe and Cadela's experiences, Popular Library, Colection Testimonials Nº2, La Burbuja Editorial, Caracas, April 2005, http://www.venezuelananaysis.com; Bill Burgess (2005), "On the road to a new society: Venezuelan workers debate workers control of industry and government enterprises", http://www.socialistvoice.com; Rafael Rodriguez (2005), “Co-management” in the Alcasa aluminium factory, IV 371, http://www.internationalviewpoint.org 참조. 본문으로 36) 베네수엘라 여성운동에 대해서는 Sarah Wagner (2005), "Women and Venezuela’s Bolivarian Revolution", http://www.venezuelanalysis.com 참조. 본문으로 37) ‘볼리바리안 혁명’이 페미니즘적 정치, 반인종주의적 정치, 심지어 반자본주의적 정치에 대해서도 성격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Michael Albert (2005), "Venezuela's Path", ZNet, http://www.zmag.org 참조. 본문으로 38) 라틴 아메리카 사회운동의 역사에 대한 개괄로는 James Petras, "Latin America: The Resurgence of the Left," NLR, no. 223, 1997; James Petras and Timothy F. Harding, "Introduction", Latin America Perspective, Issue 114, Vol. 27 No. 5, September 2000, pp.3-10. (국역: 『월간 사회운동』 통권 57호(2005.9)에 수록) 참조. 아울러 라틴 아메리카의 좌익적 사회운동이 선거주의로 전환한 것에 대한 비판으로는 James Petras, (2004), "Class-based Direct Action versus Populist Electoral Politics", http://www.rebelion.org 참조. 본문으로